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이탈주민(탈북민) 이야기12/ 탈북(민) 소식3/ 수기1/ 2011.08.03 - 북한에서 100만 달러씩 벌다 탈북한 사연 - 2017.06.01 일가족 해상탈북이 나온 마을의 뒷이야기
북한 이탈주민(탈북민) 이야기12/ 탈북(민) 소식3/ 수기1/
2011.08.03 북한에서 100만 달러씩 벌다 탈북한 사연
사람만이 자유의 참맛을 안다. 나는 40여년을 북한에서 살았고, 독재국가에서 살다가 대한민국에 입국한 2만여 탈북자들처럼 행운아중의 한사람이다. 우리 탈북자들은 독재와 박해 속에서 살아 보았기에 대한민국의 자유와 민주주의에 대해 늘 감사하며 살아간다.
“고맙습니다.”, “사랑합니다.”
이 말들은 대한민국에 입국한 탈북자들이 하나같이 쑥스러워 하며 어렵게 배운 말들이다. 북한에서 “고맙습니다”란 말은 김일성이나 김정일을 향한 점유물처럼 일반화 되지 않은 말이다. 더구나 “미안합니다”, “사랑합니다”란 말은 더욱 그렇다.
나는 북한에서 인민무력부 산하에서 무역을 하다가, 정확히는 외화벌이를 하다가 자유의 품으로 찾아 왔다.
북한에서는 외화벌이는 ‘교화벌이’라는 말이 있다. 그만큼 돈은 벌지만 결과가 안 좋다는 말이다.
그러한 ‘교화벌이’를 시작해서 탈북 할 때까지 내가 알고 지내던 외화벌이 사람들 중 얼마나 총살되고 감옥에 갔는지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다.
그 중에는 정말 법을 어기거나 외화를 착복해서 처형된 사람들도 있지만 사실은 대부분이 김정일의 지시나 간부들과의 알력관계로 모함을 당한 사람들이다.
북한에서 외화벌이가 전국적 전분야적 범위에서 활성화되기 시작한 것은 김일성의 죽음으로 ‘고난의 행군’이 시작되면서 국고가 텅 비었다는 이유에서이다. 하지만 김정일은 김일성을 안치하기 위해 금수산기념궁전에 8억 달러 이상을 쏟아 부었다.
김정일은 김일성의 죽음을 이용하여 3년간이나 애도기간으로 정하고 일체 가정들에서 결혼식이나 망년회(송년회)를 비롯한 사적인 모임을 가질 수 없도록 했을 뿐 아니라 심지어는 상갓집에서도 곡(哭)을 하지 못하게 했다.
식량공급은 아예 끊긴지 오래고 일을 해도 월급은 나오지도 않았다. 하지만 북한주민들은 “장군님만 믿으라”는 지시대로 앉아서 기다리다가 1994년부터 1997년 사이 수백만 명이나 굶어죽었다.
당시 평양시에서 생활하던 나는 북한의 식량난이 이 정도인줄은 모르고 있었다.
어느 날 평양시 용성구역에 위치한 국방과학원에 다니는 사촌동생이 우리 집에 놀러 왔다가 과학자들이 굶어죽는다는 소리를 전하는 것이었다.
“과학자들까지 굶어죽을 정도면 우리나라는 이미 망한 것이나 다름이 없구나” 아마도 그런 생각이 나를 그 위험하다는 외화벌이에 끌어들였는지도 모르겠다.
그때로부터 얼마 후, 나는 조선인민군 총정치국산하 외화벌이 회사에서 일했다.
당시 인민군 안에는 물론 국가안전보위부, 인민보안성(당시 사회안전부), 정무원의 각 부서들에서 저마끔 외화벌이 회사들을 만들었었는데 몇 백 개가 생겼다가 반년도 되지 않아 또 몇 백개가 사라지군 했다.
외화벌이 품목은 각이했는데 농수산물부터 광석, 유색금속, 심지어 석탄까지 그야말로 돈(외화)이 안 되는 것이 없었다. 이것들을 중국이나 일본에 팔아 식량으로 바꿔와 다시 되거래를 하는 방식이었다.
하지만 외화를 번다고 해서 누구나 다 잘되는 것은 아니다. 빽이 없는 회사들은 생긴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빚만 잔뜩 짊어지고 파산한다. 그것도 파산에만 그치면 다행이다. 국가재산 탐오낭비로 걸리면 시범껨(본보기)으로 처벌되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외화를 잘 벌어 계획을 해도 문제다. 번 돈을 100% 바친다면 모르지만 모든 운영을 무에서 시작했기 때문에 운영자금 역시 번 돈에서 충당해야 했다. 몇 년 지나서 회사가 잘되면 또 검열이라는 굴레를 씌어 어떤 명목을 만들어서라도 반듯이 잡아넣고야 마는 것이 북한 당국자들의 관습이었다.
나도 농수산물로부터 시작해서 철광, 선철, 석탄, 중고차 장사까지 해보지 않은 게 없다. 그중에서도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이 석탄수출이었다. 평안남도 순천시에 있는 직동탄광의 탄이 그중 칼로리가 높아 중국회사들의 요구를 충족시키기에 적격이었다.
직동탄광에서 석탄을 채굴하고 있는 북한 광부들.
석탄을 수출하자면 우선 수출허가를 받아야 하고 화물방통을 받아야 한다. 거기에다 석탄을 선불로 사야 하기 때문에 밑천도 만만치 않게 들었다. 우리 회사는 총정치국 산하였기 때문에 국방위원회 명령분으로 석탄과 화차를 받는데 거칠 것이 없었다.
원래 석탄 1톤당 중국에 파는 가격은 46불, 말단회사까지 오면 1톤당 15불 정도에 거래된다. 직동탄광에서는 1톤당 5불에 판매했고 화차 한 방통에 100불이었다. 대체로 견인기 하나에 120톤짜리 10개의 화차를 단다고 보면 석탄 1200톤에 6천불, 화차 10개에 1천불, 도합 7천불의 자금이 있어야 했다.
그러다 보니 돈이 없는 회사들은 (북한에서 7천불은 일반 사람들이 평생을 뼈 빠지게 일해도 손에 만져도 볼 수 없는 거금이다.) 화차 한두 개를 다른 회사들 편에 붙여 따라 보낸다.
당시 우리는 한 번에 견인기 4~5대를 동원해 수출을 하다 보니 1년 동안에 번 돈이 100만 달러가 훨씬 넘게 되었다. 다른 회사들이 1톤당 15불을 받을 때 30불을 받았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국가의 에네르기(에너지)를 팔아먹는 것은 반역행위라는 김정일의 지시가 내려왔고 석탄수출은 중단되었다. 남의 돈을 엄청 끌어들여 석탄을 사놓고 신의주 국경을 넘기지 못했던 회사들은 졸지에 망할 처지에 빠져버렸다.
나도 마지막 탕에 20만 달러가 넘는 손해를 보았다. 하지만 7만 달러의 빚 때문에 자살까지 한 어느 외화벌이 회사(새날회사)의 부사장에 비하면 약과였다. 당시 신의주역에는 수출이 막힌 수많은 석탄화차가 몇 달 동안 조차장에 밀려있었고 그로 인해(화차가 모자라) 철도운행이 마비되기까지 했었다.
이것은 북한 외화벌이의 일부분일 뿐이다. 농수산물, 철광, 중고차 등 어느 것 하나 마음 놓고 외화벌이라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돈이 좀 벌어진다 싶으면 김정일의 지시로 수출금지 명령이 내려오곤 했다.
그 때문이랄까. 당시 내가 얻은 결론은 어떤 것이든지 2년을 넘기지 말고 아무리 돈이 잘 벌어지는 것이라 해도 업종을 바꿔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업종을 바꾸면서 나름대로는 공화국의 발전과 내 삶의 터전을 지키기 위해 아글타글 노력해온 나였지만 결국은 ‘교화벌이’의 희생양이 되고 말았다.
1990년대 말, 일본산 중고차(폐차형식으로 된 차량)들을 대당 800~1500불에 들여와서 중국 3000~5000불에 되파는 일을 했었는데, 여기서 문제가 발생했다. 중고차를 통한 무역이라는 북한식 외화벌이로 짭짭한 수익을 올리고 있었는데 덜커덕 김정일의 중단 지시가 떨어졌다는 것이었다
일본 중고승용차들.
국내에 들여온 중고차들은 모두 두만강을 통한 밀수 형식으로 중국에 팔려나갔다. 일이 잘 될 때에는 눈을 감아주지만 일단 걸리기만 하면 처형되는 것이 밀수이고 내가 그 중심에 서있었던 것이다.
결과는 불 보듯 뻔 한 일이었지만 당시로서는 이것저것 잴 형편이 아니었다. 이름 하여(내가 속해있던) 총 정치국으로부터 받은 당적 과업에 떠밀려 일본산 자동차들은 줄을 지어 중국으로 밀수되었고 결국 관련자 모두가 재판석에 서는 엄청난 사건이 벌어졌다.
호위사령부 문화기재관리국 산하 신의주 기지장 방영남, 호위사령부 광명성회사의 김국명, 국가안전보위부 산하 신흥회사 조성훈, 사회안전부 산하 록산회사의 김영철, 체육위원회 산하 붉은별회사 장호영 등 수십 명이 체포되었고 사형수로 전락했다.
이들과 함께 하루아침에 ‘죄인’으로 전락한 나에겐 어떤 희망도 미래도 없었으며 그곳이 고향이라고 붙들고 남아있을 이유가 없었다. 그날 이후로 오로지 탈출의 기회만을 노리던 나에게 드디어 때가 왔던 그날을 잊을 수 없다.
……
체포와 또 한 번 총살될 위기를 넘기며 2005년, 나는 대한민국에 입국했고 지금은 대한민국 국민이 되었다. 이처럼 대한민국을 위해 흙 한 삽, 벽돌 한 장 옮긴 적 없이 무작정 서울을 찾아온 나를 친 자식처럼 맞아준 대한민국 정부와 국민들을 향해 나는 무엇을 할 것인가가 늘 고민이다.
“고맙습니다”, 그리고 “감사합니다”란 이야기가 때 없이 나오는 이유이기도 하다.
2011년 5월 김철수 출처 : 탈북자동지회
중앙일보
2011.11.25 탈북 김혜숙씨 "北 참상 못 믿는 이들 답답"
"한국에서 만난 사람들 중에서 북한의 실상을 얘기해도 믿지 않는 이들이 더러 있는데 그럴 때마다 정말 답답합니다."
지난 2008년 6월 두만강을 건너 북한을 탈출한 뒤 중국과 라오스, 태국을 거쳐 한국에 정착한 김혜숙(50.여)씨는 23일 오후(현지시간) 제네바에서 연합뉴스와 가진 인터뷰에서 "배고픔의 고통이 어떤 건지 겪어보지 못한 사람은 모른다"면서 정치범수용소에서 보낸 28년의 세월과 목숨을 건 북한 탈출기를 풀어놓았다.
김씨는 얼굴 한 번 보지 못한 할아버지가 월남했다는 이유로 평양에서 180리 떨어진 평안남도 북창군 석산리 제18호 관리소에서 13살 때부터 41살까지 살았다면서 "1890년대에 태어나셔서 진작 돌아가신 할아버지 때문에 지금도 두 여동생과 막내 남동생이 수용소에서 생활하고 있다"며 "얼마나 어이없는 일이냐"고 반문했다.
김씨는 수용소에 있을 때 "할머니가 강냉이 가루를 빻으면 봉지 30개에 조금씩 나눠서 매일 풀을 섞어 죽을 끓여 먹으며 한 달을 살았다"며 "배가 고파 대동강 건너에 있는 14호 관리소에서 곡식과 야채를 훔치다 잡혀서 공개처형을 당하는 사람들을 어릴 때부터 숱하게 봤다"고 전했다.
한 달에 평균 5~7건의 공개처형을 목격했다는 김씨는 "식량을 훔치거나 안전원에게 대들면 대부분 총살하는데 교수형을 하는 장면은 딱 두 번 봤다"면서 "다른 사람의 손금을 봐준 아줌마는 미신을 퍼트렸다는 이유로 교수형을 당했고, 아내를 목졸라 죽인 남편은 소나무에 매달려 처형됐다"고 말했다.
10년 동안 토끼 30여 마리와 개 7 마리를 길러서 당 간부들에게 꾸준히 갖다 바친 공로로 수용소에서 `해제`됐다는 김씨는 "수용소에서는 살 집이라도 있었지만, 그곳을 나온 뒤에는 집도 없이 떠돌며 남의 집 담에 비닐을 쳐서 눈비를 막으며 사느라 개고생을 했다"며 눈시울을 적셨다.
수용소에서 두 명의 남편과 남동생을 탄광사고로 잃었고 수용소를 나온 뒤인 2003년 8월 홍수로 아들과 딸을 잃은 김씨는 "더는 북한에서 살 수는 없다"고 결심하고 2005년 중국으로 탈출, 옌지(延吉)에서 식당 일을 했다.
북한에서 돼지를 사오라는 중국인 식당 주인의 지시에 다시 북한에 들어간 김씨는 2007년 10월에 검문에 걸려 붙잡혔고, 6개월 노동단련형을 선고받고 18호 관리소에 재수용됐다가 이듬해 3월 양말만 신은 채 수용소를 탈출해 석달 후 또 한 번 두만강을 넘었다.
16살때부터 30살이 될 때까지 탄광에서 일했다는 김씨는 "진폐증이 심해서 말을 할 때도 숨이 가쁘다"며 "그래도 중국을 거쳐 한국에 온 뒤로 먹는 게 좋아지니 짐승이 털갈이하는 것처럼 온 몸의 껍질이 세 번 벗겨지면서 새 피부가 나오더라"며 수줍게 웃었다.
김씨는 이날 오전 제네바에서 북한인권시민연합과 국제인권단체 휴먼라이츠워치 등이 공동으로 주최한 `제11회 북한인권·난민문제 국제회의`에서 직접 손으로 그린 18호 관리소 일대의 약도를 펼쳐보이며 북한 정치범수용소의 실태를 증언했다.
현재 북한정치범수용소철폐운동본부 본부장을 맡고 있는 김씨는 인터뷰에서 "북한인권시민연합의 요청으로 캐나다, 미국, 일본 등을 다니며 수용소 실태를 알리는 일을 해왔는데 사람들이 못 믿겠다는 반응을 보일 때가 있었다"며 "두고 온 동생들을 다시 만날 때까지 세상에 북한 수용소의 실상을 알리는 일을 계속 할 생각"이라고 말했다
(연합뉴스)
2012-05-12 언니 둘은 中서 인신매매 끌려가고, 난 4번 탈출 ‘도망 전문’
“언니, 안녕.
언니가 북한에 있으면서 동생들 먹여 살리겠다고 고생 너무 많이 했지. 구리 장사 하다가 그 무거운 걸 떨어뜨리면서 손가락이 끼어 부러졌잖아. 병원에서 제대로 치료를 받았더라면 언니가 네 번째 손가락을 그렇게 못 쓰진 않았을 텐데…. 아무렇지도 않은 상처가 너무나 큰 상처로 남아 있을 거라 생각하니 너무 가슴이 아파.
언니가 한국에 오게 되면 내가 언니 손가락 고쳐줄 거야. 언니 방송 보거나 하면 꼭 연락 줘. 어디서나 아프지 말고 힘내서 열심히 살면 우리 꼭 살아서 만날 수 있을 거야.
언니, 사랑해.”
지난달 29일 채널A ‘이제 만나러 갑니다’ 방송에서 문성림 씨(28)가 탈북 과정에서 헤어진 뒤 지금껏 소식을 모르는 셋째 언니에게 보낸 영상편지다. 문 씨는 통일이 되면 언니를 꼭 치료해 주고 싶다며 구급상자를 들고 나왔다.
‘이제 만나러…’는 이산가족들의 사연을 소개하고, 이들의 소망과 사연을 담은 물건을 타임캡슐에 담아 통일 이후까지 보관하는 프로그램으로 인기를 끌고 있다. 지난달부터 ‘현재진행형 이산가족’인 탈북자로 출연자 범위를 확대해 탈북 여성들의 집단 토크쇼를 내보내고 있다.
이산(diaspora)을 겪은 사람들이 TV 예능 프로그램에 고정 게스트로 출연하는 일은 한국뿐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유례가 없다. 지금까지 언론이 비춘 탈북자들은 대부분 ‘도움이 필요한, 가엾은 대상’이라는 고정관념에 갇혀 있었지만 ‘이제 만나러…’ 출연자들은 이런 틀을 깨며 가감 없는 면모를 전한다. 거리낌 없이 막춤을 추는가 하면 남자 출연자들에게 추파를 던지기도 한다.
프로그램과 출연자를 취재하려는 주요 외신의 발길도 이어지고 있다. 15일 프랑스 일간 르몽드 기자가 서울 종로구 세종로 동아미디어센터의 채널A를 찾아 ‘이제 만나러…’ 기획 취지와 프로그램 현황을 취재했고, 미국 로스앤젤레스타임스와 일본 NHK 취재팀도 24일 녹화 현장을 방문할 예정이다.
출연진은 매회 15명 안팎이다. 이들 중에서도 문 씨는 드라마보다도 더 드라마 같은 사연으로 첫 출연부터 주목을 받았다. 채널A 인터넷 시청자 게시판에는 “문성림 씨 계속 출연시켜 주세요. 이야기 더 듣고 싶어요”(채종국 씨)라는 요청이 잇따르고, 문 씨의 출연분을 재편집한 동영상도 누리꾼들이 이리저리 퍼나르고 있다. 19일 동아미디어센터에서 문 씨를 만났다.
○ 중국 공안에만 4번 붙잡혀…“도망 전문”
“방송에 나가면 헤어진 언니들이 이걸 보고 절 찾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직접 홈페이지에 제 사연을 올려 출연신청을 했어요. 전 좋은 물건 쓰고, 배우고 싶은 거 배우면서 사는데 언니들은 어떻게 살까 많이 걱정돼요. 아직 연락은 없지만 희망을 버리지 않고 있어요.”
문 씨는 함북 청진이 고향. 열네 살 때이던 1998년 중국에 시집간 큰언니가 가족들을 만나고 싶어 한다는 연락을 받고 아버지, 언니 2명과 함께 중국으로 건너갔다가 가족이 뿔뿔이 흩어지는 아픔을 겪었다. 어머니는 5년 전 간경화로 세상을 뜬 상태였다.
중국에 도착하자 큰언니는 온데간데없었고, 다음 날 둘째 언니가 인신매매단에 붙잡혀 사라졌다. 얼마 후 셋째 언니 역시 난데없이 모습을 감췄다. 문 씨와 아버지가 “언니들이 어디 갔느냐”고 물어도 “모른다”는 대답만 돌아왔다. 기가 막힌 노릇이지만 중국어도 못하고, 탈북자 신분을 밝히면 모두 위험해지는 상황이어서 하소연할 곳도 없었다.
“당시에 큰언니가 스무 살이었고, 그 아래로 저까지 하면 열여덟 살, 열여섯 살, 열네 살이었어요. 젊은 여자들을 데려갈 수 있으니 (인신매매단의) 집중 표적이 됐던 거죠.”
아버지는 어떻게든 딸들을 찾아야겠다는 생각에 북한과 중국을 오가며 중국인들의 심부름꾼 역할을 했다. 중국인들은 북한에서 여자들을 데리고 나오라는 지시를 아버지가 따르지 않자 문 씨가 보는 앞에서 아버지를 무차별 폭행했다. 문 씨는 그 모습을 보면서 말리지도 못했다고 한다.
“그렇게 맞고 나서 또 북한에 심부름하기 위해 들어가셨다가 발각돼 수용소에 잡혀 들어가셨대요. 배탈이 났는데 치료를 받지 못해 화장실 갔다 돌아오시는 길에 쓰러져 영영 못 일어나셨다는 소식만 겨우 전해 들었어요. 돌아가신 날짜를 몰라요. 무덤도 없어요….”
불과 1년 사이에 문 씨는 아빠와 언니 3명과 모두 헤어져 15세 나이로 혈혈단신이 됐다. 한국 선교사의 도움으로 거처를 구하긴 했지만 이후 그의 삶은 도망과 탈출로 점철됐다.
“중국 공안에 네 차례 잡혔어요. 두 번은 체포 과정에서 도망쳤고, 한 번은 한국 교회의 도움으로 풀려났죠. 마지막 잡혔을 때 끝내 북송됐어요. 수용소에서도 한 차례 탈출해 두만강에 뛰어들었는데 너무 물이 깊어서 건너지 못했어요. 결국 주민 신고로 노동단련대로 끌려갔어요. 일하다가 허리라도 펼라치면 엄청나게 맞았어요. 너무 때려서 못 참고 도망 나와 다시 두만강을 건넜죠.” 2002년 그렇게 한국에 왔다. 열여덟 살 때였다.
○ 한국서 11년 만에 자매 상봉
한국에 온 지 7년째 되던 2009년, 문 씨는 둘째언니가 탈북해 한국에 왔다는 소식을 들었다. 언니와 처음 통화하던 날, 둘은 아무 얘기도 못하고 엉엉 울기만 했다. 두 번째 통화하던 날에야 겨우 대화를 할 수 있었다. 중국에서 헤어진 지 11년 만의 상봉이었다.
“언니와 가족 모두가 중국에 온 그날 밤, 중국인들이 택시에 태워서 어디론가 데려가더니 중국남자와 결혼시키려 하더래요. 그래서 곧바로 맨발로 도망쳐 나왔대요. 조선족 집에 들어가 살면서 애 봐주는 일도 하고, 장사도 하면서 떠돌다 공안에 붙잡혀 북송됐다고 해요. 노동단련대에서 8개월형을 마친 뒤 곧바로 탈북했고요.” 언니는 지금 부산에서 용접공으로 일하고 있다.
들으면 들을수록 기가 막힌 이야기다. ‘이제 만나러…’에서도 사회자와 ‘남쪽 사람’ 패널들이 더 많은 눈물을 흘린다. 중국 여행 갔다가 수면제 탄 음료수를 먹고 난데없이 인신매매로 팔려간 출연자, 여섯 살 된 아들을 북한에 두고 나온 뒤 13년째 아들 생일이면 옷가지와 신발을 산다는 출연자, 산속에서 4년을 떠돌며 살았다는 출연자, 꽃제비(집 없는 떠돌이 청소년)로 살면서 시장 바닥에서 쓰레기를 주워 먹으며 연명했다는 출연자…. 이런 사연을 전하는 당사자들이 오히려 담담하다. 목소리는 떨리고, 주춤거리며 말을 이어가면서도 눈물을 애써 삼키면서 의연하려고 애쓴다.
“스스로 아픈 기억에 대해 아무렇지 않게 느끼려고 노력해요. 어쨌든 다 지난 일이잖아요. 아프다고 생각을 하면 한없이 아프거든요. 한국 온 사람 중에 고생 안 한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함께 방송을 하면서 저 역시 위로와 위안을 받아요. 저보다 더 힘들게 오신 분들 이야기를 들으면서 나는 그나마 행복하다고 느낄 때도 많아요.”
○ ‘공무원 돼 당당한 사회 기여’ 꿈꿔
문 씨는 한국에서 1년 반 동안 초중고교 졸업자격 검정고시를 모두 통과한 뒤 2005년 연세대 행정학과에 입학했다. 외국인 전형을 통해서다. 문 씨에 따르면 매년 연세대에 입학하는 탈북자들은 10명도 채 되지 않는다고 한다. 한 해 1명만 뽑은 적도 있다. 그런데도 대학생들 일각에서는 “좋은 대학 가려면 탈북해야겠다”며 비아냥거리는 시선도 있다.
“그 말이 완전히 틀린 건 아니에요. 학점이 어느 정도 되면 등록금 지원도 되고 사실 많은 혜택을 받고 있어서 미안한 마음도 들어요. 특히 요즘은 대학생들이 학자금 대출 많이 받잖아요. 취직하면 빚부터 갚느라 뼈 빠지는데, 저는 저축이 없어도 빚은 없거든요. 도움 덕분에 배울 만큼 배웠고, 더 배우려고 노력할 수 있어 감사하지요.”
통일부에 따르면 집계가 시작된 이후 올해 4월까지 한국에 들어온 북한이탈주민은 모두 2만3568명이다. 2009년 한 해에만 2914명이 입국해 정점을 찍은 뒤 2010년 2401명으로 주춤했다가 다시 늘고 있는 추세다. 입국 시 1인 가구 기준으로 기본금 600만 원을 지급하며, 직업훈련과 취업장려금 등 장려금은 최대 2440만 원, 장기치료 등 가산금은 최대 1540만 원을 준다. 이와 별도로 주거지와 취업, 교육 지원도 해준다.
문 씨는 졸업 후 1년간 정보기술(IT)업체에서 기획자로 일하다 지금은 공무원시험을 준비 중이다. 서울시청에서 자신의 전공(행정학)을 살려 일하는 게 꿈이다. 함께 졸업한 탈북자 가운데 대기업에 입사해 일하는 친구들도 있다.
“탈북자들이 대량 입국하게 된 지 10년이 조금 넘었어요. 저처럼 탈북한 후 한국에서 정규 교육과정을 마치고 사회생활을 시작하는 새로운 탈북 세대가 생겨나고 있어요. 이들이 기반을 다지면 탈북자들이 한국 사회에 본격적으로 기여하는 시기가 올 겁니다. 실제로 ‘이제 만나러…’에 보내주시는 성원을 보면 제가 한국 사회의 당당한 일원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는 느낌을 받아요. 언젠가 탈북 청소년들 앞에 서서 그들이 닮고 싶은 롤모델로서 한국 사회에서 이룬 성취와 과정을 강의하는 게 제 꿈입니다. 조금만 더 지켜봐 주세요.”
● 시청자들이 남긴 말말말
“단순한 재미가 아니라 꾸밈없는 이야기에 마음으로 느껴지는 재미가 있다.” ― 김효정
“지금껏 가졌던 탈북자들에 대한 선입견이 얼마나 잘못됐던 것인지 깨닫게 됐다.” ― 박정미
“눈물샘이 마르지 않는다. 가족과 가정, 자유와 민족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 김현태
“많은 걸 담아 간다. 마음을 움직이게 만드는 힘이 있는 프로그램이다.” ― 정윤일
“출연 여성들의 꿋꿋한 얼굴과 마음 때문에 어느 오락방송보다 따뜻하고 즐겁다.” ― 최윤주
“탈북자와 북한이라는 정치적 주제를 재미있고 감동스럽게 풀어 보여준다.” ― 박요셉
“탈북자들의 아픔을 국민적 관심사로 이어갈 수 있게 계속 노력해 달라.” ― 김상현
“이런 방송을 시청하는 일만으로도 탈북자들을 도와주는 것이라 생각한다.” ― 양승관
곽민영 기자 havefun@donga.com
2013.05.08 탈북 출신 여가수 김정원 씨의 못다한 북한 뒷 이야기
장해성 전 조선중앙TV 기자,
탈북 출신 여가수 김정원 씨의 못다한 북한 뒷 이야기 시작됩니다.
Q. 조선중앙방송은 어떤 방송국인가?
- 김정일 김정은 어용 나팔수인 것은 사실이다. 그 안에 구조가 좀 복잡하게 되어있다. 조선중앙방송위원회라는 것이 있다. 라디오총국 안에 조선중앙방송 평양방송이 있다. 평양 방송은 대남 방송. 대내방송인 제3방송은 중앙방송이기 때문에 외국 방송은 절대 들어올 수 없다. 그리고 텔레비전 방송총국, 문예 총국이 있다. 문예 총국에는 작가들이 글 써서 드라마 만들고, 배우단도 같이 있다.
Q. 조선중앙TV 뉴스의 비중은 어느 정도인가?
- 북한에서는 쇼, 예능프로가 굉장히 국한되어 있다. 전국근로자들의 노래경연, 학생들의 노래경연 정도가 있다. 드라마도 원래는 없었다. 1980년대 중반부터 텔레비전 연속소설, 연속극이 나왔다. 그때부터 영화보다 드라마에 취미를 붙이게 됐다. 한국 드라마가 들어가기전까지 열광했었다.
Q. 북한방송, 심의규정은 어떻게 되나?
- 북한은 모든 예술은 심의 기준에 맞춰 심사를 거쳐야 무대에 오를 수 있고, 방송을 할 수 있다. 모든 작품에 김일성 김정일이 주제가 되어야 한다. 신상옥 감독의 '소금'이라는 영화에서 지주가 최은희의 몸에 올라타는 장면이 처음 등장했는데 북한 사람들이 깜짝 놀랐었다.
Q. 간판급 아나운서가 진행하는 메인뉴스도 있나?
- 저녁 8시에 있다. 종합보도가 나온다.
Q. 북한 뉴스에도 공식멘트가 있나?
- (OOO 기자 입니다?) 그런 건 절대 없다. 개별적인 사람에 대해 일절 선전할 수 없게 되어 있다.
Q. 북한 아나운서들은 왜 방송실수가 없나?
- 거의 다 녹화방송이라서 그렇다. 가끔 생방송을 하긴 한다. 북한에서는 생방송이 아니라 실황중계라고 한다. 지도자가 나오기까지 3~4시간까지 기다리기도 한다. 주로 오후 5시부터 밤 11시까지 평일 방송을 한다.
Q. 북한에서 기자·아나운서가 되기 위한 과정은?
- 정말 힘들다. 들어가는 통로가 하나는 전국화술경연대회에서 뽑히는 것과 평양연극영화대학 졸업생들 대상으로 교육해서 몇 명만 뽑는다. 퇴직했다가도 중요 방송이면 다시 부른다.
Q. 아나운서, 선망의 직업 중 하나인가?
- 방송원(아나운서)은 예술인 직업보다 더 위다.
Q. 북한 기자·아나운서 어떤 특별대우를 받나?
- 북한은 돈이 있어서 뭘 살 수 있는 곳이 없다. 매달 콩기름 2병이나 명태기름, 고기 2kg 등을 준다. 그걸 받으면 장 마당에 판다. 없어서 못 판다.
Q. 조선중앙방송의 영향력은 어느 정도인가?
- 내가 쓰면서도 믿으려면 믿고, 말라면 말라 그랬다. 당에서 하라는대로 쓴다.
- 어린 나이엔 믿었다. 그렇게 배웠기때문에 옳다고 믿었지만 어른이 되면서 의문이 들기 시작했다. 김일성 사망 이후 고난의 행군이 이어졌는데 그게 벌써 20여년이다. 요즘 젊은 사람들 불만이 쌓여가고 있다.
- 주민들에 대한 상호 감시체제가 굉장히 견고하다. 일거수일투족, 사소한 일들까지 정보원들이 쪽지를 통해 보위부원에 다 보고한다. 마을 사람들끼리, 서로가 서로를 감시를 한다. 화폐 개혁 전에는 정보원들에 한달에 15원씩 줬다.
Q. 한국에 대한 북한 주민들 인식은
- 일반 주민들은 잘 모른다. 오두산 통일 전망대 건너편 개성시 판문군 쪽 취재를 갔더니 그곳 주민들은 전망대 쪽으로 보이는 남한 사람들을 두고, '전복된 지주 자본가들, 북한에서 도망쳐나간 놈들이 옛날 땅을 찾기 위해서 와서 계속 넘겨다 본다' 그런 이야기들을 많이 하더라. 그런데 저는 대학도 졸업하고 기자생활도 오래한 지라 '얼마나 살기 편하면 저렇게 구경도 다니고 하겠냐' 그렇게 생각했다.
- 북한에서는 미국에 대한 증오심을 극대화 시켜 교육을 시킨다. 남조선 사람은 우리가 포섭해야하고, 미국은 철천지 원수로 교육을 한다.
중앙일보
2013.05.23 한쪽 손발로 뛴다, 그들 손발이 되려
《 달리는 열차에서 몇 번 뛰어내리다 보면 저절로 요령을 익히게 된다. 열차의 속도가 줄어들었다 싶으면 사다리를 잡은 손에 힘을 준 채 한쪽 다리를 땅에 슬그머니 내려놓아 본다. 발바닥이 튕겨 나오면 아직 때가 아니다. 땅에 닿으면 앞구르기를 해야 한다. 충격을 다리로만 받았다간 뼈가 부러진다. 사람들은 오전 2시 석탄가루를 온몸에 뒤집어쓴 채, 달리는 화물열차 옆 사다리에 매달려 있었다. 》
1996년: 살려주십쇼, 그래야 가족이…
1996년 3월 7일 새벽, 22호 정치범수용소에서 출발한 석탄 운반 화물열차의 기관사는 회령역에 들어갈 때 감속 타이밍을 놓치고 급하게 기차를 세웠다. 그 바람에 함경북도 회령시 세천노동자구(區)에서 석탄을 훔치러 몰래 열차에 올라탄 마을 주민들은 회령역 직전에 열차에서 뛰어내려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다. 열네 살 소년 하나는 화물열차 옆에 계속 매달려 있다가 승강장 구조물에 받혀 몸이 공중으로 날아갔다.
기이하게도, 소년이 정신을 잃었던 시간은 2, 3초 정도에 불과했다. 눈을 떠보니 역으로 들어가는 기차가 보였다. 잘린 왼쪽 다리도 보였다. 피가 뿜어져 나오는 다리를 지혈해야겠다 싶어서 손을 뻗었다가 왼손도 절반가량 잘려 있음을 알았다. 사람의 손가락뼈라는 게 성냥개비처럼 가늘어 희한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너무, 너무 아프다는 생각도.
세천노동자구 주민들은 석탄을 훔쳐 최소 수십만 명에서 최대 300만 명까지 굶어죽은 것으로 알려진 ‘고난의 행군’ 시기를 버텼다. 이틀만 굶으면 누구나 도둑이 된다. 작업자들이 기계부품을 다 뜯어서 내다 파는 통에 지하수를 퍼낼 펌프가 작동하지 않아 멀쩡한 광산이 폐광으로 전락했다. 그러나 경비가 삼엄한 정치범수용소 탄광에서는 석탄이 계속 생산됐다. 화물열차가 정치범수용소에서 청진화력발전소로 석탄을 싣고 갈 때면 주민들이 목숨을 걸고 열차에 올라 탄을 훔쳤다.
석탄 도둑질은 2인 1조로 한다. 달리는 열차 위에서 자루에 석탄을 퍼 담고, 회령역 근처에서 자루를 밖으로 던진다. 2인조 중 한 명이 달리는 열차에서 먼저 뛰어내려 자신들이 던진 자루를 지킨다. 다른 한 사람이 리어카를 가져오면 석탄을 싣는다.
“사람 살려! 살려주시오!”
손과 다리가 잘린 소년은 기면서 울부짖었다. 동네 사람들은 손을 내미는 대신 피 웅덩이 속에서 허우적대는 소년의 몸을 뛰어넘어갔다. 자루를 던진 곳에 빨리 가지 않으면 다른 사람에게 석탄을 뺏길 우려가 있었다. 소년은 병원에 실려 가 수술을 받을 때까지도 정신을 잃지 않고 외과의사에게 빌었다. “날 좀 살려주십쇼. 그래야 우리 가족이 굶어죽지 않습니다.”
2006년: 지성호, 너 도망 안 치냐?
“너 이리 좀 오라. 거기, 무릎 꿇으라.”
목발을 짚고 선 청년의 살기(殺氣)에 주눅이 든 다른 청년이 주춤거리다 무릎을 꿇었다. 세천노동자구 꽃제비 무리의 왕초가 바뀌는 순간이었다.
새 왕초는 한 손과 한 발이 없었지만 깡다구가 엄청 셌다. 새 왕초는 두만강을 건너 중국 민가에서 쌀을 얻어오기도 했다. 중국에서는 옥수수를 가축에게 사료로 준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다. 하루는 중국에 다녀온 사실을 들켜 보위부에 끌려갔다. 매질에는 단련이 돼 있었는데 “너 같은 병신이 중국에서 거지꼴로 돌아다니면 공화국 국격이 떨어진다”는 소리에 피가 거꾸로 솟았다.
1990년대가 지나가자 북한도, 북한 사람도 변했다. 배급보다 시장거래 위주로 세상이 돌아갔다. 시장을 금지하면 폭동이 일어날 분위기였다. 깡다구가 세고 수완이 좋았던 청년은 꽃제비 왕초에서 기업가로 변신했다. 페인트 장사로 큰돈을 벌었다. 남조선 대통령이 공화국에 온다는 소식에 ‘남쪽 사람들은 돈이 많다던데, 그들이 페인트를 팔겠다고 하면 어쩌지’ 하고 걱정했다. 사람들은 청년을 ‘지성호 사장’이라고 불렀다.
돈을 잘 벌다 보니 경찰이나 보위부와 부닥칠 일이 많았다. 수시로 불러 번 돈의 절반을 이런저런 명목으로 뜯어갔다. 2006년 보위부에 끌려갔을 때의 일이었다. 보위부 요원이 “지성호 너, 도망 안 치냐? 제대로 말하면 살려줄 수도 있는데”라며 웃었다. 자신의 고민을 눈치 챈 것 같아 등골이 서늘했다. 마침 서울에 정착한 동네 친구의 연락을 받고 탈북을 고민하던 참이었다. “내년에 대학 간다”고 자랑하는 친구가 못내 부러웠다.
“한 번 국경을 넘은 과오도 씻지 못했는데 제가 수령님을 버리고 어디를 가겠습니까”라며 고개를 조아렸다. 보위부 건물을 나오며 생각했다. ‘지금 이 길로 남한에 가야 한다.’
눈물을 흘리는 아버지에게 “석 달 안에 다시 돌아오겠다”고 약속하고 곧장 두만강을 건넜다. 중국, 라오스, 태국을 거쳐 남한으로 들어가는 데 4개월이 걸렸다. 방콕의 이민국 수용소 직원들은 목발을 짚고 라오스 정글을 헤쳐 왔다는 청년의 이야기에 눈이 커졌다. 청년은 남한 관리들이 자신을 ‘지 선생님’이라고 부르고, 한국으로 탈북자를 보낼 때 장애인을 더 배려해 먼저 보낸다는 사실에 놀랐다. 그 사이 아들을 기다리던 아버지는 아들이 탈북한 길을 따라 두만강을 건너려다 붙잡히고, 고문 끝에 숨졌다.
2009년: 너희들은 왜 가만히 있니?
“북한 인권 문제는 정말 심각하다. 세상에 알려야 해. 너희는 왜 안 하니? 너희가 북한의 주인이잖아.”
“야, 먹고살기 바쁘다.”
2009년 여름, 동갑내기 룸메이트의 말에 동국대 회계학과 1학년생인 지 씨가 픽 웃으며 대꾸했다. 박동훈이라는 이름의 룸메이트는 재미동포 2세였다. 한국에 왔다가 교회에서 탈북 청년들에게 영어를 가르치는 봉사활동 중이었다. 친해질수록 지 씨의 영어 실력보다는 박 씨의 한국어 실력이 느는 것 같았지만.
“북한의 참상을 묵인하는 건 범죄야. 언젠가 북한에 들어가겠어.”
“북한은 그렇게 만만한 곳이 아니다. 미국 시민권자라고 봐줄 것 같냐?”
그해 성탄절에 동훈의 얼굴을 방송 뉴스에서 봤다. ‘북한 인권운동가인 재미교포 로버트 박, 무단 입북.’ 로버트 박, 아니 박동훈은 ‘정치범을 석방하라’고 쓴 편지를 가슴에 품고 찬송가를 부르며 두만강을 건너 지 씨의 고향인 회령시로 들어갔다. 이런 소식을 들은 남한 사람들은 ‘별 이상한 사람 다 보겠네’라는 분위기였다. 그러나 지 씨는 죄책감과 부끄러움에 얼굴이 달아올랐다. 북한의 실상을 외부에 알리고 북한에 변화를 일으켜야 할 사람들은 우리 아닌가…. 알고 지내는 다른 탈북 청년들에게 전화를 돌렸다.
“뉴스 봤나. 나는 충격적이었는데 너는 어땠나.”
그렇게 남북, 그리고 해외교포 청년이 함께하는 북한인권모임 ‘나우(NAUH)’가 만들어졌다. 2010년 4월 발대식에는 60여 명이 참여했다. 처음에는 서울 강남역과 대학로에서 북한 인권 상황을 알리는 전단을 나눠주고 피켓 시위를 벌였다. 미국의 단파 라디오방송에 코너를 하나 얻어 그해 7월부터 북한으로 방송을 했다. 2011년에는 탈북 여성과 아동 구출사업을 시작했다. 지금까지 19명을 구했다.
2013년: 내가 닿은 포구는 어디인가
“제가 함경북도 청진에 살았는데, 이곳 수남시장은 ‘고양이 뿔 빼고 다 있다’고 할 정도로 큽니다. 한국 제품은 물론이고 미제, 일제, 동남아 제품까지 다 살 수 있었어요.”
지난달 6일 서울 강남구 삼성동의 커뮤니티 공간 ‘허브서울’. 강연을 듣고 있는 청중 70여 명 중에는 푸른 눈의 외국인도 더러 있었다. 나우 소속 청년 탈북자들이 북한 주민의 생활에 대해 이야기하고 남한 젊은이들과 토론하는 기획 강연 ‘북남살롱’이 열리고 있었다.
2000년대 북한 주민의 소비문화를 소개한 강연자 정유미 씨(23·여)가 박수를 받으며 자리에 돌아가자 이동구 나우 부회장이 “지성호 회장님의 생일이 며칠 전이었습니다. 그래서…”라며 케이크를 들고 나타났다. 깜짝 놀란 지 씨를 나우 운영진들이 일으켜 세우자 청중은 “노래해! 노래해! 울어라! 울어라!”며 짓궂게 합창했다. ‘장군님 노래를 불러 달라’는 요청에 지 씨가 노래를 부르다 가사를 기억하지 못하는 바람에 말문이 막혔고, 앉은 사람들 사이에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13일 서울 중구 동국대 캠퍼스에서 만난 지 씨에게 그날 부른 노래 제목을 물어 보니 북한영화 ‘곡절 많은 운명’의 주제가라고 했다. ‘곡절도 많은 내 한생 굽이굽이 흘러왔네, 사나운 파도를 넘어 내가 닿은 포구는 어디….’ 이어지는 가사는 ‘장군님의 사랑의 품’이다. 어떤 탈북자는 이 부분을 ‘대한민국 사랑의 품’이라고 바꿔 부르기도 한다. 반면 적지 않은 탈북자가 한국 사회를 못 견디고 제3국으로 다시 탈남(脫南)하기도 한다.
지 씨는 최근 전공을 회계학에서 법학으로 바꿨다. 장밋빛 미래를 그리며 왔다가 한국에서 법률문제로 고생하는 다른 탈북자에게 도움을 주고 싶다고 했다. 나우에 대해서는 더 많은 청년과 일을 같이 했으면 좋겠다고 했다. 그가 보기엔 조만간 통일이 갑작스럽게 찾아올 텐데, 그때 북한에 가서 일할 수 있는 한국 청년은 얼마 없다. ‘한국 젊은이들은 통일에 큰 관심이 없는 것 같다’고 말했더니 그는 “서운하지만 당연하다고도 생각한다”고 답했다.
“북한은 못삽니다. 남한은 잘살고. 가진 걸 나누길 누가 좋아하겠습니까?”
가진 것에 너무 집착할 때 사람은 사람이 아닌 존재가 된다. 손과 다리가 잘린 이웃집 소년이 피를 흘리며 “살려주시오!”라고 외쳐도 그 몸을 타고 넘어가는. 인터뷰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지금의 한국 사회가 멀지 않은 곳에서 들려오는 “사람 살려!”라는 피맺힌 절규를 외면한 채 ‘석탄 자루’를 쫓고 있는 것은 아닌지 궁금해졌다. 나우 홈페이지 주소는 www.nauh.or.kr이다.
동아일보 장강명 기자
2013.07.13 영화 ‘48m’ 속 삶과 죽음의 거리
삶과 죽음, 자유와 억압, 희망과 좌절 사이의 거리는 얼마나 될까. 그들은 말한다. 48m라고. 영화 ‘48m’는 그 거리를 실감나게 보여준다. 48m는 북한과 중국을 가르며 흐르는 압록강에서 가장 폭이 좁은 곳, 북한 양강도와 중국 창바이(長白) 현 사이를 말한다. 이곳엔 철조망도 없고 지뢰도 없다. 하지만 더 위험한 게 있다. 북한 국경경비대의 매서운 눈초리와 어디서 날아올지 모르는 총알이다.
영화 ‘48m’는 실화를 토대로 탈북을 다룬 작품이다. 등장인물들은 살기 위해 탈북을 꿈꾸고, 강을 건너는 모험에 나선다. 하지만 많은 이가 총을 맞고 쓰러진다. 단속 성과에 눈이 먼 국경경비대 간부의 꾐에 애꿎게 희생되는 사람들도 있다. 죄책감에 시달리던 한 국경경비대원이 결국 탈북의 행렬에 동참하는 얘기도 나온다. 강을 건너는 데 성공한 사람들도 나중에 다시 붙잡혀 북한으로 송환된다고 이 영화는 마지막에 전한다.
내가 이 영화를 보게 된 것은 “광주시민들이 ‘꽃 파는 처녀’를 막아야 한다”고 한 장진성 씨의 글 때문이다. 광주국제영화제조직위가 2013광주국제영화제에서 상영하기 위해 통일부에 승인 신청을 한 북한 영화 ‘꽃 파는 처녀’는 단순한 항일영화가 아니라 일제강점기를 배경으로 계급투쟁을 고취하는 공산혁명 선전영화라고 장 씨는 말한다. 이런 영화를 ‘민주의 땅’ 광주에서 상영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며, 차라리 북한 인권영화 ‘48m’를 상영하는 게 현명한 선택일 것이라고 그는 주장했다.
장 씨는 그 자신이 탈북자다. ‘내 딸을 100원에 팝니다’라는 시로 유명하다. 노동당 통일전선부에서 일했기에 누구보다 북한을 잘 안다. 2004년 북한을 탈출해 서울에 발을 딛기까지의 역경을 그린 그의 탈북 수기는 그 자체가 드라마다. 그는 지금 북한의 움직임을 분석하고 실상을 생생하게 전해주는 탈북자인터넷신문 뉴포커스를 운영하고 있다. 장 씨는 “이 영화는 관객들로 하여금 스스로 ‘48m’의 갈망에 빠져들게 한다”고 말했다.
영화 ‘48m’는 탈북자들이 돈을 내고 성원을 보태 만든 것이다. 실화에 충실하려고 했기에 시종 내용이 무겁고 화면은 어둡다. 다른 북한 관련 영화들에서 볼 수 있는 코믹한 내용이나 연애담 같은 재밋거리도 없다. 대사가 북한말투라 알아듣기 어렵고, 그래서 이해를 놓치는 부분도 더러 있다. 제작 여건이 어려웠던 건 이해하지만 그래도 이왕 만들 바에야 좀더 영화적인 요소를 가미했더라면 좋았을 것이란 생각이 살짝 들기도 한다.
이 영화는 작년 8월에 완성됐다. 한 달 뒤 북한인권운동가인 수잰 숄티의 지원으로 미국 하원에서 특별시사회도 열었다. 그러나 국내 상영은 1년 가까이 미뤄졌다. 배급사를 찾기 어려워서다. 흥행을 중시하는 배급사들의 성에 찰 리 없다. 그나마 경제민주화 분위기 덕에 CJ CGV가 받아줘 올 7월 4일부터 전국에서 상영 중이다.
‘역시나’ 관람객은 많지 않다. 이전엔 어두운 사회 현실을 고발하는 영화를 일부러 찾아가 관람하고, 이를 알려 힘을 보태는 유명 인사나 정치인들도 더러 있었는데 이 영화엔 그런 사람들조차 없다. CGV에 물어보니 11일까지 누적 관람객 수는 7175명이다. 10일 밤 내가 이 영화를 볼 때도 관람객은 나를 포함해 고작 11명이었다. 그래서인지 영화를 상영해준 CGV도, 함께 영화를 봐준 관람객들도 무척 고맙게 느껴졌다.
북한 인권 어쩌고 하면 흔히 이념을 떠올린다. 그러나 이 영화는 이념이 아니라, 그냥 살아보려고 발버둥치는 사람들의 얘기다. 비록 ‘재미’는 덜하더라도 그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주는 사람이 좀더 많아졌으면 좋겠다. 광주국제영화제가 ‘문화적 영향력을 바탕으로 상호 이해와 한반도의 평화에 기여하기 위해’ 북한 영화 2편의 상영을 추진한다고 하는데 이 영화도 포함시키면 안 되는 건가.
이진녕 논설위원 jinnyong@donga.com
2013-10-11 北의 남침 처음엔 안믿어
“저희는 잘 몰라요. 남한에 있는 아이들도 6·25전쟁에 대해서 잘 모르잖아요.”
22일 오전 경남 창원시 합성감리교회에서 열린 제11회 탈북동포주일 기념행사. 꼬마 탈북자들에게 6·25전쟁에 대해 묻자 되돌아온 대답은 우리 주변 학생들의 대답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북한의 소학교(한국의 초등학교에 해당)에 들어가기 전에 탈북을 한 학생들의 경우 정식으로 6·25전쟁에 대해 배운 적이 없는 탓이다. 이날 행사를 주관한 ‘두리하나’ 대표 천기원 목사는 “열 살 이전의 아이들은 교육을 받기 전이라 대체로 6·25전쟁에 대해 잘 모른다”며 “10대라 하더라도 부모가 탈북한 뒤 중국에서 태어난 아이들은 6·25전쟁을 모른다”고 설명했다.
○ “美제국주의에 맞선 조국해방전쟁이라고 배워”
20대 이상은 북한에서 최소 10년 이상 교육을 받았기 때문에 6·25전쟁을 또렷이 기억하고 있었다. 탈북자 김은정 씨(26)는 “소학교에 들어가면서부터 6·25전쟁에 대해 본격적으로 배운다”며 “6월이 다가올 때쯤이면 학교에선 6·25전쟁과 관련된 사진전시회를 열어 집중 교육을 시킨다”고 전했다. 하지만 그들이 북한에서 배웠던 6·25전쟁의 내용은 우리가 알고 있는 그것과는 180도 다르다. 이들의 머릿속에 각인된 6·25전쟁은 남한의 북침(北侵)으로 발생한 전쟁이자 북한이 미(美) 제국주의에 맞서 싸운 조국해방전쟁이다. 탈북자 김학성 씨(28)는 “북한에선 6·25전쟁의 발발에 대해 ‘1950년 6월 25일 오전 4시에 남한이 공격을 해오자 오전 6시경 김일성 동지의 지도하에 반격에 나서 서울을 해방시켰다’는 식으로 가르친다”고 말했다.
그러다 보니 탈북자들이 처음 한국에 왔을 때는 6·25전쟁의 진실이 무엇인지 혼란에 빠지기도 했다. 대다수의 사람이 자신들이 배웠던 내용과 정반대로 말하며 생각을 바꿀 것을 요구했기 때문이다. 김학성 씨는 “처음에는 전쟁이 북한의 남침으로 발생했다는 말을 믿을 수가 없었지만 이제는 북한의 남침이라는 것에 더 수긍이 간다”면서도 “전쟁 중 벌어진 많은 의혹에 대해 남과 북이 모두 거짓말을 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탈북자들은 한국에 와서 6·25전쟁과 관련된 다양한 ‘팩트(fact)’를 접하면서 발발 원인에 대한 인식을 바꿔가는 것으로 나타났다. 탈북자 김명주 씨(35)는 한국에서 만난 예전 남자친구와 6·25전쟁의 원인을 놓고 여러 차례 심하게 말다툼을 했다. 북한의 기습도발로 발생한 전쟁이란 남자친구의 주장에 김 씨는 “내가 아무리 탈북자라고 해도 역사적 사실은 분명히 해야 한다”며 북한에서 배운 ‘남한의 북침설’을 굽히지 않았기 때문이다. 논쟁이 끝나지 않자 어느 날 남자친구는 김 씨에게 비디오테이프 하나를 건넸다. 그 안에는 6·25와 관련해 1990년대에 공개된 러시아와 중국 정부의 기록물이 담겨 있었다. 김 씨는 “객관적인 증거를 접하면서부터 생각이 바뀌기 시작했고 이제는 북한의 남침이라는 것을 믿는다”고 말했다.
○ “북녘 땅은 굶주림과 인권유린으로 고통”
“와∼강냉이국수다!”
행사 시작에 앞서 교회 식당에 들어선 50여 명의 탈북자들은 오랜 친구를 만난 듯 반가운 표정을 지었다. 짝강냉이밥(옥수수를 입쌀과 비슷한 직경 0.3∼0.5mm 정도로 잘게 부숴 만든 밥)과 함께 북한 주민의 주식으로 꼽히는 강냉이국수를 남한에서 만나기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처음 강냉이국수를 접한 이들은 노란색의 면발에 신기해하다가 이내 그 별미에 놀라며 재빨리 그릇을 비웠다. 두리하나는 이날 행사를 개최하면서 첫 이벤트로 ‘북한음식 체험기’를 마련했다. 북한음식을 통해 조금이나마 남과 북이 서로를 이해하자는 취지에서다.
이날 행사에는 박시영 목사를 비롯해 경남지역 기독교계 인사들이 대거 참석해 탈북자에 대한 뜨거운 관심을 나타냈다. 황우여 새누리당 대표는 축사를 통해 “북녘 땅은 김일성 김정일 우상 숭배의 결과로 굶주림과 인권유린의 고통에 빠져 있다”며 북한동포들에 대한 따뜻한 관심을 촉구했다.
행사 말미에 마련된 축하공연 자리에선 50여 명의 탈북 청소년들이 그동안 갈고 닦은 솜씨를 300여 명의 관중 앞에서 마음껏 뽐냈다. 특히 북한에서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의 생존조차 알 수 없는 열한 살 김혜송 어린이가 ‘그리운 어머니’를 부를 땐 분위기가 숙연해지기도 했다. 이어 평양백두한라예술단, 김철웅 탈북 피아니스트의 공연이 이어지자 객석에선 박수와 환호가 쏟아졌다. 천기원 목사는 “지금 북한에서 벌어지는 인권 유린과 참혹한 고통의 실상은 ‘과거형’이 아닌 ‘현재형’의 일”이라며 “한민족인 우리는 북한 주민과 탈북동포들의 고통에 대해 다른 나라보다 더 많은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고 강조했다.
햇수로 11년째를 맞는 탈북동포주일 기념행사는 ‘일년에 단 하루 만이라도 탈북자에게 관심을 갖자’는 취지로 시작됐다. 행사를 주관한 두리하나는 1999년 10월 설립된 비영리단체로, 북한 정권에서 신음하는 북한동포를 구제하고 탈북자를 위한 체계적인 정책을 제시해온 단체다. 두리하나란 이름 역시 ‘남과 북이 하나가 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창원=손영일 기자 scud2007@donga.com
2013-11-02 이제 만나러 갑니다’ 100회
형식은 예능 토크쇼인데 주제가 예사롭지 않다. ‘떼 토크’ 대화거리로 자주 오르내리는 인물은 북한의 김정은 노동당 제1비서와 그의 일가. 예능 프로그램이 보도 프로보다 더 심층적으로 김 제1비서의 언론 플레이 패턴과 그의 아내 이설주의 패션을 분석하는가 하면 드라마보다 더 드라마틱한 탈북여성의 이야기를 소개한다. ‘북한판 백마 탄 왕자의 조건’ ‘북한의 미신’처럼 깨알 같은 얘깃거리도 매주 제공한다.
채널A ‘이제 만나러 갑니다’(이만갑)는 세계 유일의 분단국가에서도 전례 없는 예능프로다. 이 프로는 그동안 방송에서 보기 힘들었던 탈북여성을 대규모로 출연시켜 북한의 실상을 면밀히 소개한다. 이 때문에 워싱턴포스트, BBC, 르몽드, NHK 같은 유수의 해외 언론이 취재를 하고, 북한 정부로부터 견제까지 받는다. 상복도 많아 통일부 장관 표창, 서재필언론문화상 등을 수상했다.
2011년 12월 4일 시작한 이만갑이 10일 방송 100회를 맞는다. 종합편성채널의 주간 프로 중 100회를 돌파한 것은 이만갑이 처음이다. 이만갑의 성공을 이끌어낸 탈북미녀 출연진 중 이순실(44) 윤아영(31) 김진옥(28) 신은하(26) 김아라(23) 등 스타 5인방을 지난달 31일 만나 방송에서 다 하지 못한 이야기를 들었다.
―이만갑에 나온 후 알아보는 사람이 많을 텐데….
▽순실=오늘 아침 인터뷰하러 오는 길에도 고속도로 요금소 직원부터 주차장 직원까지 알아보는 사람이 여럿 있었다. 얼마 전에는 외국인인데 이만갑을 안다고 해서 신기했다.
▽은하=방송 이후 맞선 보자고 연락하는 이들이 늘었다. 얼마 전에는 미국 교포라며 연락이 왔다. 난 미국 갈 생각도 없는데….
―탈북자 신분이어서 너무 유명해지면 불안할 것 같다.
▽은하=혹시나 북에 해코지를 당할까봐 두렵긴 하다. 팬 카페가 생겼을 때 너무 부담됐다. 특히 내가 어디서 무슨 일을 했는지, 우리 부모님이 누구이며 고향이 어디인지까지 구체적으로 쓴 글이 올라왔는데 정말 무서웠다.
▽아라=북에 남은 가족 때문에 방송용 이름을 쓰는데 누군가가 인터넷에 내 실명을 공개했다. 지금도 방송 녹화 끝나고 나면 속앓이를 한다. ‘괜한 말 한 게 아닌가’ 싶어서.
―다른 탈북자들의 반응은 어떤가.
▽진옥=반반이다. 일부 탈북자는 ‘거짓말한다’며 방송국에 항의도 한다. 그런데 북한은 출신 성분이나 탈북 시기에 따라 각자 겪은 게 다 다르다. 평양 출신과 지방 출신이 경험한 것도 극과 극이다. 북한 사회가 소통이 안 되고 단절돼 있다 보니까 서로가 겪은 것에 대해 잘 모르는 부분이 많다.
―방송에서 다들 말을 정말 잘한다. 자신의 이야기를 고백하기가 쉽지 않을 텐데….
▽순실=우리 같은 삶을 살면 할 말이 많을 수밖에 없다. 방송에서 나는 탈북 과정 중 여러 번 북송당해 고문당하고, 딸을 뺏기고 인신매매당한 이야기까지 밝혔다. 지금의 시부모님도 몰랐던 얘기다. 그런데도 내가 방송에서 숨기지 않고 얘기할 수 있었던 건 북한 정권에 대한 분노에서 시작됐다. 이젠 그 분노가 내가 똑바로 걸어갈 수 있는 힘이 됐다.
―방송을 보면 남의 사연을 듣고 우느라 눈 화장이 번진 출연자가 많더라.
▽아라=화장 지워지는 건 문제가 아니다. 꺽꺽 소리 내서 울고 싶은데 방송이라 참고 눈물만 흘려야 하는 게 정말 힘들다.
▽아영=출연진이건 제작진이건 다 운다. 특히 메인작가님이 엄청 우는데 그거 보면 슬퍼서 더 울게 된다. 그런데 그 덕분에 우리가 서로 친해지게 됐다. 함께 펑펑 울고 나면 뭔가가 해소되는 느낌도 있다.
―탈북 못지않게 한국사회에 정착하기도 쉽지 않았을 것 같다. 특히 어려웠던 건 뭔가.
▽아라=열여덟 살에 한국에 온 뒤에야 사춘기를 겪었다. 무시당하는 게 싫어서 북한 출신인 걸 숨기고 조선족이라고 하고 다녔다. 그런데 가끔 북한말이 튀어나오니까 완벽하게 거짓말을 하는 건 불가능했고, 친구들로부터 의심을 받았다. 많이 외로웠다.
▽아영=상대적 빈곤감이 가장 힘들었다. 굶어죽지 않고 살아남기 위해 그 땅(북한)을 떠나왔고 한국에 오니 배고픔은 해결됐다. 그런데 다른 것에 눈이 가더라. 헛된 욕망 때문에 잠깐이지만 다단계에 빠진 적도 있다. 탈북자 중에 나 같은 이들이 많다. 자본주의에 익숙하지 않은 상태에서 욕망이 커져 갈팡질팡한다.
―이만갑에 출연한 뒤로 달라진 게 많지 않나.
▽진옥=탈북자를 바라보는 시선이 변하고 있는 걸 느낀다. 혹은 내가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이 달라졌을 수도 있다. 얼마 전엔 아버지와 식당에 갔는데 누군가가 우리 음식값을 계산해 주고 가셨다. 전에는 차별 받는다는 생각이 많았는데 꼭 그런 것만은 아닌 것 같다.
▽아영=방송 덕분에 나 자신에게 많이 떳떳해진 것 같다. 과거에는 북에서 왔다는 사실을 정말 친한 친구에게만 알렸다. 나 스스로도 탈북자에 대한 편견이 있었던 거다. 그런데 이젠 자신감 있게 생활할 수 있게 됐다.
―이만갑을 보면 앞줄 중간 자리만 집중적으로 화면에 잡힌다. 뒷줄에 앉아 있는 이들은 불만이 없나.
▽순실=그래서 앞줄 가운데는 (신)은하나 (김)아라처럼 예쁜 애들이 앉는다. 방송에서 장난삼아 앞줄로 보내 달라고 항의하지만 사실 하나도 안 부럽다. 하루에 2회 분량을 녹화하기 때문에 총 10시간 동안 스튜디오에 앉아 있어야 한다. 뒷줄에 있으면 편한 자세로 앉을 수 있고 졸기도 한다. 가끔 신발도 벗을 수 있고.
▽은하=‘센터’에서 짧은 치마 입고 꼿꼿이 앉아 있는 게 쉽지 않다. 얼마 전에 졸다가 작가님한테 혼났다. 뒷줄에 앉으면 바닥이나 앞사람 등에다가 대본을 붙여놓고 ‘커닝’도 가능하다. 난 오히려 뒷줄이 부럽다. ―출연료는 얼마나 받나.
▽아영=고정 출연자와 고정이 아닌 출연자가 다른데, 거의 두 배 차이가 나는 걸로 안다. 고정 출연자는 중소기업 초봉 정도의 월수입을 올린다. 나 같은 주부로서는 정말 고마운 자리다. 이만갑이 장수해야 할 텐데….
―100회를 맞이했다. 이만큼 오래 갈 거라고 생각했나.
▽순실=전혀. 지난해 4월 처음 방송에 나올 때 12월까지 출연하기로 계약하면서 이 프로가 설마 1년을 넘길까 싶었다. 사람들이 탈북자에 대해 관심도 없었고 이야깃거리도 별로 없다고 생각했으니까. 그런데 사람들이 좋아하더라. 그리고 우리가 할 수 있는 얘기가 아주 많다는 걸 알게 됐다. 200회는 너끈히 갈 것 같다.
▽진옥=나 역시도 이렇게 오래할 줄 몰랐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지금까지 탈북자가 주인공이 된 방송이 없었다. 형식이 신선하니까 특히 관심을 받는 것 아닐까.
―앞으로의 계획, 당신의 꿈이 궁금하다.
▽아라=최근에 쇼핑몰을 열었다. 다들 옷이 안 팔리면 어떡하느냐고 걱정하던데 난 괜찮다. 남은 옷은 간직했다가 통일되고 나서 북한에 전달하면 되니까.
▽진옥=아주 어린 시절부터 연기자가 꿈이었다. 남북의 가교 역할을 할 수 있는 배우가 되고 싶다.
▽은하=좀 안정적인 일을 찾고 싶어서 공기업 입사 준비를 시작했다. 혹시 여유가 된다면 애견카페 같은 것도 차리고 싶다.
▽순실=이만갑에 출연한 후 안보 강연과 북한 관련 단체 홍보대사 활동을 통해 북한 인권 문제를 알리는 일을 하고 있다. 앞으로도 지금 하고 있는 일을 더 열심히 할 것이다.
▽아영=개인적인 바람은 전공을 살려 통역 일을 하는 거다. 공부를 더 해야 할지 고민이다. 더불어 이만갑을 통해 더 많은 사람들이 탈북자에 대한 이해를 넓혔으면 좋겠다. 언젠가는 평양 사투리가 부산 사투리와 다르지 않게 받아들여질 수 있길 바란다.
▽은하=방송 이후 맞선 보자고 연락하는 이들이 늘었다. 얼마 전에는 미국 교포라며 연락이 왔다. 난 미국 갈 생각도 없는데….
―탈북자 신분이어서 너무 유명해지면 불안할 것 같다.
▽은하=혹시나 북에 해코지를 당할까봐 두렵긴 하다. 팬 카페가 생겼을 때 너무 부담됐다. 특히 내가 어디서 무슨 일을 했는지, 우리 부모님이 누구이며 고향이 어디인지까지 구체적으로 쓴 글이 올라왔는데 정말 무서웠다.
