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규나의 소설 같은 세상] 2021/ [121] 알고도 안 하고 몰라서도 못 하고 - [140] 백신 접종, 밀어붙이기만으로는 안 된다
[김규나의 소설 같은 세상] 소설가 조선일보
[121] 알고도 안 하고 몰라서도 못 하고

TV를 통해 전 인류에게 외계인의 인사를 전할 자리가 준비되었다. 외계인은 진심 어린 호의를 담아 지구인에게 보내는 메시지를 낭랑한 음성으로 읽었다. “야, 이 더러운 원숭이 새끼들아. 우리가 이렇게 찾아와서 떫냐? 못생긴 상판대기를 하고 서 있는 네 놈들, 꼴도 보기 싫다. 이놈이고 저놈이고 싹 다 죽어버려라!” - 호시 신이치 ‘우호 사절’ 중에서
‘NO 재팬! 가지 않습니다! 다시는 지지 않겠습니다!’ 같은 반일 운동의 구호가 집권 기간 내내 여기저기서 들린 결과였을까. 우리나라 권력 수장이(최고 권력자가) 도쿄올림픽 개막식에 참석하지 않는다. 올림픽이 정치적으로 이용되어선 안 되는 것이 당연하기에 정상회담을 바랐지만 그 결과가 정부의 기대에 미치지 못한 것으로 전해진다.
호시 신이치의 ‘우호 사절’에는 지구를 찾아온 외계인이 등장한다. 침략인지 화친인지, 그들의 목적을 몰라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난감했던 사람들은 일단 환영위원회를 조직한다. ‘외교야말로 인류가 낳은 최고의 문화’라고 자부하던 환영단은 우주선에서 나온 그들의 외모를 보며 징그럽고 불쾌하다고 생각하지만 ‘멋진 분들을 만나 기쁘다’며 반갑게 인사한다.
인간의 말을 해독한 외계인은 겉과 속이 다른 걸 알고 당황한다. 지구인은 생각과 정반대의 말을 하는 신기한 생명체라고 판단한 그들은 호의를 전달하기 위해 묘안을 짜낸다. 예의 바르고 정중한 말은 적대적으로 받아들일 테니 가장 상스러운 욕설과 적의가 담긴 메시지를 전한 것이다. TV 방송으로 외계인의 ‘진심 어린’ 저주를 들은 사람들은 어떤 표정이었을까?
양쪽의 오해가 풀려서 친교를 맺었는지, 인류의 운명을 건 우주 전쟁이 시작됐는지는 알 수 없다. 인간과 외계인의 노력이 실패로 끝났을지라도, 언어와 역사와 문화가 다른 세상을 배려하고 상생할 길을 찾기 위해 마땅히 갖춰야 할 기본 예절, 그것이 외교다. 이걸 알고도 안 하는 것인지 몰라서 못 하는 것인지, 그 결과 당연히 가야 할 자리에도 초대받지 못하는 우리나라의 고립이 안타깝기만 하다.
[122] 진실은 언제나 부메랑처럼

그게 바로 우리의 현실이야. 우리가 원하면 뭐든지 할 수 있지. 그런데 떠나버리지 않은 이유는 돌아와야 한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야. 우린 서로 사슬로 묶여 있어, 코라. 우린 산꼭대기에 있다고 생각했지. 그게 아니었어. 산이 우리 위에 있었고, 그날 밤 이래로 산은 언제나 거기 있었어. - 제임스 M. 케인 ‘포스트 맨은 벨을 두 번 울린다’ 중에서
2017년 드루킹의 대선 댓글 여론 조작 사건과 관련, 김경수 전 경남지사의 2년 실형이 확정됐다. 공직선거법 위반 혐의는 무죄가 되었지만 댓글 순위 조작 프로그램인 킹크랩의 존재를 몰랐다는 주장은 인정되지 않았다. 판결 후 기자들 앞에 선 김경수는 ‘진실은 아무리 멀리 던져도 제자리로 돌아온다’는 말로 결백을 주장했다.
무죄를 호소하는 그를 보며 잭 니컬슨이 프랭크를 연기했던 영화의 원작, 제임스 케인의 동명 소설이 생각났다. 떠돌이 프랭크는 잠시 머물러 일하게 된 식당 주인의 아내 코라와 불륜 관계를 맺고 그녀와 공모해 사장을 죽인다. 코라는 남편의 사망 보험금을 타고 프랭크는 그녀와 함께 자유를 얻는다.
하지만 행복을 움켜쥐었다고 자만한 순간, 그들은 불안해진다. 살인 용의자 신분을 벗기 위해 상대에게 불리한 증언을 한 그들은 더 이상 서로를 믿지 못한다. 순식간에 쌓아 올린 죄악의 산도 무겁게 그들을 짓누른다. 그래도 헤어질 수 없었던 건, 범죄 공유야말로 인간을 결속시키는 가장 단단한 사슬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사슬이 죄인들을 파멸로 몰아간다.
최측근의 댓글 여론 조작 혐의가 유죄판결을 받았는데도 가장 큰 수혜자라 할 수 있는 청와대는 입을 꾹 다물고 있다. 진부한 것 같아도, 뿌린 대로 거둔다. 진실은, 죄와 벌은 아무리 늦어도 있어야 할 자리로 돌아오기 마련이다.
[123] 금메달보다 빛난 신사의 품격

▲에이모 토울스 ‘모스크바의 신사’.
신사의 존재는 외투의 맵시가 아니라 태도와 발언과 몸가짐을 통해 가장 잘 드러난다. 백작이 말했다. “신사라면 손님을 먼저 대접했을 겁니다. 신사라면 포크를 들고서 손짓을 하지는 않겠지요. 입에 음식을 문 채로 얘기하지도 않을 테고요. 신사라면 대화를 시작할 때 자기 자신부터 소개할 겁니다. 자신이 손님보다 유리한 위치에 있는 경우라면 특히 더 그렇지요.” - 에이모 토울스 ‘모스크바의 신사’ 중에서
지난 7월 22일 도쿄올림픽 축구 1차전, 뉴질랜드와 벌인 경기에서 우리나라 대표팀은 0대1로 패배했다. 경기가 끝나고 승리 골을 넣은 상대편 선수가 다가와 악수를 청했을 때 우리 팀 선수는 거절했다. “진 게 너무 실망스러워서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고 했지만 입을 꽉 다문 채 화난 표정으로 눈길마저 외면한 것은 자랑스럽지 않은 매너였다.
반면 29일, 유도에서 은메달을 딴 조구함 선수는 준결승전에서 상대편 선수의 손에 쥐가 나자 풀리길 기다려주었고 아픈 손을 공격하지 않았으며 이긴 뒤에는 진 선수를 위로해주었다. 결승전에서는 아쉽게 패했지만 승리한 일본 선수 손을 번쩍 들어 올려 축하해주었다. “제가 여태까지 잡아본 상대 중에서 가장 강했어요.” 인터뷰에서 그는 말했다.
소설 ‘모스크바의 신사’는 볼셰비키 혁명 시절, 귀족이라는 이유로 한 호텔에 종신 연금된 백작의 이야기다. 그가 소유했던 모든 건 ‘인민의 것’이 되고 건물 밖으로 나오는 순간 총살이 결정된다. 평생을 그곳에 갇혀 살았지만 그는 언제나 존경받는 신사였다. 혁명 세력의 대령이 신사란 무엇이냐고 묻자 백작은 태도에서 우러나오는 상대에 대한 배려를 이야기한다.
겸손하되 비굴하지 않고 상대를 존중하되 자신을 비하하지 않는 말과 행동은 하루아침에 완성되지 않는다. 어려움에 처했을 때, 고통스럽고 불행하다 느껴질 때 인격은 여과 없이 드러난다. 이기적 행동, 경박한 말장난이 난무하는 세상에서 조구함 선수가 보여준 모습은 칭찬받아 마땅한 스포츠맨 정신, 금메달보다 귀하고 우승보다 아름다운 신사의 품격이었다.
[124] 서부 전선, 정말 이상 없나?

