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이탈주민(탈북민) 이야기6/ 탈북 지성인들이 말하는 북한5/ 주성하의 서울과 평양 이야기1/ 2012-03-09 中, 탈북 31명 전원 북송” -2014-12-02 평양 부모들 “악” 소리 나는 유치원생 뒷바..
북한 이탈주민(탈북민) 이야기6/ 탈북 지성인들이 말하는 북한5/
■ 주성하의 서울과 평양 이야기1/ 2012 - 2014 동아일보 기자
■ 2012-03-09 中, 탈북 31명 전원 북송”
중국이 탈북자 강제 북송을 중단하라는 국제사회의 호소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김정은 체제 출범 이후 대량 체포한 탈북자 31명을 북한에 넘겨준 것으로 알려졌다.
동아일보는 최근 복수의 북한 내부 소식통과 중국 공안 소식통을 통해 이 같은 사실을 확인했다. 이들 31명의 탈북자는 2월 8∼12일에 중국 공안에 체포된 사람들로 상당수가 한국에 직계가족이 있다. 다섯 살짜리 어린이를 포함한 미성년자 여러 명과 노인들도 포함돼 있다. 동아일보가 2월 14일 이들이 체포돼 북송 위기에 처한 사실을 보도한 것을 계기로 이들 31명의 안위는 탈북자 문제의 심각성과 시급성을 보여주는 상징적 사례가 되어 국제사회 북송 반대 운동의 핵심 대상이 됐다.
한 대북 소식통은 8일 “한국행 길에 올랐다 지난달 8일 선양(瀋陽)에서 체포된 탈북자 10명이 현재 평북 신의주 국가안전보위부 감방에 갇혀 있다”고 전해 왔다.
다른 대북 소식통도 “옌지(延吉) 등지에 수감돼 있던 탈북자들도 이미 송환돼 함경북도 보위부에서 조사를 받고 있다”고 전했다. 또 다른 대북 소식통은 “이들의 북송과 더불어 북한에서 관련자들에 대한 핏빛 숙청이 벌어지고 있다”고 말했다. 이미 탈북자들의 가족은 물론이고 탈북자들이 국경을 넘을 때 도와준 사람들의 일가족까지 모조리 체포돼 보위부에서 취조를 받고 있다는 것이다. 특히 몇몇 탈북자 가족은 탈북자들이 중국에 수감돼 있을 때부터 체포되기 시작했다고 한다. 이는 중국 당국이 체포한 탈북자 명단을 곧바로 북한에 넘겨주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채널A 영상] 탈북자 31명 북송…우리정부 “아무것도 확인이 안된다” 발만 동동
중국 공안 소식통에 따르면 이들 31명은 중국 당국이 작성하는 북송자 명단 데이터에도 올라 있지 않다. 이는 북한 보위부가 직접 중국 당국에서 이들을 넘겨받아 차에 실어 북으로 끌고 갔을 가능성을 보여준다.
북송 날짜에 대해선 정보가 엇갈린다. 지난달 24일을 시작으로 여러 차례로 나뉘어 북송됐다는 소식도 있고 선양에 수감됐던 탈북자 10명은 이달 6일에 북송됐다는 정보도 있다.
중국의 이번 탈북자 전격 북송은 과거의 전례에 비추어 유례없이 강경한 조치다. 중국은 과거 체포된 탈북자가 이슈로 부각하면 최대 6개월까지는 수감하면서 여론이 잦아들기를 기다렸다가 북송시켰다. 하지만 이번에는 국내외에서 강제 북송 중단 여론이 최고조에 달했는데도 체포한 지 보름 만에 모두 북송시켰다.
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2012-10-02 DMZ를 탈북의 통로로 만든다면
현재 북한의 가장 큰 체제 위험은 탈북이다. 4중 5중의 감시체제에서 쿠데타는 불가능하지만 굶어죽는 걸 피해 달아나는 것은 가능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주민들이 탈북을 선뜻 못하는 이유는 중국에서 체포될 확률이 너무 높기 때문이다. 1990년대 중반 이후 탈북자 1명이 한국 입국에 성공할 동안 5명이 북송됐다. 특히 최근에 북송된 탈북자들에 대한 처벌은 전례 없이 가혹해졌다.
북한은 몇 년 전부터 북-중 국경을 체제 보위의 최전선으로 간주하고 있다. 병력을 꾸준히 늘리고 양은 보잘것없지만 군량미와 피복도 국경경비대부터 공급한다.
그 대신 남쪽 최전방의 1, 2, 4, 5군단은 북에서 가장 힘없는 집 자식들이 어쩔 수 없이 끌려가는 부대가 됐다. 특히 강원도 1, 5군단이 가장 심각하다. 군인들의 키가 160cm 안팎에 불과하고, 병력의 3분의 1이 영양실조인 현역 중대도 부지기수다. 군인들은 밥 한 끼에 영혼도 팔 만큼 굶주려 있다. 무게 48.7kg인 한국군 완전군장을 착용시키면 태반이 그 자리에 주저앉을 판이다. 배가 고파 탈영한 군인이 너무 많아 당국이 처벌을 포기했다고 한다.
미래는 더 암담하다. 유엔아동기금(UNICEF)의 조사 결과 북한 0∼9세 아동의 절반이 영양실조다. 고난의 행군이 시작된 1990년대 중반 이후 출생자는 30% 이상 급감했다. 1994년생이 올해 입대하는 걸 감안하면 앞으로 북한군 입영 대상자가 매년 30%씩 줄어들게 된다. 머잖아 여성의무복무제라도 도입해야 할 판이다.
이런 속에서도 북한이 중국과의 국경 병력을 기를 쓰고 늘리는 것은 한국군의 북침 가능성보다 대량 탈북 가능성을 훨씬 더 우려하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아랫돌 빼서 윗돌을 괴는 형국이다.
이참에 북한이 아예 아랫돌을 뺄 수 없게 만들면 어떨까. 만약 비무장지대(DMZ)를 통해 굶주린 군인들이 무더기로 남쪽에 귀순한다면 북한으로선 더 이상의 재앙은 없을 것이다. 북한의 지금 형편으론 남과 북 두 개의 전선을 동시에 꽁꽁 막는 건 불가능하다. 탈북을 막아야 할 신세대 군인들에겐 충성심도 기대하기 힘들다.
가령 DMZ에 수많은 귀순 통로를 만든다고 상상해 보자. 대전차 지뢰나 방해물, 철조망 등은 그대로 두되 일정 구간의 대인지뢰만 제거하는 것이다. 북한 군인들이 잘 볼 수 있게 ‘지뢰 없음’이라는 팻말도 크게 세운다. 안보상 불안은 첨단 무인 감시체계 등 한국의 앞선 군사력으로 최소화할 수 있다. 실시해 보고 득보다 실이 더 크면 통로를 다시 닫으면 그만이다.
북한군에겐 당장의 배고픔을 면하고 달러를 벌어 가족에게 보내줄 수 있는 생명의 통로가 열리는 셈이다. 자기가 지키는 지역을 통과해 남쪽으로 넘어 오면 중국에서처럼 북송될 위험도 없다. 행방불명된 탈영병이 워낙 많다 보니 몰래 오면 가족이 피해 볼 염려도 없다.
이런 상상이 현실이 될 수 있을까. DMZ의 대인지뢰를 걷겠다면 아마 우리부터 난리가 날 것이다. 남북을 체험한 기자가 보기엔 북쪽은 허세만 남아 하늘을 찌르지만 남쪽은 실력에 비해 자신감이 바닥이다. 개방도가 세계 최상위권인 남쪽은 좌우로 10m씩 흔들려도 무너지지 않지만 가장 폐쇄된 북한은 1m만 흔들려도 버티지 못함을 알았으면 좋겠다. DMZ의 대인지뢰를 걷을 경우 진짜 난리가 날 곳은 북한이다. 가장 강력한 대북제재는 이런 것이 아닐까.
■ 2013-01-26 탈북자 재입북 뒤엔 ‘악마의 얼굴’ 브로커가
24일 평양회견 김광호씨 사례로 본 ‘탈북브로커의 도움과 횡포’
북한 조선중앙TV는 24일 밤 한국에 정착했다 재(再)입북한 탈북자 4명의 기자회견을 방송했다. 재입북 탈북자의 기자회견은 지난해 6월 박정숙 씨(여) 이후 벌써 3번째다. 탈북자 사회에서는 앞으로도 비슷한 사건이 이어질 것으로 보고 있다. 이번에 재입북한 4명 중 3명은 2010년 4월 전남 목포시에 정착한 김광호(사진)-김옥실 씨 부부와 10개월 된 딸이다. 이들은 지난해 10월 중국으로 여행을 간다며 출국한 뒤 소식이 사라졌다. 남한에서 결혼식을 올리고 딸까지 낳아 행복한 일만 있을 것 같던 이들이 2년 반 만에 목숨을 걸고 찾아온 ‘자유의 품’을 떠난 이유는 뭘까.
○ 정착금부터 브로커에게 빼앗겨
2010년 4월 탈북자 정착 지원기관인 하나원에서 3개월간 정착 교육을 받고 나선 김 씨 부부 앞에 기다렸다는 듯 나타난 건 중국에서 이들을 데려온 소위 ‘탈북 브로커’. 그는 중국에서 약속한 대로 1인당 250만 원씩 모두 500만 원을 지불할 것을 요구했다. 함께 온 탈북자들은 순순히 250만 원씩 줬다. 중국에서 쓴 계약서엔 하나원을 나올 때는 250만 원, 지불을 늦추면 최대 400만 원까지 내겠다고 돼 있었다.
탈북자들은 하나원을 나올 때 정부에서 1000만 원이 조금 넘는 임대주택 보증금과 300만 원의 정착금을 받는다. 보증금은 아파트 관리사무소에 내기 때문에 300만 원이 사실상 탈북자들이 쥐고 사회에 나오는 재산의 전부다. 이 중 브로커에게 250만 원을 떼어 주면 50만 원밖에 남지 않는다. 여기에 매달 기초생활수급자로 받는 30만 원을 보태 살아 나가야 한다. 직업을 구하기도 어려운 탈북자들에겐 혹독한 조건이다. 하지만 탈북자 대부분이 이렇게 시작한다. 브로커 없이 홀로 남한에 오기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김 씨는 다른 탈북자와 달리 200만 원씩만 주고 나머지는 거부했다. 하지만 브로커는 나머지도 달라며 재판을 걸었고 법원은 지불이 늦어졌으니 계약서대로 1인당 400만 원씩 주라고 판결했다. 김 씨 부부는 항소했지만 브로커가 김 씨의 주택보증금마저 차압하려 하자 결국 남한을 떠났다. 목숨을 걸고 ‘자유의 품’을 찾아왔지만 결국 ‘자유’를 포기한 셈이다.
○ 브로커는 탈북 도우미? 사기꾼?
김 씨는 얼핏 보면 피해자로 보이지만 브로커를 가해자라고만 보기 어려운 게 탈북자 문제의 복잡성을 보여준다. 한국 정부가 탈북자 입국을 전혀 도와주지 않는 상황에서 탈북자들은 이런 브로커의 도움을 받지 않을 수 없다. 브로커가 탈북자를 입국시키는 데는 돈이 든다. 중국에서 숨겨 주고 먹여 줘야 하고, 중국 대륙을 횡단하는 데 드는 교통비며 심지어 제3국에서는 벌금도 내야 한다. 운이 나빠 체포되면 감옥에 가야 하고, 김 씨처럼 한국에 들어온 뒤 약속한 돈을 안 주고 잠적하면 끊임없이 찾아내 독촉해야 한다.
▼ 北, 탈북자 회유 전문 공작기관까지 만들어 ▼
이런 브로커가 없다면 90% 이상의 탈북자가 한국에 들어오지 못한다. 브로커들은 탈북자에게서 받은 돈을 밑천으로 또 다른 탈북자들을 데려오고 생계를 유지한다. 그래서 “탈북 브로커는 필요악”이라는 말까지 나온다.
문제는 비용이 적정한가이다. 이동수단과 통로가 달라 일률적으로 말하긴 어렵지만 100만∼250만 원 선이라는 말이 많다. 250만 원을 넘기면 탈북자 사회에서 ‘악덕 브로커’로 분류된다. 비록 극소수이긴 하지만 300만∼400만 원을 요구하는 브로커도 있다. 심지어 중국에서 계약서를 썼다는 이유로 거액을 요구한 후 받지 못하면 여성의 경우 성폭행까지 하는 브로커도 있다고 한다.
탈북자는 대부분 이 비용을 지불하고 매우 어렵게 정착생활에 들어간다. 하지만 어느 정도 시기가 지나면 점차 자리를 잡는다.
○ 재입북은 절망 끝 결단 아닌 새로운 희망?
김 씨 부부가 북한으로 돌아간 것은 단순히 브로커의 횡포 때문만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김 씨는 그 나름대로 영악한 사람이다. 그는 과거 수차례 중국을 넘나들며 밀수를 했다. 이 때문에 북한에서 체포돼 처벌받기 직전 약혼녀를 데리고 탈출했다.
그는 북한에 있을 때 소를 훔치기도 했고, 중국에서 지프를 훔쳐 팔아먹기도 했다고 지인들에게 자랑삼아 이야기했다. 소도둑은 북한에서 사형까지 당할 수 있는 중범죄다. 탈북의 그 위험한 순간에 중국에서 약혼녀와 방을 함께 쓸 수 있게 해주지 않는다고 칼을 들고 위협까지 했다고 한다. 탈북 과정에서 잠잘 때 방은 보통 남녀로 구분해 사용하게 한다. 이 때문에 지인들은 그의 이름만 들어도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김 씨 부부는 공식 결혼은 하지 않았기 때문에 남한에서 임대주택을 각각 받았다. 김옥실 씨는 곧 임대주택을 반환하고 임대보증금을 받아 김광호 씨와 살림을 꾸렸다. 이후 이들은 2년 동안 여기저기서 돈을 벌었다. 보통 재입북하는 탈북자는 임대주택은 국가에 반환하고 임대보증금을 되찾은 뒤 시중은행 및 지인 등에게서 최대한 돈을 빌려 나간다. 김 씨도 그랬는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그렇더라도 남한 생활 2년이면 최소 3000만 원 안팎의 재산을 모았을 것으로 추측된다.
북한에서 3000만 원은 엄청난 돈이다. 50만 원이면 4인 가족이 어렵게나마 1년을 먹고살 수 있는 북한 실정을 감안하면 이들은 북한에서 평생 먹고살 수 있는 돈을 수중에 넣었을 것으로 보인다.
○ 북한의 새로운 탈북자 정책
과거엔 탈북자들이 한국 사회에서 어려움에 봉착해도 그냥 버티는 수밖에 달리 방법이 없었다. 북한에 돌아가면 처벌받기 때문이다. 하지만 최근 북한은 탈북자를 회유해 재입북시키는 수법으로 남쪽으로 간 탈북자들을 유혹하고 있다. 이들이 돌아와 남한 사회를 비난하면 남쪽에 대한 주민들의 환상을 막을 수 있고 탈북도 그만큼 줄일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최근엔 이를 위한 전문 공작부서까지 생겨나 북한의 가족을 동원해 남한의 탈북자를 회유하고 있다. 한 탈북자는 “김 씨 부부를 회유한 탈북 여성이 있지만 수사 당국이 증거가 없어 체포하지 못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고 전했다. 탈북자 사회에선 앞으로 이런 재입북자가 늘어날 것으로 보고 있다.
○ 탈북자 재입북 북한 정권에 이롭지만은 않아
하지만 탈북자들이 계속 돌아오면 북한으로서도 골치 아픈 일이 아닐 수 없다. 박정숙 씨 귀환 때도 말로는 남쪽에서 온갖 핍박을 다 받았다고 기자회견을 했지만 정작 주민들은 “까무잡잡한 여자가 5년 만에 귀부인이 돼 나타났다”고 쑥덕댔다. 거기에 입국한 탈북자들이 몰래 숨겨 온 돈으로 잘살게 되면 주민 여론이 문제다. 그렇다고 처벌하면 용서를 강조했던 당의 정책에 큰 흠집이 생긴다.
대북 소식통에 따르면 이 때문에 최근 북한 당국에선 새로 회의를 열고 탈북자 정책의 방향을 수정했다고 한다. 북한으로 되돌아오게 하지 말고, 어려움에 빠진 탈북자를 말레이시아나 인도네시아 등 동남아로 꾀어 보낸다는 것이다.
2013-01-29 북한 언제까지 재입북 대우할까
일요일에 혼자 몰래 골프 치는 목사에게 하나님이 내린 벌이 홀인원이란 말이 있다. 봐줄 사람이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평생의 자랑거리가 평생의 아쉬움이 될 수 있는 것이다. 한국에 혈연단신 입국한 탈북자들도 봐줄 사람이 없어 불행하다. 일반적 관점에서 볼 때 탈북자들은 취직도 어렵고 사회적 편견과 냉대에 시달리는 집단이다.
그러나 다른 관점에서 한번 보자. 입국한 지 몇 년 안 된 탈북자라도 임대아파트 보증금과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모은 돈을 합치면 최소한 수천만 원의 재산은 있다. 이 돈이면 북한에서 평생 먹고살 수 있다. 먹고살기 어려워 북한을 떠났는데 불과 몇 년 만에 북한에선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재산을 갖게 된 것이다.
그러니 혈육과 떨어져 이 땅에서 빈곤계층으로 살기보단 북한에 돌아가 가족친지들 앞에서 부자로 살고 싶은 것은 어쩌면 당연한 욕망이다. 한국에 온 지 얼마 안 되는 어떤 탈북자는 몇 달 전 중고차 거래 사이트에서 수백만 원짜리 중고 벤츠를 찜해놓고 꼭 사겠다고 별렀다. 그렇게 낡은 차는 타지 못한다고 설명했는데도 “내일이라도 북한 체제가 무너지면 단 한 번만 타도 좋으니 벤츠 타고 고향에 가고 싶다”고 이유를 댄다. 북한에서 벤츠는 최고위급만 타는 가장 좋은 차로 인식된다.
대다수 탈북자에게 탈북의 가장 큰 동기는 생활고이다. 고향에서 이집 저집 먹을 것을 꾸러 다니며 속으로 피눈물을 흘렸을 과거 정도는 누구나 있다. 이들에겐 고향에 ‘금의환향’해 부자로 대접받는 일은 매우 중요한 삶의 동기이다. 지금은 갈 수 없어 못 갈 뿐이다.
그런데 북한이 최근 다시 돌아온 탈북자는 용서해 준다고 선전하고 있다. 이 선전을 믿고 지난해 6월 박정숙 씨를 시작으로 이달 24일까지 갓난아기 2명을 포함한 8명의 탈북자가 재입북했다. 북으로 돌아가기 전 이들이 돈부터 챙겼을 것은 당연한 일. 미리 북한에 밀반입시켰을 수도 있고 중국에 숨겨두었을 수도 있다.
