딴따라 이야기8/ 2021.03월 01일 ‘미나리’ 골든글로브 외국어영화상 수상 - 윤여정 이야기 - 장사익의 소리 - ‘보컬의 神’ 이승 - “난 보수 지향하면서 헤비메탈 듣는 개그맨” 이윤석
딴따라 이야기8/ 2021.
03월 01일 ‘미나리’ 골든글로브 외국어영화상 수상
▲화제작 ‘미나리’가 미국 골든글로브에서 최우수 외국어영화상을 받았다.
골든글로브를 주관하는 할리우드외신기자협회(HFPA)는 1일 오전 열린 제78회 골든글로브 시상식에서 외국어영화상 수상작으로 ‘미나리’를 선정했다. 지난해 봉준호 감독이 ‘기생충’으로 수상한 데 이은 쾌거다.
‘미나리’는 한국계 미국인인 정이삭 감독이 직접 쓰고 연출한 작품이다. 한국인 이민 가정이 낯선 미국땅에서 적응하는 이야기를 담았다. 브래드 피트가 이끄는 플랜B가 제작하고, A24가 투자배급을 맡은 엄연한 미국 영화이지만 대사의 50% 이상이 영어가 아닌 경우 외국어영화로 분류된다는 HFPA 규정에 따라 외국어영화상 부문에만 후보에 올라 상을 거머쥐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때문에 사회자나 시상자를 제외하고 후보자들은 라이브 동영상을 통해 진행된 시상식에서 정 감독은 영상을 통해 등장해 배우와 스태프, 가족들을 언급하며 감사의 말을 전했다.
이로써 ‘미나리’의 아카데미행에는 더욱 청신호가 켜지게 됐다. 오는 15일 아카데미 후보작 발표가 이뤄지는데 이번에는 ‘미나리’가 작품상, 감독상, 연기상 등 주요 부문에도 후보 지명될 것으로 예측되고 있다. 아카데미 시상식은 4월 25일이다.
김인구 기자 clark@munhwa.com
03-01 ‘미나리’ 윤여정, 골든글로브 딛고 오스카상 거머쥘까
▲영화 ‘미나리’ 스틸컷
영화 ‘미나리’가 골든글로브 트로피를 들어올렸다.
리 아이작 정 감독(한국명 정이삭·43)이 연출한 ‘미나리는 28일(현지시간) 미국 뉴욕 레인보우 룸과 LA 비벌리힐스 힐튼호텔에서 진행된 제78회 골든글로브 시상식에서 외국어영화상을 수상했다. 지난해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이 골든글로브에서 외국어영화상을 받은 데 이어 한국 배우가 출연하고, 한국어가 영화 대사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영화가 2년 연속 외국어영화상을 수상한 것. 이날 자신의 집에서 딸을 품에 안은 채 화상으로 모습을 드러낸 정 감독은 “영화를 만드는데 함께 한 ’미나리 패밀리‘에게 감사를 전하고 싶다. 구석에 숨어있는 내 아내와, 안고 있는 내 딸에게 감사하다. 내 딸이 바로 내가 이 영화를 만든 이유”라고 전했다. 그는 이어 “미나리는 스스로의 언어를 배워나가는 가족에 대한 이야기다. 그 언어는 우리 가슴 속의 언어다”라고 전했다.
▲영화 ‘미나리’ 포스터
올해 골든글로브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산 방지 차원에서 골든글로브 78년 역사상 최초로 행사 장소를 두 곳으로 나누고, 시상자만 현장에 참석하는 방식으로 진행됐다. 수상자들 전원은 집 또는 사무실에서 시상식에 참석했고, 수상 소감은 온라인으로 생중계됐다.
▲영화 ‘미나리’ 스틸컷
▲영화 ‘미나리’ 스틸컷
미국 아칸소의 시골마을에서 태어나고 자란 이민2세 정 감독은 미나리에 자신의 유년시절을 진솔하게 담아 미국 관객들의 공감을 이끌어냈다는 평가를 받았다. 영화는 ’아메리칸 드림‘을 품고 한국에서 미국으로 이민을 떠난 부부 ’제이컵‘(스티븐 연)과 ’모니카‘(한예리), 둘의 자녀 ’앤‘(노엘 조)과 ’데이비드‘(앨런 김), 그리고 타향살이로 고생을 하는 딸 모니카를 위해 한국에서 미국으로 건너온 할머니 ’순자‘(윤여정)의 이야기를 그렸다. 정 감독의 아버지 역인 제이컵과 어머니 모니카, 순자는 정 감독의 부모님과 할머니를 참고하지 않고 새롭게 창조한 인물이지만 성공의 꿈을 품고 미국으로 이민 온 가장, 그로 인해 삶의 많은 부분을 포기해야 하는 가족들, 미국에서 함께 고생한 할머니 등 이야기의 큰 줄기는 그의 개인적인 경험에서 기인했다.
영화가 골든글로브 외국어영화상을 수상하면서 4월 열리는 아카데미 시상식에서의 수상도 가능성이 높아졌다. 현재 외신에서는 골든글로브가 작품상을 비롯해 순자로 열연한 윤여정의 여우조연상, 스티븐 연의 남우주연상, 한예리의 여우주연상 후보 지명 가능성이 높다고 점치고 있다. 골든글로브는 아카데미와 함께 미국에서 가장 권위 있는 양대 시상식으로 평가받는다. 골든글로브의 후보가 아카데미 후보와 상당부분 겹치는데다, 골든글로브 수상이 아카데미 수상으로 이어진 경우도 많아 골든글로브를 ’미리 보는 아카데미‘라 칭하기도 한다.
▲영화 ‘미나리’ 스틸컷
윤여정이 골든글로브 외국어영화상의 기세를 몰아 아카데미에서 여우조연상 트로피를 품에 안을 수 있을지가 최대 관심사다. 현재까지 윤여정이 받은 여우조연상은 미국 4대 비평가협회상으로 불리는 전미비평가협회상, LA비평가협회상 여우조연상을 비롯해 총 26개. 골든글로브에서는 윤여정을 여우조연상 후보에 지명하지 않았지만 아카데미에서는 다른 결과를 기대해볼 수 있다는 전망이 우세하다. 윤여정이 아카데미 여우조연상 후보에 들 경우 한국 배우가 아카데미 배우상 후보에 드는 최초 사례가 된다. 송강호가 영화 기생충으로 LA비평가협회상, 피닉스 비평가협회상, 시카고 인디비평가협회상, 도리안어워즈 등 4개 시상식에서 남우조연상을 받았지만 아카데미 후보에는 들지 못했다.
▲영화 ‘미나리’ 포스터
앞서 골든글로브는 대사의 50% 이상이 영어인 영화만 작품상 후보에 지명한다는 기준에 따라 대사의 대부분이 한국어인 미나리를 작품상이 아닌 외국어영화상 후보로 분류해 시대착오적이고 인종차별적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윤여정을 여우조연상 후보에 넣지 않은 것을 두고도 비판의 중심에 섰다. 미 연예매체 엔터테인먼트 투나이트는 “올해 골든글로브 후보 선정에 있어 가장 어처구니없는 누락(omission)은 윤여정을 여우조연상 후보에 넣지 않은 것”이라며 “이는 오스카에서 정정될 것으로 확신한다”고 보도했다.
동아일보 김재희 기자
03-01 정이삭 감독 “제 딸이 ‘미나리’ 만든 큰 이유”…수상소감 내내 품안에
▲골든글로브 외국영화상 수상 당시의 정이삭 감독 모습. 판씨네마 제공 © 뉴스1
“여기 함께한 저의 딸이 제가 이 영화를 만든 큰 이유입니다.”
리 아이작 정 감독(한국명 정이삭·43)의 딸은 1일 정 감독이 골든글로브 수상 소감을 말하는 내내 그의 품에 폭 안겨 있었다. 재미교포 2세인 정 감독은 온라인 시상식 영상을 통해 결정적 코멘터리를 대사처럼 말했다.
“‘미나리’는 가족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그들만의 언어로 이야기하려고 노력하는 가족의 이야기 말입니다. 그리고 그 언어는 단지 미국의 언어나 그 어떤 외국어보다 깊은, 진심의 언어(Language of Heart)입니다. 저 스스로도 그 언어를 배우려고 노력하며 물려주려고 합니다. 서로가 이 사랑의 언어를 통해 말하는 법을 배우길 바랍니다. 특히 올해는요.”
미나리의 수상에 외신들은 외국어영화상이 아닌 작품상감이라고 평가했다. dpa 통신은 “‘미나리’는 외국어영화상 부문에 오른 유일한 미국영화였다”고 꼬집으며 “한국계 미국인을 중심에 둔 본질적으로 미국적인 이야기”라고 평가했다. 이어 “미나리는 강인함을 상징하는 한국의 전통 약초에서 제목을 따왔다”며 “(미국 이민자) 가족이 고난 앞에서 찾아낸 끈기와 신뢰에 대한 은유”라고 덧붙였다.
뉴욕타임스도 “미나리 출연진도 연기상 후보에 오를 자격이 있었지만 상을 받지 못했다”고 지적했다. CNN은 “미국은 인구의 20% 이상이 집에서 영어 이외의 언어를 사용한다”고 비판했다. 골든글로브를 주관하는 할리우드외신기자협회는 대사의 50% 이상이 영어가 아니면 외국어 영화로 분류한다는 규정을 들어 한국계 미국인인 정 감독이 연출하고 브래드 피트가 설립한 플랜B가 제작한 미나리를 외국어영화상 후보에 올려 비판을 받았다.
임희윤 기자
03.02 ‘미나리’가 미국 영화판 뒤집다
▲1일(현지 시각) 미국 골든글로브 시상식에서 가족 영화‘미나리’로 외국어영화상을 차지한 정이삭(뒷줄 왼쪽) 감독과 미나리 출연진. /게티이미지코리아
제78회 골든글로브 시상식은 1일(한국 시각) 미국 뉴욕과 LA 등을 다원 생중계하고 수상자들은 집에서 화상으로 참가하는 방식으로 열렸다. 아메리칸 드림을 향해 미국 아칸소로 이주한 한인 가족의 정착기를 그린 ‘미나리’는 외국어영화상 수상작으로 호명됐다. 미국 자본(메이드 인 USA)으로 만들었지만 한국어 대사가 80%에 이른다. 윤여정과 한예리, 스티븐 연이 주연했다.
미나리는 아무 데서나 잘 자라는 생명력, 적응력의 상징이다. 미국 이민 가정에서 태어난 정이삭 감독에게 이 영화는 ‘딸에게 남기고 싶은 단 하나의 자전적 이야기’였다. 중계 카메라는 집에 나란히 앉아 있는 부녀(父女)를 잡았다. 정 감독은 “내가 이 영화를 만든 이유”라는 수상 소감을 밝히며 딸을 힘껏 부둥켜안았다. 이주민이 세운 나라에서 보편적인 가족 이야기를 들려준 셈이다.
‘미나리’는 지난해 선댄스영화제 심사위원대상·관객상부터 최근 미국영화연구소(AFI) 올해의 영화상까지 무려 75관왕을 차지하며 달려왔다. 이날 골든글로브 수상으로 ‘기생충’처럼 4월 아카데미에서도 몇몇 트로피를 거머쥘 가능성이 한층 높아졌다. 국내에서는 내일(3일) 개봉한다.
병아리 감별사 아들, 칸의 신동, 골든글로브… “가족의 힘 보여줬다”
“내가 기도했어요(I prayed)!”
영화 ‘미나리’를 연출한 리 아이삭 정(정이삭) 감독의 일곱 살 난 딸이 아빠를 얼싸안으면서 “내가 기도했어요”라고 세 번이나 외쳤다. 1일(한국 시각) 미국에서 열린 골든글로브 시상식에서 ‘미나리’가 최우수 외국어 영화상 수상작으로 발표되는 순간이었다. 이날 주요 부문 수상자들은 시상식에 참석하는 대신 자택에서 온라인 영상으로 수상 소감을 전했다. LA에 살고 있는 정 감독은 안고 있는 딸을 바라보면서 “그녀야말로 내가 이 영화를 만든 이유”라고 소개했다. 정 감독의 딸이 아빠를 안으면서 외치는 이 영상은 전 세계 SNS에 공유되며 화제가 됐다.
▲"내가 이 영화 만든 이유는 딸" - 영화‘미나리’의 리 아이삭 정(정이삭) 감독이 1일(한국 시각) 골든글로브 시상식에서 외국어영화상을 수상한 뒤 일곱 살 난 딸을 끌어안고서 수상 소감을 말하고 있다. /AFP 연합뉴스
영상 수상 소감에서 그는 “‘미나리'는 가족에 대한 이야기이며 그 가족은 자신들만의 언어를 배우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면서 “그 언어는 영어나 다른 어떤 외국어보다도 깊다. 바로 마음의 언어(a language of the heart)이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의 수상 소감처럼 영화 ‘미나리’는 재미 교포 2세인 감독 자신의 자전적 경험이 투영된 작품이다. 1980년대 미국으로 건너간 한인 가족이 남부 아칸소의 시골 마을에 정착하기 위해 분투하는 과정을 담았다. 영화처럼 이민 1세대인 정 감독의 아버지 역시 주인공 제이컵(스티븐 연)처럼, 병아리의 성별을 구별하는 감별사로 19년간 일했다. 이 때문에 정 감독이 다섯 살 때 그의 가족도 콜로라도 덴버에서 아칸소로 이사했다. 한국 채소를 가꾸기 위해 손수 트랙터를 몰고 농장을 가꾸는 영화의 설정도 아버지의 모습에서 가져왔다. 그는 지난해 선댄스 영화제 직전에 부모에게 영화를 보여드렸다. 정 감독은 당시 미 언론 인터뷰에서 “부모님께서는 굉장히 감동하시면서도 동시에 ‘꿈에서도 영화가 나온다’며 두려워하셨다”고 말했다.
예일대에서 생물학을 전공한 그는 당초 의사가 될 생각이었다. 하지만 대학 시절 왕자웨이(王家衛), 구로사와 아키라, 테런스 맬릭의 예술 영화에 빠져서 영화감독이 되기로 결심했다. 대학 졸업 직후 부모님과 함께 놀러 간 디즈니월드에서 그 사실을 용기 내어 말씀드렸다. 부모님의 만류에도 그는 수술용 메스 대신에 카메라를 잡았다. 그 뒤 단돈 20달러로 단편 영화와 실험 영화들을 찍기 시작했다.
리 아이삭 정(한국명 정이삭) 감독은
2006년에는 아내 발레리를 따라서 내전과 종족 학살의 상처가 아물지 않은 아프리카 르완다로 건너갔다. 결혼할 때 한 약속이었다. 예일대 재학 시절에 만난 아내는 르완다의 기독교 선교 단체에서 예술 치료사로 활동했다. 정 감독은 현지 학생 15명에게 영화 촬영을 가르쳤다. 르완다에서 3만달러(약 3300만원)의 저예산으로 11일 만에 비전문 배우들과 함께 장편 데뷔작 ‘문유랑가보’를 촬영했다. 시나리오도, 촬영도, 편집도, 연출도 혼자 떠맡아야 했던 사실상 1인 영화. 하지만 단돈 3만달러의 이 영화는 2007년 칸 영화제 ‘주목할 만한 시선’ 부문에 선정되며 정이삭 감독의 이름을 세계에 알렸다. 이번 ‘미나리’ 역시 순제작비 200만달러(약 22억원)의 저예산으로 촬영했다. 최근 한국 상업 영화의 평균 순제작비(76.5억원·2019년 영진위 자료)에도 크게 못 미친다. 배우 윤여정이 “200억원으로 잘못 알아듣고 출연했다”고 푸념했을 정도다.
정 감독은 데뷔작 이후에도 장편 극영화와 다큐멘터리 3편을 연출했다. 하지만 언제나 그의 영화 인생이 탄탄대로만은 아니었다. 그는 최근 뉴욕타임스 인터뷰에서 ‘미나리’를 만들기 전에 ‘감독을 그만둘 생각도 했다’고 고백했다. 정 감독은 “마흔이 되면서 현실적인 일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그가 마지막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모든 걸 대본에 쏟아 넣은 작품”이 ‘미나리’였다. 정 감독은 얼마 전 봉준호 감독과의 영상 대담에서도 이렇게 고백했다. “내 딸이 이제 일곱 살이다. 영화에서 아버지가 농장을 가꾸면서 자신의 꿈을 추구하는 것처럼, 나 역시 수년 동안 무책임하게 영화라는 꿈만 바라보고 산 것 같았다. 내 딸을 통해서 부모님 마음을 조금은 이해하게 됐다.” 그에게 ‘미나리’는 영화의 꿈을 잃지 않도록 해준 동아줄이자, 세대를 뛰어넘어 가족을 든든하게 묶어준 끈이었던 셈이다.
03.02 인종차별 없이 다룬 이민자 이야기… 그 신선함에 반해
[’미나리' 골든글로브 수상] 영화제 75관왕, 미나리의 매력
영화 ‘미나리’는 ‘바퀴 달린 집(이동식 주택)’에서 출발하는 이야기다. 아빠 제이콥(스티븐 연)은 농장을 일굴 꿈에 부풀어 있고 엄마 모니카(한예리)는 낯설고 불안하다. 부부는 병아리 감별사로 일하고 남편은 틈틈이 우물을 파고 밭을 일구고 농작물을 심는다. 할머니 순자(윤여정)가 고춧가루와 멸치, 한약과 미나리씨를 싸 들고 도착하자 스크린에 활기가 돈다.
▲영화 '미나리' /판 시네마
‘미나리’의 매력은 크게 세 가지다. 먼저 윤여정과 스티븐 연, 한예리와 아역 배우들까지 ‘그곳에서 살듯이’ 연기했다. 정이삭 감독은 새로운 인생에 동반되는 희망과 불안, 욕망과 혼돈을 관조하듯 담았다. 가족 이야기는 서정적이지만 추억이라는 함정에 빠져 질척거리기 일쑤다. 하지만 이 웰메이드 영화는 감상적이지 않다.
두 번째 매력은 생명력과 적응력이다. 제목이 말해주듯 미나리는 그런 식물이다. 순자가 가져온 미나리만 멀쩡히 뿌리를 내린다. 뱀을 보고 놀라는 손자에게 순자가 던진 대사 “그냥 둬. 보이는 게 안 보이는 것보다 나은 거야. 숨어 있는 게 더 위험한 거란다”는 이 영화를 지배하는 흙이자 물, 지혜처럼 반짝인다.
영화 ‘미나리’의 성과
보편성이 세 번째 매력이다. 뉴욕타임스는 “아칸소 토양에 한국의 뿌리를 내린 영화”라고 평했고, 워싱턴포스트는 “보편적이면서도 놀라운 이민자들에 관한 이야기”라고 했다. “아메리칸 드림을 수확했다”(AP통신)는 호평도 받았다. 이주민이 세운 나라 미국의 뿌리와 개척 정신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는 뜻이다. 이 영화에 인종차별이나 편 가르기 같은 갈등은 없다. 어쩌면 그래서 더 따뜻하게 다가온다. /
조선일보 박돈규 기자
04.05 4일 미국배우조합상 여우조연상 수상
'미나리' 윤여정 "배우들의 선택 영광이죠"
SAG 거머쥔 윤여정 "영어 별로죠?"…동료들 "퍼펙트" 엄지척

▲4일(현지 시간) 비대면 개최된 미국 배우조합(SAG)상 시상식에서 '미나리' 배우 윤여정이 한국 배우 최초 여우조연상에 불리자 놀란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사진 SAG 인스타그램]
“제가 서구에서 인정받았군요. 정말, 정말 영광이에요. 특히 배우 동료들이 저를 여우조연상에 뽑아줬다는 게요.”
영화 ‘미나리’의 배우 윤여정(74)이 한국배우 최초 미국배우조합(SAG)상 여우조연상을 차지했다. 4일 저녁(현지 시간) 코로나19로 인해 비대면 진행된 화상 시상식에서다. 지난해 ‘기생충’의 외국어영화 최초 대상격인 앙상블상(출연진 전원) 수상을 잇는 2년 연속 한국 최초 기록이다.
윤여정은 자신의 이름이 호명되자 눈이 휘둥그레지며 입을 딱 벌렸다. 미국에서 열리는 시상식을 한국시간 5일 오전 서울에서 지켜보던 터. 후보 중 자신의 얼굴이 클로즈업되자 두 뺨을 손으로 감싸며 “제 감정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매우 기쁘고 행복하다. 감사하다”고 영어로 소감을 밝혔다. 미국배우조합상은 배우들이 투표해서 뽑는 상인 만큼 더욱 각별하다면서다.
"내 영어 맞나" 윤여정에 콜맨 "예스! 퍼펙트!"
그가 “내 영어 실력이 별로냐”며 “내가 맞게 말하고 있냐. 모든 게 익숙하지 않다”고 머뭇대자, 화면을 통해 흐뭇하게 지켜보던 다른 후보들이 앞다퉈 격려했다. 일흔넷 동갑내기 미국 배우 글렌 클로즈(‘힐빌리의 노래’)는 양손 엄지를 치켜세우며, 영국 배우 올리비아 콜맨(‘더 파더’)은 양손 엄지와 검지로 동그라미를 만들며 “완벽하다!(Perfect)” 외쳤다. 재미교포 2세 정이삭 감독이 1980년대 자전적 가족 이민사를 그린 ‘미나리’에서 윤여정이 연기한 엉뚱한 외할머니 순자에게 다들 반한 걸까. 이날 여우조연상 경쟁자들은 윤여정을 내내 사랑스러운 눈빛으로 지켜봤다. 윤여정이 올리비아 콜맨, 글렌 클로즈, 마리아 바칼로바(‘보랏 속편’)의 이름을 한 명 한 명 부르며 “감사한다”고 했을 땐 모두 미소지으며 박수를 보냈다.
재미교포 2세 정이삭 감독이 1980년대 자전적 가족 이민사를 그린 ‘미나리’는 제작을 겸한 주연 스티븐 연의 남우주연상, 앙상블상 후보에도 올랐지만, 아쉽게 수상은 불발됐다.
배우조합상 유색인종 싹쓸이…'미나리' 오스카 차지할까
윤여정을 비롯해 이날 미국배우조합상 영화 부문은 유색인종 배우들이 트로피를 싹쓸이했다. 남우주연상은 지난해 암으로 세상을 떠난 ‘블랙팬서’ 배우 채드윅 보스만이 유작인 넷플릭스 음악영화 ‘마 레이니, 그녀가 블루스’로, 여우주연상도 이 영화의 비올라 데이비스가 받았다. 남우조연상은 흑표당 실화 영화 ‘유다와 블랙메시아’의 다니엘 칼루야가 수상하며, 여우조연상의 윤여정을 뺀 개인 부문을 모두 흑인 배우가 수상했다. 출연진 전원이 받는 앙상블상은 아론 소킨 감독의 넷플릭스 영화 ‘트라이얼 오브 더 시카고 7’ 주연인 흑인 배우 야히아 압둘 마틴 2세가 조셉 고든 레빗, 에디 레드메인, 마이클 키튼, 사샤 바론 코헨 등 백인 배우들과 나란히 받았다.
미국배우조합이 주최하는 이 상의 수상 결과는 아카데미 연기상까지 연결되는 경우가 많아 ‘미리 보는 오스카’로도 불린다. 이에 따라 최근 다양성에 힘써온 아카데미상 시상식이 올해 역대 가장 많은 유색인종 수상자를 배출할지 모른다는 해석도 나온다.

작품‧감독‧각본‧남우주연‧여우조연‧음악상까지 6개 부문 후보에 오른 ‘미나리’도 오는 25일(현지 시간) 비대면 개최될 제93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유력한 수상 후보로 꼽힌다. 영화가 처음 공개된 지난해 1월 선댄스영화제 심사위원대상‧관객상부터 올 2월 골든글로브 외국어영화상 등 지금껏 받은 영화상이 104개에 달한다. 이 중 윤여정의 여우조연상만 36개다. 그가 아카데미 여우조연상까지 거머쥘 경우 한국 배우 신기록을 세우게 된다.
미국배우조합(SAG)상 여우조연상 | ‘미나리’ 윤여정 영어 수상 소감 전문
“I don't know how to describe my feelings, I'm being recognized by Westerners. Oh, it is very, very honored. Especially by my actor fellow, choose me as a supporting actress. I don't know. Am I saying right? My English is not good? I’m very pleased and happy. And thanks to SAG-AFTRA. I’m sorry, everything is not familiar. Thank you so much. Thank you, Olivia, and Glenn Close, Maria [Bakalova], and everybody. Thank you.
(제 감정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제가 서구에서 인정받았군요. 정말, 정말 영광입니다. 특히 배우 동료들이 저를 여우조연상에 뽑아줬다는 게요. 몰라. 내가 맞게 말하고 있나요? 내 영어실력 별로죠? 정말 기쁘고 행복합니다. 그리고 SAG(배우조합) 덕분에. 죄송합니다, 모든 것이 익숙하지 않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올리비아, 글렌 클로즈, 마리아 바칼로바, 그리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감사합니다.)”
나원정 기자 na.wonjeong@joongang.co.kr
04.26 트로피 쥐고 브래드 피트 뼈 때렸다, 오스카 빵터진 윤여정 농담
1947년 아직 대한민국 정부가 출범하지도 않은 해방 정국에 태어났다. 한양대 재학시절인 1966년 연극배우와 TBC 공채 탤런트로 데뷔했다. 흑백TV에서 칼라TV로, 단관 극장이 멀티플렉스 영화관으로 바뀌는 격변의 반세기를 한국 대중 연기자로 살았다. 일흔 넘어 처음으로 재미교포 2세가 찍는 미국 독립영화에 “도와주는 마음으로” 출연했다. 제작비 200만 달러(약 22억3500만원)의 그 영화 ‘미나리(MINARI)’로 무게 8.5파운드(약 3.55㎏)의 황금빛 오스카 트로피를 쥐었다.
