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 이야기10/ 불교에 대하여9/ 세계의 불상(佛像)2/ 마애불 역사기행/ ①:경기 하남 선법사 마애불 - (20) 서울 봉천동 마애불①
종교 이야기10/ 불교에 대하여9/ 세계의 불상(佛像)2/ 마애불 역사기행/
■최복일의 마애불 역사기행 2015-03-27 조선일보 여행 사진작가
①:경기 하남 선법사 마애불
고려 황제의 무병장수를 기원하고 만든 마애불
자연친화적이면서 사람들의 생활, 역사와 함께 한 마애불
마애불은 자연 속의 바위나 암벽에 새겨진 부처상이나 보살상을 말한다. 과거, 장인들의 정성과 공력으로 거친 바위 면을 힘들게 깎고 다듬어 만든 마애불에서는 아직도 살아 숨쉬는 듯한 생생함을 느낄 수 있다. 그러면서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서산의 용현리 마애3존불부터 산 속에 있어서 찾는 사람이 거의 없는 마애불까지 모두 나름의 개성과 다양한 매력을 가지고 있다.
마애불은 자연 그대로의 상태에서 낮에는 해, 밤에는 달과 별을 조명 삼아 자신의 아름다운 모습을 보여 준다. 그래서 자연친화적이다. 특히, 햇빛이 바위 표면에 비스듬하게 비칠 때 드러나는 모습은 최고의 감동을 선사한다.
마애불은 삼국 시대부터 근세까지 약 1300년 이상에 걸쳐 조성됐다. 약 200개 정도 되는 우리나라 마애불에는 건강과 무병장수, 자식 기원, 극락왕생 기원 등 개인적인 것에서부터 마을의 행복, 나라의 독립과 왕실의 건강 기원, 미래의 새 세상에 대한 염원 등이 담겨 있다. 옛날 사람들은 마애불을 통해서 어려움 속에서도 절망 대신 희망을 찾았던 것으로 보인다.
고려 제5대 왕인 경종의 무병장수를 기원하면서 새겨진 마애불 서울에서 가까운 경기 하남시의 나지막한 객산 입구에 있는 선법사 경내. 법당 옆 암벽에서 마애불을 만날 수 있다. 조그만 암벽에 새겨진 이 마애불은 거대화되는 고려 전기의 특성에 비해 체구가 작은 편이다.
▲경기 하남시 교산동 선법사 마애불./최복일
마침 정오가 되면서 바위에 햇빛이 들기 시작했다. 닿으면 뭐든지 황금으로 변하는 마이다스 왕의 손처럼 햇빛은 두드리는 바위 표면마다 금빛으로 바꾸고 있었다. 어느 순간 그늘 속에서 드러난 바위의 마애불도 아름답게 빛나는 금불이 되어 있었다. 전체적인 윤곽 속에 점점이 정으로 쪼은 자국들은 마치 점을 찍듯이 그림을 그린 점묘파 기법을 사용한 듯했다.
마애불은 왼손에 약그릇을 들고 있는 약사불이다. 약사불은 중생의 병을 고쳐주고 오래 살 수 있게 해주는 부처이다. 오른쪽 옆 명문에 의하면 마애불은 태평 2년 7월 29일, 절을 중수(重修·다시 고침)할 때 황제의 만세를 기원하면서 새겨졌다. 태평 2년은 중국 연호로서 고려 경종 2년(977)에 해당된다. 마애불은 왕위에 오른 지 2년 밖에 안 된 고려의 제5대 왕 경종(975-981,재위)의 만수무강을 기원하며 조성됐다. 그러나 이 마애불을 조성한 사람의 간절한 기원에도 불구하고 경종은 왕 위에 오른 지 6년 만에 27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마애불에는 황제국으로서의 고려 역사가 남아 있고 마애불 옆 명문에서 눈에 띄는 부분은 경종을 왕이 아닌 황제로 칭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그 당시 중국과 대등한 황제국으로서 고려의 위상을 보여준다.
▲마애불의 명문./최복일
황제라는 명칭은 나말여초의 고승인 원종대사의 부도비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원종대사는 고려 광종 때에 국사(國師)의 자리에 올랐다가 경기도 여주 고달사에서 입적하였다. 이때 광종의 명으로 원종대사의 행적을 기록한 비가 세워졌다. 비신(碑身)의 비문을 쓴 신하는 제4대 왕인 광종(949-975, 재위)을 황제 폐하로 호칭하고 있다. 현재 그 비신은 깨어져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그리고 고달사터에는 비신을 세우는 받침돌인 귀부와 비신의 상부에 만들어진 지붕돌인 이수(보물 제6호)만 남아 있다.
황제라는 명칭을 사용한 광종은 마애불에서 황제로 불리운 경종의 아버지다. 광종은 고려 초기의 불안정 속에서 과거제도, 노비안검법 등 개혁정책을 통해 제도를 정비하고 있었다.
당시 중국에서는 역시 당나라가 멸망한 후 50여 년 동안 5대 10국(907-960)의 혼란에 빠져 있다가 송나라가 세워졌다(960). 송나라 역시 건국 초기였던 까닭에 내부 정세는 어수선했다. 이렇듯 중국의 불안정한 내부 사정을 지켜본 광종은 이때야말로 황제국으로서의 고려 위상을 보여줄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고려 시대에는 거란, 몽고(원) 등 외세의 침입이 많았고 내정 간섭도 많이 받았다. 고려 후기에는 원의 속국이 되기도 했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원의 쇠퇴를 틈타 요동지역을 회복하고자 했던 공민왕처럼 자주성 회복을 위한 노력도 끊이지 않았다. 초조대장경, 팔만대장경도 외침을 받았을 때 부처님의 힘으로 이를 극복하고 나라를 지키고자 하는 또 하나의 노력이었다.
이곳 교산동 마애불 역시 황제의 건강과 황제국 고려를 잘 유지해주기를 대장경처럼 부처님에게 기원하는 마음이 담겨있는 듯 했다.
▶소재지: 경기도 하남시 교산동 55-3 (선법사 경내)
동사(桐寺) 터: 부근의 고골 낚시터 주변에 고려 시대의 동사(桐寺)라는 절터가 있다. 이 절터에는 몸매가 잘 빠진 5층 석탑(보물 제2호)과 3층 석탑(보물 제3호) 두 개가 나란히 서 있다.
▲부근의 고골 낚시터 주변에 위치한 고려시대 동사(桐寺)./최복일
②:성남 망경암 마애보살
바람 앞 등불처럼 위태로운 운명 속에서 대한제국을 선포하다
조선 시대 경복궁이 있던 서울을 바라보는 망경암 지하철 분당선 가천대역 부근, 영장산이라는 낮은 야산 중턱에 망경암(望京庵)이 있다. 넓은 경내에서 탁 트인 북서쪽 방향을 바라보면 가까운 잠실을 거쳐 경복궁 등 조선시대 궁궐이 있던 서울 시내가 훤하게 보인다. 서울(京) 시내를 바라본다(望) 해서 옛날부터 망경암으로 불렸다.
경내 법당 옆에는 거대 암벽이 있는데 이 암벽 역시 서울을 바라보고 있다. 이런 지리적 여건 때문에 특히, 조선 제4대 임금인 세종의 일곱 번째 아들 평원대군(1427-1445)과 제8대 임금인 예종의 둘째 아들 제안대군(1466-1525)이 이 암벽 앞에 단을 설치하고 향을 피워서 임금의 무병장수를 북두칠성에게 비는 칠성제를 지냈다고 한다. 이렇게 칠성제를 지낸 곳은 칠성대(七星臺)로 불렸다.
▲망경암에서 본 서울 시내 전경
그 후 가시덤불로 덮여 폐허가 된 망경암을 중수(重修)한 사람은 대한제국의 관리였던 이규승이었다. 그는 조선시대의 역대 임금과 왕비의 위패를 모신 왕실 사당인 종묘를 관리하는 일을 했다. 그러면서 평원대군과 제안대군의 제사를 받들고 있었다.
바람 앞 등불처럼 위태로운 운명 속에서 자주 독립국임을 선포
조선 후기에는 개화파와 보수파의 대립이 격화됐고 또, 일본·청·러시아 등 주변 강대국의 야욕 속에 나라는 더 어려운 상황으로 빠져 들고 있었다. 그러다가 1895년 10월, 친러정책을 쓰던 명성황후가 45세의 나이에, 일본의 음모로 일본인들에게 살해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을미사변). 신변의 불안을 느낀 고종은 이듬 해인 1896년 2월 경복궁을 떠나 러시아 공관으로 거처를 옮겼다(아관파천). 이에 친일내각이 붕괴되고 친러내각이 들어서는 가운데 조선에서는 주변 열강들의 이권경쟁이 가속화되었다.
러시아에서 벗어나라는 내외의 압력에, 1 년만인 1897년 2월 경운궁으로 환궁한 고종은 국호를 대한제국, 연호를 광무, 왕을 황제, 왕비는 황후로 칭하면서 독립국임을 선포했다.
대한제국의 선포와 함께 고종황제의 만수무강을 기원한 마애보살상
이렇게 어려운 시대적 여건 속에서 자주 독립국으로서의 대한제국 출발을 알리는 광무 원년(1897)에 이규승은 이곳 망경암의 암벽에 관음보살상을 새겼다. 황제인 고종과 황태자들, 황태자비들의 만수무강을 기원하고 또, 일본인들에 의해 살해된 명성황후의 극락왕생을 빌기 위해서였다. 이런 내용들이 암벽 앞에 있는 망경암비, 칠성대 중수비, 암벽에 새겨진 명문들에 담겨 있다.
▲성남 망경암 마애관음보살상
그러나 나라를 보호하고 황실을 지켜 주고자 애썼던 이 보살상의 노력도 기울어가는 나라의 운명은 어찌 할 수 없었던 것처럼 보인다. 마애불이 조성된 지 13년만인 1910년에 대한제국은 주권을 빼앗기고 일제의 식민지가 되고 말았다.
작품성보다는 시대적, 역사적 의미가 더 커 보이는 마애보살
보살상은 암벽 위쪽 조그만 감실 안에 앉아 있다. 게다가 북서향의 암벽에는 하루 종일 그늘이 져 있어서 햇빛 있는 마애보살상을 보기 어렵다.
그러나 마애보살상은 위태롭게 돌아가는 대내외 정세 속에서도 대한제국이라는 자주 독립국으로서의 위상과 함께 황실의 만수무강을 염원하고 있어서 역사적인 의미를 가지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면서 이전에 평원대군과 제안대군이 이곳에서 서울을 바라보면서 임금을 사랑하는 마음을 다졌던 것처럼 서울을 향해 만든 보살상에서는 황제와 나라를 사랑하는 이규승의 마음도 느낄 수 있을 것 같았다.
▲명성황후가 조성했다는 서울 중계동 학도암 마애관음보살상.
경복궁을 바라보고 있는 서울 중계동의 불암산 학도암에도 명성황후가 만든 마애관음보살상이 있어서 비교해 볼 만하다. 이곳 성남 망경암의 보살상보다 27년 빠른 고종 7년(1870년)에 조성됐다. 16세의 나이에 고종의 비가 되었던 그녀는 4년 후인 20세에 학도암의 거대 바위에 보살상을 조성했던 것이다. 역시 왕실의 건강과 무병장수를 기원한 것으로 보인다. 이 보살상은 왕실의 후원을 받아서인지 거대한 크기에 화려한 장식 등 조성기법에서는 이곳 성남 망경암 마애보살상을 능가한다.
▶소재지: 경기도 성남시 수정구 복정동 553-1 (도로명 주소: “ 수정구 태평로 55번길 72)
③:강원 영월 무릉리 마애불
우리나라 영월에도 무릉도원이 있다
요즘 SF영화를 보면 잘 훈련된 사회 구성원들 중심으로 운영되는 계획화된 이상 사회가 배경이 되는 경우가 있다. 과연 이런 인위적인 이상향이 오랫동안 지속 가능할까? 영화의 결말에서는 대개 그 사회가 여러 가지 모순점이나 부작용으로 무너지게 되는데 이것이 불가능하다고 보여주는 것 같았다.
가끔 심신이 피곤할 때 한 번씩은 히말라야 산속에 있다는 샹그릴라나 무릉도원처럼 자연적으로 주어진 천혜의 이상향(理想鄕)을 떠올릴 때가 있다. 무릉도원(武陵桃源)은 중국 진나라 시대의 한 어부가 냇가를 따라 상류로 올라가다가 복사꽃 핀 복숭아나무 숲을 지난 곳에서 우연히 발견했다. 사람들은 그곳에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행복하게 살고 있었다. 그런 무릉도원이 우리나라에도 있으니 한번 가봐야 하지 않을까?
주천강과 요선암, 절벽의 소나무들이 어우러진 무릉도원 같은 절경
주천강 물길(水·물 수)이 돌아선(周·두루 주) 곳에 수주면(水周面)이 있고 이 수주면에 무릉도원이 있다. 행정구역 상의 명칭으로 무릉리와 도원리가 함께 하는 곳이다.
▲주천강 가의 돌개 구멍이 있는 요선암
상류에서 구비구비 흘러 내려오던 주천강이 중간에서 차돌처럼 매끄러운 강가 바위마다 둥근 모양으로 깊게 패인 돌개 구멍을 만들었다. 구멍이 뚫려 있는 바위들에서는 세월의 신비가 느껴진다. 이들 바위가 요선암이다. 요선암(邀僊岩)에서는 신선(僊·신선 선)을 맞이하여(邀·맞을 요) 그들과 함께 모든 것을 잊고 술 한 잔 하면서 시간을 보낼 수 있다. 바위들 앞으로 흐르는 주천강(酒泉江)에서는 술(酒·술 주)이 샘(泉·샘 천) 솟고 있으니 술이 바닥날 걱정을 할 필요도 없다.
그리고 강 옆에 높이 솟은 절벽과 그곳에 나 있는 소나무들도 몸을 비틀어 아름다움을 더해 주고 있다. 아마도 강물에 복사꽃잎들이 떠내려오고 있었다면 누구라도 무릉도원으로 생각했을 것이다. 짧은 시간이지만 무릉도원 같은 절경에 빠져 있다 보니 속세의 번잡함은 절로 잊혀지고 마음은 한없이 편해진다.
입가에 오롯이 번지는 마애불의 미소에는 마음이 편안해지고 요선암 바로 옆에 높이가 50m 이상은 돼 보이는 절벽이 있다. 그 절벽 끝에 특이한 모양의 바위가 한 개 있는데 이 바위에 부처가 새겨져 있다. 연꽃 대좌 위에 앉아 있는 마애불은 상체에 비해 하체가 크고 넓게 새겨져 있어서 안정감을 준다.
▲마애불 전경
높은 돋을새김으로 새겨진 둥근 얼굴에 아침 햇빛이 드니 지방화되고 토속화되는 고려 시대의 모습이 확실하게 드러났다. 질감이 투박하고 거친 바위 표면에 새겨진 얼굴은 막사발처럼 정이 갔다. 큰 눈망울에 뭉툭하지만 높은 코는 먼 길을 달려온 피로감을 덜어줄 만큼 포근했다. 게다가 두툼한 입가에 오롯이 번지는 미소에 마음도 편안해졌다.
이곳 마애불은 신선이 사는 무릉도원과 어우러진 바위에 새겨졌다. 그렇게 함으로써 이전의 신선 세계를 부처 세계로 바꾼 듯했다. 그러면서 부처 세계는 이처럼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이곳에 머무르면 마음도 편해지고 안식을 찾을 수 있다고 보여주는 것 같았다.
▲마애불
마애불 바로 옆에는 3층 석탑이 있고, 요선정이라는 정자도 있다. 좁은 공간에 삼삼오오 몰려 들었던 단체 관광객들이 썰물처럼 다 지나가고 난 자리에는 북적거림과 시끄러움 대신 고요만이 남았다.
어느 새 땅거미가 조용히 내려 앉았다. 영월버스터미널 옆 전통시장인 서부시장 안에 메밀전병을 파는 곳이 여럿 모여 있다. 이곳에서 저녁 식사 대신 김치를 넣은 메밀전병을 맛있게 먹었다. 높고 깊은 산 속이 아니라 계곡 물가에 있어서 가기도 쉬운데 많이 걸은 탓인지 갑자기 피로감이 몰려 들었다. 그때서야 내가 무릉도원이 아니라 속세에 와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소재지: 강원도 영월군 수주면 무릉리 산 139 (도로명 주소: 강원도 영월군 수주면 도원운학로 13-39)
▶주변 볼거리
①마애불 주변의 법흥사 신라 선덕여왕 12년(643) 당나라에서 석가모니의 진신사리를 가지고 귀국한 자장율사가 오대산 상원사, 태백산 정암사, 양산 통도사, 설악산 봉정암의 네 곳에 사리를 봉안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곳 사자산에 흥녕사를 세우고 사리를 봉안하였는데 그 절이 현재의 법흥사이다. 이후 징효대사(826-900)가 통일신라 말의 왕권 약화, 농민 봉기 등 사회적 혼란 속에서 이곳 흥녕사를 선종 9산의 하나인 사자산문의 중심지로 삼고 번창시켰다. 경내에는 징효대사의 행적을 기록한 비(보물 제612호)와 사리를 모신 부도, 적멸보궁 등이 있다.
