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 이야기1/ 김환영의 종교 이야기 - 종교와 웃음/ 동학이후 이땅에서 명멸한 종교 개수는? 정답 : 900여개/ 김한수의 종교 이야기 - 2015.02.13 建國주역 이승만, 반석에 올린 '스타 목사님' - 2017..
종교 이야기1
■ ① 종교와 웃음 - 예수님과 부처님은 유머·조크의 ‘달인’
김환영의 종교 이야기 월간중앙 2016-05-14
최근 ‘성(聖) 속의 웃음’ 등 연구하는 학자들 늘면서 웃음이 종교의 ‘핵심’이라는 주장도 제기돼…
과격 이슬람주의와 혼동하기 쉽지만 이슬람 자체는 평화와 웃음의 종교라는 사실
최근 종교와 웃음의 관계를 연구하는 종교학자·종교사회학자들이 늘면서 웃음이 종교의 핵심이라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지난해 석가탄신일을 앞두고 대구 팔공산 동화사에서 열린 동자승 단기출가 및 수계식에 참가한 유치원생들이 환히 웃고 있다[중앙포토]
근대화가 시작되면서 많은 사람이 종교의 종언을 예상했다. 신앙인은 얼핏 수가 줄어드는 것 같으면서도 사실은 늘고 있다. 미국·유럽 등지에선 줄었다지만 세계 다른 지역에서는 새로운 신자들이 증가한다. 또 기성 종교의 신자 수는 줄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많은 사람이 영성 세계의 문을 두드린다. 또 무신론자가 많아지고 있지만 그들은 신앙인보다도 더욱 종교적인 사람들이다. 탈근대의 시대에 전근대·근대의 요소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혼재한다. 전근대·근대·탈근대가 부딪히는 현장에 종교가 있다. 종교의 여러 가지 측면을 두루 살펴보고자 한다.
“마리아 막달레나가 그 사이에 시집가진 않았지?”
불경이든 그리스도교 성경이든 천도교의 동경대전·용담유사든, 원불교의 정전·대종경이든 모든 경전은 우리를 다양한 관점과 해석의 세계로 초대한다. 예컨대 논어에 나오는 “내게 벗이 있어 먼 곳에서 스스로 찾아온다면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有朋自遠方來 不亦樂乎)”에 대해서도 여러 가지 해석이 가능하다.
예컨대 공자님이 ‘나도 친구가 있으면 참 좋겠다’는 외로운 심정을 토로한 문장일 수 있다. 그 벗은 내가 불러서 오는 벗이거나 다른 일을 보러 오는 김에 나를 찾는 벗이 아니라 그저 내가 좋아 스스로 오는 벗이다. 내가 아무리 싫은 기색을 보여도 나를 너무나 좋아하는 벗인지도 모른다.
공자님은 제자는 많았으나 친구는 별로 없었다. 또 ‘외톨이’였던 공자님은 친구가 있다면 먼 곳에 있기를 바랐는지 모른다. 가까운 곳에 있으면 자주 보게 된다. 자주 왕래하며 ‘뭉치다’ 보면 공부에 방해가 된다. 공자가 인생을 바친 목표에 친교는 차질을 빚게 만들 수 있다.
공자님뿐만 아니라 예수님·부처님 등 다른 성현도 친구에 대해서는 별로 알려진 게 없다. 세계 주요 종교의 경전을 보면 성현과 제자들이 나눈 대화가 중심을 이룬다. 어떤 상황이 벌어지면 그 의미에 대해 제자가 스승에게 질문한다. 그러면 스승은 명쾌한 대답으로 제자들이 찍소리 못하게 ‘제압’했다.
‘스승의 그림자도 밟지 않는다’고 했다. 스승은 근엄한 존재다. 세계적인 종교의 교조는 존경을 넘어 경외의 대상이다. 교리가 확정돼 공식화 된 다음에는, 함부로 하는 해석이 도그마 옹호 성향 신자의 저항을 부를 수 있다.
부처님과 예수님은 ‘유머·조크의 달인’이었다는 학계의 주장이 있다. 그런 말을 들으면 인지부조화(cognitive dissonance)를 느낄 수 있다. 국어사전을 펼쳐보자. 우스개·익살·해학으로 순화할 수 있는 유머(humor)는 “남을 웃기는 말이나 행동”이다. ‘농담·우스개’로 순화할 수 있는 조크(joke)는 “실없이 장난으로 하는 말이나 익살”이다. 성현들이 ‘실없는’ 사람들이었다는 말인가? 당연한 의문이다.
l 경전 대하는 ‘심각한’ 태도도 유머 놓치게 해
▲이집트 카이로 대학 앞 거리에서 다채로운 색깔의 히잡을 쓴 여대생들이 밝은 표정으로 걸어가고 있다.[중앙포토]
자신이 믿는 종교를 위해서라면 기꺼이 목숨까지 바치는 사람들이 있다. 순교자를 배출하지 않는 종교는 없다. 영국 성직자·작가 찰스 케일럽 콜턴(1780~1832)은 이렇게 말했다. “사람들은 종교를 위해 언쟁을 벌이고, 글을 쓰고, 싸우고, 죽기까지 하지만 종교를 위해 ‘살지는’ 않는다.” 결사를 다짐하고 사는 사람들에게 “당신이 따르는 그는 ‘유머·조크의 달인’이었다”라고 말한다면 그들은 분노할지 모른다.
움베르토 에코(1932~2016)가 지은 <장미의 이름>은 ‘수도사들이 큰소리로 웃으면 안 된다’는 견해 때문에 발생한 살인 사건을 배경으로 한다. 지금은 중세가 아니지만 21세기를 중세처럼 사는 사람도 있다. 그게 꼭 나쁜 것은 아니며 그들에겐 그렇게 살 권리가 있다. 무함마드를 희화화(戱畵化)했다는 이유로 프랑스에서 벌어졌던 참극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그렇지만 한번쯤은 웃음과 종교의 관계는 어떤 것인지 생각해봐야 하지 않을까. 일상생활에서 웃음을 빼면 큰 구멍이 뚫린 것 같을 것이다. 옛말에 “웃는 낯에 침 못 뱉는다”, “웃는 집에 복이 있다”고 했다. 영어문화권에서는 “웃음은 최고의 명약이다(Laughter is the best medicine)”라고 한다. 웃음은 보편적인 현상이다. 대다수 언어에서 mother-mom, mutti-mutter, mère-maman, 어머니-엄마 등 ‘ㅁ·m’ 소리가 들어간다. 하지만 ‘하하(ha ha)’는 거의 모든 언어에서 웃음소리를 표기하는 단어다.
하지만 웃음은 왠지 속(俗)에만 속할 뿐 성(聖)과는 무관한 것으로 느껴질 때가 있다. 물론 모든 종교문화권에는 종교생활을 둘러싼 우스갯소리가 있다. 예컨대 이런 것이다. 주일학교 선생님이 “예배 시간에는 왜 조용해야 하죠”라고 묻자 한 어린이가 이렇게 대답했다. “사람들이 자고 있으니까요.” 재미있는 실화도 있다. 교황 요한 23세(1958~63 재위)에게 “교황 성하, 바티칸에서는 몇 명이나 일을 합니까”라고 묻자 교황이 대답했다. “아, 그들 중 약 반 정도는 일을 할 겁니다.”
최근 성(聖) 속의 웃음, 종교와 웃음의 관계를 연구하는 종교학자·종교사회학자들이 늘고 있다. 웃음이 종교의 핵심이라고 주장하는 학자도 있다. 종교문화 환경 속에서 생성되는 우스갯소리도 연구 대상이 될 수 있겠지만, 그들은 일차적으로 경전 자체에서 웃음을 발견한다. 그들의 논리는 대략 이렇게 요약할 수 있다. 유머는 강력한 설득의 도구다. 성현들은 대중에게 가르침을 설파할 때 조크·유머를 적절히 구사했다.
하지만 불경이나 성경을 열심히 읽은 신자도 경전에서 조크·유머를 읽고 웃었던 기억은 잘 나지 않을 것이다. 학자들은 경전을 대하는 우리의 ‘심각한’ 태도가 유머를 놓치게 한다고 주장한다. 학자들은 또 시대의 문제와 언어, 특히 번역의 문제가 있다고 지적한다.
성현들의 시대와 오늘 사이에는 수천 년의 간격이 있다. 몇 년 만에도 바뀌는 게 ‘웃음 코드’다. 전문가가 아닌 현대인이 성현 시대의 웃음 코드나 사회적 맥락을 알기 힘들다. 우리가 읽는 그리스도교의 신약성경은 그리스어로 문자화된 아람어 구어를 다시 우리말로 번역한 것이다. 영어 성경이건 중국어 성경이건 메시지는 같다. 하지만 느낌은 다르다. 유머는 번역의 첫 번째 희생자가 될 가능성이 크다. 원전의 언어 자체가 유머 친화적이 아닌 경우도 있다. 부처님의 말을 최초로 기록한 팔리어는 표현이 엄숙한 언어다.
우리말을 외국어로 옮길 때도 마찬가지다. “남이야 전봇대로 이를 쑤시건 말건.” “남이야 뒷간에서 낚시질을 하건 말건.” “남이야 지게 지고 제사를 지내건 말건.” 이 속담들은 “남이야 무슨 짓을 하건 상관할 필요가 없음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다. 뜻은 외국어로 전달할 수 있겠지만, 이들 속담에 담긴 유머까지 옮기는 게 가능할지 의문이다.
l 웃음보다는 미소 유발하는 불교 유머
상대적으로 웃음 친화적인 종교와 그렇지 않은 종교가 있다. 같은 종교 내에서도 교단·교파에 따라 다르다. 예컨대 선불교 전통에는 선승들의 일화에서 유머가 흔히 발견된다. 그리스도교의 경우에는 오순절 교회나 흑인 교회가 청교도적인 교회보다 웃음과 친하다. 웃음만 따지면 유대교가 1등이다. 탈무드에는 조크·유머가 많다. 미국 코미디언의 80%가 유대인이라고 한다. 유대인들이 ‘잘나가는’ 이유는 혹시 웃음이 넘치는 종교 문화 덕분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티베트 불교 신자들도 잘 웃는 것으로 유명하다. 그 이유를 묻자 달라이 라마는 이렇게 대답했다. “사람은 웃을 때 새로운 생각을 마음속으로 받아들이는 게 더 쉬워진다.” 티베트에는 이런 말이 있다고 한다. “만약 두 명의 철학자가 의견이 일치한다면, 둘 중 하나는 철학자가 아니다. 만약 두 명의 성자가 의견이 불일치한다면, 둘 중 하나는 성자가 아니다.” 티베트 불교를 비롯해 불교는 얼굴보다는 ‘머리’로 웃게 한다.
불교의 유머는 웃음보다는 미소(微笑)를 유발한다. 웃다는 “기쁘거나 만족스럽거나 우스울 때 얼굴을 활짝 펴거나 소리를 내다”를 뜻하다. 미소는 “소리 없이 빙긋이 웃음”이다. ‘laugh’와 ‘smile’의 차이다.
염화미소(拈華微笑)가 대표적이다. 염화미소에 대해 국어사전에 이렇게 나와 있다. “말로 통하지 아니하고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하는 일. 석가모니가 영산회(靈山會)에서 연꽃 한 송이를 대중에게 보이자 마하가섭만이 그 뜻을 깨닫고 미소 지으므로 그에게 불교의 진리를 주었다고 하는 데서 유래한다.”
부처님은 생로병사(生老病死) 즉 “사람이 나고 늙고 병들고 죽는 네 가지 고통”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출가했다. 생로병사는 웃음을 사라지게 하는 모두 엄중한 문제다.
하지만 부처님 또한 유머를 썼다. ‘십사무기(十四無記: 붓다가 대답하지 않고 침묵한 열네 가지 무의미한 질문)’와 가장 밀접한 <전유경(箭?經)>에 좋은 사례가 나온다. 이런 내용이다. 어떤 사람이 독 묻은 화살을 맞았다. 화살을 처리해야 했다.
하지만 화살을 맞은 사람은 아직 화살을 뽑아서는 안 된다고 했다. 먼저 알아야 할 게 있다는 것이다. 화살을 쏜 사람이 성과 이름은 뭔지, 귀족인지 사제인지 상인인지 노동자인지, 키가 큰지 보통인지 작은지, 피부색은 어떤지, 시골 사람인지 도시 사람인지…. 그는 잘못하면 곧 죽을 처지였지만 활의 재질에 대해서도 궁금했다. 활을 뽕나무로 만들었는지 대나무로 만들었는지, 화살깃이 매 털인지 독수리 털인지 닭 털인지…. 어쩌면 영원히 결판나지 않을, 형이상학적인 문제로 고심하지 말고 ‘독화살’을 뽑아내고 불법(佛法)을 따르라는 이야기다.
이 비유는 우리나라 70년대 고전 코미디와도 통한다. 귀한 자식이 오래 살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이름을 ‘김수한무 거북이와두루미 삼천갑자동방삭 치치카포 사리사리센타 워리워리 세브리캉 무드셀라 구름이 허리케인 담벼락 서생원에 고양이 바둑이는 돌돌이’로 지었는데 우물에 빠진 자식을 구하지 않고 이름 전체를 부르는 데 시간을 허비했다. 불경과 메시지가 같다. 우선 ‘목숨’을 살려야 한다.
학자들은 부처님이 세련되고 절묘한 동음이의어(同音異義語) 말장난(pun)을 구사했다고 분석한다. 브라만(Brahman: 인도 카스트 제도에서 가장 높은 지위인 승려 계급)의 믿음을 비판하기 위해서였다.
예수님 또한 웃음을 자아내는 반어법·과장법을 사용하면서 기득권층을 비판했다.(예수님이 사용하신 아람어 자체가 과장법을 많이 쓴다) 다음과 같은 경우다. “내가 다시 말하지만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귀로 통과하는 것이 더 쉽다.”(마태복음 19:24) 어느 시대나 부자는 그리 인기가 없다. 이 말을 들은 청중은 속이 다 시원했을지 모른다. “너를 고소하여 속옷을 빼앗고자 하는 사람에게는 겉옷까지 주어라.”(마태복음 5:40)도 박장대소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겉옷·속옷을 다 주고 나면 알몸이 되기 때문이다.
l 반어법·과장법 통해 기득권층 비판한 예수님
예수님 스스로는 어땠을까. 성경에 예수님이 울었다는 이야기는 나오지만 웃었다는 말은 없다. 실제로 전혀 웃지 않았을 수도 있다. 하지만 성경에는 예수님이 키가 컸는지 작았는지, 체형이 날씬했는지 뚱뚱했는지에 대해서도 전혀 나와 있지 않다. 성경의 저자들은 그런 문제들은 중요하지 않았다.
불교의 생로병사와 마찬가지로 그리스도교의 중심인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과 부활 또한 무거운 테마다. 하지만 그리스도교에서 웃음을 뺄 수 없다. 개신교의 주요 문헌 중 하나인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을 보면 인생의 목적에 대해 “사람의 첫째 되는 목적은 무엇인가?”라고 묻고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사람의 첫째 되는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과 영원히 그를 즐거워하는 것이다(“The chief end of man is to glorify God and enjoy him forever”) 영어 원문에서 사용한 단어는 ‘enjoy’다. 신(神)을 ‘엔조이’한다, 신을 즐긴다고 했을 때 웃음이 빠질 수 있을까. <데살로니가전서 1장>에서 바울은 “항상 기뻐하십시오”라고 말한다. 기쁠 때 웃지 않을 수 있을까.
과격 이슬람주의와 이슬람을 혼동하기 쉽기 때문에, 이슬람 자체는 평화와 웃음의 종교라는 것을 망각하기 쉽다. 선지자 무함마드는 ‘이빨이 보이도록 웃었다’는 기록도 있지만, 보통은 빙그레 웃는 정도였던 것 같다. 이런 일화가 전해진다. 언젠가 어떤 할머니가 무함마드를 찾아와 낙원에 들어가고 싶다고 말했다. 무함마드는 “늙은 여자는 낙원에 들어가지 못합니다”라고 답했다. 여자가 울면서 돌아가려고 하자 무함마드는 이렇게 덧붙였다. “늙은 여자는 하늘나라에 들어가기 전에 젊은 여자가 됩니다.”
그렇다면 ‘종교적인 유머’는 어떻게 구사할 것인가. 우리 속담에 “웃느라 한 말에 초상난다”고 했다. 이슬람에서 말하는 조크의 원칙을 참조할 만하다. ‘조크로 그 누구도 모욕하지 말 것.’ ‘지나치게 웃지 말 것.’
다음과 같은 조크는 대상과 맥락을 잘 선택해야 할 것 같다.
- 신은 나르시시스트다. 창세기 1장에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다”가 반복되는 것을 보면.
- 예수님이 부활한 후 제자들에게 나타나 이렇게 물었다. “마리아 막달레나가 그 사이에 시집가지는 않았지?”
자신이 없다면 아예 웃음을 빼는 게 좋을지도 모른다. 개인의 스타일을 존중해야 한다. 동서고금 수많은 성인이 웃음 없이도 경지에 이르렀다.
김환영 - 중앙일보 심의실장 겸 논설위원.
외교부 명예 정책자문위원. 단국대 인재 아카데미(초빙교수), 한경대 영어과(겸임교수), 서강대 국제대학원(연구교수)에서 강의했음. 서울대 외교학과 학사, 스탠퍼드대 중남미학 석사, 스탠퍼드대 정치학 박사. 쓴 책으로 <마음고전> <세계사의 오리진을 만나다> <세상이 주목한 책과 저자> 등이 있다.
■ “종교라는 보물창고에서 지혜 꺼내려면 생각의 틀 바꿔야”
2016-08-22 포항공대 수학과 강병균 교수
바람직한 재가불자(在家佛子)-승려 관계, 바람직한 평신도-성직자 관계는 어떤 것일까. 사실 많은 신앙인이 종교적 문제를 전문가인 성직자들에게 거의 일임한다. 적지 않은 분이 불경이나 성경을 잘 읽지 않고 스님·목사님·신부님들의 법어·설교·강론을 듣는 것으로 만족한다. 또 자신이 믿는 종교에 대해 다소간 ‘불만’이 있어도 이를 공적 공간에서 글이나 말로 공론화하지 않는다. 포항공대 수학과 강병균 교수는 좀 예외적인 경우다. 그는 수학자의 눈으로 종교, 특히 불교에서 발견되는 ‘미신’을 논박한다. 강 교수는 최근 『어느 수학자가 본 기이한 세상』(작은 사진)이라는 책을 펴냈다.
▲강병균 교수는 ‘진화·불교론적 무신론자’로 자신의 종교를 정의했다. 그는 ‘참나론’과 ‘윤회론’을 제외한 거의 모든 이론이 과학과 일치한다고 본다. [사진 박종근 기자]
‘불교 논객’ 포항공대 수학과 강병균 교수
강 교수가 쓴 책의 앞표지·뒤표지를 보면 ‘불교계의 갈릴레이’ ‘리처드 도킨스의 『만들어진 신』을 뛰어넘는 역작’이라고 나와 있다. 과도하게 보일 수도 있는 강 교수의 자신감의 근거는 뭘까. 강 교수는 40여 년 동안 불교 수행과 동서양 역사·철학·종교·과학 문헌을 섭렵하며 자신의 종교적 궁금증에 대한 답을 얻기 위해 치열하게 싸웠다. 그의 주장을 들어보기 위해 중앙일보 논설위원실 대회의실에서 12일 인터뷰를 했다. (본 인터뷰와 별도로 중앙일보 논설위원실 위원들이 독자들에게 제공하는 ‘페이스북 라이브’ 용도의 인터뷰도 했다. 페이스북 검색창에서 ‘중앙일보 논설위원실’을 치면 지면·디지털 기사, 인터뷰를 볼 수 있다)
질의 :수학자가 종교를 들여다볼 때 장점은.
응답 :“수학은 어느 것이 진리냐 진리가 아니냐만을 따진다. 중간은 없다. 수학자는 가장 엄밀하게 진리를 추구한다. 수학의 입장에서 보면 사실 물리학에서는 진리가 없다. 중력의 법칙, 양자 역학 등 물리학의 모든 것은 ‘현상을 기술하는, 지금까지 알려진 가장 좋은 방법’이지 진리라고 주장할 수 없다. 그러나 수학의 결과들은 진리다. 수학은 종교가 진리인가 아닌가를 탐구하는 데 몸에 밴 탁월한 힘을 발휘한다.”
질의 :학문 전공에 따라 신앙인의 숫자가 다른가.
응답 :“미국 통계에 의하면 과학자 중에서는 생물학자가 무신론자 비율이 가장 크다. 생물학자는 뇌에서 모든 생각과 욕망이 나타나는 것을 관찰하고 모든 것을 호르몬의 작용으로 파악한다. 반면 수학자 중에선 유신론자가 가장 많다. 그 이유는 수학이 이데아의 세계, 초월 세계에 속하기 때문이다. 신(神)도 초월 세계에 속한다.”
질의 :종교학자들은 불교를 무신론으로 분류한다. 불교와 서양 무신론의 차이는 뭔가.
응답 :“서양 무신론은 마음에 대한 연구가 없다. 불교는 2500년 동안 인간의 마음에 대해 연구했다. 어떻게 하면 행복을 얻을 수 있는가에 대한 방대한 연구가 쌓여 있다.”
질의 :종교는 어떤 역할을 하는가.
응답 :“제가 항상 인용하는 일화가 있다. 다산 정약용 선생이 유배 생활을 할 때였다. 어느 날 다산이 상추쌈을 먹고 있는데 하인이 ‘상추 따로 밥 따로 된장 따로 먹는 것 하고, 쌈으로 먹는 것 하고 어떤 차이가 있습니까’라고 물었다. 사실 몸에 들어가면 영양분은 똑같다. 다산이 놀라운 대답을 한다. ‘이것이 나의 혀를 속이는 법이니라.’ 우리가 음식을 요리하는 이유가 뭘까. 요리를 하지 않으면 맛이 없어 잘 안 먹는다. 맛있게 먹어야 소화도 잘된다. 바로 그런 역할을 종교가 한다고 본다. 황금률같이 인간이 지켜야 할 게 많은데 종교는 지킬 것들을 ‘맛있는 요리’로 만든다. 종교는 스토리를 만들어낸다. 그게 인류의 보고다. 반면 서양의 무신론자들은 스토리 체계가 없다. 콘텐트가 없다. 불교에는 무궁무진한 콘텐트가 있다. 성경에도 콘텐트가 있지만 유신론에 반대하는 무신론자들에게 성경은 콘텐트를 주는 텍스트로 작용하지 못한다. 불경은 그 작용을 할 수 있다.”
질의 :종교 중에서 불교의 차별성은.