임대주택 보증금을 포함해 1인당 2000만 원 가까운 정착금을 의무적으로 주었더니 그걸 홀랑 들고 북한으로 넘어간 탈북자가 한국인으로선 큰 배신감이 들 것이다. “다시 돌려줘”라는 말이 나올 것은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그 돈을 가장 빼앗고 싶은 사람은 누구보다도 김정은일 것이다. 심지어 한국에 다시 고스란히 돌려주고 싶을지도 모른다. 쌀 꾸러 다니던 아무개가 남쪽에서 몇 년 만에 평생 먹고살 돈을 갖고 돌아왔다는 소문만큼 북한 체제를 흔들 수 있는 일이 어디 있을까. 수조 원의 대북 지원도 이런 효과는 못 낸다.
북한은 지금 재입북 탈북자들을 탈북 방지 선전용으로 활용하고 대접도 잘해주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 호의가 언제까지 이어질지는 알 수 없다. 만약 김정은이 한국의 탈북자들을 정말로 돌아오게 만들고 싶다면 국제사회에 “재입북 탈북자의 신변은 나와 노동당, 공화국의 이름으로 보장한다”는 선언이라도 하면 어떨까. 얼마나 돌아갈진 모르겠지만….
2013-04-17 영화 ‘쉬리’를 처음 보았을 때
탈북해 중국에 숨어있던 2000년대 초반, 영화 ‘쉬리’를 우연히 보고 놀라움과 전율을 함께 느꼈다. 가장 놀라웠던 것은 영화 속 북한 특수부대원들이 경찰특공대를 저 죽이고 싶은 만큼 죽이며 날아다니는 장면이었다. 전혀 가능하진 않지만, 만약에 북한 영화에서 북파공작원을 그렇게 그렸다간 그 감독은 3대가 멸족할 것이 뻔하다. 이런 영화를 만든 감독도 대단하지만, 그런 불편한 장면을 앉아서 봐주는 한국 관객들도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영화를 보면서 한국 사회의 자유를 읽었다.
이후 한국 영화를 수백 편 봤지만 지금 돌아봐도 쉬리는 대단하다. 마치 아벨과 카인처럼 핏줄과 죽음이 공존하는 남북관계를 잘 담아냈다. 이는 이후 북한을 소재로 삼아 성공한 영화들에서 찾아볼 수 있는 공통적인 코드이기도 하다.
쉬리를 보면서 가장 전율했던 순간은 특수8군단 소좌 박무영으로 열연한 최민식이 국정원 요원 한석규에게 침을 튀기며 울부짖을 때였다.
“우리의 소원은 통일, 꿈에도 소원은 통일… 니들이 한가롭게 그 노래를 부르고 있을 이 순간에도 우리 북녘의 인민들은 못 먹고 병들어서 길바닥에 쓰러져 죽어가고 있어. 나무껍데기에 풀뿌리도 모자라서 이젠 흙까지 파먹고 있어. 새파란 우리 인민의 아들딸들이 국경 넘어 매춘부에 그것도 단돈 100달러에 개 팔리듯 팔리고 있어. 굶어 죽은 지 새끼의 인육마저 뜯어먹는 그 에미, 그 애비를, 너는 본 적이 있어? 썩은 치즈에 콜라 햄버거를 먹고 자란 니들이 그걸 알 리 없지.” 놀랐다. 치즈에 콜라를 먹고 사는 작가가 쓴 대본 같지 않고, 햄버거를 먹고 사는 배우가 하는 연기 같지 않았다. '
한국에 와서 기자로 산 지만 햇수로 12년째. 북한과 탈북자들을 취재하다 보니 늘 애통 슬픔 분노와 같은 감정에 잠겨 있다. 작년 봄에도 중국에서 체포돼 북송되는 탈북자들을 구출하기 위해 한 달 넘게 노력했지만 끝내 구하지 못했다.
지금 북한은 12년 전과 달라진 것이 없다. 탈북자도 여전히 팔려가고 잡혀가고 죽어가고 있다. 내 마음에는 10년 넘게 묵힌 분노가 꽉 차있다. 연기엔 소질이 없지만 박무영의 울부짖음만큼은 어느 배우보다도 더 잘할 것 같다. 북한을 바라보며 속으로 백 번, 천 번도 더 넘게 부르짖어 왔기 때문이다.
만약 영화가 아닌 현실에 박무영이 존재한다면 그는 서울에서 목숨 걸고 싸울 이유가 전혀 없다. 그가 정작 멱살을 움켜쥐고 성토해야 할 대상은 모두 평양에 있기 때문이다.
“니들이 전쟁 놀음, 핵 놀음 할 때 지금도 길바닥에 쓰러져 죽어가는 아이들이 전국에 널렸어. 새파란 우리 인민의 딸들과 누이들이 중국에 스스로 매춘부로 팔려가고 있어. 덴마크산 베이컨에 이란산 캐비아를 먹고 자란 니들이 그걸 알 리 없지.”
2013-08-13 북한 보위부의 회유 협박, 버틸 자신있습니까?
사랑하는 북녘동포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한국 방송 듣는 분들은 아시겠지만, 올 1월 북에 되돌아가 기자회견을 했던 김광호 가족이 재탈북했다가 연길에서 체포됐습니다.
그때 기자회견에 김광호와 그의 아내, 그리고 어린아이까지 3명, 여기에 더해 고경희란 여성까지 4명이 나왔습니다.
이들은 기자들 앞에서 “남조선은 사기 협잡꾼들이 판을 치는 썩어빠진 세상이고, 우리는 도무지 살 수가 없어 김정은 장군님 품으로 돌아왔다”고 목청을 높여 말했습니다.
이랬던 이들이 불과 반년도 안 돼 모두 다시 탈북했습니다. 고경희 씨는 북에 남겨둔 아이를 데리려 중국에 갔다가 보위부 함정에 빠져 끌려간 경우입니다. 애초에 북에 갈 생각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때 기자회견을 보고 저는 이런 생각이 들더군요. 만약에 내가 가령 북한 국경 취재를 갔다가 보위부 해외공작조에 납치됐다, 그래서 보위부에서 네가 기자회견을 하면 살려주겠다 이러면 나는 과연 했을까.
안하면 온갖 고문을 다 당하고 조용히 죽여 버릴 것인데, 나는 지조를 지켜서 이름 모를 죽음을 택할 것인가.
아니면 내가 기자회견에서 남조선을 비난해도, 어차피 여기 사람들은 보위부에서 강요해서 한 것임을 다 알고 이해해 줄 것인데, 일단 내가 여기에 잡혀 있다는 것을 세상에 알릴 필요가 있지 않을까.
그러면 세상에서 떠들어 내가 살아날 가능성도 있지 않을까, 인간인 이상 이런 생각도 분명히 할 것입니다.
또 한편으로 보면 저는 이렇게 몇 년째 대북방송도 하고, 북한 입장에서 용납할 수 없는 수많은 보도를 했기 때문에 용서 못할 반동중의 상반동인데, 그런 기자회견을 했다고 나를 살려둘 것 같지도 않습니다.
그러면 지조를 지키는 것이 맞습니다. 하지만 보위부 고문 수법이 얼마나 악랄합니까. 일단 체포되면 지조를 지키기가 쉽지 않죠.
아무리 정신 육체적으로 잘 준비된 사람이라 할지라도 체포돼 오랫동안 심리전과 고문 같은 것을 받게 되면 어느 순간 나약해질 수밖에 없는 겁니다.
2008년 미국 대선에 공화당 대통령 후보로 나섰다가 오바마 대통령에게 패한 존 매케인 상원의원은1967년 웰남 전쟁 때 공군 조종사로 폭격에 나섰다가 격추돼 웰남군에게 체포됐습니다.
고문을 견디지 못하고, 다른 모든 미군 포로와 마찬가지로 윁남군이 시키는 대로 미국을 비난하는 발언을 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북한은 적에게 포로로 체포되는 것은 가장 수치스러운 일이며, 체포되면 자폭하라고 교육합니다. 실제 1950년 전쟁 때 북으로 돌아간 인민군 포로들은 광산 탄광과 같은 제일 힘든 직장을 배정받고 정말 죽지 못해 살았습니다.
자식도 포로 출신이라는 성분에 걸려 아버지가 그렇게 살았듯이 최하층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때 남쪽에 남으라고 엄청 권유했는데도, 기어코 장군님 품으로 돌아간다고 목숨 걸고 고집부리더니 믿었던 조국에서 뒤통수 제대로 맞았습니다. 아마 돌아간 거 후회안하는 사람 없을 겁니다.
예전에 일본군도 포로는 최고의 수치라면서 자결하라고 교육했죠. 하지만 미국은 그렇지 않습니다.
매케인은 포로 송환으로 귀국해선 전쟁영웅으로 대중의 존경을 받고 온갖 훈장을 받았습니다. 30년 가까이 국회의원을 지냈고 대통령 후보까지 나섰습니다.
미국에선 그가 포로로 잡혀서 적의 고문에 굴복했다고 비난하는 사람은 전혀 없습니다. 그런 상황을 다 이해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선진국과 북한의 차이입니다. 그 차이는 결국 사람의 생명을 얼마나 귀중히 여기냐 이런 차이겠죠.
이런 사회이니 제가 보위부에 납치돼 기자회견을 해도 비난보단 동정을 하는 사람이 대다수겠죠. 하지만 저도 인격이 있는데 절대로 비굴해지고 싶진 않습니다.
제가 보위부에 협조할까, 아니면 지조를 지킬 수 있을까 이런 질문에 저는 현재론 자신 있게 대답을 못하겠습니다. 결국 그때 가봐야 알겠죠. 제일 중요하게는 바보처럼 보위부 함정에 빠지면 안 되겠죠.
아무튼 김광호나 고경희는 기자회견한 대가로 목숨은 건졌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반년도 안돼 다시 탈북했고, 불행히도 고경희는 도중에 체포돼 정치범수용소에 끌려갔다 합니다.
김광호는 가족은 물론 처남, 처제까지 다 데리고 나오다가 연길에서 공안에 체포됐습니다. 기자회견까지 해놓고 북한 보위부가 체면이 말이 아니죠.
연길에 대표단을 보내 다시 북으로 데려가려 하는데, 중국이 보내주지 않습니다. 세계가 지켜보는데, 죽을게 뻔한 북에 보냈다간 얼마나 욕먹겠습니까. 이들은 결국은 한국에 올 것 같습니다.
저는 보위부가 저지르는 탈북자 유인 납치 공작이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100명만 데려가도 그들의 입을 어떻게 통제합니까. 또 납치한 사람이 다시 도망치면 끌고 간 사람도 책임이 따를 겁니다.
그러니까 이번 김광호 사례를 보고 교훈을 얻고 탈북자들을 유인해 납치하겠다는 어리석은 생각을 그만두었으면 합니다. 제가 장담하는데, 남쪽에서 자유와 풍요를 체험한 사람은 북에 가선 절대 적응해서 살 수 없습니다.
다시 도망치든 아니면 북한에서 불평하다 수용소 가든 아무튼 문제가 생겨 납치한 보위부 사람도 처벌을 면하기 어렵습니다. 아무 짓도 안하는 것이 제일 무난하다는 삶의 지혜를 가르쳐 드리면서 지금까지 서울에서 주성하였습니다.
(※이 글은 자유아시아방송을 통해 북한 주민들에게 전해지는 내용으로 8월 3일 방송분입니다. 남한 독자들이 아닌 북한 청취자들을 대상으로 한 글임을 감안하시고 읽어주시길 바랍니다.)
2013-08-23 하나원에서 내 종교 선택하기
북한이탈주민 정착지원시설인 하나원에 입소하는 탈북동포의 대다수는 종교에 관해선 백지상태다. 물론 중국에서 교회를 다녔던 사람들도 일부 있지만 대개 신앙심은 깊지 않다.
탈북동포들에게 종교 체험 기회를 주기 위해 하나원은 내부에 교회 성당 법당을 두고 있다. 일요일이면 탈북동포들은 북한에서 ‘제국주의자들의 사상적 침투의 아편’이라고 배웠던 그 종교를 직접 가서 체험한다.
교회 성당 법당을 하루씩 가서 체험하는 사람들이 많다. 하지만 탈북동포들이 어느 곳에 갈지를 판단하는 가장 큰 기준은 그곳에서 뭘 받느냐이다.
교회에선 일요일마다 간식은 물론 액세서리 양말과 같은 선물을 준다. 성당에선 교회처럼 자주 주지는 않지만 탈북동포들이 3개월의 하나원 생활을 마치고 퇴소할 때 시계 등의 선물을 한꺼번에 준다. 법당은 주는 것이 거의 없다. 그 대신 2박3일간 경상북도 경주를 방문해 문화탐방을 할 기회를 제공한다. 알고 보면 상당한 돈이 드는 일이다.
일요일 저녁이면 탈북동포들은 모여 앉아 “오늘 교회에선 무엇을 주고 성당에선 무엇을 주더라”는 정보를 교환한다. 이는 “기독교는 돈이 많대”, “불교는 돈 생기면 땅만 많이 사놓는대” 하는 식의 풍문과 맞물려 특정 종교에 대한 이미지를 형성케 한다.
하나원에서 탈북동포들이 가장 많이 가는 곳은 교회 성당 법당 순이다.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이 순서는 변함이 없다. 예전에는 교회를 열심히 다녀 선물을 챙기다가 퇴소를 앞두고 나갈 때 한꺼번에 선물을 많이 주는 성당으로 옮기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러자 수녀님들은 선물 제공을 출석률에 연계하게 됐다.
탈북동포들은 하나원을 나와서도 대다수가 교회를 다닌다. 소수가 성당을 다니고 절에 다니는 사람은 드물다. 아마 하나원 시절 받은 인상의 영향이 클 것이다. 실제로 남쪽에서 탈북자들의 정착을 위해 가장 많이 노력하고 돈도 많이 쓰는 종교가 기독교다. 중국에서 탈북자 구호활동을 하는 사람들도 목사나 전도사들이 많다.
물론 부정적 사례도 있다. 몇 년 전까진 “중국에서 죽을 뻔했을 때 하나님이 꿈속에 나타나 기적적으로 구해주셨다” 정도면 교회에서 간증을 하라고 불러주었는데, 요즘은 북한에서 지하교인이나 봉수교회 전도사 정도는 했다고 주장해야 불러준단다.
탈북동포들이 종교를 선택하는 과정을 보면 훗날 북한에 종교적 자유가 허락됐을 때의 상황을 예상할 수 있다. 기독교가 하나원에서처럼만 하면 북한도 금방 교회로 차 넘칠 것 같다.
기독교계는 평양을 제2의 예루살렘으로 만들려는 꿈을 꾸고 벼르고 있는 듯이 보인다. 지금 같아선 그렇게 될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천주교와 불교가 통일 후 북한 주민들에게 더 많이 전파되려면 지금부터라도 탈북동포에게 좀 더 관심을 기울여야 할 것 같다. 종교계의 경쟁을 부추기려는 건 아니지만 북한 동포를 돕는 일을 굳이 먼 훗날로 미룰 필요가 있나 싶다.
2013-10-07 두 번이나 탈북한 사람들, 북한에서 있었던 그들의 속사정
사랑하는 북녘동포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이달 1일에 평양에서 또 북으로 재입북한 탈북자들을 내세워 좌담회를 열었더군요. 예전에 제가 그런 거 자꾸 해봐야 도움이 안 된다고 말했는데 또 했네요.
그래서 결과는 어떻습니까. 올 초에 아내와 아이와 함께 북으로 돌아가 기자회견을 했던 김광호는 벌써 다시 탈북해서 지금 한국에 와 있습니다.
북에서 다시 나올 때 기자회견에 참가했던 가족 3명 뿐 아니라 처남과 처제까지 다시 다 데리고 중국에 나왔는데, 중국에서 불행하게도 공안에 체포됐습니다.
김광호는 한국 국적도 있고, 북한 국적도 있으니까 양쪽에서 다 자기들에게 보내라고 했습니다.
중국이 이 눈치 저 눈치 살피다가 김광호와 아내, 아이는 한국에 보내고, 한국 국적이 없는 처남과 처제는 북한에 보냈습니다. 처남 처제의 운명이 어떻게 됐을 지는 삼척동자도 압니다.
여기 남쪽은 아무리 자유가 많고, 웬만한 것은 눈을 감아줘도 김광호처럼 북에 제 발로 들어가 기자회견하고, 북한 보위부에 자기가 남쪽에서 알고 있었던 정보까지 다 준 사람을 용서할 수는 없습니다. 이런 것을 봐주다간 간첩을 못잡죠.
앞으로 김광호는 재판을 받고, 그래봤자 한 몇 년 감옥살이해야 할 것 같습니다. 결국 한순간의 잘못된 선택으로 자기는 감옥에 가고, 처남과 처제는 죽이고, 이게 뭡니까.
아마 김광호는 그동안 모아놓은 돈 갖고 가면 북에서 평생 떵떵거리며 살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평양에 집 준 것도 아니고, 그가 살던 연사 농촌에 다시 보내 감시도 엄청 붙여놓은 겁니다. 갖고 간 돈 쓰면 바로 옆에 감시원들, 북한 말로 ‘쐐기’들이 신고해서 출처를 캐겠는데 돈도 맘대로 쓰겠습니까.
왜 다시 북에서 나왔는지는 모르겠지만, 듣기론 술자리에서 한국 가서 고기랑 마음대로 먹었다며 북한 실정에 불평했나 봅니다.
제가 늘 말하지만 한국에서 이밥에 고기국 먹으며 텔레비도 마음대로 보고 살던 사람이 북에 가서 절대 적응할 수 없습니다.
김광호와 같이 기자회견을 했던 고경희도 북에 남겨두었던 딸을 데리고 다시 탈북하다 체포돼 정치범수용소에 갔다고 합니다. 사실 고경희는 딸 데리려 갔다가 보위부에 잡혀 어쩔 수 없이 기자회견에 끌려나온 여성입니다.
이번에 기자회견을 한 박진근과 장광철이는 또 어떤 사연 때문에 기자회견까지 나왔는지는 모릅니다.
가족을 죽인다고 협박을 받았던지, 아님 중국에 갔다가 잡혔던지 무슨 사연이 있겠죠. 그런데 한국 생활이 아무리 힘들다 한들 북한에서 보위부 감시받으며 언제 잡혀갈지 몰라 불안에 떠는 삶보다 힘들겠습니까.
이들은 기자회견에서 “남조선에 끌려간 사람들은 돈도 없고 일자리도 얻을 수 없기 때문에 도저히 생계를 유지할 수 없었다”고 말했습니다.
북에서 기자회견 나온 사람들이 한결 같이 하는 말입니다. 여긴 중소기업에서 일하려는 사람이 없어 동남아 사람들을 일부러 데려와 일시키는 세상인데 일자리가 없다니요.
탈북자가 아무래도 전문지식도 경력도 없으니 한국에서 어려운 일자리밖에 차례지지 않을 확률이 높은 것은 맞습니다. 그럼 자신이 노력해서 지식과 경력을 쌓으면 됩니다.
오히려 일자리 없고 돈이 없는 것은 북한이 아닙니까. 공장이 다 멎어서 직장에 생활총화하기 위해서나 나가고, 도로 보수나 동원되고 하는 것이 북한 아닙니까. 직장에서 월급 배급 안줘서 장마당에 나가든 달리기를 하든 비사회주의를 해야 돈을 버는 것이 북한 아닙니까.
