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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 이야기 15/ 기독교4/ 세계의 크리스마스2/ 프랑스 - 한국 - 지구촌 산타 - 한국 개신교의 역사 - 부활절 - 유대교

상림은내고향 2021. 12. 9. 21:52

종교 이야기 15/ 기독교4/ 

■세계의 크리스마스2 

 

프랑스  

파리 11. 12.3

 

니스 13. 12. 10.크리스마스

 

 

 

 

 

 

 

 

 

 

 

파리 쁘렝땅 백회점

 

파리 몽테뉴 거리

 

 파리 - 원 하트 원 트리 2015

 

스트라스부르 광장

 

핀란드

 

필리핀 = 12. 12.25

 

헝가리 

부다페스트 국회의사당

 

호주

5층 건물 높이의 초대형 트리 12.12.25.  시드니

 

멜브런 2015

 

 

korea

1951 국회 크리스마스

 

 

1954 남북애육원

 

 

1959 구세군이 극빈자에 구호미 분배

 

 

1959 서울대 크리스마스 축하 음악회

 

 

1960 일선장병에 위문품 전달

 

 

1964 구세군 자선남비

 

 

1965 서울 거리

 

 

1966 공보부 주최 일선장병 위문 공연

 

 

1971 서울시청 앞

 

 

1974 불우이웃 돕기

 

 

1975 구세군

 

 

1988 서울시청 앞

 

 

2013. 12. 2. 서울 태평로 광장의 대형 크리스마스 트리

 

 

14.11.29 서울광장

 

 

 

14.12.10 국회의사당 중앙분수대

 

 

북트리 - 국립세종도서관

 

 

2015 코리아 서울 

 

■2015 지구촌 산타

▲6일(현지시간) 호주 시드니에서 열린 산타 펀 레이스에 참가한 참가자들이 모여 행사 준비를 하고 있다. /신화뉴시스

 

▲호주 시드니에서 열린 산타 펀 레이스에 참가한 참가자들이 모여 행사 전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신화뉴시스

 

▲독일 드레스덴에서 산타 복장을 한 남성이 햇살을 받으며 누워있다. /AFP연합뉴스

 

▲독일 드레스덴에서 산타 복장을 한 남성이 인라인을 타고 있다. /AFP연합뉴스

 

▲스위스 몽트뢰에서 산타 복장을 한 사람들이 지상 와이어에 고정된 썰매를 타고 손을 흔들고 있다. /신화뉴시스

 

▲스위스 몽트뢰에서 산타 복장을 한 사람들이 지상 와이어에 고정된 썰매를 타고 손을 흔들고 있다. /신화뉴시스

 

▲북아일랜드 뉴리에서 산타 복장을 한 사람들이 스키를 타고 내려오고 있다. /AP뉴시스

 

▲헝가리 부다페스트에서 산타 복장을 한 사람들이 눈을 맞으며 즐거워 하고 있다. /AP뉴시스

 

▲헝가리 부다페스트에서 산타 복장을 한 사람들이 눈을 맞으며 즐거워 하고 있다. /신화뉴시스

 

▲캐나다 미녀 산타

 

■한국의 개신교 이야기

2015.09.18  [선교 130주년 발자취를 찾아서]

 

아펜젤러와 드루신학교·랭커스터

"은둔의 나라 조선에서… 바로 天國으로 갈 걸세"

多교파 공존 분위기서 성장해 언더우드와 협력하며 선교 활동

정동제일감리교회·배재학당 설립

그의 모교에 이름 동판 설치돼… 청년 시절 교회엔 기념 예배실

▲아펜젤러

 

지난 8일 오후 미국 펜실베이니아주 필라델피아에서 랭커스터로 가는 길. 도로 양쪽으로 이어지는 옥수수 밭은 황금빛으로 익어가고 있었다. 가끔씩 그 길에 마차가 나타났다. 머리엔 수건 같은 흰 모자를 쓴 여인이 수백년 전의 풍경화에서 튀어나온 듯 마차를 몰았다. 영화나 다큐를 통해 알려진 아미시들이다. 문명의 이기(利器)를 사용하지 않고 전통 방식으로 농사를 지으며 경건한 생활을 하는 것으로 잘 알려진 사람들이다.

 

아펜젤러(1858~1902)가 청년기를 보낸 랭커스터는 이렇게 다양한 개신교 교파가 평화롭게 살아가는 곳이었다. 펜실베이니아에는 유럽 각지에서 종교의 자유를 찾아 대서양을 건넌 개신교 30여 교단의 본부가 자리하고 있다고 한다. 어린 시절 독일개혁교회에 출석하다가 10대 후반 감리교 신자가 된 아펜젤러에게도 여러 교파가 평화롭게 사는 모습은 낯선 것이 아니었을 것이다. 이는 장차 그가 조선에서 장로교의 언더우드와 협력한 것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아펜젤러에게 1884년 연말과 이듬해 초는 무척 바쁘게 흘러갔다. 1884년 12월 17일 엘라 닷지와 결혼한 직후 조선 선교사로 임명돼 1885년 2월 3일 샌프란시스코에서 배를 탔던 것. 그는 출발 당시까지도 1884년 12월 4일 조선에서 갑신정변이 일어난 사실을 몰랐다. 1885년 4월 5일 언더우드와 함께 도착한 제물포에서 아펜젤러 부부는 미 해군 제독으로부터 제지당한다. '조선 정세가 위험하기 때문에 젊은 여성은 갈 수 없다'는 이유였다. 홀몸인 데다 의학 공부를 한 언더우드는 알렌 박사의 제중원 일을 돕겠다며 한양으로 향했지만 아펜젤러 부부는 일본으로 발길을 되돌렸다가 6월 20일에야 다시 조선에 입국할 수 있었다.

 

▲랭커스터제일교회 내에 마련된 아펜젤러 기념 예배실. 이 교회 디파올로 담임목사는 “최근에도 인천 내리감리교회 신자들이 방문하는 등 아펜젤러는 한국과 우리 교회를 이어주는 분”이라며 “우리 교회는 매년 봄 미국 감리교 역사 유산의 날을 아펜젤러 기념일로 기리고 있다”고 말했다. /랭커스터=김한수 기자

 

어렵게 입국한 조선에서 아펜젤러는 완전연소(完全煙燒)의 삶을 살았다. 정동제일감리교회와 배재학당 설립, 언더우드 등 선교사들과 함께 성경을 번역하는 한편 북부와 남부 지방으로 전도 여행을 떠나고, 독립협회 창설과 감옥에 갇힌 배재학당 졸업생 이승만 구명운동에 나서는 등 자신을 돌볼 틈 없는 나날이었다.

 

1900년 안식년을 얻었을 때 80㎏의 당당했던 그의 체중은 20㎏이나 빠진 60㎏대로 줄어 있었다. 드루신학교의 동문이 "귀국해서 함께 목회하자"고 권유했을 정도였다. 그러나 아펜젤러의 대답은 태연했다. "나는 은둔의 나라(조선)에서 바로 천국으로 갈 걸세. 미국에서 가는 것보다 멀진 않겠지." 그리고 실제로 그는 1902년 군산 앞바다에서 선박 충돌·침몰 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목포에서 열린 성경번역위원회에 참석하기 위해 가는 길이었다. 시신도 수습하지 못했다. '조선에서 천국으로 직행하겠다'는 아펜젤러의 말은 예언 아닌 예언이 된 셈이다.