응답 :“불교의 핵심 교리인 사성제·삼법인·팔정도·연기론은 현대 과학과도 정확히 일치한다. 서양 심리학·철학이 칭송하는 이론들이다. 불교는 또 실용적이다. 부처님은 “네가 행해 보고 맞으면 따르라”고 했다. 부처님은 ‘우주의 시작과 끝이 있느냐’ 같은 질문에는 대답을 안 했다. 우주론이나 생물체의 기원에 대해서도 논하지 않았다.”
질의 :한국 불교는 과학에 밀려 종교가 쇠퇴하고 있는 유럽에서 가능성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응답 :“실제로 지금 서양에서 불교 인구가 늘고 있다. 프랑스에서는 1% 정도가 불교 신자라고 이야기한다. 문제는 서양인들이 불교에 대해 신앙으로 접근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들이 명상을 해 보니까 마음속 번뇌·갈등이 사라지고 행복해진다. 그걸로 출발한다. 그런데 한국 불교는 신앙으로 접근한다. 명상으로 마음의 평안을 얻는 대신 기도로 소원 성취를 하려고 한다. 현각 스님의 비판도 거기서 나온다. 우리 불교는 서양인들에게 별로 가르쳐 줄 게 없으니 세계화가 어렵다. 그게 현각의 입장이라고 본다. 한국 불교가 현대 생물학·심리학·진화론·우주론에 맞추어 불교 원래의 바른 모습을 찾으면 된다. 그러면 우리 불교가 세계화될 수 있다. 제가 항상 비판하는 게 있다. 인도에서 불교가 없어졌다. 그러면 우리 불교도들의 최대 사명은 뭐냐. 인도에 불교를 다시 심는 것이다. 기독교인들은 중앙아시아나 아프리카 등 온갖 곳으로 가서 복음을 전파한다. 그런데 왜 인도에 가서 불교를 다시 살리자는 운동을 하지 않을까. 저는 알 수가 없다.”
질의 :국내 물적 기반이 충분해서 아닐까.
응답 :“맞다. 도도새·코끼리새는 멸종됐다. 새는 나는 게 본성이다. 모리셔스·마다가스카르 섬에서 음식이 너무 풍부하니까 날 필요가 없어져 퇴화됐다. 행복하게 살았다. 그런데 갑자기 쥐가 들어오고 인간이 들어오니 잡아먹혀 멸종됐다. 지금 한국 불교가 처한 위기도 비슷하다. 정부 보조금도 받고 신도들 보시도 받아서 물질적으로 너무 풍족하다.”
질의 :인도에서 불교가 사라진 이유는.
응답 :“인도 네루 총리가 이유를 말했다. 부처님을 신격화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신격화로 부처님이 대중으로부터 유리됐다. 그 결과 힌두교와 불교의 차이가 없어졌다. 힌두교인들은 불교를 힌두교 종파로 간주한다.”
질의 :종교는 결국 다 사라질 것인가.
응답 :“지금 젊은 세대는 종교를 안 믿는다. 제가 5~6년 전부터 학생들에게 계속 물어본다. 60~70명 수강하는 강의에서 종교가 있는 학생은 5~6명이 될까 말까다. 그게 전 세계적 현상이다. 젊은이들은 공부하기도 바쁘고 본능적으로 종교에 회의적이다. 이대로 가면 종교는 망하게 돼 있다고 다들 이야기하고 있다.”
질의 :새로운 종교 르네상스의 가능성은 없는가.
응답 :“통상 종교가 흥할 때에는 종교가 앞서갔다. 불교에서도 보면 심리학이자 의식에 대한 연구인 유식학(唯識學)이 현대 심리학이 나중에야 발견한 것들을 앞서 발견했다. 종교가 환망공상(幻妄空想), 즉 환상·망상·공상·상상을 하더라도 ‘첨단’ 환망공상을 해야 한다. 현대 과학을 수용하고 과학에 기초한 한 단계 높은 환망공상을 해야 한다. 그러면 종교에 다시 부흥기가 올 수 있다.”
질의 :명상 같은 것을 통해 평소에는 할 수 없는 신비로운 체험을 하는 것은 무엇이 좋은가.
응답 :“엄밀히 말하면 좋은 게 하나도 없다. 용수보살이 대지도론(大智度論)에서 그런 논의를 했다. ‘그런 상태가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라고 묻자 ‘열반을 미리 경험하는 것이다’라고 대답했다. 현실 속 일상생활에는 아무 소용이 없다. 부처님은 힌두교가 제시하는 최고의 영적 수준에 도달하고도 그것이 인간의 번뇌를 없애는 데 도움이 안 된다고 그것을 버렸다.”
질의 :바람직한 종교와 사회의 관계는.
응답 :“인간 전체가 하나의 군집 생물체다. 그래서 과학자·종교인·상인·기업인·정치인이 각자 자기 위치에서 자기 역할을 하는 것이다. 군인들은 의식주를 제공받지만 전쟁이 나면 나가서 싸워야 한다. 죽을 수도 있다. 마찬가지로 종교인들은 의식주를 제공받지만 탐욕 없이 지혜와 자비로 살면 사람이 진정 행복해질 수 있다는 것을 바삐 사는 일반인에게 보여줘야 한다. 그것만 보여줄 수 있다면 종교는 살아남을 수 있다. 특히 가톨릭의 프란치스코 교황이 하는 일을 보면 그는 성인이다. 그런 식으로 나가면 종교가 멸망할 일이 없다. 1978년 취임했다가 한 달 만에 서거하신 요한 바오로 1세는 다음과 같이 놀라운 이야기를 했다. ‘하느님은 남성도 아니고 여성도 아니다. 그리고 하느님은 남자로도 나타날 수 있고 여자로도 나타날 수 있다. 그런데 오히려 하느님은 어머니라고 하는 게 더 옳다.’ 굉장히 개혁적인 교황이었다. 너무 개혁적이라 독살당했다는 설도 있다. 그런 사람이 나오면 종교가 폭발적으로 늘어날 수 있다. 왜냐하면 종교에는 콘텐트가 있다. 위대한 성인·성녀, 위대한 수행자들의 전통이 있다.”
질의 :그런 콘텐트는 종교에만 있는 고유 콘텐트인가. 다른 데도 있는 것 아닌가.
응답 :“그렇지 않다. 종교 고유 콘텐트다. 예컨대 세계 문학을 보면 지혜와 자비를 이야기하지 않는다. 주로 남녀 간의 이야기, 인간의 부정적인 면을 많이 묘사한다. 톨스토이 같은 사람은 종교인이다. 그는 종교적인 가르침을 소재로 한 소설을 많이 썼다. 『안나 카레니나』 같은 소설은 안수정등(岸樹井騰)이라는 불교 우화를 보고 감동받아 썼다.”
질의 :종교를 만약 사람이 만들었다면, 이유는.
응답 :“종교학자들은 여러 이론을 제시한다. 제 생각은 이렇다. 의식이라는 게 나타난 것은 진화의 역사에서 후반기다. 의식이 의식을 대상으로 하는 자의식, ‘내가 누구인가’하는 그런 의식이 나타나는 것은 굉장히 나중이다. 처음에 자의식이 생겨났을 때 무엇을 느끼느냐 하면 ‘내가 이것을 해서 이런 일이 벌어지는구나’하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런 생각은 자연현상을 볼 때에도 적용됐다. 번개가 친다. 누가 번개에 맞아 죽었다. 그러면 저 번개를 누가 쳤을까. 사물 현장의 배후에 어떤 의지를 가진 주재자가 있다고 생각하게 된다. 그게 종교의 시작이라고 본다.”
질의 :출가할 생각도 했는지.
응답 :“젊었을 때 굉장히 많이 고민했다. 부석사 근일 스님께서 출가하라고 여러 번 권했다. 지금 저는 출가하지 않은 것을 다행으로 생각한다. 승가 밖에서 현대적인 사고로 불교를 볼 수 있게 됐다.”
강병균 교수는… 서울대학교 수학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했다. 미국 아이오와대학교에서 수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울산대학교를 거쳐 지금은 포항공과대학에서 가르치고 있다. 강 교수는 명상과 여러 종교에 대한 사색을 통해 모든 불행의 원인은 인간의 환망공상(幻妄空想), 즉 환상·망상·공상·상상에 있음을 알게 됐다. 그는 기존의 종교 패러다임에서 벗어나야 종교라는 인류의 보고에서 지혜와 자비를 끄집어낼 수 있다고 믿는다. 그는 그런 운동이 한국에서 시작해 전 세계로 확산되기를 희망한다.
글=김환영 논설위원 사진=박종근 기자
■ 2016년 07월 21일 동학이후 이땅에서 명멸한 종교 개수는? 정답 : 900여개
▲ 일제강점기 최대의 교세를 보인 신종교 보천교의 본당인 전북 정읍 소재 십일전(十一殿)의 위용(왼쪽 사진). 경복궁 근정전보다 규모가 컸다고 한다. 1936년 일제의 탄압으로 보천교가 해체되면서 십일전의 건축자재 중 일부는 현재 ‘한국불교의 1번지’인 서울 종로구 견지동 조계사(당시 태고사·오른쪽) 건축에 쓰였다. 자료사진
- 김홍철교수 ‘신종교대사전’ 출간
500여개 교단 자세하게 해설
천도교 등 민족운동에 큰 역할
일제, 위기감에 ‘사이비’ 낙인
구한말 위대한 사상가 잇달아
“구한말 서세동점(西勢東漸)의 변화를 맞아 나라와 민족의 명운이 기울어진 시기에 민중의 한(恨)과 원(寃)을 풀고자 생겨난 신종교는 사상적으로나 민족운동으로나 우리 민족의 큰 자산입니다.”
조선 후기 동학(東學) 이후 최근까지 이 땅에서 명멸한 신종교를 집대성한 ‘한국신종교대사전’(모시는사람들)이 출간됐다. 김홍철(사진) 원광대 명예교수의 신종교 연구 50년 결산이라 할 이 대사전은 전체 항목 수가 2300여 개, 해설한 교단 수가 500여 개, 해설하지 못했지만 교단명이나 창립자를 밝힌 교단이 400여 개, 인명 570여 명 등 200자 원고지 1만5000장 분량에 달한다. 이전에 몇몇 문헌이 있었지만, 사실상 최초로 한국의 신종교를 총정리한 역작이다.
김 교수는 19일 출간에 맞춰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사전에서 다룬 500여 개의 신종교 중 현재 살아남은 것은 50∼60개 정도일 것”이라며 “일제강점기 엄청난 역할을 한 ‘대종교’가 무엇인지, 지금은 어디에 있는지조차 사람들이 모르게 된 상황에서 어떤 형태로든 정리해야겠다고 생각해 사전을 내게 됐다”고 말했다. 그는 “한국사상사를 말할 때 흔히 단군에서 실학까지 다루면서 구한말 이후를 취급하지 않는 것은 크게 잘못됐다. 이 기간이야말로 우리 역사에서 일찍이 찾아볼 수 없었던 위대한 사상들이 연이어 출현한 시기였다”고 신종교 연구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수운 최제우, 일부 김항, 증산 강일순, 홍암 나철, 소태산 박중빈 등 다섯 신종교 창시자를 당대 가장 뛰어난 사상가로 꼽는다.
그는 ‘신종교’라 하면 보통 ‘사이비종교’를 떠올리게 된 배경도 일제가 조장했고 해방 이후 이어진 탓이라고 비판했다. 신종교는 그 바탕이 민중적이고 민족운동을 지원했으며, 한때 ‘보천교’의 경우 많게는 조선인의 25%가 믿게 되면서 식민지배의 위기의식을 갖게 된 것이다. “일제강점기에 문부성이 총독부를 통해 우리 민족혼을 말살하기 위해 저들의 신교(神敎)와 불교, 기독교 등 세 종파에 속하지 않는 신종교는 마치 ‘사이비’란 느낌의 ‘유사종교’로 분류하도록 강제하면서 시작됐다. 해방 후에도 이승만 정권이 기독교 지원정책을 폈고, 자신의 정적인 민족운동가들이 관여하고 있던 대종교 등 신종교를 탄압한 것이 일제의 ‘유사종교’ 분류가 이어지도록 했다.”
그는 사상에서 뛰어나고 민족운동에 큰 역할을 하고도 교세를 유지하지 못한 대종교와 천도교를 아쉬운 신종교로 꼽았다. 그러면서 신종교의 쇠퇴 원인으로 “출가자 문제 등 제도와 교육의 부재, 창시자 사후의 교권 다툼, 정치적 탄압이 훌륭한 신종교가 시들게 된 원인이지만, 종교가 사람들을 치유해주면서 자신도 치유하는 ‘사회적 역할’을 하지 못할 때 쇠망한다는 것은 현재 모든 종교에도 그 의미가 중하다”고 덧붙였다.
그는 “미래의 종교는 ‘신신(新新)종교’가 지배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현대인들은 점점 제도나 계율, 전문종교인의 설교나 설법 등 기존 종교의 틀에 얽매이기를 싫어한다. 그런 것이 없이 혼자 혹은 몇몇이 모여 힐링하고 치유하는 종교의 형태는 이미 번지고 있으며 미래에는 이 같은 종교형태가 주류를 이루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1967년 원광대도서관 사서로 재직 시부터 신종교에 관심을 가졌던 김 교수는 이후 원광대 강단에 서고 원광대 종교문제연구소장, 한국종교학회 회장 등을 거치면서 계룡산 등 신종교의 흔적이 있는 전국을 돌아다니며 실태조사를 벌이는 등, 한국에서 손에 꼽는 신종교 연구자이다.
엄주엽 선임기자 ejyeob@munhwa.com
■ 2017.05 11 한 뿌리의 인연, 브라만교, 불교, 힌두교 - 쿠르간 가설
▲ 마리야 김부타스
인도유럽어족에 대해 공부하다 재미난 가설을 알게 되었다. 리투아니아계 미국인 고고학자 마리야 김부타스(영어:Marija Gimbutas, 리투아니아어:Marija Gimbutienė)는 고고학과 언어학을 결합하여, 인도유럽어족의 기원에 관해 1956년 ‘쿠르간 가설’을 발표했다.
쿠르간은 터키어로 ‘언덕’이라는 뜻으로 고대의 거대분묘를 의미한다. 고대에 있어 민족들 간의 가장 뚜렷한 문화적 구분은 조상을 묻는 매장방식이었다. 여기에 착안하여 김부타스는 러시아 남부 초원지역의 쿠르간(Kurgan, курга́н)이라는 ‘봉분 있는 무덤’을 가진 문화에 주목하고 이를 조사하여 "쿠르간 문화"라고 불렀다. 전형적인 쿠르간 무덤모양은 신라 왕릉에서 보여 지는 ‘적석목곽분’ 형태로 이런 유형이 흑해 북안과 알타이 지역에서 흔히 보이는 오리지널 쿠르간 무덤 형태이다.
그녀는 쿠르간 문화의 전파 경로를 추적했다. 이 과정에서 기원전 50~30세기에 걸쳐 흑해 북안에 살던 종족이 처음으로 말을 길들여 강한 무력으로 주위를 정복해 나갔다는 ‘기마민족설’을 제기하면서 이들을 통해 쿠르간 분묘와 그 문화가 유럽과 중앙아시아 전역으로 퍼져나갔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쿠르간 가설에 의한 인도유럽어족의 이동
그녀의 이론은 한 동안 절대적으로 통용되었다. 그러다 1987년 영국 고고학자 콜린 랜프류는 인도유럽인이 기원전 70세기 이전에 소아시아에서 건너온 농경인이라는 주장을 제기하여 폭 넓은 지지를 받았다.
최근에는 이 유력한 두 이론을 통합하려는 시도가 있는데 이는 이탈리아계 미국인 유전학자 카빌리 스포르짜의 유전자 연구에 기반을 두고 있다. 쿠르간 문화와 관련성이 있다고 여겨지는 유전형질은 중앙아시아에서 서아시아, 인도, 이란, 유럽 중부와 동부 슬라브족, 유럽 북부 스칸디나비아인에 자주 보이며 그 주변으로 갈수록 점점 드물어지는 것이 특징이다.
이에 따르면 소아시아에서 유래한 농경민족이 발칸반도로 들어선 후에 북쪽의 흑해 북안으로 이주해 그곳에서 말을 타는 기마민족이 되어 유럽과 북인도 지역을 정복해 나갔다는 주장이다. 어쨌든 이들이 한 뿌리에서 나온 인도유럽인이고 이들이 쓰던 언어가 인도유럽어이다. 이 언어에서 많은 언어들이 파생되어 나왔다. (출처; 인도유럽인, 세상을 바꾼 쿠르간유목민, 라인하르트 쉬메켈 지음, 푸른역사)
아리안의 이동
기원전 25~20세기경 흑해와 카스피해 사이 코카서스 지방에 인도유럽어를 쓰는 아리안이라 불리는 백인 유목민들이 살고 있었다. 그들이 최초로 불의 온도를 1000도 이상으로 끌어올려 철기시대를 연다. 그 뒤 기후 변화로 초원의 풀이 사라지자 그들은 먹이를 찾아 이동해야만 했다. 철기와 전차로 무장한 그들은 쉽게 주변 청동기 부족들을 정복했다.
▲아리안의 대이동이 시작되어 일부는 유럽으로, 일부는 지중해 바닷가로, 일부는 이란을 거쳐 인도 북부를 침입해 정복했다.
이들이 정복 과정에서 탄생시킨 종교가 조로아스터교와 브라만교이다. 선과 악의 대결이 강조되었던 조로아스터교는 유대교에 영향을 주어 오늘날 기독교 사상에 크게 영향을 미쳤으며 브라만교는 인도 토속 종교와 결합해 오늘날 힌두교의 모체가 되었다.
브라만교의 탄생
카스트제도는 아리안이 기원전 15세기경 북인도를 침입하여 원주민인 드라비다족을 정복하고 자신들의 지배를 합리화하는 과정에서 만들어졌다. 아리안은 원주민을 평정한 다음 지배를 확고하게 하기 위해 '바루나'(Varna)나 불리는 신분제도를 만들었다.
'바루나' 라는 말은 산스크리트어로 '색'을 의미한다. 결국 피부색에 의해 신분이 구분된 것이다. 백인인 아리안이 지배계급이다. 그 뒤 아리아인들도 사회적 기능에 따라 계급이 구분되어졌다. 따라서 고대 신분제도인 바루나가 카스트 제도의 기본을 이루고 있다.
카스트 제도에 따른 인도인의 신분은 브라만(승려). 크샤트리아(왕이나 귀족). 바이샤(상인). 수드라(일반백성과 천민) 등 4개로 구분되었다. 그 외에 최하층인 수드라에도 속하는 않는 불가촉천민이 있다. 불가촉천민은 '이들과 닿기만 해도 부정해진다.'는 생각 때문에 이렇게 불렸다. 또 각 계급에서도 구체적인 직업에 따라 계급이 세분되어 바이샤와 수드라의 경우 2천 여 개 이상으로 세분된다.
신분이 다른 계급 간에는 혼인을 금했다. 그리고 이름에서부터 신분간의 차이가 드러나도록 했다. 카스트 제도는 브라만교의 '업'과 '윤회'사상을 근거로 정당화되어 사람들이 이를 숙명으로 여겼다.
카스트 제도의 목적은 이렇게 아리안들이 들어와서 선주민들인 혼혈족을 지배하고 자기들의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 선주민들과 혼혈 뿐 아니라 식사하는 것까지 금하고자 종교의 이름을 빌려서 제도화시킨 것이다. 이것이 브라만교가 탄생된 이유의 하나이다. 그래서 브라만교에는 특정 교조가 없다.
브라만교에 대해 알아보자. 초기 브라만교는 다양한 신을 숭배했고 그들로부터 구복을 바라는 단순한 형태였다. 자연현상의 배후에서 지배력을 행사하는 신들을 상정하고 그것을 인격적 주체로 구체화하고, 더불어 불과 같은 요소를 숭배하여 장수, 다산 등을 바랬다. 곧 태양신 수르야, 어둠과 축복의 신 푸샨, 선의 신 미트라, 공기의 신 인드라 등 삼라만상의 존재를 신격화했다. 아마 수메르 신화의 영향을 받은 듯하다. 사람들은 필요에 따라 신을 가려서 제를 올렸기에 그 수는 33신 혹은 3,333신이나 되었다.
아리안들이 인도 이주 뒤 처음 만든 경전이 "베다"이다. 베다는 알다(知)라는 뜻이다. 브라만교 교의와 제례규정, 찬가 등을 담고 있는 방대한 산스크리트어 문헌으로 성경의 6배에 달한다. 브라만교 전통에서 베다는 인간이 만든 작품이 아니라 신의 계시를 받은 리시(rishi, 성자)를 통해 만들어진 것으로 생각한다. 베다를 하늘의 성전이라는 뜻의 슈루티(Sruti)라 부르는 것은 이 때문이다.
이후 브라만교는 '우파니샤드'라는 경전이 탄생하면서 우주의 근본원리 브라만(Brahman, 梵)과 개인의 본체인 아트만(atman, 我)이 동일하다는 ‘범아일여’(梵我一如) 사상이 브라만교의 중심사상이 된다.
우주의 근본원리인 범(梵)과 불변하는 영원한 참 존재인 나(我)는 하나라는 뜻이다. 외부가 아닌 나의 내면에 있는 신을 찾고 의례적인 제식이 아니라 만물에 스며있는 브라만을 찾으라는 가르침이 핵심이다.
그리고 기초개념으로 ‘윤회와 달마(達磨), 업(業), 해탈’을 제시했다. 이러한 관념은 뒤에 인도에서 발생한 모든 종교의 근본개념이 된다. 특히 이는 훗날 불교의 중심사상이 된다.
브라만교는 제사장인 브라만의 역할에 따라 개인과 우주의 운명이 달라진다고 가르쳤다. 그 무렵 씨족 사회를 벗어나 군데군데 소국을 세운 왕들은 권력기반을 다지기 위해 브라만과 손잡았다. 왕들은 대규모 제사의식을 통해 자연스럽게 제왕으로 인정받았다. 종교와 정치의 결탁은 신정일치의 사회를 이루어 계급구조를 공고히 하며 기원전 6세기 신흥세력의 도전에 직면할 때까지 계속됐다.
불교의 탄생
이러한 브라만 중심의 지배질서에 맞선 신흥세력들이 갠지스 강 유역에서 힘을 키웠다. 그리고는 누구든 전생의 업으로 비롯된 운명에 충실해야 더 나은 생을 얻는다는 브라만식 사상 대신 인간의 운명이란 각자 행하기 나름이고 모든 사람은 평등하다는 붓다 사상을 받아들였다.
붓다의 일깨움은 평소 하층계급과 연결된 모계혈통 때문에 열등감을 느끼던 마우리아 제국의 3세손 아소카 왕을 크게 고무시켜 하나의 인도 건설을 뒷받침하는 통치이념이 되었다. 그 뒤 서민들이 불교에 마음을 열었다.