영화 '미나리'로 한국배우 첫 여우조연상
시상자이자 제작사 대표 브래드 피트에
"우리 영화 찍을 때 어디 있었냐" 농담도
배우 윤여정(74)이 제93회 아카데미 영화상 시상식에서 여우조연상을 수상했다. 102년 한국영화사상 첫 아카데미 연기상이다. 윤여정은 25일(현지시간) 미국영화예술과학아카데미(AMPAS) 주관으로 미국 LA의 유니언 스테이션에서 열린 시상식에서 15번째로 호명된 수상자가 됐다. 아시아 여배우의 이 부문 수상은 ‘사요나라’(1957)의 우메키 미요시 이후 두 번째다.

▲25일(현지시간) 미국영화예술과학아카데미(AMPAS) 주관으로 미국 LA의 유니언 스테이션에서 열린 제93회 아카데미 영화상 시상식에서 여우조연상 후보로 레드카펫에 선 '미나리'의 배우 윤여정. [AFP=연합뉴스]
“(아카데미 시상식은) 내게 텔레비전으로 보는 프로그램이었다. 여기 있다는 걸 믿을 수 없다. 나는 경쟁을 믿지 않는다. 내가 어떻게 글렌 클로스(‘힐빌리의 노래’)를 어떻게 이기겠느냐. 경쟁이란 있을 수 없다. 그냥 내가 운이 좀 더 좋았다. 미국 사회가 한국 배우를 환대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백발을 틀어올린 모습에 이집트계 디자이너 마마르할림의 짙은 네이비색 드레스를 입고 무대에 오른 윤여정은 약간 떨리는 목소리로 이같은 소감을 영어로 쏟아냈다. 그는 무대 오른쪽에 서 있던 시상자 브래드 피트를 향해선 “드디어 만났군요. 우리가 털사에서 영화 찍을 동안 어디 계셨나요?”하는 우스개로 좌중의 웃음을 자아내기도 했다. 브래드 피트는 ‘미나리’의 공동제작사인 플랜B의 대표다. 윤여정은 ’미나리’ 정이삭(리 아이작 정) 감독을 비롯한 출연진에게 감사를 전한 후 “내 첫 영화를 찍은 김기영 감독님이 살아계셨다면 기뻐했을 것”이란 말로 소감을 마무리했다.
앞서 미 배우조합(SAG)상과 영국 아카데미상(BAFTA)에서 여우조연상을 잇따라 수상했던 그는 이날 이변 없이 트로피를 쥐었다. 함께 경쟁한 마리아 바칼로바(‘보랏 속편영화’), 글렌 클로스, 아만다 사이프리드(‘맹크’), 올리비아 콜맨(‘더 파더’)은 그의 수상에 환한 미소로 박수를 보냈다

▲25일(현지시간) 미국 LA의 유니언 스테이션에서 열린 제93회 아카데미 영화상 시상식에서 여우조연상 후보로 레드카펫에 선 '미나리'의 배우 윤여정(왼쪽)과 같은 영화에 출연한 배우 한예리. [AFP=연합뉴스]
지난해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이 작품상 포함 4관왕을 휩쓸었지만 배우 개인의 연기상은 없었다. 전 세계 영화산업의 꽃인 아카데미에서 아시아 배우의 수상 자체가 손에 꼽을 정도다. 남녀 통틀어 아시아 배우가 아카데미 연기상을 탄 것은 1985년 ‘킬링필드’의 베트남계 미국인 행 앵고르가 남우조연상을 탄 후 36년 만이다. 남녀 주‧조연을 통틀어 비영어 대사로 연기한 배우 중에선 ‘두 여인’(1961)의 소피아 로렌(이탈리아어), ‘인생은 아름다워’(1998)의 로베르토 베니니(이탈리아어), ‘라비앙 로즈’의 마리옹 코티야르(프랑스어) 등에 이어 윤여정이 여섯 번째다. 1947년생인 그는 역대 여우조연상 수상자 중에 ‘인도로 가는 길’(1984)의 페기 애슈크로프트(당시 77세), ‘하비’(1950)의 조지핀 헐(당시 74세)에 이어 세 번째로 나이가 많다.
1980년대 한인 가족의 미국 정착기를 그린 ‘미나리’(감독 정이삭)는 여우조연상을 포함 총 6개 부문 후보에 올랐지만 앞서 발표된 감독상과 각본상에선 고배를 마셨다. 남우주연상 후보에 오른 스티븐 연은 이날 시각효과상의 시상자로 나서 1991년 ‘터미네이터’ 관람 기억을 회고하기도 했다. 시각효과상은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테넷’이 차지했다.
봉준호 감독은 이날 시상식장과 화상연결된 서울 메가박스 돌비시네마관에서 감독상을 발표했다. 통역 샤론 최와 함께 화면에 모습을 드러낸 그는 “후보에 오른 다섯 감독에게 ‘길에서 아이를 붙잡고 감독이란 무엇인가 20초 안에 설명한다면 뭐라고 할 건가’ 하는 질문을 던졌다”면서 차례로 다섯 답변을 소개하기도 했다. ‘미나리’의 정이삭 감독은 “영화는 삶에 대한 응답이어야 한다. 그 반대는 성립하지 않는다. 실제 삶에 스토리텔러는 뿌리를 내리고 있어야 한다”고 답했다. 봉 감독이 한국어로 인용한 이 같은 답변들은 영어 자막과 함께 실시간으로 세계 관객들을 만났다. 감독상은 ‘노매드랜드’의 중국 출신 클로이 자오 감독에게 돌아갔다. 여성 감독으론 두번째, 아시아 여성으로선 첫 수상이다.

▲올해 아카데미 연기상 수상이 유력시되는 후보들을 25일 AFP 통신이 한데 묶은 사진으로 소개했다. 왼쪽부터 남우조연상 다니엘 칼루야('유다 그리고 블랙 메시아'), 남우주연상 채드윅 보스만('마 레이니, 그녀가 블루스'), 여우조연상 윤여정('미나리'), 여우주연상 바이올라 데이비스('마 레이니, 그녀가 블루스'). [AFP=연합뉴스]
이날 남우조연상은 1960년대 흑인 인권운동의 이면을 그린 ‘유다 그리고 블랙 메시아’의 다니엘 칼루야가 수상했다. 시상식 후반부에 발표될 남우주연상은 지난해 사망한 채드윅 보스만(‘마 레이니, 그녀가 블루스’)의 사후 수상이 유력하다. 같은 영화에 출연한 바이올라 데이비스 역시 여우주연상 수상이 유력시 되고 있다. 이들 모두가 아프리카계 흑인. 예측대로 이들이 수상하면 윤여정과 함께 한 해 아카데미 연기상 전체를 비백인이 수상하는 진기록이 세워진다.
윤여정은 이날 행사 시작 2시간 전인 오후 3시쯤 행사장인 유니언 스테이션에 도착해 '미나리'에 함께 출연한 배우 한예리와 함께 레드카펫에 올랐다. 미국 연예매체 E뉴스가 진행한 레드카펫 인터뷰에서 그는 “한국 배우로서 처음으로 오스카 연기상 후보에 올랐고, 한국인이자 아시아 여성으로서 우리에게 이것은 매우 역사적인 순간이다. 당연히 우리는 무척 흥분되지만, 나에게는 정말 신나면서도 무척 이상한 일”이라고 말했다. ‘미나리’의 한국 할머니 순자 역할과 실제 삶이 얼마나 비슷하냐는 질문에는 “사실 저는 (영화에서와 달리) 손자와 살고 있지 않다. 이것이 영화와의 차이점”이란 농담으로 웃음을 자아냈다.

▲제93회 아카데미 시상식 레드카펫에 참석한 영화 '미나리'의 정이삭 감독과 그의 아내 발레리 정. [AFP=연합뉴스]

▲제93회 아카데미 시상식 레드카펫에서 아내 조아나 박과 동반 입장한 '미나리' 주연배우 스티븐 연. [AFP=연합뉴스]

▲시상식장 레드카펫에서 장난기 어린 모습을 연출한 '미나리'의 아역배우 앨런 김과 제작자 크리스티나 오. 크리스티나 오는 고름이 달린 퓨전한복 정장 차림으로 눈길을 끌었다. [AFP=연합뉴스]
정이삭 감독과 주연 스티븐 연은 둘 다 나비넥타이에 검은 정장으로 멋을 내고 각자 부부 동반으로 입장했다. 두 사람은 먼 사돈 관계로 정 감독 부친의 조카딸이 스티븐 연의 아내 조아나 박이다. ‘미나리’에서 막내 아들 데이빗을 연기한 앨런 김과 제작자 크리스티나 오도 함께 손을 잡고 레드카펫을 밟았다. 크리스티나 오는 고름이 달린 퓨전한복 정장 차림으로 눈길을 끌었다.
이번 아카데미 시상식은 200여 후보를 포함한 참석자들에 대해 백신 접종 및 세차례 코로나 검사 등 철저한 방역을 거쳐 대면 행사로 열렸다. 진행을 맡은 흑인 배우 레지나 킹은 “카메라가 돌 땐 마스크 없이, 꺼지면 마스크 착용을 원칙으로 함께 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내 이름 '여영'이라 부르는데 오늘만은 용서" 또 터진 윤여정
“아시다시피 저는 한국에서 온 윤여정입니다. 유럽 분들은 제 이름을 여영이라고 하거나 그냥 정이라고 부르는데, 오늘만은 모두 용서해드리죠.(웃음) 내게 (아카데미 시상식은) 텔레비전으로 보는 프로그램이었는데 여기 있다는 걸 믿을 수 없네요. 전 경쟁을 믿지 않아요. 제가 어떻게 글렌 클로스(‘힐빌리의 노래’)를 이길 수 있겠어요. 그의 영화를 그렇게 많이 봤고 좋아했는데…. 경쟁이란 있을 수 없고 다만 제가 운이 좀 더 좋았습니다. 미국인들이 한국 배우를 특별히 환대해주는 것 같네요.”
25일(현지시간) 한국 배우 첫 아카데미 연기상 수상이라는 쾌거를 이룬 윤여정은 이렇게 영어로 소감을 이어갔다. 짙은 네이비색 드레스에 떨리는 모습으로 무대에 오른 뒤 첫 마디는 “브래드 피트, 드디어 만났군요. 우리가 털사에서 영화 찍을 동안 어디 계셨나요?”하는 우스개. 무대 오른쪽에 서 있던 시상자 브래드 피트는 ‘미나리’의 제작사 플랜B 대표다. 무더위 속에 털사에서 촬영한 ‘미나리’ 현장이 녹록치 않았음을 환기시키는 재치 있는 한마디에 좌중의 웃음이 터졌다. 윤여정은 자신의 이름을 잘 못 부르는 서구인들에 대한 농담으로 본격 소감을 시작해 경쟁자에 대해 추켜세우는 말로 이들의 환대에 값했다.
소감 마무리는 1971년 첫 영화 ‘화녀’를 함께 했던 김기영 감독에 대한 언급이었다. 그는 “김기영 감독님은 천재적인 분이었다”면서 “살아계셨다면 오늘밤 무척 기뻐했을 것”이라고 회고했다. 서구인들에게 한국영화의 축적된 역량과 계보를 넌지시 일깨워주는 관록의 한마디였다.
배우 경력 55년의 윤여정은 이렇듯 언제 어디에서도 핵심을 찌르는 촌철살인 화법이 빛난다. 모국어가 아닌 영어로 즉흥적으로 말하면서도 세계인들을 사로잡은 그의 수상소감‧인터뷰 등을 모아봤다
◆콧대 높은 영국인들, 땡큐=“모든 상이 의미있지만 이번엔 특별히 콧대 높은 영국인들에게 인정받았다(Specially recognized by british people known as very snobbish people).” 지난 11일 영국 아카데미상(BAFTA) 여우조연상 수상 소감은 시청자는 물론 진행자까지 폭소를 터뜨리게 한 ‘뼈 때리는 발언’이었다.
‘snobbish’는 ‘콧대 높은’ ‘고상한 체하는’ ‘젠체하는’ 등을 포괄하는 형용사다. 비판적으로 들릴 수 있지만 윤여정은 밝은 미소에 어깨를 으쓱하는 동작으로 영국인들의 ‘블랙 유머’를 휘어잡았다. 이날 시상식 방송 주관사인 BBC가 SNS를 통해 “우리가 가장 좋아한 수상 소감”이라고 언급할 정도였다.
윤여정의 ‘snobbish’ 발언에 대해 대만계 사회학자로서 할리우드 내 인종차별을 활발하게 지적해온 낸시 왕 위엔은 “서구를 자신의 렌즈(시선)로 평한 것”이라며 의미를 부여했다. 지난 23일 미 시사주간지 ‘타임’ 보도에서 위엔은 “윤여정이 BAFTA 수상 의미를 한국 배우로서 재정의한 것은 서구를 탈중심화시킨 효과가 있다”면서 “마치 봉준호 감독이 아카데미를 ‘로컬영화제’라고 했던 것을 연상시킨다”고 말했다.
◆한국의 메릴 스트리프 아냐, 나는 나=윤여정은 ‘미나리’가 골든글로브 외국어영화상을 수상한 뒤 미 ABC ‘굿모닝 아메리카’와 인터뷰 했을 때 앵커로부터 “한국의 메릴 스트리프”라는 소개말을 들었다. 그는 답변에 앞서 “우선 저를 한국의 메릴 스트리프라고 하셨는데… 스트리프는 그런 말 들으면 싫어할 것이다(웃음). 칭찬으로 듣겠다”고 말해 진행자들의 웃음을 자아내는 한편 자신이 56년 경력의 한국 대표 배우임을 분명히 했다. 이 같은 소신 발언은 아카데미 후보 지명 후에도 되풀이돼 미국 평단이 ‘한국의 메릴 스트리프’라며 쏟아낸 찬사가 “일종의 스트레스였다”고 외신 인터뷰에 털어놓기도 했다. “한국의 메릴 스트리프로 불리는 것이 칭찬이라는 것을 알지만, 왠지 마음이 편치 않았다. 메릴 스트리프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여성이고, 저는 단지 한국의 윤여정이다. 모든 사람은 다르고, 나는 나 자신이 되고 싶다”라면서다.
◆전설적이라니, 내가 늙었단 거니= tvN 예능 ‘윤식당’ ‘윤스테이’ 등에서 빛을 발한 유머감각은 라이브 행사장에서도 유감없이 발휘됐다. 지난해 초 선댄스영화제에서 ‘미나리’가 상영된 뒤 Q&A 시간에 정이삭(리 아이작 정) 감독이 “한국에서 온 전설적인(legendary) 배우”라고 소개하자 윤여정은 “아이작, 전설적이란 말은 내가 늙었단 뜻이잖아(Isaac, ‘legendary’ means I am old)”라며 나무라듯 눈을 흘겼다. 관객 폭소를 자아낸 뒤 마이크를 잡았을 땐 “이번 영화는 하기 싫었다. 독립 영화라는 걸 알았기에. 그 말은 제가 고생할 거라는 뜻이라서다” 하면서 유쾌하게 분위기를 살렸다.
이 같은 윤여정의 화법과 영어 구사를 두고 영국 출신의 제이슨 베셔베이스 숭실사이버대 교수는 “외국인이 어떻게 볼까에 연연하지 않고 나는 나 자신이란 걸 당당하게 보여주는 캐릭터”라고 말했다. 그는 윤여정의 소감이 매번 화제가 되는 데 대해선 “여러차례 인터뷰로 알려지는 동안 한결같은 모습과 유머감각을 보여서 외국인들도 그의 코드를 이해하게 됐다”면서 “마치 봉준호 감독이 지난해 전세계적인 팬덤을 끌어모은 것과 비슷한 양상”이라고 말했다
윤여정 수상소감 전문
브래드 피트, 드디어 우리 만났네요. 털사에서 우리가 촬영할 땐 어디 계셨던 거예요? 만나서 정말 영광이에요. 아시다시피 저는 한국에서 왔고 제 이름은 윤여정입니다. 유럽인들 대부분은 저를 '여영'이나 또는 '유정'이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하지만 오늘만큼은 여러분 모두를 용서하겠어요.
저는 지구 반대편에 살아서 오스카 시상식은 TV로 보는 이벤트, TV 프로그램 같았는데 제가 직접 왔다니 믿기지 않네요. 잠시만요, 마음을 가다듬고진정 좀 할게요. 저에게 투표해주신 아카데미 회원분들에게 대단히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원더풀한 미나리 가족들에게 감사드립니다.
'Next Speech' 보통 이렇게 얘기하곤 하죠. 그리고 원더풀한 미나리 가족들에게 감사드립니다. 스티븐 연, 정이삭, 한예리, 노엘 조, 앨런 김. 우리는 가족이 되었습니다. 무엇보다도 정이삭 감독이 없었다면 저는 오늘 밤 이 자리에 없었을 겁니다. 정이삭이 우리의 캡틴이었고 저의 감독이었습니다. 깊은 감사를 전합니다. 또감사드릴 분이...
저는 경쟁을 싫어합니다. 제가 어떻게 글렌 클로즈를 이기겠어요? 저는 그녀의 영화를 수없이 많이 봤습니다. 5명 후보가 모두 각자 다른 영화에서의 수상자입니다. 우리는 각자 다른 역을 연기했잖아요. 우리끼리 경쟁할 순 없습니다. 오늘 제가 여기에 있는 것은 단지 조금 더 운이 좋았을 뿐이죠. 당신보다 조금 더 운이 좋았네요. 그리고 아마도 미국인들이 한국 배우를 대접하는 방법일 수도 있죠. 아무튼 감사합니다.
사랑하는 두 아들에게도 고맙다고말하고 싶네요. 저를 일하게 만든 아이들이요. 사랑하는 아들들아, 이게 엄마가 열심히 일한 결과란다. 그리고 저는 이 상을 저의 첫 번째 감독님, 김기영에게 바치고 싶습니다. 아주 천재적인 분이셨고 제 데뷔작을 함께 했습니다. 살아계셨다면 아주 기뻐하셨을 거예요. 정말 진심으로 모두에게 감사드립니다.
Mr. Brad Pitt, finally! Nice to meet you. Where were you while we were filming in Tulsa? It's a very honor to meet you. As you know, I'm from Korea, actually my name is Yuh-Jung Youn. Most of the European people call me Yuh-Yung, some of them call me Yu-Jung.But tonight, you are all forgiven. And well.. I usually... I'm living in the other part of the world. I just watched television, It is a oscar, event on the television. Just watching, like a television program for us. But me being here by myself, I cannotbelieve it that I'm here. Okay, let me put myself together. Thank you, Tremendous thanks to the Academy members who voted for me. Thank you for the wonderful MINARI family, Steven, Isaac, Yeri, Noel, and Alan. We became a family. And most of all, Lee IsaacChung, without him, I couldn't be here tonight. He was our captain and my director. Thanks to you, Too many thanks to you. And I'd like to thank.. see, I don't believe in competition. How can I win Glenn Close? win over Glenn Close? I have been watching herso many performances, so this is just... all the nominees, five nominees, we are the winner for the different movies. We played different roles, so we cannot compete with each other. Tonight I'm here is that just because of a little bit of luck, I think. Maybeluckier than you. And also maybe.. Is that an American hospitality for the Korean actor? I'm not sure. Thank you so much. And I'd like to thank to my two boys who made me go out and work. So, beloved sons, , this is the result because mommy works so hard.And I'd like to dedicate this award for my first director, KIM Ki-Young who was a very genius director. I made a movie together with my first movie. I think he will be very happy if he is still alive. Thank you very much! Tremendous thanks for everybody. Thankyou.
강혜란 기자 theother@joongang.co.kr
04월 26일 윤여정의 한국 배우 첫 아카데미賞, 국민 위로한 慶事다
‘국민 여배우’ 윤여정(74)이 한국 영화 역사를 새로 쓰면서, 세계의 스타로 공식 인정받았다. 미국영화예술아카데미는 제93회 아카데미상(賞) 여우조연상 수상자로, 미국에 이민한 한인 가족의 정착기를 담은 영화 ‘미나리’에서 할머니 배역을 더없이 실감 나게 연기한 윤 씨를 확정, 한국시간 26일 오전 시상식에서 발표했다. 세계 최고 권위의 영화제 중 하나인 아카데미영화제에서 한국 배우 첫 수상인 데다가, 윤 씨가 고령에도 남달리 눈부신 활동으로 큰 성취를 이뤘다는 사실 등으로 의미는 더 각별하다.
더욱이 그의 수상은 코로나19 사태 장기화와 국정 난맥 심화 속의 쾌거여서, 개인의 영광과 국내 연기자들의 세계 위상을 드높인 차원도 넘는다. 짜증 나고 지친 국민을 위로한 경사(慶事)이기도 하다. 1971년 김기영 감독의 영화 ‘화녀’로 데뷔한 그가 쌓아온 역량은 ‘미나리’ 감독인 한국계 미국인 리 아이삭 정(한국명 정이삭)의 찬사로도 확인된다. “그를 보물로, 비밀무기로 생각했다. 진짜 천재다. 그의 연기로 영화가 빛날 수 있었다”고 했다.
‘미나리’가 세계 각지 영화제나 행사에서 받은 상 100여 개 중에서 30여 개는 윤 씨를 대상으로 삼은 이유도 달리 없다. 지난 11일 영국 아카데미상 여우조연상 수상 배경도 마찬가지다. 그는 “모든 상이 의미 있지만, 이번 수상은 특히 무척 고상한 체하는 것으로 알려진 영국인들에게서 명배우로 인정받은 일이어서 더 기쁘다”고 해, 세계 영화계 안팎에서 “솔직하고 재치 있다” “(영화인들의) 올해 수상 소감 중 최고” 등의 찬사를 받기도 했다. 이 경사가 사회 각 분야의 또 다른 성취동기로도 작용하길 기대한다.
문화일보 사설
04월 27일 인종·나이 편견까지 일거에 깬 윤여정

▲황영미 한국영화평론가협회 회장 숙명여대 교수
한국영화사 100년 만에 ‘기생충’이 칸영화제 황금종려상을 받았고, 이듬해 아카데미 주요상 4관왕을 석권했다. 102년 되는 올해 윤여정 배우가 ‘미나리’에서의 진솔한 연기로 미국 아카데미 여우조연상을 받았다. 이번 수상이 지니는 의미가 여러 가지로 깊다.
첫째로, 아카데미 배우상 수상은 한국 최초라는 점이다. 그동안 세계 3대 영화제에서 수상한 배우는, 여우주연상으로 베니스영화제에서 ‘씨받이’의 강수연, 칸 영화제에서 ‘밀양’의 전도연, 베를린 영화제에서 ‘밤의 해변에서 혼자’의 김민희와 베니스 영화제에서 신인상을 수상한 ‘오아시스’의 문소리를 꼽을 수 있다. 이번 수상으로 윤여정 배우는 영국 아카데미 배우상에 이어, 미국 배우조합상 등 30여 개 상을 받으며, 미국 아카데미상까지 거머쥐게 됐다. 할리우드 영화계의 세계 파급력은 유명 국제영화제보다 크기 때문에 더욱 주목할 만하다. 연기가 뛰어난 한국 남자 배우가 많지만, 아카데미나 세계 3대 영화제 수상이 없었다는 것도 아쉬운 점이다. 여배우 기근이라고 말하는 현 한국 영화계도 이 점을 유의해야 할 것이다.
다음으로, 93회 동안 아카데미에서 영어가 아닌 대사(臺詞)로 수상한 경우는 남녀 통틀어 여섯 번째, 아시아 여배우로는 두 번째 수상이라는 점이다. 상대적으로 외국어 대사 평가에 인색하다고 여겨졌던 아카데미에서 수상했다는 것은 윤여정 배우가, ‘기생충’에 이어 아카데미의 인종과 언어의 문을 활짝 열게 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는 한국 영화의 위상을 높이는 데 기여해 앞으로 한국 배우가 할리우드에 진출할 수 있는 터전을 마련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를 위해 해외 경쟁력이 있는 배우를 키우는 산업적인 시스템도 필요하다.
또한, 역대 여우조연상 수상자 중 세 번째로 나이 많은 수상자라는 점도 유의미하다. 50년 동안 자신의 연기에 몰입한 결과인 만큼, 우리 사회에 노인의 능력을 귀하게 여겨야 한다는 교훈을 준다. 또한, 영화에서 주인공만 중요한 게 아니라, 영화의 색깔을 보태주는 조연(助演)의 중요성을 강조할 필요가 있다. 73세에 받은 여우조연상은 그동안 인종·노인·조연·여성이라는 편견을 일거에 불식시킨 드라마틱한 쾌거임에 틀림없다. 앞으로 한국 영화계도 톱스타 주연에만 연연하지 말고, 다양한 조연의 역할에 좀 더 주목해야 할 것이다.
배우상 수상은 영화의 작품성을 기반으로 하는 것이므로 우선 작품성이 뛰어난 영화가 다양하게 제작돼야 할 것이다. ‘미나리’가 아카데미 6개 부문 후보가 될 만큼 북미에서 어필하는 것은, 이민자의 아픔에 대한 공감이 크기 때문일 것이다. 한국 민족의 아픔과 매력을 보여주는 디아스포라 관련 주제도 세계인의 공감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 증명된 셈이다. ‘미나리’에서 순자라는 캐릭터가 보여준 한국 할머니의 모습은 한국인의 끈기와 의지, 솔직함과 자유로운 이미지를 전 세계에 전파했다.
영화라는 문화 콘텐츠가 기여하는 국가 경쟁력은 예상보다 크다. ‘기생충’의 해외 수익이 3000억 원이 넘는다고 한다. ‘미나리’의 경우는 해외 제작이어서 ‘기생충’과는 다른 경우다. 하지만 이번 수상에 대한 관심이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어려운 한국 영화산업에 대한 국가적 관심과 투자로 이어지길 기대한다.