 

고향에서 아펜젤러는 '한국과 미국의 인연을 이어준 은인'으로 대접받고 있었다. 지난 8일 찾은 랭커스터제일감리교회는 지금도 한국과 미국 감리교를 연결하는 다리 역할을 하고 있었다. 교회 내에는 아펜젤러 기념 예배실도 있었다. 이 교회는 아펜젤러가 프랭클린 앤드 마셜대학교 재학 중 출석하면서 1년간 평신도 설교자로 활동한 곳. 교회는 8~9년 전 건물을 개축하면서 결혼식이나 유아 세례 장소로 쓸 작은 예배당을 만들며 아펜젤러의 이름을 붙였다. 예배실의 십자가는 아펜젤러가 설립한 서울의 정동제일교회가 기증했다. 예배실 앞 진열장엔 아펜젤러 가족사진 등이 전시됐고, 배재고와 이화여고 졸업생들이 보낸 감사패가 있었다. 1901년 아펜젤러는 안식년을 맞아 미국에 왔다가 가족을 이곳 랭커스터에 남겨두고 조선으로 돌아갔다. 이 교회 디파올로 담임목사는 "아펜젤러가 보내온 편지는 지역 신문에도 보도돼 교인들과 주민들에게 조선 소식을 알려주는 통로가 됐다"고 말했다.

 

  ▲드루신학교 입구에 설치된 아펜젤러를 비롯한 이 학교 출신 해외 선교사 이름을 새긴 동판.

 

지난 7일 찾은 그의 모교인 뉴저지 주 드루대 신학부 현관엔 27명의 이름이 새겨진 동판이 설치돼 있었다. 이 학교 출신으로 1873~1885년 외국 선교사로 나간 선배들을 기려 1886년 졸업생들이 만든 이 기념 동판 끝에서 셋째로 아펜젤러의 이름이 보였다. 이 대학 고문서연구소엔 1882년 9월 신입생 아펜젤러가 자필(自筆)로 쓴 자기소개서를 비롯해 그의 사후 2년이 지난 1904년 조선의 감리교 선교사들이 보내온 추모 행사 팸플릿 등이 보관돼 있었다. 고문서연구소 크리스토퍼 앤더슨 소장은 "개교한 지 20년도 안 됐던 시절 세계 각지로 떠난 선배들의 뒤를 이어 많은 후배가 선교사로 파송됐다"며 "노블(1866~1945) 선교사처럼 아펜젤러 선교사를 따라 조선으로 간 이도 있다"고 했다. 그는 또 "한국 유학생은 20세기 초부터 우리 학교로 오기 시작했다"며 "아펜젤러는 당시로서는 완전히 미지의 나라였던 한국의 문화와 역사, 사람들에 대해 미국에 알려준 분이다. 그렇게 시작된 역사가 130년에 이른다"고 말했다.

랭커스터(미국)=김한수 종교전문기자

 

2015년 09월 15일  개신교 선교 130주년… 언더우드·아펜젤러의 고향에 가다

 

▲  7일 미국 뉴저지주 뉴브런즈윅신학교 도서관에 세워진 언더우스 선교사의 흉상 앞에서 이 학교 김진홍(왼쪽부터존 코클리 교수, 그레그 매스크 총장, 윤사무엘 감람원선교신학교 총장이 언더우드의 선교 정신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흉상은 2011년 연세대가 기증한 것이다.

 

▲  미 펜실베이니아주 랭커스터 제일감리교회에 마련된 아펜젤러 기념 예배당에 정동제일교회가 기증한 십자가가 걸려 있다.

 

언더우드 뉴브런즈윅 신학교
현지에 교단 안세운다전통
복음 강요보다 교육·의료 봉사

아펜젤러 랭커스터 감리교회
사회봉사·공동체 생활 강조
가슴으로 믿는 신앙설교

분열보다 융화와 연합의 선교
韓을 亞유일 개신교 정착지로


“THE FIRST THEOLOGICAL MISSIONARY IN KOREA, ASIA AFTER 32 SUCCESSFUL YEARS WORK PASSED TO HIS REWARD.”

(
아시아 한국의 첫 신학 선교사, 32년간의 성공적인 임무를 마치고 하늘의 부름을 받다.) -호러스 언더우드(1859∼1916) 선교사의 묘비 문구


7
일 찾은 미국 뉴저지주 노스버겐 그로브 개혁교회 공원묘지, 언더우드의 묘비는 여전히 남아 있었다. 1885년 인천 제물포항에 발을 디딘 후 32년간 한국 선교 활동을 펼친 그는 쇠약해진 몸을 돌보기 위해 고국을 방문했다가 숨을 거둬 이곳에 묻혔다. 1999년 그의 유해는 서울 마포구 양화진 외국인선교사묘역에 이장됐지만, 교회 측은 묘역을 보존하고 있었다. 한국을 사랑했던 푸른 눈의 선교사는 그렇게 죽어서도 고향을 떠나 한국에 제 몸을 눕혔다.

지난 7∼12일 경기 용인 새에덴교회(담임목사 소강석) 주최로 언더우드, 헨리 아펜젤러(1858∼1902) 선교사의 발자취를 찾아 미 뉴저지·펜실베이니아주 등지를 방문했다. 올해는 한국에 개신교 복음이 전래된 지 130년 되는 해다. 조선에 개신교의 꽃을 피운 두씨앗은 먼저 이곳에서 싹을 틔웠다.

언더우드 배우는 뉴브런즈윅신학교 = 노스버겐에서 남서쪽으로 50㎞ 가량 떨어진 뉴저지주 뉴브런즈윅신학교는 언더우드의 정신이 잘 간직된 장소. 설립한 지 231년이 된 미 최초의 신학교지만, 학생 수가 200명이 채 되지 않았다. 김진홍 뉴브런즈윅신학교 교수는 “19세기 초 학교 졸업생의 15%가 세계 각국의 선교사로 파송됐지만, 현지에 소속 교파를 세우지 않는다는 전통 때문에 교세가 크지 않다고 했다.

1881
년 이 학교에 입학하면서 신학자의 길을 걸은 언더우드는 본래 인도로 선교를 가려 했다. 하지만 당시 한국에 갈 선교사가 나타나지 않자네가 가는 게 어떻겠니?’라는 내면의 목소리를 듣고 한국행을 결심했다. 그는 파송된 이후 특히 교육·의료 사업에 공헌했다. 제중원에서 약제사로 일하며 물리·화학을 가르쳤고, 경신학교(현 경신중)와 연희전문학교(연세대의 전신)를 세웠다. 영한·한영사전, 영어로 된 조선어 문법책도 만들었다. 일방적으로 복음을 전하기보다 조선에 도움을 주는 선교 방식을 택한 것이다.

뉴브런즈윅신학교는 그의 선교법을 학생들에게 전하고자 3년마다언더우드강좌를 열고 있다. 지난해에는 개교 230주년을 맞아 호러스 언더우드 기독교 글로벌 크리스천 센터를 설립했다. 김진홍 교수는내년 언더우드가 선교 초기 가족들에게 보낸 미공개 편지들을 모아 책도 출간할 예정이라고 했다.

랭커스터가 기억하는 아펜젤러 = 8일 도착한 펜실베이니아주에서는 아펜젤러를 만날 수 있었다. 퀘이커, 모르몬교 등 다양한 교파의 본부가 모였던 이곳에서 아펜젤러는 목회자의 꿈을 키워갔다. 특히 그는 독일개혁교회의 교세가 강했던 랭커스터 지역에서 본래 따랐던 개혁교단을 떠나 감리교인이 됐다.

7
년 전, 그가 다닌 랭커스터 제일감리교회에는 아펜젤러 기념 예배당이 세워졌다. 이 교회 조셉 디파올로 담임목사는교회 개축 당시 교인 중 많은 영향을 끼치고, 해외 선교에 공헌한 인물로 아펜젤러가 꼽혀 그를 기리는 공간을 만들었다고 했다. 아펜젤러가 한국에 세운 정동제일교회가 기증한 십자가가 예배당에 걸렸다. 교회 지하 보관실에는 그가 한국에서 보내온 선교 보고의 일부도 보관돼 있다. 디파올로 목사는아펜젤러가 보내온 편지는 지역신문에 실려 주민들에게 한국을 알렸다고 했다.

