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이탈주민(탈북민) 이야기10/ 탈북(민) 소식 1/ 2012.06.25 최근 강제북송된 탈북자 4명 공개처형" - 2016.12.07 탈북민을 북송시킨 죄책감에 옷 벗은 러시아 검사 이야기
북한 이탈주민(탈북민) 이야기10/
■ 탈북(민) 소식 1
■ 2012.
□ 06.25 최근 강제북송된 탈북자 4명 공개처형"
NK지식인연대 김흥광 대표 “40명은 정치범수용소行”
탈북자 출신인 김흥광 NK지식인연대 대표는 25일 “북한에서 들려 온 소식에 의하면 최근 중국에서 붙잡혀 강제북송된 탈북자 44명 중 4명은 처형당하고 나머지는 정치범수용소에 끌려갔다고 한다”고 전했다.
김 대표는 이날 인터뷰 전문 인터넷신문인 디인터뷰가 서울 중구 프레스센터에서 주관한 ‘북한인권법 제정 추진을 위한 제3차 세미나’에서 “북한주민의 인권은 북한당국의 그릇된 인권의식이 바뀌지 않는 한 개선될 수 없다”며 이같이 밝혔다.
그는 “공개총살과 정치범수용소, 가혹한 경찰폭압체제를 가동해 주민들이 강제로 순종하게 하고 반항자들은 중세시대처럼 3대를 멸족시키는 곳은 지구 상에 오직 북한뿐”이라며 “북한당국이 주민의 인권을 거부하는 것은 체제가 존재하기 위한 필수불가결의 조건이기 때문”이라고 강조했다.
발제를 맡은 제성호 중앙대 교수는 “열악한 북한인권 상황을 호도 내지 침묵하거나 북한인권법 제정에 반대하는 것은 그 자체가 반인권적·반민족적인 것일 뿐만 아니라 진보를 자처하는 사람들의 자기모순적인 행태”라고 역설했다.
선진화시민행동 상임대표인 서경석 목사는 제19대 국회에서도 북한인권법안이 여야 합의로 통과될 공산이 낮다고 분석하면서 “북한인권법은 민주통합당이 북한인권법 지지여부가 대선에 주는 영향에 대해 어떻게 판단하는가에 따라 제정여부가 판가름날 것”이라고 내다봤다.
조선일보
□ 07.09 수많은 '박인숙씨'의 비극
북한으로 되돌아가 기자회견장에서 남한을 비난하면서 김정은에게 감사의 눈물을 흘리는 박인숙씨의 모습을 보는 순간 내 눈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탈북 단체 모임에서 자주 봤고 개인적으로 깊은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는 사람이기 때문이었다. 온화한 모습이지만 얼굴이 항상 어두웠고 근심이 깊어 보였다. 가족에 대해 물어봤을 때 북한에 아들이 있다며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그가 북한 체제를 동경했거나 좋아했다는 것은 출신 성분이나 살아온 배경으로 봤을 때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런 박씨가 북한으로 되돌아갈 마음을 가졌을 때는 목숨을 포기할 각오를 했을 것이다. 자기 때문에 자식이 위험해졌다면 목숨을 내놓고라도 자식을 구하고 싶은 것이 세상 모든 어머니의 마음일 것이다. 그래서 박인숙씨의 기자회견을 보면서 가슴이 아팠고 분단과 북한의 폭압 체제가 만들어낸 또 하나 반인륜 범죄의 현장이라고 생각했다.
박인숙씨 건과 유사한 사건은 이전에도 종종 발생했다. 그 주인공은 모두 잘 알던 사람이어서 당황스러웠지만 우리는 북한을 체험한 사람들이라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1996년 남한에 들어왔다 다시 입북해서 남한을 헐뜯는 강연을 하다가 재탈북한 남수씨도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이다. 함경북도 온성에서 우산공장 지배인을 했던 그는 '빨간물'이 덜 빠진 상태에서 회사 공금 문제로 탈북했다가 남한까지 흘러들어 왔다.
하지만 사업 실패로 희망을 잃은 그는 북에 남겨둔 자식들이 생각났고 다시 북한으로 돌아갔다. 그는 "참 우스운 이야기지만 다시 북한에 가서야 남한의 자유가 소중한 것을 깨달았고, 겨울에 찬물도 안 나오는 북한의 현실을 다시 느끼고서야 남한의 풍요로움이 얼마나 좋은 것인지 느꼈다"고 말했다. 그래서 그는 자식들을 모두 이끌고 재탈북해서 현재 대한민국에서 살고 있다.
비록 재입북한 죄 때문에 감옥 생활도 했지만 자유가 있는 남한이어서 감옥 생활도 좋다고 했다. 남쪽에서 보면 괘씸죄이지만 그의 입장에서 보면 재탈북은 어쩌면 영웅적인 행위다. 김정일이 직접 나서 용서하고 우산공장 지배인으로 다시 임명했는데 그걸 박차고 나왔다. 김정일을 망신 주고 북한 인민들에게 진실을 알려준 것이다.
북한의 아내와 자식을 구하려고 재입북했다가 체포돼 종신 수용소에 끌려갔던 유태준씨는 국제사회의 노력으로 풀려나 역시 김정일의 방침을 받고 북한 사회에 재정착했지만 그것을 뿌리치고 재탈북했다. 그는 북한의 기자회견장에서 자신의 구명 운동을 벌이고 있는 남한의 어머니에게 "인간쓰레기, ○○년은 인간도 아니다"는 욕설을 하도록 강요받았다. 김씨 부자(父子) 사적관의 해설원이던 고청송씨도 남한에서 사업 실패로 방황하다 북한의 가족이 그리워 재입북했지만 국가보위부는 그를 지하 감방에서 때려 죽였다.
북한은 거대한 감옥이면서 인질 국가다. 탈북자들은 그 누구도 북한에 남겨두고 온 가족 앞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가까운 가족을 인질로 잡고 간첩질을 시키고 재입북(再入北)을 강요당할 때 사람들은 괴로워한다. 박인숙씨는 바로 그 악랄한 정권에 자식을 인질로 잡힌 힘없는 한 어머니의 비극적인 모습일 뿐이다.
조선일보
■ 2013
□ 02.01 北 보위부의 탈북자 공작
최근 우리의 국가정보원에 해당하는 북한 국가안전보위부의 탈북자에 대한 공작이 도(度)를 넘고 있다. 마치 재미라도 들린 듯이 재입북(再入北)한 탈북자들의 기자회견이 그들의 주요 업무가 된 듯하다. 북한체제를 지키는 제1선에 서 있는 국가안전보위부는 최고지도자를 제외한 모든 사람을 투옥해 수용소에 가둘 수 있는 '무소불위'의 권력을 가진 곳이다. 1970년대 말 자살한 김병하 보위부장 후임으로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보위부장을 겸직했을 정도로 그 권세가 대단하다.
김정은이 김씨 왕조의 오랜 수족인 김원홍 전 보위사령관을 국가보위부의 최고 수장(首長)으로 임명하면서 탈북자 공작은 날로 거세지고 있다. 원래 국가안전보위부는 대남 간첩을 파견하는 곳이 아니다. 간첩 파견은 과거 노동당 직속 '대외연락부' '35호실' '작전부' 등에서 관장해오다가 김정일 정권 말기에는 정찰총국으로 통폐합됐다. 경제난은 북한의 전통적인 첩보망을 무력화시켰고 과거처럼 막대한 돈을 써가며 공작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게 됐다. 게다가 탈북자가 대거 발생하면서 그로 인한 국내 문제가 중요한 현안으로 대두되기 시작했다.
국가안전보위부의 주요 임무는 김씨 왕조와 지도부를 해치려는 국내외 세력을 차단하고 감시·통제하는 것이다. 보위부의 대외 업무도 해외에 나가는 북한 출장자들을 감시하기 위해서다. 그런 보위부가 지금은 싸구려 끄나풀(간첩)들을 마구 만들어 남쪽에 보내고 있다. 마치 북한 내부에서 주민 감시를 위해 보위부 끄나풀들을 대거 운영하는 것과 같은 방식이다. 북한 보위부는 대한민국에 입국한 2만5000명의 탈북자를 자기 '관할'로 보고 있다. 그래서 탈북자와 연계된 북한 내부의 모든 문제를 감시·감독하기 위해서는 남한 내 탈북자 동향을 북한 내부처럼 감시해야 한다는 착각에 빠져 있다. 막대한 자금을 들여 간첩을 파견하는 것보다 탈북자로 인해 발생하는 국내적 문제들이 더 중요해진 것도 한 요인이 됐다.
간첩을 탈북자로 파견하는 것과 재입북 탈북자를 활용한 기자회견은 저렴한 공작이지만 효과는 아주 커 궁핍한 북한 현실에서 불가피한 선택이다. 지금 김정은 체제는 변화의 실패와 극(極)에 달한 경제난으로 많은 주민은 김씨 왕조에 등을 돌리고 있다. 북한 사람치고 남한행을 꿈꾸지 않는 사람이 없을 정도다. 이 때문에 국가보위부는 탈북자 사회를 이간시키고 한국 사회로부터 멀어지게 해 북한 주민이 설령 남한에 간다고 해도 보위부 손아귀를 벗어날 수 없음을 보여주려고 한다.
기자도 북한에 있을 때 남한 사람들이 북한에 와서 남한을 헐뜯는 것을 경멸하며 본 적이 있다. 하지만 아직 다수의 순박한 사람은 보위부의 심리전 공작에 농락당하고 있기 때문에 재입북 탈북자의 기자회견은 남한을 헐뜯는 최후 수단이 된 것이다. 북한 국가안전보위부의 탈북자 공작에 한국 사회는 의연하게 대처해야 한다. 탈북자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지고 성공하는 탈북자가 더 많아지도록 한국 사회가 포용한다면 국가보위부의 공작도 물거품으로 만들 수 있다.
조선일보
□ 02.04 핵실험 앞 北·中 국경경비 강화해도 탈북행렬 계속… 추궁 겁난 北 군인들, 탈북자 발자국 지우기 바빠
천국의 국경을 넘다 2, 3… TV조선·英 BBC서 방송
"핵실험을 앞둔 탓인지, 새해 들어 중국과 북한 모두 국경 경비를 부쩍 강화했습니다. 그렇지만 바이블 루트는 여전히 열려 있습니다. 군인한테 돈만 주면 됩니다."
지난달 13일 오전 11시. 중국과 북한의 국경에서 취재진을 안내하던 갈렙선교회의 중국인 가이드가 카메라를 들고 찾아왔다.
취재진이 묵고 있는 국경 도시 인근의 모습을 담은 것이다. 카메라에 북한 군인 두 명의 모습이 보였다. 한 명은 두꺼운 겨울용 군복을 입었다. 다른 한 명은 긴 총을 등에 차고 있다.
◇탈북 흔적 지우는 북한 군인
그들은 엎드린 채 뒷걸음질하면서 무언가를 열심히 지우고 있었다. 카메라 렌즈를 당기자 그 이유가 드러났다. 북한에서 중국으로 건너온 것으로 추정되는 발자국을 없애는 중이다. 발자국은 서로 다른 줄 세 개로 이어졌다. 지난밤, 적어도 주민 세 명이 탈북한 것이다. 경계를 서던 군인이 직접 중국을 다녀왔을 가능성도 있다.
[크로스미디어] 핵실험 앞 北·中 국경경비 강화해도 탈북행렬 계속… 추궁 겁난 北 군인들, 탈북자 발자국 지우기 바빠
군인 가운데 한 명은 중국에서 북한 방향으로 걸어가면서 발자국을 없앴다. 다른 한 명은 겨울용 군복 야상(야전 상의)을 벗어 눈길을 쓸면서 흔적을 감췄다.
본지와 갈렙선교회가 중국과 북한의 한 국경 도시에 도착한 것은 지난달 11일. 한국에서 제작한 성경과 대중문화 DVD를 전달하고, 북한 내부의 최신 영상을 받는 이른바 '바이블 루트'를 재확인하기 위해서다.
◇경비 강화에도 '바이블 루트' 건재
다음 날 새벽. 양쪽 군대 경비 초소의 불빛이 잠시 꺼진 틈을 타 북한에서 영상이 넘어왔다. 강을 건너온 북한 브로커는 영상을 건넨 뒤 곧바로 돌아갔다. 북한 군인에게 돈을 줘야 한다면서도 가격은 말하지 않았다. 최근 경계가 강화된 이후 안전하게 국경을 넘는 가격은 탈북자 1인당 700만원 이상이다. 그가 전해준 영상에서는 북한 가정집의 휴대용 DVD 플레이어에서 한국 드라마 '가을동화' '천국의 계단'이 나오고 있었다.
19일 갈렙선교회의 중국인 가이드가 다급하게 찾아왔다. "새벽에 탈북자 4명이 얼어붙은 강을 건너다 북한 군인이 쏜 총에 맞아 한 명은 죽었고, 세 명은 북송됐다"고 했다. 북한 군인이 중국 쪽을 향해 총을 쏘는 건 드문 일이다. 가이드는 말했다. "너무 걱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군인을 끼고 일하는 루트는 항상 열려 있으니까요."
그의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20일 새벽, 싸이의 강남스타일 뮤직비디오를 보는 북한 주민들 모습이 다시 국경을 넘어왔다. 선명하게 찍힌 영상에는 최근에 교체된 김일성·김정일 부자의 초상화도 보였다. 가이드는 "김정은 지시로 북한 우상화 작업이 한창이다"고 했다.
29일 중국 공안이 취재진이 묵고 있는 호텔을 급습했다. 공안은 호텔방 내부까지 들어와 여권 검사를 했다. 관광객이라 말했지만 그는 믿지 않는 눈치였다. 앞으로 국경 도시에 외국인이 오래 묵으면 감시를 철저히 할 것이라 경고했다.
다음 날 국경을 빠져나오는 길, 가이드는 말했다. "며칠 동안 강변에 줄지어 서 있던 봉고차가 오늘 새벽에 모두 사라졌습니다. 인신매매에 나선 북한 여성들을 태우고 옌지(延吉)로 간 것 같습니다."
◇TV조선과 영국 BBC에 방영되는 '천국 시리즈'
바이블 루트 등의 취재 내용을 담은 '천국의 국경을 넘다 2, 3' 시리즈는 4일부터 8일까지 매일 오후 6시 50분, TV조선을 통해 공개된다. '바이블 루트' '머나먼 여행' '밀항선' '재회' '세 번째 국경' 순이다. 김영애·하정우· 전도연·지진희·존 조·문 블러드 굿 등 국내외 스타들의 목소리 재능 기부로 화제를 모으고 있는 이번 다큐멘터리 시리즈는 영국 BBC, 독일 ZDF에서도 편성했다.
조선일보
□ 03.21 14호 신동혁씨를 아십니까
캐나다 노바스코샤주의 주도(州都) 핼리팩스는 대서양 연안의 조용한 도시다. 그곳의 댈하우지대학에선 이달 초 이례적인 일이 벌어졌다. '세상에서 가장 암울한 비밀(The World's Darkest Secret)'이라는 제목이 붙은 강연회에 학생, 지역 주민 600여명이 몰렸다. 250명이 들어갈 수 있는 행사장에 약 400명이 미리 입장할 정도로 관심이 높았다고 자유아시아방송(RFA)이 전했다.
강사는 북한의 개천 14호 강제수용소에서 태어나 23년간 바깥세상을 보지 못하고 살았던 탈북자 신동혁씨. 1982년 수용소의 남녀 모범수에게 주어지는 '표창 결혼'으로 출생한 그는 탈출 전까지 그곳이 세상의 전부인 줄 알고 지냈다. 수용소의 세뇌 교육 탓에 '가족애'를 모르고 살았다. 13세 때 탈출을 꾀하던 어머니와 형을 밀고하자 수용소 간부들은 정보를 더 얻어내려고 그를 뜨거운 불 위에 매달고 꼬챙이로 찔렀다. 그의 등에는 평생 지워지지 않는 고문 후유증이 남았다. 어머니와 형이 처형당하는 장면을 목격한 순간은 고문의 흉터보다 더 아프게 각인됐다. 참석자들은 신씨가 참혹한 기억을 되살려 한 시간 넘게 북한 인권 상황에 대해 증언하는 것에 박수를 보냈다.
신씨의 강연은 지난해 이 대학교의 로버트 후이시 교수가 북한의 참혹한 인권 상황에 대해 가르친 것이 계기가 됐다. 후이시 교수는 워싱턴포스트 기자가 신씨와 한 인터뷰를 바탕으로 출간한 '14호 수용소 탈출(Escape from Camp 14)'을 교재로 채택했다. 수업을 들은 학생들은 자발적으로 북한 인권 개선을 위한 '캠프 14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페이스북에 사이트를 만들어 북한의 강제수용소와 신씨의 이야기를 알리기 시작했다. 이 운동엔 미국 텍사스 기독교대의 학생들도 동참했다. 세계 각국에서는 북한의 참혹한 인권 상황에 대한 증언을 듣기 위해 앞다퉈 그를 초청하고 있다.
이런 움직임은 최근 국제사회에서 북한 인권을 개선하려는 노력이 활발해지고 있음을 시사한다. 유엔 인권이사회의 47개 회원국은 이달 중 북한 정권의 반인도적 범죄를 조사하기 위한 조사위원회(COI·Commission of Inquiry) 신설 결의안 초안을 회람 중이다. 존 케리 미 국무장관은 취임 3일 뒤인 2월 7일 북한의 강제수용소 문제를 언급하며 중요한 의제로 다루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하지만 대한민국은 유독 이런 움직임에서 예외다. 외교부는 올 초 정권 교체기 등을 이유로 COI 신설 방안에 신속하게 대응하지 않아 인권 단체들로부터 항의를 받았다. 박근혜 정부의 주요 관계자들은 현재의 북한 도발 국면을 어떻게 대화 모드로 전환하느냐는 구상만 하고 있다. 북한 인권에 대해 고민하는 모습이 없어 2005년 처음 발의됐던 북한인권법 처리도 불확실하다. 우리 사회 일각에선 북한 인권을 위해 목소리를 내는 이들을 '보수 꼴통'으로 깎아내리는 분위기도 여전하다. 현 상황에서는 신동혁씨가 한국에서 활동하지 않고 굳이 외국을 다니며 증언하는 이유에 공감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조선일보 이하원 정치부 차장
□ 04-19 북한 미사일 경비병의 폭로 “그 날 열병식에 나왔던 미사일 속엔…”
인터뷰 날짜 : 2013년 3월 16일
장소 : 북한개혁방송 사무실
증언자 : 류정훈 : 북한군 중거리 미사일 부대 근무
탈북일자 : 2011년 9월
입국일자 : 2011년 12월
1. 미사일 부대 조직 개편
2. 보유 장비 및 근무 성원 구성
3. 00미사일 부대 실제 훈련 횟수 및 준비 상태
4. 00미사일 부대 복무 환경 및 군인들 인식
5. 기타
나는 2002년부터 2010년까지 북한 미사일 부대 경비병으로 복무했다. 우리 부대는 2002년 5월부터 2005년까지는 평양 만경대 금천리 미사일 부대에 있다가 같은 해 4월 부대가 함경남도 양덕군으로 이동하면서 2010년 3월까지 근무했다. 맡은 업무는 미사일 이동식 발사대 경비로 제대할 때 계급은 중사였다. 경비병은 2시간 경비를 선 후에 4시간 휴식하고 또 2시간 경비서는 식으로 하루 3교대 8시간 근무를 섰다.
1. 미사일 부대 조직 개편
북한에서 미사일 부대가 만들어진 것은 80년대다. 내가 근무한 부대는 1999년에 조직되었다. 옛날 포병사령부 산하에 있던 부대를 130mm 자연포 부대를 모체로 해서 포병 지도국을 새로 개편한 것이었다. 포병지도국이라고 하면 한 개 군단급으로 그 아래로 각 여단들이 있다.
내가 근무한 미사일 부대 군단은 총참모부 직속 포병지도국 8훈련소였다, 훈련소가 사단 범위이고 그 아래로 분소들이 있는데 연대급이다. 훈련소는 8훈련소(강원도), 9훈련소(평안북도 정주군), 10훈련소(강원도)가 있었고 여단 위에 포병지도국 산하에 모두 위에 독립기지들이 있다. 여기 독립기지는 우리의 미사일보다 더 멀리가는 장거리 미사일이다.
원래는 10훈련소가 가장 높은 단계 훈련소였는데 2008년 4월 훈련소를 없애면서 지휘체계를 간단하게 만들었다. 과거에는 포 지도국이 있고 8, 9, 10훈련소에 각 분소들이 있었다면 지금은 훈련소를 없애고 바로 지도국에서 분소로 내려가게끔 만들었다. 그 과정에서 훈련소 인원을 각 분소로 통합시키고 분소를 여단으로 개편했다. 즉, 개편 후에는 가장 위에 포병지도국이 있고 바로 아래에 각 여단들이 있는 체계이다.
여단 밑으로는 5개 대대가 있는데, 1~3대대는 미사일 발사대를 갖고 있는 대대로 1개 대대에 미사일 3개씩 총 9개가 있다. 4대대는 연소 산화제 연료를 취급하고. 5대대는 경비대대이다.
1~3대대에 6개 중대가 있는데 1~3중대에 미사일 한 대씩 있다. 4중대는 미사일을 탑재할 때 필요한 기중기나 압축기 등을 보장하는 보장차량 중대이고, 5중대는 측지수(測地手)나 통신병, 청잘병 중대다. 6중대는 경비중대인데, 경비 대대가 외곽쪽으로 경비를 본다면 이들은 미사일 바로 옆에서 경비 보는 업무를 맡고 있다.
여단(과거 훈련소)마다 갖고 있는 탄두 모양과 미사일 이동식 발사대 종류가 다르다. 개편 전 기준으로 보면 바퀴 4개짜리 미사일 발사대는 8훈련소 것이고 바퀴 5개짜리는 9훈련소, 바퀴 6개 짜리는 10훈련소 것이다.
여단 마다 조금씩 차이가 있지만 한 개 골짜기에 여단 전체가 들어가 있는 곳도 있고 어떤 여단은 산 하나를 둘로 놓고 빙 둘러 위치해 있는 것도 있다. 바퀴 6개 짜리 여단(과거 10훈련소)은 허천, 양덕, 신흥에 각각 1개씩 있다. 9훈련소나 8훈련소도 분소를 3개 갖고 있었기 때문에 조직 개편 이후에도 마찬가지로 3개의 여단이 있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렇게 총 9개의 여단이 있고 독립여단이 또 있는 것이다.
1개 여단이라고 해봐야 연대급 밖에 되지 않는다. 한 개 대대에 450명 정도니까 1개 여단에 약 2,000~3,000명 정도 된다. 일반 보병보다는 인원이 적다. 화력중대의 경우 인원이 30~35명 밖에 되지 않는다.
2. 보유 장비 및 근무 성원 구성
우리 부대가 평양 만경대 금천리에 있을 때는 미사일 갱도가 있었기 때문에 그 안에 직선으로 미사일이 넣어 놓았다. 산이 하나 있다면 이쪽에서 뚫은 갱도가 산 반대편을 관통하도록 해서, 나뭇가지처럼 방사형으로 갱도를 뚫어놓았다. 원래는 평양 만경대 금천리가 미사일 본 기지는 아니다. 금천리는 과거에 미사일 기지인 8훈련소가 있을 때 발사대 기지였던 곳인데, 8훈련소가 강원도로 옮겨가니까 그냥 그곳에 실어다 놓은 것이다.
금천리 갱도 직선거리는 약 1km 정도 될 것이다. 이곳에 미사일 17대를 주차하듯이 촘촘히 깔아놓고 보장차량들을 놓아두었다. 당시 보유하고 있던 보장차량은 기중기차(러시아제 ‘마즈’) 1대, 압축기 차량(러시아제 신형 ‘마즈’) 1대, 계산기차량(북한제 ‘태백산’) 1대, 발전기 차량(러시아제 ‘우랄’) 1대, 통신기 차량(‘태백산’ 혹은 러시아제) 1대였다.
미사일에 산화제나 연소제를 공급하는 산화제 차량이나 연소제 차량 모두 러시아제 ‘우랄’차였다. 발전기 차량도 러시아 ‘우랄’차였고 그 안에 발전기도 모두 러시아제였다. 압력을 보충해주는 압축기 차량은 러시아산 신형 ‘지르’였다. 그밖에 통신차량과 계상차량은 북한산으로 ‘태백산’ 자동차였다.
평양 만경대 금천리에 있을 때는 운반차량이 있었는데 양덕군으로 올 때 다른 곳으로 넘겨 준 것 같다. 운반차량은 탄두나 발사대 자체를 운반하는데 쓰이는 것으로 원래는 보유하고 있어야 한다. 운반 차량은 러시아산 벌목차량을 자강도 만포에서 개조해서 사용한다고 들었는데, 소모품이나 부품도 그곳에서 가지고 와 수리한다고 들었다.
탐지기 차량은 처음부터 내가 제대할때까지 없었다. 미사일 발사대 차량 안에 유도 조정실이 있는데 그 안에 자체 컴퓨터가 있어서 좌표 입력 후 200~300미터 떨어진 곳에서 원격 발사기 단추만 누르면 되기 때문이다.
미사일 발사대 부속품들 중에 외국 말로 표시된 것은 보지 못했다. 운전실 안에 있는 스위치도 ‘열림’ ‘닫김’ 이렇게 표시되어 있었는데, 외국 제품이 아니라기보다는 북한 병사들이 알아보기 쉽게 하려고 한글로 바꾼 것 같았다. 차량 안 유도칸 컴퓨터도 한글로 되어있다. 재미난 것은 그 당시 차량 안 컴퓨터 모니터(액정)를 잘 관리해야 한다고 했다. 그 모니터가 텔레비전 100대 가격이라며 동파 나지 않도록 철저히 관리하라는 지침이었다. 아무래도 부대 자체가 고산지대에 있기 때문에 겨울에는 동파사고가 일어날 수 있어서 그랬던 것 같다.
미사일 발사 명령이 떨어지면 산화제를 설치(주입)하고 탄두를 조립하고 좌표를 맞춰 발사 단추를 누르기까지 약 40분이 소요된다. 1개 발사대 차량에 복무하는 인원은 하전사 9명, 운전수 1명, 군관 2명이다. 군관들은 발사대장 1명과 유도 조종사 1명으로, 발사대장 자체가 소대장이고 발사 하전사들은 소대원들로 모두 일반 병사들이다. 발사대 대장은 일반 군관 졸업생으로 대위고, 유도조종사는 중위 또는 상위이다. 운전수는 소좌 또는 중좌로, 2006년 우대해 준다는 이유로 군관으로 바꾸었다.
미사일 발사대 정비는 일주일에 한 번씩 한다. 미사일 발사대에 운전석 뒤로 연료탱크가 있는데 일명 ‘510호 연료’(디젤유, 약 1톤)라고 항시적으로 채워 넣고 점검할 때 자로 재곤 했다. 발사대 정비는 하부부터 닦고 차량 시동 걸어보는 정도로 끝내며 정비시에 미사일 발사대를 세우는 것은 하지 않았다.
3. 00미사일 부대 실제 훈련 횟수 및 준비 상태
우리 부대가 2005년 함경남도 양덕군으로 이동했을 때 모든 갱도가 완성된 것이 아니었다. 갱도는 발사대 보관 갱도, 보장차량 갱도, 연료 보관 갱도 등 모두 다른데, 내가 제대하던 2008년에도 발사대 갱도와 차량 갱도만 완공된 상태였다.
처음 함경남도 양덕군으로 왔을 때, 연료나 탄두를 저장할 갱도가 없었기 때문에 우리 부대로는 연료나 탄두가 들어오지 않았다. 미사일은 항상 발사대에 장착이 되어있어 그 상태에서 산화제 차량이 산화제를 갖고 와서 주입구에 호스로 연결, 주입만 하면 된다. 산화제 차량의 경우 1개 대대에 1~2대씩은 있어야 하는데, 우리 부대에는 그것을 보관할 갱도가 없으니까 산화제나 연료, 탄두가 들어오지 못했고 그저 빈 껍데기만 발사대 이동 차량에 올려놓은 상태였다. 탄두가 있는지 없는지는 우리가 알 수 없었다. 때문에 실제적으로 우리 부대에서 2002년부터 2010년까지 미사일 갖고 훈련한 것이라곤 열병식에 2번 갖고 나간 것이 전부이다. 2005년과 2007년이었는데 2005년에는 무력시위에 나간다고 했으나 무엇 때문인지 총관통훈련(최종 리허설)만 하고 그냥 돌아왔다.
그 이후 2007년 무력시위 할 때 우리 부대가 미사일 발사대를 끌고 열병식에 나간 적이 있다. 당시 저녁 8시부터 이동해서 역에 도착한 후 화물열차 빵통(차량)에 옮기는데만 2시간이 걸렸다. 그때는 주민들을 일체 통제시키고 미사일 차량 위로 텐트를 쳐서 바퀴만 보이도록 해서 나갔다. 산화제나 탄두가 장착되어 있지 않은, 사용하지 못하는 미사일이지만 그래도 노출은 안 되게 한다고 그렇게 한 것이었다. 그렇게 열병식에 갔다가 돌아와서는 그냥 그대로 세워놓고 있는 것이다. 2005년과 2007년을 제외하고는 부대 밖으로 나가기는 고사하고 부대 안에서라도 움직인 적이 없다.
미사일 발사대를 세우는 것도 2007년에 한번 해보았다. 당시 훈련기간에 실전처럼 해본다고 시도했었는데, 지반이 약한 곳에 세워놓았더니 한쪽으로 뒤집어 져서 40도 정도 세우다가 바로 내렸다. 지금이야 갱도도 완성되고 기타 필요한 것들이 준비되어 있는지 모르겠지만, 그 때까지만 해도 사용 하려고 해도 사용할 수 없는 빈 껍데기 미사일이었던 것이다.
듣기로는 미사일 탄두를 조립하고 만드는 여단이 따로 있다고 한다. 어느 여단인지는 모르겠는데, 그 여단에 직속 분석소가 (1개 소대) 있어 전문적으로 취급한다는 것이었다. 내가 듣기로는 미사일을 발사하려면 1분당 산화제가 60kg이 필요하다고 한다. 산화제 1kg이 60달러만 하더라도 굉장히 고가에 속한다. 그런데 그 미사일에 일반 폭약을 넣어가지고 터뜨려봤자 축구장 하나만큼도 파괴하지 못 한다. 즉 엄청난 연료를 들이부었는데 겨우 축구장 하나 폭파할 정도라면 수지타산이 맞지 않는다. 때문에 일반 폭약이 아니라 핵탄이나 수소탄을 장착하는데 사용하려는 것이라는 말이 있었다. 미사일에 핵탄두를 장착하면 핵탄이 되는 것이고 수소탄을 장착하면 수소폭탄, 화학무기를 장착하면 화학탄이 되는 것인데 어찌됐든 우리 부대에는 탄두를 보관할 갱도가 완성되지 않았기 때문에 포탄 자체가 없었다.
내가 근무한 부대에서는 8년 동안 미사일 발사 연습이나 가동이 없었지만 2006년에 함경남도 허천군 쪽 부대에서 시험사격으로 한번 발사를 했다고 들은 적이 있다. 또 같은 해 강원도 철산반도 쪽으로 우리 부대 대대장급들이 미사일 시험 사격하는 곳에 간 일이 있었다. 철산반도 쪽이라면 8훈련소(바퀴 4개 짜리)쪽이다. 그리고 핵실험을 할 경우에도 미사일과 관련이 있기 때문에 미사일 부대 대대장급 이상이 동원된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동계훈련이든 하계훈련이든 사실상 일반 군인들이 나가서 훈련한 것이 없고 기술병정 조차도 이론상, 모형을 갖고 한 것이지 실전 대비 연습은 한 것이 없었다. 갱도 자체가 완성되지 않았기 때문에 군사복무 기간동안에 미사일 발사대도 대대마다 정비장에 세워놓고 위장막을 쳐놓는 정도였다. 레이더에 잡히지 않게 하려고 가려놓은 것인데 재질은 잘 모르겠지만 북한 방수옷과 비슷했다.
갱도 공사는 우리 부대가 하는 것이 아니라 리원에 있는 삼호건설사업소에서 진행했는데 2010년 내가 제대하기 바로 전에 발사대 갱도와 차량갱도만 완공되어 그나마 발사대와 차량을 갱도 안으로 넣을 수 있었다.
양덕군 부대 갱도는 직선거리가 약 11km 정도로 양 옆에 산이 있고 골짜기가 있고, 한 쪽에서 갱도를 뚫기 시작하면 반대편 산까지 뚫었다. 미사일 차량이 골짜기로 들어갈 때는 그 일대 군 시민들을 동원해서 길을 미리 닦아 놓도록 시킨다. 미사일이 가는 도로 말고도 위장도로가 있는데, 갱도 입구까지도 위장도로를 만들어 놓았다. 미사일 차량 바퀴가 크기 때문에 일반 돌은 타고 넘을 수 있다. 때문에 그렇게까지 매끈하게 닦아 놓는 것이 아니라 큰 돌만 뽑아 놓도록 시킨 것이다.
그런데 2011년에 즈음에 모든 갱도 공사가 완공된 것이 아닌가 싶다. 왜냐하면 그 즈음 군관들이나 군인들이 일체 밖으로 나오는 일이 없었다. 나는 2010년 6월에 제대하고 8월까지도 부대 사람들을 만날 수가 있었다. 내가 부대 있을 때 직속 상관이었던 소대장이 군관학교 졸업 후에 허천에서 보위지도원을 했다. 가끔 그가 다른 군관 참모들과 출장을 홍원에 출장을 왔다가 2~3일 머물다 가기도 했는데 내가 탈북하기 전까지 부대 안으로 포탄이 들어왔다거나 하는 이야기를 듣지 못했다.
