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12/ 세계저명인사2/ 미국1/ 앵거스 디턴- 불평등에 대한 나와 피케티의 우려는 같아, 앵거스 디턴 - 노스 제니 타운 대표, “문재인과 트럼프 당선되면 북한은 매우 강해..
사람들12/ 세계저명인사2/ 미국1/
■2013.11.16 불평등에 대한 나와 피케티의 우려는 같아① - ④ 앵거스 디턴
“부의 불평등은 성장의 원천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올해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인 앵거스 디턴(Deaton·70) 교수에게 가장 듣고 싶었던 얘기였다. 한마디라도 더 자세히 듣고 싶어 첫 질문으로 던졌다. 디턴 교수 역시 기다렸다는 듯 대답했다. 어떻게 보면 ‘흑백’을 묻는 말이었지만, 그의 답변은 상식적이고 온건했다.
“불평등 그 자체만으로는 (성장의 원천이) 아닙니다. 단서가 있습니다. 불평등은 좋은 면도 있지만 어두운 면도 있어요. 좋은 면은 사람들에게 동기(인센티브)를 준다는 겁니다. 먼저 뭔가를 이룬 사람들을 보면서 ‘아, 내게도 가능성이 있구나’ 하고 생각하게 되죠. 새로운 기술이 등장하거나 혁신이 일어나 경제가 성장하면 일부는 먼저 기회를 잡지만 나머지는 뒤처집니다. 이때 생겨나는 불평등은 일종의 발전 결과로, 좋은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다른 한편으로 불평등은 매우 나쁜 결과를 낳을 수도 있는데, 바로 민주주의를 위협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몇몇 부자만이 이득을 보는 금권(金權)정치가 지배하는 세상이 되는 겁니다. 아주 끔찍한 일이죠. 저는 결코 경제 불평등의 전폭적 지지자가 아닙니다. 저 역시 토마 피케티(Piketty) 파리경제대 교수가 걱정하는 것과 같은 것을 우려하고 있습니다. 피케티 교수와 저는 같은 것을 다른 방식으로 볼 뿐, 전혀 반대되는 태도가 아닙니다.”
▲2015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인 앵거스 디턴(Deaton) 교수가 미국 프린스턴대 연구실에서 인터뷰를 하고 있다. /프린스턴(미국)=김남희 조선비즈 기자
지난달 디턴 교수가 올해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로 선정된 후 국내에서는 날카로운 불평등 논쟁이 벌어졌다. 디턴 교수가 작년 ‘피케티 열풍’을 일으킨 프랑스 경제학자 피케티 교수와 대척점에서 불평등을 옹호하는 견해를 가진 것으로 알려지면서다. 피케티 교수는 작년 베스트셀러가 된 저서 '21세기 자본'에서 불평등을 사회악으로 단정하고 부자들에 대한 부유세를 도입해야 한다고 주장해 전 세계 불평등 논쟁에 불을 댕겼다. 반면 국내에는 디턴 교수가 ‘불평등이 사회 발전을 촉진한다’는 취지의 주장을 하는 대표적 학자로 소개됐다. 디턴 교수의 노벨상 수상은 피케티의 주장에 대한 주류 경제학계의 반박이라는 분석까지 나왔다.
그러나 이후 국내 경제학계에선 불평등과 빈부 격차에 대한 두 학자의 관점이 실은 대립하지 않는다는 반론이 이어졌다. 디턴의 저서 ‘위대한 탈출’이 국내 번역본 출판 과정에서 왜곡됐다는 논란도 나왔다. 그렇다면 디턴 교수의 진의는 과연 어떤 것일까?
지난 9일 가을이 깊어져가는 미국 뉴저지주 프린스턴대 캠퍼스에서 노벨상 발표 이후 한국 언론 중 처음으로 디턴 교수를 직접 만났다. 그는 인터뷰 약속 시간에 딱 맞춰 거구를 이끌고 연구실로 천천히 걸어왔다. 이날은 상징인 나비 넥타이를 매지 않았다. 연구실 맞은편에 있는 학과 게시판에는 노벨상 수상 발표 후 프린스턴대에서 열린 기자회견 소식이 조그맣게 걸려 있었다.
▲앵거스 디턴 교수 연구실의 맞은편에 있는 게시판에 디턴 교수의 노벨 경제학상 수상 기자회견 소식이 작게 걸려 있다. /프린스턴(미국)=김남희 조선비즈 기자
불평등은 좋은 면, 나쁜 면 모두 있다
―불평등의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 중 어느 것이 더 크다고 보십니까.
“나라마다 다를 것입니다. 각국이 스스로 논의하고 결정해야 합니다. 불평등이 커진 지난 20~30년간 좌파는 ‘불평등은 나쁜 것이고, 이를 저지해야 한다’고 말했어요. 우파는 ‘불평등이 뭐가 문제라는 거냐. 문제가 아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저는 이 두 견해 모두 틀렸다고 생각합니다. 좌파의 우려도 맞고 동시에 우파의 주장도 옳습니다. 어떻게든 균형을 찾는 것이 중요합니다. 균형은 나라마다, 시대마다 다릅니다.
이 때문에 각국 내에서 민주적 토론이 필요합니다. 제가 보기에 미국인은 유럽인보다 불평등을 훨씬 더 좋아합니다. 제가 1970년대 말에 처음 미국에 교환교수로 왔을 때 미국 사회에서는 불평등이라는 이슈에 관심이 적었어요. 영국에서와는 달리 미국인은 고소득자와 다른 계층 간 소득 불평등에 대해 별로 신경 쓰지 않는 분위기였죠. 오히려 용인하는 분위기랄까요. ‘아메리칸 드림’ 때문이었을 겁니다. 지금은 불평등을 보는 상황이 조금 달라졌습니다. 중요한 것은 국민을 위해 어느 정도 안전망을 갖춰야 하는지를 결정하는 것입니다. 경제학에서 아직까지도 충돌이 빚어지는 어려운 부분이죠.”
―어떻게 균형을 맞출 수 있을까요?
“이미 도구는 모두 가지고 있습니다. (불평등을 줄이기 위해) 어떤 것을 할 수 있을지도 알고 있죠. 세금 인상, 공공 보건 시스템 강화, 공교육 개선 등은 이점도 있지만 비용도 많이 듭니다. 지금 필요한 것은 새로운 도구(정책)가 아닙니다. 기술적으로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모르는 것도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사람들이 무엇을 원하는가’입니다. 누구나 원하는 게 다릅니다. 민주적 논의가 필요합니다. 불평등이 없는 세상은 불가능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한 사람이 모든 것을 가지는 세상도 원하지 않죠. 그 중간에 효과적인 것이 각 나라에 있을 텐데, 이게 나라마다 다 다르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불평등이 현 추세로 확되되면, 민주 자본주의에 위협②
―요즘 불평등의 위험에 대한 경고가 자주 들립니다. 불평등 때문에 자본주의가 위기에 처했다고도 합니다만.
“저는 ‘위기’ 같은 선동적 용어는 좋아하지 않습니다. ‘자본주의의 위기’라는 표현은 마르크스주의자들의 표현 같잖아요. 다만 한편으론 불평등이 지금처럼 계속 빠르게 확대되면 민주적 자본주의에 위협이 될 거라고 많은 사람이 말하고 있습니다.”
―불평등에 대한 사회의 관심이 커진 상황은 어떻게 보시나요?
“잘된 일입니다. 사회가 불평등에 대해 논의해야 합니다. 우리 사회는 아주 오랫동안 불평등에 대해 얘기하지 않았습니다. 좌우가 모두 들을 수 있는 곳에서는 전혀 논의가 되지 않았죠. 저의 노벨 경제학상 수상이 더 진지한 불평등 논의가 이뤄지는 데 도움이 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올해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로 선정된 앵거스 디턴 미국 프린스턴대 교수는 지난달 캠퍼스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어린 시절 경험을 얘기하며 “인생에서는 운이 상당히 중요한데, 다른 가족의 만류에도 아버지 덕분에 공부할 수 있었던 것이 나에겐 큰 행운이었다”고 말했다. /AP뉴시스
디턴 교수는 한국에서 벌어진 논란을 의식한 듯 인터뷰 첫머리에 피케티 교수에 대한 얘기를 꺼냈다. 피케티 교수와 염려하는 바가 비슷하고 반대 의견도 아니라는 것이었다. 피케티 교수가 부의 불평등을 날 세워 비판하긴 하지만, 불평등이 성장을 위해 어느 정도는 유용하다고 인정한다는 점에서도 디턴 교수와 시각이 비슷하다.
그러나 불평등을 해소할 방법에 대해서는 두 사람의 견해차가 크다. 피케티 교수는 소득 상위 1%에게 최고 80% 소득세를 물리자거나, 자산에 대해 최고 10% 부유세를 부과하자는 등 과격한 제안을 한다. 반면 디턴 교수는 꼭 집어 해결책을 제시하지는 않는다. 나라마다 해결책이 다르므로 일괄적으로 얘기할 수 없다는 것이다.
―피케티 교수는 부자에게 더 많은 세금을 매겨 빈부 격차를 줄이자고 주장했습니다.
“불평등을 완화할 공통 해결책은 없습니다. 각 국가가 스스로 해결해야 합니다. 사람들은 각각 다른 걸 원합니다. 경제학자들이 즐겨 쓰는 말이 있습니다. ‘트레이드 오프(trade-off)’란 말인데, 해결 방안이 있으면 그에 따른 비용도 있다는 뜻이죠. 예컨대 세율을 소득의 90%로 올린다면 아무도 세금을 안 낼 겁니다. 세금을 안 낼 방도를 찾을 테니까요. 과거에 그런 일이 실제로 있었습니다. 여러 가지 정책이 어떤 결과를 내는지 이미 알고 있다는 것이죠. 토론이 사람들의 정치적 믿음에 상당히 좌지우지된다는 게 문제 같습니다.”
―저개발 국가의 빈곤 탈출을 다룬 저서 ‘위대한 탈출’ 마지막에 ‘새로운 탈출은 새로운 불평등을 낳을 것이다’고 했습니다. 새로운 불평등이란 어떤 건가요.
“역사를 보면 새로운 혁신은 새로운 불평등을 만들어낸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예컨대 애플은 삶을 더 좋게 만드는 수많은 기기를 세상에 내놨습니다. 저는 애플 기기를 이용해 다른 나라에서도 손자들과 대화하고 아이들 사진을 볼 수 있다는 게 참 좋습니다.
전 세계에 있는 거의 모든 책과 음악도 접할 수 있게 됐죠. 아주 멋진 일입니다. 100년 전에는 교향악단 연주를 들으려고 며칠씩 여행을 가야 했어요. 그러지 않으면 평생 들을 기회도 없었죠.
애플은 새로운 기기를 탄생시킨 덕분에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부유한 기업이 됐습니다. 애플 주주와 임원들도 부자가 됐죠. 이건 상당한 불평등이 생겼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이는 제가 보기엔 꽤 좋은 종류의 불평등입니다. 새로운 혁신, 즉 창조적 파괴가 새로운 불평등을 초래한 겁니다.
과거에도 그랬고 앞으로도 그럴 겁니다. 속도도 빨라졌죠. 이를 멈추는 게 바람직하지도 않습니다. 혁신이 필요하니까요. 그래도 불평등은 조심스럽게 다뤄야 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정부 규제가 없어지지는 않을 겁니다.”
―인류 전체 삶의 수준은 진보했지만, 한 나라 안에서 불평등이 커지는 현상은 어떻게 보십니까? 기업 최고경영자나 월스트리트 금융인들이 천문학적 돈을 받으면서 빈부 격차가 더 벌어지고 있습니다.
“월스트리트나 제약사 때문에 생겨나는 거대한 불균형은 위험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동안 별로 이야기되지 않은 것이 있기 때문인데요. 바로 가장 똑똑한 젊은이들이 이 산업으로 일하러 몰려간다는 점입니다. 그들 개인적으로는 돈을 아주 많이 벌게 될 테니까 좋은 일이죠. 그렇지만 사회에는 꼭 좋은 일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개인의 이익과 사회의 이익이 서로 일치하지 않는다는 게 문제이죠.”
OECD 국가인 한국이 '따라잡기 성장'에 의존할 수는 없어③
―불평등을 논의할 때 정치의 역할은 뭔가요?
“정치는 갈등을 해결하는 수단입니다. 다른 사람들과 함께 사는 사회에서는 내가 원하는 걸 남이 원하지 않을 수도 있고 남이 원하는 걸 내가 원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정치는 이 갈등을 해소할 수 있는 한 방법입니다. 매우 중요한 기능이죠.
정치가 매섭고 분열적인 것도 이 때문이겠죠. 꼭 민주주의가 아니라도 모든 형태의 정치는 어떤 식으로든 갈등을 풀기 마련입니다. 그중에서도 민주정치가 효과적이기 때문에 우리 사회가 민주주의를 유지하는 것이겠죠.”
개발도상국, 자체 성장 모델 개발해야
스웨덴 왕립과학원은 지난달 12일 디턴 교수를 올해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로 선정하며 ‘소비·빈곤·복지’라는 세 가지 키워드를 제시했다. 왕립과학원은 “복지를 증진하고 빈곤을 줄이는 경제정책을 설계하려면 우선 개인의 소비 선택을 이해해야 한다”며 이 분야 연구에서 디턴 교수의 공로를 높이 평가했다. 디턴 교수는 최근에는 특히 건강, 복지, 빈곤국의 경제 개발을 중점 연구하고 있다.
―선진국 경제가 저성장을 겪고 있습니다. 개발도상국의 빈곤과 선진국 내부 불평등에 어떤 영향이 있다고 보십니까.
“복잡한 문제입니다. 선진국의 경제성장 둔화는 모두에게 나쁜 영향을 줍니다. 환경에는 좋다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경제성장이 환경 문제 대응에 필요한 자원을 제공한다는 점에서 꼭 성장 둔화가 환경에 유익하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성장률 하락으로 해결할 수 있는 게 없다고 생각합니다.
또 부자 나라의 경제성장이 약해지면 가난한 나라들이 물건을 내다 팔 수 있는 시장이 작아지니 안 좋은 일이죠. 경제성장 둔화는 정치에도 악영향을 줍니다. 경제가 성장하지 않는다면 한 그룹이 이득을 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다른 그룹을 희생시키는 것뿐이니까요. 따라서 경제성장률이 떨어지면 상황이 훨씬 더 어려워집니다.”
앵거스 디턴 교수는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로 결정된 후 잠을 충분히 못 자고 있는데, 아무래도 첫 달이니까 그렇지 않겠느냐”며 웃었다. 책으로 가득 찬 연구실에서 인터뷰하는 도중에도 디턴 교수는 수차례 스마트폰을 집어들고 메시지를 확인했다. /프린스턴(미국)=김남희 조선비즈 기자
―저성장 시대에 개발도상국이 새로운 모델을 만들어야 할지 논의가 벌어지고 있습니다.
“각 국가가 각자 길을 찾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현재 중국이 특이한 방식으로 하고는 있는데, 지금보다 더 민주적이어야 합니다. 경제가 더 빠르게 성장하는 아시아와 다른 지역은 성장을 먼저 거친 선진국과는 달라야 합니다. 이들은 이미 발명된 많은 것을 가져다 쓸 수 있습니다. 컴퓨터나 전자 기기 같은 기술을 재창조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냥 옮겨 가기만 하면 됩니다.
개발도상국의 성장이 선진국과는 다르고 선진국보다 더 빠를 수 있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그러나 결국에는 ‘추격자 어드밴티지(이점)’ 효과가 증발하고 맙니다. 한국은 이제 거의 선진국에 가까워졌습니다. 한국이 미국만큼 좋은 차를 만들고 있지 않습니까?”
―한국도 새로운 성장 모델이 필요하다는 말씀입니까?
“그렇습니다. 물론 쉽지 않을 것입니다. 경제성장이 완전히 새로운 것에 달려 있고 그 새로운 것을 스스로 생각해내야 하니까요. 한국은 이미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일원이며, 더는 ‘따라잡기 성장’에 의존할 수 없습니다. 한국은 다른 나라와 마찬가지로 새로운 방법을 찾아야 합니다.
그러려면 교육이 매우 중요해집니다. 한국에는 교육을 잘 받고 똑똑하고 유능한 인재가 많습니다. 한국이 스스로 길을 찾지 못할 이유가 없습니다. 이탈리아는 물건을 자기만의 것으로 다르게 만들기로 유명한데, 한국을 ‘동양의 이탈리아’라고도 하더군요.”
―한국에서도 빈부 격차가 확대되면서 계층 간 갈등이 커지고 있습니다. 어떤 조언을 해주시겠습니까.
“사회의 적극적 논의가 필요합니다. 한국은 큰 경제성장을 이뤘고 삶의 수준이 크게 개선됐습니다. 그러나 뒤에 남겨진 사람도 여전히 많습니다. 저는 먼저 성공한 사람들이 자기 삶의 수준 향상이 혼자 힘으로는 불가능했다는 것을 인식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나라에 빚진 것이 있다고 생각하고 뒤에 남겨진 사람들을 도와야 합니다. 건강관리와 교육 개선에 노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원조 효과 없다…북한 원조 효과도 회의적④
개발 경제학의 선구자인 디턴 교수는 개발도상국 원조에는 강력하게 반대하는 견해를 갖고 있다. 원조는 저개발국에 만연한 부패를 부추기고 독재 정부의 배만 불린다는 이유를 든다. 그는 “질병 퇴치에 쓰이는 일부 원조는 효과가 있지만, 과도한 원조는 부정적 결과가 크다”고 했다.
―원조가 수백만 명의 생명을 구하고 경제성장에 긍정적 영향을 준다고 주장하는 경제학자도 많습니다만.
“저는 원조가 경제성장을 일으킨다는 증거를 본 적이 없습니다. 학자들이 ‘이렇게 됐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가득 찬 연구를 하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결과는 신통치 않을 때가 많습니다. 원조가 경제성장을 늦춘다는 증거는 있지만, 더 빠르게 성장하게 만든다는 증거는 없습니다.
그래서 최근 원조 사업의 방향이 보건 관련 원조로 더 많이 옮아가고 있습니다. 보건 원조가 생명을 구한다는 것에는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이 점은 분명하게 밝히고 싶군요. 그러나 이때도 과도한 원조가 부정적 결과를 낳은 예 역시 많습니다. 원조를 계획할 때 이 점을 고려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원조 수혜국에 대한 단순 재정 지원이 아닌, 구체적 프로젝트 단위의 원조 효과는 어떻게 보십니까.
“프로젝트를 기반으로 한 원조 역시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효과가 없습니다. 세계은행이 프로젝트 단위 원조에 대한 지원을 끊었을 정도로 비효율적입니다. 이 역시 부패가 들끓고 효율적인 진행이 어렵습니다. 나라 전체 경제가 엉망인 상황에서 프로젝트 하나를 고친다는 생각 자체가 말이 안 됩니다.”
―한국에서는 북한 원조를 둘러싼 논쟁이 치열합니다. 어떻게 보십니까.
“저는 결국 독재자에게 흘러갈 지원은 하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국민을 돕는 일이라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실제로는 독재자의 생존을 돕는 것일 수 있습니다. 예컨대 아프리카에는 질이 나쁜 독재자가 많습니다. 이런 나라에 원조를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를 두고 끝없는 논쟁이 이어지죠. 원조를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쪽에서는 어린이의 생명을 구한다는 논리를 듭니다. 독재자가 싫다고 해서 아이들을 내팽개칠 거냐는 것이죠. 반대쪽에서는 결국엔 독재자가 아이들에게 가야 할 돈을 가로채 자기 배를 불린다고 반박합니다. 북한에서는 북한 정부를 거치지 않고 북한 주민을 지원하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북한 정부가 모든 것을 통제하니까요. 이렇게 생각해보세요. 여러분 이웃 가정의 남편이 사이비 종교에 빠져서 아내를 때린다면 그 아내가 불쌍하다고 느끼겠죠. 그래서 그 아내에게 돈을 준다면 그 돈은 고스란히 남편이 빼앗고 아내를 계속 때릴 겁니다. 결국 남편 좋은 일만 해주는 꼴이 됩니다.”
―세계은행이 지난달 공식 빈곤선을 하루 소득 1.25달러에서 1.90달러로 올렸습니다. 적절한 조치라고 보십니까.
“현실을 조금 더 반영했다는 면에서는 좋은 시도라고 봅니다. 그러나 빈곤 측정 방식에는 여전히 문제가 많습니다. 국가 간 생활수준을 비교하는 것은 매우 어렵습니다. 자료도 여전히 부족하고, 우리가 모르는 것이 너무 많습니다. 단순히 소득이 아니라 빈곤의 다른 측면을 측정하는 데 더 많이 주의해야 합니다. 예컨대 건강과 영양 상태 같은 것입니다. 인도는 국가 전체의 부는 상당히 늘었지만 여전히 굶주림에 시달리는 아이가 많습니다. 나라 경제 규모가 커졌다고 손뼉을 칠 때가 아닙니다. 다만 빈곤과 불평등은 다릅니다. 둘을 혼동해서는 안 됩니다. 빈곤은 바닥층에서 일어나는 것이고 불평등은 다른 계층 간 또는 개인 간 차이를 말합니다. 부자에게 더 많이 주면 불평등이 커지지만 빈곤에는 아무런 영향을 주지 않습니다. 빈곤과 불평등은 서로 관련이 있지만 같은 것이 아닙니다.”
프린스턴(미국)=김남희 조선비즈 기자
■ 2015.05.21 짐 클리프턴 갤럽 회장
"북한은 여론이 존재하지 않는 어둠의 국가… 점수 매긴다면 0점"
"북한에 대해 여론 (형성) 측면에서 점수를 매긴다면 0점입니다. 북한은 이라크나 팔레스타인과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최악입니다."
세계적 여론조사 기관인 갤럽의 짐 클리프턴(Clifton) 회장은 20일 서울 신라호텔에서 가진 인터뷰에서 "북한은 주민의 여론이 존재하지 않는 어둠의 국가"라며 "정부의 통치구조에 대한 (국민의) 이해도 측면에서 최악의 여론조사 국가로 평가되는 이라크나 팔레스타인보다 훨씬 나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북 주민들은 '어떤 정부가 바람직하냐'는 질문에 응답할 정도의 판단력이 현재는 없을 것"이라며 "두려움과 고통에 시달리면서 자급자족하는 데 급급한 데다 북한 정권의 세뇌 작업 때문에 그럴 것"이라고 했다.
▲짐 클리프턴 갤럽 회장이 20일 서울 중구 신라호텔에서 열린 제6회 아시안리더십콘퍼런스에 참석, '일의 미래' 세션 기조연설을 하고 있다. /오종찬 기자
클리프턴 회장은 북한에 정치적 여론이 확산되기 위해서는 인터넷과 모바일의 확산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현재 북한 내 휴대폰 가입자는 250만명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튀니지와 이집트 등 민주주의가 촉발된 국가를 보면 젊은 20~30대들이 그간 접하지 못했던 인터넷을 통해 '나는 왜 좋은 일자리가 없이 굶고 사는가'라는 생각을 갖게 됐다"며 "이러한 움직임이 북한의 젊은이들에게도 나타나야 한다"고 했다.
그는 기회가 된다면 북한 주민의 실상을 파헤치는 여론조사를 하고 싶다고 했다. 그는 "북 주민들이 얼마나 두려움에 사로잡혀 사는지, 의식주는 어떻게 해결하는지, 미래를 위한 희망이 있는지 묻고 싶다"며 "이를 다른 나라와 비교해 실태자료를 만들면 통일 과정에 보탬이 될 것"이라고 했다. 그는 "한국이 분단국가라는 사실을 미국과 유럽인의 20%만 알고 있을 것"이라며 "분단상황을 전 세계에 알려야 통일에 대한 글로벌 공감대도 형성할 수 있다"고 했다.
