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6/ 정치분야1/ 강원택 정치학회장 - 문국진(文國鎭) 대한법의학회 명예회장
사람들6/ 정치분야1/
■정치분야
□강원택 차기 정치학회장①②
2015.07.21 내각제 공론화
“내각제였으면 애초에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죠. 정당이 지배하는 내각제에서는 당연히 당청 갈등이 벌어질 가능성이 제로입니다.”
▲강원택 서울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김연정 조선일보 객원기자
강원택(54) 서울대 교수(정치학)는 최근 정치권을 뒤흔든 대통령(박근혜)과 여당 원내대표(유승민)와의 갈등을 원천적으로 풀 해법으로 내각제를 말했다. 그는 지난 7월 7일 전화 인터뷰에서 “그동안 내각제에 대해 유보적인 입장이었지만 최근에 입장이 달라졌다”며 “내각제의 필요성에 대해 나와 비슷한 고민을 하는 사람들이 많아진 걸로 알고 있다”고 했다. 김대중 조선일보 고문도 지난 7월 7일자 칼럼에서 ‘대통령제, 수명 다했다’며 내각제를 통한 협치(協治)를 주장했다. 강 교수는 “대한민국이 왜 이제 내각제로 가야 하는지 그 이유와 논리를 담은 책을 집필 중에 있는데 7월 중 원고를 마무리한다”며 내각제 공론화에 앞장설 용의가 있음을 밝혔다. 책 제목은 ‘대한민국과 내각제, 87년 체제를 넘어서’(가제)라고 한다. 강 교수는 2016년부터 임기가 시작되는 한국정치학회장에 선출된 국내의 대표적인 정치학자로, 여야 각 정당에서 주최하는 당내 세미나의 단골 연사이기도 하다.
강 교수는 지난 7월 8일 유승민 원내대표의 사퇴로 일단락된 당청 갈등과 관련, 일단 박근혜 정권에 와서 당정 협의가 원만히 이뤄지지 않고 있다는 사실부터 지적했다. 그에 따르면, 청와대가 국정을 일방적으로 주도하려는 모습은 한국의 전통적인 당정 관계와도 맞지 않는다는 지적이다. “3공화국 이후 국정 운영 스타일은 당정 간 합의를 기반으로 했습니다. 청와대가 일방적으로 명령하고 당이 거수기처럼 따라가는 스타일이 아니라 당정 간에 협의를 하면서 문제를 풀어나갔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이게 제대로 작동하지 않고 있습니다.”
강 교수는 대통령이 여당과의 소통에도 문제가 발생하는 상황에서, 대통령이 야당의 협조까지 이끌어내며 국정을 이끄는 미국식 대통령제를 기대하는 것은 힘들다고 지적했다. 특히 한국은 제헌헌법부터 순수한 형태의 대통령제와는 거리가 있었다는 사실을 상기시켰다. “한국 제헌헌법은 당초 내각제를 지향했는데 이승만 대통령이 대통령제를 고집하면서 변형됐습니다. 내각제적 요소가 가미된 혼합형이 됐습니다. 국무총리라는 독특한 제도가 단적인 예죠. 출발부터 미국적 대통령제에 대한 고민이 없었던 셈입니다. 미국식 대통령제의 가장 중요한 정신인 입법부·행정부·사법부 간의 견제와 균형도 나중에 독재자가 생기면서 강조된 것이지 당초 우리의 고민은 아니었습니다.”
강 교수는 “미국의 경우 주정부에 권한이 많이 가 있어 대통령이 실제 국민들의 삶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치는 경우는 한국보다 훨씬 적은 반면 한국은 무슨 사고만 터져도 대통령한테 화살이 다 돌아간다”며 “대통령의 영향력과 권한이 그렇게 큰데도 의회와의 불화로 제도가 원활히 돌아가지 못한다면 그 제도 자체를 다시 생각해 봐야 한다”고 했다.
강 교수에 따르면, 한국의 대통령제는 의회 운영 방식에서도 미국과는 다르다. 미국은 승자독식에 따라 국회의 모든 상임위원장을 다수당이 독식하지만, 한국은 여야 합의라는 관행에 따라 상임위원장직을 야당에도 배분한다. 거의 야당 몫으로 굳어진 법제사법위원회와 교육위원회가 대표적이다. “지금의 여야 합의제는 ‘87년 체제’의 산물입니다. 당시 여소야대 국회가 탄생하면서 표로 하면 여당이 밀리게 되니까 여야 합의 정신을 내세운 겁니다. 이것이 뿌리 깊은 관행이 되면서 한국 국회는 다수결제가 아닌 합의제로 운영돼 왔습니다. 이것을 극한으로 밀고나간 게 지금 문제가 되고 있는 국회선진화법이라 할 수 있습니다. 대통령의 권한이 너무 강하니까 그걸 견제한다는 차원에서 국회가 이런 장치를 마련한 측면도 있죠. 이런 합의제하에서는 책임정치도 구현되지 않을 뿐 아니라 야합이라는 비판에서 보듯 정책이 정치적으로 왜곡되는 현상이 발생합니다. 다수결제와 다수당 집권이 보장되는 내각제하에서는 이런 문제가 정상화될 수 있습니다.”
<①편에서 계속>
강 교수는 지금 내각제를 고민할 수밖에 없는 가장 큰 이유가 정책의 연속성이라고 강조했다. 5년 단임대통령제하에서는 장기 국가 과제가 제대로 추진되기 힘든 현실이 내각제를 고민하게 만들었다는 얘기다. “여야 정권교체는 말할 것도 없지만 이명박-박근혜 대통령으로 이어지는 사실상 같은 당으로의 정권교체에서도 정책이 단절됩니다. 대표적으로 이명박 정권에서 강조되던 ‘녹색(green)’은 그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박근혜 정권에서는 아예 실종돼 버렸습니다. 통일 같은 중요 국가 과제가 연속성을 갖고 추진되기 힘든 구조죠. 내각제의 경우 총리는 자주 바뀔 수 있지만 같은 당이 계속 집권할 경우 정책의 연속성은 보장될 수 있습니다.”
강 교수는 “정책 방향이 옳든 그르든 이명박-박근혜 정권이 같은 정책을 지속적으로 추진했다면 한국 사회가 바뀌었을 것”이라면서 “하지만 지금처럼 정책의 단절이 계속되면 한국 사회는 항상 제자리걸음만 하면서 진정한 변화와 발전은 이루기 힘들다. 관료들도 정권이 바뀌기만 기다리며 움직이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강 교수는 특히 지난 대선을 치르면서 내각제에 대한 고민이 깊어졌다고 한다. 한국 사회가 사람을 제대로 키우지 못하는 현실에서 1인 리더에 대한 의존도가 깊은 대통령제가 과연 제대로 작동할 수 있느냐는 고민을 했다는 것이다. “지난 대선 때 ‘안철수 현상’을 보면서 까딱하다가는 한국이 위험한 상황에 빠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이전의 정치 리더들은 치열한 성장과정을 통해 그 권위를 인정받은 지도자들입니다. 군인 출신들도 과거 군대라는 조직이 효율성에서 앞섰던 시절에는 그 권위를 인정받았죠. 하지만 지금은 이런 리더를 키워내지 못하는 상황입니다. 갑자기 튀어나온 인물이 대통령이 된 후 권위도 인정받지 못하고 국정 경험도 없다고 할 때 심각한 상황이 닥칠 수 있습니다.”
강 교수가 염두에 두는 내각제는 영국식 제도보다 총리에게 상대적으로 더욱 강한 권한을 주는 독일식 내각제이다. 독일식 내각제의 경우는 건설적 불신임이 특징이다. 즉 총리를 불신임하기 위해서는 의회에서 재적 과반수의 동의로 후임자를 먼저 선출해야 한다. 아데나워부터 메르켈까지 총리들이 모두 7년 이상 재임하는 독일에선 이 건설적 불신임 장치를 통해 내각의 안정적 운영을 보장하고 있다. “독일의 경우 의회 한쪽은 극우정당이 있는 반면 또 다른 반대편에는 공산당이 있습니다. 이들이 내각을 무너뜨리는 데는 합의할 수 있지만 후임 총리를 합의하기는 어렵습니다. 때문에 불신임을 남발하고 반대만을 위한 반대가 어려운 것이죠. 한국이 만약 내각제를 실행한다면 건설적 불신임에 더해 내각 구성 1년 안에는 불신임을 할 수 없다는 보조적인 안전 장치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강 교수는 한국이 내각제로 가기 위한 선결조건으로 정당개혁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지금처럼 파행과 갈등을 빚는 공천제도와 파벌주의, 동원식 당원제로는 내각제를 소화할 만한 안정적인 선진정당이 자리 잡기 힘들다는 것이다. 강 교수는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선거제도의 개혁이 급선무라고 주장했다. “지금 한국의 정당들은 독점적 지역주의를 기반으로 별다른 경쟁을 하지 않습니다. 이를 타파하기 위해서는 중대선거구제로 가야 합니다. 독점적인 지역기반이 사라져 정당들끼리 진정한 경쟁을 시작하면 공천제도 등도 바람직하게 바뀔 수 있습니다.”
강 교수는 “내각제에 대해서는 전문가들 사이에서도 많은 비판이 있는 걸 알고 있고 개헌 자체를 당리당략으로 터부시하는 분위기가 있는 것도 사실”이라며 “하지만 내각제 가능성을 그냥 덮어버릴 게 아니라 이제는 공론의 장으로 끌고 나와 제대로 한번 논의해 봤으면 좋겠다”고 했다.
정장렬 주간조선 기자
□남재준 원장
2016-12-19 親中 노선 반대하고 최순실 그룹과 충돌해 경질된 것”
구해우 미래전략연구원 이사장·전 국가정보원 북한담당기획관
▲15일 서울 종로구 내수동 미래전략연구원 사무실에서 만난 구해우 이사장은 “북핵 문제를 해결하고 평화통일 전략을 실행하기 위한 핵심적인 선결 조건이 확고한 한미동맹”이라며 “박근혜 정부의 비선 그룹이 중국의 지원을 통해 북한을 변화시켜 대박 통일을 이루겠다는 주관적 바람에 기인해 한미동맹의 기초를 흔들어 놓은 건 심각한 과오”라고 평가했다. 김재명 기자 base@donga.com
나라의 존립을 좌우하는 외교안보 정책에도 비선 그룹이 관여했다는 얘기들이 나온다. 현 정부의 대북정책을 주도했던 남재준 초대 국가정보원장이 비선 그룹을 조사하다가 경질됐다고 세계일보가 15일 보도했다. 신동아 12월호는 익명의 취재원을 인용해 “대북정책은 정호성(전 청와대 제1부속비서관)이 다 했다”고 폭로했다. 사실 확인을 위해 남 전 원장에게 여러 차례 전화했으나 받지 않았다.
현 정부가 출범한 해인 2013년 5월 1일부터 이듬해 1월 7일까지 국정원 1차장(해외 및 북한 담당) 산하 북한담당기획관(1급)을 지낸 구해우 미래전략연구원 이사장(52)은 “국정원직원법상 구체적인 정보를 밝히긴 어렵다. 하지만 대북 및 외교정책에 정윤회와 정호성이 상당 부분 개입한 것은 맞다”고 증언했다. 그는 박근혜 정부 외교안보 정책의 가장 큰 문제로 친중(親中) 노선을 지목하면서 “도널드 트럼프라는 역대 최강의 ‘마초형’ 미국 대통령 당선인이 등장한 상황에서 친중 정책이 대가를 치르게 될까 봐 걱정”이라고 말했다.
그는 고려대 법대 재학 시절 주사파 리더로 주체사상을 공부하면서 북한과 인연을 맺었다. 국가안전기획부(현 국정원)의 수배를 받던 사람이 국정원 1급 공무원이 된 것이다. 김대중 정부 시절이던 2000년 9월∼2002년 1월 SK텔레콤에서 남북경협 담당 상무를 지냈다. 고려대에서 북한 개혁·개방을 주제로 법학 박사 학위를 받았고, 2000년 최장집 고려대 명예교수와 박세일, 윤영관 서울대 명예교수를 도와 외교안보 싱크탱크인 미래전략연구원을 만들어 16년째 운영하고 있다.
“대북 정책에 정윤회 정호성 관여”
―국정원에 있을 때 최순실의 존재를 알고 있었나.
“당시 최순실은 심부름하는 집사 비슷한 역할이었고 대북이나 외교안보 정책에 관여한 건 정윤회, 그리고 문고리 3인방 중에선 정호성이었다.”
정윤회는 박근혜 대통령이 국회의원이던 시절 비서실장으로 보인상고를 졸업하고 경희대에서 관광경영학 석사 학위를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정호성은 경기고와 고려대 노어노문학과를 졸업했고 고려대 정치학 석사다. 박 대통령의 국회의원 시절엔 정무기획 담당을 했다.
―2014년 3월 독일 드레스덴 연설문은 최순실이 고쳤다던데….
“연설문에 코멘트 한 정도일 것이다. 최순실은 2014년 말부터 분탕질한 거고 분야도 문화 체육 분야에 제한돼 있다.”
―‘통일은 대박’이라든가, 드레스덴 구상도 정윤회와 정호성의 아이디어였나.
“(즉답을 피한 채) 국방장관, 외교장관, 안보실장 모두 단 한 번도 자기 소신을 갖고 정책 결정을 하지 않았다. 모두들 심부름꾼 역할만 했다. 자기 소신대로 논쟁하고 직언한 사람은 남재준 전 원장이 유일하다.”
―그러다가 경질된 건가.
“최순실 그룹과 충돌이 있었다. 정부가 미국보다 중국 쪽에 가까워지는 데 대해 반대했던 것도 경질 사유이다.”
-신동아 12월호에는 문고리 3인방이 세월호 문제 해결책을 마련하라고 국정원에 요구했는데 남 전 원장이 ‘국내 문제에는 개입할 수 없다’고 거절해 경질됐다고 나온다.
“그 부분은 잘 모른다.”
남 전 원장은 박근혜 정부의 대북정책을 상징하는 인물이었다. 국정원의 대선 개입 사건과 탈북 위장 서울시 공무원 간첩 사건 증거 조작 파문으로 정치적 타격을 입었을 때도 건재했던 그다. 하지만 2014년 세월호 참사 후 5월 김장수 당시 대통령국가안보실장과 함께 전격 경질됐다. 김 전 실장은 이후 주중 대사로 재기용됐지만 남 전 원장은 돌아오지 못했다.
“남 전 원장은 대통령에 이어 현 정부의 2인자였다. 남 전 원장 시절 국정원 차장급 인사는 대통령이 했지만 1급은 원장이 했다. 이후 이병기 전 원장, 이병호 원장 모두 1급 인사를 단 한 명도 못 했다. 모두 청와대가 좌지우지했다.”
“앞으로 친중 정책의 대가 치를 것”
―보수 정권임에도 왜 중국 쪽에 기울었나.
“정윤회나 정호성은 모두 세계 질서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르는 사람들이다. 정서적으로는 반미(反美)였던 것 같다. 김재규 전 중앙정보부장이 박 대통령과 최태민의 관계를 박정희 대통령에게 보고했고, 박정희 시해사건 당시 미국의 사주를 받았다는 말이 있었으니. 그리고 박 대통령을 통일국가의 여성 대통령으로 만들고자 했다. 중국이 도와주면 가능하지 않을까 ‘wishful thinking’(희망에 근거한 생각)을 한 거다.”
―남 전 원장도 2013년 12월 국정원 핵심 간부 송년회에서 ‘2015년 통일을 위해 다 같이 죽자(열심히 하자는 뜻)’고 했다던데, 사실인가.
“그렇다. 2013년 12월 장성택 숙청 후 다들 북한이 곧 붕괴될 것처럼 얘기했다. 난 장성택 숙청 후 오히려 북한 체제가 안정될 거라고 예상했다. 이런 견해차로 남 전 원장과 사이가 벌어졌다. 그 송년회에 1급 간부들이 다 참석했는데 난 부르지도 않았다. 2014년 1월 7일 사직서 쓰고 나왔다.”
―결과적으로는 구 이사장의 예상이 맞았지 않나.
“장성택은 야심이 큰 사람이었다. 2009년 5월 2차 북핵 실험 후 중국은 북핵과 북한 문제를 분리해 북핵 문제는 악화되지 않도록 관리하면서 북한 문제는 친중 정부를 세워 해결하자는 전략을 세웠다. 친중 세력을 만드는 데 대표적인 성공 사례가 장성택이다. 장성택의 세력이 커지자 북한의 주류인 노동당 서기실이 잘라낸 거다.”
―올 3월 세미나에서 북한은 노동당 서기실 중심의 집단지도 체제로 김정은은 형식적 수령에 불과하다는 주장을 했다. 일종의 ‘얼굴 마담’이라는 건데….
“2011년 12월 17일 김정일이 죽은 지 석 달도 되지 않은 2012년 2월 29일 북-미 간 2·29 합의가 이뤄졌다. 김정일이 죽은 직후 중요한 합의를 한 것이다. 이걸 김정은이 컨트롤했을까. 재벌권력도, 정치권력도 지켜봤지만 그렇게는 안 된다. 이미 시스템이 구축돼 있었던 거다. ”
―올 9월 뉴욕타임스가 김정은을 “합리적인 인물(too rational)”, 월스트리트저널이 “노련한 독재자(very skilled dictator)”라고 보도했는데 이는 집단지도 체제이기에 가능한 평가였을까.
“그렇다. 김정은 참수 작전을 통한 북한 정권 교체 시도는 실효성이 없다. 북한 붕괴론이나 북한 정권 교체론에 근거한 대북정책으론 안 된다. 합리적인 집단지도 체제가 가동한다는 걸 전제로 전략을 짜야 한다.”
“사드, 미국 보복은 두렵지 않나”
―북핵 위기의 해법으로 북한의 ‘레짐 체인지(regime change·정권 교체)’ 운운했는데, 우리가 레짐 체인지를 하게 됐다. 국정 공백기여서 안보 위기에 대한 우려가 크다.
“‘트럼프 쓰나미’가 몰아닥칠 것이다. 트럼프 시대를 이해하는 키워드는 경제적인 국익을 우선시하는 경제민족주의(economic nationalism)다. 트럼프는 이를 실행할 외교 수장(首長)으로 렉스 틸러슨 엑손모빌 최고경영자(CEO)를 지명했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17년 지기인 틸러슨의 등장이 뜻하는 또 다른 하나는 미국의 주요 경쟁국이 러시아에서 중국으로 옮겨가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트럼프를 거의 유일하게 지지하는 정통 외교 관료가 헨리 키신저 전 국무장관이라는 점은 흥미롭다. 그는 1979년 미중수교의 1등 공신이다. 당시는 소련을 견제하기 위해 중국과 손잡은 것이다. 그랬던 키신저가 이번엔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 러시아와 손을 잡을 수 있다는 태도로 바뀌었다.”
―사드(THAAD·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문제로 미중 사이에서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다.
“사드는 1차적으로 주한미군을 방어하기 위한 것이다. 미국 예산으로 자국민을 보호하겠다는데 이걸 반대한다. 트럼프는 미국우선주의자에 포퓰리스트(인기영합주의자)다. 주한미군을 철수할 수도 있는 거다. 사드는 외교적 이슈이기도 하다. 2013년 시진핑(習近平) 주석이 등장하면서 중국은 미국의 본토 접근을 막기 위해 반(反)접근지역거부(A2AD) 전략을 세웠는데 그 두 가지 축이 동북아의 사드와 남중국해 영유권이다. 사드를 배치하지 않으면 중국의 이 전략이 먹히고 한반도에서 미국의 영향력은 쇠퇴한다. 한미동맹이 와해되는 것이다. 트럼프는 신사가 아니다. 계산기 두드려보고 죽일 수도, 뒤통수를 칠 수도 있다.”
―사드가 배치되기도 전에 중국은 경제적 보복을 하고 있다.
“왜 중국만 보복을 할 거라고 생각하나. 사드 배치 안 하면 미국은 가만히 있을까. 미국은 중국처럼 보복한다고 말하고 하는 나라도 아니다. 최중경 전 지식경제부 장관이 지난번 인터뷰 때 ‘아베노믹스가 미국이 엔화 평가 절하를 눈감아줬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했다. 박근혜 정부의 친중 정책 덕분에 경제가 나아졌나. (미국과 가까웠던) 일본이 경제적으로는 더 좋았던 것 아닌가. 내년 대선에서도 사드가 핵심 이슈가 될 것이다. 야당에선 정권 교체를 기대하지만 총선은 심판이고, 대선은 미래를 보는 선거다. 박근혜 심판은 이미 했다. 탄핵안을 국회에서 가결했고, 정유라도 퇴학됐다. 사드 배치 반대는 한미동맹 깨자는 얘기인데 중국에 종속적인 국가로 가자고? 그런 야당을 박 대통령이 밉다고 해서 국민들이 찍어줄까?”
―트럼프 쓰나미에 어떻게 대응해야 하나.
“한미동맹을 토대로 정보, 경제, 안보적 자강(自强) 전략을 세워야 한다. 정보적 자강을 위해서는 국정원을 개혁해야 한다. 최순실 게이트는 국가의 정보 기능과 사정 기능이 마비돼 터진 거다. 정보기관이 보고하고 사정기관에서 잘라내야 국가 시스템이 작동하는데, 국정원이 몰랐을 리 없다. 그건 또 다른 죄다.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 정보기관 역량을 강화하면 엉뚱한 사람에게 밥상 차려주는 꼴이 된다. 개혁을 전제로 해야 한다. 미국처럼 해외·북한 파트와 국내 파트를 나눈 뒤 기소권과 공소유지권은 검찰이 갖고, 나머지 수사권은 미국의 연방수사국(FBI) 같은 조직이 갖도록 해야 한다. 지금 한반도는 트럼프, 푸틴, 시진핑, 아베 신조 등 역대급 마초들에게 둘러싸여 있다. 죽어 있다시피 한 정보수집 기능부터 살려내지 않으면 언제 팔다리가 잘려 나갈지 모른다.”
이진영 기자 colee@donga.com
□김경재 대통령 홍보특보
2015-03-17 “노무현은 마키아벨리스트 혹은 정치적 포퓰리스트일 뿐”
지난 2월 27일 단행된 청와대 인사의 관심 포인트는 김경재(73) 홍보특보였다. 이병기 신임 비서실장이야 워낙 박근혜 대통령의 신임이 두터운 사람이었으니 새삼스러울 게 없었다. 일반의 관심은 30년 넘게 ‘DJ맨’이었던 김경재 홍보특보에 더 모아졌다.
지난 3월 3일 오후 서울 종로구 정부종합청사 창성동별관 5층 사무실에서 김경재 특보와 마주앉았다. 벽면에는 박근혜 대통령의 사진이 걸려 있었다.
인터뷰를 막 시작하려는데 김 특보의 휴대폰에서 메시지가 왔다는 신호음이 울렸다. 김 특보가 “잠깐만요” 하며 메시지를 확인했다. 그러더니 씩 웃으며 “이 사람들 참 뭐 이런 걸…” 하며 “고향에 축하 현수막이 걸린 걸 찍어 보내왔네요”라며 보여줬다. 현수막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김경재 전 국회의원님의 청와대 특보 임명을 축하드립니다’. 김 특보의 고향은 전남 순천이다.
비서가 노크를 하더니 들어와 책상 위에 무언가를 놓고 나갔다. 흘깃 보니 축하 전보였다. 두툼한 걸로 봐서는 20여장이 넘어 보였다. 홍보특보에 임명된 지 사흘째인데도 우체국 축전이 쇄도하고 있었다.
2012년 대선 당시 김경재 특보는 과거 동교동에서 한솥밥을 먹던 한화갑·한광옥씨, 유신독재와 싸웠던 김중태씨 등과 함께 박근혜 후보 지지선언을 했다. 골수 DJ맨인 김경재 특보는 순천곡성에서 15~16대 국회의원을 지낸 바 있다. 김 특보는 13대 총선으로 정치에 입문하기 전 작가 박사월(朴思越)로 필명을 날린 사람이다. 전 3권으로 된 ‘김형욱 회고록’은 유신 말기 박정희 정권을 불편하게 만들었던 책이다.
“노무현 대통령 시절인 2004년 사실상 정계은퇴를 했었죠. 저는 글쟁이의 삶을 살고 싶었습니다. 지금도 글을 쓰는 작가를 가장 위대하게 생각합니다. 글로써 역사에 승부를 걸겠다고 생각했는데 주변 환경이 저를 가만두지 않았습니다.”
이번에 김 특보를 천거한 사람은 김기춘 전 비서실장이다. 김 특보는 “김기춘 실장이 나가면서 탕평 인사의 대표 작품으로 나를 추천한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김 특보의 기용을 놓고 여권 일각에서 “박정희 정권을 흔들어 놓았던 사람을 어떻게 측근으로 기용할 수 있느냐?” “김 특보는 결국 그쪽 비판은 한마디도 하지 않을 거다” 등의 이야기가 나오고 있다. 김 특보의 말이다.
“자꾸 나를 변절했다고 하는데 나는 한 번도 변절한 적이 없는 사람입니다. 나는 한 번도 좌파를 해본 일이 없어요. 정치적으로 나는 리버럴리스트입니다. 리버럴리스트는 자유민주주의 지지자입니다. 사회경제적으로는 ‘가지지 않은 자(the have-nots)’의 입장에 서는 것이지요. 한국 사회의 을(乙) 쪽 입장을 대변하는 겁니다. 그리고 문화예술에 있어선 보수적입니다. 추상화보다는 구상화를 좋아하고 클래식을 좋아합니다.”
그의 말을 더 들어보자.
“저는 민주당을 배신한 적이 결코 없어요. 친노세력이 민주당원인 저를 숙청했지요. 친노세력들이 ‘김경재 최고위원은 공천심사위에서 배제한다’는 말로 저를 배제한 겁니다. 내가 내 고향이 아니라도 좋으니 어디든 출마하게 해달라고 했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어요. 저는 DJ도 배신한 일이 없어요. 저는 친노세력이 열린우리당을 분당해 나갈 때 분당을 반대하면서 끝까지 민주당을 지킨 사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앞으로 홍보특보로서 DJ를 욕할 일도 없을 겁니다. 하지만 대북(對北) 문제에 관해서는 필요한 때 할 말은 할 겁니다.”
그는 1942년 전남 순천생으로 서울대 정치학과 60학번이다. 대학 시절 그는 민족주의비교연구회(민비연)를 만들었던 것으로 유명하다. 이종률, 박범진 등이 민비연 멤버였다. 4·19혁명 당시 대학 1학년이던 김경재·김중태·김지하·한광옥·한화갑 문리대 5인방이 지난 대선 당시 보수우파 박근혜 후보를 지지했다.
현재 대통령 비서실에서 김 특보만큼 다양한 경험을 한 사람은 없다. 뉴욕에서 15년간 망명생활을 하면서 알게 된 사업가 박지원(현 새정치민주연합 의원)을 DJ에게 처음 소개한 사람이 바로 그였다. 1997년 대선 때 새정치국민회의 홍보위원장을 맡아 DJ를 대통령으로 만드는 데 기여하기도 했다. 이병기 비서실장이 여러 면에서 유능하다는 평을 받고 있지만 국회의원 경험이 없다는 게 약점이다.
“15년2개월간 미국 뉴욕에서 망명생활을 하면서 저는 박정희를 비판하는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DJ 입장에서 박정희를 보면서도 (역사 발전 과정에서) ‘꼭 있어야 할 사람이구나’ 하는 생각을 했죠. 민주화가 먼저냐, 산업화가 먼저냐 논쟁에서 저는 세계사적 관점에서 판단했습니다. 뉴욕에 살면서 세계 여행을 정말 많이 다녔죠. 그런데 2차 대전 후 산업화 없이 민주화를 먼저 한 나라들은 하나같이 전부 실패했습니다. 박정희의 선택이 옳았던 겁니다. 그런데 산업화를 먼저 추진하다 보면 희생당하는 사람들이 나오게 마련입니다. 이렇게 희생된 사람들을 도외시해서는 안 되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처럼 산업화 세력과 민주화 세력이 갈갈이 찢겨진 사회가 없어요. 대한민국을 만든 산업화 세력과 민주화 세력이 화해하게 해야 합니다.”
2002년 12월 대선 당시 그는 노무현 당선의 일등공신이었다. 노 대통령이 취임 후 일생 처음으로 미국을 방문했을 때 민주당 의원으로 유일하게 대통령을 수행한 사람이 그였다. 그러나 열린우리당 창당에 반대하면서 친노세력과 다른 길을 가게 된다.
“노무현 대통령은 좌파가 아니라고 봅니다. 정치적 마키아벨리스트 혹은 정치적 포퓰리스트일 뿐이지요. 인기가 올라간다고 하면 뭐든지 하는 사람이지요. (노 대통령이) 엉뚱하게 딴 데로 가는데 어떻게 그를 따라가겠습니까? 지난 대선 당시 야당 후보로 문재인이 나오지 않았다면 어물어물하고 있었을 겁니다. 박근혜 후보를 지지함으로써 확실하게 보수 정치가로 자리매김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는 박근혜 정부가 지난 2년간 소통에 실패했다는 언론의 지적에 대해 이렇게 답한다.
“주변에 정치적 감각이 있는 분이 부족했다고 봅니다. 대통령 나름의 소통 방식이 있습니다. 그러나 국민은 거기에 플러스(plus) 알파를 원하는데 청와대에 이걸 해주는 사람이 부족했다고 봅니다.”
그는 연말정산 파동이 대표적으로 정권 홍보에 실패한 케이스라고 본다.
재선의원 출신인 그는 대통령 홍보특보로 어떤 역할을 하게 될까. 여권 일각에서는 그의 경륜, 상징성 등으로 미뤄 사실상 대통령의 ‘정치적 대변인’ 역할을 할 것으로 전망한다.
