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 이야기2/ 불교에 대하여1/ 한국 불교의 역사 - 불교, 어떻게 인도에서 세계로 퍼졌을까? - 원불교 100년 …
종교 이야기2/ 불교에 대하여1
한국 불교의 역사 - 위키백과
■삼국 시대 (372~676)
불교의 전래
공식적인 기록에 따르면 불교가 처음 한국으로 전래된 것은 고구려 소수림왕(재위 371~384) 2년인 372년으로, 전진(前秦: 315~394)의 왕 부견(符堅: 재위 357~385)이 사신과 승려 순도(順道)를 보내어 불상과 불경을 전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국가적인 공식 기록일 뿐, 불교가 이 보다 먼저 전해졌으리라는 것을 중국 남북조 시대 양나라(梁: 502~557) 때 승려 혜교(慧皎: 497~554)가 저술한 《양고승전(梁高僧傳)》(519) 등의 문헌에 나타난 내용으로 미루어 알 수 있다.
불교가 발생지인 인도에서 직접 들어오지 않고 중국[1]을 거쳐 들어왔으며 또한 기원전 6세기에 발생한 불교가 8~9세기라는 시간적인 간격을 두고 4세기에 한국으로 들어왔다는 것에서, 한국에 전래된 불교가 고타마 붓다 당시의 원시 불교와는 차이가 있었으리라는 것은 충분히 짐작되는 사항이다.
당시 전래된 불교가 어떤 성격의 것이었는지는 자세히 알 수 없으나, 그전까지 한국의 민간에서 믿어 온 고유한 민간신앙인 무속신앙이나 도교와 별다른 마찰 없이 융합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단, 신라의 경우 이차돈의 순교에서 보듯이 초기 전래시 고구려와 백제 보다는 고유 신앙의 융합에 어려움이 컸던 것으로 여겨진다.
□고구려 (372~668)
불교의 고구려 전래
불교의 고구려(高句麗) 전래는 소수림왕(小獸林王: 재위 371~384) 2년인 372년에, 전진(前秦: 315~394)의 왕 부견(符堅: 재위 357~385)이 사신(使臣)과 함께 순도(順道)를 보내 불상과 불경(佛經)을 전한 것이 그 시초이며 2년 후인 374년에 아도(阿道)가 들어와 성문사(省門寺) 혹은 초문사(肖門寺)와 이불란사(伊弗蘭寺)를 세운 것이 한국 사찰의 시작이다. 그러나 이것은 국교를 통한 공식 전입으로, 실상 민간에 먼저 불교가 들어왔을 것으로 보인다.
고구려는 고국양왕 8년(391)에 "불법을 믿고 받들어 복을 구하라"는 교지를 내렸고, 다음 해인 광개토왕 2년(392)에는 평양에 9사(寺)를 세웠다. 이 밖에도 구법(求法)과 전교(傳敎)의 고승들이 나라 밖에까지 나가 많은 활동을 하였다
고구려 불교의 특징
고구려의 불교는 한마디로 학술 외교불교라고 할 수 있다. 즉, 고구려의 학승 등은 중국에 가서 경전을 배우고 연구함을 구법(求法)의 최상목표로 하였으며, 중국의 승려를 지도할 수 있는 고승도 있었다. 그 대표로 장수왕(재위 413~491) 때 태어난 승랑(僧朗: fl. 500년 전후)을 들 수 있다. 승랑은 중국에 들어가 삼론학(三論學)을 깊이 연구하여 학문적 체계를 완성함으로써 신삼론(新三論)이라는 새로운 사상을 개척했다.[2] 승랑의 사상은 승전(勝詮) · 법랑(法朗: 507~581[3]) · 길장(吉藏: 549~623)으로 이어졌으며, 길장에 의해 새 종파인 삼론종이 성립되었다. 승랑은 중국 사상계를 지도한 최초의 인물로서, 중국에서 일생을 마쳤다.
고구려 학승들은 중국만이 아니라 일본에도 건너가 불교 학술과 예술면에 큰 공헌을 하였다. 최초의 전교자인 혜편(惠便)을 위시해서, 혜관(惠灌)은 수(隋)의 길장(吉藏: 549~623)에게 삼론의 깊은 뜻을 배우고 돌아와 일본으로 가서 승정(僧正)이 되었고,삼론종을 널리 펴서 일본 삼론종의 시조가 되었다.[2] 고구려의 담징이 일본에 건너가 법륭사의 벽화를 그렸다는 사실도 익히 알려진 일이다. 또한 혜량(惠亮)은 551년 신라로 가 승통(僧統)이 되어 신라 불교를 일으키는 데 커다란 역할을 했다.
고구려 불교의 일본 전래
고구려 승려로 일본에서 포교활동을 한 최초의 인물은 혜편(惠便: fl. 584)이었다. 그는 일본 비다츠(敏達) 13년(584) 소가노 우마코(蘇我馬子)의 요청으로 사마달(司馬達)의 딸인 선신(善信)과 그밖에 선장(禪藏) · 혜선(慧善)의 세 여자를 비구니로 출가시켰으며, 일본 귀족들의 존숭을 받았다. 이것이 일본 불교사상 비구니 출가의 효시가 되었다.
영양왕 6년(595)에 일본에 건너간 혜자(惠慈)는 일본 역사상 위대한 업적을 남긴 성덕태자(聖德太子) 풍총(豊聰)의 스승이 되었으며, 《일본서기(日本書紀)》에서는 같은 해 백제에서 건너온 혜총(惠聰)과 더불어 혜자는 일본 불교의 동량(棟梁)이 되었다고 전하고 있다. 혜자는 삼론학(三論學)을 위시하여 《법화경》·《유마경(維摩經)》·《승만경》과 같은 난숙한 발달을 보인 대승경전을 가르쳤는데, 후일 성덕태자가 불교정신을 뒷받침으로 한 정치를 베풀 때 이러한 불교정신이 통치 이념으로 중요한 역할을 하였을 뿐 아니라 일본 문화 발전에도 큰 전환점을 가져다 주었다.
같은 영양왕 때 일본으로 간 담징은 불교학은 물론 오경에도 능통하였고 채색(彩色), 지묵(紙墨), 공예(工藝)에 능하여 일본 미술사의 선구적 역할을 하였으며, 그가 그린 법륭사(法隆寺) 금당벽화(金堂壁畵)는 불후의 명작으로 전해 온다. 이 밖에 그는 맷돌 제조법도 가르쳐 일본의 문물 개화에 크게 기여하였다. 영류왕 8년(625)에 일본에 건너간 혜관(慧灌)은 일찍이 수(隋)의 길장(吉藏: 549-623) 밑에서 삼론학(三論學)을 배운 다음 일본에 건너갔다. 그는 일본 불교의 승정(僧正)이 되었고 삼론종(三論宗)을 가르쳐 일본 삼론종의 시조가 되었다.
같은 왕대(王代)의 도등(道登)도 일찍이 당(唐)나라 길장 밑에서 삼론을 배운 다음 일본에 건너가서 삼론을 강술(講述)하였다고 전한다. 그리고 도현(道顯)도 일본에 가 대안사(大安寺)에 머무르면서 교수(敎授)하는 한편 《일본세기(日本世紀)》라는 책자를 몇 권 지었다고 전한다. 또한 기록에 나타난 승려들의 이름 이외에도 망각된 고승들이 많았으리라 짐작되며, 고구려 불교가일본에 끼친 영향은 종교적인 차원을 넘어선 문화 전반에 걸친 광범한 것이라고 믿어진다.
□ 백제 (384~676)
불교의 백제 전래 및 전개
백제(百濟)에는 불교가 고구려보다 12년 늦게 들어왔다. 침류왕(枕流王) 1년(384)에 인도의 승려 마라난타(摩羅難陀)가 바다를 건너 동진(東晋: 317~420)으로부터 왔는데 왕이 직접 환영하여 맞이하였고 궁중에 머물게 하였으며 예로써 공경하였다. 다음 해 한산(漢山)에 절을 짓고 승려 10명을 양성했다. 왕이 외국의 승려를 직접 맞이하였고 궁중에 있게 한 것으로 보아 백제에도 그 이전부터 불교가 전해졌던 것으로 여겨진다.
그 뒤 140년쯤 지나 26대 성왕(聖王: 재위 523~554) 때에 이르러 불교는 크게 번창했다. 왕은 겸익(謙益)을 인도에 보내어 계율을 연구하게 했는데, 526년 산스크리트어본의 율장(律藏)을 가지고 돌아오자 국내의 고승들을 불러 겸익을 도와 번역하게 하고 주석서를 짓게 했으며, 왕이 몸소 서문을 썼다고 한다.
