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의 자유를 찾는 반체제 운동가들 3/ 北 혁명조직원과의 死生決斷 대화록 ⑦ 北 김일성 6·25 남침 전후 김익두 목사 외 수천 명 처형 이유 - (마지막회) 美 펜타곤도 주목하는 금성학원 컴퓨..
북한의 자유를 찾는 반체제 운동가들 3/ 월간조선
■ 2020.01월호 北 혁명조직원과의 死生決斷 대화록
⑦ 北 김일성 6·25 남침 전후 김익두 목사 외 수천 명 처형 이유
⊙ 김일성, 6·25전쟁 때 황해도 기독교 저항세력 결사항전에 경악
⊙ “천안함 테로(테러) 때 ‘차라리 솔직히 말하지’라며 량심적인 빨갱이들 분노”
⊙ 6·25는 명백히 남침
⊙ 유독 기독교 탄압 심한 北
⊙ 공산주의에 대항한 기독교의 순교투쟁, 자유통일 역사에 길이 남아야
도희윤
1967년생. 연세대 행정대학원 사회복지학 석사 / 피랍탈북인권연대 대표, 도대체 TV 대표, 한국자유전선 사무총장, 뉴라이트 전국연합 북한인권특별위원장, 공명선거실천시민운동협의회 사무국장 역임
[편집자 註]
도희윤 피랍탈북인권연대 대표는 2019년 5월 16일 《월간조선》과의 인터뷰에서 “북한 내부 혁명조직원 김씨와 2014년 중반부터 연락을 주고받았다”는 사실을 공개했다. 도 대표는 인터뷰에서 “혁명조직 일원은 ‘김정은 체제를 무너뜨리기 위한 방법은 그를 제거하는 수밖에 없다’고 했다”며 또 “그는 ‘새로운 지도자가 또 독재를 하더라도, 그건 개발독재이기 때문에 지금처럼 신격화된 독재보다 낫다. 박정희 같은 사람으로 북조선을 끌고 가다 통일을 이루면 된다’고 했다”고 말했다. 당시 인터뷰에서 도 대표는 《월간조선》 기고를 통해 혁명조직원과 나눈 대화 내용 등을 자세히 공개하겠다고 약속했다. 도 대표가 보내온 ‘北 혁명조직원과의 사생결단(死生決斷) 대화록’ 제목의 글에는 그가 혁명조직원 김씨(닉네임 ‘최이상’)와 메신저를 통해 나눈 대화 등이 담겼다.
세상이 거의 미쳐나가는 수준이다. 신문·방송의 사설 제목만 보아도 지금 대한민국이 얼마나 엉망진창, 아비규환인지 가늠할 수 있다. ‘아, 한국’ ‘아, 한국 대통령’ ‘아, 한국 국민’, 거의 절규 수준이다. 거기에 진보학자로 널리 알려진 고려대 최장집 교수조차 “그들 민주주의는 전체주의”라고 작심 질타를 날리고 있으니 상황이 얼마나 엄중한지 정신이 혼미해질 정도다.
이런 와중에 북한 김정은은 뭔가 크게 사고라도 칠 듯 백마에 모닥불 쇼를 하고 있으니, 얼마 남지 않은 2019년을 무사히 넘길 수 있을지….
신년호에는 북한의 수많은 종교 중에 유독 기독교에 대해서는 일고의 포용력도 보여주지 않는 북한 세습왕조의 야만성을 적나라하게 폭로한다. 북한 아우는 황해도 신천 지역에서 벌어진 6·25 전쟁사 과정을 설명하는 것으로 이야기를 전개하는데, 얼핏 보면 북한 당국의 야만적 행태가 기독교회와 교인들이 자초한 것처럼 선전하는 북한식 인식에 바탕을 두는 듯 보이지만, 악마의 사악한 행동 속에서 진실을 발견할 수 있다는 데 주안점을 두었을 것이라 필자는 짐작한다.
김일성의 초대 기독교 총회 회장인 김익두
북한은 신천 학살이 미군 측이 저지른 만행이라고 하지만 당시 미군은 북진을 하면서 평양을 선점하려고 했기에 황해도 신천군에는 오랫동안 머물지 않았다.
신천 지역에서 기독교 목회 활동을 하던 김익두 목사가 북한 김일성 밑에서 초대 기독교도 총회 회장이 되어 기독교계 거두가 된 것도 역사의 아이러니고, 공산 세력에 충성하는 것처럼 보이던 김 목사가 퇴각하는 북한 공산군에 대항해 결사항전의 순교자적 모습을 보인 것도 역사의 드라마임이 틀림없다. 미제의 앞잡이며 잔혹한 민간인 학살의 주역으로 가담한 것으로 지목되어 신천박물관에 철천지 원쑤로 전시되어 있는 김익두 목사와, 1980년 광주에서 있었다는 5·18학살 소문과 거의 흡사한 여인네 젖가슴을 도려내는 미군과 국군의 사진을 진실인 양 버젓이 전시하는 저들에게서, 전 세계를 통틀어 붉은 무리는 하나같이 사고하는 게 똑같다는 데에 경악을 금할 수 없었다. 이 글을 빌려 김익두 목사와 함께 순교한 신천 지역 기독교인들의 명복을 빈다.
자유통일 이후 신천의 혁명박물관은 미 제국주의와 대한민국 국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의 현장이 아니라, 공산 세력에 목숨으로 결사항전한 기독교인들의 숭고한 순교박물관으로 재탄생되어야 한다. 또한 반공·자유 인사들에 대한 천인공노할 만행을 숨기고자 조작한 희대의 대사기극이자 비극임을 널리 알리는 역사의 교육현장이 되길 바라며 이 글을 시작한다.
6·25는 명백히 남침
최: 신천 학살에 대한 북과 남의 견해가 어떤지 론쟁을 해보아야 합니다.
도: 신천기념관은 북한 주민을 겨냥한 선전물이겠지만 그 고민을 잘 알고 있습니다.
최: 신천에 대한 자료를 준비하여 래일 토론을 합시다.
도: 알았습니다. 근데 아우님, 남침입니까 북침입니까? 6·25전쟁이 말입니다.
최: 저는 증오감을 말하자는 게 아니라 학술토론을 하자는 것입니다. 명백히 남침입니다만 다른 문제도 있습니다. 래일 의제는 6·25전쟁과 신천사건입니다.
도: 하하하, 무섭습니다. 살살해주시죠.
최: 준비하시고요. 맞짱을 떠봅시다. 아니 사정이 없습니다. 저를 마구 조져대도 일없습니다. 길고 짧은 것은 대보아야 안다는 조선 속담 있지 않습니까?
도: 아우님, 우리가 이기고 지고가 없지 않습니까? 도망가야겠습니다. 하하.
최: 아닙니다. 여기서는 서로 다른 이견을 좁혀나가야 합니다. 래일의 맞짱을 위해서 오늘 그만 쉬도록 하는 게 어떻습니까?
도: 하하, 알겠습니다. 편히 쉬시지요.
맞짱 토론날이 밝아왔다. 여지없이 아우는 자신이 편한 시간대에 장문의 1차 토론문을 보내왔다. 사실 아우와의 대화 중에 사소한 이견들이 존재한 것은 사실이지만, 서로를 알아가고 체제변혁을 위한 혁명을 논의하는 과정에서 상호 간 이견을 잘 조율하는 것은 혁명의 실행 못지않게 중요한 과제임이 틀림없었다. 필자에게도 상당한 기술적 융통성이 요구되는 상황이었지만 그냥 부딪쳐보자는 생각으로 아우와의 대화를 이어나갔다.
6·25전쟁과 신천사건
▲평양에 세워진 대표적인 기독교 건축물인 봉수교회와 장충성당의 모습.
최: 대표님, 6·25전쟁과 신천 학살사건은 우리가 꼭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실은 우리 민족이 화해하기 어려워하는 것도 6·25전쟁의 원한과 상처를 안고 있기 때문입니다. 6·25전쟁을 누가 일으켰느냐 하는 문제에서는 북과 남의 주장이 서로 다릅니다. 북에서는 북침이라고 하고 남에서는 남침이라고 하고…. 여기서 문제로 되는 것은 남과 북의 주민들이 그것을 그대로 믿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북한 주민들은 남한의 북침으로 시작됐다고 하는 것과, 남주민들은 북한의 기습남침으로 동족상쟁이 시작됐다고 믿고 있으며, 믿으려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둘 다 근거가 있습니다.
최: 남한의 근거를 들어보면, 김일성이 남한을 침략하기 위하여 쏘련의 승인을 얻어 많은 군사 장비를 보급받아 준비를 충분히 했다. 전혀 전쟁을 할 의향이 없었던 남한은, 전쟁에 대비할 수 있는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아 전쟁 개시 3일 만에 서울이 점령당했다. 후퇴를 거듭하여 락동강 방어선까지 밀렸다. 락동강 방어선까지 무너지면 마지막으로 부산인데 부산까지 점령당하면 뒤에는 남해 바다로 락동강 방어선을 고수하다 죽나 후퇴하다 죽나 매한가지였을 것이다.
필사적인 방어를 하여 시간을 얻었고 미군의 개입과 인천상륙으로 전선의 형세가 바뀌어 북으로 북상하였다. 퇴각하던 북한군의 전선이 압록강에 이르자 중공군이 참전하여 다시 퇴각하여 전쟁 시작점으로 돌아왔다. 38선 부근에서 2년6개월간 전쟁을 하였으나 승부가 나지 않아 남과 북은 유엔군 측과 중공군의 제안을 받아들여 전쟁 3년 만에 정전하였다.
남침 유도설 기반으로 한 北 기만책
최: 북한의 근거를 들어보면, 한반도와 일본은 전략적으로 대국들이 지배권을 확보해야 할 지역이었다. 특히 미국은 일본에 대한 지배권을 확보한 데 기초하여 이제 한반도만 장악하여 친미국가로 만들면 앞으로 중국과 쏘련을 견지하는 데서 매우 유리할 것으로 판단하였다. 그리하여 남한의 리승만에게 군수 장비와 전략물자들을 넘겨주어 전쟁 준비를 하게 하였다. 남한에 의한 북침이 피할 수 없는 상황에서 우리도 만반의 전쟁 준비를 하고 기다리고 있었고, 38선 일대에서는 상대방의 전투력을 파악하기 위한 대소 전투들이 2년간 지속되던 상황이었다.
1950년 6월 25일 일요일, 이날도 남한과 북한 사이에 전투가 진행되었다. 이를 시작으로 즉시에 전 전선에 걸쳐 공격을 개시하였는데, 남한군은 지역전투로 그칠 줄 알고 방심해 있은 상태였으며, 전면전이 시작되자 남한은 퇴각하고 3일 만에 서울을 장악하였다. 락동강까지 밀고 나갔으나 많은 전투 장비가 파손되고 무기도 부족하였으며, 모자라는 병력을 남한 지역에서 보충하니 정신 상태와 훈련 상태가 말이 아니었다. 이때 무기와 장비를 보내주겠다던 쏘련이 약속을 어기여 무장 장비와 탄약이 도착하지 않아 락동강 방어선을 돌파할 수가 없었고…. 그다음부터는 남한의 주장과 같습니다.
양심적인 빨갱이, 천안함 폭침에 대한 북한 내부 비판
▲천안함 폭침으로 파괴된 선체를 인양한 모습. 백령도 뒤편으로 들어온 북한 잠수정에 의해 피격된 천안함 사건에 대해, 북한 내부에서도 비판의 목소리가 높았다는 것은 혁명조직원을 통해 처음 소개되는 내용이다.
최: 대표님. 조국해방전쟁은 민족적 및 계급적 모순을 정의의 통일전쟁으로 해결하려는 우리 장군님의 대결단에 의하여 진행되었으며, 그 후과는 엄청났지만 우리는 대를 이어서라도 이 과업을 수행하여야 한다, 이 말은 들어본 적이 없는데 어디서 난 소리입니까? 빨갱이들이 솔직하지 못하고 비겁한 것은 사실입니다. 천안함 테로 때에도 량심적인 빨갱이들이 몹시 분노한 것도 차라리 (내가 그랬다) 할 것이지, 남조선 사람들의 분노만 사지 않았느냐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지금의 민주주의 한국과 6·25 때의 한국은 다릅니다. 솔직하지 못하기는 리승만 때의 남한도 같습니다. 1948년 리승만, 요시다, 맥아더 3자 비밀회담에서 맥아더의 지시에 따라, 일본은 이제 일어나게 될 조선전쟁에서 미국의 B29 전략폭격기들이 발진하게 될 비행장을 건설하기로 하고 한국은 일본에 수만 석의 쌀을 주기로 합의 보지 않았습니까. 그래 일본에 준 호남벌의 쌀이 후에 북한 주민들의 머리 우에 폭탄이 되어 떨어지리라는 것을 남한주민들은 몰랐다 치고 리승만도 몰랐단 말입니까.
만일 남한이 6·25 때의 한국으로 남아 있거나, 전두환, 로태우 집권시기의 한국으로 남아 있다면 한반도의 통일을 주도할 자격이 없습니다.
기독교 탄압의 시작, 지하교회 존재
최: 오늘은 종교 이야기를 합시다. 남한에는 어떤 종교단체들이 있습니까?
도: 불교, 기독교, 천주교, 천도교, 그 외 민족 종교 등이 있습니다.
최: 불교는 알겠는데 그 밖에 하나님 믿는 단체들의 차이가 무엇입니까?
도: 천도교는 동학이라고 하면 아실 것이고, 천주교는 교황 아시죠? 원래 천주교에서 마틴 루터라는 독일 신부가 천주교는 썩었다고 하면서 종교개혁을 외치며 나온 것이 기독교인데, 천주교에서는 개신교라고 부릅니다. 유럽 사회에서는 구교, 신교라고도 하지요.
최: 알 만합니다. 이런 생각을 해보신 적 있습니까? 북한의 종교에 대하여 이야기합시다.
저는 종교에 대하여 전혀 모릅니다. 단지 사람들이 하나님, 부처님, 알라신을 믿는데, 우리나라는 하나님 믿는 사람들과 부처님 믿는 사람들만 있다 이 정도입니다. 북한 당국이 종교에 대한 무자비한 탄압을 한다는 데 대하여서는 다 아는 사실이고, 그런데도 북한에는 아직도 종교를 믿는 사람들과 지하종교 조직들도 있습니다.
도: 지하종교 조직들을 만나보신 적 있으신지요.
최: 최근에도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20년 전까지만 해도 종교조직들이 있었습니다.