이렇게 카스트 제도와 브라만교에 반발해 태어난 종교가 불교다. 불교는 만민평등사상을 그 뿌리로 삼고 있다.
불교가 출현한 기원전 6세기경의 브라만교 실상과 사회 환경을 살펴보자. 다신교인 브라만교는 신과 조상들에게 드리는 제사의례를 중시했다. 그리고 카스트 4계급이 각각 지켜야 할 의무를 강조했다. 브라만교는 기원전 6~7세기에 인도 중부와 동부로 퍼져나갔다. 이 새로운 지역에 도시들이 생겨나고 상공업이 발달해 강력한 군주국들이 출현했다.
이에 따라 브라만들의 종교적 권위와 지도력은 상대적으로 약화되고 도시 분위기는 보다 합리적인 새로운 종교를 요구했다. 번잡한 제사의례에 대한 비판과 제사 행위 대가로 사후 천상에서 영원한 복락을 누린다는 관념에도 회의가 생기기 시작했다.
이러한 변화는 범아일여 사상에도 나타났다. 인간은 '유한한 행위'(業 karma)로서는 도저히 영원한 세계를 얻을 수 없고 끊임없이 윤회하며 생과 사를 되풀이할 수밖에 없다는 자각이 일어났다. 더불어 인간의 참 자아와 우주의 궁극적 실재를 아는 신비적 지식을 통한 해탈이 강조되었다.
카스트의 본질은 인간을 원천적으로 생각하는 자(영혼이 있는 자)와 단순히 일만 하는 자(영혼이 없는 자)로 구분하고 있다는 점이다. 따라서 카스트 체제에서 진정한 인간으로서의 가치를 지니는 존재는 영혼을 가진 브라만 등 상층계급에 국한된다. 하층계급 특히 카스트에도 속하지 못하는 불가촉천민은 영혼이 없는 존재로 치부되었다. 이러한 하층민들에게는 브라만교가 아닌 새로운 종교가 필요했다.
그러자 인도에서는 브라만들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고 제사행위와 내세를 거부하는 새로운 종교운동들이 나타났다. 이러한 운동을 주도한 사람들을 사문(沙門)이라 불렸다. 그들은 출가자들로서 숲속에서 고행과 명상을 통해 인생문제에 대해 다양한 해결방식을 제시했다.
그들 가운데 불교의 창시자인 석가모니가 있었다. 석가모니라 함은 석가족 출신의 성자라는 뜻이다. 성은 고타마, 이름은 싯다르타이다. 뒤에 깨달음을 얻어 ‘붓다’라 불렸다. 신도 사이에서는 진리의 체현자(體現者)라는 의미의 여래(如來), 존칭으로서의 세존(世尊), 석존(釋尊)으로도 불린다.
석가족 왕자로 탄생한 석가모니는 안락한 삶을 살았지만 영혼의 평안을 얻지 못했다. 그는 29살에 출가해 6년간의 고행 끝에 35세에 크게 깨달아 녹야원이라는 동산에서 다섯 명의 비구들에게 최초의 가르침을 주었다. 그 뒤 그는 45년에 걸쳐 인도 각지를 돌며 설법을 전파하며 해탈의 길을 제시했다. 기원전 6세기의 일이었다. 그 뒤 브라만교는 불교에 밀려 쇠퇴했다.
부처님께서 열반하시고 난 후 불교가 발전되어 오다가 기원전 3세기경 대부분의 인도지역을 통일한 아소카 왕에 의해 불교가 세계 여러 곳으로 전파되었다. 아소카 왕은 해외에 전법사를 보내 스리랑카, 미얀마를 비롯해 이집트, 그리스, 북아프리카까지 불교를 전파했다.
특히 불교가 본격적으로 전파되기 시작한 것은 기원전 1세기경부터로 이때 새로운 불교운동이 일어났다. 자신의 깨달음도 중요하지만 중생들의 교화를 위한 보살사상을 우선하기 시작했다. 이를 대승불교라 한다. 대승불교는 이후 파키스탄, 아프가니스탄 지방을 거쳐 중국, 우리나라 일본 등지로 전해지며 크게 발전했다.
브라만의 역습, 힌두교
인도에서는 1세기부터 3세기까지가 불교의 전성기였다. 그러다 4세기경 반전이 일어났다. 인도가 불교의 발상지임에도 5세기경부터 불교가 쇠퇴한 이유는 불교가 기본적으로 인도인의 뿌리박힌 사상인 카스트 제도에 반대하고 남녀평등 사상에 따라 승려계급에 여성 참여를 허용해 기득권층의 격렬한 반발과 저항을 샀기 때문이다.
서민종교인 불교가 쇠퇴하면서 인도인에게는 그들의 성향에 맞는 새로운 종교가 필요했다. 이때 브라만교가 변신을 시도하고, 소나 말 같은 동물을 잡아서 드리던 제사 대신 이를 꽃과 과일로 간소화했다. 그리고 사람이 태어나면서부터 죽을 때까지 만나는 삶의 고비마다 의미를 부여해서 작명식, 돌잔치, 결혼식, 장례의식을 철저히 챙겼다. 낮은 곳으로 더 가까이 다가간 것이다. 이렇게 브라만교가 인도의 여러 토착종교와 결합하고 기존 불교 등의 영향을 받으면서 ‘비슈누와 시바’를 최고신으로 하는 힌두교로 발전했다.
반면 불교는 참선, 고행을 강조하며 민초들의 삶에는 세심한 눈길을 주지 못했다. 밑바닥 사람들은 굿을 하던지 푸닥거리를 해야 사는 재미가 났다. 그 뒤 불교는 신도와 승려의 거리가 멀어지고, 민중 속으로 파고들어 토속신앙과 결합한 힌두교를 당해내지 못했다.
인도 종교와 철학은 베다의 권위를 인정하는 가의 여부에 따라 두 파로 나뉜다. 곧 정통파를 뜻하는 아스티카와 비정통파를 뜻하는 나스티카로 구별된다. 아스티카 그룹은 대략 기원전 2세기부터 기원후 6세기 동안 분화되어 여섯 힌두철학 학파 곧 삼키아 · 요가 · 니야야 · 바이셰시카 · 미맘사 · 베단타 학파로 나뉘었다. 반면 불교 · 자이나교 · 차르바카파와 기타 다른 종교나 학파들은 나스티카로 분류되었다.
이 시기에 이들 학파들은 지지자를 얻기 위해 서로 경쟁하며 서로 영향을 주고받았다. 힌두교는 베다 전통이 민속 신앙들과 융합하면서 고대의 베다 종교가 새로운 모습으로 부흥한 형태로 시기적으로는 인도에서 불교가 쇠퇴하였던 8세기경에 출현했다. 이렇듯 인도인의 사상 속에는 베다를 중심으로 하는 사상이래야 정통으로 인정되고 불교와 같은 나스티카 종교나 사상들은 비정통으로 인식되는 뿌리 깊은 베다 사상이 밑바탕을 이루고 있다.
힌두교와 고대 브라만교와 차이점이 있다면, 브라만교가 《베다》에 근거하여 희생제를 중심으로 하며 신전이나 신상(神像) 없이 자연신을 숭배한 데 비해, 힌두교는 신전과 신상이 있으며 인격신이 신앙의 중심이 된다는 점이다. 또한 신불(神佛)에 산 제물을 바치는 공희(供犧)를 반대하여 육식이 금지되었다.
힌두교의 경전은 브라만교에서 유래된 《베다》와 《우파니샤드》이며 그 외에도 《브라흐마나》, 《수트라》 등의 문헌이 있다. 힌두교는 브라만교에서 많은 신관(神觀)과 신화를 계승하고 있기 때문에 다신교 같이 보이지만, 신들의 배후에 유일한 최고신을 설정하고 힌두교의 여러 신들을 최고신의 다양한 현현(顯現)으로 통일시키고 있는 점에서 일신교적 형태를 취하고 있다.
오늘날 인도는 헌법적으로 만민평등 사회이다. 그럼에도 인도인의 일상생활에서 힌두 카스트식 불평등사상과 신분질서가 실질적 밑바탕을 이루고 있다. 아이러니다. 현재 인도의 최대 종교는 힌두교이다. 인도인의 80%가 힌두교를 믿고 있는 반면 불교신도는 전체 인구의 0.8%인 800만 명에 지나지 않는다.
조선일보 글 | 홍익희 세종대 교수
■김한수의 종교 이야기 - 조선일보 기자
2015.02.13 建國주역 이승만, 반석에 올린 '스타 목사님'
[유튜브 조회수 95만건… 전국 강연하는 이호 목사]
"한성감옥 갇혀 성경 읽던 '크리스천 이승만' 재조명"
現代·建國史 강연 年300회… 중국 떠도는 탈북자 구출도
유튜브 동영상 40여 개, 누적 조회 수 95만건에 육박하는 '스타 목사'. 그의 강연 장소는 대개 교회, 주제는 이승만과 대한민국 건국이다. 교회 담임목사도 아니지만, 한국 현대사와 안보 강연을 방불케 하는 내용으로 구름 청중을 모으는 사람, 올해 만 44세의 이호(통일한국 리더십아카데미 대표) 목사다.
"우리 개신교계는 그동안 이승만에 대해 무관심했습니다. 제 강연은 '이승만 없는 대한민국 건국' '기독교 없는 이승만'이 가능했을까, 생각할 기회를 드리는 겁니다. 욕먹을 각오 하고 시작한 일인데 의외로 호응이 큽니다."
▲이호 목사는“대한민국이 자유민주주의 위에 성취의 역사를 이뤄온 바탕엔 이승만과 기독교가 있다”고 말했다. /이진한 기자
이 목사의 강연은 우선 재미있다. 왕정 폐지와 공화정을 주장하다 사형을 선고받은 이승만이 한성감옥에서 회심하는 장면은 극적이기까지 하다. 한성감옥은 1인당 면적 0.23평에 온갖 벌레가 들끓는 곳. 여기서 낮엔 목에 칼 쓰고 꼼짝없이 앉아 있고, 밤엔 발가벗긴 채 고문당하던 이승만이 옆 죄수가 한 장씩 넘겨주는 성경을 읽으며 골고다 언덕을 오르는 예수를 그리는 장면을 이 목사는 실감 나게 설명한다. 이 목사는 "한성감옥에서 이승만은 40명을 전도했다"고 말한다. 또 소련 공산혁명 후 누구보다 먼저 공산주의의 해악을 예견하고, 일본의 진주만 공격을 예견한 것도 이승만이 국제정치학을 전공했을 뿐 아니라 크리스천으로서 늘 영적(靈的)으로 세상을 봤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라고 역설한다. 요컨대 대한민국을 반공과 자유민주주의라는 반석에 올려놓아 오늘의 성취가 가능하도록 한 거인이 '크리스천 이승만'이라는 것이다.
이 목사의 이력은 색다르다. 그는 침례신학대를 나와 대형 교회 부목사와 대학 겸임교수를 거쳐 미국 텍사스에서 5년간 교민 목회를 하다 2009년 귀국했다. 미국 체류 당시 30주(州)를 자동차로 여행한 그는 미국 건국사의 현장을 보면서 이승만을 떠올렸다고 한다. "독립운동가로서 이승만에게 미국 독립운동사·건국사는 남다르게 다가왔을 것 같았다"고 했다. 하지만 그는 "귀국 후 깜짝 놀랐다. 한국 사회가 너무도 좌경화돼 있어서"라고 말했다. "기독교에서는 하나님이 하신 일, 인간이 한 일, 마귀가 한 일을 구분한다. 북한은 악(惡), 그것도 거악(巨惡) 아닌가? 그런 북한을 옹호하고 김일성·김정일에게 면죄부를 주는 것을 보고만 있을 수 없었다."
그래서 본격적으로 이승만 공부에 뛰어들었다. 책 '하나님의 기적 대한민국 건국 1, 2'를 쓰기 위해 1개월간 하루 500페이지씩 관련 서적을 독파했다. 교회 강연 등에서 이승만과 기독교, 대한민국 건국의 정통성을 외치기 시작했다. 기폭제는 지난 2013년 '통영의 딸 구출 운동'을 주도한 통영 현대교회에서 4회·7시간 강연이 유튜브에 공개된 것이었다. 이후 이 목사는 전국을 돌며 연(年) 300회 강연하고 있다. 강연과 책 판매 수익금으로 중국을 떠도는 탈북자도 구출하고 있다고 했다.
이 목사는 "이승만도 분명 비판받을 부분이 있다"며 "그렇지만 이승만 비판이 대한민국 건국 자체에 대한 부정, 즉 '태어나선 안 될 나라'라는 논리 위에 있는 것은 문제"라고 했다.
조선일보 김한수 문화부 종교전문기자
2015.03.10 레바논에서 돌아본 한국의 종교 간 平和
터번 같은 천으로 머리를 감싼 사람, 흰 모자와 검은 모자를 쓴 사람, 검은 셔츠에 흰색 로만 칼라를 두른 사람…. 기자의 맞은편 자리는 중동 지역 모든 종교·종파의 전시장을 방불케 했다. 지난주 레바논의 한 마을에서 열린 불교 조계종 총무원장 자승 스님과 현지 종교 지도자들의 간담회 풍경이었다. 그들은 수니파·시아파 등 이슬람과 정교회(正敎會), 로마가톨릭과 기독교 마론파 등의 성직자였다. 거리 풍경도 그랬다. 모스크와 교회·성당의 십자가, 첨탑이 번갈아 보였다.
이슬람이 국교(國敎)가 아닌 레바논에는 합법적으로 인정된 종교·종파가 18개라고 했다. 이슬람 시아파 내에서도 '12 이맘파' '알라위파' '드루즈파' '이스마일파' 등 네 가지가 있고, 정교회도 그리스·아르메니아·시리아 정교회 등 세 파에 이른다고 했다. 우리나라 경상북도만 한 면적에 인구는 410만명인 레바논에서 대통령은 마론파, 총리는 수니파, 국회의장은 시아파가 각각 나눠 맡도록 법으로 정했다고 한다. 여러 종교가 평화를 유지하며 공존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며 노력하는 레바논 국민의 절박함으로 보였다.
그런 노력에도 종교가 정치가 된 사회는 힘든 일이 많아 보였다. 작년 5월부터 지금까지 대통령이 공석(空席)이라는 점도 그 한 예였다. 종교인 간의 만남도 쉽지 않은 듯했다. 참석자들은 "한국 불교 스님 덕분에 오랜만에 한자리에 모였다"고 했고, 자리를 주선한 동명부대 관계자도 "실제로 이분들을 한자리에 초대하기가 쉽지 않았다"고 했다.
그들과 만나면서 새삼 우리 현실에 감사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한국종교지도자협의회(종지협)에 모인 주요 종교 지도자들이 이웃 종교의 성지(聖地)를 함께 순례하고, 이웃 종교의 명절 행사를 찾아가고 축하하는 모습은 다른 나라에선 보기 어려운 풍경이다. IMF 외환 위기 사태에 따른 실업 문제나 세월호 사고 등 국력 결집이 필요할 때 종교인들이 앞장서는 모습도 떠올랐다. 왜 한국이 '모범적인 다종교 사회'라는 평가를 받는지 저절로 이해됐다. 그렇지만 다른 한편으론 이런 종교 간 평화를 지키기 위해 이제 우리도 더욱더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할 때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언젠가부터 우리 사회에도 '종교 편향'이라는 단어가 심심치 않게 등장하고 있다. 이명박 정부 때의 종교 편향 논란을 비롯해 현 정부 들어서도 문창극 전 총리 후보자는 교회 내 신앙고백이 문제가 돼 결국 자진 사퇴했다. 최근엔 지리산 왕시루봉 인근의 개신교 선교사 유적을 근대문화유산으로 지정할 것인가를 놓고, 또 서울 지하철 9호선의 역 이름을 놓고 '봉은사역'과 '코엑스역' 간에 논란이 있다.
종교는 신앙의 진리를 추구한다. 그리고 그것에 관해서는 타협하지 않는다. 그러나 신앙 이외의 일상생활에서는 역지사지(易地思之)하는 마음과 조심하고 양보하고 배려하는 태도가 필요하다. 그러지 않아도 분노 지수가 높은 대한민국 사회다. 종교 문제는 인화성도 강하다. 우리 모두의 안전과 평화를 위해서는 이념·지역·계층 간 평화뿐 아니라 종교 간 평화도 필수적이다. 지금까지 종교 갈등에 관한 한 거의 '청정(淸淨) 지역'을 유지해온 자랑스러운 전통을 이어가기 위해서라도 낙관보다는 노력이 필요한 때 같다.
2015.06.19 종단·교단 수, 부처님·하나님도 모릅니다
[종교, 아 그래?] 불교 종단·개신교 교단
2005년 대한불교조계종은 상징 문장(紋章·CI)을 발표했다. 불(佛), 법(法), 승(僧)을 상징하는 점 3개를 원이 둘러싼 형상이다. 지금은 조계종의 모든 문서와 가사에 이 문양이 새겨져 있다. 당시 종교계로서는 이례적이자 선진적인 CI 발표였다. 그러나 속내를 보면 그런 이유가 전부는 아니었다. 난립한 군소(群小) 종단들이 저마다 '조계종'이란 이름을 쓰고 있어 '대한불교조계종'과 구분이 잘 되지 않았기 때문. 이 때문에 CI를 만들면서 이름 즉 '상표권'에 대한 단속도 강화했다.
현재 사단법인 한국불교종단협의회에 소속된 불교 종단은 모두 29개. 대한불교조계종, 한국불교태고종, 대한불교천태종, 대한불교진각종, 대한불교관음종 등이다. 대개 불교 종단의 작명은 '대한불교○○종'이다. 보통은 앞의 '대한불교' 혹은 '한국불교'를 빼고 '조계종' '태고종' 등으로 쓰다 보니 초보 종교 담당 기자는 가끔 '한국불교조계종' 혹은 '대한불교태고종'이라고 잘못 쓰기도 한다. 종단협에 등록된 종단은 29개이지만 한국에서 활동하는 불교 종단 수가 얼마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사찰 1개로도 '○○종(宗)'을 붙이는 종단이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 불교계 인사들의 말이다.
개신교도 마찬가지다. 흔히 개신교계에선 '장·감·성'이라 불리는 장로교, 감리교, 성결교단이 전체 교회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하지만 여기서도 분류하기 시작하면 끝이 없다. 장로교는 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 통합 두 교단이 장자(長子) 교단으로 불리지만 한국기독교장로회(기장), 대한예수교장로회 고신총회(고신) 등도 장로교 교단이다.
개신교인이 아닌 경우 혹은 개신교인의 경우에도 각 교단 이름의 '예수교'와 '기독교' '대한'과 '한국'이 어떻게 다른 뜻으로 쓰이는지는 잘 모른다. '대한'이 '기독교' 혹은 '예수교' 앞에 붙기도 하고, 뒤에 가기도 한다. 또 일상 언어생활에서는 비슷한 뜻으로 쓰이는 '합동'과 '통합'이 어떻게 구분되는지 일반인들로서는 알쏭달쏭하다.
이렇게 비슷비슷해 보이는 교단들이 많은 것은 뿌리가 대개 같기 때문. 그러나 한국 개신교 130년 역사를 지나면서 이런저런 이유로 교단이 나뉘어 모르는 사람이 보기엔 '암호(?)' 수준으로 이름이 어려워진 것이다. 그래서 개신교계 인사들도 "한국 개신교 교단이 몇 개인지는 하나님도 모르실 것"이란 이야기가 나온다.
2015.07.03 狼狽의 세월 70년
"평양교구 소속 신학생 8명 합격." 올 2월 천주교 평양교구는 이런 자료를 홈페이지에 올렸다. '평양교구'라면 고개를 갸웃할 사람이 많을 것이다. 광복 후 북한이 공산화되면서 북한 전역에선 천주교 사제와 수도자들이 추방당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평양교구 '소속' 신학생이라니?
1970년 평양교구 소속 사제와 신학생들은 모두 서울대교구로 적(籍)을 옮겼고, 서울대교구장은 평양교구장 서리를 겸하게 됐다. 그러다 2009년 정진석 추기경이 서울대교구장이던 시절 평양교구 소속 신학생 양성을 재개했다. 물론 북한 지역에서 선발한 신학생은 아니고 서울대교구 출신 신학생이 '소속'을 평양교구로 삼은 것이다. 이렇게 시작한 평양교구 소속 신학생들이 벌써 26명에 이르고, 지난 2월엔 처음으로 부제(副祭)도 탄생했다. 평양교구 소속 신학생들은 사제품을 받은 후 일단 서울대교구에서 활동하게 되지만 통일이 되면 평양교구로 달려가게 된다.
올해 광복 70주년, 분단 70주년을 맞아 종교계의 통일 준비 움직임이 활발하다. 한국천주교주교회의는 6월 1일자 담화문에서 "이스라엘이 70년의 바빌론 귀양살이에서 풀려나 은총의 새 시대를 맞이하였듯이 올해 2015년이 분단과 갈등의 70년을 마감하고 새로운 평화를 여는 해가 되기를 염원한다"고 말했다. 천주교는 또 연말까지 '한반도 평화와 통일을 위한 기도 운동'을 전개하며 매일 미사 전에 묵주기도를 올릴 것을 신자들에게 당부했다. 한국기독교총연합회(한기총·대표회장 이영훈)도 교회별로 통일 이후 북한 지역의 교회 재건을 위한 기금으로 예산 1% 적립 운동을 벌이고 있다. 이영훈 목사는 "1% 적립 운동은 각 교회가 북한의 한 지역을 마음에 두고 기도하며 통일 이후 물질적·영적으로 그 지역을 책임지겠다는 각오"라고 설명한다. 서울 명성교회는 작년부터 매주 월요일 '통일을 위한 기도회'를 열고 있다. 세계적 어린이 양육 기구인 컴패션도 통일 이후에 대비해 북한의 취약 어린이들을 양육할 프로그램 마련에 나섰다.
남북 관계 경색으로 모든 분야의 교류가 중단된 상태에서 종교계의 통일 준비 역시 한계가 뚜렷하다. 그렇지만 종교계의 움직임에서 눈에 띄는 대목은 정신적·영적으로 북한 주민들을 끌어안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는 점이다. 가시적 성과는 더디더라도 꾸준히 기도하겠다는 정신이다.
국어학자 이희승은 수필집 '딸깍발이'에 수록된 '낭패(狼狽)'란 글에 이렇게 적었다. "세상에는 낭패(狼狽)란 짐승이 있다. 그런데 '낭'이란 짐승은 앞발 둘만 있고, '패'란 짐승은 뒷발만 둘이 있어서, 낭과 패는 둘이 꼭 달라붙어서 떨어지지 말아야 비로소 훌륭한 한 놈 몫의 활동을 할 수 있다 한다. (…) 어쨌든 이 둘은 항상 붙어 있어야만 한다. 만일 어쩌다 떨어지는 날이면 그야말로 낭패요, 큰일이다. 우리나라의 현재 상태는 이 낭패와 같다."
