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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이탈주민(탈북민) 이야기13/ 탈북(민) 소식4/ 수기2/ 11살 은주는 왜 유서를 써야 했나 - 성공적으로 정착한 탈북민

상림은내고향 2021. 11. 14. 15:21

북한 이탈주민(탈북민) 이야기13/ 탈북(민) 소식4/ 수기2/ 

■ 2013.10.21 11살 은주는 왜 유서를 써야 했나 

함경북도에 은덕에서 서울까지 생사를 넘나든 9년간의 탈북 이야기

미국 샌디에고에서 교환학생으로 공부할 때의 김은주씨. 은주씨는 최근 북한에서의 굶주림 경험과 목숨을 건 탈북 등 9년간의 탈북이야기를 담은 <열한 살의 유서>를 펴냈다.

 

1997년 6월 22일, KBS의 <일요스페셜>이란 방송을 본 국민은 경악했다. 그동안 말로만 들어오던 북한의 대기근 현실이 생생한 영상을 통해 안방에 전해졌기 때문이다.

 

강변에서 탈진한 채 쓰러진 어머니와 그 품을 파고드는 젖먹이 아이, 영양실조로 금방이라도 쓰러질듯한 깡마른 꽃제비들이 장마당의 더러운 시궁창에 떨어진 밥알을 주워 먹는 모습, 이들을 철저히 외면하는 주변 사람들, 한 바가지의 옥수수 가루와 나뭇잎으로 목숨을 이어가는 식구들, 그리고 살기 위해 두만강을 건너다가 경비원에게 사살당한 채 강을 떠다니는 시신들···.

 

한마디로 ‘인간 생지옥’이 따로 없었다.

북한은 김일성이 죽기 전인(1994년)인 1992년부터 이미 극심한 식량난에 시달리고 있었고, 1997~98년에는 기근이 거의 절정에 달했다. 비공식 통계에 의하면 1997년에 이미 중국에는 20만 명에 이르는 북한 식량난민들이 넘어와 있었다. 하지만 북한 당국은 이런 대기근의 참상을 외부에 철저하게 숨겨왔다. 대다수의 우리 국민도 이날 KBS가 방영한 영상을 보기 전까지는 북한의 식량난과 대량아사를 그저 ‘먼 나라’ 이야기처럼 느끼곤 했었다.

 

1997년 KBS '일요스페셜'에 소개된 북한 꽃제비.

 

서강대 4학년 졸업반인 김은주(27)씨는 1997년과 98년의 대량 아사(餓死) 시기에 모질게 살아남은 소위 ‘꽃제비’ 중의 한 명이다. 서강대 부근 한 커피숍에서 만난 은주씨는 키가 또래 친구들보다 머리 하나 정도는 작았지만,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그저 평범한 대학생의 모습이었다.

 

인터뷰 내내 보인 밝은 모습에서 굶주림과 목숨을 건 탈북, 그리고 9년간의 힘겨운 타국 생활을 견뎌낸 과거가 숨겨져 있다는 게 쉽게 연상이 되지 않았다.

 

◇11살의 유서, ‘엄마 기다리지 못해서 미안해. 엄마 용서해’

함경북도 은덕에서 태어난 은주씨는 11살 때인 1997년 11월 아버지를 영양실조로 잃었다. 아버지를 잃은 은주씨 가족에게 남은 삶은 ‘지옥’ 그 자체였다. 목숨을 보전하는 것만이 은주씨와 언니, 그리고 어머니 세 모녀의 유일한 목표가 되었다.

 

은주씨 어머니는 처음에는 집안에 남은 세간을 팔아서 연명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한계에 부딪혔다. 은주씨와 언니는 학교도 다닐 수 없었고 온종일 먹을거리를 찾아다니는 데 모든 시간을 쏟았다. 심지어 아파트에 키우던 토끼 철조망에 토끼배설물과 함께 굳어 있던 나물 쪼가리까지 골라서 먹었을 정도였다.

 

그렇게 한 달을 버티던 어느 날 은주씨 어머니는 언니를 데리고 중국인이 많이 드나들던 나진ㆍ선봉(경제특구) 지역에 가서 음식을 구해 오겠다며 집을 나섰다.

 

어머니가 은주씨에게 남긴 음식은 옥수수 30알 정도(두부 한모 살 수 있는 돈) 였다. 어머니는 “옥수수를 하루에 열 알씩만 먹으라”는 당부를 잊지 않았다.

 

텅 빈 집안에는 11살의 야윈 은주씨만 남아 있었다. 하루, 이틀, 사흘···. 식량을 구하러 간 어머니는 엿새가 지나도 돌아오지 않았다. 어린 은주씨였지만, 자신이 분명 죽어가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은주씨는 돌아오지 않는 어머니에 대한 서운함과 원망하는 마음, 그럼에도 보고 싶은 어머니에게 마지막 힘을 모아 유서를 남겼다.

 

‘엄마 죽을 것 같아요. 엄마 기다리지 못해서 미안해. 엄마 용서해.’

열한살의 은주씨는 그렇게 유서를 썼다. 그리고는 차디찬 방다박에 이불을 덮고 누워서 죽음을 기다렸다. 몇 시간 후 흐릿한 의식 속에 인기척이 들렸다. 마치 기적처럼 어머니와 언니가 돌아왔던 것이다. 하지만 이들 손에는 은주씨의 목숨을 구할만한 것이 아무것도 들려 있지 않았다. 어머니는 “다 같이 죽자”며 추운 아랫목에 딸 둘을 눕히고 같이 이불을 덮고 누웠다. 나진ㆍ선봉에 가서도 음식을 구하지 못했으니 마지막 희망까지 사라져 버린 것이다.

 

굶주림으로 새로운 묘지가 즐비한 북한의 어느 야산. 그나마 이렇게라도 묻힐 수 있으면 행운이다. 은주씨는 장마당에서 죽은 이들을 손수레에 싣고 한 구덩이에 몰아서 묻는 장면을 수없이 보았다고 한다.

 

그렇게 아침이 밝았다. 하지만 세 모녀의 목숨은 아직 꺼지지 않았다. 전날 같이 죽자던 어머니는 무엇인가 결심했는지 ‘위대한 수령’과 ‘친애하는 지도자’의 초상화가 든 액자를 떼어냈다. 어머니는 돌이킬 수 없는 범죄를 저지르고 있었다. 어머니는 두 영도자의 사진은 불태우고, 액자를 내다 판 얼마간의 돈으로 음식을 마련했다.

 

집에 마지막 남은 세간인 농까지 땔감으로 쪼개서 팔고 나자 더는 팔 것이 없었다. 세 모녀는 구걸하거나, 땔감을 구해 팔고, 풀을 뜯고, 버섯을 캐고, 쌀과 옥수수를 훔치려고 들판을 헤매며 모진 목숨을 연명했다. 꽃제비가 된 것이다.

 

그렇게 해서 언제까지나 버틸 수는 없었다. 은주씨 어머니는 마침내 북한 땅에서는 더는 목숨을 부지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탈북을 결심한다. 무슨 정치적인 목적이 있어서가 아니라 오직 살고자 하는 본능이 이들 세 모녀를 조국과 고향을 떠나도록 만들었다. 당에 대한 배신의 대가가 두려웠지만, 굶어 죽는 것보다는 강을 건너다 총에 맞아 죽는 것이 나았다. 1999년 세 모녀는 두 번의 시도 끝에 두만강을 건너 북한을 탈출하는 데 성공했다.

 

◇두만강을 무사히 건넜지만…

김은주씨의 탈북 이야기를 다룬 <열한 살의 유서>

 

은주씨는 자신과 가족이 겪은 이야기를 엮어 지난 10월 4일 <열한 살의 유서>(씨앤아이북스)라는 책으로 출간했다. 원래 은주씨의 이야기는 프랑스의 일간지 <르 피가로>의 세바스티앙 팔레티 서울특파원을 통해 지난해 초 프랑스에서 ‘북한 지옥탈출 9년’이라는 제목으로 출간됐다. 이어 노르웨이에서도 출간되었고, 유럽의 관심을 끌자 한국에서 역으로 번역 출판이 된 것이다. 은주씨 말이다.

 

“저도 저와 가족의 이야기가 책으로 나올 줄은 생각도 못했습니다. 제가 겪은 일이 여느 탈북자와 다를 바 없기 때문이에요. 책을 쓰게 되면 우리 가족의 이야기가 공개될 수밖에 없다는 것도 걱정했었습니다. 하지만 고통받는 북한 주민을 생각하면 우리 탈북자들이 마냥 침묵하고 있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어요. 북한 인권이 개선되는 데 도움이 된다면 작은 목소리라도 내야 합니다. 개인과 가족에게는 아픈 기억이지만 북한 사람들이 자유를 누릴 수 있는 그날까지 작은 힘이라도 보태야 해야 하기에 저의 이야기를 세상에 내놓게 되었어요.”

 

강을 무사히 건넜지만, 그곳에는 또 다른 ‘지옥’이 펼쳐졌다. 이들을 반기는 사람도, 음식을 주는 사람도 없었다. 죽음을 각오한 탈북이었지만, 낯선 중국에서 사는 것은 배고픔 하나만을 해결할 수 있을 뿐 그 외의 모든 것은 잃어야만 했다. 생계가 막막했던 세 모녀는 결국 인신매매에 걸려 어느 중국인 농부의 집으로 팔려갔다. 두 딸을 지키기 위해 은주씨 어머니는 원하지 않은 사람과 살아야 했고, 그곳에서 아들(은주씨 남동생)을 낳았다.

 

은주씨는 “의붓아버지와 함께 산 3년 동안 ‘북한에서 온 거지’라는 말까지 들으며 참고 견뎌야 했다”고 한다. 배고픔은 해결 되었지만 인간으로서의 대우는 기대할 수 없었다. 그럴 때면 뒷산에 올라가 하늘의 별을 향해 아버지를 부르며 목 놓아 울었다. 하지만 그런 생활도 3년이 가지 않았다. 2002년 3월 30일, 마을 주민 누군가의 밀고로 중국 공안에 체포되어 북한으로 넘겨졌기 때문이다.

 

◇중국에서는 ‘거지’, 조국에서는 ‘인간쓰레기’ 취급

2012년 2월 23일 서울 종로구 효자동 주한 중국대사관 앞에서 탈북자 김은주씨가 ‘중국 인민들에게 전하는 호소문’을 읽으며 감정이 북받치는 듯 눈물을 흘리고 있다. 은주씨는 “탈북자들의 죄는 배고픔을 느낀 것뿐”이라며“중국 정부가 탈북자 강제 북송을 중단하도록 도와달라”고 호소했다. 조선DB.'

 

‘중국 아이까지 낳았는데 조금의 아량은 베풀어 주겠지.’

헛된 기대였다. 중국 변방대(북송할 탈북자들을 모아 놓는 곳)에 갇혀 있는 5일 동안 체포된 탈북자들은 ‘인간’이 아니었다.

 

“우리는 세상에 쓸모없는, 그들을 귀찮게 하는 존재에 지나지 않았어요. 그들은 온갖 욕설을 퍼부었고, 남자들을 가두어 둔 곳 에서는 맞아서 괴로워하는 신음이 들렸습니다. 맞아야 하는 정당한 이유도 없었어요. 어쩌면 ‘정당함’이란 단어 자체가 우리에게 해당하지 않는 것이었어요.”

 

북송되어서는 보위부에서 조사를 받았다. 조사 중 하나인 신체검사는 알몸 상태에서 진행됐고, 속옷부터 생리대까지 찢어가며 모든 곳을 뒤졌다.

 

▲2005년 자유북한방송은 북한군 초소의 군인들이 탈북 여인을 구타하며 취조하는 동영상을 입수해 방영했다.

 

“그들이 이렇게 하는 것은 오직 돈을 찾아내기 위한 것이었어요. 우리는 그런 모욕을 당하면서도 수치스러움을 느껴서도 안 되고, 수치스러워할 자격도 없는 존재였어요. 내가 나고 자라고, 그토록 그리워하던 내 나라에서 이런 ‘인간쓰레기’ 대접을 받은 것입니다.”

 

조사가 끝난 후에는 5~6평 남짓한 감옥에 갇혔다. 화장실에서 나는 냄새는 지독했다. 한쪽 벽은 쇠창살로 되어 있어 밤낮없이 감시원이 들여다볼 수 있었다. 은주씨는 “인간으로서 부끄러움, 민망함과 감정은 북송 시작부터 금지된 대상”이라고 말했다.

 

15일 후 노동단련대로 이송되었다. 중국에서 젖도 떼지 못한 아이를 두고 북송된 은주씨 어머니는 극심한 젖앓이를 했지만, 감히 아프다는 말조차 꺼내지 못하고 견뎌야 했다.

 

“어머니는 강제노동과 젖앓이로 사상교육 받던 중 쓰러지셨어요. 정말 어머니를 잃는 줄 알고 너무나 두려웠지만 마음대로 울 수조차 없었습니다. 그곳에서 죽음 어쩌면 당연하고 마땅한 것이었어요. 죽는다고 한들 누구하나 슬퍼해 줄 사람도 없었어요.”

 

은주씨 어머니는 수감자가 사온 주사를 맞고서야 겨우 정신을 차렸다.

 

이후 은주씨 가족은 청진 도집결소로 이송됐다. 청진은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가 사시던 곳인데 모두 굶어서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도 집결소에 가서 새로운 사실을 알았어요. 우리가 북한 사람임을 증명할 수가 없었던 겁니다. 북한은 당시 식량난으로 수많은 사람이 굶어 죽었기 때문에 3년 동안 소식이 없으면 죽은 걸로 간주하여 호적에서 삭제를 하였거든요.”

 

불행 중 다행으로 신분이 확인되지 않은 것으로 인해 은주씨 가족은 도망칠 기회를 얻었다고 한다. 마침 고향인 은덕에서 다른 죄수를 호송하러 안전원이 왔는데, 청진 보위부에서는 은주씨 세 모녀를 그 안전원에게 인도한 것이다. 2~3일 여정의 식비를 대며 일전 한푼 없는 세 명의 여성을 데리고 가야 했던 안전원의 난처한 입장을 은주씨 어머니는 역이용했다. 당시 북한은 죄수를 호송하기 위한 식량조차 호송 담당자가 마련해야 할 정도로 식량사정이 좋지 않았다고 한다.

 

“어머니는 은덕에서 온 보위부 요원을 설득했습니다. 어머니는 ‘우리는 어차피 고향에서 사망처리된 사람들이다. 우리가 알아서 은덕까지 갈 테니 놓아주면 당신도 식량 부담을 덜 것 아니냐’고 말했습니다. 얼마간 설득하자 정말 그 사람이 우리를 놓아주었습니다. 말 그대로 기적이 일어난 것이죠.”

 

2002년 6월 다시 중국으로 탈출에 성공하여 강제북송의 고통을 끝났지만, 은주씨 가족의 마음속에 더는 고향에 대한 동경과 그리움은 남아있지 않았다. 중국에서는 ‘북한에서 온 거지’ 대접을 받았고, 고향 북한에서는 ‘인간쓰레기’ 취급을 당했기 때문이다.

 

재탈북에 성공한 은주씨 가족은 돈을 모으기 시작했고, 그렇게 모은 돈으로 2006년 브로커에게 1인당 2만 위안을 내고 몽골의 고비사막을 거쳐 울란바토르로 탈출, 이후 한국으로 들어올 수 있었다. 재탈북 후 따로 떨어져 도피생활을 하던 은주씨 언니는 2008년 한국으로 들어와 가족이 재회했다.

 

◇“어머니와 헤어지지 않았으니 우리는 운이 좋은 편”

출판 일로 영국을 방문했을 때.

 

은주씨는 어머니가 중국인에게 팔려가고 강제로 새 시집을 갔는데 그것조차도 ‘운이 좋은 경우’라고 했다.

 

“탈북자들은 거의 예외 없이 브로커들에게 걸려들게 되어 있습니다. 인신매매에 팔려가 매음굴에서 매춘을 강요받는 경우도 많았거든요. 우리도 인신매매하는 자들의 손에 떨어졌지만, 지금 우리 가족이 함께할 수 있는 것은 엄청난 행운입니다. 제가 아는 아주머니의 딸이 16세였는데, 팔려간 중국 집에서 딸이 다시 팔려서 어디론가 사라졌어요. 브로커들은 어차피 돈이 목적이기 때문에 딸을 강제로 납치해서 다른 곳으로 팔아넘긴 것입니다. 이처럼 모녀지간도 나이가 차면 각자 따로 팔려가는 경우가 허다했습니다. 나와 언니는 그나마 어렸기 때문에 어머니랑 항상 붙어 있을 수가 있었죠.”

 

은주씨는 한국에 온 후 서울 강서구에 있는 일반 고등학교(세현고)에 다녔다. 우리 나이로 스물두살의 늦은 나이에 고등학생이 된 것이다.

 

“북한을 탈출한 11살 이후 중국을 떠돌면서 학교에 다녀 본 적이 없어요. 한국에 와서 진로를 선택할 때 고민도 많았어요. 또래보다 4~5살 많은데 과연 적응을 할 수 있을까 하고…. 어쨌든 고2에 편입했고, 배운다는 열정이 가득했지만, 시간이 갈수록 힘들었어요. 열정과 상관없이 수업을 들어도 무슨 말인지 아는 것이 없으니까 너무 힘들었죠. 그래도 쉬는 시간마다 짬을 내서 영어를 가르쳐준 선생님 덕분에 따라갈 수 있었던 같아요.”

 

은주씨는 2009년 서강대에 입학해 중국문화와 심리학을 전공했다. 지금은 취업준비로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다.

 

“아동심리학자가 되는 게 꿈이에요. 북한에서 중국에서 엄마 없이 자라는 아이들이나 버려진 어린 소년소녀들을 너무나 많이 보았어요. 어린 시절에 받은 상처는 쉽게 아물지 않기 때문에 이들의 마음을 치료하고 희망을 주는 일을 하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이 꿈은 잠시 미뤄두고 일단은 취업을 할 생각이에요.”

 

-은주씨는 기억력이 정말 좋은 것 같네요. 어려웠던 시절을 그렇게 자세하게 기억하면 힘든 점도 있을 텐데. “저는 탁아소에 다닐 때도 기억을 해요. 남한에서 삶은 대체로 큰 굴곡이 없는 삶이잖아요. 저도 이런 상황에서 살았으면 옛날 일을 세세하게 기억 못 할지도 모르겠지만, 탈북자로서 고향을 떠나면서 한시라도 고향을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는 상황이었어요. 중국에서 힘든 도피생활을 하면서 고향과 어릴 적 추억이 그리웠어요. 밤이면 우리 모녀 셋이 늘 고향 이야기를 하고, 북한 노래를 흥얼거리곤 했어요.”

 

-북한의 식량 위기는 1990년 중반부터 있었는데 왜 1997년 갑자기 집안 사정이 어려워졌나요? “물론 이전부터 배급이 줄어들어서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하지만 우리 집은 어머니가 병원 식당에서 일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먹고살 만했습니다. 어머니가 늘 식당에서 쌀과 밥을 가져오다 보니까 크게 굶지는 않았어요. 그런데 1990년대 중반에 접어들면서 배급은 거의 끊어졌고, 병원에서도 식량이 떨어져 환자들에게 밥도 못 주다 보니까 집에 가져올 양식이 없어졌습니다. 이때 아버지가 영양실조로 병이 나서 쓰러졌어요.”

 

◇당의 명령에 충성한 고지식한 사람부터 죽어나가

은주씨의 아버지는 1ㆍ21일 화학공장의 노동자였다. 무기를 만드는 공장이었지만, 식량난으로 배급이 제대로 공급이 안 돼 은주씨의 아버지는 영양실조로 몸이 쇠약해졌고, 늑막염으로 큰 고생을 했다고 한다. 병으로 공장에 나가지 못하니까 그나마의 배급도 완전히 끊어졌다.

 

“1995년 이미 외할아버지가 굶주림으로 쓰러지셨는데 노인과 어린이부터 차례로 죽어나갔습니다. 간혹 몇 개월마다 한두 킬로씩 배급이 나와도 그걸로는 버틸 수가 없죠. 식량난 당시 북한 체제에 충성하고, 당의 명령을 충실하게 따른 고지식한 외할아버지와 아버지 같은 사람들부터 가장 먼저 굶어 죽었습니다. 배급은 없는데 당에서 다른 살 방도는 주지 않으니까 그냥 꼬꾸라진 것이죠.”

 

-그런 상황에서 체제에 대한 불만은 없었나요?

“불만도 뭘 알아야 가질 게 아닙니까. 북한은 외부 정보가 다 차단되어서 뭐가 왜 잘못되었는지 사람들이 자각하지 못합니다. 당시에 우리가 못사는 것은 맞지만 ‘미국놈과 남조선놈, 간첩 때문에 농사를 망쳤다’고 당이 선전했기 때문에 그렇게 믿고 있었어요. 설사 원망의 대상이 있다면 미국인데 미국을 어떻게 하겠어요. 당시 대부분의 북한 사람들은 굶어 죽으면서도 추호도 장군님 잘못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어요.”

 

먹을 것을 찾아 풀뿌리를 캐고 다니는 북한 어린이들.

 

하지만 굶주림과 싸우면서도 은주씨와 북한 주민들이 추호도 의심과 원망을 하지 않았던 ‘위대한 장군님’은 밤마다 기쁨조에 둘러싸여 파티를 열고, 프랑스산 고급와인과 산해진미를 먹고 있었다는 사실을 당시 김정일의 요리사를 지낸 일본인 후지모토 겐지씨가 증언을 하면서 세상에 밝혀졌다. 은주씨도 이때 받은 배신감을 책에서 언급해 놓았다.

 

◇먹을 것을 구할 자유도 주지 않은 ‘자애로운 아버지’

-지금의 북한 식량 사정은 어떤가요? 굶어 죽는 사람은 많이 줄어들었다고 하는데.

“적어도 그때보다는 아사자가 많지는 않다고 생각합니다. 아마 확실할 거에요. 그렇다고 생활여건이 나아진 것은 아닙니다. 다만 1990년대 당시는 배급이 갑자기 끊기면서 사람들이 요령이 없었어요. 장사도 할 줄 모르고, 어떻게 살아야 할지 방도를 모르고 있다가 그냥 굶어 죽은 겁니다. 하지만 그 후에 살아남은 사람들이 스스로 살아갈 방도를 조금은 터득하면서 장사를 통해 식량을 얻는 방법을 찾은 것이죠.”

 

2000년 북한은 노동당 창건 55주년을 기념하며 ‘고난의 행군’이 끝났다고 선언하였다. 하지만 국제인권단체는 2000년 이후에도 60만명 이상이 아사했다고 추정하고 있다. 국내외 인권기구는 1990년대 중반에서 2000년까지 소위 말하는 고난의 행군 시기에는 약 200만명에서 300만명이 죽은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

 

은주씨 책에는 고난의 행군시기 아사자가 50만명이나 100만명이라고 했는데요.

“어느 국제기구 통계를 인용한 것인데, 아사자 통계는 저도 정확하게 알기가 어렵습니다. 기준을 잡는 시점에 따라 큰 차이도 나고요. 굶어서 죽는 것도 죽는 것이지만, 못 먹어서 영양실조와 심지어 얼어 죽는 것도 모두 굶어 죽는 것이나 마찬가지죠. 사람이 든든하게 먹으면 쉽게 얼어 죽지 않거든요. 그렇게 계산하면 수백만 명의 아사자가 틀린 말은 아닐 거에요.”

 

김정일은 소위 고난의 행군시기 김정일은 체제유지에 필요한 약 500만 명에게만 식량을 주고, 나머지 주민에게는 배급을 끊어 버렸다. 그러면서도 식량을 얻기 위해 탈북한 자들을 가혹하게 처벌했다. 사실상 주민들을 굶겨 죽인 것이나 마찬가지인 셈이다. 주민들의 목숨이 낙엽처럼 떨어질 때도 김정일은 북한 전 주민을 3년간 먹이고도 남는 옥수수 600만톤을 살 수 있는 돈을 김일성의 시신 보존처리 비용으로 사용했다. 김은주씨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북한에서는 굶어 죽을 자유조차 없습니다. 자살을 하는 것도 반역자가 되기 때문에 할 수도 없어요. ‘자력갱생’하라고 했는데 못했으니 그것도 죄라면 죄인 것이죠. 북한 당국은 그 상황에서 먹고 살기 위해 탈출을 한 주민들을 잡아다가 혹독한 처벌을 했습니다. 말로는 ‘아버지가 자식을 어떻게 버리겠는가’ 하면서 실제는 그 반대의 행동한 것이죠. 자식을 먹여 살리지 못하는 아버지라면 자식이 스스로 먹고살기 위해 식량을 구할 자유는 주어야 하는 것 아닌가요. 한마디로 ‘너는 내 밑에서 죽으라’는 건데 그게 어떻게 아버지입니까.”

 

◇“북한을 변화시키는 데는 남한 드라마가 최고”

-당시 북한이 핵무기 개발을 포기하는 대가로 남한과 미국에서 엄청난 식량이 들어가기 시작했는요.

“탈북자들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하면 2% 정도가 남한과 미국에서 보내준 구호식량을 ‘보았다’고 대답한답니다. ‘받았다’가 아니라 그저 ‘보았다’는 것이죠. 중간에서 간부들이 다 빼돌렸는지 평양에만 주었는지 모르지만, 탈북자 중에 그걸 받았다고 하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평양과 지방은 그야말로 다른 세상입니다. 극과 극이죠.”

 

-두 번째 탈북을 하고, 왜 바로 남한으로 올 생각을 하지 않았나요?

“우리는 조선족처럼 합법적으로 남한으로 시집을 갈 수도 없고, 방법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기회를 보며 돈을 모았고 2006년 알고 지내는 언니가 친구가 브로커를 소개해주어서 그를 통해 남한으로 온 것입니다.”

 

-중국에서 팔려간다는 것은 돈을 받고 간다는 뜻인가요?

“탈북자들이 자기가 돈을 받으면 팔려가는 게 아니죠. 인신매매 당사자들은 돈을 구경 못합니다. 돈은 브로커들이 가져가죠.

 

북에서 온 여자들에게 브로커들이 ‘당신들이 살길은 시집가는 길밖에 없다’고 집요하게 설득을 해요. 그렇게 설득당해서 가는 경우도 있고, 어떤 경우는 그냥 자기들끼리 어디론가 팔아버립니다. 많은 북한 처녀들이 중국 농촌의 나이 많은 남자에게 팔려가서 갇혀 지내거나, 반강제로 애를 낳고 살고 있습니다.”

 

은주씨는 “한국으로 오기 위해 몽골에 도착했을 때 21살에 세 번이나 팔려 다니며 애까지 낳은 후 탈출한 여자를 직접 만났다”며 “나는 그 친구를 보면서 중국에 있는 탈북 여성들의 삶을 더 깊이 절감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국제구호 단체가 찍은 영양실조로 고통받고 있는 북한 어린이들. 기아에 허덕이는 아프리카 난민 어린이와 다를 바가 없다.

 

-북한 주민의 삶을 개선하기 위해 가장 좋은 방법이 뭐라고 생각하세요?

“저는 가장 좋은 방법이 중국을 통해서 한국의 드라마나 외부 정보를 지속적으로 북한으로 들여보내서 내부로부터 변화시키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북한 체제를 심하게 비난하는 선전물은 오히려 역효과가 날 수 있지만, 남한의 드라마는 문화적으로 접근하기 때문에 북한 주민들이 빨리 그리고 쉽게 받아들일 수 있어요. 드라마를 보면서 북한 주민들이 자신들의 처지를 외부 세계랑 비교할 수도 있고, 여러 가지 변화를 이끌어 낼 수 있다고 봅니다.”

 

-북한의 일반 주민들이 DVD를 사서 보기에는 비용이 만만치 않을 텐데요.

“북한에는 미디어가 지하시장 형태로 존재합니다. 그러니까 중국을 통해서 저렴한 비용 혹은 무료로 남한 드라마를 북으로 되도록 많이 보내는 것이 중요하다고 봐요. 그러면 최소한 공짜는 아니더라도 더 좀 더 싼 값으로 더 많은 사람이 접할 수 있으니까요.”

