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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3/ 언론인 학자/ 김대중 - 이어령 - 홍콩대 법학과 조윤(趙雲) 학과장

상림은내고향 2021. 12. 19. 10:11

사람들3/ 언론인 학자

■언론인1

□김대중

 

2015.05.30 신문기자 50년… 歷代대통령들이 '치워버리고' 싶어 한 直筆

언론 외길 김대중 本社고문

"아부 안 해도 되고, 마음대로 쓸 수 있어서 신문기자로 산 게 좋았다"

난 財福 없는 '신문사 안 개구리'… 나랑 반대로 하면 돈 번다고들 하더라

 

좋은 글, 좋은 칼럼이란

공감을 불러일으키거나 몰랐던 걸 알게 해줘야

짜깁기 않고 단번에 써야 독자들도 한 호흡에 읽어

 

'쟁이' 본분을 지켰다

권력 압박·유혹 있었지만 다른 직업 생각하지 않아

매일매일 정면 승부 하는 사회부장 때가 재밌었다

 

'배짱'대로 쓴 게 통했다

논객은 소통하는 직업 아냐 자기의 생각을 얘기할 뿐

的確한 단어를 찾아내면 비로소 글이 풀리더라

 

잘 삐지는 싸움닭

예의 안 차리면 싫어해 나는 好不好가 강하다…

류근일이 내게 그러더라 당신같은 사람 받아줄 덴 신문사밖에 없을 거라고

 

김대중(76) 조선일보 고문은 6월 1일로 기자 생활 50년을 맞는다. '신문기자 50년'이란 한국 언론계에서 드문 기록이다. 기자 본인의 능력과 의지도 중요하고 신문사 여건도 받쳐줘야 한다. 김 고문은 1965년부터 25년은 현장에서, 1990년 주필이 된 이후엔 칼럼과 사설로 대한민국의 격동기를 지켜봤다. 한국 언론계에서 50년 기자 기록도 찾기 어렵지만, 반세기 동안 오로지 한 신문에서, 대통령을 겨냥한 정치칼럼으로 권력자들을 긴장하게 한 기록은 전무후무한 것이다.

 

▲지난 22일 서울 종로구 통인동의 한 카페에서 김대중(76) 조선일보 고문이 잠시 말을 멈추고 손으로 턱을 괸 채 허공을 응시하고 있다. 김 고문은 신문기자로 산 50년 세월을 되돌아보다가 “나는 노병(老兵)이다. ‘쟁이’로서의 본분을 지키려 노력하다 보니 여기까지 왔다”고 말했다. /이태경 기자

 

76세 현역인 김 고문은 한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언론인 중 한 명으로, 또 당대 최고의 논객으로 주목받았다. 그의 힘은 논리와 비판을 장착한 글의 힘에서 나왔다. 그는 마흔 살 때부터 지금까지 칼럼니스트로서 거의 모든 정권에 눈엣가시 같은 존재, 때로는 어딘가 딴 곳으로 '치워버리고 싶은' 기자였다. 그래서 망명 가듯 외국에 나가 있기도 하고, 세무조사와 계좌 추적을 받기도 했다.

 

이 인터뷰는 당초 신문 게재를 위해서가 아니라 '50년 기자'의 경험을 기록으로 남긴다는 차원에서 추진됐다. 김 고문도 "인간 김대중보다는 언론인 김대중을 조명해달라"고 했다. 지난 18일과 22일 그는 2회에 걸쳐 역대 대통령들과의 관계, 글 쓰는 고민을 풀어놨다. 6시간 녹음을 풀어보니 흥미로웠다. 김 고문은 반대했으나, 그의 의사에 반해 이 기사를 싣기로 했다.

 

―기자로 일한 지 50년 됐다. 26세에 기자가 돼 76세에도 현역이다. 비결이 뭔가.

"기자를 50년 동안 해보겠다고 목표를 세워 추구한 게 아니라 그냥 하다 보니 여기까지 온 거다. 그저 노병(老兵)일 뿐이다. 그리고 '쟁이'로서의 본분을 지키려고 노력했을 뿐이다."

 

―'쟁이'로서의 본분이라니.

"우리는 우리를 하루살이에 비유하며 어제의 신문을 구문(舊聞)이라 부른다. 우리에게는 어제가 없다. 어제에 매달리면 회한만 쌓인다. 우리는 내일도 개의치 않는다. 내일에 집착하면 자칫 몽상가가 된다. 우리는 오늘을 살되 치열하게 살면서 '있는 것'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없는 것'을 가차없이 들춰낸다. 생명력은 짧아도 생동감 넘치게 살고 싶은 것이다. 이게 내가 신문기자로 살아온 방식이다."

 

―50년을 돌이켜보면 기자가 천직(天職)이었나. "하늘 천(天)자 들어가는 말은 겁난다. 하지만 기자 하면서 한 번도 다른 직업에 대해 생각해본 적이 없는 건 맞다."

 

―칼럼니스트로서 평생 흥행할 수 있는 비결은 뭔가.

"내 배짱대로 쓰는 거다."

 

―칼럼니스트로서도 기자를 할 때와 마찬가지로 취재를 하나.

"나는 지금 사람들의 관심이 쏠리는 일이 무엇인가를 캐치하러 다닌다. 사람들 만나 술 마시다가 좋은 쓸 거리가 떠오르면 얼른 밖에 나가 메모한다. 칼럼은 사람들의 공감을 불러일으키든가, 아니면 몰랐던 것을 알게 해주는 것, 둘 중 하나는 해야 한다. 둘 다 하면 더 좋고."

 

대통령 비판에 모든 정열을 바친다?

―김대중 칼럼은 대부분 대통령을 겨냥한다. 칼럼니스트 김대중은 좌든 우든 상관하지 않고 권력자를 비판하는 일에 모든 힘을 쏟는 것 같다.

"맞는 얘기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언론은 권력과의 대칭관계에서 사물을 볼 수밖에 없다. 우리가 사사건건 정부가 하는 일에 찬성하려면 뭐하러 언론을 하나. 싸울 때는 누구랑 싸우는 게 제일 좋은가. 상대방의 보스와 싸워 넘어뜨리면 나머지와 안 싸워도 된다. 우리는 보스와 싸우는 게 본업이다. 그리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 게임을 좋아하지 않나."

 

―시사저널 조사에서 1994년부터 2004년까지 영향력 있는 언론인 1위(1995년 제외)였다. 그 이후에도 5위 밖으로 나간 일이 없다.

"'라이팅 저널리즘(writing journalism)' 면에서 우리나라는 인적 고갈 상태다. 앞으로도 글 쓰는 기자가 영향력 1위에 오르는 건 쉽지 않을 것이다. 동영상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한번 방송에 뺏긴 자리를 라이팅 저널리즘이 되찾아오기는 어려울 테니까. 내가 신문이 우세한 시기에 글을 썼다는 게 행운이었을 것이다."

 

―당대 최고의 칼럼니스트라 불리는데, 요즘도 컴퓨터를 사용하지 않고 펜으로 글을 쓰나.

"컴퓨터로 몇 번 써봤는데 글을 고칠 때 고치는 맛이 없더라. 줄 쫙 긋고 싹 집어넣는 그 맛이 안 난다. 종이에 쓰면 지워도 원래 쓴 글자가 남아 있으니까 '이 표현이 더 나을 것 같다' 그런 생각을 할 수 있어서 좋다."

 

―사장이 대통령과 만날 약속이 있는 날 아침 신문에 대통령 비판하는 칼럼이나 사설을 내보내서 사장 입장을 곤란하게 만들곤 했다던데.

"아니다. 그건 그분들의 면피용이다. 사장에게 그런 일정이 있는지 몰랐다. 결과적으로 그렇게 된 것일 뿐이다. 나는 거꾸로 사장에게 '일정을 미리 알려 주셔야죠'라고 했다. 비밀로 해놓으니 그걸 어떻게 알겠나. 내가 일부러 그러지는 않았다. 또 솔직히 비판적인 글을 배경으로 하고 만나야 힘이 생기는 것 아닌가."(하지만 당시 동료들의 증언은 다르다.)

 

칼럼 쓰기는 일필휘지(一筆揮之)로

―김대중 칼럼은 다른 사람 말이나 책을 거의 인용하지 않는다.

"200자 원고지로 겨우 12장 쓰는데, 그중 인용에 두세 장을 쓰는 건 아깝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언론에 관한 어록은 '언론은 역사의 초고(Journalism is the first draft of history)'라는 것이다. 그런 정신으로 써왔다."

 

▲김대중 고문은 요즘도 펜과 원고지를 쓴다. 그는 “컴퓨터로 쓰면 글을 고치는 맛이 안 난다”고 했다. 원고지 12매 분량 칼럼을 쓰는 데 1시간 반쯤 걸린다. 일단 쓰기 시작하면 중간에 쉬지 않고 써서 완성하는 것이 독자들이 읽을 때 흐름이 끊기지 않는 글을 쓰는 비결이다. /이태경 기자

 

―칼럼 쓸 때 지키는 글 쓰기의 원칙이 있나.

"글 쓰기 시작해서 끝까지 단번에 쓰려고 노력한다. 그래야 읽는 사람도 한 호흡으로 읽을 수 있다. 경우에 따라 한 문단 들어내고 다른 것을 넣을 수도 있지만 되도록이면 그렇게 안 한다. 글을 짜깁기하면 읽는 사람도 턱턱 걸린다. 내가 글 쓰다가 중간에 화장실 갔다 오면 독자들도 읽다가 중간에 서게 된다. 미리 구성하고 준비해서 책상에 앉으면 되도록 쉼 없이 쓴다."

 

―기자가 아니라면 작가가 되고 싶었다고 했다. 요즘 좋아하는 작가는 누구인가.

"김훈 작품을 몇 읽었다. 이문열씨 것도 좋다. 어휘를 찾아내고 연구하는 노력을 하더라. 글을 쓴다는 건 문장력과 어휘의 문제다. 글을 잘 쓴다는 건 문장력인 것처럼 얘기하지만 사실은 그 상황에 딱 맞는 어휘, 한 단어를 찾는 것이다. 나는 어떤 단어를, 어휘를 찾으려고 노력한다. 문장이 맛깔지다, 멋있다는 건 신문기자에겐 복이다. 문장력은 타고나야 하는 측면이 있다. 하지만 어휘를 찾아내는 건 책을 많이 읽고 남의 글을 많이 보면 발전시킬 수 있다. 단어 하나를 찾아내서 '아, 이거다' 싶으면서 글이 풀린다."

 

―조선닷컴에 실리는 칼럼 중 유독 김대중 칼럼에만 댓글을 달 수 없다. 왜 그런가.

"내 글을 논리적으로 비평하고 자기 얘기의 줄거리를 세워서 비판하는 건 좋다. 내가 충격받은 건 '왜 그 따위로 글을 쓰느냐' '미 중앙정보국(CIA)에서 돈 얼마 받아먹었냐'는 식의 댓글이 달리는 거다. 그런 댓글이라면 차라리 댓글 못 쓰게 한다고 욕먹는 게 내 정신건강을 위해 좋다."

 

50년 동안 사표 세 번 썼다

―법대에 갔는데 왜 기자가 됐나.

"아버지가 송사에 휘말려서 법대 가라고 하셨다. 그런데 대학 다닐 때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고시의 압박에서 해방됐다. 나는 기자보다는 글 쓰는 일에 대해 생각했다. 글을 쓰는 게 직업적으로 가능한 게 신문기자라고 생각했다."

 

―사표를 내본 적은 없나.

"세 번 내봤는데 기자가 하기 싫어서는 아니었다. 첫 번째는 1970년인가? 조선일보 청와대 출입기자를 청와대가 거부한다고 해서 젊은 정치부 기자들이 사표를 냈다. 두 번째는 전두환 시절 언론 통폐합 때 기자들 전원 다 사표 내라고 해서 냈다(당시 약 1500명의 언론인이 강제 해직됐다). 세 번째는 2001년 김대중 대통령 시절 방상훈 사장이 감옥 들어가기 직전이었다. 김정일 답방을 지지해달라는 DJ의 요청을 거부하자 압박이 왔고 그게 세무조사로 이어졌다. 검찰이 나보고 출두하라고 했다. 죄목이 뭔지 아나. 필화 사건이 아니라 비자금 조성 혐의라고 했다. 순전히 개인 형편 때문에 회사 돈을 가불해서 쓴 것을 마치 무슨 불법 비자금을 조성한 것으로 검찰이 몰아가려 한 것이다. 나는 나를 구인하더라도 내가 조선일보에 사표를 낸 뒤에 민간인 김대중으로 가면 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사표를 냈다."

 

―주필로서 검찰에 가는 게 권력의 언론 탄압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는 면에서 더 의미가 있는 것 아닌가. “당시 기자들 생각도 그랬다. 만일 내 글이 문제가 된 거라면 사표를 낼 일은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재정비리에 관여된 것처럼 분위기를 몰아갔고 그래서 정말 창피해진 거다. 그때 나는 사표를 내고 ‘조선일보를 떠나며’란 칼럼을 써놓고서 회사에 나가지 않았다. 하지만 사표가 수리되지 않았기 때문에 칼럼이 신문에 실리지는 않았다.”

 

YS, 아들 청와대 데리고 가면 안 된다는 칼럼 썼더니…

―김영삼 대통령과도 칼럼 때문에 불화가 있지 않았나.

“YS가 취임하기 직전이었다. 시내 호텔에서 방우영 회장을 초청했는데 내가 수행했다. YS가 아들 김현철을 청와대에 데리고 들어갈 것이라고 했다. 저녁 먹고 와서 취재를 해보니 김현철이 여의도에 사무실을 냈는데 거기에 이미 사람들이 몰려들어 미어터진다고 했다. 김현철이 청와대에 들어가면 어떻게 될까. 사람들이 부나비처럼 달려드는 일이 벌어질 것이다. 그래서 김현철을 멀리 있게 해야 한다는 칼럼(1993년 2월 21일자 ‘대통령의 친인척’)을 썼다.”

 

―칼럼이 나간 후 청와대에서 연락이 왔나.

“초저녁에 나오는 가판 신문에서 다음 날 아침 신문에 나갈 칼럼을 미리 보고 청와대에서 난리가 났다. 나는 술 먹는다며 도망가 버렸다. 신문사 입사 동기인 최청림이 야간국장인 날이었다. 그날 밤 YS는 아들을 청와대에 데리고 가지 않을 것이라고 말을 바꿨다. 내가 쓴 팩트를 틀린 걸로 만들어버린 거다. 청와대에선 그 칼럼 내용이 사실과 다르니 빼라고 했다. 그래서 중요한 대목을 들어냈다. 최청림이 악역을 맡았다. 그때 버텨줬어야 하는데!”

 

▲김대중 고문이 18일 조선일보 사옥에 있는 그의 사무실에서 인터뷰 질문에 답하고 있다. 그는 ‘칼럼니스트 평생 흥행’의 비결을 묻는 질문에 “내 배짱대로 쓰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태경 기자

 

―그 일 때문에 YS와 사이가 나빠진 건가.

“그다음부터 청와대와 조선일보가 사이가 나빠졌다. 그 전까지는 YS가 군부에서 민간정부로 넘어오는 바통을 넘겨받는 과정에서 꼭 필요한 인물이라고 생각했다. YS는 언론을 장악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했다. 그래서 언론인들의 뒷조사를 한 것이 뒤에 드러났다. 그는 스스로 조사해보니 누구는 집이 몇 채라는 식으로 말을 했다. 퇴임 후 김대중 대통령이 조선일보를 세무조사할 때 YS를 만났는데 DJ를 비판했다. 그래서 ‘대통령께서 현직에 계실 때도 뒷조사를 하지 않았느냐’라고 했더니 YS가 ‘나는 발표는 안 했잖아’라고 하더라. YS는 자기만 알고 있고 뒤로 압력을 넣었지만 DJ는 정식으로 문제 삼고 국세청 조사하고 검찰이 수사하게 만들어서 방상훈 사장을 감옥에 가게 했다. 알고 보면 권력자들은 다 똑같다.”

 

입각 제의 받기도

―대통령들로부터 입각 제의를 받은 일도 있지 않나.

“한번은 DJ가 후보 때 만나고 나오는데 박지원씨가 ‘뭐라고 말씀 안 하시던가요’라고 물었다. 아무런 얘기도 없었다고 하자 무슨 제의를 하려고 했는데 생각을 바꾼 것 같다고 그러더라. YS는 대통령 시절 청와대에서 같이 밥 먹을 때 ‘들어와서 도와달라’고 한 일이 있다.”

 

―어떻게 했나.

“내가 그때 믿었던 건 권력자들이 글 쓰는 기자를 데려가는 이유 중 하나는 자기들에게 비판적인 기사를 못 쓰게 하기 위해서라는 것이다. 그 기자가 절실하게 필요하거나 그의 머리와 지혜를 활용하겠다는 게 아니다. 언론인의 능력을 탐하는 게 아니라 그에게 족쇄를 채우려는 것이라고 판단했다. 물론 다른 사람들 경우는 다를 수도 있지만.”

 

―전두환 대통령에게도 ‘찍히지’ 않았나.

“전두환은 우리 경영진에게 신문에서 김대중이라는 이름 석 자만 봐도 기분 나쁘다고 했다고 한다. 전두환은 차라리 솔직했다. ‘저 이름 꼴 보기 싫으니까 치우라’는 식이었다.”

 

―1986년 영국 옥스퍼드대에 간 건 일종의 망명이었나.

“전두환 쪽에서 ‘김대중을 좀 딴 데로 보내달라’고 요청했다고 한다. 그래서 ‘논설위원 겸 현대사연구소장’으로 발령이 나고 글을 못 쓰게 됐다. 그런데 신문엔 ‘현대사연구소장 겸 논설위원’이라고 났다. 청와대에 대해 ‘논설위원은 그냥 붙여준 거다’라는 메시지를 보낸 거다. 글을 못 쓰게 됐으니 엎어진 김에 쉬어가자고 영국에 갔다.”

 

―권력자들이 미워하고 다른 데 보내라고 하면 기분이 어떤가.

“일상으로 느껴졌다. 어차피 나는 대통령이나 정부가 잘한다는 글을 쓰고 싶지 않았다. 공직을 맡은 사람이 잘하는 것은 기본이다. 못하면 욕먹을 일이다. 우리는 그런 걸 지적하는 거다. 그렇지만 자기 거 비판하는데 기분 좋다는 사람이 어디 있겠나.”

 

김대중과 햇볕정책

―김대중 전 대통령과 결정적으로 사이 나빠진 계기는?

“대북문제, 햇볕정책 때문이었다.”

 

―그것도 계기가 된 칼럼이 있었나?

“DJ의 햇볕정책은 전반적으로 돈 퍼주기였고 우리는 받는 게 없었다. 나는 그 논리에 찬성할 수 없었다. DJ와 사이가 더 나빠진 건 김정일 답방과 관련된 것이다. 청와대에 불려가서 단둘이 밥을 먹었는데, DJ가 조선일보가 김정일의 답방을 찬성하는 글을 써달라고 했다.”

 

―대통령이 직접 부탁하는 걸 거절하긴 어려웠을 텐데.

“‘대한민국은 언론 자유가 있는 나라다. 어떤 신문은 찬성하고 어떤 신문은 반대하고 여러 가지 견해가 있을 수 있다. 대통령이 심사숙고해서 결정해 끌고 나가면 되지 왜 언론을 다 한줄로 세우려고 하느냐’고 했다. 김 대통령은 ‘대한민국 보수지 조선일보가 찬성을 해주는 게 중요하다’고 했다. 조선일보가 찬성해야 대한민국 전체가 찬성한다는 뜻으로 여겼다.”

 

―그래서 김정일 답방을 지지하는 글을 썼나.

“그 자리에서 나는 ‘국내의 여러 이론과 반대에 불구하고 김정일 답방이 성사된다는 의지를 가지고 하시면 됩니다’라고 했다. 한참 싸웠다. 대통령과 싸우니 사실 좀 거북했다. 나온 후 부탁받은 글은 안썼다. 다만 김정일이 오더라도 어째서 6·25를 일으키고 1·21 사태는 왜 일어났고, 왜 칼(KAL)기를 폭파했는지 먼저 밝혀야 한다고 썼다. 청와대에선 그건 김정일이 오지 말란 얘기 아니냐고 했다. 그걸 보고 DJ가 화가 난 모양이다.”

 

▲김대중 고문이 조선일보 주필 시절 논설위원실 ‘원탁회의’를 주재하는 모습. 오른쪽부터 류근일 논설주간, 김대중 당시 주필, 고학용·김형기·김기천 논설위원. /조선일보DB

 

―DJ는 어떤 대통령이었나.

“오래 전 내가 초년병 시절에 만났을 때부터 그의 꿈은 남북이 대화하거나 통일할 때 자신이 남쪽을 대표하는 인물이 되고 싶다는 것이었다. 그는 통일을 이룩한 대통령이 되고 싶어 했다. 그게 그가 대통령이 되려는 목표였다.”

 

―이름도 같고, 원래 사이도 나쁜 편은 아니었지 않나.

“그렇다. YS가 대통령이 되자 DJ는 정계 은퇴를 선언하고 영국에 갔다. YS 정부가 덜커덩거리기 시작하니까 DJ는 돌아와서 정계 복귀를 선언했다. 그래서 조선일보가 사설에 ‘정계 은퇴한다고 나가더니 잉크가 마르기도 전에 들어와서 정계 복귀하느냐. 이런 식으로 정치인들의 선언이나 결단은 다 휴지조각이냐’고 썼다. DJ가 만나자고 하더라. DJ는 ‘김 주필이 그렇게 순진한 줄 몰랐다’고 했다. 자신이 정계 은퇴를 선언한 것은 그대로 남아 있으면 YS가 선거자금을 캐는 등 못 견디게 만들 것이 뻔했기 때문이었다는 거다. 때론 이긴 자가 진 자에게 복수하는 게 우리나라다. YS가 뒤에 한 얘기가 있다. ‘DJ가 나간다는데 뭘 뒤지겠어’라고 했었다.”

 

―노무현 대통령과는 왜 사이가 나빠졌나.

“노 대통령과는 만난 적이 없다. 일면식도 없다. 조선일보 사람을 아예 만나지 말라고 엄명했는데 나를 만났겠나.”

 

보수를 대변한다는 말이 싫다

―칼럼니스트 김대중은 보수의 대변인이라는 평가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나.

“나는 사고방식이 보수적이고 이 시대에 대한민국이 살아남으려면 당분간은 우파적 관점이 필요하다고 보는 입장이다. 하지만 내가 보수를 대변한다는 말은 싫다. 나는 우리나라가 좀 발전하면 양 날개로 갈 수밖에 없다고 본다. 인간의 자유와 기업의 활동을 전제로 한 보수 우익 정권은 국고에 돈을 저장할 수 있다. 그러다 보면 불우하고 가난한 사람들이 쪼들리게 되고 빈부 격차가 생기게 마련이다. 그러면 진보 좌파 정당이 들어와 곳간의 쌀을 풀어야 한다. 이번엔 곳간이 빈다. 그럼 또 보수를 불러다가 곳간에 쌀을 쌓기 시작하는 거다. 한 정권이 둘 다는 못한다. 이게 내가 좌우가 순환한다고 보는 논리이다. 나는 이 시대 대한민국이 이 터널을 빠져나가려면 어느 시점 우파적 관점으로 나라를 관리할 수밖에 없다고 본다. 나를 설명하는 방법이다. 하지만 우리는 반드시 건방지지 않은, 싸가지 없지 않은, 중후한, 심도 있는 좌파와 공존해야 한다. 보수 우파도 반드시 그래야 하지만, 그래야 그들과 같이 교대로 대한민국을 발전시킬 수 있다.”

 

―박정희 대통령에 대해 어떻게 평가하나.

“박정희 시대에 기자를 시작했지만 만난 적은 없다. 나는 그때 사회·외신부 기자였다. 정치부에 가서도 야당 편이었다. 야당을 짓밟은 공화당 사람들과 그 우두머리들을 미워했다. 지금에 와선 한 나라를 이끌면서 모든 사람이 좋아하는 길을 갈 수는 없었다는 것을 이해는 한다.”

 

―전두환 대통령과는 만난 적 있나.

“태풍 때 고생한 신문기자와 소방관들 40~50명 초대하는 데 가서 밥 먹으며 멀리서 한번 만났다. 전두환은 자기가 부족하다고 믿었던지 머리 좋은 사람을 썼다. 1983년 아웅산 테러사건 때 죽은 사람들이 다 미국에서 좋은 대학 나온 사람들이었다. 그는 그런 의미에서 솔직한 사람이었다.”

 

―노태우 대통령은 어떤가.

“많은 사람들이 노태우를 과소평가하지만, 북방정책을 성공시키고 중국·러시아와 국교정상화를 했고, 대한민국의 외교적 지평을 넓힌 사람이다. 그리고 군부통치를 민간에게 넘기는 과도 역할을 자임했다. 그것만은 평가해야 된다.”

 

―김영삼 대통령은 어땠나. “처음엔 좋아했는데 나중엔 실망스러운 대통령이었다. 6·25전쟁을 겪으면서 어려운 시절을 보냈다. 그래서 자신은 공부에 정진할 시간이 없었다고 했다. 그는 감(感)으로 정치를 한 사람이다. 그래도 금융실명제 했고 하나회 척결도 했다. 잘한 것인지는 몰라도.”

 

“맞다. 나 잘 삐진다”

―김대중 칼럼은 박력있다는 평을 듣는다. 글이 하나의 주제를 향해 돌격해가는 스타일이라 파괴력이 있다고들 한다. 그런데 주변에서 함께 일했던 사람들은 인간 김대중은 섬세한 성격이고 잘 삐진다고 하더라.

“박력있게 삐지는 것인가. 나는 호불호가 강하다. 누군가 나에 대해 험악한 얘길 했다면 만났을 때 외면하는 스타일이다. 예의를 안 차리고 말을 함부로 하고 어디 가서 확인되지도 않는 이야기를 하는 사람이 제일 싫다.”

 

―오랜 시간 논설위원실에서 함께 일했던 류근일 전 조선일보 주필은 곁에서 본 김대중이 ‘몽니로 뭉친 사람’이고, 청개구리 심보를 타고 났으며, 심통 그 자체라고 했다. 자기 이외의 다른 스타를 견디지 못하는 ‘샘쟁이’이고, 자기 혼자 글만 쓰면 되는 논설위원실이란 직종이 없었으면 큰 일 날 뻔한 사람이라고 했다. 또 사사건건 시비를 거는 ‘싸움닭’이라고 하더라.

“싸움돼지라고 하는 것보단 싸움닭이 낫지. 하하… 류근일은 늘 내게 ‘세상에 너 같은 사람 받아줄 데는 신문사밖에 없고 신문사 중에서도 조선일보밖에 없다’고 했다.”

 

“돈 벌려거든 김 주필 반대로만 해라”

―당대 언론계에서 영향력 있는 기자로 꼽히지만, 재복은 없다는데.

“내가 신문기자 하길 참 잘했다고 생각하는 이유가 세 가지다. 첫째 신문사는 빽이니 뇌물이니 이런 거 없이 성실하게 실력껏 노력하면 되는 직장이라는 거다. 둘째는 신문사에선 아부 안 하고 자유롭게 말할 수 있고 자기 마음대로 글을 쓸 수 있다. 셋째는 돈과 연관되지 않고 비교적 깨끗하게 살 수 있게 해준다는 점이다.”

 

―셈에 밝다던데 아닌가 보다.

“한때 연말 상여금을 계열사 주식으로 받았다가 거의 다 날려먹었지. 방상훈 사장이 한 유명한 얘기가 있다. 돈을 벌려면 김대중이 하는 정반대로 하면 된다고.”

 

―한 끼도 그냥 먹지 않고 늘 맛있는 걸 찾아다닐 정도로 먹는 걸 좋아한다는데.

“마시는 걸 더 좋아하는데(웃음)? 사람들이 나보고 싸고 맛있는 걸 찾아다닌다고 하지. 아니다. 나는 맛있는 걸 찾는 거다. 싼 것은 그냥 따라오는 거고. 비쌀 수도 있다. 하지만 맛있는 게 위주다. 살아보니 맛있는 게 대개 싸더라. 비싼 건 모양만 나지 맛과는 별로 관계가 없더라.”

 

나는 ‘신문사 안 개구리’

―기자 하면서 꼭 하고 싶었는데 못한 일이 있나.

“시경 캡(경찰 기자 팀장)과 법조 출입기자 못해본 것이 아쉽다. 법조 출입 못한 건 경찰 기자일 때 객기로 파출소에서 행패 부리고 붙들려가는 바람에 그렇게 된 거다.”

 

―50년 기자 생활 돌이켜보면 후회되는 건 없나.

“다른 직업을 한 번도 못가져본 게 아쉽다. 세상에 태어나서 신문기자 외에는 한 게 없다. 내 친구들은 관리를 하기도 하고, 판·검사 하다가 변호사도 하는데 나는 언필칭 세상 일을 기록하는 직업을 가졌다면서 신문사 외에 다른 직장에서 일해본 적이 없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신문사 안 개구리’다.”

 

―신문사에서 맡은 일 중 뭐가 제일 재미있었나.

“사회부장이 재밌었지. 사회부엔 그날그날 승부가 있다. 그것도 정면 승부다. 방우영 회장 책 제목이 ‘나는 아침이 두려웠다’이다. 아침에 낙종했을까봐 겁나서.”

 

―앞으로 책을 쓸 계획은 없나.

“기자는 처음부터 끝까지 관철될 수 있는 논점으로 기자생활을 하는 건 아니다. 일단 쓰면 다 구문(舊聞)이다. 내가 초년병 총리실 기자일 때 그때 총리가 뭐라고 말했다고 쓴 걸 책으로 내면 누가 읽겠나. 다 자기 만족이지. 기자가 쓰는 건 ‘오늘’이다. 지금 생선을 회쳐 먹어야지, 냉장고에 넣었다가 꺼내면 맛이 없다.”

조선일보 강인선 기자

 

2015-06-02 

□[내가 본 김대중]

(1) 술과 사람 좋아한 평생 친구, 그의 칼럼은 '대한민국 지킴이'였다

김대중은 내가 존경하는 친구다. 그런데 금년이 그가 조선일보사에 입사하여 기자생활을 시작한지 50년이 되는 해다. 한 직장에서 50년을 보낸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신문사에서 이런저런 기념행사를 마련하는 모양이다. 며칠 전에 문화부의 이한수 기자가 전화를 했다. 이만 저만하니 김대중에 관한 글을 하나 써주면 좋겠다는 이야기였다. 내가 작년(2014년) 여름에 펴낸 수필집 '술의 노래'(도서출판 선)에 김대중에 관한 글이 있어서 나에게 청탁을 한 것인지 모른다. 어쨌거나 김대중과 나의 관계를 생각하면 거절하기가 어려웠다.

 

김대중이 한 신문사에서 반세기동안 기자 생활을 한 것은 경이롭다. 우리나라 신문 역사에서는 처음이고, 아마 마지막일 것이다. 신문사고 어디고 오너가 아닌 이상 한 직장에서 50년을 보낸다는 것은 정년 연령이 점점 낮아지는 요즘의 추세를 염두에 두지 않더라도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다. 김대중은 1965년 수습 8기로 조선일보사에 입사했다. 편집부, 외신부, 사회부를 거쳐서 1967년에 정치부로 갔다. 제일 적성에 맞았다고 했다. 물론 정치부로 가기 전에도 민완기자였다. 취재 잘하고 글도 잘 썼다. 그러나 다른 문제보다 정치 현실을 보는 안목이 날카로워 정치부로 가게된 것이 아닌가 한다.

 

50년 기자생활… 신문 역사에 처음 있는 일

▲김대중 조선일보 고문

 

그러다가 그는 주미특파원으로 발탁되어 1972년에 워싱턴으로 갔다. 유신이 막을 내린 1979년까지 미국에 있었다. 독재를 안방에서 목도(目睹)하지 않고 지낼 수 있었으니 마음이 편하다고 할 수도 있었겠으나, 외국에서 한국을 보면 더 잘 보이기 때문에 실은 마음이 편하지 않은 7년의 기간을 미국서 보낸 것이다. 7년이란 긴 세월동안 민주주의의 본향에서 그것이 어떻게 운영되는가를 배웠다. 민주주의에 대한 그의 확고한 신념은 이때 성숙된 것이다. 누가 무어라고 해도 그는 철두철미 자유민주주의자다. 민주주의와 관련해 한마디 첨언하고 싶은 것이 있다. 그것은 1986년 김대중이 전두환 정권과의 마찰로 자의반타의반 다시 한국을 떠나 1년 남짓 영국으로 피신한 일이다. 영국은 근대민주주의의 발상지다. 여기서 민주주의에 대한 그의 신념이 투철하게 재충전되었다고 나는 확신한다. 민주주의에 대한 그의 신념과 자유주의적인 사고는 군사독재와 깊은 관련이 있다.

 

근자에 대한민국이 기적적으로 민주화를 이룩했다고 떠드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정치 현실은 선진민주국가의 그것에 비하면 한참 후진인 것이다. 실은 민주주의도 아니다. 정치가 4류란 말도 있었지만, '개판'만도 못한 국회가 민의를 대변하는 기구라고 한다. 50년 동안 쓴 김대중의 글을 내가 다 알지는 못한다. 그러나 그의 글은 한결 같이 어떻게 하면 민주주의가 우리나라에 정착할 수 있는가, 어떻게 하면 한국 사회가 바르고 질서 있게 될 것인가, 어떻게 하면 대한민국이 일류의 품격을 갖춘 국가가 될 것인가 하는 문제들을 심도 있게 다뤄왔다. 그는 현실주의자이다. 이상국을 꿈꾸지 않았다. 점진적으로 조금씩 나아가는 방법을 늘 제시했다.

 

내가 김대중을 알게 된 것은 1958년 봄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에 입학해서였다. 그러니까 그가 조선일보사에 입사하기 7년 전이고, 60년이 다 되어가는 오래 전이다. 사실 처음엔 그를 잘 몰랐다. 물론 처음부터 잘 아는 사람도 없다.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그를 잘 몰랐다. 서울법대는 좀 이상한 곳이라 학생들은 대체로 개성이 강하고, 다는 아니나 대부분 고등고시(지금의 사법고시에 해당) 준비에 열중이어서 다른 곳에 한눈을 잘 팔지 않는다. 허기야 당시엔 바둑도 많이 두고, 당구도 많이 치고, 등산도 더러 다니기는 했어도, 대체로 같은 고등학교를 졸업한 친구들끼리 몰려 다녔다. 그와 나는 물론 고등학교가 다르다. 그런데 나는 대학 2학년 때부터 평생의 지기(知己)가 된 김광웅(서울대 명예교수)과 어떻게 친해졌다. 일찍 혼자되신 어머니가 아마 그 해(1960년)에 돌아가시고, 김광웅은 두 살이 위인 누나 김문자와 수유리에서 살았다. 김문자는 우리와 같은 학년이고, 이화여대 영문과에 다녔다. 정말로 “남매는 단 둘”이었다. 그러다가 졸업 다음해인 1963년부터인가 김광웅은 우리나라 최초의 아파트인 마포아파트로 이사를 갔다. 그 집에 어쩌다 놀러 가면 김대중이 와 있던 때가 많았다.

 

기사와 칼럼 못지 않게 연애편지 실력도 수준급

그때 김대중은 ROTC 1기의 통역장교였고, 휴가를 자주 나온 것 같다. 자세한 내막은 모르나 김대중은 김광웅의 누나와 친했다. 그는 문재(文才)의 기자로 평생을 보냈지만, 당시는 연애의 재주도 비상했다. 친구의 여동생과 사귀는 경우는 더러 있다. 그러나 친구의 누나와 연애하는 경우는 드물다. 뛰어난 능력인 것이다. 김대중이 김문자와 가까워진 것은 아마 편지를 잘 썼기 때문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김대중은 중학 시절부터 문학에 심취하여 “휴머니즘이 녹아 있는 촉촉한 글을 쓰고 싶다”고 했다는데, 그 촉촉한 연애편지에 김문자가 녹아난 것이 아닌가 한다. 그래 결혼했다. 그건 그렇고 나는 김광웅과 어울려 다니면서 김대중을 잘(?) 알게 되었던 것이다. 친해진 것이다.

 

그러다가 1964년 말에 나는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한동안 우리는 만나지를 못했다. 김대중이 조선일보사에 입사한 이야기는 미국서 들었다. 나는 1970년 여름에 귀국했다. 그리고는 두세 번 만났을까? 그는 1972년 주미특파원이 되어 워싱턴으로 갔다. 장장 7년을 그 곳에서 보냈다. 그의 소식은 그의 칼럼을 통해서였다. 그러다가 1978년 여름 나는 워싱턴에서 그를 만났다. 나에게는 그해 8월에 하버드대학에서 있었던 ‘중국공산운동에 있어서 농촌기지’란 워크숍에 논문을 발표하러 갈 계획이 있었다. 그런데 당시 나는 서울대학교 사회과학연구소에서 중국연구의 책임을 맡고 있었고, 혹시 워싱턴의 정부인쇄국에서 발간된 중국관계 자료에 어떤 것이 있나 궁금했고, 필요하다고 판단되면 구입하려는 생각이 있어서 워싱턴에 간 것이다. 아니 그것보다는 이왕 동부로 가는 길이니 오래 떨어져있던 친구 김대중이 보고 싶어서였다.

 

그래 나는 8월 13일 오후에 덜레스국제공항에 내렸다. 김대중이 기다리고 있었다. 다짜고짜 자기 집으로 나를 데리고 갔다. 김문자 여사가 철판에 연신 구운 고기를 안주로 1리터짜리 시바스리갈 한 병을 다 비웠다. 무얼 더 마셨는지, 무슨 이야기를 하였는지는 기억에 없다. 취한 김에 그랬겠지만, 염치불구하고 그 집에서 잤다. 다음날 아침 김대중은 나를 정부인쇄국에, 또 늦은 오후엔 공항으로 데려다 주었다.

 

다음 해(1979년)에 귀국한 김대중은 정치부장, 편집국장, 주필, 이사기자를 지내면서 참으로 훌륭한 기사와 칼럼을 많이 썼다. 그래서 한국에서 가장 영향력이 있는 언론인의 자리를 굳게 지켜왔다. 다 아는 일이지만 지금은 고문이다. 그런데 그동안 그도 바쁘고 나도 바빠서, 또 직장이 다르고 하는 일이 달라서, 자주 만나지 못했다. 그는 비상한 머리의 소유자라 글을 쉽게 술술 쓰는지 모르나, 무엇을 어떻게 쓸까하는 문제를 늘 생각해왔을 것이니 바빴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고, 나는 없는 머리를 가지고 학생들을 가르쳐야 했으니 바쁠 수밖에 없었다. 그런저런 이유로 1년에 서너 번 만나면 잘 만나는 그와 나였다.

 

이런 일은 기억에 남아있다. 20년 전이다. 하루는 어디선지 그와 엄청 마셨다. 당시 나는 서울 반포동에 살았고, 그의 집은 방배동이다. 강북에서 가자면 방향이 같다. 또 그에게는 기사가 딸린 차가 있다. 취하면 으레 나를 데려다 준다. 그날도 그랬다. 우리 집 앞에 먼저 왔는데 그냥 헤어지기가 아쉬웠다. 주당들이 헤어질 때는 늘 미진하다. 그래 2차인지 3차인지 내 아파트에 들어가자고 했다. 선선히 따라 들어왔다. 취해서였을 것이다. 왜 그가 술을 좋아하고 많이 마시는지는 모르나, 나를 위시하여 내가 아는 술꾼들은 다 외로운 존재들이다. 나의 경우에 술을 마시면 외로움이 좀 덜하다. 그도 그런지 모른다. 집에는 다른 술도 병깨나 있었겠지만, 법성포소주가 말로 있었다. 독하긴 하나, 맛이 기막히게 좋은 밀주다. 서울법대 박병호 교수를 통해서 구한 것이다. 몇 잔 같이 마시다가 그의 코를 보니 비뚤어지지는 않았다. 아마 나만 코가 비뚤어지게 마신 모양이다. 코는 비뚤어져도 정신은 있다. 그래 한 되를 따라주어 보냈다. 한동안 그 이야기를 가끔 하더니, 요즘은 안한다. 그러나 법성포소주 이야기가 나오면 그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50년 기자생활을 하는 동안 김대중은 매우 많은, 그리고 여러 종류의 사람들과 만났을 것이고, 다니면서 밥이고 술이고 먹은 집도 부지기수일 것이다. 그러니 잘 아는 밥집도 많고, 음식 잘하는 집도 많이 안다. 자연히 미식가가 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비싼 집은 잘 다니지 않는다. 소탈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그는 칼국수 같은 음식을 좋아한다. 자주 가는 국수집이 물론 있다. 지하철 4호선 성신여대입구(돈암동)역에서 가까운 태극당 건물의 뒤편에 위치한 허름한 집이다. 김영삼 씨가 대통령되기 전에 자주 다닌 것으로 소문난 삼선교역 근처의 ‘국시집’에서 오랫동안 일하던 여자가 독립해 나와 차린 집이다. 옥호는 ‘밀양칼국수’다. ‘국시집’에서 여러 해 닦은 솜씨니 칼국수는 물론이고, 소고기 수육과 생선전이 특이하게 맛있다. 또 그 집의 김치가 일품이다.

 

이런 에피소드가 있다. 그 집의 사장인지 주방장인지 하는 여자는 미인은 아니나 유명한 ‘국시집’에서 오래 일했기 때문에 장안의 명사들을 많이 안다. 독립해 나오면서 먼저 집의 명사고객, 단골손님들을 대거 끌고 왔다. 김대중도 그 중 하나다. 그런데 그녀의 취미는 대통령의 이름이 새겨진 시계를 수집하는 것이다. 드나드는 명사들에게 부탁하면 대통령시계는 쉽게 얻을 수 있을 것이란 계산에서 시작된 취미인지 모른다. 그래 대통령시계를 갖다 주는 단골들이 꽤 있었다고 한다. 맛있는 음식을 먹자면, 그녀에게 잘 보여야 하기 때문이다. 박정희 대통령이 봉황무늬가 있는 시계를 만들어 새마을지도자들에게 나누어 준 것이 대통령시계의 효시(嚆矢)라고 한다. 최규하 대통령 때는 모르겠으나, 아무튼 그 후 역대 대통령 모두가 시계를 만들어 청와대를 방문하는 인사들에게 선물로 주곤 했다. 대통령시계가 남발(?)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런데 박근혜 대통령은 취임 처음 몇 달은 시계를 만들지 않고 지냈다. 예산을 아끼기 위해서 그랬는지 모른다. 여러 가지 말이 있었다. 그러다가 오륙 개월이 지나서 시계를 만들어 새누리당 의원 등에게 돌렸다고 한다. 그전처럼 남발되지 않았기 때문인지 비교적 귀했다. 그런데 ‘밀양칼국수’의 그녀가 김대중에게 박근혜 대통령 시계를 하나 구해 달라고 했다고 한다. 김대중도 그 시계를 받지 못했다. 갖고 있었으면 선뜻 주었을 것이다. 그래 청와대에 출입하는 기자에게 부탁해 구했다는 것이다. 그 시계를 받은 칼국수집의 그녀는 입이 함박만 해졌을 것이다. 시계사건 후 나도 김대중과 그 집엘 두어 번 간 기억이 있다.

 

'장지연 상을 반납해야 하나' 칼럼… 통렬한 역사 인식 인상적

우리 집에서는 다른 신문도 보나 오래 전부터 ‘조선일보’를 구독해왔다. 그러니 김대중의 칼럼을 매번 읽게 된다. 위에서 잠시 언급한 바와 같이 그는 늘 나라를 걱정하는 글을 쓴다. 때문에 그의 글은 우국지사의 문장이고, 그의 글을 읽으면 우국지사의 면모가 약여(躍如)하게 떠오른다. 여기서는 그의 칼럼 가운데 하나를 이야기하고자 한다.

 

4년 전 4월, 김대중은 ‘장지연 상(賞)을 반납해야하나?’라는 제목의 칼럼(조선일보 2011년 4월 18일)을 썼다. 김대중은 뛰어난 언론인이고 그의 글은 영향력이 크기 때문에 몇 개의 큰 상을 받았다. 내가 시상식에 참석하여 축하한 상도 몇 개 된다. 그 가운데는 ‘자랑스러운 서울법대인 상’(2004년)도 있고, 경암학술상(2013년)도 있다. 여러 상 가운데 김대중이 가장 긍지를 느끼고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상이 ‘장지연 상’(1991년)이 아닌가 한다. 다 알다시피 위암(韋庵) 장지연(張志淵)은 항일 언론인으로 1905년 을사늑약(乙巳勒約)을 규탄하는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이란 유명한 논설을’황성신문’에 실었던 지사다. 그는 1962년 국가보훈처로부터 ‘건국훈장국민장’을 추서(追敍)받았을 뿐 아니라, 같은 보훈처는 2004년 11월에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그를 선정했다. 그런데 나라가 어찌되려는지 이명박 정부의 국가보훈처는 2010년 11월 위암의 서훈을 취소하는 결정을 내렸고, 그 국무회의는 2011년 4월 5일 위의 취소결정을 확정했다.

 

그 몇 해 전부터 경술(庚戌) 이후 위암의 행적을 시비하는 좌파 무리들이 등장했다. 그들은 위암이 총독부의 어용신문인 매일신보 주필이 되어 친일의 글을 썼다고 떠들어댔다. 민족문제연구소란 간판을 내건 그들은 2008년 ‘친일인명사전’을 만든다면서 위암을 수록 대상자에 포함시켰다. 짐작컨대, 나라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지 못하는 김황식 총리가 주재하는 국무회의는 민족문제연구소의 작태에 부화뇌동한 것이다. 이것이 내가 생각하는 취소결정의 배경이다.

 

이에 김대중은 노했다. “정부가 장지연을 ‘친일인사’로 단정 짓고, 과거 정부가 그에게 줬던 훈장을 도로 빼앗기로 결정한 이상, 나는 ‘친일인사’를 기려서 만든 상을 더 이상 자랑스러워 할 이유가 없어졌다”고 개탄했다. 개탄의 이유는 여럿이다. 그 하나는 ‘이명박 정부’에 대한 것이다. “언필칭 보수정권이라고 하고 또 실제로 보수우파 세력의 지지로 권력을 담임한 정부임에도 불구하고 하는 일들을 보면 ∙∙∙∙∙∙ 이쪽도 저쪽도 아닌 ‘기회주의적’ 집단인 것으로 드러나고 있다.” “이 정부는 한마디로 ‘철학이 없는’ 정부다”고 일갈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김황식 총리의 ‘인식’과 서훈취소를 “말 한마디 없이 통과시킨 국무위원들의 무식함이 부끄럽다”고 했다. 대통령이 그 모양이니 그 밑의 총리나 국무위원들이 오죽하겠느냐는 의미가 여기엔 분명 내포되어있다. 그래서 김대중은 서훈취소를 의결한 국무위원들이 “시일야방성대곡을 읽어보기나 했는지,” “그의 다른 글이 얼마나 ‘매국적’인지 읽어 본적이 있는지 묻고 싶다”고 했다. 나도 여기에 전적으로 동감이다. 읽어보았자 무슨 얘긴지 이해할 수도 없는 집단일 것이라고 나는 지적했다.

 

나는 위암의 서훈취소와 관련하여 몇 가지 문제를 제기했다.

