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1/ 신동식 - 대우 김우중 전 회장 - 송금조 경암교육문화재단 이사장 - 조진수 한양대 교수
사람들1 경제계 신동식 - 조진수 한양대 교수
■경제계
2015-12-19
□신동식 한국해사기술 회장(上)]
[박정희 정부 초대 경제수석비서관…
1961년 11월 스물아홉 신동식은 도쿄(東京) 주일 한국대표부에서 열린 교민 행사에 참석했다. 안내를 받고 찾아간 방엔 군복 쫙 빼입은 장성들이 양쪽 쇼파에 앉아 있었다. 끝자리에 앉은 별 세 개가 '당신이 신동식이냐'고 물었다. 그 별은 "우리가 잘사는 나라 만들려고 혁명했는데 같이 가서 애국 좀 하자"고 다그쳤다.
반말지거리에 신동식은 기분이 상했다. "나도 언젠가는 대한민국 조선 산업 일으키겠다는 생각으로 밤잠 안 자고 굶어가며 일했다. 군인들만 애국하는 거 아니다. 내가 하는 거도 애국이다." 소란해지자 상석(上席)의 남자가 '그만'하면서 자리를 권했다. "유럽에서 좋은 공부하고 로이드 선박 검사관 되신, 그 경험 나라 살리는 데 도와주오." 신동식과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은 그렇게 처음 만났다.
▲2003년 선박 건조량과 수주량, 수주 잔량 1위로 대한민국이 세계 최강의 조선 국가가 됐을 때 신동식은 국립현충원 박정희 묘역에서 눈물을 흘렸다고 했다. 그리고 자신의 엉뚱한 구상을 믿어주고 끝까지 밀어줘 고맙다고 했다. 여든 셋 나이에도 그의 요즘 관심은 온실가스 감축 발전소 사업이다. "우리조선 업체와 노르웨이의 공동 개발로 막대한 규모의 미래 먹거리를 준비하고 있다"고 했다. 선박 설계도를 살펴보고 있는 신동식 한국해사기술 회장. /김지호 기자
6·25 피란중 조선업에 관심가졌지만
국내 조선소 없어 해외에 편지보내
신동식은 1960년대 초대 청와대 제2경제수석비서관과 경제과학특별심의위원회 상임위원(장관급)을 맡아 조선 정유 등 산업화 마스터플랜 입안을 주도했다. 그리고 한국해사기술 회장으로 여든셋 된 지금까지 2000종의 선박을 설계했다.
지난 14일 오후 서울 논현동 사무실에서 만난 그는 "이산화탄소를 배출하지 않고 재활용하는 발전소 건설 사업에 우리 조선 플랜트의 미래가 걸려 있다"고 했다. 풀밭에서 세운 조선 산업 60년의 회상과 신사업에 대한 그의 마지막 구상을 듣는 데만 6시간 30분이 걸렸다.
―고교 3학년 시절 6·25가 났군요.
"춘천중학(6년제) 다닐 때였어. 6월 25일 아침 빨갱이 무찌르러 간다고 춘천 남학생들이 다 소집됐지. 상고·농고 다 합쳐 1000명쯤 모였을 거야. 목총, 삽 들고 이북 놈들이 온다는 곳으로 우르르 몰려갔지."
―진짜 총이 없었나 봅니다.
"그런 게 어딨어. 당시 학교 군사훈련 때 쓰던 목총 들고 어떤 애들은 빈손으로 따라가고. 그런데 저쪽에서 탱크가 나타나는 거야. 순식간에 수십명 죽었어. 인솔 교사가 도저히 안 되겠던지 모두 도망가라고 했어. 지금 춘천고에 학도병 참전 추모비가 있지."
―피란을 갔겠군요.
"가족들과 부산으로 갔어. 코딱지만 한 움막에서 사는데 춥고 배고프고 영화에 나오는 피란 생활 그런 거 한 거야. 먹을 거 구하러 다니다가 기가 막힌 아르바이트를 구했어."
―무슨 일이었습니까.
"미군 수송선 하역 물자를 세는 일이야. 지프, 탱크 숫자 적는 거지. 미군은 우리를 체커(checker)라고 불렀어. 10시간 일하면 1달러 주고, 점심때 되면 분유, 커피, 설탕, 도넛 주는 거야. 영어로 원부터 텐까지 셀 수 있고, 예스 오케이, 라이트, 레프트만 알면 돼. 당시 그 정도 영어 하는 사람 많지 않았거든."
▲1968년 수석비서관 제도 도입과 함께 제2경제수석비서관으로 발탁된 신동식. 그를 제외한 당시 수석들은 모두 작고했다. /신동식 회장 제공
―피란 도중 서울대에 입학했는데.
"부산 언덕배기에 서울대학도 피란 와 있었어. 난리 중이더라도 신입생은 뽑아야지. 입학 경쟁률도 제법 됐어."
―조선공학과를 택한 특별한 동기라도.
"부산 앞바다에 미국·영국 군함과 수송선이 새까맣게 떠 있었어. 바다 지배하는 나라가 세계 지배하는구나 이렇게 생각했지. 하지만 부모님은 난리가 났어."
―왜요.
"내가 종손이야. 할아버지가 법관을 했고, 아버지도 법관이야. 당연히 법대 갈 거라고 기대했는데 조선쟁이 되겠다니 집에서 쫓아내더라고."
―졸업은 제대로 했습니까.
"서울 수복돼서 태릉에서 졸업했어. 그런데 취업이 안 돼. 조선소가 있어야 취직을 하지. 부모님이 얼마나 구박하던지…. 할 수 없이 숙명여고에서 잠시 물리·수학 가르쳤어."
―답답했겠습니다.
"배 만들겠다고 큰소리친 놈 꼴이 말이 아니야. 그렇다고 유학 갈 돈도 없고. 유학 받아주지도 않았어. 미국 MIT나 일본 가야 되는데 그땐 군함 만들려고 조선공학과를 뒀기 때문에 외국 학생은 받아주지 않았어."
―유럽은 어떻게 가게 됐습니까.
"당시 스웨덴에 코큠이라는 좋은 조선소가 있었어. 일하고 싶다고 편지를 썼지. 그런데 답장이 온 거야. 숙소 주고 비행 경비도 대주겠다고. 당시 한국은 전쟁으로 제법 알려진 국가였잖아. 불쌍한 나라 청년이 일해보겠다고 하니 받아준 거지. 전쟁 끝난 다음 해였어."
―스웨덴 가는 것도 쉽지 않았을 텐데.
"프로펠러 비행기 타고 홍콩·방콕·콜카타·파리 거쳐 1주일 이상 걸렸어. 비행기에서 부드러운 휴지와 소금·후추·설탕을 주는데, 너무 황송해서 쓰질 못하겠더라고. 이 고급스러운 걸 나중에 자랑해야겠다 싶어 집에다 몇년 보관했어. 참 찢어지게 가난한 때였지."
―조선소에선 뭘 했습니까.
"낮엔 철판 자르고 용접하고 기능 실습하고, 밤엔 설계도면 보고 주말엔 공과대 교수와 미팅하고 미친 듯이 배웠지. 능력 많이 모자랐지만 조선소에서 대단한 청년이라고 많은 배려를 했지."
―그다음 영국으로 갔다면서요.
"영국 선박회사의 설계기사 모집 광고를 봤어. 조선 하면 영국일 때잖아. 지원서를 보냈는데 덜컥 합격했지. 런던엔 또 다른 세상이 펼쳐져 있는 거야. 미국, 일본에도 막 전화하고 글로벌 세계가 따로 없어. 해군 중장으로 퇴역한 하디라는 사람과 영국조선학회 회장을 지낸 토빈이 운영하는 회사에 다녔지. 하디와 토빈이 열심히 일한다면서 자기 지인들 모두 소개해주고 나를 자랑삼아 데리고 다녔어. 전쟁 치른 한국에서 온 청년이다, 대단하지 않으냐 뭐 그런 자랑이었지."
▲신동식 한국해사기술 회장. /조선일보 DB
장군들의 반말을 잠재운
박대통령의 부탁
1958년 스물여섯 살 신동식은 당시 조선인(造船人)의 꿈이라는 영국 로이드선급협회(Lloyd's Register)의 국제검사관이 된다. 영국 보험업자들에 의해 1760년 창립된 로이드선급협회는 당시 전 세계 선박의 설계와 건조 과정을 감독했다. 로이드 검사관들이 승인하지 않는 배는 만들지도 못하고 운항할 수도 없다. 미국이 자체적으로 설립한 미국선급협회와 함께 로이드선급협회의 영향력은 지금도 막강하다.
―어떻게 로이드 검사관이 됐습니까.
"운이 좋았어. 당시 선박 건조에 변화가 있었어. 철강을 연결할 때 리벳으로 조이는 방식을 쓰다가 용접 방식으로 바뀌고 있을 때였지. 검사관들이 많이 필요했고 그때 합격한 거야. 가장 놀랍고 환희로운 순간이었어. 요즘엔 로이드 검사관이 많지만 당시 한국인은 나 하나고 아시아 사람들도 없을 때였지."
―월급이 많았겠습니다.
“당시 유학생 한 달 생활비가 20파운드쯤 됐는데, 로이드 검사관 초임 월급이 150파운드였어.”
―넉넉한 생활을 했겠네요.
“분당 같은 신도시에 독채를 얻었는데, 주말마다 대사관 직원과 유학생들이 몰려와 고기, 햄 사서 부대찌개, 곰탕 끓여줬지. 나중에 김유택 대사까지 놀러 오니까 우리 집을 ‘소사관’이라고 했어. 하하.”
―김유택씨가 초대 경제기획원 부총리를 지낸 분이죠.
“맞아요. 5·16 나고 김 대사는 한국으로 돌아갔지. 두 달쯤 뒤 김 장관이 전문을 보냈어.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 우리나라를 조선 해양 국가로 키운다는 꿈을 가지고 있으니 좀 도와줘야겠다는 내용이었지.”
―뭐라고 했나요.
“싫다고 했어. 군인이 정치하는 거 싫고, 어린 놈이 맡을 일이 아니라 했지.”
하지만 신동식은 1961년 가을 선박 검사관 자격으로 일본 장기 출장을 떠났다. 그리고 그곳에서 박 의장을 처음 만났던 것이다.
―어떻게 박 의장을 만나게 됐습니까.
“김 장관이 일본 출장지로 연락을 했어. 박 의장이 케네디 대통령 만나러 미국 가는 길에 일본 들렀다 간다는 거지. 한국대표부에서 교민들과 저녁 리셉션을 하니까 그 자리에 꼭 와달라고 신신당부하더라고.”
―그런데 초면에 장군들이 반말로 뭐라 하니 기분이 상했던거군요.
“어깨에 별들 보니 무섭기도 하더라고, 하하. 박 의장이 장군들을 소개했어. 한쪽은 박 의장과 미국 가는 길이고 다른 쪽은 국가 건설에 필요한 협조를 받으러 독일 간다더만.”
―무슨 말을 했습니까.
“그 사람들 일정이 마음에 들지 않았어. 독일 가는 군인들 결국 돈 하고 기술 빌리러 가는 거잖아. 의욕만으론 그 보수적인 유럽 국가들이 돈을 주질 않는다고. 그래서 독일 대신 일본을 먼저 살펴보자고 했지. 싫어하는 국가지만 경제 부흥 속도는 엄청났어.”
―제안을 받아들이던가요.
“그 별들이 또 네가 뭔데 계획을 바꾸려 하느냐고 난리 치는 거야. 그때 박 의장이 날 보며 ‘그렇게 하시죠’라고 했어. 그걸로 상황 정리됐지.”
▲1969년 열일곱 살이던 박근혜 대통령이 신동식 당시 제2경제수석 비서관과 함께 일본에서 열린 미국 걸프그룹 경영진과의 회의 자리에 우리 측 대표로 참석했다. /신동식 회장 제공
귀국한 신동식은 부산 영도에 있는 대한조선공사의 기술고문으로 간다. 시설 활성화 방안을 찾아보라는 특명을 받았지만 공장은 참담한 지경이었다고 했다.
“이건 공장이 아니고 풀밭이야. 직원 줄 월급이 없어 못 쓰는 기계 내다 팔아서 직원에게 쌀 주고 있더라고. 처음 한 일이 직원들 데리고 풀 깎고 청소하는 것이었어.” 조선공사 공장엔 방치된 전기로(電氣爐)가 있었다.
신동식은 대학교수들 불러 전기로를 고쳐 난로를 만들었다. 당시 우리나라는 학교에서 쓰는 조개탄 난로를 만들 기술이 없어 일본에서 전량 수입하는 처지였다. 신동식은 이후 경제기획원장관 고문으로 잠시 일하다 미국선급협회 검사관으로 다시 한국을 떠난다. “돈 없고 일감 없고 사람이 없어. 조선 산업엔 막대한 자금이 들어가는데 내가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더라고.”
