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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촌 소식 2021-02/ 08월 09일 32조원 쏟아붓고도 흥행실패… 日에 남은 건 ‘빚 청구서’ - 12.23 10만 병력 국경 집결... 푸틴은 왜 우크라이나에 집착하나

상림은내고향 2022. 1. 3. 13:19

지구촌 소식 2021-02/

08월 09일 32조원 쏟아붓고도 흥행실패… 日에 남은건 ‘빚 청구서’

▲  도쿄올림픽 폐회식이 열린 8일 일본 도쿄 올림픽 스타디움에 마지막을 알리는 화려한 불꽃이 터지고 있다. 연합뉴스

 

■ 도쿄올림픽 ‘적자’ 후폭풍

 입장권 수익 9354억원 무산
신규경기장 유지비 年 52억
언론 “손해 눈덩이” 한목소리
경제효과 대신 재정난 신음
23년전 ‘나가노 악몽’ 우려


 도쿄올림픽이 8일 폐회식을 끝으로 17일간의 열전을 마무리했다.

 

도쿄올림픽은 코로나19 탓에 무관중으로 진행됐다. 올림픽 사상 처음. 토마스 바흐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위원장은 “이번 올림픽의 성공을 훌륭한 희망의 메시지로 받아들이고 있다”고 밝혔지만, 도쿄올림픽 개최 강행 후유증은 무척 클 것으로 우려된다.


일본 요미우리신문은 9일 “입장권 판매로 기대했던 900억 엔(약 9354억 원)의 수익이 무산됐고, 코로나19 확산에 따른 자영업자의 휴업 및 영업시간 단축 보상으로 5조 엔(52조 원) 이상이 발생할 것”으로 전망했다. 이 매체는 특히 “도쿄도는 도쿄올림픽을 위해 아쿠아틱스 센터와 아리아케 아레나 등 6개 경기장을 새로 건설하면서 총 1375억 엔(1조4300억 원)을 투자했다”면서 “올림픽을 마친 뒤 유지 보수 및 경영 등으로 막대한 유지비가 투입될 수밖에 없고, 연간 최대 5억 엔(52억 원)까지 적자를 피할 수 없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도쿄도는 신설된 경기장의 운영권을 민간에 넘겨 적자 규모를 최소화한다는 계획이지만 막대한 자금이 소요되기에 쉽게 해결되지 않을 것으로 내다보인다.


영국 옥스퍼드대는 도쿄올림픽 개최비용을 총 154억 달러(17조6500억 원)로 추산했다. 코로나19 확산으로 인해 개최가 1년 연기되며 발생한 유지보수 등 추가비용 28억 달러(3조2100억 원), 무관중으로 인한 8억 달러(9200억 원)의 손해까지 포함한 금액이다. 미국 경제 전문지 포브스는 도쿄올림픽 개최 비용이 최대 280억 달러(32조880억 원)에 달할 것으로 전망했다. 이는 2016 리우데자네이루올림픽의 137억 달러(15조7000억 원)를 뛰어넘는 역대 올림픽 개최 사상 가장 많은 비용이다.

 

그래서 1998 나가노동계올림픽의 악몽이 23년 만에 반복될 것이란 암울한 전망이 나오고 있다. 일본 나가노현은 동계올림픽 개최 이후 무려 110억 달러(12조6100억 원)의 빚을 떠안았다. 나가노의 올림픽 개최는 희망이 아닌 악몽이 된 셈. 당시 경기장 4곳을 새로 만들며 57억8000만 달러(6조5300억 원)를 투입했고 공항과 철도, 도로 등 대회를 위한 사회간접자본 건설에도 205억2000만 달러(23조5200억 원)가 들어갔다. 하지만 올림픽 개최 이후 기대했던 경제효과는 얻지 못했고, 오히려 부채 상환 탓에 재정난에 시달렸으며, 개최 이후 지역 경제는 발목을 잡혔다. 이젠 올림픽의 저주가 도쿄를 위협하고 있다.
오해원 기자 ohwwho@munhwa.com

 

08월16일 아이티 강진 피해 ‘눈덩이’…1천297명 사망·수천명 부상

▲  지진으로 무너진 집에서 살림살이를 찾고 있는 아이티 레카이 주민들[AP=연합뉴스]

 

인명 피해 계속 커질 듯…잔해 속 생존자 찾기 총력
비 예보에 추가 피해 우려…각국의 구호 인력·물자 지원 이어져

카리브해 아이티를 강타한 규모 7.2 강진의 사망자가 빠르게 불어나며 대형 참사로 확대되고 있다.


15일(현지시간) 아이티 재난당국인 시민보호국은 전날 발생한 강진으로 인한 사망자가 1천297명으로 늘었다고 밝혔다.

 

부상자도 5천700여 명에 달하고 실종자도 많아 인명 피해는 계속 늘어날 것으로 우려된다.


로이터통신에 따르면 시민보호국은 “많은 이들이 실종 상태고 그보다 더 많은 이들이 잔해 아래 깔려있다”고 전했다.


아이티에서는 전날 오전 8시 29분께 프티트루드니프에서 남동쪽으로 13.5㎞ 떨어진 곳에서 규모 7.2의 지진이 발생했다.


수도 포르토프랭스에서는 서쪽으로 125㎞ 떨어진 지점으로, 진원의 깊이가 10㎞로 얕아 아이티 전역은 물론 이웃 나라에서도 강력한 진동이 감지됐다.

 

이튿날인 15일까지도 규모 4∼5의 강한 여진이 계속 이어지고 있다.


지진으로 집이 무너진 피해 지역 주민들은 물론 다른 지역 주민들도 여진의 공포 속에 집 밖에서 일요일 아침을 맞았다. AFP통신은 사실상 아이티 전 국민이 바깥에서 밤을 보냈다고 전했다.


피해지역 병원들은 몰려드는 부상자들로 포화상태가 됐다.


이번 지진 피해는 아이티 남서부 도시 레카이와 제레미 등에 집중됐다.


당국은 이 지역들을 중심으로 주택 1만3천694채가 붕괴되고 1만3천785채가 파손됐으며, 병원, 학교, 교회 등에도 피해가 있다고 밝혔다.


구조당국은 붕괴된 건물 잔해에 깔린 생존자들을 수색해 구조하고 있으나 지진에 따른 산사태 등으로 도로가 막혀 진입에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설상가상으로 열대성 저기압까지 아이티를 향해 다가오고 있어 추가 붕괴와 구조 차질도 우려된다.


미국 국립허리케인센터(NHC)에 따르면 열대성 폭풍에서 열대성 저기압으로 세력이 약해진 그레이스가 16일 오후부터 아이티에 영향을 미칠 것으로 예상된다.


NHC는 그레이스가 아이티와 도미니카공화국에 강한 비를 몰고올 것이라고 예보했다.


빈곤율이 60%에 달하는 극빈국 아이티에서는 지난 2010년에도 포르토프랭스 부근에서 규모 7.0의 지진이 발생해 최대 30만 명이 목숨을 잃은 바 있다. 수십만 명이 다쳤고 100만 명 이상이 집을 잃었다.


11년 만에 또 다시 찾아온 이번 대지진은 지난달 조브넬 모이즈 대통령의 피살로 아이티의 정치·사회 혼란이 극심해진 가운데 발생했다. 극도로 악화한 치안과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위기까지 그야말로 최악의 상황이다.

 

아이티의 참사에 주변국들의 도움도 이어지고 있다.


미국 국제개발처(USAID)는 65명으로 이뤄진 수색·구조팀을 아이티에 파견했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전날 지진 희생자들에 애도를 표시하며, 즉각적인 대응을 지시한 바 있다.


아이티와 히스파니올라섬을 공유하고 있는 이웃 도미니카공화국과 멕시코는 즉시 식량과 의료용품 등을 지원했고, 쿠바와 에콰도르 등은 구조팀과 의료팀 등을 파견했다. 칠레, 아르헨티나, 페루, 베네수엘라 등 중남미 국가들도 지원 의사를 밝혔다.


프란치스코 교황도 이날 아이티 지진 피해자들을 위해 기도하며 “비극의 여파를 줄일 수 있도록” 국제사회의 연대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 연합뉴스>

 

08월 16일 철군 발표 4개월만에 탈레반 아프간 장악… 미국 내 후폭풍 거세져

▲  [ 카불( 아프가니스탄)= AP/뉴시스] 탈레반 부대의 전투원들이 15일(현지시간) 아프간의 수도 카불에 있는 대통령궁을 점령하고 내부까지 진입한 채 관내 전체를 장악했다.

 

20년간 1조 달러 투입하고 병력 2440여 명 희생한 세계 최강국 자존심에 상처
바이든 행정부 “전 정부 당시 결정된 것” 강변에도 ‘바이든 표 사이공’ 비난 쇄도
워싱턴=김남석 특파원

 미국이 20년간 주둔했던 아프가니스탄에서 철군 방침을 밝힌 지 불과 4개월 만에 아프간 정부가 이슬람 무장조직 탈레반에 사실상 항복을 선언하면서 거센 후폭풍이 일고 있다. 조 바이든 미 행정부는 철군 결정이 도널드 트럼프 전 행정부 당시 이뤄진 것이라며 책임을 돌렸지만 대사관 등 철수가 완료되지 않은 시점에서 수도 카불까지 탈레반의 수중에 넘어가면서 1975년 베트남전 당시 탈출에 빗대 ‘바이든표 사이공’이라는 뼈아픈 비난까지 나오고 있다.

