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라이브러리속의 모던 경성1} 조선일보/ 2021.06.05 반포 ‘아리팍’ 인기 뺨쳤다,-- 12.25 종로 야시장, 低價합숙소, 윤락가… 1925년 경성의 밤은 어땠을까
{뉴스 라이브러리속의 모던 경성1} 조선일보 김기철 학술전문기자 2021
06.05 반포 ‘아리팍’ 인기 뺨쳤다, 1930년대 경성 문화주택 열풍

▲1930년대 대표적 문화주택 중 하나로 알려진 홍난파 가옥. 서울 지하철 5호선 서대문역 근처 종로구 홍파동에 있다. 2층 붉은 벽돌 건물로 작곡가 겸 바이올린주자 홍난파가 1935년부터 죽기 전까지 6년간 살았다./이경아 '경성의 주택지'
‘요사히 걸핏하면 여자가 새로 맞이한 사나이를 보고서 우리도 문화주택에서 재미있게 잘 살아보았으면 해서 그런지는 몰라도 쥐뿔도 없는 조선 사람들이 시외나 기타 터 좋은 데다가 은행의 대부로 소위 문화주택을 새장같이 가뜬하게 짓고서 ‘스윗홈’을 삼게된다.’(조선일보 1930년4월14일자 ‘文化住宅? 蚊禍住宅’ 파란 글씨를 클릭하면 기사 원문을 볼 수 있습니다.)
일제시대 만화를 곁들인 시사평론으로 이름을 날린 석영(夕影) 안석주(1901~1950)는 1920년대 이후 유행하던 ‘문화주택’이 못마땅했던 모양이다. 재래식 한옥대신 서양 주택을 개조한 문화주택은 당시 조선의 부호와 인텔리는 물론 월급 봉투 두둑한 은행원과 공무원 같은 샐러리맨이 꿈꾸던 스위트홈이었다. 요즘 서울 한강변의 반포 ‘아리팍’(아크로리버파크) ‘아리뷰’(아크로리버뷰)를 능가하는 인기를 누렸다.

▲안석주가 1930년 11월28일자에 실은 만문만화. 높은 언덕에 짓던 문화주택을 빗대 높은 나무 꼭대기에 집을 지었다. 나무 위에 줄 사다리가 걸려있다. 집을 빼앗긴 새떼들이 날아가고 있다
경성고등공업학교(경성공전·서울대 전신)를 나온 건축가 박길룡(1898~1943)이 당시 유럽 유학에서 돌아온 친구가 서울 근교에 지은 문화주택을 탐방한 스케치 기사가 있다. ‘구조는 벽이 연와조(煉瓦造), 지붕은 인조 슬렛트, 기타 부분은 목조이고, 외모는 대체로 ‘쩌맨 쎄셋슌’에 가까운 듯하나 아무 통일 없는 ‘스타일’이다. 먼저 현관을 지나 중앙이 홀이 되고 그 홀안에 윗층에 올라가는 계단이 있다. 그 홀에서 바른편 방이 응접실이고, 왼편방이 가족실, 이 방으로 연속하여 식당 주방 변소가 있다. 윗층은 침실이 두개 있고, 서재와 욕실이 있다. (조선일보 1930년9월19일자 ‘유행성의 소위 문화주택’1)
박길룡은 친구가 1만원이나 들여 지었다는 ‘문화주택’을 혹평했다. ‘각 방 난방은 모두 ‘스토부’(난로)를 피게 되고 가구 등속도 전부 양식(洋式)이니 대체로 조선미는 조금도 찾을 수 없는 집이다.’ 이 문화주택을 지은 친구 근황을 이렇게 소개한다. ‘귀국하는 길로 생활을 개선하느니 어쩌느니 하고 양옥을 지었는데, 지은 당시에 양풍가구를 사들인다, 문화설비 생활혁신에 분주하더니 어찌한 셈인지 새로 지은 양옥이 불편하다고 그 옆에다가 순 조선식으로 집 한 채를 지어놓고 지금 그집 가족들이 조선식집에 거처하고 양관(洋館)은 별로 쓰지 않고 혹 손님이나 있으면 응접실로나 쓴다고 한다.’

▲1937년 지은 서울 종로구 가회동의 이준구 주택. 가회동이 있는 북촌엔 한옥만 있는 게 아니라 이런 서양식 문화주택이 섞여있다/이경아 '경성의 주택지'
하지만 지저분한 부엌과 화장실을 개량하고 주부실, 노인실, 응접실, 서재 등을 갖춘 문화주택은 선망의 대상이었다. 1932년 종로2가에 증축한 화신백화점은 20평짜리 ‘문화주택’을 경품으로 내건 마케팅 전술로 근처의 경쟁자 동아백화점을 문닫게 만들 정도였다. 금화산 아래 ‘금화장’이나 ‘연희장’처럼 문화주택이 몰린 지역을 부르는 이름도 생겼다. ‘장’, ‘원’같은 이름이 붙은 곳이다. 아래를 내려다볼 수있고 채광이 좋은 언덕위 이층집이 많았다.
경성엔 이런 문화주택이 몰려있는 문화주택촌이 크게 세 지역에 있었다. 동부의 신당리·왕십리 일대, 남부의 남산과 용산 일대, 금화장, 연희장 등이 있던 서부 지역이다. 남산이나 용산은 일본인 거주지였고, 다른 지역도 내로라하는 부자들이 몰려살았다. 샐러리맨들이 몰려사는 문화촌은 동소문 근방 정도였다. (최병택·예지숙,’경성리포트' 72~73)
문화주택을 보는 세간의 눈은 곱지 않았다. 안석영은 ‘문화주택은 돈 많이 처들이고 서양 외양간같이 지어도 이층집이면 좋아하는 축이 있다. 높은 집만 문화주택으로 안다면 높다란 나무 위에 원시 주택을 지어놓은 후에 ‘스위트홈’을 베푸시고 새똥을 곱다랗게 쌀는지도 모르지'(1930년11월28일자)라고 비꼬았다. ‘무리하게 은행 빚얻어 장만한 문화주택은 모래 위 성일 뿐이다. ‘몇 달 못되여 은행에 문 돈은 문 돈대로 날러가 버리고 외국인의 수중으로 그 집이 넘어가고 마는 수도 있다. 이리하야 문화주택에 사는 조선 사람은 하루살이 꼴으로 그 그림자가 사라진다. 그럼으로 우리에게는 문화주택이 문화(蚊禍)주택이다.’(1930년 4월14일자 ‘文化住宅? 蚊禍住宅’)

▲석영 안석주가 그린 조선일보 1930년 4월14일자 만문만화. 은행 돈을 빌려 문화주택을 지었으나 하루살이 모기처럼 몇달만에 집이 넘어간다고 꼬집었다.
안석영은 그물에 걸린 모기를 잡아먹는 거미에 은행을 빗댔다. 푸른 초원에 그림 같은 문화주택을 지은 신혼 부부는 은행이 쳐놓은 거미 줄에 걸려있고, 거미줄에는 대부(貸付)라는 글자가 적혔다. 분수 넘는 집을 산 조선의 젊은이들을 하루살이 같은 모기에 비유한 것이다. 안석영 만문만화를 분석한 ‘모던 보이, 경성을 거닐다’를 쓴 신명직은 ‘식민지 근대의 환상은 하루살이 같은 욕망일 뿐’이라고 했다.
06.12 “탕남음녀의 마굴” 손가락질...1930년대 경성은 아파트 전성시대
대부분 독신자 임대 전용 ..카페여급부터 고관대작까지 살아
‘최근 ‘아파ㅡ트’ 업자중에는 ‘가임지대통제령’(家賃地貸統制令)때문에 방세는 갑자기 올릴 수 없으므로 ‘스팀’대를 예년보다 사오할씩 올리는 경향이 있다...기실 ‘스팀’이란 말뿐 불을 적게 때므로 방이 차서 견디기가 힘든데 이는 연료를 빙자하여 방세를 올린 것이나 다름없지 아니하냐고 ‘아파ㅡ트’ 유숙인들로부터 부내 각 경찰서에 투서가 연일 들어오고 있다.’(조선일보 1939년 12월 5일 ‘교활한 아파트’ 파란 부분을 누르면 옛날 기사로 연결됩니다)
신문에 이런 기사가 났다. 당국이 집세를 올릴 수없도록 규제하니까 집주인들이 연료비를 40~50% 올려 사실상 집세를 올린 게 아니냐는 샐러리맨들의 투서가 잇따른다는 내용이다. 82년전 경성에 갑자기 웬 ‘아파트’일까. 집세 규제는 또 무슨 소리인가.
▲1937년 준공된 서울 충정로3가 충정아파트. 서울 지하철 5호선 충정로역 앞 대로변에 있다. 준공당시엔 도요타아파트로 불렸다. 84년이 넘은 지금도 아파트로 쓰인다. 1932년 준공으로도 알려졌지만, 최근 연구에서 1937년 준공으로 밝혔다./김기철 기자
지난 4월 나온 책 ‘경성의 아파트’는 이런 궁금증을 풀어준다. 주거문화사를 연구하는 박철수 서울시립대 교수는 ’1930년대 식민지 대도시 경성은 아파트가 넘쳐나던 곳으로 아파트의 시대라 불러도 어색하지 않다'고 썼다. 박 교수가 책에서 밝힌 경성 아파트만 70여곳이다. 친절하게 부록에 경성 지도를 싣고 아파트 70여 곳의 이름과 주소, 규모, 준공 연도를 밝혔다.
일제는 중일전쟁에 돌입한 이후인 1939년 10월 땅값과 집세를 1년전인 1938년 12월말일 기준으로 되돌리는 비상조치를 단행했다. 앞의 ‘가임지대통제령’(家賃地貸統制令)이다. 하지만 편법으로 집세를 올리는 아파트업주들이 있었던 모양이다. 임대료 규제를 피하기 위해 월세를 받던 아파트를 호텔로 용도를 바꾸기도 했다.
◇'아파ㅡ트' ‘아파ㅡ트멘트’ ‘아파ㅡ트멘츠 하우스’
일제시대 경성은 인구 폭발의 도시였다. 3·1운동 직후인 1920년 25만, 1935년 40만, 1945년엔 100만에 육박했다. 1930년의 경우, 경성 인구 32만2000명 중 일본인은 약 8만7000명(27%)이었다. 집은 부족했고, 집값과 월세는 폭등했다. 요즘 주택난 뺨칠 정도였다. 이런 상황에서 남산동 미쿠니 아파트(1930년 준공)를 비롯, 황금·녹천장·취산·창경·덕수·관수정·광희 아파트와 미쿠니·히카리·도요타·스즈키·오타 등 일본식 이름을 딴 아파트가 속속 들어섰다.
‘아파ㅡ트’ ‘아파ㅡ트멘트’ ‘아파ㅡ트멘츠 하우스’같은 이름으로 불리던 아파트는 조선인들에겐 낯설었다. 지금 아파트와는 달리 대부분 독신 아파트로 임대주택이었다. 부엌과 욕실, 화장실은 물론 냉난방시설을 갖춘 곳이 많았다. 1층엔 공동 식당과 사교장, 당구장 같은 오락시설과 공동 목욕탕을 갖추기도 했다. 요즘 오피스텔이나 주상복합건물과 비슷했다.
▲지난 11일 오후 찾은 남산동 미쿠니 아파트.(왼쪽). 1930년 준공돼 미쿠니 상회 직원 사택으로 쓰였다. 지금도 아파트로 사용중이다. 오른쪽은 완공 직후 잡지 '조선과 건축' 1930년12월호에 실린 사진.외관은 준공 당시와 거의 바뀐 게 없다./김기철기자
◇경성의 랜드마크 ‘채운장 아파트’
‘아메리카 인디언의 모자와 같은 풍차를 보고 구라파 농촌으로 미리 짐작 마십시오. 이것은 멀리 그렇게까지 생각하실 것이 아니라 바로 수구문(水口門) 턱에 있는 ‘아파트’ 채운장의 물 퍼올리는 풍차입니다. 도시로서의 인구밀도가 많지 않고, 도시로서의 다른 시설이 제대로 된 바 없는 서울에서 이 ‘아파트’의 그림자를 볼 수있기는 수년 전부터 였습니다만 난쟁이 수염처럼 시답지 않게 보이던 것이 이제는 대경성의 실현을 앞두고 그 ‘수염’도 수염 구실을 하게 되었습니다.’(1935년 1월1일자 ‘대경성의 새 얼굴’특집)
조선일보 1935년 신년호는 객실 82개를 갖춘 4층짜리 아파트 사진을 실었다. 광희문 근처, 지금의 중구 장충동 1가에 들어선 이 건물은 1927년 착공해 7년만인 1934년에 완성된 경성의 랜드마크였다. 냉난방시설과 욕실을 갖춘 이 현대식 아파트는 순식간에 입주가 끝났다. 건축주는 아파트 부대시설로 ‘댄스홀’을 설치하겠다는 의욕을 부렸다.(당국 허가는 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채운장은 1972년까지 거의 원형 그대로 남아있었다. 이듬해 일부 철거가 시작돼 몇 년 후 모습을 감췄다.
▲조선일보 1939년12월 5일자 '교활한 아파트'. 당국의 집세 규제로 아파트 업자들이 방값을 올리는 대신 '스팀'비를 40~50%올려 사실상 집세를 올린다고 입주민들이 항의한다는 보도다.
◇카페 여급부터 고관대작까지 아파트 입주
경성 아파트엔 누가 살았을까. ‘각 관청·은행·회사 등 각종 기관에는 여사무원이 있어 자기들의 전문한 기술과 능력에 따라서 한 역할을 맡아가지고 모든 사무를 처리하고 있으니 세상에서 말하는 ‘아파트걸’로써 장차 올사회의 실업가와 정치가의 첫 걸음을 걷고 있으며...’(1931년10월19일자 ‘취직線에 混戰하는 형형색색의 생활상’) 이 기사는 은행원, 회사원, 공무원 같은 전문직·사무직 여성을 아파트 거주자로 꼽고 있다. ‘경성의 아파트’(172쪽)는 카페 여급부터 고관대작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부류와 계층이 아파트에 살았다고 설명한다. 조선 최상류층에 속하는 경성 골프구락부 회원 일부도 아파트에 살았고, 고향을 떠나 유학온 학생들도 아파트 주요 입주자였다. 일본인과 조선인의 국적 구별은 쉽지 않고, 임대료의 차이만 있을 뿐이라는 얘기다.
◇'탕남음녀의 마굴?’
독신 남녀가 한 건물안에 사는 아파트는 경계의 대상이었다. 앞의 채운장 기사 말미엔 ‘그러나 앞으로 ‘딴스홀ㅡ’이 생기는 날이면 이 ‘아파트’가 한층 더 탕남음녀들의 마굴이 안 될까 걱정입니다'라고 썼다. 대중잡지 ‘삼천리’도 비슷한 우려를 했다. ‘가정을 떠나 부모들의 슬하를 멀리하고 하숙생활 ‘아빠트’ 생활을 하는 남학생 또는 여학생들이 서로 방문을 하고 찾아다니는 것이 쉬운 까닭에 그 접촉이 비교적 가정에 붙들려있는데 비하여 용이할 것이다. 더구나 전문학교 대학생들은 거의 순결치 못하다. 그래서 결국은 최후의 일선을 넘어서는 것이 자명의 리(理)다.’( ‘삼천리’ 1936년 11월호 ‘여학생행장보고서’ 198쪽) 아파트가 풍기문란의 소굴로 지목당한 것이다.
‘경성 아파트시대’의 흔적은 지금도 남아있다. 충정, 황금, 국수장, 취산, 청운장, 적선하우스, 남산동 미쿠니 아파트 등 7곳이나 된다. 황금, 국수장, 충정, 미쿠니 아파트는 지금도 일부 주거 시설로 사용하고 있어 근대유산 탐방 코스로 인기를 누린다.
06.19 바나나, 오렌지, 딸기빙수... 1920년대 경성의 여름은 氷水의 계절
시인 이하윤은 하루에 아홉그릇(아이스크림 포함)
▲여름철이면 경성 거리엔 빙수를 파는 노점이 줄이어 등장했다. 얼음 빙(氷)자 깃발을 내걸었다. 조선일보 1934년6월23일자에 실린 사진.
시인 겸 수필가 이하윤(1906~1974)은 빙수(氷水) 마니아였던 모양이다. 30대 한창이던 1939년 여름, 신문에 ‘빙수’ 에세이를 썼다. ‘여름철이 되면 두가지 자랑스럽지 못한 기록의 소유자인 내가 그 가진 바 특징을 발휘하기에 여념이 없다. 청량음료의 섭취량이 그 하나요, 흘리는 땀의 분량이 그들이다. 아마도 나처럼 냉수며 빙수며 사이다며 삐-루며 무릇 청량제치고 좋아하지 않는 것이 없는 사람도 드물게다.’(조선일보1939년 8월3일자· 파란 글자를 누르면 옛날기사로 연결됩니다.)
그는 ‘중학4학년때 일본 수양(修養)여행을 갔을 때 고베에서 아이스크림과 빙수를 합하여 하루에 아홉 그릇을 먹은 데서 시작됐다’며 이력을 소개한다. 경성에서 학교 다니던 4년간 여름마다 ‘상당한 훈련’을 거친 데다 일본 빙수라는 게 ‘경성 시내 빙수 집에서 주던 커다란 접시 한그릇에 비하면 3분의 1을 넘지 못’해 ‘아홉 그릇(아이스크림 포함)’ 기록을 세웠다는 자랑이었다. 이하윤이 경성제일고보(경기고 전신)를 수료한 게 1923년이니까, 그 무렵 경성 시내엔 빙수가 꽤 유행했던 것같다. 서울대 사대에서 가르치다 정년퇴임한 이하윤은 한때 교과서에 실린 수필 ‘메모광’으로도 유명하다.
◇1920년대 서울의 여름은 빙수의 계절
▲음식인문학자 주영하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가 작년 말 낸 '백년식사'
‘1920년 서울의 여름은 빙수의 계절이었다.’ 음식의 역사를 연구하는 주영하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는 직설적으로 말한다. 작년말 출간한 ‘백년식사’(휴머니스트)에선 구한말 종로거리에 등장한 빙수가게를 소개한다. 제국신문 1903년 5월16일자에 실린 ‘국영당’(菊影堂) 빙수점 개업광고다. 이 가게는 유행병 예방약을 빙수에 첨가한다고 알렸다. 당시 얼음은 겨울철 한강에서 채취해 보관하던 걸 썼기에 식중독 같은 유행병에 걸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한강 얼음을 손으로 잘게 깨서 만들던 빙수는 1920년대 들어 한단계 진화한다. 일본에서 얼음을 가는 빙삭기가 들어왔다. 빙수는 물론 일본에서 들여온 간식이다. 1890년대 일본 대도시엔 여름이면 노점 영업을 하는 빙수점이 많았다고 한다.
▲제국신문 1903년 5월16일자에 실린 빙수점 국영당 개업광고. 종로에 개업한다는 내용이다. 오른쪽은 조선신문 1929년6월28일자에 실린 빙삭기 광고. 얼마전까지 한국 빙수점에서 쓰인 기구와 비슷하다.
◇식중독, 콜레라 경고 기사도 등장
1920년대가 되면 여름마다 이런 기사가 실릴 만큼 빙수는 떠오르는 간식이었다. 1921년 여름에 개업한 빙수점이 417곳인데, 일본인이 하는 가게가 187곳, 조선인 가게가 230곳(1921년 7월27일 ‘금하의 빙점’)이라거나 1923년 6월말 벌써 계절영업자(주로 빙수점)가 334곳(일본인 174곳, 조선인 160곳)이란 기사(1923년 7월10일 ‘계절영업증가’)였다.
한강에서 채취한 얼음을 빙수재료로 쓰다보니, 여름철이면 식중독을 경고하는 기사가 신문에 더러 났다. 1920년 콜레라가 유행하자 ‘냉수·빙수 같은 것은 아무쪼록 먹지 않도록 할일이오’(1920년7월11일 ‘콜레라 예방주의’)란 권유다. 한밤중에 구역질하며 설사를 하는 아이 얘기를 소개하면서 약을 먹였더니 팥껍질을 한사발이나 누었다며 ‘팥빙수’를 많이 먹어 배탈이 났다는 사연도 소개한다. ‘아무리 더운 날일지라도 절대로 얼음을 가까이 하지 않을 것입니다. 얼음이 배속에 들어가면 벌써 그 냉도만으로도 위의 점막은 ‘가다루’를 일으킵니다.’(1931년8월9일 ‘빙수를 어떻게 먹어야 탈안나나’)
▲1920년대 경성엔 바나나, 딸기, 오렌지 물을 얹은 과일맛 빙수가 유행했다. 사진은 요즘 인기있는 신라호텔의 망고빙수.
◇바나나 빙수, 오렌지빙수, 딸기빙수, ‘취향의 시대'
당시 빙수는 팥보다는 바나나, 오렌지, 딸기 같은 과일즙이나 시럽을 주로 뿌려먹었던 모양이다. 망고 빙수, 블루베리 빙수처럼 요즘 인기있는 과일빙수가 100년전 벌써 유행했던 셈이다. 주영하 교수는 팥빙수라는 말은 1970년대 들어서야 등장한다고 했다. 국문학자 김동식 인하대 교수는 당시 경성 거리엔 빙수말고도 칼피스, 라무네(레모네이드), 사이다,
시토론, 평야수(平野水)같은 탄산음료가 유행했다고 전한다.(1920~30년대 경성의 거리와 음식에 대한 몇가지 소묘, 대산문화 2017년 여름호) 칼피스는 우유를 발효시켜 만든 유산균 음료이고, 라무네와 시토론은 물에 과즙과 포도당을 넣은 레모네이드 풍 음료, 평야수는 설탕·과즙·향료가 들어가지만 천연탄산수를 베이스로 한다는 특징이 있었다. 갖가지 청량음료에 더해 빙수 한 그릇에도 바나나맛, 오렌지맛, 딸기맛을 구분하던 ‘취향의 시대’가 탄생한 셈이다.
06.19 소파 방정환의 빙수예찬 “사랑하는 이의 보드라운 혀끝 맛 같은…”
딸기빙수 즐겨...’날달걀 깨트려 먹으라’ 제안도
▲소파 방정환은 빙수를 사랑한 애호가였다. 그는 빙수의 맛을 '사랑하는 이의 보드라운 혀끝같은 맛'에 비유할 만큼, 생생한 필치를 선보였다.
‘방정환씨는 빙수를 어찌 좋아하는지 여름에 빙수점에서 파는 빙수 같은 것은 보통 대여섯그릇은 범 본 사람이 창구녕감추듯 하고...’ 월간지 ‘별건곤’(1931년4월호)에 난 기사다.
소파 방정환(1899~1931)은 소문난 빙수광이었다. 잡지 ‘어린이’를 내던 개벽사에서 함께 낸 월간지 ‘별건곤’에 ‘빙수’라는 제목으로 두차례나 글을 남겼을 정도다.
‘사알ㅡ사알 갈아서 참말로 눈같이 간 고운 얼음을 사뿐 떠서 혓바닥위에 가져다놓기만 하면 씹을 것도 없이 깨물것도 없이 그냥 그대로 혀도 움직일 새 없이 스르르 녹아버리면서 달콤한 향긋한 찬 기운데 혀끝이 환ㅡ해지고 입속이 환ㅡ해지고 머리속이 환ㅡ해지면서 가슴속 뱃속 등덜미까지 찬기운이 돈다.’(1928년 7월호)
▲파리바케트가 최근 내놓았던 딸기빙수. 소파 방정환은 눈처럼 곱게 간 얼음에 빨간 딸기물이 흐르는 딸기빙수를 사랑했다.
수다스럽게까지 보이는 소파의 빙수예찬이다. ‘빙수는 혀끝에 녹고 녹이거나, 빙수물에 혀끝을 담그고 시원한 맛에 눈을 스르르 감으면서 기뻐하는 유치원 아기들같이 어리광피우며 먹어야 참맛을 아는 것이다’라는 묘사에서 천진난만한 아이 같은 소파의 성정이 느껴진다. 소파는 이글에서 ‘한 그릇먹고는 반드시 또 한 그릇을 계속하는 것이 버릇이 됐다’면서 ‘몇 그릇이든지 자꾸 이어 먹을것같다’고 아쉬워한다.
◇궁중·고관만 즐기던 얼음
‘여름에 얼음을 먹는다는 것은 지금 와서 퍽 평범한 이야기지오만 그렇게 되기까지에는 우리 인류가 여러 천년 동안 여러 가지의 격난을 걲어온 것이랍니다.’ 빙수가 유행하던 1930년대엔 ‘빙수의 내력’을 소개하는 기사가 실렸다.(1936년7월10일 ‘빙수의 내력을 들어보소!’)
조선에서도 서빙고가 있었지만, ‘한껏해야 궁중 즉 대궐안에서나 자시었고, 좀 더 내려와야 높은 벼슬아치들이나 자시었지 지금처럼 누구나 먹게 된 것이 아니다’고 했다. 이 기사는 아이스크림과 아이스크리를 구분하고 있다. ‘아이스크리’는 마구 만들어 싸게 파는 것(아이스케키?)이고 ‘아이스크림’은 고급 양식점에서 모양있게 만든 것이란다.
▲빙수의 내력을 소개한 조선일보 1936년7월10일자 기사. 시원한 빙수 사진과 함께 실렸다.
◇'빙수黨' 방정환, 딸기빙수즐겨
소파는 ‘딸기빙수’파였다. ‘빙수에는 바나나물이나 오렌지물을 쳐먹는 이가 있지만은 얼음맛을 정말 고맙게 해주는 것은 새빨간 딸기물’ (별건곤 1929년 8월호)이라고 썼다.
‘눈이 부시게 하얀 얼음 위에 유리같이 맑게 붉은 딸기 물이 국물을 지을 것처럼 젖어있는 놈을 어느때까지던지 들여다보고만 있어도 시원할 것같은데 그 새빨간데를 한술 떠서 혀 위에 살짝 올려놓아보라. 달콤한 찬 전기가 혀끝을 통하야 금시에 등덜미로 또르르르 달음질해 퍼져가는 것을 눈으로 보는 것처럼 분명히 알 것이다.’
소파가 온 몸으로 빙수의 맛을 느끼며 쓴 ‘딸기 빙수’ 리뷰다. ‘써억써억 소리를 내면서 눈발 같은 얼음이 흩어져나리는 것을 보기만 하여도 이마의 땀쯤은 사라진다.’
◇빙수에 날달걀 깨어서 먹어라
소파는 광충교 옆 환대(丸大)상점을 경성 제일의 빙수집으로 추천한다. ‘얼음을 곱게 갈고 딸기물을 아끼지 않는 것으로 이 집이 제일이다.’ 빙수가게에서 ‘밥풀과자’같은 군것질을 곁들이는 건 ‘얼음맛’을 모르는 소학생이거나 시골서 처음 온 학생으로 간주했다.
얼음만 먹기 심심하면 ‘빙수위에 닭알 한 개를 깨어서 저어먹으면 족하다’면서도 딸기맛이 덜해지니까 추천하고 싶지 않다는 의견도 곁들였다. 쌍화차나 커피에 날계란 풀어먹는 게 100년 전 빙수에도 해당됐던 모양이다.
빙수마니아 시인 이하윤은 ‘빙수당(黨)’으로 소문난 아동문학가 소파 방정환과 빙수먹기 시합을 벌이고 싶었다고 고백한 적있다. ‘개벽사의 소파가 빙수당으로 명성이 다는 소문이 들려왔다. 어느 기회에 정식으로 시합을 걸어볼 작정이었으나 드디어 실현되지 못하고 그는 그해 여름 빙수 흔한 세상을 남겨놓고 마침내 고인이 되고 말았다.’ (조선일보 1939년 8월3일자 ‘빙수’) 이하윤이 중외일보 학예부(1930년9월~1932년5월)기자로 일하던 시절이었다.
◇빙수와 에로티시즘 연결시킨 섬세한 취향
방정환은 앞의 딸기빙수 예찬에서 ‘사랑하는 이의 보드라운 혀끝 맛 같은 맛을 얼음에 채운 맛! 옳다, 그 맛이다. 그냥 전신이 녹아 아스러지는 것같이 상긋하고도 보드랍고도 달콤한 맛...’라고도 썼다. 김동식 인하대 국문과 교수는 ‘빙수와 에로티시즘을 연결지을 정도로 섬세하면서도 격렬한 취향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으로 방정환을 평가했다.
덧붙이자면, 앞의 월간지 ‘별건곤’은 소파가 설탕도 무척 좋아했다고 소개했다. ’15전짜리 냉면에 10전짜리 설탕 한 봉을 넣지 않고는 잘 못자신다.’ 한때 어린이나 젊은이중에도 우유나 콜라에 밥말아먹는 기호를 가진 것처럼, 소파는 냉면에 설탕을 봉지째 넣어먹는 독특한 취미를 가졌다.
06.26 ‘빌리아드 걸’ 미모가 흥행 좌우...순종 부부까지 빠진 경성 당구 열풍
상류층의 고급 오락 출발..중일 전쟁 후 퇴폐 온상으로 꼽혀
▲석영 안석주가 1928년10월17일자에 그린 만문만화 . 경성의 부자들이 당구에 빠진 풍경을 풍자했다.
양복에 넥타이차림 신사가 왼손에 당구 큐대를 들고 시가를 피우며 게임을 지켜본다. 뚱뚱한 남자는 당구대 위에 몸을 올려 놓고 두 발을 공중에 띄운 채 공을 조준하고 있다. 만문만화가 석영 안석주가 경성의 부자들이 당구를 즐기는 모습을 풍자한 그림이다.
‘이것에 심취한 뚱뚱보 대감 두 사람이 그 움직이기도 어려운 몸덩치로 ‘큐’를 들고서 빌리아드판 언저리를 빙빙 서로 엇갈려돌면서 붉은 옥돌, 흰 옥돌을 밀고 때리고 서로 맞추고 하다가 여송연을 문 입을 씰룩거리며 지절댄다. ‘이건 오마와시일세 그려?’ ‘오마와시든 무에든 오늘은 자네가 한 턱 내게 된 형편일세.’(조선일보 1928년10월17일자 아도짓뎅겜 열점만 남았습니다)
◇당구 마니아 순종, 하루 두차례 즐겨
당구는 1920년대 경성에 유행병처럼 번진 스포츠이자 오락이었다. 당시 ‘옥돌’(玉突)이라 불렀다. 당구대는 옥돌대, 당구장은 옥돌장식(式)이었다. 19세기 후반 인천 개항장을 통해 들어온 당구는 처음엔 상류층이 즐겼다.
▲순종이 세상을 떠난 직후 시대일보 1926년5월4일자에 실린 창덕궁 인정전의 당구대 사진.
순종(1874~1926)은 당구 마니아였다. 순종은 1912년3월 일본 당구재료 판매상 닛쇼테이(日勝亭)에 당구대 2대를 주문, 창덕궁의 인정전 동행각에 설치했다. 당시 ‘매일신보’(1912년3월7일)는 순종이 매주 월요일과 목요일을 당구하는 날로 정했는데, 이외에도 추가로 당구장에 들른다고 소개했다. 나라 뺏긴 군주는 당구로 소일하는 신세였다.
당구에 재미가 붙은 순종은 하루에 두 차례 당구장에 들를 정도가 됐다. 조선일보 1922년 12월21일자에 소개한 순종의 하루 일정을 요약하면 이렇다. 오전 9시 또는 9시20분 기상, 주치의 진찰과 세수, 한약 탕제를 들고, 낮12시 아침 수라를 마친 뒤 오후2시까지 업무. 오후 2시부터 4시까지는 ‘인정전 옥돌장으로 가시어 유쾌하게 공을 치시며’, 오후 4시 다과와 목욕을 마친 후 책과 잡지를 읽는다. 오후7시 저녁 수라를 마친 뒤 산보 겸 ‘옥돌장으로 가시와 친히 공을 치시든지 그렇지 아니하면 배종하였던 신하에게 명하시와 어람도 하시고’, 이후 신문을 일일이 읽고 밤 11시쯤 잠자리에 들었다.
▲순종과 순정효황후는 20살 차이가 났다. 두 사람은 창덕궁 인정전에 설치된 당구장에서 가끔 당구를 같이 한다고 보도되기도 했다.
◇당구 즐긴 신여성 순종황후
순종 아내인 순정효황후(純貞孝皇后·1894~1966)는 당구를 즐긴 신여성이었다. 매일신보 1914년 7월4일자는 ‘왕비께서도 더위를 물리치기 위한 방편으로 매일 오전 10시에 내인들을 대동해 인정전에서 옥돌로 소요하시다가 오후5시가 되면 돌아가셨다’ 는 소식을 전했다. 조선일보도 1922년 12월21일자에서 순정효황후는 오후4시쯤 간단한 다과를 들고 목욕을 한 뒤, ‘옥돌장으로 가서 공을 치신다’고 소개했다. 부부가 함께 당구장을 찾아 오락을 즐기는 시대는 아니었든지 순종과 시간차를 두고 당구장을 찾았다.
하지만 순종이 세상을 떠난 직후 시대일보 1926년 5월4일자는 ‘순종이 애용하시던 옥돌대’라며 인정전 당구대 사진을 싣고 이렇게 소개했다. ‘순종 황제께서는 구중궁궐에 깊이 계시면서 세상일을 억지로 잊으시고 적막하실 때에는 근친, 종척과 함께, 또 어떤 때는 대비 전하와도 같이 ‘옥돌’을 치심으로써 일시의 소견으로 삼으셨는데 이제는 모든 것이 애통을 새롭게 할 옛일이 되어 누구라도 인정전 안의 옥돌대 사진을 보면 감회가 깊을 것이다.’
◇당구장 영업은 빌리아드 걸에 달렸다
당구는 당시 은행이나 회사, 공공기관에서도 권장하는 오락이자 운동이었다. 1922년 경성부의원에 당구대와 탁구대를 갖춘 오락실이 들어섰고, 1937년 지금의 서울시의회 옆자리인 태평로 1가에 들어선 조선체신사업회관 4층에도 도서열람실과 함께 당구장, 오락실이 들어섰다. 1930년대 경성에 경쟁하듯 들어선 아파트 1층에도 당구장이 자리했다. 아파트 임대업체는 입주자 뿐 아니라 외부인에게도 당구장을 이용하게 하고 부수입을 챙겼다.
‘빌리아드 걸’은 이 와중에 등장한 신종 직업이다. 손님과 함께 당구를 치거나 점수판을 들고 서서 점수를 세는 역할을 했던 여성들을 말한다. ‘헬로 걸’ ‘가솔린 걸’ ‘데파트 걸’ ‘매니큐어 걸’처럼 근대 이후 등장한 새 직업군 여성들을 ‘OO걸’로 부르며 주목하던 시대였다.
시인 백석이 초창기 편집을 맡았던 월간지 ‘여성’ 1937년 11월호엔 ‘빌리아드 걸’이 있는 풍경을 취재한 ‘당구장’이 실렸다. ‘백촉은 됨직한 눈부시는 전광아래 파ㅡ란 천을 깐 옥돌대위에는 새빨간 돌공이 두 알, 하얀 공이 두알 이것을 무서운 눈으로 쏘며 견주는 신사가 있다. 공은 큐를 받아 옆 것을 치고 이리 저리 구르다가 다른 알을 또 건드리고 명랑한 음향을 내며 정지하면 옥돌대 옆 계산대에 앉은 게임 세는 여자가 있어가지고 ‘나나쯔 게임’ ‘고고노쯔 게임’하고 크게 외인다.’
빌리아드 걸의 역할은 대단히 중요했다. ‘옥돌장의 인기는 계산대에 있는 여자가 예쁘고 미운데 있는 것이라 한다. 그 목소리가 이뻐야 하고 좋은 인상을 주어야 된다. 그리하야 가끔 옥돌장 이 계산대에 있는 여자와 손님 사이엔 곧잘 일생을 같이 하는 인연이 맺어지는 수도 있다 한다.’(앞의 ‘당구장’ 기사)
국문학자 소래섭 울산대 교수는 ‘당구장 사업의 성패는 빌리어드 걸의 외모에 달렸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으므로 업주들은 예쁘고 인상 좋고 목소리 좋은 여성을 채용하려고 애썼다’(‘불온한 경성은 명랑하라’,2011)고 적었다. 빌리어드 걸의 보수는 월15원 정도로 ‘데파트 걸’의 20~30원보다는 적었지만, 고객인 남성들의 희롱이 잦았다고 한다. 당구장 손님들이 ‘아무도 없는 틈을 타서 손목을 만지고 몸을 스치는 등 별별 추태를 다 부리는 바람에 남자란 흉측하고 더럽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신동아 1932년12월호. ‘불온한 경성은 명랑하라’에서 재인용)는 빌리어드 걸이 겪은 성희롱 실태를 보여준다.
▲김남천이 쓰고 정현웅이 삽화를 그린 조선일보 연재소설 '사랑의 수족관' 첫회. 당구장이 등장한다. 1939년8월1일자에 실렸다.
◇퇴폐로 비난받은 ‘빌리아드’
일부 당구장은 퇴폐와 도박의 온상으로 알려져 사회적 물의를 빚고 단속대상이 됐다. 조선일보 1937년11월4일자는 개성의 남문상가에 위치한 당구장은 표면만 당구장일뿐 내부는 이미 도박장으로 바뀐지 오래됐다고 비판했다. 일정한 직업이 없는 룸펜과 청소년, 상점 수금원, 농촌 청소년들로 당구장에는 늘 100여명 가까운 사람들이 사행심 때문에 모여든다고 전한다.
‘인천부내에 있는 아홉 군데 당구장에도 요즘 중등학교 생도들이 몰려들어 일반의 풍기상 가장 재미롭지 못한 일이 적지 않다. 그중에도 심한 생도들은 책보를 낀 채로 당구장에 들어와서 정모·정복에 담배까지 피워물고 ‘게임’보는 여자들에게 농담까지 해가며 유희를 한다하여 인천서에는 매일같이 투서가 들어오므로…'(1940년2월9일) 고급 사교 오락이자 건전한 스포츠로 주목받던 당구는 중일전쟁 발발 후 당국으로부터 퇴폐와 향락의 근거지로 비난받았다. 전쟁의 시대에 오락이 끼어들 틈은 없었다.
07.03 ‘배달의 민족’ 元祖 라이더, 경성 거리를 누비다
자전거로 설렁탕, 냉면 배달
아침엔 배달, 저녁엔 ‘테이크 아웃' 설렁탕
경성에 대중 음식점이 언제부터 들어섰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음식인문학자 주영하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는 1900년대부터 서울에는 온갖 음식점이 문을 열었다고 소개한다. 고급음식점인 ‘조선요리옥’을 비롯, 냉면집, 장국밥집, 설렁탕집, 비빔밥집이 등장했다는 것이다. 남녀노소, 계층 구분 없이 한 식당에서 음식을 먹는 일은 그 전까지 보기 힘든 장면이었다. 그중 설렁탕은 가장 인기있는 메뉴였다. 하지만 일부 양반계층이나 모던 보이, 모던 걸은 설렁탕을 먹고 싶어도 직접 음식점에 가서 먹는 걸 꺼렸다. 설렁탕 집에선 이런 고객을 위해 배달 서비스를 시작했다.(주영하, ‘백년식사’ 60쪽)

