문화4/ 국보4/ 국보탐방3/ [21] 국보 제21호 경주 불국사 삼층석탑 - [30] 국보 제30호 경주 분황사 모전석탑
문화4/ 국보4/ 국보탐방3/
[21] 국보 제21호 경주 불국사 삼층석탑
공식명칭 : 경주 불국사 삼층석탑 (한자 명칭 : 慶州 佛國寺 三層石塔)
지정일 : 1962. 12. 20
테마 : 유적건조물 / 종교신앙/ 불교/탑
시대 : 통일신라
주소 : 경북 경주시 불국로 385, 불국사 (진현동)
문화재청 설명
탑은 불국사가 창건된 통일신라 경덕왕 10년(751) 때 조성된 것으로 추측되며, 2단의 기단(基壇)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세운 석탑으로, 경주 감은사지 동·서 삼층석탑(국보 제112호)과 경주 고선사지 삼층석탑(국보 제38호)의 양식을 이어받은 8세기 통일신라 시대의 훌륭한 작품이다.
탑 전체의 무게를 지탱할 수 있도록 2층의 기단이 튼실하게 짜여 있으며, 목조건축을 본떠서 위·아래층 기단의 모서리마다 돌을 깎아 기둥 모양을 만들어 놓았다. 탑신에도 그러한 기둥을 새겼으며, 지붕돌의 모서리들은 모두 치켜 올려져 있어서 탑 전체에 경쾌하게 날아오르는 듯한 느낌을 더한다.
1966년 9월에는 안타깝게도 도굴꾼들에 의해 탑이 손상되는 일이 있었으며, 그해 12월 탑을 수리하면서 2층 탑신의 몸돌 앞면에서 부처님의 사리를 모시던 사각형의 공간을 발견하게 되었다. 여기서 여러 가지 사리용기들과 유물을 찾아냈는데, 그중에서 특히 눈길을 끄는 것은 ‘무구정광대다라니경(無垢淨光大陀羅尼經) 국보 제126호)’이다. 이것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목판 인쇄물로 닥나무 종이로 만들어졌다.
탑의 머리 장식(상륜부)은 16세기 이전에 유실된 것으로 추정되는데, 1973년 남원 실상사 동·서 삼층석탑(보물 제37호)의 머리 장식을 본떠서 복원하였다. 탑 주위로 둘러놓은 주춧돌 모양의 돌에는 연꽃무늬를 새겼는데, 이를 부처님의 사리를 두는 깨끗한 곳이라는 뜻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이 탑은 ‘무영탑(無影塔:그림자가 비치지 않는 탑)’이라고도 불리는데, 여기에는 석가탑을 지은 백제의 석공(石工) 아사달을 찾아 신라의 서울 서라벌에 온 아사녀가 남편을 만나보지도 못한 채 연못에 몸을 던져야 했던 슬픈 전설이 서려 있다. 불국사 대웅전 앞마당에는 직전에 소개한 다보탑(국보 제20호)과 함께 석가탑(국보 제21호)이 동서로 나란히 서 있다.
이번에 소개할 석가탑의 원래 이름은 ‘석가여래상주설법탑(釋迦如來常住設法塔)’으로, ‘석가탑’이라고 줄여서 부른다. 지난번 다보탑이 과거불인 다보여래였다면 이번 소개할 석가탑은 현재불인 석가여래를 의미한다. 다보탑이 화려하고 아름다웠다면 석가탑은 간결하고 장중한 느낌이다. 다보탑이 첫눈에 끌린다면 석가탑은 '볼매'(볼수록 매력)라고나 할까? 보면 볼수록 감탄스러운 석탑이다.
이후 대부분 석탑은 다보탑을 표준으로, 모범으로, 원본으로 삼아 만들어졌다고 보면 된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신라 석탑의 전형, 즉 이층기단에 삼층석탑이 바로 이 모습이며, 정식명칭은 '경주 불국사 삼층석탑'이다. 탑을 지은 석공 아사달과 부인 아사녀의 전설을 담아 ‘무영탑(無影塔:그림자가 비치지 않는 탑)’이라고도 한다.
천 년만의 석가탑 해체, 보수공사 (2012~2015년 11월)
석가탑은 지난 1966년 9월 사리공 도굴 미수 사건이 있었으며 이때 탑 부재 일부가 훼손돼 10월에 부분 보수가 이루어진 바 있으며 이때 사리장치가 여럿 발견되었으나 그만 2층 옥개석을 떨어뜨려 3층 옥개석이 일부 손상되는 상처를 입고 말았다. 그 뒤로 46년 만인 지난 2012년 9월부터 다시 해체 수리에 들어가 원래는 2014년 말에 복원을 마친다고 하였으나 불국사에 확인한 결과 올해 말인 2015년 11월쯤에 마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는 답변이다.
3년여에 걸친 대공사이다. 이는 지난 2010년 12월 정기 안전점검 때 상층 기단 갑석에서 틈이 발견되면서 결정된 일이기는 하나 석가탑이 세워진 천 년 만에 이루어지는 완전한 해체와 복원과정이니 역사적 문화적으로 뜻깊은 일이며 부디 완벽한 복원 후 만나볼 수 있기를 기대한다.
▲2010년 12월 발견된 균열. 상층 기단 외 여러 곳에서 심각한 균열이 발견되어 보수가 불가피하였다. /문화재청 자료 사진
▲요즘은 문화재 해체, 복원 공사현장도 일반에 공개한다. 투명가설 덧집 설치 그래픽, 물론 현실은 조금 다르다. /문화재청 자료 사진
▲2013년 4월 2일에는 2층 옥개석을 들어내고 사리공을 공개하였다. 1966년 도굴 미수사건 후 47년 만이다. /뉴스화면 캡처
통일신라 석탑의 전형 석가탑
답사 다니는 사람들이 통일신라 석탑을 말할 때 '이층기단에 삼층 몸돌'이라고 표현하는데 바로 석가탑이 그 전형이다. 답사 초보는 다보탑에 끌리고, 답사 내공이 쌓이면 석가탑에 매료된다고 하는데 이는 허언(虛言)이 아니다. 다보탑을 비롯한 여러 종류의 이형탑이나 화려한 탑들을 보았으나 석탑의 제일은 역시 석가탑이다.
2층 기단의 든든한 하층기단은 물론 묵직한 상층기단이 믿음직스럽고, 그 위로 3층의 몸돌과 지붕돌을 적절한 체감비율(4:2:2)로 올려 쌓아 상승감이 탁월하며, 10m가 넘는 큰 석탑이지만 보기에 안정적이며 완벽한 균형미를 자랑한다. 통일신라 시대 석탑을 손꼽을 때 감은사 터 삼층석탑과 고선사 터 삼층석탑, 그리고 불국사 삼층석탑을 일컬어 경주 3대 탑이라고 하며 이러한 흐름은 석가탑에서 완성되었다고 본다. 그리하여 이후 석탑들은 석가탑을 모범으로 하여 조금 축소하거나 약간의 장식과 치장, 조각을 보태어 만들었다고 생각된다. 석가탑을 조각했다는 백제의 아사달이 새삼 존경스럽고 궁금하다.
▲석가탑 전경, 아무리 보아도 멋스럽다. 복원 후 모습이 궁금하다.(해체 전 사진)
사진에서 보듯 각층의 지붕돌 처마는 약간 뾰족해 보이도록 치켜 올려져 보이지만 사실은 빗각 그대로 유지한 채 네 면의 긴 부분을 파내듯 깎아내린 것이다. 참 기가 막힌 석공의 솜씨이다. 또한, 석가탑 주변에는 네모 모양으로 한 바퀴 돌려 8개의 석재 연꽃 대좌를 만들어놓았는데 이는 영취산에서 설법하던 석가모니의 말이 진리라고 증거한 다보여래의 친견을 상징함과 더불어 석가탑의 성역 표시, 안정감 표현 등의 효과 등으로 보인다.
▲팔방금강좌, 8개의 연화 대좌가 석가탑을 둘러 놓여졌다.
무영탑(無影塔), 아사달과 아사녀의 전설
불국사는 김대건이 지었다고 하지만 석가탑은 당대 천하제일의 석공, 백제의 아사달을 불러와 맡겼다. 아사달이 정성으로 한 해, 두 해 일하는 동안 남편을 기다리다 너무 보고 싶은 부인 아사녀는 아사달을 찾아왔다. 그러나 신성한 성역 안에 아녀자를 들일 수 없다고 생각한 스님은 꾀를 내어 영지(影池)에 가서 지성으로 빌면 탑이 완공되는 날 수면에 탑의 그림자가 떠오른다고 했다.
그러나 아무리 기다려도 그림자는 안보이고 그리움은 사무쳐서 아사녀는 못에 몸을 던지고 만다. 뒤늦게 아사달이 달려왔으나 아사녀는 보이지 않고 수면에 웃는 모습만이 어른거려 통곡했다는 전설, 무영탑(無影塔) 이야기이다. 그때 아사달이 새겼다는 석불이 불국사 서남쪽의 영지(影池) 옆에 지금도 놓여 있다.
석가탑에서 발견된 국보급 보물들
앞에서 기술하였듯이 석가탑은 47년 전인 1966년 도굴범들이 사리공을 들어내려다가 일부가 훼손된 채 발견되었다. 부득이 그때 복원과정에서 2층 몸돌의 사리공(舍利孔)을 개방하였는데 뜻밖에도 천하의 보물이 여러 점 나왔으니 녹슨 금동제 사리함과 목제소탑, 동경, 비단, 향목, 구슬 등이었는데 그중 비단으로 싼 8cm 폭 5m 길이의 다라니경은 세계 최고(最古)의 목판 인쇄물인 무구정광다라니경(無垢淨光大陀羅尼經 : 국보 제126호)이다. 이로써 금속활자인쇄물 직지심경과 함께 금속활자와 목판인쇄 모두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오래전에 가장 뛰어난 문화를 가진 증표로 내세울 수 있게 된 것이다. 1966년 도굴범들의 도적질에서 국보급 문화재가 발견되었으니 전화위복이라 해야 할까, 불행 중 다행이라 해야 할까 하마터면 세계적 국보문화재가 장물이 되어 돌아다닐 뻔했으니 말이다.
상륜부 복원의 아쉬움
불국사는 1969~1973년간에 박정희 대통령의 특별지시로 대대적인 복원공사를 벌여 오늘의 모습을 갖추었는데 이때 석가탑을 복원하면서 상륜부는 남원 실상사의 석탑 상륜부를 모방하여 그대로 살렸다고 한다. 많은 사람이 이때의 석가탑 상륜부 복원이 지나침을 아쉬워한다.
물론 실상사 앞마당의 동, 서탑 상륜부가 몇 안 되는 온전한 상륜부로 손꼽혀서 여러 곳에서 모방, 복원한다고는 하지만 석탑의 제작 시기에 따른 제작경향의 차이와 작가(석공)의 철학, 그 밖에도 석탑별로 고유한 특성이 있음을 고려할 때 다소 지나치다는 평이다. 게다가 실상사 석탑이 적어도 백여 년 뒤에 지어져 오히려 석가탑을 보고 세운 것임에야….
때로는 부족하고 모자란 모습의 상륜부가 더 값어치 있어 보인다. 지금 전국에 산재한 모든 석탑의 상륜부를 전부 되살려놓는다면 오히려 문화재의 가치를 훼손하는 일로 보인다. 그저 노반 위에 복발정도, 아니면 두어 개의 보륜 정도가 있더라도 자연스러움이 더 나을 듯하다.
▲남원 실상사 석탑 상륜부(왼쪽), 석가탑 상륜부(오른쪽).
불국사의 대표적 석탑, 다보탑(국보 제20호)과 석가탑(국보 제21호)을 이어서 살펴보았다.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이형탑과 삼층탑의 원전이다. 지나친 설명과 묘사가 더 부담스럽다. 각자 보고 느껴지는 생각대로 담아두자. 현재 석가탑은 천 년만의 완전 해체, 복원 공사 중이므로 올해 말쯤 나타날 모습을 기대해본다. 복원 후 온전한 모습을 대상으로 국보 제21호 답사기는 다시 한 번 써야 할 듯하다.
[22] 국보 제22호 경주 불국사 연화교 및 칠보교
공식명칭 : 경주 불국사 연화교 및 칠보교 (한자 명칭 : 慶州 佛國寺 蓮華橋 및 七寶橋)
지정일 : 1962.12. 20
테마 : 유적건조물 / 교통통신/ 교통/ 교량
시대 : 통일신라
주소 : 경북 경주시 불국로 385, 불국사 (진현동)
문화재청 설명
불국사의 예배공간인 대웅전과 극락전에 오르는 길은 동쪽의 청운교와 백운교, 서쪽의 연화교와 칠보교가 있다. 연화교와 칠보교는 극락전으로 향하는 안양문과 연결된 다리로, 세속 사람들이 밟는 다리가 아니라, 서방 극락세계의 깨달은 사람만이 오르내리던 다리라고 전해지고 있다.
전체 18계단으로, 밑에는 10단의 연화교가 있고 위에는 8단의 칠보교가 놓여있다. 청운교 ·백운교보다 규모가 작을 뿐 구조나 구성형식 등이 매우 비슷한 데, 계단을 다리형식으로 만든 특이한 구성이나 경사면을 45° 각도로 구성한 점, 다리 아래가 무지개 모양을 그리고 있는 것이 그 예이다. 비슷한 구성 속에도 이 다리만의 독특한 특징이 있는데, 그것은 연화교의 층계마다 연꽃잎을 도드라지게 새겨놓았다는 점이다. 안타깝게도 오랜 세월 동안 스쳐 간 사람들의 발자국 탓에 많이 닳아서인지 조각이 희미해져 있어, 지금은 통행을 금지하고 있다.
통일신라 경덕왕 10년(751)에 세워진 것으로 보이며, 창건 당시부터 많은 사람이 이 다리를 오르내리며 극락왕생을 기원하였고, 비구니가 된 신라 헌강왕비도 이곳을 오가며 왕의 극락왕생을 빌었다고 전해진다. 동쪽의 청운교와 백운교가 웅장한 멋을 보여주는 데 비해, 섬세한 아름다움을 내보이고 있어, 불국사의 조형에 조화와 변화를 보여주고 있다.
지난 국보 제20호 다보탑, 제21호 삼층석탑(석가탑)에 이어 세 번째 불국사에 있는 국보를 소개 중이다. 그리고도 아직 제23호 청운교 백운교와 26호 금동비로자나불상, 27호 금동아미타여래좌상이 남아있다. 국보급 문화재만도 6개를 지닌 명불허전(名不虛傳)의 불국사, 한국불교를 대표하는 사찰이자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문화유산에 걸맞은 위상을 인정받는 곳이다.
불국사 전각 배치
1973년 대대적인 보수공사로 지금의 모습을 되찾았다고는 하지만 아직도 복원되지 않은 부분이 많이 있을 것이다. 일단 현재의 모습만으로 불국사를 살펴보면 앞쪽에 대웅전과 극락전이, 뒤쪽에 관음전과 비로전이 배치되어 있으며 대웅전으로 오르는 계단이 국보 제23호인 청운교 백운교이며, 좌측의 극락전으로 오르는 계단이 지금 소개하려는 국보 제22호 연화교 칠보교이다. 물론 이 계단들은 현재는 통행목적으로는 사용치 않고 있다.
▲불국사 국보 여섯 점을 전각배치도로 살펴보면 대웅전 앞마당에 이미 소개한 국보 20호 다보탑, 21호 석가탑이 있으며 대웅전으로 올라가는 국보 23호 청운교 백운교, 극락전으로 올라가는 국보 22호 연화교 칠보교가 나란히 놓여있고 비로전에는 국보 26호 금동비로자나불상이, 극락전에는 국보 27호 금동아미타여래좌상이 모셔져 있다.
연화교(蓮華橋) 칠보교(七寶橋)
불국사 입구를 들어서 극락전으로 들어가려면 연화-칠보교를 밟고 안양문을 지나 올라가야 한다. 연화-칠보교는 2개의 다리가 아니라 2단으로 구성된 오르막계단 형식의 다리를 위쪽 8계단은 칠보교, 아래쪽 10계단은 연화교라고 부르는 것으로 오른쪽 대웅전으로 올라가는 청운교 백운교와 구조와 형태는 매우 비슷하지만, 규모가 다소 작은 편이다.