그러다가 2010년 3월에 부대 근처에 갈 일이 있어서 복무 중에 자주 갔던 집에 들렀는데 그 즈음 군인들의 바깥출입이 통제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내가 군에 있을 때만 해도 마을 앞에 부대 사람들이 몇몇 오고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런데 몇 달 전부터 군인의 바깥출입이 없다는 것이었다. 2008년 4월 훈련소가 여단으로 개편되면서 단속을 강화하기 시작한 것이 아니면 미사일 포탄이나 연료가 들어와서 기강잡기에 들어간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4. 00미사일 부대 복무 환경 및 군인들 인식
훈련은 동계훈련, 하계훈련을 진행한다. 동계훈련은 12월 1일부터 시작하는데, 한 달 동안 그냥 일반 보병훈련을 진행한다. 그리고 1월부터 여름까지는 전문병 훈련을 하는데, 발사대 근무성원은 발사대 훈련만 하고 통신병은 통신훈련만 하는 식이다. 여름훈련을 하기는 하지만 날씨가 덥다 보니까 이론 훈련만 하고 군관들(대대장 이상 급들만 진행) 경우에는 삼중지휘 훈련을 한다. 삼중지휘훈련이란 각 지휘 명령체계에 따라서 일사불란하게 빨리 제 위치 역할을 하는지를 훈련하는 것이다. 그 밖에 다른 지역 부대와 합동 연습은 없었다.
미사일 부대 병사들 대우는 일반 병사들과 비교해 보면 일류에 속한다고 말할 수 있다. 식량의 경우 미사일 부대 병사들이 직접 가을에 농촌에 나가서 1년 동안 먹을 벼를 받아 양덕군 양정사업소에 부대 것만 따로 보관했다. 거기서 정리해서 부대로 가져왔는데 하루에 800g(백미:잡곡=8:2) 외에도 버터 30g, 초콜렛 50g, 계란 1개, 물엿 모두 공급되었다. 사탕이나 과자는 공급되는 것이 없었는데 수산물 등 받을 수 있는 것은 모두 받아왔다. 간혹 스트레스나 기타 이유로 허약한 군인도 있었지만 영양실조에 걸린 군인은 없었다.
피복도 내가 군에 있을 동안 한 번도 거르지 않고 제대로 공급되었다. 겨울 피복은 2년에 한번, 여름 피복은 1년에 한 번씩 제공되었고 여름 신발은 1년에 2켤레, 겨울 신발은 해마다 1개씩 공급되었다.
미사일 부대 군복무 기간 동안 일반 휴가, 표창휴가가 있긴 하지만 그것으로 나가는 경우는 거의 없고 자재 구입명목으로 나가는 경우가 많다. 자재를 구하겠다며 집에 나갈 수도 있고 콩농사 지으러 밖에 나갔다 올수도 있다. 배급이나 기타 공급되는 것을 보면 솔직히 훈련 한번 제대로 하지 않고 굉장한 대우를 받고 나온 셈이다.
사실 미사일과 관련해 복무성원들끼리 의견을 말하거나 하는 일이 없다. 미사일 발사 복무 인원들 자체가 별로 하는 일이 없다. 8년 동안 군대에서 하는 일이라는 것이 자기 번수 동작 딱 하나이기 때문에 미사일 기술이나 성능에 대한 자랑이나 평가할 것이 없는 것이다.
학습강연 할 때 보면 미사일 사거리가 5000km라며 이야기도 하지만, 제대로 시험 발사한 적도 없기 때문에 아는 것이 없다. 또한 소문도 굉장히 단속하는 편이다. 미사일 부대 특성상 비밀 엄수를 철저히 시키기 때문에 서로 자기 전문 분야가 아닌 것에 대해 물어보면 의심받을 수 있다. 또한 기술병들과 같은 골짜기에 있었다고는 하지만 다른 대대에 가는 것조차도 통제하기 때문에 서로 말을 섞거나 미사일 제원이 어떻거나 하는 이야기는 할 수 없었다. 만약 자기 부대 구역을 벗어나 다른 부대 구역에 들어가면 대대 보위부에서 잡아다가 넘겨주는 분위기다.
5. 기타
2007년에 양덕에 수해 피해가 굉장히 심했다. 병실이 모두 유실되고 발사대도 잠겼는데 쉬쉬하는 분위기였다. 그 밖에 우리 부대가 57판정(오중흡7연대)을 받으려고 2006년부터 준비를 해왔다. 출신성분 좋은 아이들로 해서 한 개 중대를 꾸려서 병실도 시범적으로 하나만 꾸려놓고 ‘김정일 접견 중대’(김정일이 현지 시찰을 하는 중대)도 만드는 등 준비를 했었다. 2008년 2월에 57판정은 받았는데 결국 김정일은 오지 않았다.
동아일보
□ 05-08 한국 온 지 석 달 만에 10cm 자란 꽃제비 진혁이
북한의 꽃제비 출신인 김진혁 군(8)은 영하 20도를 밑도는 살인적인 추위 속에서 노숙과 구걸을 하면서도 해맑은 웃음을 잃지 않았다. 진혁이는 구걸하다 얻어맞아 머리 한가운데에 동전만 한 흉터 2개가 있다. 그의 처절한 탈북 과정은 올해 초 채널A를 통해 세상에 알려졌다. 일본에도 소개돼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한국에 가면 고기와 오이를 먹고 싶다던 진혁이는 1월 입국해 한국 생활에 적응하고 있다.
한국에 온 지 3개월여가 지난 진혁이에게 놀라운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여전히 또래 아이들보다 작지만 키가 10cm 이상 자라서 105cm가 됐다. 생계를 위해 가족을 버린 어머니, 스스로 목숨을 끊은 아버지에 대한 아픈 기억을 훌훌 떨쳐버린 듯 밝고 명랑한 어린이로 커나가고 있다. 어제는 한국에 와서 처음 맞는 행복한 어린이날이었다.
한 연구 결과에 따르면 만 11세 남아의 경우 남한 어린이는 키 144cm, 몸무게 39kg인 데 비해 북한 어린이는 125cm, 23kg이라고 한다. 키는 19cm 작고 몸무게는 16kg 적다. 세계식량계획(WFP) 조사로는 5세 미만 북한 영유아의 27.9%인 47만여 명이 발육 부진이다. 이대로 가면 같은 민족이지만 인종이 달라질 수도 있다는 과장된 분석도 나온다.
남한에 내려와 몰라보게 달라진 진혁이의 모습은 통일 한국의 미래인 북한 어린이들을 이대로 방치해서는 안 된다는 엄중한 메시지를 던지고 있다. 진혁이는 그나마 북한의 국경 지대에 살아 탈북이라도 했지만 대부분의 북한 어린이들은 철저하게 닫혀진 체제 속에서 굶기를 밥 먹듯 하고 있다. 주민 세 명 중 한 명이 제대로 먹고 입지 못하고 있는 것이 북한이 내세우는 ‘김일성 민족’의 현실이다. 그런데도 북한은 핵과 미사일 개발에 수억 달러씩 물 쓰듯 쓰고, 김정은의 식품 창고에는 수백만 원짜리 와인과 상어지느러미, 철갑상어 알 같은 산해진미가 쌓여 있다.
박근혜정부는 대통령선거 공약인 ‘한반도 신뢰 프로세스’를 가동하기 위해 정치적 상황과 관계없이 북한 영유아에 대한 지원에 나서겠다는 뜻을 밝혔다. 일각에서는 북한이 변하지 않는 한 그런 지원조차 하지 말아야 한다는 의견도 나온다. 그러나 통일이 되면 북한의 아이들도 모두 대한민국의 국민이 될 것이다. 어떻게든 북한을 설득해 구호의 손길을 내밀어야 한다.
동아일보
□ 05-30 <상>사선을 넘는 아이들
《 북한을 탈출한 15∼23세 꽃제비 9명이 라오스에서 중국으로 추방됐다가 곧바로 강제 북송된 비극적 사건이 발생했다. 대부분 부모 없는 고아인 것으로 알려진 이들은 왜 사선(死線)을 넘나드는 모험을 감행했던 것일까. 이들은 라오스 이민국의 조사 과정에서 “북한에서 배고파 죽느니, 죽을 각오로 한국에 가려고 한다”고 말한 것으로 전해졌다. 동아일보는 북한의 대표적 취약계층인 어린이 및 영유아, 임산부 등의 참담한 현실을 진단하는 상하 시리즈를 마련했다. 동아미디어그룹의 연중기획 ‘준비해야 하나 된다-통일코리아 프로젝트’ 7대 다짐 중 하나인 ‘북한 어린이는 통일코리아의 미래다’를 실천하려는 의지도 담았다. 이 시리즈는 한국언론진흥재단이 후원한다. 》
2012년 북한 양강도 혜산시의 장마당. 13세 유진이(가명)는 하루 종일 쭈그리고 앉아 콩나물을 팔았다. 2006년 돈을 벌어오겠다며 나간 엄마의 소식이 끊긴 후 학교를 더 다닐 수 없었다. 거동이 불편한 이모의 집에 얹혀살면서 생계를 해결해야 했다. 늘 배가 고팠다. 하루 세 끼를 먹은 날이 기억에 없다. 한두 끼도 불린 국수나 강냉이밥으로 때운 적이 많다. 아예 끼니를 거르는 날도 적지 않았다. 사흘을 내리 굶어 힘없이 누워만 있었던 적도 있다. 팔고 있던 생콩나물을 씹어보기도 했다. 장마당에서 파는 ‘인조고기밥’은 그저 쳐다만 봤다. 콩을 고기처럼 갈아 넣고 만든 인조고기밥은 유진이가 제일 좋아하는 음식이다.
유진이는 지난해 말 두만강을 건너 탈북했다. 먼저 탈북해 한국에 정착한 엄마가 8번째 시도 만에 탈북 브로커를 통해 딸을 북한에서 빼내는 데 성공한 것이다. 유진이는 먹고 싶은 음식을 묻는 엄마에게 제일 먼저 “인조고기밥이 먹고 싶다”고 했다.
○ 김정은보다 무서운 굶주림
북한의 식량 사정은 2012년 김정은 체제의 본격 출범 이후 나빠지는 추세다. 유엔식량농업기구(FAO)는 지난해 북한의 식량부족량을 약 50만 t으로 예상했으나 올해 2월 이를 65만7000t으로 늘려 잡았다. 만성적인 식량난이 계속될 경우 280만 명의 주민이 끼니를 거르는 식량부족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라는 전망이다. 5월 초 유엔 세계식량계획(WFP)이 발표한 대북사업 평가보고서도 올해 1분기(1∼3월) 조사대상 북한 가정(87개)의 80%가 영양부족 상태를 겪고 있다는 결과를 내놨다.
북한의 영유아를 비롯한 취약계층은 이런 식량부족 문제에 그대로 노출돼 있다. 올해 3월 유엔아동기금(UNICEF)과 WFP 등이 공동 발표한 북한식량보고서에 따르면 조사대상인 북한 어린이의 27.9%인 47만5868명이 만성화된 영양결핍 문제를 겪고 있다. 이 중 8.4%는 심각한 상태였다.
엄마와 함께 탈북한 후 대안학교 ‘물망초학교’에 다니는 5세 박재원(가명) 군은 입학 초기 배가 아프다며 데굴데굴 굴러서 교사들을 당황하게 했다. 허기진 생활에 익숙해 있던 박 군이 갑자기 많은 양의 음식을 먹은 뒤 장에 탈이 난 것. 이 학교를 운영하는 박선영 물망초재단 이사장은 “아이들의 장 기능이 크게 떨어져 있어 소화 문제가 자주 생기고 병원에서 관장을 해야 하는 경우도 많다”고 전했다.
북한 어린이들은 굶주림으로 고통받는 동시에 영양부족으로 인한 각종 질병에도 시달린다. 북한에서 꽃제비 생활을 하다 지난해 말 탈북한 8세 김진혁 군의 경우 최근 건강검진에서 결핵 판정을 받았다. 과거 장마당에서 음식찌꺼기를 주워 먹으며 험한 생활을 한 것도 영향을 미쳤다는 분석이 있다.
○ 이대로 가면 ‘같은 민족, 다른 인종’의 비극 온다
영양이 부족해 성장하지 못하는 북한 어린이들의 몸집은 점점 작아지고 있다. 예를 들어 유진이(13)의 체구는 남한 어린이 9, 10세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또래 평균(156cm)보다 키가 무려 30cm가량 작다.
서울대 생활과학연구소의 2011년 발표 자료에 따르면 남한의 만 11세 남자 어린이 평균 키는 144cm, 몸무게는 39kg인 반면 북한 어린이는 125cm, 23kg에 머물렀다. 남북의 키 차이가 19cm, 몸무게 차이는 16kg에 이른다.
서울대 윤지현 교수는 “단백질이나 탄수화물 같은 5대 기본 영양소나 비타민과 철분 요오드 같은 미량원소가 부족하면 아이들의 성장 발달은 물론이고 인지발달과 학습 능력에도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다”고 설명했다.
남북한 어린이의 영양상태 및 이에 따른 발달 격차가 장기화되면 사실상 인종이 바뀐다고 느낄 만큼 심각한 편차가 생길 것이라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후생유전학(epigenetics)’ 혹은 ‘후성유전학’의 관점에서 이를 설명할 수 있다.
아주대병원 의학유전학과 정선용 교수는 “(분단 이후) 60여 년밖에 안 흘렀기 때문에 남북 간에 유전적인 변화가 일어났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러나 영양상태의 차이에 따라 어떤 유전자는 발현이 더 잘되고 안 되고 하는 차이가 있을 수 있다”고 말했다.
이정은 기자 lightee@donga.com
▲간절한 눈빛 북한 평안남도 순천시 교외의 한 장마당에서 구걸하는 꽃제비. 제대로 씻지도 못한 채 오랫동안 노숙생활을 한 것으로 보이는 어린 꽃제비의 얼굴에 때가 가득하다. 이 아이의 간절한 눈빛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아시아프레스 김동철 씨 제공
□ 06.01 탈북자 막으려 血眼인 김정은
필자가 평양에 있던 1980년대 말 '인민문화궁전'에선 월북한 남한 주민이나 군인들의 기자회견이 해마다 한두 번 있었다. 당시 북한 주민은 TV에 나오는 남한 사람들의 말에서 다른 의미를 찾았다. '남조선에서 일자리 찾기는 하늘의 별 따기'라는 말에 "그곳은 개인 의사에 따라 직업을 구할 수 있나 보다" 푸념을 했고, '서울에선 매일 노동자·농민이 정부 반대 시위를 한다'는 말에 "만약 공화국에서 노동당을 비판하는 시위가 있다면 어떻게 될까" 수군거렸다. 그 부작용으로 1990년대 들어 월북자들의 TV 출연이 서서히 사라졌다.
최근 북한 방송에 새로운 선전용 기자회견이 등장했다. 이번에는 남한에 살던 탈북자들이 귀향해 평양에서 한국 사회를 비난하고 있다. 작년 6월 박인숙씨와 11월 김광혁·고정남 부부를 시작으로 얼마 전 리혁철 외 여성 2명의 좌담회까지 이어지고 있다.
그들은 TV에 나와 "생활고를 해결하러 잠시 중국에 갔는데 거기서 한국 정보기관의 회유로 남한에 강제로 끌려갔다"고 입을 모은다. "탈북자를 사람 취급하지 않는 남조선 사회에 환멸을 느껴 귀향을 결심"했고, 김정은이 "과거를 묻지 않고 넓은 아량을 베풀어준 점"에 감사하다는 말도 빠지지 않는다. 이런 거짓말을 통해 주민의 탈북을 막아보려는 것이다.
북으로 돌아간 탈북자들의 과거 남한 생활을 보면 공통점이 있다. 다단계 판매에 빠져 돈을 날렸거나 흥청망청 빌려 쓴 은행 빚이 있거나 일하기 싫어 남을 사기 친 경우 등이다. 이런 사람들일수록 북에 남은 가족을 볼모로 하는 북한 보위부의 협박에 쉽게 굴복한다.
탈북자 중 남한 정부가 오라고 해서 온 사람은 단 한 명도 없다. 모두 자기 의지로 새 삶을 찾아 목숨 걸고 이 땅에 왔다. 동포라고 품어주는 남한이 없었다면 지금쯤 이들은 낯선 이국에서 유랑 걸식으로 연명할 것이다. 언제 닥칠지 모를 체포의 불안감에 떨며 사막과 정글을 떠돌고 있을 것이다.
대한민국 주민등록증을 받던 그날 감격했던 우리다. 수령을 비판하면 총살되고 제 나라 제 땅도 정부 허락을 받아야 다닐 수 있는 북한에서 보낸 짐승 같았던 삶이 싫어 한 해 평균 북한 주민 1000여명이 남한으로 내려온다. 탈북자들은 한국에 아무리 일자리가 없어도 굶어 죽는 사람이 없음을 목격했다. 대통령을 비판해도 되고, 국내는 물론 세계 어디든 살고 싶은 곳에서 살 수 있음을 피부로 느꼈다.
김정은 정권은 탈북을 막는 데 혈안이 돼 있다. 그래서 남한에 정착한 탈북자들을 데려가 선전도구로 삼았고, 이번에는 어린 나이에 목숨 걸고 탈북을 감행한 청소년들을 비행기에 태워 다시 북으로 끌고 갔다. 그런다고 탈북 행렬이 멈출까.
김정은은 탈북자가 왜 생겼는지 고민해야 한다. 인민들이 쌀밥에 고깃국은 아니라도 잡곡밥에 시래깃국이나마 먹을 수 있고 온 가족이 따뜻한 집에서 발 뻗고 잘 수 있다면 누가 목숨을 담보로 탈북을 하겠는가.
주민의 탈북을 막으려면 김정은은 아버지 흉내 내며 군부대 방문하고 문화 공연 관람이나 다닐 게 아니라 기계가 멈춘 공장을 찾고 흉년이 든 농장을 찾아 대책을 세워야 한다. 실패한 할아버지·아버지의 정책을 따르지 말고 과감한 개혁으로 인민 생활 경제를 발전시켜야 한다. 한 발에 수억달러짜리 미사일 발사에 드는 돈으로 인민들의 식량부터 해결해야 한다.
조선일보
□ 06-07 朴대통령 지휘로 라오스 탈북자들 대사관 이송작전
“머무는 安家도 위험” 4일 18명 옮겨
박근혜 대통령의 지휘로 4일 라오스에 있는 탈북자 18명을 주라오스 한국대사관저로 이송하는 작전이 펼쳐진 것으로 알려졌다.
외교 및 대북 소식통은 6일 “박 대통령이 라오스 수도 비엔티안에 있는 안가(安家·한국 정부가 탈북자들을 보호하는 은신처)에 머물던 탈북자 18명을 모두 대사관저로 이동시키도록 지시했다”고 전했다. 그러면서 “박 대통령이 청와대 내 지하 벙커인 국가안보실 예하 위기관리상황실에서 자리를 지키며 이송 상황을 지휘했다”고 덧붙였다. 박 대통령은 18명 중 마지막 1명이 대사관저에 안전하게 도착하는 걸 확인할 때까지 위기관리상황실을 떠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박 대통령과 함께 외교안보 주요 당국자들이 벙커를 지켰으며 첩보작전을 방불케 했다는 후문이다.
주라오스 한국대사관과 정부 관계자들이 안가에 머물던 탈북자들을 대사관저로 인솔했으며, 18명을 한꺼번에 옮기지 않고 소규모 그룹으로 나눠 이동시키느라 이송 시간이 하루 종일 걸렸다고 이 소식통은 전했다. 한국 정부가 이송 작전의 보안을 유지하려 한 것으로 보인다.
대통령이 지하 벙커를 떠나지 않고 탈북자들의 이송을 직접 확인하며 지휘한 건 이례적인 일이다. 박 대통령은 탈북 청소년 9명이 라오스에서 강제추방돼 북한 당국에 의해 평양으로 압송되는 사태가 일어나자 당시 정부의 대응에 문제가 없었는지 점검하면서 외교안보 당국자들에게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선 안 된다”고 강조한 것으로 알려졌다.
박 대통령은 라오스를 비롯해 동남아시아 국가들에 머물고 있는 탈북자들의 상황을 보고받는 과정에서 라오스의 안가에 18명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고 한다. 그러면서 “현재 라오스의 상황을 고려할 때 안가도 안전하지 않다”며 “탈북자들을 대사관저로 이동시킬 것”을 직접 지시한 것으로 알려졌다.
▼ 朴대통령, 18명 이송 끝날때까지 靑벙커 지켜 ▼
안가에 있는 탈북자들을 모두 대사관저로 옮긴 것도 이례적이다. 통상 탈북자들은 안가에 머물다 한국으로 향하며 대사관저로 옮기는 경우는 환자나 아기인 경우에 한정된다고 한다.
이처럼 박 대통령이 직접 나선 데는 비슷한 사태가 재발될 수 있다는 위기의식이 반영된 것으로 알려졌다. 박 대통령은 3일 “라오스에서 탈북 청소년 9명이 강제로 북송된, 정말 안타깝고 일어나서는 안 될 일이 일어났다”고 강조했다. 라오스 정부는 “10대 미성년자의 정치적 망명을 인정할 수 없다”면서 “인신매매에 대응한 것”이라는 주장을 되풀이하고 있다. 이렇듯 라오스 당국이 탈북자의 한국행에 비협조적인 상황에서 또다시 탈북자들이 라오스 당국에 체포되는 최악의 상황이 일어날 수 있다고 판단한 것으로 풀이된다. 라오스를 경유하는 탈북 루트가 막히지 않도록 라오스 당국에 외교적 노력을 벌이는 것과 별도로 탈북자도 한국 국민인 만큼 국민의 신변안전을 최우선으로 생각하는 박 대통령의 인식이 작용한 결과로도 볼 수 있다.
주라오스 대사관은 라오스 당국과의 비공식 신사협정에 따라 중국을 거쳐 라오스로 들어간 탈북자들을 안가에서 보호하고 있다. 탈북자들이 라오스 등을 거쳐 한국으로 탈출하기 시작한 초기에는 주라오스 한국대사관 내에 탈북자들이 한국행 때까지 머물 공간을 마련했으나 탈북자가 늘어나면서 이 공간만으로 수용이 어려워지자 별도의 안가를 마련한 것이다.
윤완준 기자 zeitung@donga.com
□ 07.13 평양서 재입북 기자회견 한 탈북여성 또 탈북하다… (1)
지난 1월 24일 북한 조선중앙TV에 출연해 “남조선으로 끌려갔다가 공화국으로 돌아왔다”며 기자회견을 했던 4명의 탈북자 중 1명인 고경희(39세)씨가 며칠전 재탈북을 감행하던 중 두만강에서 체포됐다고 복수의 소식통이 전했다.
이들 소식통에 의하면 며칠전 량강도 혜산시 두만강에서는 한 탈북여성이 도강을 시도하다가 북한 경비대와 보위부의 합동작전에 걸려들어 체포됐으며, 이 여성은 고경희 씨인 것으로 밝혀졌다.
고씨는 앞서 조선중앙TV 기자회견에서 “남조선 괴뢰들에게 끌려갔으나 공화국의 품으로 자진 입북했다. 조국 앞에 지은 죄를 씻겠다”고 밝힌 인물이다. 북한 당국도 고씨를 혜산광산에 배치하고 새 집도 배정했다며 체제전선에 이용했었다.
하지만 탈북자들의 증언에 의하면 고씨는 자진 입북한 것이 아니라 북한에 남겨둔 아들과 딸을 데려오기 위해 중국으로 갔다가 북한에 포섭된 여성 브로커에 의해 북한으로 끌려간 것이었다.
당초 고씨는 북한 당국의 조사를 받는 과정에서 속내를 감추고 전향적인 자세를 보이면서 자신에게 배정된 집을 영예군인에게 돌리겠다는 이유로 사양했으며, 이는 충성심 때문이 아니라 재탈북을 위해서였다.
자신에게 주어진 시내의 주택을 영예군인에게 돌리고 중국과 인접한 국경 강변에 있는 자신의 집에서 거주할 경우 재탈북에 유리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고씨의 이러한 행동은 북한 당국의 의심을 샀고 강변에서 1차례 탈북을 시도하다가 적발되어 집중감시대상이 되고 말았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탈북 시도를 중단하지 않은 채 이번에 과감하게 강을 건너다 북한 국경경비대와 보위부 합동작전에 체포되었다고 소식통은 설명했다.
소식통은 고씨가 일정 기간 충성심을 발휘하면서 감시망이 느슨해진 뒤에 탈북했어야 했는데 너무 조급하게 탈북하려고 시도하다 체포됐다고 지적했다. 또 “더는 못살겠으니까겁 없이 도강하다가 잡혔다”는 것이 주변에 흐르는 소문이라고 덧붙였다.
고경희 씨는 서글서글한 성격에 개방적 성품을 가진 여성인 것으로 알려졌다. 탈북자들에 의하면 그는 2011년 3월 탈북해 한국에 입국한 후 하나원을 나오자 곧바로 경기도 화성에 있는 전자부품 회사에 취직해 누구나 인정할 정도로 열심히 일했다고 한다.
그러나 슬하의 아들과 딸 남매를 북한의 오빠 부부에게 맡겼던 그는 오빠가 이를 빌미로 과도하게 돈을 요구하자 자식들을 데려오려고 중국으로 들어갔다가 브로커의 유인에 걸려들어 결국 변을 당하고 말았다.
고경희 씨가 재탈북을 시도하다 붙잡혔다는 소식을 접한 탈북자들은 “이제는 진짜로 죽게됐다”며 우려를 나타냈다.
고씨와 하나원을 같이 졸업했다는 안 모(女)씨는 “참으로 좋은 사람이고 성실했는데… 정말 불쌍하다”며 눈물을 감추지 못했다. 북한민주화위원회 서재평 사무국장은 아직 고씨의 집과 통장이 국내에 그대로 있다며 고씨의 인권보호를 위해 정부가 나서야한다고 강조했다.
북한개혁방송 최진규 기자
□ 07-17 北 공작에 희생되는 탈북자, 한국 책임도 크다
가족과 함께 중국으로 탈출한 탈북 여성 A 씨는 “서울로 보내주겠다”는 탈북자 공작원 채모 씨에게 속아 북한으로 끌려갔다. A 씨의 남편은 정치범수용소에서 처형됐고 생후 7개월 된 아들은 어딘가에 입양되어 소재를 알 수 없는 상태다. 6년 징역형을 살고 출소한 A 씨는 올해 3월 다시 탈북해 한국에 오자마자 수사기관에 채 씨의 악행을 알렸다.
A 씨의 고발로 구속된 채 씨는 중국에서 탈북자 색출활동을 하면서 따로 돈벌이를 하다가 2003년 전력(前歷)을 숨기고 한국에 왔다. 그는 북한에 남아있던 가족을 데려오기 위해 함경북도 보위부 간부와 접촉하다 포섭돼 다시 탈북자 납치 공작에 나섰다. 채 씨가 중국에서 벌인 공작으로 A 씨 남편과 탈북 군인 2명이 북한으로 압송돼 처형당했다. 채 씨는 납치 범행이 중국 공안에 적발돼 한국으로 추방됐다. 한국 정부가 채 씨의 정체를 조기에 간파했더라면 억울한 죽음을 막을 수 있었다.
재입북한 이후 탈북하다 중국 공안에 체포된 김광호 씨 가족은 또 다른 유형에 속한다. 김 씨는 한국에서 정착해 살다가 가족을 구출하기 위해 재입북했다. 열린북한방송은 김 씨를 포함해 올해 1월 북한에서 재입북 기자회견을 했던 탈북자 4명이 모두 재탈출을 시도했다고 전했다. 요즘 탈북자들이 북한의 가족에게 전화를 걸면 “벌어놓은 돈이 있으면 가지고 돌아오라”는 권유를 받는다고 한다. 김정은 집권 이후 북한이 얼마나 집요하게 재입북 공작을 벌이고 있는지 알 수 있다.
자포자기식 재입북 시도도 늘고 있다. 광주에서 국내 정착에 실패한 20대 탈북자가 재입북을 시도하다가 적발됐다. 배급 경제에 익숙한 탈북자들이 한국 사회의 치열한 생존경쟁에 적응하기는 쉽지 않다. 최선의 정착 지원은 탈북자에게 일자리를 제공하는 것이다. 탈북자 지원은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에 적응하도록 만드는 일로 ‘작은 통일’이라고 불린다. 탈북자들은 통일 이후의 시대에 대비하는 귀중한 자산이다. 정부는 탈북자 보호와 정착에 무거운 책임감을 느껴야 한다.
동아일보
□ 08-17 내가 본 北권부 속살 가감없이 전달
“사실 우리는 밥을 못 먹어서 탈북한 건 아니지 않습니까. 민족을 위해 한 가지라도 일을 해야 통일이 됐을 때 할 말이 있을 것 같았습니다. 북한 실상을 제대로 전달하는 것이 통일준비의 지름길이라고 생각했어요.”
탈북자 장해성 씨(67·사진)는 요즘 너무 바쁘다. 장 씨는 16일 기자에게 “6월에 장편소설 ‘두만강’(나남)을 펴낸 뒤로 더 바빠졌다. 1996년 한국에 온 이래 지난 17년간 지금처럼 바쁜 때가 있었나 싶을 정도”라고 말했다. 이틀에 한 번꼴로 TV에 출연해 호위총국(경호부대) 요원, 김일성종합대 학생, 북한 조선중앙TV 기자로 보았던 북한 권부의 속살을 가감 없이 전달하고 있다.
서울 한복판에서 한식당을 운영할 만큼 생활이 안정됐고 인생도 황혼기에 접어든 그가 북한 알리기에 열정을 더욱 내고 있는 이유가 궁금했다.
“한국에서 좌파 사람들과 얘기해 보면 현실이 아닌 환상 속의 북한을 생각하는 경우를 많이 봅니다. 북한 체제가 카를 마르크스가 지향했던 평등사회라고 생각하는 게 대표적입니다. 그게 아니라고 설명하면 ‘국정원에서 그러라는 지령을 받았느냐’라고 되묻더라고요. 허탈했습니다.”
그가 책을 쓰게 된 동기가 그 답답함이다. 북한을 추종하더라도 제대로 알고 추종하라고 하고 싶었다고 했다. 소설 ‘두만강’에 김일성이 6·25전쟁 때 자신을 도왔던 군부를 숙청하는 과정과 후계구도 구축, 분주소(파출소)와 교화소(교도소)를 활용한 공포정치가 잘 나타나 있는 이유다. 체제를 비판했다가 교화소로 끌려간 아버지와 남겨진 두 딸이 탈북 과정에서 겪는 고투(苦鬪)도 상세하게 묘사돼 있다. 김정일의 출생지가 백두산 밀영이 아닌 소련이라고 폭로했다가 반동으로 몰려 탈북하게 된 장 씨 본인의 경험이 고스란히 녹아 있다.
조숭호 기자 shcho@donga.com
□ 09-05 가정폭력에 무너진 탈북女 ‘코리안 드림
겨울이 되면 굶주림에 시달린 북한 주민들은 얼어붙은 두만강을 건너 중국으로 탈북을 시도한다. 김경자(가명·44·여) 씨도 그랬다. 2001년 초 김 씨는 목숨을 걸고 폭 48m의 얼어붙은 두만강을 건넜다. 탈출엔 성공했지만 북한군에 붙잡혀 돌아갈 것이 두려웠던 김 씨는 차 한 대를 얻어 탔다. 그 차에 인신매매단이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김정일 지옥을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에 한국행을 택했지만 김 씨는 또 다른 지옥에 떨어졌다. 그녀가 팔려 간 곳은 중국의 한 시골 마을. 나이 든 한족 남성과 강제로 혼인한 김 씨는 아들까지 낳고 약 7년 동안 반(半)감금 상태로 살았다. 2007년 둘째를 임신한 김 씨는 야반도주한 뒤 탈북 브로커를 통해 한국 땅을 밟았다. 화장품 외판원 생활을 하던 김 씨는 중국에서 한국으로 오는 과정에서 자신을 도와준 중국교포 이모 씨(38)를 초청해 이듬해 이 씨와 결혼했다. 자신이 한국에서 낳은 아들과 남편이 데려온 딸을 함께 키우며 행복한 미래를 꿈꿨다.
하지만 남편의 폭력 앞에 그녀의 ‘코리안 드림’은 산산조각 났다. 또다시 ‘생지옥’을 만난 것이다. 밤늦게 술 취해 집에 온 이 씨는 “오늘은 또 어떤 놈이랑 놀아났느냐”며 잠자고 있는 김 씨의 얼굴에 칼과 망치를 들이댔다. 중국교포라 결혼 생활을 유지해야만 혼인비자를 받을 수 있었던 이 씨는 아내가 ‘헤어지자’는 소리를 입 밖에도 못 내도록 때리며 겁을 줬다.
폭행과 스트레스로 뇌경색을 앓게 된 김 씨가 7월 아들을 데리고 집을 나가자 남편은 이불 가득 기름을 붓고, 유리창과 가전제품을 모조리 부쉈다. 피 묻은 손으로 흰 냉장고 문짝에 “이제 모두 끝이다. 죽여버리겠다. 또 오겠다”는 글을 남겼다.