▲조선일보 1930년 4월25일자에 실린 광고. 당시 유행하는 조미료 아지노모토를 넣으면 배달주문이 폭증한다는 상품광고다. 자전거에 그릇을 얹고 거리를 달리는 배달부 모습을 실었다
1920년대는 자전거 음식 배달 전성시대였다. 설렁탕과 냉면, 국밥, 중국음식이 주요 메뉴였다. ‘동지 섣달에 비가 오다니 이런 괴상한 일기가 또 어디 있나! 9일의 경성 시내는 밤새도록 퍼붓는 때아닌 비로 인하여…하루에도 수백그릇씩 팔아먹는 설렁탕집에서 설렁탕의 주문을 산같이 받아 놓고서도 거리가 미끄러워서 배달을 해주지 못하여, 수백원어치의 손해를 보았다는 것도 거짓말 같은 정말이야.’(조선일보 1928년1월10일자 ‘자명종’)
◇모던 걸 부부, 아침은 배달, 저녁은 ‘테이크 아웃’ 설렁탕
아침 식사로 설렁탕을 배달시켜 먹는 신여성 주부들이 꽤 있었던 모양이다. 개벽사에서 발간한 대중잡지 ‘별건곤’ 1929년12월호는 ‘무지의 고통과 설넝탕 신세, 新舊가정생활의 장점과 단점’이란 글에서 막 결혼했거나 가정부를 둘 처지가 안된 신여성 부부의 일상을 이렇게 소개했다. ‘신가정을 이루는 사람은 하루에 설렁탕 두그릇을 먹는다고 합니다. 돈은 넉넉지 못한데다가 아침에 늦잠을 자고 나니 속은 쓰리지만은 찬물에 손넣기가 싫으니까 손쉽게 설렁탕을 주문한답니다.’
모던 보이, 모던 걸 부부는 오후 늦게는 손을 마주 잡고 구경터나 공원 같은 데로 산보를 다니다고 소개한 뒤 ‘저녁 늦게나 집에 들어가게 되니까 어느 틈에 밥을 지어먹을 수없고 또 손쉽게 설렁탕을 사다 먹는답니다.’라고 썼다. 아침은 배달, 저녁은 ‘테이크 아웃’ 설렁탕으로 두끼 식사를 해결한다는 얘기다. ‘별건곤’은 1929년 9월에도 ‘근래에 소위 신식 혼인을 했다는 하이카라 청년들도 이 설렁탕이 아니면 조석을 굶을 지경’이라고 썼다.
◇서울 대표음식 설렁탕
설렁탕은 서울을 대표하는 음식점 메뉴였다. 외지인은 설렁탕 맛을 알려면 3년은 걸린다고 했다. 조선일보 1938년 10월13일자는 설렁탕을 주제로 한 기사 ‘색연필'을 실었다. ‘팔도강산의 자랑스러운 문물이 다 모인 옛 왕도, 맛득하고 사치하기로 으뜸인 서울에서 소를 머리와 발쪽 그대로 삶아서 국을 만들어 파는데 거리의 상인도 양복쟁이도 소위 양반도 상하없이 먹는다고.’
기사는 이어진다. ‘오뉴월에 진땀을 흘리며 먹는 맛도 제맛이요, 추운 겨울에 밤늦어서 뜨뜻이 배를 채우는 맛이란 또 그럴 듯한 것이다.’ 당시에도 설렁탕을 뚝배기에 담아냈는데, 그릇을 바꾸려는 움직임이 있었던 모양이다. ‘설렁탕의 음식 그맛도 맛이려니와 그 그릇인 뚝배기 밑창을 숟갈로 긁는 소리의 귓맛까지 알게 되야 그 진미를 안다는 것인데, 이제 와서 개량한다고 설렁탕을 뚝배기와 영 이별을 시킨다면 어떨까. 설렁탕의 서울 취미로 보아서는 큰 실수라고도 할 것이다.’
◇교통사고 줄잇고 동맹파업 벌이기도
자전거 배달이 많다보니, 교통 사고도 심심찮게 났다. ‘시내 관철동 180번지 화천옥 배달부 신점석(19)은 29일 오전 1시경에 자전거로 종로4정목으로부터 질주하여 오던 중 종로 3정목 앞지대에서 시내 종로1정목 39번지 최해산(26)이 운전하여 오던 자동차와 충돌되어 전기 최점석은 자전거에서 떨어지며 뇌진탕을 일으키어 인사불성에 빠진 것을….’(조선일보 1929년4월30일) 당시 신문 사회면에 종종 등장하는 기사다. 전차에 받히거나 반대로 어린 아이를 치어서 다치게 하기도 했다.
자전거 음식 배달인들이 저임금에 항의해 동맹파업을 벌이기도 했다. 평양냉면 본고장 평양에서 1929년 4월 자전거 음식배달원들이 파업을 일으켰다. ‘평양 각 국수집에서 자전거로 국수를 배달하는 면옥노동자들은 지난 21일 각 국수 집주인에게 대하여 아래와 같은 임금 인상 요구를 하고 그간 수차 회의를 거듭하던중 지난 31일에 이르러 교섭을 파열이 되고 금월1일부터는 자전거 배달 노동자들이 파업을 단행하는 동시에….’(조선일보 1929년 4월2일자 ‘평양 냉면상의 자전차배달인 파업’).
‘일급 60전에서 70전 인상' ‘외상 대금의 책임 부담과 기구파손 손해 배상을 노동자에게 물리지 말 것' ‘만일 앞과 같은 책임을 노동자에게 지울 것같으면 일급을 1원20전으로 인상' 등을 요구했다. 주인들은 거부했고, 국수집 자전거 배달은 중지됐다. 평양 냉면집 배달원 파업은 그후에도 종종 보도됐다.

▲조선일보에서 발행한 월간지 '조광' 1935년 11월호에 실린 음식배달원 인터뷰. 얼음판에 미끄러져 그릇을 깨뜨리면 눈물이 나올 지경이라고 하소연했다.
◇음식 배달원의 꼴불견 목격담
조선일보가 발행한 월간지 ‘조광’ 1935년11월호에 음식배달원의 생생한 증언이 나온다. ‘한그릇에 일전씩, 塵合泰山 의 苦夢’. 거리의 직업인을 1문1답으로 소개하는 코너였다. 배달비는 그릇당 1전씩. 설렁탕, 냉면이 한그릇에 15전이던 시절이었다. 이 배달부는 싼 배달비 때문에 ‘생활이 곤란해 견딜 수가 없다’고 하소연했다. 게다가 더운 여름과 추운 겨울이 제일 괴롭다고 했다. 얼음판에 미끄러지면 그릇·음식값을 다 물어내야했기 때문이다. 배달중 목격한 에피소드가 생생하다.
‘어느 겨울밤이야요. 눈보라가 치고 바람이 찬 때인데 냉면X그릇과 약주술을 가져오란 전화가 오겠지오. 그래 그걸 제가 메고 가게되었는데…’냉면 가져왔습니다' 했더니 안에서 ‘식모, 대문 좀 열어’하고 두어서너마디 여자의 목소리가 나겠지요! 나는 가슴이 두근러기는 것을 참고 잇다가 열어주는 대문을 쑥 들어서 마루 위에 냉면 그릇을 내려놓고 안방편을 쓱 들여다 봤더니 아니 그게 무업니까……문틈으로 보이는 남녀의 모양이 눈에 휙 띄지 않겠지오. 그러나 그들의 꼴이란 말못할 경지에 이르렀어요.’
07.10 경성의 ‘자동차 주막’ 영업비결? ‘가솔린걸'
교사 출신까지 전업
손님들의 은근한 눈길 부담
8등신 여성 모델이 고개 숙여 손님을 맞고, 핫팬츠 차림 여대생들이 창유리를 닦아준다?
1990년대 주유소에선 치열한 판촉전이 벌어졌다. 1993년 정부가 서울 등 6대도시에 대해 주유소간 거리제한을 없애는 등 규제를 완화하면서 주유소들이 우후죽순 들어섰기 때문이다. 화장지, 생수 서비스는 물론이고 치어리더까지 고용한 ‘미인계’가 활개쳤다. 판촉비가 마진에 육박할 만큼 출혈 경쟁을 벌인 끝에 문 닫는 주유소가 속출했다.(조선일보 2018년 7월11일 김명환의 시간여행, ‘수단 방법 안 가렸던 주유소 판촉전…’ )
2000년대를 목전에 두고 벌어진 작은 해프닝이었다. 하지만 주유소 판촉전쟁에 미인계를 동원한 것은 이 때가 처음은 아니다. 90년전 경성으로 거슬러 가본다.
▲2011년 서울 여의도의 한 주유소에서 여직원이 자동차에 연료를 넣고 있다. 90년전 경성 거리에 등장한 주유소엔 '가솔린 걸'이 세간의 주목을 받으며 손님을 맞았다./조선일보 DB
◇'18~19세의 꽃같은' 가솔린 걸
조선일보 1933년 11월25일자 ‘저물어가는 1933 가두여인’ 주인공은 ‘가솔린 걸’이었다. 1931년말 경성 시내에 등록된 자동차는 1000대쯤 됐다. 그해 여름 ‘깨솔린 써ㅡ비스 스테슌’이 등장, 경성 역앞과 종로4가에도 주유소가 생겼다. 주유소 점원은 남자를 쓰지 않고, ’18~19세가량의 꽃 같은 여성'을 썼다. 이른바 ‘가솔린 걸’이다. 자동차 자체가 희귀한 시대인데다 주유소란 신종 업종에 젊은 여성이 일하고 있으니 관심이 쏠렸다.
‘신동아’(1932년 12월호)는 고등보통학교를 중퇴하고 사립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던 인텔리 여성이 ‘가솔린 걸’로 일하고 있다고 소개했다.(소래섭, ‘불온한 경성은 명랑하라’ 158쪽 재인용) 당시로선 고학력인 고보 중퇴생인데다 교사까지 했던 여성이 전업할 정도였으니 꽤 괜찮은 직업처럼 보인다.
▲조선일보 1932년1월5일자에 실린 '깨소린 걸의 십자로에서 외치는 소리'. 화장도, 좋은 옷도 필요없다면서 기름 속에 파묻혀 일하는 게 힘들다고 고백했다.
◇'생명보다 중한 피부가 거칠어지는 게 쓰라려'
하지만 젊은 여성이 온종일 기름 냄새 맡으며 일하는 게 쉽진 않았던 모양이다. ‘다른 여성들과 같이 고운 의복이나 다른 사치품은 이곳에서는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날마다 손에 기름칠을 하고 옷에 때가 묻어서 천하기로는 제일일 것같습니다.’
실업학교를 마치고 가정상 피치못할 사정으로 이곳에 몸담게 됐다는 이 ‘가솔린 걸’은 ‘종일 앉아만 있다가 몸을 움직이는 것은 다만 자동차에 기름을 부어주는 것 30여회로써 유일의 운동을 삼습니다’ ‘직업이 너무 단조하여 취미가 없고, 전신이 기름 속에 파묻혀있기 때문에 생명보다 더 중한 피부가 거칠어지는 것이 무엇보다 쓰라립니다’라고 호소한다. (조선일보 1932년 1월5일 ‘깨소린걸의 십자로에서 외치는 소리’) 월급을 구체적으로 밝히진 않았지만, ‘남들과 같이 화장도 하여야겠고, 의복도 남부끄럽지 않게 입어야겠지만 이곳에서 생기는 수입으로는 도저히 몽상도 못할 일’이라고 했다.
▲조선일보 1939년4월26일자에 실린 가솔린 걸. 손님 기분 맞춰주느라 힘들다면서도 '우리는 장사니까 살살 달래는 수밖에..'라고 했다.
◇'한떨기 웃음을 던져주는 것도 사회봉사'
가솔린 걸들은 ‘감정노동’에 시달렸다. “운전수들 말씀마세요. 자기네들은 손님들께 아니꼬운 꼴을 보니까 그담엔 그들이 또 우리들께 와서 별 아니꼬운 꼴을 다보여줘서 질색이에요.” 경성부청 앞 ‘까솔린 스탠ㅡ드’에서 일하는 ‘까솔린 양’은 푸념한다. 배화보통학교를 나왔다는 전순업양은 그럴 때 어떻게 대응하느냐는 질문에 이렇게 답한다. “호호…할 수있나요. 저쪽은 그래도 손님이고 우리는 장사니까 살살 달래는 수밖에….”(조선일보 1939년4월26일 ‘대상부대는 몰려든다. 도시의 오아시스로’)
월간지 ‘여성’(1938년7월호 ‘직장의 명랑화’)에 등장한 ‘가솔린걸’ 이숙자(가명)양은 미소로 반기면 손님들이 무슨 호의나 보이는 줄 알고 은근한 눈을 주고간다고 하소연한다. 곧 “재미가 어떠세요. 어느날 노십니까.자동차 가지고 외시러올게 드라이브나 하실까요” 하는 수작에 시달리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도 그는 ‘먼지가 날리는 거리로 핸들을 잡고 시달려 지내다가 가솔린을 사러 들어서는 운전수에게 한떨기 웃음을 던져주는 것은 사회 봉사의 한가지라고 믿는다’고 당차게 선언한다. ‘거리의 자동차 주막ㅡ여기에는 명랑한 직업 부인의 웃음섞인 민활한 서비스가 필요합니다.’
▲조선일보에서 발행한 '여성' 1938년7월호에 실린 '가솔린 걸'의 항변. 한 가솔린 걸은 남성들의 은근한 눈길이 부담스럽다고 고백했다.
◇ ‘얼마나 씩씩하고 장쾌한 직업이냐’
몸도 마음도 고달픈 ‘가솔린 걸’을 치켜세우며 찬사를 바치기도 했다. ‘얼마나 씩씩하고 장쾌한 직업이냐. 거리로 걸러가는 요염백태의 뭇여성들아! 위대한 그들에게 머리를 숙이라! 그리고 너희들도 목말라서 받는 자동차와 같이 새 ‘삶’의 생명수를 받으라! 그러면 너희에게는 거짓없는 참다운 새 ‘삶’이 꼭 올 것이다.’(1933년 11월25일 ‘십자로에서 활약하는 깨소린 걸’) 신분이나 외모가 아니라 노동으로 인정받는 ‘모던 걸’의 탄생이었다.
07.17 ‘륙싹’ 멘 씩씩한 모던걸… 하이킹 전성시대
남산, 봉은사, 청량리로…
값비싼 장비에 ‘히말라야 가나’ 핀잔도

▲조선일보가 1936년 4월 창간한 월간지 '여성' 표지. 석영 안석주가 표지화를 그렸다. 창간호에는 여성들의 하이킹을 예찬하는 시인 김상용의 에세이가 실렸다
’'산보'시대는 갔다. 때는 ‘하이킹’시대이다. 명랑한 ‘하이킹’! 바득바득 핏대를 올리고 싸우는 따위가 없는 유유자적의 ‘스포츠’이다. 자연을 쓰다듬으며 건강을 말하는 ‘하이킹 이데오로기ㅡ’의 소유는 오늘 청춘의 자랑이다. 자! 하이킹!’
30대 한창이던 기자 홍종인(1903~1998)이 쓴 ‘하이킹 예찬’(‘여성’ 1936년 5월호)이다. 훗날 조선일보 주필, 회장을 지낸 홍종인(1903~1998)은 한국산악회 회장을 맡을 만큼 소문난 등산광이기도 했다.
1930년대 경성은 하이킹 전성시대였다. 조선 뉴스라이브러리 100 (파란 부분을 클릭하면 바로 연결됩니다) 에 ‘하이킹’( 1920년~1940년)을 검색하면, 기사가 230건이나 뜬다. 첫번째 기사는 1933년 10월2일자 ‘日曜이자 小春日暖! 교외교내에 賞秋행락’이다. ‘산으로 물로 하이킹隊 활약’이란 소제목 아래 덕수궁, 창경원은 물론 청량리, 소요산, 북한산 등 교외로 행락객이 몰려든다고 보도했다.
◇여성들이여, 하이킹으로!
‘이즈음 ‘하이킹’이란 말이 대단히 유행하는 모양입니다. ‘씨ㅡ즌’이 ‘하이킹’에 적당한 만치 이 ‘하이킹’이란 말은 사세를 얻은 듯 어느 누구의 입에서나 튀어나옵니다.’ 1934년10월31일자 조선일보 기사 ‘하이킹과 여성’은 당시 하이킹 붐에 발맞춰 하이킹의 유래를 소개하면서 특히 여성들의 참여를 촉구한다.’사이좋게 이야기하면서 걷는 것' ‘힘들여 걷는다’로 하이킹을 설명하면서 ‘야외 원족(遠足)’으로 정리했다. 특히 여성들을 향해 방안에 갇혀 낮잠을 자거나 부질없는 공상에 잠기지 말고, ‘떼파ㅡ트’로 돌아다니지 말고, 높은 산과 깊은 골, 언덕으로 나가 ‘사이좋게 이야기하면서’ 자연과 가깝게 지내자고 권한다.

▲조선일보에서 발행한 월간지 '여성' 창간호에 실린 시인 김상용의 '하이킹 예찬: 춘, 산, 녀'. 배낭을 메고 등산화를 신은 모던걸의 사진을 실었다
.◇하이킹 여성 ‘근대성의 심장은 뛴다’
‘하이킹대(隊)’로도 불리던 당시 하이킹족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그들은 각기 ‘륙색'’을 지었다. 스마트한 복장, 륙색 속에는 ‘코댁’ 식물채집통, 스케치북, 시집 한 권, 원고지 열장, 그리고 손수 만든 영양과 미미(美味)를 겸한 점심, 약간의 다과 등이 들었다. 수통에 든 정한 물은 두 사람의 하루 분이 넉넉하다.’
교과서에 실린 시 ‘남으로 창을 내겠오’로 유명한 시인 김상용(1902~1951)은 1936년 4월 조선일보가 창간한 ‘여성’ 첫 호에 ‘하이킹예찬: 春·山·女’를 썼다. 동네 주변을 돌아다니는 산책과 달리 근교 산이나 들판을 걷는 하이킹은 ‘룩색을 멘 스마트한 복장’이 요구됐다. 김상용은 집안에 갇혀지내는 구식 여성이나 창경원 벚꽃놀이나 즐기는 신여성 대신 ‘하이킹걸’의 건강미를 예찬한다. ‘우선 그들은 모두 건강하다. 탄력이 넘친다. 씩씩하다. 아름답되 대담하다…그들은 병든 꽃이 아니라 아침 이슬을 머금은 푸른 잎이다.’ 김상용은 하이킹걸을 향해 ‘근대성의 심장은 뛴다’고 치켜세웠다.
◇거창한 장비, 알프스·히말라야 원정하나?
하이킹의 필수품은 ‘륙삭크’였던 모양이다. ‘하이킹에 드는 도구’(조선일보 1938년 5월17일)는 ‘하이킹을 한답시고 야단스럽게 도구를 새로 구입할 필요는 없고 전에 입던 헌 양복에 떨어진 구두, 거기에 ‘륙싹’하나만 있으면 그만입니다'라고 썼다. ‘륙싹’은 어른 것은 3원70~80전, 아동용은 1원이상이라고 했다. 설렁탕 한 그릇이 20전쯤 하던 시절이니, 어른 용은 요즘 돈으로 10만원을 훌쩍 넘는다.
당시도 최고급 등산복과 장비를 갖추고 하이킹가는 모습이 꼴불견이었던 모양이다. ‘심하면 몸단속한 차림차림이 얼핏 보아 알프스나 히말라야 등산대라도 무색할 만치 어마어마한 무장(?)을 하고 나서는 꼴은 고소를 못참을 광경’이라며 ‘비노니 웬만큼 날뛰시지요’ (1938년 10월16일자 색연필)라고 일갈했다.
◇남산, 세검정, 청량리, 봉은사, 신촌…인기 하이킹코스

▲극작가 이서구가 월간 '삼천리' 1936년 6월호에 쓴 경성 근교의 하이킹 추천 코스 지도.
당시 경성의 인기 하이킹 코스는 봉은사, 남산, 세검정 등이었다. 극작가 이서구(1899~1981)는 ‘애인 데리고 갈 사랑의 하이킹코ㅡ쓰’(‘삼천리’ 1936년 6월호)에서 뚝섬~봉은사를 1순위 코스로 꼽았다. 전차로 동대문까지 가서, 30분에 1대 꼴로 있는 뚝섬유원지행 자동차를 타고, 나룻배로 건너 걸어서 봉은사에 도착하는 코스다. ‘앞뜰에 연꽃이 피고 천불전이 있고 대웅전 위에 약물이 있고 느티나무 밑에는 금잔디, 고개를 들면 푸른 하늘에 마음껏 솟은 낙락장송 ….’ ‘사람 사태 나는’ 창경원이나 ‘떼난리 나는’ 우이동과 달리 두 사람만의 오붓한 하이킹 코스로 추천했다. 이서구는 하이킹 비용까지 꼼꼼히 계산했다. 전차삯 20전, 자동차삯 40전, 뱃값 12전에 봉은사 연못가의 점심 밥값 1원40전 등 두명의 봄놀이 비용으로 2원12전을 꼽았다. 남산, 연희동, 청량리~보성전문학교, 자하문~세검정도 그의 추천코스다. 홍종인도 여의도, 남산, 뚝섬~봉은사, 북악산, 마포를 경성 근교 하이킹 추천 코스로 소개했다.

▲1930년대는 하이킹 전성시대였다. 등산화를 신고 배낭을 짊어진 모던 걸, 모던 보이들은 산과 들판으로 나가 땀흘리며 신체를 단련했다. 하이킹 코스를 소개한 조선일보 1938년 10월16일자 기사.
◇하이킹 간식, 드로포스, 사이다
이서구는 하이킹 휴대 간식으로 드롭프스를 꼽았다. ‘드롭프는 등산 할 때 어름사탕 대신 입에 무십시오. 잘못 실수해서 사내 양반이 자시다 남은 사탕이 아낙네입으로 튀어들더라도 증거인이 없는 이상 항의를 제출해야 이길 가망 없으니 아이고 고것은 더 맛나다, 명랑히 웃을 준비를 미리 하고 가시는 게 도덕상으로든지 위생상으로든지 지당하다고 생각합니다.’ 객쩍은 농담까지 곁들였다. 신문에도 ‘하이킹엔 드롭포스’식 광고가 종종 실렸다. 초콜렛, 사이다, 아이스크림도 하이킹 단골 간식이었다.
◇총력전 벌이던 일제, 하이킹 장려
하이킹은 중일전쟁 이후 전시체제로 들어간 일제의 권장책이기도 했다. ‘수년 전부터 개시된 소위 ‘하이킹’이 전시하 당국의 체육장려정책에 박자를 맞추어 작년 이래 경성을 위시로 전 조선 각도시에 대유행하게 되야.’ 1938년 10월14일자 1면 사설 ‘하이커와 공덕(公德)’은 하이킹 유행에 총독부의 체육장려책이 개입하고 있다는 사실을 밝힌다. 총력전 준비를 하던 일제는 전 국민을 잠재적 노동력으로 파악, ‘신체단련’을 권장했다. 산과 들판을 걸으며 자연과 어울리는 하이킹까지 전쟁의 그림자에서 벗어날 수 없는 시대였다.
<참고문헌>
김동식, ‘1920년~30년대 대중잡지에 나타나는 음식표상-별건곤과 삼천리를 중심으로' 684~685, 한국학연구 제44집, 2017
소래섭, ‘불온한 경성은 명랑하라', 184~189, 웅진지식하우스, 2011
07.24 엽기적 유행한 ‘베ㅡ비 꼴프’, 모던 보이의 오락
용산, 충무로, 인사동...’소꿉질골프' 핀잔도
장편소설 ‘탁류’(濁流)의 채만식이 서른 한살이던 1933년 신문에 이런 글을 썼다. ’'베ㅡ비꼴프'장에 모여드는 사람들이 누구라구! 조선 서울서는 1933년식이라고 자랑하는 새로운 감으로 새로운 맵시로 지은 양복을 입고 얼골이 해맑고 어제 저녁에 ‘바ㅡ’XX에서 어찌어찌 했다든가쯤의 사교적 담화쯤은 척척 내어놓을만한 청년신사들이다.’(조선일보 1933년 10월8일 ‘베비ㅡ꼴프’)

▲1927년 유럽 여행길에 영국 세인트 앤드류스 골프장에서 라운딩하는 영친왕. 2001년 발간한 '한국골프 100년'엔 군자리 골프장으로 나왔지만, 대한골프협회는 세인트 앤드류스로 바로잡았다. 경성에 하나밖에 없는 골프장을 갈 여유가 없는 모던 보이, 모던 걸은 '베이비골프'로 오락을 즐겼다. /대한골프협회
장안의 모던 보이들이 당시 유행하던 최신 양복을 입고 베이비 골프를 즐긴다는 것이다. 채만식에 따르면, ’베ㅡ비꼴프'는 ‘소꿉질꼴프’였다. ‘훤하니 넓은 잔디벌판에서 딱 힘있게 ‘꼴프’를 치는 흉내로 손바닥만한 마당에 열여덟개의 다 다른 코스를 만들어놓고, 조그만한 공채로 조그만한 공을 쳐서 구멍으로도 넣는 이 얄궃은 장난이 ‘소꿉질골프’, 소위 ‘베ㅡ비꼴프’다.’
채만식이 못마땅하게 여긴 ‘베이비골프’는 당구와 함께 1930년대 모던 보이, 모던 걸들이 환호하던 ‘오락의 총아’였다. 경성에는 효창원(1921년), 청량리(1924년)에 이어 1930년 군자리(지금의 능동) 30만평에 18홀 정규코스를 갖춘 조선의 첫 골프장이 들어섰다. 영친왕이 하사하고, 골프장 건설자금과 운영비까지 보탰다. 하지만 너른 잔디밭에서 골프를 칠 수 있는 이는 드물었다. 대신 ‘손바닥만한 마당’에 오밀조밀, 아기자기하게 퍼팅 위주로 만든 게 ‘베이비 골프’장이었다.

▲조선일보 1933년10월8일자에 실린 채만식의 '베ㅡ비꼴프'. 채만식은 베이비골프를 '소꿉질골프'라고 비아냥댔다.
◇리듬과 감정을 담은 근대인의 오락
‘가벼운 힘과 각도에 부드러운 감정을 담아 ‘큐’와 ‘뺏’을 움직이면 각도와 각도를 더듬어 구르는 알의 유각명랑(柔角明朗), 이는 근대인의 오락감각이다.’
매일신보(1932년12월19일자 ‘옥돌과 베비꼴푸, 오락물의 총아’)는 ‘빌리어드’와 ‘베비골프’를 근대인의 오락으로 치켜세웠다. 한걸음 나아가 ’1932년의 오락물의 총아가 됐다'고 선언했다. ‘엽기적으로 유행한다’는 말까지 나온 베이비골프는 아이들 장난 같지만 ‘리듬’을 타고 감정을 컨트롤하는 최신 스포츠였다.
‘공알은 얼음위를 미끄러지듯 가볍게 굴러 미묘한 각도를 더듬는다. 신시대인의 새 감정은 이에 신경의 ‘리듬’을 타고 흐른다. 한 게임에 20전, 근대인은 이 진귀한 오락에 감정의 명랑을 받고 가벼운 피로를 느낀다. 정신세척을 받고 경쾌한 ‘스포츠’의 단련을 얻는다.’
◇전주·안변에도 베이비골프장…야간 경기도
베이비골프장은 용산 철도국, 충무로 경성전기 본사는 물론 인사동까지 들어섰다. 동아일보 1932년6월5일자 ‘철도에 베비꼴프’ 기사는 철도국 국우회에서 정구 코트옆에 베이비골프장을 개설, 직원에겐 10전, 일반인에겐 15전을 받고 개방한다고 소개했다. 당시 얼마나 인기있든지 야간 개방까지 했다. ‘시대의 첨단적 오락 ‘베비 꼴프’는 점차 대중화하는 바, 본정(本町·지금의 충무로) 베비 꼴프장에서는 20일부터 야간영업을 개시하였다 한다.’(조선일보 1932년4월23일).
철도국과 경성전기 베이비골프장은 일본인이 운영했다. 하지만 조선인이 운영하는 인사동 베이비골프장도 인기였다. 1932년 10월엔 이곳에서 골프대회가 열린다는 기사까지 났다. 그해말 전주에도 베이비골프장이 생긴다는 보도도 나왔다.
영화감독 겸 시나리오작가였던 서광제는 여름철 원산과 가까운 안변 석왕사 부근에 자주 피서를 갔다. 조선일보 1936년9월5일자에 기고한 에세이 ‘석왕사여록’에 이렇게 썼다.
‘저녁이 되면 나와서 정구도 하고 베이비골프도 한다. 물론 나혼자서 갔겠지만 며칠 있으면 남자도 알게 되고 여자도 알게된다. 운이 좋으면 미인을 알게되어 밤길 동무하기가 퍽 좋다.’ 피서지로 유명한 석왕사 부근에도 베이비골프장이 성업중이었다.
◇김규택 소설 ‘망부석’, 이태준 소설 ‘딸 삼형제’의 베이비골프

▲조선일보 1935년6월9일자에 실린 웅초 김규택 소설 '망부석'. 웅초는 직접 삽화도 그렸는데, 마당에 '베이비골프' 팻말을 세웠다.
베이비골프는 당시 문학작품에도 등장했다. 만화가로 유명한 웅초(熊超) 김규택이 조선일보에 연재한 유모어소설 ‘망부석’(1935년5월3일~7월12일·총58회)엔 베이비골프장이 나온다. 툭하면 손찌검하는 바람둥이 남편을 길들이는 아내 명례의 이야기다. 셰익스피어 작 ‘말괄량이 길들이기’의 경성 버전이라고나 할까.
명례는 허구헌날 싸돌아다니는 남편에게 푸념한다. 돈만 있으면 마당 널찍한 큰 집을 사서 ‘당신 비위에 맞도록’ 당구장, 카페, 선 술집, 냉면집, 빠를 열고, 마당엔 베비골프장을 설치하고 자기는 여급 노릇을 하겠다고. 남편을 쥐락펴락하는 여장부같다. 웅초는 이런 가게를 그린 뒤 마당에 ‘베비골프’ 표지판을 세웠다.(1935년6월9일자)
상허 이태준이 1939년 동아일보에 연재한 소설 ‘딸 삼형제’에도 골프장 라운딩 장면이 나온다. 주인공 정매에게 눈독들이는 회사 사장이 수작거는 장면이다.
‘공을 나무못 같은 곳에 오뚝히 고여놓더니 캐디가 뽑아주는 대로 제일 길어뵈고, 끝에 나무주먹이 달린 채를 받아든다. 서너번 딴 데를 후려 어깨연습을 하더니 ‘처음엔 이걸로 멀리 보내는 게 수야…저기 언덕을 넘어갈 테니 봐…’ 사장은 ‘인제 끄린이라고 더 새파란 잔디마당이 있어. 거기 가선 베비꼴프처럼 허는거야’'라고 설명한다. 정매는 사장과 코스를 걸으면서도 연인을 떠올리며 ‘이런델 같이 산보했으면!’ 한다.
‘베이비골프’는 해방 후에도 명맥을 이어갔다. 하지만 유원지 오락으로 퇴락을 거듭하면서 차츰 자취를 감췄다.
07.31 윤봉길 의거 뒤이은 올림픽 낭보,조선을 뒤흔들다
日 마라톤 제패한 김은배·권태하, 대한남아 기개 펼친 윤봉길
90년전 경성은 떠들썩했다. 도쿄에서 날아온 뉴스였다. 1932년 제10회 LA 올림픽에 출전할 마라톤 대표 선수를 뽑는 최종선발전에서 조선 청년 둘이 나란히 1,2위를 차지했다. 5월25일 오후2시30분 도쿄 신궁 외원(外苑)경기장에서 출발한 42.195㎞ 풀코스 경기였다. 권태하는 2시간36분50초로 들어왔고, 김은배가 2시간 37분 59초로 뒤를 이었다. 스물여섯 청년 권태하는 경기 이틀전 ‘발열되야 와석하야있다’가 거둔 값진 성과였다.

