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이탈주민(탈북민) 이야기11/ 탈북(민) 소식2/ 2017.07.06 어선 타고 귀순한 5명, 평양 출신 엘리트 과학자 가족 - 2018년 03월 02일 “中서 강제송환 탈북민 최대 10만명”
북한 이탈주민(탈북민) 이야기11/ 탈북(민) 소식2/ 2017
■ 2017.07.06 어선 타고 귀순한 5명, 평양 출신 엘리트 과학자 가족
산서 어선 산뒤 NLL 넘어와… 탈북 조평통 출신 여성도 입국
지난 1일 소형 어선을 타고 동해 북방한계선(NLL)을 넘어와 귀순 의사를 밝힌 5명의 북한 주민은 평양 출신의 과학자 가족인 것으로 알려졌다.
또 북한에서 대남사업을 전담하는 기구인 조국평화통일위원회(조평통) 출신 여성이 최근 탈북해 국내에 입국한 것으로 알려졌다.
정부의 한 소식통은 5일 "우리의 카이스트 격인 평성리과대학을 졸업하고 평양에서 엔지니어로 근무하던 A씨가 아들, 아들의 여자친구, 남동생 가족 2명과 함께 탈북했다"며 "A씨의 아들과 여자친구도 평성리과대학을 졸업한 엘리트 출신들로, 이들 가족은 모두 평양에 거주했던 것으로 안다"고 했다. 이들은 김정은 집권 이후 북한체제에 회의를 느껴 탈출을 결심하고 강원도 원산으로 이동해 소형 어선을 구입했다고 한다. 대북소식통은 "바다에 나가려면 해상출입증을 발급받아야 하는 등 시간이 꽤 걸린다. 이들 가족이 오랫동안 치밀하게 귀순을 준비했음을 보여준다"고 했다.
올해 해상을 통한 귀순은 지난달 3일 함경남도 신포를 출발해 동해 NLL을 넘어와 귀순한 부자(父子)에 이어 두 번째다. 국책연구소 관계자는 "최근 북한 당국이 육로 탈북 루트인 북·중 국경을 봉쇄하면서 해상 탈북이 앞으로도 계속 늘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이와 함께 2010년까지 조평통 서기국에서 근무하다 3개월 전 중국으로 탈북했던 40대 여성 B씨가 최근 국내에 입국했다. 조평통 출신이 탈북해 국내에 입국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북한은 지난해 노동당 통일전선부 소속이던 조평통을 국가기구인 국무위원회 산하로 편입시키고 조평통 서기국을 폐지했다. B씨는 우리 당국에 북한 통일전선부와 조평통의 상황 등을 자세하게 설명한 것으로 알려졌다.
정부 관계자는 "최근 평양 출신 엘리트들의 탈북이 이어지는 것은 김정은 집권 이후 감시·통제가 강화되고, 중견 간부들의 생활이 어려워졌기 때문으로 분석된다"고 했다.
조선일보 김명성 기자
□ 07.28 "탈북민 임지현(전혜성), 北 국가안전보위부에 납치되어 6월 17일 북송돼"
▲북한의 대외 선전매체인 우리민끼리 방송에 등장한 임지현(전혜성)씨.
최근 탈북방송인 임지현(전혜성)씨가 북한 대남선전매체에 등장해 남한사회를 비난하는 영상이 전해지자 일각에서는 납치냐? 자진입북이냐?를 두고 각종 루머를 만들어내고, 심지어 탈북자로 위장한 간첩이라는 추측까지 나오고 있다.
이러한 추측과 억지들이 난무해져 본 방송은 2주간 북한내부소식통들의 도움을 받아 전혜성씨가 북한 당국의 납치에 의해 북송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북한 양강도 소식통은 “전혜성이 지난달 17일 국가안전보위부 지도원들에게 호송되어 넘어왔다”며 “4명의 양복차림 지도원들은 그 여자를 연봉동에 위치한 경비총국(국경경비 25국) 조사실에 데리고 갔다”고 설명했다.
국가안전보위부는 6월 초 전혜성씨를 납치했으며 일주일간 기본조사를 끝내고 17일 새벽 4시 공식절차를 무시한 채 세관이 아닌 양강도 혜산시 xx동 국경경비중대 군인들의 도움으로 은밀하게 북송했다는 것이 소식통의 설명이다.
소식통은 “통상 이런 사건을 발생하면 해당 도 보위부 반탐과도 참여하지만 이번에는 양강도 보위부를 거치지 않았다”며 “경비총국에서 이틀간 조사를 마무리 하고 바로 평양으로 호송했다”고 전했다.
이어 “그 여자는 (넘어올 당시) 그날 짐바(청바지)바지에 중국 글이 새겨진 노란 반팔(티셔츠)을 입었다”며 “전날 국(25총국)에서 지시가 내려왔고, 넘어올 장소에서 군인들이 대기했다”고 전했다.
북한 국가안전보위부 요원들이 중국정부의 감시를 의식해 세관출입절차가 아닌 불법 루투를 이용했다는 것이 소식통의 전언이다.
소식통은 “납치과정에 대해서는 우리도 알지 못한다”며 “대부분 납치한 사람이나 중요한 물건일 경우 중국의 눈을 피해 경비대로 종종 넘어오는 경우가 있다”고 덧 붙였다.
글 | 이석영 자유북한방송
□ 11.23 '72시간 다리' 건너, 추격조 총 맞고도 뛰어… 영화 같은 탈출
['JSA 귀순' 영상 공개] JSA 귀순 '44분 드라마'
귀순병, 지프차 몰고 南으로…
판문점 배수로에 바퀴 빠지자 車 버리고 자유의집 향해 질주
따라온 北 4명, 40발 총알 세례
귀순병, 우리 구역에 쓰러진 후 한국군 경비대대장 엄호 속
부사관 2명이 포복 구출작전
유엔군사령부가 22일 공개한 CCTV와 열상감시장비(TOD) 화면에는 지난 13일 판문점 공동경비구역(JSA)에서 일어난 북한군 귀순 사건 당시 상황이 모두 담겨있었다. 귀순병이 간발의 차로 북한군 추격조를 따돌리고 전력 질주하는 장면, 추격조가 귀순병 등 뒤에서 10초간 조준 사격을 퍼붓는 모습, 총상을 입고 쓰러진 귀순병을 우리 JSA 경비대대원들이 구출하는 상황들이 확인됐다. 이날 유엔사가 공개한 영상은 총 6분 57초 분량으로, 6개의 별도 영상을 시간순으로 편집한 것이다.
◇지프 몰고 귀순 시도
오후 3시 11분. JSA에서 북서쪽으로 2.5㎞ 떨어진 북한 지역에서 JSA 방향으로 달리는 지프 차량이 우리 측 CCTV에 포착됐다. 속도는 시속 65~70㎞였다. JSA의 북측 관문 격인 '72시간 다리' 옆 북측 초소 앞에서 잠시 속도를 줄이는 듯하던 지프는 북한군 초병이 뛰어나오자 다시 속도를 냈다. 다리를 건넌 지프는 판문점 북측 시설인 통일각과 김일성 친필비를 지나 크게 우회전을 했다. 지프는 남쪽으로 방향을 틀어 계속 내려오다 갑자기 멈춰 섰다. 나무에 가려 잘 보이지 않지만 나무 사이로 빛나는 지프의 전조등이 크게 흔들렸다. 배수로에 바퀴가 빠진 것이다. 이때가 3시 13분. 지프가 멈춘 지점은 중립국감독위원회(중감위) 회의실 건물과 북측 초소 사이로, 군사분계선(MDL)을 10여m 앞둔 지점이었다.
▲3시 14분. 사태를 파악한 북한군의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판문각 계단에 서 있던 북한 군인 2명과 판문각 동쪽 초소에 있던 북한군 2명이 사고 지점을 향해 전속력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2명은 권총, 2명은 AK-47 소총으로 무장한 상태였다.
◇군사분계선 넘어 전력 질주
3시 15분 배수로에서 빠져나오려 애쓰던 지프 운전자(귀순병)가 차를 버리고 MDL을 향해 뛰기 시작했다. 거의 동시에 판문각과 초소에서 달려온 북한군 추격조 4명이 귀순병 바로 등 뒤에서 사격을 시작했다. 소총을 든 북한군 중 1명은 엎드려쏴 자세로, 다른 1명은 무릎쏴 자세로 조준 사격을 했다. 합참에 따르면 이때 북한군은 40여 발을 쐈다. 귀순병은 빗발치는 총탄 속에 MDL을 넘어 우리 측 자유의집을 향해 약 9초간 전력 질주했다. 추격조의 사격도 9~10초간 계속됐지만 귀순병이 총에 맞아 비틀대거나 쓰러지는 모습은 CCTV에 잡히지 않았다.
귀순병이 CCTV 시야에서 사라지자 북한군도 사격을 멈췄다. 귀순병이 총에 맞아 쓰러지는 모습을 봤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어 엎드려 쏘던 북한 병사가 일어나 귀순병을 쫓아 남쪽으로 달리다 멈칫하더니 황급히 되돌아갔다. MDL(중감위 건물 중앙) 월선 사실을 뒤늦게 알아차린 것이다. 귀순병이 MDL을 넘은 뒤에도 북한군이 사격을 계속한 행위, 추격조 1명이 MDL을 넘은 행위는 정전협정 위반이다.
3시 17분 판문각 서측 김일성 친필비 앞에 소총을 든 방탄복 차림의 북한군 병사 12명이 집결했다. 이들은 대열을 갖추지 않은 채 우왕좌왕하다가 북쪽에서 간부로 추정되는 군인이 내려오자 그를 따라 북쪽으로 이동했다. 유엔사 측은 이들을 '신속대응군'으로 표현했다.
◇총상 입고 쓰러진 귀순병
3시 43분부터 시작하는 다음 CCTV 영상엔 총상을 입은 귀순병이 낙엽이 수북이 쌓인 땅바닥에 쓰러져 있다. 화면 뒤에 보이는 시멘트 구조물은 자유의집 서측 부속 건물 담장이다. 귀순병은 한쪽 발에 양말만 신고 있다. 전력 질주 과정에서 군화가 벗겨진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귀순병이 MDL을 넘은 시각은 3시 15분, 우리 군이 쓰러져 있는 그를 발견한 건 3시 31분이었다. 16분 동안 귀순병을 놓친 이유에 대해 그동안 군은 "귀순병이 쓰러진 지점이 CCTV의 사각지대라 추가 장비를 동원해 수색하는 데 시간이 소요됐다"고 설명했지만 이는 사실과 달랐다. 이날 유엔사가 공개한 CCTV 화면 중에는 쓰러져 있는 귀순병이 보였기 때문이다. 군 측은 "낙엽과 섞여 있어서 발견이 늦어졌다"고도 했다.
◇포복 구출 작전
귀순병이 쓰러진 곳의 열상감시장비(TOD) 화면도 공개됐다. 3시 55분부터 시작하는 이 영상에 따르면 한국군 경비대대장을 포함해 우리 군 간부 3명이 귀순병을 향해 포복으로 다가갔다. 경비대대장이 도중에 포복을 멈추고 엄호·지휘하는 가운데 부사관 2명이 귀순병을 안전지대로 끌고 왔다. 귀순병이 쓰러진 곳은 지프에서 내려 뛰기 시작한 지점으로부터 60m 떨어져 있었다. 자유를 향한 60m 질주였다.
☞72시간 다리
북한 병사 오모씨가 차량으로 넘어온 ‘72시간 다리’는 판문점 서쪽을 흐르는 ‘사천(砂川)’에 있는 다리다. 북한은 1976년 8월 ‘판문점 도끼 만행 사건’ 이후 자신들이 72시간 만에 건설했다고 해서 이 같은 이름을 붙였다. 판문점에 군사분계선(MDL)이 그어지기 전까지 북한군은 ‘돌아오지 않는 다리’를 이용했다. 그러나 도끼 만행 사건 이후 판문점에도 MDL이 그어지고 ‘돌아오지 않는 다리’가 MDL 남쪽에 위치하게 되자 북한군은 이 다리를 만들었다. ‘돌아오지 않는 다리’는 1953년 휴전협정 체결 후 포로 교환이 이뤄졌던 곳으로, 한번 넘어가면 돌아올 수 없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김일성 친필비
유엔사가 공개한 CCTV 영상
https://youtu.be/EnU8XP0dpPY
Video C00:57탈출, 추격 그리고 극적인 구조까지 JSA 영상이 공개됐다
□ 11.23 "귀순병, 현빈 닮았고 근육질 몸매… 소녀시대 노래 좋아해"
의료진 "한국민 피 1만2000㏄로 살았다"… 귀순병 "감사합니다" -
법학도가 꿈이었던 25세 운전병
의사 "악수할때 해군 UDT 느낌"
빠르면 이번 주말 일반 병실로
귀순 과정에서 폐·복부 등에 총상과 관통상을 입고 무의식 상태에서 두 차례 수술받은 북한 병사가 의식을 찾고 의료진과 대화할 정도로 회복하면서 그의 신상과 심정 등이 속속 알려지고 있다. 가벼운 농담까지 나눌 정도로 빠르게 안정을 찾아가는 북한 병사는 이르면 이번 주말 중환자실에서 일반 병실로 옮겨질 것으로 보인다.
주치의인 아주대병원 중증외상센터 이국종 교수는 22일 기자회견을 열고 "병사와 악수를 하는데, 수술 후 회복 중임에도 해군 UDT 대원 같은 단단한 근육의 힘을 느낄 수 있었다"며 "본인이 먼저 요구하는 것도 없고 불평도 하지 않는 배우 현빈을 닮은 건장한 청년처럼 보인다"고 말했다.
의료진 등에 따르면 북한 병사는 25세로 성이 오(吳)씨다. 키는 170㎝, 몸무게는 60㎏ 정도다. 북한 청년 평균 키보다 5~6㎝ 큰 편이다. 본인 의사로 귀순을 결심했으며, 한국에 긍정적 기대를 갖고 있다고 의료진은 전했다. 구체적인 귀순 동기에 대해서는 알려지지 않았다. 운전병이 주특기로 군에는 8년째 복무 중이다. 애초에는 법학도를 꿈꾼 것으로 전해졌다. 의료진이 "대량 출혈 치료 과정에서 대한민국 국민의 피가 1만2000cc 이상 들어가 전체 피가 세 번 이상 바뀌며 전신을 돌아 (당신이) 살 수 있었다"고 하자 오씨는 "감사하다"고 답했다고 이 교수는 전했다.
의료진은 오씨의 감각을 자극하기 위해 병실에 TV를 설치해 영화를 보여주고 한국 가요도 들려주고 있다. 또 심리적 안정을 위해 병실 벽 곳곳에 태극기도 걸어두었다. 중환자실에서 환자를 깨울 때 자극을 주기 위해 음악과 TV를 활용하기도 한다. 이 교수는 "오씨에게 소녀시대의 노래 'Gee' 오리지널 버전, 록 버전, 인디밴드 버전을 들려줬다"며 "어느 노래가 좋으냐"고 물었더니 "소녀시대의 원곡이 좋다"고 전했다. 이 교수는 오씨가 걸그룹을 좋아해 음악 얘기를 많이 나눴고, 야구도 소재가 됐다고 했다.
오씨는 TV에서 영화 '트랜스포터'를 보면서 "나도 운전을 했다"는 얘기도 했다. 북한으로 들어온 한국 자동차 갤로퍼도 운전해봤다고 한다. 북한의 고향이나 부모 얘기는 자극할 우려가 있어 묻지 않고 뉴스도 보여주지 않고 있다. 오씨는 지금은 물만 마실 수 있지만 묽은 미음부터 시작해 점차 음식물 섭취를 늘려갈 예정이다. 이 교수가 오씨에게 "얼마나 아프냐. 견딜 만하냐"고 물었더니 "총 맞아서 아팠는데 지금은 안 아프다"고 대답했다. 장 속에서 발견된 기생충 감염은 오씨가 지난 19일 일요일부터 물을 먹기 시작하면서 구충제를 투약해 해결된 걸로 의료진은 보고 있다. 이 교수는 "총상 입은 소장 여러 곳을 절제 수술해 몇 개월 후에 장폐색을 유발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의료진은 팔 등에 난 상처가 크기 때문에 추가 수술이 필요할 수도 있다고 전했다.
□ 11.23 태영호 “자유 찾으려 질주, 北주민 모두의 마음”
태영호, 귀순병에 대한 심경 토로
“죽음을 무릅쓰고 자유를 향해 뛴 북한군 병사에게서 우리는 북한 전체 2500만 주민의 마음을 읽어야 합니다. 아직도 통일을 요원한 것으로 보고 속수무책으로 앉아만 있는다? 그건 역사에 죄를 짓는 일입니다.”
지난해 탈북한 태영호 국가안보전략연구원 자문연구위원(전 영국 주재 북한대사관 공사·사진)은 22일 본보와의 전화 통화에서 “분초를 다투며 질주한 병사의 심정에는 내 심정도 담겼고 대한민국을 동경하는 2500만 북한 주민의 심경도 담겼다”며 먼저 온 탈북자로서의 애잔한 심경을 토로했다. 이날 북한군 병사가 판문점 공동경비구역(JSA)을 통해 탈북하는 영상을 지켜봤다는 그는 “살아나서 정말 기쁘다”며 “그가 병상에서 태극기를 보고 싶고 걸그룹 노래를 들으려는 진짜 이유는 눈만 감으면 아직도 북한에서 총탄에 쫓기고 있다는 불안감에 시달리기 때문에 ‘내가 한국에서 살아있구나’라고 계속 확인하려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자유와 민주주의를 향해 목숨까지 거는 북한 주민들의 절박함, 대한민국을 향한 동경심과 호소를 잘 읽어야 한다”며 “한국 문화가 들어가면서 북한 주민들 사이에 북과 남의 삶에 대한 ‘비교’의 개념이 생겼고 이것으로 통일 혁명을 위한 1단계 과업이 완성됐음을 증명하는 사례”라고 평가했다.
