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재윤의 슬픈 중국2/ 2021.10.09 대륙의 자유인들 <1회> 중국공산당이 ‘꽃미남’을 싫어하는 까닭은? - <10회> “법률은 있지만 법치는 없고, 헌법은 있지만 헌정은 없다”
송재윤의 슬픈 중국2: 캐나다 맥매스터대 교수 조선일보
*오늘부터 매주 토요일 ‘송재윤의 슬픈 중국: 대륙의 자유인들’ 연재를 시작합니다. 2021년 8월 14일까지 70회 연재했던 ‘슬픈 중국: 문화혁명 이야기’의 후속편입니다. 문혁 이후 ‘개혁개방’을 거쳐 오늘날에 이르는 40여년의 격변기, 그 파란만장(波瀾萬丈)한 역사를 동시대 중국인들의 육성에 귀 기울이며 핍진하게 꾸준히 기록하겠습니다. 독자님들의 성원에 감사드립니다.
2021.10.09
대륙의 자유인들 <1회>
중국공산당이 ‘꽃미남’을 싫어하는 까닭은?
▲<2018년 서바이벌 쇼 “Idol Producer”로 데뷔해 1년 간 중국에서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다 해산한 아이돌 그룹 “Nine Percent(百分九少年)”의 모습/ 중국인터넷>
2021년 7월 창당 100주년을 맞은 중국공산당은 인민 개개인의 사생활을 침해하는 규제의 법망(法網)을 조이고 있다. 청소년의 비디오 게임 주 3시간 이하 제한, 과외 활동 및 사교육 시장 제한, 연예인의 인터넷 팬클럽 활동 금지, 음란·폭력·배금주의 조장 방송 금지 등등······. 그중에서도 특히 ‘여성스런 남자’ 연예인들의 방송 노출을 제한하는 법안은 중국 안팎에서 커다란 논란을 일으키고 있다.
오늘날 중국에서는 외모나 언행이 여자 같은 사내를 조롱하고 폄하할 때 흔히 “냥파오(娘炮, 여성화된 남성), “나이요우 소생(奶油小生, 크림 소생),” “사이오셴러우(小鮮肉, 작고 신선한 육고기) 등의 인터넷 신조어를 사용한다. 겉모습이 “예쁘장한” 남자 연예인들은 모두 “냥파오”로 몰려 방송에서 퇴출당할 위험에 직면해 있다. BTS를 비롯한 K-팝 아이돌은 물론, 송준기, 박보검 등 중국 전역에서 인기를 누리는 “꽃미남” 한류스타들도 표적이 될 수밖에 없다.
개인의 문화적 취향을 규제...새로운 문혁의 조짐인가
최근 방송·통신을 감독하는 중국 국가 광파전시(廣播電視, 이하 광전) 총국은 “냥파오” 연예인의 방송 출연을 규제하고 나섰다. 표면적 이유는 “남자의 여성화”를 막기 위함이다. 이미 10년 전부터 중국에선 한·일 팝문화의 이른바 “비정상적 심미(審美)” 경향을 비판하는 목소리가 점점 고조돼 왔다. 급기야 중국공산당 성립 100주년을 맞아 중공 정부는 대대적인 풍기 단속에 나섰고, 예쁘장한 페미닌룩의 “꽃미남” 연예인들은 곤경을 겪고 있다. 과연 중국공산당은 왜 안팎으로 위기가 중첩되는 지금 바로 이때 인민 개개인의 미적·성적·문화적 취향까지 규제하려 할까? 새로운 문혁의 조짐인가?
하얼빈 전기공사 이사장 쓰쩌푸(斯澤夫, 1958- )는 중국 인민 정치협상회의(정협) 전국위원회에서 상무위원 300명 중 한 명으로 활약하고 있다. 마르고 날렵한 체격에 짧은 헤어스타일의 쓰쩌푸는 군 장성 같은 풍모의 고급 관원이다. 2020년 5월 그는 정협 상무위에서 작심하고 “남자 청소년의 여성화 추세”를 비판하며 나름의 해결책을 제시했다.
▲<중국 청소년 남자의 여성화를 비판한 중국 정협 상무위원 쓰쩌푸의 최근 사진/ 중국인터넷>
문혁이 절정으로 치닫던 1966-69년 동안 그는 초등학교 고학년이었다. 조반(造反) 혁명의 주역으로 활약하다 하방(下放)당했던 홍위병 집단의 주류는 아니라 해도, 1958년생 쓰저푸 역시 문혁 세대에 속한다. 유년 시절 날마다 마오쩌둥 어록을 암송하고 전쟁영웅을 동경하며 혁명정신을 벼리고 심신을 단련했던 바로 그 세대다.
쓰쩌푸의 눈에 비친 현재 중국의 “‘사내아이들(男孩子)’은 유약하고, 비굴하고, 담력 없는” 무기력한 존재들일 뿐이다. 그는 “사내아이의 여성 기질화” 혹은 “중국 청소년의 여성화 추세”는 절대로 방치할 수 없는 심각한 국가적 위기라 생각한다. 1자녀 정책의 결과 요즘 아이들은 집안에서 응석받이로 자라고, 유년기 내내 대부분 여교사의 지도를 받기 때문에 신체를 단련할 기회를 잃었다는 분석이다.
쓰쩌푸는 개탄한다. 나약한 응석받이 어린 소년들은 날마다 모니터 앞에서 일본 만화와 K-드라마를 보며 “비쇼넨(美少年)”과 “꽃미남”을 흉내 내며 닮아가고 있다. 사내라면 강건한 심신으로 국토를 보위해야 하는데, 요즘 남아들은 “양강지기(陽剛之氣, 밝고 강건한 기질)”를 잃고, 음유(陰柔, 여성성)의 기질을 갖게 되었다.
“꽃미남은 중화민족을 해쳐...남자의 여성화를 막아라!”
대체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쓰쩌푸는 초·중·고 남자 교사를 늘리고, 체육 교육을 강화하고, 여성화를 부추기는 퇴폐적인 팝문화를 금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남성의 여성화”는 “중화민족의 생존과 발전을 저해하는” 사회 병리적 현상이라 부르짖는다. 중국 밖의 사람들에겐, “꽃미남”이 “중화민족”을 해친다는 쓰쩌푸의 주장은 코미디 대사처럼 들릴 수 있지만, 결코 일개인의 견해만이 아니다. 가령 중국 인터넷에 다음과 같은 작자 미상의 표어를 널리 퍼져 있다.
여자 같은 사내는 일생을 약하게 하고(娘炮軟一生)
굳센 사내는 일세를 강하게 한다(硬漢强一世)
이 한 마디엔 “꽃미남” 연예인에 대한 다수 중국 인민의 반감이 담겨 있다. 오랫동안 중국의 매체들은 꽤나 상투적으로 게임과 팝문화를 “정신적 아편”에 비유해 왔다. 19세기 아편이 중화문명을 파괴하고 “100년 치욕”를 초래했듯, 외래의 “불량 문화”는 오늘날 청소년의 심신을 해치고, 나아가 “중화민족의 생존”까지 위협한다는 발상이다.
쓰쩌푸의 발언 이후 중국에선 “남자의 여성화”를 둘러싸고 꽤 큰 논쟁이 일었다. 특히 남성 교사의 비율을 늘리고, 체육교육은 남자 교사가 도맡게 해야 한다는 주장은 남녀 차별의 시비를 불러일으켰다. 그럼에도 쓰쩌푸의 주장은 사장되지 않았다. 오히려 중국공산당의 강력한 지지를 얻었다.
급기야 2021년 9월 2일, 중국 광전총부는 전국 각지의 방송국에 “연예인들의 풍격, 복식, 화장까지 엄격하게 관리하고, 특히 ‘냥파오(여성스런 남자)’ 등의 기형적 심미 취향을 단연히 두절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2021년 9월 8일, 중앙선전부는 텐센트(Tencent), 넷이즈(NetEase) 등 중국의 대표적 게임 회사들을 향해 “그릇된 가치”를 조장하는 음란, 색정, 폭력, 공포, 배금주의의 콘텐츠와 남성의 여성화 경향을 부추기는 “냥파오” 불량문화를 모두 삭제하라 엄포를 놓았다.
중 공산당, 문혁 땐 계급 혁명의 완수 주창...지금은 ‘중화민족’ 강조
1920년대 성립 초기부터 중국공산당은 전통 시대 사대부의 문약(文弱)을 배격하고 혁명 전사의 상무(尙武) 정신을 강조했다. 1930-40년대 반제·반봉건 투쟁의 과정에선 더욱 강인하고 용맹한 혁명가의 정신이 강조됐다. 문혁 시절엔 여성의 몸치장과 화장까지도 봉건적 구습이나 부르주아 퇴폐풍조라 여겨졌다. 젊은 여성들이 오히려 여성성을 버리고 남자 못잖은 남성적 강인함을 발휘해야만 했던 시대였다.
문혁 시대의 가치관에 비춰 보면 , “남자의 여성화”는 절대로 용납될 수 없는 반혁명적 자산계급의 퇴폐 문화일 뿐이다. 쓰쩌푸는 그 시대의 가치관에 따라 “꽃미남”의 대중적 인기를 그대로 방치하면 “중화민족의 생존과 발전”에 큰 위협이 된다고 말했을 뿐이었다.
▲<1961년 중국 영화 “홍색낭자군”의 한 장면/ 공공부문>
요컨대 중공 정부는 “중화민족 대부흥”의 깃발을 들고 “여성스런 남자”가 판을 치는 연예계에 정풍(整風)을 일으키고 있다는 얘기다. 문혁 때는 “중화민족”보단 “계급 혁명”의 완수를 위해 정풍을 일으켰다. 이제는 “중화민족 대부흥”이 중국공산당의 최고 의제다.
2021년 7월 1일 중국공산당 총서기 시진핑은 창당 100주년 기념행사에서 중국공산당의 초심(初心)은 바로 “위대한 중화민족의 부흥”이라 만천하에 선언한 바 있다. 시진핑이 생각하는 중국공산당의 존립근거이자 궁극목적은 계급철폐도, 인민해방도, 공산사회의 건설도 아닌 바로 중화민족의 부흥이라는 얘기다. 중국공산당이 계급정당이길 포기하고 민족정당으로 탈바꿈한 셈이다.
중국공산당은 더는 공산혁명의 정당이 아니라 민족주의 정당이다. “민족중흥”의 깃발 아래 인민 개개인의 사생활을 감시하고 교정하는 가부장적 국가사회주의 정당이다. 근대 자유주의는 개인의 사생활과 기본권의 보장을 위해 국가권력을 제약한다. 반면 중국공산당은 인민 개개인의 사고를 개조하고 인격을 교도(矯導)하는 가부장적 온정주의(paternalism)의 국가관을 표방하고 있다.
게르만 민족 강조한 1930~40년대 독일 나치와 비슷
그러한 중국공산당의 선전을 보면서 1930-40년대 독일의 나치를 떠올린다면 무리일까? 나치는 군사훈련과 스포츠 교육을 통해 청소년기 남자들을 강건하고 군기 잡힌 나치 혁명의 주동세력으로 배양하려 했다. 나치 선전부는 게르만 민족의 번영을 위해선 건강한 사내들의 “규율 있는 남성성(disciplined masculinity)”이 필수적이라 주장했다. “건강한 남성성”을 해치는 모든 “비정상적” 성행위를 처벌했다. 1933년 5월 6일 나치 선전부장 괴벨스(1897-1945)는 “동성애자들을 모두 제거해야 한다”고 말했으며, 1937년 2월 나치 친위대 수장 힘러(Heinrich L Himmler, 1900-1945)는 동성애자의 숙청을 잡초 제거에 비유한 바 있다.
▲<1937년 나치 청소년 조직 히틀러 유겐트(Hitler Jugend) 복싱 캠프. 1922년부터 시작된 히틀러 유겐트는 게르만 민족의 번영을 이끌 남자 청소년들의 강인한 신체 단련을 특별히 강조했다./ 공공부문>
“중화민족”을 절대가치로 내세운다는 점에서 중국공산당은 레닌주의 볼셰비키 정당과는 판이하게 다른 모습이다. 오히려 독일 제3제국 나치당과 유사한 점이 많다. 때문에 현재 중화 대륙에 몰아치는 새로운 문혁의 바람을 이해하기 위해선 중국공산당이 “계급” 노선을 버리고 “민족” 노선을 취한 근본 이유를 파헤쳐야만 한다. <계속>
<2회> 시진핑 ‘공동 부유’ 뒷모습엔… 빈곤층 6억명, 천문학적 빈부격차
▲<시진핑은 중국공산당 창당 100주년을 맞아 “공동부유(共同富裕)”를 핵심 의제로 부르짖고 있다. https://news.creaders.net/china/2021/08/24/2390507.html>;
“대동 사회 건설”...중국공산당이 40년 전 폐기한 선전 문구
“억강부약(抑强扶弱)의 대동(大同) 사회 건설!” 강자를 억누르고 약자를 부축해서 모두가 함께 어울려 잘사는 이상사회를 만들겠다는 주장이다. 최근 “단군 이래 최대 토건 비리” 의혹에 휩싸인 채 대한민국 여당 대통령 후보로 선출된 바로 그 정치인이 내건 당돌한 슬로건이다.
일면 멋진 공약 같지만, 역사를 돌아보면 시대착오와 도행역시(倒行逆施, 거꾸로 가고 거슬러 일을 하는)의 낡고 진부한 구호임이 대번에 드러난다. 중국공산당조차 40년 전에 폐기했던 냉전 시대 공산권의 판에 박힌 선전 문구와 다를 바 없기 때문이다.
중국공산당이 “대동 사회”를 추구하던 1950-60년대 중국 경제는 바닥 아래 바닥으로 추락했다. 대기근의 참상과 문화혁명의 광기를 겪고 나서야 중국공산당은 “대동 사회”의 몽상을 버리고 “소강(小康, 시아오캉) 사회”의 실리를 추구하기 시작했다. 유토피아의 몽상이 디스토피아로 귀결되고, 낡은 리더십의 교체가 번영을 몰고 오는 단적인 사례다.
완전고용, 완전복지, 인간해방?...실패한 “대동 사회” 실험
<<예기(禮記)>><예운(禮運)>편에 제시된 “대동”은 대도(大道)가 행해지던 상고 시대 요순(堯舜) 통치의 이상향을 의미한다. 청렴하고 유능한 인재들이 발탁돼 좋은 통치가 이뤄지고, 가족 구분도 없이 모두가 서로 돕고 아끼며, 홀아비, 과부, 고아, 노인도 보살핌을 받고, 도둑도. 불량배도 하나 없이 모두가 다 같이 함께 세상을 누리는 “천하위공(天下爲公)”의 완전 고용, 완전 복지, 인간 해방, 인격 완성의 아름다운 유토피아의 세계다.
청일전쟁(1894-1895) 후, 중국의 지식인들은 무너지는 중화문명의 회복을 위해 유교(儒敎)의 이상향 “대동 사회”의 건설을 꿈꿨다. 청말 광서(光緖, 재위 1875-1908) 황제의 지원 아래서 103일간 무술변법(戊戌變法, 1898)을 이끌었던 캉유웨이(康有爲, 1858-1927)는 평생에 걸쳐 유토피아의 이상을 담은 <<대동서(大同書)>>를 집필했다.
1958-59년 대약진(大躍進)의 구호 아래 전국에 인민공사(人民公社)를 건립할 당시, 마오쩌둥은 <<대동서>>의 유토피아가 바로 “우리들 공산주의자들이 건립하려 하는 이상사회”라고 말한 바 있다. 대동의 꿈은 대약진 운동으로 이어졌고, 그 결과 3천만-4천5백만 명이 아사하는 인류사 최악의 대기근을 초래했다. 대기근 발생 후 잠시 주춤했던 대동의 꿈은 다시금 문화대혁명(1966-1976) 10년 동안 파괴적이고 야만적인 대중 반란, 권력투쟁, 계급투쟁, 집단학살, 무장 충돌로 표출됐다.
오늘날 중국 지도자들은 그 누구도 “대동 사회”를 섣불리 외치지 않는다. 그들은 대부분 1950-60년대 급진 마오주의 정책의 처참한 후폭풍을 직접 겪고 자랐으며, 개혁개방 이후 40년 간 중국공산당은 일관되게 대동의 몽상을 폐기하고 소강 사회의 실현을 추구했기 때문이다.
▲<무술변법(戊戌變法, 1898)의 주동자 캉유웨이(康有爲, 1858-1927)의 대표적 저서 대동서(大同書)>
시진핑이 주창한 예의 지키고 질서 유지되는 “소강 사회”는 실현됐는가
1976년 9월 9일 마오쩌둥이 사망하고 2년 후 덩샤오핑이 최고영도자로 추대된 후에야 중국공산당은 “대동 사회”의 강박증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1979년 12월 덩샤오핑은 농업, 산업, 국방, 과학·기술 분야의 “4대 현대화”를 통한 이른바 “소강 사회”의 달성을 현실적인 목표로 제시했다.
작은 평화를 의미하는 “소강”도 <<예기>><예운>편에 전거를 두고 있다. 대도가 이미 숨어버린 후, 사람들이 스스로 부모를 모시고 자식을 돌보는 “천하위가(天下爲家)”의 세상이다. 요순의 통치처럼 완전하진 않지만, 소강 또한 우왕(禹王), 탕왕(湯王), 문왕(文王), 무왕(武王), 성왕(成王), 주공(周公) 등 삼대(三代)의 성왕(聖王)들이 다스렸던 작은 이상 사회를 의미한다. 예의가 지켜지고, 질서가 유지되고, 형벌이 바로 선, 완벽하진 않아도 꽤 살기 좋은 세상이다. 오늘날 중국공산당은 언급조차 하지 않지만, <<예기>>의 원문을 보면 소강의 세상에선 독재자가 출현하면 인민이 그를 재앙의 원흉이라 여겨 축출했다고도 적혀 있다.
1990년대 들어와 장쩌민은 다시금 “소강 사회”를 중국 경제 발전의 현실적 목적으로 제시했다. 이후 2002-2012년 후진타오 집권기 10년 동안 “소강 사회”는 중국 사회의 중장기 목표로 더욱 강조됐다. “중국몽”을 외치며 “중화민족의 위대한 부흥”을 중국공산당의 초심이라 강조하는 강력한 권력 의지의 시진핑도 감히 “대동 사회”를 언급하지 않는다. 2015년 시진핑은 “4대 전면 전략 구상”을 발표했는데, 제1조항이 바로 “소강 사회의 전면 건설”이었다. “소강 사회”의 달성이 여전히 중국공산당의 가장 큰 목표로 설정돼 있는 셈이다.
▲<“전면 건설 소강 사회: 새로운 시대, 새로운 사상, 새로운 목표, 새로운 장정” 중국공산당 선전 포스터/ 공공부문>
1인당 GDP 미국의 23%...6억명이 월수입 140달러 이하 빈곤층
현재 중국의 총생산량은 세계 2위를 자랑하지만 규모의 경제는 중국의 평범한 인민이 겪는 경제 현실을 제대로 보여주지 못한다. 미국보다 4.35배 인구가 많은 중국의 GDP가 미국과 같아진다면, 1인당 GDP는 미국의 23%에도 못 미치기 때문이다.
2020년 5월 25일 국무원 총리 리커창은 중국 인구의 40%에 달하는 6억 명이 월수입 1000위안(미화 140 달러) 이하의 빈곤 상태를 탈출하지 못했다고 발언했다. 2020년 2월 시진핑이 중국에선 절대 빈곤층(월 소득 미화 28불 이하)이 완전 소멸됐다고 선언한지 불과 석 달 만에 터져 나온 당내의 돌출 발언이었다.
중국 안팎에선 두 사람 사이의 갈등이 표출됐다는 분석이 뒤따랐지만, 오히려 중공지도부의 잘 조율된 이중 메시지란 해석이 더 설득력 있다. 개혁개방의 큰 성과를 선전하는 동시에 경제적 불평등을 이슈화함으로써 중공 정부의 적극적 역할을 강조하는 포석이다. 40여년 마구 달려 온 결과 2020년 중국의 1인당 GNP는 미화 1만 달러를 넘어섰지만, 도농, 지역, 계층 간 소득격차는 심각한 문제로 남아 있다.
현재 중국의 지니계수는 미국(0.41)보다 더 높은 0.47에 달한다. 중국 상위 1%의 재산 규모는 하위 50%보다 더 크다. 도시 3만 호 가정을 조사한 결과, 상위 20%가 전체 재산의 63%를 차지하고, 하위 20%는 고작 2.6% 밖에 갖고 있지 못하다. 전체 중국에서 상위 20%의 소득은 하위 20%의 10.2배에 달한다. 극심한 빈부격차는 상대적 박탈감과 빈곤층의 패배 의식을 부추긴다. 가난한 중국인들은 흔히 자조적으로 “돈이 있으면 귀신을 불러서 맷돌을 갈게 할 수도 있다(有錢能使鬼推磨)”는 속담을 내뱉곤 한다. 사회주의를 표방하는 레닌주의 국가가 세계에서 가장 불평등한 배금주의의 나라가 돼버린 아이러니컬한 현실이다.
상위 20%, 전체 재산의 63% 차지...이율배반 “공동부유(共同富裕)” 구호
중국공산당 총서기, 중화인민공화국 국가주석, 중앙군사위 주석 시진핑은 중앙재경 위원회 주임이기도 하다. 2021년 8월 17일 시진핑은 중앙재경위 제 1차 회의에서 공동부유의 촉진 방안을 토의했다. 그는 “공동 부유는 사회주의의 본질적 요구이자 중국식 현대화의 중요한 특징”이라며, 고도의 경제 발전을 이어가면서 동시에 “공동 부유”를 촉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공동 부유”의 저작권은 마오쩌둥에 있다. 1955년 마오쩌둥은 “농업 합작화 문제에 관하여”에서 부농(富農) 중심의 개체 경제를 전면 폐기해서 농촌 인민이 ‘공동 부유’를 누릴 수 있게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시진핑이 ‘공동 부유’를 국정의 핵심 의제로 제시하자 중국 안팎이 술렁였다. 강력한 카리스마를 발휘해 철통 권력을 유지해 온 시진핑 정권은 여러 모로 마오쩌둥 시대를 연상시키기 때문이다. 일단 2021년 8월 17일 중앙재경위 회의록을 보면 시진핑의 “공동 부유”가 마오쩌둥처럼 사유 재산을 철폐하는 과격한 사회주의 이상의 선포는 아님이 확실해 보인다.
▲<리커창 총리는 2020년 5월 중국 인구의 40%가 월수입 1000위안 이하의 빈곤층이라 발언했다. https://www.fairplanet.org/editors-pick/chinese-poverty-coming-to-an-end/>;
개혁개방 이후 중국공산당은 번영을 희구하는 “치부광영(致富光榮)”의 구호와 효율적 발전을 위해 개인적·지역적 경제적 불평등을 용인하는 “선부론(先富論)”을 들고 나왔다. 2002년 이래 중국공산당은 “한 치의 동요도 없이 공유제 경제 발전을 공고히 하고 발전시키고,” 동시에 “한 치의 동요도 없이 비공유제 경제 발전을 북돋우고 지지하고 인도해야 한다”는 이른바 “한 치도 동요 않는 두 가지(兩個毫不動搖)”를 중국 경제의 기본 원칙으로 천명하고 있다.
시진핑의 “공동 부유” 역시 그 두 가지 원칙을 벗어나진 않는다. 시진핑의 표현을 빌면, “공동부유는 소수의 부유가 아니지만, 획일적 평균주의도 아니다.” “공유제를 주체로 삼는 다양한 소유 경제의 공동 발전을 견지하고, 일부의 사람들이 먼저 부를 일군 후, 선부(先富)가 후부(後富)를 이끌고 도와주는” 중국 특색의 사회주의라는 얘기다.
중공 정부의 정치 구호는 “민주독재”나 “사회주의 시장경제 체제”처럼 상호 모순되는 이율배반의 두 원칙을 억지로 합쳐 놓은 경우가 흔하다. “공유제 경제”와 “비공유제 경제”를 둘 다 “한 치의 동요도 없이” 견지한다는 중국공산당의 선언은 자가당착처럼 보인다. 논리적 모순이지만, 중국공산당으로선 필요에 따라 어느 쪽이든 벨 수 있는 양날의 칼을 쥐고 있는 셈이다.
중 정부, 언제든 민간기업 해체할 수 있어...’대동사회’ 말하진 않아
중공 정부는 “공유제 경제”를 전면에 내세워 언제든지 민간 기업을 압박하고 통제하고, 심지어 해체할 수도 있다. 최근 중공 정부는 날로 덩치가 커져가는 대표적인 민간 기업의 총수들을 노골적으로 압박하고 나섰다. 특히 기업의 총수가 정부를 비판하는 언행을 보일 경우 정치 보복을 피하지 못한다.
2020년 11월 알리바바의 마윈(馬雲, 1964- )은 기업의 창의성을 해치는 관료 행정의 불합리를 비판했다는 이유로 갖은 압박에 시달려야만 했다. 2021년 5월 3일 메이투완(美團)의 총수 왕싱(王興, 1979- )은 SNS에서 진시황의 분서갱유를 비판하는 당시(唐詩) 한 수를 공유해 시진핑의 정치적 탄압을 우회적으로 비판했다. 바로 그날 메이투완의 주가는 7.1%나 폭락하는 후폭풍이 몰아쳤다. 그밖에도 바이트댄스(ByteDance)의 장이밍(張一鳴, 1983- ), 핀둬둬(Pinduoduo)의 황정(黃崢, 1980- ), 텐센트의 마화텅(馬化騰, 1971- ) 등도 경영권을 박탈당하거나 공적 매체에서 자취를 감췄다.
▲<중국 구이저우(貴州)의 가난한 마을 어린이들/ Syndicated News https://www.mole.my/china-to-relocate-2-million-this-year-in-banish-poverty-plan/>;
시진핑이 중국공산당 창당 100주년을 맞아 다시금 “공동 부유”를 꺼내든 까닭은 과연 무엇일까? 표면상 1000위안 이하의 월수입으로 어렵게 살아가는 6억 명의 가난한 인민의 구제를 궁극 목적으로 내세우지만, 날로 사회적 영향력을 확장해가는 민간 기업을 견제하기 위함일 수도 있다.
“민주독재”나 “사회주의 시장경제”란 이율배반의 모순 개념이야 말로 중국공산당 일당독재를 가능케 하는 예리한 이념적 무기다. 그러한 중국공산당도 “억강부약의 대동 사회 건설” 같은 유토피아의 몽상을 정치 구호로 꺼내들지 않는다. 과대망상의 정치구호는 스스로 권력 기반을 허무는 자승자박의 올가미란 사실을 이미 배웠기 때문이다. <계속>
10.23
<3회> 중국공산당은 왜 ‘인민’ 대신 ‘민족’을 부르짖을까
▲<티베트 라싸 포탈라궁 앞에서 중국 56개 민족의 대표들이 모여서 “중화민족”의 대단합을 결의하고 있다. 2012년 9월 27일/ www. chinadaily.com.cn>
한국의 성공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중국인의 심리
2002년 여름 월드컵 경기가 한창일 때 나는 중국 저장(浙江)성 진화(金華) 지방에서 역사 현장 답사를 하고 있었다. 한국 대표단이 16강, 8강에 진입한 후, 급기야 이탈리아를 꺾고 4강에 오르자 많은 중국인들은 한국이 홈그라운드에서 심판을 매수했다며 비분강개했다. 한 지방 신문엔 “무치일로(無恥一路, 부끄럼 없는 한 길)”란 큰 제목 아래 한국이 부당하게 편파적으로 경기를 운영한다고 비판하는 기사가 대서특필됐다. 중국 공영 방송의 한 앵커는 “한국에 가봤더니 화장실 사용할 때 돈을 받더라!”는 현실성 없는 멘트를 내뱉으며 “한국인들이 쩨쩨하다(小氣)”고 말하기도 했다. 그 후로도 중국에 갈 때마다 다양한 부류의 중국인들로부터 월드컵 4강 진출할 때 한국이 심판 매수한 게 아니냐는 질문을 수없이 받았다.
중국인들이 쉽게 한국의 약진을 받아들일 수 없는 이유는 한(漢, BC 206- AD 202) 제국 이래 견고하게 뿌리내린 중화 중심주의 조공 체제의 유습이라 여겨진다. 일반적으로 중국인들은 청일전쟁(1894-1895)의 패배로 “조선의 완전무결한 독립국임을 확인”하기 전까지 중국이 한반도를 대대로 지배하고 있었다고 믿고 있다. 변방에서 중화제국을 보위하던 작은 번국(藩國, 울타리 나라)이 세계적 국가로 발돋움한 현실을 인정하기 싫어하는 심리다. 북한처럼 가난에 허덕이며 중국에서 기름을 받아가며 연명해야 당연하다 생각하는 걸까?
“56개 민족 15억 인구가 단일한 ‘중화민족’을 이룬다”
한 중국학자는 사석에서 내게 “한국은 작은 나라일 뿐”이라고 퉁명스럽게 말한 적이 있다. 인구로 보면 한국은 세계 193개 국가 중 28번째로 큰 나라다. 상식적으로 한국이 작은 나라가 아니라 중국이 특별히 지나치게 커다란 나라일 뿐이다. 중국의 총 인구수는 세계 전체 인구의 18.47%에 달한다. 이 세상 사람들 다섯 명 중에 거의 한 명꼴로 중국에 살고 있는 셈이다. 또 그 많은 사람들이 모두 중국공산당 일당 독재 아래서 살아가고 있다. 실로 중국은 세계사에 유래 없는 극히 예외적인 비대한 대륙국가다.
문제는 중국공산당이 중국의 총인구 14억 5천만 명과 5천만 해외 중국계 인구를 모두 합해서 “중화민족(中華民族)”이라 부르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때의 “중화민족”은 한족(漢族), 위구르족, 티베트족, 몽골족, 조선족, 장족, 먀오족 등등 중공 정부 공인의 56개 민족들 모두를 아우르는 개념이다. 중공 정부의 표현을 빌면, “중화민족엔 56개 민족들이 있다.” 56개 각기 다른 민족들이 모여서 어떻게 단일의 “중화민족”을 이룰 수 있단 말인가?
▲<2021년 4월 4일 중국 산시(陝西)성 황링현에서 거행된 “신축년 청명일 헌원(軒轅) 황제(黃帝)에 올린 전례(典禮) 제사”의 장면. 56개 민족 복장을 한 아이들이 성 있다. 황제 헌원씨와 염제(炎帝) 신농씨는 “중화민족”의 조상으로 알려져 있다./ https://www.prnewswire.com/news-releases/ceremony-paying-homage-to-huangdi-held-in-huangling-county-chinas-shaanxi-301262565.html>;
일찍이 량치차오(梁啓超, 1873-1929)는 통일된 국가에서 장시간 살게 되면 다양한 민족들이 결국 혼융되어 다원일체(多元一體)의 “국족(國族)”을 이룬다는 주장을 펼쳤다. 다문화, 다인종, 다언어의 유럽, 북아메리카, 아프리카도 한 나라로 통일되면 결국 “유럽민족,” “아메리카민족,” “아프리카민족”을 이룬다는 정치적 주장이었다. 그 속엔 청제국의 모든 영토를 그대로 유지한 채 다민족의 중국을 단일한 민족국가로 재건하는 묘책이 깔려 있었다. 량치차오가 발명한 “국족” 개념은 중국공산당에 의해 “중화민족”으로 구체화되었다.
프롤레타리아 계급 정당이라면서 “위대한 중화민족 부흥” 부르짖어
2021년 7월 1일 베이징 톈안먼 광장에선 오전 8시부터 두 시간에 걸쳐 중국공산당 성립 100주년 기념식이 거행됐다. 광장엔 전국에서 초청장을 받고 몰려온 수만 명의 공산당원과 행사에 동원된 젊은 학생들이 질서정연하게 착석해 있었다. 팬데믹의 상황에서도 광장의 군중 중엔 마스크를 착용한 사람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
기념식 시작 후 20분 쯤 지났을 때, 중국공산당의 핵심 지도자들이 톈안먼 성루(城樓)로 걸어 나왔다. 1949년 10월 1일 중국공산당 총서기이자 국가주석 마오쩌둥이 “중화인민공화국”의 건국을 선포했던 바로 그곳이었다. 성루에 선 영도자들은 맨 얼굴을 드러냈지만, 지근거리서 취재하는 기자단은 모두 마스크를 착용하고 있었다.
하늘에 수대의 헬기가 떠오르고 장엄한 열병식이 거행된 후, 중국공산당 총서기 시진핑의 “강설(講說)”이 시작됐다. 정면을 응시한 채 침착하고 낮은 목소리로 시진핑은 느릿느릿 연설문을 낭독했다. 그의 강설은 무려 1시간 5분 동안 이어졌다. 200자 원고지 40장에 달하는 긴 글이었다. 한국어로 번역한다면, 70-80매는 족히 넘을 분량이었다
▲<2021년 7월 1일, 톈안먼 광장에서 거행된 “중국공산당 창당 100주년 기념식/www.reuter.com>
2019년 6월부터 2020년 1월까지 시진핑은 중국공산당 전 조직을 대상으로 이른바 “주제 교육운동”을 벌였다. 그 주제란 바로 “불망초심 뇌기사명(不忘初心牢記使命, 초심을 잊지 말고 사명을 명심하자!)”였다. 100주년 기념식에서도 시진핑은 중국공산당의 그 초심을 내내 강조했는데, 그 초심은 다름 아닌 “중화민족의 위대한 부흥”이라 단정했다.
마르크스는 “계급소멸의 합법칙성”을 주장했고 레닌은 프롤레타리아 혁명으로 제정 러시아를 무너뜨렸고, 마오쩌둥은 한 평생 “절대로 계급투쟁을 잊지 말라!(千萬不忘階級革命!)”를 부르짖었다. 지금도 중국공산당은 마르크스-레닌주의와 마오쩌둥 사상을 이념의 기둥으로 삼는 프롤레타리아 계급정당을 자임하고 있다. 묻지 않을 수 없다. 중국공산당이 진실로 “위대한 중화민족의 부흥”을 위해 결성된 조직이었나? 시진핑은 무슨 근거로 중국공산당의 초심이 “중화민족의 부흥”이라 주장하고 있나?
중국은 공산당이 만든 ‘당 국가’...당초 제1강령은 “계급 투쟁”
1921년 7월 23일부터 중국공산당은 코민테른의 지원 아래서 일주일 간 상하이 프랑스 조계(租界, 조차구)에서 제1차 대표대회를 열었다. 당시 전국 각지에서 대표로 참석한 인원은 마오쩌둥을 포함해 13명에 불과했다. 모스크바에서 파견된 두 명의 코민테른 참관 요원이 현장에 있었다. 당시 전국 및 재외 당원 수는 다 합쳐야 고작 57여명에 불과했다. 대회 마지막 날 폐회식은 조계 경찰을 피해 저장(浙江)성 자싱(嘉興) 난후(南湖)의 선상에서 폐막식을 열 수밖에 없었다.
중국공산당의 시작은 그만큼 불안하고도 미약했다. 그 후 100년의 세월 동안 중국공산당은 9500만 명의 열심 당원을 자랑하는 명실 공히 세계 최대 규모의 막강한 정치조직으로 성장했다. 중국공산당을 어느 나라에나 있는 그저 일개 정당이라 여긴다면 큰 착각이다. 민주 국가의 정당과는 달리 중국공산당은 무장집단을 조직하고, 게릴라 전투로 관할 지역을 넓혀가고, 급기야 내전을 거쳐 전 영토를 점령한 후 중화인민공화국을 세웠다. 당이 군을 만들고 나라를 세웠다. 그 점에서 중화인민공화국은 중국공산당이 만든 당-국가(party-state)이다. 오늘날 중국공산당이 일당독재의 지배체제를 유지되는 이유라 할 수 있다.
1921년 7월 말 성립된 중국공산당의 초심은 무엇이었나? 러시아어로 작성해서 공표한 중국공산당 제1강령에 잘 나타나 있다.
1. 혁명군대는 반드시 자본가 계급의 정권을 전복하고 노동자 계급을 지원하며, 사회 계급의 구분이 소멸되면 해산한다.
2. 계급투쟁을 종식하고 사회적 계급 구분이 소멸될 때까지 무산계급독재를 승인한다.
3. 자본가 사유제를 소멸하고 기기, 토지, 공장 및 반제품 생산 자료(資料) 모두를 사회 공유로 귀속한다.
4. [1919년 모스크바에서 창립된] “제3국제(코민테른)”와 연합한다.
950자 남짓한 중국공산당 제1강령의 키워드는 “계급투쟁,” “프롤레타리아 독재,” “사회 계급의 철폐”이다. 그 어디에도 “중화”나 “민족” 같은 단어는 찾아볼 수 없다. 마르크스, 엥겔스, 레닌 등이 제창한 공산주의의 근본이념에 따르면, 공산당의 궁극적 목적은 사적 소유의 폐지, 착취구조의 혁파, 계급모순의 철폐를 통한 공산 유토피아의 건설이다. 마르크스-레닌중의 강령에 입각해서 1921년 중국공산당은 계급 철폐와 사적소유제 폐기, 국제 연대, 공산주의 실현 등을 창당의 목적으로 삼았다.
물론 동아시아 공산주의 운동의 역사는 민족주의를 배제하고선 이해될 수 없다. 1920-40년대 중국공산당은 크게 반제국주의와 반봉건주의의 깃발을 내걸고 투쟁했다. 1917년 레닌은 그 유명한 <<제국주의론>>에서 구미의 부르주아 자본주의 민족국가(nation-state)들이 내부의 계급모순을 해소하기 위해 해외 식민지를 건설해 저개발 지역 인민들을 착취하는 제국주의 단계로 접어들었다고 주장했다.
레닌의 명쾌한 설명에 감복한 1920-30년대 많은 중국의 지식인들은 프롤레타리아 계급투쟁이야말로 민족모순을 해결하는 근본적 대안이라 믿고서 공산주의 운동에 참가했다. 적어도 공산당원들 사이에선 계급의식이 민족의식에 우선했다. 중국공산당은 노동자·농민의 이익을 대변하는 계급정당으로 출발했다.
▲<1967년 문화혁명 당시 전국 각 민족의 단결을 촉구하는 선전 포스터. 당시에는 “중화민족”이란 표현보다 “전국 각 민족”이란 표현이 더 많이 사용되었다./ chineseposters.net>
빈부 격차 벌어지고 자산 계급 등장하면서 “인민” 대신 “중화민족” 강조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부르주아지가 노동계급에 민족의식을 심어 계급모순을 약화하려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 위기의식 속에서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공산당 선언에서 “전 세계의 노동자여, 단결하라!” 외쳤다. 민족주의의 음모에 빠지지 말고 국경을 초월하는 노동자 계급의 연대를 촉구했던 것. 부르주아지는 계급모순을 감추기 위해 민족적 연대를 강조하기 때문에 노동계급은 민족의식을 해체하고 국제적 연대를 결성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1950-60년대 마오쩌둥도 민족모순보단 계급모순을 더욱 부각시켰다. 문화혁명 당시엔 “중화민족”이라는 용어가 널리 사용되지 않았다. 중국인의 범칭으로는 “중국인민”이나 “각 민족” 등의 용어가 더욱 상용됐다. 문혁의 정신을 한 마디로 압축하면 “계급투쟁”이었다.
1976년 9월 9일 마오쩌둥 서거 후 중공 정부는 점점 “중화민족”이란 용어를 자주 쓰기 시작했다. 그 이유는 의외로 쉽게 설명된다. 1978년 이래 시장경제의 도입으로 빈부격차가 벌어지고 본격적인 자산계급이 등장했다. 세계 제2위 경제규모를 자랑하지만, 월수입 미화 140불 이하의 극빈층이 6억 명, 인구의 40%에 달한다. 그러한 상황에서 중공 정부는 “중국인민” 대신 “중화민족”이 강조할 수밖에 없다. 마오쩌둥의 표현을 빌면, 계급모순을 감추기 위해 민족모순을 부각시키는 전략이다.
100년의 세월을 거치는 동안 중국공산당은 노동자·농민의 계급정당에서 “중화민족”의 민족정당으로 탈바꿈했다. “중화민족”은 다민족의 대륙에 “민족국가”로 세우기 위해 중국공산당이 고안한 비자연적, 비과학적, 비논리적 정치 언어다. 그럼에도 “중화민족”은 놀라운 정치적 효력을 발휘한다. 다민족의 대륙을 “단일 종족(single ethnicity)”의 “민족국가(nation-state)”로 뒤바꾸는 정치 마술의 주문(呪文)과도 같다.
“중화민족”을 전면에 내세워 중국공산당은 유엔헌장에 명시된 인류적 보편가치를 부정한다. 오로지 중국만의, 중국 특색의, 중화주의의 특수 가치를 선양할 뿐이다. 그 결과 “중화민족”이 인류에서 분리되고, 인류와 충돌하고 있다. 중국 밖의 전 세계가 “중화민족의 위대한 부흥”을 우려하고 경계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계속>
<4회> ‘중국 특색 사회주의’는 사회주의인가
▲<“새로운 시대 중국 특색 사회주의.” 호주에서 활약하는 중국의 반체제 정치 만화가 파듀차오(巴丢草, 1986- )의 풍자작품/ 공공부문>
빈부격차 세계서 가장 큰 나라...중국이 사회주의 국가인가
오늘날 중국이 과연 사회주의 국가인가? 20세기 인류사에 등장한 여러 종류의 사회주의 정권들은 많은 차이점에도 불구하고 두 개의 핵심적 공통점이 있었다. 생산수단의 공유화와 중앙집권적 명령경제의 추진이었다. 개혁·개방 이래 중국공산당은 “치부광영(致富光榮)”의 구호 아래 생산수단의 파격적인 사유화를 추진했으며, 민영기업을 확장해서 시장경제를 활성화했다.
중공 정부가 급속한 경제 발전의 추진을 위해 낡은 건물을 부수듯 스스로 사회주의의 양대 기둥을 무너뜨린 셈이다.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와 시장경제를 도입한 국가를 사회주의라 부를 수 있나? 현재 중국을 관찰하는 모든 이들이 갖는 강한 의구심이다. 실은 중국의 지식인들도 크게 다르지 않다.
가령 중국의 비판적 지식인 덩위원(鄧聿文, 1968- )은 2020년 7월 1일 “중국/중공국가주의의 전면 흥기”라는 칼럼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사실상, 오늘날 중공은 정통의 공산당이 아니며, 오늘날 중국도 마르크시즘의 관점에서 사회주의 국가가 아니다. 수많은 논자들이 지적하듯, 오늘날 중국은 마르크스주의의 얼굴로 등장한 극우(極右) 정권일 뿐이다.”
덩위원은 2013년 2월 27일 영국 파이낸셜 타임즈에 “중국이 북한을 버려야(China should abandon North Korea)”라는 도발적 칼럼을 기고해 세계를 놀라게 했던 중공중앙당교(當校) 기관지 <<학습시보(學習時報)>>의 부편집장이었다. 이 칼럼이 해외에서 떠들썩하게 회자되자 그는 부편집장의 직책을 잃었다고 한다.
▲<현재 미국에서 망명 중인 중국의 비판 언론인 덩위원의 모습 (2020). 2020년 11월 19일 덩위원은 중공 정부가 자신의 중국 내 은행 계정을 동결했다고 발표했다. 2012년부터 그는 중공 정부를 공개적으로 비판해 온 “대륙의 자유인”이다./ www.asianews.it>
대체 사적 소유제를 인정하고 자본주의 시장경제를 도입한 나라가 어떻게 사회주의 국가인가? 빈부격차가 OECD회원국 중 최하위인 칠레보다도 더 심각한 중국이 어떻게 스스로 사회주의 국가라 외칠 수 있나? 이러한 근본적 물음에 대한 중국공산당의 대답은 초지일관 확고부동하기만 하다.
바로 “중국 특색 사회주의”이다. 중국공산당에 따르면 현재 중국은 낮은 단계의 사회주의 국가이다. 더 높은 단계로의 비약을 위해 중국은 잠정적으로 자본주의 경제노선을 취했을 뿐이라는 주장이다. 일면 그럴싸하지만 수사학적 속임수일 뿐이다. 사적소유제와 시장경제를 도입한다면, 사회주의의 폐기가 아닐 수 없다. “사회주의 시장경제”란 “착한 악당,” “소리 없는 아우성”처럼 모순어법(oxymoron)에 불과하다.
게다가 “중국 특색 사회주의”는 마르크스주의, 레닌주의, 마오쩌둥 사상, 덩샤오핑 실용주의, 장쩌민(江澤民, 1926- )의 “세 가지 대표” 사상, 후진타오(胡錦濤, 1942- )의 “과학발전관”, 급기야 “시진핑 사상”까지 다 합친 이념의 다발, 사상의 나열일 뿐이다. 마르크스에서 시진핑까지 한 줄로 관통하는 철학적 원리는 무엇일까? 다다익선(多多益善)인가?
냉철하게 따져보면 마르크스가 개탄했던 “철학의 빈곤”에 불과하지만, 중국공산당의 주장 밑엔 도도하게 흘러가는 중화문명의 오랜 지적 전통이 깔려 있음을 간과해선 안 된다.
모순된 제도와 원칙의 공존 “절충과 봉합”은 중국사의 전통
“절충(折衷)과 봉합(縫合)”은 중국 역사의 깊은 전통이다. 명백히 모순돼 보이는 제도나 원칙이 중국 역사에선 별 무리 없이 공존하는 경우를 흔히 본다. 한(漢)제국(기원전 206-기원후 220) 초기 유생(儒生)들은 진(秦)제국(기원전 221-206)의 폭정을 비판하는 과진론(過秦論)을 개진해 천하를 통일한 진시황(秦始皇)을 역사의 악인으로 만들었다. 덕분에 진나라는 암흑기로 폄하됐지만, 한나라 황제들은 진시황이 창건한 제국의 시스템을 계승·발전시켰다.
겉으로는 유교의 도덕교화를 표방하면서 중앙집권적 관료제의 법가전통을 폐기하지 않았다. 학자들은 흔히 중화제국이 속으론 법가이면서 겉으론 유가를 가장하는 내법외유(內法外儒)의 통치술을 썼다고 해석한다. 이후 중국의 역대 황실은 정면(正面)에선 공맹(孔孟)의 이상주의를 선양하면서 배면(背面)에선 한비(韓非)와 이사(李斯)의 모략을 활용했다.
“절충과 봉합”을 보여주는 중화문명의 대표작은 중화인민공화국의 헌법이다. 물과 기름처럼 혼합될 수 없고, 불과 얼음처럼 공생할 수 없는, 상호 모순된 강령들과 이율배반의 원칙들이 중국 헌법을 가득 메우고 있다. 공산주의와 실용주의, 사회주의와 시장경제, 인민민주와 인민독재, 인민주권과 일당독재, 애국주의와 국제주의, 집단주의와 공민 권리, 사적 소유와 국가 소유, 마오쩌둥 사상과 덩샤오핑 실용주의, 다민족 공동 발전 이론과 중화민족의 위대한 부흥 등등. 창을 팔 땐 못 뚫는 방패가 없다고 하고선, 방패를 팔 땐 못 막는 창이 없다고 외쳐대는 무기상의 궤변을 연상시킨다.
▲<1964년 6월 14일, 헌법을 제정하는 중앙인민정부 위원회/ 공공부문>
명백한 모순임에도 중국 헌법 속의 “절충과 봉합”은 놀라운 힘을 발휘한다. 중국 헌법은 자유, 민주, 평등, 공정, 법치 등을 “사회주의핵심 가치관”이라 부르짖는데, 중국공산당은 “인민민주독재”의 이름 아래 전일적인 일당독재를 시행할 수 있다.
오늘날 중국의 비판적 사상가 두광(杜光, 1928- )이 지적하듯, 중국 헌법은 인민주권의 민주성과 일당독재의 전제성을 동시에 지향하지만, 현실 정치에선 언제나 전제성이 민주성을 억누르고 공민의 권리를 박탈한다. “절충과 봉합”의 오랜 전통이 중국공산당 일당독재의 정치선전으로 면면이 흘러내리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덩샤오핑의 “도광양회(韜光養晦)” 실용주의 버린 시진핑
1978년 12월 최고영도자의 지위에 올라 개혁개방의 시대를 연 덩샤오핑은 “절충과 봉합”의 대가였다. 그는 마르크스-레닌주의, 마오쩌둥 사상, 공산당 일당독재의 리더십은 그대로 둔 채로 오로지 “실용주의”의 이름으로 자본주의 방식의 경제개혁을 과감하게 추진했다. 사적소유와 시장경제를 전면 수용한 후 중공 정부는 중국 특색의 “사회주의 시장경제”를 건설하겠다고 선전했다.
1980년대 초반 영국과 홍콩 문제를 논의할 때 덩샤오핑은 일국양제(一國兩制)의 묘안을 제시했다. 중국의 특별행정자치구로서 홍콩이 1997년 이양 이후 50년간에 걸쳐 독자적인 법적, 경제적, 정치적 자치권을 누린다는 국제사회와의 약속이었다. 일국양제는 두 체제의 근본적 상호차이를 교묘히 “절충”하고 잠재적 갈등의 소지를 적당히 “봉합”하는 기발한 시스템이었다.
홍콩은 홍콩대로 자유무역 금융자본의 논리에 따라 발전하고, 대륙은 대륙대로 공산당 일당독재 아래서 “사회주의 시장경제”를 추진한다는 타협책인데, 전 세계는 노회한 지략가의 복안을 흔쾌히 수용했다.
물론 그 밑에는 실제적으로 시장경제를 수용한 중국이 자본의 논리를 따라 점점 더 개방적이고, 더 자유롭고, 더 민주적인 사회로 진화하리라는 닉슨 시대의 낙관론이었다.
톈안먼 대학살 직후 전 세계는 중공 정부의 만행을 규탄했다. 북미, 서유럽, 동유럽, 호주, 동남아, 남미의 수십 개 나라들이 비판 성명을 발표하고 중공 정부를 규탄했다. 당시 중국은 외교적 고립의 늪에 허리까지 잠긴 꼴이었다. 상황을 예의주시하던 덩샤오핑은 장고에 들어갔다. 석 달 후 그는 드디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는데······.
1989년 9월 4일 덩샤오핑은 중공중앙의 지도자들을 향해 중국 외교 전략의 3대 원칙을 발표했다. 각각 1) 냉정관찰(冷靜觀察), 2) 온주진각(穩住陳脚), 3) 침착응부(沈着應付)이다. 국제 정세를 냉정하게 관찰하고 중국 국내에 단단한 발판을 마련한 후 변화무쌍한 현실에 침착하게 대응하라는 주문이었다. 덩샤오핑은 그러한 실용주의 외교 전략의 정신을 한 마디로 압축해서 도광양회(韜光養晦)라 했다.
▲<1982년 9월 베이징 인민대회당 덩샤오핑와 대처의 만남/ 공공부문>
도광이란 스스로 재능, 재물, 명성 등을 가리고 숨기는 지혜를 말한다. 양회란 제 때가 올 때까지 세상에 나타나지 않고 내공을 쌓는 슬기를 이른다. 개혁개방이 추진되어 급속도로 경제가 발전하고 있지만, 마오쩌둥 시대처럼 과장되게 단기간의 성과를 떠벌리는 대신 내실을 다지며 묵묵히 사회주의의 이상을 실현할 수 있을 때를 기다려야 한다는 메시지였다. 사회주의 기치를 견지하되 높이 쳐들기 보단 조심조심 자세를 낮추고 경제성장의 길을 가라는 당부였다.
덩샤오핑의 도광양회는 절묘한 시기에 쏘아올린 낮은 포복의 신호탄이었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기 불과 두 달 전이었다. 구소련의 붕괴 조짐도 가시화되고 있었다. 견고한 냉전의 질서에 큰 균열이 생길 때였다. 냉전 시대는 종언을 고하고 있었다. 마르크스의 사회주의는 시효를 상실한 19세기적 환상으로 판명이 났다. 변화의 바람이 중화대륙을 휩쓸 듯 거세게 일어났다. 중국 밖의 많은 논자들은 중국 붕괴가 임박했다며 묵시론과 예언서를 남발하고 있었다.
세계는 도광양회의 정치 마술에 다시 한 번 속았다. 자존심 거센 비대한 대륙국가의 저자세 외교가 효력을 발휘했다. 덕분에 중국은 전 세계의 눈앞에서 자국민을 탱크로 짓밟은 후에도 “중국 특색 사회주의”의 돛을 올리고 조심조심 국제 무역의 격랑을 헤치고 나아갔다.
2021년 바로 오늘 중국공산당은 “절충과 봉합”의 지략을 내팽개친 듯하다. 덩샤오핑이 고안한 일국양제는 이미 허물어졌다. 도광양회의 저자세 지략 외교 대신 벼랑 끝 치킨 게임을 일상화한 듯하다. 세계인의 반중정서가 하늘로 치솟는데, 시진핑은 “중화민족의 위대한 부흥”을 외치며 전 중국에서 56개 민족 14억 5천 만의 공민들을 옭아매는 디지털 전체주의의 고삐를 더 세차게 당기려 한다. 낮은 포복 대신 “돌격 앞으로!”만 외쳐대는 꼴이다. “절충과 봉합”의 지략을 모두 망각했나? 항룡유회(亢龍有悔), 하늘 모르고 끝까지 오른 용은 반드시 후회한다. <계속>
▲<1989년 6월 4일 톈안먼 대학살 당시의 사진/ http://xahlee.org/Periodic_dosage_dir/tiananmen_64_1989.html>;
<5회> “여기서 권력 분립을 말하다니...문화 침략 아닌가!”
▲<오늘날 중국의 애국주의/ 신화(神華) 통신>
“중국은 잘하고 있어요...최소 50년간은 승승장구합니다”
이번 주엔 오늘날 중국인들의 일반적 생각을 잘 보여주는 에피소드 두 토막으로 이야기를 시작해보자.
2019년 겨울 중국 중세사를 전공하는 한 중국인 교수와 나눈 대화다. 1년 간 캐나다를 방문하고 돌아가기 직전 그 교수는 작심한 듯 부드럽지만 단호한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
“물론 중국은 인권이 제한돼 있지만, 중국 나름의 안정되고 효과적인 치리(治理)의 방법이 있어요. 외부에선 중국이 잘못 가고 있다고 비판해도 중국에서 살아가는 우리로서는 그렇게 인구가 많은 나라가 그 정도로 일사분란하게 잘 돌아가고 있다는 사실에 감탄하지 않을 수가 없지요. 불과 얼마 전엔 상하이서 베이징까지 기차를 타면 밤을 새고 가야 했는데, 이제 고속철을 타면 5-6시간밖에 안 걸리지요. 중국은 아편전쟁을 겪고, 난징대학살을 당하고, 제국주의 열강들에 둘러싸여 ‘박이 쪼개지듯(瓜分)’ 산산 조각났던 나라였는데, 얼마나 큰 발전인가요? 여전히 많은 문제가 있지만, 중국은 매우 잘하고 있고, 향후 최소 50년간은 이대로 승승장구하리라 봅니다. 저는 애국자입니다. 한국인도 모두 애국자가 아닌가요?”
한 ‘애국자’의 진정어린 질문에 먼 타국의 ‘이방인’으로서 나는 겨우 이렇게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네, 이해가 됩니다! 한국인들도 거의 대부분 다 애국자이겠지만, 문제는 사람들마다 애국하는 방법이 극과 극으로 다르다는 점이겠지요. 중국 역사를 돌아보면, 8년간 항일전쟁을 주도했던 장제스도 애국자이고, 공산혁명을 일으켰던 마오쩌둥도 애국자잖아요? 매번 선거 때만 되면 한국인들은 장제스와 마오쩌둥처럼 두 패로 갈라져서 꼭 전쟁 치르듯이 싸우지요. 모두가 자기편이 옳다고 우겨대면서 말이죠!”
“중국에선 보편가치, 권력분립을 논하지 마라!”
2016년 12월 말 중국의 한 대학에서 남송대(南宋代, 1127-1279) <<주례(周禮)>> 경학(經學)의 “권력분립 이론”에 관해 강연할 기회가 있었다. 유가 13경 중 하나인 <<주례>>는 고대 국가의 이상적 관료조직이 직관별로 매우 상세하게 묘사돼 있다. 정부 조직을 천·지·춘하추동 여섯 부서의 360 관직으로 분류하고, 각 직관마다 맡은 바 역할과 책무를 시시콜콜한 의식, 음식, 의복에 이르기까지 상세하게 규정하고 있다. 360 직관에 달린 관원의 숫자를 모두 합하면 9만 3천여 명을 넘는다. 실로 세계사에 보기 드문 신비로운 고대 관료제의 청사진이다.
▲<유가(儒家) 13경의 하나인 “주례(周禮)”는 한(漢) 제국 이후 동아시아 여러 국가에서 관료행정 조직의 원형으로 기능했다. / 공공부문>
<<주례>>에서 가장 중요한 직책은 <<천관(天官)>>의 총재(冢宰) 혹은 태재(太宰)인데, 이후 동아시아 관료제의 재상(宰相), 승상(丞相), 영의정(領議政)의 원형이라 할 수 있다. 현대어로 풀면 수상(首相, premier) 혹은 총리(總理, prime minister) 정도가 될 수 있다. 800-900년 전 중국의 정치 사상가들은 바로 그 총재(冢宰)의 직책에 비상한 관심을 보였다. 무엇보다 총재와 왕(王)의 관계에 주목하면서 양자 사이의 견제와 균형에 관한 정교한 논변을 계발했다. 국가의 권력이 “황제” 일인(一人)에게 집중될 때 발생하는 “남권”(濫權, 권력 전횡 및 남용)의 문제를 지적하면서 남송대 정치 사상가들은 총재는 왕권을 제약하고, 왕은 총재의 권력을 감시하고 통제해야 한다는 논리를 정교하게 발전시켰다. 황권과 신권의 상호견제, 상호감시가 정부의 부패와 실패를 막는다는 명실 공히 권력분립 이론이었다.
이미 수편의 논문을 통해 학계에 소개한 내용이기에 나는 더욱 설레는 마음으로 중국의 학인들에게 남송대 권력분립 이론을 알리고 싶었다. 근대 입헌주의 논쟁보다 수백 년 앞서 권력분립 이론을 구성했던 남송대 경학자들을 칭송하려는 의도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권력분립을 용인하지 않는 중국공산당의 일당독재에 대한 이의제기이기도 했다. 무엇보다 “800년 전 중국의 학자들도 권력분립을 역설했다”는 점을 중국 인민들에게 말하고 싶었다.
강연이 시작되자 곧 대부분 청중의 표정이 심각하게 굳어 있음을 감지할 수 있었다. 발표가 끝나자 질문이 쏟아졌는데, 경계와 적의가 섞인 문책성 질문의 연속이었다. 내용과 상관없이 제목부터 시빗거리였다. 강연의 제목을 “<<주례>>와 보편가치: 남송대 권력분립 이론”으로 뽑았던 게 화근이었다. 그 제목에는 보편가치와 권력분립이라는 두 개의 금칙어가 포함돼 있기 때문이었다. 정치적으로 민감한 주제임은 알고 있었지만, 그 정도 거센 반발이 일지는 예상하지 못했다.
공산당원이 아닐까 의심되는 한 청년이 오늘날 중국에서 구미 대학의 현직 교수가 권력분립을 강조하는 행위 자체가 “문화 침략”이 아니냐고 따졌다. 이에 대해 나는 서구의 근대 입헌주의보다 700-800년 앞서서 “황제 중심체제”의 중화제국에서 더 먼저 권력분립 이론이 구성됐다면 중국인으로서 자랑스러워 할 일이 아니냐고 대답했다.
이어서 다른 학생이 날카롭게 따지는 목소리로 질문했다. “제목이 <<주례>>와 보편가치라고 붙였는데, 정치적 의도가 대체 무엇인가?” 그 질문에 대해 나는 <<주례>>의 세계사적 의의를 인류 보편의 관점에서 적극적으로 해석하려는 의도일 뿐이라 답했다. 질세라 그 학생은 다그치듯 물었다. “대체 그 보편가치가 구체적으로 무엇인가?” 순간 머리가 텅 빈 느낌이었다. 큰 청중 앞에서 말문을 잃고 궁지에 몰리는 느낌이었는데, 머리에서 위기를 빠져나갈 묘한 꾀가 떠올랐다. 나는 겨우 어색한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
“요사이 중국 어디나 붙어 있는 ‘사회주의 핵심 가치관 12가지’가 생각나네요. 부강·민주·문명·화해, 자유·평등·공정·법치, 애국·경업(敬業)·성신(誠信)·우선(友善), 이 열 두가지 모두가 보편가치가 아닐까요? 캐나다 대학생들도 이 열두 가지 가치관을 흔쾌히 받아들일 듯합니다. 특히 민주, 자유, 평등, 공정, 법치는 인류의 보편적 가치라고 유엔 헌장에 나와 있지요.”
▲<2012년 시진핑 정권 등장 이래 중국 어디서나 흔히 보이는 사회주의 핵심가치관 12가지/ 중국인터넷>
내가 그렇게 말하자 청중은 비로소 웃음을 터뜨리고 나에 대한 적의를 어느 정도 거둬들였다. 강연이 끝나고 만찬이 이어질 때 주최 측의 담당 교수가 내게 다가와 넌지시 말했다. “보편가치”와 “권력분립”은 모두 정치적으로 매우 민감한 용어니까 상부에 강의 내용을 보고할 때는 제목을 좀 바꾸려 한다며 동의를 구했다. 결국 그날 강연의 제목은 주최 측의 뜻에 따라 “남송대 주례 경학사 논쟁” 정도의 무색무취한 평범한 학술 상투어로 사후 수정되었다.
2013년 ‘헌정민주’ 논쟁...”무책임한 자유파의 서구 추종주의” 비난
2013년 여름 “헌정 민주” 논쟁이 뜨겁게 중국의 인터넷을 달구고 있었다. 중국 안팎에서 법학, 역사학, 철학, 정치학 등 다양한 학술분야의 전공자들이 참여하면서 논쟁이 일대의 정치 담론으로 확산되는 상황이었다. 당시 나는 항저우(杭州) 사범 대학에서 단기 방문학자 자격으로 강의를 하고 있었는데 주변의 지식인들이 흥분된 목소리로 내게 정치 개혁을 둘러싼 큰 논쟁이 진행 중이라 알려 왔다. 얼마 후 중국공산당은 부랴부랴 산불을 진화하듯 “헌정 민주” 논쟁을 잠재우기 위해 중앙 당교(黨校)의 이론가들을 “헌정 민주” 논쟁에 투입했다.
당교의 이론가들은 “헌정 민주” 논쟁이 서구 자유민주주의를 동경하는 무책임한 “자유파”의 줏대 없고 무분별한 서구 추종주의일 뿐이며, 무엇보다 “중국 특색 사회주의”에 대한 심대한 도전이라고 일갈했다. 이미 그해 5월 중국공산당은 중국 대학에 일곱 가지 사항에 대해선 아예 언급조차 하지 말라는 “칠불강(七不講)”의 비밀 지시를 하달한 상태였다. 상하이 화둥(華東) 정법대학의 법학자 장쉐중(張雪忠, 1976- ) 교수가 그 사실을 인터넷에 폭로하면서 구미 언론에까지 “칠불강” 관련 보도가 잇달았다. 중국공산당이 직접 나서서 금지한 그 일곱 가지 주제는 바로 서방식 헌정민주, 보편가치, 공민사회(시민사회), 신자유주의, 서방언론관(언론자유), 역사허무주의(중국공산당의 역사적 착오), 개혁개방 비판 등이었다.
중국공산당의 개입으로 이후 “헌정민주” 논쟁은 꽤나 위축되었지만, 적어도 그해 여름까지는 논쟁의 불길이 거세게 타오르고 있었다. 1989년 톈안먼 대학살 이래 잠잠했던 중국의 지식계가 다시금 “헌정민주”의 화두를 들고 정치 개혁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특히 1920-30년대 태어난 80대 원로들의 맹활약이 돋보였다. 이들 원로들은 “해방” 이후 태어나 문혁을 겪은 세대와는 달리 1930-40년대 중국의 다양한 사상 논쟁을 체득한 세대였다.
▲<중·영 이중 언어로 출간되는 미국 캘리포니아 소재 비판 언론 “中國數字時代(Chinese Digital Times)의 2015년 5월 1일 기사, https://chinadigitaltimes.net/chinese/391123.html>;
“헌정민주” 담론 이끄는 80대 두 거장, 두광과 위잉스
1919년 5.4운동 이후 1920-30년대 중국의 지식인들은 다양한 사상과 이념의 격랑 속에서 다채로운 논쟁을 벌였다. 그 당시 중국 지식계를 휩쓸고 갔던 다양한 사조들을 열거해 보면········. 공화주의, 계몽주의, 자유주의, 합리주의, 경험주의, 실증주의, 회의주의, 신용주의, 민족주의, 애국주의, 범(泛)아시아주의, 세계주의, 공리주의, 자유주의, 자유방임주의, 개인주의, 평등주의, 상대주의, 니힐리즘, 공동체주의, 염세주의, 휴머니즘, 다윈 진화론, 사회진화론, 복고주의, 전통주의, 모더니즘, 사회주의, 무정부주의, 낭만주의, 박애주의, 마르크시즘, 레닌이즘, 트로츠키주의, 무정부주의, 반제국주의, 반봉건주의, 반전통주의, 반외세주의 등등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그 많은 사상 사조 중에서도 청나라 말기부터 유입된 입헌군주제, 입헌민주주의(constitutional democracy) 등은 근대 국가의 기본 제도를 짜는 중요한 논쟁을 촉발시켰다. 1949년 중국공산당의 승리는 중국역사에서 다시금 백가쟁명의 다양성을 모두 죽이고 공산주의 이념으로 통일하는 사상의 암흑기를 열었다.
2013년 당시 “헌정민주” 논쟁이 일자 80대 원로 학자들 몇 명이 논쟁의 핵심에 섰다. 그들은 아마도 젊은 시절 자신들을 경동시켰던 5.4운동의 지적 혁명을 다시금 구현하고 싶어 한 듯하다. 그중 특히 두 명의 활약이 매우 두드러졌다. 1990년 은퇴할 때까지 중앙 당교 이론연구소의 부주임을 역임했던 두광(杜光, 1928- )과 프린스턴 대학 명예교수 위잉스(余英時, 1930-1921)이다.
▲<중국의 “헌정민주” 담론을 주도하는 두광(1928- ) 교수, 2015년 사진/ scmp.com>
1928년 저장성에서 태어난 두광은 1946년 베이징 대학에서 수학한 후 자발적으로 화북 지방의 공산군 해방구로 들어갔다. 신념 있는 청년 마르크시스트였던 두광은 1957년 반우파 운동 때 우파로 몰려서 20여년의 세월 정치적 박해를 당했다. 20년을 음지에 묶여 있던 그는 1979년에야 겨우 당교로 복귀해 정치 이론가로서의 삶을 재개했다. 1990년 퇴직한 후 그는 왕성하게 “헌정민주” 담론을 이끌었다. 두광은 정통 마르크시즘의 관점에서 중국공산당 일당독재의 이론적 모순과 반인류적 전제성을 정면으로 비판하고, 중국 현행 헌법을 근본적으로 뜯어고치는 전면적 정치 개혁을 요구해 왔다.
두광은 여러 편의 글을 통해서 오늘날 중국에서 정치 개혁의 중책을 감당해야 할 “개혁파” 혹은 “민주파”의 정신적 계보를 밝혀 왔다. 그의 연구에 따르면, 중국의 “민주파”는 5.4운동에서 기원했으며, 이후 중국공산당 치하에서도 질기게도 명맥을 이어왔다. 특히 1957년 백화제방 당시의 5.19 학생민주운동, 1976년 톈안먼 광장의 4.5 민주운동, 베이징 시단(西單)의 민주장 운동, 1986년 민주운동, 1989년 톈안먼 민주화 운동으로 중국의 민주파는 면면히 이어졌다. 두광은 보편가치에 입각한 입헌민주주의의 실현이야말로 중국헌정사의 종착점이라 주장하고 있다.
2013년 당시 위잉스는 이미 10년 넘게 일당독재를 비판하고 보편가치를 선양하는 중후한 시론들을 꾸준히 발표하고 있었다. 특히 “민주 중국”이란 제목 아래 연재된 위 교수의 문장은 대륙의 지식인들 사이에서 널리 회자됐다. 그 당시 중국 지식인들은 위잉스의 학술 저술뿐만 아니라 정치 평론을 탐독하고 있었다. 2014년 9월 27일 위잉스가 홍콩 중문대학의 좌담회에서 발표한 “대륙에서 제창하는 유교는 죽음의 입맞춤(kiss of death)”이라는 제목의 짧은 글은 큰 파장을 일으켰다. 결국 2014년 10월 중국공산당은 위잉스의 저작들을 금서 목록에 넣을 수밖에 없었다.
▲<2021년 8월 타계한 세계 중국학의 거장 프린스턴대 명예교수 위잉스(1930-2021)의 모습/ caixinglobal.com>
1930년 톈진에서 태어나 안후이(安徽)성에서 유년기를 보낸 위잉스는 젊은 시절 5.4운동의 거장 후스(胡適, 1891-1962)의 영향 아래서 자유주의의 분위기를 익혔던 “신청년(新靑年)” 세대라 할 수 있다. 1950년 홍콩으로 탈출한 후 그는 중국학의 거장 첸무(錢穆, 1895-1990) 밑에서 공부했고, 1955년 도미해서 하버드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이후 위잉스는 영미 학계에서 최고의 영예를 누린 중국학의 거장이 되었다.
2010년대 중국에서 5.4운동의 정신을 기억하는 80대의 거장들이 “헌정 민주” 담론을 이끌었다는 사실은 오늘날 중국 사상사에서 매우 커다란 의미가 있다. “슬픈 중국”에서는 앞으로 2-3주에 걸쳐 척박한 대륙의 사상계에 5.4운동에서 태동했던 헌정, 민주, 자유의 불씨를 새롭게 되살린 두광과 위잉스의 저서와 정치평론을 보다 상세히 소개하고자 한다. 생애 마지막까지 인류의 보편가치를 선양하며 중국공산당의 인권유린과 정치범죄를 비판한 두 사람이야 말로 진정한 “대륙의 자유인들”이기 때문이다. <계속>
<6회> “말할 자유를 빼앗는 악당들, 모두 뿌리째 뽑아버리자

