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횡설수설 2021-12/ 12-01(수) 적자인생 60세 - 12-31(금) ‘홍합탕 한 그릇

상림은내고향 2022. 1. 2. 19:24

횡설수설 2021-12/ 동아일보

12-01(수) 적자인생 60세

몇 년 전 국내에서도 출간된 일본 소설 ‘끝난 사람’은 한국의 중장년층 독자들에게서 큰 공감을 받았다. 대형 은행의 임원 승진을 앞두고 자회사로 좌천돼 정년을 맞이한 주인공은 끝난 사람 취급하는 주변 분위기에 침울하다. 정년퇴직은 생전에 치르는 장례식이라나. 소득이 소비보다 적어지면 사회에서 쓸모가 다했다는 생각이 들게 마련이다. 그 나이가 한국에서는 60세다.

 

▷통계청이 발표한 ‘2019년 국민이전계정’에 따르면 우리 국민은 태어나서 27세까지는 적자인생을 살다가 28세부터 흑자를 낸 뒤 60세부터 다시 적자 사이클에 들어선다. 60세부터 월급과 사업 등으로 버는 노동소득이 쓰는 돈보다 적어지는 것이다. 2010년엔 적자인생 진입연령이 56세였는데 2016∼2018년 59세가 됐다가 2019년에 60세가 됐다.


▷우리 국민은 17세 때 최대 생애주기 적자를 낸다. 버는 돈은 거의 없는데 교육비 등으로 소비가 많기 때문이다. 1인당 노동소득은 41세 때 정점을 찍은 후 하향곡선이다. 노동소득에서 소비를 뺀 생애주기 흑자는 44세 때 최대가 된 후 내내 줄어들다가 60세부터 적자로 돌아선다. 어릴 때에는 대개 부모에게 의존해 살다가 경제활동을 하면서 제 몫을 한 뒤 60세 이후 삶이 쪼그라드는 흐름이 영화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를 떠올리게 한다.

 

▷그런데 예전처럼 나이 들었다고 자식의 도움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자식이 부모를 부양한다는 의식이 흐릿해진 지 오래다. 한국의 65세 이상 노인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8개 회원국 중 두 개 부문에서 1위다. 인구 대비 취업자 수인 고용률이 OECD 회원국 평균(14.7%)의 두 배를 넘는 1위이고, 급격한 고령화 속에 노후 소득원이 마땅치 않아 노인 빈곤율도 1위다. 집 장만하느라 자녀 교육시키느라 노후 준비가 뒷전이었기에 긴긴 날을 살아가려면 무슨 일이든 해서 돈을 벌어야 한다.

 

▷노후 설계의 발목을 잡는 흔한 착각은 자신에게 80세 이후 삶은 없다고 생각하는 것, 죽음이 어느 날 갑자기 조용히 온다는 것이라고 한다. 전문가들은 미래를 위해 절약하고 아무리 화려한 젊은 날을 보냈다 하더라도 눈높이와 자세를 낮춰 일자리를 구하라고 한다. 적자인생에 들어서기 전에 자녀에게 ‘올인’하는 걸 관두고 국민연금 퇴직연금 개인연금의 3층 연금구조를 마련해 노후 고정수입을 최대한 확보하라고 한다. 무엇보다 호기심을 포기하지 말고 도전을 멈추지 않으며 감사한 마음으로 일을 하면 일상에서 삶의 기적을 발견할 수 있다니 인생, 참 심오하다.

김선미 논설위원 kimsunmi@donga.com

 

12-02 96년 된 서울역그릴 폐업

한국의 첫 경양식당인 ‘서울역 그릴’이 지난달 30일 문을 닫았다. 개점한 지 96년, 한국인에게 돈가스 맛을 처음 알린 곳이 100년을 목전에 두고 폐업했다. 작가 이상이 커피를 마셨고, 그의 소설 ‘날개’에 등장한 식당이다. 6·25전쟁과 외환위기도 이겨냈지만 코로나19를 피해 가지 못했다. 마지막 영업일에는 머리가 희끗한 고객들이 많았다고 한다. 추억의 공간이 사라지는 게 아쉬웠던 것 같다.

 

▷그릴은 1925년 르네상스 양식의 옛 서울역(당시 경성역) 2층에 문을 열었다. 식당 별실에는 상평통보를 형상화한 원탁과 은제 식기를 갖췄다. 호화식당답게 정찬 값은 당시 설렁탕 가격의 21배였다. 신역사로 옮기고 대중식당으로 변신했지만 고풍스러운 분위기를 잃지 않았다. 오래된 나무 의자와 타일, 샹들리에는 중년의 웨이터와 잘 어울렸다. 양식에 깍두기와 ‘납작한 접시 밥’이 나오고, 후추를 뿌려야만 할 것 같은 크림수프는 추억의 맛이었다. 하지만 코로나 이후 단골 발길마저 끊어졌다.


▷마지막 영업 날, 그릴은 오랜만에 만석이었다. 폐업 소식을 듣고 찾은 고객들은 식당 내부와 음식 사진을 찍어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올렸다. 부모님의 맞선 장소, 할아버지와 왔던 기억을 떠올리며 그릴의 부활을 기대했다. 서울역사를 운영하는 한화역사는 그릴을 포함해 문을 닫은 식당가를 리모델링한다고 밝혔다. 그릴 자리에 스테이크집이 들어올 것이란 소문도 있는데 그릴 상호를 다시 사용할지는 불투명하다.

 

▷코로나로 노포(老鋪)들이 사라지는 건 한국만이 아니다. 일본과 유럽에선 수백 년 된 식당이 줄줄이 폐업하고 있다. 일본 도쿄에선 231년 된 민물고깃집 ‘가와진’이 문을 닫았고, 복어 등불 간판으로 유명한 오사카 맛집 ‘즈보라야’도 100년 만에 폐업했다. 독일에선 식당과 술집들이 문을 닫으면서 400년 전통의 베르네크 양조장이 덩달아 폐업했다. 가와진 직원들은 ‘폐점식’ 날 눈물을 쏟았고, 베르네크 양조장 매니저는 “이곳이 너무 그리울 것”이라고 했다.

 

▷한국 음식점 10곳 중 4곳은 개업 후 1년 내 문을 닫는다. 5년 뒤까지 살아남는 식당은 20%에 불과하다. 유럽에는 수백 년 된 식당이 곳곳에 있지만, 한국에는 100년을 넘긴 곳도 손에 꼽는다. 코로나 사태가 길어지면서 식당 절반이 폐업 위기에 몰렸다. 많은 업주들이 100년 노포를 꿈꾸며 창업했을 것이다. 이런 도전이 코로나에 꺾이는 게 안타까울 따름이다. 대를 이어 맛과 정취를 지켜가는 식당이 많아질수록 고객의 추억도 쌓인다. 오는 주말엔 가족과 함께 오랜 단골집을 찾아가도 좋겠다.

이은우 논설위원 libra@donga.com

 

12-03 ‘집값 정점론’

지난달 서울 2분위(하위 20∼40%) 아파트 평균 매매가가 KB부동산 기준 8억7104만 원으로 전달보다 0.92% 떨어졌다. 2019년 10월 이후 2년 1개월 만의 하락이다. 한 단계 위인 3분위(하위 40∼60%) 아파트 값도 11억70만 원으로 0.05% 내렸다. 서울에서 아파트를 ‘팔겠다’는 사람이 ‘사겠다’는 사람보다 많은 상황도 2주 연속 이어지고 있다. ‘집값 정점론’이 점차 현실화하는 모양새다.

 

▷‘노도강(노원 도봉 강북구)’에 몰려 있는 서울 중저가 아파트값 하락은 시장 흐름이 바뀐다는 중요한 신호일 수 있다. 집값은 오를 때 서울 강남지역 등의 고가 아파트가 가격을 이끌고, 내릴 때는 상대적으로 값이 싼 아파트가 먼저 하락하는 경향이 있다. 수도권 전체 아파트를 가격순으로 줄 세웠을 때 한가운데 있는 ‘중위 아파트’ 매매가가 지난달 7억7387만 원으로 10월보다 2.3% 내린 것도 이런 점에서 의미가 있다.


▷다만 지난달 서울 최하위 20% 아파트 매매가는 5억7094만 원으로 전달보다 1.35% 올랐다. 매매가 6억 원 이하로 제한된 서민용 고정금리 대출상품인 보금자리론을 받을 수 있어서 청년, 서민층의 막판 매수세가 유지되고 있는 것이다. 4분위(상위 20∼40%), 5분위(최상위 20%) 고가 아파트값이 여전히 오르는 건 매물이 부족한 영향이 크다.

 

▷노형욱 국토교통부 장관의 ‘하우스 푸어(집만 가진 가난한 사람)’ 발언도 다시 주목받고 있다. 지난달 말 노 장관은 “집값이 안정세에 접어들고 있다”면서 일부 강남지역 아파트값이 최대 40%까지 떨어졌던 2012, 2013년의 집값 폭락을 상기시켰다. 무리한 대출을 받아 집을 샀다간 가격이 떨어져 손해 볼 수 있으니 추격 매수를 자제하라는 경고였다.

 

▷지금은 상황이 그때와 다르다는 의견도 만만찮다. 당시엔 글로벌 금융위기에서 벗어난 한국은행이 기준금리를 3.25%까지 올렸지만 이번엔 1%대 후반에서 멈출 공산이 크다. 또 그때는 아파트 공급이 몰리면서 미분양 아파트가 속출했고 이명박 정부가 강남·서초구에 그린벨트를 풀어 공급한 ‘반값 아파트’ 때문에 “집 살 필요 없다”는 분위기가 강하게 형성됐다.

 

▷결국 아파트값 하락을 추세로 굳히려면 서두르지 않아도 내 집 마련에 문제가 없을 것이란 믿음을 실수요자들에게 심어줘야 한다. 정부가 공공 주도의 주택공급 확대를 서두르고 있지만 실제 공급은 일러야 2024∼2025년에나 이뤄진다. 차기 정부가 초기부터 민간 주택공급을 확대한다는 강한 의지를 보이지 않으면 간신히 시작된 집값 안정의 기회마저 놓칠 수 있다.
박중현 논설위원 sanjuck@donga.com

 

12-04 월 수출 첫 600억 달러

지난달 수출액이 604억4000만 달러(약 71조5000억 원)를 기록했다. 월 기준으로 600억 달러를 넘어선 것은 처음이다. 100억 달러 달성을 온 국민이 함께 기뻐했던 1977년 연간 수출액의 6배나 되는 규모다. 코로나19 팬데믹 위기 속에서도 수출액은 13개월 연속 증가 행진을 하고 있다. 전 세계적으로 비대면 경제활동에 대한 수요가 크게 늘고, 한국 제조업의 탄탄한 경쟁력이 뒷받침되면서 가능한 일이다.

 

▷품목별로도 고르게 선전하는 중이다. 반도체, 석유화학, 일반기계, 석유제품, 선박, 철강, 디스플레이, 무선통신기기 등은 작년 같은 기간에 비해 두 자릿수대 증가율을 나타냈다. 반도체는 모바일기기 수요가 늘면서 17개월 연속 수출이 증가하고 있다. 한때 사양산업화하던 선박도 수출경쟁력이 급속히 되살아나고 있다. 삼성중공업은 지난달 24억 달러짜리 ‘부유식 천연가스 생산 액화 저장 플랜트’를 모잠비크에 인도했다.