이신영 경제부 기자
■ 2015.08.03 '빈곤의 종말' 저자 제프리 삭스 미국 컬럼비아대 교수 특별인터뷰① - ⑤
"한국은 부존자원 없이도 빈곤을 퇴치했다는 좋은 사례"
제프리 삭스(Jeffrey Sachs) 미국 컬럼비아대 교수는 세계 경제학계 ‘슈퍼스타’다. 말 만들기 좋아하는 호사가(好事家)들은 로렌스 서머스 전(前) 미국 재무장관(현 하버드대 교수), 폴 크루그먼 프린스턴대 교수와 함께 삭스 교수를 세계 3대 경제학자라고까지 부른다. 그러나 삭스 교수가 나머지 두 명의 교수보다 업적 면에서 더 나은 평가를 받는 이유는 그가 추구하는 학문의 방향성 때문이다. 현재 컬럼비아대에서 지구연구소(The Earth Institute) 소장으로 재직하고 있는 삭스 교수는 지속가능 개발(Sustainable Development)이라는 목표를 위해 활동무대를 강단에서 현장으로 넓혔다. <빈곤의 종말>, <커먼 웰스>, <문명의 대가> 등을 통해 대중과 호흡하는 것과 동시에, 전 세계 저개발 국가를 돌며 부의 불균형 문제를 해소하는 데 주력하고 있다. 그에게 있어 경제학은 통계기법을 활용한 전망(Forecasting)이 아니라 인류의 공존을 모색하는 수단(Tool)이다.
사회운동가적 기질도 엿보인다. 지난 2011년 월가(街)의 탐욕에 대한 항의로 수많은 대학생들이 ‘월가를 점령하라’(Occupy Wall Street)라는 구호를 들고 거리로 나섰을 때, 그는 선두에 서서 “상위 1%가 부(富)를 독점하는 현 자본주의체제는 잘못됐다”고 비판했다. 지난 5월18일 ‘지속가능 개발의 시대(The Age of Sustainable Development)라는 주제로 열린 한국고등교육재단 초청 강연회에 앞서 <이코노미조선>과 가진 인터뷰에서 삭스 교수는 비판론자들을 향해 “나는 낙관론자가 아니라, 빈곤을 퇴치할 수 있다고 믿는 긍정론자”라고 말했다. 또 그는 “한국은 부존(賦存)자원 하나 없는 저개발 국가가 어떻게 빈곤을 퇴치했는지를 보여준 좋은 사례”라면서 “한국의 놀라운 과학기술과 혁신은 지속가능한 개발 시대 중요한 동력이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지하자원 없이 인적자원만으로 성공 대단
북유럽형 사회민주주의 연구 가치 있어
▲제프리 삭스 미국 컬럼비아대 교수는 세계 부(富)의 불균형을 없애기 위해 다양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이신영 기자
제프리 삭스 교수와의 대담(對談)을 마련하는 것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다. 거물급 인사인 탓에 방한 기간 동안 중간에 빈 스케줄을 비집고 들어가는 것 자체가 쉽지 않았다. 지난 5월17일 저녁에 한국에 도착한 그는 18일 오전에는 유엔 자문그룹인 지속가능발전네트워크(SDSN) 한국지부 회의를 주재한 데 이어, 오후 2시에는 한국국제협력단(KOICA) 초청 ‘지속가능 발전을 위한 개발재원회의’에 참석했다. 오후 6시에는 한국고등교육재단이 주최하는 대중강연회에 연사로 나섰다. 우리의 당초 인터뷰 약속시간은 이날 오후 1시였다. 이튿날인 19일에는 세계교육포럼과 유엔글로벌컴팩트 코리아 리더스서밋 2015, 아시안리더십콘퍼런스 참석이 예정돼 있었다. 현재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의 밀레니엄개발목표 특별자문관을 맡고 있는 삭스 교수는 행사 중간마다 분(分) 단위로 시간을 쪼개 정부, 학계 관계자들을 만나며 저개발 국가 지원과 관련한 다양한 아이디어를 주고받았다. “이번 일정만 이렇게 빡빡한 게 아니냐?”는 기자의 질문에 삭스 교수를 수행하는 클레이 벌저(Claire Bulger) 컬럼비아대 지구연구소 연구원은 “이번 스케줄은 오히려 시간이 넉넉한 편”이라면서 “저개발 국가에 갈 때는 잠잘 시간도 모자랄 정도로 바쁜 일정을 보낸다”고 말했다. 대담은 삭스 교수의 바쁜 일정 탓에 강연회 직전 잠시 진행됐으며 시간 부족으로 못한 질문은 서면 인터뷰 형식으로 진행됐다.
지난 2000년 9월 유엔 밀레니엄 정상회의는 세계 빈곤 문제를 개선하기 위해 △극한의 가난과 기아 퇴치 △초등교육의 확대와 보장 △남녀평등과 여성 권익 신장 △유아 사망률 감소 △임산부 건강 개선 △에이즈, 말라리아 등 질병 퇴치 △지속 가능한 환경 보호 △개발을 위한 전 세계적 협력 구축 등의 합의를 이끌어냈다. 이렇게 만들어진 밀레니엄개발목표(MDGs)는 계획대로 올해 마무리되고, 오는 9월 열리는 유엔 정상회의에서는 지속가능발전목표(SDG)가 새롭게 만들어진다. 지속가능 성장을 위한 17가지 실천 과제로 돼 있는 SDG는 빈곤 퇴치부터 교육 강화, 평등 실현까지 포괄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MDGs의 확대된 개념이다. 이 두 가지 글로벌 어젠다가 마련되는 데는 삭스 교수가 커다란 역할을 했다.
<②편에 계속>
<①편에서 계속>
▲제프리 삭스 교수가 지난 5월18일 서울 역삼동에서 열린 한국고등교육재단 초청 강연회에서 연설하고 있다. /이신영
송창섭 기자(이하 송) : 올해는 유엔이 주도하는 밀레니엄개발목표(MDGs·Millennium Development Goals)가 마무리되는 해입니다. 그동안 MDGs를 통한 교수님의 노력이 성공적이었는지 묻고 싶습니다.
제프리 삭스 교수(이하 삭스) : 저는 밀레니엄개발목표가 극심한 빈곤을 줄이고 기아, 질병 퇴치에 대한 전 세계의 관심을 성공적으로 이끌어 냈다고 생각합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에이즈, 결핵, 말라리아 퇴치를 위한 국제협력과 해당국가의 정책적 노력을 이끌어냈습니다. 아이들이 학교에서 제대로 된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하는 것과 가난한 소규모 농가 지원 등 빈곤을 없애기 위한 노력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계획대로라면 빈곤의 종말(The end of poverty)은 오는 2030년이면 가시화될 겁니다. 이를 위해 우리는 현재 지속가능발전목표(SDG·Sustainable Development Goal) 1단계 수립 절차를 9월에 마무리할 생각입니다.
송 : 교수님은 저서 <빈곤의 종말>에서 지구상 빈곤을 2025년까지 끝낼 수 있다고 하셨는데요. 지금도 이것이 가능하리라 보시는지요.
삭스 : 지난 몇 년 간 우리의 빈곤 퇴치를 위한 노력은 다소 지체된 것이 사실입니다. 무엇보다 2008년 경제위기가 닥치면서 주요 선진국들이 공적 개발 원조를 늘리지 않았기 때문이죠. 세계 각국이 SDG 1단계를 통해 극심한 빈곤을 종식시키려는 노력에 합의한다면, 오는 2030년 빈곤의 끝을 볼 수 있을 겁니다. 세계 각국 정부가 우리 세대의 극심한 빈곤에 대해 종말을 고하는 것에 강력한 지지를 보내길 희망합니다.
송 : 제가 보기에 부의 균등한 분배를 위한 국제공조는 잘 이뤄지지 않는 것 같습니다. 교수님은 최근 세계은행과 국제통화기금(IMF)이 비판을 받는 이유가 뭐라고 보십니까. 아울러 중국이 주도하고 있는 아시아인프라개발은행(AIIB)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삭스 : 현재 국제공조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는 가장 큰 문제는 선진국들(High-income countries)이 소득의 0.7%만 공식적인 개발원조에 쓰고 있다는 점입니다. 아울러 이들은 조세피난처를 없애고 법인관련 제도의 남용을 근절하는 데도 소극적이죠. 인류가 저지른 기후변화에 대해 결단을 내리는 것 등 세상을 평등하게 만드는 조치들에 반대하고 있는 겁니다. 이런 식의 구조는 극히 불안정하고 불평등합니다. 그런 면에서 세상을 공정, 공평하고 사회통합적인 경제 체제로 이끄는 지속가능 개발 목표를 세우는 것은 정말 중요합니다.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AIIB)을 물어보셨는데요. 저는 개인적으로 AIIB가 아시아 지역 투자와 인프라 확충에 도움을 주는 아주 좋은 계획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중국 정부가 이런 계획을 추진하는 것을 지지한다고 공개석상에서 말한 바 있습니다. 이 계획은 공적 기금이 더 높은 차원의 공익을 실천할 수 있는 대담한 계획이라고 평가하고 싶습니다. 바람이 있다면 AIIB가 환경의 지속성에 대해 많은 관심을 가져주길 기대합니다.
송 : 저는 개인적으로 교수님의 지속가능 개발 모델이 마치 국제기구와 각국 정부의 참여만을 독려한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저는 공공 못지않게 민간의 참여를 어떻게 늘리느냐가 관건이라고 생각합니다. 지속가능 개발에 민간이 참여해 이익을 낼 수 있는 영역은 없는 것인지 여쭤보고 싶군요.
삭스: 저는 공공과 민간 영역이 조화를 이룬 혼합경제를 신봉하는 사람입니다. 두 영역 모두 중요하며, 비영리를 추구하는 사회적기업도 세 번째 영역을 이룬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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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②편에서 계속>
“오는 2030년 세계 빈곤 종말의 시대 온다”
제프리 삭스 교수(사진)가 말하는 오염(Pollution)은 환경적인 개념만 해당하지 않는다. 정치 부패, 사회적 불평등 등 부조화와 관련된 모든 요소가 총망라돼 있다. 일반적으로 개발경제학에서 빈곤은 저개발 국가의 경제개발을 저해하는 근원적인 요인이다. 빈곤의 악순환을 끊는 것은 저개발국가 경제성장의 기본 과제다. 이 과정에서 삭스 교수는 “경제성장은 단순히 제도에만 맡겨서는 안 된다. 개발에 필요한 모든 역량이 한데 모아져야 한다”고 말한다. 그런 점에서 그는 세계은행 이코노미스트 출신 폴 로젠스타인 로댄이 주장한 빅푸시 이론(Big Push Theory)의 신봉자다. 삭스 교수는 눈부신 경제성장을 통해 빈곤 문제를 해결한 국가로 한국을 높이 평가했다. 제대로 된 부존자원 하나 없이 오로지 인적 자원 개발에 사활을 걸어 오늘날 세계 10대 경제대국으로 성장한 한국은 빈곤의 대물림을 끊어버린 좋은 사례다. 그가 생각하는 공정한 사회란 공동의 목표를 달성하는 데 구성원 모두가 참여하는 것이다. 그는 “고소득자들도 스스로의 특권을 내려놓고 지속 가능한 발전을 위해 협력을 도모해야 한다”고 말했다.
송 :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 시스템이 그렇게 심각한 상황인가요.
삭스: 영국 글래스고 대학 출신의 제임스 와튼이 개발한 증기엔진은 인류 문명을 너무 많이 바꿔놓았습니다. 문명은 발달했지만 국가간 부의 불평등 또한 심각해졌죠. 여전히 많은 나라들이 빈곤의 덫에 빠져 있습니다. 증기기관이 생겨난 이후 경제 규모는 산업혁명 이전보다 100배나 커졌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사이 우리 지구가 100배나 커지지는 않지 않았습니까. 인구 증가로 인한 식량 부족은 정치 불안을 만들 겁니다. 그런데도 여전히 부자나라들은 기득권 내려놓기를 주저하고 있습니다.
송 : “한국의 경험을 다른 개발도상국과 공유해야 한다”고 말씀하셨는데요. 이유를 묻고 싶습니다.
삭스 : 지난 1998년 외환위기는 말 그대로 금융위기였습니다. 당시 한국은 패닉 상태였죠. 경제가 패닉상태에서 정신을 차리기 위해서는 통화당국이 유동성을 늘려야 합니다. 그런데도 국제통화기금(IMF)은 정반대 처방을 했습니다. 그리고 2008년 미국이 위기에 처했을 때 어땠습니까. 페드(Fed·연방준비제도이사회)에서 유동성을 보장하겠다고 시장을 안심시켰지 않습니까. 몸에 열이 나더라도 왜 그런지 원인은 다를 수 있습니다. 경제도 마찬가지죠.
한국은 우수한 두뇌와 과학기술의 결합으로 경제를 성장시켰습니다. 자원 없이 이런 일을 성공한 나라로는 아마 한국이 유일할 겁니다. 당장 보십시오. 지금 삼성과 애플이 경쟁하는 세상이 아닙니까. 한국은 녹색경제를 창출하고 빈곤층을 도우며 혁신을 향한 솔루션을 마련하는 데서 길을 찾아야 합니다.
송 : 그동안 교수님이 주도가 돼 진행됐던 지속가능 성장과 개발(Sustainable Growth & Development) 캠페인에서 한국의 활약이 어땠는지 궁금합니다. 한국의 참여가 어떤 특별한 의미를 갖고 있다고 보십니까.
삭스 : 한국은 반세기만에 가난을 딛고 일어서 경제발전을 이뤄낸 성공적인 국가 중 한 곳입니다. 따라서 한국은 다른 나라들이 극심한 빈곤을 끝내고 성공을 이뤄내는 것을 돕는 일에 있어 리더 역할을 해야 합니다. 한국이 가진 경험, 노하우, 기술 그리고 자금 조달 방법 등은 충분히 공유할 만한 가치가 있습니다. 한국 기업인 삼성이나 LG 같은 대기업이 가진 정보통신기술 분야의 리더십은 아프리카의 경제적 발전을 이끌어 낼 역할을 할 수 있으리라 기대합니다. 삼성전자의 갤럭시 폰으로 아프리카 말라리아모기를 퇴치하는 데 쓰는 것도 충분히 가능합니다. 동시에 한국 내 산적한 발전 과제를 진행하는 일도 중요합니다. 화석연료에서 풍력, 태양열, 원자력, 수력, 지열, 탄소포획 및 격리기술(CCS) 같은 저탄소 에너지로 바꿔가는 것 말입니다. 다시 말해 대부분의 고소득 국가들이 겪고 있는 문제를 해결하는 것도 중요한 과제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송 : 안타깝게도, 현재의 한국정부는 전임 정부의 중요 정책기조였던 ‘녹색성장’을 뒤로 미룬 상태입니다. 교수님께서는 이를 어떻게 보십니까.
삭스 : 저는 한국이 장기적으로 경쟁력을 갖추기 위해 녹색경제에 집중하라는 말을 해주고 싶습니다. 세계 경제는 지속가능한 기술로의 전환을 필요로 합니다. 한국이 이미 기술 강대국인 만큼 녹색기술 분야에 있어서도 리더가 될 수 있습니다. 저탄소 에너지로의 전환은 한국에게 엄청난 기회가 될 겁니다. 한국은 지금도 지속가능 분야의 리더입니다. 특히 정보기술(IT)산업 분야에서 한국은 선도적인 위치에 있습니다. 혁신을 통해 녹색분야에서 기회를 찾는다면 한국은 분명 번영을 이어갈 겁니다. 더군다나 한국은 이미 사회가 고령화되고 있지 않습니까. 이러한 때는 새로운 기술, 새로운 제도가 필요한 법입니다. 그래야만 평화적인 한반도 통일도 가능하죠. 최근 한·중·일 세 나라 사이가 껄끄럽다고 들었는데요. 동북아 3국은 세계경제의 한 축이 될 정도로 성장했습니다. 기술 흐름의 측면에서도 그렇죠. 지속가능 발전을 위해서도 동북아 3국 관계는 중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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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③편에서 계속>
송 : 복지정책 확대는 최근 전 세계적인 현상입니다. 하지만 복지 확대로 인한 경기침체를 우려하는 의견도 있습니다. 이러다보니 한국 내에서는 복지정책 축소를 주장하는 사람들도 꽤 많습니다. 이들에게 어떤 말씀을 하고 싶으십니까.
삭스 : 저는 건강, 교육, 가족 부양, 연금과 같은 복지정책은 현실경제에 기반을 둔 채, 재정에 대한 장기적인 관점에서 운영돼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북유럽의 사회민주주의 국가들이 그랬던 것처럼 충분히 성공적으로 진행될 수 있습니다. 저는 사회통합, 사회보험, 아동복지, 경제효율을 위해서도 강력한 사회복지 시스템은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송 : 지난해 프랑스 경제학자 토마 피케티 교수의 이론이 화제가 됐습니다. 부의 불균형을 걱정하는 면에서 교수님의 생각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고 보는데요.
삭스 : 제가 몇 년 전 <문명의 대가(The Price of Civilization)>라는 책을 썼는데요. 이 책에는 미국의 심각한 소득, 빈부 격차를 극복할 전략이 담겨져 있습니다. 저의 생각이 피케티 교수의 주장과 비슷한 부분도 있고 다른 점도 있습니다. ‘불평등의 증가가 불가피하다는 것에 동의하지 않는다’는 것을 빼고는 제 생각을 더 자세히 설명하기는 힘들 것 같군요. 다만 이러한 소득, 빈부 격차는 효과적인 공정정책으로 대응할 수 있다는 게 제 견해입니다.
송 : 부자에게서 세금을 더 거둬야 한다는 교수님의 주장에 부유층의 반발이 클 것 같습니다. 이와 관련해 부자들을 어떻게 설득시켜야 할까요.
삭스 : 저는 공정하고 적합한 방법으로 부자에게 세금을 부과해야 하며 많은 이들에게 앤드루 카네기, 록펠러, 빌 게이츠, 워런 버핏 등 훌륭한 자선사업을 펼친 사람들의 뒤를 따라갈 수 있도록 설득해야 한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자선사업은 세상을 더 좋게 만드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며 또 그렇게 돼야 합니다. 올해 <포브스>의 억만장자 리스트에 올라온 1826명이 7조1000억달러(약 7772조원)에 육박하는 순이익을 올렸다고 들었습니다. 물론 이는 상식적으로 그들과 그들의 가족이 쓸 수 있는 소비를 훨씬 넘어설 겁니다. 부는 공익을 위해 사용돼야 합니다. 제 개인적으로는 많은 부유층들이 이러한 전략을 채택했으면 합니다. 이는 그들 자신의 삶을 풍요롭게 하는 것은 물론, 전 세계 수많은 사람들의 삶의 질을 높이게 될 겁니다.
▲1.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미국 유명 경제학자들을 초청한 회의에 참석한 제프리 삭스 교수(맨 왼쪽). 2. 제프리 삭스 교수가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오른쪽), 조지 소로스 소로스펀드매니지먼트 회장(가운데)과 손을 잡고 웃고 있다. 3. 제프리 삭스 교수는 현재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 밀레니엄개발목표 특별자문관으로 활동 중이다. /jeffsachs.org
“미국의 시대 가고, 중국의 시대 온다”
삭스 교수는 미국에서 진보적인 학자로 분류된다. 미국 주류사회에 대해 거침없이 비판한다. 그렇다고 해서 자본주의 시스템 전체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그의 학문적 노선은 ‘시장경제에는 긍정을, 그러나 시장사회에는 부정’이라는 기조 아래에 있다. 거시경제학자인 삭스 교수는 자신의 저서 <커먼 웰스(Common Wealth)>에서 미국 중심 시스템의 종말을 예언하면서 “이는 미국 복지의 붕괴가 아니라 아시아의 경제력 증대로 인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송 :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자본주의를 비판하는 목소리가 높습니다. 자본주의가 미래에는 어떤 모습으로 변신하리라 보십니까.
삭스 : 자본주의는 지속 가능한 성장의 테두리 내에서 운영돼야 한다고 봅니다. 이는 시장의 역할이 사회 통합과 환경의 지속성을 촉진시키는 방향으로 가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죠. 그런 면에서 저는 개인적으로 덴마크, 노르웨이, 스웨덴 등 스칸디나비아(북유럽)국가들이 채택한 사회민주주의(Social Democratic) 모델이 지금으로선 가장 성공적인 경제시스템이라고 생각합니다.
송 : 지금 그리스 처리 방식만 봐도 세계 경제 리더십에는 문제가 있어 보입니다. 지금처럼 리더십이 사분오열된 상태에서 많은 지구촌 이슈가 해결될 수 있을까요.
삭스 : 그리스 사태는 한 나라의 정치지도자가 국제 문제 해결보다는 자국 정치에 더 집중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유럽연합 파트너들은 그리스가 위기를 딛고 일어설 수 있도록 더 도와줘야 합니다. 저는 그리스와 유럽연합 회원국들이 해결책을 찾으리라 기대했지만 지금까지 너무 시간을 끌었습니다. 그 사이 불필요한 손실이 너무 많아졌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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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 : 주요 외신들에 따르면, 미국 경기가 최근 살아날 조짐을 보이고 있다고 합니다. 교수님께서도 미국이 위기를 잘 이겨낼 거라고 보십니까.
삭스 : 미국 경제는 아직도 공공재에 대한 투자 부족이 심각합니다. 또 화석연료에 대한 지나친 의존, 극심한 소득으로 인한 빈부격차도 문제입니다. 주요 외교 무대에서 평화를 위한 개발보다 군사적 접근을 지나치게 강조하고 있는 것도 골칫거리죠. 그런 의미에서 저는 미국 경제가 지속가능 개발이라는 과제에 적절히 대응하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기술적으로 역동적으로 바뀌었다는 데는 동의하고 이 또한 희소식이지만 미국 경제는 여전히 심각한 문제가 많습니다. 무엇보다 이를 해결할 수 있는 정치적·사회적 합의가 이뤄지지 않고 있죠.
송 : 중국 경제 성장 속도가 매우 빠릅니다. 최근 중국 경제의 변화를 교수님은 어떻게 보십니까. 정말 중국이 미국을 제치고 세계 최대 경제국가가 될 수 있을 거라고 보시는지요.
삭스 : 몇 개의 근거를 토대로 말씀드리면, 중국 경제는 절대치로 봤을 때 미국보다 규모가 큽니다. 중국의 1인당 국내소득 수준이 미국의 4분의 1 정도지만, 중국 인구가 미국보다 4배 정도 많다는 것을 감안해야 합니다. 저는 중국 경제가 금융시장 규제 등 많은 과제를 안고 있지만, 굉장한 성공을 거두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무엇보다 중국회사, 과학자 그리고 엔지니어들이 가진 혁신 역량을 중요하게 봐야 합니다. 앞으로 이는 중국이 해외 기술적 발전과 더불어 내부 혁신에 기반을 둔 내적 발전을 이뤄내는 데 중요 동인(動因)이 될 겁니다. 중국은 이미 해외 주요 나라에 자금을 투자했고 이는 몇 년 후 중국 경제가 더 나가도록 하는 추진력이 될 거라고 생각합니다.
지난 5월18일 서울 역삼동 한국고등교육재단에서 열린 ‘제프리 삭스 교수 초청 특별강연회’에는 1000여 명의 청중이 몰리는 등 성황을 이뤘다. 2시간 가까이 진행된 강연에서 삭스 교수는 “지구를 파괴하면서 얻는 대가가 아무 것도 없는데 도대체 왜 대가 없는 짓을 하는가”라며 무분별한 환경파괴를 강도 높게 비판했다. 이후 진행된 질의·응답 시간은 양수길 한국지속가능발전해법네트워크(SDSN-Korea) 대표가 청중들로부터 사전질문을 받아 삭스 교수에게 묻는 형식으로 진행됐다. 자신을 가리켜 낙관론자, 이상론자라고 부르는 비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청중의 질문에 삭스 교수가 입가에 옅은 웃음을 띠었다.