▽아라=북에 남은 가족 때문에 방송용 이름을 쓰는데 누군가가 인터넷에 내 실명을 공개했다. 지금도 방송 녹화 끝나고 나면 속앓이를 한다. ‘괜한 말 한 게 아닌가’ 싶어서.
―다른 탈북자들의 반응은 어떤가.
▽진옥=반반이다. 일부 탈북자는 ‘거짓말한다’며 방송국에 항의도 한다. 그런데 북한은 출신 성분이나 탈북 시기에 따라 각자 겪은 게 다 다르다. 평양 출신과 지방 출신이 경험한 것도 극과 극이다. 북한 사회가 소통이 안 되고 단절돼 있다 보니까 서로가 겪은 것에 대해 잘 모르는 부분이 많다.
―방송에서 다들 말을 정말 잘한다. 자신의 이야기를 고백하기가 쉽지 않을 텐데….
▽순실=우리 같은 삶을 살면 할 말이 많을 수밖에 없다. 방송에서 나는 탈북 과정 중 여러 번 북송당해 고문당하고, 딸을 뺏기고 인신매매당한 이야기까지 밝혔다. 지금의 시부모님도 몰랐던 얘기다. 그런데도 내가 방송에서 숨기지 않고 얘기할 수 있었던 건 북한 정권에 대한 분노에서 시작됐다. 이젠 그 분노가 내가 똑바로 걸어갈 수 있는 힘이 됐다.
―방송을 보면 남의 사연을 듣고 우느라 눈 화장이 번진 출연자가 많더라.
▽아라=화장 지워지는 건 문제가 아니다. 꺽꺽 소리 내서 울고 싶은데 방송이라 참고 눈물만 흘려야 하는 게 정말 힘들다.
▽아영=출연진이건 제작진이건 다 운다. 특히 메인작가님이 엄청 우는데 그거 보면 슬퍼서 더 울게 된다. 그런데 그 덕분에 우리가 서로 친해지게 됐다. 함께 펑펑 울고 나면 뭔가가 해소되는 느낌도 있다.
―탈북 못지않게 한국사회에 정착하기도 쉽지 않았을 것 같다. 특히 어려웠던 건 뭔가.
▽아라=열여덟 살에 한국에 온 뒤에야 사춘기를 겪었다. 무시당하는 게 싫어서 북한 출신인 걸 숨기고 조선족이라고 하고 다녔다. 그런데 가끔 북한말이 튀어나오니까 완벽하게 거짓말을 하는 건 불가능했고, 친구들로부터 의심을 받았다. 많이 외로웠다.
▽아영=상대적 빈곤감이 가장 힘들었다. 굶어죽지 않고 살아남기 위해 그 땅(북한)을 떠나왔고 한국에 오니 배고픔은 해결됐다. 그런데 다른 것에 눈이 가더라. 헛된 욕망 때문에 잠깐이지만 다단계에 빠진 적도 있다. 탈북자 중에 나 같은 이들이 많다. 자본주의에 익숙하지 않은 상태에서 욕망이 커져 갈팡질팡한다.
―이만갑에 출연한 뒤로 달라진 게 많지 않나.
▽진옥=탈북자를 바라보는 시선이 변하고 있는 걸 느낀다. 혹은 내가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이 달라졌을 수도 있다. 얼마 전엔 아버지와 식당에 갔는데 누군가가 우리 음식값을 계산해 주고 가셨다. 전에는 차별 받는다는 생각이 많았는데 꼭 그런 것만은 아닌 것 같다.
▽아영=방송 덕분에 나 자신에게 많이 떳떳해진 것 같다. 과거에는 북에서 왔다는 사실을 정말 친한 친구에게만 알렸다. 나 스스로도 탈북자에 대한 편견이 있었던 거다. 그런데 이젠 자신감 있게 생활할 수 있게 됐다.
▼ ‘이제 만나러 갑니다’ 이끄는 이진민PD ▼
“탈북자 소재로 한 시트콤 구상중… 제목은 평양 신데렐라”
이진민 채널A PD(37·사진)는 ‘이제 만나러 갑니다(이만갑)’의 카메라 밖 미녀다. 그는 개국 당시 기획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이만갑을 이끌어온 숨은 주역이다. 프로그램 시작 당시 실향민 스토리를 다루다가 지금의 탈북여성 토크쇼 형식을 도입한 것도 그의 아이디어였다.
“프로그램은 유기체 같아서 계속 변한다. 전 세계 유일의 분단국가에서 나올 수 있는 얘기가 많을 거라고 생각했다. 실향민은 80, 90대가 주 연령층이었는데 이산가족을 넓혀서 보니 탈북자가 보였다.”
어둡고 우울한 얘기로 흐르는 걸 막고, 기존 탈북자에 대한 고정관념을 깨기 위해 젊은 여성 출연진을 모았다. 섭외도 쉽지 않았지만 “이전까지 상상하지 못했던” 그들의 이야기를 듣는 과정이 특히 힘들었다. ‘탈북 스토리’ 위주로 내보내던 방송 초기에는 눈물이 마를 날이 없었다. 당시 이 PD를 포함한 작가들이 모두 시름시름 앓았다고 한다.
“워낙 기구한 사연이 많았다. 사전 인터뷰 하면서 울고, 또 녹화하면서 울고, 방송 편집하면서 울었다. 그때 마음이 아프면 몸도 아프다는 걸 알았다.”
최근 이만갑은 탈북 스토리를 전할 뿐 아니라 탈북 과정에서 헤어진 가족을 찾아주는 프로젝트도 진행하고 있다. 덕분에 8월 출연했던 북한 꽃제비 출신 최광혁 씨가 8세 때 생이별한 어머니를 19년 만에 찾는 ‘기적 같은’ 일도 있었다. 이 PD는 이때를 “방송을 하면서 가장 보람됐던 순간”으로 꼽았다. 최근 휴대용 저장장치(USB 메모리)로 한국 방송을 돌려보는 북한 주민들에게 이만갑은 인기 프로그램으로 알려졌다. 실제로 5월 북한 조선중앙TV는 이만갑을 “중국 조선족을 활용한 모략극”이라고 비난했다. 이 PD는 “과거 ‘겨울연가’ ‘가을동화’ 같은 한류 드라마를 보고 남으로 오는 사람이 늘었듯 앞으론 이만갑의 영향을 받은 탈북자가 많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 PD는 현재 이만갑 외에 ‘명랑 해결단’의 연출도 맡고 있는 터라 눈코 뜰 새 없다. 하지만 기회가 되면 “탈북자를 소재로 한 시트콤의 연출도 해보고 싶다”고 포부를 밝혔다.
“이미 이만갑의 장희정 작가랑 제목도 정해놨다. ‘평양 신데렐라’라고. 탈북 여성의 신데렐라 스토리인데 재미있지 않을까. 이만갑 출연진을 동원할 예정이다.”
구가인 기자 comedy9@donga.com
■ 2014.01.15 “탈북 여성들 국경 넘을 때 열에 여덟은 성폭행” 충격 증언
“탈북 여성들은 국경을 넘으면서 열에 여덟은 성폭행을 당합니다. 사흘 정도 국경에 잡혀있었는데, 웬 남성들이 와서 여자들을 죽 세워놓고 원숭이 보듯 위아래로, 여기저기 훑어보더니 몸값을 가지고 흥정을 하더라고요. 그러더니 8000원 주고 데려갔어요. ”
14일 오전 서울 연세대 새천년관 세미나실. 북한에서 인권 유린 범죄를 저지른 이들에 대한 처벌을 촉구하기 위해 만들어진 ‘휴먼리버티센터’ 창립 간담회에서 한 편의 동영상이 상영됐다. 동영상에 등장하는 중년 여성은 북한에서 탈출한 최경옥씨. 최씨가 담담하게 들려주는 자신의 이야기에 장내는 순간 숙연해졌다.
최씨가 탈북을 결심한 것은 두 딸 때문이었다. 먹을 것이 없어 딸들은 흙을 주워먹었다. 하지만 제대로 소화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속에서 흙이 뭉쳐 변을 보지 못하는 딸을 거꾸로 들고 최씨는 나뭇가지로 항문에서 흙덩어리를 파냈다. 돌처럼 단단해진 흙덩어리를 파낼때마다 딸의 항문은 찢어져 피가 났다. 그 때 결심했다. 차라리 목숨 걸고 이 땅을 떠나자고, 어미로서 책임을 지자고, 어딜 가더라도 내 새끼들이 이런 꼴은 당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최씨는 먼저 자신이 가서 자리를 잡고 딸들을 데려오리라고 마음먹었다. 몽골에서 중국 변방까지 걸어서 15분이라는 브로커 말만 믿고 한겨울에 철조망을 넘었다. 당시 최씨는 임신 7개월이었다. 하지만 사흘 밤낮을 걸어도 브로커가 이야기한 변방은 나오질 않았다. 걸어도 걸어도 그자리인 것만 같았다. 더 이상은 못가겠다 싶어 소변을 보려고 앉았다 일어나는데 뭔가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다리 사이에 묵직한 것이 매달려 있었다. 아이가 예정일보다 세달 가까이 빨리 태어난 것이었다. 하지만 엄마보다 더 기력이 없는 아이는 울었지만, 울음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심장박동도 제대로 느껴지질 않았다. 그렇게 최씨는 젖 한번 물리지 못하고 품 안에서 아이의 심장이 멈추는 것을 지켜봐야 했다.
국경을 넘으면서 최씨가 잃은 것은 아이 뿐만이 아니었다. 한겨울에 며칠을 걸은 최씨는 동상에 걸렸고, 발가락 대부분을 잘라야 했다. 지금도 성한 발가락은 오른쪽 세개 뿐이다.
최씨의 사연은 북한 주민들이 북한 내에서, 탈북 과정에서 겪는 참혹한 상황의 일부일 뿐이다. 휴먼리버티 센터장인 이정훈 외교부 인권대사(연세대 국제대학원 교수)는 지난해 8월 유엔 북한인권조사위원회(COI)가 한국에 방문했을 때 공청회에서 직접 들은 탈북자들의 증언을 전해줬다.
한 탈북자는 포로수용소에서 목격한 일을 털어놨다. 한 교도관이 오더니 “당신들 처지가 안됐다”며 탈출을 도와주겠다고 했다. 자신은 의심을 품고 동참하지 않았지만, 대여섯명은 그 말을 믿고선 한밤중에 교도관이 가르쳐준 담장으로 가서 탈출을 시도했다. 그런데 이들이 담장을 다 기어오르기도 전에 등 뒤에서 요란한 총성이 울렸고, 전원 사살됐다. 총을 쏜 것은 바로 탈출을 도와주겠다던 그 교도관이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탈출하는 포로를 잡거나 죽이면 포상이 있대요. 대학을 보내준다나, 교육을 시켜준다나. 그래서 실적 올리려고 그랬대요. 그런데 그 윗사람들도 그 포로들이 교도관 말에 속아서 담장 넘으려고 했던걸 알고 있었다고 해요. 그런데도 잘 죽였다며 상을 주더라고요.”
이 대사는 “한 탈북자는 포로 수용소에서 고문을 당해 손가락이 잘렸다.그런데 그 사람은 손가락 자른 사람에게 고맙다고 하더라. 죽이지 않고 손가락만 잘라서 다행이라는 것이었다”라며 안타까워했다. COI의 마이클 커비 위원장은 공청회가 진행되는 동안 수차례 눈물을 보이며 격분했다고 한다. 이 대사는 얼마전 미국 워싱턴에서 한 여성이 북한에서 당한 인권 탄압에 대해 증언하는 기자회견에서 목격한 장면도 전했다. 곱상한 외모의 여성이 자신이 당한 일을 침착하게 이야기했는데, 외신 기자들의 반응은 시큰둥했다고 한다. 말로서는 그 참혹함이 와닿지 않았던 것이다. 순간 갑자기 그 여성이 책상 위로 올라가 치마를 걷어보였다. 여성의 허벅지는 말 그대로 군데군데 도려내져 그 다리로 어떻게 서있는지 놀라울 정도였다. 외신 기자들은 더이상 말을 잇지 못하고 카메라 셔터만 눌러댔다고 한다. 북한 포로수용소에서는 순번을 정해 교도관들이 여성 포로들을 성폭행하고, 입막음을 위해 그자리에서 즉결 처형하는 일도 잦다.
휴먼리버티센터가 하려는 일은 바로 이처럼 포로들을 총으로 쏴 죽이고, 고문한 가해자에게 법적 책임을 지우는 것이다. COI가 올 3월 낼 보고서에는 북한에서 벌어지는 인권 탄압 행위가 ‘반인도 범죄’라는 증거를 담을 예정이다. 그동안 국제사회 차원에서 북한 인권 상황과 관련한 선언적 규탄은 있었으나, 반인도 범죄라고 못박는 것은 처음이다. 북한의 핵무기 개발이나 장거리 미사일 개발 뿐 아니라 인권 분야에 있어서도 ‘레드 라인’을 설정하게 되는 것이다.
COI가 반인도범죄를 규정하며 어느 정도 구체적인 부분까지 언급할지는 아직 결정되지 않았지만, 이런 짓을 저지른 범죄자의 이름과 혐의를 특정하는 것도 가능할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지도부까지 거론하기는 힘들겠지만 구체적으로 포로수용소의 교도관이나 군사 책임자 등의 이름이 나올 수 있다는 이야기다.
휴먼리버티센터는 영국의 로펌 호건 로벨스와 협약을 맺고 이런 범죄자들을 어떻게 처벌할 수 있을지 법적으로 검토해 COI의 조사 결과를 뒷받침하는 독자적인 별도 보고서를 낼 계획이다. 증거가 충분하다고 판단되면 유엔 안보리를 통해 이들을 처벌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하거나 국제사법재판소(ICC)에 회부, 기소하는 것도 가능하다. 2차 세계대전 이후 나치 전범들을 처벌하기 위해 뉘른베르크 재판을 진행했듯이 특별 법정을 세울 수도 있다.
국제사회의 이런 시도 자체가 북한 정권에는 큰 압박으로 작용할 수도 있다. 휴먼리버티센터 창립식에 참여한 새누리당 심윤조 의원은 “과거 독일이 통일되기 전에 서독이 동독에서 인권 유린에 가담한 책임자들에 대한 구체적이고 방대한 자료를 수집해 보관했다”며 “추후에라도 이런 범죄를 저지른 이들을 사법처리하겠다는 근거를 마련해놓은 것인데, 서독의 이런 시도 이후 동독에서 인권 상황이 상당 부분 개선된 것으로 나타났다”고 전했다.
유지혜 기자 wisepen@joongang.co.kr
03.18 탈북자들의 체험담
“먹고살아야 한다는 생각뿐… 人權이 뭔지도 몰랐다”
한국에 온 지 1년 6개월째인 김민선(가명·50·여) 씨는 탈북을 시도하다가 붙잡혔던 2006년 겨울의 악몽을 아직도 떨치지 못한다.
그녀는 보위부에서 조사를 받던 열흘 동안 한잠도 잘 수 없었다. 30분에 한 번씩 불려나간 그녀는 붙잡혔을 때까지의 행적을 종이 10장에 걸쳐 자세히 적어내야 했다. 반복되는 고통에 지친 김 씨는 “너무 고달파서 내가 안 한 것도 했다고 할 것 같았다”며 “난방도 안 돼 나중에는 손발이 얼어서 가지색으로 변했다”고 말했다. 하루에 한 끼 제공되는 식사도 고작 두 숟가락이면 바닥이 드러나는 누룽지 물에 김치 두 쪽이 전부였다. 보위부에선 수감자들이 자살 도구로 사용하는 것을 막기 위해 젓가락을 안 주고 숟가락도 동그란 부분만 준다.
가족 중 탈북자가 있으면 더욱 심한 감시에 시달려야 한다. 김성진 씨(38)는 “가족이 먼저 탈북한 이후 1주일에 한 번이나 2주일에 한 번씩 꼭 당에 가서 자백서를 바쳐야 했다”고 말했다. 임해리(가명·39·여) 씨가 북한을 떠난 뒤 임 씨의 아버지(74)는 18일 동안 감금됐다. 임 씨는 “아버지 병이 위중해 거의 죽기 직전 상태가 되자 풀어줬다”고 했다.
인권은 고사하고 인간으로서 최소한의 존엄성조차 지키는 것이 힘들었다.
무산광산에서 일했던 홍은경(가명·45·여) 씨는 어두운 갱에 들어가는 대신에 컨베이어벨트 작동상태를 관리하고 점검하는 조작실에서 일하기 위해 작업반장과 하룻밤을 보내야 했다. 홍 씨는 “여자들이 돈이 없으면 다른 게 뭐가 있겠느냐”며 “내가 살기 위한 유일한 무기는 ‘그것’뿐이었다”고 말했다. 캐나다 토론토에 살고 있는 김혜숙(가명·44·여) 씨는 “1996년 4월을 잊을 수 없다”고 했다. 김 씨의 집에는 이미 5개월 동안 식량이 하나도 없던 때였다. 산에서 풀과 나무뿌리를 캐서 소금을 뿌려 먹으며 목숨을 부지했다. 어느덧 영양실조로 얼굴은 누렇게 변했고 노인과 아이들부터 죽음을 맞기 시작했다.
중국 남성들과 결혼한 탈북 여성들이 인권의 사각지대에 놓여 있다는 지적도 집중적으로 제기됐다. 1998년부터 중국에서 6년간 숨어 지낸 뒤 강제 북송됐다가 다시 탈북한 이지영 씨(37·여)는 중국 정부가 전향적으로 태도를 바꿔야 한다고 강하게 요구했다.
그녀는 2000년 조선족 남성과 결혼했지만 정식으로 혼인 신고를 하지 못했다. 중국 정부가 자국 남성과 결혼한 탈북 여성에게 영주권을 주지 않기 때문이었다. 이 씨는 죽은 사람의 신분증을 위조해 중국에서 숨어 다녀야 했다. 다행히 마음씨 좋은 남편을 만나 큰 어려움 없이 살았지만 다른 탈북 여성들은 남편의 폭력과 감금에 시달리는 일이 많다고 증언했다.
대부분 불법 체류자 신분인 탈북 여성들이 보호의 사각지대에 놓여있는 것 자체가 중국에서 겪어야 하는 심각한 인권침해다. 이 씨는 “먹고살기 어려운 부모가 나이 많은 중국인에게 어린 딸을 한국 돈 500만∼600만 원에 파는 일도 있었다”고 밝혔다. 중국인 남편은 어린 아내가 도망가지 못하도록 집 안에 몇 년씩 가둬놓고 수공업 일을 시키기도 한다.
탈북 브로커에게 속아 인신매매로 중국인과 살게 된 사례도 많았다. 2007년 탈북해 일본 도쿄(東京)에 살고 있는 50대 여성은 “두 번째 탈북 시도 때 브로커가 젊은 여성 2명과 함께 선양(瀋陽)까지 데리고 간 뒤 중국인 남자에게 팔아넘겼다”고 말했다. 중국말도 안 통하는 데다 신분증명서도 없으면 공안에 반드시 붙잡히기 때문에 제3국으로 갈 때까지 중국 남자와 살아야 했다. 중국인 남성은 자신이 화장실에 갈 때에도 감시했다고 한다.
이렇게 힘든 생활을 하다가 북한으로 송환된 여성이 중국인 남성의 아이를 임신한 사실이 발각되면 ‘중국 종자’를 가졌다는 이유로 북한 당국이 강제 낙태를 시키기도 한다고 탈북자들은 전했다. 이 과정에서 사망한 여성들도 있다는 것.
탈북자들은 북한의 인권문제를 개선하는 출발점은 생활 여건을 개선하는 것이라고 입을 모았다. 박기춘(가명·49) 씨는 “생활이 어려우니까 나라에서 하지 말라는 일을 해 ‘죄’를 짓고 그게 인권침해의 출발점이 된다”며 “결국 생활이 개선돼야 인권침해도 줄어들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아무리 밖에서 인권침해를 없애라고 말해봐야 북한 고위층들은 절대 안 들어준다”고 덧붙였다.
생계 곤란은 밀수, 탈북으로 이어지고 이는 북한 정부의 감시와 처벌 강화, 인권침해라는 악순환을 심화시킨다는 게 북한 주민들 앞에 놓인 현실이다.
북-중 국경지대인 양강도 출신 서수연(가명·45·여) 씨는 1990년대 중후반 이른바 ‘고난의 행군’ 이전 시기에는 평범한 주부였다. 하지만 하루아침에 배급이 끊겨 쌀을 구하기 힘들어지자 그는 구리 등을 챙겨 압록강 둑으로 나갔다. 그곳에서 중국 상인들을 만나 비누, 신발을 받아왔다. 밀수 규모는 점점 더 커졌다. 서 씨는 “나라만 바라보던 사람들은 ‘고난의 행군’ 때 다 굶어죽었다”며 “아무리 단속이 무서워도 입에 풀칠하는 것이 제일 중요했다”고 말했다.
2014년 봄. 한반도의 비극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평양 아파트도 2층까지만 수돗물… 전기 하루 4시간 공급”
외부와 단절된 북한 사회지만 내부에서는 자본주의적 요소들이 하나둘씩 생겨나고 있다. 동아일보와 아사히신문이 만난 탈북자들에게서 북한 사회의 변화를 짚어낼 수 있는 얘기들을 들을 수 있었다.
탈북자들은 북한 최고의 직업으로 러시아 벌목공, 중국 콩 농장 인부 등 해외 근로자들이 떠오르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해줬다. 돈을 잘 번다는 이유로 과거 선망의 직업이던 의사나 교원을 능가하는 최고의 인기를 누린다는 것이다.
2012년 7월 탈북한 박금주 씨(42·여)는 “러시아나 중국에서 2년 정도 일하고 온 사람들은 동네 주민들이 모두 부러워할 정도로 잘살았다”고 말했다. 해외 근로자들은 월급 중 70% 정도를 정부에 빼앗긴다고 한다. 하지만 나머지 30% 정도만 해도 북한에선 큰돈이다. 러시아 벌목공들은 본국에 돌아와 TV 냉장고 옷장을 구입하고도 장사 밑천까지 남겼다. 북한의 일반 근로자들로서는 상상도 못하는 일이다.
이런 직업을 얻는 게 쉽지는 않다. 박 씨는 “벌목공이 되려면 당원이어야 하고 36세 이하라는 나이 제한도 있다. 자녀 모두를 외국으로 데려가지 못한다는 규제도 있다”고 말했다. 의사나 교원도 아직까지는 인기 있는 직업이지만 의사들도 장마당에 나와야 먹고살 수 있는 게 현실이라고 한다.
2014년 3월 현재 북한 장마당에서 쌀 1kg은 북한 돈 4000원에 거래된다. 뇌물용으로 쓰는 일명 ‘고양이 담배’가 한 갑에 2000원이고 항생제인 페니실린 역시 2000원 정도에 거래되고 있다. 탈북자들은 북한 장마당에는 중국쌀, 북한쌀 그리고 호남쌀이라 불리는 대한민국 쌀을 비롯해 없는 것이 없다고 전했다. 한국에서 수입된 화장품까지도 거래될 정도다. 물론 한국산 브랜드임을 표시하는 상표는 지운다.
북한의 교육도 말이 무상교육이지 모든 비용을 스스로 부담해야 하는 상황이 됐다. 교과서 교복 학용품은 모두 자신이 챙겨야 한다. 의료비도 자기 부담이다. 일선 시도 병원에는 기본적인 항생제나 거즈조차 배급되지 않는다. 그러다 보니 병자들은 장마당에서 각종 약품을 구입해 병원으로 가져가곤 한다. 페니실린의 국정가격은 38원60전이지만 시장가격은 2000원. 시도 약품관리소장이 시장 상인에게 1500원에 팔아 착복하는 일이 다반사다. 따라서 탈북자들은 치료받기 위해 북한 장마당에서 항생제 붕대 마스크 반창고 주사기 등을 구입해야 한다.
평양의 고급 아파트를 제외한 대부분의 아파트 단지에는 재래식 공동 화장실이 있다. 아파트라고 해서 집집마다 화장실이 제대로 갖춰진 게 아니어서 아침이면 주민들이 공동 화장실 앞에 길게 줄을 서야 한다.
평양에서 10년을 거주한 재일교포 탈북자 김석규 씨(76)는 “평양의 간부 등 엘리트가 사는 집을 가도 대한민국 같은 중앙 가스난방 시스템을 갖춘 곳이 없다. 가스레인지로 밥을 짓는 일은 거의 없고 대부분 조그마한 아궁이에 불을 지펴 밥을 짓는다”고 말했다.
전기도 공휴일, 명절에나 제대로 공급되기 때문에 평소 TV나 DVD를 보는 게 쉽지 않다. 일부는 뇌물을 주고 기업소에 공급되는 전기를 자택으로 연결하기도 한다. 평양의 사정도 크게 다르지 않다. 김 씨는 “중앙당 간부들이 거주하는 평양의 중구역을 빼고는 시간제로 오후 6시부터 10시까지만 전기가 들어온다”고 설명했다. 그는 “평양 광복거리 등 고층 아파트가 보기에는 멋있지만 사실은 날림으로 지은 것이어서 2층까지만 물이 공급된다. 그 위에 거주하는 사람들은 계단을 걸어 내려와 물을 길어야 한다”고 전했다. 그러다 보니 매일 샤워를 하는 것은 꿈도 꾸지 못하며 보름에 한 번 정도 목욕을 한다.
여성에 대한 외모 간섭도 심하다. 북송 교포의 손녀로 2006년 탈북한 뒤 일본에 살고 있는 20대 여성은 “북한에서는 여성들의 머리가 흑발이어야 하고 너무 짧아도 안 된다. 원래 갈색 머리인 나는 길거리에서 종종 주의를 받았다. 귀고리와 반지 때문에 시비를 걸어올 때도 있었다”고 전했다.
신분에 따른 이중 잣대도 적용된다. 북송 교포의 자녀로 2000년 초 탈북해 일본에 살고 있는 30대 남성 가네다(金田) 씨는 “경찰 고위 간부인 친구 아버지가 김정일로부터 미국산 담배와 고급 통조림을 선물 받은 것을 알고 충격에 빠졌다. 서민들에게는 미국을 적이라고 가르치고 미국 물건을 갖고 있으면 체포하면서도 고급 간부들은 미국산 제품을 쓰면서 윤택한 생활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고 말했다.
최근 북한 제13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선거에서 100% 지지 결과를 두고 논란을 벌였던 것은 새로운 일도 아니었다. 도쿄(東京)에 거주하는 탈북자 가와사키 에이코(川崎榮子·71·여) 씨는 “북한의 선거가 가장 이상했다”고 회고했다. 1개 선거구에 후보자는 반드시 1명이었다. 투표율 100%에 득표율도 100%다. 투표소 모퉁이에는 감시원이 있어 반대에 해당하는 ‘×’를 쓴 주민을 현장에서 체포한다. 그러곤 곧바로 수용소로 보낸다. 그게 북한식 투표다.
▼ 본보가 35명, 아사히가 25명 탈북자 4개월 심층면접 ▼
어떻게 조사했나
이번 조사는 탈북자와 일대일 심층면접 방식으로 진행됐다.
동아일보 취재진이 지난해 12월과 올해 1월 35명을, 아사히신문 취재진이 지난해 12월부터 올 3월까지 4개월간 25명을 각각 만났다. 취재에 응한 탈북자는 남자 25명, 여자 35명. 연령은 10, 20대 6명, 30, 40대 30명, 50대 이상 24명이었다.
설문 항목은 △식량 사정 △사상 통제 △시장 상황 등 전반적인 북한 생활을 묻는 항목을 비롯해 △현재 한국 또는 일본에서의 생활 만족도 △통일 이후 북한에 돌아가 살고 싶은지 등 24개였다. 특히 인권 침해 상황에 대해 상세하게 설명했다. 1인당 최소 4시간에서 8∼9시간이 걸리는 대장정이었다. 동아일보와 아사히신문은 2월 말 취재 내용을 교환해 취재한 설문의 분석 작업을 벌였다.
동아일보·아사히신문 공동취재팀
<동아일보> 배극인 박형준 도쿄특파원, 김영식 박희창 국제부, 백연상 사회부 기자
<아사히신문> 기하라 다미유키(鬼原民幸) 호리우치 교코(堀內京子·이상 특별보도부), 요시타케 유(吉武祐) 히가시오카 도루(東岡徹) 히라가 다쿠야(平賀拓哉) 마키노 요시히로(牧野愛博) 기타가와 마나부(北川學·이상 국제보도부), 다이나카 마사토(田井中雅人) 도쿄 사회부, 다케다 하지무(武田肇) 오사카 사회부 기자
“북송뒤 고문… 각목이 부러뜨린 내 인권”
“북한에서 태어난 것 자체가 인권침해였습니다.” 함경북도 무산군 출신인 이성재(가명·34) 씨는 북한에서 겪었던 일을 생각할 때마다 몸서리를 친다. 1999년 먹을 것을 찾아 중국에 갔던 그는 2001년 중국 공안에 붙잡혀 강제 북송됐다. 함께 북송된 무산군 출신 4명과 함께 8시간가량 스포츠유틸리티차량(SUV) 트렁크에 갇혀 옮겨졌다. 그의 다리는 누군가의 가슴에, 또 다른 누군가의 다리는 그의 머리에 닿았다.
‘이렇게 죽는구나’ 하는 생각뿐이었다. 무산군 조사실에 불려가 각목으로 두들겨 맞은 그에겐 재판도 없이 강제노동 6개월 처분이 내려졌다. 염전 건설현장의 특수부대 출신 감독관들은 주먹부터 휘둘렀다. 이 씨는 “맞아서 이나 갈비뼈가 부러진 사람도 봤다”고 말했다.
동아일보와 아사히신문은 지난해 12월 특별 공동취재팀을 구성해 탈북자 60명에 대한 심층 면접조사를 진행했다. 유엔 북한인권조사위원회(COI)의 북한 인권침해 실태 보고서 발표에 맞춘 작업이었다. 마이클 커비 COI 위원장은 17일 스위스 제네바에서 열린 ‘제25차 유엔 인권이사회’에 출석해 최종 결과보고서를 제출했다. 그는 “반인도적 범죄는 북한의 국가 최고위층의 정책에서 비롯됐으며 그 규모와 잔혹성, 심각성은 현 시대에 비교할 곳이 없을 정도로 심각하다”며 이 문제를 국제사법재판소에서 다뤄야 한다고 촉구했다.
동아일보와 아사히신문은 북한 인권침해 실태와 주민 생활상을 탈북자의 입을 통해 생생하게 짚었다. 국내 언론이 해외 유수의 언론과 공동취재 형식으로 탈북자 심층 면접조사를 진행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특별취재팀이 만난 탈북자의 이야기도 COI 보고서만큼이나 충격적이었다. 전경희(가명·61·여) 씨는 “2009년 화폐개혁 이후 대부분의 거래가 중국 화폐로 이뤄졌다. 북한 기관원은 중국 화폐를 단속한다면서 여성의 브래지어까지 들춰 보곤 했다”고 말했다.
조성원(가명·19) 씨는 “남한에 온 뒤 ‘인권’이라는 개념을 배웠다”며 “북한에선 당연히 여행증을 발급받아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그것도 인권침해였다”고 말했다.
“자본주의 삶 힘겹지만… 통일돼도 北엔 안돌아갈래요”
‘향수’는 있지만 ‘귀향’은 없다.
탈북자들에게 북한은 돌아가야 할 ‘고향’으로 비치지 않았다. 동아일보·아사히신문 특별 공동취재팀이 만난 60명 중 “통일이 된 뒤 북한으로 돌아가겠다”고 답한 사람은 13명에 불과했다.
오유정(가명·41·여) 씨는 “내가 남한에 온 뒤 어머니가 보위부에 세 번이나 끌려가 조사를 받았고 지난해 1월 네 번째 조사를 앞두고 ‘이번에는 못 나올 것’이라는 소리를 듣고 약을 먹고 목숨을 끊었다”며 “북한 쪽으로 등도 돌리기 싫다”고 잘라 말했다. 하지만 과거의 살았던 정(情)까지 모두 끊기는 어려운 것처럼 보였다.
○ 앞서 경험한 남한
탈북자의 상당수는 남한에서 겪은 자본주의 경험을 고향 사람들과 나누고 싶어 했다. 남한에 온 지 10년이 된 윤아영 씨(32·여)는 “남북한에서 다 살아봤기 때문에 양쪽 사람들이 잘 융합할 수 있도록 중간에서 가교 역할을 하고 싶다. 기회가 된다면 북한 사람들이 남한 문화를 이해할 수 있도록 돕는 상담사 일을 했으면 한다”라고 말했다. 북한에서 선전 학습강사로 일했던 이성심 씨(64·여)는 탈북자들을 상대로 하는 남한 홍보 자격증을 만들자고 제안하기도 했다.
자본주의식 경쟁으로 인한 피로감을 호소하는 탈북자들도 있었다. 대학 진학을 준비 중인 이상현(가명·23) 씨는 “가정을 꾸릴 자신이 없다”고 했다. 그는 “아이들에게 경제적으로 풍요롭게 해 줄 자신이 없다. 북한에 계속 살았다면 이곳에서만큼 잘 먹지는 못해도 한 가족의 가장으로 살 수 있었을 텐데…”라며 말끝을 흐렸다.
일부는 북한에서 엘리트로 살았던 이들이 남한에 와서도 손쉽게 돈을 버는 모습에 실망감을 표현했다. 배가 고파 북한을 떠나 온 대다수는 남한 사회에서도 비숙련 노동자로 적은 임금을 받지만 엘리트들은 ‘북한 고위층의 실상’을 전달한다는 명목으로 돈을 받고 고급정보를 팔거나 방송에 출연한다는 것이다.
○ 자녀 교육은 공통 고민
부모의 고민은 남과 북이 별반 다르지 않았다. 14세 딸을 둔 서수연(가명·45·여) 씨는 “애가 학교 수업을 따라가기 힘들다며 국영수 학원을 보내줄 수 없냐고 묻지만 월세를 내고 나면 생활비도 빠듯하다”며 학비 고충을 털어놨다.
어린 자녀를 맡길 곳을 찾지 못해 이직하기도 한다. 탈북 여성과 결혼해 맞벌이를 하고 있는 이성재(가명·34) 씨는 1년 전부터 공기업 시험을 준비 중이다. 컨설팅회사에 근무하는 아내의 퇴근시간이 늦고 불규칙해 어린이집에서 돌아온 두 아들을 보살펴 줄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북한에서 주체사상에 초점을 맞춘 교육을 받았던 10, 20대 탈북자들은 ‘상식’의 부족을 호소했다. 김은솔(가명·19·여) 씨는 “북한에서는 아무리 좋은 대학 출신이라도 남한에선 무식하다는 소리를 듣는다”고 말했다. 김 씨는 “탈북한 뒤 부모 없이 혼자 사는 청소년들은 애정결핍도 많이 느낀다. 어머니같이 따뜻하게 아이들 생활 전반을 가르쳐주는 프로그램이 있으면 좋겠다”고 덧붙였다.
“돈 찔러주면 사형도 무기징역으로”
[동아일보 통일코리아 프로젝트 2년차/준비해야 하나 된다]
北 떠난뒤 새로 만난 세상, 탈북자 60인의 증언
北에선 뇌물 주면 모두 해결… 담배 1보루나 술 1병이 기본
“겉모습만 사회주의이고 굴러가는 방식은 자본주의와 같습니다.”
심층취재에 응한 탈북자들은 한결같이 북한의 현 상태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돈이면 모든 것이 다 해결되는 사회라는 얘기다.
북한은 자유주의 국가와는 달리 거주 및 이동의 자유가 없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이젠 돈만 주면 다른 지방은 물론이고 평양까지도 갈 수 있다고 했다. 박민철 씨(44)는 “북한에서 뇌물의 기본단위는 담배 한 보루나 술 1병”이라며 “장사를 위해 통행증을 얻으려면 ‘고양이 담배’로 불리는 크라벤 담배를 찔러줘야 한다”고 말했다. 고양이 담배는 영국 BAT사와 북한이 합작해 만드는 담배로 대표적인 뇌물 수단으로 통용된다. 이 담뱃갑에는 검은 고양이가 그려져 있다.
2011년 국내에 들어온 김유진 씨(74)는 “보위지도원에게 2년간 명절과 기념일마다 고양이 담배 한 보루를 다섯 번 정도 상납한 뒤 여권을 얻었다”고 했다.
북한에서 뇌물은 군대에서도 통한다. 젊은이들이 가장 선호하는 부대 1순위는 신의주처럼 국경에 있는 부대라고 한다. 중국인 밀수업자, 탈북 브로커 등 불법 월경자들을 상대로 돈을 받아 챙기는 이런 부대를 제대하면 TV를 구매할 수 있을 정도의 돈을 챙긴다는 것.
정치범이 아닌 일반 사형수들은 뇌물을 주고 무기징역으로 감형되기도 한다. 선호하는 대학교나 학과도 뇌물이면 다 통한다.
일본에 거주하는 20대 후반의 여성 탈북자는 “북한에 있을 때 밀수하는 친구를 통해 한국 드라마 ‘가을동화’ DVD를 구해 보다가 경찰에 걸렸다. 뇌물을 건네자 ‘뭐 좋은 DVD는 없나’라며 ‘천국의 계단’을 구해달라고 하더라”고 전했다.
“정착지원 없어… 日정부 차갑다”
아사히신문 특별취재팀이 일본에서 접촉한 탈북자들은 대부분 북송된 재일교포와 일본인 처 부부의 자식이거나 그들의 손자였다. 이들은 현재 생활에 만족한다고 밝혔다. 하지만 일본 정부가 취업 등 탈북자를 위한 지원제도를 마련하지 않고 있다며 불만을 드러내는 사례도 적지 않았다.
도쿄(東京)에 살고 있는 30대 여성 탈북자는 “한국과 비교하면 일본은 마이너스다. 한국에는 정착 지원제도가 있는데 여기엔 아무것도 없다”고 말했다. 40대 탈북 여성은 “일본 정부는 차갑다”고도 했다.
특이한 일본 정착 사례도 있다. 북한에 남편과 두 딸을 남겨둔 채 2004년 탈북해 도쿄에 거주하는 40대 여성은 “중국인 브로커에 속아 본의 아니게 이산가족이 됐고 일본으로 오게 됐다”고 말했다. 1960년대 초 북한으로 돌아간 재일교포인 아버지와 일본인 처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그녀는 당초 탈북할 생각이 아니었지만 탈북하면 돈을 더 뜯어낼 수 있을 것으로 여긴 브로커들 때문에 본의 아니게 중국 선양(瀋陽) 일본영사관으로 들어갔다가 결국 일본에 정착했다. 그는 아사히신문 취재진에 “중국 브로커 때문에 이산가족이 되고 말았다. 딸들을 다시 볼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한국에서의 차별을 피해 캐나다를 선택한 탈북자들도 있다.
2009년 브로커에게 300만 원을 주고 한국으로 왔던 오용철(가명·42) 씨는 안정적인 직업을 얻지 못해 다른 선택을 했다. 신문 구인광고를 보고 전화를 하면 “발음이 이상하다. 조선족이냐”는 질문이 항상 날아왔다. “북한에서 왔다”고 하면 대부분 “다음에 봅시다”라며 전화를 끊었다고 했다. 그는 2011년 11월 캐나다로 향했다.
그는 캐나다의 기계공장에서 하루 8시간 일하고 1600캐나다달러(약 154만 원)의 월급을 번다. 세금 200달러와 집세 1000달러를 내면 월 400달러로 생활해야 하지만 북한에서보다는 벌이가 낫다.
캐나다 토론토에 살고 있는 김혜숙(가명·44·여) 씨는 현재 생활에 만족하느냐는 질문에 “만족한다”고 답했다. 무엇보다 탈북 뒤 한국에서 따라다녔던 ‘차별’이 없어서 좋다고 했다.
‘신이보낸사람’ 北 인권유린 실태에 대사관 관계자도 충격
‘신이보낸사람’을 본 대사관 관계자들이 충격에 빠졌다.
지난 3월6일 오후 세계 각국을 대표하는 주한 대사들과 대사관 관계자들이 영화 ‘신이 보낸 사람’(감독 김진무/제작 태풍코리아) 관람을 위해 서울 삼성동 메가박스에 모였다.
이날 특별시사회는 북한의 인권 실상을 전세계에 알리기 위해 북한정의연대 주최로 마련됐다. 주한 프랑스, 슬로바키아, 튀니지 등의 대사를 비롯해 일본, 아르헨티나, 스페인, 핀란드, 요르단, 방글라데시, 세르비아 등 30여개국의 대사관 관계자와 가족들이 참석했다. 또한 유력 외신 기자들도 관람해 눈길을 끌었다.
영문 자막 버전으로 상영된 특별 시사회가 끝난 후 참석자들은 대부분 한동안 자리를 뜨지 못했으며, 일부 대사와 대사관 직원들은 눈물을 흘리는가 하면 북한의 충격적인 인권 유린을 실제로 목격한 듯 충격을 받은 모습이었다.
‘신이 보낸 사람’은 자유와 인권이 유린된 북한에서 지하교회를 다니는 사람들의 참혹한 현실을 그린 작품으로 연기파 배우 김인권이 주연을 맡았다. 지난달 13일 개봉한 ‘신이 보낸 사람’은 열악한 상영 환경 속에서도 관객들로부터 호평을 받으며 37만명의 누적관객을 기록하며 현재 극장에서 상영중이다.
영화 상영 직후에는 김진무 감독과 출연배우인 홍경인, 최선자 등이 참석한 좌담회가 열렸다.
한편 영화 ‘신이 보낸 사람’은 이달 18일 영국 의회에서, 19일에는 스위스 제네바 유엔유럽본부에서 상영될 예정이다. 제작사는 또 미국과 일본, 호주, 캐나다 등에서도 영화 상영회를 여는 방안을 추진할 계획이다.(사진=태풍코리아 제공)
[동아일보 통일코리아 프로젝트 2년차/준비해야 하나 된다] 북한의 잃어버린 인권, 탈북자 60인의 증언
동아일보·아사히신문 공동취재팀
06-29 “압록강 인민군대는 軍이 아니다, 밀수·인신매매 장사꾼일 뿐”
나는 평안남도 평성에서 나고 자랐다. 31세다. 양강도 혜산이 두 번째 고향 격이다. 그곳에서 군인으로 살았다. 고등중학교를 졸업한 후 압록강변에서 10년 넘게 국경을 지켰다. 올해 한국에 정착했다. 경기도 안산에 산다.
오늘(5월 30일) 자동차 운전면허 주행시험을 치렀다. 필기시험은 탈북자 교육기관 하나원에서 100점을 맞고 통과했다. 도로주행은 어렵다. 북한에서 운전해본 적이 없어서다. 강사와 주행연습을 할 때 드는 비용이 시간당 4만3000원. 지금껏 17시간을 탔다. 70만 원 넘는 돈을 들였는데, 아깝지 않다. 실력이 느는 게 느껴져서다. 다음 시험 때는 합격할 것 같다.
나는 압록강을 건너 한국에 왔다. 48m. 혜산과 중국 지린(吉林)성 창바이(長白)현을 가로지르는 압록강의 최단 폭이다. 수많은 탈북자가 이곳에서 북한을 버렸다. 48m는 둑과 둑 사이 거리를 가리키는 것. 강물이 흐르는 곳에서 가장 폭이 좁은 곳은 15m 안팎이다.
“나는 공화국의 국경경비대”
내가 도강할 때 강물은 무릎 높이로 낮았다. 강이 얼어붙은 한겨울엔 건너기가 더 쉽다. 물론 운이 나쁘면 목숨을 잃을 수도 있다. 언 강물 위에서 개를 쫓다가 강을 건너는 것으로 오인돼 총을 맞은 아이도 봤다. 국경경비대가 탈북자를 발견하면 먼저 공포탄을 쏜다. 서지 않으면 공포탄 한 발을 더 쏜 다음 실탄을 장전한다. 탈북자가 총알을 맞지 않으면 강을 따라 건너 잡아와야 한다. 탈북하다 붙잡히는 일은 별로 없다. 내가 탈북할 때만 해도 경계가 허술했다.
인신매매와 밀수, 탈북이 내가 얼마 전까지 거주한 혜산의 오늘을 상징하는 낱말이다. 여자들을 중국 유흥업소에 넘기려는 남자가 득실거린다. 어린 여동생을 중국에 팔아넘기려는 오빠를 보는 것도 어렵지 않다. 군인들도 밀수, 인신매매, 마약범죄에 나선다.
한국 사람은 잘 모르는 것 같은데, 인민군은 군대도 아니다. 국경경비대 전사는 국경을 지키는 일보다 돈벌이에 혈안이 돼 있다. 각종 밀수 물건을 배달하거나 뇌물을 받고 도강 편의를 봐주는 것은 소소한 돈벌이다. 큰돈이 되는 것은 직접 밀수에 뛰어드는 것이다. 나도 한국에 오기 전 밀수 일을 했다.
나는 공화국의 국경경비대였다. 장사꾼이 돼버린 군인들은 고향집에 돈을 부쳐주면서 군사복무를 한다. 한국 물가로 환산하면 매달 200만 원씩 고향에 보내주는 녀석들도 있었다. 한국 돈 10만 원이면 북한에서 풍족하게 살 수 있다는 점을 떠올리면 200만 원이 얼마나 큰돈인지 짐작이 갈 것이다. 나도 매달 200달러씩 고향집에 보냈다.
사단장, 여단장부터 사관, 전사까지 모두가 밀수 관련 일로 돈을 번다. 밀무역을 눈감아주는 대가로 뒷돈을 받기도 하고, 직접 뛰어들어 큰돈을 벌기도 한다. 계급이 높은 사람만 직접 하고 졸병은 뒷돈을 받는다고 생각하면 오해다. 반대의 경우도 꽤 있다.
국경경비대가 밀수 현장을 적발하면 대부분 아는 사람들이 주도한 것이다. 소속 부대 여단장이 주도한 밀수를 부하가 적발해 멋쩍어하는 일도 벌어진다. 중국 내 밀수거점까지 확보해놓고 활동하는 군인도 있다.
통이 작은 녀석들은 한 탕에 북한 돈 100원 정도로 작게 한다. 공산품 같은 것을 거래하는 것이다. 제대로 하는 놈들은 t에 얼마 하는 식으로 사업을 크게 벌인다. 한 번에 500달러, 1000달러를 번다. 한국에서도 1시간에 50만 원, 100만 원을 버는 사람을 찾아보기 어려울 것이다.
국경경비대 사관, 전사들은 변경무역을 하는 북한 사람, 중국 사람에게 각각 뇌물을 받는다. 명절이나 생일 같은 좋은 날엔 중국 사람들이 선물도 챙겨준다.
전연지대(前緣地帶)에서 근무하는 인민군은 돈을 벌 기회가 없다. 전사들이 가장 싫어하는 근무지는 단연 강원도다. 국경에서 근무하려면 밑 작업이 필요하다. 나도 이런저런 사업을 벌여 국경으로 갔다. 사람 관계에 서투르거나 머리가 나쁘면 국경에서도 돈 못 버는 곳으로 밀려난다. 돈 되는 자리를 빼앗기지 않으려고 10을 벌면 5~6을 뇌물로 갖다 바친다.
군복도 사비로 제작해 입어
중국산 공산품 따위나 밀수하는 것 아니냐고 순진하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 같다. 물론 그런 것도 거래한다. 고기 넘기고, 술 넘기는 녀석도 있다. 큰돈 되는 밀수 상품은 북한 지하자원이다. 마그네사이트 아연 희토류 철광석 홍보석 금강석 니켈 같은 것 말이다. 칼슘부터 염산까지 별의별 것을 다 거래한다. 북한산 마약을 밀거래하는 녀석도 적지 않다. 적발되면 어떻게 되느냐고? 단속하는 놈도 먹고살아야 할 것 아닌가. 돈 주고 나오면 그만이다. 밀수상품 액수의 절반을 내놓는 게 관례다.
중국 국경경비대 녀석들은 잘 먹고 잘 살아선지 북한 사람들이 밀수를 하든 뭐를 하든 관심이 없다. 우리는 인민이 빨래하러 나가는 것까지 통제한다. 겨울에 공동작업 할 때는 중국 사람들과 나누는 대화도 감시해야 한다.
중국 녀석들은 살인, 마약, 국가범죄 같은 큰 건을 통보받기 전엔 국경에 나오지 않는다. 먹고사는 것과 관련한 짓엔 관여하지 않는다. 그러려니 하는 것이다. 우리 애들이 국경을 넘어가 쌀 낚아채오고, 여자 강간하고 그런 게 있다. 그럴 때는 중국 녀석들도 무장(武裝)을 쓴다. 국경 부대는 음식도 중국에서 넘어온 좋은 것만 골라 먹는다. 소 족발, 돼지 족발을 포장한 게 인기다. 중국 라면도 넉넉하게 쌓아둔다. 한국 라면? 중국 것보다 비싸다. TV도 삼성전자 게 고급이다. 모든 게 중국산보다 한국산이 비싸다.
돈을 잘 벌다보니 국경경비대 전사들은 군복도 부대에서 내주는 것은 촌스럽다고 여겨 사비로 직접 옷을 제작해 입는다. 혜산의 국경경비대 여전사들은 군복바지 안에 높은 굽 구두를 신는다. 구(舊)대원들은 정기적으로 드나들며 오입하는 집이 있다. 오래될 ‘구’자를 쓰는, 그러니까 군 생활을 오래한 전사를 가리키는 말이다. 밀수일하는 집마다 아가씨들이 다 있다. 그 집에서 고정적으로 여자 맛을 본다.
북한 여자는 오입질하기 편하다. 아니, 여기와 똑같다. 한국의 클럽에서 눈 맞는 것과 비슷하다. 와서 보니 경제 상황과 사회·정치 시스템이 다를 뿐 사람 사는 것은 똑같더라. 서로 깎아내리기 하고, 권력 두고 파벌을 나눠 다투고 하는 게.
2006년께 김정일이 군기 확립을 지시해 조금 팍팍했던 적이 잠시 있기는 했지만, 다시 한 번 밝히건대 북한 군대는 군기가 서 있는 정상적인 군대가 아니다. 마음대로 밖에 나다니면서 돈벌이도 하고, 오입도 한다. 농번기에 농사짓고, 현장서 건물 짓는 것도 다 군인이다.
대(代)를 이어 군에 복무하는 이들을 제외하면 인민군 군관은 농촌 출신 일색이다. 그렇다보니 농촌엔 농사지을 사람이 없다. 또한 사람들이 협동농장에서 일하려고 하지 않는다. 장사하는 게 돈벌이에 유리하기 때문이다.
한국처럼 2년 정도 복무하면 군기가 확립될 텐데, 10년씩 군 생활을 하니 그게 어렵다. 10년 동안 복무하다보면 인간관계가 어떻게 되겠는가. 연대장과도 서로 잘 통하고, 그냥 사회에서처럼 지내는 것이다. 한국 군인은 주둔지 밖을 못 돌아다닌다고 들었다. 자본주의 군대가 더 군대다운 모양이다.
지난해 말부터 경비 강화돼
국경지역에서는 중국 휴대전화도 마음껏 사용할 수 있다. 중국 게 터진다. 오늘도 혜산에 있는 친구와 통화했다. 서울에서 통화하려면 중국 식별번호를 누르고 국제전화를 걸면 그만이다. 1분당 1500원가량이어서 자주 연락하지는 못한다. 북한 당국이 전파 감지기를 많이 설치해놓아 5분 넘게 통화하면 탐지기에 적발될 수 있다. 그래서 통화를 짧게 한다.
카카오톡 같은 것도 할 수 있느냐고? 북한 사람들은 그것을 설치하는 방법을 모른다. 중국에서 SNS를 설치해 북한에 들여온 것도 있는데, 그것은 간첩 잡는 기관에 적발될 사안이다. 국가정보원 같은 곳에서 그런 것을 해서 들여보내는 것으로 안다.
평성 같은 내륙지역에선 중국 휴대전화가 당연히 터지지 않는다. 북한 휴대전화로는 국제전화를 할 수 없다. 중국 휴대전화를 가져와 개조해 ‘조선에서 만든 것’이라고 거짓말하고 판다. 중국돈으로 100~300위안(한국 돈 1만6000~4만8000원) 하는 폴더형 휴대전화를 300~400달러(한국 돈 30만~40만 원)를 받고 주민에게 판다. 휴대전화를 인민의 돈을 빨아들이는 수단으로도 이용하는 것이다. 한국에선 폴더형 휴대전화를 무료로 주더라.
북한에서는 한국 드라마를 많이 본다. 나도 여러 편을 봤다. 남자들도 많이 본다. 과거에는 CD알(CD의 북한식 표현)로 주로 들어왔는데, 요즘엔 노트북 컴퓨터를 활용한다. USB에 담긴 형태로 북한에서 유통된다. 노트북은 대부분 중국산이다. 노트북이 없으면 가난한 집이다. 내가 알기로는 한국 정보당국이 신의주와 온성을 통해 한국 드라마가 담긴 대량의 CD알을 공작 차원에서 북한에 들여보내려다 실패한 적이 있다. 종국엔 혜산을 통해 CD알을 북한에 집어넣는 데 성공했다고 들었다. 북한 인민에게 자본주의의 우수성을 알리려고 그런 일을 한 것 같다. 북한을 변화시키는 데 도움이 될 것으로 보인다.
북한도 빈부격차가 심해졌다. 돈 많은 이는 엄청 부자다. 한국 사업가처럼 돈이 많지는 않지만 40만~50만 달러를 소유한 사람이 적지 않다. 그런 사람들은 돈 많은 티를 내지 않으려 노력한다.
국경은 2008년까지는 마음대로 오갈 수 있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2008년 이후 경비가 강화됐지만 지난해 말까지는 강을 건너는 데 큰 어려움이 없었다. 그런데 최근엔 경계가 장난이 아니라고 한다. 나무에 송곳을 박은 부비트랩도 설치해놓았다고 한다. 시력 상실을 목적으로 한 것이다. 탈북자와 밀수꾼 일을 돕는 행위를 철저히 봉쇄하라는 내용을 골자로 한 4대 범죄 처단 특별지시도 내려졌다고 혜산에 사는 친구가 말했다. 국경경비대가 국경여단 산하에 독자적으로 있었는데, 국가안전보위부 소속으로 넘어갔다고도 한다.
북한 지역 국경에는 철책이 없다. 중국 쪽은 철책을 쳐놓았다. 나는 솔직히 목숨 걸고 북한을 탈출해 한국에 왔다는 사람들의 얘기가 잘 와 닿지 않는다. 중국 국경경비대는 도강을 막는 일에 관심이 없다. 중국 쪽 철책에 개구멍이 곳곳에 있다. 밀수꾼들이 만들어놓은 통로다. 사람들은 그곳을 통해 국경을 밥 먹듯 오갔다.
이 간나 새끼들아!
나도 철책 아래 개구멍을 통해 중국 창바이(長白)에 도착했다. 창바이에서 건너다본 혜산은 한심했다. 기와가 없어 나무로 지붕을 얹은 집이 늘어선 마을이 한눈에 들어왔다. 중국에는 딱 1주일 머물렀다. 창바이에서 두 시간가량 쏘다니다 중국돈으로 버스표를 끊어서 산둥(山東)성 칭다오(靑島)를 거쳐 윈난(雲南)성 쿤밍(昆明)으로 갔다.
쿤밍에서 제3국(탈북 루트가 공개될 수 있어 나라 이름을 밝히지 않는다)으로 넘었다. 동남아 A국에 한국이 경제 지원을 많이 한다고 알고 있다. 협정이 맺어져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이 나라에서 한국으로 들어가는 게 가장 쉽다고 한다. 혜산을 떠나 제3국을 거쳐 A국 수도에 도착하는 데까지 딱 9일이 걸렸다. 고생해서 한국에 왔다는 사람은 도대체 뭔지 모르겠다. A국에서 한 달간 머무르다 한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창바이에서 만난, 서울행을 도와주는 사람에게 700만 원가량의 돈을 줬다. 한국에 와 들어보니 나는 돈을 많이 준 편이다. 혼자 힘으로 탈북한 사람을 중국에서 제3국으로 안내하는 경우는 브로커 비용이 300만 원가량이라고 한다. 브로커가 국경 통과까지 책임질 때는 국경경비대에 주는 뇌물이 포함돼 500만~600만 원을 내야 한다고 한다. 한국에 와 후불로 브로커 비용을 내는 사람은 정착지원금 통장이 깡통이 되기도 한다.
북중 국경에서 생활한 것은 일생일대의 기회였다. 평성에서 계속 살았다면 더 큰 세상을 몰랐을 것이다. 한국에 온 탈북자의 거의 대부분이 국경지방 출신인 것도 그래서인 것 같다. 2000년대 초반 탈북이 많을 때는 한국행을 결행할 생각을 못했다. 부모님이 혹시 잘못되는 것은 아닌지 걱정했다. 요즘엔 한국에서 중국을 거쳐 부쳐주는 돈으로 북한의 가족이 잘사는 경우가 많다.
한국에 처음 와서 놀란 것은 건물이 늘어선 모양이 울퉁불퉁하다는 것이다. 북한 건설은 계획에 따라 이뤄지는 반면 한국은 자본가가 각자 돈을 대서 짓기에 그런 것 같다. 북한 건축은 겉으로 보이는 곳은 멀쩡하지만 뒤쪽 동네는 한심하기 그지없다. 지금도 전기가 아예 안 들어간 지역이 있다. 한국에서도 과거에 썼을 것 같은데 ‘돌가스’ 같은 것에 의지해 사는 것이다.
중앙합동신문센터에서는 힘들었다. 석 달을 그곳에 머물렀는데, 신원보증이 잘 안돼 독방에 1개월간 있었다. 사람을 걸러내고 심사하는 게 그곳의 일이라는 것은 이해하지만 국정원 사람들과는 앞으로도 얽히기 싫다. 독방에는 TV도 없고, 책도 주지 않는다. 마지막엔 악이 나서 “이 간나 새끼들아! 맘대로 하라”고 고함도 쳤다. 그 안에서 있었던 일은 비밀로 하기로 돼 있다. 문서에 서명을 한 터라 더는 밝히지 않으려 한다. 탈북자들이 그 안에서 겪은 일을 말하면 국정원의 이미지가 나빠질 것이다.
원래는 서울에 정착하려 했는데, 월세가 비싸 안산을 선택했다. 경기도는 서울보다 월세가 저렴하다. 먼저 온 친구들이 서울에는 오지 말라고 하더라. 탈북자 이미지가 나쁘다고 했다. 여자들이 물을 흐려놓는 경우가 많았다. 한국에서 유흥업소 나가는 탈북자의 상당수가 인신매매로 중국에 팔려갔다 도망쳐 한국에 들어온 경우다. 중국으로 팔려가는 북한 여성이 나날이 늘고 있다. 안타까운 일이다.
보증금 350만 원 주택에 정착
안산 집에 처음 도착했을 때는 집이 너무 작아 실망했다. 평성 고향집보다 훨씬 나빴다. ‘우리가 한국에서 뭐 한 게 있나, 삶을 시작할 수 있게끔 도와준 것만도 고마운 일’이라고 생각하면서 마음을 고쳐먹었다. 살아보니 집은 작지만 동네가 조용해 서울보다 살기 좋은 것 같다. 지금 사는 집은 보증금 350만 원, 월세 4만 원이다. 정부에서 탈북자에게 지원하는 전세 보증금은 1200만 원이다. 850만 원을 손해 본 게 아니냐고? 저축해놓은 돈이다. 5년 동안 다른 곳으로 옮기지 않고 이곳에서 살면 나머지 돈을 현금으로 준다.
처음 한국 생활을 시작했을 때는 막막했다. 내가 있는 곳의 위치도 몰랐다. 마음 약해지면 쓰러진다고 마음을 다잡았다. 오로지 내일 할 일에만 신경을 곤두세웠다. 휴대전화는 ‘팀장’이라는 사람이 개통하는 것을 도와줬다. 수고비를 10만원씩 받아먹더라. 속으로 ‘10만 원 갖고 잘 살아라’ 하면서 그이에게 돈을 줬다. 북한에서 일반인은 한국에서 사용하는 고급 휴대전화를 쓰지 못한다.
내가 관찰해보니 수도권이 아닌 지방에 정착한 친구들은 망탕망탕 사는 경우가 많았다. 부산, 대구에 다녀왔는데 우리 아이들은 하나같이 산비탈 구석진 곳에서 살았다. 반면 수도권에 사는 아이들은 삶이 대체로 정리돼 있다.
북한 경제가 과거보다 좋아졌다는 기사가 나오던데, 당최 무슨 얘기인지, 나는 이해하기 어렵다. 어느 부분이 좋아졌다는 것인가? 인민 경제가 좋아졌다는 것인가? 국가에 돈이 많아졌다는 것인가? 북한에 미래가 있느냐, 없느냐에 대해 오랫동안 고민했다. 건설자, 기술자를 만나 공부하면서 북한의 미래를 나름대로 내다봤다. 전망이 나쁘다는 결론을 내려 한국에 온 것이다.
나는 노동당원이었다. 입당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노동당에 들어가야 사람 구실하면서 살 수 있다. 당원이 돼야 비로소 떳떳한 존재가 되는 곳이 북한이다. 여자들은 몸을 주면서까지 입당하려고 한다. 군대에 간다고 입당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똘똘하거나 대외관계를 잘해야 한다. 그것도 아니면 착하고 말을 잘 들어야 한다. 나는 군 생활을 괜찮게 했다. 북한에서 한자리 해보자는 생각을 가진 적도 있다.
북한은 ‘총화’의 나라다. 노동당 조직이 체제 유지의 근간이다. 김정은이 노인은 당 생활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방침을 내놓았다. 평양에 깨인 늙은 사람은 귀찮은 일 이제는 안 해도 된다면서 좋아했다. 지방의 노인은 당증 외엔 우리가 볼 게 뭐가 있느냐면서 한탄했다. 우둔하다고 하겠다. 허울뿐인 당증을 갖고 당원 행세를 하면서 안분지족하는 것이다.
나는 노동자의 아들이다. 농민과 함께 북한에서 가장 좋은 출신성분이다. 노동자, 농민이 성분이 좋다는 것은 선전 포스터용일 뿐이다. 열심히 하면 나도 뭔가가 될 수 있다는 환상을 심어주는 것이다. 수많은 노동자, 농민의 아들 중 한 명이 선전 포스터의 주인공이 되는 것이다. 멋진 상표를 붙인 시제품 맥주를 하나 만들어놓고 그런 맥주를 도처에서 구할 수 있는 것처럼 광고하는 꼴이다. 사람들의 충성을 그런 식으로 유도한다. 한국에 온 탈북자 중 일부는 그런 원리를 파악하고 강을 건넌 것이다.
TV 같은 곳에 출연해 북한 권력의 내막을 아는 것처럼 말하는 탈북자가 있던데 북한 내에서도 핵심인 아주 적은 수의 사람만이 실체를 알 것이다. 김정은이 고모부까지 죽이는 것을 보면 뒤에 누군가 있지 않나 싶다는 생각은 한다. 장성택이 김경희의 남편인 것을 사람들이 다 안다. 북한에서 장성택이 누군지 모르는 사람은 의식이 없는 사람, 상식이 없는 사람이다. 죽으라면 죽는 시늉까지 할 무식쟁이나 왜 사는지도 모르는 사람들만 장성택이 누군지 모른다. 김정은이 김일성의 사위를 죽이는 패륜을 저지른 것이다. 과연 김정은의 선택일까.
폭압의 정치
나에게는 자본주의가 맞는 것 같다. 뭘 하든 누가 참견 않고 일한 만큼 보상받는 것 아닌가. 일자리를 얻으면 자유가 제한받는다는 것도 안다. 열심히 일해서 돈을 많이 버는 게 목표다. 막노동부터 시작해서는 미래가 담보되지 않을 것 같다. 운전면허 시험에 합격하면 이런저런 일을 시작할 수 있다.
한국에 적응 못하고 영국, 노르웨이, 캐나다로 이주한 친구가 많더라. 나도 캐나다에 가라는 권고를 들었다. 영국, 노르웨이, 캐나다 같은 나라는 복지가 잘 돼 있어 먹고살 걱정이 없다고 한다. 내 생각엔 한국도 복지가 잘 돼 있는 것 같다. 살아보니 30만~40만 원으로도 한 달을 살 수 있더라. 국가에서 저소득층에게 매달 지원해주는 돈만으로도 사는 데 지장이 없다.
어쨌거나 탈북자가 한국에서 살기란 힘든 것 같다. 오죽했으면 말도 안 통하는 나라로 떠났을까 싶다. ‘제 땅에서도 성공 못하면 어디 가서 성공하겠느냐’고 마음을 다잡을 뿐이다.
국가를 위해 공을 세우는 게 애국이 아니라 한국 사회에 잘 적응해 사는 게 애국이라고 여긴다. 그런데 이상한 애가 많다. 머리가 나쁘게 굴러간다. 유흥업소에 맨 우리 아이다. 안 그러면 좋겠다.