▷한국의 연간 수출액이 1억 달러를 돌파한 것은 1964년이다. 그해 11월 30일을 ‘수출의 날’로 정했다가 1990년 ‘무역의 날’로 이름을 바꿨다. 이어 2011년 세계에서 9번째로 무역규모 1조 달러를 달성한 것을 기념해 2012년부터 날짜를 12월 5일로 변경했다. 한국경제가 1970년대 1·2차 오일쇼크, 1998년 외환위기, 2008년 금융위기를 버티고 일찍 극복할 수 있었던 데도 수출산업의 뒷받침이 컸다.

 

▷전국경제인연합회 분석에 따르면 한국이 최근 5년 동안의 평균 증가율을 이어갈 경우 이르면 2024년 연간 수출 7000억 달러 시대에 진입한다. 연간 수출 7000억 달러는 코로나19 팬데믹 발생 이전인 2019년을 기준으로 중국 미국 독일 네덜란드 일본 등 5개국만 달성했다. 스탠다드차타드그룹은 2030년에는 한국의 수출이 1조 달러에 이를 것이라는 분석을 내놓기도 했다.

 

▷물론 불안요인도 있다. 11월 수출액에는 오미크론 변이의 영향은 반영되지 않았다. 감염력이 델타 변이의 최대 6배에 달한다는 오미크론으로 인해 세계 각지에서 국경 봉쇄가 늘어나고 물류에도 차질이 빚어질 가능성이 크다. 올해는 어떻게든 넘긴다 해도 내년부터는 직접적인 영향권에 들 수 있다. 미국과 중국 간의 심각한 무역갈등과 경제패권 다툼도 변수다. 미국 정부는 안정적인 공급망 확보를 위해 한국 기업에도 미국 내 설비투자를 강하게 압박하고 있다. 개별 기업에는 기회가 될 수도 있지만, 국내 제조업 일자리에는 마이너스다. 지속적으로 수출경쟁력을 키워 가는 한편으로 국내 일자리를 지키는 것이 한국경제에 던져진 중요한 숙제다.

허진석 논설위원 jameshur@donga.com

 

12-06(월) 진주만 공습 80년

7일은 일본의 미국 하와이 진주만 기습으로부터 80년째가 된다. 일본은 1941년 12월 7일 미군이 평화로운 일요일을 맞아 휴식을 취하는 사이 진주만을 공습했다. 미국 측 함정 16척과 항공기 177대가 파괴됐다. 당시 수장된 애리조나호를 그대로 놔둔 채 그 위에 설치한 기념관에서는 여전히 솟아오르는 기름을 볼 수 있다. 미국은 기습에서 살아남은 베테랑들을 모아 하와이에서 80주년을 기념하는 대규모 퍼레이드를 준비하고 있다.

 

▷일본이 1868년 메이지유신으로 근대화를 시작한 후 1904년 러일전쟁에서 승리해 세계열강의 하나로 인정받기까지 36년이 걸렸다. 다시 러일전쟁 이후 진주만 기습으로 미국을 공격하기까지 37년이 걸렸다. 그 사이 1910년 한국, 1931년 만주를 차례로 점령하고 1937년 중일전쟁을 일으켜 중국과 인도차이나로 진출했다. 이에 미국이 일본을 향한 석유와 철강의 수출을 금지하자 일본은 1940년 독일 이탈리아와 3국 동맹을 체결한 뒤 진주만 기습을 강행했다.


▷진주만 기습은 이후 4년간 이어진 태평양전쟁의 시작이다. 미국은 항공모함 3척이 바다에 나가 있어 피해를 면한 것이 불행 중 다행이었고 일본은 미 해군 수리시설과 유류 저장소를 미처 파괴하지 않고 돌아간 것이 실수였다. 미국은 남은 전력을 바탕으로 1942년 6월 미드웨이 해전에서 일본 항공모함 4척과 경항공모함 3척을 격침시켜 반격의 계기를 마련했다. 미국인은 진주만 기습을 미드웨이 해전과 연결시켜 시련을 극복한 승리의 역사로 기념한다.

 

▷태평양전쟁은 일본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이 투하됨으로써 끝난다. 일본의 항복은 한국의 광복으로 이어졌으니 진주만 기습은 우리에게도 의미가 없지 않다. 특히 진주만 기습 80년을 맞는 올해는 중국이 미국과 대결적 자세를 취하며 동아시아에 짙은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대동아공영권이란 일본몽(日本夢)은 사라졌지만 그 자리에 ‘동풍이 서풍을 제압한다’는 마오쩌둥 이래의 중국몽(中國夢)이 대신 들어섰다.

 

▷중국이 1978년 덩샤오핑에 의해 개혁개방 정책으로 돌아서 2008년 금융위기를 거치며 주요 2개국(G2)으로 부상하기까지 30년이 걸렸다. 시진핑은 미군을 중국 연안의 열도에서 몰아내는 군사몽(軍事夢)을 실현할 해로 올해로부터 29년 뒤인 2050년을 잡고 있다. 중국 연안의 열도에는 일본까지 포함된다. 시진핑은 지난해 홍콩을 사실상 본토로 편입하고 올해는 대만해협에서 긴장감을 높이고 있다. 항공모함에 탑재한 항공기의 기습을 대신해 둥펑(東風) 미사일이 하늘을 나는 일만은 막아야 할 것이다.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12-07  25년 내 대학 절반 소멸

대학의 미래에 대한 전망은 어둡다. 24년 전 미래학자 피터 드러커는 “30년 후 대학 캠퍼스는 역사적 유물이 될 것”이라고 예언했고, 토머스 프레이는 “2030년 대학의 절반이 사라질 것”이라고 내다봤다. 시대의 변화에 대비하라는 뜻에서 던진 충격 발언이었는데 국내에선 실제로 25년 내 대학의 절반이 소멸된다는 예측이 나왔다.

▷서울대 사회발전연구소와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이 5일 주최한 ‘미래전망 전문가 포럼’에서 저출산으로 학령인구가 줄면서 2042∼2046년 국내 대학 수가 190개가 될 것이라는 보고서가 발표됐다. 현재 대학이 385개이니 25년 후엔 절반만 남게 되는 셈이다. 전국 17개 시도 가운데 대학 생존율이 75% 이상인 곳은 서울(81.5%)과 세종(75%)뿐이다. 경남(21.7%) 울산(20%) 전남(19%)은 5개 중 4개가 사라질 전망이다.


▷지난해 입시부터 학생수가 입학 정원을 밑돌면서 지방대들은 소멸의 위기를 체감하고 있다. 지방 수재들이 가던 국립대 수학과를 수학 8등급 학생이 가고, 지원자 전원이 합격하는 학과들도 속출했다. 속이 타는 대학들은 ‘원서만 내면 100% 합격’이라고 모집 공고를 내거나 ‘1년 학비 면제+토익 수강비 지원’ 같은 유인책을 제시한다. 성적과 무관하게 들어온 학생들에게 고교 수학 과학을 가르치려고 사교육업체와 계약을 맺는 대학도 있다.

 

▷대학의 소멸은 지역 경제의 위기다. 대학생 1명의 월 경제유발 효과가 100만 원이라고 한다. 2018년 서남대 폐교 전후 6년간 전북 남원시의 연간 소득 감소액은 260억∼344억 원으로 추산된다. 2017년 남원시 총예산의 4.5∼6%다. 2010년부터 8년 연속 부실 대학 지정으로 학생수가 꾸준히 줄지 않았다면 폐교의 충격은 더했을 것이다(국토지리학회지 논문). 가야대와 단국대 캠퍼스가 2003년과 2007년 빠져나간 후 경북 고령군과 서울 용산구의 서비스업 고용은 약 6% 줄었다(KDI 보고서). 대학이 지역 문화의 구심점임을 감안하면 폐교로 지역 사회가 입는 손실은 더욱 커진다.

 

▷학생수 급감이 아니라도 지금의 교육 방식으로는 생존이 어렵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진단이다. 미래학자 프레이는 “앞으로는 평생 10개 직업을 바꿔가며 일하게 될 것”이라며 평생교육 수요에 대비하라고 제안했다. 코로나로 미국을 포함해 대부분 나라에서 유학생이 줄어든 데 비해 한국은 한류 덕에 올해 외국인 유학생 수가 12만 명으로 2019년보다 19.8% 늘었다. 공간적 시간적으로 시야를 넓혀 새로운 교육 수요를 찾아내는 것이 대학 소멸을 막는 방법이 될 것이다.

이진영 논설위원

 

12-08 올해도 찾아온 김달봉 씨

김달봉 씨가 올해에도 찾아왔다. 사실 김달봉이란 그의 이름은 실명인지 가명인지 알 수가 없다. 2016년부터 이 이름으로 전북 부안군과 사회복지공동모금회에 기부하러 오는 남성이 “김달봉 씨의 대리인”이라며 돈다발을 놓고 갈 뿐이다. 3일에도 찾아온 그는 종이 쇼핑백에 1억2000만 원의 성금을 넣어 왔다.

 

▷김달봉 씨는 대리인을 통해 2016년 5000만 원을 기부한 것을 시작으로 2019년부터 올해까지 매년 1억2000만 원을 전달하고 있다. 지난해에는 마스크 20만 장(5800만 원어치)도 기부했다. 김달봉 씨의 기부와는 별개로 부안군청에는 2016년 이후 지금까지 매년 누적돼 온 익명의 기부가 2억3000만 원에 이른다. 부안군 측은 “이전까지 익명의 기부가 없었기 때문에 이 기부도 김달봉 씨가 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며 “이것까지 합하면 그의 기부액은 지금까지 6억9800만 원”이라고 했다.

▷김달봉 씨는 왜 기부를 하는 걸까. 2016년 모금회에 처음 기부할 때의 당부는 “저소득 아이들을 위해 돈을 써 달라”는 것이었다. 올해 1월 1억2000만 원을 기부할 때에는 “다문화가정을 돕고 싶다”고 했다. 그 결과 올해 전북 전주와 완주의 다문화가정 100곳이 매달 10만 원씩 생계비 지원을 받고 있다. ‘김달봉 다문화 장학금’인 셈이다.

 

▷그동안 대리인을 통해 부안군에 기부하던 김달봉 씨는 올해 1월에는 모금회 사무실에 직접 나타났다. 2016년 5000만 원에 이은 두 번째 기부액이 1억2000만 원이라 1억 원 이상 고액 기부자 클럽인 아너소사이어티 가입 조건이 됐다. 모금회 측이 가입을 안내하자 그는 관련 서류를 작성했지만 주소와 연락처를 적지 않았다. 서명란에도 김달봉이라는 이름을 적었다. 그러니 회원 대상의 안내를 보낼 수가 없다. 그가 “내년에 뵐게요”라고 했기 때문에 다음 방문을 기다릴 뿐이다.