아펜젤러는 감리교 뿌리를 지닌 드류신학교에서 공부하면서 실천가로 거듭났다. 존 코클리 뉴브런즈윅신학교 교수는드류신학교는 학문적인 일보다 설교 같은 실천적인 일이 중심이 됐다고 설명했다. 실제 아펜젤러는 평신도임에도 당시 1년간 제일감리교회에서 설교자로 봉사했다. 한국에 와서도 이런 정신에 바탕을 두고 정동제일교회, 인천내리교회 등을 개척하고 조선 최초 서양식 학교인 배재학당(현 배재대)을 세우는 등 실천에 앞섰다. 그의 죽음 또한 침몰하던 배에서 조선의 소녀를 구하던 중 예기치 않게 찾아왔다.

하트퍼드에서 조선으로, 같이의 가치 = 130년 전 언더우드와 아펜젤러는 한 배에 몸을 싣고 조선을 향했다. 하지만 두 선교사의 만남은 더 앞선 것으로 보인다. 둘은 1883년 신학생 시절 코네티컷주 하트퍼드에서 열린신학교 간 선교사 연맹’(The Inter-Seminary Missionary Alliance) 총회에 각 학교 대표로 참석했다.

1880
년 설립된 이 모임은 당시 초교파적 선교운동의 선두에 있었던 곳. 둘은 한국에서도 이런 활동을 이어갔다. 북한 전도 활동을 함께했고, 언더우드가 세운 정동교회(현 새문안교회)와 정동제일교회가 연합기도회도 열었다. 특히 언더우드는 미 북장로교 소속이지만 캐나다감리회의 올리버 에비슨 선교사, 미 남감리교의 로버트 하디 선교사의 한국 활동을 도왔다.

조선은 이 같은 초교파적인 연합을 통해 아시아에서 유일하게 기독교가 자리 잡은 선교지가 됐다. 하지만 만개했던 꽃은 현재 시들어가고 있다. 각 교단의 분열과 갈등이 이어지고, 상징적인 부활절 예배마저 제각각 진행된다. 김진홍 교수는개신교가 가진 분열의 특성을 넘어 서로 담을 쌓기보다 이해와 양보, 협조를 통한 초교파적 사랑으로 하나가 되라는 가르침을 두 선교사에게 배울 때라고 했다. 이번 미국 탐방을 기획한 소강석 담임목사도언더우드·아펜젤러 선교사가 보여준 헌신과 연합의 정신이 필요하다교단 이기주의로 뿔뿔이 분열된 채 민족과 사회에 봉사하지 못하고 있는 한국교회가 뼈를 깎는 회개와 화합과 실천으로 다시금 민족과 사회의 희망이 되고 소금이 되고 등불이 되어야 한다고 했다.
뉴브런즈윅·랭커스터=·사진 유민환 기자 yoogiza@munhwa.com

 

2015.10.19  의사선교사 로제타 홀...

⊙ 1890년 10월 한양 도착 후 곧바로 진료 시작… 자궁 종양·백내장·언청이 등 첫 10개월 동안 2359건 진료, 처방전 6000여 건 발행 ⊙ 43년간 조선 땅에 머물며 첫 한국인 洋醫 교육, 이화여대 부속병원·고려대 의대 前身 설립, 한국어 點字 개발해 최초 특수교육 시작 ⊙ 조선에서 醫療선교 같이한 남편 윌리엄은 전염병, 어린 딸 이디스는 이질 걸려 사망 ⊙ 로제타의 아들 셔우드, 국내 최초 결핵요양병원 설립했고 크리스마스실 처음 발행

젊은 여의사이자 선교사였던 로제타 셔우드 홀. 1890년 조선에 올 무렵의 사진이다.당시 그녀의 나이는 25세였다.

  
얼마 전 주한 미국 대사관과 여성가족부가 주최한 미 부통령 부인 질 바이든(Jill Biden) 박사의 환영 리셉션에 참석한 일이 있다. 이날 바이든 박사는 연설에서 “미국 여성들과 한국 여성들의 우정의 역사는 60년”이라고 말했다. 바이든 박사가 연설을 마치고 연단에서 내려올 때 필자는 그분에게 이렇게 말했다.
 
 
“말씀 중에 미국과 한국 여성 우정의 역사가 60년이라고 하셨는데 사실은 130년입니다. 우리나라의 여성교육은 미국의 감리교 여성 선교사들이 시작했습니다. 그녀들이 학교를 세워 여성 교육을 시작했고 병원을 세워 여성들을 치료했습니다. 로제타 셔우드 홀(Rosetta Sherwood Hall)이라는 분이 있는데 우리나라에 125년 전에 와서 병원을 세웠고 여성들을 위한 의학교육을 시작했습니다. 우리나라 최초의 양의(洋醫)는 이분이 키운 여성이었습니다. 


 
로제타 홀의 업적

  곧이어 필자가 최근 출간한 로제타 홀 여사의 평전을 건네자 그녀는 “이런 분이 정말 있었느냐”며 놀라워했다. 미국인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사람도 첫 양의가 여성이었고, 그녀를 키운 이가 로제타 셔우드 홀이라는 의사(醫師) 선교사였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많지 않다. 게다가 그녀가 이화대학 부속병원과 고려대 의과대학의 최초 설립자였으며 한국어 점자(點字)를 최초로 개발했고 특수교육을 시작했다는 사실은 더더욱 알려져 있지 않다.
 
 
필자가 로제타 셔우드 홀의 이름을 처음 들었던 것은 10년 전쯤 박에스더에 대한 자료를 찾으면서였다. 우리나라에서 최초라는 수식어가 붙는 여성 전문인들의 이야기를 어린이 책으로 출판하고 있을 때였다. 초등학생 딸 둘을 키우면서 여느 엄마와 다름없이 내 딸들이 당당한 전문인으로 자라나길 원하면서 아이들에게 모범이 될 만한 인물들의 이야기를 전해 주려는 의도였다.
 
 
필자가 찾았던 최초의 여성 전문인 박에스더, 최은희, 이태영의 어린 시절에는 미국 감리교 여성 선교사들과의 만남이라는 공통점이 있었다.
 
 
박에스더는 로제타 셔우드 홀의 도움으로 미국의 의과대학을 졸업할 수 있었다. 박에스더는 우리나라 최초의 양의사였다. 최은희는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상급학교 진학을 못하고 있던 중에 감리교 선교사이자 여학교 교장이었던 거튜르드 스네블리의 도움으로 해주의정여학교에 진학했다. 그녀는 후에 《조선일보》에 입사해 최초의 여기자가 됐다.
 
 
이태영은 첫돌을 맞을 무렵 아버지를 여의고 열두 살 위의 큰오빠를 아버지처럼 믿고 자랐다. 이태영의 큰오빠 이태윤은 배재고보를 졸업하고 영변에서 활동하던 감리교 여성 선교사 룰루 밀러와 에설 에스티의 비서로 일했다. 이태영은 여성 선교사들의 독립적인 삶을 동경하며 성장, 우리나라 여성 변호사 1호가 됐다.
 
 
감리교 여성 선교사들 중 가장 먼저 거론해야 하는 이는 이화학당을 세운 메리 플레처 스크랜턴이다. 이분에 대해서는 꽤 많이 연구됐고 책도 나와 있다. 다음으로 꼭 기억해야 할 분이 로제타 셔우드 홀이라고 필자는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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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 처녀 의사 로제타 셔우드가 조선 땅을 밟은 것은 1890 10월이었다. 메리 스크랜턴이 남자 의사들에게 몸을 보일 수 없었던 조선 여성들을 위해 세운 보구여관(保救女館)의 두 번째 의사로 파견된 것이었다.


 
로제타가 쓴 125년 전 두루마리 편지 발견

▲1890년 로제타가 미국 고향집에 보낸 두루마리 편지.

