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너진 安保 2021-12/ 12.03 핵무장에 헌법적 장애 요인 없다 - 12월 29일 전작권 역량부터 갖춰라
무너진 安保 2021-12/
■12.02 핵무장에 헌법적 장애 요인 없다
대한민국 헌법은 국가 목표로서 평화통일을 추구하되 자유민주적 기본 질서, 즉 자유민주주의와 자유시장 경제 질서에 입각한 것이어야 함을 천명하고 있다(헌법 제4조). 우리가 어떤 통일인가를 묻지 않는 몰(沒)체제적 통일 지상주의를 수용할 수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이는 우리 헌법의 확고한 의지로서 헌법 개정의 한계다.
북한의 완전한 핵 폐기는 물 건너갔다. 북한의 핵 보유는 기정사실화되었다. 북한이 절대 무기인 핵으로 무장하고 있는 한 이미 한반도에서의 힘의 균형은 깨진 상태다. 이제 대한민국은 북한의 핵우산 하에 덧씌워진 현실이 됐다. 그렇게 되면 통일은 대한민국 체제를 부인하는 북한의 의도대로 끌려갈 수밖에 없다. 이는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에 입각한 현행 헌법에 의한 대한민국 체제가 종언을 고함을 의미한다. 우리는 북한 체제에 흡수될 수밖에 없는 운명에 처한다. 그럼에도 핵 보유에 관하여 평화통일 운운하며 원론적⋅이상론적 주장만을 되풀이할 것인가!
혹자는 우리가 핵 보유 선언을 하는 순간 국제사회의 왕따가 되고 경제가 무너질 수 있다는 판에 박힌 주장을 하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의 체제가 북한 체제로 흡수되는 상황이 와도 괜찮은지 묻고 싶다. 문재인 대통령은 2017년 CNN과 가진 회견에서 “핵 개발에 반대한다. 우리도 핵으로 맞서겠다는 자세로 대응하면 남북 간에 평화가 유지되기 어렵다”고 밝혔다. 만약 지금도 이러한 견해라면 이는 대통령으로서 국가의 독립, 영토의 보전, 국가의 계속성과, 헌법을 수호할 책무(헌법 제66조 2항)를 저버리는 것이 될 것이다
대통령의 평화통일을 위한 북한과의 접촉(대화)은 자유민주적 기본 질서를 수호하기 위한 것이어야지, 이를 도외시하거나 포기한 통일 논의는 그 자체로 위헌적이다. 통일이 자유민주주의를 달성하기 위한 수단이어야지 자유민주주의가 통일의 희생물이 될 수는 없다. 국가의 독립, 영토의 보전, 국가의 계속성, 헌법 수호 의무는 대통령의 최우선 헌법적 책무다. 따라서 헌법의 자기 방어적 성격상 자유민주적 기본 질서를 지키기 위한 최후의 수단으로서 핵 보유는 국민적 결단에 의하여 정당화될 수밖에 없다. 핵 보유는 헌법상 평화통일 조항과 상충되지 않는다. 오히려 헌법은 핵 보유에 대하여 개방적 성격을 띠고 있다.
북한의 핵 보유가 기정사실화된 이상 북한 체제로의 종속(흡수 통일)을 막기 위해서 대통령은 헌법 제72조에 따라 핵 보유 여부에 대한 국민투표를 실시하여 그 결과에 따라 핵 개발을 위한 준비를 하여야 한다. 차기 대선 후보들도 이에 대한 명확한 입장을 밝히고 국민의 심판을 받아야 한다. 국제 정치 공학상 당장 핵 보유는 할 수 없다 하더라도 국제사회, 특히 북한에 대하여 우리도 언제든지 핵무장을 할 수 있다는 굳은 의지를 천명해야 한다. 한국이 그런 의지를 표출하는 순간 핵 억지 효과도 있다고 본다. 북한 핵 문제는 바로 우리의 문제다. 언제까지나 미국만 바라볼 수는 없다. 북한과 중국의 핵 보복 위협을 무릅쓰고 미국이 서울을 지키기 위해 하와이나 LA를 포기할 것으로 보는가?
얼마 전까지만 해도 우리의 원자력 기술은 세계 최고 수준이고 전문가들은 늦어도 6개월이면 핵실험 없이도 핵무기를 만들 수 있다고 하였다. 현 정부의 탈원전 정책으로 원자력 기술의 유출과 전문가들의 사기 저하로 핵 개발 능력이 현저히 약화되었다면 헌법적 체제 수호의 관점에서 중대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이에 대한 문 대통령의 해명이 있어야 할 것이다. 아무나 흔들 수 없는 나라를 만들겠다는 문 대통령의 말은 힘을 배경으로만 가능하다는 것은 삼척동자도 아는 일이다.
조선일보 이석연 변호사·전 법제처장
■ 12.02 북한 핵 도발 기미 보이면 미사일 기지부터 때려야
미 핵우산만 믿다가 낭패볼 수도
북핵, 미사일 제거하면 무용지물
KTSSM으로 북 미사일 기지 파괴
김정은 핵희망 포기때 협상 나올 것
최근 북한이 쥐죽은 듯 조용하다. 한국에 대한 비난도 없고 걸핏하면 발사하던 미사일 시험도 없다. 국가정보원이 북한에 관한 정보를 공개하지 않는 탓도 있지만, 기본적으로 북한 내부가 복잡한 것으로 보인다. 북핵에 따른 대북제재와 코로나19 여파 등으로 북한 주민의 삶이 크게 열악해졌다는 점은 틀림없지만, 그로 인한 내부 갈등 문제는 확인할 도리가 없다. 최근엔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의 오미크론 변이 확산으로 북한과 중국은 서로 국경을 차단할 조짐이어서 북한 경제는 더 어렵게 될 것이라고 정보 관계자가 전했다.
그렇지만 북한이 차분하게 핵무기를 생산하고 있다는 점은 확실하다. 지난달 말 미국의 북한 전문 매체 38노스에 따르면 북한이 영변 5메가와트(㎿) 원자로를 계속 가동하고 있다. 이 원자로는 매년 플루토늄 6㎏을 생산할 수 있다. 핵폭탄 1개 분량이다. 라파엘 그로시 국제원자력기구(IAEA) 사무총장은 북한 평산과 강선에서 핵 관련 활동이 지속하고 있는 징후가 발견된다고 우려했다. 평산에는 우라늄 광산이 있고, 강선에는 우라늄 농축공장이 있다. 이런 북한의 핵 활동은 핵무기 재료를 추가로 확보하기 위한 것이다.
▲북한이 가동 중인 평양 외곽의 강선 우라늄 농축시설. [제프리 루이스 미들버리국제연구소 비확산센터 국장 트위터]
북한이 전술핵무기로 공격하면 방어 곤란
군사적으로는 북한이 개발했다고 주장하는 전술핵무기를 전방지역의 우리 군에 투하한 뒤, 전차 등으로 구성된 기계화부대로 밀고 내려오면 방어 자체가 곤란하다. 북한의 국지적인 전술핵무기 공격에 미국이 대량살상용 전략핵무기로 대응할지에 논란도 있다. 또 미국이 핵우산과 한반도 방어시스템을 가동하기 위해 고민하는 사이 북한군 전술핵무기에 우리 군이 먼저 궤멸할 소지도 없지 않다. 그런데도 문재인 정부는 아무런 담보와 신뢰가 없는 종전선언에 매달리고 있다.
미국 바이든 행정부가 ‘선제 핵 불사용(No First Use: NFU)’ 정책을 검토하고 있다는 외신 보도는 미국 핵우산 신뢰성에 의문을 갖게 했다. NFU는 적이 핵무기로 공격하지 않는 한 미국이 먼저 핵무기를 사용하지 않는다는 정책이다. 바이든 대통령의 오랜 신념이라고 한다. 그래서 바이든 행정부가 준비 중인 핵태세검토(Nuclear Posture Review: NPR)에 NFU가 반영될 가능성도 있다는 전망이 나온다.
NFU가 NPR에 반영되면 심각해진다. 서울이 북한의 핵공격에 초토화된 뒤에야 미국이 북한에 대한 핵무기 사용 여부를 결정하게 된다. 그러나 북한이 우리를 핵무기로 공격할 상황이면 미국에도 동시에 경고할 소지가 크다. ‘만약 미국이 한국을 도우면 북한은 뉴욕을 핵무기로 타격할 것’이라는 메시지다. 미국은 고민에 빠질 것이다. 미국 내에서 한국 지원을 반대하는 여론이 조성될 가능성도 있다. 미국 핵우산이 부도 수표가 된다는 얘기다. 이화여대 박원곤 교수(북한학과)는 “(핵우산이 포함된) 확장억제에 부정적인 영향을 줘 동맹에 대한 신뢰도가 약화한다”고 말했다.
외교안보 전문가 사이엔 걱정이 많다. 국제사회가 지난 30년 동안 북한이 핵무기 개발을 막으려 했지만 모두 실패했다. 북한이 설마 핵무기로 동족인 우리를 공격할까에 대해 의문을 제기할 수 있지만, 북한이 미국에 대응할 다양한 핵무기를 확보하면 상황이 달라진다. 북한이 핵무기로 한국을 위협하거나 공격할 수도 있고, 미국과 직접 핵군축 협상에 나설 가능성도 있다. 더구나 북한은 한국에 새 정부가 들어선 초기에 거의 도발했다. 정권 길들이기 차원에서다.
▲북한이 2021년 10월 19일 동해상에 있는 잠수함에서 미니 SLBM(잠수함용 탄도미사일)을 발사하고 있다. 이 미사일은 상하 및 좌우 회피기능이 있어 요격이 어려우며, 사거리가 590km 이상이어서 동해에서 남한 전역을 타격할 수 있다.[조선중앙통신]
북 '미니 SLBM' 요격 어려워
북한의 핵ㆍ미사일 능력은 간단치 않다. 북한이 지난 10월 19일 시험발사한 미니 SLBM(잠수함 발사 탄도미사일)은 수직기동과 좌우기동을 모두 할 수 있는 것으로 평가됐다. 잠수함에서 발사된 미니 SLBM은 상하는 물론 좌우로도 움직이며 레이더 탐지를 피한다는 것이다. 이 미사일에는 핵탄두를 장착할 수가 있다. 사거리가 590㎞ 이상인 이 미사일은 동해에서 남한 전역을 공격할 수 있다.
북한이 지난 수년 동안 개발해 시험발사를 해온 신형 단거리 전술유도무기 4종 세트 가운데 북한판 이스칸데르(KN-23)에도 핵탄두를 탑재할 수 있다. 제프리 루이스 미 비확산센터(CNS) 소장의 분석에 따르면 북한이 소형화한 핵탄두는 직경 60㎝에 무게는 200∼300㎏ 정도다. KN-23도 회피기동 기능이 있어 우리 군의 패트리어트(Pac-3) 등 한국형 미사일방어체계(KAMD)의 요격을 피할 수 있다. 더구나 북한이 여러 종류의 미사일을 섞어 쏘면 핵탄두 식별은 더욱 어렵다.
그래서 북핵 대응에 가능한 모든 방안을 고려해야 한다는 것이다. 1차적으로 미국의 북핵 억제방안인 핵우산이 포함된 확장억지를 최대한 활용해 북한이 함부로 도발하지 못하게 하는 게 우선이다. 미 국방부는 그제 “북핵 억제를 위한 핵우산 정책은 변함없다”며 “확장억지는 매우 중요하다”며 우리를 안심시켰다. 그런데도 북핵 위협을 직접 받는 당사자인 한국의 걱정은 이만저만 아니다. 미 국방부가 그동안 순환 배치해오던 주한미군 공격헬기 대대와 포병여단 본부를 상시 배치로 정한 것도 앞으로 한반도 안보가 더 위중해질 수 있다는 우려가 반영된 조치로 보인다.
미국 핵우산만 믿을 게 아니라 한국 스스로 좀더 적극적인 대비가 필요하다는 의견이 나오고 있다. 우선 북핵을 핵무기로 상쇄하는 방법이다. 미국의 확장억지력의 실행력을 높이기 위해 구체적인 계획 수립과 훈련이 필요하다.(김광진 전 공군대학총장) 그다음은 유럽의 나토(NATOㆍ북대서양조약기구)처럼 미군 전술핵을 공유하는 방안이다.(전성훈 전 통일연구원장) 북핵 위협이 더 심각해지면 미군 전술핵 재배치도 불가피할 수 있다. 그러나 미국은 전술핵 공유나 재배치에 소극적이라고 한다.(고려대 김성한 교수)
▲북한 미사일 기지는 신의주-화대군 이남에 대부분 분포해있다. 중장거리 탄도미사일 기지는 개마고원 이북의 중국 국경에 가까이 설치돼 있다.[FAS]
한국 핵무장, 1년 이상 걸려
미국 핵우산 가동과 전술핵 공유 및 재배치가 안 될 때를 대비해야 한다는 지적도 있다. 한국의 핵무장이다. 핵무장은 국가 비상사태 때 핵확산금지조약(NPT) 10조에 따라 가능할 수 있지만, 시간이 필요하다. 원자력계 전문가는 “핵무기가 최신 기술은 아니지만 한국이 1년 만에 핵무장 하는건 어렵다”고 말했다. 시간이 오래 걸리는 만큼 철저한 사전준비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북한은 핵 개발을 위해 영변 핵단지에 400개의 시설을 갖추고 있다. 국제사회의 경제ㆍ외교 제재도 감수해야 한다. 한미동맹도 삐걱댈 수 있다.
▲국방과학연구소(ADD)가 개발한 육군 전술지대지유도탄(KTSSM)가 표적을 정확하게 타격하는 모습이다. 사거리는 290km 이상이고 정확도가 2m 이내다. 발당 생산 가격은 20억원이다.[국방과학연구소]
첨단무기로 북핵에 대응하는 방안이다. 유사시 북한이 핵무기를 사용하기 전에 핵탄두를 쏠 미사일 기지를 제거하는 것이다. 국방과학연구소(ADD)가 개발해 200∼300기 생산하기로 한 전술지대지유도탄(KTSSM)을 1000발 가량으로 늘리는 것이다.(육군 예비역 장성) KTSSM은 정확도(CEP)가 1∼2m로 북한 미사일 기지를 핀포인트로 타격할 수 있다. 북한이 미사일을 먼저 쏘면 우리도 즉각 KTSSM을 발사하는 것이다. 북한 무수단-신의주까지 타격이 가능하다. 다행히 한ㆍ미 정보당국은 북한 미사일 기지와 발사 장소를 거의 알고 있다.
▲공군 F-35A 스텔스 전투기. 벙커버스트 2발을 내부 무장창에 장착하고 북한 상공을 은밀하게 침투해 미사일 기지를 타격할 수 있다.[방위사업청]
은밀 침투가 가능한 공군 F-35A 스텔스 전투기도 미사일 제거에 효과적이다. 북한 최후방에 있는 중ㆍ장거리 미사일 기지는 ADD가 개발한 현무-4와 신형 고위력 탄도미사일로 파괴할 수 있다. 이 미사일은 6∼8톤이나 되는 강력한 고폭약을 장착해 지하벙커까지 뚫고 들어간다. 북한엔 1000발가량 미사일이 있지만 발사대는 200개 이하다. 그래서 미사일 기지와 연료 공급시설, 미사일 발사대만 제거하면 북한은 핵탄두를 쏠 수 없다. 그래도 살아남은 소량의 미사일이 날아오면 패트리엇과 천궁, 사드(THAADㆍ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등으로 요격한다. 마지막으로 국방부가 준비한 참수작전도 북한 도발 억제방안이다. 공산 독재체제인 북한은 수뇌부에 공백이 생기면 오합지졸이 된다.
▲국방과학연구소가 최근 개발한 신형 고위력 탄도미사일. 8톤이 되는 강력한 고폭탄을 탄두로 장착해 북한의 지하벙커를 정확하게 타격해 뚫고 파괴할 수 있다. 사거리는 800km 이상이다.[국방과학연구소]
김정은 정권이 믿는 것은 사실상 핵뿐이다. 한ㆍ미가 북핵을 상쇄할 수 있는 다양한 방안과 수단을 갖추고 있을 때 북한은 도발을 포기하고 평화가 유지된다. 북한이 핵무기로는 희망이 없다고 판단하면 그제야 대화와 협상에 나오지 않을까.
☞NPT 10조: 모든 체결국은 본 조약상의 문제에 관련되는 비상사태가 자국의 지대한 이익을 위태롭게 하고 있을 경우에는 본 조약으로부터 탈퇴할 수 있다.
중앙일보 김민석 군사안보연구소 선임위원
■12.06 靑, ‘공무원 北에 피살된 경위 공개’ 판결에 항소...유족 “뭘 숨기나”
“정부는 패소할 경우 항소 자제” 4년전 文대통령 지시와도 배치유족 “대체 뭘 숨기려는 거냐”
지난해 서해상에서 북한군에 피살된 해양수산부 공무원 사건과 관련, 법원이 지난달 “정부는 유족들에게 군사기밀을 제외한 일부 정보를 공개하라”는 판결을 내렸지만 공개 당사자인 청와대와 해양경찰청이 모두 항소한 것으로 5일 확인됐다. 유족들은 “단지 사망 경위를 알고 싶을 뿐인데 국가가 대체 무엇을 숨기려고 이러느냐”며 반발하고 있다.
5일 피살 공무원 이모(당시 47세)씨 유족 등에 따르면, 해경은 지난달 30일, 청와대 국가안보실은 지난 2일 서울행정법원에 항소장을 제출했다. 지난달 12일 이씨 유족 측이 청와대·해경·국방부를 상대로 낸 정보공개소송 1심에서, 재판부가 “유족에게 사망 경위 관련 일부 정보를 공개하라”고 한 것에 대한 항소다. 당시 재판부는 청와대에는 국방부·해수부 등에서 받은 보고 내용과 각 부처에 지시한 내용, 해경에는 이씨가 탑승했던 ‘무궁화 10호’ 직원 9명의 진술 조서와 초동 수사 자료 등을 공개하라고 판결했다. 유족이 요청한 국방부의 ‘북한군 대화 감청 녹음 파일’은 군사기밀이란 이유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작년 9월 서해 최북단 해상에서 해수부 공무원 이씨가 어업 지도 활동 중 실종됐다가 북한군에 피살된 후 국방부는 ‘A씨가 자진 월북했고, 북측이 총격을 가한 후 시신을 불태웠다’는 취지로 발표했다. 하지만 유족들은 “이씨가 자진 월북할 이유가 없고, 사망 경위 역시 불확실하다”며, 정부에 줄곧 진상 규명과 관련 자료 공개를 요구해왔다. 유족 측은 지난해 10월 국방부, 해경, 청와대에 정보 공개를 청구했지만 거절당하자 올 1월 정보 공개 청구 소송을 제기했고 지난달 1심에서 일부 승소했다.
이씨의 형 이래진씨는 “법원이 공개하라는 정보들은 이미 국정감사 등에서 알려진 내용들인데 그마저 정부가 숨기려 하니 참담한 심정”이라며 “문재인 대통령이 2017년 ‘정부가 재판에서 패소하면 항소를 최대한 자제하라’는 지시까지 했는데도, 청와대가 항소했다”고 말했다. 이어 “정부가 북한과 ‘보여주기식 평화’에만 몰두하고, 북한에 의해 피살된 국민의 사망 경위는 숨기기에 급급한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하다”고 했다.
■ 12월 06일 ‘北 피살 공무원’ 정보 공개 한사코 거부하는 靑의 저의
지난해 9월 서해상에서 북한군이 표류하는 해양수산부 소속 공무원을 사살·소각한 사건과 관련, 법원이 일부 정보를 공개하라고 판결했음에도 청와대와 해경은 불복해 항소했다고 한다. 청와대와 국방부, 해경 등은 “자진 월북했다”고만 밝혔을 뿐 이를 입증할 자료를 공개하라는 유족의 요구를 기밀이라며 계속 거부하고 있다.
1심 법원이 북한군 통신 감청내용 등 민감한 정보를 제외하고 내부 자료를 공개하라고 판결한 것은 지극히 타당하다. 그런데도 청와대는 한사코 응하지 않으려 한다. ‘세월호 7시간’ 등의 정보 공개를 집요하게 요구했던 것과 정반대 행태다. 무엇인가 숨기려는 저의가 아닌지 의심을 자초한다.
서울행정법원은 지난 2일 피살 공무원 이모 씨의 유족이 낸 정보 공개 소송과 관련, 청와대가 국방부·해수부 등에서 받은 보고 내용과 각 부처에 지시한 내용, 해경에서 이 씨가 탑승한 ‘무궁화 10호’ 직원 9명의 진술 조서와 수사 자료 등을 공개하라고 판결했다. 유족들은 자진 월북할 이유가 없고, 북측이 시신을 불태웠다는 사망 경위 역시 불확실하다며 줄곧 진상 규명과 자료 공개를 요구해 왔다. 지난해 10월 이 씨의 아들은 문재인 대통령에게 편지를 보내 “대통령님 자녀 혹은 손자라고 해도 지금처럼 하실 수 있겠느냐”며 진상 규명을 요구했다. 문 대통령은 답장을 통해 “모든 과정을 투명하게 진행하고, 진실을 밝혀낼 수 있도록 내가 직접 챙기겠다”고 약속했다. 이래 놓고도 정부 반응이 미흡하자 유족들은 소송을 냈다.