관내 탈북자를 관리하던 마포경찰서 보안계 송지원 경위는 김 씨의 안색이 올해 유난히 안 좋아졌다는 것을 느꼈다. 송 경위는 그녀를 불러 가정 형편을 자세히 묻기 시작했다. 김 씨는 부끄러운 집안 이야기라 아무에게도 꺼내 놓지 않았던 고충을 송 경위에게 털어놓았다. 마포경찰서는 지난달 초 이 씨에 대해 사전구속영장을 신청했다. 도주한 이 씨는 자신이 수배 상태인 것을 알면서도 ‘내 마누라 어디 있느냐?’며 경찰서에 전화를 할 정도로 뻔뻔함을 보였다. 그는 결국 지난달 20일 구속 수감됐다.
가정폭력 사건에 대해 경찰이 구속영장을 신청한 것은 이례적인 일이다. 송 경위는 “남한 사정을 모르고, 도움을 구할 지인이 없는 탈북여성들은 ‘가정폭력’ 단속에서도 사각지대에 놓여 있는 편”이라고 말했다. 지난해 말 여성가족부가 탈북여성 140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가정폭력 등 신체폭력을 경험한 탈북 여성은 전체의 37%로 한국 여성 평균(15.3%)의 두 배가 넘는 것으로 나타났다. 성폭행 또는 성추행을 당한 여성도 44%나 됐다. 이런 피해들은 탈북 과정 또는 정착 이후 발생한 것들이다.
송 경위는 “탈북 과정에서 인신매매, 강제혼인 등을 겪고 가까스로 한국에 정착한 여성들을 폭력 가정에 방치하는 것은 그들을 두 번 죽이는 일”이라며 “가정 문제지만 공권력이 적극 개입해 남편을 격리하는 게 맞다고 판단했다”고 말했다. 현재 쉼터에서 생활하는 김 씨는 “사람답게 살고 싶어 탈출했지만 지난 12년은 지옥 같았다”면서 “언제 다시 찾아올지 모르는 남편 때문에 불안하기도 하지만, 이제부터라도 새 삶을 시작하고 싶다”고 밝혔다.
김수연 기자 sykim@donga.com
□ 10.10 탈북자 지원이야말로 북한 주민을 돕는 길
한반도 역사상 가장 심각한 아사 사태가 20년 넘게 북녘 땅에서 벌어져 왔다. 천재지변 때문이라고 변명할 수 없다. 3대 세습 독재라는 인재(人災)가 만들어낸 비극이다.
식량 배급에서 제외되는 적대 계층 주민들은 국경을 넘을 수밖에 없다. 그들 중 용기 있는 자들은 목숨을 건 고생 끝에 한국까지 온다. 그 숫자가 이미 2만5000명을 넘었다. 탈북자들은 한반도 통일 과정에서 많은 일을 할 것이다. 분단 68년간 남북 간 이질화를 해소하고 질서 있게 통일을 촉진해갈 첨병들이다.
지금도 한국 내 탈북자 한 사람이 북한에 남아 있는 20명의 가족을 먹여 살리고 있다. 남다른 가족애를 가진 탈북자들이 1가구당 500~5000달러를 연간 한두 번씩 북의 부모·형제에게 송금하고 있다. 이 돈은 중국 동포들의 중개로 거의 확실하게 전달된다고 한다. 햇볕정책 추진 당시 정부 차원의 대규모 지원이 북한군이나 간부층의 배를 불린 것과는 대조적이다.
탈북자들의 한국 정착은 쉽지 않다. 과거 정부는 '햇볕정책'을 펼치면서 북한을 자극하지 않기 위한 일련의 조치들을 채택했다. 북을 자극하지 않기 위해 '새터민'이라는 용어를 만들어냈고, 유엔인권위원회에서 북한인권결의안에 기권함으로써 국제사회의 웃음거리가 되기도 했다. 그 당시 탈북자가 하나원을 마치고 사회에 나오는 순간 손에 받게 되는 지원금도 종전의 절반으로 줄여버렸다. 이유는 탈북자들이 의타적이기 때문에, 자립적 근로 의욕을 북돋우기 위해 초기 정착금을 줄이고, 대신 노력해서 적응한 경우 상여금을 지급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다 보니 막상 그들이 하나원을 나올 때 중국 내 탈출을 도와준 '도우미'에 대한 수고료 200만~300만원을 주고 나면 손에 남는 현금은 달랑 200만~300만원에 지나지 않는다고 한다. 그 액수로 남한에 연고가 없는 탈북자들이 한국에 정착하기는 쉽지 않다.
당장 탈북자에 대한 지원금을 예전대로 원상회복해야 한다. 이를 통해 탈북자들의 조기 정착을 실질적으로 도와줘야 한다. 그런다고 모든 탈북자가 성공할 수는 없겠지만, 성공할 확률이 높아질 것은 틀림없다. 그것이 바로 탈북자 당사자와 북한에 있는 가족에 대한 가장 확실한 인도적 지원이다. 북한 당국을 자극할까 봐 신경 쓸 필요는 없다. 왜냐하면 그들은 주민을 먹여 살릴 기본적 의무마저 저버리고 있기 때문이다.
조선일보 김석우 21세기국가발전연구원장·前 통일원 차관
□ 11-27 간첩죄 복역 원정화 “北찬양은 통일 역행
“이해가 안 간다. 어떻게 나라를 대표하는 국회의원이 종북세력이 됐나. 북한은 고려시대 때나 다름없는데, 그걸 찬양할 일은 아닌데….”
2008년 간첩죄로 5년간 복역한 뒤 7월 출소한 원정화 씨(40·사진)가 채널A ‘박종진의 뉴스쇼 쾌도난마’ 프로그램에 출연했다. ‘첫 탈북위장 남파 간첩’인 원 씨는 현재 재판 중인 통합진보당 이석기 사건에 대해 “너무 놀랐다”고 말했다. 그는 “국민이 뽑은 국회의원은 국민을 잘 먹여 살려야 하는 것 아니냐”며 “어떻게 국회의원이 국민을 기만하고 뒤에서 작당을 했는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원 씨는 방송에서 북한에서 받았던 훈련에 대해서도 이야기했다. 그는 “월북한 군인들로부터 특수 훈련을 받았는데 어떤 성인 남성도 제압할 수 있도록 훈련 받았다”며 “한국군은 상대가 아니었고 미국군을 염두에 두고 교육을 받았다”고 말했다. 이어 “한국 내 미군기지의 수와 위치 등을 파악하려 했다”고 말했다. 그는 간첩 훈련 당시 ‘남한 말’을 배우는 것이 힘들었다고 회상하기도 했다. 원 씨는 함경북도 청진에서 태어나 15세의 나이로 김일성사회주의청년동맹에 발탁됐다.
이후 공작원 양성기관인 금성정치대학에서 교육받았다. 1998년부터 보위부 소속으로 중국에서 외화벌이와 정보활동을 시작했다. 탈북자 관련 사업을 하는 한국인, 일본인 100여 명을 납치 북송했으며 2001년 북한 국가안전보위부 소속으로 남파돼 간첩활동을 했다. 원 씨는 5년형을 선고 받고 항소를 포기했다. 그는 방송에서 “저로 인해 피해 입으신 가족 여러분 제가 어떻게 사과를 드려야 용서해주실 수 있을지…. 아픔과 고통을 드린 것에 대해 사과합니다”라고 말했다. 현재 원 씨는 출소 이후 혹시 모를 테러 가능성에 대비해 경찰과 검찰의 보호관찰을 받고 있다.
김성모 기자 mo@donga.com
■ 2014
□ 01-15 死線 넘은 은혜 가족 “한국 대사관서 안받아줘 미국으로”
북한에서 유년시절을 보내고 우여곡절 끝에 미국에 정착한 탈북 젊은이들을 만나는 일은 생각보다 길고 어려운 과정이었다. 드넓은 태평양을 건너온 그들의 디아스포라(Diaspora·조국을 등진 사람들의 집단 이동)가 날선 경계심을 만들었는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터뷰 요청을 거듭하면서 기자의 마음은 간절해졌다.
“여러분(재미 탈북 젊은이)의 ‘어제’가 곧 북한 어린이의 여전한 ‘오늘’이잖아요. 다문화사회인 미국에서, 그 안의 ‘작은 한국’인 한인사회에서도 분투 중인 여러분의 이야기는 미래의 통일코리아를 준비하는 데도 적지 않은 시사점이 될 수 있어요.”
한 달 가까운 기다림 끝에 ‘예스’라는 대답을 들을 수 있었다. 지난달 중순 미 버지니아 주의 애넌데일에서 조은혜 씨(23·여)를, 같은 주의 알링턴에서 서철수(가명·27) 씨와 각각 마주 앉았다.
이제는 그레이스, 제이컵이라고 불리며 살아가는 그들에게 북한은, 한국은, 그리고 통일은 무엇이고 어떤 의미일까.
○ “다섯 밤만 자면 데리러 온다 했는데…”
“제가 일곱 살 때였어요. 식량을 구하러 중국에 다녀온 아버지를 보위부가 탈북자로 몰아세웠죠. 어머니만이라도 살리겠다고 아버지가 모든 죄를 뒤집어쓰고 고문 받다가 돌아가셨어요. 간신히 풀려난 어머니가 피투성이가 된 얼굴로 들어오시던 모습이 눈에 선해요.”
1998년 7월의 어느 깊은 밤. 은혜 씨 자매가 엄마의 손을 잡고 고향을 도망치듯 등져야 했던 것은 말 그대로 살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두만강을 건너는 것은 영양실조로 제대로 걷지도 못하는 4세 남동생에게는 무리였다.
“나중에 사람을 보내 동생을 데려오기로 했죠. 엄마가 떡 5개를 쥐여주면서 ‘다섯 밤만 자면 데리러 온다’고 하자 울지도 않고 고개만 끄덕이던 착한 아이였어요.”
은혜 씨는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1시간 넘게 줄곧 담담하면서도 거침없는 어조로 이야기하던 그의 눈가가 붉어졌다.
“그게 마지막이었어요. 김정일의 ‘탈북자 총살령’이 내려진 때였거든요. 나중에 수소문해보니 동생을 맡아준 북한 지인 집도 사정이 어려워지자 동생을 쫓아냈다고 해요. 그 뒤 혼자 겨울 들판을 헤매다 굶어 죽었다는 말도 있고….”
그 소식을 전해들은 엄마가 절규했다. “왜 북한이라는 이놈의 나라는 이렇게밖에 되지 않는 거야.” 그 통곡의 소리는 아직도 은혜 씨 귓가에 생생하다.
양강도가 고향인 철수 씨에게도 비슷한 아픔이 있다.
“밑으로 동생 세 명이 있었는데 대기근 때 다 굶어 죽었어요. 그중에서도 막 재롱을 부리기 시작했던 2세 여동생이 제일 기억나요. 온 가족이 식량을 찾아 나설 때면 그 애를 강아지처럼 묶어놓고 갈 수밖에 없었어요. 해질녘 들어가면 혼자 울다 지쳐 잠들어 있던 모습이 참….”
철수 씨 가족 역시 ‘살아남기’ 위해 강을 건넜다. 2007년 6월 어느 여름밤의 일이다.
○ ‘멀고 먼 나라’ 한국
새 삶을 위해 처음부터 미국행을 원했던 것은 아니었다. 은혜 씨는 엄마 언니와 함께 중국 옌볜에서 4년간 숨죽이듯 살았다. 신분이 노출될까 걱정돼 학교는 꿈도 꿀 수 없었다. ‘언젠가 한국에 갈 거야’라는 막연한 희망을 품고 살았다.
은혜 씨는 한국행을 미끼로 탈북자들을 유린하는 일부 탈북 브로커의 어두운 세계에 대해 담담히 이야기를 이어갔다.
“브로커가 말한 베이징의 건물이 외국 공관이고, 그 담장만 넘으면 한국에 갈 수 있다는 말만 믿었어요. 그런데 서방국 대사관이 아니라 그냥 외국인들이 묵는 게스트하우스였어요. 우리 모습을 찍어 언론사 등에 팔려는 의도였던 것 같아요. 죽을힘을 다해 담장을 넘으려는 데 카메라 플래시가 일제히 터지는 소리가 들렸어요. 바로 모두 잡혀 북송됐죠.”
은혜 씨 모녀는 2006년까지 강제 북송과 재탈북을 세 차례나 반복해야 했다.
은혜 씨는 “그래도 여기(미국)까지 올 수 있었던 건 알게 모르게 저희를 도와주던 분들 때문”이라고 말했다. “보위부에 끌려간 엄마에게 음식까지 넣어주며 석방을 위해 힘써준 아버지의 친구분, 유엔난민기구(UNHCR)라는 곳을 소개해 주고 줄까지 놔주신 조선족, 선교사님 모두 우리의 은인”이라고 덧붙였다.
인터뷰 내내 은혜 씨는 한국에 대한 이야기를 꺼렸다.
그의 언니 진혜 씨는 언론과의 인터뷰를 통해 “중국에 있는 동안 선양 한국영사관에 전화와 편지를 보냈지만 주중 한국대사관에서 (우리를) 받아주지 않았다”고 토로한 바 있다. 한국은 그들을 보호해줘야 할 ‘국민’으로 감싸 안지 못했다고 은혜 씨는 느끼고 있는 듯했다.
2006년 11월. 은혜 씨 가족은 베이징 UNHCR 사무실에 극적으로 진입해 미국행을 호소했다. 중국이 2008년 베이징 올림픽을 앞두고 국제사회의 여론을 의식하던 때라는 ‘타이밍’이 큰 힘이 됐다. 이번엔 오히려 한국대사관 관계자들이 찾아와 한국행을 권유했지만 상처 입은 마음은 굳어진 상태였다.
2008년 3월 마침내 도착한 미국에서의 첫날 밤, 세 모녀는 서로 부둥켜안고 벅차오르는 감정에 밤새 울고 또 울었다.
철수 씨 가족은 아예 처음부터 한국행을 고려하지 않았다.
중국 헤이룽장(黑龍江) 인근에서 1년 반 정도 숨어 지내는 동안 한국 등 외부 소식을 쉽게 접할 수 있었다. 아버지는 김대중 노무현 정부의 유화적인 대북 정책 기조에 항상 불만이 많았다고 했다.
“아버지와 동생이 중국에 있을 때 미국 방송을 많이 봤어요. 그래서 큰 나라 미국에 대한 환상과 기대가 컸던 것 같아요. 아버지는 한국이 ‘대북 퍼주기’를 하고 있지만 북한 주민에게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했어요.”
▼ “미국선 잘 살줄 알았는데…” 산산조각 나버린 철수 가족 ▼
동생이 용기를 내 ‘미국의 소리(VOA)’사에 전화를 걸었다. 종종 듣던 한국어 방송에서 불러준 번호였다. 미국행 의사를 밝히자 VOA 관계자는 UNHCR와 다리를 놔줬다. 가족은 관광객으로 위장해 중국 국경을 넘었다. 이 얘기를 할 때 철수 씨의 표정에는 당시의 긴장감이 짙게 묻어났다.
“관광객으로 위장하고 기차를 타고 가던 중이었어요. 갑자기 공안이 다가와 신분증을 보여 달라는 거예요. 그리고 제 신분증을 받아들자마자 손톱으로 한번 쓰윽 긁더니 “가짜잖아!”라고 소리쳤어요, 그때 심장 뛰던 일을 생각하면….”
하지만 공안은 ‘다음부터는 주의하라’는 말만 남긴 채 사라졌다. 철수 씨는 “기적 같은 일이었다”고 말했다.
2008년 11월. 마침내 철수 씨 가족은 라오스에서 UNHCR 및 미국대사관 관계자들과 만났다. “왜 한국이 아닌 미국입니까.”(미대사관 관계자) “아이들에게 보다 안전하고 공평하고 자유로운 나라이기 때문입니다.”(철수 씨 아버지) 그로부터 7개월 뒤인 2009년 6월. 철수 씨 가족은 미국 땅을 밟았다.
○ 불법체류 탈북자 노린 암시장까지 등장
은혜 씨나 철수 씨처럼 탈북 후 제3국을 경유해 합법적으로 미국에 정착하는 경우도 있지만 한국 정착에 실패한 뒤 자녀와 함께 미국에 밀입국하는 이른바 ‘탈북탈남인’도 상당수다. 그러나 이미 한국 국적을 부여 받은 탈북자들이 미국으로부터 다시 난민 지위를 부여받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전문가들은 말한다. 한국이 이들에게 정치적 탄압과 인권침해를 가했다는 사실이 입증돼야 하기 때문이다.
단, 한국 국적을 취득했더라도 미국 법원에 의해 정치적 망명을 승인 받을 경우 합법적인 정착이 가능하다. 도미(渡美)해야 할 만한 절박한 사유가 있거나 미국에 중요한 정보 제공자인 경우가 해당된다. 지금까지 공개된 사례는 1998년 한국 국적을 취득한 뒤 2006년 미국 망명을 승인 받은 북한군 장교 출신의 탈북자 서재석 씨가 유일하다. 그만큼 까다롭고 어려운 과정이다.
결국 한국을 떠나온 상당수의 탈북자는 미국 내 불법체류자로 전락한다. 한국을 떠나 미국에 망명해야만 하는 절박성을 입증하기 위해 변호사를 고용하는 데 몇만 달러를 써야 하고 미 당국의 결정을 기다리며 불안한 하루하루를 보내는 경우도 적지 않다.
7년간 한국에 정착해 살다가 2011년 미국에 온 피터 정 씨(42)는 미국 현지 대북지원단체가 스카우트해 취업비자를 받고 합법적으로 체류 중인 매우 이례적인 경우다. 그러나 정 씨는 “내 주변에도 불법체류자로 전전긍긍하며 지내는 안타까운 탈북자가 꽤 있다”며 “이들을 위한 암시장까지 있다”고 말했다.
자녀 취학 등 미국 생활을 위해 필수적인 신분증을 발급받을 수 없는 불법체류자를 위한 운전면허증, 소셜시큐리티카드(한국의 주민등록증) 등을 위조해 판다는 얘기다. 미국 동부지역의 경우 가짜 운전면허증은 3000달러(약 318만 원), 소셜시큐리티카드는 7000달러(약 750만 원) 선에서 거래된다고 한다.
한국과 미국 정착의 장단점을 몸소 체험했다는 정 씨는 상당수의 탈북자가 한국을 등지는 가장 큰 이유로 ‘차별’을 꼽았다.
그는 “천안함 사태나 탈북자 위장간첩사건 등이 터질 때마다 탈북자들은 불안과 심리적 압박감을 느낄 수밖에 없다”며 “상당수 부모는 자녀들이 자랐을 때 ‘탈북자’가 아닌 ‘아시아계 미국인’으로 편견 없는 세상에서 살게 하고 싶어 한다”고 말했다.
○ 다시 희망을 꿈꾼다
높은 기대감에 비해 냉혹한 현실의 벽에 부닥쳐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경우도 있다.
가족과 함께 그토록 원하던 미국에 왔을 때만 해도 철수 씨의 아버지는 큰 꿈에 부풀어 있었다. 그러나 아버지의 미국 적응은 고되고 더뎠다. 중국에서 가족의 생계를 책임졌던 50대 아버지의 체력도 예전 같지 않았다. 다니던 조그마한 한인 교회에서 ‘탈북자라 무시 받는다’며 괴로워했다.
가정불화도 끊이지 않았다. 2011년 6월. 아버지는 어머니를 자택에서 흉기로 찔러 살해한 뒤 목을 매 자살하는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 아르바이트를 끝내고 집으로 돌아온 철수 씨가 그날 저녁 그 끔찍한 장면을 목격했다.
평생 아물기 힘든 그 상처에 대해 철수 씨는 어렵게 말문을 열었다.
“(아버지가) 너무 주변에 의지하려 했던 거 같아요. 미국에 대한 기대감, 환상이랄까 그런 것도 컸던 거 같고요. 여기도 사람 사는 사회인데. 또 의지하면 할수록 상처도 쉽게 받을 수 있는, 독이 될 수도 있는 거죠.”
철수 씨는 요즘 한인 교회에 매주 나간다. 교인의 집에서 숙식을 해결하고 한인이 운영하는 일식당에서 주방일을 배우는 데 여념이 없다. 철수 씨는 “통일된 한국에 가서 식당을 차리는 것이 꿈”이라고 했다.
“배고픈 친구들에게 직접 만든 음식을 나눠주고 싶어요.”
낮에는 치과에서 아르바이트를, 저녁에는 야간고등학교를 다니는 은혜 씨는 지난해 여름 시민권을 취득했다. 삶은 여전히 고단하지만 이제 높은 목표도 세웠다.
“아직은 감히 넘을 수 없는 산이라는 걸 알아요(웃음). 그래도 언젠가는 꼭 로스쿨에 진학해 국제무대에서 탈북자들을 위해 봉사하는 법조인이 되고 싶어요.” 그들은 다시 희망을 꿈꾸고 있었다.
버지니아=김정안 기자 jkim@donga.com
□ 02.13 2012년 어머니·남동생과 탈북, 서울대 의대 합격한 여학생
"의사가 되겠다는 꿈, 꼭 이루거라. 그리고 반드시 남(南)으로 가라."
그것이 아버지의 유언이 돼버렸다. 지난 4일 서울대 의대 합격 소식을 들은 이서영(25·가명)씨는 "함께 탈북(脫北)하다가 붙잡혀 감옥에서 목숨을 잃은 아버지가 떠올라 한참을 통곡했다"고 말했다.
1989년 신의주에서 태어난 이씨는 대학교수 아버지와 의사 어머니 아래에서 유복하게 자랐다. 그러나 2007년 평양의 한 대학 생명공학과에 진학한 후 평양의 '속살'을 보고 북한 체제에 대해 심각한 회의(懷疑)를 느꼈다고 한다. "북한이 자랑하는 그 화려한 지하철역에 노숙인이 넘쳐났어요. 옛날 같으면 외국인 관광객을 의식해서라도 숨겼을 풍경이거든요."
일과가 끝나면 평양의 교수·의사·교사 등 '엘리트' 시민마저 시장에 나와 장사를 해야 생계가 유지되는 모습을 보며 이씨는 "이 나라에 무슨 미래가 있겠느냐"며 좌절했다. 이를 본 아버지와 어머니는 "이제라도 사람답게 살자. 함께 남으로 가자"며 2009년 탈북을 시도했다. 간신히 압록강은 건넜지만 중국 공안에 체포돼 북송됐고, 수용소에서 3개월 동안 취조를 받은 끝에 서영씨와 어머니, 남동생은 일단 풀려났다. 그러나 아버지는 끝내 다시 볼 수 없었다.
2012년 결국 탈북에 성공한 서영씨는 어머니, 남동생과 함께 양천구 신정동의 임대아파트에 보금자리를 꾸렸다. 2년 동안 하루 5시간 수면과 고등학생인 동생 도시락 싸주는 시간을 빼곤 모두 공부했다고 한다.
이씨는 "한국 젊은이들은 통일에 대한 의지가 별로 없는 것 같다"고 했다. "북한에선 그래도 '우리 민족'이라는 의식이 남아 있는데, 한국 젊은이들은 북한을 미국이나 일본 같은 '외국' 중 하나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강하더군요."
조선일보
□ 03.11 탈북자 위장 '北보위부 직파간첩'
거짓말 탐지기 통과법 등 北서 교육받고 국내 잠입
탈북자로 위장해 국내에 잠입한 북한 보위사령부 직파 간첩이 우리 정부의 탈북자 합동신문센터에서 적발돼 구속됐다.
서울중앙지검 공안1부(부장 이현철)는 10일 북한 보위사령부 7처 공작원 홍모(40)씨를 국가보안법상 목적 수행·간첩 미수와 특수잠입 혐의로 구속 기소했다.
검찰에 따르면 군 출신인 홍씨는 2012년 5월 북한군 보위사 공작원으로 선발돼 공작 교육을 받고, 국정원의 탈북자 합동신문을 통과하는 방법 등을 배워 1년 뒤 남파 공작 계획에 착수했다. 그는 ▲탈북자 정보 ▲탈북자 단체와 우호·비우호 세력 ▲국정원 정보망 ▲통일·애국 세력 등을 파악하라는 지령을 받고 작년 6월 두만강을 건너 탈북했고 태국·라오스를 거쳐 두 달 만에 한국에 들어왔다.
그는 "지령을 받은 사실 외에 나머지는 사실 그대로 말해 거짓말 탐지기를 피하라"는 보위사 교육을 받았으나 홍씨가 간첩이라는 첩보를 입수한 국정원에 덜미가 잡혔다. 홍씨는 작년 6월 탈북 브로커 유모(55)씨를 납치하라는 지령을 받고 유씨를 북·중 국경으로 유인해 납치하려다가 미수에 그쳤는데, 이를 눈치 챈 유씨가 당국에 신고한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달 11일 구속된 뒤 수차례 검찰에 불려온 홍씨는 "남한 구치소 밥이 북한 국경절이나 명절에서나 먹을 수 있는 밥보다 맛있어 몸무게가 14㎏이나 늘었다"고 진술하기도 했다.
홍씨는 1998년 평양에 있는 초급장교양성기관인 강건종합군관학교를 최우등으로 졸업하고 1999년 5월 조선노동당에 가입했으며, 2002년 상위로 제대 후 송금 브로커, 마약장사 등을 하며 번 돈으로 생활하다 공작원이 됐다. 북한군 소속인 보위사령부는 4개 부와 17개 처로 구성돼 있고, 홍씨가 소속된 7처(해외반탐처)는 반체제 사범을 색출하고, 한국인·탈북자를 공작원으로 포섭하거나 유인·납치하거나, 공작원을 남한에 침투시켜 군사기밀 등을 수집하고 있다.
검찰은 "과거엔 북한 국방위원회 소속 국가안전보위부의 공작원이 많았는데 최근에는 보위사령부 소속 공작원의 지속적인 침투 사례가 늘고 있다"고 말했다. 2011년 6월 김모씨, 2011년 8월 허모씨, 작년 2월 여성 공작원 이모씨 등도 보위사 공작원이었다는 것이다.
조선일보
□ 08.31 예술단 단장 탈북 왜 쌍심지 켜고 쫓나
최근 중국에서 불고 있는 탈북자 검거 열풍과 관련해 북한이 중국 정부에 공식 검거 요청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또한 북한이 중국에 탈북자 대량검거를 공식 의뢰한 이유는 북한을 탈출한 국가급 예술단 단장의 추적을 용이하게 하기 위해서인 것으로 전해졌다. 중국 내 대북 소식통은 “탈북한 예술단 단장을 잡으려고 북한이 최근 중국 정부에 검거 요청 공문을 발송했다. 북한이 탈북자 검거를 위해 이름을 적시해 공문까지 발송한 것은 이번이 두 번째”라고 밝혔다.
중국 당국은 지난 두 달 새 많은 탈북자를 잇달아 체포했다. 7월 중국 산둥(山東)성 칭다오(靑島)와 윈난(雲南)성 쿤밍(昆明) 지역에서 탈북자 27명이 중국 공안에 체포돼 20일 지린(吉林)성 투먼(圖們)시의 수용 시설 ‘투먼시 공안 변방대대 변방 구류심사소’에 수용됐다. 8월 12일에는 중국·라오스 국경을 넘으려던 탈북자 11명이 윈난성 쿤밍 지역에서 체포됐다.
두 사례는 언론 보도를 통해 공개된 경우이고, 그렇지 않은 사례는 이보다 훨씬 더 많다. 탈북자 지원 민간단체 북한인권개선모임의 김희태 사무국장은 기자와의 통화에서 “최근 중국 당국의 탈북자 체포 사례가 크게 늘었다”면서 “우리가 자체 파악한 것만 해도 중국이 체포한 탈북자 수는 6월 20일부터 7월 20일 한 달 동안 100여 명에 이른다”고 말했다. 탈북자 업무에 종사하는 한 공직자도 “최근 중국의 탈북자 체포가 과거에 비해 크게 늘었는데 그 배경이 의문”이라고 귀띔했다.
이에 대해 탈북자 상황에 밝은 중국 내 또 다른 대북 소식통은 “국가급 예술단 단장이 중국에서 잠적했고 이를 추적하려고 북한과 중국이 협력해 탈북자 루트를 샅샅이 뒤지는 과정에서 탈북자 조직망이 속속 드러나고 있다”면서 “탈북한 단장은 여성”이라고 말했다. 소식통은 “북한은 이 여성이 외국으로 망명할 경우 큰 문제가 된다고 여긴다. 중국은 물론 중국을 벗어났을 개연성도 있다고 보고 태국 등 동남아 국가의 국경선 지역에서도 수색 작업을 벌이고 있다”고 전했다. 이 과정에서 해당 국가와 북한 당국 간 충돌이 빚어지기도 했다고 한다.
잠적 여성은 국가급 단장
사라진 예술단 단장이 어느 예술단의 누구인지는 구체적으로 확인되지 않고 있다. 다만 국가급 예술단이란 점과 중국에 왔다 사라졌다는 점에서 조선국립민족예술단 단장일 가능성이 제기된다. 조선국립민족예술단은 만수대예술단, 피바다가극단과 더불어 북한의 3대 예술단 가운데 하나다. 조선국립민족예술단은 국가 간 공연에 북한을 대표하는 단체로, 최근 들어 중국 공연을 자주 하는 등 중국과의 교류가 잦았다.
조선국립민족예술단은 지난해 10월 북·중 접경 도시인 랴오닝성 단둥에서 대규모 공연을 해 중국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 공연은 당시 열린 ‘북·중 경제무역문화관광박람회’ 행사 중 하나였다. 중국 관영매체 ‘중국신문사’는 당시 공연에 대해 “혁명 가무 위주의 기존 공연 방식에서 벗어나 중국의 인기 가요를 부르는 등 일반인을 위한 공연으로 관객 수천 명으로부터 박수갈채를 받았다”고 보도했다. 또 조선국립민족예술단을 북한의 일류 예술가 400여 명으로 구성된 북한 문화외교의 주력군으로 소개하고, 단둥 공연에는 단원 100여 명을 보냈다고 전했다. 조선국립민족예술단은 지난해 초에도 한 달 동안 베이징과 상하이 등 중국 주요 도시를 순회 공연했다.
조선국립민족예술단은 우리와도 인연이 있다. 한때 남한에서 폭발적 인기를 누렸던 조명애가 바로 조선국립민족예술단 출신이다. 조명애는 2002년 한민족통일축제 한마당에 참가하려고 서울에 처음 와 빼어난 미모로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이후 조명애는 2005년 가수 이효리와 함께 CF에 출연했고, 2007년에는 남북 합작 드라마 ‘사육신’에 출연하기도 했다.
북한이 중국에 매우 이례적으로 검거 요청 공문을 발송하면서까지 국가급 예술단 단장을 붙잡으려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 여성 단장이 북한 예술단 내부의 기밀을 상당히 많이 알아 이를 폭로할 것을 우려하기 때문으로 보인다. 북한이 이처럼 긴장하는 점으로 미뤄 여성 단장이 가진 기밀이 북한 권력 지도부와 연관됐을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국립민족예술단에서 10년간 활동한 바 있는 탈북 예술인 K씨도 이와 비슷한 견해를 밝혔다. 2007년 남한으로 넘어 온 K씨는 현재 우리나라에 있는 탈북 예술인 가운데 유일하게 조선국립민족예술단 출신이다. 또 한 명의 조선국립민족예술단 출신 예술인은 수년 전 외국으로 이민을 갔다. K씨는 기자와의 통화에서 예술단원과 북한 권력자 간 특수 관계를 설명했다.
지도부와 예술단 그리고 기쁨조
K씨는 “내가 조선국립민족예술단에 있을 때는 일부 예술단원이 주로 예술단 내부 간부들과 ‘그렇고 그런’ 관계를 유지했다”고 말했다. 예술단원과 외부 권력자의 관계에 대해서는 “주로 평양이나 지방 공연 이후 연회석상에서 해당 지역 권력자들이 마음에 드는 무용수 등 예술단원을 별도로 불러놓고 ‘시커먼 속’을 드러냈다”고 전했다. 예전에는 만수대예술단 단원이 주로 권력자들의 즐거움을 위해 움직였지만, 김정일을 위한 ‘기쁨조’가 만들어지면서 만수대예술단은 그 구실에서 벗어나게 됐다고 한다.
그런데 기쁨조는 어디까지나 1인자, 김정일만을 위한 것이었다. 1인자를 제외한 나머지 권력자도 자신만의 기쁨조가 필요했고, 그래서 눈을 돌린 대상이 예술단이었다. 개중에는 ‘김정일 기쁨조’에 감히 눈독을 들였다가 낭패를 보거나 총살을 당한 경우도 있었다. 하지만 기쁨조는 군부대를 비롯해 여러 조직에 걸쳐 있었고, 결국 이들은 김정일만의 기쁨조일 뿐 아니라 해당 조직 권력자들의 기쁨조이기도 했다. 그들이 조직 내부의 기쁨조를 가만히 내버려둘 리 만무했던 것이다.
K씨는 “조선국립민족예술단이나 만수대예술단 등 중앙 예술단의 단장은 매우 비중 있는 자리”라며 “김정일이 직접 임명했다”고 말했다. 단장 임기는 따로 정해져 있지 않았고, 무슨 이유에선지 어느 날 갑자기 단장이 바뀌곤 했으며, 단장은 대부분 남성이었고, 주로 지휘자 등 예술적 재능이 있는 이가 맡았다는 게 K씨의 증언.