그런 기자회견을 해봐야 주민들이 그 말을 곧이 믿고 남조선을 암흑의 세상이라 생각하지 않을 겁니다.
이번에 기자회견을 한 박진근과 장광철도 언제 탈북해 다시 한국에 갈지 모르니까 보위부에서 얼마나 감시하겠습니까. 두 번째로 기자회견을 해서 동상을 폭파하려 했다고 하던 전영철은 이미 보위부에서 죽였다고 합니다.
제가 보기엔 보위부나 선전당국도 이제는 사람들이 기자회견 믿지 않는 것을 잘 안다고 봅니다. 그런데도 기자회견을 하는 이유는 오직 김정은 한 사람이 보라고 한다는 생각입니다. 김정은이 수고했다고 한 마디 하면 출세하니까 나중은 어떻게 되든, 사람들이 믿든 말든 그냥 한건 터뜨리는 거겠죠.
요새 북에서 남쪽 비방하는 것을 지켜보면 참 어이가 없습니다. 이번에도 1일이 북한의 인민군 창건일이라 할 수 있는 한국의 국군의 날인데 기념행사를 했습니다.
올해는 건군 65주년, 6·25전쟁 정전 60주년, 한·미동맹 60주년이 되는 의미 있는 해이기 때문에 10년 만에 어쩌다가 열병식 비슷한 것도 했습니다. 10년 만에 하는 행사치고는 동원인원이 겨우 1만1000명에 불과했고 북한처럼 1년 가까이 훈련한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노동신문이 2일자로 “동족대결과 북침열을 고취하기 위한 또 하나의 대결광대극”이니 “호전적 광기”니 비난합니다. 아니 거의 매년 10만 가까이 불러다 열병식을 하는 북한이 이런 말을 하니까 너무 웃기지 않습니까. 아마 글 쓰는 사람들도 낯이 뜨겁겠지만 먹고 살아야 하니까 어쩔 수 없겠죠.
요즘엔 쩍하면 최고 존엄을 모욕한다고 펄펄 뛰는데, 아니 이명박, 박근혜 대통령 입에 담지 못할 온갖 욕 다 골라서 해댄 게 누군데, 이런 말을 합니까.
얼마 전엔 노인이 손수레 끌고 가는 사진을 싣고 남조선은 불효정권이니 뭐니 비방하기도 했습니다. 여러분들도 잘 아시지 않습니까.
북한 대도시 주변만 가도 수레에 나무 끌고, 이고 지고 메고 가는 노인들이 줄을 이어 셀 수조차 없다는 것을요. 한국이 불효정권이면 북한은 패륜정권인가요.
여기 남쪽의 유행어 중에 “너나 잘하세요”라는 아주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제 주제 모르고 떠벌이는 사람에게 하는 소리인데, 북한에게 아주 잘 맞는 말입니다.
“너나 잘하세요.” 지금까지 서울에서 주성하였습니다.
2013-10-22 혁명의 도시’에서 ‘욕망의 도시’로 변한 평양 - 주성하 기자의 북한 이야기
혁명의 수도 평양.’
평양역 앞 아파트 옥상에 크게 붙어있는 구호이다. 기차를 타고 평양에 들어오는 사람들은 차창 밖으로 맨 먼저 이 구호부터 보게 된다. ‘혁명의 수도’는 세뇌의 키워드다. 북한 사람 누구에게나 “평양은?” 하고 물어본다면 수십 년 익숙하게 된 접선암호 맞히듯이 “혁명의 수도”라는 대답이 즉시 돌아올 것이다. 심지어 잠꼬대 속에서라도.
평양아파트 가격 최고 16만달러
하지만 반세기 전쯤 평양에서 끓었던 사회주의 혁명의 열망은 세습과 고난의 행군을 거치며 개인의 욕망으로 변해버렸다. 이제 평양은 더는 혁명의 수도가 아니다. 부자가 되려는 꿈이 지배하는 ‘욕망의 수도’일 뿐이다. 이제 그곳에선 혁명도, 통제도, 순응도 부자가 되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
평양의 욕망을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는 아파트다. 내 집 마련에 대한 한민족의 집착, 집을 통한 부의 과시욕은 평양이나 서울이나 다르지 않다. 다른 점은 평양의 집값은 아직 꺾인 적이 없다는 것이다. 집값 그래프는 계단식으로 상승해왔다.
1990년대 중반 고난의 행군 시절 굶주린 사람들은 국가에서 배정받았던 아파트를 달러와 바꾸기 시작했다. 평양 모란봉구역 북새거리의 30평형대 아파트가 5000달러에 팔렸다. 그렇게 평양의 부동산 거래는 본격화됐다. 혁명의 수도에서 아파트 가격은 항상 그들이 증오하는 ‘미제국주의자’들의 달러로 거래된다.
10여 년 전 최고가 5000달러에서 시작된 평양의 아파트 가격은 2013년 16만 달러를 넘어섰다.
올 4월 보통강구역 유경동에 완공된 30층짜리 아파트는 8만 달러 언저리에서 맴돌던 아파트 최고가를 단숨에 두 배나 올렸다. 평양 아파트 최초로 180m²(약 54.5평) 이상의 크기에 수입산 대리석과 같은 최고급 자재를 썼다. 중국 아파트의 설계를 그대로 가져다 지었고, 지하철 황금벌역까지 100m 정도 떨어져 교통 입지도 매우 좋다. 다만 주변 아파트보다는 훨씬 낫긴 하지만 정전과 단수는 피해가지 못했다.
권력기관들 절반 챙기고 절반 팔고
이 아파트는 국가가 지은 것이 아니다. 달러를 주무르는 대외경제총국(일명 99호총국)이 자체 부동산 개발로 지은 것이다. 아파트의 절반은 99호총국 간부들의 몫이고, 나머지는 공사비를 뽑기 위해 팔고 있다. 하지만 99호총국 간부들이 서로 차지하겠다고 내전이 벌어져 이 글을 쓰는 시점까지 6개월째 배정이 끝나지 않았다.
평양의 고급 아파트들은 이런 식으로 힘 있는 기관이 건설한 것이다. 국방위원회가 대동강구역 동안동에 최근 신축한 160m²짜리 아파트는 7만∼8만 달러에 거래된다. 중구역 평양의학대 앞에 신축돼 완공을 앞둔 160m²짜리 아파트 역시 연말부터 7만∼8만 달러에 거래될 예정이다. 시내 중심 중구역은 100m² 정도의 낡은 아파트도 3만∼4만 달러에 팔린다.
중구 보통강 모란봉 대성구역과 같은 평양 중심구역에는 지금 새 아파트들이 발 디딜 틈 없이 올라가고 있다. 억눌렸던 욕망이 분출되듯이. 특히 각 기관들은 아파트를 지어 절반은 자기들이 갖고 나머지는 공사비를 뽑기 위해 팔며 권력을 남용한다.
시내 중심에 건설되는 아파트는 예외 없이 북한 관련법을 위반한 것이다. 북한 당국이 합법적으로 건설허가를 내주는 지역은 통일거리 등 평양시 외곽뿐이다. 하지만 중앙 기관들은 권세로 내리눌러 건설허가를 따낸다. 평양시 인민위원회는 권세에 눌린 척 도장을 눌러주면서도 아파트 몇 채는 받아 챙긴다.
평양의 건설부문 간부에 따르면 평양에 각 기관들이 자체적으로 지은 아파트는 최근 10년 사이 7만∼8만 채나 된다고 한다. 반면 북한이 국가적으로 건설한 집은 1995년 이후 2만 채가 채 되지 않는다. 북한은 2008년 평양시 10만 채 건설을 발기하고 강성대국의 원년인 2012년까지 완공하겠다고 큰소리쳤다. 그러나 현실은 만수대거리와 창전거리, 시내 외곽의 아파트 단지를 통틀어 2만 채도 채 완공하지 못했다. 그것도 아파트 동별로 외무성, 인민무력부 등 각 기관에 할당해주고 자체 완공하라고 강압적으로 시켰기 때문에 가능했다. 총력을 쏟아 부어 5년 동안 아파트 2만 채도 완공하지 못한 북한은 한국의 중견 건설사보다 못한 국력을 입증하고 말았다.
선분양-후분양 한국 개발방식 모방
하지만 점점 놀라울 정도로 한국의 개발방식을 닮아가고 있는 욕망의 사적 부동산 시장은 외부의 상상을 넘어서고 있다. 심지어 선분양가와 후분양가까지 존재한다. 그럼에도 사회주의 잔재인 국가 배정 시스템도 여전히 남아 있다.
최근 북한 은하수악단이나 공훈합창단, 국립교향악단 성원들은 몇만 달러짜리 아파트를 선물로 받았다. 부동산 시장에서 나타난 시장경제와 사회주의의 혼재, 시장화의 급속한 확산, 이것이 북한 전체를 아우르는 오늘날의 실상이다.
북한 이야기는 늘 궁금증이 남는다. 부동산만 해도 주택 매매가 어떻게 가능한지, 구매자는 어떻게 돈을 벌었는지 등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끝도 없이 이어진다. 그런 궁금증을 글 하나에 다 담을 순 없다. 주성하의 북한 이야기는 이제 시작일 뿐이다
2013-10-24 북한 보위부가 삭제한 ‘부적절한 사진들’, 그 이유를 알고 보니…
한 스웨덴 기자가 북한을 방문해 비교적 자유롭게 사진을 찍는 행운을 얻었지만, 북한 국경 세관에서 무려 90장이나 삭제를 당했다. 그러나 그는 홍콩에서 카메라 데이터를 다시 복구해 삭제된 사진을 모두 되살려냈다.
그는 복구한 사진과 함께 자신의 방북경험담을 22일 CNN 홈 페이지에 게재하면서 “이 사진들이 왜 삭제됐는지 이유를 알 수 없다”며 놀라움을 나타냈다.
스웨덴의 요한 닐랜더 기자가 북한을 방문한 것은 지난달 북한에서 열린 국제 자전거 경주대회를 취재하기 위해서였다. 서방 기자로서는 그가 유일했다.
‘운 좋게’도 그의 담당 가이드는 ‘선전 기계’가 아닌 매우 친절한 북한인이었다. 평양에서 영어를 공부했고 셰익스피어의 작품들을 좋아한다는 42세의 북한 가이드는 그에게 원하는 사진을 모두 찍어도 좋다고 허락했다.
금지 사항은 단 두 가지. 군인이나 군 시설을 찍으면 안 되고, 김일성 부자 사진은 전신이 나오도록 해야 한다는 것.
닐랜더 기자는 가이드의 친절 속에 비교적 제약 없이 마음껏 사진을 찍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두만강을 통해 중국으로 넘어오는 길에 세관 검열관(보위부원)에게 카메라를 빼앗겼다.
검열관은 그 자리에서 90장의 사진을 삭제했고, 가이드는 “부적절한 사진을 삭제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홍콩에 도착한 닐랜더 기자는 한 작은 정보기술(IT) 업체에 데이터복구가 가능한지를 문의했고 이 업체는 24시간 만에 삭제된 모든 사진을 복구했다.
삭제된 사진을 확인한 닐랜더 기자는 CNN 기고문에서 “삭제 기준에 놀랄 수밖에 없다. 왜 북한 당국의 가이드라인을 지킨 사진도 삭제를 해버렸는지 미스터리”라고 주장했다.
그는 “화난 표정의 군인이나 여권 검열원의 사진은 이해를 할 수도 있겠지만, 옥수수 밭을 함께 걷는 노부부나 세관 앞 배구장 풍경 등은 전혀 문제없어 보이는데도 삭제 당했다”고 덧붙였다.
북한 검열관은 노인들이 무거운 배낭을 메고 걸어가는 사진이 북한의 빈곤 실상을 서양에 보여주는 것으로 판단했을 가능성이 크다.
그런데 저는 이 사진을 보고 대략 왜 북한 검열관이 삭제했는지 그 이유를 알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 기사를 통해 북한에서 사진을 어떻게 찍으면 검열대상이 되는지도 다시금 잘 알았습니다. 그런데 저도 왜 삭제했지, 갸우뚱한 사진도 있네요. 삭제한 북한 검열관이 대충대충 보면서 삭제했기 때문에 본인 스스로도 큰 의미를 부여하지 못했을 수도 있긴 할 겁니다.
자 이제부터 스웨덴 언론인이 왜 삭제했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했던, 그 사진들을 하나씩 삭제 이류를 분석해볼까요.
2013-11-13 돈이면 다 되는 北 - [3]'시장화' 부작용 겪는 北
김정은이 권력을 세습한 지 2년이 지난 현재 북한의 '공식 경제'는 아직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지만 '지하경제'의 규모는 날이 갈수록 커지는 추세다. 1990년대 '고난의 행군' 이후 식량과 의복 등 생필품을 스스로 구하기 위해 조성된 북한의 시장은 현재 전국에 공인된 것만 300개가 넘는다. 조봉현 IBK기업은행 경제연구소 연구위원은 "북한의 지하경제 규모는 최소 10억달러에서 최대 30억달러 규모로 공식 경제와 거의 맞먹는 수준"이라고 말했다.
◇"돈이면 뭐든지 가능"
북한 사회에는 "돈이면 뭐든지 된다"는 황금만능 풍조가 퍼지고 있다. 출세 코스인 노동당 입당은 농촌 출신은 미화 300달러, 공장·기업소 노동자나 군인은 500달러 정도를 당 간부에게 뇌물로 주면 된다. 대학 입학도 돈을 통한 부정입학이 가능하다. 북한 내부 사정에 밝은 정부 소식통은 "평양의대는 1만달러, 김일성대 법학·경제 등 인기 학부는 5000~1만달러, 김원균 평양음악대 등 예체능 계열은 1만~2만달러 선에서 거래된다"고 말했다. 해외 파견 근로를 위해서는 3000달러 정도가 필요하며 1년 체류 연장 시 추가로 1000달러씩 내야 한다.
범죄를 저질러도 돈으로 해결한다. 탈북자 B씨는 "최근 함경북도 청진시에서 한국 영화를 보다 걸린 주민이 2년형을 받고 강원도 소재 교화소에 갔지만 돈을 내고 3일 만에 풀려났다"며 "교화소 간부들이 돈을 제일 잘 번다"고 했다. 한 소식통은 "한마디로 출생에서 사망까지 모든 게 돈으로 해결된다는 인식이 퍼졌다"고 했다.
▲독일 구호단체 '캅 아나무르'가 촬영한 북한 평안남도 안주시의 한 시장. 신발·의류 등 온갖 물품이 거래되고 있다. /독일 구호단체 '캅 아나무르'
이런 분위기는 당·군 기득권층에까지 퍼졌다. 일부 군 간부는 고리대금업자로부터 돈을 받고 부하들을 동원해 채권 추심을 대행해주는 경우도 있다. 평북 신의주 출신으로 올 초 탈북한 A씨는 "전주(錢主)가 빌려준 돈을 받지 못하면 군관들에게 돈을 주고 병사들을 동원하는 경우가 많다"며 "군인들이 총을 들고 채무자 집에 들어가 돈을 받아내고, 돈이 없으면 돈 되는 것들을 닥치는 대로 들고 나온다"고 했다. 그는 "군인들은 무지막지하기 때문에 해결사 역할을 잘해준다"고 말했다.
국경 지대에서는 탈북을 눈감아주거나 도와주는 일이 군인들의 주요 돈벌이다. 2011년 탈북한 박모씨는 "남포시에서 해안경비대에 북한 돈 500만원을 주고 바다로 나왔다"고 했다. 현재 미화 1달러는 북한 돈 약 7000원에 거래된다. 압록강과 두만강 등에서는 도강비가 미화 40달러 선이고 노약자들은 60달러를 주면 군인들이 업어서 건네준다고 한다.
◇탈북자 대부분 "북한서 장사 경험"
서울대 통일평화연구원이 최근 2년간 탈북자 261명을 면접 조사한 결과, '북한 체류 시 장사를 해본 경험이 있느냐'는 질문에 30대의 92.3%, 40대의 88.2%, 50대의 71.9%가 "있다"고 답했다. 노동당원이었다는 사람 중에서도 68.4%가 장사 경험이 있다고 했다. 신분에 상관없이 다양한 형태로 시장에 종사하고 있다는 것이다. 탈북 전 평균 가구 수입은 북한 돈 10만원 미만(16.6%), 30만원 미만(31.7%), 50만원 미만(13.7%), 100만원 미만(13.2%) 등이라고 답했다. 같은 기간 이들이 국가로부터 지급받은 생활비는 월평균 3000~5000원에 불과했다. 나머지 수입은 대부분 시장을 통해 번 돈이었다.
돈벌이 수단으로는 주로 소규모 상점·식당 등을 운영하거나 의류·신발 등을 생산하는 가내수공업, 사설 과외와 개인 의료 등 서비스업이다. 농민들은 뙈기밭에서 콩과 옥수수 재배로 연 700㎏을 수확하고 닭 5마리, 개 1마리를 키우면 북한 돈으로 월 6~8만원 수입이 가능하다고 한다.
최근에는 개인 소유가 금지된 차량이나 선박을 기관·기업소 명의로 등록해놓고 실제는 자신이 운영해 돈을 벌고 수익의 10~50%를 기관·기업소에 주는 일종의 지입(持入)제 운수업자가 크게 늘었다고 한다. 이들은 밀수 등을 통해 엄청난 돈을 벌어들이고 있다. 또 컴퓨터나 휴대전화 수리도 한 번에 5~10달러 고소득을 올릴 수 있어 선호 직종이 되고 있다. 한 소식통은 "최근에는 장마당 상인들이 전화 배달 서비스까지 제공하고 있다"고 말했다.
2013-12-21 백두혈통 신화… 가면을 벗기다 - 동아 주성하 기자
《 당 비서가 사람들 앞에서 “이제부터 회의를 시작하겠습니다”라고 말하면 모두가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선다. 그러곤 정면에 걸린 김일성, 김정일 초상화를 바라보며 합창을 시작한다.
장백산 줄기줄기 피어린 자욱/압록강 굽이굽이 피어린 자욱….” ‘김일성 장군의 노래’와 ‘김정일 동지의 노래’를 부르고 다시 자리에 앉으면 당 비서가 주제를 말한다. “오늘의 학습 주제는 새로 개정된 ‘당의 유일사상체계 확립의 10대 원칙’(이하 10대 원칙)입니다…. 백두산에서 개척된 주체 혁명 위업을 대를 이어 계승 완성하기 위해서는 지도자의 두리(주위)에 굳게 뭉쳐야 합니다.”