▲앞쪽 가까운 것이 지금 설명 중인 연화교 칠보교, 멀리 뒤쪽으로 보이는 것이 청운교 백운교이다.
연화교 칠보교는 높은 석축을 쌓은 뒤에 지은 극락전에 올라가기 위한 계단으로 거대한 석재를 자유자재로 손질하여 기둥을 세우고 난간을 설치하였으며, 전체적으로 45° 각도의 안정된 기울기를 지녔다. 연화교와 칠보교가 이어지는 부분은 청운교 백운교가 둥근 아치 모양을 띠고 있는 데 비하여 다소 완만한 무지개 모양의 배부른 곡선 모양을 띠고 있다. 계단은 그 옛날 실제로 통행을 하던 때에도 많은 사람이 다니기에 불편함이 없을 만큼 충분히 넓고 견고하며 중앙에는 아래쪽 연화교에는 좌우계단보다 좀 더 높인 계단 모양으로 구분하였으며, 위쪽 칠보교 부분은 일반적인 세로모양의 통석재를 설치한 점이 다르다.
▲연화교 칠보교를 좌측에서 본 모습, 계단 위가 안양문(安養門)이고 오른쪽으로 솟아오른 지붕이 종루 범영루이다.
▲연화교 칠보교를 우측에서 본 모습, 대석축(大石築)이 받치고 있는 건물이 듬직해 보인다.
▲연화교 칠보교 중앙 전면에서 본 모습, 계단의 폭이나 규모가 많은 인원이 통행하기에 전혀 부족해 보이지 않는다.
▲연화교의 층계에는 계단마다 넓은 연꽃잎이 새겨져 있는데, 계단을 밟는 사람이 아미타 부처님의 극락정토에 왕생하기를 기원하는 의미가 담겨 있다고 한다. 오랜 세월이 흘러 희미하게 보일 만큼 마모되었다.
불국사 대석축(大石築) (보물 제1745호)
극락전을 칠보-연화교를 밟아 올라갈 수는 없기에 실제로는 대웅전 우측으로 돌아가거나 극락전 좌측으로 돌아가야 한다. 그런데 여기서 칠보교 연화교에 못지않은 걸작이 바로 대석축(大石築)이다. 애초 불국사는 경사진 지형에 거대한 석축을 쌓고 그 위에 극락전과 대웅전을 지은 것인데, 이 석축이 일반적으로 쌓던 방법과 달리 잘 다듬은 장대석을 가로세로 틀을 짜듯이 세우고 그 사이사이에 크고 작은 자연석을 채워 넣어 마치 가구를 조립하듯 쌓은 것인데 자연과 인공이 잘 어울리는 모습은 유례를 찾기 힘든 토목구조이다. 특히 정면에서 바라본 석축은 일정한 높이에 수평적인 균형을 잘 갖춘 모습이지만 왼쪽 극락전에서 돌아 나오는 측면의 석축은 지형이 경사짐에 따라 자연스럽게 높이를 줄여가면서 짜 맞춘 공학적인 구조와 조형적인 시각의 아름다움을 모두 갖춘 모습이다.
▲극락전 측면의 석축, 경사진 지형에 맞게 높이를 조절하면서도 질서정연한 아름다움을 잃지 않아 전면보다 더 멋지다고들 한다.
계단마다 연꽃잎을 새겨놓은 신비한 다리 연화교는 무지개처럼 붕긋한 연결부위를 지나 칠보교로 이어져 극락을 뜻하는 안양문을 들어서 마침내 서방정토 불국토를 상징하는 극락전에 도달하는 개념을 건축으로 구현해놓은 것으로 보인다. 극락전에는 서방정토의 주불인 국보 제27호 아미타여래불이 계셔 험한 길을 헤쳐 극락세계를 찾아온 속세의 범인들을 반겨주신다. 이제는 더이상 밟아볼 수 없는 연화교 칠보교이기에 못내 아쉽다.
[23] 국보 제23호 경주 불국사 청운교 및 백운교
공식명칭 : 경주 불국사 청운교 및 백운교 (한자명칭 : 慶州 佛國寺 靑雲橋 및 白雲橋)
지정일 : 1962.12.20
테마 : 유적건조물 / 교통통신/ 교통/ 교량
시대 : 통일신라
주소 : 경북 경주시 불국로 385, 불국사 (진현동)
문화재청 설명
불국사의 예배 공간인 대웅전과 극락전에 오르는 길은 동쪽의 청운교와 백운교, 서쪽의 연화교와 칠보교가 있다. 청운교와 백운교는 대웅전을 향하는 자하문과 연결된 다리를 말하는데, 다리 아래 일반인의 세계와 다리 위로의 부처의 세계를 이어주는 상징적인 의미를 지닌다. 전체 34계단으로 되어 있는 위로는 16단의 청운교가 있고 아래로는 18단의 백운교가 있다. 청운교(靑雲橋)를 푸른 청년의 모습으로, 백운교(白雲橋)를 흰머리 노인의 모습으로 빗대어 놓아 인생을 상징하기도 한다.
계단을 다리 형식으로 만든 특이한 구조를 하고 있으며, 오르는 경사면을 45° 각도로 구성하여 정교하게 다듬었다. 다리 아래는 무지개 모양으로 이루어져 있어서 직선으로 딱딱해졌던 시선을 부드럽고 생동감 있게 풀어주고 있다. 다리가 있는 석축 아래쪽으로 연못이 있었다고 전하는데, 지금도 계단 왼쪽에 물이 떨어지도록 만들어 놓은 장치가 남아 있다. 이곳에서 물이 떨어지면 폭포처럼 부서지는 물보라에 의해 무지개가 떴다고 전하고 있어, 무척이나 아름다웠을 옛 불국사를 그려보게 된다.
통일신라 경덕왕 10년(751)에 세워진 것으로 보이며, 당시 다리로는 유일하게 완전한 형태로 남아있는 매우 귀중한 유물이다. 또한, 무지개 모양으로 이루어진 다리 아랫부분은 우리나라 석교나 성문에서 보이는 반원 아치 모양의 홍예교의 시작점을 보여주고 있어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국보를 번호순으로 소개하다 보니 칠보교 및 연화교(국보 제22호)를 먼저 소개하고 청운교 및 백운교(국보 제23호)를 나중 소개하게 되었다. 불국사에 들어서면 청운교 백운교를 먼저 만나게 되고, 대웅전에 오르는 다리이자 계단으로 원래 규모가 더 크고 아름다운 청운교 백운교이며 칠보교 연화교는 상대적으로 규모는 조금 작지만 섬세하고 아름다운 데다 대웅전 옆에 있는 극락전으로 오르는 다리이자 계단이기에 청운교 백운교와 연화교 칠보교를 동시에 오를 수는 없으니 관습적으로는 대부분이 청운교 백운교를 많이 오르지 않았을까 싶다. 그러나 국보 소개를 번호순으로 하다 보니 오른쪽에 있는 청운교 백운교 보다 그 왼쪽에 있는 칠보교 연화교를 먼저 소개한 것이다.
현재 학계를 비롯하여 문화재 관련 인사들 사이에서는 국보 1호 남대문을 지난번 화재사건도 있었고, 복원 문화재를 국보 1호로 하기가 좀 그렇다면서 훈민정음을 국보 1호로 정하자는 운동이 있는가 하면, 차제에 국보와 보물 등의 문화재 번호를 아예 없애고 그저 국보와 보물 등으로만 분류하여 번호가 우열의 순서나 의미적 개념이 아님을 실천하자는 운동이 벌어지고 있다.
필자는 현재 번호순으로 국보를 소개하고 있고, 또 나름대로 국보나 보물에 붙인 번호가 꼭 없애거나 바꾸어야 할 것은 아니라고 보지만 관련 분야에서 지혜를 모아 정해지는 것을 기다려본다. 그래도 답사기는 기존의 번호순으로 이어 나갈 생각이다.
청운교(靑雲橋) 및 백운교(白雲橋)
위쪽 16계단이 청운교, 아래쪽 18계단이 백운교이다. 낮은 곳에서 높은 곳으로 올라가거나 내려오는 것은 계단인데 왜 ‘다리(橋)’라고 하였을까? 그것은 이곳 불국사에 들어와 대웅전 부처님을 뵈러 가는 과정이 때 묻고 속박으로 얼룩진 속세를 벗어나 부처님의 세계로 건너가는 것임을 상징하여 다리로 부르는 것이다. 즉 속세를 떠난 사람들이 청운교 백운교 경사진 계단에 조심스럽게 올라서면 자하문을 들어서서 비로소 부처님의 세계로 들어서는 것인데, 불경에 부처님 사는 나라로 가기 위해서는 물을 건너고 구름 위를 지나야 한다고 하였으니 그런 과정을 건축으로 표현한 것이 바로 이 청운교 백운교라는 것이다.
▲청운교 백운교 전경, 불국사에 들어서면 천왕문을 지나 청운교 백운교에 다다른다.
이 청운교 백운교는 계단 경사면이 45°의 안정된 각도로 되어 있으며, 청운교와 백운교가 이어지는 부분의 아래쪽은 무지개(아치) 모양의 홍예로 되어 있어 우리나라 홍예교와 홍예문의 초기 형태를 보여주며 완전한 형태로 남아 있는 통일신라의 계단으로 매우 중요한 자료이다.
청운교(靑雲橋)’는 푸른 청년의 모습으로, ‘백운교(白雲橋)’는 흰머리 노인의 모습으로 빗대어 놓아 인생을 상징하기도 합니다. 계단을 ‘다리(橋)’라고 한 것은 속세로부터 부처님의 세계로 건너감을 상징합니다. 위로는 16단의 청운교가 있고, 아래로는 18단의 백운교로, 계단 경사면이 45°의 안정된 각도로 되어 있습니다. 청운교와 백운교가 이어지는 부분의 아래쪽은 무지개 모양의 홍예로 되어 있어, 우리나라 홍예교와 홍예문의 초기 형태를 보여줍니다.
연화교 및 칠보교와 함께 8세기 중엽에 건립되었으며, 완전한 형태로 남아 있는 통일신라의 계단으로 매우 중요한 자료이다. 청운교와 백운교는 대웅전을 향하는 자하문과 연결된 다리를 말하는데, 다리 아래 일반인의 세계와 다리 위로의 부처의 세계를 이어주는 상징적인 의미를 지니다. 이러한 교리적인 의미와 해석도 중요하지만 불국사에 있어서 석조건축의 백미는 바로 이 청운교 백운교이다.
▲가까이 옆에서 본 아래쪽 백운교와 홍예.
돌을 자유자재로 다루고 가공하는 신라인들의 기술도 놀랍지만 건축구조학적으로 크고 튼튼함은 물론 오밀조밀 아기자기한 아름다움과 상호 연결과 어울림의 석조건축 기술은 오늘날 현대적 기법으로도 결코 쉬운 기술이 아닌 것으로 인정받고 있다.
홍예문, 홍예교의 처음으로 불리는 청운교 백운교
무지개다리의 시작점으로 매우 중요한 의미라고 하는데 참으로 볼수록 매력적이다. 어떻게 돌을 저렇게 둥글게 쌓아서 무지개처럼 구부린 후에 그 위에 계단을 올릴 생각을 했을까? 이론으로 수학적 공식풀이를 선행하고 돌을 다듬고 쌓아 올리는 건축 기법으로 구현한 홍예(아치)의 아름다움이라니….
▲자하문 앞이 테라스처럼 약간 돌출된 가운데 청운교가 연결되었는데 그 아래에도 홍예 구조가 있음이 확연히 보인다.
저 아래에 물이 고인 연못이 있었다면 얼마나 더 아름다웠을까? 처음 설계한 사람의 진정한 의도가 구현되기를 기대해 본다. 그런데 대부분이 청운교와 백운교의 연결 부분에 있는 홍예만 기억하고 이야기를 하는데 가만히 살펴보면 청운교 아랫부분에도 작지만 분명한 홍예 구조가 밑에서 받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자하문(紫霞門)
청운교와 백운교에 올라서면 자하문이다. 자하문은 수미산의 정상에 해당되며, 중생을 보살피는 천신 제석천왕이 상주하는 곳이다. ‘붉을 자(紫)’, ‘안개 하(霞)’를 써서 붉은 안개가 서려 있는 문이란 뜻인데, 부처님 몸을 자금광신(紫金光身) 즉 자줏빛 금색이라고 하는데 이 자줏빛 금색이 안개처럼 서린다는 뜻으로 부르는 문이다. 이 문을 들어서면 부처님의 세계, 불국(佛國)이 펼쳐진다는 것이니 불국사의 문이라고도 할 수 있다.
연지(蓮池)
또한 붉은 자줏빛 금색이 안개처럼 번지는 것은 아침 햇살을 받아 구품연지에서 피어오르는 안개를 지칭하기도 하는데 그럼 어디에 연못이 있는 것일까? 아무리 둘러보아도 연못은 없다. 청운교, 백운교가 계단임에도 다리라고 부를 때는 분명 연못을 건너가는 구조일 텐데 그렇다면 청운교 백운교 아래는 연못이 아니었을까? 원래 불국사를 떠받든 거대한 석축 아래는 연못이 있었다고 하며, 당시 연못으로 물을 끌어들이는 수구(水口)가 지금도 남아있으니, 연못이 있었을 당시 이 주변은 얼마나 아름다웠을까?
잔잔한 물이 고여 있는 길고 좁은 형태의 연못이 왼쪽으로는 칠보교와 연화교 아래로, 오른쪽으로는 청운교와 백운교 아래로 자리 잡고 있는 가운데 주변에는 기화요초가 피어 있거나 수중에 연꽃이 기품 있는 자태로 떠 있거나…. 수구에는 쏟아지는 토함산 물줄기는 포말을 일으키며 햇빛을 반사하여 허공중에 무지개를 띄워 올리고, 그 빛남이 자하문까지 번져 올라 자주 금빛이 안개처럼 피어오른다는 이름 그대로의 광경을 연출하였을 것이다. 또한 길고 거대한 석축 위의 안양문과 자하문, 그리고 범영루와 경루가 물에 비쳐 마치 실루엣처럼 어른거리는 절경은 불국(佛國)의 아름다움을 더욱 신비롭게 하였을 텐데 70년대 복원 시에 빠진 것이 못내 아쉽다.
그 옛날 불국사에 들어서면 청운교 백운교를 올라 대웅전을 보고 옆에 있는 극락전으로 가거나, 아니면 애초 칠보교 연화교를 올라 극락전을 본 후 옆에 있는 대웅전으로 갔을 것이다. 일반적으로 청운교 백운교와 칠보교 연화교를 동시에 오르기는 쉽지 않다. 그럼에도 왜 두 개의 다리 계단을 만들었을까? 청운교 백운교로 올라 앞마당에 석가탑, 다보탑을 만난 후 대웅전에 계신 부처님을 뵙고 관음전, 비로전을 돌아 극락전의 아미타불을 뵈며 극락세계를 체험한 후에 칠보교 연화교로 내려오라는 의미이거나 또는 그 반대의 순서일까?
아무튼 속세와 불국토를 이어주는 청운교 백운교를 둘러보았다. 지금의 기법에도 전혀 손색이 없는 국보급 다리가 새삼 존경스럽다. 추후 여력을 비축하여 다리 아래 연못도 다시 되살려 보기를 기대해 본다.
[24-1] 국보 제24호 경주 석굴암 석굴 ①
공식명칭 : 경주 석굴암 석굴 (한자 명칭 : 慶州 石窟庵 石窟)
지정일 : 1962.12.20
테마 : 유적건조물 / 종교신앙/ 불교/ 불전
시대 : 통일신라
주소 : 경북 경주시 불국로 873-243, 석굴암 (진현동)
문화재청 설명
석굴암은 신라 경덕왕 10년(751)에 당시 대상이었던 김대성이 창건을 시작하여 혜공왕 10년(774)에 완성하였으며, 건립 당시에는 석불사라고 불렀다. 경덕왕은 신라 중기의 임금으로 그의 재위 기간(742∼765) 동안 신라의 불교예술이 전성기를 이루게 되는데, 석굴암 외에도 불국사, 다보탑, 삼층석탑, 황룡사 종 등 많은 문화재가 이때 만들어졌다.