70년 세월은 '낭'과 '패'가 떨어져 있다는 사실조차 둔감하게 여길 만큼 길었다. 또한 이제 통일이 된다면 그게 낭패가 아닌가 하는 의구심마저 싹트게 됐다. 그래서 이 낭패의 상황을 극복하고 북한 주민을 영적으로 보듬으려는 종교계의 노력에 기대를 걸게 된다. 결국 통일 후 북한 주민들이 맞닥뜨릴 정신적·영적 허기를 어떻게 달래고 채워주느냐에 진정한 통합의 성패가 달려 있기 때문이다.
2015.07.03 바느질·목공·출판… 수도원도 바쁘답니다
수도자와 노동
스페인 아빌라의 엔카르나시온수도원. 봉쇄수도원으로 유명한 '맨발의 가르멜 수도회'를 창립한 아빌라의 성녀 대 데레사가 설립한 수도원이다. 박물관으로 공개되는 옛 수도원 건물엔 모든 '구멍'이 봉쇄돼 있어 고백성사도 쇠창살을 사이에 두고 하도록 돼 있다. 이 수도원 2층엔 특별한 유물이 전시되고 있다. 주교와 사제들이 입는 예복들이다. 봉쇄 속에서 하느님만 바라보며 기도하는 생활이지만 그 가운데 노동은 기본이었음을 보여주는 유물이다.
이렇듯 천주교 수도회는 기도하는 생활 가운데 특별한 노동을 한다. 서울 강북구 스승예수의제자수녀회는 옷 만드는 것으로 유명하다. 김수환 정진석 염수정 추기경 등 세 추기경은 물론 주교, 사제들의 예복을 한땀 한땀 손으로 만들어왔다. 지난해 광화문광장의 124위 시복식 때 프란치스코 교황이 입은 제의(祭衣)도 스승예수의제자수녀회 수녀들이 만들었다. 새벽 5시 기상해 밤 10시 잠자리에 들 때까지 하루 8차례 기도 시간 외에는 '사각사각' 소리만 내면서 옷을 짓는다. 곳곳에 붙은 표어는 '침묵 단순 민첩'. 손바느질이 사라지는 시대, 수녀들 역시 입회(入會) 전에는 바느질해보지 않은 경우도 많지만 한 해 300여 사제의 옷을 만든다. 수녀들은 "성모님의 마음으로 사제들의 옷을 짓는다"고 말한다.
스승예수의제자수녀회는 이탈리아의 복자(福者) 야고보 알베리오네(1884~1971) 신부가 1924년 설립해 1965년 한국에 진출했다. 역시 알베리오네 신부가 창설한 수도회 중 성바오로수도회와 성바오로딸수도회는 매스미디어 '전공'이다. 출판을 기본으로 비디오, CD, 팟캐스트 등 새 미디어엔 전문가들이다. 알베리오네 신부는 이 수도회들을 설립하면서 바오로 사도가 문서(편지)를 통해 선교했듯이 첨단 미디어를 통해 복음을 전하고 있다.
경북 왜관 베네딕도수도원은 목공(木工), 스테인드글라스, 출판 등이 특기. 특히 목공에 관해서는 국내 최고 품질을 자랑한다. 이 수도회 창고엔 거대한 목재소를 방불케 할 정도로 목재가 산더미처럼 쌓여있다. 베네딕도회가 만든 목공예품은 튼튼하기로 이름 높다. 제대(祭臺)와 독서대, 감실대, 장의자 등을 만들어 전국 성당에 납품한다. 서울 명동성당의 주교좌 윗부분 강론대 등이 베네딕도회의 작품. 지난 2011년 50주년 금경축을 맞은 이규단 수사는 군생활과 재정담당 12년을 제외하곤 오로지 목공예에만 전념한 장인(匠人)으로 칭송될 정도다.
'기도하고 일하라'는 베네딕도 성인의 정신은 사실 수도자들뿐 아니라 모든 인간에게 필요한 정신이 아닐까.
2015.08.07 '봉암사 結社' 습격한 빨치산, 그들이 털어간 물건은?
스님들의 고무신·털신 1950년, 봉암사 출몰한 共匪들… 처마 밑 숨긴 고무신도 훔쳐가 고무신·털신만 신어온 스님들, 최근엔 등산화·운동화 신기도
"그때가 11월 초 저녁 7시 반쯤 된 것 같아요. 큰방에선 어른 스님들이 참선하고 계시고, 우리 신참들은 뒷방에서 다음날 먹을 시래기를 장만하고 있는데 갑자기 문이 확 열리더니 군복 입은 사람들이 '동무들 나와!' 고함을 지릅디다. 빨갱이였어요. 그들은 인민재판을 하겠다, 어쩌겠다 하며 한참 소란을 떨다가 사라졌어요. 다음 날 아침에 절을 둘러보니 식량이란 식량은 몽땅 털어가고 딱 좁쌀 한 말만 남겨뒀더군요. 근데 마침 그때 법전 스님이 고무신 한 켤레를 선물 받은 게 있었는데, 기왕 신던 것이 아직 멀쩡해서 나중에 신으려고 그걸 처마 밑에 끼워놓아 뒀어요. 근데 공비(共匪)들이 플래시도 없는데 어떻게 알고 처마 밑에 있던 그것까지 가져가 버린 거라. 그렇게 공비들이 출몰하면서 스님들이 흩어지게 됐지요."
지난 2007년 초 당시 조계종 총무원장이던 지관 스님은 제1차 봉암사 결사 60주년을 맞아 경북 문경 봉암사를 찾아 그 마지막 풍경을 이렇게 전했다. 봉암사 결사는 '부처님 법대로 살자'를 기치로 걸고 1947년 성철·청담 스님 등이 주도해 일제강점기 동안 왜색에 물든 한국 불교의 정통성을 되살리고자 벌였던 운동. 2007년 종정 법전 스님과 총무원장 지관 스님은 막내급으로 이 결사에 참가했다. 그 마지막 풍경에 고무신이 등장하는 것. 1950년대까지도 '고무신 선거=금권선거'라는 말이 있었을 정도이니 당시 고무신을 강탈당한 법전 스님은 얼마나 허탈했을까.
지금도 스님들의 신발 하면 고무신과 털신을 떠올리는 이가 많다. 사찰 고무신의 특징은 남녀가 따로 없다는 점. 속세의 고무신은 남성용의 경우는 볼이 넓고, 여성용은 홀쭉하지만 스님들이 신는 고무신은 모두 남성용이다. 또 과거 스님들은 겨울엔 털신을 신었다. 스님들은 이렇게 고무신과 털신 두 가지로 1년을 나곤 했다. 그러나 이젠 스님들도 각종 예식 외에는 고무신 대신 '만행화(卍行靴)'라는 이름의 신발이나 등산화, 운동화를 신는 경우가 많다. 고무신은 의식용 신발이 된 셈. 인터넷 쇼핑몰에서 고무신은 3000원대, 털고무신은 8000원대, '만행화'는 10만원 안팎에 판매되고 있다.
그런데 요즘도 고무신을 '집단'으로 만나는 경우가 있다. 사미, 사미니 등 예비 스님들이 공부하는 각 사찰의 승가대학이다. 깨끗이 씻은 콧잔등에 각각 법명이나 번호가 적힌 고무신이 댓돌 위에 가지런히 줄 맞춰 앉은 모습을 보면 왠지 그 정갈함에서 초심(初心)이 느껴지는 듯하다.
2015.09.08 프란치스코 교황과 오현 스님
"프란치스코 교황의 화두(話頭)와 우리 선승(禪僧)들의 화두가 시간적으로 1000년의 차이가 나고 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오늘의 문제가 화두인데, 우리 선승들의 화두는 1000년 전 중국 선승들의 도담(道談)이다."
신흥사 조실 설악무산(雪嶽霧山) 스님은 흔히 속명(俗名) '조오현 스님' 혹은 '오현 스님'으로 더 잘 알려졌다. 그가 지난 8월 말 하안거 해제 법문에서 또다시 프란치스코 교황을 언급했다. 스님은 지난 3월 동안거 해제 법문에서도 "스님들의 말이 교황의 언행처럼 감동을 주거나 회자되지 못하는 현실이 참으로 안타깝다"고 말한 바 있다. 그로부터 6개월 후 다시 한 번 교황 이야기를 꺼낸 것이다. 이번엔 아예 법문의 주제가 '교황에게 배우라'였다.
무산 스님에게 지난 3개월은 스스로 선택한 '독방(獨房) 감옥살이'였다. 그는 가로·세로 30㎝짜리 '밥 구멍'이 세상과의 유일한 소통 통로인 무문관(無門關)에서 지냈다. 그 독방에서 석 달 동안 그의 뇌리를 떠나지 않은 화두가 '프란치스코 교황'이었던 셈이다.
무산 스님과 교황의 파격은 닮은꼴이다. 교황은 취임 이후 지금까지도 교황청 내 숙소를 이용하지 않는다. 방문객들이 이용하는 '마르타의 집'에서 생활한다. 교황청의 관료주의를 질타하고, 사제들에겐 "영적 웰빙에 빠지지 말라"고 주문한다. 최근엔 낙태 여성들에게 특별히 용서를 구할 기회를 1년간 주었다. 아르헨티나 추기경 시절에도 미혼모의 아기에게 세례 주기를 꺼리는 사제들에게 분노했던 교황이기에 이번 '낙태 발언'도 놀라운 것은 아니다. 지금까지 교황의 언행으로 볼 때 앞으로 더한 파격도 예상된다. "아마도 교황청을 팔아서 가난한 이들에게 내주지 않을까 싶다"는 농담이 천주교계에서 나올 정도다.
무산 스님의 하안거 해제 법문도 '충격 요법'이었다. 보통 선승들의 법문에는 '뜰 앞의 잣나무' '무(無)' '본래면목' 등 중국 당·송시대 고승들의 예화가 많이 등장한다. 스님은 이들 화두에도 정통하다. 화두를 정리한 고전 '벽암록'을 해설한 책도 펴낸 바 있다. 그럼에도 무산 스님은 이날 당·송시대 선사(禪師)들을 '신선(神仙)주의자' '산중 늙은이들'이라 했고 "그들의 전설적인 말은 그들의 화두이고 그들의 삶일 뿐" "1000년 전 중국 화두에 중독되지 말라"고 했다. 그러면서 "그들은 '살불살조(殺佛殺祖)' '부처 있는 곳에 머물지 말라' 했는데 우리 선승들은 아직도 1000년 전 그네들의 도담에 머물러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교황에게 배우라"고 했다. 교황에게서 '살불살조'의 정신을 발견했기 때문 아닐까.
하안거 해제 후 만난 무산 스님은 "출가 생활은 일탈(逸脫)"이라고 했다. "부모·형제 버리고 출가하는 것 자체가 일탈 아닌가. 그렇다면 남들과 다른 삶을 살아야 하지 않겠는가."
교황과 스님은 공통적으로 '거룩한 일탈'을 꿈꾸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통과 관행의 껍데기를 버리고 본래의 정신을 회복하는 일탈은 좁게는 자신의 종교계를 향해 '예수의 삶' '부처의 삶'을 살자는 간절한 권유였다. 하지만 보다 넓게는 세상 모두를 향해 "타성(惰性)에 젖지 않았는가? 당신의 화두는 무엇인가?"라고 내리치는 따끔한 죽비였다. 오늘 우리 삶의 화두는 업데이트되고 있는가.
2015.09.11 천주교 신자 뒤엔 자랑스러운 '빽' 있다?
천주교 원로 사목자 최익철(92) 신부는 취미 덕분에 더욱 유명한 사제다. 최 신부는 천주교 사제답게 천주교 신앙과 관련된 우표를 수집했다. 책도 냈다. 그중 하나가 2002년 칠순을 맞아 펴낸 '우표로 보는 성인전'(가톨릭출판사). 여기엔 세계 114개국에서 발행된 642장, 572명의 성인 얼굴이 실렸다. 성인을 담은 우표와 함께 성인의 짧은 일대기를 정리한 책엔 또 다른 재미있는 이야기가 수두룩하다. '수호성인' 이야기다.
수호성인이란 "어떤 직업, 장소, 국가, 개인이 특정한 성인을 보호자로 삼아 존경하며, 그 성인을 통해 하느님께 청원하며, 하느님의 보호를 받는"(가톨릭대사전) 존재다.
수호성인을 세우는 관습은 그리스도교 초기 순교성인의 무덤 위에 성당을 지으면서 시작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실제로 세계 가톨릭의 심장이라 할 바티칸 성베드로대성당은 베드로 성인, 아시시의 성프란치스코대성당은 프란치스코 성인의 무덤 위에 세워졌다. 전 세계 순례객들을 불러 모으는 스페인 북서부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대성당 역시 야고보 성인의 무덤 위에 지어졌다. 야고보 성인은 스페인의 수호성인이다.
특정 직업, 장소, 국가의 수호성인은 교황이 선포한다. 성인 자체가 해당 직업에 종사한 경력이 있는 경우도 있다. 변호사와 집달리 등 법률과 관련된 직업의 수호성인인 이보 성인은 13세기 프랑스의 판사 출신이다. 또 예수회를 설립한 이냐시오 성인은 피정과 영신 수련, 이냐시오 성인과 함께 예수회를 설립하고 동방 선교에 앞장선 프란치스코 하비에르는 선교의 수호성인이다. 그 밖에도 뱃사공(브렌든), 대장장이·간호사·광부(아가다), 금속세공인(엘리지오), 빵 제조업자와 빵집(엘리사벳), 우편집배원(제논), 장례 관련(요셉), 편집·교정자(요한 보스코), 학생·청소년(알로이시오) 등 다양한 직종에 수호성인이 있다.
새 직업의 등장에 맞춰 수호성인이 새로 선포되기도 한다. 미디어를 통한 복음 전파에 앞장서는 성바오로수도회와 성바오로딸수도회의 설립자인 이탈리아의 알베리오네 복자(福者)는 '인터넷의 수호복자'라고 한다.
최 신부의 책을 넘기다 요즘 젊은이들에게 용기와 희망을 줄 수호성인을 발견했다. '좌절하고 실망한 사람들의 수호성인'인 리타 성녀. 그녀는 카시아의 아우구스티노 수도회에 입회하려 했으나 3번 거절당했고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끈질기게 신청해 끝내 입회에 성공한 인물. 과연 좌절하고 실망한 사람들에게 용기를 줄 법한 인물이다.
이렇듯 웬만한 경우에는 거의 수호성인 혹은 수호복자가 있는 셈이니 천주교 신자라면 누구나 '빽'을 가지고 있다는 자신감을 가져볼 일이다.
2015.09.23 법정스님의 '통일 염원' 담긴 봉투 3개
통일은 반드시 온다…진통은 감내해야 할 業"
"통일되면 금강산 가서 공양" 맡겨진 유품, 통일나눔재단에
▲ 통일과 나눔 재단에 전달된 법정 스님의 봉투 3개. 스님은 통일이 되면 금강산 신계사를 찾아 부처님 전에 이 봉투를 바치고 싶어 했다. /이명원 기자
21일 통일과 나눔 재단에 한지를 접어 만든 빛바랜 봉투 1개와 일반 편지 봉투 2개가 인편으로 전달됐다. 2010년 입적한 법정(法頂) 스님의 유품이라고 했다. 각 봉투에는 1만원권 지폐 10장씩이 들어 있었다. 한 봉투의 1만원권 10장은 1979년 발행된 지폐로 일련번호가 다양했다. 다른 봉투 2개에 든 1만원권은 각각 '1440957가바아~1440966가바아' 'KA0209691L~KA0209700L'까지 나란한 일련번호였다. 각각 2000년, 2007년에 발행된 지폐였다.
이 봉투를 갖고 온 사람에게 누가 보낸 것이냐고 묻자 "노(老)보살"이라고만 답했다. 칠순의 노보살과 전화가 연결됐다. 그는 "1985년부터 법정 스님이 서울 오실 때마다 뵙고 일을 도와드린 사람"이라며 말문을 열었다.
"법정 스님은 생전에 한국은행에서 새로운 디자인의 지폐가 나오면 바로 1만원짜리 10장을 가져가 바꾸시곤 했어요. '통일되면 은사인 효봉 스님이 출가한 금강산 신계사에 차 운전해서 가서 (새 지폐를) 부처님께 공양하자'고 하셨죠. 그런데 스님은 안타깝게도 통일을 못 보고 가셨어요. 최근 통일나눔펀드가 출범한 것을 보고 펀드에 기부하는 것이 스님의 유지(遺志)를 받드는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일제강점기 판사로 일했던 효봉(曉峰·1888~1966) 스님은 1925년 금강산 4대 사찰 중 하나인 신계사로 출가했다. 법정 스님은 6·25전쟁으로 민족이 서로 총부리를 겨누는 참상을 목격한 후 1954년 효봉 스님을 은사로 모시고 출가했다.
▲생전의 법정 스님은“통일 과정에서 혼란과 진통이 있겠지만 그것은 우리가 감내해야 할 업(業)이다. 통일은 반드시 이뤄질 것이다”고 말하곤 했다(왼쪽 사진). 효봉 스님. /이진한 기자(왼쪽 사진)
노보살은 "법정 스님은 통일은 반드시 이뤄진다는 확고한 생각을 갖고 계셨다"고 했다. 법정 스님은 "통일은 이뤄지지만 독일 통일과는 다를 것이다. 독일은 준비도 많이 돼 있어서 혼란이 적었지만 우리는 굉장한 진통과 혼란이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것은 우리가 감내해야 할 업(業)이다"고 말했다고 노보살은 전했다. 노보살은 "첫째 봉투에 넣으시는 것은 직접 못 봤지만 두 번째, 세 번째 봉투에 새 지폐를 넣으시는 것은 목격했다"며 "법정 스님이 '자, 봉투 여기 있어요. 잘 봐둬요'라고 맡기셨다"고 했다.
그는 "스님 모시고 신계사 갈 생각을 많이 했는데, 스님 입적 후 한동안 봉투의 존재를 잊고 지냈다"며 "통일나눔펀드가 출범하고 국민적 관심이 모이는 것을 보면서 문득 스님의 봉투가 떠올랐다"고 했다. 이어 "스님을 좋아하고 따랐던 많은 불자(佛子)들에게 (통일나눔펀드에) 동참할 수 있는 동기부여가 되지 않을까 싶다"면서 "엊그제 스님이 마지막으로 머무셨던 강원도 오두막을 찾아 너럭바위에 절하고 (기부 계획을) 스님께 고했다"고 말했다.
2015.10.16 불교계도 '女風당당'
조계종 외국어 스피치대회, 개인·단체大賞 여성이 휩쓸어 "파워포인트, 동작 하나까지… 꼼꼼히 준비하는 열의 대단해"
"역시~."
지난 14일 오후 조계사 경내 한국불교역사문화기념관 지하공연장. '제1회 조계종학인 외국어 스피치대회' 결과가 발표되자 조계종 주변에선 이런 탄성이 나왔다. 조계종 교육원이 처음으로 전국의 승가대학 학생인 예비 스님(사미·사미니)을 대상으로 외국어 능력을 평가한 이 대회에서 개인과 단체 대상을 여성인 사미니들이 휩쓴 것. 개인 부문에선 동학사 승가대 진홍 스님, 단체는 운문사 승가대학팀이 수상했다.
이날 대회에선 영어, 중국어, 일본어 부문으로 나눠 랩과 뮤지컬, 연극을 혼합한 공연이 펼쳐졌다. 공연장 왼편엔 사미니, 오른편엔 사미들이 앉은 채 시작된 행사는 불교방송 인기 DJ인 성전 스님의 사회로 이어졌다. 실수가 나오면 박수로 응원했고, 출신 학교별로 응원 손팻말을 들고 열띤 응원을 펼쳤다. 심사 기준은 발음 등 표현 능력과 불교적 내용, 그리고 청중의 호응도.
▲14일 열린 조계종학인 외국어 스피치대회에서 대상을 받은 사미니 진홍 스님이 기뻐하고 있다. /조계종 제공
사실 결과는 어느 정도 예견됐다. 우선 지난달 예선을 거쳐 이날 본선에 올라온 출전자는 사미니 68명(단체 포함), 사미 19명으로 여성 파워가 압도적이었기 때문이다.
이런 풍경은 작년에도 벌어졌다. 역시 조계종 교육원이 주최한 조계종학인 염불시연대회에서도 청암사 승가대학(단체)과 사미니인 운문사 승가대 보견 스님(개인)이 휩쓴 것.
이에 대해 작년과 올해 행사를 기획한 조계종 교육원 진광 스님은 "사시, 행시, 외시 같은 시험에서 여성들이 약진하는 것과 같은 현상이라고 보면 된다"고 했다. "동작 하나와 파워포인트를 준비하는 것 하나부터 악착같이 하는 모습이 열의가 대단하더라"고 말했다.
특히 올해 개인 부문 대상을 받은 진홍 스님은 자신이 영어 공부를 열심히 하게 된 동기를 설명해 호응을 얻었다. 2년 전 사찰에서 쓰레기 더미를 치우고 있었는데, 이 모습을 본 한 여성 불자가 아들에게 "너도 공부 열심히 하지 않으면 저렇게 된다"고 말하는 것을 듣고 충격을 받았다는 것. 진홍 스님은 "마흔 넘어 출가해 영어 공부 한 지도 오래됐지만 바쁜 승가대학 생활 틈틈이 잠시라도 짬이 나면 5분, 10분이라도 단어 하나 더 외고 공부하다 보니 시간 없다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며 "앞으로 국제적으로 한국 불교를 알리는 일을 하고 싶다"고 말했다.
2015.12.03 '종교인 과세' 국회 본회의 통과
한기총 "심각한 우려… 자율 납세가 바람직"
한국기독교총연합회(한기총·대표회장 이영훈 목사)는 2일 종교인 소득에 세금을 부과하는 소득세법 개정안이 국회를 통과한 데 대해 "심각한 우려를 표한다"며 "원칙적으로 종교인 과세를 법으로 제정하여 시행하는 것에 반대한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한기총은 성명에서 "한국의 큰 교회들은 현재도 자발적으로 세금을 납부하고 있다"며 "법으로 강제성을 띠기보다는 교회가 자발적으로 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말했다. 성명은 "교회와 교단들도 종교인 과세에 대해 자체적으로 공청회나 세미나를 가지면서 합리적으로 문제를 풀어내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며 "납세 대상에 들어가지 않는 미자립 교회가 한국 교회의 80% 정도로 절대다수인 상황에서 종교인 과세는 시기상조"라고 말했다.
