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5/ 기타 여러 분야 / 김상보 - 천재 기사 조훈현
■기타 여러 분야
□김상보
2015.08.09 임진왜란 때 일본에 등 돌린 '왜장 사야카' 金忠善… 후손
"어릴 때 '쪽바리 후손' 놀림 받았지만… 훌륭한 始祖에 대해 자부심 있어"
"한반도에서 일본인 시조를 공개적으로 밝힌 일족은 우리가 유일하다. 그만큼 당당하다는 것이다. 후손은 11개 파로 7500명쯤 된다. 김치열 전 내무장관도 우리 문중이다."
김상보(67) 종친회장은 다혈질이고 목청이 크고 화끈했다. 그는 임진왜란 때 귀화한 일본 장수 김충선(金忠善)의 12세손이다.
대구시 달성군 가창면 우록리. 병풍처럼 둘러싸인 산 안쪽으로 들판과 마을이 숨어 있었다. 김충선을 시조로 한 '사성(賜姓) 김씨' 집성촌이다. 마을 입구에 황금색 복고양이 상(像)과 함께 '한일우호관'이 서있다. 문을 연 지 3년이 됐다. 국내보다 일본에서 더 유명하다. 일본 정계와 학계 인사들의 필수 방문코스다.
"작년에만 일본에서 3천여 명이 다녀갔다. 여기 오는 일본인들을 무조건 '친한파'로 만들어버린다. 일본 정계 거물인 니카이 도시히로(二階俊博) 자민당 총무회장은 여러 번 방문했다. 지난 2월 박근혜 대통령을 예방했을 때도 일본 정계와 관광업계 인사 1400명을 이끌고 여기까지 내려왔다."
당시 니카이 도시히로 총무회장은 서울 잠실 롯데호텔에서 열린 '한일우호교류행사'에 참석해 이렇게 연설했다.
"지금 한·일 관계가 힘든 상황이다. 우리는 과거 역사에서 배워야 한다. '한·일 우호 모델'로 김충선 장군이 있다. 이분의 기념비가 내 지역구인 와카야마(和歌山)현에 세워져 있다."
일본에서 더 관심을 갖고 있는 역사 속 인물 김충선. 일본명은 사야카(沙也可), 21세 때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의 우선봉장으로 동래에 상륙한 직후 "이 침략 전쟁은 명분이 없다"며 조선군에 투항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 뒤 조선군에 편입됐고, 조총 제조법을 전수한 인물로 추정된다. 그가 이순신 장군에게 보낸 서신에는 '이미 조총을 개발해서 훈련하고 있다'는 내용이 나온다. 선조(宣祖)가 그의 공을 인정해 직접 성(姓)과 이름을 내려준 게 '김충선'이다. 그 뒤로 이괄의 난과 병자호란에서도 공을 세워 정2품까지 올랐다. 승정원일기에는 다음과 같은 인물평이 나온다.
'항왜영장(降倭領將·항복한 왜군 장수) 김충선은 담력과 용력이 뛰어나지만 성질은 매우 공손하고 근신합니다. 지난번 이괄의 난 당시 괄의 부장(副將) 서아지를 뒤쫓아 처단했습니다. 진실로 가상한 일입니다.'
하지만 김충선이 임진왜란 때 출정하기 전 일본에서 무엇을 했고 어느 가문 출신인지는 정확히 밝혀진 게 없다. '사야카'라는 이름 자체가 당시 일본의 출정 문서나 역사기록에 나오지 않는다.
―한때 일본에서는 본국에 등 돌린 김충선에 대해 '가공인물' '비열한 조작'이라고 했는데?.
"과거에 그런 논쟁이 벌어졌지만 역사적 기록과 자료 등에 의해 이미 밝혀졌다. 일본의 국민작가라는 시바 료타로(司馬遼太郞)가 1972년 '한국기행'이라는 책에서 실존 인물로 언급했다. 그 뒤 일본의 12개 도시에서 '사야카 연구회'가 생겨났다. TV 다큐멘터리로도 제작되고, 김충선을 모델로 한 소설 '바다의 가야금'도 나왔다."
―왜 조선을 치러 온 그가 조선땅에 닿자마자 귀화했는지는 미스터리하다.
"당시 경상도 병마절도사 박진에게 보낸 서신에는 '내 소원은 예의의 나라에서 성인의 백성이 되고자 할 뿐이다'라고 나온다. 하지만 조선땅에 닿자마자 귀순한 데는 어떤 배경이 있었을 것이다. 김충선은 당시 임진왜란을 일으킨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반기를 들었던 세력으로 보인다.".
―그렇다 해도 일본 입장에서 김충선은 '역적' '매국노'일 수밖에 없지 않겠나?
"1997년 일본 NHK는 '출병에 대의(大義) 없다-히데요시(豊臣秀吉)에게 등 돌린 사나이'라는 다큐멘터리를 방영했다. 한 무사의 의로운 결단, 명분 없는 침략전쟁을 거부한 인도주의자, 일본의 양심 등으로 재평가되고 있는 것이다. 한·일 관계가 악화될 때 김충선은 특히 일본 쪽에 의미 있는 메시지를 던져주고 있는 것이다."
―한·일 양국 교과서에 김충선이 실린 적이 있다고 들었다.
"정유재란 4백주년인 1997년 오사카와 교토에서 '왜 또다시 사야카(沙也可)인가'라는 한·일 역사학자 심포지엄이 있었다. 그때 양국 교과서에 싣자고 합의했다. 이듬해인 1998년 일본은 고교 역사교과서에, 우리는 중학교 도덕교과서에 딱 한 번 게재했다."
―이곳 '한일우호관'을 방문하는 일본인들의 반응은 어떤가?
"일본 학자나 언론인들이 여기에 오면 '일본인이 어떻게 한국에서 이런 귀한 대접을 받게 됐느냐?'고 묻는다. 김충선은 정2품까지 올라갔고, 부인은 당시 진주목사의 딸이었다. '반일감정'이 있는 한국에서 이렇게 존경받는 일본인이 있었다는 사실에 놀라워한다. 내가 일본을 방문하면 '위대한 일본인'의 후손으로 대접받는다."
―니카이 도시히로 일본 자민당 총무회장은 자신의 지역구인 와카야마(和歌山)현이 김충선의 고향이라며 그곳에 김충선 기념비를 세웠다고 했는데?
"시내 중심부라고 할 수 있는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 신사의 정문 앞에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당시 제막식에 나도 참석했다. 니카이 회장과 친분 있는 박삼구 아시아나 회장이 모든 경비를 댔다. 박 회장은 전세기로 기념비 석재를 싣고 갔다. 내가 '일본 현지에서 석재를 구해 만들면 될 일을 번거롭게 그러느냐'고 하니, '세월이 흘러 비문이 지워지면 다시 쓰면 되지만 돌은 썩어 허물어지면 어떻게 할 수가 없다'고 대답했다."
―와카야마현에 기념비를 세웠으니, 김충선은 그 지역 출신이라는 게 확인된 건가?
"일본에서는 와카야마현을 비롯해 구마모토·쓰시마·신시로·교토 등 다섯 개 지역에서 자기 고향 출신이라고 다투고 있다. 지금으로서는 와카야마현 지역의 철포 부대를 지휘했던 인물이 가장 유력하다."
―무슨 근거로 그렇게 보나?
"일본에는 임진왜란 당시 출정한 16만 명의 신상 기록이 남아 있다. 사망·행방불명·귀화한 인물이 다 적혀 있다는 뜻이다. 각 지역마다 출정한 뒤 돌아오지 않은 인물 중에서 몇 가지 조건에 부합하면 김충선일 것이라는 식이다. 그럼에도 아직 확정된 것은 아니다. 일본에서 결정적인 증거인 집안 족보가 나오지 않는 한 말이다."
―'사야카'라는 이름이 일본 문서에는 전혀 나오지 않는다고 들었다.
"내 생각에 '사야카'는 가명이다. 일본 입장에서는 일족을 멸할 반역 행위를 했으니 자신의 신분을 감췄을 것이다. 후대에 엮은 문집에는 일본에 일곱 형제가 있었고 두 부인을 남겨두고 왔다는 기록이 있다."
―여기 우록마을에 들어오는 순간 산에 둘러싸여 아늑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지형적으로 좁은 입구만 막으면 누구도 못 들어오게 돼 있다. 자연 요새였던 셈이다. 지금은 40가호쯤 산다. 내가 어렸을 때만 해도 200가호가 넘었다. 자급자족한 집성촌이었다. 바깥세상에서 호롱불을 쓸 때 우리는 물레방아로 전기를 만들어 썼다. 초가지붕을 이을 때 우리 동네만 기와를 덮었고. 마을 자체적으로 초등학교를 세울 만큼 교육열도 높았다."
―본인이 일본 핏줄과 연결돼 있는 사실을 언제 처음 알게 됐나?
"집성촌이라 어릴 때부터 들어왔다."
-학교에 진학하면서 '왜놈 후손'이라는 놀림을 받지 않았나?
"왜 안 그랬겠나. '쪽바리 후손'이라고 핍박과 놀림을 많이 받고 살았다. 가끔은 참지 못해 싸우기도 했고."
―출신을 감추고 싶었을 텐데.
"스트레스를 받았지만 사실인데 어떻게 하나. 요즘도 일본 매스컴에서 찾아오면 '일본인 후예로서 살면서 고초를 많이 겪지 않았느냐'는 질문을 꼭 한다. 부끄러워하고 숨기는 후손들도 있었겠지만 나는 당당하게 살아왔다. 훌륭한 시조님에 대해 자부심이 있다."
―부친은 어떤 분이었나?
"아버지는 일제강점기 시절 일본 유학을 가서 정착한 뒤 히로시마에서 줄 공장을 운영했다. 종업원 3천여 명이 됐다고 한다. 일본 여자와 결혼하려고 했는데, 할아버지가 '가문을 망친다'며 반대해 이루지 못했다."
―시조가 일본인인데, 일본 여자와 결혼하면 가문을 망친다?
"어쨌든 일본 여자와 결혼을 못했다. 롯데가(家)와 같은 재벌가가 될 뻔했는데(웃음). 히로시마 원폭 투하가 있은 뒤 할아버지의 종용으로 귀국했다. 그 뒤 다시 일본으로 들어가려고 했지만 할아버지에 의해 좌절됐다. 광복이 된 뒤 일본돈을 한국돈과 바꾸는 화폐교환이 있었다. 1인당 바꿀 수 있는 돈 액수가 얼마 안 됐다. 그때 아버지가 갖고 있던 엄청난 일본돈은 휴지가 되고 말았다. 그 뒤로 아버지는 마을 바깥을 나가지 않았다."
―선생의 정체성은 한국인과 일본인 중 어느 쪽인가?
"가끔은 내 칼 같은 성격에 대해 '왜놈 성질 같다'는 말은 듣지만, 솔직히 420년이 흘렀는데 아직 일본 피가 남아 있겠나. 대대손손 한국 부인을 만나 자식을 낳아왔는데."
―일본에서는 선생을 같은 핏줄로 보지 않는가?
"몇 년 전 일본에서 태풍 피해가 심했다. 우리 국민들이 반일감정에도 불구하고 성금을 모아 보냈다. 우리 문중과 대구의 '사야카 연구회'에서 2백만원을 보냈다. 일본 신문에서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제목으로 그걸 대문짝만하게 다뤘다. 다른 데서도 성금이 많이 들어왔을 텐데 얼마 안 되는 돈을 보낸 우리를 조명한 것이다. '이걸 보면 우리 국민 감정이 어떨까' 하는 자격지심이 있었다."
―우리 사회에 확산되는 '반일감정'이 불편하지 않나?
"요즘 아베 정권이 하는 처사를 보면 나도 반일감정이 생긴다. 일본인들을 만나면 독도와 위안부 문제에 대해 강하게 얘기한다. 내가 그런 비판을 하면 다들 경청한다. 당초 우리 시조님도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명분 없는 전쟁'이라고 반기를 들었지 않나."
최보식 기자
□추리소설의 代父 김성종
2015.06.07 조선일보
"5共 때 건장한 사내들이 대통령 경호에 대하여
자문을 하려고 찾아와 '상상으로 썼다'고 거절"
''여명의 눈동자'의 인기로 '추정'이라는 假名 쓴 채
같은 신문 '제5열'도 연재… 신문 연재 사상 유례없어"
부산에 내려갔다가 우연히 김성종(金聖鍾·74)씨의 소식을 들었을 때, 내게는 '발견'과 같았다. 추리소설로 한 시대를 풍미했던 그는 추억 속 인물이었다. 그런 그가 현실에서 존재할뿐더러 여전히 추리작가로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작년 한 해 부산일보에 매주(每週) 단편 추리소설을 연재했어요. 장편 소설 연재도 힘든 작업이지만, 매주 소재를 바꿔 새 작품을 연재한 사례는 지금껏 없었지요. 1년에 무려 52편을 썼어요."
▲김성종씨는“내게 겁을 먹고 다가오는 독자들도 있었다. 소설에서 사람을 워낙 죽이니까”라고 말했다. /최보식 기자
―연재를 끝내고 난 뒤 "나이가 들수록 글이 술술 잘 풀려 즐겁다"고 했더군요.
"처음에는 가능할까 걱정됐어요. 작심하고 몰입하니 되더군요. 내 나이의 작가들은 거의 작품을 안 써요. 나는 과거에 비해 지금이 훨씬 잘 쓰는 것 같아요. 앞으로 더 좋아질 거고."
―글은 정신과 체력으로 쓰는데, 본인 관리를 잘 해오셨군요.
"보다시피 나는 술·담배를 다 하고 운동은 전혀 안 해요. 비결이라면 즐거운 마음으로 글을 써온 거죠."
―직업적으로 글을 쓰는 것은 진을 빼는 일이지 마냥 즐거울 수 있나요?
"어디에 매여서 쓰는 게 아니라 나 자신을 위해 쓰니까요. 농부가 아침에 일어나면 땅을 갈고 씨를 뿌리는 것처럼 글을 써요. 상상력도 아직 시들지 않았어요. 나이 들수록 보고 싶은 책은 늘어나고, 책을 읽으면 내가 무지한 것을 깨닫게 되니 더 보고 싶은 책이 많아져요. 남은 삶을 허투로 쓸 수가 없는 거죠."
그가 신문 연재한 작품들을 엮은 '달맞이언덕의 안개'는 문장의 긴장감도 살아있었고, 단숨에 읽혔다. 작품들 속 공통된 무대는 카페 '죄와 벌'. 그가 부산 해운대의 달맞이언덕에 세운 '추리문학관' 1층에 실재하는 카페다. 여기에 앉아 커피를 마시며 그와 얘기를 나누었다.
―선생의 고향은 전남 구례로 알고 있는데, 어쩌다가 부산에 추리문학관을 지었나요?
"화창한 날에는 여기서 대마도도 보입니다. 안개가 낄 때면 더욱 멋있고. 서울서 한창 집필하던 시절에 머리를 식히러 부산에 몇 번 내려왔어요. 그런 인연으로 땅을 사서는 1992년 이걸 짓게 된 거죠. 사설(私設)문학관 1호입니다. 그 바람에 빼도박도 못하고 부산에 살게 됐어요." 그는 구례농고와 연세대 정외과를 나왔다. 그 뒤 잡지사에 근무하던 중 1969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경찰관'이 당선됐다.
―등단(登壇)은 소위 '순수문학'으로 했군요.
"추리소설에 관심이 많았지만 그때는 써봐야 발표할 지면이 없었어요. 출판사에서도 책을 내주지 않았으니까요. 그러다가 한국일보 장편 현상공모에 '최후의 증인'(1974년)이 당선됐어요. '한국전쟁의 비극을 추리적으로 묘사한 작품'이라는 게 심사평이었어요. 그때부터 추리소설 청탁이 오는데 정신이 없었어요. 여기저기 20년간 연재했으니까요."
그는 '여명의 눈동자' '제5열' '국제 열차 살인사건' 등 100여권을 썼고, 몇몇 작품은 영화와 드라마로 만들어졌다. 출세작인 '최후의 증인'은 배창호 감독의 영화 '흑수선'의 원작으로 쓰였다.
―역시 대표작은 '여명의 눈동자'라고 할 수 있겠지요? 고(故) 김종학 감독의 TV 드라마로 공전의 히트를 쳤고.
"10권짜리였는데 300만부쯤 나갔어요. 아이러니하게도 '여명의 눈동자'는 추리소설이 아니었어요. 1975년부터 81년까지 6년간 일간스포츠에 연재했던 거죠. 워낙 인기가 높으니까, 당시 한국일보 장기영 사장이 '작품 하나를 더 연재해달라'고 했어요. 그분은 막무가내 스타일이라, '여명의 눈동자'를 연재하면서 같은 지면에 '제5열'도 1년 반 연재했어요."
―같은 신문에 한 작가가 두 작품을 동시 연재한다는 게 말이 됩니까?
"그래서 '제5열'에는 '추정'이라는 가명을 썼지요. 신문 연재 사상 그런 적이 없었어요."
―두 작품을 동시에 쓰면 사건 스토리와 등장인물이 헷갈릴 법도 했을 텐데.
"그런 적이 더러 있었죠. 사실 두 작품만 했던 게 아니라 다른 신문에도 연재했어요. 그 시절에는 손으로 쓰고 원고를 직접 신문사에 갖다 줬어요. 지금처럼 인터넷이 되는 시절이 아니었으니."
―마감 시간에 못 맞춰 펑크를 낸 적은 없었고요?
"한번은 지쳐서 펑크를 낼 작정으로 친구들과 지리산 종주를 떠났어요. 산장에서 자다 깼는데 슬며시 걱정이 되더라고요. 거기서 랜턴을 켜고는 원고지 일곱 장을 썼어요. 공중전화로 집에서 자고 있던 내 사무실 여비서를 깨워 불러줬어요. 연재 동안 펑크를 한 번도 못 냈던 거지요."
―청탁이 오면 써주니, 머릿속에 새로운 스토리가 늘 잠겨 있는 모양이군요.
"써야겠다고 마음먹으면 쓸 게 많아요. 일본에서는 열차 범죄 소재로만 쓰는 작가도 있으니까요. 나는 작품을 시작할 때 첫 장면과 마지막 장면은 꼭 생각해둡니다."
―추리소설을 계속 읽으면 어떤 도식(圖式)이 보이는 것 같았어요.