김일성, 김정일 어록과 혁명 활동 자료들이 빼곡히 걸려 있는 선전실에서 사람들은 한 시간 넘게 당 비서의 ‘설교’를 들어야 한다. 지금도 북한의 어느 곳에서나 끊임없이 되풀이되는 광경이다. 선전실이 없는 공장 작업장이나 농촌에서도 예외는 없다. 찬양하고, 감사하고, 자아비판으로 회개하는 이 일정은 북한 주민들의 삶의 한가운데를 차지한다. 》
▼ 김정일, 빨치산 역사를 ‘김일성에 대한 충성’으로 각색 ▼
▲2003년 8월 14일부터 17일까지 평양에서 열린 ‘평화와 통일을 위한 8·15 민족대회’에 참석했던 남측 대표단 중 민주노총과 한국노총 대표단(사진 왼쪽)이 평양 대동강구역 동문동 소재 ‘조선직업총동맹’을 방문해 북측 대표단과 환담하고 있다. 회의실 중앙 벽에 김일성과 김정일 부자의 사진이 걸려 있다. 사진 아래 흰 천으로 덮여 있는 탁자에는 ‘김일성이 앉았던 자리’라는 푯말이 붙어 있으며 누구도 앉지 않고 비워 두었다. 평양=변영욱 기자 cut@donga.com
유치원 때부터 김일성 초상화 앞에서 두 손을 쳐들고 “위대한 수령 김일성 대원수님 고맙습니다”를 외치며 인사를 한 뒤에야 밥을 먹을 수 있다. 죽을 때 “장군님을 끝까지 받들어라”는 유언을 남기면 운 좋은 경우 훌륭한 귀감으로 내세워져 후손에게 도움이 될 수 있다.
김씨 일가를 믿지 않는 자는 죽음에 이르거나 어느 날 갑자기 사라져 정치범수용소로 끌려간다. 북한의 2인자였던 장성택도 숙청 나흘 만에 전격 처형되는 운명을 맞았다. 북한이 발표한 장성택 사형의 핵심 죄목은 국가전복 음모다. 북한 발표가 사실일 가능성은 희박하지만 만약 2인자로 행세했던 장성택이 쿠데타를 기도했다고 가정한다면 김정은의 형인 김정남이 옹립 대상으로 지목될 수밖에 없다. 김정은과 김정남은 이른바 ‘백두혈통’이다. 장성택의 부인 김경희도 17일 열린 김정일 사망 2주기 추모대회장에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지만 백두혈통이기 때문에 숙청의 칼날을 피할 것이라는 관측이 유력하다.
북한은 올 8월 10대 원칙을 개정해 “우리 당과 혁명의 명맥을 백두의 혈통으로 영원히 이어나가며”라는 대목을 새로 집어넣었다. 10대 원칙은 김일성 김정일 부자를 높이 받들어 모시라는 것이 골자로 북한에서 헌법보다 상위에 있는 ‘통치 바이블’이다.
북한 주민 대부분이 달달 외우는 10대 원칙에 새로 삽입된 백두혈통은 다름 아닌 김일성의 자손을 의미한다. 김일성의 자손이 아니면 당과 혁명의 명맥을 이어나갈 수 없다는 것이다. 법으로 북한이 김씨의 나라임을 명시한 것이다.
장성택 숙청 후 북한의 백두혈통 성역화는 더욱 노골화되고 있다. 북한 노동신문은 김정일 사망 2주기인 17일 1면 사설에서 “백두혈통은 우리 혁명의 영원한 핏줄기”라며 “어떤 천지풍파가 닥쳐와도 백두혈통을 순결하게 계승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북한 내부에 정통한 전문가들은 “할아버지나 아버지처럼 신화를 만들 시간이 없었던 김정은은 ‘김일성의 핏줄’이라는 사실에 매달릴 수밖에 없다. 그렇지 않으면 집권의 정당성이 무너질 수 있다”고 말한다. 김정은은 백두혈통을 세습의 보증서로 믿고 있다. 백두혈통의 실체는 무엇이고, 북한 주민들에게 얼마나 먹히고 있을까.
공포의 세뇌 종교, 백두혈통 신화
▲장성택 북한 국방위원회 부위원장이 12일 국가안전보위부 특별군사재판에서 ‘국가전복 음모’ 혐의 등으로 사형 판결을 받기 전 두 손이 묶인 채 재판정으로 들어가고 있다. 동아일보DB
김정은은 지난달 말 백두산 자락 양강도 삼지연을 찾았다. 이곳에서 열린 비밀회의에서 장성택 숙청이 전격 결정된 것으로 알려졌다. 멀고 먼 백두산에서 숙청을 결정한 배경에 대해서는 ‘백두혈통 후손’의 명령이라는 것을 부각하기 위한 상징 조작이라는 말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북한에서 백두산은 성지 순례 코스다. 북한 사람들은 계절을 가리지 않고 줄을 맞춰 오른다. 붉은 기를 앞세우고, 항일 빨치산이 입었다는 군복 차림을 한 사람들은 김정일이 탄생했다는 생가를 방문한다.
생가 뒤에 있는 산은 1988년 장수봉에서 정일봉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백두혈통’이 강조된 것은 그 무렵부터다. 김일성과 함께 백두산에서 싸운 빨치산도 많다. 어떻게 보면 그들도 백두혈통이 될 수 있었다. 하지만 정일봉이 생기면서 김일성만 백두산에서 아들을 낳았다는 차별화된 스토리를 만들었다. 그런 다음 백두혈통은 김일성 혈통을 뜻하게 됐다. 김일성과 함께 싸운 빨치산은 김일성의 충직한 신하들이 됐다. 현재 북한에 생존한 빨치산 1세는 3명으로 모두 90대를 넘겨 혼자서는 거동을 못하고 있다. 북한은 이 중 2명을 김정일 사망 2주기 행사장에 내세워 김정은이 빨치산의 지지를 받고 있다는 이미지를 심어주려 했다.
2003년 노동당 출판사는 김일성 찬양 일색인 ‘항일 빨치산 참가자들의 회상기’를 펴냈다. 목록에는 ‘영광스러운 조선인민혁명군을 창건하시는 길에서(오백룡)’ ‘백두산에 자주의 기치를 높이 날리시며(이을설)’ 등이 들어 있다. 이 회상기는 1959년에 나온 책의 이름과 표지 그림까지 똑같다. 그런데 내용이 전혀 딴판으로 바뀌었다.
1959년의 회상기는 북한이 백두혈통을 신화화한 첫 번째 책이다. 이 책의 수정 과정은 백두혈통이 어떻게 김일성 개인숭배로 변했는지를 보여준다.
이 회상기는 “내가 이렇게 대단하게 싸웠다”는 내용 중심의 빨치산 개인 영웅 서사시였다. 회상기를 처음 본 주민들은 “최용건이 높았냐, 김일성이 높았냐”를 따지기도 했다.
그런데 1964년 노동당 선전분야에서 일을 시작한 김정일은 기존의 회상기를 폐기하고 새 회상기를 쓰게 했다. 1970년까지 12권으로 발간된 회상기는 ‘내가 대단했다’에서 ‘내가 김일성과 이만큼 가까웠다’로 주제가 바뀐다.
북한은 빨치산 출신이 숙청될 때마다 회상기에서 그의 글을 찢어내고 이름은 먹으로 지웠다. 1970년대 말쯤 어떤 회상기는 페이지 절반 이상이 뜯겨 나가 누더기가 됐다. 그러자 북한은 1980년 초 그때까지 생존한 빨치산들의 증언을 모아 새로운 제목의 빨치산 회상기를 펴냈다. 그리고 빨치산이 거의 다 죽은 2003년부터 다시 1959년 원판의 외부를 복원한 회상기를 시리즈로 낸 것이다. 회상기의 내용은 전부 ‘백두산에서 김일성을 신처럼 경외하며 무조건적으로 충성했다’는 내용으로 각색됐다. 김일성과 함께 싸운 빨치산은 죽어서도 백두혈통의 신화를 위해 이용되고 있는 셈이다.
백두산 신화는 지구상 모든 인물 중 가장 전지전능하고 용맹하며 자비로운 김일성과 그의 명령을 목숨 바쳐 집행한 신하들의 이야기이다.
빨치산 중 가장 충직한 신하의 본보기로 내세워지는 것이 바로 최룡해의 부친 최현이다. 최현을 원형으로 한 영화와 작품도 많다. 하지만 최현은 1950년대까지도 “내가 먹물만 먹었어도 일성이 대신 내가 수상을 했을 거다” “일성이가 산에서 학교물을 마셨다고 우쭐댔다”고 공공연하게 떠들고 다니던 인물로 알려져 있다. 그가 자기를 화나게 했다고 현장에서 총으로 쏴 죽인 사람도 여럿이다.
그런데 그는 충성의 상징으로 둔갑한다. 1950년대 김일성이 정적을 숙청할 때 총을 빼들고 앞장섰기 때문이다. 김정일 세습에도 손들어 줬다. 최현은 처음엔 세습을 반대했지만 결국 김정일에게 넘어갔다.
▼ 김일성 선배 최용건 “北 떠나라” 유언 밝혀져 매장돼 ▼
반면 최용건은 백두산 신화에서 사라진 대표적 인물이다. 김일성의 혁명 선배였던 그는 1976년까지 공식석상에서 김일성을 “김 장군” 또는 “일성 동지”라고 ‘무엄하게’ 부른 마지막 인물로 전해지고 있다. 그는 죽기 전 빨치산 시절 결혼한 중국인 아내에게 남긴 유언 한마디 때문에 백두혈통 신화에 더는 등장하지 못했다. 그는 아내에게 “내가 죽거든 중국에 가서 사시오”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렇게 사라진 빨치산들을 본 북한 주민들은 “빨치산도 저렇게 숙청되는데, 나 정도야”와 같은 혼잣말을 하며 살아왔다.
북한 선박이 침몰되면 나중에 발견된 선원들의 몸에서 비닐로 꽁꽁 싼 김일성 초상화가 나오는 경우가 많다. 이런 시신이 발견되면 북한은 그의 자녀들을 유자녀로 인정해준다. 북한이 초상화를 품고 죽은 최초의 귀감으로 내세운 인물은 납덩어리를 몸에 매달고 물에 뛰어들었다. 하지만 북한 선원들은 납을 매달면 죽은 뒤에 시신이 발견될 수 없기 때문에 절대 따라 하지 않는다. 초상화를 품은 시신이 발견되게 하는 것,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 지배하는 백두혈통의 우상화, 이것이 북한의 일상이다.
신화의 균열 조짐
백두혈통 신화에 길든 사회에서 공개적인 충성심은 북한 주민들의 생존 본능에 가깝다는 분석이 나온다. 그렇다면 평생 세뇌받은 충성심은 얼마나 지속될 수 있을까.
중국에서 수많은 탈북자들을 도와준 한 사람은 이렇게 말했다.
“처음으로 중국에 나온 탈북자들은 조선족들이 ‘김정일’이라 이름만 부르면 ‘우리 장군님을 그렇게 부르지 말라’고 화를 냈다. 그런데 일주일 정도만 중국에서 지내며 바깥세상을 본 뒤에는 김정일을 향해 우리가 놀랄 정도로 욕을 해댄다.”
2003년 한국을 찾았던 북한의 미녀 응원단은 김정일 초상화가 새겨진 현수막이 비를 맞는다고 엉엉 울었다. 그 장면을 지켜본 탈북자들은 “집단이 아니라 개인적으로 다른 사람이 지켜보지 않는 상황에서 지나갔다면 눈물 흘리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었을 것”이라고 입을 모았다.
북한에서 김일성에 대한 존경심은 김정일에 비해 훨씬 뿌리 깊다. 많은 사람들은 김정일에 대해선 험담을 해도 김일성 욕은 거의 하지 않는다. 한국에 온 일부 탈북자들조차 초기엔 김일성에 대한 경외심을 간직하고 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철저히 폐쇄된 북한에서 비교 가능한 시절은 김일성 시대밖에 없다. 그 시대가 지난 뒤 당국에 대해 불만이 있으면 “김일성 때는 이렇지 않았다”는 말을 한다.
김일성에겐 ‘조국을 광복시켰다’는 신화, ‘미제를 굴복시켰다’는 신화, ‘인민을 위해 평생을 바쳤다’는 신화 등 주민들에게 철저히 주입된 가공의 스토리가 많다. 반면 김정일에겐 그에 필적하는 신화가 없다. 또 어떤 신화를 썼다 해도 김정일 시대가 열리자마자 수많은 사람들이 굶어 죽었다는 진실이 북한 주민들의 뇌리에 남아 있다.
▲우상화에 나선 노동신문의 한 페이지.
2006년 북한군 총참모부 금고에서 8만 달러가 사라졌다. 한국에서 수십억 원이 사라진 것과 맞먹는, 북한에선 상당한 거액이다. 범인은 김영춘 당시 총참모장의 아들로 얼마 뒤 잡혔다. 그런데 수사 과정에 총참모장의 자녀와 일가친척 20여 명이 모두 군부 외화벌이 기관의 핵심요직에서 달러를 열심히 벌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져 화제가 됐다.
김영춘은 만경대혁명학원 출신의 빨치산 2세다. 김영춘과 그의 아들은 북한의 빨치산 2세와 3세의 행태를 보여준 인물들이다. 빨치산 1세와 2세는 당·정·군의 요직을 두루 거쳤다. 2010년 노동당 비서국 구성원의 80%는 1940, 50년대 빨치산 2세들만이 다닐 수 있었던 만경대혁명학원 출신이었다.
하지만 빨치산 3세 대다수는 권력보다는 달러를 택했다. 이들과 어울린 권력층 외곽의 사람들은 “백두혈통에 충성한 대가로 그들 나름의 보상 심리가 작용하기 때문에 그런 선택을 한다”고 말한다. 언제 세습받을지도 모르고, 언제 숙청될지 모르는 위험한 미래의 권력보다는 부모의 권력을 활용해 달러를 버는 길이 현명하다는 얘기다.
엄청난 권력을 쥔 이들의 부모들은 자식들에게 무역을 독점할 권리를 넘겨주고 밀어주었다. 자신들의 권력도 영원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직감했기 때문이다.
2000년대 중반 북한 최고의 남성 부자는 이제강 조직지도부 1부부장의 사위인 차철마 만수대의사당 총장이었고, 최고의 여성 부자는 김일철 인민무력부장의 딸로 알려졌다. 이제강은 2010년 5월 의문의 교통사고로 사망했고, 빨치산 2세인 김일철은 그보다 한 달 앞선 5월 공개적으로 모든 직무에서 해임됐다.
그렇기는 하지만 북한에선 공개적으로 숙청되지만 않는다면 그동안 모았던 재산은 그대로 후손에게 남길 수 있다. 수많은 숙청을 지켜본 빨치산 3세가 권력형 자본가의 길을 택한 이유 중의 하나다.
같은 학교를 다니며 의리를 두텁게 했던 빨치산 2세와 달리 3세는 학연도 거의 닿지 않는다. 김정은은 스위스에서 격리돼 자란 빨치산 3세다.
인민대중을 위한다고 그럴듯하게 포장하고, 실제는 대대손손 빨치산 계급이 세습되는 왕국에 사는 주민들의 시선은 싸늘해지기 마련이다. 빨치산 세대를 보면서 “그래도 산속에서 고생했으니”라고 이해해주던 마음도 돈과 여자에 빠져 향락을 독점한 빨치산 3세를 향해선 분노로 변하고 있다. 김정은이 백두혈통을 꺼내 들어 세습을 정당화하고 있지만, “백두혈통만으로 주민들의 존경을 받던 시대는 이미 지나갔다”는 게 북한 전문가들의 관측이다.
북한 주민들은 3대까지 세습되는 교주직과 국가 재산을 독차지하고 방탕하게 사는 가신 그룹의 자손들을 보고 체념한 듯 보인다. 아직은 김일성이 만든 백두혈통의 신화가 역사상 가장 정교하고, 공포스러운 종교로 매일 세뇌되고 있다. 그렇지만 백두혈통이 깨지지 않는 신화로 유지될 기반은 점점 허물어지고 그 어떤 세뇌도 결국은 진실의 힘을 이길 수 없다는 것이 북한에서도 증명될 것이다. 백두혈통의 신화는 타락한 인간의 이야기로 마지막 장을 향해 가고 있다.
■ 2014-01-14 자작 납치극까지 벌어진 공포의 신년사 학습
지난해 1월 이맘때 김일성종합대에선 사상 초유의 사건이 발생했다.
화학부의 한 학생 어머니가 “아들이 괴한들에게 납치됐다가 병원에 입원했다”고 대학에 전화를 건 것이다. 학생이 보안원(경찰)들에게 진술한 납치 과정은 더 끔찍했다.
인민대학습당에서 공부하고 나왔는데 길옆 승합차에서 한 남자가 내려 “너 누구 동생이지” 하더니 다짜고짜 차에 태웠다는 것. 주먹으로 머리를 맞아 의식을 잃었는데 깨어 보니 농장 밭이었고, 칼질을 당한 손목에선 피가 철철 났다고 한다.
김일성광장 뒤편에 있는 인민대학습당은 평양의 중심부에 있다. 이런 곳에서 납치가 벌어졌다는 자체가 믿기 힘들었지만 학생의 아버지가 중앙당 조직지도부 당생활지도과 보안성 담당 과장이고 과거 보안원 출신이라는 점에서 보복 납치일 가능성도 있다는 이야기가 나돌았다. 가뜩이나 최근 평양에선 법 기관 간부들에 대한 보복 살해 사건이 심심치 않게 일어나고 있던 터다.
하지만 며칠 뒤 반전이 일어났다. 학생이 “사실은 문답식 학습이 너무 싫어 스스로 손목을 그어 자작극을 꾸몄고 어머니도 동조했다”고 자백한 것이다. 북한에서 이는 당장 반동으로 몰려 온 가족이 수용소에 끌려갈 수 있는 중대 범죄이다. 하지만 아버지 ‘끗발’이 하늘을 찌르는 직위이다 보니 해당 학생은 ‘49호 병원’(북한 정신병동을 지칭)에 보내지는 것으로 끝났다. 아마 그 정도 권력이면 지금쯤 그는 병원에서 퇴원했을 것이다.
김일성대 문답식 학습은 북한에서도 악명이 자자하다. 주제는 혁명역사, 노작, 신년사 등이다. 겨울방학이 끝나면 각 학부는 3일 동안 토너먼트를 벌여 최종 우승 학부를 가린다. 대진표대로 두 개 학부씩 강당에 모여 제비뽑기로 10여 명의 답변자를 뽑아 경쟁을 한다. 뽑기를 하는 순간은 강당에는 살얼음판 같은 긴장이 깔린다. 번호와 이름이 발표되는 순간 안도의 한숨소리가 쏟아지고 지명된 학생은 도살장에 끌려가는 양 창백해진다. 답변할 문제도 뽑기로 정하는데, 대답을 잘했다 해도 끝이 아니다. 다시 상대 학부에서 무작위로 추첨된 학생들이 나와 그 문제에 대한 추가 질문을 하기 때문이다.
필자는 다행히도 김일성대 시절 뽑혀 나간 적은 없지만 많은 웃지 못할 사례들을 기억한다. 한번은 한 학생이 “김정일이 대학 시절 어느 공사장에서 비를 맞으며 학생들과 함께 일했다”는 일화를 이야기하자 상대편 질문자로 나선 학생이 준비를 못했던지 한참 당황하다가 불쑥 “그날 정말 비가 오긴 왔습니까” 물었다. 강당에는 순간 폭소가 번졌다. 답변자도 당황했는지 “비가 온 것 같습니다” 대답했다. 당시에는 웃느라 별문제 없이 넘어갔는데 나중에 다시 생각해보니 “비가 오긴 왔었느냐”는 질문은 사실 등골이 오싹한 질문이었다. 김정일이 비를 맞으며 일했다는데, 감히 의문을 제기하다니….