한기총은 또 "성직자들이 마치 특혜를 누리고 있는 것처럼 비치게 하는 여론에 편승해 정부나 국회가 이 문제의 결론을 성급히 내려서는 안 될 것이며 시간을 가지고 다각적으로 검토하여 함께 결론을 만들어 갈 것을 요청한다"고 밝혔다.
2016.02.26 "윤동주의 '序詩', 너무 와닿아 끝까지 외지 못하셨어요"
▲서울대교구 제공
아, 김수환… - 일생 촘촘히 재구성
그 사람… - 17명 인터뷰 모아 엮어
"추기경님, 이런 고급 차를 타고 다니시면 길거리의 사람 떠드는 소리도 안 들리고 고약한 냄새도 안 나겠네요."
1969년 김수환〈사진〉 추기경과 함께 캐딜락 승용차를 타고 가던 한 수녀가 농담을 던졌다. 한국 최초의 추기경이 탄생하자 천주교 신자 기업인들이 선물한 승용차였다. 그러나 김 추기경은 뒤통수를 망치로 맞은 느낌이었다. 그날 밤 그는 십자가 앞에 꿇어앉았다. 자신도 모르게 귀족이 된 모습을 통렬히 반성했다. 그는 결국 돌려보내고 평생 고급 차는 타지 않았다. 그랬던 그가 다시 한 번 캐딜락을 탔다. 선종(善終) 후 장지로 가는 영구차였다.
김수환 추기경의 선종 7주기를 맞아 최근 그를 기리는 책 2종이 선보였다. 전기(傳記) '아, 김수환 추기경'(김영사) 그리고 김 추기경과 교유했던 17명의 인터뷰를 모은 '그 사람, 추기경'(소담출판사)이다.
'아, 김수환 추기경'은 '간송 전형필' '혜곡 최순우, 한국미의 순례자'를 펴낸 전기작가 이충렬씨가 메모와 일기, 강론과 기고문, 언론기사와 관련 인사 인터뷰를 통해 김 추기경의 일생을 재구성했다. 앞의 '캐딜락 사건'도 김 추기경의 비서를 지낸 장익 주교에게 확인한 내용이다.
▲김수환 추기경. /서울대교구 제공
특히 당시 교황청 기관지 등의 기사를 토대로 1969년 당시 만 47세로 최연소 추기경으로 서임된 배경을 분석한 부분이 눈에 띈다. 요한 23세에 이어 제2차 바티칸공의회를 통해 가톨릭 쇄신을 밀어붙이며 보수파의 반발에 부딪혔던 바오로 6세 교황이 '젊은 우군(友軍)'으로 김 추기경을 발탁했다는 분석이다. 독일에서 당시 선진 학문 분야이던 그리스도교 사회학을 전공하면서 변화된 성속(聖俗) 관계를 고민하며 공의회 정신을 깊이 이해하고 제3세계 가톨릭의 입장을 대변해온 젊은 추기경이 필요했다는 이야기다. 군사 독재 시절 민주화에 앞장섰지만 민주화 이후 노년엔 후배인 함세웅 신부로부터 "시대에 뒤진 분"이란 소리를 들으며 염량세태(炎凉世態)를 맛봐야 했던 김 추기경의 87년 생애가 촘촘하게 재구성돼 있다.
서울대교구가 운영하는 평화방송이 엮은 '그 사람, 추기경'은 생생함이 생명이다. 2009년 당시 명동성당 주임사제로 김 추기경에게 마지막으로 병자성사를 준 박신언 몬시뇰은 '빵구 난 양말'을, 이해인 수녀는 윤동주의 '서시'를 다 외지 못하는 김 추기경을 기억한다. 그런데 그 이유가 "차마 못 외우신다고.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그 구절이 너무 와닿아서 그렇다"는 것이었다. 김정남 전 청와대 교육문화수석은 "길을 물어야 되는데, 길을 알려줄 목자가 없는 것"으로 김 추기경의 빈자리를 아쉬워하고, 안동교구장을 지낸 두봉 주교는 "참 웃기고 울리기를 잘하신 분"으로 기억한다.
2016.07.20 종교인 말의 무게
"사드 배치는 한반도 안정과 국제 평화를 위해 필요한 조치이다."(한국기독교총연합회·한기총) "사드 배치는 남북 관계를 더욱 악화시키고 한반도의 군사적 긴장을 한층 고조시킬 것이다."(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교회협)
정부의 사드 배치 결정을 두고 종교계가 최근 발표한 논평과 입장문의 주요 내용이다. 사드 배치 문제에 대해 보수 개신교계를 대변하는 한기총은 '찬성', 진보 시각을 반영하는 교회협은 '반대'다. 입장은 상반되지만 양측은 모두 '평화'를 이유로 삼고 있다. 한쪽에선 평화를 위해서 사드 도입을 찬성하고, 반대편에선 평화를 위해 사드 배치를 철회하라 한다. 종교 단체들이 표방하는 상반된 '평화의 조건' 앞에서 국민은 헷갈릴 법하다.
그런데 이미 알 만한 국민은 짐작하고 있다. 국가적, 사회적 이슈가 발생할 때 어느 쪽이 어떤 의견을 발표할지 예측 가능하기 때문이다. 지난 10여 년간 국군의 이라크 파병(派兵), 국가보안법 폐지 등 여러 논란 때도 종교계는 보수·진보 진영으로 나뉘어 찬반 공방을 벌였다.
다른 모든 분야와 마찬가지로 종교계 역시 특정 사안에 대해 찬반이 엇갈릴 수 있다. 그럼에도 국가 중요 사안에 대한 종교 단체들의 발언은 무거워야 한다. 찬반이 극명하게 갈린 사안을 중재하고 정리하기보다는 종교 단체조차 한쪽 당사자가 되어 비슷한 말을 보태는 것도 보기 민망하다.
최근의 사드 배치 논란을 보면서 작년 3월 주교회의 정의평화위원회(정평위)가 발표한 '후쿠시마 사고 4주기를 맞으며'라는 입장문이 떠올랐다. 당시는 월성 1호기의 연장 가동을 놓고 안전 문제로 논란이 뜨거웠다. 주교회의 정평위는 그 이전에 4대강 사업, 원전(原電) 신설, 밀양 송전탑, 제주 해군기지 등을 반대했었다. 천주교계 안팎에선 '정평위는 이번에도 원전 연장 가동을 반대하겠지'라는 예상이 있었다. 그러나 발표 내용은 예상을 깼다. 정평위는 당시 "핵발전소 재가동과 관련한 심의 과정은 전문적 지식이 요구되는 사안인 만큼 교회가 안정성 심의 과정이나 법률 준수 여부에 관한 입장을 표명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은 행동일 것"이라고 했다. "논란 중인 사안과 관련하여 어느 한쪽의 주장만 큰 목소리로 강조하여 분열을 자극하기보다는 합리적이고 철저한 자료에 근거한 대화, 각 분야 전문가들의 지속적인 논의와 활동을 통해 문제 해결에 다가서기를 바란다"고도 했다. 오랜만에 종교인다운 묵직한 목소리를 들은 것 같아 반가웠던 기억이 생생하다.
그러나 불과 1년여가 흐른 지금 정평위도 '예측 가능했던 옛날'로 'U턴'한 모양새다. 지난주 정평위는 민족화해위원회와 공동으로 낸 입장문에서 "한국 천주교회는 한반도의 군사적, 경제적 불안을 가중시키는 사드 배치를 강행하려는 현재의 상황에 심각한 우려와 함께 분명한 반대의 입장을 표명한다"고 말했다. 1년 전 '합리적이고 철저한 자료에 근거한 대화'를 강조하던 그 정평위가 맞나 싶을 정도다.
지금 우리를 둘러싼 상황은 한 치 앞을 내다보기 힘들다. 국민의 불안도 크다. 속인(俗人)들이 종교인의 말에 귀 기울이는 것은 뭔가 세속과는 다른 차원의 혜안을 바라기 때문이다. 무리한 기대는 아닐 것이다. 종교인 말의 무게가 회복되길 기대한다.
2016.07.29 목사님·스님·신부님, 휴가 언제 가세요?
[성직자의 여름휴가]
"휴가는 언제?"
요즘 일반인들이 가장 많이 주고받는 인사가 아닐까 싶다. 그렇다면 성직자들도 휴가가 있을까? 종교 기관들은 1년 내내 법회·미사·예배가 있기 때문에 시간을 내기가 쉽지는 않다. 그래서 성직자들은 다양한 형태로 휴식을 취한다. 가족이 있는 개신교 목회자들의 휴가는 일반인과 비슷하다. 가족과 함께 국내외로 여행을 가기도 한다. 다만 대개 일요일 예배에 맞춰 월요일부터 목요일 정도까지 휴가를 마치고 설교 준비에 들어간다.
독신인 불교 스님이나 천주교 사제들의 휴가는 일반인들과는 좀 다르다. 불교 조계종 총무원, 교육원, 포교원 등의 보직을 맡고 있는 스님들은 7월 말~8월 초 재가자 직원들이 휴가를 갈 때 맞춰 휴가를 사용하기도 한다. 그러나 불교에서 한여름철은 '하안거', 즉 집중 수행 기간이기도 하다. 지금도 전국의 선원에서는 2000여명의 선승(禪僧)이 음력 7월 보름(양력 8월 17일)까지 석 달 동안 화두(話頭)를 풀기 위해 더위를 잊고 정진하고 있다. 이 때문에 불교에서 본격 휴가철은 안거가 끝난 이후가 되곤 한다. 선원에서 나온 스님들이 국내외로 만행(卍行)에 나서서 해외 성지순례도 떠나기 때문.
천주교 사제들도 관행적으로 1년에 2주 정도 휴가를 쓴다. 취향에 따라 히말라야 트레킹을 떠나기도 하고, 외국 성지순례를 가기도 한다. 신학교 동창 사제들을 찾아 전국 각지의 성당으로 떠나기도 하지만 대개 업무가 많아서 제대로 휴가를 쓰지는 못한다고 한다. 휴가 문화가 발달한 유럽 천주교계는 분위기가 다르다. 유럽의 사제들은 신도들과 마찬가지로 1개월씩 휴가를 떠난다. 이때 유럽으로 유학 온 외국인 사제들에게는 '아르바이트' 자리가 나기도 한다. 휴가 떠난 사제를 대신해 해당 성당에 머물면서 미사를 집전하고 현지인들과 교유도 넓힌다.
본디 교황들도 휴가를 사용했다. 로마 남쪽의 소도시 카스텔 간돌포에 교황의 여름 별장이 있다. 요한 바오로2세, 베네딕토16세 등 역대 교황들도 한여름엔 이 별장에서 휴식을 취했다. 문제는 현 프란치스코 교황은 휴가를 계속 반납하고 있다는 것. 2014년 한국에 왔을 때에도 교황은 여름휴가 기간을 이용했다. 올해도 폴란드 크라쿠프에서 열리는 세계청년대회를 찾았다. '아무리 좋은 상사(上司)도 휴가 간 상사만 못하다'는 말이 있다. 교황청 성직자들은 휴가를 가면서도 왠지 마음이 편하지 않을 것 같다.
2016.08.19 스님도 '김영란법' 적용 대상?
조계종, 22일 김영란법 설명회
'김영란법'은 종교계 풍속도까지 바꿔놓을까.
대한불교 조계종은 오는 22일 오전 한국불교역사문화기념관 지하 공연장에서 '부정청탁 및 금품 등 수수의 금지에 관한 법률'(일명 김영란법) 교육을 한다. 대상은 총무원·교육원·포교원 등 중앙종무기관을 비롯해 산하기관 교역직과 일반직 종무원 등 약 300명이다. 이 자리에선 동국대 법학과 박민영 교수가 9월 28일부터 시행 예정인 김영란법의 취지와 주요 내용을 설명하고 각종 사례를 통한 문답을 가질 예정이다. 종교계에서는 그동안 헌법재판소의 김영란법 합헌 결정 후 한기총과 한교연 등 개신교 단체 등이 환영 논평을 발표했다. 하지만 김영란법과 관련해 종단 차원의 단체 교육은 조계종이 처음이다.
얼핏 생각하면 불교와 김영란법은 별로 관련이 없을 것처럼 보이는데 왜 조계종이 먼저 나서서 설명회를 열까. 조계종 측은 "김영란법은 불교계라고 해서 예외가 아니다"고 말했다. 김영란법 적용 대상자는 공직자와 사립학교 교원, 언론인 등이다. 그런데 불교계도 정부·지자체 산하 기관의 위원, 교계 언론사 임직원, 종립학교 임직원, 복지시설장 등이 이 법의 적용 대상이다. 이는 개신교·천주교계도 마찬가지다. 불교계에서는 적용 대상 스님과 재가자가 8000명에 이를 것으로 추산하기도 한다. 이 때문에 법이 시행되면 그동안 한국 불교계 미덕으로 여겨져 온 보시와 공양 등 절집 문화 역시 상당 부분 변화가 불가피해 보인다. 스님과 신도 사이에 주고받던 차비·약값 등을 비롯해 차(茶)나 다기(茶器), 된장, 고추장 등 선물과 각종 기념품도 본인과 상대의 신분과 액수 등을 따져봐야 하는 것이다.
조계종 관계자는 "김영란법은 스님과 종무원 본인뿐 아니라 업무상 만나게 되는 상대가 적용 대상이 될 수 있는 등 구체적인 사례로 들어가면 현재로서는 예측하기 어려운 부분도 많다"며 "미리 공부해서 준비하고 모범을 보이자는 뜻에서 설명회를 마련했다"고 말했다. 박 민영 교수는 "흔히 김영란법에 대해선 '3·5·10(음식·선물·경조사비) 원칙'만 생각하는 경우가 많지만 실제 적용 범위는 매우 광범위하기 때문에 법의 내용을 미리 알고 숙지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조계종은 중앙 종무기관 설명회 결과를 바탕으로 앞으로 전국의 교구(敎區) 본사 등과 협의해 김영란법 교육을 확대하고, 필요할 경우 매뉴얼도 마련할 계획이다.
2016.08.23 '특별한 사람'의 "특별히 한 것 없다"는 말
역시 짐작한 대로였다. 올해 만해대상을 받은 오스트리아 출신 마리안느·마르가레트 수녀는 세금을 뺀 상금 전액을 남미 볼리비아에 직업학교를 짓는 데 쓰기로 했다. 두 수녀를 기리는 사단법인 마리안느·마르가레트 대표를 맡은 김연준 소록도성당 신부는 22일 이 소식을 전하며 "두 수녀님은 한 푼도 자신들을 위해 쓰는 걸 바라지 않았다"며 "한국보다 더 어려운 곳을 돕고 싶어 했다"고 말했다. 소록도에서 43년간 환자를 돌보다 지난 2005년 귀국한 두 수녀는 고국에서 연금으로 최저 생활을 한다. 평생 무소유로 살아왔고 지금도 방에 한자로 '無(무)' 자를 써 붙여놓고 산다. 두 수녀는 지금도 어떻게 그렇게 봉사할 수 있었느냐는 물음에 "특별히 한 거 없다"고만 말한다. 지난 12일 두 수녀를 대신해 수상한 오스트리아 가톨릭부인회 임원들이 전해준 말도 똑같았다. 두 수녀는 귀국 후에도 "특별히 한 것 없다"는 말만 되풀이했다고.
'특별한 것 없다'는 말은 종교 담당 기자에겐 일종의 화두(話頭)다. 종교인 혹은 종교에 귀의해 아무 조건 없이 남을 위해 헌신한 '특별한 이들'에게 이유나 동기에 대해 물으면 대개 '특별한 것 없다'고 말한다. 그래서 헌신의 비결을 찾으려는 문답은 헛돌기 일쑤다. 속으로 '기왕 시작했으니 관성적으로 계속 하는 것일까?' '보통 사람들과는 차원이 다른 공감 능력을 가지고 있을까?' 등의 질문을 떠올려보지만 여전히 뾰족한 답을 찾지 못했다.
"특별한 것 없다"고 말하는 이들은 오히려 자신들의 나약함을 토로하곤 했다. 서울 영등포역 인근에서 행려인과 노숙인들을 무료로 진료하다 정작 자신의 몸속에서 자라는 암세포를 놓쳤던 고(故) 선우경식 요셉의원 원장. 그는 생전에 "'2년만…' '3년만…' 하면서 늘 도망가려 했다"고 말했다. 남(南)수단 톤즈의 성자(聖者)로 불리는 고(故) 이태석 신부도 그랬다. 홍창진 신부는 최근 저서 '유쾌한 인생 탐구'에서 브라스밴드용 악기와 구호품을 싸들고 이태석 신부를 찾아갔던 이야기를 적었다. 현지에서 만난 이 신부는 "너무 힘들어요. 봉사는 견디면 되는데, 이 적막함과 문명과의 이별, 뇌가 정지된 기분…, 힘들고 지칠 땐 가끔 들에 나가서 울고 옵니다"라고 털어놓았다고 한다.
왜 고독함에 몸서리치고 혼자 울면서까지 남을 돕는가. 올해 만해평화대상 공동 수상자인 국제구호단체 로터스월드 이사장 성관 스님은 이런 궁금증에 힌트를 제공했다. 10년간 모두 65차례나 캄보디아를 오가며 현지 어린이와 어려운 이웃들을 챙겨온 그는 시상식 수상 소감에서 "봉사 활동은 저에 대한 위로이자 격려, 칭찬, 피난처였다"고 했다. '보람'이란 단어보다는 '위로'라는 표현이 더 솔직하게 느껴졌다.
모든 사람이 특별하게 살 수는 없다. 그러나 '본받기'는 보통 사람도 가능할 것 같다. 홍창진 신부는 앞의 책에서 '이태석 신부가 남긴 선물'을 이렇게 적었다. "한없이 위대하게만 느껴져 감히 따라갈 수 없는 존재로만 생각했던 그가 실은 나와 똑같은 두려움을 안고 사는 나약한 인간이라는 걸 깨닫는 순간, 나도 어쩌면 지금보다 더 나은 사람이 될 수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2016.09.02 조선 총독에게 호통쳤던 스님 아시나요
"전 조선 총독 데라우치는 조선 승려로 하여금 일본 승려처럼 파계하도록 했으니 무간지옥에 떨어져 큰 고통을 받을 것이다. 정치와 종교는 분리되어야 한다."
1937년 조선 총독 미나미는 전국 31개 본산 주지와 도지사를 모아 이른바 '불교 진흥책' 회의를 열었다. 마곡사 주지로 이 자리에 참석한 만공(滿空·1871~1946·사진) 스님의 일갈에 미나미는 머쓱해졌다. 이야기를 들은 만해 한용운 선사가 "잘했다"며 "이왕이면 주장자(지팡이)로 저 쥐새끼 같은 놈들을 한 방씩 갈겨 주지 그랬느냐"고 하자 만공 스님은 "미련한 곰은 방망이를 쓰지만 큰 사자는 원래 할(喝·말로 설명할 수 없는 도리를 일러주기 위해 크게 고함을 지르는 것)을 하는 법"이라고 했다. 불교계에 전해오는 거인들의 일화다.
만공 스님의 일화를 주제로 한 학술회의가 열린다. 오는 8일 오후 1시 충남 예산 덕숭총림 수덕사 경내 황하정루에서 열리는 '제8회 만공대선사 학술대회'다. 수덕사는 경허(鏡虛)·만공의 전통을 잇고 있는 사찰. 경허 스님은 한국 근대 불교의 선풍(禪風)을 일으킨 주역이며, 만공 스님은 그의 법을 이은 제자다. 경허·만공선양회(회장 옹산 스님)가 주관하는 학술회의에서는 불교 전문 언론인 이은윤씨, 이덕진(문성대)·김광식·하춘생·이동언(이상 동국대) 교수가 나와 만공 스님의 선(禪) 사상, 후학들에 대한 참선 지도 과정, 비구니 교육에 깃든 독립 정신에 대해 발표한다.
경허·만공선양회 회장 옹산 스님은 "만공 선사가 미나미 총독에게 던진 사자후는 정신적 차원의 폭탄 투척과 다름없다"며 "복잡한 국제 정세로 한반도에 먹구름이 드리운 오늘의 시점에서 민족 문화를 수호하기 위한 만공 선사의 할을 재조명하기 위해 학술회의를 마련했다"고 말했다.
2016.09.28 신앙인답게 사는 게 어려운가
'선데이 크리스천이 먼데이 크리스천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개신교계에서 자조적으로 하는 말이다. 주일 예배 빠지지 않고, 봉사도 열심이지만 막상 일상으로 돌아가면 신앙 없는 사람들과 다를 바 없이 산다는, 신앙과 일상의 불일치를 꼬집는 표현이다.
지난 4월 총선 후 20대 국회 개원을 전후해 국회에서는 종교별 신자 의원 모임이 줄을 이었다. 20대 국회의원 300명 중 개신교, 천주교, 불교 신자만 꼽아도 줄잡아 240명 선에 이른다. 정치인뿐 아니라 공무원 사회에도 종교별 모임이 있고, 법조인 등 직업별 모임도 상당하다. 이렇게 곳곳에 신앙인 조직이 있는 나라라면 우리 사회가 정직하고, 투명하고, 서로 위하는 모습이어야 옳다.
그러나 우리가 목격하는 실제는 그렇지 못하다. 국회는 싸움판이 되기 일쑤고, 각종 비리 사건에도 신앙을 가진 이들의 이름이 심심찮게 등장한다. 심지어 사회 고위층 인사가 검은돈을 움직이는 정거장으로 종교기관을 이용하기도 한다. 신앙인 많은 나라의 자화상이 왜 이럴까.
고위층 인사들은 종교 활동에서도 알게 모르게 '특권'을 누린다. 종교 행사 때에도 앞쪽 자리를 배려받고, 일반 신자들은 직접 만나기 힘든 종교인들과 '독대(獨對)'할 기회도 상대적으로 많다. 종교인들이 바쁜 시간을 쪼개 사회 고위층 인사를 따로 만나는 것은 이들의 사회적 역할에 대한 기대 때문일 것이다. 그런 독대 자리에서 정치인에게 "상대 당과 열심히 싸우라" "막말도 서슴지 마라"고 할 종교인은 없을 것이다. 기업인에게 "국가 경제 생각 말고 개인 재산이나 챙기라" "세금 적게 내고, 종업원 줄이라"고 권하거나 공무원에게 "눈치 잘 보고 그저 보신(保身)이나 하라"고 말하는 종교인도 상상할 수 없다. 종교인들은 아마도 각 종교의 가르침에 따라 올바른 처신과 언행을 권할 것이다. 국가 사회를 위한 봉사와 헌신도 주문할 것이다.
