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없음

餘談4/ 2021.10-06 100세 앞둔 노부부의 지각 결혼식 - 12.16 “혼수상태 친구 기다리는 중” 1년 뒤… 친구는 지팡이 짚고 나타났다

상림은내고향 2022. 1. 4. 19:28

餘談4/ 2021

10.06 100세 앞둔 노부부의 지각 결혼식...뜨거운 입맞춤에 미국이 열광했다

식도 못올리고 77년 해로한 아이오와 부부
요양시설에서 뒤늦은 결혼식 마련해줘
웨딩드레스에 군 제복 입고 정열적인 입맞춤

모든 키스신은 아름답고 설레는 법이다. 77년을 해로하고 100세를 코앞에 둔 시점에서 인생의 황혼녘을 함께 보내고 있는 부부의 키스신이라면 얼마나 따뜻하고 그윽하겠는가. 변변한 결혼식을 치르지 못하고 생의 반려자로 살아온 미 아이오와주의 로이스 킹(98)과 프랭키 킹(97)의 지각 결혼사진이 잔잔한 감동을 일으키고 있다. 강산이 여덟번 바뀔동안 함께 하면서 두 자녀와 네 손주, 여러 명의 증손주를 둔 이 커플은 결혼식은 급하게 올리는 바람에 턱시도와 웨딩드레스를 마련할 엄두도 못냈고 변변한 혼인 사진도 없다는 것이 큰 아쉬움이었다.

 

▲사랑과 정열을 그대에게'. 백세를 코앞에 둔 프랭키 킹(왼쪽)과 로이스 킹 부부가 77년만에 찍은 웨딩사진. 20대 커플 못지 않은 달달함이 느껴진다. /세인트 크루아 호스피스 페이스북

 

두 사람은 2차 대전이 막바지로 향하던 1944년 9월 16일에 번갯불에 콩구워먹듯 급하게 결혼식을 올렸다. 신랑 로이스는 짧은 휴가를 마친 뒤 군대로 돌아가야 하는 상황이었고, 주변에 알리고 식을 준비할 시간은 불과 이틀밖에 주어지지 않았다. 평생 한 번 뿐인 순간을 사진에 담을 촬영기사를 섭외하는 것은 꿈도 꾸지 못했다. 공군 중령으로 예편한 남편 로이스는 기업과 학교에서 일했고, 아내 프랭키는 치위생사와 꽃장식가로 일하며 두 자녀를 키웠다.

 

▲결혼한지 77년이 지난 뒤에야 웨딩드레스를 입게 된 프랭키 킹 할머니가 꽃다운 미소를 지어보이고 있다. /세인트 크루아 호스피스 페이스북

 

둘은 함께 나이들었고, 요양시설에서 여생을 보내고 있다. 이들이 살고 있는 아이오와주 올웨인의 크루아 호스피스에서 킹 부부의 77번째 결혼기념일에 맞춰 제대로 된 결혼식을 마련해줬다. 웨딩드레스를 입은 신부와 공군 제복을 입은 신랑의 달콤한 사진이 소셜미디어와 미 언론을 통해 퍼지자 누리꾼들은 열화와 같은 성원을 보내고 있다. 호스피스 직원들은 뒤뜰을 이들의 신혼기였던 1940년대 스타일로 꾸몄고 색소폰과 기타를 곁들인 1940년대 히트곡들을 연주했다. 직원들은 직접 신부의 웨딩드레스를 구입해서 입혔고, 신랑은 현역 복무 때 입었던 공군 제복을 입었다. 이 부부의 딸인 수 빌로도는 아버지를 앉힌 다음 손수건으로 눈을 가렸고, 신부복을 입은 어머니를 부축해 뒷걸음질로 데려왔다.

 

▲무슨 설명이 필요할까. 이 사진은 77년을 함께 살아온 부부가 얼마나 서로를 신뢰하고 사랑해왔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세인트 크루아 호스피스 페이스북

 

딸은 어머니를 뒤돌아서게 한 뒤 “당신의 신부를 볼 준비가 됐냐”고 물으며 아버지의 눈을 가린 손수건을 벗겼다. 빌로도는 “신랑 신부의 얼굴에서 미소가 가시지 않았다”고 했다. 피부에 주름이 가득한 두 사람의 입맞춤은 청춘남녀의 그것에 못지 않게 뜨겁고 황홀했다. 이 사진을 포함한 당일 식 사진이 소셜미디어를 통해 공개되자 1만8000여개의 댓글이 달렸고, 아이오와 레지스터 등 지역 언론들이 앞다퉈 보도했다. 이날 뒤늦게 제대로 열린 예식에서 “77년동안 함께 해서 가장 좋은게 뭐였냐”는 기자의 질문에 신랑과 신부는 각각 다른 답변을 내놓았다고 이들의 딸은 웃으며 말했다. “프랭키를 내 곁에 둔 거죠.”(신랑 로이스) “우리 아빠가 말씀하신 것처럼 늘 이 말을 생각해요. ‘주님 저에게 인내심을 주시옵소서. 지금 당장요.’”(신부 프랭키)

조선일보 정지섭 기자

 

10-06 틀린 말, 나쁜 말, 이상한 말

틀린 말보다 바로잡기 힘든 나쁜 말

‘언어 감수성’ 없는 정치인 걸러내야

▲TV를 보는데 교양 프로그램에서 초로의 신사가 “저와 제 아내는 네 살 터울입니다”라고 말했다. 예능 프로그램 진행자는 여자 연예인의 결혼 소식을 전하며 “예비 신랑은 금융권에서 일하는 재원으로 알려졌다”고 소개했다.