▲1932년 제10회 LA올림픽에 마라톤 대표로 출전한 김은배(왼쪽)와 권태하. 일장기를 달았지만, 조선인 첫 올림픽 출전이었다. 김은배는 당당히 6위에 입상했다./대한체육회 공식블로그
‘일본서 세계기록을 지었다던 영목헌웅(鈴木憲雄)군과 숙적 고교(高橋)군을 쾌히 물리쳐 조선인 선수가 일이착의 영예를 독차지한 것은 운동계뿐 아니라 우리 조선 민족으로서 다같이 경하할 일이다.’조선일보 1932년5월27일자 ‘세계올림픽 최후예선 조선 대표선수가 우승’ 기사 마지막은 이렇게 마무리했다. ‘올림픽의 꽃’ 마라톤에 출전할 선수로 조선 청년들이 일본을 대표하게 됐으니, 말 그대로 쾌거였다.
도쿄 승보가 날아오기 직전, 조선엔 긴장감이 돌았다. 상하이에서 날아온 급보때문이었다. 4월29일 상하이 홍커우 공원에서 스물넷 청년 윤봉길이 일왕 생일 겸 전승축하기념식장에 폭탄을 던졌다. 시라카와(白川義則) 상하이 파견군 사령관이 죽고, 제3함대 사령관 노무라(野村吉三郎) 중장, 9사단장 우에다(植田謙吉) 중장, 주중공사 시게미쓰(重光葵) 등에 중상을 입혔다. 장제스 국민당 정부는 이 사건을 계기로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다시 보게 됐다. 침체된 독립운동에 활기를 불어놓은 쾌거였다.

▲혁혁한 양 용사의 수훈'. 김은배, 권태하 두 선수가 마라톤 올림픽 대표선수로 선발됐다는 조선일보 1932년5월27일자 보도

▲윤봉길 의사가 상하이 의거 직전 한인애국단에 입단하면서 수류탄과 권총을 들고 서약하는 사진. 조선일보 1932년 5월27일자 석간 2면에 실렸다. 권태하,김은배가 일본 마라톤을 제패했다는 뉴스를 보도한 같은 날자 신문이다. 1면엔 '반도 남아의 의기' 사설이 실려 미묘한 분위기를 연출했다
◇'반도 男兒의 意氣' 사설
조선일보는 ‘상해축하식장에서 조선 청년이 폭탄 투척’(5월1일자), ‘상해폭탄사건 화보’(5월4일자) ‘상해폭탄범尹은 항일동맹의 일원’(5월7일자) 등 윤봉길 의거를 시시각각 보도했다. 권태하, 김은배의 마라톤 제패를 보도한 5월27일자 석간 2면엔 윤봉길 의사가 왼손엔 수류탄, 오른손엔 권총을 들고 태극기 앞에서 찍은 사진이 실렸다. 상하이 헌병대에서 첫 군사재판이 열렸다는 톱뉴스와 함께 였다.
이 날짜 조선일보날 석간 1 면의 사설 제목은 ‘반도 남아의 의기(意氣)’. 다음 페이지에 실린 윤봉길 의거와 맞물리는 미묘한 제목이었다. 사설은 권태하·김은배의 올림픽 대표 선발을 축하하면서 이렇게 썼다. ‘조선문화의 수준, 특히 조선인이 한 개의 민족으로서 체질적으로 타인종에 비하여 손파(遜巴·손색)가 없는 것을 제시하는 역연한 재료가 된 점에 의의가 있다할 것이다.’
스포츠는 당시 단순한 운동 경기가 아니었다. 구한말 부국강병과 근대 문명의 기치를 내걸고 도입된 스포츠는 나라 뺏긴 시절, 조선인이 타인종보다 뒤쳐지지 않는다는 걸 보여주는 시험대였다. 1930년대가 되면 마라톤, 축구, 농구, 빙상 등에서 조선인은 두각을 나타냈다. 일본에서 열리는 선수권대회를 제패하거나 뛰어난 성적을 내는 경우가 많았다.
◇세계신기록 세운 무서운 10대
양정고보생 김은배는 한해전 10월18일 경성운동장에서 열린 조선신궁마라톤대회에서 비공인 세계신기록(2시간26분12초)을 세운 무서운 신예였다.(조선일보 1931년10월20일 ‘세계기록을 돌파한 김은배군의 수훈’) 열여덟살의 ‘세계 기록 보유자’ 김은배는 하루아침에 스타가 됐다. 조선체육회와 운동기자단 등 7개 단체는 이튿날 김의 ‘세계기록 돌파 표창식’을 열기로 결정했다. 그해 11월14일 수송학교 운동장에서 열린 표창식엔 조선체육회장 윤치호, 조선일보 안재홍, 동아일보 송진우 사장을 비롯한 관계자 수백명이 참석했다. 그해 말 잡지 ‘동광’이 실시한 ‘조선이 낳은 10대 운동가’ 조사에서 김은배는 야구·축구 선수로 최고 인기를 누리던 이영민에 이어 2위에 올랐다.
◇연습 중 일본인 경찰에게 구타당한 권태하
김은배·권태하에 이어 권투선수 황을수(라이트급)가 올림픽 티켓을 따냈다. 6월 올림픽 대표 최종 선발전에서 우승한 것이다. 일본 국기를 달았지만 한국인 최초로 올림픽 무대를 밟은 3명이었다.
김·권 선수가 LA로 떠나기 전날인 6월22일 조선일보는 이렇게 촌평했다. ‘권태하 김은배 양군의 뒤를 이어 권투계의 맹장 황을수군이 라이트급에서 우승하야 만국 올림픽 대회로 간다니, 조선이 세계적 무대로 나가보기는 3명이 효시다. 그러나 황을수군에게 당부하노니 도중에 권태하군에게와 같이 폭력을 사용하는 경관이 있거든, 연습 겸 ‘녹크 아웃’을 안겨보시오.’(여의봉)
권태하는 도쿄 최종 선발전 직전인 5월8일 경성에서 열린 1차 예선전을 위해 경기 이틀전 을지로에서 마라톤 연습을 하다 일본인 교통 순사 지시를 따르지 않았다는 이유로 연행돼 구타를 당했다. 각 체육단체와 스포츠기자단이 분개해 대책 수립에 나설 정도로 물의를 빚은 사건이었다.(1932년 5월8일 ‘마라손 조선대표선수를 교통순사가 무리 구타’). 전치 2주 부상으로 출전이 어려울지도 모르는 형편이었다. 하지만 권태하는 2시간35분12초의 기록으로 우승을 차지했다. ‘여의봉’ 촌평은 이 사건을 넌지시 풍자한 것이다.
◇첫 올림픽 입상, 호외로 전해
8월7일 열린 올림픽 마라톤 경기에서 김은배는 2시간 37분28초로 6위를 차지했다. 권태하는 경기 중반 다리에 경련을 일으켰으나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달려 9위로 들어왔다. 함께 나선 일본인 선수 쓰다(津田)는 5위였다. 당시 올림픽 개인전은 1~3위는 메달과 상장을 주고, 4~6위는 상장을 수여해 입상으로 간주했다. 김은배는 첫 출전한 올림픽에서 당당히 입상했다. 다음날 경성 일대엔 김은배의 올림픽 입상을 알리는 호외가 뿌려졌다. 황을수는 8월9일 열린 1회전 경기에서 독일 카르츠 선수에게 판정패했다.
경기가 끝나자마자 코치 겸 선수로 나선 쓰다가 조선인 둘이 짜고 작전을 무시했다고 권태하와 김은배를 비난했다. 권태하는 쓰다가 팀 전술을 내세워 컨디션이 좋은 김은배가 쓰다를 앞지르지 못하게 했다고 반박했다. 조선인에게 책임을 전가한 쓰다에 분격한 권태하는 올림픽이 끝난 후 귀국하지 않고, 미국에 남았다.
◇日, 금메달 7개로 종합 5위
일본은 LA올림픽서 괄목할만한 성적을 거뒀다. 1928년 암스테르담 올림픽에 이어 평영200m를 2연패한 츠루다 요시우키를 비롯, 자유형 100m의 미야자키 야스지와 1500m의 기타무라 쿠소, 800m 계영, 배영 100m 등 수영에서만 금메달 5개를 포함, 12개의 메달을 땄다. 남자 수영에 걸린 금메달 6개중 5개를 가져가면서 그간 이 분야메달을 휩쓸어온 미국의 독주를 가로막았다. 미국은 남자 수영에서 자유형 400m만 금메달을 땄다. 육상 3단뛰기와 승마에서도 금메달을 딴 일본은 금·은메달 각각 7개, 동메달 4개로 종합 순위 5위를 기록했다.
◇밤은 깊지만...
김은배·권태하의 첫 올림픽 도전은 4년 뒤 1936년 베를린 올림픽의 서막이었다. 손기정·남승룡은 1936년 잇달아 열린 올림픽 대표 선발전에서 각각 1등을 차지했다. 일본은 4년 전 LA올림픽처럼 조선 청년들이 일본 대표로 뽑히는 걸 지켜봐야했다. 손기정 우승, 남승룡 3위의 빛나는 금자탑은 이런 곡절을 딛고 탄생했다.
윤봉길은 1932년 12월19일 일본 가나자와 형무소에서 총살당했다. 조선의 밑바닥은 용솟음쳤지만 밤은 아직 깊었다. 해방은 12년 넘도록 더 기다려야했다. 1932년은 그렇게 저물었다.
08.07 베이브 루스와 겨룬 ‘홈런왕’ 이영민
1928년 경성운동장 첫 장외홈런
축구, 농구에 육상 200, 400미터 신기록까지
1931년 새해 벽두 조선의 10대 스포츠 스타를 뽑는 인기투표가 벌어졌다. 주요한이 발행하던 월간지 ‘동광’(東光)이 기획한 이벤트였다. ‘조선이 낳은 각종 운동선수 중에서 가장 인기있고 뛰어나다고 인정하는 사람 10명의 이름을 엽서에 연서(連書)’해달라는 안내문(동광 1930년12월호 맨뒷쪽)이 실렸다.
일반투표에 앞서 체육계 전문가 14명이 추천(각10명)한 선수 명단과 순위가 동광 1932년 1월호 ‘조선이 낳은 10대운동가’에 공개됐다. 1위는 당시 식산은행 야구선수였던 스물 여섯살 이영민이 차지했다. 투표자 전원의 추천을 받아 사실상 만장일치였다. 두달 전 열린 풀코스 마라톤대회에서 비공인 세계신기록을 세운 양정고보 김은배가 13표로 2위였다.

▲홈런왕 베이브 루스와 포즈를 취한 이영민. 그는 1934년11월 미국 메이저리그 올스타팀이 일본을 방문해 경기를 가졌을 때, 조선인으로선 유일하게 일본 대표팀에 선발된 야구천재였다. 조선일보 1937년 3월6일자 기사
◇1928년 경성운동장 첫 홈런타자
이영민(李榮敏·1905~1954)은 조선의 홈런타자였다. 1928년 6월8일 경성운동장에서 열린 야구대회에서 장외홈런을 쳤다. 연희전문 소속으로 경성의전(醫專)과 가진 야구시합에서 1회말 2사후 3번타자로 나가 112m짜리 홈런을 날렸다. 경성운동장이 생긴 이래 첫 홈런이었다. 이영민이 기선을 제압한 연희전문은 3대2로 경성의전을 이겼다.
놀라운 사실은 보름 뒤인 6월23일 같은 곳에서 열린 제3회 전(全)조선육상경기대회에서 이영민은 400m에서 조선신기록(54초6)을 세웠고, 200m(23초6)에서도 1위로 2관왕을 차지했다. 이영민은 2년 전 같은 대회 400m에서도 우승한 육상 스타였다.
그뿐 아니다. 이영민은 그해 1월 정예 선수로 꾸린 조선축구단 상하이 원정에도 참가했다. 이영민이 주전으로 뛴 조선축구단은 상하이주둔 영국 육군팀, 상하이 중국팀 등과 6번 싸워 4승2패를 기록했다. 상하이는 잔디구장을 갖춘 축구팀이 30여개나 되는 당시 아시아의 축구 도시였다. 이영민은 ‘축구을 이해하는 중국-상해원정인상기’를 12회에 걸쳐 조선일보에 연재했다.

▲미국 아메리칸 리그 올스타팀은 1934년 11월 일본을 찾아와 여러 도시를 돌며 친선 경기를 가졌다. 미일대항전을 알리는 포스터 인물로 베이브 루스가 등장했다./위키피디아
◇연희전문 축구, 농구, 육상대표
1905년 대구에서 태어난 이영민은 계성학교에서 축구와 야구를 시작했다. 농구와 육상에도 뛰어난 재질을 보인 이영민은 1923년 배재고보로 스카우트됐다. 그해 6월 경인역전경주대회와 1924년 전조선축구대회에서 배재의 우승 주역이었다.
1925년 연희전문에 들어가서도 기량은 독보적이었다. 연희전문 야구부의 경쟁자는 일본인 학생이 대다수인 경성의전 야구팀이었다. 경성의전은 도쿄, 오사카로 여러 번 원정 경기를 다닌 강팀이었다. 하지만 이영민이 이끈 연전 야구부는 4년 연속 경성의전을 무너뜨렸다. ‘홈런왕’ 이영민의 이름을 본격적으로 알린 것도 이때였다. 이영민은 1925년 보성전문과의 정기전에 농구선수로 출전해 승리를 이끌었는가 하면 축구, 육상 대표로도 선수 생활을 이어갔다.
연전(延專)을 졸업한 1929년 봄부터 식산(殖産)은행 야구부에 들어갔다. 서른 명 중 유일한 조선인 선수였다. ‘식산 야구부는 대부분이 일본 내지인이오, 조선 사람으로는 다못 나 하나뿐이었지오. 그리고 그 선수의 대부분이 일본 내지에서 쟁쟁한 명성을 날리는 6대학(6개 명문대)선수들이었습니다.’ 이영민은 월간지 조광(朝光) 1937년5월호에 실은 ‘야구생활 十五年記’에서 ‘여러가지를 참고 또 참고 노력에 노력을 하였습니다’라고 회고했다.
◇야구왕 베이비 루스와 대결
투수 겸 타자로 활약한 이영민의 실력은 발군이었다. 1930년 7월 내한한 일본 대학 1위팀인 게이오대와 경성운동장에서 가진 경기에서 팀은 11:3으로 졌지만, 이영민은 홈런을 쳤다. 일본 신문에까지 ‘천재야구인’으로 소문날 정도였다. 이영민은 1934년11월 미국 아메리칸 리그 올스타팀이 일본에 건너와 일본 선발팀과 경기를 가질 때, 조선인으로 유일하게 일본 대표선수로 선발될 정도로 실력을 인정받았다.(조선일보 1934년10월6일 ‘對美야구전에 이영민군 출장’) 베이브 루스가 포함된 메이저리그 올스타 팀은 도쿄 고베 등 12개 도시를 돌면서 18전 전승의 기록을 세웠다. 미국 올스타팀으로 참가한 지미 폭스가 8mm카메라로 남긴 당시 일본 투어 필름이 미국 야구의전당에 남아있다. 영민은 서른 둘이던 1937년 3월 은퇴를 선언했다. 조선일보는 ‘조선의 ‘루ㅡ쓰’로 홈런 40여개’란 제목으로 그의 야구 인생 15년을 소개했다.

▲주요한이 발행한 월간 동광은 1932년초 조선의 10대운동스타를 뽑는 인기투표를 시행하려다 스포츠 관계자 및 해당 선수들의 반발로 중단했다. 사진은 동광 1932년 4월호에 실린 중단 안내문.
◇경성축구단 창설주역
이영민은 식산 야구선수를 겸하면서 1933년 5월 경성축구단 창단 멤버로도 참여했다. 창단 한달전 평양축구단 초청으로 열린 京平전에도 나섰다. 이영민이 주전으로 뛴 경성축구단은 1935년 11월 일본 도쿄에서 열린 베를린올림픽 대표선발전을 겸한 전일본축구대회에서 우승했다. 하지만 이듬해 열린 베를린올림픽에서 출전한 조선인 축구선수는 김용식 한사람뿐이었다. 이영민의 ‘투 잡’은 은퇴까지 이어졌다.
◇무산된 운동스타 인기투표
서두의 스포츠스타 인기투표는 무산됐다. 동광은 1932년 2월말까지 투표를 받아 4월호에 발표할 계획이었다. 하지만 4월호엔 발행처 동광사 명의 안내문이 실렸다. ‘조선스포츠만 투표발표중지에 대하여’. ‘일반 독자 제위의 열렬한 지지로 무려 2만여표의 성황을 이루었습니다’만 ‘스포츠계의 諸선배로부터 이 투표가 생장도중에 있는 조선의 운동계에 利를 줌보다 폐해를 남김이 더하리라는 懇告한 충고가 있고’라고 해명했다. 보다 더 중요한 이유는 뒤에 나왔다. ‘이에 대한 평론이 신문지상으로 발표되어 온 것은 제위가 이미 知悉하셨을줄 압니다.’ 스포츠 전문가는 물론 투표에 이름이 오른 해당 선수들까지 반발(조선일보 1932년3월3일 ‘스포츠맨 인기투표로 운동선수가 회합’)하면서 여론이 나빠지자 인기투표를 중단한 것이다.
◇허망한 죽음과 이영민 타격상
이영민은 해방 후 대한야구협회를 앞장서 만들었고, 1948년 런던올림픽에도 임원으로 참여했다. 하지만 1954년 8월12일 불의의 강도사고로 마흔 아홉 나이에 세상을 떴다. 허망한 죽음이었다.
대한야구협회는 1958년 고교 선수중 가장 높은 타율을 기록한 타자에게 주는 ‘이영민 타격상’을 제정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백인천 이광환 김일권 이만수와 이번 도쿄 올림픽 야구 대표팀 주장으로 활약한 김현수도 역대 수상자다. 지금은 야구에서만 그를 기억하지만, 이영민은 1930년대 조선이 낳은 걸출한 만능 스포츠 스타였다.
참고자료
대한체육회 편, ‘대한체육100년’(e북), 2020
김을한, ‘운동의 천재로 불세출의 대선수’, “그리운 사람들”, 삼중당, 1961
이영민, ‘은퇴하는 명투수ㅡ야구생활 15년기, 朝光 1937년5월호.
‘조선이 낳은 10대 운동가’, 東光 1932년1월호
08.14 ‘억센 조선을 세우자, 부인도 한강에 오시라’
1933년 한강 인도교 수영장 특설
피서와 함께 수영, 체조 강습 등 체력 단련
서울 토박이인 소설가 안회남은 서른일곱살에 이런 글을 썼다. ‘요새도 나는 매일같이 한강에 나간다.심하면 비오는 날에도 나간다. 그곳은 나를 길러주었고 나는 그속에서 싱싱하게 자라난 까닭이다.’(‘나를 길러준 한강水’, 女性 1936년9월호)
◇소설가 안회남의 ‘한강 예찬’
안회남에게 ‘수영을 하기에도 물은 부족하지 않고, 일광(日光)도 어디와 마찬가지로 뜨겁고 신체에 유익’한 곳이 한강이었다. 그는 별나게도 ‘한강 물 먹기를 썩 좋아한다’고 썼다 ‘이상한 버릇이라면 꽤 기특하고 묘한 놈의 한가지이다. 백사장에 누웠다가 목이 컬컬하고 그야말로 물이 고프면 나는 한강 중턱에까지 나가서 입을 벌리고는 꼭 세번 다물어 꿀꺽꿀꺽 삼키는 것이다. 그리고는 헤엄을 쳐서 다시 온다. 그 습관이 커져서 그런지 나는 더우면 한강이 생각나고 한강물이 먹고싶고 한 것이다.’

▲조선일보는 1933년 여름 한강 인도교 아래 수영장을 특설하고 수영과 체조 강습을 펼쳤다. 1933년 7월24일자에는 전날 개장한 수영장 백사장에 사람들이 성황을 이룬 사진이 실렸다
◇일본인 자제들이 단련한 서빙고 수영장
한강은 사람들이 즐겨 찾는 여름 피서지였다. 선비들이 옷 벗고 멱감았다는 기록은 찾기 어렵지만, 체면치레 할 필요없는 평민이나 아이들은 더위를 피해 물에 뛰어들었다. 한강에 수영 구획을 정하고, 탈의장과 세면소, 다이빙대 등을 갖춘 근대적 수영장이 들어선 것은 1910년대부터다.
서빙고 앞 한강변에 경성에 거주하는 일본인 자녀들을 위한 수영장이 설치됐다. 1916년 8월1일부터 20일간 개장한 한강철교 상류의 서빙고 수영장에선 경성부내 각 소학교 5년 이상의 생도 600명 이상이 수영 연습을 했다. 서빙고 수영장은 1920년대 초중반까지 경성부민의 유일한 한강수영장이었다.

▲코로나 이전 인파가 몰린 한강 뚝섬 수영장. 올해는 개장조차 못했다.
◇경성부 한강인도교 수영장
1925년부터 한강 인도교와 한강철교 사이에 수영장을 설치하는 시도가 이어졌다. 기차가 달리고, 야간엔 전등이 반짝이는 다리는 당시 대단한 볼거리였다. 경성부가 용산경찰서와 협력해 수영장을 개설한 것은 1929년 여름이다. 그해 7월24일 폭 109m, 길이 45m의 수영장이 개장했다. 위험방지 경계선을 비롯, 탈의장과 세면소, 다이빙대가 설치됐다. 1933년부터는 인도교 상류 600m 지점, 즉 현재의 이촌한강공원에 길이 150 m, 폭 50 m의 수영장을 만들었고, 이듬해부터 매년 여름 인도교 상류 500 m지점부터 약 3000평 땅에 부영 수영장을 개설했다.

▲억센 조선의 건설을 제창한 조선일보 1932년 1월1일자
◇혁신 조선일보, 1933년 한강 특설 수영장 개설
‘억센 조선의 건설을 표어로 하는 본사에서는 경성시내의 독자들을 위하야 금하 한강강변에 수영장과 일광욕장을 특설하고 누구나 자유로 입장하야 마음껏 심신을 단련할 기회를 만들고자 합니다.’
조선일보는 1933년 6월27일 조간 1면에 ‘한강수영·일광욕대회’사고(社告)를 냈다. 한강 인도교 수영장에 특설구역을 만들고 수영장과 일광욕장을 설치한다는 내용이었다. 탈의장과 세면대, 화장실 같은 기초시설은 물론 라디오와 축음기, 독서장에 목마, 그네까지 갖춰 남녀노소가 즐기는 장소였다. 수영장 개장전 경성공회당에서 수영과 일광욕의 유용성에 대한 강연회를 열었다. 한강 수영장 특설은 방응모 사장이 1933년 조선일보를 인수한 뒤 펼친 독자 서비스였다. ‘한강수영장’은 태풍 탓에 예정보다 며칠 늦은 7월23일 개장했다. ‘이날의 성황을 질투하는 음침한 하늘위에 흩어졌다가도 뭉치는 검은 구름장과 고요한 강면에 거친 물결을 일으키는 축축한 바람도 가리지 않고’(7월24일 ‘한강반에 개장된 일광욕수영장, 작일 성대히 개장’) 인파가 몰려들었다.
◇'부인들이 건강치 못하면 불행의 원인’
한 주 뒤엔 가정면에 ‘억센 조선을 세우자-부인도 한강에 오시라’(7월29일)는 기사가 나갔다. ‘조선 가정에서는 여름이 되면 흔히 남자들만 강변이나 해변으로 피서를 하지만 부인들은 대개 골방에서 종일 땀을 흘리며 지나야 합니다. 한 가정에서 남자들만 튼튼하고 부인들이 건강치못하면 불행의 원인이 됩니다.’ 이어 ‘깨끗한 공기와 바람, 햇빛을 쏘이면 몸이 건강해진다’며 여성들의 동참을 호소했다. 여성용 탈의실과 휴게실을 따로 만들고, 수영에 익숙치않은 여성들을 위해 일일히 구명대를 나눠줬다. 조선체육회 산하 조선수영장려회 주최로 수영강습도 열어 근대 스포츠로서의 수영을 전파했다.

▲한강 인도교와 수영장 풍경을 담은 기념우편 날짜 도장. 단기 4293년은 1960년으로 당시엔 한강 인도교 수영장이 남아있었다.
◇'조선은 약하다. 줄잡아서 억세지 못하다’
조선일보는 1932년1월1일자 신년호에 ‘억센 조선의 건설’을 내걸었다. ‘억센 조선의 건설은 우리의 큰 구호의 하나가 되어야한다. 조선은 약하다. 줄잡아서 억세지 못하다. 못먹고 못입고 못살아서 약하니 가난하여 약한 것이오, 못배워서 약하니 지식으로 약한 것이오, 뛰고닷고 밀고 나가고 잡아나꾸기에 약하니 체육에 약하고 단련이 약한 것이다.’ 신문은 ‘억센 조선’을 위해 보건의료와 민중체육을 강화할 것을 제시했다.
조선일보는 1933년7월 학생들을 중심으로 ‘하기 민중체조반’을 만들어 천도교기념관과 청년회관에서 강습회를 열었다. 학생 183명이 지방에 내려가 ‘일반 민중에게 정신적 단련과 단체훈련을 겸한 체육 건강의 기술을 지도’했다. 장흥 수문포 해수욕장, 상주 농잠학교 운동장을 비롯 서흥, 함흥, 청진, 신천에서도 체조 강습이 열렸다. 이듬해 여름 한강수영장 개설은 ‘억센 조선’을 만들기 위한 운동중 하나였다.
◇코로나 19로 문닫은 한강수영장
뚝섬에도 1934년 7월 수영장이 개설됐다. 한강 수영장은 광복 이후에도 살아남았지만 산업화와 도시화로 수질오염이 가속화되면서 1969년 폐쇄됐다. 수질 오염에 더해 지금의 노들섬(중지도)개발 공사가 시작됐기 때문이다. 1970년대에도 비교적 물이 깨끗한 뚝섬이나 광나루에서 간간히 수영이 허용됐으나 수영객은 자취를 감췄다.
1980년대 한강 개발이 시작되면서 공원이 조성되고 수영장이 하나둘씩 들어서면서 1000만 서울 시민의 알뜰 피서지로 인기를 누렸다. 그 한강 수영장이 올 여름엔 개장조차 못했다. 코로나 19가 기승을 부린 탓이다. 뚝섬(수용인원 3500명), 여의도(3600명), 광나루(1200명), 망원(3300명), 잠실(3400명), 잠원(3000명) 등 수영장 6곳과 난지(1100명), 양화(600명) 등 물놀이장 2곳까지 합하면 한번에 2만명이 피서를 즐기던 명소가 사라져버렸다. 코로나 19가 100년 전부터 이어진 한강 수영장의 즐거움까지 앗아가버린 것이다.
참고자료
김윤정, ‘일제강점기 경성부민의 여름나기-한강과 수영장을 중심으로’, <<일제강점기 경성부민의 여가생활>>, 서울책방, 2018
안회남, ‘나를 길러준 한강수’, 女性 1936년9월호
08.21 ‘양키 무릎꿇린 동방의 영웅’, 6000 관중 환호
이광수도 주목한 ‘복싱의 神’ 서정권
日 제패 이어 미국 원정까지
▲1935년 10월 21일 밤 경성운동장 특설링에서 3년여 미국 원정경기를 마치고 귀국한 서정권(왼쪽)과 스페인계 선수 라슈 조의 시합이 열렸다. 6000여명의 관중이 몰려 환호했다. 이 시합을 예고한 조선일보 10월14일자에 실린 사진
‘요사이 권투가 조선에도 수입되어 부녀들도 링사이드에서 손뼉을 친다. 통쾌한 운동이나 생명을 촌탁(忖度)할 수도 없는 위험한 시합이다. 다만 이 권투에 있어서는 ‘넉아웃’을 당하야도 재기하려는 그 정신이 좋음으로 기개가 커진다.’(조선일보 1933년11월19일 ‘필마를 타고ㅡ스포츠의 보편화’, 파란 부분을 누르면 옛날 기사를 볼 수있습니다.)
권투는 1930년대 조선에서 축구와 함께 최고 인기를 누린 스포츠였다. 만문(漫文)작가 안석영이 여성까지 권투장에서 박수치며 응원하는 모습을 스케치할 정도였다. LA올림픽(1932·황을수·라이트급)과 베를린 올림픽(1936·이규환·웰터급)에 조선인 권투선수가 일본 국가 대표로 출전할 만큼 실력 뛰어난 선수가 많았다. 몸과 몸이 부딪쳐 주먹으로 때려눕히는 권투는 짓눌린 대중의 투지를 끓어오르게 하고, 카타르시스를 안겨줬다.
◇日 챔피언 1회 KO로 쓰러뜨려
서정권(1912~1984)은 당시 스타복서였다. 열여덟살이던 1930년 전(全)일본아마추어선수권대회를 석권한 서정권은 이듬해 프로로 전향했다. 일본 플라이급챔피언 가시와 우라코로를 1회전 KO로 쓰러뜨리면서 각광을 받았다. 일본에서 연전연승을 거두며 적수가 없어지자 1932년 여름 미국에 건너갔다. 서해안 일대를 중심으로 3년간 총 54회 대전을 치르면서 승리를 거듭했다. 뉴욕·워싱턴과 캐나다 몬트리올까지 진출했고, 세계 플라이급 6위까지 오르면서 화제를 모았다. 1938년 미국 예술계의 주목을 받은 무용가 최승희를 소개하면서 ‘우리 조선사람으로 미국에 건너가서 이러한 인기를 획득한 것은 권투의 서정권과 무용의 최승희로서 쌍벽이라고 아니할 수없다’(조선일보 1938년2월26일 ‘태평양 건너서의 미쓰 최승희’)라고 쓸 정도였다. 서정권은 미국에서 ‘코리안 조’라는 닉네임으로 활약했다. 만화가 이현세가 2014년 발표한 웹툰 ‘코리안 조’의 모델이 바로 서정권이다.
◇이광수도 주목한 서정권
서정권의 활약이 얼마나 대단했던지, 춘원 이광수도 그를 주목했다. ‘야구, 정구, 축구, 농구, 권투 등 스포츠의 왕성은 근래의 快事’(조선일보 1933년 12월6일 일사일언 ‘스포츠열’)라며, LA올림픽 마라톤 6위의 김은배와 미국에 진출한 서정권을 대표적으로 꼽았다. 이광수는 조선초까지만 해도 전국민이 무예를 숭상했는데, ‘근대에 들어 조선인의 체력과 담력은 말못되게 줄어들어 해수욕장에서 보면 조선인의 체격이 얼마나 열등한 것을 알 것’이라고 썼다. ‘다시 건장하던 옛날 大人에 회복하는 것은 체육밖에 없다’는 결론이었다.
▲조선일보 1933년11월19일 ‘필마를 타고ㅡ스포츠의 보편화’. 안석주는 여성들까지 링사이드에 자리잡고 박수칠 만큼, 권투가 인기를 얻고 있다고 소개했다.
◇6000명 몰린 경성운동장 특설링
1935년 가을 귀국한 서정권은 영웅 대접을 받았다. 올림픽 금메달리스트가 귀국하는 듯, 총독부에서 차를 내줘 카퍼레이드가 열렸을 정도다. 1935년 10월21일 밤 경성운동장(동대문운동장·현 DDP자리)특설링에는 관중 6000명이 들어찼다. 3년만에 돌아온 서정권의 귀국환영경기를 보려는 인파였다. 링밖은 경기 한참전부터 술렁였다. ‘종로 네거리에서 전차를 잡어타니 차중의 화제는 전부 서정권에 대한 이야기다. 이야기하는 이들은 산뜻하게 차린 청년신사들이 아니면 어느 고등학교인 듯한 학생패들이다. 전차는 탑동공원앞에서도 이러한 구경패를 한아름 싣고, 또 종묘앞에서도 한아름 싣고 쏜살같이 쏜살같이 훈련원의 운동장으로 닿는다. 운동장 앞은 수십의 자동차와 또 작고 계속하여 오는 전차가 수십명씩 수백명씩 사람을 쏟아놓고는 가버린다.’(‘삼천리’ 1936년1월호 ‘무적서정권대회광경’) 월간지 ‘삼천리’ 기자의 묘사다.
◇ ‘양키들이 무릎꿇는 동방의 영웅 탄생’
서정권 상대는 하와이 선수권 대회를 제패한 스페인계 라슈 조. ‘표범’이란 별명으로 알려진 세계 권투계의 강적이었다. 서정권은 라슈 조를 일방적으로 몰아붙였다. ‘제4회에 이르자 중도에서 서반아원객(遠客)은 두 번의 맹렬한 강타를 받더니, 이마가 터지며, 피가 흘러 투지를 버리고 한편에 쓰러지고 심판은 드디어 徐의 손을 들어 서정권 선수의 승리를 보(報)하야.’ 4회 TKO승이었다. 경기장은 함성으로 잔뜩 달아올랐다.
‘삼천리’는 ‘이 5척 어린 청년 앞에 전 세계의 코끼리 같은 양키ㅡ들이 길을 피하고, 그의 앞에 무릎을 꿇음에 우리들은 그와 피와 산천을 같이 하였음을 영광이라 하지 않을 수없다’며 감격했다. ‘아, 동방에도 우리 반도에는 세계적으로 우러러보는 새로운 영웅 한 분이 나타났다. 우리는 그의 장래를 빌며 그가 현재의 제6위로부터 제1위에 오를 날이 하루 급하기를 빌 따름이노라.’(‘무적서정권대회광경’)
◇1면 사설로 권투 보급 장려
권투는 20세기 초 들어왔다. 대한체육회가 쓴 ‘대한민국 체육 100년’는 1912년 10월7일 단성사 주인인 박승필이 ‘유각권(柔角拳: 유도 씨름 권투)구락부’를 조직하고 회원들간에 권투를 하게 한 것이 우리나라 복싱 최초라고 소개한다. 권투는 1924년 YMCA체육관에 처음으로 국제규격 링이 설치되면서 조금씩 알려졌다. 1929년 조선권투구락부가 발족하고 2년 뒤 전용체육관이 들어서면서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신문들은 권투를 각별히 주목했다. 조선일보는 1면 사설(社說)까지 써서 권투 보급을 장려했다. ‘문약 또 나약한 기풍을 벗지 못하는 조선의 청년계에 있어 탄력적이어 또 투쟁적인 체육사업이 차차로 생장되어 가는 것은 퍽은 기쁜 일이다스포츠의 진정신은 소수의 첨단적인 명가(名家)를 내고 마는 것보담 일반화, 민중화로써 민족적 건강 과감 및 승리적인 실질 및 그 기풍을 달성함으로써 그 극치를 삼는 것이니, 이러한 체육은 중요한 일과목으로써 권투술의 보급을 서슴없이 추천한다.’ ‘조선일보 1931년6월15일 사설 ‘권투구락부 낙성-청년에 권투추천’)
▲조선일보는 1932년 2월21일 소공동 경성공회당에서 열린 서정권 도미송별시합을 주최했다. 위 신문은 1932년 2월23일자 ‘권투대회에 관중쇄도’
이듬해 신년호에서 ‘억센 조선의 건설’을 내건 조선일보는 보건운동과 함께 ‘신흥 스포츠’ 권투를 집중적으로 후원했다. 1932년 2월21일 소공동 경성공회당에서 열린 서정권의 도미(渡美)송별권투대회를 주최한 것도 이런 이유에서였다. ‘억센 조선을 건설하랴면 무엇보다도 먼저 필요한 것은 건강한 청년남녀일 것이다.
따라서 건강한 청년을 많이 양성하려함에는 일반 민중의 보건운동을 장려할 것이 급선무이다’ ‘다른 운동 경기보다 절대의 투쟁의식과 인내력이 주체됨에 따라 더욱 나약하야가는 조선 청년에 보급시키려는 것이다. 자기의 피를 흘리면서 남의 피를 보게 되는 이 같은 용감한 운동을 볼 때에 어느 누가 가슴의 피가 뛰지 않으며 쾌재를 부르지 아니할 것인가.’ (1932년 2월23일 ‘권투대회에 관중쇄도’)
권투는 이렇듯 약한 민족의 염원을 담은 스포츠로 자리잡았다. 해방 이후 서정권은 한국 권투연맹이사장을 지내면서 후진양성에 힘썼다.
◇참고자료
대한체육회, 대한체육 100년 e북, 2020
천정환, 끝나지 않는 신드롬, 푸른역사, 2005
‘삼천리’ 1936년1월호, ‘무적서정권대회광경’
08.28 ‘방황하던 청춘’ 김환기, 영화 감독과 댄스홀 사장을 꿈꾸다
巨匠의 막막했던 20대 시절
‘정자옥(丁子屋) 지하실에다 비야홀을 해보고, 본정서(本町署) 관할에는 40평쯤의 땐스홀을 만들어본다면 돈벌이도 될 모양이니 재미있을 것같고.’
하마터면 한국 최고 화가가 맥줏집이나 댄스홀 사장으로 남을 뻔했다. 스물 일곱 김환기의 청춘(靑春)도 막막하긴 마찬가지였다. 여관방에 드러누워 이런저런 공상으로 소일했다.
‘하두 섬생활이 지리하고 울적해서 서울이나 올라가면 소풍도 되겠고 또 그러나 저러나 공교롭게 무슨 방도라도 얻어 붙든다면 그대로 서울에 주저앉아 살아보리라는 쓰도 달도 않은 생각으로 서울에 올라왔다.’ 김환기가 1940년 ‘문장’ 4월호에 쓴 수필 ‘군담’에 나오는 대목이다. 공상끝에 이런 대목도 있다. ‘좋은 조수를 하나 다리고 내 자유껏 짤막한 영화를 꼬옥 한편만 만들어 보았으면’. 화가 대신 봉준호나 박찬욱 같은 영화감독 김환기로 기억됐을지도 모를 일이다.
▲1957년 파리에 머물던 김환기와 아내 김향안. 김환기는 190센티미터의 장신이었다. /환기재단,환기미술관
◇스물두살 데뷔작부터 신문에 실려
▲1935년 일본 이과회 전시에 입선한 김환기의 데뷔작 '종달새 노래할 때'. 데뷔작부터 신문에 실릴 만큼 주목받았다. 조선일보 1935년 10월20일자
김환기는 1937년 일본 유학을 마치고 귀국했다. 도쿄나 경성에서 열린 전시회에 더러 작품을 출품해 신문에도 자주 소개될 만큼 주목을 받았다. 스물두살 무렵 일본 이과회(二科會) 전시회에서 입선한 데뷔작 ‘종달새 노래할 때’부터 조선일보(1935년10월20일자)에 실렸다. 시골 처녀가 바구니를 이고 가는 장면을 그린 100호짜리 대작으로 지금은 소재를 알 수없는 작품이다. 이듬해 이과전에 입선한 작품 ‘25호실의 기념’도 조선일보(1935년9월25일자)에 실렸다.
김환기는 스물 다섯 무렵까지 그린 작품만 500여점이 될 만큼 이런 저런 실험을 하며 화가로서의 길을 모색했다. 귀국 후 고향인 신안 기좌도에 들어가 작품활동에 전념했던 모양이다. (조선일보 1938년 6월1일, ‘漂渺의 孤島에서 畵想에 沉潤而已’ 파란 부분을 클릭하면 옛날 기사 원문과 현대문을 볼 수있습니다.)
◇주목받는 작가였지만 백수
▲김환기가 그린 20대의 자화상. 조선일보 1938년 6월1일자에 실렸다
주목받는 젊은 작가였지만 앞길 막막한 백수나 다름없었다. 예술가의 삶은 불확실한데다 당시는 중일전쟁으로 치닫기 시작하던 때였다. 작품을 출품한댔자 그림이 팔릴 리도 없었다. 더구나 김환기는 사실주의와 거리가 먼 추상화(非구상화)를 택했으니 더 그랬다.
고향 섬 생활이 지겨울 무렵 서울로 올라왔다. 글솜씨 뛰어난 그는 신문, 잡지에 기고하고 좌담에도 불려나가는 이름있는 신진작가였다. 김인혜 국립현대미술관 근대미술팀장은 ‘김환기가 다닌 니혼(日本)대학 예술학부는 학제가 참신했다’고 소개한다. 문학과 철학, 미술사와 함께 미술 실기를 가르치는 융합교육을 펼친 것이다. 훗날 조선일보 사회부장을 지낸 시인 김기림과 임화, 화가 구본웅과 박고석 등이 니혼대학 예술학부 출신이다. 문청(文靑) 김환기는 조선 문화계의 떠오르는 스타였다.
◇까칠한 평론속 ”이중섭은 우리 화단의 일등 빛나는 존재”
김환기는 조선일보에서 발간하던 월간지 ‘조광’과 ‘여성’, 이태준이 편집주간으로 있던 문예지 ‘문장’에 자주 기고했다. 대중이 어려워하는 추상미술을 당당히 변론하는 글도 신문에 썼다.
‘현대의 전위회화의 그 주류는 추상예술’이라면서 ‘현대에 있어 적어도 추상회화의 출현이란 현대문화사에 한 ‘에포크’가 아니될 수없다. 현하 조선화단에 전위적 회화의 분위기가 있는지 없는지 나는 모르되, 적어도 현대예술에 있어서 사상,시대성,의식, 감각, 즉 말하자면 적어도 현대생활의 표현양식 또는 방법이 가장 추상회화에 다분한 특질이 없지 않을까’(조선일보 1939년6월11일 ‘추상주의소론’)
글 잘 쓰는 김환기는 미술 평론도 더러 썼다. 1940년 12월 ‘문장’에 쓴 ‘구하던 1년’도 그 중 하나다. 당대 작가들의 등용문이었던 ‘선전’(鮮展)을 호되게 비판한다. ‘금년의 선전은 정직하게 말하여 그 기술은 나아졌다고 보겠으나 우리들의 감성을 뒤흔들 수는 없었다. 그것은 작가가 作畫하기 이전 ‘구하는 마음’이 없기 때문이다’ 칭찬에 인색했던 이 글에서 그가 극찬한 신예가 있었다. ‘작품 거의 전부가 소를 取題했는데 침착한 색채의 階調, 정확한 대포름, 솔직한 이매ㅡ주 소박한 환희, 좋은 소양을 가진 작가이다.’ 부민관에서 열린 미술창작가협회 경성전에 출품한 스물 넷 이중섭이었다.
◇巨人국의 신사
1940년 전후 김환기의 경성 생활을 증언하는 자료가 있다. 김환기가 죽첨정(竹添町·충정로)에 있던 도요타 아파트(현 충정아파트)에 살았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일본미술협회가 1940년 5월 도쿄 우에노공원에서 ‘자유미술전’를 개최하면서 발간한 목록이다. 전시에 출품한 김환기는 주소를 ‘경성부 죽첨정 도요타 아파트’로 올렸다. 1937년 8월 준공한 도요타(豊田) 아파트는 4층 규모 철근 콘크리트 구조로 당시로선 첨단 건물이었다. 아파트는 단기 체류자도 받는 숙박시설이었다. 이 아파트는 84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주거시설로 사용하고 있다.
또 하나는 190센티미터 가까운 장신의 김환기를 ‘거인국 신사’로 묘사한 글이다. ‘요즈음 종로 네거리를 걸으면 가끔 거인국에서 여행온 듯한 육척 전후의 대단한 두 신사를 만난다. 그중 한 사람은 이미 정평 있는 거구의 임자 길진섭씨여서 자칫하면 화단을 ‘스포츠’단체로 연상시키기 쉬워서 화단으로서는 위험인물이지만 다른 한사람인즉 남해에서 봄바람에 쫓겨 상경한 추상파의 김환기씨인데 길씨보다도 청공에 두각을 나타내기를 수촌을 더한 초거인이다.’ (조선일보 1940년 3월9일 ‘거인국’) 미술계가 문단이나 음악계에 비해 체격이 좋았던 모양이다.
◇조지야 백화점서 개인전
▲2019년 한국 미술품 경매사상 최고가인 132억원에 낙찰된 김환기 작 '우주'
▲김환기가 1950년대 그린 '여인들과 항아리'(281.5x567㎝). 그가 그린 그림 중 가장 크다. 고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과 유족이 기증한 '이건희 컬렉션'중 하나로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내년 3월까지 전시중이다.
김환기는 조지야 백화점 지하에 비어홀을 여는 대신, 1940년 말 이 백화점 갤러리에서 국내 첫 개인전을 열었다. 지금의 롯데백화점 영플라자 건물이다. 이 전시회에 어떤 작품을 냈는지는 알 수없다. 이후 김환기의 활동은 뚜렷하게 드러난 게 없다. 근원 김용준, 상허 이태준, 정지용과 교류하고 글 몇 편을 남긴 게 전부다. 천만 다행스럽게도 일본이 일으킨 전쟁을 거들지 않았다. 일제가 주목할 만한 위치에 있지 않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내게 있어 그림보다 더 재미난 일이 발견되는 때는 당장에 나는 그림 생활을 옴쑥 그대로 놓아두고 발견된 새로운 대상을 바꾸어 가지려한다’(문장 1939년 10월호)고 호기롭게 썼던 김환기는 결국 영화감독도, 댄스홀 주인도 되지 못했다. 20대의 김환기는 훗날 한국 미술품 경매사상 최고가인 132억원에 작품이 팔릴 만큼, 성공한 작가가 되리라고는 몰랐을 것이다. 서울대·홍익대 교수를 거쳐 1963년 미국으로 간 김환기는 예순 한살이던 1974년 뉴욕에서 창작에 몰두하다 ‘과로’로 숨졌다. 천생 예술가였다.
<참고자료>
오광수, ‘김환기’,열화당, 1990
박철수 등 지음, 경성의 아파트, 집, 2021
김환기, ‘자화상 기일’, 문장, 1939년 10월
김환기, ‘구하던 1년’, 문장, 1940년 12월
김환기, ‘군담’, 문장, 1940년 4월
환기미술관 홈페이지 등
09.04 모던 걸의 선망과 허영 ‘피아노와 문화주택 사주면, 일흔 살도 좋아’
‘피아노는 스위트홈의 필수품’