"과거에는 '사람이 죽었는데 문이 안으로 잠겨 있었다. 범인은 어디로 갔는가'처럼 수수께끼를 풀어가는 식이었어요. 지금은 로펌, 병원, 인터넷, 에너지, 국제테러, 화학무기 같은 전문적인 분야가 소재가 되고 스토리 전개도 복잡해졌지요. 존 르 카레('추운 나라에서 온 스파이'를 쓴 영국 작가)의 추리소설에는 서방세계로 넘어온 공산국가의 스파이가 사상적 갈등을 겪는 내면 풍경까지 묘사됩니다."
추리문학관 내 집필실에는 잡다한 책과 자료, 신문 스크랩들로 빽빽해 그 안에서 글을 쓰려면 오히려 정신이 산만할 것 같았다. 그것은 내 관점일 뿐이다.
―선생은 세상을 어떤 식으로 관찰합니까?
"나는 '음모론적'으로 세상을 보지요. 신문 뉴스를 읽어도 그냥 읽지 않고 배후를 상상해보죠. 눈에 보이지 않는 무엇이 있다는 거죠. 내가 가장 좋아했던 추리소설은 프레드릭 포사이스의 '자칼의 날'이지요. 그는 기자 출신입니다. 최형도 그만두고 한번 써보세요."
―저는 그런 음모론의 허구를 추적하고 벗겨내는 데 더 관심이 있는 편입니다.
"내가 말하는 음모론적 시각은 사실과 다르게 거짓을 지어내는 걸 말하는 게 아니라 세상의 작동 원리에 관한 겁니다."
―세상을 움직이는 이면(裏面)에는 다른 힘이 숨어있고 작용한다는…?
"그런 거죠. 우리가 자유민주주의 체제의 세상에 살고 있는 것처럼 되어있지만 실제로는 그 세상은 몇몇 소수 실력자들의 음모에 의해 조종된다는 거죠. 선하고 도덕적인 것이 세상을 움직이지는 않는다는 겁니다."
―어쨌든 좋습니다. 선생의 작품은 독자들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 거죠?
"추리를 통한 지적 유희(遊戱), 인간에 내재된 위선과 악마성, 사회의 감춰진 비리를 보여주는 것이지요."
―인간 누구나 위선적이고 악마적 본성이 있다고 봅니까?
"그런 면이 있는 것 같아요."
―그런 소설을 쓰니까 인간이 그렇게 보이는 것은 아니고요?
"허허허. 연쇄살인범 같은 범죄자도 한 번 인터뷰해보시지요."
―추리소설 속 범인과 선생을 혼동해, 선생에 대해 집착적이거나 이상한 성격일 것으로 보는 이들은 없던가요?
"내게 겁을 먹고 다가오는 독자들도 있었어요. 소설에서 사람을 워낙 죽이니까."
―실제 살인 사건 현장을 본 적이 있습니까?
"직접 본 경우는 없어요. 살인이나 시신 묘사는 다 상상이지요. '제5열'에는 정보부장이 대통령을 암살하는 장면이 나와요. 작품이 나온 뒤 박정희 대통령이 암살됐어요. 5공 정권 때 건장한 사나이들이 찾아와 '대통령 경호에 대한 자문을 하고 싶다'는 거예요. '난 그거 모른다. 모두 상상해서 썼다'고 했어요."
―선생은 대중적으로 성공했지만, 문단에서는 통속 추리작가로 취급해 눈길을 주지 않았지요?
"한국문학이 도식화되고 폐쇄적이어서 그런 거지요. 애거사 크리스티, 코난 도일, 조앤 롤링이 문학의 순수성을 훼손했나요. 스타인벡, 윌리엄 포크너도 추리소설을 썼어요.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들의 추리소설 모음집도 있어요. 일본은 추리작가가 1000명쯤 돼요. 하지만 우리는 추리소설이나 SF 분야에 작가가 없어요. 이런 배타성이 한국문학을 왜소하게 만들었어요."
―동료 문인과 평론가들에게 인정을 받고 싶은 욕구는 떨칠 수가 없지요?
"평론가들은 무식합니다. 그런 사람들의 평가를 받고 싶지 않아요. 아예 읽어보지도 않은 채 상업소설이니 어떠니 하니까. 나는 눈 하나 깜박하지 않았어요. 내 인생 내가 사는 겁니다."
―선생의 이력 중에 흥미로운 것은 2006년 지방선거에서 열린우리당 부산 시의원 후보로 나섰더군요. 동명이인인 줄 알았습니다.
"신문에 '특이한 출마자' '화제의 인물'로 났어요. 800여억원의 부산시 문화 예산을 책정하는 시의원들 중에서 문화계 사람이 없었어요. 그래서 출마한 거죠. 여당을 싫어해 야당으로 나섰고 물론 떨어졌지요. 내가 엉뚱한 면이 있어요."
카페 '죄와 벌'에서 일어나 청사포 해변의 조개구이집으로 내려갔다. 그는 젊은이처럼 백팩을 메고 있었다. 소주잔을 앞에 놓고 그는 6·25에 관한 대하소설을 준비 중이라고 털어놓았다.
"전쟁이 나면 남자들은 총 들고 싸우지만 제일 고난을 받는 이들은 아녀자이지요. '독일군의 선물'(허버트 릴리호 作)이라는 아주 짤막한 소설이 있어요. 전쟁이 끝난 뒤 병사가 귀향했는데 가로등 아래에서 짙은 화장을 한 여인이 '놀다 가세요'라고 합니다. 몇 년 전 전쟁으로 헤어졌던 자기 아내였던 거죠. 전쟁이 양민에게 선물하는 것은 그런 거지요."
―왜 6·25 소설을 생각했나요?
"6·25 때 내 부친은 제주도로 징용됐고, 임신 중인 모친은 5남매를 데리고 부산으로 피란갔어요. 피란길에 막내를 낳고 열이틀 만에 돌아가셨고, 그 막내도 죽었어요. 내 나이 열세 살 때였어요. 스페인 내란을 소재로 헤밍웨이는 연애소설 '누구를 위하여 종을 울리나'를 썼지만, 나는 수백명의 인물이 등장하는 앙드레 말로의 '희망'(1937년)처럼 쓰고 싶어요. 내가 이걸 쓰면 산소를 마시는 기분이 되겠지요."
어둠이 뱀처럼 청사포 해변으로 몰려왔다.
□김성주 성주그룹 회장
2015-08-24 여성과 청년이 희망
《 그는 동아일보와의 인터뷰 자리에 커다란 검은색 양(羊) 인형을 품에 안고 왔다. 김성주 대한적십자사 총재 겸 성주그룹 회장(59). 지난달 말 서울 강남구 논현동 성주그룹 사옥 1층 MCM 매장에서 만난 그는 흰색 운동화와 셔츠, 감색 줄무늬 재킷의 경쾌한 차림이었다. “제 사무실에 있던 ‘블랙 시프(black sheep·검은 양)’를 데리고 왔어요. 제 별명이 검은 양이거든요. 흰 양들 속 검은 양. 제일 골치 아픈 말썽쟁이 막둥이. 그게 제 얘기잖아요.” 자칭 ‘검은 양’ 사업가는 대성그룹 창업주 고 김수근 회장의 막내딸로 태어나 부모가 반대하는 국제결혼을 했다가 이혼했고 홀로 외동딸을 27세의 숙녀로 키웠다. 1990년 패션 수입 업체인 성주인터내셔널을 창업해 이탈리아 ‘구치’를 들여와 팔았으며, 독일 명품 브랜드 MCM을 라이선스 제조로 팔다가 “언제까지나 남의 브랜드 하수인으로 지내지는 않겠다”며 2005년 아예 MCM 본사를 인수했다. 이제 연 매출 7000억 원대로 성장한 MCM은 현재 8조 원대가 넘는 국내 면세점 시장에서 루이뷔통, 카르티에와 함께 매출 ‘빅3 브랜드’다. 》
그동안 여성들을 향해 “여성도 군대에 가야 한다”거나 “고학력 여성이 ‘솥뚜껑 운전’만 하면 안 된다”며 사회 기여의 필요성을 직설적으로 쏟아냈던 그는 이번엔 “주요 일자리의 절반을 여성에게 의무적으로 배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인구 5000만 명 중 2500만 명의 여성을 무시하면 대한민국의 미래는 없어요. ‘머슬(근육) 파워’ 시대는 가고 ‘감성 콘텐츠’ 시대가 왔잖아요. 국가 공무원, 국회의원, 대기업에서 무조건 여성이 절반 이상 돼야 해요. 이건 여권(女權)의 문제가 아니라 국가 경쟁력의 문제입니다.”
여성, 권리만큼 역할도 찾아야
―‘여성 쿼터’가 필요하다는 말씀입니까.
“그럼요. 국가 경제의 생존이 달린 문제라고요. 한국 여성이 ‘이젠 내 삶을 살래’라며 결혼과 출산을 꺼리는 게 인구 절벽 시대를 앞둔 우리 사회의 가장 심각한 문제입니다. 이게 다 그동안 여자를 무시했기 때문이에요. 그 책임의 3분의 1은 여자의 희생을 요구하는 유교문화, 3분의 1은 남성들의 끼리끼리 문화에 있죠. 나머지 3분의 1은 불필요한 남 탓을 하며 자기계발을 놓친 여성의 탓입니다.”
‘여성 차별 해소’ 외침 속에 나왔던 ‘배려’들 중 일부는 여성의 잠재력을 제약한 측면도 있지 않을까. 여성이 권리만큼 역할을 찾는 데도 적극 나서란 얘기로 들렸다.
―여성인데 성공하셨습니다.
“사업하면서 술대접 안 해서 욕 많이 먹었습니다. 하지만 이 때문에 투명 경영하며 글로벌로 훨훨 날 수 있었어요.”
―대한적십자사 총재로서도 책임을 느끼시지요.
“올해로 110주년을 맞은 대한적십자사를 글로벌 시대에 맞게 재탄생시키고 싶어요. 최근 30, 40대 여성 봉사요원으로 적십자 레이디스 클럽을 만들었어요. 한국 여성의 나눔과 봉사 정신을 사회운동으로 확산시키겠습니다. 여성들도 뛰어난 감성과 직관력이 시너지를 낼 수 있도록 극기(克己)의 리더십을 갖춰야 합니다.”
▲김성주 성주그룹 회장이 지난달 서울을 찾은 패션 저널리스트 수지 멩키스 씨에게 명동 ‘MCM 스페이스’매장을 안내했다. 성주그룹 제공
―언젠가 적극적인 정치를 하실 건가요?
“하하. 전혀요. 전 체질상 직설적이어서 안 돼요. 정치판에 왜 들어가나요. 저처럼 사업하는 게 훨씬 사회적 영향력이 큰 시대예요.”
‘미스터 마미’와 ‘비즈니스 베이비’
인터뷰 전날 김 회장은 한국 출장을 나온 딸과 얼굴 맞댈 시간이 없어 회사로 불러내 점심을 함께 했단다.
“제가 잔소리를 해서 딸이 눈물 그렁그렁해져서 갔어요. 딸이 ‘난 엄마처럼 아파 가며 낑낑대며 살고 싶지 않아’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제가 말했어요. ‘내가 언제 나처럼 살라고 했느냐. 너의 시대는 다르다’고요. 아들이라고 수조 원 회사를 물려받고 딸이라고 쫓겨나는 시대는 지났잖아요.”
―‘늘 바쁘게 일하는 엄마’셨지요.
“해외 출장이 잦아 아이 입학식에도 참석하지 못했어요. 밤늦은 퇴근길 집 앞 성북구 삼선시장에서 3000원짜리 아이 티셔츠를 한 가득 사서 둘러메고 오기도 했고요. 사업 초기 여자라고 업신여김 당하기 싫어 남자 넥타이를 매고 다니다가 그대로 아이 학교 상담에 간 적도 있어요. 그때 어린 딸이 친구들에게 저를 이렇게 소개했어요. ‘얘들아, 우리 미스터 마미야.’ 딸은 줄곧 이런 말도 했어요. 엄마에겐 베이비가 둘이라고. ‘비즈니스 베이비’와 딸. 그런데 엄마는 비즈니스 베이비를 더 좋아하는 것 같다고.”
이번에 김 회장은 그 ‘미스터 마미’ 시절의 넥타이를 딸에게 몽땅 물려줬다고 했다. “이제 나이 60에 매고 다니면 사람들이 미쳤다고 할까봐서요.”(웃음)
딸은 엄마처럼 살지 않겠다고 했다지만, 김 회장은 딸이 자신처럼 살기를 바라는 건 아닐까. ‘내가 정답’이라는 자신감마저 느껴졌다.
―워킹맘들을 향한 조언이 있나요.
“엄마는 가정의 최고경영자(CEO)잖아요. 엄마의 시간을 현명하게 분배해서 운영하세요. 엄마가 공부하고 일하고 봉사하면 아이도 똑같이 합니다.
첫째, 울타리를 넓게 쳐 주고 실수할 수 있는 기회를 주세요. 이를 통해 아이는 배우고 성장합니다.
둘째, 신앙심을 키워 주세요. 자신을 객관화하고 겸손하게 만드니까요.
셋째, 긍정적 사고의 힘을 길러 주세요.
스스로에 대한 확고한 신념이 있을수록 위기에서 흔들리지 않습니다. 제가 항상 바빴는데 오히려 그 때문에 저희 딸은 혼자 있는 시간에 책을 많이 읽어 러시아 문학을 전공하게 됐습니다.”
‘MCM 패션 스쿨’ 설립 계획
올해는 성주그룹 설립 25주년, 내년은 1976년 독일에서 설립됐던 MCM의 40주년이다. 김 회장은 이제 브랜드 명성에 의존하지 않고 기능적으로도 앞서는 제품이 ‘럭셔리’가 된다고 믿는다. 그는 디지털 경영이 발 빨랐던 영국 ‘버버리’에서 최근 최고정보책임자(CIO) 등 주요 경영진을 ‘모셔’ 왔다. MCM 백팩을 히트시켜 소비자들에게 ‘손의 자유’를 줬던 그는 이제 사물인터넷(IoT) 기술을 접목한 ‘웨어러블’ 핸드백을 준비하고 있단다.
―럭셔리를 새롭게 정의하시는데요.
“새로운 세대가 추구하는 럭셔리를 저는 ‘뉴 스쿨 럭셔리(새로운 명품)’라고 이름 지었어요. 기존 올드 럭셔리처럼 거만한 태도를 보이지 않고 ‘마음이 젊은’ 세대의 글로벌 유목민 라이프스타일을 타깃으로 삼죠. MCM은 소비자의 나이, 성별, 국경에 제한을 두지 않는 전략으로 개별 현지화를 추구해 성공할 수 있었습니다. MCM 인수 10년 만에 35개국에 12개 현지 법인, 1500명의 직원, 300여 개 백화점 매장, 120개 직영점을 운영하는 글로벌 강소 브랜드가 됐으니까요.”
―여성과 젊은층을 주목한다고요.
“내년 MCM 40주년을 맞아 서울 홍익대 앞에 신개념 콘셉트 스토어 ‘MCM 바우하우스’를 엽니다. 대개의 명품은 전 세계에서 같은 매장을 선보이지만, MCM은 각각의 특징을 갖는 ‘쇼퍼테인먼트(쇼핑+엔터테인먼트) 플래그십 스토어’를 지향하거든요. MCM 바우하우스는 한 단계 더 나아가 글로벌 패션 리더를 양성하는 교육 장소로 만들겠습니다. 여성과 젊은이, 중소기업처럼 그동안 약자였던 이들을 도와 ‘작은 거인’이 ‘큰 거인’이 되도록 돕겠습니다. 한 달에 약 100명씩, 10년간 1만 명의 글로벌 패션 리더를 길러 낼 겁니다. 성주재단이 지원했던 글로벌 리더들의 재능 기부 강의, 국내 170곳 MCM 공방에서 핸드백 기술 지원, 자신이 만든 제품을 MCM e-커머스(전자상거래)로 팔고 수익을 가져가게 하는 제도 등 온·오프라인 교육이 포함됩니다. 장기적으로 ‘MCM 김나지움’이라는 패션 스쿨 설립도 생각하고 있습니다.”
‘검은 양’의 끝없는 도전
2시간여의 인터뷰 동안 그의 답변은 거침없었다. 도중에 그는 “점심식사로 죽, 괜찮으시겠어요?”라고 물었다. 흑임자죽과 잣죽이 사무실로 들어왔다.
후식은 김 회장이 개발했다는 ‘김성주 표 진셍 라테’(인삼을 섞은 우유)였다. 3년 전 그의 ‘진셍(Ginseng·인삼) 쿠키’ 발언 논란이 떠올랐다. “애 젖먹이면서 주방에 앉아 ‘진셍 쿠키’를 만들었다고 구글에 올리면 전 세계 주문을 받을 수 있다”고 말해 세상 물정 모른다는 비난을 들었던 것이다.
그런데 식사 시간도 아까워 사무실에서 죽을 먹는 그에게 ‘진셍 쿠키’ 발언은 그때나 지금이나 ‘진심’이다. “진셍 라테야말로 맛있고 건강한 ‘코리안 드링크’예요. 언젠가 사업 다각화 측면에서 각국에 ‘MCM 카페 체인’을 열어 진셍 라테, 진셍 쿠키, 진셍 팥빙수를 세계인들에게 알릴 거예요.” 글로벌 무대를 향한 야심뿐 아니라 몸에 좋은 것을 먹이고 싶어 하는 ‘한국 어머니의 마음’도 엿보였다.
과학적으로 흰색 양에서 돌연변이 검은 양이 태어날 확률은 0.001%에 불과하다고 한다. 김성주라는 ‘검은 양’은 말했다. “글로벌 대해(大海)를 향해 통통배를 타고 출발해 여기까지 왔네요. 여성과 청년 육성이라는 제 소명을 생각하며 한국이 글로벌 패션 시장으로 나가는 일대일로(一帶一路·육상과 해상의 실크로드)를 만들겠어요.”
김 회장과의 인터뷰를 마치고 나는 우리 사회가 ‘검은 양’들의 큰 비전과 도전을 너그러운 시선으로 대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새로운 생각과 사회의 변화는 ‘검은 양’에 의해 이뤄질 가능성이 더 크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그러했듯이.
김선미 기자 kimsunmi@donga.com
□김이진 '워커대장추모기념사업회' 회장
2014-02-07
오늘날 한국인에게 가장 친숙한 6·25 전쟁의 은인(恩人)은 ‘맥아더 장군’이다. 하지만 한 사람의 용맹한 장군이 없었다면 6·25의 흐름을 반전(反轉)시킨 맥아더 장군의 인천상륙작전은 시도조차 해보지 못했을 것이다.