 

직업병인지 잘못된 표현들이 귀에 걸렸다. 흔히 나이 차이로 알고 있는 ‘터울’은 ‘한 어머니로부터 먼저 태어난 아이와 그 다음에 태어난 아이의 나이 차이’를 말한다. 형제자매 사이에만 쓸 수 있는 단어를 부부 사이에 쓰면 뜻밖의 패륜이 된다. 뛰어난 사람을 가리킬 때 많이 쓰는 ‘재원(才媛)’은 ‘재주가 뛰어난 젊은 여자’를 말한다. 위에 언급된 연예인은 졸지에 동성(同性) 결혼을 하는 셈이다.


이처럼 ‘틀린 말’은 화자의 의도와 다르게 이상한 결과를 낳기도 한다. 몰라서 틀린 거라면 어휘를 배우고 고쳐 쓰면 된다. 국어사전만 들춰봐도 기본은 지킬 수 있다.

 

그런데 무심코, 혹은 무의식중에, 또는 숫제 의도적으로 쓰는 ‘나쁜 말’도 있다. 사전적 의미로는 욕이 아니고 문장 구조로 따지면 비문이 아니더라도 쌍욕만큼이나 천박한 말들이다. 예를 들어 같은 국회의원에게 나이가 더 적고 여자라는 이유로 “야! 어디서 감히”라고 하거나, 우리 사회 원로의 고언이 맘에 들지 않는다고 해서 “이래서 오래 사는 것이 위험하다”고 하는 경우다. 여기엔 말을 한 사람의 지식, 이념, 가치관, 인성이 총체적으로 녹아 있기 마련이다.

 

나쁜 말의 특징은 대개 폄하와 혐오가 담겨 있고, 편견과 편 가르기를 조장한다는 점이다. 나쁜 말을 바로잡으려면 어휘가 아니라 사람 자체를 고쳐야 하는지라 간단치 않다. 실은 나부터도 ‘맘충’이나 ‘기레기’라는 말에 발끈하면서부터 나쁜 말에 대해 더 주의를 기울이게 됐다. 내게 불쾌한 말은 싫어하면서 한편으로는 ‘부린이’나 ‘불편러’라는 말을 입에 올리는 걸 반성하게 됐기 때문이다.


나쁜 말을 고치려면 인지가 중요하다. 과거에는 문제가 되지 않던 관행들이 ‘갑질’이나 ‘성인지 감수성’이라는 용어가 많이 회자되면서 조금씩 고쳐지는 것처럼 ‘언어 감수성’에 대한 관심이 필요하다.

 

내가 나쁜 말에 대해 더 촉각을 곤두세우게 된 계기는 3년 전 신지영 고려대 교수가 낸 ‘언어의 줄다리기’라는 책을 보면서다. 신 교수는 어떤 말을 어떻게 할 것인가를 결정하기 위해 우리는 끊임없이 줄다리기를 한다고 말한다. 타인과의 줄다리기, 언어 표현들 사이의 줄다리기, 이념의 줄다리기가 벌어진다는 설명이다.

 

이 과정에서 우리도 모르게 빠져 있는 함정 등을 생각해보고, 이전까지는 거슬리지 않던 표현들에 마음을 쓰며 언어 감수성을 높일 수 있다고 조언한다. 예전에는 아무렇지도 않게 쓰였던 각하나 미망인이라는 표현이 사라지고, 여교사나 장애우라는 호칭이 적절한가에 대한 논의가 이뤄지고, 미혼과 기혼을 넘어 비혼과 돌싱이라는 용어가 등장한 것 등이 일례다.

 

이미 욕설과 막말이 난무하는 정치판에서 대선이 다가올수록 나쁜 말은 더 기승을 부릴 것이다. 인격과 가치관의 발현인 말이 상스럽고 나쁜 사람이 좋은 리더가 될 리 없다. 물론 GSGG처럼 본인은 나쁜 말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이상한 말’을 쓰는 경우라면 더 말할 것도 없다.
김희균 문화부장 foryou@donga.com

 

10.09 “文 만난다면 ‘세상 가장 큰 용기는 뒤돌아설 수 있는 용기’라 말할 것

[아무튼, 주말]
첫 장편소설 ‘가지꽃’ 낸 한국 1호 여성앵커 박찬숙

▲한국 최초의 여성 앵커인 박찬숙은 50년간 방송을 했다. 그는 “나보다 대통령, 정치인, 관료 등 명사를 많이 만난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라며 웃었다. /김종연 영상미디어 기자

 

1976년 11월, KBS ‘9시 뉴스’에 한국 최초로 여성 앵커가 등장했다. 당시는 요리·음악 프로가 여성 아나운서들이 진행할 수 있는 최고의 프로로 여겨지던 때. 큼직한 이목구비와 중저음의 목소리를 가진 박찬숙의 등장은 그래서 화제였다.

 

한국에도 바버라 월터스 같은 여성 앵커가 필요하다는 홍경모 당시 KBS 사장의 의지로 1호 여성 앵커가 된 박찬숙(76)은 인생 3분의 2를 방송에 쏟았다. 박정희 전 대통령을 비롯해 전직 대통령 일곱 명을 만났고, 인터뷰한 국무총리나 장관, 시장 등은 셀 수 없이 많다. ‘박찬숙을 거치지 않고서는 유명인이라고 할 수 없다’는 말이 나왔고, 그 자신도 17대 국회의원으로도 활약했다.

 

이제 좀 쉬는가 싶더니 지난 3월 한국아나운서클럽 회장에 취임했다. 최근엔 장편소설 ‘가지꽃’을 출간했다. 서문의 한 구절이 눈길을 끌었다. ‘흔들리는 나라의 운명에 따라 사람들의 운명도 흔들린다.’ 박찬숙은 “문재인 대통령을 만난다면, 잘못됐다고 깨달은 순간 뒤돌아설 수 있는 용기가 세상에서 가장 큰 용기라고 말씀드리고 싶다”고 말했다.

