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 이야기7/ 불교에 대하여6/ 한국의 사찰4/ 사성암 구례 오산 - 일붕사 - 의령 동굴법당
종교 이야기7/ 불교에 대하여6/ 한국의 사찰4/
●사성암
구례 오산531m,원효 도선 진각 의상대사가 수도
4명의 성인 元曉, 義湘, 道詵, 眞覺 스님이 공부하였다고 지어짐
오산 350m
사성암 산왕전
오산 정상 나무테크
●삼광사 - 부산
연등 3만여개 13. 5. 16. - 부산
●삼화사 - 두타산
●상원사 - 평창 오대산
전쟁의 분노도 껴안은 佛法의 터… 평온한 범종 소리 ‘그윽’
▲ 선우휘 소설 ‘상원사’의 배경이 된 상원사는 강원 평창군 오대산에 자리 잡고 있다. 사진에 보이는 문수전은 소설 속 한암 스님이 6·25 전쟁 중에 목숨을 걸고 지켜낸 곳이다.
선우휘 소설의 배경‘상원사’
▲ 문수전에 있는 한암 스님 액자 사진.
선우휘의 단편 ‘상원사’는 6·25전쟁 시기의 실화를 바탕으로 쓴 짧은 액자소설이다. 작중 화자인 ‘나’는 상원사를 쓰게 된 이유를 이렇게 밝히고 있다. ‘그 얘기는 내가 이 몇 년 동안 추구하고 있는 가장 절실한 문제와 직결되는 것임을 발견했다.’ 화자는 이제껏 시시한 얘기만 하고 바로 그 얘기를 쓰지 않았다는 것을 깨닫고 펜을 들었다고 한다. 6·25전쟁은 기본적인 교전 규칙도 지켜지지 않는 아수라장이었다. 고전적인 전쟁관에서 성역이라 여기는 사찰이나 예배당도 뺏고 뺏기는 싸움의 대상이 되고 만다. 강원 오대산의 사찰들이 북한 인민군의 소굴이 돼서 국군이 피해를 보게 되자 소설 속 주인공인 김 소위에게 사찰을 불태우라는 명령이 떨어진다.
김 소위는 부대와 함께 오대산 대가람 월정사를 먼저 불태운 뒤 상원사에 달려 올라갔다. 그는 승방의 창문에서 나오는 한줄기 불빛을 보고 다가간다. 이때 주지인 한암 스님이 창문을 열었다.
“절을 태우러 왔습니다.”
“왜 이 절을 태워야 하지요?”
“명령입니다. 군인은 명령을 따라야 하니까요.”
그러자 스님은 가사를 걸치고 나타나 법당 안으로 들어섰다. 법당에 불을 밝히고 불상을 올려보더니 그 자리에 주저앉아 다리를 엮고는 합장을 했다. 곧 사라질 법당에서 마지막 기도를 드리는가 싶었다.
“이제 불을 지르시오.”
스님은 자신은 죽으면 어차피 다비에 부쳐질 몸이니 걱정 말고 불을 지르라고 말한다. 그러고는 “캬악!” 하는 일갈이 스님의 입에서 터져 나왔다. 이 원숭이 같은 늙은 것이. 김 소위가 치밀어 오르는 노여움과 함께 웅크리고 앉은 스님을 그대로 안아 들어 올려 법당 밖으로 내동댕이치려고 할 때였다.
“그대가 장군의 부하라면 나는 불제자 곧 부처님의 부하, 어찌 깨닫지 못할까. 그대가 장군의 명령을 따르듯이 나는 부처의 명령을 따라야 한다는 것을.”
법당은 다시 침묵 속에 빠져들었다. 순간 가슴에 피어오르던 불길이 사라지는 것을 느낀 그는 그대로 불을 질러버리자는 소대원을 제지하고 법당의 문짝을 떼어내게 한다. 헤아릴 수 없는 거대한 힘을 느꼈던 것이다. 그는 부수고 떼어낸 법당 문짝을 끌어다 마당 한가운데 쌓아올리고 불을 질렀다. 그 불길이 대낮처럼 상원사 일대를 밝히는 동안 그는 임무 완료를 외친다. 검은 모순의 덩어리가 부풀어 올라 가슴이 터지려는 아픔을 이기려고 안간힘을 쓰면서. 상원사는 1969년 문예지에 발표된 후 몇몇 단행본에 수록된 작품이다. 나에게는 아버지인 작가는 이 소설로 오래도록 찬사와 비난을 받아야 했다. 그런데 그 두 가지가 모두 아버지를 곤혹스럽게 했다.