▲<1976년 4월 5일, 저우언라이 총리 추모식을 계기로 톈안먼 광장에 모인 100만 군중. 문화혁명 막바지 “10년 동란”을 겪은 시민들은 광장에 몰려나와 울분을 터뜨리며 항의했다./ 공공부문>
”나랏일 얘기할 땐 좀 작게 말씀하세요”...노래에 담긴 자유의 메시지
1940년대 후반 중국 대학가에서 널리 불렸던 노래 중에 “차관소조(茶館小調)”라는 서사 가곡이 있다. 신바람 나는 리듬에 촌철살인의 풍자가 담겨 있어 꼭 조선 후기의 사설시조 같은 느낌을 풍긴다.
“밤바람 불어오는 싸늘한 시간
동쪽 거리 찻집은 참으로 시끌벅적
위층과 아래층에 손님들이 북적이며
‘주인장, 끓는 물 좀!’ 소리를 치네.
찻잔과 접시 부딪히는 소리
딩딩 당당, 딩딩 당당!
어떤 이는 잡담하고, 어떤 이는 언쟁하고,
어떤 이는 고뇌하고, 어떤 이는 나랏일을 논하고,
어떤 이는 불평을 늘어놓네!”
이렇게 흥겹게 시작한 노랫말은 슬슬 정치판을 비꼬기 시작한다.
“오직 찻집 주인만 간이 작아서
다가와선 작고 가는 목소리로 속삭이는데,
여러분들, 제발 장사 좀 할 수 있게
나랏일 얘기할 땐 좀 작게 말씀하세요!
나랏일을 얘기하면 곤란해져요.
나, 너, 우리 모두 힘들어져요······.
그러다 철창신세를 질 수도 있죠!”
찻집에 모인 사람들이 모두 흥겹게 큰 목소리로 국사(國事)를 논하는데, 겁에 질린 주인장이 손님들에게 다가가서 정치 얘기는 제발 하지 말아달라고 허리를 굽혀 가며 당부하는 장면이다. 바로 그때 담력이 큰 한 손님이 벌떡 일어나선 “통쾌한 큰 목소리로 또렷하게” 소리 지른다.
“우리를 압박하고, 우리를 갈취하고,
우리들의 말할 자유를 빼앗는 악당들,
모두 뿌리 채 뽑아버리자!
우리의 말할 자유를 빼앗는 악당들,
모두 뿌리 채 뽑아버리자!”
“헌정 민주” 주장하는 이론가 두광 “권력 규제하고 공민의 권리 보장해야”
2015년은 을미(乙未)년, 청양띠의 해였다. 그해 11월 16일 베이징의 한 강연장에서 수십 명의 젊은 청중에게 “양떼(羊群) 강연”을 마친 후, 당시 87세의 두광(杜光, 1928- ) 선생은 청중의 부탁에 호응해 자리에서 일어나서 바로 그 “차관소조”를 흥겹게 불렀다. 노래를 부르기 전 두 선생은 이 노래가 1940년대 쿤밍에서 학생들이 즐겨 부르던 노래라 했다.