<下편에 계속>
<上편에서 계속>
―미국에서 다시 박 의장을 만나지요.
“1965년, 그땐 의장이 아니라 대통령이지. 김현철 주미 대사가 박 대통령이 뉴욕 교민 리셉션에서 당신을 만나고 싶어하니까 꼭 참석해달라고 하더라고.”
―대통령과 무슨 얘기를 했습니까.
“만나자마자 호텔방 큰 메모지에 한국 지도를 그리셨어. 그러곤 삼면이 바다인데 고기를 잡든지 배를 만들든지 해야 할 거 아니냐, 존슨 대통령이 비행기 보내줘 타고 왔는데 자리 한 개 비워놨으니 나랑 같이 돌아가자고 하더라고.”
―그래서요?
“감동이었지. 나 같은 젊은 놈이 뭐 대단하다고 대통령이 직접 국가 백년대계를 같이하자고 하셨겠어. 저런 분이라면 목숨 바쳐 일하겠다고 마음먹었지. 대통령이 먼저 귀국하고 난 미국 생활 바로 정리하고 뒤따라왔지.”
▲1969년 과학 기술의 요람이 된 서울 홍릉의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에서 박정희 대통령(맨 오른쪽)과 신동식(박 대통령 왼쪽)제2경제수석비서관이 새로 조성될 연구 단지를 점검하고 있다. /신동식 회장 제공
박정희 대통령과 두 번째 인연,
한강에 '존슨대교'가 생길 뻔
―대통령이 좋아했겠습니다.
“낡아서 삐걱거리는 마룻바닥을 지나 집무실에서 대통령을 만났어. 정말 반가워하더라고. 이후락 비서실장을 불러 내게 1급 비서관 자리를 주라는 거야. 정무 담당인데 원래 2급 자리인데 1급으로 발령내라고 지시하더라고.”
―파격 인사였네요.
“집무실 나와 이 실장을 따라 실장 방으로 갔어. 대뜸 정일권이야, 김종필이야, 당신 ‘빽’ 누구야 하면서 소리를 버럭 지르더라고. 깜짝 놀라 그런 거 없다고 하니까 이제부터 내가 당신 빽이야 이러더라고.”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 설립에 적극적이었다고 들었습니다.
“1966년 존슨 대통령의 한국 방문 전이었어. 미국이 깜짝 선물을 하고 싶다고 한국이 원하는 걸 제시하라고 했지. 청와대 안팎이 시끌시끌했어. 여의도에 존슨 기념탑을 지어달라 하자, 한강 다리를 지어 존슨 이름을 붙이자, 각종 제안이 마구 쏟아졌어. 난 과학연구소 지어달라는 의견을 냈지. 다른 참모들이 날 바보 취급하는 거야. 이런 선물은 정치적 감각을 발휘해야 한다는 거지.”
―한강대교 옆에 ‘존슨대교’가 만들어질 뻔했네요.
“도무지 결론이 날 분위기가 아니었어. 대통령이 논의를 가만히 지켜보더니 ‘연구소로 하자’고 하시더라고. 그렇게 KIST가 생기게 된 거야.”
신동식은 정무비서관으로 근무하다 1968년 수석비서관 제도를 도입하는 청와대 인사에서 중화학공업과 해사(海事), 과학 기술 등을 관장하는 제2 경제수석 비서관에 임명된다.
▲신동식 한국해사기술 회장. /김지호 기자
거대 플랜트 계획 세우자
朴 대통령, "당장 은행 기업 불러"
―서른여섯에 경제수석, 엄청난 출세입니다.
“이후락 실장한테 따졌지. 아무리 가난한 나라라 해도 전문가한테 경제를 맡겨야지, 이런 인사 하면 국민이 웃는다고, 경제수석 못하겠다고 했어. 그랬더니 이 실장이 당신을 지명한 대통령한테 가서 따지라고 하더라고.”
―대통령에게 따졌습니까.
“똑같이 말했어. 그런데 대통령이 이렇게 말씀하더라고. ‘내가 총칼로 정권 잡았지만 외국에서 돈 빌리고 기술 가져오는 능력은 없다. 당장 수백명씩 굶어 죽는데 쌀 증산 해야지, 휘발유는 없어도 정유공장은 지어야지, 합판공장·유리공장 다 만들어야 된다. 그런데 경제 전문가라는 사람들 얘기 들어보면 물가 안정, 환율 안정, 경제성장률 유지가 중요하다는 뻔한 소리만 한다. 그렇게 해서 언제 국민들 배 불릴 수 있겠느냐, 당신은 로이드에서 조선과 금융 보험 익히고 세계 기업 상대했으니 나보다 연줄 많지 않으냐. 이제부터 나가서 돈·기술 꿔오는 게 당신 임무다.’”
―주로 무슨 일을 했나요. “공장 짓고, 틈나는 대로 외국에 돈 빌리러 다니고. ‘고급 거지’ 같다고 생각했지. 운동권이 말하는 개발 독재의 하수인이 바로 나였어. 하하하.”
―대통령이 강조하던 조선 해양 분야는 어떻게 시작했습니까.
“1969년 초대형 조선소 건설 계획을 포함한 조선 산업 마스터플랜을 만들어 보고 했더니 대통령이 매우 만족해했어. 당장 은행과 기업 불러 브리핑하라고 하더라고.”
―민간 반응은 어땠나요.
“정신나간 놈이래. 돈 없고 철판 조각 한 개 못 만드는 나라에서 대형 조선소가 말이 되느냐는 거야. 저런 놈이 청와대 있으니까 대통령이 이상한 일 하고 다닌다는 말까지 나왔어. 경부고속도로 착공한 지 얼마 안 됐을 무렵이야. 외국에서 온 대사와 기업인들도 비웃더라고. 성공 불가능한 유치한 발상이라는 거지.”
―그래서 어떻게 됐습니까.
“이런 반응을 대통령에게 보고하니까 굉장히 실망하시더라고. 그래서 다시 말씀드렸어. 세계 인구는 늘어나고 경제활동 활발해지면 배로 운송하는 짐이 엄청나게 늘어나고, 거대한 배들이 더 필요해진다. 우리가 먼저 지으면 나중에 세계 최대 조선 국가가 될 수 있을거라고 장담했지.”
―대통령이 뭐라고 하시던가요.
“날 한참 보더니 한번 해보자 그러더라고. 이게 바로 조선 산업의 시발점이야. 정주영 회장이 아니라 박 대통령이 대한민국 조선 산업을 일으킨 거지. 물론 정 회장은 현대중공업이라는 걸출한 조선소를 만든 거고.”
그로부터 34년이 지난 2003년 한국은 선박 건조량, 수주량, 수주 잔량 등 3개 부분 모두 1위를 차지하며 명실상부한 세계 최고의 조선 국가가 된다.
▲1969년 우리정부는 원유를 운송하기 위해 30만t급 유조선을 들여온다. 이 프로젝트를 지원한 미국 걸프그룹은 일본 요코하마 미쓰비시 조선소에서 열린 유조선 망명식에 한국 최고위층이 참석하길 원했다. 영애 박근혜(당시17세)양이 일본으로 건너갔다. 오른쪽은 신동식씨. /신동식 회장 제공
신기술 발전소가 앞으로의 화두
온실가스 감축사업의 가치
신동식은 1969년 말 제2 경제수석 비서관에서 경제 개발을 위한 대통령 특수 자문기관인 경제과학심의위원회의 상임위원 겸 사무국장(장관급)으로 영전했고 그 이듬해 공직을 떠난다. 이후 선박 설계와 감리를 담당하는 ㈜한국해사기술을 운영해오고 있다. 부산에 본사를 둔 한국해사기술은 건실한 중견 기업으로 알려져 있다. 로이드선급협회는 최근 협회지를 통해 신동식을 한국 조선 산업의 아버지(The father of Korean ship-building industry)라고 했다.
―국내 조선 업계가 매우 어렵습니다.
“국제 경기 탓도 있겠지만 선박 수주가 줄어드는 데 따른 해양 플랜트 덤핑 경쟁이 화근이 됐어. 저가 수주 경쟁하다가 이 모양 된 거야.”
―요즘 온실가스 감축 사업을 한다면서요. 파리 기후변화협약 체결되고 전 세계가 이산화탄소 배출을 막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데.
“노르웨이 사르가스 파워(SARGAS POWER)라는 회사가 있어. 최근 영국 정부와 돈 밸리라는 지역에 천연가스 발전소를 짓기로 했지. 이 발전소가 아주 특별한 기술을 갖고 있어.”
―뭐가 특별합니까.
“발전하려고 가스를 태우면 이산화탄소가 나오잖아. 이 업체는 이산화탄소를 하나도 배출하지 않고 한 곳에 저장하는 기술이 있어. 그래서 영국은 이 발전소를 지어 포집한 이산화탄소를 북해 밑바닥 유전에 쏘아주는 사업을 추진하고 있지.”
▲신동식 한국해사기술 회장. /김지호 기자
―유전에 이산화탄소를 왜 넣나요.
“기름을 잘 뽑기 위해 원유층을 흔들어 놓는 역할을 해. 물을 주로 사용하는데 이산화탄소를 주입하면 훨씬 효과가 좋다고. 전기 만들고 모아놓은 이산화탄소는 유전에 재활용하고, 지구온난화 막는 데 아주 혁신적 기술이지.”
―사르가스와는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사르가스 회장이 오랜 친구야. 선박 발주 등 내가 그에게 많은 도움을 줬지. 그 친구가 7년 전 이산화탄소 포집 발전소를 만든다면서 플랜트 업체를 소개해달라고 하는 거야. 한국이 플랜트는 세계 최고거든. 그래서 대우조선해양을 연결해줬어. 두 회사가 2009년 발전소 공동 개발 계약을 맺고, 상용화되면 최초 발전소 5기는 대우조선이 독점 개발권을 갖기로 했고.”
―영국 발전소가 최초 상용화인가요.
“그렇지. 주요 국가들이 자체 기술로 해보려고 무수히 노력했지만 경제성 효율성 문제로 모두 실패했지. 영국도 결국 사르가스 기술 쓰기로 한 거야.”
―사업은 어디까지 진행됐습니까.
“지금 영국이 엄청 서두르고 있어. 영국은 향후 2025년까지 모든 석탄·석유 발전소를 없앤다고 지난달 발표했지. 지구온난화 방지에 기여하는 사업이니까 EU에서 막대한 자금을 지원받게 되고. 현재 EU본부에서 이 프로젝트 참여 업체와 영국 정부 관계자가 모여 회의를 하고 있어. 한국에선 대우조선이 갔고, 발전기 납품하는 미국 GE도 참여했지.”
―발전소 짓는 비용이 얼마나 됩니까.
“돈 밸리에 900MW 생산 설비 만드는 비용이 3조원 정도로 추산돼. 이 돈을 사르가스와 대우조선, GE 등이 나누는 거지.”
―금액이 어마어마합니다.
“이 발전소가 성공하면 영국은 다른 발전소도 이걸로 대체하겠지. 영국에만 3만MW 발전 설비가 필요해져. 대략 720억달러(약 85조원) 규모야. 유전이 있는 나라는 모두 잠재적 고객이거든.”
―회장님 역할은 무엇인가요.
“사르가스 꼭 붙들어 매서 우리나라 업체와 꼭 맺어줘야지. 이런 사업을 중국 같은 데 넘겨줄 순 없잖아. 조국에 대한 내 마지막 봉사라고 생각해.”
신동식 회장은 피곤해하지 않았다. 다음 날 그는 대구로 내려가 영남대 박정희새마을대학원에서 45개국 유학생 상대로 한국 경제 발전이라는 2시간 영어 특강을 했다. 건강 비결을 묻자 “배 설계하고 일하는 게 보약이야 보약”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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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강훈 기자 편집=최원철
□ 2016.12.24 대우 김우중 전 회장이 말하는 기업가정신
“나는 여러 차례에 걸쳐 대우그룹의 김우중 씨를 만나 이야기를 나눴다. 그때마다 감명 깊었던 것은 김우중 씨의 젊은 열정. 폭넓은 국제적 시야와 무한한 행동력, 그리고 조국에 대한 깊은 애정 이었다.”
▲1990년 일본에서 발행된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김우중 저) 일어판에 실린 일본 종합상사 니쇼이와이(日商岩井) 하야미 마사루 (速水 優) 회장의 추천사의 한 대목이다. 하야미 회장은 추천사를 쓰면서 김 회장에게 ‘어디 계신가’라고 물어보았던 모양이다. “미얀마 출장 중”이라는 답이 돌아왔다는 일화도 함께 소개했다.