④:충북 충주 창동 마애불
남한강 뱃길의 중심지였던 충주
강은 옛날부터 사람과 물건을 나르던 주요 뱃길이었다. 뱃사공들은 배로 사람과 화물을 실어 주고 운임을 받았다. 돈을 많이 벌기도 했지만 급류를 만날 때는 죽을 고비를 넘기기도 했다. 또, 물이 적을 때에는 노를 젓는데 더 많은 힘이 들고 배달 시점에 늦기도 했다. 이런 위험 속에서 뱃사공들의 생명을 지켜주고, 화물을 잘 배달할 수 있게 해달라는 염원으로 강가 암벽에 조성했을 마애불들이 여러 개 있다.
남한강에서는 중간의 충주 창동에서, 또 강물이 하류로 더 흘러 내려간 경기도 여주 계신리에서 마애불을 볼 수 있다. 그리고 금강이 흘러 내리는 전북 익산의 화산리에서는 마애3존불을, 낙동강 중간의 경북 의성군에서는 마애보살을 볼 수 있다. 특히, 의성군의 마애보살상은 4대강 공사로 낙동강의 낙단보 공사를 하던 중 2011년 발견되면서 최근에 알려졌다.
충주는 이전에 남한강 상류와 하류 지역의 생산물을 실어 나르던 뱃길의 중심지였다. 지금은 육로의 발전으로 쇠락해 버렸지만 충주의 창동 마애불 가는 길에는 목계나루, 가흥창 등 과거 번성했던 남한강 뱃길의 역사가 남아 있다.
마애불 북쪽에 충주의 가흥리와 제천을 연결하는 목계교가 있다. 목계교 옆에 지금은 터로만 있지만 이전에 목계나루가 있었다고 한다. 1930년대까지만 해도 이 나루는 많은 뱃사공들과 상인들로 번성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마애불이 있는 창동(倉洞)이라는 지명은 고려 말부터 이곳에 조세 창고(倉 창고 창)가 있어서 생겼다. 경상도와 충청도에서 세금으로 거둔 곡물을 수도로 운송하는 중간지인 이곳에 가흥창이라는 조세 창고가 있었다.
암벽에서 뱃사공의 생명과 화물을 지켜주던 마애불
마애불 바로 앞으로는 남한강 물이 출렁이고 있는데 폭이 몇 백m나 될 정도로 넓은 강 중간에는 나룻배도 두 세 척 떠 있었다. 마애불은 암벽의 툭 튀어나온 면에 새겨져 있는데 바위 면은 깨져 마애불은 부분적으로 파손이 있다.
▲바로 앞에 남한강물이 출렁이는 마애불 전경 /최복일
얼굴은 돋을새김으로 새겨졌는데 반달 눈썹과 살구 모양의 눈, 뭉툭한 코, 입에서는 고려 시대의 토속적인 웃음이 진하게 흘러 나온다. 고달픈 뱃사람들의 무사 기원을 편안하게 받아주는 얼굴이다. 그래서 물길을 따라 오가던 사람들은 배나 뗏목 위에서 이 마애불을 보고 그들의 무사를 기원했을 것이다. 정오가 되자 마애불은 내일을 약속하고 바위 그늘 속으로 완전히 들어가 버렸다.
▲토속적이고 친근한 느낌의 마애불 얼굴
마애불 주변에는 남한강을 끼고 있는 탄금대라는 절경이 있다. 이곳에서 신라시대 우륵이 가야금을 탔다고 한다. 임진왜란때는 경상도와 전라도를 휩쓸고 서울로 올라가던 왜군들을 막기 위해 신 립 장군(1546~1592)이 이곳 탄금대에서 배수진을 치고 싸우다가 죽었다.
역사는 여기에서 끝나지만 전설은 창동 마애불에까지 이어진다. 탄금대 싸움에서 패한 신 립 장군이 이곳 마애불에 와서 죽었는데 그때 흘린 피눈물로 마애불이 새겨진 암벽이 붉게 물들었다고 한다. 실제로 바위 면은 붉은 색을 띠고 있으나 철 성분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지금은 뱃사공이 가져다 주었던 과거의 번성을 그리워하고 뱃길 안전을 담보해 주는 수호천사였던 마애불은 오랫동안 집을 떠나 외로웠던 뱃사람들에게 좋은 길동무가 됐을 것이고 또, 조금만 더 가면 목적지에 도착할 것이라는 희망봉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화물이나 사람을 운반해 주는 운송 수단이 트럭, 버스, 기차, 비행기로 바뀌면서 뱃길은 쇠락하고 말았다. 많은 사람들로 붐비던 나루도 사라지고 그 나루터는 이제 이름만 남았다.
▲충주 봉황리 마애불상군 제1지역의 마애불들
아직도 말없이 뱃길을 지키고 있는 이곳 강가의 마애불은 강을 오르내리면서 자신에게 기원하던 많은 뱃사공들이 가져다 준, 과거의 번성을 그리워하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소재지: 충북 충주시 중앙탑면 창동리 240
▶주변 볼거리
- 충주 봉황리 마애불상군(보물 제1401호): 이곳 남한강 유역을 차지하기 위해 고구려와 신라가 싸우던 삼국 시대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두 개의 구역으로 나뉘어져 모두 9개의 불상, 보살상, 공양상이 새겨져 있다.
- 충주 조동리 마애불: 화성침공 영화에 나오는 외계인처럼 특이하게 생긴 부처상이다. 마을의 수호신 역할을 위해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 정토사터 법경대사 탑비(보물 제19호): 지금은 충주호 건설로 수몰된 정토사에 머물렀던 법경대사(879~941) 행적을 기록한 비이다. 가는 길에 충주호 드라이브 길이 시원하게 펼쳐진다.
- 충주 고구려비(국보 제205호): 남한에 남아있는 유일한 고구려비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현재 고구려 전시관 안에 있다.
- 탑평리 7층 석탑(국보 제6호): 통일신라의 중앙지점에 세워져 중앙탑이라고도 불린다.
- 충주박물관: 충주의 역사적, 지리적, 문화적 변천 과정을 잘 보여 주는 유물이 전시되어 있는데 탑평리 7층 석탑과 함께 있다.
(5) 충남 서산 용현리 마애존불
바위에서 1400년 전 백제인들을 만나다
오전 햇빛 속에서 다시 빛나는 ‘백제의 미소’
달팽이 집처럼 얹혀 있던 보호각이 없어진 암벽에는 따사로운 햇살이 오르내리고 향기로운 바람도 서성이는 듯했다. 2007년 12월 이후 무겁고 답답한 보호각과 뜨거운 백열등을 걷어낸 암벽에 ‘백제의 미소’가 다시 돌아온 것 같았다.
▲거대 암벽에 새겨진 마애불 전경
거대 암벽 하단에 새겨진 마애불은 시간대별로 아름다운 모습을 보여 준다. 오전 중, 그늘이 있던 암벽에 햇빛이 내리면 마애불의 세부 조각들은 섬세하게 깨어나기 시작한다. 눈은 더 반짝이고 미소는 더 환해진다. 마애불에는 백제가 멸망하기 전 태평성대를 누렸던 600년경(7세기 초)의 백제인 모습이 반영되었다고 한다. 우리는 이곳 암벽에서 약 1400년 전의 백제인들을 만나고 있다.
3존불은 법화경의 과거불, 현재불, 미래불의 세 부처를 새긴 것으로 추정
이곳 3존불은 석가불인 중앙의 본존불을 중심으로 좌우에 보살이 있다. 좌협시는 미륵보살이 확실하나 두 손에 보주(寶珠)를 들고 서 있는 우협시는 관음보살이라는 의견과 제화갈라보살이라는 의견이 있다. 우협시를 제화갈라보살로 본다면 다음과 같이 이야깃거리가 많아진다.
현재불인 석가불을 기준으로 했을 때 석가불 이전에 성불한 부처들은 과거불, 석가불 이후의 부처들은 미래불이라고 한다. 이곳의 제화갈라보살은 과거불인 연등불이 보살이었을 때, 미륵보살은 미래불인 미륵불이 보살일 때의 모습을 새긴 것으로 보고 있다. 좌우 보살은 각각 미륵보살, 제화갈라보살로 불리지만 실제로는 둘 다 부처인 셈이다. 그래서 이곳 3존불은 현재불인 중앙의 석가불을 포함하여 왼쪽에 미래불, 오른쪽에 과거불 등 세 부처를 새긴 것으로 보고 있다. 대승불교 경전 중 하나인 법화경의 제1장 서품(서문)에 석가불과 관련된 연등불, 미륵불 이야기가 있다.
▲약 1400년 전 백제인의 아름다운 미소를 가진 마애불
중앙에 서 있는 석가불은 크기, 돋을새김 등에서 중심이 되고 중앙에 서 있는 석가불은 가장 크게 그리고 가장 높은 돋을새김으로 조각되었다. 3존불의 중심이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머리 주변의 광배와 활활 타오르는 불꽃에서 석가불의 위대한 권능은 더 돋보인다.
또, 햇빛이 둥근 얼굴에 내려 앉으면 터질 듯 살이 오른 두 뺨, 살구씨 모양의 눈, 입에서는 자비로운 미소가 흐른다. 그리고 두 손 모양 역시 중생의 두려움을 없애주고 소원을 들어준다는 시무외여원인을 표현하고 있어서 자비로움이 넘친다.
그래서 석가불의 모습에서는 위대한 권능과 함께 자비심을 동시에 볼 수 있다.
우협시는 석가불이 전생에서 만난 연등불을 보살 모습으로 새긴 제화갈라보살
법화경에 의하면 일월등명부처는 출가 전 여덟 명의 왕자를 아들로 두고 있었다. 아버지가 성불하여 일월등명부처가 되었다는 소식에 왕자들 모두 출가하여 부처가 되었다. 그 중에서 막내 왕자가 연등불(燃燈佛)이 되었다.
부처가 되기 전 윤회하던 전생에서 석가불은 상인, 왕, 브라만 승려 등으로 태어났다. 그리고 선혜보살이라는 이름으로 열심히 수행하던 전생에서의 어느 날, 연등불이 지나간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는 일곱 송이 연꽃을 공양하고 진흙 길에 자신의 머리카락을 풀어 연등불이 밟고 지나가게 하였다. 이에 연등불이 선혜보살에게 부처가 되리라는 예언을 해 주었다. 이렇게 닿은 연등불과 석가불의 인연 이야기는 여러 불교 국가에서 많은 불화의 소재가 되기도 하였는데 이곳 서산에서는 마애불로 표현된 것으로 보인다.
어린 아이처럼 밝게 웃는 미륵보살은 미래의 희망을 주는 듯하고 왼쪽의 미륵보살은 연꽃 대좌 위에서 오른발을 왼쪽 무릎 위에 올린 반가(半跏)의 자세로 사유(思惟)하고 있다. 법화경에 의하면 일월등명부처의 여덟 왕자에게 스승인 묘광보살이 있었다. 묘광보살의 많은 제자들 중에 구명(求名)이라는 제자가 있었다. 구명은 경전을 독송해도 이해하지 못하고 잘 잊어버렸다. 이렇게 수행이 더디었던 구명이 미륵보살이었다. 미륵보살은 먼저 부처가 된 석가불로부터 미래에 부처가 될 것이라는 예언을 듣고 지금도 열심히 수행하고 있다.
이 미륵보살상 역시 소년 같은 체형에 어린 아이 같은 미소가 아름답다. 우리나라의 아름다운 국보 중 하나인 금동미륵반가사유상(국보 제83호)은 깨달음을 얻기 위해 명상에 잠겨 고뇌하고 또, 빼빼 마른 육체가 가늘고 잘 빠진 모습으로 표현되었다. 그러나 이 보살상은 통통하고 중생들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주는 듯한 밝은 표정으로 사유를 하고 있다.
백제와 중국간 해상 교역의 무사안전 소원을 들어 주었을 마애불
그 당시 고구려에 의해 육로가 차단된 백제는 이곳의 서해안 바닷길을 통해서 중국과 문물교류를 하고 있었다. 특히, 중국 산동반도와 가까운 태안과 당진 등의 항구를 통해 사신, 상인, 승려들이 나가고 들어오면서 다양한 문화와 문물이 교류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서해 바다 뱃길과 교역로 상의 무사안전을 위해서 태안에는 마애3존불(보물 제432호), 그리고 그 길목인 이곳 서산 용현리에 마애3존불(국보 제84호), 예산 화전리에 사면석불(보물 제794호)이 조성되었을 것으로 보고 있다.
단단한 화강암 바위에 살아 숨쉬는 듯 생생하게 표현한 장인의 공력에 감탄하면서 길을 내려오는데 계단 길 옆 돌담 바로 위에서 웃는 얼굴로 마애불이 배웅해 준다.
▶소재지: 충남 서산시 운산면 용현리 산 2-10 (도로명 주소: 충남 서산시 운산면 마애삼존불길 65-13)
▶주변 볼거리
- 보원사터: 백제시대에 창건되었고 나말여초에 융성했다고 하나 지금은 넓은 터로만 남아 있다. 나말여초의 고승인 법인국사(900-975)의 부도(보물 제105호)와 비(보물 제 106호), 석조(보물 제102호), 5층 석탑(보물 제104호), 당간지주(보물 제103호)가 있다. 서산 용현리 마애3존불에서 약 1.5km 거리에 있다.
- 개심사: 백제시대에 창건되었다고 하는데 아늑하고 운치가 있다. 경내에는 대웅전(보물 제143호), 심검당 등의 건축물이 있는데 특히, 비틀어진 나무를 그대로 살려서 만든 심검당, 종각, 무량수각의 기둥이 눈길을 끈다.
- 해미읍성: 조선시대에 왜구로부터 백성을 보호하기 위해 만들어진 성이다. 특히, 조선 말 박해 받던 많은 카톨릭 신자들이 이곳에서 순교하였다. 2014년 8월에는 프란체스코 교황이 이곳을 방문하였다.
▲해미읍성
(6):전북 김제 문수사 마애불
토목기술자를 짝사랑하던 태수의 딸 단야의 희생적인 사랑
우리나라 최초의 수리시설인 벽골제를 끼고 있는 김제평야
충남 논산에서 시작된 들판은 남쪽 아래로 군산과 익산을 거쳐 김제와 부안, 정읍 등 전북의 곡창지대까지 넓고 길게 연결된다. 이 곡창지대 중심에 김제가 있다. 김제 시청이 있는 시내는 차지하는 면적이 새발의 피일만큼 좁다. 반면 시내를 조금 벗어나기만 해도 눈 앞에 펼쳐지는 건 너른 들판뿐이다.
김제는 옛날에는 볏골(벼 고을)로 불리었고 한자를 이용해서 벽골(碧骨)로 표기되었다. 농사를 천하의 근본으로 알고 살아가던 이곳에서는 물이 필수적이었다. 기본적으로는 들판을 가로 질러 서해로 빠지는 동진강과 만경강, 주변 하천이 젖줄 역할을 했다. 하지만 이곳 김제에 우리나라 최초로 저수지에 물을 가두었다가 필요할 때 논에 물을 대던 백제 시대의 벽골제(碧骨堤)가 있었다는 점에 큰 의미를 둘 수 있다.
▲현재 남아 있는 벽골제의 두 개 수문중 하나.
벽골제는 백제 비류왕 27년(330)에 처음 만들어졌다고 한다. 통일신라와 고려, 조선시대에 보수공사를 하면서 다소 변동이 있었으나 대체로 높이 5.7m, 폭 10~21m의 제방이 들판을 따라 약 3km에 걸쳐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제방 중간에는 다섯 개 수문이 있어서 필요할 때마다 수문을 열어서 그 지역의 들판에 물을 대었다고 한다.
우리나라 김제평야에서도 지평선을 볼 수 있다
지금은 두 개만 남아 있는 수문 중 하나가 둑길 끝에 있다. 이 수문 앞에는 통일신라 원성왕 때 제방 보수공사를 하던 토목기술자를 짝사랑하던 이곳 태수의 딸 단야의 희생적인 사랑을 애도하는 단야각이 있고 또, 조선 태종 때의 보수공사 내용을 기록한 중수비도 있다. 단야각이라는 보호각은 사랑 이야기로, 중수비는 기록으로 당시의 보수공사 사실을 보여 주고 있다.
이곳 김제에서 바늘과 실처럼 벽골제와 함께 따라다니는 또 다른 하나가 지평선이다. 지평선은 하늘과 땅이 맞닿는 곳이다. 중간에 구릉, 산 등의 장애물이 없어야 지평선을 볼 수 있다. 김제에서는 서해 바다쪽을 바라보는 들판에서 나름 지평선을 볼 수 있다고 한다. 중국 내륙의 들판에서, 둔황에서 우루무치까지 가는 실크로드의 모래 사막에서 질리도록 보았던 지평선을 우리나라에서도 볼 수 있는 셈이다.