 

▷그런데 그가 김달봉 씨인지, 평소 찾아오던 그의 대리인인지 알 수가 없다. 모금회 직원 중 둘 다를 만나본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그보다 더 궁금한 것은 김달봉 씨가 과연 한 명인지, 여러 명인지이다. 2016년 인천의 구청 3곳에 각각 5000만 원을 놓고 사라졌던 기부자의 이름도 김달봉이었다. 구호단체들에도 정체를 숨긴 김달봉이란 이름의 후원이 잇따른다. 남의 평가에 연연하지 않는 익명의 기부는 타인의 인정에 굶주린 우리 사회를 성숙시킬 수 있다고 한다. 제 돈 아닌 돈으로 생색내는 사람들이 많은 세상에서 김달봉 씨는 어려운 시기를 함께 버틸 수 있는 기부의 힘을 알려준다. 그가 누구든, 한 명이든 여러 명이든 참 감사하다.

김선미 논설위원 kimsunmi@donga.com

 

12-09 ‘일당 15만 원’ 예비군

한 해 최대 180일을 복무할 수 있는 ‘장기 비상근 예비군’ 제도가 내년부터 새로 시행된다. 평일과 휴일 구분 없이 하루 15만 원이 지급된다. 근무일을 꽉 채우면 2700만 원을 받는다는 계산이 나온다. 지난해 30인 미만 중소기업의 평균 초임 연봉인 2772만 원과 얼추 비슷한 금액이다. 예비군으로 반년만 일하면 이 정도 목돈을 만들 수 있으니 일부 전역자들에게는 솔깃한 이야기일 수 있다.

 

▷종전에도 비상근 예비군 제도는 있었지만 연 최대 15일만 일할 수 있는 단기 아르바이트 성격에 그쳤다. 하지만 7일 예비군법과 병역법 개정안이 공표되며 근무 기간이 대폭 늘었다. 180일간의 근무는 한 번에 이어서 하는 것이 아니라 ‘쪼개기 복무’로 이뤄진다. 부대가 우선 근무 기간을 정하지만 대원과 협의해 조정할 수 있다. 정규직 노동자는 지원이 어렵겠지만 배달 플랫폼 노동자처럼 근무 조정이 자유로운 직군은 가능할 것이다. 내년 2월에 처음 선발한다니 조만간 헬멧과 철모를 번갈아 쓰는 ‘투잡 예비군’의 모습을 보게 될지도 모르겠다.


▷비상근 예비군 제도가 도입된 것은 저출산 현상이 심화하면서 현역병 충원에 차질을 빚고 있기 때문이다. 군 동원사단의 경우 평시에는 소수의 인원으로 유지되다가 전시가 되면 예비군이 충원돼 100% 전력의 부대로 바뀐다. 그런데 평소 이 부대에서 근무하는 현역병 비율이 8% 남짓까지 떨어지면서 전투 대비 태세 유지마저 어려운 실정이다. 이러자 예비군을 투입해 부족한 인원을 채우는 것이다. 2033년이 되면 한 해 충원 가능한 현역병 인력이 필요 인원인 30만 명을 밑돈다고 하니 예비군 투입은 더 늘어날 수밖에 없다.

 

▷내년에 단기 예비군은 3700명, 장기는 50명 채용되는데 이런 규모가 2024년에는 단기 4500명, 장기 600명까지 늘어난다. 육군으로 시작해 공군, 해군, 해병대로도 확대된다. 포병, 정비, 통신, 보급 등 분야뿐 아니라 예비군이 늘어나면서 중·소령급 참모도 선발돼 부대 체계를 갖추게 된다. 예비군은 군기를 말하기 어려울 정도의 오합지졸이란 인식도 있었다. 확대되는 ‘직업 예비군’이 이런 오명에서 벗어날지도 지켜볼 일이다.

 

▷군은 내년부터 비상근 예비군을 모집하면서 기존처럼 장교와 부사관뿐만 아니라 사병 출신도 받기로 했다. ‘두 번 군대 가는’ 기회가 모든 전역자에게 열린 셈이다. 취업 한파 속에서도 채용 인원이 확대되는 예비군 자리는 괜찮은 중·단기 일자리로 각광 받을 수 있다. 하지만 비상근 예비군은 전시와 같은 위기 상황에서는 전투에 투입되는 엄연한 군인이다. 사명감 없이 일자리만 쫓다간 개인에게도 국가에도 피해가 갈지 모른다.

황인찬 논설위원 hic@donga.com

 

12-10 부다페스트 메모랜덤

1994년 12월 5일 헝가리 부다페스트에 미국 러시아 영국 대표가 모였다. 이들은 옛 소련의 핵무기를 분산해 갖고 있던 우크라이나 벨라루스 카자흐스탄 등 세 나라를 핵확산방지조약(NPT)에 가입시키기 위한 문서에 서명했다. NPT 가입의 대가로 이 나라들이 무력침공을 받을 경우 안보를 보장한다는 약속이 들어갔다. 서명 직후 유엔에 제출된 이 문서가 바로 부다페스트 메모랜덤(memorandum)이다.

 

▷당시만 해도 우크라이나는 미국 소련 다음으로 핵무기를 많이 보유한 나라였다. 물론 우크라이나는 핵무기를 갖고만 있었을 뿐 핵무기 발사를 위한 코드 등은 러시아가 통제하고 있었으니 온전한 의미에서의 핵무기 보유국은 아니었다. 이런 이유도 있고 해서 우크라이나는 부다페스트 메모랜덤을 믿고 핵무기를 러시아에 넘겼다.


▷우크라이나가 자국의 안보를 위해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에 가입할 움직임을 보이자 러시아가 10만 명에 가까운 군 병력을 우크라이나 국경지대에 집결시켰다. 러시아가 내년 초 우크라이나를 침공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미국은 러시아를 향해 강력한 경제제재를 경고했지만 우크라이나에 미군을 파병하는 데는 선을 그었다. 러시아가 2014년 우크라이나의 크림반도를 무력으로 병합했을 때에 이어 다시 한번 부다페스트 메모랜덤이 종잇조각에 불과했음이 드러나고 있다.

 

▷메모랜덤의 약자가 흔히 말하는 메모다. 물론 외교적 메모랜덤은 메모이긴 해도 개인이 잊어버리지 않기 위해 쓰는 메모와는 다르다. 거기에는 서명한 국가들의 약속이 들어있다. 다만 메모랜덤은 의회의 비준을 필요로 하는 조약(treaty)이나 협정(agreement)과는 달리 법적 구속력을 피하고 싶을 때 사용하는 형식이다. MOU(memorandum of understanding·양해각서)처럼 조약이나 협정으로 가기 위한 전(前) 단계로서 작성되기도 한다. 우리나라와 관련된 주요 메모랜덤으로는 구한말의 가쓰라-태프트 메모랜덤이 있다.

 

▷국가 간의 조약이나 협정은 당사국의 의회가 비준했기 때문에 조약이나 협정의 불이행은 의회의 의사를 존중하는 국내 세력에 의한 반발에 직면할 수 있다. 그러나 메모랜덤은 그런 것도 기대하기 어렵다. 메모랜덤은 약속을 불이행하는 국가가 불이익을 받게 할 만한 지렛대가 있을 때는 실효성을 갖는다. 우크라이나는 핵무기를 넘겨주는 순간 그 지렛대를 잃어버렸다. 따져보면 조약이나 협정조차도 그것을 강제할 기관이 없는 국제사회에서는 무시될 리스크를 안고 있다. 우크라이나가 처한 곤경은 국제 질서의 냉엄한 현실을 다시 한번 보여준다.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12-11 “반도체가 석유보다 중요”

돈 그레이브스 미국 상무부 부장관이 9일(현지 시간) “반도체가 석유보다 더 중요하다”고 말했다. 그는 “반도체가 없다면 세계 어디에서든 상품 생산도, 기업 운영도 할 수 없다”고 했다. 세상을 지배하는 힘이 석유에서 반도체로 바뀌었다는 뜻이다. 20세기 이후 석유는 전쟁의 불씨였다. 미국은 석유 지배권을 놓고 전쟁을 마다하지 않았다. ‘슈퍼 파워’를 놓지 않으려는 미국에 반도체 전쟁은 당연한 수순이다. 총만 들지 않았을 뿐이다.

 

▷그레이브스 부장관은 “적국이 우리에게 반도체를 주지 않기로 결정할 수도 있다”고 했다. 반도체 공급을 중국에 의존해선 안 된다는 얘기다. 미국은 ‘파트너 국가’의 역할을 강조하고 나섰다. 내년 아시아 국가들과 새로운 경제 기본 협정을 추진하는데, 공급망과 수출 통제를 다룰 예정이다. 중국을 고립시키는 ‘동맹국 동원령’인 셈이다. 미국은 자국에 공장을 짓도록 압박한 데 이어 글로벌 반도체 기업에 고객정보까지 받아갔다. 우리 기업이 받을 압박은 거세질 수밖에 없다.


▷미중 틈바구니에서 살아남으려면 우리 역량이 탄탄해야 한다. 그런 면에서 삼성전자가 3분기 미국 인텔을 누르고 글로벌 반도체 매출 1위를 차지한 건 반가운 일이다. 메모리 수요가 늘었기 때문인데, SK하이닉스도 3위에 올랐다. 하지만 경쟁 기업들이 천문학적 돈을 쏟아붓고 있고, 초미세공정에 필수인 극자외선(EUV) 노광장비는 네덜란드 업체가 독점하고 있다. 비메모리 분야에선 한국 점유율이 10년째 3% 선에 그치고 있다. 매출 1위인데도 생존 위기라는 게 냉혹한 현실이다.

 

▷반도체특별법이 1일 국회 상임위 소위를 통과했다. 논의 9개월 만에 첫 관문을 넘었지만 기획재정부가 예비타당성 조사 면제 등에 반대하고 있어 본회의를 통과할지는 불투명하다. 소위를 통과한 법안도 기업들이 요청한 알맹이가 빠졌다. 수도권 대학의 반도체 관련 학과 정원을 늘려주거나, 주52시간제를 탄력 적용하는 방안이 배제됐다. 이렇게 느긋해서는 반도체 전쟁에서 버티기 어렵다.

 

▷반도체는 승자가 독식하는 시장이다. 삼성전자가 메모리 1위가 된 것은 과감한 투자로 ‘치킨 게임’에서 이겼기 때문이다. 이런 성과가 미래 성공을 보장하지 않는다. 글로벌 반도체 기업들은 인공지능(AI) 특화용 등 차세대 반도체에 사활을 걸고 있다. 자칫 투자의 때를 놓치면 만회할 기회조차 얻기 어렵다. 미국과 중국은 한국을 압박하면서도 협력 관계를 강조한다. 한국과 틀어져서는 공급망 전쟁에서 불리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반도체 입지가 흔들리는 순간, 한국은 두 나라 사이에서 설 자리를 완전히 잃게 될 것이다.

이은우 논설위원 libra@donga.com

 

12-13(월) 묘서동처<猫鼠同處

고양이와 쥐는 서로 천적 관계다. 한자리에 풀어놓으면 쥐가 고양이의 먹잇감이 되는 숙명이다. 그래서 예로부터 쥐는 곡식을 훔쳐 먹는 ‘도둑’이고, 고양이는 이 쥐를 잡는 엄정한 ‘관리’로 비유되곤 했다. 그런데 만약 이 고양이와 쥐가 서로 사이좋게 지낸다면 무슨 일이 벌어질까. 대학교수들이 올 한 해를 정리하는 사자성어로 뽑은 ‘묘서동처(猫鼠同處)’는 이 같은 장면을 꼬집은 것이다. 고양이와 쥐가 함께 잠을 잔다는 ‘묘서동면(猫鼠同眠)’도 같은 뜻이다.