바로 월튼 해리스 워커(Walton H. Walker: 1889~1950) 대장이다. 워커 장군은 초대 미8군 사령관으로 파죽지세(破竹之勢)로 남진하는 북한군을 낙동강 방어라인(워커라인)을 구축하여 막아낸 인물이다.
▲월튼 해리스 워커(Walton H. Walker: 1889~1950) 대장.
포항·영천·대구·창녕·마산·통영을 잇는 낙동강 전선이 뚫렸다면 대한민국이라는 신생 독립국은 지도 상에서 사라졌을 것이다.
전선에서 몸을 사리지 않은 것으로 유명했던 워커 장군은 6·25 전쟁이 한참이던 1950년 12월 23일 전사(戰死) 했다.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중공군과 맞서 방어전을 펼치던 미 24사단과 영연방 27여단을 방문하기 위해 의정부 북방으로 가다가 반대편에서 남하하던 한국군 트럭과 부딪혀 현장에서 사망한 것이다.
미 제24사단에서 중대장으로 근무하고 있던 아들 샘 워커 대위에게 미국 정부가 수여한 은성무공훈장을 직접 가슴에 직접 달아 줄 계획이었기 때문에 안타까움을 더했다. 이후 워커 장군은 한국인들의 기억 속에서 빠르게 잊혀졌다.
34년간 이어진 워커 장군 추모사업
하지만 이런 워커 장군의 은혜를 잊으면 안 된다며 지난 34년 동안 사재(私財)를 털어가며 ‘워커장군기념사업’에 전념해 온 인물이 있다. 올해 90세가 된 김이진(金利鎭) ‘워커대장추모기념사업회’ 회장이 바로 그 주인공이다.
김 회장은 전후에 나라의 은인인 워커 장군을 기리는 기념비조차 하나 없고, 아무도 그에 대해 알지 못하는 현실이 안타까워서 추모사업을 시작했다고 했다.
“그 누구한테 은혜를 입으면 반드시 보답해야 하는 것이 사람의 도리입니다. 풍전등화의 위기에서 우리나라의 운명을 지켜준 분이 워커 장군이고, 오늘날 우리가 자유를 누리며 살고 있는 것도 모두 그분의 은혜입니다. 그런데도 전쟁 후 정부 관료나 정치인, 군장성, 재벌가 중 그 누구도 그분의 희생을 기리는 일에 나서지 않는 현실이 굉장히 부끄러웠고 화가 났습니다.
1970년대까지는 우리가 먹고살기 바빠서 그렇다고 쳐도, 1980년대 들어와서 경제력도 어느 정도 갖추고 올림픽까지 개최한 나라에서 은혜를 잊어버리는 것은 도리가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돈과 권력 있는 사람이 하지 못한다면 나 같은 시민이라도 나서서 나라의 체면을 세워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김이진 회장의 ‘워커대장추모기념사업회’ 사무실은 을지로 2가 역 부근의 낡은 건물 3층에 있다.
4명의 각기 다른 사람들이 나누어서 사용하는 사무실 가운데 2평 정도를 따로 세를 내어 책꽂이와 책상 하나를 두고 사무실로 사용하고 있었다. 물론 비서도 없고 도와주는 직원도 없다. 복사와 서신 발송 등 모든 관련 일은 고령의 김 회장이 직접 하고 있었다. 사무실은 난방이 제대로 되지 않아 작은 전기난로를 가까이 두고 인터뷰를 해야 했다.
워커 장군의 3星 계급장을 선물로 받다
김 회장은 90세라고 믿기지 않을 만큼 목소리가 우렁찼고 발음이 또박또박했다.
그는 지난 34년 간 워커 장군 추모사업을 하면서 1987년 광진구 워커힐 호텔 경내에 워커 장군 추모기념비를 세웠고, 워커 장군의 전사지(戰死地)를 찾아내어 그곳에도 표지석을 세웠다. 워커힐 호텔의 추모기념비 제막식에는 워커 장군의 외아들 샘 워커 예비역 육군대장이 직접 참석했다. 작년 10월에는 워커 장군의 손자인 월튼 워커 2세와 샘 워커 2세가 워커 장군의 전사지에 있는 추모기념비를 처음으로 찾아와 참배했다.
워커 장군의 추모기념비를 찾은 손자들은 “할아버지가 이렇게 많은 한국인에게 기억되고 있다니… ”하며 울멱였다. 그들은 “일면식도 없는 조부(祖父)를 위해 33년간이나 헌신한 한국인에게 감동했다”며 “이런 게 한국의 힘”이라고 말했다. 한 사람의 노력으로 전체 한국인이 감사를 받은 것이다.
미 육군참모총장을 지낸 워커 장군의 아들 샘 워커 대장은 김이진 회장에게 아버지 워커 장군이 차던 3성(星) 계급장을 감사패에 심어 선물했다.
▲워커 장군의 3성계급장이 박힌 감사패.
이 계급장은 2차 세계대전 당시 유럽연합군의 최고 사령관이었던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장군(미국 대통령)이 전차군단장이던 조지 패튼 장군에게 직접 달아준 것이다. 1945년 4월 패튼 장군은 자신이 ‘미국에서 가장 찬란한 장군’이라고 칭찬했던 워커 장군이 중장으로 진급할 때 이 계급장을 달아주었고, 아들인 샘 워커 대장이 보관하고 있다가 김이진 회장에게 건네 준 것이다.
김이진 회장은 그 자신이 6ㆍ25 참전 용사출신이다. 그는 전쟁이 절정에 달하던 1950년 11월 소위로 임관하여 소대장으로 전장을 누볐고, 화랑무공훈장과 미국의 은성훈장을 받았다.
추모사업에 전 재산 소모
그는 1959년 대위로 전역했다. 대위 계급장을 7년이나 달고 있었지만, 진급이 되지 않아 군복을 벗을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당시 군부대에는 고위 간부들이 보급품을 빼돌리는 비리가 만연했는데 김이진 회장은 상관들의 부당한 명령을 듣지 않았고, 그 댓가는 늘 진급누락으로 되돌아왔다는 것이다. 이런 고지식한 면이 그를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워커 장군 추모사업에 평생을 매달리게 한 원인 중의 하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제대를 했지만 생계가 막막했다. 김 회장은 군에서 배운 행정업무 경험을 살려 관공서 근처에서 행정대서(行政代書) 업무를 하며 생계를 유지했다. 그러다가 1970년대 되면서 전국에 아파트 건축 붐이 일어나자 그는 조경사업에 뛰어들었고, 이후 상당한 돈을 벌 수 있었다고 한다.
경제적으로 어느 정도 안정이 되자 김 회장은 1979년 8월 오랫동안 가슴에 품고 있던 워커 장군 추모 사업을 시작했고, 그렇게 시작한 일이 지금까지 이어진 것이다.
“하지만 그동안 사재를 털어서 추모사업을 하다 보니까 재산이 모두 사라졌습니다. 올해로 만 34년간 추모사업을 해오고 있는데 그 가운데 29년은 100% 저의 개인 돈으로 해 왔습니다. 그 후 지난 몇년간 조갑제(趙甲濟) 전 월간조선 대표께서 후원자를 소개해주어 행사비를 마련해 주기도 하고, 여기저기 구걸하다시피 해서 겨우 추모행사를 열고 있는 형편입니다.”
김 회장은 워커 장군 추모사업을 하면서 동두천에 있던 3000여 평짜리 농장도 팔았고, 한탄강 옆에 있던 800평 별장도 팔았다고 했다. 동두천 농장은 현재 시가(時價)로 평당 80만원이 넘는다고 한다. 그는 “추모사업은 계속 해야 하고, 돈 나올 데는 없으니까 재산을 팔아서라도 행사비를 대는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1950년 12월 23일 의정부 입구 국도상에서 워커 중장의 지프와 충돌한 국군 제6사단 소속의 쓰리쿼터 트럭. 김이진 회장은 이 사진의 배경 지형을 찾아 정확한 전사 지점을 확인하는데 3년 4개월이 걸렸다.
워커 장군 戰死 지점을 찾아서
김이진 회장은 워커 장군 전사지점(사고지점)을 찾아내는 데 3년 4개월이 걸렸다고 했다. 미국 국방성 8군, 육군사관학교, 재향군인회 등에 워커 장군 전사지점을 문의했지만, 그들도 정확한 자료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고 한다.
“미국 측에서 회신한 자료에는 워커 장군이 전사한 곳이 ‘서울 북방 11마일, 의정부 남방 6마일 지점’이라고만 나와 있었습니다. 정확한 좌표가 없어서 전사지점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당시에 워커 장군은 한국 사병이 몰던 쓰리쿼터 트럭과 충돌해서 사망했다고 알려져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트럭을 몰았던 한국군 운전병을 찾으면 정확한 전사지점을 찾을 수 있겠구나 싶어 그 운전병을 찾아다녔습니다.”
▲쓰리쿼터를 몰았던 군속 박경래씨는 군사재판에서 징역 3년형을 선고받았다. 당시 판결 집행명령문 3장중 일부.
김 회장은 워커 장군의 지프와 충돌사고를 낸 그 운전병이 당연히 군법회의에 회부되었다고 판단하고, 육군본부 법무감실의 협조를 받아 1950년도에 군법에 회부된 자료 1만 2000건을 뒤졌다고 한다. 하지만 워커 장군 사망사고와 관련한 기록을 찾지 못하자 이번에는 그 운전병이 소속되었다는 6사단 2연대를 찾아가 부대 연혁을 살펴보았다. 다행히 6사단에는 자료가 남아 있었다.
확인 결과 그 운전병이라고 알려진 사람의 이름은 박경래로 나타났다. 박경래씨의 신분은 군인이 아니 군속(군무원)이라는 것도 확인할 수 있었다.
“이분 고향이 춘천이라고 해서 춘천을 9번 찾아가 박씨란 박씨는 다 뒤졌습니다. 나중에 동사무소의 협조를 받아 호적을 확인하니까 대전으로 이사했다고 나오더군요. 그래서 대전에 찾아갔더니 1980년에 이미 돌아가셨습니다. 내가 그 사람을 찾아다닌 것은 워커 장군의 정확한 사망지점을 확인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어렵게 찾아낸 유일한 증언자가 사망했다고 하니 그 허탈감이 말할 수 없이 컸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전사지는 찾았지만…
하지만 김이진 회장은 워커 장군 전사지점을 찾는 일을 포기하지 않았다. 미국 국방성으로부터 워커 장군 사망 당시 현장 사진을 넘겨받은 그는 사진에 나오는 지형과 같은 곳을 찾아 나서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주한미군 야전사령부의 데이비드 넥 대령이란 분을 만났고, 그를 통해 미 8군 보병 2사단 공병대의 지형 분석팀의 도움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저와 넥 대령, 지형분석 장교가 서울에서 의정부로 연결된 국도의 지형을 분석하고 다녔는데, 어느 날 도봉구에 사는 김태욱이란 분이 자기가 14살 때 워커 장군 사고 직후에 현장을 봤다는 증언을 했습니다. 그 사람이 말한 곳의 지형을 분석하니까 사진의 워커 장군 사망지점과 정확하게 일치했습니다. 그래서 워커 장군의 전사지를 현재 서울 도봉구 도봉 1동 596-5번지로 확증할 수 있었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워커 장군 전사지점을 찾은 김 회장은 그 자리에 기념 표지석을 세우려고 했지만, 수십년의 세월이 흐르면서 그 일대가 주택가로 개발되어 여의치가 않았다고 한다.
“장군의 사망 지점은 현재 식당의 주차장으로 쓰이는 사유지(私有地)로 변했습니다. 전사지점에 추모비를 세울 수가 없어서 그곳에서 200m 떨어진 도봉역 출구 입구 인도 변에 세웠습니다. 워커 장군 전사지는 6ㆍ25 전쟁의 역사를 조명하는 상징적인 장소로 길이 보존되어야 하는 곳입니다. 수년 동안 자비를 들여 찾아낸 전사지인데 표지석 건립허가를 받는 데 6개월이 걸렸고, 구청을 수없이 들락거렸습니다.”
김 회장은 “전사지를 찾으면 국방부나 담당 관청이 기념 표지석을 세우는 데 도움을 줄줄 알았는데, 늙은 내가 뛰어다니며 모든 일 처리를 했다”고 말했다.
어쨌든 김 회장의 노력으로 2009년 워커 장군 59주기 추모식부터는 워커 장군의 전사지에서 개최할 수가 있었다. 김 회장은 “현재 워커 장군 전사지를 식당 주인이 팔 의향이 있다고 하는 데 자금이 없어 살 수가 없는 형편”이라며 “정부나 독지가가 나타나 이 땅을 사들여 역사적 장소로 보존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울 도봉역 부근 인도변에 세워진 워커 장군 추모 기념비. 워커 장군의 실제 전사 지점은 사유지로 변해 기념비는 이로부터 200m 정도 떨어진 곳에 세웠다.
"사수하느냐 죽느냐만 있을뿐"
김이진 회장이 평생을 바쳐 추모사업을 진행하고 있는 워커 장군은 1889년 텍사스주 벨톤(Belton) 시에서 출생했다. 1908년 미 육군 사관학교에 입교한 그는 1912년 졸업 후 소위에 임관했고, 1916년 중위로 세계 제1차대전에 참전했다. 1918년에는 미 5사단 기관총대대 중대장으로 프랑스의 뫼즈-아르곤 전투에 참전, 뛰어난 전공을 세워 소령으로 지급했다.
2차 대전이 발발하자 워커 장군은 전차전의 귀재인 조지 패튼(George S. Patton) 장군이 지휘하는 미3군 예하의 20군단을 맡아 유럽전선에서 맹활약했다. 워커 장군이 지휘한 20군단은 ‘유령의 군단’이란 별명을 얻었다. 전후 워커 장군은 미 본토 5군 사령관을 거쳐 1948년 9월 일본 점령 임무를 맡은 미8군 사령관에 임명됐다.
6ㆍ25 전쟁이 발발하자 워커 장군은 한국군의 작전권까지 인계받아 모든 지상군을 통합 지휘하는 주한 유엔군사령관이 되어 전장을 총지휘했다. 미8군은 남하하는 북한군을 막기 위해 1950년 7월 7일 대구로 사령부를 옮겼다. 당시 미군은 워낙 급하게 참전했기 때문에 북한군을 반격할만한 만한 충분한 여력이 없는 상황이었다.
워커 중장은 8월 말 이루어질 연합군의 대대적인 반격 준비를 위해 북한군을 최대한 지연시켜야만 했지만, 전황은 여의치 않았다. 8월이 되자 아군은 낙동강까지 밀려 내려왔다. 하지만 워커 장군은 어려운 상황에서도 낙동강에서 전선을 고착화하는 데 성공하였고, 반격할 준비를 계속해 나갔다.
북한군은 낙동강 방어선만 뚫으면 100km도 되지 않는 부산까지는 한달음에 진격할 수 있었기 때문에 필사적인 공세를 퍼부었다. 북한군의 낙동강 전선 돌파를 시도하는 과정에서 다부동, 영천, 포항, 마산 등지에서는 연일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워커 장군은 낙동강 방어선의 사수를 위해 예하 장병에게 다음과 같은 훈시를 했다.
“우리에게 제2의 뒹케르크(1940년 5월 프랑스 북부 뒹케르크 항구에서 독일군에 몰린 영국-프랑스 연합군 30만명을 영국으로 철수시킨 작전) 철수는 없다. 그러한 탈출구가 있다고 기대하지도 말라! 부산으로 밀리면 대살육이 일어난다. 오직 사수하느냐 죽느냐(Stand or Die)의 선택밖에 없다.”
워커 장군은 자신의 말을 실천하기 위해 우리의 육군본부가 부산으로 내려간 상황에서도 미8군사령부를 대구에서 후퇴시키지 않았다
▲1950년 8월 23일, 콜린스 미 육군참모총장(조수석)을 수행하고 다부동의 동명초등학교에 있는 임시 1사단사령부를 방문한 워커 중장(서 있는 이) 일행. 백선엽 장군(왼쪽)이 전황 브리핑을 마치고 돌아가는 일행을 전송하고 있다./출처: 월간조선 2010년 4월호. 백선엽 장군 제공.
백선엽 장군의 회고
당시 낙동강 전선을 방어하던 백선엽(白善燁) 국군 1사단장은 이 무렵 워커 장군을 만났다. 백선엽 장군은 2010년 4월 월간조선 오동룡 기자와 인터뷰에서 낙동강 전선에서 만난 워커 장군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불독처럼 생긴 얼굴에 번쩍거리는 철모를 항상 쓰고 다녀 활동적이고 과감한 군인이라는 인상을 짙게 풍겼다. 그는 잠시도 쉬지 않았다. 낙동강 전선에서는 머물던 막사를 나서면 쉼 없이 전장을 돌아다니면서 장병을 독려했다. 별안간 나타나 전쟁터의 현황을 파악하고, 요점을 간단히 정리해 작전 지시를 내린 뒤 바람처럼 사라졌다.”
백선엽 장군은 워커 장군이 ‘공세방어’ 개념을 알려주었다고 말했다. 적에게 몰릴 때라도 항상 역습을 염두에 두라는 것이었다. 백선엽 장군의 회고다.
“그는 ‘소방대 전술’도 구사했다. 예비 기동타격대를 마련해 두고 다급한 전선에 이를 재빨리 투입하는 전술이다. 국군 1사단은 낙동강 전선에서 2만1000명에 달하는 적 3개 사단의 공세에 직면했다. 그때 병력 7600명의 우리 사단은 워커 장군이 보내준 미군 23연대와 27연대 병력과 함께 사상 최초의 한미 연합작전을 벌였다. 그는 처음으로 미군을 한국군 지휘관 휘하에 보내줘 다부동 전투에서 대승을 거둘 수 있게 해준 사람이다.”
▲6·25 전쟁에 대위로 참전했던 워커 장군의 외아들 샘 워커 대장.
워커 장군은 호위도 없이 전선을 돌아다녔다. 지프 뒤에는 30구경 기관총을 장착하여 적이 나타나면 언제든지 손수 기관총으로 응사할 태세를 갖추었다. 지프차 밑바닥은 강판으로 보강하고, 바닥 위에는 흙 마대를 깔아 지뢰 폭발에 대비했다. 백선엽 장군은 이런 워커 장군을 통해 ‘현장을 보러 다니는 습관’을 배웠다고 회고했다.