“대통령이 시키는 일은 경우에 따라서 개인적 데미지가 있더라도 선봉에 서서 전사로서 역할을 할 것입니다. 하지만 종편에 평론가로 나갈 때처럼 할 수는 없겠지요. 품격도 생각하고 언어도 절제해야 겠지요.(웃음) 저는 (상대방이) 기분 나쁘지 않게 하면서 고치게 하는 방법을 알고 있습니다.”
조성관 주간조선 편집위원
□고(故) 김계원(金桂元) 전 청와대 비서실장 생전 인터뷰
2017.10.27 월간조선
『김재규는 사형장으로 끌려 나가다 내 방을 한참 바라보았다』
『편집자注 : 박정희 전 대통령의 ‘마지막 비서실장’이자 박정희 정권의 마지막 장면인 1979년 ‘10ㆍ26’을 지켜본 김계원(金桂元•93) 전 청와대 비서실장이 12월 3일 노환으로 별세했다. 김 전 실장은 10ㆍ26 발생 직후 비서실장으로서 직분을 다했다는 입장이었으나 김재규 중앙정보부장과 내란 목적 살인 등을 공모했다는 혐의를 받아 1980년 군법 회의에서 사형을 선고 받았다. 이후 몇 차례 감형을 거쳐 1988년 특별사면을 받고 복권됐다. 1923년 경북 영주에서 태어난 김 전 실장은 연희전문학교와 군사영어학교(1기)를 졸업했다. 박정희 정부에서 육군 참모총장과 중앙정보부장, 대통령 비서실장 등을 지냈다. 《월간조선》은 김 실장을 두 차례 인터뷰했다(1987년 9월ㆍ2005년 12월). 김 전 실장은 궁정동 안가(安家)에서 벌어진 ‘10ㆍ26’의 그날 밤 상황을 두 번째 인터뷰에서 상세히 설명했다.《월간조선》2006년 2월호에 보도된 두번째 인터뷰 기사를 전재(全載)한다.
10·26 일주일 전 朴대통령이 실연(實演)을 했다. 식사 중에 朴대통령이 「金실장, 급하면 이렇게 하는 거야」라며 테이블 밑에 누워 나를 쳐다봤다』
■『(궁정동 시해 현장에서)내가 김재규의 손을 쳐서, 권총이 불발됐다. 그 권총은 예민해서 나뭇잎 하나라도 걸리면 사용할 수 없다. 전방 근무시절 그걸 알았다. 10·26 당시 내 말을 믿지 않아 진술하지 못했다』
■『내가 심문받던 옆방에서 김재규가 고문받는 소리, 아내의 목소리가 들렸다. 사형받으러 나가는 김재규가 천천히 사형장을 향해 걸어가다가 내 방을 바라봤다』
■『쿠데타를 할 군(軍)병력은 차지철이 보유하고 있었다. 전두환(全斗煥) 장군이 차지철의 심복이었고,(차지철이) 하나회다 뭐다 뒷돈을 대주었다. 김재규는 쿠데타할 능력이 없었다』
金桂元 前 청와대 비서실장
1923년 경북 영주 출생. 연희전문학교 졸업. 육군 참모총장(대장), 중앙정보부장, 駐대만총영사관 대사, 대통령비서실장 역임. 現 원효실업 회장.
꿈틀꿈틀 살아나는 궁정동 현장
김계원(金桂元·83) 前 청와대 비서실장은 1979년 10·26 당시 궁정동 만찬장에서 박정희(朴正熙) 대통령의 마지막을 지켜본 유일한 생존자다. 이후 무려 27년이 흘렀지만 10·26은 현대사의 모진 미스터리로 여전히 살아 있다. 2005년 1월 영화 「그때 그사람들」이 개봉된 뒤 10·26은 또다시 숱한 화제와 논란을 낳았고, 결국 송사(訟事)로 이어졌다. 朴대통령의 아들 지만(志晩)씨는 영화상영금지 가처분 신청을 내기도 했다.
金 前 실장은 1987년 9월16일 월간조선과 만나 朴대통령의 마지막 순간을 처음으로 증언했다. 그의 증언은 당시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그리고 18년이 흐른 뒤 다시 월간조선 기자와 만났다.
간혹 金 前 실장의 근황이 언론에 전해지기도 했다. 하지만 토막소식 정도였고 어느 것도 그가 겪은 고통과 부채의식을 담아 내진 못했다.
그는 한 해가 저무는 지난 12월28일 기자와 만나 작심하듯 기억을 다시 꺼냈다. 27년 전 궁정동 만찬장이 마치 살아난 듯 꿈틀꿈틀 재연됐다.
먼저 『「그때 그사람들」 영화를 봤냐』고 물었다. 金 前 실장은 『다 못 보고 15분 정도만 잠깐 봤다』며 『난 별로 흥미가 없어서 봐도… 옛날 회상을 하니 기분이 나빠서』라고 했다. 재차 『조금 본 인상은 어떠냐』고 묻자, 『아 글쎄, 조금 보다 그만뒀다니까』라고 손사래를 치며 불편한 속내를 드러냈다.
기자는 10·26이 일어나던 해의 대통령 면담일지 복사본을 金 前 실장에게 보여 주었다.
- 18년치 대통령 면담일지를 모두 가지고 있습니다. 그중 1979년 6월에서 9월까지의 자료를 가지고 왔습니다. 일지를 보면 대부분 車智澈(차지철) 당시 경호실장과 독대하는 시간이 많습니다. 또 배드민턴을 자주 치고 자유시간이 많은 것 같아요. 차지철이 金실장보다 먼저 대통령과 만나는 경우도 많습니다. 이유가 있나요.
『특별한 이유는 없어요. 경호 관계니까 차지철이 먼저 보고한 것이지요』
- 車실장이 보고할 때는 먼저 청와대 비서실의 허가를 받아야 하지 않나요.
『경호실장은 비서실의 허가가 없어도괜찮았어요』
대통령을 못 만나는 중정(中情)부장
▲金桂元 비서실장이 1978년 朴대통령에게서 임명장을 받고 있다. 金실장은 6년간의 駐대만 대사 생활로 인해 국내 정세에 매우 어두웠다. 이것이 비서실장으로서 金載圭와 車智澈의 권력투쟁을 조정·통제하지 못한 결정적인 요인이었다.
- 자료를 보면 대통령이 김재규(金載圭) 당시 정보부장과 만난 횟수보다 차지철을 만난 경우가 더 많아요.
『(김재규가 대통령과 만난 경우가) 별로 없죠. 자꾸 (차지철이) 제한을 하니…』
朴대통령에게 누가 먼저 보고하느냐는 것은 파워게임에서 누가 권력을 차지하느냐와 상관이 있다. 차지철이 김재규의 대통령 접근까지 가로막은 전횡은 결과적으로 10·26의 불행한 씨앗을 낳은 셈이다.
- 그건 이상합니다. 대통령의 접근권은 의전수석이나 비서실장에게 있는데, 정보부장이 경호실장 허가를 받아 대통령을 만나는 것은 이상하지 않나요.
『…대통령의 뜻이니…』
- 그게 바로 문제의 발단 아니었습니까.
『그래서 제가 「그렇게 해선 안 된다」고 했어요. 어떨 때는 오히려 제가 답답해서 김재규에게 「꼭 대통령을 만나고 싶으면 내게 찾아오라」고 말해 만남을 주선한 일도 있어요』
- 金실장이 정보부장으로 계실 때도 경호실장이 대통령과의 접견을 막았습니까.
金 前 실장은 육군참모총장을 역임한 뒤 1969년 10월부터 1970년 12월까지 중앙정보부장(제5대)을 맡았고, 1971년 2월 駐대만 대사로 임명됐다.
『아닙니다. 마음대로 대통령을 만났어요. 한밤중에 서슴없이 청와대에 들어갔습니다. 또 그래야 했고요. 그런데 비서실장을 맡고 보니 그렇지 않았어요. 김재규는 경호실장 허가 없이는 일과시간에도 대통령과 접견할 수 없었어요』
- 1979년 당시 대통령께서 지나치게 차지철에게 의존하려 한 것 같아요. 귀찮은 것은 모두 그에게 맡기고….
『朴대통령께서는 당시 저하고 잡담이나 하며 지내려고 하셨던 것 같아요. 제가 뭐 일을 잘합니까. 駐대만 대사로 6년이나 외국에 나갔다 왔는데 저를 비서실장으로 기용했어요. 저를 곁에 둔 것은 그냥 허물없이 얘기할 수 있는 친구를 원하셨던 것 같아요』
김재규(金載圭), 『그놈(차지철)이 자리가 없다고 나를 밀어 버렸다』
▲趙甲濟 기자가 보여주는 朴대통령 면담일지를 보며 당시를 기억해 내는 金桂元씨.
10월26일 오전 10시30분 청와대內 헬기장에서 석 대의 헬리콥터가 이륙한다. 헬기는 곧장 삽교천 방조제 준공식장으로 날아갔다. 앞서 김재규 정보부장은 차지철 경호실장에게 전화를 걸어 헬기에 동승할 수 있는지를 물었다. 하지만 차지철은 매몰차게 거절한다.
기분이 상한 김재규는 승용차로 직접 현장에 내려갔다. 김재규는 삽교천 방조제 준공식장에 가진 않았다. 대신 이날 새로 건립된 KBS 對北 방송 송신소로 향했다. 거기서 金실장과 조우한다.
- 김재규가 헬기를 못 탄 사실을 어떻게 아셨나요.
『제게 전화를 해왔어요. 「가려고 했는데 그놈이 자리가 없다고 밀어 버려서 전 자동차로 가야겠습니다」라고 말했어요』
- 「밀어 버렸다」는 말은 글자 그대로 떠밀어 냈다는 뜻인가요.
『아닙니다. 金부장은 청와대 헬기장에 오진 않았어요』
- 그럼 金부장은 삽교천 방조제 준공식장에 가지 못했겠군요.
『아닙니다. 가긴 갔어요. 삽교천엔 안가고 송신소에 갔어요. 그날 중앙정보부가 운영하는 對北 송신소 개소식이 함께 열렸기 때문입니다』
- 그 자리에서 김재규를 분명히 봤나요? 착각하신 게 아닙니까.
『아닙니다. 분명히 만났어요. (김재규의) 표정이 좋지 않았어요. 헬기에 못 탔으니까. 하지만 그와 대화를 나눌 상황은 아니었어요. 제가 朴대통령을 수행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 차지철은 당시 경호실장으로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고 있었는데, 김재규를 핍박해서 무엇을 얻으려 했을까요.
『글쎄요… 잘 모르겠지만… 차지철은 김재규나 저나 모든 사람들이 자기 밑에 꿇어 엎드리기를 기다렸던 것 같아요』
▲軍수뇌부와 함께 한 車智澈 경호실장. 앞줄 왼쪽부터 黃汀淵 해군참모총장, 周永福 공군참모총장, 車智澈 경호실장, 李世鎬 육군참모총장, 陳鍾埰 보안사령관.
『전두환(全斗煥)은 차지철의 심복이었다』
- 쿠데타할 생각은 없었다고 봅니까.
『글쎄… 있었죠.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저도 처음에는 김재규 하고 싸울 때 차지철이 (쿠데타를) 하지 않을까 생각했어요』
- 차지철이 쿠데타를 한다면 동원할 무력이라도 있었나요.
『될 겁니다』
- 우선 청와대 경호실과 30단이 있을 테고….
『그것 말고도 軍에 심복이 있었습니다. 全斗煥 장군도…. 「하나회」다 뭐다 뒤에서 돈 대준 것 아닙니까』
- 비서실장 입장에서 보면, 당시 全斗煥 보안사령관도 차지철 밑에 있다고 보신 겁니까.
『네, 왜냐면 경호실 차장이니 뭐니 차지철이 갖다 놓은 것 아닙니까』
- 차지철 밑에서 작전 차장을 한 게 노태우, 全斗煥, 김복동씨가 있었고 수경사령관도 차지철 사람이었습니까.
『그것은 모르겠습니다』
- 당시 하나회 존재를 아셨습니까.
『그땐 몰랐습니다. 제가 불행한 것이 비서실장 하기 직전에 6년간 駐대만 대사로 갔다 와서 국내 사정은 전혀 몰랐어요』
- 그 때문에 비서실장 자리를 고사하셨다지요.
『네, 못 하겠다고 하니 朴대통령이 「괜찮아. 내가 모든 것을 다 알아서 해줄 테니 걱정마라」 하시더군요』
- 재미있는 표현이네요. 비서실장이 모든 것을 알아서 해줘야지, 왜 대통령이 알아서 하겠다고 했을까요.
『軍 시절부터 朴대통령과 관계가 있으니… 제게 그런 말씀하실 수도 있죠』
- 朴대통령과 軍 시절 어떤 인연이 있나요.
『과거 朴대통령께서 보병으로 계셨는데 진급이 안 돼 소외되셨어요. 제가 미국 가서 포병학교 교육을 받고 오니 轉科(전과)를 하셨더군요. 그전부터 개인적으로 알고는 있었어요. 고향이 같으니까. 포병으로 오니 반갑다고 했어요』
- 군단 포병단장을 같이 하셨나요.
『아닙니다. 제가 선임이었습니다. 제가 포병감을 하고, 朴대통령은 군단 포병사령관을 하셨습니다』
- 사실상 朴대통령이 직속부하셨군요.
『직속은 아니지만 방계라고 할까요? 그리고 제가 포병학교 교장을 하고, 그 다음다음에 교장을 하셨습니다』
朴대통령이 宮井洞(궁정동) 나棟에 도착한 것은 오후 6시5분. 궁정동은 중앙정보부장 공관 옆에 있는 비밀 식당으로 몇 달 전에 지어진 새 건물이었다. 만찬장에는 직사각형 식탁이 있었다. 식탁 안쪽에 朴대통령이 혼자 앉았고 그 맞은편엔 김계원, 김재규가 착석했다. 차지철은 김재규의 왼쪽 측면에 조금 떨어져 앉았다.
대화가 부마사태, 金泳三씨 문제, YH사건 등이 나오면서 분위기는 가라앉았다. 김계원은 분위기를 바꿔 보려고 TV를 켜는 등 애를 썼지만 되레 험악해졌다.
『중정부장과 경호실장을 바꾸려고 했다』
▲1952년 포병학교장 시절의 金桂元(가운데).
- 당시 상황을 보면 朴대통령이 일방적으로 김재규를 나무라는 자리였습니다. 너무하다는 느낌이 들 정도입니다. 조금 이상하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나요.
『그래서 분위기를 바꾸려고 몇 번이나 시도했는데 안 돼요. 그래서 TV를 틀라고 했어요. 「삽교천 행사 뉴스가 나올 겁니다」라고 대통령께 말씀드렸어요』
- 뉴스를 보고서도 또 이야기가 그 쪽으로 흘렀지요. 왜 그런가요. 朴대통령이 화가 많이 났습니까.
『차지철이 자꾸만 바람을 넣었어요. 왜냐하면 그런 이야기가 계속돼야만 자기가 유리한 방향으로 이끌 수 있으니…』
- 따지고 보면 죽은 자리를 朴대통령과 차지철이 만든 셈입니다. 계속 김재규가 울화통을 터뜨리게 만들었나요.
『네, 사실은 그런 이야기를 할 때가 아닌데… 낮에만 해도 (朴대통령의) 기분이 좋으셨는데…』
- 당시 법무장관이던 金致烈(김치열)씨 이야기를 잠깐 할게요. 10·26이 있기 며칠 전 그가 朴대통령에게 두 번이나 불려갔다고 해요. 대통령이 시국 얘기를 하면서 자기를 정보부장으로 내정하려 한다는 느낌을 받았답니다. 그래서 10월26일 발령이 날 줄 알고 기다리고 있었다고 하더군요. 김재규는 자신이 물러날 줄 알고 그날 「결행」을 한 것은 아닐까요? 당시 실장께서 김재규에게 人事(인사) 이야기를 하셨나요.
『그런 얘기를 하진 않았습니다. 내심 정보부장과 경호실장 자리를 바꾸려고 생각한 적은 있습니다. 기회가 오면 朴대통령에게 건의하려 했지요. 하지만 기회가 없었어요』
- 김재규에게 혹시 인사가 날 거라고 정보를 준 사람은 없었을까요.
『글쎄요. 절대 그런(인사) 이야기를 잘 안 하니까요』
- 인사에 대한 느낌은 받았나요.
『그런지도 모르겠습니다』
- 김재규도 그 자리가 마지막이란 사실을 알았을 것 같아요. 그래서 시해할 생각을 했을 것 같습니다.
『저는 전혀 느끼지 못했어요. 김재규가 대통령 시해나 쿠데타 계획이 있었다면 저에게 귀띔 정도는 했을 거라고 믿어요. 김재규, 前 국방장관 李鍾贊(이종찬·1916~1983), 朴대통령, 저 이렇게는 정말 가까운 사이입니다』
- 5·16 이전의 말씀이지요.
『네, 심지어 여자문제에 대해서도 서로 얘기할 정도예요. 김재규가 쿠데타를 모의했다면 먼저 제게 귀띔했을 겁니다』
만찬석상에서 시국수습 방안을 두고 朴대통령과 차지철에게 혼이 나자 김재규가 우발적으로 저질렀다는 것이 金 前 실장의 주장이다.
그는 『김재규가 그날 뭔가 달랐다면, 그 자리에 권총을 가져왔을 것입니다. 옆에 있는 건물도 아니고, 총을 가져오기 위해 계단을 오르내릴 필요가 있었을까요. 식당 2층 자신의 사무실에 얼마든지 총을 숨겨 놓을 수 있었을 텐데 뭐하러 허덕거리며 옆집에 갔을까요?』라고 했다.
김재규는 당시 만찬장을 빠져나와 50m를 걸어 인근 본관으로 갔다. 식당으로도 쓰이는 1층 회의실 문을 여니 정승화 총장과 김정섭 2차장보가 있었다. 잠시 대화를 나눈 김재규는 곧장 2층으로 올라가 자신의 책장 선반 뒤에 감추어 두었던 권총을 꺼내 바지 주머니 속에 넣었다.
『김재규는 자포자기 심정에서 朴대통령 사살』
- 시해할 생각이 있었다면 처음부터 권총을 지녔을 텐데, 도중에 권총을 가지러 간 게 이상하긴 해요.
『그렇지요. 처음에는 계획이 없었다고 봐요』
그날 저녁 7시40분쯤 김재규가 쏜 총탄은 차지철의 오른쪽 팔목을 꿰뚫었다. 차지철은 실내 화장실로 달아났다. 김재규는 다시 朴대통령을 겨냥한다. 총알은 朴대통령의 가슴에 꽂혔다.
- 朴대통령이 총에 맞은 뒤 차지철은 실내 화장실로 피신했습니다. 왜 김재규가 대통령에게 총을 쐈다고 생각하나요.
『김재규가 차지철을 쏜 순간, 「이젠 나는 죽었다. 이러나 저러나 차지철을 죽였으니 용서 못 받을 것이다」는 심정이었을 겁니다』
- 1탄과 2탄 사이에는 약간의 간격이 있습니다. 또 김재규가 차지철은 앉아서 쏘고 朴대통령은 서서 쐈습니다. 엉겁결에 차지철을 쐈는데, 朴대통령도 쏴야겠다고 생각했는지…. 시간차가 애매합니다. 어쨌든 김재규의 권총이 고장이 났습니다. 왜 불발이 됐나요.
『불발이 난 것은 제가 김재규의 손을 쳤기 때문입니다. 그 권총(독일제 월터PPK)은 예민해서 나뭇잎 하나라도 걸리면 사용할 수 없어요. 전방 근무 시절 경험이 있습니다. 권총이 나뭇잎에 걸려 불발이 나더라구요. 그래서 이 총은 테러용으로 못 쓰겠다고 생각했지요. 제가 쳤기 때문에 불발이 난 겁니다. 그런데 제 말을 믿질 않아 당시 말을 못 했어요』
- 朴대통령은 가슴에 총을 맞고 「난 괜찮아」라고 하셨는데, 같이 있던 두 명의 아가씨(심수봉·신재순)에게 피하라는 뜻이었나요.
『그것보다는 그런 상황에서도 여성들이 대통령을 보호하려고 하니, 「나를 너무 생각하지 말라」는 뜻으로 이해됩니다. 물론 당시에는 아무 생각도 없었지만 말입니다』
- 그때 朴대통령의 마지막 모습이 어땠나요. 보통사람 같으면 몸을 피하려고 했을 텐데, 가만히 계셨습니다.
『朴대통령께서 비스듬히 쓰러지셨는데 저는 식탁 밑으로 들어갔다고 생각했어요』
▲1975년 10월 영동-동해 고속도로 개통 테이프를 끊은 직후의 朴대통령.
「궁정동 피습」을 예감한 박정희(朴正熙)
당시 만찬장 테이블 밑은 日食집처럼 다리를 내려놓을 수 있을 정도로 깊게 파였다.
『10·26이 일어나기 일주일 전인가, 朴대통령이 제가 보는 데서 實演(실연)을 했어요. 식사 중에 朴대통령께서 「金실장, 급하면 이렇게 하는 거야」 하며 테이블 밑에 누워 저를 쳐다보셨어요』
- 그런데 막상 일이 나자 피신하지 않고 조용히 계시니… 이상하지 않나요.
『아니죠. 옆으로 누우셨지요』
- 어쨌든 피하진 않으셨잖아요. 사람은 본능적으로 무엇을 하게 돼 있거든요. 차지철은 도망갔고요. 朴대통령은 오히려 체념한 듯한 행동을 했어요.
『사실 朴대통령 스스로도 자기가 총에 맞았다고 느끼지 못하셨을 겁니다. 통증보다는 뭐랄까… 정신적 쇼크가 더 컸을 거예요』
김재규는 차지철과 朴대통령에게 치명상을 입힌 뒤 권총이 고장 나자 만찬장에서 뛰어나가 정보부 의전과장인 朴善浩(박선호)의 권총을 받아 다시 방 안으로 들어갔다. 김재규는 차지철이 문갑을 잡고 피하는 것을 발견하고, 그의 복부를 향해 권총을 쐈다. 그러고 나서 식탁 왼쪽으로 돌아 50cm 앞에서 「야수의 심정으로 정분을 끊고」 朴대통령의 머리를 쏘았다.
그러나 金실장은 김재규와 그의 부하들이 총질을 해대는 상황이었지만 아무런 대처를 하지 못했다.
- 金실장께서 비판받는 부분인데… 김재규가 총을 들고 들어왔을 때 문 밖에 있지 않았나요? 朴대통령 머리에 확인 사살할 당시 말입니다. 안에서 朴대통령을 보호해야 하는데, 밖에 계셨습니다.
『당시 朴善浩가 김재규에게 현관에서 총을 주는 것을 본 것 같아요』
- 덮쳐서 말릴 생각을 하지 않았나요.
『그때 대통령이 총에 맞았는지 잘 몰랐어요』
- 차지철을 쏜 뒤 朴대통령을 쏴 옆으로 쓰러지는 것을 보시지 않았나요.
『대통령이 쓰러진 것은 본 것 같아요. 그런데 대통령께서 (총에 맞아) 쓰러졌다기보다 식탁 밑으로 들어간 줄만 알았습니다』
- 아니 그것보다 김재규가 총을 들고 있어 겁이 나 들어갈 수 없었던 것 아닙니까.
『그것도 있죠…. 하지만 그것보다는 朴대통령이 총에 맞았을 것이라는 생각은 안 했어요』
金실장은 中情(중정) 요원이 모는 차의 뒷좌석에 朴대통령을 무릎 위에 비스듬히 누이고 국군 서울지구 병원으로 갔다. 1987년 그는 기자와 만나 이렇게 말했다.
< 朴대통령 체구가 아주 작고 가벼웠어요. 돌아가신 줄도 모르고 빨리 병원에 가서 살려야 한다는 생각만 했죠. 처음엔 좀 신음소리가 나는 것 같았어요. 그때 내 양복에 피가 많이 묻었는데 그것도 몰랐어요. 병원에 가서 얘기 들으니까 「이미 절명하셨습니다」 그래요>
- 朴대통령을 안고 가시다가 숨이 넘어가는 때를 기억합니까.
『몰랐어요』
- 살아 있다고 봤습니까.
『네』
- 두 분의 키가 비슷하시지요.
『네, 朴대통령과 제가 누가 크냐고 서로 물을 정도였습니다』
「육본(陸本)으로 오라」는 김재규 전화에 최규하(崔圭夏) 총리 벌떡 일어서 『갑시다』
- 朴대통령의 키는 164cm였어요.
『제가 162cm인데… 저보다 크셨네요』
- 10·26 당시 崔圭夏(최규하) 총리가 처음 청와대로 왔을 때, 「차지철과 김재규가 싸우다 김재규의 잘못된 총에 각하가 돌아가셨다」고 정확하게 말씀드렸나요.
『네, 그렇게 알았으니까요』
당시 朴대통령을 시해한 김재규는 범행현장을 떠나 육본 벙커를 향한다. 그때가 저녁 8시5분쯤이었다. 당시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은 朴대통령 시해 사실을 듣고 1군과 3군에 비상사태를 발령한 뒤 국방장관·합참의장·해군총장·공군총장·연합사 부사령관 등을 육군 벙커로 오도록 연락했다.
이런 상황에서 金실장은 육본으로부터 걸려온 김재규의 전화를 받았다.
- 崔총리와 몇몇 장관에게 육본으로 가자고 한 것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김재규가 육본을 장악하고 쿠데타를 모의하고 있다」는 의심이 가능한 게 아닙니까. 김재규가 金실장에게 전화로 육군 벙커로 오라고 했을 당시 崔총리는 어떻게 했나요.
『崔총리가 가만히 있다가 벌떡 일어나 「갑시다」고 했어요』
- 당시 崔총리의 판단이 중요한데, 왜냐면 김재규가 범인인 줄 알았는데 김재규가 벙커로 오라고 해서 가겠다는 것은 좀 문제 있는 것 아닙니까.
『그렇죠.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지요』
- 김재규가 朴대통령을 쏘아 죽였다는 것을 알았을 것 아닙니까.
『알았죠』
박근혜(朴槿惠), 『괜찮습니다. 어머니 때도 있었고… 말씀하시죠』
- 알았으니, 김재규가 육본에 갔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軍을 동원해 쿠데타를 했을 것이라고 볼 수 있지 않나요. 『저는 김재규가 그럴 만한 능력이 있었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육본에 갔다고 하더라도 軍을 장악하지는 못했을 거라고 봤어요. 또 내가 말하면 들을 것으로(쿠데타를 돌릴 것으로) 봤어요』
- 金실장께서 朴槿惠(박근혜)씨에게 朴대통령 시해를 전했을때 반응이 어땠나요.
『특별히 기억이 나진 않지만, 朴槿惠를 보니 눈물이 났어요. 그래서 말을 못하고 있으니 「괜찮습니다. 어머니 때도 있었고… 말씀하시죠」라고 했어요』
- 朴槿惠씨가 어느 정도 짐작했다는 뜻이네요.
『네』
金桂元 前 청와대 비서실장은 당시 朴대통령의 有故(유고)만 밝힌 채 사건의 진상에 대해 함구했다. 金실장은 崔총리에게 『국가안보를 위해 보안을 유지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밝힌 뒤 내각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사인을 말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金실장은 김재규에 협조했다는 혐의를 받았다.
그는 10월29일 연행된 뒤 구속돼 김재규의 공범으로 발표되었다. 1979년 12월20일 「김계원 피고인」은 계엄보통군법회의에서 김재규 등과 함께 사형선고를 받았다. 죄명은 내란목적 살인 및 내란 중요임무종사 미수죄였다.
1980년 5월24일 새벽 김재규가 형장으로 끌려가던 날 金실장은 그의 마지막 모습을 목격했다.
- 金실장에게 김재규가 깍듯하게 대했지요.
『네, 김재규가 사형당하는 날 제 방 쪽을 한참 봤어요』
- 그때 마지막 표정은 어땠나요.
『복도가 어두워 표정은 못 봤습니다. 제 방 위치를 아니까 천천히 걸으며 이쪽을 봤어요』
- 육군 구치소 안에서 만난 적은 없나요.
『없어요. 간수가 한 명씩 붙어 있었으니까요』
- 김재규가 사형 당하러 가는 것을 누구에게 들었나요.
『전날 제 담당 간수가 「내일 아침에 갈 겁니다」라고 그래요. 밤에 잠이 와요? 그렇게 있으니 새벽에 웅성웅성 거려요』
- 金실장은 그 당시 무기징역이 확정된 상태였습니까.
『사형에서 무기로 감형됐습니다』
- 사형선고 받은 뒤 얼마 만에 무기가 됐나요.
『나흘인가 닷새 뒤에 무기로 감형됐습니다. …사형수 상태로 며칠 있었죠』
- 감형될 것이라고 예상했나요.
『당시엔 제가 크리스천이니 기도만 했어요』
사형수(死刑囚) 생활
- 사형수의 느낌은 어떤가요.
『글쎄요. 당시 한 가지 생각뿐이었습니다. 「죽을 때 내 모습이 어떨까. 총알이 내 이마를 뚫을까, 가슴을 뚫을까」라고 생각했지요』
- 한국전쟁을 겪었으니, 죽음에 대한 공포가 적었을 텐데….
『마찬가지예요. 죽음에 대한 공포심은 누구나 똑같아요』
金실장은 김재규의 사형이 집행된 지 이틀 뒤 안양교도소로 이감됐으며, 1982년 5월1일 형집행정지로 풀려났다. 그는 옥중에서 어머니 李一順(이일순·당시 80세·1982년 1월8일 사망)씨의 부고를 접해야 했다.
- 조사를 받으실 때 고문을 당하셨나요.
『직접적인 고문은 없었고 잠을 재우지 않았어요. 잠이 들라치면 깨워요』
- 조사받을 때 김재규를 봤나요.