▲조선일보 1931년 6월24일자에 실린 안석영 만문만화 '락타가 바눌구멍으로'. 비좁은 대문을 헐고라도 피아노를 월부로 들여놓는 모던 부부의 허세를 꼬집었다.
‘요사이 전황바람에 몇곱씩 남겨먹던 ‘피아노’를 월세로 주는 데가 있다. 그래서 그러한지 바늘 구멍만한 대문으로 피아노를 몰아넣다가 ‘스피ㅡ드’내외가 대문을 헐고서 끌어들이는 피아노광(狂)이 있다. 천당도 헐고 들어가면 지구덩이째 들어갈 수있을 듯ㅡ’( 조선일보 1931년 6월24일 ‘락타가 바눌 구멍으로’, 파란 글씨를 클릭하면 옛날 기사를 볼 수있습니다.)
만문만화가 안석주(1901~1950)는 대문을 헐어서라도 피아노를 들여놓으려는 모던 부부의 허영심을 풍자했다. 당시 피아노 한 대는 평범한 샐러리맨 1년치 월급과 맞먹었다. 값이 워낙 비싸다보니 월부 판매도 유행한 모양이다.
안석주가 궁색한 살림에도 불구하고 월부까지 마다않고 사들인다고 꼬집은 피아노는 모던 보이, 모던 걸이 꿈꾸는 선망의 대상이었다. 비싼데다 고급스러운 피아노는 서구와 근대를 상징하는 도구였다.
◇칠 줄도 모르면서 피아노 들여놓고, ‘온 집안이 환한 듯’

▲스무살에 유학을 마치고 1920년 12월 조선일보 기자로 입사한 현진건. 훗날 사회부장까지 지낸 현진건은 1922년 '개벽'에 '피아노'를 발표했다. 모던 부부의 허영을 꼬집는 세쪽짜리 미니 소설이다.
도쿄와 상하이에서 공부한 ‘유학파’ 현진건은 스무살이던 1920년 12월 조선일보 기자로 입사했다. 소설가로 떠오르기 시작한 1922년 11월 월간지 ‘개벽’에 ‘피아노’란 단편소설을 실었다. 일본에서 대학을 나온 주인공이 중등학교를 나온 신여성과 신식결혼을 하고 살림을 차리는 내용이다. 둘은 피아노를 칠 줄 모르면서도 거금을 들여 피아노를 구입한다.
‘훌륭한 피아노 한 채가 그 집 마루에 여왕과 같이 臨御하였다. 지어미 지아비는 이 화려한 악기를 바라보며 기쁨이 철철 넘치는 눈웃음을 교환하였다.’ 아내가 ‘마루에 무슨 瑞氣가 비친 듯 하다’고 하자 남편은 ‘참 그래. 온 집안이 갑자기 환한 듯 한걸’하고 감탄한다. 한 해전 ‘빈처’ ‘술 권하는 사회’를 발표하며 이름을 얻은 현진건의 촌철살인이 담겨있다. 피아노는 모던 보이, 모던 걸이 꿈꾸는 ‘이상적 가정에 필수적인 물건’이었다.
◇결혼하면 떠오르는 것, 다이아몬드 반지, 양옥, 피아노...

▲1924년 조선일보 편집국장을 지낸 민태원. 교과서에 실린 수필 '청춘예찬'으로도 유명하다. 그는 1921년 폐허에 발표한 단편 '음악회'에서 다이아몬드 반지와 양옥, 피아노를 결혼의 필수품처럼 떠올리는 여주인공을 그렸다.
교과서에 실린 수필 ‘청춘예찬’으로 유명한 민태원(1894~1934)이 1921년 문예지 ‘폐허’에 발표한 단편 ‘음악회’도 이런 구절이 나온다. 여주인공 숙정은 동경 유학생과의 만남을 앞두고 행복한 결혼을 상상한다.
‘비단 옷, 시체(時體·신식) 양복, 금강석 반지, 자동차 탄 젊은 내외, 양옥집, 앞뒤로 둘린 정원, 집 안에서 흘러나오는 피아노 소리.’ 안석주 만문만화가 나오기 10년 전, 피아노는 이미 모던 걸의 ‘스위트홈’에 빠질 수 없는 물건이었다.
◇'피아노에 맞춰 흐르는 독창 아니면 유성기판 재즈쯤은 들려 나와야’
1929년 9월 대중잡지 ‘별건곤’은 경성의 이색지구를 소개하면서 ‘문화촌’의 일상을 이렇게 설명한다. ‘文化村이라면 소위 문화생활을 하는 사람들, 문화생활이라면 松板쪽을 붙여놓았더라도 집은 신식 양옥으로 지어 놓고 피아노에 맞춰 흐르는 독창 소리가 아니면 유성기판의 재즈밴드 소리쯤은 들려 나와야 하고 지붕 위에는 라디오 안테나가 가로걸쳐 있어야 할 것은 물론이어니와 하루에 한번씩은 값싼 것일망정 양요리 접시나 부서야 왈 문화생활이라고들 한다.’
신식 양옥과 피아노, 유성기, 라디오 안테나, 그리고 하루 한번 서양 음식을 먹어야 문화생활 좀 한다고 얘기할 수있다는 것이다.

▲조선일보 1930년1월12일자에 실린 안석주의 만문만화. 문화주택과 피아노만 사주면 일흔 노인과도 결혼하겠다는 모던 걸을 비판적으로 풍자했다.
◇처녀 꾀는 수단인 문화주택, 피아노
피아노가 주는 환상은 대단했다. 안석주의 만문만화 ‘여성선전시대가 오면’2(조선일보 1930년1월12일)는 다리를 광고판처럼 쓰는 모던 걸의 소망을 풍자한다. 문화주택에 ‘피아노 한채만 사주면’ 일흔 살 노인도 괜찮다는 내용이다. 당시 상품화된 연애·결혼 풍속도를 보여주는 이 만화에서도 결혼 필수품으로 피아노가 거론된다. 남성중심적 편견이 담기긴 했지만, 이쯤되면 피아노는 단순한 악기가 아니라 신식·근대·부를 의미하는 상징이었다.
피아노는 신문 사회면 기사에도 등장했다. 목포에 사는 열여덟살 처녀를 유인해 선금 200원을 받고 평양 카페에 팔아넘기려다 적발된 사건이었다. 범인은 “서울에 가서 공회당에서 결혼하고 문화주택에서 음악공부하며 살게 해주겠다”는 미끼를 던졌는데, 이 기사 제목이 ‘처녀를 꾀는 수단인/문화주택 피아노’(조선일보 1934년10월4일)였다.
일본 유학생조차 변변한 직업을 찾을 길 없는 100년 전 경성에서 피아노를 살 만한 능력있는 이들은 많지 않았다. 피아노가 집집마다 들어오게 된 것은 산업화의 과실을 본격적으로 누리게 된 1970년대부터였다. 모던 보이, 모던 걸의 선망의 대상에서 중산층의 값비싼 교육, 문화 수단을 거쳐 아파트 층간 소음을 유발하는 애물단지로 바뀐 피아노의 변천이 무상할 뿐이다.
◇참고자료
현진건, ‘피아노’, 개벽 1922년 11월호
민태원, ‘음악회’, 폐허2호,1921년
신명직, ‘모던 보이, 경성을 거닐다’, 현실문화연구, 2003
조윤영, ‘경성의 음악회(1920~1935)’, 이화여대 박사학위 논문, 2018
이경분, ‘일본 식민지 시기 서양음악의 수용과 그 정치적 의미’, 한국음악학학회, 2010
09.11 ‘오페라스타’ 김영길은 왜 北送船을 탔을까
1936년 도쿄 ‘나비부인’ 주역 데뷔한 조선 최고 테너
’신은 곧잘 이런 장난을 잘한다’(김수영 시인)

▲1936년 도쿄 긴자의 가부키좌에서 푸치니 오페라 '나비부인'을 공연한 김영길과 미우라 다마키. 미우라는 '나비부인' 초초상을 2000번 넘게 부른 세계적 소프라노였고, 김영길은 갓 데뷔한 스물 일곱 신인이었다.
‘모두 별안간 가만히 있었다/씹었던 불고기를 문 채로 가만히 있었다/아니 그것은 불고기가 아니라 돌이었을지도 모른다/신은 곧잘 이런 장난을 잘한다’(김수영 시 ‘永田絃次郞’)
김수영(1921~1968)은 1960년 12월9일 이 시를 썼다. 느닷없이 시작한 이 시의 2연에는 사연이 나온다. 일본에 가는 친구와의 모임에서 이토추 상사 신문 광고를 보다가, 거기에 실린 ‘곳쿄노 마치’(國境の町·국경의 거리)라는 노래 음반을 낸 나가타 겐지로(永田絃次郞) 얘기가 나왔다. 그해 초 김영길이 북송선을 탔다는 보도(조선일보 1960년 1월19일 ‘테너 김영길 북송을 자원’)가 나온 참이었다.
‘아니 김영길이가/이북으로 갔다는 김영길 이야기가/나왔다가 들어간 때이다//내가 나가토(長門)라는 여가수도 같이 갔느냐고/농으로 물어보려는데/누가 벌써 재빨리 말꼬리를 돌렸다……/신은 곧잘 이런 꾸지람을 잘한다’
나가타 겐지로는 일본에서 활약하던 테너 김영길(金永吉·1909~1985)이다. 일제시대 군국가요 음반을 많이 녹음한 성악가였다. 나가토는 김영길과 함께 킹레코드 전속가수로 ‘애마진군가’ ‘출정병사를 보내는 노래’를 듀엣으로 부른 소프라노 나가토 미호(長門美保, 1911~1994)였다. 둘이 함께 부르는 군국가요를 숱하게 들었던 김수영은 나가토가 따라가지 않았냐는 농을 한 것이다. 천황을 찬양하던 그가 북한의 인민 낙원 건설을 위해 북송선을 탔고, 이런 아이러니조차 맘대로 비꼴 수없는 불편한 시대상황을 김수영은 ‘신의 꾸지람’으로 풀이했다.

▲김수영은 1960년 12월 나가타 겐지로의 북송을 소재삼아 시를 썼다. 나가타 겐지로는 조선인 테너 김영길이 일본에서 활동할 때 썼던 예명이다
◇잊혀진 스타, 김영길
김영길은 일제 시대 조선인 최고 테너로 이름을 날렸지만, 우리 음악사에선 거의 잊혀진 존재다. 평안남도 강동군 출신인 그는 1928년 평양제2중학을 졸업한 뒤 일본 도야마(戶山)학교 군악대에 들어가 클라리넷을 전공해 이듬해 수석 졸업했다. ‘소학교시대부터 음악을 좋아했다’는 김영길은 ‘(중학교)졸업후에는 변성기도 지나고 해서 성악가가 되겠다고 생각했다’( ‘신인문학’ 1935년 12월)고 인터뷰에서 밝힌 것을 보면, 일본에 건너갈 때부터 성악에 뜻을 둔 것같다.
김영길은 1933년 일본 시사신보사 주최 제2회 음악콩쿠르에서 입선했고, 1934년과 1935년에도 2위로 입상했다. 1935년 일본청년회관에서 가진 첫 독창회는 호평을 받았다. 여세를 몰아 같은 해 10월3일 조선중앙일보 주최로 경성공회당에서 독창회를 열었다. 음악평론가로 활동한 홍종인(훗날 조선일보 주필·회장)은 김영길이 부르는 아리아 ‘남몰래 흐르는 눈물’(도니체티 ‘사랑의 묘약’중)을 듣고 ‘청투(淸透) 또 감미(甘美)한 성색(聲色)과 곡의 정확과 기교의 자연에 절로 머리가 숙여짐을 느꼈다’(조선일보 1935년 10월6일 ‘김영길군 독창을 듣고’)고 호평했다.
◇세계적 소프라노 미우라 다마키와의 만남
김영길이 이름을 알리게 된 계기는 1936년 일본이 낳은 세계적 소프라노 미우라 다마키(三浦環·1884~1946) 상대역으로 푸치니 오페라 ‘나비부인’에 출연하면서부터다. 미우라는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를 비롯해 런던, 밀라노, 로마, 피렌체, 나폴리 오페라극장에서 ‘나비부인’ 주역 초초상에 2000회나 출연한 오페라 스타다. 1935년 시칠리아 팔레르모 극장에서 2000번째 초초상을 부른 그는 그해 말 일본에 영구 귀국했다.
이듬해 6월 2001회째 출연한 ‘나비부인’ 전막을 이태리 원어로 공연했는데 이 공연에서 스물일곱 청년 김영길이 상대역 핀커튼을 맡은 것이다. 공연장은 도쿄 중심가 긴자의 가부키좌. 6월27일과 28일 저녁 7시30분 메인 공연을 미우라와 함께 김영길이 섰다. 이틀째 공연 1막은 시즈오카 라디오 방송(JOPK)을 통해 실시간 중계할 만큼 화제를 모았다.

▲1937년 5월 26일과 27일 경성 부민관에서 열린 오페라 '나비부인' 전면 광고. 김영길을 '천재적 테ㅡ너'로 소개했다. 매일신보 1937년 5월26일자 전면광고.
◇1937년 조선의 첫 전막 오페라 ‘나비부인’ 주역
미우라 다마키는 1937년 5월 26일과 27일 경성 부민관에서 올린 전막 오페라 ‘나비부인’에 출연했다. 역시 김영길이 상대역 핀커튼을 맡았다. 일본 공연과 같이 일본 중앙(中央)교향악단, 미우라 다마키 합창단 등 오케스트라와 합창단까지 일본에서 건너왔다. 조선 땅에서 열린 첫 전막 오페라 공연이었다.
총독부 기관지 경성일보가 후원한 이 공연 티켓 최고가 특등석은 5원, 일등석은 3원이었다. 특등석은 설렁탕이나 냉면(각 20전) 25인분 값이었다. 당시 신문 광고엔 미우라 다마키와 김영길을 각각 ‘세계적 명가수’, ‘천재적 테너’로 소개했다.
◇조선 창작 가곡 적극 불러

▲김영길 독창회 소식을 알린 조선일보 1939년 2월19일자 기사
김영길은 1939년 3월3일 경성공회당에서 음악사가 주최하고 조선일보가 후원한 리사이틀에 출연했다. 공연은 대성황이었다.(조선일보 1939년3월4일 ‘풍성한 음률의 파도, 청중은 무아경에’) 미리 공개된 이날 프로그램은 독특했다. 마스네의 ‘베르테르’, 푸치니 ‘라 보엠’의 오페라 아리아로 시작한 이날 프로그램엔 작곡가 박태준의 창작가곡 ‘가는 사람’ ‘부끄러움’이 포함돼 있었다.
박태준(1900~1986)은 ‘뜸북뜸북 뜸북새 논에서 울고…’로 시작하는 동요 ‘오빠생각’과 가곡 ‘동무생각’ ‘냉면’으로 유명한 작곡가였다. 이흥렬의 ‘마을색시’ 박태준의 ‘고향하늘’(동요)은 앙코르곡으로 불렀다. 작곡가가 성악가의 친족이거나 특별한 관계가 아니면 우리 가곡을 부르는 일이 매우 드물던 시절이었다. ‘조선의 악인에게서 우리의 노래와 멜로디를 듣기는 하늘의 별따기보다도 힘든 일이다.’(‘박문’1939년6월호) 이 때문에 조선의 창작가곡을 레퍼터리에 대거 포함시킨 김영길의 시도를 높이 평가하기도 했다.
◇군국주의 가요 음반 취입
김영길은 1935년부터 1945년까지 일본 킹레코드 전속가수로 활동했다. 1935년부터 ‘일본 행진곡’ ‘소년 전차병의 노래’ ‘우리는 병사로 부르심을 받았다’ ‘천황의 백성인 우리들’을 불렀고 1945년엔 ‘카미카제노래’ 등을 불렀다. 1941년 내선 일체와 지원병 장려 등을 위해 만든 국책 영화 ‘그대와 나’ 주연을 맡기도 했다. 유튜브에선 지금도 그가 부르는 ‘출정 병사를 보내는 노래’ ‘애마행진곡’ 등을 들을 수있다. 복잡한 삶이었다.

▲김영길의 생애를 다룬 책 '북조선에서 스러진 歌聲'. 2011년 新潮社에서 나왔다.
◇'신은 이런 장난을 잘한다’
김영길은 1945년 이후 후지와라 오페라단을 중심으로 ‘라 트라비아타’ ‘리골레토’ ‘토스카’ ‘라보엠’ ‘카르멘’ ‘아이다’ ‘파우스트’ 등 주역으로 무대에 활발히 섰다. 그가 왜 북송선을 탔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이북 출신이라 고향에 돌아간 것으로 보기도 어렵다. 1959년12월부터 1984년까지 북송선을 탄 재일교포(재일조선인)는 9만3340명. ‘북한행 엑서더스’를 쓴 테사 모리스-스즈키 호주국립대 교수에 따르면, 이들은 거의 전원이 남한 출신이었다. 재일교포의 97%가 남한 출신이었으니, 그럴 만하다. 모리스-스즈키 교수는 ‘일본에서 민족적 마이너리티로서 차별 대상이 되었던 귀국자들은 북한에서도 곧바로 ‘사회적 마이너리티’로 식별되어 버렸다’고 썼다.
가족과 함께 북송선을 탄 1960년 3월 공훈배우 칭호를 받고. 국립예술극장 국립교향악단 국립가극극장 독창 가수로 활약했다. 그러다 1994년 김영길이 강제 노동 수용소로 갔다는 보도가 나왔다.(조선일보 1994년 8월5일 ‘북 정치범 15명 신상확인’) 북송 교포들을 추적해온 전직 조총련 간부가 북한 ‘승호마을’수용소에 수감된 정치범 가운데 김영길의 신상자료를 확인했다는 내용이었다.
KBS가 1995년 내보낸 다큐멘터리 ‘통한의 증언ㅡ북송선’은 김영길이 북송 몇 년 후 행방불명됐고 가족들도 수용소를 거친 후 소식이 끊겼다고 소개했다. 북송선을 탔을 때만큼이나 느닷없는 소식이었다. ‘신은 곧잘 이런 장난을 잘한다’던 김수영은 그의 운명을 내다본 것일까.
09.18 열아홉살 조선 처녀는 왜 시베리아를 방랑했을까
자작나무, 雪原 동경한 백신애
시베리아 체험 담은 대표작 ‘꺼래이’ 남겨

▲요즘 패션지 표지모델이라고 해도 믿을 만큼 세련된 스타일의 소설가 백신애. 90년 전 동경 유학시절 찍었다. 백신애는 1930년 5월 일본에 건너가 니혼대학 예술과에서 문학과 연극을 공부했다. 딸의 유학을 반대한 아버지가 경제적 지원을 끊으면서 여급, 가정부, 세탁부일까지 했던 짧은 유학생활이었다. /영천시 공식블로그
‘언젠가 꼭 레나 강에 조각배를 띄우고 강변에는 자작나무로 된 통나무집을 짓고 눈이 하얖게 덮인 설원을 걸으며 아름다운 오로라를 바라볼거야! 그리고 초라한 방랑시인이 되어 우랄 산을 넘을 땐 새빨간 보석 루비를 찾아 볼가의 뱃노래를 멀리서 들을거야.’
세계지도를 쳐다보며 시베리아 방랑을 꿈꾸던 소녀는 열아홉살되던 가을 밤, 작은 손가방 하나를 들고 고향 집을 빠져나왔다. 어머니에겐 병든 친구의 임종을 지키러 가는 길이라고 난생 처음 거짓말까지 했다. 원산에서 웅기까지 배를 타고 가는 동안 단발머리를 틀어올려 시골 여자애로 변장했다. 웅기 도착후 다시 출항할 때까지 화장실에 숨어 5시간을 버텼다. 선원에게 발각됐지만 다행히 짐칸으로 옮겨 블라디보스톡항에 도착했다.
갑판에서 몰래 뛰어내린 그를 맞은 건 소련 헌병의 총검이었다. 한달여 유치장에 갇혔다 소만국경으로 추방됐다. 조선인 농가에 머물면서 도움을 받아 ‘쿠세레야 김’이란 이름의 여권을 만들어 블라디보스톡 입성에 성공한다. 첩보영화 같은 이야기의 주인공은 소설가 백신애(1908~1939). 1927년 가을에 벌어진 ‘시베리아 방랑’ 출발기다.
◇방랑은 1930년대의 키워드
‘방랑은 실제로 1930년대의 키워드였다.’
러시아 문학 전공자 김진영 연세대 교수는 2017년 낸 책 ‘시베리아의 향수’에 이렇게 썼다. 자작나무가 끝없이 펼쳐진 설원(雪原), 오로라, 통나무집... 10대 백순애를 포함, 조선 청년을 사로잡은 낭만의 상징이었다. 미국과 유럽, 일본, 중국 여행은 유학이나 사업, 개척을 위한 구체적 목표를 가졌지만, 시베리아는 유독 정처없이 이곳 저곳을 떠돌아다니는 ‘방랑’의 공간이었다.
영화 ‘아리랑’주연 나운규의 ‘나의 로서아 방랑기’(1927)부터 홍양명(1931), 김동진(1932), 한용운(1933), 이규갑(1934), 현경준(1935), 김서삼(1936), 이극로(1936), 여운형(1936), 이광수(1936)까지 시베리아 방랑 체험을 소재로 한 여행기를 신문, 잡지에 남겼다. 김진영은 ‘집단적 방랑의식의 발단은 한일합방이었다’고 봤다.
◇신춘문예 출신 첫 여성작가

▲백신애는 1929년 1월 조선일보 신춘문예 단편소설 분야에 1위로 당선하면서 등단했다. 수상작 '나의 어머니'가 실린 조선일보 1929년 1월1일자
시베리아 방랑 직후 고향인 경북 영천에 돌아온 백신애는 1929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현상공모에 단편소설 1등을 받으면서 등단했다. 신춘문예 사상 첫 여성당선자였다.수상작은 ‘나의 어머니’. 박계화란 필명으로 응모했다. 중견 기자 한달치 월급인 60원을 상금으로 받았다.
당시 조선일보에 소설 ‘향원염사’(香園艶史)를 연재하던 최독견(1901~1970)이 심사위원중 하나였다. 최독견은 ‘문장이나 기교는 결코 묘하고 능란한 것은 아니다’면서도 ‘억지가 없고 순진한 정서의 유로(流露)가 보인 것도 좋지만 후미에 이르러 그 필봉이 한층 날카로와지고 침착해진 것이 무엇보다도 좋다’(조선일보 1929년 1월1일자 ‘手法其他 1’, 파란 부분을 클릭하면 옛날기사 원문을 볼 수있습니다.)고 호평했다.
‘나의 어머니’는 자전소설이다. 감옥에 들어간 오빠 뒷바라지에 수심 가득한 어머니는 동네 청년들과 어울려 연극한답시고 늦게 들어오는 딸에게 꾸지람만 쏟아낸다. 이 어머니와의 갈등과 화해를 담았다.
◇여성청년동맹, 조선여성동우회 활동한 맹렬 신여성
소설 속 오빠는 1926년 6월 제2차 조선공산당 사건 때 검거된 백기호다. 어릴 때부터 집에서 독학하던 동생에게 책을 권하고 사회운동에 관심을 갖게 한 ‘마르크스 보이’였다. 사업가 외동딸로 태어나 부유하게 자란 백신애는 오빠 덕분에 일찍 여성운동과 사상 운동에 눈떴다.
경북 공립사범학교를 졸업한 1924년 모교인 영천공립보통학교에서 교사를 하면서 사회주의 계열 ‘여자청년동맹’과 ‘조선여성동우회’에 가입했다. 1926년 1월5일 문화소년회가 주최하고 조선여성동우회가 후원하는 강좌가 경성 청진동 회중교회에서 열렸다. 백신애는 여성동우회 대표로 ‘어머니가 꼭 지켜야 할 일’이란 강연을 했다.(조선일보 1926년1월2일 ‘어린이와 소년회 5일오후에’)
백신애는 이런 활동 때문에 1926년 1월 학교에서 권고사직당했다. 그러자 서울에 올라와 본격적으로 사회운동에 뛰어들었다. 주세죽과 함께 여성동우회 집행위원에 뽑히는가 하면, ‘정사(情死)는 자본주의의 산물이다’란 제목으로 연사로 나섰다(조선일보 1926년 8월15일 ‘정사비판강연 演士와 演題’)
◇일본유학 시절 체홉 연극 주연
1927년 가을까지 여성운동에 바빴던 백신애는 돌연 시베리아 방랑에 나선다. 혁명 직후 러시아에 대한 동경과 사회주의 조직과 관련된 것 아니냐는 추측이 나돌지만, 정확한 이유는 밝혀지지 않았다.1939년 발표한 ‘나의 시베리아 방랑기’에는 러시아 병사와의 만남, 자작나무, 설원처럼 낭만으로 가득한 10대의 모험심만 돋보인다.
시베리아에서 돌아오다 두만(豆滿) 국경에서 일경(日警)에 체포된 백신애는 심한 고문을 당했다. 소련 스파이거나 비밀임무를 띠고 잠입한 조직원으로 의심받았기 때문이다. 이때 당한 고문 때문에 아이를 낳을 수없게 됐다. 부자였던 아버지가 손 쓴 덕분에 백신애는 만신창이가 된 몸으로 고향 집에 돌아올 수있었다. 그의 시베리아 방랑은 몇 달에 그쳤던 것으로 보인다.
그후 영천에서 신간회와 근우회, 청년동맹 활동으로 바빴던 백신애는 1929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당선으로 사회운동과 거리를 뒀다고 한다. 1930년5월 일본에 건너가 니혼(日本)대학 예술과에서 문학과 연극을 공부했다. 체호프 단편 ‘개’를 무대에 올린 연극에서 주인공으로 출연하기도 했으나 반응이 신통찮았다. 과년한 딸의 유학이 맘에 들지 않았던 백신애의 아버지는 경제적 지원을 끊어버렸다. 바에서 여급생활도 하고, 식모, 세탁부를 해가면서 버티다 1932년 가을 귀국했다. 이듬해 봄 은행원 출신으로 아버지 사업을 돕고 있던 이근채와 결혼했다. 결혼 5년을 넘기면서 1937년 별거에 들어가기까지 비교적 평탄한 생활을 하며 창착에 몰두했다.
◇서른 한살에 췌장암으로 요절

▲백신애는 조선일보 1938년 6월25일부터 7월7일까지 '광인수기'를 연재했다.
백신애가 1934년 1월과 2월 잡지 ‘신여성’에 연재한 ‘꺼래이’는 시베리아 방랑 체험을 담은 대표작이다. 고향을 떠나 살길을 찾아 시베리아를 떠도는 조선인의 수난을 그렸다. 1937년 ‘현대조선여류문학선집’에 수록되면서 대표적인 여성문학작품으로 떠올랐다. ‘복선이’ ‘채색교’ ‘적빈(赤貧)’ 등 단편 소설을 잇따라 발표한 백신애는 조선일보에 ‘광인수기’(1938년 6월25~7월7일), 월간지 ‘조광’ 1938년 7월호에 ‘소독부’를, 1938년 6월호에 ‘혼명에서’를 발표했다. 신문, 잡지에도 수필과 에세이를 많이 썼다.
백신애의 마지막은 느닷없이 찾아왔다. 1938년 하반기부터 건강이 악화된 백신애는 이듬해 5월말 경성제대 병원에 입원했다가 한달만인 6월28일 오후 5시에 세상을 떴다. 췌장암이었다. 후배 작가 이선희는 미장원에서 파마를 하고 나타난 그의 마지막 모습을 떠올리며 이렇게 썼다. ‘신애ㅡ그는 무엇인가 늘 찾았다. 무엇인가 부족한 것을 찾아 헤매이노라고 그의 정열은 필요 이상으로 그 생명을 불태우는 것같았다.’(조선일보 1939년6월27일 ‘哭白信愛’)
병실 한켠에 원고뭉치로 쌓여있던 유작 ‘아름다운 노을’은 월간지 ‘여성’(1939년11월~1940년2월)에 연재됐다. ‘방랑은 청춘의 생명이며 인생행로의 첫 출발’(현경준, ‘西伯利亞방랑기’)이라는 구절대로, 백신애는 1920년~1930년대를 방랑하며 뜨겁게 살다갔다. 고향 영천에서는 백신애 문학상과 문학제를 운영하면서 그의 삶과 문학을 기리고 있다.
◇참고자료
백신애, 나의 시베리아 방랑기, 백신애선집, 현대문학, 2009
백신애, 나의 어머니, 조선일보 1929년 1월1일자
현경준, 西伯利亞방랑기, 新人文學 2권2호, 1935년3월
김진영, 시베리아의 향수, 이숲, 2017
이중기, ‘백신애, 그 미로를 따라가다’, 백신애선집, 현대문학, 2009
09.25 펜 던지고 금 캐러간 채만식, 김기진...1930년대 조선의 황금광 열풍
法服과 청진기 던지고 너도나도 광산 투자

▲작가 채만식은 1938년 금광 브로커로 뛰어들었다. 사금 시추 전문가였던 형들의 금광 개발을 돕기 위해서였다. 금광은 허탕이었지만 창작엔 도움이 됐다. 채만식은 1939년 금광꾼 경험을 토대로 쓴 장편 '금의 정열'을 매일신보에 연재했다.
‘모든 광(狂) 시대를 지나서 이제는 황금광(狂)시대가 왔다…너도 나도 금광, 금광 하며 이욕에 귀밝은 양민들이 대소몽(大小夢)이다. 강화도는 사십 간만 남겨놓고 모두가 소유자 있는 금땅이라 하고 조선에는 어느 곳이나 금이 안 나는 곳이 없다 하니 금 땅 위에서 사는 우리는 왜 이다지 구차한지?’
만문만화가 석영 안석주(1901~1950)는 대공황 여파가 불어닥친 1932년 ‘황금광시대’(조선일보 1932년11월29일)란 만평을 실었다. 조선 땅에 금광 붐이 일기 시작한 때였다.