후덕한 미소로 김제의 황금빛 풍요로움을 지켜주었을 마애불
김제 시내에서 금산사를 향해 가는 길에 황산이 있다. 낮은 야산이지만 산이 귀한 이곳에서는 융숭한 대접을 받을 것처럼 보인다. 정상 부근의 문수사라는 절에 마애불이 한 개 있다. 아담한 문수사는 경내가 조용해서 마음이 편해진다.
▲문수사 마애불.
마애불은 경내 부도밭 위, 조그만 암벽에서 떨어져 나온 바위에 새겨져 있다. 바위는 인위적으로 잘 다듬어졌다. 12시 30분경, 햇빛이 바위 표면에 살포시 내려 앉는데 살랑이는 봄 바람도 덩달아 마애불 뺨을 가볍게 두드리고 있었다. 그늘 속에 숨겨져 있던 마애불의 미소가 점차 환해지고 있었다. 웃는 듯한 눈썹과 눈, 낮고 넓적한 코, 통통한 두 뺨, 둥근 얼굴에서는 후덕함이 느껴진다. 누구라도 와서 소원을 빌면 너그러이 받아줄 모습이다.
주변 바위에 산신에게 복과 장수를 기원하는 글들이 몇 개 보인다. 마애불이 있는 곳에서 사람들은 산신에게도 기도한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이곳 마애불은 불교와 산신 신앙이 융화된 모습을 보여 준다.
마애불에서는 김제평야가 훤히 내려다 보인다. 가슴이 뻥 뚫리는 시원함보다여유로움이 느껴진다. 매년 사람들은 모를 심고 정성껏 가꾸면서 가을에는 수확의 기쁨을 노래할 것이다. 마애불은 이곳에서 이들을 바라보면서 오랜 세월동안 황금빛 풍요를 지켜주었을 것으로 보인다.
▲금산사 경내의 미륵전.
▶소재지: 전북 김제시 황산동 6 (도로명 주소: 전북 김제시 황산5길 158)
(7): 경남 거창 가섭암터 마애불
좌우 보살 상반신은 옷을 입지 않았으나 하반신은 얇고 살랑이는 치마 입어
금원산 거대 바위들이 만든 자연 동굴 속 마애불
거창 읍내에서 북쪽으로 좀 떨어진 금원산. 검게 보인다고 하여 검은 산이라는 발음대로 이름 지어졌다고도 하고 너무 날뛰는 금빛 원숭이(金猿)를 이 산의 바위 속에 가두었다고 하여 금원산(金猿山)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어찌 보면 천방지축으로 날뛰다가 바위산에 500년이나 갇힌 원숭이인 손오공 이야기와도 비슷하다.
금원산은 높이만큼 산세도 우람한데 아름다운 계곡과 폭포들을 곳곳에 품고 있다. 매표소 입구의 선녀담(仙女潭)에서부터 들리는 물소리가 맑다. 마애불은 지재미골이라는 골짜기 입구에 있다. 지재미골 입구에서 절의 일주문 역할을 했을 문바위라는 거대 바위를 지나면 바로 위쪽에 마애불 관리사무소가 있다. 주변에 지금은 터로 남아 있지만 마애불이 소속되었을 가섭암이 있었다고 한다. 관리사무소 옆 계단길 끝에 올라서면 역시 문바위처럼 거대한 바위들이 포개어져 만들어진 자연 동굴이 있다. 동굴 안은 20명은 거뜬히 앉을 수 있을 정도로 넓은데 이 동굴 안 바위 면에 마애불이 있다.
▲지재미골 입구의 문바위.
죽은 사람들을 극락세계로 인도하기 위해 아미타불로 새겨진 본존불
보물 제530호로 지정된 마애불은 조그만 크기로, 섬세하게 만들어졌다. 마애불은 중앙의 본존불을 중심으로 좌우에 협시보살이 있는 3존불이다. 본존불은 두 손 모양으로 볼 때 아미타불로 조성되었다. 아미타불은 서방의 극락세계를 관장하는 부처로서 죽은 사람들을 극락세계로 인도한다고 한다. 그래서 좌우에 관음보살과 대세지보살로 추정되는 보살을 둔 마애불은 아미타3존불이다.
좌우 보살은 상반신은 옷을 입지 않았으나 하반신으로는 얇고 살랑이는 옷 자락이 아름다운 치마를 입고 있다. 특이하게도 치마 옆으로는 물고기 지느러미 모양의 장식이 붙어 있어서 눈길을 끈다. 그리고 머리에는 보관을 쓰고 목에는 목걸이를 하는 등 보살상의 화려한 패션도 돋보인다.
▲마애불이 있는 자연동굴 입구.
마애불 명문에서는 거란족이 세운 요나라의 연호가 사용되고
마애불 옆 네모난 감실에는 글자들이 새겨져 있으나 마모가 심하다. 판독가능한 글자들중 ‘천경 원년(天慶 元年)’이라는 글자에서 조성연대를 알 수 있다. 천경은 거란족이 세운 요나라(916-1125)의 마지막이자 제9대 황제인 천조제(天祚帝)가 1111년부터 1120년까지 사용한 연호이다.
거란은 3차에 걸쳐 고려를 침입했다. 1차 침입은 고려 제6대 임금인 성종 때(993) 있었으나 서 희의 담판으로 물리쳤다. 제8대 임금인 현종 때는 2차(1010), 3차 침입(1018)이 있었다. 2차 침입 때는 현종이 수도인 개경을 뒤로 하고 경기도, 전라도, 충청도로 피난다니기도 했는데 이때, 부처님의 힘으로 외세를 물리치고자 초조대장경이 만들어졌다. 3차 침입때는 강감찬 장군이 귀주대첩으로 이들을 물리쳤다.
마애불에서 보이는 천경 원년은 거란의 3차 침입 이후 약 90여 년이 지난 고려 제16대 임금인 예종 6년(1111)이다. 시기적으로 거란과의 냉랭했던 분위기는 사라졌을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역시 ‘천경3년(고려 예종 8년, 1113)’이라는 연호가 새겨진 기와가 강릉 굴산사터에서, 그리고 양양 진전사터에서 발견되어 당시 고려와 요나라 간의 활발한 문물교류를 했을 것으로 보고 있다.
▲머리광배와 대좌의 연꽃잎이 촛불 모양인 본존불.
경주 석굴암처럼 돌아가신 어머니의 명복을 빌기 위해 조성된 마애불
마애불 옆 명문에 의하면 조성자는 알 수 없으나 고려 예종 6년(1111), 돌아가신 어머니를 생각하면서 이 마애불을 조성한 것으로 보인다. 어머니의 죽음을 슬퍼하며 크게 울었을 자식은 아미타불을 새기면서 어머니의 극락왕생을 간절하게 기원했을 것이다.
그 효심은 추도하는 촛불 모양으로 된 본존불의 머리 광배에서 잘 나타난다. 바위 면에 영원히 꺼지지 않는 촛불을 새긴 것과 같은 효과일 것이다. 그리고 본존불의 연꽃 대좌에도 여덟 개의 연꽃 잎중 다섯 개의 잎을 한 개씩 뜯어 추모하는 촛불 모양처럼 일렬로 세워 놓았다. 이런 모양의 연꽃 대좌는 특이한데 어머니를 잃은 슬픔과 함께 살아 계실 때의 은혜를 생각하는 마음이 찐하게 전해져 온다.
경주 토함산에 세계적으로 가치를 인정 받은 문화유산이 두 개 있다. 산 입구에 불국사, 산 정상에 있는 석굴암이 바로 그것이다. 이들은 통일신라 시대의 재상이었던 김대성(700-774)에 의해 만들어졌는데 함께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전생에서 가난하게 태어난 김대성은 가진 모든 것을 시주해서 현세에서 재상의 아들로 다시 태어났다. 효성이 지극했던 김대성은 전생의 부모를 위해서 석굴암을, 현세의 부모를 위해서는 불국사를 지었다.
이 마애불은 석굴암과 불국사의 역사적, 미술사적, 건축사적 의미 등에서는 따라갈 바가 못 된다. 시대 상황, 조성자의 사회적 지위 등에 의해서 나타난 결과물인 이곳 마애불과 석굴암, 불국사에는 차이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돌아가신 어머니(부모님)의 은혜에 감사드리고 명복을 비는 기본적인 효심에는 차이가 없어 보인다.
마애불을 보고 내려오는데 이제는 고인이 된 소설가 최인호씨의 소설 제목이 머리 속에 떠올랐다. 돌아가신 어머니의 은혜에 그 역시 ‘어머니는 죽지 않는다’라고 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소재지: 경남 거창군 위천면 상천리 산 6-2
(8): 전남 진도 금골산 마애불
진도 울돌목에서는 숭어도 바다 한가운데를 피해 간다
조선 연산군 때 진도에 귀양왔던 이 주가 올랐던 금골산
해남 우수영에서 진도대교를 건너면 섬인 진도로 들어가게 된다. 진도대교 입구에 진돗개 동상이 있어서 이곳이 진돗개의 고장이라는 사실도 깨닫는다. 진도대교에서 멀지 않은 곳에 금골산이 있다. 금골산(金骨山)에서는 뼈(骨 뼈 골)처럼 층층이 쌓인 지층들이 아침 햇살에 금빛(金 쇠 금)으로 빛난다.
조선 연산군 4년(1498) 무오사화 때 진도로 귀양온 이 주( ? -1504)도 이곳 금골산에 올랐다. 이곳에 귀양온 지 4년이 지난 해의 9월에 왕세자 책봉을 기념하는 대사면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자신은 사면을 받지 못해서 어지러운 마음을 달래기 위해 이 산의 석굴에 잠시 머물렀다.
그는 <동국여지승람>에서 누락된 금골산과 동굴(東窟), 서굴(西窟), 상굴(上窟) 등 세 개의 석굴을 자세히 서술함과 동시에 이곳 상굴에서 23일간 거처한 사실을 금골산록(金骨山錄)이라는 글로 남겼다. 이 글은 서거정의 <속동문선> 제21권 녹(錄)에 있다.
▲바다안개에 싸인 금골산 아침 전경.
앞마을과 남해를 내려다보고 있는 후덕한 얼굴의 석굴 안 마애불
산 정상에 서면 방조제로 바다를 막아 개간한 둔전 평야와 바다가 시원하게 펼쳐진다. 주변을 돌아보면 진도대교도 희미하게 보인다. 정상에서 다시 경사가 급한 바위 비탈을, 현기증이 날 정도로 아찔하게 50미터 정도 내려간 길 끝에 석굴이 있다. 이 굴이 상굴(上窟)이다. 20-30명 정도는 앉을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석굴의 탁 트인 방향으로, 바다를 바라보는 동굴 안 벽면에 마애불이 있다.
동굴 안으로 들어서면 살찌고 후덕한 얼굴의 마애불이 웃으면서 반겨 준다. 조그만 눈과 입, 크고 뭉툭한 코에서는 친근함이 물씬 묻어 나온다. 그러나 한 개의 둥근 원으로 표현된 머리 광배는 옆집 아저씨처럼 친근한 마애불이 그래도 위대한 권능을 가지고 있다는 표현일 것이다. <금골산록>에 의하면 이 주가 유배오기 약 30년 전 이곳 진도군수 유호지(1469-1472, 재임)가 시주하여 조성했다고 한다.
특이하게도 마애불이 새겨진 바위 표면에 크고 작은 구멍들이 많이 뚫려 있다. 마치 벌집처럼 생겼다. 이는 금골산이 바다 위로 솟아오르기 전 바닷물의 침식 작용으로 생긴 것이라고 한다. 옛날 이곳 동굴에서 수행하던 스님과 그를 보좌하던 수습 승려가 이들 구멍에서 나온 쌀을 먹으면서 살았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마애불이 있는 석굴 전경.
진도대교가 있는 울돌목은 이순신 장군이 대승한 명량대첩의 무대
진도대교가 있는 바다는 울돌목이다. 진도와 해남 사이의 바다 폭이 좁기 때문에 밀물 때는 남해 바닷물이 서해 방향으로 한꺼번에 빠져나가면서 물살이 빨라진다. 그래서 그 물살이 우는소리를 내고(울) 돌아서(돌) 소용돌이를 일으키는 목(목)이 울돌목이다. 울돌목을 한자로 표기한 것이 명량해협(鳴梁海峽)이다. 임진왜란 때 이순신 장군은 이런 울돌목의 특성을 활용하여 대승했는데 이것이 유명한 명량대첩이다.
오랜 시간을 끌어오던 휴전 협상이 결렬되자 조선 선조 30년(1597), 왜군이 다시 조선을 침략했다(정유재란). 그 해에 이순신 장군이 모함으로 한양으로 압송되어 무고한 옥살이를 하다가 권율 도원수 밑에서 백의종군했다. 7월에는 거제도의 철천량 전투에서 조선 수군이 왜의 수군에게 대패하면서 삼도수군통제사인 원균이 죽었다. 그래서 8월에 이순신 장군이 다시 삼도수군통제사로 복귀했다. 삼도수군통제사는 전라도, 경상도, 충청도의 3도 수군을 지휘하던 총사령관이었다.
그가 없는 동안 조선 수군은 망가질 대로 망가져 있었다. 남아 있는 배도 모두 12척밖에 되지 않았고 군사들의 사기는 땅에 떨어져 있었다. 게다가 조정에서는 수군을 폐지하고 육군을 양성하려는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그럼에도 이순신 장군은 임금에게 “전하, 신(臣)에게는 12척의 배가 있사옵니다. 신이 죽지 않고 살아있는 한, 적군은 우리를 가벼이 여기지 못할 것입니다”라는 상소를 올려 수군폐지 계획을 무산시켰다. 그리고 병사들에게는 “죽고자 하면 살고, 살고자 하면 죽는다(必死卽生 必生卽死 필사즉생 필생즉사)”라면서 굳은 정신력을 심고 또 사기를 올려 주었다. 그러면서 무기를 만들고 백성을 군사로 훈련하는 등 준비를 하고 있었다.
전라도에서 육군과 합류하여 한양으로 진격하려던 왜의 수군은 이곳 명량을 거쳐야만 했다. 배 130여 척을 보유하고 있던 왜군은 자신만만하였다. 그러나 9월 16일(음력), 이순신 장군은 이곳 명량에서, 모두 13척의 배로 북상하는 130여 척의 왜선을 물리쳤다. 왜선 31척이 격파되고 나머지는 도주했다. 절대 열세 속에서도 이순신 장군을 중심으로 한 조선 수군의 압도적인 승리였다.
왜구 침입으로부터 평안하기를 기원하며 조성되었을 금골산 마애불
삼국시대부터 동해와 남해 바닷가를 노략질하던 왜구는 고려 말에 더 심해졌다. 그들은 경상도와 전라도뿐만 아니라 충청도 내륙까지 들어와 많은 백성들을 괴롭히고 노략질을 일삼았다. 그래서 이런 왜구의 침입을 부처님 힘으로 막기 위해 동해와 남해가 내려다 보이는 산에 조성한 것으로 보이는 마애불이 몇 개 있다.
이곳 진도도 고려 말부터 왜구의 침략을 많이 받았다. 금골산 마애불 역시 이런 지리적 배경을 안고 조성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임진왜란이 발생하기 약 120년 전에 조성된 이 마애불은 이곳 바다를 노략질하던 왜구들로부터 마을 사람들을 안전하게 지켜 주면서 그들의 행복 기원을 들어 주었을 것으로 보인다.
▲마애불.
▶소재지: 전남 진도군 군내면 둔전리 산 75-1
(9):경북 문경 봉암사 마애보살
일년에 단 하루 공개되는 지증대사탑비와 마애보살
인생에서 별이 된다는 것
귀밑머리가 희어지기 시작하면서 은퇴하는 친구들 수가 늘고 있다. 얼마 전 오랜만의 술자리에서 적지 않은 친구들을 만났는데 현역과 퇴역의 수가 반반이었다. 술이 거나해진 한 친구가 “이제까지 살아온 자신의 인생이 ‘별’인줄 알았는데 퇴직하고 나서 보니 ‘별’ 볼 일 없는 것 같다”고 농담삼아 넋두리하였다. 과연 ‘인생에서 별이 된다는 것'은 무엇일까? 그 해답을 경북 문경 봉암사의 지증대사탑비명(국보 제315호)에 새겨진 최치원의 글에서 찾아 보았다.
최치원(857-?)은 당나라에서 벼슬할 때 토황소격문(討黃巢檄文)이라는 글로, 난을 일으켰던 황소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든 대문장가였다. 신라에 귀국한 이후에는 왕명으로 훌륭한 고승들의 행적을 비문으로 남기기도 하였다. 대표적인 것이 사산비명(四山碑銘)인데 그중의 하나가 문경 희양산의 봉암사에 있는 지증대사탑비명이다.
통일신라 후기 문경 봉암사를 창건한 지증대사가 입적하였을 때 최치원은 화려하면서 박식한 문장으로 대사의 생애를 비석에 남겼다. 대사는 출가하면서 자신이 가지고 있던 전 재산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고 청렴하게 산속에서 수행 생활을 했다. 대사는 왕이 부르는데도 세상에 나가지 않았다. 그리고 죽어서는 밤하늘로 되돌아가 별이 되었다고 했다.