『못 봤어요. 다만 고문당하는 소리를 들었어요. 또 우리 집사람 목소리가 옆방에서 났어요. (그 소리를 들으니) 아주 괴로웠어요. 집사람을 고문한 것은 아니었지만…』
- 김재규 소리가 많이 났나요.
『네, 비명도 들리고』
- 그때 간이 좋지 않았다는데… 김재규가 간이 안 좋아 제대로 집무를 못 본 사실을 압니까.
『네, 그때 그런 얘기가 많았죠. 얼굴도 시커멓다 하고…』
- 김재규가 軍장교 시절 자동차 추락사고가 났을 때, 그를 업어서 병원까지 데려갔었죠. 그 이후 가까워졌지요.
『그렇죠. 그때부터 저를 은인으로 생각했어요』
1960년 金桂元 당시 소장이 육군대학 총장으로 부임하면서 부총장이던 김재규와 인연을 맺었다. 그 즈음 김재규의 지프차가 벼랑으로 굴러 떨어졌을 때 金桂元이 중상을 입은 그를 병원으로 옮겨 목숨을 구했다고 한다.
신민당 전당대회
- 1979년 5월30일 신민당 전당대회가 중요한데, 全大 전에는 김재규와 차지철 사이가 그렇게 나쁘지 않았다는 설이 있습니다. 全大를 계기로 둘 사이가 나빠지지 않았나요.
『비서실장으로 와 보니 둘 사이가 이미 나빠져 있었어요. 그래서 제가 두 사람 자리를 서로 바꾸는 게 어떻겠냐는 말을 했어요. 이미 청와대 비서실도 필요성을 느끼고 있었던 것 같아요』
- 신민당 全大에서 김재규의 對野(대야) 공작이 실패해 이철승씨 대신 金泳三씨가 총재로 당선됐어요. 그날 저녁 全大를 놓고 식사하면서 朴대통령이 신문지를 둘둘 말아 김재규 머리를 치면서 나무라셨다고 하던데… 확실하지는 않지만. 실은 차지철도 공작을 했죠.
『네, 제도 「朴대통령이 왜 저렇게 하실까」 하고 느꼈어요. 공작을 여러 사람에게 맡기니 혼선이 일었어요. 두 사람을 통하지 않고 朴대통령이 직접 하신 경우도 있습니다. 야당 정치인을 불러 (공작을) 지시했어요』
- 全大 이후 눈에 띄게 차지철이 김재규를 욕하고, 朴대통령도 김재규를 무능하다고 보는 것을 느꼈습니까.
『그렇게 느끼진 않았는데… 성격상 두 사람은 안 되겠다, 바꾸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 빨리 바꿨어야 했는데….
『이틀 늦은 것 같아요. 삽교천에 다녀오자마자 바로 했어야 했는데…. 청와대 의전수석인 최광수에게도 몇 번 이야기했어요. 「요 다음에 대통령께 보고할 때 나도 하겠지만 너도 건의 드려라. 둘이 바꾸는 게 좋겠다」고 했습니다. 朴대통령은 최광수를 믿고 좋아했어요』
박정희(朴正熙)와 카터의 감정 폭발
신민당 全大 한 달 뒤인 6월29일 카터 대통령이 訪韓(방한)한다. 카터가 도쿄에서 김포에 도착한 시각은 밤 9시가 훨씬 지나서였다. 밤에 남의 나라를 방문한 것도 결례인데 보안상을 이유로 도착시간조차 가르쳐 주지 않았다. 이 바람에 朴대통령은 미리 나와 한 시간을 기다려야 했다.
다음날인 6월30일 청와대에서 두 사람은 頂上회담을 했다. 그 자리에서 朴대통령은 국내 안보를 일방 강연하듯 쏟아 내며 카터를 무안스럽게 만들었다. 화가 난 카터는 옆자리에 앉은 밴스 美 국무장관에게 『이자가 2분 이내에 입을 닥치지 않으면 나는 이 방에서 나가 버리겠다」는 메모를 써 건네주기도 했다고 한다.
- 카터와 만났을 때 배석하셨죠.
『네. 朴대통령이 우리 실정을 오래 말씀하셨어요. 15분쯤 하셨나요?』
- 15분이면 통역시간과 합쳐서 30분 정도는 되겠네요.
『네, 「주한 미군철수는 안 된다」는 것이 주요 내용이었습니다』
- 인권문제에 대한 지적은 없었나요.
『별로 없었던 것 같아요』
- 朴대통령이 카터를 만날 때 많이 고민을 하시던가요.
『그런 것 같아요. 혼자 방에서 골똘히 생각하셨어요』
- 카터 대통령의 인상은 어땠나요.
『무뚝뚝하고… 두 분이 서로 잘 안 맞았어요』
- 「朴대통령 카터에게 엿 먹이는 구나」 하는 느낌을 받진 않으셨나요.
『그렇게는 안 느꼈고… 「자기 열성을 다해 카터를 설득시키려고 애쓰시는구나」하고 생각했어요. 朴대통령은 진지하게 이야기했습니다. 반박하는 식이 아니었고 이해시키려 하셨습니다』
- 그 자리에서 카터가 발언을 하지는 않았나요.
『별로 없었던 것 같아요. 굉장히 화가 난 것 같았어요』
- 자기 고집은 좋은데 손님을 불러 그렇게 하면 안 되지요.
『잘못된 거지요. 술술 부드럽게 해야되는데…』
- 우리 쪽에서 안 말렸나요.
『대통령이 그렇게 하실 줄 누가 알았나요』
- 그렇게 하려면 참모들하고 먼저 논의를 했을 텐데….
『통역을 맡았던 최광수가 말을 부드럽게 바꾸는 방법밖에 없었을 겁니다』
- 카터 등장 이후 미국이 주한미군과 인권문제로 압박해 오니 朴대통령이 꽁하고 벼르고 있지 않았나요? 마치 「너도 내 욕 많이 했으니 내가 할 이야기는 하겠다」는 식이 아니었나요.
『사실 카터도 잘못이에요. 남의 나라에 국빈으로 와서 비행장에 내려 軍 숙소로 바로 가는 사람이 어딨어요. 악수만 하고 바로 미군 숙소로 가버렸어요. 그런 불미스런 일이 어딨나요. 화가 더 났죠』
- 평소 朴대통령이 카터를 이야기할 때 「땅콩장사나 하던 사람」 정도로 얘기하지 않았나요.
『글쎄요. 하지만 과히 좋지 않게 생각 했어요』
- 朴대통령이 카터를 직설적으로 욕한 적이 있습니까.
『기억에 없는데… 뭐 있었을 겁니다. 회담을 마치고 본관 앞에 나가 보니 카터가 탄 리무진이 안 떠나요. 朴대통령과 제가 옆에서 기다리는데 당시 미국 대사 글라이스틴이 리무진에 탔다 내렸다를 반복해요. 한참 있어도 떠나지 않아요. 또 10m쯤 갔다가 다시 멈춰 서요.
의전비서에게 가서 알아보라고 하니 「카터와 글라이스틴이 이야기한다」는 정도만 얘기해요. 나중에 들으니 글라이스틴이 카터에게 욕을 얻어먹었던 것 같아요』
회담 후 카터는 리무진을 숙소 입구에 세워둔 채 차 안에서 글라이스틴 대사에게 회담 진행과정에 대한 불만을 토로한 것으로 전해졌다. 朴대통령은 그간 카터에게 묻어 두었던 섭섭한 생각을 토로한 것이었다.
그해 7월20일 미국은 「주한미군 철수를 하지 않겠다」고 발표했다. 朴대통령의 이날 압박이 성공을 거둔 셈이었다.
최태민과 박근혜
- 얼마 전 金실장께서 『차지철과 김재규의 사이가 나빴던 것은 대통령의 큰 딸인 槿惠씨를 둘러싼 힘겨루기가 원인』이라고 말씀하신 게 한 주간지에 실렸는데, 무슨 의미인가요.
『자꾸 차지철이 김재규가 하는 일에 제동을 거는데, 그중 하나가 박근혜와 崔太敏(최태민) 목사 문제였습니다. 최태민 때문에 여러 사람에게 (청와대로)비난이 꽤 많이 들어왔어요. 결국 대통령에게 보고되는데… 구국봉사단 총재였던 최태민이 재벌 사람을 불러 돈을 모으는데… (액수가) 꽤 큽니다.
박근혜씨가 앞서서 돕기 때문에 김재규가 朴대통령에게 몇 번 말씀을 드렸는데, 「朴대통령이 딸 얘기만 듣는다」고 해요』
- 당시 朴槿惠씨를 시집보내야 한다고 말한 적이 없나요.
『朴대통령께 두어 번 말씀드린 일이 있어요. 그런데 한번은 朴대통령께서 최태민 얘기를 했어요.「최태민이라고 있는데 金실장 알아?」 그래요. 제가 알 수 없죠. 「얘기를 들었습니다만… 목사라고 하던데요」 하니, 「글쎄 목사라고 하는데 진짜인지 뭔지 모르겠어. 내가 불러 親鞫(친국)을 했는데, 요즘은 덜 만나는 모양인데」 그래요』
- 최태민을 직접 불러 친국을 했다는 겁니까.
『네, 朴대통령에게서 직접 들었습니다. 김재규에게 사실이냐고 물으니 「親鞫을 했다」고 해요. 꿇어 앉혀서…. 그런데 그 배후에 차지철이 있다는 겁니다. 김재규는 「차지철이 최태민의 청와대 출입을 방조해 놓고 대통령에게 보고하지 않았다」고 불만이 높았어요.
김재규는 자기 나름대로 대통령에게 보고하는데, 차지철이 볼 때는 김재규가 옆에서 자꾸 자기가 하는 일에 이러쿵저러쿵 말을 하니, 둘 사이가 점점 나빠졌다고 봅니다. 김재규는 자연 청와대 출입이 어려워지게 된 겁니다』
- 朴槿惠씨도 朴대통령에게 김재규를 많이 비난했겠네요.
『그렇죠. 자연 그렇게 될게 아닙니까. 자기가 하는 일에 감시하는 것처럼 이러쿵저러쿵 이야기하니…』
- 「최태민이 기업체 회장에게 일종의 압력을 넣어 돈을 많이 모은다」는 보고가 청와대로 올라온 거죠.
『그때 잘못한 일이 있는데, 최○○이라고 있어요. 그 친구가 청와대 비서로 있었는데, 제가 판단을 잘못해서 朴대통령에게 「槿惠양이 영부인 일을 하고 있으니 그를 보좌하는 비서관을 두는 게 좋겠다」고 보고했어요. 대통령께서 「글쎄…」 이러시면서 「누가 좋겠냐」고 묻길래 「槿惠양에게 물어보는 게 좋겠다」고 했어요. 그때 의전수석인 최광수 이야기가 「최○○이 담당하면 좋겠다」고 해서 제가 추천하지 않았겠어요? 최씨 몇이 몰리게 된 것이지요』
- 최○○은 최태민과 가까워졌겠네요.
『그렇죠. 제가 생각한 것과 영 달라지게 됐어요』
- 참 이상한 게 그전의 朴대통령 같으면 최태민을 잡아넣었을 텐데.
『한 번은 「야단치려고 해도 에미 없는 것이 불쌍해서 눈물 나더라」고 하시던데요』
김재규와 차지철, 그리고 박정희
- 이 문제 역시 朴대통령의 접근권 관리가 제대로 안 됐기 때문인 것 같아요. 빨리 정보부장을 바꿨어야 했던 것 아닙니까.
『(朴대통령이) 두 사람 모두에게 미련을 갖고 있었어. 둘 다 좋아했으니까요』
- 朴대통령이 김재규를 좋아한 이유는 어디에 있나요.
『두 사람이 동향인 데다 육사 동기(2기)고 초등학교 교사 경력도 같았다고 해요. 사실 확인은 안 했지만 김재규에게 그런 이야기를 들었어요. 그래… 「김재규는 朴대통령과 어릴 때부터 친분관계가 있구나」 하고 생각했지요』
- 朴대통령이 김재규를 대할 때 동생처럼 대했지요.
『네, 朴대통령이 아무에게나 말을 안 놓는데, 김재규는 동생처럼 얘기해요』
- 朴대통령이 김재규를 너무 몰아세워 그에게 미안한 감정 같은 것은 못 느꼈나요.
『미안한 느낌은 없으셨던 것 같아요. 김재규를 너무 믿고 귀여워했어요. 「저놈은 야단쳐도 괜찮다」는 식이었지요. 김재규는 자기대로 다 컸는데, 「여기 있는 놈들 전부 나보다 나은 놈이 없는데 나를 멸시한다」고 생각한 것 같아요』
- 어떻게 보면 朴대통령이 차지철보다 김재규를 더 신뢰한 것 같지 않나요.
『네, 맞아요』
- 김재규도 朴대통령을 진심으로 깍듯하게 모셨지요.
『네, 그럼요』
- 朴대통령이 차지철에게 대하는 것은 김재규와는 달랐지요.
『그렇게 친밀하진 않았아요. 뭔가 간격을 두고 있었던 것 같아요』
- 차지철과 김재규의 갈등을 朴대통령이 조장하거나 암묵적으로 악용해 권력의 안전을 도모하려 했다고 보진 않으십니까.
『정치인으로 두 사람을 경쟁시켰을 수 있었는지 모르지만, 朴대통령 성격으로 볼 때 악의적으로 그렇게 하시진 않았을 거예요. 朴대통령은 두 사람 다 귀엽게 보셨어요』
- 이럴 때 JP(김종필) 같은 분이 朴대통령을 만나 간언할 수 있는데, 그런 역할을 하지 못했어요. JP도 차지철을 상당히 경계를 했겠네요.
『네』
「박정희는 JP를 후계자로 고려 않았다」
- 朴대통령께서 신직수(청와대 법률특보)·김기춘(법률 비서관)씨에게 「언젠가 자리에서 물러난다. 그 전에 JP를 총리로 임명해 자연스레 대통령 권한대행을 맡기는 방안을 연구하라」고 지시했다고 하던데, 그런 보고를 받았나요.
『그랬을까요? 누가 괜히 한 말일 겁니다』
- 朴대통령의 지시로 그런 연구를 했다고 하던데요.
『저는 朴대통령이 어떤 계기가 있었다고 해도 JP에게 (대통령직을) 넘기진 않았을 것으로 봐요』
- 그런 느낌을 받았나요? JP를 싫어하는….
『특별한 이유는 없지만, 제가 육군참모총장 시절, 「JP를 그만두게 해야 한다」고 보고한 적이 있습니다. 당시 김종필 중앙정보부장과 오히라 일본 外相의 韓·日 청구권 협상 메모를 두고 학생데모가 심할 때였는데, 朴대통령에게 그 얘기했더니 짜증을 내시며 「그런데도 그 친구 왜 못 알아들어」라고 하시면서 저보고 「金장군이 JP와 가깝잖아. 나가라고 얘기해」라고 할 정도였어요. 제가 비서실장 시절에도 국내·외 사정이 한참 복잡해 웬만하면 JP를 불렀을 텐데 한 번도 부르지 않았어요』
- 朴대통령이 1979년 당시 만난 사람을 보니 공화당 사람과는 거리를 두신 것 같아요.
『싫은 사람은 안 만나려 하셨어요』
- 朴대통령이 김수환 추기경과 만나시지는 않았나요.
『제가 한번 만나시라고 말씀드렸는데 과히 반응이 좋지 않았어요』
- 그분들을 싫어하셨나요.
『김수환 추기경, 강원용 목사 같은 분들 이름을 거명하면 그냥 머리를 흔들었어요』
- 그분들이 곧잘 바른 소리를 해서 그런 반응을 보이셨나요.
『저는 그런 분들과 朴대통령을 연결시키려 했는데 「그만둬」 했어요. 朴대통령이 김재규나 저를 보시면, 어린애처럼 생각하시고 「그만둬」, 「나둬」, 「싫어」라고 하셨어요. 물론 딴 비서관들에겐 그런 표현을 쓰지 않으셨어요』
- 정승화 장군과 차지철의 관계는 어땠나요.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사이였어요. 그런데 차지철은 정승화를 좀 밑으로 봤죠.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다고 본 것 같아요. 정승화는 자기 주관이 있는 사람이니까 경솔히 움직일 사람이 아니지요』
사무라이 기질 있던 김재규
- 김재규의 軍 시절 당번병을 만난 적이 있습니다. 그 사람 눈에 비친 김재규는 사무라이 영화에 중독된 사람이라고 하던데요.
『맞아요. 김재규는 일제시대 일본군 소년 항공병으로 갔다 왔다고 하는데 그학교 교육이 사무라이 기질로 만드는 겁니다. 격하면 배를 가르는 것은 보통이고. 김재규가 그런 기질이 있었던 것 같아요』
- 그가 사무라이 얘기를 자주 하지 않던가요.
『그냥 일본 이야기를 많이 했는데, 「어떤 목적을 위해서는 목숨을 버리겠다」는 기질이 있었다고 봐요』
- 사무라이들은 자신이 존경했던 이가 잘못되면, 그 사람을 죽이고 스스로 자살한다고 봅니다. 김재규도 그런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요.
『글쎄…』
- 김재규는 평소 예절이 바른 사람이었죠. 차지철과 다르죠. 차지철은 교양이 없고 안하무인이고.
『그럼요』
- 그런데 김재규는 갑자기 폭발하는 성격이 있다고 하던데… 누가 「김재규가 건설장관 시절, 국회 상임委 도중 갑자기 화를 내더라」고 기억하더군요. 10·26이 일어난 그날 밤도 그런 성격이 폭발한 게 아닐까요.
『그렇죠. 그러니 옆 건물 2층까지 뛰어가 권총을 가져왔겠죠』
朴正熙의 애창곡
- 金실장은 朴대통령을 어떤 사람으로 보십니까.
『모든 것이 깨끗하고 직선적인 사람입니다. 구질구질하게 말을 돌려서 하는 분이 아니셨어요. 그분을 두고 요즘 친일파라는 말이 많은데 그런 사람을 친일파라고 하면, 대한민국에 남을 사람이 하나도 없어요. 요즘 과거사 문제로 떠드는데 언제까지 이런 짓을 해야 하나요』
- 朴대통령이 사석에서 일본 노래를 부르시는 것을 본 적이 있나요.
『뭐… 없어요. 일본 노래를 부른들 또 어떴습니까. 그걸 가지고, 그걸 부르면 친일파가 돼버리는 건가요?』
- 朴대통령이 어떤 노래를 주로 부르셨나요.
『「버들잎 외로운 이정표~」, 「으악새 슬피우니~」 두 가지만 불러요. 트럼펫도 부셨는데, 잘은 못하셨지만 오르간도 치시고요. 사범학교 출신이니 음악 기초는 합니다. 일제시대에 사범학교에 들어가면 천재라고 했지요』
- 1970년대 신민당 전당대회에서 金大中씨가 대통령 후보로 뽑힐 당시 정보부장을 하셨죠. 그때 정확하게 예측을 하셨나요? 아니면 金泳三씨가 후보가 된다고 보셨나요.
『예측을 잘못했던 것 같아요. (잘못해서) 대통령께서 좀 화가 나셨던 것 같습니다(웃음)』
- 오히려 朴대통령은 金泳三씨가 되면 경상도 표를 나누니까 오히려 金大中씨가 된 게 잘된 일이라고 생각하시진 않았나요.
『글쎄요. 그때 그랬는지 기억이 나질 않아요. 당시 저는 정치문제에 대해 그다지 관여를 안 했어요』
- 정치는 다른 사람이 했나요.
『그때가 제가 정보부장이 된 지 얼마 안 됐을 때입니다. 나중에 공화당 쪽 사람에게 들으니 제가 그걸 잘못해서 잘렸다고 해요』
- 무엇을 잘못했다는 건가요.
『大選을 잘못 예측해서…』
- 大選이 아니라 전당대회가 아닙니까.
『뭐든 「잘못해서 잘렸다」는 이야기를 그때 들었어요. (全大 때문인지도) 모르지요』
- 朴대통령이 김형욱을 사석에서 욕하신 적이 있나요.
『농담처럼 이야기하시지, 그렇게 심하게 욕한 적은 없었어요』
朴대통령, 부마(釜馬)사태 심각하게 안 봐
- 권력자로서 朴대통령을 만난 사람들은 비정하다고 하지만, 행정하는 사람들은 그를 따뜻하고 합리적인 분으로 보더군요. 권력자냐, CEO냐를 두고 시각차가 크다는 느낌이 듭니다. 혹시 무서운 사람이라고 느낀 적은 없나요.
『별로. 당시에는 어느 정도 통치에 자신감이 있으셨다고 봅니다』
- 1979년 釜馬사태 당시 비상계엄령은 과잉조치가 아니었나요.
『저도 크게 염려하지 않았어요. 그런데 김재규가 (부산에) 갔다 와서 「보통이 아니다」라고 해요. 저에게 「실장님, 판단을 잘못하고 있다」고 해요. 차지철은 반대로 「괜히 (김재규가) 놀라서 저렇다」고 반박했어요. (두 사람의 시각차가) 대통령의 판단을 흐리게 한 것 같아요』
- 朴대통령이 돌아가시기 하루 전에 국가안보회의를 열었지요. 당시 釜馬사태 분석보고를 했는데, 朴대통령이 釜馬사태를 계기로 국정쇄신을 하려 하셨지요.
『그런 것 같아요. 하지만 당시 朴대통령은 釜馬사태를 그다지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어요』
- 평상시 같으면 아무 일도 아닌데 작은 허점도 허용하지 않으려는 독재시대의 과잉이 사태를 키웠다고 봅니다. 조금만 뚫려도 김재규처럼 「큰일났다」고 과대평가한 것이지요. 지역도 한정됐는데 계엄령을 내리니 더 문제가 됐어요. 계엄령은 누구의 주장인가요.
『차지철일 겁니다』
- 장시간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월간조선 2006년 2월호 / 글=조갑제 조갑제닷컴 대표]
□김문수(金文洙) 전 경기지사
2016.09.20 ‘오해’와 ‘진실’
⊙ “사드 반대하는 의원들, 어떻게 반미·친북 세력과 똑같은 주장을 할 수 있나”
⊙ 2014년 7·30 동작을 재·보선 출마 안 한 이유… 더 좋은 기회 올 것으로 판단했었다
⊙ 대구 수성갑 ‘험지’라 해서 나섰는데, 패배하니 텃밭 뺏긴 정치인으로 낙인
⊙ “나의 전대全大 출마 청와대도, 김무성 전 대표 쪽도 원치 않았던 것 같다”
⊙ 청와대서 직접 국무총리 제안 온 적 없어… 2012년 홍보 동영상에 최태민 목사 나오는 사실 알지 못해
김문수 전 경기도지사를 만나기로 마음먹은 것은 그의 측근인 차명진 전 의원의 이야기 때문이었다. 두 달 전쯤 우연히 사석에서 만난 차 전 의원은 여권 대선 주자인 김 전 지사의 지지율이 3%에 머무는 것을 아쉬워하며 “문수 형이 세 번의 판단 착오를 했다. 보좌했던 나도 책임이 있다”고 했다.
차 전 의원은 김 전 지사의 최측근이다. ‘김 전 지사의 장남’이라고 불릴 정도로 25년 넘게 인연을 맺어왔다. 차 전 의원은 김 전 지사가 사회·노동 운동을 할 당시부터 곁을 지켜왔고 김 전 지사의 의원 시절엔 보좌관을 지내기도 했다. 2006년 김 전 지사가 경기도지사로 당선된 이후 차 전 의원은 김 전 지사의 지역구였던 경기 부천 소사에 출마해 재선에 성공했다.
차 전 의원이 이야기한 세 번의 판단 착오는 다음과 같다.
첫 번째는 2012년 새누리당 대선 후보 경선 당시 후보였던 김 전 지사가 민주화와 노동운동을 해온 자신의 삶과 상대 후보였던 박근혜 대통령의 삶을 비교하는 동영상을 틀면서 박 대통령과 고(故) 최태민 목사가 나란히 앉아 있는 장면을 삽입한 것이었다. 차 전 의원은 “당시 나는 최 목사 장면을 빼자고 말렸는데 강경파한테 밀렸다. 이 사건으로 문수 형이 국무총리가 되지 못하는 것이라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했다.
두 번째는 2014년 7·30 재·보선 서울 동작을 출마 고사였다. 당시 재·보선은 전국 14개 지역구에서 치러진 미니 총선이었다. 14곳 중 8곳을 되찾는 게 새누리당 목표였다. 승리가 절실했던 새누리당은 김 전 지사에게 험지인 서울 동작을 지역에 출마해 달라고 ‘SOS’를 쳤다.
김 전 지사는 끝내 출마를 고사하고 소록도 봉사활동을 떠났다. 차 전 의원은 “문수 형은 선거 출마보다는 낮은 자세로 민심을 살펴보겠다는 생각이 강했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시간이 갈수록 박근혜 정부가 위기에 빠질 가능성이 크니, 그때 구원투수로 나가자고 제안했다”고 밝혔다.
김 전 지사 대신 출마한 나경원 의원은 33개월 만에 3선으로 화려하게 국회에 복귀했다. 나 의원은 20대 총선에서도 동작을 지역에서 승리, 4선 의원이 됐다. 결과론이지만 동작을 불출마는 득보다 실이 컸다.
마지막 세 번째는 20대 총선에서 ‘대구의 강남’으로 불리는 수성갑에 출마한 것이었다. 차기 대선에 도전하기에 앞서 먼저 새누리당 텃밭에서 대선 주자로서의 가능성을 인정받겠다는 의도였다. 김 전 지사는 이곳에서 4년 전인 19대 총선 때부터 바닥을 다져온 더불어민주당 김부겸 의원에게 패했다.
야권 불모지인 대구에서 정통 야당 후보가 총선에서 당선된 것은 중선거구제로 치러진 1985년 12대 총선 때 신한민주당 후보 2명이 당선된 이후 31년 만이었다. ‘장남’이라고 불리는 최측근의 분석을 김 전 지사는 어떻게 생각할까.
“반미·친북 세력과 같은 주장”
▲2012년 8월 6일 오전 서울 올림픽공원 체조경기장에서 새누리당 18대 대통령 후보자 서울 합동연설회가 열렸을 때 모습.
― 인터뷰를 결심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사드 문제 때문에 답답해서요. 북이 보유한 1000여 기의 탄도미사일로부터 대한민국을 지키려면 사드 도입이 불가피합니다. 사드 문제는 5천만 국민이 죽느냐 사느냐의 문제죠. 선택이 아니라, 생존의 문제라는 이야기입니다. 야당은 사드 설치를 반대하고 있어요. 반미·친북 세력과 똑같은 주장을 하고 있죠. 대한민국 국회의원이 선전·선동 포퓰리즘에 따라가서 되겠습니까.”
김 전 지사는 더 나아가 대한민국의 핵무장을 주장했다.
“대한민국은 지금 당장 핵무장을 시작해야 합니다. 북한 핵미사일은 물론, 중국, 일본, 러시아 등 강국에 둘러싸인 약소국이 앞으로 계속 살아남으려면 대등한 핵 억지력을 갖추는 것이 필수라고 생각합니다.”
― 지난 8·9 새누리당 전당대회 결과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정현 대표가 승리할 것으로 예상했습니다. 언론에 보도된 여론조사 결과를 보니 이 대표가 많이 앞서더군요. 비주류가 단일화에 성공, 마지막 조직표의 행방은 어떨까 궁금했는데, 주류 쪽으로 쏠리더군요. 이 대표가 제 생각보다 많은 표를 받았어요.”
― 친박이 다시 당을 좌지우지하게 됐습니다. 아직도 정신 못 차린 것 아닌가요.
“당원들이 위기의식이 있었던 것 같아요. 비주류가 당 대표가 되면 당이 깨질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이죠. 당·청 관계가 완전 파국으로 치닫는 것은 원치 않았던 것 같습니다.”
“주류, 비주류 모두 나의 전대 출마에 부정적”
― 주류가 독단적으로 행동하면 견디다 못한 비주류가 당 밖으로 나갈 수도 있지 않습니까.
“당이 분당까지 가지 않도록 지도부가 잘해야겠지요. 대통합을 이뤄야 정권 재창출을 이룰 수 있지 않겠습니까.”
― 보수층에서조차 정권 재창출은 이미 물 건너갔다는 이야기가 많습니다.
“저도 70% 정도는 야권에 넘어갈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희망이 있다면 사드 문제에서 보듯 야권은 안보 의식이 형편없습니다. 이런 세력에 대한민국을 맡기는 것은 ‘나라 그만하자’는 이야기입니다. 외연을 확장하고, 혁신을 거듭해 나간다면 기회가 생길 수도 있지요.”
― 전당대회 출마를 검토하셨죠.
“총선에서 패배하고 나서 좀 쉬고 있었는데, 《조선일보》 보도(7월 25일) 나오기 며칠 전부터 기자들이 전화해서 전당대회 출마 여부를 묻더군요. 출마 생각이 없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기자들이 여론조사 결과가 상당히 좋은데, 왜 출마 생각이 없느냐고 물어요. 그래서 제가 그런 결과가 있으면 좀 보여달라고 했어요. 보여준다는 사람도, 그 결과를 보도하는 사람도 없더군요. 그런가 보다 했는데, 여론조사 하는 지인이 전화해서 저를 후보로 넣겠다는 거예요. 그러지 말라고 했는데 이미 제 이름을 놓고 여론조사를 돌렸더라고요. 어떻게 합니까. 결과 나오면 좀 보자고 했죠.”
― 결과가 좋았군요.
“제가 많이 나왔더라고요.”
― 일반인을 대상으로 한 여론조사였습니까.
“당원을 포함한 조사였습니다.”
― 자신감이 생기셨겠네요.
“이 정도 결과면 무난히 승리하겠다 싶었습니다. 그래서 측근들을 불러 상의를 했죠. 이 시점에 김재원 청와대 정무수석에게 전화가 왔습니다.”