 

  2012년 가을, 필자는 미국 필라델피아 근처 퀘이커 영성센터 ‘펜들 힐’에 머물 기회를 얻었다. 펜들 힐은 함석헌 선생이 머문 이후로 관심 있는 한국인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은 곳이었다. 필자가 관심을 가져 온 여성인물 이야기의 주인공 중 한 분이었던 수전 앤서니가 퀘이커 신자(信者)였기 때문에 나는 퀘이커에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곳에 있는 동안, 로제타 셔우드 홀에 대해 알아보기로 했다. 로제타 또한 퀘이커와 인연이 있었다. 그녀가 다녔던 펜실베이니아 여자의과대학은 1850년 퀘이커들이 세운 세계 최초의 여자의과대학이었다. 1765년 펜실베이니아대학(U Penn)이 의대를 설립한 후 100여 년 동안 미국 내 의대에서는 여성들의 입학을 허용하지 않았다.
 
 
남녀노소 누구나 하나님의 빛을 나누어 가졌기에 평등하다고 믿는 개신교의 한 분파인 퀘이커들은 노예해방운동과 여성참정권운동을 처음 시작한 그룹이기도 하다. 펜실베이니아 여자의과대학의 설립을 적극 지원한 이들 중에는 루크레시아 모트가 있다. 그녀는 남성들과 동등하게 여성들의 정치참여를 천명하고 참정권운동을 처음 시작한 세네카 폴즈회의의 개최자이기도 했다.
 
 
로제타가 다녔던 의대의 문서보관소는 펜들 힐과 지척(咫尺)에 있었다. 또 그녀를 조선에 파견했던 미국 감리교 여성해외선교회의 문서보관소는 두 시간 거리에 있었다. 수소문해 찾은 로제타의 손녀 필리스 홀 킹 또한 두 시간 거리인 버지니아 매클린에 살고 있었다. 1934년 황해도 해주에서 태어난 필리스는 로제타 여사가 쓴 어린 시절의 일기부터 선교 초기의 일기 4, 두 아이를 위한 육아일기 2권 그리고 여러 사진과 편지 등을 보관하고 있었다.
 
 
펜으로 잉크를 찍어 가며 정성스럽게 기록한 그녀의 일기를 보는 순간, 가슴이 벅차 올랐다. 조선까지 거의 두 달이 걸린 여정과 조선에서의 첫 3개월을 기록한 길이 31m, 너비 15.2cm의 ‘지는 해를 향하여(Toward the Setting Sun)’라는 제목의 두루마리 편지를 보며 감동하지 않을 수 없었다. 눈물이 절로 흘렀다. 조선으로 오는 도중 젊은 로제타가 쓴 글과 그림, 사진 등을 보며 그 자체로 한 권의 기행문이자 로제타의 성품을 보여주는 살아 있는 증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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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기 필기체로 적은 그녀의 일기는 해독하기 쉽지 않았다. 노안(老眼)으로 필자는 안구통도 겪어야 했다. 하지만 어렵게 글을 읽어 갈수록 그 기쁨은 더욱 컸다. 한국인 최초로 로제타의 일기를 읽는다는 사실 자체가 축복이었다.
 
 
로제타의 손녀 필리스를 처음 만난 자리에서 일기를 빌려 달라는 말을 감히 할 수 없었다. 몇 번을 방문하고 나서야 조심스럽게 일기를 빌려줄 수 있느냐고 여쭤보았다. 필리스와 그녀의 남편 에드워드 킹은 기꺼이 빌려주겠다고 했다.


 
노예해방운동에 적극적이었던 로제타의 아버지

▲로제타는 어릴 때부터 같이 살았던 흑인 조슈아 윌슨을 ‘조(Joe)’라 부르며 그를 잘 따랐다. 로제타의 아버지 로즈벨트 셔우드는 흑인 노예해방에도 적극 관여했다.

 

  한마디로 그녀는 거룩했다. 그녀는 신앙이 한 인간을 얼마만큼 거룩하게 만들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본보기이다. 그 신앙의 바탕에는 신실한 부모가 있었다. 로제타는 남북전쟁이 끝난 직후인 1865 9 19, 뉴욕주() 리버티에서 부유한 농장주의 딸로 태어났다. 아버지 로즈벨트 셔우드는 누구나 인정하는 언행일치의 표본이었다.
 
 
로제타의 아버지 로즈벨트는 1882, 음주(飮酒)절제운동 차원으로 교회가 지방선거에 참여하자 선거에 출마해 당선된 후 리버티에서 살롱을 추방하는 데 앞장섰다. 언더그라운드 레일로드에 열렬히 참여했을 정도로 노예해방운동에도 적극 관여했다.
 
 
언더그라운드 레일로드는 18세기 말부터 남북전쟁으로 노예가 완전히 해방되기 직전까지 운영되던 비밀지하조직이었다. 퀘이커들이 시작한 이 조직은 양심적인 감리교도와 장로교도가 합세하면서 19세기 초에 이르러 전국 조직으로 발전했다. 로즈벨트는 자신의 농장을 언더그라운드 레일로드의 거점으로 제공했다.
 
 
로제타가 태어나기 15년 전인 1850년부터 리버티의 농장에는 ‘조’라고 불리는, 조슈아 윌슨이라는 노예 출신 흑인이 함께 살고 있었다. 언더그라운드 레일로드를 통해 탈출, 캐나다로 가는 도중 리버티 농장에 들렀다가 로즈벨트와 마음이 맞아 함께 살았던 것이다.
 
 
로제타의 일기를 보면 그녀는 조와 특별히 친밀했다. 로제타가 조선에 있는 동안 문맹(文盲)이었던 조는 매번 ‘리버티 리지스터’라는 지역신문을 편지 대신 보냈다. 로제타는 자신의 방에 조의 사진을 걸어 두었다. 일기 속에 아버지보다 더 자주 ‘조’를 등장시킬 정도로 그의 안부를 걱정했다. 로제타는 이렇게 약자(弱者)에 대한 진정한 보살핌과 사랑을 보면서 자라났고, 이는 조선의 긍척(兢惕)한 여성들에 대한 섬김으로 이어졌다.
 

▲로제타 여사의 남편 윌리엄 제임스 홀. 그는 1894년 청일전쟁 직후 평양으로 돌아갔다가 그 지역에 퍼진 발진티푸스에 걸려 그해 11월 사망했다. 그의 나이 34세였다.

 

  어머니 피비 길더슬리브 또한 여느 19세기 여성들과는 달랐다. 그녀는 고등학교 교사로 근무하던 스무 살 딸이 의료선교사가 되기 위해 의과대학에 진학하겠다고 했을 때 적극 찬성했다. 한양에 와서 근무하던 로제타가 1년 후 자신을 뒤따라 들어온 의료선교사 윌리엄 제임스 홀과 결혼하겠다고 했을 때는 선교회와의 계약을 완수하라며 결혼을 반대했을 정도였다. 19세기의 일반적인 어머니였다면 딸이 이방인의 나라로 선교하러 가겠다고 했을 때 반대했을 것이며, 번듯한 의사 남편을 만나 결혼하겠다고 했을 때 적극 찬성했을 것이었다. 그만큼 그녀는 딸의 독립적이고 자립적인 삶을 지지하고 지원했으며, 사사로운 것보다 대의(大義)를 앞세울 것을 가르쳤다.
 
 
로제타는 열여섯 살 생일의 일기에서 “내가 오래 살게 되어 오십이나 육십의 심술궂은 노처녀가 되어도 이 기록으로 꽃다운 열여섯 시절을 생생하게 기억할 수 있을 것”이라며 몇 년 동안 쓰지 않던 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이 일기는 정확하게 열여섯 생일에 시작해 열일곱 생일에 끝이 날 정도로 어려서부터 뭔가를 스스로 계획하고 결정하면 실행하고야 마는 강한 의지를 가진 이였다.
 
 
열여섯 생일에 이미 결정했듯이 그녀는 전형적인 신()여성이 되고자 했다. 19세기 말 미국 여성들은 결혼하면 어머니로서, 전업주부로서 살아가는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하지만 대학 교육을 받고 전문직을 가진 이들은 결혼을 안 하는 경향이 있었는데 당시 미국 사회는 이들을 ‘신여성(New Woman)’이라 불렀다.
 
