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이탈주민(탈북민) 이야기14/ 탈북(민) 소식5/ 북한 고위급 탈북/ 황장엽 망명비화 - [탈북민과 함께 '통일 사다리' 놓자] - 자유를 위한 탈북자들의 단체 - 탈북여성 死地로 내모는 법조인들
북한 이탈주민(탈북민) 이야기14/ 탈북(민) 소식5/
■ 북한 최고위급 탈북
■ 황장엽 망명비화
① 황장엽 잡으려 北특수요원 500명 베이징 파견, 한국대사관 습격직전…
1997년 2월 12일 북한 김정일과 당 간부들은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국제부 비서 황장엽 선생(1923~2010)의 망명소식에 대경실색하였다.
북한은 처음에는 황 비서가 일본에서 개최한 주체사상국제연구토론회에 참석하고 돌아오다가 중국에서 한국의 정보기관에 의하여 납치되었을 것이라고 떠들었다. 망명할 것 같으면 자본주의 나라인 일본에서 망명하는 것이 편하지 굳이 북한과 관계가 좋은 사회주의 국가인 중국에서 망명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하여 김정일의 특별지시를 받은 국가안전보위부의 대외반탐국(3국) 성원들과 인민군 정찰국 산하 특수부대 요원들, 재중국 요원 등 거의 500명이 실제로 베이징의 한국대사관 쪽으로 파견됐다. ‘납치된’ 황 비서를 구출하는 작전이었다. 당시 평양의 이 작전 책임자는 “여차하면 1000명을 더 파견할 준비를 하고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베이징에 파견된 북한 요원들이 한국대사관을 포위하고 습격을 단행하기 직전 중국 당국이 강력히 반발했다. 자국 영토에서 그런 상황을 허용하지 않겠다며 무장경찰부대를 동원, 북한 요원들을 포위하고 압박한 것이다.
상황이 심각해지자 북한 고위간부들은 중국과의 관계가 나빠질 수 있기 때문에 한국대사관을 습격하는 것은 무리라고 김정일에게 말하였다. 그러나 김정일은 중국과 관계가 악화되는 것은 물론이고 심지어 전쟁을 하는 한이 있더라도 중앙당 비서가 납치되는 것을 용납할 수 없다고 했다. 그는 황 비서가 납치된 것인지, 망명한 것인지를 빨리 확인하라고 하면서 책상에 앉아 망명?, 납치? 라는 글을 수백 번도 더 썼다고 했다. 그러다가 중국주재 북한대사관 안전참사(국가안전보위부 3국에서 파견한 보위부 요원)로부터 황장엽 비서가 납치된 것이 아니라 본인의 의사에 의해 망명한 것이라는 보고가 들어왔다.
▲2005년 12월 8일 서울 신라호텔에서 열린 '북한인권국제대회'에서 황장엽 전 북한 노동당 비서가 연설을 하고 있는 모습.
김정일은 당초 중국 측으로부터 황 비서가 망명했다는 얘길 들었지만 망명으로 믿지 않았다. 하지만 국가안전보위부의 보고를 받고는 ‘습격을 그만두고 철수하라. 괜히 황장엽의 몸값을 올려주지 말라’고 지시하였다. 그러면서 중국과의 전쟁상황을 사전에 막았다고 하면서 중국주재 북한대사관 안전참사에게 공화국영웅 칭호를 주게 하였다.
이 단계에서 황 비서 망명에 대한 북한 당국의 설명은 다음과 같이 달라진다. ‘남조선 정보기관에 매수된 간첩인 로동당 국제부 산하 무역회사 사장이 황 비서가 일본의 주체사상토론회에서 발표할 연설문을 주체사상을 부정하는 내용으로 몰래 수정하였다. 황 비서는 이 사실을 모른 채 토론회에서 연설문을 그대로 읽는 실수를 저질렀고, 평양으로 복귀하기 위해 중국에 도착해서도 돌아가 문책받을 것을 고민하고 두려워하였다. 이때 마침 남조선으로 가자고 유혹하는 간첩의 홀림수에 넘어가 한국대사관으로 간 것이다. 중앙당 비서가 자기 의사에 의해 넘어간 것은 결코 아니다.’
하지만 황 비서가 자유의사로 망명했다는 사실들이 속속 드러나면서 간부들과 인민들을 더 이상 속이기 어렵게 되자 이런 설명도 포기했다. 결국 황 비서가 사상이 변질돼 달아났다고 선전하기 시작했다.
그후 북한에서는 간부강연과 근로자강연을 통하여 ‘황장엽은 대지주의 아들로 일제식민지 시기에 일본에서 호의호식하면서 공부를 하였지만 김일성 주석과 당에서 믿음을 주었다. 다른 사람들이 피를 흘리며 미국의 침략전쟁에 맞서 싸우던 6ㆍ25전쟁 시기에도 그는 소련에서 공부만 하였지만 당에서 신임하여 중앙당 비서까지 되었다. 그러나 지주출신의 계급적 야망을 버리지 못하고 70이 넘은 나이에 가족을 버리고 도망친 비열한 자이다’라고 비평하였다. 또 김정일은 혁명가요의 가사처럼 ‘비겁한 자는 갈라면 가라, 우리는 붉은 기를 지킬 것이다’ 라고 하면서 전국적으로 자본주의 황색바람 숙청 돌풍을 일으켰다. 특히 황 비서와 관련된 중앙당 국제부와 평양시 만경대구역에 있던 주체과학연구원에서 근무하던 사람들에 대한 대대적인 피의 숙청을 단행했고, 주체과학연구원은 건물 자체를 폭파시켜버렸다.
황장엽 비서의 가족은 그날부터 즉시 외출이 금지되고 국가안전보위부의 철저한 감시 하에 자택감금되었다. 황 비서가 공개성명을 발표하였기 때문에 북한에서도 약 6개월가량은 가족을 건드리지 않고 감시만 하였다. 세계인권단체에서도 평양시 보통강구역 서장동에 살고 있는 황 비서의 가족 안부를 위해 2차에 걸쳐 공식 방문을 하였다고 하였다. 황 비서의 사택은 당시 중앙당 비서들인 전병호, 한성룡, 계응태, 김기남 등이 살고 있는 독립가옥 주택에 있었다.
하지만 조만간 숙청될 것을 직감한 황 비서의 부인은 아들 황경모만이라도 살리려는 일념으로 보위부의 감시를 늦추기 위하여 매일 새벽 온 가족이 함께 서장동에 있는 김일성사적비를 청소하는 것처럼 하면서 외부와 연락을 취하며 만단의 준비를 했다. 결국 황 비서 망명 8개월 뒤인 1997년 10월 말에 아들 황경모를 탈출시키었다. 그들을 감시했던 보위원들은 모조리 해고됐다. 황경모의 탈출과 관련하여 전국의 보위부와 보안부에는 황경모의 사진이 배포됐고 특히 국경지역을 철저히 봉쇄하라는 지시가 하달되었다.
후에 판명되었지만 황경모는 평상시에 친하게 다니던 이경두와 같이 탈출을 하였었다. 이경두의 형 이성두는 보위사령부 잠샘무역회사의 부사장이었는데 중국에 가서 한국으로 탈출하려다 보위사령부에 잡혀 총살되었다. 이에 북한 당국에 원한을 품은 이경두는 황경모의 탈출을 도와주면서 같이 도주를 하였던 것이다.
▲1997년 황장엽 전 노동당 비서 망명 당시 중국 경찰이 베이징 한국대사관 영사부 건물 앞을 삼엄하게 경비하고 있다.
철저한 봉쇄를 뚫고 중국으로 탈출하여 한국으로 오려고 했던 황경모는 11월 10일경 탈출한지 약 보름만에 평안북도 룡천군 산간마을에서 보안원들에게 잡혀 국가안전보위부로 이송되었다. 보위부가 그를 취조하면서 탈출 이유를 묻자 황경모는 떳떳하게 ‘아버지의 망명을 지지하며 아버지를 찾아가려고 했다’고 하였다.
그 후 11월 말, 보위부에 잡혀간 황경모와 그의 어머니 외에 황장엽 비서의 온 가족은 함경남도 요덕군에 있는 보위부 15호 관리소에 이주민으로 잡혀가고 황경모와 그의 탈출을 주모한 어머니는 12월 말경 보위부에서 비밀리에 처형당했다.
이렇게 김정일은 독재와 폭압정치를 반대하며 모든 것을 버리고 단호히 한국으로 망명하였던 황장엽 비서를 민족반역자로 낙인찍으며 온 가족을 숙청한 것이다.
② 황장엽 망명에 충격받은 김정일 "南의 오익제를 끌어오라!"
황장엽 비서의 탈출은 김정일은 물론 북한의 모든 간부들과 주민들에게 큰 충격을 던져주었다.
북한주민들 대다수는 황장엽 비서가 김일성종합대학 교원으로 근무하면서 김정일의 직접적인 담임선생으로 있었던 것을 알고 있다. 김정일은 아버지 김일성과 외국에도 나가고 현지지도를 많이 나가기 때문에 대학에도 잘 나오지 않고 실력도 높지 못했다. 이 때문에 졸업논문을 황 비서가 대신 써주고 그 일로 김정일의 신임을 받아 김일성종합대학 총장과 중앙당 국제부 비서로, 최고인민회의 의장으로 출세를 하였다는 소문도 은밀히 떠돌았다. 황 비서의 탈출 직후엔 ‘그러한 황 비서가 오죽했으면 일가식솔을 한지에 남겨두고 남조선으로 갔겠는가’ 하는 말을 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이렇게 북한주민들뿐 아니라 세계적으로 황장엽 비서의 한국 망명이 화제가 되면서 김정일의 위상은 완전히 바닥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북한 당국은 나아가 국제인권단체들의 눈을 의식해 ‘한국정보기관의 유혹과 매수로 빚어진 결과’라고 여론을 호도했다. 황 비서의 가족도 일정한 기간은 놔두고 가택연금정도만 시키었다. 그러다보니 일부 주민들은 황 비서가 강제로 끌려갔다고 믿는 경향도 나타났었다.
▲황장엽 관련 어록.
황장엽 비서는 김일성, 김정일 독재정권시기 권력의 지도적 위치에 있으면서 독재의 비극을 숱하게 체험했다. 그러다보니 환멸을 느끼고 정권을 민주주의 정권으로 교체하여야 한다는 의지를 가지고 있다가 이전 소련과 동유럽 사회주의 국가들의 붕괴현상을 목격하면서 사회의 민주화와 자유화는 막을 수 없는 흐름이라는 진리를 보았다고 볼 수 있다.
1994년 김일성 사망 직후 북한에선 음주가무를 못하게 하였다. 북한사람들은 통상 새해 1월 1일을 술을 많이 먹는 날이라고 해서 ‘술날’이라고도 부른다. 그런데 김일성 사망으로 1995년 1월 1일은 명절인데도 술을 제대로 못 마시게 됐다. 황장엽 비서의 아들 황경모의 친구들은 술이 하도 먹고 싶어 ‘중앙당 비서의 집에서 술을 마시면 누가 보지도 못하고 단속하지도 못하겠지’ 하면서 평양시 보통강구역 서장동에 있는 황 비서의 집에 둘러앉아 술을 마시고 놀았다.
그때 갑자기 황 비서가 집에 들어왔고 황경모의 친구들은 다들 당황해서 어쩔 줄을 몰랐다. 그런데 황 비서는 ‘다들 편히 앉아라. 우리 아들 경모의 친구들이니 반갑다’ 하면서 손수 술을 한 잔씩 부어주면서 어느 대학을 졸업하고 어느 기관에서 근무하는가, 부모들은 무엇을 하는가 등등을 물었다. 아들 경모를 보고는’ 동무들을 잘 사귄 것 같다’고 칭찬을 하다가 ‘동무들 사이에는 어떤 일이 있어도 서로를 버리지 말고 끝까지 생사운명을 같이 하여야 한다. 앞으로 너희들이 정말 할 일이 많다’며 격려까지 해주었다.
다른 간부 집 부모들 같으면 ‘술을 마시지 말고 끼리끼리 몰려다니지 말고 장군님과 당에 충성을 하라’는 속에 없는 말을 먼저 하는데, 황 비서는 젊은 사람들의 심금을 울리는 의리적인 말을 해주고 편하게 놀다 가라고 하면서 자리를 피해주는 아량을 보이었다.
이렇게 평양에서의 황장엽 비서를 보면 중앙당 고위간부라고 해서 틀을 차리고 주민들을 하대하는 것이 아니고 인간 대 인간으로 무던하게 대해주기 때문에 아래 사람들도 흉금을 털어놓고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고 주체과학연구원 직원들은 이구동성으로 말하곤 하였다.
한편 황장엽 비서의 망명으로 자기의 위신이 크게 저하되었다고 생각한 김정일은 중앙당과 인민무력부의 관련 간부들을 모아놓고 이 창피를 어떤 수단과 방법을 다 해서라도 만회하라고 하면서 그 일을 얼마나 잘하는지에 따라 충성도를 평가하겠다고 말하였다고 한다.
▲1997년 8월15일 열차편으로 월북한 한국 천도교중앙본부 전 교령인 오익제(吳益濟)가 북한에 도착해 환영을 받는 모습.
이에 중앙당 3호청사 대남공작부서는 화가 난 김정일을 진정시키고 그 기회에 점수도 따기 위해 공작을 벌였다. 당시 한국 정치지도자급 인물 중 한 명이라는 오익제의 월북제안을 김정일에게 보고한 것이다. 그러자 김정일은 황장엽을 데려간 한국 정부와 정보기관에 보복을 하기 위하여 황 비서와 대등하다고 할 수 있는 남조선 정치인(오익제)을 무조건 끌어오라고 지시하였다. 그리하여 북한 대남기관에서는 오익제의 처자를 내세워 그를 그해 8월 북한으로 끌어오는데 성공하였다. 오익제는 한국 천도교 24대 교령을 지낸 저명 인사다.
북한에서는 오익제가 북한에서 살다가 6·25전쟁 시기 미국의 원자탄 투하 공갈로 남조선에 끌려 나간 사람들 중 한 명으로, 정의와 민주를 위해 남조선에서 민주화투쟁에 앞장서 싸우다가 미제와 남조선 군사독재정부를 반대하여 과감히 북한으로 망명했다고 공개하였다. 그때 일부 북한 간부들은 1997년 8월에 중국을 거쳐 평양으로 왔다고 보도된 오익제는 북한에 살고 있던 본처와 딸을 미끼로 유인 납치해왔다고 수군대며 말하였다.
그 후 중앙당에서는 간부강연에 오익제라는 사람을 출현시켰다. 오익제는 ‘황장엽은 당과 수령의 크나큰 믿음과 사랑을 받아왔지만 그에 보답을 하지 못하고 비열하게 자신의 온 가족을 버리고 달아났지만 나는 사회주의 우리 조국을 항상 가슴에 품고 조국의 평화적 통일과 남조선 사회의 민주화를 위하여 투쟁하다가 이제는 나이가 있어 그리운 처자가 있는 조국의 품에 안기었다’고 주장했다. 또 ‘우리 장군님께서는 크게 한 일도 없는 나에게 조국통일상을 수여해주고 조국평화통일위원회 부위원장으로 내세워주었다’며 북한 사회주의를 선전했다. 그는 강연들을 통해 북한사람들에게 한국의 많은 정치인들과 교수들 및 국민 대다수가 북한의 사회주의를 지지하고 있다는 인상을 주려고 애썼다.
③<끝> 황장엽 비서의 최대 오류…그는 탈북 시기를 잘못 골랐다
황장엽 비서의 한국으로의 탈출은 김정일과 북한 고위층 세력에게는 심대한 타격을 주었지만 한반도의 평화통일과 민주주의를 지향하는 북한의 진보세력과 주민들에게는 한국에 대한 새로운 이미지를 생각하게 하였다.
북한에서는 주민들에게 강연회를 비롯한 학습이나 각종 모임을 통하여 남조선을 다음과 같은 사회라고 끊임없이 세뇌시켜 왔다. ‘자본주의사회는 오직 돈이 있는 재벌들만이 살 수 있는 썩어빠진 세상이고 일반 시민들은 일생 머슴을 살아야 하고, 특히 미국과 일본의 식민지 체제인 남조선은 철저한 괴뢰들만이 사는 사람 못살 사회이다.’
그런데 북한에서 받을 것은 다 받고 젊어서부터 최고위직에서만 살아온 황장엽 비서의 탈북소식에 북한 사람들은 충격을 받았다. 외국에도 많이 다니면서 알만큼 다 아는 중앙당 비서가 노년에 온 가족이 다 죽는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남조선으로 갔다니…. 이는 황 비서가 ‘전체는 하나를 위하여’에 종속되어 있는 북한 김정일의 집단주의 독재체재보다 남조선 사회가 우월하다고 보았기 때문이며, 남조선은 인간의 자유가 존재하는 사회라는 새로운 인식을 가지게 된 것이다.
▲2013년 10월 10일 서울 여의도 렉싱턴호텔에서 북한인권단체 관계자 등이 참석한 가운데 황장엽 비서 서거 3주기 추모식이 열리고 있는 모습.
이것이 황 비서가 한국으로 오면서 비록 가족과 친지들을 잃었지만 북한 주민들에게 남긴 강한 메시지라고 본다. 그렇기 때문에 1997년 이전에는 불과 얼마 되지 않던 탈북자들이 그때부터 한국에 대한 다른 인식을 갖게 되었다. 우리는 한 핏줄을 나눈 단일민족이며 절대로 총부리를 마주하지 말아야 할 한 겨레, 한 동포라는 자각을 가지게 되었다. 그 이후 한국으로의 탈북이 많아지면서 오늘날 북한에서 노동자, 농민, 간부 출신의 각계각층 탈북자들이 거의 3만 명에 이르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
특히 북부 국경지역에서보다 평양이나 내륙지방에 사는 사람들도 한국행을 많이 하게 되고 우리는 결코 전쟁을 주장하지 말고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개정하고 한 나라가 되어야 한다는 강한 의식을 가지게 된 것이다.
그런데 2000년 6월 김대중 대통령이 평양을 방문하고 나서 이상한 소문이 돌기 시작하였다. 김정일이 한국에서 사회주의 신념을 지켜 오랜 기간 감옥살이를 하면서도 전향하지 않은 비전향 장기수들을 보내달라고 김대중 대통령에게 요구하자 그들도 다 돌려보내주고 황장엽 선생을 비롯한 탈북자들도 다 돌려보내주겠다고 하였다는 것이다.
그런데 오히려 김정일이 ‘우리는 사회주의 신념을 지켜온 비전향 장기수들을 민족의 영웅으로 받아들이지만 당과 수령의 크나큰 믿음과 배려를 망각하고 조국과 인민을 배반하고 달아난 자들은 절대로 이 땅에 다시는 발을 들여놓지 못하게 하겠다’며 거절하였다는 것이다. 물론 이것도 소위 김정일이 높은 정치적 실무자질과 넓은 도량을 가진 아주 위대한 지도자라고 선전하려는 정치선전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다.
▲황장엽 비서의 수양딸 김숙향씨가 황 비서 생전에 함께 찍은 사진./김숙향씨 제공.
비전향 장기수들이 북한으로 들어온 다음에는 중앙기관들과 각 도급 기관들에 파견되었다. 거기서 그들은 남조선으로 달아난 놀가지(북한에서는 잘 달아나는 노루에 비교하여 탈북자들을 놀가지라고 함) 황장엽 비서가 남조선에 가서도 ‘온 가족을 버리고 달아난 사람’으로 낙인찍혀 자그마한 집에서 가택연금으로 거의 감옥살이와 같은 생활을 하고 있다고 선전했다. 또 북한에서는 사회주의 신념을 지켜온 비전향 장기수들을 영웅으로 내세워주고 있다고 간부 강연회와 축하모임들에서 체제 찬양을 하였다.
하지만 북한 주민들은 황장엽 비서가 친북정권이 들어선 남조선에서 얼마나 근심이 많겠는가라고 하면서 오히려 걱정을 하기도 했다. 즉 김대중 정권에 대해 정치적으로 그래도 북한에서 최고위직에 있다가 간 사람을 하대한다고 하면서 남조선 정권에 대해 불만도 가지었다.
그 후 노무현 전 대통령이 2007년 10월 북한을 방문한 이후에는 황 비서가 남조선에 가서 10년 동안 인간으로서의 대우도 받지 못하고 남조선 괴뢰들에게 아부하며 비굴하게 살다가 결국 제명도 다 살지 못하고 죽었다고 선전했다. 당과 수령의 신임을 배반하고 민족반역자가 된 자들의 운명은 역사가 보여준다고 하면서 허위선전을 한 것이다.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탈북자들이 많이 늘어나자 남조선에 가면 결국 비참한 생활밖에 차려질 것이 없다고 선전했다. 이에 대해 북한 주민들은 대대적인 탈북을 막아보려는 시도라고 보면서도 북한의 일부 간부들과 주민들은 남조선에 북한을 지지하는 정권이 들어섰기 때문에 충분히 그럴 가능성이 있다고 믿게도 되었다.
그런데 실질적으로 고령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온 가족을 잃으면서도 북한의 민주주의와 한반도 평화통일을 이룩하려는 민족적 숙원을 가슴에 지니고 한국으로 들어온 황장엽 비서는 결국 북한에 햇볕정책을 시행하는 남한정부의 보이지 않는 그물에 걸려 역사적 사명을 완수하지 못하고 애달프게 돌아가신 것이다.
황 비서는 큰 오류를 범했다. 탈북 시기를 잘못 고른 것이다. 그는 당시 김정일 독재의 전횡으로 북한이 최악의 사태에 이르렀다는 것을 직감하고 과감하게 탈출했지만 남한 상황을 오판했다. 그는 남한 현실과의 불협화 속에 안타깝게도 한반도의 평화통일을 이루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면서도 독재의 세상에 두고 온 북한의 가족과 인민들을 생각하며 눈을 감지 못하였을 것이다.
오는 10일이면 황장엽 비서가 한 많은 세상을 떠난지 4주년이다. 삼가 명복을 빈다
■ 2014.11.11 황장엽은 왜 한-중 FTA를 열망했을까?
한국과 중국이 30개월 동안의 진통(陣痛) 끝에 ‘자유무역협정’(FTA; Free Trade Agreement)을 “실질적으로 타결했다”는 뉴스가 TV 화면에 뜨는 것을 보는 필자의 머릿속에 불연 듯 한 고인(故人)의 영상(映像)이 강렬하게 떠오른다.
▲2003년 12월 9일 프레스센터에서 열린 전 북한 노동당 국제담당 비서 황장엽씨의 출판기념회./조선DB
1997년 북한으로부터 탈출하여 13년 간 ‘자유 대한민국’에서 ‘망명(亡命)’ 아닌 ‘망명’ 생활을 하다가 2010년 8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고(故) 현강(玄江) 황장엽(黃長燁)의 영상이다.
생전(生前)의 고인은 필자를 비롯하여 평소 가까이 했던 사람들에게 기회가 있을 때마다 “한국과 중국 사이에 FTA가 체결되기만 하면 그로부터 머지않아 북한의 ‘김가왕조(金家王朝)’는 스스로 무너지게 될 것”이라면서 박근혜(朴槿惠) 대통령에게도 의사소통의 길이 열리기만 하면 그러한 그의 생각을 전하면서 한-중 FTA의조기(早期) 타결을 촉구해 마지않았었다.
그의 그러한 주장에는 그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그가 탈북을 단행한 1997년의 시점에서 김정일(金正日)이 이끄는 북한(당시)의 전근대적인 세습 독재체제는 이미 권력유지 능력을 상실했음에도 불구하고 북한과 중국간의 ‘동맹’ 관계와 이를 통하여 중국이 연례적으로 제공하는 2억 달러 상당 규모의 식량과 유류 원조 때문에 생존(生存)을 유지하고 있다는 것이 그의 진단이었다.
그의 예언(豫言)(?)은 이 때문에 한-중간에 FTA가 체결되면 이는 중국과 북한 간의 ‘동맹’ 관계가 실질적으로 소멸되는 것이 되어서 북한 정권의 붕괴를 초래하게 된다는 것이었다. 이제 한-중 FTA 체결이 기정사실이 되었으니만큼 고인의 예언이 과연 적중할 것인지는 앞으로 지켜보아야 할 일이 되었다.
지난 10월8일은 고인의 4주기(週忌)가 되는 날이었다. [고인은 10월8일 오후 그가 독거(獨居)하던 논현동 자택 목욕탕의 탕(湯) 안에서 앉은 자세로 절명(絶命)해 있는 것을 다음 날인 9일 출근한 가사도우미 여인이 발견했다. 그런데도 어찌 된 일인지 항간(巷間)에서는 10월10일이 고인의 기일(忌日)인 것처럼 널리 인식되어 있다.]
고인의 사후(死後) 3년간은 필자가 중심이 되어 고인이 생전에 발족시킨 <북한민주화위원회> 주관으로 탈북자들을 포함하여 국내에서 고인과 가까이 지난 분들과 ‘추모위원회’를 조직하여 매년 10월8일을 전후하여 추모 행사를 거행하고 8일에는 버스를 동원하여 대전 국립묘지의 ‘애국선렬’ 묘역(墓域)에 있는 고인의 묘소를 참배하는 것을 관례화했었다.
그러나, <북한민주화위원회>(위원장: 홍순경)을 주관으로 하는 추모행사는 탈북동포 사회가 지리멸렬(支離滅裂)로 분열되어 있어서 계속 이어가는 것이 불가능해져서 금년 4주기 때는 ‘추모위원회’를 조직하는 것을 포기하고 기일인 8일 대전 묘소를 참배하는 것으로 추모 행사를 가름할 수밖에 없었다.
고인의 생전에 고인과 친교(親交)를 나누었던 남쪽의 많은 뜻있는 분들이 이 같은 상황에 대해서 애석(哀惜)해 할 뿐 아니라 고인에게 송구스러움을 느껴서 뜻 있는 유지(有志)들이 내년 초에 모여서 고인의 유덕(遺德)을 기리고, 유지(遺志)를 계승하기 위한 추모 행사를 조직화하자는 화두(話頭)의 공론화(公論化)를 상론(相論)하고 있는 중이다. 아마도 이 같이 새로이 시작되는 고인의 추모 행사는 이번에는 남쪽 사람들이 중심이 되어서 주도하고 탈북동포들은 거기에 동참하는 형식으로 추진되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의견이 유력하다.
고인은 그가 평생 동안 절차탁마(切磋琢磨)하던 ‘인간중심철학’을 탈북, 월남 후 더욱 천착(穿鑿)하여 그 내용을 <인간중심철학원론>(시대정신; 2008) 등 도합 19권의 주옥(珠玉) 같은 저서(著書)에 담아 세상에 펴내놓았다.
마침, 고인의 독창적 학문 영역인 ‘인간중심 철학’에 관하여 고인이 생전 7년간에 걸쳐 매주 1회씩 진행했던 ‘학습 클라스’에 참가한 수강생(受講生) 의 한 사람인 흥사단(興士團) 출신 강태욱 씨가 녹음하고 해독한 강의 내용을, 2013년10월 고인의 3주기에 즈음하여, <황장엽의 인간중심 철학> ①②권에 담아 출판하는 큰일을 해 놓았다. 앞으로 고인의 추모 사업이 본격화되면 강태욱 씨의 노작(勞作)을 토대로 고인이 평생을 바쳤던 철학연구를 이어 받아서 올바르게 평가하고 해석하고 보급하는 일이 이루어져야 하리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북한민주화위원회>는 2011년 고인의 1주기 추모 사업으로 10명의 고인의 생전 친지(親知)들의 10명의 탈북동포들로부터 수집한 추모의 글을 엮어서 <걸머지고 온 보따리는 누구에게 맡기고 가나>라는 제목으로 ‘추모문집(追慕文集)’을 출판했었다. 오늘 한-중 FTA 타결 소식에 접하면서 머릿속으로 물밀 듯 밀려드는 고인에 대한 회상(回想)에 떠밀린 나머지 필자가 ‘추모위원회 상임위원장’의 입장에서 쓴 이 문집의 ‘발간사(發刊辭)’를 여기에 싣는다. 한반도 분단사에 큰 족적을 남긴 애국 선비 황장엽을 기억하는 분들의 일독(一讀)과 편달(鞭撻)이 있기를 감히 부탁한다.
<故 황장엽 선생 서거 1주기 추모 문집> 發刊辭
1945년8월15일 광복(光復)의 시점에서 약관 22세의 황장엽은 좌(左)도, 우(右)도 아닌 ‘해방(解放)’의 감격에 들뜬 조선의 한 지식인이었다. 해방의 순간, 그의 정위치는 38선 이남인 강원도 삼척이었다. 1941년 평양상고를 졸업한 뒤 1942년부터 일본 주오(中央)대학에서 유학생활을 하던 그는 1944년 일제의 징용으로 삼척의 탄광에 투입되었다가 거기서 해방을 맞이한 것이다. 해방으로 징용에서 풀린 그는 집이 있는 평양으로 귀환을 서둘렀고 이로써 그의 평생의 운명이 결정되었다. 공산당이라는 호랑이가 그를 집어 삼킨 것이다.
코민테른이 주도하는 세계공산화 전략에 따라 북한 땅에 공산국가 수립을 추진하기 시작한 공산세력은 황장엽의 두뇌를 ‘징발’하여 공산주의 노멘클라투라의 길을 걷게 만들었다. 그는 1946년 북한판 공산당인 ‘조선노동당’ 당원으로 가입했고, 김일성(金日成)이 6.25 전쟁을 도발하기 한 해 전인 1949년 ‘선발된 엘리트’로 모스크바 유학의 길에 올랐다. 그는 6.25 전쟁의 전쟁기간을 모스크바 국립대학에서 보내고 휴전의 해인 1953년 귀국했다. 세계공산화 운동의 메카인 모스크바 국립대학에서 공산주의 이론을 전공한 그의 귀국 후 진로는 탄탄대로였다. 귀국 다음 해인 1954년 그는 김일성종합대학 철학 강좌장으로 발탁이 되었고 동시에 김일성의 이론담당 서기로 그의 연설문 작성을 전담하여 그의 신임을 받기 시작했다.
그러나, 인간 황장엽의 머리에서 자라기 시작한 공산주의와 맑스-레닌주의에 대한 회의와 불신은 아이러니컬하게도 그의 모스크바 유학 기간 중에 이미 싹트기 시작했다. 그는 모스크바 국립대학에서 소련 공산당과 학계의 전문 이론가들과 공산주의 이론을 가지고 토론하는 과정에서 맑스-레닌주의가 기초하고 있는 대부분의 이론적 가설과 가정에 결정적 허구와 모순이 내포되어 있다는 것을 인식하게 되었다. 그에게는 맑스-레닌주의의 기본 명제들인 ‘역사적 유물론’•‘계급투쟁론’•‘프롤레타리아 독재론’•‘자본주의 모순론’•‘잉여가치론’•‘유물론적 변증법’이 모두 허구와 모순 투성이었다.
이렇게 해서 국가통치 이념으로서 새로운 정치철학에 대한 그의 탐구가 시작되었다. 그의 ‘인간중심 정치철학’이 모습을 드러내게 되었다. 그의 ‘인간중심 정치철학’의 기본적 운동법칙은 ‘변증법’에 의한 사물의 무한한 변화와 발전이었다. 그는 인간의 ‘정신(精神)’을 중시하는 헤겔의 유심론적 ‘관념 변증법’과 ‘믈질(物質)’을 중시하는 맑스의 ‘유물론적 변증법’은 모두 “반 쪼가리의 진리를 담은 2개의 극단”이라는 시각에 입각하여 두 ‘변증법’의 편파성을 극복하고 그의 독창적인 ‘인간중심 변증법’을 완성시키려 했다.
‘인간중심 철학’의 세계에서 그는 모든 다른 사물과 마찬가지로 ‘개인적 존재’와 ‘집단적 존재’의 양면성을 지니고 있는 ‘인간’이 “양과 질의 통일” “대립물의 통일” “연속성과 불연속성의 통일” “목적과 수단의 통일” “주체와 객체의 통일” 등 변증법의 법칙에 입각하여 ‘개인적 존재’와 ‘집단적 존재’의 양면성을 ‘극복’하고 ‘통합’하는 과정을 무한대로 반복함으로써 “인간개조” “자연개조”“사회관계개조”로 이루어지는 3대 개조를 끝없이 지속시켜 나갈 수 있는 것으로 보았다.
여기서 그는 “‘개인적 존재’로서의 ‘인간’은 ‘유한(有限)’하나 ‘집단적 존재’로서의 ‘인간’은 ‘무한(無限)’하다”고 갈파한다. 이 같은 ‘인간중심 변증법’의 세계는 “정(正) ⇒ 반(反) ⇒ 합(合)”의 수렴(收斂) 과정이 중단 없이 무한정 영원히 반복되는 무변광대한 ‘긍정’과 ‘낙관’의 세계라는 것을 그가 2008년8월15일 탈고(脫稿)한 역작(力作) <인간중심 철학 원론>의 다음 대목이 보여 준다.
세계는 무한하다. 무한한 세계의 주인으로 되기 위해서는 인간이 영원한 발전의 길을 걸어야 한다. 발전이 멎어지면 인류는 멸망한다. 세계의 주인으로 되지 않고서는 자기운명의 완전한 주인으로 될 수 없다. 좀 먼 앞날의 이야기지만 약 50억 년 후에는 태양이 소멸되거나 폭발할 수도 있고 또 태양의 지름이 현재의 200배로 되고 부피는 800만 배로 되어 지구궤도까지 팽창할 수도 있다고 예견하고 있다. 인간이 태양을 완전히 관리하게 되지 않고서는 인류의 멸망을 막을 수 없다. 또 우주팽창설에 의하면 지금 속도로 우주가 팽창되어 가면 몇 천 억년 후에는 우주물질이 다 녹아버려 원시물질로 전환될 수 있다는 견해도 있다.
약 200만 년 후에는 인간이 우리 은하계 우주(은하수계 우주)를 관리할 수 있다고 내다보는 사람도 있지만 그 크기는 약 10만 광년인 만큼 빛의 속도로 한 번 가는 데만 10만 년이 걸린다. 오늘날 100년도 못사는 사람으로서는 은하계 우주의 주인으로 될 수 없다. 따라서 인간의 육체를 개조하고 수명을 늘리는 문제도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끝없는 세계의 완전한 주인으로 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오직 완전한 주인의 지위에 끝없이 접근하여 가도록 끝없이 발전을 계속하는 길이 있을 뿐이다. 인간의 영원한 발전이 곧 인간의 삶의 영원한 목적이다.
이것은 영원한 발전의 길만이 영원히 인간의 운명을 개척해 나가는 길이며 영원히 행복의 수준을 높여 나가는 길이라는 것을 말하여 준다. 또 바로 여기에 인간의 종국적인 삶의 목적과 그것을 실현하는 근본 방법이 있다는 것을 말하여 준다. 인간의 영원한 발전이 곧 인간의 영원한 삶의 목적이며 인간의 창조적 역할을 영원히 높여 나가는 것이 인간의 삶의 목적을 실현하는 근본방법이라는 것을 밝혀주는 것이 인간중심철학의 사명인 것이다.
그러나, 황장엽에게는 ‘좌절’의 계절이 시작되었다. 공산주의 권력체제에서도 하나의 금기(禁忌)인 ‘권력의 세습’을 통해 북한의 ‘일당독재(一黨獨裁)’를 ‘수령독재(首領獨裁)’를 넘어 서서 전근대적인 ‘봉건왕조(封建王朝)’로 변질시키는 역사 파괴적 실험을 시작한 김정일(金正日)이 그의 ‘인간중심 철학’ 이론을 압수(押收)하고 이를 북한판 ‘주체사상’으로 개조하여 ‘세습독재(世襲獨裁)’를 합리화시키고 정당화시키는데 이용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 와중에서 북한에는 엄청난 재난이 밀어 닥쳤다. 이른바 ‘당우위(黨優位)’의 정치논리에 짓눌려 경제법칙이 압사(壓死)된 북한의 경제는 파국을 지나 파탄 지경에 이르는 가운데 300만명이 넘는 주민들이 굶어 죽고 수십만명이 굶주림을 못 이겨 탈북(脫北) 길에 오르는 가운데 북한은 수십만 명이 정치범수용소에 갇혀서 지나는 거대한 ‘수용소군도’로 변모했다. 김정일이 이끄는 북한은 핵무기와 미사일 개발을 주축으로 한반도 긴장의 고조를 지속적으로 주도함으로써 전 세계로부터의 고립을 자초했다.
황장엽에게 새로운 선택이 강요되었다. 1997년2월 그는 북한을 탈출하는 역사적 결단의 주인공이 되었다. 사랑하는 부인과 1남3녀의 자녀들의 희생을 무릅쓰고 대한민국으로 이주한 그는 그로부터 13년의 여생(餘生)을 오직 한 가지 목적에 불살랐다. “김정일 독재정권의 타도”와 “북한의 민주화”였다. 그에게 그가 버린 북한의 ‘김정일 독재정권’은 “오늘날 한반도에서 평화와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주적(主敵)”이었다. “김정일은 수백만 북한 주민들을 무참히 굶겨 죽이고 북한 땅을 하나의 큰 감옥으로 만든 전대미문의 독재자”로 “민주주의를 반대하는 것을 자기의 생존전략으로 간주”하고 있어서 “그 누구도 김정일이 독재자이며 민주주의의 적이라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었다.” [2003.3.20; “김정일에 대한 태도는 진짜 민주주의자와 가짜 민주주의자를 가르는 시금석”]
1997년 황장엽이 베이징으로부터 필리핀을 경유하여 대한민국 행을 택할 때 그는 김영삼(金泳三) 대통령(당시)으로부터 두 가지 ‘약속’을 확보했다. 하나는 서울에서 그의 “‘인간중심 철학’ 연구를 계속하겠다”는 것, 또 하나는 “서울을 거점으로 하여 북한 민주화 운동을 전개하겠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김영삼의 ‘약속’은 공염불이었다. 무엇보다도 황장엽 서울 도착으로부터 5개월 후인 12월에 실시된 제15대 대통령선거에서 김대중(金大中)이 당선됨으로써 대한민국은 10년간의 ‘좌향좌(左向左)’ 실험을 경험하게 되었다. 김대중 정권에서 노무현(盧武鉉) 정권으로 ‘좌파 정권’이 지속되는 동안 대한민국에서의 황장엽의 생활은 ‘유수(幽囚)’의 생활과 다를 것이 없었다.