 

▷중국 당나라 역사를 기록한 ‘구당서’ 등에 따르면 지방 군인이 집에서 고양이와 쥐가 같은 젖을 빨고 사이좋게 지내는 모습을 봤고, 그 상관이 고양이와 쥐를 임금에게 바쳤다고 한다. 중앙 관리들은 예사롭지 않은 징조로 보고 “복이 들어올 것”이라며 환호했다. 그러나 오직 한 관리만이 “이것들이 실성했다”고 한탄했다고 한다. 도둑인 쥐를 잡아야 할 고양이가 쥐와 손을 잡고 있으니 행정당국이 도둑과 한통속이 됐다는 경고 아니겠는가. 위아래가 부정하게 결탁해 세상이 잘못 돌아가고 있다는 신랄한 비판이다.


▷이 대목에서 올해 초반 국민들의 억장을 무너지게 한 한국토지주택공사(LH) 임직원 투기 사건이 떠오른다. 부동산 투기를 엄단해야 할 LH 임직원들이 오히려 투기세력으로 나섰으니 고양이가 도둑인 쥐를 잡기는커녕 아예 도둑질을 한 것 아닌가. 검찰이 수사 중인 대장동 게이트는 고양이와 쥐가 손을 굳게 잡은 비리 백화점이었다. 수십, 수백 배 개발이익을 노린 업자들은 유력 법조인들을 방패막이로 끌어들여 법조 카르텔을 만들었다. 인허가권을 쥔 성남시 산하 기관과 이를 견제해야 할 성남시의회 일부는 이들의 비호세력이 됐다. 누가 고양이인지, 쥐인지 알 수가 없을 지경이다.

 

▷여야 후보에 대한 비호감도가 가장 높다는 대통령선거를 걱정하는 시각도 보인다. 여야 유력 후보 모두 사법리스크를 안고 있으니 서로 남 탓할 자격이 있을까. 대선이 끝나면 패자(敗者)가 사법처리 되는 것 아니냐는 흉흉한 얘기까지 나도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이런 식으로 대선이 흘러가면 누가 대통령이 되더라도 갈라진 민심을 수습하고 국민통합의 길로 나아가기는 어려워질 것이다.

 

▷교수들이 고른 2, 3위 사자성어도 고달팠던 한 해를 연상케 하고 있다. 두 번째로 뽑힌 인곤마핍(人困馬乏)은 사람과 말이 모두 지쳐 피곤하다는 뜻이다. 코로나19 사태에 온 국민이 어렵게 버텨왔던 한 해였다는 비유다. 뒤를 이은 이전투구(泥田鬪狗)는 민생을 제쳐둔 채 정치권이 벌이는 그들만의 전쟁을 꼬집은 것일 게다. 제발 내년에는 좀 밝고 희망적인 사자성어가 나왔으면 좋겠다.

정연욱 논설위원 jyw11@donga.com

 

12-14 사라지는 5만 원권

5만 원짜리 지폐가 숨고 있다. 올해 1∼10월 5만 원권 지폐의 환수율이 17.75%로 떨어졌다. 2009년 6월 5만 원권을 발행하기 시작한 이후 최저 수치다. 한국은행은 올 들어 10월까지 5만 원권을 약 19조7721억 원어치 발행했는데, 환수된 5만 원권은 3조5087억 원어치에 불과했다고 밝혔다. 10장 중 8장 이상이 어딘가에서 잠을 자고 있다는 이야기다. 5만 원권 환수율은 2019년만 해도 60% 수준이었다. 지난해 24%로 뚝 떨어지더니 올해는 그 추세가 더 가속화한 것이다.

 

▷한은에 환수되지 않은 5만 원권은 금고나 장롱 속으로 들어간 것으로 추정된다. 5만 원권에 대한 수요 증가 현상을 반영하듯 금고 판매도 크게 늘고 있다. 올해 1∼10월 해외에서 들여온 금고 수입액은 492만 달러로 지난해 같은 기간에 비해 20% 가까이 늘었다. 5만 원권으로 15억 원 정도를 보관할 수 있는 금고가 인기라고 한다.


▷5만 원권 환수율이 낮아진 1차 원인으로는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인해 경기 불확실성이 커진 점이 꼽힌다. 금리가 낮아서 은행에 예금을 해도 이자가 거의 붙지 않는다는 점도 현금 수요를 자극하고 있다. 디지털금융 활성화로 현금 거래 자체가 줄고 있는 것도 5만 원권이 돌지 않는 것과 관련이 크다. 하지만 5만 원권 회수율이 급격히 낮아진 데는 이처럼 정상적인 경제 요인만으로는 설명이 충분하지 않다. 고액권 수요는 지하경제와는 아무리 떼려고 해야 뗄 수 없는 관계다.

 

▷세금 부담이 늘면 세금 탈루를 위한 고액권 수요가 커질 공산이 크다. 최근 들어 세금 부담이 커진 부동산 분야에서 탈루 적발이 많다. 부동산을 자식에게 증여하고 증여세를 현금으로 조금씩 나눠서 보태주다가 적발되는 경우가 종종 발생한다. 금융정보원은 하루 1000만 원 이상 규모의 현금 입출금을 모두 알고 있다. 최근 일부 집주인들은 임대료를 음성적으로 높이면서 월세의 일부를 현금으로만 달라는 요구를 하기도 한다. 이런 돈들은 금고에서 잠을 자다가 은밀하게 쓰이기 마련이다.

 

▷5만 원권은 2009년 이후 올해 9월까지 256조6670억 원이 발행됐고, 이 중 116조4082억 원만 회수됐다. 나머지 약 140조 원이 회수되지 않고 있다. 우리나라의 연간 5만 원권 환수율은 미국 100달러 지폐의 환수율 70%대와 유럽 500유로 지폐의 90%대와 비교하면 현저하게 낮다. 시중에 풀린 고액권이 지하경제로 흘러들면 세수 부족으로 증세 요인이 되고, 이는 다시 탈세용 고액권 수요를 부추길 수 있다. 이런 우려가 아니더라도 지하경제의 규모가 커지면 정치나 사회적으로도 많은 주름살이 생기게 된다. 정부가 5만 원권의 ‘퇴장’에 경각심을 가져야 하는 이유다.

허진석 논설위원 jameshur@donga.com

 

12-15 세계 최장수 국가 ‘한국’

세계 최장수 국가는 일본이다. 보건복지부가 지난해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일본인의 기대수명은 84.2세로 한국(82.7세)보다 1.5세 더 오래 산다(2018년 기준). 일본인의 생선 사랑과 저지방 식단이 비결로 꼽힌다. 그런데 일본을 제치고 한국이 최장수 국가가 된다는 전망이 나왔다.

 

▷통계청이 최근 발표한 ‘장래인구추계’에 따르면 2020∼2025년 한국인의 기대수명은 84.1세로 일본(84세)을 근소한 차이로 앞지를 전망이다. 2065∼2070년이면 기대수명은 90.9세(남자 89.5세, 여자 92.8세)로 늘어나 일본(89.3세)과의 격차는 더 벌어진다. 2위와 3위는 노르웨이(90.2세)와 핀란드(89.4세)다. 통곡물과 채소, 오메가3 지방산 함량이 높은 생선 위주의 ‘노르딕 식단’으로 주목받는 북유럽 국가들이다.


▷한국이 세계 1위의 장수 국가가 된다는 전망은 영국 과학계에서 먼저 나왔다. 영국 임피리얼칼리지 런던 연구진은 2017년 의학저널 랜싯에 게재한 논문에서 2030년 한국인의 기대수명은 여성 90.82세, 남성 84.07세로 최장수 국가가 된다고 예측했다. 연구진은 건강보험제도와 의료기술의 발달, 높은 수준의 교육과 어린이 영양을 비결로 꼽았다. BBC를 비롯한 외신이 주목한 건 김치로 대표되는 발효음식 문화와 조금만 아파도 병원으로 달려가는 건강염려증이다.

 

▷실제로 한국인 가운데 ‘나는 건강하다고 생각한다’고 응답한 비율은 32%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가장 낮다. 한국인보다 평균수명이 짧은 미국(87.9%)이나 독일(65.5%)의 절반도 안 된다. 건강염려증을 감당해주는 건 가성비 뛰어난 의료 인프라다. 한국인의 1인당 연간 병원 방문 횟수(16.6회)는 OECD(평균 7.1회) 회원국 중 최고 수준이다. 예방접종률, 건강검진율 등 의료 접근성을 나타내는 지표와 위암 유방암 대장암 같은 중증질환 생존율 모두 OECD 평균보다 높다. 반면 1인당 연간 진료비(3192달러)는 OECD 평균(3992달러)보다 싸다.

 

▷세계 1위 장수 국가 기록에 기여한 또 다른 요인은 저출산이다. 영아 사망이 드물다 보니 기대수명이 길어지는 것이다. 지금 같은 저출산 기조가 이어지면 생산연령인구 100명이 부양해야 하는 인구가 2020년 38.7명에서 2070년이면 116.8명으로 급증한다. 유엔은 한국 인구가 2024년경 정점에 이른 뒤 2100년이면 2900만 명까지 줄어든다고 전망했다. 1966년 인구 규모다. 전후 폐허를 딛고 최장수 국가로 발돋움한 나라가 후손을 보지 못해 전후 수준으로 쪼그라든다니 서글프다.

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12-16 천수 누린 김영주

1972년 세계적인 데탕트 물결 속에 비밀 방북한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은 김일성을 만나 그의 동생 김영주 노동당 조직지도부장이 서울을 답방해줄 것을 요구했다. 하지만 김일성은 난색을 표했다. “그는 사실 몹시 아픕니다. 거짓말이 아닙니다. 반나절밖에 일을 못 합니다.” 이후락이 “그럼 반나절이라도 좋으니 보내 달라”고 했지만, 김일성은 ‘식물성신경부조화증’이란 병명까지 대며 거절했다. 그래도 이후락은 확인해야 했다. 연회에서 김영주에게 집요하게 술을 권했다. 술을 마신 김영주는 그 자리에서 졸도해 혼수상태에 빠졌다고 한다.

 

▷결국 김영주 대신 서울엔 박성철 제2부수상이 다녀갔지만 남북 최초의 공식 합의문인 7·4공동성명에는 ‘서로 상부의 뜻을 받들어’ 이후락과 김영주가 서명했다. 남측은 실무협상 때부터 이후락의 대화 파트너로 김영주를 지목했다.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정보부장이자 정권 2인자의 상대라면 마땅히 북한 실권자이자 후계 1순위자여야 했다. 하지만 김영주는 이미 몇 년 전부터 해외로 신병 치료를 다니는 등 건강이 좋지 않았고, 조카 김정일과의 권력투쟁에서도 밀려 퇴장 수순을 밟고 있었다. 중앙정보부는 당시 김영주를 후계자로 잘못 짚고 있었던 것이다.