제가 만나볼 리는 없지요. 그러나 자료로 본 적이 있습니다. 신의주에는 매우 큰 조직이 있었습니다. 또 개별적으로 믿다가 적발된 사람들도 있고요.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이상한 것을 발견하였습니다. 종교조직이든 아니면 친목을 위한 사조직이든 조직하면 무조건 체포하거나 처형하지요. 그러나 개별적으로 믿는 경우 기독교는 용서가 없지만, 불교와 관련한 종교조직이나 사람들에 대한 처리는 대단히 관대하다는 것입니다. 대표님 생각에는 왜 그런 것 같습니까?
도: 기독교와 수령 독재가 다른 것 같으면서도 너무 비슷하니까요. 그래서 오히려 위험하다고 보는 거 아닐까요.
최: 그런 것 같지 않습니다. 우리는 종교에 대하여 관심 밖이기 때문에 깊이 생각해보지 않았는데 단지 한 가지 생각되는 점이 있어서입니다.
기타 종교에는 관대한 북한, 유독 기독교는 용납 안 해
▲신천 지역에서 목회 활동을 하고 있던 김익두 목사.
최: 만일 어떤 사람이 하나님께 기도를 드리다 적발되면 용서가 없지요. 그러나 부처님께 불공드리다 적발되면 당 위원회나 보안서에 불려가서 욕이나 먹는 정도입니다. 리유가 있습니다. 1950년으로 되돌아가야 하고 또 미국 이야기를 꺼내야 합니다.
도: 예, 열람하겠습니다.
최: 이렇게 이야기를 하면 종교탄압의 구실을 모두 미국에 돌린다고 생각하실 수 있는데 그런 게 아닙니다. 8·15광복 이전 북 지역은 기독교 세력의 기본 중심지라고 하더군요.
도: 맞습니다. 신의주 등.
최: 1950년 전쟁 시기 황해남도가 특히 기독교인들이 많이 밀집되어 있었다고 합니다. 전체 수는 신의주에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밀집도에서는 황해남도라고 합니다. 특히 신천군, 삼천군은 인구의 60%가 교인들이었다고 합니다. 이것은 정확한 자료입니다. 1945년 10월 10일, 공산당을 창건한 북한은 후에 야당인 신민당과 소수 종교정당을 통합하여 로동당을 만들었습니다. 로동당 안에 종교정당으로 기독교 민주당이 있었습니다. 당수로는 1950년에 김익두라는 사람입니다.
북한 신천 지역에서 목회 활동을 했던 김익두 목사에 대해 북한의 아우가 처음 언급하였다. 관련 자료를 살펴보면 김익두 목사에 대한 남·북한의 이야기가 6·25 전쟁사만큼이나 다른 큰 차이점을 발견할 수 있었다. 실제 미 제국주의의 만행을 알리는 신천박물관의 경우 김익두 목사에 대해 상당 부분 할애해 설명하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만큼 북한 입장에서는 자신들의 체제를 위협한 인물이고, 기독교 수장으로서 지역 주민들과 북한 전체 신도들에게 상당한 영향력을 미쳤을 것이라는 짐작이 가능하다.
최: 1950년 미군과 국군이 북상하자, 김일성은 모든 주민에게 북쪽으로 피란을 가라고 지시했습니다. 구체적인 조직사업이 진행됐는데, 기독교인들이 밀집되여 있는 신천군과 삼천군에는 로동당의 지시가 40%밖에 먹히지 않아 교인들을 설복하라고 김익두를 내려보냈습니다. 김익두 자신이 물론 기독교인이지요. 김익두는 신천에 내려와서 교인들을 교회당에 모아놓고 피란을 선동한 것이 아니라 이렇게 말했습니다.
“공산당 정권 밑에서는 하나님의 나라를 세울 수 없다.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자면 미군이 들어와야 한다. 미군이 들어오기 전에 신천과 삼천군 구응면 일대에서 폭동을 일으켜 빨갱이 정권을 뒤집어 엎어야 한다. 그러고는 지금 미군이 들어오고 있다, 공산당은 패주하고 있다. 우리가 폭동을 일으켜 이 지역에서 정권을 장악하면 미군이 도우러 올 것이다.”
사실 김익두는 이미 전에 미군 정보기관과 련계를 맺고 있었으며, 인천상륙과 동시에 폭동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김익두가 내려왔을 때에는 폭동 준비가 상당히 완료된 상태였습니다. 그것은 주민의 60%가 교인들이었고 사실상 기본적으로 김익두가 장악한 것이었습니다.
기독교 조직의 반란
최: 폭동 준비를 위하여 어떻게 했는가는 생략하겠습니다. 반공부녀회, 반공청년행동대 등 많은 조직을 만들어 내고 그 지휘를 교회가 하였습니다. 무기 탈취를 위하여 군인들을 독살하거나 유인 살해하고, 한 차량분의 총탄과 적지 않은 무기도 확보하였습니다. 드디어 폭동 준비가 완료되자 폭동을 위한 마지막 교회모임에서 교인으로 가장한 내무원이 폭동을 선동하는 김익두를 사살하였습니다. 그러자 교회에 있던 교인들이 내무원을 때려죽인 다음 그의 시체를 찢어놓았습니다. 그러고는 김익두의 시체를 안고 거리로 달려나갔습니다.
폭동의 시작은 군 방송국 방송으로 그때 당시 북한의 애국가였던 동해와 천지물이라는 노래를 반주 없이 육성으로 부르는 것이었습니다. 노래는 방송국의 아나운서였던 16세의 처녀가 불렀습니다. 전주대에 매달린 스피커에서 밤 10시경에 노래가 나오자 김익두의 시체를 안은 교인들과 무장행동 대원들이 군 인민위원회, 군당청사, 군 내무서, 군 정치보위부 등 군내 정권 기관들을 포위 점거하려고 하였습니다. 다른 기관에 대한 점거는 쉬웠는데 무장인원들이 있는 보위부 내무서, 그리고 자위대가 지키는 군당청사를 점령 못 하고 총격전이 벌어졌습니다. 군 정치보위부에는 2명의 인원이 있었고, 내무서에는 20명가량 있었으며 군당 자위대 인원은 40명에서 50명가량 있었다고 합니다.
생생한 반란 현장
▲신천교회 교인들을 중심으로 저항조직을 만들어 총격전을 벌였다는 당시의 신천군 인민위원회 청사의 모습.
최: 북한의 독재자는 주민들을 교양하는 자료는 모두 거짓으로 그럴듯하게 엮어대지만, 사실을 알아야 할 사람들에게는 아주 정확한 자료만을 알려줍니다. 그럼 계속 쓰겠습니다.
북한의 아우는 이 대목에서 자신이 북한 당국이 정확한 사실을 알려주는대상임을 넌지시 언급하고 있다. 실제 아우는 자신이 직접 듣고 보고 느낀 점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진실 여부는 그다음의 문제이리라.
최: 군 정치보위부엔 2명의 인원밖에 없었으나 악질이라는 것을 고려하여 50여 명이 몰려가 포위한 다음 손들고 나오라고 소리쳤다. 밖을 내다보니 10명 정도가 무기를 들고 나머지는 몽둥이나 농쟁기를 들고 서 있었다. 만일 건물 안으로 밀고 들어왔으면 쉽게 죽일 수도 있으나 아무런 훈련도 받지 못한 사람들이라 소리만 치고 있었다.
건물 안에는 경기관총 한 정과 자동총 한 정, 권총 두 정이 있었는데, 25세의 과장이 뛰어나가며 경기관총을 휘두르자 3명 정도가 즉사하고 4명 정도가 부상을 당하자 모두 달아났다.
밤중에 당한 일이라 가만 생각해보니 내무서나 군당에서도 무슨 일이 일어나는 것 같았다. 내무서로 2명이 달려가니 거기도 70명가량 모여서 소리를 치고 있었는데 무장인원은 얼마 없고 나머지는 역시 농쟁기였다.
내무원들은 무서워서 밖으로 나오지 못하고 안에서 총질하였는데 이따금 쏘고 있었다. 뒤에서 달려나가며 기관총을 휘두르자 10명 정도가 즉사했고 모두 달아나버렸다. 20명의 인원으로 군당에 달려가 보니 군당 자위대와 150명 정도의 인원들이 총격전을 벌이고 있었다.
그때 당시 비교적 군사훈련을 받은 인원은 군당 자위대였는데 필사적으로 건물 안에서 대항하고 있었다. 자연히 25세의 과장이 내무서와 정치보위부의 지휘관이 되었는데, 많은 무장인원이 군당청사로 사격을 가하는 것을 보고 내무원들이 주춤하자 뒤에서 달려나가며 기관총을 휘둘러 혼자서 150여 명을 쫓아버렸다. 군당 자위대와 내무서의 2개 소대가량의 인원을 정비하고 긴급회의를 열었는데, 밖에 매달린 스피커에서 공산당 정권은 폭동지휘부에 의하여 장악되였고, 군 안의 정치는 교회에서 하게 되였다고 아나운서가 원고를 읽고 있었다. 그때야 상황파악을 하고 방송실로 달려가 아나운서를 체포하였다.
도: 예, 계속 남겨주세요.
3일간 계속된 즉결처형
▲청진의 한 지하교회 교인이 김일성·김정일 부자의 초상화 밑에서 기도하고 있다. 이 여성은 기독교를 믿었다는 이유로 처벌받은 뒤 행방불명된 것으로 알려졌다. 사진=서울USA 제공
최: 방송을 통해 폭동지휘부가 교회당이라는 것을 알고 군 방송을 통해 폭동이 실패하였으니 다음번 행동 토론을 위해 폭동지휘 성원들은 교회당에 모이라고 아나운서를 통해 방송하였다. 그다음은 교회당으로 가는 길옆에 매복했다가 길가에 들어서는 사람들은 모조리 사격하여 죽여버렸다. 밤중이라 아무것도 모르고 보위부와 내무서 군당에서 쫓겨나 숨어 있던 주모자들이 밤중에 교회당으로 찾아가다 주모자 대부분이 사살됐고, 살아남은 자는 방송을 듣지 못한 몇 명뿐이었다. 다음 날 날이 밝아서야 폭동 참가자들은 폭동이 실패했고 밤중에 많은 폭동지휘부 성원이 사살되었다는 것을 알았다.
날이 밝자 군 안과 주변 마을을 돌아다니며 어젯밤에 농쟁기를 들고 밤중에 나갔던 사람들이 누구인가 하고 물었다. 누가 어제 폭동에 따라갔댔는지 마을 사람들이 알고 있었는데, 나갔던 사람들은 모두 교인들이었고 그것을 알려준 사람들은 당원들이거나 교인들이 아닌 마을 사람들이었다. 그들을 마당에다 끌어내여 전시법에 따라 즉결처형하였다.
이 즉결처형은 3일간 계속되었는데 약 300명가량의 기독교를 믿는 농민들과 신자들, 폭동지휘부 성원들이었다고 한다. 그때 목격자의 말에 의하면 시체가 도랑에 뒹굴고 있었다고 한다.
신천학살
최: 신천에 들어온 미군은 폭동지휘부 성원들과 참가자들, 신자의 일부와 군 안에 있던 폭력 건달들로 치안대와 무궁화 무장청년단을 비롯하여 여러 가지 무장조직들을 모아서, 폭동 참가자들을 처형하는 데 참가했거나 그들을 밀고한 사람, 로동당원들과 신자가 아닌 개인적 원한이 있던 사람들을 비롯한 군 정권 기관에서 일한 사람들과 그의 가족들, 한마을에서 사는 친척들까지 모조리 무참하고 잔인하게 학살하였다.
최: 미군은 그들에게 무기를 제공하였고 학살 현장에 나와 지켜보고 있었다고 한다. 특히 치 떨리는 만행은 102명의 아기와 520명의 아기 엄마들과 아줌마들을 군당방공호에 몰아넣고 휘발유를 뿌려 불을 질러 학살하였다. 이때도 미군이 옆에서 지켜보고 있었다. 이것이 신천학살 만행이다. 신천학살에는 국군이 참가하였다는 기록은 없고 일부 수색대가 마을과 주변 야산을 수색하였을 뿐이라고 했다.
미군이 퇴각하기까지 50여 일 동안에 신천군과 삼천군, 구응면 일대에서 35600여명을 잔인한 방법으로 학살했는데, 여기에는 신천 고급중학교 학생이었던 건달패 두목이 제일 앞장섰다고 한다. 그는 자기의 학교 녀선생까지 수일 동안 강간하고 죽였으며, 미군과 함께 남으로 나갔다가 다시 켈로부대의 성원으로 구월산 일대에 잠입하여 사람들을 랍치 살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고 한다. 청장년들에게는 손을 못 대고 주로 처녀들과 부녀자들에 대한 랍치 강간살인을 했다고 한다. 결국 신천 땅에 있는 기독교 신자들을 제외하고 나머지 모든 사람을 남녀노소 가림없이 모두 무참히 잔인하게 학살하였다.
이 부분에는 너무나 상반된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한국기독교총연합회(한기총) 북한 교회 재건위에서 발간한 《북한 기독교 100장면》이라는 책에서는, 처형된 숫자와 방법은 대체로 비슷하지만 주객은 전혀 다른 것으로 언급하고 있다. 특히 방공호에 생매장한 사건은, 전쟁 이후 북한이 1956년 농업집단화 정책으로 야산을 개간하던 중 신천지구의 폐광에서 해골로 변한 시쳇더미가 발견되었다. 이 시체들은 모두 행방불명된 반공 인사와 기독교인이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책은 이를 미군과 국군의 소행으로 역선전하기 위해 신천 지역에 혁명박물관을 지었다고 기술하고 있다.
北, 기독교 탄압하는 이유
최: 결국 김익두가 미군 첩보대의 지원을 받아 조직한 폭동은 수백명의 교인들과 나머지 모든 사람의 죽음으로 끝났고, 북한은 치안대 가담자나 폭동가담 교인들의 가족들을 후에 모두 수용소로 보냈다. 8·15광복 직후 신의주에서 일어난 학생폭동도 기독교 교회가 주도했고, 신천 대학살도 기독교 교회가 주도했다.
따라서 북한 당국은 기독교 조직들이 다른 나라에서는 어떤지 몰라도 북한에서만은 대중적 폭동과 학살의 온상이라고 보고 있으며, 살생을 금한다는 불교 교리와는 다르며, 불교 신자들이 반국가 폭동을 시도한 적은 없지만, 기독교는 그 교리에 매혹돼서 많은 사람이 모여들 수 있고, 또 교회의 지도자들의 말을 신자들이 맹목적으로 잘 따르기 때문에 쉽게 무모한 폭동에로 나온다고 보고 있다. 이것이 기독교를 무자비하게 탄압하는 리유이다. 이상입니다.
도: 신천기념관은 알고 있지만 신천 사건의 전말에 대해 깊이 있게 살펴보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저도 자료를 한번 찾아보겠습니다. 신천사건이 과장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지만, 어쨌든 이런 일이 되풀이되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참으로 비극입니다.