소송이 필요 없도록 정부가 신속하게 진실을 공개하고 설명하는 것이 마땅하다. 그런데 항소로 시간을 또 끌려 한다. 청와대는 이례적으로 북한 통일전선부 명의의 사과문과, 사건 발생 전 문 대통령과 김정은이 주고받은 친서까지 공개했다. 북한 입장은 대변하면서, 정작 국민에게는 필요한 정보도 제공하지 않는다. 청와대는 누구 편인가.
문화일보 사설
■ 12월 06일 文 대북 정책 ‘파산 선고’ 내려졌다
이미숙 논설위원
문 - 트럼프 시대 위기 넘은 동맹
팬데믹 후 中퇴조, 美 주도 기류
친중 → 탈중 소프트 랜딩 필요
北 핵·미사일 제거용 작계 이어
바이든 임기내 동맹 더 강화해
核 능력 및 억지력 확보 힘써야
문재인 대통령 임기 중 마지막으로 열린 한·미 안보협의회의(SCM)에서 북한의 핵·미사일 대응용 새로운 작전계획 수립을 위한 전략기획지침이 승인됐다. 북한이 핵무기 및 탄도미사일로 대한민국을 공격할 경우 대응할 작전계획을 만들 근거가 마련된 것이다. 앞서 조 바이든 행정부가 확정한 미국 해외 주둔 전력 배치 재검토(GPR)에 따라 주한미군의 역량도 확충됐다. 한·미 양국이 북핵 대비 작계 마련에 나선 것은 북한의 위협이 더 이상 방치할 수 없는 단계에 도달해 군사적 대응 계획을 짜야 하는 상황이 됐음을 보여준다. 김정은의 가짜 비핵화 의지에 홀렸던 문 정부의 대북정책이 파산했음을 한·미 당국이 공인한 셈이다.
바이든 대통령 집권 첫해에 이 같은 결정이 이뤄진 것은 한·미 동맹이 도널드 트럼프-문재인 시대의 스트레스 테스트를 이겨내고 도약의 발판을 마련했다는 뜻이다. 문 대통령은 집권 내내 표면적으로는 동맹을 강조했지만 실제로는 “중국은 높은 산봉우리, 한국은 작은 나라”라며 중국의 심기를 우선시했고, 관변 지식인들도 “동맹은 부자연스러운 상태”라며 거들었다. 트럼프 전 대통령은 미국이 한국으로부터 갈취당하는 호구(sucker)가 된 것처럼 묘사하며 주한미군 철수를 시사해 논란을 빚었다. 임기 말엔 “재선되면 한·미 동맹을 끝낼 것”이라고 장담했다는 증언이 담긴 책도 나왔다.
바이든 대통령이 문 대통령과의 대북 이견에도 불구하고 트럼프 시대 흐트러진 동맹 관계 정상화에 주력하는 만큼, 우리도 이러한 움직임을 활용해 북핵 억지를 위한 핵 능력 확보에 나설 필요가 있다. 종전선언에 맹목적으로 집착하는 문 정부엔 기대할 바가 없지만, 누가 대통령에 당선되든 차기 정부는 코로나 팬데믹 이후 국제 정세를 면밀히 보며 현실적인 구상을 해야 한다. 문 정권의 대중 굴종은 중국이 미국을 넘어서는 패권국이 될 것이라는 관측에 기반한다. 패권국 미국이 신흥 패권국 중국에 맞서면 투키디데스의 함정에 빠져 전쟁이 날 수 있다는 그레이엄 앨리슨 하버드대 교수의 ‘예정된 전쟁’은 그러한 맹신을 부추겼다.
그러나 코로나 팬데믹 이후 중국의 패권국 부상은 백일몽이 되는 기류다. 중국의 3분기 국내총생산(GDP) 성장률은 4.9%로 떨어졌는데, 4분기엔 3%대일 것이란 관측이 나온다. 할 브랜즈 존스홉킨스대 석좌교수 등이 “중국은 정점을 찍어 쇠퇴기로 접어들었다”는 주장을 펴는 근거다. 중국이 주도·참여하는 정상회의가 영향력을 잃는 것도 그런 징후를 반영한다. 브릭스(BRICS)나 상하이협력기구,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도 위상이 미미해졌다. 친중 국가는 헝가리나 라오스, 캄보디아 등 권위주의 국가들뿐이다. 그런데도 문 대통령은 북·중에 집착하며 일본과 과거사 전쟁을 벌이는 시대착오적 대외정책을 고수했다.
팬데믹 이후 세계에서 대중 밀착은 리스크인 만큼 탈중(脫中) 소프트 랜딩이 필요하다. 바이든 행정부 출범 후 G7 정상회의가 주도적 역할을 하고 쿼드(Quad), 오커스(AUKUS) 등이 결성되며 자유 진영이 강화되는 추세다. 더구나 최근 미 학계에서는 북한의 핵 위협이 이미 임계치에 달한 만큼 한국이 자위적 차원에서 핵 개발을 할 수 있도록 지원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온다. 제니퍼 린드 다트머스대 교수는 “북핵 위기 상황에서 한국이 핵 개발을 위해 핵확산금지조약(NPT)을 탈퇴하는 것은 정당하다”며 이런 입장을 피력했다. 케이토연구소의 더그 밴도 연구원도 마찬가지다.
이러한 국제적 기류를 슬기롭게 활용하면 군사적 차원에서 북핵 대응 작전계획을 수립하는 것과 병행해 독자적 핵 능력 확보도 가능하다. 한·미 원자력협정을 개정해 일본처럼 농축 기술을 얻는 것이 직접적 핵 능력 확보법이라면 오커스 동맹 참여를 통해 호주처럼 핵잠수함 기술을 얻는 우회적 방법도 있다. 한국이 적극 나선다면 바이든 행정부도 대북·대중 견제를 위해 협력할 것이다. 단, 2024년 미국 대선에서 트럼프 전 대통령이 재선될 경우, 이런 노력은 물거품이 되고 한·미 동맹의 미래도 시계 제로가 된다. 바이든 행정부가 단임으로 끝날 경우까지 고려한다면 남은 시한은 3년이다. 차기 대통령은 핵 능력 및 억지력의 획기적 강화를 위해 최우선적으로 노력해야 한다.
문화일보
■ 12.07 서해 공무원 피살 진상 규명 막는 정부, 무얼 숨기려 하나
▲[서울=뉴시스] 국회사진기자단 = 하태경 국민의힘 의원이 8일 오후 청와대 분수대 광장에서 북한군 피격 해수부 공무원 형 이래진 씨와 함께 기자회견을 열고 사건 진상조사를 문재인 대통령이 직접 지시 할 것을 촉구하고 있다. 2021.07.08. photo@newsis.com
작년 9월 해양수산부 공무원 이모씨가 서해상에서 북한군에 피살된 사건과 관련, 청와대와 해경이 군 기밀을 제외한 정보를 유족에게 공개하라는 법원 판결에 불복해 항소했다. 정부는 이씨가 자진 월북했다고 하면서도 이를 입증할 자료를 공개하라는 유족의 요구는 거부해 왔다. 법원은 지난달 청와대가 국방부·해수부 등에서 받은 보고 내용과 각 부처 지시 내용, 이씨 동료 진술 조서 등을 공개하라고 판결했다. 그런데 청와대가 끝까지 이를 막고 있는 것이다.
작년 이씨 아들은 문재인 대통령에게 “아빠가 잔인하게 죽음을 당할 때 이 나라가 무엇을 하고 있었느냐”는 편지를 썼다. 문 대통령은 “진실을 밝혀내도록 직접 챙기겠다”고 했다. 하지만 진심이 조금도 담기지 않은 말이었다. 청와대는 유족의 정보 공개 요청을 거부했고 잇단 전화와 방문에도 응답하지 않았다. 수사는 1년 넘게 제자리다. 북한군 대화 녹음 감청 파일은 군사 기밀이라고 공개 거부하더니 청와대 자료는 대통령 기록물이라 안 된다고 했다. 대통령이 대놓고 거짓말을 한다.
그간 유족들이 겪은 고통은 말로 다하기 힘들다. 1주기 때 제사상도 차리지 못했고, 고3인 아들은 월북자 가족이라는 낙인에 육사 진학을 포기했다. 어린 딸은 아직 아빠가 죽은 줄도 모른다. 오죽했으면 이씨 아들이 바이든 미국 대통령에게 “아빠의 억울한 죽음에 대한 진실을 밝혀 달라”고 호소하는 편지를 썼겠나. 유엔 인권최고대표사무소도 북한에 책임을 묻고 유족에게 정보를 제공하라고 했다. 하지만 정부는 이것도 무시했다. 대체 무엇을 숨기려고 정보 공개를 막나.
유족들은 “청와대와 정부의 부실 대응이 드러날까봐 이러는 것 아니냐”고 했다. 청와대는 이씨가 북 경비선에 발견됐다는 사실을 보고받고도 아무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3시간 후 이씨는 사살됐다. 청와대는 다음 날에야 대통령에게 보고했다. 문 대통령은 자고 있었다고 한다. 우리 국민이 사살돼 시신이 소각됐는데 무엇을 했느냐는 말이 나올 수밖에 없다. 문 대통령은 세월호 참사 당시 박근혜 전 대통령의 ‘7시간’을 거론하며 “긴박한 사고의 순간에 대통령이 사고를 챙기지 않고 무엇을 했는지 밝혀야 한다”고 했다. 그런데 정작 본인과 관련해선 한사코 정보 공개를 막고 있는 것이다
조선일보 사설
■12.08 이제는 北이 싫어할 ‘가짜 뉴스’ 잡는 데 우리 세금 쓴다고 한다
정부가 ‘김정은 사망설’ 같은 북한 관련 가짜 뉴스를 직접 가려내도록 하는 사업에 예산 2억원이 처음 편성됐다. 이 모니터링 예산은 통일부가 요청하지도 않았는데 민주당이 국회 심의 과정에서 끼워 넣은 것이라고 한다. 통일부는 이제서야 “가짜 뉴스 판별 기준, 방식 등을 전문 기관과 협의할 것”이라고 했다. 여태 생각도 안 해본 사업이란 뜻이다.
극도로 폐쇄적인 북한 정보 특성상 진위 판별에는 상당한 시간이 걸리는 경우가 많다. 확인해줄 기관은 국정원뿐인데 그 과정에서 정보 출처가 노출될 수 있다. 그나마 틀릴 때도 적지 않다. 전 세계 누구도 북한 관련 정보는 확신하기 어렵다. 북한 곳곳에서 벌어지는 인권 탄압과 지옥도는 김정은도 일일이 모를 것이다. 무슨 수로 진위를 가려내나. ‘김여정 쿠데타설’ 같은 가짜 뉴스는 곧 밝혀지고 공론의 장에서 퇴출되기 마련이다. 자율 정화된다. 그런데도 여당이 ‘북 가짜 뉴스’를 잡겠다는 것은 김정은 남매가 싫어할 만한 뉴스를 한국에서 차단해 환심을 사려는 의도로 볼 수밖에 없다. 이미 김여정 한 마디에 ‘대북 전단 금지법’까지 만들었고 ‘도발’이라는 말도 못 쓰고 있다.
문재인 정권은 임기 내내 “김정은의 비핵화 의지가 확고하다”고 했다. 미국에 보증까지 섰다. 그런데 김정은은 올 초 당 대회에서 ‘핵’을 36번 강조하며 전술핵과 핵 추진 잠수함 개발도 선언했다. ‘비핵화 의지’는 명백한 가짜 뉴스였다. 2019년 문 대통령이 “남북 간에 다양한 경로로 소통이 이뤄지고 있다”고 말하자마자 북 외무성 국장은 “그런 것은 하나도 없다”고 반박했다. 제재를 받는 북 경제가 “오히려 좋아졌다”고 했던 사람을 통일장관에 기용하기도 했다. 북 관련 가짜 뉴스를 퍼뜨린 건 주로 정부와 여권 인사들이었다.
지금 가려내야 할 ‘북 가짜 뉴스’는 따로 있다. 한국사 교과서는 북 정권의 3대 세습은 언급하지 않고 정통성이 북에 있는 것처럼 기술해놓았다. ‘천안함 음모론’도 여전히 기승을 부린다. 북 주민을 노예로 삼은 김정은에 대한 칭송과 북 찬양이 서울 한복판에서 횡행했다. 문 정부 전 국방장관은 “김정은이 자유민주 사상에 접근한 상태”라는 말까지 했다. ‘김정은 사망설’보다 더 심각한 가짜 뉴스들이다.
조선일보 사설
■ 12.10 헤엄귀순, 급식, 성추행 등 장관 사과만 7번… “軍지휘체계 총체적 난국”
국군, 창군 이래 최대위기
군 관계자들은 “2021년은 정말 악몽 같은 한 해였다”고 말한다. 연초부터 북한 귀순자 ‘헤엄 귀순’ 경계 실패(2월)를 시작으로, 부실 급식·방역 인권 침해 논란(4월), 성추행 피해 공군 여중사 사망(5월), 청해부대 34진 코로나 집단 감염(7월), 성추행 피해 해군 여중사 사망(8월), 성추행 피해 공군 여하사 사망 폭로(11월) 등 사건·사고가 끊이지 않았다.
이 때문에 서욱 국방부 장관은 올해에만 대국민 사과를 7번 해야 했다. 전 세계에 유례가 없는 일이다. 정치권·시민단체로부터의 사퇴 요구도 거셌다. 군 고위 관계자는 “사고 한 건만 더 터지면 우린 이제 끝장이라는 각오로 자구책을 고심하고 있다”고 했다. 서 장관 등 군 지휘부는 참모들과 예정됐던 송년회를 모두 취소하고 전방 방역 상황 등을 점검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 지난 5월 페이스북 '육군훈련소 대신 전해드립니다'에 올라온 부실 급식 제보 사진. 제보자는 "계룡대 예하부대 14일자 아침 배식"이라며 "(내용은) 건더기없는 오징어국, 볶음김치 그리고 조미김"이라고 했다. /페이스북 '육군훈련소 대신 전해드립니다'
◇ ‘MZ세대 대대장’ 시대 준비해야
MZ세대의 병영 불만에 대해 전방의 한 대대장은 “올해는 어떻게든 대대장들이 ‘까라면 까자’라는 식으로 자기 몸을 갈아 넣는 식으로 막았다”며 “그런데 몇 년이 지나 MZ세대가 대대장이 돼 ‘내가 왜 까? 나도 힘들다’고 박차고 나가면 군대는 어떻게 되겠느냐”고 했다.
MZ세대와의 소통·조화는 군의 미래를 위해 반드시 해결해야 할 숙제다. 박은정 민관군 합동위원회 공동위원장은 지난 10월 “능력주의를 신봉하는 공정의 세대인 MZ세대의 병역 유입으로 권위와 통제에만 익숙했던 군 지휘 체계가 구시대 유물로 전락했다”고 했다. 수십 년 동안 누적돼온 군의 구조적 모순이 단번에 드러났다는 것이다.
군은 이 같은 구조적·복합적 문제 해결 방안을 찾기 위해 정치권과 시민 사회·학계 등과 함께 머리를 맞대는 것을 고민하고 있다. 국방부 관계자는 “전 국가적인 위기 상황에서 올해 발생한 사건·사고는 군 자체 역량만으로 대처하기 어려운 측면이 분명 있었다”고 했다.
▲지난 8월 충남 논산 육군훈련소 입영심사대 안으로 들어서는 입영장병들. 이날 오전 현재 육군훈련소 내 13명의 훈련병이 코로나19 확진 판정을 받았다. /신현종 기자
다만 군 일각에선 청와대나 정치권이 군을 너무 불신하고 일방적으로 다그치기만 한 것 아니냐는 볼멘소리도 나왔다. 일부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부실 급식 관련 민원이 올라오면 청와대에서 ‘지금 뭐하고 있느냐’ ‘빨리 상황 보고하고 대응하라’ 등 지시를 쉴 새 없이 내렸다는 것이다. 이에 일부 부대는 ‘SNS 대응반’까지 설치하면서 상황 해결에 집중할 수 없었다고 한다. 들끓는 여론과 정치권 비난에 끼어 옴짝달싹 못하게 된 간부들은 “탈영하고 싶은 심정”이라고 했다.
넷플릭스 오리지널 드라마 ‘D.P.’가 예비역 남성들의 군 트라우마를 자극하며 흥행했듯, 부실 급식 논란에 대한 대중의 반응 역시 감정적이고 격렬했다. 군 관계자는 “군에 이성적(理性的)으로 대처할 충분한 시간을 주지 않고 여론의 불을 일단 끄라는 식으로만 압박했던 것은 아쉬운 점”이라면서도 “그만큼 그간 쌓인 군에 대한 불신이 컸던 것 같아 씁쓸할 뿐”이라고 했다. 전방의 한 지휘관은 “SNS 등에 알려진 일부 자극적인 사례가 전부라면 군은 진작에 망했을 것”이라고 했다.
군의 잇단 성추행 사건과 관련해선 말기 암(癌) 수준으로 퍼진 법무관 중심의 군 사법 체계 수술을 서둘러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고(故) 이예람 중사를 비롯, 상급자에 의한 피해를 호소하다 회유·무마·협박·따돌림 등으로 2차 가해를 입고 극단 선택을 하는 사례가 판박이처럼 속출하는데도 같은 조직의 법무관들이 수사·기소·판결 업무를 독점하며 끼리끼리 봐주기를 한다는 비판이다. 실제 문재인 대통령이 이 중사 죽음에 대해 ‘격노’하며 엄정 수사를 지시했음에도 지휘부는 단 한 명도 기소되지 않았다.
◇”시뮬레이션 훈련 임계치 다가와”
더 큰 문제는 1년 내내 기강 문제 수습에 허덕이는 동안 군의 존재 이유인 국방·안보에는 구멍이 뚫렸다는 것이다. 한 육군 대령은 “한미 연합 대비 태세가 본격적으로 흔들리기 시작한 것이 군의 근본적 위기”라고 했다. 대규모 실기동 야외 훈련(FTX)는 2018년 남북정상회담 이후 컴퓨터 시뮬레이션 훈련으로 대체됐다. 지난 8월 연합 훈련도 종전보다 12분의 1 규모로 축소 실시됐다. 한미연합사령부 사정에 밝은 한 군 소식통은 “2021년 현 시점까지는 그럭저럭 준비 태세를 유지해왔다”면서도 “이런 상황이 앞으로 수년만 지속되면 동맹의 근간이 흔들릴 것”이라고 했다. 시뮬레이션으로 흉내만 내는 훈련의 임계치가 다가오고 있다는 말이다.
▲지난 8월 한미연합훈련을 앞두고 경기 평택 주한미군기지 캠프 험프리스 기지에서 헬기가 준비 태세를 갖추고 있다./연합뉴스
올해 전·현직 주한미군사령관들은 지속적으로 실전 훈련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주한미군이 한미 동맹에 품은 애착이 그만큼 크기 때문에 ‘쓴소리’를 계속했다는 해석이 나온다. 연합 대비 태세가 무너지는 상황의 위험성을 한국보다 미국이 더 예민하게 감지했다는 것이다. 특히 미군은 연합 훈련을 경험해본 한미 장교들 숫자가 줄어드는 점을 심각하게 보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군 관계자는 “1년 6개월 복무하고 전역하는 병사들이야 그렇다 쳐도, 직업 군인들의 훈련 밀접도가 떨어지고 있는 점은 우려스럽다”고 했다.
◇'땜질 대책’으론 더 큰 대가 치를 것
군은 4차 산업혁명 흐름에 맞춘 스마트 강군(强軍) 청사진을 현 난관의 해결책으로 제시하고 있다. 부실 급식 원인이었던 취사병 혹사를 로봇을 투입해 해결하고, 신형 전투 장비를 보급해 개인 전투력을 증강시키는 ‘워리어 플랫폼’으로 병력 감소에 대처하겠다는 것이다. 북한의 핵·미사일 전력 증강에 대해서도 기존의 작계 5015를 대폭 수정 보완하고, 현무4 등 게임체인저급 신무기 개발로 맞선다는 방침이다.