두 번째 과업은 모든 북한 주민이 자유를 향한 질주, 통일을 향한 염원을 ‘선택’하도록 하는 것. 그는 “병사는 한국을 선택했고 그래서 ‘죽어도 간다’는 일념으로 질주한 것”이라며 “모든 북한 주민이 자유를 향한 질주를 선택할 수 있도록 정부와 민간이 힘을 모아 맞춤형 콘텐츠를 제공해 그들의 마음을 바꿔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기재 기자 record@donga.com
□ 11월 29일 “김일성의 평양, 우리가 살던 아오지… 北엔 두 나라가 있어요”
▲ 소해금 연주자로 탈북한 박성진(가운데) 씨와 ‘열한 살의 유서’ 저자 김은주(오른쪽) 씨가 지난 28일 서울 노원구 광운대에서 북한인권시민연합 주최로 열린 ‘통통 콘서트’에서 각자의 탈북 과정을 설명하고 있다
‘脫北’ 박성진 연주가 - 김은주 작가, 대학서 ‘통통 콘서트’
‘칠갑산’ 불러 사형 선고 박성진
“北에 가 南 음악 연주하고 싶어”
‘꽃제비’ 출신… 책 펴낸 김은주
“北서도 요즘엔 동무 대신 오빠”
“북한에는 나라가 두 개 있습니다. 김일성이 태어난 평양, 그리고 제가 태어난 아오지 같은 지방이죠.”
함경북도 아오지에서 굶주림에 못 이겨 탈출한 작가 김은주(여·31) 씨가 입을 열자, 평양에 살다가 자유를 찾아 떠나온 소해금 연주자 박성진(46) 씨가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은 28일 서울 노원구 광운대에서 북한인권시민연합 주최로 열린 ‘통통 콘서트-남북 청년들 지금 통일을 만나다’에서 100여 명의 대학생에게 자신들의 탈북 과정을 생생히 전하며 통일에 대한 생각을 나눴다.
김 씨는 1990년대 ‘고난의 행군’ 시절 집 없이 떠돌며 먹을 것을 찾던 ‘꽃제비’ 출신이다. 김 씨가 태어난 아오지는 김일성 부자의 ‘은덕’을 입었다며 은덕군으로 불리지만, 정작 고난의 행군 때 가장 많은 아사자가 발생한 지역이다. 김 씨는 열한 살 때 ‘이렇게 죽을 바에야 두만강을 건너다 총 맞아 죽자’는 어머니의 손에 이끌려 탈북했다. 프랑스인 기자와 함께 자신의 탈북 과정을 책 ‘열한 살의 유서’에 담아 출간하기도 했다.
반면 박 씨는 평양에서 북송 재일교포의 아들로 유복하게 자라났다. 평양예술대학에 진학해 소해금 연주자의 길을 걸었다. 그러던 중 1990년대 중반 지인의 결혼식에서 한국 가요 ‘칠갑산’을 불렀다가 황해북도 태탄으로 쫓겨났다. 그때부터 남한 방송을 듣기 시작했고, 10년 뒤 탈북에 성공했다. 국내 유일의 소해금 연주자로 활동하고 있는 박 씨는 이날 ‘홀로 아리랑’을 연주해 공연장을 찾은 학생들에게 박수갈채를 받았다. 박 씨는 “통일이 되면 북한으로 돌아가 남한 음악을 연주하고 싶다”는 포부를 밝혔다.
두 사람은 북한 젊은이들의 연애와 결혼에 대한 이야기도 전했다. 박 씨가 “방직공장 여성 직원들과 옆 기계공장의 제대 군인들을 줄 세워서 한꺼번에 결혼시키기도 한다”고 하자 대학생들의 얼굴에 놀라움이 번졌다. 김 씨는 “과거에는 연애하는 것만으로도 생활총화에서 비판 대상이 되지만, 요즘은 연애 문화가 확산하고 있다”며 “예전에는 남자친구에게도 동무, 동지라고 불렀는데 요즘은 한류의 영향으로 오빠, 자기라고 부른다더라”고 전했다. 이날 앞자리에서 이야기를 듣던 대학생 송민정(여·22) 씨는 “북한에 대해 몰랐던 사실을 알게 돼 유익했다”고 말했다. 박성훈(22) 씨는 “소해금 연주가 감동적이었다”고 밝혔다. 글·사진 = 조재연 기자 jaeyeon@munhwa.com
□ 12.01 "북한엔 반려동물 단어도 없고 애완견 情들기 전에 잡아먹어"
탈북 수의학자가 밝힌 北실상
고기 많이 나오는 대형견 선호, 개가죽으로 외화벌이 과제 해결
11월 28일 서울 관악구 서울대 교수회관에서 인문·보건 등 각 분야 전문가들이 모여 '통일기반 구축 연합 학술대회'를 가졌다. '북한 수의(獸醫) 교육 현황 및 방역 공조 체제'라는 주제의 연구 발표가 있었다. 이 연구에 참여한 학자 중 탈북 수의학자 조현(가명·사진)씨가 있다.
조씨는 평안남도에서 축산부문 공무원으로 일하다 2010년대에 탈북했다. 조씨는 "개를 가족처럼 여기는 남한 사람들을 보고 깜짝 놀랐다"고 했다. 북한에는 애완(愛玩)동물이라는 말은 쓰지만, '반려(伴侶)동물'이라는 단어 자체가 없다고 한다. 조씨는 "북한에선 주체사상에 따라 '사람이 제일이고, 개·돼지 등 가축은 사람을 위해 복무하는 것들'이라고 가르친다"고 했다. 또 방송에 개가 옷을 입고 있는 남한이나 외국을 보여주며 '썩고 병든 자본주의 사회'라고 선전한다고 했다.
북한에 '애완동물'이라는 단어가 등장한 것은 1980년대 말쯤이다. 노동당 간부 등 상류층들이 집에서 애완용으로 개를 키우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작은 개를 주로 키웠지만, 경제가 어려워지기 시작하면서 1990년대 중반 이후부터는 큰 개가 인기를 끌기 시작했다. 조씨는 "고기와 가죽이 많이 나오기 때문"이라고 했다. 조씨는 "북한에서는 애완견을 5년 이상 키우는 경우가 거의 없다"며 "정(情)이 들기 전에 잡아먹기 위해서"라고 했다.
일반 주민들도 집집마다 개를 키운다. 고기와 가죽을 얻기 위해서다. 조씨는 "가구마다 할당된 '외화벌이 과제'를 개 가죽으로 해결하는 집들이 많다"고 했다.
고위층 사이에서 좋은 품종의 개는 옷차림과 더불어 그 사람의 부를 나타낼 수 있는 과시용 수단이 된다. 풍산개의 경우가 가장 비싸게 거래된다고 한다. 조씨는 "좋은 품종의 풍산개 새끼 한 마리는 30~40달러(북한 돈 약 20만~30만원)에 거래되고, 최상품종은 100달러를 호가한다"고 했다.
유지한 기자
□ 12.10 강제북송 겪은 탈북민들 증언… "창고에 쌓아둔 시체들 어디론가 실어나가"
지난 11월 4일 중국 선양에서 중국 공안에 체포된 탈북민 10명이 11월 17일 북한으로 강제북송됐다는 사실이 언론 보도를 통해 알려졌다. 체포 사실이 알려진 직후 탈북민을 구출하기 위한 우리 정부와 국제사회의 노력이 있었으나 강제북송을 막지 못했다. 11월 11일에 베트남 다낭에서 열린 한·중 고위 외교 당국자 접촉에서 강경화 외교부 장관은 왕이 중국 외교부장에게 “탈북자들이 원할 경우 신병을 접수할 용의가 있다”는 뜻을 밝혔고 중국 측은 “알아보겠다”고 답한 것으로 전해졌다. 강제북송된 탈북민 중에는 네 살 된 아이와 아이의 어머니가 포함돼 있었다. 한국에 먼저 들어온 이 아이의 아버지는 11월 11일 BBC와 CNN 방송을 통해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에게 아내와 아들의 북송을 막아달라는 영상메시지를 보냈다. 휴먼라이츠워치(HRW), 세계기독인연대(CSW), 앰네스티인터내셔널(AI) 등 국제인권단체도 탈북민 구출을 위해 목소리를 냈으나 중국 정부는 끝내 탈북민을 강제북송했다.
그동안 탈북민의 증언을 통해 북한의 인권 상황은 많이 알려져왔다. 그러나 강제북송 이후 탈북민이 어떤 일을 겪게 되는지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덜 알려졌다. 주간조선은 강제북송됐다 탈북한 4인을 만나 강제북송 이후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함경남도 함흥 출신의 곽정애(63)씨는 2002년과 2004년 두 차례 강제북송을 당했다. 곽씨가 처음 탈북했던 해는 1998년이다. 고난의 행군 시기(1995~1998)를 통과하며 남편은 굶주림과 질병으로 사망했고 군복무 중이던 아들은 영양실조에 걸린 상태로 돌아왔다. 곽씨는 가족을 먹여살리기 위해 중국에 건너가 생활하다 2002년 7월 중국 공안에 체포돼 지린성 옌지(延吉) 감옥에 갇히게 된다. 그는 “중국 감옥에서 의식이 혼미해질 때까지 구타당했으며 임신한 탈북여성의 강제낙태 장면도 목격했다”고 말했다. 이후 지린성 투먼(圖們)시 변방대로 옮겨졌다가 함경북도 남양 보위부로 북송된다. 곽씨는 함께 북송됐던 한 탈북여성이 북송되느니 차라리 죽는 게 낫다며 면도칼로 자살을 시도하는 것을 목격하기도 했다. 곽씨의 증언이다.
“보위부에서 처음 조사를 받을 때 알몸 상태로 조사를 받았고 몸에 숨겨둔 현금이 있는지 성기 속까지 검사했다. 알몸 상태로 높이뛰기 100번을 시키는 등 추악한 고문에 모멸감을 느끼며 치를 떨었다. 제공되는 음식은 멀건 국수죽뿐이었고 한 자세로 하루 종일 움직이지 못하게 하는 고문을 받았는데 이는 강제노동보다 더 견디기 힘들었다. 고문 후유증으로 인해 지금까지 척추디스크로 고통받고 있으며 취조 과정에서 주먹에 맞아 오른쪽 귀의 고막이 터졌고 한쪽 청각을 잃었다. 한 탈북여성이 아이를 낳자 갓 태어난 아기를 발로 밟아죽이는 모습도 목격했다.”
▲강제북송돼 전거리교화소에서 7년간 복역했던 탈북민의 그림. 보위부 지도원들이 취조 전 알몸검사를 하고 있다. / photo 세이지코리아
창고에 쌓아둔 시체들
그는 남양 보위부에서 한 달간 조사를 받은 후 남양 단련대로 이송됐다. 단련대에서는 새벽 5시부터 밤 10시까지 낮에는 강제노동을 하고 밤에는 사상교육을 받았다. 영양실조에 걸린 수감자들은 강제노동과 고문을 견디지 못하고 매일마다 죽어나갔다. 곽씨의 말을 더 들어보자.
“단련대에서는 청년 2명이 담배꽁초를 주웠다는 이유로 손톱 밑을 쇠꼬챙이로 찌르는 고문을 당했다. 노역 중에 조금이라도 뒤처지면 군홧발로 차이고 짓밟혔다. 감방 안에는 화장실이 없어 대야에는 대소변이 넘쳐났고 악취가 진동했다. 감방은 짐승의 우리와 같았다. 밤에는 단련대 지도원들이 마음에 드는 여자 수감자들을 불러내가곤 했다.” 곽씨는 단련대에서 10일간 수감된 후 청진 집결소로 보내졌다. 청진 집결소에서도 하루에 수명씩 수감자들이 죽어나갔고 시체를 창고에 쌓아두었다가 어디론가 실어갔다. 이후 거주지였던 함흥 단련대로 옮겨진다. 중국에서 체포됐을 때는 여름이었는데 함흥 단련대에서 겨울을 맞이하게 된다. 북한의 감옥은 의복을 지급하지 않기에 많은 수감자들이 여름옷을 입은 채 혹한을 이겨내야 했다. 곽씨는 영양실조, 고혈압, 탈수증세 등으로 여러 차례 쇼크상태를 경험했다. 그의 딸이 뇌물을 써서 출소하게 됐는데 곽씨는 “단련대에 더 있었다면 살아서 나오지 못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고향인 함흥에 돌아왔지만 마을 곳곳 아사자(餓死者)들의 시체가 뒹굴었고 보위부 지도원들의 감시와 뇌물 요구에 시달려야 했다. 곽씨는 2004년에 재탈북을 시도한다. 생계 목적으로 탈북했던 첫 탈북과는 달리 한국행을 위한 탈북이었다. 베이징(北京)까지 무사히 이동했으나 탈북 브로커의 실수로 중국 공안에 잡히게 된다. 그는 랴오닝성 단둥(丹東) 변방대를 거쳐 신의주 보위부로 북송된다. 한국행을 시도했기에 정치범수용소에 가게 될 상황이었으나 함께 붙잡힌 탈북민이 곽씨는 베이징에 생계 목적으로 있다가 한국행을 시도하는 이들과 우연히 만난 것이라 변호해줘서 경제사범으로 분류될 수 있었다. 곽씨를 변호해준 탈북민은 이후 정치범수용소에 수감돼 사망했다고 한다. 보위부에서 조사를 받은 뒤 신의주 집결소를 거쳐 함흥 단련대에 다시 보내졌고 강제노역과 고문에 시달리다 영양실조에 걸린다. 극심한 영양실조로 아사 직전 상태까지 이르자 일시 출소됐고 원기를 회복한 뒤 단련대로 다시 끌려가 6개월을 더 복역하고 출소하게 된다. 그는 출소 이후 2006년에 다시 탈북을 시도했고 유엔난민기구(UNHCR)의 도움을 받아 2008년에 한국에 들어오게 된다.
함경북도 OO 출신의 A씨는 2006년에 강제북송을 당했다. 고난의 행군 시절 북한에서 집단 아사가 발생하며 대량 탈북이 일어났다. 당시 A씨의 가족과 친척 가운데도 굶어죽은 사람들이 여럿 있었다. 당시에는 사태가 너무 심각해 먹을 것을 구하러 중국으로 탈북하는 행위에 대해 북한 당국도 강하게 처벌하지 않았다고 한다. 고난의 행군 시절 그의 가족 중 한 명도 탈북해 연락이 단절됐다가 2000년대 중반에 연락이 닿게 된다. 탈북한 A씨의 가족은 한국에 정착해 있었고 돈을 보내오며 탈북할 것을 강권했다. A씨는 줄곧 탈북 권유를 거부하다 2006년 1월 말 북한에 더 이상 희망이 없음을 느끼고 탈북을 시도한다. 한국에 있는 가족이 보내준 이들의 도움을 받아 함경북도 회령, 중국 지린성 옌지 등을 거쳐 2006년 3월 중순 내몽골 만주리(满洲里)에 도착한다. 차량을 타고 다음 행선지로 이동 중 중국 변방대에 체포된다. A씨가 탑승했던 차량이 맞은편에 변방대 차량이 나타나자 방향을 바꿔 이동했고 이를 수상히 여긴 변방대가 검문을 한 것이다. A씨는 중국 공안에게 조사를 받은 후 2006년 3월 말 중국 OO 변방대로 이송된다. 내몽골 지역에서 붙잡혔기 때문에 한국행 혐의를 받고 중형에 처해질 상황이었다. 그러나 중국 공안의 선처를 받아 북·중 접경지역에서 붙잡힌 경제사범으로 처리돼 2006년 4월 말 북한 OO 보위부에 넘겨진다.
식사는 곰팡이 핀 옥수수죽뿐
A씨의 증언이다. “3평(10㎡)짜리 감옥에 50명을 가뒀다. 낮에는 노동과 체벌에 시달리고 밤에는 좁디좁은 공간에서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심신이 허약한 채로 들어온 한 여성 수감자는 3일 만에 정신이상을 보이며 소리를 지르다가 끌려나갔고 그를 다시 볼 수 없었다. 보위부에서 제공한 식사는 곰팡이 핀 옥수수로 끓인 죽이었다. 처음에는 냄새가 나서 먹지 못했으나 굶주림에 시달리다 보니 먹게 됐다. 씻을 물이 감방 내 변소에서 나오는 물밖에 없어 변기를 깨끗이 닦은 후 물을 받아 씻었다.”
A씨는 이후 노동단련대로 보내져 강제노역을 하다 영양실조에 걸린다. 감옥에서 죽는구나 했는데 봄철 농촌동원을 나가 옥수수국수를 먹고 기력을 회복한다. 도 집결소를 거쳐 6월 말 고향의 지역 안전부로 옮겨진다. 지역 안전부에서는 “고문으로 하반신이 마비된 청년이 땅을 기어다니며 노동하는 모습을 목격했다”고 증언했다. 지역 안전부에 와서는 가족들이 면회식을 넣어줘 영양실조 상태를 면할 수 있었다. 2006년 7월 초 안전부 지도원들은 A씨를 장마당에 세워둔 채 동네 주민들을 모아놓고 공개적으로 죄인임을 알렸다. A씨는 수치심에 얼굴을 들 수 없었다. 2006년 8월 말에 법정에서 1년형을 선고받고 남은 형기를 OO 단련대에서 복역했다. 재판은 변호사 없이 진행됐으며 단심으로 이뤄졌다. A씨는 출소 이후 2007년 10월 말 탈북해 캄보디아를 거쳐 2008년 한국에 들어오게 된다.