 

첫째, 훈장을 추서한 정부와 그것을 취소한 정부가 과연 동일성 있는 대한민국의 정부인가를 물었다. 과거의 결정이 잘못된 것이라면 뒤집을 수도 있다. 다만 왜 잘못되었는지를 심사숙고해야 할 것이다. 설사 위암이 친일적인 글을 썼다고 하자. 그러나 그것이 '시일야방성대곡'을 없었던 것으로 만들만큼, 친일적이고 매국적인가? 길고 짧은 것은 대보고, 조금이라도 길면 길다고 해야 하는 것이 상식이다. 그러면서 나는 중국의 경우를 예로 들었다.

 

“마오쩌둥(毛澤東)에게는 공산혁명을 성공시킨 공이 있다. 그러나 그에게는 대약진과 문화혁명이라는 ‘엄중한 과오’도 있다. 그러나 1981년 중국공산당 11전 6중 대회는 마오쩌둥에게 ‘공적이 첫 번째이고, 과오[착오]는 두 번째라는 평가를 내렸기 때문에 마오쩌둥의 초상화가 아직도 천안문광장에 걸려있는 것이다.”

 

둘째, 결정의 번복이 가져올 결과도 생각하여야 한다고 했다. 상을 받은 김대중이 아니라도 절대다수의 대한민국 국민들은 위암을 항일지사로 알고 있다. 존경의 대상이다. 어려운 시절에 붓을 꺾지 않고 민족혼에 호소하는 항일의 글을 썼기 때문이다. 그러나 서훈이 취소되면서 하루아침에 위암은 항일지사에서 친일매국노로 전락하는 상황이 발생했다. 그러면 우리는 이제 그를 존경 아닌 치욕의 대상으로 삼아야하나? 우리에게는 광화문 앞의 세종대왕과 이순신 장군 말고는 존경하고 사표로 삼을 선대의 인물이 없다. 자라나는 이 땅의 어린이들에게 너희 조상 가운데는 훌륭한 인물이, 존경할 인물이 하나도 없다고 가르칠 것인가? 예컨대, 윤치호, 이광수, 최남선과 같은 훌륭한 인물들이 정당하게 평가받지 못하고, 친일분자로 억울하게 매도되는 사례가 너무나 많다. 균형 있는 평가로 옥과 돌이 구분돼야 할 것이다. 이것이 우리 세대가 해결해야 할 과제라고 나는 생각한다.

 

셋째, 친일의 문제가 근자에 와서 왜 집요하게 우리 사회를 흔드는가? 문명의 충돌도, 종교의 갈등도 도처에 있는 것이 요즘의 세계적인 현상이다. 그러나 한반도에서와 같이 이념과 정치의 분열이 심한 사회도 드물다. 친일의 문제도 기본적으로 이념의 문제고, 정치의 문제다. 그것은 한반도의 분단에서 시작된 것이다. 북한이 줄기차게 내세우는 것은 김일성이 항일투쟁을 했고, 그 집단이 정권을 창출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남한은 친일세력의 집단이라고 계속해서 비방해왔다.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부정하는 작업으로 일관해왔다. 특히 1998년 김대중 정권이 들어서면서 좌파들이 기를 펴기 시작했다. 한동안 잠잠했던 과거의 친일문제가 고개를 들었다. ‘햇볕’을 보기 시작했다. 그 임시부터 친일문제를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는 사람들 가운데는 분명 북한의 지령에 따라 움직이는 세력이 있는 것이 아닌가 한다. 이 문제도 우리가 척결해야할 과제라고 믿는다.

 

김대중의 장지연 상과 관련된 문제는 내가 위에서 언급한 ‘술의 노래’란 책(398-411쪽)에서 기술한 내용을 요약 정리한 것이다. 또 위암의 서훈 취소가 무효라는 판결도 있었다. 보훈처의 서훈 취소가 나온 후, “장지연 선생의 유족은 법원에 보훈처 처분을 취소하라는 소송을 냈다. 상당수의 학자도 ‘문제의 글 가운데 장 선생이 쓰지 않은 것도 포함돼 있다’며 의문을 제기했다. 1심을 맡은 서울행정법원은 올 1월 ‘대통령의 권한인 서훈 취소를 국가보훈처가 한 것은 월권’이라며 유족들의 손을 들어줬다. 서울고법 행정9부(재판장 조인호)도 27일 ‘대통령의 권한을 위임하지 않았는데도, 국가보훈처장이 서훈 취소를 한 것은 절차적 하자가 명백해 무효’라며 1심과 같이 유족에게 승소판결을 했다.” (조선일보 2012년 12월 28일. A10 참조.) 그러나 나는 이 문제를 이렇게 본다. 절차적 차원에서 서훈 취소의 무효판결도 있을 수 있지만, 법원은 실체적인 문제도 다뤘어야 했다고 생각한다. 위암이 실제로 친일의 글을 얼마나 썼는지, 또 그것이 서훈을 취소할 만큼 중대 중요한 것인지를 판단했어야 옳았을 것이다. 이 문제가 대법원에도 갔는지 여부는 확인하지 못했다.

 

자유주의자 김대중, 대한민국을 지키기 위해 보수적 글 써

김대중은 위에서도 말했듯이 자유민주주의의 신봉자다. 그러나 장지연 상에 대한 칼럼에서와 같이 그에게는 보수적인 사고의 측면도 강하다. 다른 칼럼들의 색채도 그와 유사한 것이 많다.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김대중의 보수주의는 한반도가 처한 상황의 산물이라고. 또 자유민주주의와 보수주의가 상충하는 것도 아니라고. 북한의 도발이 계속되는 현실에서, 종북 좌파들이 서울 한복판에서 똬리를 틀고 앉아서 기승을 부리는 현실을 직시할 때, 그의 보수 성향은 당연한 것이다. 그의 보수는 대한민국을 위한 보수이며, 한마디로 그의 칼럼은 대한민국 '지킴이'다.

 

김영삼 정부 출범 때 황인성 초대 총리발탁이 김대중의 추천작품이란 설이 있다. 문민정부라고는 하나, 오랫동안 정부의 운영기제(運營機制)가 군사정권에 익숙했던 만큼 군인출신에게 초대 총리를 맡기는 것이 안전(?)할 것이라는 취지였다. 나라를 위한 추천이었다. 그런 형편이니 왜 입각교섭이 없었겠는가? 그러나 그때마다 거절했다고 한다. 김대중(DJ) 정권 때도 그랬다는 이야기도 있다. 언론에 하마평이 돈 적은 없지만, 비교적 최근까지 청와대에서는 그를 국무총리후보로 고려한 적도 있다고 한다. 본인에게 물어볼 수도 없는 일이다. 또 그게 무슨 대수도 아닐 것이다. 그러나 이런 기억은 있다. 1999년 5월 말에 김대중의 처남인 김광웅이 DJ 정권의 초대 인사위원장으로 입각했다. 김대중은 DJ를 좋아하지 않았다. 그의 사상과 정책을 싫어했다. 그래서 그 밑으로 벼슬을 살러 들어간 처남을 매우 못마땅하게 생각한 것이다. 그로부터 약 2년 동안 김대중은 옹졸한 사람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처남을 만나도 못 본척 했고, 말도 한마디를 건네지 않았다. 내가 목격한 경우도 있었다. 그러니 입각이고 자시고 그런 것에는 관심이 없었다고 해야 옳을 것이다.

 

김대중은 줄기차게 한 직장을 지켰다. 나의 옛 기록을 보니 1985년 3월 27일자에, “김대중 국장이 전화했다. ‘월간조선’ 편집위원이 되어달라는 얘기다. 거절했다.”고 간단히 적혀있다. 편집국장 때였던 모양이다. 교수가 신문사잡지의 편집위원 노릇을 하는 것이 큰 외도는 아니지만, 나도 한눈을 팔지 않고 한 직장을 수십 년 지켰다. 나는 선생질 말고는 다른 재주가 없어서 그랬고, 김대중은 다른 재능도 많은데 외길을 걸었다. 족탈불급이다. 더 무슨 말을 하랴! 신문사를 그만 두더라도 건강히 오래 건필을 휘두르기 바란다. 술도 많이 마시고.

 

◎최명 교수는?

서울대 법대, 미국 일리노이주립대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고 서울대 정치학과 교수를 지냈다. ‘비교정치학 서설’ ‘춘추전국의 정치사상’ ‘현대 미국정치의 이해’ 등 저서 외에도 ‘소설이 아닌 삼국지’ ‘소설이 아닌 임꺽정’ 등 전공 틀에 얽매이지 않는 책도 다수 냈다. 두주불사형 호주가(豪酒家)로 최근에는 자신의 음주 편력을 담은 수필집 ‘술의 노래’를 출간했다.

 

(2) 50년 기자 김대중을 만든 세가지 힘...그의 필력, 회사의 배려, 독자의 관심

2015.06.02 05:40

김대중 조선일보 고문이 ‘기자 50’년을 기록한 것은 한국 언론사에 길이 남을 일이다. 50년이란 세월도 그렇고, 반세기 동안 줄기차게 글만 썼다는 것도 그렇고, 그런 그에게 그럴 언덕을 제공해 온 조선일보의 배려도 그렇다. 그의 글을 꾸준히 읽어주고 공감해 주고 비판해 준 독자들 또한 예사롭지 않다. 그 곁에서 그와 함께 취재하고 글 쓰고 신문을 만들어 온 언론동료들 역시 덩달아 짠한 감개를 느낄 ‘김대중 기자 50년’이다.

 

언론인 김대중과 그 동시대인들은 한 생애에 4~5 또는 5~6종류의 삶을 산 세대다. 보통은 한 생애에 그저 한두 종류의 시대를 살다가 간다. 그런데 이 세대는 여러 종류의 시대를 살았다. 우선 독립국도 아닌 식민지에 태어나 10살이 채 안 됐을 때 8. 15 해방을 맞았다. 이어서 6. 25 전란 후의 ‘국민소득 80달러짜리’ 빈곤의 시대를 살았다. 그러다가 민주주의 교육을 받고 “왜 이대로 하지 않느냐?”고 따져도 보다가 어느 날 아침 눈을 떠보니 5. 16 군사 쿠데타로 세상이 확 변해 있었다. 그리고 박정희 시대 18년. 바로 우리 세대의 청춘기와 맞물렸던 산업화 시대였다. 그리고 온 것이 1980년대 후반의 민주화, 90년대 초를 전후한 소련-동구권 붕괴, 2000년대의 ‘민주화 이후’와 정보화 시대였다. 그리고 우리는 ’실버‘가 되었다.

 

권위주의 권력의 몽둥이와 민주화 이후 권력들의 치사함에 굴하지 않아

기자 김대중은 적성(適性)에 썩 맞지 않을 성싶은 법과대학을 나와 공군장교 생활을 마치고서야 비로소 그의 최고의 적성, 언론과 만났다. 그것도 조선일보라는 최고의 적성과. 개인 김대중의 취향과 능력, 조선일보라는 터전, 그리고 격동의 시대라는 배경-이 3가지가 어우러져 언론인 김대중의, 일세를 풍미한 명(名) 논설들이 분출했다.

 

언론인 김대중의 논조는 한 마디로 가장 오만한, 또는 오만해질 낌새가 있는 권력에 직격탄을 쏘아대는 것이다. 권위주의 정권이든 민주화 정권이든 권력의 속성은 비슷하다. 스스로 알아서 조절능력을 발휘하지 않거나 못하는 점이다. 그래서 누군가, 특히 언론이 그걸 조절시켜야 하는데, 어느 종류의 권력이든 이걸 좋아하지 않는다. 언론이 “그건 노(no)….”라고 말하면 권위주의 권력은 ‘몽둥이’로 임했고, 민주화 이후 권력들은 ‘치사하게’ 나왔다. 권위주의 권력은 그로 하여금 영국에 잠시 가 있게 한 적도 있었고, 민주화 이후 권력은 회사에 그의 목을 자르라고 압박한 적도 있었다. 모두가 그의 굴하지 않는 언론인 정신이 감내할 수밖에 없었던 고난의 길이었다.

 

그러나 이 고난이 있었기에 언론인 김대중과 그 동시대 언론인들은 보람을 느낄 수 있었다. 지금은 ‘언론’이라는 말보다는 ‘미디어 산업’이라는 말이 더 통하는 시대라고들 한다. 그러나 김대중 기자 시절은 육필로 200자 원고지를 메울망정 '권력에 목이 잘릴 수도 있는 ‘자유언론의 전투현장이었다. 이 전투에 임해서 조선일보 논설위원실은 “어떻게 싸울 것인가?”를 두고 매일 오후 2시에 논설회의를 열었다. 신동호 주필이 주재하는 논설회의에서 김대중 위원과 필자는 격한 논쟁을 벌이곤 했다. 서로 한 치의 후퇴나 양보도 없었다. 어떤 때는 얼굴을 붉히고 언성을 높이기도 했다. 점심 먹는 동안에만 해도 낄낄대고 농담을 던지고 받았는데, 그 회의에서만은 완전 칼잡이들이었다. 이게 아마도 프로의 세계였던 것 같다.

 

김대중과 논설회의서 벌인 격론…남들은 "참 희한한 협업관계"라 평해

후기 권위주의 시대에 ‘칼럼의 시대’가 왔다. 김대중 칼럼과 필자의 칼럼이 조선일보에 격주로 실렸다. 그때 그와 필자는 서로 데스크 노릇을 했다. 여기서도 서로 상대방의 원고에 가차없는 메스를 가했다. “여기 이 대목이 말이 되느냐?” 그러면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자신은 ‘명사’를 조심해야 하고 필자는 ‘형용사’를 조심해야 한다고. 필자는 그가 어떤 때는 용어(명사)를 부적절하게 쓴다고 지적했다. 개념을 정확하게 매겨야 한다는 지적이었다. 반면에 그는 필자가 현장감(형용사)을 잘못 짚는다고 지적했다. 실제와 표현 사이에 괴리가 있다는 지적이었다. 이를 보고 주변 사람들은 ‘참 희한한 협업관계’라고 지적했다. ‘지적 질’이야말로 조선일보 논설위원실의 ‘치열한 미덕’이었던 셈이다.

 

지금까지의 언론인 김대중, 그리고 오늘의 언론인 김대중이 가능했던 데는 그가 다른 인생, 다른 코스에 관심이 없었다는 점이 크게 작용했다. 그는 다른 직업, 예컨대 정치인이나 관료를 곁눈질하지 않았다. 설령 ‘교섭’을 받은 적이 있었다 해도 그는 100% 사절했을 것이라는 쪽에 걸겠다. 그는 자신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언론인 노릇이 다른 데로 가는 징검다리인 사례가 적지 않다. 사람의 유형에 따라선 그게 오히려 자연스러운 경우도 물론 있다. 그러나 언론인 김대중은 “나는 그런 쪽이 아니다”라는 자기정체성(사주팔자?)에 시종 충실했다. 그래서 이력서상의 그의 직업은 딱 하나-‘언론인’이다. 김대중과 필자가 서로 많이 다르면서도 공통된 점이다.

 

워싱턴 특파원 시절 이후 늘 옷 잘입는 '굿 드레서'

그의 인간적인 면모 역시 그의 글 못지않게 필자의 시야 안에 잡히곤 했다. 그는 우선 굿 드레서다. 항상 말끔한 정장에 넥타이 차림이다. 그리고 색깔을 잘 맞춘다. 그러면서 이런 말을 했다. “워싱턴 특파원 생활할 때 보니, 유명 신문사의 저명 백악관 출입기자 하나가 그렇게 모양을 잘 낼 수가 없더라…” 그는 기자는 늘 면도도 잘 안 하고 누추하다는 속설(俗說)에 완강하게 저항(?) 했다.

 

그는 또 식도락에도 일가견이 있다. 그가 가는 식당에 가면 맛있는 한 끼를 먹을 수 있다. “돼지고기 편육에 막국수…”라고 하기에 한 번 따라가 보았더니 콧구멍만 한 식당인데 맛이 썩 좋았다. 근래엔 서산 음식이라 해서 부르기에 여럿이 갔는데 역시 짭짤한 반찬들이 밥 도둑이었다. 같은 값이면 옷이나 음식을 골라 먹는 멋과 여유는 좋은 것 아닌가? 멋과 여유가 없는 정계를 볼 때마다 따라붙는 느낌이다.

 

언론인 김대중은 한 마디로 기(氣)가 센 필자다. 그의 모든 것을 이걸로 집약할 수 있다. 비판적 논설을 쓴다는 것은 결국 기 싸움의 언어적 표현이랄 수도 있다. 이 점에서 언론인 김대중은 단연 챔피언 급(級)이다. 그래서 ‘김대중 기자 50년’을 짚고 넘어가는 주변 사람으로서도 덩달아 기가 오를 수밖에 없다. 추카추카!

류근일·전 조선일보 주필

 

□[미수(米壽)의 현역… 김동길 박사]

2015.10.12  "나는 自由人으로 살아왔어요, 고집불통이고… 元老대접은 원치 않아"

"법정서 15년 선고받자 다들 항소하라 했지만 '몇 년 깎아달라'는 항소를 자존심 때문에 포기했다" "나 스스로 반성을 한다 '실력보다 높이 평가받았다'고 좀 더 정직하게 살았으면 내가 좀 더 떳떳할 텐데"

얼마 전 김동길 박사가 미수(米壽·88세)를 맞았다. 생일날에도 그는 자신의 인터넷 홈페이지(프리덤 워치)에 글을 올렸다. '아무도 부럽지 않다'는 제목으로 자신의 삶을 돌아보면서, '적화통일을 꿈꾸는 정신박약아들은 나를 죽이고 싶어 하겠지만 그놈들에게 맞아 죽으면 요를 깔고 누워서 앓다 죽는 것보다 나에게는 큰 영광이 될 것입니다'라는 결의도 적어놓았다.

 

▲김동길 박사는“죽는 시간까지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주장을 하며 살 것”이라고 말했다. /성형주 기자

 

이 글은 그가 인터넷 홈페이지에 올린 2711번째 글이다. 인터넷 글쓰기는 2008년 이명박 대통령에게 '훈수'하기 위해 시작했다. 하지만 MB 측에서 반응이 없었다. 그는 '이제 당신한테 안 쓰고 그냥 쓴다'며 지금껏 써오고 있다.

 

"청계천 복원·서울 버스노선 개편 등을 보면서 건설업자이지만 큰 기대를 걸었는데, 막상 대통령이 되니 아닌 거요. 그이(이명박)가 자유민주주의의 큰 깃발을 들고 나왔으면…."

 

어느새 그는 해방공간 정국(政局)과 프랑스혁명 등을 예로 들며 자유민주주의에 대해 강연하고 있었다. 이렇게 인터뷰가 시작됐다.

 

그는 나비넥타이를 맨 재킷 차림에 단추를 여미고 있었다. 거실 겸 서재는 책들과 다양한 잡동사니로 꽉 차 있었다. 오래된 형광등의 불빛이 깜빡깜빡 흔들렸다.

 

"1947년부터 줄곧 살았던 집입니다. 식민지 시절 영단주택(일종의 국민주택)이었는데 1970년대에 2층 집으로 개조한 거죠. 원래 아버님이 누님(김옥길) 명의로 사준 건데, 내가 미국 유학 가 있는 동안 누님이 내 명의로 바꾸어놓았어요. 그이가 독특해요. 아버님이 내게 물려준 땅은 결혼한 여동생에게 주라고 했어요. 그 말에 나도 여부가 없었지요. 그 땅에는 여동생이 집 짓고 살고 있어요."

 

―누님은 동생(김동길)을 어떻게 봤습니까?

"존중했지요. 이 집에서 결혼 안 한 남매 둘이서 같이 살았어요."

 

―연애는 하면서 결혼을 안 했는데, 지금에 와서는 어떻습니까?

"우리 어머니도 대단했어요. 내가 독자(獨子)라서 후손을 봐야 하는데, 어머니가 '네 인생은 네가 알아서 해라'고 했어요. 그래서 자유인(自由人)이 될 수 있었지요. 결혼했다면 가족 걱정 하느라 이런 삶을 살 수 없었을 거요. 혹시라도 요다음에 태어나도 이렇게 살 겁니다."

 

―박사님은 평생 가만히 계시지 못하는 분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죽는 시간까지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주장을 하며 살 겁니다. 싸우면 싸우고 감옥에 가면 감옥에 가고. 늙고 병들어서 요를 깔고 앓다 죽는 거보다 나아요."

 

―발언하는 것에 대해 겁이 없다고 해야 할까요. 박정희 정권 시절에 '내가 대통령이 된다면 부모도 섬기지도 않던 놈들이 청와대에 가서 아부하며 각하 각하 하는 것들을 모두 잡아다가 서해의 무인도에 보내 아첨도라 하겠다'라는 글도 썼지요?

"홍사용(洪思容) 시인은 '나는 왕이로소이다'라고 썼는데, '내가 대통령이 된다면'이라는 말도 못 합니까. 그 칼럼을 동아일보에 보냈는데 그쪽에서 못 실었어요. 나중에 책에 끼워넣었는데 금서(禁書)가 됐어요. 몇 번 남산(중앙정보부)에 붙잡혀간 적 있지만 그런 건 별거 아니고…. 유신헌법(1972년)이 만들어지면서 여기에 반대할 자유가 없다는 거요. 계엄포고령과 긴급조치가 나왔어요. 내가 민주주의를 배웠는데 가만있겠어요. 겁 없이 말하는 거요. 그걸로 감옥을 산 게 1974년이었어요."

 

―당시 '민청학련 사건'의 배후 지원 혐의로 15년을 구형받았지요?

"배후는 무슨 배후요, 정권에서 다 조작한 거지. 검찰에서 구형한 15년을 법정에서 그대로 선고했어요. 다들 항소하라 했지만, 항소라는 게 '몇 년 깎아달라'는 거 아닙니까. 자존심 때문에 포기했어요. 내가 무엇으로 싸우느냐, 정신력으로 맨주먹으로 싸우는 겁니다. 15년 썩는 거 겁 안 났어요. 오랜 세월 버티려면 잘 먹어야겠다 싶어 수감 첫날부터 콩밥과 시래깃국을 잘 먹었어요."

 

―그 사건에 대한 국내외 여론이 악화되자 10개월 만에 형집행정지로 석방됐지요?

"글쎄 나가라고 하더구먼요. 출감한 지 얼마 안 돼 박정희 정권에 몹시 비판적인 프레이저 미 하원의원이 방한해 미 대사관에서 리셉션이 있었어요. 프레이저 의원이 '미국이 어떻게 하면 한국 민주화를 돕겠는가?'고 묻자, 야당 정치인들이 '스팽크 힘(spank him·박정희 엉덩이를 걷어차달라)'이라고 답했어요. 내 차례가 됐을 때 '미국이 한국 민주화에 도울 게 없다. 민주화는 우리가 한다. 매도 우리가 맞고 감옥에도 가고 해야 달성된다'고 답변했어요."

 

―인상적인 답변이군요. 박 대통령이 알았다면 박사님을 감옥에 넣은 걸 미안해했을 텐데….

"이틀 뒤 미 대사관 인사가 청와대에서 박 대통령을 만나 그 얘기를 전했어요. 또 이런 일도 있었어요. 지미 카터가 대통령 후보로 나와 미군 철수를 하겠다고 했어요. 조야에서 벌벌 떨었지요. 내가 조선일보에 '미국이 자기 군대를 데려간다는데 다 데려가라. 우리 사십대도 낡은 총을 닦아 조국을 지키겠다'고 썼어요. 그 칼럼을 읽은 박 대통령이 차지철 경호실장에게 '애국하는 교수 아니냐'고 했대요. 차지철이 서울시장에게 전화를 걸어 '김 교수 잘해드려라'고 했고, 서울시장이 내게 점심을 대접했어요. 참 묘한 시대였어요."

 

―박정희에 대해 어떤 평가를 갖고 있습니까?

"유신체제가 잘못된 것이 많지만 다 인정하듯이 그이(박정희)는 경제 건설을 했어요. 그때는 그게 급선무였으니까. 우리의 가장 문제는 덮어놓고 인물을 치는 겁니다. 이승만(李承晩)도 역사의 자리가 그것밖에 안 됩니까. 해방정국에서 국민 여론의 75%는 사회주의를 하자고 했어요. 바깥세상을 알았던 이승만이 시장경제에 바탕을 둔 자유민주주의를 한 겁니다. 그런 국내 여건에서 자유민주주의 정부를 세운 겁니다. 독재자라는 한 면만 보면 안 됩니다. 역사적 판단은 공정해야지요."

 

―박정희 시절 '내가 대통령이 된다면'이라고 글을 썼던 것처럼, 1991년 그런 야망을 갖고 정치판에 들어갔지요?

"내가 대통령이 될 만한 사람이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어요. 그때 정주영 회장이 '정치가 썩으니 나라가 어렵다. 돈은 내가 벌어놓았으니 당(黨)을 한번 해보자'며 의형제를 맺자는 문서를 갖고왔어요. 그러면서 '김 교수를 대통령 후보로 모시겠다'고 했어요. 내 입으로 한 게 아니라…."

 

―솔직히 한판 해보고 싶은 마음이 왜 없었겠습니까?

"그때는 나만 한 대중 인기를 가진 사람이 없었어요. 물론 후보로 나왔다면 정치판을 흔들었겠지요."

 

―대통령 후보 자리를 정주영 회장에게 양보했지요?

"총선에서 국민당(정주영이 만든 당)이 30석 이상 이기고 나니 주위에서 정 회장을 부추겼어요. 'CNN이 조사했는데 회장님이 압도적으로 된다'는 식으로 말이죠. 어느 날 정 회장이 찾아와 '결혼해서 가정을 가져라. 내가 200억원을 대주겠다'고 하는 걸 '이 나이에 결혼 안 한다'고 답했어요. 며칠 뒤 '김 교수는 젊으니 나중에 기회가 있다. 이번에는 내가 나간다'고 하는 거예요. 이게 뭡니까. 그때 이런 내용을 공개했으면 나는 살지요."

 

―정치판에 들어가면서 그전까지 쌓은 명망을 잃어버리게 됐지요?

"그 안에서 당하고 배운 게 많아요. 정치판에 안 들어갔으면 김수환 추기경처럼 대접을 받았을 텐데 하는데, 그건 모르는 소리예요. 정치에 안 들어가도 나는 그런 인물이 되기 어려워요."

 

―존경받는 지성인이었는데, 그 뒤로는 '이게 뭡니까?'라는 말이 패러디되는 등 TV 예능 프로의 인물처럼 됐어요.

"그건 개그맨이 그렇게 만든 거고. 정치의 실패자는 맞아요. 정치판에 4년 있었어요. 돌아와서는 내 일을 시작했어요. 계속 강연을 다녔고."

 

―보수단체 집회의 강연자로도 자주 나서더군요. 노무현 전 대통령에게 '스스로 감옥에 가든지 자살하라'는 발언으로 시끄러웠지요?

"나는 노무현 집권 시 한 번도 '대통령'이라고 한 적이 없어요. 이런 내 의견은 내 의견대로 있는 겁니다. 내게 공감하는 사람도 상당수 있어요. 그때 발언은 자살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대통령을 지낸 사람이 자살한 것은 정말 잘못된 거죠. 그런 그를 성인(聖人)처럼 떠받드는 풍조도 잘못됐고. 최 선생은 그의 자살에 대해 어떤 입장입니까?"

 

―안타까운 일입니다.

"그건 어중간한 말이잖아요. 나는 일국의 대통령을 지낸 사람이 그럴 수 없다고 보죠."

 

―이제 박사님 말을 경청하는 숫자가 과거보다 많이 줄었지요?.

"그 숫자는 안 세어봤으니…. 나 스스로 '실력보다 높이 평가받고 살아왔다'는 반성을 합니다. 많은 사람 앞에서 강연하고 가르치고 글 쓰는 위치에 설 줄 알았다면 내가 좀 더 정직하게 살았으면 좀 더 떳떳할 텐데…. 이 자리에서 다 털어놓지는 못하지만, 내가 좀 더 진실하게 살 길이 있었어요."

 

―우리 사회에도 이념과 정파를 떠나 '저분의 말씀이면 일단 들어볼 만하다'는 원로가 있었으면 합니다.

"그런 사람이 존재할 수 없는 사회라는 걸 인식해야지요. 누가 어떻게 보고 생각하든, 나는 자유인으로 살아왔어요. 고집불통이고요. 원로로 대접받기를 원하지 않아요."

 

―자신과 다른 생각과 입장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려는 노력도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내가 평소 듣지 못한 한마디를 최 선생에게 들었습니다. 하지만 내 기력이 있는 동안 자유민주주의를 위한 주장을 멈추지 않을 겁니다. 불의(不義)를 보고 말 안 하면 용기가 없는 거지요"

 

대담을 시작한 지 2시간이 훨씬 넘었지만 그는 열정적으로 얘기했다. 기억력도 정확했다. 간혹 영시(英詩)까지 낭송했다. 그를 통해 100세 인생을 느끼게 됐다. 그처럼 사는 것이 현대 노인의 모델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순간 그가 한마디 덧붙였다.

 

"나는 죽으면 연세대병원에 시신을 기증하기로 해놓았습니다. 내 장례식을 절대 치르지 말도록 했고요."

조선일보 최보식이 만난 사람  

 

■학자

□김정기 박사 별세

 

2015.08.28  박정희 前 대통령이 아꼈던 現場고고학의 代父

한국 고고학·고건축의 개척자… 경주 천마총·황남대총 발굴 맡아

26일 별세 소식에 밤새 추모글

 

"한결같은 '야전군 사령관'이었죠. 평생을 발굴 현장에 있으면서 고고학자로서의 마음가짐을 몸소 보여주셨어요."(조유전 전 국립문화재연구소장)

 

"그분에게 발굴 현장은 신성한 곳이었습니다. 조그만 토기라도 한 손으로 집으면 불호령이 떨어졌어요. 감히 유물을 함부로 대하느냐, 정중하게 두 손으로 잡으라고요."(정계옥 전 국립문화재연구소 미술문화재연구실장)

 

▲김정기 박사는 생전“황남대총을 발굴하라는 박정희 전 대통령 지시가 떨어졌을 때 사실 파기 싫었다”며“산에 오르는 사람은‘산이 있어 오른다’고 하지만 유적은 있다고 해서 발굴하는 게 아니다”라고 했다. 오른쪽 사진은 1975년 황남대총 발굴 현장에서 박정희 대통령에게 설명을 하는 김 박사(맨 왼쪽). 박 대통령 옆에 당시‘퍼스트 레이디’역할을 한 박근혜 대통령이 보인다. /이진한 기자·국립경주박물관 제공

 

하늘로 떠난 고고학 대부(代父)를 추모하는 애도의 물결이 온종일 이어졌다. 한국 고고학과 고건축의 개척자인 창산(昌山) 김정기 박사가 26일 별세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SNS에는 밤새 추모글이 올라왔다. "발굴장에 어둠이 내리면 곱창이나 순대 회식으로 피로를 풀어주셨지요" "우리 학계의 진정한 거목이셨던 선생님의 명복을 빕니다"….

 

◇현장 고고학 기초 세운 거목

1930년 경남 창녕에서 태어난 창산은 일본 메이지대 건축학부를 졸업하고 도쿄대에서 공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1959년 김재원 국립박물관장으로부터 박물관 업무를 도와달라는 요청을 받아 귀국해 경주 감은사지 발굴 작업을 주도했다. 우리나라 기술과 인력으로 이뤄낸 최초의 유적 발굴이었다. 그 뒤 박물관 고고과장, 문화재관리국 문화재연구실장을 거쳐 초대 국립문화재연구소장(1975~1987년)을 18년간 맡으며 전국의 발굴 현장을 이끌었다.

 

그의 이력이 곧 한국 고고학의 역사가 됐다. 일제에 의해서가 아니라 우리 손으로 유적 발굴이 이뤄지기 시작하는 1960년대부터 개발 계획으로 인해 대규모 유적 발굴이 시행되는 1970년대 주요 유적 발굴을 도맡았다. 경주관광개발 계획의 일환으로 시작한 경주 천마총과 황남대총 발굴이 대표적이다. 당시 황남대총 발굴을 지시하는 박정희 전 대통령 앞에서 "섣불리 대형 고분을 발굴하기보다 근처의 작은 고분부터 파보자"고 건의해 1973년 천마총을 먼저 조사하게 된 일화는 유명하다. 경주 황룡사지와 안압지 등 오늘날 우리가 볼 수 있는 경주 지역 대부분의 유적을 비롯해 익산 미륵사지 등이 그의 손을 거친 기념비적 유적들이다.

 

그는 생전 본지 인터뷰에서 "천마도가 발견됐을 땐 그 자리에서 쓰러질 뻔했다"고 했다. "손대는 순간 가루가 될지도 모를 그 천마도를 내가 무덤 바깥으로 들어냈다. 책임져야 할 어려운 일은 직접 하는 게 지휘자의 의무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가장 아낀 고고학자

창산은 박정희 전 대통령이 가장 아끼고 신임했던 고고학자였다. 지건길 전 국립중앙박물관장은 "박 전 대통령은 경주에 올 때마다 '김 박사 어디 계시느냐'며 찾았다"고 했고, 정양모 전 국립중앙박물관장은 "국립경주박물관 개관식에 온 박 대통령이 '김 박사를 부르라' 하더니 우리가 아닌 창산에게 금일봉을 줘서 당황했던 기억이 난다"고 했다.

 

창산은 1998년 회갑 기념 논총 수익금과 한림대 퇴직금을 쾌척해 '창산문화재 학술상'을 마련하는 등 인재 양성에도 힘썼다. 본지 인터뷰에서 그는 "사람들과 만나 섞여 있는 것보다 땅 파는 게 더 좋았다"고 했다. 지건길 전 관장은 "고고학자로서 누릴 수 있는 발굴 복, 유물 복을 많이 누리셨고 인복도 많았다. 모두 본인이 쌓은 덕"이라고 했다.

허윤희 문화부 기자 

 

□ 2016.03.26 헌법학자 김철수 교수, "대통령에 국회해산권 있어야"

헌법학계의 원로 학자인 김철수 서울대 명예교수. /조선DB

 

김철수(金哲洙83) 서울대 명예교수는 헌법(憲法) 학계의 태산북두(泰山北斗)와 같은 존재다. 대한민국에서 법학(法學)을 공부한 사람치고 ‘김철수’ 이름 석자를 모르는 이가 없으며, “그의 헌법학을 보지 않고 고시에 붙은 사람이 없다”는 말이 회자(膾炙) 된 지 오래다. 평생 후진 양성에 힘써 온 김 교수는 은퇴 후에는 참된 원로(元老)의 길이 어떤 것인지 실천해 왔다.


그는 대립과 반목으로 점철된 우리 정치현실을 안타까워하며 칼럼과 언론 기고문, 인터뷰 등을 통해 ‘쓴소리’ ‘바른소리’ 하기를 마다하지 않았다. 김 교수는 최근 지난 십여년 간 언론에 기고해 왔던 시사평론과 기초연구 논문 등을 묶어서 《헌법과 법률이 지배하는 사회》(진원사)라는 책을 펴냈다.

 

언론 기고문을 엮었다고 해서 내용이 딱딱하거나, 한물간 내용일 것이라고 생각하면 오산(誤算)이다. 김 교수는 마치 선생님이 학생들을 가르치듯이 모든 논설을 주제별로 분류하여 한 권의 ‘민주주의 교과서’처럼 구성했다. 딱딱한 법률 이야기의 나열이 아니라, 지난 수년 동안 우리 정치현장에서 벌어진 수많은 이슈와 살아 있는 사례를 통해 자연스럽게 헌법과 법률, 그리고 민주주의의 기본에 대해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편집한 것이다. 책장을 넘길 때마다 평생 법치주의 실천을 위해 몸바쳐 온 원로 학자의 정치 발전을 바라는 진심 어린 애정이 묻어난다.

 

김 교수는 이 책의 발간 목적을 다음과 같이 밝혔다.

 

“정치개혁과 국정운영은 정치인의 독점 영역이 아니고, 주권자인 모든 국민이 관심을 갖고 정치인, 공무원들의 반성을 촉구하고 개혁을 선도하여야 한다. 그러기 위해 입헌주의와 법치주의에 대한 상식이 필요하다. 주권자인 국민이 주권을 바로 행사하여 이들 종복(從僕)들을 제대로 지도하기 위해서는 헌법과 법률을 알아야 한다. 

 

▲김철수 교수의 신간 《헌법과 법률이 지배하는 사회》

 

"국회선진화법은 '야당결재법'"

언론은 벌써 19대 국회를 ‘최악의 국회’로 평가하고 있다. 19대 국회는 ‘식물국회’ ‘불임국회’라는 오명(汚名)으로 역사에 기록될 것이다. 김 교수는 “여야(與野)의 극한 대립으로 안보(安保)는 뒷전이고 정치권이 노사(勞使) , 이념 간, 세대 간의 대립을 조정할 수 없는 상황에 와 있다”며 “20대 국회의원 선거와 다음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이런 후진적인 정치현실이 재연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헌정(憲政)의 길잡이가 되는 책을 엮을 필요가 있다는 생각을 했다”고 말했다.

 

이 책은 ‘헌법과 입헌주의란 무엇인가’에서 시작하여 우리나라의 대통령, 정부, 국회, 법원, 헌법재판소, 정당, 선거, 법질서와 통일 등에 대해 지난 10여년 간 벌어진 우리 현실정치의 이슈와 결부시켜 이해하기 쉽게 설명하고 있다. 김철수 교수를 직접 만나 법치주의와 우리의 정치현실에 대해서 들어보았다.

 

-교수님께서는 기회 있을 때마다 소위 말하는 ‘국회선진화법’을 폐기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국회선진화법은 지난 18대 국회 마지막 때 통과되었습니다. 국회의원의 선의(善意)를 믿고 만든 법인데 지난 4년간 보았듯이 아무 일도 하지 못하는 ‘식물국회’로 만들었습니다. 민주주의는 다수결에 의한 의사결정을 전제로 하는 것입니다. 국회는 다수당이 책임을 지는 대의(代議)기관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회선진화법은 5분의 3 이상이 찬성하지 않으면 법률 하나 통과시킬 수 없도록 만들어 놓았습니다. 세계에 유례가 없는 반민주화법이고, 반책임정치법입니다.

 

-이 법을 개정하고 싶어도 소수당이 찬성하지 않으면 불가능하다고 하는데요.

“야당의 의사를 존중할 수는 있으나, 소수당에 입법 결재권을 주는 나라는 없습니다. 어느 언론은 이 법을 ‘야당결재법’이라고 이름 붙였는데 아주 절묘한 작명입니다. 수많은 언론인, 정치인, 학자가 5분의 3 가중의결 정족수 제도는 민주주의 원칙에 맞지 않기 때문에 폐지하거나 개정해야 한다고 주장해 왔습니다.

 

그래서 여당은 지난 1 11일 선진화법을 일부라도 고치자며 의장의 직권상정 사유에 ‘국회의원 과반수’가 요구할 때는 가능하다는 개정안을 제출했습니다. 의장 직권상정의 범위를 좀 넓혀서 숨통이라도 트이게 하자는 것인데, 야당은 이마저도 받아들이지 않고 있습니다. 현재 헌재(憲裁)가 ‘19대 국회의원 임기 말까지 이 문제에 대한 최종 결정을 내리겠다’고 밝힌 상태입니다. 저는 헌재 결정에 앞서 19대 국회가 먼저 이 법의 전부를 폐지하는 게 옳다고 봅니다.

 

"공직자는 선서 이후부터 자격 생겨"

김 교수는 “민주정치라는 것은 ‘국민에 의해 선출된 다수가 정치를 하고, 책임을 지는 다수결의 원칙이 작동하는 제도’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다수당이 책임을 질 수 없는 정치는 다수결에 위반되며 민주정치 자체에 위반됩니다. 국회선진화법은 국민 다수가 지지해서 다수당을 만들어주었는데도 야당이 반대하면 아무 법률도 못 만들게 한 민주주의에 반하는 법률입니다. 이는 결국 대통령의 국가 통치행위를 마비시키는 결과로 나타납니다. 우리는 국회의석의 40%만 가지면 법률제정을 마음대로 거부하게 하는 나라가 되었습니다. 여기에 더해 국회의장이 직권으로 안건을 상정할 수 있는 권한까지 제한해 놓았습니다. 이는 ‘신종입법독재국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위헌적인 상황이 지속되고 있는 것입니다.

 

-교수님께서는 상임위원회(常任委員會) 의장직을 여야가 나누어 차지하는 것도 위헌이라고 지적하셨습니다.

“상임위원장직을 여야가 나누어 가지는 것은 독일 같은 연립정부제를 채택한 나라 외에는 없습니다. 대통령 책임제 국가에서는 의석이 한 석이라도 많으면 상임위원장직을 독점합니다. 그래야 국정을 책임진 다수당이 책임정치를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과거에 우리나라도 다수당이 상임위원장을 독식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상임위원장직을 여야가 나누어 갖게 된 것은 1987년 노태우 대통령 시절부터입니다. 당시 여소야대(與小野大) 국회가 되면서 국정이 마비되자 국회운영을 하려고 어쩔 수 없이 야당과 위원장직을 나누어야 했습니다. 그 후로 관례라며 그렇게 해 오고 있는데 법률적인 근거도 없고, 대통령제에 위반되는 것이기 때문에 즉시 시정해야 합니다.

 

2012 7 2일 오후 제 19대 국회 개원식이 열린 가운데 의원들이 국회의원 선서를 하고 있다./조선DB

 

-우리는 그동안 공직자의 취임선서에 대해서 그다지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고, 하나의 요식행위라고 생각해 온 경향이 있습니다. 교수님께서는 취임선서의 중요성을 강조하셨는데요.

19대 국회가 개원일을 한참 넘기고도 개원을 하지 않은 적이 있습니다. 당시 여야당이 일을 하지 않고도 세비(歲費)를 받았습니다. 당시 제가 개원(開院)조차 하지 않았으면서 세비를 받을 권리가 있는지에 대해 법적인 검토가 필요하다고 문제를 제기한 적이 있습니다. 공무원의 취임은 취임선서와 동시에 시작됩니다.

 

대통령도 선거에 의해 취임하는 게 아니라 취임선서를 해야만 대통령직을 수행할 수 있습니다. 국회의원도 마찬가지입니다. 취임선서는 국회의원 자격의 출발선입니다. 대한민국헌법과 국가에 충성하겠다는 선서를 하지 않고, 세비를 받아 온 것이 관례라고 하겠지만, 이는 헌법과 법률에 어긋남으로 반드시 폐지해야 합니다.

 

김 교수는 “국회의원이 국회 개원에서 선서를 거부하거나 속임수로 선서한 의원이 선서를 준수하지 않으면 자격심사의 대상이 된다”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국회법의 선서 내용인 ‘헌법준수, 국민의 복리 증진, 평화적 통일’에 반대해 선서를 거부하는 당선자나, 선서 후 이 내용에 반대하는 의원은 국회의원 자격이 없습니다. 현재 국회의원 퇴출방법은 자격심사와 제명 두 가지가 있는데, 선서를 위반해 헌법을 파괴하고 국헌을 문란하게 하는 사람은 애당초 국회의원 자격이 없기 때문에 국회는 국회가 가진 자격심사권을 엄중히 적용해서 무적격자를 가려내야 합니다. 헌법재판소가 통진당 소속의원의 자격을 박탈한 이유도 여기서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대한민국에 무법과 불법이 판치고 사기가 증가하는 이유

-교수님께서는 좌파정부 출범 후 언론 기고문을 통해 대한민국의 기본질서가 흔들리는 것을 많이 우려하셨습니다.

“맞습니다. 특히 참여정부(노무현 정부) 이후 헌법과 법률을 준수하지 않으려는 아노미 현상이 사회 전반에 확산되고 있어 무척 우려됩니다. 특히 당시 대통령이 나서서 헌법을 모욕하고, 공직자들은 헌법과 법률 위반을 방치했습니다. 이후 한국은 갈수록 무질서와 불법, 탈법 행위가 심해지고 있습니다. OECD 국가 중에 최고 높은 교통사고율, 고소고발률, 최고의 소송제기율, 최고의 자살률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무법천지의 집회 시위, 초강경의 노동쟁의, 공무원부패와 불법적인 정치행위가 만연합니다. 타인에 대한 욕설과 거짓말, 허위사실을 유포하여 인격 살인을 하고 따돌림도 심각합니다. 국민의 대표자로 입법활동을 해야 할 국회의원들이 걸핏하면 거리에 나와서 폭력시위를 조장합니다. 저는 이런 현상이 1988년 민주화 이후에 민주주의의 이념인 자유평등평화를 잘못 이해해서 생긴 현상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2015년 11월 14일 오후 서울 광화문, 서울광장을 비롯한 도심지역에서 동시 다발적인 반정부 집회가 열린 가운데 광화문 세종대로에서 시위대들이 밧줄을 이용해 차벽 대열에 있던 경찰 버스를 끌어내고 있다./조선DB

 

-우리나라에 이처럼 무법과 무질서가 판을 치게 된 가장 큰 원인은 무엇이라고 보시는지요.

“가장 먼저 법의 권위가 지켜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법을 집행하는 경관이나 공무원, 수사와 공소를 맡고 있는 검찰의 권위가 엄정하게 지켜져야 합니다. 둘째는 엄정한 법 집행이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경찰이 귀찮다고 시위 현장의 범법자를 검거하지 않거나, 검거해도 훈방하는 일이 많습니다. 마지막으로 법원의 온정주의 양형(量刑)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야간집회, 허위사실 유포, 상습시위꾼 등에 대해 툭하면 무죄판결을 내리고 있습니다. 1심에서 중형을 받아도 2심에서 감형을 해주니, 항고가 필수적 절차가 되었습니다. 판사 중에는 법정 최저형만 선고하려는 경향이 있는데 이렇게 해서는 형벌의 예방적 효력을 발휘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자꾸 특별법을 만들어 법정형을 올리는데, 결국 온정주의 판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결국 모든 국민이 기본 법질서 지키기부터 생활화 해하겠군요.

“맞습니다. 국민의 법의식을 높이고, 공권력의 권위를 찾아 법집행을 공정 무사하게 해야 합니다. 당연히 신상필벌이 확실해야 하고요. 우리 국민들이 ‘국민주권’과 ‘자유’라는 개념을 혼동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주권자가 국민이라고 할 때 국민 개개인이 주권자가 아니라, 전체 국민이 주권자라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법은 국민의 대표자가 국민을 위하여 만든 것이기 때문에 반드시 이를 지켜야 합니다. 정치권은 우리 현실이 남북이 대치하는 엄중한 안보 상황 속에 있음을 한시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 헌법이 바뀌지 않는 한 그 어떤 정권도 국민이 ‘대한민국의 수호’를 위해 정권을 위임한 것이라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무슨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하라고, 특정 정당을 지지해주는 것이 아닙니다.

 

"판사들은 피해자와 그 가족의 인권을 생각해야 

김 교수는 “개인의 자유보다는 국가의 안전보장 질서유지 전체 국민의 공공복리가 더 중요한데 이를 모르는 공무원과 검사, 판사들이 늘고 있어 문제”라고 말했다.

 

“우리나라에서는 자유를 방종이라고 생각하는데 헌법은 자유와 권리도 ‘국가안전보장질서유지공공복리를 위하여 법률로 제한할 수 있게’하고 있습니다. 국가나 사회의 안전이 보장되지 않으면 국민의 권리도 빈말이 됩니다. 우리가 흔히 ‘판사가 양심에 따라 재판한다’는 것을 개인의 양심과 재량으로 착각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양심이라는 것은 법관이라는 직분에 대한 양심과 법률에 대한 양심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법관의 양형은 법에 따라 매우 엄중해야 합니다. 양심에 따른 판결이 마음대로 형량을 선고할 수 있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실례로 요즘 사형선고를 회피하는 법관들이 많은데 형벌의 목적이 교육하여 재사회하는 데 있다고는 하지만, 교육이 불가능한 위험범에까지 교육형을 선고해서는 안 됩니다.