[특별 인터뷰] “새 대통령이 국정 혼란 잘 수습할 것”
훌륭한 지도자가 나선다면 어려운 과제도 극복 가능해
박근혜 대통령 탄핵에도 박정희 전 대통령 치적 훼손되지 않아
국내 기업들, 보호무역주의에 대비해 해외 현지 생산설비 늘려야
GYBM 양성사업, 대우 50년 DNA 전파하는 내 생애 마지막 역작
20여 년이 흐른 지금도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은 여전히 ‘출장 중’이다. 미얀마·베트남 등 아세안(ASEAN) 국가로 내보낼 청년실업가 양성에 인생의 마지막 피치를 올리고 있다. 바로 글로벌 YBM(GYBM, Global Young Business Manager·글로벌 청년 사업가) 육성사업이다. 대우세계경영연구회가 운용하는 GYBM 프로그램은 베트남·미얀마 등 해외에서 취업·창업하려는 청년들을 모아 교육하는 프로그램이다. 김 전 회장은 연중 8~9개월을 동남아 현지에 머무르며 GYBM 청년들의 멘토로 활동한다. 1980~90년대 한국 굴지의 재벌 그룹 총수로 세계시장을 호령했다면, 이제는 그의 DNA를 이어받을 ‘김우중 칠더런’ 배출에 올인하는 것이다.
“당분간 박정희 같은 지도자 나오기 어려워”
2017년 새해는 대우그룹의 모체인 대우실업(현 포스코대우)이 창립된 지 50주년이 되는 해다. 대우그룹은 1999년 기업재무구조개선(워크아웃) 판정을 받아 해체되는 등 실패한 기업으로 막을 내렸다. 하지만 저성장, 청년실업, 양극화라는 현실에 고달픈 국민의 뇌리에 대우그룹의 ‘세계경영’ 기치는 개발연대를 떠올리게 하는 아련한 향수로 다가선다. 최근에는 최순실의 국정농단과 박근혜 대통령 탄핵 여파로 대한민국을 산업화의 영광으로 이끈 박정희 전 대통령의 위상과 치적마저 추락할 위기에 처했다.
더불어 한국경제의 성장엔진도 식어간다.
얼마 남지 않은 창업 1세대의 한 사람인 김우중의 눈에 비친 대한민국호(號)는 어디로 가고 있는 걸까? 월간중앙은 박근혜 대통령의 탄핵소추안이 국회에서 가결되던 12월 9일 오후 리노베이션이 한창인 서울 중국 남대문로 대우재단 빌딩 18층에서 김 전 회장을 만났다. 재계의 풍운아이자 비운의 상징이기도 한 그는 21세기 바람직한 기업가정신, 청년실업 해소 방안에 대한 견해를 피력하면서 박정희 전 대통령과 의 일화도 함께 소개했다.
▲1993년 방한한 보반 키에트 베트남 총리와 환담을 나누는 김우중 대우그룹 회장.
질의 :최순실 국정농단으로 대한민국이 나락으로 떨어졌다. 한국의 개발연대를 이끌어온 입장에서 안타까움이 앞서겠다.
응답 :“정치고, 뭐고, 내가 할 일이 아니기에 뭐라 할 말이 없다. 사실 요즘 관심도 없다. 간혹 주변에 어떻게 돌아가느냐고 물어보는 정도다. 정치든 뭐든 당사자들이 다 잘 알아서 하겠지 하고 생각할 따름이다.”
질의 :한국이 다시 혼란과 충격을 딛고 정상 궤도에 올라설 수 있을까?
응답 :“앞으로 어떻게 될지 모르겠지만, 좋은 사람이 대통령이 돼서 어려운 상황을 잘 헤쳐나갔으면 하는 바람이다. 당분간은 수고스럽고 곤란하겠지. 어려운 일을 매끄럽게 잘 푸는 게 능력 있는 대통령이 할 일이다.”
질의 :새 대통령이 뽑히면 국가적 혼란이 수습되고 도약도 가능하리 라고 보나?
응답 :“(이런 혼란과 후유증이) 그리 단기간에 해소되지는 않을 듯 하다. 하지만 우리 국민은 우수하다. 해외 어디를 돌아봐도 이런 나라, 이런 국민은 없다. 아이디어도 좋고 자신감도 넘친다. 훌륭한 지도자가 나선다면 어려운 과제도 다 극복할 수 있다. 나는 기본적으로 나라의 장래를 밝게 보는 사람이다.”
질의 :2년 전 월간중앙 인터뷰에서 “박정희 전 대통령은 역대 대통령 가운데 아무래도 가장 역사에 남을 사람이 아닌가 그렇게 생각한다”고 했다. 지금은 박근혜 대통령의 실정으로 박정희 전 대통령에 대한 평가마저 급격하게 절하되는 분위기다.
응답 :“지금도 마찬가지다. 박정희 전 대통령 같은 지도자가 또 나올 수 있을까 하는 생각에 변함이 없다. 박정희 전 대통령은 늘 나라를 걱정하고, 국민에게 도움 되는 일이라면 그게 뭐든 실행에 옮기는 스타일이었다. 요즘 이런저런 말들이 들리던데…. 역사는 이미 이뤄진 것이다. 박근혜 대통령이 잘못했다고 해서 (박정희 전 대통령의 업적마저) 허물어지는 건 아니라고 본다.”
대우 50년 정리하는 출판·전시회·다큐멘터리 제작
질의 :박 대통령의 탄핵과 박 전 대통령의 공적은 별개라는 말인가?
응답 :“맞다. 그런 일을 할 수 있는 지도자는 당분간 나오기 어렵다.”
질의 :박 전 대통령에 대한 김 전 회장의 기억이 애틋하다고 하던데.
응답 :“박정희 대통령께서 1970년대 서울역 앞 대우센터(현 서울 스퀘어빌딩) 지하에 있는 일식집을 자주 찾으셨다. 들를 때 마다 연락을 주시곤 했는데, 술 한잔 드시면 ‘우중아’ ‘우중아’라고 부르며 껴안는 등 정을 많이 내는 분이셨다. 저녁식사에 배석한 비서실장·경호실장·서울시장 등 참석자들도 깜짝 놀랄 정도였으니까.
그런 자리에서 내가 평소 생각하는 아이디어를 전해드렸다. 저축률을 높이는 방안의 하나로 도입된 근로자재산형성 저축이나 문맹 퇴치를 목표로 한 산업체 부설학교도 대통령과 대화하면서 자연스레 정책구상으로 발전한 게 아닌가 싶다. 나는 현장에서 일하다 보니 아이디어가 많은 편이었다. 박 전 대통령이 힘들어 할 때면 내 나름대로 성심성의껏 이런 저런 도움을 주고자 했다. 다 나라를 위한 것이니까. 이 점은 어디를 가도 자랑스럽게 말할 수 있다.”
질의 :박근혜 대통령은 어떤 사람인가?
응답 :“박근혜 대통령이 되고 나서는 한 번도 만난 일이 없다. 큰영애 시절 만난 박 대
통령은 상당히 똑똑하고 괜찮았던 인상으로 남아 있다.”
질의 :새해는 대우그룹 창립 50주년(1967년 3월 22일 창립)이 되는 해다. 반세기 역사를 돌이켜보면 감회가 남다를 듯하다.
응답 :“그저 세계를 종횡무진 내달린 기억만 남아 있다. 수출을 많이 하면 마치 애국이라도 하는 냥 밤낮없이 바쁘게, 열심히 일했다. 하루하루 최선을 다한 시절이 어느덧 50년이다. 본격적인 해외시장 개척에 나선 것은 대우가 처음이라고 하겠다.
따라서 한국이 해외로 나가 활동한 지가 그 정도 된다는 말과도 같다. 대우의 지난 50년 동안의 경험과 자신감은 소중한 자산이다.”
“대우센터(현 서울스퀘어빌딩) 지하에 있는 일식집을 박정희 대통령께서 자주 찾으셨다. 술 한잔 드시면 ‘우중아’‘ 우중아’라고 부르며 껴안는 등 정을 많이 내는 분이셨다. 배석한 비서실장·경호실장·서울시장 등 참석자들도 깜짝 놀랄 정도였으니까.”
▲1990년 서울 통일축구대회에 참석한 북측 임원들과 보도진이 대우자동차 공장을 방문해 자동차 제작 공정을 지켜보고 있다.
질의 :한국사회에 어떤 공헌을 했나?
응답 :“대우그룹이 한국경제와 기업에 준 영감이랄까, 공헌을 들자면 첫째 해외로 눈을 돌리게 했다는 것이다. 해외에서 돈을 벌 수 있다는 것을 실제로 해 보였다. 수출에 대한 관념이 희박하던 시절 와이셔츠를 해외에 내다 팔았다. 국내 은행도 수출 관련 금융 개념을 모르던 시절이다. 대우가 제일은행을 주거래은행으로 해서 함께 성장했다. 둘째는 산업화에 동참 했다는 점이다. 수출에서 시작해 조선·자동차·중공업 등을 이끌었다.”
질의 :대우그룹이 지금까지 남아 있었다면 우리 재계에 어떤 변화가 왔을까?
응답 :“옛 독립국가연합(CIS)과 동유럽·아프리카·중동·동남아 시장에서 대우의 명성은 그야말로 대단했다. 한국기업들이 이를 잘 활용했다면 현지 진출도 더 용이해지고, 시장지배력도 키웠을 텐데…, 대우가 해체되면서 이런 무형의 자산도 함께 매몰되고 말았다. 대우가 해외로 나갈 땐 혼자 가는 게 아니라 관련 제품과 부품을 생산하는 중견·중소기업과 동반진출을 꾀했다. 대우가 주도적으로 치고 나가면 1, 2차 밴드들이
그 뒤를 따르는 방식이다. 그랬다면 국내 기업의 글로벌화도 더욱 가속화하고 경제의 파이도 더 커졌을 것이라는 아쉬움이 남는다.”
질의 :2017년 대우그룹 창립 50주년에 펼쳐질 기념사업이 눈길을 모은다?
응답 :“조촐하게 치르고자 한다. 그래도 50주년 생일인데 대우에 몸담았던 사람들끼리 기념이라도 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생각에서 기록물도 정리하고 내부 행사도 갖기로 했다. 중견 언론인 모임인 관훈클럽에서 연설한 것이나 언론사 인터뷰 자료 등 대우의 역사를 말해주는 기록물이 예상보다 많았다.
강연록과 어록을 중심으로 책도 펴낼 계획이다. 또 대우의 세계경영 현장을 담은 사진물, 대우가 만든 주력 제품, 대표 상품 같은 것들을 기념품으로 모아 전시회도 열 참이다. 또 그 시절의 열정과 패기를 담은 다큐멘터리도 제작 중이다. 글로벌 인재 육성과 관련해 전문가 초빙 강연회도 50주년 사업의 주요 내용이다.”
남들이 ‘그룹’이라 부를 때 우린 ‘대우가족’이라 불러
질의 :대우 하면 제일 먼저 ‘세계경영’을 떠올리게 된다.
응답 :“마음속에 늘 세계를 품었다. 모든 기준을 세계 무대로 삼았고…. 글로벌 마인드, 글로벌 스탠더드로 생각했다. 대우는 한국 기업 가운데 해외 진출과 관련한 모든 기록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거의 모든 해외시장을 대우가 나가서 개척했고, 심지어 우리 정부가 사회주의 국가들과 수교 하도록 주선하기까지 했다. 시장이 열리면 또 다른 시장을 찾아 이동하는 게 그 시절 우리의 운명, 사명이었다. 1997년 외 환위기와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만 아니었으면 상황이 아주 좋았을 텐데.
당시 내가 너무 자신감이 넘쳐 내 주장만 하다 그만….”(웃음)
당시 대우그룹의 분식회계는 국민경제에 큰 충격과 후유증을 안겼다. 또 23조원에 이르는 대우그룹 임원 추징금 문제도 미완의 과제로 남아있다. 이에 대해 대우 측은 대우사태 수습에 들어간 공적자금은 모두 회수됐고, 법원이 개인적 이득이 없는데도 천문학적 금액을 추징한 것은 대우를 외환 위기의 희생양으로 삼은 결과라고 항변한다. 추징금 부분에 대해 법원에 재심을 청구한 법무법인 서울의 이석연 대표변
호사(전 법제처장)는 “법원이 해외로 도피시켰다고 본 재산은 대우 계열사 회생 절차를 거치면서 회수됐으며, 추징금도 죄형법정주의를 어긴 징벌적 판결로 헌법 위반에 해당한다” 고 주장했다.