공격, 연습, 돌격, 반격. 간단한 이 말 속에 얼마나 많은 사연이 담겨 있던가! 이 부대는 지난해 징집된 어린 청년들이 대부분이다. 이들은 훈련을 거의 받지 않았고, 전선에 투입되기 전 이론적인 것만 약간 배웠을 뿐이었다. 진지전은 많은 지식과 경험이 필요한데 이들은 유산탄과 포탄도 제대로 구별할 줄 모르기 때문에 쉽게 목숨을 잃는다. - 레마르크 ‘서부 전선 이상 없다’ 중에서
몇 해 전 세상을 떠난 지인의 별명은 놀부였다. 욕심 많고 심술궂고 남 잘되는 꼴 못 보고 손해 보는 일은 안 하는 사람이었다. 어릴 때부터 머리가 좋아서 학교에선 늘 1등이었는데 시험 때만 되면 라이벌 친구를 꼬여내 밤늦게까지 놀았다. 시험은 평소 실력으로 보는 거라며 느긋한 척했지만 본인은 며칠씩 밤을 새워 만반의 준비를 해놓은 터였다.
북한이 한미 연합 훈련을 하지 말라고 했다. 중단해야 한다고 중국도 거들었다. 주적과 이마를 맞대고 살아가는 우리 자신을 지키는 일이고 동맹 맺은 미국과 알아서 할 일인데, 통일부와 국정원은 연기하는 게 좋겠다고 했다. 70명이 넘는 국회의원들도 연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군 통수권자조차 ‘여러 가지를 고려’하라며 국가 수호의 책임을 회피했다.
1차 대전의 참상을 그린 레마르크의 ‘서부 전선 이상 없다’는 반전 문학의 정수로 꼽힌다. 열아홉 살의 어린 지원병 파울이 경험한 전쟁은 끔찍하다. 훈련도 제대로 받지 못한 병사들은 전쟁을 어떻게 하는지 배울 틈도 없이 포탄과 총알, 추위와 배고픔 속에서 팔다리가 잘린 채 죽어간다. 파울이 전사한 날에도 군 보고서에는 ‘서부 전선 이상 없음’이라고 기록된다.
야외 실제 훈련도 없이 컴퓨터 시뮬레이션으로만 한미 군사훈련이 진행된 게 3년째다. 1년에 몇 번씩 미사일로 위협하는 북한이 평화를 원해서 한미 훈련을 반대할까? 전쟁을 바라는 국민은 없다. 그러나 훈련되지 않은 우리 군이 만에 하나 전쟁을 하게 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시험 전날이면 경쟁자에게 술까지 먹였다는 놀부 어르신의 1등 비결을 생각해볼 일이다.
[125] 귀 기울여 듣던 모모는 어디로 갔을까

숱한 밤, 모모는 친구들이 집으로 돌아가면 별이 총총한 밤하늘을 아치 지붕처럼 얹고 있는 옛 극장 터의 둥근 돌 의자에 앉아 거대한 정적에 귀를 기울였다. 모모는 마치 별세계를 향해 귀 기울이고 있는 커다란 귓바퀴의 한가운데 앉아 있는 느낌에 사로잡혔다. 그러면 야릇하게도 심장을 깊숙이 파고드는, 나지막하고도 힘찬 음악이 들리는 것 같았다. - 미하엘 엔데 ‘모모’ 중에서
며칠 전 개인 소셜미디어에 올라온 지인의 글이 특정 사상을 가진 사람들 마음에 들지 않았던 모양이다. 비슷한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들이 무리로 몰려와 글 쓴 사람을 조롱하고 비웃고 인격적으로 모욕했다. 다시는 생각도 하지 말고 글도 쓰지 말라는 식의 언어폭력이 난무했다.
미하엘 엔데의 소설 속 모모는 버려진 원형극장에서 혼자 살고 있는 여덟 살짜리 여자아이다. 처음엔 가엽다며 먹을 걸 가져다주던 마을 사람들이었지만 그들에게 모모는 곧 소중한 친구가 된다. 모모는 남의 말을 귀 기울여 들을 줄 아는 아이였다. 사람들은 힘든 일, 괴로운 일, 슬픈 일이 있을 때면 찾아와 실컷 마음을 털어놓고 후련해져서 돌아갔다.
모모는 한 번도 ‘왜 그랬나요? 그래선 안 돼요. 이렇게 하는 게 좋겠어요’라고 말하지 않았다. 그저 눈을 반짝이며 열심히 들어줄 뿐이었다. 그래도 사람들은 충분히 행복했고 눈앞이 환해진 듯, 어렵게만 보였던 문제의 해결책을 스스로 찾아냈다.
사람들은 누군가 자기 생각과 말에 귀 기울여주기를 바란다. 자기를 바라봐주고 이해해주고 좋아해주기를 바란다. ‘넌 틀리고 나만 옳다’며 자기 생각을 강요하는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밤이 되면 모모는 혼자 적막한 시간을 보낸다. 온종일 이웃들이 내려놓고 간 일상의 부스러기들과 혼란한 생각과 어지러운 마음 조각들을 버리고 비운다. 누구에게나 이런 시간이 필요하다. 하지만 사람들은 이제 아무것도 하지 않는 혼자만의 시간을 견디지 못한다. 마음과 귀를 꼭 닫고 오직 자기 이야기만 들어 달라 아우성이다. 그렇게 모모는 우리를 떠나버렸다.
[126] 아프간 같지 않기를