요즘, 좋은 대학 졸업해서 대기업에 들어가서 임원이 되거나 아니면 사업으로 돈을 많이 벌면 별이 된 것으로 생각하기도 한다. 그리고 명예와 권력, 인기를 손에 조금만 넣어도 별이 된 것으로 생각한다. 별은 돈, 명예와 권력, 지식으로만 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별은 밤하늘처럼 어두운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인품으로, 환한 빛을 밝혀 주는 길잡이다. 그래서 지증대사는 살아서 뿐만 아니라 죽어서도 밤 하늘로 되돌아가 밤을 밝히는 별이 되었다고 최치원은 글로 보여준 것 같았다.
부처님 오신 날에 단 한 번 개방하는 절, 봉암사
문경 봉암사에서는 최치원의 글이 있는 지증대사탑비를 직접 볼 기회를 일 년에 단 한 번 준다. 수행을 중심으로 하는 까닭에 부처님 오신 날인 사월 초파일, 하루만 일반인에게 절을 개방하고 있다. 그래서 일 년을 벼르고 온, 많은 사람에게 떠밀리다시피 절에 올랐다가 내려온다.
희양산 중턱에 위치한 봉암사는 통일신라 헌강왕 5년(879) 지증대사(824-882)가 창건한 절이다. 통일신라 말 지방에서 참선을 중시하는 선종(禪宗)이 아홉 개의 산(山)을 중심으로 하여 개창되었는데 그중의 하나가 이곳 희양산에 창건된 봉암사를 중심으로 하는 희양산파였다.
▲이른 아침의 봉암사 경내.
경내로 들어서는 길 내내 암벽으로 덮여 특이한 희양산 정상이 눈에 들어온다. 지증대사 비에 이 특이한 지형에 세운 봉암사 이야기가 있다. 심충이라는 사람이 지증대사에게 희양산 중턱의 땅을 희사하였다. 대사가 지혜에 넉넉하고, 천문과 지리를 환히 들여다보며, 학술이 정밀하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었다. 대사는 몇 번을 사양하다가 직접 이곳을 찾았다. 병풍처럼 산에 둘러싸인 이곳이 승려의 거처가 되지 않으면 도적의 소굴이 될 지형이라고 하여 절을 세웠다.
경내에서는 지증대사의 탑비 외에 부도(보물 제137호), 그리고 몸매가 잘 빠진 3층 석탑(보물 제169호), 정사각형 모양의 지붕을 가진 극락전, 노주석이 부처님 오신 날을 함께 맞이하고 있다. 그리고 경내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있지만 고려 초기, 봉암사를 중창한 정진대사의 부도(보물 제171호), 탑비(보물 제172호)도 마찬가지다.
잘 생긴 마애보살의 아침 미소는 아름답게 빛나고
경내에서 계곡을 따라 10분 정도 걸어 올라가면 백운대가 있다. 백운대(白雲臺)에는 흰 구름(白雲)이 떠 있는 하늘을 배경으로 넓은 반석과 계곡의 맑은 옥류가 어우러진 절경이 있다. 넓은 반석의 가운데 부분은 돌로 두드리면 목탁 소리가 난다. 그래서 호기심 많은 몇몇 사람들이 엎드려서 귀를 기울이고 돌로 반석을 두드리는 모습도 볼 수 있다.
반석의 가장자리에 거대한 바위들이 몇 개 있는데 그중 하나에 보살상이 새겨져 있다. 오전 8시, 보살상 얼굴에 햇빛이 들기 시작한다. 요즘 아이돌처럼 젊고 잘 생겼다. 그러면서 아침 햇살에 빛나는 미소도 아름답다. 두 손에 연꽃 가지를 들고 있는 보살상은 관음보살로 보인다. 관음보살(觀音普薩)은 이름 그대로 중생을 보고(觀 볼 관), 또 소리를 듣고(音 소리 음) 있다가 언제, 어디서라도 중생이 부르면 가서 중생의 고통을 덜어 준다는 자비의 보살이다. 밤하늘 별처럼, 많은 사람에게 어두운 인생 밤길을 밝혀주고 있을 것으로 보인다.
▲백운대 계곡의 마애보살상.
보살상은 머리에 보관을 쓰지 않고 대신 머리 가운데에 빗을 장식용으로 꽂고 있어서 특이하다. 얼굴 부분은 돋을새김으로 새겨 놓아서 입체감이 좋다. 얼굴과 몸 주변에서 나오는 빛을 표현한 광배에 불꽃 무늬까지 새겨 놓아서 위대한 권능을 잘 보여주는 듯하다.
경내의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다 보면 금세 배가 고파진다. 절에서는 아침과 점심 때 밥과 떡을 준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다. 경내에 길게 늘어선 줄에도 불구하고 복이 담긴 떡과 공양밥을 먹고자 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기다림은 지루하지 않은 듯하다.
▶소재지: 경북 문경시 가은읍 원북리 산 91
후백제 견훤의 탄생설화가 있는 금하굴.
① 하굴: 갈전2리의 아차마을에 있는 조그만 굴로서 견훤의 탄생 설화가 전해져 온다. 밤마다 한 규수 집에 찾아와서 자고 가는 미소년의 정체를 알기 위해 허리에 실을 묶어 두었다가 새벽에 따라가 보았더니 굴속에 금빛 나는 지렁이가 있었다. 이 굴이 금하굴이다. 그 후로 처녀에게 태기가 있어서 낳은 아기가 견훤이라고 한다 (소재지: 경북 문경시 가은읍 갈전2길 160-11)
②아차마을: 견훤은 인근의 농암면에서 성장했다. 어느 날, 농암의 활터에서 금하굴이 있는 마을까지 쏜 화살과 자신이 타고 있는 용마의 속도를 비교했다. 화살보다 속도가 느린 줄 알고 말의 목을 베었으나 조금 후에 화살이 도착하자 후회하면서 “아차”했다고 한다. 그래서 금하굴 주변 마을은 아차마을이 되었다.
③농암면에는 농암(농바위), 궁궐이 있었다는 궁터(宮基, 궁기), 궁기천 등이 있다. 그외에 견훤산성, 가은성 등의 유적지도 있다
(10):경기 안양 삼막사 마애불
맑은 날, 인천 서해 앞바다까지 보이는 삼막사
서해 조망은 힘들게 올라선 삼막사에서 볼 수 있는 또 다른 볼거리이다. 맑은 날, 저 멀리 인천 쪽을 바라보면 서해까지 보인다. 이곳 삼막사(三幕寺)에서 통일신라 문무왕 때 원효, 의상, 윤필의 세 스님(三)이 천막(幕)을 치고 생활했다고 한다. 다른 이야기로는 고려 말의 지공, 나옹, 무학 등 세 명의 스님이 이곳에서 천막을 치고 생활했다고도 한다. 삼막사를 중턱에 안고 있는 삼성산(三聖山) 역시 이들 세 명의 성인 스님들로 인해 생긴 이름이다.
경내에서는 고려시대의 3층 석탑, 명부전과 망해루 등의 법당, 사적비, 거북 귀(龜)라는 글자 세 개를 바위에 새겨 놓은 삼귀자(三龜字) 등을 볼 수 있다. 이들 중에서 고려 후기의 승장(僧將)인 김윤후와 관련된 3층 석탑이 눈에 띈다. 몽골의 2차 고려 침입(고종 19년, 1232) 때 이곳 삼막사 승려 출신인 김윤후(?- ?)가 용인의 처인성 전투에서 적장인 살리타이를 활로 쏘아 죽이고 승리했다. 이를 기념하여 세운 것이 삼막사의 3층 석탑이라고 한다.
▲칠성각 앞 남녀근석.
삼막사 경내에서 마애불이 있는 칠성각까지는 계단 산길을 200미터 정도 더 올라야 한다. 이 안에 조선 후기의 영조 39년(1763)에 조성된 마애불이 있다. 그리고 마애불을 모신 법당인 칠성각은 다음 해에 세워졌다. 이런 사실이 마애불 하단에 글로 새겨져 있다.
불교가 칠성신앙을 수용하면서 치성광불, 칠성각 등이 생겨나고
요즘도 재미 삼아 천칭좌, 처녀좌, 전갈좌 등 자신이 태어난 별자리로 오늘의 운세를 보는 사람들이 있다. 개인 운명이 별자리에 의해 어느 정도 결정된다는 생각을 바탕에 깔고 있기 때문이다. 옛날 사람들은 이 별자리 운명을 주관하는 것이 북두칠성이라고 믿었다. 그래서 이 북두칠성에게 잘 되기를 기원하던 것이 칠성(七星)신앙이었다.
칠성신앙에서는 북두칠성 외에도 북극성이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북극성은 옛날부터 방위를 구별하는 나침반 역할을 해왔고 또 많은 별자리의 기준이 되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북극성이 북두칠성을 비롯한 많은 별들을 거느리고 있다고 믿었다.
전통의 토속신앙으로서, 그리고 도교에서 유행한 칠성신앙을 불교가 수용하면서 으뜸 별인 북극성은 치성광불, 북두칠성은 칠성불이 되었다. 그래서 절에는 칠성각도 생겼다. 칠성각 안에는 치성광3존불을 모셨고, 칠성탱화도 벽에 걸어 두었다.
▲바위 암벽에 세워진 칠성각.
치성광3존불은 치성광불을 중심으로 좌우에서 일광보살과 월광보살이 협시한다. 해(일광보살)와 달(월광보살)도 북극성(치성광불)을 좌우에서 모실 정도로 북극성의 존재는 절대적인 셈이다.
칠성탱화는 조선시대에 유행한 칠성신앙 속에서 특히, 조선 후기에 많이 만들어졌다. 그림에는 치성광3존불과 칠성불 외에 북극성과 북두칠성의 도교적인 표현인 자미대제(紫微大帝)와 칠원성군(七元星君), 그리고 28수(宿)라는 28개의 별 등이 함께 등장하기도 하였다.
자식을 기원하던 여인들에게 아픔을 참아 가면서 코를 내 주었을 마애불
칠성각 계단을 올라서 문을 열면 어둠 속에 묻혀 있던 마애불이 희미하게 모습을 드러낸다. 조그만 칠성각 안에 탱화는 없지만 바위에 새겨진 치성광3존불이 있다.
▲중앙의 치성광불을 중심으로 좌우에 일광보살과 월광보살이 있는 치성광 3존불.
본존불인 치성광불은 무병장수, 건강, 자식기원 등에 효험이 있다고 하는데 약사불과 거의 비슷하다. 그래서 좌우 협시보살도 약사불처럼 일광보살과 월광보살을 두고 있다. 해가 있는 보관을 쓴 보살은 일광보살, 달이 있는 보관을 쓴 보살은 월광보살인데 실제로는 구별이 잘 되지 않는다. 게다가 두 보살은 옷 모양과 주름, 앉은 자세, 합장하고 있는 손 모양 등도 비슷하다.
반달 눈썹, 가늘게 뜬 눈, 도드라진 뺨, 입에서는 아름다운 미소가 흘러 나온다. 고민을 안고 들어서는 사람들이 쉽게 마음을 열 수 있도록 해 주는 매력이 있다. 그러나 부처님 코를 만지면 또, 더 심하게는 코를 갈아서 마시면 아들을 낳는다는 속설 때문인지 3존불 모두 코가 뜯겨 나가고 없다. 특히, 자식 낳는 데 효험이 있다는 치성광불이니 오죽했을까? 조선시대 칠거지악의 틀에 매여 고통 받으면서 이 험한 곳까지 올라와 자식을 기원했을 여인의 간절함이 흔적으로 남아 있는 듯하다.
당시의 3존불은 아픔을 참아 가면서 코를 내주었을 아름다운 모습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밤하늘 별자리에 이전의 신(神) 대신 과학이 들어앉고 또, 의학으로 어느 정도 불임을 해결하고 있는 현재, 코 없는 3존불이 웃는 모습에서는 이가 한 개 빠진 듯한 허전함이 살짝 엿보였다.
칠성각 입구에는 특이하게도, 남녀 성기를 꼭 닮은 바위가 마주 보고 서 있다. 큰 바위에 자연적으로 생긴 것인데도 너무 닮았다. 칠성각이 생기기 전부터 있었을 두 개 바위는 출산과 관련된 다산, 풍어, 풍농을 위해 많은 사람들의 숭배를 받았을 것이다. 전래의 남근석, 여근석과 바로 앞 암벽에 동일한 목적을 가지고 새겨진 치성광3존불에서는 한 곳에서 만난 토속 신앙과 불교를 보는 듯하다.
▶소재지: 경기 안양시 만안구 삼막로 480
(11):강원 철원 금학산 마애불
궁예가 슬픔에 빠진 금학산을 위로하다
철원은 후삼국 시대에 궁예가 세운 나라의 수도
철원을 다니다 보면 태봉이라는 간판을 종종 보게 된다. 지금으로부터 약 1100년 이상을 거슬러 올라가면 철원은 후삼국 시대에 궁예가 세운 태봉이라는 나라의 수도였다.
신라 왕족이었던 궁예(?-918)는 태어날 때부터 이가 났다. 게다가 5가 두 번 겹치는 5월 5일에 태어나는 등 불길한 징조라고 해서 왕은 궁예를 죽이려고 했다. 누각에서 던져진 어린 궁예는 유모가 받아서 목숨은 건졌으나 유모의 손가락에 눈이 찔려 왼쪽 눈이 멀었다. 그리고 멀리 도망친 유모가 그를 키웠다.
신라가 쇠퇴해지면서 지방에서는 무리를 모은 세력들이 강해지고 있었다. 궁예는 죽주(안성)의 기훤 세력과 북원(원주)의 양길 세력 밑에 들어갔다가 독자적인 세력을 가지게 되었다. 그리고 여러 지역 세력을 흡수하는 과정에서 개성의 해상 호족세력인 왕융을 자신의 세력으로 받아들였다. 이때 왕융이 자신의 아들인 왕건(20세)을 추천함으로써 궁예와 왕건의 만남이 이루어졌다(896).
그 후 세력이 커지면서 궁예는 스스로 임금이라 칭하고 수도를 개성에 두고 나라 이름을 고려라 하였다(901). 고려라는 이름은 고구려 유민들의 근거지인 개성의 호족들 지지를 얻기 위함이었다. 26세의 견훤이 전주를 수도로 후백제를 세운 지(892) 9년이 지난 후였다. 이로써 한반도에는 이미 쇠약해진 기존의 신라(1약)와 새로 세운 후백제, 고려(2강)라는 1약 2강의 후삼국 시대가 개막되었다.
이후 궁예는 나라 이름을 고려에서 마진, 연호는 무태로 바꾸었고(904) 수도도 개성에서 철원으로 옮겼다. 몇 년이 지난 후 궁예는 다시 나라 이름을 태봉으로, 연호도 수덕만세로 바꾸었다(911).
철원으로 수도 이전 때 고암산이 아닌 금학산에 궁궐을 세우라
동송읍의 동송초교를 지나면 금학산(金鶴山)이 앞에 우뚝 서 있다. 마치 양쪽 봉우리를 날개 삼아 학이 내려앉는 모습을 닮았다. 마애불은 금학산 중턱에 있다.
▲마애불 전경.
궁예가 개성에서 철원으로 수도를 옮길 때였다. 그는 고암산(북한 소재)과 이곳 금학산 둘 중 어느 곳을 진산으로 해서 궁궐을 지을 것인지를 고민했다. 도선국사는 고암산에 지으면 단명할 것이나 금학산을 진산으로 해서 궁궐을 지으면 국운이 300년 이상 계속될 것이라는 충고를 해 주었다. 그러나 고민 끝에 궁예는 금학산이 아닌 고암산 주변에 궁궐을 세웠다. 이런 결정이 나자 버림을 받았다고 생각한 금학산은 몇 년을 울었고 그 결과 이 산에서 난 약초는 써서 먹을 수가 없었다는 전설도 전해져 온다.
전설처럼 도선국사의 예언을 무시하고 고암산에 궁궐을 세운 지 얼마 되지 않아서 궁예의 나라는 왕건에게 넘어갔다. 실제로 초기에 그 당시 민중들이 받드는 미륵불을 이용하여 자신을 미륵이라 칭하고 선정을 베풀던 궁예는 나중에 주변 사람들을 불신하고 반대세력을 처형하는 등 광기를 보였다. 결국 자신의 부하였던 왕건(42세)을 중심으로 한 신숭겸, 복지겸, 홍유 등의 세력에 의해 궁궐에서 쫓겨났다.
왕건에게 나라를 빼앗긴 궁예는 명성산(울음산)에서 사흘을 울었다고 한다. 산야를 헤매다니던 그는 결국 부양(평강)에서 백성에 의해 비참하게 살해되었다(918). 고려를 세우고 난 지 18년 만의 일이었다. 현재 아무도 갈 수 없는 비무장지대(DMZ) 안에 태봉의 궁궐터가 있다.