질의 :회한이 남나?
응답 :“대우라는 이름은 비록 사라졌지만 계열사들은 살아남아 경쟁력을 발휘하고 있다. 대우가 있고 없고를 떠나 ‘대우정신’ 이 살아있으면 대우도 살아 있는 것이고, 그 정신이 사라지면 기업이 있어도 있는 게 아니다. 대우의 옛 임직원들이 아직도 대우정신에 충만해 이렇게 젊은이들과 다시 해외 진출 (GYBM 육성)을 꿈꾸고 있다. 대우는 아직도 살아있다. 젊은 이들과 함께 새 시대를 맞아 더욱 창조적으로 대우 정신을 발전시켜 나가고자 한다.”
질의 :‘세계경영’,‘대우 정신’이 재평가받는 날이 올까?
응답 :“나는 어떤 사명감 같은 것을 항상 느끼며 살았던 듯하다. 나라를 위해 무엇인가를 해야 한다는 생각 말이다. 대우를 창업하고 나를 위해, 나라를 위해 새 도전을 하고 싶었다.”
질의 :대표적 사례를 들자면?
응답 :“바로 해외 진출이었다. 수출하면 밑진다고 생각하던 그 시절 나라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해 덤벼들었다. 처음부터 대우는 수출이 중심이었고, 수입·내수는 안 했다. 그렇게 해서 수출전선에 뛰어든 지 5년 만에 수출 2위까지 올라갔으니 엄청난 성공을 이룬 셈이다. 대우의 발전 궤적이 대한민국의 경제 성장 궤적과 겹친다는 생각도 해본다.”
질의 :대우가 다른 기업들과 차별화한 포인트는 뭐였나?
응답 :“우리는 항상 무언가 새로운 것에 도전하면서 갖게 된 공통의 가치, 컨센서스가 대단히 강했다는 사실이다. 남들이 ‘그룹’이라고 부를 때 ‘대우가족’이라는 명칭을 사용했다. 또 사훈도 ‘창조·도전·희생’으로 강한 소명의식을 담았다. 이런 것들이 자연스럽게 만들어지고 공유되기에 아주 강한 정신력의 밑거름이 된 것이다. 남들이 하지 않는 일을 한다는 자부심과 자신감, 결단력, 선구자 정신 등 이런 것들이 대우 결속
력의 원천인 셈이다.”
그는 기업의 자세로 결단을 강조했다고 한다. 다음과 같은 식이다. “기업가란 선택을 후회하지 않도록 살아가야 하며, 한 번의 선택에 연연하기보다 계속 기회를 찾고 새로운 선택을 이어나갈 수 있게 행동해야 한다.” 그는 특히 “후회할 일이 있으면 그만큼 더 노력해 다시 바로잡으면 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는 것이다.
▲한때 대우그룹의 본사로 김우중 전 회장이 ‘세계경영’을 지휘했던 서울스퀘어빌딩(옛 대우센터).
청년실업가 중에서 ‘제 2 김우중’ 나올 것
질의 :결단의 순간은 어떤 마음가짐을 요하나?
응답 :“역사를 봐도 위대한 결단의 순간들이 역으로 발전의 기회가 된다. 결단을 내리지 못하면 아무것도 할 수 없고, 이루어지는 것도 없다. 나는 실패를 두려워하지 말고 적극적으로 일을 벌이라고 촉구한다. 사실 결단의 두려움이란 실패나 성공을 극단적으로 가르는 데서 오는 게 아니라 아주 사소한 경중을 다투는 데서 비롯되는 법이다. 이럴 때 가장 필요한 것이 긍정적 사고와 철저한 준비라고 본다. 아무도 가지 않은 새로운 시장에 들어가면서 무섭고 두렵다고 생각하면 어떻게 일을 하겠나? 내가 처음 가서 남보다 먼저 그 시장에서 기회를 얻겠다는 긍정적 마인드로 시작해야 가능한 것이다. 그런 마음이면 준비도 더 철저하게 할 수 있다.”
질의 :그 대우정신을 GYBM 양성에 불어넣고 있다. 주요 활동무대를 동남아로 잡은 이유가 있나?
응답 :“2009년 GYBM을 구상할 적에 첫째 목표를 청년실업 해소에 뒀다. 향후 우리가 뻗어나갈 시장, 전략적 협력이 가능한 지역이 어딘지 물색했다. 미국·중국·일본? 천만에. 베트남·미얀마·인도네시아·태국 등 동남아 지역이다. 청년들이 이곳에서 뿌리 내려 50년 후에 네트워크를 형성한다면 중국의 화교, 이스라엘의 유대인 못지않은 파워를 가진 집단을 형성할 것으로 믿었다. 2016년에도 190명이 졸업한다. 2~3년 후면
모두 1500명에 달할 것으로 예상된다. 그중에서 ‘제 2의 김우중’이 나오지 말라는 법이 없다.”
질의 :청년들로 하여금 야망을 갖게 하는 방법은 뭘까?
응답 :“1차 목표는 꿈을 키워주는 것이다. 그 다음이 네크워크 형성이다. 그래서 대한민국이 더 부강해지는 것이다. 그런 사명감을 가지라고 청년들에게 주문한다. 그게 우리의 목표이자 마지막 미션이다.”
질의 :21세기는 꿈을 갖기 힘든 시대 아닌가?
응답 :“나는 늘 GYBM 연수생들에게 ‘꿈 중독자’가 되라고 요청 한다. 꿈이 크고 선명하면 남이 하지 말라고 해도 스스로 열심히 하게 된다. 베트남에서는 연수생들에게 자기 꿈과 비전, 계획 등을 써서 내게 편지로 보내보라고 했다. 처음에는 말도 안 되는 억지 시늉만 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내가 할아버지라고 생각하고 편하게 고민을 털어놔보라고 했더니 연수생들이 비로소 자신만의 꿈을 그리기 시작하는 것이 보였다.”
질의 :1936년생인데 지금도 현역같이 활동이 왕성하다. 이 정도면 같은 연령층 중에서는 가장 잘나가는 게 아닌가?
응답 :“이왕 하는 것이므로 마지막까지 심혈을 기울이고자 한다. 나라와 국민에게 조그만 흔적이라도 남기고자 열심히 산다.”
GYBM은 청년들이 저성장시대 일자리 창출이 어려운 한국을 떠나 동남아 등 신흥시장에서 취업과 창업의 기회를 찾도록 도와주는 프로그램이다. 박영렬 연세대 경영학과 교수는 2015년 12월 베트남을 찾아 GYBM 교육과정을 둘러보고 현지 기업에서 새 삶을 개척하는 졸업생들과 인터뷰를 진행하기도 했다. 현장의 리얼한 장면과 김우중 전 회장의 분투기를 담은 GYBM 관련 책도 조만간 출판한다.
박 교수는 "1967년 와이셔츠를 해외에 수출하던 대우가 이제는 인재의 글로벌화를 통해 사람을 수출하고 있다"며 “대한민국이 선진국이 된다는 것은 우수한 인재를 해외에 수출한다는 것이며, GYBM도 그 일환”이라고 평가했다. 도전의식과 투지, 자긍심을 겸비한 청년들이 아시아시장에서 꿈을 펼치도록 도와주는 게 GYBM의 역할이라는 것이다.
▲1998년 김우중대우그룹 회장이 폴란드 루블린에서 열린 대우자동차 공장 기공식에 참석해 초석을 놓고 있다.
트럼프와 함께 박세리 US 오픈 우승 장면 시청
질의 :창업 1세대들은 국가 현안에 대한 입장 표명에 적극적이었다. 김 전 회장만 해도 관료들에게 제대로 하라며 호통을 치기도 했다. 요즘은 모두가 침묵하거나 외면하는 세상이 된 듯하다.
응답 :“시대가 바뀐 탓이다. 예전에는 굶주림을 이겨내는 게 시대의 과제였고, 수만 명의 근로자과 고락을 같이하며 제품을 만들어내는 게 기업의 책무였다. 지금은 금융·정보기술(IT)·소프트웨어와 같은 지식산업이 더 큰 부가가치를 창출한다.
세상이 변한 것이지. 재계나 언론이나 당당하게 소신을 밝히기 어려운 시대로 접어든 듯하다.”
질의 :2020년쯤 한국이 세계에서 굉장한 위상을 갖추리라 예측하기도 했는데.
응답 :“우리는 맨손으로 시작해 50년 만에 엄청난 발전을 이뤘다.
인도네시아·미얀마·필리핀 등 숱한 국가들이 50년 전에는 우리와 비슷했거나 오히려 잘살았다. 지금 우리가 이만큼 앞서나갈 수 있는 것은 1년을 10년처럼 열심히 노력하면서 살았기 때문이다. 2020년이 몇 년 안 남았다. 우리 경제가 정점 에 도달하느냐 마느냐를 결정하는 중요한 시점이다.”
질의 :지금 한국은 선진국 문턱에서 휘청거린다. 새해 한국경제를 진단한다면?
응답 :“우리나라는 뭘 하든 수출 없이는 답이 없다. 국내시장은 좁다. 밖으로 나가야 한다. 그나마 지금은 전 세계가 자유무역협정(FTA)이라고 해서 교역도 활발하고 자유무역을 우선시 한다. 미래는 유동적이다. 영국의 유럽연합 탈퇴, 미 대선에서 트럼프 당선이 말해주듯 보호무역주의가 확산될 가능성이 크다. 수출로 먹고 사는 한국은 미리 해외에 생산기지를 건설하고 국내 부품을 조달해 쓰는 방식을 취해야 할 것이다.”
질의 :대우는 트럼프와 합작해 한국시장에서 주상복합아파트 건축 붐을 일으킨 적도 있다. 김 전 회장이 만나본 트럼프는 어떤 사람이었나?
응답 :“당시 나는 트럼프에 대해 그리 큰 관심을 갖지 않았다. 트럼프의 사업을 담당하는 대우 계열사 사장들이 주로 그를 상대했다. 대우건설이 트럼프와 제휴해 국내 7곳에 ‘트럼프’란 브랜드로 건물을 올렸다. 하지만 1998년 미국에 가서 그를 처음 만났을 때의 기억은 생생하다. 그날(7월 8일)이 바로 프로 골퍼 박세리 선수가 US오픈에서 우승한 날이기 때문이다. 트럼프 사무실을 방문하는데 그가 US오픈 결승전이 열
린다며 함께 TV를 시청하자고 하더라. 박세리의 우승 장면을 트럼프와 함께 시청했다.”
질의 :트럼프가 한미관계를 잘 이끌어갈까?
응답 :“나는 장사꾼이었다. 정치나 외교에 대해선 할 이야기가 없다.”
질의 :1992년 대선 출마를 검토했던 것으로 안다. 정치를 했으면 기업 운영만큼 잘했을까?
응답 :“아니, 장사꾼이 무슨 정치를 잘했겠나?(웃음) 대선 출마설? 괜히 하는 소리지.”
질의 :얼마 전 타계한 쿠바의 혁명 지도자 피델 카스트로와도 인연이 있지 않나?
응답 :“1994년 대우그룹이 중남미시장 개척에 나설 때 쿠바를 방문해 그와 만났다. 사람이 괴짜지만 능력이 대단해 보였다.오랜 세월 쿠바의 지도자 생활을 한 것부터가 그랬다. 국민들로부터 추앙받는 사람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질의 :지금도 양국은 미수교 상태다. 그런 나라와도 교역이 가능했나?
응답 :“대우는 쿠바와 장사를 제법 했다. 당시 쿠바는 사탕수수가 주력 수출품이었고 중국으로부터 쌀을 수입해 먹을 때였다. 그래서 대우가 중국의 쌀을 사서 쿠바에 주는 대신 사탕수수를 받아 세계시장에 내다팔았어. 소위 3각무역을 한 셈이지. 한 가지 에피소드를 전하자면, 한국정부의 고위 공무원이 미수교국 쿠바를 방문할 일이 있었다. 국교가 없어 어떻게 교섭해야 할지도 모르던 그 공무원에게 우리가 사람을 붙여 쿠바 입국을 도왔다.”
▲2012년 베트남 하노이에서 GYBM 1기생들과 얘기를 나누는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
쿠바에 생산공장 세우려던 계획, 미국 의식해 접어
질의 :미국의 봉쇄를 당하던 카스트로 입장에서는 대우가 무척 고마웠을 법한데.