함경북도 무산 출신의 B씨는 처음에는 탈북에 대한 생각 없이 아들을 살리기 위해 중국을 왕래하다 두만강 경비대에 체포됐다. 2000년에 B씨의 둘째 아들이 중국 무역을 위해 두만강을 넘다 붙잡혀 안전부에 수감됐다. B씨는 아들에게 면회식을 넣어주고 안전부 지도원에게 줄 뇌물을 마련하기 위해 여러 차례 중국을 왕래했다. 면회식을 넣어주기 위해서는 지도원에게 뇌물을 제공해야 했다. 돈은 앞서 탈북해 중국에서 지내고 있는 B씨의 첫째 딸이 마련해주고 있었다. B씨와 딸이 만나기로 한 날, 딸은 돈을 주려고 오는 길에 중국 공안에 붙잡혀 북송됐고 B씨는 딸을 만나지 못한 채 북한으로 돌아가던 중 두만강 경비대에 붙잡혔다. B씨와 그의 딸은 같은 감옥에 갇히게 되나 가족임이 알려지면 형량이 커질 것을 우려해 모른 체하며 지냈다.
B씨의 증언이다. “감옥에서 하루 종일 동일한 자세를 취하는 고문을 당했고 잘못하면 쇠꼬챙이로 피가 터질 때까지 맞았다. 한 감방 안에 20여명이 생활했는데 누울 자리가 없어 잠을 이룰 수 없었으며 한 사람만 잘못해도 단체 고문을 받았다. 식사는 콩이 조금 섞인 통강냉이 한 줌과 소금국이 전부였다.”
B씨와 그의 딸은 단순경제사범으로 처리돼 12일 만에 출소한다. 이후에는 돈을 마련할 길이 없어 둘째 아들을 찾아가지 못했다. 2년형 복역이 끝났음에도 아들에 대한 소식이 없었다. 확인해 보니 뇌물이 끊어진 뒤 지하 갱으로 보내져 노역하다 영양실조로 사망했다. 둘째 아들의 6살짜리 아들은 당세포비서 가정으로 끌려간 뒤 꽃제비 생활을 하다 병사했다. 그의 맏아들은 군복무 중 사망했다. B씨는 2008년 첫째 딸, 맏손자와 함께 탈북해 2009년 3월 한국에 들어오게 된다.
함경남도 단천 출신의 C씨는 2007년 한국에 있는 친척을 만나기 위해 중국에 나왔다가 중국 공안에 붙잡혔다. 북한 장마당에서 받은 달러 지폐가 위조지폐인 줄 모르고 사용하다 신고를 당해 중국 공안에 넘겨진 것이다. 북한으로 북송돼 청진 집결소 등에서 3달간 복역하다 대장염 등 병이 심해지자 풀려났다. 옥수수죽 식사 등 집결소 내에서의 구금생활은 다른 탈북민의 증언과 일치했다. C씨는 이후 재탈북 과정에서 두만강을 건넌 직후 중국 공안에 발각되나 지체장애인 연기를 통해 위기를 모면한다. 그는 중국에서 거동이 불편한 노인들을 돌보는 보모 생활을 하며 북한에 있는 가족들에게 돈을 보냈다. 중국에서 살던 중 한국행을 권유받고 2010년에 입국하게 된다.
▲지난 11월 30일 청와대 앞에서 열린 ‘탈북난민 강제북송 중지요구’ 촉구 기자회견. / photo 북한인권단체연합회
수감자의 30~40% 6개월 이내 사망
2013년 말 북한인권정보센터(이사장 이재춘)에서 발간한 ‘중국의 탈북자 강제송환으로 인한 인권침해 실태와 개선 방안’ 연구서는 강제북송된 탈북민의 송환 및 구금시설 이동경로를 상세히 밝히고 있다. 탈북민이 중국 공안에 붙잡히면 북·중 접경지역의 중국 변방대에 구금돼 있다가 북한 국경 관할 보위부로 송환된다. 보위부에서 조사를 거친 후 도 집결소로 보내지고 최종적으로 거주지역 구금시설로 이감된다. 이 과정에서 단련대로 보내져 강제노역을 하기도 한다. 북한의 사법 체계는 형의 결정과 집행이 사건이 발생한 지역이 아닌 피의자의 거주지 관할 사법기관에서 담당하도록 돼 있어 지역 구금시설에 도착해야 재판을 받고 형량이 정해진다. 이는 탈북민의 증언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었다. 강제북송된 이들의 상당수가 지역 구금시설로 이감돼 재판을 받기도 전에 사망에 이르고 있다. 이한별 북한인권증진센터 대표는 “탈북민의 증언을 종합해 볼 때 수감자의 30~40%가 6개월을 못 버티고 죽는 것으로 추산된다”고 말했다.
정치사범이냐 경제사범이냐에 따라 형량이 크게 달라진다. 생계 목적으로 탈북한 경제사범의 경우 보통 6개월에서 3년형을 선고받고 단련대, 교화소 등에서 징역살이를 한다. 그러나 한국행을 시도했거나 기독교를 접했던 것이 발각될 경우 정치사범으로 분류돼 정치범수용소에 갇히거나 사형에 처해진다. 정치범수용소는 혁명화구역과 완전통제구역으로 나누어지는데 혁명화구역은 일정 형량을 살고 나올 수 있는 가능성이 있지만 완전통제구역은 한번 들어가면 죽을 때까지 나올 수 없는 곳이다. 완전통제구역에서 구금돼 있다 살아나온 유일한 증언자로는 김용씨가 있다. 그는 이례적으로 완전통제구역에서 혁명화구역으로 이감됐기에 살아나올 수 있었다. 정치범수용소에 구금된 이들은 일반 구금시설보다 더 강한 강제노역과 고문, 구타에 시달리며 굶어죽지 않기 위해 쥐, 개구리, 뱀, 지렁이 등을 날로 먹으며 소똥에 박힌 옥수수까지 빼먹었다는 증언들이 나오고 있다.
인터뷰를 한 탈북민 4인은 강제북송 후 살아남아 재탈북에 성공할 수 있었지만 지금 이 순간에도 수많은 탈북민이 탈북 과정에서 죽거나 강제북송돼 감옥에서 고통받고 있다. 재중 탈북민의 수는 조사기관에 따라 적게는 1만~1만5000명에서 많게는 10만~15만명까지 추산되고 있다. 이들은 강제북송의 두려움에 떨며 인권의 사각지대에 놓인 채 노동착취, 성폭행 등의 극심한 인권침해를 당하고 있다. 이에 유엔 등 국제사회는 재중 탈북민의 강제북송 금지 및 인권문제 해결을 위해 중국과 북한을 압박하고 있다. 유엔 북한인권조사위원회(COI)는 2014년 발표한 권고안에서 “중국은 재중 탈북민을 최소한 현지 난민으로 대우하고 ‘국제난민에 관한 협약’이나 국제법상의 ‘강제송환금지 원칙’을 준수해 탈북민을 북한으로 강제송환하지 말 것”을 촉구했다.
지난 11월 30일 국내외 70여개의 북한인권단체가 속해 있는 북한인권단체연합회(이하 북인연)는 청와대 앞에서 ‘탈북난민 강제북송 중지요구’를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열었다. 북인연은 기자회견에서 “문재인 대통령은 12월 한·중 정상회담에서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에게 국제법의 원칙에 따른 탈북민 강제송환 중지 및 탈북난민 보호를 요구하고, 재중 탈북민이 대한민국 입국을 원한다면 우리 정부는 이들을 모두 수용할 수 있음을 명확히 밝히라”고 촉구했다. 정베드로 북인연 대표는 “문재인 대통령은 인권변호사 출신이고 강경화 외교부 장관은 유엔 인권최고대표사무소 부대표까지 역임한 바 있는데 우리 정부가 북한인권 문제를 외면하지 않았으면 한다. 이번 강제북송 사태도 우리 정부가 더 적극적으로 나섰다면 막을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안타까움이 든다”고 말했다. 앞서 11월 29일에는 선민네트워크(대표 김규호)와 탈북동포회(회장 한금복) 주최로 서울 명동 중국대사관 앞에서 ‘탈북민 강제북송 중지 호소 수요집회’가 열렸다. 2008년 9월 시작된 이래 400번째를 맞은 집회로 참가자 20여명은 “중국 정부는 탈북난민 강제북송을 중단하라”고 호소했다
김성훈 주간조선 기자
□ 12.11 중국을 ‘제2의 헝가리’로! 국제사회가 나서 강제北送 막아야
▲ 1. 중국 공안이 외국 대사관으로 피신하려는 탈북자들을 끌어내고 있는 모습, 영화 ‘크로싱’의 한 장면.
2. 지난 11월 29일 우리나라 인권단체 회원들이 ‘400번째 외침’이라는 팻말을 들고 서울 명동 중국대사관 앞에서 탈북자 강제송환 중단을 요구하고 있다. photo 선민네트워크
3. 중국 투먼에 있는 북·중 국경지대를 알리는 표지석. 뒤로 탈북자들이 ‘죽음의 다리’라고 부르는 투먼다차오가 있다. photo 위키피디아
중국 지린성 옌볜조선족자치주의 투먼(圖們)은 두만강을 경계로 북한의 함경북도 온성군 남양을 마주 보고 있는 도시다. 두만강에서 이름을 따온 이곳에는 ‘투먼다차오(圖們大橋)’라는 다리가 있다. 투먼∼난양을 연결하는 이 다리는 길이 500여m, 폭 6m로 왕복 2차선의 작은 교량이다. 중국으로 탈출했다가 체포된 탈북자들은 이 다리를 통해 북한으로 강제 이송된다. 때문에 탈북자들은 투먼다차오를 ‘죽음의 다리’라고 부른다.
투먼에는 중국에서 체포된 탈북자들을 가두고 있는 수용소가 있다. 탈북자들이 ‘도문 변방수용소’라고 부르는 이곳의 정식 명칭은 ‘투먼시 공안변방대대 변방 구류심사소’이다. 두만강 옆의 이 수감시설은 탈북자들이 북송 전 마지막으로 머무는 곳이다. 이곳까지 가면 사실상 북송이 확정됐기 때문에 ‘도문까지 갔다’는 말은 탈북자들에겐 마지막 희망이 사라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곳은 원래 국제감옥(외국인 수감용)이지만 수감자들은 모두 탈북자다. 중국은 탈북자들을 이곳과 단둥(丹東) 및 북한과 다리가 연결된 여러 지역을 통해 북한에 넘긴다.
투먼의 ‘죽음의 다리’
탈북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중국 공안은 투먼수용소에서 탈북자를 심문해 한국으로 가려는 것인지 또는 단순 탈북인지를 가려내 북한에 통보한다고 한다. 이 과정에서 탈북자들을 구타하는 등 가혹행위뿐만 아니라 여성 탈북자들을 성추행하는 사례도 벌어지고 있다고 한다. 중국 공안은 한국행을 시도한 탈북자의 서류에는 다른 색깔의 도장을 찍는 방법으로 북한에 통보해왔다고 한다. 탈북자 북송서류에 ‘한국행’이라고 직접 쓰면 중국이 북한에 협조한 명백한 증거물이 남기 때문에 1월엔 빨간 도장, 2월엔 파란 도장 등 시기별로 북한과 약속한 색깔의 도장을 찍는 방법으로 구분해 통보하고 있다는 것이다. 한국행을 시도한 탈북자는 북송된 뒤 정치범수용소에 끌려가거나 처형될 가능성이 높다.
중국 공안이 북송 전에 한국행 여부를 가려내는 것은 북한의 요구에 따른 것이다. 중국 공안은 그 대가로 북한으로부터 통나무와 광물을 받아왔다고 한다. 중국 공안은 투먼수용소에 탈북자들을 감금했다가 인원이 차는 대로 매주 한두 번씩 버스에 태워 북한에 넘긴다. 과거엔 군용트럭으로 북송했지만 북송 도중에 투먼다차오에서 투신해 죽음을 택하는 탈북자들이 많아 버스로 바꾸었다고 한다. 중국 정부가 강제 북송하는 탈북자의 숫자는 정확하게 알 수 없다. 중국과 북한 정부가 모두 극비 사항으로 취급하기 때문이다.
▲ 1989년 동독 난민들이 헝가리 정부의 결정으로 오스트리아 국경을 넘고 있다. photo 슈피겔
“북송은 사실상 살인 행위”
국제사회에서 중국의 탈북자 강제 송환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가 고조되고 있다. 가장 최근 사례로는 지난 11월 17일 북한으로 강제송환된 4세 아이 등 탈북자 10명을 들 수 있다. 한국에 먼저 들어온 이 아이의 아버지 이태원(가명·28)씨는 BBC와 CNN 방송을 통해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에게 아내와 아들의 북송을 막아달라고 호소하는 영상메시지를 보냈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이씨는 “탈북자들을 북한으로 돌려보내는 것은 사실상 살인 행위”라고 중국의 조치를 비난했다.
국제인권단체 휴먼라이츠워치(HRW)는 중국 공안 당국이 최근 들어 탈북자들에 대한 단속을 강화하는 추세를 보이고 있다고 지적했다. 실제로 이 단체의 집계에 따르면 중국 공안 당국은 지난 7∼9월에만 탈북자 최소 49명을 적발했다는 것이다. 이는 지난 12개월 동안 51명이 체포된 것에 비하면 그 수가 급격히 늘어난 것이다. 국제인권단체들은 중국의 탈북자 강제북송을 강력하게 규탄하고 나섰다. HRW를 비롯해 앰네스티인터내셔널(AI)과 세계기독인연대(CSW) 등 국제인권단체들은 국제사회가 강력한 압박으로 중국 정부의 행동을 바꿔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국제인권단체들은 “탈북자들이 강제로 북송될 경우 구금과 고문 등 가혹행위와 심지어 처형에 직면할 수도 있다”면서 “중국 정부에 탈북자들에 대한 강제 북송을 중단하고, 이들에게 난민지위를 부여하거나 한국 등 제3국으로 갈 수 있도록 허용하라”고 촉구했다. 필 로버트슨 HRW 아시아 부국장은 “국제사회가 탈북자들의 강제송환에 큰 관심을 보이고 있지만, 중국 정부는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다”면서 “국제사회가 중국 정부에 대한 압박을 강화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중국 정부는 탈북자들의 강제 북송 행위를 중단해달라는 유엔 인권이사회(UNHRC)의 요청도 거부하는 등 국제사회의 비난을 아랑곳하지 않고 있다. 중국 정부의 입장은 경제적인 이유로 불법적으로 자국 국경을 넘은 북한 주민은 난민이 아니라는 것이다. 중국 정부는 그동안 국내법, 국제법, 인도주의 원칙에 따라 탈북자 문제를 처리하고 있다고 앵무새처럼 말해왔다. 여기서 중국 정부가 말하는 국제법은 북한과 맺은 ‘조·중(북·중) 탈주자 및 범죄인 상호인도협정’(1960)과 ‘변경지역에서의 국가안전 및 사회질서를 위한 의정서’(1986) 등이다. 중국 정부는 이 조약들에 따라 탈북자를 북한으로 송환한다. 이는 일반 형사범죄자나 출입국관리법상의 단순한 불법 입국자에게 적용되는 조약일 뿐 국제법상 난민의 지위가 인정되는 탈북자에게 적용할 수 없다. 때문에 중국 정부의 탈북자 강제 북송은 엄연히 국제법 위반이다.
유엔은 1951년 난민 문제의 해결을 위해 ‘난민지위에 관한 협약’을 채택했다. 제1조는 “인종·종교·국적·특정사회집단에의 소속 또는 정치적 견해를 이유로 박해를 받게 될 것이라는 충분한 이유 있는 공포 때문에 자국 국적 밖에 있는 자 및 자국의 보호를 받을 수 없거나 또는 그러한 공포 때문에 자국의 보호를 받기를 원하지 않는 자”로 규정하고 있다. 제33조 제1항은 “체약국은 난민을 어떠한 방법으로도 인종·종교·국적·특정사회집단의 구성원 신분 또는 정치적 의견을 이유로 그 생명이나 자유가 위협받을 우려가 있는 영역의 국경으로 추방하거나 송환해선 안 된다”면서 ‘강제송환금지 원칙(principle of non-refoulement)’을 규정했다. 중국은 1979년 베트남과 전쟁 시기 발생한 중국계 베트남 난민을 보호하기 위해 이 협약에 1982년 가입했다.
탈북자가 북한으로 강제송환되면 ‘생명이나 자유가 위협받을 우려’가 매우 높음에도 적절한 난민 인정 절차를 거치지 않고 강제송환하는 행위는 중국이 난민협약의 강제송환금지 의무를 위반하고 있음을 명백히 보여주는 것이다. 중국 정부가 주장하는 대로 탈북자 중 다수가 경제적 이유로 월경했으며 중국의 판단으로는 국제법상 난민이 아니라 하더라도 진정한 난민이 소수라도 있을 가능성이 있다면 그들을 위한 적절한 난민 인정 절차를 반드시 거쳐야 하는 것이 당사국인 중국의 의무이다. 탈북자들이 정식 난민지위 인정 절차를 밟게 된다면 그중 대다수는 북송 시의 처벌 가능성을 근거로 난민지위를 인정받을 수 있을 것이다.