김일성은 폭압의 정치를 했다. 세계적으로 논평할 때도 독재자 아닌가. 사회주의라는 구호가 세상에 존재해선 안 된다고 생각한다. 오늘날의 북한 사회·정치시스템을 만들어놓은 것이 김일성 부자다. 사회주의 모순을 알면서도 잘못된 시스템을 지금껏 유지한다. 수십만 명이 정치범 등 이런저런 이유로 생명을 잃었다. 지금도 특권층이나 장사로 돈을 번 사람들을 빼놓고는 생지옥에 사는 게 북한의 현실이다.
북한 인민의 고단한 삶은 누구의 잘못인가? 거기서 태어난 게 죄일 뿐이다. 인간으로서 누려야 할 축복은 누구나 가질 수 있어야 한다. 한국에서 난다 긴다 하는 사람도 북한에서 났다면 어쩔 수 없이 그렇고 그런 존재로 살았을 것이다.
나도 한국에서 태어났다면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았을 나이다. 자본주의 경제를 조금씩 이해해간다. 한국식 대인관계는 아직 숙달이 안 됐다. 웃으면서 연락 준다 해놓고 답 없는 사람이 많다. 친구들은 하나원에서 배운 것 중 도움이 되는 것이 하나도 없다고 말한다. 나는 생각이 다르다. 북한 때를 지우는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마음을 더 바꿔야 한다. 북한식으로 행동하면 이미지가 나빠진다는 것을 잘 안다.
오늘 아침 나를 담당하는 경찰 아저씨에게 전화가 왔다. 어떻게 알았는지 “왜 학원에 빠졌느냐”고 묻더라. 아직까지 온전한 자유는 누리지 못하지만, 내 선택이 옳았음을 입증해 보일 것이다. 아직은 두려운 게 사실이다. 최선을 다할 것이다.
* 구술자의 신원 보호와 관련한 요청으로 편집자가 개인정보 중 일부를 실제와 다르게 바꿨습니다. 박철용이라는 이름이 가명이라는 점도 밝힙니다.
구술 = 박철용 북한이탈주민 정리 = 송홍근 기자 carrot@donga.com
11.03 김정일 동창생의 곡절많은 탈북수기 - 장영걸 수기
필자 : 장영걸 (가명) 2008년 탈북, 2009년 남한 입국
나는 3년 전 한국에 와서야 ‘이런 세상이 진정 사람 사는 세상이구나!’하고 깨닫게 되었다. 그 전까지는 사회주의 체제 내에서 살았기 때문에 사회주의가 가장 선진적이고 좋은 세상이고, 미국을 비롯한 다른 자본주의 사회는 나쁘다고만 교양 받았다.
그런 내가 어떻게 어떤 모순점들을 깨닫고 여기 한국에까지 왔으며, 이제는 세상 사람들이 그토록 부러워하는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참된 인간으로서 살게 됐는지 간단하게 적으려고 한다.
해방 이후 북한
내가 태어났던 1940년대는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얄타회담에서 승전국의 3국 수반들이 모여서 영토를 나누기 시작했던 시기였다. 한반도는 38선으로 분할되어 북조선은 소련이, 남조선은 미국이 지배하게 되었다.
이처럼 사회주의와 자본주의 진영이 서로 세계를 나누어 가지는 첨예한 투쟁 속에서 내가 태어난 것이다.
이 시기 스탈린은 해방된 북한을 사회주의 체하에 철저히 묶어두기 위해서 직접 자신이 키우고 충성을 다 해오던 당시 소련 붉은 군대 국제여단의 대대장이었던 김일성을 북한의 수반으로 보냈다. 그리고 소련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일정한 직위에 있던 조선 사람들을 김일성에게 보냈다.
당시 북한에는 젊고 싸움을 잘하는 항일빨치산들이 많았지만 이들에게는 나라를 세우거나 인민경제계획을 발전시킬 수 있는 능력은 없었다. 그래서 소련에서 온 조선 사람들이 항일빨치산들을 대상으로 소련식의 교육을 실시했고, 북한을 사회주의 체제에 맞게 건설하였다.
한편 김일성은 많은 북한청년들을 소련으로 유학을 보내서 민족 간부 양성을 진행하였다. 김일성은 스탈린의 말이라면 그대로 복종했으며, 그의 정치를 그대로 계승하여 북한을 철저히 소련식으로 건설하였고, 남한까지 사회주의 진영에 끌어들이려고 스탈린과 공모하여 6.25전쟁을 일으켰다. 이 전쟁으로 인해 한반도는 폐허가 되고 수백만 사람들이 죽었다.
나는 한국에 오기 전까지는 6.25전쟁은 이승만 정권이 미국과 결탁해서 일으킨 것으로 배웠고, 그렇게 믿어왔다. 그러나 한국에 와서 전쟁기념관을 참관하고, 거기에 전시된 스탈린과 김일성 사이의 비밀 회담들의 자료들과 스탈린이 크렘린에서 보낸 전쟁개시 날짜가 적힌 문건을 보고는 철저히 북조선이 먼저 공격하고 전쟁을 일으켰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1950년대는 북한 내 계급투쟁이 매우 첨예했던 시기였다. 1953년에 스탈린이 사망한 후, 흐루시초프가 소련의 수반이 되면서, 그는 스탈린의 독재체제를 전 세계에 폭로하고 비판하였다. 김일성은 자신의 정치적 스승이자 든든한 배후였던 스탈린을 비판하는 흐루시초프를 수정주의분자로 낙인찍고, 자기와 항일빨치산을 내세우면서 소련의 말을 듣지 않았다.
소련은 더 이상 자신의 말을 듣지 않는 김일성을 없애기 위해 쿠데타까지 준비하였으나 실패로 돌아가고, 김일성은 1956년 8월 종파사건으로 소련파를 다 숙청했다. 이때부터 김일성은 항일빨치산들을 주축으로 수령 중심의 독재정치를 본격화하고 강화했다.
유복했던 유년 시절
김일성의 총애를 받으며 고위직에서 일을 하던 아버지 덕에 나는 부러울 것도, 걱정도 없는 유년 시절을 보냈다. 이때까지만해도 북한에는 제4인민학교, 후에는 남산중학교1)라고 불리는, ‘부상’급 이상, 한국으로 치면 차관 이상 급, 군대는 장성, 장령 이상 간부들의 자제들이 다니는 학교가 따로 있었다.
나는 김정일, 김경희, 김평일, 김영일과 같은 김일성의 자제들과 함께 이 학교에 다녔고, 이들을 다 알았을 뿐 아니라, 교제도 하고, 때로는 친구들과 함께 김정일의 초청으로 김일성의 저택인 5호 댁에 여러번 놀러 간 일도 있었다.
김정일은 우리에게 맛있는 간식도 먹였고, 직접 피아노도 쳤고, 개인 영사기까지 직접 돌리면서 우리에게 각종 영화도 보여주곤 하였다 (김정일은 어릴 때부터 음악도 잘하였고, 영사기와 자동차는 그의 취미였다).
내가 인민학교 1, 2학년이었을 때만 해도 소련 교원들이 와서 아이들을 가르쳤고 나는 러시아어를 배웠고, 러시아 춤과 노래도 많이 배웠다.
그러나 김일성이 소련 수정주의를 비판하기 시작하자, 김정일은 남산학교에서 소련 교원들을 다 내보내고 소련의 춤과 노래를 금지시켰다. 또한 러시아어로 된 일체 도서들(전국적인 범위에서 정치, 경제, 과학 등 모든 서적과 유학을 가서 쓴 유학생의 노트까지)을 다 불태우게 하였다.
이렇게 엘리트 간부들 자녀들이 다니는 학교에 다녔지만, 정작 내가 알고 있는 지식은 매우 제한된 것이었다. 북한에서 엘리트 학교에 다닌 사람이라고 해도 상식적인 것도 모른다.
가령 정치, 경제, 과학, 문화, 음악 등의 분야에서 세계적으로 유명한 사람은 누구인지, 차이코프스키와 쇼팽은 누구인지, 다 모른다. 현재 북한에서는 오로지 김일성, 김정일에 대한 것, 그리고 김일성 일가를 위주로 왜곡된 조선역사와, 김일성이 일제의 100만 대군을 멸망시키고 조선반도를 해방시킨 것으로 꾸민 조선혁명역사를 유치원에서부터 가르친다.
김정일이 정권을 잡은 이후에는 아예 외국 유학이 사라졌다. 최근에는 소수의 수재들과 엘리트층의 몇몇 자제들만 특수학과에 보내고 있고, 외국에 주재한 북한의 외교관들을 자제들 중 한 명만을 데리고 가서 자기의 비용으로 공부시킬 수 있도록 하고 있다. 그러나 나는 외국인으로부터 직접 ‘북한에서 외국으로 유학 간 대학생들은 그 나라의 중학생들보다도 일반 지식이 못하다’고 들은 적이 있다. 뇌물과 선군 정책 북쪽의 경제사정은 해방 초반까지는 괜찮았다. 해방직후, 소련을 비롯한 사회주의 진영이 북한을 상당부분 지원했고 남아있던 일본 공장들도 가동되어 생산량을 맞추고도 남았다. 뿐만 아니라 북한의 농업상황도 좋아서 쌀도 남아돌았다.
비록 한국전쟁 이후에 남쪽과 마찬가지로 북한의 인프라도많이 파괴가 됐지만(북한은 그 때 남한의 자료를 가지고 “제일 못 사는 남조선” 이렇게 선전한다) 쎄브의 돈을 지원을 받아서 빠른 시간 안에 전후 복구를 이뤄냈다. 이러한 추세는 60년대 중반까지 지속된 것으로 알고 있다.
하지만 소련의 의견에 따르지 않는 김일성에게 후르시쵸프는 소련의 쎄브에 들지 않으면 원조를 하지 않겠다고 선언하였다. 한편 김일성은 북한이 쎄브에 가입하게 되면 북한이 다른 나라들에 의존하게 되고, 소련 수정주의를 받아들여 혁명은 수포로 돌아가고, 남한과 미국에게 점령당한다고 선전하였다.
이렇게 북한은 쎄브에 가입하지 않고, 항일의 혁명정신, 불굴의 자력갱생의 혁명정신 등의 구호들을 제시하며 “우리 식 사회주의 혁명노선”을 내놓았다. 이때부터 북한은 국제적으로 고립되기 시작했고, 정치, 경제, 과학과 문화 등 모든 영역에서 하강선을 긋기 시작했다.
이같은 상황에도 불구하고, 김일성은 북한이 사회주의, 공산주의를 고수해야만 사람들이 흰 쌀밥에 고깃국을 먹고, 양단 옷을 입고 기와집을 만들어 살 수 있게 된다며 사람들을 속였다. 따라서 그는 경공업보다 중공업을 우선시하고, 이를 기초로 군수공업을 발전시켜야 남한과 미국을 비롯한 제국주의자들로부터 나라를 굳건히 지킬 수 있다고 선전하며, 모든 국가 자원을 중공업과 군수공업에 집중했다.
반면, 인민이 풍족하게 살 수 있게 하는 경공업은 가볍게 여긴 결과, 인민은 날이 갈수록 더 헐벗고 굶주리면서 거지처럼 사는 신세로 전락하였다. 또한 항일빨치산들이 당과 내각 복지관을 독식하면서 뇌물이 만연하게 되었고 이들이 당, 혁명 자금이다 하면서 자기 주머니를 챙겼다. 이렇게 해서 당, 특히 복지관들이 세도를 쓰게 되고, 인민들은 종이 되고 말았다.
특히 김정일이 주체사상이라는 것을 만들면서 더욱 심해졌다. 이를 바탕으로 김일성의 사돈의 팔촌 되는 사람까지도 다 한 자리씩을 차지했고, 인민들은 지칠 대로 지쳤다. 아마 북한만큼 뇌물 많은 데가 없을 것이다.
이러한 실태는 김정일 대에 와서 더 심각해졌다. 김정일은 우선 자신의 권력을 튼튼히 다지기 위하여 김일성을 영원한 주석, 빛나는 태양으로 우상화 시키는데 모든 자원과 노력을 총동원하였다. 그러다 소련을 비롯한 사회주의 진영이 무너지자, 공산주의란 말을 다 빼고, 당의 유일사상체계와 당의 유일적 지도체제를 백방으로 강화하고 선군정치를 내놓았다.
이로써 나라의 경제와 중공업을 다 망하고 인민들이 다 굶어 죽어가도, 군수공업을 발전시키고 핵무기를 개발하는 데 모든 자원을 사용하였다. 세상이 다 아는 바와 같이 북한의 일반 공장들은 자재와, 원료, 전기와 기름 난으로 가동되지 못하고 있으며 오직 군수공장들만이 가동되고 있다.
뇌물에 대한 실례를 들겠다. 북한의 외화벌이 일꾼은 외국으로 나가기 전과 후에 중앙당, 내각, 외무성, 무역성, 국가안전보위부 등 관계기관의 간부들과 담당일군들, 자기단위의 간부들에게 무조건 뇌물을 바쳐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이들은 결함과 단서를 잡히어 다시는 외국으로 못 가게 된다. 이 상황이 오죽 부담스러우면 어떤 사람들은 아예 포기하고 외국에 나가지 않는다.
북한에서는 자식을 대학에 보내는 것에도 돈이 개입된다. 북한에서 최고의 위치에 있는 김일성종합대학은 뇌물을 가장 많이 받는 것으로 알려져 있고, 그 다음은 김책공업종합대학 그리고 평양외국어대학, 평양의학대학, 평양사범대학, 평성이과대학 등의 순이며, 뇌물도 다 각이하다.
오죽하면 2007년 대학입학시험이 끝난 후, 뇌물을 가장 많이 받았다고 보고된 김일성 종합대학보위부에 대하여 김정일은 보위부 전체를 해산시키고, 보위부장을 비롯한 보위원들을 철직, 제대, 출당, 혹은 지방으로 추방시켰다.
무역으로 외화벌이를 하던 내 친구도 교체가 시급한 김일성종합대학의 엘리베이터 와이어 1만 미터를 중국에서 구입해서 대학에 바쳤더니 아들이 입학시험도 없이 무사히 김일성종합대학에 합격했다고 자랑했다. 이러한 실례들은 너무나 많으니 더 언급을 하지 않겠다.
이렇듯, 북한에서는 아무리 결함을 크더라도 돈을 바치면 그 어떤 문제도 제기 되지 않는다. 법이든 권력이든 돈으로 팔고, 살 수 있는 나라이다. 내가 아는 재일동포도 말하기를, 외화만 좀 있으면 북한에서 살기 제일 편하고 물가도 싸다는 것이다. 자기는 통행증이나 자동차 장거리운행증도 떼지 않고 평양에서 신의주, 원산, 함흥 등, 고급담배 한 막대기면 어디든 다 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북한에서는 돈과 권력이 없는 사람들만 고생하고, 돈과 권력이 있는 자들을 비롯한 간첩들은 북한 땅 어느 곳이든 다 갈 수가 있다. 여기 한국으로 온 탈북자들 대다수가 국경경비대에 돈을 주고 중국으로 넘어 갔다가 온 사람들이다. 다시 말해서, 돈이 있으면 국경을 넘을 수가 있고, 돈이 없는 자는 국경경비대원과 의논하여 두만강을 건너 이들을 중국에 직접 파는 행위들을 하는 것이다. 무너지는 북한의 경제: 어업, 농업, 전력
김일성과 김정일은 우리식 주체조선의 “사회주의건설정신”, “수령결사옹위의 혁명정신” 등 당과 수령의 지시대로 하면 남부럽지 않게 살 수 있다고 거듭 강조하여 왔지만, 해방 후 60년 이상이 지난 지금, 노년층들의 이야기 들어보면, 지금이 오히려 일제 식민지 때보다도 어려운 실정이다. 그 실례를 들자면 끝이 없지만 몇 가지만 알려 드리려고 한다.
1. 어업
북한 앞바다에서 고기잡이를 하는 어선의 90%는 다 중국의 어선이다. 총참모부에서는 매 해마다 ‘공동 어로’의 면목으로 중국 어선들에게 영해를 내 주며 그 대가로 외화를 벌고 있다. 얼마 되지 않는 북한 어선들이 바다에 나가는 절차가 매우 복잡할 뿐 아니라, 넣을 기름도 없고 수리를 할 수도 없어 수산물을 잡지 못한다. 그러니 평양을 비롯한 큰 도시들에 있던 수산물 전문상점들은 다 없어지고 말았다. 내가 2008년에 탈북할 때에도 수산물은 시장에서만 비싼 가격으로 살 수 있었다.
또한, 북한의 동해와 서해의 해안가는 매우 길지만, 고기잡이는 둘째 치고, 파도에 밀려오는 미역이나 곰포까지도 해안가에서 주워 먹지도 못한다. 이는 나라 해안을 미국과 남한의 침입으로부터 보호한다며, 철조망과 2-3m의 모래보호선으로 막아 놓아서 경비대 외에는 그 누구도 바닷가에 나가지 못하기 때문이다.
2. 수력 및 화력
해방 직후 김일성은 레닌의 본을 따서 “전기는 곧 공산주의다”라는 구호를 내걸고, 수력과 화력 발전소들을 건설하였다. 그러나 비과학적인 방식으로 건설된 수력발전소들은 물을 채우지 못하여 자기마력을 내지 못했으며, 압록강의 수풍수력 발전소는 중국의 투자로 정기적인 수리와 보수가 이뤄지기 때문에 생산된 전기의 대부분은 중국이 가져간다.
평양화력발전소와 북창화력발전소들은 소련의 50년대 방식으로 건설하여 낡은데다가, 가동을 시키기는 하지만 설비들을 제때에 보수·수리를 하지 못할 뿐 아니라 설비들의 수명이 다 지나서 가동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형편이다. 인공위성으로 북한의 밤을 찍은 사진을 보면 이곳은 암흑의 지역이다. 지금은 평양에 있는 외교관 구역마저도 전기를 제대로 공급하지 못하는 정도이다.
3. 농업과 배급
김일성은 “쌀은 곧 사회주의이다!”, “전당, 전군, 전민이 농사 혁명에 총동원하자!”라는 구호를 내 걸었지만 주체농법의 도입으로 농경지는 황폐화되고 농업은 실패했다.
해방 직후부터 실시해 온 쌀 배급제는 오늘 날까지 존재하고 있으나 김정일 대에 와서 붕괴되어, 수백만 명이 굶어 죽는 참상이 벌어졌다. 평양시만 배급하는데 10-15일분을 주면 이것으로 온 가족이 나누어 먹으면서 살아야 한다.
배급에 대하여 한 가지 더 언급 할 점은, 한국에 와 보니 돼지, 소, 오리, 닭 등 집짐승이나 가축에게 사료를 공급 해 주는 것이다. 나는 북한에서 60해 이상이나 살면서 배급을 받으며 살았으니, 60년 이상 짐승 취급을 받으며 살았다는 결론에 도달하였다. 그리고 한국에 와서야 인간대우를 받으면서 사람으로 살고 있다고 생각하니 억울하기 짝이 없다. 북한에 남은 나의 가족, 친척, 동료들은 아직까지도 사람이 아닌 짐승대우를 받으면서 살아간다고 생각하면 하루 빨리 그들을 해방시키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번은 박남기가 당중앙위원회비서직에 있을 때, 그를 만난 적이 있었는데, 왜 당이 인민을 충분히 먹이지 못하며 원인은 무엇인가를 물어봤다. 그러자 그는 “집에서 기르는 개를 잘 먹이고 호강시키면 주인 말을 잘 안 들으며, 잠만 자고 집도 잘 지키지 않는다. 반대로 개를 굶기면서 엄하게 다루면 그 개는 주인에게 아첨하면서 말을 잘 듣고 집도 잘 지킨다”라고 답했다.
더불어, 그는 “나라를 남한과 미국으로부터 지키자니 군수공업을 강화하고 핵무기도 개발해야 하는데 많은 외화가 들며 이 자금을 쌀을 팔아서 얻는다. 이것은 위대한 장군님의 변함없는 노선이다. 만약에 군비를 1%만 줄여 인민들에게 돌리면 배급은 정상적으로 줄 수 있는데…”라고 말 하는 것이었다.
이 말을 들으니 남포항에 출장 갔을 때 어느 한 나라에서 온 쌀을 부두에 정박해놓았다가, 며칠 후 우리 무역선박에 싣던 모습이 생각났다. 그 쌀은 아프리카의 어느 한 나라에 수출된다는 것도 들었다. 인민은 쌀이 부족하여 배급을 타지 못하여 굶고 있고, 일부는 죽어가고 있는데도, 왜 우리는 들어오는 쌀을 수출하는 것일까 하고, 의문을 가졌던 일이 생각났다.
지금 생각 해보면 김정일에게는 인민이 인간이 아니라 개였기 때문에 쌀도 주지 않으 면서 자기는 전용비행기를 띄워 뉴질랜드에서는 상어 지느러미, 프랑스에서는 고급 와인과 꼬냐크,러시아에서는 연어알을 비롯하여 세계 각국에서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날라다 먹으면서 편히 잠을 잤던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에도 문제가 많이 있지만, 한국에는 적어도 사람사는 것이 기본은 되어 있다. 공산주의 사회는 구호만 요란스레 붙여놓았을 뿐, 실제로 사람을 위해서 제대로 하는 것이 없다.
내가 여기 와서 깨닫게 된 것은 북한에서는 모든 혜택이 위대한 수령, 지도자한테만 가지 인민들한테는 가지 않는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내가 살아온 경위를 보면 나는 빨갱이 중의 빨갱이라고 할 수 있는데, 내가 빨갱이로서 남쪽에 와보니까 무엇이 허위였는지를 누구보다도 더 절감하고 알게 됐다.
정보 및 지식의 차단
북한의 TV 채널은 ‘평양채널’ 하나 밖에 없고, 다른 채널은 보지 못하도록 해 놓았다. 라디오도 평양 방송만 들을 수 있도록 라디오 파장을 고정시켜 놓았을 뿐 아니라, 반도체 라디오를 가지고 있으면 간첩으로 간주하여 개인이 소유할 수 없다.
컴퓨터도 마음대로 가질 수 없으며 인터넷 사용도 불가능하다. 핸드폰은 작년부터 보급이 시작되었지만, 군대에서는 소유하지 못하고, 당, 행정 등 간부들과 엘리트들만 가질 수 있다. 그마저도 국내의 제한된 지역에서의 통화만 가능하고, 국제 통화는 생각도 못하는 수준이다.
이렇다 보니 북한은 외국인들이 말하는 것처럼 철저히 ‘통조림화’된 나라라고 할 수 있다. 북한인민은 철저히 우물 안의 개구리가 되어 버린 것이다.
북한 정부가 인민을 우롱하는 예로서 이런 일도 있었다. 북한이 인공위성을 쏴 올렸다고 TV에서 요란하게 뉴스를 내보낼 때, 나는 핵분야에서 과학자로 일하는 여러 명의 학교 동창들과 TV 앞에 앉아 있었다.
뉴스에서 아나운서는 “…철저히 우리의 과학자, 우리의 자체의 힘으로 인공위성을 성과적으로 쏴 올리는 데 성공하였으며, 우리 주체의 위성은 ‘김일성 장군의 노래’와 ‘친애하는 김정일 동지’의 노래를 온 우주에 소리 높이 울리고 있습니다‘라고 소개하자, 나의 동창들은 코웃음을 쳤다.
그래서 내가 왜냐고 물으니, 그들은 ‘러시아 과학자 12명이 주축이 되었을 뿐 아니라, 여러 명의 외국 과학자들이 이 사업에 참가하였으며, 기본적인 자재와 설비들은 다 배로 외국에서 실어 왔다’고 실토하였다. 또한 ‘이번에 발사한 것은 인공위성이 아니라 장거리 대륙 간 탄도 로켓이었는데 일본을 넘어 태평양에 떨어졌다’고 말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로켓만 가지고도 남한과 일본은 물론이고 하와이에 있는 미군 기지들까지 타격할 수가 있으니 큰 성과라고 말하였다. 김정일은 이런 식으로 인민을 속이고 기만하면서 기반 유지를 위해 핵무기와 화학무기를 개발하는 등 북한을 군사강국으로 만드는 데에만 몰두하고 있는 것이다.
강제제대와 재쏘임업대표부
북한군대에서 복무할 때, 보통의 항일투사 자제들이 그렇듯 고위직 아버지 덕택에 나의 진급도 상당히 빨랐던 편이다. 하전사 복무를 거쳐 군사대학을 졸업하고 중좌 직급의 직무에 배치되어 27살에 소령으로 근무하게 되었으니 아주 빠르게 진급했던 셈이다.
그러던 어느 날, 내게 날벼락이 떨어졌다. 그 당시에도 북한 군인들이 남한에 귀순하는 일이 많았기에, 김정일이 “외국 출신 아니면 계급적으로 높은 사람 자제들이 외국으로 달아난다. 그러니 그런 군인들을 다 검토 정리하여 제대시키라”고 명령을 내렸다. 그곳은 김정일 말이면 모든 것이 이뤄지는 곳이니, 나는 꿈이 꺾인 채 강제제대 되었다. 강제제대 된 후 나는 재쏘임업대표부로 가게 되었다.
당시 소련에 가보니 북한 재쏘임업대표부와 대표부당위원회 그리고 대표부보위부가 위장을 위하여 안전부의 이름으로 있었다. 그 산하에 2개의 임산연합기업소와 연합당위원회 그리고 연합안전부가 있었으며 그 아래 17개의 임산사업소, 사업소초급당과 임산사업소 안전부가 있었고 총 인원수는 2만 5천명이 넘었다.
당시 북한에서는 국내에서 죄를 지었거나, 교화 출소자, 기본 계급이 아닌 청산 계급을 비롯한 조선 혁명에 필요 없는 자들을 재쏘임업대표부 노동자로 보냈다. 나는 군대에서는 강제 제대되었지만 거기에는 지도원 급으로 파견되었다.
재쏘임업대표부로 보내지는 노동자들, 특히 장애를 가졌거나 중병을 지닌 자들은 혁명에 불필요한 존재로 여겨졌기 때문에 비인간적인 대우를 받았다. 하루는 우리 임산사업소의 산지중대에서 산불이 일어나 모든 인원이 산불 진압에 동원 되었고 러시아 사람들도 헬기 2-3대를 타고 도우러 왔다.
내가 현장에 도착했을 때, 중대부 옆 반토굴집이 있었는데 그곳은 벌목하다 사고로 팔과 다리를 못 쓰고 누워있는 사람, 그리고 중병에 걸려 일어나지 못 하는 사람이 12-13명이 있었다. 불이 그 반토굴까지 다가왔으므로 이들부터 빨리 대피시켜야 하는데 북한 사람들이나 소련 사람들은 가만히 있을 뿐이었다.
내가 “아니 저 사람들부터 구하는 게 기본이 아닙니까” 하니까 다들 그저 “됐어, 됐어” 하면서 아무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나는 보위지도원한테 “왜 저 사람들 헬기로 빨리 옮겨서 치료하여 살리지 않는가?”하고 물어봤다. 그랬더니 그는 “됐어, 됐어. 모르면 가만있으라. 저것들은 다 죽어도 돼”라고 하기에, 내가 “왜요?”하고 물으니, “저것들은 계급적으로 다 청산 대상이야…….”라고 하였다. 이게 바로 북한이다.
마찬가지로 김일성은 평양에 있는 장애인들을 혁명에 불필요한 존재다 해서 내쫓은 적도 있었다. 외국인들이 와서 팔다리 없고 절뚝거리는 사람들을 보면 평양 모습을 다 흐린다고, 장애인을 다 내보내라 해서 그 때는 다들 울고불고 난리도 아니었다. 우리 학급에도 꼽추인 아이가 하나 있었는데 평양에서 쫓겨 나갔다.
그때, ‘꼭대기부터 이러니까 나라 전체가 안 되겠구나’라는 것을 느꼈다. 사람이 중심이 되어야 하는데 북한에서는 장애를 가졌거나, 계급적으로 결함이 있으면, 즉 그 사람이 아니라 그 부모들이나 할아버지라도 일제시기에 흠이 있으면 죽어야 하는 것이다.
또 북한은 정책에 반대하는 인민들은 정치범수용소에 가두고, 그게 부족하다고 판단되면 완전통제구역으로 보내버리거나, 숙청하고, 총살하고, 공개총살까지도 했다. 군대에 있을 때는 못 봤지만 제대 뒤에는 나도 공개총살을 많이 보았다.
강제제대 되자마자 당국에서 한 번 모이라고 하더니 경기장 옆에 숱한 사람들을 앉혀놓고 다섯 명을 따로 세워 놓았다. 나중에야 그것이 삐라 사건이라는 것을 알았는데 사실은 삐라를 살포하지도 않은 죄 없는 사람들을 잡아온 것이었다. 당국은 김정일이 언제까지 혐의자를 잡으라고 날짜를 정해주면 그날까지 체포해야 되니까 다른 죄가 있는 사람들을 잡아서 공개총살로 해치운 것이다.
당시 나는 아무 것도 모르고 제일 앞에 앉아서 이 장면을 보게 되었는데, 사형수는 말도 못하게 혀 안에 자갈을 물리고 묶어놓은 후 “삐라 뿌린 놈”이라고 하더니 쏴 갈겼다. 그게 내가 처음으로 본 공개총살의 광경이었다.
충성의 대가: 체포와 사상검토
북한은 사회주의 체제이기 때문에 돈을 벌면 자기가 못 가지고 다 당에 바쳐야 된다. 그것으로 충성심을 평가 받고 훈장도 받고 직위도 올라간다. 나는 돈을 잘 벌어서 평가도 잘 받고 심지어 김일성・김정일과 사진도 여러 번 찍었고, 감사장과 표창장, 그리고 선물도 여러 번 받았고, 훈장도 많이 받았다.
하지만 북한에서는 아무리 충성을 다해도 험한 꼴을 당한다. 국가안전보위부에서는 충성을 다하고 돈 잘 버는 사람들도 때때로 사상검토를 한다. 털어서 먼지 안 나는 사람 없다고, 나도 이런 식으로 체포되어 사상검토를 당했다.
하루는 출근하는데 길옆에 차 한대가 대기하고 있었고, 앞 좌석에는 내가 잘 아는 보위원이 타고 있었다. 그가 나에게 ‘물어볼 게 있다’고 하면서 뒷문을 열고 타라고 하여, 나는 아무것도 모른 채 차에 탔다. 순간 양쪽에서 사람들과 운전수가 올라타더니 차가 출발했다. 보위부가 사람을 이렇게 잡아가니 집에서는 내가 체포된 줄도 몰랐다. 사람들은 그저 없어지고 말 뿐이다. 하지만 결국엔 다들 안다. ‘북한정권에서 또 체포해갔구나’ 라고. 그 후에 알았지만, 내가 체포된 원인은 이렇다.
국가안전보위부에는 외화벌이 또는 무역회사들에서 한 부서가 3년 동안 국가계획을 초과 수행하면 책임자를 사상검토를 해야 한다는 김정일의 방침이 있다. 사상 검토의 이유는 책임자가 “재외생활을 오래 했으니까 분명히 그 나라 특수기관들에 전향했다. 그래서 돈도 잘 번다”라는 것이다. 즉, 나는 돈을 잘 벌어서 당 혁명자금에 많이 기여했는데, 오히려 기여를 많이 할수록 사상검토를 당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 책임자들은 아무 것도 모른 채 집에 한 푼 남기지 않고 그저 돈을 버느라고 열심히 일했는데 말이다.
많은 외화벌이 일꾼들이 사상검토를 당하는 것처럼, 나도 사상검토를 당했다. 사상검토를 당하면 살아남는 사람은 별로 없다. 체포된 후 심문을 당하는 과정에 거의 다 죽거나, 여기서 살아남은 사람은 정치범수용소 혁명화 구역에 가서 죽게 된다. 여기에서도 죽지 않으면 어느 산골에 추방되어 광산이나 탄광에 가서 죽을 때까지 일한다. 나도 8년간 국가안전보위부에 잡혀 가서 많은 것을 겪었다.
보위부 예심국에서의 고문
나를 체포한 곳은 국가안전보위부 제3국이라는 대외정보국이다. 처음에는 나를 초대소로 데려가 “위대한 장군님의 배려로 사상검토를 하게 되었으니, 이제 며칠 동안 사상검토에 잘 응해달라”고 선포하고 그곳의 계호원들에게 나를 넘겼다.
그들은 제일 먼저 내게 혁대부터 풀라고 했다. 혁대를 푼 다음에 옷을 하나하나 다 벗기더니 그 곳 옷을 주었다. 혁대도 없고 단추 하나 없는, 아무 것도 없는 옷이었다. 신발은 사이즈가 큰 고무신인데, 그것도 뒤에는 째놓아서 감방에서는 맨발로 있어야 한다. 그 후, 아주 조그만 감방에 나를 가두어 놓았는데 감방의 한쪽 구석에는 변기가 있었다.
처음에는 나를 앉혀놓고 재우지도 않고 굶겼다. 보통 사흘을 굶고 나면 다음에는 아무 생각도 들지 않게 된다. 그리고 일으켜 벽을 향하게 한 뒤 손이 발 끝에 닿는 자세로 구부리고 서 있게 하는데, 이 자세로는 아무래도 오래 서 있지 못하고 움직이기 마련이다. 이때 보위부원이 뒤에 있다가 죄수가 조금만 움직이면 발로 성기를 차서 고꾸라뜨린다. 그게 아마 남자한테는 가장 심한 고문일 것이다.
그들이 사용하는 고문 방법들은 히틀러 시절 게슈타포나 스탈린의 KGB 들이 쓰던 고문 방법들을 보다 발전시킨 것들로, 가장 고통스럽고 야만적이다.보위부 지국을 여섯 군데 돌고 나서 예심국으로 가게 되었다. 예심국은 죄를 인정하도록 하고 재판을 하는 곳이다.
나는 러시아, 중국 그리고 남조선 안기부와 내통한 간첩 혐의로 체포되었기 때문에 당과 수령, 조국과 인민을 배신한 역적으로서 가장 무거운 죄에 해당하는 누명을 쓰고 있었다. 계호원들은 나와 같은 역적의 누명을 쓴 죄수들에게는 악질적으로 대하였으며, 보통 “야! 이 반동 놈의 새끼야” 라고 부르면서 갖은 만행을 아끼지 않았다.
예심은 원칙적으로 3개월 안에 끝내야 하지만 예심국은 재판도 없이 6개월 이상씩 마음대로 연장할 수도 있고, 죄를 증명하지 못해도 잡아둔다. 여기서는 사람이 고문과 영양실조 등의 고통을 못 이겨 저절로 죽을 때까지 잡아둘 수가 있지만, 나처럼 김정일이 알고 있는 인물들은 다른 죄수들과 차이가 났다. 다시 말해서 김정일이 나를 찾을 경우를 대비해 마음대로 죽이지 못했다. 때문에 내 예심 기간이 1년 8개월로 길어졌다.
이 기간에 나는 고문과 영양실조, 그리고 허약과 각종 병으로 두 번이나 보위부 병원에 입원했었다. 예심국에서는 그 어떤 방법으로도 나에게 뒤집어 씌운 간첩죄를 증명하지 못 하겠으니, 재판은 하지 못 하고 이러 저러한 결함을 잡아 걸어 혁명화, 노동계급화 시켜야 한다면서 나를 요덕 제 15호 정치범수용소의 대숙리 구역으로 보냈다.
예심국에서는 몇 명씩 모아서 혁명화 구역으로 보내기 때문에, 인원이 어느 정도 모이기 전까지 동안 내게 예심국 안에서 청소 등 여러 가지 일을 시켰다. 그 때, 재판실 청소를 한 적도 있다. 재판실은 영화에서 보던 조그만 방이었고 예심국장, 재판관, 죄인의 자리는 나무판자로 구분되어 있었다. 재판관이 앉는 자리 뒤쪽 벽에는 김일성과 김정일 초상화가 아닌,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장 사진이 걸려있었다. 다른 사람들이 앉는 의자도 있었는데 한 여덟 개 정도밖에 없었다.
청소하면서 누군가에게 슬쩍 이곳에 대해 물어보니까 사람들은 여기서 재판을 받고, 받은 형에 따라 다른 데로 이동된다고 하였다. 만약 사형이 선고되면 “반역자들한테는 총알이 아까워서 쏘지 않는다” 라며 복도를 걸어가다가 “서라, 앉으라” 해서 꿇어앉혀 놓고, 뒤에서 이마와 목을 쥔 후 순간적으로 비틀어 형을 집행한다고 했다.
또 다른 방에는 TV 화면이 세 줄로 배열되어 있었고 3-4명의 계호원이 앉아서 화면을 보는데, 내가 갇혀 있던 감방을 포함하여 예심국의 모든 방을 감시 하고 있었다. 이처럼 예심국에서는 감시카메라로 감시하고 계원들이 감방 주위를 늘 빙빙 돌며 지키고 있었다. 한 명이 한쪽을 도는 사이 다른 사람이 다른 쪽을 돌며 지켜보는 식으로 항상 죄수들을 보고 있는 것이었다.
감방은 다음과 같았다. 하나의 큰 방이 있으면, 그 방 한가운데에 다닥다닥 붙어 있는 여러 개의 작은 방들이 천장에 매달려 있었다. 그 작은 방들의 바닥은 그 아래의 바닥에서 50cm정도 떨어져 있고, 그 때문에 감방의 문 앞에는 계단이 세 개 있었다. 각 방의 정면과 양 옆에는 벽이 있지만 뒤쪽은 동물원 우리처럼 쇠창살만 있었다. 마치 새 둥지 같았다.
죄수는 그 살창을 등 져서 앉아 있으므로 계호원이 언제 뒤에 와서 있을지 모르기 때문에 항상 긴장한 자세를 늦출 수 없고, 조금이라도 움직이거나 졸면 어느새 쇠창살 사이로 계호원의 매가 들어왔다. 이렇게 계호원은 아무 예고도 없이 죄수를 마구 때릴 수 있었다.
정면의 벽에는 1m정도 되는 작은 문이 있는데, 아래쪽에는 밥이 들어오는 구멍이 있었고 위쪽에는 내 얼굴만 비치지만 반대쪽에서는 나를 볼 수 있게 하는 특수거울이 설치되어 있다. 죄수는 앉아 있는 내내 눈도 내리깔지 못하고 그 거울을 계속 마주 쳐다봐야 한다. 죄수들은 책상다리를 하고 거울을 보며 불편한 자세로 앉아 있어야 하는데, 자의로 할 수 있는 한가지는 가끔씩 꼬고 앉아 있는 다리를 서로 바꿀 수 있는 것이다.
그 외에는 일절 움직이지 못한다. 손도 정확히 무릎 위에 올려놔야지 허벅지에 올려놓거나 할 수도 없었다. 어차피 간수들이 다 보고 있지만, 혹시라도 몰래 움직이면 감방이 천장에 매달려 있기 때문에 소리가 나도록 되어 있었다. 작은방의 바닥과 그 아래의 바닥 사이에는 도청기까지 설치가 되어 있어서 숨만 크게 쉬어도 앉아서 감시하는 자들이 다 들을 수가 있었다.
죄수가 그 안에 들어가 있으면 죽고 싶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으니, 아예 죽지도 못하게 사람을 감시하는 것이다. 소변을 보고 싶으면 팔을 올리고 손가락 하나를 세우도록 되어 있었다. 손가락 두 개는 대변, 세 개는 물을 달라는 신호였는데, 세 번째 신호(물 요청)의 경우 아무리 손가락을 올려봐도 물을 주는 경우가 없기 때문에 제대로 써본 기억이 없다.
소변을 보겠다고 요청을 하면 바깥에서 말도 안 하고 탕탕 소리를 낸다. 소리가 두 번 나면 요청을 승인한 것이다. 그러면 (서지 못하게 하기 때문에) 벌벌 기어서 등 뒤의 변기로 가서 앉아서 소변을 본다. 소변을 볼 때도 서서 보지 못하게 했다.
감방문은 녹이 슬어서 열 때 요란한 소리가 났다. 혹시라도 죄수를 몰래 풀어주는 일이 없도록, 계호원들 마저 통제하는 것이다. 계호원이 수감자를 밖으로 데리고 나갈 때는 우선 조그만 문을 열고 “00번, 나와!”(거긴 다 번호로만 부른다)하고 부른다. 수감자가 혹시라도 계호원들에게 덤빌까봐 절대로 마주 보고 서있지 못하게 하고, 족쇄를 채우도록 손을 내밀어야 한다.
그러면 “가자”라고 하고, 수감자는 밖으로 나간다. 이곳에 두 달 앉아 있으면 대체로 잘 걷지를 못하기 때문에 계호원 둘이 와서 수감자 팔을 끼고 간다.
때로는 별다른 이유 없이도 험한 꼴을 당할 때가 있다. 감방 문 아래쪽의 음식 구멍에 얼굴을 들이대고 입을 크게 벌리라고 할 때가 있는데, 거기다 간수가 가래침을 뱉는다. 구타도 비일비재했는데 움직이거나 소리를 내면 문밖으로 손을 내밀라고 하고 몽둥이로 때리기도 했다.
요덕수용소의 생활
예심국에서 1년 8개월을 있던 어느 날 계호원이 나를 감방에서 나오게 하더니 버스에 태워서 어디론가 데려갔다. 후에 알게 된 바로는 거기가 관리소들을 총괄하는 제7국이었다. 울타리가 둘러진 마당에 내리니, 다른 곳에서도 사람들이 왔다. 잠시 후, 내 이름이 써져 있는 보따리 두 개 안에 수용소에서 쓸 이부자리와 옷을 넣어서 트럭에 실었다.
그리고 나를 어디론가 데려갔는데 당시 닫힌 트럭을 타고 들어갔기 때문에 어딘지도 몰랐고 내린 후에야 ‘산골에 왔구나’하고 생각하였다. 후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그 곳이 바로 세계적으로 악명 높은 요덕 제15호 정치범수용소였다. 관리부원들이 신참 수감자들을 소대배치 하더니 여기서의 생활은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이야기해주었다. 신입훈련을 한 달 하고 나면 중대에 배치를 한다. 집단생활이긴 하지만 자기가 자길 잘 챙겨야 되는 곳이었다.
요덕에서의 생활은 그나마 보위부보다 조금 나았다. 솔직히 둘을 비교하면 요덕은 요양소였다. 요덕 수용소에도 죄질의 경중에 따라 구역이 나누어져 있는데, 내가 간 곳은 가장 편한 곳이었다. 이곳에서도 구타행위가 있기는 하지만 매 맞을 짓을 안 하면 달리 수감자를 고문하는 게 없다. 내가 재쏘임업에 있었다고 하니까 나에게 벌목을 시켰다.
나는 보위부원들이 살 집도 짓고, 울타리도 치는 데 사용될 나무를 채벌하고 제재해서 판자와 각자를 만들었다. 그러자 보위부원들은 나를 독립소대장을 시켰다.
거기서 먹는 것은 강냉이 밥도 아니고 아예 강냉이 죽이다. 소화가 안 되는 음식을 주면 안되니 멀건 죽 같은 강냉이를 주는 것이다. 그 외에 찌개라든가 다른 반찬은 없고 야채 잎사귀를 조금 넣은 국이 나온다. 그 안에서는 일년에 이밥(쌀밥)을 두 번 준다. 2월 16일 김정일 탄생일과 4월15일 김일성의 탄생일인 태양절 점심에 이밥을 주는데, 이밥 한 사발이 그저 살살 녹아 넘어간다.
요덕에서 제일 무서운 것은 설사다. 그곳에서 설사는 죽음을 의미했다. 내가 알고 있고 또한 남한에서 배운 바로는 설사할 때 기름기 있는 음식을 먹어서는 안 되는데, 이곳에서는 반대로 영양실조가 너무 심하거나 설사를 심하게 하는 사람들에게는 죽에다가 기름을 조금 넣어준다. 그러면 변이 굳어져서 설사가 멎는다.
석방과 탈북
요덕수용소에서 석방될 때는 당국에서 무언가를 읽어준다. “위대한 장군님 배려로 몇 월 몇 일 말씀으로…….” 그러고 나면 서약서를 쓰게 하고 버스에 태워서 내가 일하던 곳에 가서 당위원회 당비서, 조직비서, 선정비서 세 명 앉혀놓고 방침전달을 했는데, 나는 김정일의 배려로 직위, 칭호, 당원증 등 모든 것이 다 원상회복되었다고 했다.
그 다음에 다시 버스를 타고 집에 가보니 벌써 아들, 딸, 사위, 며느리, 손자들이 다 와 있었다. 여기서도 가족들을 다 앉혀놓고는 또 방침전달을 했다. 그렇게 요덕에서 나와서 원래 직업에 종사하면서 평양에서 살고 있었는데, 친구 중 하나가 나에게 다시는 러시아에 나가지 말라고 경고했다.
이유인 즉, 보위부는 한 번 잡았다 놓친 사람은 끝까지 추적해서 해코지를 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또 잡으려 하는구나. 이제 내 나이가 벌써 60이 지났는데 다시 잡혀가면 우선 육체적으로 못 견딘다. 그러니 이 나라를 떠나는 수밖에 없구나”라고 생각하고 탈북을 감행했다.
북한을 나와서 간 곳은 재쏘임업소를 통해 좀 익숙해진 러시아였다. 러시아에서 모스크바 주재 유엔 난민대표부와 연락이 되었다. 난민대표부에서는 나를 전용차에 직접 태워서 모스크바 시내에서 멀지 않은 시골로 데려갔다. 가보니 북한 사람들만 있는 게 아니라 흑인들도 있었고, 아프가니스탄, 파키스탄 사람들도 있었는데, 모두 그 난민시설에서 살면서 다른 곳으로 가기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당시 열 명의 북한사람들이 있었는데 두 명은 미국으로, 또 다른 두 명은 독일로 가겠다고 했다. 한국행을 원하는 사람은 다섯 명이었다. 난민대표부는 나에게 “러시아에 있기는 어려우니 어디 가겠나”하고 물었는데, 내 나이가 62세였으니 나는 어디로 갈지 막막했다.
결국 ‘아무래도 말도 알고 풍속도 알고 같은 민족인데, 이때까지 철천지 원수로 교양 받았지만 가서 살다보면 다 같은 민족이니까 어떻게든 되겠지’ 하고서 “저는 미국이고 독일이고 갈 데가 없으므로 한국에 가겠습니다”고 말했다. 그래서 난민시설에 있던 사람들과 같이 생활하면서 기다리다가 한국으로 2009년 4월에 오게 되었다.
자유세계와 무한한 발전성
한국에 대해서는 1990년 이후 러시아에 한국 목사들과 상인들이 들어오기 시작하면서 알게 되었다. 원래 한국 사람들과 접촉이 금지되어 있었지만 나는 접촉했다.
이제 남한에 온지 3년이 되었다. 나는 60년 이상 대한민국을 적대시하는 북한과 소련에서 살면서 대한민국을 겨냥해서 무기를 손에 쥐고 군복무도 하였고, 혁명의 수뇌부인 김일성, 김정일에게 충성을 다하면서 살아왔다. 그렇지만 대한민국에서는 나에게 그 어떤 책임도 묻지 않았다. 오히려 북한에서 고생이 많았다고 격려해주면서 대한민국 국민이 될 수 있는 기회 및 집과 돈을 제공해 주고, 정착을 잘 할 수 있도록 교육도 해주고, 의료급여1종을 비롯한 많은 혜택을 주었다.
북한에서는 남조선 사람을 만나 접촉했다는 것으로도 벌을 주는데, 여기 한국에서는 오히려 포용·교육하여 살 수 있게 배려를 해주니, 이런 사회야 말로 사람을 위한 사회라고 인정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 동안 다닌 곳도 많고, 본 것도 많지만, 누구도 나한테 강요해서 돌아다녀본 것이 아니다. 북한이나 소련에 있을 때처럼 누가 나를 데리고 다니면서 선전하고 “이거 좋다, 저거 나쁘다” 정해주는 것도 없다. 남쪽에서는 직접 다 보고 무엇이 옳고 그른지, 좋고 나쁜지를 개인의 판단에 자유롭게 맡긴다.
이것이 사람이 살 자유세계이고 인간이 무한히 발전할 수 있게 하는 사회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러면서 속으로 “나에게 사람답게 살아갈 수 있는 앞길을 열어주고 온갖 배려를 다 베풀어 준 고맙고 진정성 있는 사회와 제도에 보답하기 위하여 여기서 배운 그대로, 이제라도 늦지 않았으니 스스로가 찾아서 나라에 보탬이 될 일을 할 것이며, 조국 통일을 앞당기는 일에 그 누구보다 앞장서야겠다”는 결의를 다지게 된다.
2012년 생명과 인권 봄호에 실린 장영걸 씨의 수기 “충성을 다했다는 죄” 의 전문입니다.
출처:북한인권시민연합:https://kor.nkhumanrights.or.kr/board/bbs_view.php?
11.03 북한 보위사령부 여전사에서 고려대 학생이 되기까지
편집자 주: 이 수기는 2010년 한국으로 들어온 한 탈북소녀의 이야기를 편집한 것이다.
강원도에서의 어린 시절
나는 1987년 3월 강원도에서 태어나 9세까지 유년시절을 그곳에서 보냈다. 나의 아버지는 직업군인이셨다. 우리가족은 강원도 산골에 위치한 아버지 부대의 사택에서 생활하였기 때문에 어렸을 적 만난 사람들은 군인과 군인가족들뿐이었다.
6살에는 군부대 유치원에 다녔다. 북한에서 유치원 1년은 11년제 의무교육에 포함된다. 7살에 소학교에 가게 되자 학교가 멀어서 도시락을 싸서 10리길을 걸어 다녔다.
등교할 때는 늦지 않으려 급하게 갔지만,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친구들과 이리저리 살길에서 뛰어 노느라 두세 시간이 넘게 걸리곤 하였다. 산에서 꽃도 따고 산나물도 뜯고 이런저런 놀이를 하면서········. 지금 생각하면 그 시절은 너무 즐겁고 행복했던 것 같다.
산길에는 남한에서 날아온 삐라가 많이 있었다. 학교에서는 삐라를 발견하면 읽거나 하지말고 학교로 가져오라고 했지만, 나와 동무들은 그것들을 주워 내가 귀찮아 모른척하고 그냥 지나다녔다.
기억에 남는 것은 삐라의 종이 질이 너무 좋았고, 북에서는 보기 힘든 칼라 사진이 많았다는 점이다. 잘 찢어지지도 않고 강기슭에 떨어져 있어도 물에 불지도, 불에 잘 타지도 않는 종이라 신기했다. 이제 겨우 소학교 1-2학년 이었었던 나는 학교에서 시킨대로 웬만해서는 글은 읽지 않으려고 했는데, 기억에 남는 만화 한컷이 있다.
배가 튀어나온 못생긴 남자 그림 옆에 ‘당신도 지도자인가?’ 라는 글이 적혀 있었는데, 북에서 ‘지도자’는 김정일을 의미하므로, ‘김정일 지도자님을 이렇게 욕하는 것인가?’ 학교에서 교육 받은 대로 나쁜 남한 놈들이 우리를 헷갈리게 하려고 한다고만 생각했다. 삐라는 지천이었지만 나의 성장과정에 미친 영향은 없었던 것 같다.
여기서는 북한에서 군인이 좀 잘사는 줄 알겠지만 사실 북에서 군인이 제일 못사는 축에 속한다. 왜냐하면 민간인들은 자신의 직분 외에도 장사를 하다던가, 다른 일을 하면서 살 궁리를 할 수 있지만 군인은 사회에서 다른 활동을 할 수 없도록 되어있기 때문이다.
군인은 배급받은 대로만 살고 배급이 없으면 굶을 수밖에 없다. 엄마는 당신이 처녀 적에 잘 모르고 그저 별이 멋있어 보여서(별은 군인을 의미한다) 시집오셨지만, 내 자식은 절대로 군인에게 시집보내지 않겠다고 말씀하시곤 하셨다.
군인가족은 부대소속으로 각자 맡은 역할이 있다. 엄마는 가족소대원으로 그때그때 부대에서 일이 있을 때마다 맡겨진 일을 하셨다. 나는 삼남매 중 맏딸로 아래로 세 살 터울 여동생이 하나, 여섯 살 밑으로는 남동생이 하나 있었다.
강원도에서 소학교 2학년을 다니던 중 우리가족은 청진으로 이사를 가게 되었다. 함경북도 청진에 9군단이 있었는데 거기에 사건이 있었던 거 같다. 군단장이 잘못한 일이 있었던 것 같은데, 이유는 잘 모르지만 강원도에 있는 아버지 부대였던 5군단과 청진의 9군단이 통째로 교체가 되면서 우리는 모두 아버지를 따라 청진으로 가게되었다.
늘 배가 고팠던 9살 시절
강원도는 시골이고 주위에 이웃들이 오래도록 함께 지낸 사람들이어서 우리들은 이웃사촌이란 말처럼 오가는 정이 있었다. 하지만 청진으로 옮겼을 때는 아버지 연대가 아예 해산되어버려서 다들 어디로 갈지 확정되지 않은 상태에, 뿔뿔이 흩어질 임시의 관계들이어서 서로 간에 인색하고 각박했다.
청진은 강원도와는 달리 도시였고 또 당시는 배급이 원활하지 않을 때여서 사람들이 더욱 이기적이었던 것 같다. 이웃 간에 서로 신경 쓸 겨를이 전혀 없었고 나는 시골에 비해 도시 인심이 이렇듯 인색함에 놀랐다. 그나마 강원도에 있을 때는 그런대로 배급이 있어서 괜찮았지만 (95년 이전) 그 이후 청진에서는 배급이 없어서 살기가 무척 힘들었다.
식량 배급이 갑자기 끊기면서 비상으로 미숫가루를 주기는 했지만, 한창 자랄 나이인 나와 동생들에게는 턱없이 부족했다. 1년 정도 군인들에게 배급이 나오지 않아서 우리는 너무 당황하고 힘들었다. 나는 학교에 갈 때 일부러 가방에 책은 딱 한 권만 넣고 갔다. 돌아오는 길에 남의 밭에서 무, 배추, 파 등을 훔쳐 가방에 넣어오기 위해서였다.
길가에 있는 무, 배추 등을 닥치는 대로 뜯어서 훔쳐왔었다. 그렇게 일 년 정도는 훔친 것들과 산에 가서 뜯어온 산나물을 쌀, 강냉이 등과 섞어 죽을 쑤어 먹었던 것 같다. 산나물을 뜯으러 가느라 학교를 못 갔던 적도 있다. 그것이 95, 96연도니까 내가 9-10살 때 일이다. 나도 어린 나이 이었지만 내가 그나마 철이 들어서 먹을 것을 구해올 궁리를 했다.
앙상한 밭에 무, 배추가 몇 개 밖에 없기 때문에 훔치다 걸리는 일이 많았다. 주인이 따라오면 도망가다가 배춧잎을 한 장씩 떼어내 이리저리 떨어뜨리면서 도망갔다. 어차피 잡히면 다 빼앗기니까 양이 적어지더라도 농장원의 추격을 따돌리는 편이 나았기 때문이다.
그것을 두고 가면 뒷사람이 가져갈 것이므로 주인은 따라오면서도 떨어진 배춧잎 낱장들을 주울 수밖에 없었고 그러는 동안 나는 잡히지 않고 도망갈 수 있었다.내가 이렇게라도 먹을 것을 마련해서 가져가야 6살, 3살 동생들과 내가 먹고 산다는 생각으로 도둑질을 했다.
아버지가 대대장이셨는데 대대장 딸이 농작물을 훔쳤다고 소란이 나면 아버지 이름에 누가 될 것 같다는 생각에 도망을 가더라도 집으로 바로 들어가지 않고, 농장원을 따돌리고서도 어두워질 때까지 한참을 강기슭의 버드나무 밑에 숨어 있다가 집에 들어가곤 하였다.
당시 어머니는 위궤양에 자궁까지 들어내셔서 몸이 많이 쇠약하셨고, 대대장의 아내라는 사회적 지위상 어머니가 직접 먹을 것을 훔치러 다니실 수는 없었다. 나는 장녀로서 생계에 책임감도 있었다. 엄마도 당신이 아프신 상황에 우리가 살기 위해 어쩔 수 없다는 것을 아시기 때문에 나를 이해하셨다.
하지만 어머니는 세상이 너무나 힘든 시기이기 때문에 이러는 것이지 다른 때에는 절대 남의 것을 훔쳐서는 안 된다고 자주 말씀하셨다. 나도 엄마에게 ‘나는 남의 것이 예쁘고 보기 좋아서 훔치는 사람 아니다. 학교에서 절대로 친구 물건을 훔치거나 그러지 않는다.’고 말씀드리며 어머니를 안심시키고자 애썼다.
나는 학교에서는 모범생이고 싶었고, 실제로도 그때의 그런 행동은 단지 먹고 살기 위함일 뿐이었다. 낮에는 같이 훔치는 친구들이 있었지만, 밤이 가장 안전하고 목표한 먹을거리를 구하기에도 가장 쉬웠기 때문에 주로 밤에 혼자서 많이 했다. 아버지가 한번은 “9살짜리 여자애가 겁이 없다”고 하시면서 ‘넌 커서 뭐가 되도 되겠다.’고 말씀하셨던 기억이 난다.
우리는 청진 내 송평구역에서 포항구역으로 이사를 가게 되었다. (1996년) 원래 포항에 있던 전임 대대장이 집을 내어 주어야 우리가 그 집에 들어갈 수 있는데, 그 사람이 집을 비워주지 않아 우리는 집을 짓는 동안 임시로 다른 대대의 빈집에서 살게 되었다.
거기는 완전 도심한가운데라 주위에 농장이 없고 건물들뿐이라 먹을거리를 훔칠만한 곳이 전혀 없고 건물들뿐이라 먹을거리를 훔칠만한 곳이 전혀 없었다. 살길이 막막했지만, 다행히 96년부터 끊겼던 배급이 한 달에 보름정도씩 다시 나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부대에서 어느 정도의 땅을 주어서 거기서 나오는 농작물은 우리가 먹을 수 있도록 해 주었기 때문에 상황이 훨씬 나아져서 그때부터는 나도 도둑질을 하러 다니지 않고 학교에만 다닐 수 있게 되었다.
군에도 사회에도 배급이 끊기었던 일 년 동안 군인 가족이었던 우리는 훔쳐 먹으며 연명했지만, 호항으로 나오니 주변의 사회인들은 이미 천장사, 떡장사 등으로 자신들이 살길을 찾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사회인들은 군인보다 경제적으로 훨씬 나았고 군인들이 제일 못 먹고, 못 입고, 군인의 자녀들은 학교에서 내라는 돈도 다 내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학창시절
학교에서는 늘 내라는 것이 많았다. 고철 파지 등 할당량을 모두 돈으로 내어야 했다. 어디서 훔칠만한 곳도 없고 주변의 어느 곳에서 구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학교에서 돈을 못낸 사람 일어나라고 하면 나는 끝까지 안 일어나다가 선생님이 직접 이름을 불러야만 비로소 자리에서 일어났다.
남자애들도 있고, 학급 친구들에게 너무나 부끄러웠고 자존심이 상했다. 집에와서 엄마의 등껍질까지 다 벗겨서라도 학교에 바칠 돈을 마련하고서 나는 그제야 마음이 놓였다. 집에서는 ‘너는 집안 사정은 안 보이느냐’ ‘너는 너만 생각하느냐’고 하셨다. 동생들은 그저 창피를 당하고 고초를 당하고 돈은 끝까지 안내는 경우도 있었는데, 정말이지 나는 학교에 바치는 세외부담을 꼭 내려고 애썼다.
나의 부모님들은 경제적으로 어려웠지만 그대로 학교는 꼭 보내주셨다. 그래서 나는 고등학교의 정규과정까지 모두 다 마칠 수 있었다. 주위에는 부모님들이 학교에 보내지 않고 집안일이나 장사를 돕도록 시키는 친구들도 있었다.
다행히 우리 집은 이정도로 어려운 사정은 아니었던 것 같다. 나는 내가 그나마 행복한 상황인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더 행복해지려고 학교에다 갖다 바치는 것을 빠뜨리지 않았다.
나는 학교에서 모범생이었다. 늘 선생님께 ‘성은이 정도만 하라’는 말을 듣고 지냈다. 노래면 노래, 체육이면 체육. 학교에서 하라는 것은 뭐든지 다 잘하려고 하였다. 남들이 하는 것은 웬만큼은 나도 다하려고 하였다. 공부도 반에서 1등은 아니었지만 2~3등은 하였다. 그래서 다방면(팔방미인)이란 말을 많이 들었다. 선생님의 칭찬에 어깨가 으쓱해지고 더 잘하려고 노력하였다.
학교에서 너무나 모범생이고 싶은 마음에 (내 기준에 모범생이 돈을 안낸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엄마가 돈이 없다고 하셔도 나는 안방에서 쫓으면 바깥문에 서있고 거기서 더 쫓으면 대문 앞에 서있고, 어떻게 해서든 집을 쥐어짜서도 내야할 돈을 다 내었다. 그래서 학급이 올라가면서 나는 간부표시를 달고 다녔다.
내 기억에 선생님들은 좋으셨다. 다만 그 때 당시 교원들에게 배급이 안 나왔기 때문에 선생님을 돕는 것이 필요했다. 선생님들에 대한 배급이 없고 경제사정이 어려워지자 선생님들은 바로 그만두고 장마당에 나가서 장사를 시작한 사람들도 많았다. 남아있는 교사들은 교편을 잡고 있다는 것만으로 존경을 받기도 하였다.
학급에는 모자위원장(학부형대표-학급장 엄마가 주로 맡음)이 주축이 되어 ‘선생님 돕기’란 것이 있었다. 돈을 모아서 선생님들께 드리는 것이었다. 그러나 나의 어린 마음에도 선생님들이 교육자적 양심이 없이 도움 받는 일에 더 관심이 많다고 생각했다.
잘사는 집 아이들은 편애하고 돈을 못내는 아이들은 구박하는 일이 많았기 때문이다. 우리 학급에서 ‘선생님 돕기’ 돈을 못낸 아이가 두 명 이었는데, 둘 다 군인가정의 아이들이었다. 2대대장 딸인 나와 5대대장 딸인 다른 친구였다. 그 선생님의 남편은 군인이셔서 우리 가족과 같은 곳에서 살고 있어 우리 집 사정도 잘 알고 있었던 분이셨다.
그런데 돈을 안낸다고 우리를 아이들 앞에서 욕하면서 큰 망신을 주었다. 같은 군인가족끼리 너무 심하게 하였다. 엄마도 아시고 하니, 엄마와 따로 조용히 해결할 수도 있는 문제였다고 생각한다. 나는 돈을 주지 않았던 엄마가 원망스러웠다. 아마 선생님들도 살기가 너무 어려워서 그러신 거라고 이해하려 했지만 아직도 나에게는 안 좋은 기억으로 남아있다. 그러나 이런 일 이외에는 나는 대체적으로 학창시절과 선생님들을 좋아했던 것 같다.
28명 정도의 학급친구들 중 고정적으로 출석하지 않는 아이들이 10명 정도 있었고 18명 정도만 출석하였다. 의무교육제이기 때문에 학교에 나오지 않더라도 등록만 되어있으면 졸업은 할 수 있다. 먹고 살기 바빠서 학교에 못나오는 아이들 말고도 학교에 나올 수 있는 사정은 되는데 결석하는 아이들이 있었다. 북한이 경제적으로 어려워지면서 아이들이 학교 교육이 필요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선생님이 직접 집안 형편을 확인하시는데, 극도로 형편이 어려운 아이들을 제외하고 결석을 하면 집으로 찾아가서 학교로 데려오기도 하였다. 나는 출석하지 못하는 아이들보다는 경제적으로 그나마 나은 수준이었지만 출석하는 아이들치고는 형편이 가장 어려운 축에 속했다. 우리 집은 겨우겨우 허덕이며 따라갈 정도로 어려웠다. 나는 기왕이면 우리 집이 물질적으로 풍족하기를 바랐지만 그러지 못한 것이 내내 싫었다.
수학시간은 기억이 안 난다. 선생님이 혼자 칠판에 풀이과정을 써놓으셨던 것 같다. 수학은 어느 순간 기초를 놓쳐서 잘 못하게 되었다. 학급에서는 오히려 너무 가난해서 옷도 못 입고 학교에도 이따금씩 잘 나오지 못하는 아이들 중에 공부를 비상하게 잘하는 수재가 있었다.
반에서는 그룹을 지어 다녔는데 공부는 못해도 파워가 있는 그룹이 있었다. 주로 돈이 있는 집 아이들로 된 그룹이었다. 나는 돈은 없었지만 공부도 좀 잘하고, 아버지가 사회와는 별개인 군인 집단에 있다는 것으로 이 파워 있는 그룹에 속해 있었다. 우리는 수학 숙제를 이런 수재들에게 빌려서, 가난하고 파워도 없는 아이들에게 공책 두 권을 더 넘겨주면서 베끼는 것까지 시켰다. 수학 숙제는 이런 식으로 해결하였다.