최: 참으로 비극입니다. 비극이 비극을 또 만들고 반복되는 것이 민족의 비극입니다. 가슴 아픈 일입니다.
도: 그러게 말입니다. 전쟁에 착한 전쟁이 어디 있겠습니까마는, 다시는 이런 비극을 만들지 말아야 합니다.
북한의 아우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핵심은, 북한 당국이 수많은 종교 중에 유독 기독교에 대한 탄압의 고삐를 늦추지 않는 이유가, 신천 지역에서 있었던 순교적 의거(북한은 ‘반란’이라 표현)에 크나큰 충격을 받은 결과라는 것을 말하고 싶었던 것이다. 객관적으로 봐도 동족상잔의 전쟁을 일으킨 야만적인 공산주의 세력들에 대항한 기독교 교인들의 순교투쟁은 다시 한 번 자유통일 역사에 길이 남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김익두 목사에 대한 평가도 의로운 순교자, 혁명가의 삶으로 높이 추앙받아 마땅하리라 생각된다.
(다음 호에 계속)⊙
02월
⑧ 김정은의 할아버지(김일성)와 아버지(김정일)는 미타(찜찜)한 남조선 출신 교화 안 된다며 모조리 숙청
⊙ 김일성이 만든 정치범수용소의 실체
⊙ 김일성, 연좌제 적용 아이들에게는 글만 알아볼 수 있는 교육시켜
⊙ ‘모두 죽여야 한다’는 김일성의 사상소멸이론
⊙ 심화조 사건 관련자 숙청 위해 단독 정치범수용소 만든 김정일
⊙ 김일성이 정치보위부 부장 김병하를 반당반혁명분자로 몰아 죽인 이유
이번 호를 준비하면서 북한의 아우에 대한 미안함과 그리움이 사무치게 다가왔다. 사악한 악령에 사로잡힌 무리가 벌인 적폐청산이라는 난동이 남북한이 예외가 아니라는 차원에서도 그렇고, 그런 악(惡)의 무리가 남북으로 들어선 지금 아우 같은 인물과 조직이 너무나 절실히 요구되기에 더욱 그랬다.
한없이 자애로운 인민의 어버이로 알려지길 원한 김일성. 그의 손자는 얼굴까지 성형하면서 몸짓과 어투까지 그를 따라 하고 있는 현실에서, 이 글이 감춰진 악의 화신 김일성의 실체와 더불어 지금 대한민국에서 벌어지는 반(反)대한민국 반역 정권과의 연계점을 확인하는 기회가 되기를 진심으로 소망해본다.
다시금 느끼지만 북한의 아우는 자신이 가진 모든 지식을 동원해 (자신이 속해 있는 조직의 보위를 염려하며) 무엇이 독재 체제를 작동시키며 운용되는 핵심인지 파악하고자 했다. 그리고 그 시스템을 파괴해야만 김씨 왕조를 끝장낼 수 있다는 데 명확한 확신을 갖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참다운 지식인의 자세는 국민의 아픔과 고통, 분노를 자신의 아픔, 고통, 분노로 인식하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행동하는 사람이라고 하지 않았는가. 생사조차 알 길이 없는 북한의 아우가 남긴 공포와 인권 유린의 대명사인 북한 정치범수용소에서 드러나는 야만의 종언을 위해, 세상 모든 지성인이 함께 행동하기 바라며 아우와의 대화를 이어가고자 한다.
정치범수용소 시작
최: 수용소 안에 있는 사람들에 대한 인권 유린 행위를 자행하면서도 전혀 동정하거나 량심상 가책을 느끼지 않는 것도 다 자기 딴의 리유가 있습니다. 수용소에 대하여서도 대표님과 의견을 나누었으면 합니다.
도: 잘 알겠습니다.
최: 정치범수용소에 대하여 말씀드리자면 우선 북한에 있는 여러 가지 수용소 중에서 어떤 것까지 수용소로 보아야 하는가에 대하여 말해야 합니다.
우선 어떤 나라에나 다 있는 일반 범죄자들을 수용하는 로동교화소가 있고, 보안부(경찰)가 관리하는 로동단련대(남한의 삼청교육대와 비슷한 것)가 있습니다. 그리고 온 가족과 함께 들어가 있어야 하는 농장관리소가 있고, 본인만 들어가 있는 관리소가 있으며, 또 집결소라는 것이 있습니다.
다른 나라에 어떤 범죄자들을 관리 수용하는 수용소가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유엔에서 상정되고 있는 정치범수용소는 농장관리소와 관리소를 말합니다.
정상적인 사회에서의 교정시설은 대부분 구치소와 교도소로 구분되어 있다. 형(刑)을 확정받지 않은 미결수의 경우가 구치소에 수용되고 형이 확정된 기결수의 경우 교도소에서 본격적인 수형 생활에 들어간다. 하지만 북한과 같은 공산 체제는 일반적인 교정시설 외 특히 정치범 같은 경우, 우리로서는 민주 인사들이 해당하는데 이들은 모두 정식 재판 등을 거치지 않고 국제사회가 표현하는 정치범수용소, 북한식 명칭으로는 관리소에 수용되며, 영원히 사회와는 단절된 채 살아가야 한다.
최: 정치범수용소 문제는 저희 조직에서도 깊이 있게 연구하는 대상이기 때문에, 여기에 대해서도 그리고 지금의 조건에서 수용소의 철폐 문제도 실상은 유엔이나 대표님도 잘 알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대표님이 이끌고 계시는 단체가 다루는 게 랍치 피해자 문제와 탈북자 문제, 북한의 인권 문제인데 그 운동이 해결하고자 하는 문제가 북을 대상으로 하는 것인 만큼 북 주민들의 생각과 일치해야지 만일 차이가 난다면 대표님의 노력이 무의미한 것으로 될 수 있습니다.
대표님도 아실 것입니다. 정치범수용소의 공식 명칭은 ‘국가안전보위부 농장관리소’입니다. 처음 생겨나기는 1956년 8월 당중앙위원회 정치국 전원회의에서 당시 북한의 당과 정부의 과반수 각료가, 김일성에게 집중된 권력을 민주주의공화국의 성격에 맞게 독단으로 집중 처리할 것이 아니라, 민주주의적으로 모든 내각성원의 의견을 수렴하고 집체적 토의를 거쳐 과반수가 찬성하면 가결하여 집행하는 체제를 세우자고 회의 안건으로 제출하였다가 생겨난 것입니다.
회의 안건은 인민경제 수행과 관련한 문제를 토의하게 되어 있었는데, 이 회의를 통하여 김일성의 독재를 저지시키는 체제를 세울 데 대한 결정을 채택하자고 미리 약속한 과반수의 각료가 회의 안건과는 다른 문제를 들고나와 토론을 벌이자 회의를 휴회하고 슬그머니 회의장을 빠져나간 김일성이 군대를 동원하여 안건 제기자와 안건을 지지한 각료 모두를 체포하여 일어난 사건이 8월 전원회의 종파사건입니다.
1956년 8월 전원회의 종파사건
▲1956년 8월 전원회의 종파사건은 김일성이 정치범수용소를 만든 계기가 됐다. 1953년 7월 27일 오후 2시 북한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 김두봉(가운데)과 조선노동당 중앙위 서기 박정애(오른쪽)가 둘러선 가운데 김일성이 휴전협정서에 서명하고 있다.
1956년 8월 전원회의 종파사건은 우리에게도 낯설지 않은 주요한 정치 사건 중 하나다. 북한의 아우는 위와 같이 표현하고 있지만, 국제사회에 알려진 8월 종파사건에 대해 다시 한 번 짚어보고자 한다. 전후 복구 건설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김일성이 소련과 동유럽 국가 순방 길에 오르자(6월 1일~7월 19일) 그 틈을 타서 반(反)김일성 세력들이 결집하기 시작했는데, 당시 소련 대사 이바노프가 그 배후에 있었던 것도 잘 알려진 사항이다.
당황한 김일성이 조기 귀국하여 8월 2일 예정되었던 중앙위 전원회의를 8월 30일로 연기하며 사전에 대비했고, 1956년 8월 30일에 평양예술극장에서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전원회의가 열렸다. 상업상 윤공흠이 토론자로 나서서 갑자기 김일성 지도부를 공격했는데 그 내용은 너무나 당연한 실정(失政)에 대한 비판이었음에도 이들 모두는 당직을 박탈당하고, ‘반당종파분자’로 몰렸다. 대부분의 중앙위원이 김일성을 옹호했기 때문이다. 윤공흠, 서휘 등은 당에서 쫓겨났으며 연안 독립동맹 계열의 지도자 최창익과 소련 계열인 내각 부수상 박창옥 등은 당직을 박탈당했다. 이렇게 되자 윤공흠 등은 서휘, 리필규와 함께 중공으로 망명했다.
그러나 상황은 김일성에게도 만만치만은 않았다. 중국 국방부장 펑더화이가 평양으로 들어와 반대파의 손을 들어주었으며, 반대파를 뒤에서 부추겼던 소련 측도 부수상 미코얀을 보내 이들을 도와주었다. 김일성은 일단 한발 물러서서 이들의 지위를 회복시켜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두 사람이 본국으로 돌아간 뒤 김일성은 본격적으로 반대파들을 숙청하기 시작했다. 숙청 작업은 1958년 3월까지 진행되었다.
김일성 “반혁명분자들의 씨를 말려라”
▲일본의 후지TV가 2004년 2월 27일 공개한 북한 함남 요덕 정치범수용소. 정치범들이 경비대와 보위부원들의 주택가를 돌며 인분을 퍼내 나르는 모습이다
최: 그때 체포한 각료 중에서 소련과 북한의 이중국적을 가진 사람들은 소련으로 추방하고 나머지는 처형하거나 감금하였습니다. 이때 련좌죄 법을 만들어냈는데, 체포된 각료들의 관련 부서에서 그들과 련계됐다고 하는 사람들과 그들의 가족, 친척들까지 모조리 체포하였습니다.
체포된 사람 중에는 전원회의에 참가할 급이 안 되는 산하부서의 관리들과 그와 련관된 가족, 친척들이 절대다수였는데 그들은 영문도 모르고 체포된 상황이었습니다. 여기서 문제로 되는 것은 처음 체포할 때 회의 참가자만 해당하였는데 후에 김일성의 지시로 본인들의 가족, 친척과 련관됐다고 의심되는 사람들, 그리고 또 그들의 가족, 친척까지 모조리 씨도 없이 체포한 것입니다.
그때 당시 그 지시를 집행한 내무성이 ‘가족, 친척이라고 하면 어디서부터 어디까지인가 하고 묻고, 그들을 감금하면 그 인원이 대단할 텐데 어디다 수용하며, 또 그들의 형량은 어느 만큼 적용해야 하는가’ 하고 구체적인 지시를 줄 것을 김일성에게 요구했습니다.
이때 김일성이 생각나는 대로 말한 것이 영원히 바꿀 수 없는 북한의 수용소 관리 규정으로 되었습니다. 김일성의 이 지시는 북한의 내부기밀문서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당시 주민등록 체계가 서 있지 않은 북한의 내무성(경찰)으로서는 친척관계를 규정할 수가 없었습니다. 당시는 보위부가 없었고 내무성 안에 정치보위부서가 있을 뿐이었습니다.
김일성은 가족은 본인과 부모, 형제인 경우 아들이든 딸이든 가정을 이루어 갈라져 나와 살아도 해당하며, 친척으로는 친켠으로 8촌까지의 모든 형제, 숙질들과 그의 안해(아내)까지, 외켠으로는 4촌과 그의 안해까지, 미혼의 4촌 누이까지, 처켠으로는 장인, 장모, 처남, 처남의 안해, 미혼의 처제까지 속하며, 고모켠으로는 고모 4촌, 미혼의 고모 4촌 누이동생까지, 고모 4촌의 안해까지, 이모와 이모부, 이모 4촌 형제와 그의 안해까지, 미혼의 이모 4촌 누이까지가 친척으로 된다며 그 범위를 대단히 넓게 잡아주었습니다.
얼굴 모르는 친척도 연좌제 적용
참으로 상상을 초월하는 일이다. 한없이 인자한 모습으로 자애로운 어버이 수령으로 알려지고, 이곳 남한에도 그를 추종하는 무리가 영원한 수령으로 모시는 김일성이 인류 역사상 전무후무한 인권 유린의 대명사인 정치범수용소의 창안자였음이 북한 내부의 반체제 조직에 의해 밝혀지는 지금, 소위 주사파 무리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으며 이들에게 권력까지 빼앗긴 대한민국은 무엇을 해야 할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최: 우리 조선 민족의 경우 이렇게 친척관계를 잡으면 서로 얼굴도 모르는 사람이 절반이 넘고, 친척들을 통하여 이름이나 들은 적 있다는 친척들이 30% 이상 됩니다. 그러니 거의 대다수가 영문도 모르는 애매한 사람들로 됩니다.
또 여기서 친켠은 대단히 넓게 잡고 외켠은 상대적으로 작게 잡았는데, 이것은 김일성 자신이 성장과정에 외켠 친척들의 래왕이 별로 없이 자란 환경과도 관련됩니다.
이런 규정으로 체포하면 본인 한 사람당 가족, 친척이 사생아가 아닌 다음에야 100명에서 150명 정도 되는 인원으로써, 그것을 집행하는 보위부의 고위층 관리로부터 하급 공무원에 이르기까지 몸서리쳐야 하는 범위입니다.
이런 규정은 아무리 김일성에게 충실해도 언제 어디서 어떻게 걸려들지 누구도 모르는 범위이고, 1부류 계층으로부터 4부류 계층에 이르기까지 공포에 떨게 하는 범위로써, 만일 이런 련좌죄법이 철폐되면 김정은을 제외한 모든 사람이 만세를 부를 공포의 범위입니다.
실지 1997년엔가 황장엽이 남한으로 망명하였을 때 북한이 그의 가족, 친척 150여 명을 처형했다고 제 입으로 발표하였습니다.
“반혁명 범죄자는 영원히 교화되지 않는다”
최: 형량은 어느 정도로 적용해야 하느냐는 지시사항에는 ‘반혁명 범죄자는 영원히 교화되지 않습니다’라는 지시를 내려, 그들 모두를 종신 징역자로 규정하였습니다. 다음으로는, ‘그들을 지금 있는 교화소가 아니라 깊은 산속에 닫긴 구역을 만들고, 여기서 영원히 나올 수 없게 하며, 그 존재는 북한 사람들에게도 알려지지 않게 하며, 그 안에서의 결혼으로 인한 인구 증가는 철저히 막으며, 그렇게 되면 그들 모두는 점차 늙어 사망하게 되며 나중에는 농장은 없어지게 하라’고 지시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는 최소한도의 식량과 피복만을 공급하며, 그 자녀에 대한 교육도 극히 글을 알아볼 수 있는 정도로 하며, 농장 운영에서 나오는 생산물은 내무성이 소비하라’고 그 관리 운영에 관한 구체적인 지시를 하달하였습니다.