‘예술단 여성 단장 탈북’ 소식에 대해 K씨는 “내가 알기로 예술단 단장이 여성인 경우는 없었다”면서 “만일 여성이 단장이라면 매우 특수한 상황”이라고 말했다. 북한에서 여성이 많은 남성을 제치고 국가급 예술단 단장 자리에까지 올랐다는 것은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불가능하고 뭔가 ‘대단한’ 능력이 있다고 봐야 한다는 것이다. K씨는 “만일 여성이 단장이라면 그 자리에 오르기까지 엄청난 비밀을 안고 있을 것”이라며 “북한 처지에서는 비밀 노출을 우려해 이런 여성의 외국 망명을 무슨 수를 써서라도 막으려 들 것”이라고 강조했다.
과거 조선국립민족예술단 단장을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임명해왔다면 현재 단장은 김정은 조선노동당 제1비서가 임명했을 공산이 크다. ‘국가급 예술단 여성 단장 탈북’ 소식이 사실이라면 사라진 단장은 김정은 정권의 어떤 비밀을 안고 있을까. 지도부와 예술단 간 각종 설과 추측이 난무하는 북한이기에 더욱 궁금증을 자아낸다.
김승재 YTN 기자·전 베이징 특파원 sjkim@ytn.co.kr <이 기사는 주간동아 2014년 8월 952호에 실린 기사입니다
□ 09-23 “보위부 거짓말에 속아 재입북한 엄마, 선전용 회견 끝나자…”
"우리 어머니는 죄가 없습니다. 우리 어머니를 살려주세요. 여러분 도와주세요."
한국으로 탈북했다가 북한에 돌아간 고경희 씨(39·여)의 아들 차성혁 군(13)이 23일 서울 중구 프레스센터 기자회견장에서 애타게 외쳤다. 경희 씨는 2011년 탈북했다가 이듬해 중국을 통해 북한으로 넘어갔다. 현재는 정치범 교화소에 수감된 것으로 추정된다.
경희 씨의 오빠 고경호 씨(45)는 이날 북한정의연대가 주최한 '재입북 고경희 씨 북한 보위부 탄압과 정치범교화소 수용 고발' 기자회견에서 차 군과 함께 참석했다. 둘은 지난해 12월 함께 탈북해 올해 3월 말 한국에 입국했다. 보통 탈북자들은 신분 노출을 꺼리지만, 고 씨는 "우린 죄가 없으며 진실을 알리겠다"며 공개 회견을 자청했다.
경희 씨는 재입북한 뒤 지난해 1월 평양 인민문화궁전에서 열린 기자회견에 나와 "공화국에서는 천벌을 받아 마땅할 저를 너그럽게 용서해주고 따뜻이 안아주었다"고 말했다. 이때 "(북한 당국은) 어머니, 두 자식과 함께 새집에서 행복하게 살게 해줬다"고도 진술했다.
고 씨에 따르면 경희 씨는 탈북한 뒤 딸(14)이 엄마를 간절히 그리워하자 북한행을 고려했다. 그가 동생의 귀환 의사를 전하자 북한 보위부는 "돌아오면 탈북한 죄를 따지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경희 씨가 재입북 후 평양 기자회견을 앞두고 "오빠를 직장에 복귀시켜주고, 작고한 아버지의 사망원인을 밝혀달라"고 요구하자 보위부는 "그렇게 하겠다"는 약속도 했다.
하지만 정작 기자회견이 끝나자 약속은 온데간데 없었다. 보위부는 경희 씨에게 "너는 반역자다. 원수님께서 용서해줬는데 보답을 해야 한다"며 혜산광산에 배치해 일을 시켰다고 한다. 경희 씨는 주변 사람들로부터 반역자란 소리를 들으며 매도 맞고 괴롭힘을 당했다.
고 씨는 자신이 탈북하자 보위부가 경희 씨에게 강도 높은 구타와 고문을 가했다고 주장했다. 이어 김정은 국방위원장에게 보내는 호소문을 통해 "왜 사람들이 고향을 떠나는 원인을 따지지 않고 고향을 떠난다는 이유로 반역자라며 정치범 교화소로 보내느냐"고 물었다. 또 "고향을 떠나도록 우리 등을 떠미는, 권력의 자리에서 인민들이 굶어 죽어도 눈썹하나 까딱하지 않으며 국경만 막으면 되는 것처럼 말하는 자들의 죄는 따지지 않냐"고 규탄했다.
북한정의연대는 이들의 진술을 토대로 '북한 보위부와 지도부에 의한 인권탄압과 고경희 씨의 강제적 구금·실종에 관한 인권유린보고서'를 작성해 유엔인권최고대표사무소(OHCHR)의 '강제구금에 관한 실무반'에 접수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이샘물 기자 evey@donga.com
□ 2014-12-02 2013년 5월 라오스서 강제북송된 탈북 청소년 9명… “2명 처형, 7명은 수용소로”
▲2013년 5월 29일자 A1면 보도
박선영 사단법인 물망초 이사장은 1일 “지난해 5월 라오스에서 강제 북송돼 파문을 낳았던 탈북 청소년 9명 가운데 2명이 처형당하고 7명이 수용소로 보내졌다는 이야기를 북한 내부의 정보 협력자로부터 들었다”고 밝혔다.
북한은 이들을 강제 북송한 뒤 국제사회의 비판이 이어지자 같은 해 6월 20일 조선중앙TV 좌담회에 출연시켜 “남측 종교인이 나이 어린 청소년을 유인 납치해 남조선으로 집단적으로 끌어가려고 하다 발각된 반인륜적 만행사건이 드러났다”고 주장했었다. 강제 북송된 탈북 청소년 처형이 사실이라면 북한이 방송을 통해 체제 선전에 이용했던 아이들의 인권까지도 유린했다는 뜻이어서 상당한 파문을 일으킬 것으로 보인다.
박 이사장은 “(2명은) 올해 8, 9월경 처형됐으며 그중 1명의 이름이 문철(24)이라고 이 협력자가 알려왔다. 나머지 7명은 올해 봄에 북한의 14호 수용소에 수용됐다고 한다”고 말했다. 14호 수용소는 북한 평안남도 개천에 있다. 북한에서는 관리소로 부르나 한국에서는 정치범수용소로 통한다. 올해 봄이 되기 전에만 해도 이들 9명은 동해 쪽 초대소, 지역을 확인할 수 없는 아동구호소, 교화소 등 모두 4곳에 분산 수용돼 있었다고 한다. 박 이사장은 “아동구호소는 부모 없는 부랑아들을 보호하는 곳이고, 교화소는 한국의 교도소에 해당한다. 게다가 초대소에도 있다고 하니 북한이 이들을 죽이지는 않겠구나 하고 안심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현재는 수용소로 보내진 나머지 7명도 살아남기 힘든 것이 아닌가 걱정된다”고 말했다.
북한은 당초 이들을 체제 선전용으로 활용하려 했으나 생각대로 되지 않으니 처형하거나 수용소에 보낸 것으로 분석된다. 이들 탈북 청소년은 선교사 주모 씨와 중국에서 3개월∼3년간 같이 생활하다 주 씨와 함께 라오스를 거쳐 한국으로 오려 했다. 하지만 지난해 5월 라오스 국경을 넘다가 경찰 단속에 걸렸다. 이후 중국을 거쳐 북송됐다.
윤완준 zeitung@donga.com
■ 2015.01.23 탈북자 신동혁씨 北 수용소 진술 번복에 그의 수기 작가는...
북한 강제수용소의 참상을 고발해온 탈북자 신동혁씨가 증언의 일부 오류를 인정하면서 국내외 북한 인권운동에 제동이 걸릴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 북한은 수용소의 존재 자체를 공식적으로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인권 운동은 탈북자들의 증언을 토대로 진행돼 왔다. 신씨가 진술을 번복하면서 그 신뢰성이 훼손됐다는 것이다. 뉴욕타임스는 “이번 일로 북한 지도자들을 국제형사재판소(ICC)에 세우는 일도 차질을 빚을 수 있다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고 전했다.
북한은 신씨를 ‘인간쓰레기’ 등으로 원색적으로 비난하며 반격에 나서고 있다. ‘우리민족끼리’ 웹사이트를 통해 “자료라는 것이 모두 허위였음이 명백해진 이상 그에 기초해 조작된 그 무슨 북 인권 관련 문서들 역시 전면백지화, 무효화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인권사무소 설치 등 모든 인권 모략소동 역시 중지돼야 한다”고도 했다. 이번 일이 북한 인권운동에 찬물을 끼얹게 될까.
▲탈북자 신동혁(왼쪽)씨와 그의 수기를 펴낸 블레인 하든./ 조선일보 DB
신동혁씨는 활동을 중단할 수도 있다는 뜻을 밝혔지만, 이번 일이 북한 인권운동의 대세(大勢)에는 큰 영향을 미치지 못하리라는 관측이 지배적이다. 신씨는 수용소 생활과 탈출한 경험 자체를 부인한 것이 아니라, 과거 경험한 일들이 벌어진 장소와 시점 등에 일부 오류가 있다는 점을 인정한 것이다. 북한 인권의 실상에 대한 탈북자들의 축적된 증언 전체를 무력화할 만큼 결정적인 오류가 아니라는 것이다.
미국의 북한 인권단체 북한인권위원회(HRNK) 그렉 스칼라튜 사무총장은 “아우슈비츠, 다하우, 비르케나우(모두 나치의 유대인 강제수용소 이름)가 무슨 차이가 있는가?”라며 “이 젊은이가 비참하게 고문당했다는 핵심은 여전히 사실”이라고 말했다. 북한이 지난해 유엔이 채택한 북한 인권결의안도 취소하라고 요구하자 마이클 커비 전 유엔 북한인권조사위원장은 “신동혁씨가 오류를 인정한 것은 북한 인권조사 보고서의 결론에 전혀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며 “신씨는 위원회에 증언한 300여명의 증인 중 하나일 뿐”이라고 말했다.
신씨의 수기를 펴낸 전(前) 워싱턴포스트 기자 블레인 하든도 “신씨의 등에 있는 화상 흉터나 다리의 상처를 보면 그가 실제로 고문을 당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며 “신씨는 여전히 그의 경험이 모두 사실이라고 말하고 있으며, 다만 (책과는) 다른 장소·시점에서 벌어진 일이라는 것”이라고 했다. 북한민주화위원회는 “(신씨가) 일부 거짓을 인정한 것은 북한 정권의 간악한 만행에 대한 진실마저 거짓으로 오해받을 것을 우려한 양심 고백”이라며 “분명한 것은 북한의 수용소, 교화소에서 자행되는 반인륜적 인권유린 행위는 유례를 찾아볼 수 없다는 점”이라는 성명서를 냈다.
신씨는 수기 ‘14호 수용소 탈출’에서 자신이 평양 북쪽 14호 수용소에서 태어나 2005년 탈출했다고 밝혔다. 어머니와 형의 탈출 계획을 수용소 당국에 밀고했으며, 함께 탈출하다 전기 철조망에 걸린 다른 수감자의 시신을 딛고 수용소 울타리를 넘을 수 있었다고 진술해 왔다.
하지만 최근에는 “6살 때 어머니, 형과 함께 14호 수용소에서 대동강 근처 18호 수용소로 옮겨졌다”고 진술을 번복했다. 또 1999년과 2001년에도 탈출 시도를 했으며, 2001년에는 중국까지 가는 데 성공했지만 중국 공안에 체포돼 북송됐다고 했다. 다시 북한에 와서 18호 수용소로 보내졌다가 곧 14호 수용소로 옮겨져 혹독한 고문을 받았다는 것이다.
신씨의 책에는 14호 수용소에서 고문을 당한 것이 13살 때였다고 나오지만 2001년 신씨의 나이는 20세다. 하든에 따르면 신씨는 “나의 경험을 책으로 펴내기로 했지만 과거의 일이 너무나 고통스러워 스스로 타협(compromise)을 했다. 고통스러운 기억을 다시 떠올리지 않기 위해 세부적인 부분을 정확히 얘기하지 않았다”고 말했다고 한다.
북한의 정치범 수용소는 개천(14호), 요덕(15호), 화성(16호), 북창(18호), 회령(22호), 청진(25호) 등 6곳으로 알려져 있었다. 통일연구원의 2014년 북한인권백서에 따르면 국경과 가까운 회령 22호 수용소가 2012년 폐쇄된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북한의 수용소는 한 번 수용되면 다시 나갈 수 없는 ‘완전통제구역’과 사회 복귀가 가능한 ‘혁명화구역’으로 나뉜다. 종전 6개의 수용소 중 요덕의 15호만이 유일하게 혁명화구역과 완전통제구역으로 나뉘어 있고, 나머지는 완전통제구역으로 운영된다. 그러나 최근의 증언에 따르면 18호나 25호에서도 일부 사회복귀가 가능한 사례들이 있었다고 한다.
신씨는 과거에도 ‘가짜 논란’에 휘말린 적이 있다. 지난해 북한이 신씨의 아버지를 선전용 TV방송에 출연시켜 신씨의 주장이 거짓이라고 반박하는 내용을 내보낸 뒤 일부 탈북자 등이 신씨의 증언에 의혹을 제기한 것이다. 신씨는 진술을 번복한 이후 자신의 페이스북에 “나를 믿고 지지해준 이들에게 매우 미안하다”는 글을 남겼다. 그는 “북한 수용소 실태를 고발하는 활동을 계속하지 못할 수도 있다”며 “하지만 내가 아니어도 여러분들은 계속해서 싸울 수 있다”고 했다.
채민기 디지털뉴스본부 기자
□ 03.19 '노크귀순' 북한군 장교 이철호씨의 인생 유전
다음달 아내 살인미수 혐의로 국민참여재판에
2008년 이른바 ‘노크 귀순’으로 탈북한 이철호(34)씨가 살인미수 혐의로 다음달 국민참여재판을 받는다. 귀순 초기 북한의 실상을 알리는 용감한 탈북자로 영웅 대접을 받았던 그는 지난해 11월 아내의 목을 졸라 살해하려 한 혐의를 받고 있다. 그는 아내의 목을 조른 후 지인에게 ‘한국에 와서 많은 스트레스를 이겨내기 정말 힘들었다. 오늘 비록 목숨을 끊지만 통일의 이념은 뜨거웠다’는 문자를 보낸 후 자살을 시도하기도 했다. 지뢰밭과 북한의 감시를 피해 목숨을 걸고 찾았던 남한에서의 삶이 어쩌다 이렇게까지 된 것일까.
▲지난 2008년 탈북한 이철호씨.
탈북자 스타에서 살인 미수 혐의로 추락
북한군 15사단에서 중위로 근무하던 그는 2008년 4월 27일 귀순했다. 그는 이날 북한 철책선에서 남한의 철책선까지 30여분을 걸어 GP 초소 앞에 나타났다. 그는 후일 한 온라인 카페에 “당시 철책에 서 있는 5분 동안 내가 나서 자란 고향을 뒤돌아 보며 힘겨운 결단을 하기까지 정말 모질고 힘들었다”고 썼다.
당시 지뢰밭과 북한의 감시를 피해 초소 앞까지 직접 걸어온 이씨의 귀순은 ‘노크 귀순’이라는 이름이 붙으며 화제가 됐다. 철책을 넘은 뒤 속옷을 벗어 흔들며 우리 측 전방 초소(GOP)에 총까지 쐈는데 반응이 없자 최전방 경계초소(GP)까지 걸어가 우리 장병을 불러 남한 사회에 안긴 것을 두고 생긴 말이다.
그는 두 달여 만에 한 종합편성채널에 출연해 귀순 이유와 북한 사회, 군의 모습 등을 들려주기 시작했다. 이씨는 북한 보위사령부 장교 출신의 최초 귀순자로 북한군에 대해 해박한 지식을 갖고 있었고 허술한 우리 군의 방비 태세를 폭로하는 역할까지 더해져 큰 관심을 받았다. 그는 방송 출연 당시 “내가 방송에 출연하는 게 북한 최전방에 상당한 영향을 끼치게 될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러나 남한에서의 개인적 삶은 잘 풀리지 않았다. 귀순 후 탈북자 단체 등의 도움을 얻어 취직했지만, 적응을 잘 못하고 방송 출연 등으로 문제가 생겨 금방 해고되는 경우가 많았다. 주변 탈북자들은 “북괴를 괴멸시켜야 한다는 일념 아래 방송 등에 매진한 것이지만, 개인 생활에는 마이너스가 됐다”고 했다.
2012년 탈북자 출신인 A(29)씨와 결혼도 했지만, 가정생활 역시 순탄하지 않았다. 이듬해 이씨가 사업을 벌인 것이 잘되지 않으면서 줄곧 가정 불화에 시달렸다. 이씨는 당시 지인에 사기를 당해 정착금 등 전 재산을 탕진한 것으로 알려졌다. 결국 둘은 별거에 들어갔고, 이혼 소송을 밟기 시작했다.
이씨는 이때 남한에서의 생활에 큰 좌절을 겪었다고 한다. 지인인 탈북자 출신 영화감독 정성산씨에 따르면 이씨는 종종 북한해방과 종북 척결을 위해 열심히 일했는데 나라에서 관심을 보여주지 않는다는 얘기를 종종 했다고 한다. 탈북자로서 대의(大義)와 개인적 삶 모두 어그러져버렸다는 얘기였다.
▲정성산 감독 페이스북 캡쳐.
그러던 지난해 11월 27일 일이 터지고야 말았다. 아내와의 이혼이 감정이 아닌 경제적 문제 때문이라고 생각한 이씨는, 아내를 집으로 불러 다시 합치자고 권유했다고 한다. 이씨의 또 다른 지인은 “이씨는 아내가 아직 자신을 사랑한다고 믿고, 돈만 벌면 금방 사이를 회복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며 “그런데 아내는 생각이 조금 달랐던 것”이라고 했다.
아내 A씨가 자신의 권유를 거절하자, 이씨는 순간 분노가 치솟았다. 그래서 아내의 목을 졸랐다고 했다. 아내는 다행히 생명을 잃지는 않았다. 이후 이씨는 행동을 후회하며 자살을 결심했다. 500만원이 든 통장을 아내 손에 쥐여주고, 친분이 있는 탈북자들에게 ‘한국에 와서 스트레스 이겨내기 정말 힘들었다. 비록 목숨을 끊지만 통일의 이념은 뜨거웠다’는 문자메시지를 보냈다. 다행히 의식을 차린 아내의 신고 덕에 경찰이 출동해 자살을 막을 수 있었다. 그러나 이씨는 조사 과정에서 결국 구속 기소됐다.
지난해 12월 10일 기소된 이씨는 1심 재판과정에서 국민참여재판을 신청, 다음 달 7일 재판을 앞두고 있다. 이씨는 재판부에 제출한 반성문에서 “아내를 살해할 의도가 없었다”며 “국민의 판단을 받아보고 싶다”는 뜻을 밝힌 것으로 알려졌다.
조선일보
□ 10-14 탈북 망명유학생의 쓸쓸한 퇴장
검은색 외투에 중절모를 쓴 그는 뭐랄까, 저돌적이었다.
“안녕하시오”라는 짧고 건조한 첫인사. 곧바로 렌터카 데스크로 발걸음을 돌렸다.
“내가 세 곳의 가격을 다 비교해 보고 제일 경제적인 차를 골랐다.” 짙은 함경도 사투리.
“내가 준비하라고 한 서류는 다 준비했지? 지금 선생이 4개를 냈으니 나중엔 4개를 다 받아야 한다.” 말투와 행동 모두 거침이 없는 첫인상은 강렬했다.
이상종 박사를 만난 건 2011년 12월 중순 불가리아의 소피아 공항에서였다. 우연이라면 우연이었다. 당시 ‘사라지는 세계 장수촌’이라는 신년 특집 기획기사를 준비하기 위해 출장에 나서면서 불가리아 주재 한국대사관에 통역하실 분을 소개해 달라고 부탁했다. 대사관 관계자는 “젊은 분과 나이 드신 분이 있는데 누가 좋겠냐”고 했다. 나이 드신 분이 좋다고 했다. 현지 경험이 많을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였다. 그러자 예상치 못했던 추가 설명이 이어졌다. “예. 참고로 그분은 북한 출신입니다.”
함경남도 영흥군(현 금야군) 출신인 이 박사는 북한 체제에서 촉망받던 과학도였다. 1956년 9월 불가리아 소피아대에 입학한 그는 1962년 8월 동료 북한 유학생 이장직, 최동준, 최동성 씨와 함께 세상을 깜짝 놀라게 만들었다. 냉전이 치열하던 1962년 김일성 당시 북한 수상의 유일지배 독재에 반대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6·25전쟁은 북한이 일으킨 침략전쟁이고 북한이 말하는 경제개발계획은 허구이며 김일성 선집보다는 성경을 읽는 게 낫다는 요지였다.
이 박사는 그 이후의 과정이 쉽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불가리아 북한 청년동맹 회장을 맡았던 내가 그런 성명을 냈으니 북한 노동당에서 ‘내가 미쳤다’고 생각했겠지. 북한이 발칵 뒤집혔어. 유학생 4명 모두가 불가리아 주재 북한대사관에 끌려갔지. 8월 5일에 끌려갔다가 9월 27일 감시가 느슨해진 틈을 타서 면도칼로 카펫을 찢어서 묶은 뒤 창문 밖으로 내려와서 도망쳤어.”
그렇게 북한 유학생들은 불가리아로 망명했고, 양국은 6년간 교류를 중단했다.
나중에 그가 알게 된 사실은 불가리아의 논문 지도교수와 학장들이 그가 북한에 끌려가지 않도록 하기 위해 공항과 검문소 등을 감시했다는 것이다. 한 친구는 망원경으로 북한대사관의 움직임을 지켜봤다고 했다.
그는 불가리아 국적을 취득하지 않고 약 30년간 망명자로 살았다. 한국과 불가리아가 수교하자 1992년 1월 한국 국적을 취득했다.
이 박사의 얘기를 꺼낸 것은 그가 돌아가셨다는 말을 뒤늦게 전해 듣고 안타까운 마음부터 들었기 때문이다. 그를 마지막으로 분단의 아픔을 간직한 불가리아 유학생 4명 모두가 이젠 다른 세상으로 떠났다.
그와 함께 불가리아 장수촌을 구석구석 돌아다닐 때 김정일 국방위원장 사망 소식이 전해졌다. 아들인 김정은이 3대 세습으로 권력을 물려받을 것이라는 뉴스가 나오자 이 박사는 “일가족이 아닌 사람이 권력을 잡았다면 북한이 새로운 정책을 펼 수도 있겠지만…. 가족이 권력을 잡았으니 자기 할아버지, 아버지가 했던 것을 그대로 따라가겠지”라고 했다.
최근 진행된 북한의 노동당 창건 70주년 열병식을 보면서도 그의 예상이 맞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비용이 무려 14억 달러(약 1조6079억 원)로 추정될 정도로 많은 인력과 장비를 동원한 과거지향형 행사였다. 김정은 노동당 제1비서가 ‘인민’을 97번이나 언급할 정도로 강조했지만, 진정으로 인민을 위하는 길은 군사력 강화와 선전보다는 다른 데 있는 게 아닐까.
김영식 정치부 차장 spear@donga.com
□ 2015-10-16 “한국 정부 대접 옹졸하기 짝이 없다”
[신동아 10월호/포커스]
제3국 망명 北 노동당 간부들
● 2014년 이후에만 10여 명 제3국 망명
● “한국에 와 좋을 게 뭐가 있습니까”
▲“중앙당 간부가 한국에 들어와 좋을 게 뭐가 있겠습니까. 나도 서울에 온 거 후회하고 있는데….”
북한 노동당 간부로 일하다 망명한 A씨는 이렇게 말했다. 외환 전문가로 유럽에서 일하다 탈북한 B씨의 얘기도 비슷하다.
“한국 사람이 탈북자와 대화할 때 관심 갖는 것은 딱 하나예요. 북한이 어떤 곳인지 확인하는 것 외에는 대화를 나누려고 하지 않아요. 비즈니스 파트너로 여기는 사람은 없다고 보면 됩니다.”
B씨는 서울에서 금융 관련 사업을 하다 실패했다. 명문 사립대를 졸업한 B씨의 아들은 여덟 살 때 한국에 왔다. 어린 나이에 외국 생활을 했기에 평양은 기억조차 하지 못한다.
고위급 망명자 2명뿐
“한국 사람과 다를 게 아무것도 없는 아들이 취업을 못해요. 아들보다 못한 녀석도 합격한다더군요. 큰 기업이 탈북자에게는 일자리를 잘 안 줍니다. 입사하면 국정원이 이런저런 간섭을 하지 않겠느냐는 걱정도 한다더군요. 아이들은 차별받지 않으리라 여겼는데…. 그렇지 않더군요. 혼자 탈북해 북한으로 돈을 부쳐주며 살았으면 좋았을 텐데….”
B씨는 “아들이 북한에서보다 훨씬 나은 교육을 받았으되 아버지 탓에 인생은 꽝이 됐다”면서 눈시울을 붉혔다. 김일성대를 졸업한 C씨는 이렇게 말했다.
“요즘 북한 경제도 좋아졌다 하고, 중앙당 간부들이야 먹고살 만한데 한국에 올 이유가 없죠. 선생 같으면 위험 부담을 감수하겠어요?”
7월 초순 북한군 장성을 포함한 고위급 인사들이 북한을 탈출해 한국에 들어왔다는 보도가 쏟아졌다. 한 일간지가 “김정은 공포 통치에 탈출 러시가 인다”고 보도한 후 망명설이 연거푸 터진 것. 군부 실력자 중 하나인 박재경 대장 망명설이 돌더니 박승원 상장의 이름도 거론됐다.
정부가 고위급 인사 망명은 사실이 아니라고 공식 확인하면서 언론만 머쓱하게 됐다. 앞서 7월 17일 발행된 ‘신동아’ 8월호는 “김정은 집권 후 한국에 망명한 고위급 인사는 단 1명도 없다”고 보도한 바 있다(‘평양판 엑소더스의 진실-北 고위급 망명 全無’ 제하 기사 참조).
김정은 집권 이후 한국으로 망명한 노동당 출신 인사는 5명에 그친다. 그중 가장 직급이 높은 이가 노동당 ‘중앙당 과장급’이다. 북한 김정은의 공포통치로 동요한다는 국가정보원의 분석이 사실이라면, 망명 공작 성과가 미미하다는 지적도 나올 수 있다. 한 북한 전문가는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1년에 1명 남짓 꼴로 망명한 셈인데 남북의 체제 격차와 김정은 집단의 행태를 고려할 때 매우 적은 숫자다. 최근에는 영향력 있는 사람들이 탈북하지 않느냐는 견해도 사실에 어긋난다. 두어 사람이 꽤 많은 돈을 갖고 망명했는데, 돈 가져온 것만 보고 영향력이 있다고 잘못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 김정일 집권 이후로 범위를 넓혀도 한국에 망명한 북한 고위인사는 달랑 2명뿐이다. 한국의 정보기관이 도대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르겠다.”
한국 언론이 ‘탈북 고위 인사에 따르면’ ‘고위급 탈북자가 밝혔다’ 식으로 보도한 것은 황장엽(1923~2010) 전 노동당 비서와 함께 ‘유이’한 고위급 탈북자인 ○○○ 씨를 인용한 것이 아니면 취재원의 신상을 과장한 것이다. 김정일 집권 이후 한국 기준으로 차관급 이상 직위에 있다가 망명한 고위 인사는 ○씨와 황 전 비서가 전부다.
CNN의 오보
5월 11일 미국 CNN에 ‘고위급 탈북자’라는 박모 씨가 등장했다. CNN은 서울에서 인터뷰를 진행했다. 방송은 ‘북한 최고위층이던 사람 중 한 명’이라고 박씨를 소개했다. 어두운 실내에서 뒷모습, 옆모습만 촬영하거나 실루엣으로 처리했으나 평양 말씨의 음성은 변조 처리하지 않았다. 박씨는 “지난해 5월 5일이나 6일 김정은이 김경희를 독살하라고 지시했다. 처음에는 김정은의 경호를 맡는 974부대 정도만 독살 사실을 알고 있었으나 현재는 고위 관리들도 알고 있다”고 주장했다.
올 초 한국에 입국한 박씨는 ‘북한 최고위층이던 사람 중 한 명’이 아니다. 박씨의 북한 정보에 대한 당국의 시각도 이 인터뷰로 인해 교정된 것으로 알려졌다. 정부는 ‘김경희가 살아 있는 것’으로 파악한다. 박씨는 김경희의 안위를 파악할 수 있는 위치에 있지도 않았다.
노동당 과장급 인사인 박씨가 북한에서 사용한 이름은 이○○다. 신분 보호를 위해 한국에서 다른 이름을 사용하는 예가 많다. 박씨는 노동당 39호실 출신 탈북자로 언론이 북한 고위인사 망명 오보를 내는 데 단서가 됐다. 서울에서 다양한 사람을 만나면서 탈북 사실이 알려졌는데, 박씨 망명이 ‘고위급’으로 둔갑하고, 언론이 속보 경쟁을 벌이면서 “망명 행렬이 이어진다”는 오보가 나온 것이다.
복수의 정통한 대북 소식통에 따르면 김정은 집권 후 숙청을 비롯한 공포 정치가 이어지면서 김정일 집권 시기보다 훨씬 많은 당·정·군 간부가 북한을 이탈했다. 국정원은 2월 “김정은이 ‘튀다튀다 보위부까지 튄다’는 말을 했다”고 국회에 보고했다. “김정은 집권 이후 총살된 당·정·군 간부가 70명이 넘는다”는 게 국정원의 설명이다. 당 간부들이 북한을 이탈하는 것은 신변에 위협을 느꼈거나 비위 사실이 적발되거나 적발될 소지가 있을 때인 경우가 많다고 한다. 더 나은 삶을 찾거나 소신에 따라 탈북한 경우도 있을 것이다.
“왜 서울에 와서 고생합니까”
정통한 대북 소식통은 “2014년 이후에만 군부 인사를 비롯해 해외에 파견된 간부 10여 명이 제3국에 망명했다”고 전했다. 중국, 동남아시아 등지에서 근무하던 이들이 어느 날 잠적하거나 평양의 귀국 명령에 응하지 않고 다른 길을 간 것이다. 올해 탈북한 북한군 좌급(한국의 영관급) 인사 1명도 중국에 체류 중인데, 이 인사 탈북이 박재경 대장, 박승원 상장 망명설로 둔갑한 것으로 보인다. 김정일 시대에 탈북한 장령급(한국의 장성급) 인사가 정치적 망명을 해 중국에 거주하며, 호주에 망명해 조용히 사는 노동당 간부 출신 탈북자도 있다. 지난해엔 러시아 극동지역 조선대성은행 지점에서 일하던 간부가 은행 돈을 들고 잠적했다.
소식통은 “김정은 집권 이후 탈북한 노동당 간부 중 중국에 정착한 이가 가장 많다. 베이징이 용인한 망명이기에 평양이 돌려보내달라고 요구하지 못한다”면서 “동남아시아 국가들과 러시아에서도 북한 당국의 소환에 응하지 않고 간부들이 잠적했다”고 말했다.
‘튀다튀다 보위부까지 튀는’데도 한국이 아닌 제3국을 선택하는 탈북 간부가 더 많은 것이다. 노동당 간부 출신의 한 망명자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중앙당 간부쯤 되면 한국에 와 있는 사람들이 이곳에서 어떤 대접 받으면서 어떻게 사는지 잘 알아요. 해외에서 일하면서 챙겨둔 돈이 있다면 어떤 선택을 할까요? 일자리도 한국보다 제3국이 더 찾기 쉬울 거예요. 평양에서 별 탈 없이 지내는 간부라면 서울에 올 까닭이 전혀 없고요. 바보가 아닐진대 기득권을 버리고 왜 서울에 와서 고생합니까.”
평범한 탈북자들의 제3국행도 증가한다. 북한군 복무 중 휴전선을 넘어 탈북한 주승현 민주평통 자문위원(정치학 박사)은 ‘신동아’ 8월호 기고문에서 이렇게 지적했다.
“1998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질 때까지 동독에서 서독으로 넘어온 탈출자 350만 명 중 제3국행을 택한 이는 극소수인데, 우리는 탈북자 중 상당수가 제3국을 선택한다. 통일을 위해서는 북한에 사는 사람들의 마음을 얻어야 하는데, 북한 주민은 탈북 후 한국에 정착한 고향 사람들의 삶을 보면서 통일 후 자신들이 받을 대우와 삶의 질을 가늠할 것이다.”
사족(蛇足) : 1997년 괴한의 총탄에 맞아 숨진 김정일 처조카 이한영 씨를 논외로 하면 사망한 황장엽 전 노동당 비서와 함께 유이한 고위급 탈북자인 ○○○ 씨는 고령이다. 본인과 북한에 남은 가족의 신변 보호를 위해 신상이 공개되지 않았다.
2010년 김성환 당시 대통령외교안보수석비서관이 천안함 폭침이 북한 소행이라는 것을 설명하는 기자간담회에서 이 인사의 증언을 소개하면서 신상의 일부를 밝히는 잘못을 저질렀다. 이 글에서도 김 수석이 당시 공개해 알려진 내용만으로 그를 소개할 수밖에 없다. 그는 공학자 출신으로 북한에서 해군 무기체계 관련 직종에 오랜 기간 종사했으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을 지냈다.
