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여담 2021-11/ 11월 01일(월) 훈민정음과 석보상절 - 11월 30일(화) 관제소득과 시장소득
오후여담 2021-11/ 문화일보
11월 01일(월) 훈민정음과 석보상절
문희수 논설위원
세종은 1443년 훈민정음을 창제해놓고도 바로 반포하지 못했다. 중신 등 사대부들은 한자 외에 언문(훈민정음의 속어)을 쓰는 것을 극력 반대했다. 상국(上國)으로 떠받들던 중국에 반하는 것이자, 백성들이 글을 배우면 신분제를 위협해 국가 기반을 해칠 수 있다고 반발했다. 최만리가 말년에도 상소로 반대했던 사실은 유명하다.
세종은 이런 반발 탓에 훈민정음을 만든 지 3년 뒤인 1446년(세종 28년)에야 반포했다. 세종이 눈을 감기 4년 전이다. 더는 늦출 수 없다는 절박감이 읽힌다. 1447년에 간행된 ‘석보상절’은 훈민정음 반포 이후에 나온 최초의 책이다. 1445년에 지어진 ‘용비어천가’가 이보다 빠르지만, 이는 반포 1년 전이다. 석보상절은 수양대군이 아버지인 세종의 명을 받고 편찬했는데, 석가모니의 일대기와 설법을 묶은 것이다. 수양대군의 친모이자 세종의 왕비로, 불심이 깊었던 소현왕후 심 씨의 명복을 기리려는 취지였다.
조선은 유교 국가였지만, 왕실의 종교는 불교였다. 태조 이성계의 5남인 태종(이방원)과 그의 왕비 원경왕후 민 씨, 세종과 소현왕후, 세조 등이 모두 그랬다. 다들 가슴 아픈 역정과 관련 깊다. 태종은 두 차례 왕자의 난으로 친형제와 이복동생을 처단했고, 외척을 견제하고자 폐세자된 양녕대군을 추종하던 원경왕후의 친오빠들을 처형했다. 또 소현왕후의 아버지인 세종의 장인으로, 당시 영의정이던 심온을 역모죄로 사사했고, 세종의 장모 안 씨를 그 딸들과 함께 관비로 전락시켰다. 세종은 태종의 위세에 눌려 태종 사후 4년 뒤인 재위 8년에야 장모를 복권시킨 아픈 사연이 있다. 세종 자신도 1449년 찬불가 ‘월인천강지곡’을 지었다. 수양대군은 세종의 아들 18명 중 둘째 적자로, 장자인 문종의 동생이었다. 수양대군은 문종의 독자인 어린 조카 단종을 폐위시키고 세조가 됐고, 단종이 결국 유배지 영월에서 숨을 거뒀으니 깊은 참회가 있었을 게다.
국립중앙박물관이 고 이건희 삼성 회장 유족이 기증한 석보상절 초간본 2권(권20, 권21)을 전시 중이다. 이 책 두 권은 세종대에 한글 활자로 찍은 초간본이다. 백성이 글을 깨치도록 노심초사했던 세종의 애민정신과 정치적 결단, 그리고 조선왕조 초기의 애달픈 역사를 추상(追想)하며 감상해 보시길.
11월 02일 이재명 ‘표절’ 내로남불
박민 논설위원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선 후보의 석사 논문 표절 의혹과 관련, 교육부가 2일까지 사실 확인 요청 공문을 보냈지만, 가천대는 “검증 시효기간이 지나 재조사할 수 없다”는 입장을 재확인했다. 가천대는 2013년 이 후보 논문(지방정치 부정부패의 극복 방안, 2005년)에 대해 같은 이유로 심사를 종결했다. 이 후보는 지난 7월 윤석열 전 검찰총장의 부인 김건희 씨 박사 논문 표절 의혹에 대해 “개인의 사생활 같은 내밀한 문제가 아니고, 사회적으로 책임져야 할 범죄행위”라고 말했다. 그러나 본인의 표절 의혹에 대해서는 ‘인용 표시를 안 했을 뿐’이라며 “논문을 반납하고 이력에서 지웠다”고 밝혔다. 과연 그 정도 해명으로 넘어갈 수준일까.
사회학 박사인 오건호 씨에 따르면, 이 후보 논문에서 인용 표시 없이 다른 자료를 그대로 게재한 경우가 총 77쪽 중 49쪽(64%)이었다. 한쪽 전체를 그대로 옮겨 쓴 것도 24쪽에 달했다. 오 씨는 ‘복사 수준’이라고 말했다. ‘무명의 더쿠’가 인터넷에 올린 표절 사례는 민망한 수준이다. 표절 사례가 드문 ‘결론’의 상당 부분을 그대로 베꼈다. 이 후보 논문 ‘제5장 결론’의 “부정·부패는 국가의 기원과 그 연원을 함께 해왔으며…일반인의 상상을 초월하는 경우가 많다”(75p)는 윤광재 씨의 2004년 논문 147쪽 첫 문단에서 ‘부정’이란 단어 하나를 추가해 그대로 옮겼다. 같은 페이지 다른 문단은 토씨 하나 바꾸지 않았다. 잘못 베낀 사례도 있다. 이 후보 논문 48쪽에는 “(김영종, 1988:24∼25)”라는 괄호 각주가 있는데 이는 김영종 씨의 2008년 논문 9쪽 각주 “김영종(1988.8.24∼25) …한국행정학회 주최 제1차 국제학술대회 발표 논문, p.404”를 베끼면서 학술대회 날짜를 인용 페이지로 오기한 것이다. 이 후보 논문 4쪽(pp.60∼63)은 한형서 씨의 2003년 논문 125∼126쪽을 통째로 옮겨왔다.
표절에 대한 이 후보의 해명 방식은 대장동에서와 똑같다. 자기 잘못은 없고, 남 탓이나 공작이고, 책임질 일도 사과할 필요도 없다는 것이다. 이 후보는 자신의 저서에서 “정치인의 거짓말은 칼과 같다. 그 칼은 국민을 겨누기도 하고 자신을 겨누기도 한다”며 “선거에 지더라도 국민을 상대로 거짓말을 하지 않겠다”고 적었다. 차라리 표절이었으면 하는 대목이다.
11월 03일 ‘바흐-류재준 첼로곡’ 위로
이미숙 논설위원
첼로는 인간의 목소리와 가장 닮은 음색을 갖고 있어 친근하게 느껴지는 현악기다. 따뜻하고 깊은 저음은 해질 무렵의 가을 이미지를 연상시킨다. 첼로는 피아노, 바이올린과 어우러지는 피아노 3중주나 비올라, 첼로와 함께 하는 현악 3중주에서는 낮은 음역을 담당해 조연처럼 인식되기도 하지만, 베이스에서 소프라노까지 다양한 음역대에서 풍부한 음색을 표현할 수 있어 독주 악기로도 손색이 없다. 앙상블을 구성할 경우 오케스트라와 같은 화음을 낼 수 있는 다재다능한 악기다.
첼로의 진가를 보여준 작품은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의 ‘여섯 개의 무반주 첼로 모음곡’이다. 첼로 솔로를 위해 쓰인 최고의 작품이라는 평가를 받는데, 스페인 카탈루냐의 첼리스트 파블로 카살스 덕분에 세상에 알려졌다. 그는 소년 시절 고악보 가게에서 먼지에 뒤덮인 바흐의 첼로 모음곡 악보를 발견한 뒤 오랜 연구 끝에 이 곡을 연주하고 녹음했다. 이후 므스티슬라프 로스트로포비치, 요요마 등 정상급 첼리스트들이 앞다퉈 이 곡을 녹음했는데, 카살스 음반이 가장 바흐답게 연주한 교본으로 통한다. 요요마는 현대적 감각으로 해석한 음반으로 1985년 그래미상 최고 기악연주자상을 받기도 했다.
바흐의 첼로 모음곡은 그간 바이올린과 비올라, 피아노 등 다양한 악기들로 편곡됐는데, 지난달 30일 저녁 서울 롯데 콘서트홀에서 열린 서울국제음악제 폐막 공연에서는 작곡가 류재준이 재해석한 ‘12대의 첼로를 위한 콘체르탄테’가 초연됐다. 서울국제음악제 예술감독이기도 한 그는 바흐의 첼로 모음곡을 12대의 첼로를 위해 재탄생시키는 작업을 다이아몬드 원석 가공에 비유했다. “가공사의 정밀한 손끝에서 눈부신 보석이 만들어지듯, 이 곡에 숨겨진 고귀한 선율을 세공하며 환희를 느꼈다”고 했다. 카살스가 연주한 바흐의 무반주 첼로 모음곡이 바로크 시대의 내면적 성찰을 보여줬다면, 양성원·송영훈 등 국내 정상급 첼리스트 6명과 아르토 노라스 등 외국 첼리스트 6명의 앙상블로 선보인 류 감독의 작품은 흥미롭고 복합적인 요즘 세상을 바흐적 영감으로 표현했다. 12명의 첼리스트가 빚어낸 웅장하고 다채로운 하모니는 만추의 이미지와 닮았다. 코로나 팬데믹에 지친 이들의 영혼을 위로하는 음악회였다.
11월 04일 조전(弔電) 농단
이현종 논설위원
국가 정상급 인사의 장례식 ‘조문(弔問)’은 그 자체로 의미 있는 일이지만, 외교적 의미도 상당하다. 적대국이라도 조문할 때에는 앙금을 묻고 대국적 제스처를 취할 수 있기 때문이다. 1980년 5월 티토 유고 대통령이 사망하고 장례식을 치를 때 58명의 세계 정상이 참석했다. 동서 냉전이 치열할 당시 소련은 브레즈네프 공산당 서기가 직접 참석했다. 티토 대통령이 비동맹 독자 노선을 걸었기 때문에 소련 입장에서 브레즈네프 참석을 계기로 유고를 다시 위성국으로 끌어들이는 효과가 있었다. 반면 미국은 지미 카터 대통령 대신 월터 먼데일 부통령이 참석해 소련과 비교됐다.
2005년 4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장례식 때는 대만의 천수이볜 총통이 이탈리아로부터 비자를 받아 참석했다. 바티칸이 대만과 단교하고 중국과 손을 잡으려 할 때 장례식 참석을 계기로 유대관계를 공고히 하는 계기가 됐다. 1994년 ‘김일성 장례식’ 때 극심한 남·남 갈등이 벌어졌다. 재야세력과 학생운동권은 조문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며 곳곳에 분향소를 설치한 반면 보수단체는 조문을 용납해선 안 된다고 했다. 당시 남북 정상회담 직전까지 갔던 김영삼 정부는 결국 조문을 하지 않아 이후 남북관계 경색의 빌미가 됐다.
외교부는 지난달 26∼30일 엄수된 노태우 전 대통령 국가장에서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가 29일 보낸 조전(弔電)을 장례식이 끝난 1일에야 유족 측에 전달했다고 한다. 그것도 유족 측이 싱하이밍 주한 중국대사와 통화를 하다 시 주석이 조전을 보낸 사실을 알고 외교부 측에 문의하면서 알려졌다. 더 가관은 외교부의 해명이다. 최영삼 외교부 대변인은 2일 “여러 국가의 조전 현황을 신중히 집계한 후 위로의 뜻을 모아 유족 측에 전달하고자 했다”고 말했다. 외교부는, 조전은 유족에게 보낸 것이 아니기에 즉시 유족과 공유해야 하는 것은 아니며 외교 결례도 아니라는 궤변도 늘어놓았다. 조전을 보낸 중국이나 일본 등에서 어떻게 볼지를 생각하면 한심하다. 이런 외교부가 다른 큰일을 제대로 할 수 있겠나.
문재인 대통령 모친이나 이희호 여사 장례식 때 북한이 보낸 조전·조화는 즉각 공개했던 것과 비교해도 ‘조전 횡령’ 사태는 국정 농단에 가깝다.
11월 05일 정치 ‘설거지論’
이신우 논설고문
최근 ‘설거지론’이라는 신조어가 인터넷을 달구고 있다. 중앙 일간지들까지 기사를 내보내며 관심을 기울일 정도다. 우리가 이런 말을 쓸 때는 흔히 남의 잔치에 뒤치다꺼리를 해야 하는 경우를 의미한다. 그런데 이것이 결혼을 둘러싼 남녀 관계를 설명하는 것으로 확대되고 있다. 열심히 노력해 좋은 직장을 얻은 남성들이, 젊은 시절 다수의 남성과 연애를 즐기며 살아온 여성의 결혼 파트너가 돼야 하는 처지를 비유하는 것이다. 좀 더 쉽게 설명하자면 ‘모태 솔로’나 ‘연애 숙맥’이기 십상인 공대생들이 공부만 열심히 하다 일류 기업에 입사해 신흥 도시에 살고 있다면 대부분 이런 경우에 해당한다는 이야기다.
물론 20대 남성들이 자신의 처지를 개탄하면서 논쟁에 불을 붙이고 있는 만큼, 이 안에는 여성 혐오의 정서가 묻어 있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하지만 반(反)페미니즘적인 성격을 털어낸 후 이를 대한민국 정치에 대입해 보면 어떨까. 안철수 국민의당 대표만큼 설거지론을 연상케 할 정치인도 찾기 어려울 것이다. 안 대표는 자기 몸값이 하늘을 찌를 때만 해도 기꺼이 좌파 진영에 참여해 서울시장이든 대통령 선거 등 후보 선출 과정마다 단일화를 위해 몸을 바치더니, 정작 자기 몸값이 떨어진 다음부터는 우파 쪽으로 돌아서서 단일화를 거부하는 모습을 보이는 중이다. 이쯤 되면 ‘우파 설거지론’이 거론돼도 안 대표로서는 그다지 할 말이 없을 것이다.
또 있다. 문재인 대통령이야말로 안 대표를 쑥스럽게 만들기에 충분하다. 문 대통령은 집권 내내 ‘인기 없는 개혁은 하지 않는다’는 정치 철학(?)을 고수하는 중이다. 재정 건전화가 대표적이다. 문 정부 연평균 재정 지출 증가율은 무려 8.5%에 이른다. 그런데 2023년부터는 5.0%로, 2024년엔 4.5%, 2025년에는 4.2%로 낮추는 계획을 제시했다. 매년 재정 폭주를 반복하더니 다음 정권은 허리띠를 졸라매라는 주문이다. 온실가스도 40%를 감축할 터이니, 다음 정부부터 실시하라고 한다. 국민연금 개혁을 외면하는 것은 물론이고 공공요금조차 자기 임기까지는 동결 일색이다. 나는 꽃길을 걸을 테니 다음 정권은 가시밭길을 준비하라는 것과 같다. 최근의 여론조사에 따르면 국민의 다수가 정권교체를 원하고 있다. ‘우파 설거지론’은 계속될 전망이다.
11월 08일(월) 곽훈 화백 ‘고래 사냥’