성왕 23년(545)에 장륙(丈六) 불상을 조성, 모든 중생들이 다 같이 해탈하기를 기원했다. 동 30년(552)에는 불교를 일본에 전파했으며, 이것이 일본에 불교가 전해진 시초이다. 그때 백제는 여러 가지로 일본에 많은 영향을 끼쳤는데, 불교를 전함으로써 백제의 승려와 예술가와 기능공들이 건너가 일본의 문화를 크게 일으켰다.백제는 일본 불교의 연원지(淵源地)가 되었다.
법왕 1년(599)에는 나라 안에 살생을 금하는 영을 내리고 널리 방생(放生)을 행하였으며, 고기 잡고 사냥하는 연장을 모두 불태워 버리게 하였다. 이듬해 수도 부여에 왕흥사(王興寺)를 세웠고, 무왕때에 미륵사를 창건하고 거대한 탑을 조성했는데, 백제에는 승려와 사탑(寺塔)이 많았었다는 사실이 중국의 문헌에도 전해지고 있다.
백제 불교의 특징
백제의 불교는 계율 중심의 불교, 예술 불교, 외교 불교라고 말할 수 있다.
인도로 유학하였던 겸익(謙益: fl. 526)은 백제 성왕 4년(526년)에 인도 상가나대률사(常伽那大律寺)에 이르러 산스크리트어를 익혀 율부(律部)를 깊이 공부하고, 백제 성왕 9년(531년)에 산스크리트어로 된 《아비담장(阿毘曇藏)》과 《오부율(五部律)》을 가지고 인도의 승려 배달다 삼장(倍達多三藏)과 함께 귀국했다.
귀국 시에 겸익은 성왕의 환대를 받았으며, 그 후 흥륜사(興輪寺)에 있으면서 명승 28명을 소집하여 율부 72권을 번역하였다. 당시에 중국에는 《오부율(五部律)》 중 음광부를 제외한 나머지 부파의 율부들은 이미 번역되어 있었다.그러나 끝내 음광부의 율부는 중국으로 전해지지 못하였는데 이런 점에서 백제에 《오부율》 전체가 전해지고 인도에서 직접 가져온 산스크리트어 율부의 번역이 이루어졌다는 것은 의미가 있다. 겸익의 이러한 활동에 의해 계율 중심의 백제 불교의 특징이 이루어졌다.
중국에서 율종이 성립된 때는 당나라의 도선(道宣: 596-667)이 법장부의 《사분율(四分律)》을 강설하고 저술한 624년인데,[10] 백제에서 겸익에 의해 율종이 성립된 때(526년경)는 이보다 1세기 앞선 것이다.
백제는 성왕 30년(552)에 처음으로 일본에 불교를 전래시켰으며 많은 승려와 불서를 일본에 보냈다. 특히 위덕왕(威德王) 24년(577)에는 고승들과 불공(佛工)들을 보냈고, 30년에는 일본왕이 고승 파견을 요청하여 일라(日羅)를 파견하였다. 그 후 무왕 3년(602)에 관륵(灌勒)이 각종 역서(譯書)를 가지고 가서 일본 최초의 승정(僧正)이 되었다. 백제는 일본 불교의 연원지(淵源地)가 되었으며 아울러 탁월한 불교 예술을 진작시켰다.
백제 불교의 일본 전수
일본에 불교를 처음 전한 때는 성왕(聖王) 30년(552)이었며 많은 승려와 불서를 일본에 보냈다. 달솔(達率) 노리사치계(奴唎斯致契)를 파견하여 금동석가상(金銅釋迦像)과 미륵석불(彌勒石佛) 및 번개(幡蓋) · 경론(經論)을 보낸 것이 일본 불교의 발달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처음 일본 군신들은 이를 믿으려 하지 않았고 소아마자(蘇我馬子)만이 이를 예경(禮敬)하였는데, 석천가(石川家)에 불전(佛殿)을 만들고 이를 모셨으나 그 용도나 의미는 몰랐다.
그때 일본(日本)에 와서 있던 고구려 승려 혜편(惠便)을 발견하여 그의 가르침을 받아 세 사람의 여자 승려(尼僧)를 배출하였고, 소아마자(蘇我馬子)는 사마달과 함께 최초의 일본 불교신자가 되었다. 곧이어 2년 후 성왕은 담혜(曇惠) 등 9인의 승려를 일본에 파견하여 도심(道深) 등 7인과 교체하게 하였다. 따라서 도심을 위시한 7인의 백제 승려가 집단적으로 이미 일본에 들어가 포교활동을 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위덕왕(威德王) 24년(577)에 경론(經論)과 율사(律師) · 선사(禪師) · 비구니(比丘尼) · 주금사(呪禁師) · 불공(佛工) · 사장(寺匠) 등을 일본에 파견하였고, 일본에서는 그들을 맞아 난파(難波)의 대별왕사(大別王寺)에 머무르게 하였다. 위덕왕 30년(583)에는 일라(日羅)라는 승려가 일본에 건너가 관음신앙(觀音信仰)을 크게 일으키고 또 동(同) 35년에는 불사리(佛舍利)와 사공(寺工) · 화공(畵工) · 와장(瓦匠) 등을 보냈으며, 일본(日本)에서는 소아마자(蘇我馬子)가 백제(百濟) 승려(僧侶)를 청하여 수계(受戒)하는 법을 묻는 등 백제와 일본 간의 교류는 빈번하였다.
이때 일본 최초의 비구니(比丘尼)인 선신니(善信尼) 등이 백제로 건너와 3년 동안 계율을 배우고 돌아갔으며, 같은 해(588)에 혜총(惠聰) · 영근(令斤) · 혜식(惠寔) 등의사문(沙門)과 함께 불사리(佛舍利)를 일본에 보냈다. 이 일행 가운데 혜총은 계율에 정통하여 그곳 대신인 소아마자에게 수계를 행하였다. 이밖에도 당시 도일(渡日)한 승려로는 영조(聆照) · 영위(令威) · 혜중(惠衆) · 혜숙(惠宿) · 도엄(道嚴) · 영개(令開) 등을 들 수 있다.
무왕(武王) 3년(602)에는 관륵(灌勒)이 천문(天文) · 지리 · 역서(曆書) · 둔갑(遁甲) · 방술(方術) 분야의 책을 일본에 전했지만 그는 본래 삼론(三論)의 학장(學匠)으로 그곳에서 일본 최초의 승정이 되어 승단의 기강을 정하는 등 불교계의 지주가 되었다. 그는 또 일본 의학의 시조로도 불린다. 그 후 혜미(惠彌) · 도흠(道欽) · 의각(義覺) · 도장(道藏) · 도녕(道寧) · 다상(多常) · 원각(願覺) · 원세(圓勢) · 방제(放濟) 등 많은 승려가 일본에 건너가 일본의 아스카 문화 시대(飛鳥文化時代: 538~710)를 꽃피운 인물들이 되었다.
□ 신라 (263/479~661)
불교의 신라 전래 및 전개
고구려와 백제에는 별다른 저항이 없이 불교가 받아들여졌지만, 반도의 동남쪽에 자리잡아 대륙과의 소통도 없고 문화적으로 뒤떨어진 신라에는 백제보다 수십 년 늦게 불교가 전해졌다.
최초의 전래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제13대 미추왕(味鄒王: 재위 262~284) 2년(263)에 고구려의 승려 아도(阿道)가 와서 불교를 전했다는 설, 19대 눌지왕(訥祗王: 재위 417~458) 때 고구려의 승려 묵호자(墨胡子)가 모례(毛禮)의 집에 머물러 불교를 선양했다는 설, 또 21대 소지왕(炤知王: 재위 479~500) 때 아도화상(阿道和尙)이 시자(侍者) 3인과 같이 모례(毛禮)의 집에 있다가 아도는 먼저 가고 시자들은 포교했다는 설, 고구려의 승려 아도(阿道)가 고구려로부터 들어와 일선군(一善郡: 지금의 선산(善山)) 에 있는 불교 신자 모례(毛禮)의 집을 중심으로 은밀히 교화를 폈다는 설 등이 있으나 어느 것이 맞는지 알 수 없다.
다만 민간의 승려가 들어와 공식외교를 통하지 않고 포교를 했다는 점이 고구려와 백제의 불교 전래와의 차이점인데 이런 점에서 쉽게 토착화(土着化)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진 셈이다.[6] 그러나 그 전래는 완고하고 배타적인 집권계층의 반대에 부닥쳐 커다란 저항을 받았다.
법흥왕(재위 514~540)은 불교를 백성들에게 복을 가져오게 하고 나라에 이익이 된다고 확신하여 즉위 초부터 국가적인 신앙으로 받아들이려 했으나 신하들의 반대로 고심했다. 그러다가 불교 신자요 젊은 신하인 이차돈(503~527)의 순교로 인해 법흥왕14년(527)에 비로소 불교가 공인되었다. 법흥왕은 불교를 일으켰을 뿐 아니라 정치적으로도 관제를 정비하고 율령을 공포하고연호를 세우고 문물을 개발하는 등 훗날 신라가 삼국을 통일할 수 있는 기초를 닦은 왕이었다. 그는 불교 신앙을 통해서 백성들이 선량한 국가적 관념을 가질 수 있고, 신라의 문화가 향상 · 발전될 수 있다고 내다보았던 것이다.