소학교 역사는 재미없었다. 그저 김일성 혁명사를 외우는 것이 일이었다. 한국사, 세계사 같은 것이 있긴 했지만 거의 배우지 않았고 중요하지 않았고 시험에도 나오지 않았다. 신라, 발해, 고려, 조선 등 그런 나라가 있었다는 것 자체는 알지만 역사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어떤 인물이 있었는지 잘 모르겠다. 그냥 대강 가르치고 대강 배우는 과목이었다.
내가 모범생인데도 이 정도인 것을 보면 역사 교육의 질이 낮았던 것 같다. 영어는 교과서가 없이 선생님이 칠판에 쓰는 단어나 문장을 다 베껴 쓰는 것이 전부였다. 늘 네 번째 문장과 다선 번째 문장을 외우는 것이 숙제였다. 내가 무엇을 배우는지 잘 모르는 채 쉬는 시간에 매번 그 문장을 외우는 것으로 숙제를 하였다. 이런 방식으로 2년을 배우는 동안 참 배운 것이 없었단 생각이다.
중학교 2학년까지는 순화 지역에서 다니다가 중3때 포항 구역의 학교로 가게 되었다. 이 지역은 워낙에 시내인데다가 생활수준도 높은 지역이었다. 아이들도 공부를 잘하였고 특히 우리 학급 친구들은 영어를 너무 잘하였다. 모두 본문을 읽을 수 있는 수준이었고, 중학교 3년간 배운 단어를 처음부터 시험을 보기도 하였다.
나는 전학을 가서는 영어시간에 입 뻥긋도 못하게 되었다. 전에 다니던 학교에서 반에서 2 ~ 3등 이었다가 전학 온 학교에서는 중간 정도로 성적이 떨어졌다. 우리 학급도 여학생들이 46명이나 되어서 경쟁도 치열했던 것 같다. 우리 학급에는 부모들이 외화벌이를 하는 친구들이 있었는데 머리가 트여서 돈벌이를 잘하고 회사 같은 것도 세우고 하는 부자들이 많았다. 내가 이제까지 보지 못한 것들을 입고 먹고 하였다.
학급 내 권력을 잡고 있는 그룹이 있었는데 나는 순수한 내 능력으로는 빠지는 것이 없었지만 경제적인 배경이 그 아이들과 어울리기가 힘에 부쳤다. 잘사는 파워그룹에 속하게 된 나는 친구들과 영화 보러 가기로 약속한 날이면 갑자기 배가 아프다며 빠져나오는 등 꾀를 부려 돈이 없는 것을 티내지 않으려 애썼다.
부모님들도 너무 힘들었던지 우리는 다시 전에 다니던 학교로 돌아가기로 하였다. 나는 다시 돌아온 학교에서 갑자기 전교 1등으로 되어있었다. 두 학교의 교육수준이 너무 달랐기 때문에, 그곳에서 조금 공부하고 되돌아오니 난 특별히 따로 공부하지 않았는데도 실력이 쌓여 시험에서 전교1등을 한 것이었다. 나는 쉬는 시간에 전 시간과 다음시간의 숙제를 차근차근하는 스타일이다.
집에서는 공부를 할 시간이 전혀 없었고 물 긷고 마당 청소하고 심부름 다녀오고 동생들 밥해주는 등 엄마대신 가사를 돌보았다. 엄마는 외출하시면서 내게 할 일을 조목조목 적은 쪽지를 남겨놓으셨다. ‘전기가 들어오면 국수 삶아놓고, 짐승먹이 해놓고, 동생 옷들 빨고 다림질 해놓아라.’ 이렇게 집에서 일만 하고 따로 공부하지 않아도 전교 1등을 할 수 있었던 것을 보면 우리 학교의 수준이 너무 한심했던 것 같다
학교 졸업 후 군대에 가게 된 사연
고등학교 졸업 전 진로 문제를 두고 갈등이 많았다. 엄마는 결혼을 제안하기도 하고, 나는 의사나 교사는 너무 평범하다고 생각하고 정치계로 나서고 싶었다. 당시 우리 집안사정을 생각해 보면 그것은 허황된 꿈이었다. 일반 중·고등학교를 나왔던 나는 일반대학에는 갈수 없었고 전문대학교만 갈 수 있었다.
일반대학은 제1고등학교에 다닌 사람들만 갈 수 있으며 이런 특수 고등학교 입학시험은 수재들만을 대상으로 따로 있다. 일반 고등학교를 나와 전문대학에 가는 것도 교장선생님 추천을 받아 대입시험에 합격한 사람만이 갈 수 있다.
아버지는 내게 대학 갈 궁리는 절대 하지 못하게 미리 못 박아 두셨다. 내가 수재도 아니고, 과학자가 될 것이 아닌 이상 대학을 나와도 소용없다고 말씀하셨다. “돈 안들이고 먹여주고 입혀주는 군대에 가라”고 하시면서 “그동안 엄마 아빠는 너 시집갈 준비를 해두마”라고 하셨다.
하지만 담임선생님은 여자가 군대 6년 후 사회에 나오면 세상물정 하나도 모르게 된다며 평생 군대에 있을 것이 아니라면 애초에 군대에 가지 않는 것이 좋다고 하셨다. 전문대학을 가던지, 그도 아닐 바엔 빨리 시장에 나가서 장사를 배우고 사회생활을 시작하라고 하셨다. 나는 진로를 두고 한동안 고민에 빠졌다.
북에서는 대학입학시험인 ‘정무원 시험’이 끝난 후에는 바로 부모들이 ‘뒷공작’에 들어간다. 학생들이 일단 응시를 하기만 하면 그 다음에는 부모들의 수완으로 대학을 갈지 말지가 결정된다. 우리 반에서는 단 3명만 대학진학 시험에 응시하였다. 나는 아버지의 반대로 시험을 안보겠다고 하였지만 담임선생님이 권하셔서 그저 시험장에 가서 문제만이라도 보기로 하고 시험을 치르러 갔다.
시험 중이었는데 중간에 어느 학생이 들어왔다. 지각했는데도 시험장에 들어온 것이며, 차림새로 보아 왠지 잘사는 집 아이 같았다. 바로 내 옆자리였기 때문에 그 학생이 백지에 가까운 시험지를 내는 것을 보았고 시험지를 낼 때 그 여학생의 이름을 유심히 기억해 두었다. 근데 결국 그 아이가 합격자 명단에 있었다.
북에서 학생은 대입시험에 응시만 했으면 된 것이고, 그 응시 이후에는 부모들의 ‘경주’가 시작된다고 보면 된다. 교육청에 손쓰는 작업을 의미한다. 우리 아버지는 장교였기 때문에 예비역들 중에 교육청에 계시는 분들을 아는 분도 많아서 아버지는 나의 뒤를 봐줄 능력이 있었지만 나의 요청을 아버지는 단호히 거절하셨다.
“네가 대단한 수재도 아니고 머리가 비상한 애라면 이 집을 팔아서라도 대학을 보내겠지만, 그런 것이 아닌 바에야 차라리 군대를 가라”고 계속 주장하셨다. 그래도 시험인지라 아무리 뒷거래가 많더라도 1등부터 10등까지 상위권에 드는 학생들의 당락 여부는 건들이지 못하는 면도 있다.
결국 실력이 뛰어나지도 수를 쓰지도 않은 나는 낙방을 하였다. 눈물이 핑 돌았다. 결국 아버지 말씀대로 군대에 가기로 결심했다. 아버지가 그렇게 나를 군대에 보내려고 하였던 이유는 나의 고모부님께서 함경북도 징집부 고위직에 계셔서 나를 좋은 곳으로 배치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함경북도에서 징집되어 군대에 가는 모든 아이들은 고모부의 손을 거쳐 배치된다고 보면 된다.
나는 모두의 선망 대상인 보위사령부로 갈 수 있었다. 보통 군대 가는 여자들은 해안포, 고사포로 많이 배치되고 포격을 하고 기계를 다루는 부대로 많이 배치되지만, 나는 일반 무력부의 군인이 아니라 멋진 제복을 입고 잘 먹는 곳으로 갈 수 있었다. 나는 복무 기간 중 기술을 배워 제대 후에도 자격증으로 먹고 살 수 있는 간호부대로 가는 것은 어떨까 싶었지만, 장교이셨던 아버지는 자랑을 하고 싶으셨던지 선망의 대상인 보위사령부로 가라고 하셨다.
2004년 4월 19일 나는 18살의 나이에 군대에 입대하였다. 북한군대는 누구나 다 가는 것이지만 배치를 받을 때 역시 누구나 청탁을 한다. 고모부는 함경북도에서 군대 가는 아이들 90%가 다 청탁을 하여 친척이 있는 곳, 편안한 곳 등등으로 여기저기 보내달라고 요청한다고 하셨다.
군대에 배치되면 그 곳에서 10년은 살아야 하기 때문에 아주 찢어지게 가난하지 않은 이상 부모들은 집안 살림을 팔아서라도 뇌물 공작을 한다. 영양실조에 걸려서 제대하지 않도록 조금이라도 더 좋은 곳으로 보내기 위해 가산을 팔아서라도 뇌물을 준비한다.
배치를 운명에 맡기는 집은 거의 없다고 보면 된다. 남자는 무조건 징집 후 10년을, 여자는 키가 157센티미터 이상이면 6년을 의무적으로 군대에 보내야 했다. 하지만 키가 157이 넘지 않는 여자아이들이 대부분이었고, 157이 넘더라도 이런 저런 핑계를 대고 군대징집에서 빠지는 경우가 많다.
보위사령부 신병교육은 평양에서 3개월간 이루어진다. 징집된 모든 사람들은 시간표대로 훈련을 받는다. 이 신병훈련기간이 가장 힘들었다. 북한 내에서도 가장 힘든 신병교육이 보위사령부 신병교육이라고 한다. 보위사령부는 일단 배치되고 나면 힘들지 않으면 군인냄새가 나지 않는다며 절대 봐주지 않았고, 여자애들은 이 기간 중 생리도 멈출 정도로 힘들어하고 행군하면서도 반수면 상태로 걷게 된다. 일반 무력부의 신병교육기간은 이렇게까지 힘들지는 않다고 했다.
배식은 아침과 점심에 백미를 주고 저녁은 국수를 먹었다. 보위사령부에는 보통 잘 사는 집 아이들이 와서 ‘온실 속 화초’ 같은 아이들이 많아 조금만 힘들어도 울었다. 북에서도 함경북도 출신인 나는 ‘저런 것으로 왜 우나’ 생각 하면서 씩씩하게 지내려고 애썼다.
여자 250명 정도가 함께 신병훈련을 받았고, 훈련 마지막 즈음에 여성장교 2명이 신병을 뽑으로 왔다. 인물과 체격을 보고 20명 정도를 뽑는 듯하였다. 그리고는 면접에서 자기 장기를 말하라고 하였다. 그 중 4~5명만 평양의 중앙본부 내의 통신국으로 가게 되었다.
나는 국가 보위사령부 본부 교환수가 되었다. 여기는 여자들만의 부대였다. 뽑혀 들어온 애들이 4-5명 이외에 나머지 15명 정도는 전부 고위직 부잣집 평양출신 아이들이었다. 교환 근무일이 매우 복잡하기 때문에 6개월은 근무하는 방법을 배우기만 하였다.
아이들은 모두 외출할 때 외제 옷을 입고 다닐 정도로 돈이 많았다. 나는 사정이 어려웠기 때문에 엄마에게 사정사정해서 일 년에 만 오천원만 보내달라고 부탁드려 지냈었다. 하지만 이곳 애들은 한 달에 4-5만원을 쓰고 다녔기 때문에 경제 수준에 너무나 큰 차이가 있었다. 부대원들 속에서는 부지런하고 일 잘한다고 사랑받고 지냈지만, 집이 평양인 특권층의 자제만이 배치되어 온 이 곳에서 나는 돈이 부족하여 함께 생활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할 지경이었다.
아이들은 기가 세고 교양이 없어서 사람을 무시하는 언행을 서슴없이 하기도 하였다. 내가 단독 근무 1차 시험에서 6명을 뽑을 때 합격하고 심부름도 자주 나가게 되자 질투를 많이 받았다. 하지만 나는 돈이 없어서 경제적으로 빚을 많이 지게 되고 그래서 발언권이 별로 없었다. 또래 친구에게 심부름 나갈 외출복을 좀 빌려달라고 했더니 “너의 아버지는 딸이 추운 겨울에 밖에 나갈 외투도 없는데 머하고 자빠져있냐?”고 하였다.
이날 그 친구를 지하실에 데리고 가서 흠씬 두들겨 패주었다. “나의 아버지가 당과 수령에 충성하는 덕분에 너의 아버지가 무역해서 벌어먹고 살 수 있었던 거다”라고 하면서. 이날 윗사람들에게 가서 이럴 바에 다른 곳으로 전근을 시켜주던가, 차라리 제대를 시켜 달라고 하였다. 윗분들은 오히려 우리 집이 경제적으로 이렇게 어려운줄 몰랐다면서 어려운 애가 여기는 왜 왔냐고 물으셨다.
나는 아버지에게도 다른 곳으로 가겠다고 계속 말씀드려왔었고 그곳에서 더 이상 버틸 수 없었다. 군 복무를 이곳에서 했다고 해서 제대 후 우대 받는 일도 없고, 그렇기 때문에 돈 없는 내가 힘들게 그곳에서 지낼 이유는 없었다. 부잣집 고위 간부 아이들이 돈으로 편하게 군대생활을 하는 곳이지 나 같은 애가 있을 곳은 아니었던 것이다.
이렇게 1년을 보낸 후 나는 함경남도 이원의 보위사령부로 옭겨가게 되었다. 보위사령부이면서도 지방까지 내려온 아이들은 좀 못사는 축에 속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여기서는 경제적 수준의 큰 차이 없이 마음 편하게 지낼 수 있었다.
평양에서는 보위부사령부 전화교환수를 하였다. 다른 동기들은 이런 저런 파티를 한다면서 돈을 많이 썼다. 부대 안에서는 군복을 입어도 외출복으로는 사복을 입어야 하는데 다 외제 옷을 입는 상황에서 나는 싸구려 옷도 못 입는 상황이었다. 샴푸라는 것이 있는지도 여기서 처음 알았다. 군에서 주는 돌 같은 비누를 쓰는 아이들은 아무도 없었다. 아껴 쓰는 한이 있더라도 향내 나는 샴푸 하나 정도는 거의 모두가 사용하고 있었다. 나 혼자 비린내 나는 비누를 쓸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집에다 사정을 이야기해서 만 오천 원을 보내달라고 해서 일 년치 용돈으로 겨우 받았는데 동료들에게 진 빚을 갚고 나니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았다. 이곳에 배치된 동료들은 정말 부잣집 아이들이었다. 그 아이들은 한 달에 평균 사오만원(당시 북한에서 쌀1Kg에 1400원 정도 하였다)을 쓰고 있었고 소대에 필요한 것들도 그 부모들이 다 대주었다. 이들의 부모들은 주로 보위부 고위직이었는데 권력으로 받은 뇌물로 그렇게 잘 사는 것이다.
북한은 뇌물 없이 되는 일이 아무것도 없는 사회다. 북한에서는 남한이 자본주의 사회라 이런 뇌물이나 부정부패가 훨씬 심할 것으로 상상했지만 이곳은 북한에 비하면 너무나 깨끗한 사회이다. 남한에 온 후 나는 TV 뉴스를 보면서 놀라곤 한다. 북에서는 당연한 비리와 부정부패가 남한에서는 큰 사회적 비난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부대 내 동료들은 대부분 돈이 많으면 안하무인이거나 교양 없는 경우가 많았지만, 개중에는 돈이 있으면서도 인품이 괜찮은 친구들도 있었다. 내 어려운 사정을 알고는 돈을 빌려주면서도 갚지 않아도 된다고 말해주기도 하였다. 하지만 돈을 빌려 쓰고, 갚지 않는다는 게 말이나 되는가? 나는 자연스럽게 발언권이 없어지고 비굴해질 수밖에 없었다. 뭇 사람들의 선망의 대상인 평양의 보위사령부로 배치되었다고 좋아했지만 나의 실상은 부잣집 고위직 아이들 사이에서 참으로 고달프게 사는 것이었다.
나는 시골로 재배치 받기를 원했고 그리하여 함경남도 이원의 보위부사령부로 가게 되었다. 내가 이원으로 올 즈음 아버지는 제대를 하시고 구청직원으로 일하고 계셨다. 북한은 군인이 제대하면 사회에서 다른 곳으로 배치가 되고 만 60세가 될 때 까지는 의무적으로 근무하여야 한다.
이때는 배급이나 월급은 전혀 없이 즉 노동에 대한 대가없이 일해야 한다. 우리 집은 아무런 수입이 없어 경제적으로 더욱 어려워졌다. 이원의 보위사령부는 상대적으로 가난한 집 아이들이 배치 받는 곳이었지만 그래도 우리 집만큼 어려운 집은 없었다. 그래도 나는 평양에서보다는 훨씬 수월하게 지낼 수 있는 이곳이 좋았다.
이제는 엄마가 장사를 하시던지 하여 두 동생들을 위해 생계를 꾸리셔야 하는데, 엄마는 그럴 재주가 없으셨다. 북한에서 여권을 받아 중국에 친척방문을 하여 돈을 벌어오는 등 친척들에게 많은 도움을 받는다. 엄마도 중국에 친척들이 살고 있어서 돈을 벌기 위해 친척방문을 계획하셨다.
여권을 발급받아 다녀오는 공식적인 여행을 위해서는 뇌물 등 돈이 많이 들었다. 여권 서류절차에서 이래저래 대가를 요구하기 때문이다. 엄마는 첫 중국 방문에서 벌어온 돈을 이런 사람들에게 주느라 남는 것이 거의 없었다. 한번 중국을 다녀오신 후, 다음에는 그냥 비공식으로 강을 건너 다녀오겠노라고 결심하셨다고 한다.
아버지는 술을 좋아하셨고 밖에서 드시고 들어오셔도 또 집에서 자시고자 하였다. 경제적으로 너무 힘든 엄마와 점점 술만 드시는 아버지는 이제 매일 싸우셨다. 우리 집에도 가정불화가 생긴 것이다. 아버지와 다투시고 엄마는 홀로 중국으로 도강을 하셨다.
원래는 돈을 벌어 오시려던 것이었는데, 중국에 가셔서 친척들을 통해 한국 가는 길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고 바로 한국행을 결심하게 되었다고 한다. 엄마도 북한에서는 한국에 대해 잘 모르시다가 중국에 가셔서 한국이 좋다는 것을 알게 되셨단다. 엄마가 한국에 도착한지 6개월 후에 엄마는 돈을 보내 여동생도 안전하게 한국으로 데려오셨다. 나는 군대에 있어서 이 모든 일들을 알지 못했다.
나는 이원에서 부대의 꽃처럼 지내고 있었던 상황이었다. 모두에게 인정받으며 당당하게 내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시기를 보내고 있었다. 이렇게 행복한 군 생활을 하고 있었는데 엄마와 갑자기 연락이 두절되었다. 이무리 연락하려고 해도 안 되는 것이 이상했는데 동생은 엄마가 강원도 회령에 갔다며 곧 돌아올 거라고 변명만 하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동생마저 사라진 것이었다.
동생은 내 성격을 알기 때문에 한국행을 나에게 말하지 않았던 것이었다. 나는 북한에서 체제 순응적으로 고이고이 자라 군대까지 간 사람이었기 때문에, 한국행은 절대 상상할 수도 용납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딸을 보위부사령부 교환수로 앉혀놓고 자식들의 장래를 망치고 우리가문을 망치면서 어떻게 혼자 저럴 수 있느냐, 저는 ’엄마는 엄마도 아니다‘라고 원망했다. 조선여자들이 다 같이 이렇게 힘들게 살아가고 있는데 우리 엄마 혼자 나약하게 이럴 수 있느냐’ 하며 엄마를 원망했다. 이 일이 조회되면 나의 사회생활은 끝나는 것이었다.
이원에서 나는 남자 친구가 있었다. 평양에서 김책공업 종합대학을 나온 엘리트로 나보다 6살 위였다. 보위부사령부에서 군 생활을 하고 있었으며, 이후 김정일 측근의 엘리트 라인으로 갈 수 있는 장래가 촉망받는 인재였다. 남한사회에 와서 그 시절을 생각해보면 연애라고 해봐야 너무나 수줍고 은근한 것이었다.
부대 내에서는 비밀연애였기 때문에 애정표현도 못하였다. 아침에 근무할 때 윙크를 날린다던가, 먹을 것을 따로 챙겨준다던가 하는 것뿐이었다. 연애하는 것이 눈에 띄면 안 된다고 생각했고 생활도 너무나 통제된 상황이기 때문에 한 부대에서 둘만 따로 만나는 것은 정말 드문 일이었다. 공부도 많이 하고 똑똑하고 인물 체격도 좋고 집안도 좋은 이 남자와 제대 후 결혼할 생각에 나는 행복한 단꿈에 젖어 있었다.
엄마가 탈북한 상황을 알게 된 후, 나는 이 사람과 헤어지는 것이 인간의 도리라고 생각했다. 북한에서는 가족 중에 탈북한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사회생활을 할 수가 없도록 조치가 취해진다. 나와의 결혼은 그에게 있어 인생의 출셋길을 망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내가 헤어지자고 하자, 남자친구는 처음에는 무슨 소리냐고 하다가 3일후에는 그러겠노라는 대답을 하더라. 나는 붙잡아 주기를 바라고 한 말이었던 것 같다. 엄마의 탈북으로 인해 나는 사랑도 망치게 되고 사회에서도 언제 매장될지 모르게 되었다. 슬프고 황망하였던 시간들이 지나고 있었다.
이 와중에 나는 보위사령부의 추천을 받아 청년동맹비서양성소(청년동맹비서를 교육시키고 조직책임자를 양성하는 기관)에 들어갈 수 있게 되었는데 우리 집은 돈이 전혀 없는 상황이라 갈 수가 없었다. 다른 사람들은 돈이 있어도 갈 수 없는 곳을 나는 추천을 받아도 갈 수 없는 상황이라는 게 너무나 슬펐다. 추천되었다는 자체가 너무나 감사한 일이었다.
다행히 아버지가 큰아버지께 말씀을 드려 30만원을 받아와서 옷도 새로 장만하고 겨우 등록을 할 수 있었다. 이제 나도 공부도 더하고 우선적으로 당원이 될 수 있으리라는 기대도 생겼다. 한편 검덕(광산으로 유명한 지역)의 보위부사령부에서 정치부장이 어디선가 내가 일을 잘한다는 소문을 듣고 검덕 지역으로 와줄 수 있느냐는 요청을 우리 부대로 하게 되었다. 이런 문제로 나에 대한 조회가 들어가게 되었나 보다.
사람들이 나에게 무언가를 말하려다 마는 것 같았다. 계속 이상한 느낌이 들어 주위 부대원들에게 정치부장님께 물어볼까 싶다고 했더니 평소 같으면 말릴 일인데 어서 올라가보라고 하는 것도 이상했다. 정치부장님께 조심스레 여쭈었더니 3일전에 강제제대명령서가 왔는데 나에게 전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라고 말씀하셨다. 부대 사람들도 너무나 황당한 일이라 아무도 말을 전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갑작스레 제대명령서를 나는 받아들일 수 없었다. 나의 청춘을 바쳐서 군에서 열심히 살았는데 내 잘못도 아닌 엄마의 잘못으로 이렇게 되다니 나의 충성을 돌아봐주지 않는다는 배신감을 주체할 수 없었다. 현실을 받아들일 수 없어서 김일성 동상 앞에 가서 군복에 진창을 묻히며 엉엉 울었다. ‘이것이 네가 말한 정치냐’ 이틀 동안 하도 울어서 눈이 퉁퉁 붓고 앞을 볼 수 없을 정도였다.
정치부장이 나를 병원에 데려가 안정을 시키고, ‘네가 전장에서 엄마를 만나면 엄마에게 총을 겨누고 쏠 수 있겠느냐’ ‘이곳이 무력부가 아니라 정보기관이어서 그렇다’며 나를 달랬다. 나 때문에 부대전체가 침울해졌다. 나는 이렇듯 황당하게 군 생활을 마무리하고 짐을 싸서 아버지가 계시는 청진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내가 군에 있는 동안 아빠는 제대를 하셨고 그 후 아무런 수입이 없었다. 엄마는 내가 평양에서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을 알고 계셨기 때문에, 매일 술을 드시며 돈을 벌지 않으시는 무능력한 아빠와 자주 다투며 늘 속상해하셨다.
가정불화는 점점 심해졌고 엄마는 중국 친척집으로 돈을 벌러 가셨다가 그 길로 바로 한국행을 결정하셨다. 여동생은 엄마가 태국에 있을 당시 바로 돈으로 빼내어서 동생도 곧 한국 땅을 밟게 되었다. 다른 탈북자들에 비하면 우리 가족은 큰 고생 없이 탈북과 한국행에 성공한 것이다.
엄마와 여동생의 탈북을 이유로 군에서 강제제대를 당한 후, 아빠가 계시는 청진으로 돌아왔다. 이제 사회에서는 성분을 문제 삼아 나를 받아주려는 직장이 없었다. 북한에서는 보통 17, 18세의 나이에 학교를 졸업하고 직장에 신입으로 들어가는데, 나는 군에서 만기제대도 못하고 사회 경험도 없는, 나이만 먹은 25살의 처자가 되어 있었다.
‘장사를 할까’라는 생각도 해보았지만 가난한 우리 집 사정에 밑천도 노하우도 없었고, 사무직은 사회에서도 경쟁이 치열한 곳이어서 내가 탐낼 수 있는 자리가 아니었다. 나는 아무데도 갈 곳이 없었다. 그 사이 아버지는 재혼을 하셔서 새엄마와 새 여동생이 있었다. 동네 사람들에게 부러움의 대상이었던 내가 한순간에 이렇게 되자, 나는 사람들 만나는 것을 기피하게 되었고 북한에서의 삶에 무기력함을 느끼게 되었다. 집에서도, 사회에서도 나는 고립되었다.
달리 할 수 있는 일이 없던 나는, 제일 천하고 험한 일로 치부되었던 배 위에서의 일자리를 소개받았다. 나는 뱃사람들에게 배 안에서 밥을 해주는 일을 하기로 하고 배에 올랐다. 배에서는 한 번 시동을 걸고 바다에 나가면 기름이 아까워서라도 한동안은 바다 위에 머무르며 쉽게 뭍으로 돌아가지 않는다.
생전 처음 타보는 배 위에서 나는 격심한 뱃멀미를 하게 되었는데, 무려 열흘 동안이나 배 위에서 멀미를 하였다. 사람들에게 밥을 지어주는 것은 고사하고 사람들이 해주는 밥도 먹지 못한 채 열흘 동안 토하고 굶으며 반은 죽다 살아났다. 미안한 마음에 고기 잡는 일이라도 도와보려 했지만, 처음해보는 일이라 날카로운 바늘에 살이 찢기고 짠물이 들어가 더욱 고통스러웠다.
고기를 잡는 게 아니라 오히려 고기에게 잡혀갈 것만 같았다. 뱃일이 고된 일임을 깨달았고, 이런 내 신세가 너무도 서러웠다. 한국에 도착한 엄마는 나를 한국으로 데려오기 위해 돈을 모아 어렵게 소식을 넣으셨다. 나는 북한에서 교육받은 대로 한국에 대한 왜곡된 이미지가 있었고, 내가 보위부 직원이었다는 이유로 한국에서 나를 해코지 하지 않을까 걱정을 하였다.
하지만 엄마와 여동생은 나의 걱정을 듣고는 ‘아무것도 아닌 너를 뭐라고 해코지 하겠냐. 네가 무슨 대단한 사람이라고 그런 쓸데없는 걱정을 하느냐. 그런 걱정일랑 하지 마라’며 나를 설득했다. 그리하여 나는 엄마를 믿고 한국행을 결심하게 되었다. 엄마와 여동생이 이미 한국에 가서 살고 있는데, 엄마가 설마 나를 사지(死地)로 인도하겠나 싶었다.
엄마는 한국에서 식당일 등을 하면서 어렵게 버신 돈으로, 나를 빼오는 모든 길목의 사람들을 사두었다. 북한과 중국의 국경지대, 그리고 나의 라오스를 거치는 태국으로의 후송길, 그리고 태국에서 한국으로의 비행기까지. 이렇게 모든 것이 다 준비되어있는 상황이었지만 북한에서 중국으로 강을 건너는 것은 온전히 나의 몫이었다.
강에는 건널만한 곳이 많고, 보통 강을 건너는 탈북자들은 북한 경비병이나 중국 쪽 사람들과 이미 다 짜고 있는 상황이지만, 그래도 강을 건너다가 경비병에게 걸리는 날에는 북으로 다시 잡혀가거나 그 자리에서 총에 맞아 개죽음을 당하게 된다. 이리 되는 것은 누구도 손쓸 수 없는 노릇이기에 강을 건너는 것은 정녕 목숨을 건 사투였다.
나에게도 역시, 강을 건너는 일은 오롯이 내가 치루어 야 할 운명을 건 도전이었다. 강 건너편에는 엄마가 사주한 남자가 자꾸만 물살에 휩쓸려가는 나를 따라오며 안타까운 손을 내밀고 있었다. 생각보다 물살이 너무 세어서 강 중간까지 왔는데 나는 벌써 기력을 다하였다. ‘이제 더 이상은 앞으로 나아갈 수 없겠다… 여기서 나는 죽는구나!’ 이런 생각이 들자 강을 넘지 못하는 내 자신이 너무나 한심하여 나에게 심하게 욕을 하기 시작하였다.
‘이 머저리야! 이것만 건너면 너는 살 수 있는데! 여기서 못 건너면 너는 죽는데! 요 앞까지만 오면 너는 사는데! 이걸 못하고 죽으려 하냐!’ 내가 평소에 욕하던 사람이 아닌데도 그렇게 온갖 욕을 해가며 다시 힘을 내었다. 기적처럼 상류에서 흘러오는 통나무가 있어서 그것을 지지해 나는 겨우 중국 땅을 밟을 수 있었다. 건너편 남자가 기력을 다해 실신할 듯한 나를 안전한 곳으로 데리고 갔고, 그 후에는 엄마가 보내주신 천사들이 나머지 나의 여정을 인도해주었다.
보통 탈북자들은 도강한 후, 국경지대 중국공안들의 눈을 피할 수 있는 야산으로 며칠씩 나무에 찔려가며 걸어가, 경비가 삼엄한 국경지대를 벗어나게 된다. 그리고는 중국 내 조선족 사람들에게 중국 사람에게 팔려가도록 부탁해서 팔려간 곳에서 일하면서 먹고 사는 경우가 많다.
팔려가서 사는 삶이 비참하기는 하지만, 북한에서 굶어죽는 것 보다는 낫기 때문이다. 하지만 팔려가 지내더라도 중국공안에게 잡히면 바로 북송되어 교화소로, 혹은 한국행 중에 잡히면 정치범수용소로 가게 때문에 탈북자들은 매순간 불안 속에서 살아가게 된다. 하지만 나는 혹시라도 내가 잡히면 엄마가 무슨 수를 써서든지 나를 빼내줄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처럼 불안해하지는 않았다.
한국에서 기독교인이 된 엄마는 나와 통화할 때마다 무사히 한국땅으로 인도해 달라는 기도를 하라며 권유하셨다. 교회에 가본적도 없었고, 기도하는 방법도 하나님이 무엇인지도 몰랐지만 나는 엄마말대로 틈틈이 기도했다. 엄마는 나를 북한에서 빼내오기 위해 한국에서 몸을 돌보지 못한 채 식당 허드렛일을 하시며 너무 많은 일을 하셔서 건강이 많이 상하셨다.
몸이 아파도 병원치료를 제때 받지 못한 탓에 장이 썩어서 지금은 장 절제수술까지 받으신 상태다. 이렇게 내가 북한을 빠져나와 한국에 올 수 있었던 것, 중국에서 떠돌며 고생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엄마의 희생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엄마의 희생으로 희망의 땅인 남한으로 온 나는, 고통 받는 수많은 북한 아이들 중 선택받았다는 생각에 모든 것이 감사하고 숙연해질 따름이다.
북에서 교통수단을 많이 타보지 않았던 탓에 차를 아주 잠깐만 타도 멀미를 하는데, 한국행 비행기를 타서도 극심한 멀미를 하였다. 많은 탈북자들이 한국으로 오기까지 우여곡절을 겪어 비행기에서 내려 한국 땅을 밟을 때 그 감격이 크다던데, 나는 엄마가 이미 모든 길을 인도해준다는 믿음에 두려움과 고생이 덜했고 그래서인지 그러한 감개무량도 덜했던 것 같다. 나는 비행기에서 하도 심하게 멀미를 해서, 한국 땅을 밟았다는 안도감보다는 비행기에서 내려 살았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우리 일행은 바로 하나원으로 옮겨졌다. 나는 하나원을 감옥 같은 곳으로 상상했다가 시설이 너무 좋아 깜짝 놀랐다. 건물이 으리으리하고 삼시 세끼를 먹여주고, 옷도 주고 약도 주고 보살펴주니 세상에 이런 데가 있나 싶었다. 내가 여태껏 지내온 어느 곳보다 좋았다.
그때부터 차츰 대한민국에 고마움을 느끼기 시작했다. 열악한 상황에 있다가 갑자기 좋은 데로 오니 황홀하다 못해 꿈만 같았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누구나 돈이 소중할 텐데, 탈북자들을 위해 세금으로 운영되는 이런 하나원을 마련해준 한국 정부에 감사의 마음이 샘솟았다. 앞으로 내가 이 사회에 조금이나마 보답해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한국에서는 교회에 다니게 되었다. 교회에서 북한에서 온 사람들을 위해 학업을 위한 과외교육도 해주고 물심양면으로 많은 것을 도와주고 있었다. 내가 대학을 어느 곳으로 지원할까 고민하던 중 탈북자 전형이 있는 대학교를 세군데 정도 생각하고 있었는데 하얀 옷을 입은 뿌연 물체가 고려대학교 입학지원서를 내미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인도하심인가 싶어 하루 종일 기도를 했다. 혼자서 횡설수설하면서 내가 대학에 가야하는 이유를 기도했다.
고려대학교에 너무나 합격하고 싶었으나, 이곳의 아이들이 얼마나 열심히 공부하는지 알고 있었기 때문에 내 자신이 너무도 부족하게 느껴졌고, 주위 탈북자 선배나 친구들도 올해는 원서나 한번 넣어보란 식으로 말했다. 합격자 발표 날, 팝업창에 주민등록번호를 치고 합격소식을 알게 되자 갑자기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엄마를 큰소리로 불렀다. 엄마는 그 소리가 하도 커서 집에 불이 나거나 내가 감전이라도 당한 줄 알았다고 한다. 엄마와 나는 부둥켜안고 울었다. 주위의 모든 사람들이 다 안 될 것이라고 하였는데, 이렇게 부족한 내가 수백 명의 경쟁자를 제치고 합격을 한 것이다. 나중에 알고 보니 고려대학교 탈북자 전형에서는 단 한 명만 뽑았는데, 내가 바로 그 한 명이었던 것이다.
주위 탈북자 친구, 선후배들이 선발기준이 뭐냐며 반발과 의심이 많았다. 북한에서 대학입학 전형이 비리로 가득 차 있기 때문에 탈북자들은 더더욱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는 것 같다. 고려대학교 탈북자 전형은 학력시험이 아니었고, 단지 에세이 한편으로만 당락이 결정되는 전형이었기 때문에 나 같은 사람도 입학을 할 수 있었던 것 같다.
나는 왜 대학에 가야하는지, 나의 사명이 무엇인지에 대해 교회 선생님께 글을 첨삭받아 다듬어가면서 자기소개서를 두 달 동안이나 준비하였다. 그리고 북한인권시민연합 김영자 국장님께 추천서를 써달라고 부탁드렸다. 추천서를 너무 잘 써주셔서 이것 역시 큰 도움이 된 것 같다. 이제 나는 고대에서 4년 내내 탈북학생 장학금을 받으며 공부만하면 된다.
너무나 감사하고 이런 조건에 내가 열심히 하지 않으면 큰 죄악이란 생각이다. 여동생도 열심히 해서 이화여대 탈북자 전형에 합격했다. 이화여대는 탈북자 전형에서도 공부실력도 입학전형요소로 삼고 있기 때문에, 동생은 나보다 먼저 남한에 와서 2년 동안이나 코피 쏟아가며 독하게 공부해 합격한 것이다. 그것에 비하면 나는 정말 하나님이 도우신 것 같다. 두 딸을 한국으로 무사히 데려온 것만으로도 행복해 하시던 엄마는 우리가 고대, 이대에 합격하여서 너무나 좋아하신다.
이제 나는 곧 있을 나의 대학생활의 단 꿈에 부풀어 있다. 희망의 땅인 대한민국에서 나는 나와 탈북후배들, 그리고 통일을 위한 정책에 이바지 할 수 있는 공무원이 되고 싶다. 그 꿈을 위한 공부를 차곡차곡 해나가고 싶다. 희망을 가지고 살 수 있게 된 것에 감사하며, 나의 경황없는 이 수기를 마친다.
출처 : 북한인권시민연합 https://kor.nkhumanrights.or.kr/main.htm
11-03 탈북자 주승현 수기
● 주승현(33)은 스물두 살 때 휴전선을 넘어 귀순했다. 비무장지대(DMZ)에서 남측의 심리전을 제압하는 방송요원으로 군 생활을 했다.
북한이탈주민의 한국 입국이 본격화한 2000년 이후 대학과 대학원을 거쳐 박사학위를 취득한 첫 사례이자 최연소 탈북자 박사다.
연세대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학교 대학원에서 석·박사학위를 취득했다. 국회와 동양·금호석유화학·롯데그룹에서 근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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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 전 어느 겨울 밤, 을씨년스러운 바람이 휴전선 철조망에 부딪혀 웅~웅~ 울음을 토하던 그 밤에 비무장지대(DMZ) 내 북측 심리전 제압 방송국에서 근무하던 나는 목숨을 건 귀순 길에 들어섰다.
북한군 GP(Guard Post)초소에서 한국군 GP초소는 뛰어서 5분, 걸어서 10분도 채 걸리지 않는 거리였지만 그 길은 북한에서의 스무 해가 넘는 내 인생을 뒤로하고 내딛는 길이었고 내 손에 쥔 것이라고는 어제의 동료(추격조)로부터 나를 지키는 AK자동소총뿐이었다.
지난해 7월 18일 JSA 경비대대 대원들이 비무장지대(DMZ) 내 대성동마을 인근 밭에서 일하는 주민을 경호한다. 주승현 씨는 DMZ를 뚫고 25분 만에 탈북했다.
하나원에서부터 ‘왕따’
월남(越南)과 침투를 막으려고 DMZ에 설치한 1만 볼트의 고압 전기철조망과 지뢰를 비롯한 장애물, 촘촘한 매복호, 전방 탐지기기의 추적을 피해 마침내 MDL(Military Demarcation Line·군사분계선)을 넘었고 탈출 25분 만에 나는 한국 측 초소에 무사히 도착했다.
아마도 한국에 들어온 2만7000명의 탈북자 중 최단 시간 내에 북한에서 한국으로 온 사례가 아닌가 싶다.
귀순은 사실 상상해보지 못한 일이었다. 군인 가정에서 태어나 자란 내가 환경이 좋은 곳에서의 복무를 마다하고 DMZ를 선택한 것은 어린 나이였는데도 무력으로 ‘남조선’을 해방하고 조국을 통일해야 한다는 북한 당국의 논리에 깊이 공감했기 때문이다.
출신성분이 우수하고 계급적 각성이 높은 자만 뽑혀오는 DMZ에서도 나는 심리전 제압 방송요원이라는 중요한 보직에서 근무했고, 적과 아군이 대치한 전초선이자 대북방송과 대남방송의 대결장에서 남북의 분단 상황을 6년간 목도했다.
사선을 넘어 한국에 귀순한 순간부터 나는 더 이상 귀순용사가 아닌 탈북자, 새터민, 북한이탈주민, 탈북이주민 등 수많은 용어가 난무하는 탈출 이방인 대열에 합류했다.
정체성의 혼란과 상대적 박탈감 탓에 심한 좌절을 맛보아야 했다. 다른 탈북자처럼 경제적 어려움 탓에 탈북한 것도 아니었다. 한국에서 환영받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닫자 끝없는 후회와 절망이 찾아왔다.
탈북자 정착기관인 하나원에서부터 나는 이른바 ‘왕따’였다. 특히 견디기 힘들었던 것은 고향 사람들이 나를 대하는 태도였다.
내가 DMZ에서 근무한 군인 출신이라는 사실이 소문나면서 탈북 과정에서 그들이 겪은 트라우마가 반사적 분노로 표출돼 나에게 돌아왔던 것이다.
나는 북한 주민의 탈북을 총으로 막는 국경 경비대원이 아니었는데도 북측의 DMZ를 지키던 군인이었다는 사실만으로 나를 공격하는 그들을 당시에는 이해할 수 없었다.
탈북자 정착 교육시설 하나원. 정부는 개원 10돌이던 2009년 하나원의 모습을 국내외 언론에 최초로 공개했다.
하나원에서 퇴소해 먼지 가득하고 허름한 서울의 한 임대 아파트에 들어섰을 때만 해도 지하철 타는 법도, 은행에서 돈 찾는 법도 모르던 터라 나는 차라리 외계인에 가까웠다.
어찌할 줄을 몰라 나를 담당한 형사에게 전화해 이것저것 물어보자 “혼자서 새로 온 탈북자 40명을 담당하는데 그중 절반이 어르신이다. 젊은 너는 알아서 해야 하지 않겠느냐”는 대답이 돌아왔다.
그 이후 나는 누구의 도움도 받지 못하는 상황에서 홀로 살아가야 했다.
10년 만에 학·석·박사
나는 북한에서 사회생활을 해본 적이 없다. 다른 탈북자처럼 제3국에 체류하면서 시장경제를 터득한 것도 아니기에 한국 사회에 나온 지 두 달 만에 얼마 안 되는 정착금마저 사기를 당해 날렸다.
정착금을 빼앗아간 사람은 탈북자였고, 불량 휴대전화와 짝퉁 물건을 나에게 팔아 생계비를 빼앗은 이는 한국인이었다.
생활비라도 벌려고 주유소에 찾아가 면접을 봤지만 대학생과 휴학생 구직자가 넘쳐나는 상황에서 중국 동포보다 더 어리바리했던 나를 뽑아줄 리 만무했다.
목숨을 걸고 DMZ를 넘어왔지만 잉여인간으로 전락한 채 북한도 아닌 남한에서 태어나 처음으로 굶어보았고 몸서리칠 만큼 힘든 상황을 하릴없이 받아들기에는 깊은 내상으로 인한 통증이 너무나 고통스러웠다.
고향에 대한 그리움, 가족에 대한 죄책감, 상대적 박탈감과 알 수 없는 분노로 하루하루 폐인이 돼갔으며 5개월 만에 체중이 10㎏이나 줄었다.
그즈음에 정신적 좌절이 행동으로 발현되면서 극단적 선택도 수차례 했지만 용케도 목숨이 붙어 있었다.
그러던 중 나는 ‘벼룩시장’의 구인광고를 통해 종로에 있는 일식당에 취직했다. 내가 맡은 업무는 배달과 주방 일이었는데 한국인이 8시간 일할 때 나는 12시간 일했다.
그럼에도 월급은 그들보다 적었다. 그때 처음으로 공부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자유 사회에 온 것은 맞지만 이 사회를 배우지 않고서는 평생을 열등한 타자로 살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깨달음을 얻었던 듯하다.
나는 월급의 절반을 떼어내 서울 동대문구 신설동에 있는 대입학원에 등록했고 일이 끝나면 학원으로 갔다.
함께 일하던 사람들이 탈북자가 무슨 대학이냐고 빈정댔지만 나는 하루 3시간을 자며 일하고 공부했고 마침내 그해 가을 대학시험을 치러 합격통지를 받았다.
나는 북한에서 제대로 공부해본 적이 없었다. 직업군인이 꿈이었던 나는 어려서부터 국방체육을 전공했고 수업에 참가하는 날보다 경기 일정으로 학교와 집을 떠나 있는 날이 더 많았다.
학교를 졸업하던 열일곱 살 나이에 곧바로 군에 입대해 6년간 DMZ 안에서 근무하다 한국으로 왔으니 학업의 공백은 더욱 클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나는 공부해야만 했다. 고려대 경영학과와 연세대 정치외교학과에 동시에 합격한 나는 최종 선택에서 거주지에서 가까운 고려대가 아닌 연세대를 골랐다.
그 이유는, 얼마 안 되는 한국에서의 생활을 통해 내가 ‘분단의 사생아’임을 뼈저리게 느꼈기 때문이다.
경영학을 공부해 좋은 기업에 취직하는 목표도 가질 수 있었지만 정치학을 통해 설움 가득한 삶을 강요케 한 한반도의 분단 구조를 들여다보고 싶었다.
첫 탈북자 통일학 박사
입학 전 들떴던 마음과 달리 대학 생활은 최악이었다. 남북한의 서로 다른 교육과정 탓도 있었지만 무엇보다도 나에게는 공부에 대한 취미는커녕 요령도 남아 있지 않았다.
게다가 혈혈단신이다보니 얼마 안 되는 생계지원금으로 집세를 내고 나면 교통비나 밥값도 남지 않았다.
입학하자마자 경제적 어려움으로 호프집에서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는데 첫 학기 성적은 말이 아니었다.
탈북 대학생의 경우 사립대학 등록금을 국가와 대학에서 절반씩 장학금으로 지급하는데, 일정 수준 이상의 성적을 거둬야 수업료를 지원받을 수 있다.
성적이 나빠 장학금을 지원받지 못한 나는 스스로 등록금을 해결해야 했다. 호프집 아르바이트로는 도저히 감당이 안 돼 일식당과 건설 현장으로 일을 다녔다.
수업 후 도서관으로 가는 친구들을 부럽게 바라보면서 일터로 가야 했던 대학 시절은 아직까지 가슴에 응어리로 남아 있다.
교재를 살 돈도 없었지만 그래도 공부를 포기할 수는 없었다. 도서관이나 대형서점에서 선 채로 책을 읽으면서 배움의 끈을 놓지 않았다.
부교재를 빌려보려고 6개의 도서관을 다닌 적도 있다. 책을 찾아 돌아다니면서 닳고닳은 신발 밑창 값이 교재 값보다 더 많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시험기간에는 일주일이나 열흘씩 아예 도서관 의자에서 자면서 공부했는데 군 시절에 체득한 인내심이 큰 도움이 됐다.
그렇게 두 학기 등록금을 직접 내고서야 성적이 올라 장학금을 받았고 그제야 마음의 여유도 생겼다. 친구를 사귀는 것만큼은 어려움이 없었던 나는 여러 동아리 활동을 하면서 캠퍼스의 낭만도 만끽했다.
대학 3학년 때는 산악동아리를 맡아 이끌었고 학교 친구들과 민속문화반을 결성해 방방곡곡 돌아다녔다.생활은 어려웠지만 휴학하지 않고 대학을 졸업할 수 있었다.
최근에는 대학을 졸업한 탈북 학생을 심심찮게 볼 수 있지만 당시에는 대학에 입학하고도 실제로 졸업하는 사람은 찾아보기 어려웠다. 특히 한 번도 휴학하지 않고 졸업한 사례는 거의 없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대학 졸업 후 나는 국회(국회의원 보좌관)와 두 곳의 대기업에 다니며 대학원에 진학했고 대학원에서도 한 번의 휴학 없이 석·박사 과정을 마쳤다. 22세 때 귀순해 10년 만에 탈북자 최초로 통일학 박사학위를 받은 것이다.
아웃사이더의 정체성 찾기
나는 한국 사회에 적응하기에 적합한 사람이 아니었던 듯하다. 앞서 밝힌 것처럼 군인 가정에서 태어나 DMZ에서 군인으로 근무하다 온 나에게 한국은 머리나 가슴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냉정한 자본주의 경쟁 사회였다. 나는 맞지 않은 옷을 입은 것처럼 어색했다.
어떤 사람들은 군인 출신이어서 국가적 대우나 보상이 더 많았을 것이라고 하는데, 2000년 이후 군 귀순자에 대한 배려와 대우는 소멸됐고 오히려 군 출신 귀순자는 춥고 어두운 동면을 강요당했다.
첨언하자면 가지고 온 무기의 보로금(報勞金·반국가 단체나 그 관련 구성원으로부터 금품을 취득해 수사기관이나 정보기관에 제공했을 경우 금품 가격에 따라 국가가 지급하는 돈)조차 제대로 지급받지 못했는데, 관계자의 말을 빌리면 내가 가지고 온 무기(AK자동소총)는 동대문시장에서 25만 원이면 구입할 수 있을 만큼 가치가 없다는 것이었다.
또 언젠가 나는 탈북 학생들이 안보 강연이나 특정 재단의 지원으로 생활비와 등록금을 충당한다는 기사를 본 적이 있는데 정작 군인 출신인 나에게는 그러한 기회조차 없었다.
게다가 어린 나이에 혼자 지내다보니 탈북자 사회에서도 상대적으로 열악한 위치에 있어 내적 모순과 외적 도전을 함께 이겨내야 했다.
그러나 나는 비록 아웃사이더의 위치일지라도 그 위치가 품은 다양한 면을 건전하게 고찰하고 정신적 인내를 배운다면 훨씬 더 많은 기회를 포착할 수 있다는 사실을 경험했다.
탈북자에 대한 고리타분한 편견이 사회적 주홍글씨로 존재하는 상황에서도 국회의 별정직 공무원과 대기업 사원으로 일한 것은 귀순자에 대한 푸대접에 낙담하지 않으려 노력하고 대학 진학과 관련한 비웃음에도 개의치 않은 덕분이라고 생각한다. 또한 인내심을 갖고 위기를 기회로, 단점을 강점으로 바꾸려고 힘을 다했다.
나는 국회에 들어갈 때도 누구의 도움도 없이 정치외교학 전공자 모집에 지원해 채용됐고 두 곳의 대기업도 공채에 응시해 스스로의 힘으로 입사했다. 다만 서류 전형 때 탈북자라는 사실을 밝히지 않았다.
자기소개서, 이력서 등에서 탈북 사실을 밝히지 않더라도 채용 면접 과정에서는 진실이 드러날 수밖에 없다. 그런데 면접 때는 탈북자라는 사실이 합격에 오히려 도움을 준 것 같다.
밝히지 않을 수밖에 없었던 사정을 털어놓으면서 탈북자만이 가질 수 있는 정신력과 포부가 회사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점을 호소해 좋은 평가를 받을 수 있었다.
이후 나는 입사 면접 상황을 즐겼고 예외 없이 합격통지를 받았다.내가 여러 회사에서 일한 이유는 혼자서 감당하기 벅찬 ‘미친 등록금’과 생활비 등이 발목을 잡았기 때문이다.
북한에 있을 때 ‘남조선’ 대학생들이 학비 낼 돈이 없어 피를 뽑아 팔아 등록금을 낸다는 교육을 받았는데, 한국에서 실제로 겪어보니 등록금을 낼 수만 있다면 피를 뽑는 것도 마다할 이유가 없겠다고 수백 번 생각했다. 문제는 내 몸 안의 피를 다 뽑아도 과연 등록금을 낼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어려운 형편이었어도 공부만은 포기할 수 없었다. 그래서 학위 과정을 빨리 마치고 기업에 취업해 돈을 번 후 상위 과정으로 나아가자고 마음먹었다. 남보다 일찍 석사 과정을 마치고 남은 기간에 돈을 벌어 박사 과정에 입학했고 박사 과정 역시 빨리 끝내고 취직해 돈을 벌었다.
그리고 다시 학교로 돌아와 박사 논문을 준비했다. 물론 공부에만 집중하지 못했다는 게 아쉽지만 다른 선택이 없었다. 대기업 근무를 통해 사회를 배우고 경력을 쌓은 것 역시 유익했다.
살아야 한다, 돌아가야 한다
나는 한반도의 통일은 곧 분단의 극복이므로 분단을 사유하는 것이 통일을 사유하는 것이라고 생각해 정치학을 선택했다. 박사 논문을 준비하면서 두 번 병원에 실려갔다.
극심한 스트레스 탓도 있겠지만 남북한의 잔인한 분단사를 들여다보는 것이 너무나 고통스러웠고 통일 후 통합에 대한 어두운 그림자가 나의 심신을 해치곤 했다.
남북한의 노력으로 70년 분단 상황을 끝장낼 수는 있지만 오랜 분단이 낳은 적대성과 이질성이 통일 이후에도 남북한 사람들의 통합을 심각하게 저해할 것이라는 생각에 못내 암울해진다.
박사 학위를 받은 후 미국 프린스턴대학에서 박사후 과정 초청장이 왔지만 나는 부산으로 내려갔다. 알고 지내던 지인이 부산에 대안학교를 세웠는데 사감 겸 교사로 일할 수 있겠느냐고 부탁해왔기 때문이었다. 학교가 어려워 월급도 없는 자원봉사라고 했다.
잠깐 고민했지만 흔쾌히 응했다. 이 땅에서 살면서 한 번도 제대로 된 봉사를 한 적이 없다는 것이 첫 번째 이유였고, 아이들을 통해 통일 후에 대한 희망을 찾고 싶다는 것이 두 번째 이유였다.
통일에 대한 당위적 의식이 높은 기성세대는 분단의 체험자이기도 하다. 분단의 수혜자이든 피해자이든 이들이 가진 분단 의식은 부정적 인식에서 출발한 것이며 통일 후 갈등과 대립, 혼란의 본질적 요소다.
내가 통일 후 충돌이 불가피하다고 보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러나 통일 세대라고 할 수 있는 청소년의 경우 통일을 필요적 측면에서 접근하긴 하나 분단 의식만큼은 기성세대에 비해 상대적으로 자유롭다.
만약 한반도의 통일이 필연적이라고 생각한다면 기성세대의 책임과 통일 세대의 역할을 조화롭게 융합해 새로운 통일 국가의 미래를 개척해야 할 것이다.
생각해보면 살아야 하겠다는 절박함이 DMZ를 통한 귀순 길에서 생존이라는 기적을 가져왔고,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간절함이 빈한한 처지에서도 내가 지금까지 버텨온 의지의 원천이자 자양분이었다.
나는 지금 또 다른 오기와 소망의 절박함과 간절함 앞에 서 있다. 그것은 통일이다.
다가오는 통일은 적대와 증오를 배태해온 70년 분단사(史)만큼이나 호락호락하지 않을 형태일 것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나는 그 통일이 남북한 주민 모두의 행복한 삶을 약속하는 모습이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주승현 | 북한이탈주민·통일학 박사 joosy3050@naver.com : 출처 신동아 9월호
11.03 한 납북 어부의 30년간의 북한 생존기
납북귀환자의 이야기’는 1975년 8월 동해 공해 상에서 어업을 마치고 귀항하던 중 납북되었던 어선 ‘천왕호’와 배에 탔던 선원 33명 중 한 사람인 최욱일 아버님에 관한 이야기이다. 남한의 가족과 납북자가족모임의 도움으로 극적인 탈북에 성공하여 2007년 1월 대한민국으로 귀환하였다.
납북된 33명중 22명은 모두 굶어 죽었다. 지난 3월 15일 북한인권시민연합은 제네바에서 열린 제99차 유엔 강제적·비자발적 실종에 관한 실무그룹 미팅에서 최욱일 아버님이 북한에서 자신을 포함한 납북자들의 생활을 증언할 수 있도록 하였다.
추적추적 내리는 봄비를 가로지르며, 경기도 안산에 살고 계시는 최욱일 아버님 댁을 방문했다. 납북된 지 32년 만에 황혼의 나이가 돼서야 재회하여 새로 시작한 신혼 부부 마냥 행복에 젖어있는 이들 노부부에게 아팠던 두 인생의 지난날들을 기억하게 하는 것조차 조심스러웠다.
아프지만 행복한 오늘이 있어 즐겁게 추억할 수 있고, 힘들게 버티고 이겨낸 세월이 있어 최욱일 씨 부인이 구수하게 부쳐낸 메밀김치 지짐과 한 잔 술이 더 맛나게 느껴지는 듯 했다. 아픈 그들의 지난날들은 오늘의 행복이 얼마나 소중하고 값진 것인지 분명한 메시지를 보내는 것 같았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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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과 함께 만든 기계배
내 고향은 강원도 주문진읍 교향리이다. 이 고장 토박이로 시집간 누나도 같은 동네에 모여 살았고 온 가족이 그렇게 같이 살았다. 원래 바닷가에서 나서 자란 나는 일찍이 나무배를 타고 고기잡이 일을 해왔었다. 자연스럽게 어깨너머로 배 위에서 하는 일들을 몸으로 익히면서 배우게 되었다.
21살에 일찍 결혼하고 계속 뱃일을 했다. 그러던 중 큰 배를 하나 장만할 생각을 하게 되었다. 아무래도 기계 배로 고기잡이를 하면 속도도 빠르고 힘도 더 세고 해서 더 많은 고기를 잡을 수 있을 것이라 믿었고 드디어 1974년 거금 3천 7백만 원(현재 가치로 환산하면 40억 원 정도는 더 될 것임) 돈을 들여 39톤급 기계 배를 마련했다.
혼자의 힘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었지만 모두가 희망과 꿈을 담아 아끼고 아껴서 장만한 것이었다. 그래서 그 배는 우리에게 너무나 소중했고 모두가 기뻐했다. 그렇게 우리의 꿈이 담긴 “천왕호”가 만들어졌다.
나 또한 이 배에 모든 희망을 걸었다. 삼 남매와 네 번째로 태어난 8개월 된 막내아들의 장래도 이 한 척의 배에 달려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렇게 소중했고 가족 모두의 기대가 담긴 배였다.
결혼 14년 만에 장만한 배를 보면서 이제 잘살게 될 내일만을 꿈꾸면서 기대도 컸다. 이제 큰 배도 마련했으니 먼바다로 출항할 준비가 되었다. 사실 이렇게 큰 배를 만들게 된 것은 당시에 가까운 바다에서는 고기가 잘 잡히지 않았다.
그래서 작은 배로는 고기를 잡아 봤자 적은 량 밖에는 잡을 수 없었고 여섯 식구 생계를 유지하는 데는 큰 보탬이 안됐다. 그래서 한번 크게 배 사업을 해보고자 한 것이었다. 1975년 8월 9일 섭씨 30도가 넘는 찜통더위에도 우리는 출항준비를 마치고 출항했다.
한번 먼 바다에 나가면 며칠씩 바다 위에서 있어야 했기 때문에 많은 것을 준비해야 했다. 어구 손질, 디젤유 4드럼, 냉동 오징어, 얼음 5톤, 25Kw용 전구 15개, 배의 기관용 부속품, 생필품 등을 준비했다. 그리고 33명이 “천왕호”에 탑승했다.
당시에 어획 목표량은 오징어 3만 6천 마리 정도였는데 당시 시가로는 3,4백만 원이 목표 수익이었다. 한번 항해를 떠나면 뭍에 있는 가족들은 초조한 마음으로 무사히 돌아올 때까지 힘든 생활을 해야 했다. 험난한 바다에 나가 혹시라도 일이 생길까 걱정되어 집에 있는 쌀을 다 털어서 배에 실었고 주머니에 돈을 두둑이 채워주었다.
배가 막 떠나려고 하는데 셋째 딸애가 부둣가로 달려나왔다. “아버지 알사탕 사줘” 하면서 애원하며 울면서 내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늘어졌다. 그때 내 윗옷 안주머니에는 돈이 얼마간 있었다. 항해 도중에 혹시나 경비대원들을 만나면 찔러줄 돈이었다.
형님은 배의 사무장이었던 나에게 요긴하게 쓸 비상금을 항상 챙기고 다니라고 말했었다. 그래서 나는 그날도 딸애의 울음도 뒤로하고 무작정 배에 올랐다. 북에 있는 30년 동안 그때 딸애의 울음소리가 귓전에 들려와 늘 내 가슴을 후비며 괴롭힐 줄은 미처 알 수 없었고 예상도 못 했다.
북한군에 묶여 버린 ‘희망’
당시에 우리 배 규모는 제법 되었지만, 장비는 충분히 갖추지 못했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은 무전기, 방향탐지기, 독도해역 지도와 컴퍼스 등이 전부였다. 그렇지만 우리는 선장 김익두의 오랜 경험을 바탕으로 멀리 공해 상까지 나가 고기잡이를 하곤 했었다.
공해 상에는 중국 배, 일본 배들도 많이 어로작업을 하였는데 우리는 종종 일본 배를 따라다니곤 했었다. 왜냐하면 일본 배들은 기계 장비를 잘 갖추고 있어 고기떼를 잘 탐지했었기 때문에 우리도 쫒아 다니면서 눈치껏 고기를 잡는 것이었다. 그래서 가끔은 일본 해역 부근까지 나가서 고기를 잡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1975년 8월 16일 조업 7일째 되는 날 우리는 그동안 잡아들인 오징어를 보며 돌아가서 좋아 할 처자식과 식솔들의 모습을 생각하며 만선의 기쁨을 누리며 좋아하고 있었다. 밤 11시 강릉 문화 방송에서 태풍경보가 있다는 것을 라디오로 듣고 서둘러 어구를 거두고 주문진항으로 뱃머리를 돌렸다.
1975년 8월 17일 조업 8일째 되던 날 새벽 4시쯤 되었는데 어디서 나타났는지 모르는 북한 경비정이 우리 배를 향하여 기관총을 쏘아대며 추격해 오고 있었다.
우리배가 멈추면 위협 사격이 멈추고 움직이면 다시 사격하고 그렇게 가다 멈추기를 반복하다가 결국 총 한 자루 없었던 우리는 저항도 못하는 사이에 권총과 기관총을 소지한 북한군 군관 1명과 병사 1명이 우리 배에 올랐다.
그리고 그들은 우리에게 “꼼짝 말아 움직이면 쏜다” 하고 엄포를 놓더니 우리 배를 북한경비정에 로프로 연결하여 북한해역으로 끌고 갔다. 우리 배 엔진 동력과 북한해군 배 엔진 동력을 포함하여 2척의 배가 함께 가동했는데도 6시간이나 걸려서 북한수역에 있는 어느 한 항구에 도착했다.
6시간의 거리는 우리배가 북한해군에 발견되던 당시 북한으로부터 상당히 멀리 떨어져 있었다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도 북한군은 우리배가 북한해역에 있었다고 했다. 북한군에게 끌려가는 배위에 꼼짝도 못하고 앉아 있는 동안 천 갈래, 만 갈래 생각이 다 들었다.
그동안 남한에서 들었던 소문들이 기억났다. 들었던 바대로 정말로 “북한에 도착하면 아오지 탄광으로 끌려가겠지?” 하는 생각도 들고 마음은 너무 착잡하고, 막막하고 억울했다.
왜 끌려가야 하는지 무슨 잘못을 했기에 사랑하는 가족이 아니라 아는 사람이라곤 아무도 없는 저 북한으로 가야한단 말인가? 배위에서 저항해 보고 싶었지만 북한군의 겨누고 있는 총부리를 보면서 엄두가 나지 않았다.
북한의 원산항에 도착하다.
배위에 상황은 한 마디 말만 했다가는 당장 무슨 피해가 날아올지 몰라 조마조마했고 그 속에서 우리는 더 애간장만 타들어 가는 것 같았다. 그런데 어디선가 북한 강원도 원산항에 도착했다는 말을 들었다.
우리가 도착하자 어느새 소문을 듣고 왔는지 모르지만 항구에는 환영인파로 보이는 많은 사람들로 북적였다. 아마도 북한군이 우리가 북한으로 월북했다고 허위로 미리 상부에 보고를 했었던 것 같았다. 그런데 조금 있더니 군인들이 호루라기를 불면서 다시 사람들을 돌려보내고 있었다.
도착하자마자 우리는 초대소라는 곳으로 보내졌다. 건물 외형이나 시설들이 꽤 괸찮은 편이었던 것 같았다. 대우도 그만하면 괸찮은 편이었다. 하지만 무엇을 먹어도 먹는 것 같지 않고 아무런 생각도 나지 않았다.
거기다가 배를 만들어서 1년도 타보지 못하고 잡은 고기와 배를 모두 빼앗길 것을 생각하니 억울하고 분통이 터져 잠도 오지 않았다. 밥을 먹어도 모래알을 넘기는 것 같았다. 한 일주일 동안 아무것도 안하고 그냥 시간만 보냈다.