“43년 전인 1972년 경제학이 마냥 좋아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경제학을 공부하면서 제 스스로에게 반문한 것이 ‘왜 아직도 일부 지역은 가난하고 평등하지 않은가’였습니다. 굉장히 풀기 어려운 문제였죠. 지금까지 제 스스로 이 문제를 해결하는 데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합니다. 경제학은 사람을 돕는 학문이기 때문이죠. 제 아내(소니아 삭스)가 소아과 의사인 데요. 함께 살면서 감동을 받은 것이 아내가 자신이 알고 있는 지식을 가지고 아픈 사람을 진단하고 치료하는 데 사용하고 있다는 점이었습니다. 제가 하는 일도 그렇습니다. 세계는 매우 복잡합니다. 단순하지 않죠. 제가 말하는 것은 냉소가 아닙니다. 냉소와 비판은 엄연히 다른 겁니다. 지금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느냐의 갈림길에 있습니다. 여러분 모두 열심히 공부하고 윤리적으로 행동하십시오. 여러분께 진심으로 이 점을 당부하고 싶습니다.”
2시간 넘게 그의 강연을 듣던 청중들이 순간 우레와 같은 함성을 지르며 박수를 보냈다. 행동하는 지식인의 말 한마디가 얼마나 가슴을 울리는 지 느껴서였을까. 타이핑을 하던 기자의 손은 어느 순간 컴퓨터 자판에서 떨어져 힘차게 박수를 치고 있었다.
■제프리 삭스 교수는…
1954년 생. 1976년 하버드대를 최우등(Summa Cum Laude)으로 졸업한 뒤 1980년 동(同) 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1983년 29세 나이에 당시 하버드대 최연소 정교수에 오른 삭스 교수는 지난 2002년 컬럼비아대 경제학과 교수로 자리를 옮겼다. 그는 25년 이상 미국과 유럽, 아시아, 아프리카, 중동 등지에서 각국 정부에게 경제 전략에 대한 조언을 해 왔다.
<뉴욕타임스> 선정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경제학자’로 뽑혔으며 지난 1994년을 비롯, 두 번에 걸쳐 <타임>의 가장 유명한 경제학자에 선정됐다. 삭스 교수는 현재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 특별자문관으로 활동하며 저개발국가 빈곤 퇴치를 위해 노력하고 있다. 저서로는 <빈곤의 종말>(2006년), <커먼 웰스>(2009년), <문명의 대가>(2012년) 등이 있으며, 지난 3월 미국에서 신간 <지속가능 개발의 시대>를 발간했다.
조선일보 송창섭 기자
2015.08.10 프랜시스 후쿠야마 미국 스탠퍼드대 교수 인터뷰①②
"무능력한 정부 출현하면 민주주의 쇠퇴한다" 프랜시스 후쿠야마 미 스탠퍼드대 교수①
▲프랜시스 후쿠야마 스탠퍼드대 교수는 민주주의의 쇠퇴 이유를 '중산층의 위기' '사라지는 법치주의' '무능한 정부' 등 세 가지로 꼽았다. /이경호 기자
‘인류 역사는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승리로 끝난다’는 <역사의 종언>(1992년) 저자이자 세계적인 정치학자로 꼽히는 프랜시스 후쿠야마(Francis Fukuyama·62) 미 스탠퍼드대 교수를 만났다. 5월4일 서울 강남에 위치한 한국고등교육재단 빌딩 내 강연장에서다. 그는 한국고등교육재단 초청으로 ‘민주주의는 쇠퇴하고 있는가?’를 주제로 열변을 토했다.
후쿠야마 교수는 스승인 고(故) 새뮤얼 헌팅턴 교수가 쓴 <제3의 물결:20세기 후반의 민주화>(1991년) 얘기를 꺼내며 강연을 시작했다. “20세기 후반 전 세계가 민주화 물결에 휩쓸렸습니다. 유럽에서 라틴아메리카, 아시아 등으로 민주주의가 확산됐습니다. 구조적인 힘은 사회·경제적인 변화를 가져옵니다. 세계경제는 2008년 금융위기 직전까지 엄청난 성장을 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인도, 중국 등 신흥국도 등장했습니다.” 이어 후쿠야마 교수는 “민주주의의 확산 정도는 지역별로 다르다”며 “유럽과 라틴아메리카가 가장 민주화된 지역이고 아시아는 성과가 그리 좋지 않다”고 말했다. 인구 기준으로 아시아의 민주주의 순위는 더 내려간다. 인구가 13억명에 달하는 중국이 사회주의 국가이기 때문이다.
후쿠야마 교수는 “전 세계에서 민주주의가 쇠퇴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이날 강연의 주제다. 그는 “1970년 선거 민주주의를 실시하는 국가는 35개국에 불과했다”며 “2005년 120개국으로 증가하며 민주주의의 정점인 시대를 맞이했다가 최근 9년간 4~5개국이 줄었다”고 말했다.
민주주의 쇠퇴의 이유는 무엇일까. 후쿠야마 교수는 ‘중산층’을 주목했다. “중산층이 있었기에 전 세계에서 민주주의가 성장할 수 있었습니다.” 전 세계 60억 인구 중 수십억명이 중산층에 속한다. 중산층은 경제적으로 여유로운 삶을 살거나 고등교육을 받은 사람을 말한다. 이들은 자신의 삶에 거는 기대가 크고 정치참여 욕구가 강하다. 자국의 정치, 경제 상황에 만족하지 못하고 다양한 형태로 민주화 운동을 일으켰다. 프랑스혁명, 우크라이나 오렌지혁명, 중동 아랍의 봄 등이 대표적이다. 그러나 중산층의 정치 참여가 갈수록 줄고 있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경제적 어려움을 겪으면서부터다. 입에 풀칠하기도 힘든데 국가, 민주주의를 생각할 겨를이 없는 것이다.
후쿠야마 교수는 사라지는 ‘법치주의’도 민주주의의 쇠퇴 요인으로 꼽았다. 여기서 법치주의는 권력을 제한하는 개념이다. 그는 소련을 예로 들었다. “1992년 소련이 해체됐을 때 많은 사람들은 ‘러시아가 진정한 의미의 자유민주주의 국가가 되지 않을까’라고 기대했어요. 그러나 예상은 빗나갔습니다. 2002년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이 권력을 이양 받은 후 선거를 하고 있지만 야당을 억압하고 있습니다. 시민사회 집회와 언론의 자유도 허락하지 않습니다. 여당이 반대 의견을 내는 게 쉽지 않은 상황입니다.”
민주주의가 선거를 통해 리더를 뽑는 게 전부가 아니라는 설명이다. 권력 창출 이후 견제하는 게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선거를 통해 민주적 정당성을 등에 업은 권력이 견제 시스템을 없애고 법치주의를 훼손하는 경우는 비일비재하다. 후쿠야마 교수는 “민주개혁 성과가 완전히 사라져버린 것”이라고 정의했다.
국가의 ‘무능(無能)’도 민주주의의 쇠퇴 요인이다. 국민은 책임감 있는 정부를 바란다. 기대감을 가지고 지도자를 선출한다. 그러나 정부가 무능해 그 기대를 저버리는 것이다. 후쿠야마 교수는 “국민은 안전, 교육, 복지 등 기본적인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는 능력 있는 정부를 바란다”며 “하지만 정부는 무능하거나 부패한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어떤 경우에는 아예 정부제도와 시스템이 존재하지 않는 경우도 있다”고 덧붙였다.
최근 국가부도 위기에 처한 그리스가 대표적인 예다. 후쿠야마 교수의 설명이다. “그리스는 1974년 민주주의 국가가 됐습니다. 이후 많은 시간이 흘렀죠. 그리스는 2010년 이후 장기간 재정위기로 경제가 파탄상태에 이르렀지만 공무원을 해고하지도 공공부문 지출을 줄이지도 못하고 있습니다. ‘포퓰리즘(대중인기영합주의)’ 때문이죠. 민주주의가 성장하기 위해선 효율적인 정부가 필요합니다.”
우크라이나도 정부의 무능으로 인해 민주주의가 역행한 사례다. 2004년 우크라이나 수도 키예프의 마이단 광장에 모인 수만 명의 시민은 정부의 대통령선거 부정(不正)을 규탄했다. ‘오렌지혁명’이다. 선거는 다시 치러졌고 개혁 정치인인 빅토르 유센코가 대통령으로 선출됐다. 그러나 유센코 정부는 무능함을 드러냈다. 내부 분열에 시달리며 우크라이나의 심각한 부정부패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다. 글로벌 금융위기에도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다. 그 결과 2010년 선거에서 2004년 오렌지혁명 원인을 제공한 빅토르 야누코비치가 대통령에 당선됐다.
<②편에 계속>
법치(法治) 없는 중국, 혼란 겪으며 경제성장 한계②
<①편에서 계속>
민주주의, 권력 창출 후 견제가 중요
민주주의 국가인 인도도 마찬가지다. 후쿠야마 교수는 “인도는 공공서비스와 인프라를 제대로 구축하지 못했다”며 말을 이었다. “1990년 말 인도 북부의 빈곤층을 조사해보니, 학교 선생님이 월급을 받으면서 학생을 가르치지 않는 것으로 나타났어요. 이는 인도 경쟁력 약화 요인이기도 합니다. 이후 인도정부는 10년 동안 개혁을 추진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교사의 50%가량은 월급을 받으면서 일을 하지 않고 있습니다.”
태국의 경우, 1990년 민주주의 체제로 전환했지만 여전히 부정부패가 만연해 있다. 중산층이 부의 재분배를 원치 않아서다. 이런 태국의 시스템은 시골 빈곤문제를 해결하지 못했고 결국 지난해 유혈사태로 이어졌다.
후쿠야마 교수가 2011년 쓴 <정치질서의 기원:불안정성을 극복할 정치적 힘은 어디서 오는가>를 보면, 미국 정치가 언급돼 있다. “미국 의회는 두 정당으로 심하게 분열돼 있기 때문에 법안 처리가 어렵다. 또 노동조합, 제약회사, 은행 등 수많은 집단이 로비를 해 자신의 이익에 장애가 되는 입법을 봉쇄한다. 이는 부당한 게 아니다. 그러나 어느 수준을 넘으면 ‘특권의 고수’로 문제가 될 수 있다.” 이런 모습은 한국 정치권에서도 나타난다. 보수와 진보의 경쟁은 갈수록 심화되고 있고 정치권을 상대로 한 입법로비는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
▲중국은 지난 30년간 연평균 10%의 GDP 성장률을 기록했다. 후쿠야마 교수는 "중국이 현 사회주의 체제를 가지고 꾸준히 경제성장을 이어간다면 추후 민주화 가능성은 작다"고 말했다. /조선일보DB
한국, 세계 민주주의 국가 지원해야
후쿠야마 교수에게 ‘한국의 민주주의’를 물었다. 그는 “한국 정치의 양극화는 미국과 다소 차이가 있다”며 “점점 복잡해지고 있다”고 짧게 말했다. 하지만 그는 “미국, 한국처럼 민주주의가 발전한 국가는 전 세계 민주주의 국가를 지원할 의무가 있다”며 말을 이었다. “권위적인 국가가 힘을 얻고 시민사회를 억압하는 게 오늘날 현실입니다.
민주주의 쇠퇴기에 있는 지금 미국, 한국 등 민주주의 국가들이 서로 협력해야 합니다.” 민주주의의 쇠퇴를 논하면서 중국을 빼놓을 수 없다. 중국은 공산당 지도하에 유지되는 국가다. 민주주의가 존재하지 않는다. 앞으로 민주주의가 들어선다고 전망하기도 어렵다. 중국은 어마어마한 경제성장을 이뤘다. GDP(국내총생산) 성장률이 지난 30년간 연평균 10%정도에 달한다.
후쿠야마 교수는 “중국경제가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규칙과 원칙을 만들고 이를 실천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기 때문이다”고 말했다. 사회기반시설을 구축하는 데는 중국식 권위주의 정부만큼 효율적인 체제가 없다. ‘한번 하자’고 하면 무조건 해야 한다. 그러나 법치주의는 존재하지 않는다. 중국 관리자들은 중국 내에 법치가 존재한다고 말하지만 후쿠야마 교수의 생각은 달랐다. 그는 “규칙을 근거로 한 시스템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는 게 더 정확한 표현이다”며 “중국은 강력한 국가가 있을 뿐 권력을 제한하는 법치주의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이런 중국 시스템은 혼란을 야기할 수 있다”며 중국의 반부패 캠페인을 예로 들었다. “중국정부가 뇌물을 받는 등 부패를 저지른 관리를 정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부패의 증거도 없고 공정한 재판도 없었습니다. 현재 중국의 정치인과 경제인은 공포에 떨고 있습니다. 어떤 규칙을 지켜야 하는지 혼란스러워하는 거죠.”
후쿠야마 교수는 ‘나쁜 황제’도 우려했다. 그는 “법치가 없기 때문에 권력자의 횡포에 무방비일 수밖에 없다”며 “황제가 잘하면 나라가 잘되고 황제가 못하면 나라가 망하는 것이다”고 말했다. 앞으로 중국 내에 민주주의가 확산될 수 있을까. 후쿠야마 교수는 “긍정적으로 보면, 중국 중산층은 정치참여 욕구를 지니고 있다”며 “그러나 이들의 정치참여 욕구가 지속적일지는 의문이다”고 말했다. 그는 또 “중국이 현 체제를 가지고 꾸준히 경제성장을 이어간다면 민주화 가능성은 작을 수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후쿠야마 교수는…
후쿠야마 교수는 1952년 미국 시카고에서 태어났다. 일본계 3세다. 일본어는 못한다. 그는 코넬대(고전학), 예일대(비교문학), 하버드대(국제정치학 박사)를 졸업한 후 미 국무부 정책기획실 차장, 워싱턴 랜드연구소 선임연구원, 조지메이슨대 교수, 존스홉킨스대 국제관계대학원 학장 등을 지냈다. 현재 스탠퍼드대 정치학 교수로 재직 중이다.
박용선 이코노미조선기자
■ 2015-08-31 임마누엘 페스트라이쉬 경희대 교수
▲임마누엘 페스트라이쉬 교수는 “한국의 전통 유기농법에 미래가 있다”고 했다. 무엇 하나 헛되이 버리지 않고 땅으로 돌려보냄으로써 수천 년 지속 가능한 지혜로운 농사법이라는 것이다. 뒤로 서울 광화문광장의 세종대왕 동상이 보인다. 박경모 기자 momo@donga.com
“한국, K팝 같은 표피문화에 안주하면 만주족처럼 사라진다”
《 국가 지도자에게서 모처럼 책 이야기가 나왔다. 박근혜 대통령은 이달 초 국무회의에서 “이번 여름휴가 중에 읽은 책들 중에서 특히 마음으로 공감하는 책이 있었다”면서 ‘한국인만 모르는 다른 대한민국’을 언급했다. 이 책은 우리나라의 우수성과 가능성에 대해 잘 기술했다는 평을 받고 있다. 박 대통령이 13일 국정과제세미나에서 “무슨 일이 외교적으로 생겼다 하면 ‘아이고, 또 우리나라 고래 싸움에 새우등 터지겠네’ 이렇게 생각하면 그 자체가 우리나라 국격에도 맞지 않고 패배 의식”이라고 한 말도 이 책 속에서 나왔다. 대통령 언급이 있은 뒤 2년 전에 나온 이 책은 단박에 베스트셀러 순위에 올랐다. 저자인 임마누엘 페스트라이쉬 경희대 국제대학 교수를 25일 서울 광화문 근처에서 만났다. 》
―대통령이 저서를 언급한 것을 알고 기분이 어땠나.
“미국 같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나처럼 고전문학을 전공한 사람에 대해선 미국 대통령이 신경 안 쓴다. 정치 경제 사회와 관련해 별다른 역할을 하기 어렵다. 한국에 문화를 중시하는 전통이 있고 사회적 컨센서스가 있으니 대통령도 국무회의에서 그런 말을 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대통령 서평 4일만에 정부서 전화
―대통령이 말한 후 달라진 게 있다면….
“대통령이 말하고 4일 후 인사혁신처에서 공무원 교육을 제안하는 전화가 왔다. 지난주부터 경기 과천시에 있는 중앙공무원교육원에서 특강을 하게 됐다. 한국인들은 고도성장과 민주화를 굉장히 자랑스럽게 생각하는데 성장과 민주화가 1970년대 이후에 이뤄진 것이 아니다. 오랜 과학기술 전통, 조선시대 의정부 춘추관 같은 우수한 행정과 향교 서원 등의 교육시스템, 투명한 정부와 사회적 책임감을 가진 지식인 등 오랜 민주주의 전통이 발전의 바탕이 됐다. 한국인 스스로 유교나 조선왕조를 비하하는 것은 일본 식민지의 세뇌에서 벗어나지 못한 탓이다.”
―조선처럼 하나의 왕조가 500여 년을 유지한 것도 세계적으로 드문 일이다.
“고대에는 이집트가 있었지만 근세에는 조선과 오토만제국밖에 없었다. 조선이 오토만보다 안정적이었다.”
―책을 보면 겉으로는 한국을 칭찬했지만 속으로는 날카로운 비판이 있는 것 같다. 한국인들은 왜 훌륭한 전통과 역사에 대해 그렇게 무지한가, 잘살게 됐으면서 왜 국제사회의 일원으로 책임감이 없는가 같은 문제의식이 바닥에 깔려 있다.
“그렇다. 한국은 위대한 전통과 역사가 있고 이를 바탕으로 일류 국가가 될 수 있다. 그러나 한국인이 부족한 부분도 물론 많다.”
―‘아시아에서 등장할 또 다른 1등 국가는 한국이다’라고 했는데 무슨 근거로 그렇게 말하나.
“출판사에서 그런 부분을 키운 점이 있다(웃음). 한국은 1등 국가가 될 조건을 갖고 있다. 하지만 실제로 1등 국가가 될 것인지 아닌지는 한국인의 선택에 달려 있다. 한국은 세계 최초의 금속활자로 직지심체요절을 인쇄했지만 안타깝게도 세계적으로 영향력 있는 혁신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결국 금속활자 개발의 공은 유럽인에게 넘어갔다. 무한한 가능성을 갖고 있지만 세계로 나아가기를 주저함으로써 스스로 한계를 초래했다. 지금도 그런 일들이 수없이 일어나고 있다.”
고유 정체성 살리면 르네상스 가능
―한국이 선진국이라고 했는데 정말 그렇게 생각하나.
“한국 사람들이 상상하는 선진국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미국 독일 일본에 가보면 한국보다 심각한 문제가 많다. 미국은 빈부 격차가 매우 심하다. 잘사는 동네에서는 좋은 교육을 받을 수 있지만 못사는 동네에서는 교육이 형편없다. 이민자들은 영어를 못하고 문맹률도 높다. 유럽인들은 배타적 우월주의에 빠져 아시아에 대해 배우려고 하지 않는다. 한국은 기본이 잘돼 있고 누구나 교육을 잘 받는 편이다. 한국은 선진국과 비슷한 조건을 갖췄다.”
―한국이 패스트 팔로어(fast follower)에서 퍼스트 무버(first mover)가 되려면 창의성을 꽃피워야 하는데 그것은 과거로부터의 정체성을 찾음으로써 발현할 수 있다고 했다.
“르네상스가 대표적이다. 15세기 이탈리아에서 시작돼 뛰어난 근대 유럽 문명을 만들어낸 르네상스는 그리스 로마 문화의 재발견에서 출발했다. 고대 그리스에 위대한 문화가 있었다는 것을 유럽은 오랫동안 잊고 있다가 다시 살려냄으로써 훌륭한 근대문화를 재창조할 수 있었다. 자기만의 고유한 정체성과 문화가 없다면 자신 있게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 한국이 특히 그렇다. 현대적이고 정교한 기술과 문화를 많이 만들었지만 높은 차원의 새로운 창조가 잘 안 된다. 비슷한 수준의 아이디어만 반복하고 있다. 진정한 의미의 창조를 하려면 자신 있게 해야 하는데 자기 문화에 대한 자신감이 없으면 안 된다. 과거의 재발견은 한국이 창조적 발전을 추구할 때 미래로 전진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한국의 보수는 돈 버는 일만 관심
―한국인들이 ‘새우 콤플렉스’를 갖고 있다고 했는데 한국은 실제로 미국 중국 일본 같은 강대국 사이에 낀 새우 아닌가. 자신의 위치를 잘 알고 처신해야지 새우가 고래 흉내를 내면 살아남기도 어렵다.
“우리 어머니의 조국인 룩셈부르크는 경기도보다 작다. 유럽 강국인 독일과 프랑스 사이에 끼어 있지만 자신만의 정체성을 유지하면서 유럽연합이 출범하는 데 큰 공헌을 했고 유럽 평화에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룩셈부르크는 1인당 국내총생산(GDP)이 9만6000달러로 세계 1위고 국민 개개인의 교육 문화 수준이 매우 높다. 한국도 200여 년 전 영·정조 시대에는 조선의 지식인들이 중심이 되어 한중일 사이에 지적 문화적 교류가 활발했다. 지금도 중국이나 일본보다는 한국이 주도해 동북아시아의 평화공동체를 만드는 것이 훨씬 용이할 것이다.”
―한국이 국제사회에 대한 책임감이 없다고 비판했는데….
“한류 드라마를 보면 큰 집에서 살고 큰 차 타고 낭비하고 살면 행복하다고 보는 것 같다. 다른 나라 사람들이 뭘 배우겠나. 천박하고 표피적인 문화는 오래갈 수 없다. 중국인들이 전부 한국의 재벌처럼 산다면 지구는 버틸 수 없다. 드라마에는 가족 윤리나 사회적 책임도 없다. 성형수술도 필요한 사람이 있지만 대부분은 아니다. 손재주를 꼭 그런데 써야 하나. 선진국들이 기술이 없어서 성형수술을 확산시키지 않는 게 아니다.”
―가치관이 보수적인 것 같다.
“나는 한국의 전통적인 보수와 비슷하다. 요즘 한국인들이 말하는 보수와 내가 생각하는 보수는 너무 다르다. 지금 한국의 보수는 개발하고 돈 잘 벌고 잘사는 데만 관심이 있다. 옛날 한국의 선비들은 자연을 존중하고 검소하게 생활했으며 엄격한 윤리의식이 있었다. 나는 환경을 중시하는데 지금은 이것이 진보라고 하지만 원래는 조선시대 보수의 가치다. 낙태도 매우 심각한데 한국은 어떤 신문에서도 잘 다루지 않는다. 낙태를 줄이면 저출산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박근혜 정부서도 민주주의 퇴보 여전
―2012년에 쓴 ‘세계의 석학들 한국의 미래를 말하다’를 보면 한국이 빈부 격차, 복지 문제, 언론 탄압, 민주주의 퇴보 같은 이슈를 안고 있다고 했다. 박근혜 정부가 들어선 후 나아졌다고 보나.
“좋아지지는 않았다. 아마 박 대통령의 잘못은 아닐 것이다. 정치는 국회만 하는 것이 아니고 시민의 적극적인 참여가 필요하다. 정치인을 뽑아 놓고 내 할 일 다 했다 방치해버리면 민주주의가 발전하기 어렵다. 아무리 좋은 생각을 가진 정치인이 있어도 시민이 무관심하면 아무것도 못한다. 미국의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좋은 사례다. 국민을 위한 좋은 정책을 많이 내놨지만 국민이 별로 관심을 갖지 않으니 실현하기가 힘들다.”
