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속의 雜事(한국사) 2021/ ‘殉敎 100주기’ 1946년에 간행된 《김대건 신부》- 딸이 본 拉北 전 춘원 이광수의 마지막 나날들 - 여순사건,.. - 개화기 선각자 윤치호(尹致昊)의 영문일기
역사 속의 雜事(한국사) 2021
발굴 월간조선 06월 호 2021
■‘殉敎 100주기’ 1946년에 간행된 《김대건 신부》
“5000년 忠孝의 조선아! 이 보배 또 아느냐”
⊙ 일제강점기 펴낸 《수선탁덕 김대건》(1942)… ‘조선 귀국 100주년’ 기념 간행
⊙ 대구가톨릭청년회가 펴낸 《김대건 신부》(1946)… ‘殉敎 100주년’ 추모 간행
⊙ 《김대건 신부》에 실린 12수 聯시조… 문학적 가치 따져봐야
▲故 문학진 화백의 작품인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 초상화〉. 사진 제공=한국천주교주교회의
올해는 한국 천주교 김대건(金大建·1821~1846) 신부가 탄생한 지 200년이 되는 해다. 세례명 안드레아. 우리나라 최초의 신부다. 유네스코는 제40차 총회에서 김대건 신부를 ‘2021년 세계기념인물’로 확정한 바 있다.
김대건은 1821년 충남 당진에서 태어나 26세인 1846년 순교(殉敎)로 생을 마감했다. 비록 생애는 짧았으나 삶은 극적이었고 ‘밀알’이 되어 가톨릭을 뿌리내리게 만든 주인공이다.
▲《김대건 신부》(1946)와 《수선탁덕 김대건》(1942).
김대건 신부와 동향(同鄕)인 대한민국예술원 회장 이근배(李根培) 시인이 두 권의 책을 《월간조선》에 공개했다. 《수선탁덕 김대건》(1942년)과 《김대건 신부》(1946년).
《수선탁덕 김대건》은 김대건 신부가 마카오 신학교를 떠나 1842년 조선으로 첫 귀국을 시도하던 때로부터 꼭 100년이 지난 1942년에 간행된 책이다. 지금은 잊혔지만 한국 천주교 연구에 귀중한 자료로 알려져 있다.
또한 대구가톨릭청년회가 펴낸 《김대건 신부》는 지금까지 거의 소개되지 않은 김대건 관련 소(小)책자다. 꼭 100년 전인 1846년 순교한 김대건을 추모하기 위해 간행됐다. 간행 시기가 좌우이념 대립으로 어수선한 광복 직후라는 점, 천주교 대구교구장이 일본인에서 한국인으로 바뀐 직후라는 점에 눈길이 간다.
이 두 책을 통해 한국인 신앙 속에 가톨릭이 뿌리내릴 수 있었는지 모른다. 《월간조선》은 두 책의 내용 일부를 연대(年代) 흐름에 맞게 발췌해 소개한다. 원문을 살리되 현대어 표기에 맞게 수정했음을 밝혀둔다.
① 《수선탁덕 김대건》(1942)
[편집자 註]
▲《수선탁덕 김대건》의 책 판권. 책의 편집 겸 발행인은 구로가와(黑川米尾) 신부로 적혀 있다.
《수선탁덕(首先鐸德) 김대건(金大建)》은 1941년 10월경 서울 명동성당 유영근(兪榮根·1906~1950) 신부가 저술하였다. 책 머리말에 ‘소화(昭和) 16년’, 판권에 ‘소화 17년’이라 적혀 있다. 1941~42년 사이에 책이 만들어지고 출간된 것으로 보인다.
이 책의 편집인 겸 발행인은 구로가와(黑川米尾) 신부다. 일본인 신부를 앞세워 일제의 종교탄압을 막기 위해서였다. 발행처는 ‘천주교회’.
김대건 신부는 한국 천주교회 창설(1784) 이후 한국인으로서는 가장 먼저 사제(司祭)로 서품되어 ‘수선탁덕’이라는 칭호가 붙었다. 수선은 ‘가장 먼저’라는 뜻, 탁덕은 ‘사제(司祭)’를 뜻하는 중국식 표현이다. 수선탁덕은 1846년 순교 이후 김대건 신부를 상징하는 말이 되었다.
책이 간행되기 꼭 100년 전인 1842년 당시 김대건 신부의 행적은 이렇다. 김대건 신부는 그해 2월 15일 프랑스 함대 세실 제독의 에리곤호에 승선, 마카오를 출발했다. 조선 천주교회의 밀사 김 프란치스코와 상봉했으며 그해 12월 29일 평안도 의주를 통해 조선에 일시 귀국했다. 신학생 후보가 되어 조선을 떠난 뒤 7년 만의 귀국이었다. 다음은 《수선탁덕 김대건》의 일부 내용이다.
1. 탄생
▲김대건 신부의 생가가 있는 충남 당진시 솔뫼성지.
(전략) 성벽과 같이 솟아 있는 개산에서 뻗어 나온 작은 산맥들이 꿈틀거리는 벌레와 같이 소들을 향하고 엎드려 있으니 산맥과 산맥 간에는 들이 기어들어 가서 구불~ 시내의 모양을 이루었다.
작은 산등을 뒤에 지고 작은 들을 앞에 안고 몇십 호씩 들어앉은 촌락 중에 놀매라 하던 동리가 있었다. 지금은 솔뫼(원문은 솔미-편집자)라 하고 관명은 범천, 송산리(松山里)라고 한다. 여기가 곧 우리 복자(福者·순교자일 경우 순교 사실이 밝혀지거나 순교자가 아닐 경우에는 기적이 적어도 2회 이상 일어난 사람-편집자) 안드레아 김 신부님의 태생지요, 때는 성하염천 하 일만초목에 녹음이 짙던 8월 21일이었다.
안드레아는 1836년 영세할 때 받은 본명이요, 어려서는 재복(再福)이라 불렀으며 자는 대건(大建)이요, 보명(譜名·족보에 오른 이름-편집자)은 지식(芝植)이라고 기록되었다.
그 부친은 김제준(金濟俊), 자는 신명(信明)이요, 보명은 제린(濟麟)이니 이가 곧 복자 김 이냐시오이요, 모친은 고(高) 우르술라이시다.
2. 소년시대
▲2014년 8월 15일 프란치스코 교황이 김대건 신부의 생가가 있는 충남 당진시 솔뫼성지를 방문해 기도를 올리고 있다. 사진=뉴시스
조선 속담에 ‘나무는 떡잎 적부터 안다’ 하였다.
사실 성현이나 위인호걸의 역사를 본다면 흔히 그 어렸을 적부터 남다른 무슨 특점이 있음을 보게 된다.
안드레아 신부의 끼치신 그 위업(偉業)을 보아 그 어렸을 적에 얼마나 남달리 두뇌가 명철하였으며 심리가 바르고 성질이 민첩하며 또는 활발하였을까를 어렵지 않게 점칠 수 있는 바다. 그러나 그 소년시대의 일화(逸話) 한 토막도 전하여 있지 못함은 크나큰 유감이다. 오직 조선 가톨릭 교회사의 권위 높으신 삐숑(피숑·Leon Pichon·한국명 宋世興·1893~1945·한국 천주교회사를 처음으로 연구한 선교사 연구자-편집자) 신부님의 저서에서 아래와 같은 간단한 구절을 얻어 보게 된다.
‘(김재복) 소년은 그때 양반의 자제들과 같이 품행이 단정한 중 한문을 공부하고 있었다. 신체는 좀 허약한 편이었다.’
이는 추측상으로도 어그러짐 없는 사실로 믿는다.
우리의 스승이신 그리스도의 주신 표양 그대로 재복이 소년은 그 ‘부모에게 순종하야 받드’셨다.(루카 2, 51) 성 아오스딩(아우구스티누스-편집자)의 말씀과 같이 ‘순명지덕이 가장 큰 덕행이다. 그리하야 말하자면 모든 덕이 근원이요 어머니다.’ (중략)
사람에게는 누구에게나 천부적으로 여러 가지의 권능이 있는 것이요, 그 받은 능이 강하다면 강한 만큼 그 능을 발휘시키기 전에는 불만을 멸할 수 없는 것이다.
명철한 두뇌를 가진 그들이 다시 말하면 철학적 정신을 가진 그들이,
인생은 어데서 온 것인가?
인생은 왜 세상에 사나?
인생은 최후에 어데로 갈 것인가?
등의 인생문제를 생각 아니 할 수 없는 것이요, 연구에 따라 복잡한 또는 다단한 번민을 느끼면서도 그래도 얼마간 해독을 얻기 전에는 불만의 불만을 품게 되는 것이 사실이다. 이는 역사가 또한 잘 증명하여 주는 일이다.
조선학자들이 역사 선배(先輩)의 끼쳐준 유서(儒書)나 불경(佛經)으로써 만족을 얻지 못하고 언제나 몇몇 동지가 모이는 때에는 흔히 우주론이나 인생문제 같은 고상한 문제가 화제에 오르게 되던 것이다.
중국에 리마두(利瑪竇·마태오 리치·1552~1610·이탈리아의 예수회 선교사-편집자), 남회인(南懷人·페르디난트 페르비스트·1623~1688·벨기에의 예수회 선교사-편집자), 탕약망(湯若望·아담 샬·1591~1666·독일의 예수회 선교사-편집자) 같으신 학자 신부님들이 포교하시던 때이다. 이러한 신부님들의 저서가 다행히 조선학자들의 손에 들어오게 되었다. 그 글을 읽음에 따라 조선학자들의 심중에 끼쳤던 의문의 안개가 사라짐을 깨닫게 되었다.
‘의덕을 주리고 목말라하는 자는 진복자로다. 저들이 배부를 것임이’(마태오 복음 5, 6)
(현재 가톨릭 성경은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 그들은 흡족해질 것이다’-편집자)
진리에 목말라하던 그들은 천주교회의 서적을 계속하야 탐독하였고 읽으면 읽을수록 환연빙석(渙然氷釋·얼음이 녹듯 의문이 풀리는 모양-편집자) 이연이순(怡然理順·기쁜 마음으로 도리에 순종함-편집자)이라는 문자가 있음과 같이 과거의 오류(誤謬)는 봄바람에 얼음같이 없어지고 순리를 깨닫게 되었다.
‘천주께 가까이 갈 지이다. 이에 천주 너희에게 가까이 오시리라.’(야고보서 4, 8)
(현재 가톨릭 성경은 ‘하느님께 가까이 가십시오. 그러면 하느님께서 여러분에게 가까이 오실 것입니다’-편집자)
진리를 찾기에 여념이 없던 그들에게 주의 성우(聖佑·하느님의 특별한 사랑과 은혜-편집자)가 박차를 달아주어서 급기야 그들에게 구령(救靈·신앙으로 영혼을 구원함-편집자)의 길이 열리게 되었다.
× × ×
‘생애사정에 빛의 아들들보다 더 지혜로운 세속의 아들들은’(루카 16, 8) 이익을 위하야 험한 산을 오르고 바다를 건너며 양(洋)의 동서를 가리지 않고 답파하야 짐승의 꼬리 하나라도 남기지 않고 거두고 있었다.
교회가 성행하는 나라에 열심한 신도들 역시 남의 구령사정에 특히 여의하게 되었고 이에 따라 외방에 미신자(未信者)들의 구령을 생각하야 친척과 이별하고 고국을 등지며 멀리~ 극동으로 포교의 길을 떠나오는 서양 선교사들의 수가 늘어가고 있었고 그들의 동양의 땅을 밟는 때에 이미 먼저 장사꾼들의 발자국이 있음을 보고는 부끄러움에 얼굴을 붉혔다.
만난을 무릅쓰고 생명을 걸고 온 그들의 열성은 놀라웠지만 여러 가지 환경은 그들에게 오직 불리하야 역사를 읽는 이는 누구나 안타까움을 아니 느낄 수 없다. 더욱 조선 전교 사정이 그러하였다. (중략)
조선에 들어오신 라 신부[Pierre Maubant·피에르 모방 신부·한국명 나백다록(羅伯多祿)·1803~1839-편집자]께서는 들어오신 그 즉시로 다대한 곤란 중에 조선어를 연구하시며 조선풍습을 배우시는 일방 조선교회의 당시 형편을 살피시며 사무를 시작하셨고, 또는 장래 방침을 생각하시기에 분망(奔忙)에 분망을 거듭하셨다.
그 어느 날이다. 협착한 조선집의 방 한 칸을 지키고 계신 라 신부께서 우울한 중에서 무엇을 깊이 생각하시고 계셨다.
그 얼굴은 더욱 엄중하셨고 그 입은 침묵에 굳게 닫혀 계셨다.
라 신부께서는 멀리 이역(異域)에 있는 외로운 몸으로서 고향이나 혹 친우들을 생각하심이런가?
아니다!
그러면 탁덕의 일생에 주요한 부분인 기도 중이시던가?
아니다!
혹 그러면 여러 방면에서 느끼시는 고통 때문에이시던가?
그도 아니다!
라 신부께서 조선교회를 얼마간 살피신 후 장래의 교회 발전상 몇몇 가지를 결정하셨다.
첫째, 당시에 이미 중국인으로서 조선에 체류 중이던 바드리시오 유(劉) 신부[유방제(劉方濟) 신부·순조 33년인 1833년 조선에 들어왔다-편집자]가 더 오래 조선에 계실 필요가 없음을 아시고 곧 중국으로 돌아가시게 할 것이었고, 둘째는 이미 국경에서 입선의 기회를 기다리고 계신 정 신부와 뒤따라 제2차 조선 교황 대리 감목으로 임명되신 범 주교 각하를 조선에 무사히 들어오시도록 주선할 것이었으며[정 신부는 샤스탕(Chastan) 신부, 범 주교는 앵베르(Imbert) 주교-편집자]
셋째로는 조선교회의 기초를 견고히 세우기 위하야 무엇보담도 본토인 성직자 양성의 필요를 느끼사 유망한 조선 아동을 선택하야 유학시킬 문제 등이었다.
이 문제의 소년은 곧 김재복이었다
사실 신학생 유학문제에 있어서 이미 소년 두 명을 결정적으로 간선하야 당신 집에 유숙시키시고 계셨다. 그러나 내포에 가서 전교하실 때에 장래성이 있어 보이는 소년 한 명을 보시고 당신 댁에 부르셨으나 이를 다 본 아이들과 함께 유학시키실 문제에 있어서는 십분 주저와 고려(考慮)의 필요를 느끼심이었다.
이 문제의 소년은 곧 김재복이었다.
▲1972년 5월 14일 김대건 신부 동상 제막식(절두산) 모습이다. 김수환 추기경이 제막식에 참석했다. 사진제공=천주교 서울대교구
이 소년은 이미 그 증조 되는 김비오(운조·運祚)씨부터 교회를 알아 받들어 그 증조는 1814년경에 충청도 해미에서 사망하고 그 후 박해 당시임에도 신자들이 각각 헤어져 흔히 서로 소식도 없이 살았으며 또한 다년간 지도하여 주시는 목자도 없이 지냈고 설혹 신부께서 계신 때라도 신부를 만나 뵈옵기는 극난하였다.
하여튼 여러 가지 사정으로 김재복이라는 소년이 1836년에 이르러서만 라 신부님께 영세하야 안드레아라는 본명을 받았고 또한 견진(가톨릭의 일곱 성사 가운데 하나-편집자)을 하게 된 것이었다.
그리고 그 후 8월 11일부터는 신학생의 지원자로 신부 사택에 머물러 이왕 배우던 한문을 더욱 숙달하고 공부를 계속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신학생을 선택하시는 라 신부님께서는 그 책임상 소년의 일거일동에 있어서 또는 그 가진 소질과 성질에 있어서 살피실 바이었고 더욱 이 소년의 영세한 기간이 짧은 만큼 일층 더 충분한 시련을 하실 것이었다.
신학생으로 결정할 것인가? 그리고 다른 동무와 같이 유학을 보낼 것인가?이렇게 기도로써 주의 성의를 구하시는 동시에 깊은 생각에 잠겨 계시던 것이었다.
앞으로 만단고초와 싸우고 필요하다면 생명을 이바지할 것을 각오하며 주의 영광을 위하야, 교회의 사업을 위하야, 남의 구령을 위하야 모든 것을 희생할 일꾼인 만큼 주의에 주의를 기하야 고르지 않으면 안 될 것이었다.
② 《김대건 신부》(1946)
[편집자 註]
▲《김대건 신부》의 책 판권. 인쇄일은 1946년 9월 26일, 발행일은 10월 1일로 적혀 있다.
책의 부제는 ‘조선이 낳은 세계적 위인 순교자 (안드레아)’이다. ‘대구가톨릭청년회’ 발행이다. 당시 대구교구는 전후(戰後) 한국 천주교의 중심 역할을 할 때였다. 책 판권에 인쇄 1946년 9월 26일, 발행 10월 1일로 적혀 있다. 머리말에는 ‘9월 12일 책을 펴낸다’고 밝히고 있다.
100년 전인 1846년 9월 16일은 새남터에서 김대건 신부가 군문효수(軍門梟首)로 처형된 날이다. 따라서 순교 100주기를 기념하기 위해 책을 펴낸 것이다. 책 끝에 ‘축 김대건 신부 순교 100주년 기념’이라 적혀 있다.
책의 저작자(著作者)는 주재용(朱在用·1895~1975) 신부다. 3대 대구교구장인 일본인 하야사카(早坂久兵衛·1887~1946) 주교가 1946년 갑자기 선종하자 뒤를 이어 교구 임시관리자가 되었다. 주재용은 그해 2월 27일 ‘십자가로 구원(Salus in Cruce)’으로 사목지표를 정하고 계산 주교좌성당에서 제4대 대구교구장으로 착좌하였다. 주 교구장은 해방 직후 어수선한 상황에서 교육 사업에 애정을 쏟았다. 그해 9월 대구 대건중학교, 11월 경북 왜관 순심중학교, 이듬해 1947년 4월 김천 성의학교, 1948년 부산공과학원을 설립하는 등 해방 조선의 근대화를 위해 앞장섰다는 평가다.
책의 발행자는 대구가톨릭청년회 총무부장 김점묵(金占默)이다. 그는 1928년 대구고보(현 경북고) 맹휴사건에 가담해 제적된 인물로 알려졌다. 이 사건은 학생들이 식민지 노예교육 철폐 등을 요구하며 일으킨 동맹휴교 투쟁이다. “이순신 장군을 적(敵)”으로 규정한 일본인 교사의 발언이 빌미가 되었다고 한다.
《김대건 신부》에서 가장 눈길이 가는 곳은 12수 연(聯)시조다. 김대건의 순교를 추모하고 고난을 찬양하는 시조가 인상적이다. 김대건이 15세 때인 1836년 경기도 용인의 은이 공소에서 세례받고 최양업(토마), 최방제(프란치스코)와 함께 중국으로 출발하면서 겪는 이야기가 담겨 있다.
1940년대에 이런 연시조를 썼다는 사실이 놀랍다. 잘 쓴 작품이다. 시인 이근배도 “문학사적으로 재조명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이 시조를 누가 썼을까. 주재용 교구장이 썼을까. 대구가톨릭청년회에서 썼을까. 책 머리글에 적힌 ‘일송(一松)’이 누구인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책 내용 일부를 발췌해 소개한다.
머리말
이 책은 한 사람의 역사를 간단히 적은 책자이로되 그 속에 스며 있는 암시(暗示)는 진실로 무한하도다.
‘인생은 어디로 쫓아오나 인생은 어디로 돌아가나 인생은 무엇을 하여야 하나’. 우리 민족의 철학적(哲學的) 세계관적(世界觀的) 형이상학적(形而上學的) 투쟁, 이 투쟁이 마지막 낳은 씨가 이미 뿌려졌느니.
진리를 사랑하는 우리 민족의 넋, 정의에 희생하는 우리 민족의 피, 신앙을 전취(戰取)하는 우리 민족의 기상(氣像)… 한 사람은 이를 증명하였도다.
한 사람은 한 사람이로되 다시 억만 사람이요, 한 씨는 한 알의 씨로되 드디어 억만 광을 채우리로다.
1946. 9. 29. 일송(一松)
首宗徒 성 베드로는 이 우리 대건 선생에 비기면
저 소설가의 묘사의 한 장면으로서 웃통을 벗은 채 잠방중의만 허리에 두르고 어깨에 그물을 둘러메고 로마부 —저 마다니아가 그린 폐허의 폼페이를 능가하는 명실 그대로의 화도(華都) 로마부— 에 세계적 대학자, 대정치가로 뽐내는 그 철학가 그 귀족들 앞에 나타난 옛적 수종도(首宗徒) 성 베드로는 이 우리 대건 선생에 비기면 그래도 훌륭한 한 양반의 대우를 받음 직하였으리라.
그렇건마는 이 선생이 한번 상해 부두에 나타나매 그 남루한 차림 속에 그 학식(學識), 그 초췌한 몰골 속에 숨어 있는 그 인격(人格), 그 가슴 속에 품고 있는 그 타고난 기상(氣像), 이 모든 것이 혜성(彗星)같이 한꺼번에 비추기 시작하였나니 영국 장교들을 만나면 영어로, 불란서 사람을 만나면 불어로, 지나(支那·중국-편집자) 관헌을 대하면 지나어로, 만나는 족족 거침없이 각각 그 나라 말로 담화를 걸며 개미떼처럼 달려들어 개구리떼처럼 시끄럽게 구는 지나 관헌들의 그 수없는 질문을 놀라운 웅변으로 일일이 막아내며 심지어 월권적인 불필요한 그들의 조사에는 작대기로 대답해주매 대국사람 지나 관헌들이언마는 그들은 어찌할 바를 모르고 그 당시 두 나라 사이에 성문되어 있는 엄연한 국제법에 조선인으로서 지나 땅에 표풍해온 자는 반드시 북경천자께 보하여 그 배는 불사르고 그 사람은 조선 정부에 부치어 육로로 돌려보내야 할 명문이 소연함을 번연히 아는 그들은 이 법을 내세우면 “나도 두 나라 조약을 모르는 바는 아니나 육지로 조선에 돌아가는 것은 싫고… 우리 사정을 천자께 고하든지 말든지 당신네 권리이지만 그것은 나는 원치 않으니 그대들은 우리가 귀국(貴國) 연변에 와서 이 지방의 땅을 밟고 이 지방의 물을 마시는 것만 그대들이 알고 있으면 그만인 줄 안다” 하여 막아나가니 이들은 어찌할 바를 몰라 고민하던 끝에 그 상관인 송강부(松江府) 도독에게 보고한즉 “그이는 내가 잘 아는 이이니 천자께 보할 것도 없이 제 원하는 대로 제 배를 고쳐가지고 그 배로 제 나라에 돌아가게 가만두어라”는 밀령이 나리지 않는가. 이에 저 관헌들은 더욱 이상히 여기고 더욱 걱정되어 기어코 그 정체(正體)를 알아버려 아무리 머리를 썩여가며 애를 써보나 알아볼 길은 없고 그렇다고 해서 그대로 버려두자 하니 자기네 책임문제가 또한 크고 하여 오직 마음으로써 그 어서 하루 바삐 떠나주기만 고대하고 있었다 하니 이만하면 우리 선생의 그 기품과 인격이 어떠하였던가를 가히 짐작할 수 있지 않은가.
이 선생은 송강부 도독만이 신임할 뿐 아니라 그 당시 엊그제 끝난 소위 아편전쟁의 전승자로서 상해 천지에 서슬이 푸르른 저 영국 장교들도 이 양반만은 극진히 후대하며 영국 공사는 바로 그를 팔인교(八人轎)에 태워 공사관을 무상출입하게까지 하지 않는가. 그 시 중국 관헌들과 민중이 이 어른의 정체를 알지 못하여 그 머릿속에 별별 가지 공상과 억측을 그려보아도 도저히 알아낼 길이 없으매 마침내 ‘구과이(古怪·불가사의하고 신비한 존재-편집자)’란 대명사(代名詞)를 덮어씌우고 말았다 함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이와 같이 이 폐의파립의 초췌한, 다 깨어진 죽장망혜 대활보(大步)로 좌왕우왕함 보는 우리 동족 겨레로서 그 아니 통쾌하며 그 아니 감개하랴. 저절로 어깨가 우쭐거려지고 저절로 뽐내고 싶은 생각이 절로 나지 않는가.
김대건 신부는… 1984년 한국 천주교 200주년 되던 해 聖人 반열에 김대건 집안은 지금의 충청도 당진시 우강면 송산리에 자리했다. 김제준(이냐시오)과 고 우르술라의 장남으로 1821년 8월 21일 태어났다. 경기도 용인의 은이 공소에서 모방 신부에게 세례를 받았으며 1845년 8월 17일 사제 서품을 받았다. 첫 미사는 그해 8월 24일, 마지막 미사는 1846년 4월 8일이었다. 그리고 그해 6월 5일 백령도에서 관헌에 붙잡혔고 9월 16일 서울 새남터에서 순교했다. 순교 후 김대건은 로마 교황청으로부터 1857년 ‘가경자’[可敬者·시복(諡福·복자로 선포하는 것) 후보자로 신자들에게 모범이 되는 사람]로, 1925년 ‘복자’로 선포되었다. 그리고 한국 천주교 선교 200주년인 1984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방한해 성인[聖人·복자가 된 후 다시 두 번 이상 기적이 일어난 것이 입증되어 성인으로 선포하는 시성(諡聖)을 거친 사람]으로 선포했다. |
그의 學識, 그의 氣像, 그의 교양 깊은 人品
▲한국형 이콘으로 만든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
대관절 선생은 어찌하여 그때 거기서 이와 같은 인기(人氣)를 끌고 이와 같은 대우를 받게 되었던가. 그 이유는 단순하다. 그의 학식(學識), 그의 기상(氣像), 그의 교양 깊은 인품(人品). 이것이 그렇게 만인의 인기를 끌게 하였던 것이니 이는 바로 저 미국 공사 포-베(M.Forbes)씨가 증명해주는 바이니 우리에게는 추호의 의점(疑點)의 여유도 있을 수 없는 바이다. 그 상해에 온 지 불과 며칠 되지 아니한 그는 “이 청년은 학식도 많고, 상식도 풍부하며, 여섯 나라 말을 할 줄 아는 청년이다. 그러기에 저 영국 장교들은 이 청년이 지식도 넓고 좋은 교양(敎養)도 받은 자이므로 그 교제하기에 매우 유쾌한 인격자임을 발견하였던 것이다”라 하여 이처럼 극구 찬양하는 말을 남겨두었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평이며 이 얼마나 영예스런 찬사인가. 이러한 찬사, 이러한 평을 내린 자자가 그만저만한 보통사람이라면 또 모르되 적어도 일국을 대표한 고관(高官)으로서 문화의 수준이 높고 교양의 정도가 큰 학자, 정치가로서 그 보는 점이 남다를 것이요, 비판하는 판단력이 평범하지 아니할 것이어늘 이러한 자가 이러한 평을 내리게 될 적에야 다시 망설일 그 무엇이 또 있으랴. 더욱이 그 시대 그네들의 눈에는 저들만이 문화인(文化人), 저들만이 문명인(文明人)인 체 스스로 자처 자긍하는 한편 동양인은 보다 학식도 예의도 교양도 없는 야만인으로밖에 보이지 아니하던 그때인지라 동양 사람의 여간한 미점(美點), 여간한 우수성(優秀性)으로는 도저히 그들의 그 깊은 우월감, 그 강한 선입견을 깨뜨릴 수 없어 여간한 것쯤에는 그네들의 그 높은 코 끄트머리도 실룩거리지 아니할 정도이었다. 그렇거늘 이러한 그네들의 입에서 이러한 극도의 찬사, 찬평이 나오지 않고는 못 배길 지경이었다면 우리 선생의 그 인품 그 지식 그 교양의 정도가 어떠하였음을 가히 엿볼 수 있지 않은가.
그런데 선생의 육국말(6개 국어-편집자)에 대하여 조선말은 물론이려니와 중국말, 라틴말은 그 남겨둔 20여 통 서간이 증명함과 같이 우리네의 모어(母語) 이상 능란하였고 불란서말도 훌륭히 통어하실 만큼 배우신 증거는 약 8개월간 세실 함장의 통역관의 요직에 있음만 보아도 알 것이요, 영어 역시 오송항[우쑹(吳淞)은 중국 상하이 중심가에서 북동쪽으로 20km가량 떨어진 항구-편집자] 상해 등지에서 영국 장교들과 회화함을 보든지 더구나 당시 서간 중 친히 말씀한 바와 같이 영국 공사와 통변없이 직접 담화하였다 함을 보아 그 넉넉히 통화할 수 있는 정도임을 알겠는데 그 여섯째 나라말은 어느 나라 말이었는지 똑똑한 기록이 남아 있지 않음은 가장 애석한 바이다. 요동반도 대장하(大莊河) 부두에서 이태리말을 사용하였다 한 기록이 있으나 그때 그 환경을 보아 그 시에 사용될 말이 아니라 하여 보통 오자·낙서로 돌리거니와 천주교와 로마의 관계로 보든지 그 시 마카오에 포교선생 직속의 이태리인 선교사들이 거주하고 있었던 사실 등을 참작하여 이태리말을 배웠거나 아니라면 적어도 포도아말(포르투갈어-편집자)을 배웠으리라 함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아! 그 시대 조선 안에 2000만 주민 중엔 서양 글의 꼴도 구경한 이가 없던 그 시대에 선생은 육국어를 알았으니 5000년 조선 유래에 이 어찌 끔찍한 일이 아니며 이 어찌 일대 경이적 인물(一大 驚異的 人物)이 아니리요. 근대적 세계 영웅 나파륜(나폴레옹-편집자)이 죽던 그해(1821)에 탄생한 우리 성웅(聖雄)으로 체번(替番)하신 것이나 아닐런가.
一大 驚異的 인물이 아니리요
▲김대건 신부의 두상. 가톨릭대 의과대학 해부학교실 응용해부연구소가 복원했다. 사진 제공=서울역사박물관
선생이 서울 옥중에 계실 때에 당신이 중국 어선(魚船)에 맡겼던 편지들이 발각 압수되어 경성에 들어오매 조정에서는 가장 큰 증거물이나 잡은 듯이 — 사실은 그 시대에 있어서 원자폭탄에 못지않은 위험물이 그 속에 있었음은 그 시 정부 몰래 조선 안에 잠복(潛伏)하고 있던 불국인(프랑스-편집자) 주교, 신부 두 분의 편지도 그 중에 들어 있었던 것인데 어전회의에 모인 그 정부 요로들은 서양 글씨를 처음 보고 놀라는 중, 선생의 쓴 편지와 서양인이 쓴 편지의 글체가 다름에 착안하여 “이 편지가 모두 네 손으로 쓴 것이라면 어찌하여 그 글씨가 이렇게도 다르냐” 하고 묻는 말에 그는 “한 사람의 글씨라도 그 잡은 편(철필)의 다름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하여 이 일촉즉발의 위기를 모면하려 하였더니 그들은 또다시 “철필은 우리나라에 없으나 하여튼 한 사람이 여러 가지 모양으로 쓸 수 있다는 증거만은 댈 수 있으니 어디 이리 달라” 하여 그 새 깃을 먼저 매우 뾰족하게 다듬어가지고 가늘게 몇 자를 적어 보인 후에 다시 그것을 뭉툭하게 잘라 버리고 퉁퉁하게 만들어가지고 굵직굵직하게 큰 글자를 얼마 그린 후 “보시오. 이 두 글체가 그 얼마나 다른지 그러니 이 편지들은 다 모두 내가 쓴 것이지 다른 서양인이 이 땅에 있어서 쓴 것은 아니요” 하매 군신 상하가 모두 “○너니(옳거니?-편집자) 그, 그렇겠다”라 하여 곧이듣고 속아넘어가더라 하였으니 (중략)
대개 그 고대하던 순교의 날, 즉 군문효수(軍門梟首)의 날을 당하여 순량한 양(羊)과 같이 새남터 모래밭 사형장에 끌려온 선생님은 ‘사형의 죄목은 외국인(外國人)과 상종한 탓’이라 공포하는 포장의 사형선고문의 낭독이 끝나자 즉시 일어서 명랑하고 자약한 음성으로 자기의 사형당하는 참다운 이유를 설명함과 동시에 운집한 군중을 최후로 제성권면(큰소리로 격려하다는 뜻-편집자)코자 말씀하시기를 “나의 생명의 최후시각이 이르렀으니 제군은 나의 말을 들을지어다. 내가 외국인과 교제한 것은 다만 우리 믿는 종교와 우리 대군(大君) 대부모(大父母) 천주(天主)를 위하여 하였을 뿐이요, 그 외에 다른 뜻이 없었나니 나는 이제 오직 천주를 위하여 죽는 것인즉, 내 앞에는 곧 영원한 생명(生命)이 시작될 것이다. 제군도 사후 영원한 복락을 얻으려 하거든 나와 같이 천주교인이 될지어다. 천주께서는 당신을 공경하지 않는 자는 반드시 영원한 불로 벌하시나니라” 하여 군중의 흉금을 울린 후 다시 좌 깃대 아래 꿇으시매 형역들은 그 머리에 줄을 잡아매어 좌 깃대 구멍에 꾀어 잡아당기니 자연 선생의 머리는 높이 달리었다. 이때이다. 선생은 극히 태연한 어조로 “이렇게 하면 칼로 치기가 좋으냐” 물어 형역의 “좀 몸을 이렇게” 하며 몸짓함에 따라 “자, 그럼” 하시면서 몸을 조금 고쳐주자 형역들의 칼날은 벌써 그 목을 한번 스르르 문지르고 지내간다. 이때 선생님은 “나도 이젠 내 할 일 다 했으니 너희도 어서 쳐라” 하시며 모래 우에 고이 내려놓이었다. 아 — 이 얼마나 태연자약한 기상이며 이 얼마나 순량한 고양(羔羊·어린양-편집자)의 희생인고. 종교적 입장을 떠난 순전한 민족적 견지에서 보더라도 이러한 위대한 인격자를 뉘 있어 부러워하지 않으며 뉘라서 심상히 보아 넘기고 말 것이랴. 오— 조선이 낳은 이 위인! 오! 조선의 이 보배! 이 보배를 아는 자 그 몇이나 되는고!
‘산천(山川)이 어둡거니 일월(日月)을 어찌 보며
지척(咫尺)을 모르거든 천리(千里)를 바라보랴’
(중략) 그런데 이 대건 김 선생님의 그 십년간 남긴 행적이야말로 정말 너무나 극적이요 참말 너무도 탁월하여서 그를 일일이 소개하기는 이 제한된 면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하므로 여기 오적 그 간단한 일람표를 제공하여 그 업적의 큰 윤곽만이나마 파악하게 하려 한다.
김대건 선생의 약력 일람표
1. 경기 용인 한덕동에 한문 사숙하는 어린 재복이 ‘글방 도련님’ 김대건(1821년부터 1836년 7월 10일까지)
2. 모정에 쌓인 조선을 뒤에 버리고 붕정만리의 길 떠나는 15세 ‘어린소년’ 김대건(만주 몽골 산서 중국대륙의 중앙을 뚫고 약 8개월 간 길손)
3. 산설고 물선 만리이역 마카오에 외로이 정학(精學)하는 ‘유학생’ 김대건(1837년부터 1842년까지)
4. 불국(프랑스-편집자) 동양함대장 세실 제독함 상에 오른 지나어(중국어-편집자) ‘통역관’ 김대건(1842년 2월 15일부터 9월 하순까지)
5. 양자강 하류 오송(吳淞)구에서 세실 함상을 하직하고 귀국 준비를 획책고자 황세흥(黃世興) 집에 신세기 치는 ‘외로운 손(孤客)’ 김대건(1842년 9월 하순)
6. 요동반도 대장하(大莊河) 부두 벌떼같이 덤벼드는 지나 관헌을 준책하여 외국인을 건져내고 백가점(白家店)에 은신한 ‘구호자(救護者)’ 김대건(1842년 10월 중순)
7. 8년 만에 다시 보는 내 고향 내 나라를 앞에 두고 동족에게 구축 받고 깊은 산, 찬 눈 위에 쓰러진 정체(正體) 모를 가련한 의주 변문[중국 국경 근처에 있는 변문진(邊門鎭)-편집자]의 ‘걸인(乞人)’ 김대건(1842년 엄동)
8. 장춘 서북 몽고 팔가자(八家子)에 전공의 신(神)철학을 완성하는 조선 초유의 ‘철학가’ 김대건(1843~44 양년간)
9. 백두산 눈보라는 뼈를 녹이고 만주벌 찬바람은 살을 에는 4000리 황야를 횡단하여 경원(慶源) 변문을 두드리는 수상스런 ‘홍차(紅茶)’장수 김대건(1844년 엄동)
10. 네 번째 모험으로 마침내 의주 변문의 경계망 뚫고 한양에 숨은 ‘저술가’ 김대건[1845년 춘(春)]
11. 일엽편주로 황해 노도(怒濤)와 싸우는 ‘모험적 항해가’ 김대건(1845년 4~5월)
12. 구사일생 오송구에 표류되어 영국함장의 구호를 청하는 눈치 빠른 ‘수완가’ 김대건(1845년 5월 하순)
13. 오송 관헌의 강경하게 주장하는 의법처치(依法處置)를 단호 거절하는 ‘웅변가’ 김대건(양국 조약에 배는 불사르고 사람은 나라에 부치어 육로로 귀국게 함)
14. 국제도시 상해 부두에 영국 장교들과 악수하는 조선 초유의 ‘사교가’ 김대건(1845년 6월 초순)
15. 영국 공사(公使)를 방문하고 팔인교(八人橋)에 태워 위의 품품하게 나오는 조선 초유의 ‘외교관’ 김대건(1845년 6월 초순)
16. 광풍노도에 찢기다만 일엽편주가 일시 전능 주(全能 主)의 엄엄한 성전으로 화할제 그 앞에 공손히 조력하는 ‘조제(助祭)’ 김대건(1845년 6월 초순)
17. 상해 관민(官民)들로 하여금 그 정체를 알지 못하여 머리를 썩히게 하는 그들의 구과이(古怪) 우리의 ‘신비객(神秘客)’ 김대건
18. 상해 관헌들의 그 성가신 질문을 작대기로 대답해주는 조선의 ‘큰양반’ 김대건
19. 그가 누군지도 모르고 열없이 전도하려 덤비는 영국목사 스밀 등을 함구무언케 하는 조선 초유의 ‘신학자(神學者)’ 김대건
20. 상해 김가항(金家港)서 성직(聖職)에 오르는 조선의 ‘첫 신부(神父)’ 김대건(1845년 8월 17일)
21. 상해 완당 성전에서 조선사람으로서 처음 미사성제를 거행하는 조선의 ‘첫 사제(司祭)’ 김대건(1845년 8월 24일)
22. 광풍노도에 포로되어 제주(濟州) 근해에 방황하는 라파엘호의 ‘선장’ 김대건(1845년 8월 31일부터 10월 12일까지)
23. 강경포 황산에 금의환향(錦衣還鄕)하는 형설의 ‘개선자’ 김대건(1845년 10월 12일)
24. 10년간 그리웁던 어머님 모시는 ‘효자(孝子)’ 김대건[1846년 초 춘(春)]
25. 순위도(巡威島)의 이변으로 등산(登山) 해주(海州) 한양(漢陽)에서 열변 토하는 열렬한 ‘신앙표백자(信仰表白者)’ 김대건(1846년 5월 13일부터 9월 16일까지)
26. 서울 옥중에서 친히 만드신 세계지도 지리지(世界地圖 地理志) 등으로 임금을 위시하여 온 조선을 놀래게 하는 조선 초유의 ‘경이적 대인물’ 김대건(1846년 8월 하순)
27. 조선 위정자들의 사색(四色)투쟁과 실력무능을 보고 조선의 장래를 못내 설워하며 크게 우려하는 조선의 진수한 ‘우국지사(憂國志士)’ 김대건
28. 내외친지와 교우 일동에게 일일이 보내는 최후 고별사로서 순교를 각오하는 ‘부감목(副監牧)’ 김대건(1846년 7월 28일~8월 26일)
29. 새남터 모래사장에서 최후의 대(大)설교로 구름같이 모인 군중의 흉금을 울린 후 “내 몸을 이렇게 가지면 치기가 좋으냐” 물어 조금 이쪽을 땡겼으면 하는 형역의 말에 “자, 그럼” 하며 고쳐 앉은 후 시험해보는 듯 놀리는 희광이의 칼이 자릿자릿 하게도 그 울대머리를 스스로 문지르고 지내매 “나도 이젠 내 할 일 다 했으니 너희도 어서 쳐라” 하시며 사르르 눈을 감고 유유히 칼을 받는 영웅적 ‘대(大)순교자’ 안드레아 대건 김신부(1846년 9월 16일)
30. 십만 군중을 탄토하는 세계적 대(大)전당 로마 대성전에서 창조주 조물진주의 지상대리자 로마교황으로부터 세계의 사표(師表) 세계 인류의 활(活)모델로 표창받는 ‘성웅(聖雄)신자’ 안드레아 대건 김신부(1925년 7월 5일)
▲한국인 최초 신부인 김대건의 대형 동상과 순교박물관이 있는 절두산 순교성지 전경이다.
조선이 낳은 세계적 위인 천상 복자(福者) 안드레아 대건 김신부의 역사는 대강 이러하다.
× ×
十五세 어린몸이 괴봇짐 걸머지고
정든땅 뒤에두고 정처없이 길손되니
마카오 낯선땅아 박대말아 이少年
이역에 八개성상 반성공* 품에안고
네보山 찾노라고 요동땅 굽어드니
山川은 의구ㅎ건마는 건데없네 父子情
그립던 母子情을 지척에 끊어두고
편주에 맡긴몸이 노도에 포로되고
광풍에 까불린배는 그칠줄을 모르네
김가항** 탁덕승품 천고에 경사이요
강경포*** 금의환향 만고에 보배로다
五천년 忠孝의 조선아 이보배 또 아느냐
三千里 너른 강산 터좁다곤 못할지며
二천만 숱한동포 數적다곤 못하련만
沙장에 버린 저보배 임자없음 설어라
내겨레 내동포는 내몰라라 하던임을
하늘밑 온누리가 서로다퉈 찬양하네
鮮血에 주린조선아 언제까지 잠자려나
× ×
白頭山 나린물은 白鹿潭에 흘려있고
무궁화 고운꽃이 옥야청산 붉었으니
아마도 우리복자의 血滴인가 하노라
山허리 단풍잎은 실바람에 물결치고
가을밤 밝은달에 쌍기러기 노래하니
묻노라 철없는 너희들도 이날만은 아는고야
까마귀 눈비맞아 희는듯 검다마는
티없는 저달이야 밤인들 어두우랴
信仰에 굳어진마음 칼날인들 어이리
솔숲을 이불삼고 돌틈에 베개삼아
三천리 너른땅에 갈데없어 헤맬적에
기어코 이기쁨있을줄을 뉘그때 알았으리
비단결 금수강산 가뜩이나 고운데다
때아닌 무궁화가 더한층 고운지고
무심한 조선兒들아 뉘덕인줄 아느냐⊙
[편집자 註] *반성공: ‘八개성상 반성공’은 마카오로 떠난 조선인 8명(3명의 신학생 후보 김대건·최양업·최방제 포함)이 황해도 개성(開成) 상인으로 변장했음을 뜻하는 것으로 보인다. 다른 해석으로 여덟 해, 혹은 8개 성상(聖像)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한다. 또 ‘반성공’은 ‘반드시 성공’으로 추측된다. **김가항: 김대건 신부는 1845년 8월 17일 상하이 김가항 성당에서 사제 서품을 받았다. 탁덕은 ‘천주교회의 사제’를 뜻하는 중국식 표현이다 ***강경포: 김대건은 1845년 10월 12일 충청 강경 부근의 황산포에 도착해 포교활동에 나섰다. |
글 : 김태완 월간조선 기자 kimchi@chosun.com
월간조선 09월 호
■ 딸이 본 拉北 전 춘원 이광수의 마지막 나날들
“이제 내가 또 대한민국에 不忠한 일을 할 수 없소”
⊙ “나는 親日派 노릇 한 것 이외에는 별로 죄가 없다”며 자백서 작성 거부
⊙ 납북되던 7월 12일 자백서 강요받자 책상 위에 놓인 종이, 만년필, 연필을 손에 잡히는 대로 꺾어버리고 찢어버려
⊙ 춘원, 6·25 당일 39도의 열에 시달려… 피란 위해 걷기 연습했지만 정원 끝까지 두 번 왕복하면 숨이 차서 꼼짝 못 해
⊙ 이미 7월 16일 평양감옥 수감하고서도 9월 15일까지 가족들로부터 차입품 받는 속임수 써
⊙ 계광순·신동기 선생 등이 평양감옥에서 춘원 목격
[편집자 註]
이 글은 6·25 당시 춘원 이광수(春園 李光洙·1892~1950년) 선생이 납북(拉北)되기 전, 춘원을 지척에서 지켜본 딸 이정화 박사의 수기다. 이 수기는 국내에서 근간(近刊) 예정인 《잊혀진 전쟁: 1950~1953》(화산문화 펴냄)에 실린 8편의 수기 가운데 하나다. ‘팔순이 넘은 여덟 명의 재미 한국인의 회고록’이라는 부제(副題)가 붙은 이 책에는 이정화 박사 외에도 최남선(崔南善) 선생의 손자 최학주 박사, 납북된 백관수(白寬洙) 전 《동아일보》 사장의 아들 백순 박사, 그리고 안홍균 박사, 최재원 박사, 김승곤 박사, 강창욱 박사, 고(故) 최연흥 전 서울시립대 교수 등의 6·25 수기가 실려 있다. 이 책은 원래 최연흥 전 교수가 2020년 편집한 《다섯 소년의 회고록》을 바탕으로 해 영문판과 한국어판으로 발간을 추진해왔다. 최 전 교수가 지난 1월 타계한 후에는 고인의 지인(知人)인 송종환 전 주(駐)파키스탄대사(현 경남대 국제관계학과 석좌교수)가 중심이 되어 한국어판을 펴내게 되었다.

