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 이야기 12/ 기독교1/ 성서 예수 이야기 - 조선기독교의 뿌리 예수셩교젼셔(광셔십삼년 셩경 문광셔원 활판) - 이스라엘의 예언자 ‘아모스’...정의는 어디서 출발했나?
종교 이야기 12/ 기독교1/
■성서 이야기
피렌체에서 온 걸작, 천국의 문
지난 2014.08.18일 5일간의 바쁜 한국 일정을 마치고 프란치스코 교황이 떠났다. 그는 돌아갔지만 그가 남기고 간 걸작이 마치 그의 체취처럼 남아 있다.
르네상스 시대의 이탈리아 피렌체 성당을 상징하는 대표작 ‘천국의 문’이 그 것.
조각가 로렌초 기베르티(Lorenzo Ghiberti)가 27년 간 만든 ‘천국의 문’은 이탈리아 피렌체의 산 조반니 광장에 있는 세례당 3개의 문 중 동쪽에 위치한 문이다. 초기에는 ‘믿음의 문’으로 불렀지만, 문의 아름다움에 반한 미켈란젤로(Michelangelo)가 “천국의 문으로서도 손색이 없다”고 한 뒤 ‘천국의 문’으로 불리고 있다.
실제 기자가 전시가 시작된 고궁박물관(경복궁)을 찾아가 보니 우선 거대한 문의 규모에 압도되었다. 지하 1층에 전시된 너비 4.6m, 높이 6m의 무려 6t의 무게가 나가는 ‘천국의 문’은 그 크기와 함께 500년 전 작품이라고는 믿기 어려울 만큼 정교하고 아름다웠다.
‘천국의 문’은 두 개의 대문을 10개의 획으로 나눈 청동 부조 장식 철제문이다. 각 획 안엔 아담과 이브, 카인과 아벨, 노아의 방주, 모세의 기적 등 구약성서에 나오는 이야기를 보여주고 있다. 또, 원근법을 이용한 회화적 구성과 화려한 장식이 압권이다.
이 화려한 르네상스 예술품의 탄생 과정엔 유명한 일화가 있다. 1402년 이탈리아 피렌체의 산 조반니 광장 세례당 담당자들은 세례당의 문을 새롭게 교체하고자 전국에 공모전을 냈다. 수많은 예술가들이 응모했지만 마지막으로 로렌초 기베르티와, 브루넬레스키(F. Brunellesch)가 선발되었다. 심사위원들은 용호상박의 두 조각가의 실력을 가늠할 수 없었고, 결국 각자 2년 동안 문에 넣을 부조를 제작한 결과, 기베르티의 작품이 선정되어 브루넬레스키는 탈락의 쓴맛을 본다. 그 후 기베르티는 ‘천국의 문’을 완성했고, 훗날 브루넬레스키는 피렌체의 명물 ‘두오모 성당’을 건축하여 현재까지 ‘건축의 아버지’로 불리고 있다.
500년이 넘는 오랜 세월동안 ‘천국의 문’에도 위기가 있었다. 세계 2차 대전이 발발했을 땐 다른 곳으로 숨겨져 피해를 모면했지만, 1966년 피렌체 대홍수는 피해 갈 수 없었다. 당시 ‘천국의 문’의 6개의 청동 판이 홍수에 휩쓸려 부식이 진행되었다. 이에 이탈리아 문화부는 27년간 복원과정을 거쳐 2개의 ‘천국의 문’을 추가로 제작했다. 그 중 한 개가 이번에 한국으로 온 작품이다. ‘천국의 문’ 전시총감독 유근상(이탈리아 국립 문화재복원대학) 총장은 “중세 시대의 문화암흑기로부터 새로운 르네상스 시대로의 전환을 알린 혁명적인 작품이 바로 천국의 문”이라며 “새로운 세상으로 가는 상징적 의미를 담고 있다”고 했다. ‘
천국의 문’을 비롯해 도나텔로(Donatello)와 귀도 레니(Guido Reni)의 작품 등 르네상스 시대의 조각, 성물을 비롯한 총 90여 점의 예술 작품은 경복궁 내 고궁박물관에서 오는 11월 14일 까지 전시된다.
2017.02.27 출애굽 당시 이스라엘 자손 수는 얼마나 되었을까?
출애굽 당시 이스라엘 자손 수는 2백 만 명!
성경을 읽노라면 궁금한 대목이 나온다. 그 가운데 하나. 이스라엘 자손이 기원전 1445년경 이집트를 탈출할 때 그 수가 얼마나 되었을까? 이에 관해 성경은 “20살이 넘어 군대에 입대할 수 있는 남자들은 레위 지파를 제외하고 모두 603,550명이었다”는 내용 하나만 보여준다.(민수기1:46) 당시 공식적인 집계는 ‘20살이 넘어 군대에 입대할 수 있는 성인 남자들만’ 포함시켰다.
▲영화 <엑소더스>의 한 장면 말 위의 인물은 모세
하나님은 일찍이 아브라함에게 ‘자손이 별처럼 많아지게 하고, 자손이 다른 나라에서 430년 동안 종살이를 하게 되고, 가나안 땅을 주겠다’고 약속하셨다. 아브라함의 손자 야곱이 가족 70명을 이끌고 이집트 총리가 된 아들 요셉을 찾아감으로써 이스라엘 자손의 ‘430년 종살이’는 시작되었다. 430년 후 하나님은 모세를 지도자로 세워 이스라엘 자손이 이집트를 탈출해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을 점령하도록 인도하셨다. 그러면 이집트 탈출 당시 이스라엘 자손 수는 과연‘별처럼’ 많았을까? 이를 추계해 보았다. 과문 탓이겠지만 이에 관한 글은 읽어본 적이 없다.
성경에는 ‘20살 넘은 남자들은 603,550명’이라는 내용 하나만 있어
추계와 관련해 성경에는 두 가지 내용밖에 없다. 하나는 요셉을 따라 이집트로 간 ‘야곱의 식구는 70명’,(출애굽기 1:5) 다른 하나는 430년간 종살이를 하다가 이집트를 빠져나온 후 이듬해에 조사한 이스라엘 자손 수는 ‘20살이 넘어 군대에 입대할 수 있는 남자들은 레위 지파를 제외하고 모두 603,550명.’(민수기 1:45-46)
추계 위해 몇 가지 가정이 필요
추계 방법을 <부록>으로 첨부했다. 여기서는 이 추계에서 적용된 몇 가지 가정을 간략히 언급한다.
(1) 성경 내용에 일관성이 없지만 이집트로 간 야곱의 가족 수는 70명으로 본다.
(2) 레위 지파를 제외해도 이스라엘 자손은 12지파였다.(민수기 1:26-43)
(3) 당시 남녀 성비(性比)는 같고, 20세가 넘은 남자는 결혼했고, (야곱은 아내가 4명이었지만) 야곱 아들들은 일부일처제(一夫一妻制)를 따랐다고 가정한다.
(4) 20세 이상의 딸과 손녀들은 결혼하여 야곱과 동행하지 않았다고 가정한다.
(5) 당시의 인구구조는 1970년 한국 농촌과 같다고 가정한다. 1970년 한국 농촌의 인구구조는1∼19세가 38%, 20세 이상이 62%였다.
(6) 인구증가율 공식은 다음과 같다: A(1+r)430=B (A: 이집트로 들어갈 때 가족의 수, r: 연평균 인구 증가율, 430: 이집트 체류 햇수, B: 430년 후 인구 수).
출애굽 당시 이스라엘 자손 수는 2백만 명을 넘었고, 연평균 인구증가율은 2.3%
성경에 나타난 두 가지 내용과 몇 가지 가정을 바탕으로 추계한 결과, 출애굽 당시 이스라엘 자손 수는 약 2,061,000명에 이르렀고, 430년 동안 연평균 인구 증가율은 2.3%였다.
<부록>: 추계 방법
출애굽 당시 이스라엘 자손 수는 앞에서 언급한 두 가지 내용과 몇 가지 가정을 바탕으로 추산해야 한다.
1. 야곱이 130세에 가족을 데리고 이집트로 갔을 때 며느리를 뺀 가족 수는?
성경에 따르면, “야곱과 함께 이집트로 들어간 사람들은, 며느리를 뺀 그 직계 자손이 모두 66명이다. 이집트에서 요셉이 낳은 아들 둘까지 합하면, 야곱의 식구는 모두 70명이다.”(창46:26-27,출1:5) 당시에 인구에 관한 공식적인 집계는 성인 남자들의 숫자만 포함시켰다.
그런데 이 수치에 문제가 있다. 이집트에서 요셉은 2명의 아들을 낳았으므로 요셉을 포함해 야곱의 직계 자손들은 69명이 되기 때문이다. 또 <칠십인역>과 <사도행전>은 ‘70명’ 아닌 ‘75명’으로 쓰고 있기 때문이다.(행7:14) 그렇지만 ‘야곱과 함께 이집트로 들어간, 며느리를 뺀 직계 자손들의 수는 (성경 내용대로) 70명’으로 본다.
2. 출애굽 당시 ‘스무 살이 넘어 군대에 입대할 수 있는 이스라엘 남자들 수’는?
출애굽 다음 해 모세와 아론은 각 지파별로 인구조사를 실시했다. ‘20살이 넘어 군대에 입대할 수 있는 남자들은(민1:3) 레위 지파를 제외하고 모두 603,550명’이었다.(민1:46) 인구조사에서 레위 지파는 등록되지 않았기 때문에(민1:47) ‘20살이 넘은 레위 지파 남자들의 수’는 별도로 추산해야 한다.
20살이 넘은 레위 지파 남자들의 수는, 레위 지파가 제외된 12지파(민수기 1:26-43)의 ‘20살이 넘은 남자들 603,550명의 평균치 50,296명과 같다’고 가정한다. 따라서 출애굽 당시 ‘이스라엘 자손들 중 20살이 넘은 남자들의 수는 모두 653,846명이 된다.’
3. 출애굽 다음 해 실시된 인구조사를 바탕으로 추산된 이스라엘 자손 수는?
이를 추산하기 위해서는 몇 가지 가정이 필요하다.
① 당시 남녀 성비(性比)는 같고, 20세가 넘은 남자는 결혼했고, (야곱은 아내가 4명이었지만) 야곱 아들들은 일부일처제(一夫一妻制)를 따랐다고 가정한다.
② 20세 이상의 딸과 손녀들은 결혼하여 야곱과 동행하지 않았다고 본다.
③ 당시의 인구구조를 알아야 한다. 인구구조는 1970년 한국 농촌의 경우와 같다고 가정한다. 1970년 한국 농촌의 인구구조는 1∼19세가 38%, 20세 이상이 62%다.
남녀 성비가 같고, 20세 이상 남자는 결혼했다고 가정하면, 20세가 넘은 남녀의 수는 남자653,846명의 두 배인 1,307,692명이다. 이 수에다 인구 구성비를 적용하면, 1∼19세 남녀의 수는 801,489명이다. 따라서 출애굽 이듬해에 실시된 인구조사에서 이스라엘 자손들의 수는 모두2,109,181명으로 추산된다.
4. 출애굽 당시 이스라엘 자손 수는?
인구조사는 출애굽 다음 해에 실시되었으므로 출애굽 해에 태어난 자손들은 제외되어야 한다.이를 위해 연평균 인구 증가율을 알아야 한다.
① 연평균 인구 증가율 공식은 다음과 같다: A(1+r)430=B (A: 이집트로 들어갈 때 가족 수, r: 연평균 인구 증가율, 430: 이집트 체류 햇수, B: 430년 후 인구 수).
② 위 공식에서 ‘이집트로 들어갈 때 가족 수’를 알아야 한다. 앞에서, 이집트로 들어간 야곱의 직계 가족 수는 70명으로 보았다. 그런데 이 수에는 ‘며느리들’이 제외되어 있다. 며느리들이 빠지면 이집트에서 출산은 이루어질 수 없다. 그래서 며느리가 포함된 가족 수를 추산해야 한다.
앞에서 가정한 내용을 다시 언급한다. 인구 구성비는 1∼19세가 38%, 20세 이상이 62%다. 20세 이상의 딸과 손녀들은 결혼하여 야곱과 동행하지 않았다고 본다. 20세 이상의 남자들은 결혼했고, 남녀 성비는 같다고 본다.
먼저 다음 수식을 푼다: x+2y=70 (x: 며느리를 뺀 20세 이상 남자의 수, 2y: 1∼19세 남녀의 수, x=
(62%/38%)y, 70: 이집트로 갈 때 며느리를 뺀 직계 가족의 수)
위 수식을 풀면, 성비가 같다는 가정에서 20세 이상 남녀 가족의 수는 62명, 1∼19세 남녀의 자손은 38명, 합하면 100명이다. 다시 말하면, 이집트로 간 야곱의 가족 수는 며느리까지 포함해 모두 100명이다.
③ 출애굽 다음해에 인구조사를 했으므로 인구 증가율 공식에서 햇수는 431년이 된다. 연평균 인구 증가율 공식 100(1+r)431=2,109,181 을 풀면, 연평균 인구 증가율은 2.3%가 된다.
④ 출애굽 당시 인구 수는 1년간의 인구 증가를 빼면 된다. 이 결과 출애굽 당시 이스라엘 자손들 수는 약 2,061,000명이다.
추산에 대한 자평(自評)
1. 야곱이 살았던 때 ‘남녀 성비는 같고, 20세 넘은 남자는 결혼했고, 일부일처제였고, 인구구성비는 1970년의 한국 농촌과 같았다’는 가정은 현실적일까?
현실적이라고 보기 어렵다. 특히 ‘20세 넘은 남자는 결혼했고, 일부일처제를 따랐다’는 가정은 비현실적이다. 그러나 추산을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가정이 필요하다.
2. 이집트에서의 연평균 인구 증가율 2.3%는 적절할까?
google 인터넷 자료에 따르면, 세계 인구는 기원전 1750년경부터 증가하기 시작했다. 출애굽 연도는 기원전 1445년경이므로, 출애굽 당시 세계는 이미 인구 증가기에 들어서 있었다. 또 출애굽기는 이스라엘 자손의 번성을 이렇게 썼다. “이스라엘 자손은 자녀를 많이 낳고 번성하여 그 수가 불어나고 세력도 커졌으며, 마침내 그 땅에 가득 퍼졌더라.”(출1:7) 이로 인해 이집트 왕은 겁을 먹고 이스라엘 자손을 종으로 부렸다.
이런 점들과 당시의 열악한 생활환경을 감안할 때 (독자의 판단에 맡기지만) 연평균 인구 증가율 2.3%는 크게 낮거나 크게 높다고 생각되지는 않는다.
3. 어떻든 430년간 종살이 후 이집트를 탈출해 가나안 땅으로 가기 위해 광야를 행군한 이스라엘 자손들의 수는 아무리 적게 잡아도 2백만 명은 넘었을 것 같다. 그래서 ‘자손이 별처럼 많아지게 해주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은 이루어졌다고 봐도 될 것이다.
4. 과문(寡聞)일지 모르나 이 같은 추계는 내가 처음이 아닐까 생각된다. 다른 추계가 계속 시도되기를 기대한다.
글 | 박동운 단국대 경제학과 명예 교수
■예수와 성경 이야기
■예수는 실존 인물이었을까요?
예수 그리스도는 실존 인물이었을까요? 그리고 기독교는 해리 포터와 같은 가상의 인물을 바탕으로 태어난 허구에 불과할까요?
2천년 가까이 대부분 사람들은 예수를 예외적인 성격과 리더쉽, 그리고 초자연적 능력을 가진 실존 인물로 생각해왔습니다. 하지만 현재 일부 사람들은 예수가 존재한 적이 없다고도 합니다.
예수의 실존 여부와 관련된 논쟁인 예수 신화론은 예수가 유대 언덕을 걸어 지나간 후 17세기에 시작되었습니다.
