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수설 2021-11/ 11-01(월) 교황 방북 - 11-30 거실 카메라 해킹 공포
횡설수설 2021-11/ 동아일보
11-01(월) 교황 방북

2014년 12월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과 라울 카스트로 쿠바 국가평의회 의장은 반세기 넘게 적대시해 온 양국 간의 국교 정상화를 선언하면서 프란치스코 교황에게 특별한 감사의 뜻을 전했다. 1년 반 넘게 진행된 양국 간 비밀협상이 막판 벽에 부딪쳤을 때, 프란치스코 교황은 두 정상에게 개인적 서한을 보내 중재자로 나섰고 양국 대표단을 바티칸으로 초청해 돌파구를 마련했다. 이듬해엔 쿠바와 미국을 연쇄 방문해 화해의 지속을 축원했다.
▷교황은 예수의 열두 사도 중 한 명인 베드로의 후계자로서 로마 가톨릭교회의 수장이다. 성속(聖俗)의 권력을 아우르던 중세시대에 비하면 그 영향력은 크게 줄었지만 초국가적 권위에 바탕을 둔 교황의 스마트파워는 여전히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주요 사안마다 교황이 내놓은 한마디 한마디의 울림과 무게는 남다르다.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달 29일 바티칸 교황청으로 프란치스코 교황을 예방한 자리에서 북한 방문을 거듭 요청한 것도 ‘하느님의 외교관’으로서 교황이 이뤄낼 수 있는 기적 같은 외교에 기대 보려는 안간힘일 것이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북한이) 초청장을 보내주면 기꺼이 가겠다”고 답했다. 3년 전 답변 그대로다. 문 대통령은 2018년 9월 평양 남북 정상회담에서 교황 방북 초청을 제안했고,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교황이 오시면 열렬히 환영하겠다”고 했다. 이에 문 대통령은 그 다음 달 교황청을 방문해 이런 뜻을 전했고, 교황은 그때도 “공식 초청장이 오면 갈 수 있다”고 했다. 하지만 3년이 지나도록 북한은 바티칸에 초청장을 보내지 않고 있다.
▷북한도 한때 교황 방북을 추진한 적이 있다. 동구권이 우르르 무너지던 1991년 북한은 김일성 주석의 지시로 외무성에 교황 초청을 위한 상무조(TF)를 편성했다. 외교적 고립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다급함에서였다. 북한 당국은 과거 독실했던 한 할머니 천주교 신자를 어렵사리 찾아내 바티칸에 데려가기도 했다. 교황청은 그 할머니의 눈빛만 보고도 오랫동안 마음속에만 품어온 진짜 신앙을 알아봤다. 하지만 정작 북한은 이 일을 계기로 종교의 ‘무서움’을 절감했고, 상무조는 두 달 만에 슬그머니 해체됐다.(태영호 ‘3층 서기실의 암호’)
▷교황 방북이 성사되려면 김정은의 결단이 있어야 한다. 소탈하고 거침없는 프란치스코 교황인 만큼 절차와 형식을 따지지 않는 파격 방북을 추진할 수도 있다지만 초청도 없이 갈 수는 없다. 김정은이 할아버지처럼 궁여지책으로 교황을 초청할 가능성도 없진 않다. 그러나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냉전기 두 차례 폴란드 방문이 자유노조 결성과 공산정권 붕괴로 이어졌던 역사를 김정은이 모를까. 그 공포감부터 이겨내야 가능한 일이다.
이철의 논설위원 klimt@donga.com
11-02 核 선제 불사용

그 효용은 적의 핵 공격 의지를 사전에 약화시켜 전쟁 발발의 가능성을 차단하는 억지(deterrence)에 있다. 실제 사용하지 않아도 사용 가능성만으로 적을 두렵게 하는 힘, 그것이 바로 억지력이다. 1945년 일본의 두 도시에 원자폭탄이 떨어진 이래 많은 나라가 핵무기를 보유하고 그 대열에 끼어들기를 열망하는 이유이자, 지난 76년간 한 차례도 핵무기가 사용되지 않은 이유이기도 하다.
▷이런 핵무기의 주술적 위력 때문에 그 사용과 관련해선 말을 아끼며 ‘의도적 모호성’을 유지하는 것이 현명한 전략이었다. 하지만 인류를 절멸시킬 수 있는 절대무기가 세계로 확산하는 것을 방치해야 하는가. 아무런 지침도 없이 위험한 사람에게 핵 버튼을 맡겨둬도 되는가. 적어도 핵 공격을 받지 않는 한 먼저 핵무기를 사용하지 않겠다는 ‘선제 불사용(no first use)’ 원칙이라도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미국 조 바이든 행정부가 연말에 내놓을 핵태세검토(NPR) 보고서를 준비하면서 고민하는 문제들이다.
▷사실 이런 고민은 이미 버락 오바마 행정부 때 시작됐다. ‘핵 없는 세계’를 내세운 오바마 대통령은 선제 불사용 원칙 도입을 깊이 검토했지만 정책에 반영하지 못했다. 당시 부통령을 지낸 바이든 대통령도 같은 생각이었다. 다만 선제 불사용을 천명하는 대신 ‘미국과 동맹에 대한 핵 공격을 억지하는 것’으로 핵무기의 ‘단일 목적(sole purpose)’을 명시하는 방안을 제시했고, 대선 때도 그 입장을 견지했다.
▷이런 핵정책 전환 검토에 당장 유럽과 아시아의 동맹국들은 그것이 선제 불사용과 다를 게 뭐냐고 반발하고 있다고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가 최근 보도했다. 동맹국들은 미국이 동맹에 약속한 핵우산이나 확장억지 공약을 약화시켜 결국엔 러시아와 중국을 대담하게 만들 ‘적에게 주는 선물’이 될 것이라는 강한 반대 의견을 전달했다는 것이다. 한국이나 일본의 자체 핵개발을 촉발해 그 지역의 군비경쟁을 촉진할 수 있다는 우려도 나왔다고 한다.
▷핵 선제 불사용은 1964년 중국이 가장 먼저 세계에 공언한 원칙이지만 중국도 최근 핵 증강에 나서면서 생각이 달라졌을지 모른다. 러시아도 소련 시절 선제 불사용을 약속했지만 공산권 붕괴 이후 그 약속을 철회했다. 북한은 선제 불사용을 거론하면서도 ‘선제적 응징’을 위협한다. 커지는 안보 불확실성 때문에도 미국의 정책 전환이 쉽지는 않아 보인다. 하지만 선제적인 핵무기 통제론도 만만치 않아 바이든 행정부의 고심은 깊을 수밖에 없다.
이철희 논설위원 klimt@donga.com
11-03 “더러운 중국산”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더러운(dirty) 중국산 철강이 우리 시장에 접근하는 것을 제한할 것”이라고 말했다. 10월 31일(현지 시간) 유럽연합과 철강 관세 분쟁을 끝내고 기자회견을 하는 자리였다. ‘더러운 이유’는 덤핑을 일삼고 탄소배출 기준을 지키지 않기 때문이라고 했다. 나쁜 중국을 빼고 미국과 유럽이 화해한 셈인데, 여기에 바이든 대통령의 속내가 담겨 있다. 미국 중심으로 글로벌 공급망을 재편한다는 뜻이다. 거친 말투에서 보듯 미중 경쟁이 갈수록 험악해지고 있다.
▷바이든 대통령은 이날 이탈리아 로마에서 열린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 폐회를 앞두고 14개 동맹·우방국을 긴급 소집했다. 급조된 ‘글로벌 공급망 회복 정상회의’가 열리게 됐다. 그는 “동맹국 간 조율이 핵심”이라고 말했다. 동맹국 리스트에 중국은 없다. 바이든 대통령은 “안보를 위험에 빠뜨릴 단일 공급망에 의존해선 안 된다”고 했다. 생산시설을 중심으로 중국이 장악한 공급망이 안보 위협이라는 의미다. 미국 동맹국들은 중국 의존도를 낮춰야 할 상황이다.
▷중국은 우리나라 최대 교역국이다. 미중 사이에 낀 한국은 난처하게 됐다. 미국은 반도체 공급망 안정을 명분으로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등에 재고와 주문 등 정보를 제출하라고 요구한 상태이다. 두 회사는 중국에 공장을 뒀고, 현지에 수출도 한다. 미국이 요구한 정보에 고객(중국) 정보가 포함된 셈이다. 생산기지는 중국에 있고, 원천기술과 공급망은 미국에 의존하는 처지에서 한쪽을 선택할 수는 없다. 아슬아슬한 줄타기가 위태롭기만 하다.
▷LG그룹은 내년 미국 워싱턴DC에 사무소를 열기로 했다. 삼성과 SK도 같은 곳에서 대관 업무를 강화하고 있다. 미국 투자를 요구하는 바이든 행정부에 대응하기 위해서다. 당장은 공장 증설 등 미국 투자를 늘리고 있지만, 중국이 보고만 있을 리는 없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은 이번 정상회의에서 “인위적 소그룹은 백해무익하다”며 미국 중심의 동맹을 비난했다. 이러다간 기업의 전략적 판단 대신 두 나라 요구에 따라 공장을 더 지어야 할 수도 있다. 비효율과 막대한 비용까지 감당해야 할 처지다.
▷중국과 동북아시아는 글로벌 공급망에서 핵심 생산기지 역할을 하고 있다. 이런 역할을 미국과 동맹국이 단기간에 대체하기는 쉽지 않다. 장기전이 될 미중 다툼에서 살아남으려면 기술 생산능력 네트워크 등 실력을 쌓는 수밖에 없다. 국익 앞에선 바이든 대통령도 ‘트럼프식’ 화법을 구사하는 게 냉혹한 현실이다. 그의 말이 거칠어질수록 긴장의 끈을 더 조여야 한다.
이은우 논설위원 libra@donga.com
11-04 요소수 대란