 

15일(현지시간) AP통신, CNN 등에 따르면 압둘 사타르 미르자크왈 아프간 내무장관은 이날 “과도 정부에 평화적 권력 이양이 있을 것”이라며 탈레반에 사실상 항복을 선언했다. 바이든 대통령이 지난 4월 14일 아프간전을 종식하겠다며 미군 철수를 발표하면서 8월 말로 예상됐던 철군이 채 완료되기도 전에 탈레반이 아프간 정국을 장악한 셈이다. 앞서 미국 내에서는 미군이 철수해도 병력·물자 등이 우세한 아프간 정부가 최소 1년 6개월은 버틸 것이라는 관측이 우세했지만 만연한 부패·사기저하 등으로 아프간 정부군은 탈레반 측 본격 공세가 시작되자마자 연전연패했다. 결국 아슈라프 가니 아프간 대통령은 “학살을 막기 위해 떠나기로 했다”며 국외 도피와 함께 탈레반에 정권을 이양하기로 전격 결정했다. 9·11 테러 직후인 2001년 알카에다 수장 오사마 빈 라덴에 대한 인도 요구를 탈레반이 거부하면서 시작된 20년 아프간전이 결국 탈레반의 아프간 재장악으로 막 내린 셈이다. 미국은 자국 역사상 최장기 해외전쟁이었던 아프간전에 1조 달러(약 1169조 원)를 투입했으며 미군 2448명이 숨졌다.


대사관 직원 등의 철수가 채 완료되지 않은 상황에서 이뤄진 탈레반의 승리에 미국은 비상이 걸렸다. CNN에 따르면 당초 미국은 카불 대사관의 직원들을 오는 17일까지 모두 대피시킨다는 계획이었다. 바이든 행정부는 대사관 인력 철수를 서두르기 위해 기존에 아프간에 배치했던 1000명 외에 3000명을 추가 파병키로 했다가 14일 1000명을 더 추가해 모두 5000명을 투입하기로 했다. 미 대사관 직원들의 치욕적 대피는 1975년 남베트남 패망 직전인 4월 29일부터 이틀간 펼쳐진 탈출작전 ‘프리퀀트 윈드 작전’을 연상시킨다는 지적이다. 실제로 이날 CNN방송에는 헬리콥터가 대사관 직원들을 대피시키기 위해 긴박하게 왕복하는 모습이 여러 차례 찍혔다.


미국 내에서는 아프간 철군을 최종적으로 결정한 바이든 대통령을 둘러싸고 책임론이 거세지고 있다. 스티븐 스칼리스 공화당 하원 원내총무는 “불운하게도 이 상황은 매우 예측 가능했다”며 대통령 책임을 거론했고, 마이클 매컬 하원의원도 “바이든 대통령의 오점이 될 것”이라고 꼬집었다. 바이든 행정부는 당초 탈레반 측과 올해 5월 1일까지 철군에 합의했던 트럼프 전 행정부에 책임을 돌렸다. 로이드 오스틴 국방장관과 토니 블링컨 국무장관은 이날 의회에 아프간 사태에 대해 긴급 브리핑을 가진 자리에서 “(철수는)트럼프 전 대통령의 밑그림에 따라 결정된 것”이라며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고 해명했다. 하지만 블링컨 장관 등은 탈레반의 진격 속도가 예상보다 빨랐다고 시인하며 아프간 정부군의 무능 등을 이유로 거론하기도 했다. 한편 백악관은 주말을 맞아 대통령 별장 캠프 데이비드에 머물던 바이든 대통령이 이날 오전 아프간 상황에 대한 보고를 받았다고 밝혔다. 앞서 바이든 대통령은 전날 성명에서 “다른 나라 내정에 미국의 끝없는 주둔은 받아들일 수 없다”며 철군 결정을 번복하지 않을 뜻임을 분명히 했다.

문화일보 김남석 기자 / 국제부 / 차장

 

08.27 아프간과 한국, 원조받던 두 나라의 다른 운명

아프간이 보여준 ‘원조의 역설’
‘번영 마중물’ 활용한 韓은 예외
자부심 가질만한 발전 역사에
끊임없는 자해는 뭘 위함인가

▲<YONHAP PHOTO-4267> 국외 탈출 위해 카불 국제공항 담 넘는 아프간인들 (카불 로이터=연합뉴스) 16일(현지 시각) 아프가니스탄 수도 카불의 하미드 카르자이 국제공항에서 국외 탈출을 위해 주민들이 담을 넘어 공항으로 들어가고 있다. 아프간의 이슬람 무장 조직 탈레반이 정권 재장악을 선언하자 카불 국제공항에는 외국으로 탈출하려는 군중이 몰려들었으며 결국 항공기 운항이 중단되고 공항은 마비됐다. sungok@yna.co.kr/2021-08-17 07:18:27/ <저작권자 ⓒ 1980-2021 ㈜연합뉴스. 무단 전재 재배포 금지.>

 

10여 년 전 위키리크스가 폭로한 외교 문서에는 아프가니스탄 정부의 부패 실상이 적나라하게 묘사돼 있다. 아프간 주재 미국 대사는 본국에 보낸 전문에서 “두 달 동안 아프간 고위 관리들이 카불 공항을 통해 해외로 빼돌린 현금이 2억달러(약 2300억원)가 넘는다”고 했다. 아프간 부통령이 직접 5200만달러(약 600억원)가 든 현금 가방을 들고 UAE에 입국하려다 적발된 적도 있다. 이를 정부가 뇌물을 써서 또 입막음했다고 한다. 정치 지도자들이 ‘못 먹는 놈이 바보’라는 일념으로 국제사회 원조금을 빼돌렸다는 것이다. 오랜 대테러 전쟁으로 고통받는 국민, 무너진 경제와 인프라는 뒷전이었다.

 

미국을 중심으로 한 국제사회가 지난 20여 년간 아프간에 지원한 금액은 1000조원이 훨씬 넘는다. 말 그대로 돈을 쏟아부었다. 그런데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서류상 30만명인 군대가 실제로는 5만명이었고, 대통령이 차량 4대에 현금을 가득 싣고 외국으로 도망쳤다는 등의 보도들은 말을 잃게 한다. 아프간 사태는 미국의 오판을 비롯해 여러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다. 하지만 정치 지도자들이 최소한의 능력이나 사명감을 갖췄다면 그 많은 원조금을 갖고 이렇게 무기력하게 국민을 사지(死地)로 내몰지는 않았을 것이다.

 

국제 원조가 ‘번영의 마중물’이 아니라 ‘밑 빠진 독에 붓는 물’이 되는 것은 아프간만의 경우는 아니다. 수십 년간 원조받은 국가들 대부분이 여전히 빈곤에 허덕인다. 아프간을 포함한 20여 국은 1인당 소득이 1960년대보다도 줄었다. 이런 ‘원조의 역설’을 유발하는 주요 원인 중 하나가 정부의 무능·부패라고 한다. 지원금이 경제 현장에 전달되기 전에 정부 관리들의 개인 재산으로 빼돌려진다. 몇 년 전 해외 원조 업무에 관여하는 공무원에게서 일부 개도국 관료의 무능·부패·태만에 대한 하소연을 들은 적이 있다. 그는 “신음하는 자국민들을 생각한다면 어떻게 저럴 수 있을까 속이 터진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라고 했다. ‘이러니 못살 수밖에 없다’는 생각까지 했다고 한다.

 

아프간 사태를 보면서 한국의 경우를 되돌아본다. 한국의 발전 스토리는 세계 원조사(史)에 극히 예외적인 모범 사례로 기록돼 있다. 우리도 해방 이후 90년대 후반까지 국제사회에서 127억달러의 원조를 받았다. 아프간보다 처참했던 전쟁 폐허에서 이런 원조를 디딤돌 삼아 선진국 문턱까지 도약했다. 도움을 받던 나라에서 주는 나라로 탈바꿈한 유일한 나라다. 미국이 과거 아프간·이라크 재건 지원을 시작할 때를 포함해 세계 원조 현장에서는 ‘제2의 한국이 되길 희망한다’는 말을 심심치 않게 들을 수 있다.

 

진부하지만 ‘기적’이라는 표현은 과장이 아니다. 허리띠를 졸라맨 국민들, 혁신을 주도한 기업들과 함께 자유민주주의·시장경제·한미 동맹의 길로 이끈 정치 지도자들이 모두 제 역할을 한 결과라고 생각한다. 세계사에 유례없는 압축 성장을 하면서 부작용도 많았지만 큰 틀에서 대한민국의 국력과 국격은 늘 우상향해왔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우리 사회엔 발전 과정의 그늘만 부각해 업적을 깔아뭉개고, 국민 절반을 반민족·친일 기득권으로 매도하고, 나라의 정통성마저 부인하는 목소리가 넘친다. 몇몇 편향된 개인이라면 무시하면 그만이지만, 이런 사람들이 세금 쓰는 자리를 차지하고 이런 인식을 정부 핵심 세력과 지지자들이 공유한다면 차원이 다른 문제다. 현 정권 지지자들은 논란의 여지가 많은 방역 정책에도, 대통령이 국제 회의에서 찍은 사진 한 장에도 ‘든든하다’ ‘자랑스럽다’며 국뽕을 강요한다. 그런데 진짜 국뽕 스토리에는 끊임없이 자해(自害)를 해대는 것은 어떻게 이해해야 하나.