▷북한 매체들이 15일 김정은의 종조부인 김영주의 사망 소식을 전했다. 1920년생으로 김일성보다 여덟 살 아래인 김영주는 101세로 세상을 떴다. 일제강점기 땐 빨치산 형을 둔 탓에 일경에 체포되기도 했지만 형이 알선해준 덕에 모스크바로 유학도 갈 수 있었다. 6·25전쟁이 끝난 뒤 귀국해선 권력의 핵심인 당 조직지도부 지도원으로 시작해 부장까지 초고속으로 올라갔다. 형을 대신해 조카의 훈육도 맡았다. 군사훈련에 빠진 채 영화 삼매경에 빠져 있던 김정일을 찾아내 두들겨 패선 훈련소로 복귀시킨 적도 있다고 한다. 김정일의 첫 근무지도 삼촌 아래의 조직지도부였다.

 

▷김영주가 후계자로 떠오른 것은 1967년 반종파투쟁이었다. 김일성 체제에 도전하는 갑산파를 숙청한 이 권력투쟁의 선두에 선 것이 김영주와 김정일이었다. 하지만 숙부와 조카의 합작은 거기서 끝났다. 원만한 성격의 지식인 타입인 김영주는 권력 의지가 약했고 충성경쟁에도 능하지 못했다. 김일성은 “작은아버지가 주체사상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아들의 보고를 받고 동생을 지방으로 추방했다. 그렇게 지천명(知天命)의 나이에 권력에서 멀어진 이래 유배 생활을 전전했고 말년엔 실권 없는 명예직에 머물렀지만 그는 천수를 누렸다. 병 때문이든 천성 때문이든 자신의 한계를 깨닫고선 철저하게 낮췄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이철희 논설위원 klimt@donga.com

 

12-17 佛 흔든 영부인 허위정보

지금 프랑스는 ‘장미셸 트로뇌’라는 인물로 뜨겁다. 트위터에는 ‘#JeanMichelTrogneux’라는 해시태그를 단 글이 6만여 개 올라와 퍼지고 있다. 난데없이 등장한 이 인물 관련 게시물들에는 브리지트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 부인의 사진이 실려 있다. 이들은 주장한다. “프랑스 영부인의 본명은 장미셸 트로뇌다. 실은 남성으로 태어난 트랜스젠더다.”

 

▷프랑스 일간 리베라시옹의 팩트체크 기사인 ‘체크뉴스’는 어제 ‘#JeanMichelTrogneux: 브리지트 마크롱을 겨냥한 트랜스 혐오 가짜뉴스의 기원은 무엇인가’란 제목의 기사를 실었다. 보도에 따르면 이 가짜뉴스는 언론매체를 표방하는 한 극우주의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계정에서 시작돼 주로 백신접종 반대주의자와 반정부 성격의 노란조끼 시위 지지자들이 퍼뜨리고 있다. 영부인 측은 이에 법적으로 단호하게 대응하겠다는 방침이다.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이 2017년 대선 후보로 나왔을 때에도 “에마뉘엘 마크롱은 동성애자”라는 허위정보가 나돌았다. 자신의 동성애를 숨기려고 24세 연상의 스승(브리지트 마크롱)과 결혼했다는 주장이었다. 당시 대개의 프랑스인들은 대수롭지 않게 넘겼지만 요즘엔 위기의식이 감돈다. SNS 이용자가 급증하면서 허위정보도, 이를 믿는 사람들도 많아졌기 때문이다. 내 의견과 다른 사람들의 글은 보여주지 않는 SNS의 알고리즘이 진짜와 가짜를 헛갈리게 만든다.

 

▷SNS 허위정보는 코로나19가 심화시키는 불평등 사회의 허점을 파고든다. 이번 영부인 가짜뉴스는 여성 혐오와 트랜스 차별의 민낯을 드러냈다. 영부인을 가리켜 ‘외계인 ET’나 ‘성형수술의 폐해’라고 모욕하는 증오의 말들도 난무했다. 가짜뉴스는 언론인인 척하는 사람이 시작해 인플루언서들이 퍼뜨릴 때가 많다. 리베라시옹 체크뉴스는 기사 말미에 이렇게 썼다. “우리 체크뉴스가 나간 후 해당 매체에서 연락해왔다. 최초의 영부인 관련 글을 쓴 사람은 정식 기자가 아니라 단순히 트랜스 혐오 중독 글의 한 부분을 쓴 사람이다.”

 

▷올해 노벨 평화상을 받은 필리핀 언론인 마리아 레사는 “소셜미디어는 독성 쓰레기의 홍수”라고 말했다. SNS가 거짓말 바이러스를 퍼뜨려 우리의 두려움과 분노, 혐오를 끌어내 사회를 분열시키고 과격하게 만든다고 했다. SNS에 뜨는 허위정보는 똑같은 글자체와 크기라서 신문에서처럼 비중을 분간하기 어려운 데다 콘텐츠 출처도 묘연할 때가 많다. 코로나로 디지털 기기에 대한 의존도가 높아지면서 SNS의 힘은 갈수록 커지고 있다. 허위정보가 더욱더 극성을 부릴 것이란 이야기다.

김선미 논설위원 kimsunmi@donga.com

 

12-18 아파트 거래 절벽

아파트 거래가 뚝 끊어졌다. 지난달 서울 아파트 거래량은 1200건으로 전년 동월 6365건의 20%에도 못 미쳤다. 이달 들어서는 거래 신고 건수가 129건에 불과하다. 거래가 줄면서 집값도 하락 조짐을 보이고 있다. 마포 서대문 은평 등에서는 10월 실거래가격이 7개월 만에 떨어졌다. 집값 상승세가 꺾인 것은 반갑지만, 시장이 마비된 상태에서 가격 안정을 얘기하기는 아직 이르다. 추가적인 정책 노력이 뒤따라야 한다는 이야기다.

 

▷거래 감소의 직접 원인은 대출 규제로 보인다. 거래 절벽 현상은 주로 대출을 끼고 거래하는 강북권에서 시작돼 확산하는 모양새다. 한 곳에서 집이 팔리지 않으면 이사하려던 곳의 거래까지 중단되는 연쇄 작용이 발생한다. 집값이 본격적인 장기 하락기로 접어들지는 좀 더 지켜봐야 한다. 대출 규제나 금리 양도세 대선 등 변수가 많아 ‘일단 기다리자’는 관망파들도 많기 때문이다. 대선 이후 세제나 재개발·재건축 규제 등의 굵직굵직한 변수에 시장이 어떻게 반응할지가 관건이다.


▷거래 감소는 6억 원 이하 중저가 아파트에서 두드러졌다. 금액대별 거래 비중에서 6억 원 이하 아파트는 상반기 30.4%에서 23.3%로 감소한 반면, 9억 원 초과 아파트는 거래 비중이 늘었다. 서민 아파트 거래가 더 큰 폭으로 감소했다는 뜻이다. 서민들은 빚을 내야 소형 아파트라도 살 수 있는데, 대출 규제가 발목을 잡았다. 내년 총부채원리금상환비율(DSR)이 확대 적용되면 서민들의 내 집 마련은 더 어려워진다. 거래 절벽이 길어질수록 서민들의 고민도 깊을 수밖에 없다.

 

▷대출 규제가 강화되면서 주택담보대출 금리는 연 5%를 넘었다. 한국은행은 내년 초 금리 인상을 예고했다. 수요를 억눌러 집값을 잡아놓은 셈이다. 집값 안정세를 굳히려면 공급을 늘려야 한다. 올해 서울에서 공급 예정이던 민간 아파트는 4만4722채인데, 실제 공급된 건 8533채에 그쳤다. 분양가상한제 등 각종 규제 탓에 공급이 연기된 것인데, 3∼4년 뒤 입주 물량도 줄어들게 됐다. 이래서는 집값이 안정되기 어렵다.

 

▷부동산은 심리 영향을 크게 받는다. 집값 상승 기대감에 너도나도 구매에 나서면, 불안해진 수요자가 추격 매수에 나서고 집값은 급등한다. 반면 하락 내지는 안정이 예상되면 수요자는 급할 게 없고 매도자는 가격을 내린다. 지금의 거래 절벽은 소강상태에 가깝다. 하락 조짐을 보이는 가운데 잠시 멈춰 있을 뿐이다. 현 정부 들어 강력한 부동산대책 직후 거래가 끊겼다가 곧 집값이 폭등했던 전례를 반복해선 안 된다. 수요자가 원하는 주택을 꾸준히 공급해서 본격적인 집값 안정세를 유도해야 한다.

이은우 논설위원 libra@donga.com

 

12-20(월) 못 믿을 국가시험

‘세무사 시험은 죽었다’ ‘5060 국세청 공무원을 위한 몰아주기다. 청년을 위한 나라는 없다’. 지난주 서울 동대문구 한국산업인력공단, 세종시에 있는 국세청과 기획재정부 앞에 이런 문구가 적힌 근조 화환들이 놓였다. 세무사 시험 출제 과정에서 공정성이 심하게 훼손됐다고 생각하는 수험생들이 항의차 보낸 것이다.

 

▷발단은 9월 4일 치러진 올해 세무사 2차 시험 중 ‘세법학 1부’ 과목에 출제된 상속·증여세 관련 20점짜리 서술형 문제였다. 시험을 주관한 산업인력공단 측이 “난이도 조절에 실패했다”고 인정할 정도로 어려워 응시자의 82%가 ‘과락’인 40점 미만의 점수를 받았다. 다른 과목 과락 비율 15∼46%보다 현저히 높다. 세무사 시험은 세법학 1, 2부, 회계학 1, 2부 등 네 과목에서 100점 만점에 평균 60점을 넘기면 합격이지만 한 과목만 과락이 돼도 탈락이다.

 

▷2차 시험 응시자 4597명 중 706명이 합격하고 3891명이 떨어졌는데 세법학 1부에서 과락을 받은 3200여 명 중 다수가 탈락했다. 이들의 분노에 불을 붙인 건 세법학이 세무 공무원 출신 지원자들에게는 면제되는 과목이란 점이다. 국세청, 기획재정부 세제실 등에서 20년 넘게 세무를 담당한 공무원들은 전문성을 인정받아 세법학 두 과목을 빼고 회계학 두 과목만 시험을 치른다. 결과적으로 5년간 한 해 8∼35명이던 20년 이상 공무원 출신 합격자가 올해 151명으로 급증하자 세법학 탓에 떨어진 청년지원자들의 분노가 세대 갈등으로 번지고 있다.

 

▷최근 초등교사 임용시험 응시자 22명도 지난달 치러진 1차 시험의 불합격 처분을 취소해 달라는 행정소송을 서울시교육감 등을 상대로 제기했다. 수도권의 한 교대 모의고사에 나왔던 문제와 소재, 키워드가 비슷한 문항들이 ‘즐거운 생활’ ‘슬기로운 생활’ 등 과목에서 7, 8개나 출제돼 문제 유출의 의혹이 짙다는 것이다. 한국교육과정평가원은 “문제가 없다”고 반박했지만 응시자들은 “특정 학교 모의고사 적중률이 높다는 의심이 이전부터 있었는데 올해는 당락에 상당한 영향을 미칠 수준”이라고 비판하고 있다.

 

▷2022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 생명과학 문항 출제오류에 이어 세무사, 교사임용 시험 등 정부나 정부 대행기관이 주관한 시험에서 잇따라 문제가 발생하면서 국가시험의 신뢰성은 크게 훼손됐다. 청년들은 이런 일이 생길 때마다 풍요와 성장의 시대를 살아온 부모 세대가 바로 자기 앞에서 문을 쾅 닫는 것처럼 느낀다고 한다. 공정과 형평에 그 어느 때보다도 민감해진 청년들의 눈높이를 못 따라잡는 허술한 국가시험 관리 체계는 서둘러 손봐야 한다.