경유 차량에 요소수가 떨어지면 시동이 걸리지 않는다. 화물차뿐만 아니라 승용차도 마찬가지다. 경유차 운전자들은 요소수 부족 경고등이 켜지면 주유소에서 요소수를 별도로 채워왔다. 요소수는 경유 연소 과정에서 많이 배출되는 질소산화물을 줄여주는 일종의 대기오염 방지제다.
▷경유차 운행의 필수품인 요소수가 부족해 비상이 걸렸다. 10L에 1만 원가량이던 요소수 가격이 2배 이상으로 올랐고, 급히 필요한 수요자를 노린 일부 판매상은 10만 원을 부르기도 한다. 웃돈을 주고서라도 구하면 다행이지만 물량 부족으로 요소수를 구하지 못한 화물차 운전사들은 발을 동동 구르고 있다. 이러다 보니 기존 요소수에 물을 더 타서 쓰자는 얘기까지 나온다. 하지만 요소와 정제수의 함량은 정교하게 맞춰져 있는 것이어서 자칫하면 배출가스 저감장치가 고장 나 큰 손해를 볼 수 있다.
▷요소수는 운행거리와 배기량 등에 따라 소모량이 다른데 승용차는 수개월에 한 번씩 갈아도 될 정도지만 매일 운행하는 대형 화물차는 2, 3일에 한 번씩 갈아야 한다. 2015년 이후 출고된 차량들은 유럽 기준에 맞춰 요소수가 없으면 운행을 못 하도록 설계됐다. 국내 화물차 330만 대 중 200만 대가량이 그런 차량으로 추산된다. 이대로 가면 연말에 요소수발 물류대란이 일어나지 말라는 법도 없다. 소방차와 구급차에도 요소수가 필요해 응급체계에도 비상이 걸렸다.
▷중국이 지난달 중순부터 요소에 수출 전 검사 의무화를 적용해 사실상 수출을 제한하면서 일어난 일이다. 한국은 요소의 80%를 중국에 의존하고 있다. 요소는 석탄에서 추출하는데 호주와의 무역 분쟁 여파로 중국에서도 석탄이 부족하고 가격이 급등한 상황이다. 또 요소는 식량 생산에 필수적인 화학비료의 원료다. 식량 안보 차원에서도 중국이 요소 수출을 제한하고 있는 것으로 무역협회는 분석했다. 여기에 더해 국내에서는 사재기가 일어나 물량 부족과 가격 급등에 영향을 끼치고 있는 것으로 정부는 보고 있다. 최근 3일간 요소수 판매량이 보통 때의 1개월분과 맞먹을 정도로 급증한 주유소가 나올 정도다.
▷요소수 부족 사태가 단기간에 해결될 것 같지는 않다. 우리는 요소를 전량 수입으로 충당한다. 중국 이외의 다른 나라로부터 수입을 늘리는 방법이 있다. 하지만 중국산보다 가격이 비싸고 시간도 오래 걸린다. 게다가 세계적으로 석탄 가격이 불안정해져 요소 가격은 더 오르고 물량은 더 줄어들 가능성도 없지 않다. 미국이 중국을 배제한 글로벌 공급망 구축을 본격화하고 있다. 미중 격돌 속에 우리가 수입을 못 할 품목이 더 생길 수 있다. 요소수 대란은 시작일 뿐일지도 모른다.
허진석 논설위원 jameshur@donga.com
11-05 안면인식 AI 공포

영장류(primates)에 대한 영상을 계속 보시겠습니까?” 올여름 미국의 한 페이스북 이용자는 이런 페이스북 알림을 받았다. 어쩌다 이런 질문이 나왔는지 추적해본 그는 경악했다. 열어본 영상 중 백인 경찰과 말다툼하는 흑인 남성을 페이스북의 안면인식 인공지능(AI)이 고릴라, 침팬지 등과 같은 영장류로 인식했던 것이다. 이 사실이 올해 9월 공개되자 페이스북은 “분명히 용납할 수 없는 AI 오류”라며 사과했지만 인종차별 논란에 곤욕을 치렀다.
▷최근 내부자 폭로 등 각종 악재를 맞아 회사명을 ‘메타’로 바꾼 페이스북이 안면인식 프로그램을 이달 안에 종료하기로 했다. 축적된 10억 명분의 관련 자료도 삭제한다. 메타 측은 “지속적인 불확실성 속에서 기술의 사용 범위를 제한하는 것이 적절하다고 생각했다”고 했다. 하지만 사전 동의 없는 생체정보의 수집, 저장을 금지한 미 일리노이주의 법을 위반했다가 올해 3월 6억5000만 달러(약 7680억 원)의 합의금을 물게 된 게 직접적 계기다.
▷2010년 말 시작된 페이스북 안면인식 기술은 AI를 활용해 영상, 사진 속 인물이 누구인지 알아내는 기술이다. AI는 사용자의 사진들을 분석해 식별하고 아는 사람이 페이스북에 사진을 올렸을 때 공유할 수 있게 해준다. 10년이 넘는 데이터 축적과 학습으로 페이스북 사진에 마우스를 갖다 대면 인물 이름이 뜰 만큼 정교해졌다. 친구끼리 추억을 쉽게 공유하게 해준다고 페이스북은 홍보했지만 영장류 사건 같은 착오와 사생활 침해 논란이 끊이지 않았다.
▷중국에선 안면인식 기술의 무차별적 사용이 큰 사회 문제다. 작년 11월엔 중국 산둥성의 아파트 모델하우스에 오토바이 헬멧을 쓰고 방문한 남성이 화제가 됐다. 부동산 개발업체가 첫 방문에 계약하면 할인 혜택을 준다며 안면정보를 모으자 이를 피하려고 헬멧을 쓴 것이다. 중국 정부의 청소년 이용시간 제한조치 때문에 게임업체들이 안면인식 기능을 강화한 뒤 일부 청소년이 심야에 잠자는 부모 얼굴에 스마트폰을 몰래 들이대는 일도 벌어진다고 한다.
▷한국에선 올해 초 안면인식 폐쇄회로(CC)TV와 AI를 연계한 코로나19 확진자 추적시스템 구축을 추진하던 경기 부천시가 여론의 반발에 부딪혔다. 방역이 아무리 중요해도 AI가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는 데 대한 두려움과 거부감이 만만치 않은 것이다. 신장위구르 자치구의 소수민족 감시 등에 안면인식 기술을 사용해 국제사회의 비판을 받는 중국은 올해 7월 최고인민법원이 사전 동의 없는 안면인식 기술의 이용을 제한하는 법을 만들었다. 한국도 안면인식 기술로 인한 인권 침해를 방지할 법체계 정비를 서두를 때가 됐다.
박중현 논설위원 sanjuck@donga.com
11-06 교내 휴대전화 사용금지

초중고교에서 최대 분쟁거리 중 하나가 휴대전화 사용이다. 국가인권위원회에는 2016년부터 관련 진정이 약 45건 접수됐는데 ‘전면 금지는 인권 침해’라는 것이 일관된 판단이다. 최근엔 대구 A고교에 대해 비슷한 결정이 나왔다.
▷A고 교칙에 따르면 학교에선 휴대전화 전원을 꺼놔야 한다. 수업시간은 물론 쉬는 시간이나 점심시간에 사용하다 들키면 휴대전화를 압수당하고 벌점을 먹는다. 세 번 걸리면 5일간 아침 청소를 해야 한다. 학교 측은 교사의 수업권과 학생의 학습권 보장을 위한 조치로 헌법에도 개인의 자유를 제한할 수 있는 조항이 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인권위는 관련 교칙이 통신의 자유를 침해한다며 기본권 제한을 최소화하는 방법을 모색하라고 권고했다.
▷교내 휴대전화 규제 완화에 힘을 실어준 건 진보 교육감들이다. 전국시도교육감협의회가 2018년 교내 휴대전화 자유화를 주장하며 교육부에 관련 규정 개정을 제안했다. 초중등 교사들 97%가 “다른 학생의 학습권을 침해하고 생활지도 체계가 붕괴된다”며 반대했지만(한국교총 설문조사), 교육부는 2020년 초중등교육법 시행령을 개정해 학교규칙에 담을 수 있는 내용 중 ‘두발 복장 등 용모’와 ‘휴대전화 등 전자기기의 사용’을 삭제했다. 시도교육청이 휴대전화 사용을 전면 허용하는 학생인권조례를 제정하면 학교 차원에서 시행령에 근거도 없는 규제 교칙을 만들기가 어렵게 된 것이다.
▷해외에선 10대들의 스마트폰 이용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높다. ‘청소년기 저널’ 최신호에 따르면 스마트폰이 보급된 후 37개국 중 36개국에서 외로움을 호소하는 15세 학생이 50∼100% 늘었다. 특히 여학생들이 정신건강에 더 큰 타격을 받았다. 영국에선 휴대전화 사용이 학생들의 정서와 학업 성적에 나쁜 영향을 준다는 연구 결과가 나오자 모든 학교에서 사용을 금지하는 방안을 추진 중이다. 프랑스는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의 대선 공약에 따라 2018년 15세 이하의 교내 휴대전화 사용을 전면 금지했다.
▷국내 10대들의 스마트폰 보급률은 90%가 넘는다. 코로나19로 스마트폰 이용 시간이 길어지면서 지난해 10대 청소년 중 스마트폰 과의존 위험군은 35.8%로 전년보다 5.6%포인트 증가했다. 서구 전문가들은 학교에서만큼은 사용을 전면 중단하고, 소셜미디어는 가급적 늦은 나이에 시작하도록 지도하라고 한다. 스티브 잡스는 자녀의 아이폰 사용을, 페이스북 임원들은 자녀들의 소셜미디어 사용을 엄격히 제한했다. 스마트폰의 폐해에 관한 연구들이 속속 발표되는 만큼 10대의 건강한 기기 사용을 돕는 방법을 고민해야 한다.
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11-08(월) 먹는 코로나 치료제

현재 코로나19 환자에게는 항체 치료제를 쓴다. 코로나를 앓은 사람의 혈액에서 감염을 막는 항체를 선별해 만든 약물이다. 고위험군의 입원과 사망 확률을 70% 줄여주지만 비싸고 병원에서 정맥으로 주사해야 하는 불편함이 있다. 그런데 집에서 쉽게 먹을 수 있는 알약 형태의 ‘항바이러스’ 치료제가 잇따라 개발됐다.
▷미국 제약사인 머크사의 항바이러스제 ‘몰누피라비르’가 4일 세계 최초로 영국에서 사용 승인을 받았다. 세계 2위의 백신 제조사인 머크사는 백신 개발 실패의 수모를 먹는 치료제 개발로 만회하게 됐다. 5일엔 미 화이자가 개발한 ‘팍스로비드’의 약효가 머크사를 능가한다는 임상시험 결과가 나왔다. 화이자는 이달 중 미 식품의약국(FDA)에 긴급 사용 승인 신청을 할 계획이다. 화학성분을 합성해 만드는 항바이러스제는 효능과 안전성 평가에 시간이 걸리지만 대량 생산이 쉽고 약효도 오래 지속돼 ‘게임 체인저’로 통한다.
▷머크사의 치료제는 바이러스의 유전 암호에 오류를 유도해 복제를 막는다. 화이자는 바이러스 복제에 이용되는 효소의 활동을 방해함으로써 복제를 막는데, 치료제의 약효를 더해주는 HIV 치료제와 섞어 먹는 방식이다. 두 치료제 모두 60세 이상 고령자와 기저질환자용으로 개발됐다. 임상시험에 따르면 화이자는 증상 발현 3일 이내에 먹으면 입원과 사망 확률이 89%, 5일 안에 먹으면 85%까지 감소했다. 머크사의 알약은 증상 발현 5일 안에 먹으면 입원·사망 확률이 50% 줄었다. 화이자는 젊고 기저질환이 없는 환자를 대상으로 한 임상시험도 진행 중이다.
▷약의 안전성과 관련해 머크사는 치료제 복용자의 12%가 가벼운 부작용을, 화이자는 20%가 가벼운 부작용, 1.7%가 심각한 부작용을 겪었다고 밝혔다. 영국 정부는 머크사 치료제 사용을 승인하며 임신부, 수유 중인 여성, 치료 후 4일까지 임신 가능성이 있는 여성은 먹지 말라고 권고했다. 한국 정부는 머크사 치료제 20만 명분을 구매 계약했고 화이자와 7만 명분의 선구매 약관을 체결한 상태다.
▷2009년 온 국민을 떨게 했던 신종플루는 백신과 치료제가 개발되면서 단순 독감이 됐다. 코로나도 먹는 치료제까지 나왔으니 일상 회복의 시기가 더욱 당겨질 것으로 전망된다. 하지만 치료제는 백신의 대체재가 아니다. “내년 1월 미국에서 코로나가 끝날 수 있다”는 스콧 고틀리브 전 미 FDA 국장의 5일 발언도 100인 이상 기업의 백신 접종 의무화를 전제로 나온 것이다. 당분간은 백신을 주기적으로 맞아야 한다. 치료제는 중증으로 악화할 위험을 줄여줄 뿐이다.
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11-09 최저생계비 앞선 국민연금