김종호 논설고문
“스님이 화두(話頭)를 들고 참선에 들어가듯이, 작가는 영혼 속에서 뭔가를 가지고 매달린다. 내 경우는 불가사의한 힘으로 우주를 지배하는 ‘기(氣)’를 재현하는 것이다.” “살아 있는 모든 것은 소리를 낸다. 심장이 뛰는 소리도 있다. 생명체가 죽으면 소리가 없어진다. 화가는 시각예술을 하니까 소리를 시각으로 표현한다.” “깡통도 찌그러뜨려서 버리지 않고 예쁘게 꾸며 재활용하는 게 예술가의 일이다.” 동양의 3대 사상인 유·불·선(儒佛禪)을 바탕으로 작품 활동을 하는 세계적인 원로화가 곽훈(80)의 말이다. 미술평론가 임두빈은 그를 “천 년의 시간을 넘어 역사의 숨결을 살아 있게 한다”고 했다.
서울대 미대 서양화과를 1963년 졸업하고 이화여고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며 실험주의 미술운동을 벌이던 곽 화백은 1975년 미국으로 이주했다. 그 뒤로 한국을 오가며 활동해온 그는 이탈리아 베니스비엔날레의 1995년 한국관 개관 작가로 초대받으면서, 세계의 주목을 더 크게 받기 시작했다. 당시 퍼포먼스·설치 작품 ‘겁(劫)/소리 : 마르코폴로가 남기고 간 것은 무엇인가’는 신선한 충격이었다. 옹기들을 줄로 매달아 늘어뜨린 장대를 비구니들이 들쳐 메고 행진한 뒤 그 자리에 설치했다. 하지만 미술평론가 윤진섭은 “곽훈의 예술적 본령은 회화”라고 한다. 그는 ‘기(氣)’ ‘주문(呪文)’ ‘겁’ 연작 등 동양 사상을 현대미술로 재해석한 표현주의적 회화 작품 활동을 꾸준히 해왔다.
망망대해에서 사투를 벌이는 원시적인 고래 사냥을 표현한 샤머니즘적 회화 ‘할라이트(Halaayt)’ 연작도 대표적이다. 북극해 연안에서 주로 생활하는 에스키모의 세 부류 중 하나인 이누이트족(族) 언어 ‘할라이트’는 ‘영적으로 트랜스 단계인 무아지경에 이르다’란 뜻이라고 한다. 미국 알래스카 여행 중에 고래 뼈를 보고 영감(靈感)을 받은 그는 이누이트족 등의 고래 사냥에 대해 깊이 연구하며 매료됐다. 선사시대 유적인 울산 반구대 암각화의 고래 그림도 찾아본 그는 “우리 선조도 고래를 잡아먹고 살았다는 사실에 전율을 느꼈다”고 한다. ‘할라이트’ 신작들을 선보인 그의 제33회 이중섭미술상 수상 기념전이 서울 조선일보미술관에서 지난 4일 시작됐다. 오는 14일까지다. 특별한 감흥을 불러일으킨다.
11월 09일 영부인 列傳