 

◇‘미스 박’이라 불리던 여성 앵커

-앵커로 데뷔했을 때 남자들 저항이 만만치 않았다더라.

“여자하고 같이 진행하고 싶지 않다는 사람들이 있었단다. ‘여자하고 앉으면 권위가 떨어진다’ ‘국회의원 출마할 거라 남자들을 거느리고 방송해야 한다’는 이유였다(웃음).”

 

-‘미스 박’이라 불렸다던데.

“회사 높은 분들에게 툭하면 ‘여자는 여자다워야지, 방송에서 너무 강하게, 남자같이 하는 거 매력 없다’란 충고도 받았다. 1994년에 ‘여기는 라디오 정보센터입니다’ 시작할 때도 ‘여성 앵커 박찬숙씨가 진행합니다’란 말이 꼭 따라붙었는데, ‘앵커면 앵커지, 무슨 여성 앵커냐’고 따졌더니 몇 달 후 ‘여기는 라디오 정보센터 박찬숙입니다’로 프로 제목이 바뀌었다.”

 

▲1970년대 박찬숙(오른쪽)이 KBS ‘9시의 스튜디오’를 진행하는 모습. /박찬숙 제공

 

-목소리가 굵고 키도 크다. 과거 선호했던 여성 아나운서상은 아니었을 것 같다.

“그런 얘기 수도 없이 들었다. 과거에 모 일간지에 방송평 코너가 있었는데, 어느 기자가 ‘박찬숙은 TV에 안 맞는다’고 썼더라. 그때는 꾀꼬리 같고 양순하게 느껴지는 목소리를 좋은 목소리로 여겼다. 그런데 이 굵직한 목소리 덕분에 내 방송 인생이 시사, 토론 쪽으로 풀린 것 같다(웃음).”

 

-최근에도 여성 앵커가 안경을 쓰고 TV에 나왔다고 논란이 됐다.

“어이없는 일이다. (안경 착용을) 문제 삼는 사람이 이상하지. 말할 거리도 안 된다.”

 

◇육영수 여사가 보낸 스웨터

-방송 생활 50년에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은 언제인가.

“1970년 7월 7일 경부고속도로가 개통됐다. 428km. 너무 중요해서 다 기억한다. 그땐 고속도로가 뭔지 사람들이 몰랐다. 길이 났는데 왜 마차도 못 가고 개도 못 가냐(고 했다). 그게 국토의 대동맥을 만들어 물류 혁명을 이루고 경제가 성장한다는 생각을 전혀 못 했다. 개통식 날 5시간 동안 KBS 남산 스튜디오에서 생방송을 했다.”

 

-역대 대통령들을 여럿 만났더라.

“노태우 대통령을 당선자 시절 만났는데, 내가 ‘나는 노태우 후보를 찍지 않았다. 그래도 잘되시길 바란다’고 했더니 노 대통령 왈, ‘언론인이 나를 찍었겠나. 안 찍은 줄 안다. 그러나 잘해 나갈 거다’ 하시더라. 인상적이었다. 1992년 YS(김영삼)를 어느 호텔 엘리베이터 앞에서 마주친 적이 있었다. YS가 ‘미스 박, 이번에도 나 좀 찍어요’ 하기에 ‘지난번 찍었는데 안 되시고 뭘 또 찍으라 그러냐’고 받아쳤더니 껄껄 웃으시더라.”

 

-대통령 부인들도 인터뷰했나.

“물론이다. 육영수 여사는 인터뷰 후 방송국으로 이름만 적힌 명함과 하얀 스웨터를 보내왔다. 그 뒤 한 행사에서 또 마주쳤는데, 여사가 경호원들을 물리치고 오시더니 ‘방송만 하다 언제 시집가나. 청와대에 좋은 신랑감 있으니 한번 연락하라’고 하시더라. 그래서 ‘청와대 문턱이 너무 높아 감히 어떻게요’라고 했지. 그냥 ‘감사합니다’ 하면 될 걸(웃음). 이걸 배짱이라고 해야 하나. 나도 참 별났다.”

 

◇노무현 정부 때 방송에서 다 잘려

-2004년 17대 총선에서 한나라당 비례대표로 국회에 입성했다.

“실은 양당에서 다 러브콜이 왔다. 당시 노무현 정부 사람이 만나자고 해 코리아나호텔에서 만났다. 언론·여성계 대표로 같이 일하고 싶다더라. ‘저는 해방 때 태어나 6·25전쟁을 겪었고, 나라의 발전을 지켜본 보수적 입장에 속하는 사람이다. 일주일에 방송 프로 하나만 해도 방송계에 남겠다. 죄송하다’고 했다. 갑자기 방송에서 다 잘렸다. 이유는 지금도 모른다. 내 나이 곧 예순이었다. 일을 하지 않을 순 없어 결국 여의도로 갔다.”

 

-정치는 잘 맞았나.

“전혀(웃음). 정당은 진영 논리로 떼를 지어 다니는 것이라서…. 그래서 정책에 집중했다. 공공디자인포럼을 만들었고, 퍼블리시티권을 명문화하는 입법도 추진했다.”

 

-친이명박계로 활동하지 않았나.

“이명박 대통령이 경제를 잘할 것 같았다. 이 대통령 당선자 시절에 ‘문화관광부 이름에 ‘체육’을 넣어야 한다’고 건의한 사람이 나다. 이 대통령 취임과 함께 문화체육관광부로 개명됐다.