조선일보 임민혁 기자

 

08.31 미군의 마지막 비행기 떠났다...아프간 전쟁, 20년 만에 종지부

▲수송기에 탑승하는 마지막 미군... 미 중부사령부가 공개한 아프간 마지막 미군사진. 8월 30일(현지시각) 밤 미 육군 82공수부대 사령관 크리스 도나휴 소장이 카불 하미드 카르자이 공항에서 C-17수송기에 마지막으로 탑승하고있다./EPA 연합뉴스

 

미국 국방부가 30일(현지시각) 아프가니스탄 주둔 미군 철수와 일반인 대피를 완료했다고 공식 확인했다. 이로써 미국 역사상 가장 긴 전쟁, ‘영원한 전쟁’으로 불린 아프간전이 20년 만에 공식 종료했다.

 

AP통신에 따르면 중동과 중앙아시아 군사작전을 책임진 프랭크 맥킨지 미 중부사령관은 미국의 마지막 비행기가 아프간의 수도 카불 공항에서 이륙했다고 밝혔다. 맥킨지 사령관은 “아프간 철수의 완료와 미국 시민, 제삼국인, 아프간 현지인의 대피 임무 종료를 선언한다”고 밝혔다.

 

탈레반 경비대원 역시 “미국의 마지막 비행기가 출발했다”고 AP통신에 말했고, 카불에는 폭죽이 울렸다고 한다.

 

▲8월 31일(현지시간) 아프가니스탄 수도 카불 국제공항에서 마지막 미국 항공기가 이륙한 직후 밤하늘에 이를 축하하는 발포가 펼쳐지고 있다. /AFP 연합뉴스

 

아프간전은 미국이 9·11 테러를 일으킨 국제 테러 조직 알 카에다를 감싼 아프간 집권 세력 탈레반을 2001년 공격하면서 시작됐다. 그간 미군 2400여 명을 포함해 아프간 민간인 등 총 16만여 명이 숨졌고, 미국은 2조 달러(약 2231조원)를 쏟아부었다. 전쟁 초기 미국은 탈레반을 축출한 뒤 친미 정권을 세우고 2011년 5월 알 카에다의 수장 오사마 빈라덴을 사살했지만 전쟁의 수령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다. 미국이 지원해 수립한 아프간 정부는 끊임없이 약점을 노출했고, 탈레반이 이를 이용해 아프간을 다시 잠식했기 때문이다.

 

▲2021년 8월 30일(현지시각) 아프가니스탄 수도 카불 국제공항에서 이륙하는 미국 군용기. 케네스 프랭크 매켄지 미 중부사령관은 브리핑에서 미군의 C-17 수송기가 현지시간으로 30일 오후 11시 59분 수도 카불의 하미드 카르자이 국제공항에서 이륙했다고 밝혔다./AP 연합뉴스

 

결국 지난해 2월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은 탈레반과 평화협정을 체결하고 올해 5월 1일까지 아프간 주둔 미군을 철수하겠다고 발표했다. 정권을 넘겨받은 조 바이든 대통령은 “아프간 전쟁을 치르는 네 번째 대통령으로, 이 책임을 다섯 번째 대통령에게 넘기지 않을 것”이라며 9월 1일까지 아프간 주둔 미군 3500여 명을 모두 철수하겠다고 밝혔다.

조선일보 이가영 기자

 

08월 31일 아프간전 마지막 미군은 중무장한 투스타 백전노장

▲  아프간을 떠난 마지막 군인 크리스토퍼 노나휴 미국 육군 82공수사단장[EPA=연합뉴스]

 

카불공항 철군 때 가장 나중에 수송기 탑승
군 30년차…이라크·아프간·시리아 등 17차례 작전 경력

 무려 20년에 이른 전쟁을 마치고 마지막으로 아프가니스탄을 떠난 미군은 군생활 30년차 장성이었다.

미 국방부는 30일(현지시간) 아프간 카불 국제공항에서 단행된 완전 철군 때 가장 나중에 수송기에 몸을 실은 미군이 크리스토퍼 도나휴 미국 육군 82공수사단장이라고 밝혔다.


그가 개인화기를 지니고 굳은 표정으로 C-17 수송기에 오르는 야간 투시경 사진은 아프간 전쟁사의 마지막 장면으로 공식 기록됐다.


도나휴 소장은 1992년 미국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보병 소위로 임관한 뒤 30년째 야전을 누비고 있는 백전노장이다.

 

▲  크리스토퍼 도나휴 미국 육군 소장[미국 육군 제공, DB 및 재판매 금지]

 

미국 USA투데이는 도나휴 소장이 아프가니스탄뿐만 아니라 시리아, 이라크, 북아프리카, 동유럽에서 17차례에 걸쳐 작전에 참여했다고 소개했다.


도나휴 소장은 미국 합참의장 특별 보좌관을 지내기도 했다.


그는 미국의 글로벌 대테러 작전의 일부로 아프간에서 진행된 ‘자유 센티넬 작전’(OFS)을 지원하는 특수작전합동 태스크포스의 지휘관도 역임했다.

 

미 육군 82공수사단은 트위터를 통해 “여러 어려움이 가득해 믿지 못할 정도로 거칠고 압박이 심한 임무였다”며 도너휴 소장의 철수 사진을 게재했다.

미군은 극단주의 무장세력 이슬람국가(IS)의 테러 위협 때문에 자체 설정한 시한 8월 31일이 되기도 전에 심야에 황급하게 아프간을 탈출했다.
< 연합뉴스>    문화일보

 

09.02 '멈춰버린 30년'이 알려준 것

▲일본 도쿄에서 선착순으로 무료 코로나19 백신 접종을 맞기 위해 젊은이들이 줄을 서고 있다. 일본 정부의 코로나 대응 미숙으로 일본 내 확진자수는 좀처럼 줄어들지 않고 있다. [자료 일본 닛폰뉴스네트워크 뉴스 캡처]

 

#1 원칙이 중요하다지만..영문 막도장 파 인감등록 

한국·일본·미국 세 나라에서 TV 배송 날짜 변경을 한 적이 있다. 먼저 한국. 전화응대를 한 직원은 그다지 친절하지 않았다. 하지만 답변은 깔끔했다. "네, 바로 그렇게 변경해드리죠." 다음은 일본. "대단히 죄송합니다만, 계약서에 안 되는 것으로 돼 있습니다. 죄송, 죄송합니다." 친절하지만 단호했던 건지, 단호하지만 친절했던 것인지 헷갈리지만 어쨌든 '노'. 마지막으로 미국. 미국은 전화 연결 자체가 안 됐다.

 

18년 전 도쿄특파원부임 때는 일본의 원칙 고수가 장점으로만 보였다. 하지만 세월이 지나 다시 일본을 보니 그건 아닌 듯하다. '안 되던 것을 되게 해 보려는' 의지, 변화를 선도해 보려는 활력은 찾아볼 수 없다. 6G, AI 시대에 아직도 팩스 없인 행정사무를 볼 수 없고, 신용카드 하나 만드는 데 기본이 한두 달이다. 'KIM'이란 영문 막도장을 새겨 인감등록을 해야 하는 세계 유일의 나라. 머리가 굳어버리니 새로운 발상이 나올 리 없다. 온갖 기발한 신상품들이 넘쳐나 한 번 구경하러 가면 2, 3시간이 후딱 지나갔던 도쿄의 '도큐핸즈'는  올드패션 전시장이 돼 있었다. TV를 켜도 10, 20년 된 재미도 정보도 없는 프로그램뿐. 포맷을 조금씩 바꾼 '쇼와(昭和·1988년에 끝남)의 명곡 100선'을 반복해 내보내며 "아, 그때가 좋았죠"를 외친다. 변한 게 없다.  '멈춰버린 30년'이다.

 

▲아직까지 도장 문화가 사라지지 않고 있는 일본에서는 외국인에 대해서도 이름을 새긴 도장을 인감도장으로 등록하도록 요구하고 있다.

 

▲종이 서류에 일일이 도장을 찍어야 하는 일본 '도장 문화'. [인터넷 캡쳐]

 

#2 옛 세계 최고 백신강국 명성은 어디로 

부자 망해도 3대는 간다고, 그나마 튼튼한 기초과학과 성실하고 친절한 국민성으로 버티곤 있다. 그러나 녹아내려가는 아이스크림을 보는 것 같다. 80년대까지만 해도 일본은 수두·일본뇌염 백신 기술을 미국에 공여하던 최고의 백신 강국이었다. 그래서 코로나가 터졌을 때 일본이 백신을 먼저 내놓을 줄 알았다. 그런데 웬걸. 속을 들여다보니 92년 홍역 백신, 96년 혈우병 에이즈 소송에서 국가와 제약사가 패한 뒤 민간은 투자를 사리고 정부는 지원을 끊으며 아예 손 놓고 있었다. 그 결과가 한·일 역전. 코로나 대응 시스템도 마찬가지다. 밀접 접촉자를 찾는 건 아예 포기했다. 행정 능력이 따라가질 못해서다. 그러니 하루 2만명(인구 2.5배를 고려해도 한국의 4~5배) 이상 확진자가 나와도 나라 전체가 그러려니 자포자기한다. 위기대응 능력? '1(일본) 대 390(한국)'으로 끝난 아프간 대피 작전에서 여실히 드러났다. 총체적 국력 쇠퇴다.