문화일보
04월 27일 “손들지 말고 물어요, 대통령도 아닌데”…2030, 유머장착 ‘여정체’에 빠져들다
■ 윤여정 신드롬…74세 배우의 ‘젊은 소통’
브래드 피트 만난 소감 묻자
“다음엔 돈좀 더 써달라 했다”
“최고보다 ‘최중’하면 안되나”
네티즌 “윤쌤 말에 희망생겨”
CNN “윤, 아카데미 쇼 훔쳐”
“윤여정 쌤이 영어로 말하는데 ‘여정체’로 들린 건 나뿐이었을까?”
배우 윤여정이 26일 한국 배우 최초로 미국 아카데미에서 여우조연상을 받은 이후 영화 팬과 네티즌들의 반응이 매우 뜨겁다. 서양인들의 잔치나 다름없었던 아카데미에서 한국인 처음으로 수상한 것은 둘째치고, 전 세계인이 지켜보는 무대에 올라 긴장한 모습을 비치면서도 할 말은 다했던 그의 재치와 유머, 솔직함에 박수를 보내고 있다. 특히 스스로 ‘올드피플’이라고 입버릇처럼 얘기하지만 74세 고령에도 불구하고 2030세대 못지않은 젊은 감각과 소통 능력으로 열광적이면서도 따뜻한 환영을 받고 있다.
◇‘휴먼여정체’의 매력
네티즌들은 윤여정의 직설적이면서도 친근한 말투를 ‘휴먼여정체’라고 이름 붙였다. 이를테면, 윤여정이 추임새처럼 쓰는 “어우∼, 증말∼”, 기분이 좋을 때의 “어머 얘 어떡하니?”, 생각이 나지 않을 때 “그리고 저기 또 뭐야?” 같은 말이다. 윤여정은 아카데미 시상식이 끝난 후 LA 총영사관에서 열린 언론사 특파원 간담회에서도 이런 매력을 고스란히 드러냈다. 화이트와인 한 잔을 앞에 두고 편안하게 치러진 자리에서 그는 “손들 것 없어요. 내가 대통령도 아닌데 빨리 말하세요”라든가, “하나씩만 질문해요. 늙어서 잊어버려”라며 유머를 잃지 않았다.
이어지는 질문에도 거침없었다. ‘미나리’의 제작자인 브래드 피트를 시상자로 만난 소감에 대해서는 “미국 사람들도 똑같더라. 브래드 피트 본 게 어떠냐는 질문만 계속하더라. 그는 우리 영화의 제작자였다. 다음엔 돈 좀 더 써달라고 했더니 조금 더 쓰겠다며 잘 빠져나갔다”고 했다. 재치있는 언변의 비결을 묻는 데는 “(내가) 오래 살지 않았나. 좋은 친구들과 수다를 잘 떤다. 수다에서 나오는 것 같다”고 답했다.
이에 네티즌들은 SNS를 통해 윤여정의 소감과 그에 관한 모든 것을 해시태그하며 관심을 보였다. “윤여정 쌤이 기자회견에서 나이 육십에 비로소 내가 원하는 작품을 아무 고민 없이 고를 수 있는 ‘사치스러운 상태’가 됐다는 말이 오래 마음에 남는다. 선생님 전 아직 멀고도 멀었네요”라며 큰 공감을 드러냈다.
◇‘경단녀’의 ‘최중’ 마인드
윤여정은 늘 자신을 ‘생계형 배우’라고 말했다. 영화와 예술을 하는 스타들에게서는 쉽게 접할 수 없는 솔직함이다. 그는 실제로 55년의 필모그래피 중 약 10년간의 경력 단절을 겪었다. 1974년 가수 조영남과 결혼한 후 미국으로 건너갔다가 이혼 후 1984년 복귀한 것을 말한다. 1971년 김기영 감독의 ‘화녀’로 ‘최고’를 찍었지만 이후 찾아온 10년간의 공백은 그를 바닥까지 내몰았다. 1985년 김수현 작가의 영화 ‘에미’로 가까스로 컴백했을 때가 그의 나이 38세였다. 그 이후 그는 “먹고 살기 위해” 연기했다. 윤여정은 특파원 간담회에서 ‘최고’가 된 소감을 묻는 말에 “최고의 순간은 없다. 최고 그런 말이 싫다. 1등, 최고 그러지 말고 그냥 ‘최중’ 하면 안 되나. 우리 모두 같이 살면 안 되나”라며 웃었다. “앞으로 계획이 뭐가 있겠나? 그냥 살던 대로… 오스카 탔다고 윤여정이 김여정이 되는 게 아니지 않나. 대사 외우는 게 힘든데, 민폐 되지 않을 때까지 이 일을 하다가 죽으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고 해 노배우의 소박한 꿈을 엿보게 했다. 네티즌들은 “윤여정 배우를 보면서 모두 언젠가 자기의 시간이 올 수 있겠다는 믿음이 생겼다”고 했다.
◇타임 “윤여정 소감 베스트”
해외 언론도 한결같이 윤여정의 솔직한 매력에 주목하며 단순한 여우조연상 수상자를 넘어선 열광을 얻고 있다. 타임은 27일 아카데미 시상식의 ‘베스트 & 워스트’를 꼽으며 윤여정의 수상 소감을 올해 아카데미의 베스트에 포함시켰다. 타임은 “‘미나리’에서와 마찬가지로 윤여정의 등장은 단조롭게 진행되던 (시상식) 풍경에 카리스마와 예측 불가능성의 한 방을 전달했다. 그는 한국 최초의 아카데미 수상자로서 역사적인 순간을 최대한 활용했다”면서 “제작자 브래드 피트에게 ‘어디 있었냐’고 목소리를 높였고, 글렌 클로스에게 경의를 표했다”고 베스트 선정 이유를 밝혔다. CNN은 “윤여정이 아카데미 쇼를 훔쳤다”고 했고, 뉴욕타임스의 기자는 “내년 아카데미 진행은 윤여정에게”라고 소셜 미디어에 실었다. 영국 가디언은 윤여정을 이렇게 칭찬했다. “오늘 밤의 승리자였다”.
김인구 기자 clark@munhwa.com
04.29 ‘쿨’하고 ‘힙’하다
대본을 성경 읽듯 연기를 일상처럼
식혜 위 밥풀마냥 동동 뜬 인기 말고
스타 아닌 배우로 살던 대로 살련다!
# ‘쿨’하고 ‘힙’하다! 윤여정을 가리키는 최적의 수식어다. 호리호리하고 가냘픈 여인. 그러나 오스카상을 포함해 영국 아카데미, 미국배우조합상 등 전 세계 유수 영화제에서 총 42관왕을 달성한 위업(?)에 더해 마이크만 잡으면 재치 있고 유머러스한 소감을 빵빵 터뜨리며 거의 모든 매체와 소셜미디어를 평정해버릴 만큼 압도적으로 ‘쿨(cool)’하다. 1947년생이니 우리 나이로 75세의 할머니. 하지만 한 손에 오스카 여우조연상 트로피를 거머쥔 채, 우아한 검은색 드레스 위로 카키색 항공 점퍼를 걸치고 아카데미 시상식장을 누비는 모습이 젊은이들조차 감탄할 만큼 ‘힙(hip)’하다. 그 윤여정이 대세다. 하루 이틀 이러다 말 것 같지도 않다. 광고마저 온통 그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정작 여전히 까칠한 그가 우리를 이처럼 사로잡는 진짜 이유는 뭘까? 그게 궁금해졌다.

# “하루에 되는 스타하고 배우는 달라요.” 며칠 전 아카데미 수상식이 끝나고 늦은 밤 윤여정이 기자회견 모두(冒頭)에 한 말이다. 이미 스타 중의 스타가 됐음에도 윤여정은 스타이기보다 배우(俳優)이고자 했다. 스타는 반짝한다. 오래가기 어렵다. 하지만 배우는 무명일 때도 있고 유명할 때도 있으며 슬럼프를 겪을 때도 있겠지만 끝내 버티며 스스로의 자존감을 잃지 않는 존재다. 영화 ‘힐빌리의 노래’에서 열연한 동갑내기 배우 글렌 클로스가 아카데미 여우조연상을 타길 바랐다고 말할 때 그것이 윤여정의 진심이라고 느낄 수 있었던 이유도 그가 말한 “하루에 되는 스타하고 배우는 달라요”라는 말 때문이었다. 여덟 번이나 오스카상에 노미네이트됐지만 상복은 없던 글렌 클로스다. 급기야 자신에게 밀려(?) 또다시 오스카상을 놓친 그를 향해 진심으로 글렌 클로스가 상 받기를 바랐다고 거듭 이야기하는 것을 보면서 윤여정에게 욕심이 있다면 스타가 되는 것이 아니라 ‘진짜 배우’가 되는 것이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 누구에게나 삶은 일순간의 성공이 아닌 지속적인 성장의 이야기일 때 더 가치 있기 마련이다. 윤여정도 예외가 아니다. 그는 자신의 연기 철학은 열등의식에서 시작됐다고 했다. 연극영화과 출신도 아니고 아르바이트하다가 연기를 하게 됐기 때문에 자신의 약점을 아니까 열심히 대사를 외워서 남에게 피해를 주지 말자는 게 연기의 시작이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는 결혼과 더불어 연기를 접어야 했다. 그 후 두 아이의 엄마가 돼 요즘 말로 ‘경단녀’(경력 단절 여성)가 됐다. 다시 연기를 하게 된 것은 이혼 후 아이들은 키우며 먹고살기 위해서였다. 한마디로 ‘생계’가 그를 다시 연기의 길로 나아가게 했던 것이다. “저는 절실해서 했거든요. 왜냐하면 정말 먹고살려고 했기 때문에 대본이 저한테는 성경 같았어요.” 그 어떤 말보다도 이 대목에서 우리는 그의 진심과 마주하게 되는지 모른다. 그도 나와 다를 바 없는 생활인이구나, 살려고 몸부림쳤구나 하고 느끼며 나도 모르게 그에게 스며드는 지점이 아닐 수 없다. 이와 관련해 여담이지만 오래전 그는 ‘무릎팍도사’라는 TV 프로에 나와 이렇게 말했다. “배우는 돈이 급할 때 제일 연기를 잘한다. 예술가도 배가 고프고 돈이 급할 때 좋은 작품을 만든다. 훌륭한 화가들을 봐라. 명작들은 배고플 때 나온다. 그래서 예술이 잔인한 거다.” 정말이지 정곡을 ‘콕’ 찌른 말 아닌가! 사람들은 윤여정의 이런 솔직함을 넘어서 그 매력적인 통찰에 매료되었던 것이리라.
# 다시 윤여정의 말이다. “누가 브로드웨이로 가는 길을 물었더니 ‘프랙티스(연습, 실행)’란 대답이 돌아왔다.” 그렇다. 브로드웨이로 가는 지도상의 길이야 표지판을 보면 알 것이지만 정작 브로드웨이에 진출해 배우가 되는 길은 피나는 습관 같은 ‘연습’과 치열한 ‘실행’ 외엔 달리 방도가 없다. 스타는 운에 좌우되지만 배우는 노력에 좌우된다. 그는 그것을 뼛속 깊이 알고 있는 지혜로운 배우다. 일본의 철학자이자 미학자인 이마미치 도모노부(今道友信)는 매주 토요일 밤에 3시간씩 단테의 ‘신곡’ 원전을 주석서 두세 권과 함께 읽으며 노트를 만들어나가는 비밀스러운 습관을 50년 동안 지속했다고 한다. 이를 토대로 다시 1년 반 동안 15회에 걸쳐 강의를 해서 마침내 ‘단테 신곡 강의'라는 불후의 명작을 낼 수 있었다고 한다. 윤여정의 반세기 연기 인생이 왠지 이것과 닮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만큼 그는 쉬지 않고 습관처럼 대본을 외우고 일하듯 성실하게 연기했다. 물론 생존하고 생활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그런 ‘일상 속 생활력’이야말로 오늘의 윤여정을 만든 것 아닌가 싶다.
# 앞으로의 계획을 묻는 질문에 윤여정은 “(특별한) 계획은 없다. 살던 대로 살겠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옛날부터 결심한 게 있는데, 민폐가 되지 않을 때까지 이 일을 하다가 죽으면 좋을 것 같다”고 담담하게 말했다. 탤런트 강부자씨가 윤여정에게 “지금 세상이 온통 네 얘기로 휩싸였다”고 하니까 그는 또 이렇게 답했다고 한다. “언니, 그거 식혜에 동동 뜬 밥풀 같은 인기야.” 그렇다. 윤여정은 ‘식혜에 동동 뜬 밥풀 같은 인기’를 뒤로한 채 미국 NBC 방송 인터뷰에서 말했듯이 ‘집으로 돌아갈 것이고 다시 일을 시작할 것’이다. 결국, 우리가 그에게 자신도 모르게 매료되는 속 깊은 까닭은 윤여정이 보여준 그런 어마어마한 행보와 톡톡 튀는 말솜씨 때문이기보다는, 그가 우리와 다를 바 없어 보이는 ‘생활인’을 고수하고 있기 때문이지 않을까! 그러니, “비베 호디에(Vive hodie)!” 오늘을 살아라! 그렇게 산 오늘이 내일을 만들고 그 하루하루가 쌓여 인생을 이룬다. 켜켜이 쌓은 것은 견고하다. 윤여정처럼!
조선일보 정진홍 컬처엔지니어
○배우 윤여정
녹취를 풀다가 놀랐다. 그의 이야기를 받아 적으니 그대로 문장이 된다. 구어를 문어로, 비문을 정문으로 바꾸는 작업이 필요 없다. 하나의 장면이 떠올랐다. tvN의 여행 예능 프로그램 <꽃보다 누나>에서 윤여정이 영어로 외국인과 대화를 나눌 때 제작진은 ‘관계대명사, To-부정사의 정확한 용례’라는 자막을 달았다.
나보다 어린데
나보다 나은 사람을 만나면
기분이 좋아요.
나보다 못하면 화가 나요.
젊은 사람이 늙은이보다는
나아야 하잖아요.
배우 윤여정
20년 전에 찍은 드라마를 이야기할 때나, 40년 전에 찍은 영화를 이야기할 때도 그의 기억에는 흐트러짐이 없었다. 올해 일흔이 된 그는 자신을 여배우가 아니라 노배우라고 불렀다. 그처럼 한결같이 여자인 배우가 되기도 어려운 일이지만, 이처럼 총명한 노인이 되는 것도 경이로운 일이다.
- 영화 <계춘할망>에서 계춘을 맡았습니다. 배우에게는 타이틀롤(Title role)인데요.
타이틀롤은 <화녀>(1971), <충녀>(1972) 이후로 처음이죠. 그래서 제가 제목 바꾸라고 여러 번 이야기했어요(일동 웃음). 어렸을 때는 그런 제목이 좋아요. 지금은 늙어서 세상 물정을 너무 잘 알아요. 흥하면 좋지만, 모든 일은 절반의 성공과 절반의 실패를 걸고 하는 거예요. 만약에 실패한다면 이 실패는 제 몫인 거죠.
- 시나리오를 받으면 처음에는 인물의 외면이 그려지고 나중에는 인물의 내면이 보인다고 했습니다. 이번 영화에서는 계춘의 어떤 내면이 느껴졌는지요.
사랑이오. 세상에는 엄마도 있고 할머니도 있는데 둘 중에는 할머니가 무한한 사랑이에요. 저도 엄마를 해봤지만 엄마는 그렇게 못 해요. 열심히 해야 하거든요. 그럼 자꾸 괴롭히고 잔소리를 하죠. 할머니는 그런 게 없어요. 애가 토를 해도 예쁘고 오줌을 싸도 예뻐요.
실제로 저의 증조할머니가 저를 그렇게 예뻐하셨어요. 10살까지 할머니와 같이 살았는데, 당시 저는 할머니가 저를 예뻐해주는 걸 몰랐어요. 오십이 넘으니까 그 사랑을 알겠어요. 이 영화는 할머니께 속죄하는 마음으로 찍었어요.
- 처음에는 거절했다고 들었습니다만.
시나리오를 읽고 제 첫 질문이 “상업영화 맞아요?”였어요. 할머니와 손녀 이야기를 누가 보러 올까 싶더라고요. 저예산 영화는 돈을 많이 안 주니까 못 하거든요(일동 웃음). 저는 도회적인 이미지가 있어 못 할 것 같다고 했더니, 글쎄 제작자가 “도회적인 이미지는 소진되셨습니다” 그러더라고요. 그 말이 재밌었어요. “소진됐나요?”라고 다시 물었더니, “네. 됐습니다”라고 딱 자르더라고요. 지금은 고맙죠. 저를 새로운 영역에 도전할 수 있게 건드려줬으니까요.
▲영화 <계춘할망>의 한 장면. /콘텐츠난다긴다 제공
- 촬영 기간에 실제로 제주도에서 지내셨는데요, 제주도에서의 생활은 어땠는지요.
진짜 안 좋았어요(일동 웃음). 첫 촬영 마치고 그만둘까 싶을 정도로요. 이건 앞으로 제 숙제겠더라고요. 저 같은 노배우는 이제 젊은 스태프와 함께 하는 것 자체가 힘들어요. 예를 들면, 제가 뱀장어를 잡는 장면이 있었어요. 그런데 남자 스태프도 그걸 못 잡아요. 장갑을 끼고도 못 잡아요. 촬영은 지연되죠. “나는 평생 뱀장어를 잡아왔으니 그럼 내가 잡으마” 했는데 이런 농담도 못 알아들어요. 이래서 세대 갈등이 있구나 싶어요(웃음).
- 김고은 배우와의 호흡은 어땠나요?
<은교>라는 영화에서 고은이를 처음 봤어요. 눈이 가더라고요. 한국 영화에 없던 얼굴이잖아요. 배우는 얼굴에 뭔가 이야기가 있어야 해요. 김고은의 얼굴이 그래요. 그리고 배우는 같이 하는 작업이라 상대방과의 호흡이 중요해요. 가수는 혼자 노래를 부르지만 배우는 아닙니다. ‘이게 내 손녀구나’ 라고 최면을 걸게 할 상대가 필요하죠. 고은이는 제 손녀로 보였어요.
<계춘할망> 제작보고회가 있던 날, 윤여정은 “김고은이 처음부터 살갑거나 싹싹하지 않고 서먹서먹하게 다가왔는데, 그 모습이 좋아 보였다”고 했다. 처음엔 서먹한 게 당연한데 애써 친한 척하지 않아 좋았다는 뜻이었다. 이 기사에 수많은 악플이 달렸다. 김고은의 태도에 대한 이야기였다. 윤여정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인터뷰 자리에 모인 기자들에게 당부했다. “여러분의 말 한 마디에 사람이 왔다갔다 할 수 있다”고. “내가 연기로 욕먹는 건 괜찮지만, 이런 말로 오해를 사는 건 고은이 얼굴 보기도 미안하고 배우로서 너무 창피한 일 아니에요?”라면서.
나이 듦의 기쁨과 슬픔
/콘텐츠난다긴다 제공
- 나이가 들면 ‘꼰대’라는 용어가 따라 옵니다. 그럼에도 그에 대한 두려움은 없어 보입니다.
저는 이미 꼰대죠. 나이 칠십이 된 여자가 꼰대가 아니라면 이상한 거 아니겠어요? 현장에서 저의 미션은 제가 해야 할 일을 끝내는 거예요. 그러기 위해서 쓴소리도 하죠. 그리고 지금은 이러나 저러나 꼰대 소리를 들어요. 나이가 들면 좋은 게 이제는 아무 상관이 없다는 거죠.
- 저예산은 안 한다 하셨지만 얼마 전 이재용 감독과 (저예산 영화) <죽여주는 여자>를 찍었는데요.
사람이라는 게 그럴 거예요. 케이스 바이 케이스(case by case)죠. 이재용 감독과는 <여배우들>부터 관계가 깊어져서 그와 나는 계속 저예산만 하고 있어요. <죽여주는 여자>는 모인 사람들에게 제가 밥 사 먹이면서 찍어서 제 돈이 더 들어갔어요.
- 나영석 피디와의 교분도 각별하다고 들었습니다.
나영석씨는 사려가 깊어요. 나보다 어린데 나보다 나은 사람을 만나면 기분이 좋아요. 나보다 못하면 화가 나요. 젊은 사람이 늙은이보다는 나아야 하잖아요. 처음에 <꽃보다 할매>로 간다고 하기에 그건 아니라고 했어요. 하루가 지나고 사과를 하더라고요. 꼭 그의 잘못은 아닌데, 그럼에도 자기 실수를 인정하고 교정하려고 하는 게 머리가 좋은 거죠. 바뀐 제목이 <꽃보다 누나>인 거는 저한테 비밀로 했어요. 제가 이승기 누나라는 게 말이 되나요?(일동 웃음) 누나인 줄 알았으면 안 했을 거예요.
▲드라마 <디어 마이 프렌즈> 포스터. /CJ E&M 제공
- 나보다 나은 젊은 사람’에는 <디어 마이 프렌즈(tvN)>의 노희경 작가도 포함되겠죠?
자기 분야에서 자기 일을 잘한다면 누구든 그렇죠. 노희경 작가는 아직 오십이 안 됐는데 너무 놀라워요. 이 사람은 ‘늙은이 이야기를 어떻게 이렇게 잘 알지’ 싶어요. 여러분은 어른을 어른이라 다를 거라 생각하는데 다 똑같아요. 모든 순간은 모두가 처음인 거예요.
- 혹자는 <디어 마이 프렌즈>를 ‘시니어벤저스’라 부르더군요. 배우에게도 여러모로 특별한 현장일 것 같습니다.
우리끼리 연기를 하는 건지 진짜인지 모르겠어요. 거의 50년 역사를 같이 했잖아요. 고두심이네 아이 이름도 제가 다 알고, (김)혜자 언니 아이들 이름, (나)문희 언니 아이들 이름, (김)영옥 언니 아이들 이름도 다 알아요. 처음엔 주인공들을 하다가 그 이후로는 각각 엄마가 되어 뿔뿔이 흩어진 거잖아요. 포스터 찍는 첫날 혜자 언니가 그러더라고요. “이 작가가 우리 죽기 전에 만나라고 이 작품 썼나봐.” 그래서 다 같이 울컥했죠, 뭐.
그날 밤, 예능 프로그램 <비정상회담>(JTBC)에 윤여정이 출연했다. 역대 최고령 출연자였을 텐데, 각국의 비정상과 스스럼없이 어울렸다. 그가 건넨 고민은 “꼰대가 되는 것”이었다. 아마 꼰대라고 해도 그는 선선히 받아들였을 것이다. 거기 모인 출연자도 시청자도 알았다. 그는 과거의 영광에 사로잡힌 꼰대가 아니라, 오늘의 충만함을 즐기는 인생의 선배라는 걸.
유슬기 차소현
2016.12.10 "먹고살려고 俳優 하다 여기까지… 나, 대단한 사람 아니에요"
데뷔 50주년 '제2의 전성기'… '올해의 여성영화인상' 받은 윤여정 "난 꼰대지만 젊은 사람 말 귀담아들어… 결정은 내가 해도"
▲“내가 신파가 잘 안 되잖아요. 오열 못 하고 소리 못 질러. 메소드 연기, 신들린 연기…, 그런 것 잘 못하겠어요(웃음).” 윤여정이 카메라 앞에서 이렇게 툭 한마디 한다. 뻔한 신파, 뻔한 표정이 이 배우에겐 어울리지 않아서일 것이다. 알레그레토의 경쾌한 말투, 쇳소리가 섞인 음성…. 윤여정은 항상 남달랐고 신선했다. 69세인 지금까지도. /이진한 기자
"인터뷰를 꺼리는 이유가 있느냐"고 묻자 윤여정(69)은 "나를 포장하는 게 싫어서 그렇다"고 말했다. "그냥 있는 그대로만 써줬으면 좋겠는데, 자꾸 내 말에 의미를 부여하려고들 그래요. 나 그렇게 대단한 사람 아니거든요. 그냥 지금껏 먹고살려고 일했고 그래서 여기까지 왔고, 그게 다예요. 별 볼일 없어요(웃음)."
스스로 별 볼일 없다는 이 배우를 7일 서울 사당동 한 극장에서 만났다. 올해 데뷔 50주년을 맞은 그는 이날 이 극장에서 '2016년 올해의 여성영화인상'을 받았다. 지난달 호주 브리즈번에서 열린 '제10회 아시아태평양스크린어워즈'에선 심사위원 대상도 받았다. 올해 주인공으로 출연한 영화 '죽여주는 여자' '계춘할망'에서 보여준 연기 덕분이다. "축하한다"고 인사를 건네자 윤여정은 이번엔 눈을 찡긋하며 이렇게 받아쳤다.
"고마워요. 근데 청룡영화상은 미끄러졌지만요!"
뻔한 감탄사는 그에게 어울리지 않는다. 1966년 TBC 공채 3기 탤런트로 데뷔한 이래로 윤여정은 늘 살점 남김 없이 발라낸 생선가시처럼 군더더기 없는 모습이었다. 까슬까슬한 목소리, 예민해 보이는 길고도 가는 목선…. 이날 들려준 소감도 역시나 간결했다.
"늙어서 내가 여자인지 남자인지 생각 안하고 살았다. 그런데 여성영화인상을 받고 보니 '아, 내가 여자였구나' 싶다. 1984년 복귀한 이래로는 그저 열심히 앞만 보고 달려왔다. 마치 옆을 돌아보지 않는 경주마처럼…."
시상식 열리기 세 시간 전쯤 윤여정과 마주 앉았다. 그는 "처음 보는 사람과 대화하는 게 영 낯설고 어색하다"고 했다.
포장지는 싫다, 알맹이로 산다
―포장하려는 게 아니라, 배우로서 잘 나가는 건 사실 아닌가요. 70세를 앞두고 다시 전성기를 누리고 있지 않으십니까.