그런데 현실은 왜 이럴까. 예배, 법회, 미사에 참가할 때 마음은 예배당, 법당, 성당을 나서는 순간 싹 잊는 것일까. 종교를 방패 혹은 장식품, 표(票)를 얻는 배경쯤으로 여기지 않고서야 이럴 수는 없다. 공직자와 고위층에게 자신의 종교적 정체성을 공개하라는 이야기가 아니다. 다만 최소한 일반인 수준에서 볼 때에도 양심적이고, 정직하며, 공사(公私)를 구분할 줄 알았으면 하는 정도의 바람이다.
'답게 살겠습니다'란 이름의 운동이 있다. 지난 2014년부터 7대 종단 평신도 단체들이 국민 각자가 본분을 다하자는 취지로 벌이는 운동이다. 다른 분야도 활발하지는 않지만 이 운동은 특히 국회에서 맥을 못 춘다. 지난 19대 국회 때에도 임기 종료 직전 개신교·천주교·불교 신자 의원 2 0여명 남짓이 겨우 모여서 선포식을 했을 뿐이다. 혹시 당시 모임에 불참한 의원들은 '국회의원답게 살 자신이 없어서' 불참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 정도다.
나라 안팎으로 어려운 때다. 모든 신앙인이 성직자처럼 살 수는 없다. 다만 각 종교가 강조하는 기본 덕목이라도 지키려 애쓰면 조금 더 나은 사람이 많아지고, 조금 더 나은 사회가 되지 않을까 싶다.
2016.10.21 "교회, 이젠 예배당만큼 좋은 복지관 지어 봉사해야죠"
- 이성희 서울 연동교회 목사
부친 故 이상근 목사 이어 父子 예장통합 총회장 첫 기록 "3·1운동 주도했던 크리스천… 다시 '민족 교회'로 거듭나길"
"요즘도 어머니는 무슨 일이 있으면 말씀하십니다. '너희 아버지는 안 그랬는데…'라고요."
서울 종로5가 연동교회 이성희(68) 담임목사에게 선친 이상근(1920~1999) 목사는 롤모델이다. 평양신학교를 나와 대구제일교회 담임목사를 지낸 이상근 목사는 손꼽히는 설교자이자 성경 주석(註釋) 전문가, 신학자로 이름 높았다. 1974년 제59회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 총회장도 지냈다. 아버지를 닮은 목회자를 꿈꿔온 이성희 목사는 최근 예장통합 101회 총회장에 취임했다. 한국 개신교 역사상 첫 부자(父子) 총회장이 탄생한 것. 19일 오후 연동교회에서 만난 이성희 목사는 "가문의 영광, 이런 생각보다는 내년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아 한국 교회가 어떻게 개혁해야 할까를 고민하고 있다"고 말했다.
◇"수도자 같았던 아버지"
▲예장통합 총회장 이성희 목사는“한국 교회가 3·1운동 때처럼 민족의 사랑을 받고, 희망을 주며 민족을 이끌어갈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연동교회는 초대 게일 목사를 비롯해 함태영·전필순·김형태 목사에 이어 이 목사까지 다섯 명의 총회장을 배출했다. /장련성 객원기자
"아버지는 수도자 같았습니다. 매일 저녁 9시 취침, 새벽 3시 기상이었죠. 어릴 땐 사람들은 모두 그렇게 사는 줄 알았어요."
이성희 목사가 기억하는 부친의 인상은 "절제, 또 절제"이다. 검소한 생활뿐 아니라 말과 감정까지도 절제했다. 기쁨·슬픔 심지어 아픔까지도 표현하지 않았다. 1950년대 미국 유학을 다녀온 후 대구에서 목회 활동을 하면서 전도유망한 청년들이 장학금 받아 미국 유학하도록 도왔지만 정작 차남인 이성희 목사가 미국 유학 갈 땐 "네 힘으로 공부해 봐라" 했다. 성경 주석 책을 펴내 받은 인세로 땅을 샀다가 목사 안수 40주년을 맞아 전 재산을 대구제일교회에 기증했다. 교회는 은퇴 목회자 양로원(대구기독교원로원)을 지었고, 이성희 목사의 모친은 지금 이곳에 살고 있다.
절제에 대한 이상근 목사의 철학을 보여주는 일화가 있다. 장발(長髮)이 유행하던 때 누군가 '목사의 머리카락 길이는 어느 정도가 적당한가'를 물었다. 잠시 묵상하던 이상근 목사의 대답은 "목회자의 머리카락은 교인들에게 관심의 대상이 되지 않을 정도의 길이여야 합니다"였다. '말씀' 외에 어떤 것도 교인의 관심을 끌어선 안 된다는 뜻이다. 가슴에 새긴 아버지의 말씀은 "설교 준비는 주일 예배 설교를 마칠 때 비로소 끝난다"이다. 목회자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위해 쉼 없이 애써야 한다는 뜻이었다.
◇독립·민주화운동 요람, 연동교회
이성희 목사가 연동교회에 부임한 것은 1990년, 만 42세 때였다. 연동교회 80년사, 90년사를 연구하던 이 목사는 '사회 복지'로 목회 방향을 잡았다. 연동교회는 독립운동과 민주화운동의 요람이었다. 이준 열사, 월남 이상재 선생, 김마리아 여사, 이갑성 전 광복회장 등 독립운동가 교인들이 즐비했다. 1970년대엔 김형태 전 담임목사를 중심으로 민주화운동에도 앞장섰다. 이 목사는 "우리 교회는 사회적 문제에 늘 관심을 가져왔다. 그런 점에서 1990년대의 시대정신은 사회를 섬기는 복지 활동이라고 생각하고 교인들께도 말씀드렸다"고 말했다. 그런 비전에서 연동복지재단이 탄생했다. 연동복지재단은 지역아동센터, 어린이집, 원로관 등을 운영하고 있다.
◇"교회가 사회를 외면한 것은 아닌가"
이성희 목사는 총회장 취임사에서 '민족 교회'를 강조했다. "2019년 삼일운동 100주년에는 한국 교회가 다시 민족의 사랑을 받고 민족을 이끄는 민족 교회로 거듭날 수 있도록 그 틀을 마련하겠다"는 것. 이 목사는 "삼일운동 당시 1600만 인구 중 크리스천은 20만명으로 인구의 1.3%에 불과했지만 삼일운동을 주도하며 민족의 사랑을 받고 민족을 이끌었다"며 "지금 사회가 교회를 외면한다고 하지만 사실은 교회가 사회를 외면했던 결과가 아닌가 반성한다"고 말했다.
"교회는 상향(上向), 내향(內向), 외향(外向)의 삼각형으로 서야 합니다. 상향은 예배 드릴 공간, 내향은 교육할 공간 그리고 외향은 사회를 향한 공간이어야 합니다. 성장기 한국 교회는 예배당과 교육관은 잘 지었는데 사회복지관 대신 기도원을 지었습니다. 사회를 외면한 셈이지요. 본당, 교육관만큼 훌륭한 사회복지관을 지어서 봉사해야죠."
2016.11.01 '양 냄새 밴 목자'가 필요하다
"한국 교회가 오늘날 프랑스 교회처럼 되지 않기 위해선 복음으로 살아가는 것이 중요하다."
최근 프랑스 천주교 순례단이 한국을 다녀가면서 이런 충고를 남겼다고 한다. 150년 전 병인박해 때 순교한 프랑스인 10명의 출신 교구 신자들로 구성된 순례단이다. 프랑스는 한때 '천주교의 큰딸'로 불릴 정도로 막강한 천주교 교세를 자랑했다. 그런데 이번 순례단의 한 주교는 "프랑스는 더 이상 그리스도교 국가가 아니다. 다종교 세상에 살게 돼 '모두가 믿던 대중적 가톨릭'에서 '선택받아야 하는 가톨릭'으로 바뀌었다"고 말했다고 한다. "(낯선 선교지에 도착한) 선교사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법을 배워야 하고 활력 있고 기쁘게 살며 선교 열정으로 충만한 신자 공동체를 세워야 한다"는 말도 나왔다.
열흘 남짓 일정으로 한국을 방문한 순례단이 한국 천주교의 속사정을 속속들이 알고 한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그러나 천주교계는 서울대교구가 발행하는 '평화신문'이 사설로 다룰 정도로 순례단의 충고를 무겁게 받아들이고 있다.
프랑스 순례단이 충고하고 지적한 현상은 비단 천주교만의 걱정거리는 아니다. 한국의 여러 종교가 공통으로 직면한 현상이다. 모든 종교가 대중의 '선택'을 받기 위해 '선교사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법을 배우고, 선택받으려' 경쟁하는 사회다. 선택받는 비결은 '복음으로'라는 표현에 있을 것이다. 성직자에게 이 말을 대입하면 프란치스코 교황이 말한 '양(羊) 냄새 나는 목자(牧者)'일 것이다.
/그래픽=이철원 기자
이른바 '최순실 게이트'를 보면서 최근 국내 번역된 책이 떠올랐다. '낯선 이와 느린 춤을'. 치매 남편을 20년간 간병해온 여자의 실화다. 미국의 앵커 출신인 아내는 오랜 간병 과정을 치밀하고 생생하게 묘사했다. 실력 있는 의사였던 남편이 50대 후반부터 기억과 언어 능력을 상실하고 식물인간으로 변해간다. 당초 의사들은 기껏해야 10년쯤 살 것이라고 했었다. 그 20년간 상상할 수 없었던 일이 벌어지고 악화됐다. 주변 사람들은 저자에게 물었다. "아직도 남편을 사랑하니?" "처지가 바뀌었다면 남편도 너처럼 희생할까?" 이런 권유도 했다. "할 만큼 했으니 이젠 이혼하고 네 인생을 살렴." 그러나 아내는 끝내 포기하지 않는다. 저자는 마지막에 "남편과 나는 여러 해 동안 어떤 낯선 이와 느린 춤을 추었다"고 적었다.
지금 우리 국민에게 닥친 상황도 '낯선 이와 느리게 춤을 춰야 하는' 것이 아닐까. 상상도 못 했던 낯선 사건이 일어나고, 쳐다보기도 싫은 추악한 실상은 매일 업데이트된다. 그렇다고 사랑하는 대한민국을 포기할 수는 없다. 시간이 지나면 어떻게든 사태는 수습될 테지만 상처 난 민심은 쉽게 치유되지 않을 것이다. 지금의 분노와 공허함, 참담함도 기억 속에 남을 것이다.
이 상처의 치유 과정에 종교인의 역 할이 중요하다는 생각이다. 나라 사랑과 걱정으로 광장에 나선 시민의 공분(公憤)을 공동의 선(善)을 향하도록 이끌어야 한다. 양 떼와 함께 울며 상처에 약 발라주고, 따뜻하게 안아줄 목자가 필요하다. 이 낯설고 고통스러운 시간이 지난 후 우리 국민이 "그때 참 고마웠다"고 말할 수 있는 '양 냄새 밴 목자'가 필요하다. 그런 목자와 종교가 선택받을 것이다.
2016.12.06 "속지 말자, 이 꼴 난다"
"세상 일은 '될 대로 되는 것'입니다."
연일 이어지는 어지러운 뉴스를 읽다 8년 전 법정(法頂·1932~2010) 스님과의 만남에서 들은 이 말이 떠올랐다. 스님이 말한 '될 대로'는 일반적으로 흔히 생각하는 자포자기(自暴自棄)가 아니다. 스님은 '될 대로'에 대해 이렇게 덧붙였다. "'준비된 대로'라는 뜻입니다. 씨앗을 뿌린 대로 거둔다는 말입니다." 한마디로 '자업자득(自業自得)', 즉 '업(業)'의 엄중함을 강조한 이야기다.
미신적 요소를 꺼리는 스님이었지만 여러 법문에서 '업'과 '업의 파장(波長)'을 자주 강조했다. "우리가 보고 듣고 말하고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은 곧 업이 됩니다. 우리 마음속에 그와 같은 씨앗이 뿌려지는 것입니다." 그는 또 "죽고 난 후에 우리에게 남는 것은 집? 예금? 명예? 모두 아니다. 오직 덕(德)이 삶의 잔고(殘高)로 남는다"고도 했다.
스님이 업을 강조한 것은 다음 생에 잘 살자는 뜻만은 아니다. '지금, 여기'를 잘 살고 좋은 씨앗을 뿌려야 한다는 쪽에 방점이 찍혀 있었다. 부모가 지은 업이 자녀에게 영향을 미쳐 고통받는 모습을 보게 되는 사례까지 법문에서 소개한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금생(今生)에 지은 업이 윤회한 후 다음 생의 자신에게만 돌아오는 것이 아니라 금생의 자신에게 영향을 끼치기도 한다는 뜻이었다.
▲2008년 11월12일 법정스님이 서울 명륜동의 한 시인의 집에서 새로이 선보이는 책과 관련하여 사부대중에게 전할 법문을 말하고 있다. /이진한 기자
천주교 대표 지성으로 꼽히는 원로 정의채(91) 몬시뇰의 지론은 '제대로'와 '한 만큼'이다. 그가 말하는 '한 만큼'은 법정 스님이 말한 '될 대로'와 비슷한 뜻이다. "제대로 하지 않고, 자신이 한 것보다 많이 바라기 때문에 정치·사회적 문제가 발생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지금 목도하고 있는 현실은 두 종교인이 말한 '될 대로'와 '한 만큼'의 결과이다. 수많은 사람의 충고와 건의를 무시한 불통의 씨앗, 대통령이 비선(�線)에게 국정을 '코치'받고 상의했다는 씨앗, 사건이 들통난 후에도 시원하게 털어놓지 않고 이런저런 핑계와 떠넘기기를 거듭한 씨앗들이 지금 우후죽순처럼 발아(發芽)하고 있다. 제대로 하지 않고, 한 만큼이 아니라 한 것보다 더 바라기 때문에 벌어진 일들이다. 그 결과는 매 주말 촛불시위 참가자 수를 경신하는 열매로 나타나고 있다. 이젠 호미로도 가래로도 막지 못할 지경에 이르렀다.
법정 스님은 "스님을 믿지 말라"고도 했다. "스님은 절에서 한때 머물다 가지만, 신도들은 대를 이어 이 도량을 지키고 보살펴야 합니다." 이 말에서 스님을 정권·대통령, 신도를 국민, 도량을 대한민국으로 바꿔 읽으면 바로 우리 현실이 될 것이다. "자기 자신에게 의지하고, 진리에 의지하라. 자기 자신을 등불 삼고, 진리를 등불 삼으라(自燈明 法燈明)"는 부처님 최후의 당부도 강조하곤 했다. '주인 의식'이다.
지금도 우리는 매 순간 보고 듣고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면서 씨앗을 뿌리고 있다. 그 씨앗이 어떤 열매로 돌아올지 생각하면 모골이 송연하다. 지난달 동안거(冬安居) 석 달간의 집중 수행을 시작하는 결제 법회에서 한 조실 스님은 현 시국에 대해 일갈(一喝)하려다 삼켰다고 한다. 그가 원래 하려던 법문 한마디는 "속지 말자, 이 꼴 난다"였다고 한다.
2017.01.20 "새해 복 많이 지읍시다"
"밥값 내놔라!" 생전의 성철(性徹·1912~1993) 스님은 툭하면 이렇게 일갈했다. 선방(禪房)에서 참선하다 조는 선승에게 장군 죽비를 쩍 내리치며 그랬고, 질질 끌어다 계곡의 얼음물에 메다꽂으며 외쳤고, 멀쩡히 참선 수행하는 도반(道伴)도 '밥값'으로 기습했다. 최근 출간된 '성철 평전'(모과나무)엔 이런 일화가 즐비하다.
특히 동갑내기 '절친 도반' 향곡(香谷· 1912~1979) 스님과는 멱살잡이가 일상이었다. 봉암사 결사 때의 일화는 유명하다. 1947년 시작돼 6·25전쟁 발발 전까지 이어진 봉암사 결사는 '부처님 법대로 살자'를 모토로 당대의 선승들이 모여 '날마다 두 시간 이상 노동한다' '아침은 죽, 오후엔 불식(不食)' 등 생활규칙을 정하고 추상같이 정진한 전설적인 결사였다. 이런 자리에서 두 사람은 툭하면 서로 멱살을 잡았다. 억수같이 비가 쏟아지는 가운데 서로 절 마당에 메다꽂고 씨름을 했다. 겉으론 몸싸움이었지만 실은 두 선승은 '법(法) 거량' 즉 '깨달음의 싸움'을 벌이는 것이었고, 이 광경을 지켜보는 수행자들을 위한 최고의 '퍼포먼스'였다.
▲1993년 11월4일 열반한 조계종 종정 성철 큰 스님. 평생 누더기 한벌,
지팡이 하나만으로 생활한 검소함은 불교계뿐만 아니라 사회전체의 존경을 받았다. /조선일보 DB
1960년대 후반 이후 성철 스님은 해인사, 향곡 스님은 부산 기장군 묘관음사에 머물렀다. 향곡 스님은 이런 혼잣말을 되뇌곤 했다. "보고 지바라(싶어라), 보고 지바라. 성철이가 보고 지바라. 가고 지바라, 가고 지바라. 해인사로 가고 지바라." 당시 시봉하던 법념 스님이 "해인사에 한번 가시죠" 권하면 "가고 싶어도 내가 참지. 자꾸 가면 대중한테 미안해서 자주 못 가"라 했단다. 그래서 두 선사는 1년에 겨우 한두 번 만났다. 만나면 시간 가는 줄 몰랐다. "방 안에서 두 분이 말씀을 나누시는데 웃음소리가 끊이질 않아요. 그래서 향곡 스님 가신 후에 '무슨 이야기를 그렇게 재밌게 하셨느냐'고 여쭈면 '벽암록' 펴놓고 화두를 하나씩 점검하며 '(뜻을) 일러보라'고 이야기했다고 하셨습니다."(원택 스님) 웬만큼 수행한 선승들도 이해하기 어려운 수준의 화두(話頭)를 놓고 보통 사람들 수다 떨듯이 이야기꽃을 피웠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법 싸움'은 깨달은 스님들 사이에서의 일이었다. 팔만대장경을 거꾸로 왼다는 전설의 성철 스님이었지만 조계종 종정에 취임한 후 내린 법어에선 철저히 한글 세대에 눈높이를 맞췄다. "자기를 바로 봅시다" "남을 위해 기도합시다" "남모르게 남을 도웁시다"…. 한문투성이 어려운 말씀이 아니라 당장 생활에서 실천하기에 쉽고도 어려운 화두가 아닐 수 없다.
설이 일주일 앞으로 다가왔다. 양력 1월 1일과는 또 달리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라는 인사와 덕담이 오갈 것이다. 성철 스님이 지금 생존해 설 세배를 받는다면 일반인들에겐 어떤 덕담을 할까 생각해봤다. 아마도 "새해 복 많 이 지으라"라며 "자기를 바로 보고, 남을 위해 기도하며, 남모르게 남을 돕는 것이 복 짓는 일이다. 복을 많이 지어야 받을 복도 많지 않겠나…"라고 했을 것 같다.
올해 설엔 인사말과 덕담을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에서 "새해 복 많이 지읍시다(지으시게)"라고 조금만 바꿔보면 어떨까. 덕담하는 이나 받는 사람의 새해 첫 마음가짐이 조금은 달라질 것 같다.
02.11 무산스님 "나라가 '三毒 불' 빠져… 그 불길 잡아야 대권 잡아"
- 조계종 원로, 법문서 정치권 질타
"자기 허물까지 볼 줄 아는 공명정대한 사람이 대통령감… 중생 아픔을 화두로 삼아야"
"대통령 되겠다는 정치인들은 자기 허물을 감추고 남의 허물을 들춰내는 추태가 점입가경(漸入佳境)이라고 합니다. 사람들이 '누가 대통령이 되느냐?'고 물으면 '삼독(三毒·탐욕, 분노, 어리석음)의 불길을 잡는 사람이 민심도 잡고 대권도 잡는다'고 정중하게 전하십시오."
10일 오전 강원도 인제군 백담사에서 열린 동안거(冬安居) 해제 법문에서 불교 조계종 기본선원 조실(祖室) 무산(霧山·사진) 스님이 대통령 탄핵 심판과 대선을 둘러싸고 권력 놀음에 빠진 정치판을 질타했다. 일반 대중에겐 오현 스님으로 더 잘 알려진 불교계 원로 무산 스님의 이날 법문은 석 달 만에 세상에 나가는 선승(禪僧)들에게 던진 것이지만, 진짜 과녁은 산문(山門) 너머 '삼독의 불바다에 빠진 세상'을 향했다.
무산 스님은 백담사 무문관(無門關)에서 다른 8명의 스님과 함께 밖에서 문을 걸어 잠근 1인실에 스스로를 유폐시키고 오직 밥 구멍 하나로 세상과 소통하며 석달간 정진(精進)했다. 무산 스님은 "부처님은 어느 날 산에 올라 '비구들이여, 세계가 불타고 있다. 탐욕의 불, 분노의 불, 어리석음의 불길이 맹렬히 타오르고 있다'고 설파하셨다"며 "중생은 남의 허물을 다 보면서 정작 자신의 허물은 못 본다"고 했다. 그는 "그러나 삼독의 불길을 잡으면 자기 허물이 보인다. 자기 허물을 보면 남의 허물이 보이지 않는다. 자기 허물을 보는 사람은 공명정대한 사람이고, 이번에 공명정대한 사람이 대통령이 된다는 뜻"이라고 말했다.
무산 스님은 또 "오늘의 고통, 중생의 아픔을 화두로 삼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 뭣고, '무(無)', 뜰 앞의 잣나무 같은 중국의 화두(話頭)에는 오늘의 고통, 중생의 삶, 아픔이 없습니다. 불심(佛心)의 근원은 중생심이며 중생의 아픔이 없는 화두는 사구(死句) 흙덩어리입니다." 그는 이어 "흙덩어리를 던지면 개는 흙덩이를 쫓고, 사자는 던지는 놈을 물어뜯고 울부짖습니다. 여러분은 지금 흙덩어리를 던지는 이 노골(老骨), 이 늙은이의 말을 물어뜯고 자신의 울음소리를 내야 한다"고 일렀다.
'중생의 아픔을 화두 삼으라'는 무산 스님의 법문은 선승들과 대선을 앞두고 꿈틀거리는 '잠룡(潛龍)'들을 동시에 겨눈 것이었다. 여러 권의 시집을 펴낸 시인이기도 한 무산 스님은 법문 말미에 자신의 작품 '오늘'을 읊었다.
'가재도 잉어도 다 살았던 봇도랑에/맑은 물 흘러들지 않고 더러운 물만 흘러들어/진흙탕 좋아하는 미꾸라지 놈들/용트림 할 만한 오늘.'