 
열아홉 살 처녀 교사 로제타는 어느 주일에 인도에서 일하던 여성 선교사의 강연을 들었다. 그녀는 심한 여성차별로 여성들이 남자 의사들의 진료를 받을 수 없는 인도의 현실을 말하며 의료선교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로제타는 즉각 의료선교사의 길을 가기로 결심했다.

 
 
남편 윌리엄과의 만남

▲로제타 가족과 박에스더 부부가 1895년 9월 뉴욕에서 기념촬영을 했다. 박에스더는 로제타의 도움으로 미국으로 건너가 의대를 졸업한 우리나라 최초의 양의사였다. 우리나라 최초의 의사는 여성이었다.

 

  로제타가 진학한 펜실베이니아 여자의과대학은 해외 의료선교사들의 메카였다. 그녀가 입학할 당시 해외선교가 봇물을 이루던 시기였다. 해외선교가 정점이었던 1915년에는 각 교파 여성해외선교회의 회원은 300만명이 넘었다. 당시 미국 인구는 150만명이었다. 교인들의 후원으로 급여를 받고 생활했던 여성 해외 선교사들은 외국에서 학교를 짓고, 해당 지역 여성들을 가르쳤으며, 아픈 육신을 치유하기 위해 병원도 지었다.
 
 
로제타가 펜실베이니아 여자의대에 입학하기 전해에, 인도인 첫 여의사와 시리아인 첫 여의사가 졸업했다. 로제타가 의대를 졸업할 때는 일본인 첫 여의사와 아메리칸 인디언 첫 여의사도 함께 졸업했다. 로제타는 20대 초반 이곳에서 분출하는 여성들의 에너지를 호흡하고 체화했다. 크리스천 여성 해외 의료선교사라는 말은 이 시절 적극적이고 진취적인 여성이 선택할 수 있는 가장 완벽한 조합이었다.
 
  1889
3월 대학을 졸업한 후 로제타는 뉴욕에서 인턴을 거쳐 빈민가의 무료진료소에서 봉사했다. 이 무렵 감리교 여성해외선교회에 지원서를 접수했다. 나중에 남편이 된 윌리엄 제임스 홀도 이때 만났다. 윌리엄은 로제타가 5년간의 계약을 맺고 조선으로 떠나는 것을 안타까워했으나 현실을 자랑스럽게 받아들였다.
 
 
로제타는 어려서부터 아메리칸 인디언들과 함께 사는 것을 꿈꾼 적이 있을 만큼 모험적인 삶을 동경했다. 메리 라이언의 연설문을 읽고 가슴이 뛰기도 했다. 미국 최초로 여성을 위한 대학인 마운트 홀요크 여자신학교를 세운 메리 라이언은 졸업하는 제자들에게 해외선교를 적극 권장했다.
 
 
“인류를 위해 봉사하길 원한다면 아무도 가려 하지 않는 곳으로 가서, 아무도 하려 하지 않는 일을 하라.
 
  1892
년의 일기에서 로제타는 이 말이 자신을 해외선교로 이끄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썼다. 이 말에 따라 하고 싶은 일을 접기도 했고 하기 싫은 일을 하기도 했으며, 자신은 현재 자기만의 틈새에서 아무도 하지 않는 일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로제타의 눈에 비친 조선 여성들의 비참한 현실

▲1890년 조선에 온 로제타가 처음 의료선교 활동을 했던 보구여관(保救女館).
 

로제타가 조선에서 일했던 보구여관(保救女館)은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병원이다. ‘보호하고 구하는 여성들의 집’이라는 뜻으로 명성황후가 이름을 하사했던 곳이다. 이 병원은 1887년 메타 하워드라는 여의사가 파견되면서 문을 열었다. 2년 후 그녀가 병으로 귀국한 후 로제타가 후임이 된 것이다. 이곳은 현재 서울 정동의 이화여고 부지로 미국 북감리교의 해외여성선교회의 한양 지부(支部)의 본거지였다. 병원과 이웃해서 기숙학교인 이화학당과 선교사들의 주거공간도 붙어 있었다.
 
 
로제타는 1890 10 14일 이곳에 도착해 바로 다음날부터 진료에 들어갔다. 일에 대한 열정이 얼마나 뜨거웠는지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로제타는 간호사도 약제사도 없이 환자의 맥박을 재고, 체온을 재고, 진찰을 하고, 약을 조제하고, 수술을 하는 일들을 도맡아 처리했다. 끝없이 몰려오는 환자들이 호소하는 내과, 외과, 산부인과, 소아과, 이비인후과, 피부과, 치과, 정신과 등의 온갖 질병과 씨름해야 했다. 로제타가 행한 수술은 자궁수술을 비롯해 종양 제거, 백내장 수술, 언청이 수술, 종기 수술 등이었다. 로제타는 첫 10개월 동안 2359건의 진료를 했다. 왕진이 82, 입원환자는 35명이었다. 처방전 발행건수는 6000여 건이었다.
 
 
로제타는 언어 문제로 인해 이화학당의 교사 로드와일러를 통역으로 썼다. 열흘 후, 로드와일러가 독감에 걸리는 바람에 점동(박에스더·최초의 한국인 의사)에게 통역을 하라고 했다. 이화학당의 소녀들 중에서 영어를 가장 잘하는 아이였다.
 
 
로제타는 점동과 ‘오와가’라는 일본 소녀를 훈련시키기 시작하면서 자신의 일기장에 이렇게 적었다.
 
 
“나에게만 도움이 되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아이들이 좀 더 폭넓은 삶을 살고 세상에 유익한 사람이 되게 하려 함이며, 그 아이들은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행복할 거라 믿는다.
 
 
오와가는 아버지의 한양 근무로 3년째 이화학당에 다니던 점동의 단짝이었다. 그녀는 적극적으로 점동과 함께 병원에서 일하겠다고 자원했는데 낮에 로제타가 왕진을 갈 때 통역으로 유용했다. 조선 소녀인 점동을 낮에 데리고 다닐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점동은 밤에 왕진을 갈 때만 통역으로 데리고 다녔다.
 
 
로제타가 본 조선 여성들의 현실은 ‘공포스러울 만큼’ 비참했다. 당시 여성들에게는 이름도 거의 없었다. 가난과 가부장제에 찌든 여성들, 열여섯이 되기 전에 얼굴도 한 번 보지 못한 남자와 결혼해야 하는 소녀들에게 로제타는 강한 연민을 느꼈다. 로제타는 이런 현실에서 에스더(점동)가 결혼을 하지 않고 자신과 함께 일하기를 바랐다. 그러나 결혼을 하지 않는 것은 조선의 관습상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결혼을 해서 아들을 낳아야만 인간으로서 책임을 다하는 것이 조선 여성들에게 주어진 사회적 역할이었다.
 
 
로제타는 2년 동안 세심하게 에스더의 신랑감을 모색했고, 에스더에 비해 많이 부족하지만 심성이 좋은 박유산을 신랑감으로 택해 결혼을 주선했다.


 
남편, 1894년 淸日전쟁 직후 평양에 퍼진 발진티푸스 걸려 사망

  로제타가 조선에 온 이듬해에 약혼자 윌리엄 제임스 홀이 조선으로 부임했다. 거기에는 사연이 있다. 원래 약혼자 윌리엄은 중국 선교사로 파견될 예정이었다. 윌리엄은 자신이 중국으로 갈 때 로제타를 데려가려 했다. 이런 사실을 마침 안식년으로 뉴욕에 가 있던 메리 스크랜턴이 알게 됐다. 그녀는 로제타를 뺏기지 않기 위해 선교회에 로비해서 윌리엄을 중국이 아닌 조선으로 파견하도록 했다.
 
 
두 사람은 1892 6월 서울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신혼여행에서 돌아오자마자 윌리엄은 감리교의 평양선교 책임자로 임명됐다. 이때부터 불과 2년남짓 지속된 두 사람의 결혼생활은 만남과 헤어짐이 교차하는 안타까운 시간이었다. 윌리엄은 평양에서, 로제타는 서울에서 조선 일을 돌봤다.
 