― 출마하지 말라고 하던가요.
“아니요. 《조선일보》 보도를 보고 전화를 했다더군요. 제 의중을 대통령께 보고해야 한다면서 진짜 출마하시냐고 묻기에 ‘여론조사가 좋게 나와서 검토하고 있는데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고 좀 떠봤죠. 제가 김 수석이랑 개인적으로 가깝거든요. 17대 때 김 수석에게 공천을 준 사람이 저이기도 하고(김 전 지사는 당시 한나라당 공심위원장이었다). 어쨌든 제 질문에 김 수석이 본인이 답을 하면 청와대에서 전당대회에 관여한 것이 되기 때문에 말 못한다고 하더군요. 제가 ‘내가 만약 출마를 하더라도 박근혜 대통령과 각을 세우려고 하는 게 아니니까 내 이야기를 잘 전해달라’고 했어요. 명확한 답을 하지 않고 전화를 끊더군요.”
― 비주류 최대 주주인 김무성 전 대표와는 출마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았나요.
“제 지인 중에 김무성 대표와 아주 가까운 분이 계셨어요. 그분이 연결해 줘서 김 대표와 통화를 했죠. 제가 물었어요. ‘나가도 괜찮겠느냐’고. ‘생각해 보겠다’고 하더군요. 답변을 기다렸는데, 답이 없더라고요. 그러는 와중에 김용태 의원, 정병국 의원을 돕는 제 지인들이 연락해 출마를 말렸습니다. 어느 쪽도 내가 나오는 것을 ‘탐탁지 않게 생각하는구나’라고 느끼고 출마를 접었죠.”
― 여론조사 결과가 좋았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대표 경선은 ‘세(勢)’가 있어야 합니다. ‘세’는 유력자 또는 국회의원의 확고한 뒷받침이죠.”
― 현역 중 ‘김문수계’는 없습니까.
“차명진, 안병도 다 떨어졌죠. 이번 20대 총선에서 전멸했습니다. 저도 떨어졌으니, 참 답답한 상황이죠.”
― 당권 도전을 고민했다는 건 대선 불출마까지 생각했다는 이야긴데요.
“당을 제대로 만들기 위해 대권 불출마를 생각했죠. 많은 새누리당 지지자들이 이대로 가면 당이 깨진다고 걱정했어요. 제가 당을 공명정대하게 운영하면 분당은 막을 수 있다 판단했죠. 결과적으로 불출마했지만요.”
새누리당 당헌·당규에 따르면, 당권·대권 분리 규정으로 인해 당권을 쥐게 되면 대권 출마를 포기해야 한다.
― 불출마했으니, 대권에 도전하시겠네요.
“길은 하나죠. 그런데 제가 대구에서 깨졌잖아요. ‘고향 가서 진 사람이 대권을 거머쥘 수 있겠느냐’ 이런 비판이 나오죠. 제 개인적으로야 대권에 도전하고 싶지만, 객관적 여건이 불리한 것은 사실이죠.”
― 애매한 답변이시네요.
“치명타를 입은 것은 사실이니까요. 상황을 지켜봐야겠죠.”
대구 수성갑에 출마한 이유
▲김문수 전 지사는 제20대 총선에서 대구 수성갑 지역에 출마했다 낙선했다. 19대 총선 때부터 이 지역에서 바닥을 다져온 더불어민주당 김부겸 의원에게 패했다. 20대 총선 직전 노소영 아트센터 나비 관장이 김 전 지사의 지지를 호소하는 모습.
― 왜 깃발만 꽂으면 승리한다는 ‘어당새(어차피 당선은 새누리)’ 지역인 대구 수성갑에 나온 겁니까. 경기도 등 좀 어려운 지역에 출마했으면 패배했어도, 지금보다는 타격이 덜했을 텐데요.
“대구 수성갑으로 간다고 하니까 모두 김문수는 꽃가마만 타려 한다고 비판했습니다. 하나만 물어볼게요. 4년을 준비한 더불어민주당 김부겸 의원이 출마하는 수성갑이 ‘어당새’ 지역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수성갑은 험지였습니다.”
― 당을 위해 험지에 출마하셨다는 이야기인데, 오해받지 않을 험지도 많지 않았습니까.
“재작년(2014년) 가을에 수성을 지역의 주호영 의원이 저한테 수성갑으로 오라고 했습니다. 수성갑 지역의 이한구 의원에 대한 여론이 정말 좋지 않아 김부겸 의원에게 100% 지니까 와달라는 거였죠. ‘대구의 강남’ 격인 수성갑을 야당에 내줄 경우 정치적 타격이 큰 만큼 미리 차단해야 한다는 취지였어요. 그럴 생각이 전혀 없다고 했죠. 정말 수성갑 출마는 전혀 고려하지 않았어요. 그런데도 계속 와달라는 거예요. 저 외에 대안이 없다고 하면서. 도대체 그렇게 이야기하는 근거가 뭐냐고 물으니, TK 출신 중앙언론 기자들이 김문수 아니면 새누리당에서 김부겸 의원을 이길 사람은 없다고 분석한다는 겁니다. 그걸 알아서였는지 수성갑 지역의 이한구 의원도 총선 불출마 선언을 하더라고요. 내 고향이 TK(경북 영천)잖아요. 마지막으로 고향을 위해 봉사하자는 마음에서 수성갑 출마 선언을 했죠.”
― 대구 지역 국회의원들 반응은 어땠습니까.
“유승민 의원이 원내대표 할 때예요. 유 의원에게 대구 지역 의원들은 내가 수성갑에 출마하는 것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어봐 달라고 했죠. 한 명이라도 반대하면 출마하지 않으려고요. 유 의원이 한 명도 반대하는 의원이 없었다고 전해주더군요. 대구 의원 중 고등학교(경북고등학교) 후배들 외에는 저와 인연이 있는 분이 거의 없는데 만장일치라고 하니, 출마해도 되겠구나 했죠.”
― 왜 패배했다고 생각하십니까.
“중앙언론은 꽃가마 타려 한다고, 지역언론은 수도권 규제 완화로 경기도 발전시킨 사람은 대구를 황폐화시킨 장본인이라고 비판했어요. 김부겸 의원이 4년 이상 지역구를 닦아놔서 안 그래도 불리했는데, 더 불리해졌죠. ‘너 뭐하러 여기에 왔느냐’는 소리를 하루에도 수백 번은 들은 것 같아요. 안타까웠죠. (전직 의원의) 조직도 하나도 없었어요. 대구에서 활동하는 의원들은 조직 관리를 잘 안 하잖아요. 씨만 뿌려놓으면 되니까요. 인제 와서 이런 분석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다 제가 부족했던 것이죠.”
― 공천 파동 영향은 없었습니까.
“수성갑이 이한구 공천관리위원장 지역구였잖아요. 또 수성갑이 최경환 의원의 지역구인 경산이랑도 붙어 있어요. 애매하게 공천을 못 받은 주호영(수성을), 류성걸(동구갑), 유승민(동구을) 의원 지역구와도 붙어 있고. 참 갑갑한 상태였죠.”
동작을 보궐선거에 나서지 않은 이유
― 2014년 서울 동작을 보궐선거에 출마했다면 탄탄대로를 걸으셨을 것 같습니다.
“정치인은 자신이 한 판단에 책임을 져야 합니다. 2014년 동작을 보궐선거가 7월 30일에 있었어요. 저한테 제안이 온 게 6월이었는데, 제 경기도지사 임기가 6월 말까지였어요. 도지사를 그만두자마자 선거에 나가는 것이 부담스러웠습니다. 도지사직 유종의 미도 거두고 싶었고요.”
― 당시 사무총장이었던 윤상현 의원은 《월간조선》(2014년 11월호) 인터뷰에서 지사님께서 박근혜 대통령이 직접 요청하면 출마하겠다는 이야기를 했다고 하던데요.
“제 기억으론 대통령이 아니라, 대표가 직접 요청을 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이야기를 한 것 같습니다.”
― 그때 대표가 누구였습니까.
“황우여 대표였습니다.”
― 황우여 대표가 요청했다면 출마하셨겠네요.
“당 대표 이야기는 도지사 임기가 끝나자마자 선거에 출마하라는 당의 요구가 난감하다는 뜻에서 한 겁니다. 도지사 관두고 바로 선거에 출마하는 것은 제가 생각한 코스가 아니었습니다. 3선 국회의원에 재선 도지사까지 20년 가까이 쉼 없이 달려온 만큼 민생을 좀 살펴보고 싶었습니다. 측근들도 재·보선 출마보다 쉬면서 정비하는 게 낫다고 조언했고요.”
― 1년 후인 2015년 4·29 재·보궐 선거를 앞두고 또다시 러브콜이 왔는데, 그것도 거절하셨어요.
“당에서 성남 중원에 나가라고 했죠. 성남은 저와 인연이 있는 지역입니다. 제 인생에 가장 큰 은인이 이영숙 소피아 수녀님이십니다. 1980년 ‘서울의 봄’ 당시 해고노동자이자 삼청교육대상자로 도피 중이었습니다. 그 당시 친구의 소개로 소피아 수녀님을 처음 만났습니다. 성남에서 노동운동을 할 때 서울대 의대 출신으로 성남 공단 소재 공장에 위장 취업해 노동운동을 하는 신상진을 만났습니다. 열심히 하는 후배였어요. 저랑 아주 가까워졌죠. 성남 중원은 신상진이 오랫동안 닦아놓은 지역구였습니다. 저랑 친한 운동권 후배 신상진을 밀어내고 제가 나가는 것은 말이 안 되지 않습니까.”
신 의원은 김 전 지사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했다.
“15년 만에 의대를 졸업하고 나서도 지역 시장 인근에 조그만 병원을 개원, 형편이 어려운 노동자들의 무료 진료를 도맡았습니다. 그 모습을 본 김문수 지사가 저한테 ‘성남 슈바이처’라는 별명을 붙여주셨죠. 김 전 지사는 저에게 정말 고마운 선배입니다.”
신 의원은 4·29 재·보선에 이어 20대 총선에서도 승리, 4선 고지를 밟았다.
― 20대 총선 때는 종로 출마설도 있었습니다.
“거기 당협위원장이 정인봉입니다. 정인봉 친형이 제 서울대학교 선배인데, 운동권 서클에서 같이 활동했죠. 선배 집에 놀러가면 정인봉이 형님, 형님 하면서 따랐죠. 그런 연이 있는데 제가 어떻게 종로에 갑니까.”
반기문 총장과의 인연
차기 대선 주자 지지율을 보면 여권(與圈)에선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 야권(野圈)에선 문재인 더불어민주당 전 대표의 강세가 이어지고 있다. 김 전 지사가 대선 출마를 선언할 경우 반 총장과 예선에서 대결할 가능성이 크다. 김 전 지사는 잠재적 라이벌인 반 총장을 어떻게 생각할까. 그는 “반 총장은 좌편향 된 사람이 아니다”며 “좌파 정권 때 턱도 없는 이야기하는 고위 공무원이 많았는데, 반 총장은 그렇지 않았다. 지도자의 자격을 갖춘 분”이라고 했다.
― 좌파 정부 때 턱도 없는 이야기하는 고위 공무원이 많았다고 했는데, 대표적 인사가 누굽니까.
“실명을 밝혀서 좀 그렇지만 임동원씨 같은 분이 NLL 포기를 추진하려고 하고 그랬죠.”
―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과 인연이 있습니까.
“제가 유엔 사무총장으로 당선되는 데 한몫했죠.(하하)”
― 한몫했다는 분들이 많던데요.
“라난 루리(Ranan Lurie)라고 아주 유명한 시사만화가가 계세요. 국제사회에서 영향력이 어마어마한 분이죠. 이분이 2006년에 유엔이 정한 ‘세계평화의 날’을 맞아 경기도를 방문하셨어요. 제가 도지사였는데, 외교부에서 전화가 왔어요. 그분 좀 잘 모셔달라고요. 그래야 반 총장 유엔 사무총장 선거에도 도움이 된다고. 그분이 요구하는 것을 모두 들어줬죠.”
― 뭘 요구하던가요.
“DMZ를 방문하고 싶어 했어요. 제가 안내를 해드렸죠.”
라난 루리는 이집트 출생으로 예루살렘대학을 졸업하고 20세에 이미 시사 만화집을 발간할 정도로 실력이 출중했다. 1974년 미국으로 귀화한 그는 《뉴스위크》를 비롯한 유력지에 시사만화 칼럼을 기고했다. 또 웨스트포인트, 스탠퍼드대학 등에서 시사만화철학을 강의했다. 그는 2006년 말 반 총장의 유엔 사무총장 취임을 축하하는 만화를 그리기도 했다. 테러(TERROR), 기아(HUNGER), 지구온난화(GLOBAL WARMING), 대량학살(GENOCIDE) 등 반 총장이 해결해야 할 국제 과제를 상징적으로 묘사했다.
“박근혜 대통령과 나쁘게 지낸 적 없다”
▲새누리당 대선 후보였던 박근혜 대통령이 2012년 10월 10일 오후 경기도 수원 경기도당에서 열린 경기도당 대통령선대위발대식에서 김문수 전 경기도지사와 이야기하는 모습. 김 전 지사는 “박근혜 대통령과 나쁘게 지낸 적 없다”고 했다.
― 대선 출마를 선언하면 반 총장과의 대결이 불가피합니다. 주류 측은 반 총장을 지지해 줄 것 같은데요.
“저는 주류 측의 지원을 못 받을까요. 저도 받을 수 있다고 보는데요.”
― 박근혜 대통령과 껄끄러운 관계 아닌가요.
“제가 새누리당에 들어온 지 23년 됐습니다. 이 기간에 박근혜 대통령과 나쁘게 지낸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박 대통령이 1998년 대구 달성군 보궐선거에 나왔을 때 성심성의껏 도왔습니다. 박 대통령이 당 대표로서 2004년 천막당사 할 때는 제가 공천심사위원장이었고요. 사이가 나쁠 리 없죠.”
― 2012년 새누리당 대선 후보 경선 당시 지사님 캠프에서 튼 홍보 동영상에 고 최태민 목사가 나오는 것을 보고 박 대통령이 상당히 분노했다던데요.
“그 일로 김천에서 멱살까지 잡혔죠. 한 남성분이 ‘네가 뭔데 박근혜를 욕하느냐. 너 같은 × 때문에 당 지지율이 안 오른다’고 욕을 했지요. 박 대통령이 청와대에서 생활한 분이라면 저는 밑바닥 공장에서 자란 사람이라는 것을 대비시키는 홍보 동영상을 제작해야 한다는 참모들의 의견이 있었어요. ‘오케이’ 했지요. 그런데 동영상을 제작하는 쪽에서 박 대통령의 청와대 활동 모습을 찾다가 최 목사와 같이 앉아 있는 사진을 삽입했나 봐요. 저는 몰랐죠. 제가 제작에 참여하는 게 아니니까요. 당사자 입장에서는 기분 나쁠 수 있겠지만, 고의가 아니었죠.”
당시 박 대통령 캠프 측은 이 동영상에 대해 “최 목사와의 ‘부적절한 관계’ 루머를 확대 재생산하려는 네거티브”라며 흥분했다.
― 이 일 때문에 앙금이 남아 국무총리에 임명되지 못했다는 이야기가 나오는 걸 알고 계셨는지요.
“그런가요? 저는 몰랐습니다.”
― 신임 국무총리를 임명할 때마다 하마평에 올랐는데, 실제 청와대에서 연락받은 적 있나요.
“한 번도 없습니다. 다만 제가 총리 단수 후보로 올라간 적이 있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저와 가까운 여권 핵심 관계자가 단수 후보니 조금 준비하는 게 좋겠다는 말을 전해줬어요. 공식 통보는 아니었고요.”
― 왜 안 됐을까요.
“대통령 뜻이겠죠.”
― 국무총리직 말고 다른 요직을 제안받은 적은 없습니까.
“없어요.”
― 2014년 말 박 대통령의 모교인 서강대 강연에서 “박 대통령은 여러분의 동문이다. 동문에 대해 비판적으로 보는 것은 굉장히 문제가 있다고 본다. 조상 욕하고 대통령 욕하는 것은 참 지성이 아닌 가짜 지성”이라고 말씀하셔서 논란이 됐습니다.
“아직도 대통령 당선이 무효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저한테 당선무효 책 사라고 하는 사람도 있고요. 선거에 의한 대통령을 인정 안 하면 되나요. 그러면 안 되잖아요.”⊙
[ 월간조선 2016년 10월호 / 글 = 최우석 월간조선 기자 ]
□김선택 납세자연맹회장
2015-05-26 "국민연금은 당장 폐지해야"
공무원·국민 연금개혁안을 두고 국회가 시끄럽다. 특히 여야는 국민연금 소득대체율 50%을 두고 팽팽히 맞서고 있다. 기존 소득대체율인 40%를 50%로 상향조정해 더 많은 연금을 받을 수 있도록 한다는 것이다. 하나, 이런 구조가 성립되려면 국민들이 더 많은 연금을 내야한다.
이런 방식이 단기적으로는 곧 연금을 받을 대상자들에게는 많은 돈을 지급할 수 있지만, 장기적으로는 현재 20~30대 젊은이들이 연금을 수령할 시기가 도래하면 연금을 받지 못한다는 우려가 있다. 이런 상황에서 연금개혁안의 문제를 국민의 입장에서 분석 및 지적하고 있는 납세자 연맹의 김선택 회장을 만나보았다.
-납세자 연맹이 무슨 일을 하는지, 언제 설립되었는지?
“납세자 연맹은 2001년 1월에 설립되어 올해로 15년 되었다. 우리는 여타 시민단체와 달리 한 가지 주제인 ‘납세(納稅)’만을 지속적으로 파고들고 있어 전문적인 민간단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정치적으로 중립적인 기관이다. 공무원연금, 국민연금, 사회보험 등을 집중적으로 분석하고 문제점을 집어내고 있다. 납세자연맹의 구성원들은 여느 사기업처럼 공식 채용절차를 통해서 상근직원을 뽑는다.”
-현재 진행중인 국회의 연금개혁안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연금은 복잡한 법과 계산이 포함된 사안이다. 연금이 무엇이고 어떻게 운영되는지 알기 어려운 구조다. 국회의원들도 잘 모른다. 그러니 국회의원들은 무조건 많이 돌려주면 되는 것 아니냐는 식으로 나오는 것이다.
본래 연금이란 국민의 젊을 때 자기 호주머니에서 나간 돈을 노후에 다시 받아서 살 수 있도록 도와주는 일종의 사회 보장제도이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는 마치 엄청난 혜택을 주는 것처럼 구조가 원칙적으로 잘못 꾸려져 있다. 연금의 기본원칙은 사회안전망이자 사회보장제도이다. 즉 가난한 사람들이나 서민들이 노후에 안정적인 삶을 이어갈 수 있도록 돕겠다는 취지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이 기본원칙은 우리뿐 아니라 오래전부터 시행한 유럽을 비롯한 다른 나라도 마찬가지이다.
그런데 지금 자신이 낸 돈보다도 더 많은 돈을 노후에 받아가면서부터 문제가 시작된 것이다. 그리고 그 돈을 받아가는 사람들이 우리사회에서 보호 받아야할 계층이 아니라는게 문제다. 이런 이유에서 납세자연맹은 이 적립식 국민연금과 각종 연금을 폐지하자고 주장하고 있다.
한국의 국민연금제도는 1988년에 처음 시작됐다. 다른 유럽과 비교했을 때 역사가 짧다. 역사가 짧다는 것은 그만큼 이 제도를 다시 보완하고 폐지할 수 있는 선택이 남아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유럽은 1900년대 초부터 연금제도를 시작했기 때문에 사실상 폐지 자체가 어렵다. 정부가 직접 칼을 대서 연금제도를 고치기 어렵다는 말이다. 그런데 한국은 연금제도를 시작한지 얼마되지 않았기 때문에 아직 폐지를 하는 등의 강력한 조치를 취할 수 있는 여지가 남아있다. 우리가 주장하는 폐지는 완전히 무너트리자는 것이 아니라 건강보험과 기초생활수급을 돕는 기본적인 제도는 남겨두고 현재 운영되는 적립형 제도를 사회 보장형으로 바꾸자는 말이다. 이런 방식이 바로 이미 유럽에서 시행하는 연금제도이다. 현재 일을 한창하고 있는 젊은이들이 번 돈을 가지고 현재 살고 있는 노령화 인구에게 지급하는 순환식 구조이다. 이런 보장형 지급제도는 구조적으로 위험부담이 적다.”
▲연금 개혁안을 설명 중인 김선택 납세자 연맹 회장 / 사진 김동연
-그럼 적립식에는 어떤 위험부담이 있나.
“적립식 연금의 문제는 국민의 돈을 쌓아두면서부터 문제가 발생한다. 그리고 대다수의 국민들이 착각하는 것 중의 하나가 연금공단에 쌓여있는 돈 중에 자신의 몫이 있을 것이라는 믿음이다. 공단에 쌓아둔 돈 중에 나의 몫이라는 것은 없다. 거기 어디 내 이름으로 된 무엇이 있나. 현재 쌓인 돈만 500조이고 이중에 100조가 주식 등에 투자되어 있다. 이 돈은 내 것이 아니다. 나라가 운영하고 있는 자금이다.
그런데 그리스와 같은 국가 부도를 맞이한다면 어떻게 될까. 우리는 이미 1997년 외환위기를 통해서 뼈저리게 경험하지 않았나. 아무리 많은 돈을 쌓아 두었다고 해도 한순간에 그 가치는 휴지조각이 될 수 있다. 500조를 모아둔 연금이 나라 경제가 위태로워지면 반 토막이 날 수도 있는 게 바로 적립식의 문제점이다. 그런데 다들 쌓여있으니까 어디 내 이름으로 된 돈이 있는 줄 알고들 있다. 그리고 일단 쌓아두면 그 규모가 크다 보니까 좋아 보인다.
나라 경제가 살아나고 활성화 되는 것이 국가경제와 서민들이 체감하는 경기에 좋은 영향을 미친다. 당장 500조를 적립식에서 사회보장형으로 풀어서 시장에 투입한다고 생각해보자. 당장 경기가 살아나고 돈이 국민에게 돌아가면 이 돈은 모두 소비를 통해 시장에 풀린다. 그럼 당연히 국가경제도 좋아진다. 즉 적립식은 언제든지 무너질 수 있는 위험성을 안고 있다. 이런 위험성을 인지한 유럽은 진작에 보장형으로 전환하고 있는 추세이다.”
-그럼 왜 우리는 적립식을 고집한다고 생각하는가.
“여기에는 정치적인 이유가 크다고 생각한다. 이미 이 연금을 운영하는 사람들은 모두 공무원연금, 사학연금 등을 수령하는 집단 구성원들이며 이들이 이 연금을 운영한다. 최대 수혜자들이 운영을 하고 있다. 이들이 개혁과 변화를 추진하는데 과연 제 살을 깎아먹는 제안을 하겠는가? 이 때문에 지금까지 나온 연금개혁이 모두 실패한 것이다. 적립되어 있는 돈의 영향력이 막강하다는 것은 불보듯 뻔한 일이고, 연금공단의 관계자들에게 금융, 경제계에서 투자를 해달라고 러브콜을 보내는 것도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이렇게 연금의 기득권 세력이 뭉쳐서 자신들을 위한 구조를 만들고 있는 셈이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본래 사회안전망으로서 사회의 어려운 계층을 돕겠다는 본래 취지는 잊혀진지 오래다. 사실 이번 국회 연금개혁안에서 놀란 부분은 바로 야당이다. 항상 서민을 위한 정치를 하겠다고 앞장서고 했던 그들이 어떻게 이렇게 소득대체율 50%를 주장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진정 국민을 위한다면 이런 개혁안을 추진해서는 안 되지 않나.”
-그럼 지금 이 연금안이 통과되었을 때 나중에 부족한 연금은 어디서 끌어와야 하나?
“흔히 정치권에서는 부자증세를 논한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세금 구조는 구조적인 문제가 있다. 그런데 항상 복지 증대만을 논하는 모순된 구조이다. 웃기는 것은 과연 부자가 누구이고 부자의 기준이 무엇이냐는 것이다. 부자, 부자 외치는데 누가 부자인가. 국세청에서도 세금을 부과하는데 누가 부자인지 알아야 증세를 하던지 말던지 할 것 아닌가.
우리 주변에도 많다. 직장인들은 자기 소득이 완전히 공개된다. 그런데 이른바 지하경제라고 불리는 자영업자들은 소득 파악이 어렵다. 국민 모두가 다 아는 사실이다. 어디가면 현금으로만 계산하고 그러면 좀 깎아주고 한다. 이미 다들 아는 내용이다. 가령 내 친구가 약사고 나는 직장인이다. 그런데 내가 내 친구인 약사의 소득이 나보다 3배 많은 것을 알고 있다. 그런데 연말정산에 토해내는 세금은 나보다 적다. 이런 일이 허다한 게 현재 우리의 세금 구조이다.
전문가들은 우리나라의 지하경제를 약 25% 정도로 보고 있다. 이렇게 소득파악 자체가 되지 않는 상황에서 무슨 증세를 논한단 말인가. 일례로 캐나다의 경우는 국민들이 자발적으로 자신의 소득을 신고한다. 캐나다는 파악되지 않은 지하경제가 미비하다. 이런 상황이라면 특정 계층에 대한 증세 확대가 얼마든지 가능하다. 그리고 이런 구조에서만 공정한 증세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소득 파악이 기본적으로 되지 않은 상황에서 누군가만 증세를 한다? 당연히 공정하지 못한 처사라고 반발이 거세게 나올 수밖에 없다. 소득파악은 되지도 않은 상태에서 보편적 복지를 논하고 있는 우리 현실을 알아야 한다. 소득파악이 되어야 증세를 할 것이며, 소득 파악이 되어야 선별적 복지도 할 것이다. 그런데 무조건 많이 퍼주자는 식으로 정치권은 나가고 있다.”
-그럼 앞서 말한 연금에 대한 실질적인 데이터가 있나.
“일단 우리는 공무원연금, 국민연금, 군인연금, 사학연금을 관장하는 모든 연금기관에 자료공개를 요청한다. 웬만하면 공개를 요청하면 자료를 보내준다. 우리가 원하는 세부자료는 자료가 없다면서 피하기도 하지만 일단 기본적인 자료라도 보내준다. 그런데 유독 사학연금은 절대로 자료를 주지 않는다. 우리에게 자료가 없다고 말한다. 수많은 사람들의 자금을 관리하는데 자료가 없다? 어불성설 아닌가. 이렇듯 가장 강력하게 자신들의 연금을 수호하는 집단은 사학연금이다. 이 때문에 사학연금에 대한 자료는 가지고 있지 않다.
먼저 국민연금에 대한 자료를 보면 현재 소득대체율 50%로 통과가 될 경우 2060년이 되면 세금(부과방식 비용률, 국민연금분)의 25.3%를 걷어야만 운영이 가능하다. 지금 우리가 내는 세금이 고작 9%(국민연금분)이다. 그런데 25%를 낸다? 말도 안된다는 얘기다. 한국은 다른 나라에 비해 세금이 적은 편이다. 국가가 국민이 번 돈을 별로 걷어가지 않는다는 이야기다. 북유럽이나 미국만 하더라도 세금이 모두 두 자리 수이다. 그런데 한국은 9%정도를 세금으로만 내고 있다. 그런데 갑자기 25%를 세금으로 낸다? 그럼 소득대체율 40%는 어떨까. 동일하게 2060년이 도래하면 21.4%를 세금으로 내야한다. 역시나 20%가 넘는 엄청난 세금이다. 한마디로 40%나 50%나 나중에 가면 남아있는 연금이 없다는 이야기다.”
-그럼 공무원 연금은 어떤가.
"공무원 연금은 작년도 수치를 보면 총 연금 수령자는 약 36만 명이다. 현재 연금의 총액은 약 10조에 달한다. 이들이 수령한 연금액의 평균을 내보면 자신들이 납입한 연금에 보통 6배를 수령하고 있다. 이것은 처음 자신이 납입했을 때 낸 돈의 가치에 물가상승률 등을 적용해서 분석한 것이다. 생각을 해보자. 자기가 낸 돈의 6배를 받는다면 이게 말이 되는가.
본래 자기가 낸 돈을 그대로만 받아가야 되는 것 아닌가. 그런데 어떻게 6배를 받는다는 말인가. 아마도 이 이야기 듣고 뚜껑 열릴 사람 많을 것이다. 문제는 이 공무원 연금 수령자의 대부분은 우리 사회에서 비교적 소득이 좋은 집단이라는 것이다. 연금 수령자의 대부분이 최소한 자신의 집이 있다. 그리고 모아둔 돈도 있고, 심지어 동산(動産)을 가지고 있다. 이런 이유에서 우리 주변에 공무원 연금을 받고 있는 사람들을 만나보면 매달 받는 돈은 많은데, 돈을 쓸데가 없다고 한다. 왜 이런 계층의 사람들이 많은 돈을 받아야 하는 것인가.
납세자 연맹이 계산해보니, 현재 공무원 연금이나 국민연금을 폐지한다고 해도 자신이 낸 돈에 조금이라도 이자를 받을 수 있다. 연금이 고갈되기 전에 하루빨리 폐지해야 한다."
-현재까지 납세자 연맹에서 파악한 연금에 관한 내용 중 아직 알려지지 않은 부분은 없나.
"공무원 연금 수령자 중에 부부공무원이 있다. 36만명의 연금수령자 중 약 1만쌍이 부부공무원이다. 숫자로는 2만명인 셈이다. 이 부부 공무원들이 평균 560만원 정도를 매달 받아가고 있다. 이 액수는 결코 작은 액수가 아니다. 흥미로운 점은 부부 중에 한 사람이 죽어도 연금액의 70% 정도가 지급된다는 것이다. 이것을 평균 액수로 환산하면 약 450만원을 받는 셈이다. 죽은 사람에 대해서도 연금을 끝까지 제공한다는 것이다. 과연 이것이 옳은 구조인가. 과연 홀로사는 노인이 한달에 얼마를 쓸까. 노후에 어디에 돈을 쓸까. 이 많은 돈을 어디에 쓴단 말인가."