2000년 김대중의 평양방문과 ‘6.15 남북공동선언’ 발표로 대한민국의 ‘좌경화(左傾化)’는 위험한 속도로 가속화되었다. 이 무렵 황장엽의 절박한 관심사는 대한민국에서의 “‘종북(從北)’•‘좌경’•‘반미(反美)’ 세력의 장성”이었다. 그의 이 같은 심경은 2003년3월20일자 “김정일에 대한 태도는 진짜 민주주의자와 가짜 민주주의자를 가르는 시금석” 제목의 글 속에 절실하게 표현되어 있다. “일부 사람들은 민족공조를 구실로 내세우고 김정일 독재집단과의 협조를 강조하고 있다. 이 사람들은 김정일 독재집단에게 체제유지를 담보해 주고 그들에게 경제적 원조와 정치적 지원을 적극 주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들은 평화와 민주주의를 반대하는 김정일 독재집단의 범죄활동을 견제하기 위한 미국의 민주주의적 제재조치를 반대하고 김정일 독재집단의 부당한 요구에 대한 타협과 양보를 설교하고 있다.
이렇게 함으로써 이 사람들은 사실상 평화와 민주주의의 수호자이며 동맹자인 미국의 편에서 물러나 평화와 민주주의의 적인 김정일 독재집단의 편을 들고 있는 것이다. 이 사람들은 김정일 독재집단과 타협하는 것만이 민족의 통일을 실현하고 평화를 유지하는 길이며 이것을 반대하는 사람들은 민족의 통일을 반대하고 전쟁을 바라는 사람들이라고 비난하고 있다.”
그는 “이런 사람들의 주장을 옳다고 볼 수 있겠는느냐”고 자문(自問)하고 이에 대해 “옳다고 볼 수 없다”고 자답(自答)했다. 그는 다음의 네 가지를 그 근거로 제시했다. 첫째로, “민주주의자라면 김정일 독재집단과의 민족공조에 대하여 생각조차 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김정일 민족 반역집단과의 민족공조란 말도 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둘째로, “민주주의자라면 봉건 가부장적인 수령 독재집단을 북한의 주인으로 인정할 것이 아니라 독재의 희생자인 북한 인민들을 주인으로 인정하는 것이 마땅하기 때문”이었다. 셋째로, “김정일 독재집단과 공조하여 평화를 유지하려고 하는 것은 평화의 원수에 의지하여 평화를 유지해야 한다는 주장이나 다름없으며 그것은 평화의 간판을 내걸고 침략자들 앞에서 인민들을 정신적으로 무장해제 시키려는 기만술책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었다. 마지막으로, “평화가 아무리 귀중하여도 대한민국의 자유민주주의 체제보다 더 귀중할 수는 없기 때문”이었다. 그는 ”평화를 위해서는 모든 것을 다 양보해야 한다는 투항주의적 입장에서는 평화도 민주주의도 다 잃어버리게 된다는 것이 역사의 교훈“이라는 경고를 빠뜨리지 않았다.
2007년12월 새누리당의 이명박(李明博) 후보가 530만표라는 대한민국 직선제 대통령선거사상 최대의 표차로 17대 대통령에 당선됨으로써 황장엽에게는 잠시 희망의 등불이 반짝 켜졌다. 그러나, 그것은 잠시 동안의 환각(幻覺)이었다. 황장엽은 이명박 정부를 상대로 “원칙에 입각한 대북정책”을 주문했다. 그는 “오늘날 우리 민족의 모든 재난과 불행의 화근은 김정일 독재집단”임을 강조하고 “북한 동포들을 해방하고 남북의 민주주의적 통일을 이룩하는 유일한 길은 김정일 수령독재집단을 제거하는 것”이라고 역설했다 [2010년1월1일 신년사]. 그는 북핵 문제 해결에 관해서도 “정도(正道)는 경제원조로 회유하는 것이 아니라 김정일 정권을 퇴진시키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명박 정부의 반응은 벽창호였다. 10월10일 운명(殞命) 직전의 어느 날 황장엽은 “이별”이라는 제목으로 남긴 미발표 ‘유작시(遺作詩)’에 그의 암울한 심회(心懷)를 적나나하게 써서 남겨 놓았다.
“지루한 밤은 가고 새 아침은 밝아 온 듯 하건만, 지평선에 보이는 검은 구름이 다가오는구나.” 그는 그의 임박한 최후를 예감하고 있었다. “벌써 떠나야 할 시간이라고, 이 세상 하직할 영이별 시간이라고, 값없는 시절과 헤어짐은 아까울 것 없건만, 밝은 미래 보려는 미련 달랠 길 없어”라는 대목에는 그래도 꺼지지 않는 생에의 그의 집념이 절절하게 녹아 있었지만 “사랑하는 사람들은 어떻게 하고 가나, 걸머지고 걸어온 보따리는 누구에게 맡기고 가나”라는 구절로 그는 그의 생애가 종장(終章)에 이르고 있음을 예감하고 있었다. 이 시의 마지막 구절은 “여한 없이 최선 다해 받들고 가자, 삶을 안겨 준 조국의 거룩한 뜻 새기며...”였다. 황장엽은 그가 가족들과 52년간의 생활을 영위했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아니라 13년간 그의 여생을 보냈던 대한민국에 대한 애틋한 애국심을 이 구절에 담아 놓고 있었다.
현대사의 한 위대한 애국자, 철학자, 정치가, 시인이었던 황장엽이 이렇게 세상을 떠나고 벌써 1년의 세월이 경과하고 있다. 이제 우리는 지난 13년간 그를 기둥으로 삼아 의존했던 탈북동포들 가운데서 10명, 그리고 대한민국에서 독거(獨居)의 노인으로 여생을 보내는 동안 주변을 감싸며 위로와 격려를 보내주었던 남쪽의 지인(知人) 10명으로부터 추모의 글을 모아서 이 조그마한 책을 펴낸다. 가급적 많은 분들이 이 글들을 읽으면서 위대했던 고인의 유덕(遺德)을 추모하는 것과 함께 생전에 그가 모든 것을 버리고 이룩하고자 했지만 이루지 못하고 간 유지(遺志)를 이어 갈 수 있는 동기(動機)를 부여 받게 되기를 바라 마지 않는다.
2011년10월10일
故 黃長燁 선생 1週忌 追慕委員會 공동위원장 (상임) 李東馥
조선일보
■ 2015.10.19 “황장엽, DJ 때 국정원에 살해 위협 느껴 … 미 망명도 검토”
▲황장엽 전 노동당 비서와 김덕홍 전 당 자료실 부실장은 베이징 주재 한국영사관에 망명한 지 67일 만인 1997년 4월 20일 서울 김포공항에 도착했다. [중앙포토]
황장엽 망명의 비밀을 간직해온 북한 노동당 간부(당 중앙위 자료연구실 부실장) 출신 김덕홍(67)씨가 입을 열었다. 김씨는 17일 중앙일보와의 단독 인터뷰에서 “주체사상이 김일성·김정일이 아닌 자신의 작품이라고 한 황 전 노동당 비서의 실언이 망명의 도화선이 됐다”고 밝혔다. 서울 강남의 안가에서 칩거하고 있는 김씨가 언론과 인터뷰한 건 2003년 7월 이후 처음이다.
같이 탈북한 김덕홍씨 단독 인터뷰
“YS가 친서로 장·차관 대우 약속
DJ·노무현 정부는 지키지 않아 황,
DJ 때 국정원을 적으로 지칭도”
그는 “1997년 2월 망명 때 김영삼(YS) 대통령은 친서를 보내 황장엽을 장관급으로, 김덕홍은 차관급 예우를 해주고 북한 민주화 활동을 지원해 주겠다고 약속했지만 김대중(DJ)·노무현 정부를 거치며 지켜지지 않았다”며 “황 전 비서는 생전 김대중 정부의 국가정보원을 ‘적(敵)’이라고 지칭했고, 국정원이 자신을 살해할 것이란 위기감에 미국 망명까지 고려했다”고 증언했다. “형님(황 전 비서)은 2001년 7월 3일 ‘적(국정원)들이 우리를 살해할 가능성이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조건에서 미국 망명과 언론 공개 투쟁의 두 가지 방법 중 선택이 필요하다’는 서한을 내게 보냈다. 엿새 뒤엔 ‘적과의 흥정이 어렵다’는 글도 보냈다”고 김씨는 소개했다. 당시는 제시 헬름스 상원 외교위원장 등 미 유력인사가 황 전 비서를 미국으로 초청했으나 국정원이 남북관계 악화를 이유로 반대해 마찰을 빚던 때다. 황 전 비서는 2010년 10월 심장마비로 숨졌다.
김씨의 회고록 『나는 자유주의자이다』(집사재 출판사) 발간을 계기로 이뤄진 이번 인터뷰는 경찰 경호팀의 신변보호 아래 이뤄졌다. 다음은 문답 주요 내용.
-황장엽 망명을 촉발한 진짜 이유가 뭔가.
“96년 2월 모스크바에서 열린 주체사상 국제토론회에서 황 전 비서는 ‘주체사상은 김일성·김정일이 아니라 내가 만든 것’이란 발언을 했다. 이를 보고받은 김정일이 분개했다. 6월 중순 황 전 비서는 ‘김정일이 나를 그냥 놔둘 것 같지 않다. 욕보기 전에 자살할 수 있게 독약을 구해달라’고 내게 부탁했다.”
-황 전 비서가 먼저 망명하자고 권유했나.
“아니다. 당내 여러 지인이 ‘황 비서를 김정일 손에 희생되게 놔둘 수 없다’며 정치망명을 결의했다. 나는 ‘목숨을 끊지 말고 남조선에 나가 김정일을 반대하는 투쟁을 하라’고 설득했다. 황 전 비서가 ‘김덕홍 동생이 같이 가지 않으면 서울에 안 가겠다. 남조선과 연계를 가지는 문제는 동생이 책임지라’고 버텨 함께 오게 됐다. 북한 당 간부들이 ‘혼자서는 상점도 못 찾아가는 황장엽이 망명한 건 전적으로 김덕홍 때문’이라고 평가했다는 걸 듣고 자부심을 느꼈다. (내가 황 전 비서의 망명을 이끌어낸 건) 조선(造船)을 한 사람이 폐선(廢船)을 해야 하는 이치 때문이다.”
-한국 정부와는 어떻게 접촉이 이뤄졌나.
“비밀공작이 있었다. 본래 97년 4월 망명하려 했는데 그해 1월 말 도쿄 주체사상토론회 때 접촉한 한국 정보기관 관계자가 ‘언론이 알아챈 것 같다’며 종용했다. 황 전 비서가 토론회를 마치고 일본에서 베이징으로 온 2월 12일 오전 10시 함께 한국영사관으로 들어갔다.”
-당 중앙위 자료실 책임자로 많은 북한 비밀문건을 접했을 텐데.
“김정일은 84년 9월 대남 평화공세를 위해 쌀 5만 석과 시멘트 10만t 등 수해물자 지원을 제의했다. 그런데 전두환 대통령이 덥석 수용해 (북한에) 난리가 났다. 89년 말 비공개회의에서 김정일이 ‘남조선에 구호물자로 보내려 쓴 전쟁물자를 아직도 보충 못했다. 그때부터 경제가 허리를 펴지 못하게 됐다’고 개탄했다는 서류를 본 적이 있다.”
-핵 개발과 관련한 정보도 있었나.
“영변 핵단지의 과학자들이 핵 개발 돌파구를 여는 연구성과를 얻었다는 게 91년 4월 김정일에게 보고됐다. 김정일은 전병호 군수공업담당 비서에게 ‘오늘은 내 평생 소원이 풀리는 날’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이듬해 2월 김일성은 ‘동족을 말살하는 핵을 개발한다는 건 도저히 상상할 수 없다’고 너스레를 떨었다.”
-황 전 비서는 김일성 사후 200만~300만 명이 굶어 죽었다고 했는데.
“노동당 자료연구실 부실장 시절인 96년 11월 아사(餓死)자 통계자료를 봤다. 95년에 당원 5만 명 포함 주민 50만 명 아사, 96년 11월 상순까지 100만 명이 굶어 죽었다.”
-국정원과는 여전히 불편한 관계인가.
“이젠 그렇지 않다. 지난해 9월 명예회복 인증서를 받았다. 박근혜 정부의 국정원과 대통령께 감사한다는 말을 기사에 빼먹지 말아 달라.”
-한때 황 전 비서와 등을 돌리고, 빈소도 찾지 않았는데.
“국정원에 회유당해 주체사상연구소에 집착했던 그에게 내가 반발한 거다. 망명 후 황 전 비서가 주체사상 같은 철학에 매달리지 말고 김정일 전면비판 투쟁에 나섰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있었다. 하지만 그의 정치망명 자체가 위대한 사상 전향이자 반(反) 김정일 투쟁이란 걸 최근에 깨달았다. 진심으로 미안하고 보고 싶어 밤마다 오열한다.”
이영종 통일전문기자 yjlee@joongang.co.kr
■ 2015.10.20 “황장엽, 미국으로 가 북한 망명정부 세우려고 했다”
김덕홍에게 보낸 친필서한 입수
황장엽(2010년 사망·사진) 전 북한 노동당 비서가 한국 망명 4년여 만인 2001년 7월 서울 세종로 미 대사관을 통해 미국으로 재망명하려 한 것으로 확인됐다.
19일 중앙일보가 단독 입수한 그의 친필 서한에서 밝혀진 사실이다. 자신과 함께 한국에 온 김덕홍(76) 전 노동당 자료실 부실장에게 보낸 서한에서 황 전 비서는 “지금 당장 미국 대사관에 망명할 수 있다면 그것이 제일 좋은 방법”이라며 “이 문제를 미측과 협의하고 방도를 확정하면 좋겠다”고 밝혔다. 서한에서 황 전 비서는 “망명 문제는 만일의 경우를 생각해 반드시 서면으로만 협의하도록 할 것, 전화 사용은 위험함”이라며 보안도 강조했다. 또 “망명의 암호는 ‘돈 문제’라고 함이 좋을 듯하다”며 “‘돈 문제’ 가능성 여부를 확정하고 그것을 실현하기 위한 준비 사업을 서두를 필요가 있다”고 했다. 황 전 비서가 서한을 작성한 시기는 김대중(DJ)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 간 첫 남북 정상회담(2000년 6월)이 열려 대북 유화분위기가 한창이었을 때다. 김덕홍씨는 19일 발간된 자서전 『나는 자유주의자이다』에서 “2001년 7월 2일 당시 신건 국가정보원장이 면담을 구실로 밤 11시쯤 나를 국정원 구내의 자택으로 불러냈다”고 적었다. 그러면서 “신 원장은 당시 추진되던 황 전 비서의 방미 초청에 반대하며 ‘암살당할 수 있다’고 협박했다”고 주장했다.
▲미국 망명의 뜻을 밝힌 황장엽 전 노동당 비서의 2001년 7월 3일자 서한. “미 대사관에 망명하는 게 좋은 방법”이란 글이 눈에 띈다. 글귀에 동그라미를 쳐 강조하는 건 황 전 비서의 습관. [사진 김덕홍씨]
서울 미 대사관으로의 망명 의사를 피력한 황 전 비서의 서한은 하루 뒤인 7월 3일 작성됐다. 여기에서 황 전 비서는 국가정보원을 ‘적(敵)’으로 지칭하며 “적들이 우리를 살해할 가능성이 현실적으로 존재한다. 가장 중요한 건 적이 우리의 진(진짜)의도를 모르게 하고 시간을 끌다 단호한 조치를 취하도록 하는 것”이라고 적었다.
황 전 비서는 미국행이 성사될 경우 워싱턴에 반(反)김정일 성향의 북한 망명정부를 세우려는 계획을 갖고 있었다고 한다. 망명정부의 수반은 직접 맡을 생각이었다고 복수의 관계자들이 전했다.
탈북 1호 박사인 안찬일 세계북한연구센터 소장은 “황장엽 선생은 세계에 뿔뿔이 흩어진 반김정일 세력을 규합한 망명정부를 구체적으로 계획했다”고 말했다. 망명 내각의 장관급을 제의받은 안 소장은 조직구성과 해외연락 등 핵심 역할을 맡았다고 한다. 하지만 황 전 비서의 미국 망명이 국정원에 사전 포착되고, 김덕홍씨와의 접촉이 강제 차단되면서 성사되지 못했다고 한다.
새누리당 하태경 의원은 보도자료를 내고 “당시 정부가 황 선생을 어떻게 탄압했는지 명백히 규명하기 위해 국정조사를 하자”고 제안했다.
이영종 통일전문기자 yjlee@joongang.co.kr
■ 외교관 태영호 이야기
■ 2017-01-02 [2017 새해특집] 탈북기자 주성하가 만난 태영호
남북의 현주소
▲탈북 기자-방송인과 손잡은 태영호 지난해 12월 29일 서울 종로구 동아미디어센터를 찾은 태영호 전 주영 북한대사관 공사(가운데)가 북한 출신 동아일보 주성하 기자(왼쪽)와 채널A ‘이제 만나러 갑니다’(이만갑)에 출연 중인 탈북 미녀 신은하 씨와 만나 반갑게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김재명 기자 base@donga.com
《 태영호 전 주영 북한대사관 공사는 지난해 12월 29일 3시간 가까이 이어진 대담 인터뷰 내내 밝은 표정이었다. 아픈 상처가 드러날 때면 가끔 목이 메기도 했지만 그것은 잠시뿐이었다. 사전 질문 협의가 없었지만 어떤 질문에도 막힘 없이 답을 해 엘리트 외교관 출신이라 역시 다르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보통 탈북민들은 한국에 온 초기에는 북한에서의 지위에 상관없이 외래어 때문에 의사소통에 애를 먹기 마련인데, 태 전 공사는 한국에서 쓰는 외래어를 이미 꽤 많이 학습한 듯 대화에 전혀 문제가 없었다. 오랫동안 북한에서 외교관으로 살아 한마디 한마디 조심스레 대답하는 것이 몸에 뱄을 법한데도 그는 스스럼없이 달변으로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
―서울을 경험하면서 느낀 소감은….
“여태까지 덴마크 스웨덴 영국처럼 선진국 중 발전된 나라에서 외교관 생활을 했고 한국의 발전된 모습도 많이 안다고 생각했는데 실제 와본 서울은 생각보다 훨씬 발전돼 있어 놀랐다. 아직 지하철을 못 타봤는데 타보고 싶다.”
―음식은 어떤가.
“많이 먹어봤는데, 비빔밥이 맛있었다. 임진강에서 맛본 장어도 정말 맛있었다. 북한에선 장어 4, 5점을 놓고도 상당히 비싸게 파는데, 임진강에서 마음껏 먹어봤다. 아쉬운 것은 평양냉면이더라. 유명하다는 몇 곳에 갔는데 평양 옥류관 같은 구수한 육수 맛이 안 났다. 그걸 보니 평양냉면집이나 한번 열어볼까 싶기도 하다.”
―남북 음식문화의 차이가 느껴졌나.
“말이 달라 처음엔 잘 알아듣지 못했다. 하루는 ‘수제비국 먹으러 가자’고 하기에 ‘그게 뭐예요’라고 하니까 밀가루로 만든 거라고 설명하는데 모르겠더라. 가보니 북한에서 ‘뜨덕국’이라 부르는 음식이었다. 백숙탕도 몰랐는데 ‘닭곰’이더라. 놀란 것은 한식당에 가니 반찬을 다 먹으니 또 갖다 줘서 깜짝 놀랐다.”
―낯선 환경에 적응은 잘 되나.
“제일 두려운 게 밤이다. 북에 두고 온 친인척, 동료들 생각하면 새벽 3시까지 잠이 안 온다. 수면제라도 좀 먹을까 했지만 수면제에 손대는 날이면 김정은보다 내가 먼저 무너질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안 먹었다. 새벽 3시까지 잠이 안 오면 본능적으로 냉장고 문을 열고 술을 찾게 돼서 술도 다 치웠다. 내가 지금의 고통을 알코올에 의지한다면 알코올중독자가 될 것 같아 강한 마음으로 이겨내고 있다.”
▲망명한 태영호 전 영국 주재 북한대사관 공사가 29일 동아일보 본사를 방문했다. 태영호 전 공사가
동아일보 주성하 기자와 인터뷰를 진행하고 있다. 김재명 기자 base@donga.com
―망명 직후 언론에서 ‘금수저’ 출신 외교관으로 보도했는데….
“전혀 아니다. 나는 ‘흙수저’로 자수성가했다. 다만 좋은 운은 좀 타고난 것 같다. 어렸을 때 최고위층 자녀들만 뽑는 평양외국어학원에 입학했다. ‘금수저’만 골라 보내는 유학생에 선발돼 중국에서 공부했다. 그리고 국제관계대학에서 고위외교관을 양성하는 특수 교육과정도 마쳤다.”
―남북 외교관을 비교해 본다면….
“(북한 외교관들은) 심리적으로 위축돼 되도록이면 그들(한국 외교관)을 피하려 했다. 한국 외교관들은 당당하지 않나. 한국 제품이 온 세상에 깔려 있고 유럽에서도 한국은 선망의 대상이다. 공식적인 자리에 가면 한국 외교관 주변에는 항상 사람이 많은데, 북한은 같은 코리안인데도 말 거는 사람도, 명함 주며 식사하자는 사람도 없다. 같은 민족인데도 짜증이 난다. 또 북한 외교관은 김정일 부자의 배지를 항상 달고 다니는데 사람들이 그걸 보고 장성택을 죽인 게 진짜냐고 대답 못할 질문을 던지니 피하게 된다.”
―북한 내부 관료들과 달리 외교관들에겐 숙청의 공포는 없지 않나.
“맞다. 김정일 때부터도 외교관이 숙청된 일은 없다. 김정은도 외무성은 못 흔든다. 김정은이 다른 부서는 다 갔지만 아직 외무성엔 가지 않았다. 김정은이 다른 일반 간부들을 대할 때는 항상 자기가 그들보다 위에 있다고 생각한다. 한마디로 간부들을 뭘 모르는 무식한, 쉽게 말하면 개돼지처럼 보는데 외교관에겐 그렇게 대우하지는 못한다. 김정은이 아이 때부터 해외서 자라면서 외교관들하고 많이 상대했다. 이 사람들이 말은 안 하고 있지만 인터넷으로 세상을 다 알고 있고, 속으로 자길 어떻게 생각하는지도 안다. 거기다 대고 자기가 지시해 봐야 겉으로 네네 하지만 속으로는 비웃는다는 걸 다 알고 있는 것이다.”
―최선희 외무성 미국국장은 어떤가. 북한 외교관들의 롤모델은 누구인가.
“최선희는 최영림 전 총리의 딸인데, 함께 공부한 적이 있다. 엄청 뛰어나다. 김정은이 (북한으로선) 잘한 결정 중 하나는 이용호를 외무상으로 기용한 것이다. 이 외무상은 밑에서부터 순차적으로 쭉 올라왔고, 외국어도 잘하고 필력도 좋다. 북한 외교관의 롤모델 같은 사람이다.”
▲망명한 태영호 전 영국 주재 북한대사관 공사가 29일 동아일보 본사를 방문했다. 태영호 전 공사가 동아일보 주성하 기자와 인터뷰를 마치고 본보 독자들에게 새해 인사를 전했다. 김재명 기자 base@donga.com
―기자간담회에서 한국 드라마 얘기를 했는데….
“최근 10년 동안 북한에서 영화 드라마가 안 나온다. 김정은이 아무리 독촉해도 안 된다. 한류가 들어가면서 뼈 빠지게 만들어봐야 주민들이 몰래 보는 한국 영화, 드라마를 이길 수 없으니 작가나 제작진이 아예 포기하는 거지.”
―채널A 프로그램 ‘이제 만나러 갑니다’에서 가장 인상에 남았던 장면은….
“몇 년 전에 난방비 아끼느라 집에서 어린 아기를 업고 솜옷 입고 사는 탈북여성이 방영됐다. 북에서 뜨끈뜨끈한 집에서 불 환하게 켜고 사는 게 소원이었는데 먼저 온 탈북자들이 그렇게 열심히 사는 장면을 보고 ‘어, 그게 아니네. 나도 한국 가서 저렇게 절약하면서 살아야겠다’고 결심했다. 북한 사람들은 한국 드라마만 보고 한국에선 1층에서 2층 올라가는 계단 있는 집에서 사는 줄 안다.”
―집안일은 잘하나. 경제권은 누구에게 있나.
“그건 자신 있다. 북에서 설거지는 안 해도 아침에 일어나 집 청소, 다림질, 쓰레기 버리는 거 다 내가 했다. 경제권도 당연히 아내가 다 갖고 있다. 한국에서 살려면 (아내가 모르는) 비자금이 좀 있어야 한다던데, 이젠 그 비자금을 마련하는 법을 연구해야겠다.”
―통일되면 뭘 하고 싶나.
“당연히 평양에 돌아갈 것이다. 건설을 좀 해보고 싶다. 평양은 다 허물고 다시 지어야 하는데 서울처럼 보란 듯이 건설하고 싶다. 집을 좀 짓고 싶고, 도로 철도 이런 것도 한국 건설사들과 힘을 합쳐 짓고 싶다. 서울부터 단둥까지 고속도로를 쫙 깔면 중국인 관광객들로 꽉 찰 것 같다. 우리 민족이 가만히 앉아서 돈벌 방법이 있을 것 같다.”
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 2017년 01월 06일 “北이 같은 민족엔 核공격 안할거라고?… 안일한 생각”
▲ 태영호 전 영국주재 북한대사관 공사가 지난해 12월 28일 서울 중구 새문안로 문화일보 7층 접견실에서 열린 개별 인터뷰에서 “북한의 유일지배 체제 사상은 지금 흔들리고 있고, 나의 1차 목표는 오는 2020년 도쿄올림픽 전까지 통일을 실현하는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신창섭 기자 bluesky@
태영호 前 駐영국 북한공사
중국 베이징(北京) 공항 출국장에는 북한 고려항공과 남한 대한항공 탑승구가 바로 옆에 붙어 있다. 오른쪽으로 가면 평양, 왼쪽으로 가면 서울이다. 비행 시간은 두 시간 정도지만 전혀 다른 세계로 이어지는 통로다. 태영호 전 영국주재 북한대사관 공사는 평양행 복도로 발걸음을 옮기면서도 자꾸 서울행 복도에 눈길이 갔다. ‘언제 한국 땅을 밟나. 한라산을 볼 수 있으려나.’ 태 전 공사는 “30년 가까이 평양행 비행기를 타면서 서울행 비행기를 보면 마음이 무거웠다”고 회상했다. 마음속에서 희망을 버리지 않으면 소망은 언젠가 이뤄지는 법인가 보다. 2016년 12월 28일 오후 그는 인터뷰를 위해 서울의 문화일보 사옥 7층 접견실에 앉았다. 전날 통일부 기자단 간담회에서 “통일된 대한민국 만세!”를 외친 이유를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는 “일부 사람들 보기에는 어떨지 모르겠지만 제가 갈망하던 자유를, 그토록 원했던 자유를, 사람들 앞에서, 그 자유의 외침을 한번 마음껏 터뜨려 보고 싶었다”고 답했다. 일각에서는 어딘가 자연스럽지 않았다는 지적이 제기됐다. 하지만 공기처럼 항상 자유를 숨쉬었던 사람들은 이해하기 어려울지도 모른다. 분단 72년 세월만큼이나 사고의 간극은 컸다.
―북한에서 태어나 외교관으로 살다가 남한으로 왔는데 조국의 의미는.
“남북한 사람들은 나라 지도를 그리라고 하면 한반도 전체를 그린다. 제주도도 빠뜨리지 않는다. 나의 조국, 나의 나라는 한반도 전체다. 지금 분단 70여 년을 맞지만 후세들은 어느 한순간의 임시적 체제로 여길 것이다. 한국행을 결심한 대의는 통일을 위해서다. 또 우리 민족을 핵 참화의 위기에서 구해야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개인적으로는 내 아들들에게 ‘노예의 삶’을 걷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북한에서는 특권층으로 남부럽지 않게 살았지만, 정신적으로 노예와 다르지 않았다. 그런 삶이 자식들에게 이어지는 것이 정말 싫었다. 내 양심에도 어긋난 일이었다.”
―노예라고 여기는 이유는 무엇인가.
“노예는 자기가 주인이 아니고, 주인에게 매어 있는 존재다. 주인의 생각과 요구대로 움직이고 일해야 한다. 자신의 자유와 생활은 없다. 북한 주민들은 최고위층이든 최하위층이든 김정은을 제외하면 모두 노예다. 노예의 사슬을 끊지 못하면 그 삶이 대대로 이어진다. 물리적인 자유보다도 사상적인 자유가 속박당하면서 몹시 힘들었다. 북한의 외교관으로서 거짓을 말해야 하는 나 자신을 견딜 수 없었다. 지금 한국에 와서는 마음대로 책도 보고, TV도 보고, 얘기도 나눈다. 인생에서 정신적이고 심리적인 자유가 물리적 자유보다도 더 소중하다고 생각한다.”
―과거 황장엽 선생은 부인과 자녀를 북에 두고 올 수 밖에 없었는데 가족과 함께 탈북한 경위와 과정이 궁금하다.
“정말 다행스럽다. 이 자리에서 누구라고 말할 수 없지만 저보다 먼저 오신 선배님들도 있는데, 그분들 중에는 자녀를 못 데리고 와서, 공개적으로 활동하지 못하는 분들도 있다. 나는 대단한 행운아다. 북한은 탈북을 막기 위해서 외교관 자녀를 인질로 평양에 붙잡아 두는데 천우신조로 우리 가족은 함께 나올 수 있었다. 과정을 상세하게 밝히면 북에 있는 분들이 다칠 수 있으니 경위를 구체적으로 밝히지는 않겠다. 이해해 달라.”
―유일지배 체제 사상으로 무장한 북한 사회의 변화가 가능할 것으로 보는가.
“김정은 정권은 겉으로 공고해 보이지만 내부적으로 썩어 들고 있다. 북한은 체제 유지를 위해 4가지 방법을 동원한다. 첫째, 수령의 신격화다. 둘째, 모든 주민을 정치조직에 가입시켜 옴짝달싹 못하게 만든다. 셋째, 끊임없이 인간의 사고 기능을 마비시킨다. 외부정보 유입을 차단하고 당국의 입장만을 주입하는 것이다. 넷째, 기득권 성분 제도다. 개인을 혈통적으로 나눠 어디에 속하는지 정하는 방식이다. 조선시대로 치면 양반, 중인, 천민으로 갈라놓고 통치하는 구조다. 사회의 부패와 기초 와해는 설명이 긴데 괜찮겠는가.”
―무엇보다 중요한 사항이다. 자세히 설명해 달라.
“그런데 지금 이 체제가 흔들리고 있다. 수령을 신격화하는 북한은 다른 공산주의 사회와 다르게 충효 사상을 강조하는 성리학 이념으로 유지된다. 하지만 신처럼 만들어 놓아야 하는 김정은에게는 명분과 정체성이 결여돼 본인 스스로 불안감에 휩싸여 있다. 경제적 측면에서 보면, 북한은 생산수단을 사회적 소유로 정해 놓고 사람들의 이념은 집단주의에 복종시켜 놓은 사회다. 주민 의식주를 지도자가 보장해 주는 사회주의 계획경제다. 그 역할을 지도자가 하지 못하니 체제가 깨지고 있는 것이다. 국제사회가 대북제재를 한다고 해도 북한에서 1980년대 고난의 행군 때처럼 아사(餓死)가 왜 일어나지 않는지 아는가. 더 이상 국가와 당, 수령을 믿지 않고 내가 먹고살 길을 스스로 찾기 때문이다. 사회가 자본주의와 개인주의로 가고 있다. 하지만 북한의 정책과 법률은 그대로다. 뜯어 고치면 김정은 체제가 무너지기 때문에 손을 대지 못한다. 대학은 학생들에게 경제학을 가르치지 못하고 있다. 경제를 ‘김일성 로작’에 근거해 배우는데, 시장에 대해서는 아무런 지침이 없다. ‘현실’과 ‘로작’이 다른 것이다. 북한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딜레마에 빠져 있다. 탁아소 아이 때부터 김일성과 김정일 초상화에 인사를 시키면서 종교에서 ‘아멘, 아멘’ 하듯이 철저한 세뇌교육을 시킨다. 그런데 조직 생활을 마지못해 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사회를 유지하는 기능이 마비되고 있는 것이다. 무엇보다 엘리트 계층의 동요가 심하다.”
―엘리트 계층의 동요가 심하다면, 왜 반체제 운동이 일어나지 않는가.
“내가 들은 마지막 반체제 운동은 1988년 초에 일어났다. 김일성종합대에서 대규모 반체제 조직이 적발됐다. 구체적인 숫자는 잘 모르지만, 김일성종합대가 완전히 뒤집어졌다. 학생 관리를 위해 국가안전보위부(현 국가보위성)에서 따로 인원이 나왔을 정도였다. 대대적인 숙청이 있었고, 가담한 학생들은 모두 총살당했다. 내 가장 가까운 친구도 그때 숨졌다. 북한은 공포통치로 무수한 사람들을 죽이면서 체제를 유지했다.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다 보니 사람들은 미래에 대한 비전을 상실했다. 비전이 있다면 목숨을 걸고 탱크 앞에 설 것이다. 비전을 잃으면 조직화될 수가 없고, 저항을 할 수도 없다. 사실 북한의 엘리트들은 상당히 기회주의적이다. 체제가 허물어지면 정치보복이 일어날 것으로 여긴다. 민중 봉기가 발생하면 김정은과 함께 자신들도 처형될 것이라는 두려움을 갖고 있다. 그들에게 이제 제대로 현실을 알려줘야 한다.”
―북한의 진정한 통치자는 누구인가. 김정은인가, 노동당인가, 군부인가.
“북한의 통치자는 김정은과 그를 떠받드는 기득권 세력이다. 수십 년 동안 김일성 일가와 당, 보위부 등이 호상 견제하면서 북한을 이끌어왔다. 기득권 계층이 ‘김정은으로는 안 되겠다. 들어내자’는 인식을 갖도록 만들어야 한다. 쉽지 않은 문제지만 한국 정부가 추진해 나가야 한다.”
―최근 노동신문을 보면 김 위원장이 군부대 시찰을 많이 하는데.
“불안한 독재자일수록 만세 소리를 듣고 싶어한다. 군부대를 자주 간다는 것은 김정은이 군에 대해 마음을 놓을 수 없다는 증거다. 군사훈련을 눈으로 확인하고 싶고, 박수도 받고 싶고, 군대에 대한 불안감을 씻어내려는 목적이 있는 것으로 본다. 군대를 쥐고 있으니 주변에서 들고 일어날 꿈도 꾸지 말라는 심리도 있는 듯하다.”
―한국 외교에 대해서 어떻게 평가하나.
“과거 한국 외교는 실체가 뚜렷하지 않았다. 북한 외교관 입장에서 보면 미국의 정책에 보조를 맞추는 것에 불과했다. 그러나 최근에는 미국 의존에서 벗어나 독자외교로 가는 경향이 나타나고 있다. 사드 배치와 대북 제재에 있어 한국은 한·미동맹에 기초해 중국과 러시아를 포섭해 자신의 주장을 납득시키려고 한다. 박근혜 대통령의 2015년 9월 중국 전승절 참석은 북한 외교관들에게 충격이었다. 미국과 일본도 불참했는데, 한·미동맹을 중시하는 한국이 갔다는 사실에 놀랐다. 당시 시진핑(習近平) 중국 주석 바로 옆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에 이어 박 대통령이 있었다. 하지만 북한의 최룡해 당 비서는 맨 끝자리였다. 최 비서는 빨치산 1세 아들이고, 시 주석도 마찬가지다. 아버지인 최현과 시중쉰(習仲勛)은 가까운 사이였을 것이다. 당시 북한 외교관들 사이에서는 ‘항일 전쟁 승리 행사인데 함께 싸웠던 아버지들의 아들은 떨어져 있다니’라는 탄식이 흘러나왔다. 또 북한은 인권문제로 수세에 몰렸다. 유엔의 인권문제 표대결에서 북한은 완전히 손을 들었다. 남북 외교전에서 거둔 남측의 대승리다.”
―벼랑끝 전술일 수도 있지만 북한 외교는 전통적으로 강하지 않았나.
“최근 북한의 외교는 상당히 위축됐다. 특히 북한은 장성택 처형을 공개하면서 세계적으로 비판을 받았다. 장성택은 김일성 사위이며 김정은의 고모부인데, 로열 패밀리 안에서 권력갈등을 드러낸 창피스러운 일이었다. 처형 방법도 지극히 야만적이었다. 핵실험을 통해 핵개발 진전이 이뤄지고 있지만 계속되는 대북제재로 무역이 줄고 국제 공동체로부터 고립되고 있다. 외교관들의 심리적 압박감이 크다.”
―리용호 외무상에 대해 평가하면.
“그는 북한 외교의 두뇌다. 정통 외교 관리형이 외무상에 오른 사례가 북한에서는 처음이다. 밑에서부터 시작해 문건들을 쓰고 한 발씩 외무상에 오른 보기 드문 실력자다. 김정은이 했던 인사 중에서 그나마 잘한 것 같다. 유능한 사람을 앉혀 위축된 북한 외교를 위기에서 건져 보려는 인사라고 생각한다. 영국에서 2004년부터 2008년까지 있을 때 내가 참사였고 리용호가 대사였다. 보기 드문 실력파 외교관이다.”