 

-사형을 선고해 봐야 어차피 집행이 되지 않기 때문에 사형을 회피하는 판사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자기들이 굳이 원성을 살 필요가 없다고 하여 온정주의적 판결을 내리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반인륜적인 극악범에 대한 사형은 필요악(必要惡)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형제도의 존치 문제가 학문적 논쟁의 요소이기는 하지만, 실제에는 이를 사회의 안전보장 문제로 접근해야 합니다. 현행 헌법과 법률이 사형제도를 인정하고 있고, 헌법재판소도 합헌성을 인정하고, 국민의 70%가 사형에 찬성을 하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법관들이 사형선고를 주저해서는 안 된다는 의미입니다. 다만, 국회는 사형제도에 대한 깊이 있는 연구를 통해 정치범이나 양심수에 대한 사형제도는 폐지하되, 극악무도한 사형수의 집행은 독려하고, 정부나 법원 검찰이 사형제도를 적절히 운용하고 있는지 감사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입법론으로는 사형을 폐지하는 것은 좋겠습니다만 이 경우 200년형, 300년형으로 하여 감형하더라도 석방은 될 수 없게 해야 하겠습니다. 또한 사형수의 행형(行刑)은 보다 엄중해야 합니다. 판사들은 피해자와 피해자 가족의 인권도 생각해 주어야 합니다.

 

김 교수는 “법관의 신분 보장은 법관이 좋은 판사로서 직분을 다하고 있을 때에만 한정되는 것”이라며 “헌법과 법률에 위반하여 정치적 중립성을 지키지 않고, 편향적인 판결을 일삼고, 법관의 품위를 손상시키는 경우 법관의 신분을 보장해서는 안 된다”고 덧붙였다.

 

"3의 중도정당 탄생을 위한 환경 마련해야"

-이제는 개헌(改憲)을 이야기할 때 아닌지요.

“이제는 해야죠. 대통령제에서는 야당이 다수로 국회를 지배하는 경우 국정이 마비됩니다. 국회가 개헌논의를 할 때 대통령은 국가안보와 통일국방국민통합 문제를 담당하고, 내정(內政)은 국무총리를 중심으로 운영하는 이원(二元) 정부 형태를 함께 논의했으면 합니다. 내치에 있어서는 국회와 내각이 정권을 공동책임 지게 하는 것이죠. 다만 분단국가인 우리나라에서는 대통령은 국민이 직선(直選)하도록 하여 국민의 확고한 지지를 받게 해야 한다고 봅니다.

 

-외치가 분리되면 유사시에 국력 결집에 혼선이 오지 않을까요.

“이원정부제를 하면 대통령은 국회해산권을 가지고, 의회는 내각 불신임권을 가지기 때문에 서로 견제와 균형을 잡을 수가 있습니다. 대통령에게 국군통수권, 계엄권, 국회해산권, 중요공무원 임명권을 주면 대통령이 긴급명령권이나 계엄권을 행사할 수 있으니 위기에서는 대통령제적으로 운영되어 국력결집에 문제가 없습니다. 다만 이원정부제가 제대로 되려면 다당제(多黨制)가 되어야 하기 때문에 협상과 타협을 강조하는 제3정당을 육성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를 위해서는 정부형태와 선거제도의 개혁이 필요합니다.

 

-선거 때마다 기존의 여야(與野) 정당 외에 다른 정당이 출연하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 대통령제 정치현실에서 제3의 정당 출연이 쉽지 않습니다. 출현한다고 해도 ‘사꾸라’라고 비판되어 제3당은 결국 여야의 큰 정당에 흡수되는 경향을 보였습니다. 따라서 현재의 대통령제는 결국 승자독식과 2대 정당제로 운영되기 쉽습니다. 문제는 양대 정당하에서는 야당이 차기에 집권을 하려면 대통령이 집권하는 정당을 때려 부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집권당에 협조할수록 오히려 집권기회가 멀어지기 때문에 결국은 결사항쟁과 발목 잡기에 매달릴 수밖에 없는 것이죠.

 

이런 사생결단식의 정치를 타파하기 위해서 대통령제 아닌 의원내각제나 이원정부제를 하여 다당제를 육성하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3당이 극우(極右)나 극좌(極左)를 배격하고 중도(中道) 정책을 추구하면서 제1당이나, 2당과 정책연합을 통해 연합정권을 형성하면 극단적인 정책을 회피하는 민주정치가 발달할 가능성이 많습니다.

 

-새 헌법 하에서의 선거제도는 어떠해야 한다고 보시는지요.

“선거제도는 국가마다 달라서 몇 백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그러나 토론과 타협을 중시하고 극단에 흐르지 않는 중용적인 정치를 위해서는 인물과 정당에 대한 투표를 하여 비례대표제로 의석을 배분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그러면 여러 가지 이념과 정책을 가진 국민이 자기 마음에 드는 인물과 정당을 선택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김 교수는 “독일식인 인물투표와 정당투표를 하여 정당에 비례하여 의석을 배분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며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그렇게 하면 정당이 여러 개 생길 것이고, 국민들이 많이 투표한 온건보수중간파온건진보 정당들이 서로 연립을 하여 정권을 운영할 수 있을 것입니다. 독일에서는 국회에 6개 정도의 정당이 존재하는데 이제까지 주로 온건보수와 중도파가 연립정권을 형성해 왔습니다. 그러나 현재는 온건보수와 온건진보의 대정당이 대연정을 하여 어느 이념에 치우치지 않는 정치를 하고 있습니다. 선거 후에 연립계약을 작성하여 정책의 방향에 타협하고 있어 4년은 정치가 안정되어 있습니다. 의원내각제이고 다당제이기는 하지만 정권은 안정되어 총리가 10년 이상 재직하여 정국이 안정되어 있습니다.

 

김 교수는 “그 어떤 경우라도 헌법개정의 목적이 정치인 국회의원의 권한 강화여서는 안 되며 국가의 안전보장과 통일실현, 국민행복 증진에 있어야 한다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광복 70주년을 맞은 2015년 8월 15일 서울 청계광장에서 애국단체총협의회 등 보수단체들이 '대한민국 건국 67주년 기념 국민대회'를 열고 건국절 제정을 촉구하며 북한의 군사도발 등에 대해 규탄했다. 참가자들이 건국절 제정을 촉구하며 '미래로!통일로!세계로!' 구호를 외치고 있다. /조선DB

 

"임시정부 수립일이 건국일이 될 수는 없어"

-새삼스럽게 건국일(建國日) 논쟁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헌법학자로서 이 문제를 어떻게 보시는지요 

“그러니까 현재 대한민국 정부수립일인 1948 8 15일을 건국절로 정해야 한다는 사람들과 1919년의 상해임시정부 수립일을 건국일로 삼아야 한다는 사람들이 나뉘고 있습니다. 상해임시정부 건국일을 들고 나온 사람들은 주로 진보 세력인데 그들은 현재의 대한민국은 분단국가이며 통일이 되기 전까지는 정통성이 없다고 보는 입장입니다. 따라서 그들은 건국의 주역으로 김구(金九)를 내세우고, 이승만(李承晩)을 분단의 원흉으로 폄하하고 있습니다. 1948 8 15일을 건국일로 주장하는 사람들은 대한민국이 정통국가이고 북한 정권은 UN의 결의를 따르지 않고 소련의 지시에 따라 세워졌기 때문에 법적 정통성이 없다고 보는 것이고요.

 

-1948년 대한민국 건국을 주장하면 임시정부의 정통성을 훼손하는 것이 되는지요.

“이념적 정통성으로 볼 때 우리가 상해임시정부의 법통(法統)을 따르는 것은 당연합니다. 우리 헌법 전문에도 ‘대한민국은 기미삼일운동으로 대한민국을 건립하여 세계에 선포한 위대한 독립정신을 계승하여 이제 민주독립 국가를 재건함에 있어서’라고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국가론(國家論)에 입각하여 실질적 건국으로 인정하려면 일정한 요건을 갖추어야 합니다. 영토가 있어야 하고, 국민이 있어야 하고, 주권이 있어야 하는데 임시정부는 이 중에 어느 것도 갖추지 못한 망명정부였습니다. 엄격하게 보자면 망명정부라고 하기에도 문제가 있는 것이 임시정부는 대동단결하지 못하여 국제적인 승인을 받지 못했고, 국민들의 실질적인 동의를 얻지 못하였습니다. 전후(戰後)에 국제적 승인을 받아 통치행위를 한 프랑스 드골 망명정부와는 상황이 다릅니다.

 

-국민당의 장개석 총통이 중경(重慶)의 임시정부를 지원하지 않았나요.

“안타깝게도 중경 임시정부는 정부로서 승인을 얻지 못했고, 광복군이 참전하지 못해서 망명정부로서 무게를 갖지 못했습니다. 환국(還國) 후에는 임정의 법통을 살려 미군정에게 행정권 이양을 요청했지만, 미군정뿐 아니라 미 본국으로부터도 승인을 얻지 못했습니다. 결국 국제법으로 국가로 인정이 안 되고, 국내법적으로도 국가의 구성요소가 성립되지 않기 때문에 망명정부라고는 할 수 있겠지만, 국가의 건설이라고는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우파 쪽은 상해임시정부 건국설에 대해 ‘결국 대한민국의 건국과 이승만 대통령을 부정하기 위한 맥락에서 그런 주장을 하고 있다’는 의심을 하고 있습니다.

“설사 좌파들이 이승만의 대한민국 건국을 부정한다고 해도 이승만과 상해임시정부의 연결고리까지 끊을 수는 없습니다. 이승만이 임시정부 초대 대통령을 지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승만이 친일파를 등용해서 정통성이 없다고 주장하기도 하는데, 북한의 초대 내각은 민족반역자와 친일파를 많이 기용했지만, 이승만 정부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물론 일제하에 일하던 공무원들을 건국 과정에서 참여시키기는 했지만, 그 자체를 놓고 대한민국을 친일파가 세운 나라라는 식으로 매도할 할 수는 없는 것이죠. 더구나 당시 공산당과 진보세력이 극렬하게 반대했음에도 불구하고 국민의 90%가 자유롭게 투표에 참여하여 건국을 이루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1948년 8월 15일 서울 중앙청에서 열린 대한민국 정부 수립 축하식. 이승만 초대 대통령은 자유와 민주가 넘치는 새 나라 건설을 다짐했다./조선DB

 

"대한민국은 친일파가 세운 나라가 아니다"

-좌파들은 분단의 책임까지 이승만 대통령에게 덮어씌우고 있고, 이를 국사교과서를 통해 교묘하게 학생들에게 전파하고 있는데요.

“명백한 것은 김일성이 대한민국 건국 2년 전에 이미 소련의 지시에 따라 우파인사를 숙청하고, 인민위원회를 만들고 실질적인 인민공화국을 수립하여 일당(一黨) 독재국가를 건설하였다는 사실입니다. 더구나 이 과정에서 임시정부의 행정권이양 요청을 거부하고 협력하지 않았으니 임정(臨政)의 법통성 계승도 인정받을 수 없습니다. 미소(美蘇) 공동위의 합의에 따른 것도 아니고, 유엔 결의에 위반하여 1948 8월에 부정선거를 통해 정부를 수립했기 때문에 대한민국이 먼저 단독정부를 세웠다고 비난하고 있습니다만 이것은 형식적인 것이고, 정통성을 상실했고, 주요 국가의 승인도 얻지 못했음으로 불법정부라 하겠습니다.

 

-많은 젊은들이가 대한민국을 친일파가 세운 나라라고 오해하고 있습니다.

“말씀드렸지만, 북한은 오히려 초대 내각에 친일파를 많이 등용했지만, 우리는 헌법에 임정의 정신을 계승하기로 했고, 임정요인이 국회의장, 부통령, 국무총리, 장관으로 취임했습니다. 1950 530 선거에서는 단선단정(단독선거 단독정부)이라고 반대했던 정치인들까지 대거 선거에 참여하여 대한민국 수립이 역사적 대세임을 보여주었습니다. 만약 남북 대치나 긴장, 625가 없었으면 친일파 숙청과 민족정기 부활이 더욱 철저하게 진행되었을 것입니다. 친일파 척결을 잘하지 못한 근본 이유는 긴장을 고조하고, 전쟁을 일으킨 공산주의자들을 막기 위하여 일제의 경관이나 공무원을 쓰게 되었기에 그들의 죄책이 더 크다 하겠습니다.

 

-건국 과정에서 이승만 대통령의 업적을 평가해 주시면요.

“이승만 대통령은 대통령 취임 후 미국의 정책에 반대하여 이승만 라인을 선포하고, 일본 어부를 체포하여 한국영토를 지키려고 노력했습니다. 좌파들 주장처럼 소위 ‘미국의 주구’ 노릇을 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가 평생에 걸쳐 항일독립투쟁을 했기 때문에 친일파가 아닌 것은 역사적 사실입니다. 더구나 단독정부라도 만들어서 북한과 소련이 기획한 남북한 공산화를 막았던 것은 그가 당시 냉전의 방향을 정확하게 읽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습니다.

 

 625 남침 이후에 미국과 유엔에 요청하여 나라를 지켰으며 반공포로를 석방하고, 한미(韓美)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하는 등 외교에는 천재적이었지만 내정에는 무능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한가지 잊어서는 안되는 것이 이승만이 625 이전에 농지개혁을 단행했기 때문에 농민들이 적극적으로 나서서 나라를 지켰다는 겁니다.

 

통일을 대비한 개헌 필요

-개헌을 하더라도 통일을 대비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물론입니다. 통일은 우리 헌법의 지상명령입니다. 북한은 무력통일을 획책하고 있습니다만 우리 헌법은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에 입각한 평화적 통일정책을 수립하고 이를 추진하도록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정부는 서독식인 평화적 통일정책을 수립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상대방이 도리도 법률도 모르고 핵무기로 장난을 하고 있으니 문제입니다. 우리는 북한인권법을 만들어 북한인민의 기본권을 보장하고 내부적으로 북한이 민주화되어 시민혁명으로 통일의 기회가 오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이를 위해서 핵무기 폐기와 세계로의 개방을 위한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김 교수는 책에서 통일 후의 독일의 발전을 소개하고 있으며, 우리나라 통일 이후의 헌법에 대하여 많은 지면을 할애하고 있다. 그는 “통일한국은 민주적 기본질서가 지배하는 사회복지국가가 되어 모든 국민이 평등하고 자유롭고 행복하게 살 수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독일통일과 같은 방법이 이상적인데 북한이 흡수통일이라 하여 결사반대하고 있어 문제가 많습니다. 북한이 민주화되고 법률과 계약을 지킬 줄 알아야 진정한 통일이 되겠는 데 걱정입니다. 북한이 핵무기를 포기하고 중국처럼 자본주의 경제제도를 채택한다면 우선 국가연합을 하여 동질성을 회복하고 북한의 경제발전을 이룬 뒤에 연방제로 통일하는 방법도 있습니다. 일부에서는 북한 내에서 이변이 일어날 것이라고 생각하여 흡수통일을 대비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어쨌든 우리는 북한에 돌발사태가 있거나 시민혁명이 있는 경우에 통일의 기회를 놓쳐서는 안 될 것입니다.

 

김 교수는 마지막으로 “통일비용을 걱정하는 사람이 많은데 통일의 이득이 훨씬 많을 것이기에 통일을 회피해서는 안 된다”며 “우리 국민 모두가 동포인 북한주민을 노예상태와 기아상태에서 해방하기 위하여 평화적 자유민주주의 통일에 헌신하여야 한다”고 말했다.

 이상흔 조선pub 기자

 

□ 박동규 시인 “헬조선은 제 얼굴에 침뱉는 격…”

 박동규 서울대 명예교수가 지난달 27일 서울 서초구 양재동 자신의 사무실 주변 양재시민의숲에서 포즈를 취했다. 그는 자연과 조화를 이루고, 사람끼리 화합하며 살자는 메시지를 이 시대에 끊임없이 던지고 있다 그게 문학인으로서 제 역할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김선규 기자 ufokim@

 

박동규 서울대 명예교수

문학평론가인 박동규(77) 서울대 명예교수를 만나면 물어보고 싶은 게 있었다. 역시 서울대 명예교수인 황동규(78) 시인과의 관계에 대해서다. 그들의 부친인 시인 박목월, 소설가 황순원 선생이 사돈을 맺기로 했다가 둘 다 아들을 낳는 바람에 이름만 같게 지은 것으로 세간에 알려져 있다. 과연 그게 맞는지?


“잘못 알려진 겁니다. 황순원 작가는 고향이 평남으로 이북이고, 제 아버지 박목월 시인은 경북 경주 월성이 고향입니다. 사돈을 맺자고 할 정도로 친분이 있지 않았어요. 그런데 우연히 약속이나 한 듯이 아들 이름이 동규(東奎)로 같았던 것이지요.” 동규라는 이름을 쓰는 두 아들은 같은 해에 서울고에 들어간 동기동창으로, 서울대 교수도 함께했다. 한 사람은 문학평론가이자 산문가로, 또 한 사람은 시인으로 크게 이름을 떨쳤다. 두 사람이 한국 문학사에 ‘우연의 아우라’를 이토록 멋지게 뿌릴 수 있었던 것은, 각자 아버지의 명성에 누가 되지 않게 온 힘을 다해 살아온 덕분일 것이다.


박 교수는 최근 에세이집 ‘어머니의 눈사람’을 펴냈다. 그 서문에 이런 대목이 있어 눈길을 끈다. “순한 글임을 밝힌다.” 가족과 함께, 이웃과 더불어 살아가는 지혜를 시(詩)에 기대어 풀어낸 산문집이다. 이를 굳이 ‘순한 글’이라고 한 것은, 현재의 세상에는 사람끼리 서로를 공격하는 ‘독한 언설’이 판치고 있다는 인식 때문일 것이다.


그의 책은 단숨에 읽힌다. 이른바 명문대학에서 오랫동안 강의한 학자 특유의 현학이 전혀 없다. 자신의 경험과 생각을 아주 쉬운 말로 풀어쓰고 시문(詩文)을 적절히 섞어서 울림의 진폭을 넓혔다. 박람강기(博覽强記)를 내세우지 않아도 문자향(文字香)을 절로 풍기는 내공이라고나 할까.


“따뜻한 마음의 글을 테마로 해서 서로 위로하고 어루만지며 가슴을 열어보고 싶었습니다. 그게 내가 할 일이라고 생각해서입니다.”

 

지난달 27일 서울 서초구 양재동 ‘심상사’ 사무실에서 만났을 때, 그는 특유의 웃음기 가득한 얼굴로 인터뷰에 응했다. 올해 77세가 된 그에게서 삶과 문학 이야기를 듣고, 안팎으로 어지러운 상황에 있는 우리 사회에 주는 메시지를 얻고 싶었다.

 

―어떻게 지내십니까.

“교수 정년 퇴임 후 강연을 자주 다녔습니다. 요즘엔 힘이 들어서 멀리 못 갑니다. 서울과 수도권 지역에서 요청이 오면 한 달에 서너 번씩 강연을 하는 정도입니다. 주로 이 사무실에서 일하면서 시간을 보내고 있지요. 그런데 어쩌지요? 손님을 오라고 해 놓고 사무실이 누추해서….”

 

책이 가득 들어차 있는 사무실은 실제 허름해 보였다. 그의 부친인 박목월 시인이 직접 한자로 쓴 현판 ‘心像’의 위용도 남루를 다 가리진 못했다. 컴퓨터 한 대와 응접 소파가 겨우 자리를 잡고 있는 공간의 한쪽에서 여직원 혼자서 월간 문예지 ‘심상’을 우송 봉투에 넣고 있었다.

 

 박동규(왼쪽) 교수가 30대 중반이던 1973년 서울 용산구 원효로 자택에서 박목월 시인과 포즈를 취했다.

 

‘심상’은 43년 된 잡지다. 한국 현대시사의 거목인 박목월 시인이 1973년 창간했다.

 

“아버지가 서울시문화상을 받으셨는데, 그 기금을 바탕으로 만드셨지요. 그런데 아버지는 잡지 창간 후 5년 만에 돌아가셨어요. 이후로는 제가 꾸려왔지요. 그게 벌써 38년이나 됐네요. 처음엔 목월 시인 자택 근처인 원효로에 사무실이 있었는데, 사정이 어려워져서 이쪽으로 쫓겨 온 것이지요, 허허.”

 

그는 글이나 말에서 ‘목월 시인’과 ‘아버지’를 혼용해서 썼다. 그 이유에 대해 그는 “목월은 내 아버지만이 아니다. 모든 사람의 아버지이자 한국 시인들의 아버지이다”라고 설명했다.

 

―유수의 문예지들도 경영이 어려워 폐간했는데, ‘심상’은 어떻게 버티고 있습니까.

“책을 두껍게 내지 못합니다. 사무실 직원이 한 명뿐이고, 광고나 판매를 위한 영업사원도 없습니다. 광고가 없으니 제가 강연료 등으로 번 돈을 집어넣는 형편입니다. 다행히 심상 출신 시인들이 원고료도 안 받고 글을 보내주니까 잡지를 내고 있습니다. 저 혼자 제작을 책임지고 있지요.”

 

문학계에선 ‘심상’의 위상이 과거보다 떨어진 것에 대해 안타까움을 표하는 이들이 많다. ‘심상’은 한때 한국문학계의 대표적 문예지 중 하나였다. ‘심상’이 강릉 경포대에서 여는 ‘해변 시인학교’는 고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 등이 매년 참석할 정도로 성황을 이루기도 했었다. 이제 명맥을 이어가는 것조차 힘겨운 상황에 처한 것이다.

 

박 교수는 그러나 “사정이 어려워졌지만, 돈 있는 주변 사람들에게 손을 벌리지 않는다. 돈의 시녀가 되기 싫기 때문”이라고 했다. 언제나 웃는 얼굴인 그의 안에 딸깍발이 선비 기질이 있다는 것을 알게 해 주는 말이었다.

 

그는 이 대목에서 윤강로, 김송배, 문인수, 권달웅, 한택수, 이준관, 송종규, 조용미 등 심상 출신 시인들이 펴낸 시집 두 권을 건네줬다.

 

“책집에 오셨으니까 책을 드려야지. 책이 무겁다고 안 받아가려는 사람도 있지만….”

 

그의 음성은 나지막하면서도 부드러웠고 또 소탈한 느낌을 줬다. 그가 예전에 방송에 자주 출연했던 것을 자연스럽게 떠올리게 했다. 박 교수는 1986년부터 8년간 KBS 프로그램 ‘문화가산책’을 진행했고, ‘아침마당’ 고정 게스트로 인기가 높았다.

 

―방송에 자주 나오셨기 때문인지 친근하게 여겨지네요.

“네, 그렇다고들 합니다. 얼굴이 팔려서 지하철에서 신문으로 얼굴을 가리고 다니곤 했지요. 제가 진행했던 문화가산책은 우리나라에서는 처음으로 고급문화를 안방에 전달한 방송이었어요. 음악·연극·문학 등을 옴니버스 스타일로 묶어서 내보냈습니다. 제법 좋은 평가를 받았지요. 그런데 요즘 방송은 너무 흥미 위주로만 흐르는 듯합니다. 시청률 싸움 탓에 좋은 문화를 보여주는 방송이 적은 것 같아 아쉽습니다.”

 

―이번 책의 표제작인 수필 ‘어머니의 눈사람’은 참 감동적입니다. 그런데 현대 여성들에게 공감을 살까요.

(이 수필은 시인 남편이 시를 쓰는 데 방해가 될까 봐 석 달 된 아이를 업고 나와 몇 시간 동안이나 밖에 서서 눈을 맞고 있는 아내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박 교수의 어머니인 유익순 여사의 실화다.)

“지금 여성들에게 어머니 얘기를 한 것은 남편에 대한 이해를 바라는 마음에서입니다. 남편이란 돈 버는 기계가 아닙니다. 돈 못 벌어온다고 원망을 해서 되겠습니까. 아내와 남편이 서로 이해하고 가치관을 맞춰가면서 같이 살아간다는 생각을 해야 ‘진정한 집’이 됩니다. 얼마 전 한 지인이 그러더군요. 유능한 여성이 결혼해서 피부미용에나 신경 쓰고 살면 얼마나 큰 인력 낭비냐고. 현대 여성들은 진정한 집을 만드는 삶의 창조자가 돼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목월 선생이 부인을 배려한 이야기도 책에 있더군요.

 

(박 교수는 성인이 된 후 어머니에게 물었다. 돈을 많이 벌어오지 못한 시인 남편이 뭐 그리 좋아서 그때 밖에 나가 눈을 맞고 있었냐고. 어머니는 답했다. “그래도 네 아버지는 밤에 그렇게 시를 쓰고 나면 발표하기 전에 제일 먼저 나보고 읽어보라고 해.”)

 

“목월 시인이 가진 것이라곤 시밖에 없는데 그것을 가장 먼저 아내에게 보여줬던 것이지요. 어머니가 아버지와 함께 살아가며 힘든 일을 겪으면서도 시인 남편을 이해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시 한 편을 읽어보라고 하는 배려의 힘 덕분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부부간에도 이런 배려와 이해가 필요합니다. 서로 ‘나한테 해준 게 뭐가 있냐’고 따지고 들면 그건 가정이 아닙니다. 삶을 영위하고 의지하고 의논하는 게 가족이고, 삶의 동반자라는 의식만 있어도 가족 해체를 막을 수 있습니다.”

 

―6·25전쟁 중에 어머니 심부름을 하다가 죽을 고비를 넘겼다던데.

“열두 살 때 일입니다. 서울이 인민군 치하에 들어가자 아버지도 없이 어머니와 우리 3형제가 무작정 피란을 떠났습니다. 이리저리 헤매다가 경기 수원 근처 부곡의 한 철도관사로 피신했습니다. 그런데 인천상륙작전이 시작돼 서쪽 하늘이 불바다처럼 벌겋게 보였습니다. 어머니가 맏아들인 제 손을 잡고 당부하셨습니다. 서울 원효로 우리 집에 가 보라고. 국군이 상륙해서 아버지가 우리를 찾을지 모른다고.”

 

열두 살 소년은 포탄이 쏟아지는 사선을 넘어 서울로 향했고, 아직 국군이 입성하지 못했다는 것을 확인했다. 소년은 집에 가서 가족사진 앨범 두 권을 자루에 넣고 멜빵을 해서 등에 지고 다시 부곡을 향해 떠났다.

 

“다시 내려오는 길에 인민군 패잔병들을 만나 한 농가로 숨어들었습니다. 농가 짚더미 속에 숨어 있는데 한 인민군 헌병이 들어오더니 ‘걸을 수 있는 놈은 나오라’고 하더군요. 그러고는 움직이지 못하는 인민군은 그 자리에서 쏴 죽였습니다. 짚더미를 총검으로 찌르며 수색하기도 했지요. 자칫하면 총에 맞거나 칼에 찔릴 뻔한 위기상황이었지요. 그렇게 천신만고 끝에 목숨을 부지하고 다음 날 새벽 어머니가 계신 곳으로 뛰어갔습니다. 안양 근처에 왔을 때 미군이 진입해 오는 것을 봤습니다. 부곡 관사에 가니 어머니가 문 앞에 앉아 있다가 저를 붙들고 한없이 우셨습니다.”

 

포탄이 쏟아지는 사선을 넘어야 했던 소년은 얼마나 두려웠을까. 어린 아들을 서울로 보내야 했던 어머니는 얼마나 마음을 졸였을까. 이번 수필집은 그 뒷이야기를 이렇게 적어놨다. ‘아들을 믿고 어린 것을 전선을 넘어다니게 한 어머니는 평생 마음에 상처를 안고 살았다. 어느 비 오는 날 다 큰 아들이 학교에서 돌아오면 삶은 계란 하나 보물처럼 손수건에 싸놓았다가 손에 쥐여 주며 엄마 말을 믿고 따라준 내 아들이라고 하던 그 한마디가 평생 가슴에 기쁨의 꽃이 된다.’

 

―유명한 시인 아버지가 부담스러운 적은 없었습니까.

“사실 지금도 그렇습니다. 항상 마음에 부담이 따라다닙니다. 그래도 제가 그것에 주눅 들지 않는 이유가 있습니다. 중학교 입학하니까 선생님들이 제 이름을 안 부르고 ‘목월이 아들’이라고 하더군요. 학교 가는 게 재미없었습니다. 어머니에게 ‘나는 학교에서 내 이름도 없다’고 투정을 했습니다. 그때 어머니가 저를 껴안고 ‘야 이놈아, 그게 뭐가 나쁘냐. 누구든지 아버지가 있는 것이고, 너는 훌륭한 시인이 된 아버지가 있는데 왜 주눅 드느냐. 너도 훌륭한 사람이 돼서 네 아들이 자랑스러워하도록 해라’고 다독였습니다. 나중에 대학교수가 된 다음에도 이 말을 가슴에 새기고 살았습니다. 그 이후로 제 앞에 아버지를 먼저 얘기해도 하나도 섭섭한 게 없었습니다.”

 

―목월 선생은 인품도 뛰어났다고 들었습니다.

“제자들에게 집의 쌀도 퍼주는 성격이었습니다. 솔직히 저는 그 정도는 아닙니다. 아버지는 자식들한테도 큰 소리 한 번 안 치셨습니다. 차라리 매를 들면 좋을 텐데 4∼5시간씩 훈계를 듣는다고 생각해보세요, 하하. 한 번은 이런 일도 있었어요. 어느 날 제가 집에 든 도둑을 잡았습니다. 도둑이 도망가려고 뛰어내리다가 다리를 다쳤는데, 아버지가 나오시더니 ‘너는 들어가 있어라’고 했습니다. 아버지는 도둑과 새벽 4시까지 몇 시간 동안 대화를 했습니다.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그리 오래 했느냐고 여쭸더니 아버지가 ‘도둑도 사는 동안 고통이 많지 않았겠냐. 그걸 들어줬다. 그리고 통금이 해제될 때까지 말벗을 해줬다’고 하시더군요.”

 

―목월 선생의 여성 스캔들도 회자됐었지요.

 

(목월은 중년의 한때 자신을 연모하는 젊은 여성과 제주도에서 동거했다. 동거가 시작된 몇 개월 후에 제주에 나타난 목월의 부인은 아무 말 없이 옷과 돈 봉투를 놓고 갔다고 한다. 그런 부인 앞에서 젊은 여성은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었고, 스스로 목월을 단념했다. 곧 가정으로 돌아온 목월은 이전보다 훨씬 더 충실한 가장이 됐다.)

 

“어머니가 참 대단한 분이었지요. 아버지의 스캔들에 대해 어머니는 ‘시인은 신화(神話)를 지니고 있다. 스캔들은 신화이지 왈가왈부할 문제가 아니다’라고 하셨습니다. 영국의 문호 바이런도 그렇고, 워즈워스도 다 그렇게 신화가 남아 있지요.”

 

―부드러운 이미지의 교수님도 여성들에게 인기가 많지 않았습니까.

“저는 이상하게도 서울대 교수 재직 때 초반 20년 간 여조교를 안 썼습니다. 나중에 우리 조교가 왜 우리는 여조교가 없느냐고 물어봐서 그때 알았습니다. 둘러보니까 진짜 제가 여조교를 안 썼더군요. 저도 모르게 겁나서 그랬나 봅니다. 저는 교수 생활 초기에 굉장히 내성적이었습니다. 음악 감상 하고 테니스만 치고…. 잡지 ‘심상’을 하면서 비로소 여류시인도 만나고 그런 거지요, 하하.”

 

―이번 책에 과거 장마 때의 모습을 그린 게 있는데, 이웃끼리 내남없이 서로 돕습니다. 그런 공동체의 모습은 이제 다시 오지 않겠지요.

“제가 원효로에 살 때 장마가 되면 늘 물에 잠겼습니다. 물이 차면 이웃들이 서로 손을 잡고 물을 건너게 하고 내 집과 옆집을 구분하지 않고 가재도구들을 들어 옮겨주곤 했습니다. 서로 도우며 살았지요. 그러나 요즘엔 옆집 사람이 누구인지도 모릅니다. 아파트 문화의 병폐이기도 하고, 지금 우리의 삶이 그만큼 다양화한 탓이기도 합니다. 옛날엔 삶의 모습이 다 비슷비슷했거든요. 지금 우리 삶의 이기주의는 치유하기 어려운 구조가 된 게 사실이지요. ”

 

그는 우리 현실을 그렇게 진단하면서도 희망적인 대안을 내놓고 싶어 했다. 이웃끼리 서로 돕고 위로하며 살던 공동체 정신을 어떻게든 회복시켜야 한다고 강조하며 교육현장에서 그 싹을 키워보자고 제안했다.

 

“미국 초등학교에 홈스터디데이라는 게 있어요. 교사가 다른 인종의 학생들을 한 조로 묶어서 홈스터디를 시키지요. 이때 만나게 된 학부모들은 티타임을 하며 서로 이야기를 나누고, 자연스럽게 지역 사회에서 함께 살아가는 방법을 찾게 되지요. 우리나라 학교에서도 학부모들을 학교에 부정청탁이나 하는 ‘치맛바람’으로 여길 게 아니라 부모들이 자식을 매개로 지역 공동체에서 자연스럽게 어울릴 수 있게 해 줘야 합니다. 부모들은 자식을 경쟁의 도구로 삼는 태도를 버려야 해요.”

 

―일명 김영란법이 내일부터 시행되니 학교 현장에서도 여러 가지로 조심스럽다고 하더군요.

(‘부정청탁 및 금품 등 수수의 금지에 관한 법률’이 시행되기 바로 전날 인터뷰가 이뤄졌다.)

“법 취지에는 공감하지만, 이런 식으로 시행되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생각해요. 이런 것은 사회 각계에서 자생적으로 안으로부터의 토의를 거쳐서 나와야 합니다. 포괄적으로 대상을 정해서 온 나라가 도둑을 감시하듯 살게 생겼어요.”

 

그는 더 할 이야기가 있지만 속으로 삼키는 기색이었다. 법 시행에 대한 기대와 우려가 교차하는 시점이어서였을 것이다.

 

―‘헬조선’이란 말이 유행입니다. 한국이 지옥에 가깝고 전혀 희망이 없는 사회라는 의미라고 하더군요.

“저는 이해가 안 갑니다. 우리 사회에 문제가 있긴 하지만, 지옥이라고 욕하는 것은 자기 얼굴에 침 뱉는 거예요. 부정적인 견해를 가지면 진정한 성장을 이룰 수 없습니다. 나쁜 일도 많지만, 남 탓을 하며 비난하기보다는 그것이 없어지도록 함께 노력하는 게 더 중요합니다.”

 

―일부 기득권 세력의 부정부패, 경제 소득의 격차 등 사회의 부조리가 두드러지는 것은 사실이지 않습니까.

“선진국처럼 잘 사는 사람들이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하는 게 중요합니다. 그게 사회를 지탱시켜 줍니다. 그것과 함께 보통 사람들의 지혜도 필요합니다. 비록 부자로 못 살아도 자긍심을 가져야 합니다. 부자들과 물질적으로 비교하며 열등감과 분노를 가져선 자신의 삶을 살 수 없습니다. 나는 내 나름의 삶을 살기 때문에 자긍심을 갖는다는 자세가 있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선 교양을 갖추고, 자신의 값어치를 찾아야 합니다. 학교와 가정 교육이 그 역할을 해 줘야 합니다.”

 

―이번 책은 대한민국에 대한 애국심과 자긍심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일각에선 거부감을 보일 것도 같은데.

“참 안타까운 일입니다. 미국·영국·프랑스 어느 나라를 봐도 국민이 자기 집 안에 국기를 큼지막하게 붙여놓고 사는데 유독 우리는 애국이라는 말만 나오면 현기증을 일으킵니다. 애초 역사관이 잘못 길러진 탓입니다. 해방기 좌·우익의 신탁통치 문제, 우리 정부에 대한 부정적 견해가 지금까지 남아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낮고 부드럽기만 했던 그의 음성이 다소 높아졌다.

 

“국가 안에서의 삶을 영위하고 있는 사람이라면 우리 국가에 대한 자긍심을 가져야 합니다. 국가가 성립한 후에 우리의 삶이 있는 것 아닙니까. 자기 책임을 느껴야 합니다. 애국심은 당연히 가져야 할 것입니다.”

 

―지금 나라가 안팎으로 어지러운 상황인데 정치 지도자들에게 해 주고 싶은 말이 있다면.

“원론적이지만, 서로 껴안는 자세를 당부하고 싶습니다. 당장 눈앞의 이익이 아니라 먼 미래를 내다보고, 포용의 마음과 순수한 인간애가 우리 민족의 삶에 깃들도록 하는 데 헌신하기를 바랍니다.”

인터뷰 = 장재선 문화부장 jeijei@munhwa.com

정리 = 김인구 기자 clark@munhwa.com

 

□‘제국의 위안부’로 기소된 박유하 세종대 교수

2015-12-07

“위안부문제 매듭지어야… 양심적 한일 지식인들이 해결책 찾자”

▲그의 서재에서 만난 ‘제국의 위안부’ 저자 세종대 박유하 교수. 박 교수는 자신의 의도와는 정반대로 읽히는 책에 대해 답답함을 호소했다. 검찰의 기소 처분이 나온 뒤에는 너무 충격을 받아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할 정도라고 한다. 변영욱 기자 cut@donga.com

 

《세종대 일어일문학과 박유하 교수(58)가 펴낸 책 ‘제국의 위안부’는 이렇게 시작한다. ‘위안부의 존재를 일찍이 세상에 알린 사람은 한국인이 아니라 일본인이었다. 센다 가코라는 저널리스트로 1973년 ‘목소리 없는 8만 명의 고발, 종군위안부’라는 책을 냈다.…센다는 1964년 마이니치신문사가 사진집 ‘일본의 전력(轉歷)’을 발행했을 때 만주사변부터 패전까지 25000장의 사진을 선별하는 일을 맡았는데, 군대와 함께 행군하던 조선인 여성뿐 아니라 일본 중국 여성들의 모습이 실린 ‘이상한’ 사진들을 보았다고 한다. 그 어느 설명에도 ‘위안부’라는 설명은 없었다. 그러나 센다는 이 여성들의 실체를 쫓았고 처음으로 ‘위안부’라는 존재를 알게 된다.’ 》


위안부를 세상에 알린 일본인
 

이어 박 교수는 센다가 ‘위안부’를 ‘군인’과 마찬가지로 전쟁 수행을 위해 자신의 몸을 희생해 가며 도운 ‘애국’한 존재로 이해하고 있었으며 군인들에 대한 보상은 있는데 왜 위안부에게는 없느냐는 주장을 펼친다고 덧붙인다. 그러면서 이런 결론을 맺는다

‘일본군이 장기간 전쟁이라는 ‘비일상적’ 상황에 놓이게 된 병사들을 ‘위안’한다는 명목으로 ‘위안부’라는 존재를 발상(생각)하고 모집한 것은 사실이다.…일본은 이 문제에서 책임을 져야 하는 첫 번째 주체이다. 더구나 규제를 했다고는 하지만 불법적인 모집이 횡행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모집 자체를 중지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일본군의 책임은 크다. 묵인은 곧 가담하는 일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언뜻 봐서도 일본 정부에 대한 책임을 묻고 있는 이 책의 저자 박 교수는 최근 검찰에 의해 위안부 피해자들을 폄훼하고 상처를 주었다는 명예훼손 혐의로 불구속 기소돼 논란의 한가운데에 서 있다 

 

검찰은 저자가 일본군에 의한 위안부 강제동원 또는 강제연행 사실을 부정하면서 ‘일본군 위안부는 기본적으로 매춘의 틀 안에 있는 여성’ ‘자발적 매춘부’라거나 ‘일본 제국의 일원으로서 일본국에 대한 애국심 또는 자긍심을 갖고 일본군과 동지적 관계에 있었다’고 표현한 대목들을 문제 삼았다. 

하지만 박 교수는 책에서 ‘위안부에 대한 ‘강제성’을 묻는다면 눈에 보이지 않는 식민지주의와 국가와 가부장제의 강제성을 먼저 물어야 한다. 동시에 이런 구조의 실천과 유지에 가담한 이들(조선인과 일본인 업자들)의 강제성도 함께 추궁되어야 한다’고 적고 있다. 위안부를 만들어낸 책임이 일본 정부를 넘어 당시 빈곤한 조선인 여성들을 ‘돈벌게 해 주겠다’고 꾀어 팔아넘긴 조선인과 일본인 인신매매 업자의 책임을 함께 묻는 것까지 향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검찰은 이런 대목들을 필자가 일본군의 강제연행 사실을 부정하는 것으로 해석하고 있었다. 박 교수는 또 ‘자발적 매춘부’란 표현도 일본의 우익들이 하는 말을 비판한 대목에서 쓴 것이라고 했다. 

박 교수를 만난 것은 그가 자신의 입장을 표명한 기자회견을 한 이틀 뒤인 4일 서울 자택에서였다. 그는 몹시 피곤해 보였다. 차분하고 부드러운 용모나 목소리에서는 기자회견까지 열면서 검찰이라는 법 집행기관과 맞서고 있는 강한 사람이라는 게 느껴지지 않았다. 박 교수는 “무엇보다 검찰의 조사 과정에서 받은 상처와 충격이 너무 컸다”고 한다

“작년 11월부터 올해 2월까지 검찰 조사를 다섯 번 받았습니다. 수사관들이 조사했는데 인터넷에서 저를 비방하는 듣지도 보지도 못한 자료를 들이대면서 자신들이 만든 ‘범죄 리스트’라며 묻는 질문 53개에 예스와 노로 대답하라고 하더군요. 정말 답답한 상황의 연속이었습니다. 


“학문을 법으로 단죄하려는 검찰” 

―구체적으로 어떤 질문들이었죠. 
“‘매춘’이란 표현을 썼느냐 안 썼느냐, 위안부 할머니들과 일본 군인들을 두고 ‘동지적 관계’라는 표현을 썼느냐 안 썼느냐 이런 식이었습니다. 책에 그런 표현을 쓴 것은 저의 주장이 아니라 문헌과 사료, 증언을 인용한 것이며 전후 논리 전개와 앞뒤 문맥을 읽어 보면 왜 그런 표현이 나왔는지 이해가 갈 텐데도 그런 식으로 추궁하니 정말 난처했습니다.

검찰은 박 교수에게 그를 고소한 ‘나눔의 집’에서 세 가지 조건을 받아들이면 합의하겠다고 전했다고 한다. 첫째, 할머니들에게 사죄할 것. 둘째, 삭제판까지 아예 절판할 것. 셋째, 3국에서 나온 것과 일본에서 나온 일본어판까지 (일부 문구) 삭제판을 내라는 것이었다.

“첫째와 둘째는 어떤 식으로든 받아들인다고 해도 세 번째는 제가 이래라 저래라 할 수 있는 사안이 아니었습니다. 조정은 실패로 끝났고 검찰은 저를 ‘공공선에 반하는 전쟁범죄를 용인하는 사람’이라는 원고 쪽 주장을 받아들여 기소하기에 이른 것입니다. 제 개인적 처지나 주장의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라 역사와 학문의 영역을 이런 식으로 재단한다면 어느 누가 남과 다른 생각이나 주장을 마음 놓고 이야기할 수 있을까요. 제가 책을 내면서 진정으로 바랐던 것은 되도록 많은 자료와 증언을 통해 위안부 할머니들을 좀 더 이해하고 한일 간의 협력에 더 방점을 찍기 위한 다양한 논의의 장을 만들자는 것이었는데 말이지요.

기자는 그와 만나기 전 A4용지 100여 장에 이르는 관련 기사를 일독했다. 그의 책이 나온 것은 2013 8월이었다. 당시 국내 언론들이 소개한 서평을 훑어보면 일부에서 ‘논지가 잘못됐다’는 지적도 있었지만 약 8  2의 비율로 ‘다른 목소리를 낸 용기 있는 관점’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해 다가서려는 진지한 접근’이라고 호평하는 기사가 더 많았다. 하지만 작년 6월 박 교수가 고소를 당하고 검찰이 기소하기까지에 이르자 그를 두둔하는 목소리는 잦아들었다 

이런 상황에서 중요한 것은 학문 연구에 대한 진정성일 것이다. 그에게 일본과의 인연을 물었던 것은 이 때문이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할 무렵 부모님이 일 때문에 일본으로 가게 되어 따라갔습니다. 일본에 대해서는 많은 한국 사람이 갖고 있었던 반일감정을 가졌던 평범한 ‘반일 소녀’였지요. 일본에 살다 보니 일본이 더 알고 싶어졌고 대학(게이오대)에 입학해 일본문학을 공부하게 되었습니다. 대학을 마치고 석사·박사과정(와세다대)에 들어가서는 당시 일본 문학의 최고 영웅이었던 나쓰메 소세키의 작품을 전공으로 학위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공부를 하다 보니 일본 제국주의에 비판적이었던 것으로 알려진 나쓰메의 일본관이나 조선관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게 무엇이었나요. 
“그의 저작물 곳곳에는 조선인에 대한 차별, 제국주의와 일본인에 대한 우월적 시선, 여성비하, 국가주의에 대한 용인이 많이 담겨 있었습니다. 이후 일본근대문학회에서 ‘소세키와 국가주의’라는 논문을 발표하고 학회지에 싣기도 했습니다. 자랑 같아 쑥스럽지만 외국인이 쓴 일본 문학평이 처음 실린 경우였습니다. 

―문학연구자가 어떻게 위안부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된 건가요.
1993년 귀국 직전 우연한 기회에 위안부 할머니들의 통역 자원봉사를 하게 되었는데 간접적으로만 듣던 할머니들의 증언을 직접 들으면서 눈물을 흘렸던 경험이 있습니다. 귀국해 학교에 자리를 잡았는데 한국인들이 일본을 너무 모르고 있구나 하는 생각을 많이 했습니다. 비판도 상대를 제대로 잘 알아야 효과적일 텐데, 무조건적인 민족감정만 앞세우고 합리적인 비판은 설 자리가 없어 보였습니다. 급기야 제자들이 ‘일본어를 공부하고 싶긴 하지만 죄책감을 느낀다’고 말하는 것을 들으면서 문제의식을 더 심각하게 갖게 되었지요. 

빈곤층 여성들과 가부장적 제도에 희생돼 온 여성들에게 주목해왔던 페미니즘 문제를 비롯해 탈민족주의, 탈식민지주의 비평을 함께 연구했던 박 교수에게 위안부 문제야말로 그 모든 모순이 응축된 문제로 다가왔다. 이후 집요한 탐구와 증언 청취를 통해 위안부 문제에 대한 폭넓은 자료 조사를 해낼 수 있었다. 

“‘제국의 위안부’라는 제목을 두고도 일부에서는 ‘제국을 대변한 위안부’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반대로 ‘제국이 동원한 위안부’라는 말의 줄임말입니다. 서문에서도 썼지만 제가 책을 냈던 출발점은 ‘왜 위안부 문제가 20여 년이 다 되어가도록 해결의 기미가 보이지 않느냐 하는 것이었습니다. 주변국의 오랜 비판에도 불구하고 일본이 변하지 않고 있다면, 혹은 변하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면 거기에는 비판을 하는 사람들의 형식과 내용에도 문제가 있었던 것이 아닐까 하는 자성도 필요하다는 생각이었죠.


“이성적 논의-공론의 장 필요” 

그는 목이 마른지 찬물 한 컵을 들이켠 뒤 말을 이었다.

“위안부 문제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복잡하며 그런 복잡함을 보기 위해서는 본격적인 논의와 공론의 장이 필요합니다. 분노와 비난이 채워진 ‘견고한 기억’을 걷어내고 되도록 많은 정보와 지식을 토대로 상대를 설득시킬 수 있는 합리적인 길을 모색하기 위한 이성적 노력이 선행돼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위안부 문제를 몇몇 당사자만의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문제로 만드는 시도가 우선돼야 한다는 생각이며 이 생각은 지금도 변함이 없습니다. 