▲지난 9월 강원도 인제군 육군과학화전투훈련단(KCTC)에서 Army TIGER 4.0 전투실험이 진행된 가운데 군 관계자들이 Army TIGER 4.0 장비들을 선보이고 있다. 'Army TIGER 4.0'은 첨단 과학기술을 접목한 미래 지상전투체계로 드론봇 전투체계, 워리어플랫폼과 함께 육군을 대표하는 3대 전투체계이자 모든 체계를 아우르는 최상위 전투체계이다./공동취재단
그러나 이 같은 군의 대처가 또 ‘사후 땜질’로 그칠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한국국방안보포럼 신종우 사무국장은 “인구구조 변화, 세대 문화 갈등 같은 요소는 이미 10여 년 전부터 충분히 예측하고 있었다”며 “그런데도 국가와 군의 미래엔 관심이 없고 자신의 진급과 정치권 줄 대기에 급급했던 고위 장성들의 외면 탓에 한 번에 터져버린 것”이라고 했다. 올해 발생한 부실 급식, 성추행 논란 역시 일회성으로 ‘대충 덮기’ 식으로 넘어간다면 조만간 또 큰 대가를 치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재명 “선택적 모병제로” 윤석열 “軍경력 혜택 늘릴 것”]
올 들어 창군(創軍) 이래 최대 위기를 맞았다는 지적까지 나오는 군(軍). 여야(與野) 대통령 후보들도 기존 징병제 위주의 병력 구조를 본질적으로 바꿔야 한다고 보고 관련 공약을 제시하고 있다. 후보들은 20대 남성과 부모 세대 표심을 잡기 위해 월급과 전역 후 각종 지원 등 복지에도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후보는 ‘선택적 모병제’를 국방 공약 전면에 내세우고 있다. 이 후보는 지난 10월 국군의날을 맞아 “국민개병제(國民皆兵制)를 유지하면서도 병역 대상자가 단기간 복무하는 징집병과 중기 복무하는 전투부사관 중 선택할 수 있도록 하겠다”고 했다. 현재 군이 운용하는 전문하사(임기제 부사관)제를 더욱 확대하겠다는 취지로 해석됐다.
국민의힘 윤석열 후보는 군 경력에 대한 혜택을 늘리겠다고 공약했다. 군 복무로 여성에 비해 역(逆)차별을 받고 있다는 피해 의식이 큰 20대 남성을 겨냥한 전략이다. 그는 “군 복무 경력을 인정하도록 법제화를 추진하겠다”며 “현역병의 국민연금 가입 기간을 18개월로 확대하고, 군 생활 안전보장보험 가입을 적용하겠다”고 했다. 다만 윤 후보는 모병제에 대해선 “장기적으로 20년 정도 지나면 가야 하지 않을까”라며 “징병제·모병제를 혼합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정의당 심상정 후보는 모병제에 가장 적극적이다. 그는 “1단계로 의무 복무 12개월의 징집병과 의무 복무 4년의 전문병사를 혼합 운용하는 징·모병 혼합제를 2029년까지 운영하겠다”고 했다. 해군·해병대, 공군은 2025년까지 완전 모병제로 전환하고, 육군은 2029년까지 모병제로 전환하겠다는 것이 심 후보 공약이다. 병사 월급을 최저임금 수준으로 올리겠다고도 했다.
국민의당 안철수 후보는 준(準)모병제와 군 전역 시 1000만원 지급 공약을 내세웠다. 임기제 부사관을 군 병력 50%까지 확대하고 일반병 숫자를 줄이겠다는 것이다. 안 후보는 “군 복무를 마치고 학교로 복학하거나 취업·창업 등을 위해 사회로 나가는 전역 청년들에게 1000만원을 사회진출지원금으로 지급하겠다”고 했다.
조선일보 원선우 기자
월간조선 12월 호
■장진호전투 참전했던 학도병 손담
“동쪽에서는 피리 소리, 서쪽에서는 꽹과리 소리,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 장진호 초입 수동에서 중공군과 接戰, “소나무가 포탄에 쓰러지는데, ‘엄마, 나 이제 죽어요!’ 비명”
⊙ 15세 때 나이를 18세로 속이고 학도병으로 자원입대
⊙ 3사단 26연대 통신병으로 포항탈환전투, 38선 돌파, 원산전투, 장진호(수동)전투 등 치르며 혜산진까지 北進
⊙ “한 군데도 다치지 않고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하루도 거르지 않고 목욕재계한 후 정화수 떠 놓고서 빌었던 어머니 덕분일 것”

‘동북공정(東北工程)’으로 고구려 역사를 침탈했던 중국이 영화를 통해 6·25전쟁도 자기들 입맛대로 장난질치고 있다. 6·25전쟁을 이르는 중국식 표현을 빌리면 ‘항미원조전쟁공정(抗美援朝戰爭工程)’이라고 할까. 지난 9월에는 영화 〈장진호(長津湖)〉를 개봉하더니, 그 속편인 〈장진호: 수문교〉를 준비 중이라고 한다. 〈압록강을 건너다〉라는 영화도 곧 개봉할 예정이라고 한다.
이것은 ‘기억전쟁’이다. 중국 공산정권은 미중(美中) 갈등의 와중에 ‘항미(抗美)’의 기억을 끊임없이 소환하고 있다. 하지만 오늘을 사는 한국인들에게 71년 전 김일성과 스탈린, 마오쩌둥(毛澤東)이 공모(共謀)해서 일으켰던 6·25전쟁의 기억은 점차 사라져가고 있다. 어느 속없는 업자가 돈 좀 벌어보겠다고 1953년 7월 금성전투 당시 중공군의 활약상(?)을 다룬 〈금강천〉이라는 영화를 수입하려 했던 것은 그 증거다.
그러던 차에 김경환 마산방어전투기념사업회 사무총장으로부터 “6·25 당시 장진호전투에 참전했던 분이 진해에 생존해 계시다”는 말을 듣고 귀가 번쩍 뜨였다. 장진호전투 당시 미 해병1사단의 분전(奮戰)을 다룬 마틴 러스의 《브레이크아웃》을 읽은 이래 기자는 장진호전투에 대한 관심을 이어왔다. 2012년에는 미 해병1사단에 배속되어 전투를 치렀던 이종연(李鍾淵) 변호사를 인터뷰하기도 했다. 때문에 장진호전투의 생존자가 계시다는 얘기는 무척이나 반가웠다. 다만 ‘당시 군인으로 참전했던 분이라면 연세가 최소한 90세는 넘었을 텐데, 체계적인 증언이 가능할까’ 하는 걱정이 들었다.
기우(杞憂)였다. 올해 86세인 손담(孫淡) 대한민국 6·25참전유공자회 진해지회 회장은 70대 중반으로 보일 정도로 정정했다. 기억력도 생생했다. 손 회장은 “전쟁 중에도 틈틈이 그날그날 있었던 일들을 수첩에 메모해놓았는데, 나중에 전사(戰史)에 나와 있는 내용과 비교해보니 ‘연대봉(煙臺峯)’을 ‘연좌봉’으로 잘못 적는 식의 잘못은 있었지만 큰 잘못은 없더라”고 말했다.
손 회장은 6·25전쟁이 일어났을 때 진해공립중학교 2학년에 재학 중이었다. 당시 15세이던 그는 18세라고 나이를 속이고 학도병으로 자원입대했다. 이후 그는 육군 제3사단 26연대(현재 26연대는 수도사단 소속) 통신병으로 포항탈환전투를 치른 후 38선 돌파와 흥남·원산 탈환의 감격을 맛보았다. 이후 장진호로 향하는 개마고원 초입(初入)인 수동(水洞)에서 중공군을 만나 죽다 살아났다. 이것이 장진호전투의 시작을 알리는 수동전투였다. 여기서 미 해병1사단과 교대한 후 압록강 변의 혜산진까지 올라갔다가 북청을 거쳐 흥남에서 철수했다. 그 후 전쟁이 끝날 때까지 향로봉전투, 금화지구전투, 호남 일대 공비토벌작전 등을 치렀다. 일등중사(현 하사)로 제대한 후 1959년 해군 군무원이 되어 1996년 군무부이사관으로 퇴직했다. 입대에서부터 흥남철수 때까지의 일들을 중심으로 해서 손담 회장(이하 손담)의 전쟁 경험을 재구성해본다.
“가야 합니다!”
손담은 1935년에 태어났다. 초등학교 3학년 때 해방을 맞았다. 일제(日帝) 때에는 ‘국어상용(國語常用)’이라 하여 학교에서는 우리말을 절대로 사용하지 못하도록 했다. 카드를 열 장씩 나누어주곤 무심코 조선말을 사용하면 “너, 카드 내놔!”라며 카드를 빼앗았다. 카드를 잃으면 그만큼 국어 점수가 깎였다. 학교에는 신사(神社)도 있어서 등교할 때마다 예(禮)를 표해야 했다. 어린 마음에도 ‘이건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제는 농산물을 공출(供出)해가고 대신 만주에서 들여온 콩으로 콩기름을 짠 후에 남는 콩깻묵을 배급해주었다.
아마 이런 일들을 겪으면서 자라서인지 그의 마음속에는 어느 사이엔가 애국심이 자리 잡았다. 6·25전쟁이 일어날 당시 학교에는 학도호국단이 조직되어 있었다. 전쟁이 일어나자 학생들은 학교에서 합숙을 하면서 목총(木銃)이나 모의 수류탄을 갖고 군사훈련을 받았다. 읍사무소 게시판에는 매일 마산방어전투 관련 전황(戰況)이 나붙었다.
8월 초 어느 날 어깨에 기관단총을 멘 김인조 대위가 학교에 나타났다. 그는 진해 출신으로 통신병을 모집하러 온 것이었다. 학도호국단의 선배들은 국가관이 몸에 배어 있어서 너도나도 지원했다. 15세이던 손담은 나이를 18세라고 속이고 자원했다. 당시 키가 160cm가 넘었기 때문에 입대가 가능했다.
입대 전날 집으로 돌아와 아버지께 말씀드렸다.
“내일 입대합니다.”
갑작스러운 통보(?)에 아버지는 기가 막혀서 한숨을 푹 내쉬셨다. 아버지가 물으셨다.
“어린 나이에… 나이도 어린 네가… 네가 군대에 간다고? 네가 가야 하느냐?”
“네! 가야 합니다!”
“정말, 네가… 꼭 가야 하느냐?”
“네! 꼭 가야 합니다!”
아버지는 거듭 물으셨다. 다른 말을 더 했다가는 빌미가 잡혀 입대를 못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 손담은 아버지가 물으실 때마다 “가야 합니다”라는 말만 되풀이했다.
포항탈환전투
▲ 낙동강 전선의 학도의용군. 많은 학도의용군이 군번도 없이 싸우다가 목숨을 잃었다.
8월 30일 부산 동신초등학교에 있던 육군통신학교에 입교했다. 다음 날 유선반(有線班)과 무선반(無線班)으로 분류되었는데, 유선반은 2주, 무선반은 4개월 과정이었다. 당시 많은 학도병이 군번(軍番)도 없이 전선(戰線)에 투입되었지만, 이들은 전문 병종(兵種)이어서 ‘0353’으로 시작되는 군번과 함께 하사 계급을 부여받았다. 군번에 따라 유선반과 무선반으로 나누어졌는데, 손담은 유선반이었다. 유선줄 연결이나 전봇대에 올라가 전선(電線)을 가설하고 손보는 방법을 훈련받았다.
9월 12일 교육을 수료하고 난 후, 다음 날 경주에 있는 군수(軍需)지원부대에서 그리스(윤활유) 범벅이 된 카빈 소총을 지급받았다. 기름을 닦아내고 실탄을 받은 후 트럭을 타고 포항으로 이동, 제3사단 26연대 3대대 본부중대로 배치되었다. 당시 3사단장은 나중에 육군참모총장을 지낸 이종찬(李鍾贊) 대령이었다. 26연대는 당시에는 3사단 소속이었는데, 나중에 수도사단 소속으로 바뀌었다. 진해중학교 동기 가운데 손담까지 세 명이 통신병으로 입대했는데, 다른 두 명은 각각 1대대와 2대대로 갔다. 그 가운데 손담만 아직까지 살아 있다.
부대는 지금은 포철(포스코) 공장이 있는 형산강 강변에 있었다. 여기서 SCR-300 무전기를 지급받았다. 배터리까지 포함하면 무게가 30kg에 달했다. 4km까지 교신(交信)이 가능했다. 3시간 동안 무전기 조작법을 교육받았다.
손담이 처음 치른 전투는 9월 15일 벌어진 포항탈환전투였다. 인천상륙작전이 벌어지던 날이었지만, 그건 알지 못했다. 지금은 형산강에 다리가 3개 있지만, 당시에는 콘크리트 다리가 하나뿐이었다. 이 다리를 건너 포항 시내로 진입해야 했지만 적은 다리 양쪽에 중기관총을 배치해놓고 완강하게 저항했다. 9월 15일, 16일 이틀 동안 전투를 치렀지만 전사자와 부상자만 늘었다. 대대장 은석표 대위가 손담에게 지시했다.
“연대 불러!”
연대장 이치업 대령이 나왔다. 은 대위가 말했다.
“현 상황. 중기관총이 다리 양쪽에 배치되어 병력만 손실. 목표 시간 내 목표 지점 점령 어려운 상황. 공중지원 요망!”
잠시 후 흔히 ‘쌕쌕이’라고 부르던 F-80전투기 1개 편대(4대)가 나타났다. 1·2·3번기가 다리를 향해 로켓포 공격을 가한 후, 4번기가 캘리버50 기관총을 쏘아대 적 진지를 무력화(無力化)시켰다. 10중대가 돌격, 다리를 돌파했다.
9월 18일 저녁, 비가 내렸다. 참호 속에서 판초 우의를 뒤집어쓰고 누웠는데, 아버지, 어머니 생각이 났다.
“나중에 들은 얘기인데, 아버지는 그 무렵 진해에서 부산까지 120리 길을 걸어 영도 동신초등학교까지 찾아오셨다고 합니다. 하지만 ‘사흘 전에 이미 전선으로 배치되었다’는 말을 듣고는 땅바닥에 털썩 주저앉으셨다고 하더군요.”
北進
▲육군 제3사단이 38선을 돌파한 10월 1일은 국군의 날이 되었다.
9월 19일, 손담의 대대는 탑산이라는 73m 고지를 점령했다. 전투가 벌어지는 동안 대대 통신병 손담은 30kg짜리 무전기를 짊어지고 달렸다.
“대대장이 달리면 나도 따라서 뛰고, 고참병이 엎드리면 따라서 엎드렸어요. 우리가 점령한 고지에서는 시체 썩는 냄새가 진동했습니다. ‘이것이 전쟁이구나 ’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북진(北進)이 시작됐다. 3사단은 하루에 24km씩 걸으며 북으로, 북으로 진격했다. 강원도 죽변에서 LST(Landing Ship Tank·상륙함)를 타고 주문진 앞바다에 도착, 배에서 1박을 한 후 9월 30일 상륙했다. 10월 1일 3사단 23연대가 38선을 돌파했다. 이날을 기념하여 10월 1일이 ‘국군의 날’이 된 것이다.
26연대는 이후 양양, 속초, 간성, 고성을 거쳐 10월 8일경 강원도 안변(원래는 함경남도였으나 1946년 북한의 행정구역 개편으로 강원도에 편입) 비운령에 이르렀다. 대대장 은석표 대위는 신중한 사람이었다. 수색대를 편성해서 적정(敵情)을 살피도록 했다. 수색대에는 통신병이 필요했다. 은 대위는 하사 손담에게 수색대에 참가하라고 지시했다. 이 무렵 손담은 이미 소년병, 학도병이 아니라 그런 임무를 맡겨도 될 고참병이 되어 있었다. 손담은 휴대가 간편한 SCR-536 무전기를 지급받았다. 수색대는 지휘관인 소위 한 명을 포함해 모두 12명이었다. 수색대는 봉우리에 걸린 커다란 백기(白旗)를 발견했다. 뭔가 이상했다. 아니나 다를까. 적의 기만전술이었다. 치열한 교전 끝에 적군을 생포, 적의 주력(主力)은 이미 안변천을 건너 후퇴했다는 진술을 얻어냈다.
10월 10일 3사단 23연대는 완강하게 저항하는 적을 무찌르고 원산 시내에 진입했다. 같은 날 수도사단은 해안 쪽에서 원산 시내로 진입했다. 3사단과 수도사단 중 어느 쪽이 먼저 원산을 점령했느냐를 놓고 논란이 있었는데, 결국 함께 점령한 것으로 결론을 내렸다.
원산의 여왕산(333m) 근처 옥수수밭을 지날 때였다. 옥수수 더미에서 짐승이 지나가는 것 같은 소리가 들렸다. 아군 병사가 M-1 소총을 쏜 후 “나와라!”라고 소리쳤다. 적병 7명이 손을 들고 나왔다.
원산에 이어 고원, 영흥을 거쳐 10월 17일 함흥을 점령했다.
“함흥형무소 뒤에 방공호(防空壕)가 있었는데 300명 정도가 학살되어 있었습니다. 참혹하더군요.”
중공군 출현
▲중공군은 장진호 일대에 거대한 포위망을 구축하고 국군과 미군을 기다렸다.
함흥에서 이틀을 보낸 후 서북쪽에 있는 낭림산맥을 타고 평남 영흥군 대흥면 사창리로 들어가 전투를 치르고 하룻밤을 잤다. 한데 뭔가 잘못되었다는 느낌이 들었다. 방향을 잘못 잡은 게 아닌가 싶었다.
무전기로 오로리에 있는 연대본부를 불렀지만, 아무리 불러도 나오지 않았다. 그런 중 갑자기 뭔가에 맞은 듯한 느낌과 함께 “팅!” 하는 소리가 들렸다. 적탄이 무전기 배터리 케이스를 강타한 것이었다. 주둔 시에는 무전기에 10피트(1ft=30.48cm)짜리 긴 안테나를 장착하는데, 그 때문에 적의 표적이 된 것 같았다. 적은 중공군이었다.
“배터리가 아니었으면, 그 총알은 내 몸에 박혔겠지요. 배터리 때문에 무전기 무게가 30kg이나 나가 늘 힘들었는데, 그 배터리가 내 목숨을 구한 것이지요.”
대대장은 이동을 명령했다. 멀리서 중공군과 교전을 벌이고 있는 11중대 척후병이 쏘아대는 BAR(Browning Automatic Rifle·브라우닝 자동소총) 총성이 들려왔다. 연대에서는 더 이상 전진하지 말라는 명령을 내렸다. 26연대는 일단 함흥으로 나왔다가 장진호 초입에 있는 마을인 수동으로 들어갔다. 손담은 이때가 10월 26일 아니면 27일경이었고, 그곳에서 3~4일 머물렀던 것으로 기억한다. 척후병들이 진흥리, 고토리까지 나아갔지만, 별다른 적정은 보고되지 않았다.
하지만 이때 쑹스룬(宋時輪)이 이끄는 중공군 9병단(兵團) 12만 명은 이미 장진호 일대에 거대한 포위망을 구축하고 국군과 미군이 들어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황포군관학교 출신인 쑹스룬은 국공내전(國共內戰)에서 용명(勇名)을 떨친 군인으로, 특히 매복전(埋伏戰)의 달인으로 알려져 있었다. 마오쩌둥은 그를 보내면서 “솜씨를 발휘해보라”고 격려했다고 한다. 손담이 속해 있던 26연대 3대대도 이미 적의 포위망에 들어가 있었다.
수동전투
10월 28일 저녁 7시쯤이었다. 갑자기 적의 포탄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1분에 250발 정도의 포탄이 떨어졌는데, 다들 엎드리고 숨고 난리가 났습니다. 소나무가 포탄에 맞아 쓰러지는데, ‘엄마, 나 이제 죽어요!’라는 비명이 저절로 터지더군요. 방향감각을 잃고 정신없이 달렸는데, 앞에서 쌀라쌀라 하는 소리가 들렸어요. 중공군이 몰려오고 있더군요. 등을 돌리고 다시 뛰는데 무엇인가에 발이 걸리는 바람에 넘어졌어요. 낮에 가설해놓았던 W190 유선통신줄이었어요. ‘이 줄을 따라가면 부대로 돌아갈 수 있겠다’ 싶었습니다. 그 줄을 따라 20분 정도 뛰었더니 대대본부에 이르렀습니다. 심만철 소위가 통신병들을 모아놓고 있더군요.”
이들이 무전기로 연대를 부르고 있는데, 북한군 T-34전차(戰車)가 나타났다.
“서로 먼저 도망치려고 달리다가 넘어지고, 포개지고…. 대대장 서걸우 대위도 보이지 않았어요. 동쪽에서는 피리 소리가 나고, 서쪽에서는 꽹과리 소리가 나고, 정신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이런 상황에 병사들은 혼이 나간 마냥 그 자리에 멈춰 더 이상 움직이질 못했는데, 심 소위가 권총을 뽑아 들고 자기를 따라오라고 했어요.
냇물을 건너야 하는데, 적은 60mm 박격포와 기관총을 쏘아댔습니다. 기관총은 다섯 발에 한 발씩 예광탄이 섞여 있었는데, 그 불빛도 공포감을 더했어요. 박격포 포탄이 떨어지는 각도 등을 보면 적이 얼마나 가까이 있는지 짐작할 수 있는데, 아주 지근거리에서 쏘아대고 있었습니다. 무작정 달아날 수밖에 없었는데 이런 공포 속에 2시간 정도를 내달렸을까, 갑자기 추워진 날씨에 탈진(脫盡)하는 병사가 속출하는 와중, 앞에서 한 무리의 병사가 나타나 수하(誰何)를 했습니다. 연대 수색대였습니다. ‘이제 살았다’ 싶더군요.”
이것이 10월 28일에서 29일 상황이다. 이들 앞에 나타났던 적 전차는 6·25 개전(開戰) 초기 서울을 점령했던 북한군 344전차연대의 마지막 남은 전차 4대 중 한 대였다.
철수
다급한 상황에 끼니조차 못 챙긴 채 26연대 병사들은 함흥으로 향해야 했다. 이때 ‘26R-No.1’이라는 번호판을 단 지프가 나타났다. 이치업 연대장이었다. 연대장이 물었다.