마애불 앞 너럭바위에서 바라보는 철원평야의 전망은 일품
마애불의 몸체는 큰 바위 면을 잘 다듬어 선으로 그리듯이 새겨 놓았고 머리는 별도의 바위로 만들어서 몸체 위에 올려 놓았다. 갸름한 얼굴에 큰 눈, 우뚝 솟은 코는 토속적인 한국인의 얼굴이 아니라 마치 인도 태생의 부처님 얼굴 같다. 그에 비해 몸체에 새겨진 조각 솜씨는 지방 석공의 수준을 못 벗어난 듯하다. 두 손도 그렇고 입고 있는 옷의 표현에서도 형식화되고 세련되지 못했다.
전설에 의하면 고암산에 궁궐을 빼앗겨 울던 금학산을 달래기 위해 궁예가 이곳 바위에 마애불을 새겼다고 한다. 고려시대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마애불은 어쨌든 전설과 맞닿아 있는 듯하다. 마애불 앞에는 마애불이 소속되었을 것으로 보이는 절터가 있다. 그 터에 본체를 잃어버린 두 개의 연꽃 대좌와 석탑 조각들이 있다.
▲너럭바위에서 내려다 본 5월 중순의 철원평야.
절터 끝에는 높은 절벽이 아찔한 곳에 너럭바위가 있다. 너럭바위에서 바라보는, 한국의 곡창지대인 철원평야의 전망은 가히 일품이다. 이곳 마애불이 주는 또 하나의 매력이다. 이곳 철원평야의 풍요로움을 계속 지켜달라는 사람들의 염원이 이 마애불에서 느껴진다.
그리고 후삼국 통일의 명분 속에 계속되는 전쟁으로 당시 백성의 삶은 지치고 또, 불안감은 커져만 갔을 것이다. 그래서 전쟁 없는 평화로운 미래 세계를 기다리는 백성의 미륵불 신앙도 이 마애불에서 볼 수 있는 것 같다.
▶소재지: 강원 철원군 동송읍 이평리 산 142
(12):충남 보령 왕대사 마애불
신라 경순왕이 앉아서 시름을 달랬다는 바위, 왕대(王臺)
보령 시내에서 서쪽으로 조금만 달리면 짭짤한 서해 바닷바람이 버선발로 달려나오듯 와서 반겨 준다. 바다와 거의 맞닿은 곳에 들판을 끼고 서 있는 나지막한 왕대산이 있다. 정상 부근, 암벽으로 둘러싸인 곳에 최근에 지은 왕대사가 있는데 이곳에 마애불이 하나 있다.
절은 잘 알려지지 않았는데 경내에 들어서면 거대 암벽들이 병풍처럼 펼쳐진다. 이 암벽 중앙에 특이하게도 임금이 앉는 옥좌 모양의 큰 바위가 하나 툭 튀어나와 있다. 이 바위가 왕대(王臺)이다. 전설에 의하면 신라의 마지막 경순왕(王 임금 왕)이 이곳에 왔을 때 앉았다는 자리(臺 대 대)이다. 지금은 이 절 앞까지 간척되어 육지로 바뀌었는데 이전에는 파도가 출렁거리는 바다였다고 한다.
▲마애불.
약 1,100년 전의 후삼국 시대에 약소국 신라는 강대국인 고려, 후백제 두 나라의 통일전쟁 틈에 끼여있었다. 그러다가 경주 포석정을 기습한 후백제 견훤에 의해 경애왕이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했다. 그리고 견훤에 의해 경순왕이 신라 제56대 왕이 되었다(927).
내정 파탄과 후백제의 압박 등으로 신라는 점점 더 약해져만 갔다. 경순왕은 왕조를 이어 가야 할지 아니면 항복해야 할지 많은 고민을 했을 것이다. 신하들도 항복에 찬성하는 파와 반대하는 파로 나뉘었다. 맏아들은 항복에 결사코 반대하였다. 경순왕은 이곳 왕대에 앉아서 발아래 출렁이는 파도 소리를 들으며 시름을 달래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경순왕의 항복에 반대한 마의태자는 금강산으로 향하고
경순왕은 11월 문무백관을 이끌고 경주에서 개성으로 향했다. 수레와 말이 약 12km나 되는 길에 펼쳐졌고 사람들은 담을 싼 듯 모여서 그 모습을 구경하였다. 먼 길 끝에 도착한 이들은 개성에서 왕건에게 무릎을 끓었다(935). 신라를 세운 박혁거세로부터 마지막 경순왕에 이르기까지 천 년 사직(992년간, 56명의 임금) 신라가 역사에서 사라지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고려가 후백제를 멸망시키고 후삼국을 통일하기(936) 1년 전이었다. 왕건은 경순왕을 위로하고 특별한 대우를 해 주었다.
항복을 반대하던 맏아들(태자)은 아버지인 경순왕이 고려에 항복하자 하직 인사를 하고 금강산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바위 밑에 집을 짓고 삼베 옷(麻衣 마의)을 입고 풀을 먹으며 살다가 일생을 마쳤다고 한다. 이 맏아들이 마의태자이다.
경주를 떠난 마의 태자는 문경에서 계립령(하늘재)을 넘어 충주로 들어섰다. 고개를 넘자마자 미륵리에는 5층 석탑(보물 제95호)과 석불(보물 제96호) 등이 있는 절터가 있다. 마의태자가 세웠다는 전설의 석불이 바라보는 월악산 중턱에 여동생인 덕주공주가 덕주사를 세웠고 거대 바위에 새겨진 마애불(보물 제406호)도 있다.
그리고 북쪽으로 더 올라간 원주에도 흔적이 남아 있다. 주포리에는 경순왕이 들렀다고 해서 대왕산이었다가 이름이 바뀐 미륵산, 귀한 분이 오셨다는 뜻의 귀래면(貴來面), 경순왕의 얼굴을 새겼다는 미륵산 정상의 주포리 마애불이 전설로 전해져 온다. 경순왕 전설로 전해 오지만 마의태자일 가능성도 있어 보인다. 그리고 양평의 용문사에는 마의태자가 지팡이를 심어서 된 것이라는 전설이 전하는 은행나무도 있다.
금강산에서 가까운 인제에도 태자가 옥새를 숨겼다는 옥새 바위, 그가 수레를 타고 넘었다는 수구네미 고개, 군량리, 항병골, 김부리 등의 지명이 있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서 전하는 것처럼 금강산에서 조용히 일생을 마친 것이 아니라 항복에 반대했던 태자는 금강산을 향해 가는 길 곳곳에서 뜻이 맞는 세력을 모아서 신라 부흥운동을 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경순왕이 새겼다고 전하는 마애불
툭 튀어나온 왕대 바로 옆 암벽에 마애불이 있다. 아침 햇빛에 비친 왕대 그림자가 마애불에 드리워져 있다. 동북향의 마애불은 오전 중에 시간을 맞추지 않으면 온종일 그늘이 져 있다. 게다가 선으로 새겨져 있고 마모도 심하다.
▲암벽에서 툭 튀어나와 있는 왕대(왼쪽)와 마애불(오른쪽).
5월 말, 오전 9시 30분이 되자 햇빛 속에서 마애불이 그나마 선명한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곱슬머리가 희미하게 보이고 머리와 육계, 귀가 하나로 묶어서 표현되었다. 도토리 모양의 얼굴은 선명하나 눈, 코, 입 등은 마모되어 잘 보이지 않는다. 마애불의 미소를 보려는 사람들에게는 아쉬움을 줄 것으로 보인다. 정확한 조성연대는 알 수 없으나 경순왕이 미륵불로 조성했다는 전설이 있다. 고려에 항복하기로 결정한 후 앞으로의 새로운 세상에 대한 염원을 이 마애불에 담았을지도 모를 일이다.
후백제 견훤은 자식과의 내분으로 나라를 빼앗긴 울분과 괴로움에 등창이 나서 죽었다. 천년 왕국을 고려에 넘기고 항복한 신라 경순왕은 어땠을까? 경순왕릉은 개성에서 멀지 않은 경기도 연천에 있다. 신라 왕릉은 모두 경주에 있는데 경순왕은 죽어서도 혼자만 경주가 아닌 곳에 묻혔다.
▶소재지: 충남 보령시 절길 44
(13):전북 남원 여원치 마애불
고려 말 이성계 장군에게 황산대첩의 승리 전략을 알려주다
옛날부터 전라도 남원과 경상도 함양을 이어주던 고갯길, 여원치
남원 시내에서 운봉읍, 좀 더 멀게는 함양을 오가던 사람들이 넘던 고갯길이 남원 운봉에 있다. 차로 넘는 지금도 주변 지리산과 맥이 닿아 있어서 그런지 오르는 길은 꾸불꾸불하고 경사가 심하다. 이 고갯길이 여원치다. 정상 부근의 여원치 안내석에서 내려다 보는 남원 전망이 시원하다. 그리고 황혼이 질 무렵에 고갯길에서 바라보는 낙조도 은은하고 아름다워서 운봉 8경의 하나가 되었다.
차도 힘들게 올라선 고갯마루(480m)에 마애불이 하나 있다. 앞으로 넓은 공터를 끼고 있는, 낮은 바위 암벽에 새겨져 있다. 여원치(女院峙)라는 고개(峙 고개 치) 이름에서는 여자(女)가 운영하는 숙박 시설이 있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원(院)은 고갯길을 넘는 사람들이 묵어가던 고려시대의 숙박 시설이었는데 대개 절도 함께 있었다.
▲여원치 안내석.
대한제국 광무 5년(고종 황제, 1901) 7월, 당시 운봉 현감이었던 박귀진이 보호각을 중수하면서 새긴 명문이 마애불 옆에 있다. 명문 속의 <운성지(雲城誌 운성은 운봉의 옛 이름)>에 의하면 고려 우왕 때 이성계 장군이 동쪽을 정벌하라는 명령을 받고 이 고개에 올랐다. 한 길에 여인이 나타났다가 사라졌는데 그 길로 공격하여 대첩을 거두었다. 산신이 나타난 것으로 생각하여 바위에 그 모습을 새겨 보호각을 만들어 모셨다고 했다. 이것이 여원치 마애불이다.
마애불 주변은 고려 말 왜구를 대파했던 황산대첩의 격전지
고려 말에는 왜구의 노략질로 피해가 극심했다. 고려 우왕 2년(1376) 7월, 부여와 공주 지방을 침략한 왜구를 부여 홍산에서 최 영 장군이 격파했다(홍산대첩). 그로부터 4년 후 진포(금강 하구)에 무려 500여 척이 넘는 왜선들이 들어섰다. 이때 나 세와 최무선 등이, 최무선이 발명한 화약과 화포를 장착한 100척의 전함으로, 왜선을 불태우고 왜구를 대파했다(진포대첩 1380년 7월). 살아남은 왜구들은 살륙과 노략질을 하면서 내륙의 충청도, 경상도, 전라도로 흩어졌는데 고려 사회가 혼란에 빠졌다.
진포대첩 1개월 후(9월), 신흥 무장세력이었던 이성계 장군이 우왕으로부터 왜구 토벌을 명받고 남원 운봉의 황산 지역으로 진격했다. 가까운 경상도 함양에 왜구들이 모여 있었기 때문이다. 왜구의 우두머리는 소년 장수인 아기발도(我其拔都)였다. 아기발도는 온몸을 갑옷으로 둘러싸고 얼굴에는 보호 가면까지 착용하여 죽이기가 쉽지 않았다.
▲마애불.
이성계 장군은 화살로 그를 죽이기로 하였다. 이성계의 활 솜씨는 어려서부터 뛰어났다. 이성계가 먼저 화살로 아기발도의 투구를 떨어뜨려 얼굴이 드러나게 하자 여진족 출신의 의형제인 이두란이 얼굴에 화살을 맞혀 죽였다. 기병까지 보유한 정규군 수준의 왜구들이 지도자를 잃고 혼비백산하여 거의 전멸되었는데 이것이 황산대첩이다.
조선 세종 때 만들어진 <용비어천가>의 제52장에서는 달단으로 망명한 후당 태조가 화살을 쏘아 나뭇가지에 걸어둔 바늘을 맞추는 솜씨를 과시하여 암살 위험에서 벗어난 것과 비교하여 왜구 우두머리를 화살로 쏴 죽여 백성을 살린 태조 이성계의 황산대첩을 노래하고 있다.
(후당 태조가) 청(請)을 받은 달단과 노니실 때, (화살로) 바늘을 맞히지 않으셨으면, 어비 아들이 살아 나셨겠습니까?
(이 태조가) 청(請)을 받고 와서, 왜와 싸우실 때 (화살로 왜구의) 투구를 벗기지 않으셨으면, 나라의 백성들을 살리셨겠습니까?
▲황산대첩 전 이성계가 3일간 산신제를 지냈다는 태조봉(사진 뒤편 산).
황산대첩지 주변에는 관련 지명과 유적지가 남아 있고
황산대첩의 흔적들이 여원치 마애불과 운봉읍의 인월면 주변에 많이 있다. 마애불 주변에 싸움을 하기 전
이성계가 올라가서 3일간 산신제를 올리면서 승리를 기원했다는 태조봉(지금은 고남산으로 불림)이 있다.
이성계 장군이 왜구를 토벌하는데 밤에도 불빛이 부족하여 달빛을 끌어다 썼다고 하는 인월면(引月面), 바람을 끌어다 그 바람에 실어 왜구를 향해 화살을 쏘았다고 하는 인풍리(引風里) 등도 황산대첩지 주변에 지명으로 남아 있다. 그리고 인월면에 가까운 도로 옆 람천 가운데의 피바위에는 그렇게 죽은 왜구들의 핏자국이 아직도 선명하게 남아 있다(<찾아가는 길> 그림 참조).
우러르고 사모해야 할 사적이었던 마애불
도드라지게 새겨져 있는 마애불은 입체감이 있다. 살이 찐 얼굴에서는 도적이나 야생동물의 피해 없이 안전하게 고갯길을 넘게 해달라는 길손들의 기원과 일반적인 행복 염원을 들어 주었을 편안함이 느껴진다. 그러나 하부는 땅에 묻혀 있고 얼굴과 왼팔은 부분적으로 파손되었다.
마애불이 조성된 지 약 500여 년의 세월이 흘러 운봉현감이었던 박귀진이 이곳에 직접 찾아왔다(1901). <운성지>에서 우러르고 사모해야 할 사적(事蹟)이라고 했던 마애불은 비바람에 깎이고 이끼가 자라는 통에 본래의 모습을 가리게 되었고 또, 보호각은 무너져 탄식하지 않을 수 없다고 했다. 마애불을 물로 닦아내어 자세히 들여다보니 산신의 진면목이 보이는 듯하다고 했다. 그래서 석공과 장인을 데려다가 옛 초석과 기둥을 들어내고, 새로 들보를 만들고 기와를 덮었다. 그리고 박귀진은 바위에 명문도 조성했다. 그러나 이렇게 정성 들여 보호각을 중수한 지 약 100여 년이 지난 지금, 마애불은 다시 빈 터에, 초석과 함께 쓸쓸히 남았다.
게다가, 마애불 머리 바로 위의 도로에는 고개를 넘어가는 차들이 달리고 있다. 고갯길을 오가던 길손들의 무거운 인생살이를 덜어주던 마애불이었는데 이제는 오히려 많은 차들이 눌러대는 중압감에 허물어지지나 않을까 하는 걱정을 받아야 할 처지가 되었다.
▶소재지: 전북 남원시 이백면 양가리 산 17-1
(14):충남 부여 상천리 마애불
화려한 문화를 꽃피웠던 백제의 수도, 부여
전북 장수에서 시작된 금강이 굽이쳐 돌아 서해 하구로 가까워지는 지역에 부여가 있다. 백제의 제26대 왕인 성왕(523-554, 재위)은 수도를 공주(웅진)에서 이곳 부여(사비)로 옮겼다(538). 부여는 백마강으로 둘러싸여 수도 방어에 유리하였다. 게다가 강 주변에는 넓고 비옥한 평야지대가 있었고 또, 강 하류로 배를 타고 조금만 더 내려가면 서해를 통해 중국과의 해상 교역을 할 수 있는 요지여서 경제활동에 유리하였다. 그러나 부여에서 123년간 새로운 문화를 꽃피우던 백제는 의자왕 20년(660), 나당 연합군에게 망하고 말았다.
부여읍을 거쳐 지나는 약 16km 길이의 금강은 특별히 백마강으로 불린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백마강 이야기가 전해진다. 백제를 공격하던 당나라 소정방이 금강의 용이 일으키는 비바람에 강을 건너지 못하였다. 그래서 백마로 미끼를 만들어 용을 낚으니 날이 개어 군사가 강을 건넜다. 이후 강 이름은 백마강, 소정방이 용(龍)을 낚은(釣 낚을 조) 바위는 조룡대(釣龍臺)가 되었다고 한다.
홍건적의 침입과 왜구의 노략질로 어지러웠던 고려 말
삼국시대의 백제 역사를 뒤로하고 부여읍에서 떨어진 홍산면으로 발걸음을 옮기면 이곳에는 고려말, 왜구들을 물리친 홍산대첩의 역사가 있다. 그리고 옆에서 이 홍산대첩을 지켜보았을 마애불이 있어 눈길을 끈다.