 

-문재인 대통령을 인터뷰한다면 어떤 질문을 하고 싶나.

“지금 노무현 대통령을 만난다면 어떤 말씀을 하고 싶으냐 묻고 싶다. 임기가 끝나가는 대통령으로서, 오랜 친구이자 선배인 분에게 어떤 말씀을 건넬지 궁금하다. 개인적으론 문 대통령에게 ‘잘못됐다는 생각이 들 때, 뒤돌아설 수 있는 용기가 가장 큰 용기’라는 말을 전하고 싶다.”

 

-최근 언론중재법을 둘러싸고 정치권과 언론계가 들썩였다.

“그 법이 통과되면 언론의 자유가 없어진다. 사회의 물과 공기가 사라지는 것과 마찬가지다. 언론의 자유를 막는다는 건 독재 정권으로 간다는 것이다. 언론중재법을 밀어붙이면 국민들은 ‘정권이 끝난 뒤를 대비해야 할 일이 있는 걸까’라고 생각한다.”

 

◇대통령 얘기? 여성들의 삶 쓰고 싶었다

-1980년 신군부 때 해직됐다 복귀했다. 소설을 쓰기 시작한 것도 그 무렵이던데.

“내가 왜 해직자 명단에 있었는지 모르지만, 갑자기 사회에서 추방당한 느낌이 들었다. 그때 처음 여성이 스스로를 지키려면 경제적 자립이 가장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동네에 작은 옷 가게를 열었다. 새벽에 동대문 시장에 가서 옷을 떼와 팔았다. 그러다 친구를 따라 한 신문사에서 하는 문화센터에 등록해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박찬숙은 숙명여대 국문학과를 졸업했다.

 

-왜 소설을 쓰나.

“방송 생활 끝내고 여러 일을 해봤는데, 쓰고 기록하는 게 가장 중요하더라. 내게 소설은 세상과 사람들, 특히 여성에 대한 내 방식의 사랑이다.”

 

-최근 발표한 장편 ‘가지꽃’은 해방 전후 여성의 고단한 삶을 조명했다.

“내 나이 이제 희수(喜壽)다. 주변을 오래 관찰해보니, 여성은 대개 여자라는 이유로 삶이 규정되더라. 여성이 아들 낳는 기계이던 시절, 여성이 직업을 갖는다는 걸 상상조차 할 수 없던 시절에 대한 얘길 써보고 싶었다. 이번 책에선 전쟁 속에 흔들리는 여성의 삶을 다뤘다. 사람들은 나더러 대통령, 정치인들 만난 얘기를 쓰라고 하는데, 나는 그 사람들 만난 얘기가 그리 대단한 것 같지 않더라(웃음).”

박찬숙은 1973년 구자용 한국외대 명예교수와 결혼해 1남 1녀를 두었다.

 

-아내, 엄마로서의 자신을 어떻게 평가하나.

“남편과는 서로 간섭하지 않고 독립적으로 살아왔다. 엄마로서는 글쎄…. 따스함이 부족한 엄마가 아니었을지. 워낙 바쁘게 살아서.”

 

-여성 앵커·아나운서 출신 정치인들이 늘고 있다.

“정치에 대한 의지가 확고하다면 존중해야 한다. 하지만 정계 진출을 위한 디딤돌로 방송을 이용하는 것은 잘못이다.”

 

-후배 여성 앵커들에게 하고 싶은 말은.

“(일부 뉴스에서) 내용을 전혀 모르고 읽기만 한다는 느낌을 받은 적이 있다. 뉴스를 알고 읽는 것과 모르고 읽는 것은 다르다. 화면에 예쁘게 나오려고 애쓰는 것보다, 내용을 알고 전달하는 것에 집중했으면 한다.”

 

-’1호 앵커’라는 수식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처음엔 민망하고 미안했다. 그런데 1호의 역할이 자신에게서 끝나는 게 아니라, 파장을 키워 다른 곳에도 영향을 주는 것이더라. 나 이후에 여성 앵커들이 계속해서 나왔고, 지금은 여성 앵커가 혼자 뉴스를 진행하기도 하지 않나. 1호여서 영광이다. 다시 태어나도 앵커를 할 수 있으면 좋겠다.”

조선일보 이옥진 기자

 

11.03 “결혼식에 3만원 낸 친구가 보낸 택배에 ‘눈물 핑’”…사연의 주인공은?

결혼식에 참석한 친구가 축의금 3만원을 낸 뒤 미안하다며 보내온 택배에 눈물을 흘린 작가의 사연이 온라인을 훈훈하게 달구고 있다.

 

▲소재원 작가/소재원 페이스북

 

영화 ‘비스티보이즈’, ‘소원’, ‘터널’의 원작 작가로 유명한 소재원(38) 작가는 2일 오후 온라인 커뮤니티 ‘보배드림’에 ‘결혼식에 와서 3만원을 내고 간 친구’라는 제목의 글을 올렸다. 소 작가는 같은 글을 이날 페이스북에도 게재했다.

 

2015년 9월에 결혼한 소 작가는 “결혼식 때 3만원을 내고 식비가 더 나온다며 밥을 먹지 않고 가려는 친구가 있었다”고 말문을 열었다. 이어 “유일하게 고향에서 올라온 몇 안 되는 친구였는데 난 억지로 녀석을 잡아 절대 가면 안 된다고 식이 끝날 때까지 기다리라 했다. 그러나 친구는 야속하게도 짧은 편지만 남기고 식이 끝나기 전에 떠났다”고 했다.

 

편지에는 ‘야간 일 들어가야 해서 먼저 간다. 미안하다. 진심으로 축하해. 넉넉하지 못해, 작게 내서 미안하다. 그래도 마음만은 아끼지 않고 축하한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고 한다.