미 육군은 지금도 워커 장군을 추앙하는 의미에서 수색용 경전차인 M41형 전차에 ‘불독 워커’라는 애칭을 붙였다. 알링턴 국립묘지에 안장된 워커 장군은 대장으로 추서됐다. 한국전쟁에 대위로 참전했던 샘 워커 장군은 미국 역사상 최연소 대장으로 진급했다. 아버지와 아들이 함께 대장으로 진급한 것은 미군 역사상 최초였다.
사회 지도층에 대한 실망
김이진 회장은 “워커 장군 추모사업을 해오면서 소위 우리 사회의 지도층이라고 하는 사람들의
이기심에 실망을 많이 느꼈다”고 말했다.
“나혼자 미군의 은혜를 입은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미군의 은혜를 가장 많이 받은 사람들이 소위 말하는 재벌이고, 정치인이고, 이 나라에서 성공한 사람들 아닙니까? 실례로 예비역 장성들에게 워커 장군 추모 행사 때 참석해 달라는 초청장을 보내면 대부분 외면합니다. 가장 앞장서서 워커 장군을 추모하고, 주한미군의 사기를 높이는 일에 나서야 할 장성들이 어떻게 이럴 수가 있습니까?
미국 제34대 미국 대통령인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아들이 6ㆍ25 때 최전방에서 대대장을 지냈고, 미8군 사령관인 벤플리트 장군의 아들(지미 중사)은 전사를 했습니다. 클라크 유엔 총사령관 아들은 세 번이나 부상을 당했고, 미국 장성의 아들 142명이 참전하여 35명이 전사하거나 다쳤습니다. 미국의 최고 인재들인 하버드 대학을 졸업생도 17명이나 전사했습니다.
그들은 공산주의 침략을 저지한다는 사명감에 남의 나라를 위해 목숨을 버렸는데, 내 나라의 전쟁에서 당시 우리나라 부유층, 고위층, 장성들의 자식과 친인척은 어떻게 행동했습니까? 저도 이젠 재산도 기력도 바닥이 났습니다. 뜻있는 독지가가 나타나 이 일을 계승해 주면 더는 바랄 것이 없겠습니다. ”
▲1987년 서울 도봉구 워커 장군 전사지(식당 주차장 자리)를 방문한 워커 장군의 아들 샘워커 대장은 김이진 회장(가운데 나비 넥타이)과 첫 상견례를 하고 부친의 추모사업에 대한 감사를 표하였다
"추모사업을 계속 잇는 것이 마지막 소원"
그는 “나의 마지막 소원이 워커 장군 기념사업회가 중단되지 않고 이어지는 것”이라며 “만약 누군가 기념사업회를 맡아줄 독지가가 나타나면 가보(家寶)처럼 아끼는 워커 장군의 계급장을 그 사람에게 전달하고 싶다”고 말했다.
“죽기 전에 미국 국회의사당에서 워커 장군 추모행사를 한번 하고 싶습니다. 미국 국회 귀빈식당을 빌려서 전·현직 대통령과 정치인, 사회 지도층을 모아놓고 외치고 싶습니다. ‘한국인은 어려울 때 도와준 은혜를 절대로 저버리지 않는다’라고요. 아마 우리 국민이 자발적으로 마련한 워커 장군의 대규모 추모행사를 본다면 감명을 받지 않을 미국인이 없을 것입니다. 외교부 장관이 6·25 참전용사를 일일이 찾아다니며 수천번 감사를 표하는 것보다 더 큰 효과가 있을 겁니다.”
글 | 이상흔 조선pub 기자
□시인 김지하
2018.03.05 조선일보
"내가 못났다는 거요… 난 씩씩한 사람이 못 돼, 겁이 굉장히 많고"
"영원한 진리 아닌 마르크시즘
진보 혁신 떠드는 놈들이 100년 전 하던 얘기를 똑같이, 좀팽이 깡통 좌파로구나"
"감옥에서 박정희 죽음 소식 교도관이 전해주는 순간
'인생무상' '안녕히 가십시오' '나도 곧 뒤따라갑니다'…"
시인 김지하와 통화를 한 것은 대규모 3·1절 집회를 열겠다는 보수 진영의 신문 광고 때문이었다. 주최 측 대표 명단에 '김지하' 이름이 들어 있었다.
"내 목을 걸고 감옥에 간 게 '민주' 앞에 놓은 '자유'를 지키기 위한 것이잖소. 개헌을 한다면서 민주주의 앞에 '자유'를 뺀다는 것에 좋지 않게 생각해. 그래서 내 이름을 넣어도 좋다고 한 것인데, 내가 보수의 리더인 것처럼 광고가 실렸다고 했소? 내 나이 칠십팔이오, 몸도 아픈 내가 지금 정치하게 됐소? 글도 시(詩)도 안 쓰고, 그림이나 그리며 원보 엄마(부인 김영주)만 모시고 사는데…."
술 한 병 들고 강원도 원주에 있는 그의 집을 찾아갔다.
"술·담배 안 한 지 오래됐소. 당신도 꽤 늙었구먼. 우리가 얼굴 안 본 지 10년 됐나, 20년 됐나. 김대중 시절 당신 인터뷰로 그쪽 사람들에게 많이 시달렸지…."
▲김지하는“사람 잡아 조지는 게 정치요? 할 말은 많아도 이젠 하지 않겠다”라고 말했다 /원주=최보식 기자
―보수 진영에서는 이런 난국에 김 선생께서 나와주셨으면 하더군요.
"내가 어떻게 우파의 리더가 될 수 있겠소. 나는 우파도 좌파도 아니오. 중간파도 아니고. 새로운 길을 찾아가는 걸 내 사명으로 하는 사람이오."
―새로운 길이라는 게?
"한마디로 정의하고 얘기하는 게 힘이 들지만, 우리 전통 속에서 세계적인 보편성을 찾는 것이나 세상을 바꾸는 주체로 여성성(女性性)에 주목하는 것인데…."
―지금 현실의 긴박성과는 떨어진, 너무 추상적인 답변이군요.
"시를 쓰고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 신문기자처럼 말해야 하나, 정치가처럼 말해야 하나. 안 그렇지 않소? 그런 얘기 할 수 있으면 내가 왔다 갔다 하며 돈을 벌지. 나는 아름다울 미(美), 배울 학(學), 미학 전공이오. 예술의 원리와 효과에 관심 있고, 연극 연출, 그림, 시를 해왔잖아. 그렇게 해온 사람의 말이란 애매하고 어정쩡할 수밖에 없는 거지."
―제가 이해 못하면 독자도 이해를 못합니다. 현 정권이 가고 있는 방향은 맞는다고 봅니까?
"이해를 안 하려고 하는 것이지. 현 정권이 모두 맞는다고 생각하면 당신을 이렇게 만나 떠들겠어. 간혹 어떨 때는 이 자식들 봐라, 마르크시즘은 영원한 진리도 아닌데, 그 자체가 변화·발전·진보하는 것인데, 100년 전에 하던 얘기를 똑같이 하나, 진보 혁신을 떠드는 놈들이 그걸 집착해, 좀팽이 깡통 좌파로구나 여기지. 그놈의 똘마니들이니까."
―'그놈'이 누구입니까?
"신문 기사를 보니까 문재인 대통령이 리영희의 '전환시대의 논리'에 감동받았다고 했더군. 내 인생의 책이라고 그랬나. 백낙청은 자칭 한국 문화계의 '원로'로 행세하고 있고…."
―리영희나 백낙청은 어려운 시절 함께했던 동지(同志) 아니었나요? 관계가 왜 이렇게 비틀어졌는지 궁금합니다. 지주(地主) 집안에 그 시절 하버드대 대학원을 나온 백낙청이 민중을 운운하는 이중성 때문인가요?
"하버드대에서 영문학을 한 그가 어떻게 한국 문학사의 심판관을 해. 내가 장모(박경리)를 알기도 전에, 그는 박경리 소설 '시장과 전장'을 형편없이 깠어. 그런 심미관(審美觀)을 보고 그를 더 우습게 봤어. 리영희는 중국 문화대혁명과 월남전 타령이고, 외신(外信)에 나오는 걸로 자기 사상인 양 떠들었어. 1973년인가 신경림 시집 '농무(農舞)' 출판기념회에서 비위가 틀려 이들과 대판 싸웠어요. 그 뒤 한 선배가 '함께 안 가면 이 동네에서 당신이 외톨이 된다'고 말려 억지로 친해졌던 거지."
―5년 반 전쯤 본지(本紙) 기고문을 통해 이들의 실명을 거론하며 '깡통 좌파'라고 공격해 화제가 됐지요. "내가 감옥 독방에 갇혀 있었을 때 교도관을 통해 바깥과 연락했어요. 한번은 리영희·백낙청·고은이 함께하는 술자리에 교도관이 앉아 있었어요. 그 자리에서 고은이 '박경리에게 손자를 업고 시청 앞에서 김지하 석방 플래카드 들고 시위하라고 했더니 과부년 주제에 말을 안 들어. 하라고 하면 할 것이지'라고 떠벌리자, 리영희·백낙청이 낄낄 웃더라는 거야. 그 얘기를 교도관에게 전달받았소."
―2012년 대선에서 박근혜 후보를 지지했을 때 '역사와의 화해'라는 생각도 들었지만, '김지하가 이렇게 변절할 수가 있나'라는 당혹감도 있었습니다.
"여성 지도자가 나와야 한다는 것이었소. 인류 역사의 변화가 감지됐어요. 동학에 의하면 후천(後天) 시대가 도래하고, 김일부(金一夫)의 '정역(正易)'에는 우주가 여성성으로 바뀌며 그늘이 빛을 감싸게 되며, 천부경(天符經)에도 그렇게 해석할 수 있는 구절이 나오고…."
그의 설명이 십여 분 넘게 이어져, 중간에 말을 끊지 않을 수 없었다.
―당시 박근혜 후보에 대해 '부모님이 흉탄에 돌아가셨고 18년 인고의 세월을 보내면서 내공이 있을 거다'라고 했지요?
"제 아비로부터 정치를 배웠을 것이라고 생각했고, 친하게 지낸 선후배들이 찾아와 좋게 얘기를 하며 '박근혜를 한번 만나라'고 했어요. 내게 찾아오겠다는 전갈이 왔을 때, '지학순(池學淳) 주교의 무덤에 가서 정권 잡으면 유신 체제처럼 안 하겠다고 큰소리로 다짐하고 오라'고 하니까, 실제 그렇게 하고 찾아왔어요."
―그 전부터 알아온 게 아니라 그때 처음 봤다는 것이군요. 어떤 대화를 나눴습니까?
"그의 아버지 얘기를 꺼냈어요. 감옥 독방에서 내가 미친 증세가 와서 100일간 참선을 했어요. 참선이 끝나는 바로 그날 박정희가 죽었어요. 교도관이 전해주는 순간 내 입에서 이런 말이 튀어나왔소. '인생무상' '안녕히 가십시오' '나도 곧 뒤따라갑니다'. 나처럼 박정희 미워한 사람 별로 없었을 텐데. 다음 날 교도소 TV를 통해 미사를 집전하는 김수환 추기경을 봤어요. 그분이 한참 침묵한 뒤 '인생무상'이라며 나와 똑같은 말을 하더군. 그때부터 내가 웃기 시작했어요."
―이런 얘기를 들려주니까 박 후보는 어떻게 반응하던가요?
"웃지도 울지도 않고 표정에 아무런 변화가 없어요. 부모가 총 맞아 죽고 난 뒤 18년을 고독 속에서 지내면서 생긴 내공이 아닌가 싶더만. 그래서 내가 '당신을 잘 모르지만, 이런 고통을 에너지화해서 좋은 정치를 할 수 있지 않겠느냐. 중요한 것은 문화인데 모든 것을 문화와 연결시켜 해주기 바란다'고 말했소."
―그렇게 평가했던 박 전 대통령이 탄핵을 당했는데.
"제 아버지에게 정치를 배웠으면 치밀한 정치 패거리가 있겠지, 그 패거리가 돕지 않겠는가 했는데. 그게 안 보였어. 임금처럼 만기친람이었어. 어디서 최순실이 같은 여자가 튀어나와 야단법석이 될 줄 어떻게 상상이나 했겠어."
―구속 수감된 박 전 대통령에 대해 어떤 감상이 있습니까?
"이명박도 구속시키려고 하지 않소. '적폐 청산'이 말은 그럴 듯하나, 정치가 사람 잡아 조지는 것인가. 그게 정치요? 할 말은 많아도 나는 이제 하지 않아."
―김 선생을 보면, 짧았던 젊은 날의 어떤 신념과 선택이 그 뒤의 길고 긴 세월을 모두 결정짓는 것 같습니다.
"젊은 날 나는 정치(시국투쟁)를 할 생각이 없었소. 옆에서는 자꾸 하라고 했지만, 나는 그런 조직에는 안 들어갔지. 나는 시·연극·드라마 같은 문화에 관심이 있었소. 대학 시절 은사는 내게 '노자(老子)를 읽어라. 허무에서 배워라'고 했고, 또 '서양 미학을 배우는 대학원에 진학하지 말고 거리의 미학자가 되라'고 했소. 그런 괴상한 가르침을 받은 그대로 나는 시 쓰고 거리의 미학자가 된 거 아니오."
―'허무(虛無)'를 공부했다면서 어떻게 독재 정권과 맞서는 투사가 되고 저항 시인이 됐습니까?
"우리 집안은 동학(東學)이었소. 전기기술자인 아버지는 자생적 공산주의자였소. 하지만 6·25 때 북한의 지령을 받는 진짜 공산주의 그룹에서 아버지 계열은 청산됐어. 그 뒤 자수하고 전기조명 기사로 국군에 편입됐어. 6·25가 끝나자, 공산주의자로 찍혔던 고향 목포에서 원주로 이사를 오게 된 거요. 내 나이 열세 살 때. 왜 집안의 영향이 없었겠소. 마르크스 책을 봤지만 내 성향은 운동조직과 맞지 않았소. 유물론·변증법·잉여론 같은 것도 마음에 안 들었어요."
―6년 반의 수감 생활을 마치고 난 뒤로는 생명사상을 들고 나왔지요? 운동권 진영에 '김지하가 변했다'며 당혹감과 충격을 줬지요?
"감옥 안에서 '동경대전'을 읽고 동양 정신의 세계로 들어갔지요. 생명과 환경, 농업에 관심을 가지게 됐고. 사실은 그 이전부터 내 안에서 싹트고 있었던 것들이지요."
―자신이 살아온 삶을 어떻게 평가합니까?
"만날 얻어터지기만 하고 빛을 못 보고 살았지요."
―'김지하'라는 이름을 얻었고, 서로 모셔가려고 하지 않습니까?
"그게 중요한 거요? 그게 좋은 거요? 그걸 바라고 살아온 사람 같소? 잘 살아온 것도 아니지만 잘못 살아왔다고 얘기하고 싶지 않지만…."
―돌아보면 어떤 점이 가장 아쉬움으로 남습니까?
"많지요. 중요한 것은 내가 못났다는 겁니다. 나는 씩씩한 사람이 못 돼. 원래 겁이 굉장히 많은 사람이오. 감옥을 예감하면 이틀이고 사흘이고 결심해야 돼. 적당히 결심하지 못해. 집사람은 이를 잘 알지. 그래서 고통 받았지. 집사람한테 늘 미안해. 워낙 고생을 많이 했어."
―그런 기회는 없겠지만, 가정해서 또 한 번 삶이 주어지면 이렇게 살 겁니까?
"남들에게는 어떻게 비쳤을지 모르나 내가 찾으려는 것은 아름다움이었지. 나는 어둠 속의 '흰 그늘'이라는 표현을 썼는데, 그늘에서 기적 같은 흰빛, 그런 아름다움을… 내가 살아온 삶을 똑같이 살고 싶지는 않은데 그런 원리를 찾아가겠다는 바람은 변함없소."
이제 그는 걸음걸이가 불편한 노인이었다.
최보식 선임기자
□이상백 IOC 위원
2015-09-05 시인 이상화의 형 이상정은 대한독립군 중장…
⊙ “출중한 네 형제 중 일찍 숨진 李相和가 가장 오래 기억돼”
⊙ “아버지는 몸집보다 도량이 넓고, 심중이 깊은 대담한 어른이었다”(아들 이충희)
⊙ 동생 李相旿는 대한사격회 초대회장…
《야생동물기》 저서 남겨 [편집자 주] 20세기 한국의 문인만큼 치열하게 산 이들도 드물다. 나라를 잃었고 문자를 빼앗겼으며 이념의 소용돌이와 전쟁의 極限을 모두 체험했다. 더러는 親日로, 더러는 붓을 꺾고 순수와 이념문학의 길로 흩어졌지만 이들의 내면세계는 쉽게 재단할 수 없다. 이들을 가까이에서 지켜본 자식들은 아버지를 어떻게 기억할까. 한국 근대 문인가족에 대한 연구는 매우 빈약하다. 생존한 가족의 입을 통해 문인들의 인간적 면모와 일화를 소개한다.
▲ ‘지금은 남의 땅!’이라 외치는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의 시인 상화(尙火) 이상화(李相和· 1901~1943).
〈나의 침실로〉에서 ‘마돈나, 수밀도(水蜜桃)의 네 가슴에 이슬이 맺도록 달려 오너라’던 로맨티스트 이상화는 시혼(詩魂)과 민족혼(民族魂) 모두를 지녔던 시인이었다.
22살(1922년) 낭만·유미주의를 표방한 《백조》 동인으로 시의 세계에 입문, 25살(1925년) 카프(KAPF·조선 프롤레타리아 예술가 동맹) 발기인으로 참가하며 ‘펄펄 끓는’ 저항시로 나갔던 그는 해방을 앞둔 1943년 사망하기까지 60여 편의 시와 시조, 소설 2편(번역소설 5편)과 산문 20여 편를 남겼다. 사인은 위암(胃癌).
▲왼쪽부터 이상화, 이상백, 어머니 김신자, 이상호. 뒷줄 서 있는 이가 이상정.
이상화의 아들 충희(忠熙·82)씨는 “일경(日警)에 가택수색을 당하는 바람에 당신의 시고(詩稿)를 압수당해 버렸다. 아버지는 평생 요시찰 인물이었다. 해방 후에는 시인 임화(林和)가 선친의 시집을 출판하겠다며 원고를 가져갔지만 월북하는 바람에 돌려받지 못했다”고 아쉬워했다. 이충희씨는 현재 경기도 분당에 살고 있다. “아버지 초기 시는 그렇지 않았는데 1920년대 후반이 되면서 (시어와 주제가) 강해졌다”며 이렇게 말했다.