▲태봉산 정상의 홍산대첩비
고려 말 14세기 중반 이후에는 홍건적의 침입과 왜구의 노략질로 나라가 어지러웠다. 중국에서는 원나라의 쇠퇴 속에 황하 지역에서 원나라의 압박에 대항하여 한족 농민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이들은 머리에 붉은 두건을 쓰고 있어서 홍건적으로 불렸다. 원나라를 물리치고 명나라를 세운 주원장도 홍건적 출신이었다.
요동 지방으로 진출했던 이들 홍건적 중 일부가 두 차례나 고려를 침입하여 나라를 혼란 속에 빠뜨렸다. 특히, 2차 침입 때(공민왕 10년 1361)는 원나라 정벌군에 쫓긴 홍건적 20만 명이 압록강을 넘어왔다. 개경을 점령한 홍건적이 방화와 약탈, 살인을 일삼을 때 왕은 수도인 개경을 버리고 경북 안동까지 피신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오랫동안, 심했던 것은 왜구들이었다. 그들은 경상도와 전라도뿐만 아니라 충청도 내륙까지 들어와 살육과 노략질을 일삼았다. 왜구들은 단순한 해적이 아니라 규슈 지방의 정규 부대 출신이었다. 이들은 남북조 시대(1336-1392)의 내전에서 궁지에 몰리자 군량과 전쟁물자의 확보를 위해 가까운 고려에 침략하여 돈이 될만한 쌀과 문화재, 그리고 사람까지도 약탈하여 가져갔다. 고려에서는 일본에 사신을 파견하여 왜구토벌에 협조해 달라고 요청하기도 했으나 소용없었다.
<②편에 계속>
<①편에서 계속>
최영 장군이 부여 홍산에서 왜구를 격파한 홍산대첩
고려 우왕 2년(1376) 7월, 불어난 금강물을 타고 왜구가 부여와 공주를 침략했다. 공주를 함락한 왜구는 기세를 몰아 부근에 있는 논산의 개태사까지 점령해 버렸다. 원수 박인계가 싸우다가 말에서 떨어져 죽었다는 말을 듣고 최 영장군이 왜적 치기를 자청하였다. “비록 몸은 늙었으나 뜻은 쇠하지 않았고 종묘사직을 편안하게 하기 위함”이라고 굳은 뜻을 밝혔다.
왕의 만류에도 최 영장군이 61세의 늙은 몸을 이끌고 이곳 홍산에 있던 왜구 토벌에 나섰다. 왜구들은 삼면이 모두 절벽이고, 통하는 길은 오직 하나뿐인 좁은 곳에 모여 있었다. 접근이 어려운 상황에서 최 영은 선봉에 나섰고 입술에 적의 화살을 맞은 채로 왜구를 전멸시켰다. 태봉산(90m) 정상에 1977년에 만든 홍산대첩비가 있다.
다소 잠잠했던 왜구가 다시 기승을 부리기 시작했다. 홍산대첩 4년 후인 1380년 7월에는 최무선이 진포(금강 하구)에서, 1개월 후인 8월에는 이성계 장군이 황산(남원 운봉)에서 왜구들을 대파했다. 그리고 1383년 5월에는 정 지장군이 남해 관음포에서 왜구들을 물리치기도 했다. 이들은 홍산대첩과 함께 왜구를 토벌한 고려 말의 대표적인 전투였다.
미래의 장군을 위해 갑옷을 보관하고 있다는 농바위에 새겨진 마애불
홍산대첩비가 있는 태봉산과 연결된 북쪽, 낮은 야산 정상 부근에 큰 바위가 있다. 바위 세 개가 나란히 연결되어 뒤로 뻗쳤는데 전체적으로 긴 직사각형 모양이다. 마애불은 맨 앞의 바위에 새겨져 있다.
▲농바위에 새겨진 마애불
경사진 곳에 서 있는 까닭에 바위는 앞으로 10도 정도 기울어져 있다. 그래서 바위 앞으로 다가서면 마애불이 몸을 앞으로 숙여 반겨주는 듯한 느낌을 준다. 거친 바위 면에 낮은 돋을새김으로 새겨져 있으나 햇빛이 좋으면 윤곽이 선명하게 드러난다. 둥근 얼굴, 반쯤 뜬 가늘고 긴 눈, 끝이 둥근 코에서는 원만함을 느낄 수 있다. 그러면서 머리와 몸에는 각각 두광과 신광이 있어서 권능이 있음도 동시에 보여준다. 거대 바위에 새겨진 마애불은 전체적으로 지방화된 고려시대의 특징이 잘 드러난다.
마을 사람들은 마애불이 새겨진 바위를 농바위로 부른다. 장롱 안에는 투구와 갑옷이 들어 있어서 세상을 위해 할 일이 생기면 장군이 나타나서 꺼내어 입는다는 전설이 전해져 온다고 한다. 어쩌면 전설대로 벌써 이 농바위에서 투구와 갑옷을 꺼내 입은 최 영장군이 왜구들을 쳐부수고 백성을 어려움에서 구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마애불 앞으로 홍산면으로 넘어가는 고갯길이 시작된다. 이 고갯길은 장고개로 불린다. 마애불은 이 고갯길을 넘어가는 사람들의 안전한 통행과 함께 일반적인 행복 염원을 들어주었을 것으로 보인다.
▶소재지: 충남 부여군 홍산면 상천리 산 103-9
(14-2) 충북 충주 창동 마애불 = 안전한 남한강 뱃길을 기원하다
남한강 뱃길의 중심지였던 충주
강은 옛날부터 사람과 물건을 나르던 주요 뱃길이었다. 뱃사공들은 배로 사람과 화물을 실어 주고 운임을 받았다. 돈을 많이 벌기도 했지만 급류를 만날 때는 죽을 고비를 넘기기도 했다. 또, 물이 적을 때에는 노를 젓는데 더 많은 힘이 들고 배달 시점에 늦기도 했다. 이런 위험 속에서 뱃사공들의 생명을 지켜주고, 화물을 잘 배달할 수 있게 해달라는 염원으로 강가 암벽에 조성했을 마애불들이 여러 개 있다.
남한강에서는 중간의 충주 창동에서, 또 강물이 하류로 더 흘러 내려간 경기도 여주 계신리에서 마애불을 볼 수 있다. 그리고 금강이 흘러 내리는 전북 익산의 화산리에서는 마애3존불을, 낙동강 중간의 경북 의성군에서는 마애보살을 볼 수 있다. 특히, 의성군의 마애보살상은 4대강 공사로 낙동강의 낙단보 공사를 하던 중 2011년 발견되면서 최근에 알려졌다.
충주는 이전에 남한강 상류와 하류 지역의 생산물을 실어 나르던 뱃길의 중심지였다. 지금은 육로의 발전으로 쇠락해 버렸지만 충주의 창동 마애불 가는 길에는 목계나루, 가흥창 등 과거 번성했던 남한강 뱃길의 역사가 남아 있다.
마애불 북쪽에 충주의 가흥리와 제천을 연결하는 목계교가 있다. 목계교 옆에 지금은 터로만 있지만 이전에 목계나루가 있었다고 한다. 1930년대까지만 해도 이 나루는 많은 뱃사공들과 상인들로 번성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마애불이 있는 창동(倉洞)이라는 지명은 고려 말부터 이곳에 조세 창고(倉 창고 창)가 있어서 생겼다. 경상도와 충청도에서 세금으로 거둔 곡물을 수도로 운송하는 중간지인 이곳에 가흥창이라는 조세 창고가 있었다.
암벽에서 뱃사공의 생명과 화물을 지켜주던 마애불
마애불 바로 앞으로는 남한강 물이 출렁이고 있는데 폭이 몇 백m나 될 정도로 넓은 강 중간에는 나룻배도 두 세 척 떠 있었다. 마애불은 암벽의 툭 튀어나온 면에 새겨져 있는데 바위 면은 깨져 마애불은 부분적으로 파손이 있다.
▲바로 앞에 남한강물이 출렁이는 마애불 전경 /최복일
얼굴은 돋을새김으로 새겨졌는데 반달 눈썹과 살구 모양의 눈, 뭉툭한 코, 입에서는 고려 시대의 토속적인 웃음이 진하게 흘러 나온다. 고달픈 뱃사람들의 무사 기원을 편안하게 받아주는 얼굴이다. 그래서 물길을 따라 오가던 사람들은 배나 뗏목 위에서 이 마애불을 보고 그들의 무사를 기원했을 것이다. 정오가 되자 마애불은 내일을 약속하고 바위 그늘 속으로 완전히 들어가 버렸다.
▲토속적이고 친근한 느낌의 마애불 얼굴
마애불 주변에는 남한강을 끼고 있는 탄금대라는 절경이 있다. 이곳에서 신라시대 우륵이 가야금을 탔다고 한다. 임진왜란때는 경상도와 전라도를 휩쓸고 서울로 올라가던 왜군들을 막기 위해 신 립 장군(1546~1592)이 이곳 탄금대에서 배수진을 치고 싸우다가 죽었다.
역사는 여기에서 끝나지만 전설은 창동 마애불에까지 이어진다. 탄금대 싸움에서 패한 신 립 장군이 이곳 마애불에 와서 죽었는데 그때 흘린 피눈물로 마애불이 새겨진 암벽이 붉게 물들었다고 한다. 실제로 바위 면은 붉은 색을 띠고 있으나 철 성분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지금은 뱃사공이 가져다 주었던 과거의 번성을 그리워하고
뱃길 안전을 담보해 주는 수호천사였던 마애불은 오랫동안 집을 떠나 외로웠던 뱃사람들에게 좋은 길동무가 됐을 것이고 또, 조금만 더 가면 목적지에 도착할 것이라는 희망봉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화물이나 사람을 운반해 주는 운송 수단이 트럭, 버스, 기차, 비행기로 바뀌면서 뱃길은 쇠락하고 말았다. 많은 사람들로 붐비던 나루도 사라지고 그 나루터는 이제 이름만 남았다.
▲충주 봉황리 마애불상군 제1지역의 마애불들
아직도 말없이 뱃길을 지키고 있는 이곳 강가의 마애불은 강을 오르내리면서 자신에게 기원하던 많은 뱃사공들이 가져다 준, 과거의 번성을 그리워하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소재지: 충북 충주시 중앙탑면 창동리 240
(15):경기 파주 용미리 마애불① ②
혜음령 입구 숲속에서 고개 내밀고 있는 두 개의 큰 바위 얼굴
고려시대 남경 순행의 역사가 남아 있는 파주 혜음령 길
파주에서 남쪽으로 벽제를 거쳐 서울의 구파발로 들어서는 용미리 길목에 혜음령 고갯길이 있다. 현재 이 길은 차로 드라이브를 하면서 답답한 마음을 풀 수 있는 아름다운 길이다. 그리고 약 1000여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이 길에는 고려시대의 남경 순행을 중심으로 한 혜음원터, 용미리 마애불과 관련된 역사 이야기가 있다. 제11대 왕인 문종(1046-1083, 재위)에서부터 제16대 왕인 예종(1105-1122, 재위)까지 약 80년간의 이야기가 길 위에 펼쳐진다.
서울은 문종 때 처음으로 남경으로 승격되었다가 폐지되었다. 한강을 끼고 있는 서울의 지리적, 경제적 중요성이 부각되면서 왕들은 자주 서울에 행차하여 백성의 민심을 살폈고 북한산의 승가사, 장의사 등의 절에 들러 나라의 태평과 백성의 안녕을 빌었다. 이곳 혜음령 길은 개성에서 서울로 내려가는 지름길이어서 왕들도 이용하는 길이었다.
길 숲 사이로 내민, 두 개의 큰 바위 얼굴을 가진 마애불
혜음령 고갯길을 따라 펼쳐지는 주변 야산(장지산) 중턱의 숲 사이로 두 개의 큰 바위 얼굴이 보인다. 이 얼굴들의 주인은 용암사 경내에 있는 마애불이다. 마애불은 몸체로 삼은 거대 바위 위에 별도로 만든 두 개의 머리를 얹은 특이한 방식으로 조성되었다. 크고 둔중한 바위에 선각된 몸체는 투박하고 또, 자연의 바위를 그대로 이용하다 보니 균형감도 다소 부족해 보인다. 그러나 허리까지 길게 내려오는 옷소매가 가볍게 흩날리는 아름다운 모습에서는 바위 표면을 잘 다루었을 장인의 실력을 상상해 볼 수 있다.
▲산 중턱 숲속 두 개의 큰 바위 얼굴.
가까이서 보면 머리도 정말 크다. 뭉툭한 코, 굳게 다문 큰 입에서는 토속적이고 해학적이면서 위엄있는 모습이 느껴진다. 나란히 서 있는 두 마애불 중에서 둥근 모자를 쓴 것은 남자, 네모난 모자를 쓴 것은 여자라고 한다. 고려시대에는 이런 모자를 쓴 거대 불상이 미륵불로 많이 조성되었다.
마애불은 국내에서 손꼽을 정도로 크니 왕실에서 조성한 것이라는 이야기도 전한다. 고려 제13대 왕 선종(1083-1094, 재위)의 제3비인 원신궁주에게는 자식이 없었다. 꿈에 장지산의 두 도승이 나타나 배가 고프니 먹을 것을 공양하라고 하였다. 꿈에서 깬 궁주는 왕에게 이 이야기를 하였고 왕이 사람들을 보내어 찾아보게 한 결과, 이곳에 있는 바위를 발견하였다. 그래서 이곳에 두 도승을 새긴 것이 마애불이라고 한다. 원신궁주는 왕궁이 있는 개성에서 이곳까지 와서 정성껏 기도하였고 그 결과, 첫째 아들 한산 후(왕 윤)와 두 아들을 낳았다.
거대 마애불 뒤에 숨어 있는 왕위찬탈의 역사
마애불을 새긴 선종은 문종(제11대 왕)의 둘째 아들이었다. 문종의 제2비인 인예왕후 이씨에게는 10남 2녀의 자식이 있었다. 이 자식들 중 첫째부터 셋째 아들까지 세 명이 차례대로 순종(제12대), 선종(제13대) 그리고 숙종(제15대 왕)이 되었다. 불교에서 천태종을 개창한 대각국사 의천은 넷째 아들이었다.
선종은 제2비가 낳은 11세의 어린 아들을 임금(제14대 헌종)으로 만들어 놓고 죽었다. 병약하고 어린 왕 대신에 어머니인 사숙태후가 섭정을 하고 있었으나 다음 왕위 후계자가 주요 문제가 되었다. 제3비인 원신궁주에서 난 한산 후를 왕으로 추대하려는 세력과 왕이 되고 싶었으나 되지 못했던, 선종의 친동생 왕희의 두 세력 간에 왕위찬탈 싸움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원신궁주의 사촌 오빠인 이자의는 마애불에 기원하여 얻은 한산후를 밀었으나 왕희에게 제거당함으로써 싸움은 일단락되었다. 그 결과, 원신궁주와 아들인 한산후는 귀양을 갔고 왕위에서 물러난 헌종은 14세의 어린 나이에 죽었다. 이렇듯 왕위 계승에 불만을 가지고 조카를 폐위시키면서 자신이 왕위에 오른 왕 희가 제15대 왕인 숙종(1095-1105, 재위)이었다.
이 사건은 조선시대에, 조카인 단종을 폐위시키고 왕위를 찬탈한 숙부 세조의 이야기와 비슷하다. 자식을 기원하는 절실한 염원으로 조성된 마애불 뒤에 이런 역사가 숨어 있어서 다시 한번 더 마애불을 들여다 보게 된다.
<②편에 계속>
<①편에서 계속>
본래의 조성 목적 이후 혜음령 고갯길 안전통행을 지켜주었을 마애불
많은 사람들이 이용했던 혜음령 고갯길은 험하고 숲이 우거져서 호랑이나 도적들의 피해를 보았다. 무리를 짓거나 무기를 휴대하여도 죽거나 재물 피해를 당했다고 한다. 그래서 남경으로 자주 행차를 했던 제16대 왕인 예종에 의해 고갯길을 넘던 길손들에게 숙박과 식사를 제공하는 혜음원과 혜음사가 생겼다. 이때 임금의 행차에 대비하여 머물 수 있는 별원(別院)도 만들었다고 한다. 이런 내용이 서거정의 동문선 제64권에 김부식이 지은 <혜음사 신창기>로 남아 있다.
▲마애불 전경.
마애불 주변, 고갯길이 시작되는 곳에 이 기록을 뒷받침하는 것으로 보이는 터가 있다. 여기에서 혜음원(惠陰院)과 혜음사(惠陰寺)라는 이름이 적힌 기와가 발견되었다. 그리고 왕이 지방을 순행하면서 머물던 궁궐인 행궁(行宮)이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터도 함께 있어서 많은 관심을 받았다.