 

▲소재원 작가 페이스북

 

사실 소 작가는 친구의 어려운 형편을 알고, 청첩장을 보내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신문 기사에 뜬 소 작가의 결혼 소식을 접한 친구가 청첩장도 없이 결혼식에 참석한 것이다.

 

소 작가는 “가난해 본 사람은 안다. 못해도 왕복 차비를 합쳐 10만원을 썼을 텐데. 그 친구에게 그 돈은 많은 부담이 됐을 거다. 나는 괜스레 눈물이 났다. 미안해하며 밥도 먹지 않고 떠나는, 돈만 붙이거나 문자 한통만 보내도 충분했을 축하를 친구라고 얼굴을 보이려 서울까지 온 녀석이 일 때문에 악수 한번과 짠한 눈빛으로 축하를 대신하고 급하게 버스에 오르는 모습을 상상하니 절로 눈물이 났다”고 했다.

 

결혼식이 끝나고 소 작가는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친구는 반갑게 전화를 받았고, 두 사람은 덤덤하게 대화를 나눴다고 한다.

 

소 작가 “밥 먹고 가지”

친구 “그래도 제수씨 입장하는 건 봤어”

 

소 작가 “배고프잖아. 새벽에 출발해서 아침도 못했겠고만”

친구 “너 여전히 멋있더라”

 

소 작가 “맛있는 거 많은데 밥 먹고 가지”

친구 “나중에 돈 많이 벌면 조카 장난감 많이 사줄게”

 

 작가는 “우리는 동문서답을 이어갔다. 그리고 보이진 않지만 알 수 있었다. 서로 울고 있었다는 것을”이라고 당시 기억을 회상했다.

 

5년 뒤인 2020년 소 작가는 집에 온 택배를 뜯어보고 눈물이 핑 돌았다고 한다. 그 친구가 보낸 것이었다. 택배 안에는 따뜻해 보이는 아이들 명이 옷과 편지가 들어 있었다.

 

편지에는 ‘요즘 애들은 메이커 입힌다는데 미안하다. 그래도 장날에 나와서 돌아다니는데 아기 옷이 눈에 보였다. 안 살 수가 없더라. 밖에 입히고 돌아다니기 좀 그러면 집에서만 입혀’라고 적혀 있었다.

 

소 작가는 “친구는 내 눈물을 빼내는 마법을 부리는 얄미운 녀석이다. 아내가 손빨래를 했다. 내일 건조가 되면 입히고 나가 사진을 찍어 보내주자고 했다”고 했다. 이어 이번 주에 친구를 만나 밤새 술을 마시며 회포를 풀겠다며 글을 마무리했다.

 

소 작가와 친구의 뜨거운 우정을 본 네티즌들은 “저런 친구가 있다는 것 자체가 너무 부럽다”, “멋진 친구다”, “저도 같이 눈물 흘리게 되네요”, “그 친구분 통장에 있는 3만원 전재산이었을 거다. 우정 변치 말길”, “가슴 뭉클한 사연이다” 등의 반응을 보였다. 소 작가의 사연은 다른 온라인 커뮤니티 등에 퍼지며 화제를 모았다. 일부 매체는 한 네티즌이 쓴 ‘감동 사연’이라며 기사화하기도 했다.

 

소 작가가 쓴 친구와의 일화는 이미 지난해 소 작가 소셜미디어에 올라온 적 있다. 소 작가는 2일 인스타그램에 “작년 오늘 자네의 이야기를 적은 내 글이 SNS(소셜미디어)에 남겨져 있었다네. 자네가 그리워 오늘 다시 여기저기 자네와 나의 일화를 담은 글을 작년 오늘 올렸을 때처럼 그대로 올렸지”라고 밝혔다.

 

이어 “한 달에 한 번도 묻지 못하는 안부가 오늘은 눈시울을 붉히게 만드네. 뭐가 그리 바쁘다고 자네 목소리도 듣지 못했는지. 오늘만큼은 온전히 자네만을 기억해 보려 하네. 무척이나 즐거운 하루가 될 것 같아 오랜만에 절로 웃음이 난다”는 친구를 향한 마음을 전했다.

조선일보 김소정 기자

 

11.09 사이코패스의 성공 술수 

음료 이름 뒤에 ‘lite’가 붙으면 저칼로리란 뜻이다. 그런데 ‘사이코패스 라이트(psychopath lite)’란 용어를 한 해외 경영 잡지에서 본 적이 있다. 의학적 진단 기준에 이르는 ‘반사회적 인격 장애’는 아니지만 일하다 보면 만날 수 있는 ‘사이코패스’적 특징을 갖고 있는 사람을 그렇게 표현한 것인데, 그 수가 적지 않고 나와 조직에 악영향을 끼친다는 내용이었다.

 

의학적 관점에서 사이코패스의 특징을 살펴보면, 우선 조종이다. 타인을 조종하기 위해 속임수를 빈번히 사용하고 자신의 목표를 성취하기 위해 유혹, 매력, 언변, 아부를 활용한다. 둘째는 냉담이다. 공감이 결여돼 있고, 자신의 행동이 타인에게 미치는 부정적인 영향에 대한 죄책감이 결여돼 있어 공격적 행동을 보이기도 한다.

 

셋째는 기만이다. 부정직, 사기, 허위 진술, 사건에 대한 윤색과 날조에 능하다. 넷째는 적개심이다. 사소한 경멸이나 모욕에 대해 분노 감정을 표현하고 복수심에 가득한 언행을 보일 때가 있다. 다음은 충동성이다. 결과에 대한 고려 없이 순간적인 계획과 행동을 보이고, 미래의 결과를 고려하지 않은 채 위험을 감수하는 행동을 보인다. 마지막으로 무책임성인데, 공공연히 약속한 것을 존중하는 능력이 결여되어 있다.