부부공무원연금수급자 1만1383쌍 가구당 평균 수급액은 558만원이다
-부부수급자는 11,383쌍이 월635억, 가구당평균월액 558만원(2014.10월기준)
-22,766명/2013년말 퇴직연금수급자 321,098 =7%
자료: 납세자 연맹
-공무원들은 자신들이 박봉(薄俸)이라고 한다. 공무원들은 비교적 중산층 이하 계층 아닌가.
“우리가 분석한 자료 중 흥미로운 자료가 있다. 사실 우리는 공무원들의 급여 평균치를 공무원 연금공단에 요청했는데 받지 못했다. 이 때문에 다른 방법으로 우리는 공무원들의 평균 연봉을 추적해봤다. 우리가 내는 세금 중에 지역건강보험이라는 게 있다. 이것은 온전히 개인의 연봉에 비례해 내는 것이다. 이 지역건강보험의 평균치를 국민연금과 비교해보면 얼마를 버는지 알 수 있다. 비교해보았더니 공무원은 국민보다 약2.4배 많은 연봉을 받고 있더라. 공무원이 박봉이라는 말은 공무원들의 주장일 뿐이다.
이 외에도 고위 관료직들의 연봉은 상당하다. 예를 들어 서울시장, 대법원장, 판사들의 연봉이 많은 것은 다 알려진 사실이다. 이들의 연봉은 사실 상위 1%에 속하는 집단이다. 이런 고위 관료직들이 퇴직 후에 매달 평균 7~800만원의 연금을 수령해간다. 과연 이런 구조가 본래 연금의 취지인 사회 취약계층을 돕겠다는 기조에 맞는 것인가.
그런데 공무원 연금을 공개하라고 하니 공개하기는 했는데 애매한 부분이 있다. 연금의 평균 수령액이 210만원이란다. 그런데 여기에도 함정이 있다. 이 수치는 일시 퇴직금과 연금을 합산한 것의 평균이라는 것이다.
공무원 연금은 원하면 한 번에 납입금에 큰 부분을 일시에 받아갈 수도 있다. 그런데 이렇게 일시금을 합쳐서 공개를 하면, 당연히 연금으로 나중에 받는 부분의 수령액은 줄어든다. 당연히 수치상으로 적게 나올 수밖에 없다. 일시금 부분도 장기 연금 수령방식으로 계산하지 않았다는 얘기다."
-그럼 앞으로 제대로 된 연금 개혁이 이루어질 수 있나.
"각 연금 수령자들의 수는 날로 늘어 수백만에 달하고 노령화 사회에 접어들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무조건적으로 퍼주기 식의 연금법은 국가를 파산에 이르게 한다. 하루빨리 적립식 연금을 폐지해야 하는 이유다.
내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과거 프랑스 대혁명과 같은 개편이 필요한 것 같다. 특권계층의 배만 불리는 이런 연금의 구조를 완전히 개혁하지 않고서는 본래 사회 취약계층을 보호하자는 취지를 되살릴 방법은 없을 것이다."
-올해 연말정산에 대해 다시 환급을 해준다고 하는데 이번 연말정산에 대해 아는 바 없나.
“이번 연말정산에서 1조1461억 원의 근로자 증세는 없다고 했는데 실제는 아니었다.
특히 연봉 5500만 원 이하는 증세 없다고 했지만, 이 구간 근로자 205만 명이 증세됐고, 특히 연봉 3000만~4000만 원 근로자의 경우 52%가 세 부담이 늘었다.
원천징수를 덜해서 추가 납부세액이 많이 발생했다고 했지만, 이것도 사실이 아니다. 연봉과 부양가족 수 등을 감안해 매달 원천징수할 세액을 정한 간이세액표를 만들 당시 세액공제전환으로 같은 소득구간 내에서도 세 부담 편차가 종전보다 훨씬 커질 것이라는 점을 감안하지 못했다. 그 결과 같은 연봉3000만원이라도 누구는 50만 원 감세, 누구는 50만 원 증세됐다. 원천징수세액을 조정할 때 소득구간의 평균값만 썼기 때문에 나타난 오류다.
실제 추가납부인원은 전년대비 117만 명 감소한 316만 명이지만 1인 평균 추가납부금액(64만원)은 전년보다 64%나 증가했다. 급여 인상액의 절반, 상여금 전액 등을 추가 납부해야 할 근로소득자들이 속속 등장했다. 심지어 한달치 월급을 통째로 토해낸 사람도 나왔다. 결국 이들이 느끼는 체감 증세효과가 워낙 컸던 점이 ‘연말정산 파동’의 주요 원인이었던 셈이다.”
- 글 | 김동연 월간조선 기자/ 자동차 칼럼니스트
약력 김선택(金善澤) 現 한국납세자연맹 회장 現 세계납세자연맹 부회장 2008년 청와대 국세행정 선진화 자문위원 2003년 재정경제부 소득세법정비위원
- 연금관련 기관 중 유일하게 사학연금은 자료공개요구 불응해
- 가난한 국민의 편에 서야할 야당조차 연금개혁에 손놓고 있다
□김용갑 새누리당 고문
2016.08.08 박근혜 후보 '원로 7인회' 멤버
"청와대에선 같은 新聞 봐도 세상과 다르게 해석… 人의 帳幕 쳐져 있어" "내가 민정수석땐 民心 전달… 전두환 前대통령, 내 보고에 종일 일이 손에 안잡혔다더라… 직언하는 데도 기술 있어야"
"1987년 11월 大選 기간에 군부 쿠데타 모의 진행… 대통령에게 보고 않고 주동자와 몰래 담판 지어"
박근혜 후보의 원로 모임 '7인회' 멤버인 김용갑(80) 새누리당 고문에게서 연락이 왔다. 우병우 민정수석 논란을 보면서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는 것이다.
―박 대통령을 직접 만나서 하면 되지, 신문 인터뷰를 통해 전달해야 하나?
"그게, 허허….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다른 스타일이지 않나. 그렇다고 전혀 섭섭 안 해. 당초 그쪽에서 도와달라고 부탁한 적이 없고, 내가 좋아서 박근혜를 택한 거니까."
―박 대통령이 김 고문 같은 분들을 만나는 것이 그렇게 어려운 일일까?
"많은 사람이 바른길을 가르쳐주고 있지 않나, 신문에서도 조언해주고 있고. 내가 만나서 말해봐야 숟가락 하나 더 얹는 격이지."
―대통령이 여론과 민심을 모를 리는 없을 테고?
"신문·방송·인터넷이 있고, 또 대통령에게는 국정원·경찰 등 온갖 군데서 정보가 들어와. 문제는 청와대에 들어가면, 같은 신문을 보고 글자는 같은데도 바깥세상과 다른 해석을 해. 구중궁궐처럼 인의 장막이 쳐져 있어. 세상 민심과 안 맞는 선택과 결정이 나오는 거야. 이럴 때 민정수석의 역할이 있는 거야. 지금 우병우 사태를 보면서, 내 경험(1986~1988년 민정수석)을 말해주고 싶은 거지."
'강성(强性)' '원조보수'로만 비쳤던 그에게 이런 면이 있었나 싶었다. 다음 날 중식당에서 만나 대화를 이어갔다.
▲김용갑 고문은 “직언하는 참모 못지않게 받아주는 보스가 훌륭하다”고 말했다. /성형주 기자
―논란이 된 우병우 민정수석의 거취 문제에 대해 박 대통령은 침묵하는데.
"그게 그 양반 스타일이지. 내부감찰에서 특별한 게 안 나오면 그냥 갈 수 있다고 생각하지."
―우병우를 해임해야 한다고 보나?
"설령 죄가 없다 해도 이미 신뢰를 잃었어. 나라면 그런 소리가 들리기 전에 사표를 내겠다. 시간이 지날수록 이 문제로 정권의 동력이 떨어질 거다. 박근혜 후보 시절에 '당선되면 민정수석 한 명만 똑똑한 사람 써도 나라를 잘 운영할 수 있다. 검찰 출신을 절대 뽑지 말라'고 몇 번 말했다. 이 양반은 '그렇게 걱정되면 바깥에서 전화를 걸어달라'고 했다. 그건 불가능하다. 대통령께 전화 걸도록 측근들이 놔두겠나."
―그런데 왜 검찰 출신은 안 된다고 특정했나?
"상명하복에 익숙해 거슬리는 직언을 못 하니까. 민정수석은 세상 바닥 민심을 가감 없이 전하고 해법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하는 자리다. 함께 일할 사람을 잘 써야지."
―사람 잘 쓰는 문제는 민정수석만 아니라 참모 전체에 해당된다.
"다들 대통령의 심기를 좋게 할 뿐, '노(No)'라고 한 사람이 없었던 것 같아. 민정수석 한 사람이라도 제대로 직언해줘도…. 내가 1986년 초 민정수석이 됐을 때 개헌 문제로 시국이 시끄러웠다. 그해 4월 야당에서 직선제를 위한 대규모 집회를 대전공설운동장에서 열었어. 점퍼 차림에 선글라스를 끼고 들어가 지켜봤다. 발각되면 난리 났겠지만. 대통령에게 보고하려면 내 눈으로 현장을 봐야 되겠다 싶었다."
―어떤 내용의 보고였나?
"개헌 논의를 막아왔던 전두환 대통령은 차선책으로 '내각제' 구상을 하고 있었다. 독대 자리에서 내가 '막아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선제적으로 해야 한다. 내각제와 직선제 어느 쪽이 좋은지 공론화시키자'고 했다. 그 말에 대통령의 고민이 해결된 거야. 바로 다음 날 개헌 논의를 공식화하는 담화를 준비시켰어."
―개헌 논의는 1년쯤 끌다가 원래대로 돌아가는 '4·13 호헌(護憲)'으로 끝났는데?
"서로 내각제와 직선제를 고집하니 타협이 될 리 없었지. 개헌 논의 중단을 선언하자, 시국이 더욱 혼돈에 빠졌다. 그 절정이 '넥타이 부대'라는 회사원들까지 가담한 '6·10' 시위였다. 그날 밤 3000여 명이 명동성당으로 들어갔다. 다음 날 내가 몰래 성당 안으로 들어가 살펴본 뒤 '퇴로를 열어주자'고 경찰 지휘부에게 말했다. 그렇게 해서 대다수 농성자들은 빠져나갔다."
―세간에는 '계엄령' 소문도 돌았는데?
"그해 6월 14일 청와대 녹지원에서 대통령이 시국수습 대책 회의를 소집했다. 군과 경찰 수뇌부도 참석했고. 계엄령이 논의됐지만, 치안본부장(경찰청장)이 경찰력으로 수습할 수 있다고 했다. 대통령도 실제 그런 의사가 없었을 거다. '단임(單任) 실천'에 대한 분명한 신념이 있었기에, 계엄령을 선포하면 평화적 정권 교체는 물 건너가는 것이니까."
―직선제를 수용한 '6·29선언'에 막후 역할을 했다고 들었는데?
"6월 18일 대통령 독대 자리에서 '각하 지금 임기가 얼마 남았습니까?'라고 시작하자, 이분이 당황한 기색을 보였어. 내가 '8개월 정도 남았는데 지금 상태로 민심을 수습할 수 있겠나. 특단의 대책이 필요하다. 직선제를 받아주고 싸워서 이기면 되지 않느냐. 설령 져도 정치 보복이 없을 거다'며 한 시간가량 보고했다. '필사즉생 필생즉사(必死則生 必生則死)'라는 문구도 써가며. 물론 DJ도 풀어줘 야당 후보끼리 경쟁시키는 등 정치공학적 계산까지도 해놓은 거지."
―'직선제 수용' 보고에 대한 전 대통령의 반응은?
"이분이 '지금 당장 노 대표에게 가서 내 특명이라고 하고 그대로 설명하라'고 했다. 하지만 노태우 대표는 '내가 전국을 돌면서 내각제만이 살길이라고 외쳤는데 어떻게 갑자기 말을 바꾸느냐'며 못 받아들이겠다는 의사를 비쳤다. 다음 날 대통령이 '노 대표의 반응은 어땠나?'고 묻기에, 부정적이었다고 할 수가 없어 '검토 중인 모양입니다'라고 답했다. 그러자 바로 비서실장을 불러 '오늘 안가(安家)에서 노대표와 저녁을 준비하라'고 지시했다."
―전두환-노태우의 안가 회동 결과는?
"다음 날인 20일 아침 전 대통령이 '노 대표가 지도자의 정치 노선이 왔다 갔다 하면 되겠냐고 하던데'라고 했다. 내가 '나라를 살려야 하는 마당에 정치노선이 뭐 그리 대단합니까'라고 맞받았다. 전 대통령이 '그렇지, 지금 정치 노선이 중요한 게 아니지'라고 혼자 중얼거렸다. 내 인생에서 민정수석 시절이 가장 보람이 있었다."
―5공에서 민정수석을 지낸 뒤 6공 정부에서 총무처 장관으로 발탁됐는데?
"내가 노태우 후보의 당선에 기여했다고 봤던 것 같다."
―노태우 정부 출범 직후 '5공 청산'이 시작됐고 전 대통령이 백담사로 쫓겨갈 때 어떠했나?
"역사의 큰 흐름이었다. 6공 정부 초기에 핵심 실세 회의가 있었다. 나도 그 멤버에 들어 있었다. 어느 날 불러서 갔더니 '오늘부터 전두환을 귀향시키는 논의를 해보자'고 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내 감정이 폭발했다. '전 대통령은 6·29를 받아들였고 정권을 잡도록 뒷받침했다. 당신들은 5공에서 장관 국회의원 등을 지냈다. 이렇게 해도 되는가.' 그러면서 자리를 박차고 나왔다."
―대통령 선거 유세가 한창이던 1987년 11월 군부 쿠데타 모의가 있었다고 공개했는데?
"유세 동안 지역감정과 사회 혼란이 심화되면서 그런 일이 있었다. 육사 후배인 보안사의 한 책임자가 '보안사령관에게 아직 보고는 안 했지만 너무 걱정된다'며 제보했다."
―신뢰할 만한 정보인가? 군부에서 단순히 불만을 토로하는 정도를 쿠데타 모의로 과대 해석한 것은 아닌가?
"가담자들은 예비역인 육사 11기와 내 동기(17기), 현역 장성 등으로 대부분 하나회 출신이었다. 내가 다 아는 사람들이었다."
―전 대통령에게 보고됐고 수사가 이뤄졌나?
"직무상 대통령께 보고해야 하지만, 그 순간 계엄령이 선포되고 가담자 체포와 함께 선거가 중단된다. 쿠데타 모의 수사 결과를 발표하면 '권력 연장을 위한 조작된 친위쿠데타'라고 들고일어날 것이다.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엄청나게 고민했다."
―청와대 참모가 자기 선에서 그런 중대한 사안을 처리해도 되나?
"안무혁 안기부장과 상의하려고 전화하니, 강릉에 있었고 술을 마신 것 같았다. 괜히 화가 나 '거기서 뭐하느냐'로 시작돼 언쟁이 붙는 바람에 정작 그 말을 못 꺼냈다. 그때 말을 꺼냈으면 감청이 됐을 것이다. 대통령께 보고도 안 한 정보였는데, 나까지 큰일을 치를 뻔했다."
―쿠데타 모의 건은 어떻게 수습했나?
"플라자호텔에서 주동자를 만났다. 그는 '지금 상태로 가면 나라를 송두리째 김일성이에게 넘겨준다. 이렇게 한 당신(김용갑)이 역적이다'고 했다. 내가 '안 멈추면 내일 아침 대통령께 바로 보고하겠다. 24시간 내 출국하면 비밀에 부치겠다'고 최후통첩을 했다. 그는 출국했고 그 뒤 군부 동향에 촉각을 세웠다."
―이들의 실명을 왜 밝히지 않나?
"그건 밝힐 수 없다. 그 사람들이 타격받고, 지금 와서 '그런 일 없었다'고 하면 그만 아닌가."
―민정수석 시절 전 대통령 앞에서 '땡 전(全) 뉴스'에 대한 언급도 했다고?
"독대 자리에서 대통령 기분이 좋은 걸 보고는 '땡 전 뉴스'를 꺼냈다. '9시 땡하면 전두환 대통령 동정(動靜) 뉴스가 나와 시청자들은 TV를 껐다가 5분 뒤에 켠다. KAL 기가 러시아 상공에서 격추돼 269명이 숨졌을 때도 뉴스 첫머리에 대통령의 새마을 청소 동정이 나갔다'고 말했다. 전 대통령이 '내가 그런 거 하지 말라고 했는데…'라며 얼굴을 붉혔다. 그 뒤로 바뀌었다."
―면전에서 그런 말을 하기는 쉽지 않은데?
경호실장이 '각하께서 아침에 민정수석한테 보고받고 나면 온종일 일이 손에 안 잡힌다고 하더라'고 둘러 말했다. 사실 직언하는 데는 기술도 있어야 한다."
―직언의 기술이라면?
"퇴임을 앞두고 연희동 사저에 에스컬레이터를 설치하는 등 대대적으로 개조하려고 했다. 민심이 안 좋았다. 하루는 '각하, 택시를 타니까 운전사가 연희동에 아방궁을 짓는다는 소문이 들린다고 합디다. 그런 일이 있습니까?'라고 했지. 그래서 집 외형은 그대로 두고 안에만 조금 손보는 걸로 그쳤다. 동생 전경환을 국회의원 시켜줄 마음을 갖고 내 의사를 물었을 때 '안 됩니다. 전경환은 정권이 바뀌면 대가를 치를 수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자신의 기분 하나 맞춰주지 않은 내게 많이 섭섭했을 것이다."
―직언을 할 수 있는 참모도 대단하지만, 이를 받아주는 보스야말로 훌륭한 거다.
"손바닥도 마주쳐야 소리가 나지. 직언을 받아주는 게 더 어렵다. 지금은 너무 저평가돼 있지만 전 대통령은 그런 점에서 정말 통이 컸다."
조선일보 최보식 선임기자
□김종인
1) 2016.03.26 가인 김병로를 말하다
김종인 더민주 비상대책위 대표는 그간 언론 인터뷰에서 가장 존경하는 인물로 조부인 가인 김병로 초대 대법원장을 꼽았다. 인격적인 흠모와는 별도로 조부에게 배운 것이 한둘이 아니라고 했다.
조부에게서 원칙과 결단 배워
공천 구상 추진에 두려움 없었다
경제적 약자 부양하지 않으면
사회 시스템 붕괴될 것
그는 3월 13일 이뤄진 4월호 <월간중앙> 인터뷰를 통해 조부 가인의 인생 행로와 자신의 정치철학을 피력했다. 인터뷰에서 그는 자신의 트레이드마크인 경제민주화 소신과 가인의 해방 직후 토지개혁 구상이 계보적인 것이며 동일한 테마라고 말했다. 해방 공간에서나 지금이나 경제적 약자에 대한 배려가 이뤄지지 않으면 사회 시스템이 붕괴된다는 철학이다. 가인이 일제시대부터 소작인의 열악한 생존조건에 주목하며 간직했던 토지개혁 사상이 자신의 경제민주화 철학의 뿌리가 됐다는 것을 처음으로 밝힌 것이다.
김 대표는 만 4세가 되던 해(1944년)에 부친 김재열이 지병으로 작고했다. 직후부터 가인의 손에 양육되었다. 김 대표의 부친 김재열의 요절은 가인 김병로에게는 ‘참척(慘慽) 의 슬픔’이었다. 둘째 아들 재열의 재능은 뛰어났다. 보성전문학교와 큐슈(九州) 제국대학 법학부를 졸업하고, 일본 고등문관시험 사법과에 합격하여 변호사 시보까지 마친 상태였다. 변호사 개업을 하기 직전, 그것도 해방을 불과 1년 앞두고 병마로 그만 작고했다.
지금도 가인의 집안 내력을 잘 아는 사람들은 “김재열 변호사가 살았다면 가인의 대를 잇는 큰 법조인으로 성장했을 것”이라 말하고 있다. 김 변호사는 1936년 이필기 여사와 결혼하여 종은(鍾恩), 종현(鍾賢) 자매와 아들 종인(鍾仁) 3남매를 낳았다. 23세 때인 1963년, 청년 김종인은 당시 통합 야당의 대표 김병로의 비서로 처음 정치를 배웠다. 그는 조부 가인을 “결단력이 강하고 약자를 배려했다”고 회상했다.
▲가인 김병로 초대 대법원장.
일제시대 변호사로서 가인은 두 부류의 사람들을 주로 변호했다. 첫째가 시국사범, 즉 독립운동가 그룹이다. 두 번째는 농민과 노동자들이다. 일제 강점기 많은 농민과 노동자가 소작쟁의, 노동쟁의로 재판을 받았다. 가인은 이들을 위해 기꺼이 법정에 섰다. 가인은 종종 쟁의 현장을 방문해 실사를 했는데 오지도 마다하지 않았다. 유명한 함경북도 갑산 화전민 방화사건 때도 현장을 방문했다. 일제의 만행이었음을 밝혀냈다. 사선을 넘을 뻔했지만 구사일생으로 살아 돌아왔다.
“내가 주장하는 경제민주화 철학도 사실은 조부로부터 비롯됐다. 조부는 해방 직후 한민당 창당의 주역을 맡았지만 토지개혁 문제로 당과 결별했다. 한민당 주류는 유상몰수 유상배분을 주장했고, 조부는 유상몰수·무상분배를 주장했다. 당시 소작인이 땅을 살 돈이 어디 있었겠나? 조부는 당시 자본주의 세계의 흐름을 소상히 파악하고 있었던 것 같다. 경제적 약자를 부양하지 않으면 사회 시스템이 붕괴될 수 있다는 자각이 있었다.
1945년 7월의 포츠담선언에도 일본 경제의 재편 원칙이 천명돼 있었다. 이후 맥아더 사령부가 일본을 통치할 때 재벌해체와 독점금지, 농지개혁을 통한 자작농 중심의 농업경영을 관철하려 했다. 패전 독일에서도 콘체른 해체가 이뤄지는데, 콘체른을 해체하지 않으면 시장경제의 효율에도 정치의 민주화에도 장애가 된다는 걸 인식한 결과로 볼 수 있다.
1949년 중국이 공산화되고 스탈린이 베를린을 봉쇄하면서 미국의 관심은 패전국 내부의 개혁보다 집단 방위체제 구축에 쏠렸다. 어쨌거나 조부는 토지개혁을 제대로 하지 않으면 공산화될 위험이 크다고 본 선구자였다. 그때 동유럽 농업국가 거의 전부가 토지 문제를 매개로 급격하게 공산화된 거 아닌가? 경제민주화란 것도 결국 제대로 경제개혁을 못하면 자본주의 시스템이 위험해진다는 거니까, 조부와 나의 생각은 그 근본이 같은 것이다.”
토지에 대한 가인의 인식은 철저했다고 한다. 일제강점기 각종 소작쟁의의 변호사인으로서 그는 소작제도의 실상을 너무나도 잘 파악하고 있었다. 소작제도야말로 소작인에 대한 수탈 이외의 아무것도 아니었다. 토지의 취득 과정 또한 대부분 수탈의 축적 과정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파악했다.
실제 당시 우리나라의 실정을 보면 남북을 통틀어 490만여 정보 농지 중 60%에 해당하는 295만 정보는 3%도 못 되는 지주가 독점했다. 더구나 이들은 연 30% 이상의 가혹한 소작료를 받고 있었다. 가인은 그 당시 공산주의의 위협을 받고 있는 유럽의 많은 나라가 공산주의 침투 방지의 일환으로 토지개혁의 방향으로 나가고 있는 점에 주목했다.
가인은 1963년 박정희와 김종필이 만든 공화당에 대항하는 야당세력을 구축하기 위해 민정당(民政黨)을 창당했다. 군정종식을 그는 부르짖었다. 그때 나이가 77세. 가인은 허정의 신정당, 이범석의 민우당 등과 무조건 합당한다는 원칙에 합의하며 야권통합을 추진했다. 이들은 ‘국민에게 보내는 성명’을 발표하여 국민의 지지를 받는 단일후보를 내겠다고 선언했다. 이어 세 당이 통합한 국민의당 창당 발기인 대회가 열려 가인이 대표 최고위원, 이범석과 허정이 최고위원을 맡았다. 김종인은 가인의 비서로 당시 야당 정치권의 이합집산을 가장 가까이에서 관찰했다.
“17대 국회 때부터 경제민주화를 실천할 대통령 감을 찾았는데, 이명박과 박근혜 두 사람 중 박근혜를 더 적임자로 생각했다. 이제는 그런 짓 안 한다. 정치인들은 후보 되기 전과 후보 된 후 다르고, 대통령이 되면 또 달라지더라. 내가 이제 사람을 믿을 수 없게 되었다.
조부는 정치인의 거짓말을 꿰뚫었다. 윤보선 같은 이는 63년 야당 후보 단일화 때 각서까지 썼다. ‘자신은 건전한 야당 하기 위해 물심양면으로 지원만 하지 대통령 후보나 당직을 갖지 않는다’고 약속했다. 그런데 그 약속을 바로 파기하더라. 조부에게 물으니 ‘정치인의 각서는 효력을 갖지 못하는 것’이라 말씀하셨다. 한국 정치의 서글픈 역사이지만 이게 현실이다.”
결국 63년 대선에서 야당의 대통령 후보 단일화는 이뤄지지 않았다. 최근 야당 통합에 실패한 김 대표의 실루엣이 가인의 모습과 겹친다.
“63년 대선은 야당 인사들이 당시 공화당의 다양한 정치공작에 무력하게 넘어갔다. 소위 말해서 ‘사쿠라’가 만발했던 시기였다. 조부가 아무리 노력해도 그런 상황을 통제할 순 없었을 것이다. 재밌는 것은 조부 역시 윤보선과 허정의 후보 단일화를 거의 불가능한 것으로 봤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언론과 여론의 압력이 워낙 거셌다. 또 성격 상 명분 있는 일을 시작했으니 끝을 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조부는 자신은 씨를 뿌리는 사람이지 거두는 사람이 아니라는 말을 자주 했다. 이것이 조부의 스타일이다. 단일화 노력이 실패로 돌아가면 정계를 떠나고자 했고, 실제로도 그렇게 됐다.”
야당이 분열된 상태로 총선에 임하는 지금하고 상황이 비슷하다. 1963년 9월 당시 야 3당은 국회의원 선거 지역구를 나눠 갖는 협상을 끝내고 후보 단일화를 모색했다. 대통령 후보지명대회 전날인 9월 4일 가인과 윤보선, 허정, 이범석 등이 모여 단판을 짓는데 결론이 나지 않았다. 당시 23세 청년 김종인도 참석해 현장을 생생하게 목격했다. 윤보선, 허정 두 사람 중 누구도 양보할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이때 이범석 장군이 두 사람에게 일갈했다. “도대체 당신들은 날 때부터 대통령 후보였소?” 김 대표는 “당시 윤보선, 허정 두 사람의 모습을 잘 기억한다. 한 당에 대권후보가 둘이면 당이 유지되지 않는다는 것을 그때의 경험으로 확실히 알게 됐다”고 말했다.
다음은 일문일답.
질의 :63년 9월 막판까지 후보 단일화는 이뤄지지 않았다. 가인을 추대하자는 움직임도 있었다는데.
응답 :“세 당이 통합한 국민의당의 후보 단일화 협상이 지지부진해지면서 엄청난 여론의 비판에 직면했다. 대통령 후보지명대회 전날인 9월 4일 인현동 우리 집에서 윤보선, 허정, 이범석 3인이 모여 최종 조율했다. 이 자리에서 이범석 장군이 조부를 대통령 후보로 밀자는 얘기를 꺼냈다. 이때 조부께서 단호하게 거절했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선거일을 10일 앞두고 허정 후보가 사퇴해서 자동적으로 단일화가 이뤄졌다. 하지만 야당은 만신창이가 된 상태에서 투표일을 맞았다. 그럼에도 박정희 후보와 윤보선 후보 간의 표 차는 불과 13만 5000표 정도밖에 나지 않았다. 만일 후보 단일화가 순조롭게 이뤄졌다면 한국 현대정치사는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전개됐을 지도 모른다.”
질의 :가인의 운명처럼 내년 대선 때 야당 후보들을 단일화하는 일을 맡게 되지 않을까?
응답 :“유력 정치인이란 사람들의 말을 이제 잘 믿지 못하겠다.”
질의 :경제민주화라는 철학을 정책으로 입안해 추진할 대통령이 필요하다고 말한 적이 있다. 그 사람을 찾아야 하지 않나?
응답 :“지금까지 대한민국의 거의 모든 유력 정치인을 만나 대화를 해봤는데 아직 찾지 못했다.”
질의 :문재인 전 대표도 좀 부족하다는 의미인가?
응답 :“좀 부족한 게 아니라 많이 부족하다. 더 공부해야 한다.”
질의 :그런 점에서 손학규 같은 정치인은 어떤 자질을 가진 것으로 평가하나?
응답 :“몇 차례 대화를 나눠 봤는데 아직 충분히 준비된 사람으로 느끼진 못했다.”
질의 :경제민주화가 중요한 가치라면 그것은 주장하는 사람이 아니라 국민에게 필요하기 때문 아닌가? 그런 철학을 실천할 사람을 발견하지 못했다면 본인이라도 나서야 하는 것 아닌가?
응답 :“나보고 대선에 나가라고?”
질의 :리더십과 카리스마를 갖췄다는 평가도 있다.