▲춘원 이광수
1950년 6월 25일. 이날은 일요일이어서 우리는 학교도 가지 않고, 어머니는 아버지 약을 구하러 나가셨다. 박근영 검사 따님 지혜가 놀러 와서 하루 종일 피아노를 치고 놀다가 저녁을 같이 먹고 내가 지혜를 바래다주려고 길에 나섰다. 지혜는 집이 신당동이고 나이가 나보다 어리다. 지혜 아버지는 6월 28일 아침에 공산당에게 잡혀가셨다. 길에 나서보니 웬일인지 길에 자동차가 안 다닌다. 군인들이 트럭을 타고 청량리 쪽으로 질주한다. 무시무시해서 나는 지혜를 바래다주고 달음질을 쳐서 집으로 돌아왔다.
어머니가 집에 돌아오셔서 하시는 말씀이, “공산당이 쳐들어온다고 인심이 흉흉하다”고 하신다. 우리 집 라디오는 어제부터 고장이 나서 안 들리나 신문은 여전히 매일 나왔다. “공산당이 대대적으로 쳐들어오려고 하나 우리 국군이 넉넉히 막아낼 수 있으니 백성은 안심하라”고 하였다. 그 다음 날 신문에는 정부가 수원으로 옮기려고 했으나 충분히 막아낼 수 있기 때문에 그만둔다는 것이다. 우리 집 라디오가 고장이 난 것이 우리에게는 한 가지 불행이었다.
아버지는 그날 밤 열이 39도였다. 우리 집에는 아무도 오지 않았다. 어머니는 무슨 큰일이 있을 때는 반드시 아버지의 의견을 물으시는 것이다. 고열에 괴로워하시는 아버지에게 “세상이 야단이니 어떻게 해요? 공산당이 지금 대대적으로 쳐들어온다고 그러는데” 하니까 아버지는 빙그레 웃으시면서, “그러기로 서울까지야 오겠소. 대한민국이 그렇게 약하기야 하겠소” 하신다.
어머니는 그래도 안심이 되지 않으신지 어머니가 가장 신뢰하시고 그분의 말씀이라면 무조건 믿는 백붕제 변호사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떻게 하면 좋아요?’ 하고 어머니가 물어보시니까 역시 그분도 아버지 말씀과 같이, “설마 서울 장안에야 공산당이 들어오겠어요? 그저 가만히 계세요. 춘원 선생 병구완이나 잘 하시고” 이런 대답이었다. 아버님의 마지막 생신을 같이 축하해주신 그분도 7월 17일 공산주의자들에 의하여 잡혀가셨다. 그날 밤 우리는 안심하고 잠을 잤다.
開戰 다음 날 은행에 저금하러 간 어머니