"무슨 전성기요? 어쩌다가 올해 그냥 영화를 두 편 연달아 찍었고, 그게 어쩌다 보니 다 주연이었고요. 내가 나이가 있으니 다들 예우 차원에서 고생했다고 상을 주는 거죠. 의미 부여를 하기도 좀 그래요. 맞아, 공정하기로 유명한 청룡영화상은 못 받았잖아요(웃음)."
―아쉬우셨나요.
"아쉬웠죠. 꼭 받으리라는 보장은 없었지만요. 그래도 나처럼 나이 먹은 배우가 그런 자리에 가서 후배들을 위해 박수쳐 주는 게 의미 있지 않냐고 이재용 감독이 그럽디다. 그 말 듣고 보니 맞는 말 같아서 호주에서 시상식 끝나자마자 홍콩으로 경유하는 비행기를 타고 꾸역꾸역 들어와서 청룡영화제 시상식에 갔어요. 내가 참 젊은 사람들 말을 쓸데없이 잘 들어(웃음). 그런데 정말 이 나이에 그 일정을 소화하는 게 쉽지는 않더라고요. 어찌나 힘들던지 죽는 줄 알았어요. 영화제 끝나고 이틀을 앓았죠. 무리하느라 병나서."
―1971년에 영화 '화녀'로 청룡영화상 여우주연상을 받으셨죠.
"맞아요. 45년 전이죠. 그러고 보니 아쉬운 게 하나 있긴 하네요. 내가 그때 청룡상 받을 때 소감이랍시고 '엄마, 나 상 탔어!' 이랬어요. 어른들이 무슨 수상 소감이 그 모양이냐고 야단쳤어요. 그런데 지금 우리 엄마가 93세예요. 몸이 아파서 실버타운에 계세요. 내가 이번에 청룡상 받았다면 테레비 보고 있을 늙은 엄마에게 그 말 한 번 다시 해 드리고 싶었어요. '엄마, 나 상 탔어!' 그거요. 돌아가시기 전에 그 말을 TV 생중계로 듣게 해 드릴 기회를 놓친 거, 그건 좀 애석하죠(웃음)."
▲데뷔 초 윤여정의 모습.
―기회는 앞으로도 얼마든지 있는걸요.
"글쎄, 나는 나 자신을 있는 그대로 냉정하게 보는 게 좋아요. 나는 나이 먹었고, 우리 엄마도 85세 이후로는 예전에 내가 알던 그 엄마가 아니고…. 그건 엄연한 사실이죠. 이 나이에 내가 무언가를 더 이뤄보겠다, 뭔가를 더 해내보겠다, 그것도 욕심이고요. 그냥 하루하루 열심히 살고 깨끗이 잊어버리는 게 좋아요. 확실한 건 하나인 것 같아요. 인생은 한 번뿐이고, 나는 아직도 살아있다는 것. 그거죠, 뭐!"
"이상한 아이가 탤런트가 됐어"
윤여정의 어머니는 초등학교 양호 선생님이었다. 윤여정이 열살 됐을 무렵에 남편을 여의고 홀로 세 딸을 키워낸 어머니는 윤여정이 본인의 꿈이었던 의사가 되어주길 바랐다고 했다.
"무모하죠…. 당신 꿈을 자식을 통해서 이루려고 하는 거니까요. 아쉽게도 내가 그 정도로 공부를 잘하진 못했어요(웃음)."
19세에 한양대 국문과에 입학하고 등록금 벌려고 방송국에서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TBC '어린이 열차'라는 프로그램에서 사회를 보는 김동건 아나운서에게 선물을 건네주는 일이었다. PD들이 윤여정을 눈여겨보다가 "너 탤런트 시험 한번 쳐봐라"고 했다. "그때만 해도 제겐 탤런트가 이순재 선생님처럼 서울대 나온 인텔리들이 하는 일처럼 보였어요. 탤런트가 되면 엄마를 기쁘게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싶어서 시험을 쳐봤죠(웃음)."
―그런데 덜컥 붙으셨군요. 어머니가 좋아하셨나요.
"아뇨(웃음). 공부해야 되는데 쓸데없는 짓 한다고 싫어하셨죠. 엄마가 이런 나를 자랑스러워하게 된 건 내가 예순 살도 넘어서였던 것 같아요. 모시고 살 때였는데, 손님 한 분이 엄마에게 '따님들이 다 박사인데 큰따님만 박사가 아니네요'라고 말하는 게 들려요. 엄마가 그런데 그 말에 '우리 큰딸은 연기 박사잖아요!'라고 대꾸하더라고요. 그 말 듣고 혼자 웃었죠."
―데뷔했을 때 고(故) 이낙훈씨가 '이상한 아이가 들어왔다'고 그랬다죠.
"어느 날인가 내가 유리창이 큰 복도 앞에 서 있었는데, 신성일 선생님이랑 이낙훈 선생님이 창 너머에서 나를 가리키면서 '쟤야, 쟤!' 하는 게 들리더라고요. 이 선생님이 '이상한 아이가 왔어' 하고 웃는 것도 들리고요. 내가 그때도 전형적으로 예쁘장한 여배우는 아니어서 그랬던 것 같아요. 이낙훈 선생님이 그런 나를 유난히 더 흥미롭게 봐줬던 거겠죠."
―1969년 MBC 드라마 ‘장희빈’에서 장희빈 연기를 하면서 엄청 인기를 끌었고요.
“내가 그때 음료수 ‘오란씨’ 첫 모델이었는데 다음 해에 바로 잘렸어요. 벽에 붙은 내 얼굴 사진만 보면 사람들이 ‘나쁜 년’ ‘밉다’면서 눈동자에 구멍을 뽕뽕 뚫어놨거든요(웃음). 방송국으로 ‘저 나쁜 년 잡으라’고 남자가 뛰어 들어와서 돌을 던지질 않나. 그때 숙종 역할 했던 박근형씨가 그 사람 말려주고 그랬어요(웃음).”
▲1971년 영화 ‘화녀’로 여우주연상을 받은 윤여정. 왼쪽에는 남우주연상을 받은 최무룡이 섰다. /윤여정 제공
1971년 고(故) 김기영 감독은 21세 배우 윤여정을 영화 ‘화녀’와 ‘충녀’에 연달아 주연으로 캐스팅했다. 윤여정은 이 두 편의 영화에서 한국 영화사에 길이 남을 악녀(惡女)를 연기했다. 촬영은 악몽에 가까웠다. 맨손으로 생쥐를 잡거나 계단 위에서 구르고, 물고문을 당하는 장면들이 이어졌다. 윤여정은 “‘화녀’ 찍고 나서는, 앞으로 김기영 감독과 골목에서 마주쳐도 모른 척하고 도망가겠다고 생각했을 정도였다”고 말했다.
―그런데 또 ‘충녀’를 찍었죠.
“김기영 감독이 워낙 쫓아다녔으니까요. 으슥한 골목에 숨어있다가 갑자기 튀어나오면서 ‘미스 윤, 나야’ 이러질 않나(웃음). 이길 수가 없었죠. 그땐 정말 ‘뭐 이런 사람이 다 있나’ 늘 속으로 욕하고 그랬어요. 그러다가 나중에 알게 됐죠. 내가 일생껏 만난 남자 중에서 그분이 가장 머리가 비상한 사람이었다는 걸요.”
―왜 그렇게 윤여정이라는 배우에 집착했을까요.
“몰라. 내가 감독님 말귀를 알아들을 줄 안다고 그랬어요. 나는 ‘쳇, 웃겨’ 그랬고(웃음). 어떤 날은 이래요. ‘남들은 미스 윤이 다 발랄하다고 그러는데 내 눈엔 청승맞아 보여. 그래서 미스 윤을 뽑았어.’ 그때도 속으로 ‘이건 또 무슨 소리야’ 했는데, 나중에 마흔 넘어서인가 내가 나온 방송을 보고 있는데 어떤 장면에서 정말 내 얼굴이 청승맞아 보이는 거예요. 그때 속으로 생각했죠. ‘그분이 내가 못 보는 걸 보셨구나’ 하고요.”
―지금 김기영 감독을 다시 만난다면 뭐라고 할 것 같으신가요.
“미안하다고요. 그땐 여관에서 자기 싫고 밤새기 싫어서 도망가고 화장품 케이스 내던지면서 못 찍는다고 그랬는데, 죄송하다고요. 그리고 제가 지금껏 영화를 하는 이유는, 당신이 그렇게 찍자고 했던 영화를 내가 계속 안 찍었던 것, 거기에 대한 마음의 빚을 갚고 싶어서일지도 모른다고요…. 어머, 근데 뭐야. 내가 왜 이런 쓸데없는 소리를 하나 몰라. 내가 어떻게 김기영 감독을 다시 만나겠어, 응?”
눈물도 후회도 없이
배우 윤여정은 24세가 되던 해에 결혼하고 돌연 은퇴한다. 미국으로 건너가 두 아들을 낳고 13년을 살았다. 그리고 1984년 서울로 돌아왔다. 결혼 생활이 끝나가고 있음을 예감할 무렵이었다. 생계를 위해서라도 연기를 다시 시작해야만 했다.
―복귀가 쉽지만은 않았겠죠.
“처참했죠. 그땐 이혼한 여자가 TV에 나오기 어려웠으니까요. 미국으로 다시 갈까 고민 많이 했어요. 급하면 돈 계산을 하게 되잖아요. ‘미국엔 아직 집이 있고, 두 아들은 미국 시민이니까 고등학교까진 공립학교를 공짜로 보낼 수 있는데, 먹고사는 건 어쩐다…. 나는 타이프도 칠 줄 모르고, 수퍼마켓 계산원 외엔 할 수 있는 일이 없는데, 그 일을 하면 시간당 2달러75센트 버는데…’ 했던 거죠. 답이 안 나왔어요.”
▲영화‘죽여주는 여자’의 한 장면 /조선일보DB
윤여정을 받아준 건 단막극인 MBC 베스트셀러 극장 ‘고깔’이었다. 그 이후로 윤여정은 단역·조역을 가리지 않고 들어오는 대로 연기했다. 김수현 작가와의 만남도 다시 시작됐다. ‘사랑이 뭐길래’ ‘작별’ ‘목욕탕집 남자들’ 같은 작품을 연달아 찍었다. ‘김수현 작가가 윤여정을 편애한다’는 뒷말 듣기 싫어 이를 악물고 혼자 연습하고 또 연습했다. “김수현 작가 드라마 보면 등장인물들이 수저 놓으면서 대사해 보고, 다리미질 하면서 대사해 보고 그러잖아요. 대본만 달달 외우면 나중에 실제 녹화 들어갈 때 정작 동작이랑 엉키면서 대사를 까먹게 돼요. 그렇게 헤매는 거 보여주기 싫어서 혼자 집에서 수저 놓으면서 대사 외우고, 다리미질하면서 대사 외우고 그랬죠. 그런 시간을 통해 연기를 다시 익힌 것 같아요.”
―연기할 때 아이들은 누가 봐줬습니까.
“도우미 쓰고 그랬죠. 우리 (아이들과) 셋이 뜨거운 눈물 많이 흘렸어요. 미국에선 내 손에서 자랐던 아이들이 갑자기 한국에 왔지, 엄마·아빠는 이혼했지…. 우리 애들이 그래서 너무 빨리 늙었어요. 철이 너무 빨리 든 거죠. 한번은 일산에서 촬영하고 밤 10시 반인가 들어왔는데 초등학생이었던 우리 둘째가 뭘 찾아 먹지도 못하고 라면도 끓일 줄 몰라 그때까지 쫄쫄 굶고 있더라고요. 그런 걸 보면 피눈물났죠.”
윤여정 눈가가 순간 붉어졌다.
―재혼 생각을 해본 적은 없으신가요.
“전혀. 한번은 김혜자 언니가 제게 ‘너 외롭지 않니?’ 하고 물어요. ‘응. 나는 외로운 게 뭔지 모르겠어’ 했죠. 언니가 제게 ‘너 안됐다…’ 하더라고요. 그런데 정말 그랬어요. 등 따시고 배불러야 외로움도 아는 거예요. 나는 정말 절박하고 급했어요.”
―그렇게 절박해서 연기를 잘했을 수도 있었을까요.
“맞아요. 절박하지 않았다면, 여유롭게 작품 골라 가면서 연기했다면, 아마도 지금까지 못 했을 거예요. 내가 연기를 얼마나 못하는지, 얼마나 더 배워야 하는지도 절박하니까 알겠더라고요. 한번은 후배 하나가 촬영하다가 내게 그래요. ‘언니, 이런 역할 할 땐 그렇게 깨작거리는 거 아냐. 팍팍 먹어.’ 후배에게 연기 코치 받는게 굴욕적이었죠. 그래도 울 수는 없었어요. 이걸 이겨내고 작품 찍어야 돈을 버니까.”
―목소리 때문에 에피소드도 많았다죠.
“1984년에 복귀했을 때 (탤런트) 박원숙이 ‘저게 무슨 목소리야!’ 그래요. 어떤 후배는 또 내 목소리 듣고 ‘수챗구멍에 물 내려가는 소리 같다’고 그랬대. 첨부터 목소리가 이랬던 건 아니었는데, 미국 공기 맑은 시골에 오래 살다가 스튜디오에서 촬영을 하니까 목소리가 안 나오기 시작해서 그런 것 같기도 하고….”
▲윤여정의 ‘올해의 여성영화인상’ 수상을 축하하기 위해 모인 톱스타들. 이서진·정유미·전도연·김고은·김혜수·강동원·김수철·박해일·최화정이 나란히 섰다.
―그렇게 열심히 달려온 스스로에게 이젠 칭찬해줘도 되지 않을까요.
“예순 넘기고 아들들 다 대학 보내고 독립시켰을 때, 그때 스스로에게 그랬어요. ‘너 애썼다, 고생했다. 이젠 사치 하나쯤 해도 되겠다.’ 그 사치라는 게 ‘그동안은 들어오는 역할 안 가리고 다 했으니, 앞으로는 좀 하고 싶은 것만 하고 살아도 되지 않을까’ 하는 거예요. 그때 이후로는 그렇게 살려고 해요. 하고 싶은 감독하고 작가하고만 일하고, 하기 싫은 건 억지로 안 하고. 그래서 요즘 내 별명이 ‘안 해 윤여정’이에요. ‘만해 한용운’이 아니고.”
남의 말 참 잘 듣는 꼰대
며칠 전 SNS엔 윤여정의 ‘올해의 여성영화인상’ 수상을 축하하기 위해 최화정·김혜수·전도연·김고은·정유미·이서진·박해일·강동원 같은 배우가 모여 파티를 여는 모습이 올라와 화제를 모았다. 윤여정에게 이 얘기를 꺼내자 그는 조금 쑥스러워했다. “네, 뭐 후배들이 고맙죠.”
―주위에 항상 톱 배우나 젊은 감독이 많죠.
“조사해봤어요(웃음)? 나를 싫어하는 사람도 많고, 그만큼 좋아하는 사람도 있겠죠. 그냥 내가 젊은 사람들과 노는 걸 좋아해요. 같이 놀면서 배울 게 많은 젊은 사람들 있잖아요. 이재용 감독, 임상수 감독…, 그런 사람들. 내게 ‘예쁘십니다’ 같은 소리 안 하고 솔직하게 있는 대로 다 말하는 사람들요.”
―뭐라고들 솔직하게 말하나요.
“이재용 감독은 내게 ‘그 피부로 TV 나오는 게 용하다’고 해요. 내가 종종 ‘대학 중퇴했다’고 말하면 임상수 감독은 ‘중퇴가 어딨어요? 고졸이지! 그게 학력 위조예요.’ 라고 하고요(웃음).”
―‘계춘할망’ 찍게 된 것도 그래서라죠. ‘윤여정에겐 이제 도회적 이미지 같은 거 없다’는 제작진 말에 넘어가서요.
“사실 나는 해녀가 내게 안 어울리는 것 아닌가 싶었어요. 그래서 ‘제가 도회적인 이미지도 있고 해서 안 어울릴 것 같다’고 했더니 대뜸 ‘선생님, 이제 도회적 이미지는 다 소진되셨습니다’ 이러더라고요? ‘어머, 재미있는 젊은이네’ 싶어서 한 번 만났죠. 그러다가 계약한 거고요.”
―보통은 그런 말 들으면 싫어하지 않나요.
“나는 남의 말을 귀담아듣는 걸 좋아해요. 이만큼 나이 먹었으니 이제 나도 꼰대죠. 그래도 나는 내가 온전치 않은 사람인 걸 알거든요. 그러니 남의 말을 들어봐야죠. 결정은 내가 해도, 젊은 사람들 말 일단 들어보고 결론을 내려야죠.”
윤여정은 앞에 놓인 와인 마지막 한 모금을 삼켰다. 그러고는 무릎을 털고 일어나며 말했다.
“인터뷰를 내가 두 시간이나 했어요. 이건 기록이야, 기록! 내겐 이제 뭐가 남는 거죠?”
“멋진 기사를 쓰겠다”고 대답했더니 그는 고개를 저었다. “멋진 거 싫어요. 있는 그대로 써주세요. 있는 그대로.”
물론이었다. 포장할 필요가 없는 인터뷰 상대를 만나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니까.
조선일보 송혜진 기자
■ 영화 감독 임권택
▲임권택 감독은 영화 아니면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다. 평생 묵묵히 영화만 찍고 살았다. 요 몇 년간 새 작품을 내지 못한 그에게 슬럼프가 찾아온 걸까. 화순 적벽의 기를 받은 임 감독이 다시 기운을 내서 영화사에 남을 영화를 찍기 바란다.
이훈구 기자 ufo@donga.com
임권택 감독(83)은 영화를 찍을 때 무서우리만치 몰입한다. 2002년 내놓은 ‘취화선’은 조선 말기의 천재 화가 오원 장승업(吾園 張承業·1843∼1897)의 생애를 다뤘다. 이 영화 제작 전 임 감독은 서울 종로구 소격동의 한식집 ‘큰기와집’ 옆이 장승업 생가(生家)라는 말을 들었다. 촬영에 들어가기 전까지 100번 넘게 그곳을 찾아 창가에 앉아 상념에 잠겼다. 그는 때로 흥행에 실패할지언정 영화의 완성도는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취화선은 그에게 세계적인 칸 영화제 감독상을 안겼다. ‘국민감독’이자 거장(巨匠)이라는 호칭을 거저 얻은 게 아니다.
1993년 ‘서편제’가 공전의 히트를 쳤을 때 임 감독과 술을 한잔했다. 꼭 23년 만에 다시 임 감독과 함께 전남 화순의 적벽(赤壁)과 담양의 문화유적을 다니는 1박 2일간 문화풍류 기행을 했다. 여행을 떠나기 전 아침에 그를 봤을 때 늙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여행을 끝내고 닷새 전 다시 만났을 때 그의 몸은 그대로였지만 표정은 밝고 활기찼다. 화순 적벽에서 천제(天祭)를 지낸 뒤 임 감독은 저녁 자리에서 “백 살까지 (영화판에 현역으로) 남아 있을 기를 받았다”는 뜻을 어눌하게 피력한 바 있다.
“화순적벽 天祭의 감동 못잊어”
―조선 10경(景), 호남 제1경이 적벽이라는데요, 거기서 천제를 지냈지요.

▲조선 10경·호남 제1경으로 꼽히는 화순 적벽의 노루목 적벽 풍경.
“가슴이 뭉클했습니다. 젊은 시절 화순 적벽에 가본 일이 있습니다. 그때 이런 장엄한 곳인 줄 모르고 잉어 2마리를 잡아 매운탕을 끓여 먹고 돌아갔죠. 유건과 제복을 차려입고 천제를 치르니 그 감회가 이루 말로는 다할 수 없어요.”
임 감독은 천제를 지낸 일행 중 좌장(座長)으로 사실상 제주(祭主)다. 천제는 20년 가깝게 다산 선생의 추모제를 준비해온 차인(茶人) 한영용이 총괄 기획하고 30년 넘게 차를 공부한 김승희 김애숙 선생이 거들었다.
―많은 사람들에게 천제는 생소한데요…
“저도 천제에 대해선 뭐가 뭔지 잘 모릅니다. 하지만 늦은 봄비가 부슬부슬 내리고 산허리에 안개가 피어오르는 신비로운 적벽의 웅장함은, 참 뭐라고 필설로 형언하기 힘들 정도였답니다. 그때의 감동이 너무 생생해 영원히 잊지 못할 것 같습니다. 언젠가 찍을 영화에서 감동을 피부에 와닿게 재현해낼 수 있을까 모르겠네요.”
이 땅에서 천제를 지내는 곳은 4곳이다. 태백산의 천제단과 강화도 마니산, 지리산의 노고단, 그리고 화순 적벽의 천제단. 3곳은 높은 산꼭대기이고, 적벽만 물가에 있다. 망향정에서 바라보면 천제단은 동복호 기슭의 태아가 엎드려 있는 듯, 건너편 노루목(장항) 적벽을 향해 돌출한 지형의 배꼽 자리에 위치해 있다.
―2014년 내놓은 ‘화장’이후 작품이 뜸한데….
“다음 작품으로 무엇을 할지 머릿속에 없습니다. 지금 대한민국이 힘든 상황인 것 같아요. 그래서 나라를 위하고 고단한 서민에게 힘을 주는 그런 작품을 할 수 있다면, 희미하게 떠오르는 것이 있긴 한데 아직은 말하기가 좀….”
그 시절 모든 사람이 어려웠지만 임권택(경칭 생략)도 젊을 때 험하게 살았다. 7남매(3남 4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고향은 전남 장성, 아버지를 비롯해 삼촌이 모두 좌익이었다. 한밤중 툭하면 형사들이 구둣발로 안방까지 들어와 벽장과 이불까지 뒤졌다. 그는 광주 숭일중 3학년 때 학교를 그만뒀다. 집을 나와 1951년 임시수도 부산에서 막일을 하며 겨우겨우 살아남았다. 벌면 먹고, 못 벌면 굶고, 잠은 거리에서 해결했다.
노숙자들 사이에서 그는 인기가 ‘짱’이었다. “중학생 때 몇 번씩 읽었던 삼국지 수호지와 통속소설을 그들에게 들려주고 소주 한잔 얻어먹곤 했다. 이때 얻은 수전증으로 지금도 거동은 불편하다.” 그러나 수술이나 칼 대는 짓은 않고 불편하게 살겠다고 한다. 아마 불편한 몸이 그의 작품 활동에도 방해가 된 듯하다.
―‘서편제’로 이름을 세상에 널리 알렸는데….
“1962년에 감독으로 데뷔했습니다. 첫 작품인 ‘두만강아 잘 있거라’가 요즘 말로 대박이 났습니다. 그래서 고향으로 의기양양해 갔습니다. 광주의 흥행업자가 요정으로 데려갔는데 그때 처음 악사까지 여러 명 대동한 정식 판소리를 들었습니다. 흥행업자가 돈 자랑을 너무 하는 것 같아 비위가 상했지요. 그때 유명해지기 전이지만 곱사춤의 공옥진 선생도 처음 봤지요. 하지만 판소리는 왠지 마음에 울림이 남아 언젠가는 판소리 영화를 한번 해봐야지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서편제’가 공전의 히트를 기록하는 데 본보도 기여했다. 중앙지 중 본보가 사회면에 임권택의 ‘서편제’를 맨처음 화제기사로 게재한 뒤 손님이 밀려들기 시작했다. 최초의 서울 관객 100만 명 돌파 신기록도 세웠다. 앞서 ‘장군의 아들’ 1, 2편이 연속 흥행에 성공하자 이태원 태흥영화사 사장이 기분이 좋아 보였다. 그래서 “흥행은 절대 안 되겠지만 우리 것 한번 해 보겠다”고 하자 이 사장이 흔쾌히 승낙해 돈벌이와 무관하게 서편제를 찍을 수 있었다.
호국영령의 맑은 기운 느껴져…
―1박 2일 기행 중 가장 인상 깊었던 장면은….
“나는 잘 울지 않습니다. 험한 일을 워낙 많이 당해서 그런지…. 그런데 이틀째인 5일 담양 고경명 선생의 12대 대종손의 생가를 갔을 때 사당(祠堂)에서 추념을 하고 춤꾼인 최용현(치과의사·살풀이춤의 대가 고 정재만 선생·무형문화재 보유자에게서 8년간 배움)의 살풀이춤을 보고 눈물이 났어요. 최 선생이 살풀이춤을 추다 보면 망자의 애환이 속에서 끓어오르는 경우가 많은데 고경명 선생을 추념하며 춤출 때는 아주 맑은 기운이 느껴졌다고 한 말이 너무 가슴에 다가왔답니다.”
임진왜란 때 전라도 의병장으로 6000명을 모아 의병 창의(倡義)를 했던 고경명 선생은 금산전투에서 왜적에게 패해 차남과 함께 순절했다. 대종가(大宗家)는 장손이 12대, 400년 가깝게 이어져야 붙여지는 명예로운 이름이다. 고경명 선생의 후예 고원희 대종손(75)은 눈빛이 형형했다. 사서삼경을 통달한 그의 기억은 비상했다고 한다. 그러나 작년 말부터 가슴을 앓는 지병이 도져 말이 잘 나오지 않는지 그저 눈으로만 답답함을 전했다. 임 감독을 비롯한 일행이 담양의 대종손 생가를 찾았을 때, 고씨 대종가의 어른들이 거의 다 모였다.
‘소년 임권택’의 100세 현역다짐
―고재유 전 광주시장과 중학 동기동창입니다.
“저는 광주 남구의 숭일중을 다녔지만 졸업은 못했습니다. 고경명 선생의 후예인 고재유 전 광주여대 총장과 몇 년 전 동창들과 함께 만났어요. 그때 고 총장이 ‘중학교 때 급장을 한 임 감독은 세계적인 감독이 됐는데, 나는 그 밑에서 부급장밖에 못해 국내의 조그만 지자체장만 했다’고 우스개를 한 기억이 납니다.”