강제송환금지 원칙은 1984년 채택된 ‘고문금지 협약’에도 포함돼 있다. 중국은 1988년 10월 이 협약을 비준했다. 이 협약 제3조는 “어떠한 당사국도 고문받을 위험이 있다고 믿을 만한 상당한 근거가 있는 다른 나라로 개인을 추방·송환 또는 인도해서는 안 된다”고 규정하고 있으며 그 대상이 난민뿐 아니라 모든 인간에게 적용된다는 점에서 난민협약보다 적용대상이 넓다. 또 강제송환금지원칙은 해석상 ‘고문’은 물론이고 정도가 덜한 기타 ‘학대행위’에도 적용됨으로써 적용범위가 상당히 넓다. 게다가 난민협약 제33조에서 금지한 ‘추방’ 및 ‘송환’에 더해 범죄인 ‘인도’도 금지하고 있다.
강제송환금지 원칙은 국제법상 강행규범(jus cogens)으로 돼 있다. 국제법상 강행규범이라 함은 ‘여하한 일탈도 허용되지 않는 규범으로서 뒤에 성립되는 같은 성질의 일반국제법 규범에 의해서만 변경이 가능한 것’을 일컫는다.(1969년 조약법에 관한 빈 협약 제53조) 이는 중국이 탈북자를 북한으로 강제송환할 수도 없고 북한이 강제송환을 요구할 수도 없음을 의미한다. 이와 관련해 중국의 국내법이 어떻게 되어 있는가는 전혀 문제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국가는 국내법을 근거로 국제법 위반을 정당화할 수 없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는 조약법에 관한 빈 협약에 명문상의 규정이 있을 뿐 아니라(제27조) 국제관습법으로 확립된 규칙이기도 하다. 또 유엔헌장 103조, 난민협약 8조와 40조 1항은 국제협약과 국내법이 상충할 때는 국제협약이 우선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중국은 유엔 회원국이자 안보리 상임이사국일 뿐만 아니라 미국에 버금가는 주요 2개국(G2)의 일원으로서 국제법 준수와 인류의 보편적 가치인 인권의 존중 의무가 있다.
중국 정부는 그동안 유엔 안보리에서 북한의 핵과 미사일 도발에 대한 제재 결의안을 채택할 때마다 북한 주민들의 고통을 거론하면서 강력한 제재를 거부해왔다. 중국 정부는 또 북한의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인 화성-15형 발사와 관련해 미국 정부의 원유공급 중단요구에도 북한 주민들의 어려운 삶을 고려해야 한다면서 부정적인 입장을 보이고 있다. 하지만 북한 주민들을 인도주의적 위기로 내몰아선 안 된다는 중국 정부의 ‘선의(善意)’는 탈북자들에게는 적용되지 않고 있다. 탈북자들을 강제송환하는 것이야말로 반(反)인도적 범죄라고 말할 수 있는데도 중국 정부는 이를 외면하고 있다. 중국 정부는 아예 유엔난민기구(UNHCR)의 탈북자 접촉까지 불허하고 있다.
강제 북송은 핵 미사일 개발 돕는 행위
중국 정부의 이런 이율배반적 입장에 대해 국제사회는 그 어느 때보다 분노하고 있다. 필리포 그란디 UNHCR 최고대표는 “탈북자가 중국 정부에 붙잡히거나 강제송환된다는 소식을 접할 때마다 중국 정부와 접촉한다”면서 “탈북자들은 절대 강제송환돼선 안 된다”고 강조했다. 토머스 오헤아 킨타나 유엔 북한인권특별보고관도 “중국 정부의 탈북자 강제송환이 급증하고 있다”면서 “중국 정부는 탈북자들에 대한 강제송환을 중단하라”고 촉구했다. 미국 정부도 중국 정부에 탈북자 강제송환 문제를 강력하게 제기하고 있다. 캐티나 애덤스 국무부 동아태 담당 대변인은 “모든 나라가 영토 내 북한 난민과 망명 희망자들을 보호하는 데 협력해달라”면서 “미국은 탈북자를 보호하고 이들을 위한 장기적 해결책을 찾기 위해 다른 나라들과 유엔 인권이사회, UNHCR 등 국제기구들과 계속 협력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미국 국무부는 지난 10월 26일 북한의 인권유린 제재 대상에 탈북자 강제북송을 책임진 구승섭 선양주재 총영사 등 중국 주재 북한 외교관을 처음으로 포함시켰다. 탈북자 강제북송 실무 책임자를 인권 제재 리스트에 올린 것은 탈북자를 단속하며 강제북송에 협력하는 중국 정부까지 겨냥한 것이다. 미국 의회도 최근 탈북자 강제송환에 연루된 중국 부처와 개인을 제재해야 한다는 보고서를 내기도 했다.
중국 정부가 국제사회의 강력한 요구를 거부하는 이유는 북한 정권의 붕괴를 우려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문제의 핵심은 김정은 정권이 북한 주민들의 민생은 돌보지 않고 핵과 미사일 개발에만 총력을 기울이는 한 탈북은 계속 이어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김정은 정권이 지금이라도 핵과 미사일을 폐기하고 개혁·개방 정책을 추진한다면 대규모 탈북은 줄어들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중국 정부의 탈북자 강제송환은 김정은 정권의 핵과 미사일 개발을 돕는 행위라고 말할 수 있다. 중국 정부는 그동안 북한이 핵보유국이 되는 것을 반대한다는 말을 해왔지만 실제로 이를 이행하려는 노력을 보이지 않았다. 때문에 중국 정부가 김정은 정권을 강력하게 압박할 수 있는 수단은 바로 탈북자를 강제송환하지 않는 것이 될 수 있다. 주펑 베이징대 국제관계학원 교수도 “북한 난민을 받아들이는 게 중국이 평양에 영향을 줄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수단”이라고 지적했다. 중국 정부가 북한의 비핵화를 진정으로 원한다면 탈북자에 대한 정책을 바꿀 필요가 있다.
한국을 비롯한 국제사회도 중국이 ‘제2의 헝가리’가 될 수 있도록 설득과 압박을 해야 한다. 헝가리 정부는 1989년 6월 개혁파인 미클로시 네메트 총리의 지시로 오스트리아와의 국경선 철조망을 제거했다. 그러자 동독 주민들이 대거 서유럽으로 가는 길목인 오스트리아로 탈출하기 위해 헝가리로 향했다. 헝가리 정부도 동독과의 여행협정에 따라 중국처럼 동독 주민들을 체포해 강제송환을 해왔다. 그러자 헬무트 콜 서독 총리는 헝가리를 네 차례나 방문해 네메트 총리를 집요하게 설득했다. 미국 등 국제사회도 헝가리에 직·간접적으로 압력을 행사했다. 결국 헝가리 정부가 같은 해 9월 동독과의 여행협정을 폐기하고 동독 주민들이 오스트리아 국경을 넘는 것을 허용함으로써 베를린 장벽 붕괴와 독일 통일의 기폭제 구실을 했다. 태영호 전 영국 주재 북한공사는 “독일 통일도 헝가리가 동독 주민들의 탈출 경로를 막지 않았기 때문에 가능했다”면서 “중국이 탈북자들을 강제 북송하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당시 서독 정부처럼 한국 정부도 중국 정부에 강제송환 금지 등 탈북자 정책을 변경할 것을 강력하게 요구해야 한다. 북송되는 탈북자들의 생명과 인권을 보호하기 위해서라도 시급하고 중요한 사안이기 때문이다. 미국 정부도 헝가리처럼 탈북자 강제송환을 하지 못하도록 중국 정부를 더욱 강경하게 압박할 필요가 있다. 중국에 대북 원유 공급중단보다 탈북자에 대한 인도주의 정책을 추진할 것을 요구하는 것이 더 쉬울 수가 있기 때문이다.
주간조선 2486호 이장훈 국제문제애널리스트 truth21c@empas.com
□ 12월 12일 “강제北送뒤 강제낙태… 쥐껍질까지 먹어” 참혹한 증언
▲ (서울=연합뉴스) KAL기 납북 사건이 발생한 지 48주년이 되는 날인 11일 오후 서울 프레스센터에서 KAL기 납치피해자 가족회, 북한 이탈 주민 글로벌교육센터(TNKR) 관계자 등이 북한당국에 제3국에서의 가족상봉을 촉구하고 있다.2017.12.11
탈북자들 유엔서‘인권유린’성토
헤일리 “국제사회가 행동해야”
조태열 “근본원인 대응않으면
인권개선촉구, 緣木求魚 같아”
유엔 안전보장이사회가 올해로 4년째 북한인권 문제를 공식 안건으로 상정한 11일 유엔본부는 북한 김정은 정권의 가혹한 인권탄압·유린 실태를 고발하는 ‘성토장’이 됐다. 굶주림 때문에 개구리·쥐 껍질을 벗겨 먹었다는 진술까지 등장했고, 고문과 성폭행·강제 낙태 등 상상을 초월하는 가혹 행위에 대한 증언도 이어졌다.
가장 먼저 포문을 연 것은 니키 헤일리 유엔 주재 미국대사였다. 그는 이날 유엔 안보리 북한인권 문제 회의에서 “북한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를 전 세계가 알게 될 때까지 우리는 계속 말해야 한다. 국제사회가 행동하지 않는 것은 말이 안 된다”면서 목소리를 높였다. 또 헤일리 대사는 엄격한 성분제도와 정치범 수용소, 연좌제, 외국 언론매체 금지, 외국인 납치 등 인권유린 실태를 조목조목 비판했다. 특히 헤일리 대사는 방청석에 있던 강제북송 피해자인 지현아·조유리 씨를 언급하면서 “탈북자들이 자유에 이르는 길은 위험하고 때로는 치명적으로, 강제송환된 여성 중에서는 강제 낙태를 당하는 경우도 있다”고 말했다.
자이드 라드 알후세인 유엔인권최고대표도 이날 회의 영상 메시지에서 “북한의 감옥·노동교화소에서는 고문 등 가혹 행위가 자행되고 있으며, 탈북여성은 인신매매에 취약하고 강제북송될 경우에 상당한 박해를 받는다”고 말했다.
조태열 유엔 주재 한국대사도 당사국 자격으로 회의에 참석, 지난 11월 북한 귀순병 사례를 언급하면서 “자유와 인간다운 삶을 찾아 목숨을 걸고 국경을 넘었으며, 이는 북한인권 상황이 얼마나 심각한 것인지 웅변적으로 말해주고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조 대사는 “북한 주민들의 인권상황 악화를 야기하는 근본 원인에 대응하지 않고 북한인권 상황 개선을 촉구하는 것은 연목구어(緣木求魚)나 다름없다”고 밝혀, “우리는 평화·안보와 인권에 구분이 있다고 생각해왔지만 그렇지 않다”고 말한 헤일리 대사와는 다소 다른 인식을 보였다.
한편 한·미·일 등이 안보리 회의 직후 개최한 별도의 북한인권 행사에서는 더욱 가혹한 인권유린 실태에 대한 증언이 쏟아져나왔다. 2002년 탈북한 지현아 씨는 “임신 3개월 만에 다시 3번째로 북송됐고, 해당 보안서에서 마취도 없이 강제 수술을 통해 낙태당했다”고 증언했다. 또 지 씨는 “북한에서 강제북송된 임신부들이 낙태를 당하고, 세상에 나온 아이가 죽임을 당하는 것을 수없이 지켜봐야 했다”면서 “식사도 부족해서 메뚜기를 잡아먹고, 배추를 주워 먹고, 개구리와 쥐의 껍질을 벗겨 먹었다”고도 했다.
워싱턴=신보영 특파원 boyoung22@munhwa.com
□ 12.12 강제낙태, 쥐 껍질로 식사…북송 탈북자의 교화소 참혹상 증언
▲유엔본부서 탈북자 강제북송을 주제로 열린 북한 인권 토론회./연합뉴스
강제북송과 탈북을 거듭한 끝에 한국에 정착한 지현아씨가 그 과정에서 겪은 인권 유린 경험을 전 세계에 알렸다. 지씨는 지난달 판문점 공동경비구역(JSA)을 통해 귀순한 북한군 병사에 대해 "탈북병사의 질주 모습은 2천500만 북한 주민의 자유를 향한 질주"라고도 했다. 뉴욕 유엔본부는 11일(현지시각) 탈북자 강제북송을 주제로 북한 인권 토론회를 열었다. 이날 오전 유엔 안보리가 북한 인권 문제를 4년 연속 정식 안건으로 채택해 논의한 데 이어 부대행사로 열린 것이다. 한국·미국·영국·프랑스·일본·호주·캐나다의 주 유엔 대표부가 공동 주최하고 조태열 한국 대사를 비롯한 이들 국가의 유엔주재 대사가 참석했다. 니키 헤일리 유엔주재 미국 대사가 논의를 직접 주도했다.
▲탈북자 지현아씨./연합뉴스
이날 토론회에는 강제북송됐다 탈출한 탈북자들이 참석했는데, 그중에서도 1999년쯤 처음 중국으로 탈북했다가 3차례 강제북송되고 4차례 탈북을 감행한 지현아씨가 참석했다. 그는 2007년 한국땅에 정착했다.
지씨는 가족 중 어머니와 함께 제일 먼저 한국땅을 밟았다. 이후 남동생과 여동생이 순차적으로 한국에 들어왔지만, 아버지는 여전히 행방불명 상태다.
이날 지씨는 임신 3개월 몸으로 강제북송돼 북한 평안남도 증산교화소(교도소)에서 복역했던 경험을 전했다. 지씨는 "교화소에서 강제로 낙태를 당했다"며 "아기는 세상을 보지 못했고, 아기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할 틈도 없이 떠나갔다"며 울분을 토했다.
지씨는 "저를 비롯한 많은 사람이 교화소에서 부족한 식사로 메뚜기를 잡아먹고, 개구리와 쥐 껍질을 벗겨 먹기도 했다. 사람들은 설사로 바짝 마른 상태에서 숨을 거뒀다"면서 비참했던 생활을 회고했다.
지씨는 "아버지가 많이 보고 싶고 그립다"며 "이 그리움이 저만의 그리움이 아닌 모든 탈북자의 그리움"이라고 했다.
그는 지난달 판문점 JSA를 통해 귀순한 북한군 병사에 대해 "탈북병사의 질주 모습은 2천500만 북한 주민의 자유를 향한 질주"라고 했다. 그러면서 "북한은 하나의 무서운 감옥이다. 김씨(김정은) 일가는 대량학살 만행을 저지르고 있다. 이 무서운 감옥에서 살아남는다는 것은 기적일 뿐"이라고 강조했다.
지씨는 중국에서의 탈북자 강제북송에 대해 "탈북자 강제북송은 살인행위"라며 "중국이 강제북송을 멈추길 강력히 호소한다. 국제사회가 적극적으로 나서주길 바란다"고 호소했다.
이윤정 기자
■ 2018.02.01 [인터뷰] 지성호 “목발 흔든 건 탄압을 숨길 수 없다는 걸 김정은에게 보여준 것”
-트럼프, 여러 초청 인사 중 지씨를 맨처음 찾아와 인사하고 사진찍어...“긴장하지 말라” 격려
-“트럼프 지씨의 이야기를 잘 알고 있고, 북한 인권문제도 잘 알고 있었다”
-오토 웜비어씨 부모가 “북한 인권 위해 일해 달라”며 웜비어의 넥타이 선물
31일(현지시각) 백악관에서 만난 탈북자 지성호씨 손엔 넥타이가 하나 들려있었다. 북한에 억류됐다 풀려난 뒤 일주일만에 숨진 미국인 대학생 오토 웜비어씨의 부모가 선물로 준 것이라고 했다. 지씨는 웜비어씨의 부모와 함께 전날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의 의회 연두교서 연설에 초청받았었다.
기차에 치어 왼발과 다리를 잃은 뒤, 목발을 짚고 북한을 탈출해 동남아를 거쳐 한국으로 들어온 그의 이야기는 미 의회에서 기립박수를 받았었다. 그는 전날 연두교서 자리에서 목발을 흔든 것과 관련해 “억압과 인권탄압을 숨길 수 없다는 것을 북한 김정은 정권에 보여주기 위한 것”이라고 했다.
▲백악관 브리핑 룸에서 만난 지성호씨. /조의준 특파원
이날 인터뷰는 백악관 브리핑룸과 웨스트윙(사무동)의 사무실에서 연이어 이어졌다. 웨스트윙의 지하 사무실에서 만난 존 켈리 비서실장은 그에게 다가와 “정말 감동적인 장면이었다”며 악수를 청했다. 이날 인터뷰는 백악관 국가안보실(NSC)의 주선으로 이뤄졌고, 한국 매체 중에선 본지가 초청받았다.
다음은 지씨와의 일문일답.
=손에 들고 있는 넥타이는 어떤 넥타이인가.
“북한 인권을 위해 힘내서 더 일해달라고 오토 웜비어씨 부모님이 저에게 주신 넥타이다. 웜비어씨가 맸던 것이라고 한다. 가슴이 멍하고 마음이 그랬다.”
=앞으로 넥타이를 매고 다닐 건가.
“웜비어씨 부모님께 물어보고 (허락을 받으면) 매고 다닐까 생각 중이다.”
=연두교서에 참석한다는 것은 언제 알았나. 워싱턴에서 어디에 머물고 있나.
“행사는 당일에 알았다. 그러나 자세한 것은 말할 수 없다. 백악관 초청으로 와서 전부 보안 사안이다. 미안하다.”
=연두교서에 초청 받은 기분이 어떤가.
“믿어지지 않는다. 지난 여름만 해도 백악관 외곽에서 아무도 관심을 가지지 않는 가운데 연극을 했다. 당시에 나는 꽃제비 거지 역할을 맡았었는데, 지금 내가 트럼프 대통령의 초청을 받아서 왔다니 믿어지지 않는다.
‘성호’라고 연설에서 친구처럼 불러줘서 뿌듯했다. 그런 친근감이 너무 좋았다.” (지씨는 지난 여름 다른 탈북 청소년 등과 함께 백악관 앞 잔디밭에서 북한 인권을 강조하는 ‘꽃제비 재연극’을 했었다.)