“몇 대대야?”
“26연대 3대대입니다.”
“수고한다.”
이치업 연대장은 지프에 싣고 있던 건빵들을 내려 병사들에게 나누어준 후, “연대봉으로 올라가라”고 지시했다. 10중대장 윤사섭 중위가 병사들을 모아 연대봉으로 가려 했다. 하지만 그럴 상황이 아니었다.
26연대는 결국 장진호를 향해 진격하고 있던 미 해병1사단 7연대(연대장 호머 리첸버그 대령)를 만나 교대했다. 원래 두 연대의 교대 예정일은 11월 2일이었다. 이때의 상황은 마틴 러스의 《브레이크아웃》에 이렇게 기술(記述)되어 있다.
〈10월의 마지막 날, 7연대 B중대의 정찰대는 3대의 트럭에 분승하여 내륙(內陸) 쪽으로 48km를 이동, 수동에 주둔한 한국군 26연대를 방문했는데, 7연대는 이 부대와 11월 2일에 교대하기로 예정되어 있었다. 윌콕스 대위는 무전으로 리첸버그 대령에게 한국군이 말끝마다 “많은 중공군, 많은 중공군”이라고 하면서 그 지역을 빨리 떠나고 싶어 한다고 보고했다. 한국군이 붙잡은 16명의 중공군 포로들은 4야전군 9병단 42군 124사단 370연대 탄약소대 소속이었고, 그 포로는 북한군 전차의 지원을 받는 42군의 나머지 부대가 북쪽의 산악지대에 주둔하여 장진호로 가는 도로를 차단하고 있다고 말했다.〉
손담은 미 해병1사단 7연대와 한국군 3사단 26연대가 교대한 지점을 함흥에서 연대봉을 향해 올라가는 도로상이었다고 회고했다.
美 해병대의 장진호전투
▲장진호에서 공군의 지원 공격을 바라보는 미 해병대. 미 해병대는 장진호에서 1달여 동안 사투를 벌였다.
이치업 연대장의 지시에도 불구하고 26연대가 공격하지 못했던 연대봉은 도로 서쪽에 있는 해발 698m의 고지로 인근의 도로, 교량, 터널을 감시할 수 있는 요지였다. 존 얀시 중위가 이끄는 미 해병대 병력이 11월 2일 연대봉을 점령했다. 이어 미 해병은 26연대가 철수한 수동에서 중공군과 접전(接戰), 적을 격퇴했다. 11월 4일 미 해병은 진흥리로 진입했다. 이곳에서 미군은 북한군 T-34전차 4대를 격파했다. 서울을 점령했던 북한군 344전차연대는 이렇게 최후를 마쳤다.
하지만 미 해병1사단의 장진호전투는 이제부터 시작이었다. 개마고원 깊숙이 들어갔던 미 해병1사단은 그해 12월 11일까지 중공군 13병단과 혈전(血戰)을 벌였다.
미국의 전사가(戰史家) 에드윈 P.호이트는 미국 해병대의 장진호전투를 두고 “군사상(軍史上) 가장 위대한 후퇴작전 가운데 하나”라고 평했다. 하지만 장진호전투에 참가했던 미 해병대원들은 ‘후퇴작전’이라는 표현을 거부한다.
“그건 공격작전이었지 후퇴작전이 아니었습니다. 장진호전투 전체가 공격작전이었다는 말입니다. 처음에 우리는 북쪽으로 유담리까지 쳐올라갔고, 다음으로는 유담리에서 서쪽으로 1500m 지점까지 공격해갔으며, 그러고는 남쪽으로 유담리에서 황초령까지 공격했습니다. 내가 묻고 싶은 것은 우리가 그러는 중에 후퇴한 적이 있느냐는 것입니다.”(우드로 윌슨 테일러)
“우리는 수동에서 중공군과 처음 조우했을 때부터 그들을 무찔렀고, 나중에 답교를 건너면서도 그들을 무찔렀습니다. 그들이 우리에게 항복했지, 그 반대가 아니었습니다. 후퇴라니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겁니까?”(조지프 오웬)
당시 미 해병1사단장 올리버 스미스 소장은 상부로부터 철수 명령을 받은 후 “우리는 후방으로 후퇴하는 것이 아니라, 후방으로 공격한다!”고 명령했다.
12만 명에 달했던 중공군 13병단은 2만5000명의 전사자, 1만2500명의 부상자를 내고, 무력화(無力化)되었다. 미 해병1사단에서는 700명 이상의 전사자, 200여 명의 실종자, 3500여 명의 부상자가 발생했다. 이 외에 6200여 명의 비(非)전투 사상자가 나왔는데, 이들 대부분은 동상(凍傷) 환자였다. 이들 중 3분의 2는 바로 임무에 복귀했다.
미 해병1사단의 장진호전투를 다룬 《브레이크아웃》 한국어판 서문에는 장진호전투의 의미에 대해 이렇게 나와 있다.
〈장진호전투의 군사적 의의(意義)는 무엇보다 중공군 제13병단의 기습공세 앞에 속절없이 무너져간 서부전선의 유엔군-주로 미 육군과 국군 부대-에 비하여 제1해병사단이 악조건하에서도 부대 건제(建制)를 유지하면서 보름간에 걸친 탈출작전 동안 중공군 제9병단의 병력 대부분의 발을 묶어, 함경도 지방으로 진출한 다른 미군과 국군 부대들이 철수하거나 흥남으로 집결할 시간을 벌어주었고, 나아가서 동(同)병단에게 전투력을 상실할 정도의 막대한 타격을 입혀, 중공군이 38선을 넘어 유엔군을 추격할 때 제9병단이 참가할 수 없게 만들어 유엔군과 국군이 재편성하여 반격을 개시할 수 있는 여유를 갖게 되었다는 데 있다.
만약 제1해병사단도 맥없이 무너져서 큰 손실을 입지 않은 9병단이 주공(主攻)인 13병단과 함께 남진(南進)해왔더라면, 그 압력을 못 견딘 유엔군은 한국에서 전면적으로 철수했을지도 모르고, 그렇게 됐을 경우 우리 대한민국이 이 땅에 존재할 수 있었을까? 이 가정(假定)은 충분히 근거가 있는 것이, 13병단만의 남진에도 유엔군은 서울을 다시 내주고 오산-제천-원주를 잇는 37도선까지 후퇴하여야 했기 때문이다.〉
혜산진까지 진격
26연대는 이후 함흥 북방의 홍원으로 이동했고 사라졌던 대대장 서 대위 또한 합류했다. 홍원에서 5일간 묵은 후 26연대는 유개(有蓋)열차를 타고 단천, 길주를 거쳐 청진까지 올라갔다가 다시 내륙으로 진격, 11월 21일 압록강 상류의 혜산진에 도달했다. 이 때문에 26연대는 혜산진부대라는 별칭을 갖게 되었다. 국군 제6사단은 이미 10월 27일 초산에 도달, 압록강 물을 수통에 담아 이승만(李承晩) 대통령에게 보냈다.
26연대는 두 주일 동안 혜산진에 머물렀다. 하지만 중공군의 공세가 강화되자 연대에 북청으로 철수하라는 명령이 내려왔다. 개마고원을 질러 후퇴하는 길은 끔찍했다. 무엇보다도 추위가 가장 무서운 적이었다. 방한모(防寒帽)에 방한복을 입었음에도, 동상 환자가 속출했다.
“12월 8일경 북청에 도착했는데 사람 몰골이 아니었습니다. 박박 깎았던 머리카락은 길게 자라났고 수염도 덥수룩했습니다. 북청 시내에 있는 이발관에서 이발을 하고 나니 멋진 청년의 모습이더군요. 우리가 북청 시내에서 잠을 자고 있을 때, 중공군은 북청 외곽의 산에서 잠을 자고 있었습니다. 북청역에서 석탄 싣는 무개차(無蓋車)를 수리해서 20km 떨어진 신북청으로 철수했습니다. 12월 10일경 열차에 타니 중공군이 방망이 수류탄을 던지면서 공격해왔습니다. 중공군은 세 명에 한 명 정도만 소총을 갖고 있었고, 방망이 수류탄이 주된 무기였습니다. 윤사섭 중위가 3~4시간의 전투 끝에 중공군을 물리쳤습니다.”
이 무렵 26연대는 3사단에서 수도사단으로 소속이 바뀌었다. 신북청에 도착한 후 유선통신을 가설하고 연대본부와 통화했더니 연대장은 “빨리 퇴조까지 철수하라”고 했다. 퇴조는 오늘날 북한 해군의 잠수함 기지가 있는 곳으로 1994년 9월 강릉으로 침투했던 무장공비들도 이곳에서 출항했었다.
신북청에서 퇴조까지는 걸어서 내려왔다. 손담은 “죽거나 포로가 되지 않으려면, 필사적으로 걷는 수밖에 없었다”고 술회했다. 퇴조에서 사흘간 머물면서 식량을 마련한 26연대는 흥남으로 이동했다. 흥남부두는 12만 명의 피란민들로 북적이고 있었다. 미군들은 수송선에 실었던 군수물자들을 버리고 대신 피란민들을 태웠다. 12월 23일 흥남을 출항한 메레디스 빅토리호는 사흘 후 거제에 도착했다.
26연대는 12월 24일 미국 군함을 타고 흥남을 출발, 다음 날 오후 강원도 묵호항에 도착했다.
어머니의 정화수
여기서 일주일간 휴식 겸 부대를 정비한 후 26연대는 바로 강릉탈환전투에 투입됐다. 이어 대관령 유철리전투(1951년 1~2월), 오대산전투·설악산전투(1951년 5~8월) 등을 치렀다. 유철리전투 때에는 중공군과 북한군의 협공을 받고 황급하게 탈출하는데 무전기 안테나가 버드나무 사이에 걸리는 바람에 죽을 뻔했다. 거창 출신의 전우가 그를 발로 걷어차 간신히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줄곧 26연대에서 같이 통신병으로 복무했던 진해중학교 시절의 친구는 중공군의 포로가 되었다가 3개월 만에 탈출해왔다.
향로봉전투(1951년 8월) 때에는 동해에 있는 미국 전함에 무전을 날려서 함포사격 지원을 요청했다. 미 해군의 함포는 대체로 정확하게 적진을 때렸지만 낙오탄(落伍彈)이 아군 쪽으로 떨어지는 바람에 화기중대장 선우관성 중위가 즉사(卽死)했다. 죽음은 늘 가까이에 있었다. 이후 손담은 금화지구전투(1952년 7~10월), 호남지구 공비토벌작전 등을 치른 후 1955년 1월 일등중사(오늘날의 하사)로 제대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1951년 3월 학도병들은 제대시키라는 명령을 내렸다. 하지만 이미 군번을 받은 병사들, 특히 통신병이었던 손담처럼 전문 병종의 병사들은 그 명령에도 불구하고 계속 군에 남아 있어야 했다.
“그래도 나는 한 군데도 다치지 않고 살아남을 수 있었습니다. 나중에 들은 얘기인데, 어머니는 내가 군대에 있는 내내 추우나 더우나 하루도 거르지 않고 목욕재계한 후 정화수를 떠 놓고서 비셨다고 합니다. 내가 그 숱한 전투를 치르고서도 무사히 살아 돌아올 수 있었던 것은 아마도 그 덕분일 겁니다.”
제대한 후 손담은 진해중학교로 복학하려 했다. 하지만 학교에서는 복학을 받아주지 않았다.
“‘왜 안 되느냐’고 따졌더니, 교무주임은 ‘문교부의 지침이 없다’고 하더군요. 화가 나서 ‘우리가 전선에서 싸우지 않았으면 이렇게 무사히 공부할 수 없었다’고 따졌지만 소용이 없었습니다.”
“학교 안보 강연 거의 없어져”
손담은 1959년 해군 보급창(현 해군군수사령부)의 군무원(당시에는 ‘군속’이라고 했음) 모집에 응시, 합격했다. 보급창 군무원에 지원한 것은, 군에 있을 때에 보급이 잘못되어 굶거나 고생했던 기억 때문이었다.
1996년 손담은 군무부이사관(2급)으로 정년퇴직했다. 2002년부터는 대한민국 6·25참전유공자회 경남 창원시 진해지회 사무국장으로 일하다가 2020년부터 지회장으로 봉사하고 있다. 그러면서 그는 틈나는 대로 6·25 전적지(戰跡地)를 찾아 전사자들의 유품을 발굴하는가 하면, 각급 학교를 찾아 안보 강연을 해왔다. 배대균 마산방어전투기념사업회장과 함께 《마산방어전 루트를 찾아서》라는 책을 내기도 했다. 그는 “근래에는 학교에서 안보 강연을 요청해오는 일이 거의 없다”며 섭섭해했다.
“우리 때에는 어려웠던 시절이었지만, 전쟁이 일어나자 모두들 나가서 싸우려고 했을 정도로 애국심이 대단했습니다. 요즘 젊은이들에게는 그런 생각이 있는지 모르겠어요. 걱정입니다. 오늘날 대한민국이 세계 10위권의 경제대국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6·25 때 수많은 젊은이와 미군, 유엔군이 목숨을 던진 덕분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 정신을 잊지 말고 앞으로도 계속 노력해서 6·25전쟁 100주년이 되는 2050년에는 대한민국이 G2의 하나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순간 정수리를 얻어맞은 것 같았다. 6·25전쟁 100주년이 되는 2050년에 대한민국이 G2가 되는 꿈이라니! 갈수록 꿈이 작아지고 작아지는 시대에 86세의 참전용사는 참 큰 꿈을 꾸고 있었다. 우리 시대 누구보다도 큰 꿈을!⊙
글 : 배진영 월간조선 기자 ironheel@chosun.com
월간조선 12월 호
■배대균 마산방어전투기념사업회 상임대표
“마산이 무너졌으면, 대한민국 없었을 것”
⊙ “마산에서 부산까지는 직선거리로 40km, 國道 50km… 美 25사단이 방어”
⊙ 高地 주인이 19번 바뀐 서북산전투
⊙ 서북산에서 전사한 로버트 티몬스 대위… 아들은 8군 사령관, 손자는 2사단 대위로 3代에 걸쳐 한국 방위
⊙ 전적지 발굴 작업… “남의 나라에 와서 목숨을 바치고 구천을 떠도는 영혼들의 시신, 인식표 찾아서 돌려보내고 싶어”

▲사진=배진영
“배 기자, 서북산전투라고 들어봤어요? 6·25 때 대한민국을 구한 전투라는데…”
지난 9월 어느 날 저녁, 오래간만에 전화를 걸어온 조전혁 전 국회의원이 한 말이다. 서북산전투? 생소했다. 조전혁 전 의원이 설명했다. 6·25 당시 낙동강 교두보의 서남부에 해당하는 마산 일대는 미(美) 25사단이 담당했는데, 그때 마산이 뚫렸으면 부산을 지켜내지 못했을 것이고, 대한민국도 보전될 수 없었을 것이라는 얘기였다. 마산방어전투 가운데서도 가장 중요한 전투가 서북산전투였다는 것, 그 중요성에 비해 마산방어전투가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것을 안타깝게 생각한 마산 지역 인사들이 기념사업회를 만들었다는 이야기가 이어졌다.
마산방어전투기념사업회 상임대표는 배대균(86) 박사. 마산에서 53년째 배신경정신과의원을 하고 있는 의사이다. 군의관으로 월남전에 참전했던 예비역 해군 소령이기도 하다. 배 대표는 《마산방어전투;미 25보병사단 마산방어전투실화 번역집》 《마산방어전투 루트를 찾아서》(배대균·손담 공저) 등의 책을 내는 등 마산방어전투를 널리 알리기 위해 노력해오다가 지난 9월 마산방어전투기념사업회를 설립하고 상임대표를 맡았다. 10월 26일 경남 창원시 마산합포구에 있는 배신경정신과의원에서 배 대표를 만났다.
6·25의 기억
▲미 25사단 전투일지를 번역한 배대균 대표의 《마산방어전투》.
― 어떻게 해서 마산방어전투에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까.
“6·25가 일어났을 때 진해공립중학교 2학년에 재학 중이었습니다. 마산 쪽에서 들려오던 포성(砲聲), 마산전투에 대한 뉴스에 귀 기울이던 기억이 지금도 기억에 생생합니다. 집이 진해비행장 바로 옆이었는데 전쟁이 나면서 미(美) 18전투비행단이 들어왔어요. 적 게릴라가 비행장을 기습하러 와서 여러 차례 전투가 벌어졌어요. 비행기들이 밤낮없이 출격하던 모습, 비행기가 격추되어 조종사가 낙하산으로 탈출하던 모습, 비행기가 비행장에 동체(胴體) 착륙하던 모습들이 기억납니다. 불과 1시간 전에 출격했던 비행기가 거의 부서진 모습으로 돌아오는 것도 보았고….
그런 기억 때문에 군(軍) 복무하면서 마산전투에 관한 기록들을 찾아보았더니, 의외로 자료가 없더군요. 전사(戰史)편찬위원회 자료도 찾아보았는데 별로 없었고…. 몇 년 전 한미친선 모임에서 진해에 와 있는 미 해군고문단 관계자들과 만났을 때 이 이야기를 했습니다. 미 국가기록관리청(National Archives)에 제25사단 관련 자료가 있을 거라고 하더군요. 6개월 후에 미 25사단 전투일지를 구할 수 있었습니다. A4 용지 500여 장 분량이었습니다. 전쟁 중에 그렇게 세세한 기록을 남기다니 미국 사람들은 참 놀라운 사람들입니다. 그걸 번역해서 작년에 《마산방어전투;미 25보병사단 마산방어전투실화 번역집》(청미디어 펴냄)을 내놓았습니다.”
― 마산방어전투는 어떤 전투였습니까.
“1950년 8월 1일부터 9월 30일까지 마산시(현재는 마산합포구) 진동·진북·진전면과 함안군 일대에서 벌어진 전투를 말합니다. 미 25사단(사단장 윌리엄 킨 소장), 한국 육군의 민(閔)부대(민기식 부대장의 이름을 따서 그렇게 불림), 김성은 중령이 이끄는 해병대, 최천 총경이 이끄는 전투경찰대 등이 함께 싸웠습니다.”
대한민국을 구한 전투
▲북한군 6사단장 방호산(왼쪽)과 미 25사단장 윌리엄 킨 소장.
― 마산방어전투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마산에서 부산까지는 직선거리로 40km, 국도(國道)로 50km밖에 안 됩니다. 부산까지 1시간 거리였죠. 당시 마산을 방어하던 부대는 미 25사단뿐으로 별도의 예비대가 없었습니다. 만약 마산이 무너졌다면, 부산을 지켜내지 못했을 것이고, 대한민국은 무너졌을 것입니다.
▲낙동강 방어선. 방어선의 서남부는 미 25사단이 담당했다.
당시 마산으로 쳐들어온 북한군은 6사단(사단장 방호산)이었습니다. 북한군 6사단은 원래 조선족으로 구성된 중공군 166사단으로 국공내전(國共內戰)에서 많은 전투 경험을 쌓은 최정예 부대였습니다. 북한군 6사단은 7월 31일 진주를 점령하고 다음 날인 8월 1일에는 마산과 함안의 고지대를 이미 점령했습니다. 부산 공략은 시간문제였죠. 반면에 마산 방어 병력은 7월 31일 진주에서 후퇴한 미 24사단 19연대와 29연대, 미 25사단 27연대로 전력(戰力)이 심하게는 절반 수준으로 격감한 상태였습니다. 미 8군 사령관 워커 장군은 대구 북방 상주에 있는 미 25사단을 8월 1일 새벽 240km 떨어진 마산으로 급히 이동시켰습니다. 이 ‘기적의 대이동’ 이후 미 25사단은 마산방어전투의 주역이 됩니다.”
그렇게 중요한 마산방어전투가 왜 그동안 주목받지 못한 것일까? 이는 당시 낙동강 방어를 담당했던 부대 배치도를 보면 이해가 간다. 오늘날 대구·경북에 해당하는 낙동강방어선의 동북부를 담당한 부대들은 국군 1사단, 3사단, 수도사단, 6사단, 8사단 등이었다. 반면에 달성에서 진해를 잇는 방어선의 서남부는 미 기병1사단, 24사단, 25사단 등 미군 부대가 담당했다. 때문에 1사단(사단장 백선엽)의 다부동전투 같은 것은 널리 알려졌지만, 마산방어전투에 대한 관심은 상대적으로 떨어진 것이리라. 같은 마산방어전투 가운데서도 해병대가 치른 진동리전투나 이후의 통영상륙작전 같은 것은 비교적 널리 알려져 있다. 8월 6~7일 제1차 진동리전투에서의 승리로 해병대는 미 25사단장 킨 소장으로부터 “귀신 잡는 해병”이라는 격찬을 받았고, 이후 ‘귀신 잡는 해병’은 해병대의 구호가 되었다.
남정옥 전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책임연구원은 “마산방어전투는 미 25사단의 전투나 국군 부대들의 전투 모두 전사(戰史)연구 차원에서는 충분히 연구되어 있다”면서 “다만 미 25사단이 주역이었고, 국군 부대들도 미 25사단에 배속되어 전투를 치렀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홍보가 덜 되어 있다”고 말했다.