도: 정말이지 말문이 막히고 억장이 무너지는 내용입니다. 제가 찬찬히 열람하고 의견을 남겨두겠습니다.
최: 수용소의 철폐는 김씨 왕조가 무너지면 자연히 없어질 것이지만, 김씨 왕조가 존재하는 상황에서 수용소 철폐운동을 벌리자면 그 집행자들의 사상동향 상태와 리해 관계를 잘 파악한 데 기초하여 전략과 전술을 세워야 성과를 거둘 수 있다고 봅니다. 따라서 장문의 설명이지만 잘 들어주시기 바랍니다.
악의 화신, 김일성의 사상소멸이론
▲미국 민간단체인 북한인권위원회(HRNK)가 2019년 말 북한 함경북도 청진의 정치범수용소인 ‘25호 관리소’에서 강제노동에 동원된 수감자들을 촬영한 민간 위성사진을 공개했다.
북한의 아우는 정치범수용소 철폐운동이 얼마나 중요하고 이것을 위해 필자가 노력해달라고 당부하는 것이 또 얼마나 중요한 것임을 잘 알고 있었다. 이날의 아우는 거의 잠을 자지 못했을 것이다. 다음 날은 일과가 없는 휴일이기 때문이기도 하였고 그만큼 절박한 심정이었을 것이리라. 생사조차 모르는 아우에게 미안함이 한없이 몰려온다.
최: 우리 조직은 김일성이 왜 이렇게 잔혹하게 정치적 반대세력과 그 관계자들의 범위를 넓게 잡아, 그들의 육체를 말살하여 그들의 정신 상태가 외부와 접촉하지 못하도록 차단하는 닫긴 구역을 만들었을까에 대한 토론을 많이 하였습니다.
그것은 김일성의 정치적 사상 상태의 성장과정과 관련됩니다. 김일성의 아버지 김형직은 민족주의자로써 반일독립운동을 벌인 사상운동가입니다. 그의 정신 상태가 자란 시기는 리씨 왕조의 마지막 시기였고, 국권 회복 후 나라의 통치 방식은 봉건적 군주제였습니다.
김형직이 식민지 반체제 사상운동을 하다 체포되었을 때 김일성이 평양감옥에서 감옥살이를 하는 아버지를 처음 본 것이 7살 때인 1919년이었습니다. 김일성은 아버지를 보면서 그를 감금한 일제에 대한 반항의식이 크게 자라났고, 또 자기는 거기에서 경험과 교훈을 얻어 새롭고 과감한 반일투쟁을 해야겠다는 결심을 가졌다고 회고록에 밝혔습니다.
결국은 ‘아버지를 체포하거나 처형할 때 아들을 살려놓으면 자기의 경험으로 보아 반항의식이 더 크게 자라기 때문에, 아예 모두 죽여 없애야 사상이 소멸된다’는 김일성의 ‘사상소멸리론’에 따라 이러한 련좌죄 처벌 방식을 적용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의 사상의 성장과정이 리씨 왕조의 통치 방식이 지배하던 시기이므로 그는 처음부터 왕을 꿈꾸는 절대 봉건 군주주의자였지 공산주의자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김일성, 수용소 운영 실체 철저히 비밀에 부쳐
▲국제사회에 악명을 떨치고 있는 북한 요덕 정치범수용소 전경. 요덕 수용소 입구에 있는 국숫집 앞에 군인들이 서 있는 모습(왼쪽)과 요덕 정치범수용소 입구. 사진=피랍탈북인권연대 제공
북한의 아우는 실로 놀라운 이야기를 서슴지 않고 쏟아냈다. 북한의 골수 빨갱이가 하는 말을 남한에서 김일성을 추종하는 악의 무리가 들으면 어떤 반응을 보일지 자못 궁금했다. 계속 따라가보자.
최: 그는 ‘모든 사람은 자기의 정치적 견해를 가질 수 없으며, 오직 한 사람의 사상과 지도를 절대적으로 따라야 하며 그를 거부하는 것에 대한 처형은 죄 되는 것이 아니라’는 세계관적 사고를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렇기에 그는 다른 사람들에게 정책 수립에 대한 의견이나 찬반을 물으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김일성의 통치관을 리해하지 못한 것은 그가 자기의 속생각을 잘 감출 줄 아는 성격을 소유했기 때문입니다. 만일 전원회의 참가자들이 그가 이러한 조치를 취할 것이라고 미리 생각했다면 다른 전술을 썼을 것입니다.
1970년대 들어서면서 유일사상 체계를 세우는 과정에 유일사상 체계에 재빨리 적응하지 못하고, 자기의 견해를 말하던 수많은 사람들과 가족, 친척들, 그리고 6·25전쟁 당시 적 기관이나 치안대에 가담하여 살인 만행을 한 사람들, 남조선 출신들로서 사상 상태가 미타(찜찜)하다고 생각되는 사람들, 국군포로 중에서 미타한 사람들, 인민군 포로 귀환병 중에서 그러한 사람들, 그전에 8·15광복 이전에 국내, 국외에서 활동한 정치적 적수들을 비롯하여 수많은 사람이 수용소에 감금되어 수용소의 수도 늘어났습니다.
그리하여 김일성이 처음에 지시했던 수용소 인원들의 노화로 인한 수용소 범위 축소 및 폐지는 집행되지 않았고 오히려 늘어났으며, 그 실체에 대한 비밀 보장도 국내의 북한 주민들은 물론 국제사회에까지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수용소의 위치나 수용소의 수용인원, 수용소 안의 구체적 인권 상황 등에 대한 상세한 자료는 렬거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거기에 대한 자료는 우리 조직의 관심 밖의 일이고 또 그 자료를 알 수도 없습니다. 수용소의 인권 상황은 이미 나와 있는 진술로도 충분하며 관계자라 해도 그 이상 더 잘 알 수 없습니다. 수용소의 수용인원에 대한 통계는 극비사항이므로 몇 명의 관계자 외에는 누구도 모를 것입니다.
김일성 시대에 그가 직접 만들어놓은 수용소는, 그 운영 실체에 대한 것이 북의 일반 주민들에게 알려질 경우 나타나게 될 부정적 결과 때문에 김일성은 생전에 그 존재 자체를 비밀에 부치라고 수차에 걸쳐 당부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안에서의 번식(출산)을 막으면 나중에 수용소가 없어질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수용소의 인원은 계속 늘어났고 김정일 시대에 와서 사회안전성 농장관리소라는 것이 새로 또 생겨났습니다.
8월 종파사건과 같은 큰 사건 때 말고는 개별적으로 잡혀 들어오는 사람들과 거기서 죽어 나가는 사람의 수가 대체로 균형을 이뤄 이후 수용소는 더는 늘어나지 않았습니다. 김일성 시대 때 있은 여러 가지 정치적 반대파나 적수들을 제거하기 위한 대숙청으로, 3차례 내지 4차례에 걸쳐 수용소의 개수가 늘어나고 더는 김일성의 통치에 도전하는 세력이 없어진 김정일 시대에 들어서서는 수용소가 늘어날 일이 없어졌습니다.
심화조 사건으로 자체 수용소를 만든 사회안전성
▲심화조 사건 관련자 조사를 위해 수용소를 만든 김정일.
최: 대표님도 아시겠지만 심화조 사건이라는 것이 김정일 통치 시기에 들어서면서 있었는데, 이 사건을 당시 사회안전성(현 인민보안성)이 진행하였는데 이때 체포한 관련자들과 그 가족, 친척들을 수감하느라고 국가보위부와는 별도로 안전성이 자기의 농장관리소를 만들어냈습니다.
지금 인민보안성 10국(교화국) 소속의 관리소를 운영하고 있는데 보위부 소속의 수용소와 보안부 소속의 수용소 모두 일단 들어가면 나오지 못하는 지역을 말합니다.
최: 원래 김일성이 체계를 세워놓기는 수용소는 정치범 사건을 다루는 보위부가 운영하고, 일반 사회범을 다루는 경찰(보안성)은 세계 모든 나라에 다 있는 교화소(교도소)만을 10국이 운영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심화조 사건과 같은 정치적 사건은 자기들이 실마리를 잡았다고 해도 보위부에 넘겨주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경찰의 기능을 초과하여 보위부의 기능에 속하는 심화조 사건을 도맡아 진행하여 나중에는 단독 정치범수용소까지 만들어냈습니다. 그것은 그럴만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심화조 사건은 김정일 통치에 들어서면서 수많은 아사자가 발생하자 경제 파탄의 책임을 김일성 시대 때 등용되었던 로간부들에게 씌우려 서북청년회의 북파된 간첩으로 몬 김정일의 지시에 의하여 조작된 사건입니다. 원래 그 사건의 조작은 국가안전보위부가 해야 하는데, 사건을 조작하라는 김정일의 지시를 보위부 상층의 간부들이 무언의 항변으로 거부하여 하는 수없이 안전성이 진행하게 되었습니다.
도: 정말 좋은 자료입니다. 아우님의 이야기는 들을 때마다 제가 감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설명도 설명이거니와 수용소 문제에 이렇게까지 상세한 사항들을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이것이 북한을 넘어 국제사회에 제대로 알려지면 엄청난 파장이 있으리라 봅니다. 인권운동을 하는 많은 분을 대신해서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최: 제가 잘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조직의 고심 어린 연구 결과입니다.
도: 참으로 대단합니다. 그 성원들의 역량과 땀이 소중히 느껴집니다.
北 국가보위부도 김씨 왕조의 피해자
▲지난해 말 김정은이 묘향산의료기구공장을 시찰하며 담당자들을 질책하는 모습.
최: 계속하겠습니다. 마지막에 토론합시다.
김일성 시대 때부터 수용소의 2차 피해자는 보위부였습니다. 초대 부장이였던 김병하를 내세워 김일성은 유일적 지도 체제를 세우기 위하여 말과 행동을 충성스럽게 하지 못하는 수많은 4부류에 속하는 인민들과 1, 2, 3부류의 간부들을 대량 체포하여 수용소에 보냄으로써, 자기에게 충성을 다하지 않고서는 살아남지 못한다는 공포심을 주어 사상의 일색화와 유일령도 체계를 세워놓았습니다.
그러나 너무나 많은 사람이 말 한마디의 실수로 잡혀가 인민들 속에서 불만이 생겨날 조짐이 보이자, 그 집행자인 국가정치보위부 부장 김병하를 반당반혁명분자로 몰아 처형하고 보위부 상대로 대대적인 숙청을 단행하여 인민들의 불만을 모두 보위부에 넘겨씌웠습니다. 김일성은 자기는 전혀 모르고 있었고 김병하가 수령도 모르게 수많은 사람을 수용소로 보냈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때 숙청된 보위부의 간부 중 국가정치보위부 내 장령(소장) 1명만이 살아남고 모두 처형된 사실은 대량 체포가 있을 때마다 보위부도 그에 못지않은 피해를 본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후에 중앙방송위원회 론설원 사건으로 대량 숙청의 피해를 본 보위부의 상층부 간부들은 심화조 사건이 마지막에는 자기들에게 어떤 피해로 돌아오는가 하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만일 김병하가 반당반혁명분자라면 그가 체포한 수용소의 수많은 사람을 석방하여야 하지만, 그의 처형으로 끝났지 석방된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는 것은 김씨 왕조가 할아버지 때부터 속임수를 잘 쓴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김씨 왕조를 추종하는 남한의 주사파 출신들이 속임수에 능하다는 게 우연일까 필연일까. 김일성의 감춰진 사악함에서 지금 남북 정권을 같이 보노라면 초록이 동색이라는 느낌이 떠나질 않는다. 6·25전쟁이 아직도 계속되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지금까지도 이런 악령의 세력과 싸우고 있음을 한시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최: 이러한 풍부한 경험을 가진 보위부의 상층부는, 1998년 국가보위부를 비밀리에 방문한 김정일이 4대 보위부장 김영룡의 계급을 상장에서 대장으로 승격시켜주면서 심화조 사건을 추진시키라고 지시를 주었으나, 알았다고 대답만 하고는 무언의 항변으로 그 집행을 하지 않았습니다. 마지막 결과에 대한 대접이 뻔하기 때문이었습니다.
화가 난 김정일은 당시 중앙사로청위원장이였던 최룡해의 뢰물 및 부화(섹스 스캔들) 사건을 자기에게 보고하지 않았다는 구실로 그를 반당반혁명분자로 몰아 숙청하고(사무실에서 음독자살), 보위부 안의 거의 모든 장령을 안기부와 결탁한 간첩집단으로 몰아 보위사령부로 하여금 체포, 취급하게 하였습니다. 이러한 상황에 그 사건 날조를 안전성(경찰)이 하게 된 것입니다.
도: 이런 사실들을 ○○○이 인민들에게 알려준다면 엄청난 일이 벌어지겠습니다. 보위부 안에서도 김씨 왕조에 대한 반감이나 저항의식이 장난 아니겠습니다. 보위부의 상대가 보위사인가요?
최: 대단합니다. 제일 높다고 봐야지요. 아, 그건 서로 계통이 다릅니다. 평시에는 서로 상대에 대한 체포 권한이 없으나 김정일의 지시가 있으면 상대를 누를 수 있습니다.
북한의 아우는 국제사회의 일반적 상식을 뛰어넘는 발언을 하고 있었다. ‘김씨 왕조의 유지에 가장 앞장서 있는 보위부가 김씨 왕조에 대한 반감이 가장 높다’고 말이다. 평소 보위부에 대한 악감정을 내가 쏟아놓을 때 아우가 ‘너무 보위부를 미워하지 말라’던 기억이 다시 떠올랐다. (다음 호에 계속)⊙
03월 호
⑨ 김정일, ‘고난의 행군’ 시기 “인민은 줄면 줄었지 마르지 않는다”
⊙ 김정일-김정은 시대의 주된 수용소 피해자는 특권층… 최상층 계층이 정치범수용소에 反感
⊙ 수용소 경비대 근무 기피해 보위부·보안부 간부들 골머리
⊙ 어느 월북자의 아내, ‘남편의 꾐에 넘어가 왔으니, 남편과 이혼하고 아들을 데리고 남한으로 다시 가겠다’고 사정
⊙ 前 천도교 교령 오익제, 6·25 당시 헤어진 전처와 딸을 만나게 해준다는 꾐에 빠져 北 억류
남북 혁명가의 대화록을 공개해야겠다고 결심한 후 벌써 9회째 연재 글이다. 무엇보다 놀라운 사실은 이미 상당 분량의 대화를 기록했고 어느 정도 마무리 내용이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정작 북한의 아우와 나눈 대화록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많은 내용을 담고 있었다는 점이다. 전자편지처럼 서신을 주고받았거나 연애편지 등으로 작성해둔 것을 살펴보는 편지글이 아니라, 지금은 일상이 되어버린 SNS 대화를 그날그날 정리했으니 하루 동안 얼마나 많은 이야기를 휴대폰에 대고 쏟아냈을까. 지금 다시 그런 기회가 온다면 과연 해낼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마저 드는 게 사실이다.