국민연금 수령자가 매달 받는 금액이 평균 55만 원을 넘었다. 올해 최저생계비 54만8349원을 앞지른 것이다. 국민 다수가 노후에도 최소한의 생계는 유지할 수 있는 셈이다. 하지만 국민은 이 정도로 만족할 수 없다. 용돈 내지는 생존 연금이 아니라 ‘생활 연금’을 원한다. 월 100만 원 정도 받으려면 적어도 20년은 가입해야 한다. 건강에 자신이 있다면 연금 수령 시기를 늦추는 방법도 있다. 고령화시대는 연금 전략이 필수이다.
▷예전에는 20년 이상 가입한 경우를 ‘완전 노령연금’이라고 불렀다. 연금보험료를 낼 당시 소득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대부분 월 90만 원 이상 받는다. 이런 가입자는 매년 급증하고 있다. 국민연금이 도입된 1988년 이후 취업자들이 은퇴를 시작했기 때문이다. 납입 기간이 30년 이상이면 ‘평균’ 136만 원을 받는다. 여기에서 연금 수령 시기를 62세에서 더 미룰 수도 있다. 최장 5년을 미루면 월 수령액이 200만 원을 훌쩍 넘는다. 이 정도면 ‘매월 찾아오는 효자’에 걸맞다.
▷국민연금은 ‘덜 내고 더 받는’ 구조여서 기금 고갈은 예정돼 있다. 제도를 일찍 도입한 유럽 선진국들은 1990년 이전에 기금이 고갈됐다. 고갈 시점부터는 일하는 세대에게 돈을 거둬 은퇴자들에게 나눠준다. 문제는 고령화에 따라 일하는 세대는 줄고, 받을 사람만 늘고 있다는 점이다. 부족한 기금은 정부 재정에서 메워야 한다. 현재 고갈 예정 시기는 2057년이다. 이를 늦추려면 지금보다 더 내거나, 덜 받거나, 더 늦게 받아야 한다. 모두 인기 없는 정책이니 선뜻 나서는 정권이 없다.
▷요즘 청년들은 일찌감치 노후 준비에 나선다고 한다. 의무 가입 대상이 아닌데도 가입하는 20대들이 4년 새 2배 이상으로 늘었다. 이들이나 그 부모들은 국민연금이 어떤 민간 보험사 연금보다 더 후하다는 걸 안다. 보험사 영업 직원들도 자사 연금보험을 팔기 전에 국민연금부터 가입하라고 조언한다. 하지만 정작 노후 생계비가 절실한 저소득층은 연금보험료를 낼 여유조차 없다. 이런 사각지역을 없애는 게 정부의 과제이다.
▷한국은 통계에 잡히지 않는 ‘노후 생계비 보험’이 있었다. 자녀들이 주는 용돈이다. 이제는 옛말이 됐다. 상속을 받고도 부모를 외면하는 자녀들 때문에 ‘불효자 방지법’이 추진될 정도이다. 노후는 본인이 챙겨야 한다. 국민연금은 기본이고, 집을 담보로 연금을 받는 주택연금(역모기지)도 마다할 이유가 없다. 집을 물려받을 생각인 자녀 눈치 보느라 주택연금을 망설이기도 한다. 이래선 안 된다. 다양한 연금이 효자가 될 수 있는 현실을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이은우 논설위원 libra@donga.com
11-10 마오·덩 반열 오른 시진핑

8일 시작돼 11일 끝나는 중국 공산당 중앙위원회 전체회의가 주목을 받는 건 여기서 ‘역사(歷史) 결의’란 걸 채택하면 시진핑 당 총서기 겸 국가주석의 장기 독재까지는 한 단계만 남기 때문이다. 남은 한 단계는 시진핑 집권 10년이 되는 내년에 열리는 새로운 회차의 공산당 대회다. 제20차가 되는 이 공산당 대회에서 시진핑이 세 번째 당 총서기로 선출되면 국가주석직에도 연임되면서 장쩌민 이래 중국 지도자의 ‘10년 집권’ 관행이 깨진다.
▷약 3000명의 대표가 참석하는 공산당 대회는 약 200명으로 구성된 중앙위원회 전체 회의가 좌우하고, 중앙위원회 전체 회의는 약 25명으로 구성된 중앙정치국이 좌우하고, 중앙정치국은 당 총서기를 포함한 7인 상무위원이 좌우한다. 당 총서기인 시진핑이 권력을 강화하면서 상무위원들의 집단지도체제도 유명무실해졌다. 상무위원들의 결정은 시진핑이 좌우한다.
▷시진핑의 권력 강화는 그의 집권으로부터 5년이 지난 2017년부터 가시화했다. 장쩌민 시대에는 덩샤오핑이 지정한 후진타오가 후계자로, 후진타오 시대에는 장쩌민이 지정한 시진핑이 후계자로 집권 5년이 지나 부상했다. 후진타오는 2017년 시진핑을 이을 후계자를 지정하지 못했다. 시진핑이 막았다고 볼 수 있다. 격대지정(隔代指定) 원칙이 깨진 것이다. 시진핑 집권 10년이 되는 내년에도 후계자가 부상하지 않으면 시진핑의 집권은 15년을 넘어 20년까지 이어질 수 있다.
▷시진핑을 마오쩌둥 덩샤오핑과 같은 반열에 올리는 공작은 여러 단계에 걸쳐 진행됐다. 2017년 제19차 공산당 대회의 결정에 따라 제19기 중앙위원회 1차 전체회의가 소집돼 공산당 당장(黨章)에 ‘시진핑 신시대 중국 특색의 사회주의 사상’을 삽입했다. 2018년 국가 입법 기구인 전국인민대표대회는 헌법(憲法)에서 ‘국가주석직 3연임 제한’ 조항을 삭제했다. 지금 열리고 있는 제19기 중앙위원회 6차 전체회의에 앞서 공산당은 100년사를 펴냈다. 그 속에 시진핑 관련 내용을 마오쩌둥 덩샤오핑과 비슷한 분량으로 기록했다.
▷공산당 대회에서 역사라는 단어가 들어가는 결의가 채택되는 건 이번이 세 번째다. 1945년 역사결의에는 마오쩌둥 사상을 중심으로 단결과 통일의 필요성을 담았다. 1981년 역사결의에는 덩샤오핑의 개혁 개방 노선을 확고히 하는 내용을 담았다. 2021년 역사결의에 구체적으로 어떤 내용이 담길지는 지켜봐야 하겠지만 미중(美中) 대결 시대에 ‘시진핑 신시대 중국 특색의 사회주의 사상’의 역사적 당위성을 강조하는 내용이 될 것으로 예상된다.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11-11 상속 유류분 개혁

사망자가 배우자가 있고 자녀가 둘일 때 첫째 자녀에게 모든 재산을 물려주겠다는 유언을 했다 하더라도 그대로 되지 않는다. 첫째 자녀, 배우자, 둘째 자녀는 2.25 대 0.75 대 0.5의 비율로 상속받는다. 유류분(遺留分) 때문이다. 배우자와 자녀의 유류분은 법정 상속분의 절반이다. 배우자와 자녀 2명이 있을 때 법정 상속분은 배우자 1.5, 첫째 자녀 1, 둘째 자녀 1이므로 유류분은 배우자 0.75, 둘째 자녀 0.5이고 나머지가 첫째 자녀의 차지가 된다.
▷유류분 제도는 농경사회의 잔재다. 농경사회에서는 자녀들이 부모의 생산 활동에 동참한다. 한 자녀에게 전 재산을 물려줄 경우 다른 자녀들이 불만을 가질 수밖에 없다. 다른 자녀에게도 최소한의 보상을 하는 게 유류분이다. 우리나라는 1977년 유류분 제도를 도입했다. 산업화의 한가운데서 시대착오적으로 농경사회의 잔재를 도입한 측면이 있다.
▷유류분 제도는 유럽 대륙 국가를 중심으로 남아있다. 영미법 계통에는 없다. 유럽 대륙 국가들도 오늘날 사망자 형제자매의 유류분 권리까지는 인정하지 않는 나라가 많다. 법무부는 9일 형제자매의 유류분 권리를 없애는 민법 개정안을 입법 예고했다. 하지만 그 정도로는 유류분 제도를 개혁했다고 보기 어렵다.
▷산업사회에서는 가족이 함께 생산 활동을 하지 않는다. 따라서 자녀라고 해서 무조건 유류분을 줄 이유가 없다. 미성년자를 중심으로 평균적인 경제활동 시작 연령 미만의 자녀에게만 유류분을 줘도 취지를 충분히 살릴 수 있다. 그 연령 이상의 자녀는 배제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되 장애가 있는 자녀 등을 예외적으로 포함시킬 수 있겠다.
▷우리나라에서 가업(家業)을 이어가기 어려운 이유가 가업 승계 목적의 상속에 대한 면세 혜택이 적어서이기도 하지만 다른 자녀들이 유류분 권리를 행사해 지분을 내놓으라고 요구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유류분 제도는 근대적 상속의 제1원칙인 유언의 자유를 제한한다. 경제 발전을 위해서는 유언의 자유를 제약하는 요인은 가능한 한 줄이는 게 좋다.
▷상속은 법정 상속에서 개인 의사를 존중하는 유언에 의한 상속으로, 다시 신탁 등을 이용한 상속으로 발전하고 있다. 신탁 상속은 재산을 신탁회사에 맡겨 관리하면서 상속인에게 어떻게 배분할지 미리 정해 놓았다가 사망 후 배분된 재산의 비율대로 수익금을 취하게 하는 것이다. 엄격한 요식을 요구하는 유언에 비해 유연하고, 효력에 대한 분쟁이 잦은 유언에 비해 확실한 상속 방법이다. 다만 미국처럼 유류분 제도가 없어야 발전할 수 있다. 유류분 제도의 더 과감한 개혁이 필요하다.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11-12 ‘에디슨의 GE’ 해체