마애불은 처음에 자식을 기원하던 절실한 염원으로 조성되었다. 그 이후 혜음령 고갯길 입구에 있는 마애불의 두 개 큰 바위 얼굴은 위험한 고갯길을 오르는 길손들에게 무사통행을 지켜주는 상징이 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소재지: 경기 파주시 광탄면 혜음로 742-28
(16):충북 괴산 도명산 마애3존불
화양 9곡의 선경(仙境) 속에서 하루 신선이 되다
계곡의 우렁찬 물소리, 기암괴석, 소나무, 학이 있는 화양 9곡
충북 괴산의 깊은 곳에 화양 9곡의 비경(秘景)이 있다. 물 맑은 화양천 계곡에 아홉 곳의 절경이 펼쳐진다. 조선 중기 문신인 우암 송시열이 관직에서 물러난 후 이곳에 은거하면서 화양 9곡이라고 했다.
계곡 입구에서 기암괴석들로 가득 찬 봉우리가 하늘을 떠받치고 있는 제1곡 경천벽(擎天壁)부터 계곡 상류의 제9곡 파천까지 총 4km에 걸쳐 절경이 펼쳐진다. 제2곡 운영담(雲影潭)을 지나면 제3곡 읍궁암(泣弓岩)과 제4곡 금사담(金沙潭)에서 본격적으로 계곡이 시작된다. 집채만한 바위들 사이를 흘러 지나가는 물소리가 천둥처럼 우렁차다. 맑은 계곡물 아래 서는 아름다운 금빛 모래(金沙 금사)가 햇빛에 반짝인다. 제5곡 첨성대(瞻星臺), 제6곡 능운대(凌雲臺), 제7곡 와룡암(臥龍岩)을 지나면 제8곡 학소대(鶴巢臺)가 있다. 이들 이름은 모양이나 품고 있는 사연만큼 잘 어울린다.
▲화양9곡 제4곡인 금사담과 암서재.
계곡길 끝에 제9곡인 파천(巴串)이 있다. 계곡 전체에 넓은 반석이 펼쳐져 있고 그 위를 얕게 흐르는 물이 반석의 모서리마다 부딪쳐 하얀 물살을 만든다. 그 물살이 마치 용(巴 구렁이 파)의 여러 비늘을 꿰어(串 꿸 천) 놓은 것처럼 보인다. 신선들이 이곳에서 술잔을 나누었다고 한다.
이 계곡을 품고 있는 도명산 주변에 공림사라는 절이 있다. 조선 숙종 14년(1688)에 만들어진, 절의 사적비에 공림사와 낙영산, 이곳과 관련된 여섯 개의 기이한 자취가 적혀 있다. 그중에서 네 번째 기이한 것으로 미륵봉(도명산)에는 10리에 걸쳐 아름다운 선경(仙境)이 펼쳐진다고 했는데 이 선경이 화양 9곡이다.
화양 9곡의 선경(仙境)을 품고 있는 마애불
제8곡인 학소대에서 산으로 오르면 9부 능선쯤에 이런 선경을 품고 세상을 내려다보는 마애불이 있다. 도명산(道明山)이라는 이름에서처럼 힘든 산길을 오르면서도 도(道)를 깨우칠(明 밝힐 명) 수 있는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든다. 정상 못 미쳐서 반갑게 맞아주는 거대 바위 무리들 속에 마애불이 있다. 입구에서 수문장 역할을 하는 큰 바위 뒤 암벽에 마애불이 있다. 마애불은 거대화되면서 지방화되는 고려시대의 특징을 보여 준다. 거대 암벽에 새겨져서 조성에 어려움이 많았을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전체적인 신체 균형감과 미적 완성도는 떨어지는 편이다.
▲마애불 제1불과 제2불.
14미터나 되는 암벽 면에는 두 개의 부처상이 함께 선으로 새겨져 있고 바로 옆 별도의 바위에 한 개의 보살상이 있다. 그래서 중앙의 본존불을 좌우에서 보살이 협시하는 일반적인 3존불과는 차이가 있어 보인다.
두 개의 부처상중 머리 위에 덮개석이 놓여 있는 것이 중심불로 보인다. 오전 9시 30분, 큰 눈, 넓고 뭉툭한 콧망울, 두꺼운 입술을 가진 토속적인 얼굴이 환하게 드러나고 있었다. 입가에 머금고 있는 미소는 세련미는 없어도 옆집 아저씨 같은 친근감을 준다. 거대 규모와 시무외여원인(施無畏與願印)의 손 모양에서는 중생들의 두려움을 없애주고 원하는 바를 잘 들어줄 권능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같은 바위 면에 중심불보다 작게 새겨진 두 번째 부처상 역시 옆의 중심불처럼 포근한 인상을 준다.
그리고 바로 옆, 독립된 바위 면에도 보살상이 한 개 있다. 작은 바위에 새겨진 보살상은 격에서 부처상과 차이가 있다. 낮은 돋을새김으로 새겨져 선각의 두 부처상보다 입체감이 있다. 머리에 쓰고 있는 보관, 허리띠 장식, 귀걸이, 목걸이, 팔찌 등에서 화려한 패션 양식을 볼 수 있다.
▲마애불 보살상.
역시, 공림사 사적비에 하늘로 치솟은 미륵봉 돌끝 탑 속에 있던 세 개의 장육미륵불상을 바위 표면에 새기고 산 이름을 낙영산(落影山)이라고 했다는 세 번째 기이한 자취가 있다. 낙영산의 한 봉우리로 생각했을 미륵봉의 세 개 장육미륵불상이 이 도명산 마애3존불상인 것으로 보인다. 장육(丈六)은 거대한 크기 때문에, 미륵불은 부처는 모두 미륵불이라고 불렀던 조선시대의 관행에 따랐기 때문일 것으로 보인다.
마애불과 어우러진 이곳 선경에 들어서 있는 동안 속세의 번잡함은 다 잊힌다. 머리는 편안해지고 막혀 있던 가슴도 뻥 뚫린다. 찾아가기 쉽지 않은 계곡 속에서 맑은 물과 어우러진 거대 바위, 물가 기암절벽과 소나무 그리고 푸른 하늘에 떠다니는 흰 구름, 학들이 있으니 이곳 선경을 거닐고 있는 사람이야말로 신선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비록 짧은 하루이지만 이곳에서 신선이 되어 보는 즐거움이 크다.
▶소재지: 충북 괴산군 청천면 화양동길 188
(17) 경주 단석산 신선사 마애불상군① ②
경주방어 요충지 단석산에는 김유신이 두동강낸 바위가 있다
신라 수도인 경주 서쪽 끝의 단석산은 화랑들의 훈련소
삼국시대 신라 수도였던 경주의 서쪽 끝에 단석산(斷石山)이 있다. 경주로서는 이 일대가 서쪽에서 침입하는 적군을 막는 최종 방어선이었다. 단석산이 마주 보는 바로 앞 북쪽에 부산(富山 오봉산)이 있다. 겨울인데도 이곳 여근 계곡 내 영묘사 옥문지(玉門池)라는 샘에서 며칠씩 개구리가 운다는 이야기를 듣고 선덕여왕이 군사들을 보내어 여근곡에 숨어 있던 많은 백제군들을 물리쳤다고 한다. 삼국유사에서는 이 여근곡과 함께 모란꽃, 여왕 자신의 무덤 위치에 대한 이야기 등 세 가지를 통해서 선덕여왕의 지혜를 보여 준다. 그러나 여근곡 이야기에서 이 지역은 적군의 침입에 노출된 지역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후 문무왕 3년(663), 경주 방어를 위해 부산의 정상에 부산성을 만들었다.
▲단석산 정상에서 김유신이 두동강을 낸 단석.
이런 지리적 특성 때문에 단석산에는 삼국통일을 염원하던 신라 화랑의 자취들이 많이 남아 있다. 특히, 단석(斷石)이라는 산 이름은 17세 화랑 시절의 김유신 장군으로 인해 생겼다. 고구려와 백제를 치기 위해 김유신이 난승이라는 도인에게서 받은 신검으로 이곳 석굴에서 검술을 연마하였다. 칼로 베인 큰돌들이 산더미처럼 쌓였는데 산 정상에는 김유신이 두 동강 낸 단석이 지금도 있다. 그리고 정상 부근의 산길에도 마을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또 하나의 단석인 송곳바위(천주암 天柱岩)가 있다. 높이 솟은 바위 표면에 칼자국들이 많이 남아 있는 듯하다.
단석산의 또 다른 입구인 방내리(芳內里)라는 마을 이름은 꽃다운(芳 꽃다울 방) 화랑이 규율에 따라 무술 연마를 하던 지역 안(內 안 내)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그리고 산길 중간의 화랑바위에서는 부모들이 와서 이곳에서 훈련받는 자식들을 면회하였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10개의 불상과 보살들중에서 미륵불이 중심이 되고
우중골의 단석산 8부 능선쯤 최근에 지은 신선사라는 절이 있다. 이 절 안에 국보 제199호로 지정된 마애불상군이 있다. 마애불이 새겨진 거대 바위 위에 지붕처럼 덮여 있는 투명보호각이 멀리서도 보인다. 이전에는 기와 지붕이 있었던 신라 최초의 석굴사원으로 보고 있다.
서쪽이 툭 트인 ⊐자 모양의 석굴 안으로 들어서면 왼쪽에 두 개, 정면에 한 개, 오른쪽에 한 개 등 모두 네 개의 거대 바위가 있다. 마모가 심해서 해독하기 어려운 것도 있지만 오른쪽 바위 면에 있는 명문에 의하면 “산의 바위 아래에 절을 창건하면서 신선사로 이름지었고 미륵불 한 개와 높이 삼장(三丈 실제 약 6 미터)의 보살상 두 개를 새겼다”고 한다.
<②편에 계속>
<①편에서 계속>
명문에서처럼 중심이 되는 미륵불은 석굴 입구로 들어서면 왼쪽 바위 안쪽에 서 있다. 그리고 정면에 관음보살로 보이는 보살상이, 명문이 있는 오른쪽 바위 면에는 지장보살로 보이는 보살상이 각각 서 있다.
이곳 마애불상군은 다소 차이는 있으나 삼국통일 전인 7세기 초에 조성되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반달형의 눈과 눈썹, 약간 도드라진 뺨을 가진 미륵불의 둥근 얼굴에서는 다소 투박한, 해님같은 미소가 쏟아진다. 비슷한 시기에 조성된 충남 서산의 용현리 마애3존불(국보 제84호)이 보여주는 백제의 미소와는 다른 신라의 미소이다. 그러나 약 8.2미터 높이의 모습에서는 압도당할 만큼 그 권능이 커 보인다.
▲마애불들중에서 중심이 되는 미륵불.
그리고 미륵불이 있는 왼쪽 바위와 나란히 붙어 있는 또 하나의 바위에는 불상과 보살상 등 모두 7개가 조그맣게 새겨져 있다. 천상의 부처세계 같은 바위 상부에는 중심불인 미륵불이 있는 안쪽으로 안내하는 자세를 하고 있는 세 개의 불상과 한 개의 반가사유미륵보살상이 있다. 반가사유미륵보살상은 왼쪽 무릎 위에 오른발을 올리고 오른손을 턱에 괴고 사유하는 자세를 하고 있다.
바위 면 하부에는 역시 스님 한 명과 버들가지와 향을 들고 미륵불에게 공양하는 두 사람이 있다. 특히, 버선 같은 큰 모자를 쓰고 있는 공양자 두 사람의 옷은 신라 복식을 연구하는데 중요한 자료가 되었다. 이차돈 순교비(국립경주박물관 전시관 내 소재)에서 순교하는 모습의 이차돈이 역시 이들과 비슷한 옷을 입고 있어서 눈길을 끈다.
신라 화랑이 품었던 삼국통일의 염원을 바위에 미륵불로 담은 마애불
김유신이 속했던 화랑도는 국가가 필요로 하는 인재를 양성하기 위해 만든 청소년 단체였다. 얼굴과 풍채가 단정한 한 명의 화랑을 중심으로 수 백, 수 천 명의 낭도들이 그 뒤를 따랐다. 이들은 전국 각지를 돌아다니면서 수련을 하고 풍류를 즐겼다고 한다. 그래서 화랑은 국선(國仙), 풍월주(風月主) 등으로 불리었다. 신선사(神仙寺)라는 절 이름은 나라의 신선이라는 뜻의 국선으로 불린 화랑과 관련이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서쪽이 트인 석굴사원 안의 마애불상군.
이곳 바위에 새겨진 미륵불 역시 화랑과 관련이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그래서 신선사 마애불상군에는 미륵신앙을 정신적인 지주로 삼아 삼국통일의 큰 뜻을 품고 이곳 단석산에서 수련하던 신라 화랑들의 자취가 남아 있는 것으로 보인다.
▶소재지: 경주시 건천읍 단석산길 175-143
(18) 대구 동화사 입구 마애불①②
고려 왕건이 대패한 공산전투의 배경이 된 동화사
팔공산에는 적지 않은 마애불이 있는데 중턱의 천년 고찰인 대구 동화사 입구에도 마애불이 있다. 동화사는 통일신라 흥덕왕 7년(832) 심지대사에 의해 중창되었다고 하는데 이때 처음 세워진 것으로 보는 의견도 있다.
심지대사가 동화사를 중창한 이야기는 <삼국유사>에 전한다. 김제 금산사를 창건한 진표율사로부터 그 수제자인 영심대사에게 전해진 제8간자와 제9간자 두 개를 심지대사가 받아왔다. 간자(簡子)는 미륵보살로부터 계(戒)를 받았다는 대나무 징표이다. 이곳 팔공산 산신의 안내로 심지대사는 간자를 던져 떨어진 숲속 샘에 절을 다시 세웠다. 추운 겨울날임에도 불구하고 그곳 오동나무(桐 오동나무 동)에 상서로운 꽃이 피었다(華 꽃필 화)고 하여 동화사(桐華寺)로 이름지었다.
▲마애불 전경./최복일
동화사가 중창되고 95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경상도 지역에서 고려와 대립하던 후백제 견훤이 경주 포석정을 기습 공격하면서 신라 경애왕을 자살하게 하고 경순왕을 왕으로 내세웠다. 신라의 구원 요청을 받았지만 개경에서 뒤늦게 쫓아 온 왕건이 동화사의 동수(桐藪 오동나무 숲) 일대에서 견훤과 맞붙었다. 이 싸움이 대표적인 후삼국 통일 전쟁 중 하나인 공산전투(927)이다. 공산전투의 첫 싸움터가 영천의 공산 은해사, 대구 동화사 또는 파군재 삼거리라는 등 경로와 그때 상황에 관해서는 기록이나 추정하는 학자마다 다소 차이가 있다.
팔공산 주변에는 도망다니던 왕 건의 자취가 많이 남아 있고
왕건의 군사는 동수에서 패해 남쪽의 금호강까지 밀렸다. 이때 두 나라 군사가 하천을 사이에 두고 서로 쏜 화살(살)이 하천(내)을 가득 채웠다(살내). 여기서 신숭겸과 김락의 지원 병력과 합세한 고려군이 대구 시내에서 동화사로 가는 길의 파군(破軍)재 삼거리에서 다시 후백제군과 큰 싸움을 벌였다.
그러나 고려군(軍)은 후백제군에게 대파(破 깨뜨릴 파)당했다(파군재 破軍峙). 이때 부하였던 신숭겸 장군은 왕건의 갑옷과 투구를 입고 왕건 행세를 하면서 싸우다가 대신 죽었다(이후 <찾아가는 길> 그림 참조).
구사일생으로 살아 나온 왕건은 왕산(王山)에 숨었고 주변의 독좌암(獨坐岩)이라는 바위에 홀로 앉아서 잠시 쉬기도 하였다. 시량이(失王里 실왕리, 동구 평광동 소재)라는 산골 마을에서는 한 나뭇꾼이 자신이 먹을 주먹밥을 주고 나무하고 내려오니 그 자리에 있던 사람이 없어졌는데(失 잃을 실) 나중에 왕(王)인 왕건이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왕건은 반달이 비추어 주던 반야월(半夜月)의 도망길 속에서 적의 추격을 벗어나서야 굳었던 얼굴이 풀리고(해안동 解顔洞) 비로소 마음을 놓았다(안심동 安心洞). 그리고 남쪽으로 더 멀리 도망쳐 앞산(남구 소재)에 숨으면서 안일사, 은적사, 임휴사, 왕굴 등에 자취를 남기기도 했다.
<②편에 계속>
<①편에서 계속>
후삼국을 통일한 왕건은 공산전투의 공신들에게 큰 보답을 하고
3년 후 왕건은 경북 고창(안동)의 병산전투(930)에서 다시 직접 맞붙은 견훤에게 완승을 거둠으로써 공산전투의 패배를 되갚기도 했다. 이후 왕건이 신라 경순왕을 위로하고 배려하는 모습에 감동하여 경북 중심의 많은 지방 호족들이 왕건에 항복해 왔다. 이를 계기로 경북지역에서의 왕건 세력은 더 강화되었고 후삼국 통일의 기반이 마련되었다.