 
이 무렵 1893 3월에 로제타는 동대문 옆에 볼드윈 진료소를 개설했다. 한양에 온 직후부터 로제타는 낮에 돌아다니지 못하는 여성들을 위해 밤에도 진료소를 열었고, () 밖에도 진료소를 개설하고 싶어했다. 동대문 진료소는 성 밖의 가난한 여성들이 찾아오기에 용이했다. 이 병원은 후에 동대문 부인병원, 해방 후에는 이대부속병원이 됐다.
 
  1894
5 8, 로제타는 남편이 있는 평양으로 갔다. 이때 에스더 부부를 데리고 갔다. 당시 개항장을 제외하고는 외국인의 거주나 자산을 보유하는 것이 금지됐다. 처음으로 평양에 나타난 서양 여성과 그녀의 아기를 보기 위해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평양에 도착한 다음 날, 이들을 보러 몰려든 사람들이 1500여 명이었다고 한다.
 
 
당시 평양감사는 이들의 이주(移住)를 위협적으로 받아들였다. 외국인들을 직접 감금하는 일은 민감한 일이었기에 한국인 조력자들을 대신 수감하고 박해했다. 로제타를 도운 한국인 몇몇이 구속됐다. 34일 동안의 피 말리는 시간 끝에 이들은 모두 석방됐다.
 
 
로제타는 이때 구속되었던 이들 중의 한 사람인 오석형에게 시각장애인 딸이 있음을 알게 됐다. 조선에 와서 장애인들의 현실에 가슴 아파하며 그들을 위해 뭔가를 할 수 있기를 소망하고 있던 차였다. 로제타는 어린 시절 점자(點字)를 배운 기억을 되살려 한글 점자를 개발하고자 했다. 이때 전문지식의 필요성을 절감했다. 안타깝게도 청일(淸日)전쟁의 전운이 몰려왔고 한 달여 만에 이들은 모두 서울로 되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1894
10 1, 남편 윌리엄은 부랴부랴 평양으로 돌아갔다. 치열한 전투를 치른 직후의 평양은 전염병이 돌고 부상자들이 넘쳐났다. 불행히도 이들을 치료하던 도중 윌리엄은 발진티푸스에 감염돼 11 19일 서울로 돌아온 후 일주일도 못 버티고 11 24일 아내 곁을 영원히 떠나고 말았다. 그의 나이 서른넷이었다. 둘 사이에는 돌을 갓 지난 아들 셔우드가 있었고, 둘째가 그녀의 몸 속에 자라고 있었다. 로제타는 남편의 장례를 치른 후 고향으로 돌아가 둘째를 출산하기로 했다. 다시 돌아오겠다고 다짐하며 떠나는 그녀의 귀향길에 에스더 부부가 동행했다.
 
 
로제타는 1895 1 14일에 고향집에 도착했고, 나흘 후 딸 이디스를 낳았다. 이디스는 건강하고 총명했다. 아버지가 없는 두 아이들을 데리고 평양으로 돌아오는 데는 많은 고민이 따랐다


 
어린 딸 잃은 후 어린이병동 건립하고 醫師 양성 위해 분투

▲로제타의 ‘내 아이들(my girls)’. 왼쪽부터 진명여고 설립의 주역 여메례, 선교사역 동반자 노수잔, 최초의 양의(洋醫) 박에스더.

 

  로제타는 뉴욕에 있는 사이 남편 사망으로 위로금을 받았다. 그녀는 이 돈을 평양에 남편을 기념하는 기홀병원을 짓는데 쓰고자 마음 먹었다. 한글 점자를 개발하기 위한 체계적인 공부도 했다.
 
  2
년 뒤인 1897 11, 로제타는 아이들을 데리고 제물포항에 내렸다. 그 무렵 박에스더는 미국에서 의대에 다니고 있었다. 이듬해 5 1, 로제타는 부푼 꿈과 두 아이를 안고 다시 평양에 들어갔다. 그런데 짐도 풀기 전에 세 사람 모두 이질에 걸렸다. 로제타와 아들은 회복했으나 딸 이디스는 어린 나이에 엄마의 품을 떠나야 했다.
 
 
로제타는 아픔을 잊기 위해 미친 듯이 일에 매달렸다. 곧바로 진료소를 열었다. 개원 직전 평양감사의 부인을 치료해 준 덕에 감사는 광혜여원이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다. 기홀병원과 광혜여원은 후에 통합돼 평양연합기독병원이 됐다. 로제타는 이 병원에 이디스를 기념하는 어린이병동을 추가로 건립했고 이곳에서 맹아들을 위한 교육도 시작했다. 1897년 겨울 동안 서울에 머물며 초급 한글 교리서 등을 점자 교재로 만들어 평양에 다시 돌아왔다. 로제타는 오지(奧地)를 돌며 의료선교 여행도 다녔다.
 
 
로제타에게 위기가 찾아왔다. 아무리 일에 매달려도 딸을 잃은 아픔이 가라앉지 않았던 것이다. 딸 이디스가 떠나고 2년 후 친정 어머니마저 세상을 떠나자, 결국 로제타는 신경쇠약으로 쓰러지고 말았다. 고향으로 돌아가 요양을 마치고 돌아오는 여행의 동반객 중에는 감리교 첫 정식 간호사 선교사 마거릿 에드먼즈가 있었다. 이들은 여행 도중 한국어를 함께 공부하고 간호사 양성학교 건립도 계획했다.
 
  1903
년 말에 마거릿 에드먼즈는 보구여관 간호학교를 개교했다. 첫 학생이었던 이그레이스는 여종 출신으로 다리에 생긴 괴사병으로 주인한테 버림받고 보구여관에 왔던 소녀였다. 그녀는 우리나라 첫 정식 간호사가 됐고 후에 광혜여원에서 로제타로부터 산과(産科) 훈련을 받아 의생면허를 취득해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개업의가 됐다. 의생제도는 부족한 의사를 충족하기 위해 총독부가 만든 제도였다.

▲필자(가운데)는 로제타 여사의 손녀 필리스(오른쪽)를 여러 차례 방문한 후 마침내 로제타 여사의 소중한 자료를 받을 수 있었다. 필리스는 현재 건강이 악화돼 요양병원에 입원해 있고, 남편 에드워드 킹은 지난 3월 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1890년 로제타는 미국을 떠나 조선으로 오는 도중 이 나라 소녀들에게 의학교육을 시키겠다는 계획을 자신의 일기장에 적었다. 그녀는 점동과 오와가를 시작으로 이듬해 겨울부터 이화학당의 소녀 다섯 명을 데리고 생리학 수업을 시작했고, 곧 약리학 수업을 추가했다. 로제타는 이들을 ‘내 아이들(my girls)’이라 불렀다. 최초 양의사 박에스더는 이들 중 한 명이었다. 최초 간호사 이그레이스, 진명여고 설립에 크게 기여한 여메례, 선교사역 동반자 노수잔 등이 로제타의 ‘아이들’이었다.
 
  1903
년 조선으로 돌아온 이후에도 장학금을 마련하고 영특한 소녀들을 뽑아 중국, 일본에 유학을 보내 의사로 양성했지만 그 수는 미미했다. 로제타는 좀 더 많은 수의 의사를 양성하기 위해 1912년 광혜여원 안에 실습을 병행하며 의학강습반을 열었다. 그리고 이들을 의전(醫專)에 입학시키려 애를 썼으나 선교사들이 세운 세브란스의전에서조차 여학생 입학을 거부했다.
 
 
로제타는 이 일에 크게 실망하고 격분했다. 남자들의 이기심이 문제라고 생각했다. 다행히 총독부에서 운영하는 경성의전에 사정해 간신히 청강생으로 1년에 몇 명씩을 입학시킬 수 있었다. 1918년에 이들 중에서 세 명이 처음으로 조선에서 교육받고 의사 자격증을 얻었다. 하지만 경성의전은 1926년부터 여학생의 청강을 다시 불허했다.
 