―‘한류가 위기다’라는 내용의 글을 쓴 적이 있다.
“케이팝 같은 한류문화를 보면 흥겹지만 표피적이란 느낌을 받는다. 만주족을 보자. 만주족은 17세기 동아시아에서 문화적 영향력이 가장 컸고 중국 본토까지 정복해 청나라를 세웠다. 당시 경제 행정 대중문화면에서 크게 성공했지만 만주족의 나라는 사라지고 없다. 한국이 홍익인간 선비정신 유교 불교, 이런 깊은 사상과 철학을 버리고 뿌리 없이 표류하는 대중문화만 좇다가는 만주족처럼 될 수 있다. 중국의 일부가 될 수도 있다. 조선은 친환경 농업, 한양의 도시설계, 조선왕조실록 편찬 등에서 100년, 500년을 내다봤고 실제로 성공했다. 지금 한국인들은 2년에서 5년 앞 정도밖에 생각하지 않는다. 미래를 멀리 보고 행동하는 것이 지금 한국에 필요하다.”
:: 페스트라이쉬 교수는 ::
정약용-박지원 사상 심취… 허생전등 10권 영어 번역 1964년 미국 테네시 주 내슈빌 출생. 예일대에서 중문학 학사, 일본 도쿄대에서 비교문화학 석사, 하버드대에서 동아시아 언어문화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일리노이주립대 교수, 우송대 솔브릿지 국제경영학부 교수를 거쳐 경희대 국제대학 교수 겸 아시아연구소장으로 있다. 한국인 부인을 둔 페스트라이쉬 교수는 한국말이 유창했다. 장인이 지어준 이만열이라는 한국 이름도 있다. 그런데 중국어와 일본어는 더 잘한다. 중국어와 일본어는 20대에 배웠고 한국어는 늦게 배우기 시작해 발음이 정확하지 않다며 부끄러워했다. 한문학 전공이라 한자 실력도 상당하다. 일본에서 7년 살았고 대만에서도 유학했다.
‘인생은 속도가 아니라 방향이다’ ‘세계의 석학들, 한국의 미래를 말하다’ 등의 책을 펴냈다. 연암 박지원의 소설 허생전 양반전 등 10권 전권을 영어로 번역했다. 그는 동양의 선비, 특히 한국의 다산 정약용과 연암 박지원의 사상에 큰 감명을 받았다고 했다. 특히 고전에 대한 깊은 이해와 철학을 가졌고 당시 서민이 처한 어려움을 해결하기 위해 다양한 대안들을 창안해냈다는 점이 다산을 존경하는 이유다.
신연수 논설위원 ysshin@donga.com
■ 2015.09.12 제프리 가렛(Garret·58) 와튼 스쿨(Wharton School) 학장
리더가 과학자일 필요 없지만 이해하고 찾아내고 적용할 수 있어야①
“비즈니스 리더에게 꼭 필요한 것이요? ‘뉴 하드 스킬’이죠.”
제프리 가렛(Garret·58) 와튼 스쿨(Wharton School) 학장은 다소 생소한 단어를 꺼냈다. 다양성이라던가 리더십처럼 익숙한 단어가 아니었다. 다소 의외라는 표정을 짓자 그는 “이미 당신도 알고 있는 것”이라며 웃었다.
▲제프리 가렛 펜실베니아대 와튼스쿨 학장이 2015년 9월 3일 서울 남산 그랜드하얏트호텔에서 본지와 인터뷰를 갖고 있다. /김지호 기자
과거의 비즈니스 리더에게 필요한 것이 재무·회계·마케팅 등과 관련된 지식을 뜻하는 ‘하드 스킬’이었다면 2000년대 들어서는 조직 관리에 필요한 커뮤니케이션이나 직원들과 공감하는 능력 등 ‘소프트 스킬’이 중요해졌고, 최근에는 혁신이 기업의 중요한 과제로 등장한 만큼 첨단 기술과 관련된 ‘뉴 하드 스킬’이 중요해졌다는 뜻이라고 그는 설명했다.
미국 펜실베이니아대학 경영대학원인 와튼 스쿨은 미국 하버드·스탠퍼드 경영대학원(MBA)과 함께 전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MBA로 꼽힌다.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가 매년 실시하는 글로벌 MBA 과정 평가에서 와튼 스쿨은 2001년 이후 9년 연속 정상을 차지했다. 올해 초 FT가 발표한 글로벌 랭킹에서는 3위를 차지했다. 올해 초 대학 평가 전문 매체 ‘US 뉴스 & 월드 리포트’가 집계한 랭킹에서도 3위에 올랐다.
지난 3일 서울 그랜드 하얏트호텔에서 와튼 스쿨 입학 설명회 참석차 서울을 방문한 가렛 학장을 만났다. 호주 출신의 가렛 학장은 작년 7월 부임했다. 스탠퍼드대, 예일대, UCLA대, 옥스퍼드대 등에서 강의를 했고 와튼 스쿨에 오기 직전에는 호주의 명문인 뉴사우스웨일스(New South Wales)대 비즈니스 스쿨의 학장을 맡았다.
뉴 하드 스킬이란? 첨단 기술 이해하는 것
―경영자를 양성하는 비즈니스 스쿨의 대표격인 와튼 스쿨의 학장께서 ‘기술과 관련된 지식’이 중요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다소 의외의 말씀입니다.
“과거의 비즈니스 환경과 지금은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첨단 기술이 등장하면서 혁신이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좋은 비즈니스 리더가 꼭 괴짜 과학자일 필요는 없지만, 이런 종류의 사람들이 말하는 것을 이해하고 이 중에서 기업의 성장에 필요한 것들을 찾아내 적용할 줄 알 정도의 지식을 갖춰야 합니다.
경영 관련 분야에 대한 전문적인 지식을 보통 ‘하드 스킬’이라고 부릅니다. 과거 MBA에서 전통적으로 가르쳐 왔던 것이죠. 그러나 이제는 마케팅 전략을 줄줄 외우고, 재무제표를 잘 분석하는 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책을 읽고, 교실 안에서 토론하고, 계산기를 두드리면서 기업을 경영하는 데 필요한 것을 배우는 데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교실 밖에서 무엇인가를 배워야죠. 뭔가를 저질러야 배움이 따라옵니다. 스타트업 기업에 가서 새로운 기술을 익히고, 벤처 캐피털에 가서 어떤 기업들이 자금 조달에 성공하는지 알아야 합니다. 그렇게 익히는 것이 뉴 하드 스킬입니다.”
/게티이미지
―와튼 스쿨은 전통적으로 금융 분야에 강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그런 정도로 기술 혁신이 기업에서 중요한 요소가 된 것인가요.
“물론 기업 경영에 필요한 전문적인 금융 지식이 필요하다는 것은 당연합니다. 특히 지난 2008년 전 세계적인 금융 위기가 발생한 후 기업의 최고경영자(CEO)나 임원들이라면 누구라도 금융을 더 많이 이해할 필요성을 느끼고 있을 겁니다. 그럼에도 금융처럼 특정 분야에 전문적인 지식을 갖추는 것이 요즘 비즈니스 리더에게 필요한 덕목의 전부는 아닙니다. 와튼 스쿨의 경우 이 때문에 10년 전부터 뉴 하드 스킬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나름대로는 성과를 거두고 있다고 판단합니다. 최근 구글의 새로운 CEO로 선임된 선다 피차이(Pichai)도 와튼 스쿨을 거쳤습니다.”
―잭 웰치 전 GE 회장과 비슷한 말을 하시는군요. 그는 인터뷰에서 첨단 기술에 관한 모든 궁금증이 해소될 때까지 전문가에게 질문을 던지라고 말했습니다.
“그렇다면 영광입니다(웃음). 그것이 바로 뉴 하드 스킬을 배우는 가장 좋은 방법 중의 하나입니다. 괴짜 과학자와 대화할 수 있어야 하고, 그들이 하는 말을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 말입니다. 그래야 뉴 하드 스킬을 배울 수 있습니다.
<②편에 계속>
<①편에서 계속>
―세상이 어떻게 변했다는 말씀이신가요?
“가장 먼저 매체의 변화를 들 수 있어요. 라디오와 신문에서 TV가 주류 매체가 되면서 사람들은 시각적인 요소를 중시하게 됐습니다. 예컨대 TV가 발명된 이후 선출된 미국 대통령은 모두 잘생겼어요. 케네디가 닉슨을 꺾고 대통령이 된 가장 큰 이유는 바로 TV 토론에서 보여준 매력 덕분입니다. 당시 미국인들이 케네디의 환한 미소, 젊은 패기에 반한 것이지요. 닉슨은 당시 ‘내 정치 인생의 가장 큰 핸디캡은 잘생기지 못한 외모’라고 자책하기도 했습니다. 또 오바마 대통령을 보세요. 그는 큰 키에 호리호리한 몸매, 매끈한 피부, 심지어 옷도 잘 입기로도 유명해요. 그가 미국 최초 흑인 대통령으로 당선된 데에는 물론 똑똑하고 교육을 많이 받은 이유도 있지만 훌륭한 외모도 큰 기여를 했다고 봅니다.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조선일보DB
정치인뿐만 아니라 일반인에게도 매력 자본은 중요해졌습니다. 산업 구조가 달라졌기 때문이에요. 과거 농업, 제조업 중심의 시대와 다르게 지금은 화이트칼라 직종이 많아졌습니다. 공장에서 일할 때야 앉아서 담당하는 일만 잘하면 됐지만, 지금은 사람을 상대하는 업무가 많아요. 예전에 하드록 카페에서 일하는 웨이터와 웨이트리스를 교육한 적이 있는데, 매력적인 직원이 보통 두 배 이상의 팁을 받더라고요. 특정 직원이 서비스해주길 원하는 단골손님도 있고요. 고용주 입장에서 매력적인 사람을 고용하는 것은 당연한 논리겠지요? 또 큰 회사일수록 매력적인 사람을 CEO로 뽑는다는 연구 결과도 있습니다. 회사의 얼굴이기 때문이지요.
마지막으로 중요한 변화는 SNS의 발달입니다. 페이스북과 인스타그램 등을 보면 누구나 자신의 사진을 올려 대중에게 노출시킬 수 있어요. 쉽게 말해 일반인도 가수 마돈나 못지않게 대중에게 얼굴을 알릴 기회가 열린 것입니다. 10년 전만 해도 매력 자본을 대놓고 활용하는 곳은 연예계·스포츠계로 국한됐지만, 이제 누구나 자신의 매력 자본을 활용해 유명해지고 사회적 지위에 오르거나 돈을 벌 수 있는 세상이 된 것입니다.”
▲리처드 브랜슨 버진그룹 회장(왼쪽)과 실비오 베를루스코니 이탈리아 전 총리. /조선일보DB
―매력 자본을 경영 등에 활용한다고 하지만 한국에서는 대체로 비즈니스 리더들이 중년의 남성입니다. ‘자본력’을 키우는 것이 쉽지 않을 수도 있는 게 아닌가요.
“남성들이 매력 자본을 키우는 일은 상대적으로 쉽습니다. 여성들은 대부분 화장을 하고 헤어스타일에 신경을 쓰지만, 남성은 아직 그렇지 않기 때문에 조금의 노력만으로도 매력 자본에서 우위를 선점할 수 있어요. 굳이 영화배우처럼 화려한 옷을 입고 치장하라는 게 아닙니다. 깔끔하게 면도를 한다든지, 자신에게 어울리는 색깔의 셔츠를 골라 입는다든지, 운동을 시작한다든지, 약간의 변화만 주어도 충분히 조금 더 매력적으로 될 수 있어요.
영국 회사 버진그룹의 CEO 리처드 브랜든 아시죠? 개인적으로 그의 헤어스타일은 너무나도 매력적이에요. 나이가 들어도 참 멋있는 사람이지요. 외적인 부분뿐만 아니라 매너도 중요해요. 대화할 때 상대와 눈을 마주치고, 공감해주고, 적절한 호응을 해주는 것이 좋습니다. 미소도 잊지 마시고요. 실비오 베를루스코니 전 이탈리아 총리는 누구보다도 오래 미소를 유지할 수 있는 능력으로 유명합니다. 외모를 가꾸고 외향적인 부분에 신경 쓰는 것이 하찮다고 생각하지 마세요. 업무를 잘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매력적인 상사, 부하 직원, 동료는 주변인을 행복하게 하기 때문에 회사 분위기를 살리는 시너지 효과를 내기도 합니다.”
<①편에서 계속>
와튼 스쿨 출신들을 보통 금융 관련 회사나 관련 직종에서 많이 선호하는 편입니다. 그런데 금융회사라고 해도 JP모건, 골드만삭스처럼 규모가 크고 오랜 역사를 가진 곳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모펀드(PEF)나 벤처 캐피털도 금융회사입니다. 이런 회사들이 어디에 투자할까요? 요즘은 (기술기업인) 스타트업에 가장 많이 투자합니다. 금융회사에도, 일반 기업에도 전문적인 경영 지식과 함께 뉴 하드 스킬을 가진 인재들은 항상 필요한 것입니다.”
미국 경제 전문지(誌) 포천은 작년 말 ‘2014년 최고 경영인 50’을 선정해 발표했다. 그런데 50명 가운데 10명이 IT 기업의 경영인이었다. 래리 페이지 구글 공동창업자·CEO가 1위를 차지했고, 팀 쿡 애플 CEO가 바로 뒤를 이었다. 마윈 알리바바 회장과 마크 저커버그 페이스북 CEO, 일론 머스크 테슬라 CEO도 명단에 포함됐다.
가렛 학장의 말대로 ‘뉴 하드 스킬’의 전성시대인 셈이다. 다만 가렛 학장은 덧붙인다. ‘소프트 스킬’의 중요성 역시 줄지 않았다는 것이다.
“아무리 좋은 기술을 가진 기업이라도 기업이 성장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경영상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성공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런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소프트 스킬’에 정통한 비즈니스 리더 역시 꼭 필요합니다.”
▲제프리 가렛 펜실베니아대 와튼스쿨 학장이 2015년 9월 3일 서울 남산 그랜드하얏트호텔에서 본지와 인터뷰를 갖고 있다. /김지호 기자
―뉴 하드 스킬이 중요하더라도 실제로 이를 습득하는 것은 별개의 얘기인 것 같습니다. 별도의 기술을 배워야 한다는 얘기인가요?
“이전부터 MBA에서 배울 수 있던 것 중에서도 관련되는 것이 많습니다. 예를 들어 데이터 분석입니다.
차량 공유 서비스 업체 우버와 숙박 공유 서비스 업체 에어비앤비를 생각해봅시다. 이 기업들은 구매자와 판매자를 연결해 주는데, 여기에는 엄청난 데이터 분석이 필요합니다. 게다가 기업이 성장할수록 데이터양이 많아지고 데이터 분석은 점점 어려워집니다. 데이터를 읽는 것은 IT라기보다는 경영 관련 재무 기술에 가깝습니다. 이전부터 MBA에선 재무 쪽에서 많이 가르치는 것들이죠. 미국 실리콘밸리의 스타트업 창업자 가운데에는 공대 출신이 많지만, 스타트업 기업들이 규모를 키우는 단계에 접어든 후에는 MBA 출신이 활약하는 경우가 많은 것도 이 때문입니다. 첨단 기술과 관련된 분야를 공부한 학생들이 MBA 과정을 이수하는 경우가 많이 있는 것도 역시 같은 이유 때문입니다.”
승진할수록 중요해지는 것은 소프트 스킬
―다만 MBA 출신들이 풍부한 지식에도 리더십은 부족하다는 비판이 많습니다.
“그래서 ‘뉴 하드 스킬’ 이외에도 여전히 필요한 것이 ‘소프트 스킬’입니다. 뉴욕타임스의 토머스 프리드먼이 말한 것처럼 무엇을 알고 있느냐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알고 있는 것으로 무엇을 하느냐가 중요한데, 이때 소프트 스킬이 꼭 필요합니다.”
―소프트 스킬은 좀 친숙하게 들립니다
“많이 들어보셨을 겁니다. 소프트 스킬은 조직을 잘 운영하는 능력입니다. 비즈니스 리더에게 필요한 리더십, 가령 커뮤니케이션 능력이나 다른 사람들과 공감할 수 있는 능력 같은 것들이죠. 기업의 규모가 커지면, 아무리 유능한 리더라도 모든 것을 혼자서 다 해낼 수는 없습니다. 똑똑한 사람을 뽑는 것 못지않게, 똑똑한 사람을 잘 다루는 것이 중요해졌습니다. 게다가 인터넷이 발달하면서 정보가 빠르게 퍼지고, 직원들이 수시로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여건이 형성됐습니다. 좋은 리더라면 가능한 모든 수단을 동원해 커뮤니케이션에 임해야 합니다. ‘소프트 스킬’이 바로 이러한 능력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③편에 계속>
<②편에서 계속>
―조직 내에서 지위가 올라갈수록 더 필요한, 리더에게 필요한 능력이 소프트 스킬이라는 말씀이군요.
“맞습니다. MBA를 막 졸업한 사람 중 높은 수준의 전문 지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당장은 더 좋은 직장에 가고 높은 연봉을 받고 더 빠르게 승진을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장기적인 관점에서 바라보면 소프트 스킬이 더 필요합니다. 성공적으로 커리어를 쌓아 조직 내에서 지위가 올라간 후에는 더 많은 조직원을 아우르는 스킬이 필요한 것이죠. 목표를 제시하고 조직원들을 격려하고, 때로는 갈등을 해결해야 할 때도 있습니다. 이때 필요한 것이 소프트 스킬입니다.”
―소프트 스킬을 길러 주는 방법이 따로 있나요?
“와튼스쿨의 경우 신입생이 입학하면 자동으로 특정 팀에 배정됩니다. 국적과 인종, 직장 경력을 고려해 최대한 다양한 사람과 어울릴 수 있도록 학교에서 미리 짜줍니다. 그리고 정해진 과제를 수행합니다. 팀원들끼리 서로 돕지 않으면 과제를 마무리할 수 없게 돼 있으니 자연스럽게 리더십, 소통 능력, 책임감이 길러집니다. 실제로 기업에서 일했던 경험을 떠올려 보세요. 정말 다양한 종류의 사람과 이야기를 하고, 의견을 교환하고, 문제를 해결하지 않나요? 이렇게 미리 캠퍼스에서 소프트스킬을 써먹으면 다른 조직에 가서도 이를 자연스럽게 쓸 수 있게 됩니다.”
―리더에게 필요한 기술이 ‘소프트 스킬’과 ‘뉴 하드 스킬’이라는 얘기를 해 주셨습니다. 비슷한 질문일지 모르겠습니다만 어떤 사람이 좋은 비즈니스 리더가 될 수 있을까요?
“뉴 하드 스킬이든 소프트 스킬이든 새로운 경험을 통해서만 익힐 수 있는 것입니다. 최대한 다양한 사람을 만나보고, 다양한 경험을 해본 사람이 좋은 비즈니스 리더가 될 가능성이 크겠죠. 와튼스쿨이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것도 ‘글로벌 비즈니스 스쿨’입니다. 다만 본거지가 미국일 뿐이죠. 게다가 호주 출신인 제가 학장까지 되지 않았습니까(웃음).
와튼스쿨의 메인 캠퍼스는 미국 펜실베이니아주에 있지만, 다양한 학생이 교류할 수 있는 플랫폼도 함께 운영하고 있습니다. 샌프란시스코에 있는 제2캠퍼스에서는 창업자 코스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지난달 말에는 무료 온라인 강좌 무크(MOOC)를 통해 데이터 분석과 최신 기술에 관한 강의 서비스를 시작했습니다. 이번 달에는 한국을 비롯해 중국, 일본에서 입학설명회를 합니다. 아시아의 우수한 학생들을 와튼스쿨로 데려오는 것이 최대 목표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외국의 학생들을 유치하겠다는 뜻보다는 자연스럽게 많은 나라의 사람을 접하게 하기 위한 뜻도 있습니다. 여러 나라의 사람과 부딪치면서 다양성을 경험하도록 하는 것이 비즈니스 리더의 경쟁력이라고 보기 때문입니다.”
―MBA 졸업생들이 예전만큼 높은 연봉을 받지 못하고, 취업률도 높지 않다는 이야기가 들립니다. 특히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에는 오히려 기업들이 채용을 꺼린다는 얘기가 있습니다. MBA 실효성에 대한 논란이 있습니다. ‘비즈니스 스쿨’이 ‘비즈니스’ 자체로서 계속 성장할 수 있다고 보시나요.
“MBA 비즈니스는 결국 사람을 관리하는 일입니다. 사람들의 재능을 관리하고 효과적으로 활용하는 기술은 어디에나 필요합니다. 제가 앞에서 말했던 소프트 스킬, 뉴 하드 스킬이 다 이런 것에 관한 것입니다. MBA가 사라질까요? 전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온혜선 조선비즈 기자
■ 2015.12.09 [인터뷰] 칼 거슈먼 미국 민주주의기금 (NED) 회장
"과거 박정희 정부는 공산주의식 독재가 아니었다"
▲칼 거슈먼(Carl Gershman) 미국 민주주의기금 회장 /사진: 민주주의기금(NED)
지난 11월 여의도에서는 세계민주주의운동이라는 주제아래 전 세계 100여명의 민주주의 전문가들이 모여 민주주의의 참된 의미를 되새기고 있었다. 마침 한국에서는 역사교과서 국정화를 두고 올바른 역사를 통해 제대로 된 민주주의를 아이들에게 가르쳐야 한다는 주장이 일부에서 제기되고 있을 시점이었다.
이날 세계민주주의운동은 황교안 국무총리, 킴 켐벨(Kim Campbell) 전 캐나다 국무총리, 칼 거슈먼(Carl Gershman) 미국 민주주의기금회장(NED: National Endwoment for Democracy) 등이 참석했다. 이번 세계민주주의운동을 주관한 미국 민주주의기금의 칼 거슈먼(Carl Gershman) 회장을 만나 더 자세한 이야기를 들어보기로 했다.
민주주의기금은 미국 의회로부터 예산을 받아 미국뿐 아니라 전 세계 약 90여 개국에 민주주의의 발전과 가치를 전파하는 비정부조직이다. 의회로부터 예산을 받지만, 여당이나 야당의 정책과는 무관하게 운영되고 있어 미국내 정치판도와는 무관한 것이 특징이다. 이 민주주의기금은 민주국가의 상징인 미국에만 있는 특수한 조직이라고 할 수 있다. 민주주의기금은 올해로 8회째를 맞은 세계민주주의운동(World Movement for Democracy)을 11월 1일부터 4일까지 서울 여의도에서 개최했다. 세계민주주의운동을 한국에서 개최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칼 거슈먼 회장은 기자를 반갑게 맞으며, “한국은 올 때마다 발전하는 모습이 놀랍다”는 간략한 소감을 기자에게 전했다. 다음은 거쉬만 회장과의 일문일답이다.
-한국의 독자들을 위해 민주주의기금 및 자신의 간략한 소개 부탁합니다.
“저는 민주주의기금의 회장입니다. 민주주의기금은 1980년대 초에 설립된 기관으로 전 세계에 민주주의의 가치를 전파하고자 만들어진 비정부 조직입니다. 이 민주주의는 국민의 자유를 전파한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저희 민주주의기금은 비정부조직이자 비정치적인 조직입니다. 비정부조직이지만 예산은 매년 미국 의회로부터 받고 있습니다.