American Atheists의 회장인 Ellen Johnson은 이 예수 신화론을 CNN TV 래리 킹 라이브(Larry King Live)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했습니다.
예수가 실존했다는 현실적인 증거는 단 한가지도 없습니다. 예수는 신화적 예수 그리스도와 동일한 기원과 사망에 대한 이야기를 가진 다른 신들을 통합한 존재입니다.
이에 놀란 진행자는 이렇게 묻습니다. “그렇다면 당신은 예수 그리스도의 존재를 믿지 않나요?”
Johnson은 “예수 그리스도가 존재했음을 알리는 현실적인 증거는 단 한가지도 없습니다.”라고 답했습니다.
그러자 King은 광고를 요청했습니다. 전세계의 시청자들이 궁금증을 품게 되었습니다.
옥스포드의 문학자인 C. S. Lewis 역시 무신론자였던 어린 시절에 예수는 신화이며, 모든 종교는 단순히 인간이 지어낸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수 년 후 Lewis는 Oxford 기숙사 방의 난로 옆에서 “알고 있는 가장 강력한 무신론자”인 친구와 함께 앉아 있었습니다. 갑자기 친구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복음의 사실성에 대한 증거는 놀랄 정도로 신빙성이 높고, 실제로 있었던 일 같다.”
Lewis는 크게 놀랐습니다. 예수에 대한 실제 증거가 있었다는 친구의 말은 Lewis에게 직접 사실을 알아보라고 재촉하는 것과 같았습니다. 그는 예수의 진실에 대한 조사를 순전한 기독교(Mere Christianity)라는 저서에 남겼습니다.
그렇다면 Lewis의 친구가 예수 그리스도에 관해 발견한 증거는 무엇일까요?
고대 역사에 따른 사실
먼저 좀 더 기본적인 질문으로 시작해보겠습니다. 허구의 인물과 실제 인물을 어떻게 구분해야 할까요? 이를테면 역사학자들에게 알렉산더 대왕이 실존 인물이라고 납득시킬 수 있는 증거는 무엇이 있을까요?그리고 그러한 증거가 예수에게도 존재할까요?
알렉산더와 예수 모두 카리스마가 뛰어난 리더들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두 사람 모두 30대 초에 사망해서 대외적 활동은 길지 않습니다. 예수는 사랑으로 이기는 평화로운 성격으로 알려졌으며, 알렉산더는 반대로 무력으로 통치한 전쟁의 화신으로 알려졌습니다.
B.C.336년에 알렉산더 대왕은 마케도니아의 왕이 되었습니다. 군사적 천재로 잘 생긴 외모와 거만한 성격의 이 리더는 그리스와 페르시아의 수많은 마을과 도시, 왕국을 휩쓸어 모든 것을 손아귀에 쥐게 되었습니다. 더 이상 정복할 땅이 없다고 판단되자 눈물을 흘렸다고도 합니다.
알렉산더에 대한 이야기는 그가 사망한 시점으로부터 300년도 더 전에 쓰여진 고대 이야기를 바탕으로 합니다.[4] 그리고 알렉산더라는 사람을 눈으로 본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하지만 역사학자들은 알렉산더를 실존 인물이라고 생각하며 알렉산더가 역사에 미친 영향과 고고학을 통해 그의 삶에 대한 이야기가 확증되었다는 것이 그 주요 이유입니다.
마찬가지로 예수가 실제 인물이었다면 다음과 같은 분야에서 존재의 증거를 찾아야 할 것입니다:
1. 고고학
2. 초기 비기독교적 설명
3. 초기 기독교적 설명
4. 초기 신약 필사본
5. 역사적 영향
□고고학
시간은 예수와 관련된 많은 미스터리를 묻어버렸으며 이 미스터리들은 최근에서야 밝혀지기 시작했습니다.
가장 중요한 발견은 18~20세기 중에 발굴된 고대 필사본들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필사본에 대해서는 나중에 살펴보겠습니다.
또한 고고학자들은 신약에 등장한 예수의 이야기와 일치하는 수많은 장소와 유물들도 발견했습니다. Malcolm Muggeridge는 영국 언론인으로 BBC에서 TV 관련 업무차 이스라엘에 간 동안 그러한 증거를 보기 전까지 예수를 허구로 생각했습니다.
신약의 예수 관련 이야기에 등장한 장소들 관련 보도를 한 후 Muggeridge는 이렇게 썼습니다. “예수의 탄생, 사역, 십자가에 못박힘 등에 대한 확신이 나를 사로잡았습니다. 저는 예수라는 한 사람이 정말로 존재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하지만 20세기 전까지 로마의 총독 본디오 빌라도와 유대의 대제사장인 요셉 가야바에 대한 확실한 증거는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두 사람 모두 재판에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히게 만든 핵심 인물입니다. 회의론자들은 이런 불충분한 증거야말로 예수 신화론을 뒷받침하는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하지만 1961년에 고고학자들은 “본디오 빌라도, 유대의 총독”이라는 이름이 새겨진 석회석 벽돌을 발견했습니다. 그리고 1990년에는 가야바의 이름이 새겨진 납골 상자도 발견되었습니다. 이는 “어떠한 의심도 할 수 없는” 진품으로 확인되었습니다.
또한 2009년까지는 예수의 고향인 나사렛이 그의 생전에 존재했다는 확실한 증거도 없었습니다. Rene Salm과 같은 회의론자들은 1세기 당시 나사렛이 존재했다는 증거가 없음을 기독교의 치명적인 오류라고 생각했습니다. 2006년 Salm은 저서 Myth of Nazareth에서 이렇게 적었습니다. “자유사상가들이여, 축복하라… 우리가 알고 있는 기독교가 드디어 종말을 고할 수도 있다!”
하지만 2009년 12월 21일, 고고학자들은 1세기의 나사렛에서 사용된 점토 조각을 발견했으며, 이 작은 마을이 그리스도의 시대에 존재했음을 확인했다고 발표했습니다(참고: “예수는 정말로 나사렛 출신인가?”).
이러한 고고학적 발견이 예수가 그 곳에서 살았음을 증명하지는 못하지만 그의 생애의 복음서들을 뒷받침해 줍니다. 역사학자들은 늘어나는 고고학적 증거들이 예수에 대한 이야기에 반하지 않으며 오히려 이를 뒷받침해준다고 합니다.
□초기 비기독교적 설명
Ellen Johnson과 같은 회의론자들은 예수와 관련하여 “세속사의 부재”야말로 예수가 존재하지 않았다는 증거라고 합니다.
하지만 그 시대에 존재했던 인물과 관련된 증거는 그 누구에 대해서도 거의 찾아볼 수 없습니다. 대부분 고대 문서들은 전쟁, 화재, 약탈 또는 단순 풍화 등으로 인해 1세기 중에 파괴되었습니다.
로마제국과 관련된 비기독교 문서 대부분을 정리한 E. M. Blaiklock에 따르면 “특히 그리스도 생전과 관련된 것은 거의 찾아볼 수 없다”고 하며, 율리어스 시저와 같은 실제 지도자 관련 자료도 없다고 합니다.
하지만 황제의 존재를 의심하는 역사학자는 아무도 없습니다.Darrel Bock에 따르면 예수는 위대한 정치 또는 군사적 지도자도 아니었으므로 “우리가 가진 자료에 예수가 등장한다는 사실 자체가 놀라우면서 중요한 점”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Bock이 말하는 자료는 무엇일까요? 예수를 다룬 초기 역사학자들 중 기독교적인 연관성이 없었던 이는 누구일까요? 먼저 예수의 반대 세력들을 살펴보겠습니다.
유대인 역사학자: 예수의 존재를 부정함으로써 이득이 가장 큰 이들이 유대인입니다. 하지만 유대인들이야말로 예수를 실존 인물로 간주해왔습니다. “일부 유대인들의 자료를 보면 예수를 자신들이 반대한 실존 인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는 “그리스도라 하는 예수의 형제”인 야고보에 대해 다룬 적이 있는 유대인 사학자 Flavius Josephus의 말입니다.[12] 예수가 실존 인물이 아니라면 Josephus는 왜 그런 말을 했을까요?
다소 논쟁거리가 될 만한 다른 말을 들어보면 Josephus는 예수에 대해 보다 광범위한 의견을 내놓고 있습니다.
이 당시 예수라는 이름의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의 행동은 선했으며, 도덕적인 이로 알려졌습니다. 유대인 중, 그리고 다른 나라에서도 많은 이들이 그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빌라도는 그에게 십자가에 달리는 형을 선고하여 죽였습니다. 그리고 예수의 제자들은 그에 대한 제자의 신분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이 제자들에 따르면 예수는 십자가에 매달린 후 3일 만에 자신들 앞에 나타났고 다시 살아났다고 합니다. 이에 사람들은 예수를 메시아라고 생각했습니다.”
논란거리가 된 발언도 있지만 Josephus의 예수의 존재에 대한 이러한 확인은 많은 학자들이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학자 Shlomo Pines은 이러한 글을 남겼습니다. “기독교를 가장 심하게 반대하는 이들조차 예수가 실존 인물이었다는 점에 의구심을 표한 적이 없습니다.”
세계 역사학자인 Will Durant에 따르면 1세기를 살았던 유대인이나 비유대인 중에서 예수의 존재를 부인한 이는 없다고 합니다.
로마 역사학자 초기 로마 역사학자들은 황제에게 중요한 사건과 인물들에 대한 기록만 남겼습니다. 예수 역시 정치나 군사적으로 로마에 크게 중요한 인물이 아니었으므로 로마 역사학자 중 예수를 언급한 이는 극소수에 불과합니다. 하지만 로마 사학자 중에서도 중요한 인물들인 Tacitus와 Suetonius는 예수의 실존을 인정합니다.
Tacitus(서기 55~120)는 초기 로마 역사학자 중 가장 위대한 인물로 평가받는 이로 Christus(그리스도의 그리스어 표기)가 티베리우스 황제 시대에 살았으며 “본디오 빌라도의 핍박을 받았고 예수의 가르침이 로마까지 전해졌으며 기독교인들은 죄인으로 여김 받아 십자가형을 포함한 여러 방법으로 고문을 받았다” 고 기록했습니다.
Suetonius(서기 69~130)는 “Chrestus”를 선동자로 묘사했습니다. 대부분 학자는 이것이 예수라고 생각합니다. 또한 그는 서기 시대에 기독교인들이 네로 황제의 핍박을 받았다고도 기록했습니다.
로마 관료: 기독교인들은 로마 황제(가이사) 대신 예수를 왕으로 받아 들였으므로 로마의 적으로 간주되었습니다. 로마 황제 2명을 포함하여 다음의 로마 정부 관료들은 그러한 관점에서 서한을 남겼으며, 예수와 초기 기독교의 기원에 대해서도 언급하였습니다.
플리니(Pliny the Younger)는 트라얀 황제 시대의 총독이었습니다. 서기 112년에 플리니는 기독교인들로 하여금 “신으로 숭배하는” 그리스도를 포기하게 만들려는 시도와 관련하여 황제에게 서한을 남겼습니다.
트라얀 황제(서기 56~117)도 예수와 초기 기독교 기원에 대해 언급한 서한을 쓴 바 있습니다.
하드리안 황제(서기 76~136)는 기독교인을 예수를 따르는 자들로 묘사했습니다.
이교도: 일부 초기 이교도 작가들도 2세기 말 이전에 예수 또는 기독교인에 대해 간단히 언급하였습니다. Thallus, Phlegon, Mara Bar-Serapion, Lucian of Samosate 등이 이러한 작가들이었습니다.
특히 Thallus의 예수에 대한 언급은 예수가 사망한 후 약 20년 뒤인 서기 52년경에 작성되었습니다.
총 9명에 달하는 초기 비기독교 세속 작가들이 예수가 사망한 후 150년 내에 그를 실존 인물로 묘사했습니다. 흥미로운 점은 같은 수의 세속 작가들이 예수의 시대에 황제였던 디베료 황제에 대해서도 언급했다는 점입니다. 기독교인과 비기독교인들 자료를 고려하게 되면 예수를 언급한 자료의 수는 디베료를 언급한 10명에 비해 42명이나 됩니다.
□예수에 대한 역사적 사실:
이러한 초기 비기독교적 자료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다음과 같은 사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수는 나사렛 출신이었습니다.
예수는 지혜롭고 선한 삶을 살았습니다.
예수는 유대인의 왕으로 여겨져 디베료 황제가 통치하던 시대에 본디오 빌라도에 의해 유월절에 십자가에 못박혔습니다.
예수의 제자들은 예수가 죽었다고 생각했으며, 그 후 3일이 지나자 죽음에서 돌아왔습니다.
예수의 반대 세력들은 그가 남다른 능력을 보여주었다고 인정했습니다.
예수의 제자들은 빠르게 늘어났으며, 로마에서도 제자들이 나타났습니다.
예수의 제자들은 도덕적인 삶을 살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신으로 경배했습니다.
예수의 삶에 대한 이러한 전반적인 요약 내용은 신약과도 완전히 일치합니다.
Gary Habarmas의 말에 따르면 “비기독교인 자료 중 약 3분의 1이 1세기에 나타났으며, 대부분은 2세기 중반에 나타났다”고 되어 있습니다.[24] 또한 Encyclopedia Britannica 에 따르면 “이러한 독립적인 이야기들은 기독교에 반대하는 이들도 예수의 역사적 진실성을 의심하지 않았음을 증명합니다.”
□초기 기독교적 설명
초기 기독교인들은 예수와 관련하여 수천 건의 서한과 설교 및 주석을 남겼습니다. 또한 예수를 언급한 교리들도 그가 십자가에 못박힌 지 5년부터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이러한 비성경적 글들은 십자가에 못박힘과 부활을 포함하여 예수에 대한 신약의 내용을 대부분 확인시켜주고 있습니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놀라운 점은 이러한 기록의 일부 또는 전체 36,000건 이상이 발견되었으며 그 중에서는 1세기에 작성된 것도 있습니다.[28] 이러한 비성서적 기록은 전체 신약 중 몇 구절을 제외한 내용을 재구성할 수도 있을 정도입니다.
이 기록을 작성한 이들은 예수를 실존 인물로 묘사했습니다. 예수 신화론자들은 이러한 기록이 편향된 것이라고 무시합니다. 하지만 이들이 답해야 하는 질문은 바로 이것입니다. 예수가 허구의 인물이라면 어떻게 단 수십 년의 그의 삶에 대해 그렇게 수많은 이야기가 쓰여질 수 있을까요?
□역사적 영향
허구는 역사에 거의 영향을 미치지 못합니다. 역사학자 Thomas Carlyle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세계의 역사는 위대한 인물에 대한 전기라 할 수 있습니다.”
국가의 기반이나 유산을 신화적인 인물이나 신으로 내세우는 국가나 정권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는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요?
평균적인 로마 시민은 예수가 사망한 지 오랜 시간이 지나고서야 예수가 미친 영향을 깨달았습니다. 예수는 군대를 지휘한 적이 없습니다. 책을 쓰거나 법을 바꾼 적도 없습니다. 유대인 지도자들과 로마의 황제들은 예수와 관련된 기억을 지워버리고 싶었으며, 성공할 것처럼 보이기도 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보는 것은 고대 로마의 유적 뿐입니다. 황제의 강력한 군대와 로마 제국의 강력한 힘도 모두 기억 저편으로 사라졌습니다. 하지만 예수는 오늘날 어떻게 기억되고 있을까요? 그가 지금까지 남긴 영향력은 무엇일까요?
역사상 예수보다 더 많은 책에 쓰인 인물은 없습니다.여러 나라에서는 예수의 말을 정부의 기반으로 활용했습니다. Durant의 말을 빌리자면 “그리스도의 승리야말로 민주주의의 시작이었습니다.”[39]예수의 산상 수훈은 윤리와 도덕에 있어서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했습니다.