서북산전투와 티몬스 대위 3代
▲창원 학동저수지에서 바라본 서북산. 사진=배진영
― 마산방어전투 가운데 특히 주목할 만한 전투가 있다면 무엇입니까.
“서북산전투입니다. 서북산은 경남 함안군 여항면과 창원시 마산합포구 진북면과 진전면을 경계 지우는 740m의 준봉(峻峯)입니다. 정상에 오르면 북동쪽은 함안군, 남서쪽은 진동면·진북면, 서쪽은 진주가 훤히 바라보이는 요충(要衝)이죠. 미 25사단과 북한군 6사단은 8월 3일부터 9월 20일까지 고지의 주인이 19번이 바뀌는 격전(激戰)을 벌였습니다. 미군의 함포사격으로 서북산 정상은 풀 한 포기 남아나지 않고 높이가 몇 미터 낮아지기까지 했는데, 그래서 미군은 이 산을 ‘늙은 중머리 산’이라고 했습니다. 미 공군기가 쉴새 없이 네이팜탄을 퍼부었다고 해서 ‘네이팜산 언덕’이라고도 했고, 뺏고 빼앗기는 싸움을 벌일 때마다 미군이 ‘갓 뎀 잇(God damned it)’을 연발했다고 해서 ‘갓뎀산’, 전투가 계속 이어졌다고 해서 ‘전투산’, 아군과 적군의 피가 강물을 이루었다고 해서 ‘피의 고지’라고도 했습니다.”
▲로버트 티몬스 대위의 흉상.
배대균 대표는 “서북산전투와 관련, 꼭 기억해야 하는 이름이 있다”고 했다.
“로버트 티몬스 대위는 미 25사단 5연대 1대대 중대장으로 8월 23일 서북산전투에서 100여 명의 중대원들과 함께 고지를 지키다가 전사(戰死)했습니다. 당시 일곱 살이던 아들 리처드 티몬스는 아버지의 뜻을 잇기 위해 군인이 되어 1995~1997년 주한 미 제8군 사령관(중장)으로 한국에서 근무했습니다. 티몬스 중장은 재직 중 아버지가 전사한 서북산을 찾기도 했습니다. 로버트 티몬스 대위의 손자(리처드 티몬스의 아들)도 미 육군 대위로 한국 근무를 자원해 1996~1997년 판문점 인근 미 2사단 최전방 초소에서 근무했는데, 몇 년 전에 준장으로 진급했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만일 이후에 진급한다면 언젠가는 8군 사령관으로 올 수도 있지 않을까요? 3대(代)에 걸쳐 대한민국에 자유를 주고 있는 것입니다.”
다행히 로버트 티몬스 대위는 기억되고 있다. 육군 39사단은 1995년 12월 서북산에 그를 기리는 추모비를 세웠다. 경남 함안군도 2016년 함안면에 호국공원을 조성하면서 티몬스 대위의 흉상을 건립했다. 국가보훈처는 작년 11월 ‘11월의 전쟁영웅’으로 로버트 티몬스 대위를 선정했다.
전투 흔적들 발굴
▲직접 발굴한 6·25전쟁 당시의 실탄과 파열된 총열 등을 들어 보이는 배대균 상임대표. 사진=배진영
마산방어전투기념사업회는 지난 6월부터 준비 모임을 갖기 시작, 지난 9월 6일 정식 출범했다. 배대균 원장이 상임대표를, 김경환 (사)ROTC 경남지구 부회장이 사무총장을 맡았다. 기업인, 대학교수 등 지역 내 유지들이 참여하고 있다고 한다.
― 앞으로 기념사업회는 어떤 활동을 할 계획입니까.
“우선 내년 6·25전쟁 72주년에 즈음해서 미 25사단 생존자 5명과 그분들을 에스코트할 분 10명을 초청하려고 합니다. 또 39사단과 함께 마산방어전투에 대한 학술 세미나를 열고자 합니다. 그리고 티몬스 대위 3대의 이야기를 비롯해 마산방어전투와 관련된 스토리들을 다양한 형태의 콘텐츠로 만들어 널리 알리는 일을 할 생각입니다. 하와이에 있는 미 25사단을 방문해 감사패를 전달하려는 생각도 갖고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마산방어전투기념관을 건립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배대균 대표는 5년여 전부터 틈나는 대로 뜻있는 이들과 함께 마산방어전투 전적지를 찾아서 전사자들의 유품 발굴 작업을 해왔다. 배 대표의 말이다.
“남의 나라에 와서 목숨을 바치고 구천을 떠도는 영혼들의 시신, 그게 어려우면 인식표라도 찾아서 돌려보내고 싶어서 발굴 작업을 시작했습니다. 아군이나 적군의 총알 탄피, 실탄, 수류탄 파편, 철모, 군복 단추, 버클, 이런 것들은 많이 나오는데, (한숨을 내쉬며) 유골은커녕 인식표도 아직 못 찾았어요.”
배 대표는 그동안 발굴한 물품들을 꺼내서 보여주었다.
“이건 인민군 장교의 어깨띠 버클, 이건 파열(破裂)된 따발총 총열, 이건 미군 군복 단추, 이건 인민군 모젤 소총탄 탄피, 이건 M-1 소총 탄환…”
―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과는 협조가 있습니까.
“유해발굴감식단에도 알아보았는데, 그동안 마산방어전투와 관련해서 유해를 발굴한 것은 아직 없다고 합니다. ‘같이하자’는 말은 하면서도 아직 구체적인 진전은 없어서 아쉽습니다.”
배대균 대표는 “무엇보다도 정부와 지방자치단체의 관심이 절실하다”고 말했다.
“두 달여 동안 그렇게 피를 흘려가면서 대한민국을 구해낸 전투임에도 이렇게 기록이 없고, 관심이 없다는 게 말이 됩니까? 우리의 아들딸들이 외국에 나가서 그렇게 죽었다면 우리의 마음은 어떻겠습니까? 시민들이 마산방어전투를 기억하자고 나서는데, 정부와 지자체에서도 좀 더 적극적인 관심을 가져주었으면 좋겠습니다. 이는 한미동맹을 견고히 하기 위해서라도 꼭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美 25사단 전투일지로 본 마산방어전투
마산교도소 수감자들 폭동 기도
⊙ 적군, 부랑자로 변장하고 통신소 파괴
⊙ 방첩대, 적군에게 미군 이동·집결 정보 제공하던 12세, 14세 아이들 체포
⊙ 한국 학생들, 공산주의 이데올로기 깊게 침투되어 있어
⊙ 일부 한국군, 변절해서 인민위원회에 협조
▲미 5연대 전투단이 마산 진전면 인근의 전선에서 적진을 향해 포격을 가하고 있다. 사진=《마산방어전투》
배대균 마산방어전투기념사업회 대표가 작년에 펴낸 《마산방어전투;미 25보병사단 마산방어전투실화 번역집》은 마산방어전투 당시 미군의 전투일지를 번역한 것이다. 기록자는 사단 군사기록관 잭 펜케이크 소령으로 되어 있다. 주된 내용은 예하 연대의 전투상황, 해·공군의 지원내용, 한국군(카투사) 배속, 한국 관공서나 경찰과의 업무 협조 등에 대한 것들이어서 무척 무미건조하다.
다만 남한에서 인민군으로 징집되거나 자원입대한 의용군, 민간인으로 위장해 전선에 출몰하는 부랑자나 게릴라 등에 대한 이야기들은 흥미롭다. 북한군이 12세, 14세짜리 소년들이나 미군 부대 노무자들을 첩자(諜者)로 활용했다거나, 전 마산교도소 교도관들로 공산주의 활동을 하다가 수감된 자들이 무기를 입수해 폭동을 일으키려 했다든지, 일부 한국군 부대가 변절해서 공산주의자들과 협조했다든지 하는 이야기들은 상당히 충격적이다. 그러한 내용들을 소개한다.
마산방어전투의 주역 美 제25보병사단은 어떤 부대인가?
-하와이 주둔 부대로 과달카날 전투 치른 ‘熱帶의 戰士’
마산방어전투의 주역이었던 미(美) 제25보병사단은 하와이에 뿌리를 둔 사단이다. 1921년 하와이를 방어하기 위해 창설된 ‘하와이사단’이 1941년 제24사단과 제25사단으로 분리되면서 탄생했다. 6·25전쟁 당시 제24사단은 창녕전투, 제25사단은 마산전투에서 어깨를 나란히 하고 싸웠다. 제2차 세계대전 중 제25사단은 과달카날 전투 등을 치르면서 ‘열대(熱帶)의 전사(戰士)’라는 호칭을 얻었다. 이후 필리핀 탈환 작전에 투입되었다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에는 일본 오사카에 주둔했다. 6·25전쟁 발발 뒤 한국으로 파병되자 당시 사단장 윌리엄 킨 소장의 이름을 딴 ‘킨 특수임무대’의 핵심으로 마산방어전투를 성공적으로 치러냈으며, 이후 인천상륙작전, 철의 삼각지 전투, 펀치볼 전투 등을 치렀다. 1954년 한국에서 철수, 하와이로 복귀했다. 월남전쟁, 걸프전쟁(1991년), 아이티 민주화지원작전(1995년), 보스니아 평화유지작전(2002년), 이라크
안전통행증, 적군 수중에 들어가
▲미 25사단 부상병들이 후송을 기다리고 있다. 사진= 《마산방어전투》
- 한국인 근로자들이 분실한 안전통행증이 적군들 수중에 들어가고 그들은 아군 전선 앞에서 어른거린다. 미군들은 그것을 가려내기 위하여 검문한다. 짐꾼들은 안전통행증을 가지고 전선은 물론 포로수용소까지 넘나들 수 있다. (1950년 8월 9일)
- 8군 사령부는 민간인 흰옷을 입고 전선으로 달려오는 적군을 붙들어 조사하고 절차상 본부로 보냈다. (1950년 8월 14일)
- 적군 83기계화연대의 포로 약 3분의 1은 중공군 제8보병(팔로군을 말하는 듯-기자 주)이다. 그들은 전부 이북 사람들이라고 우겼다. (1950년 8월 16일)
- 적은 5연대와 24연대 경계선을 따라 계속적으로 공격해왔다. 한 포로는 서울에서 강제 모병 되고, 알 수 없는 공장에서 시키는 일을 했으며, 민간인 10명에 2명의 무장군인의 비율로 2000명이 서울에서 10일간 밤에 행군하면서 수류탄을 운반했으며, 그 후 군인이 되어 이곳으로 왔다. (1950년 8월 23일)
- 전투가 한창일 때 적군은 투항하는 듯 백기를 들어 올렸다. 트릭이었다. 한순간에 해치우고 강력하게 공격을 이어갔다. 백기의 진실을 어긴 자들에게 벌을 준 것이다. 정찰대는 20명을 사살하고 2명의 포로와 다수의 무기를 노획했다. 또 다른 적은 강을 건너면서 투항하는 속임수를 썼다. E중대 정찰대는 자동화기로 끝장내버렸다. (1950년 8월 25일)
- 전투 지역과 후방의 피란민 통제와 후송 문제가 심각하다. 후방에서 작고 큰 문제들이 거침없이 일어나고, 작전 수행에 큰 장애물이다.… 전선 전반을 정찰한 결과 적들은 포격이 불가능하게 마을 주민들 속에 침투해 있었다. 마을 입구에 지뢰를 매설하고 보급품을 마을 깊숙한 곳에 감추어놓았다. (1950년 8월 26일)
12세짜리 첩자
▲미 35연대 병사들이 노획한 인공기를 들어 보이고 있다. 사진=《마산방어전투》
- 대대 정보연락장교는 2명의 한국군 연락장교를 대동한 후 중리 근방의 부랑자들을 걸러내는 일을 시작했다. 부랑자들은 경찰과 군의 제재에도 불구하고 군 주둔지 부근을 배회하고 있으며, 전투가 있기 전에 연대는 지정한 장소로 보내도록 했다. (1950년 9월 2일)
- 25수색중대와 한국 해병은 사단 존 주위의 게릴라와 부랑자들을 탐색하고 분쇄했다. 적군들이 부랑자로 변장해 있었다. 그들은 통신소를 파괴하고 전투장을 흔들어놓았다. (1950년 9월 9일)
- 적은 규모는 작지만 정찰을 밤새 이어 하고, 3개 연대 모두가 소규모의 공격을 받았다. 차를 탄 힘센 정찰병 3명이 아침 일찍 각각 한 사람씩 64야전포병 3명을 납치해갔다. 아무도 이 장면을 목격하지 못했다. 대원들은 1148-1365.8 지대에서 교환부서 장비를 다루는 요원들이며 포대 주변에 흙이 뿌려져 있었다. (1950년 9월 10일)
- 방첩대는 2명의 아이를 붙들었는데 군 이동과 집결 장소를 적에게 제공했다. 12세, 14세 아이들이었으며 정보를 마산으로 가지고 온 후 전선을 가로질러 인접한 적군에게 전달했다. 정보는 군 시설에 고용된 주민 노동자들이 타고 다니는 미군 차에 승차하여 수집한 것들이며, 그 더럽혀진 손가락으로 적에게 전달했다.
25사단에 드나드는 한국 민간인은 미군 방첩대가 사전에 거른 사람들이며 걸렀다 하더라도 많은 고용인이 적군 전선과 맞붙어 기거하고 있으므로 유념해야 한다. 정보 요원들이 아무리 엄격하게 걸러낸다 해도 단편일 뿐이다. (1950년 9월 11일)
- 의회, 종교단체, 병사 부모, 사회단체로부터 좋지 않은 일 하나가 전달되어 왔다. 군인들에게 맥주는 추천할 만한 물건이 아니며, 많은 양의 맥주는 허용될 수 없다는 여론들이었다. 맥주를 구하기 위하여 적절한 돈을 내는 것을 말릴 수는 없다. 차후로는 개인이 돈을 지불하고 맥주를 구하는 방식으로 나아가야 하며 PX를 통하여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을 제안했다. (1950년 9월 11일)
의용군이 된 서울 학생들

▲북한은 의용군이라는 이름 아래 점령지에서 징발한 젊은이들을 전선으로 내몰았다. 사진=조선DB
- 104안전연대는 1950년 7월 24일 서울에서 창군되었다. 학생과 노동자들에 의해 자발적으로 구성되었으며 장교들과 준사관들이 지휘하고 요원들은 별도로 모병했다. 간단한 신체검사 후 무기 없이 서울을 출발했다. 이들은 별도로 훈련하거나 강력한 군대일 필요가 없다. 4개 대대의 연대와 본부요원으로 이루어져 있다. 1개 대대원은 약 500명, 총 병력 2000명이며, 철저한 공산주의자들이다. 도망 나온 적군 장교는 말한다. 그가 포로로 잡은 한국군 신병들은 참신하고 전투의지가 강하고 도덕적이었다. 한국 학생들에게 공산주의 이데올로기는 깊게 침투되어 있었으며 북쪽 군인이 되면 곧장 말과 행동으로 옮긴다. 공산주의를 싫어하는 학생도, 전쟁을 싫어하는 학생도, 북쪽 군인에게 매료된다. 이런 사실이 많은 사람으로 하여금 자원병이 되게 한다. 군인이 되면 윤리·도덕 관념은 없어진다. (1950년 9월 12일)
- 마산교도소 수형자가 35연대 진지로부터 카빈총을 취득하려 했다고 자백했다. 교도소의 한 감방에 7명이 있는데, 모두가 교도소 경비과 직원들이며 공산주의자들이다. 감방의 두목은 교도소 경비과장이며 일주일마다 면회 오는 가족을 통하여 무기를 구입하고자 했으며, 공산주의 수형자들을 무장시키고 봉기하려 했다. 구입비는 수형자들의 쌀을 내다 판 돈이었다. 이들 감방 수감자들은 같은 수형자, 외부 인사들, 공직자들을 포섭하여 세력을 넓히려 했고, 마산 근방에 우글거리는 적군들과 봉기하려 했다. (1950년 9월 15일)
- 서울 학생들은 적군이 서울을 점령해도 피란길에 오르지 않고, 공산당 ‘인민위원회’는 학생들에게 접근하여 학교(공부를 말하는 듯-기자 주)를 계속하라고 했다. 그러나 학교에 모이게 하고는 군중집회를 통해서 정치 강의를 듣게 한 후 군에 가라고 부추기고 어느 정도 응하면 그때부터 감시하에 군훈련소로 행진해갔다. (1950년 9월 17일)
- 최근 팔에 문신을 한 피란민 속의 젊은이들이 추적되었다. 그들은 제곡마을에서 온 젊은이들이며 북조선 공산주의 ‘인민공화국 청년연맹’이라는 단체의 회원들이다. 그들은 마산지부를 결성하고 오른쪽 팔에 ‘단결’이라는 한자를 문신하고 적군들의 수족이 되었다. (1950년 9월 21일)
- 적군들이 진전면 둔덕, 요장리, 함안 등지에 차고 넘칠 때, 이 지역에 주둔한 일부 한국군은 변절하였다. 중대한 사건이었다. 군인들은 공산주의자들이 결성한 ‘인민위원회’를 보호하고 안내해주었으며 그 사실을 뒤늦게 고백해왔다. ‘인민위원회’는 적군이 되거나 노동 제공자가 되고 게릴라가 되어 유엔군을 괴롭혔다. (1950년 9월 24일)
[증언] 마산방어전투 참전 학도병 유승석
“우리 세대와 젊은 세대는 국가관이 너무 차이가 나는 것 같아”
⊙ 학도병으로 남원전투 투입, 인민군에게 붙잡혀 노역하다가 탈출
⊙ 특무대에서 사흘간 특수훈련 받은 후 진동의 敵情 살피러 침투

▲유승석 옹. 사진=배진영
6·25전쟁이 일어날 당시 합포중학교 4학년에 재학 중이던 유승석(90·이하 유승석) 옹은 19세의 나이로 학도병으로 참전했다. 그는 학도병으로 나섰다가 인민군에게 붙잡혀서 노역(勞役)을 했고, 탈출해서 돌아온 후에는 ‘특수요원’이라는 이름으로 적진에 투입됐다. 이후 미군 부대에서 2년간 일했다. 그의 증언은 마산방어전투 당시의 긴박했던 분위기를 알 수 있게 해준다.
박격포 탄환을 메고
6·25전쟁이 일어났을 때 유승석은 마산 합포중학교 학도호국단 감찰부장이었다. 배속장교는 서북청년단 출신으로 반공정신이 아주 강한 사람이었다. 전쟁이 난 후 목총을 가지고 훈련을 하는 날들이 이어졌다. 배속장교는 “나라가 위기에 처한 때에 자원입대해서 학교의 명예를 드높여야 한다”면서 학도호국단 간부들에게 자원입대를 권유했다. 이에 응한 학도호국단 간부 10명은 7월 10일 부산의 제5연대에 가서 부산, 마산, 진주 등에서 지원한 학도병들과 함께 신고했다. 이후 마산으로 돌아와 월영동의 옛 일본군 연대 병영 자리에서 대기하고 있다가 7월 14일경 진주로 출동 명령을 받았다.
출동 전에 군복을 지급받았다. 일본에 주둔하고 있는 미군의 낡은 군복을 세탁한 것인 듯했다. 덩치 큰 미군의 군복이 어린 학생들의 몸에 맞을 리 없었지만, 그나마도 동작 빠른 사람만이 차지할 수 있었다. 무기도 마찬가지였다. 윤활유가 칠해진 손도 안 댄 M-1 소총이 보급되었지만 10자루에 불과했다. 유승석은 무기도 못 가지고 나섰다. 다음 날 진주극장에서 카빈 소총과 M-1 소총을 지급했다. 유승석에게는 박격포탄을 주면서 그걸 짊어지고 오라고 했다. 아침에 민간인 트럭에 40명씩 분승해서 남원으로 갔다. 새벽에 전투가 벌어졌다. 뭐가 뭔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유승석에게 박격포탄은 있었지만 박격포는 어디에도 없었다. 솔직히 유승석은 자기가 갖고 있는 물건이 무엇인지도 그때는 몰랐다.
후퇴 명령이 내려졌다. 어느 군인이 유승석에게 “그건 이제 버려라”고 했다. 갈림길이 나타났다. 하나는 담양, 하나는 순천 쪽으로 가는 길이었다. 유승석은 순천 쪽 길을 택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담양 쪽으로 향했던 이들은 지역 빨치산의 공격을 받아 많은 희생자를 냈다.
순천의 위수(衛戍)사령부에서 일본군이 쓰던 38식 소총을 지급받았다. 실탄은 받지 못했다. 여수에서 순천으로 오는 국도변 야산에서 보초를 서라고 했다. 며칠간 제대로 먹지도, 자지도 못한 탓에 잠이 밀려왔다.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다. 총을 내려놓고 웃옷을 벗고 드러누웠다. 그렇게 잠에 빠질 때쯤, 갑자기 따발총 소리가 요란하게 들려왔다. 사이드카 소리, 트럭 소리도 들렸다. 적이었다. 모두가 도망가기에 바빴다.