우리 학부의 한 여학생도 대답을 잘못한 뒤 대동강에 나가 자살하겠다는 것을 친구들이 말려서 잡아온 일이 있다. 대답을 잘못해 낮은 점수를 받은 학생은 졸업할 때까지 찍힌다.
사정이 이러니 각 학부는 방학이 끝나기 일주일 전부터 학생들을 불러놓고 밤새 공부를 시킨다. 겨울방학은 한 달이지만, 지방 학생들은 고향까지 며칠씩 걸리는 기차를 타고 오가느라 일주일 넘게 보내고, 또 문답식 때문에 일주일 빨리 올라오느라 집에서 보름도 못 쉰다. 그 보름 동안도 문답식 답안을 외워야 한다.
그런데 지난해부턴 김일성대의 문답식 경연 방식이 전국에 일반화됐다고 한다. 또 이전엔 신년사 내용만 외우게 했는데 지난해부턴 전국적으로 10여 일 동안 아무 일도 안 하고 신년사를 토 하나 틀리지 않게 외우게 했다. 이러니 누구라도 손목을 긋고 싶은 심정이었을 것 같다. 지난해 여름엔 개정된 ‘유일사상체계 확립의 10대 원칙’ 10조 65개항도 모두 외우게 했다.
지금도 북한은 만사 제쳐놓고 신년사 외우기 ‘열공’ 중이다. 그런데 사실 북한의 매년 신년사는 “지난해도 다 잘했고, 올해도 다 잘해야 한다”는 한 줄로 요약할 수 있다. 올해 서울의 한 70세 탈북자는 신년사를 몇 번 읽다가 “정은이 도대체 뭘 말하고 싶은 건지 알 수가 없다니깐. 핵심이 없어요, 핵심이” 하고 버럭 소리를 질렀다 한다. 방송 출연이 예정된 딸을 위해 반평생 신년사를 공부했던 내공을 살려 분석을 해주려 했는데 도무지 알맹이를 모르겠다는 것이다. 아무리 천하제일 검객이라도 뜬구름이야 어찌 벨 수 있을까. 김정은 시대의 신년사는 김일성 시대보다 더 추상적이다. 자신 있게 내세울 분야가 없으니 이해는 되지만 젊은 지도자의 이미지와는 어울리지 않는다. 분량도 1만 자가 넘는다. 참고로 올해 박근혜 대통령의 신년사는 700여 자에 불과했다.
그나마 변화라면 올해는 신년사를 잘 외운 사람에겐 인센티브를 준다고 한다. 일반 주민에겐 비누나 치약 같은 상품을, 군인은 표창휴가를 주는 등 단위별로 재량껏 준다는 것이다. 사회주의가 망한 중요한 이유 중 하나는 인센티브가 없어서이다. 남보다 조금만 더 하면 욕이나 처벌을 면하니 딱 그만큼만 한다. 채찍과 함께 당근을 꺼냈다니 나쁘진 않은 소식이지만, 하필이면 그 대상이 비생산적인 일의 극치인 신년사 외우기라니.
김정은은 자기가 25분간 읽어 내려간 신년사에서 얼마나 많은 주민들의 비극이 시작되는 줄 알고는 있을까. 내년엔 암기를 중단시키든지, 박근혜 대통령처럼 알맹이만 발표하면 어떨까. 숨차게 읽어 내려가지 않아 좋고, 주민들도 좋고 말이다. 신년사를 강제로 외우게 하고 스키장이나 만든다고 존경심이 생기지 않는다. 민심을 얻는 방법은 먼 데 있지 않다.
2014-02-11 낚시질 배우겠다는 北에 물고기 주는 南
햇볕정책의 최대 수혜자는 북한 대남담당부서인 통일전선부(통전부)였다. 한국 정부의 지원에 더해 많은 민간단체가 각종 대북지원 물자를 들고 줄을 서는 바람에 그 처리를 맡은 통전부 간부들이 부자가 됐다. 남쪽의 어떤 민간단체들은 통전부에 “제발 (지원을) 받아 달라”고 사정하는 수준이었다. 대북지원을 제대로 하느냐 여부가 단체가 사느냐 죽느냐 하는 이유가 되었기 때문이다.
통전부는 산하기관들까지 한국산 승용차 버스 화물차를 사용했다. 청사 건설과 보수, 직원용 아파트 건설도 남한 지원용품으로 해결했다. 심지어 공사 때 쓰는 삽과 양동이는 물론 직원용 목욕탕에서 쓰는 바가지조차 한국산이어서 평양 사람들은 “공화국 통전부인지 남조선 통전부인지 알 수 없다”고 수군거릴 정도였다.
통전부는 시멘트와 건설자재 및 설비, 의복, 약품 같은 물자를 선호한다. 식량은 군이나 군수공업 종사자, 평양시민처럼 우선순위가 대충 정해져 있다. 비료도 각 지역 농촌에 배분해 보낼 수밖에 없는데, 농민은 가난해서 로비를 할 능력이 못 된다.
반면 시멘트는 북에서 곧 돈이다. 힘 있는 기관은 아파트를 지어 절반쯤은 간부들이 나눠 갖고 나머지는 분양해 돈을 번다. 그런데 시멘트 수입 허가권은 수도건설총국이나 2경제(군수공업)와 같은 중요기관들만 갖고 있다. 사정이 이러니 시멘트나 건설장비가 왔다고 하면 사방에서 손을 내민다. 통전부는 뇌물을 챙겨먹고 이를 분배한다. 물론 수해복구 등의 명목으로 온 지원의 절반쯤은 피해 지역에 가기는 한다.
한국에서 오는 식품은 간부 공급을 담당하는 중앙당 재정경리부에 우선권이 있으며 나머지는 통전부 마음대로다. 의복이나 약품은 몰래 나눠 갖거나 큰손들에게 넘긴다. 통전부는 북한 주민들을 돕자며 모금해놓고는 자기들에게 물자를 갖다 주는 남쪽의 대북지원단체가 제일 고마울 것이다.
영유아 지원처럼 수혜자를 특별히 지정한 지원도 역시 알고 보면 남쪽의 자기 최면에 불과하다. 영유아용 분유가 허약한 군인들의 영양 보충제로 간다는 것은 공공연한 비밀인데 이를 넘어서 중앙당 간부 공급용으로 쓰인다는 사실을 알면 어처구니가 없다. 따라서 대북 지원 원칙의 첫째는 지원 물자를 어디에 쓸지를 북한 간부 입장에서 따지는 것이다.
간부도 좋고 주민도 좋은 것도 물론 있다. 예를 들어 ‘대한민국’이라고 적힌 쌀 포대는 내각 양정부에서 회수해 장사꾼에게 몰래 팔렸다. 2008년 포대 8장은 1달러에 팔렸다. 당시 연평균 40만 t이 지원됐으니 포대 값만으로도 최소 100만 달러 이상을 챙긴 것이다. 방수가 잘되는 한국제 포대는 수십만 척의 목선들에 물돛 제작용으로 팔렸다. 그 덕분에 주민들은 남조선의 국호가 대한민국임을 잘 알게 됐다.
한국의 지원으로 돈을 만진 사람들은 대남 유화파가 될 수밖에 없다. 대북지원이 끊긴 2008년 이후 통전부 사람들도 많이 바뀌었다. 통전부 신입들은 선배들이 전하는 ‘꿈의 시절’을 학수고대할 것이다. 만약 김정은이 지원물자 분배권을 군부에 준다면 군부도 유화파로 바뀔 것이다. 외부 지원이 특권층들의 배를 불려주는 일은 북한만의 일이 아니다. 아프리카를 비롯해 어느 빈국에 가도 얼마나 빼돌려지는가가 문제일 뿐 상황은 마찬가지다.
기자는 과거에 식량은 군에 흘러가더라도 지원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북한은 군과 민간을 구분하기 어렵다. 영유아가 튼튼하게 크면 결국 이들이 나중에 커서 군인이 된다. 허약한 군인도 그는 어느 백성의 귀한 아들이며, 제대하면 평범한 주민으로 돌아간다. 한 북한군 장교는 “한국 쌀을 군에 가장 주고 싶지 않은 사람은 김정일일 것”이라고 말했다. 한국 쌀을 먹으니 군인들의 심리가 달라지더라는 것이다. 인간은 굶을 때 밥을 준 사람에게 적개심을 드러내며 총을 쏘긴 어렵다.
또 다른 이유는 북에서 살아보니 식량이 없어 굶어죽는 것은 결국 제일 힘이 없는 백성들이었다. 조금이라도 힘이 있는 사람은 어떻게든 뺏어먹거나 훔쳐 먹고 살았다. 이것은 유사 이래 불변의 진실이다. 북한 내에 식량이 많으면 식량가격도 떨어졌다.
하지만 기자에게 지금 북에 식량지원을 해야 하느냐고 누가 묻는다면 “노”라고 대답할 것이다. 대북지원이 끊긴 지난 6년간 북한 주민들은 자력갱생으로 먹고 사는 방법을 더욱더 터득해왔다. 이제는 굶어죽는 사람도 거의 없다. 작년에는 태풍 피해가 없어 풍년까지 들었다. 이런 상황에서 남이 다시 식량지원을 한다면 장마당에 의존해 살아가는 사람들을 배급을 준단 이유로 다시 직장으로 불러내 조직생활을 강요할 것이 뻔하다.
대북 식량지원에 회의적인 훨씬 더 중요한 이유가 또 있다. 그것은 김정은 체제가 본격적인 개혁을 시작했다는 점이다. 지금 북한의 공장과 농촌에는 경영 자율성과 도급제가 본격적으로 도입되고 있다. 이런 현실은 대북지원 방식의 변화를 요구한다. 굶어죽지도 않는데 긴급 구호 성격의 ‘인도적 지원’을 계속 고집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이제 대북지원은 퍼주기 딱지가 누덕누덕 붙어 있는 인도적 지원에서 벗어나 북한의 ‘개발지원’ ‘개혁지원’으로 전환해야 한다. 그러면 북한인권법에 인도적 지원 항목을 넣느냐 마냐 같은 문제로 정치권이 다툴 필요도 없다. 김정은이 개혁을 해 인민을 잘살게 만들겠다는데 그 개혁을 못 도와줄 이유도 없다. 박근혜 대통령이 말한 ‘대박 통일’은 준비 없이 그냥 오는 것이 아니다.
북한 개발지원의 핵심은 철도 도로 수자원 개발과 같은 인프라 구축과 생산 기술 지원이다. 여기에 더해 부정부패 가능성이 적은 물자를 선별하는 것이다. 포전 관리제(3∼5명 농민들에게 일정한 면적의 토지를 맡겨 수확 농산물 가운데 국가 납부 몫을 뺀 나머지 현물에 대해선 자유롭게 처분할 수 있도록 한 북한식 농업개혁조치)가 도입돼 농민들의 생산 의욕이 높아진 지금은 비료만 충분해도 북한은 스스로 먹고살 수 있다. 예방 백신이나, 수돗물 정제약 같은 것도 간부들이 뇌물 받고 빼돌릴 수 없다.
이산가족 상봉이 끝나면 대북 식량지원이 재개될 예정이라고 한다. 남북은 지도자가 바뀌고 세대마저 달라졌다. 김정은이 낚시질을 배우겠다는데, 우리의 인식은 물고기를 주던 때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젠 대북지원의 패러다임을 바꿀 때이다.
2014-02-25 전쟁서 살아 돌아온 아들에게 “죽는게 나았다” 통곡한 어머니
1980년대 북한의 한 농촌에 미국에서 성공한 한국인 사업가가 고향 방문을 오게 됐다. 마을에선 제일 좋은 집을 내주고 좋은 가구와 가전제품들을 채워 넣었다. 사업가가 오자 북에 살던 어머니와 형제들은 “수령님 품속에서 이렇게 좋은 집에서 아무 걱정 없이 행복하게 살고 있다”고 자랑했다. 그러나 이별의 순간이 오자 하염없이 눈물 흘리던 어머니가 불쑥 이런 말을 하는 게 아닌가. “우린 네가 차라리 죽은 게 나았다.”
사업가는 인민군 포로 출신이었다. 포로 교환 때 북에 돌아가지 않고 미국으로 건너간 것이다. 이를 몰랐던 북한은 그를 전사자로 처리했다. 인민군 전사자 가족은 국가유공자 대우를 받아 대학도 쉽게 가고 간부 승진도 빠르다. 그래서 북에선 출신성분을 따질 때 항일빨치산 가족을 의미하는 ‘백두산줄기’ 다음으로 6·25전쟁 전사자나 참전자 가족을 일컫는 ‘낙동강 줄기’를 꼽는다.
그런데 사업가의 북한 동생들은 형이 불쑥 나타나는 바람에 졸지에 ‘혁명열사 형제’에서 ‘반역자 형제’로 신세가 바뀌었던 것이다. 인민군은 “포로가 되는 것이 최대의 수치”라고 교육받았는데 형이 포로가 된 것도 모자라 철천지원수인 미국에 가서 사업가가 되었으니 말이다. “네가 차라리 죽은 게 나았다”는 어머니의 말은 “너 때문에 이제 네 동생들은 물론이고 조카들까지 망했다”는 뜻이었다.
어머니의 말에 충격을 받았는지 사업가 아들은 미국으로 돌아간 뒤 연락을 끊었다. 실제로 형의 존재가 알려지면서 졸지에 파면을 당한 형제들은 두고두고 푸념을 했다. “이렇게 된 바엔 돈이라도 보내주지.” 그러나 미국에 있다는 형에게 연락할 방법은 없었다.
몇 년 전, 1953년 포로 송환 때 인민군 포로들이 한국에서 준 옷을 벗어던지고 팬티 바람으로 북으로 돌아가며 “공화국 만세”를 외치는 기록 영상을 본 적이 있다. 하지만 이들은 공화국이 자기들에게 어떤 가혹한 운명을 안겨줄지 몰랐다. 이들은 ‘귀환병’이란 딱지를 안고 탄광과 제철소 같은 가장 힘든 곳에 보내져 전향 혐의자로 평생 감시 속에 생을 마쳤다. 귀환병 자녀들은 아버지의 고통스러운 삶을 대물림했다.
북한에선 전사자와 포로를 대하는 태도가 하늘과 땅 차이였다. 1960년대 후반 출신성분 조사를 시작할 때 북한은 전쟁 중 인민군 행방불명자 대다수를 전사자로 인정했다. 초기에 참전해 거의 궤멸된 인민군은 죽었는지 잡혔는지 입증해줄 사람조차 없었다.
이달 20일 열린 1차 이산가족 상봉에는 인민군 포로 출신의 남쪽 상봉자가 2명 포함됐다. 그들의 북한 아들과 형제들은 지금까지는 전사자 가족으로 처리돼 국가의 우대를 받았다고 조총련 기관지 조선신보가 22일 보도했다. 하지만 전사자인 줄 알았던 아버지와 형님이 남쪽에서 살고 있었다는 것이 알려지면 과연 이들의 운명은 어떻게 될까.
그렇다고 내놓고 “이제 배신자 가족으로 어떻게 사느냐”는 푸념을 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수많은 도청기가 설치된 곳이니 앞으로 닥칠 삶에 대한 걱정 대신 “수령님의 보살핌 속에 행복하게 산다”는 말만 되풀이해야 했을 것이다. 실제로 남쪽 이산가족들 중에는 “내가 북한 입장에선 반동인데 내 존재가 알려지면 혈육들에게 피해를 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해 중국을 통해 몰래 혈육을 찾아 나선 사람들도 적지 않다.
전쟁이 끝난 지 60년이 넘었으니 고령이 된 북한의 혈육 성분 따윈 개의치 않을 수도 있다. 전사자 가족에게 주는 혜택도 2대부터는 별로 없다. 차라리 요즘에는 자녀들에게 남쪽 혈육을 이어주어 나중에라도 도움 받을 희망을 갖게 하는 것이 더 나을지 모른다.
남쪽에 자발적으로 남은 인민군 포로가 있다면 북쪽엔 강제로 남겨진 국군포로가 500여 명 생존해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지금까지 80여 명의 국군포로가 남쪽으로 귀환했다. 이들 대다수는 브로커들이 몰래 빼오는 방식으로 한국에 돌아왔다. 브로커들은 한국에 가면 엄청난 보상금이 기다리며 나중에 북한 가족도 빼오면 된다고 회유한다. 죽기 전 고향땅을 밟고 싶은 간절한 마음에 적잖은 국군포로들은 고령의 몸으로 두만강을 건넜고, 가족을 빼온 경우도 많다. 하지만 요즘은 북한의 집중 감시로 가족까지 데려오기가 여의치 않다. 홀로 남쪽에 와도 평생을 함께 산 가족을 남겨두고 왔다는 죄책감을 안고 살아가니 몇 년 안 남은 여생이 행복할 수는 없을 것이다.
국군포로는 한국 정부가 최우선적으로 해결을 원하는 사안이다. 북한은 이들이 자발적으로 남았다고 주장하면서 적극적으로 해결할 태도를 보이지 않고 있다. 하지만 이는 명분에 집착해 실리를 잃는 어리석은 일이라고 생각한다.
북한은 이산가족 상봉에는 철저히 실리적으로 접근한다. 남쪽의 대북지원이 없었다면 지금까지 이산가족 상봉 행사가 지속됐을 리 만무하다. 이번 역시 남쪽에 ‘배려’를 해줬다고 여기고 대가를 생각할 것이다. 그런 북한이 정작 국군포로가 갖는 파급력은 놓치고 있다.
만약 국군포로 고향방문단을 만들어 남쪽에 보낸다면 한국의 민심이 어떻게 달라질지 북한은 곰곰이 따져볼 필요가 있다. 어차피 남쪽 사람들은 그들이 아오지 탄광에서 학대당했음을 다 안다. 방문 후 북한 가족에게 돌아갈 국군포로들은 말도 조심스럽게 할 것이다. 이제 삶이 별로 남지 않은 80대 후반의 국군포로들이 남쪽 고향에 와서 며칠 지내고 가는 것이 뭐가 두렵단 말인가. 남쪽에서 북한과 등 돌리고 살자는 여론이 커지는 현실을 감안할 때 북한으로선 혈육의 정을 지속적으로 강조하는 것이야말로 실리적인 전략이다.
개인적으론 2000년 9월에 대다수가 남파간첩인 비전향장기수 63명을 대가 없이 북송한 것을 대북정책의 가장 큰 잘못 중 하나로 생각한다. 그것이 그해 김대중 전 대통령을 노벨 평화상 수상자로 만드는 데 기여했는지는 몰라도 사실 남한은 장기수 북송을 북한이 국군포로 문제 해결에 적극적으로 나설 수 있게 만드는 카드로 활용할 수 있었다. 남쪽은 그 좋은 빅 카드를 그냥 버렸다.
북한은 남한이 범한 그런 우(愚)를 반복하지 않기를 바란다. 남쪽과의 협상에서 국군포로라는 빅 카드가 있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가. 다만 유효기간은 몇 년 남지 않았다.