법흥왕에 의해서 시작된 신라 불교가 특색을 지니게 된 것은 진흥왕(재위 540~576) 때부터로, 이는 왕 자신의 신앙심과 불교 정책에 의해서였다. 진흥왕 5년(544)에 선왕 때부터 짓기 시작한 흥륜사(興輪寺)가 낙성되고, 그해 3월에는 뜻이 있는 자는 승려가 되어 자유롭게 신앙생활을 할 수 있도록 일반에게 출가를 허락하였다. 만년에는 진흥왕 자신도 출가하여 법운(法雲)이라 이름짓고 수도하였으며, 왕비도 영흥사(永興寺)에 들어가 여승이 되었다. 진흥왕은 또 불교이념에 의거한 청소년 수양단체인 화랑도를 창설하여 국민 정신의 함양에 크게 이바지했다.
신라는 제30대 문무왕(재위 661~681) 때에 이르러 당나라의 원조를 받아 마침내 삼국통일(676)의 대업을 성취했다. 겉으로는당나라를 모방한 듯했지만, 안으로는 평화가 깃들여 태평성대를 구가했고 문화는 눈부시게 뻗어갔으며, 불교도 크게 융성했다.신라의 승려들은 뒤를 이어 당나라에 들어가 그곳의 불교 교학을 배워 왔다. 그래서 한국의 불교사상 유례가 없는 황금시대를 가져오게 되었다.
진흥왕과 불교 정책
▲황룡사 9층 목탑 모형
신라에 처음 불교가 공인된 것은 법흥왕(재위 514~540) 때부터였으나 불교를 진흥, 발전시켜 국가종교로까지 이끈 것은 진흥왕(재위 540~576)에 의해서였다. 그의 치세중의 불교 진흥을 위한 업적은 괄목할 만한 것이었으며, 자신도 불교를 열렬히 신봉하여 말년에 사문(沙門)이 되어 호를 법운(法雲)이라 하였고 부인 역시영흥사에서 비구니가 되었다. 그의 재위 동안의 불교 업적은 다음과 같이 간략히 요약할 수 있다.
1. 왕 5년(544)에 흥륜사(興輪寺)가 완공되었고, 3월에 비로소 출가승니(僧尼)가 되는 것을 국법으로 허락하였다.
2. 황룡사(皇龍寺) · 지원사(祗園寺) · 실제사(實際寺) 등 여러 사원들을 계속 새로 세웠으며, 왕 27년(566)에 낙성된 황룡사는 13년 동안에 걸쳐 조성된 거찰(巨刹)이었다.
3. 왕 10년(549) 봄에 각덕(覺德)을 위시한 유학승(留學僧)들이 계속 귀국하였고, 이때 불사리(佛舍利)와 함께 경전(經典)을 들여왔다.
4. 왕 11년(550)에 대서성(大書省)과 소년서성(少年書省)을 설치하여 불교의 제반 업무를 관장케 하였으며 안장법사(安藏法師)를 대서성으로 삼았다. 왕 12년(551)에는 신라로 귀화한 고구려승 혜량(惠亮: fl. 551)을 승통(僧統)으로 임명, 교단을 지도 · 육성케 하고 이 승통 밑에 대도유나(大導唯那) · 도유나랑(都唯那娘) 등을 두고 승관제(僧官制)를 정비하였다.
5. 왕 12년(551)에 승통(僧統)인 혜량(惠亮: fl. 551)에 의해 인왕백고좌법회(仁王百高座法會)와 팔관회(八關會)가 시작되었다. 인왕백고좌법회는 《인왕호국반야경(仁王護國般若經)》의 내용에 따라 국가의 안태(安泰)를 기원하고 내란(內亂)과 외환(外患)을 소멸시키기를 비는 법회였으며, 팔관회는 본래 하루하나의 계(戒)를 닦는 법회였으나 신라에서는 전몰장병을 위한 위령제였다는 점에서 인왕백고좌법회와 함께 팔관회는 국가의 현실적인 의도와 이익에서 베풀어진 법회들이었다.
6. 왕 26년(565)에 진(陳)나라 사신 유사(劉思)와 승려 명관(明觀)이 귀국할 때 1700여 권의 경전을 들여왔다.
7. 왕 35년(574)에 황룡사 장륙존상(丈六尊像)을 주성(鑄成)하였다.
8. 왕 37년(576)에 안홍법사(安弘法師)가 중국에서 돌아올 때 인도의 승려 비마라(毘摩羅) · 농가타(農伽陀) · 불타승가(佛陀僧伽) 등이 그를 따라 입국하였고 이때 《능가경》·《승만경》 등 발전된 대승경전을 왕에게 바쳤다.
이 밖에도 진흥왕은 재위시 신라 국민사상의 총화를 이룬 화랑도(花郞道)를 제정하여 삼국통일의 기반을 닦았다. 이러한 일련의 불교진흥책은 진흥왕으로 하여금 정교일치(政敎一致) 정책을 써서 불국토(佛國土)를 신라 사회에 현실화시키려 했고, 왕 자신도 정법(正法)으로 세상을 다스리는 전륜성왕(轉輪聖王)의 이념에 심취되었다고 생각할 수 있으므로 신라 사회에서의 불교 발전은 진흥왕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었다.
밀교의 전래
신라에 밀교(密敎)가 처음 들어온 것은 선덕여왕(善德女王: 재위 632~647) 4년(635)에 명랑법사(明朗法師)가 당나라에서 귀국하면서부터이다. 그는 승려 자장(慈藏)의 외숙(外叔)으로 선덕여왕 원년(632)에 당나라에 들어갔다가 귀국할 때신인비법(神印秘法) 혹은 문두루비법(文頭婁秘法: Mantra)이라는 방위신(方位神)을 신앙 대상으로 삼는 주술적인 신앙을 들여왔다.
밀교는 대승불교를 난숙하게 발달시켜 타력신앙(他力信仰)을 강조하다 파생된 신앙형태로서, 주술을 통해 병귀(病鬼)와 악귀를 쫓고 초자연적 힘을 구사하여 외적을 물리치는 등 실리적 효과를 목적으로 하는 교파이다.
명랑은 이러한 밀교를 신라에 처음 전래하여 신인종(神印宗)의 종조가 되었고, 같은 시대의 밀본(密本)도 비밀법(秘密法)을 통해 선덕여왕의 질병을 치유하여 밀교전파에 공헌하였다.
그 후 혜통(惠通)은 당나라에서 인도 밀교승 선무외(善無畏)에게 밀교 교의를 배운 다음 문무왕 5년(665)에 귀국하여 크게 교풍(敎風)을 일으켰다. 후대에 혜통을진언종(眞言宗)의 조사로 삼을 정도로 그의 밀교 전파에 대한 공로는 큰 것이었다.
혜통 이전까지 전래된 밀교는 잡밀교(雜密敎)여서 주술적인 면이 강조된 반면, 혜통은 영묘사승(靈妙沙僧) 불가사의(不可思議)의 순밀교(純密敎)를 처음 신라에 전하여 태장법(胎藏法)과 금강법(金剛法)에 의해 불교의 오의(奧義)를 터득하는 길을 열었다.
신라 후대의 불교신앙은 미신과 결부된 주술적 밀교신앙이 횡행하여 본래의 탄력을 잃고 타락적인 양상을 드러내기에 이르렀다.
신라 불교의 특징
신라의 불교는 호국불교(護國佛敎)의 경향이 강하여 진흥왕(眞興王: 재위540~576) 이후 신라는 불교정신에 입각하여 국민을 단합시켰던바 그 대표적인 것으로는 팔관재회(八關齋會), 백고강좌(百高講座), 황룡사 9층탑(九層塔) 건립,사천왕사(四天王寺) 건립 등이 있으며, 특히 세속오계(世俗五戒) 등은 모두 불교정신에 의해 민족을 단합하고 국가를 수호하기 위한 뜻을 담고 있다.
팔관재회는 불교를 배우기 위한 범국민적 집회였으며, 백고강좌는 《인왕반야경(仁王般若經)》의 호국적인 사상을 익히는 법회였으며, 황룡사 9층탑 건립은 자장(慈藏: 590~658)이 중국에 가서 본국의 선덕여왕(재위 632~647)의 여성으로서의 연약한 면을 보좌하고 국가 권위를 세울 것을 암시받고 돌아와 인접 9개국을 진압한다는 의미로 9층탑을 세웠다고 한다.