경영의 신’으로 불렸던 잭 웰치는 2001년 GE 회장직에서 물러나면서 “나의 성공은 앞으로 20년 동안 후임자들이 GE를 어떻게 경영하느냐에 달렸다”는 말을 남겼다. 정확히 20년이 지난 지금 GE는 사실상 기업 해체 선언을 했다. 129년 역사를 가진 기업이 겨우 이름만 유지하게 된다.
▷로런스 컬프 GE 회장은 GE를 3개 회사로 분할한다고 9일(현지 시간) 발표했다. 헬스케어 부문을 2023년 초까지 분리하고, 에너지 부문은 그 이듬해에 떼어 낸다. 남아 있는 항공 부문이 GE의 이름을 사용한다. 컬프 회장은 항공 부문만 실질적으로 이끌고, 헬스케어 부문은 비상임 의장을 맡는다. 기업분할은 GE 구조조정의 ‘절정’으로 평가된다. 발명왕 에디슨이 만든 회사가 사실상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는 셈이다.
▷GE는 잭 웰치가 회장으로 재임했던 1981년부터 20년간 전성기를 구가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그가 키웠던 금융계열사 GE캐피털이 GE 몰락의 화근이 됐다. 제조업체였던 GE는 잭 웰치와 제프리 이멀트 시대를 거치면서 이익의 50% 이상이 GE캐피털에서 나오는 사실상 금융회사였다. 그런 상태에서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를 맞아 미국 정부로부터 구제금융을 받을 정도로 치명적인 타격을 입었다. 2014년에는 프랑스 알스톰 전력 부문을 인수했다가 큰 손해를 보고, 2018년에는 간병보험에서 22조 원대 손실을 입었다. 결정적인 3연타다.
▷GE의 경영은 그 자체가 ‘경영학 교과서’였다. 불량품을 100만 개 제품 중 3, 4개 수준으로 낮추는 ‘6시그마 운동’이 대표적이다. 이 품질 경영은 세계에 내로라하는 제조업체 중 도입하지 않은 곳이 드물었다. 국내에서도 삼성, LG뿐 아니라 중소기업들도 잇따라 도입했다. GE는 GE캐피털을 발판 삼아 각 부문 세계 1, 2위 기업들을 사들이는 방식으로 매출과 이익을 늘렸다. NBC 인수로 미디어 분야까지 진출했다. 당시 경영컨설팅 회사들은 GE를 ‘프리미엄 복합기업’이라며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GE의 기업 분할 발표에 시장은 일단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기업 분할 발표 후 장외거래에서 주가가 17%나 뛰었다. 전문가들은 기업 분할에 20억 달러의 비용이 들기는 하겠지만 향후 몸집이 가벼워진 3개 회사가 자원을 더 효율적으로 쓸 수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절대 망할 것 같지 않던 기업이 무너지는 데는 2008년을 기준으로 13년 정도밖에 걸리지 않았다. 가장 잘나갈 때 위기에 대비해야 한다는 말이 틀리지 않음을 GE가 보여준다. 이번 기업 분할이 새로운 성장의 계기가 될 수 있기를 고대한다.
허진석 논설위원 jameshur@donga.com
11-13 심상찮은 물가 폭등

미국의 10월 소비자물가 상승률이 6.2%로 31년 만에 가장 높았다. 메리 데일리 샌프란시스코 연방준비은행 총재는 “물가 상승에 눈이 튀어나올(eye-popping) 지경”이라고 했다. 중국 물가도 1996년 통계를 작성한 이래 최고 상승률을 나타냈다. 유럽과 남미, 아시아를 가리지 않고 10%대 물가 상승률을 보이는 곳이 수두룩하다. 코로나 사태가 진정되면서 소비는 늘었는데, 원자재 값 폭등과 공급망 위기로 공급이 차질을 빚기 때문이다.
▷영국 런던의 무료 급식소 ‘아빠의 집’에는 평범한 직장인까지 몰려든다고 한다. 폭등한 식품 값을 감당하지 못해서다. 난방용 가스 값도 치솟아 저소득층은 난방과 끼니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할 처지다. 미국의 무료 급식소는 나눠줄 우유와 닭고기 부족을 호소한다. 개발도상국 서민들은 더 딱하다. 아무런 반찬 없이 빵이나 쌀만 먹거나 아예 굶는 사람들도 많다. 현지 언론들은 올겨울 굶어 죽는 사람이 급증할 것이라고 우려한다. 세계식량가격지수는 1년 새 30% 이상 올랐다.
▷한국 물가도 가파르게 치솟고 있다. 10월 수입물가는 35.8% 올라 13년 만에 가장 높은 상승률을 보였다. 수입 의존도가 높은 원자재 에너지 곡물 등의 가격이 크게 올랐다. 수입물가는 시차를 두고 소비자물가를 끌어올린다. 이미 3%를 넘어선 소비자물가 상승률이 더 높아질 상황이다. 원재료를 수입해 만드는 가공식품 값이 밥상물가를 압박하고 있다. 라면 식용유 육류 빵 설탕 등 안 오르는 게 없을 정도다. 중국처럼 사재기가 벌어지지 않는 게 그나마 다행이다.
▷이주열 한국은행 총재는 “알 수 없는 불확실성의 영역이 갈수록 확대되고 있다”고 말했다. 물가 상승을 초래한 공급망 위기가 어떻게 전개될지 예측하기 어렵다는 뜻이다. 물가를 잡으려면 금리를 올려야 하는데 그 시점을 정하기도 난감하다. 공급망을 두고 미국과 중국은 연일 난타전을 벌이고 있다. 문제는 두 나라 모두 기존 공급망을 상당 부분씩 장악하고 있다는 점이다. 힘이 팽팽하면 다툼은 길어지고, 물가가 진정되기 어렵다.
▷물가가 오르면 당장 고통스러운 것은 서민들이다. 치솟는 물가에 밥상 차리기도 힘겹고, 금리가 오르면서 이자 부담이 커졌다. 코로나로 빚이 불어난 자영업자들은 대출이 막혀 사채시장으로 내몰린다. 기름 값이 올라 난방도 걱정이다. 도시가스를 설치하지 못한 저소득층은 주로 등유를 난방에 쓰는데, 등유는 유류세 인하 대상도 아니라고 한다. 나갈 돈은 많아졌는데 겨울에는 일용직 일거리가 줄어 생계를 위협받을 위기다. 이들을 위한 세심한 배려가 필요한 시점이다.
이은우 논설위원 libra@donga.com
11-15(월) 사라지는 은행 공채

하나은행과 우리은행이 올해 신입행원 공개채용을 하지 않는다. 다른 은행들도 공채 대신 수시채용을 늘리고 있다. 대기업에서 시작한 공채 폐지가 금융업계로 확산하는 모습이다. 공채가 없어지면 필요 인력만 조금씩 뽑아, 전체 일자리는 줄어드는 경향이 있다. 금융 업종은 제조업보다 평균 연봉이 높고 고용도 안정적이다. 청년들이 신입으로 갈 수 있는 최고등급 일자리가 줄어드는 셈이다.
▷은행들은 산업 변화에 발맞춰 채용 방식을 수시 위주로 바꾼다고 한다. 한꺼번에 뽑아 부서별로 나누는 방식으로는 비대면과 정보기술(IT) 시대에 대응할 수 없다는 뜻이다. 올 연말까지 5대 시중은행이 정기 공채로 뽑은 신입행원은 1000명 안팎으로 2년 전의 절반에 그쳤다. 공채 폐지가 확정된 것은 아니라지만 사실상 폐지 수순을 밟고 있다는 분석이 많다. 이런 추세는 경력자보다 졸업생에게 불리하다. 청년들이 사회에 첫발을 내딛기가 갈수록 어려워지고 있다.
▷몸집 줄이기도 활발하다. 금융 업무가 디지털과 비대면 위주로 바뀌면서 영업점 인력 수요가 줄었기 때문이다. 금융 상품의 80∼90%가 비대면으로 팔리는 상황이다. 시중은행들은 지난해 점포 304곳을 정리했고, 내년 초까지 250개 안팎을 더 정리할 계획이다. 명예퇴직에도 적극적이다. 올해 1∼9월 5대 시중은행 명예퇴직 인원은 1644명으로 이미 전년 전체 1531명을 넘어섰다. 적은 점포와 인력으로 은행을 운영하는 흐름은 당분간 바뀌기 어려울 것 같다.
▷공채는 줄지만 디지털 인재 채용은 늘고 있다. 채용 시험도 디지털 능력을 갖춘 이공계 전공자에게 유리해 문과 졸업생의 불안감을 더하고 있다. 신한은행은 올해 10월 치른 일반직 필기시험에 ‘디지털 리터러시(디지털 문해력)’ 과목을 도입했다. 어떤 일이나 온라인 주문을 처리하는 방식을 순서도로 표현하는 방법 등을 물었다. 데이터 관련 자격증을 가진 지원자에게 우대점수를 주는 것도 일반화되고 있다. 문과생들은 학부 때 이공계 수업을 듣거나 IT 관련 자격시험을 준비해야 할 처지다.
▷금융업계는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 때 168조 원의 공적자금을 지원받았다. 금융업이 공적 기능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국가가 부여한 ‘금융업 면허’로 막대한 이익을 얻으면서, 산업 변화를 핑계로 고용에 대한 공적 책임을 외면해선 곤란하다. 수시채용을 명분으로 시장이 만들어 놓은 인재만 가져다 쓰는 것도 옳지 않다. 디지털 인재가 필요하다면 대학과 협조해 직접 양성할 수 있다. 은행들이 공적 기능을 외면한다면 국가도 그들에게만 금융업 면허를 허용할 이유가 사라진다.
허진석 논설위원 jameshur@donga.com
11-16 사토시의 정체