―앞으로 북한이 트럼프 행정부와 북·미 간 직접 접촉, 이른바 통미봉남(通美封南)의 외교 전술을 구사할까.
“통미봉남은 적중한 표현이 아니다. 북한은 미국과 한국이라는 두 실체를 가지고 자기 필요에 의해 움직인다. 김대중과 노무현정부 때는 한국의 대북정책에 기대 미국을 견제했고, 1994년 미국 클린턴 행정부 시절 북·미 제네바 합의 당시 미국의 실체를 이용해 한국으로부터 경수로 지원을 받는 전술을 썼다. 그때 그때의 상황에 따라 미국을 이용해 한국을 압박하고, 한국을 이용해 미국을 압박하는 것이 북한 외교다.”
―북한은 차기 한국 정부가 과거의 햇볕정책으로 돌아가기를 기다리고 있다는 의미인가.
“일반적인 견해로 보면 한국뿐 아니라 자유민주주의 체제에서는 정권이 바뀌면 정책도 변한다. 현재 남북관계가 막혀 있으니 보수든 진보든 관계없이 새 행정부는 이전 정권과의 차별화를 시도할 것이다. 북한에 새로운 접근을 시도할 것이라는 얘기다. 북한은 핵과 미사일 문제가 여기까지 왔으니 되돌릴 수는 없고, 대신 핵동결을 할 테니 원하는 것을 달라고 할 것이다. 남북한이 서로 주고받을 게 있으면 타협이 가능하다. 북한은 수출주도 경제인 한국이 안정을 위해서는 도발적 상황을 장기간 방치할 수 없다고 본다. 결국 안정적 관리로 나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북한은 한 번 직업을 잡고 일하면 그 분야에 줄곧 몸 담는다. 단점이기도 하고 장점이기도 하다. 외무성 유럽국에 1988년에 입직했는데 줄곧 유럽국에서 일했다. 유럽은 손바닥처럼 다 안다. 마찬가지로 북한 외교관들은 남한 외교관들을 손바닥처럼 들여다보고 있다. 북한 내부에서는 대권주자인 문재인, 반기문, 안철수가 어떤 행보로 움직일 것인지도 예측한다. 반면에 한국은 북한에 대한 정보가 없어서 마치 화성 이야기하듯 한다. 주관적인 생각으로 문제를 판단한다.”
―북한 주민들이 한국 국민들을 바라보는 시각은.
“북한도 남측이 풍요하게 산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남한 사람들은 ‘소프트’하다고 생각한다. 북한은 열네 살부터 농촌에서 풀 베고, 농사 지으며 고생한다. 난관을 극복하는 정신이 상당히 강하다. 군대만 해도 북한이 남한과 장비면에서 비교가 안 되지만, 북한 병사들은 전쟁은 장비가 아닌 사상으로 한다고 교육을 받는다. 한국전에서 북한은 현대 무기가 없었지만 사상으로 싸웠다. 남한 군대는 군대도 아니라고 본다. 남한 병사는 입대하면 제대할 날짜만 꼽고 컴퓨터 게임만 한다고 여긴다.”
―김정일이 물려준 것으로 추정되는 40억 달러의 김정은 비자금은 스위스에 있나?
“비자금 존재는 명백하다. 김정은의 호화생활과 시설의 유지에는 상당한 외화가 필요하다. 스위스 비밀계좌에 얼마가 있는지 구체적으로는 모르지만 상당히 많은 자금이 해외에 은닉돼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외국인 명의 계좌나 외국 법인 계좌에 있을 것이다. 외국 법인은 주로 북한과 거래하는 회사들일 것이다. 중국의 훙샹(鴻祥) 그룹은 빙산의 일각이다. 많은 북한 회사는 제재가 들어오면 중국인을 내세워서 중국인 계좌를 이용해 제재를 피한다.”
―북한 핵무기는 방어용인가, 공격용인가. 한국 일각에서는 같은 민족인 북한이 핵공격을 가하지 않을 것으로 생각하는데.
“딱 잘라서 말하기가 상당히 힘든 문제다. 그러나 김정은은 핵무기라는 실체를 장기집권을 위한 건축물의 기둥으로 생각한다. 중동 독재자들의 몰락에는 외부의 군사적 개입이 있었다. 만일 북한에서 급변사태가 발생하면 미국과 한국이 가만히 있겠는가. 김정은은 이 점을 두려워한다. 그런데 핵무기가 있다면, ‘(북한에) 들어오면 너도 죽고 나도 죽는데, 할 테면 해봐라’라며 버틸 수 있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크림반도 침공을 보자. 미국과 유럽연합(EU)은 러시아의 핵무기라는 실체 때문에 (군사적으로) 움직이지 않았다. 우크라이나 외교관들은 ‘구 소련 해체과정에서 핵무기를 파기하지 않고 보유하고 있었다면 크림반도를 빼앗기지 않았을 것’이라며 통탄했다. 핵무기는 국제질서에서 엄청난 위력을 발휘한다. 한국은 이 점을 인정해야 한다. 한국 사람들은 ‘같은 민족인 우리에게 김정은이 핵무기를 쓰겠는가’라고 생각한다. 안일한 생각이다.”
―북한이 핵미사일을 워싱턴과 도쿄, 베이징에 겨누면서 남한을 상대로 재래식 전쟁에 나설 가능성은.
“북한은 다른 사상을 허용하지 않는 사회다. 김정은 입장에서는 이건(남한은) 없어져야 할 실체다. 한국 사람들은 매우 모순되는 질문을 한다. 전쟁이 나서 장사포를 쏘면 휴전선 200㎞ 안은 잿더미가 된다. 그런데도 혹시 ‘전쟁이 일어나면 참화를 면할 방법이 있는가’라는 식이다. 참사와 비극, 이런 것을 생각하고 싶지 않은 심리가 있는 것 같다. 하지만 북한의 현실을 봐라. 어떻게 사람을 죽이고 어떻게 처형하는지를….”
―천안함 피격은 북한의 소행인가.
“북한은 천안함 사건 발생 이후 ‘했다’ ‘안 했다’의 아무런 입장 표명이 없었다. 다만 북한에서는 ‘이제 우리가 버블 효과도 발생시키는 어뢰까지 만들어 냈으니 해군도 자신이 있다’는 소문이 돌았다. 그것을 보면 북한의 소행이 맞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전까지 북한은 해군과 공군은 자신이 없고, 육군은 붙어봐야 안다는 이야기를 했었다.”
―김정은 득녀설은 사실인가.
“철저하게 비밀에 부쳐져 있다. 북한에서 수령은 신과 마찬가지인데, 하느님에게 ‘아들이나 딸이 있다’고 말할 수 없다. 김정은 가족 내부 일은 말도 하지 말고, 듣더라도 옮기지 말라고 세뇌 교육을 시킨다. 김정은이 이설주를 처음에 데리고 대중 앞에서 모습을 보여줬는데, 북한 주민들에게 충격이었다. 아내를 동행하고 팔짱을 끼는 행동을 상상도 못했다. 그런데 김정은은 그런 모습을 국민에게 보여주고 싶어했던 것 같다. 왜냐하면 김정일은 한 번도 김정은의 어머니를 국민에게 보여주지 않았으니 아버지처럼 하지 않겠다는 콤플렉스가 있었던 것 같다. 아이 때부터 어머니의 처지를 봤을 테니, 심리적으로 ‘나는 그렇게 하지 않겠다’는 생각이 있었던 것 같다. 물론 개인적 견해다.”
―북한에서는 숙청으로 반대파를 제거하는데, 장성택 처형 이후 ‘종파’가 다시 발생할 가능성은.
“장성택 일파는 종파도 아니다. 일부에서는 숙청 이후 장성택을 현대판 종파라고 하는데 장성택 밑에 있었던 사람들은 당에 충실하고, 김정은에게도 충실한 사람들이었다. 장성택이 총을 들고 모이라고 하면 대부분 동의하지 않았을 것이다. 실제 장성택이 정치적 군사 쿠데타를 꿈꾸지도 않았다. 김정은 자기가 무서우니까 먼저 제쳐버린 것이다.”
―한국 사회도 완벽하지는 않다. 빈부격차와 사회갈등도 심한데.
“오래 좀 생활해봐야 알 것 같다. 북한처럼 너무 열악하고 인권 보장이 안 된 노예사회에서 살다가 자유로운 몸이 돼서 그런지 모든 게 훌륭해 보인다. 사회로 배출된 지 며칠밖에 안 돼서 결론을 내리기 어렵다.”
―앞으로 개인적 또는 사회적 목표는 무엇인가?
“아들들이 한국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통일된 한반도에서 고향으로 돌아가 북한 경제를 재건하는 꿈을 갖고 있다. 내 1차 목표는 2020년 일본 도쿄올림픽 전까지 통일을 실현하는 것이다. 통일된 대한민국의 단일팀이 출전하는 것을 보고 싶다. 가장 중요한 것은 북한 주민들을 계몽하는 일이다. 그런 문제를 갖고 남한에서 많은 토론을 해나갈 것이다. 북한 주민이 깨어나면, 북한은 단방에 무너진다. 건국 이후 북한은 공포로 유지돼 왔다. 그 제도에 사는 인간들의 사고가 마비됐지만 지금 변하고 있다. 72년 공포 통치는 이제 깨뜨릴 수 있다.”
인터뷰 = 이제교 부장 (정치부) jklee@munhwa.com 정리 = 인지현 기자 loveofall@munhwa.com
■ 2017-01-18 태영호 “김정은에게 비선라인 따로 있다”
지난해 한국으로 망명한 태영호 전 주영 북한대사관 공사(사진)가 17일 “김정은에게도 대외적으로 보이지 않는 비선실세 라인과 언론에 공개되는 라인이 따로 있다”고 폭로했다.
태 전 공사는 이날 국회 의원회관에서 열린 바른정당 초청 간담회에서 “북한에는 주민도 잘 모르는 김정은의 서기실이 3층짜리 건물에 자리 잡고 있는데 모든 부서에서 올라오는 정책을 김정은에게 전달하고 지시를 하달하는 곳”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북한은 ‘신(神)’ 밑에 작은 신이 있을 수 있는 구조가 아니기 때문에 2인자는 있을 수 없다”며 “황병서 최룡해 같은 이름 있는 사람을 다 제거해도 북한은 정상적으로 굴러간다”고 말했다. 이어 “북한의 실권자는 국가 서열에서 몇 번째인지를 따지는 게 아니라 인사권, 표창권, 책벌권을 누가 쥐고 있는지를 따져야 한다”며 대표적 실세로 조연준 조직지도부 제1부부장, 박태성 평안남도 당 위원장 등을 꼽았다.
태 전 공사는 또 “앞으로 더 좋은 삶을 찾아오는 엘리트층의 탈북이 늘어날 것”이라며 “최근 한국에 온 고위 외교관이 상당히 많고, 세계 각국에서 한국행을 기다리는 외교관도 많다”고 말했다. 태 전 공사가 말한 외교관은 탈북한 북한 무역일꾼까지 모두 포괄한 개념으로 보인다.
▼ “최근 한국 온 北고위외교관 상당히 많아” ▼
한 대북 소식통은 “태영호 전 공사보다 높은 정무직 외교관은 없지만 최근 2년 동안 해외에 파견된 북한 고위급 간부 20여 명이 한국에 조용히 입국한 것은 사실”이라고 밝혔다.
태 전 공사는 이날 “북한의 핵 무장화를 중단시키는 유일한 길은 북한 정권의 소멸에 있다”며 “휴전선을 통해 집단 탈북을 유도하는 것이 북-중 국경을 통해 탈북을 유도하는 것보다 훨씬 쉽다”고 주장했다. 그는 “휴전선 군인들은 북한의 ‘흙수저’만 남아 근무하는 곳”이라며 “이곳에 김정은 체제의 실상을 알리는 전단과 10달러 지폐 등을 지속적으로 살포하면 중국 북한식당 여종업원 집단 탈북 같은 사태가 지휘관을 포함한 군인들 속에서 나올 것”이라고 말했다.
태 전 공사는 “북한에 외부 정보를 지속적으로 유입해 민중 봉기 환경을 만들어야 한다”며 “한국의 발전상을 보여주는 현대적 병원이나 시장경제 원리를 알려주는 평양과학기술대 등 주민들과 접촉할 수 있는 시설을 많이 지어줄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대북 식량지원에 대해서는 “한국에서 지원한 식량의 70∼80%는 당국이 다시 실어간다”며 “하지만 분배의 투명성을 강화해 식량의 10∼20%만 주민에게 가더라도 남한에서 식량이 왔다는 사실을 주민이 알게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태 전 공사는 김정은 체제의 가장 큰 아킬레스건으로 세습 명분과 정체성이 불분명하다는 점을 꼽았다. 김정은이 자신의 나이와 경력, 후계자가 돼야 한다는 명분을 심어주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간부들과 주민들의 지지를 얻지 못한다는 것이다. 태 전 공사는 “간부들에게 평양 대성산에 있는 (김정은의 모친인) 고용희(고영희로 알려졌으나 최근 고용희라는 주장이 나옴)의 무덤을 참배시켰는데, 무덤에 ‘선군 어머니 묘’라고만 돼 있을 뿐 묘비에 묘주의 이름도 없다”고 지적했다.
주성하 zsh75@donga.com
■ 2017.03.17 태영호 "北에 대규모 저항 운동 있다…南은 선제공격 의지 보여야"
▲16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 의원회관 제1세미나실에서 열린 대한민국미래혁신포럼에 참석한 태영호 전 영국 주재 북한 공사가 강연하고 있다. 이날 강연은 김정남 암살 등에 따른 경호 문제로 비공개로 진행됐다. /뉴시스
태영호 전 영국 주재 북한대사관 공사는 “김정은 정권을 붕괴시키는 것만이 유일한 북핵 해결책”이라고 16일 밝혔다.
김학용 바른정당 의원에 따르면, 태 전 공사는 이날 오전 국회 의원회관에서 열린 대한민국미래혁신포럼 주최 비공개 간담회에서 이같이 말했다.
태 전 공사는 “김일성은 이미 한국전쟁 때 원자탄의 심리적 효과가 매우 크다는 걸 알고 핵무기를 가져야 한다는 확고한 의지를 갖고 있었다”며 “할아버지 대(代)부터 수십년간 이어져 온 핵개발을 김정은은 절대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북한이 대규모 핵실험을 주저했던 이유는 방사능 오염 등 피해가 일어나면 대규모 탈북사태로 이어져 체제가 붕괴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라며 “대규모 핵실험은 반드시 막아야 한다”고도 했다.
그러면서 “전 세계에서 인구 밀집 지역에서 핵실험을 하고 있는 나라는 북한이 유일하다. 핵재난이 발생하면 한국과 중국까지 미칠 수 있다”고 경고했다.
태 전 공사는 북핵 문제의 근본 해결책은 김정은 정권 붕괴라고 강조했다. 그는 “지금 북한에서는 눈에 보이지 않는 대규모 저항 운동이 일어나고 있다”며 “남한에서 선제공격을 포함한 모든 옵션에 대한 의지를 확실히 보여줘야 한다”고 했다.
북한 민중의 봉기를 유도해야 한다는 주장도 했다. 그는 “지금 북한에서는 내 권리는 내가 지킨다는 의식 변화가 일고 있다”며 “민중봉기가 일어날 수 있도록 의식 변화를 계속 줘야 한다”고 주문했다.
권순완 기자
■ 2017.07.04 "北 민중이 집단적 분노 표출하는 순간, 김정은 단번에 무너질 것"
[아시안리더십콘퍼런스 첫째날 / 협력과 번영의 길을 찾아서]
- 통일과 나눔 재단 세션
작년 英서 탈북 태영호 前공사
"北이 무인기 침투시킨다면 우린 무인기로 전단 보내야"
태영호 전 영국 주재 북한공사는 3일 "북한 민중이 분노와 좌절을 집단적으로 표출하는 순간 북한 체제는 단번에 무너진다"며 "북한 김정은은 공포정치로 이런 저항 심리를 억누르고 있지만, 영원히 지속될 수 없다"고 했다. 태 전 공사는 이날 아시안리더십콘퍼런스에서 통일과 나눔 재단(이사장 안병훈)이 마련한 세션에서 "이제는 대한민국의 민주주의 용사와 인권 투사들이 북한 주민들의 소리 없는 저항에 귀 기울여야 할 때"라며 이같이 말했다.
▲태영호 전 주(駐)영국 북한대사관 공사가 3일 통일을 주제로 강연하고 있다. /김지호 기자
태 전 공사는 "지금까지 북한 정권에 대항했다가 수용소에 끌려간 사람은 5·18 민주화운동 때 희생된 사람의 100배에 달하지만, 아쉽게도 북한의 이런 투쟁은 한국 국민들과 국제 공동체의 관심을 받지 못했다"며 "대한민국은 이제부터는 각종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 한국 민주화 투쟁의 역사를 알리고, 인간의 고유한 권리를 깨치게 해야 한다"고 했다. 그는 이어 "북한이 핵과 미사일이라는 비대칭 전력이 있다면, 대한민국에는 자유와 민주주의, 경제력이라는 비대칭 전력이 있다"며 "북한이 무인기를 대한민국 중심부에 침투시킨다면, 우리는 무인기로 북한 중심에 전단지와 달러를 보내야 한다"고 했다.
태 전 공사는 이후 이어진 김병연 서울대 교수와의 대담에서 "김정은이 가장 두려워하는 건 무엇이냐"는 질문에 "북한 주민"이라고 답했다. 김 교수도 "김정은이 외부 세력의 개입보다 북한 주민들의 저항을 더 두려워한다는 데 동의한다"며 "소련의 경우도 외부 요인이 아니라 대내 토대가 사라지면서 붕괴했다"고 했다.
태 전 공사는 개성공단 재개와 관련해 "만약 재개한다면 북한 당국을 거쳐 노동자들에게 봉급을 건넨 지금까지의 방식과 달리 남한 정부가 직접 북 노동자들에게 월급 봉투를 줘야 한다"고 했다.
태 공사는 "이 과정을 통해 북한 주민들은 '노동에 대한 정당한 보상과 권리가 있다'는 걸 깨치게 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조선일보 엄보운 기자
■ 2017.08 12 김정은, ICBM으로 미국 흔들어 한국 포기하게 하려는 전략
탈북 망명 1년 태영호 전 북한 공사가 보는 한반도 위기
약 1년 전만 해도 그는 북한의 모범적인 고참 외교관이었다. 영국의 유럽연합(EU) 탈퇴(브렉시트) 결정이 난 지난해 6월에는 브렉시트가 ‘공화국’에 미칠 영향을 분석한 보고서를 평양에 보내기도 했다. 실은 일생일대의 결단을 코앞에 둔 때였다. ‘한국에 망명한 최고위 북한 외교관’으로 지난해 8월 가족과 함께 서울에 온 태영호(55) 전 주영 북한 공사 얘기다. 국가안보전략연구원 특임전략자문위원으로 대북정책을 조언하고 있는 그를 지난 8일 연구원 접견실에서 만났다.
김정은, 미친 척할 뿐 상당히 영리
올해 말까지 핵무력 완성에 올인
평화적인 수단으로 북한 정권 교체
북핵 문제 풀 수 있는 유일한 해법
북 주민 겨냥 문화 콘텐트 확산시켜
각성을 통한 민중봉기 유도해야
경호 등에 세금 많이 쓰게 해 송구
울창한 숲과 깨끗한 화장실에 감동
▲태영호 전 주영 북한 공사는 “핵무력을 완성하고 나면 북한은 핵과 미사일 활동 동결을 조건으로 제재 해제를 요구할 것”이라며 “그동안의 모든 제재 노력을 수포로 돌리는 그 제안엔 절대 응하면 안 된다”고 강조했다. [김경록 기자]
질의 :이제 한국 생활에 어느 정도 적응이 됐을 것 같다.
응답 :“한국 사회의 흐름에 자연스럽게 동화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는데 지난 2월 김정남 암살 사건이 나면서 틀어졌다. 신변 보호가 한층 강화되면서 자유로운 활동이 힘들어졌다. 1년이 됐지만 아직 서울 시내 동서남북 구별도 잘 못한다.”
질의 :김정남 암살 사건 이후 실제로 신변에 위협을 느낀 적은 없나.
응답 :“없었다. 그 사건 이후 경호원 숫자도 늘고 경비도 대폭 강화됐다. 그분들이 나 때문에 정말 고생한다. 한국 국민의 혈세를 너무 많이 쓰는 것 같아 송구한 마음이다.”
질의 :그래도 이곳저곳 다녀봤을 텐데 가장 인상적인 게 뭐였나.
응답 :“고속도로 주변 산들에 나무가 많은 게 가장 인상적이었다. 휴게소 화장실이 엄청 깨끗한 점에도 감명을 받았다. 영국의 고속도로 화장실도 한국처럼 깨끗하진 않다.”
질의 :지난 1년 한국 사회를 경험해 보니 어떤 점이 가장 큰 문제란 생각이 들던가.
응답 :“글쎄… 북한 사람들에 비해 한국 사람들이 너무 순한 것 같다.”
질의 :무슨 뜻인가.
응답 :“북한 말로 순하다고 하면 ‘말랑말랑하다’는 뜻이 강하다. ‘순진하다’는 뜻도 있다. 한국 사람들과 대화해 보면 종종 그런 느낌을 받게 된다. 그렇게 순해서 어떻게 북한을 상대할 수 있을지 걱정이다.”
질의 :아무리 북한이 사실상의 왕조 체제라 해도 나이 서른도 안 된 젊은이가 몇 년 만에 그렇게 권력을 장악할 수 있다는 게 솔직히 이해가 안 된다. 김정은은 얼굴마담이고, 뒤에 숨은 어떤 사람들이 실권을 쥐고 있는 것 아닌가.
응답 :“칼로 두부모 자르듯 이거다 저거다 답변하기 힘든 문제다. 김정은 3대 세습 체제는 김일성 가문 출신인 김정은과 현 체제의 유지를 바라는 측근 세력이 합심해 끌고 가는 체제라고 보는 것이 가장 정확할 것이다. 그렇더라도 최종 결정은 김정은이 내린다고 봐야 한다.”
질의 :김정은을 철부지, 막무가내, 미치광이 등으로 희화화하는 경향이 있지만 생각보다 스마트하고, 전략적이고, 리더십도 있다는 평가도 있다. 어느 쪽이 진실에 가깝다고 보나.
응답 :“김정은은 미친놈이 아니다. 미친 척하는 ‘미친놈 전략’을 쓰고 있을 뿐이다. 상당히 영리하다고 봐야 한다.”
질의 :한국에 와서 봤겠지만 한국 국민은 촛불시위로 현직 대통령을 탄핵해 법정에 세웠다. 남과 북은 같은 민족이지만 북한 체제에서는 절대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없다고 말하면 맞는 말일까.
응답 :“틀린 말이다. 지난 수십 년간 북한 내부에서도 한국으로 말하면 민주화운동이라고 할 수 있는 반당·반혁명 종파 사건이 많이 있었다. 주민들 사이에서도 강력한 반발이 있다고 봐야 한다. 한국 영화나 드라마를 보다 들키면 심지어 공개 처형까지 당하는데도 안 보는 사람이 거의 없다. 보이지 않는 불복종이자 항거라고 할 수 있다. 일반 민중과 김정은 체제의 간극은 해가 갈수록 벌어지고 있다. 언젠가는 고무줄처럼 끊어질 날이 올 것이다. 10년 내 올 걸로 본다.”
질의 :1조 달러가 아니라 10조 달러를 줘도 김정은은 핵을 포기하지 않는다는 게 귀하의 견해다. 제재나 협상을 통한 해결은 불가능하다는 뜻인가.
응답 :“김정은은 올해 말까지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을 포함한 모든 미사일에 핵탄두를 탑재해 실전배치한다는 계획을 세워놓고 있다. 실제 그렇게 될지는 좀 더 두고 봐야겠지만 그 방향으로 올인하고 있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질의 :핵미사일 실전배치까지는 이대로 간다는 뜻인가.
응답 :“그렇다. 북한 당국이 군 지휘관이나 엘리트 층에 계속 강조하는 게 뭔가 하면 남한 사람들은 심리적으로 약하다는 것이다. 북한은 자주의식이 강하지만 한국은 사대주의 성향이 강하다는 것이다. 한국은 무슨 일이 생기면 스스로 돌파할 생각을 하는 게 아니라 미국에 의지해 문제를 풀려고 한다는 게 남한을 보는 북한의 시각이다. 북한은 ICBM을 완성한 뒤 ‘공포전략’으로 미국을 계속 흔들 것이다. 로스앤젤레스·시카고… 다 날려 버릴 수 있다고 계속 위협하다 보면 우리 자신을 희생하면서까지 한국 방어를 위해 북한과 싸울 필요가 있나 하는 의문이 내부에서 제기되는 순간이 올 걸로 보고 있다. 6·25 전쟁 때처럼 휴전선이 아니라 대한해협에 제2의 애치슨 라인을 긋는 사태가 올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북한이 핵무기를 갖고 있는 데다 미국이라는 버팀목까지 사라지면 한국 사회는 공포심리에 사로잡혀 금방 무너질 것으로 북한은 기대하고 있다. 제2의 베트남 사태를 노리는 것이다.”
질의 :미국이 바보가 아닌 이상 김정은이 진짜로 미국에 핵무기를 날릴 수 있다고 생각할까.
응답 :“김정은은 미국에 미친놈처럼 보이기를 원한다. 저러다 저놈이 진짜로 쏠 수도 있겠다 싶으면 저런 놈하고는 아예 상대를 안 하는 게 낫겠다며 뒤로 빠질 수 있다고 보는 거다.”
질의 :그렇다면 귀하가 생각하는 해법은 뭔가.
응답 :“김정은 정권을 평화적인 방법으로 교체하지 않으면 이 문제는 해결될 수 없다. 김정은 체제와 핵미사일은 동전의 양면과 같다.”
질의 :그게 가능할까.
응답 :“100% 가능하다. 지금까지 수십년 동안 한국과 미국은 북한 당국을 상대로 협상도 하고 제재도 했지만 다 실패했다. 해결의 주체를 북한 당국으로 보면 절대 해결되지 않는다. 열쇠는 북한 민중에 있다. 북한 민중을 각성시켜 그들 스스로 현 체제에 반대해 들고 일어나게 만들어야 한다.”
질의 :북한에 삐라를 날리고, 대북방송을 하는 등 이미 그런 노력을 해 오지 않았나.
응답 :“비정부기구(NGO) 손에 맡겨 쇼나 하는 정도로는 안 된다. 정부가 직접 나서서 정책적으로 접근해야 한다. 우선 북한 사람들을 겨냥한 맞춤형 문화 콘텐트를 많이 만들어야 한다. 지금 북한 사람들이 보는 한국 드라마나 영화는 한국 사람용이지 북한 주민용이 아니다. 나도 많이 봤지만 보고 남는 것은 ‘잘사는 한국이 부럽다’는 정도지 북한 사회를 비판적 시각으로 바라보고 각성을 촉발하는 계몽적 역할은 거의 못 하고 있다. 우리도 한국처럼 민주화되고 잘 살려면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하게 만드는 콘텐트를 많이 만들어 북한에 확산시켜야 한다.”
[S BOX] 매일 아침 가족이 모여 신문 사설 읽고 영어로 토론
태영호 전 공사는 BBC와 CNN을 보며 국제 뉴스를 체크하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한다. 이어 가족과의 ‘잉글리시 브렉퍼스트(English Breakfast)’. 국내에서 발행되는 여러 영자 신문에 실린 사설을 본인과 부인, 두 아들이 하나씩 나눠 읽고 아침을 먹으며 영어로 토론하는 시간이다.
큰 아들(27)은 런던대에서 보건경영학을 공부하다 왔고, 수학에 취미가 있는 작은 아들(20)은 영국의 이공계 명문인 임피리얼 대학에 합격한 상태에서 입국했다. 탈북자 특별전형으로 내년 3월 나란히 국내 대학에 진학할 계획이다.
좋아하던 골프를 그만두게 된 사연도 소개했다. 2004년 처음 영국에 부임할 때만 해도 남북관계에 훈풍이 불던 때였다. 그 덕에 런던 근교 뉴몰든에 사는 한국인 레슨프로로부터 공짜로 코치를 받기도 했다. 그 사실이 한국 언론을 통해 알려지면서 사달이 났다. 평양에서 보도를 접한 김정일 당시 국방위원장으로부터 해명 요구 지시가 떨어진 것. 영국에서 외교활동을 하려면 골프는 필수라는 설명으로 큰 탈 없이 넘어가긴 했지만 더 이상 칠 수는 없었다. 당시 참사관이었던 그는 자신의 상사인 이용호(현 북한 외무상) 대사와 함께 푹 빠질 정도로 한때 골프를 열심히 쳤다. 한국에 와서 그는 골프채를 다시 잡았다
배명복 칼럼니스트 bae.myungbok@joongang.co.kr
■ 북한 엘리트 탈북
■ 2015-05-18 北노동당 간부 탈북 “공포통치 두려웠다”
권력 핵심보직 맡은 중간급 간부
“김정은 숙청에 많은 간부들 떨어… 더는 일할 수 없다고 느껴 南으로”
북한의 최고 지배권력 기관인 노동당의 중간급 간부가 김정은 노동당 제1비서의 공포통치에 두려움을 느껴 탈북한 뒤 한국에 온 것으로 17일 알려졌다. 익명을 요구한 대북 소식통은 “탈북한 노동당 중간급 간부가 한국 정부 당국에 ‘김정은의 통치가 굉장히 공포스러워 많은 간부들이 숙청의 두려움에 떨고 있다. 더는 일할 수 없다고 느껴 탈북했다’고 말했다”라고 전했다. 이 소식통은 “이 간부는 2012년 김정은 집권 이후 통치행위와 이에 대해 당·정·군 간부들이 느끼는 두려움을 충분히 확인할 수 있는 중요 보직에 있었던 것으로 안다”며 “노동당 내부 상황을 자세히 아는 이 간부는 지난해 말 탈북한 것으로 안다”고 덧붙였다.
북한 노동당은 김정은을 정점으로 비서(부총리급)-부장(장관급·비서가 겸직하는 경우 많음)-부부장(차관급·조직지도부와 선전선동부 등 핵심부서는 제1부부장도 있음)-과장(1급 실·국장급)-책임부원-부원 등으로 구성된다. 중간급 간부는 노동당 과장급 정도를 가리킨다. 북한 전문가들은 노동당 중간급 간부가 북한의 다른 모든 기관을 실무적으로 지도하는 핵심적인 역할을 맡고 있다고 보고 있다. 한국으로 치면 고위직으로 볼 수도 있다.
이처럼 다른 기관도 아닌 노동당 중간급 간부가 탈북한 것은 북한의 권력 핵심 엘리트들이 김정은의 공포통치에 느끼는 두려움의 정도가 얼마나 큰지를 보여준다. 숙청에 의한 공포통치는 권력 세습 기간이 짧았던 김정은 처지에서는 권력 안착을 위한 과정이지만 숙청의 대상이 되는 핵심 간부들은 북한을 탈출하고 싶은 생각이 들 정도로 압박을 받고 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이에 앞서 국가정보원은 13일 “북한이 최고위급 간부들은 물론이고 중앙당 과장과 지방당 비서 등 중간 간부들까지 처형했다”고 밝혔다.
윤완준 기자
■ 2015-07-04 “北인민군 상장 탈북-망명”
남북 국방장관회담에서 북측 차석대표로 참석했던 고위 장성이 탈북한 것으로 알려졌다. 채널A는 3일 2000년 1차 남북 국방장관회담 때 북측 차석대표로 제주도에 왔던 박승원 북한 인민군 상장(사진)이 러시아 모스크바의 제3국 대사관을 통해 망명했다고 보도했다. 박 상장은 과거 러시아에 근무한 적이 있으며 4월 탈북을 감행했으며 한국 정부는 최근 박 상장의 신병을 인수한 것으로 전해졌다. 북한군 상장은 한국군 중장에 해당한다.
박 상장은 지난해 마식령스키장 건설에 세운 공이 크다며 북한 정부로부터 노력영웅 칭호와 금메달, 국기훈장 제1급을 받았을 만큼 능력을 인정받았다. 탈북 배경과 관련해 채널A는 “지난해 연말을 기해 건설 현장을 함께 담당하던 마원춘 국방위원회 설계국장이 숙청되는 등 공포정치가 계속되자 탈북을 결심한 것으로 보인다”고 보도했다.
마원춘은 2013년 11월 김정은 북한 노동당 제1비서와 백두산 삼지연을 방문해 ‘삼지연 8인방’으로 불릴 만큼 잘나가던 인사였으나 평양 순안공항 신청사를 지시대로 짓지 못한 혐의로 숙청돼 공식 석상에서 자취를 감췄다. 올해 4월 현영철 인민무력부장이 회의석상에서 졸았다는 이유로 무참히 처형되는 등 공포 분위기가 만연한 것도 영향을 미친 것으로 추정된다.
2000년 당시 남북 국방장관회담 남측 대표단으로 박 상장을 상대했던 인사는 “박승원은 주러 북한대사관에서 무관으로 근무했으며 그의 딸은 모스크바에서 의대를 다닌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정부 당국자는 동아일보와 한 통화에서 “사실관계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이 없다”며 보도 내용을 확인하지 않았다.
조숭호 기자 shcho@donga.com
■ 2015-07-08 “北 보위부-조직지도부 등 핵심간부 최소 5명 탈북 - 한국 망명”
북한 김정은 정권 유지에 핵심 역할을 하는 정찰총국, 국가안전보위부, 노동당 조직지도부와 연계된 해외사업 기관의 주요 간부들이 잇따라 탈북해 한국에 망명한 것으로 알려졌다.
익명을 요구한 대북 소식통은 7일 “국가안전보위부 소속으로 대남(통일전선) 업무를 맡아 남북회담에 나왔던 실세 A, 노동당 조직지도부와 연계된 해외사업 기관의 B, 정찰총국에서 해외공작을 담당한 C를 포함한 핵심 간부들이 탈북했다”라고 밝혔다. 이들은 대부분 지난해 탈북해 올해 한국에 왔으며 최소 5명에 이른다. 대부분 부부장(차관급) 바로 아래 국장급 핵심 간부다.
국가안전보위부는 북한의 권력 엘리트를 감시하는 비밀경찰기관이고 당 조직지도부는 당과 국가 핵심 기구를 통제하는 핵심 권력기관이다. 국가안전보위부와 당 조직지도부는 김정은 체제를 지탱하는 양대 핵심 축으로 볼 수 있다. 이들 조직은 김정은의 고모부 장성택이나 현영철 인민무력부장 처형 등 ‘김정은 공포통치’의 행동대장 역할을 해 왔다. 조직지도부 등 핵심 기관들은 산하에 해외 외화벌이 기관을 운영한다. 정
찰총국은 대남·해외 공작을 총괄 지휘하는 기관으로 지난해 미국 소니픽처스 해킹의 배후로 지목됐다. 이처럼 김정은 체제를 지탱하는 권력기관이나 이 기관들의 산하 기관 핵심 간부들이 한국에 망명한 것이다. 대북 소식통은 “이들은 모두 비리나 부패가 아니라 김정은의 공포통치가 두렵고 신변에 위협을 느껴 탈북했다고 우리 정부에 진술한 것으로 안다”며 “북한의 간부들이 지시 불이행 등으로 체포되거나 숙청될 수 있다는 두려움 때문에 만일에 대비해 탈출하기 위한 용도로 달러를 모으고 있다고 한다”고 전했다.
이들은 모두 북한과 해외를 오가다 탈북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처럼 외국에 드나드는 간부들이 탈북하자 북한은 해외에 나가 있는 노동당과 군부 산하 외화벌이 등 해외사업 기관 전체를 대상으로 대표 등 핵심 인사들을 평양에 소환해 대대적인 사상 조사를 벌이고 있다고 다른 대북 소식통이 전했다. 이 사상 조사는 지난해 7∼9월에 집중된 뒤 올해에도 이어지는 것으로 알려졌다. 사상 조사 대상에는 해외에 주재하는 대사관 직원도 포함됐다고 한다. 통일부 당국자도 7일 “북한이 해외에서 근무 중인 외화벌이 일꾼들을 점검하는 동향이 있는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울릉도 근해서 北선박 구조… 선원 5명 중 3명 귀순 의사
한편 해양경비안전본부는 4일 울릉도 근해에서 침수 중이던 북한 선박에서 선원 5명을 구조했으며 이들 가운데 3명이 남쪽으로 귀순하겠다는 뜻을 나타냈다고 통일부가 밝혔다. 남측은 6일 대한적십자사 총재 명의의 대북 전화통지문을 통해 북한 선원 구조 사실을 알리고 북한으로 돌아가기를 원하는 2명을 송환하겠다고 통보했다. 하지만 북측은 7일 선원 5명 전원을 돌려보내라고 주장했다. 남측은 관례에 따라 귀순 희망자 3명에 대해 본인 의사를 존중해 처리하고, 북한으로 돌아가기를 원하는 2명은 조속한 시일 내 판문점을 통해 송환하겠다고 북측에 재차 통지했다.
윤완준 기자 zeitung@donga.com
■ 2016.04.11 북한 정찰총국 대좌, 한국 망명…탈북 북한軍 출신 최고위급
대남 공작 업무를 담당하는 북한 정찰총국 출신의 북한군 대좌(우리의 대령급)가 지난해 탈북해 한국으로 망명한 것으로 11일 알려졌다. 국방부 문상균 대변인은 이날 정례 브리핑에서 정찰총국에서 대남공작을 담당하던 A대좌의 탈북에 대한 언론보도와 관련한 질문에 “그런 사실이 있다”고 공식 확인했다.
문 대변인은 그러나 “인적 사항 등 구체적인 내용은 설명해 줄 수 없다”고 덧붙였다.
정찰총국의 대좌는 인민군 일반부대의 중장(별 2개·우리의 소장)급에 해당하는 직위로, 북한군 장성이 탈북해 국내에 입국한 사례는 아직 없는 것으로 알려졌다.