사천왕사(四天王寺) 또한 불교를 보호하는 동서남북의 사천왕(四天王)이 신라를 호위함을 상징하는 것이었으며, 원광(圓光: 542~640)의 세속오계는 호국의 표준이념이 되었다. 또한 원승(圓勝), 혜숙(惠宿: fl. 600[15]), 혜공(惠空: fl. 7세기 후반) 등 많은 고승들이 나와 능히 삼국을 통일(676년, 문무왕 7년)할 수 있는 정신적 역량을 길러 왔다.
인도 구법순례승의 활동
백제의 겸익(謙益)이 삼국시대에 구법(求法)순례를 위해 인도를 방문한 이래 많은 승려들이 불교의 본고장인 인도로 떠났다. 삼국 통일기(676)를 전후하여 이들 유학승(留學僧)의 수는 급격히 증가되었으나 그들은 거의 대다수는 본국으로 귀환하지 못하고 일부는 인도에서, 일부는 귀국 도중 중국에서 세상을 떠났다.
아리나발마(阿離那跋摩)는 당(唐) 정관년간(貞觀年間: 627~649)에 장안(長安)을 떠나 중앙아시아를 거쳐 인도에 들어갔다. 당시 불교학의 최고학부인 인도 나란타사(那爛陀寺 · Nalanda)에 머물면서 연구하다가 70여 세로 그곳에서 세상을 떠났다. 혜업(慧業)도 같은 시기에 나란타사에 머물다가 귀국하지 못하고 60여 세로 일생을 마쳤다. 현각(玄恪)은 당나라 승려 현조(玄照)와 함께 인도로 들어가 대각사에서 공부하다가 40세를 겨우 넘어 병으로 죽었다.
현태(玄太)는 당 영휘년간(永徽年間: 650~655)에 티베트 방면을 통해 중인도(中印度)에 들어가 고타마 붓다가 대각(大覺)을 얻은 부다가야(佛陀伽耶 · Buddhagaya)의 보리수를 참배하고 이어서 그곳 대각사(大覺寺)에서 연구를 한 다음 다시 당나라로 돌아왔다. 그러나 당나라에서 그 후 무엇을 하였는지는 알려지지 않고 있다.
한편 혜륜(惠輪)은 산스크리트어에 능했던 승려로, 당(唐) 인덕(麟德) 3년(666)에 인도에 들어가 신자사(信者寺)에서 10년간 유학을 마친 다음 토카라 지방(Tokharistan: 현재의 발크(Balkh))의 사원으로 옮겨갔다는 기록이 있다. 이외에도 구법순례 도중 수마트라(Sumatra)섬 서해안 파로사국(婆魯師國 ·Baros)에서 병사한 2인의 신라 유학승이 있었다는 기록이 전해지나, 그들의 이름은 밝혀지지 않고 있다.
대범(大梵)은 신라 무열왕(재위 654∼661) 때 인도 대각사에서 연구를 하고 다시 당나라로 돌아가 중국 불교계를 위해 공헌하였다. 원표(元表)는 경덕왕 때 입당(入唐)한 후 당 천보년(天寶年)에 다시 인도로 들어가 성지(聖地)를 순례하고 당으로 돌아왔다. 귀국시 그는 《화엄경(華嚴經)》 80권을 가지고 왔으며 지제산(支提山) 석실(石室)에 들어가 고행(苦行)과 연구를 계속했다.
《왕오천축국전(往五天竺國傳)》의 저자로 유명한 혜초(慧超: 704~787)는 일찍 당나라에 들어가 당시 인도에서 나와 있던 고승 금강지(金剛智 · Vajrabodhi)에게서 사사(師事)하다가 인도로 들어갔다.
그는 벵골만(Bengal灣)에 있는 니코바르 군도(Nicobar群島)를 거쳐 인도에 들어갔고, 거기서 갠지스강(Ganges江) 유역 비하르(Bihar) 지방의 마가다국(Magadha國), 고타마 붓다의 열반지(涅槃地)인 쿠시나가라국(Kusinagara國)과 성도지(成道地)인 부다가야 등의 성지를 순방하고 중인도 · 남인도를 거쳐 서인도 · 북인도를 두루 순방하고 나서 토카라국을 거쳐 아무다리아강(Amudarya江)을 지나 사마르칸트(Samarkand) 지방으로 들어갔다.
다시 파미르(Pamir) 고원을 넘어 동투르케스탄(東Turkestan)을 거쳐 타슈켄트(Tashkent)까지 들어갔다가 다시당(唐) 안서도호부(安西都護府)가 있는 쿠차국(Kucha · 龜慈國)으로 돌아왔으니 이때가 당 개원(開元) 15년(727) 11월 상순이었고 신라 성덕왕(聖德王) 26년이었다.
당으로 돌아온 후 혜초는 금강지(金剛智)와 그의 제자 불공(不空 · Amoghavajra)에게 밀교(密敎)를 배우며 밀교 경전을 번역하다 끝내 고국에 돌아오지 못하고 당나라에서 죽었다.
혜초의 이 기록은 프랑스의 동양학자인 펠리오(Paul Pelliot)에 의해 1910년 둔황(敦惶) 명사산(鳴沙山) 천불동(千佛洞) 석실(石室)에서 극적으로 발견된 그의 《왕오천축국전》에 의해 알려지게 된 것이다. 혜초의 이 기행기는 동서 문화교섭사의 귀중한 자료로서, 당시의 인도는 물론 중앙아시아의 종교 · 풍습 · 인종을 알려주는 희귀한 문헌 중 하나가 되었다.
□ 조선 시대 및 대한제국 (1392~1910)
조선 시대 불교의 개요
조선은 고려 후기의 사원경제의 폐해 등의 불교의 폐단을 없애기 위해 억불책을 시행하였다. 이에 따라 한창 번성하고 있던 불교의 모든 종단이 위축 일로를 걷게 되어, 마침내 세종(世宗: 재위 1418~1450) 때에 5교양종이 선교양종(禪敎兩宗)으로 바뀌게 되었다.[40] 특히, 조선은 억불책의 일환으로 국가 재정의 안정을 위해 처음에는 도첩제를 시행하였고, 성종(成宗: 재위1469~1494) 때에는 이마저 폐지해 승려가 되는 길을 막아버렸다.
세종 7년(1424)에 7종을 폐합하여 선교양종으로 바꾸었는데 이것은 왕명에 의한 것으로 조계종 · 천태종 · 총남종(摠南宗)을 선종으로, 화엄종 · 자은종 · 중신종 · 시흥종을 합하여 교종으로 폐합하고, 흥천사(興天寺)를 선종도회소(禪宗都會所)로, 흥덕사(興德寺)를 교종도회소(敎宗都會所)로 삼았다.
조선에도 유명한 승려들이 있었는데 무학 자초(無學自超: 1327~1405)를 비롯하여, 호불론(護佛論)의 하나인 《현정론(顯正論)》을 제시한 함허 기화(涵虛 己和: 1376~1433) 등이 있다. 명종(明宗: 재위 1545~1567)때 문정왕후(文定王后: 1501~1565)의 비호로 허응당 보우(虛應堂普雨: 1515~1565)는 불교 부흥을 시도하였다. 그는 판선종사(判禪宗師)가 되어 도승법(度僧法)과 승과(僧科)를 시행한 결과 서산대사 휴정(休靜: 1520~1604), 사명대사 유정(惟政: 1544~1610)이 등용되어 각각 선 · 교 양종판사(禪 · 敎兩宗判事)가 되어 인재를 발굴, 억불정책 속에서도 계속 법맥(法脈)을 유지시키며 발전시켜 왔다.
이러한 소수의 유명한 승려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조선 시대 전체적으로는, 조선의 불교는 숭유배불(崇儒排佛) 정책으로 인해 신라나 고려에서 보여주던 왕성한 교학적 · 종교적 활동의 의욕이 자취도 없이 사라졌으며, 결과적으로 교학상 혹은 선리(禪理)상 독창력을 발휘하지는 못하였다. 조선의 승려들은 깊숙한 산사에 묻혀 개인의 수도에 전념할 수밖에 없었으며 종교의 대(對)사회적인 기능 같은 것은 전혀 생각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조선 500년의 불교는 국가의 숭유배불 정책에 의해 억압과 수난으로 점철된 법난(法難)의 시대였다.
조선 전기 (1392~1506)
조선 전기 불교의 전개
조선(1392~1897) 건국을 주도하였던 관학파 신진 사대부들은 고려말 불교의 많은 폐단을 봄에 따라, 도첩제를 시행하는 등 국가적인 억불책을 펼쳤다. 고려말부터 일어나기 시작한 유생(儒生)들의 배불(排佛)운동은 불교를 사교(邪敎)로 이단시하기까지에 이르렀다. 정도전(鄭道傳)은 《불씨잡변》을 통하여 당시 불교계의 타락상을 비판하였다.