 

활기·역동성 '쇼와'에 멈춘 일본

'고인물 정치' 방치한 언론 책임 커

기자가 '메신저'로 남아서 되겠나

 

#3 고인 물 정치, 방치하는 언론...총체적 쇠퇴 

결국은 정치, 언론의 문제로 귀결된다. 지도자를 만들지 않는 교육시스템도 문제지만 정치가 '고인 물'이 됐다. 세습의원 비율은 무려 26%. 집권 자민당만 따지면 40%다. 한국(5%), 영국(3%), 미국(6%)보다 현저히 높다. 일만 잘하면 그럴 수도 있다. 문제는 못해도 바꾸질 않거나 바꾸지 못하는 거다. 스가 정권의 내각지지율은 최근 4년 사이 최저치인 26%로 고꾸라졌지만, 국회의원들은 파벌 수장 입만 멍하니 바라보고 있다.

 

방치하는 '착한 언론'은 더 문제다. 70년대 록히드 스캔들(당사자인 다나카 총리는 당시 철저하게 부인했다) 이후 일 언론의 권력감시(watchdog)는 급격하게 사그라들었다. 정치가 언론을 더욱 '을'로 길들이고, 당사자가 인정하지 않으면 가급적 보도하지 않는 일 언론 특유의 소극적 자세까지 자리를 잡으면서다. 분명 오보는 많이 사라졌다. 하지만 그만큼, 아니 그보다 훨씬 더 정치와 사회의 활력, 역동성도 사라졌다.

 

▲[사진 지지통신]

 

#4 "한국은 대부분 저널리스트, 일본은 전원 메신저" 

한·일 언론에 조예가 깊은 한 원로는 이렇게 지적했다. "한국 기자는 대부분 저널리스트가 됐고, 일본 기자는 모두 메신저(정보전달자)가 됐다." 뼈 있는 말이다. 보도와 주장의 경계선을 혼동하고, 때로는 선을 넘는 한국 기자들이 자성해야 할 대목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기자가 단순한 메신저로 남는 게 과연 옳은 일일까.  그리고 그걸 정부가 강제하려 하는 게 과연 맞는 일일까. 일본의 '멈춰버린 30년'은 그 답을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중앙일보 김현기 순회특파원

 
 

09월 06일 내전·살인적 물가·인권 탄압에…세계인구 100명중 1명은 난민

▲  로힝야족 난민들이 지난 2월 15일 방글라데시 남부 항구도시 치타공에서 바샨차르 섬으로 가는 선박에 탑승하기 위해 기다리고 있다. 방글라데시 정부는 자연재해 피해 우려가 큰 섬으로의 이주는 의사에 반하는 강제 이주라는 인권단체들의 반발에도 난민들을 섬 내 주거시설로 대거 이주시켰다. AP 연합뉴스

 

■ ‘아프간 엑소더스’로 본 난민 대란

지구촌 8240만여명이 떠돌아
시리아·베네수엘라·아프간
順 18세미만 비중이 42%에 달해
자연재해發 ‘기후난민’도 속출
코로나 등 영향에 재정착 급감
작년 3만여명… 20년만에 최저
유럽, 5년전 유입사태 재현 우려
장벽 설치 등 아프간인에 ‘빗장’


 “7월 마지막 주 어느 날. 작은 고무보트에 33명이 끼어 탔지만 괜찮았다. 파도가 몰아치기 전까지는. 파도는 거대해졌고 엔진은 갑자기 멈췄다. 7시간 동안 표류하는 배 위에서 버텼지만 결국 배는 뒤집혔고 나와 10세, 9세 난 내 아들과 딸은 차가운 바닷물로 빠졌다. 구명조끼는 하나뿐. 밧줄로 나와 아이들을 묶고 구명조끼에 의지해 버텼다. 얼음장같이 차가운 바닷물 속에서 이렇게 죽는구나 싶었다. 한 시간쯤 지났을까. 군인들이 나타났다.”


프랑스에서 영국을 향해 영국해협을 건너려다 전복 사고를 당한 두 아이의 엄마 조안(32)은 1일(현지시간) 영국 데일리메일과의 인터뷰에서 이처럼 그 날을 회상했다. 쿠르드족인 그녀와 아이들은 지금 목표했던 영국에 도착했을까. 대답은 ‘아니요’다. 그녀와 아이들은 다시 프랑스 북부 칼레에 있다.


칼레는 북아프리카와 중동, 아프가니스탄 등지에서 온 난민 1만여 명이 머물렀던, ‘정글’이란 무시무시한 별명을 가진 대규모 난민촌이 있던 곳이다. 이곳 난민들은 대부분 영어로 의사소통이 가능한 영국을 목적지로 삼고 있다. 프랑스 정부는 지난 2016년 이곳을 강제 철거했지만 현재 2000명 이상의 난민이 소규모로 분산돼 160㎞ 길이의 프랑스 해안을 따라 숨어 있다. 경찰들은 이들을 수색하고 이들은 점점 더 외진 삼림, 모래 언덕 등으로 숨어든다. 난민들은 이를 “고양이와 쥐 놀이”라고 표현한다.


그녀처럼 고무보트로 프랑스 북부에서 영국해협 횡단을 시도한 이는 올 들어 지금까지 약 8500명에 달한다. 목숨을 건 여정을 위해 난민 중개업자들에게 지불하는 액수는 성인 2000파운드(약 320만 원), 어린이 1000파운드(약 160만 원). 조안은 “배에서 일어난 일을 생각하면 두렵다. 하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다. 다시 건너야 한다”고 말했다.


◇세계 인구의 1%가 난민…아프가니스탄 사태로 급증 우려 = 현재 전 세계를 떠도는 난민은 8240만 명으로 추산된다. 남북한 인구수를 더한 것보다도 많다. 전 세계 인구 100명당 1명이 난민이라는 뜻이기도 하다. 국가별로는 내전 중인 시리아가 가장 많고 베네수엘라, 아프간, 남수단, 미얀마 순이다. 특히 18세 미만의 아동·청소년은 전체 난민의 42%에 달한다. 하지만 코로나19 영향 등으로 재정착 비율은 급격히 감소했다. 지난해 재정착한 난민 수는 3만4400명에 그친다. 이는 지난 20년 동안 가장 낮은 수치다.


이슬람 무장조직 탈레반이 수도 카불 장악 후 아프간 ‘엑소더스’가 벌어지며 세계는 또다시 대량 난민 문제에 직면했다. 아프간은 이미 세계에서 세 번째로 난민이 많은 국가다. 주변국들과 유럽 국가들은 아프간발 난민 대란이 벌어질까 우려하고 있다. 특히 유럽은 2016년 대거 난민 유입 사태의 재현을 우려한다. 이 때문에 지금 유럽의 문은 굳게 닫혀 있다. 터키는 아프간 난민 유입을 막기 위해 장벽까지 세웠고 오스트리아·그리스 등도 아프간 난민 수용 거부를 선언한 상태다. 유럽연합(EU) 국가들은 최근 아프간 이웃 국가들에 난민 보호에 필요한 재정적 지원을 하기로 합의하기도 했다. 돈을 줄 테니 난민을 수용해 달라고 요청하겠다는 것이다.


◇내전, 살인적 인플레이션, 인권 말살…“떠날 수밖에 없다”= 난민은 크게 정치적, 경제적 난민으로 나뉜다. 전 세계 난민 중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시리아의 경우 내전이 문제였다. 두 번째로 많은 베네수엘라는 대표적 경제 난민 배출 국가인데, 인구 3000만 명의 베네수엘라는 400만 명 이상이 나라를 떠난 상태다. 올해에도 매일 1800~2000명씩 베네수엘라를 떠나고 있다. 살인적 인플레이션이 주원인으로, 지난 1년간 물가상승률은 2575%에 달하며 지난 3월 나온 역대 최고액권인 100만 볼리바르의 가치는 현재 25센트에 불과하다. 아메리카 드림을 꿈꾸며 중남미에서 미국으로 향하는 불법 이민 행렬과 아프리카에서 보트를 타고 유럽으로 향하는 이들의 경우 정치적 불안과 경제 침체 등에 “떠날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미얀마 로힝야족은 특정 종교와 종족에 대한 박해로 난민이 된 경우다. 로힝야족은 수니파 무슬림으로, 불교 국가인 미얀마는 이들에게 시민권도 내어주지 않는 등 박해를 가하고 있다.


◇새로운 ‘기후난민’의 탄생…해수면 상승에 고향 떠나 도시빈민으로 전락 =환경 파괴의 영향으로 집을 떠날 수밖에 없는 기후 난민 역시 최근 급증하고 있다. 국제난민감시센터(IDMC)에 따르면 지난해 자연재해로 인해 4050만 명이 집을 떠나야 했는데, 최근 10년 이래 최고 기록이다. 기후난민은 전 세계적인 문제로 선진국도 예외는 아니다. 2020년 한 해에만 미국에서 약 171만 명이 기후재난으로 이재민이 됐다.


기후난민 문제는 더욱 심각해질 가능성이 크다. 세계경제포럼(WEF)은 2018년 발표한 보고서에서 2050년 안에 기후 관련 사건으로 최소 12억 명이 실향민이 될 것이라고 전망할 정도다. 특히 지난 9일 발표된 유엔 산하 ‘기후변화에 관한 정부간 협의체’(IPCC) 보고서는 지구촌의 노력으로 2050년 탄소중립(온실가스 실질배출량 0)을 이룬다 해도 해수면은 최대 55㎝ 상승한다고 내다봤다. 21세기 말이면 투발루나 바누아투, 마셜제도처럼 해발고도 1~3m의 야트막한 섬나라들은 영영 사라진다는 의미다. 실제로 최근 방글라데시 수도 다카에서는 한 식품 제조 공장에서 난 화재로 10여 명이 숨졌는데, 이들 중 대다수가 해수면 상승으로 해안가의 집과 농경지를 잃은 소년들이었다. 기후 재난으로 고향을 잃은 이들이 도시의 빈민가로 흘러들고, 기후변화가 새로운 도시 빈민을 형성하는 일이 곳곳에서 이미 진행되고 있는 셈이다.