인민군에게 붙잡히다
유승석은 산 옆에 있는 민가로 뛰어 들어갔다. 주인과 마주쳤다. “전라도에는 빨갱이가 많다”는 말이 떠올랐다. 주인은 “네가 총을 메고 보초 서고 있는 것을 봤다”면서 “빨리 저기 웅덩이에서 몸을 씻고 옷을 갈아입으라”고 했다. 주인은 유승석이 입고 있던 옷을 거름통에 던져버리고, 옷을 가져다주었다. 우익 인사였던 것이다. 주인은 음식을 내오면서 “이럴 때 학도병이라고 마음대로 뛰어다니면 큰일 난다” “마산 고향 집으로 가라”고 했다.
다음 날 아침 10시경 그 집을 나섰다. 이미 ‘지방 빨갱이’들이 죽창을 들고 쫙 깔려 있었다. ‘이들이 갑자기 이렇게 나선 것은 아닐 것이다. 사전에 지하에 조직망이 있었을 것이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은 유승석이 어려 보이는 데다가 빡빡머리를 하고 있는 것을 보고 통과시켜주었다.
마산으로 가는 길에 소련제 장총을 멘 의용군들을 만났다. 붉은 줄이 들어간 바지를 입은 장교가 그들을 인솔하고 있었다. 장교가 유승석을 불러세워 어디로 가느냐고 물었다. 유승석은 “마산 출신으로 서울에서 공부를 하고 있는데 인민군이 마산을 ‘해방’시켰다는 말을 듣고 고향 집으로 가는 길”이라고 대답했다. 그의 비위를 맞추려고 일부러 좌익들이 사용하는 ‘해방’이라는 말을 사용했다. 그 장교는 유승석의 손을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오랫동안 총을 다룬 군인이라면 손에 못이 박여 있을 것이라 생각한 것이다. 그는 유승석을 학생이라고 인정하고 그냥 놓아주었다. “전쟁 초기에 내려온 인민군 장교들 중에는 그래도 괜찮은 사람들이 있었다”고 유승석은 말한다. 남의 집에 들어가서 몰래 보리쌀을 훔치거나 고추를 따 먹으며 허기를 채웠다.
7월 20일경 하동에 이르렀을 때 또 인민군을 만났다. 그들은 폭격으로 섬진강 다리가 무너지는 바람에 강을 건너지 못하고 있었다. 인민군이 불러세우기에 또 “인민군이 마산을 ‘해방’시켰다는 말을 듣고 고향 마산 집으로 가는 길”이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그 인민군이 말했다. “잘됐소. 우리도 지금 이 다리를 복구하는 공사를 하고 있는 중인데, 동무도 좀 도와주시오. 다리를 고치고 나면 같이 마산으로 갑시다.”
그렇게 어쩔 수 없이 인민군에게 붙들려 노역을 하고 있는데 미군 F-80 ‘쌕쌕이’가 나타나 폭격을 했다. 폭격이 멈춘 후 다시 보수공사를 시작했다. 어느 사이엔가 ‘쌕쌕이’가 또 나타나 폭격을 했다. 모두 흩어지고 엎드리는 와중에 도망을 쳤다.
‘백두산 호랑이’

▲김종원
하동에는 인민군 선무대(宣撫隊)가 들어와 있었는데, 서울의 대학생들인 듯했다. 모두 미인들이었다.
유승석은 고생고생해서 마산에 도착했다. 남성동 파출소 자리에 학도의용군 본부가 있었다. 일단의 학도의용군들과 함께 마산위수사령부로 신고를 하러 갔다. 한 육군 소령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김종원 중령이 들어왔다. ‘백두산 호랑이’라는 별명으로 유명했고, 나중에 내무부 치안국장을 지낸 사람이다. 그는 학도의용군들을 보고 소리를 질렀다.
“이놈들은 뭐야?”
“학도의용군입니다!”
“니들 군번 있어?”
“없습니다!”
“군번 없으면 경찰서에 가서 신고해!”
경찰서에 가서 신고했더니, 학도병과 지역 내 전투 경험자들 30명을 모아 부대로 편성했다. 일제 강점기에 일본군 헌병대가 있던 월남동 특무대(현재의 국군안보지원사령부)로 갔다. 특무대에서는 “지금 국군과 미군이 진동에서 전투를 벌이고 있는데 현지 적정(敵情)을 잘 알지 못하고 있는 형편”이라면서 “적진에 침투해서 정확한 정보를 수집해와라. 너희의 임무가 아주 막중하다”고 했다. 사흘간 특수교육이라는 것을 받은 후 따발총을 지급받았다. 면바지를 입고 어깨에는 미숫가루 주머니를 둘러 의용군인 것처럼 꾸몄다. 30명 가운데 15명은 진동, 15명은 함안 쪽으로 침투했다. 유승석은 진동 쪽으로 가는 일행에 속했다.‘
1회용 특수요원’

▲마산방어전선의 일부였던 함안 전선으로 이동하는 미 24연대 병사들. 사진=《마산방어전투》
적은 현재의 진동 해병대전적비가 있는 곳까지 들어와 있었다. 의용군인 것처럼 꾸몄다고는 하지만 적군이 거기에 넘어갈 정도로 어리숙할 리가 없었다. 특수훈련을 받았다고는 해도 고작 사흘간의 훈련으로 제대로 된 ‘특수요원’이 된 것도 아니었다. 적군과 아군의 경계 사이를 며칠간 정찰하고 다녔지만 눈에 띄는 성과는 없었다. 당초에는 일주일 동안 활동하라고 지시받았지만 5일 만에 돌아가기로 했다. 특무대에서는 원래 정해진 날짜, 정해진 시각에 특정 지점에서 웃통을 벗고 손을 머리 뒤로 하고 나타나면 이들인 줄 알고 쏘지 않겠다고 약조했다. 문제는 앞서서 나타났을 때였다.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몰랐다.
8월이어서 시퍼런 벼들이 자라나고 있을 때였다. 유승석 일행은 논에 누웠다. 미군 정찰기가 하늘을 날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미군기가 공격해올 것만 같았다. “움직이면 죽는다”고 아우성을 쳤다. 그곳에서 하룻밤을 잤다. 다음 날 죽기 아니면 살기라는 생각으로 웃통을 벗고 손을 머리 뒤로 얹고 강을 건너서 미군들 앞으로 나아갔다. 다행히 총을 쏘지는 않았다. 잠시 후 이들이 옷을 벗어놓고 온 논 위로 미군 ‘쌕쌕이’가 날면서 기관총을 쏘아댔다. 위장한 적병으로 숨겨둔 병력이 있는 것은 아닌지 확인하기 위함이었다.
당초 15명이었던 ‘특수요원’들은 어느 사이엔가 7명으로 줄어 있었다. 지휘자를 비롯한 8명이 사라져버린 것이다. 특무대 진동파견대와 접촉했지만 아무도 유승석 일행에게 관심을 두지 않았다. 출동하기 전에는 일제시대에 독립투사들이 그랬던 것처럼 태극기를 들고 기념사진까지 찍었지만, 그들은 ‘1회용’일 뿐이었다. 미 25사단 소속 특수부대라고는 했지만, 함께 돌아온 동료들도 슬금슬금 사라졌다. 남은 사람은 유승석 한 사람뿐이었다. 유승석은 가네코라는 이름의 일본계 미군 중사 아래서 ‘하우스 보이’ 노릇을 하며, 미 25사단이 북진할 때 함께 올라가 금화, 의정부 토성, 동두천에 주둔했다. 군인도 아니고 민간인도 아닌 생활을 견딜 수 없어 1952년 6월 미군 부대를 나왔다. 2년 동안 이런저런 고생을 했지만 남은 것은 하나도 없었다.
1952년 10월 유승석은 시험을 쳐서 공군 부사관으로 임관했다. 고향인 마산에 있는 항공수리창에 배치되었으며, 1964년 10월 공군 중사로 제대했다. 이후 경남 마산시 재향군인회 공군부회장, 6·25참전유공자회 경남마산지회장, 참전기념사업회 고문 등으로 봉사해왔다.
“안보교육도 없어져”
유승석 옹은 “전쟁 중에 큰일을 한 것도 없고, 인정도 못 받고 있지만, 그래도 나는 나라를 지키기 위해 자원해서 전쟁터로 나갔다”면서 “우리 세대와 젊은 세대는 국가관이 너무 차이가 나는 것 같다. 전쟁이 나면 지금 학생들은 과연 어떻게 할까”라고 걱정했다.
“전에는 교육청에서 참전용사들을 초청해서 학생들에게 안보교육도 하고 그랬는데, 근래에는 그런 것도 없어졌어요. 학생들에게 6·25 때 얘기를 해주면 ‘할아버지도 정말 전쟁을 했어요?’라고 물어보고는 같이 사진도 찍고 그랬는데…”⊙
글 : 배진영 월간조선 기자
12.13 체제 경쟁은 끝나지 않았다
“침통하고 유감스럽다. 국가 주권과 존엄을 수호하기 위해 오늘부로 니카라과와 외교 관계를 중지하며 협력 및 원조 계획을 전면 중단하고 대사관을 철수한다.” 지난 10일 중남미 니카라과가 중국과 수교하기 위해 대만과 단교한다고 일방적으로 발표한 직후, 대만 정부는 이런 대응 성명을 냈다.
니카라과의 ‘갈아타기’는 시간문제였다. 좌파 게릴라 지도자 출신으로 1985년 집권한 다니엘 오르테가 대통령은 그해 55년간 수교해온 대만과 국교를 끊고 중국과 외교 관계를 맺었다. 그러나 1990년 대선 승리로 새로 들어선 우파 정권이 대만과 복교했다. 이후 2007년 재집권한 오르테가 정권이 헌법을 고치고 야당과 언론을 억누르며 장기 독재 체제를 구축했지만, 정통성은 부정당했고 서방의 경제 제재 강도는 높아졌다. 중국이 이 ‘약한 고리’를 파고들었다.
이 외교적 사건은 체제 우월성과 국가의 안위는 무관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대만의 국제적 위상이 요즘처럼 높은 적이 없다. 유럽 주요국과 호주·일본 등이 고위 인사들을 대만으로 보내며 교류의 폭을 대폭 넓히거나 대만에 우호적 발언을 이어갔다. 프리덤하우스 자유지수에선 한국을 제치고 아시아 2위에 올랐고, 이코노미스트 민주주의지수(11위), 헤리티지재단 경제자유지수(6위) 등 대만 체제를 높이 평가한 수치들도 잇따라 발표됐다. 미국 주도 민주주의정상회의에도 초청돼 참석했다.
하지만 존재감이 커지는 만큼 존립 위협도 증가했다. 중국은 전례 없는 수준의 무력 시위를 벌였고, 중국이 무력으로 강제 복속에 나설 것이라는 전망이 구체적인 시점까지 곁들여 나돌았다. 니카라과의 단교로 대만의 수교국은 14국으로 줄었다.
우리 상황은 어떤가. 분단 뒤 70년간 체제 경쟁을 하면서 거의 모든 분야에서 북한을 압도했지만, 비대칭 전력의 우위를 빼앗긴 상태다. 2006년 공개 핵실험을 시작한 북한은 국제사회 제재에 아랑곳 않고 핵 역량을 키워왔다. 우리는 김정은이 핵 단추를 누를지 노심초사하는 ‘핵 인질’ 신세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미 동맹과 안보 정책은 갈수록 더 중요해지고 있다.
그런데도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 10월 한 행사에서 “(남북) 체제 경쟁이나 국력의 비교는 이미 오래전에 더 이상 의미가 없어졌다”고 말했다.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미·중 갈등 격화로 냉전 시대 유산인 올림픽 보이콧까지 되살아났는데, 이 나라의 방향타를 잡은 사람들은 제대로 된 설명도 없이 ‘6·25 종전선언’에 몰두한다.
나라의 생존은 낭만적 민족주의로 보장되지 않는다. 국제 정세와 맞물리며 여전히 치열하게 계속되는 체제 경쟁에서 긴장의 끈을 놓아 버리면, 언제 국가 존립의 위기를 맞을지 모를 일이다. 집권층의 비현실적 안보 인식에 국민이 불안해하는 일은 더 이상 보고 싶지 않다. 체제 경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조선일보 정지섭 기자
12월 13일 바이든式 대북제재 시작…文도 종전선언 미몽 깨야
조 바이든 미국 행정부가 북한의 강제 노동과 인권유린을 이유로 북한 중앙검찰소와 사회안전상 출신의 리영길 국방상을 제재 명단에 올렸다. 신장(新疆) 인권유린 등을 지적하며 베이징동계올림픽 외교적 보이콧을 한 데 이어 민주주의정상회의 폐막일이자 세계인권의 날인 10일 북한 및 중국, 미얀마 등에 인권 관련 제재를 한 것은 바이든 외교의 기조를 보여준다. 더구나 임기 말이던 2016년 김정은 등에 대해 인권 제재를 한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과 달리 바이든 대통령이 임기 첫해에 이 같은 카드를 꺼낸 것은 앞으로 인권을 중심에 놓겠다는 선언이다.
바이든 행정부는 지난 4월 대북정책 재검토를 완료했지만, 그간 북한이 단거리 탄도미사일 도발을 지속해도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대북결의 위반이라는 점을 환기시켰을 뿐 추가 제재를 꺼내진 않았다. 작은 도발을 묵인한 것은 대화에 방점을 찍고 있기 때문이라는 해석이 나왔던 이유다. 그러나 북한이 핵·미사일 개발에 골몰하며 대화에 불응하자 인권 관련 제재를 시작한 것이다. 바이든 행정부의 이런 조치는 북한 인권 문제에 눈감은 채 종전선언을 외골수로 추진하는 문재인 정부에 대한 경고로 비친다.
그런데도 문 대통령은 13일 스콧 모리슨 호주 총리와 정상회담에서 종전선언 구상 등을 설명하며 지지를 촉구했다. 기자회견에선 “베이징동계올림픽에 대한 외교적 보이콧을 검토하지 않고 있다”고도 했다. 앞서 문 정부는 유엔 북한인권결의안 공동제안국에서 3년 연속 빠졌고, 지난해 9월 북한군에 피살된 해양수산부 공무원 관련 정보를 공개하라는 법원 판결에도 불복해 항소했다. 그러면서도 북한이 요구한 대북전단금지법은 위헌 논란에도 불구하고 강행했고, 북한 관련 가짜뉴스를 막는다며 통일부에 2억 원 예산까지 배정했다. 북·중 인권에 눈감은 채 종전선언 미몽에 끝까지 집착하면 국제적인 웃음거리가 될 뿐이다.
문화일보 사설
12.14 北 정찰총국 대좌 출신 “청와대 근무 北 공작원은 냉난방 기술자”

▲북 정찰총국 대좌 출신 탈북민이 BBC 인터뷰에서 "1990년대 초 북파 공작원들이 청와대에서 근무한 뒤 복귀한 사례도 있다"고 말했다. /BBC 캡처
1990년대 초 북한 간첩이 유사시 ‘독가스 살포 임무’를 부여받고 청와대 냉난방 기술자로 근무하다 평양으로 복귀했다는 주장이 13일 제기됐다. 북한 정찰총국 대좌(대령) 출신 탈북민 김국성(가명)씨는 최근 시사저널 인터뷰에서 이런 내용을 공개했다. 앞서 김씨는 지난 10월 영국 BBC 인터뷰에서 ‘간첩 청와대 근무’ 내용을 처음 주장했다. 이후 국가정보원이 “사실과 다르다”고 반박하자 국내 언론을 통해 좀 더 구체적인 내용을 공개한 것이다.
김씨는 “국정원이 발뺌하는 걸 충분히 이해하지만 북한 공작원의 청와대 근무는 분명한 사실”이라고 말했다. 그는 “‘박명수’라는 이름의 이 사람은 1976년 한국으로 직파된 첫 부부 공작조 중 한 짝으로 김영삼 대통령의 청와대에서 근무하다 1994년 북으로 복귀했다”며 “이후 정찰총국에서 일했다”고 했다.
그는 “BBC 인터뷰 때 북한 공작원이 청와대에서 근무했다고 말하니까 다들 넥타이 매고 일하는 비서관이나 행정관만을 생각하더라”면서 “박명수는 기술 업종, 그중에서도 공기 조화 계통을 담당하는 일을 했다”고 말했다. “냉난방을 담당하는 공조 기술자는 건물 구조를 다 꿰고 있을 수밖에 없고 이 때문에 북한이 청와대를 속속들이 들여다봤다”는 것이다. 그는 “유사시 공조 시스템을 통해 독가스 살포 같은 테러를 벌일 수도 있었다”고도 했다. 김씨에 따르면 박명수는 평양 귀환 후 공화국 영웅 칭호를 받았다고 한다.
유동열 자유민주연구원장은 “1968년 북한 무장 공비들이 청와대 기습을 위해 내려왔을 때 이들에게 청와대 약도를 건넨 것이 당시 박종규 경호실장의 비서로 있던 북한 간첩 김옥화였다”면서 “90년대에도 이런 일이 충분히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했다.
김씨는 ‘천안함 폭침’ 도발과 관련해선 “천안함 사건이 터진 지 두 달이 지난 2010년 5월 평양 만경대구역 특각에서 김영철 정찰총국장 등과 만났다”며 “그때 김영철이 ‘대장 동지 지시로 천안함 작전이 대성공했다. 대장 동지 결단이 대단하다’고 말하는 걸 들었다”고 했다. 당시 ‘대장 동지’는 김정은 국무위원장에게 붙이던 칭호다.
조선일보 김명성 기자
12.15 北 지상군 110만인데 우리 육군 42만… ‘병력 부족 쓰나미’에 대책 없는 軍
“우리가 가진 총알보다 그 ××들 숫자가 더 많다는 거 아세요?”
6·25전쟁을 소재로 한 영화 ‘고지전’에서 한 국군 장교가 물밀듯이 몰려오는 북한군(인민군)을 보고 절규하듯 한 말이다. 이처럼 수많은 병력을 투입해 전투하는 ‘인해(人海)전술’은 6·25전쟁 때 중공군을 상징하는 말처럼 됐다. 영화나 책에서 중공군은 유엔군의 몇 배에서 몇 십 배에 달하는 병력을 투입해 무기에서 앞섰던 유엔군을 공포에 몰아넣은 것으로 묘사된다.

하지만 군 전사 자료에 따르면, 6·25전쟁 때 북한군·중공군과 한미 양국군 등 유엔군 총병력은 가장 격차가 크게 벌어졌을 때에도 1.9대1을 넘지 않았다고 한다. 즉 북한군과 중공군 총병력이 유엔군의 두 배를 넘지 않았다는 얘기다. 중공군과 북한군은 특정 지역, 특정 전투에 병력을 집중적으로 투입해 유엔군의 몇 배에 달하는 수적 우세를 달성했던 것이다.
각종 첨단 무기의 비중이 커졌지만 현대전에서도 지상전의 경우 이런 수적 우세를 무시할 수 없다. 이라크전과 아프가니스탄전이 이를 잘 보여주고 있다. 산이 많은 한반도는 더욱 그렇다. 국방부가 발표한 국방백서에 따르면, 지난해 말 기준으로 우리 육군은 42만명, 북한 지상군은 110만명이다. 북한군이 2.6배 수적 우위에 있는 셈이다. 우리 육군은 인구 절벽에 따른 병력 감축 계획으로 내년까지 36만5000명으로 줄어든다. 북한군 상당수가 각종 건설 현장에 투입돼 실제 운용 병력이 70만~80만명으로 줄어든다 해도 2배가량의 우세는 유지하게 되는 것이다. 한 예비역 장성은 “유사시 북한은 공격자 입장에서 주도권을 갖기 때문에 특정 지역에선 한국군보다 5~10배의 병력 우세를 달성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문제는 인구 절벽에 따른 병력 감축 태풍이 내년에 끝나는 것이 아니라, 2030년대 말 이후엔 쓰나미급으로 몰려온다는 점이다. 전문가들은 병력 50만명(2022년 기준)을 유지할 경우 2026년엔 2만9000여 명, 2028년엔 1만2000여 명가량의 병역 자원이 부족할 것으로 보고 있다. 이 같은 부족 사태는 2030년대 중반 이후 심화해 2037년엔 부족한 병역 자원이 6만명 이상에 달하게 된다. 이에 따라 2030~2040년대엔 총병력을 35~45만명으로 줄일 수밖에 없다는 평가가 나오고 있다. 게다가 현재 18개월(육군·해병대 기준)인 현역 복무 기간을 일부 정치인의 주장대로 12개월 이하로 줄인다면 총병력 규모는 더 줄어들 수밖에 없다.
이에 대한 우려가 커지고 있지만 문재인 정부의 국방 개혁 청사진을 담은 ‘국방 개혁 2.0′은 2030년까지 50만명의 총병력을 유지하는 것으로 돼있다. 국방부 산하 싱크탱크인 국방연구원이 2040년쯤까지 병력 규모 재조정 계획 등이 포함된 청사진을 짜고 있지만, 내년 5월 임기 만료인 현 정부에서 얼마나 정책에 반영될지는 미지수다.