=이번 초청이 북한 인권 문제에 어떤 영향을 줄 것으로 보나.
“이 연두교서를 계기로 탈북자이자 장애인, 북한에서 거지로 살았던 이가 미국 대통령의 초청으로 미 의회에 섰다는 것 자체가 북한 사람들에게도 상당한 영향을 줄 것으로 생각한다. 말 못하는 북한 사람들의 목소리를 대변해줄 수 있다는 것으로도 큰 의미다. 북한 정권에는 큰 위협으로 다가올 것이다. 미국 대통령이 북한 인권에 관심을 가지고 추진한다는 것에 두려움을 느낄 것이다.”
=어제 트럼프 대통령이 의회에서 지씨의 이름을 부르자 목발을 들고 흔들었다. 어떤 의미가 있나.
“목발은 아버님이 만들어주신 마지막 유품이다. 목발은 내가 자유를 찾아 새 삶을 살고 있다는 상징이기도 하지만, 내가 살았던 과거를 북한 정권에게 보여주는 의미도 있다. 인권을 억압하는 것을 숨길 것이 아니라 숨기려고 해도 손바닥으로 해를 가릴 수 없다는 것을 김정은 정권에 보여주는 메시지다.”
=트럼프 대통령을 만나 어떤 얘기를 나눴나.
“대통령은 바쁘니깐 대화까지는. 그러나 어제 특별초청된 미국의 다른 영웅들보다 나에게 먼저 다가와 인사하고 사진을 찍었다. 긴장하지 말라고 윙크도 해주더라. 영부인과도 사진을 찍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내가 지내온 삶을 너무 잘 알고 있었고, 북한 인권 문제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었다. 끝나고 나니 상·하원 의원들도 서로 악수하자고 와서 인사했다.”
=트럼프 대통령을 만난다면 어떤 얘기를 하고 싶나.
“중국내 탈북자들의 북한 송환을 막는 것에 대해 얘기하고 싶다. 탈북문제를 전세계의 문제로 부각시켜 (세계가) 알아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 싶고, 통일과 관련해서도 많은 말을 하고 싶다.”
=트럼프 대통령이 대북압박을 하면서 북한 내부의 변화가 있다고 보나.
“북한 내부의 분위기는 효과를 보고 있다고 생각한다. 북한 주민들의 반발이 커졌다. 북한 주민에게 필요한 것은 핵·미사일이 아니라 잘 먹고 사는 삶, 안정된 삶이다. 그게 힘들어졌다.”
=개인적으로 앞으로 계획이 무엇인가.
“북한 인권문제가 빨리 끝났으면 좋겠다. 북한이 자유 민주주의 국가가 되도록 하기 위한 일에 더욱 노력할 것이고 특히 북한 청년들을 위해 일하겠다. (북한 인권을 위해) 도움을 요청할 수 있는 많은 분들에게 도움을 요청할 것이다.”
=북한 청년들을 위한 일이라면 어떤 것을 말하는가.
“청년들이 좋아하는 케이팝(K-pop)이라든가 음악, 노래 등을 (북쪽에) 공급하는 것이 주가 될 것 같다. 시장·장사·돈버는 방법·기술 등에 대한 정보유입을 하는 것 등을 말하는 것이다. 통일이 되면 북한 청년들이 자유 민주주의 체제에 잘 정착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는 역할을 하고 싶다.”
▲지성호씨가 백악관 브리핑룸에서 활짝 웃고 있다. /조의준 특파원
=탈북한 계기는 무엇인가.
“북한은 사람이 살 곳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먹을 걸 구걸하러 간 것이 죄라고 고문을 당하기도 했고, 너 같은(팔 다리를 잃은) 장애인은 죽어야 되고, 나라 망신을 시킨다는 말을 듣고 탈출을 결심했다. 6년 동안 기회를 보다가 2006년에 두만강을 건넜다.”
=여전히 북한 간첩의 추격이나 위협 아래 놓여있다고 보나.
“그것으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고, (트럼프 대통령의 초청 이후) 국제사회에서 활동의 폭이 넓어지면 그런 일이 더 많아질 수도 있을 것으로 본다.”
=북한 주민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나.
“꽃제비이자 장애인인 내가 이 자리에 섰다. 많은 이들이 자유를 찾고 북한 정권을 뒤집는 그런 날이 왔으면 좋겠다.”
조선일보 워싱턴=조의준 특파원
02.03 트럼프 탈북자 만난 자리에서 “평창 뒤에 무슨 일 있을지 누가 알겠느냐”
-트럼프 “평창 올림픽 관련 남북대화는 나쁜 것아냐”
-트럼프 “북한은 살기 어려운 위험한 곳으로 탈북자 얘기 많은 감동”
-탈북자들 “중국정부의 탈북자 강제 북송 막아달라”, 트럼프 “놀라운 이야기”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은 2일(현지시각) “평창동계올림픽은 아주 잘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면서도 “그(평창) 뒤엔 (무슨 일이 있을지) 누가 알겠느냐”고 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날 백악관으로 탈북자 8명을 초청해 만나는 자리에서 “우리는 (평창 이후를) 곧 알게 될 것이고, 내 생각에 꽤 조만간(pretty soon) 알게될 것”이라며 이같이 말했다. 그는 “방금 전 문재인 대통령과 통화를 했다”며 “(그들) 남북은 올림픽과 관련해서 대화중이다. 대화는 나쁜 것이 아니라 좋을 일”이라고 했다.
백악관은 이날 성명에서 “트럼프 대통령은 문 대통령과의 통화에서 북한 내 인권 상황 개선의 중요성에 대해 논의하고 이 문제에 대해 함께 협력하는 데 있어 서로의 책임을 강조했다”고 밝혔다. 평창 동계올림픽 이후 북핵·미사일 문제 뿐 아니라 북한 인권문제를 본격적으로 밀어붙이겠다는 뜻으로 보인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날 약 24분간의 행사를 이례적으로 전부 공개했다. 이중 언론에 공개될 수 있는 2명의 탈북자를 제외하고, 나머지 6명의 탈북자와는 일일이 사연을 물어보고 이들의 얘기를 들었다.
트럼프 대통령은 탈북자에 대해 미국에서 흔히쓰는 ‘망명자(defector)’란 단어가 아닌 ‘탈출자(escapee)’란 단어를 썼다. ‘defector’란 단어는 국가에 버림받아 망명했다는 뜻이 강한 반면, ‘escapee’는 자유를 찾아 탈출했다는 뉘앙스가 더 강하다.
트럼프 대통령은 “북한은 살기 어려운 위험한 곳으로 많은 사람이 탈출하고 있다”며 “내 옆에 있는 지성호다. 지씨의 얘기는 감동적이었고 TV를 통해 (전 세계에) 감동을 줬다”고 했다. 그러면서 탈북자들에게 일일이 발언기회를 주며 “무슨 일이 있는지 말해달라”며 “전세계가 듣고 싶어할 것”이라고 했다. 왼손과 발이 없이 목발을 짚고 북한을 탈출한 지씨는 지난달 30일 트럼프 대통령의 의회 신년국정연설에 초대받은 뒤 목발을 흔들어, 탈북자의 실상을 알렸다.
이날 참석한 탈북단체 대표 정관일씨는 “3년간 정치범 수용소에 있었고, 한국에 와서 노체인이란 단체를 만들어 정치범 수용소 해체와 북한에 정보 유입운동을 하고 있다”며 “트럼프 대통령이 지난해 11월 서울 국회에서 했던 연설을 맨 처음 북한으로 들여보냈고, 그 영상을 본 북한 주민들이 많은 감동을 받았다”고 했다. 그러자 트럼프 대통령은 “도움이 됐기를 바란다”고 했다.
탈북자 김영순씨는 “정치범으로 9년간 있었고, 뮤지컬 요덕스토리가 제 이야기”라며 “김정일의 사생활을 안다는 이유로 수용소에 갔다”고 했다. 그러면서 “일곱 식구가 들어가 남편의 생사는 알 수 없고, 다 죽고 저와 중증 장애인이 된 아들이 살아나왔다”고 했다. 그러자 트럼프 대통령은 “지금은 잘 지내고 있나”라고 물은 뒤 “놀라운 이야기다”라고 했다.
미국 자유아시아방송에 있는 탈북자 출신 기자 정영씨가 “한국에 7년간 있다가 미국으로 왔고 지난해 미국 시민이 됐다”고 하자, 트럼프 대통령은 “환상적이다. 축하한다”라고 했다.
탈북자 이현서씨는 “트럼프 대통령이 ‘만일 중국이 (북한에 대해) 행동하지 않으면 미국이 독자적으로 행동할 것’이라고 말했을 때, 나는 눈물을 흘렸다”며 “나는 아주 오랫동안 당신 같은 리더로부터 그 얘기를 듣고 싶었다”고 했다. 그러면서 “나는 중국에 있는 동안 (붙잡히지 않기 위해) 7번이나 이름을 바꿔야 했다”며 “그게 내 자서전 이름이다”라고 하며 자신이 쓴 ‘7개의 이름을 가진 소녀’란 책을 선물했다. 현서씨는 “탈북자들이 중국에서 잡히면 죽기를 선택하는 경우가 많다”며 “탈북자 북송을 막아달라”고 했다.
북한 김정일 정권의 비자금을 관리하던 고위 탈북자 김광진씨는 “트럼프 대통령의 국회 연설이 북한 엘리트들에게 깊은 영향을 줄 것”이라고 했다.
마지막으로 발언권을 얻은 지씨는 “지금 저는 상상할 수 없는 크고 놀라운 자리에 섰다. 얼마나 기뻐서 울었는지 기억이 안날 정도”라며 “북한 주민들을 사랑해주셔서 너무 감사하다”라고 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금 여러분들이 있는 곳이 그 유명한 백악관의 집무실이다”라며 “대부분 들어봤겠지만. 많은 좋은 일이 이 자리에서 일어나길 바란다”고 했다. 대통령의 집무실에서 북핵문제와 북한 인권 상황 개선을 위한 새로운 정책을 만들어낼 것이란 뜻으로 해석할 수도 있는 것으로 보인다.
워싱턴=조의준 특파원
□ 02.12 “참혹한 北 주민 실상, 올림픽 중에도 잊지 않았으면”
“모든 미디어가 북한의 평창 겨울올림픽에 참가와 예술단에 스포트라이트를 비추고 있는 이 순간에도 북한에선 추운 겨울날 생존 자체가 목적이다.”
11일 탈북 작가 이현서(38)씨는 중앙일보와의 전화 인터뷰에서 이같이 말했다. 이씨는 지난 9일 평택 2함대사에서 탈북자 지성호ㆍ지현아ㆍ김혜숙씨와 함께 마이크 펜스 미국 부통령을 면담했다. 이씨는 펜스 부통령에게 “북한의 겨울이 정말 추운데 생존을 위해 고생하고 있는 사람들을 잊지 말아 달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씨는 또 “중국에서 성 노예로 팔려나가고, 강제 시집가고 있는 탈북 여성들이 지금 이 순간에도 얼마나 고생하고 있는지를 알렸다”며 “나는 미국만이 이 문제를 해결해줄 수 있다고 보고 있다. 정말 ‘간청(begging)’했다”고 말했다.
트럼프ㆍ펜스 모두 만난 탈북 작가 이현서씨 인터뷰
"北 참가, 김여정에 스포트라이트..선수 아닌 엉뚱한 사람에 관심"
▲탈북 작가 이현서씨와 그녀가 쓴 책 '7개의 이름을 가진 소녀' [사진=이현서씨 제공]
이씨는 17세에 압록강을 넘어 중국인으로 가장해 10년 넘게 선양(瀋陽)과 상하이(上海) 등지에서 살았다. 이름도 원래 박민영에서 미란ㆍ순향ㆍ순자 등으로 여러 차례 바꿨다. 2008년 한국에 들어온 이씨는 2015년 『7개의 이름을 가진 소녀:한 탈북자 이야기』를 발간(24개 언어, 30여 개국)했고, 이후 테드(TED) 강연 등을 통해 북한의 실정과 탈북 과정의 고통을 전세계에 알렸다. 이씨는 지난 2일 지성호씨와 함께 트럼프 미 대통령도 면담했다.
이씨는 펜스 부통령이 면담장에 들어서자마자 “현서”라고 부르며 자신을 알아봐 놀랐다고 했다. 펜스 부통령은 먼저 “우리(미국)가 어떻게 도와주면 좋겠느냐”고 물었고, 참석자들의 의견을 주로 들었다고 했다. 지현아씨는 탈북 후 중국에서 인신매매를 당해 임신을 했고 북송당한 뒤 마취제 없이 인공 유산을 당한 경험을, 김혜숙씨는 정치범 수용소에서 가족을 잃은 아픔에 대해서 얘기했다. 트럼프 대통령의 연설로 유명해진 지성호씨는 외부 정보가 북한으로 유입되는 것이 중요하다고 설명했다고 한다. 이씨는 “펜스 부통령이 아빠처럼 들어주려 하고 배려해주려는게 느껴졌다”고 말했다. 펜스 부통령은 이씨가 미국에서 정치학 석사를 하고 싶다고 하자 추천서를 써주겠다고 했다.
▲펜스 미 부통령이 9일 오전 경기 평택 해군 2함대를 방문해 탈북자들과 면담을 하고 있다. [뉴시스]
▲오토 웜비어의 아버지 프레드 웜비어가 9일 오전 경기 평택 해군 2함대에서 마이크 펜스 미 부통령과 함께 탈북자 지성호씨의 이야기를 경청하고 있다. [뉴시스]
이날 면담에는 북한에 억류됐다가 의식불명 상태로 귀국한 뒤 사망한 미국 대학생 오토 웜비어의 부친 프레드 웜비어도 함께였다. 그는 참석한 탈북자들에게 “북한 정권은 악마다. 웜비어를 위해서 같이 싸우자”고 말했다고 한다. 웜비어는 미국 국기를 배경으로 아들의 이름 ‘OTTO’와 ‘PYEONGCHANG 2018’이 적힌 티셔츠를 참석자들에게 선물했다. 평창올림픽에 북한이 참가한 와중에도 북한의 인권 탄압 실상을 잊지 말아달라는 메시지였다.
▲웜비어가 탈북자들에게 선물한 티셔츠. [사진=이현서씨 제공]
이씨는 이날의 면담에 대해 “웜비어씨가 굉장히 강력한 메시지를 전했고, 참석자들이 본인의 아픈 경험을 공유하면서 분위기가 많이 무거웠다”면서도 “북한 정권이 얼마나 잔인한 정권인지, 북한 인권 문제에 대해 포커스하고 의견을 공유할 수 있는 자리였다”고 했다.
이씨는 통화에서 김여정 노동당 중앙위 제1부부장의 방남에 대해 “펜스 부통령이 말했듯 ‘수백만의 북한 주민을 굶겨죽이고, 감옥에서 살게한 잔인한 독재자’의 동생을 귀빈 대접하고, 모든 미디어가 집중하고 있다는게 말이 안된다”고 비판했다. 이씨는 “북한 응원단이 와서 말하는 ‘통일’이라는 단어에 감격하고, 우리가 하나가 된 거 같다고 하는데 그들은 북한 중심의 통일을 외친 것 아니냐”고 반문했다. 김정은의 남북 정상회담 제의에 대해서도 “정 만나고 싶으면 당연히 북한이 비핵화에 대한 약속을 가지고 나왔을 때 만나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북한 주민과 탈북자 인권 문제에 대해서 전세계가 다 말하고 있는데 유일하게 당사국인 우리 한국 정부만 아예 금지어로 삼고 있다. 솔직히 이건 말이 안되는 상황”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문재인 정부가 북한 인권 문제 해결을 요구할 수 있는 당당한 정부가 되면 좋겠다. 지구상 그 어떤 나라보다 당사국인 한국이 따끔하게 지적하는 것이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
박유미 기자 yumip@joongang.co.kr
□ 02월 14일 “예술단 보낸 北의 감성팔이는 對北제재 피하려는 술수”
▲‘평양올림픽’ 경계하는 ‘脫北 웹툰 작가’ 최성국 씨
“제재 유지해야 김정은 힘 빠져
北선 南연예인 옷 모방 돈 벌어
문화예술이 통일 앞당기는 무기”
“예술단 파견 등 북한의 감성팔이는 국제사회 제재를 피하려는 술수일 뿐입니다. 핵 개발 및 세습독재 포기 의사가 없는 김씨 왕조를 무너뜨리려면 대북 제재를 유지하고, 우리 문화 콘텐츠를 무기로 삼아야 합니다.”
국내 유일의 탈북자 웹툰작가 최성국(39·사진) 씨는 2018 평창동계올림픽을 맞아 북한 김정은 노동당 위원장이 선수단과 응원단, 예술단 등을 대거 파견한 데 대해 큰 경계심을 드러냈다. 최 씨는 14일 문화일보와의 통화에서 “북한이 예술단을 보내 평화를 말하고 통일 노래를 부르면서 감성팔이를 하고 있지만, 당장 목을 조여오는 제재를 피하기 위한 술수이지 결코 핵·미사일과 세습독재를 포기하겠다는 의사는 아닐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남북 평화 분위기에 대한 감동을 논하기 전에 북한에는 지금 이 순간에도 굶어 죽어가거나 수용소에 갇혀 고문에 시달리는 사람이 수없이 많다는 불편한 진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최 씨는 “대북 제재를 유지해야 김정은의 힘이 빠지고 결국 그를 지탱하던 정권 주요 인사들도 인민들 편으로 돌아설 수 있다”며 “과거 국제사회의 대북제재로 인해 배급체계가 무너졌지만, 북한 주민들이 살기 위해 밀수·밀매 등에 뛰어들면서 오히려 경제력을 축적하고 외부 정보 유입의 원동력이 된 사례를 상기할 필요가 있다”고 역설했다.