이와 같이 억압책 속에서 불교계에서는 태조의 창업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는무학(無學: 1327~1405)을 비롯한 고승들이 나오기는 했으나, 교학상 혹은 선리(禪理)상 독창력을 발휘하지 못하였다.
태조(재위 1392~1398) 자신은 개국공신인 정도전과 조준 등의 진언으로 억불정책을 쓰면서도, 역성(易姓)혁명으로 인한 많은 인명을 살상한 죄업을 두려워하고 개국 초의 민심을 가라앉히기 위해서 전시대의 신앙을 존중하려 하였다. 태조는 즉위 초에 해인사 고탑을 중수하고 《대장경》을 인출하여 탑 속에 안치, 국리민복(國利民福)을 꾀하였다. 태조 6년(1397)에는 왕후 강씨를 위해 흥천사를 세우고, 수륙재를 베풀어 고려 왕씨들의 원혼을 달래기도 했다.
그러나 태종(재위 1400~1418)은 국가의 재정과 국방을 위해, 즉위하자 곧 불교 탄압에 착수, 종파를 병합하고 사원의 수를 줄이고 승려를 강제로 환속시켰으며,사찰 토지를 몰수하고 왕사와 국사의 제도를 철폐하였다.
세종(재위 1418~1450)도 태종의 억불정책을 계승, 더욱 강행하였다. 이러한 억불책 때문에 세종 1년과 3년에 승려들이 명나라로 가서 국내의 심한 박해를 호소한 일도 있었다. 세종 때에는 여러 종파들을 선(禪) · 교(敎)의 양종으로 폐합하고 성 밖의 승려에게 성안 출입을 금하게 하였다.
한편 세조(재위 1455~1468)는 일찍부터 신미(信眉) · 학조(學祖) 등의 당시 고승들을 가까이 하였다. 그는 왕위에 오르자 호불정책(護佛政策)을 썼다. 승려들에게는 다시 도성 출입을 자유롭게 허용하고 출가도 제한을 받지 않았으며, 관속들이 함부로 사찰에 침입하는 것을 금했다. 그 중에도 세조의 업적으로는 간경도감(刊經都監)을 설치, 불경의 번역과 간행에 힘쓴 일을 들 수 있다. 《월인석보》 등을 간행하고 《대장경》을 인출했다.
조선 태조와 불교
태조는 창업(創業) 이전부터 불교와 인연이 깊었으며 불교 신자였다. 그는 즉위하기 전에 이미 태고(太古) · 나옹(懶翁) 등의 고승들에 사사(師事)하였으며, 특히 무학대사(無學大師)와는 관계가 깊었다. 그리고 그의 창업에 전기(轉機)를 가져다 준 위화도(威化島) 회군(回軍) 때에는 승장(僧將) 신조(神照)의 도움이 컸으며 등극(登極) 후에는 곧 무학을 왕사(王師)로 삼고 어려운 건국사업(建國事業)을 완성코자 하였다.
태조는 즉위 초에 연복사탑(演福寺塔)을 중창(重創)하고 문수회(文殊會)를 베풀었으며, 해인사(海印寺) 고탑(古塔)을 중수(重修)하고 《대장경》을 탑 속에 안치하여 국가의 이익과 국민의 번영을 빌었다. 태조 3년(1394)에는 천태종의 조구(祖丘)를 국사(國師)로 삼고 승(僧) 100명을 내전(內殿)에서 반사(飯食)하였다. 6년(1397)에는 흥천사(興天寺)를 세워 조계선종(曹溪禪宗)의 본사(本寺)가 되게 하였고, 이듬해에는 강화(江華) 선원사(禪源寺)에 있던 대장경판을 지천사(支天寺)로 옮겼다. 이 밖에도 건국경찬사업(建國慶讚事業)으로 《대장경》 인경(印經)과 금은자 사경(金銀子寫經)을 하게 하였다.
《실록(實錄)》에 전하는 불교행사만 해도 인경(印經) 12회, 소재회(消災會) 14회, 불사법석(佛事法席) 35회, 반승(飯僧) 9회 등을 들 수 있다. 주위 여론이 승니(僧尼)를 도태시키고 사원(寺院)을 혁파(革罷)해야 한다고 했으나 태조는 개국(開國) 초기부터 그렇게 할 수 없다 하여 척불(斥佛)에 휩쓸리지 않았다.정도전(鄭道傳) · 조준(趙浚) 등도 척불을 주장했으나 태조의 신불(信佛)은 변함이 없었다. 그는 자호(自號)를 송헌거사(松軒居士)라 하였고, 왕위를 떠난 뒤에도 염불삼매(念佛三昧)로 만년을 보냈다.
배불정책
불교 자체의 부패와 유생들의 척불(斥佛)은 태종(太宗: 재위 1400~1418)이 즉위하면서부터 정치적으로 다음과 같은 배불정책(排佛政策)을 단행하게 하였다.
① 종파(宗派)를 병합하고 사원(寺院)수를 줄이며 승려를 환속(還俗)시켰다.
② 사찰 토지를 국유(國有)로 몰수하고 사원에 딸린 노비(奴婢)를 군정(軍丁)에 충당하였다.
③ 도첩제(度牒制)를 엄하게 하고 왕사 · 국사를 폐지하였다.
④ 능사(陵寺)의 제도(制度)를 금하였다.
태종 2년(1402)에 왕은 서운관(書雲觀)의 상언(上言)에 좇아 경외(京外)의 70사(寺)를 제외한 모든 사원의 토전(土田) · 조세(租稅)를 군자(軍資)에 영속케 하고 노비를 제사(諸司)에 분속(分屬)시켰다.
태종 5년(1405) 11월에는 의정부(議政府) 상서에 좇아 개성(開城)과 신경(新京: 지금의 서울)에 각종(各宗)의 사원 1사(寺)씩,목(牧)과 부(府)에는 선종 사찰 하나와 교종 사찰 하나, 각 군현(郡縣)에는 선종 · 교종 가운데서 1사(寺)씩만 두고 다른 사원은 모두 없애게 하였으며, 노비의 수도 대폭 줄이고 토지는 국가에서 몰수하였다. 그러나 연경사(衍慶寺) · 화장사(華藏寺) · 신광사(神光寺) · 석왕사(釋王寺) · 낙산사(洛山寺) · 성등사(聖燈寺) · 진관사(津寬寺) · 상원사(上元寺) · 견암사(見岩寺) · 관음굴(觀音窟) · 회암사(檜巖寺) · 반야사(般若寺) · 만의사(萬義寺) · 감로사(甘露寺) 등만은 노비(奴婢)와 토지를 감(減)하지 않았다.
이듬해 태종 6년(1406) 3월에는 의정부(議政府)의 계청(啓請)에 좇아 전국에 남겨둘 사찰의 수를 다음과 같이 정하여 이밖의 사원은 모두 폐지하도록 하였다.
· 천태소자종(天台疏字宗)과 법사종(法事宗)을 합해서 43사
· 자은종(慈恩宗) 36사
· 남산종(南山宗) 10사
· 시흥종(始興宗) 10사
그리고 신 · 구 양경(兩京)에는 선종 · 교종의 각 1사(寺)에 200결(結)의 속전(屬田)과 100명의 노비로써 100명의 승려를 상양(常養)하게 하고 그외 경내(京內) 각사는 속전 100결에 노비 50인으로 50명의 승려를 상양케 했으며, 각도 수관지(首官地)에는선 · 교 중에서 1사에 100결의 속전과 50명의 노비로써 50명의 승려를, 각 관읍내(官邑內)의 자복사(資福寺)에는 급전(給田) 20결에 노비 10명으로써 승려 10명을, 읍외(邑外)의 각사에는 급전 60결에 노비 30명으로써 승려 20명을 상양케 하도록 하였다. 이와 같은 가혹한 정부의 처사에 석성민(釋省敏) 등이 수백 명의 승려를 이끌고 신문고(申聞鼓)를 쳐서 복구를 호소하였으나 관철되지 못하였다.
세종(世宗: 재위 1418~1450) 역시 억불정책(抑佛政策)을 강행하려 하였으나, 세종 원년과 3년에 승려들이 명나라에 가서 명제(明帝) 성조(成祖)에 호소한 사실에 의해서 세종의 배불은 완화되었다. 그러나 세종 6년에는 종단을 폐합하여 선(禪) · 교(敎) 양종(兩宗)으로 하고 태종에 의하여 전국 242개 사찰로 축소되었던 것을 다시 36개사로 줄였으며, 성외(城外) 승려에게 성내(城內) 출입을 금하였다.
□ 조선 후기 및 대한제국 (1637~1910)
조선 후기 및 대한제국 불교의 전개
명종 20년(1565) 4월에 문정왕후가 세상을 떠나자 흥불 사업이 중도에서 꺾어지고 억불책이 다시 시행되었다.그 후 승려들은 도성 출입이 다시 금지되었고 깊숙한 산사에 묻혀 개인의 수도에 전념할 수밖에 없었다.