작가는 작품에서 김 소위가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지 못하며 그 이름조차 모른다고 했고, 독자들도 애써 그를 찾지 말기를 바란다고 했지만 독자들은 각자의 짐작으로 김 소위를 만들어버렸다. 즉, 김 소위는 선우휘 소설가라는 것이었다. 6·25전쟁에 장교로 참전한 전력이 있는 작가였으니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본인이 아니라고 하는데도 사람들은 작가의 겸손이라고 해석하며 믿고 싶은 대로 믿어버렸다. 그 덕에 비난도 이어졌는데 어느 날 한밤중에 울린 전화는 아버지를 매우 심각하게 만들었다.
“아, 글쎄, 제가 아니라고요. 제가 했다고 쓴 적이 없어요.”
전화가 끊어지고 내가 무슨 일이냐고 묻자 아버지는 황당한 얼굴로 대답했다.
“자기가 그 전투 때 상원사에 있던 사람이란다. 당신이 아닌데 왜 당신이 했다고 썼냐고. 아직도 작가가 쓴 걸 그 사람 얘기로 아는 사람이 있구나.”
“소설에서도 김 소위를 1인칭 나라고는 안 했는데?”
“그러게 말이다.”
평소 이쪽저쪽에서 욕을 먹다 보니 그 방면으로는 근육 비슷한 것이 생긴 아버지였지만 소설로 욕을 먹는 것은 좀 힘드셨던 모양이다. 아직도 인터넷에는 6·25전쟁 때 상원사가 보존될 수 있었던 것은 한암 스님에게 감동 받은 선우휘 소위의 용기 때문이라는 기사가 남아 있다. 다른 어딘가에는 육사 출신 김모 소위라고 실명이 등장하기도 한다. 내 추측으로는 그분이 맞지 않을까 싶다.
내가 처음 상원사를 찾은 것은 1986년 이맘때였다. 그 여름은 내 인생에서 가장 힘든 시절이었다. 어느 날 여행 가방 하나 들고 출장을 떠났던 아버지는 다시 돌아오지 않으셨고, 그렇게 갑자기 닥친 아버지의 죽음은 슬픔보다는 공포였다. 가슴은 점점 밑바닥으로 가라앉았으며 모든 것이 허망하고 시큰둥했다. 1986 서울아시안게임을 앞두고 온 나라는 들끓었지만 내겐 시시하기만 했고 날은 짜증 나게 더웠다. 그렇게 두문불출한 채 주변 사람들과도 멀어지고 있을 때였다. 어머니의 친척 동생은 우리 가족에게 상원사행을 권했다.
그녀는 탄허 스님의 따님으로 그 절과는 남다른 인연이 있는 분이다. 한암 스님을 은사로 모시고 상원사로 출가, 수행하셨던 탄허 스님의 부도와 탑비가 있는 곳이니 그녀에겐 상원사가 친정 같은 의미였을 것이다.
“언니, 집에만 있지 말고 애들 데리고 바람 쐬고 옵시다.”
그녀의 투박하지만 애정 어린 권유로 어머니는 별로 내켜 하지 않는 자식들을 데리고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모든 것을 말려버릴 듯 뜨거운 여름이었다. 월정사를 거쳐 상원사로 가는 길, 적멸보궁으로 올라가는 길은 쉽지 않았다. 소설 상원사의 무대가 된 사찰 상원사에 들어섰을 때도 내 마음속에는 별다른 느낌이 없었다. 소설 속 계절은 한겨울이었다. 1·4후퇴 때 소대원들이 하얀 입김을 틀어내며 바삭바삭 얼어붙은 마당을 밟고 있었으니 그 또한 실감이 나지 않았다. 상원사는 층층이 나무로 울창한 오대산의 그저 작은 절이었다.