“시인으로서 아버지에 대한 평가가 20세기 후반 들어 더 좋아졌다고 할까요? 어떤 분이 이런 말을 하세요. ‘상화 시를 이북(以北) 사람이 더 좋아한다’고요. 항일시를 썼으나 변절하지 않고 지조를 지킨 유일한 분이라는 겁니다. 사실, 카프에 가담한 문인 중 전향하지 않은 이가 없어요.
이런 생각도 해 봅니다. 선친이 오래 사셨다면, 하고 말이죠. 그래도 변절하지 않으리라 단언할 수 없으나 일찍 돌아가신 것이 ‘안타까운 행복’이라 생각합니다.”
상화의 호적에는 ‘대구부(大邱府) 명치정(明治町) 2정목(丁目) 84번지’에서 사망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 대구시가 이곳을 상화 고택(古宅)으로 조성했다. 또 그가 태어난 ‘대구부 본정(本町) 2정목(중구 서문로 2가) 11번지’에는 표징물이 설치돼 있다.
이상화는 열아홉 되던 1919년, 달성 서씨 집안인 서순애(徐順愛)와 결혼해 3남을 낳았다. 서순애는 충남 공주의 명문가 서한보(徐漢輔)의 딸이다. 서한보는 구한말 공주군 참사를 지냈고 당시 공주지역 대부호였다고 한다. 이충희씨는 이렇게 회고했다.
“서순애의 큰오빠 서덕순(徐悳淳)은 1947년 미군정 시기 충남도지사를 지냈어요. 서덕순은 와세다대 정경과를 나왔는데 신익희 선생과 와세다대 동문이었어요. 백부 이일우(李一雨)의 사위인 윤홍열(尹洪烈·일제시대 《대구시보》 사장 역임)이 일본 유학시절, 서덕순과 교우(交友)한 것이 ‘공주처녀’와 결혼하게 된 계기였습니다.”
‘성심을 다해 남편을 기다려 온 아내의 미덕을 경애했다’
▲이상화의 후손들. 뒷줄 가운데가 상화의 부인 서순애 여사다. 그 왼쪽이 충희씨 부부, 오른쪽은 3남 태희씨 부부다.(1980년대 찍은 사진이다.)
이상화의 장남 용희(龍熙)씨는 1926년, 차남 충희씨는 1934년, 3남 태희(太熙)씨는 1938년 태어났다. 결혼(1919년)에 비해 자녀출생이 늦은 까닭은 상화가 일제 검속을 피해 도망 다녔고 《백조》 동인활동을 위해 자주 서울에 머물렀기 때문이다. 당시 문우(文友) 나도향·현진건·박종화 등과 ‘음주행각이 심했다’는 기록도 있다.
1922년에 도일(渡日), 도쿄의 외국어전문학교인 ‘아테네 프랑세’에 입학하는 등 외지로 떠돌아 아내와 자연 멀어질 수밖에 없었다고 추정할 수 있다. 그러나 문중에 따르면 “30대 후반 이후 대구에 정착하면서 아내와 부부의 정이 깊어졌다. 이상화는 ‘줄곧 성심을 다해 남편을 기다려 온 아내의 미덕을 경애했다’”고 한다.
이상화의 장남 용희씨는 1966년 병사했다. 결혼을 하지 않아 후손이 없다. 문중에 따르면 “장남의 사망으로 어머니 서순애가 가톨릭에 귀의했다. 그의 세례 대모(代母)는 장면(張勉) 총리의 아내다. 세례명은 베로니카”라고 했다.
차남 충희씨는 경북고와 해양대 기관과를 나와 원양(遠洋) 어선을 탔다. 그는 “외교관을 제외하고 유일하게 해외견문을 넓힐 수 있는 직업이 마도로스라고 생각했다. 배를 타다가 사고가 나서 잠시 귀국했는데 5·16이 터졌다. 집안에서 배 타지 말라는 강권이 심해 그만뒀다”고 했다.
이후 박정희(朴正熙) 대통령의 대구사범 동기인 흥국상사 창업주 서정귀(徐廷貴·1919~1974)의 회사로 이직했다. 훗날 호남정유 사장을 지낸 서정귀는 이상화의 5촌 조카사위다. 충희씨는 흥국상사 요직을 거쳐 계열사인 흥국공업 회장을 지냈다. 그는 아버지 상화에 대한 기억을 이렇게 떠올렸다.
“아버지는 자식들에게 각별했고 자상했습니다. 제가 대구 수창국민학교에 입학한 후 1주일 동안 손을 잡고 학교에 데려다주고 데려오곤 하셨어요. 그림 동화책도 읽어 주신 기억이 나는데 그게 정서적으로 많은 영향을 미쳤어요. 집안 형님 증언에 따르면, 아버지는 몸집보다 도량이 넓고, 심중이 깊은 대담한 어른이었다고 합니다.”
이상화의 家訓
▲이상화가 죽기 전 붓으로 쓴 가훈 ‘반다시(반드시) 애써 할 일’.
시인이 죽기 한 해 전 가훈을 붓으로 써서 집안에 걸어 두었다고 한다. 충희씨는 “친필 가훈을 형제들이 가슴에 담고 살았다”고 했다. 가훈의 내용은 이랬다.
〈반다시(반드시-편집자 주) 애써 할 일.
우리는 서로 사랑하고 섬기고 위하여 살자.
우리는 몸과 마음을 맑게 하고 적고 큰 것도 고맙다 아끼자.
우리는 저마다 할 일에 있는 힘을다하자.
우리는 혼자 있을 때에도 내가 나를 속이지 말자.
우리는 내 것을 귀여웁게 할 것이요, 남의 것만 부러워 말자.
우리는 항상 옳은 일을 하여 뉘우침을 모르게 하자.
우리는 언제 어데서나(어디서나) 오분히(‘허술한 데가 없이 알차게’라는 뜻) 착한 사람이 되자.〉
충희씨는 슬하에 2남1녀를 뒀다. 아내는 동양화가 정태순(鄭泰順)씨. 자제 가운데 문학과 예술 분야에 종사하는 이는 없다고 한다. 모두 샐러리맨이란다.
막내 태희씨는 일찌감치 미국으로 이민을 떠나 로스앤젤레스(LA)에 정착했다. 이민 전에는 흥국상사 계열인 범한해상에서 차장으로 근무했다. 슬하에 1남1녀를 뒀으나 문예 방면으로 직업을 갖지는 않았다. 태희씨는 작년 미국에서 사망했다.
키 170cm에 70kg이었던 女傑 어머니
▲학창시절 이상화.
이상화는 이시우(李時雨)와 김신자(金愼子)의 4남 중 둘째로 태어났다. 아버지 이시우가 1908년 사망해 4형제는 편모 슬하에서 자랐다. 어머니 김신자는 덩치가 큰 여장부였다. 문중에 따르면, 키가 5척6촌(169.7cm 추정), 몸무게가 18관(67.5kg 추정)으로 당시 여성의 평균 신장보다 훨씬 컸다.
그래서인지 이상화를 제외한 3형제의 키가 6척(尺)이 넘었다고 한다. 1척이 30cm라면 180cm가 넘었다는 얘기다. 이상화는 신장과 몸집이 보통이었다고 한다.
맏아들 이상정(李相定)은 광활한 중국 만주벌판에서 임시정부와 중국 장계석 군대에서 독립전쟁을 벌인 장군이 되었다. 셋째 이상백(李相佰)은 일본 와세다대 농구부 주장으로 활약, 나중 일본체육회 고위인사가 되었고 해방 후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위원에 올랐다. 넷째 이상오(李相旿)는 ‘대한사격회 초대회장’을 역임한 수렵인이다. 이상오는 훗날 《한국야생동물기》 《세계명포수전》 같은 책을 썼다.
상화의 어머니 김신자는 억척스레 자녀를 키웠지만 정이 많아 베푸는 것을 좋아했다고 한다. 일찍 과부가 되어서인지 불심(佛心)이 지극했다는 증언도 있다. 충희씨는 “어린 시절, 할머니 사랑을 많이 받았는데 세 살 버릇 여든 간다시며 버릇을 잘 들여야 한다는 말을 수시로 들었다”며 “아버지가 할머니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말했다. 계속된 그의 말이다.
“상화의 백부가 소남(小南) 이일우(李一雨) 선생입니다. 당대 부호로서 재력을 바탕으로 팔운정(現 수창초등학교 부근)에 우현서루(友弦書樓)를 세워 많은 인재를 길렀습니다. 우현서루는 단순 책방이 아니라 수천 권의 책이 있는 도서관이었어요. 우현서루와 인연을 맺은 인물이 많은데 ‘목놓아 크게 소리내어 통곡하노라’고 쓴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의 장지연(張志淵), 상해 임시정부 국무총리와 제2대 대통령을 역임한 박은식(朴殷植),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으로 독립운동에 헌신한 이동휘(李東輝) 등이 대표적입니다.
이 우현서루에 인재들이 모여들자 1915년 일제는 폐쇄하고 말았어요. 그 후 강의원(講義院)으로 바뀌었다가 교남학교(1921년 설립)의 모태가 됩니다. 이 교남학교에서 이상화 시인이 영어와 작문을 가르쳤는데 이 학교 후신이 지금의 대구 대륜중고교입니다.”
충희씨는 이런 말을 덧붙였다.
“그러나 이상화가 백부의 영향을 많이 받았겠지만, 제가 생각하기에, 백부보다 어머니(김신자)의 영향이 더 컸을 것으로 보입니다. 조카자식이 귀하겠습니까, 아들자식이 더 귀하겠습니까. 가훈인 ‘혼자 있을 때도 나를 속이지 말라’는 당당함과 성실성은 할머니 훈도에 의한 것이라고 봅니다. 그런 가르침 덕에 아들 4형제가 모두 출중했으니까요.”
—아버지 시 중에서 가장 좋아하는 시는 무언가요.
“〈빼앗긴 들…〉과 〈나의 침실로〉를 좋아해요. 아버지 시비가 전국에 6개 있습니다. 우리나라 최초로 대구 달성공원에 세워진 시비가 ‘상화시비’입니다. 천안 독립기념관에도, 아버지가 교사로 재직했던 대륜고 교정과 아버지가 잠시 다녔던 서울 중앙고 교정에도, 대구 두류공원에도 시비가 있어요.”
대조적인 두 형제, 李相定과 李相佰
▲상화의 형인 독립운동가 이상정(오른쪽)과 이상화. 두 사람은 1937년 중국 베이징에서 조우했다.
문중에 따르면, 상화의 큰형 이상정(1897~1947)은 “중국 장개석 군대 밑에서 국부군(국민군) 고위 막료를 했다”고 한다. 임시정부 수립 당시 통위부 장관을 지낸 유동열(柳東說), 독립운동가이자 김일성(金日成)이 다니던 만주의 화성의숙 교장이었던 최동오(崔東旿·그의 아들이 최덕신 장군)가 이상정의 의제(義弟)들이다. 충희씨는 “최동오의 아들 최덕신 장군이 어린 시절 아버지 형제들을 아저씨라고 불렀다. 세 분이 만주에서 결의형제를 맺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상정은 스물다섯에 결혼해 1남1녀를 낳았으나 중국 만주로 망명(1923년), 광복 후인 1947년 일시 귀국할 때까지 집을 떠났었다. 딸 이선희는 양조장을 하는 배씨 집안(포항)으로 시집갔고, 아들 이중희(李重熙)는 영남대 교수로 재직하다가 퇴임한 뒤 20여 년 전 사망했다. 그는 3남1녀를 뒀는데 큰아들은 미국으로 이민을 갔다. 문예 방면에서 활약하는 후손은 없다고 한다. 한 후손의 말이다.
“이상정은 광복 때까지 중국에서 독립군을 이끌었던 장군으로 항일운동을 펼치셨던 분입니다. 임시정부 의정원 의원에 선임되었고 대한독립군 중장이었어요. 중·일전쟁이 일어나자 국민당 정부의 육군참모학교의 소장교관(少將敎官)으로 취임했고, 중화군사령부(中華軍司令部)의 막료직도 겸했어요. 그런데 1947년 일시 귀국했다가 안타깝게도 대구 본가에서 뇌일혈로 운명하셨습니다.”
▲상화의 첫째 동생으로 IOC위원을 지낸 이상백.
이상정은 우리나라 최초의 여자 비행사 권기옥(權基玉·1903~1988)과 결혼했다. 일설에는 해방 전까지 자신이 유부남이란 사실을 밝히지 않았다고 한다. 문중에 따르면 “두 분 사이에 후손이 없어 집안 호적과 족보에 ‘권기옥’의 이름을 올리지 않았다”고 했다. 권기옥에게는 1977년 대한민국 건국훈장이 추서됐다. 충희씨의 말이다.
“큰아버지 이상정이 광복 후에도 바로 귀국하지 못하고 중국에 남아 있었어요. 그 이유는 중국군이 해방 후 한국에 진주(進駐)하려던 계획이 있었다고 합니다. 기다리다가 미군이 주둔하는 바람에 못 오시게 됐어요. 제가 경북중에 다닐 때였는데 백부님이 귀국해 학교 강당에서 강연을 하신 기억이 납니다.”
이상화의 동생 이상백(1903~1966)은 문무(文武)를 겸비했다는 평이다. 어찌 보면 만주벌판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이상정과 대조되는 인물이다.
대구고보(지금의 대구고)를 나와 와세다대 사회철학과를 졸업했다. 대학시절 와세다대 농구부 주장으로 활약했고 미국 원정 경기를 가졌다고 한다. 일제 강점기 때는 일본 도쿄올림픽 초치(招致)위원으로 활약했고 해방 후 서울대 교수와 한국사회학회 회장, 대한체육회 부회장, 아시아경기연맹 집행위원을 거쳐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위원을 역임했다. 문중 한 인사의 말이다.
이상오는 초대 대한사격회 회장
▲상화의 둘째 동생인 수렵인 이상오.
“6척 키에다 문무를 겸해 일본 체육계에 그만한 인물이 없었다는 평입니다. 스물여덟 무렵에 일본농구협회 상무를 했고 서른이 넘어 일본 체육회 전무가 되었다고 해요. 당시 일본 체육회는 전부 황족들이 도맡았는데 황족과 교분이 있었다고 합니다. 당시 조선인이면 모두 창씨개명(創氏改名)을 할 때도 그분은 개명을 하지 않았다고 해요. 누구 하나 함부로 개명을 권하는 사람이 없었다고 합니다.”
이상백은 독신으로 지내다 55살에 결혼했다. 자녀를 두지 않았다고 한다.
막내 이상오(1905~1969)는 해방 전까지 경북 칠곡에서 양조장을 했다.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자”, 취미로 수렵을 한 것이 평생의 직업이 됐다. 형 이상백이 대한체육회에 있을 때 이상오는 초대 대한사격회 회장이 됐다. 글재주가 뛰어나 《야생동물기》의 저술가로 명성이 높았다. 이상오는 슬하에 5남2녀를 뒀다. 첫째 사위가 육사2기로 박정희 대통령의 동기인 윤온구(尹溫求) 대령이다. 둘째 사위는 5·16 당시 국가재건최고회의 혁명검찰부장이었던 박창암(朴蒼巖) 장군. 충희씨는 이런 말을 덧붙였다.
“대학 동창 중에 세계적인 과학자가 된 친구가 있는데 이런 말을 해요. ‘너희 아버지 형제가 모두 출중한데도 제일 오래 이름이 회자하는 이는 독립투사 이상정, IOC 위원 이상백, 수렵인 이상오가 아니라 일찍 돌아가신 시인 이상화’라고요.
요즘도 아버지 시를 노래하는 이가 많고, 전국 곳곳에 시비가 건립되며, 시에 대한 새로운 평가도 나와 놀라고 있습니다.”
출처 | 월간조선 8월호 글 | 김태완 월간조선 기자
□매국노 이용구(李容九) 아들 오히가시 쿠니오(大東國男)의 기구한 생애
2015-08-11 조선일보
일본 우익에게 이용당하여 한일합병의 심부름꾼이 되었던 一進會 회장은 좌절속에서 숨을 거두고 그의 아들은 일본인도 조선인도 아닌 상태에서 기구한 삶을 이어갔다. 그와 한 마지막 인터뷰.
*대륙낭인의 무덤 앞에서
일본 도쿄의 교외에 다마레엔(多磨靈園)이란 공원 묘지가 있다. 저명인사들이 많이 묻혀 있다. 1984년 여름, 나는 이 묘지의 14구(區) 1종(種) 9속(屬) 12호를 찾았다. 우치다 료헤이(內田良平)의 화장한 뼈가루가 묻혀 있는 묘가 거기에 있었다. 돌난간으로 둘러처진 약 30평 되는 큰 무덤. 우람한 비석이, 묻힌 인물의 크기를 말하는 듯했다. 깨끗하게 청소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최근에 누가 참배했음이 분명했다. 나를 안내한 우치다 연구가 다키자와 마코도씨(瀧澤誠 당시 45세·저술가)가 분향, 묵념했다.
우치다 료헤이는 일본 우익사상의 뿌리에 터잡고 있는 대륙 낭인이다. 우치다는 1874년에 「국권(國權)주의와 대륙 팽창주의의 요람」인 후꾸오카에서 검객(劍客) 집안의 아들로 났다. 그는 숙부 히로오카 고타로(平岡浩太郞)로부터 글과 칼을 함께 배우며 자랐다. 검도, 유도의 달인이 된 우치다는 히로오까가 창립한 국권주의 정치결사인, 일본우익단체의 효시 현양사(玄洋社)에 들어갔다.
우치다가 한국과 관계를 갖게 된 것은 천우협(天佑俠)의 일원이 되면서부터였다. 천우협은 현양사 사장 히로오카의 재정지원으로 조직된 단원 15명의 유격대식 단체. 일본 우익은 나중에 천우협의 활동을 터무니없이 과장했다. 천우협이 조선 민중을 도탄에서 구하기 위해 전봉준 진영의 요직을 차지, 동학군과 손잡고 관군(官軍)과 싸웠다는 것이다. 한국 학자들은 천우협이 일본군의 앞잡이였고 일본군의 보호 아래에서 방화, 폭력을 자행했다고 정반대의 해석을 하고 있다. 우치다가 반도와 대륙에서 활동무대를 찾게 된 것은 청일전쟁 뒤였다. 일본의 가상 적(敵)으로 등장한 러시아에 대해 일본국론이 「민족주의의 발흥」을 보이고 있을 때였다. 우치다는 1895년 러시아 블라디보스톡에 유도 도장을 차렸다. 이 도장은 대륙낭인과 일군(日軍) 첩보원들의 정보활동 기지가 되었다. 그는 흑룡강변을 여행하면서 이렇게 썼다.