박중현 논설위원 sanjuck@donga.com

 

12-21 ‘나쁜 아빠’ 신상 공개

거액의 양육비를 지급하지 않은 ‘나쁜 아빠’ 2명의 신상 정보가 처음 공개됐다. 여성가족부는 19일 홈페이지에 양육비 미지급 금액이 1억2560만 원인 A 씨와 6520만 원인 B 씨의 이름, 생년월일, 직업, 근무지 등을 올렸다. 양육비를 받지 못했던 이혼한 여성이 법원의 감치명령 이후에도 지급을 외면하는 전남편의 신상 공개를 직접 요청했다고 한다. 아마도 신청자의 가슴은 그동안 까맣게 타들어 갔을 것이다.

 

▷신상 공개엔 당연히 얼굴 사진이 나올 법하지만 빠졌다. 근무지도 도로명만 있을 뿐 상세 주소가 없다. 이래서는 한눈에 ‘나쁜 아빠’가 누군지 알아차리기가 쉽지 않아 보인다. 정부에 앞서 민간단체 ‘배드파더스(Bad fathers)’는 신청을 받아 양육비를 지급하지 않는 ‘나쁜 아빠’들의 얼굴 사진까지 공개하며 지급을 촉구하는 운동을 벌인 적이 있다. 이런 활동을 통해 3년간 900여 건의 양육비 지급 성과도 거뒀다. 이 단체는 정부가 직접 신상을 공개하겠다고 하자 두 달 전 활동을 중단했다. 이번에 정부가 얼굴을 뺀 ‘무늬만 신상 공개’에 나서자 “배드파더스만도 못하다”라는 비판이 나온다.


▷정부는 신상 공개에 앞서 10월 양육비 미지급자에 대한 출국금지와 운전면허 정지 처분을 처음 시행했는데 결과가 기대에 못 미치고 있다. 처벌을 받은 사람 대부분이 여전히 양육비 지급을 외면하고 있다. 출국금지는 6개월, 면허 정지는 100일이 지나면 자동으로 풀리는 만큼 일단 버티고 보는 것이다. 양육비를 계속 지급하지 않으면 이런 처벌을 연장할 수 있다지만 심의 과정 등에만 다시 1, 2년이 필요하다. 이러니 실효성 논란이 벌어질 수밖에 없다.

 

▷여가부가 2018년 양육비 지급을 약속받은 쪽의 부모 2039명을 조사한 결과 73.1%가 한 번도 받지 못했다고 답했다고 한다. 여가부의 양육비이행관리원에 도움을 요청한 건수도 2015년부터 지난해까지 2만3184건에 달했다. 하지만 실제 양육비를 지급받은 사람은 10명 중 3명꼴도 안 됐다. 우리 주위에 신상이 공개 안 된 ‘나쁜 아빠’들이 그만큼 많은 것이다. 많은 한부모와 그 아이들이 이혼 과정도 힘들었는데 양육비 때문에 추가적인 고통에 시달리고 있다.

 

▷양육비 지급을 외면하는 것을 이혼한 부부의 이견이나 갈등 정도로 여겨서는 안 된다. 어린 자녀의 복지 및 생존권을 위협하는 또 다른 아동학대로 봐야 한다. 미국과 프랑스, 영국 등 선진국들이 양육비를 강제징수하거나 고발 조치에 나서는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 정부 또한 관련한 법 집행에 있어 더 신속하고 과감하게 나서야 한다. ‘나쁜 아빠’들의 이번 신상 공개를 그 시작점으로 삼을 수도 있을 것이다.

황인찬 논설위원 hic@donga.com

 

12-22 주민번호 변경 3000명

최근 한 달간 개인정보보호위원회의 ‘털린 내 정보 찾기’ 서비스를 이용한 18만 명 가운데 약 10%는 실제 정보가 유출된 것으로 확인됐다. 10명 중 1명꼴로 개인 정보가 인터넷에 떠돌고 있었다. 이런 정보 가운데 주민등록번호는 범죄에 이용되기 쉽다. 남의 명의로 금융거래를 하거나 휴대전화를 개설하는 식이다. 피해를 막으려면 금융감독원 ‘개인정보노출자 사고 예방 시스템’ 등을 이용할 수 있는데, 아예 주민번호를 바꾸는 방법도 있다.

 

▷2017년 주민번호 변경 제도를 도입한 후 실제 변경한 국민이 3000명을 넘어섰다. 번호 유출을 입증하고, 피해를 당했거나 당할 우려가 있다는 근거를 제시하면 행정안전부가 허가 여부를 결정한다. 변경 이유로는 보이스피싱을 당한 사례가 가장 많았다. 피해자들은 자책감과 함께 자신의 정보를 범죄자들이 갖고 있다는 불안감에 시달린다. 유출된 주민번호는 불법으로 유통돼 2차, 3차 피해로 이어질 수 있다.


▷경찰청에 따르면 보이스피싱은 2016년 1만7040건에서 지난해 3만1681건으로 늘었다. 피해액은 5배로 늘어 지난해 약 7000억 원에 달했다. 신고하지 않은 사례까지 합치면 피해액은 훨씬 많을 것이다. 올 들어 카카오톡 문자로 정보를 빼가는 ‘메신저 피싱’도 늘고 있다. 자녀를 사칭해 “휴대전화가 망가져 아빠 명의가 필요하다”는 식으로 주민번호를 요구한다. 택배 배송을 핑계로 거짓 메신저를 보내는 사례도 많다고 한다. 이러다간 주민번호를 수시로 바꿔야 할지 모르겠다.

 

▷지난해 10월 주민번호 부여 방식이 바뀌었다. 뒷자리에서 성별을 뜻하는 첫 번째 숫자를 빼고는 임의 번호가 적용된다. 기존 번호는 뒷자리 2, 3번째 숫자가 출신 지역을 나타내는 등 개인 정보가 노출된다. 새 주민번호 방식은 신생아와 변경 신청자에게만 해당된다. 변경한 주민번호는 복지나 세금 등에 자동으로 적용되지만 은행 통신 등 민간 분야는 직접 변경 신청을 해야 한다. 행안부 조사에서 주민번호를 바꾼 사람 3명 중 2명은 만족한다고 답했다.

 

▷주민등록법은 1962년 행정 편의를 위해 제정됐다. 인구 이동이 바로 드러나고, 선거 과세 병역 등 공공 업무도 편리해졌다. 하지만 정보기술(IT) 발달로 유출된 주민번호가 인터넷을 떠돌며 언제 어디서 피해를 유발할지 모르는 상황이 됐다. 주민번호를 입력할 곳이 많아질수록 피해 우려도 커진다. 미국은 ‘사회보장번호’를 사용하지만 바꾸기도 비교적 쉽고 공공기관 업무나 금융거래 등으로 사용이 제한돼 있다. 주민등록번호 변경 절차를 간소하게 하고, 사용 범위도 좁힐 필요가 있다.

이은우 논설위원 libra@donga.com

 

12-23 전공 불일치 50%

고용 없는 성장이 이어지면서 인문과학이나 사회과학을 전공한 대졸자들이 전공을 살려 취업하는 일이 갈수록 어려워지고 있다. 경기가 불황일수록 이런 경향은 심화된다. 취준생 입장에서는 찬밥 더운밥을 가릴 여유가 없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2016년 자료에 따르면 우리나라 근로자 중 전공과 맞지 않는 직업을 가진 근로자 비율이 50.1%에 이른다고 한다. 조사 대상 29개 국가 중에서 인도네시아(54.6%) 다음으로 2위다. OECD 평균 39.6%보다 훨씬 높은 수준이다.

 

▷대입을 준비하는 수험생들은 지금 전공을 선택해야 하는 중요한 기로에 서 있다. 12월 말 시작되는 대입 정시모집은 자신의 수능 점수만으로 대학과 학과를 선택하는 치열한 경쟁이다. 올해는 생명과학Ⅱ 출제 오류로 변수가 하나 더 추가됐다. 많은 수험생들이 부딪히는 고민 중의 하나가 전공을 우선시해야 할지, 학교를 우선시해야 할지의 선택이다.


▷전공 불일치는 불황기에 대졸 취업자의 임금을 낮추는 부정적인 효과가 있다. 한국은행 최영준 연구위원의 연구에 따르면 불황기였던 2009년 전공 불일치 근로자들은 전공이 일치하는 근로자보다 임금을 평균 5.5%가량 적게 받았다. 한번 적게 받은 임금은 단기에 회복되지 않고 장기간 지속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불황기였던 1998년과 2005년, 2009년에 전공 불일치 근로자가 늘어났다는 사실도 확인했다. 졸업 이후의 경제적 삶을 생각한다면 학교보다는 전공에 무게를 두는 것이 합리적인 선택인 셈이다.

▷수험생들이 미래에 일하고 싶은 분야의 전공을 선택하고 싶어도 학과가 없거나 정원이 부족한 것은 큰 문제다. 4차 산업혁명과 관련된 인공지능(AI), 반도체, 바이오, 미래차 등이 대표적이다. 반도체의 경우 산업이 지속적으로 발전하려면 연간 1000명 정도의 석사급 이상 인력이 필요하다. 하지만 실제 배출되는 인력은 10분의 1 수준에 불과하다. 국가첨단전략산업 특별법으로 인력 부족 문제를 해결해 보려 했지만 수도권 대학 정원 증설은 법안에서 빠졌다.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양질의 일자리가 부족한 상황이 계속되고 있다. 2020, 2021년에도 전공 불일치 근로자가 늘었을 가능성이 높다. OECD는 한국이 한 단계 더 도약하려면 사회적 자원의 낭비를 부르는 ‘전공 불일치’ 비율을 낮춰야 한다고 조언했다. 이를 위해서는 초중고의 직업교육을 강화하고, 직종 간 이동이 보다 자유롭도록 노동시장을 유연화해야 한다. 또한 미래 산업 트렌드에 맞춰 대학의 학과와 정원도 더 유연하게 운영할 필요가 있다.
허진석 논설위원 jameshur@donga.com

 

12-24 中 ‘SK, 인텔 낸드 인수’ 승인

중국이 SK하이닉스의 인텔 낸드플래시 사업부 인수를 승인했다. 대규모 인수합병은 이해관계국의 반독점 심사를 통과해야 하는데, 이번 인수는 미국 중국 영국 유럽연합(EU) 등 8개 나라의 승인이 필요했다. 중국이 마지막으로 승인함에 따라 인수 발표 14개월 만에 절차를 마무리하게 됐다. 미국과 패권 다툼을 벌이는 중국이 미국 기업 인텔의 거래를 허용한 것은 이례적이다. 중국은 한미 간 거래를 막기보다 한국을 ‘우리 편’으로 이끄는 게 유리하다고 판단한 듯하다.