지금도 그때의 기억은 흑백사진으로 남아 있다. 억불숭유정책을 취한 조선 시대에도 상원사만은 세조에 의해 명찰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던 사연, 세조의 피부병을 고쳐준 문수보살과 세조의 옷자락을 물어 자객의 살해 위협에서 벗어나게 해준 고양이 이야기를 들으며 고양이 석상 앞을 얼쩡거렸던 것도 같다.
이 첩첩산중이 격전지였다니. 그렇게 멍한 얼굴로 기웃거리다 나는 문수전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계단 앞에는 한 스님이 서울에서 온 불자들에게 이런저런 설명을 하고 있었다. 한암 스님은 우리나라 선불교의 대표적인 분으로, 스님의 지팡이는 단풍나무가 됐고….
곧 내가 아는 이야기가 들려왔다. 6·25전쟁 때 문수전의 전소 위기를 한암 스님이 법력으로 지켜내셨다는 얘기였다. 그리고 덧붙이는 한마디, 그 일화를 소설로 썼던 선우휘 씨가 얼마 전에 돌아가셨다는 것이었다. 순간 그루터기처럼 자리 잡고 있던 슬픔이 다시 고개를 들었다. 그래, 작가는 가도 작품은 이렇게 남는구나….
얼마 전 나는 상원사를 다시 찾았다. 서울이 끈적거리던 날, 진부 버스터미널에 내리자 2018 평창동계올림픽을 알리는 광고판이 보였다. 작은 빗줄기를 맞으며 오대산으로 향하는 시내버스는 여전히 덜컹거렸다. 월정사에서 상원사로 들어가는 길은 ‘선재길’이라는 이름의 둘레길이 돼 있었다. 꼭 30년 만이다. 전나무 숲 오대산에는 푸른 안개가 덮여 있었다. ‘번뇌가 사라지는 길’이란 팻말이 붙은 돌계단을 오르는 동안 곳곳에서 다람쥐가 출몰해 발걸음을 멈추게 했다. 수풀 사이 숨은 까마귀들은 나무라듯 쉰 소리로 울어댔다. 입구의 청풍루에는 ‘천고의 지혜, 깨어 있는 마음’이라고 쓰여 있다. 들어서자 카페 ‘마루’가 보인다. 절에 카페라니. 상원사는 세련되고 현대적이 돼 있었다. 그 오래전, 대학졸업반이던 내가 역시 대학졸업반인 딸을 동반하고 찾아왔으니 상원사의 세월은 그래도 무던한 편이다. 범종은 호기 있게 자리를 지키고 있었고, 고양이 석상도 여전했다. 세월의 풍파로 고양이들이 조금 여위었다고 할까.
나는 문수전으로 향했다. 한암 스님이 전쟁 중에 두려움 없이 지켜낸 곳. 장엄한 문수동자좌상 앞에서 반세기 전 그 자리에 가부좌를 튼 채 합장하고 있었을 스님을 그려 봤다.
‘이제는 스님을 어떻게 할 수 없다는 생각이 그의 마음을 사로잡았고, 그는 스님이 돌이 돼버렸다는 것을 알았다. 어떠한 힘도 스님을 법당 마루에서 떼어 놓을 수 없을 것만 같았다.’
김 소위가 불을 지를 수 없게 만든 스님의 모습이다. 한암 스님은 상원사에 들어와 입적하실 때까지 27년간 한 번도 오대산문을 나서지 않으셨다고 한다. 전쟁이 터지고 사부대중이 다 떠난 텅 빈 절을 스님은 지키고 있었던 것이다. 그 마음은 절과 자신이 서로 다르지 않다는 믿음에서 나온 것은 아닐까. 집착의 대상으로서의 절이 아니라 너와 내가 다르지 않다는 물아일체의 경지에서, 어차피 절을 태워야 하는 것이 부조리한 전쟁의 법칙이라면 자신도 함께 산화되기를 원했던 것은 아닐까.
그 후 김 소위는 다시 상원사를 찾았다가 위독한 상태에 빠진 한암 스님을 만나게 됐다. 좌이대사(坐而待死), 즉 앉아서 죽음을 기다리는 스님을 지켜보던 그는 한암 스님이 운명하자 좌이왕생(坐而往生)한 그 모습을 찍어 액자에 담아 상원사에 기증했다고 한다.