탈레반은 큰 집을 찾고 있었다더구나. 그들은 하산에게 집을 안전하게 지키기 위해서 자기들이 들어와 살겠다고 했대. 하산이 다시 항의를 했지. 그랬더니 거리로 끌고 가서 무릎을 꿇으라고 명령하고는 뒤통수를 쏴 죽였다는구나. 하산의 아내 파르자나가 비명을 지르며 달려들자, 그녀도 쏴 죽였단다. 그자들은 그게 정당방위라고 했단다. - 할레드 호세이니 ‘연을 쫓는 아이’ 중에서
아프가니스탄에서 미군이 철수했다. 대통령은 돈 보따리를 싸들고 일찌감치 도망갔고, 국민은 각자도생해보겠다며 공항으로 달려가 이륙하는 비행기에 매달렸다. 권력을 장악한 탈레반은 총을 들고 거리로 나가 전 정권에서 일했던 사람들을 색출하고 있다. 저항할 수 없도록 시민들을 위협하며 여성 혼자 집 밖에 나왔다는 이유로 즉결 처형도 서슴지 않는다.
아프가니스탄 출신의 작가 할레드 호세이니는 ‘40년간 평화를 찾아 헤맨 아프간 사람들을 버려선 안 된다’며 목소리를 내고 있다. 그는 소련 침략으로 아프가니스탄이 공산화되었을 때, 숙청을 피해 망명했던 아버지를 따라 미국으로 가서 작가가 되었다. 그러는 동안에도 아프간 국민은 공산주의, 부패정권, 탈레반 틈바구니에서 끝없는 고통을 겪었다.
작가의 소설 ‘연을 쫓는 아이’의 아미르도 미국에서 성공적으로 정착했을 때 한 통의 전화를 받는다. 그는 어린 시절 충직했던 하인, 자신이 도둑 누명을 씌워 내쫓았던 하산이 그들이 살았던 저택을 지켜내려다 탈레반에게 총살당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아미르는 하산이 남긴 아들을 구하기 위해 탈레반이 점령하고 있는 지옥, 약탈과 학살이 난무하는 카불로 향한다.
미국이 지난 20년간 지원했던 100조원어치의 첨단 무기와 장비가 탈레반의 손에 들어갔다. 오랫동안 정치인, 고위 관리들이 장비를 팔아넘겼고 군인들도 무기를 버리고 달아난 탓이다. 북한의 비위를 맞추려고 한미 연합훈련 전면 중단, 전작권 환수, 종전선언, 평화협정을 주장하며 ‘주한미군 물러가라’ 외치는 우리나라의 미래가 아프간과 같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127] 법무부 ‘우산 맨’, 우리의 자화상

높은 지붕 위에 올라간 새끼 염소가 아래를 내려다봤다. 늑대 한 마리가 지나가는 것이 보였다. 새끼 염소는 늑대가 올라올 수 없는 곳에 있었기 때문에 안심하고 그를 놀려댔다. 늑대는 새끼 염소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이 철딱서니 없는 것아. 네가 지금 우쭐거릴 수 있는 건 네가 잘나서가 아니라 네가 서 있는 그 자리 때문이란다.” - 이솝 ‘늑대와 지붕 위의 새끼 염소’ 중에서
상상조차 해본 적 없는 장면이라 충격이었다. 양복 말끔히 차려입은 법무부 직원이 죄인처럼, 흥건히 젖은 아스팔트에 무릎을 꿇고 차관을 위해 우산을 받쳐 들었다. 우리나라 국민이나 탈북자를 위한 자리도 아니었다. 아프가니스탄 난민을 위해 우리 국민이 낸 세금을 쏟아부어 무엇을, 어떻게, 얼마나 잘해 줄 것인지를 발표하는 시간이었다.
코로나 때문에 야외를 고집했다지만 비가 오면 장소를 옮기는 게 상식이다. 강당이나 처마가 있는 건물 입구, 또는 현관 로비였어도 큰 문제가 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굳이 추적추적 내리는 빗속에서 브리핑을 강행했다. 자신은 TV에 나오지 않으면서 차관에게 우산을 씌워주려던 직원은 주위 사람들 지시에 따라, 차관의 묵인 하에 빗속에서 무릎을 꿇었다.
법무부를 대표해서 브리핑을 하는 차관이 얼마나 높은 사람인지는 모르겠으나 국민 앞에 서는 일이었다. 우산을 직접 쓰겠다고 해야 했다. 짧은 시간이니 우산을 쓰지 않겠다고, 다들 빗속에 서 계시는데, 목숨 걸고 탈출한 난민도 있는데 비 좀 맞아도 된다고 말할 수도 있었다. 어떤 이유였든 자국민을, 그것도 부하 직원을 노예처럼 무릎 꿇게 해서는 안 되는 거였다.
기원전 6세기, 고대 그리스에서 살았던 노예라고 알려진 이솝, 그가 쓴 수많은 우화 중 하나는 윗자리에서도 겸손하게 ‘아래를 올려다볼 줄’ 알아야 한다고 말한다. 잠시 높은 자리에 올라 늑대를 깔보는 새끼 염소처럼, 조금만 출세하면 안하무인이 되는 사람이 많다. 무릎 꿇은 법무부 ‘우산 맨’의 모습이 권력 앞 우리의 자화상인 것만 같아 민망하고 씁쓸하다.
[128] ‘사람이 먼저’가 아니라 ‘먼저 사람이’!

사람들은 그와 아들을 종종 착각했다. 그러면 벤자민은 기분이 좋았다. 전쟁에서 돌아왔을 때 자신을 덮쳤던 음험한 공포를 곧 잊어버렸고, 외모에 대해 순진한 기쁨을 느끼게 됐다. 딱 하나 흥을 깨는 게 있었는데, 그는 아내와 함께 사람들 앞에 나서는 게 싫었다. 거의 쉰이 다 된 그녀를 보고 있자면 어처구니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 F. 스콧 피츠제럴드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 중에서
정치색이 분명한 51세 변호사가 101세 원로 철학자에게 ‘100년 동안 안 하던 짓’을 했다며 ‘이래서 오래 사는 것이 위험하다’고 말했다. 정치권의 노년층 폄하는 오랜 악습이다. ‘60세 이상은 투표하지 말고 집에서 쉬라’거나 ‘노인네들이 오지 못하게 엘리베이터를 모두 없애버리자’거나 ‘나이 들면 사람이 멍청해진다’며 자기 진영을 반대하는 노인 세대를 비난해왔다.
인간에게 자부심과 어리석음을 동시에 주는 게 몇 가지 있다. 그중 하나가 노력 없이 누리는 젊음이다. 그래서 젊음은 눈부시지만 오만하다. 어떻게 저렇게 쭈글쭈글 늙어서 바보 같은 말만 할까, 난 절대 늙지 않을 거야, 착각한다. 젊음에 권력과 명성이 더해지면 세상에 무서울 게 없다고 믿을 수도 있다. 그러나 시간은 예상보다 빨라 모든 것을 변화시킨다.
영화를 본 독자라면 브래드 피트의 근사한 외모와 사랑을 떠올릴 테지만, 피츠제럴드의 원작 소설은 좀 다르다. 50대 외모였을 때 20세 아가씨와 결혼한 벤자민은 스무 살 청년이 되자 볼품없어진 쉰 살의 아내를 환멸한다. 노인의 모습으로 태어나 장년에서 청년으로, 소년이 다시 갓난아기가 되는 이야기는 인간은 육체를 떠나 생각할 수 없으며 ‘늙으면 애 된다’는 속언의 풍자다.
늙고 싶어서 늙는 사람은 없다. 생명과 건강이 주어지는 한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며 살 뿐이다. 고난 없는 인생은 없으므로 포기하지 않고 100년을 살았다면 그 자체로도 존중받을 일이다. 자신과 생각이 다르다고 외모나 장애, 늙음과 죽음을 소재로 조롱하는 건 비겁하다. 51세라면 그 정도는 알아야 한다. ‘사람이 먼저’라고 한다지만, 사람이 ‘되는’ 게 먼저다.
[129] 모비 딕을 쫓는 이유