박세희 기자 saysay@munhwa.com

 

 09.08 “그는 프랑스 국보였다” 아듀, 장 폴 벨몽도

▲2013년 프랑스 뤼미에르 영화제에 참석, 젊은 시절 사진 앞에서 선 장 폴 벨몽도. [AP=연합뉴스]

 

프랑스 국민배우 장 폴 벨몽도(88)가 6일(현지시간) 별세했다. AP·AFP 등 외신에 따르면 벨몽도의 개인 변호사 미셸 고데스트는 벨몽도가 파리 시내 자택에서 평화롭게 눈을 감았다고 밝혔다. 사인은 공개되지 않았다.

1933년 파리 근교 뇌이쉬르센에서 유명 조각가 폴 벨몽도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장 뤼크 고다르 감독의 ‘네 멋대로 해라(1960)’를 비롯해 80여편의 영화에 출연하며, 1960~70년대 프랑스의 대표적인 남자배우로 이름을 떨쳤다.

 

1957년 데뷔 후 그는 예술영화뿐 아니라 액션·스릴러·코미디 등 여러 장르에서 경찰·도둑·신부·비밀요원 등 다양한 배역을 소화하며 화려한 필모그래피를 남겼다. ‘파리는 불타고 있는가?’(1966), 007 시리즈 ‘카지노 로열’(1967), 갱스터 영화 ‘볼살리노’(1970) 등이 대표작이다.

 

벨몽도는 장 뤼크 고다르, 프랑수아 트뤼포 등 1960년대 프랑스 영화 운동 ‘누벨 바그(Nouvelle Vague, 새로운 물결)’를 대표하는 감독들과 함께 기존의 권위와 관습을 거부하고 실험적인 영화들을 선보였다. 특히 ‘네 멋대로 해라’ 에서 거칠고 반항적인 비운의 깡패 역을 연기하며 누벨 바그를 상징하는 스타로 떠올랐다. 한때 아마추어 권투선수였던 그는 대역을 쓰지 않고 직접 스턴트 연기를 하는 배우로도 유명했다.

 

2001년 뇌졸중으로 쓰러져 은퇴를 예상했지만, 2008년 영화 ‘남자와 그의 개’로 복귀하는 집념을 보였다. 평생 영화에 헌신한 그는 2009년 LA비평가협회상에서 공로상을 받았고, 2016년 제73회 베니스국제영화제에서는 명예 황금사자상을 수상했다

 

벨몽도의 오랜 친구이자 경쟁자인 배우 알랭 들롱은 그의 타계 소식을 접한 뒤 “나 자신이 산산조각난 것 같다”며 슬퍼했다.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도 트위터에 글을 올려 “위대한 영웅부터 친숙한 인물”까지 연기한 벨몽도를 국보라고 부르며 “우리는 그에게서 우리 모두를 발견할 수 있었다”고 추모했다.

나원정 기자 na.wonjeong@joongang.co.kr

 

10.04 ‘위안부 합의’ 기시다 日총리 선출…오늘밤 내각 발족

[속보] ‘위안부 합의’ 기시다 日총리 선출…오늘밤 내각 발족

▲차기 일본 총리 취임을 앞둔 기시다 후미오 집권 자민당 총재가 1일 오후 도쿄도(東京都) 소재 자민당 본부에서 임시 총무회에 참석하기 위해 이동하고 있다. 연합뉴스

 

4일 오후 일본 중의원 본회의에서 실시된 총리 선출 투표에서 기시다 후미오(岸田文雄) 자민당 총재가 다수당인 자민당과 연립 공명당의 지지로 과반을 득표했다. 이후 참의원 본회의에서 실시되는 투표에서 기시다의 총리 당선이 확정됐다.

 

자민당과 공명당이 참의원의 과반을 점하고 있어 기시다가 무난히 총리로 선출됐다. 앞서 이날 오전 총사직한 스가 요시히데(菅義偉) 내각은 발족 384일 만에 종료됐다.

투표가 끝난 후 각료 명단을 발표하며 이날 저녁 기시다 내각이 정식 출범한다.

중앙일보  이해준 기자 

 

월간조선 10월 호

탈레반의 아프간 장악과 주변국에 미치는 영향

抗蘇 지도자들, 사치에 빠져 탈레반과 싸우지 못해

⊙ 중국은 탈레반의 신장위구르 독립운동세력 지원, 인도는 탈레반이 파키스탄의 카슈미르 탈환 지원하는 것 우려
⊙ 탈레반 후원해온 파키스탄, 이번에도 헬기·특수부대 동원해 탈레반의 판지시르 점령 도와
⊙ 축출된 가니는 탈레반보다 政敵 제거에 관심… 대통령안보보좌관이 정부군에게 항복 명령
⊙ “투쟁은 길자이족이 하고 果實은 두라니족이 따 먹는다”
⊙ 4명의 형제 중 3명이 탈레반에 가담한 경우, 나머지 1명이 형제들의 가족 생계 떠맡아

박현도
1966년생. 서강대 종교학과 졸업, 캐나다 맥길대학 이슬람연구소 이슬람학 석사, 同 박사과정 수료. 이란 테헤란대학 이슬람학 박사 / 명지대 중동문제연구소 연구교수, 외교부 정책자문위원 역임. 現 서강대 유로메나연구소 연구교수, 《Religion & Peace》 편집장, (사)한-이란협회 학술위원장, 법무부 난민자문위원, 한국종교인평화회의 출판위원장

 

        ▲지난 8월 15일 카불에 입성한 탈레반 전사들은 대통령궁을 접수했다. 미군 장비로 무장한 것이 인상적이다. 사진=AP/뉴시스

  

‘아프가니스타니즘(Afghanistanism)’이라는 표현은 ‘당면한 국내 문제를 무시하고 먼 나라의 문제에 집중하는 것’을 가리킨다. 그런데 탈레반의 카불 입성(入城)으로 전 세계 언론이 아프가니스탄 관련 기사를 쏟아내고 있다. 먼 나라 일이라기보다는 국내 문제와 같은 비중으로 보도된다. 예전과 달리 세계가 그만큼 좁아졌다. 아프가니스타니즘이라는 단어가 새로운 뜻을 얻은 것 같은 느낌이다.
 
  미군이 떠나도 적어도 1년은 버텨줄 것으로 믿었던 아프가니스탄 정부군이 미군이 철수하면서 급격히 무너지자, 우리나라처럼 미군과 함께 국가안보를 꾸려가는 미국 동맹국들의 민심이 동요하였다. 특히 탈레반이라는 ‘악마’의 귀환에 놀란 아프가니스탄 국민들이 비행기에 매달리다 떨어지기까지 하면서 필사적으로 탈출하려는 아비규환(阿鼻叫喚)을 보면서 자유세계 시민들은 경악을 금하지 못하였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서둘러 동맹국의 중요성을 강조하자 미군 철수 가능성 논란이 조기(早期) 진화되긴 하였지만, 미군의 아프가니스탄 철수는 안 그래도 중국의 부상(浮上), 러시아의 크림반도 무력(武力)점령 등으로 혼란스러운 국제사회 질서에 커다란 파장을 일으킨 것은 분명하다. 


  아프가니스탄은 고대(古代) 페르시아의 키루스 대왕이 정복 전쟁 중 목숨을 잃은 곳인데 이 사건으로 처음 역사 문헌에 모습을 드러냈다. 아프가니스탄은 1979년 12월부터 1989년 2월까지 이어진 소련의 침공을 이겨냈고, 2001년 10월 7일 들어왔던 미국도 지난 8월 30일 떠나면서 ‘제국의 무덤’이라는 별칭이 더욱 공고해졌다. 


  정복의 고속도로

아프가니스탄은 역사를 되돌아보면 사실 1965년 아널드 플레처의 책 제목 《아프가니스탄: 정복의 고속도로(Afghanistan: Highway of Conquest)》처럼 ‘정복의 고속도로’라는 말이 더 어울리는 곳이다. 페르시아의 다리우스,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를 비롯해 아랍 무슬림, 칭기즈 칸, 티무르, 바부르, 19세기 영국까지 세기의 강자들이 거쳐갔다.
 
  정복자들은 잠시 머물다 가지 않고 왕조를 세워 주변 지역으로 세력을 넓혔는데, 가즈나 술탄조(Ghazna Sultanate·977~1186년)가 대표적인 예다. 오늘날 아프가니스탄의 가즈니를 수도로 삼은 가즈나 술탄조는 이란 동부 지역과 인도 펀잡을 장악하였다. 인도 무슬림들은 가즈나 술탄조의 마흐무드(재위 998~1030년)를 인도에 이슬람을 전파한 정복자로 존경한다. 또 가즈나 술탄조에 이어 아프가니스탄 구르에서 발흥한 구르 술탄조(Ghur Sultanate)는 원래 이슬람교를 신봉하지 않았으나, 가즈나 술탄조의 침략을 받고 복속된 후 이슬람화되었다. 훗날 가즈나 술탄조를 멸망시킨 구르 술탄조는 인도에 무슬림 세력 기반을 더욱 굳게 다졌다. 북부 인도를 열어 델리, 아지메르 등 주요 도시를 정복하고 벵골까지 진출하였다. 