최 씨는 “2003∼2006년 평양에서 ‘어린 신부’와 ‘장군의 아들’ ‘파리의 연인’과 같은 한국 영화와 드라마를 복사·편집해 팔았는데, 주민들은 작품에 등장한 PC방이나 택시기사, 부동산업자 등과 같은 새로운 문화에 큰 충격을 받았다”며 “배우 차태현이나 문근영이 입었던 옷이나 한국 가구 등을 비슷하게 만든 뒤 팔아서 큰돈을 번 사람들도 있었다”고 설명했다. 그는 “북한 사회가 크게 변화하는 모습을 직접 목격하면서 통일을 앞당기는 가장 위력적인 무기가 바로 문화예술임을 똑똑히 깨닫게 됐다”고 말했다.
평양에서 태어난 최 씨는 평양미술대를 졸업하고 북한 만화영화촬영소에서 잠시 일하다가 중고 컴퓨터 재조립 판매에 뛰어들었다. 북한 국가안전보위부 검열을 통과한 망가진 컴퓨터 하드디스크에 담긴 한국 영화를 우연히 접한 뒤 그의 인생은 180도로 바뀌게 됐다. 그는 한국 영화와 드라마, 가요 등을 복사해 북한 주민들에게 판매하다 당국에 적발돼 세 차례나 감옥에 갔다. 함경남도 리원군으로 쫓겨나 강제노역에 시달리다 탈북, 2010년 8월 한국에 정착했다. 2016년 5월부터 인터넷 포털에서 탈북민의 남한 정착기와 북한 주민들의 삶을 그린 웹툰 ‘로동심문’을 연재 중인 그는 작품의 주요 에피소드를 엮은 신간 ‘자유를 찾아서’를 지난달 출간했다.
최준영 기자 cjy324@munhwa.com
02.16 “김일성 훈장, 옥수수 빵 한 개와도 안 바꿔주더라”... 문학으로 증명된 北 실상
국제펜(Pen) 망명북한센터 연간 문학지 제4호(2016년) 발췌
▲2017년 5월 25일 오후 경기 수원 아주대학교에서 열린 2017 와글바글 장마당에서 학생들이 북한 꽃제비를 재연하고 있다. 사진=뉴시스
국내에는 공식적인 탈북작가들의 문인 단체가 조직돼 있다. 바로 2012년 세계문학단체인 '국제펜클럽에' 가입된 국제펜망명북한센터(이하 ‘망명펜센터’)다. 현재 탈북 등단작가 1호인 김정애 소설가가 이사장이 돼 이끌고 있는 망명펜센터는 연간 문학지를 발행한다.
망명펜센터 탈북작가들은 매년 이 문학지에 북한의 실상을 고발하고 자유통일을 촉구하는 문학 작품들을 발표해 싣는다. 시·소설·수필은 물론 북한에서 직접 보고 들은 실화 또한 일기처럼 구성해 수록한다. 굶주림에 시달리는 북한 주민들의 참상과, 그들을 억압하는 세습 독재 치하의 모순적인 사회구조가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다.
이하 2016년에 발간된 해당 문학지 제4호에 수록된 문학작품들의 여러 대목을 인용해 싣는다. 최근 평창올림픽을 계기로 급물살을 타는 남북 대화 국면에서 다시금 북한 사회의 허실을 간파할 수 있는 자료가 될 것이다.
“그들의 뜻대로 통일될까 겁이 납니다”
망명펜센터 연간 문학지 제4호에 ‘통일의 그날까지’라는 제목의 발간(發刊) 축사를 쓴 이길원 망명펜센터 고문은 해당 글에서 “북한은 세계 최악의 인권 사각 지대”라며 “경제 문제 또한 세계 최빈국이다. 그런데도 여전히 통일 운운하며 핵개발이나 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망명펜센터에서 발간하는 연간 문학지. 사진=망명펜센터
이 고문은 “그들(북한)의 뜻대로 통일될까 겁이 난다”며 “이런 북한의 현실은 북한 최고 권력자가 사라지기 전에는 개선의 여지가 없다고 본다”고 밝혔다. 이어 “망명북한 작가들은 이런 북한의 실상을 문학으로 표현해 제대로 알리는 문인들”이라며 “망명북한펜센터 회원들의 이와 같은 노력은 조국이 통일되는 날까지 끊임없이 계속되어야 한다”고 촉구했다. 다음은 해당 축사의 한 대목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정치인들은 북한 주민의 인권은 외면한 채, 북한 정권과 눈을 맞추고 있습니다. 한 탈북 작가는 ‘북한에서 살다 온 우리들도 있는데 한국의 종북 좌파의 행동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문학평론가 방민호 서울대 국문과 교수도 축사에서 “저는 글을 쓰는 한 사람으로서 문학 단체에도 소속돼 있고 대학의 교수이기도 합니다만 더 이상 북한의 인권문제를 외면할 수 없다고 생각을 한다”며 “이 일(탈북문학)은 매우 중요하며 꼭 해야 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뭇매 맞아 피 흘리면서도 젊은이는 무를 삼키려 한다”
제4호 문학지에 탈북 시인 이룡하씨는 ‘저승길’이라는 제목의 시편을 발표했다. 이 시인은 해당 시편에서 “먹고살기 위해 떠난 것이 죄 붙잡힌 것이 죄다”라며 “죄 값 치르느라 모진 고통, 온갖 노역, 굶주림에 / 허덕이면서도 지친 몸으로 노역에 시달리고 있다”고 고통받는 북한 주민들의 삶을 그렸다.
그는 특히 해당 시편에서 중국으로 탈출하려다 붙잡힌 한 북한 청년이 배고픔에 무 한 조각을 주워 먹다 맞아 죽는 참상을 묘사하기도 했다.
“살길 찾아 중국으로 가려다 잡힌 그 / 중국 밥 한 그릇 먹어보지 못하고 애석하게 잡혀온 그 / 땅에 뒹구는 무 한 조각 주어 먹으려다 / 동갑내기 계호원에게 사정없이 두드려 맞는구나 / 차이면서도 무 한 조각 기어코 입에 넣는다 // 당장 뱉으라고 소리치는 계호원의 소리 / 아득한 공간에서 들리는 먼 소리일 뿐 / 청춘은 정신없이 무만 씹는다 // 뭇매가 이어졌고 뭇매를 맞아 피 흘리면서도 / 젊은이는 무를 삼키려고 한다. 삼키려고 한다. (...) 팔다리 부러진 애젊은 청춘은 피를 토하며 쓰러지고 / 채 삼키지 못한 무 한 조각 입에 물고 마침내 절명하고 말았다 // 젊은이 죽음 앞에 잠시 침묵이 흐르고...... (후략)”
▲2017년 5월 25일 오후 경기 수원 아주대학교에서 열린 2017 와글바글 장마당에서 학생들이 북한 꽃제비를 재연하고 있다. 사진=뉴시스
전 망명펜센터 이사장인 탈북 소설가 이지명씨는 제4호 문학지에 ‘금덩이’라는 제목의 소설을 발표했다. 북한 정치범관리소에 잡혀온 노인 ‘윤칠보’의 시선을 통해 북한의 비정상적 배급제를 비판하고 아사(餓死)하는 북한 주민들의 모습을 사실적으로 그려냈다.
“1997년에 들어서며 삼 년째 계속되던 ‘고난의 행군’이란 굶주린 악귀가 사람을 마구 잡아먹기 시작했다. 갑자기 국가 식량 공급이 끊겨 굶어 퉁퉁 부은 사람들이 전국 어디나 차고 넘쳤고 먹을 것을 찾아 돌아다녔다. 뭐라도 건지면 그날은 숨을 쉴 수 있었고 빈손이면 숨을 멈춰야 하는 비몽사몽의 환각 같은 날들이었다. 아침이면 돌덩이처럼 굳어진 시신을 실은 달구지며 리어카가 집집에서 나와 곡소리도 없이 산으로 향했다. 하도 많이 죽으니까 사람 죽었다는 소리가 나중에는 향방 없이 짖어대는 건넛집 개 소리같이 들렸다. 노인의 큰딸도 그런 굶주림 때문에 자리에 누웠고, 작은딸은 먹을 것을 찾아 가출해 버렸다.”
곡식이란 곡식은 군량(軍糧)으로 쓰여... 굶어 죽는 주민들은 외면
소설 속에서 노인은 가을임에도 가족들이 쌀을 구경조차 못하는 상황이 되자 곡식을 관리하는 북한 농장관리위원회에 간다. 노인은 굶는 식구들을 보다 못해 “분배 몫에서 얼마간 먼저 떼어 달라”고 통사정을 한다. 그러나 돌아오는 것은 위원회 간부의 싸늘한 박대다.
“굶는 게 어디 당신 집뿐이요? 지금 탈곡한 식량은 전량 군부대로 수매될 식량인데 지금 그 양이 형편없이 모자란단 말이오, 가서 한 달만 기다리우. 알겠소? (...) 눈이 있으면 좀 보오. 탈곡장을 에워싼 저 총 든 군대 안 보이오? 수매량을 맞추지 못하면 군법에 의해 처형당할 수도 있는 판인데, 누구 죽는 꼴 보려고 이러우? 나가우. 어서, 아, 빨랑.”
다음날 노인은 퇴근 무렵 남몰래 허리춤에 강냉이를 훔친다. 굶어 죽어가는 처자식을 먹여 살리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한 절도였지만 그나마도 ‘총 든 군인에게 잡혀 부대가 주둔한 건물로 끌려’ 가고야 만다.
“노인은 식량 도둑으로 체포됐고 군법에 의해 속전속결로 다스려졌다. 이를 갈던 군부대 수뇌부의 결정에 의해 시범처벌대상이 된 노인은 결국 그날 밤으로 어디론가 끌려갔다. 끌려간 후 나도는 말은 도적질보다 노인이 토한 울분 때문에 더구나 용서받지 못했다는 소문이었다. 나라를 원망하고 군대가 백성을 말려 죽인다는 그 말 때문에 결국 저승사슬을 목에 걸었다고 숙덕거렸다.”
이 같은 북한 주민들의 굶주림은 비단 서민들만의 고통이었을까. 북한에서 이른바 ‘영웅’ 칭호를 하사받을 정도로 나름 ‘인재’ 대접을 받았던 사람들은 편하고 배부르게 삶을 영위할 수 있었을까.
제4호 문학지에 ‘노력영웅의 소원’이라는 실화(實話) 수기를 발표한 탈북 작가 이주성씨는 해당 글에서 “노력영웅 (칭호를 받은) 심재만도 다를 바 없었다”며 “그는 굶주림을 참다못해 혹시나 돈이 될 만한 물건이 없나 집안을 뒤적거리다 훈장들과 먹거리가 될 만한 것을 바꾸어 보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해당 이야기가 북한의 실화 수기라는 점을 감안, 글 전체 분량 중 절반가량을 요약해 옮겨 싣는다.
〈피골이 상접한 70세가 훨씬 넘어 보이는 남자가 10평도 되나마나 한 작은 방 안에서 장롱 문을 열더니 안쪽에서 무엇인가 뒤적거린다. 힘이 없는 모양이다. 조금 움직이다가는 멈추기를 반복한다. 거친 숨을 몰아쉬는 입은 반쯤 열려 있다. 그의 나이는 60세를 갓 넘긴 사람이다. 그는 몇 년 전까지만 해도 1급 기업소 유선탄광에서 이름을 날리던 심재만 노력영웅이다. 그는 유선탄광 성남갱 굴진 중대장으로 10여 년간 죽기 살기로 일을 해왔다. 데리고 일하던 아래 직원들만 100명 가까이 되었다.〉
‘영웅’ 칭호 받은 국회의원급 인사도 먹을 게 없어 객사(客死)
〈밤색 옷 칠을 한 작은 나무함을 꺼내 방바닥에 내려놓고는 텅 빈 장롱문을 닫는다. 나무함은 가로 세로 붉은 천 포장 띠로 묶여 있다. 그는 띠를 풀어 헤친다. 길게 한숨을 몰아쉬고는 손을 천천히 움직인다.
나무함 뚜껑을 열어 놓으니 그 속에는 금박으로 된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국장이 찍혀 있는 빨간 비로도 천의 주먹 크기의 네모 박스 3개가 들어 있다. 조심히 박스를 하나씩 방바닥에 꺼내놓는다. 나무함 안에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노력영웅 훈장 증서’ 금박 글씨로 박힌 검은 밤색의 마분지로 되어 있는 두터운 훈장증서가 보인다.
북한 정권이 노력영웅 칭호를 수여한 심재만은 북한 정권의 최고 통치자였던 김일성을 미친 듯이 숭배하고 충성했던 핵심 노동당원이며 일꾼이었다. 그는 북조선 최고인민회의 대의원(국회의원)까지 한 북한 정권에서 말하는 조선로동당 핵심 정수 분자였다.
▲군장을 지고 행군하는 북한 군인들. 사진=조선DB
수천 길 지하 막장에서 수십 년간 북한 정권을 위해 목숨을 걸고 일한 대가로 얻은 것은 노력영웅 훈장과 국기훈장 1급 3개를 비롯해서 공로 메달만도 수십 개나 되었다. 그러던 그가 수개월째 낟알 구경을 하지 못해 죽음을 눈앞에 두고 마지막 선택을 하고 있었다.
심재만의 아내는 자식들이 하늘나라에 떠난 지 몇 달 동안 낟알 한 알 없이 지냈다. 풀만 먹다 보니 풀독이 올라 온몸이 부어 며칠을 앓더니 끝내 남편을 남겨두고 먼저 세상을 하직했다.
아내마저 없는 심재만을 보다 못한 동네 사람들이 두부비지와 술을 뽑고 남은 찌꺼기를 가져다 줬고, 심재만은 그것을 조금씩 먹으며 목숨을 부지했었다. 그것도 며칠간이다. 어디서 도움받을 데가 없어진 심재만은 산에 올라가 풀뿌리며 나무껍질을 벗겨 먹다 움직일 기력이 없어지자 산마저 가지 못하고 집에 들어 누워버렸다.
그는 굶주림을 참다못해 혹시나 돈이 될 만한 물건이 없나 집안을 뒤적거리다 훈장들과 먹거리가 될 만한 것을 바꾸어 보려고 생각했다. 자식들과 아내가 굶어죽었을 때도 팔려고 생각지 않던 영웅훈장을 죽음이 목전에 다다르자 먹을 것과 바꾸기로 결심했다.
‘위대한 수령님께서 수여해 주신 영웅 메달과 훈장들인데 쌀을 얼마나 받을 수 있을까? 아무리 못 받아도 강냉이(옥수수) 50kg은 받을 수 있겠지? 조금씩 죽을 쑤어 먹으면 죽지는 않을 거야.’
“여보게, 먹을 것 있으면 노력영웅 메달과 바꾸지 않겠나.”
한 집, 두 집 문을 두드려 노력영웅 훈장과 국기훈장들을 낟알과 바꿀 수 없는가 물어 보았더니 한 사람 같이 머리를 가로 저었다. 밀가루 빵을 팔고 있는 아낙네에게 훈장들이 들어 있는 나무함을 들이밀며 빵 한 개와 바꿀 수 없는가 하고 애원해 보았으나 시끄럽다는 욕설뿐이다.
옥수수 50kg과 바꾸어 보겠다던 영웅메달과 훈장이다.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국가주석 김일성 동지께서 하사한 공화국 공민의 최고 훈장인 노력영웅 메달과 훈장이 옥수수 빵 한 개와도 바꿀 수 없는 동조각에 불과한 것임을 심재만은 그때에야 알게 되었다.
다음날 아침, 회령시장 입구에서 멀지 않은 길거리에 심재만 노력 영웅이 싸늘한 시체가 되어 누워 있었다. 하늘을 향해 눈도 감지 못하고 숨을 거두는 순간 그는 무슨 생각을 했을 것인가.〉
월간조선 뉴스룸
□ 02월 18일 “아들 보러 돌아가려고…” 北보위성에 쌀 130t 보낸 탈북민
입북시 처벌 피하려 성의 표시…국가보안법 위반 구속기소
북한으로 돌아가기 위해 국가보위성(옛 국가안전보위부)에 대량의 쌀을 보낸 북한이탈주민(탈북민)이 적발돼 재판에 넘겨졌다.
수원지검 공안부(한정화 부장검사)는 국가보안법상 자진지원, 탈출예비 등 혐의로 A(49·여)씨를 구속기소했다고 18일 밝혔다.
A씨는 지난해 중국 브로커를 통해 북한의 비밀경찰 조직인 국가보위성에 두 차례에 걸쳐 쌀 65t씩 모두 130t(1억 500만원 상당)을 보낸 혐의를 받고 있다.
또 경기남부지방경찰청 보안수사대에 검거되기 직전 브로커에게 8천만원을 송금해 쌀을 추가로 보내려 한 것으로 확인됐다.
아울러 검거 당시 자택을 처분하는 등 한국 생활을 정리한 상태여서 북한에 가려고 한 것으로 검찰은 보고 있다.
탈북민이 입북한 사례는 종종 있지만 A씨처럼 입북에 앞서 보위성을 비롯한 북한 측에 쌀 등을 보내 자진지원 혐의가 적용된 것은 이례적이라고 검찰은 설명했다.
그는 2011년 탈북했지만 북한으로 돌아가고자 지난해 초부터 보위성 측과 연락을 주고받은 것으로 조사됐다.