한 주가 지나고 본격적으로 사상교육이 시작되었다. 초대소에서 하루 일과는 아침 6시에 기상, 아침체조 하고, 그리고 다시 숙소로 들어와 세수하고 7시에 아침식사하고, 8시 반부터 집중 강습을 받고 12시까지 계속됐다. 이렇게 아침일과가 끝났다.
강습은 한 번에 90분 동안 들었고 10분 동안 잠깐 쉬고 다시 두 번째 강의를 들었다. 점심을 먹고 약 한 시간동안 오침을 하고 오후 강습이 시작 되었고 3시간 동안 두 강습을 듣고 오후 강습 일정이 끝났다.
강습이 끝난 후 체육운동도 하고 저녘 식사를 하고 북한체제 선전용 영화를 보는 것으로 하루 일과가 끝나고 보통 저녁 9시에 잠자리에 들었다. 침대에 누워도 두고 온 처자식들이 눈앞에 얼른얼른 거리는 것만 같아 눈을 감아도 잠도 않고 긴 한숨만 나왔다.
그러니 김일성의 주체사상이니, 혁명역사니, 사회주의체제의 우월성이니 하는 것들은 사실 듣고 있어도 귀에 들어올 리가 만무했다. 우리가 가장 기다리는 소식은 우리를 과연 언제 돌려보낼까 이었다. 3개월이 지나고 6개월 지나도 돌려보낸다는 소식은 들리지 않았다.
기다리는 대답은 하지 않고 대신 계속 기다리라는 말뿐이고 “수령님의 교시가 있어야” 한다고 하니 어떤 동료들은 무의식적으로 불평을 하기도 했다. “사회주의 사회는 거짓말도 안한다고 하는데 왜 보내준다고 하고 보내주지 않느냐”고 불만을 토로했다.
결국 원산초대소에서 10개월의 시간이 지나갔다. 초대소에서는 구타나 고문 같은 행위는 없었으나 불평을 하면 요주 인물로 찍히고 나쁜 놈으로 취급을 하여 이런 말도 자주 할 수 없었다. 단지 하도 억울하고 답답하여 늘어놓은 푸념이었다.
동료들과 헤어지다
원산 초대소에서 생활한지 9개월쯤 되니 사회에 배치된다는 소리가 들렸다. 그때 처음으로 직감했다. 우리는 어쩌면 영영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겠구나. 지금까지 집에 돌려보낼 거라고 순진하게 믿고 있었던 것이 바보 같았다.
우리는 큰 버스에 타고 기차역까지 함께 가게 되었는데 가기 전에 우리를 인솔하는 5과 지도원 이라는 사람이 각 사람에게 북한 돈 200원과 가방 그리고 속옷과 세면도구, 겉옷을 챙겨주었다. 보내달라는 고향에는 안 보내주면 크게 선심이라도 쓰는 듯이 우리를 위로한답시고 안심시키려는 수작이었다.
그렇게 어찌할 방법 없이 30년 세월이 시작되었다. 새로운 곳에 정착하다 배치 받은 곳은 함경북도 김책시의 어느 한 시골 농장이었다. 이제 아는 친구 하나 없이 혼자가 되었다고 생각하니 가슴속으로는 하염없이 눈물만 나왔다. 의지할 사람도 말 친구를 해줄 사람도 없이 무인도에 홀로 남겨진 느낌이었다.
처음 도착하자마자 나를 인솔해 간 5과 지도원과 함께 내가 일하게 될 농장 관리워원장과 초급당 비서를 비롯한 간부들과 만났다. 해당 협동농장에 배치 받은 것을 환영하며 앞으로 일도 열심히 하고 당과 수령을 위해 성실히 생활하면 좋은 일들이 있을 거라고 위로해 주는 듯이 나에게 말을 건넸다.
하지만 생활 속에서는 처음에 환영인사를 할 때와 전혀 달랐다. 처음 거처할 집이 없어 늙은 노부부가 사는 윗방에 곁방살이로 들어갔다. 집이라고 말하기에는 너무나 불편했고 정 붙이기가 너무 힘들어 잠이나 겨우 잘 수 있는 곳이었다.
잠만 그곳에 자고 밥은 합숙 식당에서 먹었다. 남쪽에서 왔다고 특별히 심한 노동을 시키지는 않았지만 내가 하는 행동 하나하나를 다 지켜보고 있다는 것은 분명하게 느낄 수 있었다. 특히 말을 조심해야 했다. 둘이서만 말한 얘기가 다른 사람을 통해 여러 번 나에게 돌아오는 것을 경험했다.
그 이후로 나는 둘이 있을 때는 절대 속 깊은 얘기를 하지 않았고 얘기 한 내용을 기억하고 있어야 했다. 그래야 나중에 나에게 돌아온다고 해도 나를 보호 할 수 있었다. 세 명이서 모여 이야기 할 때는 아예 말조차 하지 않았다. 둘 중 누가 어떻게 보고할지 몰랐기 때문이다.
특히 한국이 북한 보다 좋은 점에 관하여 말을 하면 큰일이었다. 혹시나 주변 사람들이 한국에서는 사람들이 어떻게 사느냐고 물어보면 언제나 북한보다는 힘들고 어렵게 산다고 말을 해야 했다.
사실 내가 납북 되던 당시까지만 해도 한국의 경제 형편은 그리 좋지 못했다. 그래서 북한에서는 한국이 항상 그렇게만 살고 있다고 말했지만 속으로는 고향 한국이 언젠가는 더 발전하고 있을 거라고 근거도 없이 믿고 있었다.
그리고 북한 텔레비전에서 내보내는 것은 남한의 대학생들이 시위하고, 깡패들이 나오는 것만 보여주었다. 박정희대통령이 사망한 소식과 8·28 도끼 사건도 한국이 도발을 했다고 북한주민들에게 역설하는 것도 들었다. 북한 사람들은 북한정부가 보여주는 것이 전부인 것처럼 알고 있었지만 점점 고향 한국이 더 발전할거라고 굳게 믿고 싶었다.
결혼과 계속되는 감시
시간이 지나면서 배치 받은 곳에서의 생활에 잘 적응해 가고 있었다. 주변으로부터 내가 일을 잘하고 있다는 호평도 퍼지기 시작했다. 이곳으로 배치 받은 후에도 종종 나를 이곳까지 이송해 왔던 연락소 지도원이 가끔 찾아오곤 했다.
이 연락소 지도원이 나를 결혼 시키면 좋을 것 같다는 얘기를 내가 일하는 단위의 관리책임자들에게 귀띔을 해주었던 것 같다. 결혼을 하고 난 후에는 입당(북한의 조선노동당에 당원으로 가입함을 의미, 입당은 북한에서 성인남자라면 가정 이력에 특별한 문제가 없는 한 가입해야 하는 것으로 인식되고 있다. 그러므로 입당 여부는 배후자를 만날 때도 중요한 문제이다.)도 하게 되었다.
당원이 되고 나서는 분조장(북한의 농촌에서 7~8명으로 구성된 조의 팀장을 이르는 말)과 기술지도원 일도 하게 되었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더 이상은 올라갈 수 없었다. 나는 남보다 일을 더 잘하기 위해서 주간에는 일을 하고 야간에 공부하는 야간기술학교에도 다녔다.
당시에 북한에서는 농촌을 선진화 한다고 하여 농업전문학교가 생겼는데 강사들이 일주일에 세 번 직접 농촌 마을회관 같은 곳에 찾아와서 강의를 해주곤 했다. 그렇게 2년간을 열심히 다녀 농업 준기사 자격증을 받았다.
일을 잘 한다는 좋은 평가도 받았고 일정한 관리자로 그리고 기술자로 일 하게 되었지만 차별과 감시를 받는다는 생각은 떨쳐 버릴 수 없었다. 직접적으로 당한 것은 없었지만 뒤에서 나에 대해 이러쿵 저러쿵 얘기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내가 일도 잘하고 열심히 공부하면서 노력한다고들 겉으로는 얘기하지만, 안전부나 보위부 같은 사람들은 항상 내 속내를 알아보고 싶어 안달이었다.
당 일군이라는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열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을 모른다고 그들이 내 마음을 다 알 수 없는 것은 당연한 이치일 것이다. 그래서 나도 그 놈들한테 속을 다 내보이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북에 있는 자식들은 아예 대학에 가는 꿈조차 꿀 수 없었다.
북한에 있으면서 다른 곳으로 여행을 간다는 것은 사실상 거의 불가능했다. 사시사철 손에서 일을 놓기가 힘들었고 열흘에 한 번씩 쉬는 날이 있다고 해도 쉬는 날에는 텃밭 가꾸고, 김매고 하느라 너무 힘들었다. 여자들은 열흘 내내 흙 묻은 옷을 손빨래 하느라 온 하루를 보냈다.
가족들에게까지 감시를 받았다고 말하고 싶진 않다. 하지만 가족들에게도 내 마음 속 깊은 얘기를 솔직히 다 말할 수는 없었다. 나도 모르게 남한에 있는 가족들과 부모님 생각이 나 눈물을 흘리면 가족들은 고향생각이 나서 그러는 것이라고 여겼다. 나는 자식들에게 “내가 죽거들랑 내 뼈라도 내 고향에 묻어 다오…”라고 말하곤 했다.
고역과 아픔의 기억들
북한의 농촌에서는 아침 5시에 출근해서 해가 져야 일이 끝나는 것이 정상이었다. 하지만 이 시간동안 내내 일을 할 수는 없었다. 농촌이긴 했지만 식량이 없어서 쥐꼬리만큼 먹기 때문에 서너시간만 삽질하고, 밭, 김을 매고 나면 금방 허기가 졌다. 그리하여 어떻게 해서든지 시간을 보내는 것이 고역이었다.
도중에 중참이나 간식 같은 것은 꿈도 꿀 수가 없었다. 우리집 형편도 그리 넉넉한 편은 아니었지만 다른 사람들이 굶어 죽어가는 모습을 눈으로 직접 보는 것은 너무 힘들었다. 기차역마다 굶어 죽은 사람들이 널렸었고, 꽃제비(노숙자)들로 가득했다.
한 번은 회령이라는 곳에 가봤는데 열대여섯 살로 보이는 누나가 힘없이 거리에 쓰러져 있는 아홉 살 쯤으로 보이는 남동생위에 앉은 파리를 쫓아 주는 모습을 목격했다. 오고가는 중국 상인들이 먹을 것을 주길 바라고 앉아 있는 듯 했다. 정말로 눈 뜨고는 볼 수 없는 장면이었다. 이렇게 굶주림을 이기지 못해 죽어 가는 사람들을 수도 없이 목격했다.
우리 납북자도 예외는 아니었다. 박정원이라고 기관장 했던 사람도 굶어 죽었다. 장례식에 갔더니 동네 사람들이 부인이 먹을 것을 주지 않아 굶어 죽었다고 했다. 식량난이 지속되면서 여성들이 장사를 하는 것은 정부가 그런대로 묵인했지만 남성들이 장사를 하는 것은 정부가 엄격히 통제했다. 그리하여 남성들이 여성의 경제활동에 많이 의존하게 되었다.
중국 친척과의 연락
우리 집도 언제 굶어 죽을지 모르는 상황에 이르게 되었다. 당시에 나는 노동연한이 다 되어 정년퇴임을 한 상태였다. 그리하여 집 주변에 텃밭을 가꾸고 거기서 나오는 채소를 팔아 쌀을 사오면서 생계를 근근이 유지하는 정도였다. 그러던 중 94년도에 처음으로 부인이 중국에 있는 친척집을 방문하였다.
부인은 돌아오는 길에 중고 옷이며 신발, 밀가루, 외화 등을 가져와서 중국 친척집 방문은 마른땅에 단비가 내린 것처럼 우리 집 경제생활에 많은 도움이 되었다. 98년에 부인이 다시 중국에 들어갔다가 중국에 있는 친척들에게 내가 한국에 가족이 있다는 말을 했다.
그랬더니 중국친척들이 한국 가족을 찾는 것이 가능하다고 하면서 내가 편지를 쓰면 한국 가족에게 전달해 줄 것이라고 했다. 편지를 보내는 것도 매우 조심스럽고 나름의 작전이 필요했다. 나는 생각 끝에 부인 편에 편지를 보내지 않고 중국친척들을 만나는 대로 조카를 세관으로 내보내 달라고 했다.
그리고 나는 세관 앞에서 3일간 조카가 나오기를 기다리기로 했다. 2일 만에 세관에 나온 중국친척에게 담배 대 모양으로 된 편지가 들어 있는 담배 곽을 주며 한국 집 주소를 알려주었다. 편지에는 “처남한테 편지 받아 봐라, 간단히 내 소식을 전한다. 주문진 누나에게 소식을 알려주라. 소문은 내지 말아다오”라고 적었다.
중국의 조카가 한국과 연락을 한지 이틀 만에 한국에서 전화가 왔고 한국에 있는 우리 형님의 전화를 부인이 중국조카 집에서 받았다.부인은 한국 가족들의 집주소와 전화번호 그리고 현금 200달러를 받아 돌아왔다.
한국 가족과의 연락, 그리고 탈북
그렇게 한국가족들과 연락이 시작되었다. 하지만 굉장히 조심스러웠다. 만에 하나 한국과 연락을 주고받고 있다는 것을 이웃들이나 보위부원들이 알게 되면 언제 어떤 일이 벌어질지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국 가족과 연락을 다시 주고받은 이후로 한국에서 보낸 편지도 받았다. 편지를 받자마자 읽어 볼 새도 없이 눈물이 쏟아졌다. 그러나 한국에 오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그때가 2000년 이었다.
한국 가족은 그때부터 납북자 가족회와 함께 나를 한국으로 데려오기 위한 작업에 들어갔다. 그 후로는 나를 한국으로 인도하려는 사람들이 우리 집으로 찾아오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너무 겁이 나고 무서워서 어찌 해야 할지를 몰랐다.
급기야는 북한의 보위부원이 쌀을 가지고 아예 우리 집에 살림을 차리고 우리 가족과 함께 먹고 자기에 이르렀다. 나는 당 일군을 찾아 갔다. “나를 왜 감시하나? 탈북 안할 거다. 감시 시키지 말라”고 강력하게 요구했다.
그 이후로는 보위부 감시원이 집을 떠났고 한동안 감시망도 주춤해 지는 듯 했다. 이때 한국에서 나를 데리러 온 사람이 왔다. 나는 그 사람과 내가 미리 생각해두었던 장소에서 다시 만나기로 했다. 그 사람이 나와 함께 떠나면 분명 동네에 감시하는 눈이 많아 금방 보위부에 알려질 것이기 때문이었다.
나는 그날 저녁 그 사람을 만나러 가면서 가족들에게 “누가 물어 보면 내가 시장에 갔다고 해라. 만약에 내일에도 물어 보면 마찬가지로 시장에 갔다고 해라”라고 입단속을 시켰다.
나를 인도하러 온 사람은 국경경비대에 돈을 주면서 중국에 갔다가 다시 돌아오는 시간까지 약속 하고 나와 함께 국경을 넘었다. 중국에 처음 도착했지만 여전히 불안하고 초조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나는 가능한 빨리 한국영사관으로 가야했다.
국경 근처에서 몇 일간 숨어 지내다가 연길로 가던 중 나는 교통사고를 당했다. 그러나 한시가 급했다. 나는 급한 응급처치만 받고 병원을 나와 선양에 있는 한국총영사관으로 들어갔다. 2007년 1월 16일 드디어 꿈에도 그리던 내 고향 대한민국 인천공항에 도착하여 가족들과 재회하였다.
출처 : 북한인권시민연합 https://kor.nkhumanrights.or.kr/main.htm
11.03 한 탈북 여대생의 감동적인 연세대 졸업기
탈북 청소년 교육기관에 따르면, 대학에 입학한 탈북자 10명 중 1명만이 졸업장을 받는다. 중도에 포기한 이들은 아르바이트나 비정규직을 전전하며 저소득층으로 전락하거나, 노르웨이, 캐나다 등 제3국에 난민으로 귀화한다.
스무 살에 혼자 한국에 온 탈북자 김혜성(28) 씨는 6년간의 고생 끝에 2월 연세대 사학과를 졸업했다. 그의 대학 시절은, 캠퍼스의 낭만과는 거리가 멀었다. 탈북자 청년이 평범한 한국 대학생이 되기 위해 고군분투했던 기록을 공개한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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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24일, 나는 연세대 사학과를 졸업했다. 졸업식장에 앉아 학사모를 한참 어루만졌다. 연세대에 입학하는 순간부터 목표는 오직 ‘졸업’이었다. 남들에게는 자연스러운 과정이 내게는 모두 엄청나게 어려운 관문이었다. 이 졸업장을 받기 위해 얼마나 긴 시간 노력했던가. 그간의 고생이 떠올라 계속 눈물이 났다.
2월 24일 연세대 학위수여식에서. 6년 간 내 목표는 오로지 ‘졸업’이었다.
나는 탈북 새터민이다. 18세 때 혼자 국경을 넘어 2년간 중국, 몽골을 헤매던 끝에 2006년 한국에 들어왔다. 나진 지역에서 사업을 하던 아버지는 “이러다 다 굶어죽겠다. 너라도 살아야지”하며 내 등을 떠밀었다. 그렇게 고향을 떠나온 지 10년이 훌쩍 지났다.
한국에 홀로 왔기 때문에 내 졸업식에 올 가족이 아무도 없었다. 내가 외로울 거라고 생각했는지, 정말 많은 친구가 졸업을 축하해주기 위해 왔다. 학사모를 쓴 나를 보며 마치 자기들 일인 양 기뻐했다. 이 졸업장을 따기 위해 걸린 6년이라는 시간이 헛되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북한 사람이 남한 사회에 적응하는 것은 탈북보다 더 어렵다. 사람마다 일생 쓸 에너지가 한정돼 있다고 하면 탈북자는 남한으로 오는 동안 자신이 가진 에너지를 다 쓴다고 해도 과장이 아니다. 지친 심신을 다스릴 여유도 없이 바로 이 사회의 냉혹함을 견뎌야 한다. 생각보다 높은 사회의 벽을 경험하다보면 나도 모르게 의지를 잃는 경우도 있다. 나도 한국에 온 지 8년이 다 됐지만, 아직도 이 사회에 온전히 적응하지 못했다. 매일매일 또 다른 나의 모습을 발견하면서 그저 살아갈 뿐이다.
아메리카노에 딸기 시럽
한국에 온 후, 처음부터 대학을 가려고 했던 건 아니었다. 아니, 나는 한국에 대해 아는 것이 없었다. 한국에 도착한 지 얼마 안 돼 지인의 소개로 한 도너츠 매장에서 일을 했다. 손님이 “아메리카노에 시럽을 넣어달라”고 주문했다. 나는 아메리카노를 먹어본 적이 없다. 어찌어찌 커피는 만들었는데 손님이 말하는 시럽이 무엇인지 도무지 몰랐다. 나는 찬장을 열어 맨 앞에 놓인 시럽을 커피에 넣었다. 나중에 손님은 사장에게 항의를 했다. 내가 설탕시럽이 아니라 스무디용 딸기시럽을 넣었다는 것이다.
그렇게 3일간 실수를 연발했더니 사장은 내게 10만 원을 쥐여주며 “내일부터 나오지 말라”고 신신당부했다. 나는 깨달았다. 내가 이 나라에서 할 일이 별로 없음을. 그때부터 나는 식당 서빙, 고깃집 불판 닦기 등 눈치와 힘만으로 할 수 있는 아르바이트를 전전했다. 일은 고되고 일당은 적었다.
겉보기에 화려하고 풍요로운 대한민국에서, 나는 가진 것 없고 배운 것 없는 북한 출신일 뿐이었다. 평생 이렇게 ‘아무것도 아닌 사람’으로 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살기 위해 배워야 했고, 대학을 가야 했다. 나는 북한에서 고등학교를 나왔지만, 한국에서 학력이 인정되지 않아 검정고시를 봤다. 북한에서 체계적인 교육을 받은 내가 한국에서는 어떤 평가를 받을지 궁금했다. 나는 별도로 공부를 하지 않고 고교 학력 인정 검정고시를 봤다.
평균 62점. 60점 이상이라는 커트라인을 겨우 통과했다. 영어와 역사는 겨우 과락을 면했고, 국어와 수학 점수는 높았다. 이때 나는 ‘내가 북한에서 배운 것이 모두 쓸모없지는 않구나’하고 안도했다. 대학을 선택해야 하는데, 나는 한국에서 가장 좋은 대학이 어디인지도 몰랐다. 집에서 가까운 대학 3곳에 원서를 냈다. 연세대, 이화여대, 서강대. 그중 연세대에만 합격했다.
농담도 못 알아들은 첫 수업
지금도 연세대 입학 관계자들이 왜 나를 뽑았는지 매우 궁금하다. 당시 내가 쓴 자기소개서를 읽어보면, 나 자신도 무슨 말을 하고 싶었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형편없었다. 그저 운이 좋았다는 말밖에는 할 수 없다. 남한 친구들은 연세대에 오려고 그토록 노력하는데 나는 북한에서 왔다는 이유만으로 이곳에서 공부할 기회를 얻은 것이다. 연세대에 입학한 것은 분명한 특혜다. 하지만 거기서 버티고 졸업하는 것은 온전히 내 몫이었다.
우수한 학생들은 치열하게 경쟁했다. 경쟁에서 살아남는 것은 거의 불가능해보였다. 첫 수업 날, 나는 교수님의 강의 내용을 10%도 이해 못했다. 농담도 못 알아들었다. 평생 강력한 규율 속에 살던 내게, 대학생활이 준 자유는 일종의 폭력과 같이 느껴졌다. 수업을 마치고 나오며 백양로를 걷는데 ‘이곳은 내가 있을 곳이 아니다’라는 생각만 머릿속에 맴돌았다. 연세대 담장은 한없이 높아 보였다.
그렇게 첫 학기는 뭐 하나 제대로 되는 것이 없었다. 수업 내용은 거의 알아듣지 못했고 열등감과 외로움 때문에 친구들과 친하게 지낼 엄두도 못 냈다. 학교 수업 때문에 아르바이트를 할 수 없으니 경제 사정이 안 좋아졌고, 교통비가 없어 강의실에 출석을 못하는 날도 있었다. 결국 나는 학사경고를 받았다. 학사경고를 받으면 국가에서 등록금을 보조해주지 않기에 나는 다음 학기 등록금을 마련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휴학했다.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나는 왜 내가 첫 학기를 실패할 수밖에 없었는지 고민했다. 자신감이 없었기 때문이다. 나는 내가 북한 출신이라는 것에 대해 부끄러워하고 있었다. 내가 쓰는 사투리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이상하게 보는 것 같았고, 그들이 나에게 북한에 대해 물어볼 때마다 매번 같은 대답을 해야 하는 것에 짜증이 났다.
나는 그때부터 ‘남한 사람 되기 프로젝트’에 돌입했다. 북한 억양을 버리기 위해 매일 저녁 볼펜을 입에 물고 신문 사설을 따라 읽었다. 매일 신문 사설을 필사하며 남한식 글쓰기 방식을 익혔다. 또한 나는 남한 친구들과의 공통점을 만들기 위해 그들이 좋아하는 소설을 사서 읽었고, 일본 만화도 열심히 읽었다.
남한 친구들이 자주 하는 게임기와 게임 CD들을 전부 사서 직접 플레이해 보았고, 2000년대 이후 유명한 영화, 드라마를 모두 내려받아 보았다. 이렇게 남한 친구들과 같은 문화적 배경을 얻으려 노력했다. 그리고 같은 탈북자 출신들과 연락을 철저하게 끊었다. 이 사회에서 정착하는 데 도움이 안 된다는 판단에서였다.
그렇게 1년6개월을 준비했다. 경제적인 어려움을 해결하기 위해 일체의 소비를 차단했다. 버는 돈은 전부 저금하고, 용돈도 아껴 매주 1만 원이라도 저금했다. 그렇게 모은 돈으로 내가 살던 임대아파트를 월세에서 전세로 돌렸다. 매월 빠져 나가는 월세만이라도 아끼면 좀 여유로울 것 같았다. 경제적 여유가 없으면 공부는 물론 친구들과의 관계도 어렵고, 결국 꿈을 이루기 힘들다. 나는 자본주의의 힘을 실감했다.
학점 3점을 넘겼지만…
노력 끝에 2010년 가을학기의 등록금을 자비로 냈다. 그리고 1년6개월간 혼자 준비했던 것을 실전에서 사용하기 시작했다. 내 말씨가 변하자 이제 나에게 “어디서 왔어?”라고 묻는 사람이 줄어들었다. 나는 수업시간마다 내 전후좌우에 앉은 모든 학생을 친구로 만들겠다고 생각했다. 먼저 말을 걸었고, 대답할 때도 한껏 긴장해 단어를 선택했다.
그 친구들이 좋아하는 관심사가 있으면 따로 공부를 해가기도 했다. 남한 친구들은 자연스럽게 습득할 수 있는 모든 지식을 나는 학습을 통해 의도적으로 공부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었다. 남한 친구들을 만날 때마다 하도 긴장을 하다보니, 만나고 난 후 등에 식은땀이 흐를 때도 있었다. 그렇게 나는 매일매일 새로운 가면을 쓰고 덧써가며 내가 아닌 남한의 새로운 나로 살아가고 있었다.
친구들에게 북한 사람임을 숨기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들이 나를 만날 때마다 북한 사람임을 느끼지 않도록 하기 위해 최대한 노력했다. 새로 사귄 친구들은 나의 학업에 많은 도움을 주었고 2010년 가을 학기에 4.3 만점에 3.3이라는 학점을 받았다. 그토록 꿈꾸던 학점 3점을 넘은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나였다. 밖에서 완벽한 남한 사람 행세를 하느라 북한 사람인 ‘나’를 잊으려 노력했지만, 쉽지 않았다. 저녁에 집 출입문을 열고 집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부터 나는 북한 사람인 ‘나’를 만났다. 너무 외로웠다. 너무 슬펐고, 집으로 들어오면 하루의 긴장이 풀리면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한번 집에 들어오면 다시 밖으로 나가기 싫었고, 나 스스로에게 이토록 잔인하게 폭력을 행사해야 하는가 싶기도 했다.
그러나 어쩔 수 없었다. 나는 살아야 했고, 그러기 위해서는 이 사회를 배워야 하며, 이 나라 사람들을 이해해야 하며 여기에 나를 조각을 내서라도 끼워 맞출 수밖에 없었다. 그러지 않고서 나는 발전이 없고, 내가 만난 이 사회가 흠 많은 사람을 받아줄 만큼 그렇게 여유롭지도 관대하지도 않았다.
교수님이 준 흰 봉투
나는 북한 사람인데, 북한에서 태어난 것이 죄는 아닌데 왜 이토록 숨기고 살아야 하는가. 수없이 질문했지만 답을 찾을 수 없었다. 그냥 그렇게 하는 것이 맞는 것 같다는 추측만 남았다. 심각한 우울증에 빠졌다. 스스로 너무 비참해졌고, 그런 나를 보는 주변사람들마저 힘들어했다. 너무 혼란스러웠고 매일 그렇게 살다간 더 버틸 수 없을 것 같았다.
내가 북한 사람이라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사실이었다. 뭔가 잘못됐다는 생각으로, 다시 시작한다는 마음가짐으로 다음 학기를 준비했다. 대학에 입학한 이상 졸업은 해야 했다. 목표는 오로지 졸업이었다.
연세대는 ‘채플’이라는 종교 필수 수업을 4학기 동안 들어야 졸업할 수 있다. 나는 그것도 모른 채 3학년이 돼서야 첫 채플 수업을 들었다. 원래 1~2학년용 수업인 ‘채플’을 3학년이 들으려면 학과장의 사인이 필요했다. 학과장실에 내가 채플 수업을 못 들은 이유를 쓴 종이를 들고 찾아갔다. 노크를 하고 들어가 멀뚱멀뚱 서있으니 학과장님이 물었다.
“너 누구야?”
“저 김혜성인데요.”
“김혜성? 그게 누군데.”
“저 사학관데요. 이쪽으로 가서 학과장님 사인 받아오라고 해서 왔는데요.”
자그마한 체구의 학과장님은 안경 너머 반짝 날카로운 눈빛으로 내게 소리쳤다.
“넌 대학 3학년짜리가 자기소개도 할 줄 모르냐. ‘08학번 사학과 누구입니다’라고 해야지.”
나는 그제야 교수님이 가르쳐준 대로 내 소개를 하고 사유서를 내밀었다. 나는 그렇게 자기소개도 할 줄 모르는 상태에서 대학을 다니고 있었던 것이다.
그 후 학과장 하일식 교수님이 전화로 내게 학과장실을 방문하라고 하셨다. 갔더니 교수님이 흰 봉투를 하나 주셨다. 그 속에는 10만 원짜리 수표 12장이 들어 있었다. 하 교수님은 “사학과 교수들이 사비를 모아 어려운 학생을 위한 장학금을 주는데, 너를 너무 늦게 알았다”며 “금액이 적어 미안하다”며 봉투를 내 손에 꼭 쥐여주었다. 겉보기엔 냉정하고 차가운 사회지만, 이 땅에도 좋은 사람들이 있다는 걸 알았다. 흰 봉투에는 따뜻한 온기가 감돌았다.
책 한 장 읽는 데 하루 꼬박
3학년이 돼 전공 공부를 본격적으로 시작하자 공부는 더욱 어려웠다. 학술서적은 왜 그리도 어려운 말만 골라서 쓰는지. 꼭 한국말로 된 외국어를 읽는 느낌이었다. 한번은 사이드의 오리엔탈리즘에 대한 책을 읽다가 책 내용을 내가 아는 한국말로 번역해 써보았다. 이렇게 쉬운 개념을 그토록 어렵게 쓴다는 것도 재주인 것 같았다. 마치 나같이 한국식 외래어에 익숙하지 못한 사람은 책을 못 읽게 하려는 것 아니냐는 삐뚤어진 생각도 들었다.
이렇게 책을 한 권 읽는 데 정말 오랜 시간이 걸렸다. 논문 한 장을 이해하기 위해 10번 이상 읽어봤다. 사학과의 특성상 보고서를 많이 써야 하는데, 전공 글쓰기는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감이 안 왔다. 전공 수업시간에 교수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몰라 꺼벙하게 앉아만 있는 날이 늘어갔다.
또 이러다가는 1학년 1학기 때처럼 될 것 같다는 위기감이 생겼다. 스스로 약속을 했다. 욕심 부리지 말고 수업시간마다 하나만 제대로 배우자. 수업시간에 집중하기 위해 선생님의 얼굴과 동선에 시선을 고정했다. 교수님과 끊임없이 눈을 맞추며 교수님의 말씀을 최대한 받아 적었다. 친구들과 관계에서도 나를 포장하지 않고 진심으로 대하려 했다.
내가 특히 자신 없는 분야가 영어였다. 나뿐 아니라 많은 북한 출신 대학생이 이에 공감할 것이다. 나는 YG(연세글로벌)라는 동아리에 가입했다. 외국인 교환학생과 한국인 재학생을 짝지어주는 동아리다. 나는 이 모임을 통해 많은 외국인을 만났다. 외국인을 자주 만나 대화하다 보니 영어 말하기 실력이 하루가 다르게 향상되는 경험을 했다. 외국인 친구를 집에 초대해 요리도 대접하면서 친분을 쌓았다. 외국인 친구들에게 나는 북한 사람이 아니라 그냥 동양인이었다.
3년간 스스로를 너무 억압했던 나는, 이제 행복해지고 싶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성장하고 발전하기 위해 자신에게 엄격해질 필요는 있지만, 숨 막힐 정도로 나를 학대하는 것은 잘못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학기 중 아르바이트한 돈으로 방학 때 여행을 떠났다. 연세글로벌에서 만난 외국인 친구들은 내가 해외에서 무료로 숙식을 해결하도록 도와줬다.
2013년 프랑스 코르시카 여행 .
동아리에서 만난 프랑스 친구의 집을 방문했을 때다. 프랑스 남부의 작은 시골마을이었다. 한 아주머니는 내가 북한에서 왔다는 얘기를 듣더니 내 손을 잡고 한참 우셨다.
“내 아들이 교환학생으로 브라질에 가 있어. 물론 보고 싶으면 언제든 볼 수 있는데도 걱정되고 가슴이 아파. 근데 너희 어머니 마음은 어떻겠니. 이렇게 어린 딸을 멀리 보내놓고 단 한 번도 볼 수 없으니….”
나도 아주머니를 안고 한참 울었다. 나는 한국에서 사람들에게 밝은 모습만 보여주려고, 북한에서의 추억을 가슴 깊이 묻어뒀다. 어머니란 말만 들어도 가슴이 너무 아파 생각할 엄두도 못 냈다. 아니, 그럴 여유도 없었다. 그런데 인종도 국적도 다른 프랑스인 아주머니가 내 손을 잡고 눈물 흘리며 내 어머니를 걱정해주다니. 나는 이 먼 곳 땅에서 가족을 느꼈다.
여행을 통해 나는 대한민국에서 북한 사람으로 살아가는 데 필요한 자신감을 얻었다. 잘사는 나라든 못사는 나라든, 그곳에는 사람이 있었고 실상 나와 별로 다르지 않았다.
대학생활을 거듭할수록 느낀 것도 비슷했다. 남한 사람들 역시 사람이었다. 친구들은 내 학업이 뒤처지지 않도록 진심으로 도와줬다. 나는 남한 친구들과 경쟁하기를 포기했다. 그들은 모두가 나의 멘토였다. 난 친구가 하는 행동을 유심히 관찰하고, 그들이 쓴 보고서를 빌려 열심히 필사하고 분석했다. 친구가 하는 만큼 나도 노력했다. 그러다보니 조금씩 성적이 올랐다. 조금씩 성장해가는 나에 대해 많은 교수님이 칭찬을 아끼지 않으셨다.
한국을 떠난 탈북자 친구들
도움을 받기만 하던 내가, 누군가에게 도움이 된다는 것은 참 기쁜 일이었다. 나는 어느새 남한 친구들에게 ‘북한 출신’이 아니라 그냥 친구가 됐다. 남한 친구들은 비교적 나이도 많고 경험도 많은 나에게 고민을 자주 털어놓았다. 이성, 진로, 사회 등 다양한 주제로 참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나는 이렇게 내가 이들과 진짜 친구가 되는 과정이야말로 통일이 아닐까라고 생각했다.
남한 친구들의 도움으로, 나 역시 누군가의 고민을 들어줄 여유가 생겼다. 나는 그때부터 북한 사람들과의 모임에도 자주 나가고 그들과도 친구가 되었다. 주변에 마음을 터놓을 수 있는 친구가 여럿 생겼다. 외롭지 않았다. “대한민국에서 대학도 졸업했는데 어떤 일인들 못하겠냐”는 자신감이 생겼다.
나처럼 대학생활을 어려워했던 탈북자 출신 친구 중 다수가 외국으로 떠났다. 영국, 캐나다, 벨기에 등 안 가는 나라가 없을 정도였다. 탈북자 친구들은 사회적 차별을 견디지 못했다. 여기든 다른 나라든 어차피 차별을 받을 거라면 차라리 더 넓은 세상에서 인종차별을 겪는 것이 낫다는 생각이었다.
나 역시 남한에서 산다는 것이 고단했다. 나에게 외국으로 가자고 제안하는 사람도 많았다. 하지만 갈 수 없었다. 누군가는 말한다. 언어가 통하는 한국에서도 적응을 못하는데 외국에서는 적응하겠느냐고. 그 말도 맞다. 하지만 내가 한국에서 얻은 기회를 포기할 수 없었다.
한국은 내게 많은 기회를 줬다. 그간의 내 노력이 아까웠다. 내가 외국으로 간다고 한들 한국에서의 상황보다 더 나을 것이라는 보장도 없었다. 또다시 처음부터 시작해야 하는데 그게 더 힘들 것 같다는 판단에서였다. 나는 또다시, 이 사회의 벽을 넘고 싶었다.
대학이라는 울타리를 벗어나 이젠 사회인이다. 그간은 친구, 학교, 교수님의 도움을 받았다면 이제 홀로 해결해야 한다. 대학 졸업을 앞두고 8개월간 쉬지 않고 구직활동을 했다. 대기업, 중견기업, 중소기업 가릴 것 없이 서류 지원을 했다. 하지만 단 한 건의 면접 기회조차 얻지 못했다.
또다시 좌절에 빠질 뻔했다. 나는 이 사회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는가. 대학을 다니는 동안 그토록 많은 지원을 받았으니 이제는 사회를 위해 내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 이 때문에 나는 지금도 쉬지 않고 구직활동 중이다.
많은 북한 출신 대학생이 졸업하고도 취직할 기회를 얻지 못한다. 취업이 어려운 건 남한 출신 친구들도 마찬가지다. 남한 친구들이 가진 스펙과 내 스펙을 비교해보면 사실 내 것은 참 보잘것없다. 자본주의 사회는 어디까지나 결과 중심의 사회이기 때문에 내 좌절은 당연하다는 생각도 든다. 하지만 나는 남한 친구들과 출발선이 달랐기 때문에 대학 졸업 과정에 정말 많은 노력이 필요했다.
사실 많은 기업이 탈북자 채용을 꺼린다. 북한 출신들이 취직 후 중도 포기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탈북자에 대한 인식이 좋지 않다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용기를 잃지 않고 도전할 것이다. 일자리의 소중함을 알기에, 기회가 닿는다면 끝까지 잡고 열심히 노력해서 남한의 일원이 될 것이다. 그토록 높아 보였던 대학 문턱을 넘는 동안 받은 도움을, 사회에 돌려주고 싶다.
김혜성 | 연세대 사학과 졸업 / 출처 : 신동아 2014년 4월호
11.03 “김정일, 잃어버린 내 젊음을 돌려다오”
이번에 소개해 드리는 수기는 가장 불운한 케이스에 포함된다고 봅니다. 솔직히 저도 1990년대 북한에서 살았고, 원산도 1990년대 중후반 2~3차례 찾았지만, 이 정도로 어렇게 사는 사람들이 있는 줄 몰랐습니다. 제 주변에는 그나마 잘 사는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 수기의 저자가 쓴 글이 거짓말이라고는 꼬물만치 생각하지 않습니다. 눈으로는 엄청난 방랑자들과 꽃제비들을 보았고, 시신들을 목격했기 때문입니다. 그들 모두 참혹한 체험을 겪었을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죠.
중국에서도 13년 동안 머무르며 이 여성은 다른 탈북여성들에 비해 엄청난 고난을 겪었습니다. 위의 여학생처럼 한국에 가족이 먼저 와서 데려오는 경우 가장 쉽게 고초없이 올 수 있지만, 그렇지 않으면 쉽지 않습니다. 이때 중요한 것이 중국에서 어떤 사람을 만나느냐인데, 이 여성은 좋은 사람은 거의 만나지 못한 것으로 보입니다.
중국 조선족들에 대해 말한다면 좋은 사람이 대다수입니다. 그러나 많은 탈북자들은 불행하게도 이런 사람들을 만나지 못하기 일쑤입니다. 대다수 조선족들은 탈북자에 대해 무관심하지만, 민족의 불행을 악용해 돈을 벌려는 소수의 악독한 인간들이 북중 국경 전역에 거미줄을 쳐놓고 악착같이 강을 넘는 탈북여성들을 사냥해 팔아넘기기 때문입니다.
고난의 행군 시기를 포함해 북한 사람들의 삶에 대해 아는 듯이 함부로 단정하는 몇몇 한국 사람들을 보면 화가 납니다. “최악의 정보통제로 북한에서 살았던 나조차도 미처 다 모르고 사는데, 네가 어떻게 알어”라고 반박하고 싶습니다.
“김정일, 내 청춘을 돌려다오”라고 제가 달았습니다. 2011년 한국에 입국해 사는 그녀의 현재 심정이 그럴 것이라 생각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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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3년 10월, 나는 강원도 문산시 산재동의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1999년 1월 29일 37살의 나이로 두만강을 건너 중국으로 탈출한 후, 중국에서 12년간의 힘겨운 생활을 끝으로 2011년 4월 11일, 한 단체의 도움으로 한국땅을 밟았다.
내 나이 49살에야 자유의 땅에 들어와 감사와 행복감을 느끼면서도 지난 날의 고통을 잊을 수가 없다. 나의 하나원 동기 중 ○○○을 볼 적마다 그 분은 여든 살의 고령에도 희망의 대한민국의 품에 안겼는데, 나의 아버지와 어머니, 작은 오빠와 올케, 어린 조카들, 그리고 나의 귀여운 아기는 왜 고난의 시기를 넘기지 못하고 먼저 저 세상으로 가게 되었을까를 생각하면서 쓰리고 아픈 마음을 달랠 길이 없다. 나의 지난 역경의 날들과 탈북 동기에 대해 이곳에 기록으로 남기고자 한다.
내가 태어나기 전, 나의 아버지는 강원도 문산시 산재동의 당 부비서를 거쳐 강원도 당 책임비서로 공직에서 높은 자리에 있었다. 하지만 부유했던 작은 아버지가 억울한 일로 추방당하면서 아버지를 비롯한 형제들도 모두 천직되어, 내가 태어날 당시에는 일가친척의 삶의 기반이 모두 무너진 상황이었다.
집안이 갑자기 가난해지게 되자 어머니는 울화병으로 앓아 누우시고, 아버지도 밖으로 나돌며 여자들을 만나고 다니며 타락하셨다. 내가 태어날 당시 아버지는 수입이 일정치 않은 막노동을 하시며 이리저리 생계를 꾸리고 계셨다. 나는 1963년 가을, 기울어지고 암울한 이 집안의 막내로 태어났다. 내가 태어날 당시 아버지는 47세, 어머니께서는 42세이셨다.
아버지는 15년 동안이나 병중에 계시며 일어나 앉지도 못하고 누워만 지내셨다. 결국 1992년 3월 31일 병중에 돌아가셨다. 나는 스물여섯에 첫 번째 결혼을 하고 곧 이혼으로 친정에 돌아와 살다가 아버지께서 돌아가신 후 식량난이 점차 심해지자, 친정에서 지내는 것도 어려워져 재혼을 하여 일단 친정살이를 면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90년대 북한 사회에서의 식량난은 해가 갈수록 점점 더 악화되어갔다. 당시 북한에서는 강연회와 인민 반상회의를 진행할 때마다 인민들에게 선전하기를, 이런 심각한 식량난의 위기가 마치 남조선 괴뢰도당과 미제침략자들, 그리고 일제야만의 경제적 봉쇄로 인해 일어난 것인 듯 책임을 돌리고 있었다. 당시 순진하고 천진하던 북한인민들은 이 말들을 곧이곧대로 믿었고 모든 원한을 남한과 미제로 흘려보냈다.
인민들은 굶으면서도 이 고난의 시기만 지나면 모두가 잘사는 날이 오는 줄만 알고 허리띠를 졸라매며 굳게 이겨내자고 다짐하고 있었다. 외부 세계에 대한 소식이 단절된 채 사는 인민들은 당국의 이런저런 선전과 조치들에 속고 또 속으며 배고픈 생활에 나날이 지쳐가고 있었고, 시간이 흐를수록 식량난은 가혹해져만 갔다.
식량난이 해마다 가중되던 중, 설상가상으로 1994년 7월 8일 김일성이 갑작스럽게 삼장마비로 사망하였다. 북한인민들 모두가 김일성을 하나님처럼 경배하면서 모든 것을 그에게 의탁하고 기대하며 살아오고 있었는데, 하루아침에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린 것이었다. 당시 인민들이 받은 충격은 자유세계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컸다.
외부소식과 완전히 단절된 채 북한 인민들은 오직 김일성에 대한 찬양과 선전만을 접하며 살아왔었고, 김일성 사망 이후 삶에 대한 두려움과 아버지를 잃은 슬픔으로 그의 죽음을 진심으로 애도하였다. 순진하고 진실한 마음으로 나라를 위해 충성을 다하던 많은 인민들이 강원도 원산시 개선광장 내 김일성 동상 앞에 꽃다발을 증정하고 묵도하던 도중, 땅을 치고 통곡을 하다가 심장마비로 죽어 나가기도 하였다.
‘김일성이 죽었어도 산 사람들은 각자의 자식들을 생각해서 살아야 한다.’며 순진한 인민들은 아픈 마음을 추스렸다. 그런 와중에 둘째 오빠도 그의 살아생전 소원이었던 새 집에서 남부럽지 않게 잘 살아 보겠다며 자기노력과 뼈심(뼈힘. 몹시 힘겹게 쓰이는 힘이란 뜻의 북한말)으로 집을 짓기 시작하였다.
1995년 초부터 벽돌을 손으로 찍어서 축조를 해가며 어머니와 둘째 오빠, 올케 셋이서 큰 집을 지어놓았다. 비록 벽지와 장판을 바르지도 못한 채 살고 있었으나, 50Kg짜리 돼지와 오리를 함께 기르며 400-500Kg의 식량을 밑천으로 삼아 만족을 느끼고 살아가던 때였다. 배부른 밥은 먹지 못했어도 앞으로 잘 살 수 있을 것이란 기대감에, 집을 지어놓은 것만으로도 우리 친정 가족들은 행복해하고 있었다.
그런데 1995년 7월 29일 새벽 2~4시 사이, 하늘이 깨질듯한 번개와 사정없는 소낙비가 내리던 그 날 밤, 그날의 날씨처럼 하늘이 무너지는 일이 벌어졌다. 우리 가족의 미래였던 돼지와 오리, 식량이란 식량 전부를 깡그리 도적질 당하였던 것이다! 그때부터 어머니와 둘째 오빠, 올케 그리고 3명의 어린 조카들은 아무것도 먹지 못한 채 굶주림에 시달리게 되었다.
김일성이 죽은 이후, 식량공급체계로부터 시작되어 모든 생필품 등 공급체계가 완전히 마비되어갔다. 간혹 외국에서 식량을 실어왔다는 소문만 무성할 뿐, 내어준다던 밀쌀이나 알락미, 강냉이를 비롯하여 1-2Kg의 식량을 받기도 너무도 힘든 때였다. 일체 공급체계로 살아가던 북한인민들에게 갑자기 모든 것이 차단되고 마비된 생활이 이어지게 되자, 모든 이들이 가난에 허덕이며 고난을 겪게 되었다. 우리 친정 가족 또한 예외일 수 없었다.
극심한 굶주림에 시달리던 우리 친정 가족들은 사경을 헤맬 지경까지 이르게 되었다. 가족 중 올케가 가장 먼저 세상을 떠났다. 1996년 5월 3일이었다. 다음 해인 1997년 초, 어머니께서 돌아가셨고, 곧이어 5월 중순에 둘째 오빠가 세상을 떠났다. 이렇듯 담담하게 ‘굶어 죽었다’고 서술하기에 그 굶주림의 고통은 너무나 컸다.
둘째 오빠가 죽기 직전, 오빠는 세 자녀에게 유언을 남겼다. 그것은 생존에 대한 명령이었다. “아버지는 이만큼 살았으니 죽어도 되지만, 어린 너희들이 태어나서 이 세상을 살아보지도 못하고 죽으면 얼마나 불행하냐. 꼭 살아라. 꼭 살아서 이 땅에 생존해라. 집에 있으면 죽는다. 돌아다니면서라도, 밥을 빌어먹으면서라도 죽지 말고 살아남아야만 다시 좋은 날이 오는 것을 볼 수 있다. 아버지는 이제 틀렸다. 나는 가지만 너희들은 꼭 살아남아라.”
둘째 오빠는 큰오빠에게 아이들을 맡기고 부어 오른 몸으로 숨을 거두었다. 큰오빠는 둘째 오빠가 새로 지은 집을 눅은(헐) 값으로 팔고, 3명의 조카들을 거두었다. 하지만 큰오빠는 본인의 자식 4명 중 군대에 보낸 첫째를 제외하고 남은 자식 3명과 올케가 있었기 때문에, 죽은 동생의 자식 3명까지 총 8명의 대가족을 부양해야 했다. 이런 대가족이 90년대 고난의 삶을 유지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었다.
결국 둘째 오빠의 아이들은 큰오빠의 집에서 뛰쳐나와 방랑생활을 시작하였다. 그들이 뿔뿔이 흩어져 어디에 살고 있는지 찾을 길도 없었다. 나 또한 두 번의 이혼 후, 장사 등으로 생계를 연명하면서 남은 돈 300원을 수중에 쥐고 원산시 신흥동 장마당을 거닐고 있을 때, 죽은 오빠의 자식인 첫째 조카아이와 우연히 마주치게 되었다.
신발도 제대로 신지 못한 채, 상상 할 수도 없는 몰골의 꽃제비가 되어있었다. 며칠을 굶었는지 걸을 힘조차 없어 간신히 몸을 끌며 맨발로 서있는 조카의 모습을 보는 순간, 나는 미어지는 아픔에 눈물을 왈칵 쏟았다. 조카도 나를 보고 아줌마라 부르며 앞으로 다가오지 못한 채로 우뚝 서서 소리 없는 눈물만 줄줄 흘리고 있었다.
내 사정을 생각하기에 앞서 이 아이를 살려야 한다는 생각으로, 조카아이가 먹고 싶다는 대로 100원어치를 사 먹이고, 신발과 옷을 사 입혔다. 수중에 있던 300원을 그 자리에서 모두 다 써버린 것이다. 우리는 할 수 없이 큰오빠 집으로 도움을 청하러 가게 되었다.
결혼과 이혼
나의 첫 결혼은 금세 이혼으로 끝났다. 그는 부잣집 아들이었으나 도벽이 있었다. 남편의 도둑질이 문제가 되자, 큰오빠가 찾아와 도벽 있는 사람과 절대 같이 살게 할 수 없다며 이혼을 시켰다. 시댁형편이 친정보다 훨씬 나았기 때문에 아이는 그 집에 두고 나왔다.
아이와 헤어지는 것이 너무도 가슴 아팠지만 나로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나의 소원은 통일이 되고 죽기 전에 생이별 하였던 딸을 한 번이라도 만나보는 것이다. 당시 시댁이 부잣집이었으니 아마 좋은 곳에서 잘 자라서 지금쯤 20대의 어여쁜 처녀가 되어 있을 것이다.
이렇듯 친정의 성화에 못 이겨 이혼을 한 후 다시 친정으로 돌아왔지만, 마음이 결코 편하지 않았다. 집에는 이미 오빠와 올케, 조카들이 함께 살고 있어서 내 집이란 생각이 들지 않았고, 내가 이혼할 당시 식량난이 심해져 더 이상 친정신세를 질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이런 와중에 친구 어머니의 소개로 한 남자를 만나게 되었다. 그 남자 역시 이혼한 사람이었지만 대학을 두 군데나 졸업한 교원으로 겉보기에 매우 점잖은 사람 같았다. 나는 하루빨리 친정에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에 그를 몇 번 만나본 후 덥석 재혼을 하기로 결심하였다. 이제 재혼하여 행복하게 살 수 있겠다, 란 생각에 한껏 들떴고 나의 여성스러운 기질을 잘 살려 가정을 아끼며 열심히 살아야겠다고 다짐했다.
이렇게 새로운 결혼생활에 대한 기대는 컸으나 결혼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남편은 나를 괴롭히기 시작했다. 재혼 전에는 이런 괴상한 성격을 전혀 알지 못했지만, 알고 보니 술만 마시면 여자를 학대하고 괴롭히는 성격 이상이 있었다. 이전에는 그 남자의 이혼사유를 알지 못하였는데 아마 이런 이유로 이혼했을 것이다.
술을 마시면 다른 남자가 있다는 생트집을 잡아 옷을 모두 벗겨 나의 알몸을 요리조리 꼬집어댔다. 때리는 것이 아니라 꼬집어 대는데 내가 조금이라도 반항을 하면 크게 때릴 듯이 협박을 하면서 꼬집은 탓에 온몸에 시퍼렇게 멍이 들었다. 때리는 것보다 오히려 더 폭력적이고 가학적인 사람이었다.
처음에는 매 맞지 않으려고 가만히 있었으나 더 이상 이렇게 살 수는 없었다. 비록 평소에는 점잖은 사람이었고 술이 깨면 이전에 한 일에 대해 사죄를 하며 다시는 안 그러겠다고 다짐을 했지만, 그 때뿐이었다. 나는 더 이상 이 남자와 살 수 없어 또다시 이혼을 하게 되었다.
아직 돌도 안 된 어린 딸을 데리고 동거살이(셋방살이)를 하며 장사를 시작하였다. 하지만 갓난아이를 데리고 장사를 한다는 것이 여간 힘든 게 아니었다. 장사는 말려들어 가고, 아이와 둘이서 하루 벌어먹고 살아가기도 어려운 형편에, 집세 내는 것은 생각하기도 어려웠다. 게다가 여 맹위원장이요, 동지도원이요, 하는 사람들이 찾아와 왜 직장을 다니지 않고 하지 말라는 장사를 하냐며 장사밑천을 빼앗아 가곤 하였다.
그렇지 않아도 생활하기가 어려운데 매나니(괜히) 건집(트집)을 걸어서 장사를 하려고 하면 밑천까지 깡그리 빼앗아갔다. 아이에게 알락미조차 먹일 수 없는 형편에 죽을 쑤어 먹이려 해도 울면서 입 밖으로 도로 내밀며 받아먹질 않았다. 워낙 맥이 없어 하기에 어르고 달래면서 죽을 도로 떠먹이면, 그 어린 것이 서러운 울음소리와 함께 눈물을 줄줄 흘리며 도리도리 고개를 젓곤 하였다.
이러다가는 아이가 갑자기 죽을 수도 있겠다는 두려움이 엄습해오자, 내가 거두지 못할 바에야 차라리 잘사는 집에 보내어 살게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군관에게 시집간 동창생에게 부탁하여 그 동창의 소개로 평양에 잘사는 한 군관의 집으로 아이를 떠나보냈다. 생때같은 딸이 떠나는 모습을 차마 볼 수가 없었다.
첫째 남편의 도벽과 두 번째 남편의 학대로 두 번의 결혼생활은 모두 파탄 나게 되었다. 내 의지와는 별개로 남자들의 결함을 알지 못한 채 결혼하고, 고생하고, 이혼하는 것은 과연 누구의 잘못일까 싶었지만, 그저 남자 복이 없는 것이 나의 운명이라는 생각을 하였다.
당시 90년대의 지독한 식량난으로 많은 사람들이 굶어 죽어가고 있었다. 이미 우리 아버지와 어머니도 모두 돌아가시고 둘째오빠 내외도 굶어죽게 되자 갈 곳이 없었다. 수중 몇 푼의 돈으로 여기저기서 장사를 해가며 연명해 보았지만, 나는 이 기근 속에서 언제 죽을지 모르는 파리 목숨과 같았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만났던 세 번째 남자는 살아남기 위해 할 수 없이 만난 사람이었다.
죽은 작은오빠의 세 조카들 중 둘은 어디로 갔는지 생사조차 모르는 상황에서, 장마당에서 우연히 꽃제비가 된 큰 조카를 만나게 되었다. 그 아이를 데리고 큰오빠를 찾아가 작은오빠 집을 팔고 남은 돈의 일부(2,000원 정도)를 달라고 하였지만, 나뿐만 아니라 조카에게도 살아갈 밑천을 조금도 나눠주지 않았다. 큰오빠 입장에서는 두 번이나 이혼한 나를 좋게 봐줄리 없었고, 오히려 갈 곳이 없는 나를 이래저래 챙기느라 친정의 가세가 더 기울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무엇보다 그 때는 사회적으로 식량이 너무나 부족한 시기였다. 가족이라도 서로 챙겨줄 형편이 못 되었고, 오히려 가족끼리도 서로 잡아먹을 수밖에 없는 흉흉한 시절이었다. 돈도 없고 집도 없었던 나와 조카는 말 그대로 생존을 위한 삶을 살 수밖에 없었다. 여자가 몸을 팔아 돈을 버는 것을 잘 알아듣지 못했던 조카에게 ‘혹시 굶어죽을 상황이 되면, 네 몸을 팔아서라도 살 길을 찾아라.’고 가르쳐주었다.
나 역시 지나가다 집이라도 한 칸 있었던 남자를 따라서 살게 된 것이 세 번째 남자와의 인연이었다. 길거리에서 굶어죽지 않으려면, 집이라도 있는 남자가 내게 손을 내밀 때 그저 그 손을 잡을 수밖에 없었다. 외모나 성격, 직업 등 남자들에게 기대하며 신랑감으로 재던 그 어떤 조건들도 상대방에게 기대할 수 없었던 것이 당시 식량난 중의 내 상황이었다. 단 하루, 오늘의 거처와 먹을 끼니가 해결될 수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그 손은 나에게 생존의 기회였던 것이다. 90년대의 식량난은 이토록 절박했다.
남자를 따라 간 집에는 제대로 된 이부자리조차 없었다. 그저 솜 같은 것이 둘둘 말려있어서 한기를 피할 수 있을 뿐이었다. 둘이서 국수장사를 시작한 후 임신을 하게 되었지만, 하루 종일 제대로 못 먹으며 시장바닥에 앉아 국수를 팔다보니 몸을 추스릴 시간이 없었다.
하루의 일이 임산부가 감당할 수 있는 양이 아니었고, 매일 추운 길가에 앉아 있는 것 또한 몸에 안 좋았던지 아이를 낳자마자 보름도 지나지 않아 죽었다. 죽은 사내아이를 바라보는 나의 절망은 너무도 커서, 더 이상 조선 땅에서 숨을 쉬고 살 수 없게 느껴졌다. 그리고 개미만큼의 미련도 남아있지 않은 이 땅을 버리기로 결심하였다. 적어도 중국에서는 숨을 쉬고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식량난 중 북한 원산 지역의 상황
나는 아이를 떠나보내고 술을 마시며 눈물 속에서 아픈 마음을 달래고 있었다. 다 굶어 죽어가는 상황에서 달리 어쩔 방법이 없었다고 위로해주던 친구와 함께, 마실 줄도 모르는 술을 연거푸 마셔댔다. 정신은 또렷한데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게 되자 이런 생각만 줄기차게 맴돌았다.
‘더는 이 세상을 살고 싶지 않아. 그냥 이대로 잠들어 버리고 싶다…’ 친구는 지금 거리에 시체들이 널려 있는데 이렇게 살아있는 것만으로도 긍지를 가져야 한다고 내 손을 붙잡았다. 어떻게든 살아갈 방법을 찾으라고 얼마 가량 밑천을 대주었던 고마운 동무 덕분에 나는 힘을 얻어 다시 일어날 수 있었다.
원산의 거리에는 시체들이 드문드문 널려져 있었다. 죽은 지 3일이 지나도록 장사 지내주는 사람이 없어 길에서 썩어가는 시체들에는 악취와 함께 파리와 구더기 떼가 들끓었다. 국가에서는 그런 시체들을 한 차로 실어가서 한데 묻어버렸다. 수많은 인생이 굶주림 속에 속절없이 죽어가고 있었다.
살아있는 사람들도 오랜 굶주림으로 너무나 기진맥진한 상태였다. 다음엔 내 차례라며, 지금은 숨이 붙어있으나 며칠 후에는 우리도 이 신세를 면치 못할 것이라는 이야기를 서로가 공공연히 주고받았다. 시체를 나르고 구덩이 파는 일을 하면 술 한 잔에 밥 한 덩이라도 얻어먹을 수 있었기 때문에, 마지막까지 안간힘을 다해 구덩이 파는 일을 하며 술 한 잔과 음식을 얻어먹고 죽어가는 게 불쌍한 인민들이었다.
수많은 인민은 빌어먹는 처지로 전락하였고 동냥하러 다니는 사람들은 늘어만 갔다. 그중에 꿰맨 군복을 입은 총각들이 허약한 몸으로 굶어 죽어있는 것을 여러 명 보았다. 당시에는 굶주린 탈영병들을 만나기가 쉬웠다. 어느 날 하루는 함흥이 고향이라던 21살의 어여쁜 처녀 아이가 빨간 완장을 달고 군복을 입은 채 국수를 팔던 내게 왔었다. 국수를 사 먹으며 하는 말이 엄마 아빠가 굶어 죽고 남동생도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으며, 더는 배고픔을 견딜 수가 없어 부대를 탈출했다고 이야기하였다. 그 여자아이는 스무날 동안 원산역전을 맴돌더니 완전히 거지가 된 몸으로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원산역전을 옆으로 마주 보던 건물의 A층 2호에는 아버지, 어머니, 아들, 딸 이렇게 네 식구가 살고 있었다. 굶주림이 극심한 난리 통에 어머니는 먼저 죽었고, 딸이 음식장사로 간신히 가족의 생계를 이어가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딸이 장사하던 중 안전원에게 장사밑천을 깡그리 빼앗기는 일이 생겼다.
굶주리던 남동생이 들어와 오늘은 어째서 먹을 것을 하나도 못 벌어 왔느냐고 묻자 누나는 장사밑천을 빼앗긴 사정을 이야기하였다. 순간 동생은 치미는 분노에 악이 받쳐 누나의 머리를 내리쳤는데 누나는 그대로 숨져버렸다. 그다음에 벌어진 끔찍한 일은, 동생이 누나의 인육을 먹은 이야기다. 굶주림에 지칠 대로 지쳐있던 남동생은 이래도 죽고 저래도 죽겠으니 먹고라도 죽자는 심정으로 죽은 누나의 젖가슴과 뱃살을 도려내 시장에 내다 팔았다.
그걸로 알락미 2kg을 샀고, 시체의 포를 떠서 고기를 베어내어 고기반찬과 밥을 지어 저녁 식사를 내었다. 저녁상을 보고 깜짝 놀란 아버지는 이런 밥과 반찬이 어쩐 일인가 물으니, 누나가 장사가 잘돼서 이렇게 먹을 것을 싸놓고 큰 장사를 하러 떠났다며 둘러댔다. 그날, 아버지와 아들은 허기진 배를 두둑이 채울 수 있었다.
며칠이 지난 후, 아들은 남은 고기를 팔러 장마당에 나갔는데 전에 고기를 사갔던 할머니가 다시 찾아왔다. 총각이 판 돼지고기가 매우 맛있었다며 다시 고기를 사려고 찾아온 것이었다. 할머니는 고기를 뒤적거리다 문득 사람의 배꼽형태를 보고 소스라치게 놀라, 이게 도대체 무엇이냐고 물었다. 순간 너무도 당황했던 아들은 남은 고기를 다 팔지 못하고 식량도 구하지 못한 채 집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아무 것도 구하지 못한 아들은 할 수 없이 밥이나 반찬 없이 고기만을 넣어 아버지와 함께 먹을 죽을 끓여 놓았다. 허약한 몸 때문에 비위가 약해져 고기만 먹기 어려웠던 아버지는 식탁을 보고 이상한 느낌이 들어 아들에게 사정을 물었더니, 아들은 그제야 모든 일을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말인즉슨, 아무래도 시간이 지나면 우리가 다 굶어 죽게 될 것인데 한 끼라도 배불리 먹어보고 죽자는 생각으로 죽은 누나의 고기를 내다 팔아 쌀을 구했다는 것이었다.
이 말을 듣고 참을 수 없이 분노한 아버지는 그 즉시 아들을 내리쳤다. 워낙 허약했던 아들은 그 자리에서 맥없이 숨져버렸고, 아버지는 안전부에 잡혀가 그 집은 텅텅 비게 되었다. 단란했던 네 식구의 비극은 이렇게 끝이 났고, 이 소문은 온 동네에 퍼져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또 원산시 원석 동에서는 아버지가 굶주림에 미쳐 7살 난 딸을 잡아먹는 사건이 있었다. 아이 아버지는 아이를 먹은 후, 아이 머리를 문 앞마당에 놓고 쓰레기통에 아이의 손이 보이는 채로 꽂아 두고는 허허 웃으며 “내가 먹었어. 내가 먹었어.”라고 되풀이하였다. 그가 정신이 나가 있는 것을 본 안전부에서는 그를 잡아갔고, 동네 사람들은 원산시 검찰소 검찰관들이 사건 현장 사진을 이리저리 찍어가는 모습을 인산인해를 이루며 구경하였다. 나는 지금도 그 집을 찾을 수 있다.
이렇게 북한 사람들이 짐승보다도 못하게 속절없이 굶어 죽어가는 것을 보면서, 인민들의 눈에는 설움이 가득 찼다. 나 역시 너무나 서러웠다. 이러한 상황에서 말을 하고 싶어도 할 수 없고 말 한마디 잘못하면 어디론가 잡혀가 생사도 모르게 되는 이런 북한 땅에서 인민들의 울분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커져만 갔다.
목숨을 유지하기 위해 아무런 의견도 낼 수 없으며 무조건 참으며 살아갈 수밖에 없는 불쌍하고 처참한 인민들의 삶, 이것이 북한이었다. 어떻게 해서든 장사 등을 하며 살아갈 궁리를 모색하면, 안전원이나 노동검찰대가 밑천을 깡그리 빼앗아 가기 일쑤였기 때문에 이러한 독재와 극심한 배고픔 속에서 더 이상은 견딜 수 없었다.