박 교수 기소 이후 많은 한일 학자는 박 교수 주장의 옳고 그름을 떠나 학자의 주장을 법의 이름으로 단죄할 수 없다는 성명을 냈다. 박 교수 주장에 동조하지 않는 국내 학자들조차 “연구자의 지적에 대해 법정에서 형사책임을 묻는 방식으로 단죄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며 “공개 토론을 하자”고 제안했다 

일본의 학계 문예계 정계가 망라된 54명의 인사도 지난달 26일 기자회견까지 열며 항의 성명을 냈다. 성명서에 이름을 올린 사람들은 와카미야 요시부미(若宮啓文) 전 아사히신문 주필, 사회학자인 우에노 지즈코(上野千鶴子) 도쿄대 명예교수를 비롯해 1993년 고노 담화를 발표한 고노 요헤이(河野洋平) 전 관방장관, 1995년 무라야마 담화를 발표한 무라야마 도미이치(村山富市) 전 총리, 노벨 문학상 수상자인 오에 겐자부로(大江健三郞) 선생까지 망라돼 있다 

박 교수의 말이다. 

“한일 양국뿐만 아니라 동아시아의 평화로운 시대를 만들려면 하루속히 위안부 문제를 매듭지어야 합니다. 오히려 위안부 문제 해결과정은 한일협력의 새집을 짓는 주춧돌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려면 정부 간 대화도 중요하지만 위안부 문제의 실체와 본질, 책임과 보상에 대해 양심적 지식인 학자 정치인들이 여러 견해를 내놓고 허심탄회하게 대화하고 합의를 도출해 내는 게 중요합니다.


양국 지식인들의 큰 공감을 불러일으킨 학자에 대한 검찰의 기소는 잘못돼도 한참 잘못되었다. 
허문명 기자 angelhuh@donga.com

 

□변희룡 교수, ‘2025년이 가뭄의 정점이 될 것이며 2041년까지 빈번히...’

2015.10.29

중부지역의 극심한 가뭄으로 농업용수는 물론, 생활용수 확보에도 비상이 걸린 지 오래다. 새누리당 김무성 대표는 "앞으로 4대강 사업이 원래 2차 사업으로 계획했던 지천 사업에 대해 (공사를) 빨리 착수해야겠다"고 말했다.

'조선pub'은 장마 시작전인 지난 6월 기상학자인 변희룡 부경대 환경대기과학과 교수를 인터뷰 한 적이 있다. 변 교수는 당시 "현재 가뭄은 단기간에 비가 오지 않아서 생긴 것이 아니라, 강수량 부족이 상당히 오래 누적되어 나타난 현상"이라며 "올해 장마에도 해갈이 되지 않을 것 같다"는 우려를 나타냈다. 인터뷰를 다시 한번 소개한다.

 

2015 10 26일 충남 보령댐 상류 지역. 물이 바짝 말라버린 자리에 잡초만 무성히 자라 풀밭으로 변했다. 현재 저수율 20.0% 1998년 보령댐 준공 이후 역대 최저치를 기록했다./조선DB
 

2012 6월 말, 두 달 가까이 비가 내리지 않고 가뭄이 한 창일 때 “지금 가뭄은 몸 풀기 수준이고, 2015년에 진짜 큰 가뭄이 온다”고 주장한 학자가 있었다. 부경대 변희룡 환경대기과학과 교수(전 한국기상학회장)가 그 주인공.

 

변 교수는 우리나라의 모든 가뭄 기록을 분석해 가뭄에도 주기가 있다는 소위 ‘가뭄주기설’을 주장해온 기상학자다.

 

변 교수는 2008 10월과 2009 3월 두 차례에 걸쳐 월간조선에 기고문을 내 “우리나라의 가뭄 기록을 분석한 결과 한반도에서 가뭄은 6(평가뭄), 12(중가뭄), 38(대가뭄), 124(극대가뭄) 주기로 나타났으며, 특히 38년 주기의 대가뭄은 그 중심이 2015년과 2020년이고, 그 시작은 2012~2013년쯤이 될 것”이라고 주장한 적도 있다.

 

그는 당시 기고문에서 “<조선실록> <고려사> <삼국사기> 등의 기록을 분석한 결과 우리나라의 극대가뭄은 거의 정확하게 124년 간격을 유지했다”며 “1901년에 중심을 둔 극대가뭄은 1882년에 시작하여 29년간 지속되었기 때문에, 이런 상황이 반복된다고 가정했을 때, 다음 극대가뭄 주기는 2012년 또는 2015년에 시작하여 2025년에 중심이 될 것”이라고 분석했다.

 

변 교수의 예측은 여러 대중매체에 거듭 발표되었고, 그 예측은 적지 않은 관심을 모았다. 성서 창세기에도 요셉이 이스라엘 7년 가뭄을 7년 전에 예측한 기록이 있다. 그런 신화 같은 역사가 현대에 과연 재현될 수 있을까?

 

7년 전에 2012년에 이어, '2015년 대가뭄' 예측도 적중

▲변희룡 부경대  환경대기과학과 교수.

 

여론은 기대 반 호기심 반으로 지켜보았다. 2012년 예측은 적중하였다. 더구나 매일 가뭄상황을 분석해 방송해 온 부경대학의 가뭄 사이트 (http://atmos.pknu.ac.kr/~intra3/)  피해가 발생한 지역을 정확하게 지적하였다는 점에서 한 번 더 관심을 끌었다. 이렇게 정확한 진단은 아직 국내외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 후 2015, 아주 강한 가뭄이 발생할 것이란 예측마저 적중하였다. 기상청에 따르면 올해 우리나라 중부지방의 강우량은 예년의 절반 수준이며, 영동지방의 경우 40% 수준에도 못 미치는 극심한 가뭄에 시달리고 있다. 북한 지역도 극심한 가뭄에 시달리고 있다는 소식도 보도되고 있다. 변 교수가 수년 전 경고한 ‘2015년 대가뭄’이 현실이 된 것이다.

 

하지만 변 교수의 예측이 적중한 것보다 더 중요한 사실이 있다. 2025년이 가뭄의 정점이 될 것이며 2041년까지 간헐적으로 그리고 빈번히 가뭄이 발생할 것이란 예측’이 추가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우리가 대재앙을 피해 살아남기 위한 대비활동의 중요성이 더 이상 남의 일이 아닌 현실로 다가오고 있는 것이다.

 

변 교수에게 전화를 걸어 현재의 가뭄상황과 그의 독창적인 가뭄진단방법, 대비책 등에 대해 들어보았다.

 

그는 “현재의 가뭄은 2013 811일 이후부터 이어진 것”이라며 “현재 가뭄은 단기간에 비가 오지 않아서 생긴 것이 아니라, 강수량 부족이 상당히 오래 누적되어 나타난 현상”이라고 말했다. 관심은 당장 올해 가뭄의 해갈문제에 먼저 집중된다.

 

“올해와 유사한 형태의 가뭄이 1939년과 1977년에 나타났는데, 1939년의 가뭄은 해갈(解渴)이 제대로 되지 않고, 3년을 지속했고, 1977년의 가뭄은 장마철에 해갈이 잠시 되었지만, 이듬해인 1978년까지 지속되었습니다. 가뭄주기설에 따라 올해 가뭄이 과거 두 개 가뭄과 유사한 형태를 나타낸다고 볼 때, 어쨌든 내년까지는 가뭄이 지속될 것이라는 결론을 도출할 수 있습니다. 지금의 가뭄 상태는 위 두 개 사례보다 훨씬 심각합니다.

 

-지난 619일 전국적으로 비가 왔지만, 해갈에는 부족합니다. 올해 장마는 언제쯤 시작될 것으로 보시는지요.

“우리나라 기후의 특성상 장마가 지기 전에 건기가 나타나는 북고남저(北高南低)의 기온배치가 나타납니다. 617일 오전 지상 1500미터(850hPa)의 등고선을 보면, 우리나라보다 북쪽이 더 고온입니다. 이 북고남저의 기온배치 때문에 장마전선이 올라오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 기온배치는 중국대륙의 가열된 공기가 북만주로 향하기 때문입니다. 이 기온배치는 해마다 6월 초에 발생하는데 평균적으로 15일 이전에 사라집니다. 그런데 올해는 지금까지도 아주 강력합니다. 이것이 사라져야 장마가 오는데 아직 사라질 기미가 보이지 않습니다.

 

617일 오전 지상 1500미터(850hPa)의 등고선./자료=변희룡

 

-다가올 7월이나 8월에 비가 많이 오면 해갈이 되는 것 아닌가요.

“우리나라 기후는 거의 항상 그랬지요. 올해도 그렇게 해갈이 되었으면 좋겠는데, 유사연도 즉 1939년과 1977년도 충분히 해갈이 안 되고, 가뭄이 이듬해까지도 지속됐으니 염려하지 않을 수 없지요.

 

"가뭄에 대한 정확한 정의부터 세워야"

-가뭄발생을 이렇게 정확히 예측한 특별한 비결이라도?

“저의 가뭄 예측은 당연한 결과입니다. 지금까지의 가뭄진단법, 강수량 진단법에 어디가 문제가 있는지를 분석하여 그 점을 보완한 결과이기 때문입니다.

 

, 단순히 과거의 가뭄 기록을 분석하고 패턴을 연구하는 것만으로 가뭄예측을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변희룡 교수는 최근 <4차원강수지수를 이용한 수문기후(hydro-climatology) 연구의 혁명적 진화>라는 자신의 연구내용을 올해 수자원학회에서 발표했다. 그는 이른바 ‘4차원강우지수’라는 독창적인 가뭄과 강수량 진단법을 개발해 이를 학계와 대중에게 전파 중이다. 변 교수의 설명이다.

 

“현재까지 강수량 측정은 단순히 특정 기간의 강수량을 합하는 방식이 사용되어 왔습니다. 1년 전에 내린 비와 어제 내린 비가 똑같은 비중으로 합산하는 방식입니다. 이 방법은 현재 물이 풍부한지 아니면 모자라는지를 진단할 능력을 가지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가뭄과 홍수의 위험도 감지하지 못하지요.

 

예를 들어 9 1일 시점에서 물 환경을 알고 싶은 경우를 가정해 봅시다. 81일 하루만 비가 300mm 오고, 나머지 30일 동안 비가 오지 않았다고 하면, 당연히 91일은 물이 부족한 가뭄상태가 됩니다. 반대로 8월 내내 비가 오지 않다가 마지막 날인 31일 비가 300mm가 내렸다고 할 때 91일 시점은 홍수가 됩니다. 같은 양의 비가 왔는데 결과는 극과 극이 됩니다.

 

, 강수량을 단순히 합하는 계산으로 가뭄상태를 판단하는 것은 합리적이지 않으며, 시간분포를 고려해서 합산해야 그 시각에 사용 가능한 수자원 량을 정확히 알 수 있고, 이를 바탕으로 계산해야 물이 평균치보다 많은지 모자라는지(즉 가뭄인지 아닌지)를 판단할 수 있다는 개념이다.

 

-무조건 전년대비 비가 적게 내렸다고 해서 혹은 당해 연도에 오랫동안 비가 오지 않았다고 해서 ‘가뭄이다. 아니다’라고 판단하면 안 된다는 의미이군요.

4차원강우지수에서는 먼저 유효수자원지수(AWRI)를 계산합니다. AWRI는 매일 매일, 지금까지 온 빗물 중에 증발, 유출 등으로 빠져나가고 남은 물이 얼마나 되는지를 계산한 것입니다. 한마디로 줄여서, 강수량을 합산하되, 어제 온 빗물은 많이 남아있고 1년 전 내린 빗물은 적게 남아 있을 것이니 강수량에 시간감소함수를 적용하여 합산한 것입니다.

 

강수량을 단순 합산한 것과는 시간개념이 들어갔다는 점이 다릅니다. 그래서 ‘4차원’이라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계산된 AWRI를 그 날짜의 평균치(기상학에서는 평년치라 함)와 비교한 것이 효과가뭄지수(EDI)입니다.(전문용어로는 표준화라 함. 평년치에 대한 편차를 표준편차로 나눈 것).

 

-EDI를 사용했기 때문에 가뭄주기를 볼 수 있었다는 말로 이해됩니다.

“그렇습니다. 현재 남아있는 물의 양이 적은 지 많은지는 AWRI, 그것이 평년치보다 많은지 적은지는 EDI로 알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나와 있는 다른 가뭄지수 (SPI, PDSI )에는 이렇게 시간개념이 들어간 것을 본 적이 없습니다. 거의 모두 강수량을 단순 합산해 왔습니다.

 

중부지방의 가뭄이 계속되면서 소양강댐의 수위가 역대 최저 수준으로 떨어진 2015 6 12일 전날 내린 비에도 강원도 인제군 소양강 상류가 말라 바닥을 드러내고 있다./조선DB

 

4차원강우지수로 가뭄과 홍수의 정밀한 예측 가능

-시간감소함수 외에 한 가지 더 중요한 시간개념이 포함되었다면서요?

“그렇습니다. 지금까지는 ‘올해 강수량이 얼마나 모자란다’ 다거나 ‘지난 6개월간 강수량이 평년보다 얼마나 모자란다’라는 표현으로는 가뭄 상황을 설명하여 왔는데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왜 올해만 따지는지, 왜 지난 6개월만 따지는지가 분명하지 않으면 과학이라 할 수 없습니다. 지금 남아있는 물을 전부 합쳐서, 이것이 평년치보다 모자란 것이 가뭄이니까, 일 년보다 더 이전에 가물었다면(혹은 물 과잉이었다면) 이도 고려해야 합리적입니다.

 

-교수님께서 강수 합산 기간을 결정하는 방식이 기존과는 달리 아주 독창적인데구체적으로 어떤 차이가 있는지요.

“지구 상 모든 지역에서 강수량은 1년 주기가 가장 강합니다. 그래서 강수량의 누적은 1년을 기본으로 하는 것이 맞습니다. 그러나 가뭄이나 과우(홍수)가 일 년 이상 지속되었으면 그 지속된 기간을 고려해야 합니다. 과우인 상태가 500일 이상 연속되었으면 500일 동안 누적된 강수량을 시간 감소함수로 누적해야 지금 남아 있는 물의 양을 합리적으로 추정할 수 있게 됩니다.

 

-4차원강우지수는 물이 얼마나 남았는가를 측정하는 지수이니, 홍수의 조기경보에도 활용되는 것입니까?

“그렇습니다. 지금까지는 홍수가 발생할지 말지를 지형, 증발, 하천 유출량 등의 수자원 데이터를 모두 계산하여 판단하려 했는데, 계산도 어렵고 아무리 정밀하게 해도 한계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4차원강우지수를 이용하면 이 계산을 대충해도 조기경보가 가능합니다.

 

당일의 AWRI 값을 과거에 홍수 등의 재해가 발생한 날의 AWRI와 비교하여, 그보다 큰 값이면 홍수가 발생할 것으로 예측합니다. 비 온 다음에 강 수위가 올라가는 데는 시간이 걸리는 데, AWRI의 계산은 시간이 걸리지 않습니다. 이 시간만큼 미리 예측이 가능합니다. 또한 최근 2~3일은 강수량예측치가 잘 맞으니까 그만큼 미리 예측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지역에서 AWRI가 얼마 이상이 되면 홍수 또는 산사태가 발생한다’ 하는 자료가 있어야 예측이 가능하겠군요.

“그렇습니다. 그래서 과거의 관측치를 기록해 놓은 것이 아주 중요합니다. 몇월 몇일 몇시에 비가 얼마나 왔다는 기록이 장기간 누적되어 있으면, 비가 오기도 전에 홍수 등이 예측됩니다. 자료가 없다면 인근에서 유사한 지형, 유사한 기후조건을 갖춘 지역의 자료를 활용할 수도 있습니다.

 

변희룡 교수는 “가뭄지수의 원리에 대해 몇가지 세부적인 내용은 다음에 기회가 되면 설명하겠다”며 가뭄지수에 대한 개략적인 설명을 마쳤다

 

설명을 마친 변 교수는 “우리나라가 강수량은 측정하는 측우기를 1441년에 만들었지만, 그 사용법을 제가 1999년에 완성한 것이나 다름없다고 감히 말씀드린다”며 “앞으로 4차원강수지수가 강수량 측정의 표준방법이 되는 날이 올 것”이라고 덧붙혔다.

 

창세기 이래 처음으로 성공한 ‘대가뭄의 7년 전 예측’도 사실상 이러한 독창적이고, 과학적 방식을 동원했기에 예측이 가능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화제를 다시 올해의 가뭄과 대책으로 옮겼다

 

"가뭄으로 북한에 변고 가능성"

-올해 가뭄에 대비하기 위해서 당장 해야 할 일이 있다면요.

“단기적으로는 미국의 방침을 따르면 됩니다. 각 주별로 프로그램을 마련해 놓고, ‘가뭄이 발생했다’고 선언되면 바로 그 프로그램대로 실행하는 겁니다. 가뭄 발생의 선언은 기상청의 도움을 받아 각 지자체의 위원회가 결정합니다.

 

장기적으로는 호주의 정책이 바람직합니다. 국가는 국민이 가뭄에 스스로 대비할 수 있도록 기상자료를 제공하는 책임을 가집니다. 피해가 발생해도 국가는 보상해 주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합니다. 그리하여 지자체와 국민의 책임의식을 높입니다. 불가항력적 피해가 너무 심하면, 나중에 중앙정부에서 판단하여 보상해 주기도 합니다.

 

-현재 우리나라의 가뭄대비 정책에 대하여 하고 싶은 말이 많으실 텐데요.

“현재 우리나라 기상청 업무 중에 가뭄경보 규정이 없는데 최소한 가뭄특보라도 발표해야 합니다. 한반도는 강수량이 여름에 집중되기 때문에 봄가뭄 발생 여부는 그 전해 9월 중순이 되면 결정이 나기 때문에, 이를 활용하면 가뭄특보가 어렵지 않습니다. 가능한 한 큰 댐, 그게 안 되면 물을 가둘 수 있는 작은 보라도 많이 만들어야 합니다. 물론 바다로 흘러가는 물도 있어야 합니다. 물이 많으면 생태계가 다양해지고, 문명은 번창합니다.

 

변 교수는 “4대 강은 본류는 정비되었지만, 현재 이 물을 제대로 활용할 지류 정비사업은 포기된 상태인 것으로 안다. 지류도 정비해 나가야 한다”며 “가뭄대책은 주무부서가 어디인지도 모를 정도로 산재되어 있는데, 이를 정리하여 한 부서에서 관리되어야 장기적인 대책이 수립될 수 있다”고 조언했다.

 

마지막으로 변 교수는 가뭄 주기를 연구하다 보니 극심한 가뭄이 발생한 시기에 “고구려, 백제가 멸망했으며, 가까이는 대한제국까지 망했다. 당시 가뭄이 국가의 흥망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고 유추할 기록이나 합리적인 근거가 많다”며 “이렇게 볼 때 올해 가뭄으로 북한에 변고가 일어날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 이상흔 조선pub 기자

 

□ 송복 교수 인터뷰  2016.10.21

▲ 지난 10월 3일 42년간 재직 중인 연세대 신촌 캠퍼스 ‘언더우드 가든’에 선 송복 교수. / photo by 한준호 영상미디어 차장대우 

 

송복 연세대 명예교수는 휴대폰이 없다. 1937년생이니 올해로 일흔아홉. 송복 교수는 평생 휴대폰을 가져 본 적이 없다. 그래서 그와 연락을 하려면 집에 전화를 걸어 메시지를 남겨야 한다. 송 교수는 “집사람이 전화를 받아서 전해주면 되는데 불편할 일이 뭐가 있느냐”고 했다. 기자도 송 교수와 인터뷰 약속을 잡기 위해 몇 차례 집에 전화를 걸었지만 부재중이어서 일단 부인과 통화를 해야 했다.

 

송 교수는 집 전화번호도 바꾼 적이 없다. 이사를 한 번도 간 적이 없으니 번호가 달라질 이유가 없다. 그는 1969년에 조성된 서울 은평구의 일명 ‘기자촌’을 떠나본 적이 없다. 1970년대 초 서울신문 기자를 할 때 마련한 집에서 평생을 살았다. 2006년 기자촌의 원주민이 38가구가 남았을 때 동네가 은평뉴타운으로 탈바꿈하면서 단독주택이 아파트로 바뀌었을 뿐이다. 그는 집 옆 북한산도 평생 다니고 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주말이면 북한산을 오르는 게 40년간 가까이 이어지고 있다.


나의 삶, 나의 책무

 그의 인생은 어찌 보면 느리고 단순하다. 40여년이라는 긴 세월 한결같은 것이 한둘이 아니다. 지난 10 3일 서울 신촌 연세대 캠퍼스 내에 있는 ‘언더우드 가든’에서 만난 그는 “이 학교도 올해로 42년째 적을 두고 있다”며 “1974년부터 강사로 학생들을 가르쳤고 1975년에 교수가 됐다”고 회고했다. 지난 40여년간 한 번도 한눈팔지 않고 교수로서 한 길을 걸어왔다는 것이다. 서울대 문리대 정치학과를 졸업한 그는 사상계와 서울신문 외신부 기자를 하다가 미국 하와이대학교 이스트웨스트센터 장학생으로 선발돼 유학을 갔고, 석사학위를 따고 돌아와 연세대 교수가 됐다. 박사학위는 교수가 된 후 서울대에서 받았다. 그는 2002년 정년퇴직으로 명예교수가 됐지만 학교에서 10년간 강의를 더 개설할 수 있는 특별초빙교수 자리를 줘서 8년간 학생들을 더 가르쳤다. 그는 “힘들어서 강의를 더 이상 못 하겠고 학생들이 나를 증조할아버지 보는 듯해서 그만뒀다”며 웃었다. 2002 6 11일 그가 정년 퇴임 고별 강의를 할 때 일부 학생들이 ‘한국 사회의 수구 냉전 논리를 대변했다’는 성명서를 발표하며 피켓시위를 해 논란이 일기도 했다. 당시 송 교수는 “학교에서 늘 있는 일이고 치지도외(置之度外·내버려두고 상대하지 않음). 철없는 학생들이 한 일일 뿐”이라는 반응을 보였었다.

 

요즘처럼 변화무쌍한 세상의 기준으로 보면 그의 인생은 고루하고 답답하다는 느낌을 준다. 하지만 그는 “가르치고 글쓰는 인생을 후회한 적이 없다. 내 삶에 만족한다”고 했다. 함께 대학에 몸담았던 동료, 선후배들이 당연하다는 듯 정계나 관계로 ‘외도’하는 모습을 봐왔지만 “나는 내가 가장 잘할 수 있는 일을 해왔을 뿐”이라고 강조했다. 오히려 그는 연세대 교정에서 천직(天職)을 갖게 된 지난 삶을 회고하면서 자신이 대학교수가 된 것이 ‘특혜’라고 말했다. 자신의 실력과 노력이 아니라 특혜라니…. 그 이유를 묻지 않을 수 없었다. 


“내가 잘나서 기자가 됐고 유학을 갔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때 장학생 선발시험에서 1등을 했지만 점수 차가 얼마나 됐겠나. 그저 운이 좋아서 다른 사람의 기회를 빼앗았을 뿐이라고 생각한다. 그 어렵던 시절에 유학을 간 게 특혜 아닌가.
 


그에 따르면, 당시 유학은 지독한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치던 대한민국 지식인으로서는 엄청난 기회였다. “김포공항에서 출국할 때 100달러짜리를 가지고 나가지 않나 몸수색을 당하던 시절이었다. 50달러는 됐지만 100달러는 나라 밖으로 가져 나갈 수 없던 때였다. 내가 유학가면서 하와이대학 이스트웨스트센터로부터 비행기표 말고도 받은 돈이 가족수당이니 보험금이니 해서 주급 400달러였다. 기자 월급의 4배에 이르는 돈이었다.


- 그렇다고 대학교수가 된 것이 단순히 운만 좋았을 뿐이겠는가.

“나는 교수가 된 것도 그저 유학에서 돌아왔을 때 조건이 맞았을 뿐이라고 생각한다.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다. 대학에서 교수를 채용할 때 항상 같은 경험을 하지만 숱한 인재들이 10  1 이상의 경쟁을 벌인다. 비슷비슷한 인재들 중에서 어쨌든 한 사람을 뽑아야 하고, 그렇게 뽑힌 교수는 뽑히지 못한 다른 인재의 불운과 희생 위에서 교수라는 지위를 획득하는 것이다. 다른 누군가가 아니라 내가 지금 이 자리에 있다는 것이 얼마나 행운이며 특별한 은혜인가. 하지만 우리나라의 상층(上層)은 자신의 지위, 소득, 권력, 그리고 그로 인해 빛나는 이름 모두가 특혜이자 특권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다 자기가 잘나서 그 자리에 왔다고 생각한다. 그러니 책임과 희생도 없는 것이다.


사실 송 교수를 창간기념 인터뷰에 초청한 것은 바로 이 부분을 듣기 위해서였다. 우리나라에서 힘세고 잘나고 돈 많은, 이른바 상층이 왜 존경받지 못하고 지탄의 대상으로 전락했는지를 존경받는 삶을 살아온 원로의 시선으로 짚어보자는 취지였다. 마침 송 교수는 최근 ‘특혜와 책임’(가디언)이라는 저서를 출간했다.

 

‘한국 상층의 노블레스 오블리주’라는 부제가 붙은 이 저서에서 그는 한국 상층의 문제점을 날카롭게 파고들었다. 그런데 이런 취지의 인터뷰 첫머리부터 그는 자신의 인생을 저울에 달고 스스로의 특혜와 책임부터 거론하기 시작했다. 


- 그럼 대학 교수가 된 게 특혜라는 인식 때문에 40여년간 한 길로 봉직했다는 말인가.

“그런 생각이 있었다. 누군가의 기회를 빼앗고 교수가 됐는데 그 사람의 몫을 다하기 위해서라도 한 우물을 파야하지 않겠나. 또 내가 다른 일을 잘할 자신도 없었다. 오직 잘하는 것이 가르치고 글쓰는 일인데. 


- 정치권 등으로부터 유혹이 많았을 것 같은데.

“장관으로 와 달라는 부탁을 두 번 정도 받았고 국회의원 출마 권유도 늘 있었다. 특히 김영삼 정부(1992~1997) 때는 거절하는 일이 달걀로 바위 때리는 듯이 엄청 힘들었다. 하지만 다 물리쳤다.

 

- 장관 자리 준다면 학계에서 반길 사람들이 대부분인데.

“소명의식과 책임의식들이 없어서 그렇다. 우리나라 장관들의 평균 수명이 11개월이라는데 대부분 별로 한 것도 없이 오찬이다 만찬이다 하면서 그 시간을 날려버린다. 요즘 업적과 이름을 기억할 수 있는 장관이 몇이나 되나. 얼마나 어려운 자리인 줄 모르고 권력욕과 명예욕에 덥석 받는다. 그래놓고 청문회에 나가면 국회의원들 앞에서 다들 기가 죽어 할 말도 못하는데, 살면서 부끄러운 게 많으니까 그렇지 않겠나. 


송 교수는 이와 관련해 우리나라 장관들의 병역의무 이탈자 비율이 대개 40%가 넘는다는 사실을 새삼 꺼내들었다. 정권마다 다르긴 하지만 적은 경우라도 장관들의 병역 이탈 비율이 30% 전후의 수치를 보인다는 것이다. 이는 일반 국민의 병역 면제 비율인 4%보다 많게는 10, 적게는 7~8배의 격차를 보인다는 지적이다. 그는 “고위 자리에 오르려면 더 큰 희생과 책임이 따른다는 것을 우리 상층들은 모르고 있다”고 꼬집으며 우리와 비교되는 한 수치를 제시했다. 1·2차 대전 때 죽은 영국 이튼스쿨 졸업생이 비공식 기록으로 5000명이라고 한다. 졸업생이 한 해 고작 250명 정도라는데 20년분이 몽땅 나라를 위해 죽어주었다는 소리다. 실제 이튼스쿨에 가보면 교정 벽면에 1차 세계대전과 2차 세계대전에 조국의 부름을 받고 참전해 숨진 졸업생들의 이름이 빼곡하다.

 

▲ 지난 6 2일 서울 은평구 기자촌 홈커밍데이에 참석한 송복 교수. 은평 뉴타운으로 바뀐 기자촌에서 송 교수는 평생을 살았다. / photo by 뉴시스 


사회 상층의 천박함

 송 교수는 저서 ‘특혜와 책임’에서 우리나라 상층을 15000명 정도로 분석했다. 이들을 세분화하면 고위 정치인, 고위 법조인, 고위 군·경찰, 고위 관료 등의 위세(威勢) 고위층 4200여명과 고위 교육자층, 고위 언론인층, 고위 의료인층, 기타 저명인사 등으로 구성된 위신(威信) 고위층 7200여명으로 나뉜다. 권력이 바탕이 된 위세 고위층과 달리 한 인격자로서의 권위와 신망이 바탕을 이룬 고위층이 위신 고위층이다. 여기에 재벌 등 4800여명의 자본가층을 더하면 우리 사회 상층이 완성된다. 


송 교수는 자신은 고위 교육자로서 위신 고위층에 속한다고 했다. 하지만 위세고 위신이고 간에 우리나라 상층의 대부분은 서구 선진국과 같은 존경의 대상이 아니라는 게 송 교수의 지적이다. 어느 시점부터 부패하고, 믿을 수 없고, 책임지지 않고, 탐욕스러운 집단이라는 낙인이 찍혀 버렸다는 것이다. 
 


- 우리나라 상층을 분석하면 몇 가지 부류로 나뉘는데 가장 문제 있는 집단이 뭐라고 보나.

“아마 법조인하고 정치인들일 것이다. 두 집단만 자정해도 사회가 일단은 바뀔 수 있다고 본다. 하지만 정치인이 바뀌기 위해서는 상당히 긴 시간이 요구된다. 반면 법조인은 빨리 자정의 길로 들어설 수 있다. 


- 왜 그런가.

“법조인들의 가장 큰 문제가 전관예우 아닌가. 대법관 지낸 사람들도 옷을 벗고 나오면 돈을 한 푼이라도 더 벌려고 전관 변호사를 하면서 문제가 발생한다. 일종의 집단탐욕이다. 이미 많은 특혜를 누린 사람들이 임기가 끝나도 일반 국민으로 돌아가지 않고 전관이 현관으로 다시 와서 그전의 특혜를 또 누리려고 하는 것이다. 사실 고위 법조인을 지냈으면 연금 받으면서 그냥 살아도 된다. 어려운 처지도 아니고 내일 모레면 죽을 텐데 그 돈을 어디다 쓰려고 그렇게 욕심내면서 벌려고 하는지 모르겠다. 대법관 하다 나오면 기껏 20년이나 더 살까. 돈 많아 봤자 자식들 간에 분쟁만 벌어지고 집안 분란만 일으킨다. 


- 어떻게 하면 자정이 되겠나.

“대법관 등 고위 법조인 출신들이 정치권 같은 데 기웃거리지 말고 전관을 앞장서 없애자는 캠페인이라도 했으면 좋겠다. 스스로 자정 결의하고 후배들을 바르게 이끌면 조금이라도 달라질 수 있지 않은가. 나부터 전관 안 하겠다고 ‘노’라고 선언하면 존경받을 텐데 왜 못하는지 모르겠다. 


송 교수는 ‘특혜와 책임’에 우리나라 상층의 민낯을 드러내는 자료를 실었다. 바로 1992 12, 대통령 선거전 도중 공개된 ‘부산지역 기관장 모임’의 발언록, 이른바 ‘초원복집’ 사건의 기록이다. 당시 부산에서 장관과 여당 지부장, 시장, 기무부대장, 경찰청장 등 우리 사회 지도층 인사들이 모여 선거에 이기기 위한 대책을 숙의한 대화록이다. 송 교수는 “당시 발언들은 우리 사회 상층의 수준과 의식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는 점에서 지금도 유용한 자료”라며 “그 발언록을 보면 우리 상층의 국가관, 사회관은 물론이고 교양, 교육, 인격적 수준까지도 가감 없이 드러난다”고 지적했다.


이 발언록에는 20여년이 지난 지금 들여다봐도 사실 낯뜨거운 발언들이 널려 있다. “믿을 곳은 부산 경남이 똘똘 뭉치는 것밖에 방법이 없습니다” “노골적으로 얘기할 수는 없고 접대를 좀 해주세요” “우리는 지역감정이 좀 일어나야 해” “그런데 이놈들이 원체 삐딱하니까”…. 송 교수는 당시의 발언록을 보면 우리 사회 상층이 △목적을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오히려 일반인 이상의 지역이기주의를 갖고 있고 △자기 쪽에 유리하면 어떤 행동도 감행하며 △국가가 깨어지건 사회가 부서져나가건 아랑곳하지 않는다고 비판한다.
 


- 20년이 더 지난 자료인데 한국 사회 상층을 너무 과거의 잣대로 일반화하는 것 아닌가.

“그렇지 않다고 본다. 우리 사회 상층은 그때나 지금이나 같다는 생각이다. 1990년대를 지나면서 다들 소명의식도, 이렇다 할 국가관도 없는 상태에서 공직으로 갔다. 고시 준비생들 대부분이 나라를 위한다는 소명의식이 아니라 입신양명과 출세라는 생각에 더 사로잡혔다고 본다. 철저하게 사익을 위해 공익집단으로 뛰어든 셈이다. 1990년대 이래 우리의 공익집단은 사익집단이 돼 버렸다는 게 내 생각이다. 나라의 세금을 사익을 위해 써온 것인데 그 사회적 손실이 엄청나다. 공익집단이 사익만 생각하고, 기득권을 연장할 생각만 하니까 부패할 수밖에. 그 끝자락이 ‘김영란법’이라고 생각한다.


이와 관련 송 교수는 “우리 사회 지도층은 크게 봐서 세 가지의 치명적 단점을 갖고 있다”는 지적도 했다. 첫째는 너무 탐욕적이고 이기적이며, 둘째는 인격이 성숙되지 못하고 수련이 덜 돼 있다는 점이고, 세 번째는 구사하는 어휘의 질이 떨어지는 등 표현력 결핍이라는 문제를 안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특이하게 우리 사회 상층의 문제점 중 하나로 말()을 꼽았다. 그는 “우리 고위층은 그 지위에 맞는 언어를 구사하지 못하고 있다. 사람들 앞에서 말하지 않으면 안 되는 지위임에도 언어 훈련이 전혀 돼 있지 않다. 말을 막 하고 함부로 하는 것이 습관화돼 있다”고 비판했다. 
 


- 그래도 상층의 역할이 있었기에 우리 사회가 이만큼이라도 유지·발전된 것이 아닌가.

“개개인이야 그런 역할이 있었겠지만 나는 상층이라는 집단을 얘기하는 것이다. 이는 일반인의 인식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책에 썼지만 ‘사회 발전에 많이 기여했다’는 기여도 평가조사를 보면 고위 공무원이 5.1%, 국회의원이 4.0%, 판검사가 6.3%, 군장성이 8.6%, 기업인이 18.0%인 데 반해 공장근로자는 55.3%, 기능공은 53.6%, 농민은 48.4%, 우체부는 39.1%로 나타나 있다. 얼마나 우리 사회 상층이 낮게 평가되고 있는지 미루어 알 수 있다.


- 상층이 이렇게 낮은 평가를 받게 된 원인이 뭐라고 보나.

 “결국 그들이 도덕적 모범을 보이지 못했기 때문이다. 역사적으로 존경받아온 상층은 지위나 권세, 부 때문이 아니라 그들의 도덕성 때문이었음은 경험적으로 수없이 입증된 사실이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지식·상식·교양을 뜻하는 문화와, 도리·도덕·규범을 말하는 윤리가 내면화·체질화돼 있어야 한다. 이게 없으니까 서양의 상층처럼 법도와 한도를 벗어나지 않는 절제를 보여주지 못하는 것이다. 그런 데서 갑질과 막말이 발생하고 그런 상층을 향해 일반인들의 분노가 쌓이는 것이다. 특히 ‘갑질’이라는 말은 유독 우리 사회에서만 볼 수 있는 특이한 야만적 행위라고 생각한다. 자기 수양, 자기 관리가 전혀 안 돼 있음은 물론이고 가정 교육과 학교 교육까지 제대로 받지 못했음을 입증하는 천민 행위다. 


- 도덕적 모범만 보이면 상층은 존경받는 것인가.

“그와 함께 상층은 사회구조 개선, 개혁에 앞장서야 한다. 우리 사회 상층은 스스로 사회구조의 수인(囚人)이라고 체념하고 책임을 전가해 버리기에는 힘과 영향력이 일반 국민에 비해 너무 크다. 그러한 힘과 영향력 측면에서 보면 그들은 분명 구조의 수인이 아니라 구조의 개선자, 개혁자여야 한다. 구조개혁, 사회개혁은 다시 말해 상층의 기득권을 뺏거나 줄이는 것을 말한다. 자기 기득권을 자기가 앞장서 줄이고 내놓는다는 의미인데 우리 사회에서 이것이 가능했겠나. 


- 서구 선진국은 다르다는 말인가.

“그렇다. 서구의 전형적인 상층이 존경받고 지도력을 갖는 이유는 기득권에서 나오는 과실을 끊임없이 사회로 돌려보내기 때문이다. 정치학자 윌리엄 미첼이 한 유명한 말이 있다. ‘가난한 사람들은 그들이 내놓는 것보다 훨씬 많은 것을 국가로부터 받고, 부유한 상층은 되돌려받는 것보다 훨씬 많은 것을 국가에 낸다.’ 이것이 서구 상층이 부를 지키고, 지위와 명예를 지키고, 존경과 지도력을 계속 유지해온 비결이다.


이 대목에서 그는 우리와 서구 선진국의 상층이 구조적으로 다르다는 점을 강조했다. 즉 서구의 경우 누대에 걸쳐 이어져온 상층, 즉 ‘올드 하이(old high)’ ‘올드 리치(old rich)’인 반면 우리의 상층은 대부분 당대 성공을 이룬 ‘뉴 하이(new high)’ ‘뉴 리치(new rich)’라는 것이다. “우리의 상층은 서구와 달리 역사와 전통으로부터 분리되고 가족으로부터 디시플린(discipline·훈육)을 받지 못한, 오직 자기의 노력과 의지만으로 당대에 성취해서 올라간 1세대 상층이 대부분이다.
 


특히 우리의 뉴 하이는 상대적으로 안정된 뉴 리치와 달리 ‘자리’를 차지하기 위한 경쟁에서 이기고 난 후에는 사회적 소모품으로 끝나는 경향이 짙다. 거주지를 봐도 강남 3구 같은 신거주지에 몰려 사는데 이건 이들의 부동성을 말해준다. 한곳에 터 잡고 이웃 공동체를 만들면서 사는 게 아니라 더 나은 우세 지역이 나타나면 항상 옮겨갈 준비를 하고 있다는 의미다. 일상은 화려할지 모르지만 이웃 간 신뢰고 품위 있는 삶의 관행이고 간에 쌓이는 건 아무것도 없는 셈이다. 이건 한곳에 터 잡고 이웃의 존경을 받으며 대대손손 살아가는 서구 선진국의 상층과는 분명 다르다.


- 제대로 된 존경받는 상층이 없으면 사회가 어떻게 되는가.

“제대로 된 상층이 없는 사회를 나는 ‘혼돈사회’로 본다. 한 사회의 상층은 없앨 수도 없고 없어지지도 않는다. 상층은 그 사회의 희소가치를 가장 많이 소유한 계층인데 그런 소유계층이 존경받지 못하고 지도력을 갖지 못하면 가장 지탄받는 사람, 쇄신과 척결의 대상이 되는 사람들이 거꾸로 사회를 호령할 가능성이 커진다. 그게 바로 혼돈사회다. 가치가 완전히 뒤집힌 사회라는 것이다. 가장 무서운 사회는 가장 많은 것을 소유한 사람이 가장 치열한 매도 대상이 되는 사회라고 본다. 이런 사회는 좌절과 폭압이 늘 교차하고 횡행한다. 

 

노블레스 오블리주가 왜 중요한가

 송 교수의 주장은 결국 서구 상층에는 있는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 oblige)가 우리에게는 없다는 것이 요지다. 그는 옥스퍼드 사전의 정의대로 ‘특혜는 책임을 수반한다(Previlege entails responsibility)’는 말로 노블레스 오블리주라는 단어를 풀이했다. 


- 노블레스 오블리주에서의 책임은 무엇을 말하나.

“나는 특혜받는 사람들의 책임을 구체적으로 세 가지로 본다. 첫째는 목숨을 바치는 희생이다. 나라에 심각한 안보 위기가 닥치면 앞장서서 목숨을 내놓으라는 것이다. 둘째는 나라가 어려움에 닥치면 ‘선점해서 오래 누리고 있던’ 기득권을 내려놓으라는 것이고, 세 번째는 평상시 배려와 양보와 헌신을 하라는 것이다.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중요한 함의는 일반 국민이 이런 책임을 지라는 게 아니다. 바로 특혜받는 사람이 그런 책임을 반드시 져야 한다는 의미다. 


- 노블레스 오블리주가 이 시대 왜 중요한가.

“나는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역사의 동력이라고 생각한다. 지금 우리 정치인들이 개헌 등 우리 정치의 시스템을 바꾸자는 주장을 펴고 있다. 하지만 나는 좋은 헌법, 좋은 제도를 갖는다고 좋은 나라, 앞선 나라가 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런 정치 낭만주의 시대는 이미 지났다. 200년 이상 선진(先進)의 지위를 누리고 있는 서구 민주주의 국가들이 단순히 제도가 좋아서 선진국이 됐겠는가. 그들의 민주화와 우리의 민주화는 다르지 않다. 또 우리가 이미 달성한 산업화는 그들과 큰 차이가 없다. 나는 우리가 선진국이 되지 못하는 이유가 단 하나 있다고 본다. 그들에게는 있지만 우리에게는 없는 것, 바로 노블레스 오블리주다.  


-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유무가 결정적 차이를 만든다는 것인가.

“그렇다. 그들도 요즘은 우리처럼 저성장 양극화에 시달리고 있지만 우리와는 달리 계속 존경받는 집단이 있고 계속 도덕심을 유발하는 집단이 있다. 그래서 그들은 계속 선진국일 수 있는 것이다. 왜 우리 일부 젊은이들이 ‘헬 조선’이라며 우리 스스로를 비하하겠나. 존경할 만한 사람, 집단이 없기 때문 아닌가. 노블레스 오블리주가 없으면 우리에게는 역사를 이끌어 나갈 동력이 없다는 인식을 해야 한다. 노블레스 오블리주가 없으면 우리는 더 이상 한 발짝도 앞으로 나갈 수 없다.


- 노블레스 오블리주는 어떻게 만들어진다고 보나.

“우리도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경험해 봤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아주 오래전 얘기지만, 삼국을 통일한 신라에 그런 기풍이 있었다. 삼국사기 열전 편에 나오는 인물이 85명인데 그중 63명이 신라인들이다. 신라에는 특권층이 나라를 위해 목숨을 내놓는다는 책임과 의무의 정신이 있었다. 반면 백제와 고구려는 상층이 지지를 받지 못하고 분열하면서 망했다. 나는 지금의 대한민국을 있게 한 것도 노블레스 오블리주라고 생각한다. 


- 대한민국을 만든 그런 상층이 있었다는 의미인가.

“나는 5·16군사정변을 일으켰던 세력이 그랬다고 본다. 그들에게는 국가 재조(再造)라는 구조 변동을 일으킬 통찰력과 지식, 결단력과 추진력, 돌파력 등이 있었다. 이전의 지도층과는 완전히 다른 세력이 나타나 나라를 바꾸며 대단한 성취를 이룬 것이다. 그래서 나는 5·16이 쿠데타이지만 혁명이라고 본다. 똑같이 배고팠지만 5·16 추진 세력에는 나라를 바꾸겠다는 소명의식, 책임의식 같은 게 있었고 그게 역사를 이끈 동력이었다. 


그는 이 대목에서 자신이 기자로서 처음 접했던 5·16 세력에 대한 언급도 했다. 5·16 전만 해도 우리는 사실 절대 절망의 시기를 살고 있었다. 그때 기자로서 늘 쓰던 기사 소재가 보릿고개였다. 그러던 무렵, 4·19혁명 직후였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수색에 있는 국방대학원에 취재하러 갔다가 우연히 대령급 장교들이 세미나를 하는 걸 보게 됐다. 국방개혁에 관한 것이었는데 그 세미나를 지켜보다가 뒤통수를 망치로 맞는 듯한 경험을 했다. 그때 그 장교들이 말하는 내용과 지식은 내가 그동안 접했던 지식체계와는 완전히 다른 것이었다. 탁상공론이 아니라 실제적이고 구체적인 액션플랜을 그들은 얘기했다. 그들의 두뇌는 명석했고, 설명은 분석적이었다. 어느 것 하나 두리뭉술 넘어가는 것이 없었다. 우유부단하고 사리사욕에 차고 권력에 눈이 어두운, 그때 기자로서 내가 대하던 기성 정치인들과는 아예 유가 달랐다. 그렇게 사람이 달라지고 지식과 통찰력이 달라지니까 아무도 생각 못 했던 수출입국, 경부고속도로 건설 같은 국가적 과업들을 거센 반대를 무릅쓰고 밀고 나갈 수 있었다고 본다.


송 교수는 “나만 하더라도 중학교에서는 중졸 교사가, 고등학교에서는 고졸 교사가, 대학에서는 대졸 교수한테 가르침을 받았을 정도로 그 무렵 우리 사회 지식인층은 깊이가 얕았다”며 “6·25전쟁 이후 1950년대와 1960년대 미국으로 유학 간 한국군의 엘리트 장교 숫자가 16000명이나 되는데 그들이 어찌 보면 당시 기준으로는 가장 앞서는 지식인층이었는지 모른다”고 지적했다.


-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우리는 다시는 갖지 못하나.

“사실 노블레스 오블리주는 학교에서 배워서 되는 것도 아니고 사회에서 훈련받아서 되는 것도 아니다. 가정에서 태어나면서 배우고 익히고 수련되어서 그 가정 특유의 도덕적 생활양식이 내재화될 때만 가능하다. 결국 가정 교육과 가풍(家風)이 원산지인 셈이다. 하지만 너무 비관적으로 볼 것만은 아니다. 언론과 비판정신이 살아 있는 자유민주주의 국가에서는 결국 시간이 문제라고 본다. 끊임없이 비판받는 상층들이 있다는 것은 그만큼 반면교사가 많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천민성 공연장처럼 돼버렸지만 장관 청문회도 그렇다. 제대로 된 공직자라면 저렇게 살아서는 안 되겠다는 교훈을 얻지 않겠나. 스스로 우리 사회 상층이라고 생각하면 위기의식을 갖고 정신 차리고 살아야 한다.

출처 | 주간조선 2428호   글 | 정장열 주간조선 부장대우

 

□'천재소년' 송유근, 한국 최연소 박사 된다

UST서 내년 2,  18 3개월
상대성이론 응용한 천체 물리학

/과학기술연합대학원대학교 제공

 

'천재 소년'으로 불린 송유근(17·사진)군이 대전의 과학기술연합대학원대학교(UST) 박사학위 논문 심사를 통과, 내년 2월 만 18 3개월 나이로 박사가 된다. 국내 최연소 박사로 기록될 전망이다. 이전 기록은 미국 뉴욕 RPI공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정진혁씨가 23 11개월, 엔씨소프트문화재단 윤송이 이사장이 24 2개월에 박사학위를 받은 적이 있다.