임종 당시 한암 스님을 지켜보던 김 소위의 마음은 어땠을까 상상해 본다. 작가는 김 소위의 감회를 써서 메울 유혹을 느끼지만 독자의 상상에 맡긴다고 했다. 그건 김 소위의 감회를 헤아릴 상상력과 근사하게 묘사할 표현력의 부족이라면서. 나도 그 마음을 측량할 길이 없다.
여러 상념이 오고 갔다. 그런데 소설 속, 법당의 왼쪽 벽에 걸려 있다고 했던 한암 스님의 좌탈입망(坐脫立亡) 사진이 눈에 띄지 않았다. 직원에게 물으니 월정사 박물관으로 옮겨졌다고 한다. 짧은 아쉬움을 뒤로한 채 법당을 나왔다. 뒤뜰의 지혜수를 마시니 낮은 하늘이 닿을 듯했다.
작가의 바람처럼 나도 누군가 오대산에 간다면 월정사를 구경하고 선재길을 걸어 상원사를 찾아가 보라고 얘기해 주고 싶다. 그윽한 범종 소리에 귀 기울이며 6·25전쟁 때 상원사가 타지 않고 남은 이유를 잠시 생각해 보라고.
글·사진=선우숙임 소설가
■석림사
●석불사 - 부산 금정산
석불사(石佛寺)는 금정산성 제1망루와 남문 사이에 남쪽으로 하나의 긴 지맥이 흘러내린 다. 이 지맥이 만덕동을 내려보는 위치에서 갑자기 급경사를 이루며 직벽의 암석군을 빚어 놓았다. 그 모양이 병풍과 같다고 하여 이를 '병품암'으로 일컫는다. 이 병풍암 아래에는 바위와 바위 사이를 조각으로 이어 붙인 듯한 사찰이 하나 자리하고 있다. 거대한 자연 암 석들 사이에 세운 당우의 모습이나 지하와 지상으로 연결된 그 출입구도 여느 寺庵에선 보 기 어려운 것들이다. 무엇보다 그 높이가 무려 40m와 20m 가량 되는 직벽의 암석을 깎아 여러 불상들을 조각해 놓은 것이 특히 눈길을 사로잡는다. 이들 석불들은 규모도 크지만, 정교하게 새긴 그 예술성 또한 뛰어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이 사찰의 이름은 석불사로 병풍암에다 많은 석불을 새겨두었다고 하여 일명 '병풍사'라고 부르기도 한다. 사람들은 대체로 병풍암의 장관 때문인지 '병풍암 석불사'로 부르고 있다.
이 석불사는 금정산의 다른 사암들과는 달리 창건 역사가 아주 짧다. 일제시대인 1930년에 조일현(曺一鉉) 스님이 창건했는데, 그가 주지로 있는 동안 계속 암벽에 석불을 조성해온 것이다. 석불사는 무엇보다 사찰 명칭 그대로 병풍암에 조각한 석불의 위용이 대단하다. 그 조각 솜씨 또한 대단히 뛰어나 현대불교 미술의 한 면모를 볼 수 있다. 무엇보다 수십 길 절벽을 이룬 병풍암에 정교하게 새긴 불상의 아름다움이 돋보여 현대의 불상 조각기법 이 신라나 고려의 조각술에 크게 뒤지 않는 듯한 느낌을 준다. 석불사의 석불 가운데 특히 미륵불의 정교함은 단연 두드러진다. 이들 석불들은 사찰이 세워진 그 자리에 있는 암석에 그대로 새긴 것이므로 더 가치를 가진다. 이것이 곧 화강암을 보석처럼 풍부하게 지닌 금 정산의 한 특징을 웅변해 준다.
금정산에 산재한 여러 사암 가운데 병풍암 석불처럼 그 장소에 원래부터 있었던 화강암석 에 석불을 조각하는 경우가 더러 있다. 금정산성 제2망루에서 가까운 휴정암이나 부산대학 교 뒤편 깊숙한 숲속에 위치한 호국사 등이 그러하다. 병풍암 석불사는 불과 65년의 짧은 연륜을 지닌 작은 규모의 사찰이다. 그러나 이 사찰은 금정산 명당에 터를 잡았기 때문에 전국적으로 그 유례를 찾아보기 쉽지 않은 독창적인 모습을 갖출 수 있게 된 것이다.