이도운 논설위원
영부인(令夫人)은 남의 부인을 3인칭으로 높여 부르는 말인데, 대통령의 부인을 지칭할 때도 ‘여사(女史)’라는 존칭과 함께 관례적으로 사용한다. 국내에는 모두 11명의 대통령 부인이 있었다. 이승만 초대 대통령의 부인 프란체스카 도너는 오스트리아 출신으로 스위스에서 이승만을 처음 만나 결혼했다. 유일한 외국인 영부인이었다. 윤보선 2대 대통령의 부인 공덕귀는 5·16 쿠데타로 1년 6개월 만에 영부인 자리에서 물러났지만, 구속자 석방·기생관광 반대 등 사회운동가로 활동했다.
박정희 대통령의 부인 육영수는 지금도 많은 사람이 영부인의 전형으로 삼고 있다. 한센인 등 사회적 약자를 돕는 데 적극적이었을 뿐만 아니라, 남편에게 쓴소리를 하기도 해 박정희는 육영수를 ‘청와대 안의 야당’으로 부르기도 했다. 박근혜 대통령의 모친이기도 하다.
최규하 대통령의 부인 홍기는 8개월 10일의 가장 짧은 영부인 재임 기간을 기록했다. 12·12 쿠데타 등 격동기여서 영부인 역할도 하기 어려웠다. 전두환 대통령의 부인 이순자는 육사 교장의 딸로 생도였던 전두환과 결혼하려고 이화여대를 중퇴했다. 영부인 시절 적극적으로 대외 활동을 했고, 전두환이 유배와 수감 등 풍파를 겪을 때도 적극적으로 남편과 함께했다. 노태우 전 대통령의 부인 김옥숙은 이순자와의 차별화를 위해 외부 활동을 최소화했다.
김영삼 대통령의 부인 손명순은 전형적인 내조형 영부인이었다. 김대중 대통령 부인 이희호는 남편의 정치적 동지였다. 그는 육영수와는 다른, 여성의 정치·사회적 참여라는 측면에서 또 하나의 영부인 전형을 만들었다. 노무현 대통령의 부인 권양숙은 남편이 고시 공부 시절부터 뒷바라지했던 첫사랑이었고, 이명박 대통령의 부인 김윤옥은 한식 세계화에 관심을 갖고 활동했다. 박근혜 대통령은 배우자가 없었다. 문재인 대통령의 부인 김정숙은 캠퍼스 커플이었고, 집안에서뿐만 아니라 정치 현장에서도 남편을 도왔다.
내년 3월 당선되는 차기 대통령의 부인은 피아니스트거나 미술 전문가일 가능성이 크다. 혹은 병리과 전문의나 최초의 ‘퍼스트 허즈번드(남성 배우자)’가 될 수도 있다. 누가 되든 가장 중요한 역할은 사회 통합을 돕고, 소외된 이웃을 보듬는 일이 될 것이다.
11월 10일 ‘부산을 향해 묵념’

이미숙 논설위원
매년 11월 11일 오전 11시, 세계 각국의 6·25전쟁 참전 용사와 가족들은 부산을 향해 1분간 묵념을 한다. 대한민국의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해 싸웠던 유엔 참전 용사들을 추모하기 위해서다. 행사 명칭은 ‘턴 투워드 부산(Turn Toward Busan)’. 캐나다 참전용사 빈센트 커트니가 “국경을 초월해 하나가 되자”며 세계 유일의 유엔군 묘지가 있는 부산을 향해 1분간 묵념하자는 제안을 한 후 2007년부터 6·25 참전 21개국(전투지원 16개국 + 의료지원 5개국)에서 동시에 진행돼왔다.
이 행사는 지난해 3월 ‘유엔참전용사의 명예선양 등에 관한 법률’ 제정으로 11월 11일이 유엔참전용사 국제추모의 날로 지정되면서 지난해부터는 ‘턴 투워드 부산, 유엔참전용사 국제추모식’으로 확대됐다. 유엔 참전국들과 함께 6·25 참전용사들의 희생과 공헌을 기념하는 유엔참전용사 추모 평화음악회 등 다양한 행사가 열린다.
지난해엔 코로나19 여파로 참전용사 방한 행사가 중단됐지만 올해엔 미국과 영국 등 7개국의 참전용사 40여 명이 가족과 함께 방한, 행사에 참석한다. 국가보훈처에 따르면 턴 투워드 부산 제안자인 커트니 씨도 올해 행사에 참석한다. 6·25전쟁 때 유엔군은 총 175만4400명이 파병돼 4만896명이 전사했는데 부산 유엔기념공원엔 2300구의 유해가 안장됐다.
11월 11일은 원래 제1차 세계대전 종전기념일이다. 영국과 영연방에선 전몰장병 추모의 날로 지정해 개양귀비 꽃인 빨간 포피를 가슴에 단다. 미국에선 과거 참전했던 모든 전쟁의 재향군인을 기리는 날로 공휴일인데 올해엔 특히 6·25 때 희생된 미군 3만6593명의 이름을 새긴 한국전 참전기념비가 캘리포니아주에서 제막돼 의미가 있다. 기념비 건립위원회 사무총장인 재미동포 박동우 씨가 페이스북에 올린 글에 따르면 기념비는 11일 오후 1시 제막된다. 플러턴시 힐크레스트 공원에 조성된 기념비는 오각형 별 5개로 구성됐는데 별 1개에 희생 미군의 이름을 7500명씩 새겨넣었다. 71년 전 자유민주주의를 위해 피를 흘렸던 미국의 청년들이 한·미 동맹의 수호 별이 된 셈인데, 이젠 우리가 흔들리는 자유민주주의를 지키는 데 앞장서야 한다. 언제든 자유는 결코 거저 주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Freedom is not free).
11월 11일 정치인 첫인상