무엇이 나를 이토록 정열적으로 움직이도록 했을까. 누구는 북한만 생각하면 무슨 대단한 민족의 선구자가 된 양 그것도 민족이라는 단어 앞에 압도되는 자신과 신비스러운(?) 북한이라는 대상 사이에 무언가 훌륭한 가교(架橋) 역할을 하리라는 책무감으로 밤잠을 설쳤다고 한다. 필자는 민족이라는 단어보다 혁명을, 화해협력이라는 기대치보다는 자유와 인권이라는 가치에 밤잠을 설쳤음이 틀림없으리라. 북한의 아우와 나눈 대화의 분량과 시간이 정확히 이를 증명해주고 있다고 할 것이다.
지금 대한민국은 다가오는 21대 총선 문제로 온 나라가 시끌시끌하다. 위기의 시기에 국회라는 곳이 무엇을 하는 곳이며 얼마나 중요한 위치인가 돌아보면, 여전히 우리의 정치는 후진성에 머물러 있음을 보게 된다. 분단과 정전(停戰)이라는 현 시국에 북한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이며, 이를 위해 국제정치와 열강(列强)의 역학 관계 속에서 무엇을 해야 할지 가늠조차 못 하는 모습이 바로 그러하다 하겠다.
21대 총선 이후 대한민국은 어디로 갈 것인지 막막하다. 브레이크 없이 폭주하는 반역의 무리에 운전석마저 빼앗긴 대한민국이 과연 기적의 역사를 이어갈 수 있을지, 아니면 모든 것이 멈춰 설 것인지 절체절명의 기로(岐路)에 놓여 있음을 제대로 인식하는 정당과 정치인은 찾아보기조차 어렵다. 얼기설기 잘 섞일지도 모르는 섞어찌개가 제대로의 맛을 낼지, 배후에 암약하는 어둠과 탐욕의 무리에게 휘둘려 반역 세력의 2중대로 전락할지 한 치 앞이 도대체 보이지 않는다. 살아 있다면 지금 이런 상황을 두고 북한의 아우와는 어떤 대화를 나누었을까. 아우는 필자에게 무엇을 주문했을 것이며, 그리고 지금쯤 필자는 무엇을 하고 있을까. 지금과 같은 깊은 자괴감은 아니었을 것이다.
북한식 兎死狗烹
최: 심화조 사건 당시 사회안전성의 상(相)은 백학림이었는데 그는 늙고 또 김일성의 빨치산이기 때문에 마지막에 죽여야 하는 주역을 시킬 수가 없었습니다. 부상(副相)은 5명에서 7명으로 당과 국가의 로간부들을 체포, 처형하는 문건에 서명할 급이 안 되기 때문에 할 수 없이 정치국장이었던 채문덕을 주역으로 내세웠던 것입니다.
심화조라는 사건을 심화시키니 김일성 시대에 등용된 당과 국가의 로간부들이 모두 서북청년회 성원들로서 미국의 간첩이었다는 것을 밝혀냈다는 날조된 사건입니다. 이 사건은 김정일이 등용하지 않고 아버지인 김일성이 등용한 로간부들이 자기에게 진심으로 충성하지 않는다고 하여, 경제파탄과 수백만 아사(餓死)의 원인이 미국 간첩들 때문에 일어났다고 책임도 전가하고 숙청도 진행하기 위하여 김정일이 짠 서툰 시나리오였습니다.
그 결과 안전성이 독자적으로 수용소를 설치, 운영하게 되었고, 그 후 채문덕을 비롯해서 수백 명의 안전원들이 숙청, 처형되었습니다. 또 아버지의 수법대로 ‘나는 몰랐고 반당반혁명분자 채문덕과 그 일당이 진행한 사건’이라고 모든 책임을 안전성에 뒤집어 씌웠지요. 여기서도 아버지의 수법과 마찬가지로 날조된 사건으로 수용소가 설치되었으면 모두 석방하고 수용소는 해체하여야겠으나, 눈가림으로 몇 명만 석방하고 나머지 인원들과 수용소는 그대로 운영하였습니다.
이상에서 보는 바와 같이 수용소 문제는 김일성 시대 때는 그 피해자가 1부류, 2부류와 4부류, 그 집행자인 3부류에 속하는 보위부원이었다면, 김정일 시대와 김정은 시대에 들어와서는 그 피해자가 주로 1부류의 특권층이고 4부류의 일반 주민은 거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는 4부류 계층은 수용소 문제에 별로 리해관계를 가지고 있지 않으며 수용소가 해체되길 바라는 계층이 상층부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어느 나라에나 수용소 있다’고 알아
북한 아우의 이야기 중 눈여겨봐야 할 부분이 바로 이 부분이다. 김정은 세습독재체제를 유지하는 데 공동운명체인 1부류를 기점으로 하는 최상위 계층이 정치범수용소에 대해 반감과 철폐를 바란다는 점이다.
최: 수용소의 관리 운영자들은 수용소는 그 어느 나라나 다 설치, 운영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실지 북한 당국은 ‘매 나라 자기의 국가체제를 지키기 위하여 정치범수용소를 설치, 운영하고 있으며, 남조선에는 우리보다 몇 배나 큰 정치범교도소(수용소)가 있고, 정치범에 한해서는 종신징역제와 련좌죄가 적용된다. 남조선은 우리보다 더 엄격하다. 미국에도 있고 일본에도, 쏘련에도, 중국에도 있다’, 이렇게 교양했기 때문에 우리 같은 조직 내부에서도 3년 전까지만 해도 그렇게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도: 주민들보다는 상층부의 반감이 높다고 하셨는데 일반주민들의 반체제적 단죄는 어떤 방식으로 진행되는지요.
최: 불평을 말하는 것 외에는 거의 없다고 보아야 합니다. 리유는 그들이 생업에 힘쓰고 나면 사회관계라든가 사회의 모순에 대하여 마음 쓸 형편이 못 된다는 것입니다.
‘생명구원의 전화’
▲2009년 김정일 국제형사재판소 제소 활동을 펼친 필자의 반인도범죄조사위원회 활동. 사진제공=피랍탈북인권연대
방송이 시작되는 시각이라 아우와 필자 모두 잠시 한숨을 돌렸다. 북한의 아우가 언급한 내용을 처음으로 대북(對北)방송을 통해 알리기로 결정했다. 이런 결정을 하게 된 이유는 아우의 간곡한 당부와 요청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 연재를 시작하면서, 러시아에서 일하면서 한국의 친척에게 보냈다가 수취인 불명으로 러시아로 돌아온 편지가 하필이면 노동자들을 감시하는 보위부원 손에 들어가는 바람에 현장에서 체포되어 북한으로 압송당한 북한 노동자의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그는 북으로 끌려가면서 ‘제발 갓난아이만이라도 살려달라’고 절규했다. 당시 아우는 그런 내용을 필자에게 전달하면서 조금이라도 도울 수 있게 전화번호라도 대북방송을 통해 알려달라고 간곡히 요청했다. 그 후 필자는 ‘생명구원 전화’라는 이름으로 방송을 시작했다. 아우와 나는 모두 감개무량했다. 이게 시작이라고 생각하니 가슴이 떨렸다. 아우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최: 대표님, 수고하셨습니다. 우리 조직의 목소리를 남한과 북한의 주민들이 듣게 되었다는 게 마치도 ○○○○을 배포한 기분입니다.
도: 예, 저도 꼭 기여를 하도록 하겠습니다.
최: 감사합니다. 라디오가 최고입니다. 이제 라디오만 대량으로 전파되면 민주화 계몽에 큰 걸음을 내디디게 될 것입니다.
도: 예 알겠습니다. 더욱 노력하겠습니다.
수용소 관리 인원이 되기를 거부하라
최: 수용소와 관련된 자료는 잘 활용하셔야 합니다. 저희의 안전을 생각해주시기 바랍니다.
계속하겠습니다. 방금 방송에서 북한의 현실을 2가지로 평가하는데 하나는 ‘나라도 아니다. 쉽게 무너질 수 있다. 무질서와 무법천지다’라는 것이고, 또 하나는 ‘절대 무너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어디서 보는가에 관계됩니다. 4부류에서 보면 법과 질서가 엉망이고 모든 것이 뢰물로 통하며 상층부가 부패 타락하여 마치 썩어가는 듯이 보입니다. 2부류에서 우로 올려다보고 아래 3부류와 4부류를 내려다보면 부패와 부패 절단수술이 아주 제대로 잘 진행되고 있어 끄떡없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량면적 효과가 나타납니다. 4부류 계층은 독재유지 시스템에 대하여 잘 모르니 마치 세상이 자기수명을 다한 것처럼 인식할 수 있습니다. 방금 말씀하셨는데 문제는 4부류 계층이 자기들이 착취와 수탈, 통제에서 시달리고 있으며 여기서 벗어나는 길은 김씨 왕조 밑에서는 앞날이 없으며 오직 새로운 자유와 민주주의적 환경만이라는 것을 인식하도록 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도: 맞습니다. 아우님의 이야기로부터 제가 새롭게 인식하고 배우는 게 참 많습니다. 무엇보다 현실에서 제대로 적용해나가야 할 텐데 말입니다.
최: 수용소에 대하여 결론적으로 말씀드리면 수용소 관리자들에게 유엔의 이름으로 된 서한을 보내야 합니다. ‘국제사회가 지금 당신들이 운영하는 수용소에 대한 책임을 김정은에게까지 추궁하는 정도로 심각하다. 당신들은 지금 나치독일의 전범자들과 같은 범죄를 범하고 있다. 범죄에서 벗어나는 길은 무언의 항변으로 사직하라. 자기들의 아들들을 관리소 경비대에 입대시키지 마라’, 이렇게 그들이 당장 할 수 있는 것부터 일깨워주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수용소 경비대에 자식들을 보내지 않으려는 움직임이 보여 북한 당국도 골머리를 앓고 있는 상황입니다. 또 관리소에 인사배치하면 잘 응하지 않아 보안부나 보위부의 상층부도 고민 중입니다. 그것은 관리소가 외진 산속이나 사람이 살기 어려운 곳에 있고, 또 여기서 생활하면 자식들을 대학에 보내기가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에 누구도 가려고 하지 않는 벼슬입니다. 또 관리소 자체가 김일성 시대 때와는 달라 공급이 잘 안 되어 관리자 자신들도 강낭밥을 먹는 상황이라, 평양에 있는 상층부는 수용소 간부로 인사배치하면 유배지에 가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이 점을 잘 리용하면 우선 수용소의 근무성원으로 되는 것을 꺼려 해 그 통치 기능을 약화시킬 수 있습니다. 누구나 수용소 관리 인원이 되기를 거부한다면 김정은에게도 큰 타격이 아닐 수 없습니다.
도: 아우님, 어제 말씀하신 수용소 부분은 조심해서 활용하도록 하겠습니다. 굳이 활용하기보다 학습이라고 생각할 것이구요. 말씀하신 수용소 근무성원들에 대한 서신 전달에 대해 고민한 것이 있으시면 말씀해주십시오. 일반인들이나 외부인이 그곳으로 접근하기도 쉽지 않을 것이고, 결국 내부성원이나 그곳 방문이 가능한 조직원들에 의해 일이 진행되어야 할 텐데 방법들이 잘 떠오르지 않네요. 만약 저희가 진행할 수 있는 가능한 방법들이 있으면 꼭 진행해보고 싶습니다.
“김정일의 과거 알려주는 자료 필요”
▲모스크바 요양 당시의 성혜림
아우와의 약속 중 몇 가지는 그렇게 오래가지 못했다. 방송이 바로 그중 하나인데 대북방송이라는 것이 개인적으로 할 수도 없는 일이고, 당시의 상황이 아무리 박근혜 정부였을지라도, 실행부서로 내려가다 보면 민노총의 사주를 받는 언론노조가 틀어쥔 상황인지라 일개 프로그램 하나조차 제대로 자유롭게 운영되지 못하고 있었다. 하물며 지금이야 말할 것도 없지만 말이다. 후속적인 조치들이 나오지 못하는 상황이었지만 아우는 좀 더 세부적인 북한 정치범수용소 해체 작업의 방법들을 지속적으로 필자에게 쏟아내고 있었다. 모든 것을 여기에서 밝히지 못함을 독자분들에게 양해를 부탁드린다. 언젠가 다시 아우의 그 필살기와 같은 보검들을 꺼내 들 날이 오리라 믿는다.
최: 알겠습니다. 대표님께서 제가 부탁한 자료를 구하시느라 휴일에도 쉬지 못하시고. 성혜림의 이야기는 여기에 와서 알게 되었습니다. 북한에는 아는 사람이 전혀 없다고 보아야 합니다. 이런 것도 다 김정일의 과거를 알려주는 자료가 될 수 있습니다.
김씨 왕조가 집권하는 데 그를 안받침하는(내부적으로 받쳐주는) 기초가 있습니다. 그것은 김씨가 다른 것은 제쳐놓더라도 인간 됨됨이가 아주 따듯하고 자애로우며 인자하고 성실하며 인정이 많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내용을 담은 영화들과 자료들이 수없이 많으며 그것을 페이지 수로 계산하면 도서관 하나 분량만큼 될 정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김씨를 반대하면 사람들의 인식이 ‘어떻게 그렇게 위대하고, 인자하고, 덕망 높은 분을 받들어 모실 대신 배신할 수 있느냐’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진실은 그런 것이 아니라 그의 뒤 생활을 살펴보면, 남의 유부녀도 가로채 제 것으로 만들고 인위적인 고난의 행군을 만들어 아사자를 내고도 수십억 달러를 들여 자기의 별장을 건설하고, 세상의 산해진미로 포식하면서도 인민들 보고는 자기도 감자죽이나 강냉이빵으로 끼니를 때운다고, 인민들과 같이 굶기도 한다고 거짓말을 늘어놓고 있는데, 우선 여기에 대하여 진실을 알려주어야 합니다. 그래서 그의 약력과 사생활에 관한 자료가 ○○○에 꼭 필요하기에 대표님께 부탁하였습니다.
“北은 봉건군주제로 후퇴”
도: 아우님, 오늘이 주말인데 아우님이 바쁘지 않습니까? 생활총화 못 하면 장성택처럼 되니 잘 하세요. 배경이 든든한 장도 갔으니 더 조심하셔야죠.