학교, 병원, 그리고 인권 단체들이 그의 이름으로 설립되었습니다. 하버드, 예일, 프린스턴, 다트머스, 콜롬비아, 옥스포드를 비롯한 100개 이상의 유명 대학들이 그의 제자들에 의해 설립되었습니다.
서양 문화권에서 여성의 지위가 상승한 것도 예수가 근원입니다 (예수 시대의 여성들은 예수의 가르침이 퍼지기 전까지 열등한 존재이자 거의 없는 것이나 다름없는 취급을 받았습니다).모든 인간의 생명이 중요하다는 예수의 가르침 덕분에 영국과 미국에서는 노예제도가 사라졌습니다.
놀라운 점은 대중(공생애) 사역으로 3년 만에 이러한 모든 일들이 일어났다는 사실이니다. 유명한 세계 역사학자 H. G. Wells에게 역사상 가장 큰 유산을 남긴 이가 누구인지 묻자 그는 이렇게 답했습니다. “그러한 기준이라면 예수야말로 최고입니다.”
예일대의 역사학자 Jaroslav Pelikan은 예수에 대해 이런 글을 남겼습니다. “예수에 대해 누가 개인적으로 어떤 생각을 하거나 믿음을 갖더라도 나사렛의 예수가 거의 20세기 동안 서양 문화권을 지배해 온 인물이었음을 부인할 수는 없습니다. 예수가 태어나면서 인류의 달력 대부분이 시작되었고, 예수의 이름에 의해 수백만 명이 그에게 저주를 하고, 예수의 이름으로 수백만 명이 기도를 합니다.”
예수가 존재하지 않았다면, 그러한 허구가 어떻게 이 정도로 역사에 영향을 미칠 수 있었는지에 의문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전설 속의 신들이 인간의 환상과 욕망을 대신 실현해주는 슈퍼히어로들로 묘사되는 한편 복음서들은 예수를 겸손하고 인애를 겸비하고 순전한 도덕적인 인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추종자들은 예수에 대해 목숨이라도 기꺼이 바칠 수 있는 실존 인물이라고 말합니다.
비기독교 과학자인 Albert Einstein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복음서들을 읽다 보면 예수가 실존했다는 느낌을 받을 수 밖에 없습니다. 단어 하나 하나에 예수의 성격이 살아 숨쉬고 있습니다. 어떤 전설이나 신화도 그만큼 생생하지 못합니다… 예수가 실제로 존재했다는 점과 그의 말이 아름다웠다는 사실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이러한 전설에서 표절했다는 게 가능한 일일까요? 예수가 실존 인물이 아니라는 주장은 유튜브에서 공개된 영화인 시대정신(Zeitgeist)에서도 제기되었으며, 이 영화를 만든 Peter Joseph은 대담하게도 이런 주장을 내세웠습니다.
사실 예수는 허구적인 인물이며, 여러 유신론적 종교를 비롯한 기독교는 그 시대의 사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복음서에 묘사된 예수와 신화 속의 신들을 비교해 보면 그 차이는 분명합니다. 복음서에서 드러난 실제의 예수와 비교할 때 신화의 신들은 이러한 환상 속의 요소를 가진 비현실적 신들로 그려지고 있습니다.
미트라는 바위에서 태어났다고 합니다.
호루스는 매의 머리를 가진 것으로 묘사됩니다.
바커스, 헤라클레스를 비롯한 여러 신들은 페가수스라는 말을 타고 천국에서 날아왔다고 합니다.
오시리스의 아내인 이시스는 그를 살해한 후 시신을 14조각으로 자른 후에 다시 모아서 •부활시켰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기독교에서는 이러한 신화를 바탕으로 예수의 죽음과 부활에 대한 이야기를 만들어낸 것일까요?
예수의 추종자들은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며, 예수의 부활이 사실이라는 주장에 대해 목숨이라도 걸 수 있다고 합니다. [참고: “예수는 죽은 후에 부활한 것인가요?”]
게다가 “예수의 부활과 유사하게 부활한 신에 대한 이야기들은 예수의 부활이 알려진 후 최소 100년 후에 처음으로 알려졌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호루스, 오시리스, 미트라 등의 신이 죽었다가 부활했다는 이야기는 원래 신화에 없었으며, 복음서에 예수에 대한 이야기가 쓰여진 후에 추가된 것입니다.
룬드 대학 교수인 T. N. D. Mettinger는 “현대 학자들은 부활한 신들이 기독교보다 나중에 등장했다는 점에 거의 공통적으로 동의하고 있습니다. 이 신들은 모두 1세기 이후에 등장했습니다.” [메모 50 참고]
대부분 역사학자들도 이러한 신화의 신들과 예수 그리스도 간에 진정한 유사점은 없다고 합니다. 하지만 C. S. Lewis의 생각은 영생에 대한 인간의 욕망과 관련된 공통적인 주제는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Lewis는 반지의 제왕(The Lord of the Rings) 3부작의 저자인 J. R. R. Tolkien과 나눈 대화에 대해 이렇게 설명합니다. Tollkien은 “예수에 대한 이야기”는 “진정한 신화일 뿐이고 실제 일어난 사건과는 엄청난 차이가 존재합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신약성서 연구학자인 F. F. Bruce의 결론은 이렇습니다. “일부 작가들은 ‘예수 신화론’을 활용할 수도 있겠지만, 역사적인 증거를 기반으로 활용하지는 않습니다. 편견이 없는 역사학자들에게 그리스도의 역사적 진실성은 줄리어스 시저의 역사적 진실성 만큼이나 자명합니다. ‘예수 신화’론을 퍼뜨리는 것은 역사학자들이 아닙니다.”
□신약성서
Ellen Johnson과 같은 회의론자들은 신약도 “편향”되어 있으며 예수에 대한 증거로 충분치 못하다고 합니다. 하지만 가장 비기독교적인 역사학자들도 고대 신약 필사본을 예수의 존재에 대한 확실한 증거로 간주합니다. 캠브릿지의 역사학자이자 무신론자인 Michael Grant의 경우 신약을 다른 고대 역사에 대한 증거와 동일하게 간주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래야 하겠지만, 역사적 자료가 담긴 고대 기록과 동일한 기준을 신약에 적용한다면, 우리는 역사적 존재를 누구도 의심하지 않은 다수의 이교도 인물들을 부정할 수 없는 것처럼 더 이상 예수의 존재도 부정할 수 없게 됩니다.
4대 복음서(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는 예수의 생애와 언행을 묘사한 주요 기록이라 할 수 있습니다. 누가복음의 경우 데오빌로에게 전하는 말로 시작됩니다. “모든 일을 맨 처음부터 완전히 이해한 나도 데오빌로 각하 당신에게 차례대로 써서 알리는 것을 좋게 생각하였으니”
유명 고고학자인 William Ramsey 경은 원래 누가복음의 예수에 대한 역사적 설명을 거부한 인물입니다. 하지만 최근 그는 이렇게 인정했습니다. “누가야말로 최고의 사학자입니다… 이 분은 역사상 최고의 사학자들과 함께 존경받아야 합니다… 누가가 남긴 역사는 그 신뢰성에 있어서 최고라 할 수 있습니다.”
알렉산더와 관련된 초기 자료는 그가 사망한 후 300년이 지나서 작성되었습니다. 하지만 예수의 삶에 대한 복음서들의 이야기는 실제에 얼마나 근접한 것일까요? 예수를 실제로 본 이들이 그 때까지 살아있었으며, 또는 예수에 대한 전설이 완성되기까지 충분한 시간이 있었을까요?
1830년대에 독일 학자들은 신약이 3세기에 작성되었으며 이는 예수의 사도들이 작성하기에는 너무나 늦은 시기라고 주장했습니다. 하지만 19, 20세기에 고고학자들이 발견한 필사본의 사본을 통해 이러한 예수에 대한 이야기들이 3세기보다 훨씬 전에 작성되었음이 증명되었습니다.
William Albright는 신약이 작성된 일자를 “서기 50년에서 서기 75년 사이”[33]사이라고 추정했으며, 캠브리지의 사학자 John A. T. Robinson의 경우 서기 40~65년 사이로 추정했습니다. 이러한 시간대가 의미하는 것은 예수를 본 증인들이 살아 있었으며 예수와 관련된 전설이나 허구가 완성되기 훨씬 전이라는 뜻입니다.
C. S. Lewis는 복음서들을 읽어본 후 이렇게 적었습니다. “문학 사학자로서 나는 복음서들이 허구가 아니라는 점을 100% 믿게 되었습니다. 예수 관련 전설은 많이 읽어봤으며 복음서와 전설은 다르다는 점을 매우 명확하게 확신할 수 있습니다.”
신약 필사본의 수는 엄청납니다. 부분 또는 전체 필사본의 경우 24,000 건 이상이 존재하며 이는 다른 어떤 고대 문서보다 월등히 많은 양입니다.
다른 어떤 종교적 또는 세속적인 고대 인물도 예수 그리스도만큼 많은 문서가 뒷받침해주지 못합니다. 역사학자 Paul Johnson은 이런 의견을 내놓았습니다, “이를테면 Tacitus와 같은 인물은 단 하나의 중세 필사본에만 등장하지만 초기 신약 필사본의 양은 놀라울 정도입니다.”
□한 남자가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역사학자들은 예수를 실존 인물로 보고 있을까요?
역사학자들에 따르면 알렉산더 대왕과 예수 그리스도는 모두 실존 인물입니다. 하지만 예수에 대한 필사본 증거는 알렉산더와 관련된 역사적 기록보다 훨씬 위대하고 수백 년 이상 예수의 삶에 근접해 있습니다. 게다가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적 영향은 알렉산더가 미친 영향을 크게 뛰어넘습니다.
역사학자들은 예수의 실존 여부에 대해 다음과 같은 증거를 제시합니다.
고고학계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발견은 복음서에 나온 인물과 장소를 계속해서 증명해 주고 있으며, 가장 최근에는 본디오 빌라도와 가야바가 1세기에 나사렛에 존재했다는 증거도 발견된 바 있습니다.
예수의 존재를 기록한 역사적 문서는 수천 건이 넘습니다. 예수가 떠나고 150년이 지나지 않아 기독교 신자가 아닌 9명을 포함하여 42명에 달하는 작가들이 예수를 언급하기 시작했습니다. 동일한 시기에 디베료 황제를 언급한 세속 작가의 수는 9명이고, 줄리어스 시저의 정복을 언급한 작가는 5명에 불과합니다. 하지만 두 황제의 존재를 부인하는 역사학자는 없습니다.
종교 관련 여부와 무관하게 역사학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야 말로 다른 어떤 인물보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 큰 영향을 미쳤음을 인정합니다.
위대한 세계 역사학자인 Will Durant는 예수 신화론을 조사한 후, 다른 신화 속의 신들과 달리 예수가 실존 인물이라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역사학자 Paul Johnson은 진지한 학자라면 예수의 존재를 인정한다고 말합니다.
무신론자인 역사학자 Michael Grant도 “정리하자면, 현대의 비판 방식으로는 예수 신화론을 뒷받침할 수 없습니다. 최고의 학자들이 몇 번이고 예수 신화론을 반박해왔습니다.”
비기독교 역사학자인 H. G. Wells는 예수 그리스도의 존재에 대해 가장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한 남자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부분이야말로 누구도 지어낼 수 없는 진실입니다.
□예수는 정말로 죽은 후에 부활한 것인가요?
예수 그리스도를 실제로 본 이들은 예수가 십자가에 못박혀 죽은 후에 다시 살아난 것을 믿는 것처럼 말하고 행동했습니다. 어떤 신화나 종교도 그렇게 열정적인 믿음을 가진 추종자들을 갖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해 단지 믿음만 가지고 받아들여야 할까요? 아니면 역사적인 증거가 존재할까요? 일부 회의론자들은 부활에 대한 이야기가 거짓임을 입증하기 위해 조사를 시작했습니다. 이들은 무엇을 발견했을까요?
© 2012 JesusOnline Ministries. 본 기사는 Bright Media Foundation & B&L Publications에서 Y-Jesus 에 부록으로 제공한 것입니다. Larry Chapman, 편집장
■신화 대 현실
전설 속의 신들이 인간의 환상과 욕망을 대신 실현해주는 슈퍼히어로들로 묘사되는 한편 복음서들은 예수를 겸손하고 인애를 겸비하고 순전한 도덕적인 인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추종자들은 예수에 대해 목숨이라도 기꺼이 바칠 수 있는 실존 인물이라고 말합니다.
비기독교 과학자인 Albert Einstein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복음서들을 읽다 보면 예수가 실존했다는 느낌을 받을 수 밖에 없습니다. 단어 하나 하나에 예수의 성격이 살아 숨쉬고 있습니다. 어떤 전설이나 신화도 그만큼 생생하지 못합니다… 예수가 실제로 존재했다는 점과 그의 말이 아름다웠다는 사실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이러한 전설에서 표절했다는 게 가능한 일일까요? 예수가 실존 인물이 아니라는 주장은 유튜브에서 공개된 영화인 시대정신(Zeitgeist)에서도 제기되었으며, 이 영화를 만든 Peter Joseph은 대담하게도 이런 주장을 내세웠습니다.
사실 예수는 허구적인 인물이며, 여러 유신론적 종교를 비롯한 기독교는 그 시대의 사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복음서에 묘사된 예수와 신화 속의 신들을 비교해 보면 그 차이는 분명합니다. 복음서에서 드러난 실제의 예수와 비교할 때 신화의 신들은 이러한 환상 속의 요소를 가진 비현실적 신들로 그려지고 있습니다.
- 미트라는 바위에서 태어났다고 합니다.
- 호루스는 매의 머리를 가진 것으로 묘사됩니다.
- 바커스, 헤라클레스를 비롯한 여러 신들은 페가수스라는 말을 타고 천국에서 날아왔다고 합니다.
- 오시리스의 아내인 이시스는 그를 살해한 후 시신을 14조각으로 자른 후에 다시 모아서 •부활시켰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기독교에서는 이러한 신화를 바탕으로 예수의 죽음과 부활에 대한 이야기를 만들어낸 것일까요?
예수의 추종자들은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며, 예수의 부활이 사실이라는 주장에 대해 목숨이라도 걸 수 있다고 합니다.
게다가 “예수의 부활과 유사하게 부활한 신에 대한 이야기들은 예수의 부활이 알려진 후 최소 100년 후에 처음으로 알려졌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호루스, 오시리스, 미트라 등의 신이 죽었다가 부활했다는 이야기는 원래 신화에 없었으며, 복음서에 예수에 대한 이야기가 쓰여진 후에 추가된 것입니다.
룬드 대학 교수인 T. N. D. Mettinger는 “현대 학자들은 부활한 신들이 기독교보다 나중에 등장했다는 점에 거의 공통적으로 동의하고 있습니다. 이 신들은 모두 1세기 이후에 등장했습니다.”
대부분 역사학자들도 이러한 신화의 신들과 예수 그리스도 간에 진정한 유사점은 없다고 합니다. 하지만 C. S. Lewis의 생각은 영생에 대한 인간의 욕망과 관련된 공통적인 주제는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Lewis는 반지의 제왕(The Lord of the Rings) 3부작의 저자인 J. R. R. Tolkien과 나눈 대화에 대해 이렇게 설명합니다. Tolkien은 “예수에 대한 이야기”는 “진정한 신화일 뿐이고 실제 일어난 사건과는 엄청난 차이가 존재합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신약성서 연구학자인 F. F. Bruce의 결론은 이렇습니다. “일부 작가들은 ‘예수 신화론’을 활용할 수도 있겠지만, 역사적인 증거를 기반으로 활용하지는 않습니다. 편견이 없는 역사학자들에게 그리스도의 역사적 진실성은 줄리어스 시저의 역사적 진실성 만큼이나 자명합니다. ‘예수 신화’론을 퍼뜨리는 것은 역사학자들이 아닙니다.”