▲<1940년대 윈난성 쿤밍의 국립 시난(西南) 연합대학 학생들의 시가행진/ 공공부문>
당시 쿤밍에는 국립 시난(西南) 연합대학이 있었다. 중일전쟁 발발 후 1938년부터 1946년까지 무려 8년 동안 전란을 피해 캠퍼스를 남방으로 옮겨야만 했던 베이징 대학, 칭화(淸華) 대학, 난카이(南開) 대학 등이 국민당의 지원 아래 세웠던 전시의 국립 합동대학이었다. 1946년 이후 세 대학은 모두 베이징과 톈진으로 복귀했다. 그때부터 이 노래는 베이징과 톈진의 청년들 사이에서도 애창됐다고 한다.
두 선생은 1946년 17세의 나이로 베이징 대학에 입학해서 1948년까지 두 해 동안 수학했다. 국공내전이 한창일 때 베이징의 국민당 정부는 공산당 요원들을 색출해서 처형하는 공포 정치를 이어가고 있었다. 그러한 상황에서 “차관소조”는 사람들의 자유를 탄압하는 국민당 정부를 희화하고 비판하는 풍자의 민요였다.
2015년 11월 15일 두광이 거의 70년 전 그 노래를 기억의 창고에서 다시 불러낸 이유는 무엇일까? 불과 석 달 전인 2015년 8월 25일, 그가 언론사에 기고한 칼럼, “안전부가 노인들의 식사모임을 금지하는 불법 행위에 대한 항의”에 그 이유가 잘 드러나 있다.
두 선생은 5, 6년 전부터 70-80대의 친구들과 함께 봄, 여름, 가을 세 계절 동안 매월 한 번씩 모여서 차를 마시며 대화를 나누고 오찬을 한 후 악수를 하고 헤어지는 친목 모임을 열어 왔다. 물론 “우국애민(憂國愛民)”의 충정이 일어나 “정치가 맑아지고 사회가 안정되는 태평의 생활”을 갈망하기도 했지만, 모두가 “세정에 맞고(合情), 이치에 맞고(合理), 법도에 맞는(合法)” 그저 작은 이벤트일 뿐이었다.
특히 그날 모임은 5년 전 타계한 전 인민대학 부총장 셰타오(謝韜, 1921-2010)의 추모일이었다. 고인의 기일에 맞춰 추모집의 출판을 준비한 딸 셰샤오링(謝小玲)은 그날 모임에 참석해서 별도의 출판 기념식을 열 예정이었다. 그러한 정황을 파악한 베이징 안전부는 셰사오링에게 세 차례나 추모회에 가지 말 것을 요구하고, 사복 경관을 풀어서 식당 문 앞을 감시하고, 식당에 압력을 넣어 예약을 취소하게 했다. 베이징 시 안전부의 노골적인 정치적 탄압에 격분한 두 선생은 공민(公民)의 기본 권리를 박탈한 당국을 향해 항의의 격문을 작성했다.
“베이징 공안부문이 우리에게 가한 박해는 의법치국의 정신을 완전히 위배하고 있다. 묻건대, 그대들이 그토록 권력을 남용해서 우리들의 식사 모임을 갖는 자유까지 박탈하는데, 대체 어느 법률, 어느 조항에 의거하고 있나? 우리가 서로 모여 얼굴을 보는 행위가 대체 어느 법률, 어느 조항에 위배된단 말인가? 설마 우리들의 권리는 헌법과 법률의 보호를 받을 수 없다는 말인가? 대체 왜?”