최: 제가 무식한 질문 하나 드리겠습니다. 주말이라는 것은 토요일입니까, 일요일입니까?
도: 또 무서운 질문을 하는 줄 알고 두렵습니다. 아 예, 주말은 둘 다를 말합니다. 이틀이 되는 거지요.
최: 남한 분들은 일주일에 2일 휴식합니까? 그렇게 된 지가 언제부터인지요?
도: 거의 10년 이상이 되어가나 봅니다. 주 5일 근무한 것이요.
최: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하루 몇 시간씩 일합니까?
도: 원칙적으로 하루 8시간, 기본적으로는 그렇습니다.
최: 주 40시간 로동제입니까?
도: 맞습니다. 세계 기준이랍니다. 국제노동기구 ILO의 기준이요.
최: 예, 레닌이 1916년이든가 멘셰비키들의 반대에도 주 40시간 로동제 법령에 수표하였지요. 국제공산당사 배울 때 얼핏 들은 기억이 나는데, 남한에서 진정으로 공산주의 사회를 건설했군요. 진정한 공산주의는 민주주의입니다.(웃음)
도: 하하 그래요. 북은 아직도 봉건제구요.
최: 예 봉건군주제로 후퇴했습니다. 정치적 후진국입니다. 가슴 아픈 일이지요.
도: 그러게 말입니다. 슬픈 일입니다.
어느 월북자 가족
▲중국을 비롯한 국제연대 차원에서 제작된 ‘자유조선’ 기관지. 사진제공=피랍탈북인권연대
최: 예, 한 가지 더… 남한에서 북한으로 마지막으로 월북한 사람을 기억하십니까?
도: 동학 천도교 교령(敎領)이었던 오익제?
최: 예, 이름은 기억 못 하고 7~8세쯤 되는 아들과 부인이 함께 온 30대의 사람입니다. 오익제 같은 거물은 아니고 남한에서 서민으로 살던 사람입니다.
도: 예, 말씀하시죠.
최: 너무 힘들게 살아 좀 나을까 해서 북한으로 왔습니다. 부인에게는 북한은 지상낙원이다 라고 얼려서 같이 왔는데 그 사람이 온 가족과 함께 월북한 마지막 사람입니다.
도: 예 그래요.
최: 저희 조직의 기억에는 1989년 같습니다. 저희 기억에 의하면 그 사람의 온 가족을 그때 북한에서 기자회견을 시켰습니다. 평양 구경도 시키고 그다음 지방에 배치했던 것 같습니다. 월북자라고 다 평양 배치하는 것은 아니고 참 오래된 자료를 본 기억이 나는데, 아마 황해남도 옹진군 어느 자그마한 공장에 로동자로 배치한 것 같습니다. 그 후 국가안전보위부에 자료가 통보되어 올라왔는데 내용은, 본인은 ‘죽었소’ 하고 직장 출근은 잘했답니다. 그리고 부인은 사회생활은 하지 않고 집에서 노는데 그에 대한 교양사업을 맡은 녀맹원들이 집으로 찾아가면 문을 걸고 일절 사람 만나기를 거절했답니다. 하루종일 하는 일이란 집에 앉아서 화장하고 울고불고 했답니다. 매일 군당(郡黨)위원회 조직부를 찾아가서 자기의 의사로 월북한 것이 아니라 남편의 꼬임에 넘어가 왔으니, 남편과 리혼하고 아들을 데리고 남한으로 다시 가겠으니 제발 돌려 보내달라고 사정하려 군당에 하루 한 번씩 찾아오는 것이 업이었답니다. 인민학교에 다니는 아들은 철이 없어 그런지 김일성의 혁명력사만 가르쳐준다며 한 시간 정도 수업만 참가하고 인차 가방을 메고 집으로 왔답니다. 그러고는 일절 다른 아이들과 접촉을 하지 않았답니다.
그런 내용을 통보하며 그들 가정에 대한 처리를 어떻게 해야 하는가 문의하는 문건이었는데 평양의 보위부에서도 몹시 난감해하는 처리 내용이었습니다.
도: 아 그래요. 행위는 잘못되었지만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네요.
최: 북한에서는 이런 사람들이 북한에 찾아오면 몹시 골치 아파 합니다. 죽일 수도 없고, 그렇다고 돌려보낼 수도 없고, 또 그냥 놔둘 수도 없고.
도: 하하, 알 만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관리소에 보내는 걸로 알고 있는데요.
최: 당시 처리 결과는 없었고, ‘평양 보위부의 승인을 받아야 처리하겠는데’라는 의견서입니다. 아마 그렇게 했을 겁니다. 그때부터 25년 세월이 흘렀으니까요. 계속 그렇게 요구하는 것을 지금까지 그냥 둘 리 없지요.
도: 정말로 관리소에 보낸 것만 확인할 수 있다면 독재 세력을 국제사회에 폭로하기가 좋을 텐데요.
오익제의 월북
▲북한 내부 혁명조직원은 “황장엽 탈북 효과 희석시키려 오익제 꼬셔 월북시킨 것”이라고 주장했다. 황장엽 전 북한 노동당 비서가 2003년 7월 4일 국회 의원회관에서 열린 탈북자와 북한 인권문제 토론회에서 북한의 핵무기 개발 실상 등에 대해 증언하고 있다.
최: 예, 국제사회에 알려 그들의 반인권적 행위를 폭로해야지요. 그리고 우선 남한 사람들이 알아야 합니다. 오익제도 인질로 잡혀 고생했지요.
도: 그런 건 확인하기가 어려운가요? 인질요? 그런 놈은 고생해야 해요. 천도교 교령까지 해놓고 월북을 하다니 말이 안 되죠.
최: 그건 확인하기 어렵습니다. 다만 북한의 황해남도 옹진군에 사는 월북자 가족의 생사를 확인하는 친척들의 요구 사항을 들어주지 못하면 그건 관리소행이겠지요.
도: 아우님, 그런 건 어떻게 문건을 관리합니까? 유엔에서도 그런 자료를 무지 갈망하고 있을 텐데요. 그리고 오익제를 아우님이 잘 아시는지요.
최: 그런 문건은 평양 보위부 1국 안에 또 그런 문건만 보관, 취급하는 부서가 있는데, 그런 문건의 사본을 구한다는 것은 어렵습니다. 다만 그런 문건이 올라오는 시점에서 잠깐 열람할 기회가 있을 뿐입니다.
그리고 오익제에 대해서는 잘 모릅니다. 그것은 아마 통전부(통일전선부)가 했겠지요. 다만 오익제가 몹시 심란해서 ‘내가 북에 왔으니 가족들은 어떻게 살아가나’ 하고 걱정을 하면 ‘선생님 서울에 있는 가족에게 이번 달에 1만불 전달했습니다’라고 위로했다더군요. 그러니 그가 자발적으로 왔겠습니까? 아마 황장엽 못지않은 거물이 북한에 왔다고 선전하기 위하여 그를 꾀어서 데려왔겠지요.
도: 꾀어서 데려갔다는 것은 일리가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 친구가 오래전부터 고정간첩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최: 예. 통전부가 박아놓은 간첩이었는데 황장엽 때문에 할 수 없이 드러나 데려왔고, 본인은 오고 싶지 않은 걸 왔다고 들은 거 같습니다.
도: 고첩이 아니고서야…. 고정간첩 이야기가 맞을 겁니다.
최: 그건 맞습니다. 그를 거기까지 올려놓으려고 많은 돈과 품을 들였다더군요.
도: 그런 돈을 인민들을 위해 써야지 원. 아무튼 이상하게 높이 올라가는 놈들은 수상히 봐야 해요.
김정일, “내가 있는 한 인민은 얼마든지 다시 불어난다”
최: 인민을 위해서라니요. 김정일이 고난의 행군 시기 인민들이 굶어 죽는다 하니, ‘인민은 줄면 줄었지 마르지 않는다’고 했다던데요.
도: 정말 대단한 단어입니다. 이 말은 꼭 언급해야겠어요.
최: 땅이 있고 물이 있고 내가 있는 한 인민은 얼마든지 다시 불어난다 했답니다.
도: 기가 차네요. 천하에 죽일놈!!
최: 제가 왜 형님을 존경하는지, 그리고 형님에게 왜 손을 내밀었는지 아십니까?
도: 모르겠습니다. 전생에 부부였나?
최: 형님이 김정일을 국제형사재판소에 고발한 최초의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형님께서 유독 문제를 옳게 보셨고 저희 조직의 생각과 일치하지 않습니까. 분단 70년 동안 헤어져 살았지만, 마음이 통하지 않습니까. 이제 와서 유엔도 김정은을 기소한다 어쩐다 하지 않습니까? 형님이 유엔에서 활동하는 인권기구의 간부라면 벌써 상정되었을 것입니다. 력사는 김정일을 형사재판에 기소해야 한다고 주장한 첫 사람이 형님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도: 아이고 아닙니다. 많은 사람이 같이 고생했어요. 저는 얼굴마담으로 하하…
최: 그래도 기치를 들고 날 따르라, 돌격하는 사람이 있어야 합니다.
도: 아우님께 칭찬받으니 그 어떤 칭찬보다 기분이 좋습니다.
“통일되면 자전거 여행하자”
최: 제 죽기 전에 내 나라 한반도를 한 번 편답하고 싶은데 그 소원이 이루어질까요?
도: 당연히 이루어질 겁니다.
최: 형님은 자전거타기를 즐기십니까?
도: 아우님, 통일되면 우리는 다 내려놓고 여행이나 같이 다닙시다. 자전거 좋아하니 같이 타고 다닐까요?
최: 예, 그럽시다. 내 나라를 자전거를 타고 한 번 돌고 싶습니다. 자동차 말고요.
도: 꼭 그럽시다. 그때까지 혁명과업 완수하구요.
나의 아우와 2인용 자전거를 타고서 금수강산 한반도를 돌아보는 꿈을 꿔본다. 혁명의 과업이 완수되는 그날, 당장은 반역의 무리가 장악한 대한민국부터 바로 세워야 할 터이기에 오늘도 힘겨운 발걸음을 한발 한발 떼어보지만, 꿈은 이루어지리라. (다음 호에 계속)⊙
■ 04.06 산책중 사라진 北 조성길대사, 김한솔 구출했던 자유조선 車타고..
WSJ "北 대사 부부,자유조선 차량으로 탈출해"
석달 후 스페인 北대사관 습격… 탈북작전 가능성
▲잠적한 이탈리아 주재 北대사대리 조성길. 임기 만료를 앞두고 2018년 11월 부인과 함께 공관을 이탈해 잠적한 것으로 알려진 조성길(가운데) 이탈리아 주재 북한 대사대리가 앞서 같은 해 3월 이탈리아 베네토 주에서 열린 한 문화행사에 참석한 모습./ AP 연합뉴스
미국에 기반을 둔 반북(反北) 단체 ‘자유조선’(옛 천리마민방위)이 2018년 11월 로마에서 잠적한 조성길 전 주이탈리아 북한대사대리의 탈북에도 관여했다는 보도가 나왔다. ‘자유조선’은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이복형인 김정남이 2017년 2월 말레이시아에서 암살당한 뒤 김정남의 아들 김한솔 일가를 구출해 제3국으로 보낸 조직으로 유명세를 탔다.
/조선일보DB
3일(현지시각) 월스트리트저널(WSJ) 보도에 따르면, 조 전 대사대리는 2018년 11월의 어느 날 직원들에게 “산책을 다녀오겠다”며 아내와 함께 로마의 북한대사관을 빠져나온 뒤 대사관 근처에 대기하던 차량에 올라탔다. 자유조선 회원이 모는 차였다. 자유조선의 리더 에이드리언 홍은 이들 부부를 ‘정치적 망명객’으로 한 서방 정부에 넘기는 일을 처리했다.
조 전 대사대리 부부의 탈북 사실은 알려져 있었으나, 자유조선이 관련돼 있다는 주장은 처음 나왔다. 조 전 대사대리 부부는 탈출 이후 한 서방국가에 머물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미 정보당국에 따르면 이 사건으로 자극받은 북한은 자유조선 회원들을 노린 암살자들을 파견했다고 한다. 또 북한 당국은 작년 여름 외교관들을 평양에 모아 놓고 정권에 대한 충성 교육을 실시했다고 WSJ는 보도했다.
에이드리언 홍은 서던캘리포니아에서 한국계 미국인 선교사 부모 슬하에서 자랐으며, 예일대에서 역사를 전공했다고 한다. 정치범수용소에서 살아남은 탈북자의 수기에 감명받아 북한자유화운동을 시작했고, 수백명의 탈북을 도운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작년 2월 자유조선이 주도한 스페인 주재 북한대사관 습격 사건이 노출된 뒤 강도와 납치 혐의로 받았고, 스페인에 인도되는 것을 피하기 위해 잠적했다.
WSJ는 이날 보도에서 자유조선이 조 전 대사대리와 아내는 탈출시켰지만, 이들 부부의 딸이 북한대사관에 홀로 남겨졌다가 평양으로 북송된 점을 지적했다. 자유조선은 이 때 얻은 ‘교훈’을 다음 프로젝트인 스페인 주재 북한대사관 습격 때 적용한 것으로 보인다. 탈북을 원하는 북한 외교관의 가족까지 확실히 보호하기 위해 ‘납치극’으로 위장한 탈북을 추진하다가 실패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조선일보 김진명 기자
■ 04월 호 北 혁명조직원과의 死生決斷 대화록
(마지막회) 美 펜타곤도 주목하는 금성학원 컴퓨터 수재 양성반
⊙ 北 최고 천재 30명, 10년 동안 TV 한 번 못 보고 해커 교육 받아
⊙ 석 달에 한 번씩 실력테스트, 김정일에게 직접 보고
⊙ 금성학원 수재반 수준, 대학 박사원까지 공부한 인물들보다도 월등
⊙ 北, 용천기차역 폭파사건 미국 CIA의 공작으로 선전
⊙ 자신의 아들 부탁하고, 김정은 암살 위해 평양 들어간 혁명조직원
⊙ 《월간조선》 기고문 게재 후 혁명조직원과 나눈 대화 해킹당한 도희윤 대표
도희윤
1967년생. 연세대 행정대학원 사회복지학 석사 / 피랍탈북인권연대 대표, 도대체 TV 대표, 한국자유전선 사무총장, 뉴라이트전국연합 북한인권특별위원장, 공명선거실천시민운동협의회 사무국장 역임
[편집자 註]
도희윤 피랍탈북인권연대 대표는 2019년 5월 16일 《월간조선》과의 인터뷰에서 “북한 내부 혁명조직원 김씨와 2014년 중반부터 연락을 주고받았다”는 사실을 공개했다. 도 대표는 인터뷰에서 “혁명조직 일원은 ‘김정은 체제를 무너뜨리기 위한 방법은 그를 제거하는 수밖에 없다’고 했다” “그는 새로운 지도자가 또 독재를 하더라도, 그건 개발독재이기 때문에 지금처럼 신격화된 독재보다 낫다. 박정희 같은 사람으로 북조선을 끌고 가다 통일을 이루면 된다고 했다”고 밝혔다. 당시 인터뷰에서 도 대표는 《월간조선》 기고를 통해 혁명조직원과 나눈 대화 내용 등을 자세히 공개하겠다고 약속했다. 도 대표가 보내온 ‘北 혁명조직원과의 사생결단(死生決斷) 대화록’ 제목의 글에는 그가 혁명조직원 김씨(닉네임 ‘최이상’)와 메신저를 통해 나눈 대화 등이 담겼다. 2019년 7월호부터 시작했던 연재를 4월호를 끝으로 마무리한다.