 

◇통일비용만 생각하는 남한 친구들이 야속하기도

은주씨는 “남한의 또래 대학생들이 북한에 대해 너무 무관심하다”며 “한편으로 이해는 가지만 서운한 것이 사실”이라고 말했다.

 

“그나마 탈북자와 북한에 대해서 관심이라도 가지는 친구가 있으면 고마워서 하나라도 더 알려주려고 노력합니다. 정작 뉴스에는 북한관련 소식이 하루도 빠짐없이 나오지만, 우리나라 대학생과 청소년은 북한에 대해 거의 무관심해요. 북한에 대해 듣고 싶어하는 친구가 있으면 적극적으로 이야기해주는데 그런 친구가 많지는 않아요. 그 점이 아쉬워요.”

 

 

-남한의 친구들의 통일관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세요.

“친구들과 통일 이야기를 하면 일부 친구들은 대뜸 ‘통일비용’에만 초점을 맞춰요. 이런 모습이 너무 이기적으로 보일 때가 많죠. 서운해야 한다고 해야 하나 씁쓸하다고나 해야 하나. 아무튼 무척 안타까워요. 친구들이 ‘왜 내가 내는 세금으로 통일비용을 부담하느냐. 다음 세대가 하면 되지’라고 말할 때는 정말 할 말이 없어요.”

 

은주씨는 “북한은 재건이 필요하고, 우리는 기술력이 있으니까 통일이 되면 일자리도 늘어나고 내수시장도 확보되며, 더욱이 지하자원을 잘 활용할 수 때문에 늦어도 10년이면 북한의 경제가 남한 수준으로 회복할 수 있다”며 “젊은 친구들이 통일을 무조건 부담이라고만 생각하지 말고, 좀 더 멀리 보는 안목을 가졌으면 좋겠다”고 밝혔다.

 

기자는 영양실조에 걸린 북한 어린이들의 사진을 은주씨에게 보여주었다. 은주씨는 “나는 사진이 아니라 북한에 있을 때 매일 이런 아이들의 모습을 보았다”며 다음과 말했다.

 

“이모의 아들도 영양실조로 걷지를 못했어요. 지금은 이 세상 사람이 아니겠죠. 한국에 와서 마음이 씁쓸한 것이 바로 이런 북한 어린이들의 모습을 보는 거에요. 깡말라 죽어가는 아프리카 어린이들과 피부색만 다른 것이 지금 북한의 어린이라고 생각하면 되거든요. 하지만 먼 곳에 있는 아프리카 어린이는 도울 수 있지만, 형제·자매인 북한의 어린이는 도와줄 길이 없잖아요. 그 점이 제일 안타깝죠.”

 

은주씨는 “남한에서 북한과 통일 교육에 대한 체계적이고 실질적인 교육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며 아쉬워했다.

 

“현재 남한의 학교에서 하는 북한 관련 교육이 북한의 실상을 제대로 가르치지 않고, 그저 한민족을 강조하는 막연하거나 피상적인 교육에 그치고 있습니다. 그나마 지금 일부 학교에서 탈북자들을 강사로 활용하는 교육을 진행 중인데, 이것도 교장의 재량에 따라 강의를 하거나 하지 않거나 선택할 수 있습니다. 모든 초중고에서 탈북자들이 직접 북한의 실상을 알리는 교육을 할 수 있도록 의무적이고 체계적인 시스템이 마련되면 좋겠어요.”

 

은주씨는 “북에서 꽃제비 생활을 할 때 엄마가 있어서 살아남을 수 있다”며 “엄마가 없었으면 장마당의 유령이 되었을 것”이라며 거듭 어머니에 대한 사랑과 감사를 드러냈다.

 

인터뷰 후 은주씨가 서강대 캠퍼스를 배경으로 활짝 웃고 있다. 북녘땅에서는 은주씨처럼 해많은 영혼이 지금 이 시간에도 수없이 사라지고 있다.

 

“어머니는 한겨울 추운 바닥에서 잘 때도 항상 저를 끌어안고 주무셨고, 바닥에 작은 비닐이라도 깔아주었어요. 그래서 그나마 이렇게 살아있습니다. 당시에 많은 부모가 입을 하나 덜려고 자식을 버린 경우가 많은데, 우리 어머니는 우리를 끝까지 지켜주었잖아요.”

 

은주씨는 “지금 이 순간에도 자유와 인권 유린의 현장에 있는 북녘 주민을 생각하면 분통함을 억누를 길이 없다”고 말했다.

 

“배고픔으로부터 인간으로서 주어진 생명을 지키려고 한 것이 무슨 잘못인가요? 그런데도 탈북자들을 배신자니 뭐니 하며 혹독한 처벌을 하고 있습니다. 나는 자유와 인권이 상실된 비참함을 겪었기에 그 중요성을 너무나 잘 알고 있기에 탈북자로서 북한의 인권과 자유를 실현하는데 의무를 다할 것입니다.”

- 더 많은 기사는 '조선pub'에서 볼 수 있습니다.

 

■ 2014.10.31 '세계 100대 여성'에 뽑히고 英의회에서 연설한 탈북 여대생 박연미는 누구?

탈북 여대생 박연미(21)씨가 영국 BBC가 선정한 ‘올해의 세계 100대 여성’에 선정됐다. 한국인으로는 박씨가 유일하게 명단에 포함됐다. BBC는 박씨를 북한 주민들이 겪는 고난을 알리는 사회 활동가(activist)라고 소개했다. 스코틀랜드 자치정부를 이끌게 될 니콜라 스털전과 온라인 여성단체 ‘에브리데이 섹시즘 프로젝트’의 설립자 로라 베이츠 등이 박씨와 함께 100인으로 선정됐다.

 

박씨는 나이는 어리지만, 국제 사회에서의 인지도를 급속도로 키워가고 있다. 지난 29일(현지 시각)에는 영국 웨스트민스트 의회에서 열린 ‘북한의 과거와 현재’를 주제로 한 공청회에 참석했다. 이 자리에서 그는 유창한 영어로 “시장 경제를 체험한 세대들이 성장하고 있어 북한도 밑바닥부터 변화하고 있다”는 내용의 연설을 했다.

 

박씨는 11월엔 미국으로 건너가 하버드대 등에서 북한 인권의 실상을 전하는 강연을 펼칠 예정이다.

 

▲박연미씨/프리덤팩토리 제공

 

나는 장마당 세대, 북한도 변하고 있다

 

박연미씨가 처음 국제 사회에 알려지게 된 것은 지난 5월 미국 워싱턴포스트지(紙)에 ‘북한 장마당 세대의 희망(The hopes of North Korea’s Black Market Generation)’이라는 제목의 본인 글이 실리면서부터다.

 

장마당 세대란 1990년 이후에 출생한 세대를 일컫는 말로, 이들은 국가 배급망이 붕괴한 이후에 태어나 국가의 혜택을 거의 받지 못했다. 박씨는 글에서 장마당 세대의 특징을 ‘김씨 정권에 대한 충성심이 없으며(has no devotion to the Kim dynasty)’, ‘미디어와 정보를 많이 접했고(wide access to outside media and information)’, ‘자본주의에 친숙하다(capitalistic)’라고 정의했다.

 

지난달에는 아일랜드서 열린 ‘세계 젊은 지도자 회의’에 한복을 입고 연설자로 나섰다. 이 자리서 그는 영어 연설을 하면서 탈북 과정에서 어머니가 중국인 브로커에게 성폭행당하는 장면을 눈으로 뻔히 보면서도 숨만 죽이고 있었다고 말해 시청자들에게 큰 충격을 던져주었다. 아울러 중국 당국이 탈북자 강제북송 정책을 중단하도록 힘써달라고 눈물로 호소해 전세계적인 관심을 모았다.

 

현재는 북한 실상을 영어로 알리는 팟캐스트 방송 ‘케이시 앤드 연미 쇼’를 진행하고 있다. ‘김정은과 북핵’에만 초점을 맞춰 북한을 보는 것이 아니라, 실제 북한 사람들의 생활 모습을 알리는 것이 통일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해, 이런 방송을 하기로 생각했다고 한다. 박씨는 이런 일을 자유롭게 하고 있는 것이 꿈만 같다라고 표현한 적이 있다.

 

13살에 북한 탈출, 영어 배우려 ‘미드’ 20번 돌려봐

올해 21살인 박연미씨는 북한 양강도 혜산 출신이다. 13살이던 지난 2007년 가족과 함께 북한을 탈출한 뒤, 중국 고비사막과 몽골 등을 거쳐 2009년 정착했다. 이 과정에서 그는 몇 번이나 죽을 고비를 넘겼지만, 탈북 과정에서 아버지를 장암으로 여의었고 어머니는 중국 브로커에게 성폭행을 당하는 아픔도 겪었다.

 

그는 지난 5월 한 언론 인터뷰서 “공포 정치 때문에 불만을 표출하지 못하는 것 뿐이지, 사람들이 모여 앉기만 하면 김씨 정권을 욕한다”며 “끝나지 않을 독재정권이 곧 무너지는 날이 점점 당겨지고 있음을 피부로 체감하고 있다”고 했다.

 

현재 박씨는 동국대 경찰행정학과 3학년에 재학 중이다. 그는 이 전공을 택한 이유를 “부끄럽기도 슬프기도 하지만, 중국에서 경찰복을 입은 사람들이 너무 무서웠다”며 “그런 경찰이 되면 한국에서 가족을 잘 지킬 수 있을 것 같았다”고 말한적이 있다.

 

박씨의 아버지는 북한에서 당원이었다. 시 인민위원회 지도원으로 일했는데, 2000년 경제개혁조치 이후에는 기업소에서 일했다고 한다. 기업소에서는 수익금을 일정 이상 올리면 밖에 나가 장사를 할 수 있게 했는데, 박씨의 아버지도 수익금만 채워놓은 채 밖에서 장사를 했다고 한다. 박씨에 따르면 아버지가 신분상 꽤 고위직이었음에도 월급으로는 쌀 1㎏도 살 수 없어, 불법으로 장사를 하지 않았다면 생활이 불가능할 정도였다.

 

그는 지난 2009년 한국에 정착하고 나서는, 북한의 실상을 세상에 제대로 알리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그래서 언젠가는 현재의 북한이 아닌 완전히 바뀐 모습의 북한에 가는 것이 소망이라고 한다.

 

박씨는 북한의 실상을 알리기 위해 영어를 공부하기 시작했다. 지난 2009년엔 알파벳만 아는 수준이었지만, 탈북자들에게 영어 교육을 하는 미국인 케이시 라티그를 만난 이후 꾸준히 공부해 지금은 유창하게 영어를 구사한다.

 

당시 박씨는 미국 드라마인 ‘프렌즈’의 전회를 20번씩 반복해 보는 일도 있었다고 한다. 하루에 9시간 씩 영어를 공부했다. 케이시는 박연미씨 외에도 117명의 탈북자에게 영어를 가르치고 있는데, 박씨는 그 중에서도 가장 성실한 학생이었다고 한다. 박씨는 이후 미국과 코스타리카로 자원 봉사활동도 다녀왔다.

 

박씨는 11월에는 미국으로 떠날 예정이다. 그곳에서 메사추세츠 스미스 칼리지와 하버드 대학교, 조지타운 대학교에서 각각 북한의 실상을 전하는 강연을 할 예정이다.

조선일보 김아사 프리미엄뉴스부 기자 

 

■ 2015-02-03 탈북 박연미 씨, 北동영상 반박 인터뷰

최근 북한 우리 민족끼리가 탈북민 신동혁 씨(33)에 이어 박연미 (21)씨도 가짜라고 주장했다. 국제무대에서 북한인권을 알리는데 적극 기여했던 신동혁 씨같은 경우 14호 관리소에서 18호 관리소 출신으로 증언을 번복한 점이 가장 큰 문제가 되었다

 

완전통제 구역에서 탈출한 수용소 출신으로서 근본적 오류를 범한 셈이다. 북한은 이번에도 박연미 씨를 “가짜”로 만들기 위해 신동혁 씨와 똑같은 수법으로 가족 친인척들을 동원하면서까지 동영상을 만들어 공개했다. 

 

박연미 씨는 "일부 언론들에서는 의혹을 제기하는데 그 기사들에는 아주 무책임하게도 북한의 주장만 있고 나의 해명은 없다."는 말로 입을 열었다. 뉴포커스가 현재 뉴욕에서 활동 중인 박연미 씨를 직접 만나 인터뷰를 했다.  

 

 
 

문: 먼저 북한이 공개한 동영상을 보았나?

답: 보았다. 내가 북한을 떠날 때 13살이었는데 북한 정권이 그런 어린애한데 도대체 무슨 짓을 하는가 싶었다. 한편 그런 동영상에 친인척 얼굴들이 등장하니 어리둥절했다. 나를 친딸처럼 아껴주던 친인척들이었는데...북한은 정말 나쁜 것 같다.   

 

문: 일부 언론들에서 박연미 씨의 적극적 해명이 없어서 오히려 더 의심을 하는 것 같다. 왜 침묵하나?

답: 대응할 가치도 없다. 그리고 난 바쁘다. 거짓을 상대할 시간이 안 된다. 

 

문: 지금 북한 동영상에서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이 아버지 사망문제이다. 언론들도 그 점을 가장 주목한다. 박연미 씨는 그동안 아버지가 중국에 같이 나와서 사망했다고 했는데 북한 주장으로는 아버지가 북한에서 10년 전에 이미 사망했다면서 그것을 근거로 박연미 씨의 증언 전체를 거짓으로 매도한다. 

답: 북한은 독재정권이라면서도 참 멍청한 것 같다. 세계를 상대로 거짓말하면서도 왜 그런 치명적 실수를 했는지 이해가 안 된다. 나의 아버지는 2008년 탈북했고, 중국에서 찍은 가족사진도 있다.  중국에서 우리 가족이랑 함께 살았던 탈북자들도 남한에 10여명이나 와 있다. 중국에서 치료 받다가 사망했는데 현재 묘지도 중국에 있다. 

 

▲ (사진) = 박진식(박연미 아버지) 씨의 영정사진과 가족사진

 

북한은 나의 증언과 실체를 뒤집으려고 아버지 사망을 이용하려고 했는데 오히려 그 고약한 짓이 동영상 전체의 치명적 오류임을 증명해주었다. 이 말을 하고 보니 아버지가 죽어서도 나를 지켜주었구나, 하는 생각에 목이 메인다. 

 

문: 박연미 씨는 처음엔 아버지랑 같이 탈북했다고 했다. 그런데 훗날에는 아버지보다 먼저 탈북했다고 말을 바꾸었다. 한 외신 기자가 그 점을 문제삼는 기사를 쓰는데 빌미를 제공한 셈이다. 왜 아버지의 탈북시점에 대한 증언이 오락가락했나?

답: 처음에 아버지랑 같이 탈북했다고 말한 것은...(울먹이며) 어머니와 내가 같이 탈북했을 때 중국 브로커가 시집가지 않으면 어머니와 나를 북한에 다시 돌려보낸다고 협박했다. 탈북이자 인신매매여서 그 점을 감추고 싶어,(갑자기 울음을 터뜨렸다.) 여자들끼리 탈북했다고 하면 어머니를 이상하게 볼까봐 아버지랑 같이 탈북했다고 말했다...(울음을 그친 뒤)그러나 외신 인터뷰가 많아지면서 솔직해야져야 겠다는 생각에 우리가 먼저 탈북하고 아버지가 뒤따라 강을 넘었다고 정정했다. 

 

문: 북한 동영상에서는 박연미 씨의 집 앞이 압록강이어서 강만 넘으면 그만인데 산을 3개 넘었다며 그 증언 자체가 거짓말이라고 했다. 산을 넘었나? 강을 넘었나?

답: 목숨을 걸어야 하는 탈북이다. 집에서 편하게 걸어나와 탈북하는 사람들이 어디 있나? 그리고 혜산보다 그 위 쪽으로 올라가야 경비가 덜하고 강폭도 좁다. 도로를 따라가면 경비대가 있어서 그 사람들을 피해야 했다. 별 수 없이 꽃동지 산을 넘어 까막골 아래에 있는 주체 바위 쪽에서 내려가 언 강을 건너 탈북해야 했다. 그때는 밤인데다 어린 나이에 국경을 넘는다는 공포로 나에겐 엄청 큰 산을 몇 개 넘는 것처럼 인식됐다. 북한 동영상에서 그런 것까지 트집잡는 것을 보니 앞으로는 신중하게 증언해야 하겠다는 생각이 든다.

 

문: 북한 동영상에서는 탈북자들의 증언을 빌어 혜산 경기장에서는 공개총살을 한 적이 없다고 했다. 

답: 공개총살을 본 것은 여러 번인데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친구 엄마가 죽는 것이었다. 그때 내 나이가 11살이었다,(미국 나이로 9살이었다.) 지금까지 그 증언중에서 고원이란 지명을 밝히지 않은 이유는 가족들의 신변을 걱정해서였고 그래서 공개 처형 장소를 정확히 밝히지 않고 북한 중부지역이라고만 해왔다. 단 한번도 혜산 경기장에서 공개처형을 봤다고 한 적은 없었고 혜산 연풍시장이나 시장 근처에서 공개 처형이 있었다고는 말했다. 고원에서 본 공개처형 증언에는 지금도 변함이 없다. 나와 가장 친한 친구 별명이 까나리(하도 말라서 까나리라 불렀다)었는데 그 친구의 집에 가면 항상 여러 나라의 영화들을 볼 수 있었다. 그러다 어느 날 “까나리 엄마”가 빌려준 비디오를 본 친구가 안전원에게 잡히게 되었고 그 친구가 취조를 받던 중 결국 "까나리 엄마"에게서 DVD를 얻었다는 것을 자백했다. 그 집에선 헐리우드 영화 외에도 포르노비디오, 남한 드라마들이 가득 나왔다. 어린 내 나이에 포르노비디오 이야기를 할 수 없었다. 미국인들이 강연 대상이어서 가볍게 헐리우드라고 했던 것이다.   

 

문: 북한은 박연미 씨의 증언에서 강에 시체들이 떠내려가는 것을 보았다고 말한 점을 외국인을 내세워 부정했다. 그 외국인은 강에는 시체가 아니라 아이들이 뛰어놀고 행복한 모습 뿐이라고 했다. 

답: 외국인에게 보여주는 북한의 모습에 그런 처참한 장면들이 있을리 없다. 그건 아마 많은 사람들이 더 잘 알 것이다. 내가 구태어 해명할 일은 아니라고 본다. 

 

문: 마지막으로 더 할 말이 없나?

답: 2009년 12월 엄마가 중국에 가서 아버지 유골을 가져오려고 했다. 그런데 상담사한테 물어봤더니 아버지가 한국 국적이 없기 때문에 중국 공안에서 문제 삼을 것이다면서 만류했다. 일이 터졌으니 이제 유골을 가져오려고 한다. 필요하다면 아버지가 묻힌 장소를 외신 기자들과 함께 가려고 한다. 중국에 있을 때 아버지가 한동안 치료 받았던 중국 병원에 가서 진료기록과 의사들도 만나려고 한다. 

 

북한은 남포에서 아버지가 사망했다고 했는데 그 완전한 날조를 아버지 유골로 증명하려고 한다. DNA조사도 신청할 것이다. 끝으로 한국 언론들이 섭섭하다. 어떻게 북한 주장을 그대로 기사화 할 수 있나? 북한이 그렇게 진실한 정권이나? 왜 북한 편에서 나에게 의혹을 던지나? 현재 내 에이전트와 소속사에서 법적 고소를 위해 북한 입장에서 기사를 쓰는 언론사들을 체크 중이라는 말을 들었다. 

 

 

북한은 내가 영어를 좀 한다고 해서 미국 CIA에서 만들어 조종하는 로봇인형이라고 했는데 나는 지금도 북한 혜산의 소녀이다. 북한 주장대로 인권이라는 말 자체가 필요없는 그런 무릉도원이라면 도대체 뭐가 그렇게 불안해서 이렇게 잔인한 수법으로 나의 가족들에게까지 뼈아픈 고통을 준단 말이가. 펭귄과 책을 쓰고 있는 동안 정말 별의 별 협박을 다 받아왔다. 솔직히 가끔은 무섭기도 했다. 하지만 그 어떤 일이 있어도 이 책은 출판 될 것이고 세상에서 가장 어두운 곳, 그 곳에서 벌어지는 북한정권의 만행을 고발할 것이다.      

신준식 뉴포커스 기자

 

■ 2016-03-19 탈북소녀 ‘생존투쟁’ 세계인 가슴 적시다

열일곱 살 때 압록강을 건넜다. 갖은 고난을 겪으면서 일곱 개의 이름을 가졌다. 10년 넘는 시간을 바쳐 가족을 구해냈다. 가녀린 여인의 파란 많은 서바이벌 스토리에 청중과 독자는 만감이 가슴에 사무쳤다.

 

여기, 세계가 주목한 대한민국 청년이 있다. 이현서(35). 2013년 2월 28일 미국 캘리포니아 주 롱비치에서 열린 TED 강연에 연사로 나서면서 샛별로 떴다.

 

한국보다 서구에서 더 유명하다. 2015년 7월에는 ‘The Girl with Seven Names(일곱 개의 이름을 가진 소녀)’라는 제목의 영문 저서를 냈다.

 

TED는 세계 각지의 전문가와 실천가가 아이디어를 나누는 지식의 향연. TED의 슬로건은 ‘Ideas Worth Spreading’이다. ‘퍼뜨릴 만한 가치가 있는 아이디어’를 세상에 알리는 게 목표.

  

데이비드 캐머런 영국 총리 같은 정상급 지도자를 비롯해 영화감독 제임스 캐머런, 요리사 제이미 올리버 등 다종다양한 실천가와 전문가가 TED 연단에 올랐다.

 

TED 강연을 현장에서 들으려면 입장료 4400달러(520만 원)를 내야 한다. 1000명 남짓한 인원만 입장할 수 있다.

 

‘퍼뜨릴 만한 가치가 있는 아이디어’를 널리 퍼뜨리는 게 목표인 만큼 홈페이지(www.ted.com)에 강연 동영상을 올린다.

 

누적 시청 인원이 10억 명을 넘었다. 이현서의 강의는 700만 명이 봤다. 꾸미지 않은 진실이 세계인의 심금을 울렸다. 

 

▼ TED 강연을 통해 현서 씨를 알게 됐어요. 스피치가 인상 깊었습니다.

“와우~ 감사합니다. TED에 자주 들어가세요? TED가 뭔지 모르는 사람이 많아요. 영어 공부하는 대학생은 다 알죠.”

 

“막 떨려서, 심장이 쿵쿵쿵”

 

이현서는 탈북인이다. 1997년 압록강을 건넜다. 한국에는 2008년 입국했다. 동영상의 영어 액센트처럼 한국어 발음이 또박또박하다. 말하는 투가 씩씩하면서도 경쾌하다. 

 

▼ TED는 청년에게 꿈의 무대입니다. 어떻게 강연하게 됐나요.

 “사람들이 제일 궁금해하는 게 어떻게 저 같은 사람이 TED 무대에 올라갔냐는 거예요. 지원하거나 제안한다고 되는 게 아니라 주최 측에서 추천해야 하거든요.

 

운이 엄청 좋았던 게, TED 역사상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오디션을 열었어요. 2012년 핵안보정상회의 때 서울 인사동에서 닉 클레그 당시 영국 부총리를 만났습니다.

 

그분과 밥 먹는 게 TV에 나왔나 봐요. TED 측에서 뉴스를 보고 오디션 대상으로 추천했습니다. 연단에 오르기까지 1년이 걸렸어요. 1차, 2차, 3차 오디션.

 

첫 오디션은 서울 삼성동에서 청중 500명을 상대로 했습니다.”

 

▼ 예선인 셈이네요.

 “네. 예선 영상이 TED 웹사이트에 올라갔어요. 사람들이 동영상을 본 후 ‘추천’도 누르고, 이 사람 강연을 TED에서 듣고 싶은 이유를 적어냅니다.

 

최종 결과, 제가 1등을 했다고 해요. 놀랍죠? 강연을 잘해서가 아니라 콘텐츠 덕분인 것 같아요. 서울에 있는 외국인 지인들이 소셜미디어에서 ‘좋아요’를 누르면서 도와주기도 했고요.”

 

그는 직접 겪은 스토리를 날줄, 북한 인권 문제를 씨줄로 삼아 강연을 구성했다.

 

▼ TED 강연이 현서 씨 인생에 어떤 변화를 줬나요. 

“전환점!”

‘다른 우주’에서 온 여인

 ▼ 기립박수도 받았죠.

 “지금도 떨려요. 그렇게 큰 무대인지 몰랐어요. 못하겠더라고요. 머릿속이 하얘지고, 아무 생각 안 나는 거예요.

 

아, 진짜 세계적 망신을 다 당하겠구나, 막 떨려서, 심장이 쿵쿵쿵. 영어가 완벽하지 않아 스크립트를 통으로 외웠거든요. 용기를 냈어요.

 

아, 내가 이 자리에 나를 위해 서 있는 게 아니라 북한 사람들을 위해 대표로 서 있는 거라고 생각하고 마음을 다스렸죠.

 

 그런데 하나도 안 까먹고 그대로 다 뱉은 거예요. 반응이, 와…충격이었어요. 1000명 넘는 청중이 평범한 사람들이 아니거든요.

 

앨 고어 전 미국 부통령을 비롯해 엄청나게 유명한 사람들이 마구 안아 줬어요. 기립박수도 진짜 오래 받았습니다.

 

길거리에서 만난 사람들도 하나같이 칭찬해줘서 ‘Thank you’를 하도 많이 말했더니 입이 벌렸는지 닫혔는지 감각이 없어질 정도였어요.”  

 

이현서의 12분 강의는 청중에게 사무치는 감정을 느끼게 했다.

 

“페이스북을 통해 아프리카에서도 메시지가 왔습니다. 팔레스타인 가자지구에서도 ‘영상을 잘 봤다’는 반응이 왔고요. 깜짝 놀랐어요. 그곳은 엄청난 분쟁지역이잖아요.

 

중국에서도 응원 메시지가 많이 왔습니다. 가슴이 울렁울렁했어요. 중국인과 탈북자의 관계가 좀 그렇잖아요. 안 좋았던 기억이 많죠. 탈북자들이 상처를 입거든요,

 

중국에서. 중국인은 무조건 탈북자의 ‘안티’라고 생각했는데, 그들이 우리의 현실을 잘 몰라서 그랬던 것 같습니다.

 

뿌듯한 점은 TED를 통해 최초로 북한 인권 문제를 전 세계인에게 알렸다는 겁니다. 나쁜 점은 대인기피증 비슷한 게 생겼다는 것.

 

이상한 메시지를 받은 적이 있습니다. 사람을 잘 못 만나겠더라고요. 이 사람이 혹시 북한 스파이는 아닌지, 그런 게 좀 두려워서요.”

 

2015년 12월 10일 오준 유엔대사가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회의장에서 각국 대사와 방청객의 가슴을 적시는 연설을 했다.

 

10대에 북한을 탈출해 어머니와 동생을 구출하는 데 10년 넘는 시간을 바친 탈북 여성의 사무치는 사연을 소개했다. 오 대사는 연설에서 ‘The Girl with Seven Names’의 한 대목을 인용했다.  

 

‘북한을 떠나는 것은 그저 어떤 나라를 떠나는 것과는 다르다. 그것은 차라리 다른 우주로 떠나는 것과 같다. 즉 내가 얼마나 멀리 떠나느냐에 상관없이 나는 그 중력으로부터 진정 자유로울 수 없을 것이다.’

 

그는 “오준 대사와는 페이스북 친구”라면서 웃었다. 

 

▼ 아마존의 자회사인 굿리즈가 선정하는 ‘2015 굿리즈 초이스’ 수기와 자서전 부문에 후보로 올라 최종 3라운드까지 진출했더군요.

 “12월 2일 굿리즈 어워드 최종 결과가 나왔는데요. 아쉽게도 20개 후보작 중 4위에 올랐습니다. 1위와 4위 득표 차가 크지 않아 아쉽기는 해요.”  

 

“돌아오지 마”

 ▼ ‘The Girl with Seven Names’는 다른 탈북자가 낸 책들과는 성격이 다르던데요. 

 “지금껏 탈북자가 낸 책들은 대부분 익스트림(extreme)한 쪽이잖아요. 정치범 수용소 아니면 목숨을 건 탈출, 뭐 그런 식이죠. 말씀한 대로 제 책은 각도가 달라요. 북한에서는 출신성분이 중요한데, 저는 운이 좋았어요.