박민 논설위원
자연과 인체의 법칙이나 현상을 나타내는 숫자들은 인간 심리와 행동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정치에서도 잘 활용하면 효율적인 전술·전략을 구사할 수 있다.
최근 인터넷에 78 대 22 법칙이 회자된다. 바다와 육지의 면적 비, 공기 중 질소와 기타 구성비, 인체의 수분과 기타 구성비가 모두 78 대 22라고 한다. 유대인이 창조의 법칙이라고 부르는 이유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사업에서 성공 확률이 78%, 실패 확률이 22%면 최상의 조건으로 간주한다. 정치에서 중요한 선전선동에도 이 법칙이 적용된다. 유대인을 탄압했던 독일 나치의 선전장관 괴벨스는 80%의 진실에 20%의 거짓을 섞으면 더 큰 효과를 발휘하는 것을 발견했다. 선거에서도 거짓을 활용하면 일시적 효과를 거둘 수 있다. 그러나 탄로 나면 치명상을 입는다.
김성태 고려대 교수에 따르면 학습이나 감정 정보 처리를 담당하는 뇌의 편도체가 시각적으로 첫인상을 형성하는 데 걸리는 시간은 0.017초다. 이렇게 형성된 정보는 나중에 습득된 정보보다 강한 영향력을 발휘한다. 심리학에서 말하는 초두효과(Primary Effect)다. 찰나에 형성된 첫인상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 더구나 부정적 첫인상은 편도체에 더 오래 기억된다. 첫인상을 바꾸기 위해서는 200배의 긍정적 정보나 60번의 좋은 만남이 필요하다.
첫인상이 나쁜 정치인은 회생불능일까. 다행히 유명 셀럽에 대한 평가는 최근에 입력된 정보가 더 큰 영향력을 행사한다. 미디어 사회학의 점화이론(Priming Theory)이다. 매주 실시되는 대통령 지지도 조사가 대표적인데, 첫인상이나 오래전 기억보다 최근 대통령 관련 정보를 바탕으로 평가가 이뤄진다. 선거에서도 악재를 해명하는 것보다 새로운 이슈로 덮는 것이 훨씬 효과적이다.
마이크로소프트의 연구에 따르면, 미국인들이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은 평균 8초에 불과하다. 성공적 커뮤니케이션을 위해서는 8초 안에 상대의 마음을 사로잡아야 한다. 정치인의 유세나 연설도 마찬가지다. 따라서 대담한 선언이나 도발적 문제 제기 등으로 서두를 시작하는 것이 유리하다. PGA투어의 명예의 전당에 들어간 골퍼들을 분석해보면 어드레스 자세를 취한 뒤 평균 8초 안에 스윙을 마쳤다고 한다.
11월 12일 맑아진 늦가을

문희수 논설위원
날씨는 쌀쌀해졌지만 공기는 한층 맑아진 느낌이다. 매년 11월 이맘때엔 미세먼지로 뿌연 날이 많았는데 올해는 사뭇 다르다. ‘위드 코로나’로 방역 조치도 다소 풀려 깊어가는 가을이 아쉬워 길을 재촉하는 행락객 발걸음이 더욱 가볍다.
지난 9월 서울 대기 질은 관측을 시작한 이후 가장 좋았다. 미세먼지는 1995년 관측 이래 최저치였고, 초미세먼지도 종전 최저치였던 2018년보다 낮았다. 전국 17개 시·도 모두 ‘좋음’ 수준이었다. 최근 공기가 깨끗해진 데엔 중국의 석탄난이 큰 요인으로 꼽힌다. 석탄값 급등에다 중국이 외교 갈등을 빚는 호주에 대한 보복으로 호주산 석탄 수입을 금지함에 따라 석탄 화력 발전이 차질을 빚으면서 미세먼지 배출량이 줄어 국내로 유입되는 미세먼지도 감소했다는 것이다.
중국은 한국의 대기오염은 한국 탓일 뿐이라며, 중국발 미세먼지 영향이 적지 않다는 것을 극구 부인한다. 그러나 2017년 한국 국립환경과학원과 나사(NASA·미 항공우주국)가 발표한 한 해 전의 공동조사 결과를 보면 중국 대륙 영향이 34%, 북한 9%, 국내 요인 52%였다. 중국 미세먼지 유입이 적은 5∼6월에 측정했는데도 이 정도였다. 2019년 11월 발표된 한·중·일 3국 공동조사에서도 확인됐다. 서울 초미세먼지에 미치는 중국 영향(기여도)은 한국·일본 두 나라의 평가 모두 39%였다. 반면 중국 측 평가는 23%로 낮았다. 한국 요인의 영향 평가는 일본 30%·한국 42%인 데 비해, 중국은 무려 63%였다. 책임을 회피하려는 중국의 안간힘이 확연히 드러난다. 그러나 중국 영향은 대전에선 한국 47%·일본 48%였고, 이보다 먼 부산도 한국 29%·일본 31%로 높게 나왔다. 더구나 국내 조사에서는 중국발 미세먼지 유입이 많은 2∼3월엔 중국 영향이 60% 이상인 실정이다.
대기오염을 줄이려면 국제 공조가 필요하다. 수치 왜곡으로 진실을 숨기지 못한다. 중국은 내년 2월 베이징동계올림픽을 연다. 평소 매캐한 베이징의 대기를 깨끗하게 만들려고 부심할 게다. 시진핑 국가주석의 사상 초유 3연임을 앞둔 시점이니 더욱 그럴 것이다. 중국이 자국 미세먼지의 영향이 적을 수밖에 없을 이 시기를 골라 자기 탓이 아니라는 조사 결과를 내미는 일은 없길 바란다.
11월 15일(월) 이재명의 위험한 언론관

이현종 논설위원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선 후보는 본인에게 따지고 드는 언론에 매우 적대적이다. 지난 2018년 6·13 지방선거에서 이 후보가 경기도지사에 당선된 후 이뤄진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이런 모습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당선된 뒤에는 대개 통합과 화해를 강조하는데, 이 후보는 달랐다.
이 후보는 당선이 확실해진 후 MBC 인터뷰에 응했다. 이 후보는 소감을 묻는 말에 “100만의 시정을 맡고 있을 때보다는 많은 책임감, 하중 그런 걸 느끼고 있다”고 답했다. 이 후보는 선거전의 이슈였던 김부선 씨와의 스캔들 의혹 관련 질문이 이어지자 “네, 감사합니다. 저희가 잘 안 들리는데요. 열심히 하겠습니다. 고맙습니다”라며 인터뷰를 중단했다. 이어 JTBC 인터뷰에서도 “제게 부여된 역할, 또 제가 책임져야 할 부분들에 대해 확고하게 책임지도록 노력하겠다”고 소감을 밝혔다. 이에 진행자가 “책임질 부분이 있다면 책임을 지겠다, 이런 말씀을 하셨다. 구체적으로 어떤 뜻에서 하신 얘기냐”고 묻자 “그런 말 한 적 없다. ‘책임질 부분이 있으면’이라고 가정해서 말한 적이 없다. 본인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으신가 보다”고 되레 진행자에게 쏘아붙였다.
당 대선후보가 된 뒤 지난 10일 관훈클럽 토론회에서도 대장동 의혹을 묻는 패널 질문에 이 후보가 “편향적”이라고 지적하자 패널로 나온 다른 언론인이 “국민을 대신해 질의하는 것이니 질문이 거슬려도 패널을 평가하는 건 자제해 달라”고 반박했다. 경선전에서도 대장동 의혹을 집중 제기한 한 언론사에 대해 “이런 것이 징벌 대상”이라며 언론사를 향해 “손을 떼라”는 말도 서슴지 않았다.
심지어 지난 12일 부산을 방문해서는 지지자들을 향해 “우리가 언론사가 돼야 한다. 그리고 소식을 전하고 우리의 진심을 알리고 저들의 잘못을 우리의 카톡, 텔레방 댓글로 커뮤니티에 열심히 써서 언론이 묵살하는 진실을 알리자”고 했다. 이에 대해 드루킹 일당이 한 댓글 공작 선동과 같다는 비판이 있다. 이 후보는 기자들에 대한 ‘백 브리핑’도 갑자기 중단했다.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이 재임 중 백악관 브리핑을 사실상 중단하고 트위터로만 소통했던 것처럼 이 후보가 대통령이 된다면 똑같은 모습이 되지 않을까 하는 우려가 기우이기를 바랄 뿐이다.
11월 16일 요소수와 불화수소