토함산 중턱에 백색의 화강암을 이용하여 인위적으로 석굴을 만들고, 내부공간에 본존불인 석가여래 불상을 중심으로 그 주위 벽면에 보살상 및 제자상과 역사상, 천왕상 등 총 40구의 불상을 조각했으나 지금은 38구만이 남아있다. 석굴암 석굴의 구조는 입구인 직사각형의 전실(前室)과 원형의 주실(主室)이 복도 역할을 하는 통로로 연결되어 있으며, 360여 개의 넓적한 돌로 원형 주실의 천장을 교묘하게 구축한 건축 기법은 세계에 유례가 없는 뛰어난 기술이다.
석굴암 석굴의 입구에 해당하는 전실에는 좌우로 4구(軀)씩 팔부신장상을 두고 있고, 통로 좌우 입구에는 금강역사상을 조각하였으며, 좁은 통로에는 좌우로 2구씩 동서남북 사방을 수호하는 사천왕상을 조각하였다. 원형의 주실 입구에는 좌우로 8각의 돌기둥을 세우고, 주실 안에는 본존불이 중심에서 약간 뒤쪽에 안치되어 있다. 주실의 벽면에는 입구에서부터 천부상 2구, 보살상 2구, 나한상 10구가 채워지고, 본존불 뒷면 둥근 벽에는 석굴 안에서 가장 정교하게 조각된 십일면관음보살상이 서 있다.
원숙한 조각 기법과 사실적인 표현으로 완벽하게 형상화된 본존불, 얼굴과 온몸이 화려하게 조각된 십일면관음보살상, 용맹스런 인왕상, 위엄 있는 모습의 사천왕상, 유연하고 우아한 모습의 각종 보살상, 저마다 개성 있는 표현을 하고 있는 나한상 등 이곳에 만들어진 모든 조각품은 동아시아 불교조각에서 최고의 걸작품으로 손색이 없다. 특히 주실 안에 모시고 있는 본존불의 고요한 모습은 석굴 전체에서 풍기는 은밀한 분위기 속에서 신비로움의 깊이를 더해주고 있다. 지극히 자연스러운 모습의 본존불은 내면에 깊고 숭고한 마음을 간직한 가장 이상적인 모습으로 모든 중생에게 자비로움이 저절로 전해질 듯하다.
석굴암 석굴은 신라 불교예술의 전성기에 이룩된 최고 걸작으로 건축, 수리, 기하학, 종교, 예술 등이 유기적으로 결합되어 있어 더욱 돋보인다. 석굴암 석굴은 국보 제24호로 지정되어 관리되고 있으며, 석굴암은 1995년 12월 불국사와 함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공동 등재되었다. 현재 석굴암은 내부 전면 공개 관람 시 항온항습 등의 문제가 우려되어 1976년부터 유리벽을 통한 외부관람을 시행하고 있다.
국보 제24호 석굴암
그동안의 국보 소개로 올린 것 중 어느 하나 소홀하거나 상대적으로 우열을 가릴 것이 있을까마는 석굴암은 단연 그중 제일이다. 석굴암은 기존에 소개한 국보들처럼 하나의 불상이나 탑, 석등, 기념비, 문, 절집 당우 등의 단품이 아니라 모두 40구의 불상, 보살상과 나한, 거사 등이 모셔져 있되 그저 복잡한 종교적 인물상을 나열한 것이 아니다. 한두 개의 뛰어난 조각상이 아니다.
▲석굴암 전경, 토함산을 올라 주차장에서 십 여분 걸으면 언덕 위에 석굴암이 보인다. 멀리서는 목조건물만 보일 뿐이다.
세계적 석굴을 만든 건축공학적 우수함과 돌을 깎아 만든 여러 가지 인물상들의 환조와 부조의 뛰어난 예술성, 수만 권의 불경과 교리서로 해설해야 할 만큼 복잡하고 심오한 불법과 불국의 세계를 표현한 교리적 오묘함, 심지어 자연 친화적인 온도와 습도 조절의 기능을 유지한 비결 등 21세기의 과학기술로도 재현하기 어려운 종합적인 결정체가 바로 이 석굴암이다.
▲가까이 다가가면 정면 3칸, 측면 1칸의 건물에 맞배와 팔작지붕이 겹쳐진 건물과 그 뒤편에 붕긋하게 솟아올라 석굴임을 알 수 있는 인공지형이 연결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지난 1995년에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세계의 보물이다. 한두 페이지로 설명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에 선뜻 답사기를 쓰기도 쉽지 않다. 두 편으로 나누어 올려본다.
창건 설화
삼국유사 권5 효선 제9(孝善 第9)에 대성효이세부모(大成孝二世父母) 신문왕대(神文王代) 내용이 있다. 즉, 대성이 두 세상의 부모에게 효도하다(신문왕대) 라는 말인데 그 본문을 해석하여 옮기면 다음과 같다.
모량리의 가난한 여인 경조에게 아들이 하나 있었는데, 머리가 크고 정수리가 평평한 것이 마치 성(城)과 같아 이름을 대성(大城)이라 하였다. 집안이 가난하여 키울 수가 없었으므로 부자인 복안의 집에 가서 품팔이를 하였는데, 그 집에서 몇 이랑의 논을 주어 의식의 밑천으로 삼게 하였다.
이때 덕망 있는 승려 점개가 흥륜사에서 육륜회를 베풀고자 하여 시주를 받으러 복안의 집에 이르자, 복안이 베 50필을 시주하였다. 점개가 주문으로 축원하였다.
“신도께서 보시를 좋아하므로 천신이 항상 보호하여 하나를 보시하면 만 배를 얻게 될 것이니, 바라건대 안락을 누리고 장수할 것입니다.”
대성이 그 말을 듣고 집으로 달려와 그의 어머니에게 말하였다.
“제가 문밖에 온 스님이 외우는 소리를 들으니, 하나를 시주하면 만 배를 얻는다고 합니다. 생각해보면 저는 전생에 좋은 일을 한 것이 없어 지금 이렇게 가난한 것입니다. 이제 또 시주를 하지 못한다면 오는 세상에서는 더욱 가난할 것입니다. 우리가 품팔이로 얻은 밭을 법회에 시주하여 후세의 응보를 도모하는 것은 어떻겠습니까?”
어머니도 좋다고 했으므로 밭을 점개에게 시주하였다. 얼마 후 대성이 죽었다. 그날 밤 나라의 재상 김문량의 집에 하늘에서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모량리의 대성이란 아이가 이제 너의 집에 태어나려고 한다.’ 집안사람들이 깜짝 놀라 모량리에 사람을 보내어 조사해 보게 하니 대성이 과연 죽었다고 하는데, 하늘에서 소리가 들리던 날과 같은 때였다.
김문량의 부인이 임신하여 아들을 낳았는데 왼쪽 주먹을 펴지 않고 있었다. 그러다가 7일 만에 폈는데 '대성'이란 두 글자가 새겨진 금패를 쥐고 있었으므로 이름을 다시 대성이라 짓고 그의 어머니를 맞이하여 집안에 두고 함께 봉양하였다. 대성이 어른이 된 뒤에는 사냥을 좋아했는데, 어느 날 토함산에 올라가 곰 한 마리를 잡고 산 아래 마을에서 묵게 되었다. 대성의 꿈에 곰이 귀신으로 변해 시비를 걸며 말하였다.
“너는 무엇 때문에 나를 죽였느냐? 내가 다시 너를 잡아먹겠다.”
대성이 두려워하며 용서를 비니, 귀신이 말하였다.
“나를 위해 절을 지어줄 수 있겠느냐?”
대성이 그렇게 하겠다고 맹세하고 꿈에서 깨어났는데, 이불이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이후부터는 사냥을 하지 않고 꿈속에 나타났던 곰을 위해 장수사(長壽寺)를 세웠다. 이 일로 해서 감동하는 바가 있어 자비로운 바람(悲願)이 더욱 독실하게 되었다.
이로 인해서 이승의 부모를 위해서 불국사(佛國寺)를 세우고 전생의 부모를 위해서 석불사(石佛寺)를 세워, 신림과 표훈 두 승려에게 각각 절에 머물도록 부탁하였다. 대성은 아름답고 큰 불상을 세워 길러준 부모의 노고에 보답하였으니, 한 몸으로 전세와 현세의 두 부모에게 효도한 것이다. 이것은 옛날에도 듣기 어려운 일로 과연 시주를 잘한 징험을 어찌 믿지 않을 수 있겠는가?
대성이 석불을 조각하려고 큰 돌 한 개를 다듬어 감실을 만드는데, 갑자기 돌이 세 쪽으로 쪼개졌다. 그래서 분통해 하다가 얼핏 선잠이 들었는데, 밤중에 천신이 내려와 감실을 다 만들어 놓고 돌아갔다. 그래서 대성은 잠자리에서 일어나 급히 남쪽 고개로 올라가 향나무를 태워 천신에게 공양을 올렸다. 그러므로 그 땅을 향고개(香嶺)라 한다. 즉, 김대성이 전생의 부모를 위해 석굴암을, 현생의 부모를 위해 불국사를 위해 세운 것이다.
수리, 보수공사와 문제점(신라역사과학관 자료 발췌)
이러한 석굴암이 근세에 들어 처음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된 것은 1907년 일본인 우체부에 의해서이다. 그러나 여기서부터 세계적 문화유산인 석굴암의 수난이 시작되기 시작한다. 당시 석굴암이 많이 훼손되어 있던 관계로 1913년부터 1962년에 이르는 오랜 시간 동안 석굴암의 중수 공사가 이루어지면서 석굴암이 지금의 많은 문제점을 가져오게 된다.
문제점 1) 1913년경의 일본인들에 의한 수리 공사
당시 수리 공사를 하던 일본인들은 석굴암을 이루고 있던 석재들을 완전해체하고 재조립하는 과정에서 많은 오류를 남기게 된다. 이중 가장 큰 오류로 여겨지는 것이 돔 외부를 보강하고 있는 콘크리트에 있다. 이로써 궁륭 내부의 고온다습한 공기의 흐름을 차단하게 되었으며 이로 인해 지금의 이슬 맺힘 현상(결로현상)을 유발했다.
문제점 2) 1917년, 1924년경의 수리공사
이 같은 결로현상으로 인해 내부벽면에 많은 청태가 발생하기 시작했고 이를 제거할 목적으로 증기세척을 가하게 된다. 이는 내부 석재의 수명에 치명타를 가하기 시작한 것이다.
문제점 3) 1962년경의 우리나라 문화재관리국에 의한 수리공사
문화재관리국은 먼저 석굴암 전실에 목조로 된 가옥을 만들게 된다. 또한, 1913년에 설치한 콘크리트 돔 위에 또다시 콘크리트 돔을 만들게 된다. 그리고 1966년경에는 내부 결로현상을 막기 위해 기계장치들을 설치하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기계장치로 인해 내부의 습기 문제는 다소간 해결을 하였으나 많은 기계장치의 소음과 진동으로 인해 많은 문제가 발생하고 있다. 그뿐만 아니라 1970년대 중반경에는 결국 석굴암의 과학적 보존을 위해 전실 앞부분에 유리로 차단막을 설치함으로써 일반 관람객들의 출입을 제한하고 있다. 이상은 신라 역사과학관의 자료에 제시된 문제점들이다.
직접 보수 유지에 관여하는 담당 전문가가 아니면 알 수 없는 문제점들이지만 우리 같은 일반 탐방객이나 답사군, 불교 신자들에게는 무엇보다 유리 벽 밖에서 넘겨다 보아야 하는 답답함이다. 석굴에 목조건물을 덧대어 지음으로써 매우 옹색해졌음은 물론 그 답답한 실내에 다시 유리 벽을 설치하여 나도 모르게 창밖의 남자, 여자가 되어 세계적 문화재이자 우리의 자랑거리인 석굴암을 매우 단편적으로 건너다보기만 해야 한다. 게다가 실내 촬영금지까지 엄중하게 쓰여 있으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내 생전에 단 한 번이라도 안으로 들어가 본존불을 한 바퀴 휘돌아 살펴보며 둥근 벽의 위아래 불상들까지 세세히 살펴볼 수 있을까?
석굴암의 구조
석굴암은 자연 동굴이 아니라 인위적으로 석굴을 만들고 둥근 천장을 씌운 후에 흙을 덮어 인공 석굴을 만든 것이다. 따라서 석굴암이 아니라 석불사(石佛寺)라는 옛 이름이 맞는 것 같다. 언제 석굴암이 되었을까?
석굴암은 크게 본존불이 계시는 주실과 통로인 비도, 참배자가 참배를 드리는 전실의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뒤쪽 원형의 주실(主室)은 높이 9.3m 높이의 석굴에 본존불을 중심으로 둥근 원형구조에 아래 위층에 다양한 불, 보살들을 새겼고 앞쪽에 네모난 모양의 전실(前室)은 원래 지붕이 없이 밖에 드러난 예배 공간으로 보이는데 지금은 꺾어졌던 부분을 펴고 목조건물을 달아 지으니 저절로 지붕이 생겨 원래의 모습을 알기 어렵게 되었다.
좌우로 팔부신중이 조각되고 입구 좌우에 인왕상을 새겼다. 이 주실과 전실을 연결하는 비도(扉道)는 좁고 짧은 연결 복도인 셈인데 사천왕상을 좌우로 2구씩 조각하였다. 바로 그 시대에 통용되던 '하늘은 둥글고 땅은 모나다'는 천원지방(天圓地方)의 이론에 따른 구조가 아닌가 싶다.
▲석굴암 구조와 평면도.
특히나 주실의 천장은 360여 개의 넓적한 돌로 둥근 형태의 모습을 꾸며 지탱하게 하였으며 천장 덮개는 20톤이 넘는 연화문을 새긴 거대한 돌을 둥글게 깎아 덮음으로써 아름다움의 극치로 완성의 마무리를 하였다. 그러나 지금은 이런 것들을 하나도 살펴볼 수 없이 그저 유리창 밖에서 평면도 개념의 정면 본존불을 보는 것으로 만족해야 한다.
전실(前室)
위 그림에서 전실의 팔부중상 8구는 지금처럼 좌우 4구씩이 평면으로 마주 보는 형태가 아니라 4번, 8번은 안으로 구부러져서 금강역사 A, B와 마주 보는 구조였다. 즉 [ ] 형태였던 것인데 1960년대 초 공사과정에서 4, 8번을 일자로 펴고 목조건물을 잇달아 지음으로써 예배와 공양을 올리는 (지붕이 없는) 옥외공간이었던 전실(前室)이 정체가 모호한 실내공간이 되었으며, 그마저도 지금은 유리 벽을 설치하여 이곳 속세와는 완벽하게 차단된 외딴 섬 같은 곳이 되고 말았다.
▲1913년 보수공사 때의 모습, 주실(主室)만이 실내개념으로 지하구조였으며, 비도(扉道)의 좌우 인왕상부터는 외부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주실 입구의 좌우 2개의 기둥위에 작은 가로보 석재가 이때는 보이지 않는다. /성균관대 박물관
이렇게 원래의 전실(前室)은 외부공간이었던지라 복도나 출입문 역할을 하는 비도(扉道)로 들어서는 좌우에 금강역사상, 즉 인왕상 2구(A, B)를 좌우로 배치하여 입구를 경계하는 모습을 구현하였던 것이다.
비도(扉道)
일반적인 예불과 공양은 외부인 전실(前室)에서 이루어졌을 것이나 본존불 앞에 특별히 공양물을 올리거나 실내로 들어가야 할 경우에는 출입문이자 통로 역할을 하는 좁고 짧은 공간, 비도(扉道)를 통해 안으로 들어가고 밖으로 나오는 것이다.
▲현재의 석굴암 정면사진, 유리벽 너머에서 찍었는데 비도 좌우측 2구의 인왕상이 보이고 정면에 본존불이 보인다. 위 1913년 공사 때 사진에서는 안 보이던 전실 입구 2개의 기둥 위에 가로보 석재가 생겨 본존불의 시선을 차단할 듯하다.
비도의 밖에는 2구의 금강역사상(인왕상) A, B를 세웠으니 일반 사찰의 금강문(金剛門)인 셈이며, 짧고 좁은 통로의 좌우에는 각각 2구씩의 사천왕상 가, 나, 다, 라를 조각하여 천왕문(天王門)을 지나 금당에 이르는 구조를 그대로 구현한 것이다. 실제로는 아치형의 석문(石門)이 세워져 있고 비도를 나서 주실로 들어가는 즈음에 다시 2개의 돌기둥을 세웠다.