03.02 三毒의 불길 잡을 소방수
너무도 많은 분노와 증오, 심지어 저주의 말이 쏟아졌다. 지난해 가을 최순실 국정 농단 사건이 드러난 후 거대한 분노가 우리 사회를 덮쳤다. 사건 초기만 해도 대통령 탄핵과 그에 따른 조기 대선이 예정된 시간표로 보였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촛불'과 '태극기'가 맞서는 형국으로 바뀌었다. 어느새 분노는 상대에 대한 증오와 혐오, 저주로까지 번졌다. 불교에서 부르는 구업(口業·말로 지은 업)이 쌓였다. 신흥사 조실 무산 스님의 표현을 빌리자면 지금 세상은 '삼독(三毒·탐욕, 성냄, 어리석음)의 불바다'이다.
헌법재판소의 탄핵 심판이 임박하면서 다양한 시나리오도 쏟아지고 있다. 아스팔트 위의 촛불과 태극기를 동시에 만족시킬 해법은 없어 보이기 때문이다. 인용과 기각(또는 각하) 어느 쪽으로 결론이 나든 한쪽에선 환호가, 다른 쪽에선 장탄식이 터져 나올 것이다. 그 정도면 다행이지만 결과에 승복하지 않고 어느 한쪽이 아스팔트 투쟁을 계속한다면, 그러다가 폭력 사태까지 벌어진다면 그로 인한 혼란과 갈등은 지금까지와 비교도 되지 않을 것이다. 검증 기간도, 인수인계 준비 기간도 거의 없이 들어설 새 정부가 상처부터 안고 출발할 가능성도 높다.
정치권, 특히 대선 주자들은 벌써부터 특검과 탄핵의 모든 진행 과정 하나하나를 두고 유불리를 따지느라 바쁘다. 헌재 결정 '승복' 여부에 대해 이른바 대권 주자들은 명확한 답변을 내놓지 않고 있다. 자신들의 의견과 다른 결론이 났을 때 자기편을 설득하고, 상대편을 위로하는 처신도 현재로선 기대하기 어렵다.
▲1일 서울 광화문광장에 대통령 탄핵 기각을 위한 국민총궐기 운동본부 주최 탄핵 반대 집회와 박근혜 퇴진 촛불집회 사이로 경찰차벽이 세워져 있다. /연합뉴스
그러나 종교는 달라야 한다. 모든 종교는 평화와 사랑을 가르치고 있다. 세상 사람들은 전쟁터에서조차 사랑과 자비, 연민으로 평화와 화해를 이끌어내는 역할을 종교에 바라고 있다. 종교의 존재 가치와 역할이 필요한 시점이다.
지난 2015년 말 민노총 시위가 서울 도심을 휩쓸었을 때였다. 폭력 시위로 홍역을 치른 후 당시 몇몇 종교인들은 시위대와 경찰 사이에 꽃을 들고 들어가 '평화의 벽'을 만들었다. 직접적인 충돌을 막기 위한 일종의 완충지대 혹은 인간방패 같은 것이었다. 반드시 '평화의 벽' 덕분만은 아닐 수 있지만 어쨌든 그 이후 폭력 시위는 없었다. 혹시 탄핵 심판 이후, 시민 대 시민의 갈등이 커진다면 그 사이에 종교인들이 다시 '평화의 벽'을 만들면 어떨까. 종교인들 역시 탄핵 정국에서 자신의 의견을 가질 수 있고, 실제로 집회에 참여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탄핵 심판 이후, 아니 그 이전이라도 종교인들은 자신의 입장은 내려놓고 갈등의 치유와 화해에 나서길 기대한다. 때론 양쪽에서 비난을 받을 각오를 해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누군가는 '삼독의 불바다'에서 소방수 역할을 해야 한다.
흔히 사회에 '어른'이 없다고 한다. 종교계 역시 마찬가지이고, 종교계의 위상도 예전만 못하다. 그러나 어른은 주변에서 받들어 만들기도 하지만 원론적으론 스스로 성장하는 것이다. 어른다운 말과 행동을 하면 어른이 되고 어른 대접을 받게 되는 것이다. 앞으로 닥쳐올지 모를 혼란은 이 시대 종교계 어른이 탄생하는 순간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04.11 종교개혁 500년, 봉암사 결사 70년
1517년 10월 31일, 가톨릭 수도자이자 신학 교수, 사제였던 마르틴 루터는 독일 비텐베르크 교회 문에 95개조 반박문을 붙였다. 종교개혁의 출발이다. 그런데 당시 루터가 계획했던 것은 종교개혁이 아니었다. 루터의 입장에서 교황청의 '면죄부('죄'가 아닌 '벌'을 면해준다는 뜻에서 '면벌부'로도 부름)'는 신학적 근거가 없었다. 그래서 신학 토론, 논쟁을 해보자는 뜻에서 반박문을 붙였다. 루터가 내세운 목표는 3가지 '오직'에서 드러난다. '오직 은총' '오직 믿음' '오직 성서'다. 루터가 겨냥한 목표는 원점(原點)이었다.
루터의 작은 날갯짓은 태풍을 불러일으켰다. 제네바의 장 칼뱅, 스코틀랜드의 존 녹스 등이 화답하며 다양한 개신교 교파로 이어졌다. 현재 한국에서는 가장 인구가 많은 종교가 개신교가 될 정도다. 그뿐 아니라 '개혁의 대상'이었던 가톨릭 내에서도 자성이 일어나 쇄신운동이 계속됐다. 그 결과는 1960년대 제2차 바티칸공의회로 꽃피기에 이르렀다.
시대와 무대를 옮겨보자. 1947년 가을, 경북 문경 봉암사. 청담, 성철, 자운, 향곡 등 당대의 30~40대 선승(禪僧)들이 모여들었다. 한국 현대 불교를 다시 일으킨 봉암사 결사(結社)다. 당시는 조선 왕조 500년간의 억불(抑佛) 정책과 일제가 들여온 왜색 불교의 여파로 전통 한국 불교는 겨우 숨만 쉬는 지경이었다. 성철 등이 내건 결사의 정신은 '부처님 법(法)대로 살자'. 땅에서 넘어진 자 땅을 짚고 일어선다는 정신이었다. 자료도 샅샅이 뒤졌다. 성철은 "부처님 당시엔 나무 발우(스님의 밥그릇)를 쓰지 않았다"며 질그릇 발우를 제시했다. 가사(袈裟) 색깔도 옅은 갈색인 '괴색(壞色)'으로 정했다. 장삼은 송광사에 보존된 보조국사 지눌의 것을 모델로 삼았다. 그 밖에도 '일상에서 필요한 물품은 스스로 해결한다. 물 긷고 나무하고 밭일하고 탁발하는 등 어떤 일도 마다하지 않는다' '용변 볼 때와 잠잘 때를 제외하고는 늘 장삼과 가사를 입는다'…. 유명한 공주(共住)규약이다. 한국 현대 불교는 봉암사 결사에 탯줄을 대고 있다.
▲2007년 10월19일 오전 경북 문경 봉암사에서 열린 '봉암사 결사 60주년 기념 대법회'에 참석한 스님과 신도들이 대웅보전 앞마당과 전각의 처마 밑까지 가득 서있다. /조선일보 DB
루터의 종교개혁과 봉암사 결사는 시대와 무대는 다르지만 공통점이 있다. 해당 종교가 활력을 잃은 상황에서 '원점' 혹은 '초심'의 회복으로 개혁했다는 점이다. 역사상 거의 모든 종교의 개혁운동은 본질 회복이 목표였다. 오랜 세월이 흐르며 본질 외에 덧붙여진 더께를 걷어내자는 것이었다.
올해 종교개혁 500주년, 봉암사 결사 70주년을 맞는 한국 종교계의 상황은 녹록지 않다. 지난해 말 통계청이 발표한 인구주택총조사는 '탈(脫)종교 현상'을 보여줬다. 10년마다 한 번씩 하는 통계청 조사에서 종교 인구는 처음으로 전체 인구의 절반 이하로 내려왔다. 최근 한국천주교주교회의가 발표한 2016년 천주교 통계에서도 영세자 수는 줄었고, 미사 참례율은 19.5%로 20% 선이 무너졌다.
다시 종교계의 개혁이 필요하다는 이야기도 나온다. 개혁을 한다면 역시 초심과 본질의 회복이 방향이 될 것이다. '사랑'이라는 새 계명을 제시한 예수, 모두가 본래 부처임을 깨우쳐준 석가모니의 가르침을 다시 새기고 본질을 제외한 더께는 제거하는 것이 그 출발점일 것이다.
05.23 신자 이름 몇 명 기억하시나요?
"어이, 김한수!" "이병 김한수!"
신병으로 부대 배치된 지 한 달쯤 지났을까. 소대 내무반을 찾은 대대장의 호명에 깜짝 놀랐다. 마침 이름표가 달리지 않은 체육복 차림이었다. '내 이름을 어떻게 알았을까?' 의아했다. 그런데 나중에 알아보니 그는 장교, 부사관뿐 아니라 400명쯤 되는 대대원 이름을 거의 다 외우고 있었다.
그의 암기 비법(秘法)은 별것 없었다. 상급자와 눈이 마주치거나 옷깃만 스쳐도 하급자는 '파블로프의 개'처럼 자동으로 관등성명을 복창하는 규율을 활용하고 있었다. 대대장은 부임한 지 1년 남짓한 기간에 그 방식으로 '눈 마주치고 옷깃 스쳐가는' 대대원 이름을 듣고 외웠다. 이등병 시절 모든 게 힘들었지만 대대장이 이름을 불러줄 땐 어쩐지 기분이 좋아지곤 했다.
30년 가까이 된 '대대장의 이름 암기' 추억을 불러일으킨 계기는 연초 서울 내수동교회 박희천(90) 원로목사와의 만남이었다. 그는 자서전에 담임목사 시절 900명에 이르는 교인 이름을 모두 외웠다고 썼다. 교인뿐 아니라 그들의 부모, 자녀, 손주들 이름도 다 외웠다고 했다. 교인들 일상을 꿰고 있었다는 뜻이다. 군인은 이름표라도 달지만 일반 신자들 이름 외우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다. 박 목사는 출석부를 만들고 토요일을 투자해 이름과 얼굴을 연결하는 노력을 반복했다고 한다.
그는 "젊은 여성들은 쉽지 않았다"며 웃었다. "안경을 썼다가 벗고, 화장하면 달라 보이고, 머리 모양도 자주 바뀌니까 얼굴과 이름을 연결하는 데 한참 걸렸다"는 것. 그는 또 주일 예배가 끝난 후엔 '결석'한 사람들에게 전화를 돌리고 직접 찾아갔다. 신자들에겐 부담을 줄 법도 했다. 하지만 그는 "좋은 목자가 되고 싶었고, 교인이 결석하면 무슨 일이 생겼나 걱정이 됐다"고 했다. 그 마음이 통해서였을까. 그가 부임하던 1975년 당시 140명이었던 교인은 1998년 퇴임할 때 875명까지 늘었다. 무엇보다 1970~80년대 내수동교회는 '대학생 많은 교회'로 통했다.
▲만 90세의 나이에도 매월 첫째 주일엔 내수동교회에서 설교하는 박희천 목사. /성형주 기자
최근 불교계에선 조계사 청년회가 화제다. 매주 화요일 저녁과 토요일 오전 조계사에서 열리는 청년회 법회 참석자가 눈에 띄게 늘고 있다고 해서다.
지현 스님은 "별것 없다. 자주 들여다보는 것밖엔"이라고 말했다. 그는 청년회 법회가 열리면 자신이 법문하지 않더라도 꼭 20~30분씩은 들여다본다고 했다. 지현 스님은 청량사를 오늘날 경북 봉화의 명소로 일궈낸 주인공이다. 1986년 폐사지나 다름없던 청량사 주지로 부임해 농사일 바쁜 주민들을 경운기로 실어나르며 새마을회관에서 야간 법회를 열었다. 1987년부터 열고 있는 청량사 어린이 법회엔 어느덧 당시 어린이였던 이들의 자녀가 출석하고 있다. 그는 30년 전 청량사에서 신도 한 사람이 그립고 아쉬워 '찾아다니던 마음'을 지금 조계종의 총본산인 조계사에 그대로 적용해 어르신 불자들을 위해 다양한 프로그램을 만들고 있다. "그는 40~50년 절에 다닌 불자들에겐 배려하고, 젊은이들에겐 투자하고 있는 것일 뿐"이라고 했다.
'종교의 위기'에 대한 걱정이 많은 시대다. 어쩌면 해결책은 가까이 있는지 모른다. 이름을 외우고 불러주는 진심 어린 관심은 그 시작일 것이다.
07.12 "퇴임 후 3년간 교회 근처로는 발길 끊겠습니다"
올 연말 퇴임하는 이춘수 목사, 개신교 신문에 목사 초빙 광고
"후임에 짐 되지 않겠다" 다짐… 내려놓기 실천… 아름다운 퇴장
"저는 12월 첫 주 은퇴 예배드리고 멀리 이사하겠습니다. 최소 3년은 교회 근처에도 오지 않겠으며 공적으로 성도(聖徒) 그 누구도 만나지 않겠습니다. 후임 목사님이 목회에 잘 뿌리 내리시고 마음껏 주의 사역 감당하시도록 기도만 하겠습니다."
두 달 전 개신교 주간지 '기독공보'에 이색 광고가 실렸다. 평택 동산교회가 낸 담임목사 청빙(초빙) 광고다. 보통 담임목사 청빙 광고는 자격 요건과 신청 마감 정도만 간략히 알린다. 그런데 평택 동산교회 광고는 이춘수(65) 담임목사의 특별한 '스토리'가 담긴 편지였다.
"33년 전 부임 당시는 '피난민촌 교회'라는 별칭으로, 살아 있는 사람 집보다 죽은 이의 유택(幽宅)이 많았던 공동묘지 마을. 그래도 교회를 사랑하고 목사를 마음 다해 섬겨주신 성도들의 헌신으로 이제 동산교회는 경기 남부 지역에 아름다운 교회로 든든히 서게 되었습니다."
광고를 통해 '교회 가계부'도 공개했다. '2017년 4월 현재 재적 인원 3511명, 매주일 출석 성도 1500여명, 교회학교 850명(교회학교 교사 217명 포함), 2017년 예산 23억원….' 이어 "예배당과 사회봉사관, 선교교육관이 구비되어 있으며 교회 주변(차로 5분 거리)에 미래 사역 위한 3000평 부지(꿈의 동산)를 구입해 두었습니다. 교회 부채는 전혀 없으며 기독교윤리실천운동에서 2016년 좋은 교회상을 수상하기도 했습니다"라고 적었다. 광고 문구처럼 평택 동산교회는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 경기 남부 지역의 대표적 교회 중 하나로 꼽힌다. 미자립 교회를 돕고, 통일에 대비해 선교 기금을 모으고, 필리핀의 한국인 혼혈아(코피노)에게 장학금을 보내는 등 선행으로도 칭송받고 있다. 이 목사는 교단 정년(70세)보다 5년 앞당겨 은퇴한다.
여러 가지를 생각하게 하는 광고였다. 어느 조직이나 리더십 교체는 위기와 기회의 양면을 갖고 있다. 교회도 마찬가지다. 교인들에게 은퇴하는 목회자는 '편한 옷' 같은 존재다. 새 옷은 왠지 어색하고 불편해서 자꾸 편한 옷을 찾기 쉽다. 목회 기간이 길수록, 재임 시절 교인이 크게 늘어난 '부흥'이 일어났다면 더욱 그렇다. 이 때문에 전임자와 후임자 사이에 갈등과 균열이 생기곤 한다. 이의용 교회문화연구소장(국민대 교수)이 최근 '후임자 청빙 오고(五考)'라는 글에서 마지막으로 '전임자의 아름다운 퇴장'을 꼽은 것도 이런 문제 때문이다.
이춘수 목사가 염려한 것도 바로 전·후임 갈등이었다. 이 목사는 전화 통화에서 "당연한 일이고 목회자라면 누구나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 것"이라며 "지금이 내려놓기 제일 좋은 때"라고 했다. 교회도 두 차례에 걸쳐 예배당을 신축할 정도로 은혜롭게 성장했고, 교인들과의 관계도 좋은 이때 그는 "스스로 짐이 되지 말자"고 결심했다고 했다. "성도님들을 누구보다 아끼고 사랑하지요. 제가 주례를 선 교인이 아이를 낳고 그 아이들이 성장해 다시 결혼식 주례를 서고 있습니다. 문제가 생기면 교인들은 당장 저를 찾아오고 싶어하겠지요. 그걸 피하려고요. 구멍가게도 3년은 지나야 자리를 잡는다고 하지 않습니까. 후임 목사님이 어린아이부터 노인까지 잘 섬길 수 있다면 그 이상 바랄 게 없지요."
이 목사는 "노욕(老慾)을 스스로 예방하기 위한 것"이라고도 했다. "나이가 들면서 작은 일에도 화를 내고 섭섭해하는 경우를 많이 봤습니다. 그런 서운함이 생기기 전에 내려놓는 게 낫다고 생각했지요." 그래서 아예 광고를 통해 스스로 대못을 박아버린 것이다. 은퇴 후엔 그동안 도와온 지방의 후배 목회자들을 찾아다니며 함께 주일 예배 드리고, 손잡아주고, 이야기 들어주고, 식사 대접하면서 지낼 계획이라고 했다. 그러다 보면 3년이 넘을 수도 있다고 했다.
흔히 '버리고 떠나기' '내려놓기'를 이야기하지만 실천은 어렵다. 전화 통화에서 이춘수 목사는 거듭 "당연한 일이다. 특별하지 않다"고 했다. '특별하지 않다'는 그의 말이 특별하게 들렸다.
09.29 기술 배운 아이들, 가난 벗어나 사장까지… 사람 키운 게 보람
돈보스코 청소년센터 50주년, 이탈리아 출신 임충신 修士
"이 기계는 일부는 외상으로 들여와 우리가 물건을 만들어 팔아서 빚을 갚았어요. 이건 우리 학생들이 만든 물건이고요. 잘 만들었지요?"
지난 25일 오전 서울 신길동 돈보스코 청소년센터. 임충신 마리노(75) 수사(修士)는 센터 곳곳을 안내하면서 반세기 동안의 추억에 빠져들었다. 1960~70년대 산업화의 물결 속에서 어려운 청소년들에게 기술교육과 학업교육을 통해 꿈과 미래를 선물한 돈보스코 센터가 올해 설립 50주년을 맞았다. 이탈리아 출신으로 1963년 한국에 온 임 수사는 설립 준비 때부터 지금까지 이 센터와 함께한 증인이다.
▲돈보스코 청소년센터 50년의 살아 있는 역사인 임충신 수사가 학생들이 만든 작품을 들어 보이고 있다. 3000여 졸업생을 배출한 임 수사는“가장 큰 보람은 사람”이라고 말했다. /고운호 기자
돈보스코 센터를 운영하는 천주교 살레시오회 설립자인 이탈리아 성인(聖人) 요한 보스코(1815~1888) 신부는 평생을 어린이·청소년 교육과 직업훈련에 헌신했다. 살레시오회가 신길동에 기술학교인 돈보스코 센터를 설립한 때는 한국도 산업화가 진행되면서 영등포 일대에 공장이 잇따라 들어서고, 초등학교만 마친 어린이들도 공장으로 몰려들던 시절이었다.
임 수사는 돈보스코 센터에 안성맞춤인 인재였다. 이탈리아에서 기술학교와 사범학교를 졸업해 기술교사 자격증도 있었다. 살레시오회에 입회해 수련 중 한국에서 활동하던 선배 선교사들의 이야기를 듣고 "전쟁을 치른 가난한 나라 청소년에게 내가 배운 기계 기술을 가르치면 도움이 되지 않을까"라는 생각으로 한국행을 결심했다. 임충신(林忠信)이란 한국 이름은 스스로 지었다. 자신의 성(姓) 'Bois'가 프랑스어로 '숲'을 뜻하고 요한 보스코 성인의 'Bosco' 역시 이탈리아어로 '숲'을 의미한다는 점에서 성은 '임'으로 정했다. '충신'은 요한 보스코 성인의 뜻을 충실하게 믿고 따르겠다는 뜻에서 붙였다.
▲임충신 수사가 1972년 당시 학생들의 실습을 지도하는 모습. /돈보스코 청소년회관
시작은 험난했다. 당시 신길동은 허허벌판, 센터 부지는 도로에서 2~3m 푹 꺼진 땅이었다. 트럭으로 쓰레기 5만대, 토사 1만대 분량을 쏟아부어 땅을 돋웠고, 독일의 가톨릭 단체를 통해 급한 자금을 지원받았다. 임 수사와 동료들은 버려진 나무판자와 파이프를 이용해 책걸상을 만들었고, 1967년 3월 3일 첫 입학생 19명을 받아 무료로 먹이고 재우고 가르치는 돈보스코 센터를 열었다. 아이들 먹을거리는 삼립빵에서 기증받았고, 간식거리와 야유회 텐트는 미군부대에서 얻고 빌렸다.
최근 센터가 펴낸 500쪽짜리 '돈보스코 청소년센터 50년'을 보면 지금은 기억이 희미해진 '기름땀' 냄새가 생생하다. 특히 취업한 동문들이 돈보스코 성인의 동상을 기증한 사연은 감동적이다. 공장에 취직한 동문들이 월급의 30분의 1씩 저축하고 광주 살레시오 학교 동문들까지 힘을 모아 1988년 돈보스코 성인이 두 아이의 어깨를 감싸는 모습의 동상을 세운 것. 당시 세계 70여 개국 돈보스코 교육기관 중 동문들이 자발적으로 동상을 세운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고 한다. 어려운 환경의 청소년들은 이곳에서 익힌 기술로 자격증 따고, 취업하고, 진학하고, 가정 꾸리고, 기업가가 되기도 하면서 꾸준히 센터에 기부금을 보내오고 있다. 3년 과정으로 시작한 청소년센터는 현재는 1년 과정으로 운영한다. 무료로 하며 지금까지 졸업생은 3000여 명을 헤아린다.
임 수사는 반세기 동안 가장 보람 있는 일을 묻자 "사람"이라 했다. 그는 '돈보스코 청소년센터 50년'을 한 장씩 넘기면서 말했다. "1960~70년대에 청소년들이 기술을 배운다는 것은 가난을 벗어나 시야와 선택의 폭을 넓힐 수 있는 길이었습니다. 졸업생들이 성공해 센터를 찾아올 때 정말 기쁩니다. 미장원 의자에 관해선 최고인 회사 사장도 저희 동문이에요."
10.20 라틴어엔 그레고리안, 우리말엔 국악 聖歌 잘 어울리죠
[30년간 국악 성가 200여 곡 작곡… 기념연주회 여는 강수근 신부]
中·高·대학까지 국악 전공… 신자들 요청으로 보급에도 앞장
"가톨릭 미사와 음악을 떠올리면 먼저 그레고리안 성가(聖歌)를 생각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국악 성가를 들어보신 분들은 우리 심성에 잘 맞는다는 것을 알게 되지요. 그레고리안 성가는 라틴어를 가장 아름답게 전합니다. 우리말엔 국악 장단이 더 잘 어울리지요."