정치적인 영향력을 방지하고자 이 민주주의기금은 설립이후 예하에 여당과 야당을 대표하는 기관을 만들었습니다. 의회 내 민주당 쪽 예산 집행은 미국 국제사무민주학회(NDI: National Democratic Institute for International Affairs)라는 조직을 통해서 추진됩니다. 국제사무민주학회의 의장은 메들린 올브라이트(Madeline Albright)가 맡고 있습니다. 공화당 쪽에서는 국제공화당학회(IRI: International Republican Institute)를 조직했으며 의장은 존 매케인 의원이 의장직을 맡고 있으며 공화당의 예산을 지원합니다.
이렇게 받은 예산은 이번에 서울에서 개최하는 세계민주주의운동과 같은 국제 민주주의 전파 업무에 사용됩니다. 이런 운동 이외에는 민주주의와 연관된 여러 관계 기관으로 분배합니다. 이렇게 예산을 분산함으로서 여러 기관이 조직적으로 민주주의를 전파하게 됩니다. 이렇게 우리가 지원하는 예산을 받는 기관은 전 세계에 약 1,400 여개에 달합니다. 이 기관들이 추진하는 여러 민주주의 전파 프로그램이 있으며 이 프로그램들이 실질적으로 민주주의를 전파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합니다. 특히 각 기관마다 1만5천에서 2만 달러가량(한화로 약 2천4백만원)은 비민주주의 국가인 개도국 국민들의 인권 보호(human rights)에 활용됩니다. 한반도의 경우에는 북한의 정보공개 요구활동에 사용됩니다.”
▲인터뷰에 앞서 포즈를 취한 거슈먼 회장
민주주의기금은 정치 중립기관
-역으로 생각해보겠습니다. 만약 정부와 의회의 정치적 영향을 반영한다면 더 많은 참여를 유도할 수 있지 않을까요? 가령 특정 의원간의 기부경쟁이나, 더 많은 지지자 유치 등 예산확보에 도움이 될 만한 요소가 더 있을 것 같은데요. 왜 비정부 기관인 것이지요?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민주주의기금은 완전히 정부와는 독립되었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이런 독립적 비정치적 기관이라는 콘셉트 자체는 미국적인 방식이자 민주주의적 방식입니다. 정부가 관여하고 좌지우지한다면 이것은 민주적이지 못한 처사입니다. 우리는 특정 이념이나 단체의 의견을 표방하는 것이 아니라 민주주의를 알리는 것입니다. 이 민주주의 안에는 많은 것들을 담고 있습니다. 그래서 비정부조직으로 유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말씀하신대로 정부가 관여한다면 여기에는 정책과 정권이 관여하게 됩니다. 정권이 바뀌면 지원도 달라질 것이고 정부정책이 바뀌면 역시나 지원금과 추진방향도 달라질 것입니다. 심지어 민주주의기금의 주요보직자들도 정권이 바뀌면 바뀔 것입니다. 가령 미국의 對중국 정책이나 對아시아 정책이 우리의 정책과는 무관한 것입니다.”
-그럼 거슈먼 회장님의 정치성향은 어떻습니까? 민주당 지지자이신가요?
“저는 정치적으로 중립을 지키고 있습니다. 저는 공식적으로나 비공식적으로 정당지지자가 아닙니다. 물론 특정 이슈에 대해서 제 개인적인 의견과 입장이 있을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그건 어디까지나 제 개인적인 부분일 뿐 제 업무와는 분명 분리시키고 있습니다.”
민주주의가 가진 4가지 딜레마
-민주주의(democracy)는 프랜시스 후쿠야마(Francis Fukuyama)를 논하지 않고는 넘어갈 수 없는데요. 그는 대표적인 민주주의 옹호 철학가로서 “역사의 종말(end of history)”이라는 책을 통해 민주주의는 최고의 통치방법이라고 극찬했습니다. 그런 그도 2014년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귄위주의는 더 이상 진보하지 못하고 있다. 그런데 민주주의도 마찬가지다”라며 민주주의도 위기에 봉착했음을 암시했습니다. 이에 동의하시나요?
“사실 그 민주주의가 처한 위기를 논하고자 서울에 왔습니다. 후쿠야마가 민주주의에 대한 책을 적을 때만하더라도 당시 (1989년 무렵) 상황이 지금과는 달랐습니다. 그때는 공산주의가 무너지고 있었습니다. 민주주의의 라이벌이었던 공산주의의 참담한 모습을 본 것입니다. 당시로서는 민주주의가 유일한 대안이었습니다. 그 이후로 우리가 민주주의를 추진하면서 우리는 또다른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어떻게 보면 당시 공산주의와 민주주의 중 공산주의가 무너져서 택할 수밖에 없었던 민주주의였는데, 시간이 지나자 막상 민주주의 그 이상의 대안이 나오지도 않았다는 것입니다.
사실 이 민주주의라는게 제대로 정착하기 위해서는 상당한 시간을 필요로 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민주주의란 자유민주주의(Liberal Democracy)를 말합니다. 여기에는 인권이 있고, 표현과 언론의 자유가 있고, 법치(法治, rule of law)가 있습니다. 일련의 이런 체계를 구축한다는 것이 사실 상당히 어려운 것입니다. 일례로 중동국가를 보십시오. 수많은 중동국가들이 민주주의를 세우는 데에 실패했습니다. 중동에서 과거 독재정권이 붕괴되었음에도 민주주의가 제대로 정착하지 못한 경우들입니다. 가령 이집트와 예멘(Yemen) 등이 이에 해당합니다.
이외에 민주주의가 가진 첫 번째 문제점으로는 ‘퇴보’(退步,backsliding)라고 부르는 게 있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예로 태국을 들 수 있습니다. 이런 국가는 과거에는 민주국가였는데 도리어 다시 공산주의나 독재주의로 빠져들고 있는 것입니다. 태국 이외에도 헝가리와 터키, 그리고 베네수엘라 등이 이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일종의 민주주의의 역주행 혹은 퇴보입니다. 이것은 민주주의가 제대로 정착되도록 전개하는 과정(transition)에서 실패하여 역행하는 것입니다. 보통 이 민주주의의 전개되는 과정에서 많은 부패(corruption)가 발생하면서 역행하게 만들곤 합니다.
두 번째 민주주의의 딜레마로는 독재주의의 재유행(Resurgent Authoritarianism)라는 게 있습니다. 대표적인 국가로는 러시아와 중국이 있습니다. 이들은 시민사회를 억압하고 규제하는 것을 서슴지 않습니다. 인권을 위한 시민단체에 대한 정부지원을 삭감한다던지, 정부를 균형 있게 감시하는 기관들을 없애버리는 식입니다. 비정부조직(NGO)을 억압하고 언론을 통제합니다. 이미 중국, 러시아, 에티오피아, 이집트 등에서 이런 행태가 만연해 있습니다. 선거의 자유도 통제합니다. 국민의 인권을 중시한다기보다는 정부의 행정력을 집중시키는 데에만 관심이 있습니다. 국민에 대한 정부의 통제력을 강화하고 있는 것입니다.
세 번째 문제점은 발전된 민주주의(advanced democracy)에서 겪고 있는 내부적 갈등(internal divide)입니다. 미국이나 유럽처럼 발전된 민주주의를 확립한 국가들이 점차 민주주의의 발전에 대한 노력이 과거에 비해 줄어들고 있습니다. 이 과정에서 극심한 갈등이 생기고 분파적으로 나뉘고 있습니다. 이 때문에 하나의 정책을 만드는데 동의를 구하는 것이 쉽지 않고, 국가의 발전에 필요한 정책들이 통과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찌 보면 이것은 민주국가이기 때문에 이런 갈등이 생기는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권위주의적 통치를 하는 러시아, 중국, 시리아, 등에서는 하나의 구심점으로 힘이 모여듭니다. 그것은 정권에 반대를 할 세력이 없기 때문에 마치 청소기에 빨려들 듯이 하나로 힘이 쏠리는 현상입니다.
마지막 딜레마는 최근 부각되는 사이버 공간에서의 독립성 보장입니다. 이것은 민주국가와 독재국가 모두에서 해당되는 문제입니다. 물론 독재국가에서는 그 정도가 심해 사이버 공간과 비정부기관을 압박하고 통제하려고 합니다. 이들의 자유와 독립성을 보장해줘야 합니다."
중동의 석유가 민주국가의 정착을 방해해
- 방금 회장님께서 언급하신 문제점 중에서 저는 중동에서의 민주주의 정착부분에 질문을 하고 싶습니다. 중동의 일부 전문가들은 이라크 등에 미국이 개입하지 않았더라면 오히려 더 나은 정권이 유지될 수 있었을 것이라고도 합니다. 즉 중동에 갑작스런 민주주의의 정착시도가 도리어 문제를 만들었다는 주장입니다.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앞서 언급했듯이 민주주의란 어려운 시스템이고, 정착을 한다는 것도 매우 어렵습니다. 갑자기 법치국가를 만들고 언론에게 자유를 제공한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닙니다. 심지어 중동에는 헤즈볼라와 IS와 같은 테러집단들이 이런 민주국가의 시작을 방해하고 공격합니다. 그리고 여기에는 경제적인 여건이 조성되어야 합니다. 한국의 민주주의가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비교적 빠른 경제 성장이 뒷받침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경제력을 바탕으로 정치와 인프라가 민주주의의 확립을 위한 초석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런 경제적 바탕에 정치적인 영향력을 발휘하는 중산층이 점차 늘어나기 시작했습니다.
민주주의의 정착을 위해서 반드시 경제적 성장이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런 경제력 없이도 정착될 수 있습니다. 그런 사례로는 인도를 들 수 있습니다. 인도는 1940년대부터 민주국가의 초석을 다져놓았기 때문에 비교적 안정적인 민주주의를 실현하게 된 것입니다. 인도는 영국의 식민통치가 이런 민주국가의 기반을 다지는 데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고 볼 수 있습니다.
민주주의의 핵심은 자체적으로 발현해야한다는 것입니다. 민주주의는 어떤 물건처럼 수입을 해서 해결되는 것이 아닙니다. 외부의 영향으로 완성될 수 없습니다. 내부적인 동기가 부여되어야만 성공적으로 민주국가를 만들 수 있습니다.”
- 지금까지의 내용을 보자면, 민주주의에 경제력이 중요하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중동에는 오일머니(oil money)가 있습니다. 이 오일머니만 보자면 충분한 경제적 뒷받침을 가지고 있습니다. 어쩌면 이것이 종교의 문제 때문일까요? 중동에서는 왜 민주주의가 정착되지 않는 것입니까?
“지금 오일과 종교 두가지를 언급하셨는데요. 먼저 오일부터 짚고 넘어가겠습니다. 오일의 경우는 자원의 저주(Resource Curse)에 해당합니다. 이 자원의 저주라는 것은 오일과 같이 풍부한 자원을 바탕으로 한 막강한 경제력입니다. 이런 경우 막대한 자금으로 인해 내부적인 부패를 유도합니다. 정권 내부적으로 공무원들이 부패하게 되고 돈을 훔쳐갑니다. 그리고 자체적인 개발의지를 상실하게 됩니다. 한마디로 열심히 민주국가를 만들지 않아도 당장 먹고 사는데 큰 지장이 없기에 노력하지 않게 되는 겁니다.
그리고 국민을 우대해야할 필요성을 간과하게됩니다. 왜냐하면 정부입장에서는 국민의 세금을 필요로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정부란 모름지기 국민을 섬기는 제도입니다. 국민의 투표로부터 모든 권력이 나오는 제도입니다. 정부와 정치인들은 국민을 두려워합니다. 그런데 막강한 오일머니가 유입된다면 정부는 국민의 투표와 세금 앞에 두려움이 없어집니다. 그러다보니 역으로 국민에게 독재력을 과시하며 국민들이 정부를 두려워하게 만드는 겁니다. 이런 이유에서 중동의 석유는 자원의 저주입니다.
이와 반대로 한국은 오일은커녕 자원이 부족한 나라입니다. 그러니 당연히 정부는 국민을 섬겨야만 세금이 나오고 돈이 나옵니다. 국민의 높은 생산성을 발휘해야만 국가적으로 발전을 하고 경제가 살아납니다. 사실 이런 자원부족국가라는 점이 오늘의 대한민국을 성공적인 민주국가로 만들었다고 생각합니다.
중동의 이슬람교는 사실 여러 가지 사안이 걸려있는 복잡한 문제입니다. 사실 많은 무슬림들이 다른 종교에 맞서 싸우고 억압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들은 민주주의를 받아드리지 않고 적대해야하는 것으로 간주하고 있습니다. 특히 여기에 연관된 극단주의 무력집단들이 이런 문제를 더 크게 만들고 있을뿐, 아무런 해결책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폭력적이고 다른 이념을 배척하는데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파키스탄을 예로 들 수 있는데 파키스탄 내 무슬림 정당은 국민으로부터 오직 4%만의 지지를 얻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세력들이 무력을 사용함으로써 공포심을 만들어 그보다 훨신 높은 지지를 하게 됩니다.”
“북한은 침식되는 중, 빈틈이 생기고 그 안으로 민주주의가 파고들 것”
-이번에는 주제를 한반도로 옮겨가겠습니다. 한반도에는 북한과 남한이 있고, 두 국가는 상반되는 통치이념을 가지고 있습니다. 북한은 공산주의고 남한은 민주주의입니다. 일각에서는 북한이 공산주의를 가장 오랫동안 지속시켰다면서 제법 성공적인 독재국가로 평하기도 합니다. 북한의 공산주의를 성공했다고 볼 수 있을까요?
“전혀요. 북한의 공산주의는 완전한 실패작(complete failure)입니다. 전 세계에서 가장 강력하게 국민들을 탄압하는 국가입니다. 북한에서는 유교적 공산주의다 뭐라고 부를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이것은 전체주의적 독재국가(Totalitarian dictatorship)입니다. 북한의 입장에서 보자면 상당히 우려스러운 부분이 아주 가까운 거리에 같은 문화와 언어를 공유하는 남한을 마주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남한은 성공적인 민주국가로 경제적으로 풍요로운 선진국입니다. 이런 국가를 근거리에서 마주하고 있는 북한에게는 상당히 신경 쓰이는 부분입니다. 그리고 이 자체만으로도 북한의 실패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는 셈입니다. 극명한 대립하고 있는 예시가 한반도에 존재하고 있으니까요.
제가 보기에 북한은 서서히 붕괴되고 있습니다. 일종의 침식작용(erosion process)입니다. 이런 예는 과거 소련에서도 목격되었던 것들입니다. 견고했던 공산주의가 침식되면서 틈(space)을 만들어냅니다. 그리고 이런 틈새 안으로 일종의 민주주의 국가에서나 볼 수 있는 시장(market)이 파고들어갑니다. 북한에서는 ‘장마당’(그는 한국어로 장마당을 말했다)이 생기고 있습니다. 이 장마당이 생겼다는 것은 바로 공산주의 체제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배급과 분배 체계가 붕괴되었음을 보여줍니다.
배급이 제대로 유지될 수 없다보니 이런 시장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이런 시장에서는 사람간의 소통이 일어납니다. 구매자와 판매자 그리고 사람들 간의 이야기가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이 시장이라는 것 안에서 사람들이 남한의 이야기를 하고, 또 판매된 물건들, 가령 라디오나 텔레비전과 같은 장비를 통해서 남한의 소식을 들을 수밖에 없습니다. 가령 ‘북한이 지상낙원(paradise)인줄 알고 살아왔는데, 남한이 더 잘 산다더라’ 같은 이야기를 듣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사람들이 북한 정부를 신뢰하지 않게 됩니다. 즉 북한이 붕괴하는 것은 자명한 사실입니다.
다만 얼마동안 이런 상황을 유지하고 붕괴를 막고 나가느냐는 아무도 장담할 수 없는 부분입니다. 한반도에도 통일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언제일지 모르고, 또 통일 이후 한반도의 판도에는 많은 변화가 생길 것이지만 분명 통일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북한의 낙후된 환경으로 인해 피해를 입고 있는 사람들을 남한을 비롯한 국제사회가 관심을 가지고 도와줘야 할 것입니다.
최근 노벨문학상을 받은 벨라루스의 스베틀라나 알렉시에비치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벨라루스에서 살면서 나는 항상 풀리지 않는 궁금증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어떻게 하면 과거 공산주의 시절 세뇌되어 중독된 우리들의 생각을 다시 치유할 수 있을까. 나는 과거 공산주의로부터 병든 우리의 생각을 나의 문학으로 치료하고 싶었다” 이렇듯이 한반도가 통일된 이후에도 오랜 공산주의에 멍든 북한 주민들의 마음과 정신을 치료해야만 합니다.”
북한의 공산주의가 붕괴한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어
-국제전략문제연구소(CSIS)의 빅터 차 한국석좌와 싱크탱크 스트렛포(Stratfor) 등은 한반도의 통일을 늦어도 2030년 내외로 예상했습니다. 빅터 차 교수의 경우는 저와의 인터뷰에서 10년 뒤 통일 할 것으로 내다보기도 했습니다. 언제쯤 한반도가 통일할까요?
“저는 어떤 추측을 하거나 예상을 하는 주술사가 아니라서 모르겠습니다.”(웃음)
-그럼 정치 이념적으로 보셨을 때, 북한의 공산주의가 언제쯤 붕괴될까요?
“언제라고 말하기 보다는 저희 민주주의기금이 정기적으로 출판하는 민주주의 논문(The Journal of Democracy)의 사례를 들어 설명하겠습니다. 우리는 이 논문을 1990년대부터 출판했습니다. 90년대 처음 이 논문을 낼 무렵에 화제가 된 사안은 단연 쿠바의 공산체제였습니다. 당시 여러 공산국가가 다 붕괴되고 쿠바만 남아있을 때였지요.
이 때문에 우리 논문의 제목이 “카스트로의 마지막 생존(Castro's last stand)”였습니다. 당시만 해도 미국이 어떤 무력적 공격을 통해 카스트로를 체포하거나 제거할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그는 아직까지도 살아있지 않습니까.(웃음) 그 뒤로 무언가를 예측하면 안 된다는 교훈을 얻었습니다.(웃음)
그래서 저는 예측하거나 언제라고 말하기보다는 일단 붕괴될 것이라는 것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섣불리 북한의 공산주의가 금방 붕괴될 것이라고 얕잡아보아서도 안됩니다. 더군다나 북한의 정권을 유지시켜주는 중국이 있고, 중국이 그런 붕괴를 반기지 않기 때문에 언제라고 딱 집어 말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한국의 군사독재는 민주주의 발전에 필히 수반되는 과정이었다.
-회장님께서도 한국의 문제에 대해서도 관심을 기울이고 계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 한국의 역사교과서 국정화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궁금합니다.
“한국의 경우는 민주주의의 창시자(Founding father) 혹은 전직 대통령의 업적에 대해서 여야가 논쟁을 벌이는 형국입니다. 미국의 경우도 쟁점에만 차이가 있을뿐 비슷한 경험을 가지고 있습니다. 미국은 마틴루터킹 박사가 추진한 흑인 인권운동에 대한 부분에 있어서 큰 논쟁이 있었습니다. 이 내용을 더 부각해야하는지 또 흑인의 인권운동을 정당한 것으로 봐야하는지 등 여러 의견이 있었습니다.
찬성과 반대가 팽팽히 맞서고 있었습니다. 이런 이슈들은 상당히 민감한 문제들입니다. 또 이런 민감한 내용을 역사책에 담아 후대에까지 전해지는 내용으로 그 중요성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이렇다보니 어느 쪽이던지 이 역사를 이용해 정치적으로 활용하고 싶어 합니다. 따라서 정치적인 내용을 배제하고 양쪽 모두가 내부적으로 논의를 해야 하고 공통분모를 찾아야 합니다.
한국의 과거 박정희 정부시절 군사통치는 이미 여러 국가에서 목격되었던 사례입니다. 스페인도 그랬고, 칠레도 그랬습니다. 이런 국가들이 민주국가로 발전하는 과정에서 일종의 군사통치는 수반되었습니다. 이런 군사통치가 있었던 덕분에 튼튼한 경제적 기반을 다질 수 있었고, 그 경제적 인프라를 토대로 민주주의가 정착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민주국가로 가기위한 일종의 과도기적 발전형태입니다.
또 한국의 경우에는 분명히 짚고넘어가야할 것이 있습니다. 박정희 정부는 당시 전체주의나 공산주의적 독재가 아니었다는 점입니다. 이것은 상당히 중요한 점입니다. 만약 한국이 전체주의나 공산주의적 독재로 당시 정권을 통치했다면 지금과 같은 민주주의적 기반을 확립하지 못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전체주의적 독재(totalitarian dictatorship)를 추진했다면 사회 내부적으로 국민들이 숨을 돌릴 틈이 하나도 없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이것은 열려있는 (not closed) 독재정권이었고, 그 덕분에 폭발적인 경제발전이 진행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군사통치 중에도 김대중과 같은 반대세력이 목소리를 내고 있었고, 정부에 저항했습니다.
이런 세력이 존재했다는 것 자체도 중요한 시사점입니다. 이것은 저 같은 외국인인 제3자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도 한국의 독재정권은 북한 등이 시행하는 공산주의적 독재와는 달랐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결국 오늘날 대한민국이 성공한 민주국가로 자립한 것은 군사독재체제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현재 대한민국 안에서도 여야가 팽팽히 대립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미국에서도 보이는 현상입니다.
대립하고 있다는 것은 반대가 존재한다는 것이고, 반대의견을 존중한다는 것입니다. 반대가 존재한다는 것은 살아있는 민주주의의 증거이자 민주주의의 아름다움입니다. 한국이 이룬 오늘날의 민주주의는 한국 국민 모두가 기뻐할 일입니다. 종국에는 남한이 민주주의이기 때문에 북한도 이 남한의 민주주의를 감사하게 될 것입니다.”
거슈먼 회장은 젊은시절 미국의 사회민주주의자당(Social Democrats USA)의 핵심멤버로 일했던 전력이 있다. 그런 그가 과거 한국의 군사독재를 공산주의식 독재가 아니라고 분석한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회장님께서는 한국이 성공한 민주주의라고 말씀하셨는데요. 민주국가로서 성공했음을 평가할만한 잣대가 있을까요?
“비정부기관, 프리덤 하우스(Freedom house)라는 기관이 있습니다. 이 기관에서는 국가의 자유(freedom)정도를 기준(freedom house index)으로 얼마나 민주국가인지를 평가합니다. 이 기준치로 보면, 한국은 성공한 민주국가라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동일한 자료에서 북한은 최저점을 받고 있어서 민주국가가 아님을 확실히 알 수 있습니다. 이 기준은 매년 측정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보면 앞서 말한대로 민주주의의 퇴보(backsliding)를 겪고 있는 국가들도 지수를 통해서 확연히 볼 수 있습니다. 태국과 같은 나라는 매년 민주주의 수치가 떨어지고 있어서 민주주의에서 멀어지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기자가 실제 2014년도 프리덤하우스기준(Freedom House Index)의 국가별 민주주의 정도를 확인해보았다. 여기서 북한은 최악 중에 최악(Worst of worst) 국가에 이름을 올렸다. 동일한 명단에 최근 분쟁지역인 시리아도 포함되어 있었다.
-한국과 일본은 모두 경제적으로 성공한 국가들입니다. 두 국가모두 민주국가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정치적인 시스템에서는 차이를 보입니다. 전문가로서 한일의 민주주의를 보셨을 때 어느 시스템이 더 민주적이고 좋다고 생각하시나요?
“둘 다 성공한 민주국가입니다. 어느 쪽이 좋다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제 생각에는 두 국가는 각각의 문화가 잘 반영된 형태라고 생각합니다. 그 질문에 한 가지 떠오르는 사실이 있네요.