북한 정찰총국 대좌의 한국 망명 사실이 11일 알려졌다.
앞서 한 대북 소식통은 "A 대좌는 지금까지 인민군 출신 탈북민 중 최고위급으로, 북한 정찰총국의 대남공작 업무에 대해 상세히 진술한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고 연합뉴스가 보도했다.
정찰총국은 김양건 노동당 비서의 후임으로 대남담당 비서와 통일전선부장을 맡게 된 김영철이 이끌던 조직이다.
북한은 2009년 2월 대남·해외 공작업무를 총괄하기 위해 기존 인민무력부 산하 정찰국과 노동당 산하 작전부, 35호실 등 3개 기관을 통합해 정찰총국을 신설했고, 군부 강경파로 알려진 김영철을 당시 정찰총국장에 임명했다.
정찰총국은 편제상 총참모부 산하 기관이지만 김정은 노동당 제1비서에게 직보하는 북한 인민군의 핵심 조직이다.
북한 '김정은 체제' 출범 이후 북·중 접경지역에 대한 통제가 강화되면서 탈북자 수는 감소했지만, 북한 엘리트층의 탈북은 오히려 늘어난 것으로 전해졌다.
한편 통일부 역시 정례브리핑을 열어 지난 8일 발표한 북한 해외 식당 종업원 집단탈북 사혜와 정찰철국 대좌 탈북은 결이 다르다는 점을 강조했다. 정부의 정치 개입 의도도 없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정준희 통일부 대변인은 정례브리핑에서 "집단탈북 사실을 신속하게 공개한 것은 직장 동료가 집단으로 탈북한 사실이 굉장히 이례적이고, 젊은 사람이 한꺼번에 모여서 왔다는 것 자체가 굉장히 의미 있기 때문"이라며 "대북제재 국면에서 이런 현상이 나왔다는 것이 또 의미가 있다"고 강조했다.
주희연 기자
■ 2016.05.28 "집단 탈북 女종업원 중 北 최고가수인 인민배우 최삼숙 딸도 포함" RFA 보도
▲연합뉴스
지난달 초 중국 저장성(浙江省) 닝보(寧波) 류경(柳京)식당에서 근무하다 집단탈북한 종업원 13명 중 북한 최고 가수로 알려진 인민배우 최삼숙의 딸이 포함됐다고 미국 자유아시아방송(RFA)이 27일 보도했다.
보도에 따르면 북한은 대남(對南) 선전 웹사이트 ‘우리민족끼리’를 통해 지난 25일 “식당 종업원들이 남한 정보당국에 의해 강제유인 납치됐다”며 이들의 구명을 요청하는 ‘인신구제신청서’를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민변) 앞으로 보냈다.
공개된 인신구제신청서에는 북한에서 최고 인기를 누렸던 인민배우 최삼숙의 이름도 포함됐다. 신청서에 따르면 최삼숙의 딸은 리은경씨로, 1979년 1월 23일 생이다.
신청서엔 최삼숙의 출생일은 1951년 6월 15일, 거주지는 평양시 동대원구역으로 기재돼 있다.
최삼숙의 생일은 이미 한국에 널리 알려진 날짜와 똑같고, 거주지 역시 동일한 것으로 알려져 동일인으로 파악되고 있다고 RFA는 전했다. 평양 출신 고위 탈북자는 이날 RFA에 “현재 최삼숙은 평양시 동대원 구역에 거주하고 있으며, 그의 언니는 남한에 살고 있다”고 말했다.
이 탈북자는 “최삼숙은 1970년대와 80년대 김옥선과 함께 인민배우로 최고의 인기를 누렸다”면서 “이런 최삼숙의 딸이 남한으로 귀순했다는 사실이 (북한)주민에게 알려지면 파장이 클 것”이라고 말했다.
북한 통일신보에 따르면 최삼숙은 1971년 김정일 국방위원장에게 발탁돼 혁명가극 ‘꽃파는 처녀’ 주인공 역할을 맡았다. 그는 평양방직공장에서 공장예술소조원으로 활동하던 중 뛰어난 예술기량을 인정받아 평양영화음악단 가수로 입단했으며, 활동기간 예술영화 ‘열네번째 겨울’과 ‘도라지꽃’ 주제가를 비롯해 약 3000곡의 노래를 불렀다.
북한 당국은 남한 출신인 최삼숙의 성공 과정을 담은 예술영화 ‘금희와 은희 운명’을 만들어 체제 선전에 이용하 기도 했다.
지난달 7일 입국한 북한 종업원들은 현재 40일 넘게 보호센터에 머무르며 외부에 공개되지 않고 있다. 민변은 최근 이들에 대한 변호인 접견 신청을 했지만, 국정원은 “귀순자는 구금된 형사 피의자도 아니고 난민도 아니다”는 이유로 거부했다.
현재 북한은 이 사건을 일반 주민들이 볼 수 없는 우리민족끼리 등 대외 선전 매체를 통해서만 다루고 있다.
주희연 기자
■ 2016.05.30 4월 脫北종업원에 북한 인민배우 최삼숙 딸도 포함
지난달 초 중국에서 집단 탈출한 북한 식당 종업원 13명 가운데 북한의 유명 가수 겸 배우 최삼숙의 딸이 포함된 것으로 보인다고 자유아시아방송(RFA)이 28일 보도했다. 종업원 부모들이 이들의 '구명'을 요구하며 서명한 문건에 최씨 이름이 나온다는 것이다.
북한의 인터넷 매체 우리민족끼리는 지난 25일 "남조선 당국에 의해 납치된 우리 여성 종업원들의 가족들이 딸자식들의 송환을 위해 남조선의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민변)에 인신구제신청 위임장을 발송했다"며 가족들을 공개했다. 이 가운데 종업원 리은경(37)의 어머니로 기재된 이름이 최삼숙이다. 위임장에 적힌 최삼숙의 생년월일(1951년 6월 15일)과 주소(평양시 동대원구역 신리동)는 우리 정보 당국이 파악한 인민배우 최삼숙의 것과 일치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북한 화폐 1원짜리에 인쇄된 '꽃파는 처녀'
김정일이 발탁한 혁명가극
'꽃파는 처녀' 여주인공 맡아
개성에서 태어난 최삼숙은 평양방직공장에서 예술소조원으로 활동하다 평양영화음악단 가수로 입단했다. 1971년 김정일에게 발탁돼 혁명 가극 '꽃파는 처녀' 주인공을 맡았고, 20년 이상 인민배우로 활동하며 영화 '도라지꽃' 주제가 등 약 3000곡을 불렀다. 한 고위 탈북자는 RFA에 "최삼숙은 1970~80년대 김옥선과 함께 인민 배우로 최고의 인기를 누렸다"며 "최씨 딸이 남한으로 귀순했다는 사실이 주민들에게 알려지면 파장이 클 것"이라고 말했다.
한편 아프리카 순방 중인 박근혜 대통령은 이날 우간다 동포 간담회에서 "지금 (북한) 민생이 너무너무 어렵다 보니까 중국에서 13명이 가족이 아닌데도 하나가 되어 한꺼번에 탈북을 했다"며 "여러 나라에 외화벌이로 가 있는 북한 근로자들이 자꾸 이탈을 해가면서 어려움을 도저히 더 견딜 수 없는 그런 상황"이라고 했다.
▲북한이 해외에 파견한 식당에서 근무하던 지배인 1명과 여성종업원 12명이 집단 탈북해 4월7일 국내에 입국하고 있다. /통일부 제공
■ 2016-07-29 “北 인민무력부 소장, 김정은 상납자금 450억원 갖고 탈북”
북한군 장성급 인사가 7월 중순 탈북한 것으로 알려진 가운데, 이 인사는 우리의 국방부격인 인민부력부 소속으로 우리 군의 준장급인 소장 계급인 것으로 전해졌다.
특히 이 인사는 김정은에게 상납해야 할 4000만 달러, 우리 돈으로 약 450억원 가량의 거액을 가지고 탈북한 것으로 알려졌다.
29일 KBS 보도에 따르면, 이 인사는 동남아와 중국 남부 지역의 북한 식당과 건설 현장에서 벌어들인 외화를 노동당 39호실로 보내는 업무를 담당했다.
이 소식을 전한 대북 소식통은 이 인사 일행이 중국 내에서 제3국행을 기다리고 있다고 전했다. 다만, 이 같은 거액을 어떻게 빼돌렸는지, 지금은 어떻게 보유하고 있는지 등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알 수 없다고 대북 소식통은 전했다.
이번 북한군 장성급 인사의 탈북을 놓고는 엘리트 계층의 탈북이 가속화되는 것 아니냐는 관측이 나온다.
북한의 해외 파견 근로자들과 수학영재 등 이른바 북한의 '상류층' 이탈이 계속되고 있는 탓이다. 이전 탈북의 원인인 경제적인 이유와는 상반되는 것이다.
이에 따라 이들의 탈북에 북한 체제에 대한 반발과 불만 등이 크게 작용했다는 분석이 나온다. 다만 이와 관련해 정부 관계자는 "현재까지 확인할 수 있는 내용은 없다"고 밝혔다.
(서울=뉴스1)
■ 2016.08.03 엘리트층도 짐쌌다… 4년 만에 脫北 증가세
[올 7월까지 815명 한국 입국… 작년보다 15.6% 증가]
- 주민들, 김정은에 실망감 커지고
공포 정치 계속… 삶은 더 피폐 - 엘리트층, 대북 제재 직격탄 맞아
외화벌이 일꾼에 상납금 압박… 식당 종업원 연쇄 탈출로 이어져
소문 퍼지며 중산층 동요 커져
북한 김정은 집권(2012년) 이후 급감하던 국내 입국 탈북자 수가 4년 만에 증가세로 돌아섰다. 2일 통일부에 따르면 올해 들어 지난달 말까지 입국한 탈북자는 815명(잠정)으로 작년 같은 기간에 비해 15.6% 증가했다. 이는 김정은 정권에 가졌던 북한 주민들의 기대가 실망으로 바뀌고, 대북 제재로 경제 상황이 악화했기 때문이란 분석이다. 특히 올해는 김정은 체제를 떠받치는 엘리트층의 탈북이 두드러지며 생계형 탈북이 주를 이루던 과거와 차이를 보이고 있다.
◇북, 강력한 탈북 단속 펼쳤지만…
국내 입국 탈북자 수는 2006년 이후 연간 2000명 밑으로 떨어진 적이 없다가 김정은 집권 첫해인 2012년 1502명을 기록했다. 전년도에 비해 45.5% 급감한 수치다. 작년에는 1276명까지 줄어들었다. 이는 김정은이 집권 직후부터 강력한 탈북자 단속 정책을 폈기 때문이다. 국경지역 경비 강화는 물론이고 탈북자 가족 추방과 탈북 방조자에 대한 처벌도 강화했다.
이와 함께 한국에 정착한 탈북자들을 겨냥한 '재입북 공작'도 이뤄졌다. 2012년 6월 탈북자 박정숙씨가 북에 남은 아들을 인질로 잡은 북한 당국의 협박 전화를 받고 재입북하는 등 수십명의 탈북자가 북으로 돌아갔다. 안보 부서 관계자는 "북한은 재입북 기자회견을 열어 한국의 현실을 왜곡하는 동시에 '배신자까지 품는 김정은의 은혜'를 대대적으로 선전해 주민들의 탈북 의지를 꺾어왔다"며 "하지만 재입북자 대부분이 결국 오지나 수용소로 추방되는 등 가혹한 처벌을 받고 있다"고 말했다.
◇주민·엘리트층 탈북 행렬
탈북자가 올해 증가세로 돌아선 배경에 대해 정부 당국자는 "김정은 통치에 대한 실망 때문"이라고 했다. 김정은 집권 초기 새로운 지도자에 대해 가졌던 주민들의 기대감이 집권 5년 차를 맞으며 무너지고 있다는 것이다. 정부 관계자는 "거듭된 도발로 국제 제재를 자초해 삶은 더 어려워지는 데다 공포 정치는 끝날 기미가 안 보이는 상황이 탈북 의지에 다시 불을 붙이는 것"이라고 했다.
거기에 북한 내 엘리트층으로 분류되는 해외 외화벌이 일꾼들은 올해 초 4차 핵실험 이후 전방위 국제 제재로 '돈줄'이 막히면서 직격탄을 맞았다. 이들은 충성 자금 등 과도한 상납금 압박에 시달리는 데다 제재까지 더해지자 더는 버티지 못하고 체제를 이탈하기 시작했다. 지난 4월 중국 저장성 닝보의 북한 식당에 근무하던 종업원(12명)과 지배인(1명)이 집단 귀순한 것이 신호탄이었다. 6월에는 중국 산시성의 북한 식당 종업원 3명도 국내에 들어왔고, 비슷한 시기 랴오닝성 둥강의 공장에서 일하던 북한 여공 8명이 탈출했다는 외신 보도도 나왔다. 이들은 대부분 평양 출신이며 당 간부나 중산층 이상 가정의 자제들인 것으로 알려졌다.
◇흔들리는 북한의 해외 근로자
북한 중산층 및 엘리트층의 연쇄 탈북은 김정은이 자초한 측면이 강하다. 정통한 대북 소식통에 따르면, 김정은은 집권 직후인 2012년 초 "한두 놈 도망쳐도 상관없으니 외화벌이 노동자를 최대한 파견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한국의 금강산 관광 중단과 5·24 대북 제재가 장기화하며 외화 수입이 줄자 이를 해외 노동자 송출 확대로 메우려 한 것이다. 김정은의 지시로 전 세계 40여개국에 걸쳐 3만명 안팎이었던 북한의 해외 노동자는 2~3년 만에 5만~6만명 선으로 급증했다. 최근 탈북 증가에 동요할 수 있는 북한 중산층 및 엘리트층이 과거의 2~3배가 됐다는 얘기다. 정부 당국자는 "전방위 대북 제재 국면에선 돈과 관련한 각종 사고가 빈번할 수밖에 없다"며 "외화벌이 노동자들의 연쇄 탈북이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고 했다.
이용수 기자
■ 2016년 08월 02일 올 입국 탈북자 작년보다 15.6% 증가
1월~7월 815명 잠정 입국
김정은 체제 후 첫 증가세
엘리트층 늘어 불안 관측
南거주 탈북자 3만명 돌파
북한 김정은 노동당 위원장 집권 이후 감소 추세에 있던 국내 입국 탈북자 수가 올해 들어 증가세를 보이고 있다. 탈북자 증가의 배경에는 핵개발 프로그램 강행에 따른 국제사회의 대북제재와 악화된 북한 경제 상황과 맞물려 김정은의 공포정치, 폐쇄정책에 대한 환멸감이 작용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
2일 통일부는 지난 1월부터 7월 말까지 국내에 입국한 탈북자가 815명(잠정치)이라고 밝혔다. 이는 지난해 같은 기간 입국한 705명에 비해 15.6% 증가한 수치다. 2011년 말 김정은 체제 출범 이후 탈북자 수가 늘어난 것은 올해가 처음이다. 2000년대 후반에 2000명을 넘었던 국내 입국 탈북자는 2009년 2914명으로 정점을 찍은 뒤 감소하기 시작했다. 북한 당국이 북·중 접경지역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고, 탈북 방조자에 대한 처벌을 강화하면서 2011년에는 2706명으로 줄었다. 2012년에는 1502명으로 크게 감소했으며 2013년 1514명, 2014년 1397명, 2015년에는 1276명에 머물렀다.
전문가들은 5년 만에 탈북자 숫자가 증가세로 돌아선 것은 북한의 주민 억압과 착취, 경제상황 악화, 해외 파견 노동자들의 동요 등이 주원인이라고 분석한다.
특히 휴대전화, 인터넷, USB 등을 통해 외부사회 정보가 유입되면서 자유와 부(富)를 동경하는 북한 주민들이 늘어났다는 것이다.
통일부 관계자는 “중국에 체류하다 국내로 입국하는 탈북자 숫자가 최근 늘고 있다”면서 “‘직행탈북자’라고 해서 중국에 체류하는 기간이 과거에 비해 짧아지는 추세”라고 말했다.
최근에는 엘리트 계층 탈북도 속출하고 있어 김정은 체제가 불안하다는 관측도 제기된다. 북한인권정보센터(NKDB) 관계자는 “국내 입국 탈북자들 가운데 ‘북한에 있을 때 생활 수준이 중상층 이상이었다’고 답변하는 비율이 최근 늘고 있다”고 말했다. 해외 노동자들의 탈북도 과거에는 연간 1∼2명에 불과했는데 올해는 수십 명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통일부는 국내 거주 탈북자들이 올해 10월 이후 3만 명을 넘어설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한편 미국을 중심으로 하는 국제사회의 대북제재로 북한 최초의 유일한 외국계 법률회사인 ‘조선국제무역법률사무소’가 1일 평양 사무실 업무를 중단한다고 밝혔다.
박정경 기자 verite@munhwa.com
■ 2016.08.16 “영국 주재 북한 외교관, 부인·자녀와 함께 제3국 망명”
영국 주재 북한 대사관의 영사업무 담당 외교관이 이달 초 부인과 자녀를 동반해 탈북 망명한 것으로 파악됐다. 또 러시아 지역에서 활동해온 북한 외화벌이 기관 간부도 비슷한 시기 부인과 함께 망명길에 오른 것으로 드러났다. 이는 최근 잇따르고 있는 북한 엘리트 계층의 이탈 움직임과 맥을 같이하는 것이라 귀추가 주목된다.
러시아서 외화벌이 하던 간부 등 해외체류 엘리트들 잇따라 탈북 대북제재 대응책 등 압박에 부담감 “김정은 격노, 해외 근무자 가족 소환”
대북 소식통은 15일 “영국 주재 북한 외교관의 경우 치밀한 사전준비 끝에 탈북을 결행해 제3국 망명 절차를 밟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며 “북한 대사관 측이 뒤늦게 소재 파악에 나섰지만 추적에는 실패했다고 한다”고 말했다. 이 외교관은 북한 측 영사업무 외에 런던 근교에 정착한 탈북자의 동태 파악과 같은 업무도 맡고 있던 것으로 소식통은 전했다. 영국 주도로 최근 북한의 인권유린 상황에 대한 비판여론이 거세지자 평양으로부터 대응책을 마련하라는 압박을 받아왔고, 부담을 느껴 탈북을 결심했다고 한다. 러시아에 외화벌이를 위해 체류해온 간부의 경우 평양에 보내야 하는 달러 ‘계획분’을 조달하기 어렵게 되자 문책을 걱정해온 것으로 소식통은 설명했다.
이들은 모두 가족을 동반했다. 현지에서 함께 근무하는 부인은 물론 평양에 체류하거나 제3국에 유학 중인 자녀까지 합류시켜 탈북길에 올랐다는 얘기다. 다른 대북 소식통은 “김정은 노동당 위원장이 격노해 해외근무 외교관·무역일꾼 가족들에 대한 소환령을 내렸다”며 “탈북 사고가 발생한 공관장이나 외화벌이 책임자의 경우 처벌 수위가 높아질 것이란 얘기도 나온다”고 말했다.
최근 북한 엘리트 계층의 탈북 사례는 부쩍 늘었다. 홍콩에서 열린 수학올림피아드에 참가했던 18세 북한 수학 영재는 한국총영사관에 진입해 망명을 요청했다. 북한군 총정치국에서 김정은의 외화관리를 담당한 장성급 인사가 거액의 달러를 챙겨 잠적했다는 설도 나왔다. 대남공작 업무를 맡았던 정찰총국 영관급 장교가 한국으로 망명했다는 보도에 대해 우리 관계당국은 사실상 시인하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
해외 체류 북한 엘리트 계층의 탈북 사례는 드러난 것 외에 상당수 더 있다는 게 대북정보 관계자들의 귀띔이다. 유럽 지역의 외교관이나 동남아 무역기관 간부 등 10명 이상의 비공개 탈북 인사들이 한국에 정착해 관계당국의 보호 아래 생활하고 있다는 것이다. 안찬일 세계북한연구센터 소장은 “일반 주민과 달리 해외 생활을 통해 북한 체제의 모순을 알게 되고, 특히 자녀 교육 등을 감안할 때 희망이 없다고 판단해 망명을 택하게 된다”고 말했다.
한국이 아닌 제3국을 최종 망명지로 택한 경우도 적지 않다고 한다. 김정은의 생모인 고영희(2004년 사망)의 동생 고용숙은 미국,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함께 살았던 성혜림의 언니인 성혜랑과 딸인 이남옥 부부는 프랑스에 정착했다. 북한 미사일의 중동 판매 관련 극비정보를 갖고 1997년 탈북한 장승길 전 이집트 주재 대사의 경우 미 정보 당국이 눈독을 들이다 받아들인 경우다. 정부 당국자는 “북한의 타깃이 될 엘리트층의 경우 신변보호 프로그램이 철저한 서방국가를 선호하는 경향이 있다”고 말했다.
한국행 엘리트 탈북자의 유입도 늘고 있다. 윤여상 북한인권정보센터(NKDB) 소장은 “통일부 의뢰를 받아 입국 직후 탈북자 면접조사를 하고 있는데 최근 들어 북한 내에서 엘리트였다고 답하는 비율이 높아지고 있다”고 말했다. 핵·미사일 도발로 인한 국제사회의 대북비판 여론과 대북제재의 여파를 직접 몸으로 느낄 수 있는 점도 엘리트 층의 탈북 망명이 증가하는 배경으로 꼽힌다.
올 들어 국내 정착 탈북자 숫자가 증가세로 돌아선 것도 의미 있는 대목이다. 김정은 위원장은 2012년 집권 이후 탈북자 단속에 집중해왔다. 가혹한 처벌을 하면서도 한국 국적을 얻은 탈북자를 유인 입북시켜 시혜를 베푸는 듯한 유화책도 병행했다. 북·중 접경지대에는 신형 철조망을 둘러치고 폐쇄회로TV(CCTV)를 설치했다. 2011년 2700여 명이던 한국행 탈북자 숫자는 이듬해 1500여 명으로 급감했다. 지속적인 감소로 지난해 1270여 명에 그쳤던 탈북자 숫자는 지난 7월 말 현재 815명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15.6% 늘었다. 통일부는 10월께 국내 정착 탈북자가 3만 명 시대를 맞을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이영종 통일전문기자 yjlee@joongang.co.kr
■ 2016.08.18 김정은 등지고 서울 온 北엘리트
영국 주재 북한 대사관의 태영호(54·사진) 공사가 지난달 가족과 함께 한국에 망명했다고 17일 정부가 밝혔다. 태 공사는 부(副)대사로도 불리는 등 주영 대사관의 2인자 역할을 해왔다. 1997년 북한 미사일 중동 판매 관련 정보를 갖고 망명한 장승길 전 이집트 주재 대사 이후 최고위급 탈북 외교관이다. 함께 망명한 아내 오혜선씨도 김일성의 빨치산 동지였던 오백룡 전 국방위 부위원장의 인척인 것으로 확인됐다.
정준희 통일부 대변인은 이날 기자회견에서 "최근 영국 주재 북한 대사관 태영호 공사가 부인, 자녀와 함께 대한민국에 입국했다"며 "이들은 현재 정부의 보호하에 있으며 유관 기관은 통상적 절차에 따라서 필요한 절차를 진행하고 있다"고 말했다. 탈북 동기와 관련해서 "김정은 체제에 대한 염증, 대한민국 자유민주주의 체제에 대한 동경, 그리고 자녀와 장래 문제 등이라고 밝히고 있다"고 했다. 이날 한때 '태용호'라는 이름으로도 보도가 됐으나 통일부는 "태영호가 맞다"고 밝혔다.
BBC 등에 따르면 태 공사는 지난달 중순 아내, 두 아들과 함께 자취를 감췄다. 덴마크에서 태어난 것으로 알려진 그의 작은아들은 이때부터 학교에 나가지 않았고, 가족의 SNS와 전화도 모두 끊겼다. 태 공사는 당초 미국 등 제3국 망명을 추진하다가 막판에 한국 귀순으로 마음을 돌린 것으로 전해졌다.
▲태영호, 작년 김정철의 에릭 클랩턴 공연 관람때도 동행 - 태영호(오른쪽) 영국 주재 북한 대사관 공사가 지난해 5월 에릭 클랩턴 공연을 보기 위해 런던을 방문한 김정은 위원장의 친형 김정철을 수행하고 있다. 태영호는 지난달 중순 영국에서 망명한 후 한국으로 들어왔다고 통일부가 밝혔다. /JNN
평양국제관계대학과 베이징외국어대에서 공부한 그는 서유럽 전문가로 10년 이상 유럽에서 근무했던 것으로 전해졌다. 영국 대사관에는 4년 전에 부임했다. 영국 정부가 작성한 런던 주재 외교관 명단에는 직급이 '공사(minister)'로 소개돼 있다. 현학봉 대사 바로 아래 차석에 해당한다. 태 공사는 영국 내에서 북한 체제를 선전하거나 미디어에 나온 북한 이미지를 바로잡는 업무를 담당해왔다. 영국 기자들 사이에선 평양 취재를 위해 연락하는 담당자로 잘 알려져 있다. 그는 올여름에 임기를 마치고 평양으로 복귀할 예정이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김명성 기자
태영호 주(駐)영국 북한 대사관 공사는 한국 귀순 이유에 대해 관계 기관 조사에서 김정은 체제에 대한 염증, 자녀와 장래 문제 등을 언급했다고 한다. 이와 함께 최근 영국에서의 북한 인권 문제 제기에 적절히 대처하지 못해 심리적 압박을 받았을 것이란 관측도 나온다. 당초 태영호는 이번 여름 평양으로 복귀할 예정이었다. 외교 소식통은 17일 "복귀할 경우 업무와 관련한 책임 추궁을 당할 것으로 보고 귀국 직전 망명을 택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대사관 선전 일꾼의 망명
▲영국 주재 북한 대사관 태영호 공사가 지난 6월 영국 런던에서 열린 한 토론회에서 6·15 남북공동선언에 대해 발언하고 있다. /연합뉴스
BBC에 따르면 태 공사는 '대사관 차석'으로 선전 업무를 총괄했다. 김정은 체제의 '위대성'을 선전하고 북한에 대한 부정적 보도나 '최고존엄(김정은)' 모욕 등에 신속 대처하는 게 그의 임무였다. 북한 대사관 직원들이 2014년 4월 런던의 한 미용실을 찾아가 항의한 것도 그의 일이었다. 해당 미용실이 김정은 사진에 '머리가 엉망?'(BAD HAIR DAY?)이란 문구를 달아 할인 행사를 벌이자 비상이 걸렸던 것이다. 북한에서는 김정은 등 김씨 일가 사진을 '모욕'하는 걸 좌시하면 중대 범죄로 처벌된다.
2014년 한 연설에선 "(북한에 대해) 더 끔찍하고 더 충격적인 얘기를 쓸수록 영국 대중이 더 많이 본다"고 영국 언론들을 비판하면서도 "기자들을 욕하지는 않겠다. (북한 관련) 기사를 있는 그대로 써도 데스크들이 뜯어고친다"고 말했다. 작년 김정은의 친형 김정철이 에릭 클랩턴 공연 관람차 런던에 왔을 때 그를 밀착 수행하기도 했다.
◇골프·테니스 즐기며 중산층 생활
태 공사와 알고 지낸 BBC의 스티브 에번스 서울·평양 특파원은 16일 '내 친구 탈북자'란 글에서 "태영호를 마지막으로 봤을 때 그는 자신이 좋아하는 런던 서부 액턴의 인도 식당에서 커리를 먹고 있었다"며 그에 대한 기억을 소개했다. 당시 태영호는 밥 없이 커리만 먹었다. 당뇨병 위험이 있어 탄수화물 섭취를 자제하라는 의사의 말 때문이었다고 한다.
에번스 특파원은 태 공사가 말쑥하고 보수적인 전형적인 영국 중산계층으로 보였다고 했다. 태 공사는 테니스 클럽의 신규 회원 모집 광고를 보고 가입해 열심히 활동했다고 한다. 원래는 골프를 좋아했는데 아내가 "골프와 나 중 택일하라" "골프채를 놓지 않으면 평양으로 가겠다"고 하자 테니스로 종목을 바꿨다고 한다.
태 공사는 북한 외무성 내에서 서유럽 전문가로 손꼽혔다. 탈북 외교관들에 따르면, 태영호는 고교 시절 중국 유학으로 영어·중국어를 익혔고, 평양국제관계대학을 졸업한 뒤 외무성 8국에 배치됐다. 덴마크어 1호 양성 통역(김정일 전담통역 후보)으로 뽑혀 덴마크 유학도 했다.
◇아내도 '혁명 1세대' 오백룡 집안 태 공사의 아내 오혜선(50)씨는 김일성의 빨치산 동료였던 오백룡(1911~1984) 전 호위총국장 집안 출신이다. 대북 소식통은 "북에서 가장 성분이 우수한 '혁명 1세대' 후손으로 우리로 치면 금수저"라고 했다. 오백룡의 아들 오금철·오철산 형제는 각각 총참모부 부총참모장, 해군사령부 정치위원을 지냈다. 소식통은 "최근 이들 형제의 계급·지위가 몇 계단 하락했는데 이것이 이번 망명과 관련이 있을 수 있다"고 했다.
태 공사의 자녀들은 현지 공립학교에 다녔다. 아들은 영국의 한 대학에서 평양을 세계적인 도시로 만들려면 장애인 주차 공간을 확충해야 한다는 내용의 연구로 공중보건경제학 학위를 받았다고 한다.
한편 태영호의 이름은 한때 '태용호'로 알려져 혼선이 빚어졌다. 실제 작년 통일부가 발간한 '북한 주요 기관·단체 인명록'에도 태용호란 이름이 나온다. 당국자는 이날 "이번 조사 과정에서 태영호가 본명인 것으로 확인됐다"며 "태용호는 가명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이용수 기자 외
■ 201608.19 北 유럽자금총책, 4000억 들고 잠적
유럽 한 국가서 20년간 자산 관리… 6월 두 아들과 사라져 北 체포 지시
감당못한 태영호 공사 망명한 듯… 제3국 체류하던 자녀 1명은 못 와
북한의 유럽 내 노동당 자금 총책이 올해 6월 4000억 원가량의 비자금을 갖고 잠적해 북한당국에 비상이 걸린 것으로 알려졌다. 17일 한국 입국 사실이 공개된 태영호 주영 북한대사관 공사의 망명도 이 사건과 무관치 않은 것으로 보인다.
유럽의 한 대북 소식통은 18일 “노동당 39호실 대성지도국 유럽지국 총책임자인 김명철(가명) 씨가 유럽의 한 국가에서 두 아들과 함께 6월에 잠적했고 극비리에 현지 당국의 보호를 받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또 “김 씨가 관리하던 자금은 유로와 파운드, 달러 등을 모두 합쳐 4000억 원 정도에 이르는 것으로 파악되며 모두 들고 나온 것으로 안다”고 밝혔다. 유럽에서 북한 사상 최대의 당 자금 탈취 사건이 벌어진 것이다. 개성공단이 가동될 때 북한이 1년 동안 남쪽에서 받은 돈이 9600만 달러(약 1062억 원) 정도였음을 감안할 때 북한 지도부가 크게 휘청거릴 만큼의 자금이 사라진 셈이다.
이 소식통은 “김 씨가 이동해 안전한 망명지로 가는 것을 막기 위해 북한에서 특수 요원들을 대거 파견했고, 유럽 내 전체 외교 역량을 총동원해 혈안이 돼 있다”며 “한국을 포함한 서방 국가들도 김 씨를 망명시키기 위해 극비리에 뛰어들었다”고 밝혔다.
김 씨는 해당 국가에 20년 동안 살면서 북한의 유럽 내 자산 관리를 총괄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 때문에 북한의 유럽 내 자금 흐름을 잘 알고 있고, 김정은 일가가 유럽에서 어떤 방식으로 돈을 은닉해 오고 사치품을 조달하는지 등을 소상히 파악하고 있을 것으로 보여 북한 체제에 큰 타격을 줄 것으로 보인다.
북한의 유럽 내 최고위급 외교관 중 한 명인 데다 김정은 가문의 ‘집사’ 역할을 해왔던 태 공사도 김 씨를 체포하라는 등의 지시를 받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태 공사가 이를 감당하기 어려워 본국 소환 뒤 처벌을 피하기 위해 가족과 함께 망명을 선택했을 가능성이 높다. 태 공사의 가족 중 1명은 긴박한 탈출 과정에서 함께 한국으로 들어오지는 못한 것으로 알려졌다. 대북 소식통은 “영국이 아닌 제3국에 체류하던 자녀는 아직 현지에 있는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주성하 zsh75@donga.com
■ 2016.08.22 北 김정은 서기실 여론조사팀 간부 탈북…이미 입국
북한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내부 동향을 파악하기 위해 서기실 내에 만든 여론조사팀의 한 간부가 최근 탈북해 한국에 이미 들어와 있는 것으로 22일 알려졌다.
북한 사정에 정통한 소식통에 따르면 북한은 2013년 4월 우리 정부의 '적대행위'를 빌미로 개성공단 근로자를 철수시키고, 폐쇄 수순을 밟은 직후 노동당 서기실 내에 여론조사팀을 만들어 개성공단 폐쇄로 인한 실익을 계산하기 위해 다양한 여론을 조사했다.
북한은 당시 여론조사팀에 40여명을 포진시켜 개성공단 가동 중단이 북한에 미치는 영향 등을 조사했으며, 특히 경제적인 측면에서의 변화를 면밀히 관찰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북한 당국에 취합된 보고서들은 개성공단 가동 중단으로 평양에 생필품과 식료품 공급이 차질을 빚은 탓에 북한 전체 물가가 30%가량 상승했다는 내용을 담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 때문에 개성공단 중단에 대한 평양 주민들의 여론이 좋지 않다는 내용이 주를 이뤘던 것으로 전해졌다.
이 소식통은 "김정은이 당시 여론조사팀을 통해 올라온 보고를 받고 개성공단 가동 중단에 대한 입장을 바꾸고 재가동 협상에 응했던 것으로 안다"며 "당시 김정은으로서는 북한체제를 완벽하게 장악하지 못했던 상황이었던 만큼 이러한 내부 불만을 마냥 무시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라고 말했다.
현재 한국에 들어와 당국의 보호를 받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 인물은 서기실 여론조사팀의 과장급 간부다. 그는 김정은에게 개성공단 관련 보고를 주로 올렸던 임무를 맡았던 것으로 전해졌다.
그의 탈북에 이은 한국 망명은 최근 증가하고 있는 2세대 엘리트들의 탈북 러시와도 궤를 같이한다. 예전에는 '경제적 이유'로 탈북을 결심하는 사례가 대다수였으나, 최근 들어서는 체제에 대한 불만과 당국의 감시·위협 등을 이유로 북한을 등지는 사례가 늘어나고 있다.
이는 수치로도 확인된다. 국가정보원이 지난해 국정감사에서 밝힌 해외 북한 주재원들의 탈북 동향을 보면 2013년 한 해 8명에 그쳤던 탈북 해외 주재원은 2014년 18명으로 급증했다. 지난해에도 10월까지 북한 해외 주재원 20명이 한국을 택했다.
이들은 출신성분 만으로도 북한에서의 미래가 보장됐던 자신들과 달리 자녀들의 경우 북한에서 미래가 보장되지 않는다는 점 등을 우려해 가족과 함께 탈북을 결심하는 경우가 많은 것으로 전해졌다. 이달 초 국내에 입국한 태영호 주영 북한 공사도 가족과 함께 탈북했다
글 | 뉴시스
■ 2016.10.05 김정은 건강 챙기던 간부 베이징서 탈북
중국 베이징(北京) 주재 북한 대표부 소속 고위 간부 2명이 지난달 말 가족과 함께 탈북·망명길에 나섰다고 대북 소식통이 4일 전했다.
중국서 약품·의료장비 조달 맡은 보건성 실세 포함 대표부 소속 2명 9월말 일본 대사관에 망명 요청
“가족들 동반 동시 탈북…북 대사관 발칵 뒤집혀”
대북 소식통은 이날 “베이징 대표부에서 대표 직함으로 활동해 온 북한 내각 보건성 출신 실세 간부 A씨가 지난달 28일 부인·딸과 함께 자취를 감췄다”며
“이들 가족은 주중 일본대사관 측과 접촉해 일본행을 위한 절차를 밟은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A씨는 일본에 친척이 있다는 점을 들어 서울보다 도쿄(東京)로 가겠다는 뜻을 밝혔다고 한다.
A씨는 김정은 북한 노동당 위원장과 그 가족의 전용 의료시설인 평양 봉화진료소와 남산병원(간부용)·적십자병원을 관장하는 보건성 1국 출신이다. 김정은의 건강과 관련한 약품과 의료장비의 조달, 도입 문제를 담당해 왔다고 소식통은 설명했다. 소식통은 “거의 같은 시기 베이징 대표부 간부인 B씨도 가족과 동반 탈북했다”며 “B씨도 일본행을 희망하고 있어 중국과 일본 당국이 이들의 신병 처리를 위한 교섭을 벌인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한국 관계당국도 이 같은 상황을 파악해 서울행에 공을 들이고 있는 상황이라 최종 망명지는 아직 유동적이라고 소식통은 덧붙였다.
대표부 간부는 대사관 소속 외교관은 아니지만 주재국에 상주하며 무역·경협 분야 등의 교류 및 협력 업무를 담당한다. 탈북한 A씨와 B씨는 모두 가족과 함께 북한대사관 사택 구역에서 생활했다고 한다.
정부 당국자는 “베이징의 경우 북한 특권층의 핵심 간부가 근무지로 가장 선호하는 곳”이라며 “북한 외교의 심장부인 베이징에서 탈북·망명 사태가 터졌다는 점에서 평양 당국의 충격은 클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대북 소식통도 “대표부 고위 간부 2명이 거의 동시에 탈북·망명하는 초유의 사태가 터져 주중 북한대사관은 발칵 뒤집힌 상황”이라고 현지 분위기를 전했다.