□예수는 신일까요?
어디서나 주목을 받는 사람을 본 적이 있습니까? 그런 사람은 뭔가 신비롭고 알 수 없는 특징으로 다른 느낌을 줍니다. 이는 2천년 전 예수 그리스도에게도 해당되는 말입니다. 하지만 예수의 말을 들은 이들은 단순히 인간성 외에 여러 부분에 관심을 가졌습니다. 예수의 말을 듣고 삶을 목격한 이들은 나사렛의 예수에게 타인들과 다른 뭔가가 있었다고 합니다.
예수에게 존경을 받을 어떤 자격이나 특징이 있다면 그 자신 뿐입니다. 책을 쓰거나, 군대를 이끌거나, 공직을 맡거나, 재산을 소유한 것도 아닙니다. 마을의 수백 마일 내에서 돌아다녔으며 군중들은 듣는 이의 마음을 움직이는 말과 놀라운 이적에 놀랐습니다.
하지만 예수의 위대함은 그의 말을 듣고 그를 본 이들에게 명백하게 나타났습니다. 많은 위인들이 결국 역사책 속으로 사라졌지만 예수는 아직도 수천 의 책들과 수많은 매체에서 벌어지는 논쟁의 중심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논쟁은 대개 예수가 자신에 대해 내세운 급진적인 주장, 즉 그의 추종자들과 옹호자들도 놀라게 만든 주장을 중심으로 벌어집니다.
예수에 대해 로마와 유대인 지배층 모두 위협으로 간주하게 만든 것은 다름아닌 예수만의 주장이었습니다 내세울 업적이나 정치적 권력기반이 전혀 없는 아웃사이더였지만 예수는 3년 내에 향후 20세기의 세상을 바꾸었습니다. 다른 도덕적 및 종교적 지도자들도 영향을 미치긴 했지만 나사렛이 고향인 이름없는 목수의 아들과 비교할 수 없습니다.
예수는 어떤 점에서 달랐을까요? 단지 위대한 성인이었을까요? 아니면 그 이상의 존재였을까요?
이는 예수가 진정으로 어떤 사람이었는지에 대한 핵심을 묻는 질문입니다. 일부에서는 예수가 단순히 위대한 도덕 선생이며, 단지 세계 최대 종교의 지도자였다고 믿는 이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 이상의 존재였다고 믿는 이들도 많습니다. 기독교인들은 신이 인간의 몸으로 친히 세상을 방문하셨다고 믿습니다. 그리고 이를 뒷받침하는 증거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예수의 삶과 말을 면밀히 연구한 캠브릿지 대학의 회의론자 교수 C.S. 루이스는 자신의 삶에 엄청난 영향을 미친 놀라운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그렇다면 진짜 예수는 어떤 사람일까요? 많은 이들은 예수가 위대한 도덕 선생이었다고 답할 것입니다. 세계에서 가장 많은 논쟁거리가 된 인물을 좀 더 깊이있게 살펴보는 작업의 첫 단추로, 예수가 단순히 위대한 도덕 선생이었는지 질문을 던져보겠습니다.
□위대한 도덕 선생일까요?
타 종교에서도 예수가 위대한 도덕 선생이었음을 인정합니다. 인도의 지도자인 마하트마 간디는 예수의 도덕적인 삶과 깊이있는 발언을 높게 평가했습니다.
마찬가지로 유대인 학자 요셉 클라우스너는 이런 글을 남겼습니다. “예수는 가장 순수하고 심오한 윤리를 가르쳤다는 점은 누구나 인정하며, 그러한 가르침은 고대 현자들의 도덕적 계율과 격언을 훨씬 뛰어넘는 것입니다.”
예수의 산상수훈은 한 개인의 발언 중에서는 인류 역사상 최고의 가르침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사실 오늘날 우리가 “평등한 권리”로 알고 있는 내용의 대부분은 예수의 가르침이 낳은 결과입니다. 비기독교인 역사학자 윌 듀란트는 “예수는 ‘평등한 권리’를 위한 삶을 살았고 끊임없이 투쟁했습니다. 지금였다면 그런 사람은 시베리아로 유배당했을 것입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라는 말은 모든 일반적인 지혜 중에서도 정치적인 관념 일체에 대한 반전이었습니다”라고 예수에 대해 말했습니다.
많은 이들은 간디와 마찬가지로 예수가 단지 고귀한 도덕적 원칙을 가르친 선생이라 생각하고 윤리에 대한 예수의 가르침과 자신에 대한 주장을 별개로 구분하려 했습니다. 이는 미국의 설립자 중 한 명인 토마스 제퍼슨 대통령이 택한 방법으로 신약에서 예수의 신성함을 언급한 것으로 보이는 부분을 잘라내고 윤리 및 도덕에 대한 가르침과 관련된 문구는 남겨두었습니다.
그렇게 개조한 신약을 지니고 다닌 제퍼슨은 예수를 사상 최고의 도덕 선생으로 존경했을 지도 모릅니다.
사실 미국 독립 선언서에서 제퍼슨이 쓴 인상깊은 문구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성별, 인종, 사회적 지위와 무관하게 신에게 너무나 중요하다는 예수의 가르침을 기반으로 합니다. 독립 선언서에는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모든 인간이 평등하게 창조되었고, 누구도 빼앗을 수 없는 권리를 창조주로부터 받았다는 진실이 자명하다고 선언하는 바입니다.”
하지만 제퍼슨은 한 가지 질문에 답을 하지 않았습니다. 예수가 신이라는 주장이 거짓이라면 훌륭한 도덕 선생이 되지 못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는 실제로 자신이 신성하다고 주장했을까요? 예수의 주장을 살펴보기 전에 그가 단순히 위대한 종교 지도자였을 가능성을 확인해야 합니다.
□위대한 종교 지도자일까요?
놀랍게도 예수는 자신이 종교 지도자라는 말을 한 적이 없습니다. 종교적 정치에 끼어들거나 야심찬 목표를 밀어붙인 적도 없으며 목회 활동 역시 기존의 종교 프레임을 거의 완전히 벗어나서 진행했습니다.
예수를 다른 종교 지도자와 비교해보면 한 가지 놀라운 차이가 나타납니다. 힌두 문화에서 성장한 라비 재커라이어스(Ravi Zacharias)는 세계의 종교를 연구하고 예수 그리스도와 다른 주요 종교의 창시자들 간의 근본적인 차이를 발견했습니다.
“여러 종교를 보면 신도에게 내리는 지시, 즉 삶의 방식이 존재합니다. 조로아스터에게 의존하는 게 아니라 조로아스터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것입니다. 나를 태어나게 한 존재는 부처가 아니며, 우리는 부처의 사성제를 통해 배움을 얻는 것입니다. 마호메트가 나를 변화시키는 게 아니라, 코란의 아름다움이 우리에게 감동을 주는 것입니다. 이와 반대로 예수는 자신의 가르침을 단순히 전달하거나 설명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는 가르침 그 자체였습니다.”
재커라이어스의 말에 담긴 진실은 복음서에 나온 예수의 가르침이 단순한 “내게 오라”, “나를 따르거라”, 또는 “내 말을 따르거라”였던 횟수로 입증됩니다. 또한 예수는 자신의 최우선 과제가 죄를 사하는 것임을 분명히 밝혔으며 이는 신만이 할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휴스턴 스미스는 자신의 저서 World’s Great Religions에서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동시대인들에게 너무나 큰 감명을 준 나머지 유일하게 갖는 의문이 ‘저 분은 어떤 사람인가?’가 아니라 ‘저 분은 무엇인가?’였던 성인은 단 두 분이 있었습니다. 바로 예수와 부처입니다. 이 두 분이 내린 답은 질문과 정 반대의 것이었습니다. 부처는 자신도 신이 아닌 한 인간이라고 명백하게 말했으며, 마치 후일 자신을 숭배하려는 시도가 있을 거라고 눈치챈 것이나 다름없는 답이었습니다. 반면 예수는 자신의 신성함을 주장했습니다.”
이는 예수가 자신에 대해 어떤 주장을 실제로 했는지 확인하는 다음 단계로 이어지며, 구체적으로는, 예수가 실제로 자신이 신성하다는 말을 했는지 여부를 확인해야 합니다.
□예수는 신이라고 주장했을까요?
그렇다면 예수가 신이라고 주장했다고 많은 학자들이 확신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작가인 존 파이퍼는 신(하나님)만이 유일한 권세를 가지고 있다고 예수가 주장했다는 설명을 합니다.
“…예수의 친구들과 적들은 그의 말과 행동에 몇 번이고 크게 놀랐습니다. 다른 사람들처럼 길을 걷다가도 몸을 돌려서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아브라함 이전에 내가 있었노라’ 또는, ‘나를 보았다면, 내 아버지를 본 것과 다름없다’ 아니면, 신성모독이라는 비난을 받은 후에는 매우 침착하게 이런 말도 했다고 전해집니다. ‘사람의 자식은 이 땅에서 죄를 사할 권세가 있다’ 죽은 자에게는 이 두 마디만 던졌다고 합니다. ‘앞으로 나오라’ 또는 ‘일어나라’ 그렇게 말하면 그대로 이루어졌습니다. 바다에 폭풍이 불면 ‘잠잠해져라’라고 했으며 한 덩어리의 빵을 ‘수천 명이 먹을 빵으로 되어라’고 말했습니다. 말하는 대로 즉시 이루어졌습니다.”
그렇다면 그런 말을 통해 예수가 의미한 것은 무엇일까요? 예수가 단지 모세나 엘리야, 다니엘과 같은 선지자였을 가능성이 있을까요? 복음서를 간단히 살펴보면 예수는 자신이 선지자 이상의 존재라고 주장했다는 내용이 있습니다. 자신에 대해 그런 말을 한 선지자는 없었으며, 사실 어떤 선지자도 자신을 신과 동일시하지 않았습니다.
일부에서는 예수가 절대로 “나는 신이다”라고 말한 적이 없다고 합니다. “나는 신이다”라는 말 자체를 하지 않았음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예수는 “나는 인간이다” 또는 “나는 선지자다”라고 명백하게 말한 적도 없습니다. 그럼에도 예수는 분명한 인간이었으며, 그 추종자들은 예수를 모세나 엘리야와 같은 선지자로 간주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가 자신이 선지자라는 말을 하지 않으므로 선지자가 아니라고 부정할 수 있는 것처럼 “나는 신이다”라는 말 자체를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신성하지 않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사실 예수가 자신에 대해 한 말은 그가 단순한 성인 또는 선지자였다는 생각과 정반대로 배치되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는 여러 번 자신이 신의 아들이라 일컬었습니다. 예수가 신의 아들이라는 생각이 과한 것이냐는 질문에 대해 그룹 U2의 리드싱어인 보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니요. 제게는 과한 생각이 아닙니다. 보세요. 세상의 반응은 언제나 이렇습니다. 예수는 위대한 선지자였으며, 매우 흥미로운 사람임에는 분명하고, 엘리야, 마호메트, 부처, 공자 등 다른 위대한 선지자와 비슷한 말들을 많이 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사실 예수는 그러한 생각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직설적으로 말씀하시죠. 그리스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 아니다. 나는 내가 선생이라는 말을 하는 게 아니니 선생이라 부르지 말아라. 내가 선지자라는 말을 하는 것도 아니다. 나는 신이 사람의 모습을 한 존재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면 사람들은 이런 반응을 보입니다. 천만에요. 그냥 선지자로 계셔 주십시오. 선지자로 받아 들일 수 있습니다.”
예수의 주장을 살펴보기 전에, 그가 그러한 주장을 유일신에 대한 유대인의 믿음을 바탕으로 주장했다는 점을 이해해야 합니다. 믿음이 강한 유대인이라면 절대로 하나 이상의 신을 믿지 않습니다. 그리고 예수는 자신의 아버지(하나님)에게 이렇게 기도하면서 유일신에 대한 믿음을 보였습니다.
“유일하신 참 하나님”
하지만 이 기도를 하면서 예수는 자신의 아버지와 항상 함께 존재했다는 점도 언급했습니다. 빌립이 예수에게 아버지를 보여달라는 요청을 하자 예수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빌립, 나와 그렇게 오래 지냈으면 나를 모르느냐? 나를 본 자라면 아버지를 본 것이나 다름없다”
그렇다면 다음 질문은 이것이 됩니다.
“예수는 자신이 우주를 만든 히브리인의 신이라고 주장하고 있었을까요?”
예수는 자신이 아브라함과 모세의 신이라고 주장했을까요?
예수는 계속해서 듣는 이를 어리둥절하게 만드는 표현으로 자신을 묘사했습니다. 파이퍼에 따르면 예수는 다음과 같은 대담한 발언을 했습니다. “아브라함 전에 내가 있었노라”
마르다와 그녀 주변에 있던 이들에게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나는 부활이며 생명이다.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산 것이다”
이와 비슷한 말로, “나는 세상의 빛이다” “나는 하나님께 이르는 유일한 길이다” “나는 ‘진리’이다”라는 발언도 했습니다. 이 외에 여러 발언은 신을 위한 거룩한 말씀인 “나는 스스로 있는 자라(I AM / ego eimi)”보다 나중에 있었습니다.이러한 발언을 통해 예수는 무엇을 의미했으며, “나는 스스로 있는 자라”는 말은 얼마나 중요한 것일까요?
이해를 위해 다시 한 번 상황을 파악해야 합니다. 구약을 보면 모세가 불에 타는 가시덤불에서 신에게 이름을 묻자 신은 이렇게 답합니다. “나는 스스로 있는 자라(I AM).” 신은 모세에게 자신이 유일신이며 신만이 시간의 통제를 받지 않고 항상 존재해왔다는 사실을 밝히는 것입니다. 믿을 수 없지만 예수 역시 자신에 대해 이 말을 사용했습니다. 그렇다면 질문은 “왜?”가 될 것입니다.
모세 이후로 목회 활동을 하는 유대인이 자신이나 그 누구도 “자신을 스스로 있는 자”라는 말을 사용한 적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예수가 “스스로 있는 자”라 주장하자 유대인 지도자들의 분노가 폭발했습니다. 이를테면 한 번은 지도자들이 왜 자신들이 예수를 죽이려고 하는지 설명한 적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당신은 한 인간인데 자신을 신으로 만들었기 때문이오.”
예수가 신의 이름을 사용한 행동이 종교 지도자들을 크게 분노하게 만들었던 것이었습니다. 중요한 점은 구약 학자들도 예수가 하는 말을 정확히 알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는 자신이 우주의 창조주인 신이라고 주장하고 있었습니다. 신성모독이라는 비난을 초래했을 내용이 있다면 바로 이러한 주장일 것입니다. 자신이 신이라는 예수의 주장이 확실하다는 상황을 보다 깊이 이해하려면 그러한 발언 외에도 그에 대한 반응도 확인해야 합니다.
C. S. 루이스는 처음에는 예수를 근거없는 신화 정도로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신화를 잘 알고 있었던 문학적인 천재인 그 역시 예수가 분명히 실존 인물이었을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또한 루이스는 예수 관련 증거를 조사하면서 예수가 실존 인물일 뿐 아니라 그 누구와도 다른 사람이라는 점에도 확신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는 이런 기록을 남겼습니다.
“그 때 정말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당시 그 곳에 있던 유대인 중에서 갑자기 자신이 신인 것처럼 말하고 다니는 한 남성이 나타났습니다. 자신이 죄를 사한다고 했으며 항상 그 곳에 존재한다고 했습니다. 종말의 때가 되면 세상을 심판하기 위해 올 것이라고 했습니다.”
루이스에게 예수의 주장은 일반적인 학자나 종교 지도자가 했다고 보기에는 너무나 심오하고 급진적이었습니다. (예수의 신성함에 대한 주장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시려면 “예수는 자신이 신이라는 주장을 했을까요?”를 참고하십시오.