그는 현재 김일성에 반대하다 해외에 망명한 박갑동, 이상조, 정추 씨 등이 1991년 조직한 ‘구국전선’이라는 조직의 책임자를 맡고 있다. 구국전선의 실제 활동은 지지부진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2013년 박근혜 정부가 들어선 후 국정원 산하 국가안보전략연구원에 적(籍)을 두게 됐다. 자문비 명목으로 활동비 및 생활비를 보조해준 것이다. 그는 고마워했다. 이듬해 국정원장이 바뀐 후 자문비 지급이 종료됐다. 한 인사는 “통일 과정의 자산인데, 정부 대접이 옹졸하기 짝이 없다”고 꼬집었다.
송홍근 기자 | carrot@donga.com <이 기사는 신동아 2015년 10월호에 실린 기사입니다>
□ 2015.10.21 황병서 직속 중견간부 1명, 지난 4월 중국근무중 귀순
국가정보원은 20일 국회 정보위원회 국정감사에서 "올 들어 우리나라에 귀순한 북한의 해외 주재관이 20명에 달한다"고 밝혔다. 이 중에는 북한 권력층 핵심인 인민군 총정치국 소속 간부도 포함된 것으로 알려졌다.
이병호 국정원장은 이날 국감에서 "북한의 해외 주재관 출신 귀순자가 2013년 8명, 2014년 18명에서 올해(1~10월) 20명으로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며 "올해 귀순한 20명은 현재 전원 국내에 체류 중"이라고 밝혔다. 이 원장은 "귀순자 중에는 고(故) 황장엽 전 북한 노동당 비서 수준은 아니지만 상당한 수준의 엘리트 탈북민도 있다"고 했다.
이와 관련, 대북 소식통은 "북한 인민군 총정치국 소속 중견 간부 1명도 지난 4월 귀순했다"고 전했다. 이 간부는 총정치국 소속 820부대 산하 무역회사에 파견돼 중국 베이징에서 근무하던 중 탈북해 국내에 들어온 것으로 전해졌다. 총정치국은 북한 군(軍) 전체를 감시·통제하는 곳으로 북한 권력의 핵심 중 핵심 조직이다.
황병서 총정치국장은 김정은 노동당 제1비서에 이어 북한 내 권력 서열 2위에 해당한다. 앞서 올 초에는 김정은의 비자금을 담당하는 노동당 39호실에서 홍콩에 파견됐던 중견 간부도 가족과 함께 망명, 국내에 들어온 것으로 전해졌다.
박근혜 대통령은 지난 6월 워싱턴포스트 인터뷰에서 북한 간부들의 탈북이 잇따르고 있다고 언급한 바 있다. 북한에서 해외 주재관은 '성분(成分)'이 최상급에 속해야 나갈 수 있으며, 대부분 대사관이나 외화벌이 업체 직원 등으로 위장한 당·정·군의 핵심 인력들이다.
조선일보 이옥진 기자
□ 2015-11-18 거액 들고 온 탈북 관료들 “돈이 최고야”
편의상 그를 A씨라 부르기로 하자. 서울에 온 지 그리 오래 되지 않은 그는 북한 권력핵심의 비자금을 운용하는 것으로 지목돼온 부서에서 일했다.
제3국에 파견돼 그가 담당했던 임무는 주로 자금세탁과 본국 송금. 가족과 함께 서울행을 택한 A씨는 지금 강남 지역 아파트에 거주하고 있다.
A씨의 한국 생활이 보통의 탈북자와 다른 가장 큰 이유는 그가 들고 온 엄청난 규모의 돈 때문이다.
한국에 온 후 관계기관의 합동심문을 받으며 두 달 남짓 안전가옥에 머문 그는 정착지원시설인 하나원을 거치지 않고 곧바로 서울살이를 시작했다.
고가의 외제 승용차를 구매하는 등 강남 부유층의 라이프스타일이 이내 그의 것이 됐다. 오랜 기간 외국에서 살아온 A씨와 가족에게 서울에서의 삶이 딱히 새롭거나 불편할 것은 없었다.
정확한 규모는 본인만 알겠지만, 탈북자 사회에서는 그가 들고 온 자금 규모가 500만 달러(약 56억7000만 원) 안팎이라고 알려져 있다.
“자금이전 협조해달라” 사전에 담판
10월 20일 국가정보원은 국회 정보위원회 국정감사에서 최근 3년간 탈북해 한국에 입국한 북한 해외주재관이 46명에 이른다고 밝혔다.
2013년 8명, 2014년 18명, 올해는 10월까지 20명으로 증가폭이 가파르다. 2009년 한 해 3000명에 육박했다 2014년 1400명 수준으로 떨어진 전체 탈북자 수의 감소 추세와는 정반대다.
그러나 이들 가운데 얼굴을 드러낸 이는 한 명도 없다. 떠들썩한 기자회견도, 북한의 현실에 대한 규탄도 없다. 정부 당국이 중간간부 이상 관료 출신에게 제공해온 산하 연구기관 자리를 마다하는 경우도 드물지 않다.
가장 큰 이유 가운데 하나는 이들 가운데 상당수가 거액의 도피자금을 마련해 서울행을 택했다는 사실이다.
이전 시기 탈북 관료들이 우발적인 이유로 정치적 망명을 택하는 경우가 많았다면, 이들은 꼼꼼한 사전 계획과 준비 작업을 거쳐 ‘더 나은 삶의 조건’을 누릴 수 있는 공간으로 한국을 택한 경우다.
정확한 통계는 없지만, 탈북자 사회에서는 대략 최근 입국한 해외주재관 출신 중 절반가량은 수백만 달러 안팎의 비자금을 갖고 들어오는 것으로 추산한다.
궁금증은 하나로 모인다. 왜 최근 수년간 이런 사례가 늘고 있을까. 전문가들과 탈북자 사회에서 내놓는 해석은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김정은 체제가 들어선 이후 ‘외화벌이’에 대한 압박이 엄청나게 늘었다는 사실이다.
마식령스키장을 비롯한 건설 프로젝트나 당 창건 70주년 열병식 같은 초대형 행사 등 체제과시용 사업이 줄을 이으면서, 해외주재관들에게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자금을 모아 송금하라는 지시가 하루가 멀다 하고 쏟아지고 있다는 것.
거꾸로 말하면 이전에 비해 돈을 만지는 사람의 수가 늘었고, 한 사람이 관리하는 자금 규모도 커졌다는 의미다. ‘딴 마음을 먹을 수 있는’ 개연성이 전례 없이 높아진 셈이다.
다른 하나는 김정은 체제의 구축과 함께 진행된 권력엘리트 지형도의 변화다.
이 과정에서 상당수 권력자가 실각하는 바람에 측근에 해당하는 인사들이 다른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으리라는 시각이다.
엄밀히 말하자면 풍문에 가깝지만, 장성택 전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제1부위원장이 관리하던 비자금 가운데 상당 부분의 행방이 묘연하다는 이야기도 흔히 함께 거론되는 레퍼토리다.
차명계좌 등의 형식으로 그의 개인 금고지기 노릇을 하던 이들이 자금을 챙길 수 있게 됐을 것이라는 추측인 셈. 한 탈북 인사의 말이다.
“장승길 전 이집트 주재 북한대사나 김정은의 이모인 고영숙 등 이전의 고위급 탈북자 상당수는 미국을 망명지로 택했다. 1997년 이한영 씨 피살사건을 계기로 ‘서울도 안전하지 않다’는 인식이 퍼진 탓이다.
그러나 망명 조건이 까다로운 미국은 개인자금을 들고 가기가 쉽지 않다. 횡령 등 범죄와 연관됐을 가능성이 있다면 더욱 그렇다.
하물며 난민 신청을 해야 하는 중간간부급이라면 두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반면 한국은 얼마를 들고 들어오든 문제 삼지 않는다. 오히려 더 많이 갖고 올수록 북한 체제에 타격이 될 것이므로 반기는 기색마저 역력하다.”
실제로 해외에서 생활하던 경우라 해도 거액의 자금을 한국까지 갖고 오기란 간단한 일이 아니다.
달러화나 유로화로 현금화하기도 어렵지만, 현지 세관의 감시를 피해 그 정도 돈을 갖고 비행기를 타기도 어렵기는 마찬가지.
결국 대부분은 조세피난처 국가의 금융기관에 차명계좌를 만들어 입금한 다음 한국에 정착한 뒤 회수하는 방식을 택하지만, 이 역시 넘어야 할 장애물이 있다.
서울 정착과 함께 여권 등 신분이 바뀌므로 본인임을 입증하기가 까다롭다는 것이다.
“돈만 있으면 서울이 미국보다 낫다”
이 때문에 적잖은 경우 한국 정보당국과 사전에 협의해 자금 이전 작업에 도움을 받는다는 게 탈북자 사회의 정설이다.
쉽게 말해 “내가 서울에 갈 테니 이러저러한 편의를 봐달라”고 미리 조건을 내걸어 담판한다는 것.
원래는 합동심문 과정에서 압수하게 돼 있는 북한 여권을 당분간 소지할 수 있도록 허용하는 방식이 대표적이다.
한 전직 정보당국자는 “그러한 ‘협조’를 통해 더 많은 탈북자가 서울에 올 수 있다면 실적을 쌓아야 하는 해당 부처로선 마다할 이유가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거액을 들고 온 최근 탈북자들의 경우, 탈북자 단체의 활동이나 모임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당국과의 접촉도 최소한 선에서만 유지한다는 것이다. 간섭도 마다하고 자유롭게 살기를 원한다는 이야기다.
당장 국가정보원 산하 연구기관에서 일할 경우 해외여행도 자유롭지 않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로 평범한 출신의 다수 탈북자 사이에서 이들에 대한 시선이 그리 곱지 않은 편. ‘북에서는 관료로 잘 먹고 잘살고, 남에서는 들고 나온 돈으로 잘 먹고 잘산다’는 시각이다.
실제로 탈북자 한 명에게 정부가 제공하는 정착 지원금이나 포상금 규모는 이전에 비해 크게 줄었다.
소형 임대아파트 보증금이나 정착 초기 기초생활수급자 자격으로 받는 생활자금, 자격증 취득에 대한 격려금 등을 모두 합쳐도 최대 3000만~4000만 원 수준이라는 게 이들의 설명이다.
관계당국에 제공하는 정보의 양과 질에 따라 제공되는 포상금 역시 1989~90년대에는 1억 원을 넘는 경우도 있었지만, 탈북자 수가 크게 늘어난 요즘에는 중간간부급의 경우 수백만 원 안팎에 그친다고 한다.
혈혈단신 맨몸으로 3년 전 서울에 왔다는 한 탈북 관료는 “역시 서울에서는 돈이 최고인 모양”이라며 씁쓸히 웃었다.
출처 : 주간동아 1012(11월9일자) 황일도 기자 shamora@donga.com
□ 2015.12.17 "찰거머리처럼 달라붙겠다, 북한인권법 위해서"
[탈북자 출신 反北운동 마영애씨 "북한인권법 통과를" 뉴욕서 날아와]
"한국만 10년 넘게 처리안돼… 北동포들에게 죄 짓는 것"
- 美서 '찰거머리 시위' 유명
남편 처형된 後 투사 변신
北 고위직 따라다니며 7년간 70차례 피켓시위
화난 北, 비방 방송까지
지난 9월 27일(현지 시각) 오후 6시 50분 미국 뉴욕 유엔본부에서 기조연설을 마치고 북한 대표부 사무실로 들어가던 리수용 북한 외무상 앞에 한 여성이 불쑥 나타났다. 2001년 탈북한 북한 인권운동가 마영애(52·사진)씨였다.
리 외무상과 수행원들이 당황해 멈칫하는 사이 마씨는 둘둘 말아 손에 들고 있던 종이를 펼쳐 들었다. 종이에는 '김정은, 국제사회를 위협하는 핵을 당장 포기하고, 정치범 수용소 해체하라'는 글이 적혀 있었다. 문구를 읽은 리 외무상은 굳은 표정으로 쫓기듯 발길을 옮겼다.
▲(왼쪽 사진)마영애씨. (오른쪽 사진)탈북자 마영애씨가 2009년 10월 뉴욕 북한 대표부 앞에서 신선호(가운데) 당시 유엔 주재 북한 대사를 쫓아가며 1인 피켓 시위를 벌이는 모습. /마영애씨 제공
미국 뉴욕 인근에 거주하는 마씨는 북한 외무성 관계자들 사이에서 '찰거머리'라고 불린다고 한다. 북한 고위직 인사가 뉴욕을 방문할 때마다, 그들의 일정과 동선을 파악해 따라붙어 '1인 시위'를 벌여 왔기 때문이다. 마씨는 이들 앞에서 북한 정권을 비판하는 내용이 적힌 피켓을 흔들며 '김정일·김정은을 국제사회에서 심판해야 한다' 같은 구호를 외쳐댄다. 전(前) 유엔 주재 북한 대사 신선호를 비롯해 자성남 현 유엔 대사 등이 미국에서 마씨의 시위에 걸려 곤욕을 치렀다. 마씨가 지난 2009년부터 7년간 미국에 있는 북한 고위직 인사 앞에서 벌인 시위만 70여회에 달한다.
그런 마씨가 최근 한국을 찾았다. 북한인권법 제정을 촉구하기 위해서다. 자유민주연구원이 오는 28일 북한인권법 제정을 주제로 여는 세미나에 참석하는 마씨는 16일 본지 인터뷰에서 "2004년 미국을 시작으로 일본과 유럽 등 세계 주요 국가들이 북한인권법을 제정했는데 정작 당사자인 한국만 10년 넘게 법안 처리를 하지 않고 있다"며 "한국 정치권을 이해할 수 없다"고 분통을 터뜨렸다. 한국에선 17대 국회 때인 2005년 8월 북한인권법이 발의됐지만 국회 임기가 끝나면 폐기되고, 다시 발의되는 일을 11년째 되풀이하고 있다.
마씨는 "이번 국회마저 내년 5월 임기 만료 전에 북한인권법을 처리하지 못하면 북한 동포들에게 큰 죄를 짓는 것"이라고 했다. 마씨는 2001년 단신(單身)으로 탈북해 그해 한국에 정착했다. 처음엔 서울 송파구에서 자그마한 식당을 했다. 그러다 2004년 지인을 통해 북에 남아 있던 남편이 처형당했다는 소식을 들었고 2006년 미국 정부에 망명 신청을 했다. 마씨는 "아내가 탈북했다고 남편을 죽이는 나라에 우리 동포가 2000만이나 사는데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며 "북한 인권 문제를 제기하기엔 미국이 더 낫겠다고 생각해 생면부지 나라로 건너갔다"고 말했다.
마씨는 그간 미국 50개 주(州)를 돌며 북한 인권 보호를 촉구하는 서명운동을 벌이는 등 미국 사회가 북한 인권 문제에 관심을 갖도록 하는 일에 앞장서 왔다. 마씨가 북한 고위 관료들을 상대로 '찰거머리 시위'에 나선 것은 2009년 무렵부터라고 한다. 2009년 10월 뉴욕의 북한 대표부에서 나와 유엔 본부로 걸어가는 당시 신선호 주(駐)유엔 북한 대사 앞에 갑자기 뛰어들었다. 마씨는 "내 남편 살려내라"고 소리치며 신 대사를 50m 정도 따라갔다. 이 장면은 현장에 있던 기자들에게 포착돼 전 세계 여러 매체에 보도됐다. 2010년 5월에는 유엔 주재 북한 차석 대사였던 한성렬이 마씨의 시위를 피해 차가 내달리는 도로를 무단 횡단해 도망가는 모습이 외신에 보도되기도 했다.
이런 마씨의 시위에 북한 외교관들은 "죽여버리겠다"고 위협했다고 한다. 마씨의 집으로 한밤중에 "도끼로 대가리 까고 이빨 뽑아버린다"는 정체불명의 전화도 수시로 걸려왔다. 지난해 3월 12일에는 북한 조선중앙통신에서 마씨를 맹비난하는 특집 방송을 내보내기도 했다. 방송 10일 전 마씨가 자성남 유엔 대사 부임 후 첫 출근길에 따라붙어 시위한 것에 대한 보복이었다.
그러나 마씨는 "북한의 저열한 협박과 공갈에 무릎 꿇을 것 같으면 탈북하지도 않았다"고 했다. 그는 "한국 국회가 하루빨리 북한인권법 제정에 나서 달라"고 호소했다
문현웅 기자
□ 2015.12.27 우리는 지금 통일 예행 연습 중입니다
자유를 찾아 남한에 온 지성호씨는 꽃제비(먹을 것을 찾아 헤매는 북한 어린이)였다. 함경북도 회령시 세천노동자구(區), 두만강이 흐르는 학보탄광마을이 그의 고향이다. 그는 열세 살부터 부모님을 따라 달리는 열차에 몸을 던졌다. 석탄을 실어 나르는 화물열차에서 석탄을 훔쳐다 팔았다. 열여섯 살이 된 어느 날, 속도를 줄이지 못한 열차에서 뛰어내리지 못하고 매달려 있다 사고를 당했다. 왼쪽 팔과 다리가 떨어져 나갔다. 먹을 것이 없어 수백만 명의 사람들이 죽어간 시절이었다. 한쪽 팔과 다리만 남았을 때 그는 생각했다. ‘가족에게 짐이 될 순 없다.’
목발을 짚고도 달리는 열차에서 석탄을 훔쳐 파는 꽃제비 생활을 이어갔다. 배짱 두둑한 성격 덕분에 석회 장사(북한에선 페인트가 귀해 석회석을 구운 생석회로 칠을 한다)로 돈도 벌었다. 돈을 벌기 위해 위험한 월경(越境)도 주저하지 않았다.
돈을 많이 버는 만큼 소문의 꼬리도 길어져 보위부 사람들 귀에 들어갔다. 버는 만큼 뜯겼다.
수차례 보위부로 끌려가 고문을 당했다. ‘다음에 잡히면 죽이겠다’는 협박도 무서웠지만 ‘병신’이라는 말이 치가 떨리게 싫었다.
죽음을 각오한 탈출 행렬
2006년 어느 날, 엄마와 여동생이 먼저 국경을 넘었다. 그와 남동생이 뒤를 따랐다. 마지막까지 고향에 남아 있던 아버지는 두만강을 건너다 잡혀 고문을 받다 죽었다.
탈북자들은 대부분 다시 북으로 돌아갈 바엔 죽는 게 낫다며 몸에 극약을 지니고 다닌다. 그 역시 마찬가지였다.
한쪽 팔과 다리만으로 중국에서 라오스・미얀마를 거쳐 태국까지 1만km에 이르는 여정을 견뎌냈다. 20여 일에 걸쳐 한여름의 열대지방을 통과했다. 길은 대부분 험난한 산맥이었다.
방콕의 난민수용소는 아비규환이었다. 건물 한 동에 50~60명의 난민이 수용됐다. 햇빛을 볼 수 있는 외부활동은 일주일에 두세 번뿐. 창살 없는 감옥이었다. 그는 석 달 만에 그곳을 빠져나올 수 있었다. 그의 장애에 대한 배려였다. 같은 곳에 수용됐던 동생은 열 달 가까이 수용소 생활을 했다.
비행기에 내려 한국 땅을 밟았을 때 휠체어를 갖고 마중 나온 정부 관계자를 보았다. 북한에서 장애인은 사람이 아닌 존재이지만 한국에서 장애인은 다르다는 사실에 감격했다.
한국은 상상했던 것 이상으로 잘살았다. 길 위를 가득 메운 자동차, 높게 솟아오른 고층 빌딩을 보고 있으면 자신이 마치 30년 후의 미래 세계로 온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하나원(북한이탈주민정착지원사무소)을 나와 충주에 자리를 잡았다. 낮에는 컴퓨터학원을 다니고, 밤에는 포장마차를 했다. 장사가 잘되는 날은 하루에 5만원도 넘게 벌었다. 여기선 적어도 굶어 죽을 일은 없겠구나 생각했다. 옆집 할아버지가 남한 땅에서 잘살려면 서울에 있는 대학을 나와야 한다고 했다. ‘서울 대학’ 가보고 싶다는 마음으로 충주에서 인천으로 갔다. 인천에서 대입 준비를 할 때 동갑내기 복지사를 만났다.
“성호씨, 남한 사람들과 어울려 살려면 탈북자들도 좋은 일 해야 해요.”
‘착하게 살자’는 생각이 아예 없었던 건 아니었다. 힘든 탈북 과정을 겪으며 ‘남한에 가면 통일을 위해 좋은 일을 하겠다’는 생각이 든 적도 있다. 지 대표는 알고 지내던 탈북자 40명과 봉사활동을 시작했다.
스물여덟의 나이에 동국대 회계학과에 입학했다. 스스로 시간표를 짜야 했고 수업을 알리는 종소리도 나지 않아서 놀라웠다. 입학식 후 첫 번째 수업은 〈경영학원론〉. ‘남한 말’도 어려운 게 태반인데 아예 모르는 영어로만 진행되는 수업이었다. 대학 공부를 포기해야 하나 싶었다.
영어 선생님 겸 함께 살게 된 룸메이트는 재미교포 선교사였다. 그에게 북한에서 어떤 일을 겪었고 어떻게 탈북했는지, 지금도 2400만 북한 주민들은 어떻게 살고 있는지 이야기를 들려줬다.
교포 선교사는 놀라기만 할 뿐 그의 이야기를 믿지 못하는 눈치였다. 그러더니 “왜 당신은 그들을 위해 아무것도 하지 않느냐”고 물었다. 그리고 “남한 사람을 비롯한 전 세계 사람들은 그들을 왜 모른 척 하느냐”고도 했다.
몇 달 뒤 성탄절 날. 얼어붙은 두만강을 건너 북한으로 들어가는 룸메이트, 로버트 박의 모습을 텔레비전 뉴스에서 보았다. 선교사였던 친구는 북한인권운동가가 되어 북한 국경을 넘었다.
“북한 주민과 아무런 관계없는 미국 시민권자, 로버트 박도 북한의 인권 개선을 위해 자기 몸을 던져 세계에 호소하는데 나중에 통일이 된 다음, 내가 과연 고향 사람들 앞에 떳떳하게 나설 수 있을까? 통일을 위해 그 어떤 노력을 다했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2400만 북한 주민의 자유를 위하여
2010년, 지 대표는 자신과 같은 탈북자, 남한에 와서 만난 친구 그리고 해외교포 청년 12명과 함께 북한인권단체 ‘나우(NAUH・Now Action & Unity for Human Rights)’를 만들었다.
거리에 나가 북한 인권 상황을 고발하는 전단지부터 나눠주기 시작했다. 대북라디오 방송에 출연해 북한 주민들에게 자유의 소리를 전했다. 남북청년 소통의 장을 마련, 남북 문화를 알리는 이벤트도 꾸준히 열고 있다. 국제사회에 북한의 현실을 고발하고 인권개선을 호소하는 일에도 적극적으로 나섰다. 최근에는 북한인권법 제정에 힘을 쏟고 있다.
지 대표는 지난 5월 26일 노르웨이 오슬로에서 열린 ‘오슬로자유포럼’의 24인의 연사 중 한 명으로 초청됐다. 세계 각국에서 모인 인권운동가와 정부 관계자 300여 명은 그의 이야기에 기립박수를 보냈다. 포럼이 끝난 후 주최 측인 국제인권단체 인권재단(HRF)은 나우를 돕겠다고 나섰다. 펀딩 사이트를 통해 사무실 임대 보증금을 마련해줬다.
탈북자 구출 후원 계좌에 후원금이 모이면서 탈북자 구출사업도 시작했다. 어린이와 여성, 장애인이 주 대상이다. 지금까지 100명이 넘는 사람을 남한으로 데려왔다. 작년 초 한 TV 방송 프로그램에 출연한 후 탈북자 구출 후원이 대폭 늘었다. 순식간에 1억원에 가까운 액수가 모였다. 나우 결성 5주년을 맞이한 올해는 10월 초 현재까지 49명의 탈북자를 구출했다.
“남한으로 온 탈북자 수가 2만8000명이에요. 우리는 이미 통일 예행연습을 하고 있다고 봐야 합니다. 남북 주민이 함께 살아가고 있으니까요. 통일은 정말 가까이 와 있습니다. 우리가 원하지 않아도 어떤 형태로든 통일은 현실이 될 거예요. 북한 주민의 불만이 최고조에 이르렀어요. 북한의 시장경제를 굴리는 것도 ‘돈’이 된 지 오래니까요. 자유민주주의와 자본주의를 향한 북한 주민의 열망은 흐르는 강물과도 같아서 누구도 막을 수 없을 겁니다.”
얼마 전 나우는 국제사회의 도움으로 엘리베이터가 있는 건물로 사무실을 옮겼다. 지난 2년 동안 지 대표는 낡은 건물 5층에 있는 사무실을 계단으로 오르내렸다. 한쪽 팔과 다리에 보조기구를 찬 그에게는 재래식 화장실도 고역이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사무실로 출근할 수 있어서 너무 좋다”는 지 대표. 그가 남한 땅에서 찾은 행복의 가치는 돈이 아니었다.
“자유 없는 나라에 자유를 돌려주고 인권을 박탈당한 사람에게 인권을 찾아주는 일, 죽음의 문 턱 앞에 선 생명을 살리는 일에 힘을 보탤 수 있다는 것이 제가 남한 땅에서 찾은 행복입니다.”
북한인권단체 나우(NAUH) 후원 문의 : 02-2271-2070
한정림 톱클래스 기자 사진 김선아
■ 2016-01-22 카메라에 꿈을 담는 탈북자 대표
복잡한 편집 장비와 촬영 도구들로 가득 찬 허철 대표의 스튜디오, 원코리아미디컴을 방문했습니다. 피디이면서 회사 대표인 그는 오늘도 새벽까지 편집 작업을 하느라 잠을 거의 못 잤다고 했지만, 목소리는 평소처럼 자신감과 당당함이 넘칩니다.
그는 북한이탈주민임에도 전문 기술과 예술성이 모두 요구되는 방송 영상 분야에서 전문가로서 입지가 탄탄합니다. 북한에서부터 영상 관련 일을 한 적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한국에 와 뒤늦게 영상 관련 일을 배우기 시작하였지만, 지금의 위치에까지 오른 것입니다.
영상 편집 장비나 촬영장비들의 모든 기능이 전문 영어로 되어 있는 것이 어렵지 않으냐는 질문에 그는 ‘감으로 했다’며 크게 웃었습니다.
지금은 농담처럼 웃으며 말할 수 있지만, 처음부터 그렇지 쉽지만은 않았습니다. 복잡한 편집 장비들의 기능들을 완벽히 익히기 위해서 수백, 수천 번씩 클릭하며 원하는 영상 결과물이 나올 때까지 작업을 반복하였다고 합니다.
자유로운 대한민국에서 태어나 젊었을 때부터 체계적으로 영상 교육을 받은 경쟁자들에게 뒤처지지 않기 위해서 그들보다 몇 배의 시간과 노력을 투자하는 방법밖에는 없었습니다.
하고 싶은 일, 잘할 수 있는 것을 발견하라
“우리 탈북자들은 마음이 너무 조급합니다. 한방에 큰돈을 벌고 싶어 합니다. 또 그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런 생각은 아직 자본주의 사회를 잘 모르는 것입니다. 한방에 큰돈을 버는 길은 없습니다. 우리보다 뛰어난 능력이나 재능을 가진 사람들이 대한민국에는 많고도 많습니다. 그렇게 똑똑하고 능력 많은 사람도 날마다 회사에 출근해서 힘들게 일하면서 월급을 받아 돈을 모읍니다. 돈은 호락호락 쉽게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허 대표는 1997년 고난의 행군 시기, 어렵게 가족들과 탈북한 후 국경선 주위의 깊은 산 속 과수원에 숨어서 근근이 생계를 유지하며 살았습니다.
하지만 깊은 산 속마저도 공안당국의 눈을 피할 수 있는 안전지대는 아니었습니다. 이후 공안의 단속을 피해 북경과 청도의 소도시로 숨어서 온갖 힘든 일들을 하며 살다가 우연히 라디오를 통해 남한 방송을 듣게 되었고 남한에 가기로 결심했습니다.
어느 날, 가족들과 함께 몽골 국경을 넘었다. 온종일을 걸어도 나무 하나 없는 광대한 사막을 걸으면서 그는 ‘자유를 얻기도 전에 사막에서 목말라 죽겠구나!’ 라는 절망감을 떨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말을 타고 순찰을 하던 국경 경비병에 의해 극적으로 발견되어 월드컵으로 온 국민이 들썩이던 2002년도에 남한으로 오게 됐습니다.
하나원을 수료한 후 가장 먼저 자동차정비기술자 자격증을 6개월 만에 취득하였다. 자격증을 손에 쥔 그는 이것만 있으면 어느 정비소에서든 쉽게 취업해서 일 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었습니다. 하지만 정비소 사장과의 첫 번째 면접 자리에서 큰 좌절을 경험하였습니다.
정비소 사장은 ‘나는 자격증을 원하지 않는다. 서울 연고대 같은 명문대 졸업장이 필요한 것도 아니고 지금 당장 나를 위해 돈을 벌어줄 수 있는 전문 기술자가 필요하다’고 말했습니다. 그 말을 듣고는 자본주의 사회가 이토록 치열하게 자신의 경쟁력과 실력을 키워야 하는 곳이라는 것을 깨달았다고 합니다.
그 후 자신의 경쟁력을 키우기 위해서는 남들이 하기 힘든 전문 기술을 익혀야 하겠다고 결심하고는 평일 주간에는 전문 방송기술을 배우고 주말과 야간에는 막노동해가며 가족의 생계를 책임졌습니다.
체력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무척이나 힘든 시기였지만 결코 대한민국 사회가 원망스럽지는 않았다고 합니다. 그래도 대한민국은 나만 노력하면 성공의 기회를 잡을 수 있는 사회인 데다 무엇보다 탈북 때와는 달리 원하는 일을 할 수 있는 자유가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하필이면 미디어 영상촬영 편집 전문가가 되었을까? 여기에는 어린 시절 기록영화 촬영소에 근무하던 아버지의 영향이 컸다고 합니다. 아버지가 매일 어깨에 메고 다니던 멋진 촬영 장비를 보면서 언젠가 자신도 저런 장비를 만지고 싶다는 생각을 어려서부터 했다고 합니다.
오랫동안 힘든 탈북 생활을 하며 그 꿈을 잊고 살다가 한국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게 되면서 어릴 적 꿈이 다시 생각났습니다. 어차피 새로 시작하는 일은 어떤 것이든 힘들기 마련이다.
이왕이면 꿈꿔 왔던 길을 걸어가자.
그때부터 지금까지 무려 12년 넘게 이 분야에서 포기하지 않고 한우물만을 파며 묵묵히 외길을 걷고 있습니다. 초창기에는 일거리가 거의 없어 힘든 시절도 있었지만, 지금은 실력과 경쟁력을 모두 인정받아 꾸준히 그에게만 의뢰하는 클라이언트들도 많이 늘어났습니다.
무엇보다 취재에 거부감이 많은 북한이탈주민을 대상으로 하는 영상을 촬영하거나 제작 시에 많은 주의가 요구되는 북한 관련 영상물에 관해서는 단연 그가 국내 최고 전문가입니다.
그는 지금도 작품 제작비를 받으면 대부분을 새로운 장비를 구매하는데 재투자합니다. 지금도 사무실 전체를 가득 메울 만큼 온통 촬영 장비와 카메라, 편집 시설을 갖추었지만 그는 항상 새로운 방송 장비에 욕심을 냅니다. 대한민국에서 경쟁력 있는 영상업체로 살아남기 위해서는 새로운 장비와 최신 기술을 계속 익히고 도입해야 한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마침 인터뷰 도중 허 대표의 휴대전화에 반가운 문자가 왔습니다. 얼마 전 남북하나재단 홈페이지 공고를 보고 ‘경영개선지원대상자 지원금’을 신청했었는데 그 대상 업체에 최종 선정이 되었다는 문자였습니다. 허 대표는 신청서를 제출할 때도 이렇게 썼다고 합니다.
“최신 촬영 및 편집 장비 구매에 최소 500만 원이 필요합니다. 200만 원만 지원해준다면 우리 회사에서 300만 원을 추가로 투자해서 그 장비를 꼭 장만하겠습니다.”
그런 일에 대한 열정과 굳은 의지가 심사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을 것입니다.
노력은 나를 배신하지 않는다!
고생에 비하면 큰돈을 버는 일도 아니고 잦은 지방 출장에 밤샘도 많은 일이지만 그는 지금도 이 일이 너무도 즐겁다고 합니다.
“사람마다 다 자기만의 능력이 분명히 있습니다. 그걸 발견하는 게 제일 중요합니다. 남들이 하니까, 돈을 많이 주니까 하는 게 아니라 쫓아다니지 말고 자기에게 있는 재능을 발견했으면 좋겠습니다. 그게 영상이면 어떻고 농사짓는 거면 어떻습니까? 내가 잘 할 수 있고 잘하는 거면 무엇이든 하면 됩니다.”
허 대표는 자기의 사상이나 생각을 언제든지 피력할 수 있는 자유가 있고, 일한 만큼의 보상을 받을 수 있는 이곳 대한민국에 감사한다고 말했습니다. 인터뷰가 끝나가면서 그는 자신만의 재치와 여유를 찾은 듯 호방하게 웃으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면 됩니다. 노력은 절대로 나를 배신하지 않습니다.”
인생의 좌우명이나 존경하는 인물이 있느냐는 기자의 마지막 질문에 그는 거침없이 ‘에디슨’이라고 답했습니다. 마치 다음은 무슨 질문이 있을지를 미리 알고 충분히 준비한 사람 같았습니다.