특히 지난 7월 말 영국 주재 북한대사관 태영호 공사의 한국 망명 두 달 만에 또다시 엘리트 간부의 체제 이탈이 벌어졌다는 점에서 당혹해하는 모습이라고 소식통은 설명했다. 김정은은 태영호 사태 직후 해외 체류 외교관과 주재원, 가족 등에 대한 대대적인 검열과 소환을 포함한 특별 대책을 지시한 상태다.
◆박 대통령 탈북 언급 관련 있는 듯=박근혜 대통령이 최근 북한 엘리트 이탈과 탈북을 잇따라 언급한 것도 이런 베이징 탈북·망명 사태를 염두에 둔 것이란 분석이 나온다. 지난 1일 박 대통령은 68주년 국군의날 기념사에서 북한 주민들을 향해 “언제든 대한민국의 자유로운 터전으로 오라”고 말했다. 이에 북한은 3일 노동신문을 통해 “탈북을 선동하는 미친 나발짓(헛된 소리)”이라며 격한 반응을 보였다.
이영종 통일전문기자 yjlee@joongang.co.kr
■ 2016.10.06 탈북 보건성 간부의 독백…내러티브 리포트
공기가 맑다. 중국 베이징의 탁한 공기와는 비교가 안 되는구나. 지난달 말, 나는 나고 자란 조국,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등졌다. 지금은 서울의 모처에서 조사를 받고 있다. 남조선의 가을 하늘은 이리 높고 푸르건만 마음은 복잡하다. 그래도 아내와 딸이 함께 올 수 있어서 천만다행이다. 이젠 대한민국이 내 새 삶의 터전이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우리 가족이 이곳 남조선에 있으리라곤 생각도 못했지만.
내가 탈북을 결심한 것을 두고 지난 5일 청와대 정연국 대변인이 “북한 정권 내부의 최측근이 탈북하는 것이기 때문에 크게 주목하고 있다”고 했다. 그런 말이 나올법도 하다. 나는 내각 보건성 보건1국 출신이다. 보건1국은 핵심 중의 핵심 부서다. 김정은 노동당 위원장 동지와 부인 이설주 동지, 여동생 김여정 동지의 전용 의료시설인 평양 봉화진료소는 물론 간부와 그 가족이 이용하는 남산병원을 관장한다. 내각 안에선 어깨에 힘 좀 주고 다녔다. 평양에선 “중국에 가서 1~2년 쉬다 오라우”라면서 날 베이징으로 보내줬다. 해외 근무는 아무나 누릴 수 없는 특혜다. 하지만 나와보니 솔직히, 마음이 흔들렸다. 같은 사회주의 체제인데 중국은 달랐다. 딸에게 좀 더 나은 삶을 살게 해줘야 하지 않을까, 아버지로서 그런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러다 지난 8월엔 영국 대사관의 태영호 공사가 남조선으로 망명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태 공사가 누군가. 조선의 영웅인 항일빨치산 가문 소속이다. 엘리트 중의 엘리트가 아들 교육 문제 등으로 고민하다 큰 결심을 했다니. 내 마음도 요동쳤다.
베이징에서 내가 맡았던 업무는 공화국에서 구하기 힘든 의약품을 구매하는 거였다. 일종의 무역일꾼이었던 셈이다. 하지만 올해 공화국에서 4차 핵실험(1월6일)에 이어 5차 핵실험(9월9일)을 하면서 상황이 많이 달라졌다. 국제사회가 대북 제재란 끈을 조여왔고 평양에선 이런 저런 요구가 더 많아지고 세지기 시작했다.
공화국의 베이징 대사관은 아마 발칵 뒤집혔을 터다. 베이징은 공화국 외교의 심장부다. 이런 곳에서 다름 아닌 김정은 위원장 동지의 건강 관련 업무를 맡았던 내가 망명을 했으니 난리가 났을 거 아닌가. 안가에 있어 잘은 모르지만 내가 망명을 결심한 이유에 대해서 여러 설도 나오고 있을 것이다. 평양에서 대금은 주지 않으면서 구매해 보내라는 의약품이 엄청 많았을 것이라는 얘기부터 나 역시 외화상납금 독촉을 받아 체제에 대한 환멸을 느꼈을 것이라는 얘기 등등…. 일부에선 내가 김정은 일가의 건강을 위한 연구를 맡은 장수연구소에 근무한 적이 있다고도 했다. 진실은 차차 밝혀질 것이다. 지금 딛고 있는 이 땅이 아직은 많이 낯설다.
내가 망명을 결심한 며칠 뒤인 1일 남조선, 아니 대한민국의 박근혜 대통령은 국군의 날 기념사에서 이렇게 말했다. “북한 주민 여러분들이 희망과 삶을 찾도록 길을 열어 놓을 것이다. 언제든 대한민국의 자유로운 터전으로 오시기를 바란다”고. 이 발언이 지금 국회에선 논란이 되고 있다지만, 앞으로도 태 공사와 나 같은 이들은 계속 이어지지 않을까. 나와 비슷한 시점에 베이징 대표부에서 또 다른 간부도 탈북을 결심해 실행에 옮겼다고 들었다. 더 나은 삶을 위한 열망은, 아니 권리는, 인간이라면 누구에게나 있다.
전수진 기자 chun.sujin@joongang.co.kr
※지난달 탈북한 보건성 보건1국 관리의 시점으로 작성한 기사입니다.
■ 2016.10.06 北 '金氏왕조 장수연구소' 출신, 韓國 귀순
베이징 北대사관의 보건성 간부
평양 고위층 약품공급 맡아오다 지난달 가족과 함께 탈출 서울로
재일교포 집안 출신인 듯… 엘리트층 체제 환멸, 동요의 증거
중국 베이징 주재 북한 대사관에 근무하던 보건성 소속 간부가 지난달 말 가족과 함께 탈북해 최근 서울에 들어온 것으로 5일 알려졌다.
중국의 대북 소식통은 이날 "베이징에서 평양으로 약품과 의료기기 등을 공급하던 보건성 간부가 지난달 말 북한 대사관을 탈출한 것으로 안다"며 "그는 북한에서 생산되지 않는 약품 등을 구매해 북한 고위층이나 특수 계층을 위한 병원에 제공하는 '무역 일꾼' 역할을 했다"고 말했다.
특히 이 간부는 김정은 등 김씨 일가의 건강을 연구하는 평양 '장수연구소'에서 근무한 적이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장수연구소는 김일성·김정일 시대 만수무강 연구소로 불리다가 김정일 사망 이후인 2012년 초 현재 명칭으로 개명한 것으로 전해졌다. 북한 해외 공관에 근무했던 한 탈북자는 "김정은이 사용하는 의약품은 서기실(비서실)이 직접 사람을 외국에 보내 구입한다"며 "평양 봉화진료소는 김씨 일가와 장관급 이상, 평양 남산병원은 일반 간부와 그 가족이 사용한다"고 전했다. 베이징의 외교 소식통은 "이번에 탈북한 간부는 재일교포 집안 출신인 것으로 안다"며 "이 간부가 일본행을 검토했다는 소문이 돈 것은 일본에 친척이 있기 때문일 것"이라고 했다.
외교 소식통은 이날 "지난 7월 말 영국 주재 북한 대사관의 태영호 공사 일가가 탈북한 이후 북한의 전 해외 공관에는 '탈북 비상령'이 떨어졌다"며 "모든 주재원의 여권을 압수하는 등의 조처를 했는데도 추가 탈북 사례가 나온 것은 김정은 정권의 감시 시스템에 문제가 생겼다는 의미"라고 말했다. 특히 북한 외교의 심장부인 베이징 공관에서 탈북자가 나온 것은 엘리트층을 중심으로 한 북한 체제가 동요하고 있다는 증거라는 분석도 나온다. 베이징의 대북 소식통은 "지금 베이징 북한 대사관은 발칵 뒤집혔다"며 "모두 쉬쉬하지만 '탈북자가 나왔다'는 소문이 하급 직원까지 퍼진 상태"라고 했다.
이 간부의 탈북 이유와 관련, 외교관 출신 탈북자는 "보건성 간부라면 평양에서 사달라고 요구받는 의약품이 엄청나게 많을 것"이라며 "약품을 보냈는데 대금을 제대로 받지 못하거나, 돈도 주지 않고 약품만 빨리 보내라고 채근하는 일을 반복적으로 당하면서 체제에 환멸을 느꼈을 것"이라고 말했다. 최근 대북 제재로 평양의 '돈줄'이 마르면서 이 간부는 '상납금을 올려 바치라'는 독촉도 많이 받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귀국을 앞둔 간부라면 자녀 교육 문제도 탈북 동기가 된다.
청와대 관계자는 이날 "북한 정권 내부의 최측근이 탈북하는 것이기 때문에 크게 주목하고 있다"고 했다. 박근혜 대통령은 지난 1일 국군의 날 기념사에서 "북한 주민 여러분들이 희망과 삶을 찾도록 길을 열어 놓을 것"이라며 "언제든 대한민국의 자유로운 터전으로 오시기를 바란다"고 했다. 사실상 북한 주민들의 탈북을 촉구한 것이다.
朴대통령 '한인의 날' 기념사서 "핵고집 북 경제난에 자멸할 것"
▲세계 韓人의 날’ 기념식 참석한 朴대통령 - 박근혜 대통령이 5일 서울 송파구 롯데호텔월드에서 열린 제10회 세계 한인의 날 기념식 및 2016 세계한인회장대회 개막식에 입장하고 있다. 박 대통령 오른편(사진으론 왼편)으로 주철기 재외동포재단 이사장이 보인다. /뉴시스
박 대통령은 이날 서울 롯데호텔월드에서 열린 제10회 세계 한인의 날 기념식에서도 "북한의 핵 위협이 사라지고 평화통일의 문이 열리면 한반도에 사는 우리뿐만 아니라 720만 재외 동포들과 세계 각국에도 새로운 행복과 번영의 기회가 열리게 될 것"이라고 밝혔다. 이어 "북한이 핵과 미사일에 광적으로 집착할수록 국제적 고립과 경제적 어려움만이 가중될 뿐이며 결국 북한은 자멸에 이를 수밖에 없게 될 것"이라고 했다.
김명성 기자
■ 2016-10-13 탈북 감시단 통역도 탈북
北보위부 검열단 6월 中 파견하자 대사관 통역 담당 여직원 사라져
8월엔 양강도 세관 男통역도 탈북
북한이 엘리트 탈북을 막기 위해 중국에 파견한 국가안전보위부 검열단 통역요원이 탈북한 것으로 알려졌다. 대북 소식통은 12일 “중국 식당 종업원 13명 탈북 이후 중국 내 북한 근로자들의 동향을 파악하고 탈북 방지 대책을 세우기 위해 파견됐던 검열단의 통역요원이 6월 랴오닝(遼寧) 성 선양(瀋陽)에서 종적을 감췄다”고 전했다.
탈북한 통역요원은 베이징(北京) 주재 북한대사관 직원인 27세 여성으로 알려졌다. 중국 주재 북한대사관 직원이 탈북한 것도 매우 이례적이지만, 그가 보위부 검열단과 함께 일한 뒤 이탈한 것이어서 주목된다. 탈북한 통역요원은 황해도 출신으로 김일성대 중국어과를 졸업한 재원으로 알려졌다. 직책은 높지 않아도 맡고 있던 직책상 북-중 고위급 간에 오간 내밀한 비밀을 적지 않게 알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이 소식통은 “북한에서 대표단이 파견되면 대사관에서 통역 지원이 나가는데, 이 여성이 지원을 나갔던 팀이 탈북 방지를 위해 나온 보위부 검열단이었다”고 말했다. 당시 검열단은 중국 단둥(丹東)과 창춘(長春), 선양 등에 파견된 북한 식당과 공장 근로자들의 실태를 파악하고 추가 탈북을 막기 위한 목적으로 급파됐던 것으로 전해졌다. 통역요원이 사라지자 검열단은 급히 북한으로 귀국한 것으로 알려졌다. 정보당국은 이 요원의 신병 확보 여부에 대해 확인해 주지 않았다.
또 8월 20일경엔 북한 양강도 혜산 세관의 통역요원도 탈북한 것으로 밝혀졌다. 해당 요원은 평양외국어대 중국어과를 나온 20대 후반의 남성으로 현재 한국에 입국했다고 소식통은 전했다. 8월 17일 태영호 주영국 북한대사관 공사의 탈북 사실이 알려진 것이 이 남성의 탈북 결심에 영향을 미친 것으로 추정된다.
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 2016.12.27 태영호 전 공사 "北 낮에는 '김정은 만세', 저녁엔 이불쓰고 한국 영화"
▲태영호 전 주영 북한대사관 공사가 27일 서울 세종로 정부서울청사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발언을 마친 후 만세를 외치고 있다./뉴시스
태영호 전 주영 북한 대사관 공사는 27일 기자 간담회에서 북한 주민의 실상에 대해, “낮에는 김정은 만세를 외치지만 저녁에는 이불 쓰고 한국 영화를 보는 게 현실”이라며 “일반 주민은 물론 저 같은 엘리트층도 기회주의적으로 살고 있다. 그렇게 살아온 것을 부끄럽게 생각한다”고 했다.
태 전 공사는 북한 주민들은 외부 정부로부터 철저히 통제돼 있지만, 외교관이나 당 관료 등 주요 인사들은 한국 뉴스를 면밀히 보고 있다고 전했다. 그는 “북한 외교관들이 아침에 나가서 제일 먼저 컴퓨터에서 열어보는 게 연합뉴스(통신)다. 태영호 저 놈이 한국서 뭐라고 하나 다 본다”고 했다. 또 “주민들도 (TV조선의)모란봉클럽 등 여기 와서 탈북민이 활동하는 것은 다 본다. 가서 어떻게 사는가 궁금한 것”이라고 했다.
태 전 공사는 “만일 어느 순간에 북한에 외부 정보가 유입되는 날 북한은 스스로 물먹은 담벽처럼 무너질 것”이라며 “북한 주민 여러분, 쭈뼛거리지 말고 김정은에 반대해 들고 일어나라. 해외에서 고생하는 주민 여러분, 여러분 손에 탈북 면허증이 쥐어진 순간을 놓치지 말고 어서 빨리 대한민국으로 오십시오”라고 했다.
태 전 공사는 “북한은 고위 엘리트들은 지금 김씨 일가와의 공동체 의식이 없어졌다”고 했다. 그는 “북한은 초기엔 지도자에게 충과 효를 강조하는 선비정신에 기초해 존재하던 사회였으나 김정은 대에 들어와 그 명분과 정체성을 잃었다”며 “김정은 집권 5년이 되는 지금까지 주민들에게 자신이 집권하게 된 명분과 정체성을 명백히 밝히지 못하고 있다”고 했다.
그는 최순실 국정농단과 박근혜 대통령 탄핵을 지켜본 소감을 묻자,
“가슴 아픈 일이지만 다른 한편으론 지금 한국이 세계의 민주화 과정을 새로운 단계로 선두에 서서 끌고 나가고 있지 않나 생각한다”며 “촛불집회 등으로 나라가 끝날 것 같다가도 다시 사회가 가동되는 것을 보고, 시스템이 정말 중요하다는 것을 느꼈다”고 말했다.
[태영호 전 공사 기자회견 전문]
가족들과 함께 탈북했던 태영호 전 주(駐)영국 북한대사관 공사는 27일 오후 서울 세종로 서울정부청사에서 통일부 출입기자단 대상으로 2시간 넘게 간담회를 가졌다. 태 전 공사는 간담회에 앞서 발표한 기자회견문을 통해 “해외에서 자유민주주의 체제의 우월성을 실감하고 한국의 경제발전과 민주화를 목격하며 북한 정권에 미래가 없다는 걸 알았지만 가족과 일가친척 연좌제가 두려워 박차고 나오지 못했다”고 말했다.
다음은 태영호 전 공사가 기자들과 일문일답을 갖기에 앞서 읽은 회견문 전문.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먼저 대한민국 국민들에게 진실을 알리기 위해 밤낮으로 뛰는 기자들에게 경의를 표합니다.(목례) 저는 몇 달 전까지만 해도 김정은 정권을 위해 외교 전선에서 활동한 전 영국 대사관 공사 태영호입니다. 저희 가족이 한국에 온 이후 몇 달간 언론은 북한에서 잘 살던 저희 가족이 왜 한국으로 귀순하였는지 여러 가지로 추정하며 커다란 관심을 표시했습니다.
전 어릴 때부터 유학을 통해 외교관 양성 과정을 마치고 오래동안 덴마크, 스웨덴, 영국에서 외교관으로 살며 남부럽잖은 인생을 살아습니다. 저는 해외에서 자유민주주의 체제의 우월성을 실감하고 한국의 경제발전과 민주화를 목격하며 북한 정권에 미래가 없다는 걸 알았지만 가족과 일가친척 연좌제가 두려워 박차고 나오지 못했습니다. 저는 김정은 정권이 들어선 이후 김정은이 세상 돌아가는 형편을 알아서 북한 미래를 위해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판단을 내려줄 것이란 한가닥 희망으로 살았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자기 고모부는 물론 측근도 무자비하게 처형하는 모습을 보며 점점 절망감이 들었습니다. 김정은이 지난 5월 제7차 당대회를 계기로 대통령 선거가 진행되는 미국과 한국의 변환기를 통해 핵개발을 2017년 말까지 완성한다는 광신 정책과 핵질주 모습을 보면서 빨리 민족을 핵참화에서 구하기 위해 결심을 굳히게 됐습니다. 여러분, 지금 김정은 체제는 겉으로는 견고한 것처럼 보이나 내부는 썩고 대내외적으로 심각한 위기 상황입니다. 낮에는 김정은 만세를 외치지만 저녁에는 이불 쓰고 한국 영화를 보는 게 현실입니다. 주민의 이런 동향을 아는 김정은은 삼수갑산에서 바늘 떨어지는 소리까지 들으며 북한 주민과 간부의 일거수 일투족을 감시하고 공포 통치를 강화하고 있습니다.
북한 간부들은 김정은의 미치광이 행태를 보면서 태양 가까이 가면 타죽고, 멀어지면 얼어죽는다는 기회주의적 생각을 하고 지금 노예 생활이 대대로 이어지지 않겠느냐고 걱정합니다. 저는 탈북하기 위해 북한 대사관을 벗어나는 순간, 오늘 이순간 내가 너희들의 노예 사슬을 끊어주니 자유롭게 살라고 말했습니다. 대한민국에서 지난 몇 개월간 자유의 삶을 누리면서 저희 가족들은 “왜 진작 오지 못했나” 후회까지 했습니다. “누가 김정은 정권을 허물어주지 않나”하는 기대감으로 하루하루 기회적으로 살아간 것도 후회했습니다.
대한민국 국민 여러분, 통일은 민족 번영의 기회이기에 앞서 저와 여러분의 생사 존망이 달린 문제입니다. 김일성과 김정일도 핵개발을 중단한 적이 없지만 김정은은 시간표까지 정해놓고 위험천만한 핵질주의 마지막 직선 주로에 들어섰습니다. 만일 김정은 손에 핵무기가 쥐어진다면 핵인질이 될 것이며, 한반도 핵전쟁이 일어나면 이 한몸 숨길데 없는 작은 영토는 잿더미로 변해 구석기 시대로 갈 것입니다.
북한의 주민 여러분, 쭈뼛거리지 말고 김정은에 반대해 들고 일어나면 물먹은 담벽처럼 무너집니다. 간부 여러분, 숨죽이지 말고 김정은을 가볍게 쳐내고 통일 나라에서 행복하고 자유롭게 삽시다. 해외에서 고생하는 주민 여러분, 이미 수만명의 주민이 대한민국으로 왔습니다. 여러분 손에 탈북 면허증이 쥐어진 순간, 놓치지 말고 어서 빨리 대한민국으로 오십시요.
북한 외교관 여러분, 부모 자식 간 숭고한 사랑마저 악용해 자식을 잡아놓은 김정은을 놓지 말고 일어납시다. 노예의 사슬을 끊었다고 자랑스레 말할 기회입니다. 탈북민 여러분, 여러분은 목숨 걸고 탈북해 김정은 정권에 흠집낸 선봉입니다. 고향으로 돌아가 마을 사람들로부터 통일의 선봉 투사라는 명예로운 칭호를 받게 될 것입니다. 우리 실향민 탈북자를 위해 김정은 정권이 허물어지며 박차고 나온 3만명 탈북민의 외침이 임진각에서 울려 퍼질 때 통일의 아침은 밝아올 것입니다.
통일된 대한민국 만세!”
정시행 김명성 기자
'최순실 물타기 아니냐'에… 태영호 "통일하러 왔다"
[엘리트외교관 출신답게 침착·당당]
"제가 김정은 테러에 죽는다면 되레 통일의 기폭제 될 것"
태영호 전 주(駐)영국 북한 대사관 공사는 27일 정부서울청사에서 통일부 출입기자단 50여명과 가진 공개 간담회에서 시종일관 침착하고 당당한 모습을 보였다. 20 여년간 덴마크, 스웨덴, 영국 등 유럽 지역에서 근무한 엘리트 외교관답게 2시간 30여분간 끊임없이 이어지는 질문에도 여유가 있어 보였다. 간담회 중간 기자의 영어 질문에도 당황하지 않고 유창한 영어로 답변했다. 태 전 공사는 사전에 준비해온 모두 발언 원고를 읽은 뒤, 두 팔을 번쩍 들어 올리면서 "통일된 대한민국 만세"라고 외치기도 했다.
이날 기자간담회는 태 전 공사가 지난 19일 국회 정보위원회 여야 간사 간담회에서 "신변 위협을 감수하더라도 대외 공개 활동을 하겠다"고 밝힌 것을 계기로 언론 인터뷰 요청이 쇄도하면서 성사됐다. 그는 "기자회견 등 공개 활동이 '최순실 사태 물타기용' 아니냐"는 질문에 "저는 한국에 도착한 순간부터 언제 밖에 나가서 사람들 만나면서 공개 활동을 할 수 있는지 물었고, 규정상 12월 말쯤 가능하다는 답을 들었다. 한국에 통일하러 왔다. 한국 정치에 개입할 의사도 없고 잘 알지도 못한다"고 강하게 부정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는 최근 탄핵 정국에 대해 "100만명이 하룻밤에 모였다가 흩어질 때 (아무도) 연행되지 않고 모두 청소하는 장면을 보고 대단히 큰 감명을 받았다"며 "현재 국정 농단 사태가 가슴 아픈 일이지만 한국이 세계 민주화 과정을 새로운 단계로 선도해 끌고 나가고 있지 않나. 그런 과정이지 않을까 생각한다"고도 했다.
태 전 공사는 앞으로 '반(反)김정은 활동'에 매진할 각오도 밝혔다. 그는 "이 한몸 통일에 바친 몸인데 제가 김정은의 테러에 죽는다면 그것이 되레 통일에 기폭제가 되고, 더 많은 동료에게 기폭제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김정일의 처조카 이한영씨가 북한 체제의 실상을 폭로하다 잘못된 것을 알고 있느냐'는 질문에는 "이한영 (암살된 거) 다 봤다. 통일이라는 건 그 어떤 개인이나 집단 희생 없이는 되지 않는다"고 했다.
태 전 공사는 "북한에 남겨둔 가족, 친척 등이 연좌제로 처벌받을 것이 두려워 차마 박차고 나오지 못했지만, (망명을 결심한 이후) 한국에 도착한 순간부터 김정은 정권을 붕괴시키기 위한 공개 활동을 하기로 마음먹었다"고 말했다. 또 "북에 두고온 가족들과 저 때문에 피해를 본 동료들을 생각하면 마음이 아프다"면서도 "그러나 제가 방구석에 앉아서 눈물 흘린다고 해서 달라질 것은 없다. 저는 오직 김정은 정권을 소멸시키기 위해서 통일 성업을 위해 싸울 것이고, 이를 통해 통일의 아침을 당겨올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김명성 기자
■ 2017.02.27 탈북한 18세 수학영재 리정열군은 어떻게 한국 영사관까지 왔나…홍콩언론 스토리 공개
지난해 7월 홍콩에서 열린 국제수학올림피아드에 참가했다가 홍콩 한국총영사관을 통해 한국으로 망명한 북한 수학영재 리정열(18)군의 탈북 스토리를 홍콩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SCMP)가 27일 보도했다.
보도에 따르면 리군은 지난해 7월 17일 올림피아드가 열렸던 홍콩 과학 기술 대학교(Hong Kong University of Technology and Technology) 기숙사에서 공항까지 무작정 택시를 타고 빠져나갔다. 북한 당국의 감시 때문에 스마트폰과 여권은 쓸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는 “공항에 가면 일단 한국인을 만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고 말했다. 실제로 공항에서 한국 항공사에서 근무하는 직원들을 발견한 리군은 그들에게 접근해 “한국에 가고 싶다”고 말했다.
리군의 말을 들은 한국 항공사 직원은 한국영사관에 연락했고, 영사관 측은 리군에게 혼자 택시를 타고 홍콩 한국총영사관으로 올 것을 권했다. 외교관이 탈북 과정에 개입할 수 없다는 원칙 때문이었다.
오래전부터 탈북을 준비한 덕분에 리군은 홍콩섬 애드미럴티의 홍콩주재 한국총영사관을 찾는데 별다른 어려움이 없었다 한다. 현지 소식통은 “리군이 영사관에 걸어들어왔을 때 영사관 직원들은 그의 용감함에 놀랐다”며 “그들은 또 리군 부모의 안전에 대해 매우 걱정했다”고 전했다.
리군은 영사관에서 2개월을 보냈다 한다. 현지 소식통은 “리군은 첫 달에 거의 말을 하지 않았지만 이후 점차 영사관 직원과 친분을 쌓았다”며 “영사관은 24시간 내내 리군을 도왔지만, 직원들은 그를 자극할까 두려워 가족과 관련된 질문을 하지 않았다”고 했다. 그해 9월 말, 리군은 새 여권과 유효한 홍콩 관광 비자를 받아 서울로 이동했다.
리군은 입국 후 최근까지 한국의 언어, 문화, 사회 및 국제 관계에 관한 강의를 들었다. 그는 다음 달부터 한국에서 대학 생활을 시작할 예정이다.
리군은 아버지의 독려로 한국행을 결심한 것으로 알려졌다. 한국과 인접한 북한 강원도에 살면서 한국 TV와 라디오 방송을 접할 기회가 많던 리군의 부친은, 수학에 재능을 보이는 아들을 위해 교사인 자신의 신분상의 불이익을 각오한 채 리군의 탈북을 독려했다.
지난해 당시 국제수학올림피아드에 참가한 북한 대표팀 중 대회 출전 경험이 가장 많은 ‘베테랑’이던 리군은, 3년간 대회에서 한국 학생들과 만나면서 한국과 북한의 차이를 분명히 알게 됐다 한다. 지난해 대회에서 리군은 은메달을 수상해 지난 2014년 남아프리카공화국 케이프타운, 작년 태국 치앙마이에서 열린 대회에 이어 3연속 은메달을 받았다.
문현웅 기자
■ 2017.03.17 "北 엘리트의 탈북, 내가 도울 것"
- 안티 前 핀란드·조선친선협회장
핀란드 친북 단체서 주체사상 공부… 김정일에 생일 축하편지도 보내
7회 방북하며 북한 현실에 환멸 "친했던 北 외교관 처형돼 충격"
영어로 발행된 북한의 체제 선전물에 100번 가까이 이름이 등장하는 핀란드인이 있다. 지난 2009~2014년 핀란드·조선(북한) 친선협회장을 맡았던 안티 시카-아호(Antti Siika-aho·31)씨다.
그는 북한 당국 공식 초청으로만 7번 방북했을 만큼 북한과 가까운 인물이었다. 그러나 2013년 장성택 숙청 이후 북한 현실을 직시하기 시작했다. 최근 헬싱키에서 만난 안티씨는 "북한 체제는 붕괴 직전의 벼랑 끝에 서 있다"며 "탈북하려는 옛 친구들이 자유를 찾을 수 있도록 어떻게든 돕고 싶다"고 말했다.
▲2014년 핀란드·조선친선협회를 떠난 안티 시카-아호씨는 현재 핀란드 집권당인 중도당 청년사무국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정경화 특파원
북한에 대한 그의 첫 기억은 1998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는 "당시 북한이 인공위성이라고 주장한 광명성 1호 발사 뉴스를 봤다"며 "평소 국제 정치에 관심이 많았는데 북한의 '주체사상'을 공부하면서 그 나라와 가까워졌다"고 했다. 안티씨는 핀란드 내 친북(親北) 단체인 주체사상 공부 모임과 핀란드·조선친선협회에 가입했다. 이들 단체에서 북한 기관과 교류하면서 영어로 된 북한 체제 선전물을 핀란드어로 번역하는 일을 했다. 당시 북한에선 이른바 '고난의 행군'으로 100만명 이상이 굶어 죽은 상황이었지만 그런 현실은 전혀 알지 못했다고 한다. 안티씨는 2002년 김일성 출생 90주년 행사에 초청받아 처음 방북했다. 2012년 7번째 방북 때는 김정은 노동당 위원장도 직접 봤다. 그는 "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 등 연로한 원로들이 일렬로 서서 40분 넘게 (김정은을) 기다리더라"며 "내 또래인 김정은이 할아버지뻘인 원로들에게 무례하게 행동하는 것을 직접 보고 놀랐다"고 했다.
안티씨는 2009년 핀·조친선협회 회장이 됐다. 그는 "노동당 창당일이나 김일성·김정일 부자 생일마다 축하 이메일을 보내는 게 주된 일이었다"며 "무슨 기념일만 되면 북한의 대외문화연락위원회라는 곳에서 '축하 편지라도 보내달라'는 요청이 왔다"고 했다. 편지는 언제나 '경애하는 지도자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생일을 축하하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같은 구절로 시작했다. 북한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대신해 당신의 편지에 감사드린다'는 답신을 보냈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안티씨는 북한의 선전과 현실이 다르다는 사실을 깨닫기 시작했다. 그는 "북한 관리들은 핵개발이나 인권 문제에 대해 '미군이 남한에 주둔하는 비정상적인 상황이라 어쩔 수 없다'는 말만 되풀이했다"며 "그 주장이 허구라는 게 명백해지면서 북한에 염증을 느끼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핀·조친선협회에서 활동하던 동료들도 하나둘 떠났다.
그는 2013년 말 북한에서 장성택이 숙청됐다는 소식을 들었다. 장성택 계열로 알려진 박광철 당시 주(駐)스웨덴 대사 부부가 본국으로 강제 소환됐고 연락이 끊겼다. 안티씨는 "박광철과는 맥주잔을 부딪치며 대화를 나누던 친구 사이였다"며 "나중에 그가 처형됐다는 소식을 듣고 큰 충격을 받았다"고 했다. 북한 초청 및 축전 요청에 응하지 않은 것도 그때부터였다.
안티씨는 2015년 핀란드 집권당인 중도당의 청년 사무국장으로 선출됐다. 그는 최근 헬싱키시 당국에 고위탈북자 보호 시설을 만들자고 공식 제안했다. "태영호 전 영국 공사 같은 엘리트 탈북자가 앞으로 늘어날 겁니다. 탈출하려는 북한 해외 주재원들에게 '우리가 도와주겠다'는 메시지를 전하고 싶어요."
헬싱키(핀란드)=정경화 특파원
■ [탈북민과 함께 '통일 사다리' 놓자]
2016-07-08 조선일보
[1-1] 기술·자격증으로취업한 탈북민들
관광 통역 안내원 장문혜씨
"자격증 따게 도움 준 학원 원장, 안내원 면접때 배려해준 면접관
편견 없이 도와줘 정말 고마워"
"몐수이뎬 짜이 바이훠상창리몐(면세점은 백화점 안에 있습니다)" 빨간색 유니폼을 갖춰 입은 탈북민 장문혜(39)씨가 지난 25일 서울 중구 명동예술극장 앞 거리에서 중국인 관광객 가족에게 유창한 중국어로 길 안내를 하고 있었다. 칼국수를 파는 유명 음식점 위치를 묻는 한국 학생들의 질문에는 한국어로 막힘 없이 안내했다. 북한 강원도 출신으로 2013년 한국에 온 장씨는 2014년 10월부터 서울시관광협회 소속 관광통역안내원으로 일하고 있다. 유동 인구가 많은 길목에 서있다가 길을 묻는 중국인 등 관광객들을 안내하는 일이다. 익숙하지 않은 명동 지리를 익히기 위해 처음 몇 주간은 근무 시간 외에도 골목골목을 다니며 '공부'를 했다. 장씨는 "처음에는 길이 헷갈리기도 하고 말투도 어색해 '북한에서 왔냐'고 농담처럼 묻는 분들도 있었는데 요즘은 그런 이야기를 전혀 안 듣는다. 이제 진짜 한국 사회 구성원이 된 것 같다"며 웃었다.
▲관광 통역 안내원으로 취직한 탈북민 장문혜(오른쪽)씨가 25일 서울 명동 거리에서 유창한 중국어로 ‘유커(중국인 관광객)’에게 길 안내를 하고 있다. 장씨는 탈북 후 중국에 체류할 때 익힌 중국어를 ‘밑천’으로 안정된 일자리를 얻었다. /이태경 기자
장씨는 한국에 온 지 1년 만에 취직에 성공하고 안정적으로 정착했다. 한국에 오기 전 8년간 중국에서 지내며 익힌 '생존 중국어'를 바탕으로 중국어 능력 자격증인 HSK(중국어 시험) 최고 등급인 6급을 취득한 게 큰 도움이 됐다.
하지만 그는 한동안 이런 자격증이 있는 것조차 모르고 있었다고 한다. 장씨는 "하나원을 졸업하고 처음에는 어떻게 해야 취직할 수 있을지 막막했다. 주변 동료 중에는 당장 돈을 벌려고 무턱대고 막노동 등에 뛰어들다 좌절하는 경우도 많았다"고 했다. 그러다 2014년 소개받은 컴퓨터 학원 원장 A씨의 조언으로 장씨는 '자격증'에 눈을 떴다. A원장은 장씨에게 "무작정 취업하려 하면 떨어질 수밖에 없다. 준비가 필요하다. 자격증을 따라. 실력을 객관적으로 입증하면 누구도 문혜씨를 무시 못 한다"고 했다. 장씨는 이때부터 A원장의 학원에서 PC 정비사, 네트워크 관리사 과정을 듣는 한편 중국어 실력을 살려 HSK 시험과 관광통역안내사 시험을 준비했다. A원장은 틈틈이 장씨를 따로 불러 진로 상담을 해줬다. 장씨는 "원장님에겐 별것 아닌 일이었을지 몰라도 저에게는 한마디 한마디가 포기하지 않는 힘이 됐다"고 했다.
이런 과정을 거쳐 장씨는 10여개 자격증을 취득했고, 목표로 하던 관광 통역 안내원에 도전할 수 있었다. 면접 과정에서는 난관도 있었다. 장씨는 "면접 때 '추 억의 한국 관광지를 소개해보라'는 질문을 받고 당황해하자 면접관님이 '대신 중국의 관광지를 소개해도 된다'고 해 실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며 "작은 배려였지만 나에게는 잊지 못할 큰 도움이 됐다"고 했다. 그는 "큰 틀에서의 정부 탈북자 정책도 중요하지만, 탈북자들을 마주하는 개인과 고용주들의 편견 없는 태도가 탈북자들에게는 더 큰 희망이 된다"고 말했다.
[1-2] 기술 교육으로 취업 돕는 기업들
"정규직 30%를 탈북민으로… 기술 가르쳐 뽑습니다"
- 탈북민 취업프로그램 운영 '바오스'
이동왕 대표, 본지 기사 읽고 탈북민에게 일자리 주기로 결심
"업무능력 南직원 못지않고 성실"
탈북 직원들 "살길 막막했는데 기술 배우고 돈 벌고 희망 생겨"
▲ 이동왕 대표
경기도 평택에 있는 LED TV용 도광판(빛을 균일하게 전달하는 아크릴 판) 제조업체 '바오스(BAOS)'는 지난해 6월부터 남북하나재단과 함께 탈북민들을 채용하는 취업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1년여간 4차례에 걸쳐 탈북민 31명을 연수생으로 선발했다. 현재 12명이 정규직으로 근무 중이다. 바오스가 몇 년 전 자체적으로 채용한 탈북민 직원 2명까지 포함하면 이 회사 정규직 180명 중 약 7.8%가 탈북민인 셈이다. 근로 조건 및 대우는 일반 직원들과 똑같다. 이동왕 대표는 "탈북민들 근무 태도가 매우 성실하다. 올해 2~3차례 더 탈북민을 채용할 계획"이라며 "정규직 중 20~30%를 탈북민으로 채우는 게 목표"라고 말했다. 이 대표는 지난해 조선일보의 '탈북민 3만명 시대' 기획 기사를 읽고 난 뒤 이 같은 취업 프로그램을 운영하기 시작했다. 그는 "기업인으로서 사회에 기여하고 싶은 마음이 들어 채용을 시작했다"고 말했다. 그는 "채용한 탈북민의 능력이 남한 사람과 별 차이가 없어 만족한다"고 말했다.
이 대표는 매일 기사를 스크랩해가며 직원들에게 탈북민 채용이 필요한 이유를 설명했다고 한다. 탈북민에게 일자리를 만들어주기로 결정한 바오스는 남북하나재단 쪽에 먼저 전화를 걸어 취업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싶다는 의사를 전했다고 했다.