병풍암 석불사의 석불들은 그 자체만으로 현대 불교미술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것으로 의 미를 지니고 있으며, 이곳의 석불들은 세월이 흐르면 문화재적인 가치를 지닐 것이라고 말 하는 이들도 있다. 시인이자 수필가인 유병근씨도 그의 수필집(〈연등기행〉)에서 그렇게 이야기하고 있다. 그 내용을 간추려 보면,
"···대응보전 뒤켠으로 돌아갔다. 높고 커다란 암벽이 앞을 가로 막는다. 암벽은 병풍처럼 둘러쳐져 있다. 그 암벽에 불상을 깎았다. 석가모니불 비로자나불 약사여래불 십일면관세 음보살 미륵존불 십육나한 사천왕 등의 불상이 장엄하게 새겨졌다. 암벽에서 받는 중압감 위에 불상이 새겨져 있으니까 위 압감은 한결 진하게 가슴에 닿는다. 세속을 등진 산중에 서 다시 바위를 뚫고 바위 속으로 숨어 들려는 불교의 원력이 바위에 불상을 새기게 한 공 덕 아닐까. 두 쪽으로 갈라진 암벽을 따라 들어가니 좁은 암굴이 깊숙이 나타난다. 무슨 탐 험가 처럼 키를 낮추며 굴속으로 들어갔다. 그곳에 용왕당이 있다. ··· 굴 안쪽을 더 살피니 작은 옹달샘이 눈에 띈다. 아하, 샘을 바다로 보았구나. 불교의 원력이란 옹달샘을 바다로 보는 심안에도 있지 않는가. 삼천 대천세계의 경지가 이에 있음이리라. ··· 옹달샘 위에는 널찍한 돌이 놓였다. 그 위에 정갈하게 단을 만들어 주먹 크기만한 부처님을 모셨다. 누가 밝혔는지 촛불이 가물가물 이승의 인연을 태우고 있다. 생각나는 대로 공양을 드리라는 뜻 인지 작은 목탁이 얌전히 놓였다.··· 암벽에 새긴 불상은 많은 세월이 지난 뒤 어떤 형태의 문화적 가치를 지닐 듯한다. 그 불상으로 인하여 더 많은 사람이 병풍사를 찾아 만덕동 뒷 산에 발걸음이 그치지 않을 것이다. 병풍사는 암벽의 석굴만으로 한 채 장엄한 법당이다. 중생은 암굴 깊은 곳에서 울리는 우렁우렁한 송불소리에 귀를 세울 것이다. 그 소리는 바 위에서 터지는 정령의 소리일 것이다. 암벽에 불상을 깎아 세우라는 소리는 더 은은하게 중 생의 가슴깊이 파고 들었음직 하다.”
라고 한 것과 같이 석불사의 그 모습이 장엄하여 사람마다의 가슴속 깊이 느껴진다.
●석종사
●선암사
조계산 기슭 동쪽에 자리잡은 선암사는 백제 성왕 7년(529년)에 아도화상이 비로암을 짓고, 신라 경문왕1년 도선국사가 선종 9산 중 동리 산문 선풍으로 지금의 선암사를 창건하셨다. 반대편 서쪽 산 중턱에는 유명한 승보사찰 송광사가 자리하고 있다. 선암사 주위로는 수령 수백년 되는 상수리, 동백, 단풍, 밤나무 등이 울창하고 특히 가을 단풍이 유명하다. 또한, 절 앞에 아치형의 승선교가 있는데 (보물 제400호), 받침대가 자연 암반으로 되어 있어 견고하며, 중앙부의 용머리가 매우 신비롭다. 대웅전 앞 좌우에 서 있는 삼층석탑도(보물 제 395호) 관광객의 시선을 끈다.
사찰 전통문화가 가장 많이 남아 있는 절의 하나로 보물 7점 외에도 장엄하고 화려한 대웅전, 팔상전, 원통전, 금동향료, 일주문 등 지방 문화재 12점이 있고, 선암사 본찰 왼편으로 난 등산로를 따라 오르면 높이 7m, 넓이 2m에 이르는 거대한 바위에 조각된 마애불을 볼 수 있다. 800년 전통을 지닌 자생 다원, 송광사에서 선암사를 잇는 조계산 등산로, 수정같은 계곡물, 울창한 수목과 가을 단풍이 이곳의 멋을 더해 준다.또한, 선암사 인근에는 지리산과 백운산과 마찬가지로 고로쇠나무가 자생하고 있어 매년 경칩을 전후하여 약수를 맛볼 수 있다.