▲'모든 광 시대를 지나서 이제는 황금광 시대가 왔다. ' 1930년대 조선땅에 금광 개발 붐이 휩쓸었다. 안석영은 1932년 11월29일자 조선일보에 실은 만평 '황금광시대'에서 '조선에는 어느 곳이나 금이 안 나는 곳이 없다 하니 금 땅위에 사는 우리는 왜 이다지 구차한지?'라고 꼬집었다.
20~30대가 ‘영끌’해서 아파트 구입에 올인하고, 대학생까지 비트코인에 목매는 요즘의 투자 광풍과도 비교할 수 없는 광적(狂的) 열기가 1930년대 조선을 휩쓸었다. 골드 러시(Gold Rush), 금광(金鑛) 열풍이었다.
1929년 10월 월가 주식대폭락으로 시작된 경제대공황은 1930년대 내내 세계를 지배했다. 화폐가치는 폭락하는 반면, 금값은 천정부지로 치솟았다. 조선의 금광열풍은 대공황과 함께 폭등한 금값을 배경으로 탄생했다.
1933년 한 해에만 5025개 광산이 개발됐고, 그 중 금은광이 3222개나 됐다. 1934년 금광 출원은 5972건, 1935년은 5813건에 달했다.금 생산량도 1931년 9031kg에서 1만1508kg(1933), 1만4710kg(1935), 2만2548kg(1937)로 급증하더니 1939년 3만1173kg으로 정점을 찍었다. 한해에만 31톤이 넘는 황금이 채굴된 것이다.
◇사회주의, 여성운동, 독립운동가까지 금광 투신
1938년 11월 잡지 ‘삼천리’엔 ‘광산하는 금광신사기’란 기사가 실렸다. 신간회 경성 지회장이자 연희전문 교수를 지낸 유석 조병옥, 조선일보 영업국장 출신 김기범, 상하이 임정에서 활동하던 최현, 조선노동총동맹 중앙집행위원장 출신 사회운동가 정운영, 근우회 집행위원장 출신 여성운동가 정칠성 등 사회주의자, 민족주의자, 여성운동가 할 것없이 금광채굴에 뛰어들었다는 내용이었다. 의사, 변호사, 문인, 기자 등 지식인들도 펜이나, 법복, 청진기 대신 곡괭이를 들었다.
‘금광 3부작’을 낸 작가까지 있었다. 1935년 조선일보 신춘문예(단편 ‘소낙비’·원제 ‘따라지 목숨’)로 등단한 김유정(1908~1937)이다. 등단 첫해인 1935년 ‘금 따는 콩밭’(개벽 1935년3월) ‘노다지’(조선중앙일보 1935년3월2일~9일) ‘금’(영화시대 1935년3월)을 발표했다. 소설가로 데뷔하기 전인 1934년 충청도 예산 일대의 금광을 전전한 그의 체험이 녹아있다.

▲1935년 조선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한 김유정. 김유정은 등단 첫해 '금따는 콩밭' '노다지' '금' 등 '금광3부작'을 발표했다. 그는 등단 전 충남 예산 일대 금광을 전전하며 체험을 쌓았다.

▲1935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1등 당선된 김유정 단편 '소낙비' 첫회. 연재소설처럼 삽화까지 더해 6회까지 실렸으나 일제에 의해 연재가 중단됐다.
◇금광 브로커로 뛰어든 채만식
금광 개발에 뛰어든 대표적 문인은 ‘탁류’ ‘레디메이드 인생’을 쓴 채만식(1902~1950)이다. 셋째, 넷째 형이 사금광 시추 전문가였다. 월급쟁이로 광산을 떠돌던 이들은 1938년 여름 기회를 잡았다. 청주 남택광에서 금광개발권을 얻은 것이다. 하지만 개발 자금 2000원을 조달할 길이 막막했다. 채만식은 유명작가였지만 형들이 잡은 기회를 모른 채 할 수없었다.
채만식은 1925년 동아일보 정치부 기자를 시작으로 개벽사, 중앙일보를 거쳐 1934년말 조선일보 사회부 기자로 입사했다. 1936년 1월 퇴사한 그는 1937년부터 장편소설 ‘탁류’(1938년5월까지 총 196회)를 조선일보에 연재했고, 1938년엔 조선일보 월간지 ‘조광’(1월~9월)에 ‘태평천하’(원제는 天下太平春)를 연재했다.
채만식이 금광 개발에 뛰어든 것은 대표작 ‘탁류’, ‘태평천하’ 집필을 마친 직후였다.
투자금 조달이 그의 역할이었다. 몇 달이나 돌아다녔으나 헛수고였다. 천신만고 끝에 그해 11월 전주(錢主)를 구했다. 동아일보에서 같이 일했던 소오(小梧) 설의식(1900~1954)이었다. 혹한을 무릅쓰고 금 캐기에 몰두했지만 허탕을 쳤다. 손해만 5000원 이상이 났는데, 전부 소오의 자금이었다. 채만식은 ‘그 뒤로 1년간 그다지도 가깝던 소오를, 면목이 없어 차마 찾아가지 못했(다)’고 회고할 만큼 민망해했다.
◇메스와 법복, 집어던지고 금광으로
채만식은 1년여 후 금광 개발에 뛰어든 회고담을 썼다. 최재서가 발행하던 문예지 ‘인문평론’ 2권2호(1940년2월)에 실은 ‘금(金)과 문학’이다. ‘의사는 메스를 집어 던지고, 변호사는 법복을 벗어 던지고, 금광에로 금광에로 달려 간다. 기생이 영문도 모르고서 백오원을 들여 광을 출원하는가 하면 현직의 교원이 감석을 들고 분석소엘 찾아 간다.’
너나 없이 광산 개발에 뛰어드는 세태가 담겨있다. 채만식은 ‘하는 덕에 소설쟁이도 금광을 하자고 덤벼 보았었고’라며 금광투신기를 변명하듯 썼다. 채만식은 이 글에서 ‘손수 흙을 파 올려 금을 캔다거나, 정과 망치를 쥐고 돌을 깨뜨린다거나 하기는커녕, 현장에서 벗어 붙이고 인부 감독조차 한번도 못 해본, 천하 알량스런 금광꾼이었었다’고 회고했다. 하지만 친우의 돈을 빌려 투자한 이상 광산을 떠날 수없었다. 낮엔 광산에서, 밤엔 책상에서 ‘투 잡’을 뛰는 생활을 이어갔다. 꽁트 ‘점경’(조선일보 1938년 12월28일 )과 김남천 신작을 평론한 ‘大河를 읽고서’(1939년1월)는 이 시절 쓴 글이다.
광산 체험은 작가로서는 무익하지는 않았다. 1939년6월19일부터 11월19일까지 매일신보에 연재한 장편소설 ‘金의 정열’은 금광꾼 체험이 바탕이 됐다. 금광으로 돈을 번 주상문을 둘러싼 인간군상을 그린 작품이다.
채만식은 금광에 본격적으로 뛰어들기 전에도 관심이 많았던 모양이다. 1936년에 쓴 수필 ‘문학인의 촉감’(조선일보 6월7일, 9일)에는 황금광 시대의 에피소드가 나온다. 한 해전 광주(光州) 근교에서 금광을 경영하는 최군을 방문했을 때 들었다는 이야기다. 어느 농부가 자기 집 근처에서 금이 쏟아져나온다고 하니까 자기 집 벽을 헐어서 함지에다 흔들어보았다. 그랬더니 금 세돈이 나왔다는 것이다. 산이나 강이 아니라 집안에서도 금을 캐던 시절이었다.
◇낮엔 금 캐고, 밤에는 글 쓴 김기진

▲1962년 서울 수유리 팔봉 김기진 집을 찾은 박정희 최고회의의장. 박 의장은 이 무렵 김기진 집을 자주 찾아 얘기를 나누곤 했다. 김기진은 1934년 넉달간 낮에는 금을 찾아 헤매고 밤에는 글을 쓰는 '투잡'생활을 했다./김용한씨 제공
채만식에 앞서 금광에 뛰어든 작가는 팔봉(八峰) 김기진(1903~1985)이다. 1921년 일본 릿쿄(立敎)대에 들어간 김기진은 신극운동단체인 ‘토월회’ 결성을 주도하면서 학업을 중단하고 귀국했다. 매일신보, 시대일보, 중외일보를 거쳐 1930년 조선일보 사회부장으로 입사했다. 팔봉은 조선일보 입사전인 1928년 처가가 있던 함경남도 이원에서 정어리 공장을 운영해본 경험도 있었다. 조선일보를 관둔 이듬해인 1934년 4월 평남 안주의 금광으로 달려갔다. 재수가 터지면 신문사 하나 차릴 요량으로 덤빈 일이었다.
김기진은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동맹, 이른바 카프(KAPF) 조직에 앞장선 인물이다. 이런 사회주의 계열 작가까지 낮에는 금을 캐고 밤에는 ‘청년 김옥균’ ‘장덕대’ 등과 같은 작품을 썼다. 하지만 두 달이 지나도록 금광에선 금싸라기 한 톨도 나오지 았다. 전주(錢主)는 일찌감치 손을 털었고, 김기진은 돈 빌리러 상경했다. 불과 넉달만에 요즘 돈으로 수억원을 날린 김기진은 두 손을 들 수밖에 없었다.
김기진의 형인 조각가 김복진은 이렇게 조언했다고 한다.
‘얘! 네가 할 광산은 다른 곳에 없고, 여기 네 책상 위에 있다. 이 원고지 위에 있다. 원고지 한 장을 쓰면 광맥을 한 자쯤 파는 것이고, 열 장을 쓰면 열 자쯤 판 것이란 말이다. 이 원고지 광맥밖에 너의 광맥은 없다…’
◇참고자료
전봉관, 황금광시대, 살림, 2006
안석영, 황금광시대, 조선일보 1932년 11월29일
채만식, 문학인의 촉감, 조선일보 1936년 6월7일, 9일
채만식, ‘금과 문학’, 인문평론 2권2호, 1940 년 2월
10.02 이상의 미쓰코시·박태원의 和信, 백화점을 사랑한 모던 보이들
‘근대 소비문화의 총아’ 백화점…식당가 1원50전 ‘난찌’(런치) 인기
▲박태원은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과 '천변풍경'에 미쓰코시백화점과 화신백화점 식당을 등장시켰다. 이상도 대표작 '날개' 결말에 미쓰코시 백화점 옥상을 썼다. 백화점 식당은 1930년대 경성 소비문화의 최정점에 있었다. 사진은 박태원(가운데)과 친구 이상(왼쪽), 김소운./국립현대미술관
“우리 저기 미쓰코시 가서, 난찌 먹구 가요.”
“난찌? 난찌란 건 또 무어다냐.”
“난찌라구, 서양 즘심 말이에요.”
기생 춘심이는 윤직원 영감과 데이트하면서 미쓰코시 백화점 양식을 먹자고 조른다. 채만식(1902~1950)이 1938년 월간지 ‘조광’에 연재한 ‘태평천하’(원제 天下太平春)에 나오는 대목이다. ‘난찌’는 점심 식사를 뜻하는 ‘런치’(Lunch)의 일본식 발음이다.
미쓰코시는 1930년 10월 경성 조선은행(한국은행) 본점 건너 편에 들어선 고급백화점.지금 신세계백화점 본점으로 쓰이는 이곳은 이상이 자주 찾던 명소였다.
‘나는 어디로 어디로 들입다 쏘다녔는지 하나도 모른다. 다만 몇 시간 후에 내가 미쓰코시 옥상에 있는 것을 깨달았을 때는 거의 대낮이었다. 나는 거기 아무 데나 주저앉아서 내 자라 온 스물여섯 해를 회고하여 보았다.’
이상이 조선일보에서 발행한 월간지 ‘조광’ 1936년 9월호에 실은 ‘날개’의 피날레 부분이다. 미쓰코시 옥상 정원에서 하늘로 날아오르려했던 이상은 몇 달 뒤 도쿄에서 스물 일곱 아까운 삶을 마감했다.
▲스물 여섯살 이상이 죽기 몇달 전 발표한 소설 '날개' . 삽화도 직접 그렸다. 조선일보에서 발행한 월간지 '조광' 1936년9월호에 실렸다.
◇”백화점 식당은 행복을 스스로 느낄 수있는 사람이 찾아온다”
1930년대 백화점에서 먹는 ‘난찌’는 유행의 첨단을 달리는 모던 보이, 모던 걸이 선망하던 코스였다. 가족들의 외식 장소로 손꼽히는 곳이기도 했다.
‘백화점 식당ㅡ 그곳은 원래가 그리 불행하다거나 슬프다거나 그러한 사람들이 오는 곳이 아니다. 하로 하로를 평온무사하게 보낼 수있었든 사람, 얼마간이라도 행복을 스스로 느낄 수 있었든 사람, 그러한 이들이 더러는 아내를 동반하고 또는 친구와 모여서 그리고 대부분의 경우에 자녀들을 이끌고 결코 오랜 시간을 유난스러웁게 즐기기에는 적당치 않은 이곳을 찾아온다.’(‘조광’ 1936년6월)
1930년대 경성 스케치로 유명한 박태원은 연재소설 ‘천변풍경’에 이렇게 썼다. 백화점 식당은 1930년대 경성 소비문화의 최정점이었다.
▲1930년 10월 들어선 미쓰코시 백화점은 근대 고급 상품을 진열한 전시장이었다. 4층 식당에서 내놓는 '난찌'는 모던 걸이 선망하는 코스였다. /서울역사박물관
◇미쓰코시 1원50전 양식세트, 화신 70전 한식세트 인기
1920년대부터 경성에 본격적으로 들어선 백화점은 근대 상품을 전시하는 쇼윈도우이자 첨단 문화를 향유할 수 있는 중심지였다. 미쓰코시, 조지야, 미나카이, 히라타 같은 일본계 백화점은 물론 종로 화신백화점은 대부분 옥상에 식당을 설치했다. 백화점 식당은 깨끗하고 음식 값도 상대적으로 싸서 고객이 많았다. 미쓰코시 백화점은 1원50전짜리 양식 세트와 원두 커피 메뉴가 인기를 모았다. 화신백화점은 양식도 팔았지만 70전짜리 한식 정식세트도 인기가 높았다. 주머니 가벼운 월급쟁이 가장도 가족을 위해 호기를 부렸다.
‘젊은 내외가, 너덧 살 되어 보이는 아이를 데리고 그곳에 가 승강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제 그들은 식당으로 가서 그들의 오찬을 즐길 것이다. 흘껏 구보를 본 그들 내외의 눈에는 자기네들의 행복을 자랑하고 싶어 하는 마음이 엿보였는지도 모른다.’
박태원이 1934년 조선중앙일보에 연재한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 한 대목이다. 종로 화신백화점 식당을 찾는 젊은 가족의 일상을 스케치했다.
▲일본계 백화점이 번성한 가운데 한국인 경영을 내세워 손님을 모은 종로 화신백화점. 70전짜리 한식 세트 메뉴가 인기였다. /서울역사박물관
◇세살배기도 백화점 식당가자고 졸라
조선일보 1931년 1월1일자 신년호에 실은 제야(除夜) 기사 제목은 ‘식당에는 開化부인-대경성의 백화점내면’. ‘식당에도 쪽진 머리에 아이들을 반다스나 데리고 앉아 다과를 즐기는 훌륭한 개화(?)부인이 있다’고 썼다. 살림살이 형편에 어울리지 않는 과소비를 우려하는 지적도 나왔다. ‘문화는 조선 사람의 입에까지 미치어 김치 깍두기 된장찌개만으로는 비위를 가라앉힐 수 없게 되었다. 치킨 가쓰레쓰,멘치폴, 무엇무엇 등 입맛이 달라져서 세살 먹은 아기들까지도 밥때가 되면 엄마밥바를 백화점 식당으로 끌고간다. 이삼십원짜리 월급쟁이도 점심저녁은 백화점에서 ‘식도락’(食道樂)도 어지간하다.’(조선일보 1934년7월19일 ‘카메라산보-도회의 측면에서 측면에’) 기자는 ‘집도 없고, 입을 것이 없어도 먹기만 하면 살겠지만 뒷간의 파리, 요강, 타구부터 없앤 뒤에 식도락이 식도락이다’고 꼬집었다.
◇오므라이스, 카레라이스, 돈가스… 和洋절충 양식
구한말 손탁호텔처럼 서양인이 경영하는 호텔에서 서양 음식을 전문적으로 내놓기 시작했다. 하지만 경성 시내에 양식 레스토랑이 본격적으로 등장한 것은 1920년대~1930년대다. 호텔과 레스토랑도 있었지만 상대적으로 가성비 높은 백화점 식당에 손님들이 몰렸다. 순 서양요리보다는 오므라이스, 카레라이스, 돈가스, 함박스테이크처럼 일본화된 양식이 대부분이었다.
◇양식 못먹는 洋裝녀, 애기 울리는 舊式부인
100년전 경성 사람들이 서양 음식에 익숙할 리 없다. 백화점 식당 여종업원이 본 양식당 꼴불견이다. ‘시골서 온냥 싶은 여자손님들 가운데는 음식 이름을 몰라서 쩔쩔매다가 옆 손님을 본받아 양식 같은 것을 주문해놓고 먹을 줄 몰라서 쩔쩔 맬때도 있습니다.’ ‘여우 목도리에 좋다는 두루마기를 입고 온 여자손님이 흔히 식사를 하면서도 목도리를 그냥 두르고 있는데, 이러한 것은 몰라서 그런지는 몰라도 그다지 높이 보이지 않습니다.’
종업원에게 갑질하는 고객은 그때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였다. ‘우리가 제일 괴로워할 때는 구식 여자들이 아이를 많이 데리고 와서 음식이 비싸다느니 맛이 없다느니 하고 꾸중을 하는 것은 좋으나 어린 아이들이 제각기 먼저 먹겠다고 싸워서 울음판이 될 때입니다. 여러 손님들이 있는 곳에서 어린애 울음소리가 높이 나면 다른 손님은 상을 찌푸리지 않습니까.’ ‘심부름을 시킬 때 자기 집 하인처럼 말솜씨를 아무렇게나 하는 손님을 대하면 분하기 짝이 없습니다만 어디 입밖에 내 말할 수나 있습니까. 그저 꾹꾹 참고 지나갑니다.’(조선일보 1937년2월4일 ‘양식 못먹는 洋裝녀, 애기 울리는 구식부인’)
◇수프, 소리내며 설렁탕처럼 마시고, 남의 빵 뜯고…
박태원은 1931년부터 이듬해까지 매일신보에 연재한 소설 ‘무화과’에 조선호텔 양식당을 찾은 중년 신사의 무례를 꼬집었다. ‘선생님이 양식을 처음 잡숫는지, 자주 남의 빵을 뜯어 잡숴 가며 수프를 스푼으로 떠 잡숫다가는, 에이 성가시다고 번쩍 들어 훌훌 마시겠지요… 그거나마 소리나 내지를 않았으면 좋으련만, 설렁탕집으로 알았는지, 훅훅 소리를 내지요. 하하하…게다가 여기저기 돌려다보며, 서양부인네들 유심히 보니까, 저희들도 눈짓을 하고 웃지요! 앉았기가 민망해서 죽을 애를 썼더랍니다…’
▲이삼십원짜리 월급쟁이도 백화점 식당에서 점심 저녁을 해결하는 세태를 꼬집은 조선일보 1934년7월19일자 '카메라 산보' 기사
불친절에 위생도 엉망인 한식당
이태준은 ‘주머니가 푸근하면 양식집으로 가고 그렇지 못하면 일본집 ‘소바’먹으러 가는 것이 보통’(‘유령의 종로’,별건곤 1929년3월)이라고 썼다. ‘그릇과 숟가락이 몇십년 닦지 않은 이빨처럼 싯누런 너리가 앉은 것을 외면도 안하고 ‘헤이끼’(태연하게)로 내어 놓는다. 게다가 음식 나르는 친구들의 의복이란 언어도단이다. 걸레라고 하더라도 빨지 않고는 못 쓸 걸레들이다.’
설렁탕, 냉면 같은 한식을 파는 대중음식점은 식탁이 낮은 데다 의자는 목침 높이 정도로 낮아 음식을 먹다보면 고문당하는 것처럼 온 몸이 결린다고 했다. 불친절한데다 위생도 엉망이었다. 손님들은 ‘현대인’ ‘신경인(神經人)’인데, 북촌(北村) 상인들은 ‘쇠대가리’(牛頭)처럼 아무 생각이 없다며 노골적으로 적대감을 드러냈다.명월관, 식도원 같은 일류 조선요릿집이 있긴 했지만 100년 전 경성엔 양식, 일식, 한식의 위계(位階)가 이렇게 자리잡았다.
◇참고자료
이태준,’유령의 종로’,별건곤 1929년9월
김연숙,’외식문화의 근대적 변용과 경성의 향토음식,’일제강점기 경성부민의 여가생활’, 경인문화사, 2018
이인영·정희선, ‘1930년대 세태소설에 나타난 경성부민의 식생활 문화연구-염상섭의 ‘삼대’, ‘무화과’와 박태원의 ‘천변풍경’,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을 중심으로’, 동아시아식생활학회지 28-4, 2018
10.09 나타샤,소냐는 왜 조선 청년의 ‘마돈나’가 됐을까
백석의 ‘나타샤’, 염상섭의 ‘쏘니아’
文靑의 로망으로 떠올라
▲아오야마 학원에서 영문학을 전공한 백석은 1936년 함흥 영생여고 영어교사로 부임했다. 백석의 시 '나와 나타샤와 흰당나귀'는 나타샤가 조선 청년들의 '마돈나'로 자리잡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올 상반기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에서 열린 특별전 '미술이 문학을 만났을 때'에 전시된 백석 시 '나와 나타샤와 흰당나귀'. 조선일보에서 발행한 월간지 '여성' 3권3호(1938년3월)에 실렸다. 삽화는 정현웅이 그렸다. 백석은 '여성' 편집자이기도 했다.
나타샤와 카추샤, 소냐는 100년 전 모던 보이들을 설레게한 이름이다. 청년들의 ‘마돈나’이자 연인(戀人)을 가리키는 대명사였기때문이다. ‘가난한 내가/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오늘 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로 시작하는 백석의 ‘나타샤’가 대표적이다.
김광균과 오장환도 나타샤를 작품속에 불러들였다. ‘나타ㅡ샤 같은 계집애가 우산을 쓰고/그 우를 지나간다’(김광균, ‘눈 오는 밤의 시’일부, 1940년 5월)거나 ‘나타샤는 마우재, 쫓긴 이의 딸/나 혼자만 살았느냐/고향이 있어서’(오장환, ‘고향이 있어서’일부,1940년 12월). 나타샤는 어쩌다 조선 청년의 마돈나가 됐을까.
◇문학적 족보없이 홀연히 나타난 나타샤
‘시베리아의 향수’를 쓴 러시아 문학 연구자 김진영 연세대 교수는 톨스토이 ‘부활’의 카추샤나 도스토옙스키 ‘죄와 벌’의 소냐와 달리 나타샤는 문학적 혈통이 뚜렷한 이름이 아니라고 했다.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에 나오고 도스토옙스키와 투르게네프 소설에도 등장하지만 당시 화제를 모은 인물이 아니거나 작품 자체가 별로 인기를 끌지 못했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나타샤는 변변한 문학적 족보도 없이 홀연히 조선 문학에 출현했다’는 얘기다. 나타샤는 문학적 원형이 뚜렷하지 않은 덕분에 ‘조선의 나타샤’, ‘나의 나타샤’로 쉽게 받아들여졌고 우리 작가들의 작품속에 녹아들었다.
▲톨스토이 '부활'을 초역한 소설 '해당화'. 1918년 최남선이 이끌던 신문관에서 냈다. 역자인 박현환은 정주 오산학교 출신으로 이 책을 번역할 당시 오산학교 교사로 있었다./국립중앙도서관
◇유진오의 나타샤, 함대훈의 나탈리야
해방 후 초대 법제처장과 고려대 총장을 지낸 유진오(1906~1987)가 1942년 발표한 단편소설 ‘신경’(新京)엔 나타샤가 나온다. 만주국 수도인 신경을 찾은 주인공 철은 미지의 여성 나타샤를 호기심 어린 눈으로 지켜보며 ‘러시아 귀족 후예’를 떠올린다.
‘각가지 나라 말을 뒤섞어 이야기하고 있는 동안에 철은 여자의 이름은 나타ㅡ샤라는 것, 그 집은 보통 음식점이 아니라 캐바레라는 것, 나타ㅡ샤는 그곳에서 춤추고 있는 여자라는 것을 알았다. 문득 철은 이 여자도 소문에 듣던 로서아 귀족의 딸이 아닌가 하고 생각하였다.’
연극평론가 함대훈(1896~1949)은 ‘나탈리야’를 추억한다. 1933년 발표한 ‘외국어와 이국여성’(신여성 7권1호,1933년1월)에서다. 러시아어 개인교습을 해주던 전직 외교관의 딸이다. 집으로 찾아간 그를, 출타한 아버지를 대신해 나탈리야가 집안으로 안내한다. ‘그 명랑하고 리즈미칼한 발음…그 어여쁜 얼굴에 띄우는 미소! 언어와 동작이 자연스럽게 노는 그 여자와의 회화! 지금도 잊지못할 기쁨의 추억이다.’
◇염상섭의 ‘쏘니아’, 안석주와 안회남의 ‘소니아’
염상섭은 1929년 9월22일부터 10월2일까지 ‘죄와 벌’ 여주인공 소냐를 예찬하는 글을 다섯 차례 썼다. ‘찰스턴을 춤추는 모던 걸, 재즈에 광취(狂醉)하는 모던 보이’를 향해 ‘감히 쏘니아에게 돌을 던질 자가 누구냐’고 곧장 묻는다. ‘나는 쏘니아와 같이 운다. 가을 밤 궂은 비와도 같이 운다. 인류의 불행을 탄식하는 마음으로 운다. 나는 쏘니아를 공상의 세계에서 포옹한 아리따운 연인으로서 위로하려 함이다. 나는 쏘니아의 영혼을 바라보고 감격에 떤다. 그의 썩은 육체안에 숨은 정의의 마음을 보았기 때문이다.’(‘쏘니아 예찬’2, 조선일보 1929년 9월24일. 파란 부분을 누르면 옛 기사를 볼 수 있습니다.)
만문만화가는 물론 배우, 작가, 영화감독 등 팔방미인이었던 안석주도 잡지 기획에서 소냐를 떠올렸다. ‘나는 도스토옙스키의 ‘죄와 벌’을 읽었을 그 때는 이미 여러해 전이었으나 그 때 내 자신이 예술 방면에 파묻혔던 까닭인지 굳센 청년으로서의 고민이 남유달리 있었던 듯하였던 때여서 그랬던지 이 ‘소니아’를 찾아보려고 한 때도 있었다…’소니아’가 조선에도 있었는지 있을 것인지?’(내가 좋아하는 소설의 주인공이 실재해 있다면?: 라스콜니콥프의 소니아, 신여성 1933년2월) 안석주와 함께 이 기획에 참여한 안회남은 ‘소니아의 애인 라스콜니코프가 되고 싶다’고 노골적으로 고백한다.
▲조선일보 1929년 12월13일자에 실린 톨스토이 '부활' 요약본 첫회. 12월18일까지 5회 연재됐다.
◇ ‘카츄샤의 나라’ 노서아
사랑에 배신당하고 추락한 여인 ‘카추샤’는 애잔한 연정의 대상이었다. 귀족청년 네흘류도프에게 짓밟힌 뒤 윤락가에 빠진 ‘부활’의 여주인공 카추샤는 톨스토이가 1899년 이 작품을 발표한 직후 일본, 그리고 조선에 순차적으로 소개되면서 선풍적 인기를 누렸다. 특히 1918년 최남선이 이끌던 신문관에서 펴낸 번안소설 ‘해당화-賈珠謝애화’는 대중이 환호한 베스트셀러였다. 번역가 박현환은 정주 오산학교 출신으로 일본 세이소쿠 영어학교에서 유학하고 돌아온뒤 오산학교 교사로 일했다. ‘부활’을 번역한 것도 이 때의 일이다. 박현환은 3.1운동 직후 상하이로 망명,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몸담고 ‘독립신문’ ‘신한청년’을 이끌기도 했다.
조선일보에 러시아 기행을 연재한 김준연은 러시아를 아예 ‘카추샤의 나라’로 불렀다.’백설(白雪)을 뺀 서백리아(西佰利亞·시베리아)는 나에게 퍽 적막하고 무미건조한 것이 되고 말 것이다. ‘카추샤’의 나라는 눈 있을 때 와야되겠고 눈 있을 때 보아야 되겠다.’(조선일보 1925년 4월28일 ‘노서아 가는 길에’)
소설가이자 극작가이면서 동양극장 지배인이었던 당대 문사 최상덕은 톨스토이를 알기 전에 먼저 카추샤를 알았다고 했다. ‘이인직을 알기 전에, 이광수를 알기 전에, 염상섭을 알기 전에, 김동인을 알기 전에, 최학송을 알기 전에 톨스토이를 알았다. 그리고 톨스토이를 알기 전에 ‘카튜샤’를 알았다.’(최상덕, ‘갓주사’와 나, 매일신보 1935년 11월20일)
배우 출신으로 ‘황성의 跡’(황성옛터)을 불러 1930년대 인기 스타로 떠오른 이애리수는 ‘카추샤’를 자신에게 가장 잘어울리는 배역이라고 답하기도 했다.(조선일보 1930년1월1일 ‘아홉살에 첫 무대, ‘카추샤가 適役’의 이애리수’)
카추샤는 신문, 잡지에서 순정을 배반당하고 악의 구렁텅이로 빠지는 비극적 여성의 대명사로 자주 호명됐다. 여공 생활하다 하룻밤 사랑으로 낳은 아기를 죽이고 여급으로 전전하다 길림성 작부로 팔려가던 중 체포된 스물두살 최OO의 사연을 소개하는 기사 제목이 ‘모던 ‘카추샤’ 애화’(조선일보 1934년7월20일)였다.
▲연극 막간에 '카추샤의 노래'를 불러 대유행시킨 이애리수. 1930년대 '황성옛터'로 더 유명해졌다. 조선일보 1930년 1월1일자 신년호에 인터뷰했다.
◇소설·연극보다 히트한 이애리수의 ‘카츄샤의 노래’
‘부활’은 연극으로도 대중과 만났다. 무대로 옮길 때는 여주인공 카추샤가 제목이 됐다. 1916년 이기세, 윤백남 등 동경 유학생들이 만든 신파극단 ‘예성좌’가 처음 ‘카츄샤’를 올렸다. 이 공연에선 여장 배우 고수철이 바이올린과 퉁소 반주에 맞춰 막간에 불렀던 ‘카츄샤의 노래’가 인기를 끌었다. 1915년 내한 공연을 가진 일본 극단 ‘예술좌’의 ‘카츄샤’를 바탕으로 올린 공연이었다. 일본 극단이 만들어 막간에 부른 ‘카츄샤의 노래’는 1920년대 이애리수의 노래로 대유행했다.
신극단체 토월회는 1923년 조선 최초 여배우 이월화를 주인공삼아 연극 ‘카츄샤’를 올려 히트를 쳤다. 유치진 홍해성이 이끈 극예술연구회는 1937년4월 부민관에서 서항석 연출로 ‘카추샤’를 이틀간 올렸고, 동양극장도 그해 12월 ‘카추샤’를 공연했다. ‘카추샤’는 일제시대 가장 있는 연극 레퍼토리 중 하나였다.
소설이나 연극보다 카추샤를 더 유명하게 만든 건 노래였다. 일제시대 막간 노래로도 인기를 누렸지만, 1960년 김지미·최무룡 주연 영화 ‘카츄샤’에 들어간 삽입곡 ‘카츄샤의 노래’는 지금도 즐겨 부르는 이들이 많다. ‘마음대로 사랑하고/마음대로 떠나가신/첫사랑 도련님과/정든 밤을 못잊어’로 시작하는, 바로 그 노래다. 유호가 노랫말을 쓰고, ‘꿈꾸는 백마강’을 지은 이인권이 작곡했다.
◇1920년대 휩쓴 러시아 문학
러시아 여인들은 어쩌다 조선 청년들의 연모의 대상이 됐을까. 나타샤와 카추샤, 소냐가 조선 청년들의 ‘마돈나’로 떠오른 데는 러시아 혁명에 대한 관심과 함께 일제시대 압도적이던 러시아 문학의 영향력을 빠뜨릴 수없다. 러시아 문학은 1920년대 조선에 소개된 해외문학 중 영문학에 이어 2위를 차지할 만큼 주목을 받았다. 김병철의 ‘한국근대번역문학사연구’(1975, 을유문화사)에 따르면, 신문·잡지에 번역된 작품만 127편(영문학 151편)이나 됐다. 프랑스(100편), 독일(68편)을 한참 앞선다.
소설만 놓고보면 영문학을 능가할 만큼 서구 문학 중 가장 활발하게 국내에 번역 소개됐다. 체호프 작품이 가장 많이 신문·잡지에 실렸지만(11편), 단행본까지 합하면 톨스토이가 가장 많이 읽혔다. 투르게네프, 고리키의 인기도 높았다.
톨스토이는 당시 신문에 종종 ‘두옹(杜翁)’으로 소개됐다. ‘두씨 할아버지’쯤 될텐데, 그는 당시 조선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외국 작가였다. 타계 25주년이던 1935년 조선의 일간지들이 앞다퉈 전면 특집을 실을 정도였다. 100년 전 조선 청년들이 연모하던 ‘나타샤’는 지금 어디에 있을까.
◇참고자료
김진영, 시베리아의 향수, 이숲, 2017
김병철, 한국근대번역문학사연구, 을유문화사, 1975
박진영 엮음, 신문관 번역소설전집, 소명출판,
함대훈, ‘외국어와 이국여성’, 신여성 7권1호,1933년1월
10.16 ‘스틱 걸’까지 등장한 ‘종산이,진산이’ 전성시대
모던 보이,모던 걸,종로와 진고개 누벼

▲서양식 모자와 나팔바지 차림 모던 보이들이 거리를 활보하고 있다. 왼쪽 남자는 바이올린을 들었다. 조선일보 1928년 2월7일자
‘경성에는 산보하고 싶은 길이 없다. ‘별 일 없는 시간이니 OO이나 걸을까’하고 나설 산보할 거리가 없다.’
1927년 잡지에 이런 글이 실렸다. 인구 40만 대도시 경성에 산보할 만한 거리가 없다는 불평이었다. ‘길가의 나무와 상점의 진열장에서 흘러나오는 맛’ ‘길거리에 지나다니는 사람들이 서로 조화되는 데서 생기는 맛’ ‘거기에 싫증이 나면 들어앉아 간단히 다리 쉬어갈 수 있는 곳에서 생기는 맛’ 등이 어우러져 산보객의 마음을 상쾌하게 해줄 만한 거리가 없다고 했다.
◇유행의 전시장, 종로 네거리
그래도 이 잡지 필자가 선택한 산보지는 종로 네거리(지하철 1호선 종각역)와 진고개였다. 종로 네거리 랜드마크인 화신백화점이 들어서려면 몇 년 더 기다려야했지만, 그나마 이곳이 그럴 듯한 산보지였던 모양이다.
‘아직 건축물은 정돈도 되지 않았으니까 그 통일·조화의 유무도 말할 것 못되지만은 사방으로 시원하게 뚫린 넓은 길이 아무 때 나서도 시원한 곳이다. 자동차가 무례히 지나다니는 것은 불쾌하나 부드러운 아스팔트를 밟고 걷는 맛은 구두 신은 사람일수록 단장을 짚은 사람일수록 아무 바쁜 일 없이 산보하러 나선 사람일수록 더 잘 아는 것이다. 그래서 아무라도 여기를 나서면 말소리도 커지고 단장도 더 휘둘러지는 것이다.’(蒼石生, ‘鍾散이, 진散이’, 별건곤 1927년2월)
이런 저런 유명 인사들과 마주치는 재미도 있지만, 모던 보이, 모던 걸의 차림새를 구경하는 거리이기도 했다. ‘가지 각색의 성명모를 젊은 친구들이 가지 각색의 개성 취미를 발휘한 복색을 차리고 나와서 경성의 새 유행을 보여준다. 전에 못보던 치마가 유행하기 시작한 것도 전에 없던 양산이 유행하기 시작한 것도 종로에 나가면 볼 수 있는 것이다.’