▲<2013년 4월 둥완(東莞) 노동자/농민 청년들이 거리에 나와서 민주, 자유, 인권, 헌정을 외치고 있다. 왼쪽 붉은 종이의 구호: “정당은 국가보다 못하고, 중공은 인민보다 못하다” 오른쪽 붉은 종이의 구호: “민선(民選) 없는 정당은 모두 불량배 집단이다.” https://www.rfa.org/mandarin/yataibaodao/zhengzhi/jz-08062013151728.html >
불과 열 달 전 중국공산당 제18대 중앙위원회 4차 전체회의에서는 “의법치국(依法治國)”을 전면에 내세웠다. “인민을 위한, 인민에 의한, 인민을 행복하게 하고 인민을 보호하는, 기본적인 인민 권익의 보장을 출발점이자 종착점으로 삼는, 인민이 법에 의거해 광범위한 권리와 자유를 누릴 수 있도록 보장하는 모든 의무를 다해야 함”을 만장일치로 결의했었다. 두 선생은 “의법치국”을 부르짖으면서 자의적으로 권력을 사용하는 바로 그 중공 중앙위원회를 다음과 같이 꾸짖었다.
“우리들이 직접 겪어 느낀 바로는 이는 10개월 전 [중공중앙의] 승인한 바에 정면 위배되는 불법적 행위이다. 소위 ‘의헌치국(依憲治國, 헌법에 근거한 국가의 통치),’ ‘의법치국(依法治國)의 기본 정신은 공민 권리를 보장하고, 권력의 집행을 규제하는 데 있다. 혹은 더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권력의 운용을 규제함으로써 공민의 권리를 보장한다는 뜻이다. 공민의 권리를 침해하는 행위는 결국 정치권력에 그 뿌리가 있다. 예컨대 권력과 지위를 가진 자산계급에서 발생하는데, 우선 그들이 권력을 갖기 때문이다. 권세를 믿고 횡포를 부리는 호강(豪强) 자산계급이 출현하면 그들은 정경유착을 통해 권력을 매수한다.”
중 당국, 지인들과 함께하는 ‘식사 모임’까지 감시하고 제재
베이징 공안부가 두광 선생의 사회 활동을 감시하고 제재한 이유는 쉽게 설명된다. 두광 선생은 이미 1990년대부터 줄기차게 중국공산당 일당독재를 비판해 왔던 대표적인 헌정-민주주의자(constitutional democrat)이기 때문이다.
2013년 이래 중공중앙은 당시 중국 지식계에 거세게 타오르던 “헌정-민주”의 불길을 잡기 위해 이념적 진화 작업에 나서고 있었다. 두광 선생은 2010년대 “헌정 논쟁”의 중심인물이었다. 보편가치, 사법독립, 중국공산당의 어두운 과거사, 개혁개방 이후 정부의 문제점, 입헌주의, 권력분립, 등등 중국공산당이 금기시하는 민감한 주제들을 그는 논설, 서간, 강연, 논문 등의 다양한 형식으로 꾸준히 논해 왔다.
2015년 8월 급기야 베이징 안전부는 두광 선생이 지인들과 함께 하는 “식사 모임”까지 감시하고 제재하는 무리수를 두고 있었다. 불과 두 달 전인 2015년 6월 11일 중공중앙의 거물 저우융캉(周永康. 1942- )이 뇌물수수, 직권남용, 국가기밀 누설의 죄명을 쓰고 무기징역형을 선고받았다. 저우융캉은 중공중앙 정치국 상무위원회 9인 중 한 명으로 중국의 사법부와 경찰을 담당하는 국가 안전부문의 책임자였다. 베이징 시 안전부 역시 저우융캉의 관할 하에 있었음도 관련자의 구속·수사를 통해 밝혀진 상황이었다.