▲춘원 이광수의 딸 이정화 박사. 사진=조선DB
어머니는 아버지 방으로 왔다 갔다 하시고 늦도록 무엇을 하고 계셨다. 그 이튿날 6월 26일, 우리 삼 남매, 영근 오빠, 정난 언니와 나는 평상시와 같이 학교에 갔다. 그날은 오빠와 언니가 같이 다니는 서울대학교의 입학식이 있는 날이었다. 그렇게 경쟁률이 심한 서울대학교 문리과(文理科) 대학에 합격한 언니의 기쁨은 말할 수 없이 컸다. 학교 학생들이 수군수군하고 야단이다. 공산주의자들이 서울에서 25마일 떨어진 의정부까지 쳐들어왔다고 하는 것이다. 사태가 위험하다고 해서 이화여중 학생들은 정오가 지나 전부 집으로 돌아갔다. 몇 명의 상급반 학생들은 전선에 있는 한국군들을 방문, 격려하자고 자진해서 지원했다.
집에 돌아오니 집에서는 그리 근심하는 빛이 보이지 아니한다. 어머니는 집에 있는 돈을 은행에 저금하러 가셨다 한다. 우리 집은 무슨 모순이었던가? 다른 사람들은 은행에 있는 돈을 찾아서 달아나는 판에 어머니는 집에 있는 돈을 저금하러 가셨다니 어리석다고나 할까 순진하다고 할까?
나중에 알고 보니 기가 막혔다. 그야 그럴 수밖에 없었다. 날마다 신문 보도는 국군의 전과(戰果)가 유리하다고 하였고 정부는 옮기지 아니하고 대한민국의 수도를 사수(死守)하겠다고 방송하였으니 이것을 안 믿고 무엇을 믿는단 말인가? 정부의 속사정과 군의 동태를 알려주는 사람이라도 있었더라면 이러한 어리석은 일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는 사이에 정부와 한국군은 도망가고 일반 국민들이 남쪽으로 가기 위해 한강을 건너기 전에 한강대교를 폭파했다.
우리 집에 오시는 분 가운데는 “그따위 소리 믿지 말고 어서 달아나요” 말해주는 이는 한 분도 없었다. 어머니가 은행에 갔다 오시더니 대단히 걱정하는 빛을 보인다. 은행에는 돈을 맡기러 오는 사람은 하나도 없고 찾으러 오는 사람뿐이요, 여러 가족이 벌써 남쪽으로 달아났다고 한다. 저녁때 오빠가 돌아와서 서울의 동북쪽에 위치한 청량리에서 대포 소리가 가까이 들리고 대학의 교수들도 어디로 도망갈 준비를 하더라고 한다. 어머니는 이때부터 허둥지둥하셨다. 아버지의 열은 조금 떨어졌지만 기침이 심해서 잠을 잘 수 없는 지경이었다.
오빠, “이 집을 떠날 사람은 아버지”
다음 날 27일 아침 어머니는 그 전 날 입금한 돈을 찾기 위해 은행에 갔다. 변동이 심한 인플레이션에도 불구하고 두툼하면서 무거운 그 지폐 다발은 우리가 다음 3개월 동안 한 끼니도 놓치지 않고 지탱할 수 있게 해주었다. 어머니는 정오 넘어 돌아와서 아이들은 남쪽으로 도주토록 결정했다. 그러나 오빠는 당장 떠날 것을 반대했다.
오빠는 “이 집을 떠날 사람은 아버지이다”라고 말했다. 어떻게 아버지를 두고 아이들만이 도망갈 수 있단 말인가? 이래서 우리는 다음 날로 출발을 연기했다. 박격포 소리가 멀리 계속 들렸지만 우리는 비교적 편안하게 잤다. 아버지의 열은 떨어지고 그의 기침 빈도도 가라앉아서 잘 주무셨다.
28일 새벽 2시경 사이렌 소리에 깨어났다. 공습경고가 아니었다. 남쪽에서 간헐적으로 오는 사이렌 소리는 긴박하게 들렸다. 나는 잠에 빠진 어머니를 흔들어 깨웠다. “엄마, 저 사이렌 소리 들어봐요. 소름 돋는 소리야” 하고 말했다. 반쯤 잠에서 깬 어머니는 “걱정 마라, 그냥 자자. 우리의 수도가 그렇게 짧은 시간에 무너지지는 않을 것이야” 하고 다시 잠에 떨어졌다.
28일 아침 높은 소리의 기관총 소리가 박격포 소리와 함께 들렸다. 탱크가 굴러들어오는 소리가 침대 아래에서 진동하는 것 같았다. 서울 시민들은 북한 인민군들에게 붙들리게 된 것이었다. 도망가기에는 늦었다. 한강대교가 폭파되어 끊긴 것도 알았다. 공산주의자들로부터 탈출할 길이 없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 사이렌 소리는 국군에게 한강 남쪽으로 후퇴하라는 마지막 경보였다.
“설마 대한민국이 아주 망하기야 하겠느냐”

▲6·25 남침 사실을 보도한 1950년 6월26일자 《조선일보》. 사진=조선DB
곧 북한 공산군이 효자동 길을 점령했다. 정부의 정책들을 공공연히 반대하는 글을 계속 기고해온 아버지는 항상 공격의 대상이었다. 아버지는 독립운동을 선동했다는 이유로 일제 치하에서 체포되었고 그 이후 일본과 협력했다는 이유로 한국 정부에 의해 체포되었다. 이제 서방 민주주의 동조자라는 이유로 박해의 대상이 될 것이었다.
우리는 아버지가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체포되지 않도록 보호하는 계획을 생각하기 시작하였다. 아버지는 자신의 원기가 회복하면 집을 떠나서 어딘가 숨을 것이기 때문에 염려하지 말라고 하셨다. 어머니는 아버지의 허리 벨트 안에 6만원을 숨겼다. 아버지는 마당에서 걷는 연습을 하셨다. 아버지는 매번 정원의 끝까지 두 번 왔다 갔다 하시면 숨이 차서 꼼짝 못 하고 오랫동안 쉬었다. 아버지의 기침 빈도가 너무 잦아서 마루 밑이나 광 같은 데에 숨을 수 없는 지경이었다. 아버지는 어느 날 집을 떠날 수 있다고 할 만큼 튼튼해졌다고 말할 때까지 여러 날 걷는 연습을 하였으나 곧 다시 편찮아졌다.
공산주의를 반대하거나 미국 민주주의를 지지하는 것으로 추정되는 사람들이 재판을 받고 기소되는 인민재판이 매일 서울 거리에서 진행되었다. 체포를 피하기 위하여 도망가려고 한 자는 현장에서 즉결 처형되었다. 한편 북한 인민군들은 의용군(義勇軍)을 충원(充員)하기 시작했다. 말로는 자발적으로 지원했다고 하지만 젊은이들이 길에서 보이는 대로 징집이 되었다. 대학에서도 오빠를 나오라고 하고, 인민위원회에서도 오빠를 나오라 한다. 나가기만 하면 그 자리에서 당장 끌려간다. 그래서 아버지보다 오빠가 더 급하게 되었다.
오빠는 7월 3일 자그마한 자루 하나를 싸 들고 집을 떠나서 자하문 인근에 있는 숙모 댁 근처의 민가에서 떨어진 동굴에 숨기로 했다. 위급 시에는 동굴에 숨고 밤에는 근처의 숙모 댁에 있는 것으로 정했다.
어머니는 우시면서, “어떻게 하든지 목숨만 보전하여라. 며칠 안 갈 것이다. UN군이 들고 나섰으니 설마 대한민국이 아주 망하기야 하겠느냐. 목숨만 보전해라” 이러한 비통한 작별을 하였다.
아버지도 다시 걸음 연습을 하시며 금명간 하루 이틀 내에 어디로 달아나자고 하셨다. 아버지는 마치 덫에 걸린 다람쥐 같았다. 그는 높은 벽을 오르거나 먼 데를 갈 수 있을 만큼 튼튼하지 않았다. 어머니는 혼자서 가족을 보호하기 위해 어찌할 바를 몰랐다. 어머니는 공산주의자들과 좋은 관계를 갖고 가능한 한 집에 머물까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아버지의 체포
우리는 하늘에서 미군 비행기가 공포심을 불러일으키는 소리를 내는 폭탄을 투하하는 것을 보고 기뻐하였다. 더 많은 폭탄이 쏟아져서 전투에서 이겨다오. 폭탄 투하로 민간 피해자가 있었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처음에는 며칠만 기다리면 될 것으로 생각했다. 일주일이 한 달로 늘어났다. 시간이 갈수록 우리의 희망은 사라졌다. 아버지의 체포 가능성도 그만큼 커지고 있었다.
7월 6일 우리 집은 공산당에게 차압을 당하였다. 아침 9시경 20여 명이 우르르 우리 집으로 들이닥쳤다. 아버지는 침대에 누워 계셨다. 그들은 빨간딱지를 각방의 문에 붙이면서 어머니, 언니와 나를 어느 한 방으로 몰아넣고 앉아 있으라고 했다. 문 뒤에 있는 우리의 옷과 책들이 거의 딱지가 붙어져서 압류되었다. 그리고 그들은 떠나면서 우리 집 대문 앞에 공산당 보초를 세웠다. 보초의 허락 없이는 식료품 가게에 가는 것을 포함하여 외부로 나갈 수 없었다. 아무도 집에 들어오는 것이 허용되지 않았다. 집 뒷문에는 빨간딱지가 붙고 우리 집 대문에는 ‘내무서가 압류한 재산’이라는 표시가 붙었다. 이제는 꼼짝달싹할 수 없게 되었다.
바로 그 이튿날 인민군과 인민위원회에서 나온 도합 열 명가량의 인원이 아버지를 잡으러 왔다. 그때 침상에 누워 있던 아버지는 몸이 약해서 못 걸어가겠다고 하였다. 그들은 가까운 파출소까지 가는 것이니 천천히 가자고 말했다.
파출소에는 여러분이 잡혀 오셨다. 지서장, 재판소 판사와 그 밖에 몇 명이 잡혀 왔다. 아버지가 두 시간 이후 풀려 나올 때까지 어머니는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부모님은 걸어서 2마일 떨어진 집으로 돌아왔다. 아버지는 숨이 차신 것 같았고 어머니는 괴로워하셨다. 아버지가 도망을 갈 만큼 건강하실까? 아버지가 사라지면 우리 가족은 어떻게 될까?
“자백서 써도, 안 써도 잡혀갈 것"
아버지에 의하면 파출소에 붙잡아놓고 그들은 아버지에게 죄를 자백하라고 요구했다고 한다. 체포된 사람들은 집에 돌아가서 지금까지 살아온 과정에 잘못한 일에 대한 자백서를 써오라 하고, 그 자백서에 따라 다시 처분하겠다고 하면서 내보냈다고 한다.
이때가 아버지가 달아날 유일한 기회였다. 그러나 아버지의 건강 상태는 달아날 수가 없었다. 어쨌거나 어머니는 아버지가 죽는 한이 있어도 집으로 돌아가지 말고 바로 어디로든지 달아났어야 했다고 후회했다.
“그때 왜 아버지를 집으로 모시고 왔을까? 일단 집에 돌아오면 보초가 있으니 달아날 수가 없지 않은가. 그때 내가 분명히 정신이 없었던 것 같다.”
어머니는 그때를 천추(千秋)의 한(恨)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아버지는 항상 어머니의 결정을 따랐으므로 그때 어머니가 결심했다면 어디론가 도피했을 것이다.
아버지는 집에 돌아오셔서 곧 누웠다. 그날도 그 이튿날도 자백서를 안 쓰셨다. 어머니가, “당신 어떻게 하려고, 총칼 앞에서 안 쓰시고 있다가 무슨 일을 당할지 모르겠소” 하시니까 아버지는, “자백서를 써도 잡혀갈 것이요, 안 써도 잡혀갈 것이오. 당할 대로 다 당하겠소. 이제 내가 또 대한민국에 불충(不忠)한 일을 할 수 없소” 하고 엄숙하게 거절하셨다.
무슨 이유인지 어느 날 아침 보초가 대문 앞에 서 있지 않았다. 어머니는 기회라고 생각하고 아버지가 시골 사람처럼 보이도록 무명 고의적삼을 입히고 고무신을 신겨서 달아나도록 준비를 했다. 그때 평복을 입은 함경도 사투리 쓰는 사람이 불쑥 들어왔다.
“우리는 선생님을 모셔서 지도를 받으려고 합니다. 잠깐 같이 가십시다” 한다. 곧 뒤를 이어 인민군복을 입은 젊은 사람이 들어와서 북쪽 사투리로 “자백서 썼소?” 하고 묻는다. 아버지는, “나는 친일파(親日派) 노릇 한 것 이외에는 별로 죄가 없는 것 같아서 안 썼습니다” 하였다.
젊은 사람이 천천히 “그러면 지금 써서 가지고 갑시다. 자백서를 써가지고 가는 것과 안 써가지고 가는 것과는 대우가 다릅니다. 우리가 현관에서 20분 동안 기다릴 터이니 쓰시오” 하고 종이 한 장을 놓고 현관으로 나가버린다.
아버지의 마지막 미소

▲1929년 《동아일보》 편집국장 시절의 이광수. 사진=조선DB
어머니, 언니와 나는 놀라서 아무 말 없이 오랫동안 서 있었다. 어머니는 손과 몸을 떠셨다. 아버지는 책상 앞에 가만히 꿇어앉으셨다. 5분이 지나도 아버지는 쓰지 않으셨다. 아버지는 책상 위에 놓인 종이, 만년필, 연필을 손에 잡히는 대로 꺾어버리고 찢어버렸다. 20분쯤 지나 그 인민군 장교는 다시 들어와서 아버지 앞에 놓인 종이와 내동댕이쳐진 만년필들을 보고는 “당신은 미국 비행기가 오기를 기다리는 자요. 어서 나와!” 하고 성을 내었다. 어머니가 덜덜 떠는 것을 보고는 “문화인이 비겁하게 떨기는 왜 떨어요?” 하고 조롱했다. 어머니는 땅에 무릎을 꿇고 그 인민군이 아버지를 데려가지 않도록 빌자 그는 “나에게 비는 것은 봉건주의 사회의 나쁜 버릇”이라고 일갈했다.
아버지는 “그렇게 하는 것이 봉건주의가 아니다. 그녀는 다만 남편을 걱정할 뿐”이라고 점잖게 말했다. 아버지는 잡혀가실 때 나를 보고 미소를 지었다. 나는 아버지에게 눈물을 보이지 않으려고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이 이후에 있었던 일에 대한 기억은 불확실하다. 내가 기억하는 것과 언니의 기억이 다르다. 언니는 아버지가 트럭에 실려 북한 인민군에 잡혀갈 때 나는 울기만 하고 길까지 배웅하지 않았다고 한다.
아버지가 잡혀간 날은 전쟁 발발 후 17일째가 되는 7월 12일이다. 아버지가 잡혀가신 후 우리 집에는 보초가 없어지고 의료 기구와 가구들을 실어 내가기 시작했다. 그러고 나서 그때 순화병원에 입원하고 있던 콜레라, 장티푸스와 같은 전염병 환자들을 우리 병원에 입원시켰다. 우리 집에는 식구라야 단 셋이 남았다. 우리는 심부름하던 아이, 식모, 간호사들을 모두 자기 집으로 보냈다. 우리는 집에 더 있을 수 없었다. 그러나 오빠 일이 궁금하여 이 집을 떠날 수도 없었다.
7월 말경이었다. 새벽에 다 죽게 된 오빠가 집으로 들어왔다. 그동안 오빠는 자하문 밖 어느 바위굴 속에 숨어 있었는데 먹을 것은 떨어지고 아무거나 주워 먹어서 배는 아프고 이러다가는 죽을 것 같아서 왔노라고 한다. 여위고 파리하고 흉하고 비참한 몰골이었다.
이때는 ‘의용군’을 마구 길에서 붙잡아 가는 판이라 젊은 사람은 길에 마음 놓고 나타나지 못하였다. 오빠는 우연히 아버지가 잡혀가신 소식을 들었다. 이제 우리는 오빠의 안전을 걱정해야 했다. 어머니는 그를 숨기고 치료를 해야만 했다. 어머니는 오빠가 어느 순간에 체포되고 순화병원 환자들로부터 감염될까 봐 안절부절못했다.
어머니는 의원 복도 아래에 있는 지하실로 갔다. 좁은 창문이 있는 구석에 장작들과 구공탄들을 쌓아 오빠를 위한 비밀 방을 만들었다. 밖에서 모르는 사람이 들어오면 바로 오빠는 여기에 숨었다. 날마다 주사를 놓고 영양분을 취하도록 하였더니 일주일 지나니까 오빠의 건강이 회복되었다. 이제는 돈을 넉넉히 주어 가지고 달아나도록 생각을 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우리 집 지하실 위 복도가 사람 발자국 소리로 요란했다. 한 20명의 사복 한 젊은 내무서원들이 집 수색을 하기 위해 급습했다. 그중에는 멋모르고 날뛰는 의사 나부랭이도 있었다. 오빠는 민첩하게 지하의 숨는 곳으로 내려갔다.
그들은 당장 우리에게 집을 비우고 나가라고 명령했다. 만일 지하실에 오빠만 감추어 놓지 않았다면 어머니는 “네. 나가겠습니다” 하였을지도 모른다. 어머니는 떨리는 목소리로 하룻밤만 더 있게 해달라고 애원하였다. 그 사람들은 우리를 조그마한 방 하나로 내몰고 그 방에서 자고 내일 아침 일찍 나가라고 했다.
지하실 창틀을 뜯어낸 어머니

▲춘원 이광수(오른쪽)와 부인 허영숙(가운데). 왼쪽의 아들 봉근은 8세 때 사망했다. 사진=조선DB
우리는 빈 몸으로 그 작은 방으로 가서 벌벌 떨고 앉아 있었다. 집에서 쫓겨나는 것, 빈 몸뚱이 거지꼴이 되는 것, 이것들은 다 우리에게 걱정이 아니었다. 오직 지하실에 있는 오빠가 걱정이었다. 저들에게 발각되었다가는 당장에 잡혀갈 것이다. 그들은 좋은 방을 하나씩 차지하고 들어갔다. 오빠가 어떻게 나올 것인가. 기가 막히는 일이었다.
날은 저물어 어두워졌다. 그런데 그들이 저녁을 먹으러 간다면서 두 사람을 남겨놓고 모두 나가버렸다. ‘옳지, 이때가 오빠를 구할 때’라고 우리는 생각했다. 그런데 그 남아 있는 두 사람이 하필이면 지하실로 들어가는 문 앞 마루에 앉아 있었으니 어떻게 오빠가 나올 것인가. 어머니는 무슨 궁리를 하였는지 “너희는 이 방에 가만히 있고 나오지 말아라. 내가 할 방법이 있다” 하셨다. 그러나 나는 궁금하여 가만가만히 어머니 뒤를 따라나섰다. 우리 집은 병원이라 다소 집이 커서 이리저리 움직여도 그 두 사람의 눈을 피할 수가 있었다.
지하실에는 출입구 이외에 공기 통하는 창이 두어 군데 있었다. 그러나 그 크기가 다섯 치가량이나 될까, 도저히 사람의 머리가 드나들 수 없었다. 이 창은 뒤꼍으로 나 있어서 그 두 사람의 눈에 뜨이지 않는 곳에 있었다.
어머니는 재빠르게 가셔서 창틀을 뜯었다. 창틀이 모래흙에 파묻히고 비바람에 삭아서 뜯을 수 있었는지 모르나 그래도 어머니의 힘으로는 어려운 일이었다. 그러나 이것도 역시 죽고 사는 전쟁이었다. 적은 바로 저기 앉아 있다. 이것을 뜯다가 발각이 되면 우리가 죽고 마는 것이요, 요행히 성공하면 오빠와 우리가 살아나는 길이다.
나는 그들이 이리로 올까 망을 보고 있었다. 오는 듯하면 변소에 갔다 오는 체하다가 또 창틀을 파냈다. 창틀을 파내고 어머니가 당신의 머리를 그 안으로 넣어보았더니 넉넉히 들락날락한다. 창틀 파내는 일에는 성공하였다. 창틀은 파내었으나 여기서 나와서 어디로 가나! 바로 곁에 한 길이나 되는 높은 담이 있고 그 담 너머는 바로 예전 반장 집이다. 그 댁은 공산당 세상이 되고서는 반장 자리에서 물러난 집인데 어머니와 친한 분이다.
그 댁에는 반장 집 말고도 여러 가구가 살았다. 모두 하루하루를 노력하여 날품을 팔아 사시는 분들이다. 바로 그 담 밑에는 무연탄이 들어 있는 나무 궤짝이 있었다. 어머니는 그 궤짝 두 개를 포개어 놓고 담 너머로 머리를 내밀어 “여보세요” 하고 불렀다. 그러고는 “지금 곧 우리 아들이 이 담을 넘어갈 터이니 받아서 숨겨달라”고 부탁하였다.
“네, 그렇게 하겠으니 어서 넘겨 보내시오” 한다. 서로 정(情)이 통하는 우익 진영이다. 우리는 미국 비행기가 오지 않는 날이면 실망하고 낙심하는 대한민국 백성이다.
오빠의 탈출
다음에 남은 일은 오빠에게 이 구멍으로 지금 곧 나오라는 기별을 할 일이다. 지하실이 30간이나 되고 기역자로 구부러지고 물건이 이리저리 쌓여서 오빠가 숨어 있는 장작더미와는 거리가 상당히 멀다. 어머니는 다시 복도 마루로 들어가서 오빠가 여기쯤 숨어 있으리라고 짐작되는 마루에다 입을 대고 “영근아!” 하고 부르니까 바로 그 밑에 있어서 “네” 하는 대답이 곧 들렸다.
“서쪽 창으로 나와서 반장 집으로 향한 담을 뛰어넘어라. 연락했다. 지금 곧 나와라. 지금 못 나오면 죽는다.”
다시 “네” 하는 소리가 들린다. 그러고 나서 어머니와 나는 창문이 있는 곳으로 가서 오빠 머리가 나오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나오지 않았다. 얼마나 초조하였는지, 5분가량 지났을까. 오빠 머리가 나왔다. 그런데 현관문 종 울리는 소리가 났다. 그들이 돌아온 것이다. 오빠에게 “어서, 어서” 하고 재촉하였다. 오빠가 담을 뛰어넘었다. 우리는 뒷간에 갔다 오는 체하고 방으로 들어갔다. 이 일을 하는 동안이 한 30분 걸렸다.
우리는 방으로 돌아와 가슴을 쓸어내렸다. ‘이제는 내일 일찍 이 집을 떠나면 그만이다’ 하고 안도의 숨을 내쉬었으나, 어머니는 생각이 다르셨는지 자다 깨 보면 일어나 앉으셨거나 오빠가 넘어간 담을 멍하게 내다보고 계셨다.
이날 따라 늦게 뜬 달이 휘황하게 밝았다. 붙잡혀가신 아버지의 생각을 할 겨를도 없고, 집 떠나는 슬픔도 없었다. 그날 밤 당장 오빠와 우리의 생명이 위태한 것이 무섭고 두렵게 느껴질 뿐이었다. 그날 밤은 무사히 넘겼다.
아침 일찍 일어나서 우리는 어저께 쑤어놓았던 콩나물죽을 차가운 대로 먹고 집 떠날 준비를 하였다. 내가 그 사람들 앞으로 가서 지금 우리가 나가겠다고 하자 당장 갈아입을 옷 등을 넣을 한 개의 자루 지참을 허용하였다. 공산당원은 자루 속을 검사했다. 그는 불교 염주와 포켓 크기의 성경을 꺼냈다. 두 물건은 아버지가 내게 준 선물이었다. 그 검사관은 “이런 것들은 새 사회에 쓸모가 없다”고 말하였다. 그 성경은 내 일생 동안 떼어놓은 적이 없고 아버지의 글씨가 있는 유일한 물건이었다. 나는 검사관에게 가져가고 싶다고 말했다. 그는 반대하지 않았다. 나는 그의 얼굴에서 ‘너희가 그동안 안락하게 잘 먹고 잘살았던 속죄(贖罪)를 하라고 하는 것’ 같은 당당함을 읽었다.
우리는 자하문 밖 어머니 둘째 언니 댁으로 갔다. 어머니의 언니는 조카와 혼자 살고 있었다. 어머니는 우리 식구에게 작은 방을 내어준 언니에게 감사할 겨를도 없이 반장 댁에 두고 온 오빠를 걱정하고 있었다. 그 집에는 여러 가구가 살고 어린 아이가 십여 명이나 있으니 어느 입에서 무슨 소리가 나와서 붙잡혀갈는지 모른다. 어머니는 오빠에게 갔다.
어머니는 “영근아, 잡혀갈 것에 대비해라. 과거에 내가 너한테 섭섭하게 해준 일 있거든 용서해라” 그렇게 말씀하고 돈 5만원을 주며 우셨다. 오빠는 웃으면서 말했다.
“어머니, 내가 왜 잡혀가요. 국군이 다시 돌아올 때까지 어떠한 일이 있어도 안 잡혀갈 테니 염려 마세요.”
반장 댁에 사는 10명이 넘는 아이들은 부지불식간에 오빠의 존재를 말할 수 있다. 그렇게 위험해도 자하문 밖 어머니의 둘째 언니 댁으로 데리고 갈 수가 없었다. 우선 길에서 젊은 남자가 보이기만 하면 잡아가는 판국이니 문 밖을 나서기도 어렵고, 둘째 어머니 언니 집의 사랑채에 세(貰) 들어 있는 사람이 공산당원이었다. 그들 부부의 여자는 여성동맹의 위원장이요, 남자는 빨치산 부대원으로 나갔던 공산당 간부였다. 우리 세 식구는 정히 갈 데가 없어서 그곳으로 갔지만 이 집도 여러 날 있을 곳은 못 되고 오빠가 숨을 곳은 더구나 아니었다.
정신영 원장
우리가 집에서 쫓겨난 것은 8월 5일이었다. 자하문 밖 어머니 언니 집에서 우리는 이틀 밤을 잤다. 어머니는 이 집에 세 들어 사는 공산당원이 우리를 ‘서방 동조자’로 의심하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이 절망적인 때 어머니는 인정 많은 사람을 발견했다.
사흘째 되는 날 우리는 마포에서 조그만 산부인과 의원을 운영하고 있는 어머니의 15년쯤 후배인 정신영(鄭信泳) 원장의 상신의원으로 갔다. 그는 위험을 무릅쓰고 우리에게 피란처를 제공했다. 상신의원 원장은 젊고 역동적인 분이었다. 많은 사람이 그 의원을 방문하기 때문에 우리의 존재는 눈에 덜 띄게 되었다.
정신영 원장의 남편 조득준 선생님은 대한민국 우익 중에서도 우익이며 전 올림픽농구대회 챔피언이고 열정적 기독교인이다. 정 박사는 공산당 치하에서 겉으로는 공산당의 승리를 열망하는 것처럼 하면서 공산당원의 치료도 해주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의 집 지하에는 4명의 우익 인사를 숨겨주고 있었고 우리 식구 셋과 오빠까지 숨겨주겠다고 하였다.
원장님은 겉으로는 좌익처럼 행동하지만 우익으로서 포부가 크고 성격이 활달하시고 말하자면 여성 정치가 타입이었다. 오빠를 효자동에서 마포로 데려올 때에도 정 원장은 중국어로 ‘구호팀’이라고 쓴 붉은색의 ‘중국적십자’ 완장을 주어서 오빠는 그것을 팔에 두르고 대로를 걸어서 무사히 마포로 올 수 있었다.
이때 우리로서는 정 원장이 구세주였다. 누가 이 어려운 판국에 반동으로 몰린 우리 식구를 받아줄 사람이 있겠는가. 형제들도 일가친척도 우리를 꺼려 하였다. 우리와 가까이하다가는 자기네도 위태한 까닭이었다.
이 의원에 숨은 사람 가운데는 건축을 전공하는 분이 있어서 의원의 천정(천장) 안에다가 널빤지 쪽을 깔고 그곳에 사람이 올라가 잘 수 있도록 만들어놓았다. 천정 한구석으로 동아줄을 매어 그것을 타고 사람이 올라갔다. 저녁을 먹고는 천정으로 올라가고 낮에는 내려와서 방공호(防空壕) 속에 들어가 있었다.
이 집은 밖에서 들어오려면 반드시 의원 진찰실을 통해야만 하고, 직접 안으로 들어오는 문은 항시 잠가놓았다. 진찰실에는 간호사와 심부름하는 원장 조카아이가 있었는데 이 아이가 영리해서 안팎의 연락을 잘 해 주었다. 낮에라도 이상한 사람이 번뜩 보이기만 하면 우리에게 곧 연락이 되었다.
다가오는 위험
평소에 원장 선생은 천연스럽게 병원으로 인민군이나 내무서원을 데리고 들어왔는데, 그분의 용감함에 놀라지 아니할 수 없었다. 원장은 젊고 인물이 잘나고 체격도 좋았다. 인민군 장교도 간혹 치료를 받으러 온다. 그러면 재빨리 연락원이 우리에게 와서 ‘쉬’ 하고 신호를 보내고 간다. 원장이 원체 사람이 잘나시고 인심이 좋고 활달하니까 내무서원에게도 호감을 샀다. 원장은 사람을 많이 숨겨놓았기 때문에 일부러 호감을 사려고 고심을 하였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내무서원도 가끔 와서 유행가를 부르고 한 시간씩 간호사와 놀다 가는 일도 있었다.
한번은 내무서원이 진찰실에 와 있는 것을 모르고 어머니가 진찰실을 내다보다가 그 사람에게 들켰다.
“저 사람은 누구요?” 하고 내무서원이 물었다. 그러자 원장은 아주 천연스럽게 “저 노인 말인가요? 공습을 받아 남편이 죽고 병신이 된 분이에요. 여보, 팔 아픈 것은 좀 어떠시오?” 하고 물었다. 그러자 내무서원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9월 15일이 가까워서는 원장도 겁을 냈다. 아마 상신병원 원장의 정체를 의심하는 사람이 생긴 모양이었다. 어쩌면 이 병원도 크게 수색을 당할 날이 머지않아 온다고 원장은 걱정을 하였다. 9월 10일쯤 되어서는 어머니는 아주 절망에 빠진 말을 하셨다.
“영근아, 이제는 저 마포 강으로 가서 빠져 죽는 수밖에 도리가 없을 것 같다. 이렇게 심하게 집 수색을 하는데 우리라고 피할 길이 있겠냐. 이젠 먹을 것이 떨어져 살 수도 없다.” 오빠는 어머니의 말씀을 용기 있게 반박하였다. “연합군들은 9월 말까지 꼭 들어옵니다. 두고 보세요. 나는 과학적인 근거를 가지고 하는 말입니다. 그때까지만 어떻게든지 견디어봅시다” 한다. 오빠의 계산으로는 한국군과 유엔군이 군사 준비를 다시 해가지고 상륙을 하려면 시간적으로 9월 하순까지 걸린다는 것이다.
어머니는 오빠의 말을 믿고 다시 용기를 내어 마지막으로 몸에 지녔던 금가락지를 팔아서 7만원을 마련했는데 이 돈이 떨어지기 전에 연합군이 들어오기를 기다렸던 것이다. 그때 7만원이면 죽을 쑤어 먹고 살더라도 우리 네 식구가 한 달을 지탱하기 어려운 돈이었다.
평양감옥의 춘원