응답 :“쿠바와 제대로 사업을 해볼 요량으로 현지에 공장을 세울 생각까지 했다. 계약까지 했는데 결국 연기되고 말았다. 우방국인 미국이 쿠바를 봉쇄하는 마당에 우리가 대놓고 거래에 나서기란 어려운 일이다. 행여 블랙리스트에 오르기라도 하면 대우의 미국사업이 어려워질 수 있으니까. 그래서 교역도 우회적으로 많이 진행하던 시절이었다. 쿠바인들은 상냥하고 열심히 일하는 민족이다. 지금도 쿠바 하면 기억에 떠오르는 건 어려운 환경에서도 잘살아보려고 무던히 애를 쓰던 쿠바인들의 모습이다.”
세계경영을 표방한 김 전 회장은 서방국가뿐 아니라 사회주의권 지도자들과도 두루 만났다. 장쩌민·후진타오(중국), 블라디미르 푸틴(러시아), 피델 카스트로 등이 대표적이다. 노태우 정부 시절 아예 북한특사로 활동하는 등 북한 김일성 주석과 20여 차례 만났다고 2014년 <김우중과의 대화-아직도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에서 밝혔다. 김 주석과는 인간적으로 깊은 신뢰관계를 형성했다고 술회하기도 했다.
“본격적인 해외시장 개척에 나선 것은 대우가 처음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한국이 해외로 나가 활동한 지가 그 정도된다는 말과도 같다. 대우의 지난 50년의 경험과 자신감은 소중한 자산이다.”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은 “자신감을 잃으면 젊음을 포기하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말했다.
질의 :얼마 전 노진환 전 서울신문 사장은 1990년대 권좌에서 밀려난 김일성 주석이 김 회장에게 해외에 보내달라고 요청했다고 자신의 회고록 <시대의 격랑 속에서>에 썼다. 사실인가?
응답 :“(소리 내서 웃으며) 북한을 하도 자주 왔다갔다해서 에피소드가 많은데 전부 잊어버렸다.”(웃음)
김 전 회장의 한 측근은 이와 관련해 “그런 비화(秘話)는 있어도 말 못하고, 없어도 말 못하는 법”이라며 “김 주석과 김 전 회장은 가장 가까이 지낸 사이다. 이제 김 주석은 이세상 사람이 아니고, 김 전 회장은 기억 안 난다고 하니 없던 일이 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다만 이 측근은 “당시 김 주석이 남한에 대해서는 훤히 꿰뚫는데 반해 지구촌 돌아가는 사정에는 어두워 김 전 회장에게 많이 듣고 참고한 것은 사실”이
라고 덧붙였다.
질의 :김일성은 어떤 사람이었나?
응답 :“김일성도 능력이 출중한 사람이다. 북한이라는 나라를 수 십 년 동안 통치한 것을 보면 그것만으로도 능력이 있는 것이지. 특사로 북한을 찾은 내게 많은 것을 해줬다. 사상이나 이념을 떠나 합당한 보답을 했다. 나는 남북관계가 좋아지면 시장이 엄청나게 큰 중국을 활용할 수 있어 양쪽에 다 도움이 된다는 설명을 했다. 김일성은 좀 이상한 사람이지만 아주 매력이 있는 사람이다.”
▲1992년 평양을 방문해 김일성 주석 등과 함께 기념 촬영을 한 김우중 대우그룹 회장(앞줄 왼쪽 넷째).
기업가는 지갑의 돈을 세는 순간 끝난다
질의 :기업인, 경제인들에 하고픈 말이 있다면?
응답 :“과거에 강연에 초대받으면 꼭 하는 이야기가 있다. 기업가는 자기 지갑에 돈이 얼마 있는지 들여다보는 순간이 끝이라고 했다. 소유에 집착하는 순간 더 이상 도전의지가 생겨나지 않는 법이니까. 사업은 항상 새로운 도전과 성취를 지향하는 열정으로 하는 것이지. ‘열심히 해서 안 되는 것이 어디 있겠는가.’ 기업가는 바로 이런 자세로 일해야 한다.”
질의 :GYBM 참가자들에게 ‘창의적 사고’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창의성은 어디서 나오는가?
응답 :“나는 아무도 생각지 못한 것들을 시도했다. 예컨대 과거 사회주의 국가들이 시장을 개방하기에 앞서 그 속으로 뛰어들어 가능성을 키웠다. 우즈베키스탄의 예를 자주 든다. 막상가보니 돈이 없는 나라가 경제발전은 갈망하고 있었다. 그 나라에 흔한 게 면화였는데, 면방산업을 키워 수출하게 해주고 자동차산업을 하는 기회를 열었다. 앞서의 쿠바도 같은 경우다. 그 나라의 눈으로 보면 안 보이는 것들이 보인다. 그걸 세계시장과 연결하니 해법이 도출되더라. 창의적 사고는 특별한 게 아니다. 명확한 기준을 갖고 남다른 접근을 꾀하는 게 창의다.”
질의 :요즘 젊은이들을 보면 패기랄까, 자신감이 떨어진다는 말들을 한다. 이 또한 시대의 산물일까?
응답 :“내가 GYBM을 처음 시작하고 연수생들을 만났을 때 놀란 게 있다. 충분히 자질이 있고 능력도 있어 다 되는데도 자신감을 결여했더라. 자신감이 없으면 도전을 못하고, 그러면 아무것도 이룰 수 없다. 도전해야 성취를 하지.
그런 의미에서 자신감이 없다는 것은 젊음을 포기한 것과 같다고 늘 강조한다. 해외로 나가서 비즈니스로 경쟁해보면 우리가 얼마나 뛰어난 민족인가를 실감하게 된다. 과거에는 우리가 밖으로 나가본 역사가 없었기 때문에 우수한지 어떤지 비교할 수 없었다. 이제는 어느 나라를 가더라도 절대 기죽지 않을 것이다.
GYBM으로 내 마지막을 정리할 생각이다.”
박성현 기자 park.sunghyun@joongang.co.kr · 사진 김경빈 기자 <kgboy@joongang.co.kr
[월간중앙 1월호] 창립 50주년 맞는 대우 김우중 전 회장이 말하는 기업가정신
□2017년 05월 04일 - 송금조 경암교육문화재단 이사장
“신발장엔 구두 두 켤레뿐… 구두쇠 정신이 기업인의 덕목”
▲ 송금조 회장이 지난 4월 28일 부산 부산진구 경암교육문화재단 사무실에서 90여 년 동안 자신이 살아온 한국 현대사와 사회공헌 사업 등을 설명하고 있다. 김호웅 기자 diverkim@
“자갈밭 갈듯 일궈온 재산… 다 내놓고 가는 게 인간의 美” 인터뷰
김기현 부장(전국부)
“나는 일생 여러 사업에 매달려 오면서 하나씩 돌멩이를 걷어내며 자갈밭을 갈듯이 살아왔습니다. 어느덧 100세를 바라보는 나이가 됐습니다. 인생은 무(無)입니다. 다 내놓고 빈손으로 가는 것이죠. 내 재산이 다음 세대들의 인재양성과 교육활동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됐으면 합니다. 열심히 살아왔다고 자부하지만 나 혼자만의 노력으로는 지금에 이르지 못했을 것입니다. 내 삶이 내세울 만한 것은 못되더라도 어려운 시대를 헤쳐나가려 노력했고, 젊은 세대들에게 조금이라도 남겨놓고 갈 수 있다면 그것이 인간의 미(美)라고 생각합니다.”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부산에서 자수성가한 뒤 1300억 원 이상의 전 재산을 털어 사회공헌 활동에 매진하고 있는 경암(耕巖) 송금조 태양사 회장의 말을 요약하면 이렇다. 송 회장은 1000억 원을 출연해 ‘경암교육문화재단’을 설립해 개인 공익재단 시대를 열었다. 지역 명문대학인 부산대에 305억 원을 기부약정하고 195억 원을 기부하기도 했다. 그가 설립한 경암학술상은 올해 13회째를 맞아 국내 최고 권위의 학술상으로 성장했다.
송 회장은 올해 94세로, 50~60대의 아버지뻘이자 20~30대에게는 할아버지에 해당하는 세대다. 송 회장은 일제강점기인 지난 1923년 태어나 가장 수탈이 심했던 말기에 청소년기를 보냈다. 태평양 전쟁 때는 일본 해군에 강제 징집되기도 했다. 해방, 좌우 이념분쟁, 6·25 전쟁, 보릿고개, 경제개발과 민주화 시대 등 온갖 역정을 거치면서 한국 현대사의 부침을 온몸으로 겪었다. 그는 “운명을 한탄해 본 적이 없고 그럴 여유조차 없었다”고 토로했다. 돈이 없어 17세가 돼서야 겨우 초등학교만 졸업했지만, 점원에서부터 시작해 안 해본 사업이 없을 정도로 악착같이 돈을 벌어 수천억 원대의 재산가가 됐다. 그가 이 큰 재산을 문화·교육발전을 위해 기부한 과정을 점검하는 것도 큰 의미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송 회장과의 인터뷰는 지난 4월 28일 부산 도심인 서면 주변의 부산진구 동천로 경암교육문화재단 사무실과 인근 아파트 자택에서 3시간 넘게 이어졌다. 사무실 옆 회의실 서가에는 송 회장의 12년 전 초상화와 고려·조선왕조사 등 다양한 역사책과 레코드 LP판들이 꽂혀 있었다.
▲ 송금조(왼쪽) 회장과 부인 진애언 경암교육문화재단 이사가 지난 4월 28일 부산 자택 정원을 함께 거닐며 얘기를 나누고 있다. 김호웅 기자 diverkim@
송 회장은 90대 중반의 고령이지만 나이에 비해 훨씬 젊고 건강해 보였다. 지팡이만 짚었을 뿐, 등을 꼿꼿이 세운 채 보행을 했다. 요즘도 30~40분씩 산책하면서 건강을 유지한다고 한다. 부인인 경암재단의 진애언(72) 상임이사가 송 회장의 손을 잡고 안내했다.
진 이사는 “회장님 인터뷰를 위해 머리 감고 세수하는 데 도움을 드리고, 너무 흔한 남색 계통의 옷을 입으면 빌려 입은 것처럼 보일 것 같아 신경을 좀 썼다”며 웃었다. 사진 포즈를 취하기 위해 옷에서 지갑을 꺼냈는데 수십 년을 썼는지 가죽이 터지고 너덜너덜했다.
아직도 근검, 절약 정신이 몸에 밴 듯했다. 송 회장은 구두도 10년씩 신는다. 굽을 한 번 정도 가는 것은 기본이다. 지금 신고 있는 검정 구두도 굽을 갈았다고 한다.
송 회장은 귀가 좋지 않아 보청기를 착용했다. 바로 옆 진 이사가 다시 묻고 답해서 전달하는 말 외에는 직접 의사소통은 조금 힘들었다. 너무 예의가 발라 자신을 낮추고 단답형으로 짧게 골자만 말해 인터뷰어로서는 애가 타기도 했다. “글쎄요. 제가 크게 아는 게 없어서… 부족해서 큰 성공도 못했는데…”라며 겸손이 몸에 배어 있다.
그러나 나라를 걱정하는 부분에서는 가끔씩 열정적인 톤으로 반복해서 여러 번 강조하기도 했다. 결국 진 이사가 평소 송 회장이 자신에게 누차 강조해온 말을 전달해주거나, 부족하면 부연 설명을 하는 쪽으로 인터뷰가 이어졌다. 청소년 시절 등은 기억이 가물가물해 그가 지난해 펴낸 자서전 ‘나는 여기까지 왔다’를 참고했다.
송 회장은 최근 정세에 매우 밝았다. 모두 신문 덕분이라고 했다. 눈이 침침해도 문화일보 등 신문을 요즘도 꼼꼼히 애독한다. “문화일보 구독자가 많이 늘었느냐”고 관심을 표시하기도 했다. 그는 신문은 늘 새로운 정보와 읽을거리로 가득한 ‘배움의 밭’이라고 표현했다.
―젊은 세대에게 해주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
“우리 세대가 고생했지만 젊은 세대는 더 잘할 것으로 믿는다. 한국경제는 더 뻗어 나갈 것이다. 한국사람은 매우 영리하고 뛰어나다. 그러나 개인 이기주의가 심한 것은 고쳐야 한다. 우리는 주변 러시아, 일본, 중국의 틈바구니에서 너무 많이 고생했고 지금은 더 위기다. 우리가 힘을 키워야 이들과 평화스럽게 살아가는 방법을 모색할 수 있다. 정신 차리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는 먹고살기 위해 매진했지만 젊은이들은 절박함이 부족한 것 같다. 더 용감하게 살아가야 한다.”(용감하게 살아야 한다, 주변 3국 사이에서 버텨내야 한다는 말을 다른 질문에서도 여러 차례 반복했다.)
―한국사람들이 특히 고쳐야 할 부분은.