▲<2010년 1월 18일. 자유아시아 방송(RFA)과의 인터뷰 장면. 1988년부터 당시 두광 교수는 중국정치체제 개혁 연구회에 참여했으며, 격월지 “중국 정치체제 개혁”의 편집장을 맡았다. https://www.rfa.org/mandarin/yataibaodao/liu-01182010094359.html >
두광 선생은 70-80대 노인들의 식사모임까지 문제 삼는 베이징 시 안전부의 무리수가 저우융캉의 구속과 무관하지 않다고 판단한 듯하다. 항의서의 말미에서 두광 선생은 만약 공민의 권리 회복을 바라는 자신의 기대가 수포로 돌아간다면, “중국 사회는 여전히 저우융캉이 없는데도 저우융캉의 어두운 그늘에 덮여 있음을 보여 줄 뿐”이라며 한탄했다.
두광 선생의 항의가 중국공산당을 움직였기 때문일까? 그해 가을 베이징 시 안전부는 두광 선생에 대한 감시와 제재의 고삐를 살짝 늦췄던 듯하다. 2015년 8월 말, 두광 선생의 항의서는 홍콩, 대만의 언론에 보도되면서 중공정부에 적잖은 부담이 됐다고 사료된다. 상세한 내막을 알 수 없지만, 2015년 11월 16일 두광 선생이 수십 명의 젊은 관객들 앞에서 흥겹게 큰 목소리로 “차관소조”를 부를 수 있었다. 그 사실만으로 불과 2-3개월 만에 상황이 극적으로 바뀌었음을 느낄 수 있다.
계급적인 인민, 민족주의적 국민 아니라 공적 담론에 참여하는 ‘공민’ 내세워
위의 항의서에서도 잘 드러나지만, 두광 선생은 “헌정 민주”의 정신을 쉽고 간단하게 요약한다. 바로 “헌정”이란 국가 권력을 제약하고 공민의 기본권을 확대하는 인류의 보편가치다. 민주란 공민이 자발적인 정치 참여를 통해 정당한 권력을 창출하는 공민 주권주의의 실현이다.
두광 선생은 인민도 국민도 아닌, 공민을, 공민 사회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왜일까? 인민은 마르크시즘에 입각한 계급적 개념이다. 중국 초중고 교과서에 따르면, 인간은 사회주의 혁명에 동조하는 “인민”과 반대하는 “적인”으로 나뉜다. 국민은 1920-40년대 중국에서 국민당이 이미 선점한 개념인데다 개인보다 국가를 우선시하는 뉘앙스가 있다. 인민은 계급적인 의미가 강하고, 국민은 민족주의 색채가 짙다.
반면 공민이란 공공(公共) 영역에서 공익을 위해 자발적으로 공적 담론에 참여하는 깨어있는 사람들의 범칭이다. 누구나 생득적 권리로 공화국의 시민이 될 수는 있지만, 그 자체로 충분할 순 없다. 공민이 되기 위해선 공적 시민으로서의 교육을 받고, 공적 담론에 참여해야 한다. 그 과정을 통해서 인간의 기본권과 인류의 공공선을 인식할 때, 개인은 공화국의 시민, 곧 공민으로 거듭날 수 있다.

▲<1919년 5월 4일, 톈안먼 광장에 모인 사람들/ 공공부문>
“공인”이 아니라 “공민”이라 쓰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 연원을 추적해 보면 바로 1911년 신해년 “민국(民國) 혁명”으로 소급된다. 1911년 황제의 지배 속에서 2천 간 훈습돼 온 중국인들이 떨쳐 일어나 “제국”을 부수고 “민국”을 건설했다. 황제의 나라가 공민의 나라로 바뀌었다. 두광 선생은 20세기 초반부터 100년 역사를 파헤쳐 “헌정 민주”를 부르짖고 있다. 그 속에 중국공산당 일당독재를 해체할 수 있는 무서운 사상의 폭약이 내장돼 있다. 두광 선생의 저서를 읽어보면 더 분명히 알 수 있다. 이제 두광 선생이 말하는 “헌정 민주”의 내용을 더 깊이 살펴보자. 언제 읽어도 두광 선생의 글은 명쾌하고, 강렬하고, 건강하다! “우리의 말할 자유를 빼앗는 악당들, 모두 뿌리 채 뽑아버리자!”는 70년 전 대학가의 노랫말처럼. <계속>
<7회> “빈곤 벗어난 역사적 위업 이뤘다” 중국 공산당의 영구집권 논리

▲<티베트 자치구의 빈곤층의 모습/ https://www.tibetanreview.net/china-targets-tibet-in-2020-poverty-elimination-goal/ >
“중국공산당 100년의 최대 업적, 탈빈 전투에서 승리”
탈빈공견(脫貧攻堅)!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해 가장 견고한 적의 진지를 공격한다는 뜻이다. 2012년 18차 전국인민대표대회 이후 시진핑 정부는 소강(小康, 샤오캉) 사회의 실현을 위한 “빈곤과의 전쟁”을 최우선의 정책 과제로 내걸어 왔다. 급기야 시진핑 정부는 2021년 중국공산당 창당 100주년을 맞이하여 “탈빈공견”의 전투에서 승리했다고 선언했다.
“18대 (전국인민대표대회) 이래 전국적으로 832개 빈곤 현(縣)이 모두 오명을 벗었다. 12만 8천개 빈곤 촌(村)이 전부 가난의 딱지를 뗐다. 1억 명에 달하는 빈곤 인구가 빈곤에서 탈출할 수 있었다. 이는 유엔이 설정한 2030년 목표치를 10년이나 앞당겨 실현하고, 절대빈곤의 문제를 해결한 역사적 위업이다. 우리는 빈곤층을 줄여가는 인류의 역사에서 기적을 창조했다.”
2021년 11월 11일 발표된 중공중앙 19기 6차 전체회의의 “중국공산당 100년 분투의 중대 성취 및 역사경험에 관한 결의”에 담겨 있는 문단이다. 시진핑 정부가 지난 10년의 통치를 통해 중국공산당 “첫 번째 100년”의 목표인 “소강 사회” 실현을 급기야 달성했다는 중공중앙의 자체 평가다. 이 결의문에 따르면, 시진핑 정부의 이 “위대한” 성취는 “당 중앙의 집중적이고 통일된 영도력” 아래 전국의 모든 인민이 “중국몽”의 실현을 위해 다 함께 분투해 온 결과이다.
중국공산당 “첫 번째 100년”의 역사는 산간벽지 소비에트의 게릴라 전투에서 시작했다. 28년 만에 천하통일의 대업을 달성한 중국공산당은 조속한 사회주의의 실현을 내걸고 과도한 집산화의 폐해와 문화혁명의 광기로 곤경에 처했지만, 1978년 개혁개방 이래 연평균 거의 10%에 달하는 경제성장을 지속해서 급기야 세계 제2위 경제규모를 자랑하는 큰 나라로 탈바꿈했다.

그 “첫 번째 100년” 최후 10년의 과제는 이름하여 “탈빈공견의 전투”였다. 시진핑 정부 10년 동안 전국에 산재해 있던 가난한 인민을 극빈의 늪에서 건져냈다. “소강 사회”의 실현이라는 중국공산당 100년의 위대한 업적이란 결국 “탈빈,” 곧 “빈곤 탈출”의 내러티브에 지나지 않는다.
“탈빈”의 내러티브 밑바닥에는 중국공산당 일당독재의 논리가 깔려 있다. 중공중앙은 “당의 영도력은 전면적, 체계적, 총체적이며,” “당은 개인주의, 분산주의, 자유주의, 본위주의(本位主義, 분파주의), 호인주의(好人主義, 적당주의) 등” 서구식 자유민주주의 가치를 “방지하고 반대할 것”을 천명한다. 나아가 중공중앙은 인민 개개인의 정신적 대오각성까지 요구하고 있다. 가령 중공중앙의 2021년 “결의”에는 아래와 같은 문단도 포함돼 있다.
“마르크스주의 신앙(信仰), 공산주의의 원대한 이상, 중국 특색 사회주의의 공동 이상은 중국공산당 모든 사람들의 정신적 지주이자 정치 영혼이다. 이상과 신념은 중국공산당 모든 사람들의 정신적 칼슘이다. 중국공산당 사람들이 이상과 신념이 없다면, 정신적 칼슘 부족으로 연골증을 일으켜서 반드시 정치적 변질, 경제적 탐욕, 도덕적 타락, 생활상의 부패를 초래한다.”
개발독재의 시대를 경험했던 한국인들에겐 “초가집도 없애고 마을길도 넓히고” “우리도 한 번 잘 살아보세!” 등의 노랫말처럼 귀에 익은 이야기다. 빈곤 탈출의 범국민적 염원을 효율적이고도 강력한 중앙집권적 통치를 통해 단기간 내에 실현한다는 전형적인 개발독재의 발상이다. 그 시절 한국인들은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으며, 자주독립, 인류공영, 창조의 힘, 개척 정신, “반공 민주 정신에 투철한 애국 애족을 우리의 삶의 길”이라 배우며 자랐다.
한국의 경우 경제성장은 정치적 민주화로 직결됐다. 20-30년에 걸친 고도의 경제성장은 두터운 중산층을 낳았고, 중산층은 자유와 민주를 외치며 독재를 종식했다. 사회과학자들은 흔히 한국 모델을 일반화하여 “경제성장이 정치적 민주화로 이어진다”는 테제를 주장하지만, 과연 한국형 민주화 모델이 중국에서 실현될지는 미지수다. 한국은 국가 성립 초기부터 서구식 자유민주주의를 표방했지만, 중국은 인민민주독재의 사회주의 국가를 지향해 왔기 때문이다. 과연 앞으로 중국은 어떤 길을 갈까?