과거 일본이 전쟁에서 패하고 나서 여러 전문가들은 일본에 대해 비관적인 이야기들을 쏟아냈습니다. 일본 전문가라는 학자들이 모두 입을 모아 일본에는 민주주의가 절대 뿌리내릴 수 없다고 하더군요. 1940년대 모든 학자들이 그렇게 말했습니다. 마치 일본은 문화가 다르기 때문에 민주주의가 성공할 수 없다는 식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을 보세요. 일본은 민주주의입니다. 여기서 얻은 교훈은 어느 문화라도 민주주의가 성공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한국에도 해당했으며, 한국에도 민주주의가 뿌리내렸습니다. 이런 사례는 우리들에게 확신을 줍니다. 문화는 분명 중요한 것이지만, 그 어떤 문화라도 민주주의는 뿌리내릴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제 생각에는 민주주의가 뿌리내리지 못할 문화는 그 어디에도 없습니다. 심지어 중동에도 민주주의는 분명 뿌리내릴 수 있으며, 민주주의가 정착될 수 있습니다. 러시아도 지금 예전과 비교하면 훨씬 더 민주주의에 가까워지지 않았습니까. 중산층이 늘어나는 추세이고 경제적으로도 민주주의의 형태를 따르고 있습니다. 이 때문에 문화적 차이는 민주주의의 정착에 걸림돌이 될 수 없다는 것이 제 신념입니다.
일부 학자들은 민주주의는 국가에 관계없이 인간 본연의 문화에서 출발했다고 합니다. 민주주의는 보편적인 이념(universal idea)이라고 말합니다. 즉 이 말은 인간이 존재하는 어느 곳에서라도 민주주의는 뿌리내릴 수 있다는 말입니다. 몽고를 보세요. 몽고는 소련과 중국이라는 거대한 공산국가들 사이에서 민주국가로 생존해 있습니다. 이 때문에 특정 문화이기 때문에 민주주의를 정착할 수 없다는 말은 있을수가 없습니다.”
-민주주의를 한 단어로 정의하신다면 뭐라고 하시겠습니까?
“민주주의는 인간의 자유와 존엄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민주주의는 그 자체적으로 운영되는 체계입니다. 자치 정부(self-government)입니다. 한국을 보세요. 한국은 민주주의의 기적을 이루지 않았나요? 인간의 자유가 없는 민주주의는 민주주의가 아닙니다. 인공위성에서 본 한반도를 보세요. 자유가 보장된 남한에는 수많은 불빛이 밤을 밝히고 있습니다. 북한은 어둡습니다. 언젠가 북한도 자유로 빛이 물들기를 기원합니다.”
[칼 거슈먼 약력]
現 미국 민주주의기금(NED) 회장
前 프리덤 하우스 연구원
세계민주주의운동(WMD) 초대추진위원장
미국 예일 대학 학사(B.A)
미국 하버드 대학 석사(M.Ed.)
글 | 김동연 월간조선 기자/ 자동차 칼럼니스트
■2015.12.27 '비난 게임' 저자 벤 대트너 뉴욕대 교수
서로 비난하는 직원 똘똘 뭉치게 하려면? 공동의 목표 줘라
▲벤 대트너 뉴욕대 교수
140년의 역사를 지닌 일본 전자업체 도시바는 최근 대규모 분식회계로 큰 곤경에 처했다. 지난 8년간 기업 이익 1562억엔(1조4559억원)을 부풀린 것이 드러나면서 최근 10년간 도시바를 이끈 역대 사장 3명이 지난 7월 한날한시에 불명예 퇴진했다. 마이니치 신문 등 일본의 주요 매체들은 경직된 기업 문화와 내부 파벌 대립이 이번 사건의 단초가 됐다고 보도했다.
"사람들은 대부분 비난을 피하고 책임을 지지 않기 위해 잘못된 결정을 내립니다. 도시바의 경우 내부 파벌이 존재했습니다. 상대 파벌에게 비난받지 않고 책임을 전가하기 위해 실적을 부풀리던 것이 대규모 분식회계로 이어진 것입니다. 비합리적인 결정이 누적되면 기업이 망할 수도 있습니다."
벤 대트너(Dattner·47) 뉴욕대 경영학과 교수는 비난받고 싶지 않은 마음이 서로를 비난하는 '비난 게임'으로 이어지는데, 이는 조직을 와해시키고 회사를 망친다고 지적했다. 대트너 교수는 "솔직하게 잘못을 인정하고 책임을 질 경우 개인은 물론 기업에 돌아가는 보상이 분명히 존재하지만 대부분 이를 간과한다"고 말했다. 눈앞의 이익에 집착한 나머지 큰 그림을 보지 못하고 비난 게임의 함정에 빠지게 된다는 것이다.
벤 대트너 교수가 쓴 책 '비난 게임(The blame game)'은 조직 심리학 대가로 잘 알려진 로버트 서튼 스탠퍼드대 교수의 극찬을 받아 화제가 됐다. 대트너 교수는 조직 발전 코칭 전문 회사인 대트너 컨설팅을 만들어, 소규모 스타트업부터 대기업, 정부기관까지 다양한 조직에 조언해 왔다. ―상대방을 비난하는 대신 주어진 업무에 집중하는 것이 더 합리적인 결정인데, 왜 비난게임에 몰입하는 것인가요?
▲일러스트=박상훈 기자
"타인을 비난하는 것은 인간의 본성입니다. 공(功)이란 것은 제한된 자원입니다. 이 제한된 자원을 차지하려 할 때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더 가지려는 본능을 발휘합니다. 만약 업무 능력으로 인정받을 수 없거나, 업무에 대해 올바른 평가가 이뤄지지 않아 생각했던 것만큼 보상을 받지 못할 경우 사람들은 비합리적인 선택을 합니다. 결국 칭찬에는 인색해지고, 비난에 몰입하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비난게임이 조직의 운명을 좌지우지할 정도로 치명적인 문제점인가요?
"물론입니다. 도시바도 그랬고 과거엔 닛산 케이스가 있습니다. 카를로스 곤 르노 닛산 회장은 지난 2001년 하버드비즈니스리뷰(HBR)에 기고한 글에서 닛산의 문제점을 '비난 문화'에서 찾았습니다. 그는 기고문에서 회사의 실적이 좋지 않으면 모두 항상 다른 사람의 탓을 했다고 닛산의 문제점을 꼬집었습니다. 곤 회장은 닛산 부임 1년 만에 닛산을 흑자로 전환시킨 인물입니다. 강력한 구조조정을 지휘했던 그는 닛산의 내부 갈등을 심각한 문제로 봤던 것입니다."
―닛산은 비난게임에서 어떻게 벗어났나요?
"서로 비난하던 팀원들에게 공동의 목표를 줬습니다. 곤은 각자 다른 부서, 특히 과거 서로 비난하던 부서의 직원으로 팀 11개를 만들어 공통의 업무 목표, 이를테면 자재비를 20% 줄이라는 식의 목표를 제시했습니다. 새롭게 만든 팀에 상위 목표를 설정하고, 팀 구성원들에게 개인적 책임과 집단에 대한 책임도 같이 부과했습니다. 걸핏하면 다른 부서를 비난하던 직원들은 같은 팀을 이뤄 공동의 목표를 달성해야 했는데, 그 결과 비난하는 데 시간과 에너지를 쓰며 헛수고하지 않고 일에 집중하게 됐습니다. 공동의 목표 달성을 위한 동기를 확실히 부여하는 게 중요합니다. 한 집단이 아니라 전체 집단을 이롭게 하는 '상위의 목표'를 찾아야 합니다."
―조직 내부에서만 비난게임이 벌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회사 밖에서 비난이 일 경우 기업이 잘못에 대해 책임을 지지 않고 회피하다가 문제가 되는 경우가 많지 않나요?
"그런 경우가 아주 많습니다. 일일이 다 언급하기 쉽지 않을 정도입니다. 중요한 것은 기업이 비난을 받아들이고, 적절한 방법으로 책임을 진다면 장기적인 관점에서 기업에 더 득이 된다는 점입니다. 인텔은 지난 1994년 펜티엄 오류 사건에 잘 대처했습니다. 당시 인텔은 컴퓨터의 두뇌라 할 수 있는 펜티엄 마이크로 프로세서 칩 성공에 승부를 걸었습니다. 그런데 토머스 나이슬리 린치버그대 교수가 펜티엄 칩이 90억번에 한 번꼴로 반올림 오류를 일으킨다는 사실을 밝혔습니다. 인텔도 결함에 대해 알고 있었습니다. 인텔은 제품 결함을 알면서도 제품을 판매한 기업이 됐고, 코미디 프로그램의 소재로 사용될 정도로 비난을 받았습니다. 인텔의 주가는 급락하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CEO였던 앤드루 그로브는 공개 사과를 한 후 4억7500만달러의 비용을 감수하면서 시장에 출하된 칩을 모두 회수했습니다. 결과적으로 인텔은 1995년 출시 예정인 다음번 칩의 주문량을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회사가 책임을 회피할수록 문제는 점점 더 커집니다. 책임을 감수하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필요한 조치를 한 덕분에 인텔의 브랜드 가치는 오히려 올라갔습니다."
―비판을 수용하는 것이 보상으로 돌아온다는 것을 납득하기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미시간 주립대학병원과 일리노이 주립대학병원은 지난 몇 년에 걸쳐 의료 사고에 대한 정보를 완전히 공개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자신들이 저지른 실수를 인정할 뿐 아니라, 자진해서 잘못을 사과하고 적절한 보상을 하고 있습니다. 의료사고 소송이 늘어날 것이라는 예상과 다르게 두 병원 모두 의료사고 소송이 크게 감소했습니다. 미시간 주립대학병원에서는 의료 사고에 적극적으로 책임을 인정하기 시작한 후 1년 동안 소송 수가 252건에서 83건으로 줄었습니다. 일리노이 주립대학병원에서 적극적으로 과실을 인정한 37건의 의료 사고 중 소송으로 이어진 경우는 단 1건뿐이었습니다. 놀랍지 않나요?"
―비난을 감수하고 적절한 책임을 질 때 돌아오는 보상을 명확하게 알 수 있어야 합니다만 과연 그게 가능할지요.
"문제점을 지적하는 사람을 실패의 희생양으로 삼지 말고 칭찬해 주라고 조언하고 싶습니다. 희생양을 만들면 단기적으로 조직의 결속력이 높아지지만, 희생양이 한 명으로 끝나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많은 리더와 조직이 비난 게임을 하다가 실패의 진짜 원인, 복잡하고 잘 드러나지 않는 것들을 파악하고 개선할 기회를 놓치고 맙니다. 기업도 마찬가지입니다. 요즘 기업들은 위기에 처하면 임금을 낮추고, 부서를 통폐합합니다. 하지만 경영 전문가들은 일시적 해고가 기업 경쟁력에 큰 도움이 되지 않으며 감원 외에도 대안은 많다고 지적합니다. 나중에 필요한 인력을 찾느라 더 많은 비용을 쓰게 되는 경우도 많습니다. 누군가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데 급급하면 문제점을 정확히 찾지 못하는 것은 물론 오히려 기업에 독이 되는 의사 결정을 하게 됩니다."
―공동의 목표를 설정하거나, 오히려 비판을 하는 사람에게 적절한 보상을 해주는 것 모두 리더십과 깊은 연관이 있는 것 같습니다.
"결국 리더의 역할이 중요합니다. 독일의 유명한 로켓 연구자 베르너 폰 브라운의 일화가 있습니다. 그는 미국과 소련이 우주개발 경쟁을 벌이던 시절 미국의 우주개발 프로그램에 참여했습니다. 당시 미 항공우주국(NASA)은 경쟁이 매우 치열한 조직이었습니다. 엔지니어들은 문제가 발생하면 책임을 회피하거나 문제를 감추는 데 급급했습니다. 그때 새로운 탄도미사일이 시험 발사 도중 폭발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사고 후 한 젊은 엔지니어가 용기를 내어 민감한 회로 기판 근처에서 나사를 조이다가 불꽃이 튀었고, 그 부분에서 문제가 발생했다고 고백했습니다. 브라운은 엔지니어에게 해고통지서 대신 샴페인 한 병을 보냈습니다. 브라운은 진실을 감추는 대신 실수를 인정하는 사람을 보상하겠다는 메시지를 보낸 것입니다. 리더의 강력하고 상징적인 행동은 실수에 개방적인 문화의 밑거름이 될 것입니다."
뉴욕=온혜선 기자
■ 2016년 04월 15일 아시아 문제 전문가 이안 부루마美 바드大 교수
▲ 이안 부루마 교수가 벚꽃이 절정에 달했던 지난 1일 뉴욕 맨해튼 할렘 거리에서 웃으면서 얘기를 하고 있다. 부루마 교수는 네덜란드에서 태어나 대학에서 중국학을 전공하고, 일본에서는 문화를 공부한 전문가답게 동아시아에 대해 해박했고 한국에 대해서도 많은 애정을 갖고 있었다. 신보영 특파원 boyoung22@munhwa.com
“韓美동맹 영원안해… 韓, 中위성국 되거나 日등과 연대해야”
한·일 관계는 최근 3년여간 최악이었다. 1965년 한·일 국교 정상화 이후 묻혀 있었던 과거사 문제가 불거지면서 일본군 위안부 문제가 첨예한 쟁점으로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이명박 전 대통령과 노다 요시히코(野田佳彦) 전 일본 총리는 2011년 12월 정상회담에서 위안부 문제로 충돌하면서 한·일 관계는 3년 반 동안 정상회담이 열리지 않는 냉각기에 접어들었다. 여기에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가 우경화 정책을 주도하면서 박근혜 대통령과의 첫 정상회담 개최까지 2년 9개월이 걸렸다. 결국 한·일은 지난해 12월 위안부 문제 합의에 도달했다. 하지만 ‘불가역적인 최종 합의’를 약속하고도 일본의 공식 사과와 법적 배상을 얻어내지 못한 이번 합의에 대한 국내 여론은 차가웠다. 중국의 급부상에 대응하는 한·미·일 3국 협력의 필요성은 인정하지만, 과거사 문제에 대한 일본 태도가 전혀 바뀌지 않았다는 비판이 적지 않았다. ‘정치는 차갑고 경제는 뜨겁다’는 한국의 대일·대중 ‘정랭경열(政冷經熱)’ 정책이 전환기에 섰다는 진단도 잇따르고 있다. 1945년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형성된 세계질서가 요동치는 형국에서 과연 한국은 어떤 선택을 해야 할까. 1945년 종전 이후 세계사는 물론 동아시아 관계에 해박한 이안 부루마(65) 미국 뉴욕 바드대 민주주의·인권 및 저널리즘 교수를 지난 1일 뉴욕 맨해튼에서 만나 요즘의 한·일관계와 국제정세에 대해 대화를 나눴다.
지난 2월 한국에서 번역 출간된 ‘0년:현대의 탄생, 1945년의 세계사(글항아리, 원저 ‘Year Zero : A History of 1945’)’는 2차대전 이후 전 세계에서 일어난 사건을 종합적으로 엮어낸 명저로 평가받는다. 저서 번역 출간을 계기로 만난 부루마 교수는 한국의 선택과 관련, “한국의 선택지는 과거처럼 중국의 위성국가가 되든지, 아니면 일본 및 동남아 국가들과 연대를 강화해 중국을 견제하든지 2가지밖에 없다”고 단언했다.
부루마 교수는 “장기적 차원에서 미국의 동맹 지원은 영원히 지속될 수 없다”고 가정하면서 “한국과 일본이 동맹을 형성하는 것이 더욱 중요해질 것”이라고 전망하기까지 했다. 이를 위해서는 한·일 양국이 “국내 정치에서 위안부 문제를 비롯한 역사를 배제해야 하며, 역사가 정치적으로 악용돼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 동아시아, 특히 일본 전문가인 만큼 한·일 간 과거사 갈등을 어떻게 바라보는가.
“국가주의적 성향이 강한 아베 정부 때문에 위안부 문제가 쟁점으로 떠오른 것 같다. 하지만 이 문제를 면밀하게 살펴보면 한·일 양국 모두에서 역사 문제는 매우 국내적인 문제다. 개인적으로는 한국에서 위안부 문제보다 더 논쟁이 많은 역사 문제는 식민기간의 (일본과의) 협력 문제라고 생각한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대표적인 사례다. 이 때문에 한국의 좌파들은 역사적으로 보수가 일본에 협력했다면서 비판한다. 한국 내부에서도 역사 문제는 매우 정치적인 문제인 셈이다. 일본도 비슷하다. 진짜 싸움은 한·일, 중·일 간이 아니라 일본 내부에서 일어나고 있다. 일본의 보수들은 평화헌법을 바꾸고 싶어 하고, 많이 남아 있지 않지만 진보·좌파들은 이에 반대해 싸우고 있다. 역사 문제가 각국 간 갈등으로 보이지만, 진짜 문제는 각국 내부에 있다.”
― 위안부 문제에 한해서는 한국은 내부적으로 견해가 대체적으로 일치한다.
“한국에는 맞는 이야기지만, 일본 내부는 그렇지 않다. 일본 진보·좌파는 위안부 문제에 일본 정부가 관여했다는 것을 인정하지만, 우파 국수주의 진영은 이를 부정한다. 이 때문에 일본은 내부적으로 컨센서스(의견일치)가 없고, 제2차 세계대전에 대한 평가도 여전히 공감대가 형성돼 있지 않다. 이게 현재 일본의 가장 큰 정치 문제다. 그리고 좌파는 매우 약해진 상태로, 이는 일본뿐 아니라 전 세계적 추세다.”
― 전 세계적으로 좌파가 쇠퇴하는 경향이 시작됐다는 이야기인가.
“나는 그렇게 본다. 여러 가지 원인이 있지만, 그중 하나는 냉전 붕괴 이후 서구에서는 커다란 정치적 결과가 뒤따랐다. 물론 동아시아에서는 북한이 여전히 존재하기 때문에 냉전이 끝났다고 보기는 힘들지만. 서구에서는 냉전 기간에 공산주의 좌파가 아닌, 온건한 사회민주주의 좌파가 상당히 영향력을 발휘했다. 비(非)공산주의 국가에서도 평등과 같은 가치를 약속하는 이데올로기가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공산주의 국가의 선전·선동과는 차별화되는 이데올로기가 필요했다. 하지만 공산주의 진영이 무너지자 개인주의 등이 자리를 잡으면서 진보의 옛 가치가 퇴색하기 시작했고, 현재의 진공(vaccum) 상태를 만들었다. 이런 진공 상태를 (미국 공화당 대선 경선 선두주자인) 도널드 트럼프와 같은 포퓰리스트들이 차지하고 있는 것이다.”
― 저서 ‘0년’에서 전쟁과 종전 이후 가장 잘 살아남은 사람들은 ‘기회주의자’라고 평한 바 있다. 트럼프도 기회주의자인가.
“트럼프는 기회주의자이지만, 선동가(demagogue)이기도 하다. 트럼프는 사람들의 두려움과 편견을 이용해 본인의 힘을 키우고 있다. 기회주의자는 상당히 빨리 말을 바꾸기 때문에 정확하게 뭘 믿고 있는지 파악하기가 어렵다. 트럼프는 선동가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트럼프는 기회주의자보다 더 위험하다. 그리고 트럼프 같은 인물은 미국에만 있는 게 아니다. 유럽에도 있다. 이탈리아의 실비아 베를루스코니 전 총리도 마찬가지다. 이들은 옛 좌파가 떠난 진공 상태에 뛰어들어서 평등과 같은 이상을 이야기하면서 사람들의 마음을 사고 있다. 특히 이들이 더 강력해진 것은 세계화가 진행되면서 뒤처지고 있고, 특권을 잃고 있다는 일부 사람들의 두려움을 악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 트럼프가 미국 대통령으로 당선될까.
“그럴 것 같지는 않은데(unlikely),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잠시 트럼프로 흘렀던 인터뷰는 다시 한·일 위안부 문제로 돌아갔다. 저서 ‘0년’에서 위안부에 대해 “일본 정부에 의해 대개 납치됐으며, 일본군을 위한 공창에서 성 노예로 일했다”고 규정했던 부루마 교수는 위안부 문제와 한·일 위안부 합의에 대해 어떻게 평가하고 있을까. 부루마 교수의 답변은 의외로 한국도, 일본 편에도 가깝지 않았다. 오히려 미국의 시각에 가까웠다. 한·일 정부 간에는 위안부 문제라는 과거사를 도려내되, 위안부 피해자와 민간단체의 ‘일본의 공식 사과와 법적 배상’ 요구를 주장하는 목소리도 용인하자는 것이었다. 이런 ‘투 트랙’ 정책 권고가 나온 이유는 역시 중국이었다.
― ‘0년’에서 위안부를 일본 정부에 의해 조직적으로 납치된 성 노예로 규정하고 있는데.
“위안부 모두가 납치됐다고 보지는 않는다. 아마도 일부는 일자리를 약속받고 갔을 것이다. 일본의 시각도 누구와 이야기하느냐에 따라 상당히 다르다. 일본 서점에 가면 한쪽에는 ‘위안부 이야기는 거짓이며, 좌파의 선동일 뿐’이라고 주장하는 책이 있다. 반면 다른 한쪽에서는 완전히 다른 주장을 하는 책을 발견할 수 있다. 이 책들은 ‘위안부는 일본군 성 노예였으며, 일본 정부가 적극적으로 관여했다’고 주장한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단 하나의 일본의 시각이 있다고 볼 수 없으며, 여전히 논쟁거리다.”
― 일본의 내부 시각은 왜 이렇게 분열돼 있는가.
“전쟁 직후 일본은 건설적 대화를 할 기회가 없었다. 논쟁을 하기에는 너무 가난했고, 생존이 첫 번째였다. 미국이 일본에 전후 체제를 형성하고, 지배를 끝낸 뒤에야 일본 내부에서 상당한 시위와 토론이 일었다. 하지만 전후 체제에 대한 시각이 분열돼 있었고, 이는 평화헌법 개정 문제로 연결되면서 역사가 정치의 영역으로 들어왔다. 의회의 3분의 2 이상 동의를 얻어야 하는 헌법 개정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에 2차 세계대전에 대한 논쟁으로 바뀌었고, 정치적 쟁점이 됐다. 그런 측면에서 역사 논쟁은 파괴적이었다.”
― 한국도 과거사 문제에 대해서는 서로 다른 시각이 공존한다.
“박정희정부에서는 한·일 간 역사 논쟁이 크게 문제 되지 않았다. 박 대통령이 일본 식민주의에 일부 몸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과거사가 문제가 된 것은 한국이 민주화된 이후부터다. 일본의 현재 자민당 정부하에서는 한·중과의 과거사 문제가 해결되기 어렵다고 본다. 전쟁에 대해 죄책감이 없다고 믿는 정부는 태도를 바꿀 수 없다. 이 문제 해결은 역사 논쟁에서 정치를 배제해야 가능하다. 역사는 학자와 언론, 작가들이 논쟁하는 몫으로 남겨둬야 한다. 역사가 정치적으로 악용돼서는 안 된다.”
― 그렇다면 한·일 위안부 합의에 대해서는 어떻게 평가하나.
“이 합의를 지지한다. 한·일 양국은 공유하는 이해가 상당히 많으며, 이게 더 중요하다. 역사 문제가 한·일 간 거리를 넓혀 놓는다면, 이는 양국 모두에 매우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이다. 한·일 양국은 동아시아의 주요 민주주의 국가이자, 양국 모두 중국의 부상과 이에 따른 지역 지배를 우려하고 있다. 한·일 양국은 미국의 동맹이기도 하며, 한·일 모두 이를 잘 인지하고 있다. 역사 문제가 한·일 관계를 좌지우지하는 상황은 매우 파괴적이다.”