 

돌아가신 아빠 직업이 ○○이었거든요. 고생을 별로 안 하고 자랐습니다. 압록강을 건넌 것은 배가 고파서가 아니라 새로운 세계가 궁금해서였습니다. 중국의 친척집을 찾아간 것이었거든요.

 

중국에서 북한의 실체를 알게 되면서 충격을 받았죠. 책을 통해 ‘왜 우리가 세뇌를 당할 수밖에 없었는지’ 디테일하게 풀고자 했습니다.

 

북한이 독재국가라거나 핵무기를 개발하는 나라라는 건 세계인이 다 알아요. 책을 읽은 분이 ‘왜 저항하지 않고 노예처럼 사는지에 대해 답을 얻었다’고 하더군요.”

 

‘The Girl with Seven Names’는 가녀린 여인이 온몸으로 겪은 ‘서바이벌 스토리’다. 

 

“제가 체구는 작은데, 기가 좀 센 거 같아요. 생존능력이 강한 것 같아요. 오랫동안 가족과 생이별을 했습니다. 가족에 대한 끊임없는 사랑, 희생정신 같은 게 독자들에게 다가간 것 같아요.

 

중국에 가서 어머니와 동생을 탈출시킨 것은 가족의 목숨을 건 행동이었어요. 지금 생각해보면, 그것도 운이 좋았습니다.

 

동시대에 우리 가족 같은 삶을 산 이들은 찾기 어려울 겁니다. 스릴러가 한국말로는 뭐예요? 스릴러처럼 읽었다는 독자가 많아요. 픽션 같은 논픽션이라고나 할까요.”

 

1997년, 열일곱 살 겨울방학 때 압록강을 건넜다. 어머니는 집을 나간 딸과의 첫 통화에서 이렇게 말했다.

“돌아오지 마.”

 “압록강을 건너 중국의 친척집에서 한 달을 보냈습니다. 북한으로 돌아가려는 참에 어머니에게 전화를 했죠. 북한에서는 선거 전에 반드시 인구조사를 해요. 투표율이 무조건 100%여야 하거든요.

 

압록강을 건너자마자 인구조사가 있었나 봅니다. 강을 건너는 것을 누가 봤다고도 해요. 북한은 서울 같지 않고 동네가 굉장히 작아요. 이웃집에 무슨 일이 있는지 다 알죠. 소문이 쫙 퍼진 겁니다.

 

1997년만 해도 분위기가 지금과는 달랐어요. 강 건넌 게 알려지면 가족 모두 정치범 수용소나 감옥에 가는 걸로 알고 엄청 떨었던 거죠. 그래서 엄마가 실종신고를 했어요. 안 나타나는 게 가족이 상황을 모면하는 방법이었죠.” 

 

유엔 안보리 비공개 증언 

▼ 중국에서 곤경을 겪으면서 여러 개의 다른 이름을 갖게 된 사연이 궁금합니다.

 “탈북자가 중국에서 산다는 게 힘듭니다. 숨소리도 제대로 낼 수 없어요. 이름을 자주 바꾸게 된 이유는요, 누군가가 신고를 해 공안에 붙잡혔습니다. 중국 친구 중 하나였겠죠.

 

사복 입은 남자가 아우디를 끌고 찾아왔습니다. 중국이 참 부패한 나라여서 공안도 ‘급’이 되면 아우디 타고 다녀요. 웨이트리스로 일했는데, ‘너, ○○○지?’ 하는 겁니다. ‘맞다’고 했죠. 공안인 줄 어떻게 알았겠습니까.

 

이름을 부를 때 ‘아니다’라고 했으면 안 붙잡혔을 텐데요. 끌려가서 보니 탈북자가 많이 잡혀와 있더군요. 포대기에 싸인 채 테이블위에 놓인 신생아도 있었어요. 특별검열 기간이었죠.”    

 

그때도 운이 좋았다. 중국어를 잘한다는 이유로 석방된 것이다. 그가 붙잡힌 2000년 당시만 해도 중국은 전국의 호구가 전산으로 정리돼 연결되지 않았다.

 

한 자녀 정책 탓에 호구에 이름을 올리지 않은 여성도 적지 않았다. 공안이 언어 능력을 테스트했는데 그는 탈북자라고 믿기 어려울 만큼 중국어를 잘했다.

 

“중국엔 지금도 글을 못 쓰는 사람이 많아요. 중국 간 지 3년 됐을 때인데, 한자도 잘 쓰고 중국 신문도 읽었거든요. 풀려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갖지도 않았는데, 그 사람들이 잘못된 제보라고 얘기하는 겁니다.

 

말하는 것을 보니 아무리 봐도 북한 애가 아닌 거예요. 한국 대학생은 다른 나라 말을 공부할 목적, 여행갈 목적으로 배우잖아요. 저는 생존을 위해 배웠어요. 좀 슬픕니다. 한국 젊은이들과 동시대에 사는데, 생존투쟁을 해야 했으니까요.”

 

▲2015년 11월 30일 이현서 씨가 구해우 미래전략연구원장과 대화하고 있다. 김형우 기자

  

“막 무시하면서 외계인 취급”

▼ 사는 곳을 바꿀 때마다 이름이 바뀌었군요.

 “이름 여러 개를 갖고 살았어요. 웃지 못할 에피소드도 많아요. 회사 사람들은 A라는 이름으로 알았는데, 밖에 사람들은 B라는 이름으로 불렀습니다.

 

생일 파티에 갔는데, 양쪽에서 사람들이 왔습니다. 이 사람은 A로 부르고, 저 사람은 B로 부르고…. 사람들이 어느 게 진짜 이름이냐고 다그쳐 당황했죠.”

 

▼ 유엔 같은 국제기구나 NGO에서 북한 인권과 관련한 활동을 해보고 싶다고 했죠. 북한 인권 문제와 관련해 가장 중요한 문제가 뭐라고 봅니까.

 “북한인권법을 제정해야 해요. 제가 2014년 4월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에 참석했습니다. 유엔 주재 미국대사를 비롯해 15개 나라 대사들이 다 참석했거든요.

 

아, 아니다…러시아대사와 중국대사는 불참했어요. 북한에 대한 그쪽의 태도가 그렇잖아요. 북한대사는 문 뒤에 숨어서 엿들었고요. 안보리가 여태까지 북한의 핵이나 정치적 이슈만 다뤘습니다.

 

제가 참석한 날 처음으로 북한 인권 문제를 다뤘다고 해요. 대사들이 ‘역사적인 날’이라고 했습니다.

 

2014년 11월 북한인권결의안이 유엔에서 채택됐어요. 너무나도 감사한 일이죠. 북한 정권의 압박을 받은 지 70년이 됐습니다. 중국에서 탈북자가 인권 유린을 당하고요.

 

그런데도 북한의 참상이 세계에 온전하게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늦었지만 국제사회에서 북한 인권 이슈가 조명받는 것을 다행스럽게 생각해요.

 

문제는 아직도 국제사회에서 북한 인권 문제가 메인 이슈가 아니라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세계 각국을 돌며 강연하면서 호소하는 거예요. 참 민망한 게, 외국에서 거꾸로 물어봅니다.

 

‘왜 한국에서는 북한인권법이 통과가 안 되느냐’고요. 부끄러운 일입니다.” 

 

그는 “북한 인권 문제는 우리의 문제”라면서 “외국인들이 발 벗고 나서주는 것은 감사한데, 정작 한국에서는 관심이 적은 게 안타깝다”고 강조했다. 

 

▼ 유엔에서 북한 인권 실태를 고발한 탈북자 신동혁 씨의 증언과 그가 저서에서 밝힌 내용 중 일부가 거짓이라는 게 드러났습니다. 북한 인권 문제에 대한 탈북자들의 주장이 신뢰도가 떨어진다는 지적도 있고요. 

 “외국 기자들은 대놓고 물어봅니다. ‘과장하거나 이야기를 지어내는 문제가 있는데, 이현서 씨 이야기가 진짜라는 것을 어떻게 믿어야 하느냐’고.

 

신동혁 씨뿐 아니라 방송에 나가는 사람들 탓에 불거지는 문제가 예전부터 있었는데, 일부 사람들의 거짓말 때문에 북한에서 일어나는 실상이 사실이 아니라고 생각해선 안 됩니다.”

 

▼ 탈북자들이 북한 인권 개선에 기여하고 나아가 통일 과정과 통일 이후에 실질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하려면 대한민국 국민뿐 아니라 자신들이 함께 생활한 북한 주민들로부터도 공히 신뢰를 얻는 게 중요한 과제라고 봅니다.

 “우리 탈북자끼리도 모여서 무슨 이야기를 하냐면, 통일이 되면 누가 거짓말하고 누가 진실을 말했는지 다 들통나겠네, 이렇듯 좀 시니컬하게 이야기해요.

 

경력을 부풀린 사람도 엄청 많고, 거짓말한 사람이 신동혁 씨만이 아니에요. 북한에서 탈북자 증언의 거짓을 증명하는 비디오를 만들어 공개하잖아요.

 

꼭 드리고 싶은 말씀은, 사명감을 갖고 진실한 마음으로 북한 인권 개선을 위해 노력하는 탈북자가 더 많다는 점입니다.”

 

‘진짜 저렇게 사는 걸까?’

▼ 한국에서 탈북자로 살면서 가장 어려운 건 뭐였나요.

 “중국에 숨어살 때 한국에 대한 기대와 희망이 컸어요. 한국은 지구상에서 제일 못사는 가난한 나라라고 북한에서 교육받았거든요. 김일성이 일제로부터 북한을 되찾아준 것에 대한 (북한 주민들의) 감사가 장난이 아니었어요.

 

중국에 도착해 한국이 잘산다는 것을 알았죠. 중국인도 부러워하는 나라가 됐다는 게 솔직히 자랑스러웠어요. 한국에 오는 게 엄청난 꿈이었습니다. 가고 싶다고 갈 수 있는 곳도 아니었죠. 10년 넘는 긴 시간이 걸렸거든요.

 

그런데 두 팔 벌려 환호해줄 줄 알았는데, 인천공항에서 망명신청을 하는데, 그냥 막 무시하는 겁니다. 외계인 취급하더군요.

 

 ‘아. 이게 뭐지?’ 싶었습니다. 바라던 거와는 정반대였어요.

 

한국에서는 중국 교포라고 말해야 일자리를 구하기가 더 쉬워요. 저도 신분을 숨겼어요. 강원도에서 왔다고 했거든요.

 

중국에서도 신분을 숨겼는데, 한국에 와서도 똑같아야 하는 게 너무나 싫었습니다. 중국은 내 나라, 내 땅이 아니지만 한국은 다르잖아요.

 

상하이로 돌아가야겠다는 생각도 했습니다. 중국에서 받는 편견이 더 낫다고 생각했어요.

 

‘고향이 강원도’라고 하면 ‘강원도 어디예요?’ ‘학교는 어디 나왔어요?’라고 묻습니다. 거짓말이 꼬리를 무는 거죠. 지금은 ‘북한에서 왔어요’라고 곧바로 말합니다.

 

지금 와서 생각하면, 불평할 게 아닌 것 같아요. 우리가 너무 오랫동안 떨어져 살다보니 멀어진 것뿐입니다.”

 

그가 2010년 어머니와 함께 탈출시킨 남동생은 한국에 적응하지 못해 북한으로 돌아가고자 북중 국경지대까지 갔다고 한다. 누나의 설득으로 한국에 되돌아왔다. 남동생은 미국 대학에 합격해 출국을 앞뒀다.

 

“(동생이) 북한으로 넘어간다면서 국경에서 전화를 했습니다. 하늘이 무너지는 줄 알았어요. 한국 여권 가진 애가 북한에 가면, 그게 뭘 의미하는지 우리는 잘 알고 있었거든요.

 

두 나라에서 다 범죄자가 되는 거예요. 최선을 다해, 죽을힘 다해 설득했습니다. 그랬던 동생이 마음을 다잡고 미국 ○○대학으로 떠나요.

 

동생이 한국에 다시 돌아와 잘 적응했어요. 저를 잘 따라줬고요. 너무나 고맙죠. ○○대에 입학한다는 게 자랑스럽습니다.”

 

○○대는 미국의 명문 사립대다.

 

▼ 북한에 사는 친척을 걱정하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북한 인권 관련 활동 탓에 친척에게 해를 끼치면 안 되잖아요. 북한 당국이 이현서가 누구인지 못 알아내는 게 희망입니다. 어린 나이에 탈북한 터라 골칫덩어리 이현서가 어디 살던 누군인지 모를 겁니다.

 

엄마와 동생 얼굴은 책에서도 모자이크로 처리했어요. 북한의 친척이 해를 안 입게 하는 게 사명이고 의무라고 생각해요.

 

북한의 친척과 통화는 가끔 해요, 이모랑. 통일이 되는 날까지 건강하게 살아주면 좋겠어요. 언제쯤 우리 가족이 이산가족 상봉을 할까요.”

 

“한 가족이잖아요, 우리는”

 

▼ 21세기 한반도의 가장 중요한 과제는 통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남과 북의 청년이 통일의 주역이 되면 좋겠어요.

 북한 청년이 자유로운 삶을 갖는 것뿐만 아니라 대한민국 청년도 통일 선진국을 만드는 과정에서 많은 기회를 갖게 될 겁니다. 대한민국 청년에게, 북한 청년에게 해주고 싶은 이야기가 있습니까.

 

“외국 기자들은 하나같이 ‘한국 젊은 세대는 통일을 원하지 않는다’는 것을 바탕에 깔고 질문합니다. 슬프지만, 현실이죠. 솔직히 기분은 안 좋더라고요.

 

우리는 관심이 없고, 외부 세계는 관심을 갖는 통일은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북한에 있는 청년에게 당부할 말은 없습니다.

 

북한이 3대 세습 독재라느니 이런 말 하면 오히려 남쪽에 거부감만 더 생깁니다.

 

압록강을 갓 넘었을 때 중국의 한 친척이 ‘김정일, 김일성이 나쁜 사람’이라고 얘기하는데, 저는 그 친척이 미친 사람인 줄 알았어요. 세뇌당한 사람은 진실을 들어도 받아들이기가 굉장히 어렵습니다.

 

북한의 현실을 알려주는 것보다 한국 드라마 같은 것을 북한 사람이 많이 보게 하면 좋겠습니다. 예전에는 배고파서 도망쳤지만 지금은 다릅니다. 새로운 희망을 찾아서 북한을 떠나는 겁니다.

 

한국 드라마, 솔직히 아무 내용 없잖아요. 사랑 이야기, 눈물 짜내는 이야기인데, 북한 사람들은 그걸 보면서 ‘진짜 저렇게 사는 걸까’라고 의문을 갖게 됩니다.

 

드라마를 포함한 외부의 미디어를 북한에 보내는 게 엄청나게 중요해요. 그래서 미디어를 북한에 들여보내는 외국 단체들도 있습니다.”

 

▼ 대한민국 청년에게 해주고 싶은 말은.

 “강연 덕에 미국, 유럽을 돌아다닙니다. 그쪽과 비교하면 남한 청년도 안 됐다 싶습니다. 통일을 하면 경제에 악영향을 끼친다고 생각해 반대하는 거잖아요.

 

우리가 지구상에서 유일하게 갈라진 나라거든요. 통일을 하면 인구가 8000만 명입니다. 큰 나라가 되면 기회가 더 많아질 거예요. 왜 우리가 허리가 잘려 살아야 하나요.

 

한 가족이잖아요, 우리는 무조건 통일해야 해요. 그래야 이득 창출도 생깁니다. 북한 경제의 수준이 어느 정도 올라온 후 통일하자는 것은 잘못된 판단이라고 봐요.

 

중국이 지금도 지하자원을 빼갑니다. 중국 회사가 북한에 쫙 깔렸어요. 돈 좀 있는 북한 사람들은 북한이 중국 밑으로 가도 상관 없다고 대놓고 말합니다.

 

남북한이 통일해야지, 왜 중국 아래로 들어갑니까. 경제는 잘 모르지만 통일하면 더 부강한 나라가 될 거예요.”

 

그는 현재 ○○대 4학년이다. 늦깎이로 2011년 입학했다. 외국 활동 탓에 졸업이 늦춰졌다.

구해우 | 미래전략연구원 원장  송홍근 기자 | carrot@donga.com 출처 신동아 1월호

 

■ 탈북민들의 절규

■ 2012.06.07 백요셉 "수업시간에 '北서 왔다'고 하자 교수가 갑자기…"

 

지난 1일 임수경(44) 민주통합당 의원으로부터 '입 닥치고 살아, 이 변절자들'이란 폭언을 들은 탈북자 대학생 백요셉(28·사진)씨가 휴대폰을 끄고 잠적한 지 닷새 만에 본지 인터뷰에 응했다.

 

6일 서울 마포구의 한 사무실에서 본지 기자와 만난 백씨는 여러 말 대신 자신이 지난 6년간 탈북과정과 탈북 후 한국에서의 감회를 기록한 일기장 14권을 내밀었다. '나의 일생, 나의 하루(我的一生, 我的一天)'라는 제목이 붙어 있었다.

 

백씨는 2003년 2월 처음 두만강을 건너 탈북했다. 19살 때다. 3번의 북송, 베트남 등 10여개에 가까운 나라를 거쳤다. 지난 2005년 8월엔 가까스로 찾아가 만난 베트남 한국대사관 관계자로부터 "대한민국은 당신이 생각하는 것만큼 좋은 곳이 아니다. 돌아가라"는 말도 들었다. 백씨는 이후 2008년 10월 러시아에서 유엔난민신청을 통해 간신히 한국으로 들어왔다.

 

이날 백씨는 임 의원을 비롯해 자신이 한국에서 경험한 여러 종북론자들을 떠올리면서 "주사파와 종북주의자 비판을 색깔론이나 매카시즘으로 매도하는 이들에게, 당신들이 그렇게 찬양하는 북한에 가서 '수령님 빅엿'을 외칠 용기는 있는지 질문을 하고 싶다"고 했다.

 

백씨는 "탈북 후 학교에서 주사파를 본 적이 있느냐"는 질문에 "(한국외대) 입학하고 첫 수업시간이었다. 학생 22명이 수강했다. 한 남성 교수가 들어와 간단히 자기소개와 앞으로 수강 일정 등을 얘기했다"면서 "이 교수는 시작부터 자신이 얼마나 북한에 정통한 사람인지를 강조했다"고 말했다. 이어 "북한에 대한 정보를 얻는 루트는 4가지다. 조선중앙방송과 노동신문, 중국에 있는 조선족들, 탈북자, 한·미국에서 나오는 정보다"라고 말했다. 백씨는 자신이 손을 들고, "그럼 가장 확실한 것은 뭡니까?"라고 묻자, 그 교수는 "가장 확실한 건 노동신문, 가장 못 믿을 것이 탈북자"라고 말했다. 백씨는 "이 말을 들은 순간 피가 끓었다"며 "수업을 드롭(포기)할까 하다가 순간 나 자신이 비겁하게 느껴져 끝까지 해보기로 했다"고 전했다.

 

그러나 이 교수는 본지 통화에서 "전혀 그런 내용을 강의한 적이 없다"고 부인했다.

 

다음은 백씨와의 일문일답.

 

―수업을 받으면서 탈북자란 사실을 얘기했나.

“두 번째 수업시간에 발표하면서, ‘내 고향은 함경북도…’라고 말하는 순간 교수가 ‘그만! 너 누구야?’하고 외쳤다. 지난 1일 임수경 의원에게 들은 말과 똑같은 말이었다.”

 

―교수의 수업 내용은 어땠나.

“종북사상이 뚜렷했을 뿐더러 말도 거칠었다. ‘북한 정부는 괴물이다. 그건 인정해. 하지만 그렇게 만든 것은 남한과 미국이다’라고 말하는가 하면, 천안함과 연평도 사건을 예로 들면서는 ‘니들이 생각해봐. 자기네 앞바다에서 포탄 쏴대는데, 이런 시발X들 하고 쏜 거 아니야. 응당한 징벌이다’라고도 했다. 한 번은 ‘김일성이 총을 쥐고 만주에서 피를 흘리며 나라의 독립을 위해 싸웠는데, 이승만이는 미국으로 도망가서 카바레서 블루스나 추고 양키 기생들하고 춤이나 추면서 ‘마이 컨트리(My country) X됐다’하고 있었겠지?’ 라는 말을 했다. 여기저기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학생들이 그 교수를 ‘나꼼수’쯤으로 생각하는 듯했다. 나는 교수가 나를 향해 침을 뱉는 것 같았는데….”

 

―이런 사람을 만날 때마다 하고 싶은 얘기가 있나.

“한국에 살면서 한국 정부를 흔드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것을 이해할 수 없다. 그들은 정말 용감한 사람들인지 의심스럽다. 얼마 전 한 판사가 페이스북에 ‘각하 빅엿’을 올린 것처럼, 그들이 북한에 가서 ‘수령님 빅엿’을 한 번이라도 외칠 용기가 있을까.”

 

〈2009년 2월17일 일기에서, “남한은 지금 너무도 심하게 기울어져 가고 있다. 경제불황보다 더 위험한 것은 남한의 이념적 사상문화, 제도적 불황이다”고 적었다.〉

 

―임수경 의원 폭언사건과 관련해 음모론도 나온다.

“페이스북에 올라온 글을 봤다. 내가 이야기를 지어냈다는 얘기서부터, 정치적인 쇼라는 얘기까지 난무했다. 천안함 때도, 미국 9·11테러 때도 마찬가지 아니었나. 그런 사람들이 다수의 의견을 몰고 갈 수 없다고 본다. 치졸하게 없는 사실을 만들어서 정치에 악용하는 사람들에게 일일이 대응하고 싶지 않다.” 그는 이어 자신이 탈북과정에서 겪었던 한국 외교 당국에 대한 섭섭함도 토로했다.

 

―탈북하면서 가장 어려웠던 적은 언제인가.

“2005년 8월 걸어서 베트남 하노이까지 들어갔을 때다. 당시는 노무현 정부 때이고, 김정일과 정상회담이 성사된 시점이었다. 나는 이미 3번 북송당한 터라, 이번에도 걸리면 참형을 각오해야 했다. 간신히 성사된 한국 대사관 직원과의 만남에서 돌아온 말은 충격이었다. ‘대한민국은 당신이 생각하는 것만큼 좋은 나라 아닙니다. 환상을 갖지 마세요. 중국말 알면 중국에 가서 사시고, 아니면 북으로 돌아가세요. 탈북자들이 자꾸 찾아오면 우리가 곤란합니다.’ 그날 일을 일기에 적어 또렷이 기억한다.”

 

〈백씨의 2005년 7월 27일 일기에는 “한국 정부까지 우리를 배척하면 우리는 정말로 국제 고아가 되어버린다”고 적고 있었고, 8월 3일 일기에는, “이제는 하늘처럼 믿었던 베트남 주재 한국대사관에서도 우리를 배척한다. 하늘이 무너져 내리는 것 같다”고 적혀 있었다. 백씨는 당시 베트남 정부가 북한으로 가면 처형된다는 걸 알고, 나름 배려해 중국으로 추방했다고 전했다.〉

조선일보 

 

■ 2012.06.11 “北서 죽지 왜 왔냐…임수경이 따귀 때린셈”

“임수경 의원이 탈북자들에게 폭언을 했다는 소식을 듣고 나도 모르게 ‘악!’ 하고 소리를 질렀어요. 가시로 마구 찔린 것처럼 가슴이 너무 아팠어요. 지옥 같은 북한을 탈출한 것이 정말 변절자로 욕먹어야 하는 일인가요? 나는 정말 나쁜 사람일까요?”(탈북자 강용필 씨·가명·26)

 

탈북한 지 2년 이내의 10, 20대 60여 명이 다니는 서울 중구 남산 아래 있는 탈북 청소년 대안학교 ‘여명학교’는 최근 수업 진행이 어려울 정도의 침울한 분위기에 휩싸였다. 민주통합당 임수경 의원이 3일 “근본도 없는 탈북자 ××들, 변절자 ××들”이라고 폭언을 퍼부었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탈북한 지 얼마 안 되는 10, 20대 탈북자들은 큰 정신적 충격으로 괴로워하고 있다.

 

8일 동아일보 취재진이 이 학교에서 만난 학생들 상당수는 무거운 분위기 속에 의기소침한 모습이었다. 복도를 지나치던 학생들은 외부인과 시선을 맞추는 것조차 부담스러운 듯 기자의 눈을 피했다. 이 학교 조명숙 교감은 “자유를 찾은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을 정도로 밝았던 학교 분위기가 (임 의원의 발언 이후) 며칠 만에 완전히 달라졌다”며 “남한 사회에 적응해가던 학생들이 정체성에 혼란을 느끼면서 극도로 예민해져 있다”고 전했다. 그는 “임 의원의 폭언 사실이 보도된 직후인 4일 학생들이 등교하자마자 ‘선생님, 남한 사람들 모두가 탈북자를 변절자라고 생각하나요?’ ‘우리가 탈북한 게 잘못한 거예요?’라는 질문을 쏟아냈다”고 했다. 이어 “학생들이 학교에서 거의 말을 하지 않고 있고 지하철이나 버스에서는 북한 억양을 듣고 변절자라고 손가락질할까 봐 아예 말을 하지 않는다고 한다”며 “조금씩 마음을 열던 아이들이 주눅 들어 있는 걸 보니 마음이 정말 아프다”고 안타까워했다.

 

어렵게 입을 연 탈북 학생들은 임 의원에 대한 배신감에 울분을 터뜨렸다. 지난해 5월 탈북한 한나현(가명·23·여) 씨는 “진짜 내가 변절자인 것만 같다. 임 의원이 우리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어보고 싶다”는 말만 반복했다. 임 의원을 우상으로 여겨왔던 김은혜(가명·20·여) 씨가 받은 충격은 더 컸다. “北에서 죽지 뭐하러 왔냐고 따귀 때린 셈”

 

2년 전 탈북한 김 씨는 1989년 6월 평양에서 열린 세계청년학생축전에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전대협) 대표로 방북해 ‘통일의 꽃’으로 불렸던 임 의원 이야기를 전해 듣고 자라며 임 의원을 선망의 대상으로 여겼다고 한다. 김 씨는 “북한 정부에서나 할 법한 폭언을 한 사람이 임 의원이라는 사실을 믿을 수가 없다”고 했다.

 

지난해 1월 탈북한 김민우(가명·26) 씨 역시 “사람답게 살기 위해 목숨을 걸고 내려왔는데 변절자라고 하는 게 말이 되느냐”며 “임 의원은 탈북자들에게 ‘거기서 그냥 죽지 뭐 하러 내려왔느냐’고 다그친 것과 다를 바 없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조 교감도 “탈북자들이 신적인 존재로까지 생각했던 사람이 도리어 탈북자들에게 따귀를 때린 격”이라며 분개했다.

 

학교 측은 학생들이 받은 상처를 치유할 수 있는 사람은 임 의원뿐이라고 보고 그의 진심어린 사과를 기다리고 있다. 이 학교 이흥훈 교장은 “중요한 건 탈북자에게 ‘탈북이 나쁜 게 아니라 더 나은 선택이었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이라며 “임 의원이 진심으로 사과하고 상처받은 탈북자들을 끌어안아 줬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서동일 기자 dong@donga.com 손효주 기자 hjson@donga.com  

 

■ 2013.07.16 남편잃고 재탈북한 女性, 9년만의 복수

 "칼탕쳐('칼로 토막 낸다'는 북한 옛말) 죽여도 분이 풀리지 않을 겁니다."

세 번째 시도 만에 탈북에 성공한 A(여)씨는 검찰에서도 분을 삭이지 못했다. A씨는 "반드시 남한에 들어가 우리 가족을 산산조각 낸 '원수'를 찾아 복수할 생각만 하면서 살아왔다"고 말했다. A씨는 2004년 말 남편과 생후 7개월 된 아들을 탈북 과정에서 잃었다. 그것도 같은 탈북자에게 속아서….

 

◇탈북자가 다른 탈북자 유인해 북송까지

채모(48)씨는 지난 2001년 북한에서 보위부 공작원으로 선발돼 중국 국경지대에서 탈북자 색출 임무를 맡았다.