□그렇다면 예수는 어떤 신이었을까요?
일부에서는 예수가 신의 일부에 불과하다는 주장을 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우리 모두가 신의 일부분이며, 우리 마음 속에는 신성함의 씨앗이 존재한다는 생각으로는 예수의 말과 행동에 대해 설명이 가능하지 않습니다. 그러한 생각은 수정론자적이며 예수의 가르침과 믿음, 그리고 그 사도들이 이해한 예수의 가르침과는 거리가 먼 것입니다.
예수는 유대인이 이해하는 신, 그리고 구약에서 묘사한 것과 동일한 신이 자신이며 뉴 에이지 운동에서 이해하는 신과는 다르다고 가르쳤습니다. 예수나 그 추종자들은 스타워즈를 본 적이 없으므로 신에 대해 언급할 때 우주의 힘를 말한 것도 아닙니다. 예수가 신의 개념을 통해 제시한 의미를 재정의하는 것은 좋은 생각이 아닙니다.
루이스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이 점은 분명히 하고 넘어가야 합니다. 인디언과 같은 다신교자라면 자신이 신의 일부거나, 신과 함께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는 유대인이었으므로 그런 의미로 신을 말할 수는 없습니다. 이들의 언어에서 신이란 이 세상 밖의 존재이며 세상을 다른 어떤 것보다 무한히 다르게 만든 존재입니다. 그 개념을 이해하게 되면 예수가 말한 의미가, 간단하게 보자면, 인간의 입술 밖으로 나온 말 중에서도 가장 충격적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예수를 위대한 선생으로 받아들이는 한편 신으로 부르기 꺼려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이신론자로서 우리는 토마스 제퍼슨이 도덕과 윤리에 대한 예수의 가르침을 받아들이는 한편 예수의 신성은 부정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앞서 말한 것과 같이 더 깊이 파고 들게 되면 예수는 자신이 주장한 존재가 아니라면, 다른 대안을 검토해야 하는데, 그러한 대안 중 어떤 것도 예수를 위대한 도덕 선생으로 만들지는 않습니다.
루이스는 이렇게 주장합니다. “저는 지금 사람들이 예수에 대해 하는 말 중에서도 정말 어리석은 말을 못하게 하려고 노력하는 중입니다. 바로 이 말입니다. ‘저는 예수를 위대한 도덕 선생으로 받아들일 준비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자신이 신이라는 주장은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절대로 해서는 안되는 말입니다.”
루이스는 진실을 찾던 중에 예수의 정체성에 대해서 답은 한 가지 뿐임을 깨달았습니다. 예수는 자신이 주장하는 대로, 인간의 모습을 한 신이 맞거나, 그 주장이 완전히 잘못된 것입니다. 그리고 주장이 잘못되었다면 예수는 위대한 도덕 선생이 될 수 없습니다. 고의적으로 거짓말을 하고 있거나, 자신을 신으로 착각하는 정신 이상자일 것입니다.
□예수가 거짓말을 하고 있을 가능성이 있나요?
예수에 대해 가장 가혹한 비평을 퍼붓는 이들도 예수가 거짓말쟁이라는 말을 한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거짓말쟁이라는 표현은 예수의 고결한 도덕성과 윤리적인 가르침에 맞지 않습니다. 예수가 자신의 주장과 다른 존재라면, 고의적으로 거짓말을 하여 사람들을 혼란에 빠뜨렸을 가능성도 고려해야 합니다.
역사상 가장 유명하면서 영향력이 큰 정치적 작품은 니콜로 마키아벨리가 1532년에 쓴 ‘군주론’입니다. 이 책에서 작가는 충성심, 믿음, 정직함에 비해 권력, 성공, 이미지, 효율성을 크게 강조하고 있습니다. 작가에 따르면 정치적 목적을 달성할 수만 있다면 거짓말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예수가 단지 권력, 명성, 성공을 위해 거짓말을 기반으로 자신의 사역을 수행했을 가능성이 있을까요? 사실 예수를 거부했던 유대인들은 예수가 속이고 있다고 주장하고 거짓말쟁이라는 점을 지속적으로 부각시키려 했습니다. 이들은 예수에게 질문을 퍼부어 실수를 유도하려 하고 자가당착에 빠뜨리게 만들려 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는 놀라울 정도의 일관성으로 대응했습니다.
우리가 다뤄야 하는 질문은 이것입니다. 예수가 평생을 거짓말쟁이로 살았다면, 그렇게 만든 동기가 도대체 무엇일까요? 예수는 신이 거짓과 위선에 반대되는 존재라고 가르쳤으므로, 거짓을 행하여 아버지를 기쁘게 하기 위해 그랬을 리는 없습니다. 또한 추종자들을 위해 거짓말을 했을 리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사도들은 한 명을 제외하고 모두 예수를 버리는 대신 순교를 택했기 때문입니다(“사도들은 예수가 신이라고 믿었을까요?” 를 참고하십시오). 이제 남은 것은 타당성 있는 두 가지 설명 뿐인데, 둘 다 문제가 있는 설명입니다.
□무엇을 얻기 위해
많은 사람들은 자신에게 얻는 것이 있기 때문에 거짓말을 합니다. 사실, 대부분 거짓말의 동기는 자신이 얻는 혜택입니다. 예수가 자신의 정체에 대해 거짓말을 해서 얻는 것이 무엇일까요? 우선 가장 분명한 답은 권력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예수가 신이라고 사람들이 믿었다면 예수에게는 엄청난 권력이 주어졌을 것입니다 (그래서 로마 황제와 같은 고대 지도자들이 신성함을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설명의 문제점은 예수 스스로가 왕좌에 앉을 수 있는 모든 시도를 포기했으며 그 대신 권력을 남용하고 권력을 추구하는 삶을 사는 이들을 꾸짖었다는 사실입니다. 또한 예수는 창녀와 나환자와 같이 버림받은 이들에게 손을 내밀었으며, 이들은 영향력이 없느니만도 못한 존재였습니다. 이상하다고 할 수 밖에 없지만, 예수가 행한 모든 행동과 말은 권력과 정반대를 향하고 있었습니다.
권력이 예수의 동기였다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십자가를 피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는 사도들에게, 십자가가 자신의 운명이고 해야 할 일이라고 여러 차례 말했습니다. 로마의 십자가 위에서 목숨을 잃음으로써 권력을 얻을 수 있을까요?
물론 죽음은 모든 것을 제대로 된 관점으로 맞춰주는 힘이 있습니다. 그리고 많은 순교자들은 자신의 믿음을 위해 목숨을 바쳤지만, 알려진 거짓말을 위해 목숨을 바치려 한 순교자는 거의 없었습니다. 예수 자신의 개인적인 영달을 위한 모든 희망도 분명 십자가 위에서 종말을 맞이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마지막 순간까지 예수는 단 하나 뿐인 신의 아들이라는 주장을 굽히지 않았습니다. 신약 학자인 J. I. 패커는 이 제목이 예수의 신성함을 더욱 부각시킨다고 말했습니다.
□예수가 스스로 속인 것일까요?
인류에 대한 노력을 인정받아 1952년에 노벨상을 받은 슈바이처 박사는 예수에 대해 자신만의 관점으로 바라보았습니다. 슈바이처 박사는 예수가 자신이 신이라고 주장하는 이유가 정신이상 때문이라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의 주장은 틀렸지만, 고의로 거짓말을 한 것은 아니라는 얘기입니다. 이 이론에 따르면 예수는 자신이 실제로 메시아라고 믿도록 속은 셈입니다.
루이스 역시 이 설명을 면밀하게 검토했습니다. 그리고 예수의 주장이 거짓이라면, 예수는 미친 사람이었을 수 밖에 없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루이스의 생각은 자신이 신이라 주장하는 사람이라면 위대한 도덕 선생이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분명히 자신이 삶은 달걀이라고 하는 것과 다름없는 정신이상자이거나, 지옥의 악마 둘 중의 하나일 것입니다.”
예수의 삶과 말을 연구해 온 많은 학자들은 예수가 극단적일 정도로 이성적인 사람이라고 인정합니다. 자신의 삶이 영생과 개인적인 회의론으로 가득했지만 유명한 프랑스의 철학자 루소(1712~78)는 예수의 우월한 성격과 심리상태를 이러한 말로 인정했습니다. “상상 속의 정의로운 사람에 대한 플라톤의 설명은 정확하게 예수의 이미지에 부합합니다. … 소크라테스의 삶과 죽음은 철학자의 삶과 죽음이지만, 예수의 삶과 죽음은 신의 삶과 죽음이었습니다.”
U2의 보노는 “미친 놈”이야 말로 예수에 대해 붙일 수 없는 별명이라는 결론을 내립니다.
“결국 남은 것은 예수가 자신이 주장하는 그런 존재이거나, 아니면 완전히 미친 놈이라는 것입니다. 즉 희대의 살인마였던 찰스 맨슨 정도의 정신이상자라는 뜻입니다. 농담이 아닙니다. 정신이상자 하나 때문에 인류가 문명을 이루고 발전해 온 시간 동안, 그리고 전 세계 인구 중 절반 이상이 운명이 바뀌고 완전히 뒤바뀐 셈입니다. 그 정도면 정말 심각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예수는 거짓말쟁이거나 정신이상자였을까요? 아니면 신의 아들이었을까요? “훌륭한 도덕 선생”으로 예수를 받아들이긴 했으나 신성함은 부인한 제퍼슨의 생각이 옳을까요? 재미있는 점은 예수의 신자나 적을 모두 포함하여 그의 말을 들은 이들은 모두 예수를 단순한 도덕 선생 이상으로 생각한 적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를 만난 이들은 크게 증오, 공포, 또는 경배 등 3가지 감정을 느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주장은 우리로 하여금 선택을 하게끔 강요하고 있습니다. 루이스가 말한 바와 같이 예수를 단순히 위대한 종교 지도자 또는 훌륭한 도덕 선생으로 생각할 수는 없습니다. 루이스와 같이 과거에 회의론자였던 이들도 이런 말을 통해 우리가 마음을 정해야 한다고 합니다.
“선택을 해야 합니다. 이 사람이 과거, 그리고 현재에 신의 아들이었는지, 아니면 정신이상자이거나 그보다 더 심한 경우였는지 말입니다. 어리석다고 몰아세워 입을 닫게 만들거나, 침을 뱉거나, 악마로 몰아서 죽이거나, 그의 발 앞에 무릎을 꿇고 주인으로 경배하거나 신으로 모시거나, 선택을 해야 합니다. 하지만 예수가 사람인 위대한 선생이라는 말도 안되는 소리는 하지 않아야 합니다. 예수 스스로도 그런 말은 한 적이 없습니다. 그런 의도도 품은 적이 없습니다.”
루이스는 자신의 저서인 순전한 기독교에서 예수의 정체성에 대해 살펴본 결과, 예수 자신이 주장한 내용이 정확하게 맞다는 결론을 내립니다. 예수의 삶과 말에 대해 면밀히 검토한 이 천재적인 문학자는 그 전까지 믿고 있던 무신론을 버리고 열렬한 기독교인이 되었습니다.
인간의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질문은 이것입니다. “진정한 예수 그리스도는 누구입니까?” U2의 보노, C.S.루이스를 비롯한 여러 사람들은 인간의 모습으로 세상을 방문한 신이 바로 예수라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예수는 오늘날 살아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의 추종자들이 하는 생각도 그렇습니다.
□예수는 정말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을까요?
우리 시대에서 가장 큰 질문 중 하나는 “진정한 예수 그리스도”는 누구인가?” 입니다. 예수는 단지 뛰어난 사람이었을까요? 아니면 바울, 요한 등 사도들이 믿은 것처럼 인간으로 태어난 신이었을까요?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해 단지 믿음만 가지고 받아들여야 할까요? 아니면 역사적인 증거가 존재할까요? 일부 회의론자들은 부활에 대한 이야기가 거짓임을 입증하기 위해 조사를 시작했습니다. 이들은 무엇을 발견했을까요?
□예수는 우리가 죽은 후에 일어날 일에 대해 말한 적이 있습니까?
예수가 실제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 돌아왔다면, 죽은 후에 어떤 일이 일어날 지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예수는 삶의 의미와 우리의 미래에 대해 어떤 말을 했을까요? 신께 이르는 길은 다양하다고 했을까요? 아니면 예수 자신만이 유일한 길이라고 했을까요? “왜 예수인가?”에서 놀랄만한 답변을 확인해 보십시오.
□예수는 삶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을까요?
“왜 예수인가?”는 예수가 오늘날 갖는 중요성에 대한 답을 제시합니다. 예수는 이러한 삶과 관련된 중요한 질문들에 답을 제시할 수 있을까요? “나는 누구인가?” “나는 왜 여기 있는가?” 그리고 “나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예수는 삶과 우리 인간이 지구상에 태어난 목적에 대한 주장을 했으며, 우리는 예수를 부정하거나 무능하다고 비난하기 전에 이러한 주장에 대해 확인할 필요가 있습니다. “왜 예수는(Why Jesus)”이라는 제목의 기사는 예수가 왜 이 땅에 왔으며, 예수의 재림이 인간에게 뜻하는 바에 대해 다루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꽃미남 아닌 서민형"
크리스마스는 예수의 탄생을 기념하는 날이다. 지난주 외신들은 예수의 얼굴이 새로 복원됐다고 보도했다. 새 얼굴은 지금껏 알려진 것처럼 흰 피부에 가녀린 얼굴의 '꽃미남' 스타일이 아니라 노동으로 단련된 짙은 피부의 투박한 서민형이었다.
▲법인류학자인 리처드 니브 박사가 이스라엘 갈릴리 지방의 셈족 유골을 토대로 복원한 예수의 얼굴(왼쪽). 터키 아야소피아 박물관(옛 동방정교회 대성당)에 있는 13세기 예수의 모자이크상(오른쪽)과 같은 기존 예수 이미지와는 큰 차이를 보인다. 지금까지 예수는 백인의 얼굴에 갈색의 긴 곱슬머리와 턱수염을 가진 모습으로 그려졌다. /BBC·위키미디어 제공
예수 얼굴을 복원한 사람은 영국의 법인류학 전문가인 리처드 니브 박사이다. 그는 알렉산더 대왕과 그의 아버지 필리포스 2세 등 역사적 인물 얼굴을 복원한 것으로 유명하다. 니브 박사가 공개한 예수는 넓은 얼굴에 짙은 눈동자, 턱수염과 짧은 고수머리에 햇빛에 탄 피부를 갖고 있다. 예전부터 화가들이 그려 온 예수의 이미지와는 크게 다르다. 그는 "예수가 살았던 당시 이스라엘 북부 갈릴리 지방 셈족(族) 유골과 신약성서 기록을 토대로 예수의 얼굴을 복원했다"고 밝혔다.
우선 이스라엘 고고학자들이 발굴한 고대 유대인인 셈족의 유골들을 X선으로 촬영한 다음, 컴퓨터를 이용해 입체 영상을 수평으로 얇게 잘라냈다. 이를 토대로 골격에 근육과 피부가 어떤 형태로 붙어 있을지 결정했다. 오늘날 법의학에서 유골만으로 생전 얼굴을 추정할 때 하는 방법과 같다. 신약성서 마태복음에는 유다의 배신으로 예수가 겟세마네 동산에서 붙잡힐 때 제자들과 닮은 얼굴이었다고 나온다. 니브 박사는 이를 근거로 예수가 당시 셈족의 표준 얼굴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을 것으로 추정했다.