― 하지만 위안부 피해자들은 일본의 공식 사과와 법적 배상을 여전히 요구하고 있는데. “위안부 피해자들은 그런 주장을 밝힐 권리가 있으며, 그래야 한다. 만일 정부가 피해자들이 주장하는 것을 막는다면 그건 문제다. 하지만 한·일 간 상호 이해는 매우 중요하기 때문에 위안부 문제로 곁길로 빠져서는 안 된다. 한·일은 이번 합의로 정부 간 직접적 관계에서 당분간 이 사안에서 자유로울 수 있다. 한·일 관계와 위안부 문제는 분리될 필요가 있다. 현실에서는 모든 사람이 정의롭다고 생각하는 타협을 만들 수는 없다. 실제적 차원에서 보면 이 합의는 현재 할 수 있는 최선의 타협이라고 생각한다. 꼭 필요한 타협이기도 하다. 한·일 양국이 지금 맞닥뜨리고 있는 상황은 매우 엄중하고, 이 문제로 관계 전반이 틀어져서는 안 된다.”
― 상황이 엄중하다는 것은 중국 때문인가. “중국의 급부상이 가장 큰 원인일 것이다. 북한 위협도 있다. 국익 측면에서 한·일은 같은 편일 수밖에 없다. 게다가 중국은 매우 큰 강대국으로, 동아시아와 동남아 지역에서 다른 국가들의 우위에 서려는 경향이 강할 수밖에 없다. 이 때문에 한국이 택할 수 있는 선택지는 매우 적다. 그중 하나가 ‘사대주의’로, 중국의 위성국가가 되는 것이었다. 다른 선택지는 중국이 지역을 지배해서는 안 된다는 이해를 공유하고 있는 일본·태국·필리핀·싱가포르 등과 함께 강력한 연대를 형성하는 것이다.”
구한 말에 자주 등장했고, 1980년대 민주화 운동 과정에서도 종종 언급됐던 ‘사대주의’라는 단어를 부루마 교수에게서 듣는 것은 매우 충격적이었다. 저서 ‘0년’에서도 8쪽에 걸쳐 광복 이후 한국의 상황을 간략히 정리했던 부루마 교수는 현재 한국이 처한 상황을 1945년 직후와 유사하게 바라보고 있는 것일까. 한국에서도 최근 한·미 동맹파와 친중파 간 논쟁이 다시 뜨거워지고 있는 상황이어서 부루마 교수의 상황 인식이 더욱 궁금해졌다. 특히 한국의 선택지가 2개뿐이라니. 난감하면서도 처연한 느낌마저 들었다.
― 한국에는 2가지 선택지밖에 없단 말인가.
“제3의 길은 없어 보인다. 그리고 이런 상황은 한국 역사에서도 여러 차례 확인된 매우 전통적인 딜레마에 속한다. 한국은 강대국 사이에 끼어 있고, 이게 바로 사대주의가 나오는 배경이었다. 물론 한국만 그런 상황에 처한 것은 아니다. 역사적으로 항상 현실과 이상 사이에서 타협이 있어 왔다. 그래도 지금의 한국은 광복 이후인 1940년대 말에 비하면 더 많은 선택지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전후에는 한국인들은 스스로 어떤 선택을 할 수 없었다. 미국이 있었고, 정책 결정에 관여하는 한국인들은 이승만 대통령을 비롯한 소수의 엘리트밖에 없었다. 민주주의 국가도 아니었고, 다수의 한국인은 국가의 운명에 영향을 미칠 힘이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여론이 매우 중요하며, 이를 반영하는 다수의 정당이 존재한다. 이게 위안부 문제가 한국에서 매우 민감하게 된 이유이기도 하지만.”
― 세계질서의 변환기에는 한국 같은 나라가 강대국에 휘둘릴 수 있다는 이야기인가.
“한국이 일본과 대만, 동남아국가들과 연대를 형성하지 않는다면 그렇게 될 것이다. 한국 같은 나라는 ‘강대국의 지배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라는 문제에 자주 직면하게 된다. 1000년 전에도 마찬가지였다. 북한은 자주적이라고 주장하지만, 이건 선전에 불과하다. 북한은 매우 가난한 데다, 실제로는 중국에 크게 의존하고 있다. 완전한 자주는 세계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고 한국 혼자서는 중국에 대응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유사한 상황에 처한 국가들과 협력을 강화해야 하며, 그나마 한국은 아시아에서 강한 국가에 속하기 때문에 이런 협력구도를 만드는 데 있어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또 매우 장기적인 차원에서는(long, long and long term) 한국의 미국에 대한 의존도는 줄어들 수밖에 없다. 미국이 아시아의 동맹을 지원하겠지만, 영원히 지속할 수는 없다. 그런 상황에서는 한국과 일본, 동남아국가들 간의 연대가 더욱 중요해질 것이며, 한·일이 앞으로 무엇을 하는지가 매우 중요하다.”
― 북한에 대해서는 어떻게 평가하는가.
“북한에 대해서는 좋은 전망을 할 수가 없다. 북한이 붕괴되면 큰 문제가 생길 것이다. 수십만의 북한 난민이 남한으로 몰려든다고 생각해보라. 어떻게 남한 정부가 이를 막겠는가. 북한 정권이 유지돼도 문제다. 북한이 적대적인 행보를 이어갈 것이기 때문이다. 어떤 시나리오도 좋다고 할 수 없다. 그나마 가장 좋은 시나리오라면 북한이 천천히 변해서 중국과 같은 체제로 진화해 점차 남한과 가까워지는 것이다. 다만, 북한의 3대 세습 이후 북한 내부에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알 수 없는 것은 문제다. 북한 지도자(김정은 북한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가 숙청을 자주 단행하는 것을 보면 자신의 권력이 취약하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이는 매우 위험할 수 있고, 뭔가 미친(crazy) 행동을 할 수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 동북아의 최대 도전 요인으로 꼽은 중국의 미래에 대해서는 어떻게 전망하는가. 중국은 역사적으로 분열과 통일을 반복해왔는데.
“중국의 미래는 정말 전망하기 어렵다. 중국 공산당이 1989년 톈안먼(天安門) 사태 이후 추구한 정책은 일본 자민당이나 싱가포르 정부가 중산층과 맺었던 것과 유사한 협약 같은 것이었다. 즉, 중산층에게 질서와 번영을 약속하면서 정치에는 무관심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사실 이 정책은 상당히 오랫동안 성공적이었다. 하지만 문제는 중산층이 더 이상 잘살 수 없다고 느낀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이다. 중국에서 심각한 경제 위기가 생기면 체제 자체가 매우 취약해지는데, 공산당 통치의 정당성이 경제 성장에 기반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이 되면 무슨 일도 일어날 수 있게 된다. 강력한 민족주의가 부상할 수도 있고, 사회적 혼란이 발생할 수도 있다. 어떤 상황이 초래될지는 정확히 점치기 어렵다. 게다가 중국 공산당 통치는 한국·대만의 과거 독재 정부와는 다르다. 한국의 민주화 과정에서는 정부에 관여 받지 않은 독립적인 기관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 교회가 대표적이다. 김영삼·김대중 전 대통령이 이끄는 야당도 있었고, 노조도 있었다. 이 때문에 민주화로의 이행 과정이 상대적으로 쉬웠다. 국민들을 동원할 수 있는 구심점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중국은 그렇지 않다. 중국의 모든 조직·기관은 국가의 통제하에 있다. 그렇기 때문에 반대 여론을 조직하기가 매우 어렵다. 한국과 달리 중국의 전환은 매우 혼란스럽고, 때로는 폭력적일 수 있는 이유다.”
마지막으로 부루마 교수가 전후 질서의 시작이라는 의미에서 ‘0년’으로 삼은 1945년은 한국에는 어떤 의미인지를 물었다. 부루마 교수의 답변은 이랬다.
“남한만이 아니라 남북한 모두에 1945년은 분단을 의미한다. 언젠가 한반도가 통일되기를 기원하는데, 통일로 가는 길은 매우 험난하고 아주 오랜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한국에 행운을 빈다(Good luck).”
한국과의 인연… 1970년대부터 방방곡곡 누벼… 김일성 사망 이듬해엔 訪北도
일본·중국 전문가로 알려진 이안 부루마 교수의 한국과의 인연은 예상외로 깊었다. 한국의 서울은 물론 부산·목포·통영까지 샅샅이 여행을 한데다, 북한을 방문한 적도 있다. 유일하게 못 가본 곳은 제주도라고 했다. 부루마 교수는 “제주도가 매우 아름답다고 하던데, 아직 가보지 못했다”면서 “오는 7월 한국을 방문할 계획인데 그때 한번 시도해보겠다”고 말했다. 부루마 교수는 인터뷰 중간중간에 한국 대통령들의 이름뿐 아니라 ‘여관’, ‘막걸리’,‘사대주의’ 같은 단어도 한국어로 완벽하게 발음했다.
― 한국에는 몇 번이나 가봤나.
“1970년대 일본에서 유학하면서 한국을 너무 자주 방문해서 횟수를 정확히 기억하지는 못하겠다. 첫 방문은 1976년이었다. 2006년에 영화 ‘올드 보이’를 만든 박찬욱 감독을 만나기 위해 한국에 간 것이 마지막이었다. 1980년대에는 홍콩에서 기자로 일하고 있었는데, 홍콩의 한국 특파원과 친구가 돼서 한국에 자주 갔었다. 1986년 민주화 직전의 한국 시위대는 정말 대단했다.”
― 북한도 방문한 경험이 있는지.
“김일성 주석이 사망한 다음 해인 1995년에 북한에 갔었다. 당시에도 북한은 여전히 애도 기간이었고, 김일성 시신이 안치된 금수산기념궁전에도 가야만 했다. 평양과 개성을 방문했었는데, 중국 베이징(北京)에서 기차를 타고 압록강을 건너 신의주를 거쳐 북한으로 들어갔다.”
― 한국에 대한 첫인상은 어땠나.
“1970년대 당시에는 박정희 대통령이 집권하고 있어서 전체 사회가 규율이 잡혀 있는 느낌이 강했고, 매우 가난했다. 하지만 한국은 일본과는 달리 훨씬 활기찼다(lively). 특히 거리의 소리가 매우 달랐다. 일본에는 기계 소리가 많다. 빠찡꼬(사행성 오락기)가 많고, 소리는 주로 TV에서 나온다. 반면 한국에는 인간의 소리가 훨씬 더 많았다. 상당히 신선했다. 일본 사회가 절제돼 있는(restrained) 느낌이라면, 한국은 일본과 같은 유교 전통을 공유하면서도 많이 달랐다. 부산의 여관에서 보낸 한국에서의 첫날 밤은 아직도 기억이 생생하다. 여관 인근 주민들이 큰 잔치를 하고 있었는데, 막걸리를 마시고 있었다. 막걸리를 얻어 마셨는데 진짜 맛있었다.”
― 한국 등 동아시아에 관심을 가지게 된 특별한 계기가 있나.
“영국 런던에서 고등학교를 다니면서 만난 인도 친구를 통해 내가 전혀 모르는 지구의 절반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남들이 하지 않으면서도 앞으로 유용한 것이 뭘까 고민하다가 중국을 전공으로 택했다. 하지만 마오쩌둥(毛澤東) 주석이 권력을 잡고 있는 공산주의 중국에는 큰 매력을 느끼지 못했다. 졸업 뒤 프랑스 파리에 머물다가 일본 영화를 많이 접하게 됐고, 장학금을 받고 일본 대학원에서 공부를 시작한 게 동아시아와의 인연의 시작이었다. 대단히 잘한 결정이었다. 1980년대부터 미국과 유럽이 동아시아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면서 일자리가 많았고, 1980년대 한국의 민주화와 필리핀의 ‘피플 파워’ 혁명을 비롯해 아시아의 민주화 과정을 현장에서 목격할 수 있었다. 작가로서는 대단한 행운이었다고 생각한다.”
이안 부루마는 누구?… 교수·작가·영화감독 거친 6개국어 능통 ‘지식 유목민’
세계 100大 사상가 선정도
이안 부루마 교수는 진정한 ‘지식 유목민’이었다. 네덜란드에서 태어나 영국에서 고등학교를 나왔고, 일본 도쿄(東京)에서 대학원 공부를 했다. 지금은 미국 뉴욕에 자리 잡고 있다. 홍콩과 프랑스·헝가리·독일·오스트리아에서도 2~3년 짧게 머물렀다. 거쳐 간 직업도 다큐멘터리 영화 감독에서 기자, 연구원, 작가, 교수까지 다양했다. 동서양을 넘나든 경험은 1983년 부루마 교수가 처음으로 내놓은 ‘가면의 뒤편(Behind the Mask):성적 악마, 성스러운 어머니, 복장도착자, 깡패, 그리고 일본 문화 영웅들’에서 최신작인 ‘잔혹극(Theater of Cruelty):예술, 영화, 그리고 전쟁의 그림자’까지 20여 권의 저서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젊은 시절 일본·중국 문화에 집중했다면, 최근에는 제2차 세계대전과 그 이후 동서양을 아우르는 역사에 천착하고 있다.
부루마 교수는 외교 전문지 ‘포린폴리시’가 2008년, 2010년에 선정한 ‘세계 100대 사상가’에 이름을 올리기도 했다. 부루마 교수가 방대한 정보를 담은 다작이 가능했던 이유는 6개 국어를 구사할 수 있는 언어 능력 덕분이다. 부루마 교수는 “영어·네덜란드어·독어·프랑스어·일본어는 의사 표현이 자유로운 편이고, 중국어는 아직도 다소 힘들다”고 말했다. 실제로 인터뷰 도중 일본인 부인과 통화하면서 선보인 부루마 교수의 일본어는 완벽했다. 이런 부루마 교수에게 모국어는 영어와 네덜란드어 2개다. 부루마 교수는 “어머니가 영국인이었는데, 어릴 때 어머니와는 항상 영어로 대화했다”면서 “고등학교도 영국 런던에서 나왔기 때문에 영어와 네덜란드어를 동시에 구사하는 것이 크게 힘들지 않다”고 덧붙였다. 부루마 교수는 ‘지식 유목인’으로 비친다는 질문에 “네덜란드와 영국이 모국이라고 생각하지만, 뉴욕에 사는 것도 매우 편안하게 느낀다”면서도 “나는 남미와 아프리카에는 가본 적이 없다”고 덧붙였다.
△1951년 네덜란드 헤이그 출생 △네덜란드 레이던대(중국 문학·역사) △일본 도쿄(東京) 니혼(日本)대 대학원(일본 영화) △네덜란드 흐로닝겐(Groningen)대 명예박사(신학) △홍콩 파이스턴이코노믹리뷰(Far Eastern Economic Review) 문화 담당 기자 △영국 잡지 스펙테이터(Spectator) 국제 담당 기자 △미국 워싱턴의 우드로윌슨센터 연구원 △영국 옥스퍼드대 앤서니 칼리지 연구원 △미국 뉴욕대 리마크연구소 연구원 △뉴욕 바드대 민주주의·인권 및 저널리즘 교수
인터뷰 = 신보영 특파원 (국제부) 뉴욕 = boyoung22@munhwa.com
■2016.06.10 노스 제니 타운 대표, “문재인과 트럼프 당선되면 북한은 매우 강해질 것”
▲제니 타운 38노스의 공동대표.
38노스(38North). 북한의 핵실험, 미사일 발사 등이 있을 때마다 국내 언론에서 자주 거론하는 이름이다. 그런데 38노스를 묘사하는 각 언론사의 설명은 다양하다. 미국의 대북전문 매체, 미국의 싱크탱크, 대북소식통 등이다.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국내 언론사들조차 38노스의 실체를 정확히 파악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 38노스의 정체는 무엇인가. 어떻게 매번 북한 핵실험 준비과정과 미사일 발사 징후를 파악할 수 있을까. 과연 몇 명이 38노스에서 일하고 있을까. 38노스는 미국 정부의 정보기관과 일하고 있을까. 북한을 촬영한 인공위성 사진을 어디서 가져왔을까. 38노스에 연락을 취해 38노스의 공동대표를 직접 만나게 된 이유다.
비가 부슬부슬 내리던 5월 6일, 38노스의 공동대표인 제니 타운(Jenny Town) 씨를 서울 광화문에서 만났다. 처음 그를 만나기 전, 그가 ‘공동대표’라는 직함을 서면으로 보내 왔을 땐 중년의 남성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당초 예상과는 달리 나이가 젊은 한국계 여성이었다. 그가 건넨 명함에는 ‘부국장(Assistant Director)’이라는 직함이 있었다. 그는 38노스의 공동대표이자 38노스를 주관하는 한미연구원(USKI)의 부국장이다. 기자가 그를 만난 날은 북한이 36년 만에 제7차 당대회를 개최한 날이다. 그에게 38노스의 종사자 수, 구성원의 특성, 운영비용과 38노스의 목적 등 다양한 것을 물어봤다.
대북 전문가의 부재가 38노스의 출범 계기
— 38노스를 처음 만들게 된 계기가 궁금합니다. 또 누가 이 38노스를 만들었나요.
“38노스가 무엇인지에 대한 개념부터 정립되어야 합니다. 38노스란 기관이나 조직의 이름이 아닙니다. 이것은 존스홉킨스 대학(Johns Hopkins University, JHU), 폴니츠 고등국제대학(Paul Nitze-SAIS) 산하 한미연구원(US-Korea Institute, USKI)의 프로젝트 명(名)입니다. 처음 38노스 프로젝트를 시작하게 된 동기는 북한에 대한 무지(無知)에서 비롯됐습니다.”
— 미국도 그런가요.
“미국 내 ‘북한 전문가’라고 할 만한 사람이 없었습니다. 북한을 몰라도 너무 몰랐던 거죠. ‘자칭 북한 전문가’라는 사람들이 미국 언론에 나와서는 잘못된 정보들을 사실인 양 말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이 전문가라는 사람들은 그 직업이나 배경을 보면 대학생이나, 특정 기관의 인턴처럼 전문적인 지식과 경험이 부족한 사람들이 꽤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즉 수준 이하의 사람들이 북한 전문가로 불리게 된 겁니다. 이들은 언론이 좋아할 만한 과장된 표현을 자주 사용하고 사실보다 부풀려진 허구 등을 만들어 방송에서 여과없이 발설하곤 했습니다.”
— 그게 38노스가 만들어진 계기였네요.
“이런 잘못된 정보에 미국민들을 물들게 할 수는 없었습니다. 최소한 팩트(fact)에 근거한 북한 전문가 집단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조엘 위트(Joel Wit) 존스홉킨스 대학 한미연구원의 선임연구원과 한미연구원의 부국장인 제가 손잡고, 2010년 38노스를 만들기로 했습니다. 38노스가 만들어진 뒤로 우리는 ‘진정한 전문가들’을 수소문했습니다.”
▲존스홉킨스 대학의 폴니츠 고등국제대학은 《역사의 종말과 최후의 인간》을 쓴 정치철학자 프란시스 후쿠야마, 전직 국무부 고문을 지낸 엘리엇 코헨, 전 국가안보 보좌관이었던 즈비그뉴 브레진스키 등이 교수로 재직한 바 있다(왼쪽부터).
— 어떤 사람들이었습니까.
“전직 정보부 요원, 북한연구가, 탈북자, 북한을 여러 차례 방문한 전력이 있는 사람, 북한과 사업을 했던 사람, 전직 외교관 등입니다. 이들을 통해 입수한 정보를 토대로 38노스는 정보를 제공합니다. 이들이 말한 내용 혹은 작성한 글을 다수의 독자가 읽을 수 있도록 최소한의 편집을 한 뒤 38노스에 그 내용을 공개하고 있습니다.”
존스홉킨스 대학의 폴니츠 고등국제대학은 국제외교 분야에서 권위 있는 학자들을 많이 배출했다. 《역사의 종말과 최후의 인간》을 쓴 정치철학자 프란시스 후쿠야마(Francis Fukuyama), 전직 국무부 고문을 지낸 엘리엇 코헨(Eliot Cohen),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의 국가안보 보좌관이었던 즈비그뉴 브레진스키(Zbigniew Brzezinski) 등이 고등국제대학의 교수 등으로 재직한 바 있다.
— 38노스의 규모는 어떻게 되고, 38노스 내에 몇 명의 분석가 집단이 있나요. 또 어떤 구조로 팀을 꾸리고 있나요. 예를 들어 위성사진 분석팀 등입니다.
“38노스는 3명이 모든 운영을 도맡아 하고 있습니다. 조엘 위트, 제니 타운, 미셸 계(Michelle Kae)입니다. 3명은 한미연구원의 다른 연구 등에도 투입됩니다. 사람의 수만 보자면 규모가 매우 작지만 우리 모두는 상당한 업무 생산성(hyper-productive)을 가진 사람들이에요. 38노스의 초기만 하더라도 생산성이 떨어졌어요. 초창기에는 주 1회, 1개의 보고서(article)만을 만들어 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한 주에 최소 2~3개 정도의 보고서를 만들어서 올리고 있습니다. 38노스가 생산하는 모든 글(article)은 신뢰할 수 있는 내용으로 대부분이 20여 전문가의 조언과 분석을 토대로 작성한 것들입니다. 이렇게 전문가 집단을 통해 확인한 사안을 저희 3명의 멤버가 올리는 것 외에 다른 전문적인 글을 올리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런 글은 38노스에 올려 달라는 요청을 받은 것은 아니지만 저희 프로젝트 기준에 부합되어 게재한 글들입니다.”
인공위성 사진 분석에 4가지 어려움 있어
▲지난 5월 8일 38노스가 공개한 북한의 핵 실험장을 찍은 인공위성 사진. 사진=38노스 홈페이지 캡처
— 인공위성 사진 분석은 어떻게 진행하고 있습니까.
“인공위성 사진 분석은 2012년부터 본격적으로 시작했습니다. 2012년 4월, 북한은 김일성의 100세 생일을 기념하고자 위성발사(북한의 주장이다)를 준비했습니다. 이때를 기점으로 본격적으로 38노스는 위성사진 분석을 시작하게 된 것입니다. 당시에는 특정 위성사진을 구매하기보다는 38노스 내부적으로 입수한 위성사진을 분석했습니다. 그때부터 4~5명의 위성사진 전문가가 자문에 응하고 그 내용을 바탕으로 분석에 들어갔습니다. 이 인공위성 사진 분석 전문가들은 전직 군 출신으로 인공위성 사진 분석을 전문으로 했던 인물들입니다. 그중에는 무기체계 전문가, 핵무기 전문가, 미사일 발사체계 전문가 등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들이 분석한 내용을 비전문가인 독자들이 보았을 때도 이해할 수 있게 일부 내용을 편집하여 게재하고 있습니다. 모든 사진의 생산과 처리 등은 한미연구원 내부적으로 진행합니다.”
— 38노스는 인공위성 사진을 유럽의 군사기업인 에어버스(Airbus)에서 구매하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어째서 미국의 군사기업인 록히드마틴(Lockheed Martin)이나 보잉(Boeing)에서 촬영한 인공위성 사진을 사용하지 않는 것입니까.
“저희는 단순히 구매할 수 있는 상업 인공위성의 사진을 사용할 뿐입니다.”
— 북한에 대한 정보를 수집한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많은 어려움이 있을 것 같습니다. 어렵지는 않습니까.
“분명 어려움이 존재하죠. 가령 위성사진 분석만 하더라도 그렇습니다. 여기에는 크게 4가지 어려운 점이 있습니다.
첫째는 위성의 궤도 순환 일정입니다. 현존하는 상업위성들이 북한 상공을 비행하는 경우가 많지 않아서 매우 제한적입니다. 이 비행 일정에 맞춰 인공위성 이미지를 구해 와야 합니다.
둘째는 사진의 구매입니다. 설령 북한의 상공을 상업 인공위성이 비행했다고 하더라도 해당 사진을 인공위성 업체에서 판매하지 않는 경우입니다. 이럴 경우에는 사진을 아예 확보할 수가 없습니다.