예수그리스도의 고난 수도회(예수고난회) 한국관구장 강수근(58) 신부는 천주교 국악 성가를 만들고 보급해온 선구자다. 1987년 첫 국악 성가를 발표한 이후 30년 동안 200여 곡을 작곡·발표했고, 국악합창단을 이끌고 있다.
▲지난 16일 서울 돈암동 예수고난회 수도원에서 만난 강수근 신부는 “사제의 길을 택할 땐 국악을 포기할 각오였는데 결국 두 가지 길을 함께 가고 있다”며 웃었다. /김한수 기자
강 신부에게 성직과 국악은 인생의 두 바퀴다. 국악중고교와 서울대 국악과를 졸업한 그는 남보다 늦은 나이에 다시 신학교(광주가톨릭대)에 진학해 사제가 됐다. 특히 국악은 그에게 학업과 사제의 꿈을 향해 다가설 수 있는 사다리였다. 그가 국악과 만난 것은 가난 때문이었다. 그는 어린 시절 집안이 어려워 중학교 진학을 포기할 지경이었다. 그때 성당 선배가 "중·고교 6년 과정을 학비 없이 다닐 수 있는 학교가 있다"며 국립국악원 국악사양성소(현 국악중·고교)를 알려줬다. 학교를 다니면서 궁금증이 생겼다. "학교에서는 국악을 배우는데 왜 성당 미사엔 국악 성가가 없을까?" 제2차 바티칸공의회를 거치며 그레고리안 성가 외에 각국에서 모국어 성가를 만들어 쓸 수 있도록 허용됐지만 '국악 성가'는 용어조차 낯설던 시절이었다.
고교 시절 막연히 사제의 꿈을 꾸었지만 대학은 국악과로 진학해 대금을 전공하며 장학금으로 졸업했다. 대신 주일학교 교사로 활동하며 성당에서 살다시피 했다. 첫 국악 성가 작품은 대학 졸업 후 군대 시절 탄생했다. 국악 군악대원으로 군 생활을 하던 중 식당 청소를 하다가 콧노래로 흥얼거리면서 작곡한 것이 '자비송'이다. '주님 자비를 베푸소서'로 시작하는 가사를 장중한 중모리장단에 얹었다. '알렐루야'는 흥겨운 자진모리장단에 실었다.
군 제대 후 국립국악원에 1년 정도 근무할 때 사제의 꿈이 다시 피어올랐다. 그는 "음악과 성직 중 어느 쪽을 선택해야 죽음의 순간 후회가 없을까를 고민하다 결심했다"며 "당시엔 국악은 포기할 생각이었는데 결과적으로 사제와 국악의 꿈을 함께 이뤘다. 하느님의 섭리인 것 같다"고 말했다. 수도회인 예수고난회에 입회했고, 신학생 생활과 수련 기간이 시작됐다. 신학생 시절 소풍에서 동기생들에게 우연히 '자비송'을 들려주자 좋아했다. '자비송'과 '알렐루야'를 듣고 "악보는 어려우니 녹음해 달라"는 주변의 요청이 쇄도했다. 강 신부는 직접 녹음기 앞에서 매번 한 개씩 육성으로 노래해 카세트테이프에 담아 나눠주다가 1988년 테이프를 발매했다.
▲지난 2010년 열린 제4회 국악성가축제 모습. 지휘자가 강수근 신부. /강수근 신부
1992년 사제가 된 후 광주 피정의 집 지도신부를 맡게 되면서 이번엔 진짜 국악과 멀어지는 듯했다. 그런데 신자들이 국악 성가를 가르쳐달라고 했다. 1996년 광주대교구 한소리합창단을 시작으로 의정부교구, 수원교구, 서울대교구 등에 국악 전문 합창단이 탄생했다. 그 사이 강 신부는 미국 메리우드대학과 로마 교황청립 성음악대학에 유학했고, 음반 6장을 냈고, 2009년엔 국악성가연구소를 설립했다. 지금도 그는 작곡, 편곡, 지휘에 직접 노래까지 부르는 1인 다역을 소화하고 있다. "천주교 초기 신자들은 기도 내용을 타령처럼 불렀어요. 요즘도 장례 때 신자들이 암송하는 연도(煉禱)엔 국악 성가의 흔적이 남아있지요. 제 작업은 그런 DNA를 살려내는 것입니다."
그는 "지금도 국악 성가를 들려주면 '정말 좋다'와 '이게 뭐야?'라는 반응이 엇갈린다"며 "전체 성당 중 15% 정도에서 정기·비정기적으로 국악 미사를 드리는 점은 보람"이라고 했다. 강 신부는 올해 국악 성가 발표 30주년을 맞아 11월 4일 오후 7시 서울 여의도KBS홀에서 '감사연주회'를 갖는다. (02)953-2004
10.23 '효도잔치' '6·25 참전용사 위로 행사'… 나라·민족 사랑 강조하며 성장하는 교회
[100만 도시 용인]
죽전 새에덴교회
▲소강석 담임 목사./새에덴교회
용인 죽전의 새에덴교회(소강석 담임목사)는 한국 개신교계에서 특별한 관심을 받고 있다. 2000년대 들어 개신교 성장세가 꺾인 가운데 수도권에서 성장하는 교회로 주목받고 있는 것. 현재 등록교인은 4만 3000여명.
이 교회의 성장 배경에 대해 개신교계에서는 '아날로그적 감성'을 꼽는다. 이 교회는 '나라'와 '민족'을 강조하며 10년 넘게 외국의 6·25참전용사들을 국내로 초청하거나 현지로 찾아가 위로하고, 효도잔치를 열고, 어려운 이웃을 돕는다. 이런 활동이 지역 사회의 주목을 받고, 교인들에게는 자부심을 주면서 성장했다는 뜻이다.
◇"죽전 문화회관을 짓자"
새에덴교회가 용인 죽전에 자리를 잡은 것은 2005년. 1988년 서울 가락동 상가건물 지하에서 출발한 교회는 분당을 거쳐 죽전으로 옮겼다. 죽전으로 옮겨오면서 소강석 목사가 강조한 것은 "죽전에 세종문화회관, 예술의전당을 짓자"는 것이었다. 예배만을 위한 공간이 아니라 언제든 지역 주민을 위한 공연장으로도 쓸 수 있도록 만들자는 뜻이었다. 지하 10층, 지하 3층 연면적 1만평에 4500석을 갖춘 예배당 '프라미스 콤플렉스'는 조명, 음향 설비를 최고급으로 갖춰 설계됐다.
당초 계획대로 교회는 매년 대중문화 콘서트와 뮤지컬 공연을 열고 있다. '점프' '난타' '맘마미아' 등의 뮤지컬과 가수 노사연, 윤도현밴드, '웃찾사' 등이 이 '무대'에 섰다. 초청 비용은 모두 교회가 부담하고 교인들과 지역 주민들은 무료로 관람한다. 이 무대에선 수시로 '경로잔치' '효도잔치'도 열린다. 현재 새에덴교회 집사인 가수 남진, 송대관씨는 이 교회 효도잔치에 출연했다가 소 목사의 권유로 출석하게 됐을 정도다. 남진씨가 2015년 6월 이 교회에서 부른 특송 '내 주를 가까이하게 함은'의 동영상은 2년만에 유튜브 조회수가 66만건에 이를 정도로 인기를 끌고 있다.
▲경기용인 죽전에 자리잡은 새에덴교회 전경. 주민들을 위한 ‘효도잔치’, 뮤지컬 공연장으로도 쓰인다./새에덴교회
◇나라와 민족을 위해
새에덴교회는 지난 6월 미국 휴스턴의 한 호텔을 빌려 6·25참전용사 보은행사를 가졌다. 미국인 참전용사 450명과 한국인 참전용사 50명, 재미교포 100명 등 600여명이 참석한 이날 행사는 이 교회가 11년째 이어오는 6·25참전용사 보은행사였다. 이 교회가 보은행사를 시작한 것은 지난 2006년 미국을 방문한 소 목사가 한 참전용사와 우연히 만난 것이 계기가 됐다. 허리의 총상 자국을 보여주면서 '동두천, 의정부, 평택'을 이야기하는 흑인 노병에게 그 자리에서 넙죽 큰절을 올린 소 목사는 그해 6월부터 참전용사들을 초청해 보은·위로 행사를 갖고 있다. 참전용사들과 가족들에 대한 초청 비용은 모두 교회가 부담하고 있다. "비용이 문제가 아니라 노병들이 살아 계실 때 모셔야한다"는 게 소 목사의 말이다. 지금까지 미국 캐나다 태국 필리핀 호주 터키 등의 참전용사 3000여명을 위로했다. 보은행사 때에는 어린이와 청소년을 대상으로 글짓기 대회, 웅변대회 등을 열고 있다. 나라와 민족 사랑이 미래 세대까지 이어지도록 하려는 것이다.
지난 2015년 통일에 대비하는 통일나눔펀드에 2만명에 육박하는 새에덴교회 교인들이 참여한 것도 평소 나라 사랑, 민족 사랑을 강조한 이 교회의 분위기 덕에 가능한 일이었다.
10.25 설정 총무원장이 귀 기울여야 할 밑바닥 佛心
시골 마을서 고추 따기 봉사하고 심심풀이 화투 치는 어르신 위해 10원짜리 동전 바꿔놓는 교회
이웃 종교의 실천 눈여겨보라는 불교계 내부의 목소리 경청해야
'고추 따기 해주는 교회'. 지난 9월 불교 조계종 기관지 '불교신문'에 실린 칼럼 제목이다. 충남 보령 세원사 주지 정운 스님의 글이다. 스님이 사는 동네 교회가 주민들을 위해 고추 따기 봉사를 한 이야기다.
어느 날 저녁 공양 후 마을 산책에 나선 스님의 눈에 못 보던 현수막 하나가 들어왔다. 이 마을 교회와 수원의 한 교회가 주관해 광복절 날 마을회관에서 마을잔치와 머리 염색, 네일아트 그리고 고추 따기를 해준다는 내용이었다. 광복절 전날 대형 버스를 타고 온 젊은이들이 집집마다 간식과 전도지(傳道紙), 성경을 쇼핑백에 담아 나눠주곤 저녁 식사를 대접했다. 이튿날 마을회관엔 염색, 네일아트 하려는 할아버지 할머니들로 넘쳐났다. 스님은 "이틀 동안 마을 안은 온통 축제 분위기였다"고 썼다. 스님은 자신의 휴가를 아낌없이 내놓는 교회 청년들의 마음, 작은 시골 교회와 도시 교회가 힘을 모으는 모습 등에서 감동과 부러움, 교훈을 느낀 것 같다. 그래서 "지금부터라도 마을 주민과 함께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찾아봐야겠다는 마음이 급해지고 있다" "올여름, 이웃 종교를 통해 휴가에 대한 또 하나의 깨달음을 얻게 됐다"고 썼다.
불교 천태종이 내는 잡지 '금강'엔 '칼갈이 선교'란 글도 실렸다. 재가자(在家者)인 금강신문 기자가 쓴 칼럼이다. 벌써 수년째 한 달에 한 번꼴로 토요일 아침, 아파트 관리사무소에서 "50세대 한정, 세대당 두 자루까지 무료로 칼갈이 서비스를 한다"는 안내 방송이 나와 궁금했는데 사정을 알고 보니 지역 교회가 벌이는 봉사였다는 것. 글쓴이는 고향의 어머니 이야기도 보탰다. 고향 마을 인근 교회가 때때로 종교 구분 없이 어르신들에게 갈비탕 대접하고 관광 보내드리고, 심지어 어르신들이 경로당에서 심심풀이 화투 치는 10원, 100원짜리 동전까지 준비하고 있다는 이야기였다. 평생 절에만 다니던 그의 어머니는 요즘은 교회에도 다니는 '양다리 신자'가 됐다고 한다.
▲12일 서울 종로구 조계사에서 열린 조계종 총무원장 선거에서 제35대 총무원장에 당선된 설정 스님(오른쪽)이 조계종 현 총무원장 자승 스님과 악수하고 있다. /대한불교조계종 제공
불교신문엔 지난 7월 '노거사님의 꾸짖음'이란 칼럼도 실렸다. 경남 거창 죽림정사 일광 스님이 쓴 글이다. 어느 이른 아침 걸려온 할아버지 신자의 '전화 호통' 에피소드를 적은 것이다. "우리 할멈이 며칠 전 세상을 떠났어요. 평생 부처님 믿고 스님 의지하며 살았는데, 아니, 나오던 신도가 2년 동안이나 안 보이고 기별 없으면 전화라도 한번 줘야 하는 거 아니오?" 할머니가 2년간 병상에 있는 동안 문병 한번 없고, 장례 치르고 기다려도 절에서 아무 연락이 없지만 그래도 할머니 49재를 지내려고 전화했다는 것이다. 잠시 후 스님이 다시 전화를 드려 사과하고 위로하니 할아버지는 "집사람이 스님 염불 소리를 그렇게 좋아했다"며 울먹이셨단다.
이 이야기들은 요즘 돌아가는 '밑바닥 불심(佛心)'이다. 남과 비교당하기 싫어하는 건 인지상정, 종교계 역시 마찬가지다. 그럼에도 불교계 내부에서 이런 반성, 자성의 목소리가 기관지를 통해 공개적으로 표출되고 있다. 종단 정치에는 발언권도 없는, 불교의 실핏줄이라 할 작은 사찰일수록 느끼는 위기감이 더 크다. 불교는 지난 2015년 인구주택총조사에서 10년 만에 신자 300만명 감소라는 성적표를 받았다. 통계조사 방법의 오류라는 주장도 있었지만 불교계는 전반적으로 현실로 받아들이는 분위기다. 현장에서는 이미 변화를 체감하고 있었다는 뜻이다.
다음 주부터 4년 임기를 시작하는 새 조계종 총무원장 설정(雪靖) 스님의 앞에 놓인 현실은 이렇다 설정 스님은 수덕사 주지, 중앙종회 의장 등 사판(事判·행정)과 수덕사 방장(方丈) 등 이판(理判·수행)을 두루 경험한 70대 원로다. 불교를 둘러싼 상황의 엄중함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는 당선 일성(一聲)으로 '불교다운 불교, 존경받는 불교, 신심(信心) 나는 불교'를 다짐했다. 이 목표를 향한 첫걸음은 '밑바닥 불심'을 경청하는 것일지 모른다.
10.27 "밥 한 그릇이 아이들에겐 하나님 만큼 절실"
비행청소년 돕는 회복센터 운영 이경우 부산청소년교회 목사
지금까지 100여명 아이들 거쳐가
"부모님은 오시지 않았나?"
피고인석에서 고개를 떨구고 있던 소년은 판사의 질문에 울음을 터뜨렸다. "바빠서 오시지 못했습니다." 재판정엔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지난 2010년 겨울 창원지방법원 소년부 재판을 참관하던 이경우(45·작은 사진) 목사 부부의 눈시울도 뜨거워졌다. 재판이 끝난 후 판사는 이 목사 부부에게 "가정으로 돌아갈 형편이 되지 않는 청소년들을 돌보지 않겠냐"고 물었다.
판사는 '소년범의 아버지'로 불리는 천종호 현 부산가정법원 부장판사였고, 그 물음은 지금의 부산청소년교회, 어울림회복센터, 부산청소년상담교육센터의 시작이었다. 세 가지 이름을 달고 있지만 모두 부산 사상구 모라동 기찻길 옆 지상 3층, 지하 1층 다세대주택을 개조한 건물에 함께 있다. 지난 4월 이사해온 이 건물 1층 상담센터는 주일엔 예배당으로, 평일엔 강의실로 바뀐다. 3층엔 아이들 숙소(회복센터), 2층은 이 목사 부부 숙소다. 현재 공사 중인 지하카페가 완공되면 그곳이 예배당, 강의실이 된다.
이경우 목사는 30대에 신학을 시작한 늦깎이 목회자다. 20대에 사업을 벌였다 실패한 후 경제적으로도 육체적으로도 만신창이가 됐다. 사고까지 겹쳐 왼쪽 다리를 절단하는 일도 있었다. 뒤늦게 신학교에 진학했고 상담학 석사, 교육학 박사 학위를 받은 그는 2010년 당시 상담교육센터를 계획하고 있었다. 천 판사의 권유로 2011년 6월 부산진구에 회복센터를 열고 아이들을 받았다. 천 판사는 26일 전화통화에서 "아이들을 준비 없이 그냥 가정으로 돌려보내면 다시 비행을 저지르고 결국 사회적 비용은 훨씬 늘어난다"며 "당시 부산엔 '회복센터'가 하나도 없던 상황이라 이 목사님께 호소했다"고 말했다. 입소 대상자는 사소한 비행을 저질렀지만 가정으로 돌려보낼 경우, 다시 가출하거나 재범할 우려가 있는 남자 청소년. 기본적으로 6개월간 회복센터에서 지낸다. 지금까지 회복센터를 거쳐 간 아이들이 100여 명, 현재도 10명이 생활하고 있다.
▲부산청소년교회, 부산청소년상담교육센터, 어울림회복센터로 쓰이는 3층 다세대주택을 개조한 건물 2층 베란다에 이경우(제일 왼쪽) 목사와 직원, 청소년들이 나란히 섰다. 이 목사는“차가운 법정에 부모도 동반하지 않고 혼자 오는 아이들을 외면할 수 없었다”고 말했다. /김한수 기자
이 목사는 "아이 때문에 우는 부모는 많이 봤어도, 부모 때문에 우는 아이들을 본 것은 회복센터를 하면서부터"라고 했다. 아빠가 저지른 폭행사건 합의금을 아들이 마련하고, 아르바이트를 두 개씩 뛰어 할머니를 봉양하고 전기·가스요금까지 내는 경우도 많았다.
회복센터에 오는 아이들의 공통점은 '식탐(食貪)'. 가출 후 제대로 챙겨 먹지 못한 아이들은 처음엔 10명이 40인분 밥을 하루에 먹어치운다고 했다. 한 달쯤 지나면 식사량을 스스로 조절하기 시작한다고 한다. 육체와 정신의 허기가 조금씩 채워지는 셈이다. 그래서 이 목사는 "센터에서 아이들에게 해 줄 수 있는 것은 밥 잘 먹이는 것"이라고 했다. 하나님, 사랑 이야기는 그다음이라는 것이다. 다만 목사로서 주일 예배와 세례를 선물해 주고 싶었다. 처음엔 자신이 부목사로 있던 교회 예배에 아이들을 데려갔으나 뭔가 불편한 기운을 느꼈다. 2014년엔 센터 아이들을 위해 부산청소년교회를 따로 설립했다. 토요일엔 아이들을 돕는 청년들과, 주일엔 아이들과 청년들 그리고 일반 신자 등 20여 명이 조촐하게 예배를 드린다. 아이들은 지금까지 20여 명이 세례를 받았다.
법원에서 1인당 월 50만원씩 보조하고 있고 부족한 비용은 개신교계와 뜻있는 이들의 도움, 이 목사가 외부에서 인문학, 상담심리 등을 강의하고 강의료 등으로 메우고 있다. 이 목사는 "빚 갚는 마음으로 산다"고 했다. "사업 망하고 한때 기초생활수급자로 지내면서도 신학 공부와 석·박사 과정을 하고 지금 목사로 살고 있는 것도 다 누군가의 도움을 받은 덕분입니다. 지금 하고 있는 일들은 제가 계획했던 것이 아니라 그때그때 필요에 따라 하게 됐죠. 앞으로도 하나님이 또 시키실 일이 있겠지요."
11.03 사막의 수도자, 14년간 서서 잔 까닭은
"한 말씀 해주십시오."
4~6세기 이집트, 시리아, 팔레스티나와 터키 등 소아시아 지역의 사막은 수도자들이 넘쳐났다. '사막의 교부(敎父)'들이다. 이들은 사막에 작은 암자(움막)를 짓거나 동굴 혹은 10m가 넘는 기둥 위에 혼자 살면서 수행했다. 하루 한 끼만 먹고 철저히 금욕 생활하는 이들을 찾아온 수많은 제자는 '한 말씀'을 물었다.
▲사막에서 수행한 수도자들은 초기 그리스도교의 영성을 풍부하게 만들어줬다. 사진은 터키 카파도키아의 초기 그리스도 교인들의 유적. /김성윤 기자
최근 성(聖)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 허성석 신부가 번역한 '사막 교부들의 금언'(분도출판사)은 그런 '한 말씀'들을 모은 것이다. 사막 교부 100여 명을 그리스어 알파벳 순(順)으로 정리해 어록을 정리했다. 대화는 짧고 강렬하다. 중국 당·송 시대 고승(高僧)들의 선문답(禪問答)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생활 규칙은 지극히 간단하다. "수도승에게 필요한 세 가지는 (자발적) 유배, 가난, 침묵 속의 인내입니다." "혀와 배를 다스리라"고도 말한다. 때로는 침묵을 지키기 위해 3년간 입에 돌을 물고 살기도 했다. 14년간 눕지 않고 앉거나 서서 잠들었다는 고백도 있다.
무소유 정신을 잘 보여주는 일화는 이런 것이다. 어느 날 제자가 길가에 떨어진 완두콩을 발견하고 스승에게 물었다. "사부님, 제가 주워도 될까요?" 스승은 깜짝 놀란 표정으로 되묻는다. "네가 그것을 거기에 놓았느냐?" "아니요" "그렇다면 어떻게 네가 놓아두지 않은 것을 주울 수 있겠느냐?"
왜 독방에서 혼자 지냈을까? 교부들은 그 이유를 "하느님과 살면서 동시에 사람들과 함께 살 수 없습니다" "물고기가 물을 떠나 오래 있으면 죽는 것처럼 수도승이 암자 밖에서 지체하거나 세상 사람들 가운데서 머무르면 하느님 안에서의 깊은 평화를 빼앗깁니다"라고 설명한다.
'욕정'에 대한 경계는 현대인들의 일상생활에도 도움이 될 만하다. "욕정은 네 단계로 작용합니다. 첫째는 마음으로, 둘째는 얼굴로, 셋째는 말로 활동 합니다. 그리고 넷째는 악을 악으로 되갚으려는 욕정으로 드러납니다. 마음을 정화할 수 있다면, 욕정은 표출되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욕정이 얼굴로 다가오면, 말을 하지 않도록 조심하십시오. 하지만 말을 하더라도 악을 악으로 갚지 않기 위해 대화를 서둘러 중단하십시오."
책을 읽으면 왜 사막의 교부들이 그리스도교 영성에 큰 영향을 끼쳤는지 이해할 수 있다.◎
김한수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