주실(主室)
주실은 본존불을 모신 석굴암의 주법당인 셈인데 보수공사를 하고 유리 벽을 설치한 60년대 이후 50년 가까이 일반인의 발길이 금지된 공간이다. 부처님을 너무 외롭게 한 건 아닌지? 비도를 지나면 입구 좌우에 2개의 돌기둥이 서 있고, 내부는 둥근 구조이며 천장은 돔형 지붕이 높게 구성되어 본존불이 어느 날 벌떡 일어나시더라도 머리가 부딪치거나 좌우 공간이 움직이기에 부족하지는 않을 듯하다.
다만 일반 참배객들은 유리창 너머로 2개의 돌기둥 사이의 본존불만 겨우 볼 수 있을 뿐 둥글게 둘러싼 원형 벽이 어떤 모양, 어떤 구조인지? 거기에는 어떤 불, 보살들이 새겨져 있는지? 그밖에 어떤 장엄과 꾸밈이 그곳에 모셔져 있는지 도저히 알 수 없다.
더욱 아쉬운 것은 이러한 '눈앞에 있으되 볼 수 없고, 볼 수 없으니 알 수도 없는' 구조에 감춰진 저 대단한 국보의 자세한 면면을 상세히 설명하는 설명문 하나, 안내판 하나가 없다. 한쪽 구석에 책상을 놓고 앉아서 시주금 접수대장을 펼쳐놓고 있을 뿐이다.
개개의 상세한 설명은 ②편에서 하기로 하고, 여기 ①편에서는 개략적인 구조를 설명하면, 가운데 본존불을 중심으로 주실은 둥근 모양으로 벽면을 둘러짓고 본존불 바로 뒷면에는 십일면 관음상을 세웠고 그 좌우로 각각 5구씩 모두 10구의 불, 보살을 모셨는데 입구 좌우로는 대범천과 제석천이 있고 그다음에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을 모셨으며 그 안쪽으로는 부처님 10대 제자를 좌우로 각각 5명씩 조각하여 둘러 세웠다.
또한, 석굴암의 특징 중 하나는 본존불의 광배를 본체에 붙이거나 등 뒤에 세우지 않고 둥근 벽의 뒤쪽, 정면에서 볼 때면 본존불의 뒷머리에 위치하는 곳 벽면에 새겨 보는 이로 하여금 더욱 입체적으로 느껴지게 한 점이다. 그리고 그 광배의 높이쯤, 그러니까 빙 둘러 세운 보살상들 위로 2층 구조가 되는 자리에는 10개의 감실을 파고 보살상들을 새겼는데 그중 2개는 분실되어 비어있는데 일본 강점기에 도난당했다 하니 당시 관계된 일본인이 훔쳐갔다는 설이 있다.
결국, 지금의 석굴암은 지어진 당시와 비교해볼 때 너무나 많이 변형되고 망가지고 도난당한 아픈 역사를 갖고 있다. 또한, 엄밀히 말하면 석굴암 전체를 유리 벽 속에 가둬놓고 한 치도 들어가지 못한 채 밖에서 보아야 하는 것이다. 공사, 복원 과정에서 습도 조절 등의 균형을 깨뜨린 후 생긴 일이라지만 너무나 아쉬운 부분이다.
벌써 몇십 년 전의 상황이므로 지금은 관련 기술이나 공법이 더 좋아지지 않았을까 생각하면서 가능하다면 목조건축물을 헐어내고 본래의 모습대로 전실은 외부에 위치시키고 비도를 통해서 실내인 주실까지 들어가 볼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좋을듯하다. 그렇게 한다고 꼭 문화재의 수명이나 보호기능이 현저하게 감소하지는 않을 것으로 생각한다. 부분별 구체적이고 세부적인 설명은
②편에 이어집니다.
[24-2] 국보 제24호 <경주 석굴암 석굴> ②
①편의 설명에서 석굴암은 전실(前室)과 비도(扉道), 주실(主室)의 세 부분으로 이루어졌다고 하였다. 이 세 곳에는 모두 40구의 불·보살상과 관련 조각들이 세워져 있는데 하나하나 그 명칭과 의미, 모양 등에 대하여 알아보자. 알다시피 현재 석굴암은 전실, 비도, 주실 안으로 들어갈 수 없고 내부 사진 촬영은 더더구나 불가능하다.
따라서 각각의 사진은 필자가 찍은 사진과 석굴암 홈페이지에 올려진 사진, 그리고 문화재청에서 공개한 사진들을 사용하였으며, 관련 책자마다 관계되는 사람마다 설명이 다르고 명칭과 위치가 차이 나는 것도 석굴암 측 설명을 기준하여 여기에 올리기로 하였다. (이점 독자분들의 양해를 바랍니다.)
전실(前室) : 팔부신중(八部神衆)
전실에는 좌우로 4구씩, 모두 8구의 팔부신중 조각이 새겨져 있다. 팔부신중은 불법수호의 신중으로, 원래는 인도의 힘 있는 신들이었는데, 석가모니의 교화를 받아 불교의 수호신이 되었으며 이름도 일정하지 않고, 모습 또한 정형화되지 않은 것이 특징이다. 우리나라의 팔부중상은 대개 무장을 한 것이 많고 손에 들고 있는 지물이나 잣도 여러 가지이다. 석굴암에서 부처님을 바라보는 위치에서 좌우로 각각 4구씩의 위치별 명칭은 아래와 같다.
용 마후라가
야차 천(제석천)
긴나라 건달바
아수라 가루라
▲왼쪽 팔부신중 4구의 사진, 좌측부터 아수라, 긴나라, 야차, 용. 용이 가장 안쪽(부처님 쪽)이다.
아수라(阿修羅)는 원래 악신이었으나 선신(善神)이 되었다. 긴나라(緊那羅) 가무의 신, 인간은 아니나 부처를 만날 때는 인간 모습을 취한다. 야차(夜叉)는 사람을 도와 이익을 주며 불법을 수호하는 신용(龍)이며 물속에 살면서 바람과 비를 오게 하는 능력을 갖춘 존재이다.
▲오른쪽 팔부신중 4구의 사진, 좌측부터 마후라가, 천(제석천), 건달바, 가루라이다. 마후라가가 가장 안쪽(부처님 쪽)이다.
마후라가(摩餱羅加)는 사람의 몸에 뱀의 머리를 가진 음악의 신. 천(天)은 천계에 거주하는 제신(諸神), 수미산 정상의 도리천 주인은 제석천이다. 건달파(乾闥婆)는 천상의 신성한 물(soma)를 지키는 신, 음악을 좋아하는 衆(놀기 좋아하는 사람을 일컫는 말이 됨) 가루라(迦褸羅)는 새벽, 또는 태양을 인격화 한 새로 금시조(金翅鳥)라고도 한다.
위 전실은 8부중상은 동시에 제작된 것으로 보이지 않고 수시로 교체, 변경된 것으로 짐작된다. 따라서 조각수준이나 솜씨가 제각각이며 그 중 용과 건달바의 솜씨가 가장 우수하다는 전문가들의 평이다. 그중 아수라는 상체와 하체가 각각 다른 것을 접합시킨 졸속작품이라는 의심이 있지만 마땅한 해석이나 답변이 없어 궁금하다.
▲아수라 상, 다른 7구의 팔부중상들은 전신상이 온전한 데 비하여 어딘지 부적절한 모습이다.
① 편에서도 언급하였듯이, 이 전실(前室)은 원래 지금처럼 실내가 아니라 옥외에 있는 공양, 참배공간이었으며 전문가들은 처음 석굴암을 만들었을 때는 전실은 없었고, 비도(扉道)의 앞부분 좌우에 있는 인왕상부터가 시작이었을 것이라 한다. 그래서 나중에 추가로 설치하였을 확률이 높고 그 과정에서 8구의 조각들이 수시로 교체, 보수되면서 바뀌기도 했다고 보는 것이다.
비도(扉道) : 인왕상(仁王像)과 사천왕상(四天王像)
전실에서 주실로 이어지는 통로, 비도(扉道)라고 부르는 입구인 셈이다. 들어서기 전 좌우로는 수문장 역할로 볼 수 있는 인왕상(금강역사) 2구가 서 있고, 통로의 좌우에는 사천왕상이 각 2구씩 서 있다. 이제 부처님이 계신 본전(本殿)으로 들어서는 것이며, 일반 사찰은 금강문을 지나 사천왕문을 들어가는 것이다.
인왕상(仁王像)
금강역사라고도 불리는 인왕상은 공격하는 모습에 입을 벌리고 있는 아형(阿形) 금강역사, 방어하는 모습에 입을 다물고 있는 흠형(噷形) 금강역사가 있는데 아형 금강역사는 나라연금강(那羅延金剛), 흠형 금강역사는 밀적금강(密迹金剛)이라고 부른다. 나라연금강은 천상의 역사로서 힘이 코끼리의 백만 배나 된다고 하며 밀적금강은 언제나 금강저를 들고 부처님을 호위하며, 온갖 비밀스러운 사적(事跡)을 알고 있다. 이들은 상체를 벗은 반나체에 손은 권법(拳法)을 짓거나 금강저를 들고 있는 독특한 모습이다 .
▲인왕상, 좌측이 아형(阿形) 금강역사, 우측이 흠형(噷形) 금강역사이다.
▲실제 석굴암 사진, 중앙에 열린 부분이 비도(扉道)이며 그 좌우로 인왕상이 보이는데 유리창 너머인지라 흐려 보인다.
이 인왕상도 전실의 8부중상처럼 여러 번 제작하고 보완하였는지, 근처에서 인왕상 머리와 손 등이 발굴되기도 하였다고 한다. 국립경주박물관에 두상이 하나 전시되기도 하는 데 부조이지만 그 질량감이 뛰어나 환조에 가깝게 보인다. 아마도 해체공사 후 복원 당시 새로이 새겨 넣은 것이며, 예전 인왕상의 잔해가 아닌가 싶다.
사천왕상(四天王像)
동서남북 사방을 관장하는 신상으로 본존불을 맞이하는 입구 통로 좌우에 각각 2구씩 조각되어 있다. 동방 지국천왕(持國天王), 남방 증장천왕(增長天王), 서방 광목천왕(廣目天王), 북방 다문천왕(多聞天王)이 지키고 서 있으며, 두 발로 악귀를 밟고 서 있는 그 표정과 자태가 각양각색이다. 사악한 것으로부터 신성한 것을 보호하고 침략자로부터 수호하는 역할이다. 석굴암에서 부처님을 바라보는 위치에서 좌우로 각각 2구씩의 위치별 명칭은 아래와 같다.
서방 광목천왕
북방 다문천왕
남방 증장천왕
동방 지국천왕
▲비도 좌측 벽에는 남방 증장천왕이 바깥쪽, 서방 광목천왕이 안쪽(부처님 쪽)에 있다. 광목천왕은 얼굴을 나중에 다시 바꾼 듯하다.
▲비도 우측 벽에는 북방 다문천왕이 안쪽(부처님 쪽), 동방 지국천왕이 앞쪽(바깥쪽)에 있다.
유리창문 밖에서 보면 인왕상은 그래도 정면을 보고 있어서 나름대로 알아보겠는데 비도 좌우측에 2구씩 모셔진 사천왕상은 도저히 볼 수가 없어 아쉽다. 인왕상과 사천왕상 모두 머리 뒷면에 커다란 원형의 광배(頭光)를 새긴 것은 이들이 용감하고 힘도 세지만 지혜도 있다는 것을 암시하는 의미로 보면 될듯하다.
주실(主室) : 본존불과 십일면관음상 外
드디어 인왕문과 사천왕문을 지나 본전(本殿)에 들어섰다. 본존불인 석가모니 부처님이 계신 곳이다. 그러나 부처님은 혼자 계시지 않았다. 가운데 존귀한 모습으로 앉아 계신 부처님을 둘러싼 많은 보살과 나한상... 참으로 복잡하고 대단한 구조이자 석굴암의 정수이다.
본존불(本尊佛)
본존불은 높이 1.58m의 좌대위에 3.26m의 거대한 불상으로 결가부좌한 채 항마촉지인의 수인을 취하고 고요하게 앉아 있는데 범접하기 어려운 위엄 있는 모습이며 차분한 분위기가 마치 깊은 명상에 잠긴 듯 보인다.
▲석굴암 본존불, 세계적으로 손꼽히는 석불상이다. 주변은 원형벽면이 둘러싼 구조로 아래 위에 여럿 보살상 등이 조각되었다.
▲원형 지대석 위에 연화문 하대석과 상대석이 대칭으로 마주하며, 중앙의 중대석은 팔각으로 돌려져 있다. /문화재청 사진
우단편견의 옷차림은 주름져 내려오다가 양발에 감긴 후 바닥에 한 자락을 깔고 앉은 모습이고, 뒤쪽에 겹쳐 보이는 두광(頭光)은 연화문 광배로 조각하여 부처의 권위를 한껏 높여주고 있다. 본존불은 정중앙이 아니라 다소 뒤쪽으로 물러앉아 앞쪽이 조금 넓은 모습인데 공간적 시간을 편안하게 하려는 의도로 보인다.
▲본존불의 측면 뒷모습, 훼손된 후 보수한 흔적이 뚜렷하다.
여기서 우리가 웃지 못할 일은 언젠가 이 석굴암에 도굴꾼들이 들어와서 본존불 아래에 복장물이나 부장품이 있나 싶어서 본존불의 뒤쪽 아랫부분을 훼손하였다는 것이다. 그래서 (안에 들어가지 못하는 우리가 볼 수는 없지만) 그 부분의 흉터가 뚜렷이 남아 있다고 한다.
▲주실의 구조, 비도를 지나면 2개의 돌기둥이 서 있고, 주불을 중심으로 둥근 벽을 따라 많은 보살, 나한상이 있는 모습이다.
본존불을 둥글게 둘러싼 벽면에는 아래층과 위층으로 나누어 아래층에는 앞에서부터 좌우로 대범천과 제석천, 문수보살과 보현보살, 그리고 석가모니의 10대 제자가 좌우로 각각 5명씩 나뉘어 있으며 본존불 직후방에는 11면 관음보살상이 있다. 2층에는 작은 감실 10개를 파서 보살상 7구, 유마거사상 1구가 있으며 감실 2곳은 도난당한 후 비어 있다. 대범천(大梵天)과 제석천(帝釋天)
▲대범천과 제석천, 입구에서 왼쪽이 대범천, 오른쪽이 제석천이다.
역시 인도의 신이었으나 석가여래를 수호하는 최고의 수호신이 되었다. 둘은 불법수호의 쌍벽을 이루며 제석천은 오른손에 불자(佛子) 왼손에는 금강저를 들고 있으며, 범천 역시 불자를 들고 있으나 왼손에는 정병(淨甁)을 들고 있다. 문수보살(文殊菩薩)과 보현보살(普賢菩薩)
▲좌측이 문수보살, 우측이 보현보살이다. 반대로 설명한 곳도 많지만, 석굴암 측에 따른다.
문수보살은 지혜(知), 보현보살은 행(行)을 상징하며 석가여래의 좌우 협시보살이다. 원래 문수보살은 사자, 보현보살은 코끼리와 함께 표현되는데 이곳 석굴암은 보살상만 새겼다. 또한, 모두 두광을 단순한 둥근 모양으로 새겼는데 위에서 본 제석천, 범천은 광배의 외곽에 세세한 무늬를 넣었다. 10대 제자
▲본존불 왼쪽의 10대 제자 5구. 맞은편 오른쪽에도 같은 형태로 대칭되게 새겨져 있다. 제자상 위로는 감실이 보인다.
부처님 10대 제자는 지혜 제일 사리불과 신통 제일 목련, 두타 제일 가섭과 다문 제일 아난, 밀행 제일 라훌라와 지계 제일 우팔리, 처안 제일 아나율과 해공 제일 수보리, 논의 제일 가전연과 전법 제일 부루나이다. 이중 라훌라는 부처님이 출가 전에 낳은 아들이다. 또한, 두타 제일 마하가섭은 부처님 열반 후 제자들을 결집시켜 불교 교리와 부처님 설법을 전부 암송하여 일치시킨 불교의 1대조이다. 부처님 좌우로 5명씩 나누어 새겼는데 각각의 자리마다 정확한 이름을 알기 어렵다. 부조의 크기는 모두 2m 이상으로 등신(等身)보다 다소 크며, 얼굴 모습은 한국적이라기보다 서구적인 느낌이다. 십일면관음보살
▲십일면 관음상.