송군의 지도교수인 한국천문연구원(KASI) 박석재 박사는 "송유근군이 학위청구논문 심사 공개발표를 했고, 논문심사위원회에서 송군이 제출한 박사학위 논문 '일반상대성이론의 천체 물리학적 응용'이 최종 통과했다"고 밝혔다.

7
세 때 미적분을 푼 송군은 중·고등학교 과정을 검정고시로 졸업한 뒤, 8세에 대학(인하대)에 입학해 주목을 받았다. 이어 2009 UST 석·박사 통합과정에 입학해 수학과 물리학 등에서 탁월한 재능을 보였다. 입학 후 7년 만에 박사학위를 받게 된 것이다.

박석재 박사는 "송군의 박사학위 논문 주제는 블랙홀과 우주론, 끈이론까지 아우르는 내용"이라면서 "박사후 연구과정 계획을 연말까지 확정할 예정인데, 현재로선 미국 저명학자의 지도를 받아 연구 능력을 더 키우도록 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앞서 송군은 지난 8 SCI(Science Citation Index)급 논문으로 블랙홀 분야를 연구한 '선대칭의, 비정상성 블랙홀 자기권: 재고'를 제출했다. 송군은 또 조용승 이화여대 교수와 함께 작성한 논문을 수리물리 SCI 잡지에 투고해 심사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우정식 사회부 기자 (대전·충남·세종지역) 2015.11.19

 

□고(故) 신봉승 선생의 마지막 종명(終命) 인터뷰 - 2016.04.20 

대하드라마 <조선왕조실록>으로 유명한 원로 극작가 신봉승 선생이 4월19일 별세했다. 사인은 폐암. 선생은 폐암 말기인 2012년 11월 마지막으로 책 두 권을 출판하고 더이상의 집필작업은 하지 않겠다며 마지막 인터뷰를 가졌다. 다음은 전문.

 

▲ photo 이경민 영상미디어 기자

 

조선왕조실록 연구의 대가인 원로작가 신봉승(80) 선생이 최근 두 권의 저서를 잇따라 출간했다. 이성계(李成桂)의 위화도회군을 다룬 역사소설 ‘혁명의 조건’(도서출판 선)과 조선시대 성현들로 대한민국 가상 정부를 구성해 본 ‘세종, 대한민국 대통령이 되다’(청아출판사)이다. 신 선생은 지난 여름 섭씨 40도 가까운 더위와 씨름하며 이 책들을 썼다. 지난 11월 3일 서울 종로구 인사동 집필실에서 필자와 만난 그는 이번 책들을 쓰면서 “죽을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해서 주위 사람들에게도 과로사의 위험성에 대해 경고한다고 했다. 그는 “앞으로는 더 이상 책을 쓰기는 어려울 것 같다”며 사실상의 절필을 선언했다.  


   신 선생은 2008년 폐암 진단을 받은 후 5년 동안 8권의 책을 저술하고 한 해 20여차례의 강연을 하는 등 정열적인 활동을 벌여왔다. 성공한 작가이며 예술원 회원인 그는 자녀들도 남부럽지 않게 성장했다. 남들 같으면 유람이나 다닐 상황이지만 신봉승 선생이 염천에 키보드를 두드린 이유는 무엇일까?   


   “안타까움 때문입니다. 요즘 대한민국 판세를 보면 안타까운 구석이 너무나도 많아요. 정치도 그렇고, 아이들 교육도 말도 안되는 상황이 벌어지고…. 그런데 이런 문제들은 우리 역사를 돌아보면 다 해법이 나와 있어요. 역사를 연구한 사람으로서 참으로 안타까워요.”   


   책 출간은 지식인의 의무  

   신 선생은 개인적으로도 써야 할 이유가 있다고 덧붙였다.

 

“조선의 학자들이나 고위 관리들은 죽기 전에 종명시(終命詩)를 썼습니다. 종명시는 처음에 ‘살아서 하늘의 뜻을 거역하지 않았고, 책 속의 가르침에 어긋난 일이 없었다’고 시작합니다. 나도 살아있는 동안 사람의 도리를 하나라도 더 깨치고 싶습니다. 그러다 보면 시간이 그렇게 아까울 수가 없어요. 이번에 책을 쓰면서도 조금 더 빨리 깨쳤으면 더 좋았을 텐데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이번에 신 선생이 낸 책들이 종명작이라면 이 인터뷰는 종명인터뷰가 되는 셈이다.  


   신 선생은 강릉사범학교를 나와 문단에는 시로 데뷔했다. 그 후 소설, 희곡, 평론, 영화, TV 드라마 등으로 활동 영역을 넓혔다. 1981년부터 10년간, 그로서는 51세부터 환갑 때까지, MBC드라마 ‘조선왕조실록’의 극본을 쓰면서 조선왕조실록의 최고 권위자로 올라섰다. 매주 월요일 저녁 9시50분부터 60분간 방영된 이 드라마는 이성계부터 고종시대까지를 담은 대하역사드라마. 최고의 시청률은 세조의 측근 한명회(韓明澮)가 주역으로 나온 ‘설중매(雪中梅)’, 최저시청률은 병자호란, 정묘호란을 담은 ‘남한산성’이었다. ‘조선왕조실록’의 TV드라마 10년 기록은 앞으로도 깨지기 어려워 보인다. 그가 자부심을 갖는 것은 또 있다.

 

“TV에서 조선왕조실록을 10년 하니까 이조실록, 이씨조선이란 말이 사라졌습니다. 식민주의를 청산하는 데 기여한 것입니다. 나의 커다란 자부심입니다.”   


   신 선생은 드라마를 끝낸 뒤 5년 동안 대하소설 ‘조선왕조 5백년’(48권)을 집필했다. 이처럼 신 선생이 조선왕조실록으로 대작을 낼 수 있었던 것은 바로 한문으로 된 실록 전체를 읽었기 때문. 당시에는 아직 한글로 번역된 실록은 나오지 않았었다. 덕분에 그는 조선왕조실록에 관한 한 학계에서도 인정받는 권위자가 되었다. 그 후에도 그는 실록에 대한 깊이 있는 연구를 바탕으로 ‘난세의 칼’ ‘이동인의 나라’ 등의 역사소설, ‘조선의 마음’ ‘직언’ 등의 평론집 등 조선에 대한 작품을 쉬지 않고 썼다. 최근에 낸 인수대비를 다룬 역사소설 ‘왕을 만든 여자’는 수퍼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그가 이처럼 역사소설을 써내는 이유는 지식인으로서, 원로로서의 국가에 대한 깊은 고민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시바 료타로’가 필요하다 

   “사람들이 역사를 읽을 줄은 아는데 해석할 줄은 몰라요. 역사학계에서도 역사기록은 할 줄 알지만 전체를 아우르질 못합니다. 학생들이 배우는 한국사는 하나의 기록일 뿐 역사에 대한 해석이 없어요. 소설로 표현하면 재밌는 이야깃거리들은 많아요. 소설가 이광수(李光洙), 박종화(朴鍾和) 등이 얼마나 많은 역사소설을 썼습니까? ‘단종애사(端宗哀史)’ ‘금삼의 피’ 같은 역사소설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 소설들은 사료를 그대로 옮겨쓴 듯합니다. 역사에 대한 해석이 없어요. 학자나 소설가나 역사 기록의 행간을 읽으려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이러한 소설의 주인공들이 국가와 민족을 위해 어떻게 뛰었다는 이야기는 전혀 없어요. 그 많은 이야기거리들이 국가를 위해서 어떻게 쓰여야 하는가에 대해서는 연구한 사람이 없다는 말입니다.”  


   신 선생은 역사해석을 통해 국민의식 형성에 긍정적으로 기여한 대표적 작가로 일본의 시바 료타로(司馬遼太郞)를 꼽는다. 시바 료타로의 역사소설 ‘료마가 간다’ ‘언덕 위의 구름’은 각각 10권으로 된 대하소설. ‘료마가 간다’는 사카모토 료마를 중심으로 메이지유신 이후 일본이 강대국으로 발돋움한 이야기이다. ‘언덕 위의 구름’은 20대 청년들이 러일전쟁을 승리로 이끄는 이야기. 일본에서는 이 책들이 3500만질이 팔렸다. 신씨는 “이 소설들은 일본인의 국가인식 형성에 결정적 역할을 한다”며 “일본에 시바 료타로 같은 소설가가 있다는 것은 하늘의 보살핌”이라고 말했다.   


   신 선생은 역사소설을 통해 나라에 기여하기 위해 “정사(正史)의 대중화를 위해 노력했다”고 자부한다. 하지만 “우군이 없어서 외롭다”고 탄식했다.

 

“우리 역사학계는 역사를 문자로만 읽습니다. 팩트 파인딩(fact-finding)만 하는 것 같아요. 행간을 읽지 못합니다. 젊은 학자들은 늘 ‘선생님, 기록 있습니까?’ 하고 되묻습니다. 역사학자들은 기록은 잘 알겠지요. 하지만 만나서 이야기하다 보면 대화가 막히는 경우도 있습니다. 또 문학에 관심이 없어요. 역사인식이 없기 때문 아닐까요? 나는 역사학자들이 역사를 보는 관점을 정확히 나타내야 한다고 봅니다.”   


   이성계의 회군을 어떻게 볼 것인가

   사실 정통 사학계가 실증주의 역사학과 가치중립을 강조한 탓에 대중이 접하는 역사해석에 대한 주도권은 재야의 좌파 연구자들에게 넘어간 감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신 선생이 최근 이성계의 위화도회군을 담은 ‘혁명의 조건’을 쓴 것도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나온 것.  


   “요즘 국민에게는 최영(崔瑩)은 좋은 사람, 이성계는 나쁜 사람처럼 되어 있는 듯해요. 당시 고려인들의 상황에서 보면 이성계는 좋은 사람입니다. 그런데 왜 우리는 최영은 좋은 사람이라고 하고 이성계는 요즘 말로 쿠데타를 일으킨 사람이라고 할까요? 역사를 요즘의 정권 차원에서만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역사를 정치적 이해집단의 입장에서만 봅니다.”   


   내친김에 위화도회군에 대한 그의 견해를 들어보자. 


   “이성계가 위화도회군을 결정하는 순간은 쿠데타입니다. 하지만 3개월 만에 수도인 개성을 점령하고 훈구세력의 거두인 최영을 귀양 보내는 등 전권을 장악하고도 왕좌에 앉지 않았습니다. 3년 동안 전제(田制)개혁만 했습니다. 또 그동안 자기는 오늘날의 부총리 격인 수문하시중만 하고 총리 격인 문하시중은 훈구파 인사들에게 맡겼습니다. 권력찬탈에 대한 욕심이 없었다고 해석될 수 있는 부분이죠.”  


   당시 고려에서는 원나라와 결탁한 훈구세력과 불교사찰들이 백성들의 논밭을 다 빼앗아 가지고 있었다. 이성계는 이를 폭력을 거의 쓰지 않고 3년 만에 백성들에게 돌려주었다. 고려 훈구세력들은 물론 식자층은 대부분 반대했다. 이들의 땅문서를 개성에 쌓아놓고 불을 질렀는데 3일 동안이나 탔다. 백성들이 이 땅문서가 불타는 것을 보고 이성계가 임금이 될 만하다고 생각했다는 것. 즉 처음에는 쿠데타였지만 전제개혁을 단행한 만큼 혁명이라는 것이 신씨의 견해. 이성계는 처음부터 권력욕이 전혀 없었을까?   


   “이성계는 시골인 동북면 출신으로 고려에서 출세할 수 없는 인물이었습니다. 30년을 군(軍)에서만 살았죠. 그러던 이성계가 처음 고려 조정에 진입하여 지배층이 부패에 찌들어 있고 백성이 도탄에 빠진 것을 보고 거사를 치른 것입니다. 그리고 사실 전제개혁은 모두 정도전 등 개혁세력이 했어요. 이성계는 오히려 속도 조절을 했습니다.” 


   역사기록을 보면 이성계는 조민수, 이색, 이임, 심덕부 등 훈구세력들을 문하시중에 천거했다. 훈구세력 스스로 개혁에 동참하도록 한 것으로 해석될 수 있는 부분. 그리고 이들이 개혁을 거부해도 거의 위해를 가하지 않았다. 신씨는 이성계의 이 같은 행태를 정치적 계산보다는 성품 때문으로 돌린다.   


   “과일이 다 익을 때까지 기다린다고나 할까요? 우유부단하다고도 할 수 있지만, 부하들에게 우유부단하다는 인상을 주지는 않았습니다. 근본적으로는 착한 사람이었던 것 같아요.”   


   조선 선비들 도덕성 본받아야  

   그는 ‘혁명의 조건’에서는 이성계의 성품 중 ‘남보다 두드러진 점이 있다면 강직하되 사욕(私慾)이 없다는 점이고, 사욕이 없으니 사욕(邪慾)이 있을 까닭이 없다’고 요약했다. 그렇더라도 후대 사람들은 왜 최영, 정몽주를 높이 평가할까?

 

“충절을 기려야 한다는 점 때문인 듯합니다. 실제로 나중에 세종이 편찬한 삼강행실도에는 정몽주의 충절이 기록되어 있지요.”   


   이성계 이후 조선왕조는 군부의 정권찬탈을 우려하여 군사력을 키우지 않아 태생적으로 약체를 면치 못하게 되었다는 주장도 나온다.

 

 “조선의 역사를 전체적으로 보지 못하고 역사를 이해하지 못해 나온 주장입니다. 조선은 세계에서 가장 훌륭한 나라가 되었습니다. 이런 나라가 500년 동안이나 지속되었어요. 세계 역사상 최장수 국가가 되었습니다. 도덕적으로 바로 선 훌륭한 나라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임진왜란을 겪고 나서는 새로운 왕조가 들어섰어야 했다는 주장도 있다.

 

“근대의 눈으로 조선을 볼 때 생기는 인식의 오류입니다. 역설적으로 임진왜란을 겪고도 망하지 않은 것은 조선이었기 때문입니다. 조선의 지배층이 똑똑한 때문이었죠. 조선은 사람에 대한 투자를 열심히 한 나라였습니다. 가난해도 마음만 바로 서면 된다는 것이 조선이었습니다. 조선에서는 임금이 제 맘대로 한 적이 없습니다. 선비들은 부패하지 않았으며, 임금에게 직언하고 배운 대로 행하였습니다. 신하들이 임금을 무턱대고 따라한 적이 없어요. 요즘처럼 아랫사람들이 무턱대고 윗사람을 따라한 적이 없단 말입니다.”
 

   대한민국도 조선처럼 지식층의 도덕적 각성이 시급하다는 문제의식에서 저술한 책이 바로 ‘세종, 대한민국 대통령이 되다’.

 

“대한민국이 수립되고 대통령 이하 장·차관을 지낸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하지만 우리가 바로 이 사람이다 하고 기리는 반듯한 사람이 몇이나 됩니까?”

 

조선왕조 519년 동안 임금은 27명, 참판 이상의 고관들은 600여명. 신 선생은 이 중에서 ‘반듯함’을 기준으로 현대의 대통령을 비롯한 각부 장관을 선정했다.   

   
   조선왕조 인물들로 내각을 구성해 보니

   대통령에는 단연 세종대왕. 세종은 한글 창제 등 개인적 능력뿐만 아니라 정치적으로도 성군의 조건을 두루 갖추고 있었다. 가뭄이 들자 경회루 앞에 초가삼간을 지어 기식했고, 세금을 줄이려 세밀한 여론조사를 벌인 뒤 백성들의 의견이 분분한 세제개편은 중단한 것 등 어디 하나 모범되지 않은 행동이 없다.

 

‘예(禮)로써 가르치면 상식적인 국민이 되고, 법(法)으로 가르치면 피동적인 국민이 된다’고 설파한 김장생(金長生·1548∼1631)은 교육부 장관감이다. 외교부 장관에는 구한말 승려 출신의 개화파 인사 이동인(李東仁)을 선정한 것이 파격이다.

 

국방장관에는 당연히 이순신 장군일 것이라는 ‘예상’을 깨고 조헌(朝憲·1544~1592)을 뽑았다. 조헌은 일찌감치 왜적의 침입에 대비해야 한다고 경고하고 의병을 일으켜 싸우다 순사한 인물이다. 법무장관에는 도끼를 들고 상소를 올린 구한말 위정척사의 거인 최익현(崔益鉉), 검찰총장에는 ‘큰 간신은 충신 같고, 큰 탐관은 청백리 같다’고 경고한 신진사림의 기수 조광조(趙光祖·1482~1519), 감사원장에는 재야의 조식(曺植·1501~1572)을 선정했다. 그가 이 같은 가상 조각을 한 이유는 무엇일까.
   

   “안타까움에서입니다. 요즘 나라 돌아가는 꼴을 볼 수가 없어요. 나는 조선 선비들이 얼마나 반듯한 사람들이었는가를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지금 정치에 불만들이 많은데 역사를 읽으면 정치도 잘하게 됩니다. 역사책에 옳다고 나온 것은 지금 해도 옳은 것들이 많아요. 요즘 정경유착, 부패가 문제라고 합니다. 문제의 원인은 정치인들입니다. 정치인이 부패하면 안 됩니다. 그런 측면에서 조선 선비들의 도덕성은 우리가 하늘같이 받들어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 역사를 몰라도 너무 모르고 있습니다. 왕조실록을 읽으면 우리가 나아갈 길이 보입니다. 왜 앨빈 토플러만 읽으라고 합니까?”   


   그래도 사람들은 나중에 국권을 빼앗긴 것은 지도층 잘못이라는 생각들을 가지고 있을 텐데….   


   “나라를 빼앗긴 것은 정보 부재 탓이라고 봐야죠. 조선의 선비들은 국제정세에 대한 인식이 거의 없었습니다. 그게 최대의 약점이죠. 조선 최고의 사상은 사서오경(四書五經)의 가르침입니다. 사서오경은 인간학에 대한 책입니다. 이 서책들을 익혀서 제대로 된 인간이 되고 관리가 되어 나라를 운영해야 한다고 선비들은 생각했죠. 사서오경의 가르침은 옳은 것은 옳다고 하고 나쁜 것은 나쁘다고 하는 것, 배워 익힌 바를 행동으로 옮기는 것입니다. 이러한 교육은 요즘처럼 성인이 되어 한 것이 아니었어요. 다섯 살 때 천자문을 읽는 것부터 시작해서 일평생 익히는 것이었습니다. 학문은 몸에 익히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선비들은 이 사서오경의 세계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근대에 들어와서는 불행해진 것일 수도 있어요.

 

 하지만 도덕은 세계 최고 수준이었습니다. 부패도 거의 없었죠. 조선 후기에 들어서면서 의원, 역관, 승려 등 중인 출신들이 조선 근대화에 앞장을 섭니다. 유홍기, 오경석, 이동인이 그들입니다. 하지만 이들 중인은 과거를 볼 자격이 주어지지 않았어요. 이들의 주장이 조정에 반영될 수가 없었다는 게 안타까울 뿐입니다.”  


   “다신 책 안 쓰겠다”

   조선왕조실록에 대한 권위로서 조선 선비들의 도덕성을 소중하게 여기는 생각이 남다르다. 그렇다면 요즘의 역사드라마에 대해서도 견해가 있을 듯하다.

 

“나는 극본을 쓸 때 사실에 기반을 두고 씁니다. 드라마에서 팩트가 가장 중요하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사실보다도 역사인식이 더 중요하다는 말씀입니다. 사실을 다소 변형하더라도 조상들이 지켜온 근본 가치를 훼손해서는 안 된다고 믿습니다. 요즘에는 이러한 기본이 무너지고 있어요. 시청자들이 과연 배울 게 있을까요? 드라마 작가들이 역사 원전을 더 많이 읽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다시 한번 물었다. 정말 더 이상 책을 안 쓸 건지.

“지난 여름에 그 더위 속에서 두 권을 쓰고 나니까 너무 힘들어요. 몸이 말을 안 듣는 느낌입니다. 이제는 다신 안 씁니다. 다만 한 가지, 조선시대 선비들이 어릴 때부터 무엇을 공부하며 성장했는가에 대해 쓰고 싶지만… 안 쓰겠습니다. 사실 나에게 쓰는 것은 숙명입니다. 놀고 싶어도 시간이 너무 아까워요. 책은 안 써도 개인 홈페이지든 어디든 글은 계속 쓰고 싶어요.”

출처 | 주간조선 2403호   글 | 우태영 조선뉴스프레스 인터넷뉴스부장

 

□염한웅 포항공대 교수 2016.02.08 [제15회 한국과학상]

한계에 부닥친 반도체 산업을 구할 수 있을까?

지난 30년간 한국과학상 물리 분야 수상자는 10여 명에 불과하다. 국내 공공기관에서 수여하는 과학상 가운데 가장 권위가 있으며 그만큼 수상자에게는 영예가 뒤따른다. 20년간 연구에 매진해온 염한웅 교수에게 이 상의 수상은 일종의 이정표 같은 것이다.

 

“저에게 지금은 연구자로서 질적으로 도약이 필요한 시기라고 생각해요. 국가 전체를 대표할 수 있는 일을 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책임감도 느낍니다.”

 

▲염한웅 포항공대 교수. /하지영

노벨상에 가장 근접한 
그가 자주 듣는 질문

"
당신의 연구는
 
어떤 실용가치가 있는가?"

대다수 과학자들은
실용성에 관심없어

염 교수는 과학자가 평생 한 번도 논문을 올리기 어렵다는 물리학계 최고 학술지에 수십 번씩 논문을 발표해 샛별로 떠올랐다. 최근 《사이언스》지에 실린 논문은 국내 연구자 중 최초로 노벨 물리학상을 받을 가능성이 큰 학자임을 예감케 한다. 그가 개척한 분야인 원자선 연구는 한계에 부닥친 반도체 산업에 획기적인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를 모은다. 반도체 산업의 성패는 전자회로의 선폭을 얼마나 줄이느냐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그의 이름 앞에 ‘한국을 먹여 살릴 과학자’라는 수식어가 종종 따라붙는 이유다.

 

“많은 분들이 저에게 ‘당신의 연구는 어떤 실용적 가치가 있느냐’고 물어요. 이런 질문은 운동선수에게 ‘왜 세계 기록에 도전하시나요?’라고 묻는 것과 다름없습니다. 2015년 세계 10대 과학 뉴스 가운데 하나가 명왕성 사진을 찍은 프로젝트였어요. 세계인들은 실용성 여부와 관계없이 인간에게 인식의 폭을 넓혀주고 꿈을 심어준다는 점에서 이 프로젝트에 열광했어요. 저는 제 관심 분야를 좋아하고 파고드는 연구자입니다. 제 연구가 반도체 산업에 도움이 될 이론 중 하나로 거론되지만, 연구 결과가 어떻게 쓰일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죠.”

 

염 교수는 대다수 과학자들은 실용성에 관심이 없다고 했다. 실용성과 관계없이 연구에만 매진해온 연구자들의 성향이 과학 지식의 영역을 무한히 확대해온 원동력이 되었다고 설명했다.

 

▲염한웅 교수의 연구실 한쪽에 놓여 있는 다양한 상장과 감사패들(왼쪽), 염 교수의 책상 위에 놓인 최근 물리학계 연구 동향이 실린 학술지. /하지영

 

“과학자와 기술자를 혼동하는 분들이 많아요. 과학자들은 자연현상을 이해하기 위해 무한한 호기심을 갖고 연구하는 사람들이에요. 기술자들은 과학자들이 연구한 지식의 보고들 사이에서 산업화할 수 있는 아이템을 발굴하는 이들이죠. 과학적 연구가 이뤄지고 그 결과물이 산업 현장에서 이용되는 간격이 짧아지고 있지만, 일정 기간 수준 높은 기초 과학 연구가 축적되어야 산업화 가능성도 커집니다. 특히 기초 과학 연구의 토대가 부족한 우리나라에서는 기초 과학에 대한 지원이 더욱 절실합니다.”

 

지난해 일본은 노벨 물리학상과 생리의학상을 받으면서 현재까지 21명의 과학 분야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했다. 중국도 처음으로 과학 분야에서 노벨상 수상자가 나왔다. 이에 비하면 세계 10위권의 경제 대국인 우리나라의 과학 성적은 초라하다. 염 교수는 우리나라에서 과학 분야 노벨상 수상자가 나오지 않는 원인을 기초과학의 토대가 취약하다는 점에서 찾았다.

 

▲염한웅 교수팀이 08년도에 개발한 금 나노선의 현미경 사진. 노란색 부분이 금 원자이고, 파랗게 돌출된 점이 도핑된 실리콘 불순물이다. /연세대 제공

 

“노벨상을 받으려면 국제적으로 인정받고 수상 가능성이 있는 높은 수준의 연구 업적이 있어야 합니다. 업적이 나온 후 평균 15년 정도가 지나 노벨상을 받는다는 통계에 따르면 우리 과학계가 노벨상을 받는 것은 최소 20~25년 뒤가 될 것으로 보입니다.”

 

우리 정부 역시 기초과학의 토대가 허약함을 인식하고 2012년부터 기초과학 연구에 예산을 투입하는 등 적극적으로 지원하고 있다. 염한웅 교수처럼 세계에서 인정받는 과학자들을 기초과학연구단장으로 임명해 연구 사업을 지원하고 있다. 국내와 국외에서 각각 25명씩 모두 50명의 연구단장을 뽑아 그들이 연구단을 구성해 실험과 연구를 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중장기 프로젝트다. 염 교수는 물리・화학・재료 분야 75명의 과학자들과 함께 기초과학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국내 기초과학을 총괄하는 본부가 될 국내 최대 규모의 기초과학연구소는 현재 건립을 준비 중이다. 올해 첫 삽을 떠서 2019년 완공할 계획이다. 연구소 본부는 대전에 세워지고, 울산과기대·광주과기대·대구경북과학기술원 (디지스트)·포항공대 등 주요 대학에 브랜치 기초과학연구소가 만들어진다. 연구소를 먼저 짓고 연구원을 뽑았던 기존 관행에서 벗어나 연구 수준을 높이는 데 초점을 맞췄다.

노벨상 안나오는 이유는
기초과학 토대 취약 때문

정부가 지원하고 있지만
열매 맺기엔 갈 길 멀어

일본 과학자들에게 한 수 배우다

 

염한웅 교수는 서울대 물리학과를 졸업하고 포항공대 석사 과정을 거쳐 일본 도호쿠 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도쿄대에서 조교수로 일하다 연세대 물리학과에 부임해 10년간 연구자로 활발히 일했다. 해외 유명 저널에 가장 왕성하게 논문을 쓰던 시기였다. 2010년 포항공대로 자리를 옮겨 현재에 이르고 있다. 화려한 경력 뒤에는 20대 시절 혹독한 방황의 시간이 있었다. 지도교수와 맞지 않아 두 번이나 학교를 자퇴하는 일을 겪었다.

 

“제가 포항공대 2기 입학생이었어요. 신생 학교여서 그런지 젊지만 경험이 부족한 교수들이 많았어요. 교수들이 모든 걸 완벽하게 알 수는 없어요. 전문 분야 외에는 잘 모르거든요. 잘 모르면 모른다고 인정하고 함께 연구해보자 하면 좋을 텐데, 그걸 잘 인정하지 않아요. 틀린 것을 보고 틀렸다고 논리적으로 문제를 제기하면 굉장히 불쾌해하죠. 포항공대 박사 과정에 입학했는데, 어느 날 교수님이 ‘더 이상 너를 지도할 수 없다’고 하시더라고요. 그래서 학교를 그만두고 전북대로 옮겼어요. 거기서도 비슷한 일이 있었어요. 결국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게 되었죠.”

 

일본 대학의 연구 풍토는 한국과 매우 달랐다. 학자로서 전문성이 뛰어났지만 권위주의적이지 않았다. 교수들은 학생들의 의견에 겸허히 귀 기울이고 받아들였다. 학자들이 자신의 연구에 필요한 기계를 만들어 실험에 사용할 만큼 과학 기술 수준이 높았다. 일본 교수들은 의문이 생겼을 때 완전히 이해할 때까지 질문을 멈추지 않는 염 교수를 지지하고 눈여겨봤다. 염 교수는 2년 6개월 만에 박사 학위를 받았고 도쿄대 조교수 제안을 받았다.

일본 학자들에게 배운
연구전문성과 자세가
지금의 전문분야를 만들어

“일본 학자들의 연구 전문성과 자세에서 배운 게 많습니다. 자신이 모르는 것에 대해 인정하고 항상 배우는 자세를 갖고 있었죠. 일본의 연구 풍토는 다른 연구자를 좇지 말라는 분위기예요. 논문을 아무리 많이 발표해도 독자적인 연구 분야를 개척하지 못하면 연구자로 인정받지 못합니다. 과학 분야에서 노벨상 수상자를 많이 배출할 수 있었던 배경이 되었다고 생각해요.”

 

이런 연구 분위기에 자극을 받아 염 교수는 도쿄대 재직 시절, 세계 최초로 원자선 연구 분야를 개척할 수 있었다. 한 치의 오차도 허용하지 않는 정교한 논리를 다투는 과학자 염한웅 교수의 어린 시절 꿈은 시인이었다고 한다. 중・고등학생 때는 또래들과 밴드를 만들어 노래를 부르고 베이스 기타를 치기도 했다. 그는 시와 음악, 미술을 좋아하고 즐기는, 예술적 감수성이 풍부한 과학자였다.

 

자신의 미래를 좌지우지할 수 있는 지도교수에게 “틀렸다”고 말할 수 있었던 배짱은 어쩌면 어린 시절부터 몸에 밴 인문학적 감수성에서 나온 것이 아닐는지. 소신을 꺾지 않아 시련을 겪었던 젊은 시절의 경험이 현재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독자적인 연구 분야를 개척하는 데 큰 자산이 된 것은 분명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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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어령 前 문화부 장관  2016년 02월 05일

이어령과 문학… “한국문단은 정치 일삼는 ‘文黨’… 난 문학 아니라 문단과 작별”

일제강점기인 1934년 충남 논산 태생인 그는 스물두 살 때인 1956년에 김동리를 비롯한 당대의 문학 권력을 비판하는 ‘우상의 파괴’를 한국일보에 발표해 일약 세상에 이름을 알렸다. 20대부터 10여 년 동안 몇 개 신문사의 논설위원을 할 때, 시인 김수영과 벌였던 ‘불온성 시() 시비’는 문학에서의 순수·참여 논쟁으로 비화해 이어령에게 뜻하지 않은 각인을 찍는다. 순수(보수)로부터, 참여(진보)로부터 모두 경원시(敬遠視)되는 묘한 지점, 혹자는 ‘회색 지대’로 비딱하게 봤지만, 이어령은 이를 창조의 공간, 그레이 존(gray zone)으로 활용했다

 

―문학 얘기를 빼놓을 수 없습니다.

‘문학사상’의 주간을 13년 정도 했고, 이후 문학과는 거리를 두고 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만. “아니에요. 문학은 내가 얼마나 많이 해요. 내가 대학에서 한 강의 노트만도 신라 향가부터 어마어마하지. 최근에 ‘언어로 세운 집’, 20년 전에 쓴 것인데 다시 펴내서 1만 권 이상 나가잖아요. 그건 희망이 있는 거예요. 문학이 아니라 문단(文壇)하고 작별을 한 것이죠. 나는 문단이라고 안 하고 문당(文黨)이라고 해요. 거기는 당이야. 잘못 발을 들이면 아무것도 못해.

 

―평단에서는 선생님의 문학적 성과에 대한 본격적인 평()이 많진 않습니다.

“그건 당연하죠. 나는 이념 싸움을 안 했거든요. 한국 문단이 정치를 했지, 문학을 했나요. 그걸 안 했기 때문에 그런 거지요. 내가 버린 것이 아니에요. 나는 문단에 끼고 싶지도 않고, 그런 것을 평단의 기준으로 삼지 말라고 김수영과 논쟁을 한 것이죠. 사람들은 김수영 시에 내가 ‘불온시’라고 붙인 줄 알아요. 김수영이가 불온시라는 말을 썼어요. 그렇게 잘못 떠도니, 나중에는 내가 무슨 독재를 옹호한 것으로 곡해돼 있어요. 일본의 가라타니 고진은 좌파 문학평론가로 나와 반대편에 선 사람 아닙니까. 그가 나를 인정하잖아요. 30년이 지나서. 그런데 우리는 그렇게 하는 것 보았어요?

 

이어령은 어느 글에서 “나 자신의 문학은 실제의 자신이 세상에 의해 위조된 자신에게 대항했던 기록”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논설위원 시절 경향신문에 연재한 첫 ‘한국인론()’인 ‘흙 속에 저 바람 속에’가 출간됐을 때, 출판사 직원 한 명이 붙어 온종일 인지를 찍었다는 얘기는 전설처럼 전한다. 책을 읽을 만한 한국인 치고 그의 책을 읽지 않은 사람은 드물다. 그는 36세에 12권짜리 전집을 낼 정도였고, 이후에도 최근까지, 자신도 정확히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저서를 냈다

 

이어령의 일상… “글 쓰는 일에 은퇴란 없어… 개인 전집 곧 마무리할 것”

‘거대 지식인’에게 가졌던, 날카로울 것이란 선입견과 달리 선생님은 따뜻했다. 세심하게 기자를 배려해 주었고, 조금 수척해졌지만 여전히 열정적이었다. 따님 얘기를 할 때는 살짝 목이 메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독자들이 궁금해할 사적인 질문을 몇 개 해봤다.

 

―계획은 어떠십니까.

“모든 사회적 활동을 끊고 은퇴를 선언했어요. 대학도 언론계도. 그러나 글 쓰는 일과 생각하는 세계에 은퇴란 없습니다. 가능하면 올해 안에 대학원에서 30년 동안 강의한 노트와 도중에 신문 연재를 중단했던 ‘한국인 이야기’( 10)를 마무리 지으려고 합니다. 그리고 정본이 될 개인 전집도 진행 중입니다. 백조의 곡이 될지 까마귀의 곡이 될지 모르지만 내 마지막 작업이 될 겁니다.

 

―개인적으로 일상에서 특이한 게 있다면.

“나는 토끼잠을 자요. 매시간 깹니다. 그러면 서재에 올라가서 아무 책이나 빼서 읽어요. 그러다가 우연히 기막힌 글 한 줄을 발견하고 그것에 감전되는 거지요. 입에서 악 소리가 나면서 전율 같은 것을 느끼지요. 만약 그날 밤 내가 그냥 깊이 잠들었더라면 영원히 그런 감동을 모르고 지나쳤을 겁니다. 그 불면의 밤들을 위해 축배를 듭니다. 그 어둠이 준 선물들을 향해서 말입니다.

 

―선생님은 식성이 ‘순 한식’이라고 들었습니다.

“나는 거의 양식을 하지 못해요. 책상에는 칸트와 셰익스피어가 주종이지만 밥상 위에서는 어림도 없어요. 어머니의 손맛. 장독에서 삭은 시간의 맛. 그리고 자연 속에서 자란 나물 맛. 이런 것들이 내 생의 사상이요 명작들입니다. 한때 연탄가스에 중독된 사람이 동치미 국물을 마시고 깨어났듯이 역시 수술을 받고 거의 음식을 먹지 못했던 저를 구해준 것도 바로 그 동치미 국물이었어요. 음식이 곧 독이 되는 세상에서 식의동원(食醫同源)의 한식의 지혜를 글로 옮기고 있는 중입니다.

 

―여전히 글을 쓰고 활동하시는데건강관리는 어떻게 합니까.

“건강해서가 아니라 오기로 버티는 것이지요. 하지만 10년 가까이 ‘명상’을 해왔어요. 요가도 아니고 기도 아니고 내가 스스로 발견한 명상법인데요. 아침저녁으로 한 시간 가까이 아무 생각 없이 눈 감고 온몸의 힘을 빼고 앉아있는 것이지요. 거의 숨도 죽이고 말이지요. 그러면 스트레스가 풀려요. 다른 운동이나 보약 같은 것은 거의 먹지 않아요. 헬스클럽이란 곳은 구경도 한 적 없어요.

 

이어령 “한국정치, 右클릭하고 左회전하니 곳곳서 접촉사고”

이어령 前 문화부 장관 이어령, 그를 어떻게 불러야 할까. 문학평론가, 에세이스트, 소설가, 시인, 전 논설위원, 명예교수, 전 문화부 장관, 전 문학잡지 주간, 문명비평가, 문화기획자…. 

그가 이제껏 가졌던 직함들을 나열하자면 훨씬 길어진다. 어느 하나도 그의 정체성을 명료하게 드러내는 타이틀로는 모자란다. 각각의 것 앞에 ‘당대 최고’를 붙인다면 또 어느 하나 어울리지 않을 것도 없다.

한 가지로 명료하게 묶어낼 수 없다는 그 지점에 그의 정체성이 있는 건 아닐까. 끝없는 창의성과 ‘워커홀릭’의 열정은 거기서 나온다. 

스스로 말하듯, 아웃사이더로 인사이더의 삶을 살아온 사람 이어령. 그가 아스팔트만 달려왔다고 본다면 뭘 모르는 것이다. 그가 문화 권력을 비판하고 스스로 권력이 됐다고 하는 이들도 마찬가지다. 

친체제와 반체제로 문단이 갈릴 때 그는 비체제를 선언했다. 문학은 어떤 체제에서도 자유로워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기질상 자기 패거리를 만들지 못하며, 펜을 잡은 ‘두 손가락’의 힘으로 고독과 싸우며 새 길을 열어 온 사람이다. 

존재적 외로움이야말로 그를 문학의 길로 들어서게 했으며, 한국인이면 첫손가락에 꼽는 ‘거대 지식인’으로 끌고 온 동력이었다. 일본을 대표하는 사상가 가라타니 고진(柄谷行人)은 일본의 재무장을 우려할 때마다 항상 이어령의 저서 ‘축소지향의 일본인’에서 제시한 시각을 인용한다. 밖에서도 이어령을 한국의 대표적 지식인으로 보고 있다. 

 

연령대를 넘어 가장 폭넓은 세대의 멘토인 이어령을 지난 1 22일 그가 이사장으로 있는 서울 종로구 평창동 ‘한중일비교문화연구소’에서 만났다. 연구소 이름과 관련해서 먼저 최근 한반도를 둘러싼 현안부터 물었다.

 

―얼마 전 북한이 수소폭탄이라 주장하는 핵실험을 했고, 우리 정부는 중국과 두텁게 관계를 쌓았다고 해왔는데, 실제 중국의 행보는 기대에 한참 어긋납니다. 일본과는 일본군 위안부 문제 등으로 여전히 껄끄럽고요. 한·중·일 관계가 우리의 미래와 관련해 여러모로 어렵게 합니다.

“그 물음에 대한 해답은 내가 지금 여기 있는 한중일비교문화연구소라는 이름에 있어요. 아시아시대를 예견하고 2008년에 발족했지요. 중국을 비롯한 브릭스(BRICS)의 대륙세력이 커지면 불가불 해양세력과 충돌하게 될 것이고 그러면 대륙의 중국과 해양의 일본이 아시아의 패권 경쟁을 벌이게 될 것입니다. 그 사이에 낀 한국이 가장 큰 피해를 받습니다. 반도라는 지정학적 위치를 살리지 않으면 그 존재감도 소멸됩니다. 여기에서 지정학(지오폴리틱스·Geo Politics)을 지문화(지오 컬처·Geo Culture)로 대전환하는 전략이 요구됩니다. 중국과 일본의 대립과 충돌로 향하는 패권 경쟁을 가위, 바위, 보의 게임처럼 대륙과 해양 사이 반도의 존재를 회복하고 강화시켜 삼항순환의 상생 패러다임으로 이끌어가는 큰 그림을 그려야 합니다. 제 생각만이 아니라 자크 아탈리(프랑스 미래학자·전 유럽부흥개발은행 총재)도 그와 비슷한 말을 한 적이 있어요. 유럽연합(EU)처럼 아시아공동체가 생기게 되면 베이징(北京)이나 도쿄(東京)가 아니라 서울에 그 본부가 설치될 것이라고 말입니다. 이름은 사고(思考)의 집이죠. 그래서 저는 동아시아란 말 대신 한중일이라는 말을 사용해서 한국인의 역할이 충돌을 상생으로 향하는 비전을 만들어내야 하는 것으로 보았습니다. 이것이 바로 유불선 삼교 일체와 융합을 이야기한 고운 최치원 선생의 접화군생(接化群生)의 비전이지요.

 

―정부나 정치권이 우리의 생존이 걸린 한·중·일 문제에 예측과 대비를 제대로 하고 있는지, 의구심도 듭니다.

“중국이 우크라이나에서 폐선을 사들였을 때 정치계는 물론이고 언론도, 학계도 주목한 사람이 없었지요. 그러나 그것이 초음속기가 발진할 수 있는 항모로 구축돼 남중국해의 분쟁해역에 출현했을 때, 그제야 우리는 자다가 깬 사람처럼 야단들을 합니다. 나는 메르스(중동호흡기증후군) 사태가 나기 8개월 전 아프리카에서 에볼라가 발생했을 때 이머징 바이러스(emerging virus)의 위험성을 경고하는 글을 신문지상에 발표했지만 그러나 누구도 주목하는 사람이 없었지요. 메르스 사태가 일어나자 그제야 온 나라가 패닉 상태에 빠졌지요. 북핵도 예외는 아닙니다. 중국과 북한의 관계에 대해서도 우리는 미리 그런 사태가 올 것을 알았어야 해요.

 

―한·중·일의 비교문화 연구가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을까요?

“중국 사람이 좋아하는 꽃은 모란, 일본은 벚꽃, 한국은 무궁화지요. 다 다르지만 3국을 이어주는 꽃이 하나 있어요. 매화예요. 아무런 통일성이 없는데 매화는 통하는 것이 있다, 그러니까 세 나라를 비교해, 의자가 세 다리를 가져야 안전하듯이 문화적으로 공통의 것을 찾는 게 시작이에요. 값비싼 대가를 치르지 않고 얻을 수 있는 게 많아요. 그게 지식인의 역할이죠. 공통의 문화기반을 가짐으로써 패권 없는 아시아를 만들고 중국, 한국, 일본이 상생할 수 있는 것이에요. 최근에 ‘한중일 공통 808자’를 선정한 것도 그런 맥락에서 자화자찬 같지만 중요한 일을 한 것이지요. EU가 왜 EU가 됐어요? 정치, 경제가 만든 게 아니고 문화였어요. 한·중·일 공통의 기반을 만드는 저수지를 만들어야지. 물을 끌어다가 논에 주느냐, 밭에 주느냐는 정치, 경제가가 할 일이고.

 

―말씀하신 김에, 현실 정치에 대해선 거의 언급을 안 했지만, 4월 총선을 앞두고 선량(選良)들이 화급한 국제 정세나 민생보다는 여전히 진보·보수 타령에다가 자리 보존에 급급해 이합집산을 거듭하고 있는데, 한 말씀해 주시지요.

“한국 정치는 후미등만 켜고 질주하는 자동차와도 같습니다. 정치인이나 정당의 이슈가 항상 좌클릭이냐 우클릭이냐가 쟁점이 되고 있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색깔 논쟁을 하던 때에는 그래도 단순하지만 분명한 선택이 있고, 소박하지만 정치적 정체성이라는 것을 지니고 있었지요. 그런데 요즘은 우클릭하고 좌회전하고, 좌클릭하고 우회전하는 정치인이나 정당이 많아 도처에서 접촉사고나 충돌이 발생합니다. 표를 찍는 유권자들도 헷갈려 ‘멘붕’ 상태에 빠져 있습니다. 큰 선거를 치를 때 당명을 바꾸거나 분당하는 일이 잦은 것도 모두가 후미등의 깜빡이를 잘못 켰거나 위장한 데서 비롯되는 일도 많습니다. 앞이 보이지 않는 컴컴한 길을 가려면 가장 중요한 것이 미래의 비전을 보여주고 밝혀주는 전조등인데 결국 한국의 정치차()에는 후미등의 후향성밖에 없다는 것이지요. 소돔의 성이 불타고 있을 때 롯의 아내는 뒤를 돌아다보다가 소금기둥이 되었습니다. 위기의 시대에는 미래의 입법자라는 시인이나 예술가처럼 미래를 투시하는 상상력과 창조력을 발휘하는 전조등의 정치가 필요할 것입니다.

 

―선생님은 미래를 예측해온 상상과 창조의 아이콘인데요. ‘창조학교’도 만들었고요. 창조성에 대해 말씀하신다면요.

“누구나 창조자가 될 수는 없습니다. 그보다는 창조인을 알아볼 수 있는 능력과 안목을 교육하고 육성하는 쪽이 유효할 것입니다. 한국의 비극은 천리마는 있는데 그 천리마를 알아보는 백락(伯樂)이 없다는 것입니다. 스티브 잡스를 부러워할 것이 아니라 잡스를 알아보고 그가 학생 시절부터 도와준 명사들이 있었다는 것을 부러워해야 합니다. 왜 맨토링시스템의 창조학교를 만들었겠어요? 정치가들의 이슈가 김구, 이승만, 박정희, 김대중(DJ), 노무현 묘에 가느냐, 마느냐예요. 왜 정치가 과거에만 목을 맵니까. TV를 틀어봐도 ‘응답하라’야. 전부 과거 얘기야. ‘응답하라’는 책임을 묻는 거잖아요. 국회 청문회도 ‘응답하라’예요. 응답하라 스트레스에 걸려 있어요. 응답하다라는 것이 영어로 리스폰드(respond)이고, 리스폰서빌리티(responsibility)가 책임이죠. 미래라는 것은 책임을 묻는 것이 아니고 질문을 하는 거예요. 질문은 누구도 모르기 때문에 응답할 자가 없어. 그럼 뭐야, 만들어야 해요. 심판의 반대가 창조야.

 

―‘창조경제’니 해서 정부와 기업도 창조를 여러모로 고민하는데요.

“미래를 좌우하는 첨단산업은 대개가 다 무지와 규제 때문에 기지개를 켜지 못합니다. 드론과 3D 프린터 그리고 전기자동차의 경우 한국은 중국, 대만보다도 뒤지고 있습니다. 일본만 해도 드론을 날릴 수 있는 특별구를 만들어 요코하마(橫濱)시에서는 자유로이 사용할 수 있도록 숨통을 열어주고 있지요. 만약 우리가 농촌 지역만이라도 규제를 풀어 드론을 사용할 수 있게 되면 논이나 과수원의 병충해 발생지를 정확히 촬영해 그곳에만 농약을 뿌려 비용과 환경오염을 막을 수 있고 청년 일자리도 생깁니다. 농업과 공업이 공생하고 오락산업까지 영향을 주는 일석삼조, 사조의 성과를 낼 수 있지요. 세계 드론 대회를 열면 평창동계올림픽 개회식에 활용해 드론의 예술 문화를 창조하는 중심국이 될 수도 있습니다. 센서가 달린 스마트 젓가락을 휴대전화와 연계하면 매일 먹는 식품의 중금속 오염, 염분과 당분 측정 등 빅데이터를 만들어 운영할 수 있습니다. 당뇨병, 암 등 온갖 식품공해로 인한 질병에서 벗어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한국이 세계의 의료시스템을 창출할 수 있게 됩니다. 젓가락질을 모르는 구글과 애플을 이길 수 있는 비즈니스 분야가 열리는 겁니다.

 

―현재 신자유주의가 빈부격차를 극단으로 몰며 세계를 옥죄고 있습니다. 우리 젊은이들도 ‘금수저, 흙수저’에 ‘헬조선’을 말하는 지경입니다.