“에디슨은 전구 발명에 성공하기 전 1,200번이 넘게 실험에 실패할 무렵 과연 개발에 성공할 수는 있겠느냐는 기자의 비아냥 섞인 질문에 아직도 실험은 실패한 것이 아니며 전구가 켜지지 않는 방법을 벌써 1,200가지나 알아낸 것이라고 답변했다고 합니다. 멋있지 않습니까? 생각을 전환하면 어려움에도 좌절할 이유가 없습니다.”
허 대표는 안 된다고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될 때까지 노력하겠다는 긍정적인 의지와 도전정신이 있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성공을 위해 달리기보다는 하고 싶은 일을 오래 즐기면서 하고 싶다고 말하는 그는 언젠가 자기 손으로 영화를 만들어 보는 것이 최대의 꿈이라고 말합니다.
그의 소중한 꿈을 응원합니다.
출처: 남북하나재단 발행잡지 ‘동포사랑’
□ 2016.02.20 美, 탈북단체장들 불러 "지원예산 3배 늘려줄 것"
美, 반체제 활동도 적극 지원…
'북한판 4·19' 일어나게 한다 국무부, 지난달 北핵실험 직후 "300만달러에서 1000만달러로"
어제 한국서 예산지원 설명회
미국 정부·비영리단체가 북한 민주화 운동을 펼쳐온 국내 탈북 단체들에 대한 예산 지원을 예년에 비해 3배 이상 증액할 것으로 알려졌다. 미 국무부는 북한의 4차 핵실험 직후인 지난달 중순, K씨 등 국내의 대표적 탈북단체장 4명을 워싱턴으로 초청해 이 같은 방침을 밝히며 "미국은 올해 북한 정권 압박을 위한 탈북단체들의 활동에 가능한 모든 지원을 하겠다"는 입장을 전달한 것으로 19일 확인됐다.
이와 관련, 이날 서울 마포구의 한 사무실에선 탈북단체장 60여명이 모인 가운데 '미 국무부 예산 지원 설명회'가 열렸다. K씨 등이 국무부의 탈북단체 지원 계획을 설명하는 자리였다. K씨는 "오늘 설명회는 사실상 미 국무부가 주최한 것"이라고 했다.
그는 "지난달 13~16일 국무부의 긴급 초청으로 미국을 방문해 북한 체제 변화를 주제로 다양한 논의를 했다"며 "미 국무부 핵심 관계자로부터 '북한의 레짐 체인지(정권 교체)를 목표로 탈북단체들의 활동을 전폭적으로 지원하겠다'는 방침을 들었다"고 했다. 이와 관련, 워싱턴의 외교 소식통은 "국무부 차관보급 인사가 45분 동안 탈북 단체장들과 의견을 나눴다"고 했다.
특히 K씨는 "미국의 올해 탈북단체 지원 예산이 과거 300만달러에서 1000만달러(약 123억원)로 증액된다고 들었다"며 "미국의 대북 독자 제재가 본격 가동되는 것과 무관치 않다"고 말했다.
국무부는 2009년부터 국내 탈북 단체들에 연평균 300만달러를 지원했으나 2013년 미 정부의 재정 상황이 악화되며 대부분 끊겼다. 하지만 최근 미 의회가 대북 제재 강화 법안을 통과시키며 자금 지원의 길이 다시 열린 것이다. 미국 의회예산국(CBO)은 북한에 외부 정보를 주입하고 탈북자를 지원하는 데 매년 800만달러가 쓰일 것으로 추산했다.
탈북 단체 관계자는 "국무부 예산과는 별도로 NED(미국민주주의발전재단) 등 미국의 비영리 단체들도 올해 수백만달러를 지원할 예정"이라며 "탈북 단체들에 대한 미국의 총지원은 올해 1000만달러에 이를 것"이라고 했다.
K씨 등은 국무부 관계자들과의 면담에서 북한 인권 문제 홍보 활동, 대북 전단 살포, 북한 정보 수집과 북한 내부로의 정보 유입 활동 외에 북한의 해외 노동자와 해외 공관원 탈출 지원, 북 내부에 풀뿌리 민주주의 정착 활동, 북한 장마당 활성화 등 북한의 체제 변화를 촉진할 수 있는 다양한 활동에 대한 예산을 요청했으며, 이에 대해 긍정적인 회신을 받은 것으로 전해졌다.
K씨는 "과거 지원 분야가 단순한 북한 주민 인식 변화 활동에 그쳤다면 이제는 반체제 활동도 적극 지원하겠다는 것"이라며 "북한판 4·19나 5·18이 일어날 수 있는 저변을 다지겠다는 것"이라고 했다. 국무부 관계자는 탈북 단체 대표들에게 "사단법인이 아닌 단체도 북한 체제 변화를 위한 활동을 할 경우 자금 지원이 가능하다"는 입장도 전달했다고 한다.
K씨 등에 따르면 국무부 핵심 관계자는 "북한 주민을 위해 미국이 할 수 있는 일은 북한 주민이 자신의 미래를 스스로 결정하고 선택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라며 "북한 정권이 자기 주민들의 선택을 막는다면 결국 그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다. 미국 정부는 북한에 이런 메시지를 전달하고자 한다"는 말도 했다.
조선일보 김명성 기자
□ 2016-02-27 탈북 혜심이 기적의 7년
[혜심이의 기적… 탈북 소녀, 명문대 입학까지]
“간호학과에 입학하는 이혜심입니다.”
수강신청 방법, 학과 소개, 기숙사 안내…. 귀가 쫑긋 섰다. 교수님들이 하나씩 이야기할 때마다 혜심이(22·여·사진) 가슴이 콩콩 뛰었다. 정말 한국인이 된 것 같았다. 4일 혜심이가 앉아 있던 방에는 ‘이화여대 재외국민과 외국인 특별전형 신입생 오리엔테이션’이라는 안내판이 붙어 있었다.
7년 전 그날이 떠올랐다. 딱딱딱딱…. 잇소리가 경비대에까지 전해질까 봐 몸이 더 떨렸다. 10월이지만 배꼽까지 차오른 강물은 살짝 얼어 있었다. ‘저쪽에만 가면 엄마가 있을 거야.’ 다른 생각은 하지 않기로 했다.
한동안은 벙어리여야 했다. “국경을 넘을 때 들켜도 절대 알은척하면 안 된다”고, “같이 죽을 순 없다”고 중국 쪽 브로커가 했던 말이 귀에 맴돌았다.
태국 국경 앞에서 돈을 요구하는 사람들 때문에 붙잡혔다. 라오스에 있는 감옥은 12월인데도 따뜻했다. 하지만 몸은 두만강을 건널 때처럼 떨렸다. 한국에 들어온 건 그로부터 3개월 뒤였다.
하나원 교육을 마치고 2010년 9월 사회로 나올 때 걱정은 하나였다. 일반 중학교에 가서 따돌림당할까 두려웠다.
초중고교에 재학 중인 탈북 학생은 2008년 966명에서 지난해 2475명으로 늘었다. 하지만 이들은 언어와 학업, 편견에 부딪혀 적응을 어려워한다. 오늘의 혜심이도 없었을지 모른다. 학교와 지역사회의 관심이 없었다면….
▼ 배고픔보다 간절했던 공부… 두만강을 건넜다 ▼
휴대전화 불빛에 깨알같이 작고 꼬불꼬불한 글씨가 드러났다. 혜심이는 잔뜩 웅크린 몸 위로 이불을 더 당겼다. 새근새근 친구들의 숨소리가 들렸다. 혜심이가 입을 움직였다. ‘시-오-엔-시-이-아르-엔(concern).’ 밖으로 새어나오는 소리는 없었다.
상산고(전북 전주) 기숙사에선 자정이면 모든 불을 꺼야 했다. 소등 뒤 공부하는 게 사감 선생님에게 걸리면 벌점을 받았다. 15점이면 퇴소다. 학생이 적어도 6시간은 자야 한다는 게 학교 규칙이었다.
잠이 안 왔다. 1분 1초도 안 자고 꼴딱 밤을 새워도 시간이 모자랐다. 친구들보다 늦은 2년…. 아니, 정확히는 11년이었다. 혜심이가 풀 뽑고 밭을 갈 때 이곳 친구들은 학교에 있었다.
첫 수업 날. 무슨 과목을 배웠는지 떠오르지 않는다. 가슴이 미친 듯 쿵쾅거렸다는 느낌만 기억날 뿐이다. 선생님 말은 알아들을 수 없었다. 분명 한국말이었지만. 칠판을 보는 혜심이의 강렬한 두 눈이 심하게 흔들렸다. 슥슥슥 연필이나 볼펜이 노트 위를 바쁘게 오가는 소리가 앞뒤에서 들렸다.
꼴찌는 각오했었다. 어렵겠지만 열심히 하겠다고, 굳은 의지를 갖고 온 학교였다. 하지만 수업이 끝나고 혼자 공부할 때면 책상 위로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대체 내가 왜 여기 앉아 있을까?’
모든 과목이 어려웠지만 혜심이 성적표에 최악으로 적힌 건 늘 국어였다. ‘그래도 말은 알아들으니까’라고 생각했는데 국어는 혜심이 노력에 보답하지 않았다. 눈으로 읽을 수 있고 귀로도 들리지만 그게 어떤 의미인지, 무엇을 함축하고 있는지 머리와 가슴이 이해하지 못했다. 자연스럽게 배경 지식을 쌓아온 친구들과 갑자기 한국에 떨어진 혜심이의 차이였다.
그날 들었던 종소리는 아직도 공포스럽다. 입학 후 첫 모의고사 국어 문제지를 받아 든 날. 지문 2개를 간신히 읽었을 뿐인데 80분이 훌쩍 지났다. “21번 답, 1번이야 2번이야?” 하는 친구들 목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렸다. 거기까지 문제를 읽어보지도 못한 혜심이는 멍하니 앉아 있었다. 북한과 달리 모든 문제가 5지선다라 찍을 수라도 있는 게 다행이었다. 객관적 상관물이 뭔지, 주객전도가 무슨 뜻인지…. 외계어를 듣는 것 같았다.
한국에 와서 처음인 게 대부분이지만 특히 영어가 그랬다. 경북 포항 창포중에 2학년 2학기부터 다닌 혜심이 곁에는 늘 단어장이 있었다. 밥 먹을 때, 화장실 갈 때…. ‘엔-이-이-디.’ 여기 학생이라면 need를 ‘니드’라고 읽으며 뜻을 암기했을 터지만 혜심이는 오직 알파벳만 읽을 수 있었다.
큼직한 글씨에 한글과 그림이 적절히 섞여 있는 중학교 영어 교과서도 읽기 버거웠다. 그런데 상산고 영어 책(부교재)에는 한글이 하나도 없었다. 셜록 홈스 등 친구들은 자라면서 한 번쯤 읽어본 내용이고, 문장을 훑는 즉시 무슨 뜻인지 해석해냈다. 혜심이에겐 한 단어 한 단어가 높디높은 장애물이었다.
선생님 말이 외계어처럼 느껴지는 건 수학도 마찬가지였다. 수학 문제 앞에서는 늘 얼음 상태였다. 북한을 탈출할 때 쉴 새 없이 주변을 살피던 눈동자도, 불안에 덜덜 떨던 손도 수학시간엔 얼음처럼 굳어버렸다. 혜심이의 하루 공부 계획표에는 수학이 늘 10시간이었다. 주말, 도서관, 혜심이 책상 위에는 달랑 수학 책 한 권만 놓여 있었다. 빨간 펜으로 동그라미든 엑스든 표시되는 문제가 10개도 안 되는 날이 많았다.
젖을 먹어야 하는 아기에게 밥을 먹이는 것. 숟가락 젓가락 중 어떤 걸 써야 할지도 가르치지 않고 일단 밥만 먹게 한 것. 지금 와서 드는 생각이지만 혜심이는 자신이 한 공부가 딱 그 꼴이라고 생각했다. 중학교 때부터 늘 발등의 불을 끄기도 바빴다. 도덕 사회 체육 국어 영어 수학…. 가릴 것 없이 일단 달달달 외웠다. 어떻게 해서든 평균 점수를 올려야 하니까. 잘못된 줄 알았지만 달리 방법도 없었다.
남북하나재단의 ‘2014 탈북청소년 실태조사’에 따르면 탈북 청소년 중 48%가 학교생활에서 가장 어려운 문제로 ‘학교 수업 따라가기’를 꼽았다. 다음은 문화·언어 적응(14.9%), 친구관계(8.0%) 등이었다.
교육부에 따르면 지난해 탈북 학생의 학업중단율은 2.2%다. 2008년 10.8%였던 것에 비하면 많이 줄었지만 일반 학생의 학업중단율(0.8%)에 비하면 높은 수치다. 혜심이가 이 대열에 합류하지 않은 게 그나마 다행이다. 문제는 학년이 올라갈수록 탈북 학생들이 교육과정에 적응하기 어려워한다는 점이다. 탈북 학생의 학업중단율은 초교는 0.2%지만 중학교 2.9%, 고교 7.3%, 대학 9.8%로 올라간다. 혜심이에게는 보통의 탈북 학생과 어떤 다른 점이 있던 걸까.
꼴찌를 각오한 여정의 시작
중학교 3학년 8월 말, 혜심이 앞에 학교 소개 책자가 여러 권 놓였다. 담당 형사와 혜심이네 집을 찾아온 한 노신사가 내민 것이었다. 학생들이 직접 만들었다는 책자는 온통 영어로 돼 있었다.
“우리 상산고는 전국 단위 자율형사립고인데 공부 잘하는 애들만 모인단다. 매년 50∼60명은 서울대에 가니까 네가 와서 꼴찌만 안 해도 정말 잘하는 거란다.”
임현섭 교감(2014년 퇴임)이 말했다.
자사고? 처음 들어보는 말에 혜심이는 눈만 끔뻑끔뻑거렸다.
임 교감은 덧붙였다. “딱 한 가지, 학생들이 공부도 잘하고 형편이 좋은 경우가 많은데…. 그런 걸로 상처받지 않을까 걱정되는구나.”
혜심이는 불끈 주먹을 쥐었다. 그리고 바로 입을 열었다. “그런 건 전혀 신경 안 써요.”
임 교감이 웃었다. “공부하려는 열정은 충분한 것 같으니 오렴. 결정은 네 몫이다. 학비 걱정은 전혀 하지 말고.” 그는 다시 오겠다고 했다.
혜심이는 양손 검지만으로 키보드 위에 ‘ㅅ ㅏ ㅇ ㅅ ㅏ ㄴ ㄱ ㅗ’라고 쳤다. ‘학생들이 영어로 뮤지컬을 하잖아? 입학생 성적이 상위 3%(중학교 졸업 성적 기준)? 나는 상대가 안 될 텐데 괜히 가서 힘들지 않을까?’
잠시 머뭇거리던 혜심이 손이 빠르게 검색 창을 닫았다. ‘
여기서 평생 살 거고 힘든 날이 더 많겠지. 공부는 분위기가 반이잖아. 어차피 경쟁은 안 될 테니 친구들에게 배우자는 마음으로, 한번 가보자.’
진학을 결심한 혜심이 전화를 받은 임 교감이 수학 영어 교사를 데리고 다시 찾아왔다. 포항으로 가며 그가 두 교사에게 말했다.
“이 아이를 데려오면 당신들이 끝까지 책임져야 하는 겁니다. 당연히 입학 성적은 꼴찌겠지만 3년 동안 어떻게 잘 키워낼 수 있을지 연구하세요.”
2008년부터 상산고 교사들 지갑에는 전국 각지로 향하는 고속버스와 기차 승차권이 쌓여갔다. 각지의 ‘숨은 진주’를 찾으러 다니는 거였다. 임 교감 서랍에는 학생이 거주하는 경북 울릉도에 다녀오느라 끊었던 왕복 배편 영수증도 들어있다. 좀 더 나은 환경에서 공부하지 못한 소외계층 아이들도 일말의 가능성만 보인다면 데려다 키우기 위해서였다. 공부로 아이들의 삶과 세상을 바꾸게 하자는 취지였다. ‘수학의 정석’으로 번 돈으로 1981년 상산고 문을 연 홍성대 이사장의 뜻이었다. 어려서 어렵게 공부한 기억 때문에 경쟁력 있는 사학을 세우자고 결심했던 그였다.
그런데 유독 탈북 학생은 찾지 못했다. 어느 날 홍 이사장은 대구지방경찰청에서 장학금을 받은 학생 중 탈북자가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는 바로 수화기를 들었다. 마침 대구에서 연수를 받고 있던 임 교감이 혜심이를 찾아갔다.
“가능성이 있습니다.” 수업 시연을 해본 교사들이 말했다. 하지만 임 교감은 포항에 두 번 더 갔다. 당시 혜심이 담임교사가 말했다. “지난해 처음 본 시험(2학년 2학기 중간고사)에서 400명 중 280등이었는데 벌써 100등 넘게 올랐어요. 공부는 평생 거의 처음이라는데 대단한 거죠.” 반 친구들도 이야기했다. “혜심이요? 걔 진짜 지독해요.” 학교로 돌아오는 임 교감의 발걸음이 가벼웠다.
“내 이름을 모두가 알게 할 거야!”
▲혜심이는 “나를 만든 건 절반 이상이 선생님과 친구들”이라고 말한다. 상산고 교사들은 혜심이에게 개인 지도를 해주려고 점심을 허겁지겁 먹었다. 친구들과는 때로 기숙사 사감 선생님 눈을 피해 컵라면을 나눠 먹으며 깔깔거리는 등 자매처럼 지냈다. 지난해 2월 졸업식에서 3학년 담임 박순식 교사(뒷줄 왼쪽에서 세 번째)와 혜심이(오른쪽), 친구들. 이혜심 씨 제공
숫자가 눈물에 젖어 자꾸만 번졌다. ‘50.’ 제일 먼저 파고들었던 수학의 1학년 첫 모의평가(6월) 점수였다. 다른 과목은 점수도 모른다. 다 찍었으니 채점은 무의미했다.
입을 앙다물어도 눈앞은 흐려졌다. 선생님들이 점심시간 휴식도 포기하고 방과 후 개인과외를 해주는데, 백번도 넘게 설명해주는데 왜 이 모양일까…. 친구들이 자는 동안 공부해도 할 수 있는 건 많지 않았다. 자책이 늘어갔다. 자기 시간만 자꾸 도망가는 것 같았다.
그때마다 혜심이는 세게 고개를 저었다. ‘너무 배가 불러서, 좋아서 이러는구나. 밥도 다 주지, 선생님들이랑 친구들이 다 챙겨주지, 공부만 하면 되는데 힘들다는 게 말이 돼?’라고 생각했다.
불과 3년 전 일이다. 종일 닭 토끼 개들에게 먹일 풀을 뜯고 농사를 지었다. 왜 의자에 앉아 있고 싶지 않았겠나. 하지만 손가락이 부르트게 일하지 않으면 “꼬르륵” 소리만 들어야 했다. 최대 과제는 겨울나기였다. 공부 한번 마음껏 해보는 것. 딱 한 가지 소원이었다. 그렇지만 그저 꿈이었다. 어차피 대학도 못 갈 텐데 시간 낭비였다.
지식이 있거나 재능이 있거나 예쁘거나 돈이 많거나…. 이 중 두 가지는 가져야 한다고 사람들이 그랬다. 북한도 변했다. 자기가 벌어서 먹고사는 세상이 된 지 오래였다. 자식도 한 명, 아들보다 딸이다.
혜심이도 예쁨 받고 싶었다. 하지만 늘 손가락질을 받았다. 어깨를 펴고 다닐 수 없었다. “반역자의 집”, 사람들은 말했다. 엄마가 중국에 자주 왔다 갔다 했다는 이유였다. 억울했다. 사회 환경이 이러니 먹고살려고 그런 건데! ‘아웃사이더로 살기 싫다, 내가 열심히 살면 내 자식은 괜찮은 삶을 살 수 있는 그런 사회에서 살고 싶다.’ 혜심이는 바라고 또 바랐다.
“나는 대한민국 국민 모두가 이혜심이라는 이름을 알게 만들 거야.” “모든 사람이 나를 우러러보게 할 거야.” “나는 전설이 될 테다. 내가 보여줄게.” “내가 지금 가진 건 열정뿐이다.” 혜심이 노트에는 빈 공간이 없었다. 힘들 때마다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그날 해야 할 공부를 마칠 때마다 ‘승리’라는 단어가 차곡차곡 적혔다.
▼ “내 이름, 사람들이 알게 할 거야”… 새 꿈을 꾸다 ▼
이곳에서도 가진 게 없긴 마찬가지였다. 재산 스펙 미모…. 하지만 딱 하나 바꿀 수 있는 게 있었다. 대학. 명쾌했다. 공부만 하면 되니까.
학교를 다니는 탈북 청소년이 희망하는 최종 학력은 대학교가 67.0%로 가장 많다(2014 탈북 청소년 실태조사). 다음은 △대학원-박사(14.2%) △전문대(6.6%) △대학원-석사(6.1%) 순이었다. 가장 필요로 하는 지원 역시 학습과 학업 부분(69.1%)이었다. △경제(63.0%) △진로상담(28.4%) △의료(7.5%) △친구 교류 등 적응(3.0%)보다 높은 수치다. 탈북 학생 다수가 대학 진학을 원하지만 대부분 대학 문턱에 가보지도 못하거나 진학을 해도 공부하기 버거워한다. 어쩌면 혜심이도 ‘탈북 학생 학업중단율’ 수치만 높이는, 그런 학생으로 남았을지도 모른다.
“이해심 많은 해피 바이러스 이혜심!”
입을 열기도 전에 심장이 쿵쿵쿵 뛰었다. 들킬까 봐 두려워 중국에서 그랬던 것처럼. 하지만 이제 말해야만 한다.
“나는 북한에서 온 이혜심이야. 모르는 게 많고 부족한 게 많으니까 많이 도와줘.” 창포중과 상산고에서 처음 친구들을 만날 때 혜심이는 솔직히 말했다. 숨겨서 얻을 건 없다고 생각했다. 어차피 말투와 억양 때문에 금방 들통 날 일이었다. 그럴 바에야 솔직히 털어놓고 도움을 구하는 게 최선이었다.
주변 사람들에게 북한에서 왔다는 사실을 가급적 밝히지 않고 싶다는 탈북 청소년 비율은 2014년 32.3%로 2012년보다 4.2%포인트 증가했다. 같은 기간 ‘아무 거리낌 없이 밝힌다’는 응답은 2.4%포인트 줄었다(21.8%→19.4%). 북한 출신임을 공개하고 싶지 않은 이유로는 △밝힐 필요가 없다고 생각해서(44.2%) △차별대우를 받을까 봐(26.0%) △북한에서 왔다는 이유로 호기심을 갖는 게 싫어서(16.4%) 등이 꼽혔다.
상산고 친구들은 이상했다. ‘이 애들은 북한에 관심이 없나?’ 오히려 혜심이가 궁금했다. 중학교 때는 첫 일주일간 화장실 갈 시간도 없었다. 아이들은 “김정일 알아?” “거기도 냉장고가 있어?” “텔레비전은 있냐?” 질문을 쏟아냈다.
상산고에서는 3학년 때가 처음이었다. 한국사 시간에 선생님은 혜심이에게 “친구들이 궁금해하는 것들을 질문받아 보라”고 했다. 남학생 2개 반까지 혜심이 앞에 100명이 모였다. “나는 사실 너 같은 사람을 만난 게 처음이야.” 친구들은 그제야 털어놨다.
1학년 1학기가 끝난 뒤 여학생 3명이 임 교감을 졸랐다. “혜심이랑 한 학기 더 살게 해주세요, 네?” 기숙사 규정상 방 배정은 추첨이었다. 하지만 임 교감은 입학 전에 미리 당사자와 부모에게 양해를 구한 학생들만 혜심이 룸메이트로 묶었다. 혹시 따돌림을 겪을까 봐서였다. 하지만 한 학기 뒤 아이들은 말했다. “혜심이랑 있으니 제가 자극받고 많이 배워요.”
상산고 학부모들에게 혜심이는 딸이었다. 청소를 이유로 1년에 두 번 있는 ‘강퇴(강제퇴소)’ 때 외에는 집에 가지 않았던 혜심이는 주말이나 명절에 친구 집으로 갔다. 맛있는 것을 먹고 전주 한옥마을 구경도 같이 했다. 학부모들은 혜심이가 3학년 때 부족한 부분을 보충하려고 수학 학원을 다니고 싶어 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너는 공부만 하면 된다”며 선뜻 비용을 부담해주려 했다. 이런 사연을 안 학원장은 공짜로 수업을 듣게 해줬다.
때때로 용돈을 쥐여 주는 것도, 자기 자녀가 받은 장학금을 선뜻 “혜심이에게 주세요”라고 하는 것도 학부모들이었다. 혜심이 통장에는 매달 꼬박꼬박 10만 원이 찍혔다. 누군지 잘 모르지만 법인 감사가 주는 용돈이었다. 매 학기가 시작되기 전에는 200만 원이 넘는 돈이 들어왔다. 홍 이사장이었다. 정부 지원금은 일반고 기준인 탓에 나머지 학비와 기숙사비는 매번 홍 이사장이 장학금으로 줬다.
친구들이 학업 스트레스와 집에서 떠나온 외로움에 엄마 아빠에게 전화할 때 혜심이는 선생님들을 찾았다. 혜심이 휴대전화 발신 목록에 집은 거의 없다. ‘나도 힘들고 엄마도 힘드니까….’ 서로 이 시간을 잘 견디고 있을 거라고 믿는 게 최선이었다. 선생님이 부모였고 교장, 교감, 이사장이 할아버지였다.
3학년 담임 박순식 교사는 혜심이를 보며 여러 번 눈물을 훔쳤다. 상산고는 아이들만큼 교사에게도 쉽지않은 학교다. 3학년 담임에게는 특히 그랬다. 하지만 혜심이가 공부하는 모습을 보고 스스로를 돌아봤다. ‘내색도 않고 저렇게 열심히 하는데 나는 뭐지?’ 스트레스로 전학을 고민하는 친구에게 “나 같은 꼴찌도 있는데 네가 무슨 걱정이니? 괜찮아, 걱정하지 마”라고 위로하는 혜심이가 대견했다. 박 교사에게 ‘해피 바이러스’ 혜심이는 스승이었고, 또 복이었다.
너무 기름져서 먹으면 바로 화장실로 달려가야 했던 삼겹살 돈가스 피자 치킨이 좋아졌다. 고향에 비하면 봄바람 같았던 한국의 겨울바람이 너무 차게 느껴졌다. 친구들이 북한 말 좀 써보라고 해도 생각이 나지 않아서 할 수가 없었다. 가끔 포항에 가면 “전주 사람이냐”는 말을 들었다. 흔치 않은 탓에 출신이 드러날까 봐 개명하려던 생각도 바꿨다. ‘나를 혜심이로 알아주는 사람이 너무 많으니까….’ 좋았다. “이해심 많은 이혜심!”이라고 친구들이 불러주는 게.
그 말은 진짜였다. 의심했던 게 부끄러워질 만큼. 하나원을 나올 때 한 목사가 말했다.
“너를 도와주는 사람이 많을 거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식도 아닌 날 위해 자기 주머니를 여는 사람이 있다고?’
3학년 6월 모의평가 성적표에는 ‘수학 2등급’이 적혀 있었다. 교사들이 모두 그랬다. “이건 기적”이라고.
혜심이가 씨익 웃으며 말했다. “쌤! 이제 시작이에요.” 기적은 혼자 만든 게 아니었다. 모두, 함께였다.
모두 함께, 그리고 처음 혼자
혜심이는 2015학년도 입시에서 서울대 간호학과에 지원했지만 합격증을 받지 못했다. 서울대는 탈북자를 뽑는 기회균형선발 특별전형이 정시에만 있어서 다른 학교 수시엔 응시도 하지 않은 터였다. 이 때문에 내용이 180도 다른 한국사까지 공부했는데….
친구들이 모두 가고 싶어 하는 대학에 혜심이도 가고 싶었다. 바보 같은 실수는 잊어버리고 남한에서 흔하다는 재수를 결심했다. ‘하지만 수업료와 교재비는 어떻게 하나.’ 동그라미 개수에 숨이 막혀 학원비 고지서는 구겨버렸다. 포항으로 돌아가 혼자 공부할 작정이었다.
홍 이사장은 지난해 2월 졸업식이 끝나자마자 혜심이를 차에 태웠다. 도착한 곳은 경기 용인에 있는 재수기숙학원. 공부하겠다는 녀석을 위해 홍 이사장이 직접 알아본 학원이었다. 홍 이사장도 학원장도 혜심이에게 한 말은 똑같았다. “비용 생각은 하지 말고 공부만 열심히 하렴.”
화장실 가고 잠자고 먹는 시간 빼고 공부만 했다. 자신을 위로해 줄 친구도 선생님도 없었다. 탈북자라는 말도 꺼내지 않았다. 밥을 먹으러 갈 때도 저만치 달려가서 꾸역꾸역 넣었다. 남들보다 한 그릇씩 더 먹었는데 살은 빠졌다. 북한에서 막 왔을 때(45kg)보다 2kg이나 줄었다. 스트레스 속에서 공부만 해서 그런 듯했다.
지난해 6월 혜심이는 기숙사에서 강퇴를 당했다. 메르스 위험이 높았을 때라 밖에 한번 나가면 기숙사에 다시는 못 들어온다는 말에 끝까지 버텼다. 하지만 감기는 피로가 누적된 혜심이를 결국 쓰러뜨렸다. 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기어이 다시 돌아왔다.
6월 모의평가 전체 등급이 수능 때보다 총 4등급 향상됐다. 국어 영어 수학 사회탐구가 모두 한 등급씩 올랐다. 혜심이는 이화여대 수시 자기소개서에 “스스로 공부하고 발전할 수 있는 사람”임을 강조했다. 수능을 보진 않았지만 재수 덕을 본 셈이다.
모든 손가락으로 자판을 두드려 인터넷으로 합격 소식을 확인하고는 정말 환하게 웃어봤다.
“진짜 시작이다, 얼마든지 덤벼”
집에 웃음꽃이 피었다. 6년 만이다. 지금까지 명절이 즐거웠던 적은 없었다. 늘 불안했다. 할머니 엄마 이모랑 콩찰떡을 먹었다. 북한에서 설에 먹는 송편 대신이었다. “참말로 한시름 놓았다”고 모두 입을 모았다.
방송 뉴스 앵커가 “북한이 장거리 미사일을 발사했다”고 전했다. 할머니는 혀를 끌끌 찼다. 예전이었다면 혜심이는 주변 사람들의 웅성거리는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을지 모른다. 하지만 이제 아무렇지 않다. ‘북한이 어떻게 해도 내 잘못이 아니니까. 잘 모르는 사람들이 뭐라고 해도 신경 쓰지 않아도 돼.’ 이제 어떤 말에도 상처받지 않을 수 있을 만큼 마음이 단단해졌다.
“솔직히 (북한 출신인) 여러분 선배들도 적응하기 힘들어해요. 영어가 어렵고 친구들보다 나이도 많으니까….”
오리엔테이션에서 교수의 말에 북한 출신 신입생들이 움츠러들었다. 딱 한 사람만 빼고. 혜심이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얼마든지 덤벼!’ 혜심이는 주먹을 꽉 쥐었다. 진짜 시작이다. 살고 싶은 인생을 산다. 열심히 살 것이다. 7년 전 강물에 몸을 내던졌던 것보다 더욱 힘을 내서.
최예나 기자 yena@donga.com
□ 03-03 [在美 소설가 이혜리]
▲이혜리씨가 집필한 'In the Absence of Sun'.
"물 위의 안개가 걷히자 강 건너 우리 쪽으로 총구를 겨눈 북한 병사들 모습이 나타났어요. 진흙 속에 발이 푹푹 빠지는 것을 느끼면서 몸을 숨기던 그 순간을 잊을 수 없어요."
요즘은 탈북자들이 TV 예능 프로그램에도 심심찮게 나오지만, 20년 전만 해도 목숨을 건 이들의 탈북 스토리를 듣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재미 소설가 이혜리(51)씨가 북한에서 친척들을 빼내는 과정을 기록한 논픽션 'In the Absence of Sun'도 그랬다.
2002년 미국에서 처음 책이 출간되었을 때 그녀는 '오프라 윈프리 쇼'에 초대돼 한국 이산가족의 고통을 미국 전역에 알렸다. 책은 베스트셀러가 됐고, 그녀는 워싱턴 DC에서 열린 미국 국회의 이민법 관련 청문회에서 '탈북민의 현실'에 대해 증언하기도 했다. 하지만 국내에서 그녀의 책은 지난주 '아들이 있는 풍경'(디오네)이란 제목으로 뒤늦게 빛을 봤다.
▲외할머니와 함께 북한의 외삼촌 일가족을 탈북시킨 20년 전 경험을 바탕으로 한 논픽션 에세이‘아들이 있는 풍경’을 쓴 재미 소설가 이혜리씨는 2일 “북한 사람들의 상황은 그때나 지금이나 크게 바뀌지 않았다”며“북의 실상을 알리는 일을 계속 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태경 기자
친척 9명 탈북시킨 과정 담은 책
15년 만에 국내 번역 출간
오프라 윈프리 쇼에도 출연해
"단순히 한 가족의 탈출기 아닌
南北 문제로 바라봤으면"
2일 서울 광화문에서 만난 이씨는 "햇볕 정책과 개성공단 조성 등 해빙 무드 때문에 선뜻 한글 번역판을 내겠다는 출판사가 없었다"며 "북(北)이 미사일을 쏘고 핵실험을 하면서 더 예측불허의 상황인 지금이 더 적당한 때인 것도 같다"고 했다. 그녀는 특히 "세월이 지난 만큼 단순히 한 가족의 탈출기로 보지 말고, 좀 더 넓은 시각으로 남북문제를 바라보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고 했다.