본존불 바로 뒤에 있어서 밖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다른 보살상들보다 돌출을 확연하게 하여 부조이면서 환조에 가깝다. 아마도 가장 뒤쪽임을 고려하여 그리 한 듯하다. 연화좌에 올라선 상태로 왼손은 연꽃이 꽂힌 병을 들고 있으며, 오른손은 아래로 내려 장식물을 잡은 채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관세음보살상은 석굴암 내 조각 중에서 단연 눈에 띄는 작품이기도 하다.
▲십일면 관음보살의 머리 부분, 맨 위에 불상 1구가 보이고 중간에 얼굴 3면, 아래에는 좌우로 얼굴 3면씩 6면이 있고 입상불이 하나, 그래서 머리 위 얼굴 9면과 가운데 작은 입상불, 맨 위의 불상까지 합쳐서 11면이라고 부르는 듯하다. 그중 얼굴 하나는 나중에 따로 붙인 흔적이 역력하다.
여기서 11면, 즉 11개의 얼굴이란 관음보살이 중생을 교화하기 위한 다양한 설법 모습을 표현한 것으로 머리 위에 얼굴만 표현된 9개의 불상과 작은 입상불 1개, 그리고 가장 위쪽에 불상 1구를 합쳐 모두 11개의 얼굴이라서 십일면 관음보살이라고 한다. 일부에서는 본체를 포함하여 십일면이라는 주장도 있는데, 그러면 머리 위의 어느 얼굴을 뺀 것인지는 모르겠다. 한동안 얼굴 2개가 도난당하여 9면으로 알려졌었으나 지금은 보완한 상태이다.
감실(龕室)
불상 등을 모시기 위하여 탑의 몸돌이나 바위 등의 면을 안으로 파낸 구조를 감실이라고 한다. 석굴암 주실 내부 둥근 벽면의 2층에는 가장 뒤쪽 십일면관음보살상 위에 주존불의 광배가 있고 그 높이 좌우로 각각 5개씩 모두 10개의 감실이 있다. 감실 안에는 신광과 두광을 포함한 광배석과 앞면에 부조형태로 조각한 보살상들을 모셨는데 모두 7구의 보살상과 1구의 유마거사상이 놓여 있으며 각각 크기는 약 7~80cm쯤이다. 2개의 감실은 비어 있는데 일본강점기에 도난당했다고 한다.
▲감실 모습, 원래는 뒤편으로 환기 통풍이 되었는데 보수공사 시 다 메워버렸다고 한다.
특이한 것은 머리를 깎지 않은 유마거사가 모셔진 점인데 유마거사는 부처님 시절 재가신도로 출가하지 않았으면서도 부처님 제자들에게도 존경받았는데, 일반인들에게 나도 (출가하지 않아도) 부처가 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주기 위해 포함했다고 보고 있다. 현재 남아있는 8개의 감실 주인공은 의견이 분분하여 각각 누구인지 명확하지 않다.
궁륭(穹窿) 천장
석굴암 천장은 돔형으로 둥글게 솟아있는 모양이다. 궁륭천장이라고 한다. 둥근 천장을 높이 올려세움으로써 시각적으로 답답하지 않고 인공석굴이면서 하늘이 있음을 의미하는 뜻에 충실한 구조이다.
삼국유사에 큰 돌이 세 쪽으로 쪼개져 김대성이 분통해 하다가 잠이 들었는데 천신이 내려와 완성해 주었다는 이야기를 증거하듯이 과연 가장 꼭대기 큰 머릿돌은 세 조각을 이어붙인 흔적이 뚜렷하다. 또한, 커다란 돌을 원형으로 둘러쌓으면서 보다 견고하게 하고 빠지지 않도록 소위 돌못을 30개나 끼워 박았는데 이는 천장을 밋밋하지 않게 해주는 시각적인 효과도 있어 올려다보면 참 멋진 천장일 듯하나, 역시 사진으로밖에 볼 수가 없다.
▲석굴암 궁륭천장.
이상으로 석굴암의 구조와 구석구석 세부적인 명칭, 모양, 의미 등을 알아보았다. 석굴암의 수난 이야기를 써야 하는데 1, 2편으로 나누어 답사 이야기만 쓰게 되어 아쉽다. 그뿐만 아니라 필자 자신도 석굴암 안으로 들어가 보지 못한 채 이렇게 답사기를 쓰는 것이 모순이 아닐 수 없다. 정직하게 바깥에서만 봤습니다 하고 정면 사진 한 장만을 올리는 것이 맞는 것일까? 그래도 최선을 다해서 나름대로 자료를 수집하고 엮어서 올렸음을 양해 바라는 바이다.
우리나라 절집들 대부분이 문화재를 보유하고 있어 이를 빌미(?)로 입장료를 (문화재 관람료 명목으로) 받고 있으나, 막상 안으로 들어가 보면 실내에 있는 문화재는 대부분 '사진촬영금지'가 붙어 있고 관계되는 보살, 처사님들이 감시의 눈을 부라린다. 또 작은 문화재들은 따로 성보박물관을 지어 추가 입장료(관람료)를 내야 하고, 그곳 역시 안으로 들어가면 영락없이 촬영금지다.
부득이 도둑촬영을 하거나 통사정을 하고 한두 컷 찍어올 때면 답사군으로서의 애로가 보통이 아니다. 이번에 소개한 국보 제24호 석굴암은 특히 그러하다. 만약에 석굴암을 가게 되면 이러한 점들을 고려하여 관계 자료를 많이 참고하시고 시간이 되면 '신라역사과학관'이나 '국립경주박물관'을 방문하여 석굴암 모형이나 모조품, 관련 발굴품 등을 살펴보기 바란다.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다행히도 경주박물관에 갔더니 석굴암 주실에 있는 십일면관음상과 보현보살, 문수보살 부조를 석고로 떠 놓은 것이 있어서 (1914년 해체, 복원할 때로 추정) 그 석고상 복제품이 있었다. 진품과 다름없는 모습을 가까이서 지켜볼 수 있어 매우 좋았다.
▲문수보살, 복제한 석고상이지만 너무나 미려하다.
▲보현보살.
▲십일면관음보살.
비록 3점밖에 없어 아쉬웠지만, 진품을 대한 듯 흡족했다. 현재처럼 석굴암 내부를 개방할 수 없다면 어느 곳에건 이렇게 똑같은 모형을 만들고 상세한 설명을 해놓은 모의 석굴암을 만들 필요가 있다. 그리고 잘 찍은 사진과 정확한 명칭, 설명 등을 인쇄한 안내문을 배포해야 한다. 따지고 보면 관계기관들의 직무유기라 할 수 있다. 명색이 국보인데 이를 찾아온 내, 외국인들은 그저 답답할 수밖에 없고, 그저 정면에서 유리창 너머로 정지화면만 보아야 한다니 이해가 되지 않는다.
현재 신라역사과학관에는 1/5 크기의 모형을 만들어 이해를 돕고 있는데 학생들 견학코스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실물 크기로 예술성도 뒤지지 않도록, 위에서 본 것처럼 석고를 떠내고 다듬어서 만들어질 모의 석굴암을 기대해본다. 시간과 예산이 소요된다면 우선 정확한 설명문이라도 먼저 만들어서 배포해줄 것을 건의한다.
[25] 국보 제25호 경주 태종무열왕릉비
공식명칭 : 경주 태종무열왕릉비(慶州 太宗武烈王陵碑)
지정일 : 1962. 12. 20
분류 : 기록유산/서각류/금석각류/비
시대 : 통일신라
주소 : 경북 경주시 서악동 844-1번지
신라 제29대 왕인 태종무열왕의 능 앞에 세워진 석비이다. 통일신라시대에 세워졌던 비(碑)들은 중국 당나라의 영향을 받아 받침돌은 거북 모양을 하고 있고, 비몸 위의 머릿돌에는 용의 모습을 새겨져 있는데, 태종무열왕릉비는 이러한 양식이 나타난 그 최초의 예가 되고 있다.
비각 안에 모셔져 있는 비는 현재 비몸이 없어진 채 거북받침돌 위로 머릿돌만이 얹혀져 있다. 거북은 목을 높이 쳐들고 발을 기운차게 뻗으며 앞으로 나아가고 있는 모습으로, 등에는 큼직한 벌집 모양의 육각형을 새긴 후, 등 중앙에 마련된 비좌(碑座:비몸을 꽂아두는 네모난 홈) 주위로 연꽃조각을 두어 장식하였다. 머릿돌 좌우에는 6마리의 용이 3마리씩 뒤엉켜 여의주를 받들고 있으며, 앞면 중앙에 ‘태종무열대왕지비(太宗武烈大王之碑)’라고 새겨놓아 비의 주인공을 밝히고 있다.
통일신라 문무왕 원년(661)에 건립되었으며, 명필가로 유명했던 무열왕의 둘째 아들 김인문의 글씨로 비문을 새겨 놓았다. 표현이 사실적이고 생동감이 있어 마치 살아 움직이는 듯한 강한 인상을 주며, 삼국통일을 이룩한 신라인들의 진취적 기상을 느낄 수 있다.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동양권에서도 가장 뛰어난 걸작이라 일컬어지는 작품으로, 능숙하게 빚어낸 기법에서 당시 석조 조각의 발달상을 엿볼 수 있다. (문화재청)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 김춘추 신라 29대 임금 태조 무열왕 김춘추는 25대 진지왕의 장남 용수의 아들이며, 진평왕의 장녀 즉 선덕여왕의 언니 천명 공주 소생이다. 아버지 용수가 죽은 후에는 어머니가 삼촌인 용춘에게 재가하였기에 용춘의 양자가 되었고 24살에는 화랑도의 제18세 풍월주에 올랐으며 이후 26, 27, 28대 진평, 선덕(여), 진덕(여)왕대의 정치 외교 문제에 중추적 역할을 하기에 이른다.
백제를 고립시키기 위하여 고구려와 동맹을 맺고자 갔다가 갇히게 되었으나 겨우 탈출하였으며 이후 친당정책을 주도하여 여러 차례 당을 내왕하며 당 태종 이세민에게 병력지원을 약조 받았다. 이후 가야국 후예 김유신 등과 손잡고 강력한 세력으로 성장하였으며 654년 진덕여왕이 죽자 신하들의 지지를 얻어 52세의 나이로 29대 임금이 되니 첫 진골 출신 왕이다.
이후 김유신과 힘을 합쳐 삼국을 통일하는 초석을 닦게 되나 완전한 통일을 못 보고 661년 6월에 59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하였으며 사후 시호를 무열이라 하였으며 태종이라는 시호가 추가되어 태종무열왕이라 부르게 되었다. 김유신의 누이 중 동생 문희는 김춘추와 결혼하여 문명부인이 되었으며 언니 보희는 김춘추의 첩이 되었다. 30대 문무왕은 문명부인의 큰아들, 김인문은 차남이다. 또한 보희의 딸 요석공주는 김흠운과 결혼하였으나 백제와의 전투에서 사망하자 과부가 되어 원효와의 사이에 설총을 낳는 등(원효대사가 무열왕의 사위인 셈) 여러 가지 일화가 얽혀있는 것이 특징이다.
태종무열왕릉
태종 무열왕릉은 경주 북서쪽, 지금의 경부고속도로 경주 IC 가까운 곳 선도산의 남쪽 기슭 아래에 있는데, 신라 56대 왕릉 중 어디가 누구의 왕릉인지 명확히 알 수 있는 것이 드물지만 태종 무열왕릉은 그 앞에 무열왕릉비(碑)가 서있어 확실하게 29대 태종무열왕 김춘추의 능인 것을 알 수 있다. (사적 제20호)
▲태종무열왕릉 전경.
능은 별다른 장식 없이 약 100m에 달하는 커다란 봉분이지만 미끈하게 생긴 능선을 가진 아름다운 모습이다. 능 둘레에 자연석을 쌓고 드문드문 큰 돌을 받쳤으나 흙에 묻혀 잘 보이지 않는다. 이후 통일신라시대에서는 왕릉에 여러 가지 장식을 세우기 시작한다. 태종 무열왕릉 뒤쪽으로는 거대한 능 4기가 나란히 있는데 누구의 능인지 밝혀지지 않은 채 서악동 고분군(사적 제142호)으로 불리고 있으며 아마도 무열왕의 선조들로 짐작할 뿐이다.
태종무열왕릉비(국보 제25호)
▲무열왕릉비 비각.
▲비신은 없고 비좌와 이수만 남아 있다
태종무열왕릉비는 능 앞쪽, 그러니까 매표소에서 표를 끊고 입장하노라면 오른쪽 비각 안에 세워져 있는데 귀부와 이수만 남아있다. 비신은 없지만 머릿돌인 이수의 가운데에 '太宗武烈大王之碑(태종무열대왕지비)'라고 돋을새김 되어 있어 능의 주인을 알게 해준다. 이 글씨는 무열왕의 둘째 아들이자 명필인 김인문이 쓴 것으로 전해지며 김인문은 길 건너에 묻혀 있다.
▲옆모습. 앞발은 5개, 뒷발은 4개의 발가락이다. 비좌에 얹힌 이수의 옆면을 보면 3마리의 용을 새겼음을 알 수 있다.
▲이수는 둘로 깨어졌으나 뛰어난 조각 솜씨는 충분히 보여지며 가운데 글씨도 알 수 있다.
이수는 양쪽에 세 마리씩, 좌우 합하여 여섯 마리의 용이 서로 얽혀 여의주를 희롱하며 받들고 있는데 전체적으로 뛰어난 조각이다. 귀부는 거북이가 머리를 높이 쳐들고 힘차게 앞으로 나가려는 형상으로 보이며 실제로 앞발은 5개, 뒷발은 4개를 조각하여 뒷발을 힘 있게 땅을 박차고 미는 것을 의미한다고 한다.
▲이수의 뒷모습, 여의주를 다투고 희롱하는 모습이다.
▲거북 머리를 위로 치켜들었는데 목 둘레에도 주름을 의미하는 조각을 새겼으며 붉은 색이 돈다. 힘을 주는 모습이리라.
거북이 등에는 육각의 귀갑무늬를 새기고 당초문과 구름문양을 화려하게 조각하여 뛰어난 예술성을 보여주고 있는데 이 귀부는 현재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것 중 가장 오래된 것이다. 그만큼 국보의 가치가 충분히 있는 것이다.
[26] 국보 제26호 경주 불국사 금동비로자나불좌상
공식명칭 : 경주 불국사 금동 비로자나불좌상(慶州 佛國寺 金銅毘盧遮那佛坐像)
지정일 : 1962. 12. 20
분류 : 유물 / 불교조각/ 금속조/ 불상
시대 : 통일신라
주소 : 경북 경주시 진현동 15번지 불국사
경주시 토함산 기슭에 자리 잡은 불국사는 통일신라 경덕왕 10년(751) 김대성의 발원에 의해 창건된 사찰로, <삼국유사>에 의하면 김대성은 현세의 부모를 위해 불국사를, 전생의 부모를 위해 석굴암 석굴을 창건하였다고 한다. 불국사 비로전에 모셔져 있는 높이 1.77m의 이 불상은 진리의 세계를 두루 통솔한다는 의미를 지닌 비로자나불을 형상화한 것이다.
머리에는 머리칼을 작은 소라 모양으로 표현하였으며, 얼굴은 위엄이 있으면서도 자비로운 인상을 풍기고 있다. 왼쪽 어깨에만 걸쳐 입은 옷은 매우 얇게 표현되어 있다. 자연스럽게 흘러내리고 있는 옷 주름의 표현은 매우 사실적이다. 손 모양은 오른손 검지를 왼손으로 감싸고 있어 비로자나불이 취하는 일반적인 손 모양과는 반대로 표현되었다. (문화재청)
경주 불국사에는 국보만도 6점이나 있다. 앞서 알아본 국보 제20호 다보탑, 제21호 석가탑, 22호 연화 칠보교, 23호 청운 백운교에 이어서 다섯 번째 국보가 비로자나불이다. 이번에 소개할 국보 제26호 금동 비로자나불좌상은 불국사 비로전에 모셔져 있으며, 같은 불국사 극락전에 모신 금동 아미타여래좌상(국보 제27호)과 경주 백률사 금동 약사여래입상(국보 제28호)과 함께 통일신라 3대 금동불상으로 불린다. 계속 답사할 예정이다.