 

채씨는 공작원 신분으로 돈벌이를 위해 탈북 안내 브로커 역할도 했고 북한 내 골동품을 반출해 중국 사람들에게 파는 밀무역을 하기도 했다. 이 사실이 발각될 위기에 처하자 채씨는 지난 2003년 7월 중국 상하이(上海)의 한국 총영사관을 통해 국내에 들어왔다.

 

사건 일지 지도

 

채씨는 2004년 12월 북한에 남아 있던 가족의 안전을 확인하려고 탈북 전 알고 지내던 함북도 보위부 간부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 직후 채씨는 북한에 들어가 이 간부에게서 "중국 내 탈북자들을 납북시켜라"는 지령을 받았다. 이틀 뒤 채씨는 중국 쪽 두만강 접경 지역인 중국 투먼(圖們)에서 탈북 군인 2명과 A씨 일가족 3명을 만나 "몽골을 통해 서울로 보내주겠다"고 속여 인근에 대기 중이던 보위부 공작원 4명에게 넘겼다.

 

채씨는 2005년 6월 이 과정을 알게 된 중국 공안의 조사를 받고 한국으로 추방됐다. 하지만 국내 수사 기관은 채씨의 구체적 행적에 대한 명확한 증거가 없어 이때부터 특별관리만 해왔다. 채씨는 지난 2010년 북한에 있던 부인과 자녀 2명을 국내로 데려와 수도권에서 함께 살기 시작했다. 채씨는 일용직 노동자로 생활했고 자녀들은 현재 대학교와 고등학교에 재학 중이다.

 

◇납북된 탈북자 중 3명 사형

그러는 사이 채씨의 협조로 납북된 탈북 군인과 A씨의 남편 등 총 3명은 정치범수용소에서 사형을 당했다. A씨는 "어린 아들은 모르는 가족에게 입양돼 행방을 알 수 없다"고 진술했다. A씨 자신은 징역 6년을 선고받고 교화소에 들어갔다. 온 가족이 파탄 난 A씨는 '차라리 죽자'는 마음에 20일 단식을 하기도 하고, 자살을 시도하기도 했지만 결국 실패했다.

 

만기 출소한 A씨는 작년 2월 다시 한 번 탈북을 시도했다가 붙잡혀 함경북도 온성군의 집결소에 다시 수용됐다. 이곳에서 A씨는 뇌물로 3000위안(한화 약 55만원)을 주고 풀려났다. A씨는 올해 3월 세 번째 탈북에 성공해 라오스와 태국을 거쳐 한국에 도착하자마자 모든 사실을 수사 기관에 털어놨고 당국은 보강 수사를 거쳐 6월 21일 채씨를 구속했다. 채씨는 당국에 붙잡히자마자 범행을 순순히 인정했다고 한다.

 

채씨는 "항상 그 사건이 마음에 걸렸고 A씨 가족과 군인들에게 너무 미안했다"며 "죗값을 달게 받겠다"고 진술했다는 것. 검찰 관계자는 "채씨가 뒤늦게 참회를 했지만 그의 협조가 가져온 결과가 너무 끔찍해 안타깝다"고 말했다.

조선일보

 

■ 2014.11.06  탈북민의 눈물, 탈북민의 소망

탈북민을 처음 만난 후 필자는 며칠 동안 잠을 이루지 못했다. 탈북하다 남편은 총 맞아 죽었고 큰딸은 잡혀 북한으로 돌아갔다는 이야기를 담담히 말한 후 고개를 숙이고 만 탈북 여성의 눈물을 본 날이었다.

 

얼마 후 하나원에서 연구 조사를 하다 만난 탈북민은 남한에 먼저 정착한 딸에게 전화로 “사랑해”라고 말하며 미소 지었다. 곧 만날 그리운 딸과의 해후, 자유에 대한 기대와 함께 앞으로 먹고살 것에 대한 염려가 섞여서인지 그의 목소리는 사뭇 떨렸다.  

 

사선을 넘어 부푼 희망과 함께 왔지만 탈북민의 남한에서의 생활은 쉽지 않다. 2013년 남북하나재단의 보고서에 따르면 탈북민의 실업률은 9.7%로 남한 주민의 3.5배에 달한다. 탈북민의 고용률은 51.4%인데 이는 근로 가능한 연령대 중 절반 정도가 직장이 없음을 의미한다. 임금근로자로 취업한 탈북민의 가구당 월평균 소득은 141만원으로 남한 주민의 절반 이하에 불과하다. 그 결과 탈북민의 76%가 자신을 남한 사회에서 하층 혹은 중하층으로 인식하고 있다.

 

 

  탈북민의 남한 사회 적응이 어려운 이유는 남한의 노동시장 구조와 복지제도, 그리고 남북한의 생산성 차이 때문이다. 현재 중국 근로자의 월평균 임금이 700달러 정도인 것을 고려하면 탈북민의 생산성에 부합하는 적정 임금은 그보다 낮을 것이다. 그런데 돈으로 지급되는 2인과 4인 가족의 기초수급비는 각각 83만원과 132만원이다. 부양가족만 있으면 탈북민은 일하지 않고 기초수급을 받는 것이 유리한 현실이다.

 

더욱이 남한의 비정규직 근로자의 월평균 임금은 145만원으로 고용주는 이 인건비를 지불한다면 탈북민에 비해 생산성이 더 높은 남한 출신 지원자를 고용하려 할 것이다. 그 결과 전체 탈북민의 절반 가까이가 기초수급자다. 우려스러운 것은 경제활동 참가율에서 남한 주민과 가장 큰 격차를 보이는 연령대가 한참 일해야 할 30~40대라는 사실이다. 이들이 노동시장에 참여하지 못하면 장기간의 복지 비용이 발생할 수밖에 없다.

 

탈북민의 남한 사회 적응을 어렵게 만드는 또 다른 중요한 장애 요인은 탈북민이 남한의 사회규범과 시장경제를 잘 이해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필자와 서울대 이석배·최승주, 서강대 이정민 교수의 공동 연구 결과에 따르면 남한 대학에 재학 중인 탈북 학생은 남한 출신 대학생에 비해 경쟁과 생산수단의 사유를 지지하는 정도가 각각 26%, 18% 낮다. 남한에 온 지 평균 5년이 지났고 남한 대학에 재학 중인 탈북민도 남한 출신 학생들과 비교하면 의식구조에서 여전히 큰 차이를 보이는 것이다. 또한 탈북민 고용 기업에 따르면 탈북민은 임금을 차등적으로 지급받는 것을 매우 싫어한다.  

 

탈북민이 현재의 2만7000명 수준에서 크게 증가하지 않는다면 이들이 노동시장에 참여하지 않고 계속 복지 혜택을 받아도 남한의 경제력으로 부양 가능하다. 그러나 탈북민이 수십만 명으로 늘어날 경우에는 수조원의 복지 비용이 발생하게 된다. 더욱이 갑작스럽게 통일이 되고 한국의 복지제도가 북한 지역에 적용된다면 그 비용은 천문학적이다.  

 

통일대박의 가장 약한 고리는 북한 주민의 시장경제 적응 문제다. 통일대박론은 남한의 자본과 기술에 북한의 노동력이 결합된 성장 모델에 기초한다. 그러나 북한 주민 다수가 일하지 못한다면 통일대박도 작동할 수 없다. 오히려 통일재난이 발생할 것이다. 따라서 북한 주민이 시장경제에 신속히 적응하도록 자극하고 도와주는 것은 중요한 정책적 과제다.  

 

이런 면에서 탈북민은 신이 우리 사회에 보내 주신 선물이다. 독일과 같은 경제력이 없는 우리에게 통일을 미리 준비, 연습하도록 허락하신 기회다. 그러나 지금까지도 우리는 이 기회를 낭비하고 있다. 매우 아쉽고 안타까운 일이다. 심각한 문제는 탈북민의 생산성을 획기적으로 제고할 수 있는 방안을 아직 모를 뿐 아니라 제대로 된 연구도 없다는 것이다. 학자를 자판기로 여기듯 번갯불에 콩 볶는 속도로 결과를 내라고 요구하는 정부 용역으로는 창의적인 연구 성과가 나오기 힘들다. 통일대박의 혜택을 가장 크게 누릴 기업들은 무관심이다. 그러나 어떻게 연구 없이 아프리카의 HIV 감염률을 60~70% 줄였던 콘돔 사용처럼 효과적인 탈북민 적응 정책이 나올 수 있을까.  

 

이 문제에 대한 해결 없이 우리는 남한 사회 적응을 힘겨워하는 탈북민의 눈물을 어떻게 닦아 줄 수 있을까. 과연 북한 주민이 남한과의 통일을 소망하도록 만들 수 있을까. 우리는 한국의 노동시장과 복지제도를 통일친화적으로 개혁할 수 있을까. 여전히 잠 못 들게 하는 질문들이다.

중앙일보 김병연 서울대 경제학부

 

■ 2014.12.03 "탈북자들 앞에서 북한을 함부로 말하지 말라"

http://www.youtube.com/watch?v=QxOkH1Mj8DY&feature=player_detailpage

- 탈북민 이순실의 기자화견

 

탈북여성들이 최근 ‘종북 토크쇼’ 논란을 빚고 있는 신은미, 황선 씨에게 맞짱 토론을 하자고 제안했다. 3일 서울 프레스센터 기자회견장에서 이순실 씨를 비롯한 김정아, 송지영씨 등 탈북 여성 3인은 기자회견을 열며 이들의 발언을 반박했다.

 

북한군 간호장교 출신으로 8번 북송과 9번의 시도 끝에 탈북에 성공한 이순실씨가 준비한 원고를 읽어 내려가며, 인신매매로 딸을 팔아야 했던 피맺힌 엄마의 절규를 아는 지를 신은미, 황선씨에게 물었다. 이씨는 북한에서 살면서, 그리고 북한을 탈출하면서 겪은 북한의 실상을 말하며 복받쳐오르는 분노를 감추지 못했다. 다음은 이 씨의 회견문.

 

“잠깐 놀다온 평양을 북한이라고 말하면서 종북 콘서트를 열고 이 사회를 혼란에 빠뜨리게 하는 신은미, 황선, 임수경씨에게 할 말이 있어서 나왔다. 나는 꽃제비와 거지엄마로 10년을 살아온 탈북자 이순실이다. 나는 8번의 북송과 9번째 탈북으로 산전수전을 다 겪었다.

 

황선씨가 평양에서 애기를 출산했다고 들었고, 평양에서 북한 인민들의 생활 모습을 봤고, 꽃제비가 없는 북한을 보고 왔다는 신은미씨 이야기를 들었다. 김정은 정권은 자신들이 의도했던 것을 이 사람들을 통해서 성공한 것이다. 그 독재 국가는 자신들의 체제를 성공하기 위해서 평양을 북한이라고 보여준 것이다. 당신들은 북한 김정은의 사회주의 위대성 선전을 잘 해준 거다.

 

내 체험 한 가지만 이야기하겠다. 북한에서 알던 한 일본 재일 동포가 마약과 술에 젖어서 알거지가 되었는데, 일본에서 그 사람을 찾아온다고 하니까 그 동네에서 제일 깨끗하고 잘사는 집을 통째로 빌려주며 밥 짓고 마당을 쓸게 하면서 쇼를 한 것을 보았다. 일본에서 온 사람들이 돌아가자 다시 그들은 거지 집으로 돌아갔는데, 당신들이 보고 온 북한은 이 거지네 집과 다르지 않는 똑같은 현실이다. 북한의 일반인들은 얼마나 힘들고 배고픈지 정말 모르는 것이냐 모르는 척 하는 것이냐? 세계적으로 굶어죽는 사회주의 공산국가가 어디에 있는지 당신들도 알 것이다.

 

황선씨는 북한에서 환영을 받으면서 아기를 출산했지만, 북에서 태어난 나도 역전 보일러실에서 아기를 낳았다. 나는 내 딸이 두 살이 될 때까지 따뜻한 집에서 한번 재워보지 못했고, 뽀송뽀송하게 마른 기저귀 한 번 채워본 적이 없었다. 그런 아이를 남의 나라에 인신매매로 팔리는 아픔을 가진 엄마로서 당신들에게 꼭 하고 싶은 말이 있다. 배고파 우는 아기에게 소똥의 여물콩을 골라서 (아기) 입에 넣어줘야 하는 아픔을 당신들은 겪어 보았는가 라고. 따뜻한 이불 대신 배낭에 아기를 짊어지고 비닐을 쓰고 살아 봤냐고. 백화점 두 살짜리 아기 옷을 가슴에 앉고 피눈물을 흘려 봤냐고. 지옥 같은 탈북자들의 고통을 진실로 안다면 당신들이 놀다온 평양을 북한의 전부처럼 말할 수 없을 것이다.

 

탈북자들이 다시 북한으로 가고 싶다고? 난 남편에게 늘 유언장 같은 말을 한다. ‘여보, 언제든지 내가 죽으면 화장해서 잿가루를 뿌리지 말고 나무 밑에 통째로 묻어 달라’고. 왜냐고? 그 재가루가 바람에 떠돌다가 행여 북한으로 날아갈까 봐. 나는 죽어서도 가기 싫은 곳이 북한이고 꿈에서도 가기 싫은 곳이 북한이다. 신은미, 황선, 임수경씨! 배고픔의 고통으로 죽을 만큼 힘들어 보지 않았으면 탈북자들도 사는 이 사회에서 함부로 북한을 말하지 말라. 북한에서 태어난 죄 밖에 없는 불쌍한 탈북자들과 자유를 찾아오다 죽은 영혼들과 굶어죽은 3백만 영혼들 앞에서 함부로 북한을 말하지 마라. (울먹이며)진짜로 북한을 말하지 말라.

 

배고파 울며 굶어 죽어가는 북한, 배불러 죽겠다며 다이어트 하는 남한 사회 나는 배불러 하루 세끼 먹는 것만으로도 인간이 누릴 수 있는 가장 큰 행복이라며 감사의 기도를 한다. 우리가 얼마나 큰 고통을 받으며 살았기에 이런 말을 하는 지 똑똑히 들으라. 이 나라가 당신들의 발언으로 북한 체제로 물들을 까 봐 나는 심히 걱정이 된다.

 

내가 살다온 북한이니 당당히 말할 수 있다. 당신들이 그곳이 그리 좋으면 짐 싸들고 평양에 가서 두 달만 살다 와 보라. 그러면 꽃제비 엄마의 절절한 소리들을 곳곳에서 들을 수 있을 것이다. 나는 당신들과 맞장 콘서트를 하고 싶다. 서울 시청 앞에서 맞장 콘서트를 제안 한다”

조인원 멀티미디어 영상부 차장

 

■ 2014.12.04 신씨('종북 콘서트' 재미 교포 신은미)가 안다는 그 북한은, 우리가 演技(연기)했던 북한"

[탈북여성 5人 "신은미·황선 끝장토론하자"] "재미 교포 관광객 오면 한달간 수업 중단하고 연습

'평양 원정 출산' 황선씨는 최상류층 이용 평양산원… 난 보일러실서 몸 풀었다"

 

5명의 탈북 여성이 '종북(從北)콘서트' 논란을 빚은 신은미(53)· 황선(40)씨를 상대로 "끝장토론을 하자"고 공개적으로 요청했다. 이들은 "신씨·황씨가 그렇게 북한에 대해서 잘 안다니 북한에서 직접 살다가 목숨을 걸고 탈출한 우리와 이야기를 나눠보는 것이 어떻겠느냐"며 "북한의 인권·정치·경제·문화 등 아무 주제라도 상관없으니 어떤 것이 진실한 북한의 모습인지 가려보자"고 말했다.

 

2002~2007년 사이 탈북한 이순실(46) 김정아(39) 송지영(36) 한선화(29) 김진옥(29)씨는 3일 서울 중구 프레스센터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북한에서 놀다 온 그대들(신은미·황선)은 그곳이 그리 좋으면 짐 싸들고 평양에 가서 2년만 살아보라. 그러면 이 꽃제비 엄마의 절규를 그곳에서 들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순실씨는 "신씨·황씨가 편한 시간과 장소를 맞추면 우리와 함께 합동 토크 콘서트를 열어 제대로 된 북한 이야기를 해보자"며 "신씨 페이스북에 이런 댓글을 달았지만 아무 반응이 없었는데 당장 오는 6일 서울시청 광장에서 만날 것을 제안한다"고 말했다.

 

탈북 여성 송지영(왼쪽)·이순실씨가 3일 오전 서울 중구 프레스센터에서 가진 기자회견에서 ‘종북 콘서트’ 논란을 일으킨 신은미·황선씨에게 끝장토론을 제안하고 있다. /오종찬 기자

 

평양 출신인 이씨는 1991년 군복을 벗은 뒤 끼닛거리를 찾아 길거리를 떠돌기 시작했다. 이씨는 "여기저기 떠돌다가 혜산역 보일러실에서 몸을 풀었다"며 "황선씨가 (북한 최상류층이 출산하는) 평양산원에서 딸을 낳았다고 하는데 북한에서 나고 자란 우리 아이는 태어나자마자 온몸에 숯검정이 묻었다"고 말했다. 이씨는 "소똥에서 여물 콩을 골라 입에 넣어줬던 그 아이도 행여 굶어 죽을까 봐… 중국 돈 5000원에 팔려나갔다"며 울었다.

 

2007년 탈북한 한선화씨는 "아버지가 외화벌이를 한 덕분에 부유층 자녀가 다니는 청진외국어중·고교에 다녔다"고 했다. 한씨는 "한 번은 재미 교포 관광객이 온다고 해서 650여명 전교생이 한 달 전부터 수업을 중단하고 건물 구석구석 횟가루를 발랐다"며 "나를 포함해 전교에서 얼굴 빛깔 좋은 30명을 낯선 교실에 한데 모았다"고 말했다. 학년이 제각각인 모인 학생들에게 선생님은 "재미 교포 앞에서는 친구처럼 굴라"고 했다고 한다.

 

교사는 선발된 학생들에게 "지금부터 너희 아버지 직업은 농부다" "아버지가 광산에서 일한다고 말하라"고 일렀다고 한다. 학생들은 아버지의 '새 직업'을 외우거나, "아버지 직업과 상관없이 이런 좋은 학교에 다닐 수가 있습니다" "저희는 배가 고프지 않고, 수령님의 은덕으로 잘살고 있습니다"며 대사를 연습했다. 한씨는 "재미 교포 아줌마 신씨가 바라본 북한은 우리가 연기(演技)했던 북한"이라며 "'북한을 제대로 알려주겠다'는 토크 콘서트를 벌이는 신씨를 볼 때마다 그날 학생들의 연기에 놀아난 재미 교포 관광객이 생각난다"고 말했다.

 

아버지가 청진에서 무역회사 사장을 했다는 김진옥씨는 '외국인 방문학교'를 다녔다. 관광객들을 맞도록 지정된 학교였다. 중국인 관광객 3명이 왔을 때 키가 작은 김씨의 친구는 "눈에 띄지 않게 구석에 처박혀 있으라"는 지시를 받았다고 한다. 김씨는 "혹시라도 말실수라도 하면 관광객이 돌아간 다음에 호되게 혼났다"며 "학생들은 신은미씨 같은 외국인 관광객을 싫어했다"고 말했다.

 

북한 여군 장교 출신인 김정아씨는 평안남도의 군(軍)병원에서 첫째를 낳았다. 여건이 낫다는 그 병원에서도 "산모 피 닦을 걸레가 없으니 천을 내라"고 했다. 산모 김씨가 자신의 옷 세 벌을 찢어서 피를 닦았다고 한다. 함경북도 청진 출생으로 2004년 탈북한 송지영씨는 "북한 주민들은 '서울 사람들은 먹을 게 너무 많아서 다이어트를 한다더라'고 수군거리기만 해도 정치범 수용소에 끌려간다"며 "그렇기 때문에 주민들은 신씨나 황씨 같은 외국 관광객 앞에서 김씨 일가를 찬양할 수밖에 없는 것"이라고 했다.

 

이들은 "지옥 같은 북한을 탈출한 우리 탈북자들의 고통을 천분의 일이라도 안다면 토크 콘서트에서 관광으로 다녀온 평양을 북한의 전부처럼 말할 수 있는가"라며 "북한에 잠시 들른 신은미·황선씨가 한 마디를 하면, 백 마디 반박으로 돌려주겠다"고 입을 모았다. 이들은 지난 4월부터 북한의 '진짜 모습'을 알리는 토크 콘서트를 하고 있다.

조선일보 김형원 기자

 

■ 2015.11.05 “‘헬조선’? 니들이 지옥을 알아?”라는 글을 쓴 이화여대생 인터뷰

 

  지난 9 21일 자유경제원 홈페이지에 글이 하나 올라왔다. “‘헬조선’? 니들이 지옥을 알아?”라는 글이었다. “시리아 난민, 북한 주민들이 진정한 지옥이니 그걸 경험해 보지 못한 너희는 헬조선이라고 잠꼬대나 투정을 부리지 마라”는 내용의 글이었다. 이화여대 인문학부 1학년에 다니는 김다혜라는 학생이 쓴 이 글은 이틀 만에 4만 건이 넘는 폭발적인 조회 수를 기록했다.
 
 
이 글을 ‘오늘의 유머’ 등 여러 인터넷 사이트도 전재했다. 찬사와 비난이 엇갈렸다. 필자에 대한 신상 털기가 시작됐다. 논란이 심해지자 자유경제원은 필자의 요청에 따라 이 글을 내렸다. 기자는 인터넷에서 이 글에 대한 댓글을 보고 쓴웃음을 지었다.
 
 
“저 글 쓰신 분 부모님, 최소한 사회지도층 인사일 것임.” “글 수준을 떠나서 빚내서 학교 다니는 학생보다는 중산층 이상의 여유로움이 엿보이는 글이네요.
 
 
기자가 쓴웃음을 지은 이유는 간단했다. 글을 쓴 여학생은 사회지도층 인사의 딸도, 중산층 이상의 여유로운 삶을 사는 철부지 여대생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글을 쓴 여학생은 올해 34세의 탈북자(脫北者)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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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서울 이화여대 앞에서 김다혜씨를 만났다. 키가 150cm가 조금 넘을 듯한 단구(短軀)였지만, 야무지고 밝은 인상이었다.  

 
 
“시골에선 나물이라도 뜯어 먹지…”

김다혜씨의 고향은 강원도 원산. 2010년 여름에 중국으로 탈북, 미얀마-라오스-태국을 거쳐 1년 후 한국으로 들어왔다.
 
 
―탈북하기 전에는 무슨 일을 했나요.
 
2년제 전문학교에서 회계학을 전공한 후, 함흥시에 있는 상업관리소(주민들에게 생필품을 공급해 주는 국가기관)에서 9년간 근무했어요.
 
 
―부모님은 무슨 일을 했나요.
 
“아버지는 노동당원에, 공무원이었어요. 어머니는 가정주부였고….
 
 
―소위 ‘고난의 행군’ 때 청소년기를 보냈겠네요.
 
“그렇죠. 1992년경부터 조금씩 식량 사정이 나빠지기 시작했어요. 예전에는 안 그랬는데, 그때부터 어머니가 항상 쌀을 조금씩 덜어 모아두면서 먹을 거 걱정을 하곤 했어요. 그래도 그때까지는 보름에 한 번씩 배급을 해주었는데, 1994년 김일성이 죽은 후 배급제가 거의 무너졌어요. 1995년부터는 아사자(餓死者)가 나오기 시작했고….
 
 
―원산이면 그래도 북한에서는 손꼽히는 대도시인데, 그런 곳에서도 아사자가 나왔나요.
 
“오히려 시골에서는 산에 가서 나물이라도 뜯어 먹을 수 있지요. 대도시가 더 어려워요. 인심은 더 박하고…. 우리 집은 그래도 아버지가 당원이고 현직 공무원이어서 배급이 조금 나왔어요. 하지만 같은 반 친구들 가운데 절반 정도는 밥을 굶거나, 옷이나 신발이 없어서 학교에 나오지 못했어요. 배가 고프다고 길가에서 아무 풀이나 뜯어 먹다가 잘못해서 독초(毒草)를 먹고 풀독이 올라서 학교에 나오지 못하는 친구도 많았어요.
 
 
―주변에서도 굶어 죽은 사람이 나왔나요.
 
“너무 많았죠. 아침에 일어나면 ‘누구네 집에서 아무개가 죽었다’는 얘기가 거의 매일같이 들려왔어요. 거기에다 1995, 96년도에는 장티푸스와 파라티푸스가 돌아서 사람들이 엄청 많이 죽었어요. 자고 깨면 저쪽 골목에서 사람들 우는 소리가 들리는데, 이렇게 말하면 안 되지만, 기력이 없어서 그런지 짐승이 우는 소리 같았어요. 15, 16세 어린 나이에 그런 죽음들을 이해하기가 너무 힘들었지만, ‘이게 당연히 우리가 겪어야 되는 숙명인가 보다’라고 생각했죠. 지금도 북한은 흐린 날이나 컴컴한 밤중 같은 어두운 이미지로만 기억이 나요.
 
 
―부모님은 뭐라고 하던가요.
 
“어머니는 입버릇처럼 ‘빨리 전쟁이 났으면 좋겠다. 통일이 되든지, 누가 죽든지 간에 빨리 일이 났으면 좋겠다’고 했어요. 그래도 아버지는 당원이고 공무원이어서 그랬는지 ‘이게 다 미국놈들 탓이다. 몇 해 지나가면 고생이 끝나고 괜찮아질 거다’라고 달랬어요. 사실 북한에서는 누구든지 사회적으로나 가정적으로 일이 안 풀리면, ‘이게 다 미국놈 때문이지. 미국놈이 원쑤(원수)지’라고 해요.
 
 
―식량 사정이 나아진 것은 언제쯤부터였나요.
 
“북한 식량 사정이 좀 좋아졌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많은데, 전혀 그렇지 않아요. 정말 그건 실정을 모르는 얘기예요.
 
 
―적어도 무더기로 죽어나가는 상황은 끝나지 않았습니까.
 
“그건 그렇죠. 그런 의미에서는 2005년쯤부터 조금 나아지긴 했지요. 하지만 그건 국가가 무엇을 해주어서 상황이 나아진 게 아니에요. 10년 동안 굶어 죽을 사람들은 다 죽고, 살아남은 사람들이 ‘내가 바보처럼 이렇게 살면 안 되겠다. 땅을 파든지, 장사를 하든지, 내가 움직여서 살아야겠다’고 마음을 먹고 나서면서 그런 거예요. 그래도 굶어 죽는 아이들, 꽃제비들은 줄어들지 않았어요.
 
 
2000 6·15 남북 정상회담이 있었는데, 기억하세요.
 
“저는 그때 통일이 다 된 줄 알았어요. 김정일이 세계 모든 사람이 다 존경하는 지도자이기 때문에 남조선 대통령이 머리를 숙이고 들어온 것이라고 가르쳤죠.    


 
“救護물자, 간부들 손으로 들어가”

지난 2007년 8월 20일 인천항에서 열린 북한 수해돕기 구호물품 출항식. 하지만 북한으로 간 구호물자들은 간부들의 손으로 들어가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남한이나 국제사회에서 식량 등을 지원해 준 것을 보거나, 얘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까.
 
“상업관리소에서 일하면서 유니세프(UNICEF) 등 유엔기구에서 보내오는 물자들은 많이 보았어요. 하지만 대한민국에서 보낸 물자는 전혀 못 봤어요. 대한민국에서 쌀이나 물자를 보내와도 그걸 담은 부대나 포장을 다 바꾸기 때문에 우리는 몰라요.
 
 
―그럼 유엔 등에서 보내오는 구호물자들이 상업관리소를 통해 인민들에게 분배가 되기는 하는 건가요.
 
“그렇게 들어온 물자들은 재난을 당한 주민들에게 공급해 줘야 하잖아요. 그런데 그게 재난 피해자들한테 돌아가지 않아요. 10개가 들어온다면 1개는 주민들에게 나눠주고, 나머지 9개는 간부들이 가져가요. 국정가격으로. 시장(장마당)에서 100원쯤 하는데 국정가격이 1원이라면 상업관리소에 1원을 지불하고 물건을 가져가는 거죠. 좋은 물건은 다 이런 식으로 간부들 손으로 들어가고, 주민들에게는 돌아가지 않아요.
 