북한의 아우를 생각하며 글을 시작한 지 벌써 1년이 다 되어간다. 암울한 대한민국의 현실과 지금이라도 당장 멈추어야 하는 북한의 노예제를 위해 두려움 없이 싸울 것을 주문하며 시작한 글이었지만, 1년이 다 되어가는 상황에서도 나의 대한민국은 점점 꺼져만 가는 것 같아 안타까울 따름이다.
전례 없는 바이러스의 습격으로 온 나라가 멈춰 있음에도, 사악한 권력은 요상한 기만책으로 책임을 전가하고 갈등을 부추기며 오직 권력 유지만을 위해서는 무슨 짓이라도 할 것같이 미쳐 날뛰는 기막힌 현실이다.
난데없는 마스크로 국민 줄 세우는 사회주의, 국민갈등 부추기는 계급주의, 국민인권 탄압하는 전체주의라는 인류 공동의 악(惡)이 자유와 번영의 기적을 일군 대한민국에서 고스란히 재현되고 있다. 마치 러시아에서 수천만의 목숨을 앗아가고 공산 전체주의 잔학함을 세계만방에 떨쳤던 스탈린이 귀환하는 듯한 현상과 오버랩되어 현기증마저 느껴진다.
단언컨대, 스탈린의 폭압에 저항하지 않았고 나치 히틀러의 악행에 투쟁하지 않은 대가는, 반드시 나 자신과 내 가족의 생명줄을 옥죌 것이라는 사실은 어김없이 반복될 것이다.
이제 남북 혁명가의 대화록은 여기서 멈출까 한다. 죽느냐 사느냐가 다른 나라, 다른 사람의 일이 아니라 당장 나 자신에게 다가오고 있으므로, 이제 필자는 자유의 파도가 되기 위해 다시 전진하고자 한다. 파괴의 현장에서 다시금 세우는 창조의 모습으로 만나기 바란다.
끝으로 필자의 고향 부산 구포에서, 봄이 되면 흥에 겨워 발걸음도 가벼워지는 수백 년의 전통시장이 멈춰선 지금, 사랑하는 나의 누이가 보낸 피맺힌 절규의 시로 마무리하려 한다. 그동안 남북 혁명가의 발걸음에 동참해주신 독자분들께 머리 숙여 감사드린다. 아무리 국민을 기만하려 해도 ‘문재인 코로나’임에 분명한 악령들에 맞서 우리는 승리할 것이다.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나라
봄이 와 꽃이 피어도 꽃 핀 것 같지 않구나.
늘 붐비던 거리, 장날이면 사람들로 북적이던 동네.
헹 해져버린 그 길들엔 장꾼들의 한숨만 가득하구나.
알러지로 미리 구입해둔 그 흔했던 마스크 한 장,
발품을 아무리 팔아도 구하지 못한 이웃들과
나눠 써도 걱정은 멀어지지 않고,
뉴스만 보면 혈압부터 올라오는 이게 나라냐 라며 권력 잡았던 니들,
이건 나라냐? 이건 나라냐!
용천기차역 폭파사건 미국 CIA의 공작으로 선전
▲2004년 4월 22일 열차 폭발사고로 폐허가 된 용천 시내 주택가 모습.
최: 실은 어제 미국의 CIA에 의하여, 룡천역 폭파사건까
지 마저 이야기하려다 형님의 심기가 불편하신 것 같아 그만두었습니다. 룡천 폭파사건에서 명백한 것은 기차방통(화물칸)에 실려 있던 질안 비료가 전부 동시에 폭발하여 일어난 참사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기폭장치를 북 보위부에서 수사과정에 발견하지 못한 것입니다. 3300V의 전기선 합선에 의한 아크 불꽃으로 폭발하였다고 하는데, 그것은 보위부에서도 인정하지 않는 것입니다.
정말 의문의 폭발인데, 먼저 폭약에 대하여 간단히 말씀드리겠습니다. 폭약은 한 개의 분자 고리 안에 산화제와 연소제가 동시에 들어 있는 물질을 ‘폭약’이라고 합니다. 그래야 산화제인 공기의 접촉 없이 닫긴 용기 안에서 물질 전체가 일정한 온도 압력 조건에서 동시에 발화되면서 대단한 열과 압력을 발산하는데 이것을 ‘폭발’이라고 합니다.
도: 예, 의미심장합니다.
최: 비료로 쓰는 질산 암모니움도 비료이며 이 조건을 만족하게 하는 폭약에 속합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폭약과 달리 폭발하지 않는 것은 발화 온도와 압력점이 대단히 높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웬만한 량의 기폭약으로 또 웬만큼 잘 밀폐된 닫긴 용기 아니면 절대로 저절로 폭발하는 일이 없는 물질이기 때문에 일반 취급으로도 안전합니다.
폭파 전문가들의 말에 의하면 질안 비료에 휘발유를 붓고 불을 달아도 절대로 폭발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것도 드러난 로천 상태의 기차방통(무개화차)에서 가는 비, 오는 비 다 맞는 상태에서는 전기 아크불꽃으로 폭발은 절대 불가능하다고 합니다. 또 북한 력사에 질안 비료를 기차에 싣고 가던 도중 화재로 인한 사고가 여러 번 있었지만, 폭발은 한 번도 없었으며, 지어논 비료창고에 화재가 일어난 경우에도 그런 일은 없었다고 합니다.
의문점
그래서 만일 질안 비료 12방통을 모두 동시에 폭파시키자면 어떤 조건을 줘야 하느냐는 질문에, 좁은 밀폐 갱도를 뚫고 거기에 TNT 기폭약과 질안 비료를 약 10대 1의 비율로 섞어 장약한 다음, 갱도를 철저히 밀봉하고 폭파한다면 가능하다는 대답이었습니다. 그것은 기폭장치로 자그마한 폭탄은 안 되고 적어도 기차방통 절반만 한 크기의 기폭제 폭약을 12개의 기차방통에 골고루 장치한 다음 동시에 터뜨릴 때 그런 폭발이 가능하단 이야기입니다. 그것은 방대한 작업을 요하는 작업으로서 어떤 테러리스트가 몰래 하기에는 도저히 불가능한 작업량입니다.
이상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의도적 폭발을 일으키려 해도 기폭약 없이는 불가한 폭발이 왜 일어났겠는가 하는 의문점입니다.
여기에 미국 CIA의 대단한 능력이 있습니다. 1920년대인가 1930년대인가 질안 비료를 싣고 대서양을 횡단하던 어느 나라 배에서 이런 폭발이 일어나 산만 한 배가 산산조각이 나 행방불명되는 사건이 있었답니다. 그 폭발 원인을 못 찾았지요. 왜냐면 질안 비료를 같은 배로 여러 번 날랐는데 그전에는 아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으니까요. 그리고 산만 한 배를 산산조각 내자면 이자 설명한 조건이 만족되어야 하겠는데 그럴 근거가 전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2000년대 들어와서 미국의 연구기관이 그 폭발 원인을 컴퓨터 모의실험으로 알아냈지요.
도: 저는 용천사건이 아우님의 조직과 같은 내부의 독재세력 제거 집단들이 거사한 내용으로 알고 있습니다. 김씨(김정일)가 지나가기 30분 전에 터졌는데 아깝게 타이밍을 못 맞췄다, 이렇게 말이지요. 그 시간을 이렇게까지 정확히 맞추는 경우는 미국도 할 수 없는 일이라고 그렇게 토의를 했었습니다.
최: 질안 비료를 방통에 담긴 상태에서 오랫동안 밖에 세워두고, 비를 맞아 비료가 전부 녹아 엿처럼 되었다가 다시 굳어져 기차방통이 마치 한 개의 철저히 밀봉된 그릇처럼 밀폐된 상태였다고 합니다. 그 속에서 서서히 기차방통의 밑바닥 철판과 비료를 싣기 전에 실었던 약간 남은 소금이 반응하면서, 질안 비료 덩어리 안에서 불어날 대로 불어난 압력 때문에 질안 암모니움의 자체 발화온도 림계점까지 간 상태에서, 약간의 충돌로 압력을 조금 더 보태주자 모든 기차방통에서 동시에 거대한 폭발이 일어났습니다.
도: 허허, 그럼 그것이 시간을 제대로 계산한 것은 아니네요. 아주 우연의 일치 아니겠습니까? 김씨를 겨냥한 것도 아니고 그냥 인명 살상용으로만 했다?
최: 시간 타이밍을 맞춘 건 아니고, 그런 조건이 거의 만족했다는 것을 알고 자주 기차갈이를 하면서 충돌을 시켰습니다. 처음 충돌로 일어난 것이 아니고 그곳에 몇 달 동안 머물러 있었습니다. 바로 그것이 의문점입니다. 역전에서는 비료방통을 치우라고 여러 번 지시했지만 철도성에서 그 방통의 발차만은 질질 끌었습니다.
CIA의 김정일 암살작전?
북한은 김정일 암살 의혹이 불거진 용천기차역 폭파사건을 미국 CIA의 공작으로 선전했다.
도: 아우님, 제가 생각하기에는 만약 미국과 연계된 세력들이 용천폭파사건에 개입되었다면 북한으로서는 제대로 보복할 수 있잖아요. 철천지원수가 먼저 도발을 했는데 말입니다.
최: 전국에서 일어난 사건들을 저희가 어떻게 다 아느냐 라는 의문이겠는데, 보위부와 련관된 사람들에게 ‘사건참고통보서’라는 것을 내려보냅니다. 물론 구체적 예심과정은 비밀이지요. 단지 이런 방식의 사건도 있으니 알고 있으라 하는 정도입니다. 거기에 따르면 기사장에게 CIA가 비료 자연 폭발 원리를 상세히 알려주어 그대로 했다, 그가 CIA와 련결되였다, 이 정도로 알려줍니다.
그런데 그것도 의문입니다. 그 범인이 진짜 CIA와 련결됐는지 아니면, 대서양 횡단 배처럼 절로 우연히 폭발했는지, 억지로 CIA와 련결시키는 감이 있는데, 사실 저희 내부에서는 김정일의 자작극이라는 감이 더 듭니다. 왜냐하면 그날 김정일이 룡천역에 들르게 되어 있었는데 그날따라 그냥 지나치라 하고 지시했답니다. 평소에는 김정일이 탄 렬차가 지나가거나 역에 들르면 모든 사람을 억류시키거나 역전을 봉쇄하는데, 그때 차갈이 작업을 했다는 게 어쩐지 김의 지시 없이 철도상의 지시로는 어림도 없는 일입니다. 그리고 너무 입을 다물고 사고를 당한 사람 같지 않게 있은 점입니다. 사실 그렇다면 공개처형을 한다, 국제사회에 알려 떠들겠는데 김정일이 너무 입을 다문 게 이상하지요.
피해는 北 주민들만
▲소련 독재자 이오시프 스탈린.
도: 백성들이 얼마나 희생되었나요? 안타까운 일입니다.
최: 잘 모르겠습니다. 룡천역과 그 주변이 모두 날아갔다니 아마 한 개 군이 거의 모두 피해를 봤겠지요. 군 내 유리창이 성한 게 하나도 없어 남포유리공장에 비상이 걸렸을 정도였으니까요.
도: 그러게요. 그때 저도 많이 놀랐습니다. 이런 비극을 빨리 끝내야 할 텐데 말입니다.
아우님, 우리는 나쁜 놈 잡고 백성 살리는 일을 합시다. 그것만 변하지 않으면 되겠지요.
북한의 용천역 폭파사건에 대한 아우의 분석과 판단에 대한 글은 상당한 분량이었다. 공학도다운 언급들이었지만 여기서는 다소 핵심적인 부분만 기술하였다. 북한의 사건·사고에 대한 전문적인 연구자들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었으면 하고 바라본다.
최: 형님, 제가 재미있는 이야기 하나 할까요, 북한의 보위부 내 강습의 일부분입니다.
도: 예, 아우님 이야기는 정말 재미있습니다.
최: 스탈린 책상에서 만년필이 없어졌답니다. 그래서 스탈린이 국가안전위원회 위원장에게 전화했지요. ‘위원장 동무, 내 책상에 있던 만년필이 없어졌는데 찾으시오’ 하고 전화했답니다. 한 주일 후 스탈린이 다른 볼일이 있어 위원장을 다시 전화로 찾았답니다. ‘위원장 동무요. 나 스탈린이요’라고 하자, ‘예 스탈린 동지, 지금 만년필 혐의자 중 조사를 할 수 없는 50여 명은 총살하고 혐의자 150여 명은 예심 중에 있습니다’라고 보고했답니다. 그러자 스탈린이 ‘아 만년필, 찾지 마오. 내 책상 서랍 안에 있더구먼. 다른 문제요’라고 했답니다. 이것이 스탈린식 수사입니다. 하하하.
도: 하하. 러시아식.
아우와 필자 모두 큰소리로 웃었지만 이게 정말이지 소리 나게 웃을 일이었을까. 누구에게나 한 번뿐인 사람의 목숨을 파리 하나 잡는 것보다 더 쉽게 다루는 공산주의자들의 반인도 범죄를 언급하면서 말이다. 하지만 지금 지구촌에서는 스탈린의 동상이 다시 세워지고 독일에서도 레닌의 동상 건립이 회자하는 현실에, 조지 오웰 탄생 70주년을 맞아 인간 내부의 사악함과 우매함에 몸서리를 쳐본다.
아버지와의 추억
최: 아, 저의 아버님이 생전에 무슨 말을 한지 아십니까?
도: 무슨 말씀을요?
최: 제가 17세 나던 해입니다. 이제 2달, 아니면 3달 후 군대에 나갈 때인데, 저를 불러 앉히시더니 갑자기 ‘너 몇 살까지 살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 하시더군요.