모든 것을 파괴할 뿐, 정복하지 않는 고래여, 나는 너를 향해 돌진하고 네놈과 끝까지 맞붙어 싸우리라. 지옥의 한복판에서라도 나는 너에게 작살을 던지고, 오직 증오를 담아 내 마지막 숨을 거두는 순간까지 너를 쫓으리라. 저주받을 고래여, 갈가리 찢길지언정 네 몸에 묶여서라도 너를 추격하리라! 자, 이 창을 받아라! - 허먼 멜빌 ‘모비 딕’ 중에서
세상은 늘 편을 갈라 싸운다. 가진 것을 지켜야 하는 쪽과 갖고 싶은 것을 빼앗아야 하는 쪽이 서로 모략하고 창을 던지고 칼을 찌른다. 정치권은 말할 것도 없다. 이쪽은 했다, 저쪽은 안 했다, 이 사람은 진짜다, 저 사람은 가짜다, 공격하고 방어한다. 손에 쥔 권력을 놓고 싶지 않아서, 새로운 권력자가 되고 싶어서, 또는 권력 주변에서 살아가기 위해.
주머니에 돈 한 푼 없던 청년 이스마엘은 새로운 세계에 대한 희망을 품고 포경선 피쿼드호에 오른다. 그러나 외다리 선장 에이허브는 이스마엘처럼 저마다 꿈을 안고 승선한 선원들의 바람은 아랑곳하지 않는다. 그는 오직 자신의 한쪽 다리를 앗아간 흰고래 모비 딕을 찾아 복수할 날만을 고대한다. 마침내 모비 딕과 마주한 선장은 모두의 목숨을 걸고 결전을 펼친다.

“모비 딕이 당신을 찾는 게 아닙니다. 미친 사람처럼 쫓아가는 것은 당신이오.” 이제라도 그만두라고 1등 항해사 스타벅이 지혜로운 충언을 하지만 선장은 파국을 향해 돌진한다. 그는 모비 딕을 끝장낼 작살을 명중시키지만 선원들과 피쿼드호는 침몰한다. 그 자신도 인생을 건 복수심과 함께 바다 깊이 수장되고 만다.
1851년에 출간된 허먼 멜빌의 소설 속 바다와 흰고래는 선도 아니고 악도 아니다. 그래서 에이허브의 복수심을 광기라 읽는 사람도 있고 불굴의 의지라 해석하는 사람도 있다. 권력도 마찬가지다. 국민은 이스마엘처럼 더 나은 내일을 위해 포경선에 오른 선원들이다. 그런데 우리가 탄 배의 선장은 무엇을 위해 누구와 싸우고 있는가? 싸움의 대상과 싸움의 목표가 그 사람이 누구인가를 말해준다.
[130] 재물로 사람을 얻어 천하를 가질 수 있을까?

두 사람은 마침내 결혼했다. 리무진의 고급 가죽 시트에 기대앉자 엠버의 머릿속에 앞으로 펼쳐질 삶이 떠올랐다. 세계 곳곳에 비싼 집을 두고 황홀한 여행을 다니며 보모와 하녀들이 그녀의 명령에 따라 움직이고 고급 의상과 보석이 가득할 터였다. 거만한 여자들은 그녀에게 머리를 숙일 것이다. 엄청나게 많은 돈과 권력자 남편만 있으면 가능한 일이었다. - 리브 콘스탄틴 ‘마지막 패리시 부인’ 중에서
‘화천대유’니 ‘천화동인’이니 하는 말이 낯설다. 둘 다 ‘주역’에서 꺼내 온 말로 넓게 의역하면 ‘사람과 재물을 모아 천하를 얻는다’는 뜻이다. 그래서일까? 그들 회사 이름과 얽혀 수천 억의 배당금, 출자 대비 천 배의 이익, 연 10억 이자, 고문 변호사료 월 1500만원에 대한 기사가 넘쳐난다. 재물로 사람을 얻었으니 다음 목표는 천하를 쥐는 것일까?
가난과 멸시에 진저리를 치던 엠버는 부와 권력을 원한다. 그녀는 성공한 사업가, 잭슨의 아내가 될 계획을 세운다. 잭슨의 아내 대프니에게 접근, 거짓말로 환심을 사서 친구가 되고, 잭슨의 비서가 되고 정부도 된다. 잭슨이 그토록 바라던 아들을 임신하자 엠버는 잭슨을 대프니와 이혼시키고 마침내 결혼한다. 엠버는 세상 최고의 승자가 된 기분이었다.
하지만 그토록 행복해보였던 대프니의 삶은 지옥, 그 이상이었다. 잘생긴 얼굴에 세련된 매너, 자상함까지 갖춘 듯 보이는 잭슨은 사실 잔혹하기 그지없는 소시오패스였다. 매일 학대받던 대프니의 간절한 소원은 남편에게서 벗어나 자유를 찾는 것. 그녀는 자신을 이용해 남편을 차지하려는 엠버에게 기꺼이 그러나 아무것도 모르는 척, 지옥의 바통을 넘겨준 것이다.
특혜 의혹에 법조계와 정치권 유력 인사들 이름이 오르내린다. 논란의 중심에 선 정치인은 해명 대신, 오히려 이를 계기로 자신이 대통령이 되면 ‘민간 기득권을 해체하고 공영 개발을 제도화’하겠다며 자신이 해오던 대로 계속하겠다는 뜻을 노골적으로 밝혔다. 우리가 맞이할 미래는 어떤 모습일까? 지옥을 빠져나간 대프니, 잘못된 선택을 뒤늦게 깨달은 엠버, 우리는 어느 쪽일까?
[131] 권력자라면 오이디푸스처럼