▲경성 쇼핑과 유흥 중심지 혼마치(충무로) 입구. 카페와 상점이 즐비한 혼마치는 모던보이, 모던 걸이 산보삼아 거닐던 코스였다. 왼쪽 건물이 경성 우편국이다. /서울역사박물관
◇책방과 카페의 진고개
종로를 거쳐 가는 곳은 진고개(현 충무로2가)였다. 책방과 카페가 즐비하고, 젊은 여성들이 즐겨 찾던 거리였다. 미쓰코시 백화점과 조지야 백화점이 들어서기 전부터 진고개는 ‘모던’의 본산이었다. ‘요지경 속 같은 전기불 바다를 헤엄하듯 걸어들어가면 젊은 여성의 전람회라 할만치 흘겨보아도 좋고 노려보아도 좋고 가깝게 가서 분내를 맡아 보아도 좋을 낯모를 미인들이 수없이 마주쳐준다. 그들이 가진 젊음! 그것은 보는 사람의 마음까지를 젊게 해준다.’
걷다가 지치면 책방에 들어가 잡지와 신간을 뒤적이고 또 피곤하면 카페로 들어가 ‘차 한잔이나 쏘다수 한잔으로’ 피로를 녹였다. 일본인이 주로 살던 남촌 혼마치(本町·지금의 충무로)는 소비·유흥의 중심지였다.

▲종산이들이 산책하던 종로 네거리 풍경. 대로는 널찍하게 정비됐지만 종로의 랜드마크인 화신백화점이 들어서기 전이라 썰렁하다. /서울역사박물관
◇종로 밤거리 밝힌 夜市
종로 거리는 전깃불 밝힌 야시(夜市)가 구경거리로 인기였던 모양이다. 1927년 봄 신문에 이런 기사가 났다. ‘벌써 야시가 열리어 온 겨울동안 방안에서 꿍꿍이 셈을 대든 ‘하이카라’ 아가씨와 서방님들의 산보가 야단이다. 어떤 ‘하이카라’는 단장을 함부로 내흔들다가 남의 머리를 맞혀 경을 치는 사람도 있고, 어떤 ‘하이카라’ 부부는 동부인 산보를 한다고 손을 마주잡고 군중의 틈으로 다니며 키 큰 사람은 허리도 걸어넘기기도 하고 어린 사람은 턱도 걸어 넘기니 위태해서 야시 구경이나 가겠나.’(조선일보 1927년4월9일 ‘휘파람’)

▲도심 산보를 즐기던 모던 커플이 아이스커피 한잔을 놓고 빨대로 같이 마시고 있는 만문만화. 조선일보 1930년 7월16일자
◇도쿄의 긴부라, 경성의 혼부라
도쿄 번화가 긴자(銀座) 거리를 누비는 모던 보이, 모던 걸을 ‘긴부라’로 불렀던 것처럼, 혼마치를 거니는 사람들을 ‘혼부라’라고 불렀다. ‘종산이’(종로 산보객), ‘진산이’(진고개 산보객)는 ‘긴부라’, ‘혼부라’의 번안인 셈이다.
‘소위 ‘혼부라’당의 음모가 1930년의 여름에는 더욱 노골화하야 진고개 차집, 빙수집, 우동집, 카페ㅡ의 파루수룸한 전등 아래에 백의(白衣)껄이 사나희와 사나희의 날개에 가리워 전기유성기 소리에 맞추어 눈썹을 치올렸다 내렸다 하며 새소리 같이 바르르 떠는 소리로 노래를 한다. 칼피스, 파피스도 좋거니와 잠오지 않게 하는 커피에도, ‘아이스커피’를 두 사람이 하나만 청하여다가는 두 남녀가 대가리를 부비대고 보리줄기로 쪽쪽 빨아먹는다. 사랑의 아이스커피ㅡ’(안석주, ‘1930년 녀름’, 조선일보 1930년7월16일)

▲시내 산보를 즐기던 화가 도상봉, 나상윤 부부. 한달에 절반쯤은 산보를 다닌다는 인터뷰가 조선일보 1932년1월2일자에 실렸다. 아래 큰 사진은 나상윤, 작은 사진은 도상봉.
◇'종산이, 진산이’ 도상봉 부부
조선일보 1932년 1월2일자엔 당시 드문 화가 부부였던 도상봉·나상윤 집을 찾아가 인터뷰한 기사가 실렸다. 제목은 ‘자유결혼의 신가정방문기-채색으로 영롱히 그린 화폭 같은 스위트홈 생활’. 남편과 일본 유학을 함께한 나상윤(1904~2011)은 대표적인 모던 걸이었다. 기자가 ‘한 달이면 며칠동안이나 산보를 하십니까’ 묻자, 나상윤은 ‘반달씩은 된다’면서 ‘우리 살림은 기분적이다’고 했다. 나상윤은 부부가 함께 산보하면서 종로의 찻집 ‘멕시코’에 들러 커피를 마시고, 조지야 백화점, 미쓰코시 백화점에 가서 저녁도 먹는다고 답했다. ‘혼부라’는 모던 부부의 중요한 일상이었다.
◇심훈의 ‘혼부라’, 채만식의 ‘혼산이’
종산이, 진산이는 문학 작품에 더러 등장했다. 채만식 단편소설 ‘종로의 주민’ 주인공인 영화감독 송영호는 매일같이 도심 산보를 즐겼다. 종로 네거리에서 광교를 지나 혼마치 미스코시 백화점에서 커피 한 잔 마시고, 메이지초 식당에서 덴푸라로 점심을 먹은 뒤 조지야 백화점을 지난 종로로 돌아오는 게 일과였다. 심훈이 1933년 조선중앙일보에 연재한 소설 ‘영원의 미소’에도 혼부라가 등장한다.
‘”날두 이렇게 풀렸는데, 우리 혼부라(본정으로 산보한다는 말)나 좀 하고 들어가자꾸나”하고 백화점을 나오는 계숙의 외투 소매를 끌어당긴다.’
◇반나절 산보동행에 3원, ‘스틱걸’
산보에 동행하는 서비스로 돈을 버는 여성도 등장했다. 이른바 ‘스틱걸’. 이 신종 직업을 해설하는 기사가 신문에 실렸다. ‘한 시간에 일금 XX만 주면 사람과 장소를 묻지 않고 산보의 길 동무가 되어주는 직업 부인이 있다. 그들은 단장 모양으로 이 남자 저 남자의 팔에 걸려 다니는 까닭에 ‘스틱크껄’이라는 말이 생겼다.’(조선일보 1931년1월9일 ‘유행어’) 종로에서 본정(本町·혼마치)까지 한번 도는 데 정가는 3원이었다. 당시 여공 하루 일당이 60전이었으니 몇시간 길동무 해주고 닷새치 일당을 챙긴 셈이다.
◇안석주의 ‘모던 보이’ 비판
1920~1930년대 조선일보에 만문만화를 그린 석영 안석주는 나팔바지 차림으로 거리를 활보하는 모던 보이가 못마땅했던 모양이다. 서양 영화를 본떠 유행을 따라가는 모습이 줏대없이 보였을 것이다.
‘해롤드 로이드의 대모테 안경이 조선의 젊은 사람의 유행이 되었고, ‘빠렌티노’의 귀밋머리 긴 살적이 조선 청년들의 뺨에다가 염소털을 붙여놓았고, ‘뻐스터 키ㅡ톤’의 젬병모자가 조선 청년의 머리에 쇠똥을 얹어 주었으며, 미국 서부활극에 나오는 ‘카ㅡ보이’의 가죽바지가 조선 청년에게 나팔바지를 입혀주었다.’ ‘그러나 다 쓰러져가는 초가집만 있는 조선의 거리에 그네들이 산보할 때에 그는 외국의 풍정(風情)인 듯이 느끼리라. 대체 그대들은 아무 볼일도 없이 길로 싸다니는 까닭을 모르겠다.’(조선일보 1928년2월7일 ‘모ㅡ던 뽀이의 산보’) 안석주는 파리 샹젤리제, 베를린 운터덴린덴, 런던 피커딜리, 뉴욕 브로드웨이 같은 데나 늙기전에 한번 가서 놀고 오라고 야유했다.
‘산보’의 자유는 근대가 안겨다준 선물이었다. 20세기 초까지만 해도 양갓집 부부가 함께, 또는 여성이 혼자 도심 거리를 다니며 구경할 기회를 얻기란 쉽지 않았다. 1920년대 들어 모던 보이, 모던 걸은 양장(洋裝)에 중절모와 지팡이, 양산을 쓰고 거리를 쏘다니며 자유를 만끽했다. 그들의 일거수 일투족은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킬 수밖에 없었다. 서양 영화에서나 구경한 패션으로 차려입고 경성 도심을 쏘다니던 종산이, 진산이들은 100년 뒤 후손들이 K팝과 ‘오징어 게임’으로 세계의 유행을 선도할 세상이 올 줄 짐작이나 했을까.
◇참고자료
신명직, 모던보이, 경성을 거닐다,현실문화연구,2003
심훈, ‘영원의 미소’, 삼중당문고, 1975
蒼石生, ‘鍾散이, 진散이’, 별건곤 1927년2월
황호덕, 명동번창기 혹은 무지개 다리의 백일몽, 교수신문, 2012년5월9일, http://www.kyosu.net/news/articleView.html?idxno=25192
10.23 100년전 여성 사진가가 찍은 ’산소같은 그녀’
홍일점 사진사 이홍경, 1921년 관철동에 부인사진관 개설

▲갸름한 얼굴에 미소를 띤 여성의 얼굴은 지금 로맨틱드라마에 등장해도 자연스러울 만큼 모던하다. 1920년대 이홍경이 찍었다. 인사동 경성사진관 도장과 남편인 채상묵이 감수했다는 인장이 찍혀있다./한미사진미술관 소장
1926년 조선 여성의 직업을 소개하는 신문기사에 사진사가 등장했다. ‘아직 조선에서 오직 하나인 여자사진사’로 소개된 이홍경씨가 주인공이었다. ‘8년전부터 남편과 함께 사진술을 공부하여 현재 인사동에 경성사진관을 열었고, 한편으로 근화여학교 사진부 생도들을 가르치나니 조선에 첫 시험인 그에게 사진사로서의 설움과 기쁨’(조선일보 1926년 5월18일 ‘조선여성이 가진 여러 직업 8-사진사’)을 인터뷰한 기사였다.
이홍경의 사진 스승은 구한말,일제때 초상화로 유명한 채용신의 셋째 아들이자 역시 초상화가였던 남편 채상묵이었다. 조선인 사진가 수가 손꼽을 정도였던 1921년5월 이홍경은 종로구 관철동 75번지 우미관 앞에 ‘부인 사진관’을 개설했다. 여성 사진사가 여성 전용사진관을 개설한다는 게 당시로서도 화제였던 모양이다. ‘경성에 부인사진관 개업은 리홍경 여사가 처음이라더라’(조선일보 1921년 5월22일 ‘부인사진관’)는 신문 기사가 날 정도였다.
◇신문 1면에 ‘부인사진관’ 개업 광고

▲조선일보 1921년 5월25일자 1면에 실린 경성부인사진관 개업광고. 이홍경은 이름을 당당히 내걸고 나섰다.
당시 조선일보 1면에 실린 개업광고는 ‘신문화 건설’과 ‘예술적 관념’을 내걸고 거창하게 시작한다. ‘신문화를 건설하며 새 사업을 이루려는 우리 사회에 오직 그 요소인 예술적 관념이 결핍하옴은 우리의 항상 감탄하는 바인 줄로 생각해와 본인이 이에 다년간 연구해온 결과….’
‘3200촉의 전기를 응용하여 정선한 기술로써 요구하시는 대로 수응하겠삽기에…’라는 정중한 문구와 함께 ‘朝鮮婦人寫眞館 主 李弘敬’이라고 이름을 내걸었다. 여성이 자기 이름을 내걸고 사업을 한다는 게 낯선 시대였기에 파격적이었다.
이홍경의 마케팅은 꽤 성공적이었던 모양이다. 남녀 내외가 심해 남자가 여성을 촬영하는 게 어려웠던 당시 여건상, 여성 고객을 끌어들이기에 유리한 이홍경은 적임자였다. 한국사진사 연구자 이경민에 따르면, 이 부인사진관은 개업 10개월만에 건물을 2층으로 확장하고 설비를 대거 들일 만큼 성황을 이뤘다.
1924년을 전후해 남편까지 그림에서 사진으로 전업하면서 사진관 이름을 ‘조선사진관’으로 바꿨다. 이듬해 종로1가에 분점을 낼 만큼, 인기가 있었다. 1926년 쯤엔 이 사진관을 넘기고 인사동으로 자리를 옮겨 ‘경성사진관’을 개업했다.
◇첫 여성사진사는 1907년 ‘향원당’
이홍경은 조선의 두번째 여성 사진사였다. 첫번째 홍일점 기록은 고종의 시종인 김규진(1868~1933)이 1907년 경성 석정동에 개설한 천연당사진관에서 활동한 향원당(香園堂)으로 알려져있다. 천연당사진관은 개업초부터 여성 사진은 여성이 촬영한다는 광고를 신문에 냈다. 1907년10월25일자 대한매일신보엔 ‘부인사진사 향원당’명의로 광고를 실었다. ‘포덕문 밖 신작로변 김규진 집에 천연당사진관을 건설하고 부인네 사진을 백히옵는데 값도 싸고 사진 정교하오며 내외 엄숙하고 부인 사진은 여인이 백히오니 사진 백히기 원하시는 부인네는 본당에 왕림면의하시옵’
향원당이 누구를 가리키는 지는 아직 명확치 않다. 사진사연구자 최인진은 ‘새문안교우 문답책’(1907~1914)에 김규진 부인 김진애의 직업이 ‘사진박는 것이오’라고 기재된 것을 토대로 김진애가 향원당이라고 밝혔다. 하지만 자손들의 증언과 일치하지 않아 확정하긴 이른 편이다.
◇”사진 찾을 때 거의 트집…조선 사람의 습관?”

▲조선일보 1926년5월18일자에 실린 '조선 여성이 가진 여러 직업 8'. 사진사 이홍경이 일하는 사진과 인터뷰를 게재했다.
여성 사진사를 괴롭히는 일은 무엇이었을까. 이홍경은 이렇게 말했다. ‘사진을 찾아가는 사람이 ‘잘되었다’는 말을 하며 기뻐하는 모양을 볼 때에는 역시 한없는 기쁨을 맛볼 수있으나 이것이 조선 사람의 습관인지는 모르되 천에 한 사람 마주 서서 칭찬하는 이는 없고 거의 다 트집을 잡으려고 애를 쓴답니다.’
이홍경은 사진사가 갖출 조건으로 인내력과 주의력을 꼽았다.
1930년 조선총독부가 실시한 ‘국세조사’ 통계자료엔 당시 경성에서 활동한 여성 사진사가 모두 15명, 그중 조선인 여성은 4명이라고 기록했다. 이름은 확인되지 않지만 이홍경외에도 여러 명의 조선인 여성 사진사가 있었다는 얘기다.
◇참고자료
이경민, 한국여성 사진사 1 :1980년대 여성사진운동, 서울시립미술관, 2021
박주석, 우리나라 두번째 여성 사진사 이홍경, 우리문화 274, 2019, 8
10.30 ‘단발娘'은 저항의 상징?
조선의 첫 단발랑 강향란, 인습타파 내세운 사회주의 계열 주세죽, 허정숙

▲1934년 일본 카마쿠라 바닷가에서 포즈를 취한 최승희. 쇼와시대 사진가 쿠와바라 키네오(桑原甲子雄)작품이다. 최승희는 당대 대표적 '단발미인'이었다. 2011년 광주시립미술관이 개최한 최승희 타계 100주년 '불꽃처럼 바람처럼, 무희 최승희'전에 나왔다. /광주시립미술관
1932년 스물넷 김기림이 잡지에 이런 글을 썼다. ‘’미쓰·코리아’여 단발하시오’(동광 37호 1932년 9월)
단발은 기생이나 카페 웨이트리스사이에 유행하던 시절이었다. 조선일보 기자였던 그는 ‘단발의 여러 모양은 또한 단순과 직선을 사랑하는 근대감각의 세련된 표현’이라고 옹호했다. 모더니스트 시인다운 발상이었다.
고등교육 받은 신여성들이 간혹 단발을 하곤 했다. ‘동광’에 함께 기고한 김활란 이화여전 교수도 삼사년 전에 단발을 했다. 김활란은 ‘머리를 깎게 된 특별한 동기는 없다’면서도 ‘단발을 하면 간편한 것은 두말할 것없고, 미적 방면으로 보더라도 각기 자기 얼굴 모양에 따라 그 얼굴에 조화되도록 머리를 자르면 미를 손상하지 않을 뿐 아니라 도리어 더 ‘미’를 나타낼 수있지 않은가’라고 했다. 김활란은 근자에 여학교에 단발하는 여학생이 많아졌다면서도, 이화전문에 두 세명, 이화고보에 몇 명 정도라고 했다. 1930년대 초까지도 여학생의 단발은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였다.
◇의사 현덕신의 단발
동대문 부인병원 의사 현덕신(1896~1962)은 서른살이던 1926년 단발을 했다. 이화학당을 나와 동경여자의학전문학교를 졸업한 현덕신의 단발은 신문에 소개될 만큼 화제가 됐다. ‘밤에 자다가 갑자기 왕진을 하게 되는 일이 비일비재할 뿐 아니라 급한 환자나 방금 해산하려는 산모가 있는 때에는 일분일초를 다투게 됩니다. 그럼으로 저는 무엇보다 그런 때에 시간을 덜 들게 하자는 것이 단발한 첫 목적이라고 하겠고, 또는 머리를 깍고 보매 생각하던 것보다도 더욱 가뜬하고 편리하외다.’(조선일보 1926년 7월4일 ‘이야기거리’) 현덕신은 ‘실생활의 편리를 도모하고자 하는 것뿐’이라고 했다.

▲조선일보 1930년 1월7일자에 실린 최승희. 단발랑답지않게 보수적 연애관을 가졌다고 썼다.
◇첫 단발랑, 강향란
조선의 첫 단발랑(斷髮娘)은 강향란으로 알려져있다. 기생 출신인 그는 청년 문사와 사귀다 결별당하자 머리를 잘랐다. 1922년 단발로 학교에 다니는 사진이 보도되면서 그는 유명인사가 됐다. 강향란의 일거수일투족은 물론 그의 뒤를 따른 단발랑에 대한 보도가 이어졌다.
1925년 주세죽, 허정숙, 김조이는 ‘종래의 제도를 타파하고 부자연한 인습을 개혁한다’면서 함께 단발을 했다. 사회주의 여성단체 조선여성동우회 간부들이었다. ‘부녀자의 머리카락을 자르는 건 외국에서는 이미 진부한 일에 속한다. 그러나 우리 조선에 있어서 그것을 단행한 그 용기는 다대타 한다.’ (조선일보 1925년8월23일 ‘부인단발’) 신문은 단발여성에 우호적이었다.
◇치열한 단발논쟁
모던 걸의 단발은 스캔들이었다. 1895년 ‘을미개혁’ 당시 남성의 단발이 강제되면서 반일(反日) 정서를 불러일으켰으나 구한말 이래 곧 유행으로 정착됐다. 하지만 여성의 단발엔 거부감이 강했다. 단발 여인들은 거리를 걷을 때마다 ‘단발랑’이라며 사람들의 구경거리가 되기 일쑤였다.
1920년대 ‘신여성’ ‘별건곤’ ‘동광’같은 잡지들은 앞다퉈 ‘단발 찬반논쟁’을 특집으로 다뤘다. 여성 단발 비판의 핵심 중 하나는 ‘무분별한 서양문화 수입’이었다. 소파 방정환은 여성 단발을 서양 것을 수입한 ‘허영심의 발로’라고 비판했다. 대중잡지 ‘별건곤’ 필자는 이렇게 호소한다. ‘외국 문화가 배울 것이 많고 외국 풍조에 본뜰 것이 많으나 이 단발만은 아주 그만두십시요! 머리를 깎는다고 되는 것이 아니며, 머리를 아니 깎겠다고 될 것이 안 되는 것이 아닙니다. 여성의 특징을 잃지 말고 외관에 있어서만 남달리 차리지 말고 내적 충실을 힘쓰시기 바랍니다.’(김병준, 여자 단발이 가한가 부한가’, ‘별건곤’1929년1월 )
◇스타 단발랑 최승희
‘단발랑의 상해도착’ ‘단발랑의 호소’처럼 단발 여성을 가리키는 ‘단발랑’은 신문,잡지의 최신 유행어였다. ‘화려한 무대에 아리따운 자태를 맘껏 날리며 몽땅 찍어버린 단발랑의 그야말로 소위 모ㅡ던인 (최승희)씨에게는 아름답고도 자유스러운 연예관이 있으려니….’(조선일보 1930년1월7일 ‘1930년의 조선여인은 장차 어떻게 변할 것인가’) ‘단발랑’은 당대 무용스타 최승희를 가리키는 말이기도 했다.
1930년대 후반 ‘퍼머’가 유행하기 시작했다. 신문에도 새 유행으로 퍼머를 소개하는 기사가 났다. ‘한때는 단발이라면 소위 ‘모던 걸’이라고 하야 일종 이단자와 같이 보아왔는데 어느새 단발은 소학교나 여학교에서 제복, 제모와 같이 취급되는 형편입니다.쪽진 머리는 솔방울만큼 적어지고 2,3년내 더욱 작년부터는 부쩍 ‘파ㅡ마넨트’가 유행하고 있습니다.’(조선일보 1939년 5월14일자 ‘문제의 파ㅡ마넨트’) 단발은 거스를 수 없는 대세였다.
◇참고자료
김미지, 누가 하이카라 여성을 데리고 사누, 살림, 2005
김주리, 모던 걸, 여우 목도리를 버려라, 살림, 2005
김수진, 신여성, 근대의 과잉,소명, 2009
11.06 클래식에 미치고 커피를 사랑했던 이효석
차이콥스키 ‘비창’, 베토벤 ‘대공’이 애청곡…'음악은 정신의 문을 열어주는 신기한 요술쟁이’

▲이효석은 경성제대 법문학부를 졸업한 엘리트였다. 그는 클래식광으로 불릴 만큼, 서양 고전음악을 즐긴 애호가였다./조선일보 DB
‘산허리는 온통 메밀밭이어서 피기 시작한 꽃이 소금을 뿌린 듯이 흐붓한 달빛에 숨이 막힐 지경이다.’
‘메밀꽃 필 무렵’을 쓴 이효석(1907~1942) ‘클래식’ 마니아였다. 봉평에서 대화까지 걷는 70리 길 풍경을 전원시(詩)처럼 기막히게 묘사한 이효석이 고전음악을 사랑한 애호가라는 사실은 낯설면서도 그럴만 하다는 생각이 든다. 강원도 평창군 봉평 출신인 이효석은 경성제1고보와 경성제대 법문학부를 나온 엘리트였다.
조선일보가 발행한 월간지 ‘조광’(1937년3월)이 문화예술인을 상대로 일상의 기쁨을 묻는 설문 조사를 했다. 이효석은 ‘음악을 들을 때’ ‘헨델의 교향악을 듣고 음악이 얼마나 귀한 것인가를 더욱 느꼈다’고 답했다.
평양 대동공전 시절 제자들의 증언도 일치한다. ‘선생님께서는 클래식 음악에 능통하고 계셨다. 그런데 우리가 평양에서 명곡을 접할 수 있는 곳은 ‘세르팡’이라는 명곡 다방뿐이었다…나는 클래식 명곡을 좋아해서 이 다방에 자주 들리고 싶었지만 용돈이 궁하여 자유롭게 들리지 못하였었다.’(정창희, ‘새롭게 완성한 이효석전집’ 8, 21쪽)

▲조선일보에서 낸 월간지 '조광'에 실린 이효석 대표작 '메밀꽃 필 무렵'. 당시 제목은 '모밀꽃 필 무렵'이었다. 조광 1936년10월호
◇바이올린과 피아노, 근대 문명의 도구
1920년대 경성 사람들은 서양 고전음악(클래식)을 근대인이 갖춰야할 필수 교양으로 생각했다. 악기를 다룰 줄 몰라도 사고, 연주곡목을 몰라도 음악회에 참석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시달렸다. ‘소위 남녀 중학생 아이들까지 겨드랑이에 바이올린을 끼고 다니고 부자, 연인을 졸라서 제 집에다 피아노를 사 놓고 무엇이 무엇인지 뭣도 모르며 뚱땅거리고 앉아있는 모양’(현대남녀음악가에게 여(與)하노라, 별건곤 47, 1927년3월)을 어렵잖게 볼 수있었다.
문화주택엔 피아노를 들여놓고, 유성기나 축음기 음악 소리가 흘러나와야 한다고 생각할 만큼, 음악은 근대 문명의 필수 장식품이었다. 클래식은 서구에 대한 열망이 강한 경성 사람들이 갖춰야 할 교양이었다.
◇이효석의 ‘낙랑다방기’
다방은 고전 음악을 들을 수 있는 몇 안되는 거점이었다. 1934년부터 평양 숭실전문에서 교편을 잡은 이효석은 평양 음악다방을 순례하는 ‘낙랑다방기’(‘박문’, 1938년 12월)를 썼다.
‘차 한잔을 분부하고 3,40분 동안 앉아 있노라면 웬만한 교향악 한 편쯤은 완전히 들을 수있다. 차이코프스키 ‘파세틱’도 좋고, 베토벤의 트리오 ‘대공’(大公)같은 것도 알맞은 시간에 끝난다. 대곡이 너무 세찰 때에는 하와이안 멜로디도 좋은 것이며 재즈 음악도 반드시 경멸할 것은 못된다.’
이효석은 차이콥스키 교향곡 6번 비창과 베토벤 트리오 대공을 즐겨 들었다. 그는 평양에 다방이 더 많이 생겨나 학생 눈에 띄지 않고 드나들 날을 고대한다고 썼다.
◇쇼팽 ‘즉흥환상곡’은 영혼의 울음소리
이효석은 소설에 음악을 자주 등장시켰다. 재즈 바를 차렸던 무라카미 하루키가 작품 속에 재즈와 클래식을 곧잘 등장시킨 것과 비슷하다.
‘환상 즉흥곡의 멜로디는 그대로가 바로 느껴 우는 영혼의 울음소리였다.폭풍우같이 감정이 물결치다가 문득 잔잔하게 가라앉으면서 고유한 애수가 방울방울 떴는 듯-그렇게 느끼면서 듣노라니 미란에게는 낮에 본 바다 생각이 나면서 항구의 감상이 다시 가슴속에 소생되었다. 가을 나무가 우수수 흔들리다가 한 잎 두 잎 낙엽 지는 광경이 떠오르면서 그런 나무 선 바다의 애수를 노래한 것이 그 곡조의 뜻인 듯이도 해석되며 지금 몸이 마치 그런 배경 속에 서 있는 듯 감상속에 온통 젖어 버렸다. 폴란드의 정서는 왜 그리도 모두 슬픈 것일까.’
1939년 발표한 장편 ‘화분’(花粉)에는 쇼팽 즉흥환상곡을 비롯, 베토벤, 슈베르트, 모차르트, 차이코프스키의 대표작이 잇달아 나온다. 단편 ‘가을과 山羊’엔 베토벤 교향곡 5번 ‘운명’이 등장한다. ‘찻집에 들렀을 때 레코드에서는 베토벤의 운명 교향곡이 흘렀다. 열리지 않는 운명의 철문을 두드리는 육중한 음향이 거의 육체를 협박해 오는 지경이었다. 운명 교향악은 음악이 아니오 운명 그것이다. 운명 교향악을 작곡한 베토벤은 음악가가 아니오 미치광이나 그렇지 않으면 조물주다. 애라는 운명교향곡을 들을 때마다 몸에 소름이 치고 금시 미칠 듯이 몸이 떨리곤 한다.’(野談 1938년 12월)
주인공 독백을 빌려 음악을 찬양하기도 했다. ‘풍성한 음악을 들을 때같이 세상이 아름답고 환상이 샘같이 솟아서 살아 있는 것이 고맙고 즐겁게 여겨지는 때는 없다.이 생명의 감격이 눈물을 솟게 하는 것이다.’(‘성찬’(聖餐), 여성 1937년4월)

▲이효석이 스물세살 때 조선일보에 연재한 '마작철학' 첫회. 조선일보 1930년8월9일자
◇재즈를 사랑한 이효석
‘”적적들 하신 것 같으니 레코드나 한 장 걸까요.” 여주인은 친절하게도 축음기 앞으로 나아갔다. 단골인 터이라 두 사람의 은근한 사이도 벌써 대강 짐작하고 동정하는 눈치여서 간간이 그 정도의 친절을 베푸는 것이었다. 이윽고 ‘제 두 아무울’의 노래가 흘렀다.두 사람의 애인을 가진 여자의 노래가 낭랑하게 흘렀으나 그것은 미례의 현재의 정서와 심경과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미례는 꽃같이 잠자코만 앉아서 서글픈 표정으로 노래를 듣고 있다.’(인간산문, 조광 1936년7월)
‘제 두 아무울’은 1930년 미국 흑인 가수 조세핀 베이커가 부른 ‘나의 두사랑’(J’ai Deux Amour). 지구 반대쪽 경성에도 프랑스 최신 샹송이 유행했다. ‘클래식 광’ 이효석도 ‘고전보다 차라리 재즈가 좋을 때도 있다’고 할 만큼, 재즈를 즐겼다.
이효석은 영화와 미술은 물론 커피와 식도락을 즐긴 모던 보이였다. ‘낙엽 타는 냄새같이 좋은 것이 있을까. 갓 볶아낸 커피의 냄새가 난다.’ 그의 대표 수필 ‘낙엽을 태우면서’의 유명한 구절이다. 조선일보(1938년4월28일~5월5일)에 연재한 ‘채롱’엔 영화와 미술, 음악에 심취한 이효석의 일상이 담겨있다. 평양 냉면을 비롯한 음식 순례기를 기고한 적도 있다.
이효석은 음악을 요술쟁이에 비유했다. ‘음악은 정신의 문을 열어 주는 신기한 요술쟁이다. 마음속에 조그만 우주의 신비를 자유자재로 계시해 보이는 기막힌 요술쟁이다.’(단편 ‘일요일’, ‘삼천리’ 1942년1월) 커피와 음악을 사랑한 이효석은 서른 다섯이던 1942년 5월 뇌막염으로 일찍 세상을 떴다.
◇참고자료
이효석, ‘성찬’, ‘여성’ 1937년4월
이효석, ‘낙랑다방기’, ‘박문’ 1938년12월
이효석, ‘가을과 산양’, ‘야담’ 1938년 12월
이효석, ‘일요일’, ‘삼천리’ 1942년 1월
조윤영, ‘경성의 음악회(1920~1935): 식민지 일상과 근대의 경험, 그 다양한 시작에 대하여’, 이화여대 박사논문, 2018
임태훈, ‘음경’의 발견과 소설적 대응-이효석과 박태원을 중심으로’, 성균관대 대학원 석사논문, 2008
‘새롭게 완성한 이효석전집’ 8, 창미사, 2003
11.13 1930년대 달군 ‘국민가수’ 오디션 열풍
고복수, 진방남 등 콩쿠르 거쳐 스타로 떠올라

▲일곱살 유치원생 김유하가 '내일은 국민가수' 첫회에서 '아, 옛날이여'를 능숙하게 불러 감탄을 자아냈다.