▲ 경기도 평택에 있는 LED TV용 도광판 제조업체 ‘바오스(BAOS)’는 지난해 6월부터 탈북민에게 기술 교육을 시킨 뒤 정규직으로 채용하는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현재 정규직(180명)의 7.8%인 14명이 탈북민이다. 사진은 이 업체에서 근무 중인 탈북민의 모습. /김지호 기자
바오스는 취업을 원하는 탈북민들을 대상으로 공장을 견학시킨 뒤 인사 담당자와 면접을 거쳐 채용 여부를 결정하고 있다. 바오스 인사 담당자는 "탈북민에게 일자리를 주는 게 목표이기 때문에 큰 결격 사유만 없으면 모두 채용한다"고 말했다. 연수생으로 뽑힌 탈북민들은 2주간 이론 교육, 6주간 현장 실습 교육을 받는다. 이때 중요한 건 '일해서 자립하겠다'는 탈북자의 의지다. 소수이기는 하지만 힘든 일을 꺼리는 탈북자도 있다. 이 회사에선 연수 기간을 무사히 마치면 정규직으로 채용해 작업 현장에 투입한다. 공정에서는 숙련된 선임 직원들이 배치돼 1대1로 이들을 교육한다.
지난 26일 공장에서 만난 최일남(가명·28)씨는 도광판을 절단기에 올려놓고 있었다. 42인치·55인치 크기로 도광판을 정밀하게 자르는 작업이다. 파란색 제전복(정전기를 방지하는 옷)과 귀마개를 착용한 최씨가 팀장에게 "이 정도 크기로 자르면 되겠습네까"라고 물었다. 탈북한 지 7년이 넘었지만 북한 사투리는 여전하다. 팀장이 손가락으로 동그라미를 그리며 "오케이. 좋아 완벽해"라고 말하자 최씨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9개월간 바오스에서 일한 그는 "북한을 탈출한 뒤 어떻게 살까 막막했었는데 바오스 도움으로 기술도 배우고 취직도 하고 돈도 벌 수 있어서 마음이 편하다"며 "일을 배우느라 힘든 순간도 있지만 꿋꿋하게 참고 버티면 기술자가 될 수 있을 것이란 희망이 있다"고 말했다. 지난해 탈북한 김성국(가명·26)씨는 북한군 출신이다. 그는 "돈을 모아 나중에 대학도 가고 싶다"고 말했다. 바오스 관계자는 "탈북민 직원들이 중도 포기하지 않게 독려하고 자격증 취득도 지원할 생각"이라고 말했다.
[2-1] 창업으로 안착한 탈북민들
"재봉기술 믿고 과감하게 창업… 2년만에 점포 5곳 운영"
- 옷 수선 가게 사장님 정혜영씨
"정부의 교육·주거 지원 큰 도움… 의상학 공부 위해 방송대 수업도
남한은 노력한만큼 대가 주는 곳
다른 탈북민에 기술 가르쳐주고 가게 차릴 때 도와주고 싶어"
"사장님, 이것 좀 봐주세요. 다른 데서 수선했는데 영 몸에 안 맞아요."
지난 24일 오후 2시쯤 서울 중구 롯데마트 서울역점. 4층 에스컬레이터 옆의 3.3㎡(1평) 남짓한 옷 수선실에선 탈북민 정혜영(46) 사장이 수선을 맡기는 손님을 맞느라 분주했다. 매장 앞에는 손님들이 맡긴 옷들과 리폼을 마친 청재킷·청치마 등이 가득 걸려 있었다. 매장에서 능숙하게 손님을 맞으며 재봉틀을 돌리는 정씨는 입국한 지 2년밖에 안 되는 탈북민이다.
그는 함북 청진의 김책제철소에서 근무하다가 1999년 북·중 국경을 넘었다. 100만명 이상이 굶어 죽은 '고난의 행군' 시기를 견디기 어려웠다. 그러나 중국에서의 삶도 고단하긴 마찬가지였다. 말도 안 통하는 중국인 남편을 만나 아들딸까지 낳았지만, 남편은 2008년쯤 암으로 사망했다. 정씨는 "남편도, 국적도 없는 중국에서 더는 살 수가 없었다"며 "아이들에게 '1년만 기다리라'는 약속을 하고 2014년 한국으로 왔다"고 했다.
▲ 서울역 롯데마트에서 옷 수선 가게를 운영하는 탈북민 정혜영 사장이 지난 25일 오후 매장에서 옷을 고치며 웃고 있다. 2014년 입국한 정씨는 매장 5곳을 관리하며 탈북민 6명을 직원으로 채용하고 있다. /오종찬 기자
정씨는 입국 뒤 바로 탈북민 지원 단체가 실시하는 의류 수선·리폼 과정에 등록했다. 그는 "한국 사회에 정착하려면 반드시 기술을 익혀야 한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오후 1시쯤 학원 수업이 끝난 뒤에도 밤늦게까지 학원에 남아 재봉틀을 돌렸다. 방 한 칸 집에 혼자 있으면 중국에 두고 온 자식들이 그리워 미칠 것 같았기 때문이라고 했다. 북한 제철소에서 근무할 때도 인정받았던 정씨의 성실함은 남한 사회에서도 빛을 발했다. 빠른 속도로 재봉 기술을 익혔고, 2014년 12월 롯데마트 서울역점 수선실의 직원으로 채용됐다.
일이 손에 익을 무렵 정씨에게 '기회'가 왔다. 서울역점 점주가 매출이 낮다는 이유로 점포를 내놓은 것이다. 그는 주저하지 않고 "인수하겠다"고 나섰다. 정씨의 솜씨와 성실함을 잘 아는 학원 지인들도 "무모하다"며 반대했지만, 정씨는 자신을 믿기로 했다. 그는 "북한과 달리 남한에선 기술을 배워 노력하면 돈을 벌 수 있는데 못할 게 뭐 있느냐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중국에 남겨둔 아들딸을 데려오기 위해서도 정착해야 했다. 정씨는 중국에서 15년 동안 악착같이 모은 돈 4000만원을 모두 투자했다. 성실이란 씨앗이 성공이란 열매를 맺게 할 것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첫 두 달은 임차료와 직원 월급을 주고 나니 남는 돈이 없었다. 정씨는 "중국서 데려온 아이들은 대안학교에서 기숙사 생활을 하고, 국가가 지원해준 임대아파트 덕분에 처음의 어려운 시기를 넘길 수 있었다"고 말했다. 작년 8월 점포를 처음 인수했을 때는 '북에서 온 사람이 남한 옷을 어떻게 고치느냐'고 묻는 손님들이 적지 않았다. 정씨는 "북에서 태어났지만 기술은 한국에서 배웠으니 맡겨만 달라"는 대답으로 일감을 끌어왔다. 고개를 갸웃하며 옷을 맡겼던 첫 손님들은 이젠 단골이 됐다. 일감을 소개해주는 손님도 생겼다. 매출은 인수 때보다 2배쯤 늘었다.
지금 정씨는 서울역점을 포함해 수선실 5곳을 관리하는 '진짜 사장님'이 됐다. 전체 직원 12명 중 6명이 정 사장처럼 탈북민이다. 그는 "앞으로 다른 탈북민에게 기술을 가르쳐주고, 가게 차릴 때 도울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했다.
정씨는 방송대 의상학과에 진학하기 위해 올해부터 공부를 시작했다. 스마트폰으로 강의를 듣던 정씨는 "방송대 수업도 정부 지원 덕분에 무료"라고 했다. 그는 "단골손님, 정부의 교육·주거 지원, 노력한 만큼 대가를 주는 남한 사회가 고마워서라도 더 열심히 일해 은혜를 갚을 생각"이라고 말했다. 정씨는 "다른 탈북민도 거창한 꿈에 집착하지 말고 무슨 기술이라도 익혀서 남한 사회에 잘 정착하는 즐거움을 누렸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2-2] 창업 돕는 기업·단체
현대車 공모에 당선… 배곯던 탈북 소년, 푸드트럭 사장 됐다
지난 26일 오후 경기도 과천 경마공원(렛츠런파크 서울) 주차장. 10여명의 사람들이 토스트를 파는 트럭 앞에 서서 "대박 하나 주세요" "여기 열정 세 개요"라고 외쳤다. '대박'과 '열정'은 이 트럭에서 파는 토스트 이름이다. 떡갈비가 들어간 '대박'은 4000원, 햄·치즈를 넣은 '열정'은 3000원이다. 메뉴판에는 '파이팅(2500원)'도 있었다.
이 트럭 안에서 바쁘게 손을 놀리는 박영호(27) 사장은 탈북민이다. 함경북도 무산 출신인 박씨는 열두 살 때인 2001년 영양실조로 죽을 뻔한 상태에서 형의 등에 업혀 탈북했다. 이후 중국·태국을 거쳐 2002년 한국에 도착했다. 굶주림을 면하려고 한국에 온 지 14년 만에 '푸드트럭 사장'이 된 것이다.
▲지난 26일 경기도 과천 경마공원 주차장에서 푸드트럭을 운영하는 탈북민 박영호 사장(오른쪽)이 왼 주먹을 치켜들고 ‘파이팅’을 외치고 있다. 박씨는 현대차그룹과 한국마사회의 탈북민 지원 프로그램 덕분에 푸드트럭 창업에 성공했다. /이태경 기자
- '청년상회' 박영호씨
현대車, 1t트럭 주고 자금 지원…
마사회는 경마장 앞 공간 내줘
탈북청년 1명 등 직원 2명 고용
"사회서 받은 은혜 갚아나갈 것"
박씨는 "무일푼 탈북 청년이 창업의 꿈을 이룬 것은 현대차그룹과 한국마사회의 도움이 컸다"며 "대기업과 공공 기관의 지원을 받은 나는 진짜 행운아"라고 말했다. 박씨는 지난 2012년 서강대에 진학한 이후 푸드트럭 사업을 주목했다. 당시 동·서독 통일 과정을 체험하기 위해 1주일간 독일을 여행하면서 푸드트럭을 처음 본 것이 계기가 됐다. 그는 "작은 트럭인데 손님 주문이 끊이지 않았어요. 저거다 싶었죠. 작은 돈으로도 창업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고 했다.
독일에서 돌아온 박씨는 토스트·커피 만드는 법, 회계 등을 공부하며 창업을 준비했다. 그러나 돈이 문제였다. 고민하던 박씨는 작년 8월 '탈북민 푸드트럭 사업'을 공모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통일부가 아이디어를 내고, 현대차그룹이 차량과 자금, 마사회가 경마장 앞에 장소를 지원하는 사업이었다. 박씨는 경마장 주변의 시간대별 유동 인구까지 조사한 창업 제안서를 준비했다. 그는 면접에서 "가장 준비가 철저한 지원자"라는 평가를 받았다.
올 1월 현대차그룹은 '기프트카 사업'의 일환으로 탈북민 2명(박씨와 김경빈씨)에게 푸드트럭을 한 대씩 무상 제공했다. 2011년 시작된 기프트카 사업은 경제·사회적 이유로 어려움을 겪은 이웃에게 자동차와 창업 자금을 지원하는 현대차의 사회 공헌 프로그램이다. 지금까지 199대를 지원했다. 올해 선발된 탈북민 2명은 개조한 1t 화물차와 차량 세금·보험료 300만원, 창업 자금 500만원을 받았다. 현대차는 이들에게 2박 3일간의 창업 교육과 두 차례의 컨설팅도 제공했다. 어호선 현대차그룹 홍보과장은 "사회 공헌과 통일 대비 차원에서 탈북민의 정착 지원 사업을 계속할 것"이라고 말했다. 마사회는 경마장에서 유동 인구가 가장 많은 매표소 앞 주차장을 영업장소로 내놨다. 장소는 2년간 제공된다. 이후에는 성공 방정식을 스스로 찾아야 한다. 현대차그룹의 경우 2010년부터 지금까지 탈북민 정착 사업에 약 40억원을 지원했다. 연간 100명의 탈북자에게 승강기 관리, 봉제 등 전문 직업 교육을 실시한다.
탈북민 푸드트럭은 경마 경기가 열리는 금·토·일에만 영업을 한다. 주말에는 매출이 150만원을 넘긴다고 한다. 박씨가 월급을 주는 직원도 탈북 청년 1명을 포함해 2명이다. 영양실조로 두만강을 건넜던 '탈북 소년'이 월 매출 수백만원을 올리는 '남한 사장님'이 된 셈이다.
박씨의 푸드트럭에는 '청년상회'라는 간판이 걸려 있다. 그는 "단순히 음식만 파는 트럭이 아니라 청년의 소중한 꿈을 키워가는 점포라는 의미"라고 했다. 토스트 이름을 '대박·열정·파이팅'으로 지은 것도 비슷한 이유에서다. 박씨는 "청년의 열정과 희망을 전달하고 싶었다"고 했다. 그의 꿈은 푸드트럭을 10대, 100대로 늘려 탈북민 일자리 창출을 돕는 것이다. 박씨는 "빈손이던 제가 자립한 건 푸드트럭 지원 사업 덕분"이라며 "우리 사회로부터 받은 은혜를 앞으로 갚아나가는 것이 새로운 목표"라고 말했다.
[3] 탈북민 의료 지원
- 서울대병원 외과동문회 '굿서전스'
탈북민들 "교육·취업보다 의료지원이 우리에게 더 필요"
서울대병원 외과동문회 13명, 지난해 연말 '굿 서전스' 결성
무상으로 수술·대장내시경 검사
탈북민은 아프다. 남북하나재단의 2014년 탈북민 실태 조사(1만2777명 대상)에서 응답자의 38.9%는 '건강하지 않다'고 답했다. '건강하다'(38.7%)는 답보다 많았다. '보통이다'는 22.2%였다. 탈북민에 대한 의료 지원은 이들의 남한 정착에 중요한 요소다. 탈북민 스스로 필요하다고 꼽은 지원 분야도 의료가 1위였다.
"북한에선 조국을 배반하고 남조선 간 사람은 피가 말라 죽는다고 겁을 줍니다. 진짜로 그렇게 죽는 줄 알았는데 우리 의사 선생님 만나서 살았습니다." 탈북민 김철호(가명·51)씨는 지난달 25일 오후 서울 강남구 기쁨병원 진료실에서 강윤식 원장 손을 꼭 잡고 놓지 않았다. 김씨는 지난 3월 이 병원에서 무료로 대장내시경 검사를 받고 용종(혹) 2개를 제거했다. 강 원장은 이날 추가 검진을 위해 방문한 김씨에게 "이 작은 혹이 점점 커지다 암으로 갈 수 있는데 검사 참 잘하셨다"며 "다음에는 친구 분도 데리고 오시라"고 했다.
기쁨병원을 포함한 서울대병원 외과동문회 소속 13개 병원은 올해부터 탈북민을 대상으로 외과 수술과 대장내시경 검사를 무상으로 지원해주는 의료 봉사를 시작했다. 프로젝트 이름은 '착한 외과의사'를 뜻하는 '굿 서전스(Good Surgeons)'다.
탈북민이 남한 사회에 정착하는 데 '뜻밖에' 가장 큰 어려움을 겪는 것이 건강 문제다. 통일부와 남북하나재단(탈북민 정착 지원 기관)이 발표한 '2014 탈북민 실태조사'에 따르면, 탈북민들이 가장 지원을 바라는 분야 1위는 의료(39%)였다. 경제(37.8%), 교육(33.5%), 취업(30%) 지원보다 높았다. 북한에 있을 때부터 부실한 영양 공급과 열악한 의료 환경으로 건강이 나빠졌지만 치료를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탈북자들은 "북에서는 웬만큼 아프면 그냥 참는다"고 말한다. 또 어디가 아프더라도 어디를 찾아가야 할지를 모르는 경우도 많고, 비용 걱정 때문에 병원을 가지 않기도 한다.
서울대병원 외과동문회는 탈북민에 대한 의료 지원이 절실하다는 얘기를 듣고 봉사를 하기로 마음먹었다고 한다. 강윤식 원장은 "동문회에서 사회에 기여할 일을 찾자는 목소리가 높아지던 때 탈북자들이 한국에 와서도 아프고 소외되고 있다는 뉴스를 보고 '이거다' 싶었다"고 했다.
▲서울대병원 외과동문회 회장인 강윤식 기쁨병원 원장이 지난달 25일 진료실에서 탈북민 김철호(가명)씨의 대장내시경 검사 사진을 모니터에 띄워놓고 결과를 설명하고 있다. /성형주 기자
동문회는 작년 7월 동문을 대상으로 참가 희망자를 찾았고, 연말 13명의 '착한 외과의사'가 모였다. 오세민외과의원, 대동병원, 기쁨병원, 대항병원, 분당서울외과의원, 대항하정외과의원, 청담서울여성외과의원, 유항맥서울외과의원, 수원대항병원, 서울내과외과의원, 염차경유외과의원, 울산시티병원, 베스트원의원 등이 의기투합했다. 이들은 하지정맥류, 탈장·치질·갑상선 등의 수술과 대장내시경 검사를 무상으로 지원하기로 했다.
수원대항병원의 김태선 원장은 "개업의가 아니라서 본인 마음대로 치료를 무상으로 해주긴 어렵지만 필요하면 어디든 찾아가 진료를 꼭 돕고 싶다는 회원도 많았다"고 말했다. 봉사 시작 두 달 만에 수술 및 검사 54건을 시행했다. 올해 안에 외과 수술 404건, 대장내시경 검사 219건(약 4억4700만원 상당)을 하는 게 목표다. 굿 서전스의 의료 봉사는 생명을 좌우하는 큰 수술이 아닌데도 혜택을 본 탈북민들은 "새 삶을 찾았다"고 말한다.
탈북민 남송지(가명·41)씨는 수도권의 한 직물 공장에서 야간조(組)로 밤새워 서서 일한다. 올 초부터 남씨는 다리가 자꾸 부어서 서 있기조차 힘들었다고 한다. 남씨는 "2006년 한국 생활을 시작한 이후 온몸이 아파도 눈 질끈 감고 일해 왔는데, 이제 이대로 주저앉나 싶었다"고 했다. 남씨는 지난 4월 '굿 서전스'의 경기도 안양 대항하정외과의원에서 하지정맥류 진단을 받고 160만원 상당의 수술을 무료로 받았다. 남씨는 의사에게 "열심히 살겠습니다"라고 수차례 다짐했다고 한다.
이웅희 서울내과외과의원 원장은 "대부분의 탈북민은 북한에서 제대로 된 의료 혜택을 못 받았기 때문에 한국에서도 병원이 익숙하지 않다"며 "간단한 수술만 해줬는데도 '살려줘서 고맙다'는 얘기를 들을 때가 잦다"고 했다. 강윤식 원장은 "앞으로 서울대병원 외과동문회뿐 아니라 다른 전공과 동문회나 다른 대학 동문회까지도 동참해달라고 설득하겠다"며 "좀 더 많은 의사가 통일을 앞당기는 작은 '씨앗'이 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4-1] 농촌 정착탈북민들
낮에는 목수, 저녁엔 목축… 이젠 한우 130마리 목장主
- 경기 남양주 목장 대표 김명석씨
축사 지으며 알게된 목장主한테 7년전 소 17마리 빌려서 시작
"믿어주는 이웃 있다는 게 신기"
2007년 탈북해 한국에 온 김명석(39· 가명)씨는 낮에는 축사 신축 현장에서 일하고, 해가 지면 자기 농장의 소를 돌본다. 건축일을 하며 번 돈으로 하나둘씩 사 모은 한우가 이제는 130마리. 어엿한 목장 대표다. 지난달 27일 경기도 남양주의 한 목장에서 만난 김씨는 "7년 전 일용직 잡부로 이 목장을 지었는데, 지금은 내가 이 목장 주인이 됐다"고 했다.
김씨는 북한에서 10년간 군 생활을 하며 익힌 목수 기술로 남한에서 건축일을 하며 차츰 정착했다. 그는 2009년 어느 날 소 축사를 지어주다가 목장 주인이 소를 거래하는 데 수표가 오가는 걸 보고 '나도 소를 키우겠다'는 결심을 했다고 한다. 김씨는 "태어나서 그렇게 많은 수표가 한꺼번에 오가는 걸 처음 봤다"며 "남한에서 잘살려면 목장을 운영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탈북민 김명석(가명)씨가 지난달 27일 경기도 남양주 목장에서 키우는 소들에게 건초를 주며 환하게 웃고 있다. 김씨는 7년 전 일용직으로 일하며 이 농장을 지었지만, 이젠 이 목장의 주인이 됐다. /이진한 기자
그러나 종잣돈이 부족했다. 탈북 후 받은 지원금과 아파트 보증금까지 털었지만, 목장 운영에 최소한으로 필요한 소와 축사를 마련할 돈에는 크게 모자랐다. 김씨는 "몇 년 전 축사를 지어주면서 인연을 맺었던 한 목장 대표에게 '소 17마리만 외상으로 달라'고 부탁했다"고 말했다. "도박하는 마음이었다"고 했다.
김씨 부탁을 받은 목장 대표는 뜻밖에 순순히 '오케이'했다. 목장업은 솟값 변동 등 위험성이 있는 사업이다. 목장 대표는 위험을 감수한 이유에 대해 "김씨가 우리 목장을 지을 때 매사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봤다"며 "이런 사람이라면 소도 잘 키워서 금방 (빚을) 갚을 것이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김씨는 "열심히 일한다는 이유만으로 나를 믿어주는 사람이 생기는 게 정말 신기했다"며 "이런 것이 남한 체제의 진짜 힘 같다"고 했다.
김씨는 새벽 4시에 일어나 자기 소를 먹이고 축사를 청소한 뒤 다른 사람 축사를 지어주는 일로 목장을 키울 돈을 모으고 있다. 주변에선 이런 김씨를 신뢰했다. 자연히 건축 일감이 들어왔고, 목장 운영 자금을 빌려주겠다는 사람도 나왔다. 김씨는 "새끼 밴 암소 40마리가 매물로 싸게 나왔는데 돈이 없었다. 이웃 세 사람에게 3000여만원씩 1억원을 빌려 사 온 적도 있다"고 했다. 7년 만에 사육 두수는 130마리까지 늘었다. 김씨는 "어떤 사료를 먹여야 하는지, 소가 아프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일이 터질 때마다 인근 농가로 달려가 도움을 요청했는데 이웃들은 그때마다 선뜻 도움을 줬다"고 했다. 김씨가 먼저 이웃을 도운 덕분에 가능 한 일이었다.
김씨는 앞으로 소 1000마리를 키우는 게 목표다. 이를 위해 요즘은 자동화 설비 기술을 공부하고 있다. 김씨는 "한국 사회에 정착한다는 건 내가 사회에 필요한 존재가 된다는 것"이라며 "나를 믿어주고 도와준 이웃들 덕분에 나는 필요한 사람이 될 수 있었다"고 했다. 이어 "이제는 다른 탈북민의 정착을 도울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했다.
[4-2] 농촌 정착 돕는 사람들
"농사 노하우 가르쳐드려요"… 탈북민 농업실습장 제공
- 농촌 정착 돕는 '한민족밀알공동체'
수원지역 목사 8명이 설립 "농촌은 이웃 간 단절 덜해 도시보다 再사회화에 유리"
각계서 농지·숙소 빌려주는 등 도움의 손길 이어져 5년째 운영
"이건 유정란입니다. 닭이 이걸 품으면 스무날 동안 꼼짝을 안 해요."
지난달 26일 경기도 여주시 대신면 노아복지원에 놓인 닭장에서 탈북민 송진수(가명·49)씨가 토종닭이 품은 달걀을 꺼내며 밝게 웃었다. 닭장에는 암탉들이 알을 품고 있었다. 그는 "지금은 20마리밖에 안 되지만, 빨리 돈을 모아 500마리까지 늘리는 게 목표"라고 말했다. 닭장 옆 텃밭에선 송씨가 심은 옥수수가 싹을 틔웠다. 그는 "북한에 있을 때 먹거나 내다 팔기 위해 매년 800㎏쯤 옥수수를 키웠다"며 "그때가 생각나서 심었다"고 말했다.
탈북민 영농 정착 지원단체인 '한민족밀알공동체'가 운영하는 이곳 농업 실습장에는 송씨를 포함한 탈북민 3명이 공동체 관계자들과 생활하며 농촌 정착을 준비하고 있다. 탈북민이 직접 농사를 지어보는 일종의 '농업 인큐베이터'다. 앞으로 탈북민 8명이 추가로 합류할 예정이다.
▲지난달 29일 경기도 여주의 노아복지원에서 이동인(왼쪽) 목사, 나유정(가운데) 노아복지원장이 탈북민 송진수(가명·오른쪽)씨와 함께 새로 들여온 표고버섯 재배용 통나무를 살펴보고 있다. 한민족밀알공동체는 탈북민들에게 버섯 재배 등의 영농 기술을 가르쳐주고 있다. /이진한 기자
송씨는 2006년 9월 가족들을 데리고 남한으로 왔다. 북한에선 기차역을 경비하는 기관에서 일하며 목에 힘주고 다녔다고 한다. 그러나 남한에선 먹고살기 위해 "비닐 공장, 목재소, 조선소 등에서 안 해본 일이 없다"고 했다. 그는 남한에서 경제적으로 풍족할 것이라는 애초 기대와 달리 궁핍하게 살게 되자, 실망감으로 한동안 술에 빠져 지냈다. 송씨는 "도시 생활이 번쩍번쩍한 것처럼 보였지만 (살아보니) 옆집에 누가 사는지도 모를 정도로 삭막했다"며 "농촌 정착을 자연스럽게 결정했다"고 말했다. 그는 지난 1월부터 이곳에서 농사를 배우고 있다. 다른 탈북민인 장명옥(가명·61)씨는 2008년 두만강을 건넜다. 낯선 남한 생활은 만만치 않았다. 다단계에 속아 500만원을 날리기도 했고, 일한 월급을 떼인 적도 있었다. 지난달 29일 복지원 측은 장씨를 위해 표고버섯 재배용 통나무 300개를 들여왔다. 장씨가 북한에서 취미 삼아 200㎡(60평) 규모로 버섯을 키워본 경험이 있기 때문이었다. 장씨는 "버섯 키우는 기술을 좀 더 배워 농촌에 정착하고 싶다"며 "그동안 모은 돈으로 경기도에 조그만 땅도 사 놓았다"고 말했다.
한민족밀알공동체는 2011년 상임이사인 이동인(53) 목사 등 수원지역 목사 8명이 모여 만들었다. 이 목사가 어려운 탈북민을 돕기 위한 '쉼터'를 운영한 것이 계기가 됐다. 이 목사는 "쉼터를 운영하면서 도시에 사는 탈북민들이 남한 사회에 정착하지 못하고 겉도는 모습을 자주 봤다"며 "아직 농촌은 도시보다 이웃 간의 단절도 덜하고, 일과도 여유가 있는 편이라 탈북민의 재사회화에도 유리하다"고 말했다. 이 목사의 아내도 탈북민이다.
이 공동체는 농촌에서 농지와 숙소 등을 빌리는 방식으로 운영된다. 2011년에는 경기도 양평의 한 종교단체가 농지와 숙소를 제공했고, 2012년에는 강원도 평창의 한 독지가가 비닐하우스 8동과 목조 주택을 내줬다고 한다. 현재는 여주의 노아복지원이 숙소와 농지 등을 제공해주는 등 탈북민 농업 정착에 도움을 주고 있다. 지금까지 120여명의 탈북민이 이 공동체를 통해 농촌을 경험했다. 이들이 탈북민에게 이런 도움을 주는 것은 도시 공장과 달리 농사는 소득을 올릴 때까지 적게는 몇 달, 길게는 1년 이상이 걸리기 때문이다. 당장 돈이 필요한 탈북민에게 농업에 적응할 시간을 벌어주는 셈이다.
이 공동체의 탈북민 지원은 여러 어려움 속에서도 끊이지 않은 도움의 손길 덕분에 5년째 이어지고 있다.
농업기술센터 근무 경험을 살려 '농사 노하우'를 가르쳐준 분, 퇴직금을 쪼개 지원금을 보내준 분 등의 정성이 밑거름이 됐다. 농업 분야가 아닌 곳에서 성공 한 탈북민도 나왔다. 한 탈북민은 10여명 규모의 물류 사업체 대표가 됐고, 신학교에 진학한 탈북민도 등장했다. 이곳에 오기 전까지 남한 사회에서 방황하던 사람들이었다.
이 공동체의 감사인 권재상(63) 공군사관학교 명예교수는 "농업 교육을 받은 탈북민 일부는 독립에 성공했다"며 "이 공동체를 안정적으로 운영해 탈북민 농촌 정착에 도움을 주고 싶다"고 했다.
[5] 탈북민 학생 교육 지원부산 대안학교 '장대현학교'
탈북 청소년 "샘 수업 쏙쏙, 변호사·교수 돼 北고향 도울래요"
48명 자원봉사로 학생 18명 맡아… 강의실은 시민 200명이 마련
"아이들 통일南北의 소중한 존재"
부산 강서구에 있는 탈북 청소년 대안학교인 장대현학교 1층에는 기타 선율이 흐르고 있었다. 학생 5명은 기타를 치며 "샘(선생님), 샘"을 외쳤다. "샘, 코드 누르는데 손가락이 아파요." "샘, 제 기타는 소리가 잘 안 나요." '기타 샘' 이근형(39)씨는 "고생하지 않고 배울 수 있는 게 어딨어? 손가락을 세워 코드를 눌러야지"라고 했다. 이씨는 이곳에선 '샘'이지만, 밖에선 보험회사 직원이다. 그는 장대현학교가 개교한 2014년 3월부터 일주일에 한 번씩 음악을 가르치고 있다. 이 학교에는 전임교사 4명 외에 이씨 같은 자원봉사 교사가 48명이다. '자원봉사 샘'은 음악·미술·컴퓨터 등 방과 후 수업뿐 아니라 국어·영어·수학 등 정규수업도 책임진다. 대부분 정교사 자격증이나 강사증을 가졌다. 이 학교 학생은 총 18명(14~24세). 학생 1명당 교사 수가 3명인 셈이다.
▲환하게 웃는 '장대현학교' 학생·선생님들 - 부산 강서구 장대현학교에서 학생들과 선생님들이 활짝 웃고 있다. 2014년 개교한 장대현학교는 탈북 청소년들을 가르치고 적응을 돕는 대안학교다. 앞줄 맨 오른쪽이 이 학교 교장인 임창호 목사다. /김종호 기자
목사인 임창호(60) 교장은 2007년부터 탈북민을 돕는 교회를 운영하면서 탈북민 대안학교의 필요성을 느꼈다고 한다. 그는 "탈북민 학부모와 면담해 보니 일반 학교에 적응하지 못하는 탈북 청소년이 많았다"고 했다. 기존 탈북민 대안학교는 대부분 수도권에 집중돼 있어 지방의 탈북민은 자녀를 보낼 수가 없었다. 임 교장은 주변의 도움 덕분에 2014년 부산에 장대현학교의 문을 열었다. '장대현'이란 이름은 6·25 이전에 평양에 있던 교회에서 따왔다. 부모가 평북 출신이라는 익명의 독지가가 12억원 상당의 건물을 강의실로 기부하는 등 200여 명이 힘을 보탰다. 선생님 충원에는 부산 시민들이 나섰다. 전·현직 교사, 학원 강사, 회사원, 주부까지 탈북 청소년을 무료로 가르쳐주겠다고 했다.
이들이 이 학교에 모인 이유는 '통일 한국 건설에 쓰임 받는 자가 되라'는 학교 교훈에 공감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논술을 가르치는 송진영(54·학원강사)씨는 "탈북 청소년들은 통일 후 남·북을 이어주는 소중한 존재가 될 것임을 국민들이 잘 모르는 것 같다"고 말했다. '영어 원어민 샘'인 루이스 갈로(58)와 리사 갈로(57) 부부는 미국에서 왔다. 목회자였던 이 부부는 북한 인권운동가인 수잔 숄티 미국 디펜스포럼 대표로부터 '이 학교에 원어민 교사가 필요하다'는 이야기를 듣고 자원했다고 한다. 루이스씨는 "탈북 학생들은 북에서 미국인은 나쁜 사람들이라고 배워서 그런지 처음에는 눈도 마주치지 않으려고 했다"고 전했다. 리사씨는 "아이들이 마음을 열고 우리를 믿어줘서 고맙다"고 했다.
중학교에서 26년 동안 사회를 가르쳤던 전직 교사 도상욱(63)씨는 학생들에게 "TV에 나오는 신용대출 광고 보고 돈 빌리면 큰일 나요. 집안 망해. 이자는 은행이 제일 싸요!"라고 했다. 실생활에 필요한 내용을 가르치는 것이다.
이 학교 학생 18명 중 3명은 탈북과 관련 없는 '남한 학생'이다. 통일에 관심 있는 부모와 학생들이 스스로 입학을 선택했다고 한다. 이 중 한 명인 한예지(15)양은 "함께 공부해보니 말투만 조금 다를 뿐 같은 한국 사람이라는 걸 느꼈다"고 했다. 학생회장이자 '왕언니'로 통하는 24세 강으뜸(가명)양은 북한에서 중국어 교수가 되는 게 꿈이다. 10년 전 탈북해 중국 식당에서 일하다가 재작년에 온 강양은 학교에 다니는 건 이번이 처음이다. 그러나 1년 만에 중학교 검정고시에 합격했다. 장그래(가명·16)양은 "변호사란 직업이 있다는 걸 한국에서 처음 알았다"며 "변호사가 돼서 통일 후 고향 양강도에 돌아가 억울한 사람들을 돕겠다"고 했다.
[6] 봉사활동 펼치는 탈북민들 도움 받던 탈북민들 "도움 주니 정착 더 잘되더라"
'작은 나눔봉사단'의 탈북민 8명 "우리를 받아준 한국에 보답"
장애인 복지시설 관계자 "무관심한 한국 사람보다 낫다"
전국에 탈북민 봉사단체 40여곳
탈북자들은 남한 사회에서 도움만 받는 것으로 잘못 알고 있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익숙지 않은 체제에 적응하는 과정에서 도움을 받은 이상으로 남한 사회에 기여하며 사는 탈북자들도 많다.
"양파랑 피망은 볶음밥에 쓸 거니까 아주 잘게 썰어야 해요." 지난달 부산시 북구 화명동의 장애인 사회복지 시설인 '평화의 집'. 주방 뒷마당에서 '작은 나눔봉사단'이라고 적힌 파란색 유니폼을 맞춰 입은 중년 여성 8명이 구슬땀을 흘리며 채소를 썰고 있었다. 이곳에 거주하는 장애인 등 120인분의 점심을 준비하기 위해서다.
이날 봉사 활동을 주도한 서귀복(49) 단장은 탈북민이다. 함북 샛별군 출신인 그는 1998년부터 네 차례의 북송(北送)과 재탈북을 거듭한 끝에 2004년 몽골을 거쳐 한국 땅을 밟았다. 그러나 정착은 녹록지 않았다. 몽골 국경에서 철조망을 넘을 때 다친 허리 때문에 진통제 없이는 일상생활이 힘들었다. 북한에 두고 온 딸을 데려오기 위해 악착같이 모았던 돈을 모두 사기당하기도 했다.
자살까지 생각했던 서 단장이 삶의 희망을 찾은 곳은 담당 형사를 따라 우연히 찾은 '평화의 집'이다. 서씨는 "몸이 불편한데도 열심히 살아가는 남한 장애인들을 보면서 '내가 나약했구나' 싶었다"고 했다. 그는 한 달에 두 번씩 이곳을 찾아 장애인들을 목욕시키고 주방 일을 도왔다. 그는 주변 탈북민에게도 '평화의 집' 봉사 활동을 권하기 시작했다.
▲지난달 부산시 북구 화명동의 장애인 사회복지시설인 ‘평화의 집’에서 탈북민과 남한 주민이 함께 만든 봉사단체 ‘작은 나눔봉사단’이 점심을 준비하고 있다. 사진은 탈북민인 양한결(가운데)씨와 배영옥(오른쪽)씨 등이 단원들과 함께 음식 재료를 손질하는 모습. /김종호 기자
마음이 통한 탈북민들이 하나 둘 모여 2010년 '작은 나눔봉사단'을 만들었다. 경남 양산에서 노래방을 운영하는 탈북민 배영옥(가명·38)씨는 "대한민국 발전에 벽돌 한 장 보탠 적 없는 나를 받아주고 도와준 데 보답하고 싶어 봉사 활동에 나섰다"고 했다. 양산에서 양꼬치 가게를 하는 탈북민 양한결(37)씨도 "북한에선 풀죽도 못 먹었는데 남한에 와선 나름대로 부자가 됐다"며 "봉사 활동을 통해 한국 사회에 고마움을 전하고 싶다"고 말했다.
탈북민들의 봉사 활동이 알려지면서 지역 주민들도 가입하기 시작했다. 현재 작은 나눔봉사단원 15명 중 8명은 탈북민, 7명은 남한 사람이다. 봉사단 부단장인 손정규(30)씨는 "처음에는 탈북민에 대한 선입견 때문에 어색했는데 함께 봉사 활동을 해보니 우리나라 아줌마들과 별반 다를 게 없더라"며 "봉사 활동을 통해 남북한 주민이 하나가 되는 것을 느낀다"고 했다.
작은 나눔봉사단은 한 달에 두 번 '평화의 집'에서 봉사 활동을 한다. 지적장애인 김민수(가명·23)씨는 어눌한 말투로 "(북에서 온) 이모들이 밥도 해주고, 청소도 해주고, 운동하는 것도 도와줘요. 많이 고마워요"라고 했다. 평화의 집 관계자는 "낯선 곳에서 적응하느라 본인들도 힘들 텐데 늘 밝게 웃어준다"며 "무관심한 한국 사람들보다 낫다"고 했다. 봉사단은 또 매월 넷째 주 목요일엔 부산 북구의 화정복지관에서 50여명의 지역 독거 노인들에게 '밑반찬 만들기' 봉사를 진행한다. 매달 한 번씩은 부산연탄은행과 함께 150명의 독거 노인들에게 무료 급식 봉사 활동도 한다.
탈북민 정착 지원 기관인 남북하나재단의 '2015 북한 이탈 주민 사회 조사' 자료에 따르면 최근 1년간 자원봉사 경험이 있다는 탈북민은 전체 응답자의 23.3%로 전체 국민을 대상으로 한 통계청 사회 조사 결과(18.2%)보다 5.1%포인트 높았다. 현재 전국의 탈북민 자원봉사 단체는 40여개에 이른다. 박상돈 통일부 정착지원과장은 "탈북민 사회가 성숙하면서 '남한 사회에서 받은 만큼 되돌려주자'는 인식이 확산하고 있다"며 "봉사 활동이 남북 통합의 디딤돌 역할을 하는 셈"이라고 했다.