 
로제타는 여자의전을 만들기로 하고 한국인 의사들을 설득했다. 그리하여 1928 60여 명의 조선인 유지들과 조선여자의학전문학교 창립을 발기했다. 이 학교가 발전을 거듭하여 현재 고려대학교 의과대학이 됐다.


 
아들의 헌신

▲말년의 로제타 여사. 1942년 결혼 50주년 기념일에 촬영한 사진이다. 그녀는 1951년 86세의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로제타의 아들 셔우드는 한국에서 로제타가 선교사 자녀들을 위해 설립한 평양외국인학교에서 중학교 과정을 마치고 미국으로 유학을 갔다. 그곳에서 의학을 공부하고 의사 아내와 함께 귀국했다. 셔우드는 태어날 때부터 친()이모보다 에스더와 더 가까웠다. 그녀가 겨우 서른넷의 나이에 결핵으로 허망하게 세상을 떠나는 것을 본 셔우드는 결핵 전문의가 되기로 결심했다. 그는 우리나라 최초의 결핵요양병원인 해주구세병원을 세웠고, 우리나라 최초로 크리스마스실을 발행했다. 셔우드 부부는 1940년 일제에 의해 추방될 때까지 해주에서 의료선교를 펼쳤다.
 
 
로제타는 조선 말 우리나라 여성들에게 주어진 하늘의 선물이었다. 그녀는 수많은 여성들의 생명을 구했고 조선인이 조선인들을 치료하는 날을 꿈꾸며 더 많은 의료인을 양성하기 위해 피나는 노력을 했다.
 
  1933
년 은퇴해 고향으로 돌아간 이후에도 조선의 선교활동을 홍보하고 조선의 문화를 긍정적으로 전파했다. 로제타는 처음 조선에 왔을 때 조선옷과 한옥에 대해 매우 아름답다고 평가했다. 온돌식 주거문화에 대해서도 매우 위생적이고 편리하다고 했다. 흰옷을 즐겨 입어 소독효과가 있어 결핵 발생률을 낮출 수 있었으며 삶아 빠는 세탁방식도 서양인이 배워야 한다고 역설했다.
 
 
로제타는 처음 조선으로 오는 동안 《불교》라는 책을 읽고 부처님을 훌륭한 사람이라고 적었다. 몇 달 후에 서대문 밖 승려에게 왕진을 갔을 만큼 다른 종교에 대해 관용적이었다. 열여섯 살 부활절에 감리교회, 장로교회의 예배와 가톨릭의 미사까지 참여했을 만큼 에큐메니컬(Ecumenical·종파를 초월해 연합하자는 기독교 운동) 신앙인이기도 하였다.
 
 
서대문 감옥에 갇혀 죽어 가던 여죄수까지 석방시키기 위해 갖은 노력을 하고 그녀를 입원시킨 뒤에는 자신의 식탁에 초대하려 했을 만큼 ‘진정한’ 사랑을 실천한 이였다. 언어문제로 고민하며 한국어 습득을 위한 공부시간과 진료시간 중 어느 것을 우선시해야 하는지 고민하다가 “여러 개의 인간의 언어를 말하는 것보다 사랑이 우선”이라는 고린도전서의 구절에 위안을 얻으며 치료를 더 우선하기도 했다. 그의 치료는 말이 필요 없었고 어느 선교사의 말보다 더 많은 이들을 교회로 이끌었다. 그녀는 복음을 전해 받지 않았어도 양심에 따라 바르게 산 사람들은 구원받을 수 있다는 열린 신앙관을 갖고 있었다.

 
 
로제타의 삶을 생각해야 하는 이유

  로제타는 ‘평양의 오마니’로 불렸다. 조선 여성을 해방시켰다 해서 노예를 해방시킨 링컨에 비유되기도 했다. 그녀가 빛을 들고 이 땅에 와서 어둠에 갇혀 있던 여성들에게 뿌린 사랑의 씨앗이 싹터 무성하게 자라났다.
 
 
로제타는 처음 조선으로 오기 위해 고향집을 떠나던 1890 8 21일의 자신의 일기장 첫 문장으로 필립비서 2 5절을 인용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지니셨던 마음을 여러분의 마음으로 간직하십시오.
 
 
그녀는 예수의 마음으로 살려는 높은 이상을 설정했고 지난(至難)한 노력으로 이를 실천했다. 예수의 마음으로 사는 일은 병들어 신음하는 이들을 아픔에서 구하는 일이었다. 또 어둠 속에 있는 여성들을 교육시켜 하나님 안에서 주체성을 회복하고 세상에 유용하게 쓰임 받는 존재가 되도록 돕는 일이었다.
 
 
우리는 그동안 그녀를 잊고 살았다. 아니 모른 채 살아왔다. 인도의 마더 테레사보다 50년을 앞서 조선에 그녀가 있었다. ‘마더 로제타’가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고 있었던 것이다.
 
 
한국 교회뿐만 아니라 오늘을 살고 있는 대한민국 국민은 그녀의 숭고한 삶과 이타적인 사랑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출처 | 월간조선 10월호    글 | 박정희 작가

 

■ 사진으로 보는 선교의 역사

1923년 평북 지역에서 고장 난 선교사 자동차를 소달구지가 끄는 모습

 

 

모펫과 레이놀즈(1867-1951)는 각각 북장로교와 남장로교를 대표하는 선교사였다. 이들이 조선에 온 것은 남북 전쟁 30년쯤 뒤었다

 

 

선교의 역사 - 1942년 일본에 의해 추방된 미국 남장로회 선교사들은 노스캐롤라이나 몬트라트 선교사 안식관에 모여 살았다. 조선 생활이 몸에 익은  이들은 때때로 한복을 입고 지냈다

 

 

 1951년 5,25 중에 포탄 껍데기로 만든 교회 종

 

 

가난과 질병으로 가득 찬 조선 땅에서 가족과 자기의 목숨까지 바쳐 조선인을 섬겼다

 

 

개신교 전래 초 조선의 모습

 

 

개신교 전래 초기 미국 선교사들의 사진

 

 

기독교에서 세운 나환자 시설 당시 2천명이 넘었다

 

긴급구호 NGO

 

 

나환자들이 모여 살던 민둥산의 집단 움막촌

 

 

서로 총을 겨눴던 모펫과 레이놀즈는 40여년 조선 교회를 위해 동지로 헌신했다

 

 

선교사들의 일지

 

 

평화통일 기도회 - 15.8.9 서울시청 앞 광장에 모인 개신교계 60만 신도

 

 

■기적의 신천지

 

■ 부활절

교황청

 

 

부활절 미사 - 14.4.20 바티칸 성 베드로 광장

 

 

 

 

 

 

 

 

 

 

나이지리라 라고스

 

 

독일

살펠트 폴커 씨의 정원 1만여 개의 부활절 달걀로 장식된 사과나무

 

 

 

 

 

 

 

몰타의 부활절

14.4.16. il mixja 길,이란 뜻의 거리 공연을 벌이는 배우들의 열정적인 공연

 

 

 

 

 

 

 

미국 백악관 2012

 

 

 

 

 

 

 

 

벨기에

초콜릿으로 만든 부활 달걀

 

 

오스트리아

 

크로아티아

자그레브 성당 인근 14.4.14. 풍경이 만화풍으로 그려진 달걀

 

 

 

 

 

파라과이

14.4.16 배우들이 성 금요일 (good friday 부활절 직전의 금요일) 사과먹는 아담을 바라보는 이브

 

 

 

 

 

한국 부활절 행사

14.4.20. 여의도 순복음교회

 

 

 

 

■ 유대교

2016.08.08 원죄 사상 없는 유대인들에게 가장 큰 죄는...