고종 32년(1985) 4월 입성(入城) 금지령이 해제되었다. 그것도 일본 승려들의 요구에 의해서였다. 그때 일본의 승려들은 마음대로 성안 출입을 하는데 정작 자국의 승려들은 출입을 금지당한 모순을 보고 일본 일련종(日蓮宗)의 승려 사노(佐野)가 총리대신 김홍집에서 상서하여 고종의 허락을 받게 된 것이었다. 오랜 세월 동안 발을 들여놓지 못하던 성(城) 안에 자유로이 전교할 수 있게 되자 암담했던 불교는 겨우 숨을 돌리게 되었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일제(日帝)에게 나라가 송두리째 넘어가고 말았다.
이때는 일본의 각 종파의 승려들이 드나들면서 전도에 종사하고 있었다. 정부에서도 뒤늦게서야 배불정책을 지양하고 관리서(管理署)를 두어 국가적인 관리를 꾀하게 되고, 1899년 동대문 밖에 원흥사(元興寺)를 세워 국내 수사찰(首寺刹)을 삼고, 13도에 각각 1개의 수사(首寺)를 두어 사찰의 사무를 총괄하게 하였다.
불교계 자체에서도 전국 사찰의 통합을 위한 움직임이 일어났다. 1908년 3월에 전국 승려 대표자 52인이 원흥사에 모여 그동안 종명(宗名)마저 없어져 버린 한국불교를 개탄하고 원종(圓宗)이라고 종명을 의정(議定)했다. 그때 해인사 주지이던 이회광(李晦光)을 대종정으로 추대했다.
불교연구회
관리서가 폐지된 뒤 광무 10년(1906) 2월에 홍월초(洪月初) · 이보담(李寶潭) 등이 불교연구회(佛敎硏究會)를 창립하여 원흥사에 본부를 두고 지방 각 사찰에 지부를 두었다. 불교연구회는 일본 정토종(淨土宗)의 영향을 받아 설립된 것으로서 정토종을 종지(宗旨)로 하였다. 그리고 불교 교육기관으로 명진학교(明進學校)를 설립하였다. 초대 회장은 홍월초, 그 뒤를 이어 이보담이 회장이 되고 명진학교 교장(校長)을 겸직하였다.
원종의 성립
융희(隆熙) 2년(1908) 3월 전국 승려 대표자 52인이 원흥사에 모여 회의하고, 원종 종무원(圓宗宗務院)을 세웠다. 배불정책으로 말미암아 종명(宗名)마저 없었던 일부 불교계에서는 일본 불교의 각 종파(宗派)의 활동에 자극을 받아 종명(宗名)을 밝힐 필요를 느꼈던 것이다. 그래서 전국승려대표자회의를 열어 원종(圓宗)이라 결의하고 대종정(大宗正)으로 이회광(李晦光)이 추대되었다.
융희 4년(1910)에는 각황사(覺皇寺)를 창건하여 조선불교중앙회의소 겸 중앙포교소(中央布敎所)로 하였다. 이해 가을 종정 이회광은 일본으로 가서 일본 조동종(曹洞宗)의 관장(管長) 이시가와(石川素童)를 만나 원종과 일본 조동종의 연합체맹(聯合締盟)에 합의를 보고 7조의 조약을 체결했다. 그러나 이것은 국내 교계와 아무런 의논도 없이 단독으로 이루어진 것이었으므로 그 조약이 조선불교를 일본에 팔아먹는 매교행위(賣敎行爲)라는 반대운동이 일어났다.
이판승과 사판승
조선의 억불정책에 의하여 승려는 사회에서 가장 천인 대우를 받았다. 그리고 유역(油役) · 지역(紙役) · 혜역(鞋役) · 잡역(雜役) 등의 천대가 극심했다. 이에 견디기 어려워 황폐한 사원이 많이 생겼으며, 이때 이판승과 사판승의 두 유별(類別)이 생기게 되었다.
당시 수행에 전념하는 유능한 승려들은 산중으로 들어가고, 공부와는 거리가 멀고 다소 무식한 승려들이 사원을 맡아 그 실무를 보며 지켜왔다. 그러나 이들이 조선 말기 교단의 혜명(慧明)을 유지하고 심한 관가(官家)의 주구(誅求)와 잡역을 감당하며 사원을 지켜온 공은 컸다. 이때부터 참선(參禪) · 간경(看經) · 염불(念佛)을 비롯한 수도(修道)에 종사하는 승려를 이판승(理判僧)이라 하고, 사원의 운영 실무를 맡아 보는 승려를 사판승(事判僧)이라 했다.
□ 일제 강점기 (1910~1945)
일제 강점기 불교의 전개
1910년에 각황사(覺皇寺)를 창건, 중앙회 사무실 겸 중앙포교소로 삼았다. 이회광이 그해 가을 일본 조동종과 임의로 연합조약에 합의하자, 국내 교계에서는 크게 반발, 개종역조(改宗易祖)의 매교행위라고 규탄하였다.
박한영 · 진진홍 · 한용운 등이 궐기하여 1911년 1월 영남과 호남의 승려를 모아 송광사에서 총회를 열고 임제종(臨濟宗)을 세웠다. 그러나 이와 같은 대립도 1911년 6월 조선총독부가 사찰령(寺刹令)을 공포하자, 불교도 국운의 쇠퇴와 함께 식민지 통치아래 들고 말았다. 이때 전국 사찰을 30본산으로 나누어 유기적인 관계를 단절해 놓았다.
이 무렵 불교청년회 및 불교유신회가 생겨 사찰령의 폐지와 정교(政敎) 분리를 주장하는 운동을 펼쳤다.
임제종
1910년에 원종(圓宗)이 일본의 조동종과 연합한 데 반대하여, 박한영(朴漢永) · 진진응(陳震應) · 한용운(韓龍雲) 등이 궐기하여 이듬해 1911년 1월 영 · 호남 승려를 모아 순천 송광사(松廣寺)에서 총회를 열고 임제종(臨濟宗)을 세웠다.
임제종 임시종무소를 송광사에 두고, 관장으로 선암사(仙巖寺) 김경운(金擎雲)을 선정하였다. 그러나 연로하여 한용운이 대리로 종무(宗務)를 맡게 되었으니 광주 등지에 포교당을 설치하고 원종과 대치하여 조선 불교의 정통성을 견지하려 하였다.
그러나 1911년 6월 조선총독부는 사찰령 7조를 발포하고, 7월에 사찰령 시행규칙 8조를 발포하여 모든 사원과 승려의 문제를 규제하였다. 이리하여 원종과 임제종은 모두 저절로 없어지게 되었다.
30본산연합회
1915년 30본산에서는 포교 및 교육의 일원화를 위해 본사 주지들이 회의를 하여 30본산연합제규(聯合制規)를 제정하고, 각황사(覺皇寺)에 30본산연합사무소를 두었다. 위원장은 30본산의 주지 가운데서 선정하여 연합사무를 맡게 하였다. 이것은 30본산이 교구로 성립되고 총독의 지배를 받게 되어 유기적인 관계가 결여됨으로 인해 이를 시정하기 위하여 이루어진 것이다. 그러나 전국 사찰을 총괄하고 전 승려를 통제하지는 못하였다.
총무원과 종무원
조선 불교계에 대한 일제의 간섭과 통제가 점점 심해지자, 신진 소장 승려들이 주동하여 신성한 종교가 행정관청의 지시를 받는 것은 옳지 않다고 주장하고 전국승려대회를 열었다.[58] 이러한 움직임에 의하여 1921년 각황사에 조선불교 선교양종 중앙총무원(총무원)을 설치하고 전국 사찰을 총괄하는 기구로 삼고자 하였다. 그러나 30본사 주지 중에서 반대하는 의견이 생겨, 이듬해(1922)에 별도의 기구인 조선불교 선교양종 중앙종무원(종무원)이 역시 각황사에 설치되었다. 이리하여 같은 건물에 두 개의 간판을 걸고 총무원(總務院)과 종무원(宗務院)이 서로 정통임을 주장하였다.
1925년 마침내 총무원과 종무원 사이에 타협이 이루어지고 양원(兩院)은 하나로 뭉쳐 재단법인 조선불교 중앙교무원(교무원)으로 되었으며, 교단은 통일적인 중앙종무기구를 갖게 되었다.
조계종의 성립
일제 치하의 한국 불교 교단은 그 종명(宗名)을 "조선불교 선교양종"이라 하였다. 그러나 보다 선명한 종명이 필요하였고 유기적인 중앙통제적 체제가 요구되었다. 이리하여 태고사(太古寺)를 세워 총본산을 삼고 종명을 "조계종"으로 결정하여 1941년 4월 23일부로 조선불교조계종 총본사 태고사 사법(寺法) 전16장 130조의 인가를 얻었다. 제1대 종정에 한암 중원(漢岩重遠)을 추대하고 종회법 · 승규법을 차례로 제정 · 발포하였다.