보라. 이 사람이 오이디푸스왕이다. 시민들 중 그의 행운을 부러워하지 않은 자 누구였던가? 하지만 보라. 그가 얼마나 무서운 재난의 크나큰 파도 속으로 휩쓸려 들어갔는지. 그러니 필멸의 인간은 마지막 날을 볼 때까지는 누구도 행복한 사람이라 부르지 말아야 한다. 그가 어떤 고통도 겪지 않고 삶의 경계를 넘어서기 전까지는. - 소포클레스 ‘오이디푸스왕’ 중에서
사회적 거리 두기가 2주 더 연장되었다. 영업 시간 제한과 사적 모임 통제로 지난 2년간 자영업자와 소상공인, 일반 시민의 생활은 점점 더 큰 어려움 속으로 빠져들고 있다. 11월부터 ‘위드 코로나’ 시대로 전환될 거라지만 마스크나 백신 접종 확인증이 없으면 사회 활동에 제약을 받는 등, 강제 방역 정책은 앞으로도 국민의 일상을 지배할 것 같다.
약 2500년 전 소포클레스가 쓴 비극의 주인공 오이디푸스왕은 자신의 운명을 알기 전까지는 부러울 게 없는 사람이었다. 그는 역병과 기근을 해결하려면 선왕을 죽인 죄인을 찾아 벌해야 한다는 신탁을 듣는다. 왕은 자신이 바로 그 범인임을, 오래전 길에서 함부로 죽인 사람이 테베의 선왕이자 자신의 친부였다는 걸 알게 된다.
스핑크스의 수수께끼를 푼 오이디푸스를 시민들은 지혜롭고 용맹한 왕으로 떠받들었으나, 그는 부친 살해범이자 근친상간범이었다. 재혼해서 아들딸 낳고 살았던 남편이 자신이 버린 아들이라는 사실을 알고 왕비는 자결한다. 오이디푸스도 진실을 보지 못한 두 눈을 바늘로 찔러 멀게 한 뒤 모든 재앙의 책임을 지고 테베를 떠난다.
코로나로 많은 사람이 고통받고 있다. 과학적 사고가 당연해진 요즘, 현대의 역병이 되어버린 코로나와 그로 인한 불황이 권력자의 숨겨진 죄 때문이라 생각하는 사람은 없다. 하지만 국가와 국민의 운명을 손에 쥐었던 권력자에겐 오이디푸스처럼 모든 것을 책임지고 떠나야 할 순간이 찾아온다. 무심한 선택과 사소한 결정에 대해서조차 반드시 대가를 치러야 하는 인생의 법칙이야말로 오이디푸스가 우리에게 주는 가장 큰 비극적 교훈이다.
[132] 절대 추락하지 않는 사람들

“그런데 어떻게 해서 그렇게 대단한 사람이 추락하셨죠?” 추락했다? 그래, 추락이 있었다. 그건 의심할 여지가 없다. 하지만 대단하다? 그것이 그에게 맞는 말인가? 그는 자신을 점점 더 모호해져 가는 사람으로 생각한다. 역사의 변방에 속하는 인물. 그는 말한다. “어쩌면 가끔씩 추락하는 것도 우리에게 좋은 일인지 모르지요. 부서지지만 않는다면요.” - 존 M. 쿳시 ‘추락’ 중에서
임기가 끝나가는 정권의 지지율이 40%대로 여전히 높다고 한다. K방역을 성공으로 이끈 리더, 최고의 외교 협상가, 전략가, 승부사이기 때문이란다. 경기지사는 대장동 게이트 논란에도 불구하고 과반의 지지를 얻어 민주당 대선 후보로 확정됐다. 손바닥에 왕(王) 자를 쓰고 TV 토론에 나왔던 이는 야당의 유력한 대선 후보다.
소설의 주인공 데이비드는 제자 멜라니와 성관계를 가졌다는 혐의로 고발당한다. 사과하라는 학교 측 권고를 무시한 그는 대학교수직을 사임하고 딸 루시의 농장에 머문다. 그러던 어느 날, 괴한들이 침입하고 루시는 성폭행을 당한다. 딸을 지켜주지 못해 괴로워하던 데이비드는 그제야 멜라니의 부모를 찾아가 상처 준 것에 대해 사죄한다.
백인의 유색인종 차별 정책이 끝난 후의 남아프리카공화국을 배경으로 하는 이 소설은 백과 흑, 가해자와 피해자가 자리를 바꾸었을 뿐, 똑같은 폭력이 난무하는 세상을 그린다. 데이비드는 아무런 가책 없이 살다가 가해자로 낙인찍혀 명예를 잃었고, 딸은 피해자가 되어 모든 걸 다 빼앗겼지만 추락의 끝, 그 밑바닥에서 다시 시작하는 것이야말로 용기 있는 삶이다.
오른쪽과 왼쪽의 구분이 사라진 우리나라는 다를까. 얼굴도 들지 못할 참담한 상황에서도 절대 추락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잘못과 거짓의 혐의가 크면 클수록 더 큰 소리로 결백과 청렴을 주장한다. 그래야 대중의 신뢰와 부와 권력을 지킬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추락해야 할 때 추락하지 못하면 진실한 인생을 살아갈 기회를 영원히 놓치는 것일 수도 있다. 그까짓 게 왜 중요하냐고 하겠지만.
[133]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가 된 국민들

“모두가 이긴 거야. 모두가 상을 받아야 해.” 도도새가 말했다. “그러면 누가 상을 줘?” 동물들이 물었다. “그건 물론 저 애지.” 도도새가 앨리스를 가리켰다. 그러자 동물들이 앨리스를 둘러싸고 왁자지껄 외쳤다. “상을 줘. 상을 줘!” 앨리스는 당황해서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마침 호두 사탕 한 봉지가 있어서 모두에게 상으로 나눠 주었다. - 루이스 캐럴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중에서
앨리스는 정원에 나타난 토끼를 쫓다가 이상한 세계로 들어간다. 그곳에서 앨리스는 보였다 안 보였다 하는 고양이, “너는 누구냐?”고 자꾸 묻는 쐐기벌레, 교훈만 늘어놓는 귀부인과 화가 날 때마다 “저 놈의 목을 베라”고 명령하는 여왕을 만난다. 차를 한 잔도 마시지 못하는 티파티에도 참석하고 재판정에서 입바른 말을 하다가 사형선고를 받기도 한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는 동화로 알려져 있지만 빅토리아 시대의 사회상을, 특히 노닥거리거나 졸거나 거들먹거릴 줄만 아는 당시 지배 계층의 모순을 풍자했다. 이런 비판은 과거에만 해당하지 않는다. 출발점도 다르고 결승선도 없고 언제 끝나는지도 알 수 없는, 그러나 모두가 승자가 될 수 있다는 달리기 경주는 ‘기회는 평등, 과정은 공정, 결과는 정의’롭다면서도 지배 권력층의 이익만을 챙겨온 현 정부의 모토를 떠올리게 한다.
이상한 나라의 동물들은 땀 흘리며 힘들게 경기하고도 승패를 가리지 않는다. 모두가 이겼다면서 경주에 함께 참가한 앨리스에게 상품을 내놓으라고 한다. 다 같은 우승자라면서도 앨리스의 사탕을 자기들끼리만 나눠 먹고는 그녀의 골무를 빼앗았다가 도로 주면서 앨리스에게 주는 상이라며 환호하고 박수친다. 제대로 하는 일은 없이 국민의 등골을 빼먹는 정치인들의 쓸모없음에 대한 가차 없는 조롱이다.
처형 직전 ‘휴, 꿈이었구나!’ 하고 깨어나는 동화와 달리, 비리는 감춰지고 의혹은 사라지고 죄와 거짓과 위선만이 득세하는 세상은 눈앞의 현실이다. 하루하루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가 된 기분으로 산다. 그런 국민이 어디 나 하나뿐일까.
[134] 과학은 우주로 가는데, 정치는 퇴화 중