이래도 죽고 저래도 죽을 상황이었던 나는 북한을 떠나기로 마음먹었다. 또 함경북도 국경지대 농촌으로 시집가 살고 있던 언니네에서 낳았던 아들이 보름 만에 죽자, 더는 이 땅에서는 숨을 쉬고 살 수가 없다는 생각뿐이었다. 과거, 첫 번째 결혼에서 난 돌도 안 된 딸아이와 생이별했던 아픔에 이렇게 아들까지 잃자 그 슬픔과 고통은 배가 된 것이다.
언니네가 국경지대에 살았기 때문에 중국으로 가는 루트를 잘 알고 있었다. 언니가 비용을 대주었고, 국경지대의 다른 사람 집에 15일 정도를 머무르며 도강할 기회를 엿보았다. 드디어 1999년 1월 29일, 이 땅에 아무런 미련도 남지 않은 나와 남편은 드디어 두만강을 건너 북한을 떠나게 되었다.
중국에서의 삶
우리는 두만강을 건너 중국에 ‘서문여관’이라는 곳으로 갔다. 내가 임신해 있는 동안 남편이 그곳에서 묵은 적이 있었기 때문에 여관주인과 안면이 있었다. 당시 우리는 수중에 중국 돈 10원이 있었을 뿐, 완전 빈털터리나 다름없었다. 갈 곳이 마땅치 않았고 다른 곳은 말도 통하지 않으니 조선족이 운영하는 이 여관을 무작정 찾아갔던 것이다. 여관주인은 우리가 돈이 있는 줄 알고 받아주었다.
대책도 없이 여관에 머무는 동안 공안에 발각되어 북송될 처지에 놓인 적이 있었다. 다행히 남편의 친척이 중국 상문시의 공안부 국장이어서 우리의 뒤를 봐주어 풀려날 수 있었다. 북으로 후송되는 탈북자 일행 가운데 공안은 나와 남편 둘만 두만강가에 몰래 풀어주었다. 같은 공안끼리 의리를 지키느라 그리한 것이었다. 그것은 분명 특별대우였다.
그대로 북송되어 우리에게 일어났을 일은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 다행히 한 번의 북송 위기는 넘겼으나 또다시 잡히면 이번에는 그대로 북송될 처지였다. 당연히 북송 위기에 처한 적 있던 그 여관이 안전한 곳이 아니었음에도, 갈 곳이 없던 우리에게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여관장은 다시 찾아온 우리를 여관이 아닌 자기 살림집으로 데리고 가 일주일간을 숨겨주었다. 그 집에 있는 동안 우리는 라면과 김치만 먹었는데, 그 음식들은 매웠지만 정말 맛있었다. 라면을 먹으면서 너무 매워 얼굴이 빨개져 가면서도, 우리 둘은 후후 불어가며 맛있게 먹었다. 세상에 이렇게 맛있는 것이 있나 싶을 정도였다.
그렇게 일주일을 지내는 동안, 여관주인과 남편은 중국인 남자에게 팔려가는 수밖에 없다며 자꾸 나를 꾀었다. 우리가 무일푼이니 그 방법 외에는 달리 빠져나가는 수가 없다는 말이었다. 나더러 팔려갔다가 다시 도망쳐 나오라고 했지만, 중국말도 모르는 내가 중국의 내지 깡촌으로 팔려가 이곳으로 다시 돌아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것을 그들도, 나도 모두 잘 알고 있었다.
여관 밖으로 나가 잡히면 북송될 처지였고 그렇다고 무한정 여관주인집에 신세를 지고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모든 일이 이미 정해진 것 마냥, 나는 중국인 브로커에게 3,000원에 팔리고 여관집 주인이 2,000원, 남편이 1,000원을 나누어 가졌다. 내가 받은 돈은 고작 100원이었다. 나 역시 이러한 거래를 이미 다 알고 있었지만 달리 방도가 없었다. 그야말로 눈 뜨고 당하는 셈이었다.
그리하여 나는 어느 시골의 중국 남자에게 팔려가게 되었다. 남편에게 그가 받은 1,000원 중 500원을 우리가 북한을 탈출하는 데 도움을 준 북한의 언니에게 보내주라고 부탁하였으나, 후에 알아보니 언니에게 돈을 보내지 않은 채 입을 닦았다. 그때나 지금이나 그 점에 대해서는 괘씸하다는 생각뿐이다. 후에 그와 내가 모두 한국에 들어왔으나, 아예 연락하지 않는다.
탈북 여성에 대한 인신매매의 메커니즘은 이러하다. 국경지대에서 나를 3,000원에 사간 브로커는 중국 농촌의 남자에게 6,000원에 되팔았다. 국경지대에서 북한사람을 사서 내지로 이동시켜 중국남자에게 넘겨주는 일은 브로커들에게도 큰 위험을 감수하는 일이다.
중국 내 북한여자를 파는 일은 매우 위험한 일이기 때문에, 실제 여자를 사가는 사람들에게 두 배 넘는 이문을 넘겨 되팔게 되는 것이다. 20대 젊은 여자들은 5,000원에 팔려가 10,000원에 되팔리고, 그 중 인물이 예쁘면 더 비싸게 팔리는 실정이다. 친척들이 중국에 있거나 거처가 있지 않은 한, 북한에서 무일푼으로 도강한 여자들은 무조건 제 몸을 뜯기지 않고서는 살 수가 없다. 거의 모두 팔려간다고 보면 된다. 중국의 조선족 사람들이 다 중국 사람들에게 팔아먹는 것이다.
중국 농촌에는 여자들이 부족하고 노총각들이 많아서 조선 여자들을 사가려는 수요가 많다. 그래서 중국의 시골이나 농촌 곳곳에는 북한에서 팔려온 여자들이 많다. 그들은 중국에 살다가도 북한 여자임이 알려지면 공안에 잡혀 북송되는 위기에 항상 노출되어 있다.
나는 중국 농촌으로 팔려간 지 3개월도 지나지 않아 세 번이나 도망가려다 매번 붙잡혔다. 세 번째 탈출 시도 때는 중국 남자에게 붙잡혀 매를 맞았는데, 맞던 중 발길에 차여 꼬리뼈를 정통으로 맞았다. 순간적으로 온몸에 마비가 와 비명조차 나오지 않았고 그대로 기절하였다.
정신은 말짱한데 이상하게 몸을 움직일 수 없었고, 말도 한마디 나오지 않는 상태로 10여 분 정도를 누워있었다. 온몸에 마비가 풀리자, 그제야 짐승같이 폭풍 울음을 쏟아내었다. 온 동네 사람들이 그 모습을 보고 나를 동정하며 중국 남자를 욕하는 눈치였다. 당시에 중국말은 하나도 몰랐지만, 사람들이 혀를 차는 행동과 나에게 보내는 동정 어린 눈빛, 말하는 어투에서 그러한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한 번 기절하고 난 후, 이제는 내가 도망가지 못하도록 시어머니가 변소에 갈 때도 따라나오는 상황이었다. 나는 그 집에서 아무것도 먹지 않는 등 시위를 하였다. 생사람 죽이겠다며 동네에서도 나를 다른 곳으로 보내주라고 하자, 중국 남자는 결국 자신의 친척쯤 되는 사람에게 나를 넘겨주었다. 그는 나를 6,000원에 사온 것이기 때문에 나와 같이 살 수 없게 된 상황에서 다시 돈을 받고 팔고 싶었을 것이다. 나를 데리러 온 사람은, 그에게 돈을 주기로 하고 일단 나를 데려가는 것 같았다.
나는 어디로 가게 될지 모르는 상황에서 이보다 더 못한 곳으로 가게 될까봐 너무도 두려웠다. 나를 데려가는 사람에게, 다른 남자에게 나를 팔지 말아 달라고 애원하였다. 식당 같은 곳에 넘겨주어 일할 수 있게 해달라고 부탁하고, 또 부탁하였다. 그와 같이 길을 가던 도중에 수중에 있던 100원마저 그에게 넘겨주었다. 그 사람은 착한 사람인 것 같았기 때문에 중국 상황에 전혀 무지한 나는 이 사람을 믿고 의지하고 싶었다.
그는 내게 잘해주었으나, 유부남이었고 부인이 갑자기 찾아와 한바탕 난리가 났었다. 나는 결국 중국인이 하는 식당에 넘겨졌다. 열심히만 일하면 그곳에서 돈을 모아 자유롭게 살아갈 수 있을 줄 알았으나, 결과적으로는 월급을 한 푼도 받지 못한 채 일만 열심히 한 셈이 되었다. 왜냐면 그 식당이 망했기 때문이다.
나는 장춘과 송원의 중간쯤 위치한 자그마한 농촌의 식당에 넘겨졌다. 그곳은 농촌을 가로질러 도시로 가는 도로변에 줄지어 있는 식당 중 하나였다. 1996년 이후, 중국의 식당에는 아가씨(몸 파는 여자)들이 많아졌다. 몸을 팔아 큰돈을 번 여자들이 많다고 했다. 하지만 나는 아가씨 일은 하지 않고, 식당의 허드렛일을 하며 늘 일제 기성복을 차려입고 춤과 노래로 열심히 손님의 기분을 맞춰주었다.
이 식당은 나 때문에 손님이 많아져서 돈을 많이 벌었다. 이때 나는 중국에서 돈을 벌 수 있는 절호의 기회다 싶어 미련하다 싶을 정도로 열심히 일했다. 당시 그 주변 식당에서는 나에 대한 칭찬이 자자했다. 얼굴이 예쁜데 아가씨 일은 하지 않고 춤과 노래만 하면서 식당일을 열심히 한다는 이유였다. 그래서 주변의 식당 주인들도 탈북자인 나를 보호해주려고 하였다.
중국 공안들이 몸 파는 아가씨들을 잡으러 식당을 수색하는 경우가 많았다. 한 번은 수색 중이던 공안이 나에게 말을 시켰는데, 순간 가슴이 쿵쿵 뛰었다. 어디서 왔는가 하고 물어서 대답하고, 몇 살이냐고 물어서 당시 나는 37살이었는데 31살이라고 하였다.
그 사람들이 자신들과 같은 나이 또래라고 생각하였는지 그저 흘끔거리며 나를 쳐다보았다. 자기들끼리 ‘야 곱다’, ‘근데 북한에서 온 거 아냐?’, ‘머 어때 우리는 그런 거 잡으러 다니는 것도 아니잖아.’ 하는 대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는 그냥 가버렸다. 나는 심장이 떨려서 죽다 살아난 것 같았다.
식당에서는 한 달에 300원을 준다고 하였지만, 사실 단 한 푼도 받지 못하였다. 애초 식당 주인이 300원을 주겠다고 했던 이유는 내게 몸 파는 일을 시키고 노예처럼 부려 먹을 생각에서였던 것이었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그때그때 돈을 주었는데, 나는 탈북자라 그런지 돈을 바로 주지 않았다.
돈을 못 받은 채 그 식당에서 다섯 달을 내리 일만 하였다. 물론 나도 내 수중에 그런 큰돈이 있는 것이 두려웠다. 다른 사람들이 노릴 것만 같아서 오히려 돈이 사장님 품에 있는 것이 더 안전할 것 같았다. 하지만 돈을 못 받고 일만 열심히 한 것을 생각하면 지금도 억울하다.
손님들이 나를 원하는데 내가 몸 파는 일을 하지 않자, 식당 주인은 나를 미워하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 날, 식당에서 냉동고가 필요해서 같이 일하던 22살 아가씨와 함께 가까운 송원 시내로 냉동고를 보러 나갔다. 그런데 돌아오자마자 이 아가씨가 중국말로 내 욕을 미리 했었는지, 사장이 내게 다짜고짜 욕을 하는 것이었다.
영문도 모르게 욕을 얻어먹자 나도 조선말로 욕을 하면서 싫은 기색을 잔뜩 내었다. 그러자 사장은 갑자기 나를 때리기 시작했다. 나는 맞아서 눈이 퉁퉁 붓고 입에서 피가 났다. 주위에 많은 식당 주인들이 그 광경을 지켜보다가, 모두 내 편을 들어주며 나보고 짐을 싸 들고 밖으로 나오라고 했다.
나를 때린 것이 남 보기 부끄러워서인지 사장은 내가 짐을 싸서 나오는데도 문밖으로 나오지를 못했다. 이렇게 도망치듯 나와버려 그동안 일한 품삯은 하나도 받지 못하게 되었다. 주위에서는 나를 송원에 있는 조선식당에 소개해주었다. 이리하여 드디어 조선말이 통하는 곳에서 일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일 년 뒤 다시 그 농촌마을에 가보니 식당은 망하고 마당에 풀만 무성하게 자라있었다. 그곳은 장거리 운송트럭 운전기사들이 대부분 손님이었던 식당이었다. 춤추고 노래하며 비위를 맞춰주던 내가 없어지자 나를 찾던 손님들이 많이 줄었다고 했다. 나를 때리고 한 이야기까지 주변 식당을 통해 손님들까지 전해져서 그 식당은 결국 망했다고 한다. 그 식당 사장은 참 못나고 나쁜 사람이었다.
새로 일하게 된 송원의 조선식당에서는 개고기도 찢고 카운터도 보고 설거지도 하면서 나름 돈을 좀 모을 수 있었다. 이렇게 겨우 모은 돈 1,000원을 우선 북한에 있는 언니네로 급하게 보내주었다. 내가 북한에 있는 마지막 순간까지 신세를 많이 졌고, 언니네가 북한에서 어렵게 지내고 있을 것이 눈에 선했기 때문이다.
1,000원을 보내느라 별도의 인편 비용으로 400원을 썼다. 두 번째로 또 돈을 보냈고 옷도 보냈다. 그런데 어떤 이유에서인지 언니에게 좋은 소리를 못 들을 수 없었다. 인편을 중개로 들은 이야기라 나도 무엇이 진실인지 잘 모르겠다. 그 이후부터 나는 심화병(울화병)을 앓기 시작했다.
중국에서는 수시로 탈북자들을 색출해 가는 운동이 벌어졌는데, 그럴 때면 나는 아무도 모르는 곳, 강가의 빈집 등 아무도 나를 색출해 갈 수 없는 곳으로 도망가서 며칠 밤을 자고 오곤 하였다. 아는 사람 집에 있어도 누군가 신고해서 나를 잡아갈 것만 같았기 때문에 누구도 믿을 수 없었다.
북한에 다시 잡혀가는 것은 나에게 곧 죽음을 의미했다. 나는 바스락거리는 소리에도 벌벌 떨었고 심장이 깜짝깜짝 자주 놀라면서 신경이 예민해졌다. 아직도 밤에 잠을 푹 자지 못하고 신경이 쇠약한 이유가 많은 시간을 조마조마하게 지내왔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갈 곳 없는 몸으로 식당에서 일하며 지내고 있던 차에 한 중국 남자를 알게 되었고, 나는 그 사람을 따라가서 살게 되었다. 나는 당시 37살이었고 나를 데리고 간 중국 남자는 25살이었다. (나는 팔려올 때부터 31살로 되어 있었기 때문에 모두 내 나이가 그런 줄 안다) 그 중국 남자는 나보다 젊어 보이지도 않았고, 함께 간 그의 집은 북한의 우리 집보다도 가난한 집이었다. 즉 중국에서도 빈민 중의 빈민층이었다. 사실 북한이 마비만 되지 않았다면 우리 집보다도 더 못 사는 집이었다.
나는 얼마 안 가 이 집에서 도망쳐 나왔다. 나는 항변하고 싶다. 탈북 여성들은 근본이 나빠서 이 남자 저 남자를 따라가는 게 아니다. 공안에 잡히지 않으려면 누군가의 보호 아래 있어야 하기 때문에 사랑이 없어도 따라가는 것이다. 내가 중국말을 못하고 탈북자의 행색이 묻어나는 한, 언제 어디서든 신고의 대상이 되고, 항상 한 군데 붙어서 오래 살 수가 없는 노릇이다.
이렇게 나는 4명의 남자를 따라갔었다. 그들은 모두 중국에서도 극빈층이거나 몸이 성치 않은 환자들이었다. 탈북 여성들은 중국에서 사회적으로 너무나 불안정한 존재들이기 때문에 이런 남자들과 사는 경우가 많다. 어여쁜 조선 여자들에게 참으로 슬프고 억울한 일이다.
처음에는 공안에 잡혀갈까 두려워 중국 남자를 따라다니며 살았지만, 점차 중국말이 유창해지면서 그럴 필요가 없어졌다. 중국에서 산 지 오래되자 누가 봐도 내가 탈북자인지 모를 정도가 되었고, 더 이상 중국남자를 나의 안전 보호막으로 둘 필요가 없었다. 나는 이제 돈을 벌면서 스스로 살아갈 수 있을 만큼 내 주변을 추스를 수 있었고, 완전하진 않지만 어느 정도는 자유로워졌다. 생계는 식당에서 주방 일을 하면서 유지할 수 있었다.
주위에는 교회가 있었다. 어느 날, 기독교인이던 중국 자매가 나의 처지를 알고 내 머리에 손을 얹고 기도를 해주었다. 그녀는 주기도문을 중국어로 읊어가며 나를 위해 기도해 주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시며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시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우리가 우리에게 잘못한 사람을 용서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용서하여 주시고, 우리를 시험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악에서 구하소서. 나라와 권능과 영광이 영원히 아버지의 것입니다. 아멘”
기도를 받고 그날 식당에서 일하는데 신기하게도 나의 마음이 교회로 달려가고 있었다. 그 중국 교회를 다시 찾아갔는데 내가 말을 잘 못 알아듣자 조선교회를 알려주었다. 그곳에서 준 예수님의 생애를 담은 CD를 보고 우리를 위해 대신 죽으신 예수님에 대해 알고 눈물을 하염없이 흘렸다. 내 평생 그때 가장 많이 울었던 것 같다.
당시 나는 그동안 너무 힘들게 일해 온 탓에 몸이 많이 아팠는데, 성경에서 나오는 치유의 기적이 나에게도 일어나길 간절히 기도했다. 나는 이날 알게 된 하나님을, 내게 주어진 이 절대자 하나님을 절대 놓치지 말고 꼭 붙들겠다고 결심했다.
예수님을 내 영혼의 구주로 영접하고 난 후 어느 날, 양말을 사러 시장에 간 적이 있었다. 양말 장수가 한눈을 파는 사이, ‘어라, 내가 이 양말을 슬쩍 가져가도 이 사람 아무것도 모르겠네?’라는 나쁜 생각이 드는 순간, 심장이 뻥 뚫리는 느낌이 들었다. 나의 뼈마디 골수가 쪼개지는 느낌이 들며 정신이 버쩍 드는 것을 경험했다. ‘내가 너의 하나님이다.’ 그 순간 살아있는 주님을 체험했다.
나는 전도사님을 따라 명절을 지내러 하얼빈에 있는 교회로 갔다. 청년부 앞에서 찬송가에 맞추어 직접 창작한 춤을 공연했는데 모두 좋아해 주었다. 중국에 있는 동안 자유와 소속감을 느껴본 일이 없었기 때문에 하얼빈에서 사람들과 이곳저곳 어울려 다니는 일이 무척이나 행복했다. 내게 송원으로 되돌아가도 되고, 하얼빈에서 더 있어도 된다는 하얼빈 교회의 제안에 너무 기뻐하며 더 머물겠다고 대답했다.
하지만 하얼빈에서 나는 딱히 갈 곳이 마땅치 않았기 때문에, 한국으로 나오기까지 8개월을 교회 대문 지키는 일을 하면서 교회에서 먹고 자며 숙식을 해결했다. 바느질 솜씨를 살려 교회 청년부 아이들의 무대 공연복도 지어주기도 하였다. 주님 안에서 깨어난 지 1년도 지나지 않아 내 삶은 완전히 바뀌어 있었다. 하얼빈 교회에서도의 생활은 행복 그 자체였다.
중국에서 산지 어언 13년! 이제 중국어도 웬만큼 하게 되었고 중국에서의 고생스러웠던 시간들도 점차 안정적인 생활로 자리 잡혀가고 있었다. 처음 중국에 들어와 팔려 다니던 시절에는 탈북자 행색이 고스란히 묻어났고, 언어도 통하지 않아 항상 언제 다시 잡혀갈지 모르는 두려움 속에서 살아갔었다.
눈앞에 보이는 풍경이라고는 허허벌판뿐, 아무것도 없던 시골에서조차 가슴 졸이며 살아온 시간들이었다. 시간이 지나 점차 중국의 언어와 풍습에 익숙해지자 아무도 내가 북한출신인 것을 알아채지 못했고 그제서야 자유롭게 지낼 수 있게 되었다. 비록 조선을 탈출하여 중국 땅에서 10년을 넘게 살았어도 90년대의 처참했던 북한 땅을 결코 잊을 수 없다. 부모와 둘째 오빠 내외를 땅에 묻고 조카아이들을 뒤로 한 채 조선을 탈출하여 중국 땅으로 왔으나, 내 나라를 언제나 마음에 품고 있다.
중국에서 고마운 사람의 소개로 2011년 4월 11일 드디어 대한민국에 발을 딛게 되었다! 숨어 지내며 온갖 수모를 겪던 지난날과는 다른, 꿈속에서나 그려보던 생활을 하면서… 내 마음은 행복과 만족감으로 설렌다. 대한민국의 품으로 탈북자들을 불러주셔서 이 땅의 당당한 국민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은혜와 사랑을 주신 것만으로도 고마운데, 하나원에서 사회에 잘 적응할 수 있도록 의무교육과 직업훈련도 시켜주셔서 대한민국 사회에 감사한 마음이 물밀 듯 터져 나온다.
아, 집과 정착금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주는 이 나라! 대한민국을 더 잘 알아가도록 교육하며 지원해주시는 하나원 선생님들! 친정어머니의 심정으로 한없는 사랑을 베풀어주시고, 섬세하게 가르쳐주시는 선생님들에게 고마운 마음을 전하고 싶다.
우리 탈북자를 믿어주시고, 앞으로 통일 광장에서 더 큰 역할을 하게끔 기대해 주시며, 어엿한 대한민국 국민으로 받아주시고 환영해 주시는데 대하여 이 감사의 격정을 누를 길이 없다. 어디서 나를 이토록 당당한 국민으로 받아주리! 나라 없이, 신분 없이 떠돌아다니는 설움을 겪으면서 이런 꿈같은 날이 올 줄은 상상도 못했던 시절이 있기에, 오늘의 행복은 더욱 소중히 여겨진다.
이곳에서의 삶을 주님께서 친절한 팔로 인도해 주시는 것을 느낀다. 북한에서의 강한 말투를 남한사회에 맞추어 부드럽게 하라고 명령하신다. 가구류들은 경비 아바이가 아파트 주민이 이사가면서 버리고 간 것들로 채워주었다. 매달 43만원씩 정부 보조금이 나온다. 국가에서 지원된 300만원의 정착금을 나를 브로커에게 비용으로 지불하고 나를 빼내준 단체에 주었다.
냉장고 옷 등을 사는데 썼다. 지금 일을 할 수 없는 상황은 아니다. 그 동안 고생하여 몸이 많이 상했다. 빈혈 때문에 자주 누워있어야 한다. 6만 원짜리 홍삼 4팩에 24만원 한약 10만 원어치 지어먹고 등등 하니 손님 한 번 청할 때마다 돈이 나가고 해서 돈이 어디로 갔는지도 모르게 빠져나가고 있다. 하지만 어떻게든지 나는 잘 적응해서 살아갈 것이다.
나는 그동안 북한, 중국 등지에서 고생하며 몸이 많이 상했기 때문에 일을 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다. 빈혈 때문에 자주 누워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곳에서의 삶을 주님께서 친절한 팔로 인도해 주시는 것을 느낀다. 가구류들은 아파트 주민이 이사 가면서 버리고 간 것들을 경비 아저씨가 채워주셨고, 매달 43만원씩 정부 부조금이 나온다. 국가에서 지원된 300만원은 브로커와 내가 한국에 올 수 있도록 도움을 준 단체에 주었고, 냉장고, 옷 등을 사는데 사용했다.
앞으로 북한 땅이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 인민에게 고통이 없는 평화의 나라, 자유의 나라가 될 수 있도록 앞장서야겠다. 우리 민족은 하나의 핏줄로 이어온 동족이라는 것을 잊지 말고, 대한민국의 은혜와 사랑을 받은 만큼 우리도 남북통일을 위한 성스러운 길에 동참해야겠다. 우리 탈북자들은 무슨 일을 하든 성심성의로 대한민국 사회를 위하여 열매 맺을 수 있도록 하여야겠다.
평화통일을 이룩하기 위하여 통일의 광장에서 대문을 열고 계속 밀려오고 있는 후배들을 위해 훌륭한 교육으로 지원해 주시는 하나원 원장선생님 이하 모든 교직원, 선생님들을 축복하며 뜨거운 감사의 인사로써 마무리하고자 한다.
출처 : 북한인권시민연합 https://kor.nkhumanrights.or.kr/main.htm
11.03 남조선이 한국인줄 모른채 요덕수용소 수감생활
(편집자) ‘요덕도 가로막지 못한 가족의 끈’은 북한에서 태어나 경제적인 어려움으로 인해 탈북했지만 중국에서 북송당해 요덕 수용소에 갇혔던 이금란 동포에 관한 이야기이다. 그녀는 요덕 수용소에서 힘든 생활을 이겨낸 후 아버지와 함께 다시 탈북했다. 그 후 중국, 필리핀을 거친 고행 끝에 어머니와 재회할 수 있었다. 인간애을 찾기 힘든 공간인 수용소에서 모진 생활을 보내고도 여전히 가족에 대한 강한 믿음을 지니고 있는 이금란 동포의 이야기를 전한다.
북한에서의 생활
나는 6형제(4남 2녀) 중 맏이로 태어났다. 아버지께서 기관사셨기 때문에 유복했던 어린 시절을 보낼 수 있었다. 기억해보면 그때까지만 해도 우리 집 형편은 넉넉한 편이었다. 사탕 같은 물건도 집에서 떨어지지 않을 정도였다.
아버지 인맥 덕분에 학교 졸업하고 처녀 때 철도 교환수 일을 6년 동안 할 수 있었다. 철도 교환수는 북한 각 철도를 전화로 연결하는 일을 한다. 북한에서는 괜찮은 직업이었고 나 또한 그 일에 만족했다. 무엇보다도 여자가 하기에는 좋은 직업이었다.
대학은 다니지 않았었다. 원래는 군대를 갈까 생각했었지만, 어머니께서 편찮으셔서 갈 수가 없었다. 미공급시기가 되면서부터 집안 사정이 어려워지기 시작했다. 나는 살기 힘들어진 현실을 등에 얹고 28살에 늦게 결혼했다.
남편은 아버지와 친분이 있는 국당간부가 소개해준 부모 없는 남자였고, 직업은 돌격대 소대장이었다. 북한에는 결혼하는 딸에게 접시며 여러 가지를 보자기에 넣어서 보내는 풍습이 있다. 어머니께서는 내가 장녀였기 때문에 시집갈 때 정말 신경써서 잘 챙겨 주셨다.
나는 결혼 이후 8개월 쯤 지나 임신을 했다. 임신 후 남편은 강원도로 일하러 갔다. 아이를 낳아도 남편은 한 번도 찾아오지 않았다. 아마 남편은 엄마가 시집갈 때 챙겨준 그 보따리 때문에 미공급시기에도 잘 살았을 것이다.
얼마 후 아이가 태어났지만, 아이에게 먹일 음식은 부족했다. 어쩔 수 없이 아이에게 시래기 물을 먹이거나 통강냉이를 조금 얻어 와 주고는 했다. 그러다 보니 아이가 소화불량에 걸려 버렸다.
하지만 아이에게 포도당 주사를 놔줄 돈이 없었다. 결국 내 옷을 다 팔아서 사탕가루를 사서 나오는데 어머니가 아이는 놓아두고 보따리만 들고 나에게 걸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아이가 죽은 것이었다. 그렇게 1년 만에 자식을 잃고 말았다. 그 때가 1997년도였다. 아이를 잃고 다음 해 탈북을 위해 강을 건넜다.
흩어진 가족, 만나기 위해 중국으로 가다
현재 우리가족은 한 명을 제외하고는 다들 한국으로 나왔다. 내가 제일 마지막에 아버지를 모시고 나왔다. 우리 가족들이 한국에서 다시 만나기까지는 정말로 힘겨운 시간을 버텨야 했다.
김일성이 사망하고, 미공급시기가 온 후부터 식량 사정이 곤란해지니까 가족이 뿔뿔이 헤어지게 되었다. 나는 어머니를 만나기 위해 중국으로 넘어갔고, 연변 조선족 자치구에 있는 용정에서 우리는 만날 수 있었다.
그 후 나는 돼지 키우는 집에서 6개월간 있다가 연변 과학연구소에서 일한다는 조선족 남자와 결혼했다. 그러던 어느 날 남편이 자신은 다른 지역으로 연수를 가기 때문에 나에게 더 이상 같이 살지 말고 나가라고 했다.
그렇게 3년을 산 뒤 나는 조양촌 이라는 곳으로 다시 시집을 갔다. 그 곳에서는 1년간 머물렀다. 그러던 중 어머니가 먼저 한국으로 떠나고 내가 뒤따라갔다. 그렇게 어머니는 우리 가족 중 가장 먼저 2002년에 한국으로 갔다. 조양촌을 나선지 반 년 만에, 나는 중국의 내몽골에서 붙잡히고 말았다.
우리는 한국으로 가기위해 창고 같은 방에서 8명이 함께 생활하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중국 공안들이 방으로 들이 닥치는 바람에 전부 한 번에 잡혔다. 아마 미행이 붙었던 것 같다. 중국 공안들은 “어떻게 해서 여기까지 들어왔는가?”, “왜 내몽골까지 들어왔는가?”, “누구를 통해서 들어왔는가?” 라며 계속해서 똑같은 것만 물어보았다.
한족들은 내가 중국말을 할 수 있으니까 자꾸 나에게만 물어봤다. 그러나 나는 한족 말을 잘 알지 못했다. 그 후 몇일 뒤 기차타고 도문변방으로 가서 또다시 10일 간 취조를 받았다. 도문변방에서도 내몽골에서 붙잡혔을 때와 똑같은 질문만 계속 했다. 그러나 도문변방에서 취급 받을 때는 나무각자로 다리를 많이 맞았다.
방마다 사람들이 꽉 차 있었다. 우리 방에만 200명 정도가 있었다. 우리 방에 노부부가 같이 있었는데, 할머니 상태가 좋지 않아 계속 출혈을 했다. 그러나 북한으로 넘어갈 때 할머니가 피를 흘리는데도 질질 끌어서 할머니를 트랙터에 태워서 갔고, 그 모습을 보다 못한 할아버지는 참지 못하고 우셨다.
그래도 도문변방에서는 할머니께서 약이라도 드실 수 있었지 북한에서는 개 취급을 당했다. 그 할머니는 이틀 후 돌아가셨다. 나는 도문변방에서 10일이 지난 후 버스타고 북한으로 끌려갔다.
도문변방에서 버스를 타고 북한으로 넘어갈 때 거의 700명 정도가 함께 갔다. 그 당시는 사스(SARS) 때문에 평상시에 비해 북한으로 가는 사람들이 더 많았다. 사람이 너무 많아서 버스 안에서는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북한으로 넘어가서는 모두 온성구류장에 집결했다. 내가 도착했을 때 이미 그 곳에는 사람이 몇 백 명 정도 있었다. 도착 후에는 모두 무릎 꿇고 앉아서 대기했다. 너무 덥고, 바닥에는 이도 돌아다니고 있었다. 온성군 호송원들이 나와서 우리를 인계받았다.
여성들은 여성 간수가 받아서 따로 모두 집결시켰다. 그들은 우리를 구류장으로 끌고 온 다음 옷을 다 벗겨 뽐뿌질 시키고, 머릿속, 심지어 자궁까지 다 뒤졌다. 그들은 “야이 간나, 돈 있는 거 솔직하게 다 말해라!”라고 윽박을 질렀다. 일주일간 취조 받다가 중국에서 같이 지내던 8명 중 한 명에게서 성경책이 나와 처음부터 다시 취조 받았다.
복도에서 아침 5시부터 밤 10시까지 무릎 꿇고 앉아 취조 받았는데, 너무 힘들었다. 그 때문에 지금도 허리, 다리를 잘 못 쓴다. 취조 받는 중에 나는 너무 맞아서 까무러치기도 했다. 아무데나 다 때렸는데 그때 맞은 머리가 아직도 아프다.
그들은 같은 질문을 계속 반복했다. 그들은 우리 가족들 중 엄마랑 남동생도 중국에 간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너무 힘들었지만 가족들보다 내가 잡혀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국가안전보위부에서 재수사가 내려와서 다시 취조를 받았다. 결국엔 “다신 이런 일을 안 하고 교화하겠다.”고 했다.
그러자 이제 다 조사했으니까 혁명화로 보낼지 말지를 결정할 테니 여기서 대기하라고만 했다. 나는 내가 요덕수용소로 가게 될지 몰랐다.
요덕수용소로 가다
그렇게 심한 취조를 받은 지 3개월 후에 그들이 옷을 주어서 나는 내가 사회로 살아나가는 줄 알았다. 그러나 그들은 다시는 중국으로 도망가지 않도록 개조하러 간다고 하며 나를 끌고 나가면서 “가서 일 잘하고, 생활 잘하고 오라”는 말까지 했다.
어둠이 내리는 저녁에 나를 지프차에 태우고 달리고, 또 3시간 동안 산골로 들어갔는데, 그렇게 간 곳이 바로 요덕이었는데, 그 당시에는 그곳이 요덕인줄도 몰랐고 요덕에 15호 관리소가 있는 지도 몰랐다. 관리소의 정치부장이 나에게 대뜸 왜 여기에 들어왔냐고 세차게 물으며 “남조선 가지고 했지? 남조선이 잘 사는 것 몰랐나!”하면서 소리쳤다.
지금 생각해보면 난 그 때 잘사는 ‘한국’과 내가 아는 ‘남조선’이 같은 나라인지도 몰랐다. 정치부장은 이어서 “너 머리 깨끗이 개조될 때까지 여기서 생활해”라고 면박을 주었다. 그렇게 외래에서 일주일 생활하다가 투입되었다. 내가 그 당시 잘 걷지를 못해서 잠시 요양을 취할 수 있도록 해준 것이었다.
수용소에서의 생활
여자들은 3중대에 배치되었는데 모두 20명이었다. 하는 일은 주로 콩, 강냉이, 호박과 같은 작물을 심는 농사일을 했는데, 겨울에는 산에 가서 특별히 통나무 해오는 일을 하기도 했는데 6미터 길이의 거대한 통나무를 끌고 가는 일은 너무 힘들었다.
여름에는 아침에 5시 군대식으로 기상해서 체조 10분, 마당청소 10분, 세수 10분을 하고 30분 간 아침을 먹은 후에 일하는 현장으로 뛰어서 간다. 식사는 강냉이 죽밥이랑 염장배추나 무, 염장 배춧국 등이었는데 일의 할당량을 다 채우지 못하면 죽밥을 절반 뚝 잘라서 줬다.
계획대로 목표량을 달성해야지만 멀건 죽밥을 다 먹울 수 있었다. 오전 10시쯤 돼서 딱 10분 휴식하고, 다시 12시까지 일한 다음, 30분 점심시간 후 5분 쉬다가 1시에 작업을 나갔다. 그렇게 저녁 8시 30분까지 일했다.
겨울의 일과도 여름과 비슷했지만 아침 6시 기상, 일하러 나가는 시간이 아침 7시, 저녁에는 6시에 일을 마친다는 것이 달랐다. 노동 후에는 씻고, 7시부터는 학습, 생활총화, 9시에는 모여서 인원을 점검하고 10시에 취침이다.
여름에는 9시 점검 끝나고 11시까지 도라지랑 더덕을 산에 가서 캐 와야 했다. 새끼줄도 꼬고 지게를 엮고, 만들고 그렇게 하루 계획을 모두 수행해야만 1시든, 2시든 잠을 잘 수 있었다. 될 수 있으면 우리를 재우지 않고 일을 시켰다.
그러다 보니 죽는 사람도 참 많았다. 그것도 양반인 것이 구류장에 갇혀 판결받기를 기다리고 있을 때에는 다 떨어진 식기에 마시는 죽 같은 것을 주었는데 수저조차도 없어 그릇을 입에 대고 마셔야 했다. 먹을 것이 부실하다보니 수용소에 갇힌 사람들 모두 극도로 허약해졌다.
나도 원래 몸무게인 53킬로그램에서 무려 10킬로그램이나 빠져 44킬로그램이었다. 그러다 보니 휘청거리며 제대로 걷지를 못해 맥없이 쓰러지곤 했다. 남자들 같은 경우는 맥이 없어 제대로 일을 못하니 매일 구타당했다. 그들은 설사병에 걸려도 개처럼 현장에 나가서 일해야 했다.
그러나 우리는 불쌍한 그들을 동정할 수 있는 권리조차 없었다. 동정하는 기색을 보이면 구류장으로 끌려간다. 갑자기 모두를 모이게 하더니 지프차에 태워서 대상자들을 데려간다. 그 사람들은 우리는 몰라도, 수용소에 있는 스파이들한테 걸려서 갔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어디로 갔는지 알 길이 없으며, 구류장을 나올 때 까지 볼 수가 없었다. 구류장에 끌려갔다가 한 달 동안 갇혀 있으면 영영 못나오는 신세가 되어 거의 죽게된다. 언젠가 2명이 구류장에서 탈출하다가 일주일 만에 잡혀서 공개적으로 총살 처형을 당한 일도 있었다.
수용소에 갇힌 모든 이들에게 본보기로 다 보여줬다. 그런 마음 아픈 광경을 본 날은 모든 것이 불안하게 느껴졌다. 연민을 표현할 수도 없었기에 속으로만 마음 아파했다. 그렇게 속앓이를 하며 지내던 중 교회 다니던 사람을 만났는데, 내게 한 주일에 성경 구절을 하나씩 외우는 것이 도움이 될 것이라며 추천해주었다.
사도신경만 속으로 암송하면서 엄마한테 보내달라고 기도했다. 돌이켜 보건데 그런 바람이 통해서인지 지금 대한민국까지 무사히 왔고 너무 감사한다.
첫 해에는 통나무 끌다가 다리를 다쳐서 석 달 동안 외래에 있었다. 그렇다고 해봐야 치료하는 것은 없고 그냥 안정만 취할 수 있었다. 처음 수용소에 도착하였을 때에는 아버지가 주신 비누를 사용했는데, 수용소에서 주는 것은 새까만 비누에 거품도 나지 않는 것이었다.
생리대 같은 물품은 없었다. 2달만 생리를 했었는데 내 옷을 찢어 생리대처럼 사용했다. 한국에 와서도 2년 동안 생리를 안 했다. 그런 환경 속에서도 갇혀 있던 여자 두 명이 임신 했었다. 소대마다 창고 정리하는 일을 하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 사람들이 임신되었다.
어떻게 임신되었는지는 잘 모르지만 남녀가 신기하게 만나서 임신이 되었다. 태어난 아이는 안타깝게도 낳아서 산에다 묻었다. 아이의 엄마아빠는 죽이지는 않았고 6개월씩 수용소 구류 연장만 했다. 나는 2003년 5월에 들어가 2006년 5월에 나왔다.
일하면서 가장 힘들었던 것은 눈이 펑펑 내리고 키만큼 쌓이는 산에 가서 나무 해오던 일이 생각난다. 눈 때문에 미끄러운데 산도 아주 험한 산이다 보니 걷지도 못하고 눈에 구르면서 갔었다. 내려올 때는 굴러서 울면서 내려왔다.
나무를 제대로 해오지 못한 남자들은 숙소 안에서 정말 많이 맞았는데, 우리도 맞을까봐 떨고 있었는데, 다행히 여자들은 때리지 않았다. 내가 있던 곳은 아이들은 없었고 군대 탈영하고 붙잡혀 온 20대가 가장 어린 아이들이었다.
나오기 일주일 전부터는 선생이 “밖에 안 내보내고 구내(생활하는 곳에서 헐한 일 한다)에서 일을 시켜 이제 집에 갈 때가 되었구나 생각이 들었다. 5월 30일, 안전원이 나를 불러 호송하더니 온성군 보위부까지 데려가 그곳에 인계했고, 내 동생이 온성보위부에 와서 나를 인계한다는 담보서를 써서 수용소 밖의 공기를 마실 수 있었다.
7인 탈북자 강제송환사건의 동포들에 관하여
나는 요덕에서 ‘7인 탈북자 강제송환사건’의 당사자 들을 만났었다. 은철이(김은철)와 허영일이라는 사람을 안다. 내가 요덕에 들어가고, 은철이가 6월에 퇴소했다. 그리고 허영일이라는 사람은 같이 일하면서 알게되었다.
수용소 안에는 여자가 총 20명, 남자가 총 180명 정도 있는데, 남녀 간에 거리는 두지만 일을 하다가 이야기 정도는 나눌 수 있었다. 그래서 나는 그들이 러시아에서 잡혀왔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그들은 요덕 수용소에 나보다 일 년 먼저 들어왔으며 내가 기억하는 허영일은 키는 보통에, 호감을 주는 인상이었다. 안타깝게도 허영일의 처는 요덕에서 죽었다.
(7인 탈북자 강제송환사건에 대한 간략한 소개 (편집자)
북한 인권문제의 심각성과 탈북난민의 인권보호를 위해서 국제적 협력 메커니즘 구축의 필요성을 절감케 한 사건이다. 1999년 겨울(11월) 중국에서 러시아로 국경을 넘어 온 허영일, 방영실, 리동명, 장호영, 김광호, 김성일, 김은철 총 7명의 탈북 동포들이 러시아 연해주 국경 수비대에 체포되었다.
이에 북한인권시민연합과 국제사회의 노력으로 유엔난민기구(UNHCR)가 체포된 7명을 난민으로 인정하였다. 그들에게서 제 3국행 희망의사를 확인하였고 러시아로부터 출국비자를 받아 한국행을 확정짓는 듯하였다. 그러나 1999년 12월 30일, 러시아는 탈북자 7인을 중국으로 돌려보낸 후에야 한국 총영사관에 이와 같은 사실을 통보하였다.
이에 대하여 주한 러시아 대사는 러시아 법률에 의해 불법 월경자는 국경을 넘어온 국가로 다시 돌려보내야 하고, 러-중 국경을 탈북자들이 한국행 루트로 이용하는 선례를 남길 수 없다는 입장을 취했다.
이후 7인 탈북자들이 중국에서 북한으로 송환되지 않도록 북한인권시민연합에서는 중국 장쩌민 주석에게 호소문을 보내는 등 다방면으로 노력했으나 2000년 1월 12일 중국정부는 탈북자 7명 전원을 북한으로 강제 송환시켰다.
북한의 주장에 따르면 중국으로부터 송환된 인원은 7명이 아닌 6명이며, 그 중 허영일, 방영실 부부는 함경북도의 한 창고를 털고 불을 질러 국가에 10억원의 손실을 끼친 죄로 각각 9년, 5년에 해당하는 노동 교화형을 내린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연 단위 국제 사회의 대북원조 규모와 맞먹는 가치의 창고가 함경북도에 있을 리 없다는 점에서 북한의 주장은 신빙성이 없다. 그 외 나머지 네 명에 대해서는 그냥 풀어주었다 하였으나 북한은 이에 대한 근거를 제시하지 않았다.
북한인권시민연합은 사건의 진상을 파악하기 위해 이 사건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의 필요성을 국제사회에 호소하였다. 마침내 2002년, 2005년에 걸쳐 다른 탈북 동포들의 증언을 통해 북한 당국이 훈방했다던 4명을 포함, 7명 전원이 북한의 주장과 다르게 완전통제구역이나 요덕 수용소에 수감되었음을 확인 할 수 있었다.)
한국에 오기까지
앞에서 말했지만 수용소 안전원이 나를 온성군 보위부까지 데려갔고, 내 동생이 온성보위부에 와서 나를 인계한다는 담보를 쓰고 나서야 사회로 나올 수 있었다. 나는 수용소를 나올 때부터 북한을 빠져나갈 방법을 생각했다. 다시는 중국에 가지 않는다는 담보를 했지만 보위부원들도 나를 계속 감시했다.
요덕 수용소에서 사회로 나왔다고 해도 형편이 나아지지는 않았다. 밑천이 하나도 없었기 때문에 사회에서 장사도 못하고, 그저 아버지랑 남동생이랑 농사를 지으며 근근히 살았다. 결국 나는 어머니(2002년에 이미 한국에 계셨음)의 연락을 받고 3개월 후 다시 도강했다.
이웃이 어머니한테서 연락이 왔다고 계속 받아보라고 했는데 처음에는 미행인줄 알고 절대 받지 않았다. 그래도 계속 받아보라고 권해 마지못해 받았는데 정말 내 어머니였다. 어머니가 한국까지 오는 길을 안내해 주었지만 나는 선뜻 결정할 수가 없었다.
이미 한번 수용소에 갔다 왔기 때문에 잡히면 무조건 총살이었다. 그러나 용기를 내 도강하기로 결정했다. 아버지와 함께 떠났다. 회령 학포를 통해 국경을 넘었다. 학포를 건너니 도와주기로 한 사람이 강 건너까지 마중 나와 있었다. 국경을 넘고 중국에 도착해서는 안면이 있는 친척 언니 집에 있었다.
그다음 위조여권을 이용하여 북경 영사관으로 들어갔다. 한국까지 오는 과정은 결코 순탄하지 않았다. 영사관에 들어가서 얼굴을 보니 말이 아니었다. 6개월 후 나는 아버지와 같이 한국으로 갈 수 있었다. 비행기를 타고 필리핀에 도착한 다음 그 곳에서 다시 한국으로 들어왔다.
아직도 나는 공항에 도착했을 때를 잊을 수가 없다. 처음에는 중국보다 못 사는 나라인 줄 알았는데 공항에 내리니까, ‘정말 이런 곳도 있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마침 하나원에 사람이 너무 많고, 내 경우에는 먼저 온 가족이 있다 보니 일주일 만에 하나원에서 조기 퇴소 할 수 있었다.
퇴소 후 어머니를 만나니까 그동안 하도 울어 눈물이 말라 울음도 안 나왔다. 어머니께서도 내가 잡혀갔을 때 눈도 안 보일 정도로 눈물을 많이 흘리셨다고 한다. 어머니께서는 67세의 환갑이 훨씬 넘은 나이에 다리가 좋지 못하신 상태셨다.
이제 한국에 온지 6년이 되었다. 비록 지금까지 요덕 수용소에서 겪은 고초 때문에 전신이 아파 병원에 다니며 일을 하지 못하고 있지만, 나에게는 천사같은 아들이 있다. 요즘은 아들 키우는 재미에 빠져 지낸다. 나에게 이런 소소한 행복을 깨우치게 해준 한국, 나는 한국에 온 걸 후회하지 않는다.
출처 : 북한인권시민연합 www.nkhumanrights.or.kr
11.11 25평 국민임대아파트 당첨된 탈북자 이야기 - 김정숙 탈북자
영하 30도를 오르내리는 추운 겨울, 10살 난 아들의 손목을 잡고 그것이 탈북인줄도 모른 채 남편을 찾아 압록강을 건넜습니다. 그때로부터 벌써 8년이란 세월이 흘렀고, 그 세월을 돌이키는 감회도 새롭습니다.
▲탈북정착교육시설인 경기도 안성시의 하나원한 탈북여성의 편지를 읽는 동안 참석한 탈북 여성들이 눈물을 흘리고 있다./조선DB
집안에서 막내로 태어나 부모님과 언니·오빠들에게서 사랑만 받으며 성장한 나는 중학교와 경제전문학교를 최우등의 성적으로 졸업했고 졸업 후에는 남들이 부러워하는 좋은 직업도 가지게 되었습니다.
은행 취직과 이름 하여 ‘시집 잘 간’언니들 덕에 느닷없이 들이닥친 90년대의 ‘고난의 행군’시절도 큰 고생 없이 넘겼던 나는 군에서 제대되어 온 남편을 만났고, 중국을 상대로 장사를 하던 남편의 ‘활약’까지 더해져 안정된 삶을 영위해 왔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며칠간 중국을 다녀오겠다며 남편이 집을 나섰습니다. 아무리 국경지역에서 생활한다고 해도 ‘도강’한다는 것이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어서 걱정이 태산 같던 나에게 남편이 남겼던 말은 “걱정하지 말라”는 그 한 마디었습니다.
그렇게 남편은 이웃집 마실 다녀오듯 집을 떠났고 나는 남편이 돌아올 날 만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일주일, 그리고 또 일주일...며칠간 다녀온다는 사람이 한 달이 더 지나도록 돌아오지 않았고 불안한 마음에 근심까지 덧쌓여 밥을 먹어도 모래를 씹는 것 같았습니다.
한 달이 지나고 한 달이 더 지나던 어느 날, 뜻밖에 중국에 있다는 남편으로부터 소식이 날아왔습니다. 덮어놓고 “당장 아들을 데리고 중국으로 오라”는 청천병력 같은 소식이었습니다. “왜? 무엇 때문에?!...”
아무런 설명도 없었지만 남편을 하늘처럼 믿고 살아온 환경 때문이랄까, 잠자는 아들애를 들쳐 업다 시피 하고 칠칠야밤에 압록강을 건너던 나는, 순간에도 (다시 돌아갈 때 까지 집에 도둑이 들지 말아야 할 텐데...)하는 생각을 떨쳐버리지 못했었습니다.
그런데 강가에서 우리 가족을 기다리던 남편이 하던 이야기는 천만 뜻밖의 것이었습니다. “납북자를 데리고 강을 건넜었는데, 그 납북자가 남조선 기자와 인터뷰를 했고, 인터뷰 과정에서 자신이 이름도 나왔다”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북한보위부가 이런 사실을 아는 건 시간문제고 그 전에 가족을 빼 내야 한다고 생각했다는 것이었습니다. 정말 촌각을 다투던 환경이었던 것 같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이틀 뒤, 북한으로부터 “무슨 일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너희 집에 보위지도원들이 진을 치고 기다리고 있다. 다시 돌아오면 잡혀갈지도 모르니 돌아올 생각은 하지도 말라”는 친구들로부터의 소식이 날아왔습니다.
도대체 무슨 일이냐고, 결혼 후 처음으로 남편에게 화를 내며 따져 물었던 것 같습니다. 그렇게 호탕하고 자존심 넘치던 남편도 그때만큼은 크게 주눅 든 모습으로 자초지종을 설명하는 것이었습니다. ...
1975년 남한의 강원도 주문진 항에서 ‘천왕호’라는 배를 타고 오징어 잡으려 바다에 나갔던 한 납북자가 있었다고 합니다. 어찌 어찌 하다 알게 된 사람인데, 남조선으로 데려가 달라고 애원하고 또 애원했다는 그 노인을 차마 외면할 수 없어 함께 중국으로 갔었다는 남편이 한없이 원망스럽기만 했습니다.
“그래서요?” 나는 물었고, 남편은 “어쩌겠니? 당분간 중국에서 살면서 저쪽(북한)에서 좀 조용해 질 때를 기다리는 수밖에...”하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그건 북한당국에 대한 우리 가족의 철없는 바람이었고 우리는 곳 ‘당장 잡아들이라는 김정일의 친필 지시에 의해 중국공안으로부터도 쫒기는 신세’라는 것을 알아버렸습니다.
당분간 중국에서 숨어 살면서 북한쪽 눈치를 보자던 남편의 꿈은 산산이 깨어졌고 그런 남편의 눈에서 살기 같은 것이 번쩍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더니 어느날 밤 아들이 잠든 틈에 나를 불러 앉히더니 “정숙아, 우리 남조선으로 가자”하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아니, 갈 테면 당신 혼자서 가. 난 죽어도 안가” 벌써부터 남편의 눈빛에서 그런 이야기를 읽고 있었던 지라 다짜고짜 남편의 이야기를 끊어버렸고 이제 이 사람과도 인연이 다했구나~하고 생각했습니다.
아무리 남편이 소중하다 해도 북에 남은 부모님과 언니 오빠들을 생각하면 ‘배신의 길’만큼은 갈 수 없다는 게 당시의 제 생각이었습니다. 한편으로는 설사 ‘장군님의 친필 지시'에 의해 내가 죄인이 되는 한이 있어도 가족에게 만큼은 그 죄를 떠넘기고 싶지가 않았습니다.
남편은 가자고 했고, 나는 죽어도 못 간다고 하고...중국 공안을 의식하며 소리없이 울고, 발버둥 까지 치던 그 순간들을 죽어도 못 잊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결국, 9개월간이나 남편의 ‘설득’에 시달리다가 어느 브로커의 안내를 받아 태국을 거쳐 대한민국에 입국하게 되었습니다.
* * *
솔직히 대한민국은 제가 꿈꾸던 나라가 아니었습니다. 저의 남편에게도 지어는 저의 아들에게도 어찌 어찌 하다가 불쑥 뛰어든 ‘타향’이었고 ‘외롭고 낮선 곳’일 뿐이었습니다.
그렇게 영문도 모르고 불쑥 뛰어든 우리 가족을 대한민국정부는, 그리고 이 나라 국민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따뜻이 맞아 주었습니다. 9개월간의 중국 생활과 3개월간의 그 지긋지긋 하던 태국생활을 마쳤다 싶던 순간, 온 몸에 힘이 풀려 인천공항의 어느 벤치에 주저 않아 버렸던 기억이 납니다.
조사기관이란 곳에서 우리 가족이 만났던 최초의 ‘남조선 사람’으로부터 “최 선생, 그리고 김 선생, 참 잘 오셨습니다. 오시느라 정말 고생하셨습니다.”하는 말을 들었을 때는 그만, 울음을 터뜨려버렸습니다. 누구 에게라 없이 쌓였던 설움이 솟구쳐 올랐고 (선생이라니, 내가 선생이라니...)하면서 ‘국적 없이’ 떠돌던 탈북자의 설음을 날려버렸습니다.
...2개월간의 조사, 다시 3개월간의 교육을 마치고 우리가족은 대한민국 국민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꼭 한 달 만에 남편과 저는 ‘회사원’이 되었습니다. 하는 일은 경광등을 만드는 일이었고 회사는 크게 이름 있는 회사가 아니었지만 ‘일을 해야 먹고 살 수 있다’는 생각이 그 어떤 생각보다 지배적이었던 것 같습니다.
실지로 국가에서 준 정착금을 탈탈 털어도 브로커 비용은 터무니없이 모자랐고, 당장 살림살이를 사 들이고 아들애를 공부시키자고 해도 돈이 필요했습니다. 또 인사도 못 드리고 온 부모 형제들에게 미안한 생각에 일을 하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그나마 혈혈단신으로 대한민국에 입국한 다른 탈북자분들에 비해 우리는 가족이라는 울타리가 있었고 자식이라는 미래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8년간 저는 단 하루도 쉬지 않았고, 그 8년간 두고 온 부모 형제들을 잊지 않고 살았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저에게 자랑이고 보람이라면 보람이었습니다.
어느날, 휴가를 반납하고 퇴근하는 저에게 직장장님이 다가와 이야기하는 것이었습니다. “일을 잘 하려면 휴식할 줄도 알아야 해”. “네 무슨 말씀인지 알겠습니다.”하며 집으로 돌아오는 길 내내 이런 생각을 했었습니다.
휴가도 가고 이곳 대한민국사람들처럼 해외여행도 가면...난 언제 집을 장만하고 고향에 두고 온 시집이며 친정집 사람들을 도와줄 수 있을까. 벌써 중학생이 된 아들의 학원비는 어떻게 대며 대학입학 준비는 또 어떻게 할까...
그런 나에게 문화적 환경의 다름과 노동강도 따위는 문제도 아니었습니다. 그 8년간 남보다 먼저 출근해 마당도 쓸고 작업장 정리도 했으며 커피타임 시간에는 선, 후배에 상관없이 웃음과 함께 커피를 ‘배달’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숙련공이 되고 직급도 올라가 주변사람들이 오히려 저에게 이것저것 도움을 청하기도 합니다. 외롭고 소외되던 주변 환경을 훌쩍 뛰어넘어 이제는 제가 북한에 대한 이야기며, 탈북자들의 살아가는 모습을 직장동료들에게 들려주기까지 하게 되었습니다.
무엇보다 기뻤던 건 올해 초 우리가족이 새로 지은 아파트에 이사를 가게 된 것이었습니다. 분양받은 집은 아니지만 25평 국민임대아파트에 당첨이 되었고 이곳 대한민국에서의 또 다른 가정환경을 맞보게 된 것입니다.
어떤 이들은 25평이면 그리 큰집이 아니라지만, 우리가족에겐 고래 등 같은 집이었습니다. 아들에게도 방 한 칸, 남편에게도 방 한 칸...운수 좋게 8평정도의 난간도 달려있는 집이어서 우리 가족이 살아가기엔 너무나 만족스런 집이었습니다.
이사가 끝나던 날, 그리 무뚝뚝하던 남편이 와인 한 잔을 권하며 “정숙아, 그동안 믿고 따라줘서 고맙다”고 말했고 저는 저대로 눈물이 나서 얼른 부엌으로 달려가 천장을 멀거니 바라보았습니다. (사는 게 다 그런데요 뭐, 우리 탈북여성들이 다 그렇게 사는데요 뭐...)
그런 눈물과 행복을 준 남편이 고마웠고, 빈손으로 온 우리가족에게 오늘의 행복을 느낄 수 있고, 가꿀 수 있게 해 준 대한민국이 고마워 온 밤을 새우며 울고 또 울었습니다. 그리고 이튿날, 여느 때보다 더 밝고 활기찬 모습으로 출근길에 올랐습니다!
* * *
제 이야기만 하다 보니 아들과 남편에게 고맙다는 말을 못한 것 같습니다.
우리 가족이 중국에서 숨어살던 때, 정말이지 숨소리마저 죽여 가며 살아야 했던 그 때 “절대로 밖에 나가지 말라”고 한 아빠의 이야기를 어기고 열 살 난 아들애가 밖으로 나갔던 ‘사건’이 있었습니다.
잠시 집을 비웠던 우리 부부가 돌아와 보니 문은 잠겨있었고, 아들애가 보이질 않는 것이었습니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아 우리는 밖으로 달려 나갔고 어두워진 동네 골목길을 샅샅이 뒤지며 애타게 아들애를 찾아 헤맸습니다.
그러던 어느 골목길에서 아들을 만났고...그 열 살 자리 철부지 어린애를 남편은 있는 힘을 다해 손바닥으로 때리는 것이었습니다. “이 녀석아 그렇게 놀고 싶어? 아빠 엄마가 그렇게 걱정하면서 이야기 했는데, 그걸 참지 못해 집밖을 쏘아 다녀?!”
너무 성이나 그 '두려운 세상'에서도 소리를 지르며 숨을 헐떡이는 남편에게서 아들을 빼앗듯 낚아채 가지고 총총히 걸음을 다그치는 저의 등위에서 남편의 가시 돋친 원성이 다시 들려왔습니다. “그따위 녀석 내버려 둬!”
그날 저녁 퉁퉁 부어오른 아들의 볼을 어루만지며 저는 조용히 물었습니다. “영남아, 그렇게 밖에서 놀고 싶었니? 아빠가 우릴 걱정해서 그러는 거지 네가 미워서 그러는 게 아니야. 알지?...”
그러는 저의 손을 꼭 잡고 있던 아들애가 “엄마, 나 사실 놀려갔던 게 아니야” 하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럼?”
“엄마, 나 사실...이거 주으려 갔댔어”
그러면서 열 살 잡이 나의 아들이 주머니에게 무엇인가를 꺼내 나의 손바닥에 한 움큼 올려놓는 것이었습니다. (?!...)
손바닥위의 물건을 보는 순간, 저는 그만 흐아~~~하고 울어버렸습니다. 철부지라고만 생각했던 그 어린애가, 담배살 돈이 없어 담배를 피우지 못하는 아빠의 생각을 어떻게 읽었는지, 골목길을 돌아다니며 담배꽁초를 주어온 것이 아니겠습니까.
무슨 말을 어떻게 했으면 좋을지 몰라 그 자리에 풀썩 주저앉아 울고 또 울었습니다. 하늘이여, 땅이여, 이 무정한 아비를! 어미를! 용서해 주십시오~하며 울었던 기억이 납니다.
그 아들이 이제 어였던 젊은이가 되어 아빠 엄마를 위로하며 대한민국의 청춘을 살고 있으니 얼마나 감사한지 모르겠습니다. 그저 잘 자라준 아들이 고맙고 이런 우리 가족의 삶의 터전이 되어준 대한민국이 다시 또다시 고마울 뿐입니다.
지금까지 저를 정숙이라고 불러주는 남편에게도 감사하다는 말, 전하고 싶습니다.
1978년, 후계자로 데뷔한 김정일이 처음으로 북한주민들에게 얼굴을 알리던 그 때, 저도 정숙이란 이름을 갖고 살던 다른 이들처럼 이름을 바꾸지 않으면 안됐었습니다.
철없던 때였지만, (왜 이름을 바꾸라고 하지? 김일성이나 김정일과 같은 이름을 썼다면 몰라도 본적도 없고 들어본 적도 없는 누구의 생모와 이름이 같다고 해서 아빠 엄마가 지어준 이름을 바꾸라고 하는 건 절대 납득이 되질 않아...)
그런 제 마음을 알아서인지 주변사람들은 모두 예전처럼 저를 “정숙아~”하고 불러주었고, 결혼 후 제 남편도 저의 속마음을 읽었는지 본명을 그대로 불어주었습니다. 그냥 부른 게 아니라 남들이 다 들으라는 식으로 온 동네가 들썩하게 부르곤 했습니다. “정숙아! 야, 김정수~욱!”
그렇게 저를 불러주고 사랑해준 남편이어서 그 모진 길을 따라 예까지 왔나 봅니다. 저는 분명 미신을 믿는 사람이 아니지만 그렇게 저의 이름을 지켜준 남편이어서 나의 행복도 있다고 믿습니다.
“여보, 사랑해요. 정말 고마워요!” 이 이야기로 하고 싶은 다른 이야기를 모두 대신하려 합니다. 감사합니다!
20014년 11월, 정숙으로 불리는 경숙이가.
2014-12-02 “강제북송후 1년간 고문”… 또 건넌 두만강 외
경비대에 발각되면 죽어야지….’ 지난달 15일 오전 5시쯤. 살얼음이 얼기 시작한 두만강을 바라보며 임영미(가명·30) 씨는 속으로 되뇌었다. 지옥 같았던 교화소에 다시 끌려가느니 차라리 죽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조심스럽게 왼발을 두만강에 담갔다. 며칠간 비가 내리지 않았던 덕에 물살은 세지 않았다. 북쪽 경비대 초소는 조용했다. 강을 건너며 임 씨는 ‘이제 살았다’고 생각했다.
임 씨가 중국 땅을 다시 밟은 것은 4년 만이다. 2003년 3월 꽃다운 열아홉 살의 나이로 국경을 넘었지만 자유는 없었다. 중국인 남성과 강제로 결혼해 랴오닝(遼寧) 성 농촌 마을로 떠났다. 임 씨보다 아홉 살 많은 중국인 남편과의 사이에서 아들(현재 11세)도 한 명 낳았다. 2010년 8월 이웃 주민의 신고로 새벽에 갑자기 집으로 중국 공안이 들이닥쳤다. 국경을 넘은 지 7년 5개월 만에 임 씨는 강제 북송됐다. 북한으로 보내진 임 씨는 보위부에 끌려가 1년간 매일같이 맞으며 취조를 받았다. 온갖 고문으로 몸이 망가졌지만 다시 교화소로 끌려갔다. 1년 4개월 만인 2012년 말 만신창이가 된 몸을 끌고 교화소에서 나왔다. 자포자기한 상태로 있던 임 씨에게 먼저 탈북해 한국에서 살고 있는 동생이 연락을 했다. 한국으로 오는 것을 돕겠다고 했다. 마지막 기회였다.
지난달 15일 오전 10시쯤 중국 지린(吉林) 성 옌지(延吉)의 한 호텔에서 탈북 5시간 만에 채널A 취재팀과 만난 임 씨는 아직 긴장이 채 풀리지 않은 표정이었다. “빨리 한국에 가서 감시받지 않고 살고 싶어요. 동생도 만나고 자리 잡으면 중국에 두고 온 아이도 데려와야죠.”
옌지=김민찬 채널A 기자 mckim@donga.com
“짐승처럼 살순 없어” 7000km 탈출… 재탈북뒤 인신매매 당한 김연미씨
10월 24일 오후 라오스 수도 비엔티안에서 만난 탈북자 김연미(가명·24) 씨는 ‘드디어 끝났다’는 안도감 덕분인지 환한 표정이었다.