「아시아의 全 사회를 이처럼 아름다운 꽃밭으로 가꾸는 것이 일본의 사명이다.…누가 광활한 황야를 러시아로부터 지킬 것인가. 그 일은 우리 일본이 해야 하며, 그러려면 일본의 국력을 흑룡강까지 뻗게 해야 하고, 그러기에는 지금이 가장 적절한 시기다.」 뒤에 그가 조직한 우익 단체가 흑룡회란 이름을 딴 것도 만주 벌판에 대한 우치다의 집착을 상징한 것이었다.
*伊藤博文이 탄 名馬-우치다
우치다는 시베리아 철도를 경유, 러시아를 돌면서 정탐 여행을 했다. 우치다는 스물일곱 살에 흑룡회(黑龍會)를 창립했다. 그는 창립 동기를 이렇게 밝혔다.
「우리는 오랫동안 흑룡강변에서 노숙하고 장백산의 바람으로 저녁을 지어먹고 요동 들판의 장막 속에서 밤을 지새우며 그 지역의 풍속과 인정을 시찰하고 東아시아의 추세를 살펴 왔다. 우리가 흑룡회를 일으킨 목적은…이들 자료를 국민에게 전달하여 각성을 촉구하고, 그 자료를 종합적으로 분석함으로써 국익(國益)에 이바지하고자 함이다.」
흑룡회의 목적은 「대륙에 일본 세력을 심는다」는 것이었다. 이 목적을 위해 흑룡회는 일본 정부와 함께, 또는 정부에 대항하면서, 정부와는 별도로 활동했다. 일부 회원은 러시아로 침투, 첩보활동을 벌이고 일부는 신문·잡지를 통한 선전 활동, 일부는 정계·군벌의 유력자들을 설득하는 막후 로비를 했다. 우치다는 일본의 여론을 對러시아개전론(開戰論) 쪽으로 몰고 가는 데 큰 역할을 했다.
러일전쟁 뒤 우치다의 관심은 다시 한반도로 기울었다. 메이지 정계(政界)의 막후 거물인 스기야마 시게마루는 초대 통감으로 부임해 가는 이토 히로부미에게 말했다.
『지금 일본에는 비길 데 없는 명마가 한 필 있습니다만, 불행하게도 그 말을 부릴 수 있는 인물이 없는 것 같습니다. 각하께서 그 말에 재갈을 물리고 한번 부려 봄이 어떻겠습니까?』
이토는 『그 말에 한번 타고 싶군요』라고 했다. 이렇게 해서 일본 우익의 준마 우치다 료헤이는 이토의 개인 참모로 서울에 왔다. 여기서 우치다와 이용구(李容九)의 운명적 만남이 이루어진다. 한 사람은 나라를 팔고, 다른 한 사람은 나라를 사는 그런 관계의 만남이었다.
*病席에서 만난 李容九의 아들
일본에서 가장 인기가 있는 친일파는 단연 이용구(李容九)다. 한국에선 「매국노」란 말과 함께 떠오르는 이름이 이완용인데, 일본에선 李容九만이 일반적인 지명도(知名度)를 갖고 있다. 李容九에 대한 단행본, 논문, 기사도 숱하다. 학자뿐 아니라 일반의 연구가들도 많다. 나를 안내한 다키자와씨도 그런 연구가다. 그는 상당한 평가를 받고 있는 「우치다 료헤이 평전」을 쓴 사람인데 광고회사 직원이다.
틈만 나면 2박3일, 3박4일 정도의 휴가를 얻어 한국으로 날아온다. 송병준, 이용구의 무덤을 찾아다니고 시천교(侍天敎)의 유적을 답사했으며 앞으로는 천우협의 행적을 추적할 계획이다. 이용구에 대한 일본인의 유별난 관심은 그가 일본인의 미적(美的) 감각에 딱 들어맞는 비극적이고 결벽한 인물이기 때문일 것이다.
이용구의 아들 오히가시 쿠니오(大東國男)는 우치다 료헤이의 무덤에서 십리 정도밖에 떨어져 있지 않은 도쿄 교외 기츠조지(吉祥寺)시의 조용한 주택가에 살고 있었다. 우치다의 무덤보다도 작은 건평 20평 정도의 초라한 일본식 목조 건물. 그 타다미 방 한구석에서 70 노인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앙상하게 뼈만 남은 그는 허리를 못 쓰고 몇 달째 반듯이 누워 지내고 있다. 희끗희끗한 머리카락, 듬성듬성한 수염, 갸름한 얼굴 속에서 깊게 파인 두 눈동자만은 범상치 않게 번들거리고 있었다. 60노인의 몸으로 지금도 지압사로 일하며 남편을 부양하고 있는 일본인 부인의 부축을 받고 그는 비스듬히 돌아누웠다.
그는 턱을 괴더니 그냥 이야기를 쏟아놓기 시작했다. 두서가 없고 중복이 많은 이야기였다. 옆에서는 그의 아내가 『그 이야기는 아까 했는데…』라고 속삭이며 조심스럽게 말리곤 했지만, 그는 막무가내였다. 목소리 좋고 발음 정확한 표준 일본어였다. 감수성 깊은 표현은 절묘했고, 향수와 분노와 절통함에 떠는 그의 손짓도 격렬했다. 나는 연 사흘 동안, 그의 집에 출근(?)하여 총 15시간에 걸쳐 폭포수 같은 이야기 세례를 받았다. 그는 『죽기 전에 이것만은 꼭…』이라고 말하며 최단시간 내에 최대량의 이야기를 해야겠다는 조급함을 드러내기도 했다. 사흘 째 날 밤늦게 헤어질 때 그의 부인은 남편에게 농담을 했다. 『이제 속 시원히 한국 기자에게 털어놓았으니 죽어도 원이 없겠군요.』
*속은 자와 속인 자
李容九는 1868년 경북 상주의 양반 가문에서 났다. 12세 때 동학 교주 최시형의 문하로 들어갔다. 동학운동이 일어나자 전봉준의 참모로 참여했다. 공주 전투에서 일본토벌군과 싸우다가 오른쪽 발에 관통 총상을 입었다. 러시아와 일본 세력이 각축하자 이용구는 지난날의 적(敵) 일본 편으로 기울었다. 반일(反日)의 손병희와 헤어져 송병준과 함께 일진회(一進會)를 조직했다. 이용구를 친일(親日)로 돌리는 데 큰 영향을 준 것은 다루이(樽井藤吉)가 쓴 「대동합방론」이었다.
「동양제국은 힘을 하나로 합해 서양에 대항할 아시아 연방을 결성해야 한다」는 대목에 매료되었다. 러일전쟁 때 이용구는 일진회를 동원, 일본군의 보급 활동을 지원했다. 철도 부설, 일본군을 위한 첩보 활동 등에 동원된 일진회원은 10여만 명이었다고 한다. 당시 대중조직으로서 일진회(一進會)만큼 큰 단체는 없었다.
이토 히로부미의 참모로 한국에 온 우치다가 주목한 것은 일진회의 이런 대중 동원력이었다. 우치다는 李容九와 만났을 때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당신의 아시아에 대한 신념은 무엇인가?』
『나의 소신은 대동합방론이다.』
우치다는 일진회의 고문이 되었다. 그는 일진회 운영경비를 대며 이 조직을 조종하기 시작했다. 우치다는 일진회를 이용, 여론을 조작하여 한국 및 일본 정부에 영향을 끼쳤다. 우치다는 합병을 점진적으로 추진하자는 이토 히로부미 타도 공작을 일본에서 펴기도 했다. 흑룡회와 일진회란 양날개를 달고 합병을 향해 비상한 것은 이용구가 아니라 우치다였다.
안중근 의사의 거사 직후 이용구는 우리 나라를 일본 천황의 은덕 아래 맡기자는 상주문을 대한제국 황제, 총리, 통감에게 보냈다. 이와는 별도로 가츠라 일본수상에게는 합방청원서를 보냈다. 일본 정부는 합방 청원을 받아들이는 형식으로 합방이 아닌 「합병(合倂)」을 결행했다.
그제야 이용구는 양국이 동등한 조건으로 연방한다는 자신의 꿈이 일본에 의한 한국의 병합으로 변해버린 것을 깨달았다. 일제는 이용가치가 없어진 일진회도 합병 한달 뒤 해산시켜버렸다. 해산명령이 난 다음날 이용구는 피를 쏟고 한성병원에 입원했다. 서른 아홉 살의 우치다는 이즈음 자작시를 읊었다.
<한의(韓衣)는 일본 옷으로 변하고
오늘부터 압록강에서 목욕하고
아마데라스 오미카미의 그림자를 우러러 보리.>
*『나는 바보였나 봅니다』
이용구는 심한 신경증상과 폐병으로 쇠약해져 갔다. 일본 효고 현의 해안에서 요양하는 신세가 되었다. 그는 일본 정부가 내린 작위도 거부했다. 합병에 따른 특혜를 만끽, 실업가로 변신한 송병준과는 이때부터 처신하는 방식이 달라지는 것이다. 이용구는 죽기 석달 전 그의 친구인 대륙낭인 타케타 한지에게 보낸 편지에서 자신의 심경을 토로했다.
<어릴 때부터 평생 제가 추구한 것은 일신상의 사리(私利)가 아니라 국가의 대리(大利)와 인민구제의 소망이었습니다. 지금 돌이켜 보면 제가 잘도 속임을 당하고 잘도 농락되었음을 깨닫게 됩니다. 2000만 인민을 일본의 최하등민으로 빠뜨린 죄도 소생에게 있습니다. 문을 나서면 이웃 사람들로부터 조롱받고 욕먹고…당국의 조치를 보면 우리를 대하는 것이 원수 대하듯, 거지 대하듯, 사냥 뒤의 개 대하듯 합니다. 소생을 보고 매국노라고 부르는 사람 있어도, 어찌 입이 있어 변명을 하겠습니까. 지하에 선인의 영혼이 있다면 거기에 간들 무슨 낯으로 그들을 대하겠습니까. 스기야마, 우치다, 타케타가 속임을 당했는지, 송병준과 이용구가 사기를 당했는지, 태어날 때부터의 바보인 소생은 도대체 알 수가 없습니다.>
당시 일본의 유명한 피리 연주가인 요시다(吉田晴風)는 송병준으로부터 부탁을 받았다. 『지금 나의 친구가 중병으로 목숨이 경각에 달려 있는데 한 곡 부탁한다』는 것이었다. 그는 산중(山中)의 별장으로 초대받아 갔다. 침실에는 백랍 같은 병자가 누워 있었다. 요시다는 피리를 불었다. 연주 중에 느낌이 이상해 곁눈질해 보았더니, 병자는 상반신을 일으켜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싼 채 오열하고 있었다. 비장감, 그리고 귀기(鬼氣)가 서린 듯한 병자를 위해 요시다는 더욱 정성을 다해 피리를 불었다. 이 병자가 이용구였다.
이용구는 죽기 며칠 전 문병 온 우치다의 손을 잡고 말했다.
『나는 바보였나 봅니다. 혹시 속은 게 아닐까요?』
우치다는 대답했다.
『뒷날 반드시 모든 것이 명백해질 것입니다. 오늘은 어리석은 자이지만 뒷날 반드시 현자(賢者)가 될 것입니다.』
*땅이 무너지듯 했던 8·15
평생 이용구라는 이름에 짓눌려 살아온 75세(1984년 당시)의 독자(獨子) 오히가시 쿠니오(大東國男)는 『한국이 두렵기도 하고 그립기도 하다』고 했다. 그의 딸은 노처녀인데 『한국인과도, 일본인과도 결혼하지 않겠다』고 부모에게 말하곤 한다. 오히가시 씨는 그러나 한국과 일본 가운데서 일본을 선택했다고 봐야 할 것 같다. 이름에서, 국적(國籍)에서, 그리고 사고방식에서….
1945년 8월15일 그는 부산에서 그 선택의 날을 맞았다. 해방 9일 전 오히가시 씨는 서울에서 부산으로 내려와 군부대 공장 등에서 강연을 하며 돌아다니고 있었다.
현해탄에 기뢰가 떠 다니고 부산∼시모노세키 사이의 뱃길이 끊겨 민심이 술렁일 때였다. 그는 청중들을 앞에 두고 천황(天皇)의 전지전능한 힘에 의해 황군(皇軍)이 기필코 승리할 것이라고 절규했다. 폭탄이 떨어져도 천황이 초능력을 발휘하면 빗나가게 된다면서 그런 힘을 보여주도록 열심히 기도 드리자고도 했다. 일본에서 지금 굉장한 폭탄을 개발중인데 이 폭탄 하나만 떨어뜨리면 전쟁은 하루 아침에 일본의 승리로 끝날 것이라고 그는 외쳤다.
『내 말에 청중은 요란한 박수를 보냈고 나 자신도 스스로 도취하여 내 말을 믿게 되었습니다.』
1945년 8월15일 부산의 일본인 유지들에게 동래 범어사로 집합하라는 연락이 왔다. 오히가시 씨를 포함한 이들 일본인은 비로소 천황이 비밀 병기의 사용을 천하에 공표하는 모양이라고 가슴을 설레며 라디오에 귀를 기울였다. 정오에 나온 천황의 육성 방송은 잡음이 많았다. 오히가시 씨는 방송이 끝나도 무슨 뜻인가, 하고 어리둥절해 있는데 주위의 일본인들이 통곡하는 게 아닌가? 그제야 오히가시 씨는 「천황의 옥음(玉音) 방송」 내용이 불길한 것임을 눈치챌 수 있었다.
여기저기서 『우리는 졌다』는 소리가 튀어나왔다.
『그때 갑자기 현기증이 났습니다. 몸이 허공에 붕 뜬 기분이 들었습니다.』
오히가시 씨가 지금도 잊지 않고 있는 그때의 기분이다. 그가 딛고 있었던 것은 일본제국이었다. 그 제국이 무너질 때 그의 존재도 함께 허물어졌다. 여기서 그는 선택을 해야 했다. 한국이냐, 일본이냐? 주위에선 『여기 남아 있다가 친일파로 몰려 맞아 죽기 전에 어서 떠나라』고 권유했다. 한국에 와 있던 70여 만의 일본인들이 알몸으로 철수하는 물결에 얹혀 그는 1946년 초 일본으로 돌아갔다. 노모(老母)와 헤어져 갓난 딸아기를 품에 안고 일본인 부인을 따라 현해탄을 건넌 오히가시 쿠니오 씨는 후쿠오카에 우선 자리잡았다.
*외톨이 소년 시절
오히가시 씨의 어릴 때 기억은 나고야 산중(山中)의 어느 절에서 출발한다. 주지 요시다 부부를 그는 양친(兩親)으로 생각하며 자랐다. 잠자리에서 오줌 싸는 버릇이 있어 혼이 나곤 했던 기억이 아직 남아 있다. 5세 때 그는 갑자기 「양친」과 떼내어져 오이소의 호화스런 별장으로 옮겨졌다. 영문을 알 수가 없었다. 그해 여름 한 청년이 나타났다. 형이라고 했다. 소년을 부둥켜안고 형은 울음을 터뜨렸다. 같이 해수욕을 즐기며 여름을 보냈다. 방학이 끝나자 형은 소년을 데리고 도쿄 와세다 대학 근방의 하숙방으로 갔다. 형은 와세다 대학 예과 학생이었다. 하숙생활은 풍족했다. 어디선지 몰라도 큰돈이 매달 부쳐져 왔다.
여덟 살 때 소년은 소학교에 입학했다. 입학식 날 형은 따라가지 않았다. 어떤 아주머니가 같은 학교에 입학하는 자기 아들과 함께 소년을 데리고 갔다. 입학식 날의 쓸쓸함을 소년은 오랫동안 잊지 못하게 된다. 기가 죽은 소년은 입학식 날 자신이 「신기한 구경거리」가 된 것을 알았다. 소년은 구두와 양복 차림이었다. 부모가 따라오지도 않았는데 호사스런 복장을 하고 있었으니 소년에게 어린이들의 관심이 집중되었다. 자신의 이름이 이석규(李碩圭·오히가시씨의 원래 이름) 석자로서 보통 네 자로 되어 있는 같은 반 아이들의 이름과 다르다는 것도 깨닫게 되었다. 「조센진」「요보」라는 말도 들려왔다.
남자아이들로부터 소외된 소년은 여자아이들과 같이 놀았다. 이 무렵의 사건 중에 오히가시 씨가 지금도 선명하게 떠올릴 수 있는 장면이 있다.
『엿장수가 학교 근처에 왔습니다. 아이들이 우- 몰려갔습니다. 나는 돈이 없어 외롭게 서 있었습니다. 그런데 엿장수가 날 손짓으로 불러요. 아마도 아이들이 엿장수한테 「저 아이는 조센진이다」고 말한 모양이에요. 엿장수가 나에게 일본어로 뭐라고 하는데 아마도 성(姓)을 물었을 거예요. 나는 땅바닥에다가 일본글자로 「리」라고 썼어요. 엿장수가 잘 모르는 것 같아서 저는 하숙집으로 달려가 형 앞으로 온 편지를 갖고 와 거기에 쓰인 이(李)자를 보여 주었어요. 그제야 엿장수는 알았다는 시늉을 하더니 엿을 길쭉하게 늘어뜨려요. 가위로 싹둑 잘라 저한테 주고는 가버렸어요. 물론 그는 조선인이었죠. 지금도 그 엿장수의 눈빛을 생각하면 가슴이 찡해 옵니다.』
* 송병준의 볼모로 일본 생활
소학교 3학년 때 이석규 소년은 서울로 갔다. 형 이현규는 석규의 친형이 아니고 어릴 때 이용구의 양자로 들어 온 친척이었는데, 와세다 대학을 졸업, 동생을 돌볼 수 없었기에 서울로 데리고 간 것이었다. 서울에서 석규 소년은 어머니 이화사(李華師)를 대면했다. 어머니는 한강이 내려다보이는 용산의 남산 기슭에 큰 집을 갖고 있었다. 어머니는 일본어를 몰랐고, 소년은 한국어를 몰랐다. 형이 통역을 해주어야 했다. 그래서 어머니가 가깝게 느껴지지 않았다. 이화사는 이용구의 후처였다. 본처 권씨는 딸 봉자를 낳고는 죽었다. 동학 포교를 하다가 여러 번 옥살이와 고문을 당해 병을 얻었던 것이다.