불국사 비로전(毘盧殿)
▲불국사 배치도. 정면의 대웅전과 극락전 영역, 뒷면의 비로전 영역으로 나누어진다.
▲불국사 비로전, 대웅전 뒤 무설전에서 높이 올라간 지형에 관음전 왼쪽으로 조금 낮은 곳에 있다.
불국사는 가람 전체를 몇 개의 영역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즉, 청운교 백운교를 통해 자하문을 들어서면 대웅전 영역인데 이곳에는 석가모니 부처님이 계시고, 그 왼쪽 연화 칠보교를 올라 안양 문을 통과하면 극락전 영역인데 아미타 부처님이 계신 곳이다. 이렇게 정면에는 두 곳의 영역이 자리 잡고 있으며 대웅전 뒤쪽으로 높은 지형에 올라서면 비로전이 있어 비로자나 부처님을 모시고 있는데 이는 부처님들 간에 차이는 있지만 서로 높낮이는 없어서 각각 별도의 영역을 구축해서 모시고 있다. 불국사 비로전은 1973년 대규모 복구공사 때 고려 시대 양식으로 지은 건물이다.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
비로자나불은 진리 그 자체를 상징하여 진신(眞身) 또는 법신(法身)이라고 하며 범어 바이로차나(vairocana)를 음역하여 비로자나라고 한다. 이 부처님이 있는 세계의 공덕 무량함과 광대 장엄함은 헤아릴 길이 없고 큰 연화로 이루어져 있는 이 세계 가운데에는 우주의 만물을 모두 간직하고 있다 하여 흔히 연화장세계(蓮華藏世界)라고 하며, 연화장세계의 교주가 비로자나불이다.
경전 상으로 볼 때 비로자나불은 화엄경(華嚴經)의 교주이다. 화엄계통의 사찰에서는 대적광전을 본전(本殿)으로 삼고 비로자나불을 주 불상으로 모신다. 비로자나불이 계신 전각을 대적광전(大寂光殿), 대광명전(大光明殿)이라고 하는데 이럴 경우는 보통 비로자나불을 중심으로 좌우에 노사나불(盧舍那佛)과 석가모니불을 봉안하게 된다. 또한, 불국사처럼 비로전(毘盧殿)이라고도 하고 화엄전(華嚴殿)이라고도 하는데 이때는 보통 비로자나불만을 봉안한다.
▲비로전 안의 국보 제26호 금동 비로자나불상, 가부좌를 틀고 앉아 지권인을 취하고 있다.
국보 제26호 금동 비로자나불은 높이 1.8m로 매우 크며, 나발 머리에 육계를 표현하였으며 단정 엄숙한 표정이다. 목에 삼도가 있고 법의는 우견편단(右肩偏袒)으로 오른쪽 어깨를 드러낸 채 자연스럽게 왼쪽 어깨와 왼팔에 걸쳐진 모습을 세밀하게 표현하였다. 광배는 보이지 않으며 (뒷머리와 어깨 밑에 광배의 흔적이 있다고 함) 안정되고 넓고 든든해 보이는 결가부좌에 두 손은 지권인을 보이는데 중생을 부처님이 감싸고 있는 것을 상징하며 어리석음과 깨달음도 하나라는 의미이다.
원래 지권인은 왼손을 오른손으로 감싸 쥐어야 하는데 이 불상은 오른손을 왼손으로 감싸 쥐었다. 이를 반대라는 의미의 역지권인(逆智拳印)이라고도 하는데 이는 인도에서 발생한 불교가 중국을 거쳐 우리나라까지 오면서 좌측과 우측의 구분에 혼란이 생겨난 산물이라고 한다. 인도와 중국이라는 서로 다른 두 문화권에 걸쳐 존재하는 불교의 숙명, 좌우보처(左右補處)의 혼란이다.
[27] 국보 제27호 경주 불국사 금동아미타여래좌상
공식명칭 : 경주 불국사 금동아미타여래좌상 (慶州 佛國寺 金銅阿彌陀如來坐像)
지정일 : 1962.12.20
분류 : 유물 / 불교조각/ 금속조/ 불상
시대 : 통일신라
주소 : 경북 경주시 진현동 15번지 불국사
금동아미타여래좌상은 불국사 극락전에 모셔진 높이 1.66m의 불상이다. 머리에는 작은 소라 모양의 머리칼을 기교 있게 붙여 놓았으며, 정수리 부근에는 상투 모양의 머리(육계)가 큼직하게 솟아 있다. 원만하고 자비스러운 얼굴은 정면을 향하고 있으며, 눈썹은 반원형이고 콧날은 오뚝하다. 신체 표현은 장중하여 건장한 남성의 체구를 연상시키며, 두 무릎은 넓게 퍼져서 매우 안정된 느낌을 준다.
오른쪽 어깨를 드러내고 왼쪽 어깨에만 걸쳐 입은 옷에는 거침없는 주름이 새겨져 있는데, 특히 옷깃 안쪽에서 밖으로 늘어지는 옷 접힘은 매우 사실적으로 표현되었다. 어깨높이로 들어 약간 오므린 왼손은 손바닥을 보이며, 오른손은 무릎에 올려놓고 엄지와 가운데 손가락을 약간 구부리고 있다.
떡 벌어진 어깨, 양감있는 당당한 가슴, 잘록한 허리 등에서 사실적이면서 세련된 통일신라 시대 불상의 모습을 엿볼 수 있으며, 경주 불국사 금동비로자나불좌상(국보 제26호), 경주 백률사 금동약사여래입상(국보 제28호)과 함께 통일신라 3대 금동불상으로 불린다. (문화재청)
경주 불국사의 6개 국보 중 마지막 소개는 국보 제27호 아미타여래좌상이다. 아미타여래좌상은 극락전에 모셔져 있다. 불국사를 들어서서 (지금은 문화재보호 차원에서 막아놓았지만) 처음 만나는 청운교 백운교에 올라서서 자하문을 들어서면 대웅전에 석가모니를 모셨다. 그 옆에 있는 연화교 칠보교에 올라서서 안양 문을 들어서면 극락전인데 이 극락전 안에 모셔진 분이 아미타여래 부처님이시다. 물론 지금은 청운교 백운교나 연화교 칠보교를 통행할 수 없기에 오른쪽으로 빙 돌아 오르거나 왼쪽으로 돌아가야 하며 대웅전 영역 왼쪽에 다소 낮은 지형으로 극락전 영역이 자리 잡고 있다.
극락전(極樂殿)
극락전은 무량수전(無量壽殿), 또는 미타전(彌陀殿)이라고도 부르는데 서방 극락정토를 주재하는 아미타불을 모셔놓은 법당이다. 아미타불은 본래 임금의 지위와 부귀를 버리고 출가한 법장비구로서, 보살이 닦는 온갖 행을 다 닦아 중생을 제도하겠다는 원을 세우고 마침내 아미타불이 되었다.
아미타불의 광명은 끝이 없어 백천억 불국토를 비추고, 수명이 한량없어 백천억 겁으로도 셀 수 없다고 무량수전(無量壽殿)이라고 하거나 주불의 이름을 따라 미타전이라고도 한다. 아미타불은 서쪽에 거처하고 있기 때문에 사찰에서 건물은 서편에 배치되거나, 건물 내에서 서편으로 불상을 봉안하기도 한다. 보통 협시보살로 관세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을 배치한다.
▲불국사 극락전, 앞에 석등은 알겠는데 생뚱맞게 웬 청동 돼지가 놓여있고 극락전 복돼지라고 씌어있다.
그래서인지 불국사 극락전은 대웅전 왼쪽에 위치하며, 건물은 임진왜란 때 화재로 소실되어 영조 26년(1750) 중창되었고 1925년 일본 강점기 때에 재건축되었으나 계단, 석축 등 기단부는 신라 때의 것으로 보인다.
극락전 복돼지
지난 2007년은 돼지해로 600년 만에 돌아오는 황금돼지라고 세상이 떠들썩할 때 우연인지 필연인지 이곳 극락전 현판 뒤에 돼지 한 마리가 조각되어 있음을 관광객이 발견하였다고 하여 온 매스컴이 보도하고 야단법석을 떨었던 기억이 난다.
그 뒤로 불국사를 찾는 관광객마다 이곳 극락전에 먼저 달려와 현판 뒤에 숨겨진 돼지조각을 확인하고 사진 찍고 어수선하니까 불국사 측에서 아예 브론즈(銅)로 돼지 한 마리를 만들어 극락전 석등 앞에 놓았더니 너도나도 이를 만져 코끝이 반질반질해졌고 누구나 이것을 복돼지라고 여겨 사진 찍고 현장에서 SNS에 올리는 등 관심이 폭발하였다.
지금도 정확한 연유를 알 수 없고, 왜 극락전 현판 뒤에 있었는지, 불국사 스님들도 모르던 것을 외부 관광객이 찾은 것인지 등등 관련된 정설은 없지만, 일부에서는 돼지 최씨로도 불리는 경주 최씨 최치원의 탄생설화와 관련이 있다고도 하나 역시 알 수 없다.
▲극락전 현판 뒤에 감추어진 돼지조각, 언뜻 보면 화투 7월 홍싸리 열 끗짜리에 나오는 그림과 비슷해 보인다.
이제는 세월이 어느 정도 흘러 비상한 관심도 많이 줄어들었고 평상심을 찾은 가운데 아무것도 모르고 온 사람들은 극락전 앞에 웬 돼지 동상(?)을 세웠는지 의아해하기도 한다. 물론 근처에 이에 관한 설명 한 줄 씌어있지 않아 더욱 궁금해질 뿐이다. 게다가 복돼지라는 이름으로 관광객들의 흥미에 영합하는 우상(?)을 세워놓은 것이 불국사다운 일인지 의아하다.
아미타불(彌陀如佛)
아미타여래는 서방정토 극락세계의 교주로서 죽음의 고통에서 중생을 구제하고자 오시는 분이다. 산스크리트어로 ‘아미타바 붓다(Amitabha Buddha)' 혹은 ’아미타유스 붓다(Amitayus Buddha)'로도 불린다. 아미타는 한량없는 빛을, 아미타유스는 한량없는 수명을 의미한다. 그래서 전자를 무량광불(無量光佛), 후자를 무량수불(無量壽佛)이라 한다.
▲국보 제27호 금동아미타여래좌상, 머리 위 육계가 뚜렷하고 옷은 편단우견으로 오른 어깨를 드러낸 모습이다. 아미타불의 수인은 중생들이 극락에서 태어나는 아홉 가지 방법(9품 왕생)과 관련된 총 9가지 방법의 구품인이 있으며 우리나라 사찰에서는 대부분 하품중생인을 취하고 있다 하나 이 부처님은 9품인 중 어느 것인지 정확하지 않아 보인다.
아미타여래가 봉안된 전각을 무량수전, 극락전, 미타전이라 하며, 좌우 협시보살은 관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이 가장 보편적이나 고려 시대부터는 대세지보살 대신 지장보살로도 한다. 그러나 불국사 극락전의 아미타불은 독불(獨佛)로 모셔졌다.
▲문화재청 앱 사진을 보면 엄지손가락을 살짝 오므려 붙인 상태로 되어 있다. 하품중생인으로 일반화하려는 듯하다.
그러나 대부분은 위 아미타불의 수인을 우리나라 불교의 아미타불 대부분이 취하는 하품중생인이라고들 한다. 하지만 구품인에서는 양손의 엄지가 어느 손가락과는 맞닿아 있어야 하는데 불국사 극락전 아미타불은 오른손은 무릎 위에 손바닥이 하늘을 향하도록 올려놓았고, 왼손은 가슴 높이로 들어 손바닥을 우리에게 보이고 있는데 엄지는 모두 붙이지 않은 상태이다.
연화교 연꽃무늬
▲연화교 계단석마다 새겨진 연꽃무늬가 세월의 연륜 속에 닳고 닳아서 희미하다.
불국사 극락전을 보았으면 안양문 아래 연화 칠보교를 내려다보기 바란다. 그곳 아래쪽이 연화교인데 이를 증명하듯 계단석마다 연꽃무늬가 새겨져 있음을 알 수 있다. 물론 천 년이 넘는 세월 동안 닳고 닳아서 희미해져 잘 안 보이고 또 사람들이 이를 알지 못하거나 관심이 없어 지나치기 쉬울 뿐이다.
가구식 석축 (보물 제1745호)
극락전 영역은 대웅전 영역의 왼쪽에 있으며 높이 상으로도 한 단 낮은 위치에 있다. 또한, 정면에서 보면 청운교 백운교, 칠보교 연화교로 올라가는 구조에 높다란 석축이 쌓여 부처님 세계의 위상을 높이고 있는데 극락전 옆면으로 돌아내려 가는 석축은 경사진 길을 고려하여 석축 역시 경사진 모양을 훌륭하게 소화하는 아름다운 모습이다. 이 불국사의 가구식 석축 역시 보물 제1745호로 숨겨진 볼거리 중의 하나이다.
▲극락전 영역을 떠받들고 있는 거대석축, 경사진 길을 따라 자연스럽게 높이를 조절한 모습이 손꼽히는 구조물이다.
위에서 예를 든 복돼지 문제라든지, 아미타불의 수인에 대한 설명 등 불국사 측에서는 막대한 문화재 관람료(입장료) 수입에 걸맞은 팸플릿 자료를 제작, 비치하고 장소마다 상세한 안내판 설치, 문화 해설사 배치 등 적극적인 문화정책을 구비하여 대한민국 최고의 부처님(佛) 나라(國) 절(寺)이라는 이름에 부합하는 문화유적지가 되기를 소망한다.
[28] 국보 제28호 경주 백률사 금동 약사여래입상
공식명칭 : 경주 백률사 금동 약사여래입상 (慶州 栢栗寺 金銅 藥師如來立像)
지정일 : 1962.12.20
분류 : 유물 / 불교조각/ 금속조/ 불상
시대 : 통일신라
주소 : 경북 경주시 일정로 186, 국립경주박물관 (인왕동, 국립경주박물관)
경주시 북쪽 소금강산의 백률사에 있던 것을 1930년에 국립경주박물관으로 옮겨 놓은 것이며, 전체 높이 1.77m의 서 있는 불상으로 모든 중생의 질병을 고쳐준다는 약사불을 형상화한 것이다.
머리는 신체에 비해 크지 않은 편이며, 둥근 얼굴·긴 눈썹·가는 눈·오뚝한 코·작은 입 등에서는 우아한 인상을 풍기고 있지만, 8세기 중엽의 이상적인 부처의 얼굴에 비해 긴장과 탄력이 줄어든 모습이다. 커다란 체구에 비해 어깨는 약간 빈약하게 처리된 느낌이지만 어깨의 굴곡은 신체에 밀착된 옷을 통해 잘 드러나고 있다. 양어깨를 감싸고 입은 옷은 두 팔에 걸쳐 흘러내리고 있으며 앞가슴에는 치마의 매듭이 보인다.
앞면에는 U자형의 주름을 연속적인 선으로 그리고 있는데 조금은 도식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신체는 아래로 내려갈수록 중후해지며 옷자락들도 무거워 보이는데, 이것은 상체를 뒤로 젖힘으로 인해 자연스럽게 솟아오른 단전과 더불어 불상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두 손은 없어졌으나 손목의 위치와 방향으로 보아 오른손은 위로 들어 손바닥을 보이고, 왼손에는 약그릇이나 구슬을 들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다소 평면적인 느낌을 주지만 신체의 적절한 비례와 조형기법이 우수하여 경주 불국사 금동 비로자나불좌상(국보 제26호), 경주 불국사 금동 아미타여래좌상(국보 제27호)과 함께 통일신라 시대의 3대 금동불상으로 불린다. (문화재청)
통일신라 시대의 3대 금동불상
앞서 소개해드린 국보 제26호 불국사 금동 비로자나불좌상, 국보 제27호 불국사 금동 아미타여래좌상과 함께 지금 답사기를 펼쳐놓을 백률사 금동 약사여래입상이다. 3대 금동불상이 각각 비로자나불, 아미타여래불, 약사여래불로 다채롭다. 게다가 앞에 두 분 부처님은 좌상(座像)인데 이번 약사여래부처님은 드물게 입상(立像)이다.