두 사람은 담양과 장성에서 각자 광주 남구의 숭일중까지 도보로 통학을 했다. 광주의 남북에서 두어 시간을 걸어 학교 교문에 도착하면 지친 표정의 두 사람이 마주칠 때마다 미소짓곤 했다고 회고했다.
―고경명 선생 같은 의병장의 순절(殉節)에 관한 영화를 만들 생각은 없으신지요.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호국영령의 얘기를 언젠가는 영화로 만들 겁니다. 제대로 만들려면 제작비가 엄청나게 들 텐데, 나같이 늙은 사람에게 누가 투자하려고 할지….”
그때 여든 셋의 ‘소년 임권택’은 수줍은 표정으로 미소 지었다. 그는 눈이 맑고 순하다. 사슴의 눈처럼 슬픈 빛도 감돈다. 그는 1979년 마흔여섯에 늦깎이로 결혼했다. 신부는 당시 스물여덟의 꽃다운 여배우 채령이었다. 지금도 미모를 유지하고 있는 부인 채령을 1971년 제작한 무술영화 ‘요검’으로 처음 만났다. 당시 채령은 MBC 탤런트 공채 3기로 연기가 뭔지 모르는 햇병아리였다. 우여곡절 끝에 영화 제작을 마친 뒤 헤어졌다가 충무로 길거리에서 우연히 재회해 8년 열애 끝에 결혼했다.
―(부인에게) 광주 양림동 길거리에서 팬들이 몰려 감독님이 길을 못 갈 정도였는데요.
“그날 광주 사는 친지가 전화로 ‘임 감독이 광주에 왔다’고 전화를 해서 ‘화순 담양을 간다고 했는데 그럴 리 없다’고 했더니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사진이 떴다’며 보내더군요.”
부인이 웃으면서 임 감독에게 “그렇게 인기가 많으니 광주 가서 사세요”라고 농담을 건넸다. 그러자 임 감독은 천진한 표정으로 “고민을 해보겠다”고 화답했다. 17년 연하의 부인이 이제 거동이 불편한 그의 보호자가 된 것 같다. 임 감독이 100세까지 영원한 현역으로 영화사에 남을 좋은 영화를 몇 편 더 찍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을 갖게 만드는 눈물이 찔끔 나는 그런 영화를 말이다.
최영훈 논설위원 tao4@donga.com
■ 가수 장사익 이야기
□15개 직업 전전하다 가수 데뷔 장사익에게 '삼포세대'의 길을 묻다
① 마흔 다섯에 가수 데뷔… "내 주름은 웃어서 생긴 거예요"
고교 졸업후 25년간 방황
보험회사·딸기장사·가구 외판원·경리과장…
매제가 하던 카센터에서 잔일 하기도
데뷔 공연 마치고 '행복'을 처음 느껴
날 잘랐던 사장님들조차 반갑고 고마웠다
“人生 배우고 나서 가수 됐기에 내 노래가 먹히는 것”
찔레꽃 노래 만든 사연
장미에 가린 찔레꽃… 사람들이 쳐다도 안봐
내 신세 같아 눈물 쏟아
삼포세대에게…
원하는 분야서 일단 시작
‘10년 뒤는 내 꺼여’하고 하다보면 뭔가 이룰 것
이 남자는 45세에 태어났다. 그는 "만약 아흔 살까지 산다고 가정하면, 앞의 절반은 캄캄한 밤이었고 나머지 반은 대낮"이라고 말했다. 충남 홍성군 광천읍에서 돼지 장수의 아들로 태어난 장사익(66)은 고교 졸업 후 45세까지 15가지 직업을 전전했다. 16번째로 택한 직업이 가수였다. 그는 "노래를 하고 나니 내 인생에 없던 '행복'이란 단어가 떠올랐다. 야, 이게 내 길이로구나 하는 생각을 처음으로 했다"고 말했다. 딸기 장수부터 카센터 직원까지 오락가락하던 그 인생의 진폭(振幅)은 그때부터 잦아들었고, 장사익은 한국 최고의 소리꾼 중 하나가 되었다. 고교 졸업 후 25년간 방황하다가 중년 들어 길을 찾은 그에게서 한국 청년들에게 줄 답안지 하나를 얻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장사익(張思翼)이란 이름은 그의 부친이 작명소에서 지은 것이다. ‘생각하는 날개’라는 뜻일 터이나, 장사익은 “사람이 꼭 이름대로 살게 되더라”며 “나는 45세까지 생각이 날아다녀서 꿈만 꾸고 한곳에 정착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장사익은 지금 듣는 이의 생각에 날개를 달아주는 노래를 부르고 있다. / 김지호 기자
"그냥 지는 늘 이렇게 지내유. 마루에 앉아서 먼 산 쳐다보다가 차나 조르륵 따라 마시고…." 서울 홍지동 그의 집 2층 거실에 마주 앉은 장사익은 익숙한 솜씨로 차를 따랐다. 안동 고가(古家) 대청마루를 뜯어 만든 납작 테이블이 반들반들 빛났다. 그가 찻잔을 들며 말했다. "자, 건배합시다. 가을날에 축배! 참 좋은 날 오셨네."
―항상 "참 좋다, 참 좋다"는 말을 하시네요.
"오늘 하늘 좀 봐요. 1년에 이런 날이 몇이나 되겄어. 그니께 참 좋지. 꽃 하나만 봐도, 좋은 사람을 봐도 참 좋지요. 그러니까 즐거운 거예요. 내 주름은 인상 써서 생긴 게 아니고 웃어서 생긴 거예요. 손녀딸이 '할아버지는 얼굴에 줄이 왜 이렇게 많아?' 하는데, '하도 웃어서 그런겨' 해요."
45세 데뷔…"이미자처럼 55년은 해야 할 텐데"
작년 데뷔 20주년을 맞은 장사익은 올해 데뷔한 지 20년 된 윤도현이나 크라잉넛과 음악 동년배다. 그러나 데뷔 2년 만인 1996년 세종문화회관 대극장을 매진시킨 것을 시작으로 그간 11차례나 같은 곳에서 매진 공연을 열었다. 발끝에서 수액(樹液)처럼 끌어올린 소리를 심장에서 터뜨리는 듯한 그의 노래는 대단한 힘을 발산한다. 지난 3월엔 KBS 특집 콘서트 '이미자 장사익'에서 대선배인 이미자와 합동 공연도 했다. 이미자는 선배 가수 패티김과 함께 TV 프로그램을 한 적은 있으나 후배 가수와의 무대는 처음이었다.
"지는 무임승차죠. 데뷔 20년밖에 안 됐는데 55년이나 된 이미자 선생님하고 공연했으니까요. 이미자 선생님은 진짜 노래를 잘 넘기시는데, 그건 노래를 잘 굴린다는 거거든. 근데 굴리는 흔적이 없어요. 그게 기가 막히다는 거죠. 저두 앞으로 35년은 더 해야 하는데… 그러자면 백 살이더라구요. 허허허."
―60세까지는 TV에 거의 안 나오셨잖아요.
"마흔다섯에 가수가 되고 나서 음악은 비디오가 아니라는 걸 알았어요. 그래서 환갑 때까지는 TV 말고 열심히 공연만 하자 그랬죠. 환갑 넘으면 TV 나와도 사람들이 이해할 것이다, 이렇게 생각한 거죠."
▲나이 66세에 데뷔 21주년을 맞은 장사익은 데뷔 56년째인 대선배 이미자와 지난봄 KBS 무대에 함께 섰다. / 장사익소리판 제공
―어렸을 때부터 노래를 잘했나요.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웅변을 해서 맨날 뒷산에서 목청을 틔웠죠. 고등학교(선린상고)를 서울로 오면서 소풍 때 나가서 노래하고 허니까 잘한다고 해요. 그때 처음 '내가 노래를 잘하나 보다' 생각했죠. 그래서 졸업하고 노래 학원도 다니고 했어요. 사실 그때 싹이 튼 거지."
―그런데 왜 보험회사에 취직했나요.
"아유, 그때는 데뷔하려면 몇 천만원 든다고 했어요. PR도 해야 하고 어디어디 갖다 바쳐야 된다고…. 그리고 얼굴도 이쁘게 생겨야 되는데 그렇지도 못허구."
장사익은 상고 졸업 후 고려생명보험에 입사했다. 군 입대 전 김동아라는 가수의 음반에 '장나신'이란 이름으로 딱 한 곡 녹음한 적도 있다. 벌거벗었다는 뜻(裸身)의 가명이었다. 그러나 김동아 음반이 잘 팔리지 않으면서 그의 노래도 묻혔다. 군 복무 때도 문선대에서 노래를 했던 그가 제대하자 회사는 동해생명이란 회사로 인수·합병돼 있었다. 직업 유랑(流浪)이 이때부터 시작됐다.
"제대한 게 1972년인데 갈 데가 없어서 작은 무역회사에 들어갔어요. 그런데 이듬해 1차 오일쇼크가 오면서 1배럴에 12달러 하던 석유가 24달러까지 올라갔어요. 1년 만에 잘렸죠. 그리고는 여우목도리에 꽂는 핀 만드는 회사에 다니다가 몇 달 만에 나오고, 동생이랑 강릉에서 딸기 장사도 하고 가구 외판원, 연구소 경리과장, 금성알프스전자라고 금성전자와 일본의 합작회사도 다니고, 청계천 전자상가에서도 일하고 독서실도 해보고…. 결국 마지막에 매제(妹弟)가 하던 카센터에서 일했죠. 15가지가 넘을지도 몰라요. 하여튼 세상살이 제대로 했지. 그런데 내 길을 못 찾은 거야. 한참 올라가다가 '이 산이 아닌가벼' 하는 게 연속이었어요."
▲카센터 시절 온갖 직업을 거치며 방황하던 장사익은 1990년 매제가 운영하는 카센터에 취직했다. 그는 “‘인마’라고 부르던 매제를 ‘사장님’이라고 깍듯이 불렀었다”고 말했다. 뒷줄 오른쪽에서 둘째가 40대 초반의 장사익. / 장사익소리판 제공
―매제의 부하 직원으로 일하기가 쉽지 않았겠네요.
"정비 기술이 있는 것도 아니고 맨날 청소하고 주차해주고 커피 타주는 잔일만 했죠. 그래도 좌절은 하지 않았어요. 천성이 낙천적이라서."
―그 카센터에서 서태지와의 인연이 생겼죠.
"서태지 매니저가 차 고치러 자주 왔는데 어느 날 '하여가'에 태평소가 필요한데 태평소 부는 사람이 없다는 거예요. 그래서 '내가 좀 분다' 했더니 나중에 연락이 와서 서태지 공연에서 두 번 태평소를 불었죠. 뭐 나는 그냥 구색이었으니께 서태지하구 친해진 건 아니구."
―그때가 최악의 시절이었다고 들었습니다.
"아버지가 보내주시는 쌀로 밥 짓고 반찬은 김치만 먹고 살았어요. 매제 카센터에서 딱 3년 일했는데 '인마, 인마' 하던 매제에게 '아이구, 사장님' 하고 불렀어요. 나는 완전히 땅바닥에 떨어져 있었어요. 한 달 100만원 받았는데 사업이 잘 안돼서 50만원으로 줄었어요. 그래도 그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었죠."
▲고교 졸업 후 15가지 직업을 전전했던 그는 1992년 카센터에서 퇴직한 뒤에야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시작했다. 바로 태평소 연주였다. 이 태평소가 그를 가수의 길로 이끈 악기였다. / 장사익소리판 제공
내 신세가 찔레꽃 신세
카센터마저 그만둔 뒤 장사익은 이광수 사물놀이패에서 태평소를 불기 시작했다. "이제 할 수 있는 건 이것 하나밖에 없다"는 심정이었고 "태평소라도 열심히 불면 밥은 먹겠지" 했다고 했다. 그때 그는 '찔레꽃'이란 노래를 썼다. "찔레꽃 향기는/ 너무 슬퍼요/ 그래서 울었지/ 목놓아 울었지" 하는 노래다. 그가 무대에서 이 노래를 하면 멀쩡하던 중년 남녀들이 가사처럼 운다. 가수의 노래에 맞춰 눈물 흘리는 것은 묘한 카타르시스를 주는 낯선 경험이다.
"그때 잠실 주공아파트에 살았는데 어느 날 아침에 꽃향기가 진하게 나는 거예요. 빨간 장미가 활짝 피었기에 가까이 가봤더니 장미향이 아니에요. 자세히 보니까 저 안에 숨어있는 찔레꽃 향기였어요. 아유, 눈물이 팍 났네, 그냥. 나도 향기가 있는 사람인데 다들 장미만 쳐다보네. 그러니까 찔레꽃 너나 나나 똑같은 신세다, 그런 생각이 들었죠. 세상에 폼 잡는 놈들은 사실 향기를 내지 않는다고요." 그는 "그런 나의 사연을 노래로 쏟아내면 이상하게 사람들한테 내 마음이 전달되더라"고 했다.
장사익은 무대에서 이런 사연을 구구절절 설명하지 않는다. 다만 그 특유의 탁성(濁聲)에 그 노래가 얹히면 맥이 탁 풀리면서 그냥 울고 싶어진다. '꽃구경'이란 노래를 눈물 훔치지 않고 들을 수 있다면 대단히 이성적인 사람이다. "어머니 꽃구경 가요/ 제 등에 업히어 꽃구경 가요"로 시작하는 노래는 "산자락에 휘감겨 숲길이 짙어지자/ 아이구머니나/ 어머니는 그만 말을 잃더니/ 한 움큼씩 솔잎을 따서/ 가는 길 뒤에다 뿌리며 가네" 하고 이어진다. 그리고 "어머니 지금 뭐 하나요/ 솔잎은 뿌려서 뭐 하나요/ 아들아 내 아들아/ 너 혼자 내려갈 일 걱정이구나/ 길 잃고 헤맬까 걱정이구나" 하고 노래가 마무리되면 객석은 영락없이 눈물바다가 된다.
200석 데뷔 공연에 몰린 800명
장사익을 발굴한 사람은 피아니스트 임동창이었다. 1994년 여름 이광수 사물놀이패의 공연 뒤풀이에서 임동창이 피아노를 치고 장사익이 '대전 부르스'를 불렀는데, 후배 격인 임동창이 "형, 공연 딱 한 번만 합시다" 하고 졸랐다. 그해 11월 서울 서교동의 100석짜리 극장에 하루 400명씩 이틀간 800명이 몰렸다. 간이의자에 입석까지 팔아도 들어갈 자리가 없어 같은 건물 위층에 있는 카페에 대형 모니터를 갖다놓고 공연을 생중계했다.
"첫날 공연을 하고 이튿날 아침 눈이 번쩍 떠지면서 아, 바로 이거구나 했어요. 그때 '행복'이란 것을 태어나서 처음 느꼈어요. 이때까지 먹고살 걱정만 했지, 내가 행복한 일을 찾지 않았구나 한 거죠. 내 노래 중에 '반갑고 고맙고 기쁘다'가 있어요. 딱 그 느낌인 거예요. 엄마 아버지 형제들 친구들, 심지어 나를 자른 사장님, 넘어뜨리고 쓰러뜨린 사람들조차 반갑고 고맙고 기쁜 거예요. 그 사람들이 딱 그 자리에 있어 가지고 오늘의 저를 만든 거예요. 가수 하기 전의 내 사진을 보면 웃는 사진이 없어요. 근데 그 후의 사진은 죄다 웃고 있어요."
장사익의 데뷔 무대를 우연히 본 연극인 손숙은 당시 한 주간지에 "이미자와 조용필만 가수인 줄 알았더니 장사익도 있더라"는 글을 썼다. 당시 장사익에게 자신감을 불어넣어 준 글이었다.
―이른바 '삼포 세대'라는 요즘 젊은이들에게 하고 싶은 말씀이 있겠네요.
"저는 15가지 직업을 돌아다녔지만 항상 떳떳했습니다. 우리 때는 선생님이 취직하라는 데로 무조건 갔어요. 조그만 회사, 공장 가리지 않았어요. 거기서 열심히 해서 사장 된 친구들 많습니다. 지금은 다들 학력이 높아졌죠. 아무 데나 가라고 하면 '나더러 거길 가라고? 난 삼성 아니면 안 가요' 합니다. 내가 독서실 할 때 학생이 150명쯤 있었는데 서울대는 서너 명밖에 못 갔어요. 다들 서울대 가려고 밤 2시까지 공부해요. 그런데 대부분은 못 가요. 그게 현실이에요. 자기 페이스를 알고 자기 페이스대로 가야 돼요. 하고 싶은 분야의 어느 회사든 들어가서 '10년 뒤에 이 회사는 내 꺼여' 하고 일하면 뭔가 됩니다. 지금 스물다섯 살이면 서른다섯 살의 모습을 그리라는 거죠. 지금 당장 삼성에 들어가려니까 힘들고 안 되고 속상한 거예요."
―그런 자세로 일했는데 왜 회사를 그렇게 많이 옮겨 다녔나요.
"그러니께요. 저는 늘 내가 못 배우고 머리가 똑똑하지 않고 못나서 그런 거다, 하고 생각했어요. 그래도 다시 일어설 줄은 알았어요. 죽고 싶다, 못 하겠다 이런 생각은 하지 않았죠. 딱 한 번, 아버지께 '다 관두고 시골 가서 농사짓겠다'고 한 적이 있어요. 아버지가 불같이 화를 내시면서 '꿈도 꾸지 말라'고 하셨죠."
"인생을 알고 나서 가수가 됐다"
장사익의 부친은 돼지 장수였다. 농가마다 키우는 돼지를 축산업자에게 대신 팔아주고 수수료를 받는 일을 했다. 어린 장사익은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음식쓰레기('구정물'이라고 불렀다)를 얻어다가 겨를 섞어 돼지 밥을 주는 일을 했다. 그는 "아버지는 노래보다도 장구를 잘 치는, 아주 흥이 많은 분"이라며 "지금도 아버지를 생각하면 돼지 냄새가 나는데 구수허니 좋다"고 말했다.
―어머니는 어떤 분이셨나요.
"우리 아버지 엄마 모두 무학(無學)인데, 아버지는 성냥개비로 즉석 주판을 만들어서 셈을 기가 막히게 하셨고 엄마는 글도 잘 못 읽는 분이었어요. 엄마 생각하면 '먹으라'는 말만 생각나요. 볼 때마다 밥 먹어라 하구, 화투 치고 있으면 이거 먹어라 저거 먹어라 하구. 근데 엄마가 나 서울로 유학 보내고 딱 한 번 편지를 써서 보낸 게 있어요. 아유, 생각만 해도 웃음이 나네. '볍모가지가 나풀나풀한데 건강 조심허구 맛난 거 사먹어라'면서 용돈을 함께 부쳤어요."
―시(詩)네요, 시.
"그렇죠. 볍모가지가, 이삭이 다 익어서 바람에 살랑살랑 나풀나풀 흔들리는 계절이라는 거죠. 마침 요때네. 추수하기 직전."
―고교 졸업 후 노래 학원 다닐 때 가수 데뷔했더라면 지금 이미자 선생과 공연하는 가수가 돼 있었을까요.
"아닐 거예요. 요즘은 다들 어렸을 때 화려하게 가수로 데뷔하잖아요. 그러고 나서 인생을 배워. 그런데 저는 인생을 배우고 나서 가수가 됐어요. 그러니까 할 얘기가 많아요. 그게 먹히는 거죠. 내가 세상을 모르면 아무리 지껄여도 안 들어요. 요즘 가수 애들 다들 이쁘고 잘생기고 뱅글뱅글 돌고 뒤집어지고 허잖아요. 그러다가 한 2, 3년 되면 다 사라져요. 한때 반짝허는 거지."
―그런데도 아이들 장래 희망에 연예인이 항상 꼽힙니다.
"화려한 것만 보는 거여. 근데 무대 뒤는 엉망이거든. 복잡하고 시커멓고 지저분하고. 정반대의 세상이 무대 뒤에 있어요. 그러니까 맨날 이거(스마트폰)만 갖고 노네. 버스 타고 어디 가다 보면 다들 귀 틀어막고 그것만 쳐다보고 있어. 아니 귀 막고 뭐 하는 거여. 스마트폰이 하느님이여, 뭐여? 그런데 말입니다. 그런 애들 중에 하나가 책을 딱 펴놓고 있으면 그렇게 귀해요. 이건 뭐 인간문화재, 천연기념물 아녀?" 장사익의 노래를 듣는 것은 좀 쉬어가자는 것이다. 뛰지 말고 좀 걷자는 것이다. 그의 노래는 "뭐가 그렇게 바뻐유" 하며 옷깃을 잡아끈다.
다완(茶碗)에 다섯 번이나 더운 물을 채워가며 이야기를 나누고 일어설 때 그는 "짜장면 한 그릇 먹고 가요" 했다. "회사에 가야 해서…" 했더니 그가 말했다. "뭐가 그렇게 바뻐유." 볍모가지가 나풀나풀할 것 같은 가을 오후였다.
② 딱 한번만 하려던 공연에 수백명 몰려… "이미자와 조용필만 가수인 줄 알았더니 장사익도 있더라"
-매제의 부하 직원으로 일하기가 쉽지 않았겠네요.
“정비 기술이 있는 것도 아니고 맨날 청소하고 주차해주고 커피 타주는 잔일만 했죠. 그래도 좌절은 하지 않았어요. 천성이 낙천적이라서.”
-그 카센터에서 서태지와의 인연이 생겼죠.
“서태지 매니저가 차 고치러 자주 왔는데 어느 날 ‘하여가’에 태평소가 필요한데 태평소 부는 사람이 없다는 거예요. 그래서 ‘내가 좀 분다’ 했더니 나중에 연락이 와서 서태지 공연에서 두 번 태평소를 불었죠. 뭐 나는 그냥 구색이었으니께 서태지하구 친해진 건 아니구.”
③ "人生 배우고 나서 가수 됐기에 내 노래가 먹히는 것"
-이른바 ‘3포 세대’라는 요즘 젊은이들에게 하고 싶은 말씀이 있겠네요.
“저는 15가지 직업을 돌아다녔지만 항상 떳떳했습니다. 우리 때는 선생님이 취직하라는 데로 무조건 갔어요. 조그만 회사, 공장 가리지 않았어요. 거기서 열심히 해서 사장 된 친구들 많습니다. 지금은 다들 학력이 높아졌죠. 아무 데나 가라고 하면 ‘나더러 거길 가라고? 난 삼성 아니면 안 가요’ 합니다. 내가 독서실 할 때 학생이 150명쯤 있었는데 서울대는 서너 명밖에 못갔어요. 다들 서울대 가려고 밤 2시까지 공부해요. 그런데 대부분은 못 가요. 그게 현실이에요.
자기 페이스를 알고 자기 페이스대로 가야 돼요. 하고 싶은 분야의 어느 회사든 들어가서 ‘10년 뒤에 이 회사는 내 꺼여’ 하고 일하면 뭔가 됩니다. 지금 스물다섯 살이면 서른다섯 살의 모습을 그리라는 거죠. 지금 당장 삼성에 들어가려니까 힘들고 안 되고 속상한 거예요.”
-그런 자세로 일했는데 왜 회사를 그렇게 많이 옮겨 다녔나요.
“그러니께요. 저는 늘 내가 못 배우고 머리가 똑똑하지 않고 못나서 그런 거다, 하고 생각했어요. 그래도 다시 일어설 줄은 알았어요. 죽고 싶다, 못 하겠다 이런 생각은 하지 않았죠. 딱 한 번, 아버지께 ‘다 관두고 시골 가서 농사짓겠다’고 한 적이 있어요. 아버지가 불같이 화를 내시면서 ‘꿈도 꾸지 말라’고 하셨죠.”
한현우 주말뉴스부장 2015-10-24
□ 2016.01.29 소리꾼 장사익 “내 노래 좋아하는 사람들은 사회에 잘 적응 못하는..."
‘가장 한국적으로 노래하는 소리꾼’ 장사익
2012년 소리꾼 장사익(67)은 전남의 한 마을에서 공연을 앞두고 있었다. 그 지역의 의료 관련 봉사단체로부터 소박한 공연을 부탁받고 흔쾌히 승낙했는데 입소문이 나 지역 주민들까지 수백 명이 몰려 그의 노래를 기다리고 있었다.
공연을 10여 분 남겨놓은 시각, 주최측 사람이 그에게 다가와 말을 건넸다.
“임종을 앞둔 분의 아드님이 장 선생님께 노래 한 자락 불러주십사 부탁드리네요.”
병실에 들어서니 할머니 한 분이 눈을 감은 채 누워 있고 아들이 조용히 그를 맞았다. 의식이 있는지조차 불확실한 환자 곁에서 장사익은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연분홍 치마가 봄바람에 휘날리더라. 오늘도 옷고름 씹어가며 산제비 넘나드는 성황당 길에 꽃이 피면 같이 웃고~.”
그가 노래를 끝내자 갑자기 할머니가 눈을 떴다. 입을 벌린 채 천장 쪽을 잠시 응시하다가 천천히 눈을 감았다. 그러고는 숨을 거뒀다.
“편히 가셨지유. 원래 ‘봄날은 간다’가 일종의 장송곡이거든요. 많은 사람 앞에서 부르는 노래도 의미가 있지만, 하찮은 내 유행가 하나가 세상을 뜨는 분에게 음성공양(音聲供養)을 한 셈이지유.”
“다양하게 펼쳐지는 모습이 마치 인간사 같아요”
남쪽으로 낸 거실 통유리 창으로 햇빛이 쏟아져 들어오고 있었다. 자연스러운 맨발로 스스럼없이 손님을 맞은 장사익은 연신 녹차를 우려내며 말을 이어갔다. 서울 표준말과 고향 충청도 사투리가 섞여서 나왔다.