이신우 논설고문
“이인영, ‘요소수 우리가 좀 부족하더라도 북한과 나눠야’”. 지난주 인터넷에서 기사를 검색하다가 이런 제목을 보고 깜짝 놀랐다. 중국의 요소수 수출 금지로 국내 산업계가 발을 동동 구르던 와중에 이인영 통일부 장관이 이런 언급을 했다니! 게다가 큰 제목 바로 밑에는 ‘많아서 나누는 것보다 부족할 때 나누는 게 진짜 나누는 것’이라는 소제목까지 달려 있었다. 잠시 당황했지만 곧 실소를 금치 못했다. 제목 밑에 붙어 있게 마련인 기사 입력에 2021.11.18.21:50이라고 미래형 시간표를 달아놓은 것이다. 만우절 식의 가짜 뉴스였다. 지난해 11월 이 장관이 코로나 방역 협력을 통한 남북 대화 의지를 밝히며 “코로나 치료제·백신 부족해도 북(北)과 나눠야”라고 한 기사의 제목을 그대로 패러디한 것이었다.
요소수의 전격 수출 금지로 한국 사회가 요동을 치면서 자연히 2019년 일본이 전략물자인 불화수소의 북한 유출 의혹으로 한국에 대해 수출 금지 조치를 취했을 때가 연상됐다. 당시 한국 사회는 부당한 조치라고 분노하며 반일 열풍으로 뜨거웠다. 길거리마다 “NO JAPAN. 사지 않습니다. 가지 않습니다”라는 플래카드가 내걸렸다. 문재인 정부도 강경했다. 대통령 스스로 모든 책임은 일본에 있다며 “다시는 일본에 지지 않겠다”고 공개 선언할 정도였다. 그런데 요소수 수출금지와 함께, 중국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 중국 매스컴이 일제히 “(한국은) 글로벌 공급망에서 중국이 가진 위치를 분명히 인식해야 한다”는 기사를 내보낸 것이다. “대항한다면 반드시 해를 입을 것”이라고도 했다.
중국이 이런 식의 본색을 드러냈다면 우리 대통령도 상응하는 분노를 표시했어야 마땅했다. “양국 관계에 대한 도전”임을 확실히 하고 “다시는 중국에 지지 않을 것”이라는 입장을 표명하는 것이 외교 형평성에도 맞았을 것이다. 시민사회 역시 “NO CHINA. 사지 않습니다. 가지 않습니다”라는 플래카드를 일제히 내걸었어야 했다. 하지만 “한국은 중국의 기분을 상하게 하기를 원치 않을 것”이라는 중국 매체들의 경고 앞에 문 정부는 끝내 침묵했다. 그것도 아니라면, 중국의 일시적 해금 조치에 마냥 감읍하며 “시진핑(習近平) 주석의 중국몽을 함께하겠다”고 다짐했던가.
11월 17일 최상철 화백의 ‘無物’

김종호 논설고문
“욕심을 버리거나 줄이려고 애쓴다는 것 또한 얼마나 큰 욕심일까. 무심(無心)의 경지를 알 수 없는 내게는 그런 생각조차 이미 또 다른 이름의 욕심이 아니던가. 그리려는 열망을 안고, 어찌 욕심 없는 그림에 이를 수 있겠는가. 하나의 욕심을 지우기 위해 또 다른 욕심을 부르는 생활이 여유 없이 살아가는 내 삶의 어리석은 모습이 아닐까.” 추상미술의 독창적 세계를 열어온 최상철(75) 화백의 말이다.
‘그리기를 거부하는 화가’로도 불리는 그는 서울대 미대 회화과를 1969년 졸업한 지 10년 뒤부터 ‘붓’을 버렸다. 색칠한 종이 위에 접착테이프를 한 줄씩 붙였다가 떼어내는 작업을 반복한 작품이 그 시작이었다. 뒤이어, 캔버스에 고무 패킹 2개를 던져서 떨어진 두 지점을 선으로 연결하기를 999번 되풀이하기도 했다. 검은 물감을 묻힌 돌멩이를 캔버스 위에 놓고 기울여, 굴러가는 흔적을 남기는 작업을 1000번 반복한 작품들도 대표적이다. 거의 모든 작품을 ‘제목이 없다’는 뜻의 ‘Untitled’로 발표하다가 2004년부터 노자(老子)의 ‘복귀어무물(復歸於無物)’을 차용한 ‘무물’로 제목을 달기 시작한 그는 이렇게 설명한다. “무물이란 사물이 생성되기 전의 들끓는 혼돈의 상태를 의미한다. 근원적 지점, 궁극적으로 무의 상태에 다가가기를 바라는 마음의 한 모습이다. 어떻게 하면 그림 이전의 상태에 다다를 수 있을까 하는 내 마음의 이상향 같은 것이다. 내 체취를 걷어낼수록 진정으로 나다운 길에 들어설 수 있을 것 같다.”
그는 형이상학적 물리 법칙인 ‘우주율(宇宙律)’이 창작 주체이고, 작가는 그 결과를 발견·수습하는 역할을 한다고도 여긴다. 그의 ‘무물’ 신작 14점을 선보인 개인전이 서울 종로구 통의동 아트스페이스에서 지난 10월 28일 시작됐다. 오는 27일 끝난다. 시인·극작가·미술평론가인 장소현의 시 ‘버리기, 비우기, 얼룩- 최상철의 그림농사’를 새삼 떠올리게도 한다. 한 대목은 이렇다. ‘바흐의 무반주 첼로 곡이나 푸가의 우주율/ 또는 산사(山寺)의 풍경소리나 독경 소리/ 울림……/ 텅 빈 울림/ 거기 나는 없다/ 엎드리는 경건함만 가득할 뿐/ 엎드리는 것은 가득한 무심/ 나는 없다, 빈 그림자마저도…/ 어디로 갔을까, 어디로 가는 것일까/ 비우고 또 비우면’.
11월 18일 플라잉카 시대

문희수 논설위원
얼마 전 김포공항에서 주목할 만한 시연회가 열렸다. 민간업체와 정부가 힘을 합쳐 2인승 비행체로 3분 동안 1.2㎞ 비행하는 한국형 도심항공교통(UAM) 운용 모델 종합 실증에 성공한 것이다. 이로써 오는 2025년 하늘을 나는 에어택시 상용화를 위한 사전 작업을 마쳤다.
UAM은 전기로 수직 이·착륙하는 항공기를 이용하는 도심형 친환경 교통수단이다. 활주로가 필요 없고, 작은 소음에 오염 물질도 배출하지 않는다. 인공지능(AI)은 물론 배터리·모터·소재·전자제어 칩·빅 데이터 등 다양한 첨단기술이 동원된다. 세계시장 규모가 지난해 70억 달러에서 2040년 1조4740억 달러로 급성장할 전망이다. 이를 겨냥해 세계 200여 곳이 ‘플라잉카’를 개발 중이다. 20년 전 영화 ‘해리 포터’ 같은 마법 세계나 공상과학영화에서나 봤던 플라잉카가 현실화하는 것이다.
국내에서도 한화시스템은 2025년 최대 시속이 320㎞인 에어택시를 운행할 계획이다. 서울 광화문과 경기 용인 구간을 15분이면 이동한다. 현대차는 2028년부터 다인승 여객용 플라잉카를 상용화할 예정이다. 국토교통부는 초기(2025∼2029년)엔 유인 운행, 성장기(2030∼2034년)엔 원격조종, 성숙기인 2035년 이후엔 자율 무인 비행이라는 청사진을 제시해놓고 있다. 해외에선 이미 시제품이 하늘을 날고 있다. 미국·중국·인도 등에선 내년 서비스 상용화를 목표로 추진 중인 업체도 있다. 독일 회사는 2024년 파리올림픽 때 2인승 에어택시를 계획하고 있다. 일본도 2025년부터 운행할 예정이다. 아직 과제는 많다. 당장 도심 운행 금지 같은 규제 폐지는 물론, 전용 하늘길과 이착륙할 포트도 필요하다. 하늘길은 대략 300∼600m 상공이 될 것이라고 한다. 소음·안전성·가격도 해결해야 한다.
기술의 발전이 놀랍다. 상상했던 일들이 속속 현실화하고 있다. 지난 1980년대 인기 TV 시리즈 ‘전격 Z작전’(원제목은 ‘나이트 라이더’)에서 신기하게 봤던 ‘키트’ 같은 자율주행차는 이미 상당한 수준까지 와 실제 도로를 달리고 있다. 이대로 가면 1980∼1990년대 인기영화 ‘백 투 더 퓨쳐’나 ‘터미네이터’에서처럼 원하는 과거와 미래로 시간여행을 하는 ‘타임머신’까지 나올지 모른다.
11월 19일 경선 후유증 흑역사