▲북한군 점령하 서울에서 벌어진 인민재판. 양복을 입은 이는 소설가 김기진으로 인민재판 후 죽도록 구타당한 후 버려졌으나 극적으로 살아났다. 사진=조선DB
9월 12일경 공산주의자 신문은 범죄인들의 재판이 개시된다는 보도를 했다. 판사와 검사들이 임명되었다. 죄수들의 가족은 옷을 넣을 수 있다고 했다. 우리는 상세를 물어보기 위해 형무소에 갔다.
어머니와 나는 처음 마포형무소에 갔으나 그곳에는 아버지가 계시지 않았다. 다음 서대문형무소에 갔다. 하루 지나니 그들은 아버지가 여기에 수감되어 있다고 하면서 차입물을 받겠다고 하였다. 집에 와서 “아직 그래도 사셨구나” 하며 모두 울었다.
연합군이 인천에 상륙한 9월 15일 우리는 아버지의 재킷과 담요와 비타민 한 병을 가지고 서대문 감옥으로 갔다. 젊고 친절하게 보이는 인민군 간수는 ‘이광수’ 하고 아버님의 이름을 부르더니 가져간 차입물 자루를 받아 갔다. 크게 위안이 되었다. 우리는 최소한 아버지가 서대문 감옥에 계시고 어머니가 정성을 다하여 준비한 차입물을 수령한 것으로 생각하였다.
뒤에 우리는 공산주의자들이 우리를 속인 것을 알게 되었다. 아버지는 7월 12일에 붙잡혀가셔서 7월 16일 벌써 평양감옥으로 데려갔다. 아버지의 지인인 계광순(桂珖淳) 선생이 7월 28일 평양감옥에 있을 때 아버지와 한 방에서 한 달 동안 수감되어 있었다고 한다. 아버지의 다른 지인인 신동기 선생도 수갑을 차고 한 달 동안 아버지와 같은 감방에 있었다고 한다. 아버지는 기침이 매우 심해서 독감(獨監)으로 옮겨졌다고 한다. 계광순 선생과 신동기 선생은 공산군이 북쪽으로 후퇴할 때 구사일생(九死一生)으로 도주하여 살아오신 분들이다.
계 선생과 신 선생은 그들이 잡혔을 때 건강하였다. 서울에 연합군이 들어온 것은 9월 27~28일이지만 그들이 평양에 진주한 것은 10월 24일이었다. 연합군이 북한에 진군할 즈음 후퇴하는 북한 인민군은 죄수들을 소규모 그룹으로 나누어 분산시켰다. 계광순 선생은 그 기회에 도망을 쳤다고 한다.
계 선생은 아버지가 평양감옥에서 방은 달랐지만 밤늦게까지 조사를 받으러 다니시는 것을 보았으며 그 후 아버지의 운명은 어떻게 되었는지 알 수 없다고 했다.
연합군이 전진하자 공산주의자들은 급하게 북쪽으로 후퇴할 수밖에 없었으나 죄수들을 어떻게 해야 할지 조직적인 전략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계광순 선생은 인민군이 지키는 민가에서 탈출할 것을 엿보고 있다가 지키는 사람이 잠깐 없는 틈을 타서 용케 도망을 해 나오신 것이다. 산으로 산으로 여러 날을 굶고 구사일생으로 연합군 진영까지 오게 된 것이었다.
인천상륙
건강하고 용감한 사람이 아니고는 불가능한 일이다. 우리 아버지같이 병약하고 용기 없는 분은 공산당이 끌고 다니는 대로 끌려다니실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북한 공산주의자들은 비열하게도 차입물을 받는 속임수를 쓴 것이었다. 그때 서대문 감옥에 옷을 차입한 사람들은 수백명이었다. 공산주의 간수들은 이름이 같은 것으로 실수를 할 리가 없다. 나는 그때 차입신청서에 이렇게 썼다.
〈이광수 59세 저술업
본적 서대문 1가 9번지
현주소 효자동 175번지
차입인 이녀 이정화〉
배경을 같이 하는 사람이 어디 있을 것인가? 그들은 끝판에 달아날 때 자기네들을 가장하기 위한 남한의 민간 옷을 마련하느라고 이런 행동을 하였는지 모른다. 또 공산주의자들은 싸우는 것이 절망적인 상황이 되고 후퇴하게 될 때 이러한 일을 하였다.
아버지 옷을 서대문 감옥에 차입한 것이 9월 15일이다. 차입하는 사람이 워낙 많아서 시간이 걸려 나는 저녁 7시에나 집으로 돌아왔다. 집에 돌아오니 오빠가 대단히 기뻐하는 얼굴로 저 소리 좀 들어보라는 것이다. 과연 이상한 소리가 인천 방면에서 들린다. 이 집 뒤꼍은 백 평가량 되는 높은 지대다. 그리고 사방이 둘러싸여 밖에는 잘 보이지도 않고 앞뒷집이 모두 우리와 통하는 사람들이다.
지금까지 숨어 있던 사람들이 모두 이곳으로 나와서 그 소리를 듣고 있었다. 그 소리는 무척 형용하기 어려운 소리였다. 연속적으로 들려오는데 그것은 돌 깨뜨리는 소리와도 다르고 맷돌질하는 소리라고나 할까, 그런 소리가 연거푸 들린다. 오빠는 좋아서 껑충껑충 뛰면서 이것이 아군이 인천에 상륙하는 소리라고 한다.
“그것 보세요. 내 말이 맞지 않아요. 이달 안으로 들어온다고 그랬지요” 하고 어머니를 바라보며 소리쳤다. 바깥소문에 의하면 이미 연합군이 인천에 상륙하였다고 한다. 인민군은 원거리 대포를 바로 우리 집 맞은편 마포형무소의 마당에다 걸어놓고 인천을 향하여 연속적으로 쏘아댄다. 밤새도록 쏘았다. 우리는 귀가 먹을 지경이요, 어지러워서 정신을 못 차렸다. 대포는 인천 쪽에서도 쏘았을 터인데 우리 동네는 무사하였다.
서울수복
9월 16일 낮쯤 해서 공산주의자들은 연합군이 인천으로 상륙하려는 것을 격퇴시켰다고 발표하였다. 우리는 정말인가 하고 가슴이 가라앉았다. 인민군은 사흘가량 대포를 쏘더니 물러나서 아현동 로터리에다 옮겨놓고 쏘아댔다. 옳지! 국군이 더 가까이 온 모양이었다. 그 후부터는 대포 탄환이 비 오듯이 쏟아져 왔다. 잠시도 쉬지 않고 ‘꽝’ 하면 ‘쒸’ 하고 불덩어리가 우리 동네를 지나서 서울 시내로 들어가 쿵 하고 맞으면서 불길이 일어났다. 무섭고 끔찍한 광경이다.
우리는 이와 같은 서울 하늘 밑에서 며칠을 보냈다. 그러나 요행하게도 그 대포알이 우리 동네에는 떨어지지 않았다. 한국군과 연합군의 대포 쏘는 거리는 점점 가까워져서 마포 강 바로 건너편에서 쏠 때에는 서울의 밤하늘은 온통 불을 켜놓은 것처럼 되고 귀가 따가웠다. 포탄의 파편이 우리 집 앞뒤로 떨어졌다.
9월 24일 밤이다. 공산당들은 최후의 발악으로 사람을 마구 총살하고, 총 없는 자는 나무때기에 쇠창살을 꽂아가지고 떼를 지어 다니며 양민을 함부로 찌르는 때였다. 마침 우리 집 건너편에서 불이 나서 그 불길은 거의 우리 집으로 옮아붙으려 하였다. 광 속에 숨어 있던 사람들은 다 밖으로 나오지 않을 수 없었다. 공산당은 이리떼처럼 날뛰지 않는가. 이 판에 이 집에 불이 붙어 숨은 사람이 나왔다가는 당장에 잡혀 죽을 것이다. 사내들도 이제는 할 수 없다 하고 땅바닥을 쳤다. 그러나 기적이다. 그 불길이 우리 집으로 건너오지 않고 꺼져버린 것이다. 얼마나 죽을 고비를 많이 넘겼는가. 아슬아슬한 일이었다.
공산주의자들은 그런 가운데서도 동원을 시켜서 가마니에다 흙을 집어넣어 길을 막아놓고는 시가전 준비를 하였다. 비행기는 연합군을 엄호하느라고 연달아 쉬지 않고 날아와서는 폭격을 하였다. 하늘에서 내리쏘는 기관포의 파편이 우리 집 마당에도 수북하게 떨어졌다. 그런 가운데서도 우리는 우물에 물을 길러 나갔고 밥을 지어 먹고 살아야 했다.
9월 27일 정오 때이다. 밖으로 망을 보러 나갔던 아이가 달음질쳐 들어오면서 미국 병정이 탱크를 타고 문 앞에 와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거짓말이라고 하면서 뛰어나갔다. 과연 미군들이 탱크를 몰고 수없이 들어왔다. 뒤이어 국군이 들어왔다. 어머니는 소리를 내어 우셨다. 우리의 입에서는 절로 만세 소리가 나왔다.
집으로 돌아왔지만...
이리하여 우리는 9·28을 맞은 것이다. 이렇게 되고 보니 당장에 걱정되는 것이 서대문 감옥에 계시리라고 믿고 있던 아버지의 안부였다. 우리는 그날 가보려 하였으나 길이 막혀서 못 가고, 그 이튿날 29일에도 못 가고, 30일 아침 일찍이 집을 나서 서대문 감옥으로 갔다. 서대문 감옥은 텅 비어 있었다. 근처 사람들의 말에 의하면, 9월 20일 전후하여 어디론지 모두 끌려갔다고 한다. 길가에는 인민군과 시민들의 시체가 즐비하게 널려 있고 사람들은 얼이 빠져 있었다.
우리는 그 길로 효자동 집으로 향했다. 공산당원들이 우리 가족을 쫓아내었던 효자동 집에는 문이 다 잠겨 있었다. 앞문, 뒷문, 병원 현관문도 모두 닫혀 있었다. 국군과 유엔군이 서울에 들어왔는데 인민군이나 공산당원들이 아직도 우리 집을 차지하고 있을 리는 만무했다. 그래도 나는 혹시 누가 숨어 있지나 않을까 하고 겁이 났는데, 오빠가 담을 훌쩍 넘어서 대문을 열었다. 우리 집을 점령해 있던 공산주의자들은 황급히 도망친 것 같았다. 마루 위 밥상에는 먹다 남은 반찬이 쉬어 있고 두 달 전 우리가 쓰던 밥통에는 그들이 만들어놓은 보리밥이 아직도 남아 있었다. 그들이 신고 있던 신발들이 아무렇게나 흩어져 있었다. 어머니의 산부인과 의원의 수술실, 진찰실, 입원실들은 텅 비어 있었다.
이제 우리는 행복한 집으로 돌아왔지만 새로운 슬픔이 엄습해왔다. 아버지가 계시던 방에는 아버지의 그림자가 왔다 갔다 하는 것 같고, 어머니는 자신의 잘못으로 아버지가 잡혀가시게 된 것 같아서 형언할 수 없는 낙망과 슬픔에 빠져 있었다. 아마도 우리의 안전이 아버지의 희생으로 얻어진 것 같았다. 어머니는 왜 그리도 서러워하셨을까? 7월에 잡혀가셨을 때 아버지는 얇은 적삼을 입고 계셨었다. 추운 겨울에 북으로 끌려간 아버지가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인가? 우리가 서대문 감옥에 차입한 따뜻한 옷들이 아버지께 전달되었을까? 아마도 이런 생각들이 어머니를 괴롭혔을 것이다. 어머니는 아버지를 공산주의자들로부터 숨기는 데 실패했다. 어머니는 여생 동안 아버지를 보호하지 못한 실수로 울었다. 나는 나에게 아버지요, 스승이요, 신념이요, 희망이던 아버지를 이렇게 잃어버린 것이다.⊙
글 : 이정화 춘원문화교류센터 대표·美 채텀대학 생화학 박사
■ 09.24 노·소론 충돌한 그때, 인삼 찾아 조선 땅 뒤진 일본
조선의 ‘캐시 카우’ 인삼

▲① 일본 규슈박물관에 있는 인형 인삼과 관련 문서. 18세기 초반 부산 왜관에서 대마도를 거쳐 일본으로 들어간 것으로 알려졌다. ② 대마도가 조선에서 수입한 인삼을 다시 일본 본토에 판매한 사정을 기록한 ‘인삼시종각서(人參始終覺書)’. [사진 부산박물관, 국사편찬위원회
요즘 인삼이 은만큼 귀해서 장사꾼이 몰려듭니다. 함경도 산들은 평소 삼이 난다고 알려졌으니 백성에게 생업으로 채취하게 하면 온갖 재화가 모여 삶에 보탬이 될 것입니다. 그런데 지방관이 인삼에 세금을 너무 많이 매겨 산에 들어간 백성이 두려워서 삼을 건드리지도 않습니다. (…) 여진인은 우리나라에 삼이 많음에도 백성이 캐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매년 8월 누런 인삼 잎이 보일 때마다 두 사람씩 작은 배로 강을 건너와 수풀 속에 배를 숨겨 놓고 산과 계곡을 돌며 삼을 캡니다. (…) 심지어 산촌에 들어가 부녀자들이 모아 놓은 삼을 약탈해 가는데도 변장(邊將)들은 사실을 숨기고 보고하지 않습니다. 난리를 겪은 뒤 이런 우환이 더 심해졌는데 이것은 그들이 우리를 무시하기 때문이니 분노를 견딜 수 있겠습니까.
가혹한 세금에 인삼 채취 포기
유몽인(柳夢寅·1559∼1623)이 임진왜란 이후 함경도 지방에서 산삼 채취를 둘러싸고 일어난 정황을 증언한 글이다. 함경도가 산삼 주산지임에도 조선 백성들이 가혹한 삼세(蔘稅) 때문에 채취를 포기하고 있다는 것, 대신 여진인이 산삼 수확철에 두만강과 압록강을 몰래 건너와 함경도 산삼을 마구 캐가고 있다는 것, 그런데도 조선의 변장들이 수수방관하고 있는 것에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한국인은 예나 지금이나 인삼을 명약(名藥)이자 영약(靈藥)으로 여겼다. 중국인과 일본인도 마찬가지였다. 삼국시대 이래 한반도 인삼이 중국과 일본으로 건너갔다는 기록이 속출하는 것이 그것을 반증한다.
인삼 수입 급증에 부담 느낀 일본
조선인 시켜 한반도 동·식물 조사
인삼 생초 들여와 자국 재배 성공
중·일 인삼수요 폭증, 밀무역 성행
‘일본 극비작전’ 전혀 몰랐던 조선
인삼 수출길 막히며 가치도 하락
조선시대에도 조선 인삼의 인기는 식을 줄 몰랐다. 임진왜란 이후 조선에 온 명나라 사신들은 인삼을 챙기는 데 혈안이었다. 어떤 사신은 의주에서 한양까지 오는 동안 “인삼과 은만 주면 식사나 차 제공도 필요 없다”고까지 했다. 고가(高價)의 조선 인삼을 중국으로 가져가 한밑천 챙기거나 요로(要路)에 상납하여 승진 밑천으로 삼으려는 열망이 컸다. 유몽인의 지적처럼 여진족이 조선 땅에 몰래 들어와 산삼 채취에 매달렸던 것도 까닭이 있었다. 인삼은 모피·진주와 더불어 여진 경제를 지탱하는 중요한 기둥이었다.

▲18세기 일본은 한반도에 서식하는 동·식물의 그림을 세밀하게 그려 남겼다. 조선 인삼을 구하려는 목적에서다. 역사학자 다시로 가즈이가 쓴 『에도시대 조선약재 조사의 연구』에서 인용했다.
일본에서도 조선 인삼 열풍이 불었다. 특히 『동의보감(東醫寶鑑)』이 전래한 뒤부터 조선 인삼에 대한 수요가 몹시 커졌다. 조선 인삼을 만병통치약으로 여기는 풍조까지 생겼다. 1732년(영조 8), 조문명(趙文命
·1680∼1732)은 “일본인은 병에 걸렸을 때 조선 인삼을 구하면 살고, 그렇지 못하면 죽는 것으로 여긴다”고 말했다. 실제로 당시 부산 왜관(倭館)에 머물고 있던 일본인은 인삼을 주머니에 넣어 차고 다니면서 온종일 씹는다든가, 자상(刺傷) 등을 입었을 경우 인삼을 씹어 바른다고 할 정도였다. 일본 본토에서는 심지어 ‘가난한 효녀가 병든 부모를 위해 조선 인삼을 구하려고 몸을 팔았다’는 이야기까지 나왔다.
일본인이 조선 인삼을 금처럼 귀하게 여기면서 대마도가 떼돈을 벌었다. 대마도는 1674년(현종 15) 에도(江戶·도쿄)에 인삼좌(人蔘座)를 설립했다. 그들은 독점적으로 수입한 조선 인삼을 인삼좌를 거점으로 일본 각지에 판매했다. 전매권(專賣權)을 장악한 대마도는 인삼값을 조작하기도 했다. 그 때문에 18세기 초 일본에서 조선 인삼의 소매 가격이 두 배로 앙등했다.
인삼무역으로 번성한 개성상인
한편 대마도로부터 주문이 쇄도하면서 조선 인삼 대부분은 일본으로 수출됐다. 특히 상인이나 역관들은 일본인과 밀무역을 통해 막대한 이익을 챙겼다. 밀무역, 즉 잠상(潛商) 행위가 발각되면 처형될 수도 있었지만 워낙 이익이 커서 근절되지 않았다. 1719년(숙종 45), 통신사(通信使) 수행원으로 일본에 갔다가 귀환 중이던 역관 권흥식(權興式)은 대마도에 이르러 음독자살했다. 그의 짐 꾸러미 속에 인삼 12근이 들어 있었던 데다 일본인과 밀무역한 정황이 발각됐기 때문이다.
조선에서 인삼 무역으로 가장 큰 이익을 본 것은 개성상인이었다. 그들은 전국적으로 인삼을 매점하여 일본 상인에게 넘겨주고 그 대금으로 은을 받았다. 일본은을 북경으로 가져가 다시 비단·생사 등을 구입하여 일본 상인에게 되팔아 대단한 이윤을 남겼다.