●선운사 - 고창
●성국사
설악산 오색석사라 불린다
●성불사 - 천안
●松廣寺 - 전남 순천
한국의三寶사찰 가운데 僧寶사찰로서 유서깊은 절이다. 통도사ㆍ해인사와 함께 우리나라 3대사찰로 꼽히는 절이다
松廣寺誌에 따르면 신라 말기에 혜린(慧璘)이 마땅한 절을 찾던 중, 이곳에 이르러 산 이름을 송광이라 하고 절 이름을 吉祥이라 하였는데,창건된 뒤 고려 인종(仁宗) 3년(1125)에 釋照가 대찰을 세울 뜻을 품은 채 세상을 뜨자, 1197년(명종 27) 승려 守愚가 寺宇 건설을 시작하였다 언제 송광사로 개명하였지는 알려져 있지않다
1842년(헌종 8) 큰 화재가 일어나 모든 건물이 불타 없어졌으며 1922년부터 1928년까지 雪月· 栗庵이 퇴락한 건물들을 중수하고 1943∼1956년에 차례로 복원하여 옛모습을 되찾았다.
1983년부터 1990년까지 대웅전을 비롯해 30여 동의 전각과 건물을 새로 짓고 중수하여 오늘과 같은 승보종찰의 모습을 갖추었다. 또 가장 많은 사찰 문화재를 간직하고 있는 사찰로, 木彫三尊佛龕 (국보 42), 高麗高宗制書 (국보 43) 國師殿 (국보 56)을 비롯해 大般涅槃經疏 (보물 90) 經帙 (보물 134)經牌 (보물 175), 金銅搖鈴(보물 179)등 보물10점과 지방문화재 8점이 있으며 秋史 金正喜의 書帖 英祖의 御筆흥선대원군의 난초 족자 등 많은 문화재가 사내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조계종의 발상지로서 현재는 禪修行의 도량이며 曹溪叢林이 있는 곳이다.
송광사는 전라 남도 순천시 송광면 신평리 조계산에 있는 큰 절이다. 신라 말기에 혜린 선사 체징이 작은 암자를 짓고 길상사라고 한 것에서 비롯된다. 고려 명종 때 보조 국사 지눌이 크게 고쳐 지었다. '송광' 이라는 이름은 조계산의 옛 이름인 송광산에서 비롯되었다. 그 뒤 이 절에서 16명이나 되는 국사가 나와 승보 사찰로 유명해졌다. 불교도가 존경하고 섬기는 불 · 법 · 승을 삼보라 하는데, 불의 통도사, 법의 해인사, 승의 송광사를 삼보 사찰이라고 한다. 현재 16국사의 영정이 국사전에 모셔져 있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거치면서 빈 터만 남아 있고, 1842년 큰불이 나서 대웅전과 함께 많은 건물이 타기도 했다. 또 여순 반란 사건과 6 · 25 전쟁 등을 겪으며 절 주변의 숲이 못쓰게 되고 대웅전 등이 불타기도 했다. 그러나 그러한 때마다 다시 지어 지금에 이르렀다. 고려 명종 때 80여 동의 건물이 꽉 들어찬 전국 제일 가는 절의 규모를 갖추었으나, 난리를 거치면서 30여 동이 불타 없어져 지금은 50여 동의 건물이 남아 있다. 하지만 여전히 우리 나라에서 규모가 제일 큰 절로 남아 있다. 이 곳에는 국보인 '목조 삼존 불감', '고려 고종 제서', '국사전'을 비롯하여, 10여 가지의 보물 등 많은 문화재가 있다.


▲송광사의 중심 건물인 대웅전








●修 德 寺
백제 威德王(554~597) 재위 때 고승 지명이 처음 세운 것으로 추정된다. 고려 제31대 왕공민왕 때 중수하였다.
조선시대 제26대 왕 고종 2년(1865)에 滿空이 중창한 후로 禪宗 유일의 근본도량으로 오늘에 이르고 있다.