이석규는 1909년에 났다. 일진회 회원들의 마스코트처럼 귀여움을 받으며 자랐으나 그 기억은 없다고 한다. 어느 날 밤 소년은 잠을 깼다. 어머니가 소년의 몸을 쓰다듬으며 흐느껴 울고 있었다. 소년은 자는 척했으나 괜히 눈물이 났다. 서울에서 1년 남짓 있다가 소년은 형과 함께 다시 도쿄로 돌아왔다. 일본에 돌아와서 석규 소년은 서너 군데의 하숙집을 옮겨 다녀야 했다. 도고(東鄕)라는 형사 출신의 일본인이 그를 이곳저곳으로 옮겨다주었다. 이 무렵에 가서야 석규 소년은 어렴풋이 자신의 처지를 이해하기 시작했다.
히로오카라는 개화된 여성의 집에 하숙하고 있을 때였다. 히로오카 여사는 중국 여행 길에 서울에서 석규 소년의 어머니를 만나고 돌아와 소년에게 말했다.
『너의 죽은 아버지는 훌륭한 분이었다. 그런데 송병준 자작이란 나쁜 사람이 아버지의 유산을 가로채고 너를 어머니로부터 빼앗아 일본으로 데리고 온 것이란다. 인질처럼 말이다. 우리집에서 열심히 공부해서 아버지의 뒤를 따르도록 해라.』
소년은 소학교 작문 시간에 이 이야기를 썼다. 교장을 통해 이 사실이 일본에 있던 宋 자작에게 보고됐다. 며칠 뒤 소년은 송병준의 개인 비서격인 도고에 이끌려 시부야의 사카이 여사 집으로 다시 옮겨졌다. 다섯 번째의 이사요 전학이었다. 사카이는 교양 있는 여자였다. 그녀는 구연수(具然壽)의 내연의 처였다. 구연수는 구한말 훈련대장으로서 민비 시해 사건 때 일본측에 가담했다가 일본으로 망명, 사카이와 잠시 동거했으나 소생은 없었다.
매국노의 아들들끼리 하숙생활
구연수는 한일합병 뒤 귀국, 총독부에서 경찰 고위간부로 일했다. 그는 본처에서 난 아들 구용서를 사카이에게 보내 일본에서 공부시키게 했다. 얼마 뒤 송병준도 손녀인 노다 미에코(野田見榮子·송병준의 일본 姓이 노다)를 사카이에게 맡겼다. 이웃에 살고 있었던 사카이의 여동생 사카이 나카는 우범선(禹範善)과 결혼했던 것이다. 우범선도 훈련대 제2대대장으로서 민비 시해 사건 때 일본 미우라 공사와 손잡았던 사람. 우범선 부대는 거사 당일 대원군의 가마를 호위, 입궐했었다. 친러파의 반격으로 집권에 실패하자 그는 일본으로 달아났다. 여기서 사카이 나카와 결혼했다. 우범선은 1902년 11월 독립협회 사람 고영근에 의해 암살됐다.
사카이 나카는 우범선과의 사이에 두 아들을 두었다. 형은 禹씨 성을 갖고 한국인으로, 동생은 후지노란 성으로 일본인 행세를 했다. 이용구, 송병준, 구연수, 우범선-한국인의 입장에서는 모두가 불구대천의 원수들이다. 그러나 그들의 아들들은 사카이 자매의 따뜻한 보살핌 속에서 오손도손 행복하게 자랐다. 구용서는 나중에 노다 미에코와 결혼, 귀국한 뒤 조선은행에 들어갔다.
그는 해방 뒤 재무장관까지 역임했고 몇 년 전 죽었다. 사카이 나카의 큰 아들 즉 禹씨 성으로 행세했던 청년은 도쿄 대학교 농대를 졸업, 세계적인 육종학자가 되었다. 그가 바로 고 우장춘(禹長春) 박사다. 오히가시 씨는 사카이 자매의 집에서 「매국노의 아들들」과 함께 지낼 때가 그의 생애에서 정서적으로 가장 안정되고 행복한 시기였다고 회상했다. 이무렵 이석규 소년은 도쿄 간다의 다이세이(大成) 중학교에 들어갔다. 이름도 구보 이치로로 개명한 구용서를 따라 구보 세키오(久保碩夫)로 고쳤다.
* 2·26사건 주모자와 사귀다
석규 소년이 중학교 2학년 때 형(이현규)이 학교로 면회를 왔다. 초췌한 얼굴이었다. 이용구의 유산을 찾으려고 송병준을 상대로 재판을 하고 있다고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송병준이 보낸 사람이 한글로 된 문서를 들고 왔다. 석규 소년에게 그걸 베껴 쓰라고 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그 한글문서는 재판관 앞으로 동생이 양자인 형의 폐적(廢嫡)을 신청하는 내용이었다고 한다. 송병준은 이 문서를 이용하여 재판에서 이겼다.
1925년 송병준이 68세로 급사했다. 송병준의 재산정리 사무소는 3만 엔을 이석규 소년 앞으로 떼내어 예금, 그 이자를 양육비로서 사카이 앞으로 보내기 시작했다. 이석규는 입교(立敎)대학 예과에 들어갔다. 이때부터 이석규는 방탕하기 시작했다. 마음을 둘 데가 없었던 그에겐 『술밖에 친구가 없었다』고 한다. 3년 뒤 송금이 끊겼다. 서울에 가보았더니 송병준 재산관리사무소가 없어져버린 것만 확인할 수 있었다.
이때부터 이석규는 일본 우익의 날개 아래로 들어가게 됐다. 대학입학 때 그의 보증인으로 서명한 것은 이용구의 동지였던 우익의 거물 우치다 료헤이와 도야마 미츠루(頭山滿)였다. 전성기를 넘긴 두 사람은 금전적으로 쪼들리고 있었다. 우치다는 돈으로 이석규를 도와주지는 못했으나 우익의 인물들로 하여금 잘 지도하도록 신경을 썼다. 이석규는 대학을 중퇴하고 흥아학숙(興亞學塾)에 들어갔다.
「국수주의자들의 양산박」으로 통했던 이 학원에서 그는 비로소 「아시아주의」와 접하게 되었다. 오가와(大川周明), 기다잇키(北一輝)와 같은 유명한 이론가들도 만났다. 이 학원엔 외국의 독립투사들도 더러 와 있었다. 인도의 비하리 보스, 월남의 진복안, 아프가니스탄의 프라닷프 등등. 이들은 열띤 토론을 벌였다. 토론은 늘 서양 제국주의 특히 영국을 규탄하고 서양 제국주의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아시아 민족이 대동단결 해야 한다는 쪽으로 진행됐다. 어느 날 이석규는 홧김에 소리쳤다.
『…아시아의 불행은 영국에 있다고 하는데 조선인의 불행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영국의 인도 지배와 조금도 다를 바가 없지 않은가?』
이 학원에서 이석규는 시부카와 젠스케란 청년과 가장 친했다. 육군사관학교 예과 시절 상관과 싸워 퇴학한 정의파 청년이었다. 그는 기다잇키가 쓴 「일본개조법안 대강(大綱)」의 초고를 보여 주었다. 이 초고에는 조선의 통치방식을 전면 수정해야 한다는 내용이 들어 있었다.
* 허무주의적 방황 거듭
이석규가 아시아주의에 눈을 떠가고 있을 때 일본은 1930년대의 소용돌이에 말려들고 있었다. 20년대의 「다이쇼(大正) 데모크라시」에의 반동으로 30년대에는 군부를 중심으로 한 제국주의 물결이 거세어졌다. 만주침략은 가속화되고 국내적으로는 갖가지 사회모순이 드러났다. 소화(昭和) 공황에 이은 농촌의 피폐와 재벌의 발호, 재벌과 군벌의 유착이 사회에 수많은 불만요인들을 심게 되었다. 이 모순에 대한 해결책으로 왼쪽에선 사회주의 사상이 지식층을 끌어당기기 시작했다.
오른쪽에선 청년장교와 우익세력을 중심으로 「昭和유신론」이 대두하기 시작했다. 이들 우익의 문제의식은 명치유신 뒤의 일본 근대화가 일본을 서양제국주의의 아류로 전락시켜버렸다는 반성에서 비롯되었다. 천황 중심의 옛날 일본, 동양적인 미덕이 지배하는 나라로 일본을 다시 개조하자는 것이었다.
기다잇키를 이론가로 하는 이 사조는 조선에 대한 일본의 식민통치를 제국주의 침략으로 규정한 점에서 당시 일본 정부의 자세와는 달랐다. 그렇다고 이들이 조선의 독립에 찬성한 것은 아니고, 조선을 내지(內地)와 같이 취급해야 한다는, 말하자면 「합병정신」을 버리고 「합방정신」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논리였다. 이 개혁 사조가 극적으로 분출한 것이 1936년 2월26일, 눈 내리는 도쿄에서 일어난 청년 장교들의 쿠데타 미수 사건이었다. 2·26사건으로 유명해진 이 반란은 메이지유신을 본뜬 昭和유신을 요구했으니 천황은 그들을 반도로 단정, 진압명령을 내렸다.
이석규의 흥아학숙 친구 시부카와는 기다잇키와 함께 민간인으로 이 반란에 가담했다가 사형을 당하고 말았다. 이것은 이석규에게는 큰 정신적 타격이었다. 친구를 잃은 그는 또다시 방황의 늪으로 빠져들었다. 좌익 무정부주의자들이나 허무주의자들과도 어울려 술을 퍼마시며 유곽을 주름잡고 싸움질을 하며 돌아다니기만 했다. 조선과 일본, 좌익과 우익을 오락가락하며 그는 기댈 곳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붙들 조국도, 의지할 친척도, 마음을 터놓을 친구도 없었던 그는 1938년 홀연히 서울로 건너갔다.
*총독부에 이용당해
서울에서 그는 특별한 대우와 감시를 받았다고 한다. 「이용구의 아들」이란 간판이 그를 평범하게 살도록 내버려두지 않았다. 일진회와 시천교 등 이용구의 세력은 아직 명맥을 잇고 있었다. 이석규는 총독부 입장에서 보면 이용할 만한 가치가 있었다. 그러나 「아시아주의」의 영향을 받은 이석규는 『한일합병은 잘못 되었다. 아버지가 바란 것은 합방이었다』고 공언하고 다녀 경찰은 그를 경계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석규의 마음이야 어떻든 겉으로 드러난 그의 활동상황은 일제의 전쟁 노력에 협조한 것이었다.
독립운동으로 투옥되었다가 전향한 사람들의 단체인 대동민우회(大東民友會)의 「선도사업」에 협력했고 대동 일진회를 창설, 아버지의 잔당 세력을 규합하려고 했으며, 황군(皇軍)을 기리는 강연도 열심히 했다. 아버지의 꿈이었던 대동국(大東國)의 남아(男兒)란 뜻으로 오히가시 쿠니오(大東國男)라고 이름도 바꿨다. 일진회가 러일전쟁 때 만주와 북한에서 日軍을 위해 자원봉사를 한 일을 「북진(北進)수송대」란 연극으로 만들어 공연하기도 했다.
오히가시 씨는 서울에선 총독부 고관들과도 마음대로 만날 수 있는 유지였다. 미나미 총독에게 시천교의 운영자금 10만 엔을 요구했는데 총독이 거절하자 말다툼을 벌일 정도였고, 그가 잠시 도쿄에 돌아오면 전 총리 하야시 센쥬로 같은 거물들이 환영회를 열어주곤 했다. 오히가시 씨가 똑똑해서가 아니라 이용구란 이름이 그만큼 먹혀들었기 때문이었다.
오히가시 씨의 서울 생활에서 가장 잘 된 일은 아마도 이토 히로꼬(伊藤博子)를 만난 것이리라. 히로코 씨의 할아버지는 구한말(舊韓末)에 조선에 와서 이왕가(李王家)의 건축기사로 일한 사람이었다. 히로코 씨는 일본의 명문(名門) 실천여자 전문학교를 졸업하자마자 남산의 조선신궁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결혼식 날 파아란 하늘을 가르는 B-29의 비행운(飛行雲)이 두 사람의 험난한 앞길을 예언하고 있었다. 히로코 씨는 해방 전 3년간 이화여고에서 일본어 교사로 재직했다.
*박열(朴烈)과 한국쌀 수입 계획
이상이 오히가시 씨가 말한 그의 생애, 그 전반부다. 해방 뒤 일본으로 '귀국한' 오히가시 씨는 맨바닥에서 맨몸으로 출발해야 했다. 평생 돈을 번 적이 한번도 없는 그에게 그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오히가시 씨는 생애의 전반부에선 아버지의 이름으로, 후반부에선 부인의 헌신적 희생으로 생계문제를 해결하였다.
-해방 뒤 한국에서 철수하고서는 다시 한국에 가 본 적이 없습니까?
『있습니다. 1948년5월 밀항했습니다. 한국에서 다이아찐이란 정제약을 구해서 일본에 가져오면 큰 이문이 남았습니다. 일본에는 결핵 환자가 많았거든요. 약은 모자라고. 이걸 구하려고 갔는데 서울의 어머니 집에서 두 달쯤 머물렀습니다. 제가 일본으로 쫓겨간 이후 어머니는 매일 한강철교를 바라보며 제가 돌아오는 것을 기다리셨다고 해요. 어머니는 일제시대에도 이웃에 인심을 잃지 않은 덕분에 해방 뒤에도 핍박받지 안고 그럭저럭 지내고 있었습니다. 일본말밖에 모르는 저도 이웃이 잘 감싸주었죠. 일진회 출신 사람들도 만났는데 돈을 좀 얻었지요. 두 달만에 밀항선으로 돌아왔습니다. 그 이후로는 한국에 간 적이 없군요.』
-해방 뒤에도 우익이나 이른바 한국의 친일파들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해 왔는데….
『패전 뒤 일본에서는 치안 공백 상태가 한동안 계속되었습니다. 이때 제3국인이라 불리는 한국인, 중국인들이 폭력단을 만들었고 여기에 대항하여 우익과 야쿠자들이 조직을 만들었습니다. 하마구치 수상 저격범 사고에와 같은 거물들과 저는 옛날부터 친구였습니다. 이들과 함께 한국인과 일본인 사이의 패싸움을 말리느라고 진땀을 뺐습니다. 이 무렵 만난 것이 박렬(朴烈)이었습니다.』
-「대역(大逆)사건」의 朴烈 말입니까?
『패전과 함께 출옥한 朴烈은 아마도 당시엔 일본에서 가장 유명한 한국인이었을 겁니다. 옥중의 박렬을 도와준 사람 가운데 기무라 젠코란 저의 친구가 있었습니다. 저는 기무라와 박렬의 연락책으로 박렬의 활동을 뒤에서 지원했습니다. 이때 우리는 한국 쌀을 수입하려는 계획을 추진하고 있었습니다. 일본에서는 쌀이 모자랐습니다.
수입만 하면 떼돈을 벌 수 있었어요. 문제는 한국 정부를 설득하는 일인데, 박렬과 기무라를 한국으로 보내기로 했어요. 그때 박렬은 민단단장 자리에서 물러나 있었는데 이승만 대통령과 사이가 좋았어요. 李 대통령이 고장난 시계를 朴烈에게 보내 고쳐달라고 부탁을 할 정도였습니다. 음악가이기도 한 기무라는 무용가 최승희를 발굴한 사람이었습니다.
박렬과 기무라는 밀항선을 탈수밖에 없었습니다. 주일 한국대표부가 비자를 내주지 않았어요. 1차 시도에선 밀항선이 일본 영해에서 붙잡히는 바람에 실패했어요. 두 사람은 곧 석방됐는데 두 번째 시도에서 성공했어요. 두 사람은 한국에서 환영을 받은 모양인데 朴烈이 진해 해군 부대에서 연설하는 사진을 기무라가 보내 주었어요. 얼마 뒤 두 사람은 서울에서 한국 관리들을 설득, 쌀 수출 허가를 받았다는 기쁜 소식을 전해 왔습니다.
바로 그 며칠 뒤 6·25가 터졌습니다. 두 사람과는 소식이 끊겼습니다. 뒤에 안 일이지만 두 사람은 공산군에게 납치되어 북쪽으로 끌려갔습니다. 박렬은 평양방송에 나와 對南방송을 하기도 했지요. 1974년1월19일에 박렬이 73세로 평양에서 사망했다는 기사를 읽었습니다만. 6·25로 어머니와 형도 행방불명이 되어 여태까지 생사를 모릅니다』
*친일파 김대우의 아리랑
-김대우 씨와도 일본에서 만났지요?
『김대우는 해방 때 경북지사였습니다. 총독부에서 가장 촉망받던 한국인 관리였습니다. 반민특위(反民特委)에 걸려 재판 받고 징역도 살았습니다만 개인적으로 저는 그렇게 멋진 인물을 본 적이 없습니다. 생김새나, 법정에서의 당당한 태도나, 인품에서 저는 그에게 반한 사람입니다. 김대우는 감옥에서 나와 일본에 온 적이 있습니다. 나에게 연락이 왔어요. 만나고 싶다고. 특고(特高)경찰 책임자였던 야기 노부오, 나, 김대우, 이렇게 세 명이 모여 회포를 푼 적이 있습니다. 김대우는 곧 맥아더 사령부의 자문역으로 취직하였습니다.
6·25 때 유엔군이 38선 북쪽으로 진격했을 땐 평양에까지 갔다 온 것으로 압니다. 김대우는 나와 자주 만나고는 싶었지만 친일파끼리의 만남이라고 욕을 들을까 봐 조심을 했습니다. 가끔 저에게 전화를 걸어 아리랑을 불러 주기도 했습니다. 그는 벌써 전에 죽었고 가족은 이민갔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한일간의 불행한 역사가 망쳐버린 큰그릇이었다고 생각합니다.』
*韓日회담 촉진 운동에 등장
일본 우익 진영에선 이용구와 아들을 소중하게 모시고 있다. 이용구의 기일(忌日)에는 우익단체들이 정중한 제사를 지내 주기도 한다. 우치다 료헤이 등 일본 우익의 전설적 인물들과 같이 활동했던 이용구의 유일한 친아들이 오히가시 씨이므로 그는 우익에겐 문화재적 존재다. 1950년대에 오히가시 씨는 일본 우익의 주요 인물이었다. 자민당과 우익은 한일회담 추진 운동에 오히가시 씨를 참여시켰다. 그는 '일한(日韓)회담 촉진회' 사무국장으로 일했다. 56년 3월 도쿄 신바시에서 오히가시 씨 등이 마련한 회담촉진 강연회가 열렸다.