불교지의 간행
신문화의 영향을 받아서 한국의 불교계가 최초로 잡지를 발간한 것으로는 1910년 12월의 《원종(圓宗)》을 들 수 있다. 그러나 《원종》지는 원종 종무원의 기관지(機關誌)이며 겨우 2호로서 종간(終刊)되었다.
불교문화의 종합지이며 문화기구로서의 본격적인 불교잡지는 1912년 2월에 발간된 《조선불교월보(朝鮮佛敎月報)》부터라고 할 것이다. 《조선불교월보》(편집인 및 발행자: 권상로(權相老))이며 1913년 8월에 19호로 종간되었다. 동년 11월에 《해동불보(海東佛報)》(편집인 및 발행자: 박한영(朴漢永))가 발간되었다가 1914년 6월에 8호로 종간되었다. 1915년 3월에는 《불교진흥회월보(佛敎振興會月報)》(편집인 및 발행자: 이능화(李能和))가 발간되었다가 동년 12월에 9호를 내고 종간되었다.
1916년 4월에 《조선불교계(朝鮮佛敎界)》(편집인 및 발행자: 이능화(李能和))가 발간되었으나 겨우 3호를 내고 동년 6월에 종간되었으며, 1917년 3월《조선불교총보(朝鮮佛敎叢報)》(편집인 및 발행자: 이능화(李能和))가 발행되어 1920년 5월에 21호를 내고 종간되었다.
1924년 7월에는 《불교(佛敎)》(편집인 및 발행자: 권상로(權相老))가 발행되어 10년을 속간하다가 1933년 6월에 107호를 내고 정간되었으며, 또 1937년 3월에 《불교》지가 다시 속간되어 이를 《불교신(佛敎新)》이라 하였는데 해방 전까지 계속되었다.
이 밖에도 1914년에 동경 유학생들이 발간한 《금강저(金剛杵)》와 1920년에 통도사(通度寺)에서 발간한 《취산보림(鷲山寶林)》, 또 동년에 조선불교청년회 통도사지회(支會)의 《조음(潮音)》, 1924년 7월에 조선불교회 발행인 《불일(佛日)》, 동년에 북경 불교유학생회에서 발행한 《황야(荒野)》, 1935년 발간된 《불교시보(佛敎時報)》, 불교전수학교 교우회에서 발행했던 《일광지(一光誌)》 등이 있었다.
□ 현대 (1945~현재)
1945년 해방과 더불어 한국 불교의 고유성을 되찾는 운동이 전개되어 1954년에서 1962년까지 승단정화(僧團淨化)의 기치를 내세워 1962년 4월 12일 통합종단인 대한불교 조계종이 발족되고 25교구(敎區) 본산제도가 실시되었다. 그러나 대처승(帶妻僧) 측은 끝내 불응하여 대한불교 태고종(太古宗)을 별립(別立)해 나갔고, 조계종단은 교세를 단합하여 한국불교가 직면한 3대불사(도제양성 · 포교사업 · 역경간행)에 박차를 가하였다.
■ 불교, 어떻게 인도에서 세계로 퍼졌을까?
먼 옛날, 지금의 인도와 네팔 국경 부근 히말라야 산기슭에 작은 나라가 있었어요. 기원전 563년 음력 4월, 이 나라의 왕비였던 마야 부인은 아기를 낳기 위해 친정으로 향했습니다. 그녀는 길을 가던 중 네팔의 룸비니라는 곳을 지나가다 아름다운 호수를 만났어요. 호수에서 몸을 씻고 잠시 쉬는 사이, 갑자기 진통이 찾아왔습니다. 마야 부인은 나무 아래에서 아들 고타마 싯다르타를 낳았어요. 이 아이는 먼 훗날 '깨달음을 얻은 자'라는 뜻의 '부처'라는 이름을 갖게 되지요. 그리고 자비와 평등의 종교, 불교(佛敎)를 만들었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음력 4월 8일(올해는 양력 5월 6일)을 '부처님 오신 날'로 지키며, 이날 연등행렬·법회·방생 등 다양한 행사를 열어요. 불교를 믿는 다른 아시아 국가에서도 날짜에 조금씩 차이가 있지만, 모두 부처님 오신 날을 크게 기념합니다. 그런데 인도의 작은 나라에서 만들어진 불교가 어떻게 세계적인 종교가 되었을까요?
불교가 만들어지고 300여 년이 흐른 후, 인도 땅에 큰 변화가 나타났어요. '마우리아'라는 통일왕국이 처음으로 들어선 거예요. 찬드라굽타가 세운 이 나라는 인도 남동쪽 칼링가와 남부 지역을 제외한 대부분 지역을 모두 통일했어요. 그리고 제3대 왕인 아소카는 마우리아 왕국을 가장 강력한 나라로 만들었지요. 그는 왕이 되기 위해 100명이 넘는 형제와 권력 다툼을 벌였고, 99명의 형제를 살해한 끝에 왕위에 올랐다고 해요. 이에 반대하는 신하들도 모두 죽임을 당했습니다.
아소카는 왕이 된 후 영토를 넓히고자 칼링가를 침략했어요. 보병 60만명, 기병 10만명, 코끼리 9000마리로 구성된 대군을 이끌고 치열한 전투를 벌였지요. 이 전투로 10만명의 사람이 죽고, 15만명이 포로가 되었습니다. 바람대로 왕국의 영토는 넓어졌지만, 아소카의 마음은 편하지 않았어요.
'무엇을 위해 사람을 죽였을까' '왜 여자와 어린아이처럼 죄 없는 사람이 희생되어야 했을까' 등 많은 후회가 밀려왔지요. 승리의 기쁨은 잠시였고, 죄책감에 잠 못 드는 밤이 늘어났어요. 잔인한 왕이었던 아소카는 칼링가 전투를 계기로 자신의 욕심이 얼마나 많은 사람에게 상처를 주었는지 반성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자비'와 '평화'라는 부처의 가르침에 따라 왕국을 통치하기로 마음먹지요.
아소카가 불교를 믿기 시작하면서 인도에 많은 변화가 생겼어요. 생명을 살리고자 사람과 동물을 위한 병원이 만들어지고, 육식이 금지되었습니다. 각 지역에 도로가 건설되고 여행자를 위한 숙소도 생겼지요. 가난한 사람을 위한 구호시설을 세우고, 길에는 과일나무를 심어 언제든지 나그네가 열매를 따 먹을 수 있도록 했어요. 곳곳의 우물과 저수지는 누구나 이용할 수 있었지요.
아소카 왕은 부모와 어른을 공경하고, 무거운 짐을 들고 가는 사람이 있으면 도와주라고 백성에게 강조했어요. 아소카 왕은 이러한 내용을 절벽의 바위나 돌기둥에 새겨 널리 알리도록 했습니다. 불교의 가르침을 담은 수십 개의 돌기둥이 세워지고, 사람들은 자비와 평등을 실천하기 시작했어요. 특히 사르나트에 세운 사자 장식 돌기둥은 오늘날 인도의 상징이 될 만큼 아름답게 만들어졌지요. 아소카는 부처와 관련된 유적지를 순례하고 돌기둥을 세웠어요. 오랜 세월 방치된 룸비니가 부처의 탄생지라는 사실이 알려진 것도 아소카가 세운 돌기둥 덕분이었답니다. 그는 부처의 몸에서 나온 사리를 찾아내 8만4000개로 나누어 각 지역에 전하고, 사리를 보관하는 스투파(탑)를 곳곳에 세웠다고 해요. 그리고 불교를 전파하는 사람들을 지중해 주변의 그리스·마케도니아·이집트·시리아 등으로 파견했습니다. 아소카의 아들과 딸이 동남아시아의 실론(지금의 스리랑카)에 불교를 전하면서 미얀마·태국까지 불교가 퍼져 나갔어요. 욕심을 버리고 자비와 평등을 강조하는 불교 교리에 아소카의 노력이 더해져 세계적인 종교로 성장하기 시작한 거예요.
한때 잔인한 왕의 상징이던 아소카는 이제 '평화'를 상징하는 왕이 되었어요. 지금도 많은 인도인이 아소카를 인도를 대표하는 왕으로 기억한답니다. 불교에서는 위대한 왕을 '전륜성왕(轉輪聖王)'이라고 부르는데, 아소카는 속세(俗世·불교에서 일반 사회를 이르는 말)를 다스리는 전륜성왕이라는 칭송을 받아요. 아소카가 죽고 얼마 지나지 않아 마우리아 왕국은 멸망하지만, 불교는 계속해서 퍼져 나갔지요. 이후에 들어선 쿠샨 왕국의 카니슈카 왕은 비단길을 따라 중국·우리나라·일본 등 동북아시아 지역에 불교를 전파했답니다.