함경북도 온성 출신인 김 씨는 1997년 7세 때 부모님과 함께 북한을 탈출했지만 중국에서 살던 중 공안에 붙잡혀 강제 북송됐다. 김 씨의 아버지는 보위부에서 받은 고문으로 숨졌다. 김 씨는 어머니와 함께 풀려났지만 아버지를 죽인 북한 땅에서 더는 살 수 없었다. 어머니가 먼저 국경을 넘었고 소식이 끊겼다. 홀로 남아 외할머니 집에서 살던 김 씨는 17세가 되던 2007년 목숨을 걸고 다시 두만강을 건너 탈북했다.
하지만 김 씨를 기다리고 있었던 건 인신매매의 덫이었다. 탈북 직후 조선족 브로커를 통해 랴오닝(遼寧) 성의 한 농촌마을로 팔려간 김 씨는 곧바로 중국인 남성과 결혼했다. 김 씨는 “어린 나이여서 인신매매인 줄도 몰랐다. 그저 강제 송환되지 않기 위해선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어느 날 시외숙모에게서 “2만 위안(약 360만 원)에 사왔는데 다시 팔 수도 없다”는 말을 듣고서야 자신이 팔려왔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남편과 시댁 식구들의 냉대를 더이상 견딜 수 없었던 차에 자신이 팔려왔다는 사실까지 알게 된 김 씨는 한국행을 결심했다. 6세 아들이 눈에 밟혔지만 더이상 짐승 취급을 받으며 살 수는 없었다.
김 씨는 한국으로 간 탈북자들을 통해 탈북자 구호단체에 도움을 요청했고 두리하나선교회 천기원 목사를 만나게 됐다.
김 씨가 중국에서 비엔티안에 오기까지 이동한 거리는 7000km, 한 달 가까이 걸렸다. 김 씨는 10월 중국 랴오닝 성에서 출발해 라오스 접경지역인 윈난(雲南) 성 쿤밍(昆明)까지 차로 열흘을 달렸다. 위기도 있었다. 도중에 교통사고가 나 쿤밍에서 만나기로 약속했던 날에 도착하지 못한 것. 천 목사 측은 김 씨와 연락이 끊기자 구조를 포기하고 한때 철수하기도 했다. 어렵사리 김 씨는 천 목사와 다시 연락이 닿았고, 쿤밍에서 만나는 데 성공했다. 10월 23일 새벽을 틈타 라오스 국경을 넘은 뒤 10시간을 차로 이동하는 강행군 끝에 24일 주라오스 한국대사관이 있는 비엔티안에 도착했다. 김 씨는 다음날 천 목사와 함께 한국대사관으로 들어갔다.
대사관으로 들어가기 전 김 씨는 “한국에 가면 강제 북송된 뒤 재탈북한 어머니를 찾고 싶다”고 말했다. 11월 중순 한국에 들어온 김 씨는 하나원에서 사회정착 교육을 받고 있다.
비엔티안=정동연 채널A 기자 call@donga.com
탈북자 신동혁씨 “아버지께 죄스럽지만 입 다물지 않을 것”
[北 ‘라오스 탈북 청소년’ 처형설]
탈북자 신동혁씨 WP 기고… “北수용소 실상 폭로 나의 의무”
“아버지가 계속 고통을 받고 있는 것에 대한 죄스러움에도 불구하고 나는 입을 다물지 않을 것이다. 정의롭지 않은 것이 정의로운 것을 덮을 수는 없다.”
최근 북한 당국의 공개 비난을 받은 정치범수용소 출신 탈북자 신동혁 씨(33·사진)가 지난달 30일 미국 워싱턴포스트 칼럼을 통해 “바깥세상의 모든 이들처럼 나는 아직 북한 정치범수용소에 있는 이들에 대한 의무가 있다”며 북한 당국의 협박에 굴하지 않고 처참한 인권 실상을 계속 폭로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북한의 대남선전매체인 ‘우리민족끼리’는 지난달 신 씨의 아버지(70)를 등장시켜 신 씨를 ‘거짓말쟁이’ ‘강간범’ ‘도둑’이라고 비난했다.
그는 북한에서 자신의 아버지를 선전 영상에 출연시킨 데 대해 “돌아가신 줄로만 알았던 아버지로 하여금 거짓말을 하도록 강요하기 위해 북한 정권이 아버지를 계속 고문하고 있음을 알게 됐다”고 말했다. 이어 “아버지를 보니 북한을 방문하고 싶은 생각이 간절하다”며 “하지만 그것은 14호 정치범수용소에 대한 조사를 포함한 공개 방문이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워싱턴=신석호 특파원 kyle@donga.com
12-04 "나는 엄마다!"...한 탈북여성의 수기
2003년 6월, 세 딸을 남겨두고 북한을 떠났습니다. 당시 제가 살던 량강도엔 ‘중국에 가서 3개월만 일하다 오면 장사밑천은 넉넉히 벌어올 수 있다’는 소문이 나돌았고 나는 그 소문의 한 끝에 매달렸던 것입니다.
그냥 앉아서 굶어죽을 수만은 없다는 결심이었고 딱 3개월만 일하고 돌아온다는 생각으로 울며불며하는 애들과 헤어졌습니다. 당시의 제가 애들에게 해 줄 수 있는 것이란 남은 재산을 탈탈 털어 마련했던 안남미 쌀 7㎏이 전부였습니다.
하지만 두만강을 건너 내가 찾아간 중국은 ‘3개월 만에 장사밑천’을 잡기는 고사하고 제 몸 하나 간수하기조차 어려운 곳이었습니다. 짐승처럼 팔려 다녀야 했고 중국공안의 눈을 피해 인적 없는 산골짝에서 1년여를 헤매기도 했습니다.
겨우 정신을 차리고 뒤를 돌아다보니 집을 떠난 지가 벌써 2년이 되었는데 내 손엔 단돈 백 원도 쥐어져 있지 않았습니다. 적어도 인신매매꾼들의 촉수에서 벗어났다고 생각되던 시점부터 한국에 올 때까지 2년6개월간 하루도 쉬지 않고 중국인이 운영하는 한 식당에서 죽기 살기로 일하며 돈을 모았습니다.
얼마간 돈이 모아져 고향으로 돌아가려던 때, 저와 같은 처지에 있던 한 탈북여성을 만났습니다. 내가 북으로 돌아가려 한다는 것을 안 그 여인은 대뜸 치마를 내리고 자신의 하체에 생긴 커다란 흠집을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 “돌아간다는 건 미친 짓이다”고 딱 잘라 말했습니다.
그리고 나서 여인은, 중국에서 번 돈을 가지고 북으로 갔던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설마 죽이지야 않겠지~' 하면서 고향으로 돌아갔었는데 어떻게 알았는지 이른 새벽에 보위지도원이 집으로 들이닥쳤고 그 후로 노동단련대와 감옥에서 죽을 고생을 경험했다는 이야기였습니다.
여인은 “항문까지 벌어져 다 죽게 된 나는 시체처럼 거적에 말려 감옥 밖으로 던져졌다”고 말했습니다. 그렇게 죽어간 사람이 헤아릴 수도 없다는 이야기까지는 그냥 그러러니 하고 들었는데 “항문은 물론 음부에까지 손을 넣어 숨겨둔 돈이 없는가를 살피고 ‘중국에서 번 돈은 법을 어기고 번 것’이기 때문에 일전도 본인에게 돌려주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듣고 나선 마음을 고쳐먹고 말았습니다.
돈을 빼앗다니, 그럼 내가 이곳 중국 땅에서 짐승보다 못한 삶을 살면서 받았던 수모와 멸시는 무엇으로 보상받을 텐가. 아니, 수모와 멸시는 나 혼자만의 가슴에 꼭꼭 묻어둔다고 해도 이 못난 엄마를 기다리며 몇 날 몇 밤을 뜬눈으로 지새웠을 어린 딸애들은 또 어떻게 바라본단 말인가...
고민 끝에 한국행을 결심했고 지도를 펼치고 중국에서 라오스로, 라오스에서 또 다른 3국을 경유해 대한민국으로의 마지막 귀착지인 태국에 도착했습니다.
중국어는 물론 영어 한마디 번지지 못하는 제가 단신으로, 그것도 여성의 몸으로 5천 km나 되는 탈출을 감행해 대한민국 영사관에 왔다는 사실을 처음엔 누구도 믿지 않았습니다.
혹시는 가족이, 때로는 남자가 그 먼 길을 에돌아 자유를 찾았더라는 이야기는 들은바 있지만 여자 혼자서, 안내인도 없이 이곳까지 왔다는 것은 믿을 수 없는 일이라던 해당국 난민관계자에게 저는 이렇게 말했던 것 같습니다.
“저에겐 딸이 있습니다. 그것도 세 명씩이나요. 굶어죽게 된 자식을 세 명 씩이나 둔 엄마가 두려 울게 뭐가 있겠습니까.”
* * *
대한민국에 와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여자 혼자서 북한을 떠나 대한민국까지 왔다는 사실이 못미더웠는지 조사기관사람들이 여러 번 탈북 동기며 탈출경로를 물어보았고 석연치 않은 부분이 많다고 머리를 기웃거리기까지 하는 것이었습니다. 더욱이 제 소지품에서 나왔던 세 개의 금가락지는 같은 탈북자들까지도 저의 탈북행위에 의심을 품게 만들어 버렸습니다.
제가 조사관이라고 해도 '장사밑천을 잡으려 중국으로 나왔었고 돈을 벌지 못해 3년6개월 만에 남조선으로 왔다‘는 말을 믿을 것 같지가 않았습니다. 더욱이 금붙이까지 몸에 지닌 사람이 안내인도 없이 중국과 라오스 등을 거쳐 한국으로 왔다는 사실을 믿을 수가 없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튿날 저는 소지품 깊숙이 보관해 두었던 금붙이 몇 개를 들고 담당조사관을 찾아갔습니다. 그리고 내가 왜 죽을 고생을 하며 단신으로 대한민국까지 왔는가에 대해 자초지종을 설명 드렸습니다.
“돈 때문이었습니다...” 라고 입을 연 저는 손가방에서 물 낡은 사진과 편지 한 장을 꺼내 놓았습니다. 제가 고향으로 돌아갈 생각을 접고 한국행을 결심하면서 딸들에게 보냈던 편지에 대한 회신이었습니다.
어느 옛날에 찍었던 사진과 함께 큰애가 써 보낸 편지였는데 너무나 자주 읽어서 글조차 제대로 보이지 않을 만큼 보풀이 인 편지였고 안에는 이런 내용이 들어 있었습니다.
“...엄마 보고 싶어요. 얼마나 보고 싶은지 엄마만 생각하면 그냥 눈물이 나요. 옥이는 벌써 아홉 살이 되었는데 혹시라도 엄마가 밤에 오면 어쩌는가 며 대문을 열어놓군 해요. 낮에는 우리 식구 모두가 밥 빌어먹으려 시장으로 나가기 때문에 엄마 말씀대로 문을 꼭꼭 잠그고 나가지만 돌아와서는 아무리 무서워도 문을 열어 놓는답니다.”
“...그래도 엄마. 돌아와서는 안돼요. 며칠 전에도 3작업반에 살던 순이네 엄마가 중국엘 갔었다는 게 들통 나는 바람에 어디론가 끌려갔어요. 그래서 순이는 학교도 못 나와요. 매일처럼 울고 있는 순이를 보면서 난 차라리 지금처럼 우리엄마가 돌아오지 않는 게 낳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옥이도 엄마가 보고 싶지만 감옥 가는거 보다 돈 버는게 더 좋다고 이야기 했어요. 그러니 엄마 우리걱정은 하지 말고 그곳에서 잘 지내세요. 꼭요!”
방안엔 침묵만 감돌았고 사진과 편지를 다시 가방에 담으며 저는 말했습니다. “원래도 그랬지만, 그 편지를 받는 순간부터 저는 남은 인생은 내 것이 아니다고 생각했습니다. 또 내가 살고 애들이 사는 길은 여기 한국으로 오는 것 밖에 다른 길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혹시라고 그 험난한 여정에 나를 위해 한 푼이라도 쓰게 될까봐 중국에서 벌었던 돈을 모두 여기 금붙이와 바꾸었구요”
* * *
이 작은 보물들을 꼭 사랑하는 세 딸애의 손에 끼워주리라 결심하고 대한민국에서의 삶을 시작했습니다. 처음 1년은 중국에서 면식을 익혔던 교포여성과 함께 건설현장에서 철골을 나르는 등의 허드레 일을 했고 2년차에 접어들어서는 건설현장의 식당주방에서 그릇 가시는 일을 도맡아 했습니다.
그렇게 천만 원을 모아 애들을 데려올 ‘밑천’을 마련했습니다. 나를 기다리는 애들을 생각하면 하루 한시가 급한데 이렇게 벌다보면 언제 세 아이를 다 데려올 수 있을까 싶어 돈을 더 벌 수 있는 일자리를 찾았고 그래서 들어간 곳이 강남 어느 병원의 간병인 자리였습니다.
처음엔 환자와 나사이의 소통이 문제였고 때로는 의사선생님의 지시조차 제대로 알아듣지 못했지만 소통은 하면 되는 것이고 의사선생님의 지시는 반복해서 듣고 따르면 그만이었습니다. 남북한이 아무리 다른 제도라 할 지라도 같은 언어를 쓰는 사람들인데 내가 무슨 별나라에서 왔다고 소통이 문제가 되겠는가고 스스로 자문하면서 말입니다.
환자들에게서 매일처럼 받아내는 대소변도 생각하기 나름이었습니다. 나는 나대로 아픈 사람을 돌보고 이런 순간들이 모여 딸자식을 데려올 기회가 만들어진다고 생각하니 대소변이 그냥 대소변이 아니라 생명수처럼, 때로는 순금처럼 아름답게 보이기까지 했습니다.
어느날, 월급 타는 날이라고 모두들 기뻐하는데 병동 한구석에 말없이 서있는 저에게 내가 담당한 환자의 부인이 조용히 다가왔습니다. 그러면서 무슨 걱정이라도 있는 가고 다정히 물어왔습니다.
아무생각 없이 “딸애를 데려오려면 아직 돈이 부족해요”라고 대답하고 나서 하던 일을 묵묵히 하고 있는데 다시 부인이 다가와 제게 묻는 것이었습니다. “얼마나 부족한데요?”
“3백 만원이요”
“그럼 어떻게 딸들을 데려오나요?”
이렇게 시작된 대화는 밤새 계속되었고 이튿날부터 저는 ‘북에 남겨두었던 세 딸을 데려올 작전’을 펴기 시작했습니다. 대한민국에서 제가 2년 반 동안 모은 돈에 엄마(이후로 저는 부인을 엄마라 부르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참에 그때까지 전 하루도 쉬지 않고 일했다는 것을 자랑하고 싶어요!)가 보태준 돈 3백만 원을 어느 브로커에게 보내주었습니다.
꼭 6개월 만에 12살, 16살, 19살 먹은 세 딸이 꿈속에서처럼 저의 눈앞에 나타났습니다.
하나원 면회실에서 엄마를 외치며 품에 안기던 애들 앞에서 그동안 참고 참아온 눈물을 마음껏 쏟으며 한 애 한 애의 손가락에 가락지를 끼워주었습니다. 그리고 말했습니다.
“애들아, 엄마가 정말 미안해. 내가정말 잘못했다. 에미가 되가지고 그 험한 세상에 너희들을 내 놓았었으니 정말 할 말이 없다. 영심아, 순희야, 옥이야! 엄마가 정말 미안해 응?! 용서 할거지?”
그러는 저에게 목을 꼭 그러안고 매달려 있던 막내 옥이가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만났으면 됐어. 살아서 만났잖아. 돈 벌러 갔다가 죽은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그치 언니?”
그렇고말고. 그렇고말고...
그 모진 세월을 견디지 못해 죽은 사람이 얼마고 헤어져 사는 사람이 또 얼만데...
죽지 않고 살아서 이렇게 만난 우리는 죽은 사람들의 몫까지 열심히, 그리고 죽기내기로 잘 살아야 한다는 각오를 다지고 또 다졌습니다.
그렇게 대한민국에 우리 온 가족이 모여서 산 세월이 벌써 5년이 되었습니다. 큰 딸애는 대학을 졸업하고 모 회사의 신입사원이 되었고 둘째와 셋째는 대학교와 고등학교에서 마음껏 공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저도 엄마의 도움으로 금융설계업체의 금융 강사가 되었습니다.
이 꿈같은 일들은 모두 우리의 조국인 대한민국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입니다. 오늘 우리 가정이 누리는 이 모든 행복역시 탈북민들에 대한 대한민국국민들의 각별한 사랑과 배려가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생각합니다.
세상천지가 열백번 뒤집힌다고 해도 대한민국은 우리 가족의 조국입니다! 이곳 대한민국에서 엄마로 살아간다는 긍지를 안고 내일도 모레도 열심히 살겠다는 약속을 드리며 여기서 저의 이야기를 마치려 합니다.
감사합니다. 그리고 정말 고맙습니다!
2014년 12월 탈북민 이금순
2014-12-31 아들을 보따리처럼 둘러메고 두만강을 건넜다
1999년 7월, 아들을 보따리처럼 둘러메고 두만강을 건넜습니다. 이렇게 살다가는 온 가족이 굶어죽겠다 싶어 택했던 극단적인 선택이었습니다.
사품 치는 두만강 한복판에 들어서니 예상했던 것 보다 물살도 세고, 수심도 깊었습니다. 세 살 난 아들애를 머리위로 쳐 들다보니 아내의 허리춤을 놓아버렸습니다.
어푸, 어푸 하며 저만큼 떠 밀려가는 아내를 보는 순간 엉뚱하게도 ‘아들과 마누라가 강에 빠지면 누굴 먼저 구하겠냐’던 친구들과의 옛 이야기가 떠올랐습니다.
그땐 “당연히 아들”이라고 말했었지만 막상 당하고 보니 아내가 더 소중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니, 아들이나 처나 소중하기는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기를 쓰고 떠 밀려가는 아내의 허리춤을 다시 잡았고, 그 와중에 강물을 들이켜 정신을 놓아버린 아들을 다시 들춰 업고 중국의 장백 땅을 밟았습니다.
2000년 4월에 ‘하나원’을 나왔고 그해 6월부터 막노동을 했습니다. 함께 ‘하나원’생활을 했던 영학이 명석이, 혁철이와 함께 고층건물 위주의 ‘광고판설치작업’을 맡아 했었습니다.
광고 설치작업도 아무나 하는 일이 아니다는 것을 그때 알았습니다. 저 같은 경우는 북에서 배운 것이 막노동이었기 때문에 험하고 어려운 일은 무엇이나 자신이 있었고, 마침 광고 설치를 전문으로 하는 사장님을 알게 되어 그 일에 뛰어든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막상 일을 시작하고 보니 광고 설치라는 게 북에서처럼 대못과 철사가 있으면 마구 떼고 부수는 ‘간판설치작업’이 아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목공술로부터 용접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기술이 필요한 작업이었고 수개월, 때로는 일하는 내내 안전교육 등이 필요한 종합인력 시장이 그곳이었습니다.
그래도 저는 한 달에 130만원, 어떤 때에는 200만원씩 받기도 하는 그 ‘일’이 좋았고 월급봉투를 받아들고 기뻐하는 아내의 모습이 너무 좋아 6년 동안 친구들과 서울 시내 곳곳의 대형건물들에 광고를 설치하고 닦아내는 일을 해 왔습니다.
광고판 설치작업이라면 얼추 떠오르는 것이 ‘사고’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아내는 늘 출근길에 나서는 나를 보고 조심하라는 말을 하곤 했습니다. 그럼에도 잦은 사고는 늘 일어났고 40대 초반의 나이에도 허리며 다리가 쑤시지 않는 날이 없었습니다.
일을 시작한지 3년 정도 되는 해엔 광화문 근처의 대형건물 옥상에서 작업을 하다가 바람에 날려 5미터 높이의 구조물에서 떨어진 적도 있었습니다. 대퇴부에 금이 갔고 손가락뼈도 두 개나 부셔졌던 이른바 ‘대형사고’였습니다.
그날 병원으로 달려온 아내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용남아빠. 이젠 우리도 남들만큼 먹고 살고 있으니 험한 일은 그만 합시다. 북에서 생활할 때에 비하면 중앙당 간부만큼 먹고 살고 있는데...좀 쉬운 일을 하면서...”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아, 우리가 정말 북한의 중앙당 간부만큼 먹고 사는 구나...’고 생각했습니다. 동시에 ‘아니, 중앙당 간부만큼 먹고 살자고 죽을 고생을 하며 이 땅에 온 것이 아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또 한편으로는 탈북자동지회 송년모임때 황장엽 전 노동당비서가 하던 이야기도 떠 올랐습니다. “우리 자신들 뿐 아니라 우리 후대들의 행복을 위해 탈북을 결심했던 것 아니냐. 오늘의 나는 찢기고 터지더라도 우리 자식들에게는 우 리가 겪은 고통을 물려주지 않겠다는 각오가 없다면 탈북의 의미도 사라진다”
2000년 6월부터 2006년 2월까지...그렇게 6년을 일하고 저는 대한민국에서의 두 번째직장을 얻었습니다. 월급도 많이 나오고 정규직이라 여러 면에서 안정적인데 문제는 지금껏 내가 살아온 서울과 멀리 떨어져 있는, 그것도 거제도라는 섬에서 생활해야 한다는 단서가 있었습니다.
고민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이제 하나밖에 없는 아들애가 학교에도 갈 때인데 섬이라니...그러면 자식과 아내는 또 어떻게 해야 하나를 생각하면서 몇밤을 뜬눈으로 지새웠습니다.
그러는 내게 아내가 다가와 “당신이 결심하면 나는 어디든지 함께 갈 준비가 되어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2006년 3월, 지금 살고 있는 거제도로 이사를 왔고 그때부터 지금까지 거제도의 ‘건하공업’이라는 곳에서 용접사로 일하고 있습니다. 지금 월 평균수입이 430만원이고 현재 아들은 어머니와 함께 경기도 인천에서 대학입학준비에 열중하고 있습니다. 작년부터 34평짜리 새 아파트에 입주해서 살고 있다.
저는 정말 소원 풀었습니다. 대한민국에 오길 정말 잘했습니다. !
- 김용학 탈북민
■ 2015-04-24 “남한에선 악착같이 살면 희망이 생겨… 물도 아껴 먹었어요”
인터뷰 말미, 기자는 김은향(가명·47) 씨에게 “어릴 적 꿈은 뭐였어요? 한국에 와서 그 꿈이 좀 가까워진 것 같나요?”라고 물었다.
“솔직히 생각해본 적이 없어요. 북한에서는 어린아이에게 ‘꿈이 뭔지’ 묻지 않아요. 그냥 되는 대로 살아야 하는 곳이거든요. 한국에 와서 제일 좋은 것은 ‘앞으로 어떻게 살지’ 꿈꿀 수 있는 자유가 있다는 거예요.”
○ 탈북 북송 재탈북… 우여곡절 끝에 밟은 한국땅
김은향 씨의 고향은 함경북도 무산. 김 씨가 처음 탈북한 것은 2000년 9월이었다. ‘중국에 가서 석 달만 일하면 큰돈 벌 수 있다’는 말에 두만강을 건넜다. 8세 아들에게 ‘꼭 돌아오겠다’는 약속을 남긴 채. 하지만 큰돈을 만질 거라는 말은 거짓말이었다. 중국 이곳저곳을 떠돌다 2003년 11월 결국 북송됐다. 북송되기 전 머물렀던 옌볜. 그곳에서 만난 사람들은 ‘팬티도 남한 것이라면 좋다’며 한국행을 꿈꿨다. 지금껏 알던 남한의 모습은 진실이 아니었다. 북송 후 온갖 고초를 겪으면서도 4개월 만에 다시 북한을 탈출했다. 아들에게는 ‘한국에서 다시 만나자’고 약속했다.
김 씨는 중국에 나와 있는 한국 기업의 식당에서 일하며 정보를 얻었다. 몽골 국경을 넘어 14시간 넘게 사막을 걸었다. 2006년 5월 2년여 만에 한국 땅을 밟았다. 5개월 후 하나원을 나왔지만 막막했다. 정착금 300만 원이 전부였다. 집앞에는 브로커가 돈을 받겠다고 기다리고 있었다. 남은 돈은 100만 원이 채 되지 않았다. 처음 한 일은 막노동이었다. 겨울 내내 공사판에서 못질을 했다. 의류 공장에 일자리를 얻었지만 텃세를 못 이겨 나왔다. 그나마 안정적 일자리를 얻은 것이 2007년 8월. 서울 어린이대공원 근처의 편의점 씨유(당시 패밀리마트)에서 아르바이트를 시작하면서부터다.
○ 편의점 알바에서 사장까지…다시 재회한 아들
“클렌징 폼 어딨어요? 근데 아줌마 말투가 왜 그래요?”
편의점 일은 막노동보다 몸은 덜 힘들었다. 하지만 한국 사람들이 일상적으로 쓰는 외래어가 김 씨에게는 외계어였다. 더 견디기 힘든 건 무시와 편견이었다. 매일 밤마다 ‘북한에서 왔느냐’는 질문을 받는 건 고욕이었다. 그래도 악착같이 견뎠다. 마실 물 살 돈을 아끼려고 편의점에 있는 끓인 물을 비닐봉지에 담아 집에 가져갔다. 한 번은 지하철을 탔다가 그 봉지를 놓쳐 물바다를 만들었다. 바닥에 흐른 물에는 김 씨의 눈물이 절반이었다.
2년 9개월 동안 편의점에서 일한 김 씨는 편의점을 직접 운영해보지 않겠느냐는 제안을 받았다. 북한에서도 장사를 해봤던 김 씨는 도전했다. 사장 직함을 달고 일하니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도 달라졌다. 김 씨는 현재 서울 중랑구 공릉로의 ‘씨유 묵동도깨비점’을 비롯한 점포 2곳을 갖고 있다. 그렇게 번 돈으로 아들을 데려왔다. 2012년 12월, 스무 살이 된 아들과 6년여 만에 재회했다. 한국에 와서 만난 새 남편과 함께 지금은 새 가족을 꾸렸다.
“어떤 한국 사람들은 ‘살기 너무 힘들다’고 얘기하더라고요. 하지만 ‘열심히 살려야 살 수 없는 곳’도 있는데 한국은 훨씬 낫죠. 탈북자들도 죽을 고비를 넘겨 한국에 와놓고 정작 여기에서는 보조금에 의지한 채 하루하루 버티는 거 보면 안타까워요. ‘꿈꿀 수 있는 자유’를 그토록 원했던 사람들인데 말이죠. 저는 앞으로 더 열심히 꿈꾸며 살 거예요. 남을 돕는 것도 꿈 중 하나죠. 남북한 모두에 작은 희망이 되고 싶습니다.”
탈북 여성 김은향 씨가 자신이 경영하는 서울 중랑구 공릉로 ‘씨유 묵동도깨비점’에서 인기 상품을 한가득 안고 함박웃음을 짓고 있다.
장승윤 기자 tomato99@donga.co
한우신 기자 hanwshin@donga.com
05-25 노동당 권력 꿈꾸던 北 소녀, 南서 ‘무소유 행복’ 찾다
탈북민 첫 출가… 북한산 덕륜사 도현 스님의 ‘부처님오신날’
▲“출가하기 전까지 내 얼굴엔 근심과 그늘이 가득했었죠.” 22일 동국대 정각원 앞에서 만난 도현 스님의 얼굴이 환하게 빛났다. 올해 동국대 불교학부에 입학해 통일을 고민하는 동아리 ‘하울림’을 만들었다. 김경제 기자 kjk5873@donga.com
《 열일곱 살 북한 소녀 김수영(가명)은 조선노동당 일꾼이 되고 싶었다. 그래서 고등중학교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입대했다. 2000년의 일이었다. 나진시 그의 집은 부유했다. 595m²(약 180평)짜리 집에는 그랜드피아노가 있었다. 먹고 남은 음식 찌꺼기를 동네 개 키우는 집에 주면 ‘이 집에서 오늘은 뭘 먹었나’ 막대기로 휘휘 저었다. 》
아버지는 러시아에서 나무를 수입했다. 어머니는 나진시당 간부였다. 돈 많은 아버지는 당에 뇌물을 바쳤다. ‘아버지와 달리 뇌물을 받는 당 일꾼이 될 테다.’ 꿈은 순조로웠다. 그와 상관없는 집단 싸움으로, 복무하던 강원 통천 부대 전체가 2008년 강제 전역당하기 전까지는….
○ 자유 찾아 온 한국서 부(富)를 좇다
그렇게 귀향한 그는 직장에 나가지 않았다. 북한에서는 출근하지 않아도 처벌받는다. 억울함을 시위할 자유조차 없다. 2008년 도당 간부가 들이닥쳤다. 딸을 보호하려 목소리를 높이던 아버지가 돌연한 심장 쇼크로 세상을 떴다.
그 충격으로 석 달 뒤 국경을 넘었다. ‘한국에 가 북한이 이토록 나쁘다고 알리면 모든 게 바로잡힐 수 있을까….’
2009년 천신만고 끝 한국 땅을 밟았지만 종일 방을 닦아도 때가 지지 않는 임대아파트가 실망스러웠다. 기대했던 한국의 모습과 달랐다.
마음의 그늘은 육신의 병으로 옮아갔다. 왼쪽 목덜미에 귤만 한 혹이 났다. 원인 모를 열꽃이 피었다. 온몸에 벌건 물집이 다닥다닥 피어올랐다.
2년 만에 미국행을 택했다. 중국인의 뉴욕 네일숍에서 일했다. 많이 벌 땐 한 달에 1만 달러(약 1100만 원). 한국서 맛보지 못한 풍족함을 누렸다. 뉴욕 맨해튼에서 명품을 쇼핑했다. 하지만 그가 거액을 빌려 준 중국동포가 돈을 갚지 않아 시비가 붙었다. 중국동포가 경찰을 부르자 추방의 두려움에 캐나다로 도망쳤다. 두 번째 한국행은 자포자기 심정이었다.
북한에선 원하는 걸 마음대로 하는 자유를 얻으려 권력을 좇았다. 한국에선 돈이 있어야 자유를 누릴 수 있다고 생각했다. 움켜쥐려 했으나 갖지 못한 권력과 부(富) 탓에 불행하다고 느꼈다.
○ 한국에서 속옷을 기워 입다니
2013년 그는 산속의 절을 떠돌았다. ‘북한에 가 죽는 게 나을까….’
서울 구기동 북한산 자락 조계종 덕륜사에 발길이 닿았다. 노(老)스님과 젊은 주지스님 둘이 사는 작은 절.
빨랫줄에 넌 속옷이며 양말을 온통 이불 천으로 기웠다. ‘대한민국에도 저렇게 사는 사람이 있다니….’ “불자들이 부처님께 정성으로 기도한 시줏돈, 우리 돈 아닙니다. 함부로 써 사리사욕 채우면 죄 짓는 겁니다.” 주지인 학수 스님의 일성이었다. 마음이 동했다.
2013년 7월 한 달을 매일 3000배를 한 뒤 출가했다. 북한에서도 남 옷 안 입던 그가 처음으로 남이 입던 승복을 입었다. 지난해 2월 경북 김천 직지사에서 정식 예비 승려가 되는 사미니계를 받았다. 계를 받던 날 대웅전에서 일주문까지 1보 1배 하며 이마와 무릎이 다 까졌지만 행복했다. 탈북민 출신 첫 승려가 되는 순간이었다.
도현(度炫) 스님(32). 부처님의 법도로 세상을 밝히라는 것. 노동당 간부가 되고 싶었던 북한 소녀가 받은 법명이다.
○ 권력-부, 내 것 아니라고 깨달으니 행복
승복에 받쳐 입는 속옷, 공양할 채소까지 가장 싸고 소박한 것만으로 채운 그의 수행 생활은 ‘무소유’다. 불자들이 입고 싶고 사 먹고 싶은 것 참아 공양한 쌈짓돈 허투루 쓰면 참된 수행이 아니라는 신념 때문이다.
“북한서 동경한 권력, 한국서 가지려 했던 부, 모두 본디 내 것이 아님을 깨달으니 이제야 진짜 자유와 행복이 오네요.”
올해 1월 어머니가 그의 탈북으로 처형당했다는 비보를 접했다. “부모 잡아먹은 자식”이라는 죄책감으로 제정신이 아니었다. “훌륭한 부모님이 수행자의 삶으로 안내해 주고 떠난 것”이라는 주지 스님의 말에 마음을 다잡았다.
“북한에 있을 때 헐벗은 많은 이들을 보고도 ‘나는 이렇게 살고 저들은 저렇게 사는구나’라고만 생각했어요. 그들을 도우리라 결심합니다. 유일 영도 체제에 구속되지 않은 삶을 선택할 자유가 있음을 알리려 합니다. 한국에 뿌리내리지 못한 탈북민을 끌어안으려 합니다.” 그의 얼굴에 은은한 빛이 감돌았다.
윤완준 기자 zeitung@donga.com
06-11 당간부 때려눕히고 탈북한 처녀작업반장
북한을 떠나 대한민국에 입국한지도 이젠 3년이 지났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세월이다. 아직은 뭐가 뭔지 잘 모르지만 내 생활은 흐르는 물처럼 평범하게 흘러간다.
내가 이 남한에 와서 가장 강하게 받은 충격은 자유와 선택에 대한 고마움이다. 저 북녘 땅에서는 상상도 못했던 자유로움, 그리고 나의 선택에 따라 생활을 설계하고 만들어가는 이러한 사회에서 내 후반생을 살게 되었다는 것이 그저 꿈만 같다.
대한민국을 오늘과 같이 건설하는데 나는 벽돌 한 장 나르지 못했다. 고스란히 차려준 밥상 앞에 앉아 먹기만 하면 되는 염치없는, 그러나 복 받은 사람이기도 하다. 그래서 한 때 북한에서 내 모든 것을 바쳐 헌신적으로 일한 것이 더 허망하게 느껴지는 것 같다.
내 고향은 함경북도 성진시 하송마을이다. 집안의 맏이로 태어난 나는 어려서부터 그 사회가 요구한 삶에 희망을 두고 나름대로 열심히 살았다.
인생의 황금기라 부르는 20대 처녀시절, 나는 농업전문학교를 졸업하자마자 큰 포부를 안고 성진시에서 벼농사를 전문하는 하송농장에 자원 진출했다. 힘든 농사일이지만 나는 기쁨으로 받아들이고 열성을 바쳤다.
20대 초반의 여인이 포전에서 살다시피 애지중지 벼 모를 키우고 가꾸는 모습은 옆에서 보기에도 아름다웠던 것 같다. 북한에서 벼농사는 모두 사람 손으로 한다. 때론 모내는 기계를 사용할 때도 있지만 기름과 부속품이 없어 결국엔 손으로 하게 된다.
7월이면 무릎을 치는 벼에 종아리가 긁혀 시뻘건 뱀 지나간 자국이 생겨도 쓰리다는 생각을 가져 볼 새도 없다. 일이란 하고 싶어 하면 아무리 고된 일이라도 힘든 줄을 모른다. 지금 생각하면 그런 악조건에서 어떻게 그 일을 즐겁게 하게 되었던지 스스로 의문도 들지만 당시에는 그럴 수밖에 없었다.
당시 내 인생목표는 이러했다. 25살 전에 무조건 노동당에 입당하리라. 그 다음 벼농사 달인이 되어 농장을 이끄는 훌륭한 리더가 되겠다는 거였다.
나는 그럴만한 사회적 뿌리가 있었다. 할아버지는 이웃 길주군 당 간부고 아버지는 하송농장 관리위원장이다. 나만 노력하면 무엇이든 이룰 수 있는 든든한 바탕이었다.
그러던 우리 집에 시련이 닥쳐왔다. 내가 20살을 갓 벗은 때였다. 어느 날 아버지가 사고를 당했다. 홍수로 제방 둑이 무너지는데 그걸 막으려고 사투를 벌리던 중 터져 나오는 흙탕물에 두 눈을 크게 다친 것이다.
지방병원에서는 이미 파열된 눈동자를 치료할 능력이 없어 평양 적십자 병원에까지 올라갔지만 결국 아버지는 시력을 잃고 말았다. 자연히 관리위원장 자리에서도 밀리고 우리 집도 점점 몰락의 길을 걷게 되었다.
자식이란 나와 여동생, 이렇게 딸만 둘이라 아버지의 한숨은 그칠 줄을 몰랐다. 만약 내가 아들이었다면 아버지 뒤를 이어 하송농장의 새로운 주인이 될 수도 있었지만 그런 희망마저 가질 수 없어 아버지의 실망은 더 커졌던 것 같다.
누가 안내하지 않고는 바깥출입도 변변히 못하던 아버지는 점차 성격이 이상하게 변해가기 시작했다. 걸핏하면 화를 내고 시중을 드는 어머니를 이유 없이 구타하기도 했다. 평소 별로 즐기지 않던 술을 그때부터 입에 달게 되었고 일단 취하면 남편과 아버지가 아닌 ‘폭군’으로 변했다.
어머니는 지쳤다. 당시 18살이던 여동생은 군에 입대한 후여서 자상하게 아버지를 돌봐 줄 수 있는 사람은 나밖에 없었다.
평생 농사꾼으로 일한 아버지의 솥뚜껑 같은 손이 내 뺨을 칠 때마다 나는 울면서 아버지께 매달렸다. 왜 이러시냐고, 이러시면 병이 더 악화될 수밖에 없는데 좀 진정하면 안 되냐고 하소연했다. 그러면 아버지는 방구들이 꺼지게 한숨을 내쉬고는 다시 고래고래 소리쳤다.
“다 필요 없어! 너 같은 것이 내게 무슨 필요가 있단 말이냐, 으흐흐흐”
한생을 바쳐 받들어 온 당을 위해 이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몸이 되고 뒤를 이어 줄 아들마저 없으니 성 쌓고 남은 돌 같은 자신의 존재에 환멸을 느꼈을 것이다.
결국 어머니도 더는 어쩔 수 없어 아버지를 포기하는 것 같았다. 소리 없는 눈물을 흘리시며 물끄러미 나를 쳐다보는 어머니의 눈길엔 살아 온 지난날에 대한 회한이 가득 담겼다.
“아버지는 일밖에 모르셨다. 23년 함께 살았지만 언제 한 번 가정을 위해 애정을 기울인 적이 없었어. 그저 수령 당 조국 그것이 아버지의 전부였지. 난 그런 네 아버지를 언제 한 번 탓한 적이 없었고. 그런데 이건 좀 너무하구나! 아들 낳지 못한 내 죄가 칠거지악(七去之惡)이라지만 그게 어디 사람의 마음처럼 되는 일이냐? 이젠 나도 지쳤다! 그래도 가장 가까이서 아버질 받들어 온 나인데 지금에 와서 어떻게 이럴 수가 있느냔 말이다.”
세뇌란 참으로 무서운 것이었다. 아버지의 한생에서 교훈을 찾을 대신 나 역시 아버지처럼 그 길을 따라 나섰다. 당을 위해 한생을 바쳐 가는데 아들이면 어떻고 딸이면 어떠랴. 나는 이를 악물고 여린 여자로서 견디기 힘든 고비를 넘기며 열심히 농장 일을 했다.
정성이 지극하면 돌 위에도 꽃이 핀다고 나는 끝내 농장 당위원회의 인정을 받아 영광스럽게도 조선노동당 후보당원으로 입당하였다. 그리고 청년작업반의 분조장, 얼마 후에는 작업반장이 되었다.
내 마음속엔 오로지 아버지의 뒤를 이어 농장주인인 관리위원장이 되어 아버지 앞에 떳떳이 나서겠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그렇게 되면 아버지도 달라지리라 기대하면서 말이다.
후보당원의 된지 8개월이 지난 어느 날 밤 (후보당원 1년이 지나면 정당원이 된다. 그 1년이란 준비기간 뭔가 잘못되면 정당원이 될 수 없다.) 40대인 작업반 부문당 비서가 나를 찾았다.
반장과 비서는 자주 만나게 되지만 이날따라 비서의 눈치가 이상했다. 말로는 작업반의 이러저러한 문제를 토의한다고 했지만 나는 여자의 감각으로 그가 지금 다른 목적이 있다는 것을 이내 눈치 챌 수 있었다.
항상 만나면 마주 앉던 그가 이 날 밤만은 괜스레 곁에 바싹 붙어 앉아 치근거리기 시작했다. 뜨거운 입김을 풍기며 다가드는 비서의 행위가 역겨워 나는 그 자리를 피했다.
급히 볼일이 있다는 핑계를 대고 뛰쳐나가는 나를 그는 분명 곱지 않은 눈길로 지켜봤을 것이다. 아니 감히 당 비서의 뜻을 거역하는 방자한 행위에 복수로 가슴 끓였을지도 모른다.
며칠 후 나는 비서가 보낸 밀봉된 작은 편지를 작업반원으로부터 전달 받았다. 무심히 밀봉을 뜯었을 때 나는 거기에 적힌 내용을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오늘 밤, 10시 우리 집에 들 릴 것. 집이 비었으니 노크 하지 말고 그냥 들어 올 것. 사실 나는 반장때문에 더 살고 싶은 생각이 없다. 그러니 제발 내 소원을 들어 달라. 일 밖에 모르는 여자여서 한 남자의 가슴에 끓는 이 피멍의 깊이를 다는 알 수 없겠지만 이제 지내보면 알게 될 것이다.
여자란 혼자서는 아무 일도 이룰 수 없는 것. 무슨 일이던 뒤를 받쳐주는 믿음직한 동반자가 없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나는 반장이 무엇을 원하며 무엇을 위해 그처럼 어려운 고비를 참고 넘는지 잘 알고 있다. 내가 진심으로 방조하고 싶구나. 내가 없으면 네가 무엇을 원하던 이루기가 어렵다는 것을 알았으면 한다.기다리겠다. 난 꼭 올 것이라고 믿는다.”
나는 몸을 떨기 시작했다. 비서라는 사람이 지금 내게 무엇을 요구하는지 너무도 분명해 모멸감으로 달아오르는 얼굴을 감출 수 없어 밖으로 뛰쳐나왔다.
나는 포전으로 흘러드는 큰 수로 뚝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뚝위에 앉아 흐르는 물을 들여다보는 눈에는 눈물이 가득 고였다. 그리고는 서럽게 울었다. 무엇인가 갈쿠리 같이 무섭고 억센 것이 내 명줄을 쥐고 마구 조이는 것만 같았다.
내 곁으로 조심히 다가오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작업반에 온지 얼마 안 된 제대군인인데 내게 남다른 관심을 보인 청년이다. 그것이 스칠 수 없는 순정임을 나 역시 모르지 않았으나 아직은 때가 아니어서 내색을 하지 않았을 뿐이다.
그의 부드러운 손이 내 어깨를 감쌌다. 그 순간 왜 그렇게도 아직은 생소한 그 품에 안기고 싶었던지. 하지만 치밀어 오르는 오열을 참으며 나는 퉁명스런 어조로 내쏘듯 말했다.
“무슨 일이예요? 여긴 어인일루? 얼른 가세요. 난 지금 혼자 있고 싶거든요.” 무겁게 가라앉은 그 남자의 말이 내 귀를 스쳤다.
“힘을 잃지 마오. 내 언제나 반장을 지켜보고 있으니.”
한 달 쯤 지난 후, 그날 저녁에 작업반 전체가 모여 간단한 음식을 먹으며 오락회를 했다. 한 달간 일한 정형을 총화 지은 후였다. 술 한 잔씩 마시고 나서 농장 원들은 신이 나서 노래 가락을 뽑았다. 모두 노래를 잘 불렀다.
내 차례가 왔다. 나도 왠지 기분이 들떠 또래 처녀들의 박수장단에 맞춰 춤까지 추며 노래했다. 그때 부른 노래가 보천보전자악단 전혜영의 휘파람이다. 노래가 끝나자 박수가 일어났다.
그런데 박수 소리는 요란했으나 나를 쳐다보는 많은 눈길은 어떤 사연을 담은 듯 냉정해 보였다.나의 느낌은 틀리지 않았다.
모임이 끝나고 그 남자가 내게 다가왔다. 조용한 나무그늘 속에 잡아 세우며 격하게 말했다.
“반장은 얼굴에 철판을 깔아 둔 거요? 부끄럽지도 않소? 어떻게 그럴 수가. 그렇게 흥겨운 춤이 대체 어데서 나오는 거요?”
“도대체 무슨 일인데요?”
“정말 몰라서 묻소?”
나는 대답을 못하고 고개를 가로저었다.
무언가 안 좋은 일이 있다는 생각이 든 순간 쳐다보는 내 눈에 또다시 가랑가랑 눈물이 고였다. 그것이 일순간 그 남자에게 연민을 불러일으킨 것 같았다.
한결 부드러워진 그가 들려준 말은 곧 생벼락이 되어 내 가슴에 박혔다.
나만 모르고 있었다. 작업반 선전실에서 누구누구와 방탕한 짓을 벌린 처녀 작업반장, 그러고도 새침 떼는 철면피한 여자, 저렇게 두 개의 얼굴을 가진 여자가 어떻게 반장이냐, 옳아 그래서 어린나이에 반장을 하는 거겠지, 나에 대한 흉흉한 소문이었다.
아, 모닥불을 뒤집어 쓴 듯 화끈거리는 얼굴을 감출 수 없어 그 남자에게서 황급히 물러난 나는 어디라 없이 정신없이 뛰었다.
아버지에게도 부끄러웠다. 역시 여자란 집안 재산일 뿐 밖에 나와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나약한 존재라는 것을 증명해주는 것 같았다.
정말 그것이 억울했다. 그렇지 않다는 것을 확인시키기 위해 지난 3년간 열심히 일해 왔건만 공든 탑이 무너지는 것 같아 나는 정말 그 순간을 이겨내기가 힘들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 내가 정말로 준비된 사람이었다면 모든 것을 모르는 척 참아내며 그냥 일에만 충직했어야 했다.
그러나 나는 그렇지 못했다. 누가 이런 소문을 냈는지 밝히고 싶었다. 찾아서 따져 묻지 않고서는 순간도 편히 숨 쉬고 살 수 없었다. 그때 나는 이미 이성을 상실한 상태였다.
나는 그 소문의 시작을 찾아 헤맸다. 그리고 끝내 소문의 출처가 다름 아닌 부문당 비서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 내 분노는 하늘을 찔렀다. 나로서도 나를 걷잡을 수 없었다. 얼마 후 열린 또 다른 총화 마지막에 나는 연단에 올라가 열변을 토했다.
“나는 지금까지 당 조직을 어머니 당으로 알고 오로지 당을 위해 한목숨 바치려는 각오로 열심히 살았습니다.”
이렇게 서두를 뗀 후 그간 있었던 모든 사실을 전 작업반원 앞에서 쏟아냈다.
그 자리에는 당사자인 부문당 비서도 있었다. 그의 얼굴은 익은 꽈리처럼 벌겋게 변해갔다. 자기 욕망이 거절당하자 비열하게도 헛소문을 돌려 한 젊은 여성의 정치적 생명까지 빼앗으려는 이런 치한이 어찌 당 비서라는 호칭을 달고 행세할 수 있냐는 규탄의 목소리가 내 입에서 거침없이 쏟아졌다. 듣다못해 그가 손을 번쩍 쳐들며 일어섰다.
“반장이 지금 제정신을 가지고 말하는 거요? 누가 누구를 어쨌다는 거야?”
“듣고도 모르겠어요? 아직도 내게는 당신이 준 그 치사한 편지가 그대로 있어요. 자, 이것입니다.”
나는 주머니에서 그 쪽지 편지를 꺼내 소리 내어 읽기 시작했다. 그러나 첫 서두를 떼기도 전에 그의 커다란 손이 바람소리를 내며 내 입을 강타했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다.
입을 싸쥔 손가락 사이로 붉은 피가 배어나왔다.정신이 아찔해지는 순간 나는 뒷벽에 세워져 있던 노동 삽을 움켜쥐었다.
입에서 피를 흘리며 삽을 휘두르는 내 몰골은 분명 한을 품은 귀신의 모습과 같았을 것이다. 그러나 억센 손이 삽자루를 잡아 빼앗아 버렸고 바닥에 주저앉은 나는 울음과 저주가 섞인 목소리를 악을 쓰며 뱉어냈다.
이 사건은 곧 리당을 거쳐 군당까지 통보되었다. 결국 나는 아버지를 이어 농장 주인이 되려는 꿈으로부터 거리가 먼 낙오자로 점 찍혀 일반 농장원으로 내려앉게 되었다. 후보 당원 9개월 만에 제명되어 낙오자 교양대상이 되고 말았다. 집에 들어와서까지 아버지의 거쿨진 주먹에 사정없이 맞았다.
“되지못한 년, 네가 당이 뭔지 알기나 해? 그걸 모르는 네가 무어? 관리위원장이 된다고? 어허, 하늘이 진노할 일이다.”
정말 그때 나는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죽고 싶은 생각밖에 없었다. 모든 것이 이렇게 하루아침에 물거품이 되다니!
연 며칠 자리에 누워 일어나지 못하는 내게 어머니가 조용히 다가오셨다.
“왜 그랬느냐? 삽만 들지 않았어도 네가 조금은 유리할 수 있었는데! 그것 때문에 넌 더 큰 오욕을 들쓰게 되지 않았니?”
나는 어머니 말씀이 무슨 뜻인지 얼른 납득이 가지 않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당이란 위대한 거란다. 설사 무언가 납득이 안가도 이성을 가지고 대해야만 하는 신성한 것이기도 하고. 네가 그렇게 달려 든 것은 개인이 아닌 당에 도전한 것이기에 절대 용서받을 수 없는 거란다. 아버지의 공적, 그리고 길주 군당에 계시는 할아버지의 힘이 있어서 네가 그만큼이라도 용서를 받은 거란다. 이젠 좀 정신을 차렸으면 좋겠다.”
“그럼 당 간부의 탈을 쓴 그 인간은 잘했다는 거예요?”
“이것 봐라. 아직도? 그도 인간이다. 하지만 당 비서라는 직함을 단 일꾼인데 거기에 삽을 휘두른 네가 어찌 당원이 될 수 있다는 거냐? 넌 멀었어. 그렇게 정면으로 대드는 것은 앞으로 당에 대들 수 있다는 증거가 아니고 무엇이겠니? 그래 갖고 네가 바라는 자리에 오를 수 있겠느냐?”
나는 이불을 뒤집어썼다. 그리고는 소리 내어 울었다. 한참 울고 나서야 무언가 안겨드는 것이 있었다.
그랬다. 당을 위해 일신의 모든 것을 깡그리 바쳐 일한다는 것은 그보다 먼저 언제 어디서나 당의 권위를 존중하는 사상적 준비가 필요한 것이다. 그것 없이는 아무것도 이룰 수가 없다.
지금 생각해 보면 쓴 웃음만 나는 일이지만 그 당시에는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살던 그 사회에는 개인의 얼굴이란 없다. 오로지 당에 대한 충성만이 사람의 진가를 가리는 시금석이 되었다.
차라리 그때 그 부문당 비서의 요구를 들어주고 그를 이용했더라면 나는 보다 쉽게 관리위원장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당시 젊은 나의 이성은 절대 그것을 허용할 수 없었다.
나는 점점 살기가 싫어졌다. 겉으로는 번지르르한 구호만 부르며 자기 이속만 챙기는 권위자에 대한 환멸도 깊어갔다. 그러던 중 충격적인 소식이 전해졌다. 군대에 나갔던 여동생이 훈련도중 사고로 숨졌다는 소식이었다.
어머니는 식음을 전폐하고 밤새워 우셨다. 18살의 꽃나이로 군에 입대 할 당시 그것이 대견해서 어깨를 두드려 주던 어머니, 이제 제대할 나이도 가까워 은근히 동구 밖을 바라보며 기다리던 어머니 앞에 전사자 통지서라니! 하늘이 무너지는 일이다.
아버지는 술에 절어 고래고래 소리쳤다.
“왜 울어? 자식을 나라에 바친 자는 우는 것이 아니야. 자랑으로 생각해야지. 운다고 살아오는가? 장해. 그래도 둘째가 장하단 말이야! 내 명예를 지켜줬어.”
나는 아버지의 그 소리에 더 참을 수 없었다. 아무리 술기운이라 하지만 이건 좀 도를 지나친 것이다.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명예를 지켜 주다니. 도대체”
“이년아, 네가 무너뜨린 우리 가정의 대들보를 둘째가 일으켜 세운 것 아니냐? 그 애로 인해 우린 다시 전사자 가족이 되었단 말이다. 너 같은 건 열 명이 있어도 그 애 하나만도 못해!”
아버지의 혀 꼬부라진 외침은 불길처럼 내 가슴을 지졌다. 더는 그 자리에 있을 수 없어 나는 자리를 박차고 밖으로 뛰쳐나왔다. 그 후 나는 수면제를 다량으로 복용하고 세상을 이별하려 했다. 그러나 이상해진 나를 감시하던 어머니의 발 빠른 조치로 목적을 이룰 수가 없었다.
돌아볼수록 부모님께 죄스럽다. 당이라는 거물을 위해 개인을 희생해야만 했던 삶, 그 속에서 나의 아버님은 오로지 충성 하나만을 알고 살았다. 그러나 그것마저도 아버지에게 말년의 기쁨을 안겨주진 못했다.
내가 탈북한 후 완전히 실명이 된 아버지는 지금도 떠나간 이 딸을 부르며 나라걱정만 하고 있다고 한다. 나는 지금 나를 위해 사는 사람이 되었다. 나를 위해 열심히 일할수록 인정받는 사회가 바로 대한민국이다.
살아본 사람만이 알 수 있는 나라, 다시는 태어나선 안 되는 사회, 오로지 한사람만을 위해 수천만이 노예로 세뇌되는 땅, 갖은 권모술수로 자신을 미화하는 곳, 그곳에는 진정한 인간의 삶이 없었다.
이것이 지나온 가슴 아픈 일을 적으며 내가 하고 싶은 말이다.
2015년 1월 최춘명, 출처 : 탈북자동지회
동아일보 주성하기자
06-18 “북한, 나 같은 사람 수천만이 사는 곳”
탈북 재미동포 조지프 김 영문 증언록 ‘같은 하늘 아래’
▲‘같은 하늘 아래’의 표지(오른쪽)와 저자 조지프 김 씨.
4월 30일 미국 뉴욕 유엔본부에선 유엔 주재 한국대표부와 미국대표부 공동 주최로 ‘피해자들의 목소리, 북한 인권 대화’라는 제목의 간담회가 열렸다. 탈북자 조지프 김(김광진·25), 제이 조(28), 김혜숙 씨(53)가 초청돼 북한 인권 참상을 생생하게 증언했다. 이들 중 16세 때 중국으로 탈북해 17세 때 미국으로 들어온 김 씨만 처음부터 끝까지 영어로 발언했다. 김 씨는 2013년 세계적 강연 행사인 테드(TED)에도 출연해 ‘북한 한 가정의 사랑받는 아들에서, 중국 길거리의 꽃제비(어린 노숙자)로, 그리고 미국의 평범한 청년으로’ 변화해온 극적인 인생을 영어로 20여 분간 소개했다. 이 동영상은 140만 명 이상이 시청했다.
그런 김 씨가 273쪽짜리 영어 책을 출간했다. 제목은 ‘같은 하늘 아래―북한의 기아(飢餓)에서 미국의 구원으로(Under the Same Sky-From Starvation in North Korea to Salvation in America)’. 한국어가 아닌 영어로 먼저 출간된 최초의 탈북자 증언록이 아닐까 싶다.
김 씨는 아버지가 굶어 죽고, 어머니와 누나도 먹을 걸 찾아 뿔뿔이 흩어진 뒤 혼자 탈북했다. 그 후 자신의 처절한 삶을 지탱해준 사람들을 책에서 ‘닻(anchor)’이라고 표현했다. 중국의 한 교회에서 숨어 지내던 자신을 데려가 먹여주고 재워준 조선족 할머니, 중국 공안의 눈을 피해 자신을 미국 총영사관으로 데려가고 결국 미국행 비행기까지 타게 해준 미국의 대표적 북한 인권 단체 ‘링크(LiNK·Liberty in North Korea)’의 에이드리언 씨, 그리고 미국 초기 정착을 도와준 흑인 수양부모 등. 그의 여러 닻 중 남한이나 남한 사람은 없었다.
김 씨가 처음 제대로 접한 남한 사람은 버지니아 주 리치먼드에서 고등학교를 다닐 때 만난 한국 유학생이나 한국계 미국인들. 김 씨는 강연이나 언론 인터뷰에서 “미국 친구들은 남한 사람과 북한 사람을 구분하지 못하지만, 남한 친구들은 내가 북한 출신이란 걸 (말투 등으로) 금세 알아챈다. 그래서 미국 친구들이 더 편하게 느껴질 때가 있었다”고 말했다. 그는 “학교에서 친구 사귀기가 가장 어려웠다. 하루는 초콜릿을 가지고 가서 급우들에게 나눠주며 ‘(이 과자 줄 테니) 나랑 친구해 줄 수 있어?’라고 물은 적도 있다. 북한에선 ‘먹을거리’를 주면 모든 문제가 해결됐기 때문에 그렇게 한 것인데 미국 친구들은 정말 황당해했다”고 적었다. 이런 ‘웃을 수도, 울 수도 없는 기막힌 에피소드’는 미국 독자들의 호기심을 자극할 것 같다. 미국 사람은 고기만 먹는 줄 알고 중국을 떠나기 전 일부러 ‘마지막 야채’를 챙겨 먹은 일, 남자 허리둘레가 27인치밖에 안 돼 미국 옷가게에선 맞는 옷을 찾지 못했던 일화 등….
김 씨는 그동안의 미국 생활에 대해 “점점 더 행복하지만 상상했던 것 이상으로 더 낯설다”고 했다. 그래서 “먹을 음식과 잠잘 숙소만 있으면 만족했던 북한 생활의 단순함이 그리워질 때도 때때로 있다”고 솔직히 털어놨다.
“사람들은 북한에 대해 잘 몰라요. 핵무기, 독재, 공산주의, 김정은 정도를 떠올리죠. 가장 중요한 한 가지를 빠뜨리죠. 그 안에 저 같은 사람들이 수천만 명 살고 있다는 사실 말입니다.”
그는 결국 “‘같은 하늘 아래’ 같은 사람이 살고 있다”라고 말하고 싶다.
뉴욕=부형권 특파원 bookum90@donga.com
06-22 통일역군이 될 그날을 준비하며…
1990년대 후반부터 개시된 엄혹한 북한의 ‘고난의 행군’이 낳은 탈북민들이 근 20년이라는 시간 속에 한국 사회 곳곳에 자리 잡았다. 그동안 한국에 들어온 탈북민 중에는 각 분야 박사도 15명이 배출됐고 한의원장도 10여 명이 나오는 등 전문가도 두 자릿수로 부쩍 늘어났다. 외진 섬마을의 이장과 광역시의 동장에 그치지 않고 나라의 국사를 의논하는 여당 국회의원까지 탄생한 일도 전 국민이 알고 있는 사실이다.
왜 우리 사회에서 탈북민 출신 이장에서 국회의원까지 탄생했을까. 나는 이들이 사회주의 북한과 자본주의 남한의 판이한 두 제도를 경험해 민족의 숙원인 통일 한국을 지향하는 우리 사회에서 간과할 수 없는 ‘통일 인적자원’의 측면을 갖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전대미문의 3대 독재 세습을 완성한 북한에서 총성과 기근은 지금도 현재진행형이다. 탈북민들은 열악한 현실을 경험한 뒤 자유와 풍요에 혼이 나갈 것 같은 한국 사회와 생활 속에 녹아있다. 하지만 어제나 오늘이나 자나 깨나 고향 산천에 대한 향수는 떨칠 수 없는 천륜(天倫)과도 같다. 그리하여 나는 통일 후 저 불모의 북한 땅을 개건하고 개발, 발전시키고 싶다는 소명의식을 갖고 있다.
북한에 태와 청춘기를 묻은 나는 한국살이가 너무나도 힘들었다. 한국 생활 10여 년 사이에 자살 충동을 수회 겪었다. 탈북민에 대한 사회의 편견, 자본주의 경쟁 바다 속의 연약한 생명, 그럼에도 살아 숨쉬어야만 하는 가련함, 시간의 갈피갈피에서 어느 한 순간도 수월한 고비와 지경이 허용 안 되는 사회와 현실이었다. 탈북민으로 고진감래를 경험한 선배로서 힘들어하는 탈북민 후배들에게 나 자신의 경험과 노하우를 공유하고 함께 울고 웃으며 시련의 고비 고비들을 넘기고 싶다. 그리하여 다가오는 통일 한국의 유용한 인적자원이 돼 북한 땅 고향을 개건하는 매니저가 되고 싶은, 자그마하지만 강한 욕구가 늘 나를 일어서고 분발하게 한다.
그렇기에 “자활이 우선”이라고 본 남한 선배의 주장(5월 20일자 A28면 ‘탈북민 통일기둥論, 자활이 우선이다’)의 맥락은 탈북민으로서 통일역군임을 자임하는 내게 채찍인 동시에 가슴 아픈 상처로도 안겨온다.
이혜경 ㈔새삶 대표 약사 탈북 여성 박사 2호
11-28 호호!! 좌충우돌 탈북민 정착 경험담
만원
언제면 하나원 수료 날이 될까 고민 아닌 고민을 했던 연이는 지역으로 나오는 대로 혼자만의 ‘자유’를 느꼈다.
‘지역하나센터’ 선생님들이 ‘지역 적응 교육’을 받아야 한다고 그렇게 말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놀기에 급급해 센터엔 다른 구실을 대고 가지도 않았다.
어쩌다 보니 그는 친구랑 시내를 구경한답시고 고층건물에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게 되었다.
유리엘리베이터 안에서 내려다보이는 도시는 아찔하면서도 아름답고, 아파트 단지와 동네 놀이터는한 폭의그림 같지 않은가?
그는 받아야 한다는 지역 교육은 뒤로 한채 풀어놓은 망아지마냥 즐거운 시간들을보내고 있었던 것이다.
상점가에서 이것저것 구경을 하던 연이와 친구는 집으로 가려고 다시 그 멋져 보이는 유리 엘리베이터앞으로 왔다.
그런데 이게 뭐지? 분명히 올라올 때는 그냥 올라왔는데 내려가려 하니 ‘만원’이란다.
갑자기화가 났다. 자본주의 사회인 것은 알겠지만 이건 너무하지 않은가?
차라리 처음 올라올 때부터 내려갈 때는돈을 받는다고 하면이 높은 곳엔 올라오지도 않았을 텐데 말이다.
둘은 금방 나와서돈 만원이 아니라돈 천원도 귀할 때인데 엘리베이터에 만원이나 내고 내려갈 수는 없었다.
좀 전에 즐거웠던 기분은 어디로 간지 모른채 둘은 힐을 신은채 힘들게 20층 건물을 내려왔다. 그러고는 곧장 하나센터로 향했다.
연이: “선생님, 이건 좀 너무한것 같습니다.
“선생님: “뭐가요?”
연이: “어떻게 엘리베이터를 타는데 만원을 받을 수가 있나요? 버스도 천원밖에 안하는데…”
선생님: “네에~~?”
연이: “친구랑 ◯◯고층건물에 놀러갔다가 올라갈 때는 그냥 올라갔는데, 내려올 때는 만원이라고 해서 그냥걸어서 내려왔어요. 다리 아파 죽겠어요.”
선생님: “네에~~?”
상담사선생님은 놀람을 금치 못했다.
“연이 씨, 그건요..돈 ‘만원’이 아니라 엘리베이터에 사람이 많이 탔기에 ‘만원’이라는 말이에요.그것 봐요. 오라는 센터는 오지 않고, 혼자 놀러 다니니까 그렇죠. 하하”
연이: “네에~~?”
이번엔 연이가 놀란다. 미리 알았다면 다리 아프게 걸어 내려오지 않았을 텐데 말이다.
때론 외래어 한마디, 보이는글 하나 때문에 겪어보지 못한 문화적 차이로 인해 곤욕을 치르기도 하는 이가바로 초기 정착 탈북민이다.
‘고가도로’와 ‘저가도로’
요즘 남자들은 네비게이션이 길을 가르쳐줄 때 보면 마누라보다 낫다는 말들을 많이 한다.
북에서는 이런 말하는 희귀한 기계를 구경도 못한 직행 경수 씨는 볼수록 네비가 신기했다.
어른 손바닥만한 네비는 승용차가 도로를 달릴 때마다 무엇이라고 쉴 틈 없이 조잘댄다.
취직을 하려고 상담사와 함께 회사 면접을 보러 가고 있는데, 승용차 안에 설치되어 있는 네비는 또 혼자서 열심히 말을 하고 있지 않는가!
한참 차가 달리고 있는데 경수 씨의 목소리가 높아가고 있다.
“상담사님, 저 기계가 지금 고가도로로 진입한다고 알려주고 있는데 왜 그냥 갑니까? 고가도로로 가지 말고, 저가도로로도 갈 수 있는 것 아닙니까?돈을 아껴야지요!”