사진을 보면 사고에(佐鄕屋留雄) 등 우익 거물과 다나까 다츠오(田中龍夫)의원 등 이른바 친한파(親韓派) 인사들이 많이 보인다. 이날 강사로 나왔던 다나카 자민당의원은 조슈 군벌의 대부(代父)로서 수상까지 지냈던 다나카 기이치의 아들이다. 그는 한일친선연맹 회장으로, 또 한국로비스트로 일했다. 당시 평화선 문제로 일본에선 한일회담에 반대하는 여론이 거세었다.
이 여론을 다둑거리는 데 「이용구의 아들」이란 간판은 효과가 있었을 것이다. 한일합방을 위해 나라도, 자신도 버렸던 인물의 후손이 한일회담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니 설득력이 있었을 것이다. 오히가시 씨의 부인은 『또 이용만 당한다』고 남편을 말렸다고 한다. 이용구를 이용했던 우치다의 후예들이 50년대에는 그 아들을 또 이용한 것이 아닐까?
오히가시, 타나카, 사고에, 야기 노부오(조선 총독부 보안과장 출신), 츠카자키(塚崎直義·전 일본변호사회 회장) 등 촉진회 로비는 기시(전 수상)-야쓰기 가즈오(국책연구소 소장)-柳泰夏(주일대표부 공사)로 이어지는 다른 로비에 눌려 빛을 보지 못했다. 2년 전에 죽은 야쓰기는 소화시대 일본정계의 최대 흑막이었다. 특히 기시 수상의 개인사절로 李承晩 대통령을 최초로 방문, 과거를 사죄함으로써 한일회담 재개의 계기를 만든 이후 한일의 막후 파이프라인으로서 1980년대까지도 중요한 역할을 한 사람이다.
오히가시 씨는 한일회담 추진운동의 주도권을 놓고 야쓰기와 말다툼을 한 적도 있다. 야쓰기는 『오히가시 군! 나는 지금 아무도 들어가려고 하지 않았던 뜨거운 목욕탕에 겨우 발목을 집어넣어 놓고 있네. 이럴 때 자네가 나타나 훼방을 놓으면 곤란하네』라고 말했다고 한다. 정계흑막이나 우익에게는 한일회담이나 한국로비가 큼직한 이권 덩어리던 시절이었다.
*「이용구의 생애」까지 이용
오히가시 씨가 한일회담 추진 운동을 하고 있을 때 그는 「이용구의 생애」란 책을 썼다. 1960년 10월에 시사통신사 출판국에서 펴냈다. 166쪽의 문고판이다. 내용은 아버지의 변호다. 이 책은 오히가시 씨가 썼지만 거의 모든 자료는 아내 히로코씨가 발이 닳도록 도서관 등을 돌아다니며 수집한 것이었다. 이 책이 나왔을 때는 4.19 의거 후 장면(張勉) 정권이 출범, 한일회담에 대한 기대가 부풀고 있을 때였다. 이 책은 그런 시대적 상황 덕분에 상당한 반응을 일으켰다.
출판사나 오히가시 씨에게 날라 온 독후감들을 보면 흥미로운 관점들이 엿보인다.
<장면 신 총리가 지일(知日)정책을 추진하려고 하자 양당은 그를 『현대의 이용구』로 공격하고 있다. 혁명의 지사 이용구는 지하에서 애국자 장면 총리의 고통을 보면서 『역사는 전진해도 우리 민족은 변함이 없구나』하고 고소(苦笑)하고 있을 것이다.>
<19세기 말 조선은 내정의 부패에 의한 민중의 허무적 절망에 휩싸여 있었다. 이 중병을 치료하기 위한 기사회생(起死回生) 책으로 이용구는 일한합방의 방책을 세워 모든 박해와 싸우며 이를 관철했다. 그러나 합방은 병합으로 바꿔치기 당했고 이용구의 참뜻은 배신당했다.>
국내 여론과 맞서며 한일회담(또는 친선)을 추진한 한국 정치인은 장면 총리이든 박정희(朴正熙) 대통령이든 일단 「현대의 이용구」로 불리었다. 「현대의 이용구」라고 하면 한국에선 「나라를 팔아먹는 사람」을 뜻하지만 일본에서는 「세론을 거슬러가면서도 한국을 위해 일본과 손잡으려는 용기 있는 지사(志士)」를 의미한다. 따라서 일본인들이 말하는 「현대의 이용구」는 한국인용이 아니라 일본인용이다.
그 말엔 『한국 정치인을 「이용구의 재판」으로 만들겠다』 또는 『만들 자신이 있다』는 뜻이 함축되어 있다. 한일회담에 반대하는 일본인들에게는 『이 회담에서 결과적으로 이용구의 배역을 할 쪽은 일본이 아니라 한국이니 안심하라』는 뜻인 것이다.
이용구를 동정하는 척하면서 그런 이용구가 한국에서 계속 나와 주기를 바라는 것이 일본인의 진짜 이용구觀이다. 「이용구의 생애」는 1962년에 3판이 찍혀 나왔다. 3판의 서문을 쓴 이는 뒤에 수상이 되어 한일국교정상화를 이룩했던 사토 에이사쿠 바로 그 사람이었다. 사토는 1500 권을 사비로 구입, 자민당·사회당 의원들, 재계 인사들에게 홍보용으로 나눠주었다. 서문에서 사토는 『일본을 신뢰하여, 일본에 협력하고, 일본과 손을 잡아 아시아의 평화를 확립하려고 했던 한국인 지사(志士)의 숨은 행적을 통해 일본은 한국에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생각할 때다』고 했다.
1977년에 일본에서는 송병준의 손자에 해당하는(송병준은 수많은 일본여자들과 관계를 가져 자손이 많다) 노다씨(野田眞弘)가 송병준 전기를 썼다. 그 서문에는 이런 대목이 있다. <…우리 부처는 사토 에이사꾸씨의 초청을 받아 식사를 같이 한 적이 있다. 이 자리에서 사토씨는 『내가 어릴 때들은 이야기인데 노다 백작(송병준)은 이토 히로부미, 가츠라, 데라우치 등 조슈번의 원훈들을 멋대로 갖고 논 굉장한 거물 이었다면서요? 그 공적을 한번 공개하는 게 어떻습니까?』라고 얘기했다. 나는 『그렇게 해보지요』라고 약속했던 것이다.>
사토라는 사람은 송병준 같은 구제 불능의(결과나 동기, 그리고 도덕적 면에서도) 인간에게까지도 변호의 기회를 주어 「일본을 신뢰했던 한국인 志士」를 또 한 사람 만들고 싶었던 '인도주의자'인 것 같다.
* 李容九의 이해는 문학의 영역
1960년대 이후 오히가시 씨의 활동은 별 볼 만한 것이 없다. 한일회담과 같은, 그가 등장할 만한 무대로 사라졌다. 우익도 퇴조했다. 우익과 폭력단의 구별이 곤란할 지경이다. 오히가시씨는 말년을 아버지의 복권운동에 바치고 있는 느낌이었다. 그의 남루한 집에는 가끔 이용구를 연구하는 젊은 일본인들이 찾아온다고 했다. 워낙 기구한 생애를 보낸 오히가시 씨인지라 그의 일생을 텔레비전 드라마로 만들겠다는 사람도 찾아온다. 오히가시 씨가 가장 신경을 쓰는 것은 한국 안에서의 이용구 관(觀)이다.
일본에서의 이용구觀은 크게 개선이 되었지만 한국에서는 역적이니 매국노로 통하는 것이 답답하기만 하다. 최근 저서나 기사를 통해 이용구에 대해 객관적인 연구를 한 한상일(韓相一) 교수(「일본제국주의의 한 연구」)나 소설가 이병주(李炳注) 씨에게 그는 특히 감사하고 있었다. 이병주씨는 조선일보에 쓴 「이용구의 아들」이란 기사에서 이렇게 결론 내렸다.
『정치가의 공과(功過)는 결과로 따져야 하는데 이 점에서 이용구에 대한 평가는 앞으로도 변함이 없을 것이다. 인간으로서의 이용구를, 그 행동의 동기로 따진다면 동정할 바가 있으나 그것은 문학의 대상이다.』
오히가시 씨는 그런 정도의 이야기라도 한국에서 나온 것을 퍽 반갑게 여기고 있었다. 오히가시 씨가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이용구에 대한 평가는 이병주 씨가 규정한 한계를 벗어날 수는 없을 것이다. 오히가시 씨는 그의 기복 많은 생애로써 아버지의 비극성을 더욱 깊게 하고 있다. 아버지를 속였던 일제에 부역하고, 아버지를 속였던 우치다의 후예들에 의해 다시 이용되고, 그가 쓴 책마저 일본 정치인의 선전도구가 되고….
오히가시 씨의 생애는, 閔妃 시해 사건 가담자를 아버지로 둔 업보로 하여 평생 한국어를 모르는 한국인으로 살다간 우장춘(禹長春) 박사와 대조가 된다. 우장춘은 일본인을 어머니로 하여 났고 일본에서 살았지만 禹씨 성을 지켰다. 해방 뒤에는 귀국하기 위해 오오무라 수용소 행을 자원했다. 1959년에 죽을 때까지 부산 동래에서 원예기술 원장으로 일하면서 수많은 농학자, 육종학자들을 길러냈다. 그는 어느 고관이 한국어를 모른다고 비난하자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우리 나라에는 말 잘하는 사람이 많으니 나까지 입을 열면 더 시끄럽지 않겠습니까?
우리 나라에 벙어리가 한 사람 늘었다고 생각해 주십시오.』
禹長春은 아버지를 위해 무언(無言)의 대속(代贖)을 했고 오히가시 씨는 유언(有言)의 변명을 했다. 오히가시 씨는 작별인사를 하는 나에게 『한국에 돌아가거든 성환의 아버지 무덤이 지금도 남아 있는지 꼭 알아봐 달라』고 당부했다.
오히가시 씨는 인터뷰 2년 뒤인 1986년에 사망하였다. 44세에 죽은 아버지보다는 33년을 더 살았다.
조갑제(趙甲濟) 조갑제닷컴대표
□천재 기사로 세계 무대를 풍미했던 조훈현
2015-10-13 월간조선
예순을 넘긴 국수는 편안해 보였다. 달변은 아니었지만 답하는 데 막힘이 없었다. 하루에도 몇 번씩 성을 쌓았다가 허물기를 반복한 지 벌써 반세기. (조훈현은 1962년 9세에 입단했다. 아직까지도 깨지지 않은 세계 최연소 기록이다.) 지난 8월 초 기준, 54년간 2,768번의 대국을 벌여 1,938승을 거뒀다. 젊은 나이에 바둑계를 제패한 후 이르다 싶은 나이에 그 자리를 빼앗기고, 다시 되찾아오고 빼앗기고… 전쟁 같은 세월이었다.
이미 한참 전에 끝난 것 같은 조훈현의 시대가 새로운 모습으로 시작된 걸까. 사그라든 바둑붐과 함께 서서히 잊히는 듯했던 조훈현이라는 이름이 다시 세간에 회자되기 시작했다. 서울 평창동 자택에서 만난 조 국수는 “응씨배에서 우승한 이래 지난해 말부터 올해까지 가장 바쁜 시간을 보냈다”고 말했다. 지난 7월에는 조치훈 9단과 대국을 벌이기도 했다. 현대바둑 70주년을 기념하는 이벤트 형식의 대결이었다.
▲지난 7월의 기념 대국이 끝난 뒤 팬들의 질문을 받으며 파안대소하고 있는 조훈현(왼쪽)과 조치훈. /조선일보 DB
시작은 한 편의 웹툰이었다. 윤태호 작가의 만화 <미생>은 매 화마다 조훈현과 녜웨이핑의 응씨배 대국 기보를 실었다. 이후 동명의 드라마가 인기를 끈 후 저절로 ‘조훈현 다시 보기’로 이어진 것. 급기야 젊은 세대가 주로 즐기는 모바일게임의 광고모델로 출연하기까지 했다. 최근엔 <고수의 생각법>이라는 책도 냈다. 바둑판을 들여다보며 느낀 삶의 지혜를 담담히 풀어썼다.
스승 세고에와 내제자 이창호 묘한 오버랩
한국의 바둑 역사와 맥을 같이하는 조훈현의 인생은 조금만 들여다보면 웬만한 영화 시나리오보다 더 극적이다. 거기엔 두 명의 바둑인이 등장한다. 바로 일본의 바둑 명인 세고에 겐사쿠와 한국의 바둑 천재 이창호다. 조 국수는 1963년, 10세의 나이에 홀로 일본 유학길에 올랐다. 그때 이미 세고에 선생의 나이 일흔셋. 내제자로 받아들여 달라는 요청에 선생은 처음엔 사양하다가 ‘바둑 인생 마지막 제자’라며 조훈현을 받아들였다. 10년을 이어오던 사제의 인연은 조훈현의 한국 귀국으로 막을 내렸다. 아무리 애를 써도 제자의 군 입대를 막을 수 없다는 걸 알게 되고 얼마 후 세고에 선생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활짝 웃고 있는 조훈현. /서경리 포토그래퍼
군대를 제대한 후, 조 국수는 한국 바둑계를 평정했다. 세계대회를 차례로 석권하며 전성기를 보내고 있던 그에게 또 하나의 인연이 다가왔다. 이창호였다. 20여 년 전의 조 국수처럼 어린 나이(9 세)에 내제자로 스승의 집에 들어간 이창호는 불과 6년 후, 스승을 꺾고 ‘10대 국수’가 되었다. 그러곤 이창호의 시대였다. 제자의 천재성과 비례해 스승의 전성기가 단축된 셈이다. 삼대에 걸친 인연에 대한 소회를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조 국수는 “나이가 드니 세고에 선생님을 더욱더 이해할 수 있게 됐다”고 말했다.
“내제자는 스승의 집에 들어가 숙식을 함께하며 배우는 제자 지요. 그저 바둑을 배우는 게 아닙니다. 이런 상황에서는 어떻게 말하는지, 어떻게 행동하는지, 언제 자고 어떤 사람을 만나는지, 말하자면 사고 체계 자체를 배우는 것이지요. 어릴 때는 그저 하시는 말씀을 듣기만 했는데, 나이가 드니 ‘아, 그때 그 말이 이런 뜻이었구나’ 문득 생각이 납니다. 세고에 선생님은 정신세계가 남다른 분이었어요. ‘바둑은 중국에서 한국을 거쳐 일본에 들어왔다. 우 칭위안을 길러 중국에 보답했고, 조훈현을 잘 길러 한국에 은혜를 갚겠다’고 말씀하셨지요. 창호에게 졌을 때는, 스스로를 달랬지요. 생각보다 너무 일찍 자리를 내어주게 되었지만, 이왕 자리를 내줄 바엔 제자에게 내어주는 편이 낫다고요.”
<②편에 계속>
<①편에서 계속>
스승 이기는 제자… 아내 위해 제자 안 받아
인터뷰 도중 조 국수의 부인 정미화씨가 다과를 내왔다. 사실, 조 국수와 이창호 사이 의 역사를 정씨만큼 잘 아는 이는 없을 터다. 자신이 밥을 해 먹이는 아이가 어느 날부 터 남편을 번번이 이기는 날들을 어떻게 견딜 수 있었을까. 조 국수도 이창호 이후 제 자를 받지 않는 이유에 대해 “아내 때문”이라고 말했다. 성장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10대를 일본에서 보낸 그에게 일본은 어떤 의미일까.
“세고에 선생님 집에는 일본의 유력한 정재계 인사들도 곧잘 드나들었어요. 아무리 높은 사람이라도 깍듯했지요. 십수 살이었던 어린 저에게도 꼬박꼬박 선생님이라고 하며 ‘한 수 가르쳐달라’고 고개를 숙였습니다. 한국에 왔는데 전혀 다른 세상이더군요. 보자마자 반말로 ‘바둑 한 판 두자’고 하는 통에, 처음엔 적응하기 힘들었어요. 제가 한국어에 능숙하지 않은 탓도 있었습니다. 군대에서 상관이 기합을 주자 ‘야, 왜 때려’라고 말할 정도였으니까요. 다행히 부대 대대장이 바둑을 좋아하는 분이었어요. 군 생활 중에도 기전에 나갈 수 있게 배려를 해주셨지요. 양국의 문화 중 어떤 것이 더 우월하다거나 못 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일본이 섬세한 접근으로 바둑을 도의 경지로 끌어올렸다면 한국은 특유의 활력으로 세계 바둑을 제패했잖아요.”
▲젊은 날의 모습. 바둑 외엔 아무것도 모르는 시절이지만 스무 살 무렵을 생각하는 일은 언제나 즐겁다. /조훈현 기사 제공
묘했다. 세고에 선생과 일본 생활에 관한 얘기를 할 때, 유독 조 국수의 표정이 미세 하게 굳었다. 일부러 “훗날 저 세상에서 세고에 선생을 다시 만나면 뭐라고 하실 것 같 나”고 물어봤다. “만나자마자 혼내시겠지”라는 대답이 헛웃음과 함께 돌아왔다.
“세고에 선생님은 오롯이 바둑의 길만을 걸은 분입니다. 바둑만을 위해 사셨지요. 반 면에 저는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하고 심지어 광고도 찍고 예능 프로그램에도 나갔잖 아요. 저를 보면 왜 그랬느냐고 하시겠지요.”
바둑 외연에 관심… 온라인 게임 참여도
그에게 일본 생활은 정신의 심지를 단단하게 만들어준 축복인 동시에, 이미 그 역할을 다한 과거인 듯했다. 아니, 어쩌면 조 국수는 세고에 선생과 기본적인 기질이 다른 사람일지도 모른다. 바둑판 위 세계로 수렴하지 않고 외부로 확장하려는 것이 조 국수의 성향인 듯하다. 실제로 조 국수는 바둑과 차츰 멀어지고 난 후, ‘바투’ 등 바둑을 응용한 온라인 게임 론칭에 참여하기도 했다. ‘바둑의 원래 정신과 맞지 않는다’는 비판도 있었지만, ‘더 많은 젊은이가 바둑에 흥미를 갖도록 할 수 있다’고 답하면서 말이 다. 그의 말에서 주름살을 찾을 수 없는 이유도 그 때문이지 않을까.
조 국수는 인터뷰 내내 ‘뭐든지 시도해 보라’라는 말을 했다. “낚시든, 등산이든, 골프든 뭐든지 생각만 하지 말고 시도를 해봐야 합니다. 직접 해 봐야 알 수 있거든요. <미생>을 보세요. 장그래도 결국 기원 밖으로 나가 세상과 섞이 려는 시도를 했잖아요. 비록 완생은 못 했지만 기특하다고, 장그래에게 말하고 싶습니다.”◎
하주희 월간조선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