이도운 논설위원
한국 정당의 대통령 후보 경선에서 처음 중대한 후유증이 발생한 것은 1992년이다. 민정·민주·공화 세 계파로 이뤄진 민주자유당의 경선에서 민정계 이종찬·민주계 김영삼이 맞붙었는데, 세 불리를 느낀 이종찬이 돌연 경선 거부를 선언하고 탈당했다. 그해 5월 예정대로 치러진 경선에서 김영삼 후보가 선출돼 12월 대선에서 14대 대통령으로 당선됐다. 이종찬은 이후 김대중 정부에서 국가정보원장으로 발탁됐지만, 경선 불복 등의 이유로 더 이상 정치인으로 성장하지 못했다.
당 대선 후보 경선이 후유증을 넘어 대선 결과까지 좌우한 것은 1997년 신한국당 경선이었다. 이회창 후보에게 패배한 이인제 후보가 당을 뛰쳐나가 국민신당을 창당하고 출마했다. 그해 12월 제15대 대선에서 이인제는 무려 19.20%나 득표했다. 국민회의 김대중 40.27%, 한나라당(신한국당 후신) 이회창 38.74%를 감안하면 선거 결과에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고 볼 수 있다. 이인제는 대선 뒤 국민회의에 입당해 유력한 차기 후보로 떠올랐지만, 결국 2002년 후보 경선에서 노무현 후보에게 패하고 만다.
2007년 한나라당 경선은 이명박·박근혜 두 후보에게 정치적 축복이자 저주가 되고 말았다. 치열한 경선에서 이긴 이명박 후보가 대선에서도 손쉽게 승리해 제17대 대통령이 됐고, 경선 현장에서 깨끗이 승복했던 박 후보도 이어 18대 대통령에 취임했다. 그러나 경선 때 불거졌던 BBK·다스 소유자 논란, 최태민·최순실 일가 관계가 결국 부메랑이 돼 두 대통령 모두 영어의 몸이 됐다.
2007년의 교훈 때문인지 2012·2017년 대선에서는 여야 각 당에서 경선으로 인한 특별한 후유증이 발생하지 않았다. 그런데 내년 대선을 앞두고 여당인 더불어민주당과 제1야당인 국민의힘 모두 또다시 경선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다. 이재명 후보에게 밀린 이낙연 후보는 선대위 상임고문으로 이름을 올렸지만, 선거전에 참여하지 않는다. 윤석열 후보에게 석패한 홍준표 후보는 아예 선대위 참여도 거부하며 청년 플랫폼을 만들어 독자 노선을 걷고 있다. 이낙연·홍준표 모두 자기 당 후보의 신상 변화 가능성을 기다린다는 분석도 있다. 이심홍심(李心洪心)인데, 마치 감나무 아래서 감 떨어지기를 기다리는 것 같다.
11월 22일(월) 백의종군

이현종 논설위원
대선을 100여 일 앞두고 정치권에 ‘백의종군(白衣從軍)’ 붐이 일고 있다. 역대 선거에 비춰보면 선거대책위원회에 자리를 차지하기 위한 경쟁이 치열할 때인데, 앞다퉈 자리를 내놓는 모습은 이례적이다. 더불어민주당 의원 전원은 21일 국회에서 긴급 의총을 열어 이재명 대선 후보에게 당 쇄신과 선대위 혁신을 위한 모든 권한을 위임하기로 했다. 윤호중 원내대표는 “대선 승리를 위해 국회의원으로서 백의종군하는 심정으로 모든 일을 다 하겠다는 굳은 의지를 모았다”고 말했다. 이미 김두관, 이광재, 김영주 공동선대위원장은 사퇴했다.
국민의힘에서도 경선에서 탈락한 홍준표·유승민 전 후보가 선대위의 직책을 맡지 않고 백의종군하겠다는 입장을 밝힌 바 있다. 윤석열 후보가 수차례 전화했지만 아예 받지 않고 있다고 한다.
백의종군은 흰옷을 입고 전쟁에 나선다는 의미지만, 흰옷은 관직이 없다는 뜻으로 조선 시대에는 무관(武官)직의 징계 처분 중 하나다. 무관이 전시나 위급한 상황에 파직됐을 때 직무 중인 현 직위의 권한은 잃지만 전직 관료의 신분으로 현직을 보좌하게 하려는 처분이다. 대표적인 사례가 이순신 장군이다. 이순신 장군은 여진족이 조선 병사를 살해한 사건과 임진왜란 중 선조의 명을 어겼다는 이유로 두 번이나 백의종군했지만, 그래도 일반병보다는 높은 대접과 녹봉까지 받은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순신 장군은 비록 직책은 없었지만 사심 없이 적과 싸웠기 때문에 후대에도 귀감이 되고 있다.
그러나 지금 정치권에서 나오는 백의종군은 책임 회피 등 본래 의미와 다르게 쓰이고 있다. 홍준표 의원은 백의종군하겠다면서도 연일 윤석열 후보를 향해 쓴소리를 쏟아내고 있다. ‘김종인-김병준-김한길’ 합류에 대해 홍 의원은 ‘잡탕밥’이라고 폄하했다. 또 “막장 드라마 대선이 곧 온다”면서 “선진국 시대 이런 양아치 대선이 됐는지 여의도 정치 26년을 보낸 제가 민망하기 이를 데 없다”고 했다. 야당 내에서는 ‘백의적군(敵軍)’ 지적도 나온다. 여당에서도 이재명 후보와 거리 두기를 위한 명분으로 백의종군을 택하고 있다. 공동선대위원장직을 잇달아 사퇴하고 있다. 이낙연 전 대표는 상임고문을 맡긴 했지만 사실상 역할을 하지 않고 있다.
11월 23일 출산 경험 없는 메르켈