 

▷미국은 자국 중심의 반도체 공급망을 만들면서 중국을 배제해왔다. 기술과 공급망에서 열세인 중국은 안정적으로 반도체를 공급받을 곳이 필요한데, 미국보다는 한국이 나을 수 있다. ‘미국의 인텔’보다는 인텔 사업부를 인수한 한국 기업이 믿을 만하다는 뜻이다. 이번 인수로 SK하이닉스가 중국 다롄의 인텔 낸드 공장을 유지하면, 고용과 투자가 늘어난다는 점도 중국 판단에 영향을 미쳤다. 갈등보다 실리를 선택한 중국이다.


▷이번 인수 승인은 미중 틈새에서 한국의 생존 전략을 보여준다. 실력만 있다면 미국과 중국이 서로 자기편으로 끌어들이려 한다. 이런 구도를 이용해 두 나라로부터 각종 인허가와 세제 혜택을 받아낼 수도 있다. 우리 기업이 미중 어느 한쪽으로 과도하게 기울 수는 없다. 원천기술과 공급망은 미국이 우위지만, 최대 수출시장은 중국이다. 바이든 행정부의 압박으로 미국에 공장을 증설하면서도 중국 입장을 살펴야 한다. 두 나라 간 견제를 활용해 우리 입지를 넓혀 나갈 필요가 있다.

 

▷인수가 마무리되면 SK하이닉스는 낸드 분야에서 키옥시아를 제치고 2위로 올라선다. 1위 삼성전자와 함께 한국이 세계 시장의 절반 이상을 점유하게 된다. 메모리의 일종인 낸드는 전원이 끊어져도 저장한 정보가 사라지지 않는다.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실내에서 인터넷을 쓰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이를 소화할 낸드 등 메모리 수요가 늘어났다. 파운드리 등 비메모리 투자를 늘리면서도 메모리 1위 위상을 유지해야 한다.


▷반도체를 둘러싼 미중 갈등은 길어질 가능성이 높다. 중국계 자본인 와이즈로드캐피털은 올해 비메모리 제조사인 매그나칩을 인수하려다 미국 반대로 포기했다. 중국도 퀄컴 엔비디아 등 미국 기업의 인수합병을 막는 것으로 대응해 왔다. 이런 갈등이 언제든 한국 기업의 발목을 잡을 수 있다. SK하이닉스의 인텔 낸드 인수로 한 고비를 넘었지만, 안심할 순 없다. 탄탄한 기술과 생산 능력을 갖춰 가깝게 지내고 싶은 존재가 되어야 한다. 실력은 위기를 기회로 바꿔 줄 수 있다.
이은우 논설위원 libra@donga.com

 

12-25 중고차 ‘바가지’ 사라질까

중고차를 살 때 바가지를 쓸까 봐 겁이 난다는 사람들이 많다. 허위 매물 판매상을 고발하는 온라인상의 동영상을 보면, 400만 원에 판다는 광고를 보고 온 사람에게 3200만 원에 팔려고 하는 일도 일어난다. 초기에 일부 금액을 숨겨 구매 결정을 끌어낸 뒤 계약 단계에서 추가 비용을 덧붙인다. 소비자가 거래를 무르려고 하면 ‘차량 이전을 마쳤기 때문에 취소하려면 위약금을 내야 한다’ 등의 ‘반협박’으로 강매하는 식이다. 주행 거리나 사고·침수 차량을 제대로 확인하기 힘들 것이라는 불안도 소비자들의 중고차 시장 접근을 막는다.

 

▷현대차나 기아차 등 완성차를 만드는 대기업들이 내년 1월 중고차 시장에 진출하겠다고 선언했다. 타사가 아닌 자사 브랜드 중고차만 취급하는 방식이다. 자사 중고차가 믿을 만한 가격에 거래되면 중고차 시세가 높아지고, 이는 신차 판매에 도움이 된다고 보기 때문이다. 소비자는 중고차를 좀 더 안심하고 구입할 수 있는 유통 경로를 가지게 되는 셈이다.


▷중고차 매매업은 2019년 2월에 이미 중소기업 적합 업종에서 해제됐다. 이 문제를 둘러싸고 최근까지 정치권과 중소벤처기업부가 나서서 완성차 업체와 기존 중고차 매매 업계 간 상생 협의를 중재했지만 결렬됐다. 중고차 매매 업계는 협상 과정에서 신차 판매권을 달라고 요구했지만 완성차 업체들은 받아들일 수 없다고 통보했다. 최종 결정은 중기부가 내년에 하겠다고 한다. 완성차 업계는 이미 3년 가까이 기다려 왔다며 먼저 시장 진출을 선언한 것이다.

 

▷국내에서는 이미 수입 자동차 회사들이 중고차 사업을 활발하게 펼치며 시장 점유율을 높이고 있다. 유명 수입 자동차 회사 홈페이지에 가면 ‘인증 중고차’라는 이름으로, 그 회사가 성능을 보증하는 차량들이 차종별·가격별로 일목요연하게 나온다. 미국과 독일에서는 신차 판매 딜러들이 전시장에 중고차도 함께 전시해 두고 판매할 정도다. 차량의 생애 전 주기를 완성차 업체들이 관리하는 세계적인 추세에서 한국은 뒤처지고 있는 셈이다.


▷불투명성은 시장의 성장을 막는다. 국내 중고차 거래 규모는 신차 시장의 약 1.3배로 선진국의 2∼2.5배와 비교하면 훨씬 작은 수준이다. 시장에 대한 불신으로 당사자 간 거래 비중이 미국이나 독일은 30% 선인데, 우리는 55%나 된다. 중고차 매매 업계는 최근 들어 시장의 투명성을 높이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하고 있다. 이번 완성차 업계의 중고차 시장 진출 선언은 투명성을 높이는 좋은 계기가 될 수 있다. 정부는 소비자의 선택권을 넓힐 수 있는 결정을 빨리 내놓아 불필요한 혼란을 줄여야 할 것이다.
허진석 논설위원 jameshur@donga.com

 

12-27(월) 오미크론에 뺏긴 성탄절

크리스마스이브인 24일 미국 미니애폴리스 공항에는 담요와 베개가 흩어져 있었다. 항공편이 줄줄이 결항되면서 크리스마스 여행객들이 공항에서 밤을 보내야 했던 것이다. 지난해 봉쇄 조치로 우울한 성탄절을 보냈던 미국인들은 올해만큼은 일상에 가까운 성탄절을 보내게 될 줄 알았지만 기대는 빗나갔다. 전염 속도가 예상을 크게 뛰어넘는 오미크론 때문이었다.

 

▷미국은 오미크론이 기승을 부리면서 요즘 하루 코로나19 신규 확진자가 20만 명에 육박한다. 미 델타 항공은 크리스마스이브에 예정됐던 3100편의 항공편 중 158편을 취소했다. 델타 측은 악천후에 더해 오미크론이 결항 이유가 됐다고 설명했다. 30년 전 나온 미국 할리우드 영화 ‘나 홀로 집에’는 올해 성탄절 상황에는 맞지 않는다. 가족들이 소년을 집에 두고 크리스마스 여행에 나섰어도 항공기가 뜨지 않아 집으로 되돌아오는 상황이 됐을 것이다.


▷23일부터 26일까지 전 세계에서 무려 7000여 편의 항공이 결항됐다. 조종사와 승무원이 감염되거나 밀접 접촉자로 분류돼 근무할 수 없게 됐기 때문이라고 월스트리트저널이 전했다. 하늘길만 막힌 게 아니다. 프랑스는 철도회사 직원들의 감염이 급증하면서 버스로 열차 운행을 대체하기 시작했다. SNCF는 페르피냥, 님 지역 등의 열차 운행을 1월까지 중단했다. 고속철도와 항공편을 연결해 크리스마스 휴가를 떠나는 유럽인의 일상도 오미크론에 직격탄을 맞았다.

 

▷올해 성탄절을 앞두고 국내에서는 서울 중구 신세계백화점 본점이 ‘핫플’로 떴다. 건물 외벽에 설치된 LED 조명이 펼치는 영상 쇼를 보러 연일 많은 인파가 몰렸다. 그런데 지난 주말 이틀 동안 오미크론 감염자가 114명이나 늘었다. 오미크론은 발생 초기에는 해외 입국자 중심으로 퍼지더니 이제는 감염 경로를 알 수 없는 ‘조용한 전파’로 본격화하고 있다. 한국은 미국이나 영국보다 자연면역 인구수가 적기 때문에 감염됐을 때 상태가 나빠지는 비율이 더 높아질 수 있어 걱정이다.


▷오미크론의 맹위가 당분간 이어질 것으로 보이면서 새해맞이 행사들도 취소되고 있다. 하루 코로나19 신규 확진자 수가 처음으로 10만 명을 넘긴 프랑스는 파리 샹젤리제에서 매년 해오던 새해 전야 불꽃놀이를 취소했다. 그나마 나은 성탄절을 보낸 우리도 사정은 다르지 않다. 신년 해맞이를 보러 한라산도 지리산도 못 가고 보신각 타종 행사도 2년 연속 온라인으로 봐야 한다. 우리의 일상이 얼마나 소중했던 것인지 깨닫게 된다. 이 겨울은 힘들게 보내지만 다음 겨울에는 함께 만나 코로나의 긴 터널을 빠져나온 것을 자축했으면 좋겠다.
김선미 논설위원 kimsunmi@donga.com

 

12-28 ‘세기의 양심’ 투투 주교

전기차 테슬라, 스페이스X를 만든 일론 머스크는 남아프리카공화국 출신이다. 18세가 된 머스크가 인종차별이 만연한 사회에 환멸을 느끼고 외가 쪽 고향인 캐나다 국적을 취득해 떠난 다음 해인 1990년 넬슨 만델라가 백인인 빌렘 데클레르크 대통령에 의해 석방됐다. 만델라와 함께 악명 높은 아파르트헤이트(인종차별) 철폐를 이끈 단짝이 남아공 성공회의 데즈먼드 투투 주교다.

▷만델라는 1994년 총선을 통해 집권한 뒤 투투 주교에게 ‘진실과 화해 위원회(TRC)’ 위원장을 맡겼다. 투투 주교는 응징적 정의(punitive justice)가 아니라 회복적 정의(restorative justice)의 정신으로 TRC를 이끌었다. 그의 원칙은 첫째 인권침해를 저지른 가해자들의 자백, 둘째 그들의 기소를 면제하는 용서, 셋째 피해자들에 대한 배상이었다. 자백-용서-배상의 프로세스는 이후 국가적 인권침해와 그 극복을 위한 가이드라인이 됐다.

▷TRC는 친(親)아파르트헤이트 측의 폭력만이 아니라 반(反)아파르트헤이트 측의 폭력도 조사했다. 만델라 지지 세력인 아프리카민족회의(ANC)가 행한 고문 등 각종 인권침해 사례도 드러나 ANC의 이미지에 흠이 갔다. ANC가 TRC 보고서에서 자신들의 가해 기록을 삭제하려 하자 투투 주교는 분노했다. 그는 ANC에 대해 ‘어제의 피압제자가 쉽게 오늘의 압제자가 될 수 있다’고 일갈했다. 실제 남아공 정치는 만델라 대통령 퇴임 이후 타보 음베키와 제이컵 주마 대통령을 거치면서 표류했다. 이들의 권력남용 행위가 비일비재했다. 투투 주교는 ANC의 비판자로 돌아섰다. 그는 ‘세기의 양심’으로 불렸다.