2014-03-04 자기들만 용감하다 착각하는 북한군 병사들에게
사랑하는 북녘동포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저번 시간에 제가 공산주의 구호를 내걸고 인민들을 현혹시켜 결국 독재를 만든 북한에 대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사회주의 공산주의가 불가능한 것은 인간의 이기심 때문인데, 제일 큰 문제는 바로 통치계층이 이기적이기 때문입니다. 지도자가 이기적이면서 인민의 이기심을 없애겠다고 하니 결국 인민 노예화가 시작된 것입니다.
웰남의 국부로 추앙받는 호찌민은 죽은 뒤 허름한 집 한 채 밖에 남기지 않았습니다. 진짜 공산주의 지도자라면 바로 이래야 합니다.
그런데 김일성과 김정일이 죽은 뒤 뭐가 남았습니까. 전국에 호화로운 별장들이 가득하고, 그 별장마다 5과로 뽑혀온 고운 처녀들이 독수공방하고, 역시 5과로 뽑힌 호위국 병사들이 빈 별장을 지킵니다.
어디가나 보이는 것은 동상과 선전실과 같은 우상화 시설이며 시체를 위해 사람들이 굶어죽는 와중에 막대한 재부와 인력을 동원해 금수산기념궁전이라는 호화궁전을 만들었습니다. 마치 노예들을 수십년 간 채찍질해 피라미드를 쌓고 죽어서도 영원한 파라오로 남으려 했던 고대 이집트의 왕들처럼 말입니다.
인간의 이기심을 극복한 공산주의를 세우려면 무엇보다 통치자가 권력을 이용해 자기 배를 채우는 극도의 이기심을 가질 경우에 이를 어떻게 막느냐가 가장 먼저 앞서야 합니다. 그런데 북한처럼 지도자가 이기적인 독재자로 변해도 이를 제거할 아무 방법도 없으면 사회주의라는 것조차 이룰 수 없습니다.
북한에서 이기주의라는 것을 사악한 본능처럼 묘사해서 그렇지 인간의 이기심이 나쁜 것만은 아닙니다. 이기심의 또 다른 발로는 바로 잘 먹고 잘 살아보자는 욕구입니다. 잘 먹고 잘 살려면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열심히 일해야겠죠. 한국이 이렇게 빠르게 경제를 발전시킨 원동력이 바로 그 정신이었습니다.
박정희 대통령 시절에 새마을 운동을 하면서 내건 구호가 바로 “잘 살아보세”였습니다. 거창하거나 복잡하지 않지만, 바로 “잘 살아보세”라는 짧고 함축적인 말에 모든 인민이 열심히 노력해서 이곳까지 왔습니다.
이기심은 물론 부정적 면이 있습니다. 내가 잘 살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으면 결국 부정부패가 판을 치고, 법을 교묘하게 이용해 권력자들이 득세하고 합니다. 그건 자본주의의 병폐 중 하나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자본주의만 문제가 아니라 지금 북한이 더 문제입니다. 부정부패는 북한이 훨씬 더 심합니다.
그 이유는 자본주의는 바로 이런 병폐를 알고, 엄정한 법치주의를 확립해서 부정한 자들을 처벌하는 제도를 끊임없이 갈고 닦아 왔기 때문에 법을 어기면 대통령을 지내도 감옥에 넣을 수 있지만, 북한은 바로 권력층의 부정부패를 처벌할 수 있는 법이 거의 없기 때문입니다.
북한에선 자본주의 사회는 극도의 개인이기주의가 판을 치는 썩어 빠진 세상이라고 교육을 합니다. 그러나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그것은 인간에게는 이기심과 더불어 존엄성이란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한국군 병사들이 이기적이기만 하다면 북한군이 당장 왜 쳐들어 못 옵니까. 전쟁만 나면 나 살자고 모두 도망칠텐데 말입니다.
그러나 몇 년 전 벌어진 서해교전이나 연평도 포격 때 한국 병사들은 북한 병사들 못지않게 용감하게 싸웠습니다. 온몸에 수십 곳의 파편을 맞아도 숨이 멎는 순간까지 방아쇠를 놓지 않았고, 위생병은 자신이 심한 중상을 입었음에도 총탄이 비오듯 쏟아지는 곳을 뛰어다니며 전우들을 치료하다 함께 전사했습니다.
연평도 포격 때 휴가를 가느라 부두에 가 있던 병사는 포탄이 쏟아지자 전우들과 다시 싸우기 위해 뛰어오다 숨졌습니다. 적의 총탄을 전우 대신 맞는 것은 북한군에만 있을 수 있는 일이 아니라 여기도 그렇습니다. 바로 인간은 존엄과 명예를 귀중히 여기기 때문입니다.
군인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이번 주에 한국에선 두 개의 사고가 벌어졌습니다. 일요일에 이집트에 관광을 갔던 한국인 버스에 자폭테러범이 뛰어들어 한국인 3명이 숨졌습니다. 30명이 넘게 탔는데, 그 정도로 그친 것은 한 남성이 자폭테러범의 앞길을 막고 함께 숨졌기 때문입니다.
월요일에 폭설로 인해 대학생들이 입학환영식을 하던 건물이 붕괴되면서 안에 있던 대학생 열 명이 숨졌습니다. 이중에는 자신은 무사히 밖에 나왔지만 당장 무너져 내리는 건물 속에 다시 뛰어 들어가 후배들을 필사적으로 꺼내다 숨진 학생도 있습니다.
이처럼 큰 사고가 터질 때마다 우리는 자신을 희생하는 평범한 영웅들을 보게 됩니다. 여기는 북한처럼 남을 위해 희생한 사람에게 영웅칭호를 주면서 전 사회가 따라 배울 귀감으로 대대적으로 선전하지도 않습니다.
그럼에도 위급한 상황에서 남을 위해 목숨을 내거는 것은 바로 우리가 존엄 높은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북한의 협박을 받으면서도 여러분에게 진실을 알리는 일을 멈출 수 없는 이유도 바로 인간의 존엄과 비겁해지지 않으려는 용기 때문입니다.
남을 위해 희생하는 사례는 어느 나라에 가도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2001년 미국에서 9.11테러가 벌어졌을 때 희생된 3000여 명 중엔 소방관만 400여명이 됩니다. 인간인 이상 당장 무너지는 건물에 불길을 뚫고 뛰어드는 것이 어찌 무섭지 않을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죽는다고 해도 뛰어드는 것이 바로 자기 임무이기 때문에 들어간 것입니다. 모든 국가는 바로 이렇게 어느 분야든 자기의 위치를 목숨 걸고 지키는 사람들이 있어 든든한 것입니다.
그런데 북한이 망한 이유는 바로 인정해야 할 인간의 이기심은 무시하고, 지켜야 할 인간의 존엄은 권력을 통해 길들이고, 뺏어가기 때문입니다.
이기심을 무시당하고, 존엄을 빼앗긴 인간, 그것이 바로 노예입니다. 여러분이 노예의 삶에서 벗어나는 날이 곧 북한이 정상적인 국가가 되는 날일 것입니다. 지금까지 서울에서 주성하였습니다.
(※이 글은 자유아시아방송을 통해 북한 주민들에게 전해지는 내용으로 2월 22일 방송분입니다.
남한 독자들이 아닌 북한 청취자들을 대상으로 한 글임을 감안하시고 읽어주시길 바랍니다.)
2014-03-25 통일대박’을 위해 치러야 할 것들
현재 도박사들이 평가하는 브라질 월드컵의 한국 우승 확률은 0.5% 미만이다. 그렇다고 대통령이 “월드컵 우승은 대박”이라 말한다 해서 문제 삼을 것은 없으리라. 다만 그 경우 “한국이 우승했을 때의 경제적 효과”부터 계산하기 시작한다면 순서가 한참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박근혜 대통령의 ‘통일 대박’ 발언도 마찬가지다. 아직 우리는 어떤 방식으로 언제쯤 통일할 수 있을지도 모르는데, 한국 사회엔 통일이 되면 경제규모 세계 8위, 국민소득 8만 달러와 같은 장밋빛 계산만 넘친다. 그렇게 될 확률은 누구도 모른다.
지난 회에서 통일로 초래될 문제점을 칼럼으로 쓴 뒤 독자들로부터 “그럼 최선의 통일방안은 무엇이냐”는 질문을 받았다. 사실 남북이 다 같이 윈윈할 수 있는 최상의 통일방식을 마련하는 것은 크게 어렵지 않다. 다만 그대로 집행하기가 너무 어려울 뿐이다.
이유는 크게 세 가지이다. 우선 한국의 통일정책은 일관성을 지키기 너무 어렵다. 정권에 따라 좌와 우로 오간다. 대통령이 지지율과 지지계층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북한이 신뢰가 없다고 하지만, 북한도 5년마다 대북정책이 달라지는 한국 정부를 신뢰하지 않긴 마찬가지다.
둘째로 통일정책은 일방적으로 추진하기 불가능하다. 아무리 좋은 통일방안을 만들어도 북한은 “저런 방법으로 우릴 무너뜨리려 하는구나”라고 받아들여 기를 쓰고 방해만 할 게 뻔하다.
셋째는 북핵 문제이다. 이상적인 통일방안과 핵을 폐기하기 위한 방안이 상충되면 무엇을 앞세울지를 놓고 한국의 여론이 먼저 분열될 것이다. 북한이 끝까지 핵을 움켜쥐겠다면 아무리 좋은 통일정책도 기를 펼 수가 없다.
이런 이유 때문에 이상적인 통일방안을 마련하기보다는 그것을 일관되게 추진해 나가기가 백배는 더 어렵다. 더 나아가 우리에겐 지금 통일방안조차 없는 상태다.
통일을 떠올릴 때 경제적 대박보다 더 중요한 관심 요소는 한반도에서 살아가는 개개인들의 행복이라고 생각한다. 설사 통일로 국민소득이 8만 달러가 된다고 해도 개개인이 행복하지 못한다면 통일의 의미는 반감될 것이다.
2005년 12월 한국의 무역규모 5000억 달러 돌파 소식이 언론의 톱뉴스로 다뤄졌다. 그리고 불과 6년 뒤 다시 1조 달러를 돌파했다. 한국은 세계에서 수출규모 7위, 무역규모 8위의 강대국이 됐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국민 행복도가 2배로 높아졌을까. 시대의 패러다임이 성장과 분배에서 바뀌고 있는 것도 결국 “경제는 잘나간다는데 나는 왜 체감하지 못하냐”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이다.
통일 한국 역시 경제규모와 국력은 지금보다 더 커질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개개인들의 행복으로 쉽게 이어질 것인가에 대한 확신은 할 수 없다. 행복은 인내와 노력 없이 쉽게 찾아오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한국 언론은 남북통일이 되면 전 재산을 북한에 투자하겠다며 바람을 잡는 세계적인 투자 전문가 짐 로저스(로저스홀딩스 회장)의 발언에 환호한다. 허나 우리는 로저스가 아니다. 통일이 되면 대박을 맞을 사람들은 분명히 있겠지만 대다수 사람들은 일단 크게 늘어난 세금 고지서부터 받게 될 것이다. 문화와 사고방식이 너무 다른 북한 주민과 이웃으로 살면서 일자리를 놓고 경쟁하는 상황도 올 수 있다. 이 외에도 예상되는 어려움은 너무나 많다.
통일은 초기에 남쪽 사람들에겐 경제적 희생을, 북쪽 사람들에겐 차별을 감내해야 하는 정신적 희생을 요구한다. 통일시대의 이상적인 지도자는 국민에게 더 나은 미래에 대한 비전을 제시하고 함께 인내하고 결집하게 만드는 사람이어야 한다. 통일은 통합에서 시작해 통합으로 끝나야 한다.
우리 주변에는 “전쟁의 폐허와 혹독한 가난을 딛고 일어선 민족이니 통일이 되면 어떤 상황도 잘 헤쳐 나갈 것”이라고 믿는 낙관론자도 꽤 많다. 나도 이 낙관론에 한 표를 던지고 싶다. 처음은 어렵지만 시간이 흐르면 상황은 어떻든 더 나아질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어렵게 생각하는 문제도 통일이 되면 의외로 쉽게 풀릴지도 모른다. 예를 들어 한국의 학자들은 어떻게 하면 북한 주민들의 소득을 단기간에 끌어올릴까 고민하지만 통일이 돼 북한 주민들이 한국이나 중국에서 일하게 된다면 소득격차는 빨리 줄어들지도 모른다. 다만 장기적으로 북한 지역의 공동화(空洞化)라는 만만찮은 부작용도 있다. 그러니 통일은 닥쳐 봐야 한다.
분명히 알아야 할 점은 통일은 싫다고 해서 피해갈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북한 체제의 지속 여부는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피할 수 없다면 충격을 준비하고 대비하는 수밖에 없다.
개인적으론 통일 과정을 ‘출산 과정’에 빗대고 싶다. 준비할 때에는 희망과 설렘, 근심의 감정이 교차하는 ‘잉태의 인내’라면 통일의 순간이야말로 분만에 비할 수 있는 엄청난 고통과 혼란의 순간이 될 것이다. 또 통일 초기는 갓난이를 젖먹이고, 기저귀 갈아주고, 잠을 재우느라 정신없이 보내는 유아를 길러내는 일이나 다름없다. 이렇게 눈코 뜰 새 없는 시간을 흘러 보내고, 하루에도 열 번씩 미웠다 고와졌다 하는 자식의 성장기를 거쳐 오랫동안 함께 부대껴 사노라면 어느 순간 있는 정 없는 정이 들기 마련이다. 자식이 다 자란 뒤에야 비로소 흘러간 세월을 돌이키며 “그래도 자식 낳기 잘했다”고 말할 수 있는 것, 바로 그런 것이 통일이다.
통일 한국이 효자가 될지, 불효자가 될지는 앞으로 우리가 쏟아야 할 인내와 희생에 비례함을 ‘대박’이란 단어와 함께 명심해야 할 것이다.
2014-04-05 김정은 시대 들어 새롭게 떠오르는 北 여가수들
“어젯밤에도 불었네 휘파람 휘파람…휘 휘 휘 호 호 호….”
한 번쯤 들어 봤을 북한 노래 ‘휘파람’이다. 이 노래를 부른 주인공은 전혜영(44). 그는 1988년부터 보천보전자악단의 성악배우로 활동하면서 북한에서 큰 인기를 끌었다. 그는 북한 가요뿐 아니라 외국 팝까지 잘 불러 1991년 공훈배우, 1992년 인민배우 칭호를 받았다.
공훈배우는 북한 당국이 문예정책에서 공훈을 세운 예술인에게 주는 국가 영예 칭호다. 한 단계 위인 인민배우 칭호는 문예정책과 북한 체제의 유일사상 강화에 기여한 배우들에게 준다. 보통 부부장급(차관급) 대우를 받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90년대 이전에는 영화배우들이 전성기를 구가했다. 북한은 김일성의 항일투쟁을 찬양하는 내용인 10부작 ‘조선의 별’(1980∼1987년 제작)의 총 관람객 수가 1억5000만 명이라고 주장했다. 당시 북한 주민이 2000만여 명이었으니 전 주민이 7.5회를 본 셈.
배우들의 전성기가 지난 뒤에는 가수들이 떴다. 당시 북한 가수들은 최고 통치자 앞에서 직접 노래와 연주를 할 기회가 많았다. 김정은이 가수 출신인 이설주를 아내로 받아들인 뒤 가수들이 영화배우 등 다른 예술인보다 더 후한 대우를 받는 현상이 뚜렷해지고 있다.
통치자 취향에 흔들린 걸그룹
전혜영이 활약한 보천보전자악단은 북한에서 체제선전, 우상화 가요 말고도 이른바 ‘생활 가요’라고 불리는 노래로 큰 인기를 끌었다.
1990년대 초반 대중 앞에 등장한 보천보전자악단은 5인조 젊은 여성 가수들을 내세워 선풍을 일으켰다. 전혜영을 비롯해 김광숙 이경숙 이분희 조금화로 대표되는 5인조 여가수는 김정일 시대 북한 음악을 상징한 아이콘이었다. 이 중 이경숙은 2월 금강산에서 열린 이산가족 상봉 행사장에 울려 퍼진 북한 대표곡 ‘반갑습니다’를 부른 가수다.
보천보전자악단은 1983년에 구성됐다. 북한 소식통에 따르면 이 악단은 김정일이 측근들을 모아 여는 연회에 흥취를 돋우기 위해 만들어진 비밀악단이었다. 그러다가 1991년 9월 일본 순회공연을 계기로 대중에 공개됐다. 단원들은 북한 예술인의 최고명예인 인민배우 칭호를 20대 초반에 받으며 10년 가까이 북한 주민들의 절대적 사랑을 받았다.
하지만 이 악단은 1990년대 말부터 대중의 시야에서 멀어져 갔다. 여기에는 노쇠해진 김정일의 취향이 작용했다. 그는 걸그룹에서 조선인민군 공훈합창단으로 눈을 돌렸다. 공연장에서 군복 입은 100여 명의 남성이 김정일 찬양 노래를 함성에 가깝게 목청껏 뽑아내는 것을 들으면 귀가 먹먹해질 정도다. 김정일은 “공훈합창단의 노래를 들으면 힘이 생긴다”며 수시로 합창단을 방문해 소파에 몸을 묻고 한 시간 가까이 공연을 관람했던 것으로 전해졌다.
김일성이 지배하던 1960, 70년대는 가극이 전성기를 누렸다. 피바다가극단과 만수대가극단이 당대의 대표적 예술단체였다. 이 역시 최고 권력자가 사랑하는 장르였다.
1980년대엔 솔로 여가수들이 무대를 휩쓸었다. 당시에는 최삼숙과 김옥선 등 두 여가수가 북한 음악을 대표했다. 한국 원로가수 남인수의 조카이기도 한 최삼숙은 1970년대 중반부터 1990년대 중반까지 무대 공연 2600회를 통해 3000여 곡의 노래를 불렀다. 온 나라 인민이 매일 보는 ‘가요계의 여왕’으로 군림한 셈이다.
김정은 시대를 알린 모란봉악단
▲김정은은 지난달 모란봉악단 공연을 두 차례나 관람했다. 그가 창립된 지 1년 9개월밖에 되지 않은 모란봉악단을 찾은 것은 10회가 넘는다.
모란봉악단은 2012년 7월 창립공연에서 한국의 걸그룹을 연상케 하는 파격적인 복장으로 눈길을 끌었다. 미키마우스와 백설공주, 곰돌이 푸 등 디즈니 만화 캐릭터를 본뜬 인형 의상도 처음 선보였다. 이를 두고 외국 언론들은 “은둔의 왕국 북한이 디즈니 캐릭터를 등장시켜 개방 이미지를 연출했다”고 분석했다. 디즈니 캐릭터는 중국을 통해 들어간 상품과 함께 유입됐고, 북한 당국도 이를 막지 못했다. 2000년대 후반 북한 당국이 공급한 소학생용 책가방에는 미키마우스가 그려져 있었다.