 

이런 성향을 가지고 있다면 조직에서 성공하기 어려울 것 같은데, 성공한 리더 중에서 사이코패스 성향을 가진 경우가 일반 인구 기준 1% 미만보다 높은 3.9%에서 12%에 이른다는 통계가 있다. 하지만 큰 차이를 보이지 않았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어찌 되었건 나와 조직에 해를 미치는 사이코패스의 성공 술수를 알아볼 감별력은 필요하다. ‘다섯 단계 모델’이란 사이코패스 성공 술수 관련 가설이 있다. 우선 진입(entry)이다. 매력, 뛰어난 언변, 카리스마 등을 활용하여 구성원의 호감을 얻는다. 둘째는 평가다. 사람을 쓸모에 따라 쉽게 조종할 수 있는 추종자이자 공식 역할이 없는 ‘졸’과, 주변에서 공격할 때 자기를 방어해 줄 수 있는 공식적 포지션을 갖는 ‘수호자’로 구분한다.

 

다음은 조종이다. 자신에 대해선 소설 같은 시나리오를 만들고, 타인에 대해선 가십과 거짓 정보를 흘려 자신의 지지 네트워크를 강화한다. 넷째로 자신의 시나리오를 유지하기 위해 ‘캐릭터 저격(character assassination)’을 사용한다. 자신의 가치에 의심을 품는 사람은 평가절하한다. 마지막으로, 다른 사이코패스가 고용되는 것을 막고 자기 ‘상승’에 방해가 되는 사람은 이용하고 쉽게 버린다.

조선일보 윤대현 서울대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

 

11.30 전화위복

인요한 연세대 의대 교수·세브란스병원 국제진료센터 소장

\2015년 3월경, 평소와 같이 병원에서 아침 일찍 외국인 환자들을 둘러보는 중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우리 연세의료원 의료원장님께서 전화하셔서 “요한, 뉴스 속보 봤는가?”라고 물어보셨다. 의료원장님은 미국 대사께서 괴한에게 칼을 맞았으니 빨리 이송된 병원에 가서 대사님을 우리 병원으로 모셔오라고 하셨다. “이송된 병원에서 치료 잘 받겠지요”라고 대답했지만, 우리 병원 원장님이자 나와도 끈끈한 관계를 유지해온 선배님께서 재차 지시하셔서 이내 가겠다고 대답했다.

 

옷을 갈아입고 택시를 타면서도 속으로는 여러 생각으로 복잡했다. 도대체 어떤 명분으로 대사님을 우리 병원에 모시고 올 것인지가 가장 큰 걱정이었다. 대사 사모님께서 우리 병원에 다니고 계셨으니 내가 그 가족 주치의로서 말씀드리면 될까 하고 고민하던 중에 평소 가깝게 지내던 미대사관 주치의가 연락을 해왔다. 미대사관 주치의는 대사께서 얼굴을 심하게 다치고 괴한의 칼에 손목이 관통됐는데 어디서 어떻게 치료를 받아야 하는지 물었다. 나는 5분 내로 도착하니 조금만 기다려달라고 했다.

2015년 주한 미국대사 피습사건
완쾌 기원한 많은 한국인에 감동
두 나라 사이 신뢰 더욱 깊어져

병원 앞은 경찰과 기자 수십 명이 뒤엉켜 아수라장이었다. 나는 주치의임을 밝히고 경찰 폴리스라인을 뚫고 대사님이 계신 곳으로 들어갔다. 평소 친분이 있었던 이송된 병원의 병원장님도 내려와 계셨다. 나는 대사님의 안위가 걱정되면서도 대사님을 우리 병원으로 모셔갈 생각에 미안한 마음으로 심경이 복잡했다. 대사님의 의식이 있는 것을 확인하고 영어로 대사님께 병원을 옮기실지를 여쭈어보았다. 다행히 대사님께서 우리 병원으로의 이동을 희망하셨다.

 

그러나 대사님을 이송하려고 하니 어떻게 많은 카메라를 피해서 이 병원에 피해를 주지 않고 떠날지가 고민되기 시작했다. 때마침 이송된 병원에서 얼굴 CT를 찍어야 한다고 하셔서 CT를 찍는 동안에 그 병원 원장님께 가까운 비상구 위치를 확인하였다. 그 비상구는 한 층을 걸어서 올라가야 이용할 수 있는 상황이었으나, 대사님께서 다행히 한 층 정도는 걸어 올라가실 수 있다고 하셔서 구급차를 그 비상구 쪽으로 불러 기자들을 피해 대사님을 모시고 병원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짧다면 짧은 시간에 일어난 일들이었지만 피습당한 미 대사를 조용히 이송한다는 일은 그렇게 만만한 일은 아니었다.

 

우리 병원으로 이동하면서 동기인 성형외과 유 교수와 후배인 수부 정형외과 최 교수에게 연락해서 수술실에 빨리 오라고 요청하였다. 그리고 대사님께 우리 세브란스는 민비의 조카인 민영익씨의 암살 시도 사건을 계기로 1885년에 시작된 병원이라고 설명하면서, 그래서 무조건 서울에서는 대사님께서 우리 병원 외에 다른 병원을 가셔서는 안 된다고 농담도 했다. 심각한 상황에서 대사님의 마음을 안심시켜 드리기 위한 나의 배려였다. 병원에 도착해 바로 대사님을 수술실로 모시고 올라갔다. 수술실 근처에는 이미 병원의 여러 관계자가 잔뜩 와있었고 병원도 이미 비상이었다. 마취 담당 교수께서 바로 수술을 위한 마취를 시행하려고 하시기에 나는 대사님께서 의식이 있을 때 먼저 진찰을 하는 것이 좋겠다고 판단하고 마취 전에 성형외과 교수와 수부 정형외과 교수에게 진찰을 받도록 하였다.