그의 자택(서울 종로구 홍지동)은 북한산 자락에 자리 잡고 있다. 높이 5m는 족히 될 거대한 바위가 마당 쪽에 직벽으로 기대 있고, 집 맞은편에는 인왕산 뒤쪽이 아주 가까이에 펼쳐져 있다. 무성한 잣나무, 소나무가 지척에 보였다. 그는 15년 전에 이 집을 마련했다.
Q 산 가까이에 거처를 마련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A “지금은 체력이 떨어져 못하고 있지만 3년 전까지만 해도 새벽 3~4시면 어김없이 일어나서 산길을 오르내렸지요. 주말엔 두어 시간 산행을 하고요. 몇 시간씩 걸려 멀리 있는 산을 찾아다니느니 늘 산을 곁에 두고 싶었습니다. 사시사철의 변화를 몸으로 느낄 수 있으니까요. 홍성군 광천이 제 고향인데, 웅변 연습한다고 초등학교 5학년부터 중학교 3학년까지 5년 동안 거의 매일 마을 뒷산에 올라 소리를 질렀거든요. 목청을 틔우기 위해서. 어린 시절부터 워낙 산에 익숙해요.”
Q ‘인자요산 지자요수(仁者樂山 知者樂水)’란 말도 있듯 강이나 바다 같이 물을 좋아하는 이들도 많습니다. 산의 어떤 점에 마음이 끌리는지요?
A “산에 둘러싸여 포옥 파묻혀 있는 느낌이 저는 좋습니다. 마치 부모님 품처럼. 물은 1년 내내 똑같지만, 산은 봄 여름 가을 겨울이 다 다르니까요. 봄은 봄답게 화려하고, 여름은 무성하며, 가을은 나이 먹은 티를 내며 붉게 물들지 않습니까. 겨울은 다 벗어버린 채 황량하지만 가끔은 하얀 눈으로 덮이고…. 다양하게 펼쳐지는 모습이 마치 인간사 같고, 그래서 더 우리에게 친숙한 게 아닌가 싶어요. 게다가 이렇게 산을 끼고 살면 온갖 새와 벌레들 소리, 바람 소리, 빗소리도 선명히 들리지유. 자연을 늘 곁에 놓고 볼 수 있으니 얼마나 좋습니까.”
Q 1995년 <하늘 가는 길> 이후로 <꽃인 듯 눈물인 듯>(2014년)까지 음반을 8집이나 내셨는데, 그중에 산을 소재로 한 노래도 있습니까?
A “<꿈꾸는 세상>(2003)에 실린 타이틀곡이 그렇겠네요. 나도 날개를 달고 하늘을 날아볼까, 하는 가사의 노래지유.”
그는 이 대목에서 나지막이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높고 파란 하늘 푸른 날개 달고 아름다운 세상 날고 싶어요. 맑은 물 흐르고 푸른 산 드높은 그런 세상 꿈을 꾸며 날고 싶어요.”
장사익은 가난한 시골 생활을 벗어나려 서울로 올라왔고, 선린상고 3학년 2학기 때 보험회사 사무직에 취직하며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이후 가구점 직원, 독서실 주인, 카센터 사무장 등 열댓 개 직장을 전전했다. 노래 부르는 게 좋아 퇴근 후엔 짬짬이 낙원상가 음악학원을 다니며 가요의 기본과 샹송 등을 배웠다.
Q 직장 10여 곳을 전전하며 가족에 대한 책임에 ‘밥벌이’로 일을 하면서도 국악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고 들었습니다.
A “동호회와 명인들을 찾아다니면서 단소, 피리, 대금 등을 배웠지요. 마지막 직장을 그만두고는 ‘진짜 해보고 싶은 일을 하겠다’며 남들은 쳐다보지도 않는 태평소에 목숨을 걸었습니다. 한 3년이면 프로가 돼 밥은 먹을 수 있으리라 믿었지유.”
그는 이광수 사물놀이패에 합류해 태평소를 불었고, 공연이 끝난 후 뒤풀이에서 흥이 오르면 곧잘 노래를 불렀다. 그 모습을 본 피아니스트 임동창이 무대에 서보라고 권했다. 1994년 11월, 홍대 근처 100석 규모의 소극장에서 장사익의 공연이 열렸고, 이틀 동안 800명이 들어 매스컴에도 소개됐다. 말 그대로 대박이었다. 그때 그의 나이 46세였다.
Q 서태지, 김건모, 신승훈 같은 20년 후배들이 가요계 정상을 주름잡던 시기에 등장해 ‘트로트풍 대중가요, 판소리, 재즈 등이 혼합돼 있다’는 평을 들었습니다. 본인의 창법에 대해 스스로는 어떻게 보시는지요?
A “요즘 사람들은 뭐든지 한마디로 규정하고 고정화하려는 경향이 강합니다. 구분을 편하게 하기 위해서인데, 과연 그게 타당한 일인가요? 비디오 아티스트 백남준 선생도 별별 퍼포먼스를 다 했잖습니까? 저는 박자를 무시하는 편입니다. 어떤 땐 박자가 아예 없지요. (노래 부르며) 하야~안 꽃, 찔레~꼬~옻~. 박수를 칠 구멍도 없지유. 판소리 ‘아니리’(공연자가 장단이 없이 말로 연기하는 것)에 해당하는 노래도 있습니다. ‘어머니 지금 뭐 허신대유/ 아, 솔잎은 뿌려서 뭐 허신대유’(눈물 없인 들을 수 없는 ‘꽃구경’의 일부분)가 그렇지요. 저는 대중음악을 입체적으로 표현했다고 자부합니다. 국악과 민요를 차용하고, 연극적인 요소도 넣어 가요의 평면성을 넘어섰지요. 대중가요는 우리네 민요와 마찬가지로 사람들의 희로애락을 담은 건데, 그걸 효과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다양한 시도를 한 것이지요.”
▲43세까지 열댓 가지 직업을 전전하던 오랜 기간 동안 장씨는 거의 웃지 않았다. 가수 데뷔 이후엔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지지 않는다. “세상에 나와 이 길이 내 길이구나, 그렇게 사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될까요. 저는 복 받은 인생이지유.”
“조용히 해요, 조용히! 새들이 깨지 않소”
Q 하긴 일반의 예상을 깨는 호흡이 ‘장사익 소리’의 특징이자 강점입니다.
A “자연 현상과 마찬가진 거지요. 날짜대로 봄이 오는 게 아니잖아유. 높고 낮게[高低], 길고 짧게[長短], 세고 여리게[强弱], 물 흐르듯 정취를 맡기는 거지유. 자연스런 호흡과 흐름을 따라가다 보면 노래가 됩니다.”
홍대 소극장 대박을 터뜨린 이듬해 장사익은 1집 <하늘 가는 길>을 발매하며 가수로 정식 데뷔했다. 지금까지도 그의 대표곡으로 꼽히는 ‘찔레꽃’, ‘봄비’, ‘님은 먼 곳에’ 등이 실린 이 음반으로 장사익은 평론가들로부터 ‘가장 한국적으로 노래하는 소리꾼’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Q ‘찔레꽃’이 그러하듯 노래 가사에 신경을 많이 쓰시는 듯합니다. 시에 곡을 붙인 경우도 많구요.
A “가사가 노래에 긴 생명력을 주지요. ‘찔레꽃’은 제가 밑바닥 생활을 할 때 길가에 핀 찔레꽃을 우연히 발견하고 지은 노래지유. ‘별처럼 슬픈 찔레꽃/ 달처럼 서러운 찔레꽃/ 찔레꽃 향기는 너무 슬퍼요/ 그래서 울었지/ 목 놓아 울었지.’ 가난하고 소외받은 나 같은 존재들을 위해 쓴 가사지유. 나도 시를 쓰고 싶지만 공부가 짧아 다른 시인들의 시어를 빌려다 내 노래로 만듭니다.”
그의 노래 중엔 기존 가수들이 발표했던 곡을 리메이크한 것들도 많다. 그는 박자를 파괴한 긴 호흡으로 새로운 ‘장사익 노래’로 만들어 낸다.
“‘이 풍진 세상을 만났으니~’로 시작되는 ‘희망가’ 변주가 그랬듯 옛날 노래도 나름대로 해체시키고 변형시킵니다. 이미자 선생은 ‘헤일 수 없이 수많은 밤을~’(‘동백아가씨’)하고 똑떨어지게 부르지만 나는 엿가락처럼 완전히 늘여서 부르지요. ‘헤~~이이~ㄹ’, 이렇게 부르면 마치 동양화의 여백처럼 느림 속에서도 꽉 차게 되지요. ‘헤’자 하나에 사계절이 다 들어가 있시유.”
동양화 얘기도 나왔지만 그는 무대에서 한복, 두루마기를 고집한다. 2015년 3월에 열린 KBS 창사 42주년 ‘이미자-장사익 특별 콘서트’에서는 생전 처음 턱시도 차림으로 등장했다가 이미자 다음으로 차례가 왔을 때엔 예의 두루마기로 갈아입고 무대에 섰다.
이런 일도 있었다. 산에서 목소리를 다듬는 것이 어느덧 일상이 된 그가 2000년 어느 날 자택 뒷산에서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배 밑바닥에서 끌어올린 커다란 소리를 질러댔다. “아~야~오~.” 새벽 5시였다.
여명의 정적(靜寂)을 깬 소리가 산을 넘어 이리저리 흩어지며 메아리쳐 되돌아 왔고, 그는 만족스러웠다. ‘오늘은 컨디션이 좋군.’ 그때 갑자기 등 뒤쪽에서 버럭, 호통이 들렸다.
“조용히 해요, 조용히! 새들이 깨지 않소.”
나이 지긋한 목소리가 벼락처럼 장사익을 내리쳤다.
“아차, 싶었지유. 수십 년 동안 단 한 번도 새벽 소리 연습이 새들의 단잠을 방해하리라곤 상상조차 못 해봤으니까.”
이제껏 내 소리가 산천초목과 짐승들의 고된 휴식을 깨는 괴성(!)이었다니….
이후 그는 산에서 목청을 돋우는 따위는 일절 금하고 있다. 사진작가가 빛에 민감하듯, 소믈리에가 향기에 가장 예민하듯, 음악인은 무엇보다 소리에 조응(照應)할 수밖에 없다. 자신의 소리가 누군가에겐 애절(哀切)이지만, 어떤 이에겐 소음(騷音)일 수 있다는 사실을 그는 뒤늦게 깨달은 것이다.
여러 소리들에 지쳐 있을 법도 한데 그의 집 마당은 나지막한 음악 소리로 가득하다. ‘지나다 잠시 머무는 새와 바람, 구름을 위해’ FM 라디오를 틀어놓았다고 한다. 아침 6시부터 밤 10시까지, 1년 365일 그는 소리와 ‘더불어’ 살고 있는 셈이다.
▲장씨는 순전히 독학으로 한글 서예를 익혀 10여년 만에 ‘장사익 체’의 경지에 올랐다. 디자이너 이상봉이 그의 한글흘림체 글씨 문양을 입힌 의상을 만들기도 했다.
Q 무식한(?) 질문 하나 하겠습니다. ‘장사익 소리’는 어디서 나오는 겁니까? 목, 가슴, 배, 아니면 온몸입니까? 노래 부를 때 항상 앞뒤로 살랑살랑 율동을 하시던데요.
A “국악은 목에서 소리가 나오는데 저의 경우는 몸 전체에서 소리를 짜서 내지요. 어떤 땐 노래 부르다가 발에서 쥐가 나기도 합니다. 후반부 클라이맥스 부분을 부를 땐 눈앞에서 별이 번쩍번쩍 거려요. 아차, 하고 정신 줄 놓으면 쓰러지게 되지요.”
‘토해낸다’는 표현이 정확히 어울리는 그의 소리는 한 번 들으면 도저히 잊을 수 없을 정도로 흡인력이 강하다. 그의 음반은 대부분 최소한의 반주를 사용한다. 절창 ‘님은 먼 곳에’의 경우 피아노와 어쿠스틱 기타, 북[鼓]만으로 마치 오케스트라 같은 효과를 내고 있는데, 이는 전적으로 그의 목소리가 가진 힘 덕분이다. 오디오 마니아들이 고가의 앰프와 스피커를 고를 때 보이스 출력 상태 체크를 장사익의 음반으로 하고 있는 건 음향기기에 큰돈을 써본 이들은 다 아는 얘기다.
Q 그런 식으로 혼신을 다해 노래를 부르면 목에 무리가 가지 않나요?
A “부담이 가지유. 에너지를 엄청나게 쏟아야 하니까. 지금까지는 가성을 쓴 적이 없는데, 70 넘으면 써야 것시유(웃음). 플라시도 도밍고가 테너 하다가 바리톤으로 내려가는 이유를 알겠다니께.”
“박영석 대장이 고봉 오를 때 그랬듯이
저 역시 하루하루 최선을 다해 살 거예요”
7남매의 맏이로 태어난 장사익은 아들 둘을 뒀는데 전형적인 국악 가족을 이루고 있다. 대금을 부는 두 아들은 국립극장과 정동극장 단원이고, 큰며느리는 가야금 연주자, 둘째 며느리는 한국무용 전공자다.
2015년 9월 그의 고향에서 열린 ‘홍성역사인물축제’에서 공연할 때는 안산시립국악단이 반주를 했다. 당시 동영상을 유튜브에서 찾아서 보면 공연 중반에 그가 “이 무대에 제 손주 어매가 있시유. 얘야, 일어나봐”하며 며느리를 소개시킨 뒤, “며느리랑 이렇게 함께 노래 부르니 좋네유”라며 활짝 웃는 장면이 나온다. 부러울 따름이다.
Q 장사익 소리에서 절절함이 묻어나고, 그 노래들을 통해 아픔을 치유한다는 분들이 많습니다.
A “제 노래 좋아하는 사람들을 가만히 보니까 사회에 잘 적응을 못 하는 분들이 많아유(웃음). 내가 경험해 온 것이 많다 보니 나름대로 해줄 수 있는 얘기가 제법 있다는 거겠지요. 베토벤의 ‘운명’을 들으면 이게 과연 인간이 만든 것일까, 싶지 않나요? 모든 예술이 그러하듯 음악은 사람들을 맑게 하고, 아름답게 하지유. 우리들에게 위안을 주고, 살아갈 힘도 주고.”
Q 2016년 새해가 밝았습니다. 신년 계획은 무엇인가요?
A “세상에 나와서 이 길이 내 길이구나, 그렇게 사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될까요. 저는 복 받은 인생입니다. 노래를 통해 남들을 즐겁게 하고 나 또한 즐겁고. 해가 바뀌었다고 달라지는 건 없지유. 오늘 하루가 미래의 주춧돌이라고 생각하면 하루하루가 정말 중요합니다. 산악인 박영석씨를 죽기 서너 달 전 이 자리에서 봤지유. 말도 별로 없이 조용히 앉아 있던 그가 그럽디다. ‘8,000m가 넘는 고봉을 오를 때 목표는 정상에 두지만 산행 자체는 바로 코앞만 보면서 하는 겁니다. 고작 1m 가기 위해 죽을힘을 다해야 합니다.’ 제가 지금까지 그래왔듯 꿈과 목표를 갖고 오늘 하루를 열심히 사는 거지요.”
‘지당한 말씀’도 누가 하느냐에 따라 울림이 다르다. 식솔을 거느린 가장으로 43세에 날라리를 불겠다며 직장을 나온 남자, 늦깎이로 소망을 실현해 1주일에 2회꼴로 2시간 20분짜리 공연을 한다는 남자가 “다만 오늘 성실히 살아갈 뿐”이라고 말하고 있다.
창밖으로 그가 만든 풍경(風磬)이 울고, 새 한 마리 푸르륵 날았다.
출처 | 월간산 2016년 1월호 글 | 신용관 조선뉴스프레스 기획취재위원
□ 2016.11.20 반갑고 고맙고 기쁘다 장사익
꽃처럼 생겨난 작은 생명이 반갑다. 목말라 지치고 방황할 때 어깨를 내어주던 친구들에게 고맙다. 목 놓아 원 없이 노래하는 인생이 기쁘다. 그의 얼굴이, 고운 주름이 세 시간 내내 이야기했다. 반갑고 고맙고 기쁘다고.
“차를 다섯 잔 마셔야 소통이 된대유.”(웃음)
이쪽을 보면 인왕산 끝자락, 저쪽을 보면 북한산 끝자락. 소리꾼 장사익이 15년째 살고 있는 세검정 집을 찾았다. 천천히 하라며 차를 권했고 함께 가을을 먹자며 대추와 감을 내왔다.
“자연과 가차이 있다는 게 정말 감사한 거유. 시내는 다 회색이잖아유. 여기서 밖을 보면 하늘이 파랄 때가 있고 누럴 때가 있고, 꽃 필 때도 있고 단풍 질 때도 있고 사시사철이 다 있는 기라. 사람 만나는 것도 인연이지만 집 또한 인연인 거지유. 대궐 같은 집이 아니어도 돼유. 마음이 편안하고 피곤을 달래주고 새소리 바람소리 들을 수 있는 집이 진짜 스위트 홈이여유.”
장사익은 젊은 시절 15개 직업을 전전하다 마흔다섯이라는 늦은 나이에 가수가 됐다. 그로부터 22년간 8개 앨범을 발표하며 부르는 본인의 가슴도, 듣는 청중들의 가슴도 뜨겁게 적시는 음악을 해왔다. 그러던 지난 2월 성대에서 혹이 발견됐다.
“앞으로 노래를 못 할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 경비를 할래도, 운전을 할래도 허리가 아파 못 하겠고 막막했지유. 유일하게 내가 할 수 있는 게 노래인 거라. 그래서 이번 공연 제목이 <꽃인 듯 눈물인 듯>인 거여유. 노래 부를 때는 꽃이고, 노래 못 할 때는 눈물이다.”
그는 “노래도 못 하면 아예 세상에 없는 게 낫다는 극단적인 생각까지 했었다”며 “컥” 하고 죽는 시늉을 하면서도 웃음을 거두지 않았다. 특유의 긍정적인 성품 덕분일까. 다행히 수술 결과가 좋았다. 노래할 수 없던 눈물의 8개월을 보낸 그는 지난 10월 다시 세종문화회관 무대에 올라 성공적으로 공연을 마쳤다. 연말까지는 대전, 부산, 대구, 하남, 김해, 광주 등을 돌며 전국투어에 나선다.
수술 후 첫 공연이었습니다.
저한테는 의의가 있는 공연이었죠. 성대에도 근육이 있어요. 60년, 70년 굳어져 온 근육을 도려낸 자리는 몰랑몰랑하단 말이죠. 바람을 내도 약간 흔들릴 거고, 동그란 소리를 내려고 해도 약간 굴곡이 지고, 높은 소리에서 자신이 좀 덜 가고. 그래도 시간이 갈수록 나아질 것 같단 생각이 들어요.
완쾌되신 것처럼 들리던데요. 저는 둘째 날 공연에 다녀왔거든요.
그랬어요? 어땠어요?
첫 소절을 듣자마자 가슴에서 묵직한 게 올라와서 눈에 맺혔어요. 저와는 거의 40년 정도 차이 나는 가수의 노래고, 서로 살아온 환경과 역사가 너무나도 다를 텐데 왜 이럴까 생각하게 되더라고요.
젖먹이 애기들 있잖아요. 말도 못하는 두 살 애기들. 얘들도 우리하고 똑같이 느끼는 거라, 싫고 좋고 화나는 것들이 그대로 리트머스 시험지처럼 다 나타나요. 다만 섬세하지 않을 뿐이지. 자기가 좋으면 시키지도 않았는데 춤추고 그러잖아요. 싫으면 울고요. 나이 먹은 사람이나 안 먹은 사람이나 좋으면 좋은 거고 싫으면 싫은 거예요. 그게 음악 속에 다 들어 있지요. 클래식은 가사도 없고 우리 정서에도 안 맞지만 이 가을에 들으면 뭔가 모르게 끓는 게 있잖아요. 제가 미국 가서 미국말로 노래하는 게 아니거든요. 한국말로 하는데 내가 슬프게 부르면 그들도 뭔가 슬프게 느끼고, 내가 빨갛게 부르게 그들도 뭔가 붉게 생각해요. 사람들 느낌은 다 똑같은 거예요. 인생은 꽃일 때도, 눈물일 때도 있어요. 그걸 내가 뱅글뱅글 계속 노래하는데 같이 들어주시고 울어주는 분들이 있지요. 요즘은 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도 울지도 않잖아요. 옛날에는 막 곡을 하고 울었는데 말이죠. 그런데 이 하찮은 대중음악을 듣고 사람들이 눈물을 흘리니 이게 얼마나 멋있는 일이에요? 한번 신나게 울어젖히면 개운해요. 노래, 예술의 힘이죠.
노래에 죽음에 관한 이야기가 많은데 슬프지만은 않고 뭔가 위안이 됩니다.
한(恨)이 맺히면 원(怨)이 된다고 해요. 원한이라고 하죠. 한을 그냥 갖고 있으면 안 돼요. 풀어줘서 그게 흥이 돼야 해요. 셰익스피어만 봐도 진정한 희극은 비극 속에서 나온다잖아요. 제 소리판은 앞에 무거운 노래, 뒤에 가벼운 노래를 해서 플러스, 마이너스, 제로가 되게 해요. 극장 들어가기 전에는 마음이 심란한데 공연 보고 나면 맑아지고, 다시 또 세상에 나가서 그림을 그릴 수 있게 되고. 그래서 한번 울고 또 웃고 ‘개운하네’, ‘사는 게 재밌네’ 하시길 바라는 거죠.
그저 자연의 호흡대로
장사익은 가수라 불리지 않고 소리꾼이라 불린다. 공연도 콘서트가 아니다. 소리판이다. 대중음악을 하는 사람에게 우리의 소리를 하는 사람이라는 칭호가 붙은 바탕에는 호흡이 있었다.
장사익의 음악을 들으면 ‘이것이 우리의 말이고 우리의 소리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
제 음악이 지금의 모습이 된 계기가 있어요. 60년대 말에 유행가를 한 3년 배우고 또 나이 들며 국악도 배우고 클래식도 듣고, 그 모든 게 다 쌓인 거긴 하겠죠. 그런데 프리 재즈의 1인자인 김대환 선생님께 들은 한마디가 내 노래를 변화시켰어요. 저보고 노래를 해보래서 했는데 “너 박자 맞추지 말고 해봐” 그러시더라고. 다시 산토끼를 불러보래서 했는데 또 그래요. “너 속으로 박자 세고 있잖아.” 그때부터 박자를 해체시킨 노래를 했죠. ‘찔레꽃’ 같은 경우도 박자가 없잖아요. 전부 그냥 호흡대로 가는 거예요. 그런 식으로 다른 사람이 하지 않는 모습으로 노래를 하게 됐죠.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져서 박자가 안 맞는 건 줄도 몰랐어요.
그게 중요한 거예요. 저는 40~50년 전부터 부르던 ‘님은 먼곳에’, ‘봄비’, ‘대전 블루스’ 같은 옛날 노래도 많이 하는데 내 몸에 맞게 불러요. 리바이벌도 뭔가 똑같으면 안 돼요. 그러면 이미테이션 가수가 된단 말이죠. 카피해봐야 의미가 없는 거예요. 오리지널이 있지만 다른 생명력을 줘야 하는 거죠. 그렇지 않으면 할 이유가 없어요.
우리 악기와 서양 악기를 함께 사용하는데 동서양의 구분이 무의미하다고 느껴질 정도로 잘 어우러집니다.
그것도 배려예요. 노래하는 사람의 음악적인 배려. 보통 가수들 보면 사운드가 똑같아요. 그런데 제 음악에서는 주인공이 계속 달라져요. 트럼펫이 주인이고 기타가 주인이고 해금이 주인이고 이런 식으로 변화를 주면서 노래를 엮어나가죠. 한국적인 것과 한국적이지 않은 것이 모여 음악으로 표출될 적에 새롭죠. 또 외국 사람에게도 다가갈 수도 있고요. 그리고 악기 하는 친구들이 뒤에서 두두둑 소리북을 치든지 추임새를 넣어요. 같이 만들어가는 음악인 거예요. 그리고 나는 공연할 적에 스모그 같은 거를 일절 안 피워요. 연기 피우면 멋있죠. 하지만 맑고 깨끗한 그대로, 그대로가 좋아요.
앞으로 조금 더 이렇게 소리를 내고 싶다, 이렇게 노래하고 싶다는 욕심도 있나요?
이번에 쉬는 동안 소름 끼치는 노래를 들었어요. 지금은 죽고 없는 멕시코 여가수가 90살 넘어 부른 노래였는데, 아 그 언니가 내가 부르고 싶은 대로 부른 거예요. 노래를 압축해서 불렀어요. 아직 나는 힘이 있으니까 테크닉으로, 파워로 노래를 부르잖아요. 그런데 자꾸 힘이 달릴 거란 말이죠. 자연 그대로 늙은이면 늙은이답게 해야 해요. 호흡이 짧은 대로 음이 안 올라가는 대로. 여든 살, 아흔 살 완전히 꼬바랑 할아버지 돼서 지팡이 짚고 읊조리면서 노래한다고 쳐봐요. 얼마나 멋있어요. 진짜 노래란 말이죠. 바로 그런 노래를 계속 할 거예요. 그러려면 빠지는 힘과 반비례해서 공력을 더 길러야 해요. 우리나라 최고의 무용가 조갑녀 선생님이 마지막 춤을 나한테 줬어요. 휠체어 타고 와서 딱 서서 손 하나 탁 올리고 발 한 번 움직이고 앉은 거예요. 기가 막혔어요. 딱 1분으로 지구가 무너지는 춤을 추신 거죠. 저도 그런 노래를 하려고 해요. 그러니 나이 먹는 게 얼마나 재밌는 거예요?(웃음) 그러다 탁 가면 얼마나 재밌어요. 그게 바로 삶의 재미인 기라.