['통일 사다리' 캠페인 독자 제보·의견·제안 받습니다]
■ 영상과 이미지
□ 요덕스토리 - 감독 장성산
□ 탈북여성 고문 현장
□ 탈북민 북송반대 촛불기도
▲탈북자 북송 마세요 - 12. 5. 22. 종로구 목인교회에서 탈북자 강제 북송반대 100일 기념 촛불집회
꽃제비 진혁
채널A 이제 만나러 갑니다
■ 자유를 위한 탈북자들의 단체
2016.09.20 탈북자 단체, '북한인권법 실천을 위한 단체 연합' 발대식 개최
북한인권 및 자유화운동에 앞장섰던 30개 탈북자 단체들로 이뤄진 '북한인권법 실천을 위한 단체 연합' 발대식이 19일 오후 서울 프레스센터에서 개최됐다.
단체들은 북한주민들에게 보내는 호소문을 통해 "대한민국과 국제사회가 안간힘을 쓰며 말려온 핵을, 김정은이 세상 사람들의 면전에서 보란 듯이 터뜨렸다"며 "이로써 김정은은 인류 공동의 적이 되었고 북한 인민들이 겪어야 할 더 큰 고난과 굶주림의 근원이 되었다"고 주장했다.
이어 "김정은의 거듭되는 핵실험으로 우리 조국은 붕괴의 위기에 내몰렸다"며 "북한인권법과 강력한 대북제재로 김정은 독재정권을 하루빨리 끝장내고 조국의 자유와 해방을 앞당기자"고 호소했다.
단체들은 또 북한인권법 실행을 위해 채택된 공동 성명서에서 "김정은이 감행한 핵실험은 한반도는 물론 세계의 평화와 인류의 안전에 대한 심각한 도전이고 도발"이라고 규탄했다.
아울러 성명서는 "국내 탈북자들은 물론 유럽, 미국, 중국, 일본 등지에 사는 탈북자들과 대연합을 형성해 김정은에게 치명타가 될 세계탈북민연대를 형성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발대식에는 탈북자 단체 대표 30명과 탈북자 100여명이 자리했고 김석우 전 통일부 차관과 이인제 전 의원 등이 외빈으로 참석했다. 아래는 성명서 전문.
북한인권법실행을 위한 단체연합 공동 성명서
김정은 집단은 지난 9일, 대한민국과 국제사회의 거듭된 경고에도 불구하고 또 한 번의 핵실험을 감행하였다. 이는 한반도는 물론, 세계의 평화와 인류의 안전에 대한 심각한 도전이고 도발이다.
동시에 이는, 굶주림에 허덕이고 있는 북한 주민들의 삶과는 인연이 먼, 김정은 자신만의 정권 유지를 위한 반인민적 행위이며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결의 2094호 등을 명백히 위반한 범죄행위이다.
결국 김정은은 그 책임에서 벗어날 수 없는 북한인권문제로인해 국제형사 재판소에 제소되고, 미국과 중국 등 주변국 정상들이 인내를 안고 지켜보는 마당에조차 핵실험을 강행한 무법자, 깡패임이 입증된 셈이다.
하여 우리는, 이런 유형의 독재자, 군사깡패에게 더 이상 말이 필요 없음을 절감하며 북한인권법실천을 중심으로 한, 세습독재자 김정은과의 판가리 싸움을 다짐한다.
하나, 북한주민들에게 외부소식을 알리고 김정은정권의 반인민성을 폭로하는 대북전단을 북풍이 불면 부는 대로 끊임없이 날릴 것이다.
하나, 김정은 세습독재정권이 인위적으로 조성한 정보의 차단막을 뚫고 민간대북방송을 끊임없이 송출할 것이며 중파 및 위성방송을 비롯한 다양한 채널을 확보해 북조선 인민들에게 자유와 민주주의를 설파할 것이다.
하나, 밝히건대 북한으로 유입되어, 북한의 자유화에 공헌하고 있는 그 많은 노트텔과 USB, 각이한 영상기기들, 라디오 등은 지난 10여 년간 탈북민들과 단체들이 벌여온 사투의 결과물이다.
지난 시기 소극적이고 비공개적인 방법으로, 교회와 민간단체들의 지원에 의거해 벌여온 이러한 일들을 앞으로는, 공개적으로, 대량투입의 형식으로 진행할 것이며 전 국인이 이에 동참할 수 있도록 새로운 차원의 ‘북한자유화운동’을 벌려 나갈 것이다.
하나, 중국과 제3국에서 떠도는 탈북민들의 국내입국을 우리가 맡도록 한다. 지난시기 대한민국정부가 중국 등을 향해 ‘조용한 외교’를 펼치는 동안 북으로 끌려간 형제, 자매들의 희생까지를 통감하며 정부가 하지 못하고 있는 탈북민 국내입국을 탈북민 우리가 맡아 수행하도록 한다.
하나, 북한 내 열악한 인권상황을 고발해온 공개총살 동영상, 사진 및 각종 강연, 기밀자료의 국내유입역시 탈북민들의 몫이었다. 그 길에서 희생된 영령들의 넋을 끝까지 이어 갈 것이며 내부 통신원들과의 연대를 더욱 강화해, 북한 내에 자유통일을 위한 반체제전선을 뿌리깊이 형성해 나갈 것이다.
하나, 국내에서 생활하고 있는 3만여명의 탈북자들과 유럽과 미국, 중국과 일본 등의 탈북자들과 김정은 정권붕괴를 이유로 하는 대연합전선을 형성할 것이다.
세계탈북인대회와 북한자유주간, 유렵지역의 탈북민연대와 미주지역 탈북민들이 시도하고 있는 망명정부 등으로 탈북민 연대는 현재 진행형이며, 빠른 시일 내에 김정은에게 치명타가 될 세계 탈북민연대를 형성할 것이다.
이 외에도 핵에 미친 김정은 세습독재정권의 멸망을 위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많고, 시간은 촉박하다. 대한민국정부와 관련 기관들인 국정원과 통일부가 이같은 탈북민들의 결의를 믿고 적극 협조해 주기를 바란다.
여, 야를 막론하고 우리의 머리위에 쏟아질 김정은의 핵폭탄이 걱정인 사람이라면 김정은을 몰아내기 위한 탈북민들의 북한자유화운동에 동참하길 바라며 김정은의 예고된 핵 참화로부터 대한민국을 지켜낼 한국형 핵 개발과 도입을 적극 호소한다.
아울러, 탈북민들을 믿어왔고, 연대와 협조를 아끼지 않았던 대한민국의 애국시민들, 단체들과의 연대를 더욱 강화해 북한의 세습독재정권의 붕괴를 앞당길 것을 결의하며 이 영광스런 대오에 국, 내외 전체 탈북민들의 동참을 호소한다.
2016년 9월 19일 <북 핵 규탄>, <북한인권법실천을 위한 단체연합>
글 | 자유북한방송
2016.09.28 통일부, 탈북자 배제하고 북한인권 조사 실행?
▲지난 24일과 25일 강화군 모처에서 2박3일간의 탈북단체장 워크숍이 열렸다. 정확한 명칭은 <북한인권법실천을 위한 단체연합의 전략 및 비전을 위한 워크숍>이며 참여한 단체장 및 단체임원은 50여명이다.
그보다 먼저 이들 탈북민단체장들은 지난달 12일과 9월 7일, 그리고 11일 거듭되는 모임과 간담회 등을 가졌고, 9월 19일에는 서울 프레스센터에서 <북한인권법실천을 위한 단체연합>을 결성했다.
이날 결성식에는 31개 탈북단체장과 탈북운동가 100여명이 참석했으며 탈북자동지회 최주활 회장, 세계북한문제연구소 안찬일 소장, 탈북인단체총연합 한창권 대표, 북한전략센터 강철환 대표, 자유북한운동연합 박상학 대표 등이 연설했다.
무엇 때문에 탈북민들이 뭉친 걸까. 그리고 이 같은 긴급행동에 나선 것일까. 저들 탈북민들은 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걸까.
이날 사회를 맡았던 NK지식인연대 김흥광 대표는 이렇게 말했다. “북한인권법 아래 탈북사회 최초의 대연합이 구성됐다. 우리를 김정은 타도의 핵폭탄으로 써 달라”. 이애란 자유통일문화원원장도 “탈북민들이야 말로 북한인권법의 주체”임을 강조했고 “이를 위해 뭉치고 또 뭉치자”고 호소했다.
하지만 그동안 북한의 열악한 인권에 대한 자신들의 증언과, 자신들의 목숨 건 사투와, 자신들의 노력으로 만들어진 것이나 다름없는 북한인권법은 그 실행단계에서부터 저들, 탈북민들을 한낮 구경꾼으로 전락시켰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북한인권법에 따른 '북한인권기록센터'나 ‘북한인권재단’이 결국은 탈북민들에 증언과 경험에 의지할 것이 분명하나, 너희들은 때가 되서 우리가 부를 때 ‘그 수행 도구가 되면 된다’는 통일부의 안이한 시각이 북한인권법시행 초기부터 드러났다는 이야기다.
아직도 통일부가 그 구체적 윤곽을 드러내놓지 않고 있는 북한인권법실행을 위한 상설 및 비상설 기구들에서 탈북민들은 배제되었고 이미 조직되었다는 '북한인권기록센터'는 <북한주민의 인권 실태 조사·연구>와 <북한(관련)자료·정보의 수집·연구·보존·발간>등이 목적이라고 하면서도 탈북민들은 역시나 들러리로도 세울지 말지다.
사태가 이러함에도 통일부가 북한인권법실행이라는 이 중차대한 시기에 탈북민들을 배제할리 없다는 사람들과 과거 북한이탈주민지원재단 실례만 놓고 봐도 탈북민들은 벌써 배제되었다는 사람들로 찬반은 엇갈리고 있다.
그래서 더 기다려 보아야 한다는 사람들이 전자라면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통일부의 꿍꿍이속을 두드려 보아야 한다는 사람들이 나오는 게 현실이다. 그 때문에 모임이 거듭됐고 한 달여 동안의 탈북단체장 카톡방도 운영되고 있는 중이다. 그리고 지난 19일 단체결성 기자회견 장에선 탈북민들의 이런 고민이 담긴 박근혜대통령께 보내는 편지도 채택됐다.
이튿날 청와대 행정관을 통해 대통령님께 전해드린다는 답변도 받은 상태다.
“존경하는 대통령님께 드립니다”로 시작된 편지엔 이런 내용도 있다.
...대통령님께서도 아시겠지만, 지금껏 대한민국언론과 국제사회가 말하는 ‘대북전단’, ‘대북라디오’, 북한으로 들여보내는 USB와 노트텔, 한국드라마와 음악 등은 모두 탈북자들에 의해 보내진 것이며 북녘의 고향사람들을 향한 저들의 사랑과 지혜, 노력의 산물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이번 북한인권법 실행을 위한 정부의 시행령에서부터 탈북민들은 배제되었고, 저희들의 노력과 지혜, 그간의 경험은 무시되었으며 ‘탈북자들은 북한문제해결을 위한 실천운동의 들러리거나 이용물이다’는 서글픈 자평까지 나오게 되었습니다.
존경하는 대통령님, 따지고 보면 ‘북한인권기록보존소’나 ‘북한인권지원재단’의 운영은 하나같이 탈북자들의 증언과 경험에 기초해야 하는 일들임에도 탈북민들을 끝까지 운동의 주체가 아니라 들러리, 이용물로 생각하는 이 큰일 날 지경에서 저희들을 구해 주십시오.
지금껏 탈북민들이 목숨 걸고 실천해온 대북정보 유입 및 유출행위는 돈보다, 저희들을 믿고 지지해준 대한민국 애국시민들의 지지 속에 이루어 졌음을 살펴주시고, 지금 저희들에게 가장 절실한 지지를 소원합니다.
그래서 대한민국의 박근혜 대통령이 탈북자들을 만나 주었다는 소식만으로도 김정은이 기절초풍하고, 북한주민들에 대한 대통령님의 사랑과 김정은에 대한 증오가 세상 만방에 전해질 날을 고대합니다,,,
하지만 청와대는 아직까지 감감 무소식이다. 그래도 오늘 그 무슨 현판식에 단체연합의 대표들이 축하사절이 되여 찾아간다는 이야기가 들려온다.
그래서 더 고민인데, 정말 탈북민들은 북한인권과 북한자유화운동에 쓰고 남는 돌덩어린가. 정말로 북한인권법실천을 위한 행위에 만큼은 백명도 넘은 북한관련 탈북민 석, 박사가 무용지물이고 이방인인가.
이제 통일부는 북한인권관련 기록 및 조사, 그 실천운동에서 탈북민들을 부르면 달려오는 10~20만원짜리 이용물로 생각해온 그릇된 과거에서 깨어나야 함을 알아야 한다.
글 | 김성민 자유북한방송 대표
2016.12.15 北 "탈북민들, 北·中국경서 무인기로 김일성 동상 타격 시험"
對北소식통 "지난달 시험 비행… 北이 도발 땐 동상 공격 계획"
북한 대남선전매체인 '우리 민족끼리'는 14일 우리 정부의 지시를 받은 탈북민들이 무인기(드론)로 북·중 국경지역에 있는 '김씨 일가' 동상을 공격하는 시험을 했다고 주장했다.
이 매체는 이날 '태양(김씨 일가)을 어떻게 해보려는 자들은 살아 숨 쉬지 못할 것'이라는 제목의 논평에서 "인간쓰레기들(탈북민들)이 우리 '최고 존엄'에 도전하는 망동 짓을 감행하고 있다"며 이같이 밝혔다. 북한에서 최고 존엄은 김일성·김정일·김정은을 의미한다.
매체는 "최근 정치 추문 사건으로 최악의 위기에 직면한 박근혜 역적패당의 부추김과 재정 후원 밑에 월남 도주자들(탈북민들)이 우리 공화국과 인접한 주변 지역에 몰래 기어들어와 무인기로 북부 국경지역에 모셔진 동상을 타격하기 위한 시험까지 하는 등 음모 책동에 광분하고 있다"고 했다.
북한의 이런 주장과 관련, 국내 대북 소식통은 이날 "지난달 23~27일 일부 탈북민이 중국 지린성 창바이(長白)현에서 약 700m 떨어진 북한 양강도 혜산의 '보천보 승리 기념탑'까지 무인기 2대를 띄우는 시험 비행을 했다" 며 "그 결과는 성공적이었다"고 했다.
그는 "북한이 추가 핵실험이나 군사분계선 등에서 대남 군사 도발을 감행한다면 1400㎞에 달하는 북·중 국경지역 어디서든 무인기를 띄워 '김씨 일가' 동상을 공격하려는 계획을 세우고 있다"고 말했다.
보천보 승리는 1937년 김일성이 유격대를 이끌고 양강도 보천읍의 일제 경찰서를 습격해 승리한 전투라고 북한은 주장한다.
김명성 기자
■ 김정은을 찬양하는 탈북자들 - 간첩
2016.11.03 탈북자 인터넷 사이트에 김정은 찬양 글 올린 40대 탈북자 기소
북한 중학교 화학교사 출신의 40대 탈북자가 인터넷 사이트에 북한 체제와 김일성 3부자를 찬양하는 글을 올려 검찰에 적발됐다.
인천지검 공안부(윤상호 부장검사)는 3일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A씨(44)를 구속기소했다고 밝혔다.
A씨는 지난 2009년 12월부터 올해 7월까지 탈북자들이 주요 이용하는 인터넷 사이트에 북한 정권과 김일성·김정일 부자와 김정은 노동장 위원장을 찬양하는 내용의 이적표현물 63건을 작성해 올린 혐의를 받고 있다.
A씨는 국립중앙박물관이나 주민센터, 도서관 등 공공기관의 공용 컴퓨터를 이용해 이적 표현물을 올렸다. 그가 글을 올린 사이트는 탈북자들이 주로 이용하는 인터넷 사이트인 '탈북자동지회'다. 이 사이트의 회원 수만 1만명이라고 한다.
A씨는 이 곳에 "찬바람 눈보라가 휘몰아쳐도 대를 이어 충성을 다하렵니다" 등의 글을 올렸다. 북한에서 배운 '혁명역사' 등 북한 원전이나 저작물, 담화, 노래 등을 그대로 활용한 글이다. 그는 탈북자동지회 홈페이지가 로그인을 하지 않고도 글을 올릴 수 있는 점을 이용해 닉네임을 매번 바꿔가며 이적표현물을 작성했다. 올해만 4차례나 이사하는 등 범행을 은폐하려는 시도도 했다고 한다.
검찰 조사 결과 A씨는 함경북도 청진시 제1사범대학을 졸업한 뒤 2년간 중학교 화학교사로 근무하다 2005년 7월 탈북했다. 이후 중국과 캄보디아를 거쳐 2007년 4월 국내로 들어왔다. 국내에서는 일용직 노동자로 일하며 생활했다.
검찰 관계자는 "A씨가 탈북민들의 정서적 허점을 이용해 '배신자'라는 올가미를 씌우고 다시 북한으로 돌아가 혁명전사로서 의리와 양심을 지킬 것을 종용했다"며 "탈북자와 북한인권운동가를 대상으로 한 살해 협박글도 게시하는 등 공격적인 성향도 드러냈다"고 설명했다.
인천=최모란 기자 moran@joongang.co.k
2017.09.02 "딸 보고 싶다" 한마디 남기고 사라진 北고위층 탈북녀
[제2의 임지현?… 행방 묘연한 60대 여성, 재입북 의심]
가족 중에 노동당 간부·장교
2년 전에도 北 되돌아갈 목적… 중국으로 출국하려다 처벌받아
"북한 매체에 출연할 것" 소문
북한 엘리트 출신 탈북자 여성 A(60)씨가 지난 7월 중국으로 출국한 이후 행적이 알려지지 않아 경찰이 수사에 나선 것으로 1일 확인됐다. A씨는 2015년 재입북 목적으로 중국으로 출국하려다 처벌받은 적이 있다. 경찰은 A씨가 이번에도 재입북하려고 한국을 떠났을 가능성이 높다고 보고 있다. 탈북자들 사이에선 A씨가 이미 북한에 들어갔으며, 최근 재입북한 탈북 여성 임지현씨처럼 북한 선전 매체 '우리민족끼리'에 출연할 것이라는 소문이 돌고 있다.
함경북도의 한 도시에 뿌리를 둔 A씨 집안은 북한에서 정치적으로 상당히 지위를 인정받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가족 중에 노동당 간부와 인민군 장교도 있다고 한다. 또 A씨와 그의 외동딸은 의사 직업을 갖고 있었다. 남부러울 것 없던 생활을 하던 A씨였지만 2000년대 중반부터 신변에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다. A씨의 여동생 가족이 기독교 예배에 참석했다는 이유로 정치범 수용소로 끌려가 생사를 확인할 수 없게 됐기 때문이다. 이후 A씨 가족은 북한 당국의 감시를 받으며 살아야 했다.
A씨는 당국의 감시가 약해진 2012년 중국에 사는 친척을 방문하겠다고 출국 신청을 해 2개월짜리 비자를 받았다. 중국 친척집에 머무는 동안 A씨는 북한에 있는 지인에게서 "국가보위부 요원들이 네 집으로 찾아왔다. 뭔가 체포할 꼬투리를 잡은 것 같다. 돌아오면 수용소로 끌려갈 수 있으니 차라리 한국으로 가는 게 낫겠다"는 연락을 받았다.
북한 체제를 거스르는 일을 하지 않았고, 가족 중에 노동당 간부도 있었던 A씨는 한국행에 거부감을 보였다고 한다. 하지만 여동생 가족이 정치범 수용소로 끌려갔다는 사실이 마음에 걸렸다. 북한으로 돌아갔다가 체포되면 무사히 풀려나리란 보장이 없었다. 친척들도 "목숨은 부지해야 하지 않겠느냐"며 A씨를 설득했다.
결국 A씨는 브로커의 주선을 통해 제3국으로 건너갔다. 탈북 이후에도 북한에 남아 있는 외동딸이 걱정돼 북으로 돌아갈 뜻을 비친 적이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같이 북한을 떠나온 사람들이 "당신이 돌아가 잡히면 우리가 모두 위험해진다"며 A씨를 말렸다.
한국에 와서 강원도 춘천에 정착한 A씨는 주로 간병 도우미로 일했다. 동네 사람들과는 교류가 많지 않았고, 한국에 있는 탈북자 단체에도 가입하지 않았다. 2015년엔 재입북을 하려고 중국으로 가려다 경찰에 붙잡혔다. 평소 "가족이 그리워 북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말을 했던 A씨가 국내 생활을 정리하고 떠나려 하자 주변에서 신고를 했다. 당시 A씨는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다.
탈북자가 재입북하려다 적발되면 국가보안법(잠입·탈출) 위반으로 7년 이하의 징역 처벌을 받는다. 법원은 딸을 그리워했던 A씨의 사정을 고려해 집행유예 처분을 했다. 하지만 A씨는 지난 7월 집행유예 기간이 끝나자마자 여권을 재발급받고 중국으로 건너가 소식이 끊어진 상태다. A씨를 잘 아는 한 탈북자는 "우리 같은 사람들은 생이별한 가족에 대한 그리움을 안고 살 수밖에 없다. A씨는 그것을 견디지 못한 모양"이라고 말했다.
권선미 기자
■ 김정은을 동경하는 한국의 주사파 단체들
2016.06.20 가족의 生死' 앞에 선 탈북 12인
민변 "한국行이 납치인지 自意인지 가리자"… 법원서 수용
법정서 자진 탈북 밝히면 北 가족들 死地로 내몰릴 위험성
정부선 "北 주장에 놀아나는 일… 일단 변호사 출석시킬 것"
법원은 최근 국가정보원에 지난 4월 초 중국 내 북한 식당을 집단 탈출해 국내에 입국한 여성 종업원 12명을 21일 법정에 출석시키라고 통보했다. 이들이 정부 발표대로 스스로 한국에 온 건지, 북한 주장대로 국정원에 유인·납치된 건지 가리겠다며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민변)이 낸 인신 보호 구제 심사 청구를 받아들인 것이다. 정부 관계자는 19일 "종업원들을 법정에 세우란 건 북한 주장에 놀아나는 일"이라며 "일단 변호사를 대신 출석시키려고 한다"고 했다.
▲지난 4월 입국한 中 북한식당 종업원들 - 법원이 지난 4월 초 중국 내 북한 식당을 집단 탈출해 국내에 입국한 여종업원 12명을 법정에 출석시키라고 국정원에 통보해 논란이 일고 있다. 사진은 여종업원들이 국내에 들어온 직후 탈북 배경 등을 조사받기 위해 경기도 시흥시 북한이탈주민보호센터로 이동하는 모습. /통일부 제공
'인신 보호 구제 심사 청구'는 위법한 행정처분이나 타의에 의해 부당하게 시설에 수용된 사람의 기본권 보장을 위해 법원에 석방을 요청하는 것이다. 주로 강제로 정신병원에 갇힌 사람을 꺼낼 때 쓰인다. 민변은 "여러 의혹을 해소하고 투명하고 공개적인 검증을 하겠다"며 지난달부터 국정원을 상대로 탈북 종업원들에 대한 변호인 접견을 신청하다가 거절당하자 해외 친북 성향 인사들이 평양에 가서 받아온 종업원 가족들의 위임장을 건네받아 인신 보호 구제 심사를 청구(5월 24일)했다.
이에 대해 탈북자들과 북한 인권 운동가들은 "인권 가해자인 북한 당국의 편에서 인권 피해자인 탈북자와 그 가족을 사지(死地)로 내몰았다"고 반발하고 있다. 새누리당 하태경 의원은 이날 "북한 당국이 이들의 가족을 인질로 잡고 있는 상황에서 탈북자가 사실 그대로 진술하기가 어려운데도 이를 강제하는 것은 심대한 인권 탄압"이라고 했다. 종업원들이 사실대로 "스스로 탈북했다"고 진술할 경우 북에 남은 가족들은 '반역자 무리'로 몰리게 된다. 가족들의 안위를 염려한 종업원들이 "납치가 맞다"는 진술을 할 수도 있다.
법조계에선 "1차적으로 보호센터에 있는 탈북자가 인신 보호 구제의 대상이 될 수 있는지 의문"이란 해석도 있다. 법조 관계자 A씨는 "법원 출석 과정에서 자칫 이들의 진술이 변호인을 통해 외부로 유출될 가능성이 크다"며 "서류 심사만으로도 '인신 보호 청구의 대상이 아니다'고 결정할 수 있는 사안"이라고 했다.
대한변호사협회가 추천한 국정원 인권보호관 신분으로 귀순 종업원들을 여러 차례 만난 박영식 변호사는 최근 본지 인터뷰에서 "종업원들은 북에 남겨둔 가족과 자신의 신변 안전을 우려해 (개인 신상이나 발언이) 밖으로 드러나는 것을 절대 원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는 일부 종업원 사망설에 대해 "그걸 믿느냐"며 "(지배인 출신 남성을 포함해) 13명 모두 건강하게 잘 있다는 건 분명하게 말씀드릴 수 있다"고 했다.
귀순 종업원들의 법정 출석을 둘러싼 논란에 대해 서울중앙지법 관계자는 "사건의 민감성을 충분히 인식하고 있다"며 "심문 내용이 누설되지 않도록 대리인이나 관계자들에게 당부할 것"이라고 했다.
이용수 기자
2016.06.21 '탈북 12인 법정 증언', 北 가족 死地로 모는 잔인한 횡포다
지난 4월 중국 저장(浙江)성의 북한 식당에서 일하다 탈출해 한국에 들어온 북한 여성 종업원 12명을 법정 증언대에 세우기 위한 재판이 21일 열린다. 탈북 여성들이 자진해서 한국에 온 것인지를 가리자는 것이다. 이는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민변)이 청구한 '인신 보호 구제 심사'를 법원이 받아들인 데 따른 것이다. 인신 보호 구제 심사란 정신 질환이 아닌데도 타의(他意)에 의해 강제로 정신병원에 갇혀 있는 사람을 감금에서 구해내기 위해 쓰이는 절차다. 국정원이 운영하는 북한이탈주민보호센터에 머무는 탈북자에 대해 법원이 국정원 보호의 적법성을 따지는 건 처음이다. 국정원은 탈북자들이 법정에 서면 북의 가족들이 곤경에 빠질 수 있다고 보고 일단 법정 대리인만 출석시킨다는 입장이라고 한다.
민변은 탈출 종업원들을 증언대에 세우기 위해 미국·중국에 거주하는 친북 인사들을 동원해 북한에 있는 탈북자 가족의 위임장을 확보해 재판부에 제출했다. 북한에 들어가 위임장을 받아 민변에 전달한 사람은 김일성 일가를 선전한 공로로 박사 학위를 받은 사람이다.
도무지 납득할 수 없는 것은 북의 탈북자 가족들이 썼다는 위임장이 진짜로 그 가족들의 본심(本心)을 반영한 것이라고 어떻게 장담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김정은 치하의 북한 주민들은 숨소리도 낼 수 없는 압제 아래 살고 있다. 마음으로는 자기들 딸이 남한에 잘 정착해 살기를 원하더라도 그런 속내를 털어놓을 수 없는 사회가 북한이다. 법원이 이런 사정을 알면서도 탈북자들을 법정에 세우겠다고 한 것은 이해할 수 없다.
종업원들을 법정에 세운다면 자유를 찾아 탈출의 결단을 감행한 사람들을 궁지로 몰아넣는 것이 된다. 종업원들이 법정에서 '자진해 남한에 들어왔다'고 진술한 사실이 노출되면 북에 남은 가족들은 반역자로 몰리게 된다. 자기 고모부까지 고사포로 쏘아 죽인 게 김정은 체제다. 그런 나라에서 살아본 이 종업원들에게 거짓말을 해 북의 가족들을 보호하거나 진심을 말해 가족들을 구렁텅이로 빠뜨리는 두 가지 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강요하는 것은 반인권적인 것을 넘어 잔인한 일이다.
만일 민변 청구대로 탈북 종업원들이 법정 증언대에 서게 될 경우 앞으로 비슷한 일들이 벌어질 것이다. 국내에 들어와 있는 탈북자가 3만명이다. 자칫하면 친북 변호사들이 목숨을 걸고 남한으로 탈출해온 사람들을 법정에 세워놓고 '당신 자유의사 맞냐'고 추궁하고 드는 상황이 일상적으로 벌어질 수 있다.
이들이 국정원에 납치된 거라면 중국 당국이 이들의 출국을 허용했을 리 없다. 대한변협이 추천한 국정원 인권보호관 신분으로 탈북자들을 여러 차례 만난 박영식 변호사도 "북한으로 돌아가길 원하는 사람은 한 명도 없다"고 했다. 민변이 정말 그렇게 인권을 떠받드는 사람들이라면 왜 이제까지 북의 억압적 세습 왕조 체제와 북한 정치범 수용소의 처참한 현실에 대해선 입을 닫고 있었던 것인지도 알 수 없다.
조선일보 사설
2016.06.21 탈북 여성들의 자유의사를 확인하겠다는 이영제 판사님께
법원이, 북한이탈주민보호센터(이하 센터)에 머물고 있는 전 북한식당해외종업원 12명을 법정에 출두시켜 저들이, 자유의사에 따라 국내에 입국한 것이 맞는지를 확인한다고 하는데 맞습니까? 맞는다면 정말 할 말을 잃습니다.
대체 열두 명 탈북자들에게서 무슨 대답을 듣고 싶은 것입니까. 정말 대한민국법원이 이래도 되는가며 허탈에 빠져드는 탈북자들이 수백, 수천으로 늘어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만, 단언컨대 저들은 혀를 베어버리면 베어버렸지 자신들의 의사를 밝힐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북한의 서슬 푸른 독제체제하에 사랑하는 부모형제들이 남아있는데, 그래서 자신들의 말하기에 따라 죽고 살기가 결정될 판인데, 판사님이라면 ‘내가 김정은 독제체제에 환멸을 느껴 남조선으로 왔노라’고 말 할 수 있겠습니까.
아니면, 북에 있는 가족의 생명을 지키기 위해 12명 모두가 ‘나는, 남조선안기부의 조작에 의해 강제로 남조선에 끌려온 사람이다’고 세상에 대고 외치기를 바라십니까. 이따위 망측한 짓을 ‘공작’이라고, 김정은의 하수인들이 펴고 있는데 그 집행관이 되고 싶으신 것입니까.
통탄할 일입니다.
우리 탈북자들은 감히, 이제라도 판사님께서 정신을 차리시고 민변의 계략에서 ‘탈출’하시길 바랍니다. 아울러 자유를 찾아 사선을 헤쳐론 저 어린 처녀들을 죽음의 구렁텅이로 다시 몰아넣으려는 민변의 간계를 꿰뚫어 주시길 바랍니다.
민변은 지금 대한민국서울에서 북한의 가장 잔인한 주민통제수단인 ‘인민재판’을 재현시키려 하고 있습니다. 부모형제를 살리기 위해 내가 죽든지, 내가 살기위해 부모형제를 죽이든지...그 잔인한 ‘인민재판’을 대한민국 서울에서 판 크게 벌려놓으려고 꽤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확인되지도 않은 ‘국정원 공작 설’에 매어 달렸고, ‘센터 내 단식 설’과 ‘단식 중 1명 사망 설’도 뻔뻔스럽게 내 돌렸습니다. 아니면 말고 식의 마녀사냥에, 변호인의 특권 아닌 특권을 휘두르며 조사되지도 않은 탈북자들을 만나겠다고 생떼를 쓰며 달려들었습니다.
이 모든 ‘설’들을 누구로부터 전달받았고, 북한당국의 승인이 있어야 가능한 그 무슨 ‘구제정구서’의 입수과정이 먼저 밝혀져야 합니다. 신성한 법원까지 얼리고 닥쳐 끝끝내 탈북자들을 법정에 세우는, 그래서 정신적인 ‘사형’을 언도받아야 하는 큰일 날 지경까지 연출되었습니다.
존경하는 재판장님.
차라리 이런 악행을 백주에 저지르고 있는 민변에 대한 국민재판을 건의합니다. 대한민국의 민주주의에 기생하면서 민주주의를 좀먹고, 이 나라의 법과 원칙을 부정하는 민변과 같은 민주주의의‘적’들이 더 이상 활개 치지 못하도록 엄정 대책해 주실 것을 간곡히 당부 드립니다.
2016년 6월 20일 탈북자 김성민 드렸습니다.
2016.06.21 탈북여성 12인에 대한 법원의 출석요구가 위법인 4가지 사유는?
인권의 이름으로 인권을 파괴하며, 보호의 이름으로 보호대상자와 그 가족을 사지로 몰아넣고, 대한민국 법원의 이름으로 대한민국의 헌법과 법률을 배반하는 일이 대한민국에서 벌어지고 있다.
지난 4월 중국 저장성의 북한식당에서 근무하던 여자 종업원 12명과 남자 지배인 1명이 집단 탈출하여 동남아시아의 제3국에 머무르다 입국했다.
북한의 대표적인 외화벌이 수단의 하나인 해외식당에 파견될 만큼 상당한 지위를 가진 이들이 집단으로 탈출했다는 점에서 북한은 내부동요를 막고 집단탈북 도미노를 막기 위한 목적으로 탈북종업원의 입국 발표직후부터 적십자회를 앞세워 이들이 ‘납치’된 것이라 주장하기 시작했다.
이에 대해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이하 ‘민변’)’은 이들이 ‘자유의사로 입국한 게 맞는지’ 확인이 필요하다며 기자회견을 열었고, 이에 정부는 대한변호사협회가 추천한 박영식 인권보호관을 통하여 당사자들의 자발적 입국의사를 확인해준 바 있다.
그럼에도 민변은 거듭된 당사자들의 접견거부의사를 무시하고 접견청구를 지속하였고 급기야 최근 북한 가족들의 위임을 받았다며 인신보호법상 수용구제청구를 법원에 신청하였고 법원은 여자 종업원 12명 전원에게 심문을 위한 출석요구서를 보낸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민변의 인신구제청구와 법원의 심문출석요구는 아래에서 보는 바와 같이 형식적인 요건조차 달성할 수 없는 위법한 것이며 인권피해자인 탈북자와 그 가족들을 사지로 몰아넣고 있다는 점에서 그 행위의 부당함과 위중함이 도를 넘어서고 있다.
첫째, 민변의 이러한 행동은 대한민국 및 제3국 국가기관의 인권활동을 범죄시하는 것으로 대한민국과 국민을 공개적으로 모욕한 것과 다름이 없다. 민변은 한줌의 객관적 증거도 제출함 없이 오직 북한당국을 통한 보도에만 근거하여 자발적 입국이 맞는지 확인이 필요하다고 주장하지만 이 말은 사실상 ‘납치가 아닌지 확인’이 필요하다는 말을 살짝 포장한 것에 불과하다.
뿐만 아니라 국가기관(영사관, 통일부, 국정원 등)을 포함하여 중국 및 제3국 국가기관까지 ‘납치’라는 국제범죄행위를 협력 실행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과 같다. 이러한 주장을 한 사례는 납치로 악명이 높은 북한당국과 민변 등 소수단체 외에는 세계적으로도 유례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법원은 이러한 문제점을 간과한 채 심문기일을 지정하고 소환을 요구하여 버린 것이다.
둘째, 이번 수용구제청구는 법률상 요구되는 청구요건의 미비로 신청 자체에 각하 사유가 존재함에도 민변과 법원 모두 이를 의도적으로 무시하였다.
인신보호법 제6조 제1항 제3호는 “다른 법률의 구제절차에 따른 구제를 받을 수 있음이 명백한 때”를 구제청구 각하사유로 두며, 같은 법 제3조 단서는 ‘다른 법률에 구제절차가 있는 경우에는 상당한 기간 내에 그 법률에 따른 구제를 받을 수 없음이 명백하여야’만 구제청구가 가능 한 것으로 규정하고 있다.
한편 북한이탈주민의 보호 및 정착지원에 관한 법률 제8조 제2항은 ‘북한이탈 주민에 대해 보호대상자로 결정된 사실을 통지’하도록 하며, 같은 법 제32조 제1항에 따르면 ‘보호에 관한 처분을 통지받은 후 90일 내에 서면으로 이의를 신청할 수 있다‘고 규정되어 있다.
따라서 탈북종업원 12인의 경우에는 ‘다른 법률에 따른 구제절차를 받을 수 있음이 명백한 때’에 해당한다.
셋째, 민변이 확보한 위임장은 북한가족을 가장한 북한당국의 의사를 대리하고 있을 뿐 구제청구자인 탈북 12인 가족의 위임이 있었다고 볼 수 없다.
북한은 유엔 북한인권조사위원회(COI) 보고서에 나타난 대로 개인적 의사표현의 자유가 극도로 억압된 곳이어서 북한 당국의 승인없이는 대외적으로 어떤 종류의 위임장도 유출될 수 없는 것이 자명하다.
또한 ‘친생자관계 존재확인’과 같은 극히 사법적 영역도 아닌 ‘납치’와 ‘자발적 의사’ 주장이 서로 대립하는 분쟁적 법률관계에 북한 잔류 가족들의 독립되고 자유로운 의사에 기한 위임이 가능하다고 할 수 없다.
넷째, 민변은 구제청구의 근거가 된 위임장 수령과정을 상세히 밝히지 않고 있는 바 수용구제를 위한 심문기일소환이전에 위임장 수령과정에 대한 사전 심문을 거치지 않고 수용구제심문절차를 개시한 것은 북한주민의 인권보호와 증진을 국가책무로 규정한 북한인권법의 취지를 법원이 몰각한 것이다.
북한인권법의 제정 공포와 더불어 국가보안법상 ‘자유민주적 기본질서 위배’의 범위에는 북한 주민의 인권악화시도 또한 포함되어야 할 것이다.