일단 북한에 가면 탈북을 한 데 대한 처벌을 받을 가능성이 커 이를 피하려고 보위성에 충성을 맹세하는 의미로 쌀을 전달한 것으로 파악됐다.
A씨는 탈북 이후 경기도에서 혼자 거주하며 자영업을 해 제법 돈을 번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수사기관에서 “북한에 두고 온 아들이 보고 싶어서 돌아가려고 했다”고 진술했다.
검찰 관계자는 “A씨가 추가로 보내려 한 쌀은 보위성에 전달되지 않았지만, 그 이유 등에 대해서는 수사에 지장을 줄 수 있어 밝힐 수 없다”며 “북한에 돌아가기 위한 준비를 마친 상태여서 구속 상태로 재판에 넘겼다”고 말했다.
<연합뉴스>
□ 02.19 “북한은 나를 이렇게 만들었지만 나는 승리했다”
트럼프 의회 연설에 초대받아 목발 흔든 탈북자 지성호씨 <김현호의 넛지 인터뷰>
달리는 기차에서 석탄 훔치다 떨어져 한쪽 팔 다리 잃어
목발 짚고 두만강 건너 중국을 관통해 동남아 정글 뚫고 한국행
북한인권운동단체 ‘나우’ 창립해 탈북자 구출운동 펼쳐
북한인권 운동을 펼치고 있는 탈북자 지성호씨(36)는 길지 않은 인생을 그야말로 소설처럼 살아왔다. 북한의 대기근 시대인 1990년대, 열 살 남짓에 이른바 ‘꽃제비’ 소년이 돼 달리는 기차 위를 오르내리며 석탄을 훔치던 그는 기차에서 떨어져 왼쪽 손과 다리를 잃었다. 아버지가 만들어 준 목발을 짚고도 달리는 기차를 향해 뛰어 오르기를 계속했다. 그러지 않으면 굶어죽기 때문이었다. 그는 결국 목발을 짚고 두만강을 건넜다. 그런 몸으로 중국 대륙을 남하해 동남아 정글을 뚫고 한국 땅을 밟았다.
한국에서 대학 재학 중 북한인권 운동 단체를 결성해 국내외에서 활발한 활동을 해온 그는 지난달 31일 미국 트럼프 대통령의 연두 국정연설장에 초대받았다. 트럼프 대통령은 그를 북한 인권의 실상을 보여주는 상징적 존재로 부각시켰다. 그 자리서 그는 자신의 분신 같은 목발을 힘차게 치켜들었다. TV 중계를 통해 미국 대통령의 국정연설에 귀 기울이던 세계의 이목이 그에게, 나아가 북한 인권문제에 집중되는 순간이었다. 미국에서 돌아온 지성호씨를 만나 이번 미국행과 그의 삶에 얽힌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어떻게 미국에 가게 되었나.
“평소 잘 아는 분이 미국에 좀 오라고 했다. 미국에서 열리는 북한인권 행사에 가끔 참여하곤 했는데 이번에도 그런 줄 알았다. 무슨 행사인지 누구를 만나는지 전혀 몰랐다. 나의 경력과 관련 자료를 미리 보내달라고 해서 좀 큰 행사인가라는 생각만 했다. 미국 가서야 트럼프 대통령을 만나고 연두 국정연설장에 참석한다는 설명을 들었다. 연설 내용에 관한 이야기는 없었다.”
-백악관에는 언제 들어갔나.
“미국 도착 다음날 백악관에 들어갔다. 트럼프 대통령의 연설이 있기 전날이었다. 대통령 집무실에서 기념 촬영을 했다. 이튿날 의사당에서 있을 연두 연설에 초대돼 소개되는 이른바 ‘영웅’들이 모두 왔다. 미국인이 아닌 사람은 나뿐이었다. 그런데 나보고 가장 먼저 트럼프 대통령과 악수하고 사진을 찍으라고 했다. 그렇지 않아도 바짝 긴장돼 있었는데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내가 얼떨떨해 있으니까 트럼프 대통령이 내 어깨를 툭툭 치고 윙크를 해주면서 ”당신에 대해 잘 알고 있다“ ”당신이 겪은 고통을 세계인이 알게 해야 한다“고 말했다. 나중에 사진을 보니 트럼프대통령이 나와 사진을 찍으면서 ‘엄지 척’을 하고 있었다. 트럼프 대통령의 인상이 참 푸근했다. 친척 아저씨 같은 느낌이었다.”
-연설 당일은 어땠나.
“백악관에서 대통령 부인인 멜라니아 여사와 기념사진도 찍고 직원들이 백악관 구경을 시켜주었다. 저녁에는 펜스 부통령을 비롯해 대통령 참모들과 함께 만찬을 했다. 그 자리서 대통령 참모가 ”오늘 대통령의 의회 연설에서 당신 이야기가 나올 것“이라고 알려주었다. 대통령이 나에 대해 잘 알고 있고 북한인권문제에도 관심이 많다고 강조했다. 2년 전 내가 노르웨이 오슬로포럼에서 행한 연설 장면을 담은 13분짜리 영상을 트럼프 대통령이 다 본 것 같았다. 펜스 부통령과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나에게 ”용기가 대단하다“고 격려해 주었다. 만찬 후 의사당으로 이동했는데 일행에 대한 경호가 삼엄했다.”
(미국대통령의 연두 국정연설은 TV 시청률이 높은 저녁시간에 행하는 것이 관례이고 트럼프 대통령의 올해 연설도 현지 시간 1월30일 저녁 9시, 우리시간 31일 오전11시에 시작됐다.)
-의사당에서는 어땠나.
“미국의 상하원 의원들과 각료, 연방대법원 판사들과 장군들 등등 미국을 움직이는 중요인사들이 모두 모인 의사당에 들어설 때 가슴이 먹먹했다. 트럼프 대통령이 나를 소개하고 북한 인권문제를 지적할 때는 쏟아지는 눈물을 참기 어려웠다. 특히 북한에서 우리 형제들이 먹을 게 없어 흙을 먹던 이야기, 나의 탈북 여정, 아버지가 탈북하다 북한 보위부에 끌려가 고문으로 돌아가신 이야기를 할 때는 온몸이 굳는 듯했다. 그리고 ”아, 마침내 내가 승리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탈북 후 북한 인권 실상을 알리려고 그토록 몸부림쳐 왔는데 이제 미국 대통령이 미국은 물론 전 세계가 주시하고 있는 가운데 북한 인권 실상을 생생하게 증언하고 있으니, 이제 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트럼프 대통령의 소개를 받고 자리에서 일어나 목발을 치켜드는 모습은 그날 의사당의 하이라이트라고 할만 했다.
“한국에서는 의족을 써 목발은 계단을 오르거나 힘들 때 가끔 사용한다. 그러나 그 목발은 곧 나의 과거와 현재의 삶이 고스란히 담긴 것이다. 북한인권 관련 행사에서 강연할 때는 가급적 그 목발을 들고 간다. 미국 의사당에서 목발을 치켜들면서 나는 속으로 울면서 외쳤다. “북한은 나를 이렇게 만들었지만 나는 결국 승리했다”라고.”
-의사당 분위기는 어땠나.
“내가 소개될 때 가장 긴 기립박수가 쏟아졌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국정 연설이 끝나고 나서는 미국 의원들이 몰려와 악수를 청했다. 다들 ‘감동 받았다’ ‘용기가 대단하다’ ‘북한 인권 실상을 알게 됐다’고들 했다. 의원들과 사진도 많이 찍었다. 행사장을 나오니 일반 시민들이 따라와 함께 사진 찍자고 했다. 자전거를 타고 좇아오는 사람들도 있었다. ‘방금 TV에서 본 사람 아니냐’ ‘그게 그 목발이냐’며 몰려왔다. 호텔에 도착하니 ‘이런 스페셜게스트(특별손님)를 모시게 될 줄 몰랐다’며 반색했다. 언론사와 곳곳에서 전화가 너무 와서 전화기를 꺼놓을 수밖에 없었다.”
-그후 트럼프 대통령을 또 만났지 않았나.
“국정 연설 다다음 날 귀국하려는데 이튿날 트럼프 대통령과 탈북자들과의 만남이 있다는 연락을 받았다. 트럼프 대통령과 다시 만났는데 매우 반가워하면서 따뜻하게 대해주었다. 대통령은 탈북자 한 사람 한 사람에게 탈북 동기와 과정을 물어 보면서 깊은 관심을 보여주었다. 면담은 예정시간을 훨씬 넘겼다. 이번에 백악관에 세 번 들어가고 트럼프 대통령을 세 번 만났다. 앞으로 청와대에 들어가 우리 대통령과도 북한 인권에 대해 이야기 할 기회가 있으면 좋겠다.”
-일부에서는 트럼프대통령이 탈북자들을 북한 공격에 이용한다는 지적도 있는데.
“탈북자와 북한인권 문제에 이토록 관심을 보인 지도자가 있는가. 트럼프 대통령을 만나면서 북한인권 문제에 대한 그의 관심과 진정성을 분명하게 느낄 수 있었다. 그의 관심과 국정연설 등을 통해 북한인권 운동은 새로운 전기를 마련할 수 있다고 확신한다. 북한체제의 근본적 문제는 인권말살에 있고 탈북자들은 인권말살의 살아있는 증인들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점을 강조하고 있고, 이것이 북한 정권에는 가장 치명적인 약점이 될 것이다.”
-그날 이후 보름 정도가 지났다. 구체적인 변화를 느끼는 게 있나.
“한국은 물론 미국과 다른 여러 나라의 언론과 인권단체 등에서 많은 연락이 오고 있다. 북한 인권에 대한 관심이 크게 확산되고 있는 느낌이다. 미국 정부 차원에서 북한 인권문제에 대한 대책이 더욱 강화될 것으로 보인다. 미국에서 나의 이야기를 영화로 만들어 보자는 이야기가 나오기도 한다. 무엇보다 탈북자들이 큰 힘과 용기를 얻게 됐다. 물론 이것이 일시적 분위기로 그치지 않기 위해서는 우리와 국제사회의 지속적인 노력이 뒷받침돼야 할 것이다”
-왜 탈북했나.
“나는 함경북도 회령시 세천노동자구에서 태어나 자랐다. 두만강변의 탄광마을이다. 1990년대 대기근이 시작되면서 주물공이었던 아버지가 직장에서 배급을 받지 못하게 됐다. 열세 살 때부터 석탄을 실어 나르는 기차에 뛰어 올라 석탄을 훔쳐 팔아 먹을거리를 구했다. 열여섯 살 때 기차에서 떨어져 왼쪽 손과 다리가 잘렸다. 그후 목발을 짚고도 달리는 기차에 뛰어 올랐다. 어머니가 나의 의족과 의수를 구해 오겠다며 여동생과 함께 중국으로 간 뒤 소식이 끊겼다. 나도 네 살 아래 남동생과 함께 2006년 두만강을 건너 중국으로 갔다. 아버지는 나중에 모셔올 생각이었다. 한국에 와서 아버지 소식을 알아보니 보위부에 끌려가 고문을 받다 돌아가셨다고 했다.”
-두만강을 건넌 후에는?
“중국 옌벤에서 출발해 라오스 미얀마를 거쳐 태국까지 1만 킬로미터를 지나왔다. 중국 기차 안에서 공안에 붙잡힐 뻔 했지만 정신병자 행세를 해 위기를 모면하기도 했다. 성한 사람도 목숨을 걸어야 하는 동남아 정글을 목발을 짚고 지날 때는 완전 탈진해 쓰러졌다. 그때 이런 기도와 다짐을 했다. ‘아, 나는 왜 북한에서 태어나 이렇게 외국 정글에서 허무하게 죽어가야 하나. 만약 여기서 살아난다면 북한 동포들이 더 이상 탈북하지 않아도 되도록 통일을 이루는 데 목숨을 바치겠다.’ 그리고 기적적으로 살아나 태국의 한국대사관에 도착했다. 관계자들이 ‘목발 짚고 여기까지 온 탈북자는 처음’이라며 반갑게 맞아주고 한국으로 일찍 보내 주었다. 인천공항에서는 관계자들이 휠체어를 갖고 맞아주어서 눈물이 났다.”
-한국에서의 정착 생활은?
“하나원 교육을 마친 뒤 지방 도시에서 살기 시작했는데 경제적으로 몹시 힘들었다. 정착 지원금을 탈북 브로커에게 준 탓도 있지만 지원금 자체가 많이 부족했다. 포장마차 등을 하다가 한국에서는 대학을 나오지 않고는 성공하기 어렵다는 이야기를 많이 듣고 입시 준비를 했다. 1년 정도 공부 해 2009년 28살에 동국대 회계학과에 입학했다가 북한인권운동을 하려면 법을 알아야겠다는 생각에 법학과로 옮겼다. 지금은 대학원 과정에 다니고 있다.”
-북한인권운동은 언제부터 본격적으로 하게 됐나.
“대학 1학년 때 영어 선생님 겸해서 함께 지내게 된 재미교포 선교사가 있었다. 그에게 내가 북한에서 겪은 일이나 탈북 과정, 그리고 북한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가는지를 이야기했더니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반응이었다. 그는 ‘그게 사실이라면 당신이나 한국 사람들은 왜 북한을 그냥 두고 있느냐’고 물었다. 할 말이 없었다. 그는 자신이 북한에 들어가 순교할 것이라고 말했다. 설마 했다. 그런데 그와 헤어진 뒤 그가 실제로 두만강을 넘어 북한에 들어갔다가 북한당국에 체포됐다는 뉴스를 들었다. 그가 로버트 박이다. 로버트 박은 북한에 억류돼 있다 풀려났지만 심한 고문 후유증을 앓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로버트 박의 일을 보면서 북한 인권운동을 더 이상 미룰 수 없다고 생각해 2010년 남북한 청년들로 ‘나우(NAUH. Now Action Unity for Human rights)’를 결성했다.”
-‘나우’의 주요 활동 방향은?
“북한인권의 실상을 국제사회에 알리고 탈북자 구출운동을 벌이는 데 주력하고 있다. 지난 7년여 동안 다양한 활동을 벌여왔다. 작년에는 미국의 하버드 프린스턴 조지워싱턴 대학 등에서 북한인권 강연회를 열었고, 미국의 지미 카터 전 대통령, 우크라이나의 유센코 전 대통령, 루마니아의 콘스탄티네스쿠 전 대통령 등을 뵙고 국제적 연대를 다지기도 했다. 2016년에는 노르웨이 오슬로에서 열린 ‘오슬로자유포럼’에서 세계 각국의 인권운동가 300여명 앞에서 북한인권의 실상을 고발했다. 탈북동포 구출운동은 주로 중국내 탈북자들을 한국으로 데려오는 일로 지난 7년 동안 270명을 입국시켰다. 처음에는 1년에 10명 안팎이었으나 작년에는 72명으로 늘어났다. 앞으로 ‘나우’의 활동이 더욱 탄력을 받으리라 기대한다.”
-탈북자 지원 활동 등을 통해 북한 내부의 변화를 잘 파악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요즘 북한 사회는 어떤가.
“국제사회의 대북 압박 효과가 본격화되고 있는 것 같다. 물자가 모자라는데다가 중국에 내다팔던 물고기나 광물 등도 제값을 못 받으니 살기가 갈수록 어려워지고 있다는 불만이 고조되고 있다. 김정은이 집권하고 5년이 지났는데도 형편이 더 어려워지니 주민들도 화가 난 것이다. 예전 같으면 정치범 수용소에 끌려갈 이야기를 대놓고 해도 보위부원들이 잡아가지를 못한다. 잡아가면 주민 전체를 잡아가야 할 판이기 때문이다. 주민들은 당장 먹고 살기 힘든 마당에 핵과 미사일이 무슨 소용이냐고 한다. 특히 북한의 20~30세대인 이른바 ‘장마당 세대’(배급체계가 무너지고 장마당이 본격화하던 90년대 이후에 성장한 세대를 지칭)들의 불만이 크다. 이들은 한국의 대중문화에도 익숙한, 더 이상 외부세계와 폐쇄된 세대가 아니다. 북한의 미래도 결국 이들의 손에 달려 있을 것이다.” <상임고문>
【서울=뉴시스】 동아일보
□ 02월 21일 “김일성 앞에서 노래하며 당원 꿈꿔… 이젠 北실상 고발이 일상”
▲ 김흥광 NK지식인연대 대표가 지난 13일 서울 성동구 소재 사무실에서 NKTV 온라인 방송을 시연하고 있다. 김선규 기자 ufokim@
‘北교수 출신 탈북자’ 김흥광 NK지식인연대 대표
어렸을 때 ‘노래 신동’ 불리며
김일성 참석한 예술축전 경연
“가수로 노동당원 될 것” 다짐
변성기 거친 이후 공부 전념
컴퓨터공학 배운 뒤 교수 돼
19년간 北사이버전사 양성
더운물 나오고 가스로 밥하는
탈북자 일상이 北선 간부생활
유튜브 방송하고 USB 北보내
‘엿들을라’ 속삭이는 北사회
외부의 자극 통해 실상 알려
웅성웅성하는 사회로 바꿔야
“북한 주민들이 스스로 처참한 상황에 처해 있다는 것을 알게 되고, 외부 세계에서도 그 실상을 제대로 알게 하는 것. 그게 제 꿈이죠.”