백률사(栢栗寺)
경주하면 남산이 떠오르기 마련인데 경주 시내 북쪽에는 소금강산이 있다. 소금강산, 작은 금강산이라는 뜻이다. 높이 280m로 그다지 높지 않은 야산 수준이지만 초입에 굴불사 터 사면 석불(보물 제121호)이 있고 그 위쪽에 백률사가 있다. 소금강산은 신라인들에게는 불교 성지(聖地) 가운데 하나였을 만큼 성스러운 곳이었는데 이차돈의 순교 때문이다.
▲경주 소금강산에 위치한 백률사, 작지만 답사꾼들에게 떡을 나누어줄 만큼 정이 넘치는 곳이었다.
▲백률사에서 조금 더 올라가면 암벽에 새긴 삼존 마애불좌상이 있다. 많이 훼손된 상태로 경북유형문화재 제194호이다.
백률사(栢栗寺)는 삼국유사 등의 기록에 나오는 자추사(刺楸寺)로 보이는데, 이는 신라 법흥왕 14년(527)에 불교를 공인하여 국교로 삼게 되는 이차돈의 순교 시 이적(異跡)이 일어난 곳으로 이차돈의 목을 베자 그 머리가 날아와 떨어진 곳이며 그 자리에 세운 절이다. 현재는 대웅전과 삼성각, 요사채 정도가 전부인 작은 절이며 지금의 대웅전은 임진왜란 때 불탄 후 다시 지었다고 하는데 그 대웅전에 모셨던 부처님이 바로 '금동 약사여래입상'으로 1930년에 국립경주박물관으로 옮겨져 일반에 전시 중이다.
이차돈(異次頓)
신라가 불교를 받아들이는데 순교(殉敎)로서 이바지한 이차돈, 우리는 이차돈을 잘 아는 것 같지만 뜻밖에 잘 모르거나 잘못 알고 있다. 즉, 이차돈을 성은 이(李) 씨요 이름은 차돈으로 알거나 차돈이라는 벼슬(?)을 가진 사람으로 알기도 하는데 이는 모두 틀린 말이다. 이는 한자 교육, 역사 교육의 부재(不在)에 따른 폐단으로 보이며, 그의 성(姓)은 박(朴)이요, 이름은 염촉(厭燭)이다.
염촉은 이차(異次), 이처(異處)라고도 쓰는데 모두 염(厭 : '싫다'는 뜻 말)의 의미이며, 촉(燭), 돈(頓), 도(道), 도(覩), 독(獨) 등은 편의에 따라 자의적으로 붙인 글자로 혼자 가지는 뜻은 없다. 즉 이차돈의 이차는 염촉의 염이며 돈과 촉은 의미가 없는 글자이다. (양주동 박사 해석) 그의 벼슬은 내사사인(內史舍人)으로 차돈이 벼슬이 아님도 분명하다.
이차돈(異次頓) 순교비(殉敎碑)
고구려와 백제는 370년대에 이미 불교를 승인하였지만, 신라는 한참이나 늦은 법흥왕 15년(528)에야 불교를 승인하게 되는데 이는 그만큼 기득권 세력들의 반대가 심했다는 뜻이며 이차돈이 나서서 왕으로 하여금 불교를 받아들이지 않는 귀족들을 설득, 제압하기 위하여는 불교 도입을 주장하는 자신의 목을 치라고 한다.
망설이다가 마침내 법흥왕이 짐짓 이차돈을 나무라면서 불교 도입 주장의 죄를 물어 목을 치라 하자 이차돈은 '부처가 만일 신통력이 있다면 죽은 뒤에 반드시 이상한 일이 있을 것이다'라고 하며 목을 내밀었으니 그의 목을 자르는 순간 잘린 목에서는 흰 젖이 수십 장(丈)이나 솟아났으며, 잘린 머리는 하늘을 날아 소금강산에 떨어졌다.
▲국립경주박물관 소재 이차돈 순교비, 육각형인데 한 면에는 목을 치니 하얀 젖이 치솟고 머리가 날아가는 순교 장면을 묘사하였고, 나머지 다섯 면에는 단정하게 칸을 그린 후 글자들을 새겼는데 아쉽게도 마멸이 심하여 해독이 쉽지 않다. 백률사에서 출토되었다.
이렇게 하여 22세(또는 26세) 나이의 이차돈이 순교함으로써 신라는 비로소 불교를 받아들이게 된 것이며, 그의 목이 날아가 떨어진 경주 북쪽의 소금강산에 이차돈을 기리는 자추사(刺楸寺)를 지어 그의 명복을 빌었다고 하며, 헌덕왕 10년(817)에는 그의 순교 장면과 함께 사적을 새긴 6각 석당(六角石幢)을 만들어 세우니 이차돈 순교비로 역시 국립경주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국보 제28호, 백률사 금동 약사여래입상 (栢栗寺 金銅 藥師如來立像)
이 불상은 약사불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두 손이 없다. 두 손이 없다 보니 약사불의 표상이라 할 수 있는 약합이 보이지 않지만, 사람들은 모두 약사불로 믿고 의지하며 기도하고 빌었다. 신라 때부터 많은 사람이 찾아 기원한 불상이었다. 높이 179cm의 약사불, 거의 등신불(等身佛) 크기로 통일신라 시대 최대의 금동불상으로 원래는 금도금한듯하나 도금이 바랜 후 그 위에 채색했던 것으로 보인다.
▲국보 제28호 백률사 금동 약사여래입상, 경주국립박물관에 전시 중이다. 두 팔은 없는 상태이며 전체적으로 인체비례와 비슷하고 매우 당당해 보인다. 나발을 잘 표현하였으며 육계가 발달하였고, 온화한 표정에 미소를 머금은 얼굴이며 두 발과 발톱까지 자세하다. 통견으로 양어깨에 걸친 옷자락은 발등까지 길게 늘어졌는데 좌우 주름이 서로 이어지거나 끊어지는 모습이다.
▲일제 강점기 때 문화재사진첩인 '조선고적도보(朝鮮古蹟圖譜)'에 보면 두 손이 있고 왼손에 약합이 보인다. 약사불임을 알 수 있다.
신라 시대의 3대 금동불상이 국보 제26호, 27호, 28호이다. 두 부처님은 좌상으로 만들어져 불국사 비로전과 극락전에 모셔져 있는데 28호 약사불은 입상으로 만들어져 백률사에 모셨다가 지금은 경주 국립박물관에서 많은 사람들에게 공개 전시 중이다. 3대 금동불상 중 가장 하이라이트로 보인다.
등신불 크기로 입상으로 된 금동불상은 귀하다. 국보 제28호 금동 약사여래입상은 그만큼 소중한 국보이며 이나마 온전히 모셔진 것에 감사드린다. 양팔이 끼워진 사진은 있지만, 다시 만들어 끼우지 않은 것이 다행이다.
[29] 국보 제29호 성덕대왕 신종
공식명칭 : 성덕대왕신종(聖德大王神鍾)
지정일 : 1962.12.20
분류 : 유물 / 불교공예/ 의식법구/ 의식법구
시대 : 통일신라
주소 : 경북 경주시 일정로 186, 국립경주박물관 (인왕동,국립경주박물관)
우리나라에 남아있는 가장 큰 종으로 높이 3.75m, 입지름 2.27m, 두께 11∼25㎝이며, 무게는 1997년 국립경주박물관에서 정밀 측정한 결과 18.9톤으로 확인되었다. 신라 경덕왕이 아버지인 성덕왕의 공덕을 널리 알리기 위해 종을 만들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그 뒤를 이어 혜공왕이 771년에 완성하여 성덕대왕신종이라고 불렀다. 이 종은 처음에 봉덕사에 달았다고 해서 봉덕사종이라고도 하며, 아기를 시주하여 넣었다는 전설로 아기의 울음소리를 본떠 에밀레종이라고도 한다.
종의 맨 위에는 소리의 울림을 도와주는 음통(音筒)이 있는데, 이것은 우리나라 동종에서만 찾아볼 수 있는 독특한 구조이다. 종을 매다는 고리 역할을 하는 용뉴는 용머리 모양으로 조각되어 있다. 종 몸체에는 상하에 넓은 띠를 둘러 그 안에 꽃무늬를 새겨 넣었고, 종의 어깨 밑으로는 4곳에 연꽃 모양으로 돌출된 9개의 유두를 사각형의 유곽이 둘러싸고 있다. 유곽 아래로 2쌍의 비천상이 있고, 그 사이에는 종을 치는 부분인 당좌가 연꽃 모양으로 마련되어 있으며, 몸체 2곳에는 종에 대한 내력이 새겨져 있다. 특히 종 입구 부분이 마름모의 모서리처럼 특이한 형태를 하고 있어 이 종의 특징이 되고 있다.
통일신라 예술이 각 분야에 걸쳐 전성기를 이룰 때 만들어진 종으로 화려한 문양과 조각수법은 시대를 대표할 만하다. 또한, 몸통에 남아있는 1,000여 자의 명문은 문장뿐 아니라 새긴 수법도 뛰어나, 1천 3백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손상되지 않고 전해오고 있다.(문화재청)
신라 제일의 문화유산
성덕대왕신종이 가진 포스를 표현하기에 말과 글이 부족하다. 1,250년 전에 만든 가장 큰 종이라는 사실 하나로 모든 것을 압도한다. 만들어진 경위나 남아있는 지금의 존재가치, 신라가 패망하고 난 후 천덕꾸러기로 돌았음에도 훼손되지 않은 채 고려와 조선을 거치면서 그 숱한 전화(戰禍) 한번 입지 않고 오롯이 우리 곁에 남아있는 성덕대왕 신종.
범종 그 자체만으로도 명불허전임에야 칭송이 부족할 지경이지만, 하나하나에 깃든 조각과 새김, 예술성과 과학기술의 놀라움, 천여 자에 이르는 문장이 전해주는 메시지와 역사, 전설로 전해오는 스토리텔링까지 더해지면 가히 신라 제일의 문화유산이라 할 수 있다. 요즘 말로 보물과 국보를 통틀어 종결자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종(鍾), 범종(梵鍾)
▲국립경주박물관 야외에 종각을 짓고 성덕대왕 신종을 걸어 전시중인데 국적불명의 콘크리트 건물에 대한 비난이 드세다. 타종 또한 금지된 채 가끔씩 녹음된 종소리를 들려준다. 최근 복원계획이 발표된 적이 있는데 그 결과가 궁금하다.
종(鍾)은 시간을 알리거나 사람들을 모을 때, 그리고 의식을 거행할 때 쓰였다. 특별히 절에 있는 종은 불교를 의미하는 '범(梵)'자를 붙여 범종이라고 부르는데 이 범종은 부처님 말씀에 비유되기도 하며, 이 소리를 듣게 되면 지옥에 떨어져 고통받던 중생까지도 구제받을 수 있다고 한다. 그런데 보통 한자로 쓸 때 '쇠금(金)'변에 '아이 동(童)'자가 붙은 종(鐘)을 쓴다. 중국이나 일본 종을 지칭할 때는 이렇게 쓴다. 하지만 우리나라 종을 지칭할 때는 '무거울 중(重)'자가 붙은 종(鍾)자를 쓰는데 그 이유는 정확히 알 수 없고 종에 새겨진 글씨가 기록에 종(鍾)자를 썼기 때문이다.
성덕대왕신종(聖德大王神鍾)의 구조와 명칭
성덕대왕 신종은 높이 3. 75m, 둥근 입지름이 2.27m, 무게가 19톤이다. 매달린 신종 앞에 서면 뿜어져 나오는 포스에 압도된다. 종을 매다는 윗부분을 용뉴(龍紐, 종뉴鍾紐라고도 함)라고 하는데 단순한 고리가 아니라 용(龍)모양을 새겨 예술성이 뛰어나며 그 옆에는 수직으로 솟은 관이 하나 보이는데 음향을 조절하는 음관(音管, 음통音筒이라고도 함)이다. 중국이나 일본 종에는 없다.
둥근 모양의 종은 위, 아래에 띠를 둘러 보상화무늬나 모란당초무늬를 새기는 각각 상대, 하대라고 하며, 상대 바로 아래에는 같은 무늬를 두른 4개의 유곽(乳廓, 연곽蓮廓이라고도 함)이 있으며, 유곽 내에는 각각 9개씩 총 36개의 유두(乳頭)가 있다. 하필 왜 젖꼭지(유두)라고 하는지 알 수 없지만 재미있는 표현이다. 그리고 종의 몸통 중앙에는 2곳의 당좌(撞座, 종을 치는 부분)와 비천상(飛天像)이 조각되어 있고, 그 사이에 여러 줄의 글을 새겼다. 하대는 상대와 같은 무늬를 새긴 띠에 연화문 8개가 중간에 들어갔다.
▲성덕대왕신종의 세부설명.
▲용뉴와 음통, 용뉴는 종을 매다는 곳인데 일본 종이나 중국 종에는 없고 한국 종에만 있다. 일설에는 龍의 아홉 아들 중 셋째 포뢰(浦牢)는 울기를 좋아하여 종에 새긴다고 하며, 용뉴가 바로 그것인데 포뢰는 특히 고래를 무서워하여 고래가 다가오기만 하면 놀라서 큰 소리를 지르니 종을 치는 당목(撞木)을 고래 모양으로 하기도 한다고 한다.
▲상대, 보상화문 무늬를 새긴 띠를 둘렀고 그 바로 아래에 같은 무늬띠로 네모를 만들고 아홉 개의 꼭지를 붙였다. 이러한 유곽이 모두 네 곳이나 유두는 36개이다. 탁본부분은 국립경주박물관과 국립중앙박물관에 전시중이다.
▲상단을 탁본한 것이다. 상대와 2개의 유곽 안에 각각 9개씩의 유두가 보인다. 보상화무늬가 화려하다.
▲몸통 중앙에는 종을 치는 자리, 즉 당좌를 양쪽으로 두 곳에 연꽃으로 표시하였고, 그 좌우로 비천상이 보인다.
▲당좌의 연화문 탁본.
▲또한 신종의 앞면과 뒷면 두 곳에는 긴 문장을 적었는데 2개의 비천상이 좌우로 균형잡혀 새겨졌다.
▲좌우로 비천상의 모습과 중앙에는 긴 문장을 새겨 성덕대왕에 대한 칭송, 종을 만들게 된 경덕왕과 혜공왕의 효심, 그리고 신종의 소리로서 명복을 빌고 깨달음을 얻기를 기원하는 내용 등을 담았다. 모두 1,000자가 넘는 긴 내용을 앞, 뒷면에 나누어 새겼는데 뒷면에는 찬시와 종을 만든이들의 직책과 이름, 신종 소리에 대한 찬사등이 기록되어 있다.
▲비천상 탁본, 마주보는 2구의 비천상은 양옆에 새겨져 모두 4구이다. 연화좌 위에 무릎을 세우고 공양하는 상으로서 주위에 보상화(寶相花)를 구름과 같이 피어오르게 하고, 천상(天上)으로 천의(天衣)와 영락 등이 휘날리고 있는 것은 다른 신라 동종에서는 볼 수 없는 훌륭한 비천상으로서 한국비천상의 대표가 되는 조각수법이다.
▲하대 역시 상대와 같은 무늬띠를 둘렀는데, 중간에 8개의 연화문을 집어넣어 단조로움을 피하였다. 또한 연화문 아랫부분은 그냥 일자로 처리하지 않고 뾰족한 마름모꼴 꼭지 모양을 만들었고 그 윗쪽 무늬띠는 접어 넣었다.
▲하대의 무늬띠 탁본, 그 위로 글자를 양각한 모습과 좌우로 비천상의 일부가 보인다.
이처럼 월등하게 우수한 성덕대왕 신종의 예술성, 작품성은 물론 현대에서도 재조(再造)가 어렵다는 작업공정에 있어서의 과학과 고난이도의 기술 등은 참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다. 무려 27톤이나 되는 쇳물을 붓고 이를 작업하여 저 거대한 범종을 만들어낼 시설과 능력, 자본과 기술이 1,300년 전에도 가능했다니 그저 놀라울 뿐이다.