세계 최초 가상화폐인 비트코인을 처음 만든 사토시 나카모토는 끈기 있는 장기 투자자이기도 하다. 2009년 1월 고작 0.0008달러에 비트코인 첫 거래가 시작된 이후 그의 전자지갑에 있는 비트코인은 한 번도 인출되지 않았다고 한다. 그는 현재 비트코인 약 110만 개를 갖고 있는데, 가치가 약 700억 달러(약 82조5000억 원)에 이른다.
▷사토시 나카모토는 이름만 알려져 있을 뿐 신원은 베일에 싸여 있다. 한 명인지, 여러 명이 한 이름을 쓴 것인지조차 불투명하다. 개발 초기엔 이메일을 통해 공개 글을 쓰기도 했지만 2014년 이후론 종적을 감췄다. 이런 가운데 미국 플로리다주에서 ‘진짜 사토시’를 가리는 재판이 열리고 있다. 2013년 사망한 미국의 컴퓨터 보안전문가 데이비드 클라이먼의 유족이 “클라이먼과 호주 출신 프로그래머 크레이그 라이트가 바로 사토시 나카모토”라며 이들이 비트코인 공동 개발자임을 주장하고 나선 것이다. 결국 라이트가 갖고 있다는 비트코인의 절반을 내놓으라는 것인데 재판을 통해 사토시의 실체가 가려질지 관심이 쏠린다.
▷그동안 본인이 사토시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여럿 나왔지만 한 명도 제대로 된 증거를 대지 못했고, 결국 사기나 해프닝으로 끝났다. 라이트 또한 2016년 처음 “내가 사토시”라고 나섰지만 이후 발언을 번복하다가 다시 재번복하는 등 오락가락을 거듭했다. 증명 방법은 의외로 간단하다. 사토시의 전자지갑에 비밀번호를 입력해 몇 달러어치만 다른 곳으로 옮기는 것을 보여주면 된다. 재판 과정에서 금융 역사에 남을 ‘세기의 이체 장면’을 볼 수 있을까.
▷라이트든, 또 다른 제3자이든 사토시의 정체가 드러나는 것에 대해 코인 투자자들은 호기심만큼이나 큰 불안감을 갖고 있다. 사토시가 가진 비트코인 수량은 총 발행량 2100만 개의 5%가 넘는다. 일부라도 현금화할 경우 시세 급락이 예상된다. 비트코인은 가상화폐 시장 총액의 약 43%를 차지하고 있어 다른 코인들에 미치는 영향도 크다. 일각에서 ‘사토시의 출금을 강제적으로 막아야 한다’는 주장까지 나오는 이유다.
▷사토시가 비트코인을 만든 시점은 미국의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로 촉발된 세계 금융위기 직후였다. 미국 등의 중앙집중형 금융 권력에 회의를 느낀 사람들이 금융기관을 거치지 않는 개인 간 거래를 내세운 비트코인에 관심을 가진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이제 비트코인은 ‘디지털 금’으로 불리며 또 다른 금융 권력이 됐다. 그러나 비트코인의 탈중앙화 가치를 설파했던 개발자가 전체 발행량이 제한된 비트코인을 대량 소유한 채 결과적으로 ‘중앙화’된 것은 아이러니다.
황인찬 논설위원 hic@donga.com
11-17 中 3번째 증권거래소

베이징증권거래소가 출범 첫날인 15일 5배 가까이 폭등하는 종목을 배출하며 이목을 끌었다. 홍콩을 제외한 중국 본토에서, 상하이와 선전에 이어 31년 만에 생긴 세 번째 거래소다. 상하이는 대기업들이, 선전은 정보기술 분야 벤처기업들이 주로 상장된 데 비해 베이징거래소는 혁신적인 중소기업들이 주를 이룬다. 중국의 수도라는 지리적 위치도 상징하는 바가 크다.
▷첫날 가장 많이 오른 주식은 현대차의 상용차 부품 공급업체이기도 한 퉁신촨둥(同心傳動)이다. 차 동력전달축 제조에서 기술력이 높다는 평가를 받는다. 원래 상승·하락 제한 폭은 30%인데 중국은 개장 첫날인 이날은 제한을 없앴다. 퉁신촨둥을 비롯해 신규 상장된 10개 기업은 평균 2배 이상으로 주가가 뛰었다. 하지만 총 81개 기업 중 59개 주식은 하락했고, 3개 기업은 아예 거래가 이뤄지지도 않았다.
▷베이징증권거래소는 속전속결로 설립됐다. 시진핑 주석의 설립 발언 이후 74일 만에 문을 열었다. 시 주석은 9월 2일 국제서비스무역교역회에서 “중소기업의 혁신과 발전을 지지할 것”이라며 “베이징증권거래소 설립을 통해 서비스 혁신형 중소기업의 주진지를 구축할 것”이라고 처음 밝혔다. 중국 정부는 알리바바 등 중국 대형 정보기술 기업은 옥죄면서도 베이징증권거래소 설립으로 중소기업의 자본 조달에는 숨통을 틔워준 셈이다. 빈부격차 해소를 위해 시 주석이 주창하는 ‘공동부유론’의 일환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미중 갈등은 베이징증권거래소 설립의 또 다른 원인이다. 중국 정부는 자국 대형 기업의 미국 증시 진출을 막고, 미국 또한 중국 기업을 배척하는 상황이다. 중국은 미국 나스닥 상장을 강행한 디디추싱(滴滴出行)을 국가 안보 위협 혐의로 조사 중이다. 자국 인터넷 기업이 미국 등 해외 증시에 상장하려면 사실상 허가를 받도록 하는 제도도 도입했다. 미국은 자국 회계 기준을 따르지 않는 중국 기업은 내년부터 미 증시에서 퇴출시킬 예정이다. 중국 입장에서는 자국 혁신 기업의 해외 의존을 줄일 자체 거래소를 키울 필요성이 커진 것이다.
▷베이징 증시에는 외국인은 물론 일반 중국인도 아직 거래에 참여할 수 없다. 전문 투자가와 기관에만 개방됐다. 아직은 불안한 시장이라는 방증이다. 일일 거래 규모는 상하이와 선전 증시의 1% 수준에 불과하다. 중국이 기업 통제를 강화하는 바람에 세계 투자업계에서 중국 기업 리스크는 더 커졌다. 그런 중국이 자유로움이 경쟁력인 혁신 기업의 자본 조달 창구를 성공시킬 수 있을까. 성공적인 ‘베이징판 나스닥’으로 성장할지 지켜볼 일이다.
허진석 논설위원 jameshur@donga.com
11-18 ‘명성황후 시해’ 편지

“역사상 고금 미증유의 흉악한 사건….” 1895년(을미년) 10월 8일 자행된 명성황후 시해 사건 당시 일본 영사관의 한 젊은 외교관이 본국 외무성에 보고한 내용이다. 어쩌면 이 젊은 외교관은 시해 음모를 제대로 몰랐거나 좀 양심적이었을 순 있겠다. 시해 사건에 실제 가담했던 다른 외교관이 “우리들이 왕비를 죽였다”며 당시 정황을 밝힌 편지가 최근 발견된 것이다.
▷호리구치 구마이치(堀口九万一)라는 이 외교관은 사건 다음 날 고향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서 “진입은 내가 맡은 임무였다. 담을 넘어 (중략) 간신히 오쿠고텐(奧御殿·귀족 집의 안쪽에 있는 건물)에 이르러 왕비를 시해했다”고 썼다. 또 “생각보다 간단해 오히려 매우 놀랐다”는 심경도 밝혔다고 한다. 오쿠고텐은 경복궁 후원 건청궁의 왕비 침전인 곤녕합(坤寧閤)을 말한다.
▷명성황후 시해범은 민간인 신분의 ‘일본 낭인(浪人)’이란 것이 통설로 굳어져 왔다. 낭인의 본래 뜻은 ‘불법적으로 다른 곳을 유랑하는 부랑인’이지만, 메이지유신을 거치며 군인이나 관료가 아니라 재야에서 ‘지사(志士)’인 체하며 정치 활동을 하는 패거리들이 스스로를 낭인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이들은 “민비를 죽이자”는 여론을 형성했고, 육군 중장 출신의 미우라 고로 공사도 부임하자마자 “‘여우사냥’을 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며 실행에 나선 것이다.
▷명성황후 실제 시해범은 ‘일본 낭인’이 아니라 ‘일본군 소위’임을 입증하는 여러 자료들도 발굴됐다. 일본은 사건 직후 “우리 수비대의 어느 육군 소위”라고 보고했다. “왕비는 먼저 우리 육군사관의 칼에 맞고, 그 다음에 나카무라(낭인)도 하수(손을 대어 사람을 죽임)했는데…”라는 보고도 있다. 그러다 “어느 일본인이 살해”라고 시해범을 흐리기 시작했다. 시해범은 경성수비대 미야모토 다케타로 소위라고 한다.(이종각 저 ‘미야모토 소위, 명성황후를 찌르다’)
▷명성황후 시신은 ‘홑이불로 싸서 송판 위에 올려’ 녹원으로 옮겨져 다른 궁녀들과 함께 불태워졌다. 치명상은 이마 위에 교차된 두 개의 칼날인 것 같다는 증언이 있다. 일본의 한 신사엔 한 낭인이 살해도구로 사용했다고 주장하는 ‘히젠도’가 보관돼 있는데, 칼집에 ‘늙은 여우를 단칼에 베었다’는 뜻의 ‘일순전광자노호(一瞬電光刺老狐)’라고 새겨져 있다. 낭인들은 서로 자신이 명성황후를 베었다며 ‘공(功)’을 내세우려 혈안이었다. 군인이든 외교관이든 낭인이든 무죄 혹은 증거불충분 등의 이유로 다 풀려났다. 이번 편지 발견을 계기로 126년 전 참혹했던 시해 사건의 전말, 특히 일본 정부가 어떻게 개입했는지가 소상히 밝혀지길 기대한다.
정용관 논설위원 yongari@donga.com
11-19 코로나발 인력 대이동