마침 내년 3월 대선을 앞두고 여야 후보 캠프에서 인구 절벽 등에 대비한 대책을 공약으로 내걸고 있다. 병역 제도와 관련해 여당 후보는 ‘선택적 모병제’를 주장하고 있지만 야당 후보는 모병제는 시기상조라며 ‘징병·모병 혼합제’를 제시하고 있다. 병력 부족을 첨단 무기 등으로 보완하는 기술 집약형 군대로 탈바꿈하기 위해 인공지능(AI), 드론, 로봇 등 4차 산업혁명 기술을 적극 도입하자는 데에는 양측이 한목소리를 낸다. 이 밖에 부사관 등 간부 비율 확대, 민간 인력·시설 등 아웃소싱 강화, 동원 전력(예비군) 대폭 강화, 여성 인력 확대 등도 병력 부족 쓰나미에 대한 대책으로 제시되고 있다.
대부분 한국군이 가야 할 방향인 게 맞고 일리가 있는 제안들이다. 하지만 세상에 공짜는 없고, 이 제안들 역시 실현하려면 많은 노력과 투자가 필요하다. 우선 최근 대선 화두(話頭) 중 하나인 모병제는 이미 많은 전문가가 지적했듯이 우수한 자원을 확보할 수 있는 조건부터 만들어줘야 한다. 세계 최강으로 평가받는 미군도 1973년 모병제로 전환한 뒤 한동안 모병 인력 감소와 질적 저하라는 난관에 봉착했다. 1979년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 등을 계기로 국방 예산을 대폭 증액하고 모병 대상자들에게 장학금을 파격적으로 지원하는 ‘제대군인 원호법’ 등을 시행하면서 이런 문제는 해결됐다.
예비군 강화도 병역 자원 부족의 해결책으로 ‘약방의 감초’처럼 제시되고 있다. 그러나 관련 예산이 국방 예산의 0.4%에 불과한 현실에선 장밋빛 청사진일 뿐이다. 동원 전력을 책임졌던 한 예비역 장성이 “대한민국 예비군은 계륵인가”라며 직격탄을 날릴 정도다. 더구나 현재 275만명인 예비군도 병력 감축에 따라 2040년엔 100만명대 초반 수준으로 크게 줄어들어 기존 계획을 전면 재검토해야 할 상황이다. 인공지능 등 4차 산업혁명 기술이 이 모든 문제를 해결해줄 ‘요술봉’처럼 제시되지만 역시 넘어야 할 산이 아직 많이 남아있다. 드론·로봇의 군사적 활용을 깊이 연구했던 한 전문가는 “자율 무기 체계로 필요한 인공지능은 아직 기초조차 제대로 세워지지 않은 상태여서 상당 기간은 인력으로 해결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에 대해 방종관 전 육군본부 기획관리참모부장(예비역 소장)은 “군 스스로 위기의식을 갖고 작전 수행 개념, 무기 체계, 부대 구조, 인재 육성 분야 등에서 광범위한 혁신을 먼저 추진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차기 정부에서 병력 부족 쓰나미에 대한 대책을 제대로 세우지 않으면 한국군은 재앙적인 상황에 직면할 가능성이 크다. 차기 정부는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는 절박감을 갖고 지금까지 제시된 각종 대책과 그 현실적인 한계, 실행 계획 등에 대한 고차방정식 해법에 도전해야 할 것이다.
조선일보 유용원 군사전문기자
12.15 북한 도발엔 응징 의지 확실히 보여줘야
북한의 오판 막으려면

최윤희 전 합참의장 예비역 해군 대장
버르장머리는 버릇의 속된 표현이다. 어린아이의 못된 버르장머리는 평생 그 부모를 힘들게 한다. 국가나 집단 간에도 마찬가지이다. 6·25 전쟁 이후 우리는 북한의 버르장머리를 잘못 가르쳤다. 북한은 그 버르장머리로 수많은 도발을 자행하고 핵을 개발했다. 뒤늦게 북한의 핵 위협을 해결해 보려고 안간힘을 쓰나 갈수록 커지고 있다. 그렇다면 북한은 어떻게 그처럼 못된 버르장머리를 가지게 되었을까? 그 과정의 이해를 통해 답을 찾아보고자 한다.
한·미 동맹은 대한민국의 기적을 이룬 주춧돌이다. 한·미 동맹은 북한의 위협으로부터 우리 안보를 튼튼히 지켜 주었다. 이를 바탕으로 1인당 국민소득 3만2800달러의 세계 10위 경제 대국을 이루었고 세계 8위의 군사 강국이 되었다. 사회적으로 민주화는 물론 문화 강국을 이루는 데에도 큰 역할을 했다. 한마디로 한·미 동맹은 국가의 부(富)를 가져온 자유와 평화의 근간이었다. 후손들에게 절대 그 고마움을 잊지 않도록 해야 한다.
우리의 미온적 대응에 북한은 ‘도발해도 괜찮다’고 오판
한국은 보복 능력 갖췄으나 실행하려는 의지는 부족
핵 도발 대응 의사결정과 작전·훈련 때 한국이 주도하고
북한의 핵 위협에 대비한 독자적인 대응 능력 확보해야
독자적인 단호한 대응은 어려워
한·미 상호방위조약은 우리의 필요 때문에 만들어졌다. 그래서 그에 따른 한계도 있었다. 두 나라의 국가 이익이 상충할 경우 더욱 그랬다. 미국은 자국의 국가 이익을 위해 국제질서를 관리한다. 미국의 입장에서 한반도에서의 긴장 조성은 결코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동안 북한의 도발에 대한 대응은 추가적인 긴장을 촉발하지 않는 한도 내에서 이루어졌다. 전·평시 작전통제권이 없었던 우리는 유엔사령부의 작전지침을 따라야 했고 정전 시 교전규칙(ROE)을 적용했다.
이는 유엔헌장 51조의 자위권을 인용한 것으로 도발 시 자위권을 행사하되 필요성(necessity), 비례성(Proportionality), 완화 조치(De-Escalation)를 준수하라는 것이다. 이는 다분히 현상 유지 정책으로 우리가 원하는 단호한 조치는 이루어질 수 없었다. 조금이라도 과도한 대응을 하면 여지없이 정전관리지침 위반에 대한 조사가 이루어졌다.
1978년 연합사가 창설되었으나 평시 작전에는 큰 변화가 없었다. 유엔군사령관 임무를 겸직하는 연합사령관은 정전 관리 임무에 더 큰 비중을 두었다. 이어 94년 평시 작전통제권이 한국 합참의장에게 이양되고서도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연합사령관에게 평시 정전 관리를 위한 핵심적인 권한이 주어져 있기 때문이다. 연합위기관리 절차상 북한의 도발에 대한 대응은 국가통수기구(대통령)를 망라한 양국 의사결정 체계의 합의를 거쳐야 한다. 그래서 우리가 독자적으로 단호한 대응을 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렵다. 자위권 차원의 초기 대응은 가능하나 그 이상의 보복은 허용되지 않는다.
북한이 NLL 침범해도 대응에 한계
북한은 6·25 전쟁 이후 수많은 도발을 자행했다. 사소한 공작원 침투 외에도 대통령 암살을 시도한 1·21사태, KAL기 폭파 사건, 판문점 도끼 만행, 아웅산 폭탄 테러 등 생각만 해도 끔찍한 대형 도발을 서슴지 않았다. 우리는 주권 국가로서 어떤 형태로든 상응한 조치를 해야 했다. 그러나 수사적인 규탄 성명 이외에 아무런 조치도 못 했다. 북한은 날이 갈수록 도발의 수위를 높여가며 정치적 목표를 달성했다. 급기야 많은 제재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핵을 개발했고 우리는 전전긍긍하고 있다. 우리의 미온적 대응이 북한으로 하여금 어떤 도발도 가능하다는 오판을 하게 만든 것이다. 북한의 오만방자한 버르장머리가 만들어진 과정이다.
억지력(Deterrence Capability)은 보복 능력과 이를 시행하겠다는 의지로 이루어진다. 세계 1위와 8위의 군사력으로 이루어진 한·미 연합방위 역량은 그야말로 가공할 수준이다. 그러나 이를 활용해 북한의 도발을 막을 의지는 없었다. 필자는 고속정 정장(대위급) 시 연평도 근해에서의 경험을 아직도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칠흑 같은 밤 NLL(서해 북방한계선)을 침범한 10여 척의 북한 경비정에 에워싸여 피를 말리는 시간을 보내야 했다. 그런 순간에도 상부의 지침은 공격 행위로 간주할 어떤 행동도 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이후 제2연평해전, 천안함 폭침, 연평도 포격 도발을 겪으며 많은 전우를 잃었다. 그러나 마찬가지로 어떤 보복도 할 수 없었다. 당시 울분을 참지 못한 전우들의 절규가 귓전을 맴돈다.
필자는 합참의장으로 재직 시 북한의 도발에 대한 단호한 대응을 끊임없이 강조했다. 북한의 잘못된 버르장머리에 최소 열 배 이상의 단호한 대응을 주문했다. 이로 인해 당시 연합사령관 커티스 스패캐러티 장군과 많은 갈등을 겪어야 했다. 한·미 동맹을 깨자는 것이냐며 강력한 항의도 받았다. 필자는 북한을 절대 이성적·합리적 집단으로 봐서는 안 된다고 집요하게 설득했다. 이후 초기 대응부터 상호 정보를 공유하며 단호하게 대응했다. 그 결과 당시 북한은 쉽사리 도발해 오지 못했다.
북핵, 어떻게든 사용 못하게 억제해야
북한의 핵은 이것저것 재고 누군가의 도움을 기다리며 여유롭게 대응할 위협이 아니다. 여차하면 한순간에 나라와 국민을 괴멸시킬 수 있는 치명적인 위협이다. 어떻게든 사용하지 못하도록 억제해야 한다. 도발 시에는 너 죽고 나 죽자는 사생 결단의 각오로 대응해야 한다. 고도의 전략과 준비가 필요하다. 북한의 핵 위협을 당면한 위협으로 상정해 몇 가지 제언한다.
첫째, 미래 연합방위체계에서는 어떤 형태로든 우리가 주도적인 역할을 해야 한다. 핵 도발에 대비한 의사결정은 물론 작전, 훈련 계획도 우리가 주도해야 한다. 현재의 의사결정 체계로는 적시 대응이 곤란하다. 지난해 7월 미 육군전략연구소(SSI)의 ‘중국의 패권국화를 막기 위한 미 육군 발전 계획’ 보고서는 그 당위성을 입증하고 있다. 보고서는 제2의 한국전쟁에 대비한 동북아 중심의 미 작전 운용을 우려하며 한국이 더 큰 임무를 맡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향후 전작권 전환은 이를 염두에 두어야 하며 주도적인 역할을 하기 위한 철저한 사전 준비가 필요하다.
둘째, 북한의 핵 위협에 대비한 독자적인 대응 능력을 확보해야 한다. 여기에는 핵무장을 포함한다. 자체 핵무장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가 많으나 상황이 달라졌다. 미국의 핵 능력을 이용한 대책들(확장억제전략, 전술핵 재배치 등)이 많은 제약을 받기 때문이다. 미국은 중국의 패권국화를 견제하나 핵전쟁과 같은 최악의 상황은 원치 않는다. 한반도에서의 핵 사용이 여의치 않다는 말이다. 여기에 미국 본토까지를 위협하는 북한의 핵 공격 능력도 심각한 고려 요소다. 지난 10월 미국 다트머스대 제니퍼 린드와 대릴 프레스 부부 교수 등 미국 학계와 싱크탱크 등에서 한국의 독자적인 핵무장이 필요하다는 주장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최악의 상황을 막기 위해서는 우리의 핵 능력으로 북한의 도발을 억제하고 대응해야 한다.
북한 도발 계속되는 한 종전선언은 허황
셋째, 일본·호주 등 북한의 핵 위협에 노출된 주변 국가들과 다자적 대응태세를 구축해야 한다. 핵 공격을 재래식 무기체계로 억제하고 방어하기는 현실적으로 어렵다. 다만 그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대응 체계를 구축할 수 있으나 이 역시 막대한 재원이 필요하다. 따라서 주변 비핵국가들과 북핵 공동 대응 체계를 구축하는 것은 대단히 효율적이다. 이러한 다국적 대응 체계는 북한의 비핵화를 위한 국제적 활동에도 많은 시너지 효과를 낼 수 있을 것이다.
속담에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는 말이 있다. 6·25 전쟁 이후 대한민국 정부는 북한의 잘못된 버르장머리를 지켜보기만 했다. 이제라도 늦지 않았다. 독자적인 핵 개발을 포함한 생존 전략으로 북한의 버르장머리를 고쳐야 한다. 무엇보다 북한이 도발할 시에는 처절하게 응징하겠다는 의지를 보여줘야 한다. 필자는 한·미 동맹의 업적과 중요성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굳건한 한·미 동맹은 여전히 우리의 튼튼한 울타리다. 더욱 가치 있는 동맹으로 발전시켜야 한다. 북한의 잘못된 버르장머리가 계속되는 한 종전선언과 평화협정은 허황한 말 잔치에 불과하다. 여하한 경우에도 국가 안보의 빗장을 풀어서는 안 된다.
중앙일보 최윤희 전 합참의장·예비역 해군 대장
12.20 뜬금없는 종전선언, 산에 가서 붕어 잡는 꼴
대통령의 불안한 안보관
켈로그-브리앙 조약이 있다. 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10년이 지나자 앞으로 일어날 전쟁을 막아보고자 1928년 8월 27일 프랭크 켈로그 미국 국무장관과 아리스티드 브리앙 프랑스 외교장관이 제창하고 15개국으로 시작하여 63개국까지 동참한 국제 조약이다. 이 조약에서 처음으로 전쟁이 불법으로 규정된다. 그러나 조약 체결 후 10년 만에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한다. 독일과 일본도 조약 가입국이었다. 평화를 지향했던 조약이 남긴 ‘평화적’ 결과로는 켈로그가 노벨 평화상을 받은 것 이외에는 없다. 이후의 어떤 전쟁도 막지 못했다.
1938년 9월 29일 맺어진 뮌헨협정이 있다. 독일 총통 히틀러, 영국 총리 체임벌린, 이탈리아 총리 무솔리니, 프랑스 총리 달라디에가 서명했다. 다음날 체임벌린은 영국으로 돌아와서 ‘우리 시대를 위한 평화’를 지켰다고 자화자찬에 빠졌다. 이 협정은 독일에 군사적 역량을 강화할 시간만 벌어주었을 뿐이다. 6개월 후 독일은 체코슬로바키아 병합을 시작으로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다. “우리는 완전하고 절대적으로 패배했다!” “이것은 끝이 아니다. 시작일 뿐이다!” 이 두 마디는 뮌헨협정 소식을 듣고 처칠이 한 절규다. 그러나 ‘우매한 대중(愚衆)’은 야유하면서 그를 전쟁광으로 매도했을 뿐이다.
평화협정이 평화 가져온다는 생각은 역사 모르는 순진한 환상
켈로그-브리앙조약 10년 후, 뮌헨협정 6개월 뒤 2차 대전 터져
‘언제라도 취소할 수 있는 선언’ 집착 이유는 뒷마음이 있기 때문
종전선언은 국익 아닌 북한에 맞춰지는 방향으로 이끌릴 우려 커
문 대통령, 안보 문제서 믿음 주지 못해
나랏일을 다루는 사람이 조약이나 협정으로 현실을 완전히 통제할 수 있다고 확신한다면, 그는 환상에 빠져 있거나, 심리적 기대와 객관적 사실을 구분하지 못하거나, 마음과 입을 따로 부리는 속임수에 능한 사람이다.
모르핀 같은 잠깐의 평화라면 몰라도, 그것을 장기간 지켜낸 평화협정이란 인류 역사에서 아직은 없다. 평화를 앞세운 나라는 대개 평화를 잃고 굴종을 얻었다. 역사책에서 배우고도 모른 척한다. 딴마음이 있기 때문이다.
문재인 대통령도 조약이나 협정의 허망함을 모르는 것 같지 않다. 종전선언을 주장하면서도 2018년 9월 25일 미국 폭스뉴스 인터뷰에서 “종전선언은 정치적 선언이기 때문에 언제라도 취소할 수 있다”고 말했다. 어떤 선언을 주장하는 국가의 수반이 언제라도 취소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을 듣기란 참 민망하다. 그런데도 최종건 외교부 제1차관은 지난달 15일 한미전략포럼에서 종전선언으로 “누구도 못 벗어날 틀”을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대통령과 외교차관 사이에는 말의 위치에 큰 간극이 있다. 이 간극 사이에 무언가 뒷마음이 있을 것이다. 그 뒷마음은, 어떻게든 당사국들을 종전선언에 동참시킨 뒤 종전선언으로 설령 부작용이 나오더라도 그 부작용을 지키겠다는 뜻으로 읽힌다.
나는 문 대통령이 주장하는 종전선언을 반대한다. 선언 자체가 대통령 본인이 말한 것처럼 ‘언제라도 취소할 수 있는 것’ 정도로 실효성이 없고, 종전선언으로 야기될 “누구도 못 벗어날 틀”이 대한민국의 안보에는 오히려 위험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문 대통령은 안보에 관한 문제에서는 줄곧 믿음을 주지 못해왔다.
국군의날에 가수 불러 쇼
종전선언은 안보 이슈이고 그 중심에는 북한 핵무기가 있다. 북핵을 대하는 문제에서 김대중-노무현-문재인은 같은 입장이다. 이들은 북한이 핵을 개발할 때부터 그것을 감추거나 도외시하면서 “북한은 핵을 개발할 의지나 능력이 없다”고 말해왔다. 노 전 대통령은 북핵 문제를 둘러싸고는 북측의 입장을 가지고 미국과 싸워왔고, 국제무대에서 북한 입장을 변호해 왔다. 이는 노 전 대통령 본인이 스스로 한 말이다. 북한 핵무기를 용인하거나 애써 눈감아버렸던 입장을 가졌던 대통령이 이제 와서 종전선언을 ‘비핵화 입구론’으로 사용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은 무등산에 가서 붕어를 잡아 오겠다고 하는 것만큼이나 전략적 일관성이 없다. 전략적 일관성이 없는 것을 우리는 환상이라고 한다.
문 대통령은 자신이 선언한 인사 5원칙을 표를 구하는 데만 쓰고, 당선 후에는 헌신짝처럼 버렸다. 취임사는 한 줄도 지켜지지 않았다. 임기 내내 거짓말과 ‘내로남불’이 넘쳤다. 정치는 말로 하는 것인데, 말이 신뢰를 잃었으니, 종전선언에 대한 말도 믿기 어렵게 되었다. 문 대통령의 말 습관으로 볼 때 종전선언은 그가 하는 말과 다른 각도를 내장하고 있을 것으로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이것이 그의 뒷마음일 것이다.
문 대통령은 안보에 관한 한 대한민국의 자존이나 이익을 지키는 것과는 다른 길을 갔다. 그런 사례는 일일이 다 거론할 수 없을 정도로 많다. 대한민국 역사상 처음으로 국군의날을 군사 퍼레이드도 없이 야밤에 가수들을 불러 쇼로 보냈다. 핵을 가진 북한의 눈치를 보거나 비위를 맞추기 위해서 그렇게 한 것이다. 군 통수권자임에도 불구하고, 임기 내내 민족 관념을 중심으로 삼느라, 대한민국을 위해 싸운 사람을 핍박하고, 오히려 대한민국을 적으로 삼고 싸운 자들을 높이느라 바빴다.
대한민국 안보 흔드는 종전선언
문 대통령의 안보관이 압축적으로 드러난 사건이 있다. 올해 6월 4일에 국가정보원 원훈석의 문구를 바꿨는데, 북한과 연계된 지하당 조직 통일혁명당 사건에 연루돼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무기징역 선고를 받고 복역하다가 20년 만에 전향서를 쓰고 특별 가석방된 신영복의 글씨체를 사용하였다. 이것이 국가정보원이나 국가 안보에 주는 메시지를 상상해볼 때 아연실색하지 않을 수 없다. 군 통수권자로서 안보의 최고 책임자인 문 대통령은 대한민국을 적으로 삼고 싸운 신영복을 존경하는 사상가라고 대내외로 공개적으로 말해왔을 뿐 아니라, 2018년 평창 동계올림픽 때는 김여정 등 북한 대표단과 함께 청와대 본관 벽에 걸어놓은 신영복의 작품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었다. 대통령이라는 위치를 고려할 때 이건 상식적이지 않은 기행이다.
천안함 사건에 대해서는 여전히 모호한 태도를 취하고, 최원일 함장과 병사들은 거리를 헤매고 있다. 군 통수권자인 문 대통령의 안보관은 이적 여부를 따져봐야 할 정도다. 사정이 이러하니 문 대통령이 주장하는 종전선언도 대한민국을 이롭게 하는 선언이 아니라 북한의 뜻에 맞춰지는 방향으로 이끌릴 가능성이 더 크다.
어떤 제도도 그 제도를 움직이는 중추가 잘 마련되지 않고 실시되면 부작용이 훨씬 크다. 민주주의는 시민이 중심인 제도인데, 시민이 형성되지 않은 민주주의는 중우정치(衆愚政治)라는 부작용만 남긴다. 진영 갈등으로 날을 새는 우리의 민주주의는 이미 중우정치로 귀결되고 있다. 대통령의 안보관을 고려해서 본다면 종전선언도 부작용을 낳는 방향으로 전개될 가능성이 크다.