종 안쪽을 밑에서부터 들여다보면 쇳물 처리한 거친 표면들이 보인다는데 이는 마감 기술의 부족이 아니라 종소리가 부처님의 목소리에 가까운 장엄한 소리가 나면서도 여운이 부드럽게 오래오래 멀리멀리 가는 신비한 소리를 내려는 장인의 배려라고 한다. 물론 지금 우리가 종 밑으로 기어들어가서 올려다 볼 수는 없다.
성덕대왕신종 수난사
전설에 의하면, 성덕대왕 신종의 네 배가 넘는 대종이 황룡사에 있었는데 고려 때 침략한 몽고군이 이를 자기네 나라로 가져가기 위하여 일단 배에 싣고 감은사지 앞쪽 하천으로 실어 날라 바닷길로 옮기려다가 그만 문무왕의 화신 호국용이 배를 뒤집어 침몰시키니 그 대종은 하천에 빠졌거나 가까운 바다에 가라앉았다고 한다. 그 후로 풍랑이 심하면 종이 울리는 소리가 들린다고 하여 감은사지 앞 하천을 대종천이라고 하였다고 한다. 이처럼 크고 완벽한 보물들은 전쟁은 물론 도난과 약탈 등에 시달려 보존이 쉽지 않기 마련이다.
성덕대왕 신종은 771년 혜공왕 때 주조되어 처음 봉덕사에 매달렸는데 그래서 ‘봉덕사종’이라고도 부른다. 이후 고려를 거치면서 폐허로 변한 봉덕사에 신종을 방치 할 수 없어 1460년(세조 6년) 영묘사에 새로 종각을 지어 옮겼다고 한다. 조선 초 편찬된 ‘고려사’에서는 종소리가 백 리 밖까지 들렸다고 기록하였다. 이후 다시 1507년(중종2) 경주 남문 밖 봉황대 아래로 옮겼는데 군사 징집 이외에 성문의 개폐 시 타종하기 위해서였다. 국보급 범종이 성문개폐 신호도구로 전락한 것이다.
그러나 그나마 그때는 종각을 잘 지었다니 다행이며, 일제강점기인 1915년 다시 읍성 내아 자리에 있던 경주고적보존회로 옮겼는데 지금의 경주문화원 경내 종각이 그곳이다. 이후 1975년 국립경주박물관에 콘크리트 종각을 건립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많은 이들이 지적하는 것이 현재 국립경주박물관의 콘크리트 종각에 대한 불만이다. 우리나라의 국보 범종을 국적불명의 콘크리트 건물에 걸어 놓으니 이 어찌 경우가 바른 일이라고 하겠는가? 그것마저도 건물하중과 범종 중량에 문제가 있는지 매달려 있어야 할 종이 커다란 목재 몇 개를 고여서 그 위에 얹어 놓은 모양새는 참으로 볼썽사납기 그지없다.
원컨대 한국식 종각이나 종루를 멋지게 지어 격에 맞는 모양새를 갖추어야 하지 않겠는가? 지금의 박물관 자리에 새로 짓거나 원래 종이 달려 있었다는 봉덕사를 복원하거나 다른 방법을 강구해서라도 외국인들에게도 떳떳하고 자랑스러운 국보 범종으로 다시 태어나야 한다고 본다는 것이다. 필자도 이에 적극 동의하는 바이다.
뿐만 아니라 문화재 보호 명목으로 타종을 금지하고 관람객들에게 녹음된 종소리를 들려주는 치졸함도 재검토하여 정밀측정을 통한 가부를 가리고 난 후 가능하다면 타종의 계속 되어야 한다고 본다. 종이 울려야 종이지 않은가? 도저히 불가하다면 신종(新鍾)을 조속히 만들어서라도 타종이 가능한 역할을 부여해야 할 것이다.
▲경주 박물관으로 옮기기 전의 종각모습. /경주고적회 자료사진
▲지금의 성덕대왕신종 모습(사진 왼쪽). 목재 몇 개를 크게 잘라 그 위에 종을 얹어 놓았다. 오른쪽의 문화재청 홍보사진은 매달려 있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하니 눈가리고 아옹하는 격이다. 부끄러운 일이다.
성덕대왕 신종은 신라 패망 후 황폐해진 서라벌에 남아 용케도 잘 보존되었으며, 조선과 고려왕조를 거치는 천 년 동안 수많은 병화(兵禍)와 화재, 자연재난 등을 겪었을 텐데 용케도 온전하게 보존되어 감사한 일이다.더구나 최근 들어 과학기술의 발전 등으로 새겨진 글자를 식별, 해석하거나 안팎으로의 결함과 덧칠, 쇳물 내부의 모양까지도 관찰이 가능하고 동일한 신종(新鍾)을 복원 차원에서 주조해 낼 수도 있다고 하니 반가운 일이다. 복원 소식의 결과가 기다려진다.
[30] 국보 제30호 경주 분황사 모전석탑
공식명칭 : 경주 분황사 모전석탑 (慶州 芬皇寺 模塼石塔)
지정일 : 1962.12.20
분류 : 유적건조물 / 종교신앙/ 불교/ 탑
시대 : 신라
주소 : 경북 경주시 분황로 94-11, 분황사 (구황동)
현재 남아있는 신라 석탑 가운데 가장 오래된 걸작품으로, 돌을 벽돌 모양으로 다듬어 쌓아올린 모전석탑(模塼石塔)이다. 원래 9층이었다는 기록이 있으나 지금은 3층만 남아있다. 탑은 널찍한 1단의 기단(基壇)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착실히 쌓아올린 모습이다. 기단은 벽돌이 아닌 자연석으로 이루어져 있고, 네 모퉁이마다 화강암으로 조각된 사자상이 한 마리씩 앉아있다.
회흑색 안산암을 작게 벽돌 모양으로 잘라 쌓아올린 탑신은 거대한 1층 몸돌에 비해 2층부터는 현저하게 줄어드는 모습을 보인다. 1층 몸돌에는 네 면마다 문을 만들고, 그 양쪽에 불교의 법을 수호하는 인왕상(仁王像)을 힘찬 모습으로 조각해 놓았다. 지붕돌은 아래 윗면 모두 계단 모양의 층을 이루고 있는데, 3층 지붕돌만은 윗면이 네 모서리에서 위쪽으로 둥글게 솟은 모양이며, 그 위로 화강암으로 만든 활짝 핀 연꽃 장식이 놓여 있다.
선덕여왕 3년(634) 분황사의 창건과 함께 건립된 것으로 추측되며, 비슷한 시기에 만들어진 익산 미륵사지 석탑(국보 제11호)과도 좋은 대조를 이룬다. 특히, 부드러우면서도 힘차게 표현된 인왕상 조각은 당시 7세기 신라 조각양식을 살피는 데 좋은 자료가 되고 있다. 1915년 일본인에 의해 수리된 이후 지금까지 그 모습을 유지하고 있으며, 수리 당시 탑 안에서 사리함과 구슬 등의 많은 유물이 발견되었다. <문화재청>
분황사(芬皇寺)
경주 시내 황룡사 터 옆, 구황동에 있다. 아마도 황룡사, 분황사 등 황(皇)자 들어가는 절이 9개 있었던 곳이 아닌가 싶다. 분황사는 선덕여왕 3년(634)에 건립되었으며 우리 민족이 낳은 위대한 고승 원효와 자장이 거쳐 간 절이다. 643년에 자장이 당나라에서 대장경 일부와 불전을 장식하는 물건들을 가지고 귀국하자 선덕여왕은 그를 분황사에 머무르게 하였다. 또 원효는 이 절에 머물면서 <화엄경소> ,<금광명경소> 등 수많은 저술을 남겼다.
원효가 죽은 뒤 그의 아들 설총은 원효의 유해로 소상을 만들어 이 절에 모셔두고 죽을 때까지 공경하였다. 일연이 「삼국유사」를 저술할 때까지는 원효의 소상이 있었다고 한다. 또한, 좌전 북쪽 벽에 있었던 천수대비 그림은 영험이 있기로 유명했다. 경덕왕 때 희명의 다섯 살 난 아이가 갑자기 눈이 멀자 아이를 안고 천수대비 앞에 가서 '도천수대비가'를 가르쳐주고 노래를 부르면서 빌게 하였더니 눈을 뜨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그리고 솔거가 그린 관음보살상 벽화가 있었다고 하며, 경덕왕 14년(755)에는 무게가 30만 6,700근이나 되는 약사여래입상을 만들어서 이 절에 봉양하였다고 한다. 이처럼 역사가 오랜 분황사에는 허다한 유물이 있었을 터이나 몽골의 침략과 임진왜란 등으로 모두 유실되었고, 지금은 분황사에 둘러놓은 어른 키만 한 담장 위로 석탑의 윗부분만이 보이는 자그마한 절이 되었다.
현재 분황사 경내에는 분황사 석탑과 화쟁국사비편, 삼룡변어정이라는 우물들이 있으며, 석등과 대석 같은 많은 초석과 허물어진 탑의 부재였던 벽돌 모양의 돌들이 한편에 쌓여 있다. 1965년 분황사 뒷담 북쪽으로 30여 미터 떨어진 우물 속에서 출토된 불상들이 경주박물관 뜰에 늘어서 있다. <분황사 종무소>
모전석탑(模塼石塔) - 국보 제30호
분황사 탑은 벽돌로 쌓은 전탑(塼塔)을 흉내 내어 돌을 벽돌처럼 잘라 쌓은 모전석탑(模塼石塔)이다. 높이 9.3m로 현재는 3층만 남아있는데 원래 9층이었다는 기록으로 보아 대단히 크고 멋진 탑이었을 것이다. 임진왜란 때 파손된 것을 보수하려다 실패하고 일제 강점기 때인 1915년에 수리하여 지금에 이른다고 한다.
▲분황사 모전석탑, 현재 남아있는 신라 석탑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국보 자격이 충분하다.
▲위 분황사 소개에서 어른 키만 한 담장 위로 석탑의 윗부분이 보인다는 구절대로 사진을 찍어보았다. 밖에서 본 모습이다.
▲문화재 답사를 다니다 보면 문득 상공에서 내려다보고 싶을 때가 많다. 드론을 갖고 다녀야 하나? 생각해보기도 하는데 마침 분황사 입장권에 위에서 내려다본 분황사 모전석탑 모습이 있었다. 역시 건축학적으로도 미끈하게 잘 생겼다.
1층 네 면에 커다란 감실을 만들어 놓았으며 입구 양쪽에는 인왕상을 세웠는데 힘찬 느낌의 모습이다. 네 귀퉁이에는 돌사자를 깎아 세웠으며, 2층과 3층은 1층에 비하여 매우 낮고 3층 윗부분은 상륜부 없이 중앙을 높게 하여 모둠 지붕 형태로 마감하였다. 1915년 해체, 수리할 때 2층과 3층 사이에서 석함 속에 장치된 사리장엄구(舍利莊嚴具)가 발견되었으며 이때 발견된 병 모양의 그릇, 은합, 실패와 바늘, 침통, 금은제 가위 등은 경주박물관에 있다.
돌사자 상
큰 돌을 쌓아올린 기단은 충분히 크고 넓어서 탑이 들어선 자리 밖으로도 꽤 여유롭게 넉넉하며 기단의 네 귀퉁이에는 돌사자를 깎아 세웠는데 2마리는 수놈, 2마리는 암놈이다. 그런데 사람들이 이 사자 상을 잘못 이해하여 바닷가 쪽에 있는 것은 물개라거나 애매하니까 그저 석수(石獸)라고 하며 넘어가기도 하였는데 이는 그 옛날 사자를 못 본 채 조각을 해야 했던 선조들의 애로사항 때문이며 특히 암사자를 사자가 아닌 물개로 보이게 한 건 아닌가 싶다.
▲분황사 모전석탑의 사자 네 마리, 각각 방위대로 배치하였다. 마지막 사진을 물개로 보는 듯하지만 암사자이다.
불교에서의 사자 조각은 매우 다양하게 나타나는데 분황사 모전석탑처럼 네 곳에 사자를 배치한 것은 불국사 다보탑에서도 볼 수 있는데 인도에서는 모두 수사자만 조각을 했으나 중국, 한국 등 동아시아로 넘어오면서 암수가 함께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그러므로 분황사탑 사자 네 마리나 다보탑 사자 네 마리는 모두 암수 각 2마리씩으로 보아야 맞는다. 심지어 세조의 암살을 모면케 했다는 상원사의 고양이 석상도 사실은 돌사자 암수 2마리라고 하니 다시 한 번 정리해야 할 듯하다.
감실과 인왕상
분황사 모전석탑은 전체적으로 보아 황룡사 구층탑 같은 목탑을 보고 세운 듯하다. 그래서인지 원래 9층이었다고 하나 3층만 남은 지금의 모습을 보아도 건축물 같은 느낌이 강하다. 벽돌처럼 쌓아 더욱 그렇다. 특히 탑의 1층은 2, 3층에 비하여 월등하게 크고 높아서 사방 네 면의 면마다 감실을 큼직하게 파고 돌문을 달았는데 좌우 두 짝의 쌍문으로 문고리를 달았던 흔적도 보인다.
문지방석과 위쪽 인방석을 버티는 좌우 문설주 역할을 하는 돌을 큼직하게 박아 넣은 후 그곳에 불법을 수호하는 인왕상을 돋을새김으로 새겼는데 모두 반라의 모습으로 힘찬 느낌을 준다. 일부가 파손되어 아쉽다. 그런데 위 감실은 애초부터 출입하는 목적이 아니었는지, 나중에 없어졌는지 모르지만 높직한 기단으로 오르는 계단이 현재는 네 방향 아무 곳에도 안 보인다. 그 대신 감실 앞에 장방형의 돌을 얹어놓고 다시 갖가지 공양물을 늘어놓았는데 눈에 거슬린다.
▲1층의 각 면에는 감실을 큼직하게 만들었고 그 좌우로는 인왕상을 세웠다. 2개의 돌문은 절반쯤 열린 채로 그 안이 보인다.
▲감실에는 잘 알아보기는 어려우나 부처님을 모신 듯한데, 이 탑을 만들 때부터 있었던 것 같지는 않다.
그 밖에도 분황사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보광전이 있고, 그 안에는 약사여래입상이 모셔져 있는데 영조 때 세워진 것이다. 또한, 신라 때 3마리의 용이 살았다는 우물이 지금도 있는데 당나라 사신이 물고기로 변하게 하여 가져가는 것을 원성왕이 사람을 시켜 뒤쫓아 가서 빼앗아 왔다는 삼룡변어정(三龍變漁井)이 모전석탑 앞에 남아 있지만, 안으로 뚜껑을 덮고 잠가놓아서 물을 마실 수는 없다.
그리고 우물 옆에는 비석은 없이 대좌만 하나 남아있는데, 고려 숙종이 원효의 공덕을 기려 대성화쟁국사(大聖和諍國師)라는 시호를 내리고 비석을 세웠지만, 비석은 없어지고 대좌만 남아 근처를 굴러다니다가 추사 김정희가 대좌에 새겨진 글씨를 해독하고는 이를 찾았다고 한다.
▲분황사 보광전과 안에 모셔진 약사여래입상.
▲용 3마리가 살았다는 우물, 삼룡변어정(三龍變漁井).
▲원효대사의 비석 대좌, 옆 부분에 '차신라화쟁국사지비적(此新羅和諍國師之碑蹟)'은 김정희가 새겼다는데 잘 안 보인다.
답사를 다니면서 느끼는 것 중 하나는 이런 국보급 문화재가 대부분 불교 문화재이다 보니 거의 절집 마당이나 소유지에 자리 잡고 있는데, 특히 이처럼 석탑이나 석등 같은 경우에는 절집에서 이런저런 공양물을 앞뒤 좌우로 늘어놓거나 하늘에는 주렁주렁 등을 달아놓는 바람에 외관상 보기에도 안 좋고 사진 한 장 말끔히 찍기 어렵다. 실내는 사진촬영금지에 실외는 이것저것 걸린 것들이 너무 많다.
그것도 초파일을 전후해서 정성껏 매단 연등은 예쁘기나 하지, 일 년 내 철거하지 않아서 낙엽 지고 찬바람 부는 겨울철에도 마구 찢어진 모습의 등들이 여전히 매달려 있는 경우에는 눈살이 찌푸려진다. 해당 절집에서 조금 더 신경을 쓰면 좋겠다. 가능하면 문화재에 직접 등을 매다는 일은 삼가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