대중 공연에 노출 의상과 디즈니 캐릭터가 등장한 것은 김정은 시대를 알리는 신호 역할을 했다. 북한을 탈출한 주민들은 “김정일 시대의 마지막 10년간 고성만 내지르는 합창단의 노래에 지쳐 있었다”고 말한다. 이런 상황에서 김정은이 집권 첫해에 가요계의 물갈이를 시도했다는 게 북한 연예가에 정통한 사람들의 얘기다. 아버지 세대와 완전히 다른 젊은 여성들의 활기찬 노래는 ‘새롭고 즐거운 시대’를 알리는 전주곡이 됐다는 것이다.
북한은 3월 말부터 이달 1일까지 열흘 동안 5000석 규모인 4·25문화회관의 모란봉악단 공연을 매일 평양 시민들이 볼 수 있도록 개방했다. 걸그룹의 화끈한 공연에 객석은 연일 만원을 이뤘다고 노동신문은 전했다.
모란봉악단은 장성택 처형 이후 김정은의 ‘잔인한 독재자’ 이미지를 희석시키고 공포에 질린 북한 사회의 음울한 분위기를 바꾸려 하고 있다.
현재 모란봉악단은 이설주가 직접 지도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젊고 예쁜 여가수들은 이설주가 졸업한 북한 최고 예술인재 양성학교인 금성고등 출신으로 채워지고 있다. 이들이 부르는 노래의 가사는 대부분 김정은에 대한 충성을 유도한다.
흔적 없는 한순간의 파멸
최정상에 올랐던 가수들도 ‘한 방’을 두려워한다. 통치자의 말 한마디에 최정상에서 한순간에 나락으로 떨어질 수 있다는 것은 공포의 왕국에서 자란 육감으로 안다.
지난해 8월 처형설이 나돌았던 은하수관현악단 9명도 예외가 아닌 것으로 보인다. 이 악단은 2009년 5월 최고의 가수들을 망라해 창립됐는데 4년 만에 흔적 없이 분해된 것으로 추정된다. 무엇 때문에 이들의 처형설이 불거졌는지는 자세히 알려지지 않았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이들이 이설주의 사생활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이설주는 2011년까지 이 악단 가수로 활동했다.
지난해 12월엔 모란봉악단 대표가수인 공훈배우 류진아와 악단장인 선우향희가 장성택의 여자로 밝혀져 정치범수용소에 끌려갔다는 설이 퍼졌다.
한국 매체에서 이들의 숙청설을 제기하자 북한은 지난달 26일 자체 운영 페이스북을 통해 이들의 근황을 전했다. 북한이 외부의 보도를 반박한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다. 조선중앙TV는 4일 메인 뉴스인 저녁 8시 ‘보도’에서 모란봉악단의 양강도 삼지연군 공연 소식을 영상과 함께 전하면서 선우향희의 연주 장면과 얼굴을 근접 촬영해 내보냈다.
보천보전자악단 여가수 5명도 갑자기 북한 매체에서 사라졌다. 이들이 중앙당 고위간부 결혼식에서 축가를 부른 사실이 드러나 지방 농장원으로 추방됐다는 설이 있으나 확인되진 않았다. 다만 이들 중 전혜영은 2011년부터 만경대 학생소년궁전 성악지도 교원으로 활동하고 있다고 총련 기관지인 조선신보가 2년 전 보도했다. 이러한 근황 공개는 다분히 외부의 의혹을 의식한 것으로 보이며 나머지 여가수 4명의 행방은 여전히 알려지지 않고 있다.
2014-04-08 장성택의 판도라 상자, 김정은은 열 것인가
기원전 알렉산더 대왕은 “매듭을 푸는 자 세상을 지배할 것”이라는 예언이 걸린, 누구도 풀지 못한 고르디우스의 매듭을 단칼에 잘라버렸다. 그러곤 매듭에 묶여있던 전차를 몰고 세계를 정복했다.
김정은도 그랬다. 누구도 죽이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던 장성택을 전광석화로 처형했다. 장성택이란 매듭을 중심으로 거미줄처럼 사방으로 단단하게 얽혀있던 끈들이 한칼에 끊어져 버렸다. 하지만 장의 매듭엔 마차가 묶여있지 않았다. 대신 매듭이 끊긴 자리에 남은 것은 40년 동안 권력의 중심에서 왕재상으로 군림했던 장이 그동안 간부들을 관리한 기록이 담겼을 ‘블랙박스’였다. 김정은은 블랙박스 열기를 잠시 유보하고 당장 눈에 보이는 끊긴 끈부터 잡아당기기 시작했다.
“장성택 연관자는 단호하게 숙청하라.”
김일성 생일인 이달 15일 태양절이 숙청 마감일이다.
김정은의 지시에 흑기사 당 조직지도부와 보위부가 큰칼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여기저기서 피가 튀었다. 최소 수천 명이 직접적인 숙청을 당했고 가족까지 포함하면 피해자는 수만 명에 이를 것으로 보인다. 우연히 행정부에 발령받았단 이유로 전국의 수천 명 당 간부들은 농촌과 광산에 노동자로 끌려갔고 복권 가능성도 영영 없어졌다.
그러나 이러한 살벌한 숙청 상황은 외부에 자세히 중계되지 않고 있다. 외부에서 모르기만 하면 10만 명도 숙청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가득한 김정은은 비밀이 새지 못하게 사상 최대의 정보 봉쇄를 함께 단행했다. 올 초 외국에서 급히 공수된 수많은 최신 전파탐지기들이 국경 일대 산과 골짜기를 물샐틈없이 누비고 있다. 지난해 말까지만 해도 수십 리를 걸어 먼 산에 오르면 수십 분은 통화할 수 있었지만 지금은 휴대전화를 갖고 이동하기도 어려울뿐더러 한국과 3분 이상 통화하기도 힘들다. 신형 탐지기로 위치를 확보한 보위부가 어느새 그 지역을 봉쇄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4개월이 흘러가 어느덧 15일이 코앞에 다가왔다. 지금까지 북한에선 어떤 일들이 벌어진 것일까. 북한 소식통의 증언을 종합하면 그 윤곽이 대략 드러난다.
장성택의 숙청 사유는 “탐욕스러운 데다 더 놔두면 주인을 해칠 수도 있는 위험한 곰”이기 때문이었다. 이제 때려잡았으니 해칠 위험은 사라졌다. 남은 것은 죽은 몸뚱이를 뜯어 나누는 것뿐이다.
이는 우리가 왕조 시대에 보았던 역사와 별반 다르지 않다. 거물을 역적으로 처형하면 그 뒤에 벌어지는 것은 전리품 다툼이다. 공신들은 역적의 여자들까지 전리품으로 나누었다.
장성택 숙청 이후 가죽과 웅담에 비유할 수 있는 값진 것은 김정은이 가졌지만 남은 고기를 놓고 노동당 조직지도부와 보위부가 서로 더 뜯어가겠다고 으르렁거리는 형국이다.
여기서 눈길을 끄는 것은 군부이다. 권력의 핵심에서 수십 년을 보내 이런 광경이 익숙한 최룡해 총정치국장은 한발 물러서 겸양지덕의 신공을 발휘하고 있다. “이런 기회가 언제 다시 오겠냐”며 극성을 부리는 부하들 때문에 나서지는 않고 있지만 이권을 나눠주면 먹는 식이다. 욕심 부려 많이 먹은 자들치고 오래 못 간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아는 것이다. 물론 최룡해는 현재 실권이 크게 없기도 하다. 한국에선 그를 북한의 2인자로 보고 있지만, 실제 북한에서 최룡해의 실권은 조직지도부와 보위부에 한참 못 미친다. 권력에 반비례해 최룡해의 안전지수는 높아진다.
또 다른 관전 포인트는 숨겨놓은 장의 재산이다. 그가 해외에 숨겨놓았을 막대한 달러는 먼저 찾는 자가 임자다. 공신들은 장의 해외 심복들을 소환해 주리를 틀고 있다. 줄다리기와 흥정으로 신경전이 팽팽하다. 끝까지 불지 않으면 자기 돈이 되지만 대신 목숨은 장담 못한다. 칼날 앞에서 “장의 장부를 주고 목숨을 얻느냐, 아니면 버티느냐”를 따질 수밖에 없다. 이렇게 4개월을 보낸 북한의 장성택 일당 숙청 작업은 죽일 놈, 유배 보낼 놈, 살릴 놈으로 거의 가닥이 잡혔다.
하지만 다 끝난 것은 아니다. 성격이 급한 김정은은 다음 차례로 장성택의 블랙박스를 열고 싶을 것이다. 그러나 북한에서 이 판도라의 상자를 열고 싶은 사람은 김정은밖엔 없을 것 같다. 북한에서 장과의 관계에서 자유로울 고위층은 거의 없다고 볼 수 있다. 장에게 칼을 휘둘렀던 공신들도 마찬가지다. 장성택은 1990년대 말 조직지도부 1부부장을 지냈고 처형되기 전 10년은 보위부를 통솔하는 행정부장이었다. 최룡해와 장의 인연은 매우 오래되고 깊다. 상자가 열리면 조직지도부 조연준 황병서 부부장, 보위부의 김원홍 부장을 포함해 누구도 안전을 장담키 어렵다. 이들은 속으로 김정은을 향해 “여기까지만”을 외치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김정은의 성격으로 보아 찜찜함을 남기고 여기서 멈춰 설 것 같지는 않다. 누구도 믿지 못해 어린 여동생 김여정을 최근 측근에 둔 것만 봐도 그렇다. 판도라 상자를 연다면 아무 때나 누구든지 쳐낼 수 있는 무기도 얻게 된다. 김정은이 블랙박스에 손을 댄다면 누구보다 장의 비밀을 가장 많이 알고 있을 김원홍 부장이 제일 위험해 보인다. 동료 공신인 조직지도부와 군부에 있어서도 김원홍은 자신들의 치부를 가장 많이 알고 있는 위험인물이다. 지금 고기를 챙겨 넣기에 바쁜 김원홍을 내년에도 볼 수 있을까. 그 스스로도 만인의 적이 될 것이란 점을 모르진 않을 것이다.
알렉산더는 지혜와 인내로 풀라는 매듭의 예언을 무시하고 잘라버리는 길을 택했다. 그 과격하고도 조급한 성격 때문이었을까. 그는 세상은 얻었을지언정 젊은 나이에 요절하는 운명을 벗어나지 못했다. 그가 얻었던 천하도 죽음과 함께 분열됐다. 누구도 생각지 못했던 방식으로 장을 한칼에 베어버린 김정은의 운명은 어찌 될 것인가.
2014-04-20 군관 아내와 음악교사로 살았던 탈북여성의 수기
이번에 소개하는 탈북수기는 북한에서 군관의 아내로, 음악교사로 살다가 한국으로 탈북해 한 예술단체에서 공연을 하고 있는 여성의 구술 증언을 정리한 수기입니다.
나는 함경북도 무산읍에서 딸만 다섯인 집안의 넷째로 태어났다. 7살 때 아버지가 근무하시던 군부대가 청진으로 이전하게 되면서 우리 가족도 함께 이사한 후 탈북할 때까지 그곳에서 살았다.
지금 부모님은 돌아가시고 형제들은 북한에 남아있다. 내 어린 시절부터 남한으로 오기까지의 여정을 담담하게 이야기해 보고자 한다.
나는 아버지가 근무하시는 군부대 부속 유치원에 다니면서 교육받았다. 어릴 적부터 음악에 남다른 소질을 보였다. 북한에서는 아코디언이란 악기를 구하기 어려웠지만, 내 재능을 눈여겨보신 아버지가 적극적으로 음악을 시켜주셨다.
그 덕에 나의 인생은 아코디언의 길로 접어들게 되었다. 한 번은 아버지가 군부대에 있는 하모니카를 가져오셨는데, 당시 초등학교 2학년이었던 나는 하모니카를 배운 적이 없었지만 내 나름의 선율로 하모니카를 부르자 아버지가 깜짝 놀라셨던 것이 계기로 작용했던 것 같다.
그렇게 딸 다섯 중 넷째임에도 언니들을 제치고 나 혼자서 돈 많이 드는 악기를 배우게 되었다. 그 때가 80년대 초였는데, 당시 악기를 배우는 사람이 많지 않던 시절이었다.
아버지가 음악을 시키기로 결심하고 1년 반이 지난 후,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아코디언을 구입해서 배우기 시작했다. 아코디언은 처음부터 돈이 참 많이 드는 악기였다. 우리 집 형편에 이런 악기를 시킨 것이 애초부터 잘못이긴 했다.
나는 악기를 배우기 시작하면서부터 거의 한달 만에 독주곡을 연주할 수 있게 되었는데, 그런 나의 재능을 보고 아버지는 교육에 더 열성적이 되셨다.
아버지는 음악 선생님 집으로 직접 데리고 다니시며 밤마다, 새벽마다 개인 레슨을 받게 하셨다. 그때 새벽에 일어나던 것이 습관이 되어서 지금도 6시면 일어나 단 30분이라도 꾸준히 연습을 하고 있다.
내가 아코디언에 두각을 나타내면서 기대에 부합하는 모습을 보고 아버지는 너무 기뻐하셨다. 그렇게 예술 전문학교 시험을 치르게 되었는데, 사실 입학시험에는 연주 외에도 다른 기준이 많았다. 그 중 신장 기준이 140cm이상이었다.
당시 140cm이 안되어 떨어졌는데 아버지가 너무 억울해 하며 포기하지 않으셨다. 키 크게 하는 약도 먹이면서 노력하시다 1년 후 키가 137cm정도 되어 지원했는데 또 불합격했다. 아버지가 TV, 물고기 등으로 뇌물도 많이 하셨는데 또 떨어진 것이었다.
정규 예술전문학교 진학의 기회는 날아갔으니 일반 학교를 다니며 방과 후 활동(소년 궁전)으로 아코디언을 할 수밖에 없었다. 소년 궁전은 추천 단계부터 거저 이뤄지는 게 아니었다. 북한은 실력으로만 될 수 있는 사회가 아니다.
소년 궁전도 누구의 소개로 해서 붙었는데, 그 이후부터 고생길이 열렸다. 기차를 타면 40분, 버스를 타면 1시간 30반이나 되는 거리였다.
수업이 끝나면 12시 반 정도였고 아코디언을 매고 왕복 3시간이 되는 그 먼 길을 다니기 시작한 것이다. 게다가 86년부터는 도로공사를 하게 되어 버스가 다니지 않았기 때문에 걸어 다니는 거리가 늘어나서 정말 고생을 많이 했다.
소년 궁전이라는 것이 도당, 시당 부설이어서 도시에만 있었는데 다니기 힘든 것은 둘째치고, 변두리 출신이었던 나는 안 좋은 출신배경 때문에 많이 힘들었다. 소년 궁전에는 성분이 좋고 돈도 많은 아이들이 참 많았는데, 그 중 노동자 가족 자녀는 나뿐이었다.
기량적으로 보면 누구보다도 뛰어났는데, 선생님은 시연(오디션) 같은 것 볼 때만 나를 앞세우다 정작 평양에 공연 갈 때에는 제외시켰다. 결국 평양에는 힘 있는 집 자식들만 데려가더라. 무슨 일이 있어도 힘 있는 집 자식들이 되는 사회였다. 기량이 없어도.
평양에서 김일성, 김정일 축일 등의 공연을 할 때면 도시락을 가져가야 했는데, 엄마가 노동자로 일을 했기 때문에 나 스스로 도시락을 싸가곤 했었다. 도시락을 먹을 때마다 다른 친구들과 비교되어서 항상 돌아서 먹곤 했다.
다른 애들은 항상 최고급으로만 먹었기 때문에 한 눈에 봐도 비교가 되었다. 지금 돌이켜봐도 정신적으로 너무 힘든 시기였다. 물론 친구들 중에는 좋은 사람들도 있었다.
도당 간부의 딸이었던 한 언니가 나를 잘 챙겨주었는데, 부모보다 언니가 챙겨주는 것들이 더 값비싼 게 많았다. 이러면 안되는 줄 알면서도 부모에 대한 원망이 많아 ‘내 뒤도 못 대주면서, 차라리 음악을 시키지를 말지.’라는 생각이 가득했다.
4월 학생 축전이 진행되었는데 그 때 코트를 하나 해 입어야 했다. 우리 집 형편에는 쉽지 않은 일이었다. 무대 신발 하나 신는데도 돈이 많이 들었기 때문에 언니들은 꿈도 못 꾸는 신을 신고 참 많이 미안했다. 그렇게 온 집안의 희생으로 힘들여 한 아코디언이었지만, 책임자(반장) 같은 자리에도 못 앉았다.
‘나는 아무리 힘들게 해도 안 되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어서 인생을 자포자기 하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결국 아코디언에 대한 모든 것을 포기하기로 마음먹고, 6학년 2학기 때 궁전 다니는 것을 접었다.
선생님은 계속 나를 붙잡았다. 체력을 기르면 더 잘할 거라는 둥 여러 이유를 대며 나를 설득하려고 노력하셨지만, 이미 어린 나이에 상처와 스트레스를 너무 많이 받았기 때문에 어떠한 노력으로도 깰 수 없는 음악 세계에 혐오감이 생겼다. 이 길이 아니라는 확신이 들었다.
음악을 접고 다시 공부를 하기 시작했다. 그동안 음악 한다는 이유로 수업을 많이 빼먹어서 기초가 약했기 때문에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래서 군에 입당하는 것도 생각해보게 되었다. 엄마가 제대군인이었기 때문에 우리 자매들은 의무 입대자가 아니었다.
딸 중에 군대 입당한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우리 집에서 나만이라도 입당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붉은청년근위대라는 곳에서 그 생각을 완전히 접었다. 15살이 되면 근위대에 입당시켜서 미리 군대 생활을 일주일간 체험해보게 하는 곳이었는데, 직접 생각해보니까 상상하던 것 이상으로 힘들었기 때문이다. 결국 군대도 포기했다.
다행히 아코디언을 연주할 수 있다 보니 여기저기서 오라는 데가 많았다. 소년 궁전 시절의 혐오감이 너무나 컸던지라, ‘나에겐 내 부모가 해줄 수 있는 것이 없기 때문에 난 할 수 없다.’라는 부정적인 생각 대문에 악기하는 곳에 가지 않고, ‘기계공장 기동대’라는 곳에 들어가게 되었다.
공장의 생산현장으로 찾아가 나팔을 불어주고, 노래도 불러주는 일이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한달 만 있으려고 했는데 일하다보니 4년 반을 있게 되었다. 오전, 오후로 나가서 아코디언을 연주하며 공연을 하고 다니는 일상이었다.
남한은 연예인이라면 높이 사는데, 북한에서는 모멸감을 받는 일이 많았다. 노리개 같은 느낌도 들고…. ‘내 능력이 이 정도 밖에 안 되는가. 여기는 내가 있을 자리가 아니다.’라는 생각을 하면서 지냈는데, 그 와중에 아버지 친구들과 그 자녀들에게 집에서 아코디언을 가르치는 일도 병행하게 되었다. 감사하게도 그 일은 참 재미있었다.