이미숙 논설위원
퇴임을 앞두고 있는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는 출산 경험이 없다. 과학자 시절 울리히 메르켈과 결혼해 5년여 살면서 아이를 낳지 않았고, 정치입문 후 요아힘 자우어와 재혼했지만, 역시 무자녀의 길을 택했다. 대신 남편에겐 앞선 결혼에서 얻은 두 아들이 있다. 그런 메르켈이지만, 16년 집권하며 얻은 애칭은 ‘무티(엄마)’다. 출산 경험이 없어도 세심하게 국정을 살피며 필요할 때 국민을 진지하게 설득한 결과다. 2010년 호주 첫 여성 총리가 된 줄리아 길라드는 미혼이다. 2011년 4월 6·25전쟁 참전 60주년을 기념해 방한했을 때 헤어드레서를 파트너 자격으로 당당히 대동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카멀라 해리스 미국 부통령은 50세 때 변호사인 더글러스 엠호프와 결혼, 두 아이를 덤으로 얻었다. 엠호프가 전 결혼에서 낳은 딸과 아들을 데리고 왔기 때문이다. 2007년 프랑스 사회당 대선 후보였던 세골렌 루아얄은 프랑수아 올랑드와 27년간 사실혼 관계를 유지하며 네 자녀를 낳아 키웠다. 루아얄은 헤어진 올랑드가 2012년 대통령이 되자 그의 정부에서 생태·지속개발·에너지 장관으로 일했다. 정치지도자에게 아이 출산 여부 등은 전혀 문제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을 분명히 보여준다. 정치인의 배우자 또한 마찬가지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선 후보 수행실장인 한준호 의원은 지난 17일 페이스북에 올린 ‘두 아이의 엄마 김혜경 vs 토리 엄마 김건희’라는 글에서 “영부인도 국격을 대변한다”고 썼다. 이 후보의 부인인 김 씨는 아이를 낳아 키웠지만, 윤석열 국민의힘 대선 후보 부인은 그렇지 않아 국격에 맞지 않는다는 주장이다. 영부인이란 권위주의 시대 때 표현을 쓴 것도 문제지만, 후보자 부인의 출산을 국격의 기준인 양 내세운 것은 여성에 대한 저급한 인식 수준을 보여준다. 난임·불임을 겪은 여성들이 반발하고, 한국여성단체협의회도 “여성이 출산 도구냐”며 비판 성명을 내자 한 의원은 사흘이 지난 뒤 겨우 페이스북에 “여성을 출산 여부로 구분하려던 것은 아니지만 표현 과정에 오해의 소지가 있었다”며 사과 시늉을 했다. 그러나 민주당은 물론, 여성운동가 출신 소속 의원들은 침묵하고 있다. 입으로 페미니즘을 소리 높이 외치던 세력이다. 정치의 저질화가 이 지경까지 왔다.
11월 24일 차악 후보 선택법

박민 논설위원
“20대 대선은 차선이 아니라 차악의 후보를 선택해야 하는 선거”라는 말이 나돈다. 지지율 1, 2위인 윤석열 국민의힘 후보와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후보의 사적인 스캔들과 의혹 사건들 때문이다. 두 후보로서는 억울하고 답답할 수 있다. 그러나 대중의 비판과 조롱은 정치인 스스로 인정하는 숙명이다. 프랑스 정치가 조르주 클레망소는 “지금까지 만나본 정치인 중 누가 최악이었냐”는 기자의 질문에 “이 나이가 되도록 찾아봤지만 아직 최악의 정치인은 만나지 못했다”고 답했다. 기자가 “정말이냐”고 반문하자 “이번에야말로 찾아냈다고 생각하는 순간 더 나쁜 정치인이 나타났다”고 답했다.
언론인 홍사중 선생은 저서 ‘리더와 보스’에서 “우리가 바라는 것은 영웅이 아니라 우리를 이끌어줄 리더”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홍 선생은 “한 개인의 역량에만 의존하는 국가는 명이 짧다”는 마키아벨리의 지적과 “나쁜 오케스트라는 없다. 그저 나쁜 지휘자가 있을 뿐이다”는 독일 지휘자 한스 폰 뷜로의 발언을 동시에 인용한다. 리더가 모든 것을 책임질 수 없지만, 리더를 잘못 선택하면 나라가 망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처럼 중요한 선택을 위해서는 후보의 자질을 따져야 한다. 리더의 대표 상품은 역시 비전이다. 현재 상황을 냉정하게 분석하고 미래를 위해 무엇이 중요한지를 판단해 새로운 방향을 설정한 뒤 여기에 국력을 집중토록 하는 것이 리더의 역할이다. 리더의 비전은 국가와 국민에 대한 사명감에서 싹튼다. 상상력은 비전의 자양분이다. 새로운 것을 만들기 위해서는 직관적이고 창의적이며 종합하는 능력이 뛰어나야 한다. 정치적, 이념적 도그마는 최대 적이다.
비전은 국민의 신뢰를 받아 꽃을 피운다. 리더에 대한 신뢰는 정직에서 시작된다. 1884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민주당 그로버 클리블랜드 후보에게 열 살짜리 사생아가 있다는 말이 나돌았다. 참모들은 부인할 것을 강력히 권고했다. 그러나 클리블랜드는 공개적으로 시인하고 양육비를 보낸 사실까지 털어놓았다. 공화당은 노래까지 만들어 공세를 폈지만 클리블랜드는 대통령에 당선됐다. 정직에는 용기가 필요하다. 신념을 지키는 것보다 신념을 바꾸는 데는 더 큰 용기가 필요하다. 내로남불은 신뢰를 한순간에 무너뜨린다.
11월 25일 가상화폐와 선거

이신우 논설고문
16세기 마틴 루터는 95개 조항의 주장을 담은 글을 성당 벽에 붙임으로써 종교 개혁의 불을 댕겼다. 그의 주장은 애초 가톨릭 지도부의 윤리적 배경을 문제 삼는 데서 출발했으나 점차 모든 신자는 제사장이라는 ‘만인 제사장론’으로 확대됐다. 루터의 격문이 종교 혁명의 방아쇠를 당길 수 있었던 것은 당시엔 전혀 새로운 인쇄 기술 덕분이었다. 격문과 성경의 무한 복제 덕에 모든 신자는 누구의 도움도 없이 하나님 앞에 설 수 있게 된 것이다.
니얼 퍼거슨 미국 하버드대 교수의 저서 ‘광장과 타워’는 이 같은 과정을 민중의 네트워크와, 위계제·효율성을 장악한 국가권력의 관계를 통해 설명한다. 그에 따르면 역사상 중요한 변화들은 각종 형태의 네트워크(광장)가 기성의 위계질서(타워)에 도전하는 과정에서 발생한다. 하지만 광장은 본질적으로 무질서하고 혼란스럽다. 자칫 거짓 권력에 악용되기도 한다. 네트워크만으로는 세상이 무리 없이 굴러갈 수 없다. 기성 사회의 일부가 되기 위해서는 위계질서에 편입될 필요가 있다. 이는 정통성을 부여받는 과정이기도 하다.
한때 선진 각국의 중앙은행이나 은행의 은행인 국제결제은행(BIS)은 네트워크와 광장의 산물이라 할 수 있는 비트코인 등 가상화폐를 공공의 이익과 충돌한다는 이유로 반대했다. 그러나 가상화폐들이 최근 들어 서서히 이들 기성 사회의 정통성을 확보하기 시작했다. 미국 증권거래위원회(SEC)가 비트코인 선물 상장지수펀드(ETF)를 승인하면서 제도권 편입을 인정했으며, 국내에서도 한국교직원공제회 등이 비트코인 투자를 정식으로 발표했다. 해외 연기금들도 이미 비트코인이나 관련 기업에 대한 투자를 시작하고 있다.
그런데도 가상화폐는 여전히 무질서하고 혼란스럽다. 지하경제의 악용 가능성도 있다. 가상화폐가 광장과 네트워크 차원을 뛰어넘어 기성 사회의 일원으로 참여하려면 국가의 위계질서가 요구하는 룰을 수용하지 않으면 안 된다. 합법적 경제활동은 세금과도 직결된다. 우리 사회 일각에서는 여전히 가상화폐 자산에 대한 과세 유예를 요구하고 있지만 이는 시장 진입의 합법성을 스스로 부정하는 것이다. 가상화폐는 선거용 포퓰리즘이나 인기 영합의 대상이 아니다. 게임의 규칙을 수용하느냐의 문제다.
11월 26일 소리새 40주년