▲김광석의 '그날들'을 부른 오십세 무명가수 박창근씨.
일곱살 유치원생 김유하의 ‘아, 옛날이여’에 넋이 나가고 쉰살 무명가수 박창근이 부른 ‘그날들’에 애잔함을 느낀 이들이 많았을 것이다.
TV조선 발(發) 오디션 열풍이 거세다. ‘미스 트롯’, ‘미스터 트롯’에 이어 ‘내일은 국민가수’가 TV앞으로 시청자를 불러모은다. 가창력과 끼를 갖춘 재목이 이렇게 많았나 싶다. 하루 200개씩 숯불 닭갈비집 불판을 갈았다거나 무대 공포증 때문에 중도 포기했던 사연까지 더해지면서 매회 ‘인생극장’ 다큐 보는 것 같다.
1930년대에도 오디션 대회가 폭발적 인기를 누렸다. 음반사가 앞장서고 신문이 공동주최, 후원하는 가수선발대회였다. 이름하여 ‘전국 음악 콩쿠르’. 지역 예선을 거친 전국의 노래꾼들이 본선을 치러 가수 데뷔코스를 밟았다. 1933년 10월 당시 굴지의 음반사였던 콜럼비아사가 주최하고 조선일보사가 후원한 ‘명가수 선발 음악대회’가 그 시초였다.
◇전국 돌며 예선 치러
‘지방에 숨어있는 명가수를 찾아내어 홀륭한 소리판을 만들겠다는 뜻으로 콜럼비아 축음기회사에서 지방순회를 한다함은 이미 보도한 바어니와 지난 31일 군산 희소관(喜笑舘)에서 그 예선을 하였는데 십여명의 수험자중에서 군산 빈정에 거주하는 정일경(鄭日敬·20)양이 당선되었다. 양은 일찍 평양 여고시대부터 성악에 대한 천재적 소질이 있어 일반으로부터 매우 칭찬을 받아오던 바 금번의 당선은 양의 앞날을 개척함에 있어 실로 천재일우의 기회라고 일반은 대단 유망시하고 있다.’(조선일보 1933년11월4일 ‘콜럼비아 가수연주회 성황’,파란 부분을 누르면 옛 기사를 볼 수있습니다)
콜럼비아사는 경성을 시작으로 평양, 신의주, 함흥, 원산, 대구, 군산, 청주 등 10개 도시에서 지역별로 2~3명 정도의 가수를 선발했다. 이렇게 선발한 남녀가수 19명이 1934년 2월17일 경성 소공동 경성공회당에서 최종 결선을 치렀다.

▲1934년 2월17일 경성공회당에서 '명가수 선발 음악대회'가 열린다는 사고가 조선일보에 실렸다. 현제명, 윤성덕, 메이 영이 심사위원을 맡았다. 조선일보 1934년 2월14일자
◇현제명, 윤심덕이 심사위원
당시 결선 심사위원은 미국유학파이자 연희전문 교수였던 성악가 현제명, ‘사의 찬미’로 유명한 윤심덕 동생이자 이화여전에서 피아노를 가르친 윤성덕, 그리고 같은 학교의 메리 영이었다. 모두 서양 음악을 전공한 정통 클래식 연주자였다.
대회 이틀전인 조선일보 2월15일자엔 결선에 오른 19명 사진과 당일 부를 곡목이 소개됐다. 결선 당일인 2월17일 저녁 7시 경성 공회당은 ‘물밀 듯 하는 청중은 정각 전에 대만원을 이룬 대성황이었다.’ ‘각 가수가 차례로 등단하자 연달아 재청을 청하는 등 근래에 드문 인기를 끌었다.’ (조선일보 1934년2월19일 ‘선발가수대회 대성황’)
이날 19명이 1,2,3부로 나뉘어 출전했는데, 1,2,3등이 모두 3부에서 나왔다. 3부 맨 마지막에 ‘水夫의 아내’를 부른 전남 대표 정일경이 1위, ‘사랑은 구슬퍼’를 부른 고복수가 2위, ‘멕시코 야곡’을 부른 함북 대표 조금자가 3위였다.

▲1934년2월18일 저녁7시 조선일보가 후원한 '천재 가수 선발 음악대회' 결선이 열린 경성 소공동 경성공회당. 대회 직전 인파가 몰려 성황을 이뤘다. /조선일보 DB

▲ 1934년 콜럼비아 레코드사가 주최하고 조선일보사가 후원한 '명가수 선발 음악대회'에서 입상한 고복수. 히트곡 '타향살이'로 스타로 떠올랐다. 오른쪽은 그의 아내 황금심. '알뜰한 당신'으로 인기를 얻은 가수였다./조선일보 DB
◇정일경 조금자 고복수, 콩쿨이 배출한 가수
정일경과 조금자는 수상 직후, 도쿄로 건너가 콜럼비아 레코드사에서 음반을 취입했다. (조선일보 1934년3월7일 ‘전조선 가수대회서 선발된 두 가희’), 같은 해 3월13일 밤 경성방송국에 출연해 라디오에서 5월에 발매될 새 음반 수록곡 ‘섬색시’(정일경) ‘이별 서러’(조금자) 등 7곡을 생방송으로 불렀다. ‘섬색시’는 중외일보 학예부 기자를 거쳐 경성방송국 편성계에서 일하던 시인 이하윤(1906~1974)이 노랫말을 썼다. 이하윤은 정일경이 같은 앨범에서 부른 ‘처녀 열여덟엔’도 쓰는 등 유행가 100여편 가사를 쓴 작사가였다.
고복수의 출발은 순탄치않았다. 수상 직후 음반을 낸 여가수들과 달리, 콜럼비아사 스타였던 채규엽과 강홍식에 눌려 활약을 못했다. 그러다 오케 레코드에 스카우트됐고 ‘타향살이’가 히트하면서 스타로 떠올랐다. 고복수는 ‘알뜰한 당신’으로 인기 높았던 황금심과 1941년 결혼, 부부 가수로 활약했다.

▲1934년 조선일보사가 후원한 '명가수 선발 음악대회'에서 1, 3위를 차지한 정일경(왼쪽), 조금자. 입상 직후 도쿄에서 새 음반을 취입했다. 조선일보 1934년3월7일자
◇신문은 왜 오디션 대회를 후원했을까
신문은 왜 가수 선발 대회를 후원했을까. 1934년 2월15일자 조선일보엔 이런 글이 실렸다. ‘조선의 가요(歌謠)가 고래로 발전되지 못한 것은 정치적 기타 여러가지 원인이 있겠으나 첫째로 노래를 천히 알아서 ‘점잖은 사람은 노래를 몰라야 한다’는 폐풍이 있게 된 뒤로 인간 생활에 커다란 힘을 가져 오고 그 민족의 미래를 제시하는 그 가요가 매몰되었으니...’
‘조선의 가요가 영원히 잡멸되려할 때에 ‘레코—드’를 다리로 하고서 외래의 유행가와 가요가 조선사람의 넋속을 파고들어 고유한 조선의 문화에까지 영향을 끼치고 있거니와 이 상태로는 조선의 가요의 미래, 다시 말하면 조선 사람의 넋에서 그 입에서 그 피의소리인 노래가 영원히 사라지고 다만 소리없는 인간, 시(詩)가 없는 인간, 생의 약동이 없는 인간으로서 살게 되겠으니 이것이 그저 웃어 버릴 일이 아니다.’ (’천재가수선발대회에 등단할 기대(期待)되는 후보자(後補者)들’)
외국 유행가의 범람으로 ‘조선의 넋과 생의 약동’이 담긴 우리 노래가 사라질 위기에 처했기에 우리 가요를 살려야한다는 취지였다. 대중 가요를 살리려면 가수가 필요하니, 그 가수를 뽑는 선발대회를 열어 ‘조선의 새 가요도 이들 입으로부터’ 만들어나가자는 운동이었다.

▲작사가로 더 유명한 반야월은 1934년 2월 조선일보가 후원한 '명가수 선발 음악대회'에 입상하면서 가수로 데뷔했다. 2009년 데뷔 70주년을 맞은 반야월씨가 헌정음악회에 참석했다.
◇가수 겸 작사가 박창오(반야월)
훗날 작사가로 이름을 날린 반야월(半夜月·1917~2012·본명 박창오)도 조선일보가 주최한 가수선발대회에서 입선해 가수로 데뷔했다. 1939년 태평레코드와 조선일보가 공동주최한 ‘전국 음악 콩쿠르’였다. 박창오는 결선 전날 밤 불이 나는 꿈을 꿨는데 이 대회에서 1등을 했다. 하지만 대회 직후 자유곡으로 불렀던 ‘춘몽’의 가사가 불순하다는 이유로 일본 경찰에 끌려가 심문을 받았다.
박창오는 그해 ‘진방남’이란 예명으로 데뷔했다. 이듬해 취입한 ‘불효자는 웁니다’가 당시 최고 음반 판매량을 기록하면서 인기 가수로 떠올랐다. 여기엔 사연이 있다. 박창오가 일본에서 이 노래를 녹음할 당시, 실제로 어머니가 별세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울음이 그치지 않아 당일 녹음을 취소하고 다음날 녹음을 했다. 하지만 다음날에도 노래에 울음이 섞였는데 이게 오히려 사람들의 공감을 얻어 음반이 히트했다는 것이다.
반야월은 광복 이후엔 작사에 주력하면서 수천곡이 넘는 작품을 남겼다. ‘울고 넘는 박달재’ ‘단장의 미아리고개’ ‘산장의 여인’ ‘소양강 처녀’ 등 한국인의 애창곡이 그의 작품이다.
◇참가비 납부에 레코드 강매까지
당시 오디션 프로그램이 얼마나 인기를 누렸던지 잡음도 잇따랐다. ‘콩쿨에 신입하는 사람은 일금 3원야를 납입해야된다는 데는 그냥 그대로 시인할 수있다손치더라도 그외에 또 그 회사의 ‘레코ㅡ드’ 2장을 사야된다는 데는 너무도 어처구니가 없는 규정임에 얼굴이 찌푸려지고 만다.’ (조선일보 1940년4월25일 ‘가수선발 ‘콩쿨’과 컴머ㅡ샬리즘’) 필자는 음반 장사는 영업부원에게 맡기고 콩쿨은 깨끗하게 치르라고 주문했다. 여가수를 뽑으면서 노래보다 미모와 애교만 본다는 지적도 나왔다. 그래도 ‘유행가’는 대중의 고달픈 삶을 위로하는 힘으로 뿌리내렸다.
◇참고자료
장유정, ‘천재 가수를 내어라’, 대산문화 47, 2013년 봄
장유정, ‘대중가요 작사가 반야월 작품 연구’, 한국문학논총 64집, 2013년 8월
김준영, ‘레코드 문예부장의 제작고심기’, 조광 4-2, 1938년 2월
11.20 ‘프로 개미’ 김기진의 이중생활
1935년부터 5년간 매일 명동 주식장 출근, 저녁엔 매일신보 편집

▲1962년초 서울 수유리 김기진 집을 찾은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팔봉은 6.25때 인민재판을 받아 죽을 고비를 넘긴 뒤 육군 종군작가단 부단장으로 활약, 금성화랑무공훈장을 받았다. /김용한씨 제공
‘英佛 對 獨逸 마침내 선전포고!’
1939년 9월4일 각 신문은 주먹만한 활자로 영국 체임벌린 총리가 전날 독일을 상대로 선전포고를 했다는 내용을 톱기사로 실었다. 세계2차대전 발발을 알리는 기사였다. 이 암울한 소식에 만세를 부른 사람들이 있었다. 주식 투자자들이었다. 월요일 개장과 함께 주식시장이 폭등했기 때문이다.
‘독폴란드전쟁으로 주식시장에서는 열광적 폭등을 보였는데, 영국이 드디어 독일에 대하여 선전포고를 하였으므로 구주제이차대전이 벌어진 만큼 하룻밤을 지낸 4일의 주식시장은 폭등을 연출했다. 명치정(町)주식시장에서는 동신(東新)이 174원에서 뛰어 한꺼번에 25원이 올랐고, 종방(鐘紡)이 21원80전이 뛰어 184원90전, 조신(朝新)이 4원40전이 뛰어 35원40전에 시작된 후 파란만장이었다.’(조선일보 1939년9월5일 ‘포성에 놀란 주식’)

▲2차대전 발발을 알리는 조선일보 1939년9월4일자 1면
‘동신’은 도쿄취인소 신주(新株), ‘조신’은 조선취인소 신주를 뜻하는데, 각각 도쿄·조선의 증권거래소 주식을 가리킨다. 당시 주식거래소는 주식회사였고, 증시에 상장돼있었다. ‘동신주’는 조선 주식 거래량 절반을 차지하는 명치町(명동) 주식시장 최고의 블루칩이었다. 이 주식이 하루 아침에 174원에서 199원으로 14% 폭등해버렸다. 당시 증거금10%만 내면 주식 거래를 할 수 있었기 때문에 가진 돈의 10배까지 주식을 사고 팔 수있었다. 동신주에 투자한 사람은 하루만에 최고 14배 수익을 거뒀으니 만세가 나올 수밖에 없었다.
◇2차대전 발발하자 주식 폭등
동신주 폭등에 환호한 투자자 중엔 조선프롤레타리아 예술가동맹(카프·KAPF) 출신 시인 겸 평론가인 김기진(1903~1985)도 있었을 것이다. 김기진은 당시 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 사회부장이었다. 30대 중반이었으나 조선일보와 시대일보를 거친 중견인데다, 카프 활동 때문에 좌익 낙인이 찍혀있었다. 김기진은 1933년 조선일보를 그만 둔 뒤 금광 개발에 뛰어들었다가 빈털터리가 됐고 좌익 사건으로 경찰에 끌려가 곤욕을 치렀던 터였다.
이래저래 지쳤던 김기진은 ‘모가지에 달린 개패를 떼버린다’는 심정으로 매일신보에 입사했다. 그는 색다른 조건을 내걸었다. 직위는 상관없지만, 낮에는 출근 안하고 밤에 만드는 조간편집에만 출근하겠다는 조건이었다. 매일신보 부사장인 이상협과는 시대일보에서 함께 일한 인연이 있어 거래가 가능했다.
‘낮에는 명동에 있는 주식취인소에 나가앉아서 투기를 해볼 결심이었던 까닭이다. 정어리 공장도 해보았고, 금광도 해보았고 했지만, 이런 것은 막대한 자본과 전문적 기술과 10년 이상의 세월을 요하는 거창한 기업이지만, 주식매매만은 큰 자본이 필요치 않고 오직 총명한 판단만으로 짧은 시일내에 일확천금을 할 수 있는 일이니까 이것을 해야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김기진, 나의 회고록 12, 세대 1965년9월)

▲1931년10월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종로경찰서에 체포된 김기진. 당시 조선일보 기자였다. /국사편찬위원회 일제감시대상인물카드

▲1922년 경성 명치정에 들어선 경성주식현물취인소. 1932년 조선취인소로 통합됐다가 광복후인 1956년 대한증권거래소가 1979년 여의도로 이전하기 전까지 입주했다. 금융중심가 명동의 본산이다.
◇오전엔 명동 주식장 출근, 밤에는 신문 1면 편집
‘그래서 나는 날마다 아침 9시5분전에 중매점에 나가 앉아서 그날 아침 일본 오사카 시장에서의 기부시세를 받아가지고 경성취인소에서 시세가 정해지는 것을 보았다. 며칠동안 이렇게 공부해 가지고 10주, 20주씩 청산시장의 동신주만을 가지고 팔았다 샀다하는 연습을 해가면서 오후3시에 후장의 매매가 끝나면 신문사로 출근하는 것을 규칙적으로 되풀이했다.’
김기진은 나름대로 주식 공부를 하고, 연습까지 했다. ‘대표적 주가의 오르고 내리는 고저 운동의 법칙만 알아낸다면 과학적 방법으로 일확천금할 수있다는 신념이 있었던 까닭이다.’ 소액투자로 시작한 김기진은 5년간 ‘동신주’만 사고팔았다. 일본 전역에서 수십만명이 거래하는 것인만큼 특정 개인이 가격을 좌우할 수 없고, 일본을 대표하는 주식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주식의 운동은 미묘한 것이어서 연구하면 할수록 취미진진한 것’이라고 할 만큼 주식에 흠뻑 빠졌다. 원금의 15배까지 벌어본 적도 있지만, 5년 뒤 결산은 신통찮았다. ‘1935년봄부터 1940년 여름 동신주 상장이 일본 전국에서 금지될때까지 5년동안 나는 비가 오거나 눈이 오거나 하루도 빼놓지 않고 열심히 취인소 근방에서 살았는데 결국 돈을 벌지는 못했다.’
◇조선의 ‘주식왕’ 조준호
당시 조선의 ‘주식왕’으로 알려진 인물이 조준호다. 대한제국 고위관료 출신 갑부 조중정의 맏아들로 태어나 도쿄 주오대 법학과를 졸업한 조준호는 스물둘이던 1925년 시대일보에 1만원을 출자해 전무로 신문사 경영에 참여했다. 동갑내기 김기진이 같은 신문사 일선 기자였다. 시대일보는 이듬해 경영난으로 문을 닫았다. 조준호는 미국과 브라질을 둘러보고, 영국 유학까지 마친 뒤 1929년 사업을 재개했다. 조선윌사석유회사(1930)와 동아이발기구 주식회사(1931)를 설립하더니 서른 한살이던 1934년 동아증권을 세워 주식거래에 뛰어들었다.
증권사는 설립 첫해부터 조선취인소 최고의 중매점으로 떠올랐다. 조선취인소 거래액 10% 이상이 동아증권을 통해 이뤄졌을 정도다. 1936년 한해에만 20만원(현재 약 200억원)을 벌었들였다. 1935년엔 인천에 미두 중매점까지 열었다. 조준호는 주식으로만 300만원 이상의 부를 축적했다고 한다.
월간지 ‘조광’(1940년 10월)이 ‘하여간 근자에 와서는 기업계의 ‘호ㅡ프’라는 말이 나오면 어쩐지 곧 조준호를 연상하곤하는 것이 이 방면의 습속이 되어버리도록 그의 이름은 ‘포풀라’해졌다’고 쓸 만큼 신흥 기업가로 이름을 날렸다. 조준호는 1957년 명동 사보이호텔을 세워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조준호의 처남은 세살 아래로 조선의 수재로 꼽히던 이강국이었다. 조준호는 경성제대 법학부를 졸업한 이강국의 독일 유학 비용을 대고, 귀국하자 동아증권 이사로 앉혔다. 이강국은 해방 후 건국준비위원회 서기장과 조직부장, 민주주의민족전선 사무국장으로 활동하다 1946년말 월북했다. 북조선위원회 외무국장 등을 지내다 박헌영·이승엽과 함께 미제 간첩으로 몰려 1956년 처형당했다.
◇주식 실패로 음독한 청년
변변한 정보 없이 주식판에 뛰어든 개미들이 순탄할 리 없다. 신문엔 투자에 실패한 이들의 자살 기사가 더러 났다.
‘만소(滿蘇)국경에 풍운이 급박한 요사이 앞 길을 잡을 수 없는 주식에 발을 들이밀었다가 실패를보고 청산가리 자살을 한 청년이 있다. 부내 관철정(貫鐵町) 남산관(南山舘)에 하숙하고 있던 황금정2정목 199번지 ‘마루다마’주식취인점원 한수봉(28)군은 19일 오후3시쯤 하숙으로 돌아와 방에 들어간 채 소식이 없음으로 저녁 때 주인이 문을 열어본 즉 벌써 절명되어 있었다. 종로서에서 검시한 결과 만소국경에 급박한 풍운을 반영하야 궤도를 잃은 주식에 손을 댔다가 약 2000여 원의 손해를 본 것을 비관한 나머지 무서운 독약 청산가리를 마시고 각오의 자살을 한 것인 듯하다고 한다.’(조선일보 1938년 7월21일 ‘주식에 실패코 청년음독자살’)
중일전쟁으로 전황이 불안해지면서 증시가 요동칠 때 잘못 판단한 대가로 목숨까지 잃은 것이다. 이런 사건이 많았던지 언론에선 일확천금을 꿈꾸며 주식에 뛰어드는 사람들에게 따끔하게 경고하기도 했다.
‘투기 시장에서 수십만 수백만의 자금이 없이 큰 성공을 해보랴거든 사람 노릇 해가면서 꿈꾸어서는 안된다. 부모처자를 생이별하고 알몸으로 제 한몸이 되어 아무 거리낌이 없이 휘둥그라게 한 후에 수십원이든지 수백원을 만들어가지고 발을 들여 놓는데 그날부터는 아주 마음을 지독하게 먹어야 한다. 부모처자까지 떼놓는 터이라 취인소 문전에서 돌베개하고 세상을 떠날 최후의 비통한 장면까지 새각한 사람이라야 한다. 왜 그래야 하느냐 하면 투기에는 끈기가 經이 되고, 배포 큰 것이 緯가 되어갸 하는 까닭이다.’(이건혁, ' 朝盛暮滅의 取引狂사태, 일확천금은 가능하냐?’, ‘조광’ 1936년1월)
필자는 ‘그럴 용기가 없는 사람은 행여 투기적으로는 투기 시장에 발을 들여놓지 말라!’고 으름장을 놨다.
◇조선취인소, 2005년에 철거
‘동학개미’, ‘서학개미’란 유행어가 익숙할 만큼 주식 투자는 동네 마트 쇼핑 하듯 흔한 세상이 됐다. 투기보다는 투자, 저축의 관점에서 접근하는 게 달라졌다지만 아슬아슬하기는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인 듯하다.
김기진이 드나들던 명동 주식장의 조선취인소 건물은 2005년 헐렸다. 1922년 ‘경성주식현물취인소’ 건물로 완공된 지 83년만이었다. 경성주식현물취인소는 1932년 인천 미두취인소와 통합, 조선취인소가 됐다. 해방 이틀전인 1945년8월13일까지 영업을 이어갔다.
1956년 설립한 대한증권거래소 건물로 쓰였으나 1979년 거래소가 여의도로 옮겨가면서 상가로 쓰이다 철거의 운명을 맞았다. 정부가 근대문화재 등록을 예고했으나 소유자가 전격철거해버렸다. 그 자리엔 2008년 상가와 사무실, 오피스텔이 있는 지상 10층 복합건물이 들어섰다. ’한 방’을 꿈꾸며 주식장에 몰려들던 ‘경성 개미’들의 환호와 한숨도 찾아볼 길 없게 됐다.
◇참고자료
전봉관, 럭키경성, 살림, 2007
전봉관, 황금광시대, 살림, 2005
김기진, 나의회고록12, ‘세대’, 1965년9월
김기진, ‘나의 인생과 나의 문학-예술과 실업의 두 갈랫길’, 김팔봉문학전집2, 문학과지성사, 1988
이건혁, ' 朝盛暮滅의 取引狂사태, 일확천금은 가능하냐?’, ‘조광’ 1936년1월
‘米豆軍의 흥망성쇠기’, ‘조광’ 1939년 9월
‘현역인물론-조준호’, ‘조광’ 1940년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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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7 “기생의 가곡, 망국가요가 조선인을 망친다”
이광수·김억·김동환·홍사용 등 시인, 유행가 작사에 뛰어들어

▲1932년 빅터레코드사에서 '황성옛터'를 취입해 인기 정상을 달린 이애리수. 같은해 말 춘원 이광수가 노랫말을 쓴 '쓰러진 젊은 꿈'을 불러 주목을 받았다. 황성옛터와 쓰러진 젊은 꿈은 전수린이 곡을 썼다.

▲이광수는 기생의 가곡을 조선인의 영혼을 해치는 악성 가요라며 증오했다. 그는 직접 노랫말을 써서 유성기 음반으로 취입하기도 했다.
1932년말 한 신문이 그해의 ‘엽기적 유행’으로 ‘유행가’를 꼽은 기획기사를 썼다. 당대 스타 이애리수가 부른 ‘쓰러진 젊은 꿈’이 소개됐다.
‘그날이 덧없다/바람 갓하라/젊은 꿈의 날이/피끓던 날이/센 머리 세여보면서/그리운 지난날 더듬고 우네.’(매일신보 1932년 12월13일 ‘시대의 감정담은 애수의 유행가’)
당시 스물둘 이애리수는 전수린이 작곡한 ‘황성옛터’(荒城의 跡)를 불러 최고 인기를 누리던 참이었다. 그런데 이 신문은 같은 해 발표된 ‘황성옛터’를 제치고 ‘쓰러진 젊은 꿈’을 주목했다. 작사자가 춘원 이광수(1892~1950)였기 때문이다. 춘원은 ‘무정’ ‘마의태자’를 발표하면서 조선의 문학계를 대표하던 거물이었다. 동아일보 편집국장을 지낸 언론인이기도 했다. 춘원은 왜 유행가 노랫말을 썼을까.
◇유행가 음반 18%, 시인들이 쓴 작품
1930년대 유행가 작사자중엔 내로라하는 시인, 작가들이 수두룩하다. 이은상, 김동환, 주요한, 김억, 이하윤, 노자영…돈벌이 삼아 한두번 외도한 것도 아니다. 시집 ‘오뇌의 무도’ ‘해파리의 노래’를 낸 김억은 유행가 61편을 써서 유성기 음반을 남겼다. ‘국경의 밤’을 낸 김동환은 7편, ‘나는 왕이로소이다’를 쓴 홍사용은 9편을 남겼다.
시인 이하윤은 1935년부터 아예 콜럼비아레코드 문예부장을 지내면서 유행가 154편을 썼고, 월북한 시인 겸 극작가 조영출(조명암·1913~1993)도 오케 레코드사에 들어가 145편의 음반을 남겼다. 구인모 교수의 ‘유성기의 시대, 유행시인의 탄생’(현실문화, 2013)에 따르면, 식민지 시기 발매된 유행가 음반의 약 18% 가 시인들이 쓴 작품이었다. 작품 수로는 698곡(음반 면수로는 725면)이나 된다. 시인들은 근대 유행가시대를 이끈 주역이었다.
◇”퇴폐적 악종 가요를 배격하자” 조선가요협회 탄생

▲1929년 조선가요협회가 창설된 서울 종로 견지동 조선일보 옛 사옥. 지금은 NH농협금융 지점으로 쓰고 있다.
문인들은 원래 유행가에 적대적이었다. 이광수와 김동환은 잡가와 유행창가를 ‘기생의 가곡’ ‘망국 가요’라 비난했다. 그들이 1929년 ‘조선가요협회’를 결성한 이유다.
1929년2월22일 저녁 7시, 경성 견지동 111번지 조선일보사 건물에는 쟁쟁한 문인과 음악가 16명이 모여들었다. 이광수, 주요한, 김소월, 변영로, 이은상, 김형원, 김억, 양주동, 박팔양, 김동환, 안석주 등 문인 11명과 김영환 김형준 안기영 정순철 윤극영 등 음악가 5 명이었다. 이들은 ‘우리는 건전한 조선가요의 민중화를 기함’을 강령으로 내세웠다. ‘모든 퇴폐적 악종(惡種) 가요를 배격하자’ ‘조선 민중은 진취적 노래를 부르자’는 슬로건도 채택했다.
당시 조선일보 기사 제목은 ‘퇴폐적가요 배격코저 조선가요협회 창립’ (1929년2월24일자). ‘현재 조선 사회에 흘러다니고 있는 속요(俗謠)의 대부분은 술과 계집을 노래하는 퇴폐적, 세기말 것이 아니면 현실도피를 찬미하는 중국 산림학자식의 사상 감정이 흐른 것이 대부분이 되어 조선 민족의 기상을 우려할 현장을 이끄는 터임으로 이 풍조를 크게 개탄’한 문화예술인들이 가요협회를 창립했다고 소개했다.
가요협회는 직접 유행가를 만들고 음반을 취입했다. 이광수가 쓴 ‘우리 아기 날’과 김형원의 ‘그리운 강남’이 대표적이다. 안기영이 곡을 붙인 ‘그리운 강남’은 네차례나 유성기 음반으로 제작될 만큼 인기를 누렸다.
‘정이월 다가고 삼월이라네/강남갔던 제비가 돌아오면은/이땅에도 또 다시 봄이 온다네//삼월도 초하루 당해 오면은/가뜩이나 들썩한 이 내 가슴에/제비 떼 날아와 지저귄다네’ 요즘 유튜브에서도 들을 수 있는 이 노래는 민요풍의 서정적 분위기가 도드라진다. 김형원은 동아일보 사회부장과 중외일보 사회·편집부장, 조선일보·매일신보 편집국장을 지낸 언론인이자 시인이었다.
◇이광수 ‘기생의 가곡을 증오한다’
이광수는 왜 유행가를 배격했을까. 그는 근대 이후 조선의 피폐를 극복하기 위해선 조선인의 도덕적·심미적 태도를 개조해야 하고, 무엇보다 예술 교육을 통해 근대적 의미의 예술에 대한 심미적 취향을 길러야 한다고 주장했다.
‘조선인에게 예술을 주어라. 예술은 그네에게 쾌락을 주고 활기를 주고 향상을 주고 그 모든 것보다도 창조와 표현의 새 힘을 주리라. 조선이라는 사막을 변하야 예술의 화원을 지어라.’ 이광수는 ‘사람을 신경쇠약과 주색에 침륜함과 또는 불평과 나타로 인도하는 예술은 불건전한 예술이오, 멸망의 예술’이라고 비판했다.
이광수는 조선기생이 대표하는 민중예술이라 할 만한 모든 가곡을 증오한다면서 ‘캇쥬샤’ ‘표박가’ ‘심순애가’같은 노래를 거론했다. ‘신흥의 기상을 가져야할 우리에게는 군악적, 종교악적인 정서를 일으키는 예술을 가지고 싶습니다. 델리케트한 것보다도 순박한 것, 우미한 것보다도 장엄한 것, 비조를 띤 것보다도 상쾌한 것이 원입니다.’(‘예술과 인생’, ‘개벽’19호, 1920년2월) ‘캇쥬샤’ ‘심순애가’ ‘표박가’는 원래 일본 신파극 주제가로 조선에서도 대단한 인기를 누렸다.
파인 김동환도 ‘조선지광’ 1927년8월호에 ‘망국적가요소멸책’을 발표했다. 파인은 아리랑이나 수심가와 같은 잡가는 조선 왕조 내내 학대받은 백성들의 신음과 애탄, 곡성이었고, 유행가요 또한 그런 잡가를 답습한 ‘악(惡)가요’이자 ‘망국가요’라고 주장했다.
◇잇단 문예지 폐간으로 시인들의 발표지면 사라져
시인들이 유행가 작사에 눈을 돌리게 된 이유는 또 있다. 1919년부터 속속 창간된 ‘창조’ ‘폐허’ ‘백조’ ‘장미촌’ ‘문예공론’같은 문예지들은 단명했다. 소설에 비해 시는 독자를 확보하기 어려웠던 탓이다. 시를 싣곤 하던 종합지 ‘개벽’도 1926년 일제에 의해 폐간됐다. 근대시를 선보일 만한 장(場)이 사라지면서 시인들은 자구책을 찾았다. 1920년대 후반부터 시(詩)의 음악화를 통한 유행가 작사를 통해 음반으로 독자들을 찾아나선 것이다.

▲조선일보 1933년 12월2일자에 실린 신춘문예 사고. 유행가를 단편소설, 희곡과 같은 활자 크기로 게재했다.
◇신문사 신춘문예에 ‘유행가’ 공모
신문사도 신춘문예현상공모에서 유행가 노랫말을 소설, 시, 희곡과 같은 정식 분야로 채택했다. 조선일보는 1933년11월 신춘문예 사고를 내면서 ‘유행가’를 단편소설, 희곡과 같은 크기의 활자로 게재했다. 같은 해 동아일보도 문예평론, 단편소설, 희곡과 같은 크기 활자로 ‘가요’를 공모했다. 유행가 노랫말을 문학의 한 장르로 대접하는 분위기였다. 특히 조선일보는 유행가를 공모하면서 당선작의 음반 취입까지 주선, 유행가를 만들고 보급하는 일까지 적극적으로 나섰다.
‘새해에 첫 노래 부를 청조 같은 가희(歌姬)’(1934년 1월2일) ‘본사 현상에 당선된 유행가와 민요 레코ㅡ드화’(1934년2월17일) ‘본사현상유행가 ‘방아찧는 색시’ 세론반으로 10일에 발매’(1934년 3월6일)같은 기사를 연속으로 내보냈다.
이 때문에 기성 작가들까지 앞다퉈 신춘문예 유행가부문에 응모할 만큼 관심을 모았다. 1934년 유행가 부문 당선자였던 남궁랑은 1928년부터 1930년까지 동요 등의 아동문학 작품을 거의 매달 발표했다. 지금 남아있는 작품만 40여편을 웃돌만큼 왕성하게 집필했다. 이런 작가까지 유행가 부문에 응모할 만큼 대중을 확보하려는 문학 청년들이 많았다는 얘기다.

▲유행가 현상공모를 알리는 조선일보 1938년2월24일자. 위 기사는 마감 사흘을 앞두고 응모작이 2153편이나 들어왔다고 소개했다.
◇유행가 공모 마감 사흘전, 2153편 몰릴만큼 폭발적 관심
조선일보는1938년 유행가만 특별 공모했다. 마감 사흘을 앞두고 응모작이 2153편이나 될 만큼 폭발적 관심을 불러일으켰다.(조선일보 1938년2월24일 ‘白熱의 인기를 끄는 본사주최현상유행가’) 조선일보는 ‘어린이날 노래’(1928년)나 ‘문자보급운동가’(1931년)를 현상공모한 적이 있을 만큼, 대중가요에 적극적이었다.
신문이 유행가를 공모한 것은 ‘조선가요협회’와 비슷한 취지였다. ‘현대의 문화 영역에 있어서 그 광범한 대중성으로 보아 유행가는 거의 시대의 총아인 느낌이 있으나 불행이도 이때까지의 유행가는 그 가사와 곡조가 퇴폐저속한 것이었으므로 일반 식자의 개탄한 바이었는데 본사에서는 이러한 풍조를 일소하고 새로운 유행가의 출현을 촉진하기 위해….’(조선일보 1938년2월15일 社告)

▲조선일보 1938년 3월29일자에 실린 유행가 현상공모 당선자 사고. 아래는 당선자인 을파소 김종한.
◇현상공모 당선자 김종한의 다짐
1938년 3월 발표된 유행가 현상공모 당선자는 을파소 김종한이었다. 그는 1934년 신춘문예 ‘유행가’ 분야에서 ‘베짜는 각시’로 당선됐고, 1937년 신춘문예엔 시 ‘낡은 우물이 있는 풍경’가 뽑힐 만큼 조선일보 현상공모를 휩쓸었다. 1939년엔 ‘문장’지 추천을 받아 작품을 발표했는데, 정지용이 ‘비애를 기지로 포장’하는 기술을 가지고 있다고 평가할 만큼, 재기 넘쳤다. 함북 명천 출신인 김종한은 조선일보 봉화지국에서 일한 적있고 1934년 이후엔 광산생활을 한 좌충우돌 청년이었다. 1938년 유행가 현상공모 때는 니혼대 예술과에 재학중이었다.
김종한은 유행가 현상공모 직전, 결전에 뛰어드는 다짐 같은 글을 신문(1938년2월13일 ‘신민요의 정신과 형태’3)에 썼다. ‘시대인의 생활감정을 표현한 새로운 민요, 그것은 반드시 오고야 말게다.’ 세계가 주목하는 K팝 열풍을, 그는 짐작이나 했을까. 김종한은 1944년 만 서른에 세상을 떴다.
◇참고자료
구인모, 유성기의 시대, 유행시인의 탄생, 현실문화, 2013
이광수, ‘예술과 인생’, ‘개벽’19호, 1922년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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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4 인생에서 가장 희망에 찼던 순간, 그때의 젊음을 잊지 않으려 했다.”(박영준)
‘작가 제조기’ 조선일보 신춘문예…백석, 백신애, 김유정, 김정한, 정비석 등 연달아 배출

▲박영준은 연희전문 졸업반이던 1934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단편 '모범경작생'으로 등단했다. 당시 스물셋이었다.
연희전문 졸업반이던 스물셋 박영준은 1934년 새해 첫날을 경성에서 보냈다. 방학은 으레 시골 고향에서 보냈지만 혹시 올지 모를 신춘문예 당선 통지를 기다렸기 때문이다. 섣달 그믐까지 연락은 없었다. 신춘문예 재수생이던 박영준은 재능을 한탄했다.
혹시나 싶어 새해 첫날 태평로 조선일보 임시사옥까지 달려갔다. 신문엔 당선작 ‘모범경작생’아래 이름 석자가 당당히 찍혀있었다. ‘누구의 어깨라도 치고 한바탕 소리를 질러보고 싶었지만 꿀먹은 벙어리처럼 가슴속의 흥분을 눌러야만 했다. 내 옆에는 내 즐거움을 알아줄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조선일보 1954년 11월18일 ‘당선되던 그날’)
상금은 30원. 웬만한 샐러리맨 한달치 월급이었다. 그길로 서점에 가서 세계문학전집 한 질을 샀다. 신춘문예 당선은 움추러들었던 그에게 자신감을 줬다. ‘나도 문학생활을 할 수있다는 자신을 그 때 비로소 가졌다. 그것은 내가 운이 좋아서 당선되었다고만 생각할 수없으리 만큼 평론가들로부터 호평을 받았기 때문이다.’