 
김다혜씨는 2004년 독일에서 유니세프를 통해 쇠고기를 보내왔을 때의 일을 얘기해 주었다.
 
 
“유엔에서 분배상황을 모니터링하러 나왔는데, 저희(당국)는 주민들에게 ‘1인당 500g씩 쇠고기 공급을 하니, 몇 월 며칠 9시부터 상업관리소 앞에 나와 줄을 서서 기다리라’고 공지했어요. 그렇게 물자를 분배하는 모습을 하루만 보여줘요. 그날 못 받은 사람은 못 받는 거죠. 실제로 주민들에게 배급이 되었는지를 모니터링하기 위해 북한 주민들의 집을 방문할 경우에 대비해서, 미리 몇몇 집을 지정해 놔요. 다른 사람들에게 500g씩 고기를 주었다면, 그들에게는 3kg을 줍니다. 그리고 끝나면, 다시 가져오라고 하죠. 정말 치사해요.   

 
 
“국정가격으로 사서 장마당에 내다 팔아”

 김다혜씨는 “월급만으로는 생활이 안 돼서 비리가 만연했다”고 말했다.
 
 
“한 부서의 책임자는 자기 부서 직원들을 먹여 살려야 해요. 우리 부기장(簿記長·회계과장)도 마찬가지였고요. 예를 들어 물건을 100개 가져다가 국정가격에 공급한 것으로 서류작업을 한 후, 장마당에 팔죠. 그렇게 해서 번 돈의 50%는 자기가 가져가고 나머지는 직원들에게 나누어줍니다. 스물한두 살 때 처음 그런 서류작업을 할 때에는 깜짝 놀랐는데, 나중에 보니 다들 그런 식으로 먹고살더군요.
 
 
―내게 김다혜씨를 소개해 준 분의 말을 들으니, 북한에서 단순히 장마당에서 물건 파는 수준을 넘는 ‘사업’을 했다고 하더군요.
 
“평남 온천군에 있는 광양만제염소(製鹽所)에서 소금을 사다가 양강도나 동해안의 대도시에 내다 파는 일을 했어요. 일제(日帝)시대에 만들어진 광양만제염소는 북한의 소금을 전부 공급하는 곳이에요. 그런데 북한은 교통이 불편해서 물자공급이 원활하지 못하다 보니, 내륙이나 동해안 지역에서는 쌀이나 소금 등의 가격이 서해안보다 훨씬 비싸요. 소금의 경우, 서해안 쪽보다 20배 정도 비싸죠.
 
 
제가 있던 상업관리소에서 물자를 빼돌려 팔아서 직원들이 먹고살았듯이, 제염소도 마찬가지예요. 국가에서 배급은 주지 않는데, 직원들을 부려서 소금을 생산해야 하니까, 공장지배인은 우리 같은 사람에게 몰래 소금을 팔아서 돈을 만드는 것이죠.    


 
소금장사 

  ―얼마나 남나요.
 
“예를 들어 1000달러를 투자했다면, 5000달러 정도 벌 수 있었습니다. 이것저것 다 제하고 나면 3000달러 정도 남았죠.
 
 
―구체적으로 어떻게 사업을 했습니까.
 
“저희 상업관리소에서 올해 주민들에게 공급해야 할 소금을 실어오기 위해 철도성에서 컨테이너를 10개 정도 배정을 받을 때, 철도성 사람에게 뇌물을 주고 컨테이너를 1~2개 더 배정받아요. 여기에 80t, 혹은 160t씩 소금을 실어 와서 파는 거죠.
 
 
―컨테이너 트럭을 임차하는 건가요.
 
“트럭이 아니라 철도 화차(貨車)에 싣는 컨테이너 박스를 사는(개념상으로는 빌리는 거지만, 김다혜씨는 ‘산다’고 표현-기자주) 거죠. 북한은 도로 인프라가 안 되어 있어서 그런 큰 짐은 트럭으로는 나르지 못해요. 철도를 이용해도 평안남도에서 강원도나 함남, 함북, 양강도 같은 데까지 오는 데는 주문한 때부터 한 달쯤 걸려요. 김장철이 시작되기 한 달 전쯤 일을 시작해서, 김장철에 소금을 내다 팔면 엄청난 이윤이 떨어져요.
 
 
―돈은 얼마나 들어갑니까.
 
“아까 1000달러 얘기한 것은 예를 그렇게 든 거고요. 컨테이너 박스 하나 사는 데 500달러, 소금 사는 데 800달러가 들어갔어요.
 
 
―인건비는 안 드나요.
 
“인건비는 별로 안 들어요. ‘쏘운반’(‘쏘아서 보내준다’는 뜻), 즉 제염소에서 역()까지 소금을 실어다 주는 운전사들, 역에서 소금을 화차에 싣거나 내리는 노동자들, 안전원들에게 줄 돈 같은 걸 합쳐서 200달러 정도 들어가요. 이들의 경우 대개 ‘고양이 담배’라고 하는 외제 담배를 몇 갑 주면 됐기 때문에 그리 큰돈이 들지는 않았어요. 하지만 2010년경부터는 이들에게도 달러를 집어주어야 했어요.
 
 
―컨테이너 박스나 소금을 사는 데 필요한 돈은 어떻게 마련했습니까. 적은 돈이 아닐 텐데….
 
“부모님께 얘기를 해서 거의 전 재산을 팔다시피 해서 돈을 마련했어요. 300달러 정도는 그렇게 마련하고, 모자라는 200달러는 친척들에게 긁어서 마련했죠. 북한도 사채업(私債業)이 꽤 발전해 있기는 하지만, 한 달에 이율이 20%나 돼요. 이자를 갚으면서 장사를 하면 남는 게 없어요. 적은 돈이라도 자기 돈으로 하든지, 친척들 돈을 빌려서 해야 해요. 친척들에게 빌린 돈은 조금만 얹어서 주면 되니까…. 일단 돈을 벌기 시작한 다음부터는 그 돈을 가지고 계속할 수 있었죠.
 
 
―단순히 장마당에서 장사하는 수준이 아닌데, 아무나 할 수 있는 사업은 아니겠군요.
 
“그렇죠. 본인이 어느 정도 힘이 있는 자리에 있거나, 철도성을 비롯해 곳곳에 네트워크가 있어야 하니까요.
 
 
―그런 사람들에게는 뇌물도 줘야 할 텐데….
 
“조금 높은 사람에게는 대개 50kg짜리 석청() 같은 토산품을 주면 됐고, 낮은 사람들에게는 ‘고양이 담배’면 됐어요.  

 
 
번 돈 모두 ‘무상몰수’ 당하고 脫北

▲2009년 8월 보통강상점을 현지지도하는 김정일. 김정일이 행차할 경우, 해당 기관에서는 미리 문을 닫고 김정일을 맞이하기 위한 연습을 한다고 한다.

 

  ―몇 년이나 했어요?
 
24세 때부터 29세까지 했으니까 5년 정도? 22세 때 다른 사람 따라다니면서 배우기 시작해서 24세 때부터 본격적으로 했죠. 처음에는 3t이나 5t 하는 식으로 작게 하다가 나중에는 80t, 160t으로 규모를 키웠지요.
 
 
―담이 컸나 봐요.
 
“항상 도전정신이 강했어요. 어머니는 늘 ‘얘는 남자로 태어났어야 했는데 여자로 태어났다’고 말했을 정도예요.
 
 
―혹시 사업이 꼬여서 탈북한 건가요.
 
“고발이 들어갔던 것 같아요. 보안서에 잡혀가서 조사를 받았죠. ‘장사는 비()사회주의적인 것입니다’라는 김정일의 방침을 어겼다고 하더군요. ‘배급도 안 주고, 장사도 못 하게 하면 어떻게 하느냐’고 대들다가 맞기도 했어요. 결국 그동안 번 돈을 몽땅 ‘무상(無償)몰수’당하고 말았죠. 정말 죽고 싶었어요. 그러다 친구들이랑 탈북한 거죠.
 
 
―한국에 대해서는 어떻게 알게 되었나요.
 
“친구들하고 한국 드라마를 많이 봤어요. 〈대장금〉 〈풀하우스〉 〈가을동화〉 〈겨울연가〉 〈천국의 계단〉 〈올인〉…. 〈대장금〉을 제일 재미있게 봤어요.
 
 
―어떻게 봤나요.
 
“함흥 등 동해안 지방에는 회령이나 나진·선봉에서 들어온 CD(CD)이 많이 돌아다녀요. 평양이나 남포로 출장을 가서 보면, 남한TV가 잡히는데 북한 조선중앙TV보다 화질이 훨씬 더 좋아요.
 
  2005
년 아리랑축전을 할 때 평양에 갔었는데, 제가 묵었던 집 대학생 남매는 컴퓨터에 〈낙랑 18세〉 CD를 넣고 보더군요. 신기했어요. ‘지방에 사는 우리는 종이에다가 컴퓨터 자판(키보드)을 그려놓고 연습을 했는데, 평양에 사는 얘들은 컴퓨터로 드라마를 다 보는구나’ 싶어 무척 부러웠어요.
 
 
―남한 드라마를 보면서 어떤 생각이 들던가요. 그게 남한의 실제 모습으로 여겨지던가요.
 
“‘이런 별세상이 있구나’ 싶으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이건 다 선전이야’하는 생각도 들었어요. 북한은 모든 게 보여주기 식이잖아요, 선전용. 저도 연습이지만, 그런 촬영을 한 번 해봤어요.
 
 
―언제요.
 
“상업관리소에서 일할 때인데, 북한에서는 김일성이 한 번 다녀간 곳은 김정일도 언젠가는 꼭 다녀가요. 때문에 김정일이 온다는 소문이 돌면, 김일성이 다녀간 적이 있는 기관에서는 김정일이 올 때를 대비해요. 제가 일했던 상업관리소의 경우, 3일 동안 상점을 폐쇄하고 직원들에게 준비를 시켰어요. 인사말이나 TV인터뷰 등을 할 때, 전투적·혁명적으로, 토씨 하나 틀리지 않게 연습을 해야 했죠.  

 
 
뗏목 타고 탈북한 25세 청년

 ―북에 있을 적에 혹시 남한에서 보낸 삐라를 보거나 라디오 방송을 들은 적이 있나요.
 
“삐라는 못 봤어요. 남한 라디오를 듣는 사람은 많다고 들었어요. 남한에 와서 만난 25세짜리 남자애는 남한 라디오를 듣고 뗏목을 타고 서해바다로 탈출해 왔다고 하더라고요.
 
 
―뗏목을 타고 넘어왔다고요?
 
3 4일 걸렸대요. ‘밤에 망망대해에서 무섭지 않았느냐’고 물었더니, ‘밤에는 오히려 편안했다. 낮이 혹시라도 북한 해군경비정에 발각될까 무서웠다’고 하더군요. 그 친구는 북한에서 라디오로 서초 세 모녀 자살사건, 서울시 탈북자 공무원 간첩사건 뉴스도 들었대요. 라디오가 좋은 게, 우리 사회의 좋은 점, 나쁜 점을 다 보여주는 것이라고 하더군요. ‘그런 나쁜 뉴스를 듣고도 왜 넘어왔느냐’고 했더니, ‘그래도 북한보다는 낫잖아요’라고 하더군요.
 
 
김다혜씨는 “저보다 나이는 어려도 정말 멘탈이 강한 친구들이 많다”면서 “이제 탈북자들도 물갈이가 되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저도 이대에서 공부 좀 한다고 하지만(김다혜씨는 이번 학기에 6과목을 수강, 그중 5과목에서 A+, 나머지 한 과목은 A를 받았다고 한다), 서울대, 고려대, 연세대, 서강대 등에도 실력이 짱짱한 애들이 많이 있어요. 그런 친구들은 커뮤니티 모임 등에서 ‘우리는 언론에 나가거나 하지 말고, 조용히 실력을 키우자’고 얘기해요. 의대에 다니는 친구는 나중에 북한에 가서 병원을 세우고, 교육학을 공부하는 친구는 대학을 세우겠다 얘기하죠.
 
 
디스(Diss
누군가를 무시한다, 비판한다, 깔아뭉갠다는 의미의 유행어. Disrespect’ 등에서 유래-기자주)하는 건 아니고, 20여 년 전에 넘어온 기존의 탈북자 중에는 실력은 부족한데 남한에서 롤모델로 너무 띄워주다 보니 뻥튀기가 된 분도 있다 생각해요. 그러다 보니 탈북자에 대한 이미지도 안 좋아지고….
 
 
‘길을 가면서 먼저 간 사람이 버린 쓰레기를 내가 줍지는 못하더라도, 적어도 쓰레기를 버리는 사람은 되지 말자’고 생각합니다.    

  “브로커 비용 300만원 내주면서 현실 깨닫게 돼”

 ‘멘탈이 강하다’ ‘짱짱하다’ ‘디스한다’ 같은 표현을 거침없이 사용하는 것도 그렇거니와, 생각하는 것도 ‘신세대’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있는 소리 없는 소리 해가면서 자신을 과장하는 일부 탈북자들과는 달랐다. 참신하고, 건강해 보였다.
 
 
“저는 사실은 아직 신생아나 같아요. 이 사회의 문제를 보며 단 거는 달다, 쓴 거는 쓰다고 표현하는데, 그걸 어떻게 포장해야 하는지는 몰라요. 그래서 자유경제원에도 그런 생각으로 글을 쓴 건데, 너무 이슈화되는 바람에 자아반성을 많이 하고 있어요.
 
 
여기서 기자와 동행한 인턴기자 문지은(이화여대 심리학과 3학년 휴학)씨가 질문을 던졌다.
 
 
―북한 젊은이들의 통일에 대한 인식은 어떤가요.
 
“기성세대는 평생 남한에 대한 적대의식을 교육받으면서 살아왔기 때문에 그 고정관념에서 쉽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어요. 하지만 20~30대 청년들은 달라요. 일찍부터 한국 드라마, 한류(韓流)를 접한 세대이기 때문에 대한민국에 대해 호감을 가진 사람들이 많아요. ‘통일이 되면 우리도 저렇게 자유롭게 살 수 있다’고 생각을 갖고 있는 거죠. 


 
다시 기자가 물었다.

  ―막상 와서 보니까 북에서 생각하던 남한의 모습하고 비교해서 어떻던가요.
 
“남한 드라마를 많이 본 사람들은, 남한에 가기만 하면 그런 멋있는 집에서 살면서 멋있는 남자 만나서 연애하는 환상을 품기도 하겠죠. 하지만 하나원에서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 세상으로 나오면 정신이 번쩍 들죠. 하나원에서 나오면 바로 그날 저녁에 탈북브로커가 찾아와요. 정착금으로 받은 300만원을 주고 나면 라면 사먹을 돈도 없게 돼요. 그러면 ‘아, 이게 현실이구나’하는 생각이 들죠.   


 
대학생활

  ―탈북 이후 언제가 제일 어려웠나요.
 
“북한에서 중국의 국경을 넘는 게 제일 어려웠어요. 저희가 여기서 고생하는 건 고생도 아니죠. 저희는 지옥에서 살아봤잖아요. 그러다 보니까 저는 이 땅이 너무 좋고, 대한민국이 천국 같아요. 이런 말을 해도, 다른 사람들은 그게 무슨 뜻인지도 모르죠.
 
 
문지은 인턴기자가 물었다.
 
 
―대학 와보니까 그만큼의 가치가 있는 것 같나요.
 
“저는 좋은 걸 배우든 나쁜 걸 배우든 그만한 가치는 있다고 생각해요. 우리는 여기와는 다른 교육을 받고 자랐잖아요. 여기서는 어린 아기 같죠. 머리가 텅텅 비어 있어요. 그래서 항상 사회적으로 약자로, 소외 계층으로 취급받고, 무식하다는 소리 들어야 해요. 이게 탈북자의 현실이에요. 그런데 저는 대학에 와서 자신을 되돌아보고, 생각할 수 있고, 또 강의를 들을 수 있어요. 그거는 학생만의 혜택이잖아요. 그래서 저는 대학에 온 걸 좋게 생각해요.
 
 
김다혜씨는 “처음에는 다른 학생들에게 조금 미안했지만, 지금은 그런 마음을 버렸다”고 말했다.
 
 
“저도 영어, 논술 시험 보고, 면접시험도 치르고 들어왔지만, 불과 2년 정도 준비를 해가지고 들어왔으니까요. 남들은 10년 넘게 열심히 공부해서 들어왔는데, 혜택을 받고 들어왔다는 것 자체가 미안했어요.
 
 
지금은 그 생각을 접었어요. 원래 이대는 여자 고아 한 명으로 문을 연 대학이잖아요? 그렇다면 북한 여성들처럼 정말 불쌍한 사람들도 당연히 들어올 자격이 있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지금의 이 빚진 마음을 가지고 열심히 공부할 거예요. 지금의 저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걸 잘 알아요. 하지만 언젠가 통일이 되면, 저는 북한에 온 이대 출신들이 사업을 하겠다거나 할 때 도와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그때 이 사회에 몇 배, 몇백 배로 갚을 수 있는 자신이 있기 때문에 더 이상 미안해하지 않기로 했어요.
 
 
문지은씨가 “혹시 〈두 번째 스무 살〉이라는 드라마를 아느냐?”고 물었다. 〈두 번째 스무 살〉은 30대 후반의 나이에 늦깎이 대학생이 된 가정주부의 대학생활과 사랑 이야기를 다룬 인기 드라마. 문지은씨의 질문에 김다혜씨가 반색을 했다.
 
 
“저의 모습을 보는 것 같아서 참 짠했어요. 단톡방(단체카카오톡방)에서 애들이 말하는 걸 제대로 알아듣지 못해 절절매는 주인공의 모습이 꼭 저 같아요. ‘나는 노력한다고 하고 있지만, 내가 하는 말과 행동도 친구들한테는 어색하게 받아들여질 수 있겠구나’하는 생각이 들 때가 많아요.   


 
“김정일이 죽었을 때는 오히려 걱정”

  1994년에 김일성 죽었을 때는 어떤 생각이 들었나요.
 
“그때는 하늘이 훅 무너지는 느낌이었어요. ‘우리는 이제 어떻게 되는 거지? 우리는 고아가 되는 거야?’하는 생각이 들었죠. 죽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던 신(), 절대적인 신이 죽은 거잖아요? 삼복더위에 매일같이 40리 길을 걸어가 꽃을 따다가 김일성 빈소에 바치면서 엄청 울었죠.
 
 
―김정일이 죽었을 때는 어땠나요.
 
“하나원에 있으면서 음성 꽃동네에 봉사활동하러 갔을 때, 그 소식을 들었어요. 만세를 불렀죠. ‘이제 통일이 되는구나’ 싶어서…. 그런데 제가 ‘장사꾼’이잖아요? ‘나는 이제 막 대한민국에 왔는데, 무엇이든 배우거나 돈을 벌어서 북한에 재투자할 수 있어야 하는데, 그러기도 전에 통일이 되면 나는 어떻게 하나?’하는 걱정이 드는 거예요. 다행인지 불행인지, 김정은이 나와서 아직 통일이 안 되고 있지만….
 
 
―북한의 가족이나 친구들과는 연락이 되나요.
 
“아직 그러지 않고 있어요. 제가 그들을 도울 능력이 있어야 하는데, 아직은 그런 능력이 없잖아요. 아직은 공부를 해야 할 때라고 생각해요.
 
 
김다혜씨는 “여기에서 돈을 벌어서 북한에 있는 가족들을 데려오는 탈북자들도 많지만, 저는 고통스럽더라도 그러지 않을 생각”이라고 말했다.
 
 
“저도 처음에는 돈을 벌어서 가족들 다 데려오자고 생각했어요. 그러나 통일을 내다본다면 그럴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제가 능력을 갖춰서 통일이 된 후 북한에 들어가서 부모, 형제들을 먹여 살리자는 생각을 하고 있어요. 가족들이 다 남한으로 내려오면, 제 뿌리를 다 뽑아오는 거잖아요? 여기에도 뿌리가 없고, 북한에도 뿌리가 없는 사람, 물과 기름처럼 섞이지 못하고 사는 사람이 되는 거잖아요? 그러고 싶지는 않아요. 물론 이건 가족들을 데려올 능력이 없는 데 대한 변명일 수도 있겠지만….
    

  “북한에선 상벌 시스템이 무너져”

  ―앞으로 무슨 공부를 더 하고 싶나요.
 
“국어국문이나 중어중문을 하고 싶어요. 중국어는 조금 할 줄 아는데, 중문학을 하면 통일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중국과의 외교 교섭 같은 데 도움이 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에요. 국어국문학을 공부하면 통일 후에 북한 주민들한테 남북한 언어 차이를 잘 가르칠 수 있을 것 같아요. 가능하면 석·박사까지 공부하고 싶어요.
 
 
마지막으로 “여기에서 가장 좋다고 생각하는 점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뭐든지 제가 하는 만큼 얻는 게 가장 좋아요. 북한에서는 시스템이 무너지다 보니 상벌(賞罰) 시스템도 무너졌어요. 여기 와서 정말 열심히 했어요. 5개월 동안에 회계1·2급 자격증, 세무2급 자격증을 땄어요. 세무 자격증은, 세법 같은 건 처음 공부하는 거라서 남들이 다 어려울 것이라고 했지만, 함께 시험 치러 간 11명 중에서 저만 붙었어요.
 
 
추석 때 탈북한 동생들(남한에 와서 만난 나이 어린 탈북자들)과 함께 식사를 하면서 모두들 그랬어요. ‘여기서는 착하게 살면 착하게 사는 만큼, 나쁘게 살면 나쁘게 사는 대로 결과가 자신에게 돌아온다’고….

출처 | 월간조선 11월호    배진영 월간조선 기자

 

■ 2016.03.28  VOA "베이징에서 탈북자, 강제 북송 비판" 중국의 사드 때문으로 북한 정책 변화

사드(THAAD·고고도 미사일 방어체계) 때문인지 중국이 탈북자에 전향적인 태도를 보여 귀추가 주목된다.

 

미국 언론 VOA는 탈북 여성 이현서씨가 중국에서 탈북민의 강제 북송 정책을 비판하는 행사를 열었다고 페이스북에 26일 썼다.

 

이씨는 '일곱 개의 이름을 가진 소녀'라는 자신의 저서를 홍보하는 행사를 베이징에서 열었다.

 

VOA는 "영어로 이씨가 '중국 당국은 탈북민을 체포하지 말고 중국을 경유해 안전한 곳으로 갈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고 보도했다. 해당 행사는 외국인을 대상으로 열렸다.

 

그간 중국 당국은 탈북자를 검거해 북한에 강제 북송했다. 강제 북송된 탈북자는 모진 고문으로 죽기도 한다.

 

국제 사회는 중국 당국의 탈북자 강제 북송을 중지해서 인권을 보호해야 한다고 호소했지만, 대개는 무위에 그쳤다. 국내에서도 2012년 서울의 중국 대사관 앞에서 배우 차인표씨를 비롯한 연예인들까지 탈북자의 강제북송을 중지하라는 호소와 시위를 했지만, 효과는 일시적이었다.

 

VOA는 "한국 정부가 이씨의 중국 방문을 만류했다"며 "한국 정부가 중국에서는 북한 얘기만 하고 중국 정부는 건들지 말 것을 이씨에게 요청했다"고 썼다.

 

VOA에 따르면, 이씨는 30대 중반이며 1997년 탈북해 국내에 정착했다. 이씨는 TED에서 영어로 북한의 참담한 실상을 증언하고 국제 사회에서 다양한 강연을 이어가고 있다.

 

중국이 UN 안보리 제재에 이어 이씨의 강연까지 허용했다는 점은 중국의 대북 정책이 전환점을 맞았다는 평가이다.

조호진 기자

 

■ 2016.05.23 탈북자가 탈북 식당 여종업원 아버지에게 보내는 편지

 

청취자 안녕하십니까. 얼마전 미국 LA에서 생활하면서 북한당국의 혓바닥 노릇을 해온 종북분자 노길남이란 자가 자신이 운영하는 ‘민족통신’이란 인터넷 매체를 통해 이런 이야기를 들고 나왔습니다.

 

〈지난 4, 국정원에 의해 중국에서 식당 로동자로 일하다 강제 납치된 북한주민 12명 중 한사람인 서경아 씨가 ‘우리 모두를 공화국으로 보내 달라’며 단식투쟁을 하다가 사망한 사실이 민족통신 공동취재진에 의해 15일 확인됐다〉  

 

그리고 17일에는 『납치당한 북, 여성 가족들의 피맺힌 호소』, 「유송영, 김혜성의 가족들과의 특별대담」 이라는 것을 영상을 통해 공개했습니다. 여기서 잠깐, 그가 한 영상대담의 첫 멘트를 들어보도록 하죠

 

노길남: 안녕하십니까. 여기는 평양입니다. (저는)민족통신 노길남 특파원으로...중국에서 일을 하다가 남쪽의 국정원과 그 하수인들에 의해 강제로 납치당해서 (남으로)끌려간 피해 가족들 가운데 두 가정과...(이야기를 나누려고 합니다)  

 

그러면서 노길남은 ‘12(전 북한해외근로자들)이 외부와 철저히 차단된 상태에서 귀순공작을 받고 있는데 왜 남쪽 언론들이 보도하지 않고 있는가, 우리가 분석을 해 보니 박근혜 정권이 보도통제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는 주장을 폈습니다

 

어떤 반응이 나왔을까요? 지금 대한민국에서 정착과정을 거치고 있을 류송용의 아버지 류만복, 김혜성의 어머니 강금숙 씨 등은 ‘사랑하는 우리 딸들을 당장 북으로 돌려보내라’며 남조선 정부를 성토했습니다.

 

서론이 조금 길었습니다만, 오늘부터 자유북한방송은 노길남 같은 노동당의 하수인들, 나아가 북한당국에 속고 있는 12명 해외근로자 출신 탈북자들의 부모, 형제들에게 보내는 자유북한방송의 ‘위문편지’를 전해드리려고 합니다.

 

오늘은 그 첫 번째 순서로 중국 복건성의 북조선 합영기업에서 일 하다가 지난 2013 2, 자유를 찾아 대한민국에 입국한 김금송씨의 편지를 보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류만복 아버님, 안녕하십니까.


따님의 이름이 류송용이라고 했죠. 아버님 연세만큼의 아빠를 북에 두고 있는 탈북자 김금송 입니다. 사랑하는 딸이 남조선에서 고생한다니 얼마나 걱정이 많으실까 싶어... 초면이지만, 총총히 드리는 편지입니다.

 

먼저 노길남과 북한당국이 남조선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들을 회유해 불안을 조장시키고 있다는 점에 대해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이곳 남조선엔 3만여 명의 탈북자들이 있습니다. 노동당비서였던 황장엽 선생도 계셨고, 저처럼 해외 근로자로 일하다가 대한민국에 입국한 탈북자도 있습니다. 평범한 노동자도 있고 외교관이었던 탈북자도 있죠.

 

이처럼 각이한 환경에서 생활하던 사람들이지만, 남쪽에 오면 처음한동안은, 누구나 똑 같은 생활환경을 경험해야 한다는 것을 우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이름 하여 탈북동기 등에 대한 정보기관의 조사와 통일부에 의한 정착교육이 그것입니다.

 

저 같은 사람들에 대한 ‘조사’는 한두 달이면 끝납니다만, 군관이었거나 간부였던 사람들에 대한 조사는 우리보다 좀 더 길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리고 이 조사과정이 이번에도 문제가 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있습니다

 

이름 하여 ‘민주주의를 위한 변호사 모임’의 변호사들이 국정원 중앙합동신문센터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중국에서 일하던 12명 탈북자의 접견을 요구하는 등 꼴불견을 연출했다고 합니다.

 

왜죠? 저들이 무슨 특권을 가진 집단이어서 3만여 탈북자들 가운데 유독 12명 탈북자들을 찾아가 면회요 뭐요, 희떠운 수작을 부리는지 이해가 되질 않습니다. 탈북자들에 대한 관심이 있고 탈북자들의 운명이 걱정이라면 3만 여 탈북자들을 다 만나봤어야죠.

 

게다가 말도 안 되는 억지를 부리고 있습니다. 해당시설이 대한민국 법률에 근거한 탈북자 보호시설이라는 것은 세 살 난 어린이도 다 아는 사실인데 변호사가 뭐 그리 대한단 존재여서 법위에 군림하려 드는지, 이런 사람들은 김정은의 보위부에 한번 다녀와야 정신이 들겠다는 생각마저 해 보았습니다.