“행복이 무엇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힘든 일을 겪더라도 그것이 진정 옳은 길을 가는 중에 생긴 일이라면, 오르막이든 내리막이든 그 한 걸음 한 걸음은 모두 진정한 행복에 가까워지는 것이겠지요.” “네, 맞아요. 최고의 행복에 이르기 위해 갖가지 슬픔을 겪어야 하는 것도 모두 하늘의 뜻이랍니다.” - 미야자와 겐지 ‘은하철도의 밤’ 중에서
인공위성 발사체 누리호가 지난 21일, 우주를 향해 날아올랐다. 3단계 분리를 성공시키며 목표했던 높이까지는 도달했으나 탑재했던 위성을 궤도에 진입시키는 데는 실패했다. 그러나 1992년 ‘우리별’이라는 작은 위성을 시작으로 우주 개발 사업에 뛰어든 지 30년, 한국은 이제 1t이 넘는 물체를 우주로 쏘아 올릴 수 있는 독자 기술을 가진 7번째 나라가 됐다.
‘기차가 어둠을 헤치고 은하수를 건너면’으로 시작하는 주제가로 유명한 TV 애니메이션 ‘은하철도 999′에 영감을 준 소설이 ‘은하철도의 밤’이다. 고기잡이 나간 아버지를 기다리며 병든 어머니를 돌보는 조반니는 어느 밤, 친구 캄페넬라와 함께 은하철도를 타고 우주를 여행한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은 꿈, 소년은 친구가 하늘나라로 떠나버린 것을 알게 된다.
지금은 수많은 독자의 사랑을 받는 책이지만, 미완의 유작이기에 작가는 그 어떤 영광도 누린 적 없다. 자비로 출판한 적이 있는데 팔린 책은 고작 다섯 권. 그래도 ‘내 책은 세상에 도움이 될 거야’라며 작가는 자신의 글을 믿었다.
실패 없는 성공은 없다. 그런데 중요한 도약의 과정, 발사가 예정보다 늦춰지고 문제를 인지한 과학자들 모두 초긴장 상태였을 그 순간, 우주센터 통제실에 정부 수장과 의전비서관, 방송 관계자들이 들이닥쳐 어수선했다고 한다. 더구나 실패 후 과학기술부의 결과 발표도 있기 전에 주인공인 양, 정부가 대국민 담화까지 먼저 내놓았다.
멀찍이서 지켜보고 연구진의 브리핑까지 들은 뒤 나섰다면 얼마나 의젓해 보였을까. 과학기술은 우주를 날 수 있을 만큼 성장했는데 정부의 성숙한 모습은 언제쯤 국민의 몫이 되려나.
[135] 설거지론과 국민 퐁퐁단

‘그대의 가면이 벗겨질 때 연인은 그대를 미워하리. 그대의 운명이 스러질 때 아름다운 모습도 시들어지리. 그대의 삶이 나뭇잎처럼 떨어지고 빗방울처럼 흩뿌려지고, 그대가 쓴 베일은 슬픔이 되고 머리에 얹은 관은 괴로움이 되리니.’ 속았다는 생각이 들면 사람의 마음이란 매정해지기 마련이다. 테스의 존재란 지금의 클레어에게 한낱 미물과 다름없었다. - 토머스 하디 ‘더버빌가의 테스’ 중에서
최근 ‘설거지론’과 ‘퐁퐁남’이라는 말이 이슈다. 화려한 연애 경력이 있는 여성인 줄 모르고 결혼해서 물질적 풍요와 사회적 신분 상승까지 제공한 순진하고 능력 있는 남성의 삶을 조롱하거나 자조하는 말이다. 과거가 무엇이든 지금 사랑하고 존중하며 알뜰살뜰 산다면 문제 될 게 없을 텐데 신뢰의 부재를 추측하게 하는 세태가 씁쓸하다.
소설문학에서 ‘설거지남’이기를 거부한 대표적 인물이 테스의 남편 클레어다. 테스가 순결한 처녀일 거라 확신했던 그는 결혼 첫날밤, 알렉의 정부로 살면서 아이까지 낳은 적 있다는 그녀의 고백에 기겁한다. 자신 또한 과거가 있었고 테스의 사랑은 진실했지만 속았다고 생각한 클레어는 아내를 떠난다. 이후 자신은 물론 테스는 고통의 나락으로 떨어지고 만다.
3년 만에 바티칸에서 교황을 다시 만난 정부의 수장은 북한을 방문해 달라, 또 한 번 간곡히 청했다. 그에게는 오직 북한에 대한 사랑뿐, 여러 가지로 힘든 우리 국민을 축복해 달라 할 마음은 없었나 보다. 그에게 국민이란 북한을 원조할 수 있도록 돈 벌어 세금 내는 기계에 불과한 것일까.
대학 시절, 주체사상에 빠져 화염병을 던지며 반정부 시위를 주도하다 경찰서를 드나들던 사람들. 민주화 세력이니 민주 유공자니 하며 한자리씩 차지한 그들이야말로 연애는 북한과 실컷 하고 결혼은 대한민국과 했지만 살림은 나 몰라라, 북한과 바람피우는 꼴이다.
세금을 펑펑 쓰며 북한까지 지원한 결과, 국가 부채는 400조가 늘어 1000조를 넘었다. 국민 1인당 2000만원의 빚이다. 성실하게 살아오다 설거지론이니 퐁퐁남이니 하는 자괴감으로 괴로운 것이 꼭 일부 남성들만은 아닐 듯하다.
[136] 선거, 사회를 통제하는 또 다른 방식