▲백신애는 1929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소설 '나의 어머니'가 당선되면서 작가의 길을 걸었다. 1930년대 초 동경 유학시절 단발을 한 백신애.
◇문학사에 수록된 신춘문예 스타
신춘문예는 1920년대 신인 작가의 등용문이었다. 조선일보와 동아일보, 매일신보 등 일간지와 ‘개벽’ 같은 잡지에서도 앞다퉈 상금을 내걸고 신춘문예를 시행했다. 한국 문학사를 일궈갈 작가들이 잇따라 탄생했다.
조선일보 신춘문예는 초반부터 뛰어난 작가들을 배출했다. 단편 소설분야만 해도 여성 작가 백신애(1929)를 비롯 백석(1930) 박영준(1934), 김유정(1935), 김정한(1936), 정비석(1937), 현덕(1938), 김영수(1939) 등이 줄이어 등단했다. 소설만 쳐도 당선작 ‘모범경작생’ ‘소낙비’(김유정) ‘사하촌’(김정한) ‘성황당’(정비석) ‘남생이’(현덕)와 함세덕(1940) 희곡 ‘해연’(海燕·1940)는 근대문학사에 남은 문제작이다.
이육사의 동생 이원조는 1928년 신춘시 ‘전영사’(餞迎辭)가 당선됐고, 1929년 단편소설 ‘탈가’(脫家)가 선외가작에 뽑혔다. 일본 호세이대 불문과를 졸업한 이원조는 1935년부터 1939년까지 조선일보 학예부 기자로 일했다.

▲1930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소설 '그 모와 아들'이 당선된 백석. 시로 방향을 바꿨다.

▲조선일보 1927년12월1일자에 실린 신춘문예모집사고. '한 사람 이상을 위해 싸워본 이야기'와 '용의 이야기'를 공모했다.

▲조선일보 1924년 11월28일자에 실린 '신년문예현상공모'. 단편소설과 신시, 동화, 감상문과 자유화(그림) 분야에서 응모를 받았다. 1925년 1월1일자 신년호에 단편소설 당선작은 1등 허윤의 ‘쫓겨가는 이들’, 2등 최태원의 ‘물’과 김정숙의 ‘소년의 비애’가 실렸다.
◇신춘문예 前史이자 출발점, 1923년과 1924년 현상공모
조선일보가 본격적으로 ‘신춘문예’를 내걸고 현상공모를 시작한 것은 1927년말부터다. ‘한 사람 이상을 위하야 싸워 본 이야기’와 ‘용의 이야기’를 모집했다.(조선일보 1927년12월1일)
그에 앞서 1923년12월 ‘신춘을 맞아 신년호의 지면을 독자들의 작품으로 장식하기 위해 원고를 모집한다’는 취지의 현상문예 공모를 냈다. 모집 부문을 문예란 유년란 부인란으로 구분했다. 문예란은 단편소설·감상문·시, 유년란은 동화·동요·만화, 부인란은 가정제도와 치산 그리고 육아에 대한 논문을 공모했다. 당선자에겐 조선일보 구독권을 상품으로 내걸었다. 1등은 3개월 구독권으로 한달치 구독료가 95전이었으니 3원이 안되는 액수였다.
1924년엔 ‘신년문예현상’이란 이름으로 단편소설과 신시, 동화, 감상문, 그리고 그림(자유화)을 공모하고, 당선작엔 상금(액수 미상)을 줬다. 1925년 1월1일자 신년호에 발표된 단편소설 당선작은 1등 허윤의 ‘쫓겨가는 이들’, 2등 최태원의 ‘물’과 김정숙의 ‘소년의 비애’였다. 1924년 신년문예현상 공모는 ‘신춘문예 전사(前史)’이자 1920년대 민간지의 신춘문예 출발점으로도 주목할 만하다.
1926년과 1927년엔 각각 호랑이해와 토끼해를 맞아 ‘호랑이 이야기’와 ‘토끼 이야기’를 현상공모했다. 1928년부터 1940년 일제의 강제폐간때까지는 한해도 거르지 않고 신춘문예를 시행했다.
◇엄선주의가 작가 등용문 비결
신춘문예 심사를 진행한 조선일보 학예부는 고민이 많았다. ‘거의 예를 보면 신춘문예에 고선의 수준이라는 것이 전혀 없어서 전부 응모된 종류 중에서 그 중에 제일 나은 것이면 의례히 1등으로 입선을 시키니까 해마다 문예의 각 부문에서 새로 등장하는 신인이 몇 사람씩 생기지만 이네들이 하나도 뒤이어서 작품을 쓰는 작가로 출세한 사람은 없었다.’(조선일보 1936년1월3일 ‘신춘현상문예고선경과’)
응모한 작품 중 수준에 관계없이 1등을 뽑은 결과, 당선자중 작가로 성장한 이가 없다는 것이다. 1936년 적용한 새 심사기준은 이랬다. ‘한 작품을 어느 등수로나 입선을 시킬 때는 그 작품이 비록 완벽은 못되더라도 이만하면 현 문단의 수준에 그다지 떨어지지 않는다는 것과 또 하나는 이만한 역량을 가졌으면 얼마 안되어서 작가로 행세할 수있다는 것을 고선(考選)의 수준으로 한 것이다.’
이 때문에 당선작을 내지 못한 분야도 속출했다. 1939년엔 희곡, 문예평론, 시조, 동화, 실화 분야에서 입선작을 한 편도 내지 못했다. 조선일보 신춘문예를 연구한 손동호 연세대 HK교수는 ‘조선일보 신춘문예가 우리 문학사에서 주목할 만한 작가와 작품을 발굴할 수있었던 것은 고선 방침을 강화함으로써 지속적으로 우수한 작가와 작품을 발굴한 결과였다’(손동호, ‘근대신춘문예 당선 단편소설-조선일보편’ 33쪽,소명, 2021)고 했다.
◇파격적 상금과 발표 지면 제공도 기여
조선일보는 1929년 신춘문예에선 단편소설 1등 상금으로 60원을 내걸었다. 다른 신문보다 2배나 많은 액수였다. 그 결과 단편소설 응모편수가 500편에 달할 만큼 인기를 누렸다. 1939년엔 상금을 50원에서 100원으로 인상한 결과, 신춘문예 전체 응모 수가 4535편에서 5362편으로 800편 이상 증가했다. 상금 인상을 통해 신인들의 참여를 이끌어내는 방식이 주효한 것이다.
신춘문예 당선자에게 신문과 자매지를 통해 작품 발표 기회를 제공한 것도 주효했다. 뽑아만 놓고 사후 관리를 하지않아 작가로서 경력이 단절되는 부작용을 피하기 위한 시도였다. 김유정, 김정한, 현덕, 김영수는 당선 직후 조선일보 지면에 작품을 연재했다.
1935년11월 창간한 월간지 ‘조광’은 신춘문예 당선자의 무대였다. 조선일보 신춘문예 단편소설 당선자 중 조광에 작품을 연재한 작가는 김영수 김유정 김정한 박영준 백석 백신애 석인해 안필승 정비석 현덕 등 10명이었다. 김유정의 ‘동백꽃’ ‘봄봄’, 백석의 ‘여우난 곬족’, 김정한의 ‘낙일홍’, 백신애의 ‘소독부’, 정비석의 ‘금단의 유역’이 조광에 연재됐다.
12월은 신춘문예의 계절이다. 신문사마다 신춘문예 원고를 마감하느라 분주하다. 박영준(1911~1976)은 신춘문예 당선의 기쁨을 이렇게 회고했다. ‘나는 나의 일생 가운데 가장 즐거웠고, 또 가장 큰 희망에 찼던 시절을 그 때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리고 그때의 젊음을 죽을 때까지 잊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있다.’ (조선일보 1954년11월18일 ‘당선되던 그날’)
12.11 클래식 음악 모르면 ‘세기의 쌍놈’이라고?
채만식 ‘피아노는 졸립고, 교향곡은 시끄럽기만’…'음악 알아듣는 묘방 있으면 전수해달라’ 간청

▲도쿄 유학생 출신 모던 보이 채만식은 1940년 신문에 '피아노는 졸립고, 교향악은 시끄럽기만 하다'며 자신을 '갈 데없는 세기의 쌍놈'이라고 썼다. 서양 클래식 음악은 당시 지식인이 갖춰야하는 필수 교양인 것처럼 생각하는 분위기였기 때문이다.
‘피아노 연주는 제 아무리 명곡이라는 것을 들어도 졸립고, 바이올린은 차라리 덜한 편이되 교향악에 이르러서는 겨우 시끄러운 줄이나 알지 ‘베토벤’인지 ‘짜스’(재즈)인지 그 분간조차 못할 지경이다.’
도쿄 유학생 출신 ‘모던 보이’ 채만식에게도 서양 고전음악은 멀게 느껴졌던 모양이다. 서른 여덟 채만식은 ‘難物인 음악’(매일신보 1940년 3월14일)이란 글을 신문에 썼다. ‘탁류’ ‘태평천하’ ‘레디메이드인생’같은 대표작을 신문·잡지에 발표한 채만식은 이미 유명작가였다.
채만식은 ‘갈데 없는 ‘세기(世紀)의 쌍놈’'이라 자학하며 ‘아무리 해도 음악이란 내게는 난물중에 유수한 난물에 속하는 者이다. 누구 썩 손쉽게 그 놈 음악을 알아듣는 묘방이 있거들랑 좀 전수를 시켜주셨으면 싶다’고 썼다.
채만식이 ‘쌍놈’운운하는 자학적 표현까지 써가며 서양 클래식 음악을 거론한 이유는 당시 지식인이라면 누구나 알아야하는 필수 교양인 것처럼 받아들이는 분위기때문이었다. 음악학자 이경분씨는 ‘서양 음악에 대해서는 선망과 동경에 빠져있으면서 현대 인텔리가 반드시 갖추어야 할 교양 덕목으로, 즉 메인스트림에서 소외되지 않으려면 좋으나 싫으나 알지 않으면 안 되는 대상으로 숭배했던 것같다’( ‘일본 식민지 시기 서양음악의 수용과 그 정치적 의미’)고 당시 분위기를 소개했다.

▲바이올린을 든 모던 보이가 어느 초가집 창가에서 세레나데를 연주하면서 구애하고 있다. 안석주가 조선일보 1928년 4월6일자에 실은 만문만화 '로미오와 줄리엣'
◇중학생까지 겨드랑이에 바이올린 끼고 다녀
구한말 교회나 성당, 미션 스쿨을 통해 도입된 서양음악은 1920년대에 들어서면 신식 유행처럼 번졌다. 1927년 한 대중월간지는 서양 음악의 광적 유행을 이렇게 썼다. ‘요새는 소위 남녀중학생아이들까지 겨드랑이에 바이올린을 끼고 다니고 부자 연인(戀人)을 졸라서 제집에다 피아노를 사놓고 무엇이 무엇인지 멋도 모르며 뚱당거리고 앉았는 모양이란….’(‘현대남녀음악가에게 與하노라’, ‘별건곤’ 제2권3호, 1927년3월)
바이올린과 피아노가 ‘핫템’으로 떠오르자 다룰 줄도 모르면서 값비싼 악기를 사들이는 모던 보이, 모던 걸들이 늘었다. 1922년 현진건 소설 ‘피아노’에도 일본 유학생 출신 모던 보이가 신여성과 재혼하면서 둘 다 칠 줄도 모르는 피아노를 구입하는 장면이 나온다. 피아노와 바이올린, 서양 클래식 음악은 고급스러운 신식 문화이자 근대인이 갖춰야할 교양으로 받아들여진 것이다.
◇바이올린 연주로 프로포즈하는 모던 보이
작가 안석주는 1928년 봄 세태를 풍자한 만문(漫文)만화를 신문에 냈다. 양복 차림 청년이 다 쓰러져가는 초가집 창문 아래 서서 바이올린을 들고 세레나데를 연주하다 여인의 손등에 입맞추는 그림이었다.
‘이러한 봄에는 사나이는 ‘로메오’, 계집은 ‘쭐렛’ㅡ그리하야 선천(先天)에도 없고 후천(後天)에도 없는 대희곡가(大戱曲家)의 연극이 방방곡곡에 연출되는 것이다. ‘룸펜 바이올리니스트’ 한 분이 어느 다ㅡ쓰러져가는 초가집 창밑에서 어제밤 달뜰때부터 오늘 해뜰때까지 바이올린을 긁고 있었으니 그의 서툰 바이올린도 처음부터 끝까지 세레나데를 가늘게 또한 굵게 긁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자 바야흐로 뭇집의 대문 여는 소리가 요란할 때 홀연히 그 창문이 열리며 노리끼한 손이 나오니 이 사나이는 불시에 눈물을 흘리며 그 손을 고이 고이 잡고서 손등에 키쓰를 하는 것이었다.’ (‘로미오와 줄리엣’, 조선일보 1928년4월6일)
바이올린 연주 정도는 바쳐야 근사한 프로포즈라고 생각할 만큼, 서양 음악의 위력은 대단했다.
◇100년전 야나기 가네코의 YMCA 리사이틀
1920년대 경성에는 교회나 학교는 물론 종로 YMCA강당이나 경성 공회당에서 음악회가 자주 열렸다. 1920년 5월4일 종로 YMCA에서 열린 야나기 가네코(柳兼子) 리사이틀은 조선의 본격적인 첫 서양음악 연주회로 알려져있다. 가네코는 민예연구자 야나기 무네요시의 아내로 도쿄 음악학교 성악과를 나와 훗날 독일 유학까지 다녀왔다. 가네코는 이날 오페라 아리아와 가곡으로 프로그램을 채웠다. 토마 ‘미뇽’중 ‘그대는 아는가, 저 남쪽 나라를’ 마이어베어 ‘예언자’ 중 ‘아, 내 아이여’, 베버 ‘마탄의 사수’ 베르디 ‘일 트로바트레’의 아리아와 슈베르트 가곡 등을 불렀다. 마지막은 비제 ‘카르멘’중 ‘하바네라’였다.
야나기 가네코 리사이틀이 얼마나 인상깊었는지 ‘청춘예찬’으로 이름난 작가 민태원(1894~1935)은 이 연주회를 소재로 한 단편소설까지 썼다. 1921년 ‘폐허’에 발표한 ‘음악회’다. 소설 등장인물 심숙정과 하경자는 가네코 연주회에 다녀온 후 음악회 풍경에 대해 이런저런 얘기를 나눈다.
심(숙정) “애 참 왜 그리들 떠드는지 좀 조용히 있었으면 좋겠더구면.”
하(경자) “아직 정도들이 유치하고 음악의 취미를 모르니까 그렇지.”

▲1920년 완공된 경성 소공동의 경성공회당. 1923년의 크라이슬러와 하이페츠 연주, 1924년의 짐발리스트 공연이 이곳에서 열렸다. /조선일보 DB

▲오스트리아 출신 미국 바이올리니스트 겸 작곡가 프리츠 크라이슬러(1875~1962). 1923년 일본 연주에 이어 경성에 들러 리사이틀을 가졌다. '사랑의 기쁨' '사랑의 슬픔'으로 유명하다. /public domain

▲러시아 출신 바이올리니스트 야사 하이페츠(1901~1987)의 1920년 모습. 그는 1923년 경성에 들러 리사이틀을 가졌다./Public Domain

▲1924년 11월 내한 연주를 가진 러시아 출신 미국 바이올리니스트 에프렘 짐발리스트(1889~1985). 서른 전후의 모습이다. 홍난파는 짐발리스트를 세계제1의 바이올리니스트로 치켜세웠다. /Public Domain
◇경성 공회당의 크라이슬러, 하이페츠, 짐발리스트
1920년대 경성에는 세계 정상급 연주자들이 순회 공연을 가졌다. 1923년 한해에만 크라이슬러와 하이페츠가 다녀갔고 이듬해엔 짐발리스트가 내한했다. 공연장은 소공동(당시 長谷川町) 경성공회당이었다. 1920년 완공된 경성상공회의소 건물 2층에 자리잡은 경성공회당은 리사이틀을 열기에 적격이었다.
‘사랑의 기쁨’ ‘사랑의 슬픔’ 작곡자로도 이름난 프리츠 크라이슬러(1875~1962)는 1923년 5월23일 내한공연을 가졌고, 훗날 바이올린의 신(神)이란 별명까지 얻은 스물 둘 신예 야사 하이페츠(1901~1987)는 11월5일 경성 청중을 만났다. 하지만 크라이슬러, 하이페츠 독주회는 일본인이 주독자인 총독부 기관지 경성일보일(일본어신문) 주관한 탓에 조선인 사회엔 널리 알려지지 않았다. 홍난파는 안타까웠던 모양이다.
‘손바닥만한 경성 시중에 과연 이러한 대예술가의 예술에 접근하고 이러한 대음악가의 연주에 심취된 백의(白衣)의 인(人)이 누구누구이런가. 물론 주최자가 우리가 아니오, 따라서 우리에게는 선전을 하지 않았으니까 알지못하고 있었던 것이겠지만….’(‘세계적 제금가 악성 짐발리스트의 來京을 기하야,’조선일보 1924년11월24일)

▲홍난파는 1924년 11월26일 세계적 바이올리니스트 짐발리스트 경성 공연에 대한 기대와 의의를 담은 글을 조선일보에 기고했다. 조선일보 1924년11월24일자
◇홍난파가 극찬한 짐발리스트
1924년 11월27일 열린 짐발리스트(1889~1985) 음악회는 경성음악동호회가 주최하고 조선일보가 보도하면서 널리 알려졌다. 홍난파는 위 기고에서 ‘서악(西樂)이 동점(東漸)한 이래 수삼십년에 가극다운 가극 한번을 구경하지 못하고 관현악 다운 관현악 한번을 들어보지 못하고 지내왔으니…'라고 안타까움을 호소한 뒤 짐발리스트를 소개했다. ‘짐(짐발리스트)씨로 말하면 기교가 ‘크(라이슬러)’씨에 불하(不下)하며 노련한 악상이 역시 제타악가보다 우월한 외에 예술가로서의 침통하고 경건한 맛이 위선 청중을 괴화(魁化)케 한다. 다시 말하면 짐씨는 위대한 예술가인 동시에 위대한 인격자이다. 이점으로 보아서 나는 짐씨를 세계 제일위의 제금가라고 단언하고 싶다.’
연주는 대성황이었다. ‘그의 귀신 같은 ‘바요링’ 독주대회는…만장한 천여명 관중의 가슴을 서늘하게 하였으며,때로는 청중을 취케하야 자못 선경(仙境)으로 이끄는 느낌이 있었다.’(‘작야의 樂聖 짐氏 독주회 성황으로 마쳐’, 조선일보 1924년11월28일)
1935년 부민관이 들어서면서 하얼빈교향악단 같은 대편성 오케스트라와 전막 오페라(‘나비부인’) 내한공연까지 이뤄질 만큼 음악계는 활기를 띄었다. 하지만 고가(高價) 티켓은 넘기 어려운 장벽이었다. 일부 상류층 지식인과 상공업자, 총독부 고위관료와 일본 기업인 등으로 관객층은 제한적이었을 것이다. 서구 클래식 음악은 여전히 대중에겐 너무나 먼 ‘당신’이었다.
◇참고자료
이경분, ‘일본 식민지 시기 서양 음악의 수용과 그 정치적 의미’, ‘음악학’ 18, 2010
조윤영, ‘경성의 음악회(1920~1935): 식민지 일상과 근대의 경험, 그 다양한 시각에 대하여’, 이화여대 박사학위논문, 2018
‘현대남녀음악가에게 與하노라’, ‘별건곤’ 제2권3호, 1927년3월
민태원, ‘음악회’, ‘폐허’제2호 1921년 1월
현진건, ‘피아노’, ‘개벽’제29호 1922년11월
12.18 이효석의 연인 왕수복, 北 체제 선전가수가 되다
평양 기생 출신 첫 유행가수…北 공훈배우로 깍듯한 대접 받아

▲1935년 월간지 '삼천리' 투표에서 가수 1위로 뽑힌 왕수복. 평양 기생 출신인 왕수복은 이효석의 연인으로도 유명했다.
1935년 월간지 ‘삼천리’가 가수 인기투표를 했다. 연말 10대 가수 선정하듯, 독자 투표로 남녀 가수 각각 5명을 뽑는 방식이었다. 남자 가수 1위는 채규엽. 함흥 출신으로 일본 중앙음악학교에서 공부한 유학파였다. 1930년 콜럼비아 레코드사에서 ‘봄노래 부르자’를 취입한 ‘직업가수 1호로 당대 스타였다.
여자 가수 1위는 열여덟이던 평양 기생 왕수복이었다. 남녀 1만130표 중 1903표를 얻었다. 채규엽은 1844표를 얻어 남녀 통틀어 1위는 왕수복이 차지했다. 같은 평양기생 출신인 선우일선이 2위(1166), ‘목포의 눈물’을 부른 이난영이 3위(873)였다.
◇몸집 크고 소리 우렁찬 ‘조선의 가수왕’
왕수복은 기생 출신 첫 유행가수였다. 평남 강동군서 화전민 딸로 태어난 왕수복은 열한살 때인 1928년 평양 기성권번(箕城券番)이 운영하는 3년제 기생학교를 다니면서 시, 서, 화와 소리를 배웠다. 1933년 봄 콜럼비아 레코드에서 낸 ‘울지 말아요’ ‘한탄’ 등으로 데뷔했다. 폴리돌 레코드사 전속 가수가 되면서 ‘고도(孤島)의 정한(情恨)’ ‘인생의 봄’이 당대 최고의 음반 판매를 기록하면서 스타로 떠올랐다.
왕수복은 체격이 좋은데다 목소리가 우렁찼다. ‘고도의 정한’을 작곡한 전기현은 왕수복의 재능을 높이 샀다. ‘왕수복의 몸집이 건장한 만큼 목소리도 우렁차게 기운좋게 세차게 나옵니다. 특히 평양예기학교를 졸업한 만큼 그 넘기는데는 과연 감탄 아니 할 수없지요. 본 성대가 아니라 순전히 만들어내는 성대이면서 일반에게 환영을 받고 유행되고 많이 팔리기로 전무후무외다.’(’고도의 정한’의 작곡을 하고, ‘삼천리’ 1935년 11월)
1935년 조선의 레코드 판매량은 약 120만장이었다. 이 중 조선 소리판이 40~50만장 정도였다. 바야흐로 유성기의 시대, 유행가의 시대였다. 한 신문은 당시 유성기를 통한 유행가 보급을 ‘엽기적 유행’(‘시대의 감정담은 애수의 유행가’,매일신보 1932년 12월13일)으로 보도할 정도였다.

▲왕수복이 다닌 평양기생학교. 3년제로 입학금 2원, 수업료는 매달 1학년 2원, 2학년 2원50전, 3학년 3원으로 비쌌다./신동규 동아대교수,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진흥사업성과포털
◇일본 전역 울려퍼진 왕수복의 유행가
1934년 1월8일 오후7시반 왕수복의 목소리가 일본 땅에 울려퍼졌다. 경성방송국 중계로 왕수복의 유행가와 이왕직 아악부 연주가 처음으로 현해탄 건너 일본땅에 방송된 것이다.
‘옥반 굴러가는 구슬 소리같이 맑고도 아름다운 조선 아가씨의 귀여운 노래 가락이 훨쩍 개인 정월 하늘에 전파를 타고 해외를 달리는 귀여운 소식…조선 가수의 은근히 감춘 맑은 ‘청’을 역시 널리 소개하고자 우선 그 첫걸음으로 오는 8일 오후7시반부터 8시까지의 연예 방송 시간에…유행가수로 이름 있는 와수복 양의 조선 유행가를 방송하리라 한다.’( ‘年頭 조선樂 의 비약’, 조선일보 1934년 1월7일)
왕수복은 경성방송국 오케스트라 반주로 ‘고도의 정한’ ‘아리랑’ 등을 불렀다. 한류의 원조(元祖)라 할 만하다.

▲왕수복이 다닌 평양기생학교의 모던 댄스 수업 광경. 평양기생학교를 소개하는 엽서세트 8장중 하나다./신동규 동아대교수,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진흥사업성과포털
◇유행가 끊고 동경 유학
‘가수왕’으로 인기 절정을 달리던 왕수복은 열아홉살이던 1936년 동경 유학을 감행한다. 성악가였던 벨트라멜리 요시코에게 개인교습을 받으며 메조 소프라노로 변신했다. 훗날 이화여대 예술대학장을 지낸 채선엽이 현제명 권유로 왕수복보다 3,4년 앞서 요시코를 사사했다.
왕수복은 1938년12월1일 동경 군인회관에서 열린 ‘음악과 무용의 저녁’ 공연에서 조선 민요를 서양식 창법으로 불러 화제를 모았다. 한해전 1937년엔 폴리돌 레코드와 결별하면서 유행가와 연을 끊고, 이탈리아 유학을 꿈꾸기도 했다. 오케 레코드 전속가수로 밀라노로 유학을 떠난 테너 이인선이 모델이었다. 유학은 성사되지 못했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퀴리부인전’ 읽는 인텔리
성악으로 선회한 왕수복은 평소 책을 많이 읽었던 모양이다. 1939년 3월 어머니 장례 때문에 잠시 귀국한 왕수복의 평양 집에 기자가 찾아갔다. 왕수복은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를 읽는 중이라고 했다. 1936년 미국서 출간돼 일본에서도 널리 읽히던 베스트셀러였다. 왕수복은 말했다. ‘아메리카의 남북전쟁에 취재한 것이 퍽이나 마음에 끌려요. 문체도 참신하고 묘사도 좋구요.’( ‘이태리 가려는 왕수복 歌姬’, ‘삼천리’ 1939년 6월)
앙드레 지드의 ‘좁은 문’, 도스토옙스키의 ‘죄와 벌’, ‘퀴리부인전’, 이광수의 ‘애욕의 피안’ 등도 왕수복의 독서목록에 올랐다. ‘이런 책까지 서가에 있을 줄 몰랐다’는 질문에, 왕수복은 ‘왜요. 우리는 보아선 안되나요.호호호’하며 능란하게 받아넘겼다.
◇이효석 임종 지킨 최후의 연인
왕수복은 이효석의 최후를 지킨 연인이었다. 1940년 일본 유학 중 잠시 귀국해 언니가 운영하던 평양의 ‘방가로’(放街路)다방을 놀러다녔다. 이효석은 1935년부터 평양 숭실전문학교에서 가르쳤고, 1938년 일제 탄압으로 학교가 문을 닫자 대동공전으로 자리를 옮겼다. ‘메밀꽃 필 무렵’을 발표하는 등 창작의 전성기를 달릴 때였다. 하지만 1940년 아내와 막내아들이 잇따라 세상을 떠나면서 방황했다.
이효석은 평양의 음악다방을 순례하던 클래식 광(狂)이었다. 방가로에서 이효석을 만난 왕수복은 첫눈에 빠져들었다. 왕수복은 남편감으로 ‘(수입은 적어도)문사(文士)가 좋다’고 인터뷰한 적 있을 만큼, 지식인을 선망했다. 꿈같은 연애도 잠시, 이효석은 건강이 좋지 않았다.
1942년 5월 결핵성 뇌막염으로 입원한 이효석의 곁을 왕수복이 지켰다. 병실을 붉은 카네이션과 흰 글라디올러스 같은 화려한 서양 꽃으로 장식했다. 스물다섯살 왕수복이 지켜보는 가운데 이효석은 눈을 감았다. 신현규 중앙대 교수가 쓴 ‘평양기생 왕수복’에 따르면, 이효석은 소설 ‘풀잎’과 ‘일요일’에 왕수복과의 사랑을 모델로 한 자전적 스토리를 남겼다.
◇'고난의 행군’ 때 여든 살 독창회 개최
왕수복은 해방 이후 고향 평양에 남았다. 열네살 연상인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자 김광진과 가정을 꾸렸다. 김일성대학 경제학부장을 지낸 김광진은 김일성 훈장까지 받았다. 1981년 세상을 떠나자 애국열사릉에 붇혔다. 왕수복은 1953년 가수로 복귀, 1955년 소련에 파견한 예술단에 포함됐다. 타슈켄트와 알마티 공연에서 고려인들은 왕수복의 노래에 열광했다. 왕수복 김광진 부부는 1965년 판문점에 들러 우리 기자들과 만난 적있다. 왕수복은 이난영과 동년배라면서 악극배우로 이름을 날렸던 전옥(배우 최민수 외할머니)의 안부를 물었다고 한다.( ‘판문점에 나타난 왕수복’, 조선일보 1965년 5월11일)
공훈 배우가 된 왕수복은 북 ‘체제 가수’로 깍듯한 대접을 받았다. 환갑,칠순,팔순을 맞을 때마 김정일이 생일상을 보내줄 정도였다. 여든이던 1997년엔 ‘왕수복 민요독창회’가 TV를 통해 중계됐다(요즘은 유튜브에서 이런 영상을 쉽게 찾아볼 수있다). 한복 차림으로 무대에 오른 왕수복은 인사말을 했다.
“위대한 영도자 김정일 장군님께서는 얼마전 저에게 은정어린 80돌 상을 보내주셨습니다. 오늘은 또 이렇게 뜻깊은 독창회를 마련해주시니, 정말 생각하면 고목에 꽃을 피워주셨습니다…위대한 장군님의 은정깊은 사랑이 없으면 실현될 수 없는 일입니다. 제 나이가 비록 팔십이지만 젊었을 때처럼 소리를 낼 수있는지 모르겠지만, 그 뜨거운 은정에 보답하기 위해 이 무대에 나왔습니다.”
최악의 식량난으로 수백만명이 굶어죽었다는 ‘고난의 행군’을 하던 때였다. ‘조선의 가수왕’이자 북의 공훈배우였던 왕수복은 여든 나이에 ‘김일성 체제’를 선전하는 이벤트에 동원됐다. 2003년 여든 여섯에 세상을 뜬 왕수복은 애국열사릉에 묻혔다.
◇참고자료
신현규, 평양기생 왕수복, 경덕출판사, 2006
‘레코ㅡ드 가수 인기투표’, ‘삼천리’제7권9호 1935년10월
전기현, ‘’고도의 정한’의 작곡을 하고’, ‘삼천리’ 제7권10호 1935년 11월
‘이태리 가려는 왕수복 가희’, ‘삼천리’ 제11권6호 1939년 6월
12.25 종로 야시장, 低價합숙소, 윤락가… 1925년 경성의 밤은 어땠을까
하늘을 이불 삼은 광화문·대한문 앞 노숙자까지 찾아가

▲1925년 여름 경성의 밤은 붐볐다. 종로 야시장과 요릿집, 극장에 인파가 넘쳤다. 빈대와 벼룩 끓는 허름한 노동숙박소와 부모처자까지 거느린 노숙가족이 찾는 대한문과 종묘 앞 마당도 붐볐다. 모던 경성의 빛과 그림자였다./일러스트=조선디자인랩 정다운
1925년 여름 경성 거리는 흉흉했다. 7월15일부터 나흘간 500mm가까운 폭우가 쏟아져 한강 제방둑이 무너졌다. 강물은 용산을 거쳐 남대문 앞까지 밀려올 정도였다.
‘과연 2200戶 전멸상태/시체 200 발견’ ‘교통두절돼야 상세한 현상은 상금미상하나/구사일생의 피난민은 마포역에 수용하는 중’(조선일보 1925년7월15일자) 충청, 영남, 호남 지방도 온통 물난리였다. 8월초까지 그랬다.
100년 전 ‘경성의 밤’을 르포한 기획기사가 이때 나왔다. 사람 넘치는 종로 야시장과 쓸쓸한 탑골공원, 하룻밤 5전짜리 노동숙박소, 하늘을 이불 삼아 잠을 청하는 광화문, 대한문, 종묘 앞의 노숙자, 자유잃은 서대문형무소 수인(囚人)... 경성 주민들의 애환의 현장을 찾아간 ‘夜경성순례기’(1925년 8월23일~9월2일·총 8회)였다.
◇신사, 기생, 할멈, 아씨…남녀 노유의 活劇
‘조그마한 가게를 가운데 두고 앞뒤로는 수많은 군중이 질서없이 오고 가고 한다. 자유로이 걸음을 옮길 수없을만치 어깨가 서로 부닥치고 손과 손이 마주치곤 한다. 땀 냄새와 향내는 섞이어 코를 찌른다.’(‘신사,기생,아씨,할멈…인물 진열의 야시장’, 조선일보 1925년8월23일)
여름 밤 전등 불 밝힌 종로 야시장. 남녀학생은 물론, 아이 데리고 나온 할머니, 어멈 데리고 나온 젊은 아씨, 망건 갓에 꼬부랑 지팡이를 끄는 시골 첨지, 함부로 차린 건달패, 기생, 신사가 뒤섞여 인파를 이뤘다. ‘시장’이라기보다 ‘사람 구경터’였다.
갑자기 풍악소리가 천둥치듯 들린다. 극장 우미관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소리였다. 명탐정이 악한들을 추격하는 장면이다. ‘싸구려, 싸구려’하고 악쓰듯 물건 파는 상인 소리가 섞였다. 한 곳에선 구경꾼이 서너 겹 둘러싼 가운데 합창 소리가 들린다. ‘창가(唱歌)책’을 선전하는 거리 이벤트다.
‘이렇게 장안 한복판 제일 큰 거리에서는 밤새로 한시 두시가 지나기까지 남녀노유의 자유등장의 활극이 연출되니 이것이 경성 밤 무대의 1막이다.’ 첫 기사는 이렇게 시작했다.

▲종로 야시장을 르포한 조선일보 1925년 8월23일자 기사
◇음울한 탑골공원, 평화로운 장충단 공원
다음은 탑골공원. 6년전 ‘독립만세’ 함성이 넘치던 곳이다. ‘풀죽은 모시두루마기에 먼지 오른 갓을 쓰고 발에는 고무신을 신은 사십 가량 되어보이는 사오인의 노인이 무엇인지 수군수군하면서 공원쪽으로 들어간다.’(‘젊은 청춘이 모여드는 안식과 정적의 공원’,조선일보 1925년 8월25일)
마흔은 노인 축에 들었던 모양이다. ‘어두침침한 숲 아래 벤치에 한가한 듯이 걸터앉아 부채로 손장단을 치며 ‘가레스스끼’ ‘가고노도리’ 등 유행창가를 얕은 목소리로 부르고 있는 학생 비슷한 청년들이 둘씩 셋씩 짝을 지어 구석구석 벤치를 찾아 앉는다. 육모정에는 빈틈없이 노동자 여러분이 늦지도 않은 밤에 코를 골고 맨바닥에 누워있다.’ 음울하고 칙칙한 분위기였다.
남산 아래 일본인이 많이 오는 장충단공원과는 대조적이다. ‘우거진 숲사이로 전등은 비친다. 연못을 둘러싼 버드나무는 지나가는 부드러운 바람에 살랑살랑 춤을 춘다. 연못 건너편 언덕에는 수박등을 난간에 보기좋게 달아놓은 찻집이 있고 그 안에는 서늘하게도 차린 일본 젊은 남녀들이 웃고 즐긴다.’◎
조선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