▲18세기 일본은 한반도에 서식하는 동·식물의 그림을 세밀하게 그려 남겼다. 조선 인삼을 구하려는 목적에서다. 역사학자 다시로 가즈이가 쓴 『에도시대 조선약재 조사의 연구』에서 인용했다.
대일 수출이 늘면서 인삼은 조선의 ‘캐시 카우(Cash Cow)’ 역할을 했다. 하지만 부작용도 적지 않았다. 인삼 대부분이 유출되면서 18세기 중반 국내의 인삼 공급이 부족하여 가격이 급등했다. 양반가조차 인삼을 구하기 어려운 실정이었다. 1752년(영조 28), 병에 걸려 사경을 헤매던 재상 유만중(柳萬重) 집안도 인삼을 구하지 못해 애태울 정도였다고 한다. 때문에 숙종 연간부터 국내 인삼 수요를 고려하여 대일 수출량을 매년 700근으로 제한하자는 주장, 인삼 채취를 원활히 하기 위해 화전(火田) 경작을 금지하자는 주장, 청나라 인삼을 수입하여 국내 공급을 늘리자는 주장 등 다양한 대책이 제시됐지만 인삼 부족 현상은 좀처럼 해소되지 않았다.
일본은 인삼 수입 때문에 막대한 양의 은화가 조선으로 유출되자 고민에 빠진다. 일본의 은 생산량은 17세기 이후 점차 감소했다. 그 때문에 막부(幕府)는 1685년 중국과 네덜란드 상선의 무역 쿼터를 제한하여 은의 해외 유출량을 줄이려고 부심했다. 그뿐만 아니라 1695년 이후로는 종래까지 80%였던 은화(銀貨) 순도를 대폭 낮추는 개주(改鑄) 조처까지 단행했다.
조선 인삼 수입량을 줄이거나 일본 인삼으로 대체하려는 노력도 같은 맥락에서 시도됐다. 하지만 쉽지 않았다. 18세기 초까지 일본산 인삼의 경우, 뿌리와 이파리는 조선 것과 똑같지만 먹어봤자 별 효력이 없다는 지적이 계속 나왔다. 당연히 조선 인삼에 대한 수요는 줄어들지 않았다. 이 같은 상황에서 대마도는 고민에 빠진다. 조선 상인이 과거에 비해 순도가 훨씬 낮아진 은화를 받으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급해진 대마도는 조선과의 인삼 결제 대금은 예전처럼 순도 80%의 양화(良貨)를 쓸 수 있게 해달라고 막부에 호소한다. 막부는 고민 끝에 인삼대왕고은(人蔘代往古銀)이라 불리는 특주은(特鑄銀)을 조선과의 교역에서 사용하는 것을 허락한다.
“은 유출 막아라” 일본의 고민

▲일본 8대 쇼군 도쿠가와 요시무네의 초상.
막부는 조선 인삼을 국산화하려는 노력을 멈추지 않았다. 역사학자 다시로 가즈이(田代和生)에 따르면 그 중심에는 8대 쇼군(將軍) 도쿠가와 요시무네(德川吉宗)가 있었다. 요시무네는 1721년(경종 1) 대마도에 특명을 내린다. 대마도가 운영하는 왜관을 통해 조선의 풀과 나무, 새와 짐승 등을 보고하라고 지시했다. 조선의 동식물을 조사하여 『동의보감』에 실린 약재와 처방을 이해하려 한다는 명분을 내세웠다. 하지만 요시무네의 진짜 목표는 조선 인삼의 생초(生草)를 입수하는 것이었다. 조선으로 막대한 은화가 유출되는 것을 차단하기 위한 ‘인삼 국산화 프로젝트’였던 셈이다.
막부는 대마도와 왜관에 ‘조사 사업’ 수행을 위한 지침을 내렸다. 조선 곳곳의 동물과 식물을 현물로 입수하되 여의치 않으면 그림을 그려 보내라고 지시했다. 대마도는 1721년 조선의 전직 역관(譯官) 이석린(李碩麟)에게 사업 책임을 맡겼다. 이석린의 소개로 상인을 비롯하여 아전·의원·승려 등 다양한 조선인이 왜관과 접촉했다. 이들은 왜관으로부터 많은 돈을 받고 조선 곳곳을 누비며 각종 동·식물을 입수했다. 왜관은 그들이 가져온 동·식물을 측정하고 세밀한 그림을 그렸다. 또 식물 표본과 동물 박제를 만들어 일본으로 보냈다.
‘조사 사업’은 1721년 이후 약 30년 가까이 이어졌다. 그 과정에서 조선 인삼의 생초도 일본으로 반출된다. 막부는 인삼 생초를 일본 곳곳에서 시험 재배한다. 재배를 거듭하면서 18세기 전반 일본은 마침내 조선 인삼을 국산화하는 데 성공한다. 이후 조선 인삼의 대일 수출이 막힌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조선으로 들어오던 일본 은의 양도 격감한다. 조선의 ‘캐시 카우’가 사라지기 시작했다.
조선 정부는 매우 은밀하게 진행된 ‘조사 사업’의 존재를 알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찜찜한 대목이 없지 않다. 1721~1722년에 걸쳐 조선에서는 노론(老論)과 소론(少論) 사이에 신임화변(辛壬禍變)이라 불리는 격렬한 정쟁이 빚어졌다. 처형과 유배가 잇따르면서 두 정파 사이의 원한과 복수심은 하늘을 찔렀다. 바로 그때, 일본에 매수된 조선인이 전국의 산야 곳곳을 휘젓고 다닌 것이다.
중앙일보 한명기 명지대 사학과 교수
■ 여순사건, 그날의 眞相
2021.05.13 ‘동포 학살 반대’한다던 여수 14연대 반란, 장교 21명 총살로 시작
[김기철 전문기자의 Special Report] 조선일보

지난 11일 오후 서울 동작동 서울현충원을 찾았다. 초병 둘이 지키는 현충문을 지나 31 높이 현충탑 안으로 들어갔다. 탑 내부 오석(烏石)으로 만든 벽마다. 이름이 빽빽하게 들어찼다. 창군 초부터 6·25전쟁·베트남 전쟁 등에서 전사하거나 순직한 군인·경찰 위패를 모신 곳이다. 10만 위가 넘는다고 했다. 입구 왼편 4m 벽 맨 윗줄에서 김왈영·김순철·이봉규 소령 이름을 찾았다. 1948년 여순 사건 당시 14연대 1대대, 2대대, 3대대장이었다. 연대 대대장 전원을 위시해 반란군 총에 맞아 숨진 장교 17명 위패가 이곳에 있다. 현충원 홈페이지 소개에 따르면, 전사 일자는 10월 20~23일이다. 남로당 조직책 지창수 하사 선동으로 14연대가 반란을 일으켜 여수를 장악했던 첫 나흘간이다.

▲현충탑 내부엔 여순사건으로 전사한 14연대 장교 17명의 위패가 봉안돼있다.
◇'제국주의 앞잡이인 장교 모두 죽이자'
여당 의원 152명이 발의한 ‘여순사건특별법’엔 여순사건을 ’14연대 일부 군인들이 4·3사건 진압 명령을 거부하고 일으킨 사건'으로 썼다. 고교생 4명중 1명이 쓰는 미래엔 한국사 교과서는 ‘부대 내의 좌익 세력은 ‘제주도 출동 반대’ ‘통일 정부 수립’을 내세우며 무장 봉기하여 여수와 순천 지역을 장악하였다'고 소개한다. 14연대 반란을 피켓 들고 구호 외치는 요즘 시위처럼 썼다. 하지만 14연대 반란군의 ‘그날’은 피로 얼룩졌다.
14연대 남로당 세력은 1948년 10월 19일 밤 무기고와 탄약고를 장악하고, 장교들은 보이는 족족 총살했다. ‘동족 살상하는 제주도 출병 반대’를 명분으로 내걸었지만, 남로당 반란 지도부가 그날 밤 가장 먼저 한 일은 한솥밥 먹고 훈련하던 장교 집단 학살이었다. ‘제국주의 앞잡이인 장교를 모두 죽이자’(백선엽, ‘실록 지리산’ 153쪽)는 선동이 학살의 문을 열었다.
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가 1967년 낸 ‘한국전쟁사’ 1권(454~455쪽)엔 반란을 진압하려다 현장에서 사살된 14연대 장교 21명의 이름이 나온다. 대대장 3명 전원과 작전주임 강성윤 대위(모두 육사 2기), 진도연·이병우·길원찬 중위(3기), 정보주임 김래수 중위(4기), 김록영·맹택호·박경술·민병흥·김진용·이상술 소위 (5기), 장세종·이병순·유재환·김남수·김일득·노영우·이상기 소위(6기)다. 14연대 소속으로 여순사건 기간에 전사한 장병 명단이 잇따라 발견되고 있어 숫자는 더 늘어날 전망이다.

◇ ’99식 총검이 복부를 관통해 창자가...’
김왈영 1대대장을 비롯한 장교들의 최후는 분명치 않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가 1996년부터 발간해온 호국전몰용사 공훈록엔 14연대 장교 13명의 공적이 실려있다. ‘반란 진압 작전에 참가하여 임무 수행 중 장렬히 전사했다’는 간략한 내용뿐이다. 살아남은 장병들은 몸을 숨겼고, 반란군은 진압 과정에서 사살되거나 지리산에 들어가 현장 목격 자료가 부족해서다. 여수항에서 출동 준비하던 김래수 중위가 연대장 지시로 부연대장과 함께 귀대하다 반란군 총격으로 현장에서 즉사했다(국방부, ‘6·25전쟁사’ 1권 455쪽, 2004)는 내용 정도가 전해진다.
당시 육군 정보국장이던 백선엽 장군의 회고록(실록 지리산)엔 생존 장교들의 증언이 나온다. ‘대대 부관 김정덕 소위가 양팔이 늘어져 덜렁거리는 상태로 달려 내려와 ‘저놈들이 나를 쐈다’고 소리치며 내 앞에 털썩 쓰러졌다.’(1대대 작전교육관 전용인 소위) ‘누구냐 하는 외침 소리에 나도 모르게 ‘주번사관’이라고 답했다. 그 순간 ‘쏴라’ 하는 소리에 이어 총성이 울렸고, 복부에 따끔한 통증을 느끼며 땅바닥에 엎드렸다조 소위는 99식 총검이 복부를 관통해 창자가 흘러나와 있는 상태였다.’(5중대장 대리 박윤민 소위) 반란군은 장교들을 사냥하듯 총검을 휘둘렀다.

▲현충원 위패봉안관에 봉안된 14연대 장교 위패. 맨 윗줄에 김왈영, 김순철, 강성윤, 이봉규 등 대대장과 작전주임 이름이 보인다.
◇현충원에 모신 14연대 장교는 18명뿐
1대대장 김왈영은 스물둘이었고, 김일득 소위가 서른으로 가장 나이 많은 축이었다. 장교들은 대부분 20대 초중반으로 부사관·사병과 비슷한 또래였다. 당시 열아홉이던 최석신(육사 6기) 전 노르웨이 대사는 임관 직후인 8월 초 14연대 소대장으로 부임했다가 진해에서 포병 교육을 받느라 ‘반란’을 모면했다. 최 전 대사는 12일 통화에서 “10월 말 교육을 마치고 광주 5여단 본부에 복귀 신고를 하러 갔는데, 김왈영 1대대장 등 장교 16명의 유골이 안치돼 있었다. 그 앞에서 눈물을 흘리던 기억이 어제 일처럼 생생하다”고 했다.
14연대 전사 장교 21명 중 국립 현충원에 모신 분은 18명뿐이다. 이 중 17명은 위패만 봉안됐다. 길원찬·김래수 중위, 노영우 소위는 현충원에 위패조차 없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는 14연대 장교 전사자 21명 중 8명에 대한 ‘공훈록’은 사건 73년이 넘도록 내지 않았다. ‘여순사건’은 신생 국군 내부에 침투한 남로당 좌익 세력을 소탕하는 계기가 됐다. 이런 내부 단속이 없었다면 6·25전쟁에서 나라를 보존하기 힘들었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반란’에 맞서다 숨진 14연대 장병들을 제대로 기억하고 있는가.
[부실투성이 14연대 전몰장병 기록]
군사편찬연구소 기록 오류 많아
여순 사건으로 전사한 14연대 장교 21명에 대한 기록은 부실투성이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가 작성한 공훈록이나 현충원 안장자 소개, 전쟁기념관 전사자 명비까지 기관마다 내용이 다르기 때문이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가 작성한 맹택호 소위 공훈록에는 1950년 10월 22일 운산전투에서 전사했다고 쓰여 있다. 여순 사건 전사자를 6·25 전사자로 둔갑시킨 셈이다. 같은 연구소가 펴낸 ‘한국전쟁사’와 현충원 안장자 기록엔 같은 군번과 이력의 맹 소위가 1948년 10월 22일 여순 사건으로 전사했다고 썼다. 현충원 관계자는 “사망 일시를 비롯한 인적 정보는 각 군에서 작성한 전사자 명부를 기준으로 한다”고 했다. 위패가 봉안된 이봉규 대위도 현충원은 사망 일자를 1952년 4월 30일로 썼다. 6·25 전사자처럼 보인다.

▲14연대 반란으로 전사한 장교 17명의 위패가 모셔진 국립서울현충원 위패봉안관. 왼쪽 윗 부분에 김왈영 대대장 등 14연대 장교들의 위패가 모여있다. /김연정 객원기자
소속 부대가 제각각인 경우도 있다. 박경술 소위는 국방부 공훈록엔 1연대, 현충원 자료엔 4연대 소속으로 나온다. 민병흥 소위는 전쟁기념관 전사자 명비에 14연대와 11연대 소속으로 두 번 올라있다. 진도연 중위는 위패는 서울, 유해는 대전 현충원에 안장돼 있다고 소개한다. 유해가 없는 전몰장병만 위패를 모신다는 현충원 설명과 어긋난다.
여순 사건 전사자는 창군 초기라서 관련 기록이 정확하지 않다는 얘기도 나온다.
하지만 명백한 오류를 방치한 경우가 많다는 게 문제다. 6·25 전사자를 여순 사건 때 해체된 14연대 소속으로 쓴 기록도 많다. 전사자 현황을 추적해온 정일랑(79) 무공수훈자회 여수지회장은 “나라 위해 목숨 바친 전몰장병을 이렇듯 허술하게 다룰 수 있느냐”고 안타까워했다.
07.01 가해자와 희생자를 구분하지 않은 여순사건 특별법
여순사건 특별법이 29일 국회를 통과했다. 국가 차원에서 여순사건의 진상을 규명하고 희생자와 유족의 명예 회복과 합당한 권리 행사를 보장하는 내용이다. 여순사건은 대한민국 건국 직후 발생한 현대사의 비극이다. 북한에 동조해 폭동을 일으킨 반란군에게만이 아니라 폭동 진압 군경에게도 무고한 사람이 목숨을 잃었다. 이 무고한 사람들의 명예는 회복돼야 하고 피해는 보상받아야 한다. 하지만 특별법은 반란에 가담해 무차별 살인, 방화를 저지른 가해자와 억울한 희생자를 구분하지 않아 반국가, 반인륜 범죄자까지 보호할 수 있는 문제를 안고 있다.
여순사건은 국군 14연대에 침투한 남로당 세력이 제주 4·3사건 진압 명령을 거부하며 반란을 일으켜 국군과 경찰, 민간인 다수를 살해하면서 시작됐다. 그러나 이번 특별법은 ‘국군 14연대 일부 군인들이 4·3사건 진압 명령을 거부하고 일으킨 사건’으로 표기해 사건의 책임 소재와 반란적 성격을 의도적으로 누락했다. 제주도에서 발생한 남로당의 무장 폭동을 ‘소요(騷擾)’로 표기한 제주 4·3사건 특별법보다 더 문제가 있다. 특히 희생자 범위를 ‘사건과 관련해 사망하거나 행방불명된 사람, 후유 장애가 있는 사람, 수형자’로 폭넓게 설정했다. 별도 위원회 심사를 거친다고 하지만 법 규정이 없는 이상 반란 가담자까지 피해를 보거나 실종됐다는 이유로 명예를 회복시키고 보상할 가능성을 열어놓았다고 볼 수밖에 없다.
남로당 반란군과 동조 세력이 여수, 순천 지역에서 저지른 범죄의 잔혹성은 제주 4·3사건 초기 남로당이 저지른 잔혹성을 훨씬 능가한다. 북한조차 남로당 세력의 초기 잔혹 행위가 반란 실패 원인이라고 지적했을 정도다. 2001년 헌법재판소는 제주 4·3사건 특별법과 관련해 ‘사건 발발 책임이 있는 남로당 핵심 간부, 군경과 가족, 선거 관여자를 살해한 자, 공공 시설과 방화를 적극적으로 주도한 자를 희생자로 보호할 수 없다’고 결정했다. ‘이들까지 무제한적으로 포용하는 것은 우리 헌법의 기본인 자유 민주적 기본 질서와 대한민국의 정체성에 심각한 훼손을 초래한다’고 했다. 여순사건도 예외일 수 없다. 국민의 법 상식도 헌재의 이런 입장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조선일보 사설
11.17 한강다리
선박의 도움 없이 한강을 건널 수 있게 된 건 1900년의 일이다. 한강철교가 만들어지면서다. 도강(渡江)의 주체가 사람은 아니었다. 경인선 철도의 한 부분이었던 한강철교는 기차가 독차지했다
.사람이 다리를 건너다닐 수 있게 된 건 1917년, 한강인도교 또는 제1한강교라 불린 한강대교가 개통되면서다. 그로부터 19년 뒤 도선장이 있던 광나루에 광진교가 건설되면서 한강에는 모두 3개의 다리가 놓이게 됐다. 잇따른 전쟁과 더딘 성장으로 이 숫자는 30년간 변함이 없었다.
1965년이 돼서야 제2한강교로 불린 네 번째 다리 양화대교가 개통됐다. 고도성장이 시작되면서 한강 수면에 드리운 다리 그림자는 빠르게 늘어났다. 경부고속도로 준공에 발맞춰 1969년 한남대교(제3한강교)가 놓인 이후 마포대교(1970), 잠실대교(72), 영동대교(73), 천호대교(76), 잠수교(76), 행주대교(78), 성수대교(79), 잠실철교(79), 성산대교(80), 원효대교(81), 반포대교(82), 당산철교(83), 동작대교(84), 동호대교(84), 올림픽대교(90), 강동대교(91), 팔당대교(95), 김포대교(97), 서강대교(99), 방화대교(2000), 신행주대교(2000), 청담대교(2001), 가양대교(2002), 일산대교(2008), 미사대교(2009), 마곡대교(2010), 구리암사대교(2014), 월드컵대교(2021)가 차례로 들어섰다.
잠수교·반포대교, 행주대교·신행주대교는 사실상 하나의 교량인 만큼 지금까지 한강 본류에 건설된 다리는 총 31개로 집계된다. 내년에 고덕대교가 완공되면 이 숫자는 더 늘어난다.
다리를 매개로 일직선을 이룬 동네들은 경제발전의 축이 됐다. 최서단의 일산대교 역시 일산·김포신도시 건설 및 수도권 서부 권역 경제발전에 따른 교통 수요 증가로 만들어졌다. 다만 한강 다리 중 유일하게 통행료를 내야 건널 수 있었다. 민간업체가 만들어 기부채납한 뒤 통행료를 받는 것으로 지자체와 계약을 맺었기 때문이다.
여기에 터 잡은 흉흉한 민심에 정치적 노림수가 끼어들면서 억지 무료화 조처가 강행됐다. 하지만 법원이 이를 두 번이나 저지하면서 20여 일의 무료통행은 일장춘몽이 됐다. 늘 그렇듯 이번에도 책임지는 이는 없고, 뒤숭숭한 꿈자리를 감내하는 건 백성의 몫이다.
중앙일보 박진석 사회에디터
■ 2015.07.13 손기정 금메달 딴 후... 축하했던 장소는 따로 있었다
일제 시대인 1936년 독일 베를린의 한 두부 공장. 동양 남자 10여명이 사발과 놋쇠 그릇에 김치와 두부를 놓고 '축승회(祝勝會)'를 열었다. 축승회였지만 분위기는 엄숙했다. 벽에는 태극기가 걸려 있었다.
베를린올림픽에서 금메달과 동메달을 딴 손기정·남승룡 선수 일행이었다. 이들은 올림픽에서 우승한 뒤 일본 선수단이 여는 축하 파티에 참석하지 않고, 조선인들끼리 몰래 축승회를 가졌다. 축승회를 준비한 사람은 베를린에서 두부 공장을 운영하며 독립운동을 후원하던 안봉근 선생이었다. 그는 안중근 선생의 사촌동생으로 베를린에 유학 와 독일 사람과 결혼했다.
손기정 선수는 그때 처음으로 태극기를 봤는데 당시 감동을 자서전에 이렇게 썼다. '온몸에 뜨거운 전류가 흐르는 듯 나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잃었던 조국, 죽었던 조국의 얼굴을 대하는 듯한 기분이었다. 탄압과 감시의 눈을 피해 태극기가 살아 있듯 조선 민족도 살아 있다는 확신이 마음을 설레게 했다.'

▲손기정 선수의 외손자인 이준승 손기정기념재단 사무총장이 손기정 선수가 1936년 독일 베를린역에서 찍은 사진과 도쿄~베를린간 국제열차 차표를 들어보이고 있다. 흑백 사진 제일 왼쪽에 서 있는 사람이 손기정 선수다. (이진한 기자) 1936년 베를린올림픽에 참가한 손기정선수의 도쿄-베를린 기차표. (이진한 기자)

▲1936년 베를린올림픽에 참가한 손기정선수의 도쿄-베를린 기차표. (이진한 기자)

▲손기정옹이 1936년 베를린올림픽 마라톤에서 1등으로 골인하는 장면. (조선일보 DB)

▲손기정의 베를린올림픽 마라톤 우승 소식을 전한 조선일보 1936년 8월 10일자 호외. 손기정의 사진은 양정고보 유니폼을 입은 자료사진을 썼다. (조선일보 DB)

▲고 손기정 옹이 베를린올림픽에서 역주하는 모습. (조선일보 DB)

▲손기정 선수가 1936년 베를린올림픽 마라톤에서 획득한 금메달 (문화재청 제공)

▲손기정 선수가 1936년 베를린올림픽 마라톤에서 획득한 월계관. (문화재청 제공)