“대중적인 도덕심이 많이 부족한 것 같다. 담배꽁초나 쓰레기를 아무 곳이나 버리고 길에 침 뱉고 하면 안 된다. 도덕심을 고양해야 한다. 공동체 의식이 부족하다. (이를 고치려면) 교육계 혁신이 필요하다. 이스라엘, 독일, 스위스 등을 여행해서 보고 배우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 될 것이다. 나는 너무 바빠 외국여행은 거의 못 갔지만 사업차 독일, 일본에 여러 번 가서 보고 배운 게 많다.”
―그런데 요즘 젊은이들은 취업도 안 되고 너무 힘들다고 하는데 해결책이 없을까.
“고리타분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지금 배고파 밥 굶는 사람 없고, 돈 없어 공부 못 하는 경우도 거의 없다. 정부 정책상 사회복지가 얼마나 잘돼 있나. 잘사는 나라가 됐으니 여기에 젊은이들이 감사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취업이 안 되는 젊은이들 고통은 이해하지만 일할 자리와 기회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자신의 기대수준에 못 미치는 직업이라도 그 일과 경험을 통해 자신의 가치를 올려 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대기업, 중소기업, 자영업 등 종사하는 분야 모두가 중요하다. 눈높이를 낮춰야 한다. 그렇게 열심히 일하다 보면 새롭고 더 좋은 자리와 기회가 온다. 나도 청년 시절에 그랬다.”
―대통령 선거가 임박했는데 어떤 대통령이 되면 좋겠나. 투표를 하실 건지.
“가장 큰 화두는 경제와 안보다. 새 대통령이 국민이 먹고사는 문제인 경제를 안정적으로 발전시키고, 죽고 사는 문제인 안보를 슬기롭게 해결했으면 한다. 생각이 서로 다른 사람의 반목과 분열, 갈등의 고리를 청산하고 국민 모두를 대화합시키는 대통령이 돼야 한다. 여기에는 여야나 진보·보수가 따로 없다고 생각한다. 투표는 꼭 하겠다. 크게 희망적인 후보는 없지만 홍준표 자유한국당 후보가 안보 면도 그렇지만, 경남도지사 시절 살림을 잘해 채무를 다 갚았다고 해 호감이 간다.”
―박근혜 전 대통령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나.
“나는 박정희 전 대통령을 가장 존경해 왔고 그 따님인 박근혜 전 대통령에게도 기대를 걸었다. 그런데 마지막에 너무 실망이 크고 기대 이하다. 국가와 결혼했다고 해서 청렴, 결백하게 국가를 위해 온몸을 바칠 것으로 생각했다. 옆에서 국정을 농단한 최순실이 등장할 줄은 꿈에도 생각 못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을 가장 존경하는 이유는.
“그 어른이 헐벗고 굶주린 대한민국을 살렸다. 어렵고 힘든 시대에 몸소 헌신해 경제개발을 이룩했다. 그 어른이 아니었으면 지금 어떻게 됐겠나. 나도 박 전 대통령을 직접 만난 적이 있다. 1961년 5·16 군사정변이 일어나고 내가 양조장을 할 때 서울에서 전국 정미소 및 탁주업자 회의를 소집해 참석했더니 당시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인 그가 나타났다. 그는 ‘그래도 여러분들은 다른 사람보다 여건이 좋고 사업 여력이 있지 않나. 이제 술도가나 정미소는 필요 없으니 외화를 벌기 위해 제조업을 하라’고 부탁해 내가 제조업을 시작하는 계기가 됐다. 이승만 전 대통령의 역할도 의미가 크다. 독립운동가로서 이승만 대통령은 미국, 김구 선생은 중국으로 망명했는데 미국의 영향을 받은 것이 국가에 도움이 됐다고 본다.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으로 대한민국을 지키고 공산화를 막은 것은 큰 공이다. 이 대통령이 아니었으면 일찌감치(북으로 정권이) 넘어가 지금의 자유도, 경제번영도 없었을 것이다.”
―기업인 중 존경하는 분은.
“정주영 회장과 이병철 회장을 가장 존경한다. 이분들과 1970년대 새마을운동을 같이한 인연도 있다. 나와는 열 살 안팎의 나이 차이다. 그들은 변변한 산업 하나 제대로 없는 허허벌판에서 우리 경제가 이만큼 발전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했다. 앞으로 이런 기업가들이 나오기 쉽지 않을 것이다. 정 회장은 타고난 근면성과 도전정신, 체력을 바탕으로 한 현장중심 경영이 장점이다. 올림픽을 유치하고 대북교류사업까지 밀어붙였으니 그 열정이 정말 대단하다. 긍정적인 사고로 불가능에 도전해 나도 큰 교훈을 얻었다. 나와 사업 규모는 엄청난 차이가 있지만 정 회장은 초등학교만 졸업하고 서울로 올라와 미곡상 점원을 하다가 사업을 하게 된 경위와 삶의 여정도 비슷한 것 같다. 이 회장은 명석한 두뇌와 시대를 앞지르는 뛰어난 예지력, 신중함이 강점이다. 선견지명의 혜안으로 세계적인 삼성그룹의 모태를 만들었다. 나는 이분들을 본받기 위해 노력했지만 미흡했다.”
―이병철 회장 얘기가 나와서 그러는데 손자 이재용 부회장은 어떻게 생각하나.
“구속된 것이 너무 안타깝다. 삼성이 그동안 얼마나 많이 일자리를 창출하고 세계적으로 위상을 높였나. 본인도 억울할 것이고 나도 마음이 아프다. 이 부회장이 뭐가 아쉬워 먼저 대통령한테 뇌물을 줬겠는가. 또 성공한 기업인이 대통령에게 잘 보일 일이 뭐가 있겠나. 대통령이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국가를 위해서 달라고 하는데 안 줄 사람 없다. 이제 이런 요구는 완전히 없어져야 한다.”
―노조에 대한 의견은.
“기업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기업가의 노력 외에 정부의 제도 및 정책적 지원도 필요하다. 다른 한 축으로는 노동자의 인식 변화와 노력이 필수적이다. 그래야 노사가 서로 공생하고 발전해 경쟁력을 갖출 수 있다. 인간의 가장 숭고한 정신은 협력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지금 우리나라 노조는 세계에서도 가장 강성노조다. 노조의 이익과 주장이 너무 강한 일면이 있다. 나도 1990년 태양사 근로자들의 파업사태를 겪었다. 납품 날짜를 지키지 못해 주요 거래처인 현대 자동차와의 거래가 끊겼고, 노조원 600여 명을 비롯해 일반직원 100여 명까지 큰 고통을 겪었다. 강소주를 마시며 버틴 나날이었다. 비슷한 시기에 플라스틱 사출 업체인 계열사 태양공업사는 노조파업으로 끝내 폐업하기도 했다.”
―무려 1000억 원을 출연해 경암교육문화재단을 설립하고 경암학술상을 만든 이유는.
“이제 한국도 문화의 격이 높아지고 교육수준도 더욱 발전해야 한다. 사회적 가치와 삶의 질을 고양시키는 학술과 문예를 더 육성해야 한다. 자원 빈국이 세계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인재를 양성하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다. 경암교육문화재단과 경암학술상은 그래서 탄생했다. 특히 창의성과 기술력이 승부하는 시대에 향후 한국 발전은 더 나은 기술발전을 위한 연구·개발(R&D) 중심으로 가야 한다. 내가 살면서 가장 즐거운 날이 매년 11월 첫 주 경암학술상 시상식에 참석하는 날이다. 학문의 발전과 문화증진에 큰 공적을 남긴 분들의 노고에 조금이나마 보답한 것에 큰 보람을 느낀다. 수상자들이 미래에도 우리나라는 물론이고 세계와 인류의 번영에 더 이바지할 것으로 기대되니 가슴이 벅차다. 국제적으로도 더 많이 알려지고 발전했으면 좋겠다.”
―경암교육문화재단이 하는 다른 사업은.
“당대 최고인 각 분야 수상자들을 강연자로 모시는 학술강좌를 수시로 개최하고 있다. 일반시민도 참여해 관심과 큰 호응을 이끌어 내는 계기가 됐다. 이 같은 수상자들과 석학들의 지도로 매년 고교생을 대상으로 과학적 탐구와 열정을 직접 체험할 수 있게 하는 ‘경암 바이오유스 캠프’도 운영하고 있다. 경암재단이 주최하고 한국·분자세포생물학회가 주관해 매년 7월 이틀간 6개 대학에서 열린다. 후속 프로그램인 ‘경암 바이오유스 실험체험’과 ‘경암 바이오유스 멘토링’ 행사도 생명과학에 대한 이해와 흥미를 고취시키는 계기가 됐다. 미래창조과학부와 함께 고교생과 대학생을 상대로 한 ‘전국학생 설계경진대회’도 매년 개최하고 있다. 지난해에는 대학·고교 등 170개 팀이 참가했다. 노벨상 수상자 초청 강연도 가끔 한다.”
―경암재단이 새 건물을 갖고 출범한다는데.
“부산 최도심인 서면에 대형 건물을 갖추게 되면 각종 문화사업을 할 것이다. 2개 동으로 앞에는 11층, 뒤에는 5층 건물이다. 세계적인 건축가인 부산 출신 승효상 건축가가 설계했다. 콘서트장과 강연장을 갖춰 각종 음악공연 등으로 부산의 새로운 문화공간 역할을 해 시민들에게도 도움을 주고 싶다. 국제적 연사를 초청해 수준 높은 강연도 할 것이다. 지난해까지 경암학술상 시상식은 해운대 누리마루 하우스에서 열렸지만 올해부터는 여기서 개최해 기대가 크다.”
―아호 경암(耕巖)은 무슨 뜻인가.
“‘돌과 자갈밭을 갈아 옥토를 이루듯 열심히 살라’는 뜻이다. 부산 출신으로 문단의 큰 별인 요산 김정한 선생님이 지어주셨다. 1970년대 중반 무렵 오징어 가공공장과 금형 사출 공장들을 경영할 때 김 선생님을 만났다. 선생님은 문학적 성과도 대단하지만 성품이 바르고 인품이 높아서 모든 사람의 존경을 받고 있었다.
아직 젊으니 아호 작명을 사양하겠다는 내 말에 선생님은 ‘그렇다면 미리 지어놓았다가 다음에 쓰라’며 이 아호를 지어 주셨다. 선생님은 사업을 한답시고 부산 곳곳을 부지런히 돌아다닌 제 행동을 알았는지 ‘자네는 성격이 지독하니까 자갈밭도 열심히 갈 수 있을 것’이라고 하셨다. 선생님과의 인연은 1996년 89세의 나이로 타계할 때까지 이어졌다. 이 아호는 갈수록 내 마음에 들고 지금까지 이렇게 살려고 노력했다.”
―어렸을 때 성장 과정과 첫 취업 등을 설명해 달라.
“일본의 식민통치를 받던 1923년 당시 행정구역으로 경남 동래군(현 양산군) 철마면 송정리에서 태어났다. 호적은 1924년으로 돼 있는데 당시에는 출생신고가 이처럼 늦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8남매를 먹여 살리느라 부모님의 고생이 이만저만 아니었다.
네 신발은 네가 만들라고 일러주신 부모님 가르침에 따라 적어도 내가 신을 짚신 정도는 스스로 만들어야 했다. 공부하는 것보다 모내기 일손을 거들고 추수하는 들판에서 짚단을 나르는 것이 더 중했다.
초등학교(당시는 보통학교)는 11세가 돼서야 들어가 17세에 졸업했다. 초등학교 때 직접 닭을 키워 달걀을 낳으면 팔아 당시 50전이던 학교 월사금을 낼 수 있었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에 가겠다는 말은 하지도 못하고 중학교 교복을 입고 다니는 친구들이 너무나 부러웠다. 친구 교복을 빌려 한번 입어보긴 했지만 아쉬운 마음을 달랠 수는 없었다.
어떻게 하다 부산의 광복동에 있는 일본인이 경영하는 다이고쿠 난카이도(大黑南海堂) 약품도매상회사에 취직하는 행운을 얻었다. 판매와 경리업무를 했다.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한 정직하고 성실하게 열심히 최선을 다해 일했다. 어쩌다 일거리가 쌓이거나 골치 아픈 난제에 부딪히는 일이 있어도 불평하거나 회피하려 하지 않았다. 내 모든 심혈을 기울여 어쨌든 해결하고자 노력했다. 이런 조건에서 일할 수 있게 된 행운에 감사하는 마음을 한순간도 잊지 않고자 마음을 다잡았다. 이렇게 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인정을 받았고 중요한 일을 맡게 됐다.”
― 어머니에 대한 기억은.