응답 :“정치적으로 후회할 일은 하지 않는다. 내가 특정한 목표를 갖고 이 당에 들어온 게 아니다. 사심을 갖고 이 당에 들어왔다면 지금처럼 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래서 마음이 편하다. 세력을 만들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이걸 분명히 알아야 한다.”
질의 :가인의 삶을 돌아볼 때 가장 가슴 아픈 장면은 6·25 때 고향으로 피란 간 부인을 공비들이 희생시킨 일이다. 왜 부산 피란지로 같이 데려가지 못했을까?
응답 :“공과 사를 엄격히 가렸던 분이다. 1950년 6월 27일 아침 가족들을 모아놓고 하신 말씀이 기억난다. ‘나는 국가에 속한 몸이니까 정부가 가는 곳으로 움직여야 한다. 그러나 가족들은 나로 인해 혜택을 받을 생각을 해선 안 된다.’ 그래서 할머님이 친정인 전남 담양으로 가셨는데, 9·28 수복 며칠 뒤 마을을 덮친 공비들에 의해 무참히 사살되었다.”
질의 :조부의 슬픔이 컸겠다.
응답 :“슬픔을 내색하지 않는 분이다. 가족주의란 게 없는 분이다. 가족에 대한 애틋한 생각으로 다른 일에 욕심을 내거나 그르치는 일을 극력 피하셨다. 소소한 정을 절대로 내비치지 않았다. 자손들의 장래에 대해서도 담담했다. 능력이 있으면 추구하되, 능력이 없으면서 뭔가에 욕심 내는 일을 싫어하셨다. 사람이란 원래 능력에 걸맞게 사는 것이란 철학이 확고했다. 그러니 가족에 대한 애착 때문에 욕심이 승하는 일이 없게 된 것이다.”
질의 :그 일로 인해 공산주의를 반대하는 가인의 생각이 더 확고해진 것인가?
응답 :“조부는 일제 때 신간회 운동을 주도하는 등 독립운동 세력 내 좌우 합작운동에 큰 힘을 쏟았다. 해방 직후에도 중도 노선을 걸으며 통일정부 수립을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반공 의식은 굉장히 강했던 분이다. 해방 직후 양주군 노해면 창동리(지금의 창동)에 같이 살던 벽초 홍명희와 사상에 대한 소회를 나눈 적이 있었다고 한다. 그때 이미 벽초는 북으로, 가인은 남에 남아야 하는 이유를 서로에게 토로했다고 한다. 할머님이 공비의 흉탄에 돌아가신 일이 분명히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물론 내색하진 않으셨다. 그 일이 공산주의를 바라보는 나의 시각에도 부지불식간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질의 :부친이 일찍 돌아가셔서 군 입대를 면제받았다. 그럼에도 군에 간 이유는 무엇인가? 조부의 권유가 있었나?
응답 :“구체적으로 군대를 갖다 와야 한다고 말씀하신 적은 없다. 그런데 조부께서는 남자는 태어나서 국가에 대한 의무를 다해야 한다는 말씀을 가끔 하셨다. 내가 혹시 군대에 가지 않을까 염려하며 하셨던 말씀이 아닐까 생각했다. 그런 분위기를 미리 감지한 것이다. 신체검사 통지서가 나오기도 전에 군에 자원입대해 육군본부와 당시 임진강 근처에 주둔했던 20사단에서 근무했다.”
가인은 사법부의 기초를 닦으며 반민특위 재판을 이끌던 1949년 10월 왼쪽 다리의 신경통이 발병했다. 처음에는 그렇게 심각하지 않았으나 골수염으로 판명됐고, 1950년 2월 왼쪽 다리의 무릎 이하를 끊어내는 큰 수술을 받았다. 김 대표는 조부가 투병했던 당시의 상황을 지금도 또렷하게 기억한다고 했다.
“조부의 다리 절단 수술을 보며 느낀 게 있다. 무엇이든 과단성이 없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원래 조부의 주치의가 있었는데 그 양반이 조부를 너무 무서워했던 것 같다. 조부의 용태를 있는 그대로 진단하고 의사로서 신속하게 조치를 취했어야 했다. 그렇게 했다면 발가락 몇 개를 절단하는 선에서 치료가 끝났을 것이다. 그것을 살리기 위해 결단을 미루다가 큰일을 낸 것이다.
그때 상황이 너무 크게 뇌리에 박혔다. 어떤 일에 직면해서 두려움에 조치를 미루면 언젠가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일이 커진다는 교훈이다. 경제정책도 마찬가지다. 부작용이 두려워 결단을 못 내리면 더 큰 화를 당할 수 있다는 것이다.”
질의 :가인 선생을 생각할 때 잊을 수 없는 장면 하나를 떠올린다면?
응답 :“장면 총리가 문병을 오셔서 할아버지에게 ‘인촌 김성수 선생도 돌아가시기 전에 종부성사를 했으니 당신도 하시라’고 권했다. 그러자 할아버지는 ‘내가 인생을 잘못 산 게 없는데 죽으면서 남의 신세를 지라고 하느냐’고 잘라 말씀하셨다. 장면 총리가 더 이상 아무 말을 못했던 기억이 난다.”
가인의 묘소는 강북구 수유동 북한산 순례길 안에 있다. 김 대표는“가인(街人)이라는 호 때문인지 당신의 묘소만 등산로 옆 길가에 있다. 등산객들이 돌아가는 게 싫으니 산소를 밟고 지나가 훼손이 되곤 한다. 하지만 할아버지의 뜻이라서 그대로 둘 생각”이라고 말했다. 가인이 쌓은 음덕이 김 대표의 총선 성과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궁금하다
한기홍 기자 glutton4@joongang.co.kr
2) 2016.08.19 퇴임 앞둔 더민주 김종인 대표, 本紙에 털어놓은 '한국 정치'
김종인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오는 27일 퇴임한다. 지난 1월 27일 비상대책위원장으로 취임한 이후 214일 만이다. 더민주는 김 대표 주도로 변신을 시도해 총선 승리를 맛봤다. 2007년과 2012년 대선, 2008년과 2012년 총선에서 전패(全敗)했던 더민주의 승리는 2004년 총선 이후 12년 만이었다. 대표직을 떠나는 김 대표는 더민주와 여야(與野) 정치권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지, 그리고 더민주 구성원들은 김 대표를 어떻게 평가하는지 함께 들어봤다.
김종인 대표는 18일 국회에서 본지와 만나 1월 비대위 대표 취임부터 7개월간의 소회와 여야의 현 상황, 그리고 내년 대선 전망을 이야기했다. 김 대표는 "패배 의식에 젖어 있던 당에 생기를 불어넣었다"며 "그러나 당의 껍데기는 안정돼 보이지만 내용적으로 여전히 불안정하다"고 평가했다. 김 대표는 "강경파 새 지도부가 들어서 내가 만들어 놓은 당의 안정을 조금이라도 해치면 당의 희망은 없어진다"고 했다. 내년 대선과 관련해선 "경제 민주화와 동북아 국제 정세를 제대로 알고 헤쳐 나갈 능력과 비전을 가진 사람이 나와야 하는데, 지금 여야에는 그런 사람이 보이지 않는다"고 말했다. 김 대표는 최근 기자들과 만나서는 "더민주로의 정권 교체가 최선이지만 경제 민주화 등 자격을 갖춘 후보가 야당에 없다면 다른 당 후보라도 지지할 수 있다"며 "당보다는 나라가 먼저 아니냐"고 했다.
다음은 일문일답.
―혈혈단신으로 야당에 와서 7개월을 보냈다.
"혼자 야당에 와서 비교적 성공적으로 총선 공천을 했고, 그 결과 1당이 됐다. 표를 얻는 방법도 모르고, 자기만족에 빠져 있고, 패배 의식에 젖어 있던 정당에 생기를 불어넣었다. 그것이 보람이고 성과다. 그런데 총선 이후 내가 경제 대안(代案)을 제시하기 위해 비상경제대책위를 만들고 인적 구성까지 끝냈는데, 이를 두고 '당 대표 더 하려고 저런다'고 이러쿵저러쿵하기에 당에 대한 관심이 아예 없어져 버렸다."
―그동안 한계나 벽은 없었나.
"외부적으로는 당이 안정된 것처럼 보일 것이다. 적어도 옛날처럼 시끄러운 소리는 안 나니까. 그러나 최근 강령의 '노동자' 문제, 사드(고고도 미사일 방어체계) 문제 등을 보면 새 당 대표가 선출된 뒤 현재 만들어진 안정을 해칠까 우려된다. 그러면 당은 희망이 없어진다. 특정 계파에 힘이 몰리는 현상도 걱정된다."
―친노, 친문 계파를 의미하나.
"(즉답 대신) 다수파는 당의 안정을 위해 양보하는 자세를 가져야 하는데 현재 그런 기미가 안 보인다. 지나치게 한쪽으로 가게 되면 당이 불안정해진다."
―경제 민주화를 할 수 있는 후보라면 여야(與野)를 가리지 않고 돕겠다는 생각이라고 들었는데.
"경제 민주화를 선거에 적당히 이용할 수 있겠지만 나를 속일 수는 없다. 물론 내가 한 번은 속았지만(웃음). 경제 민주화에 대해 이해를 하고 신념까지 갖춘 후보가 있는지 지금 보고 있다. 그런데 새누리당의 DNA는 경제 민주화를 하기가 굉장히 어렵게 돼 있다."
―그럼 야권에서는 누가 경제 민주화를 제대로 할 수 있다고 보나.
"안 보인다."
김 대표는 사석에서는 미국에서 공화당 트럼프 후보에 대한 반감으로 민주당 소속인 힐러리 클린턴을 지지하는 공화당원들을 언급하면서, "경제 민주화를 제대로 할 사람이라면 다른 당 후보라도 돕겠다. 나라가 먼저이지 당이 먼저일 수는 없다"며 "더불어민주당으로 정권 교체를 원하지만 그런 인물이 당에 없다면 다른 방법을 찾아야 한다"고 말하기도 한다. 김 대표는 이날 경제 민주화 관련한 공개 강연에서 "지금 같은 양극화 사태가 지속되면 선동가가 출연하거나 사회가 붕괴하는 모습을 보일 것"이라며 "이를 막기 위해서라도 경제 민주화를 해야 한다"고 했다.
―경제 민주화 외에 차기 대선 후보의 다른 조건은 뭔가.
"미국과 중국이 동아시아에서 패권 경쟁을 벌이는 상황에서 한국이 어떻게 위치 정립을 하고 남북 문제를 풀어갈지에 대한 명확한 방향을 갖고 있어야 한다."
―그런 후보가 여야에서 보이나. "안 보인다.
"김 대표는 일부 기자와 만난 자리에선 "내년에 대통령이 될 사람은 (연령이) 아주 아래로 탁 내려와 50대가 되거나, 대단히 성숙한 사람이 될 것"이라고 했다. 이 발언에 대해 다시 물어봤더니, 김 대표는 "그렇지 않을까?"라며 웃었다. 일부에서 나오는 김 대표 본인의 '대선 도전론'에 대해선 "나를 그런 데 끼워 넣으려 하지 마라"며 "나는 다음 대통령의 기준에 대해 객관적으로만 이야기할 뿐"이라고 답했다.
―비대위 대표 취임 때 '운동권 체질'을 바꾸겠다고 했는데. 소위 '강경파'들에게 지금도 하고 싶은 말은 없나.
"아무리 정치가 각박해도 상대방에 대해 배려하고 기다릴 줄 아는 역량을 길러야 한다. 그리고 자기가 하는 말이 어떤 결과를 낳을지를 생각하면서 말해야 한다."
―사드 반대 당론 요구가 당내에 많아지고 있다.
"사드 반대 당론을 선거 공약으로 내세울 자신 있나. 그래서 집권하면 한·미 관계 생각해 뒤집을 수 있나. 그런 모든 것을 생각해야 한다. 책임 있는 정당과 정치인은 쉽게 말하지 않는다. 입에서 나오는 대로 말을 팍팍 뱉으면 그 순간 기분 좋을지 모르지만 결국에는 후회하게 된다."
김 대표는 퇴임을 앞두고 자신에 대한 당내 강경파들의 비판이 커지는 것에 대해 주변에 "강경파들이 나를 소외시킨다고 내가 소외당할 사람이냐"면서 "나는 내 나름대로 소신을 피력하면 된다"고 말한 것으로 알려졌다.
조선일보 정우상 기자 박국희 기자
3) 2016-03-14 [총선 D-30/김종인 대표 인터뷰]
《 더불어민주당 김종인 비상대책위원회 대표(사진)는 13일 야권 수도권 연대는 할 수 없다고 밝혔다. 김 대표는 이날 오후 국회에서 동아일보와 인터뷰를 갖고 “(수도권 연대는) 결국 선거구를 나눠 달라고 하는 것 아니냐. 당선되기 거의 불가능한 (국민의당) 사람들에게 선거구를 나눠 주는 건 별로 의미가 없다”고 말했다. 국민의당 천정배 공동대표, 김한길 전 상임선거대책위원장이 요구한 수도권 연대를 거부한 것이다. 그러나 김 대표는 지역별 후보 단일화에 대해서는 “(당이) 막을 방법이 없다”고 했다. 국민의당 안철수 상임공동대표도 이날 동아일보와의 통화에서 “(지역별 후보 단일화는) 당연한 이야기 아닌가. 그걸 당에서 금지할 수 있는가”라고 밝혔다. 》
더불어민주당 김종인 비상대책위원회 대표는 13일 동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후보자 간 단일화’에 대해 “(후보자 간 단일화를) 당에서 어떻게 막느냐. (막을) 방법이 없다”고 말했다. 친노(친노무현) 핵심인 이해찬 의원의 컷오프 여부와 관련해 그는 “이 의원 개인적인 명예도 있고 해서 내가 직접 이 의원을 (컷오프) 하겠다고 얘기한 적이 없다”면서 “최종적으로 비대위에서 결정할 예정이다. 당 전체의 승리를 위해 무엇을 할 때 가장 선거 구도가 맞느냐 하는 걸 고려해서 해결할 것”이라고 했다. 이어 ‘야권 통합’에 대해서는 “이제 시기적으로 안철수 대표가 극적으로 결단을 내리는 것 외에는 불가능하다”고 했다. 아직 공천을 하지 않고 비워 둔 국민의당 김한길(서울 광진갑), 박지원 의원(전남 목포) 등의 지역구에 대해서도 “월요일쯤 (공천) 확정을 할 것”이라고 했다.
○ “운동권 출신을 컷오프 하겠다고 한 적 없어”
김 대표는 ‘친노·운동권 현역 컷오프(공천 배제)가 미흡하다는 지적이 있다’는 질문을 하자 곧바로 “어떤 면에서 미흡하다는 거냐. 나는 운동권식의 당 운영이 안 된다고 했지, 운동권 (출신) 사람을 다 공천하지 않겠다고는 한 적이 없다”고 했다.
―친노 핵심은 대부분 살아남았다는데….
“다 솎아내려면 대체할 수 있는 당선 가능한 인물이 있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기 때문에 방법이 없다. 흠결도 없는데 친노라고 무조건 교체한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안 맞는다. (야당은) 인적 자원이 풍부하지도 않다.”
―정청래 의원 등 일부 컷오프 된 의원들의 반발이 거센데 번복될 수 있나.
“심정은 이해한다. 그런데 최근에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가 유행이어서 마치 SNS에서 소란스러우면 당 전체에 큰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생각하는데, 내가 보기엔 당에 질서가 없다. 몇몇 의원이 이러쿵저러쿵한다고 해서 내가 추종하고 따라갈 것 같은가.”
―홍의락 의원은 구제하나.
“구제 방법을 찾았지만 방법이 없다.”
―컷오프가 ‘정세균계’에 집중됐다는 지적도 나오는데….
“나는 (컷오프 된) 그 사람들이 정세균 의원 패거리인지도 잘 모른다. 어떤 관계가 있는지 모른다.”
―일각에선 박영선 비대위원이 공천에 많은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하던데….
“내가 박영선 의원 이야기 듣고 한다고 착각하는 사람이 있다. 내가 허수아비식으로 누구 이야기를 듣고 결정한다고 생각하나.”
―홍의락 의원 탈락 등으로 영남 선거가 어려워졌다고들 한다.
“지금까지 이 당에서 대통령이 되고자 하는 사람들이 그동안 뭘 했는지 묻고 싶다. 영남 지역에서 제대로 된 후보자를 찾아놓지도 않은 정당이다. 준비를 안 했기 때문에 (이번 총선에서) 공천을 신청하는 사람도 없고, 지금 찾을 수도 없다.”
―야권 통합이 무산되는 분위기인데….
“유권자들은 결국 1번(새누리당)과 2번(더민주당) 중에서 선택할 것이라 믿는다.”
―11일 국민의당 천정배 대표와 김한길 의원이 만났는데….
“(두 사람이) 의견 일치가 안 된 것 같다. (무소속) 최재천 의원이 나한테 보고했다는 말도 있다면서?”
―안했나?
“…….”
○ “비례대표? 뭐 대단한 거라고”
최근 정치 활동을 재개한 문재인 전 대표에 대해 그는 “조급해하지 말아야 한다”며 “당이 조용하게 잘돼서 이겨야 문 전 대표가 목표로 하는 대권 도전이 가능하다”고 했다.
―총선에서 문 전 대표의 역할은….
“내가 역할을 어떻게 정하겠나. 다만 (문 전 대표가) ‘소외되는 것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 수 있다. 주변에서도 부추기는 사람들이 있다. 요새 그런 사람들이 더 늘어나는 것 같다. 그러다 큰일 난다. 당이 화합이 안 돼 이 꼴이 됐는데, 또 분란이 일어나면 결과가 뻔한 것 아닌가.”
그는 1월 자신을 영입하러 온 문 전 대표에게 했던 이야기도 소개했다.
―비례대표 제안도 있었다는데….
“(문 전 대표 측에서) 비례대표 2번을 준다고 해서 내가 핀잔을 줬다. ‘내가 비례대표 하나 오퍼(제의)한다고 거기에 따라갈 사람이냐’고. 그런 유치한 소리는 듣기도 싫다. 그게 뭐 대단한 거라고.”
그러나 이종걸 원내대표는 이날 한 인터뷰에서 “김 대표가 명확한 답은 하지 않고 있지만 충분히 (비례대표로 나설) 가능성도 있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 “이 당 수준이 그 정도”
비례대표 후보자에 대해 그는 “새누리당 이한구 공천관리위원장이 ‘비례대표 경선 없다. 전략적으로 하겠다’고 했는데 그게 맞다고 본다”고 말했다. 경제와 관련된 인물이 전면 배치될 것이라는 관측에 대해서는 “사람이 많다고 경제가 잘되는 게 아니다”고 했다. 총선 전략에 대해서는 “이제부터 대통령과 각을 세울 것”이라며 “일반 국민이 가장 불편하게 느끼는 경제 실정을 집중적으로 다룰 것”이라고 했다.
―컷오프 된 지역에 투입할 인물이 마땅치 않다는 지적도 있는데….
“사람이 없긴 하지만 그 지역들은 금방 채워질 것이다. 공관위에서 추려서 (여론조사) 다 해서 적합한 사람을 투입할 거다.”
―총선이 끝나면 의원들 불만이 터져 나올 텐데….
“요새 저녁에 여의도에서 술 마시면서 ‘선거 끝나면 두고 보자, 뒤엎겠다’고 하는 의원들이 있다는데 누구인지 다 안다. 이 당 수준이 그 정도밖에 안 된다. 그런데 목소리 크다고 해서 그 사람들 목소리 듣다가 당이 이 모양 이 꼴이 된 것 아니냐. 나까지 그 사람들 목소리 따라야 된다? 그 순간 내가 가버릴 것이다. 가버리면 당의 꼴이 어떻게 될지 뻔히 보이는데….”
―일각에선 개헌이 된다면 김 대표가 내각제 총리로 적임이라는 얘기도 한다.
“내가 지금 나이가 몇 살인데….”
한상준 alwaysj@donga.com
□작가 김주영
2017.08.21 "文 대통령은 '영웅 심리'에 빠졌나… 돌아갈 수 있는 軌道서 너무 이탈"
"자신이 딛고 있는 현실을 뒤돌아보지 않는 게 문제
理想 아닌 훼방꾼과 손잡고 나랏일을 하는 것 같다"
"만나기 싫은 사람 앞에서 헛웃음도 많이 웃었다
내 인생 얼마 남지 않았는데 너무 퍼질러 놓고 살았나…"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한 번 쉬고 4시간을 부지런히 달렸다. 경북 청송(靑松)의 '객주문학관'에는 여름비가 뿌리고 있었다. 작가 김주영(78)은 한 달 넘게 여기서 머물고 있는 중이다.
몇 달 전 '뜻밖의 생(生)'이라는 작품을 냈다는 소식을 빼면 그는 세상 뉴스에서 멀어졌다. 불현듯 그런 그를 '문재인 정부 100일'에 떠올린 데는 연유가 있다. '객주' '활빈도' '고기잡이는 갈대를 꺾지 않는다' '홍어' 등에서 민초(民草)의 삶을 풀어냈던 그가 자신의 작품 세계를 이렇게 설명한 적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궁핍을 겪는 사람들이나, 역사의 행간에서 이름을 찾을 수 없는 사람들, 하루 두 끼 식사로도 감지덕지하는 사람들, 빗방울이 새는 움집에 사는 사람들의 편에서 글을 쓴다.'
이는 서민과 약자, 소외 계층을 대변하는 듯한 문재인 정부와 상통하는 것이다. 비정규직의 정규직화, 최저임금 인상, 부동산 대책, 부자 증세, 선심성 사업, 의료 복지 확대 등 '혁명급' 정책이 쏟아졌으니 말이다. '고마워요 문재인'이 합창(合唱)처럼 방방곡곡 울려 퍼지고 있다.
▲김주영 선생은 “현 정부의 정책은 초가삼간에 큰 장롱을 들여놓겠다는 격”이라고 말했다. /청송 객주문학관=최보식 기자
―선생은 당연히 '문재인 찬성'이겠지요?
"앞날이 걱정됩니다. 정규직 전환하고 최저임금을 올려주겠다는 마음은 좋은데, 뒤에 어떤 문제가 따르는지를 돌아보지 않습니다. 5년 뒤 본인이 퇴임한 다음의 문제를 뒤돌아보는 것이 부족합니다. 나라의 앞날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돌아보지 않고, '한번 바꿔보겠다'는 욕구만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약자와 소외계층의 편에서 글을 쓴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문재인 정부는 이를 정책으로 실천에 옮기고 있고요.
"글은 단지 정신적 위로를 주는 겁니다. '삶이 그대롤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여워하지 말라'는 푸시킨의 시처럼 말입니다. 정치는 현실적인 위로를 하는 겁니다. 그러려면 여러 계층 간 조율, 경제 능력, 국가 장래, 역사 등 여러 면을 고려해야 합니다. 이 정부는 입으로는 '통합' '협치'니 하지만, 실제로는 좌파 성향의 자기 사람들로 채웠습니다."
―문 대통령이 우파 정책을 쓸 것으로 기대하고 뽑은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문 대통령이 광복절 경축사에서 '김대중·노무현만이 아닌 이승만·박정희로 이어지는 역사 속에 있다'고 말은 하지만 실제 하는 것을 보면 좌파 일색의 가치와 정책뿐입니다. 가령 대기업이 돈을 벌어 사회에 기여하는 것을 싹 무시합니다. 이 나라가 이만큼 먹고살게 해온 전(前) 정권의 업적을 지워버리려는 것도 그렇지, 한 예로 '박정희 탄생 100주년 기념 우표'를 못 내게 하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그러면서 연설할 때마다 '통합'이라는 말을 합니다. 차라리 '내 사람 데리고 좌파 정책을 쓰겠다'고 하는 게 정직하지요."
―문 대통령은 정의와 상식, 국민 주권으로 가고 있다고 하지 않습니까?
"자기들만 그렇게 생각하는 거지. 이분은 촛불집회로 갑자기 대통령이 되면서, 영웅 심리에 빠진 게 아닌가요. 평상심으로 돌아갈 수 있는 궤도에서 너무 이탈해버렸습니다. 좌파 정책을 보면 초가삼간에 들여놓을 수 없는 큰 장롱을 들여놓겠다는 격입니다."
―약자를 위한 문 대통령의 선의(善意)에는 동의하지 않습니까?
"방법에서 달라야 합니다. 뒤돌아볼 줄 알아야 해요. 박근혜 전 대통령도 뒤돌아볼 줄 몰라서 이런 사태를 맞았지 않았습니까. 뒤돌아보지 않고 앞만 보면서 '내가 최선이고 비판하는 사람은 악(惡)'으로 여기는 게 아닌가 걱정스럽습니다. 좌파 이상주의에 빠진 것 같습니다."
―이상(理想)도 필요하지요. 이상 없는 현실을 어떻게 견딜 수 있겠습니까?
"자신이 딛고 있는 현실을 뒤돌아보지 않는 게 문제입니다. 지금 돌아가는 꼴을 보면 이상이 아니라 마치 훼방꾼과 손잡고 나랏일을 하는 것 같습니다."
―훼방꾼과 손잡는다는 게 무슨 뜻입니까?
"좌파 시민·사회단체들이 청구서를 내밀며 얻어내기 위해 훼방을 한다는 겁니다."
―정권이 바뀌었으니 이들로서는 그동안 못 한 요구를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우는 아이 떡 하나 더 준다는 속담이 있는데, 문제는 그게 받아들여지니 끼니때마다 운다는 겁니다. 문 대통령이 이들의 손을 놓지 못하거나 이들에게 밀리는 느낌이 있습니다."
―이런 비판은 보수의 관점인데, 선생은 박근혜 정부의 정책이 옳았다는 겁니까?
"박근혜 정부가 제대로 한 게 있습니까. 박 대통령 시절 편 가르기가 심했고 권한을 남용했습니다. 문재인 정부는 박 정부와 색깔과 논리는 다르지만 똑같이 편중돼 있습니다. 결국은 비슷한 길로 가는 것처럼 보입니다."
―노무현 대통령 당선자의 취임사 준비위원으로 참여했지요?
"그때는 노무현의 서민 정책에 호감을 가졌습니다. 처음에 기대를 했지만 노무현 정부는 갈팡질팡했습니다. 이들 정치 세력은 무슨 원수를 갚으러 나온 사람 같았습니다. 노무현 탄핵 직후인 2004년 총선에서 열린우리당 공천심사위원도 했지요. 공천 심사 때 탈영 이력이 있는 사람을 내세우기에 내가 기어코 반대했습니다. 공천 심사를 끝으로 그쪽과 작별했습니다."
―선생의 이념적 정체성은 어디에 있습니까?
"당시 한 인터뷰에서 '솔직히 무엇이 보수고 진보인지 모르겠다. 나는 이념이 아니라 내 스스로의 가치관에 비춰 양심적인 길인지 아닌지 판단한다. 그게 보수가 볼 때 진보일 수도, 진보가 볼 때 보수일 수도 있다. 어떨 때는 회색분자로 비칠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 뒤 청와대에서 명절이면 보내주던 대통령 선물을 끊더군요(웃음). 이제 나는 '보수'라고 해야겠지요."
―왜 보수(保守)가 된 겁니까? 흔히 나이가 들면 보수가 되는 것처럼 말인가요?
"여러 정권을 거치면서 시야가 넓어졌고 나라 장래 걱정이 많아졌기 때문입니다. 얼마 전 문 대통령은 '우리 동의 없이 한반도에서 군사행동 결정할 수 없다'고 했지만, 6·25 때 김일성이 우리 동의를 받고 우리에게 물어보고 쳐 내려왔습니까. 대통령 외교 안보 특보라는 사람(문정인)도 마치 김정은이 가만히 있는데 트럼프가 험한 말을 한다는 식으로 미국 언론매체에 말하더군요. 청와대에서 이런 사람을 그냥 놔두는 것도 정말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어쩌면 선생은 좌파 정치 세력과 더 인연이 있었던 게 아닌가요. 김대중 정부 시절 '대통령과 국민과의 대담'을 세 차례나 진행했지요?
"김대중 대통령이 나를 직접 지명했어요. 촬영 두 시간 전 청와대에 도착해 따로 환담했습니다. 이분은 그 자리에서 커피 석 잔을 연거푸 마시며 '감옥에 있을 때 객주를 두 번이나 읽었다'며 나를 만난 것에 흥분했어요. 내 손을 계속 쥐고 있었어요. '정치 9단'이라는 양반도 이렇게 순진하고 정이 많구나 싶었어요. 사실 김대중 대통령은 편중된 인사를 안 했습니다. 경북 출신 우파인 김중권을 비서실장으로 썼으니까요."
―선생은 박근혜 정부에서는 국민대통합위원으로 활동했는데요.
"국민대통합위원회에 파견된 공무원만 70명 가까이 됐습니다. 하지만 아무것도 되는 게 없었습니다. 대단한 낭비였습니다. 한번은 박 대통령과 환담하는 자리가 있었습니다. 내가 '우파 정권이 너무 경직돼 있다. 울타리를 치고 아무도 못 들어오게 한다. 이래서 통합되겠나'라고 말했습니다. 박 대통령은 반응이 없었습니다."
―박근혜 정부의 '문화계 블랙리스트'가 논란이 됐습니다. 선생은 이를 어떻게 봅니까?
"정권마다 이런 분류는 다 있었습니다. 문서로 된 명단이 안 나왔을 뿐이지. 이명박 정권 시절 문화예술지원 심사위원장을 맡은 적이 있었습니다. '윤이상 음악제'를 위해 2억원의 예산 신청서가 올라왔습니다. 사무국 직원이 심사도 하기 전에 '윤이상은 좌파라서 해줄 수 없다'고 했습니다. 내가 '당신들 언제까지 좌파·우파 따질래'라며 통과시켰습니다."