- 전쟁에 진리나 아름다움이나 지식이 무슨 소용이 있겠나? 사람들은 조용한 삶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라도 좋다는 식이었어. 우리들은 그 후부터 통제를 계속해왔어. 물론 그것은 진실을 위해서는 별로 좋은 일이 아니었지. 하지만 행복을 위해서는 아주 좋은 일이었어. 인간은 무엇인가를 얻으려면 필연적으로 대가를 치러야 해. 자네들은 지금 그런 대가를 치르고 있어. - 올더스 헉슬리 ‘멋진 신세계’ 중에서
달리는 지하철의 실내 스피커에서는 반드시 마스크를 쓰고 옆 사람과 대화하지 말라는 안내 방송이 반복된다. 승객들은 마스크로 입을 꼭 막고 스마트폰만 들여다본다. 외국어를 공부하거나 책을 읽는 사람도 간혹 있지만, 그림과 짧은 대사만 이어지는 웹툰, 정치나 연예 관련 포털 기사들이 대부분이다. 드라마나 영화, 오락 프로그램을 보기도 한다.
과학이 발달한 ‘멋진 신세계’에서는 인간도 공장에서 생산된다. 크게 다섯 부류로 나뉜 사회 계급에 따라 외모와 지능을 갖고 태어난 사람들은 정해진 역할에 맞게 양육된다. 현실에 만족하도록 세뇌되기 때문에 누구도 불만을 갖지 않는다. 기분 나쁜 일이 생겨도 국가가 무제한으로 제공하는 마약을 삼키면 그만이다. 슬픔도 분노도 없는, 모두가 행복한 세상이다.
텔레비전이 바보상자였던 시절이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원하는 프로그램을 언제 어디서든 볼 수 있는 세계적 스트리밍 서비스에 가입하고 남들과 똑같은 걸 본다고 자랑한다. 스마트폰을 바보상자라고 하는 사람도 없다. 최신 기기로 자주 바꾸고 더 많이 들여다보는 사람을 첨단 문명인이라 착각한다. 과학이 발달할수록 인간은 그렇게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하는 힘을 잃는다.
내년에 대통령 선거가 있다며 TV와 포털의 보도 열기가 뜨겁다. 그걸 본 대중들은 이자다, 저자다, 저마다 편들고 싸운다. 5년에 한 번, 4년에 한 번, 중간중간 탄핵과 보궐선거. 그렇게 해마다 무언가 바뀌면 고통이 사라질 거라는 기대, 우리 손으로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희망, 이것이야말로 사회를 유지하는 통제 방식, 대중에게 던져주는 마약은 아닐는지.
[137] 최고 권력자 딸의 친정살이
나의 흰색은 녹아버렸고 아무도 그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두 달 전, 나는 내가 어떤 인간인지 알고 있었다. 아무런 삶의 흔적도 남기지 않은, 라틴어를 가르쳐온 일개 교사라는 것을. 지금 나는 눈을 바라본다. 눈 역시 흔적을 남기지 않고 녹으리라. 하지만 이제 나는 눈이 규정할 수 없는 존재임을 깨닫는다. 나는 내가 어떤 인간인지 더 이상 알지 못한다. - 아멜리 노통브 ‘오후 네 시’ 중에서

정부 수장의 딸과 그 가족이 1년 가까이 청와대에서 함께 살고 있다고 한다. ‘아빠 찬스’와 ‘관사 부동산 재테크’라는 비난이 일자 여당 의원 윤건영은 권력자의 사생활은 보호되어야 하며 딸의 친정살이는 인간적인 면에서 이해해줄 일일 뿐, 불법이 아니라고 변호했다. 심지어 ‘야박함을 넘어 야비한 정치 공세’라고도 반박했다.
소설의 주인공 에밀은 퇴직 후 교외의 새집에서 아내와 함께 조용한 노후를 시작한다. 그런데 오후 4시만 되면 이웃 남자가 찾아온다. 애써 묻는 말에만 그렇소, 아니오, 퉁명스럽게 대답할 뿐이면서도 그는 매일 두 시간씩 에밀의 안락의자를 차지한다. 에밀은 사생활을 침해하는 비상식적인 이웃의 방문이 괴롭기만 하다.
외출도 해보고 아내가 병이 났다고 핑계도 대봤지만 막무가내 침입을 막을 길이 없다. 에밀은 몇 가지 알게 된 사실을 바탕으로 무례한 이웃의 방문 목적을 추측한다. 에밀은 그가 공허한 삶을 끝내고 싶어 하며 자신이 그 죽음을 도와야 한다고 결론짓는다. 평생 상식적이고 교양 있게 살아왔다고 자부하던 에밀은 이웃을 배려한다는 명분 아래 그를 살해한다.
자녀가 있는 젊은 부부가 내 집을 팔아 저축하고 마당 넓은 친정에 얹혀사는 것이 당연한 일일까? 세금이 잘못 쓰이면 분노하는 것이야말로 국민의 당연한 권리다. 상식을 벗어난 이해를 끝없이 강요하는 사회다. 비정상을 정상이라고 억지로 납득해야 하는 부당한 현실이 반복되면 사람은 자기 안에 있는 줄도 몰랐던 괴물로 돌변하기도 한다. 그런데 최고 권력자의 사생활이 언제부터 우리가 그토록 너그럽게 이해해줘야 하는 것이 되었을까?
[138] 나도 공산당이 싫어요