모든 것은 그녀가 젊은 시절에 쓴 소설 '할머니가 있는 풍경(Still Life with Rice)'에서 시작됐다. 6·25 때 평양을 떠나면서 큰아들만 북에 남겨놓고 온 그녀의 외할머니는 미국으로 건너 와서도 평생 큰아들을 그리워하며 살았다. 이 소설 역시 한국의 분단 현실을 미국 사회에 알린 작품으로 미국 청소년들의 권장도서 목록에 오를 정도로 화제가 됐다.
그런데 예상치 못했던 일이 벌어졌다. 소설에서 북의 외삼촌 이름을 실명(實名)으로 쓰는 바람에 친척들이 위험에 빠졌다는 소식을 접한 것이다. "일은 벌어졌고, 저는 책임을 느꼈어요. 죽기 전에 큰아들 얼굴이라도 봐야겠다는 외할머니를 모시고 아버지와 함께 무작정 중국으로 날아갔죠."
1997년 4월부터 12월까지, 그녀는 북·중 국경지대인 압록강과 두만강 일대를 무수히 헤매고 다녔다. 하루종일 강가에서 기다리다 헛걸음하고 돌아온 날도 부지기수였다. 서울서 태어나 네 살 때 미국으로 건너가 자란 처녀는 천장 위로 쥐가 다니는 방에서 기거하며 재래식 화장실도 꿋꿋이 견뎠다. 처음 2주를 예상했던 일정은 점점 길어져 9개월을 넘겼다. 이런 사정도 모르고 9명의 친척은 월경(越境) 직전까지 '넘자, 말자' 의견이 엇갈려 강 건너 사람들을 애타게 했다. 이렇게 탈출한 가족 중에는 그녀의 사촌 언니이자 탈북자 1호 박사로 유명한 이애란씨도 있었다. 미국에 친척들이 있다는 것을 알고 먼저 편지를 보내온 것도 그녀였다.
이혜리씨는 UCLA 정치학과를 졸업하고 MTV에서 작가, 사회자, 스타일리스트 등으로 일하며 엔터테인먼트 업계에서 경력을 쌓았다. 남편 켄 목은 다음 주 개봉하는 영화 '조이'와 인기 리얼리티 프로그램 '아메리칸 넥스트 톱모델'의 프로듀서다. 여섯 살짜리 아들·딸 쌍둥이의 어머니인 그녀는 '글의 힘'을 믿는다. "만약 제가 소설을 쓰지 않았다면, 할머니와 제게 이런 기적 같은 일이 벌어졌을까요? 저는 한 사람의 힘이라도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녀는 요즘 탈북자 관련 경험을 바탕으로 희곡을 쓰고 있다. 연극을 만들 때 제작자인 남편이 도와줄 것도 같았다. 하지만 남편은 전혀 그럴 생각이 없다고 했다. "책에는 탈북 가이드가 제게 마음을 고백하고, 키스하는 장면까지 나오거든요, 남편은 그 남자를 좋아하지 않더라고요. 하하하."
신동흔 기자 편집 최원철
□ 04.09 중국 北식당 종업원 13명 '탈북'
남자 지배인 1명과 여직원 12명… 동남아國 거쳐 지난 7일 한국에
對北제재 이후 해외식당도 타격… 당대회 앞두고 상납 압박 커져
정부는 8일 "해외에서 근무하던 북한 식당 종업원 13명이 집단 탈북해 지난 7일 한국에 도착했다"고 밝혔다. 이들은 중국에서 일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북한의 해외 식당 종업원이 집단 탈북한 것은 처음이다. 국제 사회의 대북 제재가 효과를 내고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한국에 온 13人 - 중국 내 북한 식당에서 근무하던 종업원 13명이 집단 탈출해 7일 국내에 들어왔다. 남자 지배인 1명과 여자 종업원 12명인 이들이 탈북 배경 등을 조사 받기 위해 경기도 시흥시 북한이탈주민보호센터로 이동하고 있다. /통일부 제공
통일부 정준희 대변인은 이날 긴급 브리핑에서 "북한의 해외 식당에서 근무 중이던 남자 지배인 1명과 여자 종업원 12명이 집단 귀순해 서울에 도착했다"고 말했다. 이날 정부는 외교 마찰 등을 우려해 집단 탈북자가 일했던 국가를 공개하지 않았다. 그러나 중국의 대북 소식통은 "탈북한 식당 종업원 13명은 지린(吉林)성 옌지(延吉)에서 근무하다가 식당이 잘 안 돼, 저장성 닝보(寧波)로 옮겨 3개월을 더 일하다가 동남아의 한 국가를 경유해 한국에 온 것으로 안다"고 밝혔다. 이들이 중국의 북한 식당에서 우리 측 영향권으로 넘어온 시점은 확인되지 않았다. 정부 소식통은 "중국은 탈북자를 우리 측에 넘길 때 시간을 끈 적이 많았는데, 이번에는 비교적 신속하게 처리했다"고 말했다.
탈북 동기와 관련, 정 대변인은 "해외에서 생활하며 한국 TV, 드라마, 영화, 인터넷 등을 통해 한국의 실상과 북한 체제 선전의 허구성을 알게 됐다고 한다"며 "한 종업원은 '한국에 오는 것에 대해 서로 마음이 통했으며, 누구도 거부하지 않았다'고 언급했다"고 전했다. 또 국제 사회의 제재로 북한 해외 식당도 타격을 입은 가운데 5월 당 대회를 앞두고 '외화 상납' 요구 등이 가중되면서 탈북을 결심한 것으로 전해졌다. 윤병세 외교부 장관은 이날 집단 탈북과 관련 "앞으로도 이런 상황이 계속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고 말했다.
조선일보 안용현 기자 김명성 기자
□ 04.12 "집단탈출 北종업원은 류경호텔 소속…당·기관 간부 자녀"
중국의 북한식당에서 근무하다 집단 귀순한 종업원 13명은 류경호텔 소속이며, 노동당과 행정기관 간부의 자녀들로 확인됐다고 북한 전문매체인 '데일리NK'가 현지 소식통을 인용해 12일 보도했다.
평양의 소식통은 데일리NK와 통화에서 "이번에 탈북을 감행한 13명은 대외봉사총국 산하 105층 류경호텔에 소속된 당과 행정기관의 간부 자녀들"이라며 "부과된 당 자금 마련은 물론 류경호텔 건설 완공에 필요한 자재 확보를 위한 외화벌이에 투입되어 수년간 해외에서 근무해 왔다"고 밝혔다고 이 매체는 전했다.
이들의 귀순 배경에 대해 소식통은 "한동안 벌이가 잘 되었지만, 이번 유엔 대북 제재가 있은 후 급격한 위기를 겪게 됐다"고 전했다.
소식통은 "평양시민 속에서는 류경호텔 당비서와 지배인, 대외봉사총국 국장 등 여러 명의 책임간부가 무사하지 못할 것이란 소문이 벌써 나돌고 있다"며 "이번 집단탈출로 대외봉사총국과 평양 류경호텔 책임간부들은 물론 국가안전보위부 역시 절망에 빠졌다"고 했다.
이번 사태에 따라 국가안전보위부는 해외 인력에 대한 사상 재점검과 감시를 강화하기 위해 수십 개의 검열조를 꾸려 중국 선양(瀋陽)에 파견했으며 현지 해외기업들을 맡은 담당 보위 지도원에 대한 교체작업도 전반적으로 실시되고 있다고 소식통은 전했다.
또 집단탈출을 막지 못한 원인을 보위 지도원의 감 시소홀로 보고 있으며 감시인원을 늘려 유사한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하는 방안도 논의되고 있다고 소식통은 전했다.
그는 "중앙기관 간부들은 '몇 푼어치 달러를 벌려다가 괜히 목이 날아나겠다'며 해외파견 인원을 부랴부랴 불러들이고 있다"면서 "돈을 먹여서라도 자식을 해외로 파견하길 바랐던 간부들도 '이 땅(북한)에서 텁텁하게 사는 게 낫다. 괜히 눈이 트면 큰일'이라며 취소하기도 한다"고 설명했다.
북한 식당 13명, 감시자 출장 간 틈에 탈출
6일 새벽 비행기로 동남아行
中 외교부 "유효 여권으로 합법적으로 출국한 것"
北불만 겨냥, 신속한 입장 발표 "불법으로 월경한 탈북자 아니다"
지난 7일 귀순한 중국 닝보의 북한 식당 종업원 13명은 감시를 총괄하는 보위부 책임자가 베이징으로 잠시 출장 간 틈을 타 집단 탈출에 성공한 것으로 11일 알려졌다. 또 13명 외 같은 식당에서 일하던 북한 종업원 일부도 안전한 곳에서 한국행을 기다리는 것으로 전해졌다.
복수의 대북 소식통은 이날 "북한 식당 종업원은 보위부 책임자, 지배인, 종업원 내 보위부원 등 삼중의 감시를 받는다"며 "이번 집단 탈북은 지배인과 종업원 내 보위부원(감시자)이 손발을 맞춘 상황에서 보위부 책임자가 출장으로 자리를 비우자 신속하게 움직여 성공한 사례"라고 했다. 또 남성 지배인(30대)이 여성 종업원의 여권을 모두 보관하고 있었기 때문에 한꺼번에 동남아행 비행기를 탈 수 있었던 것으로 전해졌다. 이들은 항공편으로 중국을 빠져나와 모 동남아 국가를 거쳐 국내에 들어왔다. 한 소식통은 "13명 중에는 요리사도 포함돼 있다"고 했다.
중국 외교부 루캉(陸慷) 대변인은 이날 정례 브리핑에서 이번 탈북 건에 대해 "최근 중국 공안 당국이 중국에 거주하던 일부 북한인의 실종 신고를 받았다"며 "조사 결과 북한 국적자 13명이 6일 새벽 유효한 (북한) 여권을 갖고 출국한 사실을 확인했다"고 했다. 중국이 북한 종업원 13명의 탈북을 공식 확인한 것이다. 그는 "이들이 유효한 신분증을 소지하고 있었다는 점을 특별히 강조하고 싶다"며 "이들은 합법적으로 중국에서 출국한 것으로 불법으로 월경한 북한인(탈북자)이 아니다"고 했다. 루캉 대변인이 '합법적 출국'을 강조한 것은 '중국이 탈북을 묵인했다'는 북한의 불만을 겨냥한 것으로 보인다. 그는 이날 "중국의 탈북자 정책은 명확하다. 국제법과 국내법, 인도주의 원칙에 따라 이 문제를 적절히 처리하고 있다"고 했다.
중국은 그동안 탈북 문제에 대해 북한 입장을 고려해 구체적인 입장을 밝히기를 꺼려왔다. 그런 점에서 중국이 이번에 신속하게 북한 식당 종업원 탈북 사건에 대한 경위를 설명한 것은 북한 측으로서는 상당히 섭섭할 수도 있는 대목이다. 북한으로서는 중국 내 북한 식당에 대해 단속을 강화할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된 셈이다.
한편 북한은 이번 종업원 집단 탈북 사건을 계기로 중국을 비롯한 해외 각국에서 운영하고 있는 북한 식당을 대대적으로 정리하고 종업원 수도 대폭 줄이기로 한 것으로 알려졌다. 한 대북 소식통은 "식당 수익 등을 조사해 경영 상태가 부실한 식당은 문을 닫고 생존 가능한 곳은 보강하라는 지침이 내려온 것으로 보인다"며 "이번 조치로 중국에 있는 북한 식당 100여개 중 절반 이상 줄어들고, 종업원들은 대거 북한으로 송환될 것"이라고 했다.
베이징=이길성 특파원 안용현 기자
□ 04.20 "비상경계령에도 김일성 생일 밤 일가족 7명 집단 탈북"
▲중국 랴오닝성 단둥 외곽에서 바라본 북한 국경지대./연합뉴스
북한 당국이 김일성 생일(4월 15일)을 맞아 4월 1일부터 20일까지 '특별경비주간'을 설정하고 비상경계령을 발동했음에도 일가족 동반 탈북 사건이 잇따라 발생했다고 미국의 자유아시아방송(RFA)이 19일(현지 시각) 보도했다.
보도에 따르면 함경북도의 한 소식통은 “특별경비주간에 내린 비상경계령에 따라 국경 지역 도로와 산길까지 모두 통제되고 있지만, 무산군에서 4월 15일 두 가족 7명이 밤새 종적을 감췄다”며 “국가안전보위부(우리의 국가정보원)가 즉시 조사에 착수했지만 (가족을 찾을 수 없어) 난처한 입장에 처했다"고 말했다.
그는 "특별경비주간에는 국경경비대와 노농적위대, 인민반(주민세대)까지 총출동해 3중, 4중으로 그물망 경비체계를 형성하고 있는데 어떻게 가족 탈북 사건이 일어났는지 현지 주민들도 놀랐다"며 “특히 이번 탈북은 김일성 생일 당일 밤에 벌어져 더 충격이 컸다”고 전했다.
북한은 설(1월 1일)과 김정일 생일(2월 16일), 김일성 생일, 국경절(9월 9일), 노동당 창건 일(10월 10일)이 오면 전국에 '특별경비주간'을 설정하고 비상경비태세에 돌입한다.
이와 관련해 다른 소식통은 “북한이 올해 초부터 주민들의 탈북을 전면 차단하기 위해 국경경비대의 근무체계를 대폭 강화했는데, 이는 오히려 경비병들의 피로감을 가중시켰다”며 "(북한 당국이) 설령 '특별경비'를 조직했다 해도 명절이면 근무를 맡은 보위부 요원과 국경경비병들부터 술에 취해 있어 경비망이 허술하다"고 지적했다.
주희연 기자
□ 04.30 서울에 모인 국내외 탈북민들 "부모형제 위해 70년 金氏왕조 끝장내자"
제1회 세계탈북민대회 개최
박관용 前국회의장 "공산·독재국가들 모두 실패"
"북녘 땅에 핵무기가 사라지고 평화적 통일이 이룩되는 날까지 탈북민들이 힘을 합쳐 노력합시다."
국내외 탈북자 100여명이 29일 서울에 집결해 제1회 '세계탈북민대회'를 열었다. 이들은 '3만 탈북민들의 결의를 담은 선언문'에서 "탈북민들의 소원은 북한의 동포들이 북한 당국으로부터 고통을 받지 않는 것"이라며 "북한은 주민 개인의 자유와 행복이 강물처럼 흐르는 세상으로 바뀌어야 한다"고 말했다.
세계북한연구센터가 주최하고 조선일보가 후원한 이날 행사에는 국내 탈북자들 외에 해외에서 활동해온 탈북민 단체 대표 7명도 함께했다. 일본 탈북민 대표 이민주(가명)씨는 연설에서 "한 사람이 역사에 맞서는 것보다 모두가 힘을 합치면 역사를 바꿀 수 있다"며 "지금도 고통받는 우리 부모 형제와 고향을 위해 힘을 합쳐 70년 김씨 왕조의 독재 체제를 끝장내야 한다"고 말했다.
▲3만 탈북민 선언문 낭독하는 남녀 대표들 - 29일 서울 여의도에서 열린 ‘2016세계탈북민대회’에서 탈북민 남녀 대표들이 3만 탈북민 선언문을 낭독하고 있다. 이날 행사에는 국내외 탈북자 100여명이 참석해 “평화 통일의 그날까지 탈북민들이 노력하자”고 말했다. /조인원 기자
2009년 미국에 정착한 미국 탈북민 대표 이철씨는 "북한에서 10년의 군 복무와 대학 졸업 후 사회생활을 하면서 암흑이 드리운 북한에 미래가 없음을 깨닫고 자유를 찾아 탈북했다"며 "전 세계 탈북자들이 연대해 김정은 정권을 타도해야 한다"고 말했다.
김주일 재유럽조선인총연합회 사무국장은 "과거 유럽에서 '인권' 하면 미얀마의 인권을 떠올렸지만 이제는 탈북자들의 적극적인 활동으로 유럽에서 북한 인권이 사회적 이슈로 부각되고, 영국 BBC방송도 대북 방송을 하게 됐다"고 말했다.
박관용 전 국회의장은 축사에서 "전 세계 공산국가, 독재국가들이 모두 실패했는데 북한만 예외가 될 순 없다"며 "그것이 역사의 순리이고 북한은 우리가 책임질 수밖에 없는 우리의 미래"라고 말했다. 그레그 스칼라튜 미국 북한인권위원회 사무총장은 "북한의 무모한 핵개발과 장거리 미사일 발사 도발, 주민의 인권 문제를 해결하는 유일한 해결책은 남북통일이며, 이 과정에서 탈북자들의 역할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이번 행사 집행위원장을 맡은 안찬일 세계북한연구센터 소장은 "북한 주민들에게 대한민국과 같은 자유민주주의의 기회를 안겨줄 책임이 탈북자들에게 달렸다"며 "오늘 행사를 계기로 탈북자들이 단결해 통일을 준비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날 대회는 박 전 의장이 대회장(長)을 맡고 안응모 전 내무장관, 권영해 전 국방장관, 수잰 숄티 미국 북한인권위원회 위원장 등이 고문을 맡았다. 탈북민 출신 피아니스트 김철웅씨, 탈북 방송인 한서희·김지영·신은하·박수애씨 등은 홍보대사를 맡았다.
김명성 기자
□ 05.20 "귀순 13명 전원 北귀환 원치않아…
중국의 북한 식당에서 귀순한 종업원 13명을 면담한 박영식(51·여) 변호사는 19일 본지 인터뷰에서 "한국에 도착한 13명(여종업원 12명, 남성 지배인 1명) 가운데 북한으로 다시 돌아가기를 원하는 사람은 한 명도 없다"고 말했다. 우리 정부가 이들을 '납치'했다는 북한 주장 등을 부인한 것이다. 박 변호사는 대한변호사협회가 추천한 국가정보원 인권보호관 신분으로 북한이탈주민보호센터(옛 합동신문센터)에 체류 중인 귀순 종업원들을 여러 차례 만났다.
박 변호사는 이날 "종업원들은 모두 북한에 남겨둔 가족과 자신의 신변 안전을 우려해 (개인 신상이나 발언 등이) 밖으로 드러나는 것을 절대 원하지 않는다"며 "종업원의 면담 내용을 구체적으로 언급하기는 어렵다"고 했다. 그러나 북한과 일부 친북(親北) 매체가 '여종업원 중 한 명이 북송(北送)을 요구하며 단식하다가 사망했다'고 보도한 데 대해선 "그걸 믿느냐"고 했다. 박 변호사는 "13명 모두 건강하게 잘 있다는 건 분명하게 말씀 드릴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종업원들은 남한 뉴스도 보고, 바깥으로 견학도 나가면서 한국에 적응하는 과정을 거치고 있다"고 밝혔다.
종업원들이 외부 접촉을 꺼리는 이유와 관련, 박 변호사는 "만약 A종업원이 말한 탈북 동기·과정 등이 그대로 (외부에) 나간다면 북에 있는 A씨 가족은 어떻게 되겠느냐"고 했다.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민변)은 최근 귀순 종업원에 대한 변호인 접견 신청을 했지만, 국정원은 "귀순자는 구금된 형사 피의자도 아니고 난민도 아니다"는 이유로 이를 거부했다.
박 변호사는 "지난 주말 종업원 13명을 일일이 만나 '민변 변호인 접견을 하겠느냐'는 의사를 물어봤다"면서 "그러나 13명 모두 거절했다"고 전했다. 박 변호사는 서울가정법원 판사를 지냈으며 작년 4월 북한이탈주민보호센터 인권보호관으로 위촉됐다. 보호센터 탈북자들을 면담해 인권 침해 여부 등을 조사한다.
지난달 7일 입국한 종업원들은 현재 40일 넘게 보호센터에 머무르며 외부에 공개되지 않고 있다. 국정원 측은 "법률상 최장 180일까지 보호센터에 있을 수 있다"며 "센터는 위장 탈북 여부 등을 조사하고, 심리적 안정과 건강을 회복하도록 돕는다"고 말했다.
안용현 기자
□ 05.25 탈북자 대북송금 받아온 북한 주민들, 보위부가 대대적 내사 중
북한의 무산 지역에서 탈북민 대북송금 관련, 최대 규모의 피해사례가 발생하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또한 이 사건 때문에 하루 평균 10여명, 최근 전국적으로 600여명의 관련자들이 보위·보안부의 내사를 받아왔다는 증언도 나왔다.
23일 북한관련 카페를 운영하고 있는 한 탈북자로부터 “지금 북한 무산군에서 국내에 입국한 탈북자들로부터 송금을 받아온 북한주민(탈북자 친척 및 가족)들이 보위부의 조사를 받고 있다”는 연락이 왔다. “대책을 강구하지 않으면 피해자는 늘어날 수밖에 없다”는 전갈이었다.
카페에 소개된 내용과 23일과 24일, 북한 내 통신원들과의 통화내용을 종합해보면 사건의 전말은 이렇다.
올해 3월 초, 북한 무산군에서 생활하면서 대북송금 중개인 역할을 하던 김 모 씨가 중국을 거쳐 한국에 왔다. 당초에 김 씨는 중국에서 일을 보고 북한으로 돌아갈 예정이었으나 예기치 못했던 일이 발생(?)하고 심경에 변화까지 생겨 한국행을 결심했다고 한다.
그동안 한국 거주 탈북자들과 연계해 저들의 대북송금을 도왔던 중국 조선족교포가 김 씨의 한국행을 도왔음으로 3국을 거쳐 대한민국으로 오기까지의 노정은 비교적 순탄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하지만 일은 김 씨가 한국에 입국한 이후에 터져버렸다.
김 씨가 애초에 한국행을 생각하지 않고 북한을 떠났던 관계로 그동안 관리해 오던 대북 송금 및 입금(연계)자료를 북한에 두고 왔던 것, 김 씨는 중국 연길에서 생활하고 있는 친척집 방문을 목적으로 여행증까지 발급 받았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이런 김 씨가 돌아오게 된 날짜를 어겼고, 중국에서 안 좋은 일에 연류 되었다는 것까지 파악한 보위부가 김 씨의 집을 덮쳤다는 게 소식통의 전언이다. 그리고 김 씨의 집 장롱 깊숙한 곳에서 발견된 송금 및 입금 장부가 발각되면서 무산군 보위부가 발칵 뒤집혔다고 한다.
그렇게 올해 3월, 북한 보위부에 의해 발각된 김 씨의 장부에는 한국에 입국한 탈북자들의 이름들과 전화번호, 북한 내 송금 받은 가족들의 이름과 주소, 송금액수, 날자 등이 깨알 같은 필체로 적혀있다고 한다. 이름 하여 북한판 ‘살생부’가 보위부의 수중에 들어간 것이다.
하지만 무산군 보위부는 이 ‘살생부’의 공개를 서두르지 않았다. 발견 즉시 사건경위와 함께 중앙에 보고했으며 중앙에서는 보위·보안부 합동조사단을 꾸려 당 대회가 끝날 때 까지 내사를 진행한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그리고 당 대회가 끝나자마자 본격적인 조사와 체포를 시작했던 것이다.
“문제는 피해 규모다”고 한 탈북단체장은 설명했다. 현재 국내에 입국해 정착기관에서 생활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는 김 씨는 송금을 위탁한 탈북민들로부터 큰 신임을 받아온 것으로 확인됐다. 따라서 그에게 대북송금을 의뢰했던 탈북민들의 수가 많을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다.
그러면 상대적인 피해자가 늘어난다는 이야기다. 김 씨를 알고 지냈다는 또 다른 탈북자는 “국내에 입국한 탈북자들이 어디 무산에만 있는가. 김 씨와 연계된 사람들은 함경남북도와 지어는 평양에도 있음”을 주장하기도 했다.
이와 관련해 24일 본방송 내부통신원은 “조사(수사)는 전국적 법위에서 광범위하게 진행되고 있다”는 소식을 전해왔다. 또 “명단(조사대상)엔 탈북자 가족뿐만 아니라 보위원, 보안원, 돈주에 당 간부까지 이름을 올리고 있어 파장은 쉽게 가라앉지 않을 것이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이 소식을 남쪽에 알려 피해를 축소시켜야 한다. 지금 무산군에서만도 하루에 열 명 정도 씩 보위부에 끌려가고 있고, 전국적인 조사 대상이 600여명이나 된다고 하지만 사람들은 모두 남조선과의 연계를 부정하고 있고, 따라서 구속자수는 많지 않고”고 말하기도 했다.
글 | 김성주 자유북한방송 기자
□ 07.04 하재헌 하사 병문안한 탈북 청년의 뜻
지난해 9월 중순, 마음을 찡하게 했던 뉴스가 있었다. 한 탈북 청년 단체 회원들이 북한의 목함지뢰 도발로 부상한 하재헌 하사를 위문한 기사였다. 이들은 지뢰 도발 관련 기사에 달린 탈북민 비난 댓글을 보고 처음엔 충격과 억울함을 느꼈다고 한다. 그러나 탈북민들도 같은 '분단의 피해자'로서, 그리고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함께 아파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성금 500만원을 들고 하 하사의 병실을 찾았고, 이들은 서로를 격려했다. 이 장면은 탈북민 정착의 어려움과 희망을 함께 보여준다.
정부는 자유를 찾아온 탈북민들이 우리 사회의 일원으로 통합될 수 있도록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무엇보다 이들이 자립하는데 필수적인 교육과 취업의 기회를 넓히기 위한 다양한 정책을 추진 중이다. 예를 들어 탈북 청소년에게 해외연수와 인턴십 프로그램 등을 제공하고, 기초적인 직업훈련뿐 아니라 영농교육과 창업 컨설팅 등을 한다.
탈북민이 대한민국의 당당한 일원으로 자리 잡기 위해서는 우리 사회의 따뜻한 시선과 배려도 필요하다. 탈북민에 대한 인식이 많이 좋아지긴 했지만 여전히 편견과 차별이 존재하는 것이 사실이다. 북한 사투리를 쓰면 이상하게 봐서 서울말을 배우기 위해 애쓴다는 학생, 취업을 했는데 기밀을 훔쳐가지 않나 의심을 받았다는 회사원, 북한 출신이라고 하면 식당도 안 받아줘 조선족이라고 말했다는 아주머니의 하소연을 들으면 안타깝다.
탈북민이 우리 사회에 성공적으로 정착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탈북민 스스로의 노력이 중요하다. 실제로 우리 사회 곳곳에는 스스로 열심히 살아가는 탈북민이 많이 있다. 최근 조선일보 '탈북민과 함께 통일 사다리 놓자' 시리즈를 통해 소개된 탈북민들이 대표적이다. 130마리의 한우를 키우는 목장 대표, 안좌도 최초의 이장을 지낸 만석꾼 농부, 영양실조에 걸려 두만강을 건넜지만, 월 매출 수백만원을 올리는 사장님으로 변신한 청년 등은 주변의 도움과 자신의 노력으로 훌륭하게 정착했다.
많은 탈북민이 그동안 받아온 도움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봉사활동에 나서고 있다. 지난해에는 통일부·하나재단 등 정부기관과 대학교, 사회봉사단, 민간단체, 12개의 탈북봉사단 단체가 의기투합해 '착한(着韓) 봉사단'을 꾸려 김장을 해 소외계층에 나눠주고, 어르신들께 북한 음식을 대접하고, 농촌 환경개선운동에 참가했다. 탈북민의 성공적 정착은 정부 지원, 민간의 배려, 탈북민의 의지라는 3박자가 잘 조화돼야 한다.
대한민국을 찾아온 탈북민이 3만 명에 육박하고 있다. 지금 이 3만 명을 제대로 껴안지 못하면 통일 이후 2500만 북한 주민과 함께하기 무척 어려울 것이다. 정부는 탈북민들의 자립 기반을 지속적으로 지원하고 민간은 자유를 찾아 탈북한 이들을 따뜻이 안아주며, 탈북민은 스스로 대한민국 국민이 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야 한다. 그러면 우리는 분단의 고난을 극복하고 한민족 모두의 행복과 발전을 이룰 통일을 성취할 것이다. 하재헌 하사와 그를 병문안한 탈북 청년이 보여준 것처럼 우리 곁의 탈북민들과 함께 대한민국 국민으로 성장하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
조선일보 홍용표 통일부 장관
□ 07-06 사랑을 찾아 탈북한 북한식당 여종업원(북한 처녀와 한국 청년의 사랑 이야기)
운명이다, ‘그녀’가 ‘그’를 만난 것은. ‘그녀’는 중국의 북한음식점에서 일했다. ‘그’는 서울대 공대 출신 대기업 엔지니어. 해안도시에서 나눈 180일간의 사랑은 불처럼 뜨거웠다. “나와 함께 한국 가서 살래요?” ‘그녀’는 북한식당을 탈출해 서울에 왔다. “미쳤었나 봐요. 저, 미친 거 맞죠?” ‘그녀’의 서울 살림은 행복해 보였다.
▲일러스트·박용인
북한 여인과 한국 사내의, 180일간의 운명적인 사랑은 타오르는 불길 같았다. 그녀는 중국 상하이(上海) 북한음식점에서 일했다. 강원도 원산이 고향이다. 사범대학을 졸업한 재원. 앳된 얼굴을 가졌다. 미인이다. 목소리도 찰랑찰랑하다. 서울에 산다. 한국 남자와 사랑에 빠져 ‘국경의 남쪽’ ‘따뜻한 남쪽 나라’로 몸을 옮겼다.
그녀가 사랑한 남자는 서울대 공대 출신 엔지니어. 대기업 A사 상하이지사에서 일했다. “나와 함께 한국 가서 살래요?”라고 말한 후 상하이 북한음식점에서 다롄(大連)으로 그녀를 탈출시켰다. 아내가 될 여인의 위조 여권을 만들었고, 그녀와 같은 비행기를 타고 인천공항에 내렸다.
2016년 5월 그녀는 서울의 한 대안학교에서 탈북 어린이들을 가르친다. 대학원에서 공부도 한다. 남자는 A사를 나와 사립대학 교수로 자리를 옮겼다. 두 사람의 운명 같은 사랑 이야기는 그녀의 지인도, 남편의 친구도 잘 모른다. 신분 공개를 꺼린 터라 이 글에선 ‘그녀’ ‘그’로만 표기한다. 정확한 탈북 시점도 밝히지 않는다.
4월 5일 중국 저장(浙江)성 닝보(寧波)의 북한음식점 ‘류경’에서 일하던 종업원 13명이 탈출해 4월 7일 인천공항을 통해 입국했다. 이들의 집단탈북 이전 한국으로 망명한 북한음식점 여종업원은 앞의 ‘그녀’와, 팝페라 가수로 활동하는 M씨 단 두 명이다. 4월 27일 서울 종로구 세종문화회관 뒤뜰에서 ‘그녀’를 만났다. ‘그’와 ‘그녀’의 스토리가 공개되는 것은 이 기사가 처음이다.
“서울대가 뭐하는 덴데요?”
“70억분의 1의 인연이래요, 남편이. 자기를 하늘같이 모시라면서요. 땅같이 모실 생각 하지 말라나, 뭐라나. 아무튼 좋은 사람이에요.”
▼ 지금은 그때처럼 설레지 않죠?
“그렇진 않아요. 남편, 못생겼어요.” 그녀가 스마트폰을 꺼내 대학교수 남편의 사진을 보여줬다.
“처음엔 남자가 저렇게 단순해도 되나 싶었어요. 공대 나오면 다 그래요? 한국 사람 아닌 줄 알았어요. 러시아 사람처럼 몸이 다부지고 코도 크거든요.”
엄살이다. 사진 속 사내는 어딜 가든 눈에 띌 미남이다.
▼ 멋쟁이신데요.
그녀가 환하게 웃었다.
“그이가 처음에 북한식당에 와서는 ‘할아버지가 중국인’이라고 거짓말을 했어요. 거의 매일 왔는데 처음엔 저 보러 온 건지 몰랐죠. 서울대 나왔다고 자랑을 막 하는 거예요. ‘거기가 뭐하는 덴데요?’ 하고 되물었죠.
‘나는 김대(김일성종합대)밖에 모른다’고 했더니 김대하고 똑같은 학교래요. 그래서 ‘김일성종합대학 명예를 훼손하지 마십시오’라고 정중하게 말씀드렸죠.”
▼ 서울로 가자는 얘기는….
“서울이라곤 안 했어요. ‘한국 가서 함께 살자’고…. 올 때마다 스마트폰으로 한국 경치를 보여줬어요. 여름에 오면 여름 풍경, 겨울에 오면 겨울 경치를요. 남산이 특히 예뻤어요. 하나원(북한이탈주민의 사회 정착을 지원하는 통일부 소속기관)에서 나오자마자 남산에 가보자고 남편을 졸랐죠.”
▼ 가보니 어때요.
“케이블카 있고, 사람도 많고. 옥탑이 동그란 식당에서 밥 먹었어요. ‘맛없어, 너무 비싸’ 투덜거렸죠. 남산에서 내려다본 서울 야경이 굉장히 예뻤어요. 남편이랑 전주, 여수 같은 관광지를 시간 날 때마다 쏘다녔어요. 한번은 남편이 프랑스엘 가재요. 흥분돼서 ‘나도 외국 가보는 거야?’ 했더니 한국에 프랑스가 있다는 거예요. ‘내가 바보냐’고 흘겼더니 정말로 있다는 겁니다.”