“중국공산당 두 번째 100년, 사회주의 강국의 전면 건설”
2017년 10월 24일 제19차 전국인민대표대회에서 반포된 “중국공산당 장정”을 보면, 중국공산당 “두 번째 100년”의 목표는 “사회주의 현대화 강국의 전면적 건설”이라 명시되어 있다. 중공중앙의 공식입장에 따르면, 이미 “소강 사회”에 진입했으므로 중국은 2022년부터 공식적으로 “사회주의 초급단계”로 들어서게 된다. “사회주의 초급단계”의 기본 노선 역시 중국공산당 일당독재를 벗어나지 않는다.
“전국 각족(各族) 인민을 영도하고 단결시켜서 경제건설을 중심으로 하여 ‘4항 기본원칙’을 견지하고, 개혁개방, 자력갱생, 간고(艱苦, 힘들고 어려운) 창업 (정신)을 견지하여 우리나라를 부강하고 민주적이고, 문명적이고 조화롭고 아름다운 사회주의 현대화 강국으로 만들기 위해 분투한다.”
여기서 4항 기본원칙이란 1) 사회주의 노선, 2) 무산계급독재, 3) 중국공산당 일당독재, 4) 마르크스-레닌주의와 마오쩌둥 사상 등 4항을 이르는데, 1979년 개혁개방을 막 개시한 덩샤오핑이 당시 거세게 일어났던 정치 자유화의 요구를 무마하기 위해 고심 끝에 밝힌 중국 특색 사회주의의 논리였다. 앞으로 계속 살펴보겠지만, 덩샤오핑의 논리는 지금도 중국공산당 일당독재를 지탱하는 이념적 기반이다.
“중국공산당 장정”에 명기된 중국공산당의 궁극적 목적은 공산주의의 실현이다. 그 꿈은 아득히 먼 미래에나 실현될 수 있는 원대하고 고원한 유토피아의 이상이다. 그 유토피아에 다가가기 위해선 일당독재가 필요하다는 전형적인 “유토피아적 전체주의(utopian totalitarianism)”의 레토릭이다. 공산주의라는 먼 미래의 비전을 담보로 오늘날 인민의 자유를 차압할 수 있기에 중국공산당은 마르크스-레닌주의의 “이상”이 인민의 “정치 영혼”이라 선전하고 있다.

시진핑 정부 들어 사상, 이념 교육의 비중이 점점 커지고 있다. 중공중앙 선전부와 중국 교육부는 2016년 이래 베이징대학, 칭화대학, 산둥대학, 우한대학 등등 전국의 주요 대학마다 “전국 중점 마르크스주의 학원”을 새롭게 건립해 가고 있다. 2020년 9월 중국 교육부는 2020년 가을 학기부터 37개 전국 중점 마르크스주의 학원에 “시진핑 시대 중국특색 사회주의 사상 개론” 수업을 전면적으로 개설할 계획이라 발표했다.
개발독재의 경제성장이 정치자유화로 직결됐던 한국의 경험과는 정반대로 중국의 경제성장은 사회주의 이념교육의 강화로 이어지고 있다. 1980년대 한국과는 달리 2020년대 중국에서 소위 “민주화” 세력은 크게 부각되지 못하고 있다. 적어도 겉으로는 풍차를 향해 달려가는 돈키호테처럼 고립된 소수의 반체제인사들이 산발적인 항의를 이어가는 듯하다.
과연 앞으로 100년 중국의 인민은 계속 중국공산당 일당독재 속에서 살아가야만 할까?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선 우선 “중국 특색 사회주의”라는 중국식 개발독재의 논리가 형성되던 1970년대 후반으로 돌아가 볼 필요가 있다.
중국 내 자유민주파의 물줄기도 흘러...일당 독재 세력에 도전
1976년 9월 9일 마오쩌둥은 8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27년에 걸친 마오쩌둥의 강력한 통치는 두 가지 큰 문제를 남겨 놓았다. 중국의 비판적 언론인 양지성(楊繼繩, 1940- )의 표현을 빌면, 중국인들은 마오쩌둥에게서 “경제적 빈곤”과 “정치적 전제(專制, 독재)”를 동시에 물려받았다. 빈곤 탈출의 경제 개혁과 전제 극복의 정치 개혁이 시대의 화두로 떠올랐다. 이 두 문제를 어떻게 푸느냐를 두고 네 개의 세력이 등장해 권력투쟁을 벌이기 시작했다.
첫째, 마오 사후 곧바로 최고 영도자의 지위에 올라 1976년 10월 6일 “사인방 분쇄(粉碎)” 작전을 직접 이끈 화궈펑(華國鋒, 1921-2008)은 “양개범시(兩個凡是, 두 개의 모든 것)”를 외쳤다. “마오가 말한 행한 모든 것, 마오가 말한 모든 것은 옳다”는 구호 아래 그는 사회주의 계획경제를 사수하고 공산당 일당독재를 그대로 계승하려 했다.
둘째, 화궈펑과는 달리 1950년대부터 경제계획을 입안했던 전문 관료 천윈(陳雲, 1905-1995)은 문화혁명으로 얼룩진 “만년의 마오”에는 거리를 두고 “1950년대 마오”의 경제 계획을 계승하되 공산당의 영도력은 절대 흔들릴 수 없다는 주장을 펼쳤다. 천윈은 대약진과 문화혁명의 착오는 인정하지만, 문제는 사회주의 계획경제의 근본 오류가 아니라 단지 운영 주체의 미숙과 정치적 광열일 뿐이라 판단 아래 이제 진정한 사회주의 계획경제를 실현하자고 외쳤다.
셋째, 1962년 이미 “흑묘백묘론”을 펼쳤던 덩샤오핑은 당내의 독단론자들을 비판하면서 전격적인 시장경제의 도입으로 과감한 개혁개방을 추진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덩샤오핑은 당내 개혁 세력을 규합해 화궈펑을 퇴장시키고 천윈과의 대립 속에서 과감한 경제 개혁의 물꼬를 텄다. 1978년 12월 최고영도자의 지위에 오른 덩샤오핑은 경제 개혁을 시작했지만, 그 역시 중국공산당 일당독재와 사회주의 이념은 묵수했다. 그의 노선은 이후 1990년대 이후 “사회주의 시장경제”라는 테제로 정립되었다.
이상 세 가지 노선의 차이는 중공중앙의 권력 투쟁 과정에서 노정되었다. 중앙 권력층의 논의와는 별개로 중국의 지식인들 사이에선 경제적 개혁과 정치적 자유화를 동시에 요구하는 이른바 “자유민주파”가 등장하고 있었다. 마오쩌둥 사후에는 누구도 공개적으로 자유와 민주를 크게 부르짖을 수 없었지만, 개혁개방이 시대정신으로 부각되던 1978년부터 일군의 시민들이 정치 자유화를 요구하고 나섰다. 자유와 민주를 향한 공민(公民) 사회의 열망은 1978-1979년 베이징 시단(西單) 운동장의 길이 100미터 넘는 담장을 대자보로 가득 메운 이른바 “민주장(民主牆) 운동”으로 표출됐다.

이에 놀란 덩샤오핑은 1979년 3월 30일 앞에서 언급한 “4항 기본원칙”을 천명했다. 경제적 자유화는 추진하되 중국공산당 일당독재는 유지한다는 “중국 특색 사회주의”의 기본 원칙이었다.
1980년대 내내 정치적 자유화를 부르짖는 자유민주파의 요구는 끊이지 않고 이어져 급기야 1989년 톈안먼 민주화 운동으로 발산되었다. 덩샤오핑의 “4항 기본원칙”은 톈안먼 광장의 시민들을 사회주의를 사보타주하는 폭도로 몰아가는 근거가 됐다. 결국 탱크 부대가 동원된 톈안먼 대학살은 자유민주파를 강압적으로 해산했지만, 그들을 완전히 박멸할 수는 없었다.
놀랍게도 중국공산당 일당독재의 두꺼운 땅 밑으로 “자유민주파”의 강물은 여전히 도도한 물줄기로 흐르고 있다. 이제 중국공산당의 일당독재를 시대착오적 스탈린주의의 변종이라 비판하는 자생적 “자유민주파”의 논리정연한 주장에 차분히 귀 기울일 때다. <계속>
〈8〉‘다윗 대만’ 민주주의를 무기로 ‘골리앗 중국’에 맞서 싸우다

대만 외교의 최강 병기, 자유 민주 인권
국제외교의 전장에선 어리석고 힘센 골리앗을 물리치는 영리하고 날쌘 다윗의 활약을 꽤나 흔히 볼 수 있다. 타이완 차이잉원(蔡英文, 1956- ) 총통의 정공법 외교술을 볼 때마다 그런 생각이 떠오른다.
최근 차이잉원 총통은 미국의 대표적인 국제외교 저널 <<포린 어패어스(Foreign Affairs)>>에 실린 특별기고문 “타이완과 민주주의를 위한 투쟁(Taiwan and the Fight for Democracy)”에서 “타이완은 절대로 민주주의를 양보할 수 없다”면서 타이완에 대한 중국공산당의 군사도발에 단호히 맞서 함께 싸우자며 세계 각국에 지지를 호소했다.
타이완은 일본 북부에서 보르네오까지 이어지는 제1열도선상에 놓여 있는 지정학적 요지이며 인도-태평양 지역 경제 발전의 핵심 거점이다. 차이 총통은 바로 그 타이완의 역사가 범인류적 보편가치를 실현해가는 “민주주의를 위한 투쟁”의 과정이었다고 역설한다. 그렇게 타이완의 이념적 정체성을 명확히 밝힘으로써 차이 총통은 타이완에 대한 중국공산당의 군사 위협은 자유민주주주의에 대한 “더욱 노골적이고, 더욱 확신에 찬 권위주의의 도전”이라고 명료하게 규정한다.
인류사의 거시적 관점에서 보면, 중국공산당이 부르짖는 “중화민족의 위대한 부흥”이란 이미 낡고 진부해진 100년 전의 구호일 뿐이다. 반면 차이 총통이 부르짖는 자유, 인권, 민주주의의 가치는 여전히 절실한 전 인류의 열망이자 이상이다. 바로 그 점을 부각시켜 차이 총통은 타이완 해협을 사이에 둔 이른바 양안(兩岸) 문제를 자유주의 대(對) 전체주의의 대결이라 정리한다. 이제 세계인의 뇌리에서 타이완 이슈는 “민족부흥”을 외치며 외교적 고립을 자초하는 비대한 대륙국가와 “자유·민주·인권”을 외치며 국제 연대를 강화하는 날렵한 강소국의 대결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대만의 민주주의 수준 아시아 1위, 세계 11위
위풍당당한 차이 총통의 발언은 자유민주주의의 보편가치를 실현해 간 다수 타이완 사람들의 결연한 정치적 신념에 근거하고 있다. 국민당 군사정권의 권위주의를 물리치고 민주화를 이룩한 타이완 사람들이 그에 비할 바 없이 가옥하고 억압적인 중국공산당의 위협에 굴복할 리가 없다. 차이 총리는 말한다.
“늘 합의에 이르지는 못했으나 지난 세월을 통해서 타이완 사람들은 집체적인 정체성을 확립했다. 우리는 [인류의 보편가치를] 흡수해서 우리의 가치로 체화했으며, 지방 전통들과 융합해서 ‘자유롭고 앞서가는’(liberal and progressive) 질서를 창출했으며, 타이완 사람이 되는 것의 새로운 의미를 찾았다.”
결코 과장이 아니다. 영국에서 해마다 발표하는 “민주주의 지수(Democracy Index)”에서 타이완은 2020년 현재 세계 11위의 온전한 민주주의이다. 호주, 뉴질랜드를 제외한 아시아 국가들 중에선 단연 1위를 자랑한다.
중국의 개혁개방 이후 전개된 강대국 중심의 비정한 실리외교 결과, 타이완은 한국을 포함한 많은 나라들로부터 배척되고 소외당하는 거센 외교의 역풍에 시달려야만 했다. 그럼에도 타이완은 최첨단의 산업 강국으로 꾸준히 발돋움했으며, 세계 최고 수준의 민주주의를 자랑하고 있다. 정치와 경제 모든 부분에서 모범이 되었기에 타이완은 당당하게 전 세계를 향해 선제적으로 자유민주주의의 국제연대를 강화하라 촉구할 수 있다.
대륙 중국의 민주주의 수준은 세계 151위 최하위권
타이완과는 정반대로 중국의 “민주주의 지수”가 세계 151위로 베네수엘라보다 아래이며, 이란, 바레인 등과 동급이다. 중국공산당은 그토록 억압적이고 폐쇄적인 방식으로 인민의 자유와 권리를 제한하기 때문에 타이완처럼 당당하게 범인류적 보편가치를 선양할 수가 없다. 대신 오로지 “중국 특색”의, “중화민족”의, “중국만”의 특수한 상황, 예외적 조건, 독자적 가치를 일당독재의 핑계로 내세울 수밖에 없다. 오늘날 중국공산당의 가장 취약한 급소는 바로 인민의 이름으로 인민을 억압하는 인민독재의 허약한 이념에 있다.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차이 총통은 자유주의 국제연대라는 최강의 병기를 꺼내들고 중공의 아킬레스건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짐짓 외면하는 모양새를 취하지만, 중공중앙은 결코 이 논쟁을 피해갈 수 없다. 중국이 그 영토의 일부라 주장해 온 타이완이 본격적으로 자유, 민주, 인권의 깃발을 들고 분리·독립의 길을 가고 있으며, 전폭적인 국제사회의 지지를 끌어내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 양안 문제의 핵심은 2차 대전 이전부터 이어진 자유주의 대 전체주의, 휴머니즘 대 부족주의, 보편주의 대 특수주의의 이념 대립임을 간과해선 안 된다.
“중국 특색 대국 외교” 내세워 민주와 자유는 뒷전
지난 2021년 11월 11일 발표된 중공중앙의 결의문에는 이른바 “중국 특색 대국 외교”에 대한 기본 원칙과 행동 강령이 장황한 만연체 문장으로 아래와 같이 열거돼 있다.
“당 중앙은 복잡하고도 엄중한 국제 형세에서 전대미문의 외부적 풍파와 도전에 직면해서 반드시 국내외의 큰 국면(局面)을 총괄하고, 외교 업무에 있어 당의 영도 체제를 더욱 강화하며, 대외 공작에 더욱 힘을 써서 최고 수준까지 치밀하게 설계하고, ‘중국 특색의 대국(大國) 외교’의 전략과 모략을 짜내고, 새로운 형태의 국제관계 건설과 인류 운명공동체의 건설을 추동하고, 평화, 발전, 공평, 정의, 민주, 자유라는 ‘전 인류 공동의 가치’를 널리 선양하고, 인류의 진보 조류를 견인하고 영도해야 함을 강조한다.
여기서 “복잡하고도 엄중한 국제 형세”란 갈수록 심각해지는 미·중 갈등과 팬데믹 이후 세계 각국의 반중(反中) 정서를 의식한 발언인 듯하다. 결의문 전체를 보면, “중화민족의 위대한 부흥”이 핵심어인데, 따로 “인류 운명공동체”를 언급하고 있다. 아마도 중국 중심의 새로운 세계 질서를 구축하겠다는 중공중앙의 결연한 의지를 표명한 듯하다. “인류의 진보 조류를 견인하고 영도해야” 한다는 표현은 중국을 세계 사회주의 운동의 중심국으로 만들고자 했던 마오쩌둥의 포부를 연상시킨다.
이 모두가 중공중앙의 국제 감각 및 외교 노선을 보여주는 중요한 단서들이지만, 특히 “전 인류 공동의 가치”라는 어구가 눈길을 끈다. 2013년 이래 중공중앙은 중국의 지식인들과 교육자들을 향해 “보편가치”는 언급조차 하지 말라 요구해 왔기 때문이다. “보편가치”에 그토록 과민반응을 보이던 중공중앙이 “전 인류 공동의 가치”로 “평화, 발전, 공평, 정의, 민주, 자유”라는 여섯 가지 가치를 나열한 이유는 무엇일까?
극히 일부의 철학자들은 인간뿐만 아니라 모든 생명체를, 심지어는 외계의 합리적 존재까지 포함하는 범우주적 보편성을 논하기도 하지만, 일상 언어에서 “보편가치”와 “전 인류 공동의 가치”는 외연과 내포가 완벽하게 일치하는 동의어이다. 유엔 헌장에 명시된 “보편가치”가 바로 “전 인류 공동의 가치”를 의미한다. 그럼에도 중공중앙은 “보편 가치”는 터부시하면서 “전 인류 공동의 가치”를 강조한다. 중공중앙은 왜 이토록 허술한 언어 게임에 빠져들고 있을까?
중공중앙이 강조하는 그 여섯 가지 가치를 잘 뜯어보면, 1) “화평, 발전, 공평”과 2) “정의, 민주, 자유”가 대칭을 이루고 있음이 보인다. 좀 더 자세히 보면 1) “화평, 발전”, 2) “공평, 정의”, 3) “민주, 자유” 등 세 쌍이다. 1) “화평, 발전”과 3) “민주, 자유”가 2) “공평, 정의”를 사이에 두고 대립하고 있다. 쉽게 말해, “화평, 발전”을 전면에 내세우고, “민주, 자유”를 뒤로 미루는 중공중앙의 의도가 번연히 보인다. 결국 전 국가의 “화평과 발전”이 “민주와 자유”보다 더 시급하고 중요한 가치라는 전형적인 권위주의 개발독재의 논리이다.