▲손기정 선수의 우승을 축하하기 위해 프랑스 파리에서 달려온 유학생 정석해씨는 손기정 선수의 손을 잡으며 “나는 손군이 단순한 운동선수라고만 생각지는 않네. 오늘 일본인들의 축하 파티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피를 나눈 동포들의 모임에 나와 주었으니 이야말로 애국지사가 아닌가”라고 말했다.
손기정 선수의 외손자인 이준승 손기정기념재단 사무총장은 13일 “최근 외할아버지가 일본 몰래 조선인들끼리 축승회를 열었던 그 두부 공장의 주소를 알게 됐다”며 “7월 말 ‘유라시아 친선 특급’을 타고 베를린을 방문하면 직접 찾아갈 것”이라고 말했다. 현재 이 건물은 옛 서베를린 중심가 인근의 칸트스트라세에 있는 6층 주상 복합 아파트로 이란망명자협회 사무실이 있다고 한다.
이 사무총장은 14일 외교부·한국철도공사(코레일)가 마련한 ‘유라시아 친선 특급’을 타고 베를린까지 간다. 7월 14일~8월 2일 시베리아횡단철도를 타고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독일 베를린까지 가는 여정이다. 손기정 선수도 베를린올림픽에 출전하기 위해 이 열차를 탔다. 당시엔 한반도와 유럽이 국제 철도로 연결돼 있어 서울에서 베를린까지 한 번에 갈 수 있었다.
▲1936년 6월 4일 경성을 출발한 열차는 손기정 선수의 고향인 신의주와 만주, 시베리아, 모스크바, 바르샤바를 거쳐 17일 베를린에 도착했다. 꼬박 13일이 걸린 것이다.
손기정 선수가 탄 열차는 여객 열차가 아니라 군 장비를 수송하는 화물 열차였다. 손기정 선수는 이 열차에서 조선인들이 싸준 마늘 장아찌와 장조림을 먹으며 버텼다.
손기정 선수는 잡지 ‘삼천리’에 쓴 기고문에서 이 여정을 “가도 가도 넓고 큰 시베리아는 사람이 살지 않는 외진 곳 같은 광막한 평야뿐으로 조선의 경부선이나 경의선에서처럼 산이라고는 보려야 볼 수 없었다”고 했다. 또 “철도는 조선 것보다 몹시 넓은 선로로 규모도 컸으나 시간을 잘 지켜주지 않는 데는 기가 막혔다”며 “덕분에 열차가 30분씩 정차할 때마다 플랫폼에 내려 달리기 연습을 할 수 있었다”고 했다. 이 때문에 소련에선 일본 간첩으로 오인받아 조사를 받기도 했다고 한다.
그러나 베를린역에 도착한 손기정 선수는 환대를 받지 못했다. 마중 나온 일본 대사관 직원들은 “왜 마라톤에 조선인이 두 사람씩이나 끼었느냐”고 불만을 털어놨다고 한다. 손기정 선수는 “보름 가까이 열차에 시달리며 도착한 곳에서 이런 어처구니없는 첫인사를 받게 되다니 눈물이 왈칵 솟구쳤다”고 했다.
▲해방후 자유해방경축전국종합경기대회에서 태극기를 손에 들고 감격의 눈물을 흘렸던 손기정의 모습. (조선일보 DB
베를린에서 손기정 선수는 시합 당일을 빼곤 일장기가 그려진 유니폼을 입지 않았다고 이 사무총장은 말했다."사람들이 '왜 유니폼을 입지 않느냐' '그러다 아예 출전을 못 하는 수가 있다'고 하자 외할아버지는 '내가 출전 못 하면 금메달은 없다'고 했답니다. 나중에 우승 못 하면 어쩔 뻔했느냐고 물었더니 '그럼 사상범으로 몰려 감옥 갔겠지'라고 하더라고요. 24세 청년이 어떻게 이렇게 위험한 일을 스스럼없이 했을까요. 일장기 말소 사건이 워낙 많이 알려지다 보니 정작 베를린에서의 외할아버지 행적은 묻혀 아쉽습니다." 이 사무총장은 이번에 독일 올림픽위원회에 편지를 보내 베를린 주경기장에 있는 손기정 선수의 명패에 한국 국적을 함께 표기해 달라고 요청할 계획이다.
조선일보 취재=최종석 기자1
편집=뉴스큐레이션팀
2016-03-24
■개화기 선각자 윤치호(尹致昊)의 영문일기
“썩어빠진 조선사회에 넌더리가 난다”
올해는 광복 70주년이자 애국가 작사자로 알려진 윤치호(尹致昊) 선생 서거 7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이에 맞춰 학계에서도 윤치호 재평가 움직임이 일고 있습니다. 윤치호가 일기로 기록한 1883~1943년의 시기는 우리 역사상 가장 파란만장했던 시기였습니다. 국사편찬위원장을 지낸 이태진(李泰鎭) 서울대 명예교수는, 윤치호 일기가 60년간 쓰였다는 점에서 예를 찾기 어려운 것일 뿐만 아니라 각 시기마다 국가적, 사회적 현안에 대한 소견이 실려 있기 때문에 사료적 가치가 매우 높다고 했습니다. 《월간조선》은 윤치호 영문 일기의 사료적 가치에 주목, 그의 친일 시비와는 별개라는 인식하에 그의 일기를 국내 최초로 소개하려 합니다. 영문일기의 번역과 해설은 윤치호 선생의 직계 후손인 윤경남(尹慶男)씨가 2013년부터 국사편찬위원회의 허가를 받아 1895~1906년분을 번역 중입니다. 《월간조선》은 10월호에 1895년 1~2월분을 시작으로 윤치호의 영문일기 연재를 합니다.
들어가는 말
우리나라 개화기의 선각자인 좌옹 윤치호(佐翁 尹致昊·1865~1945)의 영문 일기가 《월간조선》을 통해 빛을 볼 수 있게 된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모릅니다. 1883~1943년의 60년 동안의 이 일기를 윤치호 선생이 처음부터 영어로 쓴 것은 아닙니다. 윤 선생은 1883년 1월부터 1887년까지는 한문, 1887년 11월부터 1889년 12월까지는 한글, 1889년 12월부터 1943년까지는 영어로 작성했습니다.
윤치호 선생은 개화기 중국과 미국의 유수한 대학에서 공부한 고급 지식인이었습니다. 영어, 일본어, 중국어, 프랑스어에 능통했습니다.
영어로 일기를 쓴 것에 대해 의견이 분분합니다. “한글 표현에 한계가 와서 그렇다”고 주장하는 분들이 있는데, 그것은 잘못된 지적입니다. 윤치호 선생은 문장가였을 뿐 아니라 1930년 한글학회에 참여해 한글의 아래아(ㆍ)를 없애는 운동도 벌인 한글학자였습니다.
필자의 판단으로는 영문학도였기에 쉽게 영어일기를 쓴 것일 수도 있으나, 더 큰 이유는 일제하 비밀유지를 위해 영어로 쓰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아무튼 그의 영문일기는 문장, 문법, 어휘 면에서 미국의 중상위층이 구사하는 영어 수준이기 때문에 번역하는 사람에게 고된 작업임엔 틀림없으나, 일단 작업에 빠져들면 성경구절을 적절하게 인용한 비유를 구사하는 등 그 문장의 문학성에 매료될 정도입니다.
윤치호가 쓴 1895~1906년의 일기에는 고종의 아관파천(俄館播遷) 이후 독립협회 비사로부터 1905년 을사보호늑약의 현장 이야기까지 생생하게 기록되어 있는 등 우리 역사상 가장 파란과 고난이 많았던 시기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번 호는 윤치호가 상하이 중서학원(中西學院)과 미국 남부 명문 사립 밴더빌트(Vanderbilt) 대학 및 에모리(Emory) 대학에서 공부를 마치고 선교의 사명과 꿈을 가지고 귀국한 1895년부터 시작합니다. 그의 꿈은 1910년 에든버러 세계선교대회에서 ‘선교사와 토착교회의 역할(The place of the native church by Yun, Chi-Ho)’에 대하여 연설을 하였고, 그로부터 100년 후인 2010년 에든버러-보스턴-케이프타운-도쿄 등의 2010 선교대회에서 선교의 꽃을 피우는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윤치호는 비참한 조선을 문명국으로 개화하려는 사명과 신념에 불타 성직자로서 인간의 영혼을 구원하고, 교육자로서 민중을 깨우치고, 정치가로서 부정부패를 척결하여 참신한 개화정책을 실천하려는 신념을 가지고 1895년에 상하이에서 귀국합니다.
▲1895년 윤웅렬-윤치호 父子와 이범진은 일본에 의해 경복궁에 연금상태에 있던 고종을 구출하려는 춘생문의거를 시도했으나, 이진호 등의 밀고로 실패했다. 춘생문.
연립내각의 신구파들은 윤치호를 각기 자기 진영에 끌어들여 이용하려고 합니다. 친일파와 일본 낭인들은 명성황후를 시해하고 고종 임금을 경복궁에 감금한 뒤 친일정책을 강행하기에 이릅니다. 윤웅렬-윤치호 부자(父子)와 이범진(李範晉)은 감금된 임금을 구출하려는 춘생문의거(春生門義擧)를 시도했으나, 이진호(李軫鎬) 등의 밀고로 실패하자 윤웅렬은 상하이로, 윤치호는 언더우드 선교사 집으로 피신합니다.
이듬해인 1896년 임금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아관파천하여 신변보호는 받았으나, 나라의 운명을 러시아에 의탁하는 처지에 이릅니다. 즉 조선은 청국의 간섭에서 친일세력의 손아귀에 넘어갔다가, 다시 러시아 영향권으로 들어갑니다. 을미년에 일어난 명성황후 시해 사건→춘생문의거→단발령→아관파천→을사늑약 등 구한말의 처참한 역사로 이어집니다.
▲춘생문의거를 기록한 《乙未創義錄》.
아관파천으로 궁지에 몰린 고종은 그 돌파구의 하나로, 마침 러시아 황제의 대관식 축하 사절단을 파견하게 됩니다. 학부협판(學部協辦·교육부차관)이던 윤치호는 민영환의 수행원으로 함께 참석합니다. 이 부분의 일기에 ‘민영환과 윤치호, 러시아에 가다’라는 소제목을 붙였습니다.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 사절단 활동 중 민영환과 윤치호 사이에 왜 갈등이 생겼는지 그 배경을 설명해야겠습니다. 민영환은 청렴 강직한 성품이지만 융통성이 없었습니다. 그는 외국어를 못하는 자괴감과, 자신의 임무 때문에 늘 강박관념에 짓눌려 ‘한숨을 들이쉬고 내쉬며’ 지냅니다. 대관식이 끝나고 윤치호는 망국지한(亡國之恨)과 객지의 고독을 느끼며 사절단원과 결별하고 프랑스로 떠납니다.
그러나 윤치호와 호흡을 맞추지 못했던 민영환은 파리로 떠나는 윤치호를 따뜻하게 전별하고, 귀국 후에는 둘도 없는 동지가 됩니다. ‘민영환과 윤치호, 러시아에 가다’에서 생긴 일들은 나라를 가슴속 깊이 사랑하는 마음은 똑같으나 정치관과 인생관이 서로 달라 다른 길을 걸어간 근대사 두 인물의 비화를 보여줍니다.
1897년 다시 귀국한 윤치호를 친러 진영은 경계합니다. 결국 모든 진영에서 따돌림을 당한 윤치호는 서재필(徐載弼)과 독립협회(獨立協會)를 주도합니다. 그러나 친구인 서재필 박사가 윤치호를 경쟁자로 여기고 질시합니다. 결국 서재필은 《독립신문》을 팔고 미국으로 돌아가고 말았고, 윤치호와 이상재(李商在) 등이 《독립신문》과 독립협회를 맡게 됩니다.
윤치호는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萬民共同會)를 주도하면서 고종 황제를 비롯, 조정 대신들의 오해와 탄압을 받아 5년 동안 유배생활 같은 원산의 지방관리로 쫓겨납니다. 1904년에 다시 외부협판에 기용되어 1차 한일의정서, 을사늑약(乙巳勒約)의 현장에서 일본의 정치고문관인 스티븐슨의 외부대신 제안을 끝내 거절하고 교회와 교육사업과 YMCA 운동에 투신합니다. 첨언하면, 1907년 윤치호 선생 자신이 서술한 ‘애국가’와 번역이 든 《찬미가》를 윤치호 역술(譯述)이라고 했기에, 이번에 번역하는 글도 필자의 번역과 서술과 해제(解題)이므로 ‘윤경남 역술’이라고 붙인 것입니다.
1부 〈민영환과 윤치호, 러시아에 가다〉
1895년 1월에 일어난 일들 (주요사건과 인물은 독자의 편의를 위해 역술자가 정리한 것임) ● 중서서원에 사직서를 제출하고 10년 만에 귀국을 준비하다. ● 아내가 소주(蘇州)의 친정에서 첫딸(Laura·尹鳳姬)을 낳았다. ● 이노우에 가오루 일본 공사가 조선의 개혁방안으로 20개 조항을 제시했다. 1월에 등장하는 주요인물 ● 영 알렌(Young John Allen) 박사: 59세. 상하이 중서서원 교장. 윤치호의 평생 은사. ● 본넬 교수: 중서서원 선생. 윤치호에게 세례를 준 분. ● 리처드슨(Miss Helen Richardson): 중서서원 선생. ● 로호르(Loehr): 중서서원 학장 대리. ● 아내(마시엔숭·馬秀珍): 윤치호가 끔찍히도 사랑했던 마시엔숭(1871~1905)은 봉희, 영선, 광선, 용희 등 2남 2녀를 낳았다. ● 에퐁(E-Fong·韓愛芳) 자매: 아내의 친구. |
1895년 1월 1일 화요일.
상하이 중서서원
▲윤치호가 끔찍히도 사랑했던 마시엔숭은 슬하에 봉희, 영선, 광선, 용희 등 2남 2녀를 낳고 34세로 요절했다.
새해를 여는 멋진 날이 시작된다. 아침 10시, 교사들이 모두 사무실에 모여 새해 인사를 주고받았다. 남학생들은 거의 다 참석했다. 알렌 박사와 로호르 선생이 제공한 땅콩과 과자와 케이크를 소년들에게 나누어 주다. 기도를 하고 찬송가를 두 곡 부르다.
새해의 첫 번째 편지를 어여쁜 내 사랑, 시엔숭에게 써 보냈다. 세상에서 내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므로.
오전에 두 시간 동안 내 책들을 트렁크에 집어넣는 일을 했다. 오늘 아침에, 중국 본토에서 온 조 선생이 내게 중국말로 “장수하시고 아들 낳으시기 바랍니다”라고 말한다. 장생과자나 교자에 붙인 행운놀이의 글자들이 행운을 비는 모습을 암시하는 듯, 소년들의 명랑한 웃음소리가 울려 퍼진다. 그뿐 아니라 중국인들은 누군가 아들을 낳으면 붉은 계란을 친구들에게 돌리는 풍습이 있다.
중서서원의 옛날 동창 친구 정문광에게서 편지와 사진 한 장을 받다. 그는 이창(Ichang) 세관 사무실에서 일한다. 그 사람은 내가 10년 전에 상하이에 도착해서 만난 사람 중에 가장 기억해 둘 만한 인물이다. 헨리 정문광의 형은 그 당시 미국 영사관의 통역관이었다. 헨리는 나의 대학생활 중 3년 반 동안 우리 학교(밴더빌트대-옮긴이) 동급생이었다. 그의 동생인 정문고는 미국에서 돌아온 뒤에도 학교에 남아 있었다.
동흥양행의 미야게 씨를 방문했으나 못 만나다. 일본 사람 여럿이서 한테이블에 둘러앉아 즐겁게 담소하고 있다. 오늘날 즐거워할 명분이 있는 사람이 있다면 일본 사람들뿐일 터이다.
1월 2일 수요일.
아름다운 날씨,저녁엔 추운 날씨. 상하이 중서서원
오늘 아침에 알렌 박사가 말하기를, “자네가 중서서원 교무처에 사직원을 제출한 것은 잘못한 일일세. 이젠 학교가 자네를 위해 해 줄 일이 아무것도 없다네. 교무처가 자네를 학부에 채용하게 한 계획도 내가 만든 거란 말일세. 본넬 선생은 자네의 사직원서를 수리하지 못하도록 라켓을 던지며 소란을 피웠다네. 자네가 본넬 선생에게 직접 말하게나. 사직원서를 교무처에 제출한 것은 애초부터 절차가 잘못된 일이었다고.”
알렌 박사의 음성은 그의 기분이 아주 언짢은 듯이 들린다. 그의 감정이 그 일에 대해 극도로 격분해 있음을 알 수 있다. 내가 사직원을 교무처에 냈거나 학장에게 직접 냈거나 내겐 그게 그거다. 하지만 이해할 수 없는 건 본넬 교수가 어떻게 이런 학장 밑에서 견뎌 왔는가라는 것이다.
오후 1시부터 5시까지 난킨가의 한 가게에서 옛날 우표를 구경하며 하루를 보냈다. 그 가게 안에서 40센트짜리 조선 우표를 두 장 보았다. 오늘 오후에 에퐁의 여동생이 내게 말하기를, 상하이 기념우표 위에 쓴 중국풍의 우표는 에퐁이 쓴 것이라고 자랑한다. 나도 그 이야기를 듣고 기뻤다.
로호르 씨가 《예수님을 바라보며》라는 교과서를 가지고 진지한 설교를 강의하다. 7시15분에 쑤저우(蘇州)에 있는 캠벨 교수에게서 편지를 받았다. 1894년 12월 31일 밤 9시30분에 내 어여쁜 사랑하는 아내가 딸(윤봉희-옮긴이)을 낳았다는 것이다. 사랑스런 ‘산모’는 아주 산고(産苦)를 잘 견뎌내고 순산했다는 것이다. 하느님께서 내 사랑하는 아내를 건강하게 지켜 주심을 감사하다. 리처드슨 선생을 방문해서 캠벨 교수의 편지를 보여주었다. 리처드슨은 그 소식을 듣고 아주 기뻐했다. 윤애방 로라가 쑤저우에서 1894년 12월 31일 밤 9시30분에 태어나다.
1월 3일 목요일.
바람 불고 추운 날씨. 상하이
▲윤치호가 선교의 꿈을 키운 에모리대학. 경영학, 의학, 법학 분야의 명성이 높고, 남부의 하버드대로 불린다
나가미 군의 편지를 받다. 새로 개각한 조선 정부에 관한 중요한 소식이 들어 있다. 이노우에 공사가 조선 내각에 300만 엔 차관을 전제로 제시한 요구사항은 이러하다.
1. 통치권은 중앙에서 일원화하여 행사할 것. 2. 모든 정치 결정은 국왕이 한다. 다만 국법을 준수할 것. 3. 왕족들의 이해관계를 국정과 구분할 것. 4. 왕족의 한계를 명확히 할 것. 5. 조정의 각부의 업무한계와 권한을 명확히 구분할 것. 6. 국가 재정관리를 일원화할 것, 소위 자원 상납제도를 폐지할 것. 7. 각 부처와 왕족들이 쓸 예산을 세울 것. 8. 군 조직을 재편성할 것. 9. 부정을 은폐하거나 허세를 부리지 말 것. 10. 법부 조직을 재편할 것. 11. 경찰조직을 일원화할 것. 12. 관료들의 업무기강을 엄격히 할 것. 13. 지방관료들의 권한을 제한할 것. 14. 공직자의 근무체계를 일원화할 것. 15. 정치적 보복을 폐지할 것. 16. 불필요한 공공부서를 재편할 것. 17. 군국기무소(軍國機務所)를 재편할 것. 18. 외국의 전문가(專門家) 고문관을 청빙할 것. 19. 유능한 학생들을 일본으로 유학 보낼 것. 20. 국가 운영 정책을 세울 것.
노욕이 극심한 대원군이 평양에 있는 청나라 장군들과 불충하고 노예근성이 깔린 부당한 교섭을 계약한 꼴이 되었다. 영 알렌 박사 댁에서 저녁을 들다. 알렌 박사와 그의 부인, 로호르 부인과 메리 선생과 함께 즐거운 저녁 시간을 보내다. 오늘은 알렌 박사의 생일이다.
양쪽 모두 괴팍하기만 한 두 어른 사이에 끼여 있음은 난처하고 고통스런 일이다. 내가 김옥균(金玉均)과 박영효(朴泳孝) 사이에 끼여 있을 때 대책 없었듯이 알렌 박사와 본넬 교수 사이에 끼여 있는 지금도 똑같은 문제가 생겼다. 나는 알렌과 본넬 두 사람에게 똑같이 은혜를 입고 있다.
우리 주님이 개입하셔서 뱀같이 지혜롭고 비둘기같이 순하게 현재의 상황을 잘 견딜 수 있는 지혜로운 힘을 내려주소서. 이런 분위기에서 최선을 다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이 사람에게 저쪽 사람 이야기를 절대로 옮기지 말아야 한다는 사실이다.
1월 4일 금요일.
몹시 추운 날씨. 상하이
리처드 씨를 방문하다. 대화가 진행되면서 이 선량하고 섬세한 하느님의 사자가 말했다.
“어떤 위대한 영국 사람의 글을 읽은 기억이 나는군요. 그는 자신에게 다섯 가지 규칙을 세워 놓고 지켰답니다. 그중의 하나는 실제적인 것이었어요. ‘사교(邪敎)에 빠져 있는 사람에게 직설적으로 공박하지 마라.’ 내가 믿건대 우리 선교사들은 이 규칙을 조심하기만 한다면 보다 더 목표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그 사람을 권면하는 일에 전력을 다하십시오. 하지만 당신이 그 사람들이 좋아하거나 존경하는 대상을 적대시한다는 반감을 갖게 하면 안 됩니다. 그럼에도 어리석은 이들은 적대하게 됩니다. 당신은 당신의 임금보다 더 강력한 당신의 나라로 돌아가고 싶어합니다. 당신의 지성이나 감성 속엔 위대한 권세가 역사해 왔고, 앞으로 보다 높은 능력의 역사가 일어날 것입니다. 상하이에 있는 모든 선교사들도 당신의 기도가 이루어지도록 기도에 늘 동참할 것입니다.”
내가 리처드 씨에게서 알게 된 사실은 다음과 같다.
1. 《북경가제트》는 세상에서 가장 낡은 소식지라는 것.
2. 그 간행물은 황제의 모든 칙령과 일정한 수준의 기록만 발행한다. 간행물 복사본들은 제국 안에 있는 모든 관아(官衙)에 들어간다. 간행물은 목재 타이프기로 인쇄한다. 예수회가 언젠가 보급한 적이 있는 동판 종류다. 그러나 그 목판 글자판을 훔친 관리들의 욕심은 더 비싼 동판 타자기를 사용하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다.
3. 상하이에 있는 3개의 중국 본토 신문 중에 《신보》와 《읍보》 두 신문은, 외국 자본과 외국인이 운영하는 신문이며, 《신완보》는 외국인이 경영하되 중국 자본으로 운영하는 신문이다. 그 신문들은 모두 돈벌이에만 몰두하고 있다. 사람을 계몽하는 일은 두 번째 목표일 뿐이다. 중국엔 현재 신문이라고 할 만한 게 없다. 북경 간행물이 있을 뿐이다. 정부가 압류할 것이 두려워서 본토 신문은 아예 한 장도 만들어 내지 못하고 있다.
1월 5일 토요일.
춥지만 맑은 날씨. 상하이
오후 4시부터 오후 8시까지 사랑하는 자매, 에퐁의 집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다. 오늘은 자매의 생일이다.
1월 6일 일요일.
억세게 추운 밤이지만 아름다운 날씨. 상하이
알렌 박사 댁에서 가벼운 점심을 들다. 오후 4시 성찬식에 참예하려고 트리니티 교회에 가다. 그 후 트리니티 기숙사의 숙녀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콜리에르 씨가 5시30분에 리처드슨 선생을 방문하여 서재에서 멋진 저녁시간을 보내다.
리처드슨 선생이 말하기를, “내가 비기독교인들을 교육시키는 사역을 아주 고맙게 생각합니다. 나는 동양인 가정에 교육받으러 가는 일엔 아주 거부감을 느낍니다. 젊은이들이 교회에서 비싼 교육을 받고도 불량배가 되었거나 배은망덕한 사람이 된 예를 수없이 보았거든요. 심지어는 각자가 선교부에 속해 있으면서도 자기네 중국 사람보다 더 높은 봉급을 요구하는 중국인 보조 사역자도 있으니까요. 나는 그들이 중국 사람에게 더 열심인 마샬 씨를 본받았으면 좋으련만, 중국 보조 교역자들은 중국 사람들과 접촉하지도 않고 외국인들에 대해서도 관심이 없답니다. 순 씨를 보세요. 그가 좋은 영향을 끼치기만 바라요. 그 사람은 그가 받은 교육이 어떻게 활용되는지 모르고 있으니까요.”
비록 내가 ‘국내’에서 동양식 선교교육을 받은 사람이라 해도, 리처드슨 선생은 아주 교양 있는 분이기 때문에 나를 파렴치하다거나 동맹 휴학이나 선동하는 자로 여기지는 않는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나는 중서서원 선교부에 어떠한 보수를 요구하지도 않았고 보수를 받은 일도 없었다는 사실이다. 아니, 내가 상하이에 머무는 동안 대학이나 선교부에서 일했어도 봉급이고 뭐고 받은 것이 없었다.
외국 선교사와 중국 보조인 사이의 끊임없는 마찰을 생각한다면, 봉급에 대한 해결방법은 오직 중국 보조 목회자들이 자급자족하는 것뿐이다. 왜? 본토 교역자들이 품는 불만은 그의 빈약한 보수에 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이 받는 생계비가 외국 선교사들의 생활방식과 비교가 되었기 때문이다.
로호르 씨가 언젠가 내게 말한 적이 있는데, 그는 자기 하인들에게 매달 35달러를 지불한다는 것이다. 매달 8달러씩 주고 4명의 중국인 보조 목회자를 채용할 수가 있는 돈이다. 자, 생각해 보라! 중국인 목회자는 자기 자신뿐만 아니라 아내와 아이들의 생계도 책임져야 한다는 사실을.
만일에 중국 목회자인 선교사가 친구와 즐겁게 지내야 하는데, 그들과 차 한 잔을 마실 돈도 없어야 하나? 그건 그렇다 치고, 선교사가 적어도 합리적으로 편안하게 생활할 수 있도록 보장받는 것은 꼭 필요한 일이다. 그렇다면 왜 중국의 목회자만이 생활비나 용돈을 자급자족해야 한단 말인가?