김종호 논설고문
‘푸른 파도를 가르는 흰 돛단배처럼/ 그대 그리고 나/ 낙엽 떨어진 그 길을 정답게 걸었던/ 그대 그리고 나/ 흰 눈 내리는 겨울을 좋아했던 그대 그리고 나/ 때론 슬픔에 잠겨서 한없이 울었던 그대 그리고 나/ 텅 빈 마음을 달래려 고개를 숙이던 그대 그리고 나’. 여러 가수가 끊임없이 리메이크해 불러온 포크 발라드 명곡으로, 시대를 뛰어넘어 많은 사람의 가슴에 그리움의 파도가 밀려들게 하는 정현우 작사·작곡의 ‘그대 그리고 나’ 앞부분이다. 1981년 김광석·한정선·황영익이 결성한 솔개트리오가 1987년 한정선의 솔로 독립에 따라 한영을 영입해, 1988년 소리새로 개명하며 내놓은 제1집 앨범에 담았다. 그 음반에 명곡이 수두룩했다. ‘바람에 취해버린 꽃처럼 가로등 위에 있었죠/ 여인이여 내려치는 빗물을 어떻게 막으셨나요/ 어제는 밤거리에 홀로 선 그림자를 바라보았죠/ 여인이여 비에 젖은 창문을 왜 닫으셨나요’ 하고 시작하는 한정선 작사·작곡의 ‘여인’도 그중의 하나다.
그 뒤로 소리새는 구성원 수와 면면이 일부 달라지면서도 끊임없이 명곡을 발표해왔다. 천재적인 재능의 한정선 작사·작곡만 해도 ‘오늘 밤 따라’ ‘묻고 싶어요’ ‘내 뒷모습’ ‘그리움’ ‘비가 내린다’ 등 다 열거하기 쉽지 않다. 그중에서 ‘통나무집’은 ‘통나무집 바라뵈는 저 산을 멀리로 한 채/ 무얼 그리 생각하나 도대체 알 수가 없네/ 그리움이 밀려드는 좁다란 산길에 앉아/ 풀잎 하나 입에 물고 조용히 눈 감아야지’ 하고 시작한다. 신성철 작사·작곡 ‘가을 나그네’도 빼놓을 수 없다. ‘사랑이 흐르던 길 바람이 불어오면/ 가을에 지친 나는 어디로 가야 하나/ 나 은하에 별 내리면/나 이 밤이 깊어가면/ 나 가을이 다해가면/ 추억에 웁니다/ 낙엽이 흩어진 길 찬비가 내려오면/ 가을을 앓는 나는 어디로 가야 하나’ 하는. 이 밖에도 ‘오월의 편지’ ‘꽃이 피는 날에는’ ‘잊히지 않는 그리움으로’ 등이 있다.
원년 멤버 황영익·한영이 2018년 다시 결합한 듀엣 소리새는 여전히 시적 가사와 감성적 멜로디를 환상의 하모니로 들려준다. 솔개트리오부터 치면 올해가 데뷔 40주년이어서 기념 가을콘서트를 계획했으나, 코로나19 탓에 무산됐다. 음반 등을 통해 아쉬움을 달래며, 내년에라도 열리길 기대하는 사람이 많다.
11월 29일(월) 미니 제3세력 변수

이도운 논설위원
정치학적으로 ‘연정’은 연립정부(coalition government)를 뜻한다. 주로 의원내각제 국가에서 다수당이 과반 의석을 확보하지 못했을 때 다른 당과 함께 과반수를 채워 구성하는 정부를 말한다. 과반수가 모자라도 구성하는 과소 연정, 과반수 한 석만 넘어도 구성하는 최소승리 연정, 과반수를 훨씬 넘는 잉여 연정, 성향이나 이념이 다른 2개 이상 정당이 구성하는 대연정, 아예 모든 정당이 정권에 참여하는 거국일치 연정 등 다양한 형태가 있다. 대연정은 독일 앙겔라 메르켈 총리 시절 우파 또는 중도우파인 기독민주연합과 중도좌파인 사회민주당의 연정을 예로 들 수 있다. 거국일치 연정은 2차대전 당시 윈스턴 처칠 내각을 생각하면 된다.
대통령제를 채택한 한국에서는 연정이 연합 정치(coalition politics)라는 개념으로도 쓰인다. 노무현 대통령은 2005년 8월 25일 ‘국민과의 대화’에서 대연정을 제안했는데, 그에 맞춰 여권에서 ‘한국 민주주의와 연합 정치’라는 보고서가 나왔다. 보고서는 연합 정치가 각 정당이 경쟁하면서도 공통의 목적을 실현하기 위한 연합이라면서, 정책 협정과 합의를 기초로 한다는 측면에서 야합과 다르고, 새로운 당을 만들기 위해 자기 조직을 해체하는 합당과도 다르다고 했다. 그러면서 정책 연합, 정부 연합, 선거 연합 등을 구체적인 방안으로 제시했다. 노 대통령은 여야 극단 대립을 초래하는 소선거구제를 개혁하기 위해 총리 지명권·내각 구성권을 제1야당인 한나라당에 주겠다고 했지만,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는 “참 나쁜 대통령”이라고 비난했고, 여당인 열린우리당조차 반대했다.
내년 대선을 앞두고 심상정·안철수 후보 공조 또는 연대 가능성이 떠오르면서 선거 후 연정 가능성도 논의된다. 정의당 6석, 국민의당 3석인 현실을 감안하면 안·심 연대에 김동연 전 부총리가 붙어도 대선 파괴력에 한계가 있다. 그러나 이들이 더불어민주당이나 국민의힘과 같은 편에 선다면 세력 판도가 달라질 수 있다. 특히 국민의힘이 대선에서 승리할 경우 윤석열 정부는 국회 169석인 민주당과 상대해야 하기 때문에 연정이든, 정계 개편이든 검토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윤 후보가 김한길 전 민주당 대표를 새시대준비위원장에 발탁한 것도 그런 상황을 염두에 둔 선택이었을 것이다.
11월 30일(화) 관제소득과 시장소득

문희수 논설위원
통계청이 최근 발표했던 올 3분기 가계소득은 전형적인 관제소득이었다. 그런데도 문재인 정부는 또 자화자찬했다. 홍남기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기초 사회 안전망 강화 토대 위에 2차 추가경정예산 효과가 더해진 덕분”이라고 치켜세웠고, 문 대통령은 “우리 경제가 나아가야 할 방향”이라고까지 언급했다. 일회성 소득 증가를 정책의 성공인 양 포장하고 있다. 일자리 왜곡도 모자라 소득까지 왜곡한다.
올 3분기 전국 1인 이상 가구의 월평균 명목소득은 지난해 3분기보다 8% 늘어, 지난 2019년 관련 통계 개편 이후 최고 증가율을 기록했다. 그러나 말 많던 하위 88% 재난지원금(1인당 25만 원)에 의한 ‘반짝 효과’였다. 이 돈을 포함한 공적 이전소득이 30.4%나 증가해 근로소득 증가율(6.2%)과 자영업자 등의 사업소득 증가율(3.7%)보다 훨씬 높았던 게 그 방증이다. 지원금이 4인 가구이면 100만 원이나 되니, 소득액이 적은 저소득층일수록 증가율이 급등하는 것은 너무 당연하다. 하위 20%인 1분위 가구의 월평균 소득은 114만2000원으로, 증가율이 21.5%나 돼 역시 가장 높았다. 2분위는 12%, 3분위 8.6%, 4분위 7.6%였고, 지원금이 없었던 상위 12%가 포함된 최상위 5분위는 5.7%로 가장 낮았다. 소득분배가 일부 개선된 것도 같은 맥락이다. 더구나 지난해엔 10월이던 추석 연휴가 올해는 9월이었던 데 따른 기저효과도 있었다.
세금을 풀어 일시적으로 끌어올린 관제소득이 계속 유지될 리 없다. 현금 지원이 없는 올 4분기엔 소득 격차가 다시 더 벌어질 가능성이 크다. 재정도 이미 거의 다 털어 쓴 문 정권이다. 열심히 일해서 버는 근로소득·사업소득 등 시장소득이 진짜 소득이다. 그래서 일자리가 필요한 것이고, 자영업이 원활하게 돌아가도록 경제를 운영하는 게 긴요한 것이다. 좋은 일자리를 많이 만들고 장사가 잘 돼야 시장소득이 커지고, 세금도 늘어 정부 재정도 튼튼해진다. 이젠 국민도 지원금 재원을 걱정하고, 주더라도 선별 지급을 선호한다. 국민 70% 이상이 이재명표(標) 100% 지원금을 반대해 이 후보와 여당이 철회해야 했던 것은 주목할 변화다. 작년 총선 때처럼 공짜 돈으로 국민을 기만하고 재미 볼 생각은 그만 접고, 국민도 그런 후보를 감별해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