중국어에서 “화평”이란 화해, 안정, 조화, 치안, 질서, 평정(平靜) 등의 포괄적 의미로 사용된다. “전쟁”의 반대말로서의 “평화”보다 훨씬 더 큰 개념이다. 오늘날 중국의 정치적 맥락에서 홍콩의 민주화 시위, 신장 위구르족의 저항, 티베트 분리주의, 타이완의 독립노선은 모두 “화평”을 해치는 중국 특색 사회주의 체제에 대한 노골적인 사보타주 행위로 간주된다. 예컨대 중공중앙은 전 중국의 “화평”을 홍콩 기본법을 제약하는 권위주의 정치 탄압의 논리로 악용한다.
중공중앙은 “화평, 발전”을 “전 인류 공동의 가치”라고 강조하지만, 정작 대 다수 국가들이 가장 중시하는 “인권”에 대해선 언급조차 꺼린다. 중국 밖의 세계시민들은 묻지 않을 수 없다. 과연 인권 없는 화평이란 어떤 상태인가? 자유가 없는 지속적 발전은 가능한가? 현재 중공중앙의 중국은 대체 어느 시대에 머물러 있는가?
“인민민주독재” “민주집중제”는 인민을 탄압하는 명분으로
차이잉원 총통의 예리한 비판처럼, 오늘날 중국공산당은 극심한 이론적 혼란과 사상적 위기에 처해 있다. 개혁개방 이후 전가의 보도처럼 휘두르고 있는 “중국 특색 사회주의”와 “사회주의 시장경제”는 1960-70년대 한국과 타이완에서 경험했던 개발독재의 논리에 지나지 않는다. “인민민주독재”나 “민주집중제” 등의 통치 원칙은 인민의 이름으로 자행되는 인민 탄압의 허울 좋은 명분일 뿐이다. 중국 헌법 전문에 명기된 마르크스-레닌주의의 문제점과 허구성은 소련과 동구의 몰락으로 이미 30년 전에 만천하에 드러났다. 인류사 최악의 대기근과 문화혁명의 광기로 귀결된 “마오쩌둥 사상”은 중국 안팎 지식인들의 비판과 폭로를 통해 이미 오래 전에 해체되었다.
전 중공 중앙당교의 이론가 두광(杜光, 1928- ) 교수의 표현을 빌면, 오늘날 중국 정치의 핵심문제는 20세기 초반부터 끊임없이 지속된 “개혁 대 반개혁, 민주 대 반민주, 농단(壟斷, 권력 전횡) 대 반농단, 전제(專制, 독재) 대 반전제의 대립·투쟁”이다. 두광 교수는 중국의 근현대사에서 “개혁, 민주, 자유, 반농단, 반전제”에의 범국민적 열망은 이미 1908년 청나라 황실에서 반포된 <<헌법대강>>으로 최초로 표출되었다. 입헌군주제의 헌법으로서 많은 한계가 있지만, <<헌법대강>>은 언론, 저작, 출판, 집회, 결사의 자유, 법률에 의거하지 않는 체포, 구속, 처벌을 전면 금지하는 신체의 자유, 거주·이전의 자유, 나아가 개인의 재산권 등 근대 민법의 기본 권리를 구체적으로 천명하기 있기 때문이다.

1911년 “민국혁명” 이후 쑨원(孫文, 1866-1925)은 <<중화민국 임시약법>>을 통해서 “국민주권”의 원칙 아래 “인신, 재산, 거주, 이전, 언론, 출판, 집회, 결사, 통신, 신앙의 자유와 선거, 피선거, 청원, 소송의 권리를 명시했다. 곧 이어진 5-4운동의 열기 속에서 자유와 민주를 향한 대중적 열망은 최고조에 달했으나 이어지는 침략전쟁과 내전의 소용돌이에서 중국의 헌법적 기초는 쉽게 뿌리내리지 못했다.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성립 이래 1954년, 1975년, 1978년, 1982년 네 차례에 걸친 헌법 개정이 이루어졌지만, 두광 교수는 현행 중국 헌법의 입법 의도와 법리 원칙은 오히려 입헌주의 정신을 근본적으로 훼손하는 수준이라 비판한다.
“현행 <<중국인민공화국 헌법>>은 모순으로 충만한, 양면적인 헌법 조문일 뿐이다. 민주성과 전제성이 본문의 자구(字句) 및 행간에 공존하고 있는데, 실제로는 전제성이 민주성을 압도하는 추세를 보인다. 따라서 헌법이 규정하는 공민의 권리는 보장되지 않고, 정치권력은 제약을 받지 못해 도처에서 권력 남용이 일어난다. 이는 헌법이 있음에도 헌정이 실현되지 못하는 근본원인이다.”(두광, “중국 헌정민주 백년의 궤적,” 2012년 7월 16일, aisixiang.com)
두광 교수가 직접 언급하진 않지만, 청말(淸末)의 <<헌법대강>>에서 <<중화민국 임시약법>>을 거쳐 5.4운동기 다채로운 사상으로 만개했던 100년 중국헌정사의 적통(嫡統)은 중화인민공화국이 아니라 중화민국인 타이완으로 이어졌음은 누구나 알 수 있다. 2010년대 시진핑 정권 출범을 전후해서 강력하게 일어났던 대륙의 “헌정민주” 담론을 예의주시해야 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계속>
<9회> “헌법이 무기다” 공산당 독재에 맞서는 자유인들

▲<1954년 6월 14일 “중화인민공화국헌법 초안 공포”를 축하하는 장면/ 人民網, people.cn>
헌법 전문, 독재 국가는 길고 자유 국가는 간결하다
오늘날도 많은 정치인들은 헌법 전문(前文)에 특정 과거사에 대한 평가를 삽입해야 한다는 시대착오적 강박증을 보이고 있다. 이러한 강박증은 진리를 독점하고 정의를 선점하려는 인간 내면의 뿌리 깊은 독단과 아집에 기인한다. 상식적으로 자유민주주의 국가는 다양한 사람들이 공존하는 다원화된 사회를 지향하기 때문에 헌법 전문에는 그 어떤 특정 과거사에 대해서도 언급할 필요조차 없다. 헌법이 특정 과거사에 관해 전 국민에 똑같은 생각과 일양적인 가치를 강요한다면, 그런 나라는 사상, 양심, 표현의 자유를 침해하는 독재국가로 전락하기 때문이다.
2013년 6월 중국 베이징 대학 법학대학원의 저명한 헌법학자 장첸판(張千帆, 1964- ) 교수는 이상적인 헌법 전문의 양식에 관해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사회주의 국가의 헌법 전문은 일반적으로 매우 길다. 자유주의 국가의 헌법 전문은 대체로 간결하다. 바람직한 헌법 전문은 오로지 제헌 주체, 제헌 목적 및 헌법의 기본 원칙만을 간결하게 기술해야 한다. 그래야만 헌법 전문이 사람들에게 장중하고도 엄숙한 인상을 줄 수 있으며, 사람들로 하여금 뒤에 이어지는 헌법 본문이 국가가 신중하게 이행해야만 하는 법률 의무임을 느끼게 할 수 있다.”
장첸판 교수의 지적대로, 독재국가의 헌법은 일반적으로 전문(前文)이 장황하다. 자유국가의 헌법은 대체로 전문이 소략하다. 세계에서 가장 길다는 이란의 헌법 전문은 이슬람혁명의 주요사건을 서술하며, 코란을 직접 인용해서이슬람 율법의 절대권위를 강조한다. 반면 미국의 헌법전문은 자유와 평화의 일반규정을 담은 52개의 단어로, 독일기본법 전문은 세계평화와 국민주권 등을 명시한 48개의 단어로 구성되어 있다. 중국의 “중화인민공화국헌법”과 타이완의 “중화민국헌법” 역시 이와 비슷한 대조를 보인다.
중국 헌법 전문은 200자 원고지 10장, 대만의 ‘중화민국 헌법’ 전문은 75자
“중화인민공화국헌법”의 “서언(序言, 전문)”은 1,898자로 200자 원고지 10매를 넘는 분량인데 반해 “중화민국헌법”의 전문은 75자에 불과하다. 1982년 개정된 “중화인민공화국헌법”의 “서언”은 마르크스-레닌주의, 마오쩌둥 사상, 덩샤오핑 실용주의, 장쩌민의 “세 가지 대표사상” 등등 중공중앙이 공식적으로 채택한 국가적 기본 이념을 구체적으로 명시하며, 아편전쟁 이래 현대사에 관한 중국공산당 특유의 역사관이 줄줄이 나열되어 있다. 뿐만 아니라 사회주의 건설이라는 국가의 궁극 목적, 노동자·농민·지식인의 기본 책무, 중국공산당의 지배 당위, 타이완과의 통일 의무까지 기재돼 있다.
이와 달리 1946년 12월 25일에 제정된 중화민국헌법은 다음 한 문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중화민국 국민대회는 전체 국민의 뜻에 따라 중화민국을 건립한 쑨원(孫文) 선생의 유교(遺敎)에 의거해 국권 확립, 민권 보장, 사회 안녕 및 인민 복리의 증진을 위해 다음 헌법을 제정하여 모두가 준수할 수 있도록 전국에 반포한다.”
타이완은 오늘날 세계 최고의 민주주의를 구현하고 있지만, 중국의 민주주의 지수는 세계 최하위 수준에 머물러 있다. 헌법 전문의 길이와 국민이 누리는 자유 정도는 대체로 반비례함을 극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다. 왜 그러할까?

자유주의 헌법일수록 높은 추상수준의 기초원리만을 기술하는 반면, 비자유주의(illiberal) 헌법일수록 이데올로기적, 종교적 내용이 다수 포함되기 때문이다. 정치철학자 마이클 월저(Michael Walzer)의 표현을 빌면, 자유주의 헌법은 “얇고(thin),” 비자유주의 헌법은 “두껍다(thick).”
자유주의 헌법은 최대한 많은 구성원, 최대한 다양한 집단을 포용하기 때문에 전문(前文)은 얇아질 수밖에 없다. 반면 비자유주의 헌법은 전 국민에게 특정 역사관, 특정 종교관, 특정 이념, 특정 사상을 강요하기 때문에 전문(前文)이 두꺼워질 수밖에 없다. 얇은 헌법은 그만큼 다양한 집단, 다양한 사상에 개방적이다. 구성원에게 더 많은 요구조건을 내거는 두터운 헌법은 역으로 한정적이고 폐쇄적이다.
“헌법 전문에서 마르크스-레닌주의, 마오쩌둥 사상 등 ‘4항 기본원칙’을 삭제하라!”
중국의 법학자, 철학자 및 언론인이 중국 헌법의 문제점을 모를 리 없다. 적잖은 전문가들은 장황하고도 독선적인 중국 헌법의 “서언”에 대한 공개적인 비판을 피력해 왔다. 젊은 시절 다양한 사상을 접하고 반우파 운동 당시 우파로 몰려 20년의 세월 동안 고초를 겪었던 두광(杜光, 1928- ) 교수는 이미 2009년 인터넷 포럼에 올린 글에서 다음과 같이 일갈했다.
“(중국) 헌법에서 가장 큰 문제는 바로 장편 서언이다. 이 서언은 중국공산당이 영도하는 신민주주의 혁명과 사회주의 개조의 성취를 나열하고, 나아가 중국공산당이 계속 사회주의 혁명 건설을 영도해야 한다고 강조하며, 계급투쟁, 통일전선, 민족단결, 국제관계 등 문제에 기본 방침까지 기술한다. 이러한 서술의 목적은 일당독재의 합법성 확립이라는 점은 명백하다.”
“또한 큰 문제는 바로 서언에서 마르크스-레닌주의, 마오쩌둥 사상, 덩샤오핑 이론과 ‘세 가지 대표’(장쩌민 이론) 등 ‘4항 기본원칙’의 견지를 직접 언급한다는 점이다. 소위 ‘4항 기본원칙’은 이론적으로 그릇되어 정교한 분석에 견딜 수가 없으며, 실천적으로도 유해하다. “4항 기본원칙”을 전국의 인민에 강제하여 헌법 속에 담긴 민주성의 실현을 저해할 합법적 근거는 없다. 특히 (장쩌민이 설파한) ‘세 가지 대표’와 같이 졸렬하고, 이론적, 논리적으로 결함투성이의 세 구절을 전 인민의 지도사상으로 만드는 행위 자체가 공민의 지능지수에 대한 모욕이자 국내외의 웃음거리이다. 그런 구절의 헌법 삽입은 일당독재를 분식(粉飾)하고 공민의 권리를 말살할 뿐더러 헌법이라면 반드시 갖춰야 할 장엄함과 신성함을 파괴한다.”

2011년 5월 13일 화둥(華東) 정법대학에 재직했던 장쉐중(張雪忠, 1976- ) 교수는 헌법 제41조에 규정된 “공민 건의권”을 활용하여 당시 중국의 교육부 장관에 공개서한에 보냈다. 이 서한에서 장 교수는 다음과 같이 건의한다.
“중국인의 이성과 양지(良知) 방면의 무상 주권을 존중하고, 중국인의 사상자유를 확장하고, 중국인의 개체 존엄을 빛내고 드높이기 위해 교육부는 대학 및 석사과정 입시에서 정치 과목을 철회하고, 마르크스주의 철학원리, 마오쩌둥 사상 및 덩샤오핑 이론 등의 과정을 대학생 공통 필수 과목에서 철폐해 주시길 바랍니다.”
장 교수는 형식적으로 사상의 자유를 인정하는 중국의 헌법을 들어서 국가가 마르크시즘과 같은 신념 체계를 개인에게 강요할 수 없다는 점을 논리적 근거로 들었다. 그는 인간이 정부를 구성한 목적은 개개인의 안전을 보장하고, 자신의 복리를 촉진하고, 만인이 만인과 투쟁하는 무법상황을 막기 위함이기 때문에, “신념의 문제에선 정부가 그 어떤 권위도 향유할 수 없다”는 고전적인 자유주의 논변을 펼쳤다.
박진감 넘치는 두 교수와 장 교수의 문장은 후진타오 정권 말기 중국의 인터넷을 뜨겁게 달궜던 이른바 “헌정논쟁”의 한 단면을 보여준다. 당시 중국의 지식인들은 중국공산당 일당독재의 위헌성을 폭포하면서 입헌민주주의의 원칙에 입각해서 마르크스-레닌주의, 마오쩌둥 사상, 덩샤오핑 이론까지 정면으로 비판하고 나섰다.
“헌법에 규정한 인권 존중, 사상과 언론 출판의 자유 보장하라!”
시진핑 정권이 막 출범하던 2013년 1월 중국의 대표적인 비판 저널 <<염황춘추(炎皇春秋)>>의 편집부는 신년호 권두에 “헌법은 정치 체제 개혁의 공통 인식”이라는 제목의 “신년 헌사(獻詞)”를 게재했다. 좌우 2단 한 페이지에 불과한 짧은 글이지만, 이 시론에는 중국에서 법치를 실현하려는 많은 사람들의 염원이 압축적으로 담겨 있다. 이 문제의 시론은 중국 헌법과 일당독재의 사이의 괴리를 날카롭게 파고 든다. 그 내용을 요약하면······.
중국 헌법 제57조는 “전국인민대표대회(전인대)가 최고의 국가권력기관”이라 규정하고, 제62조는 전인대의 15개 직권을 명시하며, 제63조는 국가주석, 국무원총리 등을 파면할 수 있는 권력까지 부여하지만, 실제로 전인대는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 정치국의 거수기에 불과하다. 헌법 제13조는 국가는 법률 규정에 따라 공민의 사유재산권과 상속권을 보장하지만, 현실에선 사유재산을 침범하는 악성 사건이 끊이지 않는다. 헌법 제33조는 국가가 인권을 존중하고 보장한다고 규정하지만, 폭력적인 집행과 간섭이 창궐하고 있다. 헌법 35조는 언론, 출판 등 여러 자유를 보장하지만, 중국에선 언론, 출판의 자유를 제약하는 수많은 불법적 인권 침해가 일상적으로 발생하고 있다. 헌법 제126조는 법원의 독립성을 규정하지만, 법원은 공신력을 이미 상실한 상태다.