그래 제가 ‘몇 살까지 살 수 있느냐는 생각은 가져보질 못했습니다’라고 했더니, ‘그래, 네 나이에 그런 생각을 해봤다면 거짓말이지’ 하시더니, 생각을 하지 않았었다면 이 자리에서 해보라고 하시더군요. 그래서 제가 한 70세까지는 살 수 있습니다, 했더니 ‘정말 70세까지 살 자신 있느냐’ 하시더군요. 그러면서 다시 잘 생각해보라 하시더군요. 그래서 ‘예, 65세까지는 자신 있습니다’라고 했더니, 이번에는 꼭 65세까지 살아야 하겠느냐 하시더군요.
도: 하하, 아버지도 심리정보를. 정말 재밌는 부자입니다.
최: 점점 이상한 방향으로 끌고 가기에, ‘그럼 아버지는 이 아들이 언제 죽기를 바랍니까’ 했더니, ‘지금 다 살았다는 생각을 해본 적 없느냐’ 하시더군요. 어제 죽을 날인데 지금 하루 더 초과해 살고 있다고 생각하라 하시더군요. 그러면서 ‘내가 왜 어린 너에게 이런 말을 하는가, 사람이 꼭 몇 살까지 살겠다고 늘 생각하고 있으면 자연 무서운 게 많아진다. 계획했던 날까지 많이 못 살았는데’ 하고 말입니다. ‘그러나 지금 수명을 초과해 살고 있다고 생각하면 대담해진다. 그러니 언제까지는 살아야겠다는 생각은 버려라’ 하시더군요.
도: 대단하십니다. 참으로 명심해야 할 말씀이십니다.
아우는 필자가 걱정스레 이야기했던 혁명가로서의 삶과 죽음에 대한 염려에 군인으로 돌아가셨던 아버지를 떠올렸던 것 같았다. 서로에게 위안이랍시고 어처구니없게는 가지 말자, 개죽음은 되지 말자고 했던 말이 지금도 필자의 가슴을 짓누른다.
북한 해커의 산실, ‘금성학원’
최: 형님, 어제 북한의 사이버 테러와 해킹 능력에 대하여 질문하신 것 같은데 이번에 있은 미국 소니사의 사이버 테러 때문에 그러십니까?
도: 맞습니다. 많이 궁금합니다.
최: 우리 조직이 북한의 모든 실정을 다 알 수는 없습니다. 다만 북한에서 그런 일을 할 수 있는 조직체계를 가진 건 정찰총국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원래 대외정탐 및 테러, 암살, 파괴 같은 일은 중앙당 통전부가 맡아 했는데 최근에 통전부와 무력부 정찰국을 하나로 통합해 정찰총국으로 만들어 독자적인 기관으로 만들었다고 합니다. 무력부 산하가 아니라 거의 독자적인 기관으로 말입니다. 통전부는 아무리 밀봉기관이라도 중앙당 소속이니 당기관이 테러에 관여한다는 것이 철저하게 비밀에 부쳐도 대외적 이미지도 있으니 군 기관으로 탈바꿈했겠지요.
도: 해커가 참으로 무섭습니다.
최: 해킹이라는 것이 하고 싶다고 해서 되는 일도 아니고 또 하루 이틀 공부해서 능력을 쌓을 일도 아니지 않습니까. 또 미국의 보안망을 뚫고 들어간다는 게 어디 쉽습니까.
도: 맞습니다. 인터넷을 만든 나라인데 쉽지 않겠죠.
최: 그보다 먼저 남한에서는 컴퓨터 소프트웨어 전문가들을 어떻게 양성해내고 있습니까?
도: 우리는 국가적 차원이 아니라 기업 차원에서 연구합니다. 개인적으로 특출한 인재가 나타나면 스카우트하기도 하고요. 대부분 기업이 하고 있죠.
최: 아, 제가 알자고 하는 것은 해커와 소프트웨어 전문가 간에 차이가 있습니까? 다만 능력을 어디에 발휘하는가에 따라 해커로도 되고, 또 프로그램 개발자로 되지 않습니까? 그래, 프로그램 교육을 몇 살부터 어떤 교육과정을 거치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도: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개인적으로 하고 있죠. 자기가 원해서 교육을 받는 거죠. 의무사항은 아닙니다.
최: 해커 양성은 어릴 때부터 받아야 하는데, 10세부터는 집중적으로 받아야 합니다.
북한에는 인민학교 2학년 정도 되면 전문 수재들을 뽑기 위한 전국적 테스트가 진행되는데, 여기서 초벌 당선되면 2년 후에 엄격한 시험을 거쳐 당선된 실력자들 100명을 전국적 범위에서 선출하여 전문 양성학교에 넣고, 집중 수재교육을 거쳐 여기서 살아남는 몇 명의 수재들만 골라 정찰총국 같은 데 데려갑니다. 이런 수재들이 아마 이번 일도 치르었겠지요 .
김정일 생전 석 달에 한 번씩 실력 테스트
도: 예 짐작이 갑니다.
최: 북한의 프로그램 전문가는 여러 가지 경로를 통해 하는데, 보통 정규 교육과정에 학업실력이 뛰어난 학생들이 김일성대나 김책공대, 평성리과대학과 같은 데서 전문학과를 나와 되는 경우도 있는데, 이런 정규적인 교육과정 말고 인민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에 올라오면서, 인민학교 졸업 2년 전에 이미 초벌 당선된 수학실력이 뛰어난 수재들을 다시 엄격한 시험을 통하여 합격한 전국의 100명의 수학실력자를, 평양에 있는 금성학원 컴퓨터 수재 양성반에 입학시켜, 전문 수학 컴퓨터 운영실기 프로그램 설계 및 작성법 MS 체계 프로그램 작성의 기초인 아불러어(assembler)부터 MS 밑바닥까지 파고들어 집중 수재교육을 합니다.
금성학원 컴퓨터 수재 양성반에 입학하자면, 9세부터 11세까지 3년 동안 하루에 잠자는 시간, 밥 먹는 시간을 제외한 나머지 모든 시간을 전부 수학공부에 바쳐야 이 학원에 입학할 수학능력이 된다니 그 공부강도가 얼마나 센지 짐작이 가실 것입니다. 그래 그 수재들은 9세 이후에는 TV를 본 적도, 일요일 휴식도, 거리 구경 한 번 해본 적 없다니 리해가 가실 것입니다.
그렇게 공부한 전국적 수재 500명 중 100명의 당선자가 학원에 입학하는데, 여기 학습강도 또한 초인간적인 열성이 없이는 경쟁에서 살아남지 못한다고 합니다. 아침부터 자정까지 잠자는 시간, 밥 먹는 시간, 학교로 오가는 시간을 제외한 모든 시간을 공부에 바쳐야 한답니다. 그래 여기 학생들은 10세부터 20세까지 10년 동안 TV 한 번 본 적 없다니 리해되실 것입니다. 북한의 교육에서 빠질 수 없는 필수과목인 김일성의 력사도 이 학원에서는 거의 무시한다니까 어느 정도 실력 위주의 공부인가 짐작이 갈 겁니다.
매해 100명을 입학시켜 실지 졸업은 30명 정도 시킨다니 여기서 살아남기란 정말 초인간적 노력과 천성적 두뇌를 가져야 한답니다. 세 달에 한 번씩 실력 테스트를 한 결과를 김정일에게 직접 보고한다니 어느 정도 독재자도 관심 있는지 짐작이 되시겠지요. 세 달에 한 번씩 실력 테스트를 하여 기준 실력에 도달 못 하면 일반 중학교로 자동 퇴학된답니다.
북한 정찰총국의 해커 ‘라자루스’
▲“북한의 해킹 기술력, 세계 최고 수준… 인터넷 연결안 된 컴퓨터 자료도 빼내”. 美 보안업체 ‘파이어아이’ 보고서.
도: 참으로 북한 같은 독재국가에서나 가능한 일입니다. 자유세계에서는 상상도 못 합니다.
최: 기본은 영어와 수학, 컴퓨터 수학 MS 체계 프로그램에 대한 기초 각종 언어 MS c++ 같은 과목입니다. 100명 중 마지막까지 졸업하는 학생은 30명 정도가 졸업하면 김일성대나 김책공대 리과대학 이렇게 3개의 일류대학에 보내 2년간 더 공부시키고 졸업시킨답니다.
금성학원 4학년에 들어서면 살아남은 학생 중에서 실력 등수에 따라 순번이 정해지는데 이때 미리 아이들의 미래 직업이 결정된답니다. 정찰총국에서 나와 이 학생 그리고 저 학생 이렇게 찍는답니다. 그러고는 자기네가 데려갈 학생에게 그때부터 정찰총국이 후원을 해준답니다. 아이들이 벌써 정찰총국 요원이 된 거나 같습니다.
금성 수재반 수준을 알아보니 일반 수재학교인 제1중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리과대학 프로그램과를 나오고 박사원까지 공부를 한 사람보다도 뛰어나다고 하더군요.
제가 일찍 장가를 들어 좀 숙성한 아들놈이 있습니다.
도: 아, 예, 우리 조카 말입니까?
최: 아, 예 그렇습니다. 그놈이 공부만은 게을리하지 않아, 어떤 과목에서는 북한적으로 전국 순위 2위에 들어서 유지하고 있습니다. 제가 언젠가 북한의 해커 양성에 대하여 설명한 것을 기억하십니까?
북한의 아우가 자신의 하나뿐인 아들의 이야기를 어렵게 꺼냈다. 사이버 해커 양성과정을 소상히 잘 알고 있었던 것도 이유가 있었던 것이었는데, 중간 이야기는 생략한 채 해커 양성과정과 아들에 대한 부탁의 이야기로 혁명가의 대화는 그 마지막으로 달려간다.
도: 아 그래요, 아버지 닮았네요. 예 기억합니다.
최: 아, 감사합니다. 그놈이 지금 해커 양성을 받고 있습니다.
도: 그래요, 천재네요. 너무 힘든 일일 텐데….
최: 아, 천재는 못 되고 거기서 뛰어난 실력을 발휘하는 것도 아닙니다. 다만 그중 한 과목에서만 좀 잘한다고 할지. 제가 형님을 믿고 한 가지 부탁하려고 합니다.
도: 예, 말씀하시죠.
최: 이제 몇 년 있으면 ○○이나 ○○○ 같은 나라에 실지 인터넷이랑 접하게 실습을 조직할 겁니다. 북한에서는 할 수 없으니까요.
도: 아, 예, 그렇겠지요.
최: 그래 자식놈만은 독재 사회에서 살게 하고 싶지 않습니다. 자유롭게 살게 하고 싶습니다. 부모 슬하를 떠나 보내자니 마음이 아프지만 그래도 그놈의 미래를 위해서 서울로 보내려고 합니다.
도: 무슨 말씀인지 알겠습니다.
최: 그래 그놈에게 가족사진과 사진 뒷장에 ‘줄면 줄었지 마르지 않는 것이 혈육의 정이다’라고 제가 글을 써서 쥐여 보내겠습니다. 그러면 저의 자식놈인 줄 알고 형님께서 서울까지만 무사히 갈 수 있게 도와주시면 제가 일이 잘못되어 구천에 가도 마음을 놓겠습니다.
도: 그래요, 알았습니다. 아우님. 그건 걱정하지 마시고 작전을 잘 짜 안전하게 데려오도록 해야지요. 아우님 약속드리겠습니다. 제가 책임지겠습니다.
최: 형님, 정말 고맙습니다.
도: 무슨 말씀을요. 당연히 제 몫입니다.
마지막 대화
혁명조직원은 도희윤 대표에게 자신의 아들을 부탁하고, 김정은 암살을 위해 평양에 들어갔다.
최: 예, 정말 형님이 계시니 마음을 놓고 떠나보내도록 하겠습니다.
도: 예, 제가 지구 끝까지 가서라도 데려오겠습니다. 그건 염려 마시고 아우님만 건사하십시오. 아버지 말이라면 무조건 따르겠지요.
최: 아직은 철이 없어 공부밖에 모릅니다만, 이제 제가 차근히 독재 사회의 모순에 대하여 그리고 민주주의 사회의 자유와 생존경쟁의 치열함에 대하여 이야기를 해주겠습니다.
도: 북한 사회라는 것이 아우님이 더 잘 아시겠지만, 부자지간이라도 조심하시고요.
최: 아, 예, 그래도 자식놈이 아비를 따르지 독재자를 따르겠습니까.
도: 그건 그렇겠지요, 지금 몇 살입니까?
최: 지금 14세입니다.
도: 중학교 1학년 나이네요. 잘 알겠습니다.
최: 이제 5년 정도 지나면 대학 과정안까지 마치게 됩니다. 19세쯤에는 외국에 실습을 나가고 졸업하면 핵개발이나 미싸일 개발 아니면 해킹 이런 데 갈 겁니다. 대학은 김일성대인 경우도 2년으로 마칩니다. 북한은 중3입니다. 해커 양성생들은 지금 대학 과정안을 나가고 19세 안에 대학 과정안까지 마치도록 합니다. 8세 이후부터는 TV 한 번 본 적 없이 내몰기만 하니, 자본주의 사회에서 적응을 잘할 수 있을지 걱정입니다.
도: 아닙니다. 아이들은 달라요. 금세 경쟁력이 붙습니다.
최: 예, 그래 어릴 때부터 적응하면 쉽겠지요. 또 큰아버지도 계시니 좀 마음이 놓입니다.
도: 예, 그건 걱정마십시오.
최: 예, 오늘 밤에는 정말 한시름 놓이는 밤입니다.
도: 예, 제가 약속 하나는 잘 지킵니다.
최: 예, 알겠습니다. 그럼 형님께서도 편히 쉬십시오. 저도 기쁜 마음으로 자겠습니다.
도: 예, 그럽시다. 편히 잡시다.
《월간조선》 기고문 게재 후 美에서 걸려온 전화
필자와 아우는 이렇게 대화를 마쳤다. 내가 약속 하나는 잘 지킨다고 했는데. 나의 아우는 지금 어디에 있을까. 하나뿐인 아우의 아들이자 나의 조카는 어떻게 되었을까.
《월간조선》을 통해 아우와의 대화가 기고문으로 게재되었을 때 미국으로부터 연락이 왔었다. 기고문을 잘 보고 있노라고. 어려운 NGO의 사정을 꿰뚫고 재정지원을 핑계로 연락을 주고받은 미국의 교포는, 북한 해커 그룹의 일원으로 필자의 휴대폰을 해킹하는 데 성공해, 아우와의 마지막 대화가 남아 있던 텔레그램 메신저를 확보한 것으로 예상된다.
북한의 아우와는 이미 자유혁명을 위해 죽기로 각오한 몸, 더는 빼앗길 것도 두려울 것도 없는 처지지만… 이승에 없는 목숨이라면 반드시 복수를 할 것이고, 정치범수용소에서라도 살아만 있다면 기어코 구출하리라는 각오를 다시 다져본다. 주여, 우리 기도를 들어주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