“자네의 가장 큰 이상이 뭐지?” “공산주의를 실현하고 공산주의 사업을 위해 죽을 때까지 분투하는 겁니다.” 그녀가 미지근한 표정으로 웃었다. 마치 석탄불 위에 옅게 올려진 얼음과도 같았다. 류롄이 솔직하게 대답하라며 다시 한번 정색하고 물었다. “자네의 가장 큰 이상은 뭐지?” “승진입니다. 아내와 아이를 도시로 데려왔으면 합니다.” - 옌롄커 ‘인민을 위해 복무하라’ 중에서
신세계그룹의 정용진 부회장이 개인 소셜미디어에 올린 ‘공산당이 싫어요’라는 발언이 화제다. 그는 ‘반공 민주 정신에 투철한 애국 애족이 우리의 삶의 길이며 자유세계의 이상을 실현하는 기반’이라는 국민교육헌장의 문구도 덧붙였다. 이에 대해 친여 성향 사람들이 소비자에게 피해와 불쾌감을 주고 공산권 국가의 반감을 살 수 있다며 비난과 압박을 가하고 있다.
요리 실력과 성실함을 인정받아 사단장의 사택에서 일하는 취사병 우다왕은 하루빨리 당의 인정을 받아 가족을 도시로 데려오고 싶어 한다. 그런데 사단장이 장기 출장을 간 사이, 그의 젊은 아내 류롄과 내연 관계를 맺고 처음으로 내면의 욕망을 깨닫는다. 그는 꿈을 묻는 류롄에게 처음엔 공산주의 사회의 이상을 말하지만 결국 자기의 소박한 바람을 이야기한다.
중국의 작가 옌롄커의 재미있는 소설 ‘인민을 위해 복무하라’는 2005년에 출간되자마자 전량 회수되었고 출판, 홍보, 게재, 비평, 각색을 할 수 없는 5금 조치를 당했다. 내밀한 개인의 사생활과 인간 감정까지 통제하는 공산당의 허상을 남녀의 성애를 통해 적나라하게 표현한 데다, 공산주의 혁명을 위해 개인을 희생하라는 마오의 정치 슬로건을 조롱했다는 이유였다.
공산주의 체제에서 국민이 잘 먹고 잘사는 나라는 역사상 없었다. 소련과 중공, 북한이 일으킨 6·25전쟁을 모르는 국민도 없다. 중국 진출 20년 만에 이마트를 철수했던 기업인의 소신을 누가 뭐라 할 수 있나. 오히려 진보라는 이름으로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를 강요하는 사회 분위기 속에서 그의 발언 이후 많은 사람이 소리 내어 말하기 시작했다. “나도 공산당이 싫어요!”
12.01
[139] 현충원에 묻히지 못한 두 전직 대통령

몇 분이 안 되어 모두 가버렸다. 지친 표정으로 눈물을 흘리며 우리 종(種)이 가장 좋아하지 않는 활동으로부터 떠나가 버렸다. 그리고 그는 뒤에 남았다. 물론 다른 누가 죽었을 때와 마찬가지로 많은 사람들이 비통해했지만, 어떤 사람들은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거나 자기도 모르게 안도했다. 또는 좋은 이유든 나쁜 이유든 진정으로 기뻐하기도 했다. - 필립 로스 ‘에브리맨’ 중에서
약 한 달 간격으로 두 전직 대통령이 세상을 떠났다. 하지만 고인과 유족이 원했을 국립현충원에는 안장되지 못했다. 정치권에서는 과거에 대해 그들이 사과해야 했다고 끊임없이 외친다. 마치 단 한 번도 잘못을 저지른 적 없는 사람들처럼. 자기들은 절대로 죽지 않을 것처럼.
소설 주인공은 오늘 무덤에 묻힌 망자다. 그는 일생 동안 크고 작은 일들, 사랑과 이별, 열정과 권태, 성공과 실패의 순간을 겪었다. 누구나 그렇듯 가끔은 병원 신세를 지기도 했다. 자부심도 느끼고 후회도 남았지만 돌아보면 죽음과 장례식조차 삶의 과정일 뿐이다. 소설 제목처럼 태어나면 반드시 죽는 우리, 세상 모든 사람이 이 소설의 주인공이다.
가족과 지인들은 흙 한 줌씩 망자에게 던져주고 묘지를 떠난다. 그들 또한 언젠가는 닥쳐올 장례식의 주인공이 될 거라는 사실을 망각한 채, 울고 웃는 일상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어떤 이는 죽은 이를 그리워하고 어떤 이는 여전히 미워하며 또 어떤 이는 후련해한다. 아쉬울 것도 서운할 것도 없다. 오늘 땅에 묻힌 그 역시 타인의 장례식에서 숱하게 경험했을 감정이다.
전직 대통령들에 대한 호불호는, 현 정부와 일반 국민, 이쪽과 저쪽으로 나뉜 사람들의 생각 차이는 크고 깊다. 그래도 일부, 그들의 죽음을 애도하는 사람들의 조문 행렬이 추운 날씨에도 끊이지 않았다고 한다. 싫은 사람이라 해도 누군가에게는 소중한 사람이고 빈자리는 커 보이기도 하는 법이다.
어디에 묻힌들 죽은 사람이 무엇을 알까마는, 한 나라를 책임졌던 대통령들이 현충원에 묻힐 수 없다는 건 우리 시대, 또 하나의 슬픔이다.
12.08
[140] 백신 접종, 밀어붙이기만으로는 안 된다

이것은 당신들의 죄가 아니다. 당신들은 환자다. 그러나 기뻐하라. 당신들은 완벽해지고, 기계와 동등해지고, 백 퍼센트 행복으로 향한 길이 열린다. 모두들, 노소를 막론하고 서둘지어다. 서둘러 ‘위대한 수술’을 받을지어다. 위대한 수술이 시술되고 있는 강당으로 빨리 갈지어다. 위대한 수술 만세! 단일제국 만세! ‘은혜로운 분’ 만세! -예브게니 이바노비치 자마친 ‘우리들’ 중에서
이번 주부터 백신 패스가 없으면 카페나 식당을 이용할 수 없다. 청소년도 내년 2월부터 도서관⋅학원 등의 출입이 금지된다. 질병관리청장은 “확진자 급증과 변이 대응을 위해 예방접종에 꼭 참여해 달라”고 했다. 3차 접종은 물론 미접종자 및 중⋅고등학생에게도 백신을 의무화하겠다는 것이 정부의 방침이다.
소설 속 우리들은 평등하고 행복하다. 세계 단일정부 치하에서 우리는 이름도 없이 번호로만 불린다. 우리에겐 자유도 필요 없다. ‘은혜로운 분’이라 불리는 독재자의 지시를 따르기만 하면 만사가 순조롭다. 안전을 위해 우리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는 정부는 행복의 적이라 불리는 반역자들, 즉 개인의 자유로운 선택권을 되찾으려는 자들을 색출, 처단하고 그 공포심으로 대중을 복종시킨다.
반역의 싹을 잘라내기 위해 뇌의 일부를 제거하는 수술도 강제한다. 수술받고 나면 아무런 의심 없이 ‘은혜로운 분’을 사랑하고 존경하게 된다. ‘우리가 일등이다! 우리는 이미 수술받았다. 모두들 우리를 따르라!’ 수술을 선동하는 정부의 슬로건이다.
국민의 80%가 2차 접종을 마쳤는데도 확진자 수가 폭발했고 알파, 베타, 감마, 델타도 모자라 오미크론이라는 변이까지 나왔단다. 백신 무용론이 나올 법한 상황에서 전파와 감염, 변이 확산을 막겠다고 성인 추가 접종과 청소년 접종률만 증가시키겠다고 하면 문제가 해결될까.
무증상이나 경증이 많은 상황에서도 정부는 국민의 사회생활을 모두 멈춰 서게 했다. 또 많은 사람이 주사를 맞아야 하겠지만, 분명 3차로 끝나진 않을 것이다. 국민의 건강을 위해서라는 정부를 믿고 따라오는 동안 정작 빼앗긴 것이 무엇인가, 우리는 질문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