“약품상에서 근무할 때 일본군대에 징병으로 끌려갔다. 고향에서 부산 징집장소까지 어머니는 다 해진 고무신을 신고 한나절을 걸어서 오셨다. ‘일본사람들을 위해 싸우다 죽고 나면 개죽음보다 못하니 무조건 살아 돌아오라’고 내 옷소매를 잡고 눈물을 흘리셨다. 새벽 일찍 집을 나서 쉬지 않고 걸어오신 어머님을 위해 설렁탕 한 그릇 사드리지 못한 그날의 내 신세가 서럽기만 해 기억에 오래 남는다. 반드시 돈을 벌어 어머니를 잘 모시겠다고 결심했지만 어머니는 51세로 몇 년 뒤 돌아가셨다. 해군으로 당시 해군 진해기지로 배치돼 잠수함 훈련을 받는 등 근무하다 일본의 항복선언으로 고향으로 돌아왔다.”
―사업은 어떻게 성공했나.
“한창 일할 때는 밤 12시에 자고 통행금지가 풀리는 오전 4시에 일어나 사업에만 매진했다. 약품 도매상부터 미곡상, 정미소, 양조장, 수산물 가공업, 봉제공장, 플라스틱 사출 공장 등 온갖 사업에 뛰어들었다. 내세울 만한 업체는 금형 사출업체인 태양사다.
주로 스푼, 포크, 나이프 등 서구식 스테인리스 제품을 만들어 수출했다. 이 식기세트들은 품질을 인정받아 독일, 프랑스, 영국 등 유럽 전역과 미국으로 팔려 나갔다. 160년의 전통을 자랑하는 독일의 WMF 사에도 우리 제품을 납품할 정도였다.
국내 처음으로 거위털 점퍼를 만들어 선풍적인 인기를 모으면서 봉제업도 성공을 거뒀다. 성장이 빠른 건설업은 하지 않았다. 당시는 관급 공사가 많아 공무원에게 줄을 대야 하는 것이 싫었기 때문이다. 돈이 있다는 이유로 내밀던 정·관계의 수많은 유혹의 손길을 거부하고 오로지 한길로만 나갔다.
개인소득으로 10여 년간 부산에서 1위를 차지했고 성실 납세자로 등록됐다. 음악가 출신인 아내는 눈을 감으면 브람스, 베토벤 음악이 들린다는데 나는 꿈을 꾸면 내 집 정원에 돈이 쫙 깔리는 게 보였다. 저걸 벌어서 내 것으로 해야 할 텐 데라는 생각이 들었다.”
―부부는 어떻게 만났나. 요즘 진 이사 활동은.
“지난 1993년 초등학교 교사였던 첫 부인과 사별하고 주변의 권유에 따라 1995년 아내와 결혼했다. 나와 아내는 원래 먼 친척 사돈 간이었다. 진 이사는 ‘훌륭한 분이 있다고 해서 만났고 회장님의 외로운 부분을 제가 잘 감싸주고 위로해 드릴 자신이 있어 결혼했다’고 말했다. 경암교육문화재단 설립은 아내가 적극 권유해서 이뤄졌다.
미국, 유럽에서 오랫동안 유학했던 아내는 미국의 록펠러 재단이나 카네기 재단의 사례를 들며 나를 설득했다. 아내는 부산시청과 교육청을 오가며 설립인가를 받는 데 많은 고생을 했다. 경암학술상이 이처럼 성장한 데는 아내의 역할이 매우 컸다.”
진 이사는 경희대 음대(성악 전공)를 졸업한 뒤 하버드대학원에서 음악분석학과 현대음악 연주법을,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 음악원과 빈 음악원에서 수학했다. 성심여대(현재 가톨릭대) 교수, 컬럼비아 사범대학 성악 강사 등을 역임했다. 미국에서 10회 이상 독창회를 가지기도 했던 진 이사는 그러나 송 회장과 결혼 이후 경혜여고 및 경암교육문화재단 운영에 전념하고 있다.
―구두쇠란 별명을 어떻게 생각하나.
“나는 근검절약과 솔선수범이 기업인이 갖춰야 할 가장 큰 덕목이라고 생각한다. 지금도 신발장에는 구두가 두 켤레밖에 없다. 수많은 공장을 운영했지만 공장을 가동하지 않으면서 전기를 켜두는 것은 결코 용납하지 않았다. 요즘도 나는 사람이 없을 때는 무조건 소등한다. 메모지는 이면지를 사용한다. 해외여행도 거래처 방문을 위해 독일과 일본 등을 가봤을 뿐이다.”
송 회장은 아침에는 과일주스나 과일, 야채죽을, 점심·저녁에는 김치, 두부 조림, 된장, 각종 나물, 콩자반, 생선조림이 대부분인 토종한식을 여전히 즐겨 먹는다. 기자가 인근 송 회장의 아파트로 옮겨 취재를 겸해 점심 식사를 할 때는 진 이사가 추어탕을 끓여서 내왔다. 몸에 밴 예의와 겸손은 막내아들뻘 기자를 맞아서도 여전했다.
ant735@munhwa.com
□ 조진수 한양대 교수 - “항공산업이 선진국진입 척도…‘포니神話’ 하늘서도 열어야”
▲ 한국항공우주학회장을 역임한 조진수 한양대 기계공학부 교수가 서울 성동구 한양대 공업센터 연구실에서 문화일보와 인터뷰 도중 풍동시험기와 비행기 모형을 이용해 공기가 비행기에 작용하는 원리를 설명하고 있다. 조 교수는 KF-X 사업이 순탄하게 성공할 것으로 예상했다. 김낙중 기자 sanjoong@
노후화된 F-4와 F-5, 7년 후면 퇴역을 시작할 F-16 전투기를 대체할 F-16 알파 프리미엄급 전투기를 개발하는 대형 프로젝트. 익히 알려진 ‘KF-X 사업’이다. 연구·개발(R&D)비용만 6조 원, 양산비용은 16조∼17조 원 등 20조 원 이상이 투입되는 이 사업이 본격적으로 추진 궤도에 올랐다. 1999년 항공우주산업개발정책심의위에서 처음 논의된 후 갑론을박 속에 답보 상태를 면치 못했던 점을 고려하면 2026년 6월 완료가 목표인 이 사업의 성패에 당사자인 대한민국 공군이나 영공 수호를 믿고 있는 국민의 관심이 커지는 것은 당연할 터이다. 오는 7월에는 KF-X의 ‘눈’이자 이에 탑재될 핵심 장비 중 하나인 다중위상배열(AESA) 레이더 1단계 모형이 우선협상대상자로 선정된 한화그룹 방위사업전문기업인 한화탈레스의 독자 개발로 선보인다. 내년 6월이면 1차 시제품이 나올 것으로 전망된다. 한국항공우주산업(KAI)과 한국항공우주연구원(KARI)은 지난 22일에는 KF-X의 기체형상 설계를 위한 풍동시험에도 들어갔다.
KF-X 사업의 추진을 지켜보면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민간 전문가 한 명이 있다. 학창시절까지 포함해 40년 가까이 항공산업을 연구해온 조진수(60·전 한국항공우주학회(KSAS) 회장) 한양대 기계공학부 교수다. 지난 16일 서울 성동구 행당동 한양대 공업센터 연구실에서 그를 만났다. 그에게 인터뷰를 요청한 것은 KF-X 사업의 의미, 전망부터 항공산업의 중요성 및 답보 상태를 보이는 돌파구를 어떻게 찾을 것인지 독자들에게 제시하고 싶어서였다.
기자를 만난 조 교수는 “한동안 인터뷰는 정중히 거절했다. (이젠 다 지어버렸는데) 제2롯데월드 안전성 문제 제기에 따른 (세간의 시선도) 있었고…. 나이가 들자 사회 이슈·현안에서 좀 멀어지고 싶은 생각도 있었다”고 했다.
고심 끝에 인터뷰에 응한 것은 항공산업에 대한 무한한 애정이 발로됐기 때문일 터이다. 1976년 출고 후 세계 5대 자동차 생산국 반열의 발판이 된 ‘포니 신화’를 앞으로는 하늘에서 열어야 한다고 강조한 게 대표적이다.
평소 ‘항공산업이 신성장동력산업이며 선진국으로 진입하는 척도’라는 점을 주창해온 그는 이날 오후 시간을 거의 할애해 가며 조목조목 항공산업의 비전부터 개발에 얽힌 잘 알려지지 않은 뒷얘기까지 전문가다운 ‘혜안’을 이해하기 쉽도록 비유를 섞어가며 풀어냈다.
―KF-X 사업이 ‘우리가 전투기 자체 개발능력이 있느냐’ ‘거액을 들여 봐야 수출 가능성 등 경제성이 있느냐’ 등 논란 속에 장기간 표류하다가 겨우 추진으로 결론이 났습니다.
“타당성 검토에만 11년이 걸렸어요. 가정이지만 11년 전에 시작했으면 벌써 나왔겠죠. 그런데 돌이켜 생각하면 지금 시점에서 최고 성능의 비행기를 만들 수 있다는 의미로도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솔직히 공군 입장에서 보면 전투기를 직접 외국에서 사오는 게 나을지 몰라요. 성능을 보장받을 수 있고 값도 더 쌉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KF-X 사업을 독자 개발키로 한 것은 단순히 전투기 대수를 늘리겠다는 양적인 면을 떠나 질 좋은 비행기를 확보하겠다는 면에서 공군이 양보했다고 봐도 됩니다. 공군이 국산 항공기를 지지했다는 점은 괄목할 만합니다. 기본적으로 개발을 싫어하고 구매에 매달렸는데 항공산업 발전을 위해 희생을 감수하겠다고 나온 것이죠. 앞으로 유지·보수비용이 문제인데 외국에 맡기지 않고 이 역시 우리가 직접 하는 게 훨씬 낫습니다.”
―KF-X 사업의 성공 가능성은 어떻게 보십니까. 성공 시 산업 파급효과는 61조 원, 기술 파급효과는 41조 원, 고용창출 및 상생협력 파급효과를 56만 명가량 기대할 수 있다고 했는데요.
“미국, 유럽, 일본 등 선진국의 공통점은 모두 항공산업을 발전시킨 나라들이란 점입니다. 우리도 선진국에 진입하기 위해서는 항공산업을 더 발전시켜야 합니다. 예상보다 개발비용이 더 들어가고 기술력이 부족하다 해도 국제적인 협력 형태를 취하면서 국내 주도로 KF-X를 개발해야 한다고 강조한 배경입니다. 전 우리 수준으로 볼 때 성공 가능성을 100% 단언합니다. 국산 부품을 반영하는 측면에서 목표보다 떨어질 수는 있겠지만 ‘닭이 병아리 될 일’은 없을 거란 얘기지요. 11년 동안 늦어진 것도 다른 각도에서 보면 사업 추진의 내적 대응능력을 다지는 기회가 됐습니다. 반대파 논리에 대응하려다 보니 장점도 생긴 거죠. F-15, F-16(피스브리지) 사업 등을 보면 공군도 과거와 견줘 많이 발전했습니다. 이 사업에서 제일 중요한 게 시험평가인데 합동참모본부의 동향을 보면 이를 중시하는 분위기가 나타납니다.”
―국민이 우려하는 방산비리 가능성은 없는 건가요.
“과거에 보면 방산비리가 시험평가 과정에서 발생했습니다. 인력도 전문가도 많지 않다 보니 비전문가를 대충 세워 뒷돈 먹고 하면서 비리 연결고리가 형성됐던 거죠. 성적이 안 되는 걸 통과시키는 입학부정인 셈이죠. 요즘엔 많이 개선되는 징후가 보입니다. 모두 언론에서 정밀하게 비판하고 탐사보도를 한 덕분입니다. 평가위원도 외부에서 많이 데려오고 있고요, 평가가 세분화·전문화되고 있습니다. 예전엔 전문가를 데려와도 전기 전공을 기계 전공에 넣는 등 비상식적인 일이 발생하곤 했지요.”
―핵심 장치인 AESA 레이더를 둘러싸고 말이 많았는데요. 미국이 핵심 기술 이전을 거부해 전체 사업이 좌초 위기에 놓이기도 했습니다.
“한 가지 확실한 건 AESA 레이더는 전체 사업 개발의 일부일 뿐이라는 점이에요. 우리가 개발하는 건 체계이지 않습니까. 그런데 일부분만 너무 두드러졌어요. 모든 R&D는 시간이 걸립니다. 설계, 부품 시스템제작, 조립, 테스트를 거쳐야 시제기가 만들어집니다. 그때까지 이 레이더가 안 나오면 시스템을 외국에서 직접 구매해야 하는데, 대부분 수출승인품목에 걸려 있고 블랙박스도 들여와야 해요. 그렇게 하더라도 들여오는 게 맞지, 중단하는 건 옳지 않습니다. 일단 시제기를 띄우고 양산되기 전까지 2∼3년 시간이 있으니 그때 가서 논의해도 늦지 않습니다. 중요한 건 시제기가 적기에 나와서 시험평가를 통해 제때 양산에 들어가야 한다는 점이에요. 무기는 수령 계산을 거쳐 전력화 예상 시기를 도출할 수 있는데 이게 공백이 생기면 안 되잖아요.”