2008년 리먼브러더스 금융쇼크 이후 금융 자본주의가 벽에 부딪혔을 때 저는 ‘생명이 자본이다’라는 책으로 ‘산업=금융’의 물질자본주의에서 생명 공감을 밑천으로 삼는 자본주의 문명론으로 가야 한다고 주장했지요. 인적자본에서 사회자본 그리고 문화자본과 자연자본으로 확산시키고 통합하는 생명자본 개념을 제창하게 된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본주의가 요즘 폐해가 있다고만 생각하지, 그보다 자본주의의 폐해가 있다고 생각해서 만들어진 환상이 어떤 결과를 가져왔는지는 잊고 있어요. 사회주의도 있었고, 히틀러, 일본 제국주의도 있었단 말이죠. 그것으로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었습니까. 그래도 마지막 살아남은 게 자본주의예요. 리먼 쇼크 이후에 삼척동자가 봐도 금융, 돈 먹고 돈 먹는 카지노 자본주의예요. 이걸, 물질자본주의를 생명자본주의로 돌리는 얼터너티비티(alternativity)밖에 없어요. 사람이 살려 하는 것을 살림살이라고 하는데, 나는 살림살이라는 말을 참 좋아해요. 한국 사람은 뭐가 밑천이야? 자식이, 인간이 밑천, 그게 생명사상이에요. 젊은이들이 ‘헬조선’을 말하는데, 해방되고 선진국 대열 10위권 내에 그래도 턱걸이한 나라가 있나요? 상대적으로 평가해야죠. 젊은이들이, 그걸 말이라고 하느냐고. 진짜 지옥이 뭔지 가르쳐 줄까요? 포기하는 게 지옥이야. 진짜 지옥은 아무것도 안 하고 죽는 거예요.

 

―책에서 ‘메멘토 모리’(Memento mori·죽음을 생각하라)를 말씀하시고 했는데, 죽음의 문제에 대해 어떻게 정리하고 계신지요.

“그래서 내가 문학을 하게 된 거예요. 나는 6세 때 어머니가 돌아가셨고, 돌아가시기 전에도 어머니 코에다 손을 대서 숨 쉬는 거 확인하고 잠들곤 했어요. 6세 때부터 끝없이 죽음의 문제를 생각한 거죠. 죽음 앞에서 권력이 어디 있고, 돈이 무슨 소용인가, 누구나 공평해요. 그러니까 나는 죽음의 문제를 해결한다는 것, 안 죽을 순 없지만 죽음 이상의 가치를 만들지 않는 한 사형선고 받은 채로 사는 것이라 생각했어요. 소위 메멘토 모리, 이런 것들이 계속 문학에서 머무르게 한 것이고, 세속적 가치관보다 존재론적 사유를 하게 한 거예요. 마지막에는 종교문제로 들어간 것이죠. 그런데 딸(이민아 목사·2012년 작고)이 죽고, 외손자가 죽고, 나도 몇 번씩 수술을 하고 보니까, 이제는 모색하는 단계는 지났고 나에게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어. 이제야말로 세속적 언어라도 남겨야겠다고 ‘한국인 이야기’ 10권 저술에 착수한 거예요. 유언을 쓰듯. 난 자서전은 절대 안 써요. 왜 남들이 내 변명 들어주고, 나 잘난 얘기를 해요. 내가 만난 이웃들, 내가 기억하고 사랑하는 사람들이 어떻게 이 세상을 열심히 살아왔는지, 그 의미가 뭐였는지에 대해 남기고 싶어요. 내가 일제강점기, 6·25전쟁, 독재시대 등 가혹한 시대를 살았는데, 이제는 감사하고 있어요. 내가 그 시절에 안 살았다면 제국주의가, 전쟁이, 독재가 얼마나 무서운지 알겠어요. 어떤 의미에서는 버림받은 세대인 줄 알았는데, 아니다, 하나님이 선택을 하셨구나. 문학 하는 사람,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최고의 삶이었다는 거예요.

 

2007년으로 기억합니다만, 병고를 겪으면서도 밝게 살아가는 따님 이민아 목사를 기쁘게 해주겠다는 마음으로 처음 기독교 신자가 됐지요. 당시 언론들이 ‘지성에서 영성으로’라는 제목으로 1면 머리기사를 쓰기도 했습니다. 외람된 질문입니다만, 따님이 세상을 떴는데, 신앙에 대한 생각이 달라진 건 없는지요.

“딸애는 죽을 때도 참 의연했어요. 죽음아, 너 오너라, 한 번 해보자, 웃어가면서. 의사가 3개월 남았다고 하니 씩 웃었어요. 그러고서 책 세 권을 썼잖아요. 나는 인간이 안 죽을 순 없지만 죽음보다 강할 수 있다는 걸 우리 딸에게서 봤어요. 죽기 직전까지도 세계를 긍정하고,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고. 나는 밤마다 하나님을 원망하거든. 나는 절대로 지성에서 못 벗어나요. 욥처럼. 처음에는 욥처럼 나도 하늘을 원망했습니다. 세례를 받은 후 외손자가 그리고 내 딸이 내 곁을 떠났습니다. 그리고 나 자신이 세 번이나 큰 수술을 받는 재앙의 연속이었어요. 하지만 생각해 보세요. 예수님의 열두 제자 가운데 누구 하나 순탄한 길을 걸었는지. 다 순교했습니다. 그것을 알면서도 오히려 그런 불행들이 기독교를 천 년의 반석 위에 올려놓았지요. 예수님처럼 아무 죄도 없는 분이 죄인으로 형틀에서 돌아가셨는데 하물며 죄 많은 사람이 겪는 고통은 당연한 것이지요. 그런데도 밤중에도 열 번 속으로 외칩니다. ‘주여 날 버리시나이까.’”

 

―선생님은 20대부터 글로 세상에 이름을 알렸고, 60년 동안 ‘베스트셀러’를 수없이 냈습니다. 선생님을 만든 것은 무엇일까요?

“어릴 적 서울에서 학교 다니는 형님들이 방학 동안에 가져온 책들을 초등학교 2, 3학년 때 다 볼 수가 있었어요. 남들이 동화 읽을 때 세계문학전집을 읽으니 뇌세포가 활성화될 수밖에 없어요. 어머니는 밤낮 책을 읽어주셨고, 형들은 방학 때 오면 서울에서 본 영화 얘기를 해줬는데, 호기심에 가득 찬 초등학생이 대학생들과 어울려서 대화를 나눈 거예요. 단순한 독서가 아니라 문학적 상상력과 창조력을 키우는 기회였어요. 내가 세계 규모의 행사에서 기조연설을 여러 번 했잖아요. 내가 독서만으로 배운 거라면 그 사람들 앞에서 말 못해요. 그때의 상상력으로 하니까 상대가 아무리 노벨상을 탄 사람 앞이라도 가능한 거죠. 아버지는 지적 호기심이 많으신 분이었어요. 당시로선 첨단산업, 벤처인 비닐하우스를 하시고 했거든요. 아버지의 지적 호기심에 어머니의 문학적 상상력, 형님들과의 대화가 나를 만들었죠.

 

―‘이어령은 새로운 것을 만들어야 한다는 강박으로 평생을 산 사람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맞는 말이에요. 내가 하나밖에 없는 삶인데 왜 남을 되풀이해서 살아요. 강박관념이지, 트라우마. 나는 항상 새것을 하지 않으면 못 움직여요. 가령 참치는 헤엄을 쳐야 물을 빨아들여 호흡합니다. 그래서 잠을 잘 때도 헤엄을 쳐요. 나한테 있어서 산소라고 하는 것은 창조, 그게 멈추면 죽어. 나는 내 지문이 남들과 다르듯, ‘온리 원(only one)’을 추구했어요. 모방하거나 되풀이하면 나는 존재하지 않죠. 나를 아주 잘 표현했는데. 그게 없었으면 나는 쓰러졌을 것이야. 이걸 나만의 강박관념이 아니라 온 국민이 가져야 한다는 것이에요.

 

―끝으로, 독자들은 선생님이 탄탄대로를 달려온 것으로 보는데, 선생님 자신은 ‘아웃사이더이면서 인사이더로 살아왔다’는 말씀도 하셨는데, 무슨 의미입니까.

“평생 대학교수로, 언론사 논설위원으로, 수많은 위원장, 고문, 장관까지 지냈으니, 사람들은 내가 레드카펫 위를 지난 줄 알아요. 앞서도 얘기했지만, 내가 살아온 시대는 가혹한 시절이었습니다. 대학 등록금을 벌려고 문경에서 영어교사 생활한 건 모르죠. 또 내가 30대에 승용차를 사서 다녔는데, 남들은 내가 과시하는 것으로 봐요. 당시 대학과 언론사를 같이 하며 마감에 맞추려 어쩔 수 없어 차를 산 거예요. 나는 평생을 오해와 편견 속에서 살았어요. 평탄치 않은 길을 걸어왔죠. 더군다나 한국처럼 모든 것이 정치화되고 분파된 데서 외톨이로, 모든 적에게 둘러싸인 곳에서 내 편 없이 살았어요. 이아무개 편이 누구인가 물어봐요. 한 사람도 없어. 그 안에서 손가락 두 개 가지고 팔십까지 살아온 것이 그게 파란만장의 삶이 아니고 무엇인가요. 문단 정치 밖에 있었고, 언론계도 오래 있었지만 나를 언론인이라고 하는 사람 있어요? 대학에서도 학과장도 해본 적이 없어요. 평생 나는 인볼브(involve)된 적이 없어요. 항상 손님처럼 살았어요. 나는 내가 한국인인가 할 정도로 한국을 비판하고 한국 바깥에서 살아오고 그랬어요. 56년 주기로 프랑스, 미국, 일본 등 바깥에 가서 살지 않으면 못 견뎠단 말이지. 아웃사이더로 살아온 거야, 고독한 아웃사이더. 만약 내가 인사이더로 매몰됐으면 지금 평범한 늙은이, 글 써서 돈 몇 푼 벌어 집 한 채 자식들한테 물려주는 많은 사람 중 하나였을 거예요. 남들은 우물을 파도 한 우물을 파라고 하지만 나는 반대예요. 우물을 파다가 물이 나오면 다른 우물을 팝니다. 나에게 중요한 것은 우물물을 마시는 것이 아니라 생에 대한 갈증 그 자체인 것입니다. 지적 호기심, 충족은 오히려 죽음이지요. 목마르지도 않은 사람에게 물을 퍼마시게 하면 그게 바로 ‘물고문’이에요. 그래서 80세 먹은 피터 팬처럼 살지요. 영원히 어른이 되지 않는 아이로 살아요.

인터뷰 = 엄주엽 문화부장 ejyeob@munhwa.com

 

□ 2015.07.07 이어령, "바이러스와 싸우려면 의료전이 아니라 문명전을 해야"

 photo 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딸에게 보내는 굿나잇 키스’(열림원·이하 ‘딸에게’)를 낸 이어령 이화여대 명예교수를 지난 6 22일 서울 종로구 평창동에 있는 한·중·일비교문화연구소에서 만났다. 자택 인근의 개인 연구소다. 아버지로서의 이어령도 궁금했지만, 이 시대 한국의 최고 지성이자 미래학자에게 ‘희망을 어디에서 찾아야 하는가’ 묻고 싶었다. 메르스(중동호흡기증후군) 시국 속, 그는 많은 이들에게 위로를 주고 있다. 그가 쓴 시 ‘날개’가 ‘李御寧의 소원시(메르스의 환난 중에)’라는 부제를 달고 SNS(소셜네트워크서비스)를 타고 퍼지고 있다. 검증되지 않은 메르스 관련 괴담을 광속으로 퍼 나르며 공포에 떨던 네티즌들은 같은 속도로 이 시를 퍼나르며 위안을 얻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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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의 이어령 교수는 목소리가 여전히 카랑카랑했다. 연구소 건물 1층에 들어서자 2층에서 대화 중인 그의 음성이 건물 전체에 울려퍼졌다. 열정과 활력이 넘쳤다. 인터뷰는 그의 서재에서 했다. 연구소 서재는 단출했다. 책상 하나와 3인용 테이블 하나가 전부였다. 그는 테이블에 앉자마자 책 ‘딸에게…’ 이야기를 꺼냈다. 질문할 틈도 없이 시작된 첫 얘기는 20분 동안 이어졌다. 말허리를 잘라 질문하면, “이 얘기만 하고 합시다”라며 하던 말을 이어갔다. 머릿속에 기승전결의 시나리오가 꽉 짜여 있는 듯했다.
   
   
이어령 교수의 인터뷰는 딸 이야기로 시작해 본인의 삶, 한국 사회 이야기로 이어졌다. 아버지의 문화적 의미, 메르스, 새 시대의 패러다임, 언론의 역할, 한국인의 속성, 외로운 천재로 살아가기, 80대 노학자의 꿈을 종횡무진 누볐다. 영화와 고전, 과학과 인류학을 넘나들면서 펼쳐진 그의 이야기의 향연은 봇물 터지듯 쏟아졌다. 1시간 예정했는데 1시간50분이 훌쩍 흘러갔다. 녹취록을 풀어보니 200자 원고지 기준 192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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년 전 쓴 소원시 ‘날개’

   그가 쓴 소원시 ‘날개’는 벼랑 끝 대한민국의 국민들에게 다시 비상할 수 있는 날개를 달라는 간절한 기도문 형식의 시다. 이 시 이야기를 꺼내자 그는 “8년 전 일간지 신년호에 발표한 건데, 이 시가 지금 왜 다시 돌아다니는지 모르겠다”고 했다. “그때도 어수선했다. 경제는 회복이 안 되고, 정치싸움은 치열하고. 그게 요즘 상황과 딱 맞아떨어져서 사람들의 마음에 와 닿는 것 같다.
   
   
시는 ‘벼랑 끝에서 새날을 맞습니다. 추락을 이겨 낼 새 날개를 주소서’로 시작한다. 그에게 물었다. “지금은 어디에서 희망의 날개를 찾아야 합니까” 하고. 그는 주저없이 ‘생명’이라고 답했다. “잃어버린 날개는 생명이다. 생명성을 잃어가고 생명의식을 경시하는 것이 큰 문제다. 메르스는 결국 생명의 문제다. 인간이 육체를 가졌기 때문에 발생하는 거다. 메르스 이전에 사람들은 생명의 중요성을 잊고 살았다. 생명을 늘 인식하고 살았다면 이렇게 당하지 않았을 거다.
   
   
그는 지난해 ‘생명이 자본이다’(마로니에북스)를 냈다. 컴퓨터 기반의 ‘기술 자본주의’에 주력했던 패러다임에서 ‘생명 자본주의’로 눈을 돌려야 한다는 논지였다. 그가 말한 생명 자본주의는 새 시대의 패러다임을 읽는 키워드다. 새 시대는 기존의 후기 산업사회, 지식사회를 지나 생명 자본주의로 흐를 것이고, 흘러야 한다는 것. 그는 “바이러스와 싸우기 위해서는 의료가 문제가 아니다. 문명전을 해야 한다”고 힘주어 말했다. “이머징 바이러스가 새로운 골칫거리로 부상했다. 광우병, 에볼라, 메르스는 기존에 없던 질병이다. 21세기에 위험한 건 핵폭탄이 아니다. 이머징 바이러스다. 바이러스와 싸워서 이기려면 문명 읽기를 해야 한다. 제레드 다이아몬드가 쓴 ‘총, , 쇠’처럼 문명을 움직이는 하나의 팩트로 읽어야 한다. 방역대책, 병원시스템 같은 미봉책만으로는 안 된다. 거대한 문명의 문제로 인식하고 대처하지 않으면 제2, 3의 비극은 또 온다.
   
   
그는 “이 경험을 헛되이 하지 말아야 한다”면서 개인 차원의 교훈을 조언했다. “누구를 탓하지 말고 나 자신이 주체적으로 우뚝 서야 한다. 생명의 귀함을 알았으니 매사에 내 생명의 주인으로서 판단해야 한다. 그래야 정치 선동에 넘어가지 않고, 남이 부채질한다고 춤추지 않는다. 우리는 인형이 아니다. 살아있는 실체이고, 내 생명은 하나밖에 없다.
   
   
메르스 사태 속 언론에 대한 질타가 거세다. 불안에 떠는 네티즌들은 검증되지 않은 괴담을 거름망 없이 퍼나르고, 언론은 속보 다툼을 하면서 불안감을 가중시킨다. ‘망국 언론’이라는 표현까지 나돈다. 이런 혼란을 어떻게 뚫고 가야 할까. 언론이 가야 할 길은 무엇일까. 그는 계몽기를 거치지 않고 현대화된 한국의 특수성이 이런 사태를 가중시켰다고 본다.
   
   
“언론은 전체 민중의 수준과 같다. 포퓰리즘이 그래서 생기는 거다. 똑똑하면 포퓰리즘이 안 생긴다. 현재 정치지도자, 언론, 대중의 수준이 똑같다. 혁명기 이전에는 계몽기가 있는데, 계몽기는 이성적이고 지적이고 합리적 사고를 배우는 시기다. 그런데 우리는 계몽기를 거치지 않고 현대화됐다. 인터넷 보급은 세계 최강인데, 책을 읽고 사색하는 시기를 건너뛴 거다. 그래서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정보 폭탄을 맞았고, 이 정보 폭탄 속에서 길을 잃었다. 한 사람 한 사람의 태도가 언론이 되고 인터넷이 되고 정치가 되는 거다. 누군가가 심어주는 생각이 아니라 의지를 가지고 자기만의 생각을 정립해야 한다.
   
   
방법을 물었다. 그는 “인터넷만 가지고는 안 된다. 책을 읽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에 따르면 정보 처리에는 네 단계가 있다. 데이터, 정보, 지식, 지혜다. 데이터를 정보로, 정보를 지식으로, 지식을 지혜로 확장하는 과정이 있어야 한다는 것. 그리고 묻는다. “대한민국 대중의 정보 처리 수준은 어느 단계까지 와 있나?”라고.   
   


   
메르스가 한국에서 전파력 높은 이유

▲ 이어령 교수의 자택 서재에는 컴퓨터가 6대 있다. 검색용, 필기용, 스캔용, 영상 감상용 등 용도가 다 다르다. photo KBS 영상 캡처


   
메르스는 유독 한국에서 전파력이 높다. 사우디아라비아에 이어 전 세계 2위다. 이를 두고 한국인이 뭉쳐 다니는 데에서 원인을 찾는 시각이 있다. 이 교수가 그의 책 ‘흙 속에 저 바람 속에’에서 지적한 한국인의 ‘떼로 있는 운명’의 비극성과 상통하는 면이 있다. 그는 이 책에서 서양의 주사위와 한국의 윷놀이의 속성을 비교분석했다. 서양의 주사위는 하나를 던져서 판가름하는 ‘홀로 있는 운명’인데, 한국의 윷놀이는 네 개의 윷을 던져 판가름하는 ‘서로 있는 운명’이라는 것. 서로 있는 운명 때문에 당파싸움, 눈치보기, 뜬소문과 괴담이 판을 친다는 얘기였다. 이런 시국과 관련, 한국인이 홀로 있는 법, 고독해지는 법을 배워야 한다는 자성의 목소리도 고개를 든다. 그는 “이런 시기에 더욱 필요한 자세가 온리 원(Only one), 단독자로 우뚝 서는 거다”라며 딸 이야기를 꺼냈다.
   
   
“우리 딸을 봐라. 아비라는 사람이 아픈 딸 옆에서 졸린다고 코를 골면서 잔다. 내가 아무리 사랑해도 어쩔 수 없다. 그게 더 슬프다. ‘아무리 가까워도 너와 나는 각자 혼자 가는 거구나. 내 살을 주고 피를 줬어도 혼자구나’ 싶다. 혼자라는 건 외롭지만 자랑스러운 거다. 똑같은 사람이 없기 때문에. 내가 사라지면 이 세상에 나 대신 메울 수 있는 사람이 절대로 없다. 그런 점에서 한 사람 한 사람이 왕이다.
   
   
그는 현재의 대한민국을 과도기로 본다. 가족이 해체되면서 에고가 생겨나기 시작하는 시기라는 것. 이 과도기에는 양면성이 있다. 주체적인 사고력을 가진 단독자로 우뚝 설 필요가 있지만, 이 또한 행복하지만은 않기 때문이다. “한국인은 타인지향적이다. 허세 부리고 허영심 강하고 간판을 좋아한다. 자아가 빈곤해서다. 서양은 남이 뭐라든 자기 식대로 살기 때문에 문제가 되는데, 우리는 반대다. 지금 서서히 달라지고 있다. 가족이 해체되면서 에고가 생겨나기 시작했으니까. 원하든 원하지 않든 가족 중심이 아니라 사회 중심의 개인이 생기고 있다. 그게 행복한가, 하면 반드시 그렇지만은 않다.
   
   
그 다음 단계에 출현하는 이상적인 인간형으로 그는 ‘초월적, 통합적’ 인간을 들었다. 개인과 사회, 아날로그와 디지털, 서양과 동양이 만나 하나로 어우러진 유형이다. “지금 그런 세계의 인격체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미국 등을 보면 개인주의이면서도 이웃에 대한 사랑과 헌신을 베푸는 사람들이 있다. 절대 고독에서 혼자 살면서도 끈끈한 인간애를 가진 사람들. 놀랍다. 영화 ‘포레스트 검프’나 ‘레인맨’에 그런 인간형이 나온다.
   
   
현재 우리나라는 사회적 개인이 생겨나기 시작했는데, 나쁜 의미의 양면성을 지니고 있다는 게 그의 말이다. 필요에 따라서 사회적 개인과 가족적 개인을 오가면서 불화를 만든다는 것. 그는 “아버지를 안 모실 때에는 서구적이고, 아버지가 자식한테 얘기할 때에는 한국적이다”라면서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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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을 죽이는 사회

   

이어령. 그는 20대에 신문사 논설위원을, 30대에 교수를, 50대에 장관으로 일했다. 서울신문 논설위원을 시작으로 5개 일간지(한국일보, 경향신문, 중앙일보, 조선일보)의 논설위원을 거쳐 이화여대 교수로 오랫동안 근무했고 초대 문화부 장관(노태우 정부)을 역임했다. 그가 거친 위원, 위원장 타이틀은 줄잡아 15개가 넘는다. 2000년 새천년준비위원회 위원장, 범국민추진위원회 위원장이 대표적이다. 그의 이력을 살펴보다가 적잖이 놀랐다. 60개가 넘는 자잘한 타이틀 중 내세울 만한 이력이 많지 않았다. 문화부 장관, 이화여대 명예교수, 중앙일보 고문 정도가 눈에 띄었다. 그는 “우리는 비극이 하나 있어”라며 말을 이었다.
   
   
“혼자 있을 수 없는 비극. 나부터도 그렇다. 진짜 혼자 외로웠다면 뭐 하나 큰 거 했을 거다. 내가 지극히 상식적으로 살아온 것은 가족 때문이다. 아내와 자식 때문에 열심히 직장에 나가고 돈 벌고 부끄러운 아버지가 되지 않으려 했다. 그래서 비범한 사람이 못 됐다. 만약 가족이 없었다면, 철저히 외로웠다면 내 생은 외롭고 불행했겠지만 적어도 뭐 하나를 했을 거다. 나는 남들이 잘 알아주지 않는 자잘한 것을 많이 했지만, 또 가만히 놔두지도 않더라. 허허. 남들은 나를 과대평가된 사람으로 안다. 내 개인은 진짜 외롭다. 내 결점까지 포함해 나를 알아주는 사람이 없다. 별스럽지도 않은 내가 이렇게 외로운데 정말 대단한 천재들은 얼마나 외롭겠나.
   
   
그는 한국 사회를 “천리마를 죽이는 사회”라고 표현했다. 천리마에게 천리를 뛰게 하기는커녕, 천리마에게 짐을 지우고 그 무게에 짓눌려 죽게 하는 사회라는 것. 또 “1등이 될 때까지는 띄우지만, 1등을 죽이는 사회”라고 말했다. “한국처럼 잘 띄우는 나라도 없다. 풍선처럼 띄운다. 올라갈 때까지는 신난다. 그런데 떴다 하면 바로 떨어뜨린다. 롤러코스터 같다. 대통령이든 누구든 마찬가지다. 대통령이 행복한 것은 취임식 때까지다. 그 다음에는 떨어지는 일밖에 없다.
   
   
그는 후배들에게 이렇게 말한다고 한다. 1등 하지 말아라. 항상 2등 해라. 한국에서 일등하면 죽는다. 일등할 만하면 떨어졌다가 다시 올라가라. 산봉우리가 보이면 올라가지 마라. 내려와서 다른 산봉우리를 올라가라.” 그에게 “스티브 잡스가 만약 한국에서 태어났다면 어떻게 됐을까요?” 묻자 이런 답이 돌아왔다. “벤처기업하다가 망해서 사회복지기금 타 먹고 있었을 거다.
   
   
한편으로 그는 스스로 ‘럭키한 세대’라고 말한다. 현 시대 대한민국 교육에 가하는 일침이다. “학교 교육을 거쳐서 수능시험 치렀다면 나는 바보가 됐을 거다. 일제강점기 때 노동자로 동원되고, 좌우익 싸움하느라 학교를 제대로 안 다녔다. 등록금이 없어서 아르바이트도 많이 하고. 그게 내게는 행복이었다. 책 읽고 사회와 알몸으로 부딪히고 떠다니는 구름을 보면서 창의적 사고를 확장했다. 세상이 전부 교과서이자 강의실이었다.  


   
딸을 잃고 짐승처럼 울부짖다

▲ 딸 이민아 목사의 작고 1년 전 모습.(2011)


   
이민아 목사(2012년 작고·당시 53)는 정()이 많은 딸이었다. 받고 싶은 사랑도, 주고 싶은 사랑도 많은 딸이었다. 하지만 초보 아빠는 몰랐다. 좋은 학교에 보내주고 물질적으로 풍족하게 해주는 것이 자식에 대한 사랑이라고 믿었다. 딸은 아팠다. 마음도, 몸도 아팠다. 애정결핍에 시달리던 딸은 죽도록 사랑하던 남자와 결혼했다가 헤어졌고, 스물다섯 된 아들을 급작스레 잃었고, 한 아이는 자폐 판정을 받았다. 고통이 일상이 된 딸은 위암에 걸렸고 실명 위기에 처했다. 아버지는 그제서야 딸에 집중했다. 딸이 원하는 사랑이 뭔지 알게 됐고, 뒤늦게 못다한 사랑을 베풀기 시작했다. 그즈음 딸은 세상을 떠났다.
   
   
이 교수는 딸을 잃고 부치지 못하는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딸의 잉태부터 죽음까지 한순간 한순간 더듬어가면서 기록한 회고록이자 절절한 사랑 편지다. 한편으론 참회록이다. 아버지는 상상 속에서 소녀 시절 딸을 불러내 ‘굿나잇 키스’를 한다. 글의 호흡이 끊길까봐 딸의 간절한 인사를 본체만체했던 아빠는 편지 속에서 약속한다. ‘만일 지금 나에게 딱 30초의 시간이 주어진다면, 나는 글쓰던 펜을 내려놓고, 읽다 만 책장을 덮고, 두 팔을 활짝 펴고 너를 번쩍 들어올려 굿나잇 키스를 할 거다’라고.
   
   
그는 “다시는 읽고 싶지도, 공개하고 싶지도 않은 글이었다”며 말을 이었다. “나는 이 아이의 탄생에서 죽음까지 다 목격한 사람이다. 자궁(Womb)에서 무덤(Tomb)까지 본 거다. 내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 그것도 그냥 사랑하는 게 아니라 나의 일부가 태어나 죽는 것을 경험할 수 있는 체험은 아주 희귀하다. 내가 80년 이상까지 살고 이 아이가 도중에 비운(悲運)에 떠나버렸으니까 가능한 거다. 그런 특이한 경험을 통해서 출생과 사망에 관한 고전적인 테마를 말해보고 싶었다. 나의 체험이 딸을 잃은 아버지,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사람들에게 메시지를 주면 좋겠다.
   
   
그의 글은 이성과 감성의 극과 극을 오간다. 이민아 목사의 아버지로서는 시인의 감성이지만, 이 시대 아버지의 문화적인 코드를 언급할 때에는 냉철한 학자의 이성이다. 그는 이 시대를 “아버지 없는 사회(Fatherless Society)”라면서 아버지를 ‘여분의 인간’으로 규정했다. “어머니와 자식 간은 아무리 사이가 나빠도 본능적이고 자연적인 관계지만, 아버지와 자식 간의 관계는 다르다. 하나의 문화이자 문명이다. 어머니와 자식은 의미부여할 필요없이 확실하지만, 자궁을 갖지 않은 아버지와 자식 간의 관계는 다르다. ‘성()’을 이어받음으로써 문화적으로 맺어진 관계다. 아버지의 태도에 따라 더 가까울 수도 있고, 멀 수도 있고, 아예 타자처럼 느껴질 수도 있다. 아버지는 사회공동체에서 권위이자 질서이다. 요즘은 아버지 없는 사회다. 아버지는 분명 살아있으나 여분의 인간 같은 존재로 추락했다.” 한 가정에서의 아버지의 존재감과 역할을 재정립할 필요가 있다는 얘기다. 그는 이 사실을 딸을 잃고서야 뼈저리게 깨우쳤다고 한다.
   
   
아버지로서의 이어령은 그 누구보다 여린 감성의 소유자다. 그는 딸을 잃고 네 발로 짐승처럼 울부짖었다. 이성의 통제를 벗어난 슬픔 앞에서 고고한 학자의 품위는 무너졌다. “너무 슬프면 데굴데굴 구른다고 하지 않나. 나는 그게 야만해서 그런 줄 알았다. 그런데 참고 참다가 폭발하면 네 발로 짐승처럼 포효하며 울부짖게 되더라. 나도 모르게 바닥을 막 기면서. 이게 2~3분간 지속됐다. 이게 길면 죽는 거지. 극한까지 가니 다운되더라. 동물적인 것이 영성적인 것으로 승화된 거다.
   
   
이 광경은 아무도 못 봤고, 지금껏 말한 적도 없다고 한다. 딸의 죽음은 자기 죽음이나 마찬가지였다. 딸의 죽음을 통해 그는 이성으로 통제되지 않는 ‘자기가 없어지는’ 영적 죽음을 경험했다 한다. 그는 ‘spiritual(영적인) 죽음’으로 표현했다. “슬픔의 극치까지 가니 인간이 곤충이나 동물로 바뀌더라. 마음이 없어지는 거다. 마인드를 상실하는 순간 자기도 모르게 동물적인 눈물이 터져나온다. 그건 슬픔이 아니다. 슬픔은 마음이 있으니까 슬픈 거다. 진짜 슬픔은 마음을 벗어난 거다.     


   
자동차 가진 문인 1, 너를 위한 거였다

▲ 이어령 교수가 딸 이민아 목사의 이화여대 영문과 졸업식 때 함께 찍은 사진.(1981)


   
이민아 목사는 생전 인터뷰를 통해 바쁜 아버지에 대한 서운함을 종종 드러냈다. 딸은 아버지에 대한 반항심 때문에 아버지 방에서 술도 먹고, 아버지한테 못 받은 사랑을 찾아 일찌감치 결혼했다고 했다. 그 사랑에서도 충족되지 않은 사랑은 하나님한테 구했다고 토로했다. 그는 이 인터뷰를 보고 깜짝 놀랐다고 한다. 그토록 사랑하는 딸이 아빠의 사랑을 알아주지 못한 데 대한 서운함이었다. 이 교수는 “내가 딸을 귀여워한 건 유명하다. 소문이 다 났는데…”라더니 말을 잠시 멈췄다.
   
   
둘은 사랑의 방식이 달랐다. 충남 아산의 엄격한 유교 가풍 속에서 자란 아버지는 좋은 학교 보내주고 자동차 태워주는 게 사랑인 줄 알았다. 그래서 딸을 위해 자동차 가진 문인 1호가 됐다. 딸이 인도와 차도를 오가며 위험하게 논다는 지인의 말을 듣고 아버지는 자동차를 샀다. 그는 “나는 원래 그런 사람이 아닌데 아이들을 위해서라면 속물이 될 수 있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딸이 원한 건 물질이 아니었다. 밥을 굶더라도 “아빠!” 부르면 팔을 벌려 “아! 내 딸” 하고 안아주는 스킨십을 원했다. 이 전 장관은 “부잣집 아이일수록 아버지는 늘 바쁘고, 기준이 돈이더라. 지금 와 보니 물질적인 건 아무것도 아니다”라며 눈시울이 붉어졌다.
   
   
나중에 오해가 풀렸다. 딸은 딸대로, 아버지는 아버지대로 후회했다. 서로의 사랑의 방식을 뒤늦게 깨달은 것에 대한 후회였다. 딸은 “내 방식만이 사랑이라고 생각했고, 아버지의 방식을 몰랐다. 오해였다. 그 오해가 풀려 마음이 편하고 아버지한테 너무 죄송하다. 아버지는 아무리 바빠도 늘 나를 사랑하고 계셨다는 걸 이제야 알겠다”며 아버지를 꼭 껴안았다.
   
   
하지만 너무 늦었다. 얼마 후 딸은 세상을 떠났다. 딸이 원하는 방식으로 사랑을 베풀어줄 준비가 돼 있는데 딸은 가고 없었다. 그는 “하지만 그 아이는 세상을 떠나기 전 몇 개월간 가장 행복한 삶을 살았다”고 했다. 망막박리로 실명의 위기에 처했다가 기적적으로 시력을 찾았다는 얘기는 유명하다. 이성적·합리적 사고로 똘똘 뭉친 무신론자였던 이 교수는 당시 하와이의 작은 개척교회에서 무릎을 꿇고 기도했다. “이 아이의 눈을 고쳐주면 하나님을 믿겠습니다.” 얼마 후 딸은 거짓말처럼 앞이 보이기 시작했고, 한국의 김안과에서 수술 후 완전히 시력을 되찾았다. 이 교수는 딸을 위해 학자적 신념을 버리고 기꺼이 교인이 됐다.
   
   
“딸을 위해 신과의 거래를 한 거지. 당시는 앞뒤 생각 안 했다. 그 큰 눈망울이 다시는 나를 볼 수 없다는 생각에 미칠 것 같았다. 원래 그러면 안 되는 거였다. 거래는 남대문시장에서나 하는 거지. 하나님과 그러면 안 되는데 그때는 내가 워낙 급했다. 그 아이가 전화로 ‘아빠! 나 박리 아니래. 박리된 적도 없대’라며 좋아하는데, 한편으론 가슴이 철렁했다. 기뻐해야 하는 순간에 ‘휴~ 내 인생이 바뀌는구나’ 싶었다.
   
   
딸은 육체적으로는 고통스러웠지만 정신적으로는 행복했다. 위암 투병으로 몸은 야위어가고 참을 수 없는 고통으로 얼굴이 일그러졌다. 하지만 뿌옇게 보이던 세상이 깨끗하게 보이고, 그토록 받고 싶었던 아버지의 사랑을 듬뿍 받았다. 그가 세상을 뜬 건, 아버지가 예약해준 서울의 한 특급호텔에서 아버지가 주문한 밸런타인데이 기념 꽃다발을 받은 이틀 후였다.
   
   
이 전 장관은 딸의 삶과 죽음에 대해 ‘가장 슬프면서 가장 행복한 이야기’라고 했다. “의사는 3개월 시한부라고 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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년 반을 더 살았다. 죽음 앞에서는 인간의 오만도 자존심도 다 무릎을 꿇는데, 딸은 당당했다. 암에 당당히 맞섰고, 깨끗한 세상을 보고, 긴가민가했던 아버지의 사랑을 듬뿍 받고, 두 아버지(하나님과 이 땅의 아버지)와의 관계를 잘 유지했다. 땅끝의 아이들을 위해서 용기를 주고 강연을 하고 책을 3권이나 집필했다. 불행했던 삶을 행복하게 마감한 거다. 가장 불행한 순간에 가장 행복할 수 있다는, 삶과 죽음의 역설을 말하고 싶다.  


   
어느 소녀의 눈물

81세의 노학자는 변심을 고백했다. 80세가 되면 살아온 것을 정리하겠다고 마음먹었으나 요즘 마음이 바뀌었다. “정리는 무슨 정리, 써 놓은 것을 그대로 두기로 했다. 잘못된 채로 그대로 두기로 했다”고 했다. 이유는 하나다. 살아있는 동안 새로운 것을 만들기 위해서다.
   
   
“인생에 정리가 어딨나. 은퇴가 어딨나. 오늘 하루가 나한테 새로운 건데 왜 과거를 돌아보나. 지금 아니면 못 쓸 새로운 것을 써야겠다는 마음으로 바뀌었다. 새 책을 쓰기 시작했고, 방송도 다시 출연하려 한다. 오늘은 내 생애 중 처음 있는 날이다. 옛날에는 달력이 월 단위로 보였다. 그런데 차츰 일, , 분 단위로 쪼개져 보이더니 지금은 초 단위로 보인다. 순간순간이 너무 소중하다.
   
   
그는 요즘 불면증을 앓고 있다. 하고 싶은 일, 읽고 싶은 책이 많아서 잠이 안 온다고 한다. 그러면 그는 벌떡 일어나 2층 서가로 달려간다. “서가에 가 보면 서론만 읽고 안 읽은 책들이 수두룩하다. 그 책들이 요염한 여자처럼 보인다. ‘이리 오세요~ 나 어때요~ 나 좀 봐 주세요’라며 유혹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면 막 손이 간다. 우연히 손 간 책을 폈는데 거기에 기막힌 문장이 나오면 ‘악!’ 소리가 절로 난다.
   
   
그는 “한 소녀가 실망하지 않을 책을 쓰고 싶다”면서 3~4년 전 S여대에서 만난 여대생 이야기를 꺼냈다. “특강을 마치고 차를 타려는데 내 차 앞에 신입생처럼 보이는 앳된 여대생이 서 있었다. 나에게 꼭 하고 싶은 말이 있어서 두 시간 동안 기다렸다고 하더라. 소녀는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얼굴로 ‘선생님, 돌아가시면 안 돼요. 죽으면 안 된다고요. 선생님이 살고 있는 세상에 살고 있다는 게 얼마나 기쁜지 몰라요’ 하더라. 내가 들은 최고의 찬사였다. 그 소녀의 눈물을 보면서 ‘내가 세상을 헛되이 살지는 않았구나’ 싶었다.
   
   
그는 “진짜 이 말만 하고 그만합시다”라면서 “오늘을 산다는 건 참 고단한 일”이라고 했다. “현실이라는 건, 오늘이라는 건 참 엄격하고 고단하고 에누리가 없다. 과거는 변명할 여지가 있고, 미래는 희망이 있다. 하지만 오늘 하루를 산다는 건 다르다. 이 인터뷰도 그렇다. 안 하면 안 했지, 오늘, 지금 전 에너지를 쏟아서 인터뷰를 한다. 80이 지났는데도 20대 버릇을 못 고친다.
   
   
그는 “손님이 기다리고 계시니 정말 이 말까지만 합시다”라면서 뛰듯 방을 나갔다. 아직 할 말이 많이 남은 듯했다.   

- 주간조선 2363     

 | 김민희 주간조선 기자    | 김태형 주간조선 기자

 

□ 천재의 탄생, 그의 어린 시절

"내 삶은 매일, 물음표와 느낌표를 오고 갔다"

이어령을 율곡 이이, 초정 박제가와 함께 한국의 3대 천재라고 꼽은 교수가 있다. 이에 대해 그는 손사래를 쳤다. “나는 천재도 아니여.” 연재를 시작하면서 그가 한 첫마디다. 충남 아산 출신인 그는 종종 충청도 사투리를 흘린다. 표준어로 열변을 이어가다가 쉼표쯤에서 이런 식으로 사투리가 튀어나온다.

 

▲이어령 前 문화부 장관. /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그에게는 80여년 평생 ‘이 시대 최고의 지성’ ‘말의 천재’라는 꼬리표가 붙어다녔지만, 스스로는 천재로 불리길 거부했다. 천재냐 아니냐를 가르는 기준은 ‘선천성’인데 자신은 타고난 게 아니라는 말이다. 이어령의 상상력과 창조력의 원천을 기막히게 잘 드러낸 부호가 있다. ‘물음느낌표’다. 물음표가 느낌표를 감싸안은 모양으로, 1962년 미국의 마틴 스펙터가 고안해낸 부호다.

 

 그는 “내가 만약 유럽에 태어나서 자기 가문의 문장(紋章)을 만들라고 했다면 내 문장은 이거다”라고 말한다. 물음표가 있어야 ‘아!’ 하고 무릎을 ‘탁’ 치는 느낌표가 생긴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물음표가 씨앗이라면, 느낌표는 꽃’이라고 표현한다.

 

“내 인생은 물음표와 느낌표 사이를 시계추처럼 오고 가는 삶이었다. ‘유식하다, 박식하다’는 말을 들을 때마다 거부감이 든다. 나는 궁금한 게 많았을 뿐이다. 모든 사람이 당연하게 여겨도 내 스스로 납득이 안 되면 하나라도 그냥 넘어가지 않았다. 물음표와 느낌표 사이를 오고 가는 것이 내 인생이고 이 사이에 하루하루의 삶이 있었다. 어제와 똑같은 삶은 용서할 수 없다. 그건 산 게 아니다. 관습적 삶을 반복하면 산 게 아니다.

 

말썽쟁이 떼쟁이

그의 창조 이력서는 어린 시절부터 시작된다. 1934 1 15일생. 그는 늦둥이다. 7남매 중 여섯째지만 여동생과 일곱 살 터울이라 막내아들처럼 자랐다. 꼬마 이어령은 ‘말썽쟁이 떼쟁이’였다. 어느 집안이든 막내에겐 관대하다. 그는 막내의 수혜를 톡톡히 누렸다. 유교적 가풍이 엄격한 충청도 집안에서 나고 자랐지만, 그는 예외였다. 그의 부모는 다른 형제에게는 엄했지만 그에게만큼은 관대했다. 떼를 써도, 말썽을 부려도 하고 싶은 대로 그저 내버려뒀다. 덕분에 틀 없이 자유분방하게 자랐다.

 

“나는 엄마젖에서 떨어지지 않으려 했다고 한다. 형들이 떼어놓으면 기를 쓰고 다시 엄마한테 달려들었다. 금계랍(金鷄蠟)이라고, 젖 뗄 때 엄마 젖꼭지에 발라두는 게 있다. 쓴맛이 나니까 애들이 다시는 달려들지 않는 거다. 그런데 난 금계랍을 발라서 쓴맛이 나는데도 오기로 달려들어 엄마젖을 먹었다고 한다. 그 정도로 주위에서 감당이 안 되는 떼쟁이였다.

 

다루기 힘든 말썽꾸러기 막내아들에게 집에서 내린 처방전은 ‘서당행’이었다. 두 살 위의 형을 서당에 보내면서 그도 따라붙였다. “집에서 말썽 피우지 말고 차라리 서당에서 천자문 한 자라도 배우라”는 의미였다. 그의 나이 불과 대여섯 살 때의 일이다. 그의 질문의 역사는 서당에서 시작된다. 꼬마 이어령은 서당으로 간 첫날 쫓겨났다. 천자문 첫 네 자에서 넘어가지 못하고 물고 늘어지며 질문을 한 탓이다. 그 유명한 천자문 첫 네 글자. 하늘 천(), 땅 지(), 검을 현(), 누를 황(). 삼척동자도 다 아는 이 네 글자가 그에게는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하늘 천, 땅 지, 검을 현, 누를 황. 하늘은 검고 땅은 누렇느라.

 

서당 훈장의 말에 꼬마 이어령이 물었다.

“왜 하늘이 검나요? 내가 보기엔 하늘이 파란데요?

 

“야, 이놈아, 밤에 보면 하늘이 검잖아.

“그러면 땅도 검어야지 왜 누렇다고 해요? 밤에 보면 다 깜깜한데요?

할 말 잃은 훈장은 호통을 쳤다.

 

“이 쥐방울만 한 녀석이 어딜 와서 따져? 옛 선현들이 다 그렇게 말한 걸 가지고.

그 길로 꼬마 이어령은 서당을 쫓겨났다. 그는 다시 서당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서당의 반란이었지.” 이날 사건에 대한 그의 표현이다. 서당의 반란은 그의 질문 역사의 시작이자 천재의 탄생을 알리는 서막이다. ‘하늘이 왜 검을까?’라는 질문은 그의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외운 것은 금세 잊지만 의문난 것은 죽을 때까지 잊히지 않는 법이다. 천자문 첫 네 자에 대한 의문은 그가 대학생이 된 후에도, 일간지 논설위원이 된 후에도, 교수가 된 후에도 풀리지 않았다. 하늘은 검은데 땅은 왜 누렇다고 하는지, 한문 선생이나 한학자들에게 물어봐도 도대체 답을 구할 수 없었다. 다들 당연한 얘기를 왜 묻는지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이었다.

 

천자문이 창조성을 죽였다

이에 대한 의문이 풀린 것은 40대가 되어서다. 주역과 음양오행 사상을 알게 되면서 비로소 천지현황의 뜻을 이해하게 됐다. “검은색에는 두 가지가 있다. ()과 흑(). ()이 물리적인 검은색이라면, ()은 추상적인 검은색이다. 천자문에서 ‘검을 현’은 추상적인 차원이다. 오방색을 봐라. 동쪽은 파란색, 서쪽은 흰색, 남쪽은 빨간색이고, 북쪽이 검정색이다. 북쪽은 하늘을 가르킨다. 죽으면 북망산에 묻히고 하늘로 향한다. 북두칠성도 그렇다. 그래서 하늘이 검다는 거였다. 선불교에서 수행자들이 깨달음으로 들어서는 문을 ‘현관(玄關)’이라 부르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말하자면 천자문의 검을 현()은 눈에 보이는 색이 아니다. 북쪽의 방위신을 현무(玄武)라고 하듯 방향을 가리키는 동양의 음양오행 사상에서 비롯된 것이다.

 

물음표가 느낌표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그때의 즐거움은 말로 표현할 수 없었다. “꺅” 소리가 절로 나고 온몸에 전율이 일었다. 40년 전 서당에서 받은 구박이 해소되는 찰나였다. 그는 천자문이야말로 창조성을 죽인 원흉으로 본다. 천자문은 사물의 이치가 아니라 주입식 암기를 강요한다. 과거엔 천자문을 얼마나 빨리 뗐냐가 신동을 가늠하는 척도였다. 불과 몇 달 만에 속성으로 달달 외우는 암기대장 꼬마가 생기면 온 동네의 경사였다. 신동이 탄생했다며 시루떡을 돌리고 동네 잔치를 벌였다. 그는 이런 풍조가 한국인의 창조성을 말살해 버렸다고 여긴다.

궁금함의 물음표가
깨달음의 느낌표로
바뀔때의 전율을 잊지 못해

“천자문은 원래 700~800년 전 중국에서 왕자들을 가르치기 위해 만든 거다. 이게 아시아 사람들의 인생 첫 공부가 돼 버렸다. 천자문을 뜯어보면 어른이 배우기에도 어렵다. 가장 흔히 쓰는 한자인 ‘봄 춘()’이나 ‘남쪽 남()’ 같은 한자는 누락돼 있다. 뜻도 모르면서 달달 외우기만 하면 무슨 소용이 있나. 천자문으로 공부해 과거에 합격한 사람이 무슨 상상력이 있겠으며, 멀리 내다보는 혜안이 있겠나. 또 이런 사람들이 무슨 지적 반란이나 패러다임 변혁을 일으킬 수 있겠나.

 

훗날 그는 한자권 아이들이 배우는 한·중·일 공용한자를 제안하고, 80대에 들어서서 ‘한·중·일 공용한자 808’자를 주도적으로 편찬하게 된다. 서당에서의 천자문 트라우마가 평생 그를 괴롭힌 탓인지 모른다.