 

유대교에 원죄 사상이 없는 이유

창조 마지막 날에 하느님은 최초의 인간인 아담을 창조하셨다. ‘아담’은 히브리어로 인간이라는 뜻이다. 성경에서 하느님이 처음으로 ‘좋지 않은 것’으로 규정하신 것이 무엇일까? 바로 아담이 ‘혼자 있는 것’이었다.

 

“사람이 혼자 있는 것이 좋지 않으니 내가 그에게 알맞은 돕는 사람을 만들어 주겠다(창세기 2:18).” 그래서 아담의 몸에서 갈비뼈 하나를 떼어내시어 그것으로 이브를 만드신다.

 

성경에 나오는 613개 율법 중 첫 계명은 이야기 무엇일까? 바로 이들에게 말씀하신 것이다. “자식을 많이 낳고 번성해 땅에 가득하고 땅을 정복하라(창세기 1:28).

 

하느님은 아담과 이브에게 단 한 가지만을 금하시고 그들이 필요한 모든 것을 주셨다. 곧 그들에게 선악과만은 따 먹지 말라고 명하신 것이다.

 

그런데 약삭빠르고 말이 많은 뱀이 선악과를 따 먹으면 하느님처럼 지혜롭게 된다며 이브를 꼬드긴다. “이는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열려서 너희가 선과 악을 아시는 하나님처럼 될 것을 하느님께서 아시기 때문이다(창세기 3:5).

 

잠시 망설인 뒤 이브는 선악과를 따 먹고 아담도 설득해 선악과를 따 먹게 만든다. 이에 하느님은 노하신다. 하느님이 두 사람에게 당부하신 것은 단 한 가지밖에 없었는데도 그들은 하느님 말씀을 거역했던 것이다.

 

하느님은 그들에게 엄한 징벌을 내리신다. 그들은 에덴동산에서 쫓겨나고, 결국에는 죽는 운명에 처하며, 더 이상 하느님으로부터 필요한 것을 받지 못하게 된다.

 

이제 아담은 이마에 땀을 흘리며 생계를 꾸려가야 하고, 이브는 남편의 그늘에서 살며 출산의 고통을 느껴야 한다.

 

전통적인 유대 주석들은 이브의 죄를 비난하지만 유대 교육자인 슈로모 바딘(Shlomo Bardin)은 이브가 하느님의 말씀에 복종하지 않은 이유를 멋진 비유를 들어 설명했다.

 

“아버지가 대기업 회장인 젊은 남성과 결혼한 젊은 여성을 떠올려보자. 결혼 후 남성의 아버지는 그를 부회장 자리에 앉히고 그에게 거액의 연봉을 준다.

 

그런데 그의 아버지는 일을 해본 경험이 없는 그에게 어떠한 책임도 지우지 않는다. 남성은 매주 많은 돈을 받아가지만 할 일이 없는 것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아내는 자신이 남자가 아니라 소년과 결혼했고, 자신의 남편이 시아버지의 회사를 떠나지 않는 한 결코 남자로 성장하지 못하리란 것을 깨닫게 된다. 그래서 그녀는 남편으로 하여금 안전한 아버지의 회사를 그만두고 다른 도시로 가서 새로운 일자리를 구하게 만든다.” 바딘은 “이브가 선악과를 따 먹은 것도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라고 결론짓는다.

 

기독교 신학은 아담과 이브의 이러한 행동을 모든 인류에게 영구적인 오점을 남긴 원죄로 규명했다. 이른바 ‘원죄 사상’이다.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모두 죄인이라는 사상이다.

 

하지만 유대교는 그들의 불복종을 그토록 심각하게 받아들인 적이 없다. 그들의 불복종은 하느님의 말씀을 거역했기에 명백한 죄다. 하지만 그들의 이러한 죄 때문에 모든 아기가 저주받고 태어난다는 ‘원죄 사상’ 개념은 유대인 생각과는 너무나 동떨어진 것이다.

 

엄한 징벌에도 불구하고 아담은 900살 넘게 살았고, 아담과 이브의 자손들은 현재 세계 곳곳에서 살고 있다. 인류 전체가 이 한 쌍의 남녀에게서 비롯되었다는 창세기의 주장은 인종과 종교를 막론하고 모든 인간이 서로 형제자매라는 성경적 관점의 토대이다. (출처; 유대인의 상속, 랍비 조셉 텔루슈킨, 북스넛)

 

유대인에게 자녀교육이란?

이렇듯 유대교에는 아담과 이브의 불순종 죄는 인정하지만, 이 죄가 후손 대대로 이어져 내려온다는 원죄사상은 없다. 그들은 과거에 얽매이지 않는다는 말이다.

 

유대인에게 죄란 과거에 구속되지 않고 ‘현재’에 구속된다. 현실에 충실하지 않는 삶이 유대교에서는 죄다. 아담과 이브가 하느님에게 불순종한 것이 죄가 아니고, 오늘을 사는 내가 하느님에게 불순종하는 것이 죄다.

 

그렇다면 오늘을 사는 우리가 범하는 불순종은 구체적으로 어떤 모습인가?

 

인간이 하느님의 형상대로 지어졌다는 의미는 하느님이 인간에게 당신과 닮은 영혼을 주셨다는 뜻이다. 그러니 당연히 하느님이 인간에게 거는 기대가 클 수밖에 없다.

 

그래서 유대교에서는 인간이 하느님의 기대에 부응하지 않고, 하느님의 자녀로서 합당한 삶을 살지 않는 것을 죄로 여긴다. 그래서 자기에게 주어진 삶과 가능성에 최선을 다하지 않는 ‘게으름’이 죄가 된다.

 

그리고 하느님이 주신 달란트(talent:타고난 재능)를 찾아내 힘껏 그걸 갈고 닦아 키워나가 능력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않아 ‘무능력’한 상태에서 벗어나지 않는 게 죄가 된다.

 

‘자기가 잘할 수 있는 일, 좋아하는 일, 보람을 느낄 수 있는 일’이 곧 자기의 달란트다. 이걸 찾아내어 게으름 부리지 않고 꾸준히 갈고 닦아 능력 있는 사람이 되는 게 죄를 짓지 않는 길이자 하느님의 기대에 부응하는 일이다.

 

유대인에게 있어 신앙이란 이렇게 자신 속에 내재된 하느님의 형상과 자신의 달란트를 찾아 자신을 발전시켜 나가려는 노력이다. 죄인으로 태어나는 게 아니라 죄의 여부는 현재 우리가 살아 나가는 삶의 ‘선택’의 문제라는 것이 기독교와 유대교의 결정적 차이이다.

 

유대교의 죄란 자기의 가능성에 최선을 다하지 않고 삶에 편안히 안주하는 것이 죄다. 유대인 자녀교육의 핵심이 바로 이러한 자세와 생각을 자녀에게 스스로 본을 보여 가르치는 것이다.

 

유대인들은 하느님이 자녀를 13살 성인식 때까지 부모에게 맡겼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들은 자녀를 한 사람의 '온전한 유대인'으로 만들어 성인식 때 하느님께 되돌려드려야 한다고 믿는다.

 

온전한 유대인이란 ‘유대교를 믿는 성숙한 독립적 인격체’를 뜻한다. 그래서 그들은 13세 성인식 이전까지 혼신의 힘을 다해 자녀를 ‘독립적이고 자립적인 인격체’로 만들어야 한다고 믿는다. 그것도 ‘나’ 보다는 ‘우리’ 곧 공동체 정신을 우선하는, 이를 위해 무엇보다 공감능력과 배려와 제대로 된 인성을 지닌 인격체로 키워내야 하는 것이다.

 

유대인은 자녀의 근본 소유권은 하느님에게 있기 때문에 하느님이 맡긴 아이를 하느님의 뜻에 따라 키우는 것이 부모의 의무라고 여긴다. 그러니 유대인들에게 있어 교육은 그냥 교육이 아니다. 교육은 하느님을 섬기는 종교적 행위의 다른 이름이다. 자녀교육이 곧 그들의 기도이자 신앙생활인 셈이다.

 | 홍익희 세종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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