나는 언제나 뜨거운 여름
지금까지의 인생을 돌아봤을 때 가장 힘들었던 시기가 언제냐고 묻자 그는 맨날 힘들었다고 답하며 또 한 번 웃었다. 그리고 덧붙였다. 힘들고 더운 계절에 성장하는 것이라고.
“어느 분이 저한테 그러더라고요. ‘당신의 계절은 가을일 것’이라고요. 저는 ‘아닙니다. 한여름입니다’ 그랬어요. 금년 여름에 얼마나 힘들고 더웠어요. 하루하루가 전쟁이었죠. 그런데 실은 여름에 모든 식물들이 성장을 해요. 봄에 싹이 나와 꽃을 피우면 그 꽃이 진 자리에 열매가 맺혀서 여름에 크는 거죠. 우리는 하루하루 여름처럼 힘들게 살아요. 그렇지만 그 여름은 진행형이란 말이에요. 가을에 진행을 멈추고 겨울엔 죽는 거라고 할 수 있죠.”
우리 모두 뜨거운 한여름을 살아내고 있는 거군요.
저는 내일모레 칠십이지만 노래를 앞으로 계속 해야겠다는 마음으로, 태양빛이 뚝뚝 떨어지는 여름이라고 생각해요. 모든 사람들이 직장생활을 하면서 짜증 나, 때려치우고 싶어, 죽고 싶어 그러잖아요. 실은 그 자리를 백만 명이 호시탐탐 노리고 있는 걸 몰러. 그리고 그 자리가 얼마나 나한테 꽃방석인지 모른다고. 힘든 시기가 무수히 많지만 그건 다 핑계예요. 그 자리가 고되고 힘들어도 나한테는 꽃이라고 생각해야 해요.
젊을 때도 그렇게 생각했었나요?
창피한 얘기지만 맨날 잘려서 15군데에서 직장생활 했잖아요. 그때 술, 담배를 했으면 저는 서울역에 있는 숙자 형들하고 있어야 돼요. 그런데 그때 나는 ‘내가 부족해서 그래’, ‘내가 못나서 그래’ 하고 오뚝이처럼 일어났어요. 가고 넘어지고 또 가고 그랬죠. 힘없이 넘어져서 헤어나지 못했다면 오늘 같은 시간들이 안 주어지죠. 항상 긍정적으로 생각해야 해요. 나보다 더 힘든 사람들이 있어. 나는 행복한 거여. 회사 일도, 높은 사람이 뭔가 해 오라고 주는 것에 짜증을 내면 안 돼요. 높은 사람은 분명 얘가 능력이 있으니까 주는 거란 말이죠. 실패를 한다 해도 하나의 경험으로 공부가 돼버려요. ‘좋아, 내가 이 회사 10년 안에 접수하겠어.’ 이런 마음을 가지고 해봐요. 그런 마음으로 살면 이 세상이 내 것이 되는 거예요. 힘들고 어렵지만 생각을 바꾸면 이 세상이 그렇게 흥미롭고 멋있을 수가 없어요.
그런 생각으로 살아왔으니 인상이 이렇게 좋으실 수밖에요.
저는 많이 웃어서 주름살이 많이 생긴 거예요. 주름 예쁘다는 얘기를 몇 번 들었죠. 세상을 살아가는 마음가짐에 따라 표정이 나오는 거예요. 애기들 네댓 명이 있는데 사탕을 선물로 주려 한다 생각해보세요. 생글생글 웃는 놈. 인상 쓰고 있는 놈, 누구한테 주겠어요. 그게 복인 것이죠. 주름은 원래 흉한 것인데 나이 들어 ‘저 주름 아름답네’ 이런 소리 들으면 얼마나 좋아요. 저는 방송 나갈 때 언니들이 화장해준다고 덤벼도 “쫓아오지 마” 그래요. 자연 있는 그대로가 최고예요.
시를 훔쳐 만든 노래들
장사익 음악이 사랑받는 이유 중 하나는 가슴을 적시는 아름다운 노랫말 때문이다. 그가 만든 노래 30여 곡은 전부 시를 가사로 옮긴 것인데 대표곡 ‘찔레꽃’과 ‘하늘 가는 길’, ‘꿈꾸는 세상’, ‘반갑고 고맙고 기쁘다’는 그가 직접 썼다. 나머지는, 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시인들의 시를 훔친 것이다.
시를 읊조리면서 곡을 만든다고 들었습니다.
예를 들어서 ‘아버지’라는 노래는 시이면서 하나의 뮤지컬 같기도 하죠. 클래식에서 곡을 차용했고 또 ‘아니리’라고 하는 판소리의 사설도 넣은 거예요. 솔직히 다 카피죠. 그래서 나는 작곡이라는 말을 안 하고 엮음이라고 해요. 배웠던 국악, 들었던 클래식을 엮는 식으로 노래를 만들어요.
시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가 있었나요?
저는 원래 애가 진득하니 있지를 못해서 소설 같은 거를 잘 못 봐요. 그런데 시는 함축성이 있잖아요. 제가 좋아하는 부부 작가인 조정래 소설가와 김초혜 시인을 가끔 함께 만나는데요. 조정래 선생님이 막 이거는 뭐고 저거는 뭐고 5분 동안 얘기하셔요. 그러면 가만히 듣고 있던 김초혜 선생님이 ‘이거는 이거 아니야’라고 한마디로 함축시켜버려요.(웃음) 시인들은 단어 하나에 목숨을 건다고 하잖아요. 시에는 아름다운 시어가 있고, 깊고도 넓은 세상과 자연에 대한 체험이 함축적으로 들어가 있어요.
그런 시를 가사로 쓰니 노랫말이 안 좋을 수가 없죠.
저는 우리나라의 대중음악도 업그레이드돼야 한다는 생각이 있었어요. 클래식은 몇백 년을 듣고 즐기고 있잖아요. 뭔가 아름다움이 있고 우리를 위안해주고 즐겁게 해주니 오륙백 년의 생명력을 갖는 것이죠. 우리나라 대중음악은 유행가라고 하는데 특히 아이돌 노래는 거의 생명력이 없어요. 가사 보면 뼈가 타는 이 밤이 어쩌고 그러잖아요.(웃음) ‘이 맑은 가을 햇살 속에 누구도 어쩔 수 없다. 저 빨간 감처럼 철이 들 수밖에는.’ 이 얼마나 계산 없이 단순해요. 이런 것이 기막힌 것이에요. 아이돌 스타들, 애기들 다 얼굴도 예쁘고 춤도 잘 추고 코리아 팝이라고 하는데 사람들이 가수 이름은 알아도 무슨 노래인지는 몰라요. 본질이 없고 껍데기만 있는 거죠. 저는 노래를 잘 못 부르고 잘 못 만들더라도 노랫말은 좋아야겠다고 생각해서 처음부터 시를 100% 차용했어요. 이번에 고무적인 게 밥 딜런이 노벨상을 받았잖아요. 얼마나 반가운지 감히 동지를 만난 것처럼 기뻤어요. 가곡들도 시를 노랫말로 많이 하지만 대중성 없이 발표하고 끝나는 경우가 많잖아요. 시도 노래예요. 아무리 좋은 시라도 덮어놓으면 끝이죠. 저는 시로 만든 음악이 널리 알려지고 불려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이제 많은 사람들이 알아요. 되게 재밌죠.
하나와 하나가 만나 백이 되는 인연
바다 그리워 깊은 바다 그리워
남한강은 남에서 흐르고 북한강은 북에서 흐르다
흐르다가 두물머리 너른 들에서
남한강은 남을 버리고 북한강은 북을 버리고
아 두물머리 너른 들에서 한강 되어 흐르네
아름다운 사람아 사랑하는 사람아
우리는 서로 만나 무얼 버릴까
―이현주 시, 장사익 곡 ‘우리는 서로 만나 무얼 버릴까’
통 아내에 대한 이야기는 잘 안 하시네요.
네. 제가 잘 않죠. 좋은 인연은 어디선가 만나요. 친구 자녀들이 결혼식 할 때 제가 그런 얘기를 해요. 남자와 여자를 더하면 둘이잖아요. 어떤 사람들은 둘은커녕 하나도 안 되고 마이너스가 되는 사람들이 있어요. 상극이죠.(웃음) 그런데 둘이 만나 열이 되고 스물이 되는 사람들이 있어요. 내가 언덕배기를 리어카를 끌고 올라간다고 해봐요. ‘여보 내가 뒤에서 밀고 있어’라는 말만 들어도 술술 올라간단 말이죠.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오히려 리어카를 잡아당기는 사람도 있어요.(웃음) 좋은 인연을 만나면 좋은 음악도 만나고 사람이 풍성해져요. 우리는 하나와 하나가 만나 둘인데 열이 되고 스물이 되고 백이 되고 그래요.(웃음)
노래하시는 모습만 봐도 알 수 있겠네요. 정말 두 분이 만나 백이 된 것 같아요.
‘우리는 서로 만나 무얼 버릴까’를 지은 분이 이현주 목사라고 아주 도사 같은 분이에요. 교회도 없이 산속에서 공부를 많이 하며 살아요. 남한강, 북한강에서 남 자 버리고 북 자 버리니까 큰 한강이 되는 거 아니에요. 이 얼마나 기가 막혀요. 결혼할 때 돈 보고 배경 보고 그건 백전백패잖아요. 그러나 서로의 마음만 보고 서로가 서로를 위해주면 백이 되고 이백이 되고 엄청나게 크게 된단 말이죠. 서로 처가에 시댁에 돈이 있고 없고 그걸 보는 게 아니에요. 마음만 맞으면 우리 지금은 라면 먹지만 십 년 후에 큰집 한번 사자, 그러는 거죠.
그렇게 결혼하셨겠죠?
아무것도 없이 결혼할 때 이 금반지 딱 하나 했어요. 우리가 세상 사는 게 길어야 백 년이에요. 지금 사는 사람들 백 년 있으면 다 죽어요. 밖에 있는 저 바위는 수백억 년 전에 생겼을 거 아니에요. 우리를 먼지처럼 우습게 보겠죠. 우리가 하루살이 보는 것처럼요. 서로 사랑하고 위하기에도 부족할 시간이에요.
요즘 노후준비에 대한 내용을 취재 중인데 금융계통 종사자들이 그런 말을 하더라고요. 실은 돈보다 마음 맞는 친구와 내가 재미있게 할 수 있는 일이 더 중요하다고요.
저는 10년 전부터 한글을 썼어요. 공연 팸플릿, 시디, 명함도 제가 쓴 글씨고 가끔 간판 같은 것도 써주죠. 친구들 자녀가 결혼할 때 액자를 해서 주기도 하는데 그렇게 좋아해요. 문학이든 그림이든 사진이든, 무언가 꿈을 가지고 10년만 매진하면 일이 될 수 있어요. 지금 은퇴하는 사람들 50대 중반 정도잖아요. 먹고사느라 직장 다니고 가정 이룬 것은 누구나 보편적으로 하는 거예요. 그거 말고 이 세상에 나와서 진짜 하고 싶은 일을 찾는 게 좋아요. 그런데 금방 승부를 보려고 하면 안 돼요. 저 같은 경우도 직장생활과 별개로 웅변하고 노래 배우고 국악 배우고 클래식 듣고, 이 모든 것이 나도 모르게 쌓인 것이죠. 나이 마흔여섯에 노래를 하게 된 게 기적 아니에요? 집 앞부터 100m 아래까지 365일 매일 쓸고 닦는다 생각해봐요. 그러면 뭔가가 나와요. 그런 마음으로 살면 누가 칭찬을 하건 욕을 하건 내가 하고 싶어 한 일이니 아무런 상관이 없어요. 얼마나 멋있어요? 그게 꽃 피는 거예요.
사진 안규림
■ 데뷔 30주년 ‘보컬의 神’ 이승철
2016.07.05
지난 2일 올림픽체조경기장에서 열린 이승철의 ‘무궁화 삼천리 모두 모여랏’ 서울 공연에서 그는 이렇게 운을 뗐다. “제가 가수를 시작할 때만 해도, 이 직업의 수명은 서른이면 끝난다고들 했어요. 그런데 30년째 하고 있네요.” 30여년 전 1985년 말 록밴드 부활의 보컬리스트로 음악계에 첫발을 내디딘 그에게 열광했던 10~20대 소녀팬들은 40~50대 중년 여성이 됐고, 이들은 또 10~20대의 아들딸과 함께 공연장을 찾았다.
▲가수 이승철. /이경호 영상미디어 기자
30년동안 바뀐 건 팬뿐이 아니다. 홍안의 미(美)청년은 어느새 검게 그을린 아저씨가 됐다. ‘희야’ ‘안녕이라고 말하지 마’ ‘그런 사람 또 없습니다’ ‘서쪽 하늘’ ‘네버엔딩 스토리’ 등 두 시간이 넘는 공연에서 다 소화하기 힘들 만큼 히트곡이 쌓였다.
사고와 스캔들로 사람들 입에 오르내렸던 ‘악동’이었지만 최근에는 교도소 재소자 합창단, 대안학교 청소년 합창단, 탈북자 합창단을 이끌면서 매년 아프리카 차드에 공연 수익금 중 일부를 보내 학교를 짓고 자선 사업으로 신문 지면에 나온다. 쨍쨍하게 울리던 초고음(超高音)에서 힘을 살짝 빼자 그 여유는 인생에도 함께 찾아왔다.
서울 공연을 앞두고 남산 그랜드 하얏트 서울에서 만난 이승철은 반팔, 반바지에 운동화 차림이었다. 체력 관리를 위해 주 5일 유산소 운동을 한단다. 공연을 앞두면 매일 마시던 술도 끊고 식이조절에 돌입한다. “무대에 올라가는데, 턱선 정도는 만드는 건 예의이기 때문”이란다. ‘슈퍼스타K’ 같은 오디션 프로그램에선 독설로 주목받았지만, 실제로는 입을 세 번 열 때마다 한 번은 좌중을 웃기는 달변이었다.
―공연 앞두고 운동을 하나?
“체력 관리를 해야 하니까. 평소에 워낙 많이 먹는데다, 매일같이 술을 마신다. 5㎏ 뺐고, 앞으로 2㎏를 더 뺄 거다.”
―1년 내내 공연 중인 것 같다.
“상반기, 하반기, 크리스마스 세 차례 한다. 1년에 40회 정도 하는 것 같다. 지난 30년간 했던 공연이 2000회는 족히 넘는다. 공연을 할 때마다 처음 오는 관객에게 손을 들어보라고 하면 90% 이상이다. 언제나 새로운 관객을 만나는 셈이니 공연을 매번 똑같이 해도 된다는 뜻인데, 내가 지겨워서 안 된다. 아이디어가 고갈될 때까지 공연하고 싶다.”
▲이경호 영상미디어 기자
―이번 공연 제목이 ‘무궁화 삼천리’다.
“부제가 ‘마라에서 울릉까지’다. 30주년을 맞아 삼천리 방방곡곡을 다 다녀보자는 거다. 하반기에 마라, 울릉, 태백, 소록 등 문화 소외 지역에서 무료 공연을 할 예정이다. 오랜 숙원이었다.”
―히트하진 못했지만 아끼는 ‘명곡’이 있는지.
“난 무조건 히트한 곡이 좋다. 셀린 디온 공연에 갔을 때 내가 모르는 노래 나오면 지루하다. 히트곡 많은 가수일수록 공연에서 유리한 게 당연하다. ‘희야’ ‘그런 사람 또 없습니다’ ‘네버엔딩 스토리’ 같은 노래는 전주만 나와도 청중들 반응이 확 온다.”
―데뷔 때부터 30년이 지난 최근까지도 히트곡을 낸다. 노래 실력, 그리고 노력 덕분일까?
“노래 실력과 노력은 기본이지 자랑할 게 아니다. 특히 노래 실력은 가수라면 누구나 갖고 있어야 한다. 오랫동안 정상을 지키려면 시련을 이겨내는 순간이 있어야 한다. 스캔들이나 주변의 반대, 건강 문제 등은 언제나 있기 마련인데, 그것을 넘길 수 있는 힘을 가진 사람들이 있다. 그건 재능일 수도, 운일 수도, 업일 수도 있다.”
―시련을 어떻게 이겨냈나?
“안 좋은 일 있으면 ‘노래로 증명하라’는 조언을 누가 해주더라. 결국 내가 갖고 있는 걸로 돌파하는 수밖에 없다. 방송 출연정지 당했을 때 5년 동안 언더그라운드 생활 하면서 공연만 했다. 라이브가 튼튼하다는 얘기가 그때 나왔고, 롱런의 밑바탕이 됐다.”
▲지난 2일 서울 잠실 올림픽체조경기장에서 열린 이승철 콘서트 ‘무궁화 삼천리 모두 모여랏’. 10대부터 60대까지 다양한 연령의 청중들이 이승철 노래에 열광하고 있다. /이경호 영상미디어 기자
―교육자 집안에서 태어났다. 가수 될 때 집안 반대는 없었나?
“할아버지가 설립한 학교에 다녔고, 학교 이사장이 삼촌, 학생 주임이 아버지였다. 사촌 형제·자매들을 다 합치면 80명 정도인데, 다들 서울대 갔다. 나만 빼고. 아버지가 ‘안녕이라고 말하지 마’ 히트하기 전까지는 집안 행사에 데려가지 않으시더라. 그런데 지금은? 무슨무슨 모임만 있으면 제발 좀 와달라고 아우성이지.(웃음)”
―운(運) 같은 거 말고 진짜 비결이 있을 것 같은데.
“어려운 일 있었을 때 (음반) 제작사 사장이 이별을 고하더라. 홀로서기를 해야 했다. 아침 7시부터 LP랑 ‘박카스’ 들고 방송국 PD와 언론사 음악 기자들을 직접 다 찾아다녔다. 그때부터 소속사에게 휘둘리지 않고, 내가 하고 싶은 걸 다 한 게 비결이다. 돈에 구애받지 않고 공연에서 하고 싶은 것에 다 투자했고, 그게 쌓이면서 지금 이 자리까지 오게 된 것 같다.”
―아직도 혼자 다 하나?
“인생 매니저가 생겼다. 아내다. 결혼하면 활동에 지장이 생긴다는 아티스트들도 있지만, 나는 그 반대다. 혼자서 결정할 때보다 둘이서 같이 상의해서 결정하는 게 낫다. 아, 상의가 아니라 컨트롤을 당하고 있다. 컨트롤 당하는 게 너무 편하다. 음악에만 집중할 수 있어서.”
―어느 정도까지 컨트롤 당하고 있나?
“회사 운영부터 의상까지 다 한다. 나는 아내가 사주는 대로 입는다, 속옷까지. 봉사 활동을 많이 할 수 있는 것도 다 크리스찬인 아내 덕분이다.”
―두 딸에게도 조종당할 것 같다.
“딸 아빠들은 다 그렇다. 대학생인 첫째는 원래 속이 깊고, 사춘기도 안 겪었을 만큼 속을 썩인 적이 없다. 둘째는 아홉 살인데 나 닮아서 예체능에 뛰어나다. 수영, 발레, 노래 다 잘한다. 학교를 어디 보낼지 고민 많이 했다. 중국 상하이에 있는 영국 학교에 보내려고 직접 다녀오기도 했고, 뉴질랜드까지 답사도 갔다. ‘불의 고리’라 포기했지만.(웃음) 지금은 한국에 있는 사립 초등학교에 다닌다.”
―30년 후배인 청년들에게 한마디 해달라.
“직업에 귀천이 없고 전문성과 창의성을 최고로 치는 시대다. 근데 1만 시간의 법칙을 실천한 사람은 의외로 많지 않다. 자신이 하고 싶은 거, 창의성을 발휘할 수 있는 걸 갖고 1만 시간의 노력을 먼저 해보는 건 어떨까? 물론 희망도 있어야지. 내가 홀로서기를 할 때 가졌던 게 바로 희망이었다.”
변희원 기자 차소현 편집
■ “난 보수 지향하면서 헤비메탈 듣는 개그맨”
2015-06-29 월간조선
▲이윤석의 서가는 본 중 드물게 소설책이 거의 없는 서가였다. 인문과학이나 자연과학 서적으로 채워져 있었다
‘아니, 그렇게 깊은 뜻이~.’ 지금으로부터 스무 해도 더 전이다. 1993년 서울대와 연세대, 소위 ‘명문대’ 출신의 개그맨 콤비가 혜성같이 등장했다. 이윤석(李胤錫)-서경석이었다. 지금이야 서울대 출신이니 미국의 아이비리그 출신이니 하는 연예인들이 흔해졌지만, 그때만 해도 이들의 등장은 신선했다. 이전의 ‘서수남-하청일’ 콤비와는 또다른 느낌의 스탠딩 개그를 보여준 이들의 첫 유행어가 바로 ‘그렇게 깊은 뜻이’다. 지금이야 흐린 기억속으로 묻혔지만 그 시절엔 그야말로 전국을 강타한 말이었다.
독서량 가장 많은 연예인
이윤석이 쓴 책 《웃음의 과학》을 읽으며 문득 든 생각도 ‘그렇게 깊은 뜻이’였다. 웃음에 그렇게 깊은 의미가 있다니. 연예인이 썼다고 해서 왠지 만만하게 생각하며 펴든 책이 첫장부터 심상치 않았다.
‘이 책을 읽는 친애하는 독자들이여, 모든 정념을 떨쳐 버리시오.
눈물보다는 웃음에 관하여 쓰는 편이 나은 법이라오. 웃음이 인간의 본성일지니’라는, 프랑수와 라블레의 풍자소설 《가르강튀아-팡타그뤼엘》에서 빌려온 구절로 대신한 발문부터 본문 곳곳에 등장하는 참고서적의 다양함은 이윤석이라는 개그맨을 다시 보게 했다.
책 많이 읽는 연예인으로 추천은 받았지만 이윤석을 인터뷰하기 전, 혹시나 하는 노파심에 방송사 PD와 방송 작가들에게 전화를 돌려 봤다. “연예인 중 가장 책을 가까이하는 사람이 누구냐”고 묻자 대번에 “이윤석”이라고 했다. 한때 대학교수도 역임했던 박사 개그맨이자, 〈역사저널 그날〉 〈썰전〉 등 지식과 분석이 필요한 방송 프로그램에 출연 중이라 후광 효과를 누리고 있는 건 아닐까, 자문하며 서울 은평뉴타운에 있는 그의 집에 들어섰다.
새로 이사온 지 한 달가량 됐다는 그의 아파트는 상당히 깔끔했다. 소파나 텔레비전 등 기본적인 가구 외에는 별다른 장식품 없이 심플하게 꾸민 집이었다. “사진 촬영을 한다니 집사람이 집을 지나치게 깨끗하게 치워 놨다”고 투덜대며 이윤석은 뒤통수를 긁적댔다.
문간에 있는 그의 서재에 들어섰다. 가운데에는 널찍한 책상과 의자가 놓여있다. 책상 위에는 컴퓨터 모니터 두 대와 몇 권의 책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양쪽 벽은 책장이다. 자세히 들여다보니 책의 종류가 몇 가지 분야에 편중되어 있다. 리처드 도킨스의 진화론 관련 책부터 《우주의 구조》 같은 우주 관련 책까지 인문과학 분야의 책이 대부분이었다. “소설이나 에세이 같은 책이 별로 안 보인다”고 하자, “소설을 별로 안 좋아한다”고 했다.
“소설은 잘 안 읽게 되더라고요. 진리나 진실에 집착하는 증세가 있는 것 같아요. 만들어 놓은 가짜 얘기를 보면 조급증이 나요. 사람들이 꿰어 맞춘 느낌이 있잖아요. 세상에 아부하는 느낌이라고 할까요. 역사를 돌아보면, 매끈하게 모든 게 완벽하게 진행되지 않잖아요. 군데군데 구멍이 많고, 이유를 모르는 부분이 많지요. 소설은 틈이 없이 모든 게 착착 진행되죠. 현실은 그런 식으로 작동하지 않잖아요.”
—예전에도 소설을 잘 안 읽었나요.
“대학교 때도 쇼펜하우어, 니체 이런 책밖에 안 읽었어요. 학교 다닐 때 제 별명이 ‘슬픈 윤발이’였어요. 제가 영웅본색(배우 주윤발이 출연한 영화) 흉내를 내고 다녔거든요. 술 한잔 마시면 웃긴데, 평소에는 침울하고 고개 푹 숙이고 다닌다고 붙은 별명이었어요. 항상 죽음에 대해서 고민하기도 했고요.”
—염세주의 철학을 담은 책의 영향을 많이 받았나 봐요.
“그런 편이에요. 전반적으로 가장 영향을 많이 받은 책을 꼽자면, 딱 한 권만 말하기는 어렵고 리처드 도킨스류의 책에서 영향을 많이 받았어요. 최재천, 장대익 이런 분들이 쓰신 책도 많이 읽었고요. 진화론에 관한 분야이지요. 저의 주요 관심사가 항상 그런 부분이었어요. 실용적인 인간이 못 되고 추상적으로 뜬구름 잡는 성향이 있어서 그런지 종교 같은 분야에 관심이 많았어요. 죽음을 매일 생각했어요.
종교를 갖고 있는 분들을 보면 부러웠어요. 저도 믿고는 싶은데 믿어지진 않고 괴로워요. ‘아 영원한 생명이 보장된다니, 저들은 얼마나 인생이 밝을까. 나도 믿고 싶다.’ 그런 생각을 했어요. 그런데 믿어지지가 않아요. 고민하던 차에 진화론을 읽었어요. 내가 더 행복할 수도 있겠구나, 이게 더 진리에 가까운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일단 믿으면 모든 게 해결되리라 하는데, 믿어지지가 않으니까. 진화론은 그래도 납득이 가는 얘기를 하잖아요. 저에게는 더 감동적이기도 해요. 우연히 생명이 이어져 나에게까지 왔구나 하는 생각에….”
“지어낸 가짜 얘기엔 조급증 느껴”
▲데뷔 동기 서경석과 콤비로 활동하던 시기의 이윤석.