―KF-X 사업의 궁극적인 목표는 무엇인가요. 북한의 대공 억지력인가요.
“북한은 대상이 아니에요. 일본, 러시아, 중국 때문에 보유하려는 것이죠. 북한은 평소에도 전투기가 뜨지 않습니다. 유지·보수훈련도 안 돼 있는 엉터리죠. 그러나 일본, 러시아, 중국이 우리의 적이 아니라고 누가 보장합니까.” (이와 관련해 조 교수는 김태영 전 국방부 장관의 발언이 마음에 와 닿았다고 덧붙였다. 김 전 장관이 모 포럼에서 “공군이 왜 쓸데없이 비행기를 사는가. F-35처럼 한 해 1000억 원을 들여 왜 사느냐”고 질문하자, “우리도 ‘원 펀치’를 갖고 있어야 상대가 덜 때릴 거 아니냐”고 했다고 한다)
질문 방향을 KF-X에서 전체 항공산업 분야로 확장했다. 국내 경제 산업의 차세대 성장 전망 분야에서 왜 항공산업이 중요한지다. 우리나라는 세계 12번째 초음속전투기 개발국이자 11번째 헬리콥터 개발국이다.
하지만 조 교수는 “아직은 항공산업 규모가 미국의 60분의 1, 일본의 5분의 1 수준에 머물고 있다”고 했다. 어깨에 죽비를 자청하는 분발이 필요한 대목이다. 항공산업 경쟁력 역시 매출액 기준으로 전 세계에서 14위 수준이다.
―항공산업의 관심, 투자 비중을 높여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항공산업은 노동집약적·기술집약적 산업입니다. 항공기 1대를 제작하는 데 투입되는 엔지니어, 설계, 조립, 인력 규모가 매우 큽니다. 사람이 모두 손으로 조립하죠. 자주국방에 돈을 많이 쓰는 우리나라 같은 경우 특히 개발하면 회사 분할처럼 다양한 분야에 영향을 미치는, 스핀오프(spin-off)의 장점이 있습니다. 단점은 자본이 많이 들고 투자해서 얻을 수 있는 시간이 오래 걸리며 진입 장벽 역시 높다는 점입니다. 장기적인 대규모 금융투자, 완성기 개발업체 및 우수한 부품사업이란 기반이 뒤따라야 합니다. 그래서 민간은 망설일 수밖에 없고, 정부 의지가 제일 중요합니다. 정부가 의지로 자본을 뒷받침하고 민간 리스크(위험)를 줄여 줘야 합니다. 이스라엘, 미국, 일본, 중국, 브라질, 캐나다만 봐도 정부가 전폭적으로 지원합니다. 우리나라도 과거 10년간 군용에선 잘했는데 민수기 분야에서는 그렇지 못했어요.”
―항공산업 개발 역사에서 이정표, 기념비적인 순간도 있지 않나요.
“아무래도 T-50 고등훈련기를 제작했을 때겠죠. 제작한 주역들이 같이 대학을 다닌 동기이자 공군, KAI에 종사한 분들인데요. 일부에선 ‘록히드마틴 것 아니냐’고 했는데 우리 고유 모델의 완제기이자 고등훈련기이면서 경공격기로도 쓸 수 있어 의미가 크죠. 이 덕분에 항공산업 종사자나 연구진에 대한 사회적 대우와 인식이 현격하게 개선된 점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성과물을 보여주니 달라졌다고 해야 하나요. 항공산업 선배들이 완제품도 없는 상황에서 후학들에게 항공공학 공부를 지속해서 시켜 인적 토대를 갖춰 놓은 게 밑거름이 됐습니다. 1950년대 척박하던 시기부터 조선, 기계, 항공산업을 육성하기 위해 각 대학 공과대학에 관련 분야 학과를 개설하려던 노력도 빼놓을 수 없겠지요. 돌이켜 보면 정말 다행이란 생각이 듭니다.”
조 교수는 연장 선상에서 항공산업이 지금의 수준에 이르게 한 ‘숨은 조력자’로 공군과 함께 민간 분야에서는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을 꼽았다. 공군이 항공 시험평가, 전산 분야에서 미국 공군 등의 새 시스템을 지속해서 도입했고 이 회장은 항공산업 불모지였던 1980년대, 항공기 엔진 국제공동개발사업협약 등을 통해 산업 육성에 강한 의지를 보였다고 했다. 이 회장이 조성한 ‘항공붐’은 현대, 대우 등 다른 기업의 진출도 촉발했다.
조 교수가 보는 항공산업 발전의 빗장을 풀기 위한 열쇠는 무엇일까. 그는 “KT-1 기본훈련기, 수리온 기동헬기, 4인승 고정익 항공기 KC-100(나라온) 등의 지속적인 수출을 토대로 세계 시장에 진출하는 한편, KF-X, 소형 무장헬기, 국산 엔진, 비즈니스제트기 등의 개발사업을 적극적으로 추진해야 한다”고 말했다.
―관심을 기울여온 무인기에 대해 좀 더 설명해 주시죠.
“우리나라에서 처음 무인기를 준비했던 이들 중 한 명이 접니다. 그런데 무인기 산업 전반이 주춤거리고 있어요. 원인은 돈이 잘 안 되기 때문이죠. 14년 전 무인기 대회를 만들 때 사람이 제일 중요하다는 생각에 무인기 공부하는 학생을 많이 키우려 했던 기억도 떠오르네요. 결과적으로는 우리가 못했다기보다 중국이 정말 잘했습니다. 무인기 발전 방향에 대해 우리는 군사용·정찰용으로 설정했는데 중국은 ‘토이’로 정했죠. 우리는 고가 제품에, 중국은 저가 제품에 각각 초점을 맞춘 셈인데 중국이 제조능력도 좋지만, 가격 경쟁력 면에서 쫓아갈 수가 없게 됐어요.”
―비즈니스제트기도 보다 깊숙이 관여한 것으로 아는데요.
“10년 전 국토부(당시 건설교통부)에 VLJ(Very Light Jet·소형제트기) 인증을 건의했어요. 일본 혼다의 자회사인 혼다에어크래프트컴퍼니가 지난해 8월에 출시한 비즈니스 제트기인 ‘혼다젯’과 같은 겁니다. 민수항공기(민수기)는 군용기와 달리 밖으로 나가야 하는 거라 국제인증이 필요한데 주로 이용하는 게 미국연방항공국(FAA), 유럽항공안전기구(EASA) 인증 제도예요. 두 곳의 인증을 받아야 국제적 기술력을 인정받습니다. 그런데 인증 건의에 대해 정부에서 돈이 부족하다며 프로펠러기로 정해 버렸어요. 실기(失期)한 거죠. 지금이 제트기 시대인데 5억 원짜리 프로펠러기를 만들어 봐야 쓸모가 있을까요. 혼다젯은 이미 판매가 세 자릿수 넘게 신장했다고 하네요.”
민수기를 살릴 기회는 한 번 있었다고 했다. 7년 전에는 국토부 의뢰를 받아 비즈니스제트기의 필요성을 조사·연구했다. 보고서에는 정찰기, 해상초계기, 골프장을 이용하는 자가용 비행기로도 쓰일 만큼 용도가 많다는 점과 상업용 완제기 시장에 진입하기 위해서는 가장 적은 돈으로 리스크를 줄여가며 할 수 있는 게 비즈니스제트기라는 점을 담았다. 그런데 산업통상자원부(당시 지식경제부)에서 터보프롭(배기가스의 추력으로 프로펠러를 돌리는 방식)을 해야 한다고 나서는 바람에 사장됐다고 한다. 조 교수는 “터보프롭은 90인승이라 우리나라가 시작하기엔 크고, 시장성과 기술성도 맞지 않았다”며 “결국은 공무원들 스스로 (민수기 활성화) 기회를 놓쳐 버렸는데 이제 와 불씨를 살리려니 힘들다”고 애석해했다. 수출 부진을 타개하기 위해서라도 준비했어야 할 아이템 중 하나가 민수기인데 항공 분야에서 포니 같은 국산 차 신화를 창출하려는 시도가 이뤄지지 않고 있다는 점도 지적했다.
▲ 조진수 한양대 기계공학부 교수는 노동·기술집약적인 데다 고부가가치 특성이 있는 항공산업 육성을 위해 이제라도 국가 차원에서 발전 전략을 제대로 만들고 실행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낙중 기자 sanjoong@
―중국이 항공강국으로 떠오르고 있고, 일본도 한참 앞서고 있는데 시사점은 뭔가요.
“중국은 이미 미국의 반을 쫓아갔어요. 땅이 넓어 내수 능력만으로 국제 인증 없이 비행기를 띄울 수 있는데 이미 100인승 터보팬 비행기가 운항에 들어갔습니다. 내년부터는 국내선에 투입합니다. 이런 비행기가 전 세계를 돌아다니면 기술이 금방 발전해요. 설계, 운항, 시험평가 기술의 노하우가 쌓이고 함께 상승합니다. 일본은 미국 항공산업을 따라가면서 복합재료산업의 특성이 있는 항공기술력 분야에서 1등에 올라섰습니다.
보잉, 에어버스에 납품도 많이 합니다. MRJ(Mitsubishi Regional Jet)라는 70인승을 국내에서 띄운다고 합니다. 오키나와(沖繩)에서 홋카이도(北海道)까지 2000㎞를 운항하는 거죠. 혼다젯 5인승은 이미 인증을 받았고요. 상업용 완제기 시장에 뛰어든 일본은 ‘일제 프리미엄’도 있어 성장 속도가 더 빠를 겁니다. MRJ 1대에 300억 원가량인데 300대 계약하면 9조 원 아닙니까. 1대만 놓고 봐도 우리의 T-50보다 더 비싼데 수요는 훨씬 큽니다. 혼다 창업주인 혼다 소이치로(本田宗一郞)가 오래전 자동차 산업에서 비행기 산업으로 탈바꿈하겠다고 했는데 모두 고부가가치 산업이란 점에 주목한 것이죠. 일본은 60년 전 터보프롭 개발을 시작했고 성공하진 못했지만, 관련 엔지니어들을 신칸센으로 돌린 뒤 다시 로켓, F-1, F-2에 성공한 후 민수기로 순환시켰는데 엔진 원천기술 확보의 동력이 됐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지금으로선 아무것도 찾아볼 수 없어요. 항공산업의 반면교사는 멀리 있지 않아요. 바로 이웃에 있죠.”
―그렇다면 정부가 2020년에 정한 항공선진국 진입 목표는 실현 가능한 건가요.
“군용기는 가능한데 민수기는 이런 맥락에서 준비가 안 됐죠. 전 세계 시장의 80%가 민수기인데 정부나 KAI 둘 다 움직이지 않고 있어요. 민간 부문에서 자생적인 회사가 있긴 한데 규모의 경제 측면에서 미흡합니다. 대한항공이 무인기를 특화하려고 하는 것 외에 다른 회사의 자체 기술 확보 노력도 없습니다. 항공정비산업(MRO) 전망도 지정학적 위치, 높은 인건비 때문에 밝지 않습니다. MRO에 치중하기보다 민수 완제기, KF-X 사업을 계기로 엔진 기술 확보 쪽에 신경을 써야 할 것으로 보입니다.”
조 교수는 “항공 종사자들에게는 기술집약적 산업을 한다는 자부심이 있다”고 했다. ‘자유도(Degrees of Freedom)’를 예로 들었다. 힘의 방향을 기준으로 앞뒤로만 움직이거나 양옆으로 움직이거나 뒤집어져서 움직이는 등 탈 것의 자체 설계와 조종장치 설계의 기본 척도로 물리학·항공역학 용어다. 비행기와 잠수함은 궤도열차(1), 자동차·배(3)를 앞지르는 6에 속한다. 공중에서 세 방향의 병진운동과 세 방향의 회전운동을 해야 하는 게 비행기다. 그만큼 구조역학적·공기역학적·항공역학적 측면에서 최첨단 기술을 보유하지 않으면 발전할 수 없는 분야라고 했다. 그가 왜 항공산업에 매력을 느껴 평생을 동분서주하는지 조금 더 가슴에 와 닿았다. ◎
인터뷰 = 이민종 차장(경제산업부) horizon@munhwa.com 정리 = 이근평 기자 istandby4u@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