  다민족 국가 아프가니스탄

▲지난 8월 19일 수도 카불 시내를 순찰하는 탈레반 전사들. 사진=AP/뉴시스

 

국토의 75%가 산악지역인 아프가니스탄은 ‘쿠헤 바바(산의 아버지)’로 불리며 해발 5000~7000m에 이르는 힌두쿠시산맥이 국토를 가르고, 국토의 절반이 해발 2000m인 험한 땅이다. 14개 민족이 거주하고, 10여 개 언어가 사용되며, 공식 언어가 2개(다리어·파슈토어)인 나라다. 처음부터 중앙집권적인 정치체제가 자리 잡기 어려운 나라인 것이다.
 
  아프가니스탄은 오늘날의 형태를 갖춘 18세기 이래 부족 연합체 형태의 정체(政體)를 유지해왔다. 14개 민족 중 다수는 파슈툰족이지만, 전체 인구의 반을 넘지는 못한다. 인구조사는 1979년이 마지막인데, 그마저 정확하게 이루어지지 않아 오늘날 아프가니스탄 인구는 모두 추정치다. 2019년 세계은행 통계에 따르면 약 3800만명이다. 파슈툰족은 42%를 차지하고, 타지크족(27%)과 하자라족(9%), 우즈베크족(9%) 등이 그 뒤를 따른다. 사는 지역도 서로 달라서 파슈툰족은 남부와 동부, 타지크족은 북부, 하자라족은 중부, 우즈베크족은 서부에 주로 거주한다.
 
  흥미롭게도 이 민족들은 민족주의를 앞세워 국가를 만들겠다는 정치운동을 펴지 않았다. 우즈베크족이나 타지크족은 이웃한 우즈베키스탄이나 타지키스탄과 민족국가를 이루겠다는 뜻도 없었다. 다수인 파슈툰족의 경우 민족주의 운동은 오히려 파키스탄에 거주하는 파슈툰족 사이에서 거셌고, 여전히 그러한 불씨가 남아 있다. 1500만~1600만명에 달하는 아프가니스탄의 파슈툰족보다 4000만명 이상의 파슈툰족이 사는 파키스탄에서 ‘파슈투니스탄(Pashtunistan)’ 건국 운동이 더 활발하다.


  데오반디와 와하비

  탈레반은 파슈툰어로 ‘이슬람을 배우는 학생’을 뜻한다. 아랍어로 학생을 가리키는 ‘탈렙(taleb·talib)’에 파슈툰어의 복수접미사 ‘안(an)’이 붙은 형태다. 학생들은 이슬람을 기숙학교인 마드라사(madrasa)에서 공부한다.
 
  아프가니스탄 탈레반의 산실(産室)은 파키스탄 페샤와르에서 동쪽으로 약 70km 떨어진 아코라 하탁에 세운 데오반디(Deobandi) 마드라사인 다룰 울룸 하카니아(Darul Ulum Haqqania)다. 탈레반의 창시자 물라 오마르가 바로 이 학교 출신이다. 탈레반을 이끄는 지도부 상당수도 이곳에서 수학하였다.
 
  데오반디는 영국의 인도 지배기에 델리에서 북쪽으로 약 150km 떨어진 도시 데오반드에서 시작한 근대 개혁운동이다. 18세기 사우디아라비아에서 발생한 와하비(Wahhabi) 사상의 영향을 받은 원리주의 운동이다. 와하비보다는 온건한 개혁운동인데 서구의 영향으로 이슬람적 삶의 양식이 침식되는 것을 막고자 반(反)서구를 기치로 내부 개혁 교육을 시작하였다.
 
  상당히 성공한 운동으로 자리 잡은 인도의 데오반디에서 배운 학생들이 파키스탄으로 가서 교육을 이어갔는데, 인도와 파키스탄이 분리되고 파키스탄 정치인들이 이슬람을 정치에 이용하면서 파키스탄의 데오반디는 과격하게 변하기 시작하였다. 특히 1979년 이란의 이슬람 혁명이 성공하자 위협을 느낀 사우디아라비아가 와하비 사상을 전 세계에 보급하면서, 와하비 영향을 받은 국가의 이슬람 운동은 더욱 급진적인 정치원리로 발전하였다. 데오반디 역시 와하비의 영향권에서 벗어나지 못하였다.

 

괴물의 탄생  

1979년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은 단순히 존립을 위협받고 있는 친소(親蘇) 정권을 수호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중앙아시아에서 아라비아해로 이어지는 통로를 장악하여 가스와 석유 파이프라인을 마련하려는 지정학적(地政學的)·지경학적(地經學的) 노림수가 숨어 있었다.
 
  이에 미국은 소련의 남하를 막고 ‘소련판 베트남전쟁’을 선사할 준비를 하였다. 싸움의 구도를 신(神)을 믿지 않는 공산주의자와 신을 따르는 무슬림 전사(戰士)로 잡고, 무신론자(無神論者) 소련에 대항하여 성전(聖戰·지하드)을 수행할 전사(무자헤딘)를 양성하였다.
 
  소련은 농촌 지역에서 민간인과 전사 간의 구분이 어렵다고 느껴 농민들을 도시로 강제 이주시켰다. 이에 여성과 아이들은 전쟁의 참화(慘禍)를 피해 파키스탄 난민촌으로 이주하였다. 고향을 떠나 파키스탄으로 몰려온 파슈툰 소년 난민과 전쟁고아들은 데오반디 마드라사에서 제공하는 이슬람과 군사 교육을 받으며 전사로 성장하였다. 세상을 흑백(黑白)으로 보고 종말론적 사상으로 무장한 무자헤딘으로 변모한 것이다. 이들이 1994년 물라 오마르가 조직한 탈레반 병사가 되었다. 미국과 사우디아라비아로부터 든든한 후원을 받은 파키스탄 정보부는 탈레반에게 무기와 군사 기술·정보를 제공하였다.
 
  미국은 오사마 빈라덴과 손을 잡고 아프가니스탄을 무신론자의 군홧발에서 해방시킬 아랍 전사들을 무슬림 세계로부터 끌어들였다. 1988년 그러한 전사들과 함께 오사마 빈라덴은 아프가니스탄에서 알카에다를 결성하였다. 요르단 감옥에서 원리주의자의 설교에 회심(回心)한 알자르카위도 성전에 참여하고자 아프가니스탄에 와서 오사마 빈라덴을 만났다. 알자르카위는 2014년 잔혹함으로 악명을 떨친 IS의 창시자다.
 
  탈레반은 대소(對蘇) 항쟁단체 무자헤딘들이, 소련이 1989년 패퇴(敗退)한 후 벌어진 내전(內戰) 정국에서 1994년 물라 오마르 지도 아래 뭉쳐 만든 원리주의 조직이다. 힐러리 클린턴은 2012년 인터뷰에서 미국이 싸우고 있는 원리주의 테러분자들을 미국이 대소 아프가니스탄전쟁에서 키웠다고 했는데, 틀린 말이 아니다. ‘소련판 베트남전쟁’에서 미국은 알카에다, 탈레반, IS의 모체(母體)를 지원하였다. 괴물은 그렇게 세상에 고개를 내밀었다.


  길자이족과 두라니족
 

탈레반은 파슈툰족이 주축이고, 파슈툰족 중에서도 길자이족이 주류다. 그러나 파슈툰족 모두가 탈레반을 지지하지는 않기 때문에, 파슈툰족이 곧 탈레반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특히 파슈툰족 중 두라니족은 싸움에 능한 길자이족과 달리 18세기 이래 아프가니스탄의 정치를 좌지우지해온 정치 엘리트를 다수 배출한 지배적인 부족이다. 2001년 탈레반이 붕괴된 후 들어선 아프가니스탄 정부의 초대(初代) 대통령 하미드 카르자이가 바로 파슈툰 두라니족이다. “투쟁은 길자이족이 하고 과실(果實)은 두라니족이 따 먹는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거친 환경에서 자란 길자이족은 전투에 능했지만, 풍요로운 농경사회를 배경으로 성장한 두라니족은 유연한 문화를 지니고 아프가니스탄 정계를 장악해왔다.
 
  아프가니스탄 남부 스핀 볼다크에서 탈레반은 두라니족에 속하는 아차크자이족 100여명을 학살하였다. 최근 탈레반에게 뺨을 맞는 수모를 당하다 살해당한 코미디언도 아차크자이족 출신이다. 그렇다고 해서 탈레반이 두라니족을 증오하여 무조건 죽인다는 말은 아니다. 

 

 탈레반에는 두라니족도 많이 참여하고 있다. 물라 오마르와 함께 탈레반을 만들고 미국과 평화회담을 이끈 압둘 가니 바라다르도 두라니족이다.
 
  그런가 하면 1996년 탈레반이 잔인하게 살해한 모하마드 나지불라(소련 괴뢰정권 시절의 아프간 대통령)는 길자이 아흐마드자이족이다. 아랍에미리트(UAE)로 도주한 아슈라프 가니 대통령도 길자이 아흐마드자이족이다.
 
  따라서 탈레반은 파슈툰족이라도, 길자이족이든 두라니족이든 간에 종교적 세계관 공유(共有) 여부에 따라 피아(彼我)를 구분한다. 이란의 아프가니스탄 전문가 모하마드 자파리안은 아프가니스탄인 중 15~25%가 탈레반 사상을 갖고 있고 대부분 파슈툰족이지만, 그 외 6~8%는 우즈베크족·타지크족·투르크멘족으로 추정한다. 