결국 이 시론의 요지는 헌법과 현실의 괴리를 극복하고, 헌법에 명시된 권리와 자유 규정을 중국의 현실에서 실현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문제는 헌법 그 자체가 아니라 헌법을 자의적으로 악용하는 공산당 일당독재의 전횡이라는 지적이다.
“모든 법치국가는 정치 체제를 설계할 때 반드시 헌법을 근거로 삼아야만 한다. 헌법을 ‘허치(虛置, 공허하게 방치)하면, 중국 인민에 대한 신뢰를 잃을 뿐만 아니라 국제 사회의 신뢰도 상실하게 된다. 국가는 무신불립(無信不立), 곧 신뢰를 잃으면 존립할 수 없다. 헌법이 신뢰를 잃는 상황은 반드시 바꿔야만 한다. 헌법은 국가의 근본 대법이다. 헌법의 권위는 지고무상(至高無上)이다. 헌법에 의거해서 정치 체제의 개혁을 추진해야만 한다는 점에 대해선 쟁의가 있을 수 없다. 이미 헌법은 정치 체제 개혁의 공통된 인식이다. 우리는 반드시 행동에 나서야 한다. 공허하게 방치된 헌법을 현실의 제도 및 법률 체계로 되살려야 한다. 그러한 의미에서 정치체제 개혁은 실질적으로 헌법을 보위하는 행동이다.”
“공허하게 방치된 헌법을 정치 개혁의 무기로 활용하자”
“공허하게 방치되었던” 헌법을 정치 개혁의 무기로 활용하자는 선언이다. 두광 교수가 주장하듯 중국의 헌법은 민주성과 전제성이 결합되어 있다. 문제는 중국공산당의 권위에 의해 전제성이 민주성을 짓밟고 있다는 사실이다. 결국 이 시론의 요점은 중국 헌법이 전제성에 굴복하기 보단, 중국 헌법의 민주성을 적극적으로 해석해서 정치 체제의 개편을 시도해야 한다는 이른바 헌법 보위의 투쟁 선언이다. 일당독재의 무기로 악용되었다 해도 현행 중국헌법에는 공민의 기본권과 사상, 언론, 출판의 자유가 적어도 형식적으로 보장되어 있기 때문이다.
1960년대 미국의 인권운동가 킹(Martin Luther King Jr., 1929-1968) 목사가 미국 독립선언서의 “모든 인간은 평등하게 창조되었다”는 문구를 인종차별에 대한 저항의 무기로 활용했던 바로 그 투쟁의 전술이다. 가장 효율적인 정치논쟁의 출발점은 상대와 내가 동시에 인정하는 상식의 기반에 올라서는 것이다. 중국인들은 바로 그 상식의 기반을 공식(共識, 공통된 인식)이라 부른다.

2010년부터 중국의 인터넷에서 진행돼온 “헌정민주”의 담론이 급기야 중국공산당과의 법리 투쟁으로 전개될 조짐을 보였다. 많은 지식인들은 <<염황춘추>>의 당당한 논조와 정치한 논리에 열광했다. 2014년 가을 집계로 <<염황춘추>>의 판매부수는 거의 20만권에 달했고, 2008년 이래 홈페이지에 게재된 거의 모든 기사가 조회수 1천만 이상을 달성했다. 물론 시진핑 정부가 날로 커져가는 <<염황춘추>>의 영향력을 그대로 방치할 리 만무했다. 헌법의 보위를 외치며 기본권의 보장을 주장하는 대륙의 자유인들을 중국공산당은 어떤 법리로, 어떤 수단으로 짓밟고 있을까? <계속>
<10회> “법률은 있지만 법치는 없고, 헌법은 있지만 헌정은 없다”

디지털 시스템 발달로 더욱 심해지는 독재의 억압 구조
다양한 생각, 다원적 가치가 공존하는 열린사회냐? 획일적 이념, 일원적 가치가 지배하는 닫힌사회냐? 인류에겐 여전히 그것이 문제이다. 오늘날도 인류의 18.47%, 거의 다섯 명 중 한 명이 마르크스-레닌주의의 획일적 이념과 마오쩌둥 사상의 일원적 가치를 강요하는 공산당 일당독재 아래서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더 큰 문제는 중국공산당의 대민 통제와 인권 탄압이 디지털 시스템의 발달에 힘입어 갈수록 더욱 심해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학계에선 이미 2002-2013년 후진타오(胡錦濤, 1942- ) 정권에 비해서 2013년 이후 시진핑(習近平, 1953- ) 정권이 사상통제 및 인권제약 측면 에서 더 억압적이라는 연구가 속속 발표되고 있다. 후진타오 정권 시절에도 티베트 시위 진압(2008), 신장 폭동 진압(2009) 등 중공중앙에 의핸 광범위한 탄압이 자행되었지만, 시민 단체의 자발적 시위, 청원, 불법 조직의 구성과 활동에 대해서는 대체로 지방 정부가 큰 재량을 갖는 지방분권적 통제가 이뤄지고 있었다. 덕분에 시민단체의 활동가들은 정치적 탄압에 시달렸지만, 조직 자체를 와해시킬 정도의 큰 억압은 흔치 않았다.
이와 달리 시진핑 정부는 출범 직후부터 중앙정부에 의한 체계적인 강고한 억압 체제를 구축해왔다. 후진타오 정부는 “화해(和諧, 화평, 조화)”를 내걸고 시민사회 활동가들에 대해선 산발적인 사후적으로 통제를 가했던 반면, 시진핑 정부는 “국가안전”의 명분 아래 시민조직 활동가들을 범죄자 취급하고, 시민 단체의 결성 및 활동을 선제적으로 금지하고 탄압하는 강경책으로 일관해 왔다. 시진핑 정부 출범 이후 중국 사회는 사상, 교육, 지식, 문화, 연예, 방송계 등 거의 모든 분야에서 표현의 자유가 더욱 위축되고, 국가 주도의 이념 교육의 강도는 마오쩌둥 시대 이후 최고조에 달하고 있다.
“중국 특색의 자본주의”는 급격한 경제성장으로 이어지는데, 정치적 자유와 민주화의 정도는 10년 전보다도 후퇴하는 모순적 상황이다. 돌이켜보면, 대민 통제의 강화는 시진핑 정권 출범 직전부터 예고되고 있었다. 잠시 10여년 전의 상황을 복기해보자.

절대 시행해선 안 될 5가지: 다당제, 사상 다원화, 삼권 분립, 연방제, 사유화
2011년 3월이었다. 우방궈(吳邦國, 1941- ) 중앙정치국 상임위원이자 전국인민대표대회 위원장 중공중앙의 기본 이념과 국정 방향을 압축한 “8확립(八確立)”과 “5불고(五不搞)”를 발표했다. 여덟 가지 기본 원칙은 반드시 확립하고, 다섯 가지 사항은 “절대로 실행하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8확립”이란 1) 국가의 근본 제도와 근본 임무, 2) 중국공산당의 영도적 지위, 3) 마르크스-레닌주의와 마오쩌둥 사상, 덩샤오핑 이론과 “세 가지 대표” 등 중요사상의 지도적 지위, 4) 노동자 계급이 영도하는 노동자·농민의 연맹에기초한 인민민주독재, 5) 인민대표대회 제도, 6) 법에 따른 권리와 자유, 7) 중국공산당 영도 하의 다당 합작, 정치 협상 및 자치제도, 8) 공유제(公有制)를 기본으로 하는 다양한 종류의 경제 공동 발전, 노동 분배를 기본으로 한 다양한 분배제도의 확립 등, 이상 여덟 가지 사항을 중공중앙의 원칙으로 확립한다는 뜻이다.
“5불고”란 1) 여러 정당의 교대 집권, 2) 지도사상의 다원화, 3) 삼권분립 및 양원제, 4) 연방제, 5) 사유화, 이상 다섯 가지를 절대로 실시하지 않는다”는 원칙이다. 일면 새롭게 보이기도 하지만, 그 내용을 잘 뜯어보면 2008년 중앙정치국 상임위원 리장춘(李長春, 1944- )이 발표한 “여섯 가지 왜(六個爲什麽)”의 연장이다. 리장춘의 “여섯 가지 왜”도 역시 1979년 3월 30일, 덩샤오핑이 천명한 “4항 기본원칙”의 부연, 설명이다.

▲<2011년 3월 “8확립과 5불고:를 발표한 우방궈(吳邦國, 1941- )은 2011년 당시 중앙정치국 상임위원이자 제11기 전국인민대표대회 위원장을 역임했다. >
덩샤오핑이 말한 “4항 기본원칙”은 1) 사회주의 노선, 2) 무산계급전정 (1982년 이후 “인민민주독재”로 바뀜), 3) 중국공산당의 영도, 4) 마르크스-레닌주의와 마오쩌둥 사상의 견지를 이른다. 미국 방문을 마치고 돌아와서 개혁개방의 경제혁명을 개시할 때, 덩샤오핑은 전 중국의 인민을 향해 마르크스-레닌주의 및 마오쩌둥 사상에 입각한 중국공산당의 일당독재는 절대로 흔들릴 수 없는 최고의 가치임을 재천명했다.
1978년 11월부터 베이징의 많은 시민들이 대자보를 써서 베이징 시단(西單)의 담장에 빼곡히 붙이면서 정치적 자유화와 민주화를 요구하는 본격적인 정치 투쟁에 돌입했다. 문화혁명이 막을 내린지 불과 2년 만에 갑작스럽게 찾아 온 “베이징의 봄(北京之春)”이었다. 중국공산당에 대한 비판의 수위가 점점 높아지자 상황을 예의주시하던 덩샤오핑은 미국 방문을 마치고 돌아와선 곧바로 “베이징의 봄”을 강력하게 짓밟고 주동자들을 구속해서 중형으로 다스리는 강경책을 썼다.
요컨대 시진핑 정권의 강력한 대민통제 및 사상탄압은 정상궤도의 일탈이 아니라 개혁개방 이후 40년 간 중국공산당이 추진해 온 “4항 기본원칙”에 입각해 있음을 알 수 있다.
중국 지식계의 대반란...류사오보 등 지식인 303명 일당 독재 비판 ‘08헌장’ 성명
2011년 3월 발표된 우방궈의 “8확립 5불고”는 중국 안팎의 비판세력에 대한 중공중앙의 선전포고였다. 국제정치의 구체적 상황을 보면 그 점이 더 명확해진다. 그보다 석 달 앞선 2010년 12월 10일 노벨위원회가 11년 징역형을 선고 받고 수감 중인 중국의 대표적 인권운동가 류샤오보(劉曉波, 1955-2017)를 노벨평화상 수장자로 지명했기 때문이다.
2009년 6월 23일 중국검찰기관은 “국가정권 전복 선동죄”로 류샤오보를 체포했으며, 같은 해 12월 25일 베이징 인민법원은 그에게 징역 11년을 선고했다. 바로 그 이듬해 노벨위원회는 류샤오보를 노벨평화상 수상자로 선정함으로써 중공 정부의 인권유린에 강력하게 항의했다. 무엇보다 류샤오보가 인류의 보편가치를 선양하는 이른바 “08헌장”의 공동 저자였기 때문이었다.
“08헌장”이란 대체 무엇인가? 2008년 12월 10일, 303명의 중국 지식인들은 유엔의 “보편적 인권 선언” 60주년을 맞아 중국공산당의 일당독재를 정면으로 비판하며 자유, 인권, 평등, 공화, 민주, 헌정을 전면에 내세운 19개 조항의 성명서이다. “08헌장”의 서문은 다음과 같이 시작한다.
“올해는 중국 입헌 100주년, 유엔의 ‘세계 인권선언’ 60주년, 민주장(民主墻) 운동 30주년, 중국정부의 ‘공민의 권리 및 정치 권리 국제 공약’ 승인 10주년이다. 긴 세월의 인권 재난과 파란만장한 항쟁의 역정을 거친 후에야 중국의 깨어 있는 공민들은 더 분명하게 인식하게 되었다. 자유, 평등, 인권은 인류 공동의 보편가치이며, 민주, 공화, 헌정은 현대 정치제도의 기본 구조이다. 이러한 보편가치와 현대 정치제도의 기본구조를 버린 현대화는 인간의 권리를 박탈하고, 사람의 존엄을 무너뜨리는 재난의 과정이다. 21세기 중국은 장차 어떤 방향으로 갈 것인가? 계속 권위주의 통치 하에서 현대화를 추진할 것인가? 아니면 보편가치를 인정하고 주류 문명에 융화되는 민주적 정치 체제를 건립할 것인가? 이는 결코 회피할 수 없는 중대한 결정이다.”

▲<2010년 12월 5일 “류샤오보를 즉각 석방하라!” 외치는 홍콩의 시민들/ (Ed Jones/AFP) >
08헌장 “이름만 인민공화국, 실질적으로는 당 천하일 뿐” 비판
이처럼 “08 헌장”은 중국공산당 일당독재에 대항해 보편가치를 실현하는 민주적 정치 체제의 건립을 촉구하고 있다. 곧 이어지는 문단에선 <<중화인민공화국 헌법>>의 “서언”에 정면으로 반대되는 “도발적인” 역사 해석을 제시하고 있다.
“19세기 중기 역사의 큰 변화는 중국 전통의 전제(專制) 제도가 낡고 썩었음을 폭로했으며, 중화 대지에 수천 년 간 일찍이 없었던 대변국(大變局)의 서막을 열어젖혔다. 물질 영역의 개량에 국한된 양무운동(洋務運動, 대략 1861-1895)과 청일전쟁(1894-1895)의 패배는 다시금 구체제가 시효를 다했음을 폭로했다. 무술변법(戊戌變法, 1898)은 제도 측면의 혁신을 시도했지만, 결국 완고파의 잔혹한 진압으로 실패하고 말았다.
당시 내우외란의 역사조건에 갇혀서 공화국의 정체가 잠시 드러냈지만, 곧 전제주의가 되살아났다. 서양 기물(器物)의 (피상적) 모방과 제도 개혁이 모두 실패하면서 국인(國人)들은 문화적 병폐의 깊은 뿌리를 되돌아보았고, 마침내 과학과 민주의 깃발을 들고 5.4신문화운동(1910-20년대)을 일으켰지만, 내전이 빈발하고 외적의 침입이 이어져서 중국의 정치민주 역정은 중단되고 말았다. 항일전쟁의 승리 이후 중국은 다시금 헌정의 길을 열었지만, 국공내전(1946-1949)의 결과 중국은 현대 극권주의(極權主義)의 심연으로 빠지고 말았다.
이어지는 문단은 “08헌장”은 중화인민공화국의 이념적 허구성과 중국공산당의 정책를 통렬하게 비판한다.
“1949년 건립된 ‘신(新)중국’은 이름만 ‘인민공화국’일뿐, 실질적으로는 ‘당(黨)천하’일 뿐이었다. 집권당이 모든 정치, 경제, 사회 자원을 농단하고, 반우파운동(1957-1959), 대약진운동(1958-1962), 문화대혁명(1966-1976), 6.4 톈안먼 대도살(1989)을 일으키고, 민간의 종교 활동과 기본권 수호 운동을 탄압하는 등 일련의 인권 재앙을 초래했다. 그 결과 수천 만 명이 목숨을 잃고 국민과 국가가 모두 지극히 참혹하고도 엄중한 대가를 치러야만 했다.
이어서 “08헌장”은 1978년 개혁개방 이후 경제성장과 법제 개혁의 성과를 긍정적으로 평가하면서 동시에 “법률은 있지만 법치는 없는,” “헌법은 있지만, 헌정은 없는” 중국의 정치 현실을 개탄한다. 중국공산당의 위권(威權, 권위주의) 통치를 극복하기 위한 방안으로 “자유, 인권, 공화, 민주, 헌정”이라는 기본 이념 위에서 19항의 기본 주장을 조목조목 펼친다.
그 19항은 각각 1) (보편가치를 구현하는) 헌법 개정, 2) 삼권분립, 3) 입법부의 민주화, 4) 사법부의 독립, 5) 군경의 정치적 중립, 6) 인권 보장, 7) 공직 선거, 8) 지역 평등 및 거주이전의 자유, 9) 결사의 자유, 10) 집회의 자유, 11) 언론의 자유, 12) 종교의 자유, 13) 보편가치에 입각한 공민교육, 14) 재산 보호, 15) 재산세 개혁, 16) (교육, 의료, 양로 등) 사회 보장, 17) 환경 보호, 18) (홍콩과 마카오의 자유 제도를 유지하는) 중화연방공화국의 성립, 마지막으로 19) 양심수 석방, 명예회복, 피해 보상 등의 개혁적 정의의 실현 등이다.

▲<“08헌장”에 대한 지지를 선언하며 “류샤오보 즉각 석방”과 “서명자 박해 중단”을 외치는 홍콩의 시민들/ wikipedia.com>.
옥중 류샤오보에 노벨평화상...중국 안팎에서 헌쟁 논쟁 커져
물론 중공중앙은 이 헌장을 용인할 수 없었다. 중화인민공화국 헌법 총강 제1조에 따르면, “사회주의 제도를 파괴하는 그 어떤 조직이나 개인의 활동도 금지된다.” 2009년 12월 말 베이징 인민법원은 류샤오보에게 “국가정권 전복 선동죄”를 들씌워 11년 형을 선고했다.
이듬해 12월 옥중의 류샤오보에게 노벨평화상이 수여되었다. 중공중앙으로선 참을 수 없는 모욕이 아닐 수 없었다. 이에 석 달 후인 2011년 3월 우방궈는 “8확립 5불고”를 통해서 중국이 마르크스-레닌주의, 마오쩌둥 사상을 이념의 기반으로 삼는 사회주의 국가이며, 중국공산당의 일당독재는 절대로 포기할 수 없는 “중국 특색 사회주의의 가장 본질적 특징”임을 재확인했다.
2010년 이처럼 긴박하고도 혼탁한 정국에서 중국의 다수 헌법학자, 철학자, 언론인들은 국가의 정체성을 되묻는 헌정 논쟁에 뛰어들었다. 이후 중국 안팎의 저명한 학자들이 참여하면서 헌정 논쟁은 점점 더 커져만 갔다. 결국 2013년 5월 13일, 중공중앙은 보편가치, 언론자유, 시민사회, 공민 권리, 사법 독립 등 일곱 가지 민감한 사항에 대해선 언급조차 말라는 “7불강(不講)의 명령을 하달했다. 유엔 상임이사국 5개국 중 하나인 중화인민공화국의 중국공산당 정권이 1948년 유엔이 채택한 “세계인권선언”을 부정하는 기묘한 상황이었다. “7불강”이 유출되어 서구 언론에 대서특필되자 국제사회는 중국공산당을 비판하고 조롱했다. 이처럼 시진핑 정권은 출범 때부터 국제사회와의 정면충돌하는 이념전쟁을 마다지 않았다. <계속>

▲<“중국공산당의 인터넷 자유 침해에 항의한다!” 2010년 1월 26일. 사진/ 中國人權 hrchina.or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