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없음

盧泰愚 전 대통령(1932~2021)

상림은내고향 2021. 12. 13. 17:05

월간조선 2021 12월 호

盧泰愚 전 대통령(1932~2021)

민주화의 물꼬 트고 北方정책·복지 확충 등 업적

-“독재와 독선, 역사의 두 수레바퀴가 지나간 자국 밑에서 피어난 질경이꽃”(이어령)

 
 

노태우(盧泰愚) 전 대통령이 10월 26일 서거(逝去)했다. 향년 89세. 공교롭게도 군부(軍部) 출신 첫 대통령(박정희 전 대통령)과 마지막 대통령이 같은 날 세상을 떠났다.

고인은 1932년 12월 4일 노병수와 김태향 사이에서 2남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노병수는 독학으로 초등학교를 마친 후 면서기로 일하다가 고인이 다섯 살 때 교통사고로 사망했다. 후일 ‘베사메 무초’를 즐겨 부르고, 지휘관 시절 21연대가, 제9공수여단가, 백마혼(9사단장 시절) 등의 군가(軍歌)를 작사·작곡한 고인의 음악 실력은 부친으로부터 이어받은 것이었다.

경북중학교 5학년 재학 중 6·25전쟁이 일어나자 고인은 학도의용군으로 자원입대했다. 이 시절 동료 중에는 대구공고 출신 전두환(全斗煥)이 있었다. 대구대(현 영남대) 재학 중 자원입대한 김수한 전 국회의장이 이들의 훈련소 중대장이었다.

 

1952년 육군사관학교(11기)에 입교한 것은 고인의 운명을 바꾸었다. 11기생들은 4년제 정규 육사의 1기라는 자부심으로 뭉쳐 있었는데, 이들 중 영남 출신으로 특히 친하게 지내던 영남 출신 전두환·노태우·김복동·최성택·백운택 등은 재학 시절 오성회라는 친목 모임을 만들었다. 혹자는 이를 하나회의 뿌리로 보기도 한다.

1956년 육사 졸업 후 받은 첫 보직은 제5사단 27연대 소대장. 당시 사단장은 박정희(朴正熙) 준장이었다. 박정희 장군은 고인을 비롯한 육사 11기생들을 부패한 군부를 개혁할 신세대 장교들로 여기고 총애했다. 고인은 5·16혁명 후에는 최고회의 연락장교로, 1970년대 후반에는 경호실 작전차장보로 박정희 전 대통령과의 인연을 이어갔다. 5·16 이후 6년간 방첩대(후일 국군보안사령부)에서 근무하면서 정치 감각을 익히기도 했다.


‘5共의 2인자’로 은인자중

이후 고인은 20사단 1연대 3대대(재구대대) 대대장 등을 거쳐 1970년 육군참모총장 수석부관(대령)이 됐다. 전임자는 육사 동기인 전두환 대령. 그 후에도 두 사람은 경호실 작전차장보, 국군보안사령관, 민주정의당 총재, 대통령 등의 직책을 인수인계했다.

박정희 대통령이 시해(弑害)된 후인 1979년 12·12사태를 계기로 고인은 역사의 전면에 나섰다. 당시 9사단장으로 경복궁 30경비단장실에 모인 장성 가운데 하나였던 고인은 예하 29연대를 출동시켜 중앙청을 점령하도록 했다. 이후 고인은 수도경비사령관, 국군보안사령관을 맡으면서 ‘신군부의 2인자’로 부상(浮上)했다.

전두환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 상임위원장이 대통령으로 취임하기 직전인 1980년 8월 말 보안사 안가(安家)에서 노태우 보안사령관을 만난 김종필(金鍾必) 전 총리는 “내가 보기엔 당신이 2인자인 듯한데, 권력을 장악한 1인자는 2인자를 소외하거나 무력화(無力化)하고 싶어 하는 속성을 가지고 있다”면서 “때가 올 때까지 1인자를 잘 보좌해야 한다. 억울한 일이 있어도 참고 넘겨야 한다”고 조언했다.

JP의 이 충고를 고인은 그대로 실천했다. 고인은 5공(共) 시절 정무 제2장관, 체육부 장관, 내무부 장관, 서울올림픽조직위원장, 민주정의당 대표 등을 거치는 동안 장세동 안기부장 등의 견제를 받았지만 은인자중(隱忍自重), 결국 전두환 대통령의 지명을 받아 1987년 6월 민정당 대통령 후보로 선출되었다. 하지만 민정당 대통령 후보 지명대회는 ‘직선제(直選制) 개헌’을 요구하는 전국적인 시위와 매캐한 최루가스에 빛이 바랬다. 군(軍) 출동설이 나오는 긴박한 상황에서 고인은 직선제 개헌 등을 포함하는 6·29선언을 발표했다. 전두환 대통령과의 교감 아래 이루어진 일로 이를 통해 두 사람은 파국(破局)을 막고 민주화로 가는 물꼬를 텄다.

그해 12월 대선(大選)에서 고인은 ‘위대한 보통 사람의 시대’를 캐치프레이즈로 내걸고 ‘군사정권의 2인자’라는 공격을 막아냈다. 김영삼(金泳三)·김대중(金大中) 두 야당 지도자의 분열에 힘입어 고인은 36.6%의 득표로 대통령에 당선됐다. 1972년 유신 선포 이래 처음으로 국민이 직접 뽑은 대통령이었다.