 

송룡이 아버님. 따님이 북한의 보위부와 같은 남조선 안기부에 갇혀 있다니 얼마나 걱정이 크시겠습니까.

 

하지만 이곳 대한민국의 국정원 ‘조사실’은 아버님이 생각하시는 것처럼 그렇게 무시무시한 ‘중앙정보부 지하고문실’도 아니고, 사람을 한번 걷어 넣으면 평생토록 못나오게 하는 북한 보위부 예심과도 아닙니다.

 

저도 처음 대한민국에 입국했을 때 저를 태운 승용차가 어느 건물의 지하주차장으로 들어서는 순간 ‘아, 내가 드디어 남조선 중앙정보부 지하고문실로 들어가는 구나~’고 생각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또 어느 날엔, 검은색 양복을 입은 사람이 내방으로 찾아와 원주필(볼펜)과 노트를 주며 북한을 떠나게 된 동기며 이곳 남조선까지 온 과정을 써 보라고 했을 때, ‘이제 비밀을 다 빼내고 날 죽이려 들겠지?’ 하면서 북한당국이 우리에게 보여주었던『검은 심리작전의 내막』이라는 그 무시무시한 다큐멘터리의 장면을 떠 올리기도 했었습니다.

 

하지만 저의 그 모든 생각은 기우였습니다. 후에 생각해 보니 우리 탈북자들이 대한민국에 와서 조사받은 건물은 제보기에, 대통령이 살고 있는 청와대보다 더 멋진 건물이고, 더 경비가 튼튼하며, 무엇보다도 북조선에선 꿈에도 생각할 수 없을 만큼의 식의주가 보장되는 곳이었습니다.

 

내복도 공짜, 운동복도 공짜, 양복에 가방에, 치약과 비누에...전 정말 북조선 당국이 말하던 ‘헐벗고 굶주린 남조선 땅’에서 내가, 북에서 생활할 땐 꿈도 꾸지 못했던 삶을 살게 된다는 게 믿어지지가 않았습니다.

 

탈북자들이 생활하는 방방마다 갖추어져 있는 천연색 텔레비죤에, 전화기에, 세탁기에, 컴퓨터에...정말이지 중앙당 부장이면 이런 혜택을 누린단 말입니까. 한걸음만 나가면 실내 체육관에, 야외 족구장에, 어린이 집에...이 모든 것이 다만 탈북자란 이유로 우리들에게 차례졌던 국가의 배려였고 국민의 사랑이었습니다.

 

지금도 사회생활이 조금 힘들다 싶으면, 전 그곳이 먼저 떠오릅니다. 지금도 일터에서 조금 늦게 돌아와 밥해먹기가 싫다싶으면, , 그곳에선 나에게, 매일 매일 따뜻한 국에 흰밥을 차려 주었었지, 개고기를 못 먹는다는 사람이 있으면 닭고기 국을 따로 끓여 주었고, 닭고기가 싫다는 사람이 있으면 소고기 국을 따로 꾸려 주었었지... 

 

이마가 조금 뜨뜻해 나도 의사선생님이 달려오고, 운동하다 허리가 조금 삐끗해도 구급차가 경쟁하듯 달려오던 그곳. 관광도 공짜, 관람도 공짜, 먹고 입고, 쓰고 사는 모든 것이 공짜인 그곳에서 살수만 있다면 평생을 살고 싶다는 게 탈북자들의 솔직한 심정일 것입니다.

 

물론 그곳에서 생활할 당시에는 ‘어서 나가고 싶다’는 게 생각의 전부였다는 고백도 드립니다. 자유를 찾아왔으니 하루빨리 자유를 누리고 싶고, 풍요를 찾아왔으니 대한민국의 풍요로움을 어서 빨리 맛보고 싶기 때문일 것입니다.

 

하지만 조사과정을 통해 조선족이 가려지고, 황장엽 암살임무를 받은 정찰총국의 위장 탈북자도 밝혀지는 마당에 어느 탈북자가 ‘조사’를 마다한단 말입니까. 오히려 나의 탈북동기가 ‘김정은 독재체제에 반한 것’이고 ‘나는 대한민국 국민이 될 의지를 갖고 정상적인 경로를 통해 입국했다’는 사실을 서로가 증명하려 애썼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죽기를 각오하고, 죽을 지경을 넘어 대한민국에 왔는데, 그깟 한두 달 ‘조사’를 못 참을 바보가 어디 있으며, 이를 기피하려는 자들이 간첩이었었다는 기억도 생생하게 남아있습니다. 저와 저의 탈북동료들이 거쳤던 이런 과정을 아버님의 딸 송용이도 지금 겪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어제 뉴스를 보니 ‘민주주의를 위한 변호사 모임’이라는 데서 무슨 물품 전달 신청도 했다고 하는데 이 사람들 정말 바보라는 생각이 다시 들었습니다. 저들이 주는 물품이라는 게 정말 대한민국이 탈북자들에게 베푸는 혜택과 비교나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지, 아니면 그냥 생색을 내 보는 건지...간교한 그 머릿속을 확 빠개고 속 시원히 들여다보았으면 싶기도 합니다.

 

서신까지 들여보내려고 했다니 무서운 생각까지 들었습니다. 위에서 말한 노길남이란 자가 평양에 앉아 무슨 인터뷰라는 것을 하면서 “오늘도 미국과 국제전화를 했고, 미국에 있는 우리 동료들이 남쪽에 있는 변호사들과 많은 통화를 했고...” 떠벌였은즉, 무슨 암호문이라도 들여보낸다는 겄인지 '저자들 부터 조사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더 가관인 것은 “외부와 격리·차단된 장소에서 수용하고 있는 대한민국 당국의 위법한 인권침해 조치에 대한 시정과, 원할 경우 북한으로의 귀환이 이뤄질 수 있도록 돕겠다”는 저들의 행태인바 그곳 ‘합심센터’라는 곳에서는 간첩이거나 간첩혐의자만 아니면 그 누구도 인권침해사례를 말하는 탈북자가 없음을 믿으셔도 됩니다.

 

그리고,

북한으로 가다뇨?

누가 말입니까?! 머리돈 놈들이 헛소리까지 치고 있네요.

 

이야기가 잠깐 빗나갔습니다만, 아버님, 노길남 같은 자의 말을 절대로 믿지 마십시오. 아버님의 딸과 따님 친구들이 ‘남조선당국의 위법한인권침해 조치에 처해있다‘는 얼빠진 넋두리에도 귀 기울이지 마십시오. 나아가 아버님의 딸과 그 친구들이 ’남조선 안기부에 의해 납치되어 강제로 끌려갔다‘는 김정은과 그 하수인들의 말에도 절대로 속아서는 안 됩니다.

 

대한민국 통일부는 “지배인을 포함한 13명 탈북자들이 자유의사에 따라서 입국한 것”이고, “현재 이들이 안정을 찾아가고 있는 과정이어서 외부인 접견은 적절하지 않다”고 밝힌바 있습니다.

 

그리고 이들이, 북으로의 귀환을 요구하며 금식하던 중 누군가가 사망했다는 ‘민족통신’이란 종북매체의 소식에 대해서는 “탈북자들의 건강상태는 좋다”면서 “사실무근이며 그런 유언비어들은 북한 선전전의 일환이다”라고 밝하기도 했습니다.

 

더 좋은 소식도 있습니다. 대한민국정부가 이곳 합심센터라는 곳에 ‘인권보호관’제도란 것을 운영하고 있는데, 지난 17일 이 ‘인권보호관’이 아버님의 딸과 따님의 친구들을 모두 만나보았다고 합니다.

 

결과야 뻔하죠. 중국의 북한 식당에서 귀순한 종업원 13명을 면담한 법률가 박영식 변호사는 남조선의 주요 일간지를 통해 "한국에 도착한 13(여종업원 12, 남성 지배인 1) 가운데 북한으로 다시 돌아가기를 원하는 사람은 한 명도 없다"고 밝혔습니다

 

대한민국의 변호사협회로부터 추천된 이, 변호사는 또 "종업원들은 모두 북한에 남겨둔 가족과 자신의 신변 안전을 우려해 (개인 신상이나 발언 등이) 밖으로 드러나는 것을 절대 원하지 않는다"고 했고, 북한과 일부 친북매체가 '여종업원 중 한 명이 북송을 요구하며 단식하다가 사망했다'고 보도한 데 대해선 "그걸 믿느냐"고 오히려 되묻기까지 했다고 하네요.

 

박 변호사는 "13명 모두 건강하게 잘 있다는 건 분명하게 말씀 드릴 수 있다"고 다시 한번 강조했고 "종업원들은 남한 뉴스도 보고, 바깥으로 견학도 나가면서 한국에 적응하는 과정을 거치고 있다"고 설명하기도 했습니다.

 

‘종업원들이 앞으로도 외부접촉을 꺼릴 가능성’을 말하면서는 ‘북에 있는 가족 때문이라는 것’을 확실히 밝히기도 했으니, 이제는 아버님처럼 북에 남아있는 가족들께서 따님들의 마음을 헤아려 주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전해 드립니다

 

오늘 이야기 너무 길었네요. 그래도 제 아빠께 드리는 편지 같아 길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끝으로, 아버님의 딸과 따님 친구들이 합심센터를 나올 때까지 지속적으로, 따님과 따님 친구들의 소식 전해드리겠다는 약속을 드립니다.

 

그 친구들이 4 7일 한국에 입국했으니 극상해서 두 세 달이면 그곳을 나오게 될 것입니다. 나오면, 제일 먼저 달려가 따님과 따님 친구들을 얼싸안고 당신의 아빠 엄마들이 얼마나 마음 졸이셨는지를 꼭 전해드리겠습니다.

 

그리고 친구가 되겠습니다. 그러니 안심하십시오. 더 이상 속지도 마시고...건강 잘 지키십시오!

2016 5 21일 탈북자 김금송 올림.

 

■ 2016.10.14 탈북자가 말한다. 대북 식량지원이 주민을 더 굶주리게 만드는 이유는?

▲2004년 육로를 통한 대북 쌀지원 모습. /조선DB

 

제가 북한에 살 때 친구들 중에는 협동농장 관리간부로 사업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그 친구는 술좌석에서“우리나라 사람들은 쌀더미에 앉아 굶어죽는다.”고 말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는 협동농장의 관리간부로 일한 관계로 북한의 농촌들에서 해마다 흉년을 거듭하는 원인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북한에서 농사가 해마다 흉년을 거듭하고 인민들이 굶주림에 허덕이는 이유는 비생산적인 농촌구조에 있습니다. 비생산적이라는 말은 효율적인 구조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단마디로 이야기하면 토지는 있지만 주인이 없습니다. 농장도 있지만 주인이 없습니다. 주인 없는 경제가 바로 북한의 농업입니다.

 

생산자 대중의 이익이 무시된 북한의 농촌정책이 만들어 놓은 것이 매해 흉년입니다. 농민들의 무책임성은 농민들을 탓할 일이 아닙니다. 차례지는 것이 적거나 없는데 열심히 일할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되겠습니까. 김정은 정권도 그런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몇 년 전에 포전 관리제라는 경제개선을 했는데 그 역시 생산의 극대화와는 엄청난 괴리가 있는 것이었습니다.

 

김정은 정권은 포전관리제라는 명분으로 북의 농촌에, 과거 지주와 소작농의 구조를 만들어 놓았습니다. 농민들은 국가의 소유인 토지에 매달려 농사를 짓고 70%를 바치는 것이 지금 북한의 농촌구조입니다. 일제 강점기에도 농민들은 소작료를 70%나 바치지 않았습니다. 그 당시에는 50%를 바쳤다고 합니다. 지금 북한 농민들은 1년 내내 힘겹게 농사를 짓고도 소출의 30%만 가져가는데, 그 나마도 독재정권의 터무니없는 수탈로 제대로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북한 사회에서 식량난을 해결하고 주민들을 굶주림에서 해방하는 방법은 단 하나, 땅을 농민들에게 나누어 주고 농민들을 땅의 주인, 농사의 주인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땅을 농민들에게 나누어 주고 그들이 잘 살 권리와 조건을 만들어 주면, 농민들의 열성과 창의성은 하늘을 찌를 것입니다. 당연히 농사는 대풍을 거듭할 것입니다. 대풍이 들어 쌀이 많이 유통되면 식량 값은 떨어지고 주민들이 굶주림에 허덕이는 상황도 사라지겠지요.

 

그러나 북한의 독재정권은 사유화가 체제의 근간을 흔든다는 이유로 개혁을 하지 않고 있습니다. 체제 유지에 저촉된다는 것이 개혁을 하지 않는 이유입니다. 농업부분을 사유화하면 노동자들도 모두 시장에서 식량을 구매해야 합니다. 국가가 공급을 주도하는 배급제가 없어지고 북한의 모든 도시사람들도 시장에서 식량을 구매하는 시장경제가 자리 잡는다는 것입니다.

 

농업부분을 사유화 하면 도시의 노동자들도 시장경제로 살아가는데, 김정은 정권은 사유화와 시장경제가 독재체제의 기능을 약화시키거나 마비시킨다는 이유로 개혁을 하지 않고 있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런 현실이 과도적인 현상이라는 것입니다. 그 말은 앞으로 개혁개방은 꼭 이루어진다는 뜻입니다. 그것은 사회발전의 법칙입니다.

 

최근 “국민의 당” 원내대표인 박지원의원은 북한정권에 식량을 지원해주어야 한다는 주장을 늘여놓고 있습니다. 그의 주장이 반박을 받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우선 대북 쌀 지원이 북한에서는 군양미로 전환된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대북 쌀 지원이 김정은의 공로를 만들어 주는 “배려”로 변환된다는 것입니다.

 

탈북자들이 박지원의원의 대북 쌀 지원을 반박하는 가장 큰 이유는 현 상태에서의 대북지원은 개혁개방을 하지 않고 버티려는 김정은 독재정권에게 힘을 실어주는 결과를 만든다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개혁개방으로 유도하는 것이 아니라 개혁개방을 하지 않고도 버틸 수 있는 조건을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북한사회에서 식량부족을 해결하는 방법은 농업개혁입니다. 북한사회의 식량부족량을 남한에서 보충해준다는 것은 북한사회의 농업개혁을 더디게 하는 결과를 만들어 놓는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렇지 않아도 북한정권은 오래전부터 농업개혁을 통해 식량부족을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외부의 지원으로 식량부족량을 채우고 있습니다.

 

결국 섣부른 대북 식량지원에는 역설적으로 북한사회의 가난을 더 지속시키는 결과도 만든다는 원리가 숨겨져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정치공학에 묻혀 사시는 “국민의 당”원내대표 박지원의원이 그런 상식적인 문제를 모를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모르면 아셔야 합니다.

탈북자 김영호   자유북한방송

 

■ 2016년 08월 17일 “北 주민의 참혹한 죽음, 쌀 아닌 人權이 없어 생긴 비극”

▲ 탈북 시인이자 인터넷 신문 뉴포커스 대표인 장진성 시인이 지난 10일 서울 송파구 신천동 뉴포커스 사무실에서 북한의 열악한 인권 실태를 설명하며 “진정한 대북 지원은 주민들의 인권 문제를 해결해주는 것”이라고 강조하고 있다. 신창섭 기자 bluesky@

 

탈북시인 장진성

‘탈북 시인’으로 유명한 장진성(45) 시인은 2008년 ‘내 딸을 백원에 팝니다’란 시로 세상을 충격에 빠뜨렸다. 그가 북한에 살고 있던 1999년 여름에 목격한 실화를 바탕으로 한 이 작품은 북한의 처참한 현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줬다.

 

장 시인은 이후 2011년 인터넷 신문 ‘뉴포커스’를 만들었고, 2014년엔 탈북 수기 ‘경애하는 지도자에게’로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작가가 됐다. 지난해부터는 네덜란드 레이던대 초빙교수로 북한학 강의도 하고 있다. 다양한 직함에도 불구하고, 장 시인은 여전히 자신의 정체성을 ‘작가’로 규정한다. 북한 인권 실태를 외부에 알리는 데도, 반대로 북한 주민들에게 외부 세계의 정보를 전하는 데도 문화 콘텐츠만큼 강력한 무기가 없다는 믿음 때문이다. 지난 10일 서울 송파구 신천동 뉴포커스 사무실에서 장 시인을 만났다.

 

장 시인은 1971년 황해도에서 대학 학과장인 아버지와 의사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어렸을 때는 피아노와 젓대(퉁소) 연주를 배웠다. 그런데 평양음악무용대학 예비반(중학교 과정) 때 접한 19세기 영국 낭만파 시인 바이런의 시가 그의 인생을 바꿔놨다. 장 시인은 “북한에서도 상류층은 외국 문화를 알아야 하니까, 세계 명작에 한해서 딱 100부만 찍어서 읽게 하는 ‘100부 도서’란 게 있다”며 “그중에 바이런 시선(詩選)도 있었는데, 김일성 부자에게만 쓰는 줄 알았던 ‘친애하는’ ‘위대한’이란 표현이 일상 언어로 쓰이는 것부터가 충격이었다”고 회상했다.

 

피아노 건반으로는 자신의 감성을 다 표현하는 데 한계가 있다고 느끼던 장 시인은 ‘조선의 바이런’을 꿈꾸게 됐다. 그가 대학 재학 중 만든 시집 ‘복 받은 세대의 노래’는 1992년 2월 김정일의 50번째 생일을 기념해 열린 전국 문화 콩쿠르에서 당선됐다. 노동신문에도 소개됐다. 특히 김정일 당시 인민군 총사령관이 장 시인의 작품을 마음에 들어 해 “쟤가 원하는 건 다 해주라”고 했다. 그 덕에 장 시인은 1994년 졸업 후 ‘중앙방송연예’의 문예 담당 기자로 들어갔다. 이후 1996∼1998년 김일성종합대학 어문학부 박사원 위탁교육을 마친 뒤 통일전선부 101 연락소에서 대남심리전을 담당하는 ‘엘리트 코스’를 밟을 수 있었다.

 

1970년대 만들어진 통전부 101 연락소의 목적은 한국 내 운동권에 대한 ‘문화 지원’이었다. 쉽게 말해 가상의 한국 민중 시인이나 소설가가 쓴 것처럼 북한을 찬양하는 문학 작품을 만들고, 일본의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조총련)를 통해 이를 한국 운동권들에 보급하는 일이었다. 그러나 남북 간 체제 경쟁에서 북한이 완전히 밀리면서 대남심리전의 효과는 사라졌다. 오히려 북한 주민 대상 심리전으로 목표가 바뀌었다. 한국의 작가, 시인들이 북한 김일성 부자를 추앙하는 작품을 쏟아내는 것처럼 노동신문 등을 통해 거짓 선전을 하는 일이 임무로 떨어졌다.

 

장 시인의 문학적 소양은 통전부에서 유감없이 발휘됐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선군정치가 남조선까지 지켜준다는 홍보를 하라”는 ‘과업’을 받아든 그는 5·18민주화운동을 소재로 ‘영장의 총대 위에 봄이 있다’란 서사시를 썼다. 1999년 5월 22일자 노동신문에 실린 이 시는 ‘남에도 북에도 똑같이 총이 있다. 그 총으로 한쪽은 국민을 쐈고, 다른 한쪽은 민족과 선열들까지 지켜준다. 김정일 위원장의 총이 결국 민족의 총’이란 내용이다. 김정일 위원장은 장 시인의 서사시를 ‘선군 시대의 모범작품’이라고 칭찬했고, 장 시인을 ‘나의 작가’라고 부르기까지 했다.

 

통전부 직원들에겐 대남 공작을 잘할 수 있도록 한국의 방송이나 신문을 거의 실시간으로 접할 수 있는 특권이 주어졌다. 한국 소식을 계속 접하다 보니 ‘똑같은 민족인데 왜 반쪽은 후진국이고 다른 반쪽은 세계적 선진국이 되고 있는가’ 하는 의문이 커져 갔다. 그러던 2004년 1월, 장 시인은 한국에서 발간되는 한 월간지를 친구에게 빌려줬다. 그런데 인민보안성(한국의 경찰청) 최고위급 간부의 아들인 그 친구가 책을 잃어버렸다. 통전부 직원만 볼 수 있는 서적이 외부로 유출된 셈이었다. 집중 추궁을 받게 된 장 시인은 그 친구와 함께 몰래 평양을 떠났다. 목숨을 건 탈북이 시작됐다.

 

탈북한 지 벌써 12년이 흘렀지만 당시의 기억은 아직도 생생하다. 장 시인과 친구는 중국을 거쳐 한국으로 올 계획이었다. 북한의 체포조가 따라왔다. 대낮에 얼어붙은 두만강을 걸어서 건너는데, 뒤에서 ‘저 XX들 잡아’ 하는 소리가 들렸다. 곳곳에 초소가 있었다. 뒤통수가 뜨거워졌다. ‘이제 곧 여기(뒤통수)에 총알이 와서 맞겠구나’ 하는 공포가 몰려왔다. 그런데 북한군이 중국 방향으로 총을 쏠 수 없었던 덕택에 장 시인은 무사히 강을 건널 수 있었다. 장 시인은 출발 한 달여 만에 주중 한국대사관에 도착했지만, 함께 온 친구는 중간에 붙잡혀 북한으로 호송되던 중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북한에 남겨둔 부모님과 형님 걱정은 아직도 떨쳐낼 수 없다. 이후로 가족의 소식을 들은 적 있느냐고 묻자 그는 묵묵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제가 탈북 후 처음 시집을 냈을 때만 해도 ‘얼굴 없는 시인’이었어요. 북한에 남은 가족들이 걱정됐기 때문이에요. 처음 방송 인터뷰를 할 때도 얼굴을 모자이크 처리하는 게 조건이었죠. 그런데 방송국에서 약속을 어겼어요. 그 후로 북한에서 저를 마구 비난하기 시작했습니다. 인민보안성 역사상 2014년 8월에 대남성명을 딱 한 번 발표했는데, 저를 제거하겠다는 내용이었어요. 가족들이 어떻게 됐을지….”

 

시종일관 유쾌하고 여유 있게 인터뷰에 응하던 장 시인도 이때만은 목소리가 침울해지고 눈시울이 붉어졌다.

 

일반적으로 탈북자는 하나원에 들어가 적응 교육을 받지만, 장 시인은 통전부에서 일했다는 특수성 때문에 별도의 안가에서 머물다가 2004년 말에야 한국 사회에 나왔다. 2005∼2010년 국가안보전략연구원에서 일하던 중 2008년 ‘내 딸을 백원에 팝니다’를 출간했다. 그는 이 시집으로 2012년 영국 옥스퍼드대 ‘렉스 워너 문학상’을 받았다. 2014년 펴낸 ‘경애하는 지도자에게’는 당시 세계 8위의 베스트셀러가 됐다. 장 시인은 영국 선데이타임스 표지 모델로 나서고 미국 CNN의 유명 앵커 크리스티안 아만포와 인터뷰를 하기도 했다. 모두 문학의 힘으로 북한의 실상을 세계에 알리겠다는 장 시인의 일념이 빚어낸 성과였다.

 

장 시인은 특히 한국에서 북한 체제나 인권 상황을 보는 인식이 심각하게 왜곡돼 있다고 지적했다.

 

“최초로 북한의 대량 아사(餓死)를 고발한 시를 쓴 작가로서 말하는데, 북한 주민의 죽음은 쌀이 없어서가 아니라 인권이 없어서 발생합니다. 자꾸 ‘북한에 지원을 해주지 않으면 사람들이 굶어 죽을 수밖에 없다’고 하는데, 그건 북한을 모르고 하는 소리입니다. 진짜 지원은 주민들의 인권 문제를 해결해주는 겁니다. 북한 주민들이 인권유린을 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분노할 수 있도록 외부 정보를 접할 수 있게 해 주는 게 더 중요합니다.”

 

장 시인은 북한이 핵이나 미사일로 위협해도 한국정부가 뒤로 물러서면 안 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북한에서 김정은 조선노동당 위원장보다 더 강한 게 죽은 김일성 수령이에요. 그래서 핵·경제 병진 노선이 수령의 유훈이라고 못을 박은 거죠. ‘김 씨 종교’ 체제를 상대로 외교나 교류를 하려고 하면 이용당할 뿐입니다. 한국은 대북 정책이 시도때도없이 바뀌는데, 일관성이 중요합니다. 북한은 우리가 브레이크를 한 번씩 밟아주지 않으면 체제 속성상 계속 강공으로 나오게 돼 있어요. 우리가 양보했을 때 북한은 연평도를 포격했잖아요.”

 

북한을 대하는 한국의 태도에 대해서도 비판은 계속됐다.

 

“실제의 북한이 있고, 외부의 시각으로 본 북한이 있습니다. 한국의 북한 학계가 외부 시각으로 본 왜곡된 북한의 모습을 확산시키는 장본인이에요. 북한을 있는 그대로 보고 연구하지 않고, 정치적 이해관계나 진영 논리에 빠져 있기 때문입니다. 몇 년 전 영국에서 ‘뉴레프트 리뷰’ 편집위원인 파키스탄 출신의 세계적 좌파 이론가 타리크 알리를 만났습니다. ‘과거 김일성이 북한 주민들의 인권을 유린하는 모습을 보면서, 김일성을 테러하고 싶었다’고 하더군요. 왜 한국에서는 유독 북한에 대해서만 다른 잣대를 들이대는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최근 중국 내 북한 식당 여종업원들의 집단 탈북에 국가정보원 납치 의혹을 제기하거나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THAAD·사드) 한국 배치를 반대하는 단체 등을 보면 ‘민주주의 사회의 다양성에는 무식도 포함되나 보다’ 하는 생각이 듭니다.”

 

‘성공한 탈북자’인 장 시인이 보기에 한국 사회의 탈북자 대우는 얼마나 좋아졌을까. 여전히 편견이 사라지지 않고 있다는 게 그의 대답이었다.

 

“한국에서 탈북자는 일종의 난민입니다. 정부조차 탈북자 가족을 ‘다문화가정’과 똑같이 생각하면서 차별을 공식화하고 있죠.”

 

인터뷰 막바지 장 시인의 한탄은 많은 것을 생각하게 했다.

 

“오히려 외국에 나가 보면 탈북자들을 난민이 아니라 정치적 망명자로 존중해줍니다. 인문학 분야에서 세계 최정상급으로 인정받는 레이던대에서 일개 탈북 작가인 저를 학과장급 대우로 초빙했는데, 국내에선 어떤가요. 국내에 탈북자가 3만 명인데 북한학과에 탈북자 출신 교수가 한 명이라도 있습니까.”

인터뷰 = 김성훈 차장 (사회부) tarant@munhwa.com

 

■ 2017.05.04  탈북자 이현서 "北 주민 70년간 고통…트럼프처럼 말한 대통령 없었다"

▲탈북자 이현서씨./TED 영상 캡쳐

 

'7개의 이름을 가진 소녀'라는 책의 저자이자 탈북자 이현서씨가 3일(현지시각) 미국 폭스뉴스와 인터뷰에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북한 김정은 정권을 비판하는 발언을 처음 들었을 때 "울었다"고 말했다.

 

이씨는 "우리가 70년간 고통을 겪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그 어떤 (미국) 대통령도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며 이같이 밝혔다. 즉 트럼프 대통령이 김정은이나 북한의 위태로운 상황을 있는 그대로 표현한 유일한 미국 대통령이라는 뜻이다.

 

그러면서 이씨는 핵무기와 미사일, 억압 등을 일삼는 김정은을 두고 '위험한 적'으로 규정지었다. 이어 "북한 정권은 사람들을 정말로 통제할 수 있다"며 "나는 (김정은 북한 노동당 위원장이) 전 세계에서 최고의 독재자라고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이씨는 1990년대 사형과 세뇌, 기근을 목격했고, 그로 인해 1백만명이 사망하고 버려졌다며 "시체가 너무 많아서 그 시체들을 없애는 직업을 가진 사람들이 있었다"고도 밝혔다.

 

그는 말레이시아에서 이복형인 김정남을 살해한 것을 두고 자신에 대한 경고로 받아들이고 있다며 북한이 자신을 "공격할 수도 있다"고 우려했다. 이어 언젠가 북한 정권이 무너지고 자신이 북한에 있는 집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이라는 꿈을 포기하지 않았다고도 덧붙였다.