 

이때 대사 사모님과 한미연합사령관께서도 도착하셔서 대사 사모님은 수술실 밖에서 대기하시도록 하고, 사령관님과 나는 수술실 안의 조금 떨어진 곳에서 수술을 지켜보았다. 이렇게 어수선한 상황 가운데서도 미국에서도 10시간 가까이 걸릴 수술을 우리 병원은 2시간 반 만에 얼굴 봉합을 끝내고 손목의 끊어진 말초신경도 현미경을 사용한 접합 수술로 완벽하게 마쳤다.

 

그렇게 대사님의 수술과 치료가 성공적으로 마무리되고 얼마 후 대사님도 무사히 퇴원하셨다. 이 무렵 나는 두 가지 일로 한국인의 따뜻한 마음을 다시 한번 깨달을 수 있었다. 첫 번째는 수십 명의 사람이 대사님의 병원비를 대신 계산할 수 있게 해달라고 했던 것이고, 두 번째는 대사관저에 꽃집을 서너 개를 차릴 정도로 대사님의 쾌유를 기원하는 많은 꽃이 와있었던 것이었다. 이러한 모습을 보며 나는 한국인의 정을 마음 깊이 진하게 느꼈다. 더불어 나의 한국에서의 삶에 대한 감사함을 느꼈다. 미 대사님의 피습 사건은 끔찍한 일이었지만 이 사건을 통해서 한국과 미국이 서로에 대한 애정과 신뢰를 깨닫게 되고 더욱 가까워진 전화위복의 계기가 되었다고 평가한다. 그날의 사건은 정치나 국가 외교의 차원을 넘어선 대한민국 국민의 따뜻하고 넘치는 정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었던 의미 있는 경험이었다.

중앙일보 인요한 연세대의대 교수·세브란스 병원 국제진료센터 소장

 
 

12.09 메타버스 활용해 ‘디지털 강국의 꿈’ 이루자

어디서나 메타버스(Metaverse)가 화두다. 그런데 메타버스의 정체를 콕 집어 얘기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메타버스는 살아 움직이는 신기술인 동시에 4차 산업혁명의 신기술들을 빨아들이는 기술계의 ‘인싸’이기 때문이다. 코끼리 만지기처럼 보는 사람마다 다른 정의를 내린다. 최대한 비기술적 용어로 메타버스를 설명해 보자.

 

메타버스란 ‘꿈의 공유’다. 실제의 꿈은 깨어난 뒤 이야기를 통해 간접적으로만 공유할 수 있다. 한 이불 속에 잠자는 부부도 꿈은 제각각이다. 반면 메타버스는 수십만, 수백만 명까지도 함께 꾸는 집단적 꿈이다. 메타버스의 출발점은 여러 사람이 동시에 접속하는 온라인 게임이다. 현실 속의 게이머는 게임 속의 캐릭터를 키보드나 마우스로 제어한다. 메타버스는 오감 재현을 통해 몰입을 점점 더 강화하고 있다. 2차원의 게임 무대가 3D가 되고 SF영화 같은 비주얼이 구현된다. VR(가상현실) 글라스를 쓰면 스크린으로 들어가 입체적인 가상공간을 체험할 수 있다.

 

다채롭고 화려한 꿈을 꿔 본 기억은 누구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멋진 꿈을 꾸고 싶다고 꿀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메타버스는 흥미진진하고 현란한 꿈을 마음대로 꿀 수 있는 장치다. 자동차나 비행기가 걸어 다니던 사람을 먼 곳에 실어나르듯 메타버스는 실제의 잠 속에서는 상상도 못 할 멋진 꿈을 꾸게 해 준다.

 

이것뿐일까. 메타버스는 현실에서 꿈으로 가는 일방통행로가 아니다. 메타버스는 꿈에서 현실로 돌아오는 길에서 가치가 더 커진다. 실제의 꿈도 치유·학습·아이디어 발상의 기능을 갖지만 메타버스는 이를 증폭시킨다. 현실을 디지털로 복사한 미러월드, 즉 디지털 트윈이 그것이다. 싱가포르는 도시 전체를 디지털 공간에 구현했다. 구현된 스마트시티에서 교통 상황을 제어하고, 쓰나미와 팬데믹 같은 재난의 영향과 대책을 시뮬레이션할 수도 있다.

 

또 하나 주목받지 못하고 있는 웅대한 가능성의 영역이 있다. 최근 메타버스는 NFT(대체 불가능 토큰)인증기술과 결합함으로써 막대한 경제적 가치를 창출할 잠재력을 보여줬다. 더 대단한 것은 가상세계의 인증기술이 현실에도 적용될 수 있다는 점이다. 디지털 미술품만이 아니라 실제 예술품, 더 나아가 부동산·토지·천연자원 등 실물자산에 NFT가 적용된다. 이것은 현실을 디지털로 복사하는 디지털 트윈 그 이상이다. 실물자산이 디지털로 이전돼 마음대로 분할되어 거래될 수 있다. 가령 미국 뉴욕 센트럴파크 타운하우스의 지분 0.1%를 구입하고 임대료를 받을 수도 있다.