▼ 프랑스식당?
“가평에 ‘쁘띠프랑스’라고 테마파크가 있어요. 웃기죠.”
▼ 서울 사니 좋아요?
“처음엔 후회했죠. 그놈의 ‘타이레놀’ 때문에….”
그녀는 북한에서 중학교 국어 교사로 일했다. 한국에 와서는 서울의 한 공립초등학교에서 탈북 학생 담당 코디네이터로 활동했다. 현재는 한 종교단체가 운영하는 탈북 학생 대안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친다.
노동당 입당 위해 중국으로
▲일러스트·박용인
▼ 왜 북한음식점으로 일터를 옮겼나요.
“김일성 시대 때는 선생님이란 직업이 아주 좋았다고 해요. 경제가 곤두박질친 뒤 교사들이 못 먹고 못살았습니다. 배급제가 무너졌는데도 장마당에 나갈 수가 없었어요. 북한 경제가 좋아지면서 요즘엔 좀 괜찮아졌다더군요. 월급보다 과외비가 쏠쏠하대요. 잘사는 집 아이들 과외공부 해주고 돈 받는 거죠. 한국에선 초등학교 선생님이 최고 직업인 것 같아요. 오후 4시 30분이면 퇴근하던데요.”
▼ 북한 아이들과 한국 아이들은 어떻게 다르던가요.
“한국 애들은 말을 잘 안 들어요. 북한에선 학교에서 못 떠들거든요.”
▼ 원래 질문으로 돌아갈게요. 돈 벌러 중국 간 거네요.
“아뇨. 노동당원 되려고 간 거예요. 먹고살 만한 이들이 해외에 나가 일합니다. 북한음식점에 파견되는 사람들이 누구라고 꼬집어 말할 순 없어요. 다양한 분야에서 선발되거든요. 대학 갓 졸업한 친구도 있고, 예술단 출신도 있고요. 다들 목적은 단 하나예요, 노동당 입당. 해외에서 일하면 국가에 공을 세운 거잖아요. 우선순위로 입당 추천을 해줘요. 남편을 만나기 전까지 목표는 입당밖에 없었어요.”
▼ 입당하면?
“승진 기회가 생기죠. 입당 못하면 ‘평민’이에요. 그냥 아줌마죠. 해외에 나가 일하려는 로비가 치열해요. 북한은 선발 과정에 공정성이 없거든요. 북한식당에서 일하는 친구들이 거의 다 로비해서 나왔다고 보면 됩니다.”
북한의 정보기관과 노동당·내각·군 산하 기관 및 무역회사는 중국, 러시아, 캄보디아, 태국, 베트남 등의 관광지, 한국 교민 밀집지역을 중심으로 100개 넘는 북한음식점을 운영한다. 주요 고객은 한국인 사업가와 교민, 관광객이다. 중국인 손님도 적지 않다.
북한음식점은 기념품 코너를 두고 북한산 예술품(그림, 도자기)과 건강식품, 주류 등도 판다. 여성 종업원들은 ‘장군님의 노래’ ‘장군님 백마 타고 달리신다’ ‘강성부흥 아리랑’ 등의 노래를 부르며 체제를 선전한다. 북한은 자력갱생을 선서한 이들이 바글대는 곳이다. 당국이 돈을 주고 일을 시키는 게 아니라 독립적으로 돈을 벌어 호구하고 상부에 돈을 바친다. 북한식당의 운영 시스템도 이와 다르지 않다.
“타지에 나와서 일해도 월급은 없습니다. 한국에 오니 ‘인건비’라는 말이 있더군요. 북한에선 ‘노임’이라고 하는데, ‘생활비’란 표현을 더 많이 써요. 국가는 먹고살 만한 만큼의 생활비만 주는 게 당연한 건 줄 알았어요. 해외에서 번 돈은 조국에 바쳐야 한다는 것에 대해 한 번도 의문을 품은 적이 없어요. 양심 있는 사람은 누구나 그렇게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한국에 와보니 인건비도 사람마다 차등화해 있더군요.”
그녀가 덧붙여 말했다.
“어느 날 그이가 한국에 북한 사람이 많이 산다고 했어요. ‘흥, 이상한 소리 하네’ 하고 안 믿었죠. 조국을 배신하는 행위는 양심 있는 사람에겐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할 때죠.”
▼ 팁을 나눠 쓰진 않나요.
“그런 일 없어요. 고스란히 내놓죠. 10달러씩 떼어놓았다가 이따금 회식은 해요.”
▼ 매출은 얼마나?
“정확히는 모르죠. 돈을 아주 잘 벌었어요. 지배인이 만날 ‘간을 뽑아야 한다’고 했어요. ‘돈’을 뽑으란 소리예요. 손님이 북한에 대해 엉뚱한 얘길 하면 인상 쓰게 되거든요. 그럴 때 ‘인상 쓰지 말라’고 교육하죠. 배 관련 일하는 한국 사람이 팁을 팍팍 줬어요. 상하이항에 배를 댄 선장들은 100달러, 200달러씩 주죠, 팁으로만. 팁을 빼돌리려고 마음먹지도 않지만 돈을 숨겨둘 곳도 없어요.”
종업원 수집 자료, 평양에 보고
▼ 한국 드라마도 봤어요?
“네. 봤어요. 음식점에서 일하는 이들은 사상 단련도 하지만 문화교육도 해요. 손님들과 대화를 나눠 ‘간을 뽑으려면’ 말이 통해야 되잖아요. 요즘이라면 ‘송중기보다 유아인이 더 좋더라’는 식으로 대화하는 거죠.”
정부는 2월 “해외 북한식당 출입을 자제해달라”고 국민에게 당부했다. 정보 당국은 북한음식점에서 벌어들인 돈이 북한 당국으로 흘러드는 데다 남측 인사를 상대로 한 정보 수집 공간으로도 악용된다고 관측한다.
국가안전보위부, 정찰총국, 225국 등 북한의 대남 공작기관이 일부 북한음식점을 직영한다고 설명한다. 정보 수집, 포섭 활동을 하는 대남 공작 거점으로 이용한다는 것이다. 음식점 한 곳의 연평균 수익은 10만~30만 달러로 알려졌다. 이렇게 확보한 외화는 소속 기관에 ‘충성자금’으로 납부하거나 북한 공관 운영비로 사용된다.
“룸을 갖춘 북한식당이 많다. 룸에서 새벽 2~3시까지 유흥을 즐긴다. 여성 두 명이 들어와 한 명은 악기를 연주하거나 노래를 부르고 다른 한 명은 말벗 노릇을 한다”는 게 정보당국의 설명이다.
▼ 한국 정보 수집도 한다면서요.
“한국인 특기가, 술에 취하면 가족사부터 다 말해요. 스마트폰에 보관한 사진도 보여주고. 우리 아들은 어디서 일하고, 내가 다니는 회사는 어떤 곳이고…. 한국 사람과 함께 사진 찍는 게 허락됐어요. 한국 손님들이 앞다퉈 사진을 찍는데, 그게 다 음식점 홍보잖아요. 무슨무슨 회사를 다닌다는데 우리가 알게 뭐예요. LG, 삼성쯤 돼야 ‘아, 그렇구나’ 하는 거죠.”
정보 당국은 “북한 식당이 CCTV, 도청장치 등을 활용해 각종 대남 정보를 확보하고 한국인의 명함, 사진, 언행을 수집해 평양으로 보고한다”고 밝힌다. 대화 내용은 물론 정치인에 대한 인물평, 여론 동향 등을 종업원이 수집한 자료를 토대로 일보(日報) 형식으로 작성한다는 것이다.
VIP 상대 ‘꽃값’ 영업
▼ 일일·주간·월간 보고를 한다고 들었어요.
“다 보고했어요. 접촉한 사람이 누군지 일일이 적어요. 그런데 정보 수집 활동의 기준이 뭐죠? 한국 사람들은 묻지 않아도 스스로 말하거든요. 명함 주면서 회사가 뭐하는 곳인지 다 말해줘요. 이름, 연락처, e메일 주소 등을 적은 후 명함을 딱 끼워 보고하죠. 손님을 국적별로도 나눠 정리해요. 어느 나라 사람이 많이 오는지, 특정 국가 사람은 어떤 음식을 주로 주문하는지 등을 통계 내는 겁니다. 예컨대 한국인은 술값과 팁, 중국인은 음식과 술이 주 관심사죠. 중국인의 테이블 당 매출이 더 많아요. 한국 사람은 딱 먹을 만큼만 주문합니다. 새로운 요리를 개발할 때도 보고한 내용이 활용되고요.”
▼ 적극적 정보 수집은 아니다?
“관광객은 다음에 안 올 사람일 소지가 커 관심을 덜 주죠. 자주 올 것 같은 사람에게는 ‘선생님 회사는 뭘 생산해요?’ ‘월급은 얼마예요?’ 같은 질문을 일부러 해요. 월급이 얼마라고 답하면 ‘돈을 잘 버니 여기 밥값은 아무것도 아니겠네요’라는 식으로 치켜세워주고요. 손님에게 들은 얘기를 보고서에 쓰기는 합니다. 간접적 정보 수집이라고나 할까요.”
그녀가 “다른 형태의 음식점도 있다”면서 덧붙여 말했다.
“공간을 대여해 노래방 형식으로 운영하는 곳이 있어요. 음식은 달랑 평양냉면 하나예요. 술만 팝니다. 방 안에 꽃들이 있는데, 그게 다 돈이에요. 공연을 잘해서 손님이 꽃을 하나 건네면 10만 원, 이런 식입니다. 술값 계산할 때 꽃값이 추가돼요.”
▼ 업태가 건전해 보이지 않는데요.
“상당히 예쁘고 모든 게 철저한 애들이 일해요. 어떻게 보면 선을 넘을 지점이 많은 곳이에요. 그래서 가족관계든 사상이든 완벽한 애들만 보냅니다. 얘들이 술은 절대 안 마셔요. 보통 북한음식점이 일반 고객을 상대한다면 그곳은 VIP를 상대한다고 보면 돼요. 새벽까지 공연이 이어지거든요. 그쪽에서 일하는 애들은 중국어도 아주 잘해요.”
▼ 종업원이 몇 명이었나요. 다들 악기를 다룬다던데요.
“스물세 명. 악기는 다 연주할 줄 알죠. 요샌 전자기타, 전자피아노를 많이 써요. 저 같은 경우 사범대는 악기가 필수거든요. 발풍금, 아코디언, 기타, 가야금….”
▼ 4월 초순 북한식당 종업원 13명이 집단으로 탈북해 한국에 입국했습니다.
“열세 명이 다 함께 한국에 오기가 쉽지 않았을 텐데 대단한 결심을 한 것 같아요. 먼저 경험한 사람으로서 말하면 가족이 가장 걱정되거든요. 북한에 사는 부모를 한국으로 데려오기가 어렵잖아요. 해외에 자식을 보내는 가정은 평범한 사람들보다 잘살거든요. 내막은 잘 모르지만, 13명이 함께 대단한 선택을 했다는 데에는 석연찮은 구석이 있어요. 이 대목에서 꼭 하고 싶은 얘기가 있습니다. 언론에 탈북 사실을 공개한 건 정부가 정말로 잘못한 거예요. 북한에 남은 가족이 피해를 보거든요.”
‘그녀’는 ‘그’의 도움으로 가족을 모두 한국에 데려왔다.
어머니, 오빠, 올케 탈북시켜
▼ 음식점 얘기는 여기까지만 해요. 서울 가는 비행기에서 어떤 생각을 했습니까.
“기억 안 나요. 남편은 저쪽에, 브로커는 이쪽에 앉고, 나는 여기 앉고…. 인천공항 도착하자마자 국정원에 잡혀 갔죠. 남편이 미리 브로커 알아보고 국정원에 알리고 다 했어요. 원산의 가족이 다 한국에 들어와 있습니다. 다 합쳐 7000만 원쯤 썼을 거예요. 비행기 태워주는 가격만 1000만 원이거든요.”
‘그’는 서울에 ‘그녀’를 남겨두고 중국으로 되돌아갔다.
“서럽더라고요. 시댁에 나만 남겨두고 가버렸어요. 서울에 자주 오긴 했습니다. 남편이 회사에 얘길 했는지, 프랑스·미국 일로 업무를 바꿨어요. 그곳에 주재한 건 아니고 서너 달에 한 번씩 다녀오는 형태였고요.”
▼ 사랑 이야기가 영화 같습니다.
“한번은, 아팠어요, 많이. 몸살로 아팠는데, 그이가 약을 건네줬어요. 타이레놀. 이게 뭔가 싶었죠. 약을 받아도 보고해야 하거든요. 나쁜 것 같기도 하고, 먹기도 싫은 겁니다. 화장실에 가서 알약 다 뜯고 종이도 찢어서 버렸어요. 또 한번 아팠거든요. 일을 못 나가고 숙소에서 쉬는데, 남편이 음식값을 계산하면서 저를 찾더래요.
사정을 얘기했더니 약을 사러 뛰어가더랍니다. 이번엔 중국 약을 사왔어요. 그다음 날부터 거의 매일 왔어요. 다 나았냐는 둥, 어쨌다는 둥. 한국 와서도 느낀 건데 외래 글자를 너무 많이 써요. 타이레놀이 뭔지 어떻게 알겠어요. 타이레놀 때문에 인생이 이 모양이 됐죠.”
남조선한테 당했구나…
캄보디아 시엠레압의 북한식당에서 일하던 봉사원 김은아.
▼ 연애는 어떻게, 얼마나 했어요.
“180일. 같이 시장도 둘러보고 백화점도 가고, 아이스크림 먹으면서 걷고요.” 해외 북한음식점에는 ‘외출비’ 제도가 있다.
“주재원이 누구랑 밖에서 식사하고 싶다고 요청해요. 손님이 외출비를 내고 데리고 나가는 거죠. 밥 먹고 들어온다 해놓고 남편이랑 데이트한 거죠.”
▼ 한국 남자도 가능해요?
“아뇨. 한국 남자 이름으로 외출을 신청하진 않죠. 한국 사람은 절대 안 돼요. 중국인을 대타로 내세웠어요.”
▼ 어떻게 한국에 갈 결심을?
“미쳤었나 봐요. 저, 미친 거 맞죠?”
▼ 도망친 다롄에는 얼마나 머물렀나요.
“석 달. 낮에 외출 나갔다가 음식점으로 되돌아가지 않고 상하이역에서 곧바로 기차를 탔어요. 상하이에서 다롄이 정말로 멀더군요. 스무 시간은 걸린 것 같아요. 기차 안에서 ‘아차’ 싶더라고요.”
▼ 왜?
“남조선한테 당했구나 싶은 거예요. 다롄에 도착하자마자 상하이로 돌려보내달라고 했어요. 그런데 생각해보니 되돌아갈 수도 없습니다. 외출 나갔다가 없어졌는데 그걸 어떻게 설명해요. 그이는 회사 일 때문에 상하이에 남았고, 사람을 한 명 붙여줬거든요. 무서웠죠. 당했다는 의심이 들었습니다. 미쳤던 게 맞아요.”
‘그’가 다니던 A사의 지사가 다롄에도 있었다.
“기차 탈 때까지는 미쳤다고 생각지 않았어요. 뭔가에 홀려 판단이 안 된 거죠. 일을 저지르고 난 후에 ‘아, 내가 미쳤구나’ 깨달았습니다. 어머니, 오빠, 새언니 얼굴이 떠올랐지만 되돌리지 못했네요.”
위조여권 만들고, 국정원에 알리고, 하는 일에 석 달가량 걸렸다. 하나원을 나온 후 시집에 들어가 살았다. 남편이 한국으로 돌아온 후 분가했다.
“급여만 보면 대기업이 더 좋아요. 그런데 임원 진급을 못하면 옷을 벗고 그래야 한대요. 더 올라가는 게 확실하지 않으면 빨리 벗는 게 낫다고 생각해 남편이 직장을 대학으로 옮긴 거예요.”
‘탈북학생 코디네이터’ 1호
그녀는 행복해 보였다.
“한국에서 좋은 분을 많이 만났어요. 북한에서 온 엘리트 분들과도 교류했고요. 하나원에서 나와 한 달 만에 초등학교에 취직했습니다. 교육부에서 자격을 검증했는데 영어 빼놓고는 다 잘 풀었어요. 수학시험도 잘 봤고요. 자랑 같기는 한데, 초등학교 탈북학생 전담 코디네이터 1호가 저예요. 지금은 코디네이터가 22명으로 늘었습니다. 언론은 안 좋은 얘기만 다루는데, 결혼 잘해 잘사는 탈북 여성 꽤 많아요. 아는 동생만 해도 통일부 사무관님과 결혼했습니다.”
대학원에 진학한 것은 남편의 권유에 따른 것이다. 책도 한 권 냈다.
“정착 잘 했으니 사람만 만나지 말고 공부하라더군요. 학교 다니는 게 재밌어요. 탈북민 예절에 관련한 책도 한 권 썼습니다. 나중에 책 보여드릴 게요. 탈북민들이 한국 예절을 잘 모르는 경우가 많아요. 장례식장에 빨간색 옷 입고 온 분 보고 깜짝 놀란 적도 있습니다. 탈북민에게 한국 예절을 알려주는 게 필요하다고 생각해 책으로 냈습니다.”
둘 사이에 아이는 아직 없다.
“처음엔 속상했는데 마음을 비우니 괜찮아요. 학교에 가면 아이들 20명이 있거든요.”
그녀는 지난해 여름 중국으로 여행을 갔다가 일행과 함께 선양(瀋陽)의 북한음식점에 들렀다.
“알아볼 사람이 없는데도 들어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 마음이 오락가락 바뀌었습니다. 혹시나 해서 모자를 쓰고 들어갔죠. 일행이 ‘음심 값이 너무 비싸다’ ‘여기선 맛만 보고 딴 음식점에 가서 먹자’는데 서운하데요.”
그녀가 국경의 남쪽으로 몸을 옮긴 것은 신념이나 생활고 때문이 아니다. ‘그녀’는 사랑하는 ‘그’와 “다툰 적이 없다”면서 웃었다.
출처 : 신동아 6월호 : 송홍근 기자
□ 08.18 태영호, 작년 에릭 클랩턴 런던 공연 보러 온 김정철 수행
▲주영국 북한 대사관 태영호 공사의 탈북을 보도한 BBC 화면(사진 오른쪽이 태영호). [중앙포토, BBC 캡처]
고위급 베테랑 외교관과 ‘항일 빨치산’ 가족의 일원까지 탈북하는 등 북한 엘리트층의 동요가 커지고 있다. 영국 주재 북한 대사관에서 근무하다 한국으로 망명한 태영호(55) 공사의 가족은 북한에서 손꼽히는 특권층이다. 탈북자들에 따르면 태 공사는 ‘성분’이 좋은 가문에서 태어나 고등중학교 재학 중 중국으로 건너가 영어와 중국어를 배웠다고 한다. 중국에서 돌아온 뒤 5년제 평양 국제관계대학을 졸업하고 외무성에 배치됐다. 김정일의 전담통역 후보인 덴마크어 1호 양성통역으로 선발돼 덴마크 유학 길에도 올랐다.
역대 최고위급 귀순 외교관 유럽서 체제 대변한 김정은의 입 유튜브에 강연 동영상도 많아 부인은 부총참모장 오금철 집안 김일성 3대 충성한 금수저 가문 BBC “평양 소환 직전 망명 결정” 에번스 기자 “그를 마지막 봤을 땐 런던 식당서 커리 먹고 있었다”
지난 2001년 벨기에 브뤼셀에서 열린 북한과 유럽연합(EU)의 인권대화 때는 북한 대표단 단장으로 참가하면서 외교무대에 데뷔했다. 이후 덴마크·스웨덴에서 근무하다 영국 주재 북한 대사관에 파견됐다. 2015년 김정은의 친형인 김정철이 기타리스트 에릭 클랩턴의 런던 공연장을 찾았을 때 동행한 적도 있다고 한다.
태 공사의 부인 오혜선(50)은 빨치산 가문에 해당한다. 김일성의 빨치산 동료인 오백룡(사망) 전 노동당 군사부장과 오백룡의 아들 오금철(69) 군 총참모부 부총참모장이 오씨와 혈연 관계라고 대북 소식통이 전했다. 오씨 일가는 김일성-김정일-김정은 3대에 모두 충성해 온 뿌리 깊은 ‘금수저’ 계층인 셈이다.
▲그는 지난 해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친형 김정철(사진 왼쪽)이 가수 에릭 클랩턴의 런던 공연장을 찾았을 때 수행했다. [중앙포토, BBC 캡처]
태 공사는 주영 북한 대사관에서 현학봉 대사에 이어 서열 2위로 활발한 대외활동을 벌여 왔다. 동영상 전문 사이트 유튜브에는 그의 역할을 알 수 있게 하는 영상들이 실려 있다. 지난 2014년 11월 런던의 한 서점에서 한 20분짜리 태영호의 강연 동영상에서 그는 북한 체제 선전에 열심이었다.
태 공사는 강연에서 “대북제재는 미국 주도 제국주의의 압살책”이라며 “영국 등지의 양심세력이 이에 맞서 함께 싸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우리나라에 무상교육·무상주거·무상의료가 제공되고 있는 것을 안다면 사람들이 북한에 대한 생각을 바꾸게 될 것”이라고 선전했다.
객석에서 웃음소리가 나오자 그는 표정이 굳어지며 “서방 언론의 왜곡 탓에 북한의 이미지가 잘못 묘사되고 있다”고 비난하기도 했다. 2013년 12월 장성택 전 노동당 행정부장의 숙청·처형 사건도 언급했다. 태 공사는 “조카(김정은)가 삼촌(장성택)을 죽여 개 먹이로 줬다는 것은 모두 꾸며진 이야기”라며 “리더십(지도자)이 바뀌면 당연히 주변 사람들도 바뀌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유튜브에서 그의 영문 이름(Thae yong ho)을 검색하면 다른 강연 영상도 찾아볼 수 있다. 이름과 얼굴, 강연 내용이 인터넷에 생생하게 올라 있다는 것은 그가 외교관으로서 북한 체제를 대변하는 ‘홍보맨’ 역할을 활발하게 해 왔다는 뜻이다
▲탈북 소식을 가장 먼저 보도한 중앙일보 8월 16일자 지면. [중앙포토, BBC 캡처]
이 과정에서 타국 외교관이나 영국 정부 관계자, 외신기자들과도 교류해 왔다. 영국 주재 북한 외교관이 탈북·망명했다는 본지의 최초 보도(8월 16일자 6면) 이후 영국 BBC는 태 공사가 자취를 감춘 사실을 파악해 16일(현지시간) 망명사실을 보도했다.
태 공사와 친분을 맺어 온 BBC의 스티브 에번스 기자는 ‘내 친구 탈북자’란 글을 통해 “태영호를 마지막으로 봤을 때 그는 자신이 좋아하는 런던 서부 액턴의 인도 식당에서 커리를 먹고 있었다”며 “런던의 한 인도 식당에서 만났을 때 이번 여름 평양으로 돌아갈 것이라고 태영호가 말했다”고 전했다. BBC 보도에 따르면 태 공사는 평양 소환 직전 망명을 결행한 셈이다. BBC와 현지 언론인 가디언 보도에 따르면 태 공사는 한때 골프에 열광하다가 아내(오혜선)가 불평하자 골프 대신 테니스를 즐겼다고 한다.
영국 정부는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에서 한국과 미국, 일본 등과 함께 강도 높은 대북 제재를 적극 지지하고 있다.
대북 소식통은 “최근 영국의 대북제재 압박이 강화되면서 평양으로부터 대응책을 마련하라는 압박을 받아 오다 탈북을 결심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태 공사 일가는 당초 미국 등 해외 국가로의 망명을 고려했으나 최종결심 단계에서 한국행을 굳혔다고 한다. 정부는 태 공사의 망명을 계기로 비슷한 급의 엘리트 탈북이 이어질 것으로 보고 있다. 태 공사의 망명 사실을 공식 브리핑을 통해 발표한 것도 북한 엘리트들의 탈출 결심에 자극제를 주기 위해서라는 분석이다.
이영종 통일전문기자 서재준 기자 suh.jaejoon@joongang.co.kr [출처: 중앙일보]
□ 10.08 北급변 대비 '10만 탈북촌' 만든다
단기간 대규모 탈북 발생할 경우 폐교·체육관·임시건물 등에 분산 정부 "2조원대 투입… 전원 수용" 北접경지역 '해외 탈북촌'도 준비 몽골 등과 논의… 中은 거부 반응
박근혜 대통령이 북한 주민들을 향해 '탈북 권유'와 '탈북자 전원 수용' 발언을 이어가는 가운데 정부 내부적으로는 대규모 탈북 사태에 대비한 대응책을 가다듬고 있는 것으로 7일 알려졌다. 북한이 핵 개발을 완료하기 전에 적극적으로 김정은 정권 교체 작업에 나설 필요가 있다는 일부 여권(與圈) 핵심 관계자 생각이 이 같은 준비 작업에 반영된 것인지 주목된다.
정부는 북한에 급변 사태나 급변에 준하는 상황이 발생하면 단기간에 약 10만명의 탈북자가 발생할 수 있다고 추정하고, 이들을 수용하기 위한 '10만 탈북촌(村)' 건설 계획 등을 준비 중인 것으로 전해졌다. 탈북자 전원 수용을 원칙으로 최대 10만명의 난민 중 4만3000명은 폐교와 체육관 등 기존 시설에, 5만7000명은 신규 임시 건물 등에 분산 수용하는 것이 주요 내용이다. 정부는 '10만 탈북촌' 건설에 2조원대의 예산이 들 것으로 추산하고 있다. 안보 부서 당국자는 이날 "현재 대규모 탈북이 임박한 징후는 없지만, 엘리트층의 잇따른 탈북 등 북한 지도부의 균열 조짐이 분명한 만큼 만약의 사태에 대비할 필요가 있다"며 "댐에 금이 간 자국이 보인다면 홍수를 대비하는 게 옳다"고 했다.
정부 소식통은 "한·미의 북한 급변 사태 대응책인 '작전계획 5029'와 전시 대비 계획인 '충무계획' 등에 마련된 탈북자 수용 대책을 통합·정비하는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고 전했다. 대규모 북한 주민이 휴전선을 넘어 내려올 경우 통일부는 지방자치단체와 협력해 수도권 일대 폐교를 난민 수용소로 활용할 방침이다. 급변 사태 시 북·중이나 북·러 접경으로 탈북자가 집중될 가능성도 크다. 안보 당국은 박근혜 정부 출범 이후 이런 상황을 대비해 몽골 등과 해외 탈북촌 건설 계획을 비공식·비공개로 논의한 것으로 알려졌다. 외교 소식통은 "급변 사태를 염두에 두고 중국 군부와도 비밀 협의를 한 적이 있다"며 "그러나 중국은 탈북 대책 등에 거부 반응을 보인 것으로 안다"고 했다.
외교부 관계자는 "외교관 3~4명이 근무하는 소규모 해외 공관에도 탈북자 수용 공간을 마련해뒀다"며 "중국·동남아처럼 잘 알려진 탈북 루트 외에 중동·아프리카처럼 북한 노동자가 있는 곳이라면 탈북자가 생길 수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조선일보 진명 기자
□ 12.07 탈북민을 북송시킨 죄책감에 옷 벗은 러시아 검사 이야기
내가 평양에서 살다가 북한의 북부국경도시인 함경북도 온성군으로 추방된 것은 1980년대 중반이었다. 평양에서 나서 자라 대학까지 졸업했지만 핵심계층이 아니라는 이유에 가정의 사소한 문제가 겹쳐져 불순분자로 낙인 받고, 하루아침에 멀리 변방으로 추방된 것이었다.
그때 나는 정권의 배척을 받고 추방되어 가는 사람들의 심리가 어떤 것인지 느꼈다. 정권의 배척을 받으면 나라에 대한 애착이나 헌신적인 감정이 사라지고 반감이 생긴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었다. 그리하여 나는 80년대 말 북한을 탈출했다.
중국을 건너가 얼마동안 살았지만 공안의 단속이 너무 심해 살 수가 없었다. 나는 다시 중국국경을 넘어 러시아로 갔다. 내가 러시아로 간 것은 러시아 말을 조금이라도 할 수 있기에 그곳에서는 사는 것이 조금 편리할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러시아에서 나는 10년 동안 살았다. 처음에는 고생했지만 나중에는 마음고운 러시아 여성을 만나 그와 함께 살았다. 신분이 불법체류자인 까닭에 결혼식은 못하고 살았지만 트랙터까지 장만하고 열심히 농사일을 하며 낯선 이국땅에 정착해 갔다.
후에 아들까지 낳고 살면서 그 곳이 나의 마지막 정착지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나의 그런 생각은 헛꿈에 불과했다. 나는 어느 날 불시에 들이닥친 러시아 경찰에게 체포되었다. 누군가 내가 불법체류자라는 사실을 러시아 경찰에 고발한 것이었다.
나는 러시아 경찰서의 미결수 감방에 6개월 동안 감금되어 있었다. 나는 러시아 경찰에게 중국인이라고 거짓말을 하였다. 어떻게 해서든지 북한에는 가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러시아 경찰은 나에게 중국인이라는 것을 확인할 근거를 내놓으라고 요구하며 6개월을 감방에 잡아두었다.
그러던 어느 날 경찰이 나에게 “오늘은 위에서 간부가 너를 만나러 온다.”고 알려줬다. 경찰이 말한 “위에서 오는 간부”는 주 검찰청 검사였다. 나는 예전처럼 예심실에 나가 검사의 조사를 받았다.
위풍이 있어 보이는 검사는 나에게 “당신의 신분을 말해 달라. 그래야 우리가 해당한 조치를 할 수 있다.”고 이야기했다. 나는 검사의 거듭되는 설득에 입을 열었다. 나는 북한 사람이라는 것과 북한을 탈출한 뒤 10년 동안 온갖 고생을 다했다는 사실, 그리고 북한에 잡혀나가면 감옥에 가야 한다는 사실을 솔직히 이야기했다.
검사는 3일 동안 나를 조사했다. 국경을 건너온 날자와 그 동안 거쳐 온 지역, 러시아에서 범죄전과가 없다는 것 까지 알아보고 조사를 끝냈다. 그는 조사를 끝내는 날 나의 손을 잡아주며 이렇게 말했다. “당신은 북한으로 돌아가지 않아도 된다. 러시아에서 살 수 있도록 내가 노력하겠다.” 그는 아마 파란만장한 나의 과거를 듣고 감동을 받은 것 같았다.
하지만 그 검사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나는 한 달 후 북송되었다. 북송되기 며칠 전, 나는 경찰을 통해 놀라운 사실을 전해 들었다. 놀라운 사실이라는 것이 나를 조사한 검사가 스스로 옷을 벗었다는 것이었다. 그는 나를 북송하면 안 된다고 해당기관을 설득했지만 끝내 나를 북송하라는 지시가 떨어지자 “나는 불쌍한 조선 사람과 약속을 어겼다.”며 스스로 사직서를 내고 검사 옷을 벗었다고 했다.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사실이었다. “너 때문에 검사가 옷을 벗었다.” 러시아 경찰은 몇 번 씩이나 곱씹어 말했다. 나는 비록 북송을 피할 수는 없었지만 나의 북송을 막으려고 끝까지 노력하다가 나중에는 죄책감으로 스스로 검사직을 내놓은 검사에게 미안했다.
그리고 그의 인간성이 고마웠고 그의 인격에 존경이 갔다. 하지만 나는 그 후 그 검사를 다시 만나지 못했고 감사하다는 말 한마디 하지 못하고 북송되었다. 나는 지금도 때때로 나 때문에 스스로 옷을 벗은 그 검사를 생각해본다. 그는 내가 죽을 때까지 잊지 못할 고귀한 인격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 후 북송되어 북한 보위부에서 모진 고문과 인간이하의 학대를 받을 때마다 러시아에서 만났던 잊지 못할 검사를 생각해보군 했다. 꼭 같은 공권력이었지만 러시아의 공권력과 북한의 공권력은 너무도 달랐다. 러시아 사람들은 최소한 자신의 인격을 지키고 살았지만 북한의 공권력에 근무하는 인간들은 말 그대로 쓰레기들이었다.
인격이나 타인에 대한 배려나 이해 같은, 인간의 모습은 도저히 찾아볼 수 없는 사람들이었다. 때리고, 소리 지르고, 뇌물에 환장한 인간들. 그들이 바로 북한사회의 보위기관 보안기관에 근무하는 인간들의 군상이다. 북한사회의 공권력 집단에는 인간의 공간이 없었다.
그 말은 옳고 그름을 스스로 판단하고 자신의 주장을 내세울 자유가 없다는 뜻이다. 인격의 우선 조건은 자유이다. 정당성이나 합리적인 판단에 기초한 개인의 의사가 허용되지 않으니 인격이 생겨날 수도 없다. 그 모든 현상은 세습독재정권의 산물이었다.
평범한 백성들이 불쌍한 노예라면 공권력에 근무하는 사람들은 덜 불쌍한 노예들일 뿐이었다. 그리고 개인의 인격은 사회의 양상과 밀접한 연관을 가지고 있다는 것도 알 수 있다. 북한에도 세습독재정권이 사라지고 자유로운 인간의 삶이 보장되면 그때 비로소 인간의 진정한 인격도 생겨나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
탈북자 허학명 (정리 박남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