휴대전화에 음식 배달원 전용 앱을 내려받으면 지도 위에 주문이 빼곡하게 표시되면서 실시간 배달 수수료가 뜬다. 낮 시간 기준 한 건당 서울 종로 일대는 4000원대, 강남 일대는 6000원대. 배달 허용 버튼을 누르면 쉴 새 없이 알림이 울린다. 이 앱을 깔아놓고 등교나 귀가 도중에 짬짬이 아르바이트를 하는 학생들도 많다. 국내에서 배달앱 등 플랫폼을 통해 일감을 받는 종사자는 66만 명, 플랫폼을 통한 구직자까지 포함하면 220만 명이다.
▷코로나19는 국내 노동시장 지형을 바꾸고 있다. 코로나로 일자리를 잃은 근로자, 폐업한 자영업자, 미취업 청년들을 플랫폼이 빠르게 흡수하고 있다. 특별한 기술이나 자본이 필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배달원 등 좁은 의미의 플랫폼 종사자 66만 명 중 절반 가까이가 이 일을 주업으로 삼는다. 한 달에 21.9일을 하루 평균 8.9시간 일하면 월 192만3000원을 번다고 한다.
▷반대로 오프라인에서는 구인난이 심각하다. 그동안 영업시간 제한으로 직원을 내보냈던 식당들은 ‘위드 코로나’를 맞아 다시 채용하려 해도 아르바이트생조차 구하기 힘들다. 주 52시간제 시행 이후 야근과 특근 수당이 줄어든 중소기업의 숙련 인력들도 플랫폼으로 이동했다. 택시 업계는 거의 재앙 수준이다. 코로나 장기화로 사입금 채우기도 어렵던 기사들이 배달원으로 변신하면서 밤마다 택시 잡기 전쟁이 벌어지고 있다. 요즘 법인 택시회사들은 택시 기사 면허시험을 치르고 나오는 합격자들을 붙잡고 취업을 권하고 있을 정도다.
▷지금 인력 대탈출이 벌어지는 곳은 저임금 업종이다. 플랫폼 일자리는 일하는 대로 곧바로 통장에 돈이 꽂히기 때문에 형편 어려운 중소기업에서처럼 임금 떼일 걱정 없어 좋다고 한다. 근무 시간과 장소를 상황에 맞게 고를 수 있고 다른 일과 병행할 수도 있어 최저임금에 못 미치게 벌어도 마음은 편하다고 한다. ‘최선’이어서가 아니라 ‘차선’, 미래를 향한 도전보다는 대안 없는 현실에서의 체념이 이 일자리에 깃든 측면이 있다.
▷1990년대 후반 국제통화기금(IMF)발 대량 실직 사태를 떠올리면 지금의 플랫폼 일자리는 코로나발 고용 충격을 줄여주는 건 사실이다. 한 플랫폼 종사자는 “실직 후 절망 상태에서 배달원 전용 앱을 켰을 때 수없이 떠 있던 배달 주문 표시가 암흑 속의 등대처럼 반가웠다”고 했다. 하지만 앞으로 기업들이 정규직을 뽑지 않고 필요한 때에만 플랫폼에서 인력을 조달한다면, 배달 일을 조만간 로봇이 대체하게 된다면…. 플랫폼 일자리의 진입장벽은 낮지만 앞으로 펼쳐질 미래는 섬뜩할 수도 있다.
김선미 논설위원 kimsunmi@donga.com
11-20 40대 임원

한국 500대 기업에서 임원이 되면 일반 직원의 4배가 넘는 평균 3억5000만 원의 연봉을 받는다. 주요 임원은 자동차와 개인 사무실을 제공받고, 비서의 도움을 받기도 한다. 예전엔 운전기사가 집에서 회사 주차장까지 모시고 다녀서 비 오는 날에 우산을 들고 다닐 일도 없었다. 임원보다 더 귀한 등기임원이 되면 처우가 비교할 수 없이 높아지는 게 임원의 세계다. 다만 연말 인사가 발표되면 언제든 짐을 싸야 하는 자리란 점 때문에 임원은 ‘임시 직원의 줄임말’이란 자조적 표현도 있다.
▷기업평가 사이트 CEO스코어에 따르면 한국 대기업에서 신입사원이 임원이 되기까지 평균 23년 걸린다. 임원 평균 나이는 52세다. 20여 년 전까지만 해도 40대에 대기업 임원이 되는 건 신문에 기사로 실리는 사안이었다. 오너 일가이거나, 특별히 외부에서 모셔온 인물일 가능성이 높았다. 대기업의 인재 유치 경쟁으로 10년 전 임원 4명 중 1명까지 늘었던 40대 임원 비율이 올해엔 6명 중 1명으로 뚝 떨어졌다.
▷가장 큰 이유는 기업들이 핵심 사업에 집중하기 위해 작은 사업부를 정리하면서 임원 자리가 줄어든 탓이다. 기존 임원을 내보내는 마당에 40대 임원을 발탁하기는 쉽지 않다. 몇 년 사이 대기업들은 임원 직급을 간략하게 줄이면서 제일 아래 임원 직급인 ‘상무보’ 등을 없앴다. 그 바람에 40대 임원이 나오기는 더 어려워졌다.
▷‘샐러리맨의 별’을 빨리 달기 어려워졌는데도 불만의 목소리는 크지 않다. 40대 임원 감소에 당장 영향을 받는 밀레니얼 세대(1980년대 초반∼2000년대 초반 출생)의 직장생활에 대한 생각이 크게 달라졌기 때문이다. 이들은 임원이 되지 못하는 걸 ‘인생의 실패’로 여기지 않는다. 일반 직원보다 훨씬 많이 일하고, 실적 부담에 시달리는 임원 자리를 좋게만 보지 않는다. 최근 대기업에서는 50대 부장들이 임원 승진에서 계속 누락됐다고 해서 알아서 옷을 벗는 관행도 약화되고 있다.
▷구인구직업체 ‘사람인’이 청년 1865명에게 직장 선택 기준을 물었더니 연봉(33%) 다음이 ‘워라밸’(일과 개인 삶의 균형·23%)이었다. 일부는 ‘만년 대리’도 마다하지 않는다고 한다. 연봉제, 실적 평가의 스트레스를 받느니 과장이 안 돼도 좋다는 것이다. 월급만으로 ‘내 집 마련’조차 어려운 시절이다 보니 승진보다 자산 투자할 시간이 더 중요하다는 직장인도 많다.
▷회사로서는 열심히 일한 직원에 대한 보상으로 임원 승진 카드만 내밀 수는 없게 됐다. 젊은 세대는 개인 생활을 손해 보지 않으면서도 능력과 성과에 따른 공정한 대가를 원한다. 이들에게 맞춘 새로운 인사·보상체계가 필요하다. 달라진 시대, 바뀐 사람들의 역량을 이끌어낼 묘수를 찾아내는 게 이 시대 기업의 경쟁력이다.
이은우 논설위원 libra@donga.com
11-22(월) 외교적 올림픽 보이콧

내년 2월 4일 개막하는 베이징 겨울올림픽에 대한 ‘외교적 보이콧’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 영국 정부가 외교적 보이콧을 ‘적극 논의’하고 있다는 외신 보도가 20일 나왔다.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도 19일 “국익을 생각해 판단하겠다”며 가능성을 열어 놨다. 18일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외교적 보이콧을 “고려 중”이라고 처음 밝힌 데 이어 동조 기류가 확산되는 듯하다. 이러자 중국 관영매체는 20일 “가식적인 미국 당국자들을 초대할 필요가 없다”며 날을 세웠다. 미중 갈등의 전장이 국제 스포츠 부문으로 넓어지고 있다.
▷미국 등은 신장위구르 자치구, 티베트에서 중국의 인권 탄압 때문에 보이콧을 검토한다지만 사실 이들 문제가 새로운 사안은 아니다. 2008년 베이징 여름올림픽을 앞두고도 인권 단체를 중심으로 비슷한 보이콧 주장이 제기됐다. 다만 당시엔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을 비롯해 한일 정상 등 80여 개국 정상이 베이징을 찾았다. 이번에 다른 상황이 빚어지는 것은 중국이 이제 미국과 패권을 다투며 세계 민주주의와 자유시장경제를 위협하는 존재가 된 만큼 공동 견제해야 한다는 서방의 인식이 확산됐기 때문일 것이다.
▷외교적 보이콧은 선수단은 보내지만 개·폐회식에 정부 대표단을 파견하지 않는 조치다. 외교적 보이콧을 해도 경기는 정상적으로 열리지만 제대로 된 ‘화합과 축제의 장’을 연출하긴 어렵다. 올림픽을 찾는 각국 정상급 인사들의 면면과 규모는 대회 흥행의 변수이자 주최국의 국제적 위상을 보여주는 상수다. 특히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은 내년 하반기 3연임을 공식화하려 한다. 중국은 이를 앞두고 올림픽에 이어 7월 청두 유니버시아드, 9월 항저우 아시아경기로 분위기를 띄우려 하는데 이런 구상도 꼬일 수 있다.
▷일본의 고심도 깊어졌다. 일본은 미국, 호주, 인도와 함께 대중 견제 성격의 4개국 안보협의체인 ‘쿼드(Quad)’에 참여하고 있다. ‘스포츠는 예외’라고 말하기 어렵다. 그러나 중국은 7월 도쿄 여름올림픽에 거우중원 국가체육총국 국장(장관급)을 대표로 한 777명의 대표단을 보냈다. 당시 코로나 위기 속에 대회가 열렸지만 중국은 자국의 역대 올림픽 원정 가운데 가장 많은 인원을 보내며 힘을 실어줬다.
▷한국은 또다시 미중 사이에서 어려운 선택의 갈림길에 놓이게 됐다. 청와대는 18일 “베이징 올림픽이 한반도 평화프로세스의 계기가 되도록 노력할 것”이라고 재차 강조하며 “문재인 대통령의 방중 여부는 정해진 바 없다”고 했다. 정부는 베이징 올림픽을 계기로 한 종전선언 논의의 진전을 기대해 왔다. 미국의 최종 결정뿐만 아니라 북한 지도부의 참석 여부를 마지막까지 지켜보며 외교적 보이콧에 대한 결정을 미룰 가능성이 커 보인다.
황인찬 논설위원 hic@donga.com
11-23 매도 우위로 돌아선 아파트

서울과 5개 광역시(부산 대구 대전 광주 울산)의 아파트 매도심리가 매수심리를 추월했다. 11월 셋째 주 기준으로 서울 아파트 매매수급지수는 99.6으로 올해 4월 이후 7개월 만에 100 이하로 떨어졌다. 5개 광역시는 99.8로 1년 1개월 만에 매도세로 돌아섰다. 지수가 100을 밑돌면 사겠다는 사람보다는 팔겠다는 이들이 많다는 의미다. 당분간은 시장 상황을 지켜보겠다는 사람이 늘어났다고 보면 된다. 매매수급지수는 아파트 가격의 선행지수로 여겨진다. 지수가 계속 낮게 나온다면 가격 하락으로도 이어질 수 있다.
▷서울 아파트는 가격이 여전히 오르고 있지만 상승률은 줄고 있다. 거래량은 급격히 줄어든 가운데 가끔씩 신고가 거래가 나오는 상황이다. 몇 년 사이 너무 많이 오른 아파트 값 때문에 실수요자들은 아파트 대신 빌라나 오피스텔로 눈을 돌리고 있다. 아파트 매수세가 약화된 원인으로는 정부의 대출 규제, 금리 상승, 계절적인 비수기, 오랜 기간의 상승으로 인한 심리적 피로감 등이 지목된다. 이미 오른 집값 때문에 무주택자가 대출을 받아 살 수 있는 6억 원 미만 아파트가 급속히 줄어든 것도 원인으로 꼽힌다.
▷지방에서는 가격 하락 지역이 늘고 있다. 기존 세종에 이어 대구가 추가됐다. 대구는 일주일 전 가격 상승률이 0%를 기록하더니 이번에 0.02% 떨어졌다. 1년 8개월 만의 가격 하락이다. 매매수급지수가 5개월 내내 100 이하를 밑돌다 가격이 하락했다. 세종 아파트 가격은 올해 5월 중순 처음 하락했다가 반등과 하락을 반복하더니 7월 하순부터는 계속 하락 중이다. 세종과 대구 모두에서 신규 입주 물량이 늘고 있어서다.
▷집값 하락 조짐은 청약경쟁률과 미분양 물량에서 먼저 나타난다. 서울에서 아직 청약경쟁률이 약화되는 추세는 안 보인다. 하지만 일각에서는 내년이나 내후년에 수도권 외곽부터 청약경쟁률이 약화될 수 있다고 본다. 수백 대 1까지 가던 경쟁률이 최근 들어 수도권 일부에서 10 대 1 정도로 떨어지는 현상이 잦아지고 있다는 것이다. 업계에서는 5 대 1까지 경쟁률이 떨어지면 계약 단계에서 미분양이 발생할 수 있다고 본다. 전국 미분양 물량은 아직 늘지 않고 계속 줄고 있는 상태다. 다만 대구에서는 미분양 물량이 늘고 있다.
▷집값을 예측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한편으로는 매도 심리가 커졌다고 하지만 공급이 충분히 늘어나기 전까지는 계속 오를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하지만 거래절벽 속 신고가 거래를 하락의 전조로 보는 견해도 있다. 집값이 본격적인 하락세로 돌아선다면 금리 인상기로 접어든 금융 환경, 4년간 급격히 오른 가격 등을 감안할 때 그 폭이 예상을 크게 웃돌 수도 있다.
허진석 논설위원 jameshur@donga.com
11-24 ‘멘털 갑’ 韓 여자골프