종전선언이 이뤄지면 가장 먼저 유엔군사령부의 해체 문제가 제기될 것이다. 한·미 동맹 해체는 더 강하게 요구될 것이며, 주한미군 철수를 주장하는 깃발이 거리를 메울 것이다. 국제적으로는 북한·중국·러시아가 이 세 가지 문제를 강하게 제기할 것이다. 이는 해가 동쪽에서 떴다가 서쪽으로 지는 일만큼이나 분명하다. 선언문에 이 세 가지는 건드려지지 않을 것이라고 확인하는 문구가 들어가든, 들어가지 않든 그렇게 된다. 게다가 대통령 본인이나 주위에서 권력을 형성하고 있는 사람들이 원래 한·미 동맹 해체와 주한미군 철수를 주장하던 사람들이었다.
종전선언이 종전 주는가
문 대통령은 ‘언제라도 취소할 수 있는 선언’에 왜 그렇게 집착하는가? 대통령 곁의 외교 책임자는 왜 종전선언을 ‘누구도 못 벗어날 틀’로 짜려고 하는가? 일치하지 않아 보이는 이 두 태도 사이의 간격에 진짜 뒷마음이 있다. 이 뒷마음이 가리키는 방향은 대한민국의 힘을 빼는 방향일 가능성도 있다. 대한민국의 힘을 뺀다는 이 부정적인 형상은 민족이라는 환상으로 분칠되어, 오히려 대중들에게는 긍정적인 형상으로 보이게끔 시도될 것이다. 이런 시도는 사실 해방 후부터 지금까지 매우 오랜 시간 지속하여 온 하나의 정치적 흐름이기도 하다.
갈라진 혀는 말이 좋다. 그래서 노자도 “믿음직스러운 말은 아름답지 않고, 아름다운 말은 미덥지 않다”고 하였다. 평화니 종전이니 하는 말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평화협정이 평화를 주고, 종전선언이 종전을 준다고 하는 지도자는 얼마나 단순한가. 또 얼마나 위험한가.
중앙일보 최진석 서강대 철학과 명예교수, 새말새몸짓 이사장
12.25 98세 노병의 무사 귀환 “한국서 성탄 선물 받았다”

▲6·25전쟁에 참전했던 콜롬비아 참전용사 알바로 리까우르떼 곤잘레스(98)씨./국가보훈처
“위대한 한국이 우리 가족에게 큰 성탄 선물을 줬습니다. 이렇게 훌륭한 한국이라는 나라를 위해 아버지가 참전한 것이 결코 헛되지 않았습니다.”
6·25전쟁에 참전했던 콜롬비아 참전용사 알바로 리카우르테 곤잘레스(98)씨 아들 마누엘씨는 성탄절을 하루 앞둔 24일 이렇게 말했다. 알바로씨는 지난달 유엔참전용사 국제추모의 날(11월 11일) 행사에 참석하기 위해 국가보훈처(처장 황기철) 초청으로 방한했다. 당일 콜롬비아 마르타 루시아 라미레스 부통령 등과 함께 부산 남구 유엔기념공원에서 열린 ‘턴 투워드 부산’ 행사에 참석하고 서울행 KTX에 탑승할 때까지만 해도 모든 일정은 순조로웠다.
열차가 대구를 지날 무렵, 알바로씨가 갑자기 호흡곤란을 호소하기 시작했다. 지병인 담낭 결석 증상이 급격히 악화된 것이다. 6·25 당시인 1952년 12월부터 1954년 5월까지 해군으로 참전했던 알바로씨는 여행을 만류하는 가족들에게 “이번 생애 마지막 방문”이라며 67년 만의 한국행을 고집했다고 한다. 그런데 고향에서 1만5000㎞ 떨어진 한국에서, 그것도 달리는 열차에서 응급 상황이 발생한 것이다.
병원 이송이 조금만 늦어져도 노병의 생명이 위태로운 상황. 보훈처 관계자들은 신속하게 움직였다. 가까운 대전보훈병원에 연락해 대전역에 의료진을 대기시켰다. 구급차를 타고 먼저 보훈병원 응급실에 도착, 처치를 한 뒤 다시 충남대병원으로 이송했다. 알바로씨는 충남대병원에서 40여 일간 의료진의 집중 치료를 받은 끝에 24일 퇴원할 수 있었다.

▲이남우 국가보훈처 차장이 24일 오전 대전 충남대병원을 방문, 콜롬비아로 귀국하는 참전용사 알바로 리까우르떼 곤잘레스(98) 일행을 환송하고 있다./국가보훈처
알바로씨 가족은 한국의 의료 수준이 높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장기간 병원비도 걱정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보훈처는 충남대병원과 협조해 알바로씨 치료비를 전액 지원했다. 40여 일간의 아들 체재비 역시 마찬가지였다. 콜롬비아까지의 장거리 비행으로 기내 응급 상황이 발생할 것에 대비하기 위해 대전보훈병원 간호사 2명과 보훈처 직원 1명을 현지까지 동행시켰다.
알바로씨는 평소 가족들에게 “내 인생에서 6·25전쟁은 정말 중요한 시기였다”며 “내가 한국이라는 나라에 유업을 남겼고, 한국이 위대한 나라가 된 것을 보람차게 생각한다”고 입버릇처럼 말했다고 한다. 아버지의 갑작스러운 상태 악화로 만일의 사태까지 대비했던 아들 마누엘씨는 “아버지는 코로나 대유행 상황에서도 한국 방문을 그토록 원하셨다”며 “아버지 치료 과정에서 우리 가족은 한국을 집처럼 느꼈고 한국인과 형제애를 느꼈다”고 했다. 그는 “한국이라는 나라가 전쟁 후 얼마나 발전했는지 보훈처가 보여줬다”며 “아버지가 한국에서 희생한 것이 가치 있었다”고 했다.
24일 오전 인천국제공항에서 이륙한 알바로씨 일행이 콜롬비아에 도착한 뒤엔 현지 한국 대사관이 맞이할 예정이다. 이후 콜롬비아 보고타 중앙군병원에 입원해 경과를 지켜볼 예정이라고 보훈처는 밝혔다. 알바로씨의 귀국길엔 당초 황기철 보훈처장이 직접 나와 환송할 예정이었지만 코로나 밀접 접촉으로 격리돼 이남우 차장이 대신했다.
조선일보 원선우 기자
12.25 "韓 군사력, 많이 뒤처졌다"…美 돌아간 에이브럼스의 혹평, 왜
지난 7월 임무를 마치고 미국으로 돌아간 로버트 에이브럼스(사진) 전 주한미군 사령관이 한국군의 역량이 뒤처져 있다고 혹평하며 전시작전통제권 전환에 대한 부정적인 견해를 밝혔다. 또 한미가 최신화에 합의한 연합 작전계획에 중국에 대한 대응방안도 담겨야 한다고 주장했다.
에이브럼스 전 사령관은 25일 미국의소리(VOA) 방송 '워싱턴 톡'에 출연해 전작권 전환을 위한 요건을 묻는 질문에 "한국이 전략 타격능력을 획득하고 한국형 통합 공중미사일방어 체계를 개발해 배치해야 한다"며 "이것은 솔직히 많이 뒤쳐져 있다"고 답했다. 그는 "저는 2019년 이전까지 (전작권 전환에) 큰 진전이 없는 것으로 평가했다. 실제로 저는 여러 차례 밝혔다"며 "2019년 동맹은 이전 3년을 합친 것보다도 더 많은 진전을 이뤘다. 핵심 요소는 중요한 군사적 역량을 습득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에이브럼스 전 사령관은 또 작전계획(작계) 최신화를 위한 새 전략기획지침(SPG) 승인과 관련해 북한의 위협과 함께 중국의 부상을 지적했다. 그는 "중국 공산당의 통제와 지휘를 받는 인민해방군이 있다. 2010년 이후 한반도와 그 주변에서 중국이 그들의 존재감을 크게 늘린 것은 비밀이 아니다"라며 "지난 3년 동안 중국이 한국 방공식별구역을 침범한 사례가 300% 늘었고, 북방한계선(NLL)을 따라 불법조업을 하는 중국 어선들의 증가도 목격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어 "이 모든 것은 작전계획에서 다뤄야 하는 것"이라며 "현재의 전략계획지침에는 없는 내용"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한국 일각에서 제기되는 내년 3월 한미연합군사훈련 연기 주장에 대해서는 "저는 우리가 축소했던 연합훈련의 일부를 재개할지 여부를 놓고 동맹이 진지하게 논의할 시점이 됐다고 생각한다"고 반대 의견을 내놨다.
에이브럼스 전 사령관은 유엔군 사령부가 남북관계 개선을 막는다는 비판에 대해서는 "저는 유엔사가 남북관계를 방해하고 있다고 말하는 사람들에게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말한다"며 "유엔사는 유엔 안보리 결의를 집행할 권한이나 책임이 없다. 유엔사가 준수해야 할 유일한 책임은 1950년 한국전쟁과 관련된 유엔 결의밖에 없다. 유엔사는 제재를 집행하지 않는다"고 반박했다.
그는 한국 정부의 종전 선언 추진에 대해서도 "저의 의문은 종전 선언을 하면서 무엇을 얻으려는 것인지가 명확하지 않다는 점"이라며 "종전 선언을 성급히 할 경우 전쟁이 끝났으니 1950년 여름 통과된 유엔 안보리 결의들을 다시 살펴봐야 한다는 주장이 나올 가능성이 생긴다. 그러고 나면 미끄러운 비탈길이 될 것"이라고 우려를 드러냈다.
김다영 기자 kim.dayoung1@joongang.co.kr
12월 28일 동맹은 ‘文정권 국방의지’ 의심한다

이용준 前 외교부 차관보 북핵대사
공화정 시대의 로마에는 직업군인이 없었고, 매년 추첨으로 로마 시내 행정구역 중 2개를 선정해 그 지역 청장년 남자 전원을 군인으로 징집했다. 그들은 1년 복무 후 모두 생업으로 돌아갔고, 원로원이 선출하는 임기 1년의 집정관 2명이 번갈아 맡았던 총사령관도 함께 교체됐다. 전시에도 원칙은 그대로여서 매년 신임 총사령관과 신병들로 구성된 새 군단이 편성돼 전쟁을 이어갔다.
로마군의 그런 취약성에도 불구하고 로마 군대는 거의 무적이었다. 주로 용병으로 병력을 충원했던 타국들과 달리 시민병 제도를 택했던 로마는 자기 나라를 스스로 지킨다는 병사들의 의지와 자부심이 강했고, 오늘날의 총리에 해당하는 집정관들은 자신의 정치적 미래를 걸고 최전선에서 군단을 직접 지휘하며 생사고락을 함께했기 때문이다.
그런 로마가 쇠퇴기에 접어들자, 방대한 인구에도 불구하고 로마인들의 안보 불감증과 징집 회피로 제국 방어에 필요한 병력을 채우기 어려웠다. 그래서 로마의 주적(主敵)이던 게르만족 용병을 채용하기 시작했고 차츰 장교까지 충원하더니, 급기야는 게르만 용병 출신 오도아케르가 로마군 총사령관에 올랐다. 그에 의해 서로마제국이 서기 476년에 멸망한 것은 국방 의지를 상실한 국가가 맞은 당연한 귀결이었다.
국가가 주권과 영토를 군사적으로 방어하기 위해서는 3요소가 긴요하다. 첫째는 나라를 지키려는 국방 의지, 둘째는 정부와 군의 전쟁 지휘 능력, 셋째는 효과적인 무력 수단, 즉 병력과 무기다. 그중 가장 중요한 것은 국방 의지와 전쟁 지휘 능력이다. 세 번째 요소도 중요하긴 하나, 앞의 두 요소가 부실하면 쓸모없는 장식품이자 값비싼 장난감일 뿐이다. 거대한 병력과 화려한 무기로 치장된 군대가 강인한 의지와 전략으로 무장된 소규모 군대에 참패한 사례는 알렉산더 대왕 이래 차고 넘친다.
최근 수 개월 새 한국의 국방 의지와 전쟁 지휘 능력에 대한 쓴소리가 버웰 벨, 커티스 스캐퍼로티, 빈센트 브룩스, 로버트 에이브럼스 등 전임 주한미군 사령관들로부터 쏟아지고 있다. 그들의 고언은 △북한 핵에 대한 한국 정부의 무관심 △한반도 안보 현실과 동떨어진 뜬금없는 종전선언 집착 △한미 연합훈련의 장기 부재에 따른 연합작전 능력과 한국군의 지휘통제 능력 퇴보 △전작권을 이양받기에는 역량이 많이 뒤처져 있는 한국군 지휘부 △남북 군사합의 등 대북 관계 개선의 정치적 도구로 전락한 한국의 군사적 대비태세 △취약한 미사일 방어망 △주한미군 훈련시설 결여 등 여러 분야에 걸쳐 있다. 그 목소리들을 관통하는 공통 요소는, 한국 정부와 군의 국방 의지와 전쟁 지휘 능력에 대한 심각한 의구심으로 집약된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지난 8월 아프가니스탄 철군을 선언하면서, 스스로 싸울 의지가 없는 나라를 위해 미군을 희생시키지 않겠다는 입장을 천명했다. 북핵과 한반도 방어 책임을 미국에 떠넘긴 채 주적인 북한과 중국의 환심을 사는 데만 혈안인 문재인 정권을 보면, 현재의 한국도 바이든 대통령이 말하는 “스스로 싸울 의지가 없는 나라”에 속하리란 자괴감을 금할 수 없다. 차기 대선 후보들이라도 선거판의 이전투구에서 벗어나 국가 안보 문제에 한 번쯤 진지한 관심을 기울여 주기 바란다.
문화일보
12월 29일 전작권 역량부터 갖춰라

김석 정치부 차장
한국과 미국 국방부는 최근 전시 작전통제권 문제를 놓고 첨예한 이견을 드러내고 있다. 지난 2일 제53차 한미안보협의회의(SCM) 공동성명에는 전작권 전환을 위한 한·미 군 당국의 완전운용능력(FOC) 평가 시기가 2022년으로 적시됐다. 이후 구체적 평가 시기를 놓고 서욱 국방부 장관은 12일 KBS에서 “로이드 오스틴 장관이 군사 당국에 FOC 연습을 내년 봄에 할 수는 없는지 검토를 지시했다”고 밝혔다. 하지만 존 커비 미 국방부 대변인은 13일 브리핑에서 “양측이 FOC 평가를 내년 여름에 한 뒤 가을에 재평가하기로 합의했다”고 말했고, 다음 날에는 “여름을 언급했는데 부정확했다. 가을이다”라고 시기를 더욱 늦췄다. 문재인 정부 재임 중에는 전작권 논의를 더 이상 하지 않겠다는 의미다.
이런 배경에는 한국군의 전작권 능력에 대한 미국 측 의구심이 강하게 깔려 있다. 로버트 에이브럼스 전 주한미군사령관 겸 한미연합사령관은 지난 25일 미국의소리(VOA) 인터뷰에서 전작권 전환 조건 중 하나로 한국이 전략 타격 능력을 획득하고 한국형 방어체계를 개발·배치해야 한다는 점을 언급하며 “이것은 솔직히 많이 뒤처져 있다”고 지적했다. 북한 핵·미사일을 독자적으로 막아낼 능력이 없는 한국군이 전작권을 갖기는 어렵다는 의사를 드러낸 것이다. 에이브럼스 전 사령관은 또 한·미가 합의한 ‘조건에 기초한 전작권 전환’과 달리 “손쉬운 방법을 원하거나, 합의 기준을 낮추거나, 합의 기준에 부합하는 책임을 묻는 일에 반대하는 이들이 있다”고 지적했다. 문 정부가 임기 내 전환이라는 공약에 매달려 전작권 전환을 무리하게 요구해왔음을 비판한 것이다.
한·미 합의에 따르면 전작권 전환을 위해서는 △한국군의 연합방위 주도 능력 △북한 핵·미사일 위협에 대한 대응 능력 △전작권 전환에 부합하는 한반도 및 역내 안보환경 등 3가지 조건이 충족돼야 한다. 그러나 현재 문 정부의 행보를 보면 이런 조건을 충족시킬 길은 요원한 상태다. 한국군이 연합방위 전략을 이끌 능력을 갖추기 위해서는 한·미 연합훈련은 필수다. 하지만 문 정부는 북한 눈치를 보느라 한·미 연합훈련을 축소하거나 건너뛸 핑곗거리를 만드는 데 몰두해왔다. 여권 일각에서는 벌써부터 3월 예정된 한·미 연합훈련을 연기하자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는 실정이다. 북한 핵·미사일 대응을 위해 주한미국이 임시배치한 사드(THAAD·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는 중국 눈치를 보는 문 정부의 시간 끌기에 정식 배치가 되지 못하고 있다.
전작권 전환은 우리 땅에서 국가 존망과 국민 생명이 걸린 전쟁이 일어날 경우 우리가 전작권을 가져야 한다는 당위성에 근거를 두고 있다. 문 정부나 여권은 이런 당위성을 내세워 전작권의 임기 내 전환을 밀어붙이고 있다. 하지만 어떤 당위성도 전쟁에서는 승리해야만 한다는 당위성을 이겨낼 수는 없다. 북한과 중국의 눈치를 보느라 역량을 갖추는 데는 소홀히 하면서 국민 자존심만 자극하며 전작권 전환을 밀어붙이는 것은 국가 존망과 국민 생명을 위기에 빠뜨리는 행위에 불과하다.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의 말처럼 “전쟁에서는 승리를 대신할 수 있는 것이 없다”.
한국과 미국 국방부는 최근 전시 작전통제권 문제를 놓고 첨예한 이견을 드러내고 있다. 지난 2일 제53차 한미안보협의회의(SCM) 공동성명에는 전작권 전환을 위한 한·미 군 당국의 완전운용능력(FOC) 평가 시기가 2022년으로 적시됐다. 이후 구체적 평가 시기를 놓고 서욱 국방부 장관은 12일 KBS에서 “로이드 오스틴 장관이 군사 당국에 FOC 연습을 내년 봄에 할 수는 없는지 검토를 지시했다”고 밝혔다. 하지만 존 커비 미 국방부 대변인은 13일 브리핑에서 “양측이 FOC 평가를 내년 여름에 한 뒤 가을에 재평가하기로 합의했다”고 말했고, 다음 날에는 “여름을 언급했는데 부정확했다. 가을이다”라고 시기를 더욱 늦췄다. 문재인 정부 재임 중에는 전작권 논의를 더 이상 하지 않겠다는 의미다.
이런 배경에는 한국군의 전작권 능력에 대한 미국 측 의구심이 강하게 깔려 있다. 로버트 에이브럼스 전 주한미군사령관 겸 한미연합사령관은 지난 25일 미국의소리(VOA) 인터뷰에서 전작권 전환 조건 중 하나로 한국이 전략 타격 능력을 획득하고 한국형 방어체계를 개발·배치해야 한다는 점을 언급하며 “이것은 솔직히 많이 뒤처져 있다”고 지적했다. 북한 핵·미사일을 독자적으로 막아낼 능력이 없는 한국군이 전작권을 갖기는 어렵다는 의사를 드러낸 것이다. 에이브럼스 전 사령관은 또 한·미가 합의한 ‘조건에 기초한 전작권 전환’과 달리 “손쉬운 방법을 원하거나, 합의 기준을 낮추거나, 합의 기준에 부합하는 책임을 묻는 일에 반대하는 이들이 있다”고 지적했다. 문 정부가 임기 내 전환이라는 공약에 매달려 전작권 전환을 무리하게 요구해왔음을 비판한 것이다.
한·미 합의에 따르면 전작권 전환을 위해서는 △한국군의 연합방위 주도 능력 △북한 핵·미사일 위협에 대한 대응 능력 △전작권 전환에 부합하는 한반도 및 역내 안보환경 등 3가지 조건이 충족돼야 한다. 그러나 현재 문 정부의 행보를 보면 이런 조건을 충족시킬 길은 요원한 상태다. 한국군이 연합방위 전략을 이끌 능력을 갖추기 위해서는 한·미 연합훈련은 필수다. 하지만 문 정부는 북한 눈치를 보느라 한·미 연합훈련을 축소하거나 건너뛸 핑곗거리를 만드는 데 몰두해왔다. 여권 일각에서는 벌써부터 3월 예정된 한·미 연합훈련을 연기하자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는 실정이다. 북한 핵·미사일 대응을 위해 주한미국이 임시배치한 사드(THAAD·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는 중국 눈치를 보는 문 정부의 시간 끌기에 정식 배치가 되지 못하고 있다.
전작권 전환은 우리 땅에서 국가 존망과 국민 생명이 걸린 전쟁이 일어날 경우 우리가 전작권을 가져야 한다는 당위성에 근거를 두고 있다. 문 정부나 여권은 이런 당위성을 내세워 전작권의 임기 내 전환을 밀어붙이고 있다. 하지만 어떤 당위성도 전쟁에서는 승리해야만 한다는 당위성을 이겨낼 수는 없다. 북한과 중국의 눈치를 보느라 역량을 갖추는 데는 소홀히 하면서 국민 자존심만 자극하며 전작권 전환을 밀어붙이는 것은 국가 존망과 국민 생명을 위기에 빠뜨리는 행위에 불과하다.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의 말처럼 “전쟁에서는 승리를 대신할 수 있는 것이 없다”.◎
문화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