하지만 유골만으로는 머리칼, 피부색을 알 수 없다. 사실 신약성서에는 예수가 어떻게 생겼는지 정확하게 표현하는 문장은 없다. 니브 박사는 신약성서에 나오는 간접적 증언을 참조했다. 사도 바울은 "남자가 머리가 길면 욕되는 일"이라고 했다. 니브 박사는 이를 토대로 예수도 머리가 길지 않았을 것으로 추정했다. 또 예수가 30세까지 목수로 일했다는 점에서 피부가 햇볕에 타 검었을 것으로 봤다. 유골과 성서 기록을 토대로 복원한 예수는 키 1.5m에 몸무게 50㎏ 정도였다.
예수의 모습은 시대에 따라 달랐다. 로마 시대 예수는 짧은 머리에 턱수염이 없는 전형적인 로마인의 모습으로 그려졌다. 턱수염이 나타난 것은 서기 400년쯤이었다. 당시 현자(賢者)들은 다 턱수염을 길렀기 때문이다. 6세기 동방정교회에서부터 예수의 긴 머리칼이 등장했다. 중세 유럽에서는 예수가 갈색 머리칼에 흰 피부로 묘사됐으며, 이 모습이 르네상스기를 거쳐 지금까지 이어졌다.
최근 이스라엘에서는 예수가 마셨던 포도주를 복원하는 노력도 한창이다. 아리엘대의 농학자인 엘리아시브 드로리 박사팀은 이스라엘 전역에서 수집한 포도 480종 DNA를 미국과 유럽의 포도 3000여 종과 비교해 이스라엘 고유종을 150종 이상 찾았다. 이 중 두 종이 기원후 200년에 나온 유대교 기록에 적힌 포도 맛과 비슷했다. 이미 이 포도로 포도주가 생산됐다. 연구진은 또 고대 유적지에서 발굴된 포도 씨앗의 DNA를 분석해 이번에 찾은 이스라엘 고유종 중 어느 것과 일치하는지 찾을 계획이다. 짧은 머리에 짙은 피부의 예수가 마신 포도주가 어떤 맛이었는지 곧 드러날 것으로 보인다.
이영완 과학전문기자
■예수님은 동양인인가 서양인인가?
예수님이 동양인인가 서양인인가?’ 이 질문은 ‘유대인이 동양인인가 서양인인가?’라는 질문과 같다. 예수님이 유대인이기 때문이다. 유대인의 뿌리를 알아보자.
원래의 유대인은 고대로부터 팔레스타인 지역에 살아왔기 때문에 가나안 사람 특유의 외모 곧 오늘 날 중동계 사람들과 비슷한 외모를 지녔다. 예수님 역시 머리가 짧고, 턱수염이 있고, 까무잡잡한 피부의 사람이었다는 게 역사가들의 공통된 의견이다.
▲리처드 니브 전 맨체스터대학 교수가 복원한 예수 당시의 셈족 얼굴
영국의 리처드 니브 전 맨체스터대 교수는 이스라엘 고고학자들이 갈릴리호수 주변에서 발굴한 예수와 같은 시기에 살았던 3개의 셈족 두개골에 컴퓨터 단층촬영과 디지털 3D 기법을 활용해 예수님 당시의 셈족 얼굴을 복원했다.
니브 교수가 재현한 예수님 당시의 셈족 얼굴은 담갈색 눈에 수염을 길렀으며 짧은 곱슬머리와 까무잡잡한 피부를 가졌다. 이는 많은 종교적 그림에서 묘사한 긴 갈색머리를 가진 백인으로서의 예수님 모습과는 전혀 다르다. 성경에서조차 바울이 “남자가 머리를 기르는 것은 수치스러운 일”이라고 언급했다. "만일 남자가 긴 머리를 하고 있으면 자기에게 욕되는 것을 본성이 너희에게 가르치지 아니하느냐, 여자가 긴 머리면 자기에게 영광이 되나니 긴 머리는 쓰는 것을 대신하여 주신 연고니라"(고전 11:14, 15). 이로 미루어 당시 유대인 남자들은 머리를 짧게 잘랐던 것으로 보인다. 이 그림이 당대 보편적인 유대인의 모습이었다.
로마가톨릭의 월권
그런데 4세기 초에 기독교가 로마제국의 국교로 선포된 이후 가톨릭교회가 앞장서서 예수님을 유대적 바탕으로부터 끊어놓으려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가능한 예수님의 모습에서 유대인의 흔적을 지워야 했다.
원래 성경은 우상을 만들지 말라고 했다. 여기에는 조각은 물론 그림도 포함된다. "두렵건대 스스로 부패하여 자기를 위하여 아무 형상대로든지 우상을 새겨 만들지 마라. 남자의 형상이라든지, 여자의 형상이라든지, 땅위에 있는 아무 짐승의 형상이라든지, 하늘에 나는 아무 새의 형상이라든지, 땅위에 기는 아무 곤충의 형상이라든지, 땅 아래 물속에 있는 아무 어족의 형상이라든지 만들지 마라. 또 두렵건대 네가 하늘을 향하여 눈을 들어 일월성신 하늘 위의 군중 곧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천하 만민을 위하여 분정하신 것을 보고 미혹하여 그것에 경배하며 섬기지 마라."(신명기 4:16~18) 이렇듯 신명기에서는 분명하게 "남자의 형상"을 만들지 말라고 콕 찍어서 말했다.
그럼에도 로마가톨릭은 예수님을 서양인들에게 친근한 모습으로 신자들에게 각인시킬 필요를 느꼈다. 아니 유혹을 느꼈다. 그래서 교회 화가들에게 예수님을 그리거나 조각하도록 했다. 처음에는 많은 사람들이 반대했다. 우상숭배라고. 특히 당시 가톨릭의 본부격인 콘스탄티노플의 동방정교회가 반대했다. 그 무렵 로마제국의 수도는 콘스탄티노플이었다. 하지만 로마가톨릭은 물러서지 않았다. 미개한 게르만족을 교화시키기 위해서는 꼭 필요한 일이라고 우기면서. 사실 로마가톨릭과 동방정교회가 결국 11세기에 갈라선 가장 큰 이유의 하나가 이 문제 때문이었다.
게다가 가톨릭은 백인이 유색인종보다 우월하다고 생각했다. 그 뒤 교회에 속한 서구 화가들은 예수님이 유대인인 줄 뻔히 알면서도 유대인의 모습과는 완전 동떨어진 장발의 백인으로 예수님을 그리기 시작했다. 예수님을 백인으로 그린 이면에는 밝은 색은 선을 의미하고 어두운 색은 악을 상징한다는 발상이 그들의 무의식 속에 잠재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생각하게 된 종교적 연원을 살펴보자.
유대인은 셈족
유대인은 셈족이다. 곧 노아의 큰 아들 셈의 후손들이다. 성경에 의하면 대홍수 이후 살아남은 노아에게 세 아들이 있었다. 셈, 함, 야벳이 그들이다. 이들이 인류의 조상이다. 성경에 보면 둘째 아들 함은 포도주에 취해 벌거벗은 채 자는 아버지를 돌보지 않아 노아로부터 저주받는다.
▲노아의 만취, 미켈란제로, 1509, 바티칸 시스티나 소성당 천장, 세 아들의 피부색이 다르다
그 뒤 큰아들 셈의 후손들은 동쪽으로 가 이들로부터 중동아시아계가 나왔다. 히브리, 시리아, 아시리아, 페르시아, 아라비아 그리고 멀리 극동의 몽골족, 한민족 등이다. 셈족에서 유대인의 조상 아브라함이 나왔다. 이렇듯 원래 유대인은 셈족 곧 아시아계인 것이다. 둘째아들 함은 아프리카 쪽으로 갔고 그에게서 이집트, 이디오피아, 리비아 등 아프리카계 사람들이 나왔다. 막내 야벳은 유럽으로 가서 그에게서 코카서스인과 아리아인 등 백인이 나왔으며 이들에게서 바다를 끼고 사는 백성들이 갈라져 나왔다. (참고로 영어로 반유대주의를 ‘anti-Semitism'이라 한다. 그만큼 서양인들에게는 유대인이 셈족이라는 인식이 강하다. 이 단어는 같은 셈족에 속하는 다른 민족은 제외한 채 유대인만을 가리키는 데 사용되어 ‘유대인을 향한 반감’의 뜻으로 통용되고 있다.)

이런 인종적 구분은 상당부분 실제적 사실로 규명되었다. 서구의 세계관과 인종 구분은 이것에 근거하고 있다. 현대 진화론자들도 모든 인류가 공통의 조상으로부터 시작했다는 데에는 창조론자들과 의견을 같이하고 있다. 유전자 Y염색체로 본 인류의 이동 경로를 보면 6만 년 전 아프리카를 떠나온 현생인류는 중동에서 나누어졌다.
수메르 말기의 사람, 아브라함
우리는 아브라함이 양을 치고 살았기 때문에 유목민 출신인줄 알고 있다. 아니다. 그는 수메르 문명이 가장 발달했던 우르에서 태어나 자랐다. 도시 출신인 것이다. 그 무렵 아브라함이 살았던 갈대아 우르는 교역이 활발한 국제 항구도시였다. 당시 수메르 문명은 놀랍도록 발달한 고등문명이었다. 너무 물질이 발달하자 부작용도 일어나 사람들이 지나치게 타락하고 우상숭배가 만연했다. 유대민족의 출발점을 이해하기 위해선 아브라함이 살았던 우르의 수메르문명을 알 필요가 있다.
수메르 문명이 고도로 발달한 문명이라는 사실은 수메르 점토판의 문자가 판독된 20세기 전후해서야 밝혀졌다. 수메르 문명은 성서에서 실마리를 찾으려는 고고학자들 덕분에 발견됐다. 더구나 글이 적힌 점토판들이 대량으로 발견되었다. 그 옛날에 글이 있었던 것이다. 우리는 역사의 기록이 없는 시대를 ‘선사시대’라 부르고 기록이 남겨진 시대를 ‘역사시대’라 부른다. 수메르 문명이 인류 최초의 문명으로 인정받는 것은 바로 이 역사시대를 최초로 열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수메르 문명에 대해 잘 알게 된 것은 그들의 문자를 해독함으로써 수메르 문명의 실체를 알게 되었다.
게다가 발굴된 문명의 정도가 주변에 비해 너무나 월등해 외지에서 온 이주 고등문명이라는 설까지 나왔다. 이러한 수메르 문명과 문화는 주변과 후대에 큰 영향을 미쳐 히브리 문화와 유대교에도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수메르 문명과 문화에 대해 알아보자.
동양과 유사한 풍속들
수메르인은 '검은머리 사람'이라는 뜻이다. 그들은 자신들을 "검은 머리의 사람들", 자신들이 사는 땅을 수메르라 불렀다. 일부 학자들은 수메르인의 편편한 두개골 모양(편두)과 검은 머리 등으로 미루어 동아시아 민족 가운데 하나가 문명을 갖고 갑자기 나타나 세운 것이 수메르 문명이라고 보았다. 그들의 검은 머리와 편두뿐 아니라 수메르 언어가 우리 한글과 어순도 같고 토씨를 같이하는 교착어라는 주장도 있다. (출처; 수메르어와 한국어는 교착어이다, 안창범, 제주대 명예교수)
수메르 학자 고든박사는 ‘수메르인들은 메소포타미아에 정착하기 전에 이미 그들의 고유한 문자인 설형문자를 가지고 왔다’고 했다. 주목할 만한 사실은 그들이 동양의 도덕주의를 바탕으로 살았다는 점이다. 학교 선생님을 아버지라 불렀고 선생은 제자를 아들이라 했다. 이외에도 신정일치와 제천의식이 동양과 비슷하며, 60진법과 음력을 사용했다. 심지어 결혼 전에 함을 지는 풍습과 순장풍속, 왼씨름 등 우리와 유사한 풍속도 있었다.
음력 사용하는 유대인
고대로부터 동양은 음력을 쓰고 서양은 양력을 사용했다. 우리 민족도 예전에는 음력을 썼다. 그러던 것이 한일 합방 이후 일본이 우리 민족에게 음력을 못 쓰게 하고 지금의 양력을 쓰게 만들었다.
유대인들은 고대로부터 음력을 써왔으며 지금도 음력을 쓴다. 그들의 생활은 고대로부터 달을 중심으로 이루어져왔다. 그래서 달이 뜨는 저녁이 하루의 시작이다. 창세기 1장 5절을 보면, “...이렇게 첫날이 밤, 낮 하루가 지났다”로 되어 밤을 낮보다 먼저 적고 있다. 그들의 안식일은 달이 뜨는 금요일 저녁에 시작하여 다음 날 곧 토요일 달이 뜰 때까지이다. 그리고 한 주일은 안식일이 끝나는 토요일 일몰부터 시작된다. 그리고 한 달도 처음 초승달이 보이는 저녁때부터 시작되었다. 해가 바뀌는 정월 초하루는 가을 추분 직후의 초승달부터 시작했다.
“그분께서 달로 절기들을 정하셨으며...”(시 104:19)
달의 삭망주기는 29.5일이다. 그래서 음력 한 달은 29일과 30일로 이루어져 있다. 이렇게 음력에서는 한 달 29일과 30일을 번갈아 쓰다 보니 한 해가 354일이 되어 지구의 태양 공전주기 365일을 기초로 하는 양력 보다 11일이 짧다.
그런데 하느님이 유대인들에게 애굽에서 탈출해 나온 걸 기념하는 유월절의 절기를 지키라 했다. 당시 계절이 봄이었다. 유월절을 봄에 지키려면 음력을 쓰면서도 태양의 절기에 맞추어야 했다. 그래서 유대교는 음력을 쓰면서도 양력 계절에 맞추기 위해 태음태양력을 고안해냈다. 곧 음력과 양력의 11차를 극복하기 위해 음력 19년 사이에 7번의 윤달을 만들어 집어넣음으로써 음력을 태양 절기에 맞추었다. 그래서 윤달이 있는 해는 30일이 더 늘어난다. 이 개정 역법이 소위 태음태양력이다. 음력에 기준을 두면서 계절도 맞춘 역법이다. 유대인들은 지금까지도 이것을 유대력(히브리력)으로 사용하고 있다. 곧 1년 사시사철의 큰 주기는 태양력을 따르지만 일, 월은 그들의 전통대로 음력을 지키는 것이다.
서기 7세기 유대교를 본 따 만든 이슬람도 음력을 쓴다. 그들은 지금도 음력만을 씀으로서 이슬람의 종교적 절기는 매년 11일씩 빨라진다. 그래서 라마단이 3년에 1달 여 씩 앞당겨져 봄에도, 겨울에도, 가을에도, 여름에도 오는 것이다.
유대력과 단군력
유대인들은 하느님이 아담을 기원전 3760년에 창조했다고 믿는다. 그래서 2017년은 유대력으로는 5777년이다. 유대인은 그들의 달력을 ‘현세력’이라 부른다. 천지창조 이후의 일을 기록하기 때문이란다. 우리는 단군이 고조선을 기원전 2333년에 세웠다고 믿고 있다. 그래서 올해가 우리 민족이 쓰는 단군력 곧 단기로는 4350년이다. 반만년 유구한 역사란 여기서 유래된 말이다. 이렇게 지구상에서 자기들의 민족력을 쓰는 민족은 유대민족과 한민족뿐이다.
유대인의 암송노래, 5음계로 우리 창 가락과 흡사해
유대인들은 그들의 기도를 흡사 우리의 창처럼 암송하곤 한다. 그 노래를 듣다보면 영락없는 우리 창과 가락이 같다. 5음계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유대민족은 암송과 노래에 강하다. 그들은 성경 읽을 때 몸을 앞뒤로 흔들면서 읽는다. 아니 노래 부른다. 선율은 낭송 조로 되어있다. 탈무드에도 멜로디를 동반하지 않고 경전 읽는 것을 금하고 있을 정도이다. 우리도 예전 서당공부 시절에는 음률을 집어넣어 글을 배우며 이를 암송했다.