주요문화재로 국보 제49호인 수덕사 대웅전은 국보 제18호인 영주 부석사 무량수전과 함께 현존하는 한국 최고의 목조건물이다.
이 밖에 대웅전 양 옆에 승려들의 수도장인 白蓮堂과 靑蓮堂이 있고, 앞에는 조인정사와 3층석탑이 있다.
●수종사 - 남양주시 조안면 송촌리 운길산
●神勒寺 鳳尾山
신라眞平王왕 때 元曉효가 창건하였다고 하나 확실한 근거는 없다. 고려 말인 1376년(우왕 2) 나옹 惠勤이 머물렀던 곳으로 유명한데, 200여 칸에 달하는 대찰이었다고 하며, 신륵사로 부르게 된 유래는 몇 가지 설이 전해지고 있다.
그 하나는 “미륵(혜근을 가리킴)이, 또는 혜근이 신기한 굴레로 龍馬를 막았다”는 것이고, 하나는 “고려 고종 때 건너마을에서 용마가 나타나, 걷잡을 수 없이 사나우므로 사람들이 붙잡을 수가 없었는데, 이 때 印塘大師가 나서서 고삐를 잡자 말이 순해졌으므로, 神力으로 말을 제압하였다 하여 신륵사라고 했다”는 것이다.
이 절의 중요문화재로는 보물 제180호인 祖師堂 보물 제225호인 다층석탑, 보물 제226호인 다층전탑,
보물 제228호인 普濟尊者石鐘보물, 제229호인 普濟尊者石鍾종碑
보물 제230호인 大藏閣記碑 ,보물 제231호인 석등이 있으며,
유형문화재로는 極樂寶殿과 그이외의 부속건물로
九龍樓 · 冥府殿· 十王殿·산신당 ·육각정 등이 있다.
신륵사는 신라 진평왕 때 원효대사가 세운 것으로 전해진다. 전설에 따르면, 어느 날 원효대사의 꿈에 흰옷을 입은 노인이 나타나 지금의 절터에 있던 연못을 가리키며 신성한 가람이 설 곳이라고 알려주고 사라졌다고 한다. 그 말에 따라 연못을 메워 절을 지으려 했으니 뜻대로 되지 않았다. 이에 원효대사가 7일 동안 기도를 올리니 아홉 마리의 용이 연못에서 나와 하늘로 올라가면서 절을 지을 수 있게 됐다고 한다. 사료가 남아있지 않아서 창건 유래를 알 수는 없다.
절 이름에 관한 전설도 있다. 고려 우왕 때, 여주에서 신륵사에 이르는 길의 마암(馬巖)이라는 바위 부근에서 용마(龍馬)가 나타나 피해를 주자 나옹선사가 신기한 굴레를 가지고 그 말을 다스렸다는 데서 유래했다는 설이 있다. 또 하나는 고려 고종 때 마을에 사나운 용마가 나타나 붙잡을 수 없었는데 인당대사가 나서서 고삐를 잡으니 순해졌다고 한다. 신력으로 제압했다 하여 신륵사라고 했다는 것이다.
신륵사를 말할 때 나옹선사를 빼놓을 수 없다. 신륵사를 유명하게 한 주인공이기 때문이다. 나옹선사는 고려 말의 뛰어난 승려였다. 출생담, 출가담, 풍수담, 도술담 등이 전해질 정도로 전설적인 인물이기도 했다. 용문산, 원적산, 금강산 등에서 수도한 뒤 회암사의 주지가 되었다.
1371년 공민왕으로부터 금란가사와 내외법복, 바리를 하사받았다. 공민왕이 죽고 우왕이 즉위하면서 다시 왕사로 추대됐으나 회암사를 중수하면서 문제가 생겼다. 낙성회에 사람들이 몰려들어 생업을 포기할 지경이었다. 유학자들의 탄핵이 이어졌고 급기야 조정에서는 나옹선사에게 밀양 땅 영원사(瑩原寺)로 떠나라고 했다. 가는 중에 병이 깊어 신륵사에 들었고, 1376년 5월 입적했다. 세수 57세 법랍 38세였다.
신륵사는 임진왜란 때 승군을 조직해 싸웠고, 이때 극락전을 비롯해 대부분의 건물이 불에 탔다. 지금의 신륵사 건물은 현종 12년(1671) 무렵부터 다시 일으킨 것들이다.