셋째는 금전적인 제약입니다. 북한이 특정 지역에서 활발한 움직임이 포착된다면 우리 38노스는 해당 지역을 촬영한 인공위성 사진을 계속해서 구매해야 합니다. 즉 북한이 더 활발하게, 자주 움직일수록 우리의 인공위성 사진 구입 빈도가 증가하는 구조입니다. 이것은 저희의 예산과도 직결되는 문제입니다.”
▲북한은 미사일 발사체 조립과정 등의 활동이 위성에서 탐지되지 않도록 위장막을 설치하는 행태를 보이고 있다. 사진=38노스 홈페이지 캡처
— 사진의 해상도는요.
“기상이 좋지 못하면 확보한 인공위성 사진을 판독하는 게 상당히 어렵습니다. 아무리 우리가 원하는 지역을 촬영했더라도 기상조건이 맞지 않으면 분석이 어렵죠. 우리가 구입하는 상업용 인공위성이 가진 최상의 해상도는 0.25m까지 식별이 가능한 사진입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상업위성이 촬영한 사진으로는 0.5m까지만 식별되는 해상도를 가지고 있어요. 결국 이런 기상적 조건과 해상도의 어려움을 극복해야만 합니다. 이 두 조건을 극복하기 위해 우리는 지상에서 촬영한 사진(ground pictures) 등과 끊임없이 대조해 분석합니다. 그리고 2명의 전문가 서로가 분석한 결과를 체크하고 그 결과에 동의했을 경우에만 신뢰할 수 있다고 판단, 보고서로 완성될 수 있습니다.”
— 북한이 가만히 있을 리 없을 텐데요.
“최근 북한은 이런 분석을 어렵게 하고 있습니다. 북한의 은폐전술(隱蔽戰術·concealment operation)이 날로 진화하고 있습니다. 북한은 미사일 발사체 조립과정 등을 위성에서 탐지되지 않도록 위장막을 설치하는 등의 행태를 보이고 있습니다. 위성의 비행궤도와 시간 등을 고려해 로켓조립 작업도 일시적으로 멈추기도 합니다. 보급품 등을 전달하는 철로 위에 은신처(隱身處·shelter)를 설치하는 등의 조치를 시행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38노스는 다수의 정보를 종합적으로 분석하는 데이터 퓨전(Data Fusion) 방식과 모든 정보의 분석(All Source Analysis) 기법을 자주 사용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위성사진 하나만으로는 어떤 작업을 하는지 확신을 가지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 38노스의 분석은 100% 정확합니까.
“우리가 분석한 것에 대한 일부 여론의 비판도 인지하고 있습니다. 정보의 신뢰도를 높이고자 38노스는 항상 분석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특정 사건이 발생한 직후 바로 글을 게재하는 오류를 범하지 않습니다. 38노스는 최대한 많은 자료와 다른 전문가 등의 분석내용을 모두 확보해 확인하는 작업을 거친 뒤에 글을 게재하고 있습니다. 38노스는 우리 분석의 신뢰성을 보여주고자 어떤 자료를 가지고 분석했는지 참고한 자료의 모든 출처를 밝히고 있습니다.”
미 정부와는 공조 없고, 미 싱크탱크 및 한국 유학생들과 교류해
— 38노스에는 북한을 정기적으로 방문하는 사람이 있나요.
“우리가 확보한 모든 자료는 공개된 자료(open source)를 토대로 만든 것입니다. 즉 우리를 대표해서 북한을 정기적으로 방문하는 사람은 따로 없습니다. 우리는 미국 정부로부터 승인을 받아 북한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다만, 북한을 방문하는 사람들에게 유사시 자료를 요청하고 있습니다. 다만 저희들은 다양한 대북 전문가들로부터 자료와 기고문을 받고 있습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이런 정보들을 모아 비교 분석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의 옳은 주장이 있을 수는 없기 때문에 다수 전문가들의 의견과 대조하는 것이지요. 이런 다수의 정보를 하나로 모으고 비교 분석하는 전문가들이 바로 우리 38노스에 있습니다.”
— 38노스에는 한국어를 하는 사람이나 전문 통·번역가가 있나요.
“우리 직원 중에는 한국어와 영어를 모두 할 수 있는 사람(bilingual)이 있어요.”
— 38노스 홈페이지에는 미디어와 연관된 두 개의 카테고리가 있더군요. 바로 〈Media Analysis〉(언론 분석)와 〈Mediabusters〉(언론 통찰)가 그것입니다. 이 둘의 차이가 뭔가요.
“Media Analysis는 북한 매체를 통해 나온 내용을 분석하는 것으로 미래를 예측하는 것(reading the tea leaves·미국 숙어)과 같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즉 북한이 주장하고자 하는 의도가 무엇인지를 북한이 발설한 내용을 토대로 파악하는 것이죠. 이와 달리 Mediabusters는 북한과 관련된 내용을 냉철하게 분석한 기사들을 분석해 작성한 글들입니다. 이런 기사들을 토대로 북한에서 벌어지는 상황 등을 분석하는 것이에요.”
— 혹시 미국의 정보기관(Intel Community)이나 국방부(DOD)가 38노스를 지원하고 있습니까.
“38노스는 미 정부(US Gov’t)와는 어떠한 연관도 없습니다. 따라서 정보부서와의 공조는 아예 없어요.”
— 워싱턴에는 미국의 내로라하는 유수의 싱크탱크들이 많습니다. 미 국제전략문제연구소(CSIS)와 브루킹스 연구소(The Brookings Institute)가 대표적입니다. 이런 싱크탱크와는 교류하고 있나요.
“물론입니다. 워싱턴 소재의 여러 싱크탱크들과는 활발히 정보를 교류하고 활동을 해 왔습니다.”
— 존스홉킨스 대학이 있는 워싱턴 DC 근교에는 존스홉킨스대를 포함해 약 5개의 대학이 있죠. 조지워싱턴대(GWU), 조지타운대(GTU), 조지메이슨대(GMU), 아메리칸대(AU)가 있는데요. 이 대학들에는 많은 한국인 유학생이 있다고 알려졌습니다. 이 학생들이 38노스 활동에 도움을 준 사례가 있나요.
“언급하신 학교들의 한국계 학생 중에는 분명 북한에 관심이 있는 학생들이 꽤 있었습니다. 따라서 이 학교들에서 주최하는 여러 행사에 38노스 관계자 등이 참석해 북한 관련 내용을 발표하고 논의하는 등의 교류를 해 왔습니다. 이 중 일부 학생들은 38노스의 인턴이나 보조직으로 근무한 학생도 더러 있습니다.”
“정보의 최전선에서 북한을 예측하는 게 우리의 숙명”
— 존스홉킨스 대학 외에 워싱턴 소재의 다른 대학에서도 한미 연구를 진행 중입니다. 조지워싱턴 대학의 시거센터(Sigur Center for Asian Studies)가 대표적입니다. 조지타운 대학도 빅터 차 교수 주도의 한국 및 아시아 관련 프로그램이 있습니다. 다른 대학의 한국 및 아시아 관련 프로젝트와 38노스의 차이는 무엇입니까.
“제 생각에 아마도 큰 차이는 38노스에 소속된 운영진이 존스홉킨스 대학의 교직원(faculty)이 아니라는 점이죠. 즉 학교 측의 이해관계와는 무관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38노스에 관여하고 있는 사람들은 38노스 프로젝트 이외의 다른 연구과제에도 대거 참여하고 있지요. 다른 대학은 하나의 프로젝트에만 참여하는 경우가 많은 편입니다. 우리는 38노스 이외의 다른 연구과제도 하고 있습니다. 즉 북한을 탐구하는 38노스 이외의 문제인 한반도의 정세, 한반도 핵안보, 한미동맹 등과 관련된 것들입니다.”
— 미 정보기관 CIA에 따르면, 김정은의 도발양상이 과거 김정일과 다르며 예측이 어렵다고 했어요. 이번 4차 북핵실험에 앞서 국제사회에 실험날짜를 돌연 바꾸는 등 예상밖의 행동을 보였어요. 38노스가 보기에 김정은은 어떤 인물로 보입니까. 예측이 쉬운 편입니까.
“CIA의 분석에 동의합니다. 과거 김정일은 지난 20년의 집권을 통해 그가 보여준 행동이 있어요. 또 다른 국가들과의 교류를 통해서 자신의 통치스타일이 무엇인지 보여줬죠. 타국과의 교류 등을 통해 입수된 그의 성격과 특성은 다양한 분석과 추측을 가능하게 했습니다. 김정일은 도발에 앞서 예측가능한 범주의 행동을 보이곤 했습니다. 이를 어느 정도 파악했던 국제사회는 그의 취향과 그의 한계점을 잘 파악할 수 있었습니다.”
— 김정은은 김정일과 다르지 않습니까.
“김정은은 분명 그의 아버지, 김정일과는 달라요. 그의 집권을 예상한 것은 고작 2010년이었고 그의 통치를 보게 된 것은 2011년입니다. 그가 집권하는 동안 그는 다른 나라의 정상을 만나지도 않았고, 국제사회와의 대화도 없었습니다. 한마디로 그에 대해 축적된 정보가 적어요. 따라서 그의 행동을 예상하려면 더 빨리 분석하고 더 많은 정보를 축적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 말씀대로 김정은의 스타일로 볼 때 북한이라는 집단을 대상으로 어떤 예상(prediction)을 내놓는다는 것은 어려워 보이네요. 항상 거기에는 그 예측이 틀릴 가능성이 도사리고 있는데, 어떻게 이런 점을 극복합니까.
“항상 예측에는 틀릴 수 있다는 가능성이 있어요. 특히나 시점(timeline)을 제시하는 예측은 틀릴 가능성이 더 농후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의 예측이 왜 그러한지 전문가들이 분석하는 것이고 그 내용을 일반에 설명하는 것입니다. 물론 틀릴 수는 있지만 (정보의) 최전선(最前線·front end)에서 예측을 하는 것이 우리의 숙명(宿命)입니다. 우리는 틀릴 수 있음을 극복하기 위해 가능한 모든 정보를 모으고 있습니다.”
— 38노스의 업무가 쉽지만은 않은 것 같습니다. 38노스의 궁극적인 목적이나 목표가 있을 것 같은데요.
“제 생각에 38노스는 북한에 관한 정보의 허브(hub)가 되는 것이 궁극적인 지향점(goal)이라고 생각됩니다. 북한에 대한 정보를 공개함으로써 많은 사람이 알지 못하는 북한을 널리 알릴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정보의 보고(寶庫)로서 많은 사람에게 알려주는 것에서 38노스는 보람을 느낍니다.”
— 그런데 38노스가 공개한 자료들이 어찌 보면 적(敵)을 이롭게 할 수도 있을 텐데요. 이런 부분을 고려해서 정보를 공개하나요.
“북한도 우리가 공개한 내용을 보고 있습니다. 이미 북한도 인터넷을 접속해서 우리가 공개하는 정보를 볼 수 있으니까요. 그러나 우리는 정보를 공개하고 공유하는 것이 주된 목적이기 때문에 공개하는 정보를 가리거나 선별하지는 않습니다.”
— 그럼 38노스가 공개한 자료를 북한이 보고 있다는 걸 직접적으로 감지한 사례가 있을까요. 일례로 어떤 정보를 공개한 뒤 북한의 태도가 갑자기 바뀌었다든지 말이죠.
“아무래도 인공위성 사진이 대표적인 것 같습니다. 38노스가 지속적으로 인공위성 사진을 통해 북한의 주요 시설을 감시하다 보니 그런 것 같습니다. 이런 인공위성의 움직임에 과거보다 북한은 상당히 민감해졌습니다. 북한도 이미 몇 개의 상업위성이 있는지, 또 어떤 궤도로 자신들의 상공 위로 비행하는지 다 알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런 점을 고려해서 움직이고, 위장막 등을 철저히 씌우고 있습니다.”
국무총리 직속 연구원이 38노스 운영비 지원해
— 북한이 인공위성이 지나가는 시점까지 정확히 안다는 말씀이군요.
“네, 그럼요. 북한은 다 알고 있어요. 이런 인공위성의 비행 시점을 고려해서 움직여요. 예전에는 대대적으로 이동을 한다거나 철로 위로 대형 장비를 실어 나르곤 했어요. 그런데 지금은 적은 수의 소형 트럭을 활용해 단계적으로 조금씩 움직입니다. 이런 식으로 움직이면 우리(38노스) 입장에서는 분석이 어려워집니다. 이 움직임이 미사일 부속을 교체하는 것인지, 아니면 단순 점검인지, 발사체를 조립하는 것인지 등을 정확히 파악하기 어렵습니다.”
— 이번에는 자금(budget) 운용이 좀 궁금한데요. 혹시 38노스 직원들의 급여 수준을 알 수 있을까요. 북한을 분석하겠다는 열정만으로는 이런 고난도의 작업을 하기에는 무리가 있어 보입니다.
“저희 38노스의 월급을 직접적으로 말씀드리기는 곤란합니다.”
— 그럼 업계에서 지불하는 임금과 비교한다면 어떤가요.
“일반 사기업과 비교한다면 아무래도 많은 임금은 아닙니다. 그러나 다른 학계의 연구자들 급여와 비교하자면 충분히 경쟁력이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 이 월급은 누가 지불하나요. 존스홉킨스 대학이 주나요.
“고용주는 존스홉킨스 대학의 고등국제대학이지만 월급은 학교에서 주지 않아요. 모든 급여는 재단에서 줍니다.”
— 구체적으로 어떤 재단인가요.
“크게 네 개의 재단이 있습니다. 고등국제대학 예하 한미연구원은 한국 대외경제정책연구원(KIEP), 카네기재단(Carnegie Corporation), 플라우셰어스기금(Ploughshares Fund), 맥아더재단(Mac Arthur Foundation)으로부터 자금을 지원받고 있습니다.”
한국 대외경제정책연구원은 우리 정부의 국무총리 직속 연구기관이다. 즉 우리 정부는 38노스의 대북연구 작업에 적극 기여하고 있는 셈이다. 기자는 한국 대외경제정책연구원에 연락해 38노스에 지원하는 예산 규모를 확인해 봤다. 임지운 예산 담당자에 따르면 대외경제정책연구원은 2006년 노무현 정부 때부터 지원을 했다고 한다. 책정된 예산의 규모는 기재부 등과 논의하고 지원내역을 검토하기 때문에 매년 그 액수가 다르다고 했다. 정확한 지원액은 보안상 공개하지 않기로 한다.
— 처음에 북한이 활발한 활동을 할 경우 인공위성 사진을 여러 차례 구매한다고 하셨는데 이럴 경우 예산이 충분한가요.
“예전에는 매우 제한적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재단의 지원으로 상황이 나아진 편입니다.”
— 이런 재단의 지원은 어떻게 받게 됐나요.
“제가 직접 각 재단에 연락해서 38노스를 도와달라고 호소했습니다.”
38노스 직원들 대부분이 한국과 인연 있어
▲38노스 직원의 급여와 운영비는 재단에서 지불하지만, 직원들의 고용주는 존스홉킨스 대학이다. 복지나 보험 적용 내용 등은 존스홉킨스 소속 직원들과 같다.
— 직접 마케팅까지 하신 셈이네요.
“맞습니다. 그래서 힘이 많이 듭니다. 지금은 예산을 지원받고 있어서 나은 편이지만, 초창기에는 예산 부족으로 어려움이 많았어요. 각 재단에 저희가 어떤 일을 하는지 설명하고 지원받아야 할 당위성 등을 전부 설명했습니다.”
— 다시 한번 짚어 보겠습니다. 직원 월급과 운영비는 재단이 지불한다. 그런데 소속은 존스홉킨스 대학이다. 그러면 직원들의 고용계약서는 어떻게 씁니까. 돈을 주는 주체와 고용을 한 주체가 서로 다른데 말이죠.
“고용주는 존스홉킨스 대학이 됩니다. 따라서 직원들의 복리후생은 존스홉킨스 대학의 것을 따릅니다. 다른 존스홉킨스 소속 직원들과 복지나 보험 적용 내용은 똑같습니다. 다만 월급만 재단에서 주는 것입니다.”
—그럼 직원고용에 학교가 개입하나요.
“학교는 개입하지 않습니다. 모든 고용은 38노스가 직접 추진합니다. 저희들이 필요 시 직원을 고용하고 면접 등의 절차를 거쳐 선발합니다.”
— 처음에 말씀해 주셨지만 이야기를 할수록 38노스의 상주 직원이 정확히 몇 명인지 궁금한데요.
“정확히 상근직원처럼 일하는 직원의 수만 센다면 그 수가 매우 적습니다. 처음에 설명한 대로 3명만이 38노스만의 일을 합니다. 그러나 그중에서도 조엘 위트는 항시 사무실에 있는 게 아니고 여타 업무도 맡아 봅니다. 이 때문에 사실상 저(제니 타운)와 미셸 계, 두 명이 상주하며 일하는 셈이죠.
그리고 한미연구원이 고용한 인턴의 수도 총 6명(학기중)에서 10명(방학중)이지만 이 모든 인턴이 전부 38노스 일을 한다고 볼 수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38노스 업무만을 위해 일하지 않기 때문이죠. 38노스는 다시 한번 말하지만 한미연구원의 하나의 프로젝트입니다. 인턴의 경우도 주로 대학교 재학생들을 뽑기 때문에 방학이 되면 인원수가 늘어나고 학기 중에는 그 수가 6명 정도로 줄어듭니다. 지금까지 최대 인턴 수는 15명이었습니다. 따라서 38노스의 실제 업무는 2명 플러스 알파라고 보면 됩니다.”
— 그럼 한미연구원의 정직원은 몇명인가요.
“38노스의 3명을 포함해 총 9명입니다. 그리고 여기에 인턴 6명 정도입니다.”
38노스는 기관이 아니고 한미연구원 산하의 프로젝트이기 때문에 타운 대표에게 38노스라는 범주로 구분지어 질문하면 정확한 인원수를 측정하는 데 어려워했다. 38노스가 포함된 한미연구원 전체 직원의 수는 인턴을 포함해 15명이다.
— 38노스 프로젝트에 관여하고 있는 사람들은 대부분 한국계이거나 한국과 관련된 사람들인가요. 가령 재미교포이거나, 한국인과 결혼을 했거나 하는 식으로 말이죠.
“전체적으로 한국계(Korean-American)가 많은 편입니다. 저의 경우는 한국인 입양아로 출생은 부산입니다. 함께 일하는 미셸 계 씨는 재미교포 2세입니다. 그 외에 어떤 사람은 한국에서 영어강사로 일한 전력이 있는 경우도 있습니다. 인턴들도 대체로 한국계이거나 한국에 관심이 있는 학생들이 많은 편입니다. 물론 전부 한국과 연관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저희의 재무를 담당하는 사람은 동양계가 아닌 미국인으로 한국과는 아무 연관이 없어요.”
그와의 인터뷰 말미에 국제정세와 관련된 이야기들을 나눴다. 그는 한국의 4·13 총선 이후 한국의 정세, 차기 대권주자 등에 관심이 많아 보였다. 그러면서 미국의 대선 결과가 미칠 한반도의 영향에 대해서도 대화를 했다.
— 미국에서는 트럼프가 유일한 공화당 주자로 남게 됐는데, 이대로라면 트럼프가 당선될 수도 있을까요.
“트럼프가 처음 대권후보로 출마한다고 할 때만 해도 여기(공화당 단일후보)까지 올 줄은 아무도 몰랐습니다. 정말 믿기지 않는 상황입니다. 그를 지지하는 미국민들이 그만큼 많다는 반증이라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트럼프와 문재인 집권하면 한미韓美동맹 약화된다
— 만약 그가 당선된다면 한국에는 어떤 영향을 미칠까요.
“아마도 북한의 입장에서는 상당히 좋은(?) 기회로 작용할 것입니다. 주한미군의 철수와 북한의 핵보유 방치 등 좋지 못한 국면으로 들어갈 것입니다. 남한이 핵을 가지는 것도 내버려둘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중동문제에도 심각한 악영향을 미칠 겁니다. 트럼프는 외교(foreign policy)를 모두 망칠 것이고, 미국의 국제적 지위를 무너뜨릴 것입니다.”
— 야권의 유력한 대권후보인 더불어민주당의 문재인 전 대표를 어떻게 생각하나요.
“한국 여당인 새누리당에서는 지금 마땅한 대권후보가 없어 보입니다. 야당에는 문재인 전 대표, 안철수 국민의당 상임공동대표, 박원순 서울시장 등 다양한 후보가 거론되고 있어요. 아마도 이 때문에 한국에서 반기문 대권론이 계속 나오는 것 같습니다. 문재인 전 대표가 차기 대통령으로 당선된다면 아마도 북한에는 이득이 될 것 같습니다. 국가 안보적인 측면으로 보았을 때, 과거 두 정부(노무현, 김대중)와 유사한 구조로 북한을 도와줄 것입니다. 여기에 미국이 트럼프를 대통령으로 뽑게 된다면 북한은 막강한 군사력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 한국의 안보 기조가 미국과 달리 정권이 바뀌면 그 방향도 크게 바뀌는 구조를 띠기 때문입니다.”
— 그럼 북한이 남한을 공격할까요. 전쟁이 날까요.
“공격이나 전쟁이 발생하지는 않을 것이지만 분명한 것은 북한의 핵무기와 미사일 등의 무장량(arsenal)이 늘어나 지금보다 강해질 것입니다.”
— 목줄이 풀린 개가 ‘으르렁’거리는 것만으로 만족할까요. 집을 뛰쳐나와 사람을 물지 않겠습니까.
“트럼프가 된다고 해도 아직까지 전쟁으로 번질 만한 공격 가능성은 없어 보입니다. 현재로선 정확한 예측이 어려운 것이 트럼프가 당선 이후 꾸릴 외교팀에 누가 들어갈지를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확실한 것은 지금보다 한·미·일동맹을 비롯한 미국의 동맹국들과의 관계가 악화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 결국 트럼프의 외교팀이 중요하다는 말씀이군요. 그럼 트럼프가 지금 미국이 실천 중인 ‘CVID’(완전하고 검증가능하며 돌이킬 수 없는 핵의 폐기) 대북정책 기조를 이어 나갈까요.
“지금으로선 예측이 어렵습니다(hard to say).”
이번에는 역으로 제니 타운 공동대표가 기자에게 미국의 대권후보 중 누구를 지지하냐고 물었다.
“미국의 대권후보 중 누구를 지지하시나요?”
— (기자)제 개인적인 이유를 떠나서 아무래도 한국의 입장에서는 주한미군 철수를 거론하는 트럼프를 지지할 이유는 없어 보입니다. 그러니 당연히 남아 있는 후보인 힐러리를 지지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샌더스는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 샌더스는 정치적 스탠스가 사회주의자(socialist)로 알려져, 미국 대기업들에 세금을 꽤 물릴 것 같더군요. 그리고 샌더스는 힐러리와 비교했을 때 그의 외교정책이 어떤지 별로 알려진 게 없는 것 같습니다. 힐러리는 최소한 과거 정부에서 일하면서 보여줬던 외교 스타일로 미루어 볼 때 지금과 비슷하거나 강한 대북제재를 지지할 가능성이 짙어 보입니다.
제니 타운 공동대표의 말대로 국내 여권에서는 경쟁력 있는 대권후보가 없다는 딜레마에 봉착해 있다. 새누리당에는 조속히 경쟁력 있는 후보를 찾는 숙제가 던져진 셈이다. 그는 김무성 전 새누리당 대표에 대해선 아무 말을 하지 않았다. 인터뷰를 마치고 그에게 기사에 싣기 위한 사진을 찍자고 요청했다. 찍고 난 사진을 보여주자 “내가 이거보다 더 아름다울 수는 없지요. 사진에 보이는 게 내 모습인 걸요”라며 농을 던졌다.⊙
글 | 김동연 월간조선 기자/ 자동차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