‘물태우’ 소리 들으며 민주화 이행

1988년 대통령으로 취임한 고인은 군 출신답지 않은 유연함으로 민주화라는 시대의 요구에 순응했다. 분출하는 노동쟁의와 학생시위 속에서도 가급적 강경 대응을 자제했다. ‘물태우’라는 별명을 얻은 것도 이때였다. 하지만 고인은 “참용기란, 참고, 용서하고, 기다리는 것”이라며 인내했다. 그러면서도 문익환 목사나 임수경의 불법 방북, 전교조 문제, 불법 노동쟁의에 대해서는 단호하게 대처했다.

 

여소야대(與小野大) 상황 속에서 고인은 ‘5공 청산’이라는 야당의 요구를 받아들여야 했고, 그 과정에서 오랜 친구인 전두환 전 대통령을 백담사로 유배 보내기도 했다. 1990년 1월 2일 김영삼 통일민주당 총재, 김종필 신민주공화당 총재와 함께 결행한 3당 합당은 그런 상황을 타개하려는 담대한 시도였다. 고인은 후일 “여소야대를 체험하면서 한국의 민주주의를 지속적으로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대한민국의 헌법정신에 충실한 세력이 대동단결해야 좌파 세력의 도전을 견제하면서 나라를 안정적으로 운영해갈 수 있다고 생각했다”고 술회했다. 하지만 3당 합당으로 탄생한 민주자유당 후보로 정권을 잡은 김영삼 대통령은 ‘문민(文民)정부’를 내걸며 과거를 부정했고, 민자당은 5년 만에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이러한 정치적 진통 속에서도 국위(國威) 향상과 국민의 삶의 질(質) 향상이라는 점에서는 노태우 정부는 괄목할 만한 업적을 많이 남겼다. 88서울올림픽을 성공적으로 치름으로써 대한민국의 성취를 세계에 알렸고, 이는 북방외교의 성공으로 이어졌다. 소련·동구 사회주의권 붕괴라는 국제적 흐름을 활용해 남북기본합의서 합의, 남북한 유엔 동시가입 등을 이끌어냈다. 경제·사회적으로는 토지공개념제 도입, 주택 200만 호 건설, 국민의료보험 및 국민연금제도의 확대, 중학교 의무교육 확대, 범죄와의 전쟁 등의 실적을 남겼다. 경부고속전철(KTX)·인천국제공항·서해안고속도로 착공, 자유로 건설 등 과감한 SOC 투자가 이루어졌다. 고인의 재임 기간 중 임금은 115% 올랐고, 1인당 GDP는 3510달러(1987년)에서 8001달러(1992년)로, GDP는 1479억 달러(1987년)에서 3555억 달러(1992년)로 늘었다.


“정상의 영욕을 역사의 길목에 묻고…

하지만 1993년 2월 퇴임 이후의 고인의 삶은 편치 못했다. 1995년 10월 비자금 사건으로 구속되었고 이듬해에는 12·12와 5·17이 뒤늦게 ‘군사반란’으로 규정되면서 ‘반란수괴’로 법정에 섰다. 이 두 사건으로 1997년 4월 대법원에서 징역 17년, 추징금 2688억원을 선고받고 복역 중 그해 12월 사면되었다. 2000년대 초부터 전립선암, 기관지 질환, 소뇌위축증 등으로 고생했으며, 지난 10여 년간은 거의 병상에서 보냈다. 2011년 《노태우회고록》(전 2권, 조선뉴스프레스)을 펴냈다.

고인이 서거하자 문재인(文在寅) 정부는 논란 끝에 국가장(國家葬)을 허용했다. 하지만 10월 30일 영결식에서 김부겸 국무총리는 “노태우 대통령이 우리 현대사에서 지울 수 없는 큰 과오를 저지른 것은 움직일 수 없는 사실”이라고 했고, 외교부는 일본·중국 등 각국에서 보내온 조전(弔電)을 유족들에게 전달하지 않았다.

노재봉 전 총리는 추도사에서 “6·29선언은 이승만 대통령의 건국이념, 박정희 대통령의 산업화 성공, 전두환 대통령의 흑자경제 성과로 이어진 한국 사회의 구조의 변화의 길을 확인하는 선언이었다”고 평가하며 “‘군 출신 대통령은 내가 마지막이야’라고 말씀하셨던 배경, 각하께선 이를 몸소 실현했다”며 고인을 추모했다.

이어령 초대 문화부 장관은 고인의 영전(靈前)에 올린 조시(弔詩)에서 고인을 이렇게 기렸다.

“독재와 독선, 역사의 두 수레바퀴가 지나간 자국 밑에서 어렵게 피어난 질긴 질경이꽃 모습을 그려봅니다… 남들이 서쪽으로 난 편하고 따듯한 길 찾아다닐 때 북녘 차가운 바람 미끄러운 얼음 위에 오솔길 내시고 / 남들이 색깔이 다른 차일을 치고 잔칫상을 벌일 때 보통 사람과 함께 손잡고 가자고 사립문 여시고 / 남들이 부국강병에 골몰하여 버려둔 황야에 세든 문화의 집 따로 한 채 만들어 세우시고 / 이제 정상의 영욕을 역사의 길목에 묻고 가셨습니다.”⊙

글 : 배진영 월간조선 기자 ironheel@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