고진영이 미국여자프로골프(LPGA) 시즌 최종전 CME그룹 투어챔피언십에서 우승하면서 상금왕 3연패를 달성했다. 전설 박세리도 박인비도 못 이룬 성과다. 마지막 날 같은 조에서 경쟁했던 넬리 코르다는 “고진영 쇼였다. 뒤에서 구경 말고는 할 게 딱히 없었다”고 했다. 고진영은 대회 첫날 손목 부상으로 눈물을 흘리며 기권을 고민했다. 하지만 포기를 모르는 멘털로 일어서 역전승을 일궜다.
▷한국 여자골프의 계보는 개척자 박세리에서 ‘세리 키즈’ 신지애 박인비로 이어졌다. 고진영은 이들과는 스타일이 다르다. 맨 얼굴에 잠옷 바람으로 자신의 유튜브에 등장해 춤을 출 정도로 자유롭다. 과거엔 부모가 일일이 간섭했다면, 요즘 선수들은 스스로 동기부여를 한다. 게임, 악기 연주, 그림 그리기 등 취미도 다양해졌다. 인스타그램은 기본이고 유튜브로 팬들과 소통하는 선수도 많다. 세대는 바뀌어도 한국 여자골프의 힘은 여전하다.
▷타이거 우즈는 중요한 퍼팅 때 일시적으로 무의식 상태가 된다고 한다. 같은 동작을 무한 반복하면 습관이 되어 무의식으로 행동한다는 뜻이다. 이런 몰입과 연습량은 연장전과 같은 결정적 순간에 빛을 발한다. 박세리는 LPGA 무대에서 연장전 6전 6승을 거뒀다. 박인비는 연장전에서 메이저 2승을 수확했다. 고진영도 10월 BMW 레이디스 챔피언십에서 연장 우승으로 LPGA 통산 한국 200승을 달성했다.
▷슬럼프는 선수들의 숙명이다. 천하의 박세리도 손가락 부상 이후 슬럼프를 겪었다. 고진영 선수는 올해 할머니가 돌아가셨고, 손목 부상을 당했다. 도쿄 올림픽에서도 아쉬운 성적을 내자 스윙을 바꿨다. 시즌 중 스윙을 바꾸는 건 매우 위험한데, 그걸 한 달 만에 해냈다. 그의 멘털 코치는 “회복 탄력성과 성장 의지가 강하다”고 했다. 국내 투어 강자인 임희정은 선수들이 꼽은 최고의 스윙을 갖고도 지난겨울 교정에 나섰다. 바닥일 때 튀어 오르고, 잘할 때 더 잘하려는 게 한국 선수들이다.
▷한국에선 좋은 선수들이 끊임없이 배출된다. 국내에서 2부, 3부 투어까지 선수 육성 체계가 잘 갖춰져 있다. 상금 규모는 유럽 여자투어를 뛰어넘어 미국, 일본 다음이다. 여기서 성장한 선수들이 LPGA에 진출한다. 탄탄한 국내 투어, 부모들의 헌신이 맞물려 ‘K여자골프’를 만들었다. 그래도 중요한 건 선수들의 노력이다. 곰 발바닥처럼 굳은살이 박인 신지애의 손, 양말을 경계로 흰색과 구릿빛이 선명한 박세리의 발이 전설을 만들어왔다. 우승 직후 배 위에 감자튀김을 올려놓고 넷플릭스를 보고 싶다는 고진영이 내년엔 어떤 드라마를 보여줄지 기대된다.
이은우 논설위원 libra@donga.com
11-25 신돌궐제국

종신 집권을 꿈꾸며 ‘21세기 술탄’으로 불리고 있는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터키 대통령이 중앙아시아 공략에 나섰다. 튀르크어족으로 분류되는 중앙아시아 국가들과 함께 ‘튀르크어 사용국가 기구(Organization of Turkic States·OTS)’를 결성한 것. 그런데 최근 반(反)서방 노선을 걷는 에르도안과 호흡을 맞춰온 중국이 OTS에 대해선 아주 불편한 심사를 내비치고 있다. 중국의 아킬레스건으로 꼽히는 신장위구르 문제와 직결되기 때문이다.
▷이달 12일 이스탄불에서 열린 정상회의에서 공식 출범한 OTS는 터키와 중앙아시아의 카자흐스탄 아제르바이잔 우즈베키스탄 키르기스스탄이 회원국으로 참가했고, 투르크메니스탄이 참관국 자격으로 참여했다. OTS는 장기적으로는 외교안보 측면에서 협력을 강화하고 경제 분야에서 통합을 지향하고 있다. 2003년부터 집권하고 있는 에르도안 대통령은 무슬림 강경파가 핵심 지지 기반이다. 이슬람권의 맹주를 자처하며 중동 지역에 영향력을 확대해왔고, 튀르크계라는 연결고리를 활용해 중앙아시아까지 넘보고 있는 것이다.
▷튀르크라는 발음을 한자로 옮긴 것이 돌궐이다. 돌궐족은 4세기 말부터 중국 북부에서 세력을 확장해 552년에는 왕조를 세웠다. 당시 중국인들은 뛰어난 제철 기술을 가진 돌궐을 철노(鐵奴·철을 만드는 야만인)라고 부르며 두려워했다. 돌궐은 당나라에 패배한 뒤 서쪽으로 이동했고 10세기에 투르키스탄 지역까지 진출했다. OTS 회원국 대부분은 이 지역 국가들로서 민족의 뿌리가 같고 모두 이슬람권에 속해 있다. 돌궐족의 후예들이 다시 뭉치면서 돌궐제국의 부활을 떠올리게 한다.
▷OTS 출범에 가장 민감하게 반응한 국가는 중국이다. 관영 영자지 글로벌타임스는 “튀르크주의와 이슬람의 확대를 경계해야 한다. 이는 중국을 분열시키려는 분리주의자들을 자극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중국 정부의 가장 큰 고민거리인 신장위구르의 분리독립 움직임이 거세질까 봐 우려하는 것이다. 신장위구르는 18세기 청나라에 점령된 이후 중국의 일부가 됐지만 주민의 다수는 튀르크계로 분류되는 위구르족이다. 2009년 민족 간 갈등으로 대규모 유혈사태가 벌어지는 등 화약고처럼 불안한 곳이다.
▷다른 강대국들도 중앙아시아에 부는 바람을 눈여겨보고 있다. 중국 견제를 위해 신장위구르 인권 문제를 집중적으로 제기해온 미국은 중앙아시아 국가들과의 협력이 절실하다. 전통적으로 중앙아시아에 큰 영향력을 행사해온 러시아도 이 지역을 포기할 수 없는 입장이다. 돌궐족의 혈통을 이어받은 튀르크계 국가들의 움직임이 국제 정세에 또 하나의 변수가 돼 가고 있다.
장택동 논설위원 will71@donga.com
11-26 교도소 유치 나선 지자체

올해 8월 강원 태백시에는 교도소 건립을 환영한다는 현수막 150여 장이 한꺼번에 걸렸다. 태백시 교도소 건립 사업이 기획재정부의 예비타당성조사 면제 대상에 포함된 것을 축하한 것이다. 전북 남원시는 같은 달 법무부와 교도소 건립을 위한 협약을 맺었다. 일부 지방자치단체들이 기피시설의 대명사였던 교도소를 유치하는 데 발 벗고 나섰다. 급속한 인구감소로 지역 경제가 생사의 기로에 서면서 나타나는 현상이다.
▷태백시는 1980년대 광산 경기가 괜찮을 때만 해도 인구가 13만 명에 달했다. 지금은 4만2000명 수준까지 떨어졌다. 많을 때는 50곳이나 되던 광업소가 지금은 1곳뿐이다. 이마저도 친환경 에너지를 선호하는 추세 때문에 언제 없어질지 모른다. 류태호 태백시장은 “뭐라도 해야 살아남는다고 할 정도로 시민들의 마음은 절박하다”고 말했다.
▷남원시의 경우 2015년 교도소 유치 논란이 있을 때만 해도 반대 목소리가 많았다. 하지만 2차 추진 때는 달랐다. 읍면동을 상대로 교도소 유치 의사를 물었더니 4곳이 부지 제공 의사를 밝혔다. 남원시 인구는 올해 7월 처음 8만 명 아래로 떨어졌다. 남원시 관계자는 “인구 감소 추세와 지역 경기 침체 등이 교도소에 대한 시민들의 인식을 바꿔 놓은 것 같다”고 말했다.
▷태백시와 남원시에는 2026년에 교도소가 들어설 예정이다. 태백시 교도소는 직원 500명, 재소자 1500명 규모이고, 남원시는 직원 200명, 재소자 500명 규모다. 교정 공무원 등이 유입되면 줄기만 하던 인구가 모처럼 늘게 된다. 시설 관리나 조리 분야에서 지역 주민의 채용도 예상된다. 지자체들은 면회객들이 오가면서 숙박 교통 음식 관련 업종에 적지 않은 도움을 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교도소 유치 효과를 먼저 체감한 곳은 경북 청송군이다. 이미 4개의 교도소가 있는데도 추가로 여자교도소 유치를 희망하고 있다. 올해 3월 윤경희 청송군수는 박범계 법무부 장관이 청송을 찾았을 때 여자교도소 신설과 교도관 비상대기 숙소, 법무부 연수원 유치를 건의했다. 도로를 신설해 주고 인허가 절차도 빨리 제공하겠다는 인센티브까지 제시했다. 인구 2만5000여 명인 청송군의 경우 전국에서 찾아오는 면회객이 지역 상권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크다.
▷저출산 고령화로 인구 소멸에 처한 지자체는 올해 89곳에 달한다. 정부는 내년부터 매년 1조 원씩 기금을 마련해 10년간 지원한다는 계획도 세워두고 있다. 예산이나 기금과는 별도로 교도소와 같이 지역 유동인구를 늘리고 지역 경제에도 도움을 줄 수 있는 방안들이 없는지 더 적극적인 연구가 필요해 보인다.
허진석 논설위원 jameshur@donga.com
11-27 ‘지옥’