어떤 선교 사역도 시장에서 흥정하듯이 성스럽지 못하게 대가를 치를 수도 없고 그래서도 안 된다. 그렇다면 추구해야 할 임무란 무엇인가? 가능하면 빠른 시일 안에 본토 교회들이 각기 그들의 중국인 목회자를 부양해야 하는 일이다. 성실한 목표를 가지고 선교에 발을 들여놓은 사람은 누구나 외국 선교부로부터 16달러를 받는 것보다는, 차라리 자급자족으로 교회에서 8달러를 받고 만족하는 것이 더 떳떳하지 않겠는가.
‘국내에서 교육을 받은’ 동양인 선교사에 대한 비난은 이런 일들 때문이다;
1. 그들은 은혜를 원수로 갚는다. 이런 유형의 사람은 일본, 중국, 인도 기타 선교지에서도 볼 수 있다. 선교사의 도움으로 교육을 받고는 오히려 은인들에게 대드는 비열한 젊은이들에 대하여는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다. 이렇게 배은망덕한 유형은 비교적 아주 적다. 한 명의 선한 니이시마(新島, 동지사 대학 설립자-옮긴이)는 열 명의 배신자들이 저지르는 못된 짓을 막아 낼 만한 영향력이 있다.
2. 외국에서 교육을 받은 동양인은 높은 봉급을 요구한다. 한 젊은이가 고등교육을 바라면서 선교단체에 자원하여 참여했거나 관심을 가졌다면, 아무리 적은 봉급일지라도 아예 보수에 대해서는 절대로 불평하지 말아야 한다. 그렇다고 선교부가 외국에서 교육받은 교역자에게 교육을 받지 않은 사람과 같이 적은 봉급을 지불한다면 그것은 공평한 처사일까? 그것은 어쩌면 그가 교육받기 이전만 못한 건 사실이다. 그는 선교부의 은혜가 아니었으면 그 교육혜택도 없었을 것임이 분명하다.
선교부가 그들의 예산을 어디에 쓰는가를 가장 잘 판단할 것이 틀림없다. 이것이 사실인 것은 물론이고, 그것은 아주 평범한 상식문제이다. 무한한 가능성을 교육받은 한 젊은이가 그들 때문에 왔다고 해도, 그가 무엇을 했느냐가 아니라 그가 현재 무엇을 하고 있느냐에 따라 보상을 받아야 할 것이다. 날카로운 면도칼은 현재 가지고 있는 성능에 따라 평가되는 것이지 ‘비교육’ 상태인 보통 쇳조각이었을 때의 무게로 판단하는 건 아니다.
3. 국민성의 상실. 외국교육을 받고 와서 우쭐대는 동양인은 썩은 계란보다 더 나쁜 경우이다. 왜냐하면 그는 미국이나 유럽 학교에서 교육을 받았는데 마치 미국이나 유럽의 모든 영예가 자기 것인 양 알기 때문이다. 그는 뽐내거나 분위기를 꾸며 내고 구미식 음성으로 나불댄다. 자기를 제외한 다른 의식을 가진 모든 사람을 싫어하고, 그가 런던·보스턴·베를린 등에서 얻은 견문이나 승리감을 끝없이 늘어놓는다.
그는 자기 나라 물건이 특별히 나쁘지도 않은데 외국제가 아니라는 이유로 모두 경멸한다. 일본 사람들은 그런 사람을 ‘나마이키(生意氣, 건방짐)’ 혹은 ‘풋내기’라고 부른다. 남자건 여자건 이런 사람들을 보면, 나는 가장 이해하기 힘든 경멸감이 앞선다. 하지만 때로는 국제화에 대한 비난은 외국에서 교육받은 동양인에게도 던져지는 수가 있다. 그런 사람은 본토박이에 대한 호감으로 어떤 물건이나 방법을 더 선호하기 때문이다.
당신이 만약 본토 음식을 먹지 않는다면 국제화한 것이다. 왜 당신은 가난한 봉급에 만족하지 않는가? 당신은 국제화해 버렸기 때문이다! 당신이 그렇게 국제화해서 어떤 집에서건 살고 싶지 않아진다면 참으로 비참한 일이다. 이 모든 일에 대한 결론은 이렇다.: 이 모든 일들은 그 사람이 봉급을 받고 안 받고의 문제가 아니라, 선교부 안에서 주님께 봉사하고자 하는 결심이 서 있지 않는 한, 선교부 혹은 동양인의 국내교육이 문제되는 것은 아니란 점이다.
1월 11일 금요일.
구름이 끼고 아주 추운 날씨. 상하이
북풍이 요 며칠을 두고 불어대 난롯불도 소용없게 만든다. 에퐁 자매의 집에서 몇 시간을 즐겁게 지내다. 아, 사랑스러운 여인이다! 사랑하는 아내는 그 자매가 내게는 아무것도 아닌 양 터놓고 맡기는구나.
오후 5시에 옌 부인을 방문하다. 옌 부인 집을 빌리고 싶지 않다고 말하러 갔다. 시엔숭은 내가 없는 동안 부모와 함께 지내기로 했기 때문이다. 옌 부인은 영어를 아주 잘한다. 그녀는 자기 둘째 아들을 내게 인사시킨다. 외국에서 공부하고 와서 못쓰게 된 중국 사람이 있다면 바로 이런 사람이다.
나는 미국 남부에만 있었다고 말했더니, 그는 경멸하는 태도로 “당신은 뉴욕에 가 봤어야 하는데… 남부에는 뉴욕보다 더 큰 도시가 없지요” 하고 말하면서, 난로 앞에 있는 안락의자를 차지하고 앉는다. 발엔 맵시 있는 슬리퍼를 꿰고, 입에는 시가를 물고서. 그의 어머니는 내가 상하이 사투리를 못 알아듣는 줄 알고 나를 잘 대접하려고 애쓰면서, ‘희망에 부풀어 있는 젊은이’에게 말한다. “넌 어째 벙어리처럼 거기 앉아 있는 게냐? 어미보다 네가 영어를 더 잘하잖니? 어서 손님을 즐겁게 해 드려야지.”
아들은 아무 말도 안 한다. 그 젊은이는 내가 영국이나 뉴욕에 가 본 일이 없다고 나를 깔보고 가련하게 여기는 게 틀림없어 보인다. 하지만 도리어 내게는 그가 우습게만 보인다. 그리고 아들이 런던이나 뉴욕에 정말 가 본 것으로 알고 있는 착한 어머니가 측은해 보인다.
리처드 씨와 저녁나절 즐거운 시간을 보내다. 그가 이렇게 말하였다. “당신 나라의 구호를 ‘전진과 박애정신’으로 하면 어떨까요? 난 중국인의 국민성은 별로예요. 기독교 문화에서 좋은 것을 배우려고 하는 것, 그네들이 선량해서가 아니라 중국이 외국 세력에 스스로 대항하기 위해서라고요.”
그는 잠시 생각하는 듯 머뭇거리더니, 저녁식사로 중국음식을 함께 먹자고 한다. 음식은 쌀밥에 생선과 야채 한 공기를 중국식으로 요리했다. 그는 깡통에 데운 소흥주(紹興酒)를 마셨다. 나는 다루기 힘든 친구와 신경 쓰며 밥상에 마주앉아 있는 것보다는 그와 함께 간단한 요리를 대접 받은 것이 더 즐거웠다.
1월 12일 토요일.
아주 추운 날씨, 이따금 희미하게 햇빛 나다. 상하이
미야케(三宅) 씨를 방문하다. 대화 중에 그가 내게 물었다. “청국이 조선을 중국의 일개 주(州)로 포함시켰다면 전쟁이 터졌으리라 생각합니까?”
“글쎄요,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지요. 다시 말해 청국이 그렇게 비켜간 것은 나라의 어둡고 쓸모없는 정책이나 방어할 힘조차 없는 조선의 여건 때문이 아니라, 일본과 다른 세력들과 전쟁을 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일 겁니다. 게다가 누구에게나 신경을 건드리지 않고도 침략해서 착복하면 조선반도가 공식적으로 손아귀에 들어올 텐데, 청국이 무엇 때문에 아무한테나 감정을 건드리겠습니까?
구걸하는 조선 정부에 돈을 조금 꿔준 후에 관세나 통신기 등의 중요한 것을 담보로 잡고, 저주받고 운명이 다한 조선의 목을 서서히 그러나 지그시 곧장 조여 왔지요. 이런 식으로 조선은 몇 해를 두고 왕과 조정이 드러내지는 않았어도 청국의 속국이 되고 있습니다. 청일전쟁이 청국의 계획을 깨 버린 거지요.”
“그러면 당신은 청국이 시도한 일들을 일본은 전혀 개의치 않는다고 확신하는 겁니까? 당신은 조선 정부가 일본한테서 500만 엔을 차관하기로 했다는 소식은 들으셨지요? 조선의 남쪽 3개 도의 쌀을 속국공물로 바치는 조건으로 말입니다.”
“나는 매우 확신하고 있어요. 일본이 조선의 개혁이 희망적이라고 생각하는 한은 조선을 도우리라는 점을요. 일본의 개입이 조선에 고마운 일이 될지 저주가 될지는 전적으로 조선의 조정이 지혜로운 애국심을 발휘할 것인지 아니면 어리석게 이기주의를 택할 것인지에 달렸지요. 조선은 이제 상황을 개선할 좋은 기회를 맞았습니다. 만일 조정과 국민이 올바른 정신으로 성실하게 실천하지 못하면 이 절호의 기회를 모조리 망칠 가능성이 있지요. 제대로 관리되지 않는 상태에서 나라를 지킨들 무슨 소용입니까?”
F씨가 인도하는 가정기도회 모임에 참석하다. 그 후에 헬렌 선생과 오랫동안 환담을 나누다.
1월 13일 일요일.
상하이
어젯밤엔 무척 추웠다. 대야에 담긴 물이 1인치 이상 바닥까지 거의 얼어붙었다. 주일학교가 종강하게 되어 본넬 교수가 학교를 떠나는 강연을 하다. 그는 많이도 옮겨 다녔다. 그는 가 버렸지만, 지난 10년 동안 그는 젊은 제자들에게 좋은 영향과 모범을 보여주었다. 그가 필요하게 느껴지는 이 시간에, 그에게 나의 사랑에서 우러나오는 중요한 기념 표시라도 보여줄 힘이 있으면 좋겠다.
오후 4시부터 6시까지 낮잠 자다. 곧바로 중국인 교회의 저녁예배 시간에 참석하다. 알렌 박사 댁에서 저녁을 들다. 친절하고 어머니 같은 모습을 한 알렌 박사 부인을 보고 나는 내 모든 고충을 그녀에게 털어놓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내가 알렌 박사와 그의 가족들과 따뜻한 난롯가에 둘러앉자 나의 귀국에 관한 이야기가 오고갔다. 벌써 10년이란 세월이 흘러간 사실이 믿어지질 않는다. 그때 정월 초하룻날 아침에 로호르 씨가 내게 영문법을 공부했는가 물었었지. 알렌 박사는 《뉴스》지에 실리지는 않았으나 내가 쓴 〈조선의 대화〉라는 제목의 논문을 높이 칭찬해 주었었지.
1월 14일 월요일.
춥고 구름 낀 날씨. 상하이
오늘 아침에 본넬 교수가 내게 편지 한 통을 보여주다. 난킨 대학의 퍼거슨 씨가 그 학교에서 본넬 교수에게 한자리 주겠다고 제안한 내용이다. 본넬 교수가 그 제안을 꼭 받아들이면 좋겠다.
오후 늦게 미야케(三宅) 씨가 나를 방문하다. 그는 내게 조선에서 관직을 받는다면 유길준(兪吉濬)보다 낮은 직위를 받지 않도록 충고한다. 그가 중국으로 오기 전, 김옥균을 통해 조선으로 들어갈 때의 이야기를 처음으로 내게 말하기를, 김옥균은 비밀특사로서 지낼 만한 돈이 없었다는 것이다.
내가 가르쳤던 두 소년이 내게 바나나와 귤을 세 바구니나 가지고 왔다. 나는 그 선물을 아주 고맙게 받았다. 에퐁 자매의 집에서 저녁을 먹다. 자매의 계부 피터 중씨가 와 있었다. 그는 아주 명랑한 사람이다.
1월 15일 화요일.
비교적 갠 날씨, 해가 나다. 상하이
아침 11시에 학교 교사와 장학생들 모두 학기 말 종강예배를 보기 위해 예배실에 모이다. 알렌 박사가 외국인의 시각으로 교육의 중요성에 대해 짧은 인사말을 하다. 그러고는 상금으로 7달러에서 1달러 사이에 해당하는 돈을 각기 다른 학급에 맞게 시상하다.
그 시상제도는 본넬 교수가 도입한 제도였다. 알렌 박사와 L씨는 이번 학기만 지나면 그 제도를 없앨 거라고 한다. 나는 이 제도가 학생들의 사기를 높여 주기 위해서도 지속이 되어야 할 텐데, 생각한다.
오늘은 에퐁 자매를 두 번이나 봤다. 지난주에 매일 자매를 찾아간 일은 내게 기쁘고 신선한 기분이었다. 아름다운 자매를 보러 갈 때마다 내 발걸음이 빨라진다.
1월 17일 목요일.
거친 바람, 몹시 추운 날씨. 상하이
견딜 수 없이 초조하게 기다리는 하루이틀이 지나, 세상에서 가장 어여쁜 내 사랑이 12시경에 맥타이어 홈에 도착하다. 그녀가 온다는 기쁜 소식은 ‘인력거’로 맥타이어 홈으로 달려가는 시간보다 더 빨리 내게 전해졌다. 사랑하는 아내는 개더 부인의 서재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다.
내가 방에 들어서자 아름다운 그녀의 몸이 내 팔 안에 무너지듯 안겨 왔다. 창백한 얼굴, 무척이나 아름답고 고운 모습, 나를 무아경에 빠지게 하는 더할 나위 없는 그 미소를 띠고 안겨 왔다. 내가 10년 만에 귀국하는 계획을 뒤로 돌려놓는 듯한 느낌이다. 오, 하느님! 나의 죄를 용서해 주시고, 내 어여쁜 아내와 아기를 다정하게 돌보아 주소서!
오후 2시에 아내와 아기를 데리고 내 방으로 돌아왔다. 내 방은 북풍이 부는 듯 너무 추워서 난로도 소용없을 지경이었다.
밖에는 한겨울 삭풍이 윙윙거리는데, / 나는 편편찮은 내 방에 앉아 있네. / 나 자신보다 더 사랑하는 여인, / 애틋하고 사랑스럽고 지쳐 있는 여인의 얼굴을 바라보았네. / 나에게 온통 매달려 있는 그녀의 불안함과 고통과 마음 씀씀이를 생각하면서, / 내가 지금 달려가고 있는 불확실한 미래와 모험을 깊이깊이 생각해 보네. / 아무도 헤아려 주는 이 없이 오랫동안 / 내 사랑이 나 없이 홀로 겪었을 외로움과 불안감을 깊이 생각해 보았네. / 내 의지와 상관없이 이런저런 상념 속에 휩싸여 앉아 있네. / 그 어느 누구도 사랑이 넘치는 ‘시’가 어떤 것인지 전혀 몰랐으리. / 인생의 ‘산문’이 이런 것임을 알게 되기 이전에는. / 어여쁜 내 사랑을 따뜻하고 편안하게 해 주기 위해, / 나는 춥고 배고픈 곳이라도 기꺼이 달려가리라.
헤이굿 선생에게서 즐거운 이야기가 담긴 편지를 받다. 하느님, 고귀한 저 여인을 축복하소서!
1월 18일 금요일.
맑은 날씨. 바람이 불고 몹시 춥다. 하루 종일 땅까지 얼어붙다. 상하이
나가미에게서 편지를 받다. 도쿄에 있는 내 사촌 치오가 우편으로 내게 보내준 60달러를 받았음을 알려주다. 우리의 귀여운 친구가 나의 보배인 아내와 함께 하루를 지내다. 아내와 그의 자매 에퐁! 이 두 여인을 두고 떠날 생각을 하면 가슴이 찢어지는 듯 아프다!
오, 하느님, 내 사랑 시엔숭과 그의 자매 에퐁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헬렌 리처드슨 선생을 방문하여 50달러를 꺼내어 맡기다. - 그녀의 이름이 적힌 영수증을 받다.
1895년 2월에 일어난 일들 ● 10년 만에 귀국하다. 빈곤하고 헐벗은 조선을 보며 실망하다. ● 어머니는 아들에게 기독교 신자가 된 것을 절대 말하지 말라고 하시지만, 윤치호는 자신의 ‘선교의 사명’ 을 다짐한다. ● 아버지와 삼촌이 행세(行勢)할 것을 강조하시면서 미국에서 배운 것은 쓸모없는 것이니 모두 잊어버리 라고 하신다. ● 서울의 호레스 알렌 박사, 언더우드, 아펜젤러를 예방하다. ● 유길준이 찾아오다. ● 김홍집(金弘集)은 자기의 개인비서로 일해 달라고 한다. ● 학부참의(學部參議: 학무국장과 교육감 겸임) 발령받다. 당시 나이 30세. 2월에 등장하는 주요인물 ● 호러스 뉴턴 알렌(Horace Allen): 37세. 의사이며 외교관. 민영익을 치료해 준 미국 의사. ● 유길준: 37세. 연립내각의 서기장(비서실장 격). 실권자. 어윤중의 문하생. ● 박영효: 34세. 개화파 수장. 내부대신(독판). ● 김홍집: 53세. 총리대신. ● 이노우에 가오루: 59세. 조선전권공사. 원로 정치인. 조선책략의 주역. |
2월 9일 토요일.
좋은 날씨. 나가사키, 벨록스 호
기다리는 일도 끝날 날이 있나 보다. 드디어 제물포로 가는 기선, 벨록스 호가 나타났다. 오후 1시30분에 친절한 MN 가족들과 로호르에게 작별인사를 하다. 그의 여동생이 내게 아주 예쁜 돈지갑을 주었다. 그녀가 오색 비단 조각보로 손수 만든 주머니이다.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왼손으로는 선물을 건네고 오른손으로 내게 악수를 하며 배웅해 주었다. MN과 곤도 씨가 기선을 타는 데까지 배웅해 주다.
꼭 10년 전 오후 2시, 나는 나가사키를 떠나 상하이에 닿았다. 그날 밤은 서늘하고 달빛이 창백하게 빛나고 있었다. 한밤중의 정적 속에 노 젓는 소리만 구슬프게 뱃전을 때렸지. 정다운 벗들을 멀리하고, 내게 정다웠던 사람들과 황망하게 집을 떠난 나는 비감에 젖어 있었지. 나는 울고 말았지.
오늘 나는 아주 착잡하게 내 성격 속에 10년을 두고 엮어 낸 빛과 그늘의 세월을 안고 귀향하는 것이다. 나는 중국에, 미국에, 일본에도 친구들이 많이 있다. 그들은 애정과 걱정 어린 마음으로 내 장래를 주시하고 있다. 그들은 내가 필요할 때 친구가 되어 주고 내 성실함을 알아주는 영원히 감사해야 할 친구들이다. 오! 하느님, 주님께서 선한 길로 예비해 주셨음을 감사하나이다.
승객을 태우려고 만들었다고 볼 수 없는 아주 초라한 벨록스 호가 저녁 6시30분에 닻을 올렸다. 상하이 사투리는, 내가 따라하기엔 어렵지만 아주 매력 있게 들린다. 내 사랑하는 아내의 언어이기에.
2월 12일 화요일.
좋은 날씨. 조선 제물포
배가 어젯밤 11시경에 제물포에 닿았다. 그런데 날이 너무 춥고 어두워 해안에 들어서지 못했다. 아침 9시가 되어서야 부두에 닿았다. 10년 만에 내 모국 땅에 다시 돌아온 것이다. 날씨가 이렇게 아름다울 수가! 당연히 나는 행복해야 하고 지금 아주 행복하다. 이곳에서는 내가 어디든지, 언제든지 갈 수가 있다. 하지만 어쩌나! 지금처럼 슬픈 적은 또 별로 없었거늘.
조선의 막노동꾼들은 이상하게 만든 흰 옷감에 새까맣게 찌든 옷을 입고 일하고 있고, 중국에선 아주 지저분해 보이던 집들이 조선의 움막 같은 시골 초가집과 비교해 보니 오히려 궁성 같구나. 사방에 쌓여 있는 쓰레기 썩는 냄새에, 비참하게 가난하고, 천대 받고 사는 무지한 백성들, 보기 흉하게 벌거벗은 산, 무방비 상태의 조선을 잘 보여주는 이 광경들은 조선 사람의 애국심을 병들게 하기에 충분하구나. 절망스런 탄식 말고는 웃음도 나오지 않는구나.
환영하라! 그리스도인이건 다신교도이건, 조선의 여건을 향상시키는 일을 하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그가 누구이건 열 번이라도 환영하자! 주님은 내가 도움을 구하는 이 기도를 들어주시리라. 가톨릭교회나 영국 성공회 선교부는 깨끗한 건물을 가지고 있다. 하느님, 언제나 그들과 함께하소서!
타운센드 씨를 방문하다. 10년 전에 내가 그와 헤어졌을 때와 다름없이 따뜻한 마음씨를 가진 미국인이다. 그의 집에서 점심 대접을 받다. 그가 말하기를, 감자 몇 개를 밥상에 올려놓는 일은 제물포에선 이제 옛날 이야기라는 것이다. 미국인이나 유럽인들이 이러한 나라에서 살아가려면 굉장한 참을성이 필요하단 얘기다. NCDN의 유명한 주재원에게서 배운 것은, 영국교회의 선교방침이다.
제물포에서 유일하게 명랑해 보이는 것은 일본 여성들과 일본 아이들뿐이다.
상하이에 있는 사랑하는 아내에게, 알렌 부인에게, 본넬 교수와 리처드슨 선생에게 편지를 썼다. 제물포에서 가장 좋은 호텔방엔-아마도 조선 전국 어디서나 마찬가지겠지만-세 겹으로 된 것이 있다. 종이와 먼지와 매트이다. 고약한 냄새가 온 방 안에 풍기고, 가구는 지린내 나는 찌든 오줌 자국이 그대로 있고, 더러워진 놋그릇이나 나무판대기를 담배 재떨이로 쓰고 있다. 여섯 조각도 더 되는 나뭇조각들을 붙여서 만든 못생긴 목침들….
타운센드 씨의 소개로 김교삼(金敎三)을 만나다. 조선 가톨릭 신자인데 한때 호러스 알렌의 시종이었던 사람이다. 아주 착실한 조선 사람을 만난 것이다. 그 사람도 좋은 사람이지만, 알렌 박사와 타운센드 씨의 전적인 신임을 받을 만큼 신실한 사람이다.
2월 13일 수요일.
제물포에서 서울로
어젯밤에 고베야(神戶屋)에서 마에다(前田) 씨와 한방에서 자다. 6시30분에 일어나다. 오전 9시에 제물포에서 서울로 가는 인력거를 타고 가다. 아름다운 날씨이다. 인력거에서 내려 길을 한참 걸어야 할 때가 있다. 어떤 길은 걷기가 아주 나쁘고, 어떤 길은 막일꾼 중의 한 사람이 문제가 생겨 걸어가야 할 때도 있다. 보통 때도 전형적인 건달임을 증명해야만 조선 사람이 된다는 듯이 구는, 조선 막노동꾼 중의 한 사람 때문이다.
집에서 보낸 하인이 강가에 나와서 나를 마중하다. 서울 집에 오후 4시에 도착하다. 하느님, 감사합니다! 내 어머님이 건강하셔서, 내가 걱정한 것처럼 늙지도 않으셨다. 너무 기쁜 나머지, 어머니와 나는 몇 분 동안 말문을 열지 못했다. 다만 서로 잡은 손에 힘을 주면서 말 없는 사랑의 언어를 나눌 뿐이었다. 아버지는 시골집에 가 계셨다.
어머니는 작년에 아버지께서 귀양 가는 재판 받으신 이야기와 그 가혹한 과정을 간간이 들려주셨다. 나는 어머니께 제발 그만 말씀하시도록 간청했다. 가슴이 미어질 것만 같은 끔찍한 이야기들을 더 이상 들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저녁 7시에 미국 공사관의 비서관인 호레스 알렌 박사를 방문하다. 그는 나를 한없이 반기며 진심으로 환대한다. 언더우드 박사와 그의 부인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곧 조정의 전직 관리들의 몰염치한 탐욕에 대한 정보를 주다.
정부에서 운영하는 국립병원은 처음부터 장로교 선교부가 책임지고 시작하였으며, 고종께서 연간 5000달러를 지원하기로 약속하셨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돈은 한 번도 병원에 들어오지 않았고, 미국 공사가 그 일로 전하를 알현할 때마다, 통역관은 문제가 많은 관리의 횡포가 두려워 감히 사실대로 아뢰지를 못한다는 것이다.
언더우드 목사는 이어서 말하기를, 위안스카이(袁世凱)가 대원군의 손자(이준용-옮긴이)를 왕위에 옹립하려는 음모에 대해 얘기했다. 그 음모는 민영익(閔泳翊)에게 발각되었는데, 민영익은 전하에게 그 사실을 말씀드렸고, 미국 공사에게도 통보했다는 것이다.
서광범(徐光範)을 방문하다. 그는 나를 따뜻하게 맞아 주면서, 현재 조정에 대해 몇 마디 말을 전해 주다. 그의 말은, 내각은 지금 대원군파와 왕당파로 갈라져 있다는 것. 대원군파는 어윤중 탁지부 대신, 김윤식(金允植) 외무대신, 김홍집 총리대신이며, 서광범과 박영효는 왕당파를 이끌고 있다고 한다. 서광범은, 대원군이 지금 자유주의파 혹은 왕당파에 대적할 음모를 꾸미는 데 전력을 다하고 있다는 정보를 전해 주다. 그리고 유길준은 대원군파라는 것이다.
박영효씨는 내가 기대한 것만큼 마음을 열지 않는 것 같았으나 친절하게 대해 준다. 그는 뭔가 주저하는 듯하더니, 나를 학부참의(학무국장, 교육감급-옮긴이)로 임명하겠다고 말한다. 그는 조정을 자신의 손안에 쥐고 싶어하는 모양이다. 그러나 나는 참의가 된 것이고 그렇게 여기면 되는 것이다. 더 이상 바랄 게 뭔가! 이것이 남자로서 내리막길에 있지 않고 출세길에 올랐으니 그대로 따라야 한다는 게 아닐까? 적어도 내가 공직에서 모범적인 일을 할 수 있다는 가정을 제외하고는 공직에서 더 바라는 건 없다. 그러면 내가 이 직책에서 잘하려고 하는 것은 또 무엇일까?
오늘 오후 내내 들은 이야기들은, 결코 일이 잘 풀리고 있다고 볼 수 없다. 내가 이곳에 와서 기쁜 일은 오직 사랑하는 어머님과 함께 있는 일뿐이다.
2월 14일 목요일.
좋은 날씨. 서울
▲1976년 〈The Emory of Magazine〉에 실린 에모리 대학 시절의 윤치호의 모습과 윤치호의 영문일기. 1996년 에모리대학을 방문한 좌옹의 외손자 정태진 박사가 입수해 제공했다.
12시까지 잠자리에 누워 있었다. 자애 깊으신 어머님은 말씀하실 때마다, 나를 바라보실 때나 나를 만져 보실 때나 아들을 사랑하는 마음을 맘껏 드러내신다. 어머니는 내게 가족 간의 불화, 아버지의 소실 때문에 겪는 곤혹스런 일들을 얘기하신다. 그리고 이춘식과 이병휘씨의 불성실한 점을, 김정우씨의 개인적이고 변함없는 충성심을 이야기하신다.
김정우씨는 우리 아버님의 좋은 세월이나 어두운 세월에도 변함없이 곁에 머문 사람이다. 그리고 잔인한 동학 무리들이 아버지를 해치는 정도가 아니라 살해하려고 했을 때, 그 동학군에게 눈물로 모면을 간청한 사람이다.