 

하지만 실물NFT는 대도시의 초고가 부동산이 아니라 저개발국가에서 더 빛을 발한다. 페루의 경제학자 에르난도 데 소토는 저개발국이 보유한 자산의 실제 가치가 상당한데도 형편없이 저평가되고 있음에 주목했다. 그 이유는 재산권이 확립돼 있지 않기 때문이다. 열심히 경작하고 공장을 가동해도 재산권이 없다면 노력할 동기가 없다.

 

만약 실물자산의 NFT가 가능하다면, 재산권 확립을 통해 저개발 문제를 획기적으로 개선할 수 있다. 세계 인구 중 17억명은 아직도 은행 계좌 없이 살아간다. 이들에게 은행뿐 아니라 치안·사법제도, 유능한 정부 수립은 요원하다. 메타버스 관련 기술은 이 문제를 가장 효율적으로 해결할 수 있다.

 

집단적인 꿈의 위력은 역사로 증명된다. 서양문명의 근원인 헤브라이즘과 헬레니즘은 약소민족 유대인과 그리스인의 집단적 꿈과 신화에서 나왔다. 정복당하고 포로로 끌려다니는 와중에도 이들은 꿈을 잊지 않았다. 메타버스는 일확천금의 투자처가 아니라 디지털 기술에 의해 중앙 권력 없이 작동되는 수평적 네트워크 사회를 향한 꿈이다. 디지털 강국 대한민국이 메타버스가 구현할 멋진 꿈의 전위대가 되길 꿈꿔본다.

중앙일보 김은환 전 삼성경제연구소 산업전략실장

 

12.16 “혼수상태 친구 기다리는 중” 1년 뒤… 친구는 지팡이 짚고 나타났다

교통사고로 혼수상태에 빠진 친구를 위해 온라인 커뮤니티에 40일 넘게 ‘친구 기다리는 중’이라는 제목의 글을 올려 화제를 모은 한 네티즌 사연의 결말이 공개됐다.

 

네티즌 A씨는 온라인 커뮤니티 ‘디시인사이드’에 지난해 11월 7일부터 같은 해 12월 18일까지 하루도 빠짐없이 ‘친구 기다리는 중’이라는 제목의 글을 올렸다.

 

처음에 이 글을 본 네티즌들은 단순히 A씨가 약속 장소에 나타나지 않는 친구를 매일 기다린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매일 같은 글이 올라오자 네티즌들은 “맨날 기다린대”, “맨날 만나서 뭐하냐” 등의 댓글을 남기며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A씨는 별다른 설명 없이 “진짜 매일 기다리는 중”이라고 답글을 달기도 했다.

 

작년 12월 19일. A씨가 40일 넘게 같은 제목의 글을 올린 이유가 공개됐다. 이날 A씨는 ‘친구 기다리는 중’이 아닌 ‘이제 친구 안 기다려도 됨’이라는 제목의 글을 올렸다. 알고 보니 A씨 친구는 작년 11월 3일 교통사고를 당해 혼수상태에 빠졌다. A씨는 친구가 깨어나길 기원하며 매일 글을 올렸던 것이다.

 

A씨가 간절히 기다린 덕분일까. 친구는 사고 47일만인 12월 19일 깨어났다. A씨는 병원복을 입고 침대에 앉아 있는 친구 사진을 올리며 “친구가 깨어났다”며 “의사가 가망 없다는 말만 몇번이나 했다. 다행히 뇌랑 척추, 목뼈는 다치지 않아 희망은 있었다. (친구가) 지금(디스코드·음성채팅플랫폼)로 횡설수설하면서 헛소리한다. 아직 제정신은 아닌 것 같다. 그래도 기분은 좋다”고 적었다.

 

A씨가 글을 올린 이유를 알게 된 네티즌들은 “이런 사연이..”, “감동이다”, “친구랑 얼른 다시 만나서 놀았으면 좋겠다”, “두 분 우정 훈훈하다” 등의 반응을 보였다.

 

그리고 1년 뒤인 지난 15일 A씨는 친구의 근황을 공개했다. A씨는 이날 커뮤니티에 ‘친구 기다리는 중 完(완)’이라는 제목의 글을 올렸다.

 

A씨는 “친구가 사고가 난지 1년이 넘었다. ‘친구 기다리는 중’ 꾸준 글이 이렇게 많은 관심을 받게 될지 몰랐다”며 “많은 분들께서 응원과 격려를 해주신 덕분에 이렇게 다시 찾아뵙게 됐다. 정말 감사드린다”고 했다.

 

지팡이를 짚고 걷고 있는 A씨 친구 모습/디시인사이드

 

이어 “친구가 댓글 하나하나 읽으면서 포기하지 않고 많은 힘이 돼 재활 운동에 전념할 수 있었다. 댓글로 응원과 격려해 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해하고 있다”며 친구의 근황 영상을 올렸다. 영상에는 지팡이를 짚긴 하지만 두 발로 평지를 걷고, 계단을 오르는 모습이 담겨 있었다.

 

마지막으로 A씨는 “방송국이나 여러 매체의 인터뷰 요청은 친구가 부담스러워해 정중하게 거절하겠다”며 “후원을 원하시는 분들이 많으셨는데 대신 몸이 불편한 분들을 위해 기부 단체로 기부해 주시면 감사하겠다”라고 했다.

 

▲지팡이를 짚고 걷고 있는 A씨 친구 모습/디시인사이드

 

네티즌들은 “진짜 친구라는 게 이런 걸까. 부디 재활에 성공했으면 좋겠다”, “행복해지는 소식이다”, “친구 잘 뒀다”, “부럽다”, “전에 매일 꾸준 글 올라오는 거 봤는데 친구분께서 많이 나아져서 다행이다. 쭉 건강하길 바란다”며 두 사람의 우정을 응원했다.◎

조선일보 김소정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