―박 전 대통령의 문제로 지금 보수 정당은 이렇게까지 무너질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지리멸렬해졌습니다. "박 전 대통령이 탄핵된 뒤 그와 함께한 정치인들이 가만히 있는 걸 보고 정말 놀랐습니다. 자기의 정치 생명과 이익을 지키는 것에 만족하지, 국가를 생각하는 게 없습니다. 마땅히 책임지는 모습을 보여야 하는데 조용히 있습니다. 세상에 이런 좀생이들이 어디 있습니까. 그런데 우리가 계속 정치 얘기만 하고 있군요"
―화제를 옮기겠습니다. 몇 달 전 장편소설 '뜻밖의 생'을 내고는 "1만부만 팔리면 다음 소설을 또 쓸 것"이라고 했지요. 시장의 평가는 어땠습니까?
"잘 안 팔렸습니다만, 1만부는 나갔습니다. 팔십 가까이 돼서야 비로소 깨달은 것은 소외계층이 위로받을 수 있는 소설을 써야겠다는 겁니다. 문학이 이들에게 돈도 밥도 못 주지만 위로는 해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겁니다."
―요즘 수면 장애를 앓는다고요?
"잠자리에 들어도 '이 문장이 좋을까 저 문장이 좋을까'하고 뇌 활동이 계속됩니다. 잠이 안 오는 겁니다."
―나이 팔십이 됐는데 이런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나 하는 회의감은 없습니까? "하하, 글의 굴레에서 못 벗어납니다. 이번 소설은 1년이 걸렸습니다. 문장을 고치고 또 고치고. 데뷔 초기에는 베개를 가슴에 받치고 엎드려 밤 꼬박 새우며 단편 하나를 썼습니다. 이제는 그렇게 쓸 수가 없고 설사하듯 써도 안 되지요."
―언제까지 쓸 겁니까?
"창작집 한두 권 분량의 단편소설을 더 쓰겠다는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사람들과 만나는 걸 덜하게 됩니다. 내게 남은 시간이 얼마인지를 대략 아니까요."
―제 지인(知人)은 "노년이 되면 주위의 사람과 물건을 줄여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번잡한 관계와 소유욕을 경계한 것이지요.
"과거에는 사람들을 만나면 내가 먼저 술값을 못내 안달이 났습니다. 그 사람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내 기분을 위해서였지요. 만나기 싫은 사람을 만나 헛웃음도 많이 웃었습니다. 칠십 초반부터 조바심이랄까, 내 생애가 얼마 남지 않았는데 내가 너무 퍼질러 놓고 사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습니다. '삶'은 '사람'이라는 글자의 축약입니다. 삶은 사람과의 관계지요. 이제 간추리고 싶은 겁니다."
조선일보 최보식 선임기자
□남성일 서강대 경제학부 교수
2017년 08월 04일 “정부가 최저임금 보전?… 어느 나라가 민간임금에 세금 넣나”
▲ 남성일 서강대 경제학부 교수는 7월 26일 서울 마포구 서강대 남덕우경제관(GN관) 연구실에서 가진 문화일보와의 인터뷰에서 “경제의 모든 것은 인간이 하는 데 문재인 정부가 새삼 ‘인간 중심 경제’를 주창하는 것은 ‘레토릭’이라고 비판하고 있다. 김낙중 기자 sanjoong@
어렵다, 반성한다, 안타깝다, 자괴감이 든다….’
얼핏 들으면 이런 말을 하는 사람은 세상살이에 실패한 사람이라고 단정하기 쉽다. 그러나 이런 말을 한 사람이 우리나라 경제학을 대표하는 학자라면 어떨까? 지난 7월 말 서울 마포구 서강대 남덕우 경제관(GN관)의 연구실에서 만난 남성일(63) 경제학부 교수는 부드러운 인상과 온화함 때문인지 정년을 2년여 남겨놓은 사람으로 보이지 않았다. 그 순간 앞으로 적어도 십수 년은 학생들과 어울려도 전혀 어색해 보이지 않을 것 같은데 제도가, 규정이, 그리고 사회가 그를 교문 밖으로 나가도록 하는 것이 그의 발걸음을 가볍게 할지, 아니면 무겁게 할지, 어느 쪽일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인터뷰를 마칠 즈음 그 해답을 보았다. ‘반반’일 것이라는 생각이 든 것이다. 이런 판단은 그의 말과 눈빛, 그리고 무엇보다도 인터뷰 후 사진촬영을 위해 교정을 둘러보면서 일일이 자세한 설명을 들려주는 세심한 노력에서 엿본 것을 근거로 한다.
남 교수는 경제학 중에서도 노동경제학을 전공했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이러저러한 직함으로 새로 시작하는 정부에 노동과 경제 관련 조언을 해줬다. 하지만 자신의 조언을 귀담아듣고 실행하는 정부는 거의 없었다고 한다. 결국은 정부 ‘입맛’대로, 짜인 각본대로 가는 경우를 허다하게 경험했다. 그는 아직도 “경제학이 어렵다”고 말한다. 또 잘못 가는 방향에 대해 더 크게, 더 강력하게 말하지 않은 것을 후회하며 안타까워한다. 그리고 그는 “지성의 얇은 두께를 통탄한다”고 했다.
―도대체 노동이란 게 뭔가요.
“노동은 경제적 가치 창출에 기여하는 제반 인적행위라고 봅니다. 여기서 키워드는 경제적 가치 창출에 기여해야 하고 그리고 행위는 인적행위죠. 인적행위에는 육체적인 것뿐 아니라 정신적인 것도 포함됩니다. 가만히 앉아서 생각하는 것도 포함되는 거예요. 많은 이가 앉아서 생각하는 것을 자꾸 불로소득이라고 하는데 그 뉘앙스를 보면 그 사람이 땀 흘려 일한 게 없다고 비판하는 것이지요. 모니터 화면에서 주식가격을 보고 쉽게 마우스 클릭 몇 번 해서 이익을 얻었다고 불로소득이라고 하는데 제 관점에서는 불로가 아닙니다. 인적행위가 들어간 것이니까요. 그로 인해서 가치가 창출된 거죠. 가치 창출이 중요합니다. 가치 창출이 안 된 것은, 제가 볼 때는 쓸데없는 노동이고 이는 시장경제학적으로는 앞으로 없어지는 노동입니다. 21세기로 들어서면서 정신노동이 중요해졌습니다. 또 하나는 소비하고 구분해야 한다는 것이에요. 예를 들어 내가 좋아서 혼자서 만들어서 하는 건 소비입니다. 프리랜서 기자를 예로 들어봅시다. 열심히 취재해서 기삿거리가 된다고 생각했는데 데스크가 킬 했다, 그래서 셀프 프레스를 한다고 하면 이건 소비입니다. 노동이냐, 소비냐 하는 것은 가치창출이 시장에서 인정받는 가치냐, 아니냐 하는 데 달린 것이지요. 현 정부와 제가 엇갈리는 부분이 이 지점입니다. 시장경제를 공부하는 경제학자 입장에서는 가치의 인정은 시장에서 받는 것입니다. 20시간을 일했으니 20시간어치 돈 받아야 한다는 것은 공급자적 논리죠. 20시간 일했어도 1시간 일한 것보다 못하다고 하면 안 주는 것이 시장의 논리입니다. 우리는 그에 대한 컨센서스(합의·동의)가 없어요.”
―현재 노동과 가치에 대한 인식은 어떻다고 보시나요.
“지금 정부에서 하는 걸 보면 21세기가 아니라 19세기 노동가치설로 가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들 때가 많습니다. 마르크스 경제 하고 나서 소득주도 성장론을 말하는데 그것의 원천은 ‘Wage-led growth(임금 주도 성장)’라는 것입니다. 일부 이른바 좌파, 그리고 포스트 케인스학 경제학자들이 주장한 것을 차용한 것이 아닌가 하는 게 제 생각입니다. ‘임금’ 주도 성장을 ‘소득’으로 바꾼 게 아닌가 하는 게 제 생각이에요. 그건 경제학에서 보면 아주 구석진 것입니다. 가설이라고 하기도 어려운, 하나의 담론 수준이죠. 지난 2008년 세계 금융 위기를 겪고 나서 소득 격차가 너무 벌어졌다는 인식이 나와서 그 소득 격차를 줄이는 것을, 경제성장을 위한 방안 중 하나로 보자는 주장인 거죠. 마르크스가 지금 속으로 좋아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죽고 나서도 대한민국 정책의 핵심 중 하나로 정해졌으니 말입니다. 국내에서 누가 그걸 제대로 연구하는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도대체 언제로 돌아가는가 싶습니다. 왜냐면 제가 스토리를 대충 압니다. 1970년대 데모도 하고 유치장도 들락날락했고 우리끼리 맨날 술 마시고 밤새 토론하고 하던 얘기니까요. 저도 한때 그 세계에 있었습니다. 혼자 밤새 임금주도 성장 모델도 그려봤고요. 저소득층이 소비를 많이 하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 케인스식 총수요를 진작시켜서 간다는 기본적 아이디어를 가졌는데 이것은 공부하면서 보니까, 한쪽만 본 것이더군요. 노동경제학을 하게 된 게 그런 이유입니다.”
―공부하시면서 어떤 과정을 거치셨는데요.
“저는 소득분배도 공부하고 싶고 노동의 가치도 공부하고 싶어서 미국에 갔습니다. 그런데 그 미국에서 사상적 전환이 일어났죠. 두 가지 실질적 사례가 있습니다. 두 가지 충격이라고 볼 수 있죠. 첫째는 하와이대 동아시아도서관인데 북한에서 나온 서적을 가장 많이 갖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이를 접할 수 있어 좋았죠. 그런데 북한 책을 읽고 1주일 만에 실망했습니다. 소설이나 사회과학책이나 다른 책이나 다 똑같은 내용이었거든요. 둘째는 오프더레코드입니다.(남 교수는 마르크스 경제학에 대해 얘기했다) 그런데 지금 2017년에 이게 무슨 망령입니까. 최근 정부가 ‘인간 중심의 경제를 펴겠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제가 볼 때 인간 중심의 경제학은 ‘레토릭’(미사여구)입니다. 원래 경제의 알파 오메가는 다 인간입니다. 경제란 인간이 하는 것인데 왜 새삼스레 인간 중심이라고 하는 거죠? 안타깝게 여기는 지점이 그겁니다. 다양한 길을 놔두고 왜 한쪽 구석진 곳에 있는 것을 끌고 와서 포장도 유치하게 합니까. 그냥 이 정부의 정책 목표는 저소득층을 위한 것이라고 하면 솔직하지 않습니까. 경제를 아는 사람이라면 웃기지 않겠어요? 외국 이코노미스트가 들을까 창피합니다. 그건 그만큼 정부가 자신이 없는 것이라고 봐요. 지엽말단의 일부를 끌고 와서 내세우는 것이 아닌가 싶어요. 정책이 되려면 최소한 학문의 세계에서는 누구든지 아이디어는 낼 수 있지만 가설로 만든다고 한다면 과연 현실과 맞느냐를 실증 분석해야 하는 것입니다. 경제학에서는 여러 차례 실증분석과 논리 전개가 됐을 때 이론이라고 봅니다. 그런데 가설 수준도 안 되는 것을 정책 기반으로 삼는 게 얼마나 위험한지 압니까. 세계 어느 나라에서 해본 적이 있나요? 임금주도 성장을 해 본 나라조차도 보완적인 방법으로 생각하지, 그걸 성장 동력으로 삼진 않았습니다. 문제는 5000만 인구가 사는 경제가 실험 대상이 됐다는 것입니다. 5~10년씩 가야 하는 경제시스템을 그렇게 실험하는 건 무책임한 거 아닌가요? 그래서 걱정하는 거죠. 좀 실패하고 나서도 다시 돌아올 수 있다면 괜찮지만 전체 사회를 망가뜨리면 어쩌나 걱정됩니다.”
―요즘 경제정책을 보면 어떤 생각이 드시나요.
“지금이 어떤 시기냐면 ‘한국’이라는 집이 그동안 만들어져서 개방경제 축으로 최소 30~40년간 왔는데 이 집이 잘못 지어졌다며 뜯어고치면서 첫째로 잡은 게 최저임금제라는 내벽을 허문 겁니다. 집이 쏟아져 무너지게 생겨서 사방에서 소리 지르니까 ‘1년만 해보고’라고 말했습니다. ‘쏟아지면 중소상공인을 지원해 대들보를 거기다 더 받칠게’라고 하는 격이지요. 어느 나라가 민간 임금에 국민 세금을 집어넣습니까. 최저임금 인상분을 정부 세금으로 보전하겠다고요?”
―지금 정부가 왜 그런다고 생각하십니까.
“제가 요새 두 가지 머리에 떠오르는 말이 있습니다. 하나는 ‘무식하면 용감하다’, 또 하나는 내로남불(내가 하면 로맨스요, 남이 하면 불륜)이라는 말인데요. 그게 요즘 돌아가는 세태를 보면서 제가 느끼는 겁니다. 무식하면 용감하다는 것은, 본인이 지금 어디 가는지 모르면서 하는 거면 용감한 거죠. 또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니까 무식하게 보이는 거고요. 내로남불은 왜냐면, 제가 볼 때 지금 정부가 하는 게 어느 때보다 제왕적이에요. 그러면서 적폐를 청산하겠다고 하지 않습니까? 이렇게 제왕적인 게 어딨습니까. 책임도 안 지는 방식으로 일을 처리하면서 위원회(신고리 원전 5·6호기 공론화위원회)를 만든다니요. 책임지겠다는 것도 아니니 차라리 국민투표나 평가를 받겠다고 하든가요. 위원회 결정에 따른다는 건 책임을 떠넘기는 거지요. 어마어마한 결정에 비해서 너무 무책임하지 않나요.”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노동과 경제정책은 어떤 것일까요.
“우리나라의 경제적 측면에서의 큰 도전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인구가 줄어들어서 생산인구와 소비인구가 줄어든다는 것입니다. 그에 반해서 우리가 지금까지 이뤄놓은 것은 아직 국민소득 3만 달러를 못 가진 상태입니다. 국민 마음속의 기대심리는 소득 4만~5만 달러인데 격차가 크죠. 이걸 어떻게 돌파할 것인가 고민해야 합니다. 둘째는 거의 모든 나라에서 경제시스템 개선을 해서 경제적인 성장, 그리고 어떤 안정을 도모하겠다고 하는 컨센서스가 있습니다. 모든 나라가 시스템을 조금씩 바꾸는데 그 포인트가 비효율을 제거하는 것입니다. 복지시스템, 공공부문의 비효율을 제거하는 방향으로 가고 있지요. 독일의 하르츠 개혁, 프랑스가 지금 추진하는 것 등이 그렇습니다. 개혁을 안 하고 포퓰리즘으로 가는 베네수엘라, 브라질 등은 망하고 있어요. 우리가 지난 40여 년간 경제성장 과정에서 써온 시스템 중 여러 가지 경직적이고 비효율적인 게 많이 생겼어요. 과도하게 규제가 많아졌고 정부 부문이 방만해졌죠. 그런 부분들을 고쳐야 합니다. 사람들의 기대치가 있는데 이걸 맞춰 가려면 생산성이 올라가야 합니다. 노동경제학에서 가장 중요한 게 사람들의 기대치와 생산성입니다. 우리 사회의 비극은 기대치는 높은데 생산성이 못 따라가는 언밸런스 때문에 모두가 불행해진다는 것입니다. 이를 역전시킬 그 어떤 방안이 없이 자꾸 기대치만 올려놓고 있습니다. 청년수당이다, 휴가비다 지원하면서 기대치를 잔뜩 올려놨지요. 이제 사람들도 불안해하고 ‘과연 될까’하는 분위기예요.”
―최근의 증세 논란은 어떻게 보시는지요.
“최근 ‘곳간을 열라’는 표어를 봤어요. 이는 거의 불법을 넘어서 헌법을 그냥 무시하는 것이죠. 어떻게 이런 이야기를 플래카드로 대로에 붙여놓을 수 있습니까. 헌법상 소유권이 명시된 나라에서 말입니다. 지금 경제 현실과 기업의 현실을 조금이라도 아는 이라면 할 수 없는 이야기입니다. 정치하는 이들이 대부분 한 번도 세금 내는 경제활동을 안 해 본 이들입니다. 정당이나 로펌에서만 경험을 쌓은 이들이 민간 영역에서 세금을 직접 내고 직원을 한 명이라도 둔 사업체를 경영해 본 이라면 그런 말 못합니다. 경제 현실이 얼마나 무섭고 냉정한데 곳간을 열면 뭐든지 될 것처럼 말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 사회가 지식인으로서 통탄하는 게, 지성의 두께가 얇다는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도 목소리를 제대로 내는 사람이 없어요. 그건 지성이 얇다는 것이죠. 나아가서는 우리 국민의 경제에 관련된 의식이 상당히 잘못된 교육, 프로파간다(선전)에 의해서 왜곡된 게 사실입니다. 중·고등학교에서 경제에 대한 교육이 너무 잘못됐어요. 우리는 돈이 많은 사람은 운이 좋아서 많다고 생각합니다. 죽어라 노력한 것을 인정 안 하죠. 오히려 그것을 뺏어야 한다고 정부 자체가 몰고 갑니다. 그러면 기업가 정신이 안 나옵니다. 그동안 돈을 번 이들이 얼마나 애를 썼는가, 빵집 하나만 경영해도 빵을 다 팔기 위해 얼마나 노력하는데 그걸 생각지 않고 운이 좋아서 많이 벌었다고 합니다. 돈 번 노력에 대한 인정만 해줘도 그들이 알아서 세금을 더 내려고 할 것입니다.”
―기업들은 격화된 세계시장 경쟁에다 국내의 최근 정책사안(최저임금·증세 등)으로 아우성인데요.
“자동차만 봐도 7년 전에 비해서 지금 시장의 불확실성이 50배는 커졌습니다. 기술적으로 예전에는 내연기관 중심이었는데 어느 순간 전기차, 수소차, 각종 2륜 구동, 드론 택시 등 움직이는 수송수단에 대한 지평이 넓어졌고 경쟁도 치열해졌습니다. 중국에서 자동차 생산이 시작되니까 모든 나라의 자동차 산업 이익률이 떨어졌습니다. 또 삼성과 애플의 치열한 경쟁이 숨도 못 쉴 정도입니다. 애플에서 가을에 뭐 나올까 언론은 말하지만 연구소에서는 내년 것으로 싸웁니다. 아차 실수하면 가는 겁니다. 많이 버니까 내놓으라는 것은 안 되죠. 지금은 뼈를 깎아야 하는 시기입니다. 그런 기업가들의 치열함에 대해 과연 정치인들이 얼마나 이해하고 고마워하는지 궁금합니다. 한국의 성장이 과연 무엇 때문이었는지 알까요? 기업은 살아있는 생물 같아서 생존을 위한 결정을 합니다. 기업 경방이 한국을 떠난다고 하니 매국노라고 쉽게 비판하는데 그런 식의 시각이라면 대한민국 망합니다. 오죽하면 옮기겠습니까. 이 정도로 우리의 의식세계가 경직돼 있어요. 우리 상황이 비극인 게, 기술은 4차 산업혁명 말하면서 의식수준은 항일, 반미 시대 수준을 못 벗어나고 있어요. 그 멘털을 갖고 정책을 씁니다. 그러니 정책과 현실이 안 맞아 비명을 지르는 것이죠. 대통령이 기업인들을 불러들이는 것도 웃기고 기업들이 어떤 보따리를 펼칠지 그 걱정하고 있어요. 그러면서 ‘적폐를 어쩌고’ 하는데 정말 적폐를 없애려면 기업인들 만날 필요 없습니다. ‘알아서 잘 하십시오’ 해야 하는 거죠. ‘혼내주겠다’고나 하고 있지 않습니까.”
―최근 기업인들과의 간담회는 어떻게 보셨는지요.
“저는 솔직히 말해서 어색하죠. 대통령이 총수들 쭉 모아놓고 그렇게 하는 것 자체가 매우 전근대적이라는 생각을 하거든요. 기업하는 사람들은 기업 열심히 하게 해야지, 그렇게 모아놓고서 무슨 왕 앞에서 알현하는 것처럼 그런 형식이 맞지 않는다고 봅니다. 또 그 앞에서 각 그룹사가 ‘우리가 뭐 어떻게 하겠습니다’ 이렇게 하는 것도 사실은 맞지 않는 거죠. 여전히 정부가 위에 있고 기업이 그 밑에 종속돼 있는 모습을 보여주는 게 아닌가 싶었습니다. 시대에 맞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제 우리 사회에서 없어져야 될 것 같아요.”
―현대기아차 등 대기업 노조의 파업이 예고돼 있는데요.
“하투를 뒤에서 조종하는 민주노총 입장에서는 권력 분점 욕구가 강합니다. ‘우리가 정권창출을 그만큼 도와줬으니 내놓으라’는 인식이 꽉 차 있죠. 휴가철 뒤 기업이 아니라 정권을 압박할 것이라고 봅니다. 경제적 입장에서 지금 우리는 죽느냐 사느냐의 상황에 처해 있습니다. 자동차, 조선이나 산업 전반적으로 그렇습니다. 그래서 지금이 (하투를 하고) 그럴 땐가 싶습니다. 이미 이런저런 수당 합하면 연봉이 1억 원이 넘는 상황에서 말이죠. 과연 파업의 명분이 있나요? 또 그렇게 되면 문제는 지방경제, 협력업체는 정말 죽게 된다는 것입니다. 명분과 실리가 없는 것은 장기적으로 본인들에게도 해가 될 것입니다.”
―춘투니 하투니 하는 말은 언제까지 듣게 될까요?
“어느 정도 이후 성숙해서 없어질 것이라고 보기 어려워졌어요. 왜 그러냐면 춘투, 하투를 없애기 위해 필요한 것은 욕먹을 줄 아는 리더십인데 우리 정치인들이 욕먹을 줄 아는 리더십을 보여준 적이 없어요. 김대중, 노무현, 이명박, 박근혜 네 정부에서 20년간 제가 말했어요. 제 면전에서는 ‘교수님 말이 맞는다’고 하고서는 ‘시기가 안 돼서, 혹은 장기과제’라고 핑계를 대면서 20년이 지났습니다. 지금은 욕먹을 수 있는 리더십이 필요합니다, 노조가 노조의 본령을 벗어났다고 지적하는 대통령, 정치인을 본 적이 없습니다. 사석에서는 다 맞는다고 하면서도요. 그런 사람이 나오지 않는 한 계속 이렇게 가겠지요.”
―내년도 최저임금이 7530원으로 결정됐는데요.
“적정의 기준이 무엇인가에 따라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할 수 있겠지만, 우리나라 최저임금 인상은 여러 기준으로 봐서도 다 오버라고 봅니다. 단지 이번 인상률이 높아서가 아니라 기왕에도 결코 적지 않았어요. 생계비, 중위임금, 생산성 등 어느 기준으로 봐도 현재 최저임금은 결코 낮지 않습니다. 그런데 1만 원까지 올리겠다는 근거가 대체 뭡니까? 생계비 기준으로도 안 맞고 생산성으로도, 중위임금으로도 세계적 기준에서 이미 오버됐습니다. 우리나라는 임금 구조상 맨 밑이 올라가면 다 오르게 돼 있습니다. ‘최저임금 1만 원인데 무슨 소리냐’ 하면서 고임금을 정당화하고 추가임금 상승에 대한 사회적 비난을 최소화하려는 게 민주노총의 의도입니다. 애초에 그걸 간파했어야 합니다.”
―공공부문 일자리를 늘리는 내용이 포함된 추가경정예안도 통과됐습니다.
“어느 나라가 공공부문 일자리를 늘려서 성장했습니까? 오히려 공무원 늘려서 재정부담에 쓰러지는 나라는 봤어도 가치가 올라간 나라는 본 적이 없습니다. 논리적으로 맞지 않습니다. 현실적으로 더 큰 문제는 정부의 그런 정책에 의해 많은 젊은이가 노량진으로 간다는 겁니다. 그 자체로는 가치를 만들어내지 않는 일자리로 쏠리는 것, 이건 나라의 큰 손실입니다. 지금 공공부문 임금도 너무 높아요. 보통 외국의 경우 공공부문 일자리 임금이 1인당 국내총생산(GDP) 수준에서 왔다갔다 하는데 우리는 훨씬 높습니다. 우리나라 1인당 GDP가 3만 달러인데 7급 공무원 임금이 7000만~8000만 원 됩니다. 이런 상황에서 누가 불안한 민간부문에서 일하겠습니까. 공공부문은 고용안정도 되잖아요.”
―국민 경제교육은 어떻게 해야 할까요.
“교육자로서, 또 경제학자로서 가슴 무겁게 생각하는 게, 사회 일반의 경제교육이 미흡하다는 점입니다. 어떤 면에서는 참으로 우리가 먹고사는 물질적 기반 토대가 너무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 봉급이 어디서 오는가에 대한 이해가 없어요. 한 나라가 어떻게 클지에 대한 이해도 없고요. 돈 많은 이들은 운 좋아서 그렇게 됐다고 생각하고 스스로는 운이 없어서 돈을 못 번다고 생각하죠. 제대로 된 경제교육은 초·중·고등학교 기본교육에서부터 돼야 합니다. 그런데 경제 교과서 만드는 것도 사범대 교수들이 독점하고 있습니다. 경제학자들이 못 들어갑니다. 그렇게 전문적이지 못하기 때문에 시대에 뒤떨어진 교육을 하고 있고 야금야금 전교조나 민주노총 등 특정 가치 추구 집단들이 교육 보조자료를 만들어 내는 거죠. 이런 현실이 정상화돼야 합니다. 한 나라가 성장하는 게 뭘 의미하는지에 대한 가장 기본적 교육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그 부분이 많이 미흡합니다. 경제학자들도 늦게 알았습니다. 고교 교과서 분석도 2년 전에나 했지요. 저 같은 경제학자들도 반성해야 합니다. 요새는 안타까움이 듭니다. 제 교수직 퇴임이 2년이 채 남지 않았는데 과연 제가 이뤄놓은 게 뭔가 싶어요. 전공하는 노동분야에서 역사의 시계가 반대로 흘러가는 데 대해서 제가 역할을 할 수 없다는 데 상당한 자괴감을 느낍니다. 기회가 있을 때 언론을 통해 학생들에게 이야기하지만 여전히 미흡하다고 느낍니다.”
인터뷰 = 김윤림 차장 (경제산업부)bestman@munhwa.com 정리=유현진 기자 cworange@munhwa.com
□ 문국진(文國鎭) 대한법의학회 명예회장
2015.10.13 일국의 대통령 사망 사건이 졸지에 ‘변사 사건’으로 처리되고 만 사연
▲지난해 7월 25일 오전 서울시 양천구 신월동 서울과학수사연구소 대회의실에서 서중석 국립과학수사연구원장이 유병언 전 세모그룹 회장 추정 시신 부검결과를 발표하고 있다. 국과수 측은 시신의 신원이 유 전 회장은 확실하지만 사망 원인은 알 수 없다고 말했다
세월호의 실소유주인 세모그룹 유병언(兪炳彦·당시 73세) 전 회장이 반 백골 상태의 시신으로 발견된 지 1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유 전 회장은 지난해 6월 12일 순천 송치재 휴게소 인근 별장에서 2km가량 떨어져 있는 매실밭에서 변사체로 발견됐다.
국립과학수사연구원(국과수)은 변사체의 신원 확인을 위해 DNA 분석을 했고, 40일 만인 7월 22일 변사체는 유병언 회장이라고 관할 순천경찰서에 통보했다. 송치재 휴게소 인근 별장 ‘숲속의 추억’과 금수원 내 유씨 작업실에서 확보한 두 개의 유병언 DNA 시료와 일치한 것으로 나타났던 것이다.
그러나 “유병언이 밀항해 해외에 있다”는 ‘유병언 괴담’과 함께 일부 야당 의원, 일부 시민들은 국과수 발표를 신뢰하지 않았다. 경찰은 유씨 시신을 국과수 서울과학수사연구소로 옮겨 재부검을 실시했고, 지난해 7월 25일 서중석(徐中錫) 국과수 원장은 “독극물 분석과 질식사, 지병, 외력에 의한 사망 여부 등을 분석했으나 부패가 심해 사망 원인을 판명하지 못했다”고 밝혔다. 그러나 국과수는 “의혹을 완전히 풀기에는 부족한 부분이 있지만, 18일 만에 반 백골화가 가능하며, 추정 신장, 왼쪽 손가락 끝 마디 뼈 결손, 치아 및 DNA 분석 결과 변사체의 주인공이 유씨인 것만은 틀림없다”고 밝혔다.
▲지난해 7월 24일 국회에서 유병언 전 세모그룹 회장 수사 관련 현안보고를 위해 열린 법제사법위원회 전체회의에서 새누리당 박민식 의원이 유 회장 시신 현장사진을 들어 보이며 당시 황교안 법무부장관에게 질의하고 있다.
그러나 국과수 발표 직후에도 여론조사 기관 리얼미터가 조사한 결과는 ‘국과수의 발표를 신뢰하지 못한다’는 응답이 전체의 57.7%, ‘국과수의 발표를 신뢰한다’는 응답은 24.3%에 불과했다. 서 원장은 언론 인터뷰에서 “단순변사로 매장처리될 뻔한 변사체를 유전자 분석으로 신원확인을 한 국과수를 격려하지는 못할지언정 비전문가들의 의혹제기에 귀를 기울인다면 국과수를 해체해야 하는 것 아니냐”며 불쾌감을 표시했다.