후삼국을 통일한(936) 왕건은 지혜로운 묘책(지묘 智妙)으로 자신을 구하고 죽은 신숭겸 장군과 군사들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파군재 삼거리에 지묘사를 세웠다. 현재 신숭겸 장군 유적지가 있는 마을은 지묘동(智妙洞)이다. 또, 신숭겸, 김낙 등 모두 여덟 명의 고려 장군이 공산전투에서 전사한 이후 공산(公山)이라는 산 이름은 팔공산(八公山)으로 바뀌었다.
또, 왕건은 매년 열리던 팔관회에서 자신을 위해 죽은 신숭겸과 김락 두 장군이 함께 하지 못함을 슬퍼하고 이들의 허수아비를 만들어 조복을 입히고 자리에 참석시켰다. 팔관회는 토속신에 제사를 지내고 국가 태평, 왕실 안녕을 기원하면서 동시에 전쟁에서 죽은 사람들의 명복을 빌던 불교 의례였다. 그리고 약 200년 후 고려 제16대 왕인 예종은 서경(평양)의 팔관회에서 신숭겸과 김낙의 허수아비가 있는 사연을 알고 두 장군(二將)을 추도하는(悼 슬퍼할 도) 가요인 도이장가(悼二將歌)를 짓기도 했다(1120).
구름 타고 하늘을 내려오는 아름다운 모습이 새겨진 마애불
동화사 옛날 정문이 있는 곳에 봉황문이라는 일주문이 있다. 봉황은 오동나무에 머문다는 상상의 새인데 오동나무 숲이 무성했던 동화사와 잘 어울린다. 마애불은 봉황문 옆 암벽 위쪽에 있다. 5월말, 오후 5시가 되면서 마애불에 햇빛이 들기 시작한다. 마애불이 새겨진 곳은 바위가 아니라 자유자재로 그림을 그린 종이처럼 보인다. 높은 돋을새김으로 새겨진 둥근 얼굴에 오종종한 눈, 코, 입에서는 포근함이 넘친다. 머리와 몸 주변에서 나오는 빛은 석양과 만나면서 황홀할 지경이다. 우리나라에서 매우 아름다운 마애불중의 하나이다.
▲구름을 타고 하늘에서 내려오는 모습의 마애불. /최복일
좀 더 높은 곳에 모시고자 하는 마음이 반영된 듯 마애불은 3단의 연꽃 대좌 위에 앉아 있다. 게다가 가볍고 푹신푹신한 느낌이 들 정도의 많은 구름들, 그리고 신비한 느낌이 들게 말아 올린 구름 끝을 올려다 보면서 사람들은 신비감과 함께 경배심을 함께 키웠을 것으로 보인다.
동화사 중창시 조성되었을 것으로 추정하는 마애불은 구름을 타고 하늘에서 내려오는 미륵불을 새긴 것으로 보고 있다. 이는 진표율사, 영심대사를 이어서 심지대사가 중창한 동화사가 미륵불을 중심으로 하는 법상종의 계보에 속했기 때문일 것이다. 미래의 이상 세계가 오면 미륵불은 하늘에서 이 세상에 내려와 용화수 아래서 중생들에게 세 번 설법을 해서 이전에 교화되지 못한 사람들을 구원한다.
고려와 후백제의 후삼국 통일전쟁으로 인해 백성들의 불안과 두려움은 매우 컸을 것이다. 이 미륵불은 전쟁 없고 평화로운 새 세상이 빨리 오기를 희망하는 그들의 염원을 수 없이 들어 주었을 것으로도 보인다. ▶소재지: 대구광역시 동구 팔공산로 237길 147
▶소재지: 대구 동구 용천로 438-12.
▲주변 볼거리 신무동 마애불.
(19) 경기 이천 소고리 마애불①②
거란의 1차 침입을 담판으로 물리친 서 희의 호는 복천(福川)
마애불 가는 도중의 복하천은 이천 들판의 젖줄
아름답고 화려해서 또, 그 뒤에 역사가 함께하는 큰 의미로 사람들의 관심과 사랑을 받는 마애불이 다수 있다. 그러나 유명하지는 않지만 그 지역 사람들과 함께 시대적 상황을 겪으면서, 그들의 힘든 삶을 다독여 주던 마애불도 상당히 많다. 조각 솜씨는 좋지 못하고 얼굴은 못생긴 고려시대의 마애불이 경기도 이천의 한 마을, 소고리에도 있다.
마애불 가는 길 도중에 너른 이천평야가 펼쳐진다. 찰지고 밥맛 좋은 이천 쌀이 여기서 나온다. 용인에서 시작된 복하천이 이곳 이천과 여주의 비옥한 들판 한가운데를 지나 북쪽으로 흘러서 이포대교 부근의 남한강으로 합류한다. 특히, 이들 지역의 젖줄 역할을 하는 복하천(<찾아가는 길> 그림 참조)은 고려 왕 건과 직접적인 인연이 있어서 눈길을 끈다.
고려 왕건이 견훤의 후백제군과 싸우기 위해 개경에서 군사를 이끌고 남하하던 중이었다. 이천에서 하천 물이 넘쳐나 어려움을 겪고 있는데 이곳 사람이었던 서목의 안내로 왕건은 하천을 무사히 건너게 되었다. 그후 왕 건이 그 보답으로 이천과 복하천이라는 이름을 하사하였다고 한다. 이런 내용이 <신증동국여지승람> 제8권 경기 이천도호부에 전해진다.
이천(利川)은 홍수가 난 큰 하천(大川)을 건너서(涉 건널 섭) 큰 도움이 되었다(利 이로울 리)는 뜻의 이섭대천(利涉大川)에서 유래하였다. 큰 하천은 고려 건국에 복을 주었다고 하여 복하천(福河川)이 되었다.
▲이천 소고리 마애불 상부. /최복일
거란 침입을 물리친 서 희는 복천(福川)을 호로 사용하고
그리고 서목이 왕건을 도와 주었던 인연으로 이천 호족이었던 서씨는 고려시대의 문벌로 성장하는 계기가 되었다. 거란의 1차 침입 때 담판으로 거란군을 물리친 서희(942-998)가 대표적인 인물이다. 서희 아버지 서 필은 서목의 사촌이었는데 중앙 정부의 하급관리로 벼슬하여 내의령(內議令)이라는 고위직까지 올랐다. 그리고 서희는 제4대 임금인 광종 때 후주인 쌍기의 건의로 과거제도가 시작된 지 3년째에(960) 18세의 나이로 급제하였다.
제6대 임금인 성종 12년(993) 10월, 고려의 북진정책과 친송정책에 불만을 가진 거란이 80만 대군을 이끌고 고려를 침입했다(1차 침입). 이미 여진을 통해 거란의 침략 계획을 알고 있었으나 어떤 대비도 하지 않고 있던 고려였다. 다급해진 조정에서는 서경(평양) 이북 지역을 내어 주고 화의하자는 의견과 항복하자는 의견이 우세했다. 그러나 서희는 항복하거나 적에게 국토를 떼어 준다는 것은 치욕이라고 반대하였다.
임금의 승인 아래 홀로 담판을 자청한 서희가 적지에서 거란의 장수 소손녕과 대면하였다. 적장에게 눌리지 않는 비범함과 세련된 논리에 의한 화의 요청이 빛났다. 거란 땅인 고구려를 고려가 점유하고 있다는 첫 번째 주장에 고려는 고구려를 옛 터전으로 삼아 고려라 이름 짓고 서경(평양)에 도읍했다고 응수했다.
둘째로, 거란과 접하고 있으면서도 바다 건너 송나라를 섬긴다는 거란의 주장에는 압록강 주변에서 간사한 짓을 하고 있는 여진 때문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이들을 쫓아내고 우리의 옛 땅을 되찾는다면 거란과 국교를 맺지 못할 이유가 없다고 했다. 이에 거란도 군사 행동을 중지하고 철수하였다.
그 결과, 고려는 고구려 계승권을 인정받았으며 압록강 하류 지역의 여진을 쫓아내고 강동 6주를 확보하여 고려 영토를 넓히게 되었다. 그러나 이후 계속된 송과의 교류에 불만을 가진 거란이 송과의 국교단절, 강동 6주 반환과 함께 고려 왕의 친조를 고려에 요구하면서 2차(현종 원년 1010), 3차 침입(현종 9년 1018)을 감행하였다.
서희도 이런 인연을 중시했을까? 이곳 복하천을 복천(福川)으로 해서 자신의 호로 사용했다.
<②편에 계속>
<①편에서 계속>
못 생기고 또 아프리카 토인처럼 생긴 두 개의 마애불
마애불은 새로 생긴 골프장으로 인해 산 줄기들이 여기저기 잘려 버린 마오산 기슭에 있다. 골프장에 밀려 위치로는 궁지나 구석에 몰린 듯하나 그래도 본래의 모습은 잃지 않고 있다. 10미터 간격을 두고 있는 큰 바위 두 개 바위에 마애불이 각각 한 개씩 새겨져 있다. 이렇듯 마애불이 두 개나 있는 골짜기를 마을 사람들은 부처박골(부처바위골)이라고 부른다.
바위로 다가갈 때 정면으로 보면서 반겨주는 마애불이 있다면 그건 소고리 마애불이다. 아침 10시 30분경, 햇살이 비치면 선으로 새긴 마애불 모습이 선명하게 드러난다. 턱살이 찐 비만형의 얼굴에 뭉툭한 콧방울, 조그만 입은 고려시대의 전형적인 못난이 얼굴이다. 그래도 반달 같은 눈썹과 눈, 웃는 듯한 입에서 나오는 미소가 골짜기에 환하게 퍼진다.
▲이천 소고리 마애3존불 전경. /최복일
그리고 마애불은 체격이 당당한데다가 머리 주변에서 나오는 빛을 무려 일곱 개의 둥근 원으로 표현하고 있어 큰 권능을 보여 준다. 그래서 얼굴은 못생겼으나 능력있고 원만한 모습으로 이곳에 기원하러 오는 마을 사람들을 반갑게 반겨 주었을 것으로 보인다.
소고리 마애불 옆에 싸워서 삐친 듯이 등을 보이고 있는 바위의 정면에 3존불이 새겨져 있다. 본존불을 중심으로 좌우에 조그만 협시보살이 앉아 있는데 크기로 부처와 보살의 격을 구분한 것으로 보인다. 정말 특이한 것은 아프리카 토인을 닮은 듯한 얼굴 모습이다. 불교 조각의 규범이 무시되고 점차로 쇠락해가는 고려 말 불교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듯하다.
농사를 지으면서 살아가는 이곳 이천 사람들에게 실질적인 풍요를 주었을 복하천만큼 이 마애불들은 정신적인 행복도 가져다주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인지 여름날 무더위 속에 마을 논의 벼잎에 앉아 조용히 즐기고 있는 밀잠자리의 낮잠마저도 달콤해 보인다.
▶소재지: 경기 이천시 모가면 공원로 218번 길 158-48
▲이천 태평흥국명 마애보살(보물 제982호). /최복일
-이천 태평흥국명 마애보살: 중부고속도로 서이천 톨게이트 주변의 마을에 있다
(소재지: 이천시 마장면 서이천로 577-5).
(20) 서울 봉천동 마애불①
봉천동 마애불 가는 길에는 고려시대 강감찬의 자취가 있고
서울대 후문 주변에서 시작하는 관악산의 낮은 줄기 9부 능선쯤에 봉천동 마애불이 있다. 서울 지하철 2호선 낙성대역에서 서울대 후문 방향으로 가다 보면 인헌초교, 인헌아파트 등 인헌이 붙은 이름을 볼 수 있다.
낙성대(落星垈)는 귀주대첩으로 유명한 고려시대의 강감찬이 태어날 때 밤에 큰 별(星 별 성)이 떨어진(落 떨어질 락) 생가이다. 그리고 인헌(仁憲)은 그가 84세로 죽었을 때 왕이 그의 공덕을 칭송하여 붙인 시호이다.
▲낙성대 공원 내 강감찬 동상. /최복일
고려 성종 12년(993)에는 거란의 1차 침입, 현종 원년(1010)에는 거란 왕이 직접 군사를 이끈 2차 침입이 있었다. 2차 침입 때 고려 왕의 친조를 조건으로 물러났던 거란은 약속이 지켜지지 않자 강동 6주의 반환도 다시 요구했다. 고려 현종 9년(1018)에는 소배압이 이끄는 거란의 10만 대군이 3차로 침입해 왔다.
이때 강감찬이 상원수가 되어 싸움을 지휘했다. 거란군이 고려로 침입해 들어오는 길목의 흥화진(압록강 유역의 의주)에서는 소가죽을 꿰어서 막아 두었던 물줄기를 터뜨리고 산골짜기에 매복시켰던 기병 1만 2천명으로 물에서 나오는 적들을 죽이며 큰 타격을 주었다.
일격을 당한 거란군은 바로 개경으로 진격했으나 역시 중간에 고려군의 기습 공격으로 큰 피해를 입었다. 현종 10년(1019) 2월, 개경 가까이서 정벌을 포기하고 자기 나라로 돌아가던 거란군은 마침내 귀주에서 강감찬이 이끄는 고려군에게 대패하고 말았다(귀주대첩).
살아서 돌아간 거란군은 겨우 수천 명에 달할 정도였는데 거란 왕은 패배 소식을 듣고 소배압의 낯가죽을 벗긴 뒤에 죽일 것이라고 대로했다. 반면 강감찬은 마중 나온 왕의 영접을 받았고 백성의 환호성은 천지를 진동했다고 한다.
임진왜란과 정묘호란 등 조선 중기의 혼란 속에 조성된 마애불
상봉약수터를 돌아선 오솔길에 바위 무리가 모여 있는데 이곳에 마애불이 있다. 조금 힘들게 올라야 하는 산길이지만 마애불 앞에 서면 뻥 뚫린 시야에 눈과 가슴이 시원해져 온다. 바로 눈앞으로는 서울대가, 더 멀리로는 한강과 인천 방향까지도 한눈에 들어온다.
▲마애불에서 본 서울 전경. /최복일
오는 사람을 정면에서 바라보며 반갑게 맞아주는 대부분의 마애불과는 달리 이곳 마애불은 왼쪽을 향해 비스듬하게 앉아 있다. 이곳 마애불의 시선이 옆으로 향하는 곳에 조성자가 있기라도 한 것일까? 마애불 오른쪽에는 조선 인조 8년(1630) 박산회 부부의 시주로 조성되었다는 글자가 새겨져 있어 그 발원자와 조성연대를 알 수 있다.
마애불은 상체가 유난히 길어서 신체 비례감이 좋지 못하다. 또, 살이 찐 얼굴과 처진 듯한 가슴 아래로는 긴장감이 줄어들고 느슨한 느낌이 든다. 유려하지만 전체적인 조성기법에서는 다소 부족해 보인다. 그래도 불교문화의 갈수기였던 조선시대에 만들어진 마애불이라서 더 반갑다.
새로 건국된 조선시대에는 양반 사대부를 중심으로 한 성리학적인 유교 문화가 바탕이 되었다. 고려시대의 불교문화와는 큰 차이가 있었다. 숭유억불 정책 속에서 왕실이나 사대부가 개인적으로 불교를 믿긴 했으나 제한적이었다.
마애불은 소매 속에 감추어진 두 손에 고려시대의 미륵불처럼 연꽃 봉오리를 들고 있다. 또, 조선시대에 부처는 미륵으로 불렀던 관행이 있었으나 미륵불이라는 명문이 옆에 있어서 미륵불로 새겼음을 알 수 있다.
조선 후기 불교부흥의 한 신호탄이 되었을 이곳 마애불
조선 사회는 임진왜란(1592-1598)의 상처가 채 아물기도 전에 발생한 정묘호란으로 어수선했다. 인조 5년(1627)에 발생한 정묘호란은 청나라의 전신인 후금이 인조반정(1623)의 부당성을 핑계로 조선을 침략한 것이었다. 침략은 2개월 만에 일단락되었다.
마애불은 정묘호란 3년 뒤(1630) 이런 어수선한 상황에서 조성되었다. 마애불 조성자는 조선의 수도였던 한양(서울)에서 전쟁의 고통을 직접 겪거나 전해 듣기도 했을 것이다. 이런 배경 속에서 가족의 안녕과 전쟁 없는 새로운 사회에 대한 바람이 미륵불로 새겨진 마애불에 담겼을지도 모를 일이다.
▲마애불. /최복일
그러나 마애불이 조성된 6년 후인 인조 14년(1636)에 조선은 청나라의 2차 침입인 병자호란을 당하면서 더 큰 혼란과 국가적 굴욕을 겪었다. 이곳 마애불 가는 길에서는 침략을 당해서는 잘 싸웠지만 사전 준비부족과 적절하지 못한 외교 대응으로 외적의 침략을 받은 고려와 조선 두 나라의 참혹했던 과거를 엿볼 수 있다.
외침을 겪은 이후 조선 사회는 정치, 경제, 사회 등의 측면에서 반성과 함께 새로운 자각이 생겨나고 실용성을 중시하는 실학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조선 후기 문예부흥이라는 변화의 한 모퉁이에서 불교에서도 불상과 불화가 활발하게 조성되었다. 이곳 마애불은 시기적으로 그런 출발을 알리는 신호탄이라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소재지: 서울 관악구 봉천동 산4-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