 

이어령은 질문대장이었다. 평생에 걸쳐 솔솔 뿌려진 이 질문의 씨앗들은 창조의 싹이 트는 텃밭이 됐다. 초등학교에 처음 들어가면서도 근본적인 질문이 터졌다. 왜 ‘서당’이라고 하지 않고 ‘학교’라고 하는지, 누가 왜 학교라고 했는지부터 따져 물었다. 말끝마다 물고 늘어지는 그는 학교 선생의 골칫덩이였다. 질문의 수준은 난이도의 극과 극을 망라했다. 아무리 당연한 것이라도 스스로 납득할 수 없으면 대충 넘어가는 법이 없었다. 갈릴레오가 “그래도 지구는 돈다”라고 혼잣말을 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혼잣말 하는 것을 누가 들었지요?”라고 질문하다 선생님에게 ‘얄미운 놈’으로 눈 밖에 나기도 했다. 제비를 보면 으레 아이들은 ‘빠르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그는 다른 궁금증을 품었다. ‘제비 새끼들에게 어미가 벌레를 한 마리씩 물어다 주는데, 준 놈과 주지 않은 놈을 어떻게 가리는지’ 궁금했다.

 

▲1969, 35세의 이어령. /이어령저작권보존위원회

궁금한 것은 끝까지
파헤쳤던 질문대장 이어령,

배고픈 새끼 제비를
어미 제비가 구별하는법을
50대가 되어서야 알게돼

50년 만에 풀린 제비의 비밀

 

이에 대한 답은 어디에서도 구할 수 없었다. 제비 가족들을 뚫어져라 관찰하고, 조류백과사전을 아무리 뒤져도 나오지 않았다. 궁금증은 사라지지 않았다. 50대가 되어서도 제비 가족의 비밀은 커다란 물음표로 남아 있었다. 그러다 어느 날 신문을 보다가 눈이 휘둥그레졌다. 바로 그에 대한 답이 실린 게 아닌가! 과학적으로 밝혀진 사실인데, 벌레를 먹은 새끼는 입을 덜 벌리고 배고픈 놈이 더 많이 벌린다. 덕분에 어미는 고민하지 않고 입 크기만 보면 누가 배고픈 새끼인지 알 수 있다. 입 큰 녀석에게 먹이를 던져주면 정확하고 공평하게 돌아가는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농약과 환경오염 때문에 벌레가 많이 줄어들어서 먹이를 물어오는 시간이 크게 늘었다. 그 시간에 먹이를 먼저 먹은 놈은 이미 소화가 다 되어 배고픈 놈처럼 입을 크게 벌리게 된다. 그러니 어미가 헷갈릴 수밖에 없다. 이걸 정보이론에서 “노이즈(잡신호)”라고 하는데, 최근 제비 개체 수가 적어지는 이유 중의 하나가 바로 이렇게 먹이를 주는 코드가 혼란스러워졌다는 데 있다는 기사였다. 그는 무릎을 탁 쳤다. 속이 뻥 뚫리듯 수십 년 묵은 갈증이 해소됐다. 또 한 번 물음표가 느낌표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세상 모든 아이는 질문대장이다. 처음 보고 처음 겪는 것 투성이인 아이에겐 온 세상이 호기심 천국이다. “이 모야?(이건 뭐야?)” “저 모야?(저건 뭐야?)” 하며 질문공세를 퍼부어댄다. 하지만 아이는 자라면서 점점 질문을 잃어버린다. 대부분의 어른들은 귀찮아하면서 아이들이 궁금해 하는 답을 주지 않기 때문이다. 그 역시 마찬가지였다. 질문대장이었고, 어른들은 대부분 그의 질문을 ‘쓸데없는 질문’으로 치부해 버렸다. 하지만 결정적 차이가 있다. 이어령은 이런 어른들의 반응에 굴하지 않았다. 아무리 혼나도, 구박받아도 질문을 멈추지 않았다.

 

“엉뚱한 질문을 한다고 혼났지만 나는 혼나는 게 두렵지 않았다. 지적 호기심이 워낙 컸기 때문이다. 물음표가 느낌표로 바뀌는 순간의 환희는 이루 말할 수 없다. 나도 모르게 막 탄성이 나온다. 목마름 없는 지식은 고문이다.

조선일보 & Chosun.com  김민희 주간조선 기자 

 

□ 2016-02-27  이어령의 뒤통수를 때린 참용기

이어령 선생은 천재다. 1934년 충남 아산에서 났다. 올해로 82. 양주동 박사(19031977) 이후 거의 유일무이한 국보급 천재다. 양주동은 생전 술이면 술, 글이면 글, 말이면 말로 ‘국보 제1호’였다. 시인, 문학평론가, 국문·영문학자, 번역문학가, 수필가였다. 비공식 통계지만 양주동은 그 시대 TV나 라디오에 나와 가장 말을 많이 했고, 가장 많은 글을 썼다.

 

이 시대 이어령이 그렇다. 여든 넘은 나이에도, 수술하고 건강에 이상이 온 지금도 여전히 양주동처럼 박학강기(博學强記)를 뽐낸다. 내가 이어령과 인연을 맺게 된 것은 7, 8년 전 인연이 맺어진 서영은 작가를 통해서다. 이어령이 이화여대 교수를 하면서 1972년부터 14년간 월간 문학사상 주간을 할 때 서영은이 이어령을 모셨다.

 

몇 년 전 서영은이 나를 불렀다. 이어령 선생을 모시고 점심을 하는 자리였다. 기라성 같은 문단의 원로급부터 중진 작가 10여 명이 있었다. 나도 말석에 자리를 잡았다. 이어령 선생이 조금 늦게 와 착석했다. 그때부터 마이크를 아마 90% 독점했다. 나도 어디 가도 꿀리지 않고 구라를 피울 줄 안다. 그런데 그날 나는 평생 처음 짧게 두세 번밖에 말하지 못했다.

 

나의 영원한 대부(代父) 최인호가 몇 차례 이어령의 말허리를 자르고 들어갔을 뿐이었다. “승옥이 형(‘무진기행’ ‘서울, 1964년 겨울’의 작가 김승옥), 요즘 어떻게 지내? 2003년 뇌중풍으로 쓰러진 여파로 말이 어눌해 필담으로 ‘충무공 이순신에 관심…’이라고 쓴 종이를 보여줬다. 그때 이어령은 다시 “임란 때 조선 수군의 판옥선은…”이라며 해박한 지식을 한껏 과시했다. 놀라웠다. 

 

지금은 하늘나라에 있는 최인호 대부에게 나중에 물어봤다. “왜 그랬냐고.” “다 좋으신데 너무 마이크를 독점하셔서….” 나도 고개를 끄덕였다. 당시엔 압도당해 귀를 쫑긋 세우고 들었지만 

 

며칠 전 이어령을 같은 모임에서 봤다. 근데 건강이 예전 같지 않은지 마이크를 겨우 60%밖에 사용하지 않았다. 마음이 아팠다. 그가 건강하게 100세 넘게 오래오래 살아 보석 같은 체험담을, 깊고 풍부한 지혜를, 번득이는 예지를 후배들에게 많이 나눠주길 진심으로 빈다.

 

그날도 그는 나에게 보석 하나를 선물했다. 문화부 장관 때 일이었다. 외무부에서 유엔본부에 전시할 각국의 문화재를 모집할 때였다. 어떤 문화재로 할지는 문화부의 소관이다. 그런데 외무부에서 제멋대로 신라금관으로 정하고 레플리카(복제품)를 전시하기로 한 뒤 노태우 대통령의 재가를 받고 문화부에 사후 통보했다. 

 

이어령 장관은 보고를 받은 뒤 불같이 화를 내고 외무부에 항의했다. 그러나 대통령 재가가 난 사안을 뒤집은 전례가 전무했다. 할 수 없어 이 장관이 대통령 면담을 신청했다. 노 대통령에게 요모조모를 설명했다. “신라금관 모조품은 사이즈가 작아 눈길을 끌 수 없다. 오히려 88올림픽 때 사용한 용고(멕시코 큰 소의 가죽으로 만든 대형 북)나 월인천강지곡 목판인쇄본을 확대 복사하는 것이 훨씬 나을….” 듣고 보니 맞는 말이라 노 대통령은 바로 외무부 장관을 찾아 “나 노태웁니다. 이어령 장관 생각대로 하세요”라고 지시했다. 아마 대통령 재가가 난 사안을 뒤집은 첫 사례일 것이다 

 

이어령이 의기양양하게 돌아서는데 뒤통수에서 대통령의 말이 들려왔다. “이 장관, 혹시 저의 좌우명을 아시나요. 참용기입니다. 참자 용서하자 기다리자. 그렇게 평생 하다 보니 이 자리까지 왔습니다.” 이 장관이 얼굴이 붉어져 돌아보는데 ‘물태우’라 불리던 노 대통령이 부처님 같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최영훈 수석논설위원 tao4@donga.com

 

□이윤수 박사 

2015.06.01 [백두산 화산 폭발 논쟁… '韓中 백두산 마그마 공동연구' 한국 측 대표

"北 核실험과 백두산 폭발 연관? 헬륨 가스 수치 분석 결과

핵실험 진동이 백두산 마그마를 흔들었다고 보기는 어려워"

 

"活火山인 백두산은 어느 때든 터진다는 것은 분명해

다만 정확히 언제인지는 현재 자료로는 아무도 몰라"

 

국민안전처의 연구 용역을 받은 윤성효 부산대교수 연구팀은 "백두산 화산이 폭발지수(VEI) 8단계 중 7단계로 폭발할 경우 남한에 최대 11조1900억원의 재산 피해를 줄 것"이라고 발표했다.

 

'강원도와 경북은 화산재가 최고 10.3㎝까지 쌓이는 등 거의 남한 전역에 화산재가 떨어진다. 제주공항을 제외한 국내 모든 공항이 최장 39시간 폐쇄될 것이다. 화산 폭발에 따른 지진으로 서울·부산의 10층 이상 건물은 외벽과 창문이 파손될 수도 있다….'

 

우리 머리 위에 있는 백두산 화산 폭발의 공포를 다시 일깨운 것이다. 학자 개인 차원이 아닌, 정부가 발주한 '화산 재해 피해 예측 기술개발' 연구 용역의 결과이기에 훨씬 신빙성이 높아졌다.

 

당초 한국지질자원연구원 책임연구원인 이윤수(58) 박사를 만난 것은 좀 더 부연 설명을 듣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예상 밖의 반응이 나왔다.

 

"이런 경우 말하기도 난처하고, 입 다물고 있기도 그렇다. 내가 알고 있는 지식으로는 백두산 화산 폭발이 남한 지역에 그처럼 재앙 같은 피해를 줄 수가 없다."

 

연세대와 일본 교토대에서 '지구동력학'을 전공한 그는 '한·중(韓中) 백두산 화산 마그마 공동 연구그룹'의 한국 측 대표다. 오는 7월부터 중국과학원과 공동으로 백두산 내부의 마그마 움직임을 관측하기 위해 시추공을 뚫는 사전 작업에 착수한다. 그런 그가 정부 용역 연구 결과에 대해 의문을 표시한 것이다.

 

▲이윤수 박사는 “‘한일 월드컵’으로 한창 떠들썩했을 때 백두산에서는 화산 폭발 위기로 들썩거렸다”고 말했다. /김지호 기자

 

―본인이 참여하지도 않은 연구의 결과에 대해 이처럼 자신 있게 부정할 수 있나?

"10세기경 백두산 화산이 대폭발했다. 당시 분출된 화산재는 남한 전역을 1m 높이로 덮을 만한 양이었다. 고고학 연구자들은 남한 전역 수십 곳의 기반암까지 절개를 해서 지층(地層)들을 살펴왔다. 하지만 화산재 지층이나 그런 성분이 지금껏 발견된 적이 없다. 자연현상은 똑같은 조건에서는 똑같이 일어난다. 백두산 분화(噴火)로 남한에 큰 피해가 예상된다고 하려면 10세기의 화산재가 발견돼야 하는 것이다."

 

―백두산 화산재가 남한까지 날아올 수 없다는 뜻인가?

"화산이 대폭발할 경우 화산재는 10km 높이 이상의 성층권까지 올라간다. 성층권에서는 동쪽으로 제트기류가 분다. 백두산의 화산재는 북한과 동해상, 일본 홋카이도와 혼슈 북부에 떨어진다."

 

―남한이 전혀 영향을 받지 않는다고 할 수 있나?

"화산재가 동해 한류를 따라 흘러내려 오거나 계절풍으로 얼마간 날아올 수는 있다. 이번 연구처럼 재앙과는 거리가 멀다. 가장 피해를 많이 보는 인접 지역은 일본이다. 10세기에 백두산의 화산 폭발이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된 것도 일본의 지질조사에서였다."

 

―백두산 화산 폭발의 증거가 일본에서 나왔다는 것인가?

"그렇다. 1980년대 초 일본 혼슈 북부 지역의 지질조사에서 두 개의 화산재 층(層)이 나왔다. 아래층은 915년 일본 화산 폭발의 증거였다. 그런데 위층은 일본 화산에서 발견되지 않은 아주 이질적인 성분의 화산재였다. 그걸 추적하면서 근원지가 백두산임을 알게 됐고, 지층 분포에 의해 분화 시기를 915년 이후로 추정할 수 있었다."

 

―역사적으로 발해(渤海)의 멸망 시기가 926년이다. 백두산 화산 폭발과 관련 있다고 보나?

"내가 답변할 수 있는 사안은 아니다. 다만 당시 그런 대폭발이 있었을 때 왜 일본에는 있고 남한에는 화산재가 발견되지 않았을까. 강력하게 뿜어져 나온 화산재가 성층권으로 올라가 동쪽 기류를 타고 갔기 때문이다. 이번 정부 용역 연구팀은 왜 이런 기본적인 사실을 외면했는지 모르겠다. 백두산 화산 폭발의 극단적 시나리오만 보여준 것 같다."

 

이번 정부 용역 연구를 맡았던 윤성효 부산대 교수는 백두산 화산 연구의 권위자다. 2010년 유럽 항공대란을 초래했던 아이슬란드의 화산 폭발이 발생했을 때다. 두 달 뒤 윤 교수는 기상청 세미나에서 '중국 학자들이 2014~2015년 백두산 화산 폭발 가능성을 제시하는 등 백두산이 가까운 장래에 분화할 조짐이 확실하니 정부 차원의 대책 마련이 필요하다'고 발표했다. 이때부터 백두산 화산 폭발은 막연한 공포와 함께 우리 사회의 이슈가 됐다.

 

"화산 분야 연구자가 거의 없는 국내에서 윤 교수는 가장 오래 연구를 해왔다. 하지만 그때 발언으로 시끄러웠다. 당시 외교부에서 '백두산의 화산 폭발 상황이 얼마나 심각한지 토의를 해보자'며 연락이 왔다. 윤 교수 등을 포함해 전문가들이 모였다. 윤 교수에 대해 성토하는 자리가 됐다. 참석자들은 아무도 인정을 안 했다."

 

―백두산이 화산 폭발 한다는 게 근거 없다는 것인가?

"백두산은 활화산(活火山)이기 때문에 언젠가는 터진다. 다만 어떤 관측 자료나 근거가 없이 '몇 년 뒤에 터진다'는 식은 잘못된 것이다. 그건 과학이 아니고, 사회적 혼란만 부추기는 것이다. 당시 윤 교수는 '내 본의가 언론에 잘못 보도했다'고 해명했다."

 

―어쨌든 그로 인해 백두산 화산에 우리가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사실이다.

"국내뿐만 아니라 외국에서도 이슈가 됐다. 권위 있는 과학 저널 '사이언스'는 두 번이나 백두산 화산을 다뤘다. 그때까지 중국 정부는 백두산(장백산)을 관광개발지구의 관점에서 보고 있었다. 그런데 '백두산 화산 폭발' 보도가 나오니까 당황했다. 백두산 관측 자료는 중국밖에 없을 때였다. 공식 회의에서 '제3국의 학자가 무슨 자료를 갖고 그렇게 발표했는지 조사하라'는 지시까지 나왔다고 들었다."

 

―다시 묻는데, 백두산 화산은 터지느냐 안 터지느냐?

"반드시 터진다. 북한·러시아·중국이 교차하는 지점의 아래는 지진대다. 다시 말해 백두산의 심부(深部)에는 지진이 빈발하다. 그래서 전문가들끼리는 '백두산 화산이 언제 폭발해도 이상할 게 없다'고 말한다."

 

―내 기억으로는 학교 다닐 때 백두산을 '휴화산(休火山)'으로 배운 것 같은데.

"그때는 그렇게 배웠겠지만 백두산은 '활화산'이다. 1990년 중국 지진국과 미국 뉴욕주립대가 공동으로 백두산 내부의 탄성파 실험을 했고, 한반도에서 마그마(용암)의 존재가 유일하게 확인된 산이다. 마그마가 있다는 것은 활화산을 뜻한다. 이론적으로는 '홀로세'(1만1700년 전부터 지금까지) 안에 화산 활동이 있었으면 활화산이다. 그런 기준에서 한라산과 울릉도 성인봉도 활화산에 속한다."

 

―백두산이 가까운 시일 내 폭발할 수도 있는가? 20년 안에 폭발할 것이라는 설도 제기됐는데.

"중국은 1999년부터 백두산에서 지진 관측을 해왔다. 2002~2005년 사이 지진 횟수가 부쩍 늘었다. 헬륨가스 농도가 높아지고 지형이 조금씩 솟아오르는 등 폭발 징후가 나타났다. 국내에서 '한·일 월드컵'으로 한창 떠들썩할 때 백두산에서는 화산 폭발 위기로 들썩거렸던 셈이다. 하지만 그 뒤로 백두산은 다시 정상으로 돌아왔다. 현재로는 화산이 언제 터질지 예측할 수 있는 자료가 없다. 그걸 알기 위해 '내시경' 조사처럼 마그마의 움직임을 알아보려고 하는 것이다."

 

―언제부터 백두산 화산 폭발에 관심을 갖게 됐나?

"백두산의 화산 징후를 알게 됐을 때다. 내가 2007년 조선일보에 '높아가는 백두산 화산 폭발설'이라는 글을 게재했다. 이 무렵 북한도 '백두혈통의 성지'인 백두산 화산 폭발 가능성에 대해 고심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걸 어떻게 아는가?

"그해 말 노무현·김정일 간 남북 정상회담이 있고서 북한에서 '백두산 화산 남북공동연구를 하자'고 제안해왔다. 우리 측 실무대표로 나를 포함해 4명이 뽑혀 협상 초안까지 마련했다. 2008년 봄에 실무자협의를 하려고 했는데, 정권이 바뀌고 남북 관계가 경색되면서 만나지 못했다. 그러다가 2011년에 북한에서 다시 제안을 해왔다."

 

―그때는 만났나?

"우리 측 4명, 북측 3명이 두 차례 접촉했다. 북측에서는 학술발표회를 먼저 갖자고 했다. 하지만 우리는 백두산 화산에 대해 발표할 만한 연구 성과가 없었다. 정치적으로 백두산은 중국과 북한에 속해 있다. 우리가 상주하거나 장비를 들고 가서 연구할 기회가 없었다. 그동안 중국 측의 제한된 관측 자료에 의존했던 것이다."

 

―우리 쪽에서는 어떤 제안을 했나?

"북한의 관측 자료를 검토하면서 백두산 화산 연구를 어떻게 할지를 논의해보자는 것이었다. 두 번째 만났을 때 백두산 내부 마그마의 움직임을 공동 연구하자는 안을 내놓았다. 북측은 자기들끼리 장시간 검토를 한 뒤 받아들일 수 없다고 거부했다. 그 뒤로 연락이 끊겼다."

 

―북한이 왜 거부했다고 보나?

"마그마의 움직임을 관측하는 장비를 설치하게 되면, 그 장비에 의해 북한의 핵실험 같은 것도 관측될지 모른다는 부담을 느꼈을 것이다. 당시 회의에서 내가 '백두산 천지 밑에는 액화이산화탄소가 가라앉아 있을 것이다. 이걸 조사해보면 화산 폭발 관련 단서를 얻을 수 있다'고 말한 적 있다. 그 뒤 '사이언스'가 백두산을 취재한 기사에서 '한 북한 사람이 천지 밑바닥의 물을 떠올리고 있었다'는 내용이 나와 있었다."

 

―북한 핵실험이 지반을 흔들어 백두산 화산 폭발을 촉발시킬 것이라는 주장도 있었는데.

"실제 그런 연관성을 조사한 적이 있었다. 핵실험은 2006년과 2009년 백두산에서 110㎞ 떨어진 길주군 풍계리에서 이뤄졌다. 백두산의 헬륨 농도를 관측해온 중국 측 자료를 받아 핵실험 전후 기간을 분석해 봤다."

 

―분석 결과는 어떻게 나왔나?

"1차 핵실험은 TNT 1000t 규모의 위력이었고, 2차는 4500t 규모였다. 백두산 화산 폭발에 영향을 미친다면 당연히 2차 실험에서 헬륨 가스 분출이 더 많아야 한다. 하지만 측정 수치로는 그렇지 않았다. 핵실험의 진동이 백두산의 마그마를 흔들었다고 보기 어려웠다."

 

―백두산 화산 폭발에 갖는 관심 속에는 막연한 두려움도 섞여 있는 것 같다.

"사람이 죽는 것처럼 화산 폭발은 피할 수 없다. 인간의 의지와 무관한 자연현상이기 때문이다. 다만 폭발 시점을 정확히 예측해 그 현장에서 인간이 잘 피하는 도리밖에 없다."

조선일보 최보식이 만난 사람

 

□ 2015.01.03 역사학자 이인호 '삶과 역사관'

교수·大使 지내고 KBS 이사장으로… 역사학자 이인호 '삶과 역사관'

역사를 따뜻한 눈으로

좋은 점은 평가하고

잘못한 것은 지적하되…

어떤 시대, 어떤 사람을

악마화하지는 말아야

 

영화 '국제시장' 반갑더라

우파도 좌파도 아닌

역사적 사실을 그대로…

사람답게 사는 세상 위해

고달팠던 분들 삶 보여줘

 

"역사에 대한 악마적 편집, 이젠 그만 하자"

 

이승만의 功過

민주주의 파괴자?

발췌개헌·사사오입개헌 등

국민들 빈축 산 것 있지만

'건국 공로자' 평가도 해야

 

국감 때 왜 공격받았냐고?

'백년전쟁'·교과서 등

역사 왜곡하려는 이들에

맞서기 시작했기 때문일 것

학자 양심상 묵과 못해…

 

새해, 젊은 세대에게…

세상에서 성공한 사람들

대부분 인품도 훌륭하더라

어린 시절의 고생은

큰 인물 되는데 큰 몫

 

역사학자이자 러시아 대사를 지낸 이인호(79) 서울대 명예교수가 지난 9월 KBS 이사장에 취임했다. 인터뷰 요청을 한 건 지난 10월. 당시 KBS 국정감사에서 그의 역사관을 둘러싼 야당의 공세에 이 이사장이 시종 당당하게 대응하면서 화제가 됐을 때였다. 하지만 이 이사장은 그가 KBS 이사장이 된 것과 관련, 일부 야당 의원과 언론의 공격이 계속돼 업무 수행에 지장을 받을 정도로 주변이 시끄러운데 여기 가세하고 싶지 않다며 거절했다.

 

여러 차례 설득 끝에 이 이사장은 어렵게 인터뷰에 응하기로 했다. "새해가 다가오니 나이 먹은 사람으로서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고 했다. 그는 KBS 이사장을 맡기 전에도 사회문제 전반에 대해 소신 있는 발언을 해온 역사학자이자 지성계, 여성계의 원로이기도 하다.

 

지난 12월 23일 KBS 이사장실에서 그를 만났다.

 

▲이인호 KBS 이사장이 지난 12월 23일 서울 여의도에 있는 KBS 이사장실에서 한국 현대사를 어떻게 볼 것인가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이 이사장은 요즘 우리나라 정치를 보면 “서로 포용하기보다는 싸울 필요가 없는 일에서까지 싸움을 벌이고 있다”면서, “사실을 사실대로 인정하지 않고 싸움만 붙이는 역사 논쟁이 그 예”라고 했다. / 이태경 기자

 

―역사학자이면서 대사를 비롯한 다양한 공직을 거쳤다. 하지만 KBS 이사장 취임 때는 '편협한 역사관'의 소유자로 거친 공격을 받았다.

"좁은 의미의 정치에는 항상 거리를 두고 사는 역사학자이자 사회활동을 하는 여성계 사람으로서 언론의 호의적 조명을 받았다. 그런 평가에 늘 감사하게 생각해왔다. 김영삼·김대중 정부에서 대사와 국제교류재단 이사장을 지냈고, 정계 진출 권유를 여야 양쪽에서 다 받은 일도 있다. 그런데 갑자기 내 역사관과 가치관이 잘못됐다는 질타가 나오니 처음에는 기가 막혔다. 나의 80년 인생 전부가 잘못됐거나, 아니면 대한민국이 이상해졌다는 징후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래서 처음부터 나에 대한 공격이 특수한 정치적 의도를 품은 어떤 세력이 한 일이지, 국민 또는 KBS 구성원 전반의 반대는 아니라고 믿었다."

 

―왜 그렇게 거친 공격의 대상이 됐다고 생각하나.

"우리 역사를 왜곡하려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알고 그들과 맞서기 시작했기 때문일 것이다. (이승만·박정희 전 대통령에 관한 사실을 왜곡해서 다룬) '백년전쟁'이라는 이른바 '다큐멘터리'에 대한 비판, 그리고 고등학교 교과서 선정 관련 싸움이 대표적 사례였다. 나는 우리 가족이 북한이 아니라 남한에 살게 된 걸 감사하게 생각한다. 1945년 해방 이후, 특히 1948년 대한민국 탄생 이후의 역사는 아픔으로 가득 차 있다. 하지만 그걸 자랑스러운 기록으로 받아들인다. 그 점에서 나의 역사의식은 국민 전반의 역사 인식과 다를 것이 없다. 다만 역사학을 공부한 것, 그것도 역사적으로 파산선고를 받은 세계 공산주의 체제의 본산이던 러시아 역사를 전공했다는 점, 그리고 일제시대부터 지금까지 우리 현대사를 직접 살아온 사람으로서 세부적 사실에 관한 지식이 그 이후 태어난 세대에 비해 좀 더 풍부하다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역사학자의 길에 들어서게 된 계기가 있었나.

"울분 때문이었다. 초등학교 3학년 때 해방이 됐는데 어린 시절 '약소민족의 설움'이란 얘기를 지겹게 듣고 자랐다. 그래서 우리는 왜 약소민족으로 이렇게 서럽고 구차스럽게 살아야 하나 하는 생각을 많이 했다. 그러면서 나중에 선진국에 가서 공부해 우리 역사를 바로 이해하고 이끌어가는 데 도움이 돼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역사학자의 양심으로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역사 인식이란 세대마다 다를 수 있는 것 아닌가.

"역사에 대한 관심의 초점은 세대마다 다를 수 있고 해석상의 차이도 있을 수 있다. 내가 지적하고 배격하는 것은 그런 해석상의 차이가 아니다. 사진자료까지 조작하고 거짓을 사실처럼 꾸며 대한민국의 역사, 특히 이 나라 지도층에 대한 인식을 부정적으로 유도하고 여론을 분열시키려는 역사 왜곡과 날조를 말하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어떤 사례를 말하나.

"이승만 대통령과 김구 선생이 100년 전부터 반민족과 민족, 두 진영으로 갈라져서 전쟁을 해왔다는 식의 주장이 있다. 이승만 대통령을 애국심이나 도덕이 결여된 하와이 깡패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박정희 대통령 때 본격화된 경제발전도 미국인들이 시켜서 한 것임을 증명하는 '사료'가 있다는 식의 왜곡도 한다. 그건 역사 해석의 차이가 아니다. 1948년 출범한 대한민국 체제에 대한 의도적 폄훼와 부정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역사학자의 양심을 갖고는 그대로 지나칠 수 없는 일을 지적한 것뿐이다."

 

―2013년 청와대에서 박근혜 대통령과 원로급 인사들이 오찬을 하는 자리에서 이 이사장이 '백년전쟁' 동영상 문제를 제기했다. 어떤 반응이 나올 것이라고 봤나.

"여야 할 것 없이 나라를 사랑하는 모든 국민이 분개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내가 '백년전쟁' 동영상의 폐해를 박근혜 대통령 앞에서 지적했다는 보도가 나가면서, 마치 친여(親與)적 정치 행위를 했다는 식으로 오해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 후 나에 대한 역사 왜곡 세력의 공격에 일부 야당 의원들까지 가세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지난 10월, 국회 미래창조과학방송통신위원회 KBS 국정감사에 참고인으로 출석한 이인호 KBS 이사장. / 뉴시스

 

―평생 역사를 공부한 역사학자였다. 역사관이 이전과 달라진 부분이 있나.

"가치관이나 역사의식은 20년 전이나 지금이나 근본적으로 달라진 것이 없다. 그런데도 내가 '변절'을 시도했다는 이상한 표현까지 야권에서 나오는 것을 보고 쓴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 하면 이런 소모적인 역사 투쟁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역사적 사실을 그 시대에 살던 사람들의 눈높이에서 보고 이해하려는 노력을 해야 한다. 그 점에서는 역사교육을 제대로 시키지 못한 우리 세대, 특히 나처럼 역사교육에 종사했던 지식인들의 책임이 크다. 지도자든 일반 서민이든 사람은 누구나 자기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고 산다. 태생적으로 악인이나 의인은 없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지혜와 관용이 필요한 시대

―한국 현대사를 어떻게 봐야 하나.

"역사를 볼 때 따뜻한 눈으로 봐야 한다. 좋은 점은 평가하고, 잘못한 건 지적해야 한다. 어떤 시대, 어떤 사람을 악마화하지는 말아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요즘 화제인 영화 '국제시장'의 성공이 참 반갑다. 그건 우파도 좌파도 아닌, 역사적 사실을 그대로 약간의 유머를 섞어 표현한 고증이 잘된 훌륭한 역사물이다. 세대 간 정서의 차이가 얼마나 큰지도 잘 묘사돼 있고, 6·25 이전에 태어난 세대의 삶이 얼마나 고달팠는지도 잘 보여준다. 또 사람답게 사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얼마나 뼈아픈 노력을 해야 했던가를 잘 보여준다. 민주주의라는 것도 결국은 사람이 사람답게 기를 펴고 사는 세상을 만들자는 것이다."

 

―하지만 역사를 있는 그대로 본다는 것이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닌 것 같다.

"우리가 경험해온 역사의 질곡이 최근까지도 심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럴수록 이성적으로 역사를 바라봐야 하는데 지금 우리 사회에는 그것을 방해하는 요인들, 불신과 편견, 오만과 독선이 강하게 작용하기 때문이다."

 

―우리 현대사에서 명백한 사실로 인정해야 하는 부분은 무엇이라고 보나.

"1948년 대한민국이 독립국으로 다시 서기까지 3·1운동과 상해 임시정부로 상징되는 우리 민족의 끈질긴 독립정신과 투쟁, 일본 식민 통치의 굴욕을 겪으면서도 어떻게든 살아남아 속으로 힘을 키운 2000만 겨레의 인내와 노력, 일본에 대한 연합군의 승리, 스탈린의 세계 공산주의·전체주의 체제 속으로 흡수당하지 않고 세계 자유민주주의 진영의 도움을 받아 자주와 독립을 성취하고자 했던 우익 독립운동 세력의 치열한 반공 투쟁이 있었다. 어느 한 가지가 빠져도 독립은 성취될 수 없었다."

 

―이 역사적 사실에 대한 심각한 오해가 있다면 무엇인가.

"분단이 마치 이승만의 개인적 야욕 때문에 빚어진 일이고 반공이 잘못된 선택이었던 것처럼 호도하는 것이다. 이것은 남남 갈등을 부추기는 일일 뿐 통일에도 결코 도움이 안 된다. 지금 절실히 필요한 것은 과거의 사실은 사실로 인정하되 역사적 역할에 대한 평가와 개인의 인간적 면모에 대한 평가를 구분할 줄 아는 지혜와 관용이다."

 

―이승만 대통령에 대한 평가가 역사 논쟁의 핵심에 있지 않나.

"그렇다. 언제부터인가 이승만 대통령을 독재자라 부르고 친일파로까지 규정해, 이승만을 건국 공로자로 높이 평가하는 것은 '독재 미화'이자 '친일 미화'라는 궤변이 나오고 있다. 역사학자라는 사람들의 글에서까지 이런 주장이 나오는 상황이다. 이승만에 대한 '악마화'가 민주주의에 대한 찬미인 듯 착각하는 풍토가 해방 70년을 맞는 오늘날 대한민국 학계 일익까지 오염시키고 있다. 부끄럽고 죄스러운 일이다.

 

이승만은 부정선거와 부정부패에 대한 거센 항의에 밀려 불명예스럽게 대통령직에서 사퇴했고 정치적 술수가 심했다는 지적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이승만은 오랜 독립운동과 스탈린과의 정치적 결투를 통해 한반도의 남쪽만이라도 독립국가로 다시 세우고 민주주의의 법적 토대를 마련한 인물이다. 결코 민주주의의 파괴자가 아니다. 이승만은 정파정치에서 발췌개헌이니 사사오입 개헌 등의 무리수를 두어 정적들의 원한과 국민의 빈축을 사기도 했다. 그는 그러나 정권의 잘못에 항거하는 학생들의 기백을 칭찬하면서 민주주의 의식이 뿌리가 내리고 있음을 기뻐할 줄도 아는 인물이었다."

 

▲2013년 9월 한국사 교과서 논란과 관련해 ‘역사교육을 걱정하는 사람들’ 모임이 연 기자회견에서 이인호(오른쪽) 서울대 명예교수가 발언하고 있다. / 이진한 기자

 

◇이승만의 통찰력

―이승만 대통령이 당시 시대상황을 꿰뚫는 남다른 통찰력이 있다고 했는데.

"공산주의 결함에 대한 통찰력이 특출했다. 러시아 혁명 후 지식인들 다수가 새로 탄생한 공산주의 체제에 대해 큰 기대를 걸고 있던 시기인 1923년, 이승만은 '공산당의 당(當), 부당(不當)'이라는 글을 썼다. 그는 '공산당의 강점은 그 이상(理想)이다. 노동자와 농민이 고르게 잘사는 세상을 만든다는 것인데 그것은 바로 내 이상이다. 그런데 그들이 제시하는 방법은 틀렸다. 모두에게 가진 걸 똑같이 나누어주고 기업인들을 적대시하고 지식인들을 홀대하며 종교를 박해하면 그런 사회는 창의력을 발동할 수 없어 발전할 수가 없기 때문에 그 이상은 절대 성취 못한다'고 했다. 이승만은 미국 프린스턴대에서 박사 학위를 받기 전에 과거 시험을 준비하면서 동양의 철학과 세계관을 체득했기 때문에 인간의 속성이나 정치제도를 연결해서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승만 이후 다른 대통령들에 대해선 어떻게 평가하나.

"박정희 대통령은 민주적 절차를 무시했지만 안보와 민생문제를 해결했고, 김영삼·김대중 대통령은 각각 민주화를 실현하고 남북대화의 물꼬를 틈으로써 시대적 사명을 다했다. 어느 정부나 업적과 그에 따른 그늘이 있게 마련이다. 지도자들은 다 개인적인 장단점을 갖고 있었지만 모두 비범한 노력가였다. 대한민국은 국민 모두가 똑같이 잘살 수 있도록 해주지는 못했지만 각자 능력껏 뛸 수 있는 자유는 보장해줬다. 각 세대는 지도자와 국민들이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기 때문에 대한민국은 공산주의의 이름으로 자유를 억압했던 북한과는 달리 국민이 자부심을 느낄 수 있는 나라로 발전할 수 있었다. 그걸 인정하지 않고는 사회적 화해도 발전도 불가능하다고 본다."

 

―그 같은 역사에 대한 이해 부족이 우리 사회의 갈등 원인이 된다고 보나.

"지금 우리 사회의 가장 큰 문제는 의도적으로 갈등을 증폭시키는 세력이 작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특히 역사에 대한 편견과 왜곡을 통해 고질화되고 있다는 것이 문제다. 자기와 입장이 다른 사람은 무조건 의도가 나쁜 사람으로 악마화한다. 또 그런 사람들을 굴복시키기 위해 거짓과 궤변을 동원하는 나쁜 관행이 성행하고 있다. 그 결과 지각 있는 많은 사람들이 주눅이 들어 자유롭게 발언하지 못하는 풍토가 조성되고 있다. 그런 풍토 때문에 여야 정치권의 관계도 서로를 죽이는 것이 목적인 전쟁처럼 되어가고 있다고 본다."

 

―역사를 둘러싼 갈등을 푸는 실마리는 어떻게 마련할 수 있을까.

"얼마 전에 서울대 행복연구센터장이 '악마적 편집'과 '천사적 편집'이란 주제로 쓴 칼럼을 읽었다. 그 글은 행복감을 더 많이 느끼게 하는 방법에 대한 것이지만, 역사적 사건이나 인물 평가에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는 이야기다.

 

해방 이후 건국, 6·25전쟁과 분단의 후유증을 겪으면서 많은 사람들이 이념적 갈등의 대가를 엄청나게 치렀다. 어떤 사람들은 나라를 세우고 지키기 위해 반공투쟁을 하면서, 어떤 사람들은 그 반대편에 서서, 또 많은 사람들은 영문도 모른 채 그 중간에서 무고하게 희생됐다. 이제는 우리 국민, 남북한 동포 모두가 상황의 희생자, 어리석은 열정의 희생자였음을 인정하고 이념의 굴레를 벗어야 할 때가 되지 않았나 싶다.

 

그러기 위해선 과거에 일어났던 일을 사실대로 인정해야 한다. 대한민국은 좌익에 대한 우익의 승리의 결과로 세워지고 발전한 나라이지만 이제는 서로 그 결실을 함께 즐기며 지켜나가기 위해 힘과 지혜를 모아야 할 때임을 깨달아야 한다. 세상에는 악마도 천사도 없고 자기다운 보람된 삶을 살기 위해 몸부림치는 보통 사람들만이 있다는 평범한 진리를 인정해야 한다."

 

―이사장이 된 후에 알게 된 KBS는 밖에서 봤던 것과는 차이가 있었을 것이다.

"임명될 때 세상이 떠들썩했지만, 막상 가보니 이사장이 실질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이란 매우 제한돼 있다. 국민의 방송인 KBS의 임무는 국민의 귀와 눈과 입이 되어 우리 사회가 지니고 있는 소통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선도적 기능을 발휘하는 것이다. 이사회는 그 기능이 제대로 발휘되도록 하는 데 대한 책임을 지는 최고 의결 기구이다. 국민을 대신해 그 기능이 제대로 수행되도록 독려하는 것이다. 제일 놀란 것은 재정 상황이 매우 열악하다는 점이었다. 경제가 어려워져 광고 수입은 주는데 수신료는 2500원으로 동결된 지 25년이 넘었다. 이사장으로서 가장 시급한 과제 중 하나가 수신료 인상을 국회에 요청하는 것이다."

 

◇교수도 외교관도 즐겁게 했다

―교수, 외교관, 국제교류재단 이사장 등 다양한 분야에서 일했다. 어느 분야가 가장 보람 있었나.

"핀란드 대사와 러시아 대사 등 외교관도, 국제교류재단 이사장도 다 즐거운 마음으로 했다. 하지만 내면적인 성장이랄까 그런 것은 교수로 있을 때 가장 컸다. 미국에서 러시아 역사를 전공했는데, 귀국한 이후엔 좋은 아이디어가 있다 해도 미국이나 러시아에 가서 자료를 찾아보고 증명할 수가 없으니 학자로서 좌절감이 심했다."

 

―새해, 젊은 세대에게 당부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면.

"지금은 우리나라는 물론이고 세계적인 면에서도 역사가 하강 국면에 접어들고 있는 시기라고 본다. 지속 가능한 발전이 무엇인가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해야 한다. 정신적, 정서적 풍요 속에서 삶의 의미를 다시 찾아야 한다. 그렇다고 경쟁의 원칙이 다 나쁘다는 건 아니다. 세속적 성공이나 쾌락을 죄악시하는 것도 위선이다. 사회관계를 모두 갑을 관계로 보는 것도 큰 함정에 빠지는 일이다.

 

나는 한국에서 태어나 한국과 미국 양쪽에서 교육을 받았고 공산주의 소련의 역사를 전공하면서 비교적 많은 문화를 접하며 살아왔다. 가장 큰 위안은 어느 한 사회에서 훌륭한 사람으로 평가받는 사람은 다른 사회에서도 같은 평가를 받는다는 사실이다. 또 세속적 잣대로 성공한 사람들 대다수는 인품으로도 훌륭한 사람들이라는 사실이다. 그리고 어린 시절의 고생은 사람을 큰 인물로 단련시키는 데 큰 몫을 한다는 말이 맞는다는 이야기를 꼭 하고 싶다."

 

이인호 이사장은…

역사학계와 여성계의 원로. 서울대 문리대 재학 시절 미국 웰즐리대로 유학을 가 역사를 전공했다. 하버드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받은 후 고려대와 서울대 교수로 오랫동안 학생들을 가르치며 후학을 키워냈다. 이후 여성 대사 1호로 핀란드와 러시아에서 활동했고, 국제교류재단 이사장, 아산정책연구원 이사장 등을 지냈다. 러시아사 등 서양사를 전공했지만 세계사적인 관점에서 한국 현대사를 조명해왔다. 역사 문제를 비롯해 한국 사회 다양한 분야에서 소신 있게 견해를 밝혀왔다.

조선일보 강인선 주말뉴스부 부장 

 

□영원한 교육자’ 鄭元植 전 국무총리 2015.12.23  

 

정원식(鄭元植·88) 전 국무총리는 자갈밭을 가는 황소 같은 인물이다. 그의 고향은 황해도 재령(載寧). 황해도 사람 기질을 석전경우(石田耕牛)에 빗대기도 한다. 난세(亂世)의 돌밭을 건너는 법을 우직한 황소만이 아는지 모른다.
  
  
서울대 교수, 한국교육학회장, 문교부 장관, 국무총리, 대한적십자사 총재, 대통령직인수위원장, 방송심의위원장, 유네스코(UNESCO) 총회 한국대표 등 그가 지나온 자리마다 소처럼 일한 흔적이 역력하다.
  
  
그를 기억하는 많은 사람은 여전히, 제자들에게 멱살 잡힌 채 밀가루를 덮어쓴 노()스승의 얼굴을 떠올리지만, 북한 김일성(金日成)과 만나 ‘남북기본합의서’와 ‘비핵화 공동선언’을 이끈 인물이 정원식이다. () 김영삼(金泳三) 대통령이 14대 대선에 당선될 당시 민자당 선대위원장이었다는 사실도 잊어선 곤란하다. 무엇보다 가난과 전쟁의 상흔을 겪은 청소년의 마음을 상담(counseling)으로 다독인 1세대 교육학자로 1960년대 한국카운슬러협회를 창립했다.
  
  
요즘 그는 서울 신당동 개인사무실에 나와 만년필과 원고지로 글을 쓰고 있다. 평생을 살아온 삶을 정리하기 위해서다. “지금 나이에 기억을 어느 정도 재생(再生)할 수 있을까 하는 염려도 했지만 2~3번 생각을 하다 보면 놀랍게도 옛일이 눈에 보이는 듯 재생되더라”고 말했다.
  
  
“처음에는 사람의 이름이나 지명과 같은 고유명사를 떠올리기 어려웠는데 생각을 집중하다 보면 그것도 쉽게 재생할 수 있었어요. 인간의 기억력에 새삼 감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원고지 앞에서 황소의 희미한 족적이 점점 살아 꿈틀대고 있다는 것이다.
  
  
—인생을 바꾼 ‘사건’이 있었나요.
  
  
정 전 총리는 뜻밖에도 시험낙방 이야기를 꺼냈다.
  
  
“일제시대 소학교를 옮겨 다니다 보니 중학교 진학을 위한 준비를 할 수 없었어요. 6학년 중반이 지날 무렵 황해도 사리원상업학교에다 원서를 냈어요.
  
  
학과시험, 신체검사, 체력시험을 쳤는데 합격자 명단에 제 이름이 없었어요. 초등학교를 마치고 첫 관문인 중학입시에 낙방한 셈이지요. 그 충격이 작지 않았음은 물론입니다. 부모님의 권유로 재수를 마음먹었죠. 심상소학교 ‘고등부’ 과정(직업교육 과정)에 적을 두고 집중적으로 입시준비를 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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년 뒤 그는 황해도에 단 하나뿐인 공립 인문계 중학교에 합격했다. 4년제 해주동중(海州東中)이었다. 그때만 해도 각 도에 1개교의 공립중학교만 설립할 수 있었고 한국 학생 비율도 30%를 넘지 않게 제한했다. 만약 사리원상업학교에 진학했다면 어떻게 됐을까.
  
  
“중학입시에 낙방했기에 재수라는 새로운 고통이 뒤따르게 됐지만 낙방 후 재수의 경험이 무의미한 것만은 아니었어요. 사리원상업학교에 진학했다면 대학진학은 불가능했을 거예요. 인생에서 한 번의 실패는 오히려 발전의 계기가 된다는 생생한 체험을 한 것이죠.  
  

  단독 越南의 결심

▲대학시절 정원식(앞줄 왼쪽 두 번째). 맨 오른쪽이 이영덕 전 총리다.

 

  —중학교 시절엔 공부를 잘하셨나요.
  
“그땐 학교 기숙사에서 생활했는데 첫 학기 시험성적이 10등 이내에 들었어요. 2학년 때는 5~6, 어떨 때는 3등도 하고요. 문제는 2학년 말에 농구선수가 되면서 성적이 떨어졌어요. 수업을 마치고 오후 3시부터 3~4시간 농구훈련을 했는데 공부할 시간이 있나요? 저녁밥 먹고 곤해 자고 말았어요. 그랬더니 반에서 40 몇 등을 했어요. 최하로 떨어진 셈이죠. 방학이 되어 그 성적표를 들고 집에 갔더니 부모님이 ‘다시 학교로 돌아가라’고 하세요. 할 수 있나요? 학교 앞 하숙하는 선배 방에 찾아가 방학 동안 죽어라 공부했죠. 그 다음 학기에 성적이 10등 이내로 들어갔어요.
  
  
—농구부는 어떻게 됐나요.
  
“나름 프라이드가 있었어요. 주전선수로 시합에 나갔을 정도였는데 어쩌겠어요. 성적이 떨어지는 바람에 농구부를 그만둘 수밖에 없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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년제 중학교를 졸업할 무렵이 되자, 진로를 고민하고 있었다. 그때 우연히 한 친구가 찾아왔다. “그것은 분명 신()의 계시처럼 여겨졌다”고 한다. 친구 말이 “난 서울에 가기로 작정했는데 함께 갈 의사가 없느냐”는 것이었다. 어쩌면 그 친구의 권유가 아니었다면 3·8선을 넘어 ‘유학’갈 결심을 못했을지 모른다.
  
  
“당시만 해도 쉽게 3·8선을 넘을 수 없었습니다. 황해도 평산(平山)경찰서장이었던 그 친구 형의 도움이 아니었다면 어떻게 될지 알 수 없었죠. 남과 북을 잇던 기차도 멈춘 지 오래됐고 자동차 또한 갈 수 없는 길이었어요. 숨어서 산을 넘어가야 했어요.
  
  
얼마쯤 걸었을까. 그때 그는 이렇게 중얼거렸다고 한다. ‘이제 청운(靑雲)의 꿈을 안고 남()으로 간다. 이 순간부터 나의 새로운 이름은 청남(靑南)’이라고. 정 전 총리의 아호 ‘청남’은 그렇게 해서 만들어졌다.
  
  
“서울에서 제가 상급학교에 진학하는 길은 두 가지였어요. 4년제 중학교를 나왔으니 고등학교 2학년에 편입하거나 아니면 대학병설 예과에 진학하는 방법이었는데, 저는 서울대 사범대 예과에 진학했어요. 사대 예과를 택한 이유는 교육자의 길을 걷고 싶었던 이면에 장차 교사가 될 학생에게 매달 생활비를 보조해 주었기 때문이었어요.
  