유대인들 사이에는 중매결혼이 많다. 고대로부터 양쪽 집안을 잘 아는 랍비나 공동체 원로들이 중매를 많이 섰다. 그러면서도 이혼율이 세계에서 가장 낮은 민족이다. 심지어 유대인들은 결혼할 때 궁합을 맞춰보기도 한다. 유대인들에게도 우리와는 좀 다르지만 12간지 동물이 있다. 유대인들은 이걸 갖고 궁합을 보기도 한다.
유대인의 두 줄기; 세파라디와 아쉬케나지
미국 유대인들을 보면 대부분 백인들인데 그들이 동양인 후손 맞아요? 여기에도 유래가 있다. 유대인은 크게 보면 두 줄기가 있다. 하나는 옛날 이베리아 반도의 이슬람 왕국 시대와 스페인 왕국 시절에 살았던 유대인들이 그 하나요, 다른 하나는 라인 강변에 살았던 유대인들이다. 전자를 세파라디 유대인이라 부르며, 후자를 아쉬케나지 유대인이라 부른다. 세파라디(Sepharadi)는 스페인(Sepharad)을, 아쉬케나지(Ashkenazi)는 '독일'(Ashkenaz)을 뜻하는 히브리어이다.
19세기까지 팔레스타인 지방에 살던 유대인 대부분은 세파라디계였다. 그래서 이들을 정통 유대인이라 부른다. 반면 아쉬케나지는 일반적으로 라인 강 유역과 인근 프랑스 지역에 살다가 11~13세기 십자군전쟁 때 러시아 등 동구로 이주한 유대인을 통틀어 일컫는 말이다. 중세시대 라인 강은 중요한 상업교통로였다. 당시 마인츠 ·쾰른 등 라인 강 주변 지역에는 유대인 상업 공동체가 있는 마을들이 많이 있었다. 이들이 십자군 전쟁 때 박해와 학살에 시달리다 동구와 러시아로 피난 간 것이다. 그리고 그 뒤 15세기 말 스페인에서의 유대인 추방, 17세기 30년 전쟁으로 독일 지역에서의 유대인 피난 등 많은 유대인이 동구권으로 몰려들었다. 그들이 오랜 세월 게르만과 슬라브 민족들 속에 살다 보니 피가 섞여 백인화 되었다. 하지만 그들의 뿌리는 셈족이다.
셈어와 게르만어의 혼용에 뿌리를 둔 그들의 언어 ‘이디쉬’어가 이를 증명하고 있다. 반면 세파라디의 전통적 언어는 고대 카스틸랴 어에 기반을 둔 유대즈모(Judezmo) 혹은 라디노(Ladino)어로 알려져 있다. 이 언어는 고대 스페인어와 포르투갈어에 히브리어, 터키어, 그리스어, 아랍어, 프랑스어 요소가 혼합된 언어이다. 라디노어는 오늘날까지도 이스라엘 라디오 방송과 지역신문에 사용되고 있다. 이렇듯 언어가 그들 삶의 발자취를 반영하고 있다. 참고로 현재 미국 유대인의 95%가 동구에서 이민 온 아쉬케나지들이다. 반면 이스라엘의 유대인 구성비중은 세파라디 25%, 아쉬케나지 70% 내외라고 한다.
지금의 유대인은 나라를 잃고 이렇듯 2000년 가까이 갖은 박해와 학살을 피해 다니다 많은 피가 섞였다. 그래서 이제는 유대인을 혈통으로 정의할 수는 없다. 그럼에도 그들은 엄연한 셈의 후손들이다. 그는 우리와 같은 동양계인 것이다.
예수님은 유대인이지만 인종을 초월하신 분이다. ‘정의와 평등’으로 요약되는 율법의 정신에 더해 그 본질인 ‘사랑과 믿음’의 가치를 전파한 분이다. 율법의 형식에 사로잡힌 유대교를 민족종교로 가두지 않고 이방인에게도 개방해 구원의 길을 터놓으신 분이다. 그가 동양인지 서양인인지는 사실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닐 수 있다. 다만 그를 서구 기독교가 그랬던 것처럼 어느 한 틀에 가두고 싶지 않다.
글 | 홍익희 세종대 교수
2016.01.22 조선 기독교의 뿌리 - 강홍준의 읽기 그리고 잇기 - 중앙일보
(1)예수셩교젼셔(광셔십삼년 셩경 문광셔원 활판)
예수셩교젼서. 예수의 말씀을 전하는 책이다. 광셔는 광서(光緖)를 말한다. 청나라 광서제(11대 황제, 재위기간 1874~1908년) 13년(1887년) 셩경(盛京, 그러니까 당시 심양)에서 출간된 책이다.
▲1887년에 나왔다. 스코틀랜드 출신 제임스 로스(중국이름 라약한)이 펴냈다. 중국 센양(옛이름 봉천)에서 발간됐다.
젼셔는 전체의 글이라는 뜻인데 신약성서를 모두 수록했다. 예수셩교젼셔에 나온 누가복음 일부를 아래에 인용했다. 방탕한 아들 이야기다.
▲원문은 세로 쓰기다. 띄어쓰기도 돼 있지 않다. 읽기 쉽도록 띄어쓰기를 했다. 번역은 대한성서공회의 개역한글번역판이다.
"아바니!"(아버지여)
아반은 아버지, 아비다. 아반은 평안도 사투리다. 예수셩교젼서를 쓴 사람은 스코틀랜드 출신 제임스 로스(중국명 나약한) 목사. 그가 번역한 성경을 읽다보면 평안도 사투리가 나온다.
우리말로 처음 나온 성경은 평안도 사투리다.
제임스 로스 목사. 그는 1874년 스코틀랜드에서 중국으로 온 선교사다. 그런데 그에게 한글을 가르쳐 준 사람이 있다. 평북 의주 출신 이응찬. 그는 평안도 사람이다. 이응찬은 로스 목사에게 한글을 가르쳐줬고, 로스 목사는 그를 통해 같은 고향 출신인 이성하, 백홍준, 김진기 세 청년을 만났다고 한다.
로스 목사는 이응찬을 만난 지 3년 만인 1877년 '한국어 첫걸음'이란 책을 영어로 펴냈다. 한국어 회화책을 쓴 것이다. 성경을 번역하기 앞서 철저히 한글을 배운 셈이다.(선교사들은 정말 놀랍다!)
로스 목사는 1878년 중국어 성경책을 한글로 옮겼다. 물론 신약성서이며, 첫번째는 누가복음이다. 당연히 누가복음에서도 평안도 사투리가 묻어난다.
사실 우리말 연구의 시작은 서양 선교사들이 했다. 세종대왕께서 만든 한글이 나온 뒤 한글에 대한 연구라는 게 있었겠나. 암클이나 뭐니 하면서 괄시만 하지 않았나.
로스 목사, 이응찬과 그의 친구 3명이 시작한 한글 성경 번역. 앞으로 집중 탐구해보려 한다.(계속)
2016.02.09
(2)예수셩교 누가복음젼셔(1882년)
1882년 출간된 한글 번역 성경은 누가복음이다. 광세는 광서(光緖)를 말한다. 청나라 광서제(11대 황제)가 재위를 시작한 게 1874년이므로 팔년이면 1882년을 뜻한다. 그해 3월 24일 중국 심양에서 출간됐다.
▲1882년 한글로 나온 첫번째 성경. 로스목사가 번역했으며, 중국 심양(센양) 문광서원에서 출판했다고 돼 있다.
이만열 숙명여대 명예교수(전 국사편찬위원장)은 이 책의 가치를 이렇게 평가했다.
한국개신교 역사상 최초의 성경이다. 한지로 된 51쪽 23.5×14.5cm의 작은 책이었으나, 한국사회와 한국교회에 ‘대리석이나 청동으로 된 것보다 훨씬 오래 갈 기념비로 우뚝 솟아났다.
이 책의 번역자는 제임스 로스(1842~1915, 연합장로교 소속) 목사와 영국인 동역자 존 매킨타이어 목사, 평안북도 의주 출신 조선인들이다. 로스 목사에게 한글을 가르친 이응찬과 동향의 조선인, 홍삼을 팔러 중국에 왔다 열병에 걸려 죽을 뻔했으나 로스 목사의 도움으로 살아난 서상륜 등이다.
누가복음 1장 1절부터 4절의 로스 목사 번역본과 그것의 번역문, 개역한글판 성경을 비교했다. 1882년 로스 목사 번역본은 가로체가 아니며, 세로체이며, 띄어쓰기가 돼 있지 않다.
신약성서 4복음서 중 하나인 누가복음은 예수의 제자인 누가가 데오빌로 각하에게 그동안 보고 들은 예수의 행적을 세세히 적어 전한다는 내용으로 시작된다. 일종의 도입에 해당된다.
로스 목사 번역본은 지금 성경과 비교해 볼 때 문장구조부터 크게 다르다. 당시 로스 목사는 번역을 위해 한문성경(漢文文理聖經)과 그리스어성경을 참고했다고 밝히고 있다. 한문투의 문어체를 쉽게 발견할 수 있다. 다만 번역에 참여한 의주 출신 조선인들이 준 영향 탓인지 성경 곳곳에서 서북방언(평안도 사투리)도 섞여 있다.
아래는 마가복음 1장 24~27절에서 나온 예수와 귀신의 대화 내용이다.
예수가 귀신에게 "입닷고나오라(입 닫고 나와)"고 명하자 귀신든 사람의 몸에서 귀신이 큰소리를 '불우제기고(불어젖히고)' 나오는 장면이다. 평안도 사투리가 고스란히 남아 있다. (계속)
2016.03.02
(3)甲骨文合集
총 13권. 갑골문을 연구한 대표적인 책이다. 궈모뤄(郭沫若, 1892-1978년, 중국의 시인) 가 갑골문 4만1956자를 모아 연구한 결과물이다. 갑골문이란 기원전 14세기에서 11세기 중국의 고대왕조인 상(商)나라의 후기에 사용되었던 문자다.
▲갑골문합집 1권. 연세대를 비롯해 몇몇 대학 도서관에 비치돼 있다.
갑골문에서 '갑'은 귀갑(龜甲), 거북의 배껍질이며, 골(骨)은 소의 어깨뼈나 다리뼈를 의미한다. 여기에다 글씨를 새겼다고 해서 갑골문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갑골문은 거북 등껍질에 새겨져 있는 글로 알려져 있었으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고 한다. 등껍질엔 글을 새기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배껍질에 새겨져 있던 갑골문의 실체(14138편)은 아래의 그림과 같다.
그 내용은 아래와 같다.(김태완 저, '중국의 상형문자' 인용)
갑골문합집 14138편
戊子卜(무자일에 점을 치고) 貞(묻습니다)
帝及四月令雨(상제는 이번 4월에 비를 내려줄까요?) 一二三
四五(하나 둘 셋 넷 다섯번 물었다)
비가 내리겠느냐고 다섯번 물었다. 아마 가뭄이 심했던 때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비가 오는지 알고 싶어 점을 쳤다는 내용이다. 실제로 점괘대로 "10일 후 과연 비가 왔다"는 내용도 담겨 있다.
미로운 건 갑골문이 쓰인 시점이 지금으로부터 3000년이 넘는데도 불구하고 갑골문이 실제 문자로 인식된 건 1899년이었다고 한다. 청나라 국립도서관장을 지냈던 왕이룽(王懿榮, 1845-1900년)이 당시 민간에서 말라리아 치료약으로 통용돼 다려 먹던 용골(龍骨, 짐승의 뼈)에 새겨진 문자를 발견했다. 이 때가 갑골문 발견의 기원이다.
갑골문은 상형이다. 상형(象形)이란 사물을 본 떠 나타낸 문자를 뜻한다. (계속)
■ 2017.04.15 이스라엘의 예언자 ‘아모스’...정의는 어디서 출발했나?
▲ 예언자 아모스 photo thecatholicatalogue.com
독일 실존주의 철학자 카를 야스퍼스는 1949년 펴낸 ‘역사의 기원과 목적(Vom Ursprung und Ziel der Geschichte)’이란 책에서 현대문명을 지탱하고 있는 사상의 뿌리를 기원전 8세기에서 기원전 3세기에 이르는 소위 ‘축의 시대’에서 찾았다. 그 무렵 꽃피우기 시작한 종교적이며 철학적인 혁명에서 현대문명이 시작되었다고 주장했다. 그는 중국, 인도, 페르시아, 팔레스타인, 그리고 그리스-로마에 등장하는 사상이 그 후 등장하는 종교와 철학사상의 바탕이 되었다고 했다.
예컨대 공자, 노자로 시작된 중국 사상은 그 이후 묵자, 장자, 맹자로 이어져 거대한 아시아 문명을 탄생시키는 모체가 되었다. 우파니샤드를 통해서는 힌두교를, 그리고 붓다를 통해서 불교를 배태시킨 인도 사상은 물질주의, 회의주의, 허무주의와 인간 내면의 신성을 발견하고 그런 것들을 각자의 삶에서 발현하는 체계를 발명하였다. 페르시아에서는 자라투스트라라는 예언자가 등장하여 선과 악의 대결이라는 이원론에 근거한 세계관을 만들어 후대 철학과 종교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고대 그리스에서는 호메로스와 헤시오도스를 통해 문학이, 헤로도토스와 투키디데스를 통해 역사가 탄생했다. 그리고 소크라테스, 플라톤을 필두로 철학과 정치학이 시작되었다.
팔레스타인도 이런 현대문명의 뿌리 중 하나다. 여기서는 ‘예언제도’와 ‘예언’이라는 독특한 현상이 등장한다. 여기서 예언이란 현실을 직시하여 희망 찬 미래를 건설하기 위해 필요한 지적이며 정신적인 토대를 마련하기 위한 청사진이다. 그리고 그런 청사진을 제시하는 인물을 ‘예언자’라고 부른다.
‘예언자’에 해당하는 고대 히브리어 세 단어가 있다.
가장 먼저 등장한 단어는 ‘보는 사람’이란 의미를 가진 ‘로에(Roe)’다. ‘로에’라는 단어는 고대 이스라엘이 국가를 건설한 기원전 10세기 이전에 사용되었는데 미래 일을 예측하고 자연현상을 독특한 방식으로 해석하는 사람을 이르는 용어다.
두 번째 등장한 단어가 ‘신의 말을 듣고 자신의 삶을 통해 사람들에게 그 메시지를 전달하는 도구’란 의미를 지닌 ‘나비(Nabi)’다. ‘나비’는 자신의 삶의 터전에서 가장 중요한 삶의 원칙을 찾아 자신의 생각, 말, 행동을 통해 가감 없이 드러내는 사람이다.
세 번째 단어는 ‘호제(Hozeh)’다. 호제는 단순히 보는 사람이 아니라 ‘그 핵심을 꿰뚫어 보는 자’란 의미다. 이 단어는 기원전 7세기경에 처음으로 등장한 단어로, 오늘날 우리가 미국 인권운동가 마틴 루터 킹을 이를 때 사용하는 ‘예언자’와 같은 의미를 담고 있다. 고대 이스라엘은 이 예언제도를 통해 국가나 사회에 가장 중요한 가치를 주장하였다.
임시 외국인 노동자, 히브리인
고대 이스라엘을 건립한 ‘히브리인’은 요즘 말로 바꾸면 ‘임시 외국인 노동자’ 혹은 ‘나그네’ 정도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 와 있는 외국인 노동자들을 이르는 고대 히브리어가 바로 ‘히브리(Hebrew)’다. 이 단어의 어근인 히브리어 동사 ‘아바르’는 ‘광대한 지역이나 강을 건너 다른 지역으로 진입하다’이다. 고대 근동사회에서 도시는 강 주변이나, 강줄기를 새로 만든 수로 근처에 건설하는 게 보통이었다. 대부분이 사막이기 때문에 한 도시에서 다른 도시로의 이동은 끝없이 펼쳐진 사막이나 강을 건너야 한다는 것을 뜻했다. 고대사회에서 자신의 고향이나 도시를 떠나는 일은 죽음이었다. 고대 바빌로니아의 함무라비 법전에도 사형에 해당하는 극형이 성벽 밖으로 범죄자들을 내쫓는 행위로 나와 있다.