—그래서 《웃음의 과학》에도 진화론적 시각이 많이 반영되어 있는 거군요.
“네. 《웃음의 과학》은 개그맨들한테는 반응이 별로 안좋았어요. 억지로 읽고 난 후에 욕하더라고요. 이런 책 왜 쓰냐고. 다음 책을 또 쓸 생각이 있긴 해요. 과학 이론이나 과학적인 지식을 쉽게 소개하는 책에 관심이 있어요. 제의를 받기도 했고요. 그런데 책을 쓰는 게 장난이 아니더라고요. 쓰는 동안엔 다른 책을 못 읽어요. 사실 저는 쓰는 것보다 읽는 게 더 재미있어요. 읽을 책이 너무 많아서 책을 쓸 시간이 없어요. 책을 쓰니까 좋은 점은 쓰면서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된다는 거예요. 독서에 대한 강박증이 있어요. 일종의 활자중독이지요.”
—연예인은 생활이 불규칙할 것 같은데, 언제 주로 책을 읽나요.
“틈날 때면 항상 책을 읽는다고 보면 되죠. 책을 동시에 6권 정도 돌려 읽어요. 이거 읽다가 좀 지루해지면 다른 책 보다가 다시 돌아오는 식으로요. 사실 생각은 프로그램 하러 가서 대기실에서도 읽고 싶은데, 그게 무례한 거더라고요. 대기실에 앉아서 책을 읽고 있는 건, 나는 여기 집중하고 있으니까 방해하지 마라, 그런 의미니까요. 책을 가져갈 때도 있었는데 이제는 안 가져가요. 이동할 때나, 미장원에서 머리할 때 이럴 때는 읽지요.”
—연예인들 중에도 책을 즐겨 읽는 분이 많지 않나요.
“연예인들이 회원인 독서토론회를 만들고 싶었는데 책 취향이 다들 저랑 달라요. 책 좋아하는 연예인 중 반은 문학이나 시 읽는 사람, 나머지 절반은 성경 읽는 분이에요. 진화론, 우주, 물리학, 역사, 두뇌, 이런 분야에 관심있는 연예인 거의 못 봤어요. 굳이 찾자면 전유성 선생님 정도 계시네요. 김구라씨 같은 경우는 방송에서 바로 활용할 수 있는 책을 즐겨 읽어요. ‘실용적 독서’를 하시는 거죠.”
새벽 4시까지 독서
최근 장동민이나 유세윤처럼 개그맨들이 구설에 휘말리는 일이 심심치 않게 일어난다. 구설에 그치지 않고 경찰서를 들락날락한 이들도 있다. 이윤석은 데뷔 후 지금까지 22년간 스캔들에 한 번도 휘말리지 않았다. 자기관리에 철저하다고 해야 할까. 완벽주의적인 성향은 책상 위에서도 엿보였다. 군데군데 줄이 그어져 있는, 열심히 읽고 있는 프린트물이 있어 살펴보니, 〈역사저널 그날〉 녹화를 위한 참고자료들이었다.
—프로그램 준비에 상당한 공을 들이네요.
“주위 사람들이 놀라는 게 제가 프로그램 2개 하면서 집에서 안 나온다는 거예요. 다른 사람은 오늘 가서 촬영하면 오늘 끝, 이런데 저는 한 프로에 이틀이나 길면 3일까지도 품을 들여야 해요. 이경규씨, 유재석씨, 신동엽씨, 이런 분들은 타고난 개그맨이라 그날 가서 그날 해결이 되는데 저는 미리 생각하고 고민해야 하는 스타일이에요. 현장에서 즉흥적으로 재기발랄하게 웃기는 것도 재밌지요. 그런데 저는 뭔가 굳건한 토대를 놓고 거기에 대해 분석하고 토론하고 약간 비틀어서 농담하는 게 좋아요. 일반적이지는 않은 스타일이지요. 거의 즉흥적인 게 강하잖아요. 저는 애드립을 해도 탄탄한 토대 위에서 하는 게 더 잘 맞아요.”
—〈역사저널 그날〉 같은 교양 프로그램이 잘 맞겠네요.
“제가 교양 프로그램 쪽으로 가면 빵빵 터트려요. 거기 가면 천재 소리 듣는데, 예능 가면 이런 말을 주로 들어요. ‘길을 좀 잘못 든 것 같다. 방송은 너랑 안 맞는 것 같다’ 그랬는데 그건 아니고 예능이 안 맞는 것 같아요. 엘리트주의로 비칠 수도 있겠지만, 방송에서 허무한 얘기를 많이 하면 신이 안나요. 누가 누구랑 사귄다더라, 이런 얘기요. 수지랑 이민호가 사귀는 게 내 인생에 어떤 영향을 미치지? 신도 안 나고 거기에 무슨 얘기를 보태고 싶지도 않아요. 인생에 도움이 안 되는데 왜 사람들이 그런 뉴스를 찾아볼까, 그런 생각도 가끔 해요.”
—프로그램 준비를 꼼꼼히 하려면 잠도 줄여야 할 텐데요.
“보통 일찍 자면 새벽 4시, 늦게 자면 7시나 8시에 잠들어요. 그때까지 책을 읽어요. 물론 늦게 일어나지요. 제 방송은 거의 오후 3시 이후에 있어요. 제일 행복할 때가 새벽 4시쯤 침대에 누워서 스탠드를 켜고 잠들 때까지 책 읽을 때예요. 평소 6시간쯤 자는데 한 달에 한두 번 몰아서 18시간씩 자요. 건강에 좋은 습관은 아니지요. 그래서 집사람이 한 번씩 억지로 저를 데리고 나가서 개 끌고 다니듯이 산책시켜요. 제 아내가 한의사잖아요. 아내는 제 자신보다 더 자세히 제 몸을 관찰해요. 키, 몸무게, 대소변의 색깔, 머리에 새치가 얼마나 나왔나, 오늘은 뭘 먹었나, 이런 걸 매일 체크해요. 손톱 발톱도 다 깎아 주고. 결혼해서 6년 넘게 하루도 안 빼먹고 한약을 먹고 있어요. 그 힘으로 방송하고 책 읽을 수 있는 것 같아요. 그만큼의 에너지는 딱 돼요. 결혼 전에는 설사약, 무좀약, 류머티즘약, 안약, 가래약, 용각산, 수면제 이런 걸 달고 살았어요. 이제는 일절 안 먹어요. 아내 덕분에 살고 있는 것 같아요. 저는 제가 얼마를 버는지, 통장엔 얼마가 있는지 이런 것도 잘 몰라요. 제가 스스로 뭔가 하는 건 책 사는 것밖에 없어요.”
—책은 주로 어디서 사나요.
“예전에 MBC에서 방송을 많이 할 때는 거기 구내서점에서 즐겨 구입했어요. 요즘엔 인터넷 서점에서 사지요. 인터넷서점 VVIP예요. 보통 하루에 1권가량 사는 것 같으니까, 1년에는 300권 정도죠. 주로 저자와 목차를 보고 고르죠. 읽던 책에 참고문헌으로 나오는 책을 고르기도 하고요. 어머님 댁에 3000권, 저희 집에 1500권가량 있어요.”
교통사고로 5급 장애 판정
▲이윤석은 같은 책을 읽을 때마다 서로 다른 색깔의 색연필로 줄을 긋고, 관심이 가는 내용은 주제별로 컴퓨터에 파일 형태로 정리해 놓는 등 체계적으로 독서를 하는 독서광이다.
이윤석은 만 스물한 살에 개그맨으로 데뷔해 이렇다 할 무명생활 없이 스타가 되었고 현재까지 꾸준히 인지도를 유지하고 있다. 시트콤 코미디에서 리얼 버라이어티 프로그램으로, 교양 프로그램으로 적절한 순간에 무대를 바꾸며 꽤 순탄하게 연예인으로서의 삶을 걸어오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스스로도 그렇게 생각할까.
“무명기간을 겪지 않기는 했지요. 개그맨 자체도 우연히 됐어요. 대학 졸업하기 전에 생각을 했어요. 마지막으로 신나게 놀아 보자, 방송국 구경이 최고 아니냐. 그냥은 안 들여보내 주니까 개그맨 오디션을 보자, 그러고 오디션에 갔는데 덜컥 붙어 버린 거예요. 서경석이란 친구가 나랑 비슷한 생각으로 시험을 봤더라고요. 방송사 관계자들이 이렇게 생각했대요. ‘서울대 출신이랑 연대 출신이네? 얘네 둘을 붙여 놓자.’”
서경석과 콤비를 이뤄 인기를 얻은 그는 서경석이 입대한 이후 ‘허리케인 블루’라는 코너로 서경석 없는 이윤석도 웃길 수 있다는 걸 보여줬다. 한참 잘나가던 때 사고를 만났다. 1997년의 일이었다.
“라디오 프로그램 ‘별이 빛나는 밤에’ 공개방송을 하러 강원도로 가던 길이었어요. 눈길에 미끄러져서 차가 절벽에 박혔어요. 저는 조수석에 앉아 있었거든요. 안전벨트를 안 하고 있었어요. 차가 부딪칠 때 버티려고 손잡이를 잡고 있던 왼쪽 팔이 말 그대로 분해가 됐어요. 복합골절이라고 하더라고요. 뼈와 살을 이식했죠. 그 후에 장애 5급 판정을 받았습니다. 그때 같이 탔던 다른 일행들은 다 멀쩡했고요.
치료 때문에 방송도 다 그만두고 반년 동안 쉬면서 개그맨을 계속할까 말까 고민했습니다. 한의사 공부를 해 볼까, 고시 공부를 해 볼까. 그런데 여기까지 왔는데 다시 돌아가는 게 약간 자존심이 상하더라고요. 그렇게 여기까지 왔어요. 굴곡이 많았던 건 아니지만 영 순탄하지만은 않았던 거죠.
개그맨 되길 잘했다는 생각을 할 때도 있지만 회의가 생길 때도 많아요. 예를 들면, 예능 프로그램을 하면서 쓸데없는 거짓말해야 할 때가 그래요. 게임에 이기면 음식을 먹을 수 있어요. 전 별로 먹고 싶지도 않은데 먹고 싶은 척해야 해요. 누가 잘생겼나 순위 뽑는데, 별로 이기고 싶지 않은데 ‘내가 너한테 지다니’ 이러면서 작위적으로 아쉬워해야 하는 순간도 있지요. 그런데 내 본래의 성향대로만 갔으면 내가 어떻게 됐을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해요. 많은 사람과 소통할 수 있는 곳에 머물면서 소통한 게 어쩌면 나에게는 치유였겠구나 라는 생각도 하고요. 그런 면에서 개그맨 하길 잘했다는 생각을 해요.
개그맨이 안 됐다면, 잘되면 학교 선생님이나 ‘과학계의 이외수’ 같은 존재, 못 되면 폐인이 됐을 것 같아요. 왜 개똥철학 하는 사람 있잖아요. 혼자 술마시면서 ‘왜 세상은 날 알아주지 않아’ 이러는 사람이 됐을 거예요.”
—더 이상 정통 개그는 안하고 있는데, 현재 모습에 만족합니까.
“제가 20대에 개그맨 생활을 할 때는 40대의 제가 이런 개그맨이 될 줄 몰랐어요. 유재석, 신동엽, 이런 개그맨들이 부러운 건, 예능 프로그램을 하면서 기뻐하고 즐거워하고 인생의 보람을 찾는다는 거예요. 저는 그렇지 않았어요. 이게 내 인생의 전부인가, 끝인가, 더 없나 하는 회의를 느끼곤 했어요. 50대 개그맨 선배님들 중에 공허하다, 이런 얘기를 하는 분들이 계세요.
무슨 얘긴가 하면, 관찰 카메라로 촬영하는 프로그램처럼 찍히면서 사적인 모습을 세상에 남김없이 노출해야 하는 프로그램이 많잖아요. 관찰 카메라 프로그램은 진정성이 중시되는 프로그램이지만, 내용은 결국 돈을 받고 프로그램 의도에 맞춰서 움직이는 것이거든요. 어쩔 수 없이 스스로를 꾸며야 해요. 그것도 그 나름대로 재밌고 즐거울 수 있겠지요. 그런데 ‘진짜 나’와 ‘카메라 속의 나’ 사이의 괴리가 커지는 느낌은 지울 수 없어요.
예능에 나가서 저의 굴욕 사진을 같이 보면서 같이 웃어야 하는데 저는 항상 겉도는 느낌이 드는 거예요. 아이와 부모가 함께 나오는 프로그램도 많잖아요. 그런 프로그램도 그래요. 어느 연예인이 아이랑 그렇게 매일 놀러갈 수 있겠어요. 말은 이렇게 해도 제 자신도 버라이어티 예능 프로그램이 들어오면 하겠지요. 돈이 꾸준히 들어오는 프로그램이고 시청자가 제일 좋아하는 장르니까요.”
—한때 MBC는 코미디의 명가였습니다. 2000년대 들어 부진한 이유는 뭘까요.
“한 번의 타이밍을 놓쳐서 그렇게 된 것 같아요. MBC 코미디는 콩트의 성격이 짙었잖아요. 개그 프로그램의 유행이 바뀌기 시작할 때 한 번 주춤했지요. 그때 인기 있는 개그맨들은 다른 방송사 개그 프로그램으로 옮겨가고 MBC엔 신인들만 남게 됐잖아요. 시청자 입장에서는 어느 순간부터 모르는 사람들만 나오니까 더 안 보게 되지요. 빈익빈 부익부처럼 개그맨들은 〈개그콘서트〉로만 몰리고, 남아 있는 인재들도 의욕이 떨어지고 기도 죽어서 아이디어 회의도 발랄하게 안 되고요.”
“잘난 사람 잘났다고 인정해야”
책장 가장 위칸 쪽으로 눈을 들어보니 《노태우 회고록》이 꽂혀 있는 게 보였다. “저런 책도 읽느냐”고 물었다.
“저런 사람은 어떻게 살아 왔는지, 스스로를 어떻게 표현하는지 궁금했어요.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도 전집째 있어요. 저는 그 책도 좋아하고, 진중권씨가 쓴 《네 무덤에 침을 뱉으마》도 좋아해요. 회색주의자인가 봐요. 투표를 못하겠어요. 그런 생각을 해요. ‘저 후보자가 내세운 정책을 내가 얼마나 안다고 투표를 할 수 있나, 나는 잘 모르는데. 내 일 하기도 힘든데 저 사람 일자리까지 내가 왜 찾아 줘야 하나.’ 누군가를 지지할 만큼 그 사람을 믿을 수도 없어요. 저처럼 정치를 잘 모르는 사람이 괜히 한 표를 행사하면 폐 끼치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고요. 투표하고 인증샷 찍어 SNS에 올리는 연예인들 보면, ‘자신감도 넘치고 책임감이 투철하구나, 부럽다’ 하는 생각을 해요.”
—세상에 대해 냉소적이네요.
“저의 사상적인 스펙트럼은 좀 특이하다고 생각해요. 저랑 비슷한 생각을 하는 사람을 만나기 힘들어요. 저는 정치적으로는 보수 성향의 사람이에요. 그런데 진화론 얘기를 하면 진보에 속해요. 불가지론자(不可知論者·초경험적인 것의 존재나 본질은 인식 불가능하다고 하는 철학상의 입장을 지지하는 사람. 출처=두산백과)예요. 윤회 이런 건 절대 안 믿어요. 진화론을 숭상하면서 정치적으로는 보수 성향인 사람들을 만나기가 힘들어요. 한 번도 못 만난 것 같아요. 아마 복거일 작가 정도 아닐까요.
사실, 연예인들은 정치와 관련된 얘기를 약간이라도 잘못하면 큰일 나요. 인기 떨어지고 공격 받고. 저도 어디 가서 저의 정치적 성향을 이야기하기가 꺼려져요. 당장은 욕을 안 먹어도 방송에서 실수하거나 하면 ‘그럴 줄 알았다’는 글이 올라오거든요.”
—특정 연예인이 일베 사이트에서 활동을 하느니 안 하느니 논쟁도 많지요.
“정치적 지향점을 잣대로 판단하고 비판하는 게 제일 쉽잖아요. 저의 기본적인 생각은 이래요. 인생은 원래 자기가 알아서 살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국방, 안보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가족, 경제 이런 거 중요하게 여겨요. 다윈주의자로서, 사람은 날 때부터 다르고 그걸 억지로 평준화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생각해요.
무상급식 문제도 그래요. 아무리 누가 무상급식 안 받는지 가려 주려 해도 애들은 다 알아요. 그런 걸 가리는 데 초점을 두지 말자는 거예요. 잘나고 돈 많은 사람들이 잘사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 분위기가 싫어요. 인정해 주되 그 사람들이 더 사회에 기여하게 만들어야 하는 것 아닌가요. 평준화라는 이름으로 한풀이하는 것 아닐까요. 우리 사회에서는 정의감과 개인적인 울화가 잘 구분이 안 되는 것 같아요.
진보가 제일 되기 쉬운 것 아닌가요? 상대가 옳지 않다고 비판하는 건 쉬워요. 게다가 자신이 어떤 위치에 있지 않을 때 비판하는 건 더 쉬워요. 하지만 자신이 막상 직접 메인스트림 안으로 들어가면 그렇게 못하잖아요.
얼마 전에도 KBS 기자 중 한 명이 일베 활동을 했다고 논란이 되었지요. 예를 들면, 이런 사안에 대해서도 제 생각은, 일베건 뭐건 자격조건이 돼서 시험에 합격했다면 일단 기회를 줘야 하지 않느냐는 거예요. 다만 후에 잘못을 저지른다면 철저히 책임을 물어야겠지요.
과학 쉽게 설명해 주는 인포테이너가 꿈
인터넷에서는 연예인 누구는 진보고 누구는 보수고 하면서 구분을 짓지만 방송에 나오는 사람들끼리 사상을 가지고 편가르기를 하거나 하지는 않아요. TV에서만 그렇게 보이는 거지. 저도 김제동씨나 허지웅씨 이런 분들과 친해요. 정치적으로는 다른 입장이지만 문화적인 취향이 잘 맞거든요.”
—음악을 좋아한다고 들었습니다.
“저는 메탈 음악 중에서도 헤비메탈, 데스메탈을 좋아해요. 주다스 프리스트, 메가데스, 메탈리카 같은 유죠. 한때는 그런 음악에 거의 미쳐 있었어요. 보수 지지자들 중에 헤비메탈 듣는 사람이 있겠어요? 그러니 누구랑 한 팀이 될 수 있겠어요?”
—서경석씨 같은 동료 연예인들과도 사상적인 얘기를 나누나요.
“경석이는 책이랑 술, 뜬구름 잡는 얘기 별로 안 좋아해요. 축구, 골프, 탁구, 테니스 좋아해요. 서로 좋아하고 친하지만 잘 안 만나요. 같이 할 수 있는 게 없거든요. 저는 골프를 안 쳐요. 골프에 대한 아무런 불만은 없어요. 대학 초년생 때 혼자 결심했어요. ‘내가 지금 결심한 게 옳건 그르건 인생에서 이거 하나만 지켜 보자. 사람이 나이 들면 변한다고 하는데 나는 골프를 치지 말아 보자. 한번 이 신념을 지켜 보자.’
대학에 들어가니 데모하는 데 선배들이 자꾸 끌고 나가고 세미나를 해요. 이미 커리큘럼을 정해 놓고 이 책 아니고 다른 책은 읽을 필요 없다고 하는 거예요. 나는 다른 책도 읽어 보고 싶은데. 헤비메탈을 좋아한다니까 미국의 쓰레기문화를 좋아한다고 뭐라고 하더라고요. 그때 생각했어요. ‘당신들이랑 나 중에 누가 먼저 변하는지 보자.’ 지금 그분들 다 미국 유학 다녀와서 골프 치러 다니고 그래요. 저는 좀 우습게 지금까지 골프 한 번 안 치러 나가고 그렇게 살고 있어요. 결심도 결심이지만, 골프 치면 책 볼 시간이 없어요. 그 시간에 책 읽어야 하거든요.”
—앞으로 어떤 개그맨이 되고 싶나요.
“칼 세이건의 책을 좋아해요. 칼 세이건은 과학자로 출발해 대중들에게 과학을 쉽게 설명해 주는 사람이 됐잖아요. 저는 반대로 방송인에서 과학자 쪽을 향해 걸어가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인포테이너라고 할 수 있겠죠. 어른을 위한 재미있는 과학 프로그램에 출연하는 게 꿈이에요. 이를테면 〈과학저널 그날〉 이런 식의 프로그램이에요.
미국에서는 목사랑 과학자랑 창조론, 진화론을 주제로 논쟁이 붙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아직까지 그런 건 못 하나 봐요. 《종교전쟁》이라는 책 보면 지면으로는 가능한데 방송으로는 시도가 안 이뤄지네요. 텔레비전에서 정치인들, 평론가들 말싸움 이런 것 보고 있으면 허무해요. 죽음 이후에는 아무 것도 없는 거냐, 아니면 영생인 거냐 이런 게 중요한 문제 아닌가요.
일본의 저널리스트 다치바나 다카시를 좋아해요. 이분한테 영향을 많이 받았어요. 그분처럼 고양이 빌딩 만들어서 서재로 삼고 싶다는 생각도 해요. 이 분이 암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제작하고 ‘암’이라는 제목으로 책을 냈어요. 암에 관한 최신 조류를 섭렵한 후, 냉정한 문투로 기술했어요. 헛된 희망을 주지 않아요. ‘암의 종류는 사람마다 다 다르다. 획일적인 어떤 치료법이 있을 수 없다. 헛된 희망을 갖지 말고 죽음을 준비해라’ 이런 식이죠. 저의 아버지, 할아버지 다 암으로 돌아가셨는데 그 책을 보고 위안을 많이 받았어요. ‘내가 어떻게 할 수 있었던 게 아니었구나’ 하고.
이 얘기를 몇 번 했더니 출연 섭외가 들어왔어요. ‘이 밥이 날 살렸다’ 이런 기획의 프로그램이었어요. 이걸 먹으니까 낫더라, 저게 좋더라는 식이죠. 우리나라는 아직 진실을 말하는 게 잘 받아들여지지 않는 것 같아요. 거짓이라도 희망을 주고 꿈을 주고 위로를 줘야지 왜 굳이 상처를 주면서 진실을 얘기하냐 이런 분위기예요. 진실을 얘기하되 유쾌한 방식으로 얘기할 수도 있는 거잖아요.
욕심을 낸다면 일주일 내내 제가 진행하면서 월요일은 생물학, 화요일은 과학사, 수요일은 우주, 이런 식으로 하면 좋겠어요. 텔레비전에서 안 된다면 라디오에서라도요. 최대한 어깨에 힘을 빼고 발랄하게 약간의 정보와 많은 재미를 주고 싶어요. 그게 꿈이에요.”
“죽은 뒤 이름 남겨서 뭐하나”
—사람들에게 어떤 개그맨으로 기억에 남고 싶나요. 나중에 죽은 후에라도요.
“쟤, 아직도 하고 있어? 크게 뜬 적도 없는데 참 오래 한다. 그러고 보니 이윤석이 제일 오래됐네. 불꽃놀이, 폭죽놀이 다 필요없구먼. 촛불 심지처럼 천천히 타들어 가는 게 낫구먼. 이런 얘기 듣고 싶어요.
죽음이라. 죽고 난 뒤에 이름 남기는 게 제일 허무하다고 생각해요. 죽고 나서 이름을 남기기 위해 오늘을 이렇게 살아야 된다, 이런 거 없어요. 이름 남겨서 뭐하나요. 오늘을 재밌게 살아야지.
시간을 초월한 영원한 가치, 이런 걸 부정하는 건 아니에요. 저는 부모님이 저를 만들어 주신 게 정말 고마워요. 제가 만약 돌이었으면 놀라고, 아프고, 기쁜 걸 못 느꼈을 거 잖아요. 하늘을 올려봐요. 나를 만든 저 우주를 내가 다시 보면서 신기해하고 있네. 이런 생각을 할 때마다 신기하고 기뻐요. 전 영혼을 믿지 않지만, 제가 죽어서 어딜 가든 저를 이뤘던 물질은 이 우주 안에 있을 거예요. 다른 몸의 일부로 들어가겠지요.”
그가 왜 웃음에 관한 책을 썼는지 알수 있을 것 같았다. 타인을 웃겨야 하는 개그맨이 얼마큼 세상에 냉소적일 수 있을까. 밤마다 홀로 지면을 거닐며 그 한계를 건드려 보고 있는 그가, 그만의 방법으로 자신의 업(業)에 바치는 ‘오마주(Hommage)’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알고 보니 이윤석은 ‘국민 약골’이라는 천막 속에 그만의 철옹성을 감춰 두고 매일 다듬고 두드리고 나사를 조이고 있었다. 스무 해남짓이라는 동안 많은 사람의 사랑과 관심을 받으면서도, 자기 자신을 지킬 수 있었던 그가 문득 부러워졌다.⊙
⊙ 새벽 4~5시까지 역사·진화론·우주 관련 책 탐독하는 개그맨 이윤석, 과학을 대중에게 쉽게 전달하는 인포테이너가 꿈
⊙ “진보는 되기 쉽다. 남을 비판하는 건 쉽지 않나. 우리 사회는 정의감과 개인적인 울화가 구분이 잘 안되는 것 같다” 李胤錫
⊙ 43세. 연세대 국어국문학과 졸업. 중앙대 언론학 박사.
⊙ 1993년 MBC 개그콘테스트에서 금상 받으며 개그맨 데뷔. 〈오늘은 좋은 날〉 〈일요일 일요일밤에-대단한 도전〉 〈남자의 자격〉 등 출연. 현재 〈역사저널 그날〉 〈썰전〉 〈복면가왕〉 등 출연 중. ⊙ 경기대 경영대학원 겸임교수, 서울예술전문학교 학부장 역임. 《웃음의 과학》 펴냄.◎
출처 | 월간조선 6월호 하주희 월간조선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