  
이듬해 1947년 대학 재학 중 고향에 가기 위해 개성(당시 남한 땅이었다)을 거쳐 38선을 넘었으나 그곳 보안요원에게 발각돼 서울에 돌아오고 말았다. 할 수 없이 3·8선을 오가는 장사꾼을 따라 월북을 결심한다. “그 장사꾼은 서울에서 다이아찡이나 구아노찡 같은 약품을 사서 북에 들고 가 판다”는 것이었다.
  
  
해방 직후 미군이 들여온 ‘다이아찡’은 폐렴, 임질, 이질, 설사 등에 특효약이었다. 지사제(止瀉劑)인 구아노찡은 위약(僞藥·placebo) 효과가 높아 감기와 골절에 쓰였다고 한다.
  
  
“서울에서 기차를 타고 연백의 청단까지 갔어요. 청단역에서 무작정 3·8선까지 걸었어요. 한참 만에 어느 집에 도착했고, 새벽이 되어 다시 어디론가 걸어갔어요. 알고 보니, 해주 비행장 앞바다에 물이 빠지자 그 백사장을 따라 3·8선을 넘었더군요. 물 빠진 바닷가를 유심히 보니 오른쪽 멀지 않은 곳에 비행장 등불이 보였어요.
  
  
해주까지는 무사히 왔는데 기차를 타고 사리원까지 가는 것이 문제였어요. 북한에서는 여행의 자유가 없잖아요. 기차를 타고 먼 곳으로 떠나려면 여행증명서를 발급받아야 하고, 발급도 여간 까다롭지 않습니다. 이런저런 생각에 잠겨 거리를 걷는데 해주동중 친구를 만났어요. 친구가 ‘해주역에 동창생 한 명이 있으니 찾아가라’고 해요. 친구 말만 믿고 해주역에 가서 동창을 만났더니 ‘내일 아침 떠나는 기차의 어느 칸에 앉아 있으라’는 겁니다.
  
  
다음 날 아침 기차는 예정대로 출발했다. 역무원이 승객의 신원을 일일이 확인하는데 간이 콩알처럼 졸아들었다. 그런데 그가 앉은 자리에 오더니 힐끗 쳐다만 보고 지나치는 것이 아닌가.
  
  
“기차는 서사리원역에 도착했어요. 거기서 내리면 집까지는 걸어갈 수 있는 거리였어요. 그런데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 있었어요. 동생이 나를 기다리고 있는 겁니다. 누가 나의 도착 사실을 집에 알려줬을까요? 짐작하건대 서울에서 함께 온 그 장사꾼이 아니었을까요?


  
‘가이댄스? 가이던스(Guidance)!

서울대 교육학과 교수 시절 제자들과 함께.

 

민족해방과 6·25를 거치며 많은 문제를 교육당국에 던져 주었다. 일제 군국주의 교육 잔재를 청산하는 일 못지않게, 전화(戰禍)가 던진 사회적 정신적 상흔을 치유해야 할 책무도 학교가 져야 했다. 게다가 전쟁의 피해와 농촌경제의 파괴로 인한 도시화 현상은 도시빈곤과 청소년 문제를 야기시켰다.
  
  
전통적인 훈육 교육과 반대되는 가이던스 카운슬링(Guidance Counseling·지도상담 혹은 생활지도) 1953년 내한(來韓)한 미국 교육사절단을 통해 전파되기 시작했다. ‘무조건적 긍정, 일치성, 공감적 이해’를 중심으로 한 비()지시적 상담이 학교에 소개된 것도 이즈음이었다.
  
  
미국 교육사절단의 추천으로 1957년 미국 피바디(Peabody) 대학으로 유학을 떠나 상담심리를 본격적으로 배웠다. 귀국 후 카운슬러 양성교육에 뛰어들었다. 일례로 강원도 초·중등 교원 8000명 중 그의 강의를 한 번 이상 들은 이가 4000명 이상이었다고 한다.
  
  
서울대 조교로 정식 발령을 받은 것은 4·19혁명 이듬해의 일이다. 그는 아시아재단(The Asia Foundation) 도움으로 서울대 내에 ‘가이던스 센터’를 설립했다. 일종의 ‘학생상담소’.
  
  
“센터에서 학생상담을 한다는 광고를 교내 몇 군데 붙였더니 예상보다 많은 수의 학생들이 찾아왔어요. 그러고는 평소의 고민거리를 털어놓았어요. 놀랍게도 신경불안증(노이로제)에 걸린 학생이 너무나 많았어요. 그래서 서울대 신입생을 대상으로 노이로제 검사를 했는데 그 결과 신입생의 4분의 1가량이 뚜렷한 노이로제 경향을 보였죠. 그들이 입시로 얼마나 많은 스트레스를 받았는지 짐작이 가더군요.
  
  
서울대에 가이던스 센터가 설립됐다는 소문이 전국의 교도교사(요즘의 상담교사)에게 전파됐다. 전국 중·고교 교도교사들을 위한 구심적 역할을 해 달라는 요청이 쇄도했다. 문교 당국도 “가이던스 센터가 서울대생만을 위한 기관이 아니라 교도교사들을 지도하는 역할을 해 달라”고 종용했다. 결국 가이던스 센터는 전국 카운슬링 운동의 중심지가 되었고 이를 계기로 한국카운슬러협회가 창립됐다. 1967년의 일이다.
  
  
“이런 일도 있었어요. ‘가이던스 카운슬링’ 강의를 하러 어느 지방 교육청에 갔더니 50여 명의 초등학교 여자 선생님이 가득 있어요. 당시엔 여교사 수가 많지 않은 때라 조금 이상하게 생각했어요. 그래서 ‘왜 여선생님만 왔나요?’라고 물었지요. 그런데 당연한 걸 왜 묻느냐는 반응이었습니다. 알고 보니 그분들은 무용 강습회로 알고 오신 것이었어요. 당시엔 ‘가이던스(Guidance)’를 ‘가이단스’라 불렀는데 해당 교육청 장학사가 상담에 대한 이해가 없어 ‘단스’를 ‘댄스’로 오해한 겁니다. 포크댄스처럼 무슨 무용의 일종이라고 생각한 것이죠. 그때 온 여교사들은 무용복까지 준비해 왔다고 해요. 웃지 못할 일입니다.
  
  
—교육학을 전공한 이유는 뭔가요.
  
“서울대 사대 예과를 수료하고 학부 선택을 할 때였어요. 선배들은 ‘교편을 잡자면 인기 있는 영어과를 택하라’고 권했어요. 그러나 선뜻 선배의 조언을 받아들일 수 없었어요. 그 길이 가장 합당한 것인지 판단이 서지 않았습니다. 이런저런 생각 중에 ‘사회의 목자(牧者)가 되기로 한 이상, 교육 자체를 학문으로 탐구하면 어떨까’ 생각하게 됐어요.
  
  
교육학과에 진학한 학생은 20명이 채 안 됐다. 교과서도 따로 없었다. 교수님이 준비해 온 원고를 읽어 주면 그것을 학생들이 노트에 받아쓰는 게 고작이었다.
  
  
“적어도 서울 사대 학생 중에는 나라의 교육을 위해 평생 헌신하려는 정열적인 학생들이 상당수 있었어요. 뭐라고 할까, 이 땅에 좋은 나라를 만들 수 있는 것도 교육이며, 이 나라가 세계로 웅비할 수 있는 길도 바로 교육을 통해 가능하다는 분위기가 학내에 팽배해 있었습니다.
  
  
제 스승이신 오천석 박사는 교육자의 책무를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어렵고 무거운 교육의 짐을 맡아야 하는 교육자의 책임은 실로 크다’고요. 동시에 그 길은 가시밭과 같은 길이요, 단조한 길이며 무채(無彩)의 길입니다. 경제적 우우(優遇)가 기다리지 않고 사회적 영예가 따르지 않죠. 교사는 싸움마당에 쓰러지는 무명(無名)의 전사와 같고 그의 운명은 과실나무 뿌리에 파묻히는 거름과 같은 존재입니다.
  
  
그땐 해방된 조국의 사회 전반에 감돌고 있던 시대정신이 있었어요. 학생들은 페스탈로치의 교육사상을 읽고 그의 삶을 되새겼어요. 페스탈로치 그룹(PG)이라는 모임을 만들어 교육에 대한 열정을 불태웠어요. 


  
교육환경 개선 특별회계와 전교조 파동

정원식 문교부장관이 1989년 7월 21일 오전 교원노조 문제와 관련해 서울 구로고교를 첫 방문, 교사들과 대화를 갖고 있다.

 

 1988년 한 해가 저물어 갈 무렵이었다.  11시경 전화벨이 울렸다. 밤이 깊어 벨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수화기를 드니 청와대 홍성철 비서실장이었다. 대뜸 “문교부 장관으로 지명되어 내일 발표한다”는 것이었다.
  
  
“일방적 통보 같아 다소 기분이 언짢았으나 영예로운 일이라는 마음, 그래도 한 번쯤 숙고하는 것이 도리일 것 같아 주저했어요. 그런 심사를 눈치챘는지 홍 실장은 부드러운 음성으로 ‘대통령이 여러 사람의 조언을 수렴하고 정보기관의 보고를 종합한 결과’라고 하더군요. ‘강원용 목사의 적극적인 추천이 있었다’는 말을 덧붙이며 주저하지 말 것을 당부했어요. 6공화국 초기 조각 때 하마평에 오르거나 첫 번째 개각에서도 거명된 적이 없었기에 그 소식은 전혀 예상치 못했어요.
  
  
장관 업무를 시작하자 문교행정이 낯설지만은 않았다. 이미 1985년에 교육개혁심의회 위원으로 활동하면서 교육현실의 문제를 다루어 왔기 때문이다.
  
  
“당시 교육환경은 급속한 경제성장에 비해 너무나 열악했었어요. 과밀학급으로 60명이 넘는 학급이 대부분이었죠. 노후 교실에다 책·걸상이 비좁고 화장실은 여전히 재래식이었어요. 그렇다 보니 학교에서 용변 못 보는 어린 학생들도 생겼습니다. 난방시설도 문제였고 이중창이 아닌 교실창은 단열이 안 됐습니다. 시골학교는 위생상태가 나쁜 우물이나 샘물을 먹어 식중독이나 전염병에 그냥 노출되어 있었어요.
  
  
당시 ‘지방교육 재정교부금’이 있었으나 우선순위에 밀려 교육환경 개선사업은 뒷전이었다. 정원식 장관은 ‘교육환경개선 특별회계안’을 마련했다. 그러나 대통령의 재가가 있어야 하고 경제기획원도 동의해야 재원을 마련할 수 있었다.
  
  
“청와대 이연택 행정수석을 만났더니 긍정적 반응을 보였어요. 얼마 후 대통령께서 내락했다는 전갈을 받았습니다. 내친김에 바로 조순(趙淳) 경제부총리를 만났습니다. 그 양반하고 나하고는 같이 강의한 입장 아니요? 자주 어울렸지요. 그 양반은 사회대학이고 나는 사범대였지만 비교적 관계가 있다고. 밥도 밤낮 먹고. 그런 처지니까 가서 이거 하나 해 달라니까 처음엔 어려운 듯하더니, 그 양반이 결심을 했다고. 그래서 이듬해 바로 됐지.
  
  
그때 만들어진 교육환경개선 특별회계의 골자는 1990년부터 3년간 매년 3700억원씩 11000억원의 재원을 마련하는 것이었다. 사실 1조원이 넘는 재원을 특별회계로 갑자기 마련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다행히 대통령도, 경제기획원도, 국회도 많이 지원해 줬어요. 그때 상임위가 문공위였는데 위원장이 정대철(鄭大哲) 의원이야. 그 양반하고 나하고 개인적으로 친분관계도 있고. 사실은 먼 인척은 돼. 부친 정일영(鄭一永) 박사가 나를 무척 아꼈었어요. 그 양반 고향도 이북이라고, 평양이야.
  
  
—그때 문공위원들이 쟁쟁하더군요. 박관용(朴寬用), 손주환, 이철(李哲), 강삼재(姜三在), 김동영(金東英) 등등.
  
“그분들이 다 밀어 줬어요. 야당이 역시 다수였는데 이것만은 밀어 주자, 이렇게 됐지. 그래서 무난히 통과된 거야. 이 특별회계 재정은 공·사립학교를 막론하고 실행됐다는 데 의미가 있어요.
  
  
그 후 특별회계는 3년 더 연장됐는데 그 결과 한국의 교육환경이 크게 개선됐다.
  
  1989
년 초 전국 교직원노동조합(전교조)이 결성되자 전국적으로 12000명의 교원이 전교조에 가입했다. 교육당국으로선 무척 난감한 일이었다. 물론 35만명에 가까운 교원 수에 비하면 적은 숫자라고 할 수 있으나 1만명이 넘는 교원이 전교조에 가입했다는 것은 결코 가볍게 생각할 수 없었다.
  
  
“문교행정의 책임을 맡은 지 얼마 안 돼 겪게 된 전교조 문제는 제 생애에 가장 어려웠던 문제였어요. 곤혹스럽기는 하지만 제자뻘 되는 그들과 직접 만나 대화하기로 했어요. 그러나 소통이 쉽지 않았어요. 그들은 이미 조직에 얽매여 있었어요.
  
  
탈퇴권유를 먼저 했어요. 설득할 때 압력을 가하거나 편법을 쓰지 않도록 강력한 지시를 내리기도 했어요. 일부 장학사는 교원의 부모나 친척을 동원해서 설득하는 경우도 있었다고 해요. 한 달쯤 지나자 1만여 명의 교원이 전교조를 탈퇴했습니다. 두 달 남짓 탈퇴권유 작업이 계속됐고 더 이상 시간을 끌 수 없어 단호한 결정을 내려야 했습니다. 결국 공립 776, 사립 624명 등 1400명의 교원이 교직을 떠나게 된 것은 마음 아픈 일이었어요.
  
  
—왜 전교조를 받아들일 수 없었나요.
  
“가장 큰 이유는 반사회적 의식화 교육 때문이었어요. 사회융합보다 갈등을 야기하는 가르침이잖아요. 또 그들의 단체행동도 걸림돌이었어요.
  
  
—지금도 교사는 노동자가 아니라고 생각합니까.
  
“그렇습니다.
  
  
그러나 교단을 떠난 많은 해직교사들은 극심한 생활고에 직면할 수밖에 없었다.
  
  
“박봉의 교사들이 학교를 떠나니 더 생계가 어려워지게 됐어요. 대개 전직(轉職)이 어려워 아내가 품팔이에 나서는 경우도 있었다고 해요. 장관 퇴임 이후에도 해직교사의 생활이 어렵다는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무척 괴로웠습니다. 제 결정에 대한 후회는 없으나 젊은 교사들이 어려운 처지에 놓이게 된 데 대한 자책을 떨칠 수 없었어요.
  
  
문교부 장관을 그만둔 뒤에도 전교조 해직교사 문제는 오래 그의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었다. 문민정부가 들어서자 오병문(吳炳文) 교육부 장관을 찾아갔다. 오 장관은 서울대 교육학과 동기였다. “이제는 시간이 웬만큼 흘렀으니 복직 문제를 검토해 달라”고 요청했다. 그리고 김영삼 대통령(YS)을 만나 재차 부탁했다.
  
  
YS도 이미 해직교사의 복직을 결심한 상태였어요. 1994년 복직이 결정됐는데, 해임 전 동일 학교에 복직할 수 없다는 것과 단체활동을 하지 않는다는 서약이 복직 조건이었어요. 그 일로 전교조 파동에 얽힌 제 매듭은 풀렸다고 생각합니다.
  
  
—전교조 교사 해직결정은 지금도 후회가 없습니까.
  
“누구나 쉽게 결정하기 어려운 일이었을 겁니다. 개인이 희생되더라도 이것만은 해야겠다는 생각에 순수하게 전교조 문제를 대처했어요. 돌이켜봐도 잘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밀가루 세례와 과격 학생운동의 몰락

▲1991년 6월 3일 정원식 국무총리가 취임 전 맡았던 강의의 고별수업을 위해 한국외국어대학교를 방문했다가 정권에 불만을 품은 일부 학생들로부터 밀가루 세례를 받는 봉변을 당했다.

 

  1991년 문교부 장관에서 물러나고 두 달 남짓 푹 쉰 뒤 덕성여대와 한국외대에서 출강요청이 왔다. 덕성여대에서 ‘여성과 교육’, 한국외대 교육대학원에서 ‘생활지도’ 강의를 맡게 됐다. 2년여 만에 강단으로 돌아오니 감회가 새로웠다.
  
  
한 학기 강의의 3분의 2가 넘어설 무렵, 갑자기 청와대에서 대통령특사 자격으로 아프리카 5개국 순방을 해 달라는 요청이 왔다. 첫 순방국인 나이지리아에 도착하니 급한 전화가 걸려 왔다. 청와대 이병기 의전수석이었다.
  
  
“이 수석은 노재봉(盧在鳳) 총리 후임으로 제가 지명됐다는 겁니다. 그러니 대통령의 제의를 수락하고 속히 귀국해 달라는 것이었어요. 하지만 뜻밖이었어요. 일단 ‘대통령의 뜻은 고맙지만 너무나 갑작스런 일이라 당장은 결심할 수 없다’고 했지요. 다시 서울로부터 전화가 와서 무조건 수락과 빠른 귀국을 종용하는 것이었습니다.
  
  
국무총리가 되자, 마치지 못한 강의를 마무리지어야 했다. 덕성여대 강의는 다른 교수에게 위탁했는데 외대 대학원 강의는 마땅한 강사를 못 찾았다.
  
  1991
 6 3일 오후. 그는 총리가 아닌 시간강사 자격으로 외대로 향했다. 개인 일정인 만큼 경호원을 대동하지 않았고 총리 전용차 대신 지하철을 탔다. 비서 한 명만이 수행했다.
  
  
수업이 1시간가량이 지났을까, 갑자기 교실 밖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분명 외치는 소리였다. 수업을 듣던 대학원생들이 그를 보호하려 했지만 그들의 힘에 떨어져 나갔다. 그는 수업 침입자들에 잡혀 질질 끌려 나가는 신세가 됐다.
  
  
복도에서 이리저리 밀려가고 있을 때였다. 어떤 학생이 그의 얼굴에 밀가루를 퍼부었다. 계란을 깨서 문지르는 학생도 있었다. 얼굴은 밀가루와 계란으로 뒤범벅이 되었다.
  
  
“복도를 지나 계단을 내려갈 때는 정신을 바짝 차렸어요. 발이라도 헛디뎌서 넘어지면 뒤에서 밀려오는 사람들에게 깔릴 수도 있으니까요. 그때 참으로 고마운 학생이 있었어요. 지금은 그 얼굴이 흐릿하게 기억나지만 분명 내 강의를 듣던 대학원생은 아니고, 아마 시위를 하러 온 학생이었던 것 같아요. 그는 내 오른쪽 팔뚝을 붙잡고 함께 계단을 내려왔어요. 왼쪽 팔뚝은 민병환 비서가 붙잡고 있었기에 양쪽의 부축을 받으며 조심스레 계단을 내려올 수 있었습니다. 민 비서는 당연한 일을 한 것이지만 그 이름 모를 학생의 도움은 두고두고 잊을 수 없어요.
  
  
학생 중에는 군중심리에 흥분되어 발길질을 하던 학생도 있었다. 그러나 그 장면이 고스란히 저녁 TV뉴스에 보도돼 우리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다. ‘사회적 동정심을 불러일으키려는 총리의 쇼’라는 시각도 있었다.
  
  
어떻게 밀가루를 덮어쓴 총리 모습이 TV에 담기게 됐을까. 나중에 알아보니, ‘총리의 강의약속’이 훈훈한 기사감이 될 수 있다고 판단한 총리 비서실 직원이 기자들에게 귀띔했다는 것이다. 미담 취재를 위해 TV 카메라가 외대에 도착했을 무렵, 총리는 훈훈한 장면이 아닌 비극의 주인공이 돼 있었다.
  
  
이튿날 정 총리는 다소 몸이 불편했으나 평상시처럼 출근했다. 기자들이 몰려와 “지금 심정이 어떠냐”고 물었는데, 그는 “회초리로 내 종아리를 때리고 싶다”고 말했다. 이 말은 언론에 대서특필됐다.
  
  
“이후 사회가 조금씩 안정되기 시작했어요. 우선 그동안 잇따랐던 학생들의 투신자살이 더 이상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또한 민주화를 외치는 캠퍼스의 시위도 수그러들었어요. 그러자 정치권도 더 이상 정부에 대한 공박을 자제했어요. 정말 다행이었습니다. 비록 개인이 고난을 당하기는 했으나 사회가 점차 안정되기 시작했으니까요.
  
  
이 사건은 한국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다. 정국은 급반전됐고 주말마다 서울 시내에서 계속되던 시위가 사라졌다. 학생시위를 바라보는 국민의 시선도 냉소적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2
주 후인 그해 6 20일 치러진 시·도의회의원 선거에서 여당인 민자당이 564석을 차지했다. 야당인 신민주연합당 165, 민주당 21, 무소속 115석 순으로 호남을 제외한 전 지역에서 민자당이 압승했다. 일부에서는 이 사건을 학생운동권 몰락의 시발점으로 간주한다


  
주석 金日成과 개인 金日成은 다르다

1992년 9월 16일 평양에서 열린 제8차 남북 고위급회담에서 정원식 대표와 연형묵 북측 대표가 악수를 교환하고 있다.

 

정원식 총리는 1991 10 22일부터 25일 사이에 4차 남북고위급회담 남측대표 자격으로 평양을 찾았다. 서울을 떠날 때만 하더라도 평양 가는 일이 실감나지 않았다고 한다. 평양행 특별열차가 개성역에서 출발했는데 얼마 후 “사리원에 가까이 왔다”는 북측 안내원의 말이 들리자 감정이 복받쳤다. 사리원을 떠나 서울에 온 지 실로 46년 만에 찾은 고향이었다.
  
  
“평양에 갔을 때 북측에서 ‘총리 친척이 126명이나 되는데, 만나 보겠냐’고 제의를 해 왔어요. 저는 ‘남한에 200만의 이산가족이 상봉을 기다리는데, 제가 수석대표로 와서 친척을 만나는 게 양식상 못할 일’이라며 정중히 거절했어요.
  
  
—그 시절 무엇이 가장 기억에 남습니까.
  
4~8차 회담까지 다섯 차례나 했는데 평양에 3번이나 갔어요. 회담 자체는 3일밖에 안 돼요. 그런데 준비는 한 달 이상 가야 하거든. 준비시간만 적어도 6~7개월은 걸렸다고요. 총리 재임, 반 이상은 회담준비에 보냈어요. 딴 일은 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남북기본합의서’가 나왔는데 지금 봐도 잘된 겁니다.
  
  
4차 회담의 핵심은 무엇이었나요.
  
4차 회담에서 한국의 주된 관심사는 남북관계 개선이었어요. 핵문제는 우선순위에서 밀려나 있었죠. 그래도 제4차 회담의 기조발언에서 핵개발이 남북 간 새로운 긴장을 고조시킨다는 점을 지적했어요. 핵무기 개발을 포기하고 국제기구 사찰을 무조건 받아들일 것도 북측에 요구했어요. 북측은 핵 문제에 묵묵부답이었습니다.
  
  
그러나 제5차 회담(서울, 1991 12 11~12)에서 양측이 ‘남북화해’와 ‘불가침’, ‘교류협력’ 등을 골자로 한 3가지 남북기본합의서 내용을 완전히 타결하고 서명했다.  6차 회담(평양, 1992 2 19~20)에서 정 총리와 북측 연형묵 정무원총리 간에 ‘한반도 비핵화에 관한 공동선언’도 정식 발효됐다. 북한은 1992 1 30일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핵 안전조치협정에 서명하고 핵시설과 그동안 생산한 플루토늄 90g을 신고했다.
  
  
“당시 북한은 만약 1992년에도 팀스피리트 훈련이 실시되면 6차 회담을 개최할 수 없다는 입장을 공공연하게 밝혔어요. 6차 회담이 못 열리면 애써 이룬 기본합의서가 발효되지 않을 수도 있었어요. 그런데 그 무렵, 한반도의 핵 상황에 큰 변화가 있었습니다.
  
  1991
 9 2일 부시 미국 대통령이 “세계의 모든 지역에서 전술 핵무기를 미국 본토로 철수시킨다”고 선언한 것이다.
  
  
“노태우 대통령도 그해 11 8일에 ‘한반도 비핵화와 평화구축에 관한 선언’을 발표했어요. 그리고 12 13일에 ‘한반도 핵 부재(不在)’를 선언했습니다. 이렇게 북한이 상투적으로 문제 삼아 온 주한미군의 핵무기 보유문제가 원천적으로 해소됐어요. 북한은 더 이상 핵확산금지조약(NPT) 의무를 지연시킬 구실을 잃어버렸던 겁니다.
  
  
비핵화 공동선언은 남북기본합의서에 비해 덜 알려져 있으나 1992 1 20 6개 항목으로 ‘한반도의 비핵화에 관한 공동선언’에 남북 대표가 합의했다.
  
  
6개 항목 중 1항에 ‘남과 북은 핵무기의 시험, 제조, 생산, 접수, 보유, 저장, 배비(配備) 사용을 하지 아니한다’입니다. 이 선언에 명시된 대로 당시 양측은 한반도를 비핵화하려는 의도가 확실했어요. 그 취지대로 ‘남북 핵통제 공동위원회’가 제대로 운영됐다면 지금의 핵문제는 미연에 해소될 수 있었을 겁니다.
  
  
그러나 북측은 공동선언에 서명하고 최고인민위원회의 비준을 받아 발효시켰음에도 이를 어기고 공동선언을 백지화시켜 버렸다.
  
  
공교롭게도 기자와 정 전 총리가 만난 날(12 11), 개성에서 남북간 현안을 논의하기 위한 제1차 차관급 남북 당국회담이 열렸다.  


  
YS의 강권과 서울시장 낙선 

  —경색된 남북문제를 어떻게 풀면 좋을까요.
  
“제가 했다고 주장하기는 어렵지만 ‘기본합의서’, ‘비핵화 공동선언’, 그 방향으로 가야 합니다. 어떤 문제해결을 하겠다는 것보다 기본합의서를 복원시키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비핵화 문제는 그때와 상황이 많이 달라졌어요. 이미 북측이 핵을 개발했는데 중단하라고 하면 말을 듣겠습니까. 미국의 개입으로 북이 핵개발을 중단했을 때 오는 손실 등을 국제적으로 보완할 수 있게 하는 장치가 마련돼야 합니다.
  
  
사실, 기본합의서에 담긴 정신과 내용을 이후 정권에서 반대한 적이 없습니다. 햇볕정책도 기본합의서대로 했으면 좋은데 덮어놓고 재정지원을 한 것이 문제였어요. 이로 인해 북측이 많은 도움을 받은 것이 사실입니다.
  
  
—언제 한반도 통일을 기대할 수 있을까요.
  
“글쎄, 아무도 알 수 없는 일이죠. 기본합의서를 만들 당시 우리 정부의 구상은, 일단 남북이 화해하고 적대관계에서 벗어나자는 것이었어요. 인적 경제적 교류협력을 활발하게 하고 남북이 완전히 화해된 상태로 가다가 어느 시기에 평화적 통일을 이룰 수 있다고 봤던 겁니다. 우리가 TV 매체 교류도 제안했는데 북한도 받아들였어요. 기본합의서대로라면 흡수통일을 상상하기 어렵습니다. 북측도 (흡수통일을) 가장 두려워하지요.
  
  
그는 대한민국 국민 중에서 손으로 꼽을 만큼 적은, 김일성을 직접 만난 한국인이다. 김일성에 대한 인상을 물어보았다.
  
  
“당시 82세임에도 건강해 보였어요. 제가 물어봐도 건강하다고 하더니, 그로부터 3년 뒤 세상을 떠났어요. 굉장히 부드럽고 저를 잘 대해 줬어요. 사람 대하는 태도가 능수능란했다고 할까요? 그런데 개별면담에서 하는 말과 공식성명의 말이 달라 이중적이라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주석(主席) 김일성과 개인 김일성은 다르다고 생각했죠.
  
  1992
년 총리직에서 물러나고 1주일이 지난 어느 날이었다. 당시 대선후보였던 YS의 밀명을 받고 안기부 운영차장이던 김기섭씨가 찾아왔다. YS의 심부름을 왔다”며 민자당 선대위원장을 맡아 달라는 것이었다.
  
  
1992 9 16일부터 평양에서 열린 제8차 남북 고위급회담에 참가했을 때였는데 서울에서 달갑지 않은 소식이 들려왔어요. 여당이 대선후보인 YS가 중립내각 구성을 제안했으니까요. 취지는 ‘여당이 기득권을 내놓겠다’는 뜻인데 중립내각 구성을 위해 총리도 물러나야만 했던 겁니다. 저는 (노태우) 대통령의 주저하는 마음을 헤아려 스스로 사임을 청원했지요.
  
  
어쩌면 총리직에서 물러나게 한 장본인이 YS인데, 선대위원장을 맡아 달라고 하니 고민이 될 수밖에요. 안 하겠다고 해 옹졸한 사람으로 여겨지는 것 또한 싫었어요. 아내는 수락해야 된다고 했지만, 몇몇 사람은 ‘배알도 없느냐’고 해. 


  
‘당을 좀 맡아 달라’

김영삼 대통령 당선자가 1992년 12월 21일 민자당 총재실에서 정원식 선거대책위원장으로부터 중앙선관위가 보내 온 대통령 당선 통지서를 전해 받고 있다.

 

  결국 1992 12 YS의 대선 선대위원장을 맡아 표밭을 일구었다. 당시 유세활동은 어땠을까. 정 전 총리의 기억을 더듬어 보면 이런 식이었다. 이덕화, 코리아나, 주현미, 남보원을 비롯한 연예인 유세단이 노래와 춤, 웃음으로 흥을 돋우면 선대위원장이 바통을 이어받아 유세를 벌인다. 그러면 대통령 후보가 무개차(無蓋車)에 올라 손을 흔들며 입장한다. 환호소리가 절정을 이룬다.
  
  
“제가 연설을 많이 다녔어요. 이분이 대통령이 돼야 한다고. 내가 당선증 받아다가 김영삼 당선자에게 전해 줬다고 무척 좋아하더라고. 당사는 축제분위기였고 당선자는 마산에 사는 김홍조 옹에게 인사하러 바로 내려갔어요.
  
  YS
가 대통령이 된 뒤에는 대통령직인수위원장으로 6공에서 문민정부로의 정권승계를 원만하게 이뤄 냈다. 그리고 홀연히 정치권을 떠났다.
  
  
YS가 나보고 ‘당을 좀 맡아 달라’는 겁니다. 완전히 정치인이 되라는 거지. 사실, 내가 가만 보니 당의 생리라는 게 내가 있을 데가 못돼. 교육계와 영 딴판이야. 괜히 이 판에 들어와 어떻게 할 것이냐 하는 생각도 들고. 절대로 못한다고 거절을 했지….
  
  
정 전 총리가 교육계로 돌아가겠다고 고집하자 YS도 한발 물러났다. 대신 세종연구소 이사장에 임명했다.
  
  
1995 3월이었어요. 세종연구소 ‘세계화 대학원’ 설립을 준비하기 위해 미국 랜드연구소에 머물고 있었는데 청와대 비서실장의 연락이 왔어요. 도착 이튿날 YS와 저녁식사를 하는데 분위기가 다소 긴장되고 무거웠습니다. YS는 반가워하면서도 무언가 주저하는 기색이 있었어요. 불쑥 저더러 ‘서울시장 후보로 나서 달라’는 겁니다. ‘전부터 말하려고 했지만 미루다가 그제야 말문을 열었다’면서요.
  
  
사태가 이쯤 되고 보니, 더 이상 고사할 수 없었어요. 결국 며칠 생각할 말미를 허락받고 그 자리를 물러나는데 YS가 ‘빠른 결심을 바란다’며 직통 전화번호를 알려주더군요.
  
  
비록 국무총리를 지내긴 했지만 스스로 정치인이라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었습니다. 서울시장은 정치인이 아닌 행정가였지만 그래도 당의 공천을 받아 선거를 치러야 한다는 점이 마음에 걸렸어요.
  
  
마음의 동요가 일었다. 사흘이 지나자 청와대에서 독촉전화가 왔다. 할 수 없었다. 운명으로 받아들이고 다음 날 수락 전화를 걸었다.
  
  
이후 논란 끝에 이명박(李明博) 후보와 경선을 거쳐 후보가 됐으나, 상대는 서울대 동료교수이자 동갑내기 조순 후보와 말 잘하기로 유명한 박찬종(朴燦鍾) 후보였다.
  
  
첫 실시된 1995년 서울시장 선거에 우리나라 선거사상 처음으로 TV 토론이 시도됐다. 첫 서울시장 선거인 데다 첫 TV 토론인 만큼 국민적 관심이 컸다. 선거운동에 늦게 뛰어든 정원식 후보는 초반 지지율이 15%에 불과했다. 관훈클럽 토론 이후 상승세를 탔다. 그러나 선거전이 중반에 접어들면서 다양한 정치적 이슈들이 불리하게 작용했고 점점 불안해졌다.
  
  
“그래도 포기할 수 없다는 것이 참모들의 의견이었어요. 박성범, 강용식, 서청원, 이연석 의원 등과 손풍삼씨가 참모로 여러 도움을 주었어요. 참모들이 ‘더 늦기 전에 공격적인 전략을 써서 국면을 전환시키자’고 했지만 저는 한 번도 당이나 상대방 후보의 약점을 들추어 비방한 적이 없어요. 신념대로 페어플레이를 했습니다.
  
  1995
년 치러진 제1회 지방선거 당시 서울의 총 투표율은 66.2%였다. 조순(민주당) 후보가 42.4%의 득표율로 당선됐고, 박찬종 후보는 33.5%, 정원식 후보는 20.7%였다. 개표결과 예상대로 낙선하고 말았다.
  
  
“지금 생각해 보면, TV토론 당시 서민층이나 젊은이들에게 소탈하고 친근한 인상을 주지 못했던 것 같아요. 선거에서 감성적인 전략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처음 알게 됐어요. 저는 지금도 화려하거나 색깔이 튀는 넥타이를 매면 어색하기만 해요. 그런 태도는 교육자라는 고정관념에서 못 벗어난 한계지요. 옷차림이나 표정에서 자신도 모르게 근엄한 인상을 줬는지 모르겠어요. 아마도 권위적이라는 느낌을 받았을 겁니다. 
  

  YS와 나

  —낙선 후에 어떻게 지냈습니까.
  
“다행이랄까 불행이랄까, 낙선이 되고 다시 세종연구소 이사장으로 돌아왔어요. 임기를 다 채운 뒤 YS가 저를 대한적십자사 총재에 임명했어요. 강영훈(姜英勳)씨가 총재였는데, 우리 둘이 자리를 맞바꾼 겁니다. 강영훈씨가 세종연구소 이사장이 되어 둘이서 이·취임식을 같이 했어요.
  
  
적십자사에 6년 있다가 파라다이스복지재단 이사장, 유한재단 이사장을 역임했지요. 정치의 유혹이 있었으나 정치를 멀리하고 교육의 길을 가야 한다는 고집이 정치인이 아닌 교육자로 남을 수 있었다고 봅니다.
  
  
정 전 총리는 꾸준히 교육학 전문도서를 펴내고 있다. 2001년 《인간의 동기》, 2003년 《인간의 성격》, 2005년 《인간과 교육(증보판), 2010년 《인간의 인지》, 2012년 《인간의 환경》, 2013년 《인간의 가치관》, 2014년 《교육시론(時論)》 등을 출간했다.
  
  
—그때, 정치를 계속했더라면 어떻게 됐을까요. 국회의원 배지를 달았겠지요.
  
YS의 마음속은 모르지만 제가 받은 인상은, 저를 서울시장으로 만든 뒤 대권에 도전케 하려 했다고 봅니다. 그런데 저는 그럴 의사가 전혀 없었어요. 솔직히 제 집에서 반대를 했어요. 아내가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데 순수성을 강조해요. 제가 정치하면 순수성과 멀어진다고 생각해서 극렬 반대했습니다. 아직도 저는 교육자라고 생각합니다. 정치인이나 행정가 출신이라 생각하지 않아요.
  
  
2015 11 22 YS가 돌아가셨는데 그분은 어떤 분이셨나요.
  
“정치를 위해 태어나신 분 같았어요. 개인 사생활은 없고 가족보다 정치적 동지를 더 중시했어요. 정치적 의욕이 강했던 분이라고 할까요? 속되게 돈을 축적하실 분이 아니셨고 모은 돈도 없었던 것으로 생각이 들어요. 돈 관심이 없었던 겁니다. 그러다 보니, 단점도 생길 수밖에요. 자기중심으로 자기사람만 생각해서 불가피하게 타인과 적대적 관계를 맺었잖아요.
  
  
이번에 돌아가신 뒤 우리 사회에서 대단히 높게 평가하는 보도를 봤습니다. 전혀 비하하는 일이 없었어요. 언론과도 좋은 관계였던 것이죠. 어떤 정치인도 그런 평가를 받기 어려울 겁니다.
  
  
—이명박 대통령과의 인연은.
  
“별로 얘기하고 싶진 않은데, 서울시장 경선 때 나는 추대되는 줄 알았거든요. YS (내게) 간곡히 했으니. 그러나 당 총재가 부탁했는데도 당에선 경선해야 한다고 했어요. 그때 경선한 사람이 이명박 대통령이야. 내 바람에 그 양반이 낙선을 했지. 이후에 갈등은 없었지만 친해지지도 않았죠. 대통령 한 다음에도 나한테 조언을 구한 일이 한 번도 없었어요.
  
  
—전직 총리들은 자주 만나시나요.
  
6공화국 총리 중에 강영훈, 노재봉, 이헌재(李憲宰), 현승종(玄勝鍾), 내가 있고… 비교적 정치성 있는 사람들이 아니어서 계속 모였지. 강영훈 총리가 몸이 나빠 집에 들어앉게 되면서 뜸해졌어요. 아직도 사람을 못 만나요. 자연히 모임도 뜸해지고 서로 안 만나게 됐어요.”⊙

출처 월간조선 2016년 1월호      김태완 월간조선 기자

 

□홍콩대 법학과 조윤(趙雲) 학과장  2016.06.23   

판사의 변호사 개업, 변호사 성공 보수 금지한 이 나라는...

외신에 소개된 홍콩 밸리스터(법정변호사)들. 17세기 영국 법률가의 전통의상을 입고 있다.

 

홍콩대 법학과 조윤(趙雲) 학과장과의 만남은 21일 오전 이뤄졌다. 그는 홍콩에서 발달된 중재법의 전문가로 알려져 있다. 중국과 네덜란드에서 공부했으며 현재 가르치는 과목은 중국법(Introduction to Chinese Law)과 중국무역법, PRC(Peoples Republic of China) 정보기술법 등이다.

 

그는 친절함이 몸에 밴 것 마냥 처음 만난 필자에게 홍콩 법조계 현황을 상세히 설명해 주었다.

 

- 시간을 내주셔서 감사하다. 현재 한국에서는 변호사의 직역과 전관비리 문제, 과도한 변호사보수문제가 상당히 논란이 있다. 이와 관련 홍콩의 변호사 시스템 전반에 대해 설명해 달라.

조윤 “홍콩 변호사는 법정변호사(Barrister)와 사무변호사(Solicitor)로 나뉜다. 둘 차이는 사무변호사는 법정에서 변론할 수 없다는 점이다. 최근 사법개혁 차원에서 제한적인 범위 내에서 사무변호사의 법정변론을 허용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다. 법정변호사들의 단체는 HK Bar Association이라고 하고, 사무변호사단체는 Law Society of HK라고 부른다.

 

변호사가 되는 길은 두 가지 트랙이 있다. 하나는 학부에서 LL.B.(법학사) 학위를 받거나 대학원 과정인 J.D.학위를 취득한 후 PCLL(Postgraduate Certificate Law Program)과정을 거쳐 변호사가 되는 길이 있다. LL.B. 학위과정은 4년제, J.D. 과정은 대학원 과정으로 2년제다.

 

현재 홍콩에는 J.D. 과정을 제공하는 로스쿨이 홍콩대, 홍콩시립대, 홍콩중국대학 등 3곳이다. 그리고 PCLL 3개의 로스쿨에서 각기 제공하는데 학위과정은 아니고 자격증(certificate)을 위한 실무교육 프로그램에 가깝다.

 

이후 학생들은 각자 법정변호사와 사무변호사로 나눠 지원을 할 수 있는데, 법정변호사는 1년동안 챔버(Chamber)라고 불리는 법정변호사 사무실에서 실무를 배운다. 사무변호사는 2년동안 오피스(office)라고 불리는 사무변호사 사무실에서 업무를 배운다. 다만 챔버에서 일을 배우는 예비 배리스터는 급여를 받지 않지만, 오피스에서 실무를 배우는 예비 솔리시터는 급여를 받는다는 점이 다르다.

 

▲홍콩대 법대 조윤 학과장(오른쪽)과 필자


홍콩은 성공보수 금지

필자는 홍콩의 판사임용과 정년이 궁금했다. 한국에서도 판사의 변호사 개업을 불허하는 방안이 솔솔 흘러나오고 있다. 조 교수의 말이다.

 

“판사는 경험이 많고 능력이 있는 배리스터나 솔리시터 중에서 임명된다. 정년은 70세 정도이고 연장도 가능하다. 퇴직한 판사가 변호사로 활동하는 것은 금지된다. 따라서 전관문제는 발생되기 어렵다.

 

- 변호사 보수에 대한 제한이 있는가?

“형사사건 등에서 ‘성공조건부 보수’는 금지된다. 따라서 전관변호사 문제는 원칙적으로 없어 한국처럼 과도한 변호사 보수문제는 거의 발생하지 않는다.

 

-홍콩에서도 사법개혁 논의가 있는가. 온라인 분쟁해결(ODR, Online Dispute Resolution)절차에 대한 논의도 궁금하다.

 

필자는 ‘대체가능한 분쟁해결(ADR, Alternative Dispute Resolution)’에 관심이 많다. 보통 민사소송은 절차가 복잡하고 보통 3주나 4주마다 재판이 열리는 것을 감안하면 선고가 나기까지 많은 시간과 비용이 든다. 심하게는 몇 년이 걸리는 경우도 있다. 복잡한 법원의 재판 대신 중재인의 판정에 따라 분쟁을 해결하는 ODR 같은 방안이 필요하다.

 

필자는 여러 차례 ‘사이버 중재 심판정’의 법제화를 주장해 오고 있다. 조 교수의 말이다.

 

“홍콩 법원도 판결보다는 조정 또는 중재 쪽으로 유도하려는 노력이 이루어지고 있다.

현재 소송절차나 중재절차 등에서 ODR 절차를 통한 분쟁해결에 많은 관심과 노력이 이뤄지고 있다. 그러나 아직 이 제도에 익숙하지 않고 다소 거부반응도 있어 좀 더 시간이 걸릴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세계 각국의 ODR 판정의 집행과 국제협약 등이 조속히 마련될 필요가 있다.  


“한국의 법률시장 개방? 언급하기 어려워”

그는 “전자 주총시스템을 접한 적이 있느냐”는 질문에 “사이버 공간에서 ODR이 이루어지는 것과 같은 맥락인데, 앞으로 도입될 것으로 보인다”며 “다만 기술발전이 선행돼 정확성과 신뢰성을 담보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조 교수는 “한국을 여러 차례 찾았고 서울대를 비롯한 많은 교수들과 교류하고 있다”고 밝혔다. “한국의 법률시장 개방”에 대한 질문엔 조심스런 반응을 보였다.

 

“법률시장 개방은 미묘한 문제다. 시장이 개방된다고 하더라도, 법원에서 외국 변호사의 변론까지 허용하지는 않을 것으로 보인다. 이 부분은 좀 조심스러워 언급하기가 어렵다.

 

- 홍콩대가 왜 세계적 명성을 얻고 있는지 궁금하다.

“열심히 가르치지만, 실무기술(교육)도 소홀히 하지 않는 점이 졸업생 평판을 좋게 만드는 비결이 아닐까.

 

조윤 교수는 확신에 차고 분명한 어조로 말을 이어갔다. 더 묻고 싶은 질문이 많아 다음 주 월요일 점식약속을 잡았다. 못다 한 이야기를 그때 다시 물어볼 생각이다. 조 교수의 환대에 이 글을 빌어 감사드린다.


금융법 교수와의 만남

▲금융법 전문가인 홍콩대 구세이학(吳世學) 교수

 

필자는 다시 법학과 구세이학(吳世學) 교수를 찾아갔다. 구 교수는 금융법 전문가다. 홍콩이 국제금융의 중심지인 만큼 계약법, 토지법, 회사법, 파산법 등 금융 관련법을 가르친다. 홍콩 외에도 베이징, 타이페이, 도쿄, 취리히, 멜버른 등지에서 강의한 일이 있다. 필자는 구 교수에게 최근 한국에서 이슈가 되는 지식재산(IP) 금융제도에 대해 물어보았다.

 

홍콩에서 지식재산 금융제도의 관심은 어느 정도인가.

참고로, 지식재산 금융이란 지식재산에 기초해 금융기능을 제공하는 제반 활동을 말한다. 필자는 “지식재산 금융의 활성화야 말로 미래의 국가경쟁력을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척도”라고 주장하고 있다. 구 교수의 말이다.

 

“홍콩에서 지식재산 금융제도에 대한 많은 관심과 논의는 있지만 실효성에 대해선 시간이 필요한 만큼 현실적인 어려움이 있다.

 

구 교수는 이어 전자 주총 시스템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전자 주총 시스템은) 시대적 추세이긴 하나 현재의 지배구조를 형성하는 주주들로서는 아무래도 부정적이다. 왜냐하면 전자 주총이 도입되면 소액 주주들이 많은 요구를 하게 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어쨌든 시대흐름에는 부합하고 특히 소액주주들의 권익보호라는 측면에서 중요하다. 앞으로 대세는 그 방향으로 가야 할 것으로 보인다.

 

-한국은 전관비리로 법조계가 몸살을 앓고 있다.

“판사를 한 후 다시 변호사로 개업해선 곤란하다고 본다. 이해충돌이 생길 수밖에 없다. 원고나 피고측의 한 변호사가 담당 판사와 긴밀한 관계라면 상대방 입장에선 불리하다. 이 부분에 대해선 변호사단체가 좀 더 적극적으로 문제제기를 해야 한다. 홍콩은 전통적으로 이 부분에 엄격하다. 한국법원이 (전관비리를) 좀 더 엄격한 잣대로 접근해야 한다.

 

구 교수는 중국 반환 이후 홍콩의 미래를 밝게 전망했다. “중국경제가 다소 어렵고 홍콩과 중국의 미묘한 정치적 대립이 있지만 이 문제는 정치인들이 잘못 이용한 점도 있다”고 지적했다.

 

▲홍콩 고등법원 모습

 

“홍콩의 미래는 밝다고 본다. 홍콩은 해외 여러 나라의 중국진출 교두보 내지 안내 역할을 해 잠재력과 경쟁력이 상당하다. 상하이가 홍콩을 대신하긴 아직 역부족이다. 물론 홍콩국민도 추월당하지 않도록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 무엇보다 정치적 안정이 중요하다. 정치적인 안정이 유지된다면 향후에도 홍콩은 중국진출의 교두보로 그 의미가 평가되고 더욱 주목받을 것이다.”◎

 김승열 변호사(대한특허변호사협회 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