영국 일간 가디언은 어제 “세상에서 가장 쉬운 일은 K드라마 ‘지옥’을 새로운 ‘오징어게임’이라고 부르는 일이다. 폭력적 죽음을 다룬 K드라마라는 공통점으로 그렇게 부르면 안 된다”고 했다. 이 신문은 지옥이 오징어게임보다 뛰어나다고 평가한다. 오징어게임이 의상 등의 장치로 부모세대의 향수를 불러일으켰다면, 지옥은 보다 어둡고 복잡해 앞으로 10년 동안 회자될 수작이라는 것이다.
▷개봉 하루 만인 20일에 넷플릭스 드라마 1위에 오른 이후 21일 하루 빼고 줄곧 정상을 지키고 있는 지옥은 지옥 앞에 선 인간의 선택을 다룬다. 갑자기 “너는 몇 날 몇 시에 죽는다”는 ‘고지’를 받는 것은 납득하기 억울한 불행이다. 다른 사람들이 고지대로 죽는 것을 보면서 우주적 공포를 느끼지 않는 인간이 몇이나 될까. 초자연적 현상 앞에서 검증되지 않은 주장을 종교의 권위를 빌려 강요하는 장면은 섬뜩하다.
▷지옥에는 오징어게임과 비슷한 장면이 나온다. 예고된 지옥행의 시간에 괴물에게 희생당하는 인간들의 모습을 VIP들이 가면을 쓰고 지켜보는 것이다. 오징어게임에서도 가면을 쓴 VIP들이 게임 참여자들의 죽음을 희희낙락하며 관전했다. 이 ‘기울어진 운동장’에서는 평등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인지 인간들은 필요에 따라 신(神)을 소환한다. 오징어게임의 한 참여자는 자신이 유리한 상황에서만 “신이 준 기회”라 했고, 지옥의 교주는 “신의 의도는 명확하기 때문에 너희(인간)는 더 정의로워야 한다”고 말한다.
▷지옥의 특징은 ‘하이브리드’다. 연상호 감독은 2000년대 초반 만든 단편 애니메이션 ‘지옥―두 개의 삶’을 바탕으로 2019∼2020년 같은 이름의 웹툰을 연재하더니 이걸로 다시 드라마 지옥을 탄생시켰다. 지옥 시즌2도 만화부터 선보이겠다고 한다. B급 감성(CG로 나타낸 지옥사자)과 철학적 대사의 만남도 독특하다. 공권력이 약하게 처벌한 사람을 개인적으로 죽여도 되는지, 공포가 아니면 무엇이 인간을 참회하게 하는지 묻는다. 권선징악은커녕 선악의 구별에서 벗어난 세계관이 희망 없는 미래를 부각시킨다.
▷지옥에서는 사람의 목숨 값을 30억 원으로 매기고 저승사자로부터 죽어가는 과정을 지상파 방송들이 생중계한다. 코로나19, 가짜뉴스와 유튜버가 선동하는 확증편향과 갈등 조장 등 인류를 고통과 불안에 빠뜨리는 지금의 상황이 어쩌면 잿빛 ‘지옥’이다. “뜯겨 죽을까 봐 무서워서 선하게 사는 걸 정의라고 할 수 있나요? 죄인들이 무책임한 안락을 누릴 때 선한 자들만 죄의 무게를 떠안아요.” K드라마 ‘지옥’이 세계인의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현실이 더 드라마 같다.
김선미 논설위원 kimsunmi@donga.com
11-29 ‘노가더’ 유튜버

젊은 청년이 새벽길을 나선다. 인력사무소에서 100원짜리 믹스 커피를 마시고 현장에 도착하면 작업을 시작한다. 목재를 운반하고, 못질하고, 톱질하고, 새참으로 컵라면 먹고, 오후 4시쯤 일과를 마친 뒤 저녁은 따뜻한 순댓국밥으로 마무리한다. 건설 현장 청년 일꾼들의 일상을 담은 ‘노가더’ 콘텐츠가 감동을 주는 유튜브 장르로 뜨고 있다.
▷노가더는 막일꾼을 뜻하는 ‘노가다’에 사람을 뜻하는 접미사 ‘er’를 붙여 만든 신조어. 유튜브에서 ‘노가더’를 검색하면 ‘일당 13만 원 노가더의 하루’ ‘20대 노가더의 리얼 노가다’ ‘숙노(숙식 노가다)의 개솔직 후기’ 등이 줄줄이 뜬다. 고된 노동 현장을 담은 영상들엔 수십만 조회수 표시와 함께 “새벽부터 열심히 사는 모습 보고 힘을 얻습니다” “요행을 바라는 직업보다 훨씬 의미 있어 보여요” 등의 응원 글이 올라온다. “학위나 자격증을 따면 편하게 살 텐데”라는 댓글엔 이런 답이 달린다. “교과서대로 살지 않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 장르의 콘텐츠는 ‘노가다 종류와 일당’ ‘노가다 현장, 여긴 피해 가라’ ‘헝가리 숙식 노가다 가는 법’처럼 정보 전달형이 많다. 이 일을 막 시작하려는 ‘노린이’를 위해 “깔창은 필수템, 허리보호대 하면 덜 아픔” “마스크는 N95로 사고, 입술이 마르니까 립밤을 꼭 챙겨라” 등 깨알 같은 정보도 소개한다. 인력사무소의 갑질을 폭로하거나 건설 현장에 여성용 화장실이 없다는 고발성 콘텐츠로 업무 환경을 개선하려는 노력도 한다.
▷청년(15∼34세) 취업자 가운데 단순노무직은 2017년 7.3%에서 올해 9.5%로 증가했다. 인원으로는 59만9000명으로 4년 전보다 12만5000명 늘었다. 안정적인 일자리가 수년째 줄어든 데다 코로나로 알바마저 구하기 어려워진 탓이다. 창업자금 마련을 위해 작업복을 입는 청년들도 있다. MZ세대 10명 중 3명은 입사 후 1년도 지나지 않아 퇴사한다고 한다(잡코리아). 개중에는 자신의 의지로 여름엔 시원하고 겨울엔 따뜻한 사무직을 포기하고 폭염과 찬 바람 속 노동하는 삶을 택한 사람들도 있다.
▷19세 목수 이아진 씨도 대학에 입학하는 대신 목조주택 시공팀에 들어가 일하고 있다. 그는 “내 손으로 집을 짓는다는 희열이 있다”며 “생활에서 제일 필요한 게 집인데 노가다라는 단어로 건축이 낮아지는 게 싫다”고 했다. 청년들은 내 일에만 집중할 수 있고, 평생 일할 수 있으며, 노력한 만큼 기술이 늘어나는 재미를 노가더의 장점으로 꼽는다. 청년 일꾼들이 올겨울엔 덜 춥고 더 안전하게 ‘몸을 써서 성과를 만들어내는 일의 보람’을 느꼈으면 좋겠다.
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11-30 거실 카메라 해킹 공포

훔쳐보기 공포가 집 안까지 들이닥쳤다. 전국 700여 개 아파트 단지에서 월패드 카메라를 해킹해 촬영한 영상이 무더기로 유출됐다. 월패드는 주로 거실 벽에 부착된 단말기인데 출입문 난방 환기 등을 제어할 수 있다. 경비실과 영상통화를 하거나, 누가 찾아왔을 때 현관 앞을 확인하도록 카메라가 달려 있다. 해킹한 자료에는 거주자의 일상은 물론이고 알몸이나 성관계 장면도 있다고 한다. 놀란 주민들이 월패드 카메라를 가리고 있지만 해킹 공포는 가라앉지 않고 있다.
▷월패드는 영상을 저장하는 기능이 없다. 이 때문에 해커들은 아파트 보안망을 뚫고 실시간으로 내부를 촬영한 뒤 외부로 전송한 것으로 보인다. 아파트 단지는 하나의 인터넷망으로 연결돼 있어서 해킹 한 번으로 전 가구의 월패드를 통제할 수 있다고 한다. 집집마다 비밀번호를 설정할 수 있지만, 설정 안 된 한 집만 뚫리면 모든 집이 노출된다. 안심하고 쉬어야 할 가정의 보안 시스템이 취약하기 짝이 없다.
▷영상 유출은 단순한 엿보기에 그치지 않는다. 이번 해킹을 저지른 해커들은 하루 치 영상을 지워주는데 0.1비트코인(약 700만 원)을 요구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들은 주로 해외에 있고, 비트코인 거래로 자신을 숨긴다. 피해가 발생해도 범인을 잡기가 쉽지 않은 것이다. 월패드 해킹은 악성 범죄로 이어질 가능성이 적지 않다. 특정 개인의 집을 해킹해 돈을 요구하거나 사적 보복 또는 스토킹을 저지를 수도 있다. 국민 다수가 이런 범죄에 노출돼 있다는 게 끔찍하다.
▷전문가들은 아파트 가구 간 인터넷망을 분리하는 게 시급하다고 조언한다. 한꺼번에 모든 집이 해킹되는 걸 막기 위해서다. 월패드 업체들은 보안 프로그램을 설치해 영상의 외부 전송 차단에 나섰다. 보안업체들은 폐쇄회로(CC)TV 등에서 촬영한 영상에서 개인 모습을 실시간으로 가리는 ‘마스킹 시스템’을 개발 중이다. 얼굴 등을 모자이크나 암호로 전환하는 방식이다. 이를 적용하면 적어도 얼굴 노출은 막을 수 있다. 정부든 주택업체든 자동화, 정보화만 자랑할 게 아니라 보안에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도시 거주자들은 CCTV에 하루 100회 이상 노출된다고 한다. 집 안에는 월패드뿐 아니라 컴퓨터와 가전제품에 카메라가 있다. 아이들을 살펴보려고 집 안에 CCTV를 설치한 사람도 적지 않다. 길거리와 공공 화장실 등에서 집 안까지 사생활 유출에 안전지대가 사라지고 있다. 전문가들은 카메라를 가리는 게 가장 확실한 방법이라지만, 편리하고 치안에 필요한 장비를 포기하기도 쉽지 않다. 삶을 편리하게 만드는 기기보다 안전하게 해줄 기술이 더 중요한 시대이다.◎
이은우 논설위원 libra@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