세월호 참사의 슬픔 속에 맞이하는 부처님 오신 날,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아소카가 세운 돌기둥에는 저마다 다른 내용이 담겼지만, '경건한 마음과 생명 존중, 정직한 태도'는 공통으로 강조되어 담긴 덕목이에요. 요즘 이 말의 의미가 더 가슴 깊이 와 닿습니다.
▲ (사진 왼쪽)아소카 왕은 나라 곳곳에 불교의 가르침을 담은 돌기둥을 세웠어요. 그가 세운 사자 장식 돌기둥은 지금 인도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사진 오른쪽)아소카 왕은 자비와 평화를 통치 이념으로 삼고, 그리스·이집트 등 전 세계로 불교를 전파했어요. /Corbis/토픽이미지, 위키피디아
공미라 | 세계사 저술가
■2014.10.03 [불교와 원불교]
"원불교는 불교인가요, 아닌가요?"
종교 담당 기자가 가끔 받는 질문이다. 원론적으로 말하자면 '원불교는, 불교에 뿌리를 뒀지만 불교는 아니다' 정도가 아닐까. 불교와 원불교는 공통점도 많고 다른 점도 많다.
이는 1916년 소태산 박중빈이 원불교를 개교(開敎)할 때 불교에 기반을 뒀기 때문이다. 시작부터 광복까지 일제강점기에는 공식 명칭도 '불법(佛法)연구회'였다. 불교와 공통점은 참선 수행을 통해 해탈(解脫)을 구한다는 점이 가장 크다. 소태산이 스스로 수행을 통해 정리한 '원불교 교전(敎典)'도 불교 교리를 집대성해 현대화한 것이다. 교당에 불상(佛像) 대신 깨달음을 상징하는 둥그런 원(圓)만 있는 것도 불교 선방(禪房)에 불상을 모시지 않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일러스트=이철원 기자
그러나 다른 점도 많다. 불교의 비구와 비구니는 공식·비공식적인 격차가 있지만 원불교의 남녀 교무는 거의 평등하다. 여성 교무가 교구장과 중앙총부의 행정기관장을 맡는 사례가 수두룩하고 조계종으로 치면 총무원장인 교정원장까지 여성이 이미 지냈다. 종법만 따진다면 최고 지도자인 종법사(宗法師)도 여성이 맡을 수 있다. 다만 남성 교무는 결혼할 수 있지만 여성은 그렇지 않다. 검정 치마에 흰 저고리, 쪽 찐 머리 등 조총련 학교 학생 같은 차림새로 어디서나 눈에 확 띄는 복장이 여성 교무들에겐 불만이랄까, 그 외에는 남녀평등이다.
교도(신자)와의 관계도 그렇다. 종법사를 뽑는 종단 어른들의 모임인 수위단(首位團)에도 교무 대 신자 비율이 3대1 정도다. 20세기 초반 서구 신식 문물이 제국주의와 함께 해일처럼 들이닥치던 시절, '물질이 개벽하니 정신을 개벽하자'는 기치를 들고 탄생한 '신식 종교'다운 점들이다. 특히 부정부패와는 담쌓고 극도로 청빈하게 살아온 여성 교무들의 헌신은 오늘의 원불교가 국내 4대 종교로 발돋움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는 평가다.
수년 전 기자들이 전북 익산의 은퇴 교무들이 사는 중앙수도원을 방문했다. 파파 할머니 교무들은 연신 싱글벙글이었다. "평생 용금(用金·용돈)이 뭔지도 모르고 살았는데 여기 오니 돈을 줘요. 게다가 여기저기서 법문해달라고 하고, 법문하면 또 돈 주지…." 당시 그들이 받는 용금은 월 23만8000원이었고, 지금도 그대로다. 그리고 현역 교무들의 기본급은 월 38만원이다. 물론 의식주는 제공하고 자녀의 학자금은 뺀 금액이다.
조선일보 김한수 종교전문기자
■ 2016.04.20 원불교 100년 …
▲1926년 개교한 지 10년이 됐을 때 소태산 대종사(가운데)가 동선(冬禪·동안거) 기념으로 제자들과 찍은 사진. 소태산 주위의 제자들이 꽃을 들고 있는 모습이 눈길을 끈다. 올해는 원불교 개교 100주년 이다. [사진 원불교]
1916년 원불교를 연 소태산(少太山·1891~1943, 본명 박중빈) 대종사는 이렇게 말했다. “너희가 교단 일을 잘해서 나중에 비행기 타고 외국으로 나갈 거다. ‘소쿠리 비행기’도 타고다닐 거다.” ‘소쿠리 비행기’는 헬리콥터를 가리킨다. 일제 식민지 시절이던 당시에는 그저 ‘상상 속의 이야기’였다. 그랬던 원불교가 개교(開敎) 100주년을 맞는다. 대종사의 예언대로 미주 총부(뉴욕 원다르마센터)까지 설립했다. 다음달 1일에는 서울 월드컵경기장에서 ‘원불교 100주년 기념대회’를 개최한다.
내달 기념대회 여는 한은숙 교정원장
“가만히 있으면 물질의 노예 돼”
23개국에 교당 600개 교도 137만 명
"감사·은혜로 자신을 열고 또 열어야”
그 사이에 교도 수는 137만 명, 교당 수는 600개를 넘어섰다. 해외 23개국에 원불교 교당이 세워졌다. 19일 서울에서 만난 원불교 행정수반 한은숙(사진) 교정원장은 손을 저었다. “앞으로 수량적인 발전은 지양해야 한다. 살다 보면 속고 또 속는 게 물량이다. 세상에 종교인이 많다고 해서 세상이 더 안정적으로 되는 건 아니지 않나? 대종사께서는 ‘물질이 개벽되니 정신을 개벽하자’고 하셨다.” 100주년 기념대회의 주제도 ‘정신개벽’이다. 한 교정원장은 “만유(萬有)가 한 법이다. 각 종교의 교법은 달라도 결국 사랑과 평화를 말한다. 그 ‘하나’를 향해 가는 게 종교”라고 덧붙였다.
최근에 벌어진 바둑기사 이세돌 9단과 인공지능 알파고의 대국을 예로 들었다. “이제는 물질이 ‘발전’하는 게 아니라 ‘개벽’된다. 양적인 발전이 아니라 질적인 대비약(大飛躍)을 이룬다. 그런데도 사람의 정신이 가만 있으면 어찌 될까. 물질의 노예가 될 위험이 있지 않겠나. 정신을 개벽해야 한다. 그래야 정신과 물질이 하나가 된다. 그럴 때 물질을 지혜롭게 굴릴 수 있는 힘이 생긴다.”
‘정신개벽’을 위해 한 교정원장은 두 가지를 강조했다. ‘감사와 은혜’. “이 세상의 모든 것, 설사 적이라 할지라도 우리는 상대가 없이는 못 사는 존재라는 걸 알아야 한다. ‘개벽’은 ‘열 개(開)’자에 ‘열 벽(闢)’자다. 열고 또 열어야 한다. 그렇게 자신을 여는 길이 ‘감사와 은혜’다. 그건 ‘개벽’과도 연결된다”고 강조했다.
25일엔 상생·치유의 천도재 열어
사회 갈등 씻는 거국적 살풀이
원불교는 100주년 기념대회에 앞서 거국적인 특별 천도재를 연다. 25일 서울 시청 앞 서울광장에서 ‘일제강점기’‘한국전쟁’‘산업화’‘민주화’‘세월호를 포함한 재난재해’ 희생 영령에 대한 천도재를 마련한다. 각 분야의 유족들도 초청한다. 좌파와 우파, 진보와 보수로 갈라져 싸우는 한국사회의 상처와 갈등을 씻어내리는 거국적 ‘살풀이’다.
정상덕 100주년기념대회 사무총장은 “지리산에서 천도재를 지낼 때도 군경 측과 빨치산 측, 입장이 달라 함께 지내기가 참 힘들었다. 이번 천도재는 그 모든 상처를 향해 해원(解寃)과 상생(相生), 치유를 기원한다”며 취지를 설명했다. 소태산 대종사의 어록과 자료들을 모아서 『소태산 대종사 평전』(가제)도 5월에 출간한다. 김형수 작가가 집필을 맡았다. 지금껏 소태산의 생애를 다룬 소설과 만화는 있었으나 평전은 처음이다.
‘원불교 100주년 기념대회’에서는 영어·프랑스어·일어·아랍어·스페인어 등 10개국어로 번역한 『원불교 전서』에 대한 법어봉정식도 갖는다. 경산 종법사의 법문에 이어 ‘정신개벽’ 서울선언문도 선포한다. 이달 28~30일 전북 익산 원불교 중앙총부 반백년기념관에서는 ‘종교·문명의 대전환과 큰적공’을 주제로 국제학술대회를 개최할 예정이다.◎
백성호 기자 vangogh@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