김흥광(58) NK지식인연대 대표는 북한 ‘교수 출신 탈북자’라는 특이한 이력의 소유자다. 2003년 중국으로 탈북했고 2004년 ‘한국인’이 됐다. 탈북 지식인들과 연대 조직을 설립한 2008년부터는 북한 주민에게 바깥 세상의 진실을 알리기 위해 애쓰고 있다. 한국의 일상이 담긴 USB를 북한에 몰래 반입시키고, 바다 조류를 이용해 직접 쌀을 보내기도 한다. 그러다 보니 “입을 다물지 않으면 죽이겠다”는 위협은 일상이 됐다. 현재 테러에 대비해 하루 10시간 넘게 무장경찰의 경호를 받고 있다. 그는 이에 굴하지 않고 최근에는 유튜브를 이용한 온라인 방송채널도 열었다. 북한 사이버 강군을 위해 컴퓨터 운영체제를 연구하던 그가 이제는 북한 시스템을 무너뜨리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는 셈이다. 올해 10월 NK지식인연대는 창립 10주년을 맞는다. 김 대표를 지난 13일 서울 성동구에 있는 그의 사무실에서 만났다.
김 대표에게도 ‘김일성’이 전부이던 시절이 있었다. 북한에 있을 당시 그는 ‘조선노동당원’을 꿈꿨다. 어렸을 때는 노래가 그 길을 열어주리라 믿었다. 김일성 전 국가주석 앞에서 경연하는 설날 맞이 전국 학생 소년예술축전에 차출될 정도로 노래 신동이라 불렸기 때문.
“경연이 끝나고 바지 옆에 세로로 흰 줄이 새겨진 체육복을 선물로 받았죠. 당시 일명 ‘줄 쳐진 바지’는 장군들이나 만경대혁명학원 학생들이나 입을 수 있었으니 사람들이 얼마나 쳐다봤겠습니까. 마냥 뿌듯했고, 그렇게 가수가 될 줄로만 알았죠.”
김 전 주석이 당시 같이 중창한 김귀국동 씨를 따로 부르는 것을 보곤 꿈은 더 간절해졌다. “두 살 위인 김귀국동은 1960년 재일 귀국선에서 태어났어요. 김일성이 ‘길조’라며 그 의미를 담아 직접 이름을 지어줬죠. 중창이 끝나고 김일성이 그 친구를 기억한다며 따로 부르는데, ‘영광이라면 바로 저런 게 영광이겠구나’ 이런 생각이 들었죠.”
이 같은 그의 꿈은 꿈으로 그치고 말았다. 불현듯 찾아온 변성기는 그의 목소리를 갉아먹었다. 북한에서 허스키한 목소리는 인정받지 못했다. 울며 겨자 먹기로 방향을 바꿔 공부를 시작했는데 의외로 적성에 잘 맞았다. 북한의 최고 대학인 김일성종합대학을 노릴 성적이 됐지만 결국 2지망이었던 김책공업종합대학 시험을 보라는 파견장을 받았다. 북한의 대학입학시험은 거주하는 군, 시의 대학모집 과에서 ‘어느 대학에 가서 시험을 보라’는 파견장을 받아야 치를 수 있다. 그리고 1977년, 생전 들어보지도 못했던 컴퓨터공학과에 입학했다. 북한에서 대학 및 학과 배치는 성적·학교생활뿐 아니라 가족의 신분 등을 고려해 이뤄진다. 그는 “컴퓨터가 뭔지도 몰랐지만 아버지가 높은 간부가 아니었으니 (대학이나 학과가 배치된) 사정을 이해했다”고 회고하며 미소를 지었다.
1981년 졸업 후 19년 동안 그는 북한의 ‘사이버 전사’들을 키워냈다. 함흥컴퓨터기술대학에서 10년, 북한공산대학에서 9년이다.
“컴퓨터 네트워크나 운영체제를 가르쳤어요. 제자들은 거의 다 사이버 부대에 가거나 군수공장에 취업했죠.”
1986년에는 북한 최초로 교육용 극초소형 컴퓨터를 개발해 당원의 꿈을 이뤘다. “입당 자체가 벼슬이나 관직은 아니지만 일단 북한사회에서 안정을 찾을 수 있고, 더불어 출세할 수 있는 일종의 면허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장가도 당원이 돼야 잘 갈 수 있죠.”
이후로도 그는 ‘상급 교수’가 되기 위해 발버둥 쳐야 했다. 북한의 교수는 조교원, 교원, 상급교원, 2급 교원, 1급 교원 등 5개 급수로 나뉘어있다. 2년에 한 번 자격시험을 치러야만 급수를 유지하거나 진급할 수 있다. “짐승을 다루는 방식과 비슷하다고 생각하면 됩니다. 하라는 대로 열심히만 하면 뭐가 떨어지게끔 하는 거죠.”
승승장구하던 그의 신분은 하루아침에 뒤집혔다. 그 시작은 ‘검열’이었다. 2000년도 들어 중국으로부터 전자 파일화된 영화와 음반들이 많이 반입됐다. 전공 특성상 그는 북한 주민들이 다른 나라 콘텐츠를 보는지 단속·검열하는 업무를 맡게 됐다. “북한은 라디오도 한 채널만 들어야 하니 다른 채널로 넘기지 못하게 철사로 막고 납땜질을 해야 해요. 간혹 다른 나라 방송을 들으려고 이 철사를 끊는 경우가 있는데, 집집마다 들어가 끊겼나 감시했죠. 길 가는 사람도 불러다 가방 검사를 하고, CD나 비디오테이프 등을 다 회수해 수시로 검열했습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남을 감시하고 검열하던 과정 중에 그가 접한 한국 드라마 등을 통해 ‘남한에 대한 동경’을 품게 됐다. “분명히 남한은 ‘사람이 살지 못할 생지옥’이라고 들었는데 아닌 거죠. 여기서 수십 년 있으며 그야말로 ‘개고생’하며 사느니, 가고 싶으면 언제든 외국에 나가고, 책에서만 보는 인터넷도 자유롭게 쓰고 싶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렇게 얻은 한국 드라마 ‘모래시계’와 영화 ‘007시리즈’를 담은 CD와 비디오테이프를 친구에게 빌려준 게 화근이었다. 친구가 검열에 걸려버린 것이다. 결국 그는 1년 동안 정직 처분을 받고 협동농장으로 끌려가 ‘혁명화’ 과정을 겪었다. 매일 농사를 짓고 잡초를 뽑으면서 반성문을 썼다. “내가 뭘 잘못했고 왜 이런 사람이 됐는지, 이걸 어떻게 고칠지에 대한 보고서를 매일 써야 했습니다. 360장 정도 썼을 거예요.” 혁명화가 끝나고 공산대학으로 복귀했지만 그는 그를 ‘이색분자’ 취급하는 사회 분위기와 직면했다.
“간부를 키워내는 교수들이니 쉽게 말해 사상이 새빨개야 하고 오염돼선 안 된다는 거죠. 언젠간 공산대학보다 한 급이 낮은 일반 대학으로 쫓겨나고, 그 이후에도 낙향을 거듭할 게 뻔했습니다. 도저히 북한에서 살기 어려운 신세가 된 거죠.”
결국 그는 2003년 두만강 가를 지키던 군인들에게 돈 만 원을 주고 중국으로 넘어갔다. 당시 그의 교수 월급은 4400원이었다. 그리고 이듬해, 드디어 동경하던 한국에 발을 디뎠다.
“북에서는 잘 나가는 의사나 연구원이었던 사람들이 탈북 이후 할 수 있는 건 요양보호사 정도였죠. 꿈을 포기해야 하니, 그 속이 허한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죠.” 탈북 이후 김 대표는 북한대학원대학교에서 북한경제학 석사, 정치·통일 박사과정을 수료하고 한세대 U-city IT 융합 박사를 거쳐 한신대, 경기대, 수원대에서 겸임교수로 강의했다.
탈북자 중 그처럼 북한에서와 같은 직업을 가질 수 있는 이들은 극히 드물었다. 김 대표가 남북하나재단 전신인 북한이탈주민 후원회에서 3년간 정착지원과장으로 일할 당시 들여다본 탈북자들의 현실은 처참했다. “고학력 탈북자들일수록 취업도 빨리하고 적응력도 높아요. 하지만 당시 학력 인정도 어려웠고 단순 노동 위주의 직업을 주로 얻을 수밖에 없으니, 스스로에 대한 자긍심이라곤 찾아볼 수조차 없었습니다.”
그는 북한에서 얻은 지식을 ‘실질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단체를 만들고 싶었다. 그렇게 2008년 ‘NK지식인연대’가 출범했다. 북한에서 4년제 대학을 졸업한 뒤 전문직을 지낸 탈북자들로 구성된 단체는 현재 전체 탈북자의 1.5% 정도인 470여 명 규모다. 이공계만 70~80%다. NK연대는 북한 내부에 외부 사정을 알리는 일에 특히 관심이 많다. 그 일환으로 2014년 USB에 여러 콘텐츠를 담아 북한 내부로 보내기 시작했다. “탈북자들의 생활을 영상으로 찍어 담았죠. 수도꼭지를 틀면 더운물이 나오고, 냉장고를 열면 먹을 게 가득한 모습. 가스 불로 밥을 하고, 온도를 높이면 방이 따뜻하고. 북한 중앙당 최고 간부들이나 할 수 있는 생활이 여기서는 ‘기본’이라는 걸 알려주는 거죠. 지금 북한의 삶은 말도 안 되는 짐승생활이라는 걸 깨닫도록요.”
문제는 북한에 어떻게 반입하느냐는 데 있었다. 맨 처음 중국 수입업자를 통해 5000개를 들여보냈지만 모두 압수당했다. “새 USB는 되는데 뭔가 파일이 있는 USB는 반입이 안 된다는 겁니다. 일일이 컴퓨터에 끼워서 확인하더군요.”
그래서 고안한 게 ‘스텔스 USB’다. USB 속 파일들을 모두 보이지 않게 은폐해놓은 뒤 USB가 컴퓨터에 20번 정도 끼워졌을 때 저절로 드러나게끔 사전 조치를 취했다. 미국 국무부의 지원을 받아 2015년까지 2년 동안 2만여 개의 USB를 들여보냈다. 이것도 잠시, 결국 북한은 스텔스 기능을 포착했다. 북한은 은폐된 파일을 강제로 보이게끔 하는 프로그램을 만들었다. 김 대표가 ‘스텔스 버전 2’를 만들며 재차 시도했지만 싸움은 삼파전에서 끝났다. “2016년에는 북한에서 아예 ‘붉은별’이라는 운영체제를 만들어서 쓰더라고요. 그 운영체제에서는 우리가 만든 파일들이 열리지 않아요. 결국 손을 들 수밖에 없었죠.”
이후에는 대북 ‘직접 지원’도 시작해 3년째가 됐다. NK연대 회원들은 페트병이나 김치통 등에 쌀과 공책, 약품, 라면 등을 담아 인천 강화도에서 조류를 이용해 북한으로 보낸다. 흘러간 물자들은 황해남도 연안에 도착한다. “여태까지 페트병으로 쌀 40t, 김치통으로는 8t 정도 보냈어요. 위치추적장치를 넣어 시험해보니 13시간 정도 되면 북방한계선(NLL)을 넘고, 19~20시간 정도 되면 도착하더군요.” 김정은 북한 노동당 위원장 얼굴을 그린 풍선을 묶어 보내기도 한다. “김정은 사진을 잘라야만 먹을 것을 얻을 수 있게 한 거죠. 북한 주민들로선 큰 용기가 필요한 일일 겁니다. 결국 할 수밖에 없을 거고, ‘김정은을 찢었다’는 그 용기는 마음에 남겠죠.”
김 대표는 최근 사재를 털어 ‘NKTV’라는 유튜브 채널을 시작했다. 영상 제작을 위해 살고 있는 국민임대주택 전세금 3000만 원을 빼서 카메라와 조명을 비롯한 장비들을 마련했다. “영상 편집의 ‘편’자도 몰랐지만, 책을 보며 알음알음 공부했죠. 그냥 북한 실상과 인권, 그들의 간계를 제대로 알리고 싶었습니다.” ‘3만 개의 마이크’ ‘중앙당 X파일’ ‘북한 이슈 농단’ 등 코너도 다양하다. 이 중 3만 개의 마이크는 3만 탈북민들의 ‘입’을 뜻한다. “여러 사회적 편견에 부딪혀 자신의 의견을 제대로 표출하지 못하는 탈북자들이 많아요. 그들의 살아가는 모습을 담은 영상을 공유하는 플랫폼입니다.” 지난해 11월부터 시작했지만 벌써 구독자만 해도 2000여 명, 총 시청자는 24만8000여 명에 달한다.
그는 매일을 테러 위협 속에 살아간다. 오전 8시부터 오후 6시까지, 무장 경찰이 그를 밀착 경호한다. 그 생활이 벌써 5년 정도 됐다. “북한에서 저를 비롯한 8명의 탈북 활동가들을 지명수배해 놓은 상태라고 하더군요. 테러대상자가 된 거죠.”
그를 ‘죽이겠다’는 위협은 전화와 팩스를 가리지 않는다. ‘너 같은 ‘벌거지’를 반드시 밟아 역사의 오물장에 처넣겠다’든지, ‘너는 살아서는 즐겁지 못할 것이고 죽어서도 편하지 못할 것’이라는 등의 내용이 주다. “분명 중국 전환데 우리 말을 하면서 욕을 마구 하더군요. ‘너 누구냐’고 하면 ‘목을 따러 가겠으니 방송이나 신문에서 입 벌리지 말라’며 험한 말을 합니다.”
이렇게 섬뜩한 협박도 그의 활동을 막지는 못한다. 그는 또 다른 대북 지원 사업을 계획 중이다. 김 대표는 “75㎏까지 실을 수 있는 드론을 이용해 USB, 전단, 먹을거리 등을 평양에 직접 투하하고 싶다”고 밝혔다. 조류를 이용하는 방식보다 훨씬 빠르고, 파급력이 크기 때문이다. “북한은 ‘속삭이는 사회’예요. 집에서도 누가 듣겠다며 목소리를 낮추죠. 하지만 본 것에 대해서는 이야기할 수 있잖아요. ‘너 어제 물건 떨어진 거 봤니, USB에 영화가 담겨있대’와 같은….” 그는 잠시 말을 멈췄다가 다시 이어갔다.
“북한을 가만히 놓아두어서는 안 됩니다. 외부 자극을 통해 ‘세상이 달라지고 있다’는 걸 주민들이 알게 해야 해요. 북한을 ‘웅성웅성하는 사회’로 변화시키는 것, 그것이 우리의 목표입니다.”
김현아 기자 kimhaha@
□ 03월 02일 “中서 강제송환 탈북민 최대 10만명”
‘강제북송 개선방안’토론회
“中 안보리상임국으로 책임 커
탈북민 인도적체류자 인정해야
한국도 위안부 만큼 관심을”
“북핵 위기의 본질은 주민에게 쓸 돈을 핵과 미사일에 퍼부어도 주민이 말 한마디 못하는 북한의 인권 상황에 있습니다.”
한반도 인권과 통일을 위한 변호사 모임(한변) 상임대표인 김태훈 변호사는 2일 중국의 탈북자 강제송환 정책과 북한 당국의 가혹한 처벌을 고발하며, “유엔이 매년 인권이사회와 총회 북한인권결의안을 통해 강제송환 금지를 촉구해 왔음에도 중국은 이를 무시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김 변호사는 지난해 탈북 일가족 5명이 중국 윈난(雲南)성 쿤밍(昆明)에서 중국 공안에 체포돼 북한으로 압송되던 중 청산가리를 마시고 음독자살한 사례를 소개하면서 “북한으로 끌려가는 탈북민들이 차라리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는 안타까운 실정”이라고 밝혔다. 김 변호사는 이처럼 북한에 송환된 탈북민들을 최대 10만 명으로 추산했다.
2016년 3월 3일 북한인권법이 공포됐지만 아직도 북한인권재단이 설치되지 않은 데다 지난해 초부터는 중국이 탈북민들을 일제 단속해 북한에 강제송환하는 실정이다. 이에 한변은 이날 서울 중구 한국프레스센터에서 ‘강제북송 문제와 개선방안’ 특별 토론회를 열고 대책 마련을 촉구했다.
제성호 중앙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토론회에서 “중국은 유엔 안보리 상임이사국으로 인권 증진에 응분의 책임이 있는 만큼 난민법을 개정해 탈북민들에게 ‘인도적 체류자’ 지위를 부여하고 강제송환을 중단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동호 통일연구원 북한인권연구센터장은 “김정은 체제의 북한은 탈북을 체제 안정성의 심각한 위협으로 인식하고, 통제를 지속해서 강화하고 있다”며 중국의 강제송환 문제와 더불어 계속 문제를 제기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강철환 북한전략센터 대표는 “강제북송과 북한 내 조사 과정에서 강제낙태, 성고문 등 인권유린의 집합체라고 말할 만큼 심각한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며 “구 공산권 등 독재 권력의 붕괴는 국경 붕괴로부터 시작했고, 북한도 당국의 국경 봉쇄를 뚫어야 변화를 추구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김 변호사는 특히 북한 인권에 대한 우리 사회의 관심이 저조하다며 80년이 지난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기울이는 높은 관심과는 대조적이라고 지적했다. 북한 인권 문제에 대해 ‘우리와 같은 이웃이 겪는 고통’이라는 인식을 가져야 한다는 주장이다. 조형곤 21세기미래교육연합 대표도 “탈북자의 강제북송 실태는 미투 운동이나 위안부 문제만큼 심각한 상황이지만, 국민이 갖는 관심은 매우 미약하다”고 지적했다. 김 변호사는 정부의 적극적인 대처를 주문하며 “더불어민주당이 야당 시절 북한인권재단 상근이사직을 요구했다가 재단이 파행된 만큼 이제 여당이 된 민주당이 결자해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날 토론회에서는 시나 폴슨 유엔 북한인권서울사무소장이 참석했다.◎
조재연 기자 jaeyeon@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