 

이씨는 10대 때인 1997년 북한을 탈출한 후 수년간 중국에 머무르며 어려움을 겪다가 라오스를 거쳐 한국으로 넘어왔다.

 

2015년 영문 자서전 '7개의 이름을 가진 소녀'라는 책을 낸 이씨는 책에서 자신이 탈북자 생활을 하는 동안 사용했던 엘리스 등 가명에 얽힌 이야기를 풀어냈다. 이 책은 한국어로는 출판되지 않았다.

 

한국외국어대학교에서 영어와 중국어를 전공한 그가 'TED'에서 강연한 영상은 1000만 이상의 조회수를 기록하기도 했다.

이윤정 기자

 

■ 성공적으로 정착한 탈북민

■ 2016.07.27 첫 탈북자 웹툰 작가 최성국씨

▲25일 서울 도곡동 사무실에서 웹툰을 그리고 있는 최성국씨. “너무 바빠 하루 5시간밖에 못 자도 웹툰 댓글만 보면 행복하다”고 말했다. /박상훈 기자

 

"국정원 조사 첫날, 어여쁜 여의사가 채혈실로 들어오라 한다. 아니, 채혈통이 다섯 개? 북한의 다섯 배다. 정신 홀려 내장이랑 피 뽑아 팔아먹는다더니, 역시 계급적 '원쑤'는 변하지 않는 것인가. '뉴턴의 4법칙'을 써야겠군. 뇌물 받은 자는 무조건 움직이게 돼 있지, 고럼."

 

국내 첫 탈북자 웹툰 작가가 등장했다. 평양 출신 최성국(36)씨다. 지난 5월 탈북 남성의 열혈 남한 정착기를 다룬 네이버 웹툰 '로동심문'을 시작해 지난 5일 준(準)프로 대우를 받는 '베스트 도전'으로 승격됐다.

 

반응은 뜨겁다. "처음 보는 웹툰 장르" "공부되는 만화"라는 호평이 이어진다. 최씨는 "원고료 받는 정식 연재를 하는 게 목표"라고 했다.

 

북에선 연인일 때 '친구'라고 해… 문화 차이 그린 '로동심문' 호평 "서로 이해할 수 있는 場 됐으면"

 

북한에서 이미 그림으로 한가락 하던 청년이었다. 평양무진고등중학교 4학년 최성국은 1994년 6월, 반미투쟁월간을 맞아 북한에 쳐들어오는 미군을 한국화로 그렸다가 생애 첫 '천재' 소리를 듣게 된다. "그렇게 미술부에 들어가면서 인생이 바뀌었죠." 1996년엔 조선4·26만화영화촬영소 직원으로 선발됐다. 포카혼타스·라이언킹 등 미국 애니메이션을 흉내 내 수출하거나 '령리한 너구리' 같은 북한 TV용 만화를 제작했다.

 

"북에선 꿈의 직장이죠. 매달 흰쌀, 식용유, 설탕, 한우 1㎏을 줬거든요." 이런 대접도 외국인 직원에 비해 비참한 수준이라는 사실을 깨닫자 의욕이 꺾였다. 방광염을 핑계로 2002년 촬영소를 빠져나왔다. 그 후 폐기된 컴퓨터를 재조립해 내다 파는 일로 생계를 이어가던 그는 중국 컴퓨터 하드디스크에 들어 있던 한국 드라마를 발견했다. 이걸 CD로 복사해 팔아 떼돈을 벌었다. "그렇게 번 돈 200만원을 김정일에게 바쳤더니 '김일성 청년영예상'을 주더군요." 그러나 곧 보위부의 감시 대상이 됐고, 암거래가 발각돼 함경남도 리원으로 추방당했다. 2010년 9월, 그는 탈북했다.

 

한 달 뒤 남한에 도착한 그는 예상치 못한 고통과 마주쳤다. 도통 대화가 통하지 않았다. 특히 그를 미치게 한 것은 이해할 수 없는 남한의 웃음 코드였다. "나도 웃겨 보고 싶다"는 강한 열망이 솟았다. 이후 TV 개그 프로와 코믹 웹툰을 전투적으로 학습했다. 북에서 인정받은 그림 특기도 살리고 싶었다.

 

"웹툰에 '노동신문'이 등장하면 얼마나 웃기겠어요. 제가 겪은 실화를 남한식 개그로 녹이면 재밌어할 것 같았어요." 남한 단어 '친구'는 북한에선 남녀 사이일 경우 '연인'을 뜻한다. 이런 의사소통의 벽 때문에 주인공 영철이는 엉뚱한 가슴앓이를 한다. 북에서의 궁핍이 만든 습관도 소재가 된다. 국정원 교육 중 급식판 한가득 밥을 퍼담고 비닐봉투에 반찬을 숨겨가는 등 '웃픈' 현실을 담았다. "남북한의 문화 차이가 커 놀랍다는 댓글 반응이 많아요. 통일되면 난리 나겠다면서요. 근데 별문제 안 됩니다. 저도 1~2년 만에 극복했는걸요."

 

가끔은 댓글로 사상 검증을 당하기도 한다. "김일성·김정일·김정은을 향해 '개XX'라고 해보라"는 주문도 있었다. 최씨는 19일 웹툰 말미에 김씨 부자를 향해 '개XX'라 외치는 장면을 그려 넣었다. "댓글로 상처받진 않아요. 별별 죽을 고생 다했는데 댓글이 대숩니까."

 

방송 활동도 활발하다. TV조선 '모란봉클럽' 등 북한 관련 예능프로그램에 출연했고, 매주 2회 유튜브 방송 '몰랐수다 북한수다'에서 북한의 실상을 전한다. "웹툰이나 방송은 남한 사람의 호기심도 충족해주지만, 탈북자들에겐 그 어떤 적응 매뉴얼보다 실용적"이라고 했다. "서로 이해할 수 있는 장(場)이 됐음 좋겠어요. 웃어주시면 더 좋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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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7-04-21 북한 만화가에서 한국 웹툰 화가로

“탈북민 웹툰 작가가 연재하는 웹툰이 있다는 사실은 알고 계시나요?

 포털 사이트 네이버 웹툰에 ‘로동심문’을 연재하는 최성국 씨는 이미 많이 알려진 사람이다.

 

탈북 7년째인 성국 씨가 2016 5월부터 그리기 시작한 웹툰 로동심문에는 탈북민들이 한국에 처음 와서 문화 차이 때문에 겪는 웃지 못 할 사연을 재치 있게 묘사해 큰 인기를 얻고 있다.

 

또 국내외로 웹툰 로동심문을 주제로 강연회를 다니기도 한다.

 

성국 씨는 서울시 구룡역 근처에 있는 도서출판 꼬레아우라(대표 박창재)에서 2016 1월부터 직원으로 근무하고 있다.

 

직함은 아트디렉터 겸 과장이다최근에는 ‘로동심문’을단행본(꼬레아우라 펴냄)으로 출간하기도 했다.

 

 그림 소질 뛰어나 평양 미술대와 4.26촬영소에 가다

 

성국 씨는 북한의 대표적인 애니메이션 제작소인 ‘조선 4.26만화영화 촬영소’출신이다조선 4.26만화영화 촬영소는1980년대 외화벌이 위해 만들어진 곳으로 북한 최고의 직장이다.

 

어려서 그림 재주가 있었던 그는 중학교 때 반미 선전물을 그려 수상한 후부터 특별히 전문 미술교육을 받게 되었다.

 

이를 계기로 평양미술대학을 졸업하고 조선 4.26만화영화 촬영소에 들어갔다.

 

애니메이션은 보기에는 쉬워 보이지만 생각보다 힘든 3D 작업이다당시 조선4.26만화영화 촬영소는 외국 합작 애니메이션을 제작하고 있었다.

 

어느 날 같은 일을 하는 외국인의 급료를 알고 충격을 받았다같은 능력같은 일을 하는데 누구는 겨우 몇 달러를 받고누구는 수만 달러를 받는 사실을 알고 도저히 일을 할 수 없었다.

 

성국 씨는 직장을 그만두고 평양에서 사업을 시작했다컴퓨터에 관심이 있어 중국에서 고장이 난 컴퓨터를 1대당 10달러에 수입해 수리해 150~200달러에 판매했다.

 

그뿐 아니라 당시 한국 영화와 드라마의 인기가 높아 CD를 복제해 판매했다당시 인기가 많았던 ‘천국의 계단’, ‘파리의 여인’, ‘노랑머리’ 등을 판매했다하지만 CD 복사·판매가 발각돼 평양에서 추방당해 탈북하게 되었다. 

 

다양한 경험 통해 한국 사회를 배우다

 성국 씨 2010년 한국에 온 후 바로 디자인 회사에 취업했다처음에는 만화 쪽 일을 하고 싶어 이곳저곳을 알아보다가 TV 앞에서 얼어붙었다.

 

웃음 코드에 차이가 많아 어디에서 울고 웃어야 하는지 감을 잡을 수 없었다이를 계기로 사회주의 문화에서 자본주의 문화로 전환하는 게 생각처럼 빠르게 이뤄지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후 대북 관련 방송국 PD기자로아나운서로 다양한 경험을 했다시행착오를 줄이고자 여러 일을 하면서 많은 것을 배우게 되었다.

 

몇 년 정도 남한 생활을 하다 보니 사회가 조금씩 보이기 시작해 다시 만화에 도전하는 계기가 됐다.웹툰을 시작하면서 KBS, MBC, MBN, 채널등에 출연했다.

 

 만화를 보고 댓글로 욕을 하는 독자도 많았지만 전체적으로 ‘남북한의 문화적 차이를 잘 표현한다’, ‘남북한의 이질감을 줄여주는 통일 만화다’등 좋은 댓글이 더 많았다.

 

 특히 멀게 느꼈던 북한 인권,통일을 어렵게 말하지 않아도 긍정적 관점에서 받아들이는 댓글이 기억에 남았다.

“진지하게 접근하고 현실을 제대로 다뤄야 한다는 댓글을 본 적 있다제대로 현실을 보여주는 진실을 빼면 안 된다는 입장의 댓글이었다하지만 긍정적인 반응이 많다.

 

 어느 입장이든 댓글 등과 같은 독자의 목소리는 힘을 준다웹툰은 인권이나 통일을 직접 말하지 않아도 긍정적인 효과를 갖고 있다만화를 통해 이 같은 긍정의 힘을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남북한이 공감·동감할 수 있는 공통분모를 찾다

 성국 씨는 처음부터 유명 작가가 된 게 아니다시나리오든 소설이든 잘 쓰면 수많은 사람이 보듯 네이버 웹툰 만화도 마찬가지다.

 

그는 아마추어 작가들의 무대인 네이버 도전 만화에 자신의 만화를 게재해 주목을 받았다소재와 만화 그림은 독자들이 주목할 만큼 탁월했고 넉 달 만에 베스트 도전으로 승격하며 정식 연재의 꿈을 이뤘다.

 

처음에는 시사만화도 그려보고콩트도 그리면서 웹툰 만화를 준비했다단편 만화를 그리면서 조금씩 남한 사회를 알아가게 되었다.

 

70년 이상 갈라진 남북남한의 보수와 진보좌와 우를 떠나 한데 아우를 수 있는 매개체로 만화가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면서 남북한이 공감·동감할 수 있는 공통분모를 찾으면 관심을 끌어들일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채널A에 출연했을 때 O, X 퀴즈를 하면서 나름 스스로에 대해 생각한 적이 있다북한에 있을 때 평양역에 나가서 사람들을 관찰한 경험이 있다.

 

 내가 해야 할 일은 그림을 그리는 것이다그러려면 모습을 알아야 한다모습은 동물은 물론 사람도 잘 알아야 한다그래서 동물도사람도 많이 취재를 했다.

 

작업을 할 때 이런 습관이 도움을 주는 것 같다현재 그리고 있는 웹툰 ‘로동심문’은 북한을 소재로 다루지만 한국의 눈으로 푼다.

 

한국 사람이 이해할 수 있는 웹툰은 북한 사람도 이해할 수 있는 웹툰이기 때문이다그래서인지 어떤 이는 탈북민이 맞느냐고 묻기도 한다.

 

성국 씨는 자신의 웹툰을 “한국과 북한이 모두 이해할 수 있는 유일한 웹툰”이라며 “사회주의 관점에서 그렸다면 이해하기 어려웠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자본주의 관점에서 사회주의를 담기 때문에 이해가 쉽다는 것이다소수가 다수의 사회에 왔기 때문에 다른 점이 많을 수밖에 없다.

 

그런 만큼 다수의 시선으로 보게 하는 게 더 좋다는 것이다성국 씨는 이런 점을 인정하고 생각을 바꾼 후에는 만화를 그리기 위한 어려움도 없어졌다고 한다 

 

“만화가는 나의 숙명이라 생각” 

성국 씨는 북한에서 최고의 직장이라는 ‘조선4.26만화영화 촬영소’에 8년을 다녔고한국에 와서도 2년 동안 좋은 직장에서 일했다.

 

하지만 남한에서 5년을 살고 얻은 것은 “만화가를 숙명으로 생각할 것”이라는 결론이다이전 직장도 재미있게 근무했지만지금이 더 행복하다는 뜻이다.

 

자신이 잘 할 수 있고 잘 할 수 있기 때문에 다른 경험보다 웹툰 작가로서의 현재 모습이 훨씬 좋다는 것이다.

 

“한국에서 살아 보니 사랑은 돌고 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은혜를 베풀면 도움이 돼 되돌아온다또 정직하면 다른 사람의 롤모델도 될 수 있다.

 

초보 탈북민에게는 어떤 일에 휘둘리지 말라고 당부한다중요한 것은 ‘자기 자신을 잊고 견디는 것이 정착으로 가는 길’이라 생각한다그리고 자신이 무엇인가를 스스로 할 수 있는 상태가 됐다면 정착을 했다고 봐도 좋을 것 같다.

 

성국 씨는 탈북과 남한에 온 게 ‘걸림돌이 아닌 디딤돌’이라며 자신이 잘 할 수 있는 것을 잘 살려 정착한 사례다.

 

꼬레아우라에서 웹툰 작가로 활동하고 있는 그의 모습이는 성국 씨가 북한에서 4.26만화영화 촬영소에서 근무한 경험과 애니메이션보다 만화가 더 잘 어울린다는 것을 알고 웹툰으로 자신의 꿈과 적성을 살린 경우다.

  

“앞으로 문화·예술 분야 일을 계속하고 싶다”

성국 씨는 만화를 화합과 소통의 도구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만화로 북한을 알리는 것은 물론 한국과 북한의 이해를 돕고서로 이해하고 소통할 수 있는 매개체 역할을 할 수 있다고 본다.

 

특히 북한 이야기를 한국의 눈으로 보고 담기 때문에 효과적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면서 만화는 말하기 힘든 것도 즐겁게 보여줄 수 있는 방식이라며 네이버에 웹툰 코너가 있고 자신의 만화인 ‘로동신문’을 수많은 사람들이 보고 북한통일 등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는 것은 좋은 일이라 생각한다고 밝혔다.

 

또한 성국 씨는 남한에 온 후에는 ‘자기 자신을 잊고 견디는 것이 정착으로 가는 길’이라고 강조한다.

 

“견뎌야 한다일정한 시간이 지날 때까지 ‘나는 죽었다’는 심정으로 살아야 한다자기 자신을 잊어야 한다시간이 어느 정도 지날 때까지는 어떤 것이든 담는 데 집중해야 한다.

 

담기를 하면 나중에 빈 공간은 꼭 차기 마련이다북한을 모른다고 해서 얕잡아볼 사람은 없다힘든 생활을 감수해야 한다그러기에 견뎌야 한다견디지 못하면 정착은 무척 어렵다.

 

성국 씨는 앞으로 문화·예술 분야에서 일을 계속하고 싶다특히통일 후에도 남한과 북한을 문화로 이어주는 역할을 하고 싶은 게 바람이자 희망이다문화와 예술을 향한 그의 소망이 통일 한국에서 빨리 빛나기를 기대한다.

동아일보

 

■ 2016-08-01  2년 만에 시댁 전 재산 물려받은 탈북며느리

최은주 씨는 98년 북한을 탈출하여 중국에서 살았다. 2000년에 한 번 북송되어 감옥에서 고초를 겪다가 다시 탈북했다. 그리고 2008년 불법체류자로는 도저히 못 살겠다고 결심하고 중국에서 남한으로 오게 되었다.

 

2009년 하나원을 나와 대구에 집을 받은 최 씨는 하나센터 교육이 끝나자마자 가까운 식당 등에서 6개월 동안 일을 했다. 그러면서 한 남자를 만나 교제를 시작했다. 가까운 동네에 살며 농사일을 하고 있던 남자는 이미 한 번 결혼은 했지만 별거 상태였다.

 

한적한 자그마한 시골동네에서 최 씨와 그 남자의 열애는 삽시간에 동네에 퍼지고 시어른들의 귀에도 들어갔다. 동네 어른들은 젊고 예쁘고 참한 최 씨와 그 남자와의 관계에 관심이 많았고 북에서 왔다는 여자와 동네 홀아비처럼 늙어가는 남자의 교제에 너그러웠다.

 

그러나 시어른들은 완강히 반대를 했다. 험한 시골에서 며칠이나 살 것이며, 전 며느리처럼 도망갈지 모른다는 불안감 때문이었다. 그리고 포기하지않는 남자의 추진력 때문에 두 사람은 결혼을 했고 최 씨는 시어른들을 모시고 살림을 시작했다.

 

공판장·농협 대신 1대1 직거래로 돌파구 찾아

결혼 당시 시부모님은 연로한 데다 몸이 불편했다. 시아버지는 호흡기 장애 2급이어서 숨 쉬기도 힘들 만큼 심한 상태였고 시어머니도 대소변을 받아낼 만큼 병세가 중한 상태였다.

 

최 씨는 하루 세끼 시부모님 식사와 대소변을 받아내고 농사일을 마치고 들어오는 남편을 위해 식사를 따로 준비했다.

 

하루 여섯 번씩 상을 차리면서 1남1녀의 자식을 낳아 키웠다. 그는 젊은 며느리라서 며칠 못 살고 도망갈 것이라는 시어른들에게 인정받기 위해 악착같이 살림을 하고 남편을 도와 농사도 지었다. 그는 손이 열이라도 모자랄 만큼 일을 했다.

 

처음 시집에 들어갔을 때, 시아버지는 시골동네 슈퍼를 운영하면서 감 농사도 짓고 있었다. 그러나 시집에서 농사지은 감들은 제대로 말리지 않아 곰팡이가 끼고 썩어가고 있었다.

 

최 씨가 다른 농가들을 살펴보니 그들은 새로운 기술을 도입해 질 좋은 곶감들을 만들고 있었다.

 

그는 곶감 농사를 하는 동네 어른을 찾아가 기술을 좀 가르쳐 달라고 부탁했지만 자기만의 비법을 전수해 주려 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힘들게 지어놓은 감들을 썩게 내버려 둘 수가 없는 노릇이었다.

 

최 씨는 그때부터 팔을 걷어붙이고 농사일에 뛰어들었다. 남편과 시집을 비롯한 농촌에서는 한 해 동안 힘들게 지은 농산물 대부분은 공판장이나 농협 등 유통망을 통해 도매로 팔려나가고 있었다. 도매로 팔면 한꺼번에 물건을 처리하기는 쉽지만 수익이 매우 낮았다.

 

힘들게 지은 자식 같은 상품인데 싸구려로 팔려가는 것이 못마땅하고 가슴이 아팠다. 그는 생각 끝에 트럭에 농산물을 싣고 시내로 향했다. 그리고 현장에서 1대1 직거래로 물건을 팔았다. 최 씨의 생각은 성공했다.

 

“사세요, 사세요, 맛있고 당도 높은 농산물입니다. 직접 키운 농산물 사세요.”

 

하루 종일 부르짖으며 물건을 파느라 몸은 지치고 피곤했지만 도매로 넘기는 가격의 배에 가까운 수입을 거둘 수 있었다. 곶감을 말리는 방법도 터득해 창고의 높은 다락 끝에 줄을 매달고 곶감을 널어 썩어가던 감들도 모두 살려냈다.

 

그뿐 아니라 인터넷 홈페이지를 개설해 농민과 시민이 직거래를 할 수 있게 했고, 오프라인에서도 직거래로 물건을 팔 수 있는 판로를 개척했다.

 

내가 지은 농산물은 내 손으로 판다

그가 시집에 들어가고부터 시집의 살림은 조금씩 나아졌다. 평생을 농사 지어도 남는 게 없다고 하소연하던 시아버지의 입은 귀에 걸렸다. 그리고 시집간 지 만 2년 만에 시아버지는 시집의 모든 재산을 아들의 이름이 아닌 며느리 최 씨의 명의로 바꿔 주었다.

 

최 씨가 시아버지에게 인정받고 집안의 실질적인 가장이 되기까지 그가 어떤 노력을 했고 어떤 공을 세웠는지는 그 마을 사람들이 모두 증인이다.

 

그는 지난날의 고생들을 회상하며 이렇게 말한다.

 

“고향을 벗어나 타국을 떠돌고, 이 땅에 정착하기까지 가난하고 배고팠던 고향 쪽으로는 돌아보고 싶지도 않을 만큼 상처들이 깊었습니다.

 

그러나 시집에 들어와 농사를 지으며 겪었던 고난에 비하면 고향에서의 배고픔은 아무것도 아니었습니다. 이곳에서 산 설고 물 설다는 말이 무슨 말인지 뼈저리게 체험했습니다. 진짜로 뼈가 부서지도록 일을 했습니다.”

 

그는 인터뷰 중간 중간 너무 힘들다며 눈물을 보였다. 그는 힘들 때면 모든 것을 내려놓고 도망가고 싶었다. 하지만 한 해 동안 농사를 짓고 풍성한 결실들을 맞이하면 농사를 지은 후 느끼는 기쁜 마음만 남는 다고 말한다. 그 말을 하는 그의 얼굴이 환한 걸 보니 그는 천생 농사꾼인가 보다 싶다.

 

최 씨는 남편과 함께 상주에서 농사를 짓는다. 남편은 2만 평이 넘는 논밭을 관리하며 벼농사를 짓고 최 씨는 배 농사와 감 농사를 한다. 그의 수고와 성공담은 올해 KBS, MBN, 인간극장 등에서 취재해 탈북민의 성공적인 정착사례라고 소개된 바 있다.

 

그에게 꿈이 뭐냐고 물었다.

 

“나만의 특허를 내고 싶습니다. 거위 사업을 새로 시작했습니다. 거위를 잘 키워 성공하고 싶습니다. 반드시 성공한다는 자신감은 있지만 주변에서

 

도와주지 않으면 시간이 좀 걸릴 것 같습니다.”

 

그는 정착의 성공담을 들려 달라는 질문에는 “열심히 살면 무슨 일인들 못하랴, 작정하고 시작하면 어디서든 성공한다”며 말을 아꼈다.

 

최은주 씨는 고운 얼굴을 갖고 있지만 악착같이 강인하고 목표를 세웠으면 뒤돌아보지 않고 앞만 보고 전진하는 스타일이다. 인터뷰를 하는 날에도 거위를 키우기 위해 농촌진흥청에 의뢰를 하러 가는 길이라고 했다.

 

농촌진흥청에서는 닭, 오리 등 다른 짐승을 키우는 기술이나 정보는 있지만 거위에 대한 정보는 없다며 잘 준비하고 배워서 꼭 성공하겠다고 말한다. 일을 밀고 나가는 그의 파워가 대단해 보인다.

동아일보 주성하 기자

 

■ 2017.03.24 ‘탈북 래퍼’ 강춘혁씨 첫 개인전

“이 얼굴이 바로 탈북민들의 서글픈 자화상”

 

/조현호 영상미디어 인턴기자

 

슬픈 표정을 한 남성의 얼굴이 하늘색 배경에 그려져 있다. 한쪽 눈에는 한국을 상징하는 태극기가, 다른 한쪽 눈에는 북한을 상징하는 인공기가 눈동자 대신 담겨 있다. 그의 표정은 밝지 않다. 검은 후드티를 입은 그의 얼굴은 윤곽선이 찢겨져 나가는 모습이다. 금방이라도 부스러져 없어질 것처럼 보인다.

 

탈북민 출신 화가 강춘혁(31)씨가 자신의 대표작으로 손꼽는 그림 ‘혼돈, 혼동’이다. 강씨가 스스로의 모습을 그린 이 그림은 그만의 자화상이 아니다. 그는 이 그림을 “정체성의 혼란을 겪는 모든 탈북민들의 자화상”이라고 설명했다. 지난 3월 6일 오후 2시 서울 종로구 혜화동의 한 갤러리에서 강씨를 만났다. 그는 ‘봄의 혁명’이라는 주제로 지난 3월 1일부터 6일까지 이 갤러리에서 첫 국내 개인전시회를 열었다.

 

“친구들하고 치킨에 맥주를 먹으면서 축구를 보다 보면 누구를 응원해야 할지 모를 때가 있어요. 저도 2002년 월드컵을 겪어 봤고 한국 축구 덕분에 가슴이 뜨거워졌던 적이 많아요. 하지만 남북 친선 축구를 할 때 북한 팀이 돌파하는 것을 보면 마음 한구석에는 찡할 때가 있어요. 그럴 때면 ‘나는 이도 저도 아닌 사람’이라는 느낌이 들곤 했죠.”

 

강씨는 함경북도 온성군에서 1986년에 태어났다. 그는 13세 되던 1998년 부모를 따라 두만강을 건너 탈북했다. 이후 3년간 중국에서 지내다 2001년 한국에 입국해 정착했다. 한국에서 중·고교를 검정고시로 마친 후 서울 홍익대에서 회화과를 졸업했다.

 

“우리 탈북민들은 북한에서 누리지 못하는 인권과 자유를 찾아 탈출한 사람들이에요. 하지만 탈북민에 대한 편견은 여전히 존재해요. 아직까지 한국 사회에 완전히 섞이기 어려운 것이 사실이죠. 그런 어려움을 알리고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것이 제 역할이라 생각했어요.”

 

현재 정부가 공식 집계한 국내 탈북민은 약 3만명이다. 이들 중 대다수는 일자리를 얻어 생계를 꾸리고 있다. 강씨처럼 미술과 같은 예술 분야에 종사하는 탈북민은 흔치 않다. 강씨는 “내가 한국과 북한에서 겪은 경험을 예술작품으로 만들어 사람들한테 알려야 한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강씨가 이번 전시회에 낸 작품은 30여점이다. 해외 전시회나 합동전시회에 냈던 작품들을 모아 국내에서 첫 개인전시회를 열었다. 강씨는 독일 드레스덴, 영국 맨체스터와 같은 곳에서 5회 공동 전시회를 연 적이 있다. 이번 전시회는 사단법인 북한인권시민연합(이사장 박범진)을 비롯한 여러 단체의 후원으로 열렸다.

 

북한에서 그림은 강씨의 유일한 취미생활이었다. 틈나는 대로 종이에 연필로 그림을 그리고, 종이가 부족하면 벽에 낙서를 했다. 그때 쌓은 내공 덕분에 강씨는 정식 미술 교육을 받지 않고도 미대 입시 실기에 합격할 수 있었다. 중·고교를 검정고시로 졸업한 후 미술학원을 찾아가 혼자 한 달 연습한 것이 대학 입시를 위해 준비한 전부였다. 그는 “평소 그림을 그릴 때 고집이 있는 편이었다”며 “시험 보기 한 달 전 만난 선생님 한 분이 입시를 위해 정물화를 준비하라고 알려주신 것이 도움이 됐다”고 말했다.

 

강씨가 ‘혼돈, 혼동’과 함께 가장 아끼는 작품으로 꼽는 작품은 ‘청춘혁명’이다. 강씨가 스스로의 두 손을 그린 이 그림 역시 자화상 격이다. 왼손에는 ‘for the freedom 19980309’라는 글이, 오른손에는 ‘spring revolution(봄의 혁명·春革)’이라는 글이 새겨져 있다. 왼손에 그려진 글귀는 그가 자유를 찾아 탈북한 날짜를, 오른손에 그려진 글귀는 ‘춘혁’이라는 그의 이름을 뜻한다.