스스로 자기가 속한 혈연공동체를 떠나 경제적 자유를 찾아 헤매는 사람들을 히브리어로 ‘이브리’라 불렀다. 이 단어는 고대 그리스어로는 ‘Hebraios’, 라틴어로는 ‘Hebraeus’라고 번역되었다가 후대에 영어 ‘Hebrew’가 되었다. 고대 전승에 의하면 노아의 아들 셈은 ‘에베르 자손들의 조상’이며 그 후대 아브라함은 ‘히브리인’으로 불린다. 신앙의 조상 아브라함은 자신이 살던 우르지방에서 떠나 시리아, 이집트, 그리고 다시 가나안에 정착한 전형적인 ‘히브리인’이다.
이들의 이동이 이집트의 고고학적인 자료들이나 벽화, 기록에 본격적으로 등장하는 시기는 기원전 19세기경부터다. 고대 이집트 문헌에서는 이들을 ‘샤수(shasu)’라고 불렀는데, 고대 이집트어로 ‘맨발로 이동하는 자’란 뜻이다. 기원전 13세기 파라오 메르넵타 석비에선 이들이 ‘이스라엘’이란 명칭으로 등장한다. 이 석비에 고대 이집트어로 ‘이스리이르 페케트 벤 페르테프’, 즉 “이스라엘은 초토화되었고 그 자손은 더 이상 없다”라는 문장이 등장한다. 샤수는 모압, 에돔, 그리고 이스라엘 왕국 지역 출신자들을 지칭하는 용어이다. 이집트어 문헌에는 샤수 외에 ‘하비루(Habiru)’라는 명칭도 등장한다. 기원전 13~기원전 2세기에 아마르나 문헌에 등장한 이 용어도 히브리인들과 어원적·사회학적으로 연관이 있다.
이들 대부분은 고대 근동 도시의 소작농으로 있다가 왕이나 귀족들에게 세금을 바치지 못하자 고향을 떠나 외국으로 도망친 사람들이다. 성서에서는 이들이 이집트에서 노동자로 살다가 모세라는 지도자와 함께 탈출한 자들로, ‘온갖 잡족’이라고 표현돼 있다. 이들은 이집트란 당시 최고의 문명국에서 하층민으로 살다가 자신들을 변호하는 신(神)이 있다는 모세의 말을 듣는다. 그 신은 다른 나라들의 왕이나 귀족들을 위한 신이 아니라 히브리인들의 고통을 귀로 직접 들으며 그들의 고생을 눈으로 직접 보는 신이다. 그 신의 이름은 ‘야훼’이다.
그는 ‘고아와 과부, 그리고 가난한 자’를 위한 신이다. 이들에게 ‘야훼신이 유일신’이란 표현은 다른 민족이나 집단이 믿는 신을 인정하지 않고 자신들의 신만을 유일한 신으로 섬긴다는 뜻이 아니다. ‘야훼신이 유일신’이라는 표현에는 사회의 약자들을 위한 신만이 유일하게 ‘신’이라 불려야 한다는 신앙관이 담겨 있다. 이스라엘의 신은 ‘고아의 아버지, 과부를 돕는 재판관’으로 표현된다.
특히 ‘시편’ 82편엔 이스라엘 신이 법정에 나와 신들을 모아놓고 재판하는 장면이 등장한다. 다른 신들과는 달리 이스라엘 신만이 ‘고아와 과부를 변호해주고 가련한 사람과 궁핍한 사람’을 돌보는 신으로 등장한다. 이들을 돌아보지 않는 신들은 거짓이며, 그 신들은 인간들처럼 죽을 것이라고 경고한다. 기원전 8세기에 등장한 ‘아모스’라는 예언자는 바로 사회의 가장 중요한 가치가 이 소외된 자들의 복지와 권리를 보장하는 데 있다고 주장한다. ‘정의’는 바로 이들에 대한 관심에서 시작한다.
가난한 농부이자 목동이었던 아모스
예언자 아모스는 고대 이스라엘 역사에서 태평성대를 누리던 시절에 살았다. 그는 기원전 793~기원전 753년 북이스라엘의 여로보암 2세 때 활동한 예언자다. 아모스는 자신의 이름을 최초로 문헌에 남긴 소위 ‘문서 예언자’이기도 하다. 그가 다른 예언자들과 다른 점은 가난한 농부이자 목동이었다는 사실이다. 그는 남유다의 도시 베들레헴에서 8㎞ 떨어진 테코아라는 시골 출신이다. 그는 거친 광야에서 양떼를 몰고 다녔다. 남유다뿐만 아니라 북이스라엘의 초원도 수없이 돌아다니며 예루살렘이나 베델과 같은 대도시에서 발생하는 부익부 빈익빈 현상을 온몸으로 목격했다. 그는 자신의 배만 채우면 만족하는 보통 인간과는 달리 별이 쏟아지는 밤하늘 사막 한가운데서 동료 인간들이 종교와 결탁한 왕족, 특권층 귀족들에 의해 고통당하는 것을 보고 가슴 아파한다.
예언자는 미래를 예측하는 사람이 아니라 자신을 넘어서 사회 약자의 처지를 자신의 처지로 여겨 눈물을 흘리는 사람이다. 그는 눈물을 흘릴 뿐만 아니라 어떻게 하면 이들의 고통을 대변할 수 있을까를 고민하는 사람이다. 그리고 그는 불가능한 일에 도전한다. 아모스는 자신도 알지 못하는 북이스라엘의 여로보암 2세와 그의 예언자들을 향해 정의로운 말을 전해야겠다고 결심한다. 요즘 예를 들자면 대한민국의 시골에 사는 농부가 평양에 가서 북한 정치의 잘못에 대해 연설하려는 꼴이다.
그는 신의 소리를 마음속으로 듣는다. 신은 그에게 북이스라엘의 왕, 여로보암 2세가 국가의 번영이 자신의 선정의 결과라고 착각하는 자만심을 꾸짖으라고 명령한다. 남유다의 무명인사인 아모스에게 북이스라엘로 가서 신의 경고를 전하라는 요구는 터무니없는 것처럼 보였다. 아모스는 깊은 묵상과 기도를 통해 자신과 같은 ‘히브리인들’에게 진리의 말을 선포하기 위해 북이스라엘 베델로 향한다.
고대 이스라엘의 경제구조는 ‘나할라’라는 특별한 체계를 통해 지탱됐다. ‘나할라’는 보통 ‘유산(遺産)’이라고 번역되는 히브리어다. 히브리인들은 가나안에 정착하여 이스라엘 공동체를 세운 후, 모든 부동산을 이스라엘 12지파에 배분했다. 이 부동산은 다시 각 지파에 속한 친족들에게 나뉘어졌고, 친족들 밑에 아버지를 중심으로 한 가족인 ‘베이트’에게 할당됐다. 이 직계가족에 속한 양도불가한 부동산이 바로 ‘나할라’다. 그래서 모든 이스라엘 사람들은 자신들의 땅을 청지기처럼 가꾼다. 이들은 야훼가 ‘나할라’의 주인이라고 생각했다. 토지는 몇몇 귀족들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에게 이익을 가져다주었다. 이들에게는 자신들이 사는 성문 앞에 모든 마을 주민들이 참여하는 법정이 있었다. 이 법정은 사회의 약자들을 보호하는 장치로 주민들이 선출한 10여명의 원로가 약자들의 고충을 직접 듣고 결정을 내리는 구조였다.
아모스는 이 ‘나할라’ 제도가 왕족, 그리고 왕족과 결탁한 귀족들, 또 이들의 편의를 위해 존재하는 사제들과 예언자들을 위해 존재한다고 봤다. 그리고 가난과 곤경에 빠져 있는 ‘히브리인들’을 목격했다. ‘나할라’의 주도권은 모든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히브리인들을 경제적으로 억압하는 몇몇 탐욕스러운 중앙 관리들에게 넘어간 상태였다. 이집트에서 종살이할 때 선택한 그들의 신은 이스라엘을 지탱하는 버팀목이 가난한 이들에 대한 배려와 사회정의라고 가르쳤다. 자꾸 늘어가는 불의는 이스라엘의 존재 이유, 그 기반 자체를 흔드는 정신적 재난이었다.
아모스에게 신과의 계약은 본질적으로 동료 인간에 대한, 특히 사회 약자에 대한 배려와 직결돼 있다. 아니, 그 신과의 약속은 약자에게 베푸는 관심과 선행으로 완성한다. 그는 유대의 모든 구성원들의 죄를 낱낱이 고발한다. 중산층, 정부, 왕, 권력기관, 그리고 종교인들이 자신들끼리 성전 안에서만 유유자적하며 신을 섬기는 척한다고 고발했다. 아모스는 사마리아의 부유한 여성들을 ‘바산의 암소’라고 부른다. 바산은 실제로 요단강 건너편 곡창지대를 이른다. ‘바산의 암소’라는 명칭은 사실 비하하는 용어는 아니지만 결국은 도살장에 끌려가 살해당하고 갈고리에 꿰어 매달릴 운명이다. 지금은 호위호식하며 즐겁게 사는 귀부인들처럼 행동하지만, 머지않아 그들은 비참한 운명을 맞이할 것이라고 예언한다.
신이 비난하는 범죄는 우리가 아는 살인, 강간, 폭력 등만이 아니다. 이러한 범죄들이 분명 사회의 도덕을 현저하게 파괴하는 중대 범죄이긴 하지만, 아모스는 모든 시대와 장소를 초월하여 항상 발견되는 사회에 만연한 죄를 지적한다. 이 죄들은 잘 드러나지 않고, 특히 가진 자들의 자발적 노력과 행위를 통해 견제되는 것들이다. 야훼신 역시 이러한 범죄들이 나라 전체를 멸망시킬 정도로 신을 화나게 하는 범죄라고 지적했다. 우리가 주위에서 항상 보는 뇌물 주기, 속이거나 끼워 팔기, 가난한 자들 학대하기, 그리고 채무자들의 고통에 대한 무관심 등이 이에 해당한다. 특히 부도덕한 마음과 행동은 사회 전체를 위험에 빠뜨린다. 아모스는 “도덕은 제의나 종교적 의무처럼 중요한 사항으로 부각되지 않으나 도덕성이 신앙심보다 더 중요하다”고 주장한다. 야훼신에게 예배 드리기 위한 전제조건은 도덕성의 확보이다.
아모스는 신을 대신하여 북이스라엘에 외친다. “나는, 너희가 벌이는 절기 행사들이 싫다. 역겹다. 너희가 성회로 모여도 도무지 기쁘지 않다. 너희가 나에게 번 제물이나 곡식 제물을 바친다 해도 내가 그 제물을 받지 않겠다. 너희가 화목제로 바치는 살진 짐승도 거들떠보지 않겠다. 시끄러운 너의 노랫소리를 나의 앞에서 집어치워라! 너의 거문고 소리도 나는 듣지 않겠다.”
야훼신은 아무리 사람들이 모여 성대한 예배를 드리고, 값진 예물도 드리고, 오케스트라를 동원한 연주와 찬양을 드려도 받지 않겠다고 선포한다. 그는 그런 위선적인 예배가 역겹다고 신랄하게 비판한다. 사회정의를 실현하지 않는 사람들의 예배는 가짜다.
아모스에게 불의와 도덕적 불감증은 신성모독이다. 야훼신과 이스라엘의 관계는 계약의무를 이행할 때 유지된다. 그 의무가 바로 사회정의이다. 사회정의를 행하지 않는 이들이 드리는 의례나 예배는 웃음거리다. 사실 예배라는 것은 신이 인간에게 복을 내리고자 하는 은총이지, 신에게 필요한 제도가 아니다. 예배는 인간이 의례를 통해 신의 존재를 자신의 공동체에 확인시키고 자신들이 잘못한 행위에 대해 용서를 비는 제도이다. 이스라엘인들은 점점 자신들이 신에게 많은 제물을 바치면서 호의를 베푼다고 생각하기 시작하였고 자신들이 어떻게 행동하든 형식적인 의례만 화려하게 치르면 된다고 생각했다. 성대한 의례도 가만히 생각해 보면 신이 원하는 것이 아니다. 인간들이 신이 자신 편이라는 정신적 쾌감을 갖기 위한 장치에 불과하다. 아모스는 도덕성을 가장 중요하고 절대적인 종교적 가치로 해석하였다. 신의 본질은 그의 도덕적 본성이다. 동료 인간에게 의롭고 자애로운 자는, 그 자신이 의롭고 자애로운 자가 된다. 자신과 동료 인간에게 도덕적인 자는 그 자신 안에 신성을 지니고 있는 존재가 된다.
아모스가 신을 대신해 고발한 것들
이스라엘 사회가 도덕적 불감증과 불의의 늪에 빠진 가장 큰 이유는 종교인들이 그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들은 사회의 강자 편에 서서 자신들의 세속적 이윤만 바라는 속물이 되었다. 북이스라엘에 가장 큰 성전이 있는 도시는 베델이었다. 과거 신앙의 조상 야곱이 사막 한가운데서 신을 만나 ‘사다리 꿈’을 꾼 후 이곳은 ‘베델’, 즉 ‘신이 계신 집’이 되었다. 베델은 원래 특정한 장소가 아니라 신을 간절히 만나려는 사람에게 신이 자신을 드러내는 그 어느 장소다. 그런 장소가 잠정적으로 ‘베델’이다. 북이스라엘 사람들은 남유다의 예루살렘과 맞먹는 웅장한 성소를 베델에 지었다. 이들은 신이 그 웅장한 성소 안에만 계신다고 확신하고 이스라엘인들을 성전으로 불러모아 헌금을 징수하기에 급급했다.
이런 상황에서 아모스는 예언자에 해당하는 세 번째 용어인 ‘호제’를 사용한다. 그 기본적인 의미는 ‘세상을 상식의 눈으로 볼 수 있는 자’이다. 새로운 시대가 요구하는 예언자는 더 이상 환상에 젖어 가난한 자들에게 형이상학적이며 삶과 유리된 말을 고상하게 포장하여 헌금을 걷어가는 자가 아니다. 아마샤는 아모스에게 고향으로 돌아가 그런 종교인 노릇을 하며 밥을 빌어먹으라고 종용한다. 그는 베델이 왕이 계신 곳이기 때문에 절대권력 왕에게 거스르는 말을 해서는 안 된다고 경고한다. 이 구절에서 당시 북이스라엘 종교의 타락상을 볼 수 있다. 종교인은 돈을 밝히는 세속 직업이 되었고, 종교는 정치와 유착되어 그 시녀 노릇을 하고 있었다.
우리가 사회지도층이라 굳게 믿고 선택한 자들이 스스로 누구인지 깊이 묵상하지 않고 그저 자신의 이기심을 좇을 때 그 사회는 허물어진다. 우리의 종교가 고아와 외국인 노동자 같은 사회적 약자의 눈으로 사회의 취약점을 발견해 그것을 개선하려는 노력은 게을리한 채 사회 기득권층의 이익만 강화하는 것은 사회의 근간을 무너뜨리는 치명적 실수다. 정의는 다른 사람의 눈으로 자신을 보는 행위다. 정의는 사회의 가장 취약한 계층을 살피고 그들이 원하는 삶을 경청하고 이루어주는 거룩한 행위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사회를 지탱하는 성스러운 가치를 ‘정의’라 한다. 대한민국은 정의로운 사회인가? 우리는 ‘외국인 노동자’의 눈으로 한국 사회를 바라볼 수 있는가?◎
출처 | 주간조선 2452호 글 | 배철현 서울대 종교학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