“네에???”
순간 경수 씨랑 동행했던 상담사는 당황했다. 목소리 톤이 높고 성격이 급한 그가 당장이라도 상담사의 운전대를 돌릴 것 같았다.
“아, 경수 씨 그거는요…”라고 하는 사이 이미 차는 고가도로에 진입을 했고, 그럴수록 경수 씨는 혼자서 성질난 듯이 말을 한다.
“한국 사람들이 돈 잘 쓰는 건 알지만, 만날 고가도로만 이용하나요? 저가도로를 이용해도 되는 거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북한은 진흙길도 차가 막 달리는데 여기 길은 시멘트길인 것이 얼마나 좋습니까?!”
당황한 상담사는 어떻게 말을 해야 할지, 생각할 여유도 없이 목적지에 도착을 했다.뭔가 말을 하긴 해야겠는데 직행인 경수 씨가 상처를 받을까봐 말도 꺼내지 못하고,
순간 돈을 아낄줄 모르는 개념 없는 사람이 되어버린 상담사는 경수 씨를 면접장으로 들여보냈다.
추석에 있던 일
박 동무는 한국에 와서 처음으로 추석이라는 것을 맞이하게 되었다. 마땅히 갈 곳이 없었던 그는생각 끝에 동두천에 사는 안 동무를 찾아 가기로 했다.
안 동무는 하나원에서 친구로 가깝게 지내던사이였다. 때마침 얼마 전에 처음으로 중고차도 구입했겠다, 핑계에 아내도 옆에 태우고 드라이브삼아 가는 길에 절로 신바람이 났다.
한참을 기분 좋게 달리는데, 아이고야…. 백미러를 보니 경찰차가 쫓아오고 있었다. 그러지 않아도 집을 나오자마자 불법 유턴을 하였는데 딱 걸린 것 같았다.
박 동무는 “바퀴야 날 살려라” 줄행랑을 놓기 시작했다. 하지만 경찰도 떨어지지 않고 계속 쫓아오는 것이었다.
할 수 없이 차를 세우는 수밖에 없었다. 아내에겐 걱정 말라고 안심시켜 놓고, 박 동무는 북에서 하던 대로 경찰한테 돈봉투부터 내밀었다.
그런 박 동무를 경찰은 어처구니없는 얼굴로 쳐다보았다. 그리고 하는 말이.“아니, 타이어가 터졌는데 그냥 달리면 어떻게 합니까.”
그제야 경찰이 따라온 이유를 알게 된 박 동무. 멋쩍어 돈을 주머니에 다시 넣고 타이어를 보는데,이거 진짜 야단이다.
처음 운전할 때는 새 차보다 중고차가 났다고 해서 샀는데, 타이어가 터질 줄이야.
경찰이 떠난뒤 박 동무는 이리저리 궁리끝에 북한에서 하던 대로 타이어를 땜질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런데 고무풀도 없고 고무튜브도 없었다. 다행이라면 친구가 사는 동두천까지 10리정도 남았다는것이었다.
박 동무는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사정을 설명한 뒤 만사를 젖혀두고 자동차 타이어를 땜할 것들을 준비해 나오라고 했다.
친구인 안 동무도 전화를 받고 보니 사정이 참 딱하긴 했다. 고무풀을 사랴튜브를 얻으랴, 여기저기 뛰어다녔지만 그것도 쉽지가 않았다.
어렵사리 박 동무가 갖고 오라는것을 구한 안 동무. 친구가 멀지 않은 곳에 있다고 하니 뛰어가야겠다고 생각했다. 북한에서 10리는코앞인데, 친구를 위해 그 정도야 달리지도 못할까 싶었다.
메고 지고 땀을 뻘뻘 흘리면서 달려갔더니, 목이 빠지게 기다리던 박 동무는 수고했다는 말은 하지않고 “왜 이제야 왔냐”고 야단이다.
억울한 안 동무가 “그래도 쉬지 않고 달렸으니 지금이라도왔지”라고 변명을 했지만, 박 동무는 “왜 버스나 택시를 타고 오지 않았냐”고 다시 화를 낸다.
이렇게 티격태격 네가 옳다 내가 옳다 다툼질을 하면서 타이어를 떼어 땜질을 하려던 차에 아까지나갔던 경찰차가 돌아오다 옆에 세웠다.
“아니, 두 분 여기서 뭘 하고 있습니까?”
“보면 모릅니까. 타이어가 고장이 나서 고치고 있지 않습니까.”
“예비 타이어는 이럴 때 쓰라는 것이지 괜히 가지고 다닙니까?”
“돈이 없어 예비 타이어는 사지 못했습니다.”
그 대답에 경찰이 의아한 표정을 짓는다.
“그럴 리가 있나.”
슬슬 다가온 경찰이 자동차 트렁크를 열었다. 그리고 하는 말.“이건 예비 타이어가 아니고 뭡니까?”
“예??….”
출처: 남북하나재단잡지 동포사랑
12-12 댄싱 스타로 거듭난 남남북녀 부부
브라질을 대표하는 삼바나 발리댄스는 언젠가부터 우리에게 친숙하게 다가와 댄스스포츠가 되었다.
특히 TV 오락 프로그램 중 하나인 ‘댄싱 위드 더 스타’는 지하의 음침한 곳에 숨어있던 발리댄스를 지상의 건전한 세상으로 끌어올린 유명한 프로그램이다.
경기도 수원시에는 2014년, 제4회 코리아오픈 다이아몬드컵 댄스스포츠 선수권대회에서 대상을 받은 부부가 살고 있다.
팔색조 매력을 지닌 부인 박소현 씨와 그런 아내를 부드럽게 리드하며 이끌어가는 남편 이종혁 씨를 만나 사랑이야기를 들어보았다.
여자 이야기
2009년 초, 하나원을 나온 나의 고향은 함경북도 회령. 나는 담배공장에서 일하던 평범한 기능공이었다.
일찍 결혼하고 딸 하나 두었지만 고난의 행군시기 딸과 생이별을 하고 중국을 떠돌다가 한국까지 흘러왔다.
하나원을 졸업했을 때 나는 아무도 없는 이 땅에서 혼자 어떻게 살아가야 하나 걱정이 많았었다. 그러던 중 지인의 소개로 이종혁 씨를 만났다.
남자는 부자는 아니지만 성실하게 사는 사람이라고 자기를 소개했다. 인물도 훤칠하니 잘 생기고 진실되어 보여서 첫 눈에 호감이 생겼다.
한 번 두 번 만나며 서로를 알아갔고 사랑도 키워갔다. 어느 날, 남자친구가 나에게 신용카드를 건네 주며 말했다.
“먹고 싶은 것이나 사고 싶은 것이 있으면 이 카드를 쓰세요. 시장에서 쓰지 말고 백화점에서 써야 해요.”
당시 신용카드가 뭔지도 모르고, 돈의 단위에 대한 개념도 전혀 없던 나는 무엇이든 마음에 드는 것이 있으면 옷도 사 입고 맛있는 것도 먹으며 마음대로 카드를 긁었다.
가격이 얼마인지, 비싼 건지 싼 건지는 개의치 않았다. 카드만 있으면 언제든지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고 먹고 싶은것 을 먹을 수 있어 좋았다. 그런만큼 남자친구도 좋았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신용카드는 한도초과가 되고 우린 싸움을 하게 됐다.
“왜 나를 의심하는 거예요? 왜 사람을 속이냐구요.”
카드 한도초과가 된 것을 나를 의심하고 속이려는 남자의 소행이라고만 생각했다. 싸움은 항상 나로부터 비롯되었다.
성격이 급한 나는 앞뒤 상황 따지지 않고 화를 냈고 상대를 공격하고 비아냥댔다. 사람들이 문화차이, 성격차이 하더니 이래서 그러는구나 생각하기도 했다.
처음엔 이 사람을 믿지 못해 많이도 싸웠다. 일종의 기 싸움을 한 것 같다.
남자 이야기
나의 고향은 경상북도 영주, 아파트 도시가스공사에서 현장시공 관리자이자 감독관으로 일하고 있다.
나는 특전사에서 군복무를 하고 제대했다. 의협심도 강하고 지금까지 누구에게 져본 적이 없다.
그녀를 만나기 전에는 결혼 시기를 놓치고 혼자서도 잘 살 수 있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처음 그녀를 만났을 때는 순진하고 착해 보였다. 단번에 이 사람이다 싶어 먼저 사귀자고 고백했다. 신용카드를 건네주고 사고 싶은 물건이 있으면 사라고 했다.
어느 날 만났는데 왜 자기를 속이냐고 소리를 질렀다. 황당하고 당황스러웠다.
무슨 이유인지 물었더니 신용카드 한도초과를 왜 시켰느냐고 따지고 들었다. 몰라서 그러는 건지, 일부러 나를 시험하는 건지 잠깐 의심스러웠다.
그러다 그녀가 정말 아무 것도 모르고 있다는 걸 알고는 신용카드가 뭔지, 한도초과가 무엇인지 설명해주었다. 그
때 이 사람이 남한사회에 대해 너무 모르는구나 하는 걱정과 혼자 놔두면 무슨 일이 생길지도 모른다는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래서 서둘러 결혼을 했다.
물론 안 좋은 일만 있었던 건 아니다. 결혼을 한 뒤로 부인은 퇴근시간에 맞춰 밥상을 차리고 나를 맞이해준다.
정말 고맙다. 우리 어머니에게도 정성스럽게 잘한다. 어머니도 며느리를 좋아한다.
같이 살면서 이해하고 기다려주는 수밖에 방법이 없다. 북쪽이라고 더 못나고 남쪽이라고 덜 못나고의 문제가 아닌 것 같다.
남과 남이 만나 같이 살려고 약속을 했는데 이해하지 않고 기다려주지 않으면 안 되지 않는가.
지금까지 누구에게도 져본 적이 없는데 내가 유일하게 못 이기는 사람이 아내이다.
같이 살면서 보니까 지는 게 이기는 거고, 지면 마음도 편안하고 가정도 평안해진다.
지금까지 결혼을 후회해 본 적은 없다. 어떤 때는 말이 통하지 않지만 이해하려고 노력하고 뜻을 물으면 화해가 된다.
부부 이야기
함경북도 회령에서 태어난 박소현 씨와 경상북도 영주에서 태어난 이종혁 씨는 2010년 5월, 부부의 연을 맺었다.
박씨가 댄스스포츠를 배우게 된 것은 갑자기 불어난 살을 빼기 위해서였다. 남한에 와서 좋은 음식 먹으며 잘 산 증거를 보여주기라도 하듯 그녀의 몸은 하루하루 무게를 불려갔다.
처음에는 살을 빼려고 허브다이어트에 도전했다가 실패했다. 그러다가 댄스스포츠를 배우면 살도 빼고 운동도 된다는 말을 듣고는 당장에 시작하기로 결심했다.
그렇게 해서 댄스도 배우고 살도 비우며 그들은 알콩달콩 행복한 신혼을 보내고 있었다.
신혼의 단꿈에서 채 깨어나기도 전인 2011년 2월, 부인 박소현 씨는 갑상선암 선고를 받았다. 평소 몸이 무겁고 많이 피곤하던 그는 댄스를 배우는 것 때문에 몸이 힘든 것이라고만 생각했다.
그러나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온 암 진단으로 부인은 수술을 받고 한달 반을 병원 침상에 누워 있어야만 했다.
그때 남편은 병원의 작은 간이침대에서 쪽잠을 자며 부인을 지극정성으로 간호해 주었다. 그때 남편이 얼마나 고맙고 든든했던지 모른다.
수술 회복 후 댄스스포츠를 계속하며 여러 대회에서 상을 받은 부인은 욕심이 생겨 댄스스포츠 학원을 운영하고 싶었다.
그러나 손에 쥔 자금이 변변치 않아 혼자 속을 앓고 있었다. 이때 남편이 몰래 퇴직금을 먼저 정산하여 부인의 손에 건네주어 그 꿈의 문을 열어주었다.
그리고 2년째, 남편은 낮에는 밖에서 일하고 저녁에는 학원에서 부인과 학원을 지켜주며 20킬로그램을 감량하기도 했다.
이들 부부에게는 또다른 좋은 일이 기다리고 있다. 14년 동안 떨어져 지냈던 박소현 씨의 딸을 만날 날이 바로 며칠 앞으로 다가온 것이다.
4살에 헤어져 찾지 못했던 딸은 어느새 18살이 되었고 8월 12일이면 하나원을 퇴소한다. 이번호 책이 나올 즈음이면 그들은 딸과 함께 어딘가에서 휴가를 보내고 있을 것이다.
태어나서 한 번도 바다구경을 못한 소현 씨의 딸을 위한 종혁 씨의 배려로 계획된 휴가인 것 같다.
서로 다른 환경과 상황에서 다른 모양으로 살아온 두 사람, 아니 세 사람이 살아갈 세상은 앞으로 어떤 모습일지 궁금하고 기대된다.
열정이 가득한 댄스스포츠처럼 건강하고 활기차기를 응원한다.
출처 : 남북하나재단 잡지 ‘동포사랑’ 9월호 주성하기자
■ 2016-01-26 탈북민 체험담에 감동 받은 朴대통령
“자원봉사하며 나도 대한민국 국민이구나 자신감 얻어”
업무보고뒤 “훌륭한 일 하세요” 격려
▲2015년 4월 1일자 A10면.
“북한을 탈출해 한국에 온 뒤인 2007년 충남 태안의 기름 유출 사고 소식을 접했습니다. 안타까운 마음에 용기를 내 처음으로 자원봉사에 참여했습니다. 기름 묻은 돌을 닦으면서 ‘아, 내가 대한민국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기여하고 있구나’라는 자신감을 얻었습니다.”
박근혜 대통령은 22일 외교·국방·통일부 업무보고 토론에서 탈북민 출신 통일부 공무원 한미경(가명) 씨가 담담히 이어가는 말에 주의를 기울였다. 그는 “남한 주민들과 힘을 합쳐 탈북 청소년을 위한 바자회 개최 등 다양한 봉사활동을 계속하고 있다”고 말했다.
한 씨의 경험담은 계속 이어졌다.
“통일은 남한 사람들만이 아닌 탈북민도 동참해 함께 만들어 가는 것임을 보여주고 싶습니다. ‘먼저 온 미래’인 탈북민들이 사회에서 도움을 받기만 하는 존재가 아니라 당당한 사회 구성원으로서 사회 통합의 주춧돌이 되면 북녘에 있는 동포들에게 큰 영향을 미칠 것입니다. 서로 다른 남북을 하나로 이어 진정한 통합을 이루는 가교가 되고 싶습니다.”
박 대통령은 한 씨가 말하는 내내 한 씨와 눈을 맞추며 고개를 끄덕였다고 한다. 발언이 끝나자 크게 박수를 쳤다. 한 씨는 “업무보고가 끝난 뒤 박 대통령이 따로 악수하며 ‘꼭 훌륭한 일을 하세요’라고 격려해 큰 힘이 됐다”고 말했다. 청와대 관계자는 “대통령이 한 씨의 진솔한 말에 큰 감동을 받았다”고 말했다.
동아일보는 지난해 4월 연중기획 통일코리아 프로젝트 ‘받는 탈북민에서 주는 탈북민으로’ 3회 시리즈에서 사회봉사를 통해 남한 주민들과 어울려 사는 탈북민들의 모습을 조명했다. 그 이후에 통일부는 산하 남북하나재단을 통해 탈북민들의 ‘착한(着韓)봉사단’ 12곳을 선정했다. 한국에 정착했다는 뜻을 담은 명칭이다. 통일부는 올해 착한봉사단을 대폭 확대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윤완준 기자 zeitung@donga.com
02.04 북한 수용소에서 몸도 마음도 작아진 아이
나는 북한을 떠나 온지 10년이 된다. 고향을 떠난 많은 사람들처럼 나에게도 그곳에는 잊지 못할 사람들이 있다. 이웃들과 친구들, 친척들이 그곳에 있다. 그 중에는 북한인권법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떠올려 보는 어린 처녀애가 있다.
나는 그 애를 90년대 초 돌격대에서 만났다. 당시 열여덟 살이었고 체구는 마치 소학교 애들처럼 조그마 했다. 그 애의 이름은 현숙이었다.
그 애가 처음 찾아와 자기 이름을 소개할 때 나는 이상한 생각부터 했다. 이상한 생각이라는 것이 조그만 하고 갸날픈 어린 처녀애에게 성숙했다는 낱말로 많이 사용되는 현숙이라는 이름이 붙어있다는 것이었다.
그 애의 몸집이 왜 다른 사람들과 달리 조그만 하고 갸날픈지. 그 이유를 알게 된 것은 며칠 후였다. 누군가 나에게 그 애는 정치범 수용소 출소자라고 말해줬다. 그 애의 부모는 중앙기관에서 사업하던 간부였다고 했다.
그 애가 어린 시절에 부모님과 함께 정치범 수용소에 수감되어, 십 여 년 동안 모진 고생을 겪으면서 키가 자라지 않아 조그마한 어린애로 남아있다는 것은 주변 사람들의 공통된 생각이었다.
당시 돌격대가 하는 일은 산허리를 잘라내고 길을 뚫는 것이었다. 그 당시 나는 돌격대 중대장으로 동원되어 있었다. 나는 공사 지휘부 사람들과 이야기하고 현숙이를 작업현장에 내보내지 않았다.
체격이 조그마하고 갸날프기만 한 그 애가 공사현장에 전혀 도움이 안 되기 때문이었다. 대신 그 애를 숙소 당직근무를 세웠다. 당직근무라는 것이 열 개가 넘는 침실의 복도에서 경비를 서며 사람들에게 기상 시간과 취침 시간을 알려주는 것이었다.
사람들은 그 애를 “현숙 어린이”라고 불렀다. 사람들은 그 애를 많이 동정해 줬다. 사람들은 정치범 수용소에서 살아남는다는 것이 얼마나 힘겨운 것인지, 정치범 수용소에서 겪는 모진 고생은 사람의 상상을 초월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 애는 석 달 만에 집으로 돌아갔다. 어느 날 그 애가 다니던 본 직장의 당 비서에게서, 그 애를 보내달라는 전화가 왔다. 그 애는 돌격대를 떠나는 날 나에게 찾아왔다. 북한사회의 가장 흔한 답례 물건인 술을 한 병 들고 찾아와 나에게 주며 그 동안 고마웠다는 말을 하고 돌아갔다.
그 애가 돌아 간지 한 달이 지난 어느 날 나는 그 애의 집근처에 사는 사람들로부터 충격적인 이야기를 들었다. 충격적인 이야기의 내용은 그 애의 온가족이 다시 정치범 수용소에 잡혀갔다는 것이었다.
그 애의 아버지는 정치범 수용소에서 고생한 것이 억울하다며 명예회복을 요구했다가 다시 잡혀 갔다고 했다. 그 애 아버지는 온자만 간 것이 아니라 온 가족을 데리고 갔다. 네 아들과 막내딸을 데리고 갔다.
그 애의 집근처에서 사는 사람들이 전해준 소식에 의하면 보위부의 요원들은 네 아들과 네 아들의 가족들을 먼저 잡아 싣고 와서 제일 마지막에 아버지를 호송차에 처실었는데, 아버지를 처실을 때 차안에서는 “개새끼”라고 아버지를 욕하며 울부짖는 자식들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고 했다.
그 애의 가족 중에서 무사한 사람은 시집을 간 맏딸뿐이었다. 다행히도 시집을 간 딸은 출가외인이라고 다치지 않은 것이었다. 나는 지금도 북한의 인권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현숙이를 떠올려보군 한다. 그 애가 아직 살아 있을지. 살아있다면 금년에 마흔 네 살이다.
그 애도 꼭 같은 인간으로 태어났지만 인간으로 살지 못하고 마흔 네 살이 된 지금까지 수용소에서 모진 고생을 한다는 생각을 하면 세상이 허무하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동시에 국회에서 북한인권법에 대한 이색적인 논란을 만들어내는 사람들에 대한 실망과 분노를 느끼기도 한다.
글 | 김영호 탈북자
02.06 북한의 설, 고위층엔 노루·사향·명품시계 등 선물 쏟아져
▲ 설 명절에 북한 평양의 식당에서 북한 주민들이 음식을 먹고 있다. photo 조선일보
북한에 있을 때 나는 평양음악무용대학에서 무용을 전공했다. 하고 싶어서 한 무용은 아니었지만 제법 무용가로서 실력을 인정받았다. 그렇게 대학을 졸업하고 1년이 안 된 20대 중반에 결혼을 하게 됐다. 구체적인 직책을 밝힐 수는 없지만 내가 당시 시집을 간 시댁은 북한의 고위층이었다. 집은 궁궐처럼 넒은 마당을 가진 단독주택이었다. 평범한 가정에서 태어난 나는 졸지에 고위층 집안의 일원이 되어 풍족한 생활을 누릴 수가 있게 됐다. 지금 많은 이들이 내게 신데렐라의 꿈을 이뤘는데 왜 탈북을 했냐고 반문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풍족한 생활 속에서 점점 마음의 빈곤함을 느껴갔다. 탈북 여성들의 힘겨웠던 삶과 비교하면 풍요 속의 빈곤을 겪었다는 내 얘기가 복에 겨운 말처럼 들릴 수도 있다. 하지만 고위층의 일원으로서 내가 겪은 그들의 모습을 통해 북한의 빈부격차가 얼마나 심각한지를 보다 구체적으로 느꼈으면 한다.
특히 설 명절이 되면 시댁은 각종 산해진미로 넘쳐났다. 북한에서 고위층의 설은 오히려 남한의 웬만한 부자보다도 먹을 것 등 모든 것이 풍족했다. 시댁은 김일성 살아생전에 자주 직통전화가 걸려오는 집이다 보니 전화 한 통이면 안 되는 일이 거의 없었다. 내가 북에 있던 당시(1985~1996)는 1월 1일을 설 명절로 지내고 있을 때였다. 음력설을 인정하기는 했지만 간부들의 진짜 명절은 신정이었고, 그 당시 구정은 명절이라는 느낌이 들지 않을 정도로 조용했다. 1월 1일이 되면 우선 시아버지는 새벽 5시에 당중앙위원회에 설 인사를 먼저 해야 한다고 집을 나섰다. 그만큼 고위층 사이에서는 높은 이에게 인사를 드리는 게 매우 중요했다. 시아버지는 철도를 담당하였기에 새해 첫 열차 출발은 꼭 참석해야 했다.
설 명절 진상품들은 한 주 전부터 집에 배달이 되기 시작했다. 당시 39호실제품(당에 올리는 제품을 지칭)들의 견본품부터 집에 가져오는데 그 종류는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말이 견본품이지 배달된 물품들은 시댁에서 거의 챙겼다. 그 견본품들은 일반 주민들은 구경하기 힘든 물건들이 대다수였다. 각종 최고급 옷감들, 명품 시계, 일본에서 들여온 남녀 속옷들은 물론 각종 진귀한 식재료들도 많았다.
노루는 산 채로 가져오고 팔딱거리는 산천어는 나무상자로 몇 상자였다. 노루는 피가 약이라고 산 채로 신선하게 쓰라고 가져왔다. 산천어 역시 피를 보양제로 먹기 위해 가져오는데 아직 살아 움직이는 산천어들을 잡아서 꼬리 부분을 칼로 베면 한 숟가락 정도의 피가 나왔다. 시어머니 혼자 보양을 위해 거의 먹었다. 비위가 약한 사람들은 입에 대기도 힘든 동물 피를 건강을 위해서라면 아낌없이 먹는 시댁 식구의 모습을 자주 봤다.
사향과 웅담과 같은 각종 약재도 빼 놓을 수 없는 품목이다. 물론 다 자연산의 최고급 제품들이다. 그리고 바다에서 건져 올린 싱싱한 해산물들도 일품이었다. 싱싱하고 색이 선명한 털게와 대게를 비롯해 한 마리가 15㎏ 이상으로 큰 왕문어가 배달됐다. 대하도 빼놓을 수 없는 품목인데, 아직도 한국에 와서 그때 본 새우보다 크고 싱싱한 것은 본 적이 없을 정도다. 남한에서도 쉽게 구하기 힘든 이런 진귀하고 신선도가 높은 해산물들을 고위층들은 너무나도 쉽게 접하고 있었다.
북한 정부가 설날이면 국민들에게 공식적으로 배포하는 설 선물들도 있었다. 고위층 같은 경우에는 중앙당 간부들은 부장급과 일반 지도원급으로 먼저 급수를 나눴다. 나눠진 급수대로 해당 배급차량이 다니면서 가정마다 오곡식량, 육류, 어류와 채소 등이 공급된다. 우리 시댁처럼 한 부서 전체를 담당한 고위층은 국가가 공식적으로 공급하는 식품들은 거의 다 남에게 나눠 준다. 왜냐하면 국가가 주는 것은 상대적으로 신선도가 떨어지기 때문이다. 앞서 말한 당에 올리는 진상품들이나 전국 각지에서 배달되어 오는 산해진미를 먹기에도 바쁘기 때문이다.
설음식 준비는 출장요리사가
설이면 지방의 각 지역에서도 시댁이 주문한 각종 특산품들이 올라왔다. 붉은 갓김치를 함경북도 무산에서 공수해 왔다. 붉은 갓으로 담근 갓김치는 항암 역할을 한다고 알려져 시아버지가 특히 좋아했다. 양강도에서는 고추장과 된장이 배달돼 왔다. 개성에서는 요리사가 직접 집에 와 보쌈김치를 만들었다. 냉면과 온면은 함흥에서 소문난 요리사가 시댁에 와서 뚝딱 만들어냈다. 북한의 고위층들은 출장요리사를 아무렇지도 않게 집으로 불러들이고 있었다. 외국을 좀 다니는 간부들은 와인을 비롯한 양주들을 꺼내 마시며 설날에도 서양 분위기를 내는 경우가 많았다. 시댁은 토속적인 음식을 좋아한 편이라 주로 설이면 한식 위주의 전통음식을 많이 차렸던 것 같다.
나는 설을 떠올리면 맛있는 음식을 먹던 기억보다는 항상 술상을 차렸던 기억밖에 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큰 집안의 며느리로서 설날 아침부터 밤 12시가 될 때까지 10번에 가까운 술상을 차렸기 때문이다. 각종 선물을 안고 설날 인사하러 오는 각양각층의 손님들에게 무조건 술상을 차려서 거하게 대접해야 했다. 술상에 곁들이는 음식은 다양했다. 꿩 육수로 만든 만둣국은 필수이고 신선로, 각종 회무침 등이 놓였다. 또한 대게 찜과 보쌈김치는 빼놓을 수 없는 시댁의 단골 메뉴였다. 시댁 식구들은 면발이 질긴 것이 특징인 따뜻한 농마국수를 술과 함께 곁들여 즐겼다. 대게 살을 곱게 발라서 오이에 무쳐 새콤하게 겉절이처럼 먹기도 했다. 높은 간부급들이 손님으로 찾아오면 신선로를 만들어 대접해야 했다. 며느리들은 요리를 하진 않았지만 술상에 메뉴들을 서빙하기에 바빴다. 요리는 출장요리사들이 담당해 주문하는 메뉴들을 순식간에 만들어 냈다. 고위층의 설은 가족과 함께 오붓하게 보낸다기보다는 고위층끼리 모여 함께 술을 마시거나 각종 진귀한 음식들을 나눠 먹는 날이었다.
그렇게 설이 지나면 시아버지는 며느리들 보고 고생했다고 달러를 줬는데, 우리는 그 돈을 주로 쇼핑하는 데 썼다. 외화상점에 가서 수입품들을 사거나 평양 최고의 사우나인 창광원에 가서 찜질을 하며 명절증후군을 극복했다. 설이 지나서야 남편이랑 외출도 함께 할 수 있었다. 내가 기억하는 북한의 설은 참으로 이중적이다. 누군가는 고위층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호의호식하고 나머지 사람들은 질이 낮은 국가 배급품이라도 받기 위해 애쓰기 때문이다.
북한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굶어죽고 있다. 나는 비록 고위층 집안의 며느리로서 풍족한 생활을 누렸지만 이런 북한의 이중적인 실태는 시간이 흐를수록 나의 생각을 바꿔 갔다. 고위층은 날마다 설날 같은 풍요를 느끼지만, 이와 상반된 많은 사람들은 설날 하루만이라도 풍족하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간부들은 나라의 전기 사정이 아무리 어려워도 집에서 사시사철 더운물을 사용한다. 전용하우스에서는 온갖 신선한 채소들을 매일 공급해 먹는다. 사실상 북한의 고위층들은 일 년 365일 풍요가 넘치는 설날이다. 그래서 나는 늘 설이 다가오는 이맘때가 되면 마음이 아프다. 민족 대명절인 설의 진정한 풍요가 남한을 넘어 북한의 모든 이에게 전달되는 그날이 속히 오길 바란다.
방소연 남북하나 통일예술단장·자강도 강계
03.03 탈북 장마당 세대가 말하는 ‘2016 한국과 북한’
돈벌이에 관심이 많고 부모 세대에 비해 북한 체제에 대한 충성도가 낮은 세대’.
지난해 7월 14일 국회 정보위원회에서 국가정보원이 규정한 ‘장마당 세대’다. 장마당 세대는 1980~1990년대에 북한에서 태어난 20~30대 청년 세대다. 이들은 특히 ‘고난의 행군’을 경험한 세대다. 고난의 행군이란 1990년대 중반 자연재해와 국제적 고립으로 인해 발생했던 북한의 극심한 경제적 위기를 말한다.
장마당 세대는 시장경제 체제에 친숙하다. 자고 일어나면 굶어죽는 사람이 속출했던 상황에서 이들은 장마당에 나가 물건을 팔면서 살길을 찾아야만 했다. 또 이들은 패션에 민감하고 소비지향적이며, 외부 문화에 대한 개방도가 높다. 이로 인해 장마당 세대가 북한 체제 변혁의 주축이 될 것이란 전망도 있다. 북한 인구의 약 25%를 차지하는 장마당 세대. 과연 이들이 북한 사회의 변화를 이끌어 낼 ‘젊은 통일’의 발판이 될 수 있을까?
주간조선은 지난 2월 19일, 종로구 관철동 마이크임팩트스퀘어에서 탈북자 김다혜(35·함경북도 청진), 최관수(가명·27·함경북도 은덕), 이희진(가명·29·함경북도 온성)씨를 만났다. 고향도 나이도 다르지만 이들은 모두 ‘2030 장마당 세대’라는 공통 키워드를 지녔다. 이들을 통해 장마당 세대가 생각하는 2016년 남북한 문제, 통일 등에 대해 들어보았다. 김다혜씨를 제외한 두 사람은 익명을 요구해 가명을 사용했다.
- ‘장마당 세대’라는 용어를 어떻게 생각하나.
“북한에 있을 때는 장마당 세대라는 말을 못 들어봤다.”
- 여기서 만들어진 용어 아닌가.”
“2~3년 전부터 듣기 시작했다. ‘장마당 다니며 장사하는 사람’으로 알아듣는다.”
- 장마당 세대는 기성세대와 어떻게 다른가.
“‘자생적으로 살아남겠다’는 생각이 강하다. 고난의 행군으로 배급체제가 무너지면서 300여만명이 아사했다. 이 과정에서 국가에 대한 믿음이 사라졌다. 그전까지는 국가만 믿고 충성을 다했는데 그들이 아무것도 안 해준다는 사실이 큰 충격이었다.”
“나이로는 장마당 세대이지만 나는 13살 때 탈북해 경우가 좀 다르다. 김일성 사망을 북한의 가장 큰 사건으로 기억한다. 그래서 장마당 세대와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굉장히 놀랍다. 늦게 탈북할수록 체제에 대한 충성심이 현저히 약하더라.”
“‘자립자족’이 가장 큰 특징이다. 자력으로 경제활동을 하다 보니 정부에 대한 소속감이 옅어졌다. 자본주의의 가장 기본적 요소가 ‘장사’ 아닌가. 장사를 중시하는 만큼 시장친화적이고 개인주의화됐다.”
“우리보다 어린 친구들은 정작 북한이 어떻게 굴러가는지 잘 모른다. 우린 비교적 뭔가를 보고, 생각하고, 행동으로 옮길 수 있는 연령대다. 미래를 볼 수 있는 1.5세대라고 할까. 기성세대에 비해 외부의 것을 수용하는 데 개방적이다.”
- 남한의 2030세대는 어릴 때 부모님이 모든 것을 대신 해준다. 비슷한 나이의 장마당 세대가 어릴 때부터 자급자족을 했다는 이야기가 낯설다.
“중학교 때부터 많은 친구들이 학교를 안 나가고 소위 ‘보따리 장사’에 뛰어들었다. 자본금을 마련해 나진·선봉 등 중국 인접지역에서 생필품 등을 저렴하게 100㎏씩 도매로 짊어 와 팔았다. 대부분 손톱깎이, 리본핀 등을 팔았는데, 한 번 갔다 와 봤자 몸만 힘들지 수중에 몇천원 안 떨어졌다. 그래도 너도나도 뛰어들었다. 그거라도 해야 먹고살 수 있으니까.”
▲ 온갖 물품이 거래되고 있는 북한 평안남도 안주시의 한 시장. photo 안준호
“나도 열여섯 살 때부터 전자공학기술을 활용해 돈을 벌었다. 당시 북한은 남한과 달리 여전히 흑백TV와 컬러TV가 공존했다. 흑백TV로는 DVD를 볼 수 없는 설계로 돼 있는데, 그걸 부품과 연결해 DVD가 작동할 수 있도록 고쳐주고 대당 2000~3000원씩 벌었다.”
- 장마당 세대에게 고난의 행군은 어떤 의미가 있나.
“남한이 경제 상황을 IMF 전후로 나누듯 북한은 고난의 행군을 기점으로 나눈다. 1990년대 초까지만 해도 배급을 꾸준히 줬다. 1992년부터 점점 그 양이 줄었고, 김일성이 죽은 뒤 절반으로 줄더니 1996년부터는 아예 안 줬다. 특히 1997~1998년이 가장 큰 고비였다. 그때 기차역 대합실에 가면 굶어 죽은 사람이 태반이었다. 노숙자처럼 누워 있으면 죽은 사람이었다. 누구도 안 치우고 그냥 피해만 갔다. 능력 없는 사람은 다 굶어 죽고, 1999년부터 남은 사람들은 각자 생존방식을 찾기 시작했다. 이게 장마당이 활성화된 가장 큰 계기였다.”
“나는 다섯 살 때 고난의 행군을 겪었다. 그 어린 나이에 ‘이렇게 죽는 거구나’ 하고 생각했다. 북한 사회는 계급을 철저히 따지는데, 당시 노동자 계급이 농민보다 우위였다. 고난의 행군 땐 배급체제에만 의지한 노동자가 오히려 가장 타격을 받았다. 우리집도 노동자 집안이라 배급 없이는 다 죽겠다 싶어 7살 때 시골로 내려갔다. 옮기고 싶다고 다 옮길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우리는 큰아버지가 이장이었고 때마침 ‘자원 진출’이라고 시골 이주를 권장하는 정부 지침도 있었다. 이전엔 노동자가 농민 계급으로 내려가는 걸 천하게 생각했지만 당시엔 계급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다 죽게 생겼으니까.”
“시골 애들이 오히려 더 잘살았다. 선생님을 먹여살리려고 학교로 쌀을 가져가야 했는데, 시골 애들이 도시 애들보다 쌀을 더 잘 가져왔다. 국경 인접 지역도 좀 나았을 거다. 무역 때문에.”
“고난의 행군 시기에 가장 많이 죽은 게 지식인들이었다. 일반 사람들은 도둑질이라도 했지만, 지식인들은 선비정신, 양반정신 때문에 체면 차리다 많이들 굶어 죽었다.”
- 북한 당국에서 장마당에 대한 규제는 없었나.
“남한 5일장처럼 북한도 지역마다 농민 시장에서 10일장이 열렸다. 이게 고난의 행군 이후엔 매일 열리기 시작했다. 당국에서 일일이 다 막진 못하더라.”
“2000년대 초부터 장마당 없인 생계를 이어가기 힘들었다. 생필품, 가전제품, 의류, 식료품 등 모든 물품이 팔렸으니까. 장마당은 가격체계가 애매하다. 북한은 잦은 화폐개혁으로 돈 가치가 고르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장마당은 국제시장 가격대로 움직인다. 가격 체계만 놓고 보면 아마 세계에서 가장 개방적인 시장일 거다.”
- 장마당 세대와 기성세대 간 갈등은 없었나.
▲ 평양 시내 낙랑구역 종합시장의 모습. photo 임진강출판사
“북한 내에서는 잘 몰랐다. 오히려 여기에 와서 세대격차를 느꼈다. 북한에서는 표현이 억눌리고 억압됐지만, 한국에서는 표현이 자유로워서 그런 것 같다.”
“내부에서는 큰 충돌이 없었는데 남한에 와서 환경이 확 바뀌니 그 차이가 크게 드러났다. 나는 부모님과 함께 탈북했는데 나와 부모님이 남한을 받아들이는 게 현저히 달랐다. 그분들만의 고정관념이 강하다.”
“북한사회는 아직도 어른을 존대하는 유교적 사상이 강하다. 부모님과 내 의견이 안 맞더라도 ‘울며 겨자 먹기식’으로 그냥 받아들이는 게 많다.”
- 교육 면에서는 어떤가.
“외국어 교육에서 세대격차가 있다. 이전 세대는 러시아어를 배우던 세대다. 1980년대 이후 러시아 붕괴로 북·러 관계가 소원해지면서 컴퓨터, 영어가 필수라는 인식이 강해졌다. 교육에 있어 가장 불쌍한 세대가 바로 장마당 세대다. 고난의 행군 때문에 어릴 때부터 학교를 그만두고 생활전선에 뛰어들어야만 했다. 그래서 유독 장마당 세대는 교육에 대한 갈망이 강하다.”
“공립 교육시스템은 가장 좋은 고등학교, 그 다음 과학계 고등학교, 제일 밑에 일반고등학교, 세 가지 층위로 나뉜다. 일반고는 충성심 위주 교육이 이루어진다. 위로 올라갈수록 과학 위주, 심지어 코딩(컴퓨터프로그램 작성법)까지 가르친다.”
- 한국 드라마나 영화 등의 영향도 많이 받았나.
“고등학교 졸업 당시 집집마다 DVD 열풍이 불었다. ‘DVD 기계 없으면 못 사는 집’이란 느낌이었다. 중국에서 밀수로 들여온 한국 드라마, 외화는 19금 소재까지 있어 친구들과 다 함께 돌려보곤 했다. 거기서 선진화된 건물 디자인, 시설, 의상 등 굉장히 많이 배웠다. 여기 말고 다른 세상도 있다는 걸 그때 처음 느꼈다.”
“북한에 있을 때 드라마 ‘풀하우스’ ‘가을동화’ ‘올인’ 등을 즐겨 봤다. 학교에서는 한강 다리 밑 썩은 판자촌이나 남한 안기부에서 북한 주민 눈도 뽑고 내장도 다 드러낸다는 부정적인 면만 부각했다. 그런데 DVD에선 전혀 그런 게 없어 신기했다. 중학교 때 영화 ‘장군의 아들’로 한국 영화를 처음 접했다. 19금 장면이 부끄러워 이불을 뒤집어쓰고 못 보는 척했다.(웃음)”
“여기가 2000년대면 거기는 1980~1990년대라고 보면 된다. 20년 정도 격차가 있다. 마을에서 기타 잘 치는 형들이 ‘이등병의 편지’ ‘아침이슬’ 같은 노래를 불렀다. 와서 보니 남한 노래더라.”
“나는 ‘누이, 언제나 내게 친한 친구 같은’ 그 노래도 참 좋아했다. ‘찰랑찰랑’ ‘아파트’도 유행해 농촌 공원 가면 노래에 맞춰 다같이 트위스트 춤을 추기도 했다.”
“북한 드라마나 영화는 애정신이 거의 없다. 우산으로 가리고 하는 키스신이 그나마 가장 높은 수위다.”
“선진국 쓰레기를 북한에 매립하는 경우가 많다. 폐기물 중 재활용쓰레기는 북한 주민들이 가져가 팔기도 한다. 한번은 프랑스에서 대량으로 버린 쓰레기더미에 소위 ‘야동 테이프’가 여러 개 끼어 있었다. 서양인들이 찍은 게 신기해 여럿이서 돌려봤다 하더라.(웃음)”
- 스마트폰이나 SNS 사용은 어땠나.
“북한은 전화, 편지 등 모든 걸 도청하고 검열한다. 군인뿐 아니라 모든 주민이 감시받는 사회다. 튀니지의 재스민혁명처럼 SNS로 북한 사회가 계몽될 것 같진 않다. 북한 통신망은 철저히 관리받으니까.”
“SNS는 너무 앞서가는 이야기다. 카톡은 종종 한다는 이야기를 듣긴 했다. 매우 드물긴 하지만 가족한테 로밍폰(해외에서도 통신이 가능한 폰)을 보내 손주 사진을 받았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그게 가능한 건 해외 폰, 특히 중국 폰을 활용했기 때문이다. 북한은 인트라넷(조직 내부에서만 업무 통합을 목적으로 사용하는 정보시스템)만, 그것도 허가된 기관들만 사용 가능하다. 나도 학교 다닐 때 노트북을 접했지만 게임할 때만 사용했다.”
- 실제 와서 본 남한은 어땠나. 특별히 적응하기 어려운 점은 없었나.
“드라마에서 본 한국은 가능성이 열린 사회다. 그러나 현실은 다 그런 게 아니지 않나. 북한은 생활이 어렵긴 해도 직업도 학교도 다 정해준다. 여기서는 모든 걸 스스로 찾아서 해야 한다. 선택의 자유가 생긴 건 좋지만 동시에 가장 적응하기 힘든 부분이다.”
“여기 젊은 친구들은 욕을 너무 무섭게 한다. 중2 때 편입했는데 너무 놀랐다.”
“맞다. 북한도 감정이 상할 때는 심하게 욕을 하지만 여기처럼 일상에서도 습관처럼 하진 않는다.”
- 남한의 2030세대와 장마당 세대의 차이가 있다면.
“장마당 세대는 같은 또래라도 남한의 20~30대와 공감대가 다른 것 같다. 나는 한국의 60~70대 어른들의 보릿고개 이야기 등에 오히려 공감대를 느낀다.”
“남한 아이들은 북한 관련 뉴스나 사회문제에 정작 별 관심이 없더라.”
“북한 친구들에 비해 남한 친구들은 정치나 세계정세에 대해 관심이 없는 것 같다. 우리는 북한 내 혹은 탈북 과정에서 여러 일을 겪다 보니 아무래도 거시적인 사고방식이 강하다. 반면 남한 친구들은 대화를 나눠 보면 굉장히 미시적이라고 느껴진다.”
▲ 매대에 물건을 잔뜩 쌓아 놓은 평안북도 신의주 채하시장 풍경. photo 이용수
- 최근 일부 청년들이 사용하는 ‘헬조선’이라는 표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헬(지옥)’이라는 표현을 쓸 만하다는 생각도 든다. 노력만큼, 기대만큼은 못 살고 있으니깐.”
“북한에서 온 지 얼마 안 돼 그곳과 비교를 하게 되는데, ‘북한에 비하면 지옥까지야’라는 생각이 든다.”
“흙수저, 금수저 이야기 자체가 자기 능력을 과소평가하는 극단적 시각 같다. 남한은 자유가 있는 사회다. 충분히 흙수저에서 금수저로 이동할 수 있다. 결국 어떻게 표현하고 생각하느냐의 문제다. 이것이 사회문제라고 생각되면 바꾸려고 노력해야지, 한탄만 하는 건 ‘젊은 세대의 게으름’이라고 생각한다.”
- 장마당 세대에게 또래 지도자 ‘김정은’이란.
“지금 북한에서 살았다면 김정은을 당연히 받아들였을 거다. 어린 걸 떠나 신적인 존재니깐.”
“김정일까지는 그런 대로 인정했다. 하지만 나랑 비슷한 또래의 젊은 지도자는 납득하기 어렵다. 소위 ‘정은이 형’이라고도 하지 않나. 북한 내부에 있었다면 받아들이더라도 충성까진 안 했을 것 같다. 장마당 세대는 ‘너는 너, 나는 나’ 식으로 각자 살길 찾는 개인주의가 강하니 더욱 그랬을 거다.”
“장마당 세대가 주축이 된다면 체제 변혁을 빠르게 이끌 가능성이 크다고 본다. 이들은 충성심으로 똘똘 뭉친 이전 세대에 비해 능동적인 사고를 할 줄 아는 세대다.”
- 김정은의 공포정치에 대한 시각은 어떤가. 작년에도 많은 처형이 이루어졌는데.
“간부들을 처벌하면 평민들은 ‘죽을 만하니 죽었지’ ‘탐관오리 죽어도 싸다’는 생각을 갖는다. DVD 소지하다 사형된 주민 이야기엔 벌벌 떨지만 간부 숙청은 다르다. 애초에 북한 주민들은 평민과 간부를 동일선상에 놓지 않는다.”
- 박근혜 정부가 개성공단을 폐쇄했다. 북한 사회에 어떤 영향을 미칠 거라고 보나.
“개성공단에서 일하던 사람들이야 직접적인 타격을 입겠지만 전체 주민에겐 어떤 이득도 실도 없다. 그저 ‘초코파이 안 나오겠지’ 정도 생각에 그치지 않을까.”
“맞다. 개성공단이 북한 사회 전체를 먹여살리던 것은 아니니까.”
- 장마당 세대로서 바라본 남북 통일의 미래는.
“남북한이 정치적으로 대립한다고 경제적으로까지 대립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 경제적 통합 없이 절대 할 수 없는 게 통일이다. 그렇다고 통일자금 측면에만 포커스를 맞추면 곤란하다. 자금은 서로 마음 맞으면 양쪽에서 벌어서 충당하면 된다. 그러나 오래 갈라져 있던 문화적 차이는 서서히 극복하지 않으면 큰 충격으로 돌아올 거다. 지금부터 한 세대에 걸쳐 소통해 나가야 한다.”
“탈북자들을 난민 지위로만 받아들였지 전문성을 가진 사람으로 키우겠다는 정책이 전무하다. 말로만 ‘탈북자들이 남북통일의 미래’라고 하면서 사실상 방치하는 것 같다. 보다 전문적인 시스템을 통해 이들을 남북관계 완충재로 활용할 수 있어야 한다.”
“남북한 교육격차 문제가 특히 심각하다. 장마당 세대는 교육을 가장 못 받은 세대다. 북한 내에선 문맹률도 높다. 이를 극복하는 데 같은 장마당 세대인 탈북자 1.5세대를 적극 활용해야 한다. 그러나 현재 남북관계에선 탈북민들이 적극적으로 나설 수 있는 입장이 아니다. 북한엔 반역자고 남한 내에선 민감한 위치에 있으니까. 이걸 어떻게 극복할지 많이 고민해봐야 한다. 남한에서 탈북자들에게 주는 후원금이 적지 않은데, 이게 다 국민 세금 아닌가. 우릴 낭비 없이 최대한 잘 활용해야 한다.”
출처 | 주간조선 2396호 글 | 윤수정 객원기자
04.16 北 해외식당 종업원 WSJ 인터뷰 "며칠마다 자아비판, 한국TV 보고 귀순 결심
▲탈북해 국내에서 가수로 활동 중인 명성희씨./조선일보DB
15일(현지시각) 미국 일간지 월스트리트저널(WSJ)이 10년 전 북한 해외 식당 종업원으로 일하다 탈북한 명성희씨와의 인터뷰를 통해 북한 해외 식당 종업원의 생활상을 소개했다.
명씨는 중국 지린(吉林)성 창춘(長春)에 위치한 북한 식당에서 가수로 일하던 중 “남한에서 일자리를 구해주겠다”는 손님의 제안을 받고 탈출했다. 그녀는 가족들과 함께 중국을 거쳐 한국으로 귀순했고, 지금은 팝페라 가수로 활동 중이다. 명씨의 아버지는 1990년 '남북통일축구대회' 때 서울에 내려왔던 북한 축구 대표팀 명동찬 감독이다.
명 감독은 1999년 미국 LA 여자월드컵축구대회에 북한 여자팀을 이끌고 나갔지만, 조별 예선에서 탈락했다. 명 감독은 그해 사망했다. 명씨는 식당에서 가수로 일할 당시 다른 북한 종업원 여성 7명과 함께 식당에 딸린 방에서 생활했다고 전했다. 이들이 자는 동안 방문은 잠겨 있었고, 기상 시간은 새벽 6시였다. 종업원들은 상의에 북한 김씨 일가의 초상화가 그려진 배지를 달고 일했고, 손님들의 주문에 맞춰 냉면·보신탕·술 등을 날랐다.
명씨는 주로 ‘명향’이라는 별실에서 동료의 기타, 키보드 반주에 맞춰 한국, 중국 민요나 팝송을 불렀다. 그녀가 유일하게 부를 수 있었던 팝송은 할리우드 영화 ‘타이타닉’의 주제가였다. 그는 “셀린 디옹의 ‘마이하트윌고온’(My Heart Will Go On)을 부르면 식당 내 분위기가 최고조에 달했다”고 회상했다.
명씨는 중국으로 출국하기 전 집중적으로 사상교육을 받았지만, 지도원급의 북한 식당 매니저가 24시간 감시를 늦추지 않았다. 명씨는 WSJ에 “며칠마다 한 번씩 종업원들이 모여 북한 정권에 대한 자신의 충성심이 어떻게 부족했는지 지적하는 ‘자아비판’을 해야만 했다”고 말했다. 북한 정권을 비판하는 손님들에 맞서 언쟁을 벌이는 것도 여종업원들의 업무였다. 명씨는 “손님들이 정치 이야기를 하는 순간 분위기가 급격히 싸늘해졌다”고 말했다.
대신 식당 월 매출이 한 달 2만 달러(약 2300만원)를 넘을 경우 직원들에게도 일종의 ‘인센티브’가 돌아갔다. 명씨는 실적이 좋은 달엔 직원들도 100달러(약 11만5000원)를 받을 수 있었으며, 관리자의 도움으로 이를 가족들에게 송금했다고 말했다. WSJ는 100달러는 북한 노동자들에게는 매우 큰 돈이라고 설명했다.
거의 모든 해외 식당종업원들은 중국에서 인기가 높은 한국 TV 드라마를 봤다. 드라마 주인공들은 북한보다 훨씬 풍족한 생활을 하는 듯했고, 이것이 귀순을 결심하는 주요 동기가 됐다. 그는 “아무리 강한 사상을 가진 사람이라도 남한 드라마를 보면 (생각이) 바뀐다”고 말했다.
하지만 북한 해외식당의 관리자들은 지속적으로 종업원들을 감시했고, 탈북하면 성 노예로 팔려 에이즈에 걸릴 것이라고 겁을 줬다. 또 종업원들은 자신들이 탈출할 경우 북한에 남은 가족들이 벌을 받게 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이런 까닭에 명씨는 지난 8일 중국 닝보(寧波)의 북한 식당 종업원 13명이 평양에 가족들을 남겨두고 탈출한 데 매우 놀랐다고 말했다. 그는 “김정은은 자기 삼촌도 숙청하는 사람으로 종업원들의 가족은 김정은에겐 아무것도 아닌 존재”라고 덧붙였다.
WSJ는 북한이 12개 국가에서 운영하는 130개 식당에서 연간 1000만 달러를 벌고 있으며, 이는 김씨 일가 사재로 흘러들어 간다는 북한 전직 관리의 말을 소개하기도 했다.
▲올해 2월 태국 방콕의 북한 식당 '평양 아리랑관'에서 종업원들이 공연을 하고 있다./AP연합뉴스
최은경 기자
12.16 탈북군인이 밝힌다 "북한 군인들은 도대체 무엇을 먹고 사는가?"
최근 북한은 김정은이 군 수산기지를 돌아보면서 무더기로 쌓인 고기를 보니 피로가 풀린다며 마치 군인들이 고기를 마음껏 먹을 수 있는 것처럼 선전하고 있다.
그렇다면 그렇게 많이 잡은 물고기는 어디로 갈까? 군인들은 푸짐한 고깃국 한 그릇도 먹어보기 어려울 것이라고 필자는 추측한다. 필자는 북한전연지역에서 10년간을 군복무를 하였지만 물고기는커녕 꼬리도 구경하지 못했다.
이따금씩 보급품으로 물고기가 실려 오기도 하지만 그런 것들은 군관들의 부정부패의 수단으로 변환되기 때문이다. 지금 전연지역에 근무를 하는 군인들은 다 대부분 노동자. 농민의 자녀들이다.
예전에는 토대가 좋고 성분이 좋은 자녀들로 전연에 배치를 하였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 토대나 성분이 좋다고 하는 간부나 부유층들은 어떻게든 자녀들을 전연지역에 보내지 않으려고 초모가 시작되기 전부터 뇌물공세를 벌려 후방으로 빼돌리기 때문이다.
그러다보니 힘없고 돈 없는 자녀들 즉 노동자. 농민의 자녀들만 전연으로 배치된다. 필자도 역시 노동자의 자녀중의 한 사람이었다. 필자가 전연에서 생활할 당시 군인들은 한끼 옥수수 200g도 채 되지도 않는 옥수수밥과 소금으로 끓인 시라지국 뿐이었다.
남새(채소)가 없어 군인들의 반찬이라고는 짐승이 먹고 죽지 않는 풀이면 다 오르곤 하였다. 봄이면 산이나 들판에 나가 풀을 뜯어 군인들의 식탁에 올려주었고 겨울이면 염장무나 염배주 그것도 몇 개뿐이었다.
명절이라고 주는 고기래야 중대(포병 70명)에 돼지고기 몇kg 준다. 거기에서 군관(장교)들이 먹을 고기를 내놓고 나면 군인들은 고기가 건너간 물만 먹을 수 있다.아마도 북한전연지역에서 군 복무를 한 사람치고 물고기를 한번 실컷 먹어봤다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먹었다면 흐르는 개울에서 자체로 잡아먹었을 것이다. 북한의 군부대들에서 군인들이 굶주림에 허덕이고 보급물자도 제대로 공급받지 못하는 이유 중의 하나는 부정부패이다. 군관들이 부정부패를 저지르기 딱 좋은 곳이 힘이 없는 노동자 농민의 자식들만 모인 전연 구분대들이다.
“연대에서는 연대적으로 떼먹고 대대에서는 대대적으로 떼먹고 중대에서 중요한 것 떼먹고.”이라는 이야기는 군부대들에 만연한 군관들의 부정부패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10년 동안 전연 구분대에서 군 복무를 한 내가 북한에 도루묵 풍년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떠오른 것은 군관들의 부정부패 요소가 풍부해졌다는 생각뿐이었다. 부정부패가 만연해진 북한 군부대들에서 값이 나가는 물건이 많아진다는 것은 곧 비리의 요소를 확대하는 결과로 이어진다는 것을 나는 10년 동안 보았다.
글 | 강리혁 자유북한방송 기자
■ 2017.06.01 일가족 해상탈북이 나온 마을의 뒷이야기
북한주민 여러분, 여러분은 ‘잡아먹을 건 돼지’란 말을 흔하게 하죠. 제일 만만한 사람이 항상 희생양이 된다는 말입니다. 전 시간에는 국가권력이 아이들을 어떻게 노예처럼 부리는가에 대해 이야기 했습니다.
이 시간에는 사회적으로 가장 힘없는 약자, 국가와 어른의 보호대상이 되어야 할 아이들이 어떻게 약탈과 수탈의 대상이 되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아이들을 직접적으로 수탈할 수 있는 사람은 바로 교원들입니다. 그들도 어쩔 수 없습니다. 생계를 유지해야 하고, 학교관리도 국가가 후원해주지 못해 학생들 자비로 운영할 수밖에 없습니다.
교원들 자택의 겨울용 땔나무까지 학생들이 동원되어 해줍니다. 이런 현상은 농촌에서 가장 농후하게 나타나죠. 시내학교들에서는 겨울 난방을 학생들이 순번제로 집에서 무연탄을 가져다 해결하지만 농촌학교에서는 산에 가서 땔나무를 해야 합니다.
그래서 시내학교에는 없는 ‘나무방학’이 농촌학교에는 있습니다. 심심산골로 70~100리 걸어가야 채벌할 수 있는 산림이 나지는데 이곳에서 보름간 숙식하면서 나무를 해야 합니다.
돈만 내면 힘들게 나무하러 안가도 됩니다. 그러나 농촌 농가들의 생활은 대부분 열악하기 때문에 그런 아이들이 학교적으로 열손가락에 꼽을 정도입니다.
나무도 너무 베어 내여 벌목지에 가서도 벌거숭이가 된 산봉우리 서너 개를 넘나들어야 합니다. 북한의 중학교 나이는 12살~17살입니다. 서툰 도끼질로 가까스로 베어낸 나무를 여리고 갸날픈 어깨에 메고 아이들은 봉우리를 넘어 갑니다.
선생들은 학생들이 나무를 많이 할수록 자신들의 집에 땔나무를 한토막이라도 더 가져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아이들이 힘들어 주저앉아 쉬려고 하면 제대로 쉬지 못하게 산으로 내몹니다. 최대한 마력을 짜내려는 모양이 왜놈감독이나 십장을 방불케 합니다.
한 아이는 통나무를 메고 산을 넘다가 너무 힘들고 지쳐 그만 쓰러졌는데 선생님 집으로 실어간다고 생각하니 화가 나 그냥 내팽개치고 산에서 내려왔다며 그 어린것이 울분을 토합니다.
어른도 삐쳐내기 힘든 고역을 치르고 돌아온 아이들 어깨에는 여기저기 피멍이 나있었습니다. 그렇게 해들인 나무는 한 차씩 교원들의 집으로 들어가고 나머지로 학교 난방에 사용합니다.
학생가진 부모들이 기대하는 게 있다면 ‘우리 아이 학교 졸업하고 좋은 대학 가고, 좋은 직업 갖는 것’ 이런거 아닙니까? 그런데 학교의 수탈에서 벗어나는 것도 하나의 희망사항으로 되고 있습니다.
2007년 봄에 함경남도 신포시 해암동에 사는 강신호 가족이 남조선으로 배를 타고 월남하는 사건이 터졌습니다. 북한은 그들을 넘겨 보내라고 정치적 공세를 들이대는 한편 관계자들에 대한 처벌에 들어갔습니다.
일체 어부들의 바다출입을 금지하여 생활고에 시달린 것은 물론입니다. 강신호가 다니던 신포수산사업소 문화회관에서 대논쟁회의를 열고 ‘먼바다원양어업총국’ 조직비서를 비롯한 간부들에게 책임을 물어 줄줄이 해임되었습니다.
회의가 끝나는 대로 회관주변에 추방되는 가족들과 이삿짐까지 실어놓고 대기하던 자동차는 곧바로 어디론가 떠나갑니다. 시골 추방지로 가는거죠. 원양어업총국 조직비서는 북청군 농장원으로 추방되어 나갔습니다.
강신호에게 디젤유를 외상에 준 기름장사 아줌마와 인민반장이 처벌되고, 해안경비대초소장까지 생활제대(과오제대) 되면서 강신호사건으로 많은 사람들이 피해를 입었습니다.
가까운 곳에서 살던 강신호의 형만은 남한으로 가자는 동생의 말에 동의하지 않고 남았으니 끝까지 김정일과 당을 따르겠다는 충성심으로 인정되어 추방가지 않았습니다.
왜 그렇게 큰 소동이 일어난고 하니 이들이 남한에서 기자회견을 한 것이 발단으로 되었습니다. 기자회견에서 “담임선생님 아이 돌 생일은 물론 시부모님 생일까지 우리 학생들이 다 차려준다”고 강신호 딸이 발언하는 순간 TV앞에 앉아있던 남한 사람들이 경악을 금치 못하며 굳어져버렸습니다.
이 사실은 몰래 라디오로 남한의 뉴스를 들었던 사람들로부터 입소문 이 나면서 저도 들었습니다. 그때 남한사람들이 놀랐다는 사실에 오히려 저희들이 놀랐습니다.
“왜 놀라지?” 남북한 주민들은 서로 다른 차원에서 놀랐습니다. 남한 주민들은 북한에서 학생수탈이 노골적이다 못해 구조화 된 것이 충격이었고, 그 충격은 북한 주민들의 무감각을 깨우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자신들에겐 평범한 일상이었는데 남한주민들에겐 그토록 놀라운 사실이었다는 것을 말이죠.
남한에서 이 뉴스가 보도되기 바쁘게 교육성에서 검열이 내려왔습니다. 강신호 딸은 소학교 때부터 공부를 잘하는 모범생이었고 중학교까지 분단위원장이었다고 합니다.
강신호 딸의 소학교, 중학교 담임선생님들은 교원직에서 해임되었습니다. ‘웃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다’고 꼭대기 간부들의 약탈행위를 밑의 사람들도 본받는 겁니다.
지금도 신성한 교육의 전당에서 학생들에 대한 수탈이 정상적으로 벌어지고 있는 것이 북한의 현실입니다.
교원들은 집금원이나 다름없습니다. 도로공사, 인민군지원, 백두산발전소건설지원, 등의 각종 명목으로 내려오는 사회적 과제 수행을 위해 학교별 돈 얼마씩 내라는 과제가 내려옵니다.
시나 군에서 사회적 과제(도로공사를 비롯하여)는 공장, 기업소, 학교단위로 무수히 떨어지는데 운송수단부터 거의 다 돈으로 해결해야 합니다. 학교교장은 그 과제를 학급별로 배정합니다.
선생님은 학생 일인당 얼마씩 액수를 정할 때 좀 높이 부릅니다. 예를 들면 200원씩 내면 될 것을 300원씩 내라고 합니다. 그리고 100원은 자기가 갖습니다.
이외에도 선생님 개인 사정으로 요구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식량이 떨어져 그러니 좀 도와주시오” 이런 내용의 쪽지는 아무 거리낌 없이 학생들을 통해 학부모들에게 전달됩니다.
하루하루를 시장에서 벌어야만 끼니를 에울 수 있는 상황에서 선생님들은 장사도 못하고 온종일 교단에서 아이들을 가르쳐야만 합니다. 선생의 입장을 학부모들은 어느 정도 이해를 하고 챙겨주는 측면도 없지 않지만 그걸 악용하는 양심 없는 선생도 일부 있습니다.
이틀건너 한번씩 학교에 돈 내야 한다는 말을 아이들은 입에 달고 삽니다. 아이들이 학교만 갔다 오면 “엄마 돈” 하는 말이 이젠 노랫말이 되었습니다. 저녁 먹을거리가 없어 한숨을 내쉬는 엄마에게 “엄마 돈 안주면 학교 안 갈래 선생님한테 욕먹어” 칭얼거리다 매를 맞고 엉엉 웁니다.
“차라리 일제시기처럼 월사금을 내는 게 낫지. 등쌀에 못 견디겠다.” 엄마는 아이를 비자루로 때리며 화풀이를 합니다. 학교선생들에 대한 원망과 몹쓸 놈의 세상에 대한 한을 쏟아내는 겁니다.
엄마와 선생의 눈치를 보느라 아이의 얼굴은 그늘져 갑니다. 어느덧 아이가 학교 졸업할 때면 학부모들은 무거운 등짐을 내려놓은 느낌입니다. “이젠 돈 달란 소리 안 들어서 속이 시원하다.” 잔등에 들어붙어 피를 빨아먹던 찰거머리가 떨어져 나간 것 같습니다.
그렇게 학생들에게서 모은 돈이 어디로 흘러가나 살펴봅시다. 시당 교육부에 있는 지인의 말에 의하면 ‘자기 말 한마디면 돈 100만원은 순간에 자기 주머니에 들어오는데 학생들에게서 모은 돈은 법적으로도 걸리는 것이 없고 무제한하다’고 합니다.
공장, 기업소가 생산을 못하면서 먹을 알이 있던 시당 공장지도부 같은 부서들은 옭아 먹을 데가 없습니다. 그래서 모두 교육부에 매달립니다. 시당 내부에서도 인사권을 갖고 핵심권력을 틀어쥐고 있는 조직부까지 교육부에 부탁을 합니다.
‘돈 얼마 필요하니 잘 좀 부탁한다’고 말이죠. 심지어 시당간부들 묘향산 관광 가는 돈까지 각 학교 교장들에게 요구합니다. 시당 교육부의 요구를 거절하면 상관의 압력은 물론 당장 목이 날아갈 판이니 무조건 집행합니다.
그러면 김일성, 김정일 우상화, 국가건설지원, 등의 명목으로 학급별로 액수가 분할되면서 아이들은 일인당 얼마씩 무조건 내야 합니다. 그걸 내지 못한 아이는 충성심의 부족으로 비판받습니다.
지금까지 국가에 의한 아동노동력 착취, 간부들의 부정부패로 여러분의 재산권, 생명권이 어떻게 침해당하고 있는지를 말씀드렸습니다. ◎
필자 샛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