 

독학으로 미대 진학

강춘혁씨의 그림은 크게 두 가지 스타일로 분류할 수 있다. 펜으로 날카롭게 스케치한 그림과 파스텔톤으로 부드럽게 그린 그림이다. 스타일이 워낙 달라서 서로 다른 두 사람이 같이 전시회를 열었냐고 묻는 방문객도 종종 있다고 한다. 그는 이유에 대해 “그림의 주제가 크게 두 부류로 나눠지다 보니 그런 것 같다”고 설명했다.

 

그의 그림이 담고 있는 주제의식도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한 가지는 김정은 체제를 비판하는 풍자성 그림이다. 북한의 체제를 풍자하고 고발하는 그림은 만화스럽게 스케치를 하는 편이다. ‘강성대국’ ‘허상’ 등의 그림이 여기에 포함된다. 그는 “그림의 주제가 무겁다 보니 가볍게 그리는 편”이라고 말했다. 보는 사람 스스로가 메시지를 느낄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다른 한 가지는 강씨 본인이 어릴 때 고향에서 겪었던 일들을 기억하는 회상형 그림이다. 어린아이가 혼자 산에서 자기 키보다 더 높게 쌓은 땔감을 지고 걷는 그림이 그 예다. 파스텔톤으로 부드럽게 그리는 편이다. 강씨는 “보는 사람들은 마음이 아플 수도 있겠지만 나한테는 고향에서의 아련한 기억”이라고 말했다. 강씨는 “다들 비슷한 경험이 있어서 탈북한 친구들에게 보여주면 그림이 한눈에 들어온다고 한다”고 말했다.

 

봄은 강씨에게 특별한 계절이다. 춘혁(春革)은 강씨가 북에 있을 때부터 쓰던 이름이다. 봄의 혁명이라는 뜻이다. 이름이 맺어준 덕분인지 그는 3월 9일 탈북해 봄에 첫 개인전시회를 열었다. 그는 “봄하고 인연이 많다”며 웃었다.

 

강씨는 대중에 ‘탈북 래퍼’로 먼저 이름을 알렸다. 2014년 케이블 TV 프로그램 ‘쇼미더머니’에 출연해 북한의 김정은과 리설주를 비난하는 랩으로 시청자들에게 알려졌다. 당시 출연해 만난 가수 양동근씨와는 지금까지 인연을 유지하고 있다. 강씨는 “내가 그림으로 보여주는 것과 음원으로 보여주는 것의 문제의식은 비슷하다”고 말했다. 그의 말처럼 북한의 김정은 체제를 비판하고 풍자하는 그의 그림과 노래에는 닮은 구석이 많다. 그에게는 두 마리 토끼인 그림과 노래가 모두 놓칠 수 없는 직업이지만, 굳이 따지자면 화가가 본업에 가깝다.

 

“요즘 젊은 친구들이 한 번쯤 북한의 상황에 대해 생각할 기회가 있었으면 했어요. 물론 사상 최고 수준의 청년실업이 닥친 상황에서 북한 동포들까지 생각할 여유가 없는 건 저도 알아요. 하지만 탈북민에 대해 관심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한 민족이니까요.”

배용진 주간조선 기자  편집=오현주

 

2017-05-20  된장녀’로 변신해 성공한 탈북여성

‘된장녀’…어느 탈북여성의 이야기

탈북자 간첩사건이 사회적응과도 연계된다는 이색적인 뉴스가 퍼지는 순간이었다.

 

같은 날 필자는 ‘북한이탈주민 자활사업’의 일환으로 서울 강서구에 새로 개점한 탈북민들의 ‘행복커피숍 오픈식’에 참석해 축하하고 난 뒤 이런 질문을 던져보았다.

 

‘탈북민들 가운데 사회적응자가 많은가, 부적응자가 더 많은가’ 당연히 적응자가 훨씬 더 많다는 대답이 쏟아져 나왔다.

 

이 좋은 대한민국에서 살면서 적응하지 못해 간첩이 됐다는 식의 경찰브리핑은 잘못돼도 한참 잘못됐다〉는 비판에 이어 주변 사람들이 등을 떠미는 40대 후반의 한 탈북민과 마주 앉았다.

 

허진 씨(사진)는 탈북민들속에 널리 알려진 이름 하여〈된장전문가〉다.

 

청진에서 자랐고 철도대학을 졸업했으며 2006년 2월 대한민국에 입국한 탈북여성으로, 입국한 첫날부터 북한식품 개발자의 남다른 행보를 이어가고 있다.

 

어떻게 되어 사람들의 시선이 덜 미치는 된장과 인연을 맺게 됐고 된장을 만든다는게 탈북민들의 사회적응과는 또 어떻게 연계되는지를 묻는 필자에게 허 씨는 다소 충격적인 이야기를 해 주었다.

 

“인간의 삶에 가장 필요한 것인데 만지기를 꺼려하더라고요”

 

그러면서 그는 된장 한 숟갈이 없어 어머니의 소원을 풀어드리지 못했던 ‘과거’를 이야기 했다.

 

1997년 이른바 ‘고난의 행군’시기 만성질병에 영양실조까지 겹친 그의 어머니가 사경을 헤매고 있을 때였다고 한다.

 

어느날 의식을 회복한 어머니가 된장국을 찾으시는데 집안엔 서발막대를 휘둘러도 돈 되는 물건은 이미 다 거덜이 났을 때의 일이다.

 

겨우 마련한 쌀 한줌으로 죽 한 공기를 떠 드렸는데 죽은 입에 대지도 않고 된장국이라니…

 

허 씨는 다시 집안 곳곳을 뒤져 돈이 될 만한 ‘물건’을 싸 들고 장마당으로 달려갔다.

 

돈이 될 만한 물건이라고 해봐야 이 빠진 밥사발 몇 개가 전부였는데 사겠다는 사람도 없고 된장과 바꾸겠다는 사람은 더더욱 없었다.

 

그래도 사정을 아는 건너 마을 먼 친척이 주는 된장 한 숟가락을 들고 부리나케 집으로 달려왔지만 이미 어머니는 세상을 떠나셨더라고 이야기하는 허 씨의 눈가엔 피 같은 이슬이 방울방울 맺혀있었다.

 

“나에겐 그렇게 귀한 된장이고 한 맺힌 된장국인데 막상 한국에 와 보니 화려하고 기름진 음식들에 밀리고 있더라고요. ‘하나원’에서 생활할 때도 정말 먹고 싶었던 게 된장국이었는데 생선과 고기, 갖가지 채소에 밀려 된장국 먹는 날은 정말 손가락에 꼽을 정도였습니다.”

 

그래서 ‘하나원’ 생활을 마치고 서울의 한 임대아파트에 밥 가마를 걸어놓은 순간부터 열심히 끓여 먹으려던 된장국이었는데, 웬일인지 날이 갈수록 입에서 멀어지게 되었다는 허 씨.

 

처음엔 자신의 ‘교만해진 입맛’에서 원인을 찾았고 며칠 후엔 ‘남조선 된장의 문제점’을 발견했다고 했다. 일단 쓴맛이 섞여 있는 게 흠이라면 흠이라고 허 씨는 말했다.

 

“그래서 나만의 된장을 만들기로 작심을 했습니다. 메주콩을 푹 삶아서 메주를 만들었고 저만의 배합률을 공식화 했으며 물엿대신 설탕을, 보리쌀로 식혜를 만들어 독특한 장맛을 선보이기도 했죠.”

 

처음엔 집에서 만든 ‘나만의 된장과 고추장’을 양천구 소재의 탈북민교회 성도들에게 ‘무료로 봉사’했고 소문이 나기 시작하면서 제법 그럴듯한 용기에 담아 ‘주문’봉사도 했다.

 

그러다가 문득 ‘허진 표’ 된장과 고추장을 상품화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처음에는 무척 고민스럽더라고요. 된장국 한 그릇 제대로 못 드시고 하늘나라로 가신 어머니가 생각났고, 제대로 된 장맛을 주변사람들에게 보여주기 위해 시작한 일이지만 이게 상품으로 되자면 얼마나 ‘높은 산’을 넘어야 하는지 제대로 된 걱정이 앞서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공부를 했고’ 대한민국의 거의 모든 된장을 ‘먹어보았고’, 시골 어머니들의 밥상 앞에서 제대로 된 장맛의 비결을 배우기도 했다.

 

이런 허 씨를 두고 처음엔 ‘된장에 미친 된장 여, 되지도 않을 일에 정신을 놓아버린 여자’라는 평가가 따랐고 지어는 ‘적응을 못해 여기저기 떠돌아다니는 여자’라는 소문도 났다.

 

그럼에도 허 씨의 도전은 멈추지 않았고 남과 북 주민들의 입맛을 제대로 평정할 ‘통일된장’으로까지 꿈의 오작교를 펼쳐나갔다.

 

서울에서 생활한지 1년도 채 못돼 허 씨는 강원도 태백으로 이사를 갔고 태백산기슭의 양지바른 곳에 한 개, 두 개, 장독을 차려놓기 시작했다.

 

그렇게 시작해서 지금은 160개의 장독이 줄지어 늘어섰고 자칭 대한민국의 대표 브랜드 ‘진록정’이 탄생했다.

 

강원도 태백시 절골2길에서 한껏 무르익은 허 씨의 메주가 된장이 되고 고추장이 돼서 지역주민들에게는 물론 전국곳곳에 퍼져나가데 된 것이다.

 

2010년과 2013년엔 강원도 특산물 박람회에서 1등을, 2013년 2월엔 한국음식박람회에서 2등을 석권했다.

 

지난해 서울 양재동에서 열렸던 ‘한가위 음식 기획전’에선 평가위원들로부터 “국내에서 최고의 장맛을 가진 ‘진록정’이라는 평가도 받았다.

 

그렇게 허 씨의 ‘진록정’은 전국적으로도 꽤 알려진 향토식품의 대표브랜드도 발돋움했다.

 

15년을 된장에 바쳤고 된장과만 어울려 살아온 ‘된장 여’ 허 씨의 인생이 빛을 발하기 시작한 것이다.

 

현재 한식, 중식, 양식요리사 자격과 아동음식, 웰빙음식, 기초약용 음식 등 음식 쪽 자격은 물론 검퓨터 활용과 일러스트, 영상미디어 등 그가 소유한 자격증만 해도 수십 가지가 넘는다.

 

이처럼 악착같이 섭렵한 자격증들과 한국문화 모두가 “제대로 된 장맛을 내기 위해 필요한 것이다”고 허 씨는 말했다.

 

지금은 강원관광대학 호텔조리학과를 다니며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지만 ‘제대로 된 장맛’을 내기위해 ‘필요한 과정’을 거치고 있을 뿐이라고 허 씨는 말했다.

 

“언젠가는 통일이 될 거잖아요. 장독의 장은 오랜 것이 좋지만, 오래다고만 좋은 것이 아니고 환경도 꾸준히 개선돼야 하거든요. 배워서 나쁠 게 없죠. 통일되는 그날 꼭 세상에서 제일 맛난 된장을 들고 고향사람들을 찾아가고 싶어요!”

 

허 씨가 왜 주변 탈북민들의 귀감이 되는지를 구구한 설명 없이도 알게 되는 순간이었다.

 

하는 일의 필요를 알고 목표가 있으며, 곁눈 한번 팔지 않고 목표만을 향해 정진하는 도전정신이 사람들의 머리를 끄덕이게 하였으리라…

 

바라는 것이 있다면요?

 

필자의 질문에 “엄청 소개해 주세요. 장맛만큼은 어디 내 놓아도 손색이 없는 ‘진록정’입니다. 된장과 고추장, 간장과 청국장, 그리고 가시오피 청국장 가루까지 대한민국 최고의 맛을 내는 ‘진록정’이라고 자랑하고 싶어요.

 

참, 주문전화요? 033, 553,9579번 ‘진록정’입니다! 휴대폰도 있어요. 010-9301-7579번입니다”

 

그러면서 그는, 현재 160개의 장독으론 조금 부족하고 500개 정도의 장독이 있으면 발효와 숙성을 동시에 진행하는 제대로 된 생산 환경을 만들 수 있다는 아쉬움을 털어 놓았다.

 

“콩이 가지고 있는 본연의 맛을 살리자면 시간이 필요하거든요. 장맛을 낸다는 건 시간과의 싸움이고 시간은 곧 장독에서 얻어지는 것이죠.”

저자: 김성민,  출처 자유북한방송

 

■ 2018.01.13 국경도 얼굴도 없는 탈북화가, 나는 선무다

[박돈규 기자의 2사만루] 국내외서 가장 비싼 탈북화가 北서 배운 프로파간다 미술로 그곳의 '최고 존엄' 조롱 "처음엔 김정일 그리는데 붓이 떨렸어요, 너무 무서워서" 참이슬·대동강맥주 그려놓곤 "통일 폭탄주인데, 맛이 좋습니다"

▲국내외에서 작품 값이 가장 비싼 탈북 화가 선무가 작업실에서 ‘너는 누구냐2’(190×130㎝)를 붙잡고 서 있다. 불온한 붉은색 바탕에 미키마우스를 그려넣어 북한 지도자 김정은을 풍자했다. 얼굴을 공개할 수 없어 마스크를 쓴 선무는 “천장에서 비가 샌 흔적이 남은 그림”이라며 “누구도 흉내 낼 수 없기에 더 멋이 있다”고 했다. / 김지호 기자

 

1998년 10월 두만강 앞에서 한참을 망설였다. 건너야 하나 말아야 하나. 그는 담배밭에 숨어 밤이 오길 기다렸다.

 

"풀벌레 울음소리가 크게 들렸어요. 얼마나 지났을까. 불안과 공포 속에 강으로 걸어 들어갔습니다. 북한 쪽 수심은 얕아요. 중국으로 가까이 갈수록 툭 떨어졌습니다. 거기서부터는 헤엄을 쳤어요."

 

'얼굴 없는 화가' 선무(線無·46)는 20년 전으로 돌아간 표정이었다. 등유 난로에 올려놓은 주전자가 김을 내뿜고 있었다. "북한에서 살 땐 심장도 내 것이 아니었다"며 그가 말을 이었다. "가슴팍에 김일성·김정일 초상휘장을 달고 다녔지요. 탈북(脫北)하곤 떼어 버렸어요. 이제 심장은 저를 위해서만 뜁니다."

 

그는 국내외에서 작품값이 가장 비싼 탈북 화가다. 얼굴도 본명도 숨긴 채 살고 있다. "북에 남은 부모형제가 위험해지기 때문"이라고 했다. '선무'라는 가명은 '경계도 국경도 없다'는 뜻이다.

 

지난달 5일 행주산성 근처 작업실엔 '김일성' '김정일' '김정은'이 즐비했다. 최고 존엄은 그의 붓끝에서 우스꽝스러워진다. 백설공주, 신데렐라, 미키마우스, 팅커벨 같은 디즈니 만화 캐릭터들이 붉은 망토 입은 김정은을 포위한 그림을 그려놓곤 '벗고 놀자'란 제목을 붙이는 식이다. 북에서 배운 프로파간다(정치 선전) 미술로 그곳 지배자를 조롱한다. 선무는 "이제는 김일성·김정일이 하라는 대로 그리지 않고 나를 위한 프로파간다를 한다"고 했다. '같은 스타일로 생각만 다르게'하는 셈이다.

 


▲흘림체 ‘나는 선무다’. 선무가 붓으로 쓴 필체다.

 

'천국'의 국경을 넘다

작업실에 들어서자 북한 삐라(대남 전단) 같은 포스터가 보였다. 남한 소주 참이슬과 북한 대동강맥주를 나란히 그려놓곤 붉은 바탕에 흰 글씨로 '폭탄주를 마시자'라고 적었다. "저게 '통일 폭탄주'인데 맛이 아주 좋습니다"라며 그가 커피를 건넸다.

 

―북한에서도 커피 드셨나요.

"커피라는 말도 몰랐죠. 맛은 지금도 몰라요(웃음)."

 

―왜 탈북했는지요.

"고향이 황해도인데 중국에 친척이 있었어요. 너무 배가 고파 돈이나 물건을 건네받으러 올라갔지요(1994~1998년 북한은 기근이 극심했다). 여행증명서는 함북 청진까지만 받고 숨어서 두만강변까지 갔고, 돈 받고 재워주는 민가에서 전화를 걸었어요. 그런데 중국 친척이 '국경 감시가 강화돼 지금은 위험하니 돌아가라'는 거예요. 주머니에 돈도 없고 집에 가다간 개죽음당할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요?

"여기까지 온 김에 강을 건너보자, 무작정 떠난 겁니다. 안전한 경로를 일러줄 브로커도 제겐 없었어요."

 

―북한이 싫어 도망친 건 아니군요.

"과거의 저는 김일성·김정일을 위해 죽을 각오가 돼 있던 놈이에요. 그게 전부였으니까. 중국에 가서 큰 충격을 받았어요. 내가 믿었던 게 다 허상이고 가짜라니. 이젠 제가 북한에 살았다는 사실이 신기해요. 사회를 저런 식으로 끌고 간다는 게 기가 막히죠."

 

―중국에선 어떻게 살았나요.

"나무껍질도 벗기고 담배 수매하는 곳에서 잡일도 했어요. 잠깐이지만 건달로도 살았고요. 조선족들은 '야, 너네는 배곯잖아. 강택민(장쩌민)이 봐. 우리는 그래도 배불러' 하면서 탈북자들을 업신여겼습니다. 처음엔 '이 자식들이 제정신인가' 했어요. 북한에서 나와 보니 김일성·김정일은 욕만 먹고 잘한 게 하나도 없는 거예요."

 

―길바닥에 걷어차이는 자갈처럼요?

"딱 그런 꼴이었죠. 중국에서 남한 사람은 우러러보는데 북한 사람은 숨어다녀야 했어요. 남한에서 온 사업가들 주머니 털 생각을 하는 놈들도 많았습니다. 혼란스러웠어요."

 

―한국엔 어떻게 들어왔나요.

"중국은 싫고 불법체류자 신세라 남한 국적을 가져야겠다고 생각했어요. 라오스와 태국을 거쳐 2001년 말에 들어왔습니다. 라오스에선 감옥에 갇힌 적도 있는데 'I am from South Korea'라고 했더니 남한 대사관에 연락한 거예요. 태국에 머물 때 선교사가 '남한 사회는 혈연·지연·학연이 있어 비집고 들어가기 힘들다'고 하더군요. 저는 학연을 붙잡기로 했습니다."

 

▲이념의 옷을 벗고 세계와 함께 놀자는 뜻을 담은 그림 ‘벗고 놀자’(130×190㎝). 김정은이 디즈니 만화 캐릭터들에 포위돼 있다. / 선무 제공

 

"눈 감으면 북한, 눈 뜨면 남한" 홍익대 회화과 03학번으로 입학했다. 탈북자의 학비는 정부와 대학이 반반씩 댔다. 그는 "대학원은 대출받아 다녔는데 졸업한 뒤 작품이 잘 팔려 금방 다 갚았다"고 했다. 

 

―북에서도 화가가 꿈이었나요?

"해마다 12월 31일이면 전국에서 예술적으로 재능 있는 아이들을 뽑아다 공연을 합니다. 김일성이 걔들을 격려하는 모습을 어려서부터 TV로 봤어요. 나도 미술로 지도자를 기쁘게 해드리고 싶었지요. 군복무 할 땐 우리 대대(大隊)의 역사와 김일성이 지도한 내용을 그림으로 그렸어요."

 

―한국땅 밟을 때 첫인상은 어땠나요?

"인천공항에 도착했는데 중국이나 태국과는 달랐습니다. 되게 깨끗한 게 먼저 눈에 들어왔어요. '국정원 가면 두들겨 패면서 조사한다'고 들었는데 그렇진 않더라고요."

 

―처음 정착한 곳은요.

"(충남) 공주요. 1지망은 다들 서울입니다. 저도 그랬는데 광주비엔날레를 들어봐서 2지망을 광주로 쓴다는 게 그만 공주를 적었어요."

 

―홍익대에서 만난 청년들은 어떻던가요.

"신입생 환영회부터 충격의 연속이었죠. 배알대로 장기자랑을 하라는데 저는 막막해서 맥주병을 깼습니다(웃음). 수강 신청도 낯설었어요. 북한과 달리 선택해야 해 괴로웠고 책임이 뒤따라 두려웠죠. 동기들이 띠동갑인데 '형, 우리 한잔해요'가 지나가는 말이더라고요. 저는 그걸 진짜로 받아들여서 오해도 생겼죠. 처음엔 김정일을 그렸습니다. 붓이 떨렸어요. 이놈을 그려야 하는데, 그게 내 전부였는데, 자꾸만 뒤를 돌아봤어요."

 

―왜죠?

"북한에선 함부로 김일성·김정일을 그릴 수 없으니까. 이래도 되나 싶고 무서웠습니다."

 

―탈북 20년이니 적응은 끝났겠지요.

"아직도 이 사회에 적응하는 과정입니다. 북에서 받은 세뇌를 쉽게 떨칠 순 없어요. 탈북자 대부분이 그럴 겁니다. 북한에도 '자유'라는 말은 있지만 정권이 그어놓은 선 안에서의 자유일 뿐이죠. 탈북 초기엔 '눈 감으면 북한, 눈 뜨면 남한'이었습니다."

 

―무슨 뜻인가요?

"남한에 들어와 5년 동안은 매일 북한에 가 있는 꿈을 꿨어요. 밤마다 김일성·김정일에게 쫓겨요. 눈 뜨면 한숨이 나오죠. 요즘에는 1년에 한 번 정도로 줄었습니다. 육체적인 탈북보다 심리적인 탈북이 훨씬 오래 걸렸어요."

 

▲병상에 누워 있는 김정일에게 소녀가 콜라를 주는 ‘약 드세요’. / 선무 제공

 

"한국 외교, 중국에 더 당당해져야" 2015년 DMZ국제다큐영화제 개막작 '나는 선무다'(감독 아담 쇼베르그)는 그를 다룬 영화다. 명절에 색동저고리를 입은 두 소녀가 보인다. 그런데 철조망이 앞을 가로막고 있다. 이 그림 제목은 '할머니'. 선무의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딸들이 물어요. 우리 할머니는 어디 있냐고. '윗동네'에 있는데 갈 수 없는 상황을 얘기하고 싶었어요."

 

―이곳에선 가족이 어떻게 되나요.

"중국에서 조선족 여인을 만났고 한국에 들어온 뒤 결혼했어요. 여덟 살, 열한 살 난 딸이 둘 있습니다."

 

―북에 남은 부모형제와는 연락이 끊겼나요?

"중국 친척 통해 3년에 한 번쯤 송금도 하고 소식도 들었는데 2014년부턴 단절됐어요. 중국 베이징에서 개인전 열었다가 저와 가족, 친구가 위험에 빠진 직후부터입니다. '나는 선무다'엔 그 사건도 담겨 있어요. 전시는 ×판 났죠. 개막하는 날 그림 다 압수당하고 끝났어요. 탈북했을 때 공포가 되살아났습니다."

 

―전시에 무슨 문제가 있었나요?

"유머러스하게 북한 정권을 풍자하고 싶었지요. 관람객은 바닥에 깔린 '김일성' '김정일' '김정은' 이름을 밟아야 입장할 수 있었어요. 중국에 사는 북한 애들이 들어올 용기가 있을까 궁금했습니다. 그런데 북한 대사관 애들이 정문에 죽치고 앉아 입장을 막았어요. 남한 대사관 사람은 코빼기도 안 보였고요. 탈북했지만 저는 엄연히 대한민국 국민입니다. 이 나라 외교가 당당하지 못하고 형편없구나 알게 됐죠. 신체적인 위협도 느꼈습니다. 가족이 중국에 다 같이 갔는데 잘못하면 북한으로 끌려가겠구나, 겁이 나고 등골이 서늘했어요."

 

―한국에서 살아도 여전히 이해하기 어려운 게 있는지요.

"왜 정부가 자국민을 보호하지 못할까, 하는 거예요. 불법도 아니고 공개적인 전시회에서 그런 꼴을 당했습니다. 어느 중국인이 다큐멘터리를 보고 '미안하다' 해서 제가 그랬어요. '당신이 미안할 건 없고 시진핑이 나한테 사과해야 한다'고."

 

―1년에 몇 점이나 그리고 얼마에 팔리는지요.

"보통 30~50점 만듭니다. 100만원짜리도 있고 3000만원도 받아요. 80%는 해외, 그러니까 교포분들이 삽니다. 전업작가가 된 직후엔 '김정일'을 많이들 사서 놀랐어요. 집에다 걸어 놓을 만한 그림은 아니잖아요(웃음)."

 

―병상에 누워 있는 김정일에게 소녀가 콜라를 주는 그림 '약 드세요'는 미국 주간지 타임에도 실렸습니다. "당시에 북한은 외부의 치료가 필요한데 병이 나으려면 밖으로 문을 열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콜라와 아디다스를 개방의 상징으로 썼지요."

 

―어떤 탈북 화가는 본명과 얼굴을 다 드러내는데.

"그렇게 놀더라고요. TV에 나와서 흔들거리는 탈북자들 보면 가족 모두 안전이 보장돼 있어서 저러나 싶어요."

 

―지금 '당신은 누구냐' 묻는다면 어떻게 답하나요.

"분단 때문에 가족을 만날 수 없는 현실, 그게 나예요. 북한도 중국처럼 개방이 필요합니다. 너무 거짓말을 많이 해놔서 문을 열면 다 들통나겠지만요."

 

▲자신의 두 딸이 북한에 있는 할머니에게 편지를 부칠 수 없는 상황을 그린 ‘할머니’. / 선무 제공

 

김정은 신년사, 꿍꿍이는? 그동안 입국한 탈북자는 3만여 명에 이른다. 10명 중 1명은 북·중 국경에서 잡혀 감금되거나 처형된다. 그는 "가장 넘기 힘든 선은 이데올로기 같다"며 "세상에 있는 이념들을 다 지우고 싶어 '걸레질'이라는 작품도 만들었다"고 했다.

 

―최근 판문점에서 총격을 받으며 귀순한 북한 병사 소식 들으셨지요?

"죽다 살았으니 저처럼 운이 억세게 좋은 놈이구나 싶었죠."

 

―김정은은 무슨 꿍꿍이일까요.

"뻔하죠. 북한 체제를 계속 유지하려는 겁니다. 일단 핵을 만들어놓고 대화하려는 속셈이죠. 김정일 때 남북대화도 하고 같이 놀아봤는데 결국 재미를 못 봤잖아요. 시간 벌면서 믿을 만한 무기를 확보하려는 겁니다."

 

―그림들이 일종의 반어법(反語法)처럼 보입니다. 예술의 힘은 뭐라고 생각하나요.

"그림을 통해 저는 숨어도 숨은 것이 아니고 나서지 않아도 나선 것이 됩니다. 예술이 마음을 움직일 수 있다고 생각해요. 저는 북에서는 실종 상태고 남에서는 가면을 쓰고 살아요. 그림으로 말할 수 있다는 게 큰 위안입니다."

 

―외롭지 않나요?

"이곳에도 내 가족이 있습니다. 부모형제 그리울 땐 술을 마셔요. 언젠가 평양에서 전시회를 여는 꿈을 꿉니다. 화폭 안에 내 세계를 짓기도 하고 허물기도 하고. 북한에서처럼 당의 의도를 심는 선전이 아니라, 눈치 안 보고 내 생각과 감정을 담을 수 있다는 게 행복해요. 지탱하는 힘이 됩니다."

 

―이 땅에서 이루고 싶은 게 있나요?

"뭘 이루고 말고 하겠어요. 계속 작업을 하는 거죠. 가명 안 쓰고 얼굴을 드러내도 되는 날이 빨리 오길 바랍니다."

 

김정은은 신년사에서 '핵 단추' 운운하며 미국을 위협하면서도 평창동계올림픽 참여 의사를 밝혔다. 선무는 "김일성 때부터 해오던 수법이라 새롭지 않다"며 "그는 이득을 취하려 할 테고, 남한도 손해 보지 않으려면 외교력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지난 9일 판문점에서 열린 고위급 회담에 대해서는 "북한 입장에선 미국과 핵 협상을 하기 위한 발판일 것"이라고 했다. 새해 소망을 묻자 문자메시지가 도착했다.

 

"북녘의 그리움들이 안녕하기를."◎

박돈규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