  탈레반의 성공 원인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과 카르자이 전 아프간 대통령. 카르자이는 미국의 앞잡이라는 인식을 벗는 데 실패했다. 사진=AP/뉴시스

 

1989년 소련이 철수한 후 1992년부터 내전에 들어가자 칸다하르에서 자경단(自警團)으로 시작한 탈레반은, 파키스탄 정보부와 사우디아라비아의 후원으로 1996년 북부동맹이 장악한 지역을 제외하고 약 90%에 달하는 아프가니스탄을 장악하였다. 이후 탈레반 정권은 알카에다에게 테러 기지를 제공하고 오사마 빈라덴과 협력했다. 이 때문에 9·11테러 직후 미국의 공격을 받아 2001년 12월 탈레반 정권은 5년 만에 막을 내렸다.
 
  그로부터 20년 만에 다시 탈레반이 돌아왔다. 천문학적인 재원을 투입하고도 미국은 왜 아프가니스탄에 성공한 민주 정부를 세우지 못하였을까? 도대체 탈레반은 어떻게 성공한 것일까?
 
  자파리안은 탈레반의 성공 이유로, 먼저 가족의 후원과 파슈툰족이라는 기반을 든다. 4명의 형제 중 3명이 탈레반에 가담한 경우, 나머지 1명이 형제들의 가족 생계를 떠맡는다. 또 탈레반의 주축이 파슈툰족이라는 사실은 말 그대로, 파슈툰족은 마르지 않는 저수지처럼 끊임없이 탈레반 전사를 공급한다.
 
  둘째, 미국이 민심과 무관하게 아프가니스탄 정부를 구성하였기 때문에 탈레반이 성공할 수 있었다. 하미드 카르자이는 정당 당수의 비서역을 수행한 것 외에 정치 경험이 부족하였다. 대소 항전 용사들에게 미국에서 요식업을 한 카르자이는 지도자감이 아니었다.
 
  카르자이 대통령의 형 카윰 카르자이는 2014년 대선에 출마하려다 동생의 반대로 물러났다. 또 카르자이에 이어 대통령이 된 아슈라프 가니는 부정선거 시비에 휩싸였다. 가니는 집권 기간 내내 탈레반에 대적(對敵)하지 않고 오로지 정적(政敵) 제거에만 관심을 기울였다. 탈레반이 검문소를 설치하여 국민에게 세금을 거둬도 제지하지 않았고, IS나 타지키스탄·위구르·우즈베키스탄의 극단주의 세력이 아프가니스탄에 똬리를 틀어도 막지 않았다.
 
  셋째, 대소 항전으로 국민의 존경을 받은 비(非)탈레반 무자헤딘이 부유한 삶을 누리면서 국민이 더 이상 이들을 존경하지 않게 되었다. 헤라트에서 적은 병력으로 소련과 싸워 이긴 이스마일 칸은 부(富)를 누리느라 탈레반과 싸움에 전력(全力)을 기울이지 않았다. 그런 그가 국민에게 탈레반과 싸우라고 한다면 누가 따를까? 또 마자르 이 샤리프의 아타 모함마드 누르는 궁전 같은 집에서 거주하였다. 얼마나 호화로웠는지,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는 “누르의 집이 백악관보다 더 장식이 뛰어나다”고 할 정도였다.
 
  대소 항전 용사들이 이렇게 부를 좇아 변했으니, 이들의 말을 따라 국민이 탈레반에 맞서 싸우는 것은 애초부터 기대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배불러진 역전(歷戰)의 용사들은 전장(戰場)에선 아무 쓸모가 없었다.
 
  넷째, 탈레반은 정부 지도자들과 막후 협상을 벌여 손쉽게 아프가니스탄을 접수하였다. 30시간도 채 못 되어 탈레반은 칸다하르·헤라트·가즈니 등 9개 주(州)를 점령하였다. 포병도 공군도 없이 오토바이·대전차포·소련제 칼라시니코프 소총만으로 탈레반이 히틀러를 능가한 전과(戰果)를 거둔 데에는 보이지 않는 거래 외에 다른 이유를 찾을 수 있을까?
 
  가니 대통령은 우즈베크족 지역인 파르야브 주지사로 파슈툰족 다우드 로그마니를 임명하였다. 주민들은 로그마니가 탈레반을 위해 온다고 하면서 결사반대하였다. 결국 로그마니는 파르야브 대신 가즈니 주지사가 되었는데, 불과 두 달 만에 탈레반에게 가즈니를 넘기고 카불로 돌아왔다. 또 파자주에서는 정부군이 탈레반과 격전을 벌이고 있는데, 가니 대통령의 안보보좌관인 모헵이 주지사에게 전화를 걸어 싸움을 멈추고 탈레반에게 항복하라고 하였다. 육로(陸路)로 칸다하르에서 헤라트는 이틀이 걸리는 거리인데 같은 날 오전에는 칸다하르가, 오후에는 헤라트가 탈레반 손에 넘어갔다. 탈레반과 아프가니스탄 정부 간 모종의 거래가 없었다면 도저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난 것이다.

 

샤리아가 아니라 파슈툰 부족법이 지배원리 

  “공개적이고 포용적인 이슬람 정부를 구성하겠다”고 한 탈레반의 말은 일단 공염불(空念佛)이 되었다. 지난 9월 7일 탈레반이 공개한 임시정부 관료 명단은 국제사회가 ‘혹시나?’ 하고 기대한 것과는 달리 테러리스트 명단이었다.
 
  탈레반은 여성의 권리 보장이나 언론의 자유를 약속하고 있지만, 이 또한 기만술에 불과하다. 국제사회의 눈을 의식하여 용감하게 거리로 나온 여성 시위대들에게 직접 발포는 못 하고 있지만, 기자들에게는 폭력을 휘두르고 있다. 20년 전과 달리 국제사회를 의식한다는 점은 고무적이지만, 여전히 이들은 ‘샤리아의 틀’이라는 자의적(恣意的)인 잣대를 들이대면서 여성과 언론의 자유를 억압한다. ‘샤리아의 틀’이라는 것이 이현령비현령(耳懸鈴鼻懸鈴) 같아 신뢰할 만한 기준이 되지 못한다.
 
  탈레반이 샤리아를 제대로 아는지도 궁금하다. 샤리아는 여성의 상속권과 재산권을 인정하고, 혼인 시 여성의 의견을 존중하여 신랑감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여성은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다. 그러나 탈레반은 여성의 상속권이나 재산권을 인정하지 않고, 여성의 의사를 묻지 않은 채 이뤄지는 강제결혼을 인정한다.
 
  이러한 악습(惡習)은 실질적으로 탈레반이 속한 파슈툰족의 오랜 부족 관습인 파슈툰왈리(Pashtunwali)에 기반한다. 파슈툰족 여성은 남성 없이는 존재가 불가능하다. 모든 경제적 이익은 남성 차지고, 여성은 희생이라는 미덕(美德)의 피해자다.
 
  옆을 가린 경주마처럼 탈레반은 파슈툰적 세계관에서 문자적인 이슬람 해석을 받아들였다. 이들의 이슬람 해석에 대해 극단주의적이고 문자적이라고 하는 이유다. 데오반디가 인도에서 파키스탄으로 넘어가 파키스탄의 정치환경 속에서 급진화되었고, 와하비의 세례로 더욱 극보수화되었다. 그 영향 아래 파슈툰 난민촌에서 어린 전사들의 머릿속에 박힌 자의적이고 위험한 흑백 선악관은 불신자(不信者) 소련 공산주의자와 싸우면서 더욱 잔혹해져서 탈레반이 세상을 보는 창이 되었다.
 
  독기가 서린 창을 청소하려면 새로운 해석이 필요하지만, 그러한 움직임은 이내 내부 분열을 부를 것이다. 따라서 탈레반이 변하리라 기대하는 것은 어렵다. 사상 전향도 어려운데, 하물며 종교 신념을 바꾸는 것이 가능할까!


  파키스탄, 탈레반 지원

▲판지시르계곡의 反탈레반 전사들은 아직도 탈레반과의 싸움을 계속하고 있다. 사진=신화/뉴시스

 

 탈레반에게 끝까지 저항하고 있는 곳은 현재 판지시르다. 2001년 9·11테러 이틀 전 판지시르에서 저항군을 이끌던 아흐마드 샤 마수드는 알카에다의 자폭(自爆) 테러에 목숨을 잃었다. 오사마 빈라덴은 탈레반의 골칫덩어리를 제거해주고 9·11테러를 감행하였고, 탈레반은 그에 대한 보은(報恩)으로 알카에다를 보호하였다. 탈레반과 알카에다의 거래로 볼 수 있다.
 
  20년 후인 지금 아흐마드 샤 마수드의 아들이 탈레반에 맞서는 저항군을 판지시르에서 지휘하고 있다. 소련군도 함락하지 못한 난공불락(難攻不落)인 천혜의 골짜기에서 자유를 향한 투쟁을 계속하고 있지만, 파키스탄의 개입으로 전망은 밝지 못하다. 파키스탄은 극구 부인하고 있지만, 파키스탄 보안군이 헬기 27대와 특수부대를 동원하여 탈레반의 판지시르 점령에 도움을 주었다고 한다. 언론에서는 완전 함락이라고 하지만, 아직 마수드의 국민저항군은 건재하며 싸움을 계속 이어가고 있다.
 