법의학계 원로인 문국진(文國鎭) 대한법의학회 명예회장은 “경찰이 40일 만에 죽은 채로 발견된 유병언을 노숙자 변사 사건으로 처리하면서 초동수사가 엉망이 됐던 것”이라면서 “검시를 담당하는 검찰, 경찰, 의사, 판사는 초동수사 실패라고 하며 서로 몸사리기 바빴다”고 했다. 문 명예회장은 “언론은 애꿎은 국과수만 때리는데, 죽은 지 40일이나 지나 홀랑 썩은 것을 갖고 국과수가 무슨 재주로 사인(死因)을 규명할 수 있겠느냐”며 “미국의 법의관 제도만 도입하면 간단히 해결될 문제인데, 답답한 노릇”이라고 했다.
—검시의 목적은 무엇인가요.
“변사체 검시는 국민의 죽음에 대한 국가적 감시입니다. 억울한 죽음이 없도록 하기 위한 엄중한 사법행위이기도 하지요. 정확하고 공정한 사인규명으로 국민권리를 보호하고, 사회질서를 유지하는 데 검시의 목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국내 검시 내용을 보면 복잡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검시 집행은 검사가 책임을 집니다. 그런데 검사 수에 비해 변사체가 많아 집행을 경찰관에게 위임하는 바람에 실제로 검시 집행 책임자는 경찰관인 셈입니다. 그런데 검시 업무 성격상 의사의 검안(檢案)을 반드시 받아야 해요. 결국 검시 실무는 의사가 하고 있습니다.”
檢視와 檢屍의 차이
우리나라의 검시제도는 검사(檢事)가 주체다. 형사소송법 제222조는 ‘변사자 또는 변사의 의심이 있는 사체가 있을 때에는 그 소재지를 관할하는 지방검찰청 검사가 검시하여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검사의 독자적 판단만으로 부검을 할 수 있습니까.
“부검은 검사나 경찰관, 의사 마음대로 할 수 없어요. 반드시 법원의 영장을 받아야 합니다. 검시가 이처럼 지휘(검사), 집행(경찰), 실무(의사), 부검 결정(법원) 등 네 곳에 나눠져 있어요. 그렇다 보니 검시의 원래 목적 수행은 잊은 채 자기 책임 모면에만 집착하는 경향이 생깁니다.”
검시(檢視)는 죽음에 대한 법률적 판단을 위해 사체 및 그 주변 현장까지 종합적으로 조사하는 것을 말하며, 검시(檢屍)는 검시(檢視)의 과정에 포함된다. 검시(檢屍)란 죽음에 대한 의학적인 판단을 위해 주로 사체에 행하는 검안(檢案)과 부검(剖檢)을 포함한 검사다. 검안은 시체를 손괴하지 않고 사망을 확인하고 개인 식별을 하기 위해 시행하는 검사이고, 부검은 사망의 종류 및 사인을 가려내기 위해 시체를 해부해 검사하는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한 해에 사망하는 숫자는 25만명 정도로 이 중 15%인 3만6000명이 변사자라고 한다. 변사자 3만6000명 중 검사의 부검 여부 결정에 따라 3분의 1인 1만2000명 정도만 국과수 등 전국 대학병원에서 부검을 실시하고 있다. 인구가 2000만명인 서울, 경기 등 수도권의 경우, 국과수에서 부검이 이뤄지는 사체는 연간 3500건 정도다.
일단 변사체가 발생하면 경찰의 현장 감식반이 출동해 초동수사를 벌이고 시체를 병원 영안실로 보낸다. 이후 공의(公醫·내외과 의사로서 현지 경찰이 무보수로 임명한 현지 의사)가 와서 검안을 한 뒤 검사가 부검 여부를 결정하는 것이다. 법의학적 지식이 부족한 공의들은 변사자의 몸에서 나는 부패한 냄새를 농약 먹은 것으로 오인해 ‘자살’로 검안하는 일까지도 생기곤 했다고 한다.
최영식(崔永植) 서울과학수사연구소장은 지금도 직접 부검에 참여하고 있다. 그는 “사체는 의료 전문가인 법의관들의 눈에 의해 부검 여부가 결정돼야 하는데, 의료 비전문가인 검사의 눈으로 부검 여부를 결정하면 자칫 억울한 죽음이 생길 가능성이 많다”면서 “그나마 검사가 직접 현장에 나가 부검 여부를 결정하는 경우는 10% 미만이고(2014년 검사의 직접 검시율 4.1%), 대부분의 사건은 사법 경찰관들이 처리하고 있어 변사체의 사인을 밝히는 데 어려움이 많다”고 말했다.
최 소장은 정확한 사인을 가리기 위해서는 법의관이 사건발생 현장에서부터 사체에 대한 모든 검시 권한을 가져야 한다고 강조한다.
“우리의 검시체계는 반쪽짜리입니다. 현장이 중요한 것은 누구나 인정하지만 현실은 법의관이 사건 현장에 가지 못하고 사진설명만 보고 부검을 하니까요. 현장을 가본 것과 안 가본 것은 엄청난 차이가 납니다.”
1992년 6월 12일 발생한 치과의사 모녀 살해 사건은 우리나라 검시제도의 문제점을 한눈에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당시 욕조에서 변사체로 발견된 모녀의 사인 규명의 열쇠는 사망 시각이었지만 국과수가 부검한 날은 사건 이튿날인 6월 13일 오전. 이미 사체는 시강(屍剛·사체가 시간이 지남에 따라 뻣뻣해지는 것)과 허벅지에 약간 남은 시반(屍斑·피가 중력이 작용하는 방향으로 가라앉아 생긴 자줏빛 반점) 측정이 사실상 불가능했다. 경찰 측에서 준 사진도 촬영시각 때문에 인정을 받지 못해 결국 사건은 미궁에 빠지고 말았다. 법의관들이 현장에서 사체를 검안했다면 상황은 달라질 수도 있었던 사건이었다.
정년 보장된 미국 법의관들, 책임감 강해
▲광복 후 처음으로 1976년 고려대 의대에 법의학교실을 개설한 문국진 고려대 명예교수.
이 때문에 문국진 명예교수는 법의관 제도의 도입을 강력하게 주장하고 있다. 문 교수는 “미국이나 유럽 국가들은 지금 우리가 겪는 모순을 이미 겪으면서 일찍이 법의관 제도를 도입했다”면서 “검시의 모든 과정을 법의학 지식과 경험이 있는 법의관 한 사람에게 전담시켜 그들이 경찰과 함께 변사 현장에서 검시를 책임지는 것”이라고 했다.
1976년 고려대에 법의학교실을 처음으로 연 문국진 교수는 1970년 국과수 법의과장을 물러나 전 세계 법의관들이 선망하는 뉴욕대 의대 법의학교실로 1년6개월간 연수를 떠났다. 뉴욕대 의대 법의학교실엔 법의병리학자 찰스 노리스(Charles Norris) 등 당대의 법의학계 석학들이 포진하고 있었다.
문 교수는 그곳에서 선진 시스템을 눈으로 보고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문 교수는 뉴욕의 법의관이 경찰과 함께 변사 현장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검시를 지휘하는 모습을 보고 부러운 마음까지 들었다고 한다. 뉴욕은 뉴욕시의 독립기구로 법의관 사무실을 설치해 운영하고 있었던 것이다. 미국에서는 법의관을 ME(Medical Examiner)라고 부른다. ME 제도는 1877년 미국 매사추세츠주에서 시작했으며, 1917년 뉴욕주는 검시(檢屍)의 모든 과정을 법의학 지식과 경험이 있는 법의관 한 사람에게 전담시켰다.
—미국 법의관들은 한국의 법의관들과 어떻게 다른가요.
“ME 시스템은 전문적으로 훈련된 의사가 변사자에 대한 검시 업무를 전담하는 제도로, 법의관은 독자적으로 현장조사로부터 검안과 부검은 물론, 필요한 경우 증인심문까지 실시하면서 변사 사건을 주도적으로 처리합니다. 게다가 그들은 임기제가 아닌 정년제라 자기 직책에 프라이드를 갖고 천직처럼 여깁니다. 따라서 책임감이 강하지요.”
문 교수는 “뉴욕은 살인 사건이 발생하면, 현장에 법의관이 도착하기 전까지 아무도 손을 댈 수 없을 만큼 모든 권한이 ME에게 집중돼 있었다”며 “‘ME 라인’이 쳐 있으면, 미국 대통령이라고 해도 차를 우회해서 가야 할 정도였다”고 했다.
—우리는 왜 법의관 제도를 도입하지 않는 겁니까.
“한국 법의학자들의 실력은 세계적인데, 관련 제도는 아직 미흡합니다. 2005년 당시 유시민(柳時敏) 의원이 ‘검시제도 개선안’을 발의한 적이 있었으나, 17대 국회 내내 해당 기관들의 주도권 다툼으로 표류하다 회기를 넘기면서 자동 폐기됐습니다. 국회 율사(律士) 출신 의원들이 제도 도입에 마이동풍(馬耳東風)으로 대응했죠. 이제야 관심을 갖는다는데 지켜봐야겠습니다.”
경찰, 盧武鉉 대통령 검시 국과수에 요청 안 해
▲지난해 11월 3일 최영식 서울과학수사연구소장이 양천구 신월동 서울과학수사연구소에서 고 신해철씨의 시신 부검 결과를 설명하고 있다.
법의학자들은 검시체계의 문제점을 압축적으로 드러낸 사건으로 2009년 5월 23일 발생한 노무현(盧武鉉) 대통령 사망 사건을 꼽는다. 검찰과 경찰은 5월 23일 낮 12시20분부터 30여 분간 경남 양산 부산대병원 지하 1층 장례식장 영안실에서 노 대통령 시신에 대한 검안을 실시했다. 강희락(姜熙樂) 당시 경찰청장은 국과수 측에 ‘현장임장(現場臨場)’을 요청했고, 국과수는 법의학팀 부장을 위시해 3명이 현장에 도착했다. 그러나 경찰과 검찰은 현장 접근을 허용하지 않았다.
당시 검안은 검경 관계자와 허기영(許基永) 부산대 법의학교실 교수, 노 대통령의 조카사위인 정재성(鄭宰星) 변호사만 입회했다. 5월 24일 사인규명을 위해 부검이 필요하다는 입장이었던 경찰은 유가족들이 반대함에 따라 부검을 실시하지 않겠다고 발표했다. 결국 1차 검시기관인 국과수는 사체와 현장도 보지 못하고 돌아왔고, 유족의 뜻에 따라 부검도 실시하지 않음으로써 일국의 대통령 사망 사건이 졸지에 ‘변사 사건’으로 처리되고 만 것이다.
박의우(朴宜雨) 건국대 의대(법의학) 교수는 “노 대통령 변사 사건은 두 가지 문제점을 상징적으로 보여준 사건”이라면서 이렇게 말했다.
“첫째는 국과수의 검시가 수사기관의 선택에 따라 의뢰를 받을 경우에만 수동적으로 검시를 할 수 있다는 것이 공개된 겁니다. 둘째로는 법의관 육성과 처우의 현실을 적나라하게 드러낸 점입니다. 당시 경남북과 부산 지역을 담당하는 국과수 남부분소에는 근무 희망자가 없어 법의관이 한 명도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현지 경찰은 평소 의과대학 법의학교실에 부검을 의뢰하고 있었고, 대통령 사망 사건 또한 부검은 의과대학에서 하는 것으로 인식하고 있었던 것이죠.”
영미법계(英美法系)의 국가는 부검을 전담 직책인에게 의뢰하고 있는 ‘전담 검시제도’인 데 반해, 대륙법계(大陸法系) 국가는 ‘겸임 검시제도’로 검시 전담 직책을 가진 사람이 없이 관련 직종의 공무원이 검시 업무를 겸하게 하고 있다. 전담 검시제도로는 영국, 미국 일부 주, 싱가포르 등이 시행하는 검시관 제도(Coroner System), 미국이 운용하고 있는 법의관(ME) 제도가 있다.
이에 비해 겸임 검시제도는 독일, 일본, 한국, 인도 등 대륙법계 국가에서 채택하고 있다. 대부분 수사기관인 검사 또는 사법경찰관이 검시를 지휘하며, 모든 변사 사건은 일단 수사당국에 신고돼 검시 절차를 거친다. 이 과정에서 범죄와 관련되거나 그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되면 수사당국의 요청에 의해 법원의 허가로 부검이 시행된다.
특히 일본은 우리가 주목할 만하다. 일본은 행정부검과 사법부검을 이원화해 대도시 지방자치단체의 경우 감찰의(監察醫·미국의 ME의 변형)를 두고, 이들이 소속된 감찰의무원(監察醫務院)이란 조직에서 주로 행정부검(범죄와 관련이 없는 이상 사체 부검)을 담당하고 있고, 사법부검(범죄와 관련 있는 변사체 부검)은 대부분 의과대학 법의학교실에서 담당하고 있다. 지방의 경우, 행정부검이나 사법부검 구분없이 경찰공의 또는 지역의 의과대학 법의학교실에서 처리한다.
日本의 감찰의무원 제도
전문가들은 우리나라의 검시는 제도적으로 변사 현장이 수사 초기에 검시 의사에게 개방돼 있지 않다고 지적한다. 실제로 부검은 신속히 이뤄지지 못하고 사건 발생 후 최소 1일 이상이 지나 실시되고 있다. 사법경찰관의 현장임장→검사에게 발생 보고→검사의 부검 지휘→검증영장 신청→검사의 청구→법원의 영장 발부 등의 멀고도 먼 절차가 가로막고 있기 때문이다.
수사 초기에 범죄현장에 접근 못 하는 것뿐만 아니라 변사체도 사건이 발생한 지 하루 이틀이 지난 상태다. 부검의는 영안실의 냉장고를 거친 뒤 벌거벗은 차가운 주검의 모습으로 변한 변사자를 처음 대면하게 되고, 담당 경찰을 통해 검시조사 상황에 대한 정보를 귀동냥하면서 장님 코끼리 더듬듯 부검을 해야만 하는 것이다. 이러한 조건의 변사체를 주고 사망시각을 알아내라는 것은 그야말로 ‘점을 보라’는 것이나 마찬가지일 것이다.
부검 수요는 해마다 늘고 있고 부검 건수도 해마다 늘고 있다. 국과수 법의관들은 연간 5400여 건(서울·경기 3500건)의 부검 업무를 소화하느라 현장 검안은 엄두도 내지 못하고 있다. 1인당 연평균 216건에 달하는 수치다. 이 정도의 부검을 소화하기 위해서는 법의관이 300~400명 정도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소견이다.
경찰청에 따르면 연평균 3만5000여 건의 변사 사건이 발생하지만 법의관은 국립과학수사연구원 소속 23명을 비롯해 서울·연세·고려·경북·조선·전북·전남대 등 법의학 전공 교수들, 국과수 법의관 출신 개업의 등 40여 명에 불과하다. 국과수 법의관 출신 개업의들도 권일훈·김광훈·이상용·조갑래·한길로 박사 등 7~8명에 불과하다. 이들은 서울, 대구·경북권, 부산·경남권 등 권역별로 소수만 활동하고 있을 뿐이어서 극히 제한된 일부 사건만 검안할 수 있다.
촉탁부검도 2008년 이전에는 건당 25만원을 지급했으나, 2009년부터는 기본 30만원에 재료비 5만원을 합해 35만원을 지급하고 있다고 한다. 국과수는 부검 1팀당 법의관 1명, 법의조사관 2명, 형사사진 담당관 1명 등 4인이 한 팀을 이뤄 검시를 하는 것이 적절하다는 의견이다. 미국의 경우, 부검 1건당 약 3000달러, 우리 돈으로 300만~400만원을 계상한다. 이 정도라야 조직검사와 약·독물검사, 인건비와 건물유지비 등 사무실 운영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경찰청의 의견대로 촉탁의 부검비를 50만원으로 인상할 경우, 국과수 비용부담이 크게 늘어나 검시 업무가 와해되거나 촉탁부검 자체가 중단될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박의우 교수는 “부검 비용은 현실화하되 국과수의 인력과 장비를 사용하고 있는 곳과 자체 부검실을 운영하고 있는 곳과는 비용을 차별화해야 할 것”이라고 했다.
경찰, 검시 보조 인력 보충 위해 경찰검시관 채용
▲뉴욕주의 법의관(Medical Examiner)이 부검할 사체를 결정해 발가락에 태그를 달아놓은 모습. 대륙법계인 한국과 달리 영미법계인 미국은 법의학 과정을 이수한 의사가 부검 여부를 결정한다(위).
미국 네바다주 와슈 카운티의 수석 법의관 엘렌 클라크(Ellen Clark) 박사(왼쪽)가 검시보조원과 함께 부검할 사체를 옮기고 있다(아래).
경찰은 현장 검시를 제대로 하려면 법의관이 현재의 4배 이상인 160여 명 정도가 필요하다고 추산했다. 시신 1구의 평균 검시 시간을 9시간으로 잡으면 부검의 1명이 하루에 살펴볼 수 있는 시신은 많아야 2구 정도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법의관은 의대생들이 기피하는 직종이라 인력 확보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국과수도 1955년 설립 이후 57년 만인 지난해 처음으로 법의관 정원 23명을 채웠을 정도다.
국과수가 인력을 늘릴 수 없다 보니 경찰청 한기민(韓基玟) 당시 총경이 2005년부터 경찰검시관(구 법의조사관) 150여 명을 경찰 일반직 공무원으로 특별 채용안을 기획했다. 이들은 검안을 할 수 있지만 초동수사를 마친 뒤 검사에게 제출하는 시체검안서 및 사망진단서 작성 권한이 없다. 이 때문에 일각에서는 시체검안서 및 사망진단서를 경찰검시관이 작성한 ‘변사 사건 조사결과 보고서’로 대체하자는 주장을 하기도 한다. 그러나 의료법 17조에 따르면, 치과·한의사를 포함한 의사만 시체검안서나 사망진단서를 작성할 수 있다.
이숭덕(李崇德) 서울대 의대 교수는 “경찰검시관들은 동네 의사들보다 낫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대부분 간호사, 임상병리사 출신들로, 검안의를 대신해 이들로 100% 대체하는 것도 제도적 측면에서 바람직하지 않다”며 “종합병원 의사라도 해부학적 지식을 갖추지 않았다면 제대로 된 부검을 할 수 없듯 경찰검시관이든 동네 의사든 검안의 역할을 하려면 법의학적 지식을 갖춰야 한다”고 설명했다.
최영식 소장은 법의학이 크게 발전하지 못하는 또 하나의 원인으로 법의학을 전공한 의사가 배출되고 있지 않은 점을 들었다.
“정종섭(鄭宗燮) 안행부 장관이 ‘국과수 중장기 로드맵’으로 2020년까지 직원 500명(법의관 80명, 현재 25명)으로 만들어 주겠다는 약속을 했습니다. 박신양 주연의 법의학 드라마 〈싸인〉 방영과 가수 신해철 사망 사건 등 사회 이슈가 되는 사건들 부검으로 법의학에 대한 홍보가 상당히 되긴 했습니다만, 돈벌이가 되지 않는 분야이기 때문에 선뜻 나서는 이가 적습니다. 심지어 법의학을 의료계의 ‘3D 업종’으로 분류하는 사람도 있으니까요. 국과수에 여성 법의관 4명을 포함해 젊은 의학도들이 법의학도가 되겠다며 의대에 지원하는 모습에 그나마 위안을 받습니다. 2014년 세월호 참사 때 국과수의 헌신적 노력에 감사해 진도군민이 기증한 진돗개 ‘진돌이’도 크고 작은 트라우마에 시달리는 국과수 직원들에게 ‘펫 세러피(Pet Therapy)’ 역할을 톡톡히 해주고 있습니다.”
국과수에 채용되는 의사는 대개 임상병리나 해부병리를 전공한 의사가 대부분이다. 이유는 법의학 전문의 과정이 있는 대학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게다가 법의학자가 되는 길은 좁다. 의대(6년)를 졸업하고 병리학 전문의(5년)를 따고 법의학교실에서 경험을 쌓아야 한다. 문국진 교수가 초석을 놓은 법의학교실이 현재는 전국 의대 41곳 중 12곳에 있다. 현재 법의학을 전공하는 사람의 숫자는 대략 70~80명, 고려대 법의학교실 창설연도를 기준으로 보면, 지금까지 오는 데 35년이 걸린 셈이다.
유시민법
▲노무현 전 대통령 시신이 안치됐던 경남 양산 부산대학교 병원 장례식장 지하 1층의 영안실 모습. 노 전 대통령 시신은 사진의 5호 시신 보관함에 안치됐었다(왼쪽). 2009년 5월 23일 오전 노무현 전 대통령의 시신이 안치된 양산 부산대병원 지하 1층 지역응급의료센터에서 경호원들이 입구를 지키고 있다(오른쪽).
1960년대 후반부터 검시제도 개선을 위한 논의가 일어났고, 형사소송법·시체 해부 및 보존에 관한 법률 등에 흩어진 관련 규정을 아우를 수 있도록 검시 관련 독립적인 법안을 제정해야 한다는 주장도 꾸준히 제기됐다.
2003년 12월 대통령 직속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가 소위 세원청(洗寃廳) 법안으로 불리는 ‘사인확인기관의 설립·운영 및 육성에 관한 법률(안)’을 제안해 공청회를 열었고, 2005년 유시민 전 열린우리당 의원이 ‘검시를 행할 자의 자격 및 직무범위에 관한 법률안’(일명 유시민법)을 대표 발의하면서 본격화했다.
특히 유시민 의원이 발의한 ‘유시민법’은 ▲정부 산하에 검시위원회를 두고 ▲검시관의 자격을 의사에서 법의학 교육과정 수료자 등으로 확대 ▲검시대상을 법률사항으로 규정 ▲검시관의 현장접근성 보장 등을 골자로 하는 것이었지만, 국회 회기만료로 자동 폐기됐다. 이와 함께 2009년 국민권익위원회는 행정검시 활성화 및 무연고 시체처리 방안에 대해 검시를 행하는 자의 호칭, 법률 제정 필요성, 법의관 인력양성, 국과수 및 법의학교실 처우개선 방안 등에 관해 각 기관의 의견을 수렴하기도 했다.
이숭덕 서울대 의대 교수는 “유시민법은 검시관 양성에 관한 사항을 심의·의결하기 위해 국무총리 산하에 ‘검시위원회’를 두고, 이 법에 따라 대통령령이 정하는 행정기관에 검시관을 두도록 하고 있다”면서 “미국 캘리포니아주의 법률(제27491조)처럼 체계적 열거는 하고 있지 않지만, 교통사고·보험사고·업무상 재해 등 대통령령이 정하는 사망 사건에 대해 사망자 유족이 요청하는 경우 검시할 수 있도록 한 것은 진일보한 입법 태도”라고 했다.
대전경찰청 유동하 경정은 그의 논문 〈우리나라 검시제도의 개선방안에 관한 연구(충남대, 2010)〉에서, “현재 검시제도 개선 방안에서 가장 핵심적인 사항은 첫째, 검시위원회의 설치와 검시기관의 소속 문제”라며 “검시위 소속 문제는 경찰과 검찰 내부 갈등으로 합의점을 찾지 못하고 있다”고 했다. 그는 “법의관의 자격 문제도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다”며 “법의학회와 병리학회가 서로 ‘숲과 나무를 못 본다’ 갈등을 빚고 있다”고 했다.
유 경정은 “검시 관련 문제의 심의·의결 기관으로서 검시위원회를 보건복지부나 국무총리 산하에 두어 정책을 결정케 하고, 자치단체 산하에 검시기관(국과수)을 둬 운영한다면 이상적이라 판단된다”면서 “감정기관(국과수)이 수사기관(검찰)으로부터 독립돼야 한다고 보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는 법의관은 미국식 ME로 검찰과 경찰, 그리고 국과수의 의견이 모이고 있고, 이를 위해 대학에 법의학 인력양성을 위해 ‘법의학 전문의 제도’를 마련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2008년 국민권익위 주관 의견수렴회의에서는 국과수를 경찰청으로 이관하고, 검시위원회는 법무부(법의관의 임면과 육성 담당) 쪽으로 잠정합의를 도출하기도 했었다고 한다. 현장부서와 기획부서의 이원화를 꾀한 것이다. 1994년 당시 심재륜(沈在淪) 대검강력부장은 전국 수사기관에 배포한 소책자 《김기웅 (순경) 사건을 계기로 본 강력사건의 수사상 문제점과 대책》에서 검시제도의 개선방안을 제시하면서, 검사가 검시를 직접 담당하는 현행 우리나라의 ‘겸임검시’를 근본적으로 개혁하고, 검시 권한을 법의학 전문의에게 부여하는 미국식 전담검시제의 도입을 주장하기도 했다.
박의우 교수는 “현재 가장 바람직한 모델은 미국이나 일본처럼 지방자치단체에 검사기관을 두고 수사기관과 상호 대등한 관계에서 협력하는 방안”이라며 “장기적으로 검시기관의 소속을 자치단체에 두어야 하고, 단기적으로는 현행 국과수를 검시기관으로 입법화하고, 각 의과대학의 법의학교실의 해부 가능한 교수를 법의관으로 임명하는 것이 현실성 있는 대안이 될 수 있다”고 했다. 이숭덕 교수는 “검시 관련 법률은 반드시 제정해야 하고, 검시 대상을 법률로 명확히 규정해야만 한다”면서 “인력과 자원이 불충분하다면 제도를 효율적으로 운용하는 것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고 했다.
검찰과 경찰, 국과수와 현장출동 체제 갖춰
▲유병언 변사체 논란 이후 검찰이 변사체 검시와 관련한 제도정비에 본격적으로 나섰다. 지난 1월 13일 대검찰청이 전국 의과대학 법의학 교수와 국과수 법의관이 참여하는 법의학 자문위원회를 출범시켰다. 사진 중앙이 김진태 검찰총장, 김 총장 오른쪽이 이정빈 자문위원장(단국대 석좌교수), 오른쪽이 박종태 대한법의학회장(전남대 의대 교수)이다.
지난해 ‘유병언 변사체’ 초동 대응 논란으로 궁지에 몰렸던 검찰과 경찰이 변사체 검시와 관련한 제도 정비에 적극 나서는 등 해법을 모색하고 있다. 먼저 검찰은 국내 최고 수준의 법의학 전문가가 참여하는 자문위원회를 구성했다. 대검찰청은 검사장(차관급)이 주도하는 과학수사부를 신설한 데 이어, 지난 1월 13일 전국 의과대학 법의학 교수 24명과 국과수 법의관 2명 등이 참여하는 법의학 자문위원회(위원장 이정빈 단국대 석좌교수)를 출범했다. 대한법의학회 회장을 지낸 이정빈 단국대 법대 석좌교수가 자문위원장을 맡고 박의우 건국대 교수, 이윤성 서울대 교수, 이상한 경북대 교수, 신경진 연세대 교수, 김유훈 국과수 법의관 등 국내 최고 수준의 법의학 전문가들이 참여했다.
검찰의 한 관계자는 “검사의 변사체 직접 검시비율이 이전 4%대에서 두 배에 달하는 8% 안팎의 비율로 오르는 등 가시적인 결과물이 나타나고 있다”면서 법의학 자문단을 통해 주요 사건에 대응한다는 방침이라고 말했다. 검찰 관계자는 “중요 변사 사건이나 범죄의 의문이 있는 변사 사건 등 필요한 경우에 위원의 자문을 받을 예정”이라며 “직접 검시 사건 중 약 10%에 해당하는 300건에 대해 법의학 자문위원의 자문을 받을 계획”이라고 덧붙였다.
경찰청 과학수사센터는 국과수·법의학계와 공동으로 구체적 대안 마련에 착수했다. 예컨대 변사 사건 현장 검시 때, 미국의 법의관(ME)처럼 검사는 물론이고 법의학자도 함께 현장에 가는 시스템을 구축해 보자는 것이다.
경찰청은 국과수, 대한법의학회와 함께 서울과학수사연구소 주변(서울 8권역) 경찰서를 중심으로 ‘국가검안시범사업’을 발족했다. 경찰청은 지난 3월 1일 오전 9시부터 서울 양천-구로-강서 경찰서 관할지역(서울과학수사연구소 인근)을 대상으로 이 지역에서 발생하는 변사 사건에 대해 서울과학수사연구소 내에 사무실을 설치하고 365일 변사 신고에 대응하고 있다. 시범사업팀은 지난 2월 27일 발생한 화성 엽총 난사 사건, 4월 5일 시흥 시화호 토막시신 발견 사건, 5월 13일 내곡동 예비군 총기 난사 사건 등에 출동해 즉시 검안과 긴급부검을 실시했다고 한다.
김형석 전남대 의대 교수(법의학)는 “시범사업은 콜센터를 운영해 변사체를 전수 검안하고 있다”면서 “이 프로젝트를 통해 법의학 전문의들이 현장에 투입됨으로써 경·관·학 협력뿐만 아니라 억울한 변사체들이 훨씬 줄어드는 효과를 가져올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그는 “현재 인구 150만명에 달하는 서울연구소 인근 지역을 8권역으로 나누고 24시간, 365일, 30분~1시간 이내에 도착해 검안 직후 수사관과 유족에게 검안서를 즉시 발행해 주고 있다”며 “검안과 부검을 연계해 장례 비용을 줄일 수 있는 등 반응이 상당히 좋다”고 했다.
공적 검안 시범사업에 참여하는 법의학교실 교수는 강신몽 가톨릭 의대 교수(전 국과수 소장), 이숭덕 서울대 의대 교수, 김장한 울산대 의대 교수, 유성호 서울대 의대 교수(법의학회 이사), 박성환 고려대 의대 교수(법의학회 이사), 이기범 아주대 의대 병리학 교수 등이다.
김형석 교수는 “법의학 전문의들의 현장투입을 통해 검찰-경찰과의 검시 커뮤니케이션이 강화되고, 유족들이 부검에 대해 좋은 이미지를 갖는 등 국가 검시체계가 모범적으로 구축되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면서 “이 좋은 사업을 어떻게 지속성 있게 유지하고 정착시킬 수 있는가가 관건이 될 것”이라고 했다.◎
출처 | 월간조선 10월호 글 | 오동룡 월간조선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