▲ 신륵사 전경. 극락보전(가운데)은 임진왜란 때 불타버린 것을 1800년에 중창한 것이다
여주 봉미산 남쪽 기슭에 위치, 신기한 미륵이 인간에게 피해를 주는 용마를 막았다는 전설에서 유래. 고려 초기 창건
다층전탑 높이 9.4m 국내 유일의 고려 시대 전탑
●신흥사 - 설악산
● 雙磎寺 河東
(경상남도 하동군 화개면(花開面))
대한불교조계종 제13교구 본사인 쌍계사는 840년(신라문성왕 2)에 진감선사(眞鑒禪師) 최혜소(崔慧昭)가 개창 처음에옥천사(玉泉寺)라고 부르다가 헌강광(憲康王) 때 문전에 흐르는 쌍계에 연유하여 쌍계라는 호를 하사(下賜)하고 학사(學士) 최치원(崔致遠)으로 하여금 ‘쌍계석문(雙磎石門)’의 4자를 쓰게 하여 바위에 각자(刻字)하였다.
그 후 두 차례나 화재로 절이 소실되었으나 1632년(인조 10)에 벽암(碧岩)을 비롯한 여러 승려들에 의하여 복구 ·중수되었다. 경내에는 국보 제47호인 진감선사대공탑비(眞鑑禪師大空塔碑)를 비롯하여 보물 제490호의 浮屠 보물 제500호의 대웅전 등의지정문화재가 있다,
▲진감선사대공탑비 (眞鑑禪師大空塔碑) 국보 제47호
▲쌍계사와 불일폭포
●쌍봉사 - 화순
●약사암 구미 금오산
●영평사 = 공주시 장군산
●와우정사1
(황동 5만근이들어간 8미터높이의 불두)=용인
●용문사 - 경기도
▲용문사는 신라 신덕왕 2년(913) 대경대사가 창건했다고 전하며, 경순왕(927~935재위)이 친히 행차하여 창사 하였다고 전한다.
▲용문사는 세종 29년(1447) 수양대군이 모후 소헌왕후 심씨를 위하여 보전을 다시 지었고 세조 3년(1457) 왕명으로 중수하였다. 순종 원년(1907) 의병의 근거지로 사용되자 일본군이 불태웠으나 이후 중창되었다.
▲담홍빛으로 화려하게 물든 용문산 단풍과 함께 황금빛 은행나무가 환상적인 풍광을 연출하고 있다
● 용문사 - 남해 용소마을
신라 문무왕 원효대사 창건
●용암사 - 충북 옥천 쌍삼충석탑
●운문사 - 청도
●운주사 - 화순
●원당사 - 제주
●月精寺 五臺山 평창
대한불교조계종 제4교구의 본사이다. 慈藏이 唐나라에서 돌아온 643년(신라선덕여왕 12)에 오대산이 文殊菩薩이 머무는 성지라고 생각하여 지금의 절터에 草庵을 짓고 머물면서 문수보살의 眞身을 친견하고자 하였다고 한다.
이때 그가 머물던 곳이 바로 현재의 월정사 터이며, 이 절은 643년 자장이 건립했다고 볼 수 있다.
주요 문화재로는 석가의 사리를 봉안하기 위하여 건립한 8각 9층석탑 (국보48호) 과 상원사 중창권선문이 있다.
이 밖에 일명 藥王菩薩像이라고도 하는 보물 제139호인 석조 菩薩坐像이있다
적광전
금강루
8각 9층탑 국보49
●은수사
●은해사의 암자 - 영천
●일붕사 - 의령 동굴법당
세계 최대의 동굴 법당이 있다.신라 혜초 스님이 창건을 했으며 봉황산에 위치한 불교 일붕선교종의 총 본산이다. 일붕사는 일반 사찰의 대웅전과 달리 동굴법당이 2개 있고, 세계 최대 동굴 법당으로 영국 기네스북에도 등재되어 있다고 한다.
동굴 법당이라고 해서 나는 동굴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기대했는데 막창 도착하니 외관은 일반 사찰하고 별반 다를게 없다. 사찰 소속이 조계종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많은 불교 신자들이 참배를 많이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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