  이란은 파키스탄의 개입에 발끈하며 외국이 아프가니스탄 내정에 간섭하는 것은 묵과할 수 없다고 비난하고 나섰다. 그러나 이란이 판지시르 저항군을 위해 전장에 뛰어들 가능성은 없다. 이란은 미군 철수가 수니파의 이란 공세를 부채질한다고 보고 탈레반과 우호적인 관계를 맺어 상황을 통제하려고 한다. 탈레반이 좋아서가 아니라 불필요한 상황에 끌려 들어가는 우(愚)를 범하지 않도록 억제하는 중이다.
 
  판지시르 저항군에 우호적인 나라는 타지키스탄이다. 판지시르 전사들이 타지크족이기 때문이다. 우즈베키스탄도 은밀하게 돕는다는 말이 있지만, 확인하기는 어렵다. 내륙국(內陸國) 우즈베키스탄은 아프가니스탄을 거쳐 이란의 항구도시 반다르아바스에 이르는 운송로(運送路) 다각화(多角化) 계획이 있기에 운신의 폭이 작은 형편이다. 투르크메니스탄은 자국에서 아프가니스탄·파키스탄을 거쳐 인도에 이르는 가스 파이프라인 건설을 추진 중이기 때문에 굳이 탈레반과 척을 질 이유가 없다.
 
  중앙아시아 국가에 영향력을 갖고 있는 러시아는 일단 관망 중이다. 러시아는 아직 탈레반 임시정부를 인정하는 분위기는 아니다

 
  신경 곤두선 중국과 인도

  탈레반의 집권으로 비상이 걸린 나라는 중국과 인도다. 중국은 평소 탈레반과 사이가 좋은 위구르 독립운동 조직 ETIM(동투르키스탄이슬람운동)이 두 나라 국경 지역에서 암약할 가능성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다. 더욱이 미국은 ETIM을 테러조직 명단에서 제외하였다. 중국은 탈레반에게 이들과 관계를 끊을 것을 요구하면서 경제지원을 반대급부로 제시하고 있다.
 
  인도는 탈레반이 카슈미르 독립운동을 지원할까 봐 전전긍긍하고 있다. 인도는 파키스탄이 판지시르 저항군을 공격하는 탈레반을 돕는 대가(代價)로, 탈레반은 파키스탄의 카슈미르 탈환을 돕는다는 밀약(密約)이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1996년 파키스탄과 함께 탈레반 정권을 인정했던 사우디아라비아와 아랍에미리트도 탈레반의 아프가니스탄을 이용해 이란을 견제하기 위해 탈레반에게 접근 중이다. 미국과 탈레반에게 협상장소를 제공한 카타르, 중앙아시아 입지를 다지려는 터키도 활발히 움직이고 있다.
 
  미국이 떠난 ‘테러의 온상지’ ‘양귀비의 천국’ 아프가니스탄에서 주변 국가의 주판 튕기는 소리가 괴물과 춤을 권하는 무도곡(舞蹈曲)과 함께 요란하다.⊙

 

12.23 10만 병력 국경 집결... 푸틴은 왜 우크라이나에 집착하나

푸틴 “군사 조치 취할수 있다”… 나토, 4만 신속대응군 전투태세 상향

소총 든 푸틴 - 21일(현지 시각) 러시아 수도 모스크바의 군사 장비 전시회장을 방문한 블라디미르 푸틴(왼쪽) 러시아 대통령이 세르게이 쇼이구 국방장관과 함께 소총을 점검하고 있다. /AP 연합뉴스

 

우크라이나를 둘러싼 러시아와 미국 간의 대립이 해결점을 찾지 못하면서, 상호 위협의 수위가 점점 높아지고 있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21일(현지 시각) 국방부 확대 간부 회의에서 “(러시아에 대한) 서방의 공격적 태도가 계속된다면, 군사적 조치를 취할 수 있다”고 말했다. 우크라이나 국경 인근에 10만명 이상의 병력을 동원한 러시아의 행위를 ‘침공 준비’로 규정하고, 강력한 경제 제재를 경고한 미국과 EU(유럽연합)에 군사적 대응을 시사한 것이다. 이에 대해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는 22일 우크라이나 사태와 관련해 약 4만명에 이르는 신속대응군의 전투준비태세를 상향 조정했다고 독일의 디벨트가 보도했다. 나토 신속대응군은 2002년 창설된 조직으로 이번 조치는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국경에 약 10만명의 병력을 배치한 후 나토가 처음으로 취한 군사적 대응 조치다.

 

때맞춰 러시아 국영 에너지 기업 가스프롬이 유럽으로 가는 천연가스 공급관 중 하나를 닫았고, 유럽의 천연가스 가격이 장중 34% 급등하며 사상 최고치를 기록했다. 미국 정부는 즉각 더 높은 수위의 대책을 내놨다. 로이터통신은 이날 “미국이 스마트폰과 자동차 등을 대상으로 한 강력한 수출 통제 조치를 검토하고 있다”면서 “러시아 경제와 산업에 중대한 타격을 줄 수 있다”고 보도했다. 시간이 갈수록 우크라이나를 둘러싼 미국과 러시아의 ‘치킨 게임’이 심화하는 양상이다.

①러시아는 왜 우크라이나에 집착하나

 

러시아는 내부적으로 우크라이나와 사실상 한 민족(동슬라브족)이고, 우크라이나가 자국의 ‘앞마당’이란 인식을 갖고 있다. 18세기 예카테리나 대제의 정복 이후 두 나라는 사실상 한 국가에 속해 왔다는 것이다. 경제와 안보 분야의 실질적 이유도 크다. 우크라이나는 프랑스에 이어 유럽 2위 농업 대국이다. 국토의 3분의 2인 흑토 지대에서 연간 2200만t의 밀을 생산해 러시아와 소련을 먹여 살려왔다. 외교전문지 포린폴리시는 “우크라이나는 서유럽 세력이 러시아로 들어올 때 꼭 거치는 ‘전략적 요충지’”라고 했다. 나폴레옹의 러시아 원정과 나치의 러시아 침공 모두 폴란드와 우크라이나 양쪽으로 밀고 들어갔다.

 

우크라이나와 주변 나토 가입 국가들

②최근 러시아가 공격적으로 나오는 이유는

우크라이나가 나토에 가입하려 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러시아는 벨라루스를 제외한 서쪽 국경에서 나토 가입국과 완충 지대가 없어져 국경을 마주하게 된다. 전쟁이 터지면 자국 영토에서 벌어진다는 뜻이다. 비핵화된 우크라이나에 나토의 핵미사일이 배치되는 것도 골치 아픈 문제다. 러시아 타스 통신은 “나토의 중·단거리 탄도미사일이 5~10분 내에 모스크바를 타격할 수 있고, 저공으로 날아오는 토마호크 순항미사일은 최신 방공 체계로도 잡기 어렵다”고 전했다. 러시아는 구소련 시절 서유럽 주요 도시를 10~15분 내에 모두 파괴하겠다며 우크라이나에 3000여 개의 핵미사일을 배치한 경험이 있어 제발이 저릴 수밖에 없다.

 

③러시아는 결국 침공할까

러시아는 2014년 크림 반도를 침공, 강제 합병해 지금도 서방으로부터 제재를 받고 있다. 하지만 ‘러시아 민족주의’를 고취시켜 내부적으로 푸틴 지배 체제를 더 공고히 했다. 이 때문에 푸틴의 침공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당장 내년 초에 기습 공격을 감행할 가능성도 거론된다.

 

미국과 EU를 견제하기 위한 ‘페이크 모션’이라는 분석도 있다. 정치전문매체 폴리티코는 “러시아의 목적은 우크라이나를 지속적으로 ‘분쟁 지역’으로 묶어 두려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안보 위기를 지속적으로 부각시켜 권위주의적 통치 체제를 강화하고, 서방으로부터 최대한의 경제적 이득과 외교적 양보를 끌어내겠다는 구상이라는 것이다.

 

④바이든은 어떻게 대응하나

문제 국가와 1대1로 대응했던 트럼프와 달리 바이든은 ‘동맹과 함께 하는’ 집단적 대응을 추구한다. 이에 따라 러시아에도 EU와 연대한 경제적 제재를 내세웠다. 하지만 러시아가 오히려 유럽으로 가는 천연가스 줄을 조이며 역(逆) 경제 보복이란 ‘패’를 보이자 난처해진 상황이다. 결국 꺼내든 것이 스마트폰과 항공기·자동차 부품 등 전략 물자의 금수 조치다. 바이든이 군사력을 사용하지 않는다는 입장을 미리 밝히자 사실상 러시아의 침공을 용인하는 것 아니냐는 비판도 나온다. 로이터는 “1962년 쿠바 위기 때처럼 (위기가 더 고조된 뒤) 미국과 러시아 양국 간 ‘막판 타결’ 가능성이 거론된다”고 전했다.

 

⑤우크라이나는 어떤 입장인가

우크라이나는 다수인 우크라이나계(78%), 동부 돈바스와 남부 크림 반도의 러시아계(17%)로 갈라져 있다. 현재 집권 세력인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들은 러시아의 영향력에서 완전히 벗어나기 위해 친서방 노선을 걷고 있다. 이를 위해 나토와 EU 가입으로 서방의 일부가 되는 것을 간절히 바라고 있다. 미국 워싱턴포스트는 “우크라이나는 미국의 도움이 절실한 동시에 상당한 불만도 있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소련 붕괴 이후 보유하고 있던 3000여개의 핵무기를 1994년 미국 클린턴 행정부의 중재로 러시아에 넘겼기 때문이다. 당시 클린턴은 그 대가로 우크라이나의 안보를 약속했지만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고, 결국 현재의 위기를 맞았다는 것이다.◎

조선일보 파리=정철환 특파원

 

지구촌 소식 2021-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