▷투투 주교 생애의 가장 인상적인 장면 중 하나는 TRC에서 가해자의 자백을 듣다가 책상 아래로 머리를 파묻고 흐느끼던 모습이다. 흥이 나면 어디서나 자연스럽게 춤을 추는 모습은 백인 성직자들에게는 상상할 수 없었다. 그는 백인 진보주의자들이 보기에는 너무 과격했고 흑인 진보주의자들이 보기에는 너무 온건했다. 공산주의에는 늘 반대했다. 위엄과 흥을 동시에 지닌 지혜로운 지도자가 있었기에 남아공은 아파르트헤이트로부터의 전환기를 순조롭게 넘어설 수 있었다.

▷만델라는 2013년 세상을 떠났다. 지난달에는 아파르트헤이트 철폐에 기여한 공로로 만델라와 함께 노벨 평화상을 받았던 마지막 백인 대통령 데클레르크가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이달 26일 투투 주교가 선종했다. 아파르트헤이트 철폐 이후 ANC의 장기 집권을 어떻게 종식시킬 것인가 하는 새로운 과제가 남아 있는 가운데 남아공의 한 시대가 마감됐다.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12-29 기로에 선 이준석

국민의힘 김종인 총괄선대위원장은 “선거에 도움 준다는 사람들이 자기 의견을 피력하는 경우가 많은데 선거에 도움 되는지 아닌지 냉정하게 판단하고 발언해야 한다”고 말했다. 상임선대위원장직을 그만둔 뒤에도 윤석열 후보 때리기를 계속하는 이준석 대표를 정조준한 것이다. 이 대표가 “척 하면 척 하는 사이”라고 자부하던 김 위원장에게서 일격을 맞은 셈이다. 이 대표의 독자 행동이 선을 넘었다는 판단을 한 듯하다.

▷이 대표를 향해 “후보 말만 듣겠다”고 한 조수진 최고위원의 항명은 지탄을 받아야 했다. 그렇다고 해서 당 대표가 선대위직까지 던져야 했느냐는 비판도 만만찮다. 윤 후보도 이번엔 “평론가 행세 그만두라”고 직격탄을 날렸다. 더 이상 이 대표의 행동을 묵과할 수 없다는 지지층의 반발이 거셌기 때문이다. 윤 후보 측은 “이 대표에게 손을 내민 ‘울산 회동’은 없다”고 말했다.

▷대선 후보가 선출되면 당 대표는 대부분 뒷전으로 밀려났다. 당무우선권을 쥔 후보가 전권을 행사하기 때문이다. 2007년 대선 당시 한나라당 강재섭 대표실 관계자는 “이명박 후보 측이 의사결정을 주도하면서 하루에도 몇 번씩 대표직을 그만둬야 하는 것 아니냐는 생각을 했다”고 토로했다. 이 대표는 “이런 당 대표는 안 하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하지만 대여 공세는 접어둔 채 연일 윤 후보를 대놓고 공격하는 것이 당 대표의 새로운 역할이냐는 논란에 휩싸인 것이다.

 

▷선대위에서 물러난 당 대표 역할에 대해 이 대표는 “내년 3·9 재·보선과 지방선거 공천 준비”라고 했다. 그러나 공천 준비는 대선과 무관하게 돌아가지는 않을 것이다. 만약 윤 후보가 대선에서 이기면 이 대표 무용론이, 윤 후보가 대선에서 진다면 이 대표 책임론이 제기될 것이다. 이런 판국에 당 대표의 공천권 행사가 가능하겠는가. 김 위원장이 “이 대표의 정치생명은 대선에 달렸다”고 한 이유일 것이다. 선대위직 사퇴는 이래저래 이 대표의 출구전략을 어렵게 하고 있다.

▷당 안팎에서 이 대표의 ‘자기 정치’를 우려하는 목소리도 커지고 있다. 초선 의원 모임에서 당 대표 사퇴 요구도 나왔다고 한다. 이 대표는 초선 의원 간담회에 참석해 토론하자고 했지만 이마저 거부당했다. 초선 의원들이 “당 대표가 변화된 모습을 보이는 것이 먼저”라고 선을 그었다. 사면초가(四面楚歌) 형국이다. 이 대표는 어제 언론 인터뷰에서 “후보 측에서 요청이 있으면 선대위 복귀를 검토한다”고 한발 물러섰다. 그러자 윤 후보는 “본인이 누구보다 당 대표 역할을 잘 알고 계시고, 잘할 것으로 기대한다”고만 했다. 이 대표에게 결단의 순간이 다가오고 있다.
정연욱 논설위원 jyw11@donga.com

 

12-30 ‘제2의 군함도’ 사도광산

충남 논산의 임태호 씨는 스무 살 때 일제 징용에 니가타현 사도(佐渡)섬의 광산으로 끌려갔다. 매일 새벽 함바(노동자 숙소)로부터 험한 산길을 1시간 30분 걸어야 나오는 광산이었다. 직할 병원이 있었지만 온갖 부상에도 병원 치료를 받은 적이 없다. 결국 섬에서 도망쳐 사도광산 생존자로는 유일하게 구술 기록을 남겼다. 그에겐 죽음의 노역장이던 이곳이 28일 일본 문화심의회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추천 후보로 선정됐다.

▷1601년 발굴된 사도광산은 1989년까지 운영된 일본 최고(最古) 광산으로 에도 시대엔 도쿠가와 막부의 금고 역할을 했다. 니가타현은 이 시절의 금광임을 강조하지만 태평양전쟁 무렵엔 전쟁 물자를 확보하는 광산이었고 대부분 유적도 이와 관계된 시설물들이다. 얼마 전엔 최소 1141명의 조선인이 이곳에서 노역했다는 일본 정부 문서가 공개됐다. 하지만 세계문화유산 추천서 요약본에는 조선인 강제노역 사실이 빠져 있어 군함도(端島·하시마)의 세계문화유산 등재 때와 같이 역사 왜곡이 반복되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나온다.

▷조선인 광부들은 형식적으론 청부업자를 통하거나 직접 고용됐지만 실제로는 강제노역이었다. 사도광업소 기록에는 1943년 6월 기준 조선인 광부 1005명이 들어와 이 중 148명(14.7%)이 ‘도주’한 것으로 나온다. ‘퇴사’가 아닌 ‘도주’로 집계했다는 건 강제노역임을 자인하는 증거다. 조선인 1인당 평균 월급은 80엔 안팎이었으나 각종 물품비와 보험료를 공제하고 나면 손에 쥐는 돈은 얼마 안 됐고 그나마 강제저축을 했다. 인플레이션 억제와 전비 충당, 그리고 도주를 막기 위해서였다.(정부의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 보고서)

 

▷정부가 강제징용 피해자로 판정한 218만여 명 중 사도광산 피해자는 148명으로 추정된다. 이 중 73명이 진폐증과 폐질환 같은 후유증을 앓았다. 사망자는 9명(사망률 6%)으로 일본 전 지역 조선인 노무자 사망률(0.9%)보다 높다. 1945년 광복의 날 사도광산엔 조선인 244명이 남아 있었다. 사도광산은 긴급회의를 열었는데 안건은 이들의 귀국이 아니라 ‘패전으로 인한 가동률 저하 방지 방안’이었다.

▷일본은 1932년 강제노동을 금지한 국제노동기구(ILO) 노동협약 29호를 비준했다. 국내에선 올 2월에야 비준동의안이 국회를 통과했으니 일본이 89년 빨랐다. 그런데 군함도도 사도광산도 전쟁을 위해 스스로 비준한 국제협약을 위반하더니 이제는 그 사실마저 외면하려 한다. 근대화에선 앞서간 나라가 언제까지 후진적 역사 인식에 발목 잡혀 있을 건가. 강제노역의 역사를 뺀 사도광산은 세계유산의 자격이 없다.
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12-31(금) ‘홍합탕 한 그릇’

일본 사람들은 ‘해 넘기기 우동’을 먹는다. 삿포로의 한 우동 가게에도 12월 31일 늦은 밤 남루한 차림의 여인이 어린 두 아들을 데리고 와서 1인분을 주문했다. 딱한 사정을 알아챈 주인은 몰래 1.5인분을 내어주고 세 모자는 맛있게 나눠먹는다. 구리 료헤이의 소설 ‘우동 한 그릇’의 줄거리인데 실제로 따뜻한 한 끼의 추억을 지닌 이들이 적지 않다. 미국 뉴욕에 사는 A 씨도 그중 한 명이다.

▷A 씨는 가난한 고학생이었다. 겨울 밤 알바를 마치고 집으로 가던 A 씨는 서울 신촌시장 뒷골목에서 홍합을 파는 리어카를 보았다. 배가 고팠던 그는 “홍합탕을 한 그릇 먹을 수 있겠느냐. 돈은 내일 드리겠다”고 했고, 아주머니는 선뜻 한 그릇을 내주었다. 그 다음 날이라고 없던 돈이 생겼을까. A 씨는 이후 이민을 떠났다. 홍합탕 값이 내내 마음에 걸렸던 A 씨는 50년이 지난 최근 이 같은 사연을 담은 손 편지와 1000달러짜리 수표 두 장을 서대문경찰서 신촌지구대로 보내왔다. 1만 원짜리 홍합탕을 200그릇 넘게 먹을 수 있는 돈이다.

▷식당들이 코로나 폐업 위기에 몰린 올해도 ‘홍합탕 한 그릇’의 사연이 줄을 이었다. 특히 “애들 굶는 건 절대 못 보겠다”는 식당들이 많았다. 홍대 앞 치킨집은 “동생이 치킨을 좋아하는데 5000원밖에 없다”는 소년 가장에게 세트 메뉴를 공짜로 주었다. 망원동 분식집은 결식아동 카드를 가진 아이는 물론 동반 1인에게도 식사를 준다. 혼자 먹기 부끄러워할까봐서다. ‘뭐든 먹고 싶은 거 얘기해줘. 눈치 보면 혼난다’라고 문 앞에 써 붙인 식당도 있다. 이렇게 어려운 아이들을 돕는 가게가 전국에 3000개 가까이 된다.

▷홍합탕 한 그릇은 일방적 나눔이 아니다. 식당 주인들은 “아이들을 먹이는 일이 이렇게 행복한 일인 줄 몰랐다”고 한다. 더 이상 버티기 힘들다 싶다가도 “사장님 덕분에 밥 잘 먹고 성인이 됐다”는 편지를 받으면 마음을 다잡게 된다. 영업난으로 불면증에 시달리던 파스타집 사장은 “‘1년간 매일같이 신세졌는데 눈치 안 보고 잘 먹었다’는 감사 인사를 받고 수면제 없이 잘 수 있게 됐다”고 했다.

▷소설 ‘우동 한 그릇’의 형제는 14년 후 의사와 은행원이 돼 노모와 함께 그 우동 집을 찾아 3인분을 시킨다. 그날 밤 한 그릇의 우동에 용기를 얻어 열심히 살았다면서. A 씨는 편지에서 “50년간 친절하셨던 아주머니 덕으로 살아왔다”며 가장 어려운 이들에게 따뜻한 한 끼를 제공해달라고 당부했다. 올 한 해 넉넉지 않은 이들 덕분에 ‘홍합탕 한 그릇’의 추억을 갖게 된 아이들도 나눔의 힘을 믿는 반듯한 어른으로 성장할 것이다.◎
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