이번 사태를 둘러싼 민변의 지속된 접견요청 등의 행위는 자유가 억압된 북한 주민의 인권을 개선하기는 커녕 북한 잔류 가족들의 신체의 자유, 양심의 자유, 의사표현의 자유를 억압하고 잔류가족들의 생존권 및 기본권 위협을 볼모로 자유세계로의 잠재적 탈북을 억압하는 방향으로 작용할 것이 분명하다.
민변은 북한 당국과 ‘기타 방법으로 연락’을 취한 정황이 존재하므로 이에 대한 사법당국의 철저한 수사가 필요하다. 결론적으로 민변은 탈북종업원들의 명시적인 의사에 반한 인신구제청구를 강행하여 북한의 선전선동을 추종하는 한편 대한민국의 인권보호활동을 모독하고 있다.
민변의 이런 행동은 결국 국민전체를 반정부운동에 나서게 하려는 선동이자 탈북종업원에 대한 또 다른 인권침해에 다름 아니다. 그럼에도 인권의 최후 보루여야 할 법원이 법적 요건이 미비한 청구를 각하하지 않고 탈북종업원 12명에 대해 심문 출석을 요구한 것은 사법적극주의의 한계를 스스로 일탈한 것이어서 매우 우려스러운 일이다.
민변과 북한 당국이 한 목소리로 ‘납치’ 운운하며 온갖 엄포를 놓는 한가운데에도, 6월 1일 중국 산시성의 또 다른 북한식당에서 3명의 종업원이 추가로 탈북하여 입국을 완료하였다. 이 점을 보더라도 인간의 자유에 대한 본원적인 갈망은 극한의 감시체계로도 막지 못하는 것이다.
‘자유’를 영원히 억압할 수 있었던 체제는 존재하지 않았다. 이에 자유와통일을향한변호사연대는 8천만 동포와 함께 민변이 시대착오적인 북한추종을 당장 멈출 것을 촉구하며 사법당국에 대해서도 북한과 접촉한 민변의 위임장 전달과정을 철저히 수사할 것을 거듭 촉구하는 바이다.
2016년 6월 19일 자유와통일을향한변호사연대
2016.06.21 탈북여성 死地로 내모는 법조인들...법이란 이렇게 ‘생각 없는’ 도구인가?
▲북한 조선중앙통신은 우리 정부가 북측 종업원들을 집단 유인, 납치했다고 주장하며 규탄 기자회견을 5월 3일 인민문화궁전에서 열었다고 보도했다. /조선중앙통신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민변)이란 단체가 탈북여성 12인과 관련해 ‘인신구제 심사청구’를 신청하고 법원이 이를 받아들여 그들 12인에게 법정출두를 요구한 것을 보면서 느끼게 되는 것은 “지금 무슨 ‘사법(司法) 게임‘ 하나?”라는 것이다.
탈북여성 12인의 가족들이 그런 청구를 해달라는 위임장을 민변에게 전달한 것은 순전한 북한당국의 꼼수다. 이 꼼수가 대한민국 안에서 지금 멀쩡한 ‘합법현상’의 모습을 한 채 작동하고 있는 것이다.
민변으로서는 “의뢰인의 요청이 있어 변호인으로서 그걸 수임한 것일 뿐”이라고 말할 것이다. 재판부는 “사법절차에 따라 기계적으로 움직이는 것일 뿐”이라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이 ‘의뢰’에 대한민국 법률, 예컨대 국가보안법 같은 것에 저촉되는 구석은 없었는지부터 당국은 조사해 봐야 할 일이다. 그 현상 초입부터 탈북여성 가족들에 대해 북한당국의 ‘촉수’가 직접 작용했을 가능성이 짙다는 ‘합리적 의심’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상식적으로 보아 탈북 여성 12인이 지배인과 더불어 정상여권을 소지한 채 중국당국의 묵인 하에 직장을 이탈해 한국으로 이동한 것은 그 동안 28000명의 탈북 행렬의 연장선상에 있는 정치적 망명 행위였다. 이는 동독주민이 대거 헝가리로 이동했다가 다시 서독으로 이동했던 왕년의 독일통일 전야에 있었던 엑소더스 현상의 한반도적 재현(再現)이었다고 할 수 있다. 오늘의 시리아 난민사태의 성격도 기본적으로는 이와 같다고 할 수 있다. 이는 생명과 인권을 지키고 찾으려는 처절한 인간 드라마 그 자체다.
그런데 이를 같은 인간으로서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그 알량한 법 형식논리를 내세워 “자진탈북인지 아닌지 심사해 달라” “그래, 심사해 보마” 하며 탈북여성 본인들과 그 가족들의 안위에 대한 고민은 차치하고 “모월 모일 모시에 법정에 출두하라”고 통보한 것은, 법이란 과연 무엇인가를 다시 한 번 돌아보게 만든다. 법이란 이렇게 ‘생각이 없는’ 도구일 뿐인가? 그럴 리는 없을 것이다. 법에도 법철학이라는 게 있지 않은가? 법철학의 근본에 비추어 목숨 걸고 탈북 한 동포들에게 “납치인지 여부를 심사해 봐야겠다”고 하는 게 과연 법의 정신일 수 있는가?
그럴 양이면 지금까지 탈북 한 28000명 동포들도 새삼스럽게 변호사, 판사들을 붙여 다시 심사해야 할 것 아닌가? 그리고 앞으로는 탈북 하는 동포들에 대해 일일이 변호사 판사가 달라붙어 ‘납치여부’를 심사해야 할 것 아닌가? 왜 이들 12인에 대해서만 유독 그러는가 말이다.
정작 한반도의 납치범을 찾자면 그건 12만 명의 정치범을 수용하고 있는 북한 당국이다. 그리고 우리 국군포로를 돌려보내지 않고 억류해온 북한 당국이다. 변호사, 판사들이라면 마땅히 탈북동포를 받아들인 우리 당국을 향해 “납치범인지 아닌지 가려보자”고 할 게 아니라 진짜 납치범인 북한당국을 향해 “왜 현대판 아우슈비츠 수용소를 운영하느냐?” “왜 우리 국군포로를 억류했느냐?”고 힐문했어야 한다. 가족들의 ‘의뢰’가 있었건 없었건 말이다.
자고 일어나면 기상천외한 일들이 벌어지곤 하는 게 요즘의 우리 현실이다. 사법부는 그 가족들을 인질 삼아 탈북여성 12인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할 곤경에 빠뜨리려는 북한당국의 꼼수를 철저히 배제하는 방식으로 이 문제를 다룰 것을 당부한다. 문명사회 보편의 기준에 따라 고도의 윤리적 판단을 해야 한다. 이게 “왜 법치주의냐?”를 묻는 원리적인 질문에 대한 정답이 될 것이다.
글 | 류근일 언론인, 전 조선일보 주필
2016.06.22 民辯의 잔인한 탈북자 인권 '쇼'
국민의 인권을 지켜야 할 '대한민국 법'이 북한 동포의 인권을 유린하는 최악 상황이 이 땅에서 벌어지고 있다. 중국 저장성 닝보에서 탈북한 북한 식당 종업원 13명이 한국 당국에 강제 납치됐다는 북한 당국 주장을 그대로 받아들여 탈북자들을 괴롭히는 민주 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민변)의 행태는 잔인하기까지 하다. 민주 사회를 위한다는 이름은 거창하지만 세계에서 자유와 인권을 가장 악랄하게 탄압하는 북한 정권에 대해 무비판·무조건적 추종 태도를 보이고 있다.
북한 식당 종업원들이 탈북을 결행한 곳은 공산 체제인 중국이다. 20대 성인들이 원치 않는데 어떤 방법으로 그들을 한국에 데려올 수 있을까? 북한은 비상식적 국가니 그렇다 쳐도 민변은 도대체 왜 그러는가? 북한 당국은 이번 탈북 사건을 '남조선 괴뢰 패당의 납치 모략극'으로 규정하고 대대적 보복, 실력 행사에 들어갔다. 북한 양강도 혜산과 마주한 창바이현의 조선족 교회 목사가 북한 보위부에 살해당하고 탈북자 출신 한국인 일부가 중국 여행 중 소식이 끊겼다는 소식도 들려온다.
북한이 식당 종업원 탈북에 광분하는 것은 김정은이 무척이나 화를 내기 때문으로 알려지고 있다. 김정은이 화를 내는 이유는 자기 지시로 보위부가 탈북자들을 유인 납북해 행한 남한 헐뜯기 기자회견이 큰 성공을 거두고 있다고 '자화자찬'하는 도중에 일어났기 때문이다. 탈북자 10여 명이 연이어 북한에 끌려들어 가 지속적인 반(反)남한 기자회견을 하자 순진한 북한 인민들은 그 말을 믿기 시작했다. 그런데 북한에서 상류층으로 분류되는 식당 종업원이 13명이나 떼로 탈북했다는 소식이 평양에 알려지자 김정은의 이런 노력은 한순간에 수포로 돌아갔다. 북한 인민들은 북한의 기만 선전에 속다가 이번 사건을 보고 '그러면 그렇지!' 하고 번쩍 정신을 차린 것이다.
김정은의 연이은 실책으로 유엔 제재를 자초한 상황에서 벌어진 집단 탈북 사건은 불난 집에 기름을 붓는 격이 됐다. 탈북자 13명과 평양에 남은 가족의 비극적 상황은 김정은 정권의 반인륜적 폭압 체제에서 비롯된 것이다. 지난 1997년 망명한 황장엽씨 가족은 11촌까지 처형되거나 수용소에 수감된 전례가 있다. 상징적 탈북자들에 대한 북한 당국의 잔혹한 처벌은 이미 내부에 알려졌기 때문에 탈북자 13명이 평양의 가족들 생각에 잠 못 이루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김정은 정권이 이런 감정을 악용해 김정일 시대에는 없던 가족 내세우기 전략으로 탈북 여성들 마음을 흔들려고 한다. 가장 아픈 고리인 부모 형제를 내세워 눈물로 호소하면 당사자들 마음이 오죽할까. 자진 탈북 사실이 알려져 북한의 가족들에 대한 끔찍한 처벌로 이어지면 살아도 살아있는 마음이 아닐 것이다. 이것은 이 땅에 앞서 정착한 탈북자 3만명 모두가 똑같이 느끼는 감정이다. 인권유린 국가에서 부모와 생이별하고 피눈물을 삼키며 이 땅을 찾은 어린 처녀들을 따듯하게 안아주고 보살펴주지 못할망정 법정에 내세워 진실을 따지겠다는 막장 드라마는 반인륜 범죄 행위나 마찬가지다. 탈북자들에게 자유와 인권을 보장해야 할 대한민국에서 벌어지는 인권유린 행위를 막지 못하는 상황이 개탄스럽다.
강철환 북한전략센터 대표·조선일보 객원기자
2016-06-23 죽음을 부르는 민변의 탈북자 인권 옹호
▲한국에 입국한 탈북 여종업원들이 중국에서 함께 찍은 단체 사진. 미국 CNN 방송이 지난달 평양을 방문해 가족을 통해 입수한 사진이다.CNN 화면 캡처
“브레이크가 고장 나 폭주하는 기관차 앞에 두 갈래 철로가 있다. 한 곳엔 5명이 일하고 다른 곳엔 1명이 일한다. 당신의 선택은?”
2010년 히트작인 마이클 샌델 교수의 저서 ‘정의란 무엇인가’에 나오는 질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5명을 살리려 1명의 희생을 선택하는 것은 어쩌면 본능적 행동일지 모른다.
남북 간에도 이런 딜레마는 자주 생긴다. 한 사례로 지금 남쪽엔 북한을 계속 찬양해도 잡혀가지 않는 여성이 있다. 북한 미사일 발사 때도 “위대한 우리 당에 감사의 인사, 경축의 인사를 드린다. 조선로동당 만세.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만세”라고 페이스북에 올려도 아무렇지 않다. 그의 이름은 김련희. 평양에서 가정주부로 살던 그는 2011년 한국에 왔다.
그는 중국에 여행 왔다가 한국 가면 돈도 벌고 병도 치료할 수 있단 말을 듣고 남쪽에 왔다고 한다. 하지만 정작 온 뒤엔 자신은 실수로 왔으니 평양으로 보내 달라고 줄기차게 요구하고 있다. 올해도 정부청사에서 시위도 하고, 주한 베트남대사관에 들어가 북으로 망명 신청을 하기도 했다. 그를 돕겠다고 ‘김련희 송환 촉구모임’이란 것도 여기저기에서 만들어졌다.
나 역시 김련희 씨가 남편, 딸과 다시 살게 되길 희망한다. 다만 이런 인도주의적 호의를 베푸는 대가가 너무 혹독해 누구도 감당할 수 없을 뿐이다.
그가 북에 가면 한국 비난과 북한 체제 선전에 동원되고 탈북자 심문 기법 등 많은 정보도 함께 보위부에 전달할 것임은 뻔하다. 그러나 단지 이것뿐이라면 감내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진짜로 용인할 수 없는 일은 그가 하나원과 사회에서 알았을 최소 100명이 넘는 다른 탈북자들의 신상 정보를 보위부에 제공하는 것이다. 그럼 북한에 사는 탈북자 가족은 위험에 처하게 된다. 우연히 그와 엮이게 된 탈북자들에게 무슨 죄가 있단 말인가. 그를 한국까지 데려다줬던 중국 브로커도 북한에 납치될지 모른다. 이래도 과연 그를 돌려보낼 수 있을까. 한 명의 인권과 수백 명의 인권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문제다. 어떤 선택을 해야 하겠는가.
김 씨 송환에 앞장서는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민변)과 진보연대는 그가 돌아가면 수많은 탈북자 가족이 수용소에 끌려갈 가능성이 높다는 사실은 말하지 않는다. 왜 그들의 눈엔 김련희만 보이고 죽을지도 모를 탈북자 가족은 보이지 않는 것일까.
김 씨는 남쪽에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공민으로 살겠다”며 보란 듯이 북한을 찬양한다. 그는 전화번호 끝자리 4150이 ‘수령님(김일성) 생일’을 땄다고 밝혔다. 평양의 딸에겐 “엄마는 여기서 굴함 없이 꿋꿋이 놈들과 싸우고 있어. 엄마를 믿어”라는 메시지도 보냈다. 정작 싸운다는 그는 올해도 제주도 2박 3일 관광을 다녀오는 등 남쪽 여기저기 여행을 자주 다닌다. 물론 그의 찬양은 북한 당국에 보여주기 위한 쇼일지도 모른다.
“내가 남쪽에서 이렇게 열심히 투쟁하니 우리 가족 잡아가지 말아주세요”라는….
그러나 누군 북한 여행기를 말했다가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어놓고, 누군 대놓고 김정은을 찬양해도 아무렇지도 않은 이 현실은 어떻게 봐야 할까. 당국은 귀찮은 문제가 생길까 봐 그런지 뭔 짓을 하더라도 그저 두고만 본다. 김 씨의 선례를 용인하면 앞으로 어떤 문제가 생길까.
한반도엔 김 씨보다 억울한 사람이 부지기수다. 김 씨가 한국행 길에 오른 것은 자신의 선택이었다. 찰나의 선택 때문에 가족과 이별한 실향민만 수백만 명이고, 지금도 북한에선 한순간의 말실수로 처형되는 사람도 많다. 김 씨 역시 불행히도 되돌릴 수 없는 선택을 했을 뿐이다. 개인적으론 남쪽에서 치료받고 돈 벌고 평양에 돌아가려 했다는 그의 사고를 전혀 이해할 수 없다.
이번에 민변의 개입으로 논란을 빚고 있는 탈북 종업원 13명 사건도 북에 있는 가족들의 목숨이 걸린 문제라는 점에서 김련희 씨 사례와 공통점이 있다. 종업원 입국 사진이 공개됐을 때 그들의 걸음새를 보고 나는 자진 입국임을 직감했다. 상식적으로도 성인인 그들이 한국행 비행기를 모르고 탔을 리 만무하다. 전세기를 보냈을 가능성도 희박한데 비행기 안에서 저들이 소동을 부렸다는 것을 목격한 사람도 없다.
민변이 북한 가족의 위임장을 받아온다 했을 즈음 민변 간부에게 나는 이런 이야기를 했다. “그랬다간 어떤 경우에도 민변은 진퇴양난의 큰 역풍을 맞을 겁니다.” 이후 어떤 일들이 벌어졌는지는 더 설명이 필요 없다.
남북 간엔 앞장만 보지 말고 뒷장까지 넘겨 봐야 하는 사안이 부지기수다. 그걸 볼 능력, 혹은 의지가 없다면 반드시 역풍을 부르는 무리수를 두게 된다.
마침 국민이 요즘 제일 하고 싶어 근질거리던 말을 지난달 영화 ‘곡성’이 대신 해줬다. “뭣이 중헌디. 뭣이 중허냐고.
뭣이 중헌지도 모름서!”
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2016.06.25 탈북 여성 12인 관련....탈북민들이 민변을 규탄하는 7가지 이유는?
2016년 6월 21일 오후 민변 변호사들이 중국의 북한 식당을 탈출해 국내로 들어온 여성 종업원 12명에 대한 인신 보호 구제 사건 심리가 끝난 뒤 서울 법원 청사 앞에서 취재진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이번 사건은 민변이 청구한 것이다. 그러나 심리 도중 민변이 재판부 기피 신청을 내면서 심리가 제대로 진행되지 못했다./조선DB
첫째, 위선자들의 집단이기 때문이다. 중국 저장성의 북한식당에서 근무하던 여자 종업원 12명과 남자 지배인 1명이 집단 탈출해 대한민국에 입국했다는 것은 세상에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하지만 민변은 부디 12명의 보호만을 외치고 있다. 남자지배인 1인은 같은 탈북자이지만 민변의 관심 밖이다. 왜? 남자지배인이 12명 탈북자를 이끌었다는 북한의 주장에 동조했기 때문이다. 결국 저들이 말하는 탈북자인권보호의 기준은 북한의 입맛에 맞추어져있거나 저들의 목적달성을 위해 또 다른 탈북자를 희생시키는 위선에 기인하고 있다.
둘째, 탈북자들을 위한다면서 탈북자들의 의사를 무시하는 비인간적인 집단이기 때문이다. 12명 탈북여성들은 북에 있는 가족들을 걱정해 어떤 식으로든 신분이 노출되는 걸 반대한다는 입장을 거듭 밝혀왔다. 그럼에도 ‘법정에 나올 때까지, 재판부를 바꿔서라도’ 이들을 출석시키겠다고 하는 것은 비도덕적이고 비양심적인 행위이다. 이들이 법정에서 북한이 싫어서 대한민국에 왔노라고 말하면 북한의 가족은 처벌을 변치 못한다. 저들의 탈북이 자의가 아니라고 한다면 대한민국에서 살 권리가 상실된다는 것을 민변만큼 잘 아는 사람도 없다.
셋째, 변호사는 법을 통한 정의의 실현을 사명으로 여겨야 하지만, 대한민국의 법을 제대로 무시하는 집단이기 때문이다. 민변은 평양을 제집처럼 드나드는 민족통신 노길남과 중국 칭화대의 장기열 등으로부터 북한당국의 의도와 지어는 위임장까지 전달받았다. 그래서 나온 것이 ‘국정원에 의한 유인납치 설’, ‘국정원합심센터 내에서의 단식농성 설’, ‘그중 1명의 사망 설’ 이며 결국 탈북자 12명을 법정에 세우기에 이르렀다. 법을 안다고 법을 농락할 수는 있지만 북한과의 내통은 감춘다고 해서 감춰지는 게 아니다.
넷째, 아무리 둘러봐도 민변만큼 반대한민국적인 집단이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안하무인이다. 13명 탈북자들이 본인들의 의사에 따라 국내에 입국했다는 통일부의 말도, 탈북민보호센터에서 안정을 찾아가고 있다는 국정원의 말도 저들에겐 먹히지 않는다. 탈북자보호법에 따라 탈북민들이 일정기간 통제되어있는 곳을 무작정 뚫고 들어가려다 거부당하자 대뜸 방북신청서를 냈고 이마저 거부당하자 드러내 놓고 ‘우리민족끼리’등을 통해 전달되는 북한의 의도를 따르고 있다. 오직 북한의 의도만 관철중이다.
다섯째, 변호사의 지위를 이용한 오만함도 방치할 수 없다. 민변은 북한당국의 보도에만 근거해 12명 탈북자들의 강제입국을 주장하고 있다. 또 이들의 국내입국이 자발적인 게 맞는지 확인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 말의 본질은 ‘납치가 아닌지 확인’이 필요하다는 말이며 국가기관(영사관, 통일부, 국정원 등)을 포함해 중국 및 제3국 국가기관까지 ‘납치’라는 국제범죄행위를 협력·실행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과 같다. 민변의 이러한 행동은 대한민국 및 제3국 국가기관의 인권활동을 범죄시하는 것으로 대한민국과 국민을 공개적으로 모욕하는 행위다.
여섯째, 뻔뻔함 때문이다. 저들은 북한에 있는 12명 탈북자들의 가족들로부터 그 무슨 위임장을 받았고 이를 근거로 법원에 인신보호구제청구서를 제출했다고 했다. 북한이 세상에서 가장 지독한 인권유린국가여서 개별적 사람들의 외부인 접촉이 통제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모양이다. 또한 당국의 승인 없이 외부인을 만날 때 정치범수용소수감 등의 혹독한 처벌을 받게 된다는 것도 외면하고 있다. 인권의 이름으로 인권을 파괴하고, 보호의 이름으로 보호대상자와 그 가족을 사지로 몰아넣고, 대한민국 법원의 이름으로 대한민국의 헌법과 법률을 배반하는 게 민변이다.
이러한 이유 등으로 탈북민들은 민변을 규탄한다. 이번 사태를 둘러싼 민변의 행위가 탈북자 및 북한 주민들의 인권에 도움을 주기는커녕 북한 잔류 가족들의 신체의 자유, 양심의 자유, 의사표현의 자유를 억압하고 잔류가족들의 생존권 및 기본권 위협을 볼모로 자유세계로의 잠재적 탈북을 억압하는 방향으로 작용할 것이 분명함으로 탈북자 12명에 대한 민변의 간섭이 끝날 때까지 민변과는 싸운다. 그래서 정의를 이기는 불의가 없다는 것을 보여줄 것이다.
자유북한방송 글 | 김성민 자유북한방송 대표
2016.06.30 民辯, 인권의 이름으로 혀를 깨물라 하는가
최근 탈북 종업원에 대한 인신 구제 청구를 둘러싸고, 영국의 인신 보호 절차 발달의 연혁을 들며, 불법 구금 의혹이 있는 경우 '(구금된) 인신을 법관 앞에 내놓는' 것이 적법절차라는 주장이 일각에서 제기됐다. 이는 적법절차의 절차적 측면만을 강조하고 실체적 진실엔 눈감은 '외눈박이 인권법'의 시각이다.
1987년 헌법 제12조에서 적법절차 규정이 도입된 이래 영국의 인신보호영장에 연원을 둔 체포구속적부심, 영장실질심사제도가 우리나라에도 차례로 도입됐고, 2011년 인신보호법이 제정되기에 이르렀다. 그런 인신보호법이 '인권침해 지역'인 북한을 떠나 '인권보호국'인 대한민국에 신병 보호를 요청한 탈북 여성 12인에게 적용돼야 한다는 주장이 나올 줄은 몰랐다. IS(이슬람국가)를 탈출한 여성을 난민수용소에서 보호하고 있는데 IS에서 부모를 인질로 잡고 "이 여성이 IS를 버릴 리 없다"면서 납치를 주장하고 나섰다면 이 여성을 법정에 불러내 자의로 IS를 탈출한 것 맞느냐고 물어보는 게 적법절차이고 인권 국가의 처분이겠는가?
▲21일 서초구 법원삼거리에서 법정을 나선 민변 채희준, 천낙붕 변호사가 북한 식당 종업원 12명에 대한 인신보호법상 구제 청구와 관련된 취재진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맞은편은 민변을 규탄하는 대한민국 구국채널 회원들. /연합뉴스
북한과 IS를 비교하는 것이 타당하냐고 반박하려는가. 하지만 북한 당국이 바로 인권침해의 가해자인 사실은 명백하다. 이런 실체적 진실에 눈감은 형식적 적법절차는 공허하고 경우에 따라 가해자에 의해 악용될 수 있다.
적법절차는 절차적 적법성과 실체적 적법성을 모두 아우르는 규정이다. 법 절차의 형식적 준수에 치우칠 때 법의 원래 취지와 실질적 타당성이 몰각될 수 있다. 그러하기에 법은 항상 그 운용이 중요하다고 하는 것이다.
이번 민변의 인신 구제 청구는 형식적, 절차적 적법성 측면에서부터 많은 문제를 지닌 것이었다. 당사자의 의사에 배치되는 가족의 구제 청구라는 점, 인권침해자인 북 당국의 위임장이나 다름없는 위임장을 근거로 했다는 점, 보호 요청자를 피구금자 취급한 점, 다른 법률(북한이탈주민의 보호 및 정착지원에 관한 법률)에서 정한 구제 절차를 무시했다는 점 등에서 재판의 전제 요건 결여로 각하 판결 사유가 다수 존재하는 것으로 보인다.
▲최주활 탈북자동지회 대표가 23일 서울 중구 프레스센터에서 탈북자단체연합회 주최로 열린 '12명 탈북민을 사지로 내모는 민변 규탄 및 고발' 기자회견에서 관련 발언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내용적, 실체적 적법성 부분에 이르면 문제는 더욱 심각하다. 유엔 북한인권조사위원회(COI) 보고서로는 북한에는 '광범위하고 조직적인 인권침해'가 존재한다. 탈북 종업원에 대한 법적 진술 강제는 그것이 비공개로 진행된다 해도 공적 확인 절차를 거친 것이기에 부모와 본인 중 어느 쪽을 사지(死地)로 보낼 것인지 선택을 강요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어느 탈북자의 말처럼 '혀를 깨물고 싶은 상황'을 인권의 이름으로 강요하는 셈이다. 검증된 바 없는 '총선용 북풍(北風)설'에 사로잡혀 '납치설'을 강변하는 북 당국에 동조하면서 남북 대치 상황의 안보 이익을 송두리째 무시해버렸다는 점 또한 같은 궤에 있다.
법정은 그 자체로 선(善)을 보장하지 않는다. 소크라테스도 예수도 법의 이름으로 사형을 언도받았다. 이번 일은 '한국 인권사에 기록될 사건'임에 틀림없다. '인권'과 '법'이 허울만을 따라 악용돼서는 안 된다는 점을 똑똑히 깨우쳐 준 점에서 그렇다.
도태우 자유와통일을향한변호사연대 정책위원장
2016.07.08 민변의 탈북 여종업원 12인 인신보호구제 청구에 울분 터뜨린 차기환 변호사 이야기
▲차기환 변호사(왼쪽 사진)와 탈북 여성 종업원들.
최근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이하 민변) 소속 변호사들이 탈북 여종업원 12명에 대해 인신보호 구제심사를 청구한 것을 두고 각계에서 비판의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특히 탈북자 단체들은 “민변(民辯)이 변호사의 지위를 이용해 탈북자들과 북에 남은 탈북 가족들의 인권을 유린하고 있다”며 격앙된 반응을 보였다.
인신보호 구제심사 제도는 특정 시설 등에 수용된 사람이 적법하게 수용됐는지를 법원이 판단하는 것으로, 주로 정신병원에 강제로 입원한 사람을 구하는 것에 활용되고 있는 제도다. 민변이 이 제도를 사상 최초로 탈북자에게 적용해 탈북 여종업원들이 북한의 주장대로 납치되었는지 혹은 본인들 뜻대로 들어왔는지 확인해 달라며 법원에 심사를 청구한 것이다.
민변의 탈북자를 대상으로 한 인신보호 구제심사 청구에 대해 탈북자 단체뿐 아니라 ‘자유와 통일을 향한 변호사연대’도 즉각 기자회견을 열어 민변 측의 행위를 반박했다. 이 단체의 대표를 맡고 있는 차기환 변호사를 만나 민변의 이번 탈북자 인신보호 구제심사 청구 사건에 대해 들어보았다.
차 변호사는 자유와 통일을 향한 변호사연대에 대해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가치를 지키고, 자유민주체제로 통일을 위해 노력하는 변호사 단체”라고 밝혔다.
다음은 차 변호사와 일문일답(一問一答).
-민변은 탈북 여종업원의 북한 내 가족으로부터 위임장을 받아서 인신보호 구제심사를 청구했다고 하는데요.
“유엔(UN) 인권이사회는 북한 인권조사 보고서에서 2014년 및 2015년 북한 당국에 의한 광범위하고 조직적인 인권침해 사례를 규탄하며, 그 심각성과 규모, 본질은 21세기 어떤 국가에서도 유례를 찾아볼 수 없다고 지적했습니다. 그러면서 북한을 히틀러나 스탈린 체제와 같은 전체주의 국가로 분류했습니다. 이런 체제에서는 그 누구도 북한 당국의 입장에 거슬리는 의견이 나올 수가 없습니다. 당국이 이미 ‘납치’라고 규정을 내렸는데, 그 가족이 당국의 의견에 반해서 뭐라고 하겠습니까.
따라서 이는 가족의 위임장이라기보다 북한 당국의 의임장이라고 봐야 합니다. 따라서 민변의 이번 인신보호 구제신청 행위는 표면으로는 인권을 내세우고 실지만 그 반대로 탈북민들과 북한에 남은 가족에게 심각한 생명과 신체상의 위협을 가하는 인권침해 행위라는 것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탈북자들의 분노 상상 초월"
-탈북자들의 감정도 무척 격앙되어 있다면서요.
“만약 탈북자들이 법정에 나와 자의(自意)에 의해 탈북했다고 하면 북한의 가족은 강제거주이전 등 혹독한 탄압을 받을 것이고, 납치당했다고 주장하면 탈북자 자신이 강제로 북송 당해야 합니다. 이는 정부가 나서서 ‘탈북자들이 스스로 왔다’고 발표하는 것과 차원이 다른 문제입니다.
이번 사건 후 탈북자들을 만나보니 그들이 느끼는 분노와 공포심이 상상 이상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탈북자들은 목숨을 걸고 탈출한 자신들의 안전과 인권을 교묘한 법 논리를 이용해 짓밟는 것이라며, 이런 사태를 지켜보고 있는 정부에도 불만이 가득한 상태였습니다. 탈북자들을 이렇게 궁지에 몰면 도대체 누구를 믿고 남한 땅에서 살아갈 수 있느냐는 것이죠.”
차 변호사는 “북한에서 탈북자와 그 가족들이 어떤 대접을 받는지는 이미 많은 조사와 증언을 통해 확인된 사실”이라며 “북한을 탈출했다가 강제북송되는 경우 처형되거나, 수용소로 보내지며, 일부 선전용 가치가 있으면 이를 활용하다가 결국에는 비슷한 운명을 맞는다”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민변의 이번 인신보호 구제청구는 탈북 여종업원들에게 당신들의 목숨을 내놓거나 가족의 목숨을 내놓으라는 무시무시한 협박으로 비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대답하면 가족이 곤란해지고, 저렇게 대답하면 자신의 신변이 난처해지는 사안에 대해 자유민주의의 법적 제도를 통해 탈북자들을 법정에 끌고 나와서 당사자의 진술을 듣겠다고 하는 것 자체가 비인도적인 행위입니다.”
-인신보호 구제심사 제도는 정확하게 어떤 법인지요? 가족이나 제3자가 구제심사 청구를 할 수 있습니까.
“인신보호법상 구제청구는 ‘피수용자’는 물론이고, 그 법정대리인 가족 등도 청구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가족 등을 구제청구권자에 포함시켜 놓은 것은 통상적으로 이 법의 적용대상이 정신병자, 행려병자, 혹은 윤락녀같이 자신의 의사를 제대로 표현하기 어렵거나 자신의 의사에 반하여 수용될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되는 사람들이므로 그들을 위해서입니다.
이 법의 취지에 비추어 보면, 구제청구는 ‘피수용자’의 의사가 가장 중요하므로 구제청구 대상자인 탈북 여종업원들이 자신의 의사를 분명히 표현하여 이를 거부할 경우 가족의 위임이 있다고 해도 이 사건을 진행할 수 없다고 보는 것이 법리에 맞습니다. 법정대리인도 미성년자와 이해가 상반되는 사안에 대하여는 법정대리권이 제한된다는 것이 민법의 기본 법리입니다.”
"인신보호 구제심사는 당사자의 이익을 위한 제도"
-결국 탈북자들의 의사와 이익이 가장 중요하다는 말씀이군요.
“맞습니다. 이 사건의 경우 ‘자의에 의한 입국’ 여부에 따라 탈북 여종업원과 북한의 가족들의 이해관계가 심각하게 대립됩니다. ‘자의에 의한 입국’이라면 북한의 가족이, ‘강제납치’라고 하면 탈북 여종업원들의 이익이 심각하게 침해되죠. 이런 사안에서 가족들의 구제청구권은 인정하지 않아야 합니다. 통상적으로는 수용시설에서 나오는 것에 ‘피수용자’ 본인과 가족들의 이해관계가 일치될 것이므로 가족을 별개의 구제청구권자로 규정하여 두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민변 소속 변호사들이 입법 당시 사용되리라고는 생각했던 것과 전혀 다른 사안에 대해 인신보호청구를 했는데, 그것이 인도적 차원에서 인권 보호를 위한 것인지 심각한 의문이 제기된 것입니다. 실제 탈북 여종업원들과 탈북자들이 민변의 행위에 대해 자신들의 인권을 침해한다는 취지로 격렬하게 항의하고 있는 실정이고요.”
-판사가 강제로 탈북자들을 법정에 세우는 등의 절차를 진행할 수도 있는지요.
“인신보호법상 심판절차에 출석할 의무가 부과되는 자는 구제청구자와 수용시설의 기관장입니다. 판사가 필요하다고 인정하는 경우 ‘피수용자’를 소환할 수는 있으나 ‘피수용자’가 거부하는 경우 강제로 구인하는 절차도 없고 과태료 부과 대상도 아닙니다. 결국 판사가 강제로 탈북자를 법정에 세울 방법은 없는 겁니다.
저는 탈북 여종업원들에 대하여 소환장을 발부한 판사가 전체주의적인 북한 체제 특성이나, 신분이 노출될 경우 위험에 처하게 되는 탈북자라는 특수성에 대한 별다른 사려 없이 법률의 형식 요건만 보고 출석요구서를 발부했다고 봅니다.
유엔 총회의 인권결의에서 보듯이 북한은 히틀러, 스탈린 체제보다 더 심각한 전체주의 체제이고, 구제청구 대상자인 탈북 여종업원들이 인신보호 구제청구 심판을 거부하고 있고, 국정원의 보호시설에 머물고 있는 것이 자의에 반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에 대하여 대한변협의 인권보호관이 탈북 여종업원들을 수차 만나 확인하였으므로 판사가 굳이 탈북 여종업원들을 소환하지 않고 서면심리를 통하여 각하결정을 내리는 것이 옳았다고 봅니다”
차기환 변호사는 “무엇보다 탈북 여종업원들이 정부 보호시설에 머무는 것 자체가 자의에 반하는 것이 아니므로 인신보호법상의 피수용자 자격이 될 수 없고, 따라서 민변의 구제청구는 각하되어야 한다”고 설명했다.
“인신보호법상 피수용자는 ‘자유로운 의사에 반하여 보호 또는 감금되어 있는 자’를 말합니다. 탈북민들은 관련 법률에 따라 자의로 보호신청서를 작성하고 이후부터 정부의 보호를 받는 사람들이지 강제수용된 자들이 아닙니다. 그리고 이미 대한변호사협회가 추천한 인권보호관이 여러 차례 이들 탈북종업원을 만나 그들의 자유의사를 확인했습니다.
따라서 이번 구제청구 건은 인신보호법상 심문기일에 이들을 반드시 소환할 필요 없이 서면 심리만으로도 각하시켜야 할 사안입니다. 더구나 민변 측은 이들이 강제수용되었다는 아무런 소명자료도 없이 당사들보고 자신과 가족의 생명을 걸고 법정에 나와서 이야기하라고 하는 데, 이는 탈북자들에게 굉장히 잔인한 처사라는 것을 알았으면 합니다.”
"지상 최악의 인권 유린국(國)의 선전에 동조하면 안돼"
-민변이 북한의 탈북종업원 가족들로 받았다는 위임장의 위법성은?
“말씀드렸듯이 탈북 여종업원 가족이 작성했다는 위임장은 가족의 위임장이라기보다는 정치적으로 북한 당국의 위임장으로 봐야 하며, 진정한 가족의 자유로운 의사에 의해 받은 것으로 보기 어렵다는 것이 법조계의 중론이라고 생각합니다. 전체주의 정권이 이미 ‘납치’라고 정의를 내린 상황에서 그 체제의 통제를 받는 주민이 어떻게 자유로운 의사표명을 할 수 있겠습니까.”
차 변호사는 “민변의 이번 인신보호청구는 인권 보호를 내세우고 있으나, 결과적으로는 유엔에서 광범위하고 체계적인 인권유린 국가로 규탄한 북한의 선전에 동조하는 것이라는 비판을 피할 수 없다”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구제청구를 한 민변 변호사 스스로 ‘이들(탈북 여종업원)도 자의로 탈북했다면 가족들의 불이익은 어느 정도 예상했을 것’이라는 말을 했습니다. 이는 민변 변호사조차 탈북자들이 법정에서 공개적으로 자의로 탈북했다고 한다면 북한에 볼모로 잡힌 가족들이 탄압을 받을 것을 알고 있다는 뜻입니다. 전체주의 정권이 가족을 인질로 잡고 탈북 여종업원과 그 가족의 생명과 신체의 자유 등 기본권을 위협하는 행위에 민변 변호사들이 본의든 아니든 협력하는 결과가 되는 것이 심히 유감스럽습니다.”◎
| 이상흔 조선pub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