어머니는 또 말씀하시기를, 사람들 앞에서 내가 그리스도교에 입문한 이야기는 절대 입 밖에 내지 말도록 다짐하신다. 나는 어머님께 범사에 감사하셔야 함을 설명해 드렸다. 만일 앞으로 더 높은 직위에 오르지 못한다 해도 내가 선교의 사명을 가지고 어쩔 수 없이 오직 그리스도인으로 남아 있게 되리라는 것을 말씀드렸다. 그것은 바로 오늘의 내가 존재하는 이유임을 아울러서 말씀드렸다.
오전 11시에 내각의 서기장인 유길준씨가 나를 방문하다. 그는 내게 말하기를, 구당파와 신당파 간에 서로 파멸시키는 정쟁을 막느라고 얼마나 힘이 드는지 모르겠다고 말한다. 그는 김홍집 총리대신이 나를 개인비서로 기용하고 싶어한다고 친밀한 듯이 말한다.
오후 1시에 이노우에 백작을 방문하다. 생각했던 대로 그는 매우 오만하다. 내가 조선을 떠나 있던 동안 부모님 집안에 일어난 소란을 이야기하자, 그는 박영효와 서광범이 함께 있는 자리에서 무뚝뚝하게 말한다.
“윤 참의는 당신 아버지가 불만이나 불평하는 일에 같이 휩쓸리지 않도록 하시오. 한 노인네의 푸념일 뿐이오.” 이 대목에 와서 그의 목소리가 점점 알아들을 수 없는 중얼거림으로 기어가는 소리를 한다. 그가 소인배가 아니랄까 봐서인가? 지방에서 일어난 사건과 관련해서 박영효와 서광범과 김가진(金嘉鎭)을 들어 이야기하는 것을 들으면서, 나는 수치심과 슬픔을 느끼며 그 자리에서 일어섰다. 상감님과 조정 대신들이 실제로 일본 공사의 손에서 꼭두각시놀음밖에 못하는 것이 수치스럽고, 국가를 선도해야 할 대신들이 단합하지 않고 분열되어 가는 위험한 상태가 슬픈 현실이다.
호러스 알렌 박사를 방문하여 그에게 내 신상에 관한 일들을 털어놓다. 지성적인 그분은 성심껏 나를 동정해 주었다. 그는 내가 참의 혹은 개인 비서직을 맡는 일은 여건이 좋지 않다고 말한다. 그는 박영효의 지각없음을 걱정한다. 즉 박영효는 지난 여름에 500명의 일본군 병사를 거느리고 고종 임금을 억압할 목적으로 경솔하게 제물포에 갔다는 것, 박영효는 미국 공사의 개입으로 그 계획이 무산되자 미국 공사를 싫어한다는 것이다. 그는 개혁이라는 명분으로 어리석은 짓을 많이 한다는 것이다.
알렌 박사는 유길준의 태도가 변한 것도 말해 주었다. “나는 유길준에 반대하는 좋지 않은 이야기를 많이 들었어요. 적어도 무슨 일이든 명료하게 처리한 적이 한 번도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얼마 전에 유길준과 함께 저녁식사를 한 적이 있는데, 미국 공사관에 대해 아주 배은망덕하게 말하더라고요. 미국 공사관은 그에게 언제나 초지일관 아첨하는 친구로만 보이는 모양이죠. 나는 조선과 교류하는 일이라면 어떤 경우라도 마다하지 않고 달려갈 준비가 되어 있고, 장소를 가리지 않고 뛰어가고 싶습니다. 신문지상을 통해서라도 말입니다. 내가 이곳에 온 지 10년째인데 개선의 여지를 찾아보고 있습니다. 현재 내각이 새로 구성되었을 때 나는 아주 기뻤어요. 그래서 타운센드 씨에게 그 이야기와 관련해서 내 의견을 써 보냈어요. 그의 회답은, 새 내각이 서로 협력할 것이냐가 문제란 것입니다. 아니면 그들은 다시 당파로 갈라서게 된다는 얘기죠.”
아펜젤러 목사와 헐버트 목사를 방문하다. 헐버트 목사는 아주 즐겁게 사업을 운영하는 것 같다.
대원군이 자유당(왕당)파를 소탕하려고 서울과 제물포에 100명이 넘는 자객을 배치했다는 소문이 무성하게 돌고 있다. 온 나라가 의문투성이다. 사람들은 모두 공포 분위기를 탐색하려고 들지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공포, 의구심, 추측만이 나라 전체를 들끓게 하고 있다.
김홍집 총리를 방문하다. 그는 매우 사려 깊게 나를 대하면서, 자신의 개인비서가 되어 자기를 도와달라고 요청한다. 나는 아직은 아무런 공직을 맡고 싶지 않다고 말해 주었다.
2월 15일 금요일.
오전 내내 비 오고, 오후에 눈이 내리다. 서울
아주 추운 날씨이다. 내 방을 정하다. 나는 언제쯤, 사랑과 평화가 깃든 가정에서 부모님과 사랑하는 아내와 사랑하는 아이들과 함께 안심하고 기쁘고 복된 생활에 정착하게 될까!
2월 16일 토요일.
매섭게 춥지만, 아름다운 날씨. 서울
미국 공사 씨일과 알렌 박사가 방문했다. 신뢰감이 넘치는 분들이다. 오후 5시에 군부대신 조희연(趙羲淵)을 방문하다. 그는 연전에 상하이에서 조선 사람들이 모두 나를 들짐승 보듯이 피해 다닐 때 내게 15달러를 준 사람이다. 오늘 오후에 내가 방문하자 따뜻하게 환영해 주었다.
그와 함께 허심탄회하게 나눈 대화에서 다음 사실을 알게 되었다.
1. 대원군은 동학군과 청국군을 동원해서 현 조정을 전복하려고 한 일이 실패하자 울화통이 터질 지경이 되었다. 그래서 그의 다음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또 다시 악마 같은 음모를 꾸미기에 바쁘다.
2. 왕비가 하고자 하는 방법에 관하여-대신들이 서로가 서로를 비방하게 만드는 기술적인 방법으로 술책을 쓴다. 왕비의 무기는 중상모략이다. 다시 말해서 왕비는 모든 사람이 그들의 동료를 적대자로 만들거나 아니면 왕비에게 온통 헌신하게 만든다. 왕비의 이기적인 결론으로 왕국의 복지에만 총액을 쏟아붓는 일을 진척시키는 게 일이다. 왕비는 박영효를 설득하는 데 성공했다. 박영효가 김홍집, 어윤중, 김윤식 등의 인사들을 신임하도록 했다. 그들은 왕비에 대적해서 ‘신당’을 만든 인사들이다. 그렇게 해서 자기 사람 중의 한 명을 경무사(警務使, 경찰책임자-옮긴이) 직에 올려놓은 것이다. 왕비는 내 아버지가 어느 당파에도 속하지 않았고 잘못도 없는데 파직시켰다.
3. 김가진은 이노우에 공사에게 달갑지 않은 이른바 구당파이다.
4. 박영효는 그의 편협함과 완고함과 억제할 줄 모르는 야심 때문에 모든 사람의 신망을 잃었다. 그는 완전히 왕비의 손에 잡힌 바 되었다.
5. 이노우에 공사와 어제 나눈 대화로 미루어 보면, 그는 조희연과 그의 동료들을 김가진이 사사건건 적대한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위의 사실들을 종합해 보면 이렇다. 사람들은 모두 자기의 관심사에만 몰두한다. 대원군은 그의 방식과 다른 길을 가는 사람은 그가 누구이건 모두 죽여 없애 버리려고 한다. 왕비는 악취 나는 일로 그녀의 종말이 되는 천박함이 드러난다 해도, 자신의 세력을 거머쥐고 싶어한다.
박영효는 독재자가 될 만한 강력한 자질도 없으면서 독재자 행세를 하고 있다. 이노우에 공사는 자기 자신의 인격과 상황을 개선하려는 유일한 인물이다. 그는 지혜로운 어부가 황새와 조개 사이에서 투쟁하는 지혜로운 어부지리(漁父之利)를 취하고 있다. 조선의 정치란 쓰레기로 가득 차 있는 집과 같구나. 치욕스럽다! 수치스럽다! 창피하다!
조선 사람의 특징 중의 하나는 물건들을 비싸게 사 버린다는 점이다. 꼴사나운 모양새를 한 옷들을 보면 손수건 한 장 넣을 주머니 하나도 달려 있지 않았다. 잘 정돈된 집들은 미국의 〈서부의 황야(Wild West)〉라는 영화에 나오는 거대한 집처럼 휑뎅그렁하니 넓기만 하다.
나는 아직도 보편적인 서울의 큰 집들보다는 평균치의 미국 오두막집이 훨씬 더 좋다. 내 집은 여자하인, 남자하인들로 붐빈다. 일본 사람 한 명이나 외국인 하인 한 명이면 너끈히 할 수 있는 일을 그 하인들은 부산스럽게 일을 한다.
정부의 각 부처는 ‘관료’들의 집단이다. 그들은 죽도록 정부의 기계가 막혀 버리게 만드는 사람들이다. 학자들은, 시간을 보내거나 그의 정력을 낭비하면서 아침 8시부터 80권 분량의 책을 들고 큰 거위처럼 어기적거리며 학습한답시고 돌아다닌다.
11시에 감리교 학교 아침예배 시간에 참석하다. 어떤 조선 사람이 열 명의 소녀들을 앉혀 놓고 설교한다. 그의 예화는 너무 허풍스럽다. 그러나 내 조국에서 우리 구세주의 평신도 제자 가운데에 앉아 있다는 사실은 여간 감격스런 일이 아닐 수 없다.
아펜젤러 목사와 함께 점심식사를 하다. 그에겐 사랑스런 아내와 귀여운 아이들이 있다. 알렌 박사와 한 시간가량 함께 지내다. 그는 내게 일본이 워싱턴에 있는 조선 공사관을 폐쇄하도록 요청했다는 정보를 준다. 하지만 그 제안은 미국 선교부의 개입으로 무산되었다는 것이다.
오후 3시에 외국인 예배가 있는 교회에 참석하다.
김홍집 총리가 보자고 해서 그를 방문하다. 그는 신구 정당들을 공평하게 이끌기 위해서도 제발 이 내각 안의 직책을 맡아 달라고 사정한다. 아버지께서 시골에서 올라오시다. 이렇게 아버지를 다시 만나 뵙게 되다니, 하느님, 감사합니다! 아버지와 어머니께서는 아내가 아들이 아닌 딸을 낳은 것에 실망하신다. 작은아버님(윤영렬-옮긴이)도 뵙게 되어 기쁘다.
2월 18일 월요일.
서울
눈과 비가 밤새 내리더니 정말이지 문자 그대로, 온 동네가 ‘흰 눈 산과 얼음 바다’가 되었다.
오전 11시에 박영효를 방문하다. 그는 내게, 학부의 직책을 받으면 좋겠다고 말한다. 내가 참의 직을 먼저 받고 나면 곧 협판으로 진급하게 된다고 말한다. 그는 내가 일본을 방문하는 계획서를 만들어 놓았다. 내가 참의가 되려면 일본의 교육제도를 실습해야만 한다며, 유길준이 나를 자기의 당파로 끌어들이는 것은 옳지 않다고 한다. 총리가 유길준의 손아귀에 들어 있다고 말한다.
상하이에 있는 영 알렌 박사와 어여쁜 내 사랑하는 아내에게 편지를 쓰다. 아버지와 작은아버님이 가족회의를 하신 다음 내가 알게 된 것은 다음과 같다.
1. 동학당이 아버지를 괴롭혔는데, 돈을 착취하려는 목적 외엔 아무런 명분이나 동기가 없었다는 것. 내가 일본어를 전하에게 강요했다는 것이 그들의 큰 구실이었다. 아버지는 산속으로 도피하시고 굶주림과 헐벗음 속에 고통스런 세월을 참고 지내셔야만 했다.
2. 동학 혹은 ‘동방 종교’는 최제우(崔濟愚)가 시작한 지 몇 해 된다. 동학은 북학 혹은 ‘북방 종교’와 분리되고, 남학 혹은 ‘남방 종교’와 불교, 서학 혹은 서양 종교 혹은 가톨릭교회와도 구분이 된다. 동학은 유교와 5개의 항목이 연관이 된다. 불교의 선험적 이론은 도교의 이적(異蹟)과 마법에서, 그리고 가톨릭교에서 하느님, 천주 등의 용어와 연관되어 있다. 동학의 이교도적인 양태 속엔 알게 모르게 마호메트교의 강요와 충동적인 실천을 받아들이고 있다.
종교의 종파는 개방된 복수심 속에 억압과 핍박으로 충동을 자극 받는다. 그들은 어디를 가든지 양반에 대항하는 깊은 증오심을 보여 왔다. 동학군이 양반을 다루는 잔인한 수법은, 프랑스 혁명 당시 프랑스의 고상한 상류층이 당하던 유혈전쟁을 생각나게 한다.
우리 시골집과 가족과 마을 전체가 청국인과 일본인과 동학군의 복수전의 갈등 사이에서 피해가 없이 지켜지게 된 것은, 순전히 우리 작은아버님의 지혜와 작은아버님이 평소에 평판이 좋았던 덕분이었다.
4. 시골집 아산과 근방 마을에 청국 병정들이 가장 야만스런 방법으로 살인과 강탈과 겁탈을 일삼았다고 한다.
2월 19일 화요일.
매섭게 춥다. 굵은 눈발이 오후 내내 쌓이다.
오전에 이노우에 공사를 방문하다. 조정의 관직을 받아들이라고 말한다. 그 직책의 급여 여부는 중앙정부가 안정된 조직이 되기 전에는 기대할 수 없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는 ‘의심’하는 일은 조정에서 가장 치욕적임을 말하다.
2월 22일 금요일.
매우 춥다. 서울
너무 추워서 1분 동안 손을 밖으로 내놓았다가는 동태가 되어 버린다. 오전 10시에 김가진을 방문하다. 그는 내게 말하기를, 유길준이 이끄는 구당파가 제멋대로 구는 바람에 반대파인 신당파 각료들이 결국 퇴진한다고 한다. 그러나 이노우에 공사가 중재하여 한 번 더 평화롭게 공존하는 길을 모색한다고 한다. 오늘 아침에 회의를 소집하여 두 당파 사이에 새롭게 우정을 다지며 협력하기로 했다고 한다.
1. 저녁식사 후에 가족회의를 하다. 아버님과 작은아버님은 ‘행세(行勢)’하는 법, 혹은 세상에 나가 자수성가(自手成家)하는 기술 등에 관해 원탁강의를 하시다. 두 분이 쌍포문을 열어서 내게 말씀하시다. 즉, 나의 비현실적인 언사와 미국에서 경험한 가치관은 조선 사회에서는 쓸모가 없는 것이므로 내가 ‘행세’를 제대로 해야 한다는 것이다. 두 분의 목표는 벤저민 프랭클린의 금언(金言)을 들어, 최대한 약삭빠르게 세상을 살아가는 방법으로 말씀을 채우고 계셨다. 내 아버님은 의심할 여지가 없이 비범한 분이다. 그의 예리한 관찰력에 의하면, 강자나 뛰어난 명민성만이 한 인간을 어떤 사회에서나 살아남게 만든다는 것이다.
2. 아버지의 관찰력이 대단하신 한 예를 들어 보자. 어느 날 아버지는 내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집을 떠나 내가 능주(綾州)에서 귀양살이를 한 적이 있었지. 그곳에 언덕이 하나 있더구나. 언덕 위에 서울 집보다 조금 작은 벽이 남아 있더라. 그곳에 살던 원주인은 그 벽이 귀한 골동품인 것을 모르는 거야. 어떤 이들은 그 벽은 일본이 침략해 왔을 때 세운 거라고도 하고, 어떤 이는 왕씨 왕국 혹은 고려 시대에 요새로 쓰던 성벽이라고도 하는구나.
나는 그 바위 틈새에서 굉장히 많은 깨진 도자기 조각을 발견했는데, 도기와 자기로 만든 화병 조각들이었다. 그 조각들은 훌륭한 것도 있고 그렇지 못한 것도 있었지. 연대나 어디서 나온 것인지도 확인할 방법이 없었지. 하지만 내 생각엔, 그 요새는 어떤 약탈자에게서 뺏은 요새 터로 조선 왕조의 창건 이전에 요새화된 것 같았다. 주민들이 그 평야에 다시 정착한다면 조각들을 찾아 다시 재건해야 할 것이다. 물론 그 주민들의 변화가 그 시대 사람들이 사용하던 도구에도 변화를 가져오겠지.”
3. 조선에 관한 모든 것-조정과 백성과 빈약하기 짝이 없는 집들과 헐벗은 산들을 총망라해서 글로 정확하게 남기기엔 너무나 절망이 앞선다.
4. 작은아버님의 말씀에 따르면, 동학란이 일어나기 전에 서학 혹은 가톨릭에 반대하는 변란이 먼저 일어났다고 하신다. 충청도에 있는 가톨릭교회 외국인 사제들을 추방하고, 동학란 이전 몇 해 동안 억압과 폭력이 횡행했었다고 하신다.
우범선(禹範善)씨가 오후에 방문하다. 그는 말하기를 유길준은 악당이고 분당질에, 야심가에, 이기적이고 질투와 오만의 화신이라고 한다. 사랑하는 아내와 애퐁 자매를 보고 싶어 미칠 지경이다.
2월 23일 토요일.
하루 종일 눈이 오다. 아주 춥지 않은 날씨. 서울
6인치의 눈. 근래에 가장 큰 눈이라고들 한다. 오후에 외부의 이중응(李中應) 참의가 아버지와 나를 방문하다. 갈등이 생기는 두서없는 이야기들:
1. 오늘 아침에 나는 아버지께, 6법의 예의지방(禮儀之邦)과 행세(行勢)가 조선과 청국을 망쳐 놓았다고 말씀드렸다. 아버지는 내 말을 수긍하시면서 다음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지난해 7월에 일본 공사 오도리 게이스케(大鳥圭介)가 전하와 조정에 처음 운을 떼며 한 말은 ‘개혁’이었으나, 조정이나 상감은 무관심하게 들어 넘기셨다. 청국은 협력할 준비가 되어 이곳에 진을 치고 있다. 조선의 장군들이 그들의 병사를 거느리고 있다. 조정은 왜놈을 겁낼 이유가 하나도 없었다.
하지만 어느 날 아침에 상감이 대신들을 불러 말씀하시기를, 개혁을 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대신들은 그 자리에 선 채 무슨 말씀인가 하고 멀뚱멀뚱 서로 바라보았다. 나이가 많은 정 대감이 앞으로 나서면서 말했다.
“오, 전하. 무슨 개혁이나 개화를 하라는 말씀인지 도통 모르겠습니다. 한 가지 제가 알고 있는 것은, 저와 전하의 모든 신하들이 전하의 어명을 복종할 수가 없다는 말씀입니다.”
당황하신 상감께서 이 당돌한 대답에 그 말의 뜻을 다른 대신에게 묻지 않을 수 없으셨다. 이에 한 노 대신이 이렇게 대답하였다.
“전하의 신하는 지금 70세의 노인입니다. 제가 6세 때 처음으로 배운 것은, 부귀와 명예를 위해서는, 세도를 중시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얼마 안 가 14, 15세가 되자 집안이 세도를 펴기 시작했습지요. 그리고 10년이 흘러 처분에 따라서 혹은 어명에 따라서 권력과 금력의 한가운데 서게 되었습죠. 집안의 광영과 소득은 오직 이 처분에 따라서였습니다. 이 제도가 오늘날까지 계승되어 왔지요. 저는 처분대로 세도의 반열에 그리고 노령에 이르렀습니다. 어려서부터 지금까지 저는 세상에서 권력을 차지하는 것 외엔 처분대로 성장한 것입니다.
재능과 덕목은 인간의 성쇠에 달린 게 아닙지요. 그러므로 저는 자기 자신이 스스로 향상을 한다거나 학문으로 직분을 높일 걱정을 한 일이 없습니다. 어디까지나 저는 오로지 전하의 충실한 종일 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와서 어떤 계획도 배운 적이 없는 개혁을 한다는 것은 우리를 파멸로 이끌 뿐입니다. 개화에 대한 한 가지 소망은, 장차 저희 자손들에게 그들이 성인이 되었을 때에나 조정과 백성이 개혁을 하도록 할 수 있으리라 사료됩니다.”
2. 아버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극약 같은 그리고 파멸을 초래하는 이 ‘행세’가 개인과 국가에 끼치는 영향을 생각해 본다. 아버님 말씀대로 ‘행세’를 해야 한다면 정직함, 정의감, 고상한 목표와 이상적인 목적들과는 결별해야 하리라. 조선에서 다른 사람보다 더 최선의 길을 가려면 나의 아버님은 내가 아버님과 같은 길을 따르기를 바라신다. 내가 만일 아버님이 말씀하시는 ‘행세’를 하고 싶어한다면, 내 명예와 도덕의 원칙을 모두 내다 버려야 할 것이다. ‘행세’는 아버님 말씀대로라면 정직함과 명예심과 보조를 맞추지는 못할 테니까. ‘행세’함으로써 얻는 것은 오직 영예와 재물 취득뿐이다. 오직 천박하고 사악하기만 한 그 성취를 위한 결말은 조정의 관리가 되는 일 외엔 모두 무의미하단 이야기이다.
3. 박애심, 자기 부정, 정직한 동기, 성실성, 사랑 등 내가 배워 온 숭고한 목표 등에 대해서나, 내가 집을 떠나 있었던 10년 동안 쌓아 올린 공적도 아버지에겐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아버지는 ‘행세’를 잘하는 법을 배우는 일 외에는 모두 가치가 없음을 강조하실 뿐이다. 너무나 고적함을 느끼면서 나는 잠자리에 들어가 아기처럼 소리 내어 울었다. 내 아버님은 정말 나를 이해하지 못하시는구나.
4. 아버님은 ‘풍속’이라는 관습을 내세워 나를 굴레 씌우려고 하신다. 틀림없이 아버지는 가부장적 권위로 나를 밀어붙이실 것이다. 하지만 내 이성과 양심에 따라 더 이상 복종할 수가 없구나.
5. 조선 사람은 누구나 똑똑한 사람이나 능력 있는 사람을 쫓아다닌다. 그러나 조선이 원하는 것은 능력이나 재능이 아니라 애국심과 정직성뿐이다. 조정에서 일하는 관리들이 그동안 낭비한 지옥 같은 권모술수 대신에 국가의 복지방향으로 능력과 활력을 돌린다면, 개혁은 앞으로 큰 성공의 목표를 달성하게 될 것이다.
6. 서광범이 내 작은아버님께 미국에서 10년 이상 살았어도 자기 아버지의 말을 믿지 못했으리라고 말했다. 거짓말이 하도 성행하므로 누가 정직한 사람인지 구별할 수 없게 된 것이다.
7. 서울 인구 중에 열에 일곱은 식객노릇으로 더부살이하는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다. 정치적으로 힘깨나 쓰는 사람 집에는 으레 게름뱅이들이 모여들어서 온종일 쓸모없는 소리나 지껄이며 담배 피우고 먹고 자는 것이 일이다. 이런 자들은 세월이 좋을 때는 얻어먹고 입을 것까지 받다가도 주인이 역경에 처하면 잽싸게 떠나 버리거나 비난하기가 일쑤이다.
8. 지각 있는 사람은 일본인들이 조정의 관리직을 맡고 오만하게 지시하는 수모를 견디어 내는 것을 부끄러워하는 것이 당연하다. 조선의 관리들이 백성을 억압해도 하인처럼 아첨하며 길들여지는 것을 본 왜놈들과 되놈들이 이를 본받아 불쌍한 서민을 억압하려 드는 것이다. 개인이건 단체이건 모두 썩어 빠진 조선 사회의 현실에 넌더리가 난다.
2월 27일 수요일.
아름다운 날씨. 서울
1. 동학란을 진압하는 관군들이 오히려 무리를 지어 약탈을 일삼다. 어느 장터의 장사꾼이 허세를 부리는 관군에게 물었다 “이번에 재미(돈) 좀 봤어?” 돌아오는 대답은 “그럼 돈 좀 벌었지” 또는 “아무것도 못 건졌어”라는 것이었다. 이 대화는 마치 장사꾼이 멀리 장사하러 갔다 와서 하는 내용과 같은 것이다. 이런 사실은 관군들이 합법적으로 도둑질하거나 살인하도록 허가해 준 격이다.
2. 대원군이 빠져들어 꾸미는 잔인한 계획은 상상을 초월한다. 김학우를 살해한 자객이 잡혔다. 자객들은 늙은 대원군에게 고용되어 박영효, 서광범, 김홍집, 김가진을 제거하도록 했는데 불행하게도 김학우(金鶴羽)가 당한 것이다.
3. 아버님은 노비 방면이나 사회적 신분을 다른 정책과 연계할 대안도 없이 폐지하는 것을 반대하신다. 아버님은 울산병사(蔚山兵使)로 승진하셨고, 나는 정부참의(政府參議)로 발령이 나다.⊙
좌옹 윤치호 연보(年譜) 1865년 해평 윤씨(尹氏) 웅렬(雄烈)의 장남으로 충남 아산에서 출생. 1881년 신사유람단원 어윤중(魚允中)의 수행원으로 일본에 가서 동인사(同人社)에 입학. 1883년 초대 주한공사 푸트 공사의 통역으로 귀국. 1884년 10월 갑신정변에 연루되어 통역직 사임. 1885년 상해로 건너가 중서학원에 입학하여 4년간 영어와 수학 등을 배우다. 1888년 미국 밴더빌트(Vanderbilt) 대학에 입학. 1891년 에모리(Emory) 대학에 입학. 1894년 3월에 상해에서 중국인 마시엔숭(馬秀珍)과 결혼. 1895년 귀국하여 학부참의에 임명. 외부협판(外部協辦). 춘생문사건으로 언더우드 집으로 피신. 1896년 학부협판(學部協辦). 남감리교회를 조직. 니콜라이 2세의 대관식에 참석하는 민영환의 수행원 으로 러시아에 가다. 1898년 만민공동회 회장. 《독립신문》 사장. 독립협회 탄압과 체포령으로 피신. 1904년 3월 11일 외부협판에 재임명. 1905년 마 부인이 별세한 후에 백매려(白梅麗)와 재혼. 을사늑약 반대하고 외부협판 사임. 1906년 한영서원(韓英書院)을 개성에 설립. 1907년 애국가를 작사하고 찬미가를 역술. 1908년 평양 대성학교 교장에 취임. 1910년 ‘에든버러 1910 세계선교대회’에 조선대표로 참가. 1912년 105인 사건의 주모자로 피소되어 1912년부터 1915년 2월까지 복역. 1917년 YMCA 회장. 1941년 4월 연희전문학교 교장. 1945년 2월 광복 직전에는 귀족원 의원에 선임. 1945년 9월 애국가 친필본을 ‘1907년 윤치호 작’이라고 써서 셋째 딸 문희에게 주다. 1945년 치과 병원에 다녀오다 뇌일혈로 졸도. 개성 고려동 장남 영선(永善) 집에서 12월 6일 오후 9시 별세. 향년 80세. 종교교회에서 장례식 거행하고 아산 선영에 안장. |
출처 | 월간조선 10월호 글 | 윤경남 윤치호 선생 직계 후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