북한에서는 아코디언의 인기가 참 대단하다. 내가 개인 레슨 하는 일이 잘되다보니, 힘 있는 학부모의 자식들도 많이 가르치게 되었다. 오히려 한 학부모가 기동대에서 일하면 안 된다고 진심어린 충고를 해주었다. 나는 그 학부모의 도움으로 학교에 정식 교사로 들어가서 학생들을 가르칠 수 있게 되었다.
북한의 통신대학(일하면서 배우는 곳)에 들어가서 교사생활을 했는데, 거기서부터 기초를 참 잘 다지게 된 셈이다. 우리 가족이 군부대 지휘부 주위에 있다 보니 군부대 지휘 가족 자녀들이 제자로 많이 들어오게 되어 형편이 나아졌다. 그때부터는 내가 가족을 거의 먹여 살리다시피 했다. 그런 고위직 학부모들 때문에 우리 가족이 그럭저럭 생계를 유지하면서 살 수 있게 된 것이다.
아코디언과 성악을 가르치다
부유층 자녀들에게 아코디언과 함께 소년성악도 가르쳤는데, 교사생활을 시작한 다음해부터는 아이들을 데리고 평양축전에 참가하기 시작했다. 점차 학교 명예가 높아지기 시작하면서, 내 이름도 유명해졌다. 인생이 풀리기 시작한 것이다.
일반 노동자계층 자식들에게 아코디언은 꿈도 꾸기 힘든 일이었기 때문에, 보통 아코디언 동아리에 들어오는 아이들은 잘 사는 집 자식이었다. 그들이 모두 내게 배우러 온 것이다.
‘고난의 행군(90년대 북한의 어려운 시기)’는 정말 힘든 시기였는데, 당시 아이들이 학교는 안가도 소조(학교 내 동아리)에는 나왔다. 아코디언을 배워놓으면 나중에 사회에 나와 할 일이 많기 때문이라고 생각한 학부모들이 아코디언을 시키려고 했기 때문이다.
소학교 10살까지는 아코디언 배우는 것을 금하는 당의 방침이 있었지만 학교 측에서는 아코디언 동아리를 운영하였다. 아코디언 수업에 대한 학부모들의 요구가 많았고, 학교가 부유층 자녀를 좋아하였기 때문이다.
당국에서 금지한 10살 이전의 어린이들을 데리고 무대에 오를 수 없었기 때문에 오디션에도 나갈 수 없었다. 그래서 이 아이들에게 성악을 가르쳐서 경연에 참가하게 되었다. 아코디언뿐만 아니라 성악을 가르치게 되니 돈벌이가 제법 괜찮아졌다.
교사생활을 16년(초등학교 10년, 중학교 6년)을 하였는데, 교사생활을 하면서 어렸을 때 아코디언을 배워둔 것이 참 좋은 선택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2001년도에 군관(장교)와 결혼하였다. 시집가서는 교사를 그만두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경제적인 사정상 계속 하게 되었다. 정부에서 초등학생에게 아코디언을 장려하지 않기 때문에 2005년부터 2011년까지는 6년 동안 중학교 교사를 하였다.
내가 통신대학으로 사대를 졸업하였으니 교과과정도 중학교가 맞았다. 수업하는 것도 중학교 교사가 훨씬 재미있었다. 어린 학생들보다는 좀 더 큰 학생들과 소통이 잘 되었고 어울리기도 쉬웠다.
교사생활 동안 특별히 기억에 남는 사건이 있다. 봄·가을 운동회 장기자랑 시간에 퇴폐적인 춤을 춘 여학생을 심하게 혼내고 동아리에서 내쫓은 일이다. 지금 생각해보니 그렇게 매몰차게 대하지 않았어도 되었는데… 라고 마음에 걸린다.
1990년도부터 남녀 혼성인 중학교가 생기게 되었는데 남녀 학생이 함께 수업을 받는 것에 대하여 항상 조심하라고 교육을 많이 받았던 터였다. 장기자랑은 내가 관장하는 영역이 아니었지만 퇴폐적인 춤 공연을 보는 순간, 배신감이 느껴져 심하게 혼냈다.
그 다음날 아이엄마가 찾아왔다. 나는 매우 보수적이고 고집스럽게 ‘넌 더 이상 소조를 다니면 안 되겠다.’고 하며 그 아이를 내보냈다. 기분이 좀 나아졌을 때, 장기자랑 책임자이신 남자 선생님께서 내게 ‘음악선생님이 음악선생님 같지가 않습니다.’고 하는 말을 들었다.
이후 학생들에게 너무 엄하게 대하였던 것 같아 좀 풀어주기도 했지만, 아무래도 나는 좀 보수적인 사람임이 분명했다.
정부가 학교를 운영하는 게 아니고, 학부모들이 학교를 움직이는 상황이었다. 돈 있는 자녀들이 소조에 많이 들어오는데, 학급 담임들이 곤란을 많이 겪었다. 소조에 들어오면 오디션, 공연, 작은 것 하나까지도 돈이 많이 들어가기 때문에 뒷감당이 엄청나다.
게다가 한 번 들어오면 나가는 학생들은 거의 없었다. 나는 그런 돈 많은 학생들 덕분에 먹고 살았던 것이나 다름없었다. 내가 가르치던 소조는 돈을 좀 더 많이 내야했었다.
6년 동안 소조에서 아코디언과 노래를 가르치면서 많은 아이들을 양성 하였다. 제자들을 많이 아끼고 사랑했는데, 한국에 와서도 그 아이들을 생각하면 마음이 아파 밥이 목구멍으로 밥이 안 넘어갈 지경이다.
탈북을 결심하다
시어머니와 시누이는 2003년도에 탈북을 했다. 남편은 2005년에 제대한 후 북한에서 되는 일이 없자 바로 탈북을 하였다. 내가 탈북을 해야겠다고 마음먹은 것은 2009년쯤이다.
나는 아이들에 대한 교육열이 아주 강한 사람이다. 나 역시 교육열 강한 아버지에게 힘들게 양육 받았다. 자식들을 잘 키우는 것이 인생의 가장 큰 목표였고, 그 이상의 다른 꿈은 없었다. 아이들이 북에서 잘 커가고 있었던 때, 2005년 강제 제대를 당하게 된 남편이 명예를 잃고 할 일도 없어지면서 먼저 탈북을 하게 되었다.
나는 너무 고지식한 사람이었던지라 탈북 할 결심이 쉽게 서질 않았다. 게다가 평소 안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던 시누이와 시어머니를 따라가기 싫었고, 그들을 변절자라고 흉도 보고 있었던 처지라 더더욱 탈북은 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직업도 괜찮았고 경제적으로 큰 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북에서 명예를 얻자면 입당을 해야만 하는데 아이들 아버지가 탈북자이다 보니 정치적으로 제압이 들어오게 되었다.
아비가 탈북자이기에 어디를 가도 떳떳하게 얼굴을 들지 못하게 되었고, 아이들 앞길도 막힌 것이나 다름없게 되었다. 결국 자식들을 위해 북한에서는 더 이상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선택한 길이 탈북이었다.
결심을 하고 나니, 학생들 앞에서 좋은 말을 하며 웃으면서도 뒤돌아서서는 참 많이도 울었다. 제자들과 농구도 하고, 탁구도 치던 생각이 많이 난다. 인생을 돌아보면, 부모님, 학생들에게 잘못해준 게 깊이 후회되고, 지금도 힘들 때마다 북에 두고 온 나의 귀여운 제자들을 생각하면서 힘을 내곤 한다.
탈북동기와 과정
나의 탈북 동기는 한 마디로 자식들 때문이었다. 애비가 탈북한 이후, 자식들은 탈북자의 아들로 낙인찍혀 결국 출세는커녕 앞으로 변변한 직장을 가지고 살 수도 없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된 바에 자식들을 위해 탈북을 하는 게 낫다고 판단하였다.
교사를 하다 보니 ‘인권’이란 단어를 들어보긴 하였다. 하지만 존재의 이유랄까, 그런 것은 살면서 전혀 생각해본 적 없었다. 북한에서는 그런 의식은 마비된 채로 살았다. 다만 탈북을 고민하던 2년 동안 (2009-2011) 밀려오는 여러 가지 생각들로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다. 살아갈 궁리였던 것 같다.
탈북을 결심하고, 집을 떠나 국경지방으로 향하였다. 위조증명서를 떼고 가는 길이라 조마조마 하였다. 일행은 나와 내 아이들 둘(8살, 10살), 그리고 중학교 4학년 남학생이었다.
여자 하나가 애 셋을 데리고 가는 모습이었다. 남편이 탈북자였으므로 나는 당국의 감찰대상자였다. 탈북을 위해 청진에서 무산까지 기차로 4시간 거리를 가는데, 기차 안에서 몸수색을 받았다. 가히 인격 모독적이었다. 국경에 다다르니 정말 벨트까지 다 벗으라고 하더라.
무산에서 내려 어느 집에 들어갔는데 우리 가족의 행색을 보고 탈북하려는 사람들로 보였나보다. 그 집의 할아버지가 우리를 당국에 신고하겠는 것이었다.
그 할아버지는 자기 아들 이름 부르면서 아들이 중앙당에 간부에 등용될 대상인데, 집안에서 탈북하려는 사람을 머물게 하였다는 문제가 있으면 안 되니, 신고하겠다는 것이었다. 완고하신 그 할아버지가 결국 신고하러 나가셨는데, 그 타임에 우리는 도망을 쳤다.
어찌어찌하여 두만강에 다다랐다. 우리를 인솔해 길을 안내하던 사람이 갑자기 신발을 벗으라고 하였다. 걸을 때 소리가 나므로 신발을 벗으라는 것이었다. 발이 아픈 줄도 모르고 발각되지나 않을까하는 두려운 마음에 떨면서 길을 걷고 강을 건넜다.
‘강만 넘어가면 바로 사람이 기다리고 있다.’ 란 약속을 믿고 강을 건넜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약속한 사람이 없단 말이다! 껌껌한 중국 땅에 안내자도 없고, 정말이지 두려워서 미칠 것 같았다. 곧 잡혀 죽는 게 아닌가 싶어 어찌할 바를 모르고 시간이 지났다.
10분 정도를 헤매는데, 불빛이 보였다. 그렇게 만나기로 하였던 중국사람 2명을 우연히 마주치다시피 만났다. 엄청 무섭게 생긴 사람들이었다. 두 장정이 우리 애들 둘을 들쳐 업고 가는데, 마음이 너무나 불안하였다. 그렇게 얼마를 걸어 어느 집으로 우리를 데리고 들어가서는 문을 걸어 잠갔다.
그 집은 크고, 환경도 멋있었다. 하지만 우리는 극도의 긴장상태였다. 그런데 이 장정들과 우리를 연결해서 데리고 갈 사람과 마찰이 생긴 것 같았다. 결국 합의를 5,000원으로 보고, 그렇게 그 곳에서 하룻밤을 자고 연길로 넘어 올 수 있었다.
연길에서 태국으로 떠나는 길에도 또 한 번의 고비가 있었다. 우리와 만나기로 한 사람을 찾아 만나야 하는데, 우리와 같은 일행 여럿을 그 사람이 통솔하는 것이었다. 다른 일행들과 그 통솔자를 만나러 가야하는데, 찾으러 나간 일행 중 한명이 밖에서 공안에 붙잡혔다.
그 사람이 우리 거처를 말하면, 우리도 잡히게 될까봐 너무나 조마조마했다. 다행히 우리는 통솔자를 만나 무사히 연길에서 심양까지는 올 수 있었다. 중국어를 모르니까 모든 과정에서 힘들었다. 나의 운명이 다른 사람들 손에 놓여있는 그 기분이란 도살장에서 가축이 느끼는 기분일까. 어디 가서도 어떤 말도 하지 못한 채 두려움에 떨며 어디론가 끌려가는 기분.
또한 같은 일행들 사이에 칼부림도 일어났다. 서로가 너무 곤두선 신경에 몸도 마음도 지치다보니 감정에 휘말려 극한 행동으로 치닫게 되는 것 같았다. 칼에 찔린 사람은 더 이상 못 가게 되었고, 우리 일행은 칼을 찌른 사람이 너무 무서워서 같이 못가겠다고 하는 등 우여곡절 또한 많았다.
중국과 태국의 국경지대에 도착하였다. 메콩강을 건널 때에도 인원이 많아 2개 조로 나뉘어 탔는데, 칼부림을 했던 사람이 또 어떤 여자를 위협했다. 끝까지 긴장의 끈을 늦출 수가 없었다.
사실 중국에서 태국까지 넘어오는 과정은 열흘밖에 걸리지 않았는데, 그 열흘은 내 인생 어느 때보다 길고 힘든 시간이었다. 메콩강을 건너 태국으로 넘어오자 일단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태국에서 역시 말은 통하지 않았지만 조금은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어디론가 이끌려 들어가는데, 비행기 안이었다. 기내에서 주는 음식은 정말이지 맛있었다. 세상에 태어나서 이런 맛있는 식사는 처음 먹어보는 것이었다. 지금도 꿈만 같다. 8시간 비행을 하였던 것 같다. 비행기는 인천 공항에 내려앉았다. 나의 기나긴 탈북여정의 마침표가 찍히는 순간이었다.
자유 대한민국에 입국하다.
공항에 내려 한국 땅을 밟았다는 것이 처음에 믿어지지 않았다. 보이는 화려한 공항의 모습들이 신기하기만 하였고 모든 게 믿어지지 않더라. 양복 입은 사람들이 우리를 안내하고, 또 오자마자 우리의 건강상태를 체크해 주었다. 북한에서는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나를 위해서 국가에서 뭔가를 해준다는 게 가당키나 하단 말인가. 너무나 따뜻한 대우에 어리둥절하였다.
건강검진을 받는 동안 나는 놀라움과 함께 약간 무서운 감정도 들었다. 국정원가서 식사도 주고, 간식도 주고 하는데, ‘나한테 왜 이렇게 해주지?’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나를 이용하려 하는 것일까? 무엇 때문에? 왜?’ 등등 의심이 들었다.
북한 사람들은 엄한 규율 속에서 살아서 생겼던 피해 의식 때문이라는 것을 그 때는 몰랐다. 호의에 낯설어하는 나는 ‘내가 일단 한국에 왔으니 여기서 하라는 대로는 하겠지만, 절대 긴장의 끈을 놓지 말자’고 생각했다. 그러던 중 이가 아파 관리하는 선생님께 호소했는데, 그 선생님이 바로 의사 분에게로 연결해 주고 치료를 해주더라.
시간이 지나면서 남한 사회의 진심을 받아들이고는 점차 나의 의심과 경계가 감사로 변하기 시작했다. 국정원에서 2달 동안은 너무 감사한 시간들이었다. 하나원으로 나오니 정말 하루하루가 더더욱 감사하더라. 국정원에서도 시기별로 옷을 줬는데, 하나원에서도 좋은 옷을 또 주더라.
하나원에서 컴퓨터, 운전면허 공부도 열심히 했다. 자격증, 운전면허 시험을 보는데 ‘내가 돈을 안 넣었는데 설마 내 점수가 그대로 나올까?’는 생각이 들었다. 정말 뇌물을 안 넣었는데도 점수가 그대로 나오더라. ‘아, 여기는 내가 노력하면 다 되는 세상이구나…’ 그런 생각이 들면서 나의 가슴은 희망으로 부풀기 시작했다. 너무나 기쁘고 설레었다.
남한에 정착하다.
하나원에서 컴퓨터, 운전면허 공부도 열심히 했다. 모두 합격하였다. 아, 내가 노력하면 다 되는 세상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 때 사감 선생님도 ‘네가 노력하면 되는 땅이야.’ 라고 용기를 주셨다. 내가 하고 싶어서 응시했는데 노력한 만큼 다 되더라. 북한에서는 할 수 있는 게 없었기에 더욱 감사했다.
자본주의가 좋다는 게 결국 개인한테 좋다는 뜻인 것 같다. 사회, 사상을 떠나서 실질적으로 나에게 좋은 제도인 것이다. 사회주의에서는 내 존재도, 가치도 없으며 정치에 대해서 알면 괜한 소동일 뿐이었다.
내가 음악 교사로서 음악만 가르치는 일만 알면 되는 것이지 더 많이 알고자 하면 시끄러운 일뿐이었다. 정보도 전혀 공유되지 않으며 인터넷도 안 되는 세상에서 “뭐, 세상에 대해 알아서 뭐하니?” 이런 생각이었다. 여기 와서는 내가 그동안 세상에 대해 너무나 무지했다는 것을 깨닫고는 많은 걸 알고 싶었고 배우고 싶었다.
나는 한국에 와서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나원에서도 앞으로 뭘 하며 살아야 하나를 제일 걱정하였다. 2011년 9월 8일 하나원을 나온 후 운전면허와 컴퓨터 학원을 다니면서 일주일을 아르바이트 했는데 만족스러울 리 없었다.
그러다가 11월에 평양민속예술단이라는 탈북인 예술단체를 알게 되었다. 그 곳에 들어갈 기회를 얻은 것이 나에게 남한에서의 삶을 윤택하고 희망차게 한 큰 축복이었다고 생각된다.
그 다음부터 내가 내 길을 개척해 나가고 있다. ‘NK통일사랑교육협회’라는 북한 교사 집단에도 다니게 되었다. 그 이듬해 2012년 3월부터는 대안학교에서 방과 후 교실 강사도 하고 있다. 참으로 나에게는 행운의 연속이었다.
그러다가 작년 겨울 12월에 서울에 올라와 봤더니 그 때까지 나의 아이들은 놀기만 한 것을 알게 되었다. 나의 탈북동기가 아이들을 좋은데서 살게 해주기 위한 것이었는데 정작 아이들이 그냥 집에만 있고 하는 일이 집을 지키는 것이라니 너무나 마음이 안 좋았다.
나는 발전하고 내 자리를 잡고 있는데, 아이들은 집에서 놀고 있으니까 차라리 반대가 되면 좋겠단 생각이 들 정도였다. 평양민속예술단에 있으면서 내가 열심히 하니까 케이블 방송국 TV조선에서 나를 촬영을 하러 왔었다. 아이들 개교식 하는 모습을 찍고 싶어 하였다. 한국에 정착하는 모습을 담고 싶었던 것이다.
나는 별 생각 없이 그렇게 해달라고 했는데 우리 아이들이 ‘엄마, 우리가 북한에서 왔다고 해야 해요?’라고 말하더라. 못사는 데서 왔다고 하는 게 싫다고 하더라. 그날 밤에 PD에게 아이들을 촬영하는 것은 하지 않겠다고 전했다. 결국 나도 아이들 개학식 때 가지를 못했다.
한국교사들과 북한교사들이 굉장히 다른 점이 있다. 북한은 권위적인 모습이라면 남한은 교사들이 너무나 친근하다는 점이다. 아이들 담임선생님은 너무 편하고 혈육 같은 느낌이었다. 너무 잘 대해주니, 그것이 너무 신기했다. 교사라면 직급이 있는데, 자기 체면을 차릴 줄 알았는데, 그런 게 전혀 없었다.
그래서인지 한국아이들은 선생님들한테 엄마처럼 친근하게 다가가는데, 내 생각에는 교사가 따뜻한 건 좋은데 한편으로는 교사로서 조금 엄하고 그런 면이 있어야 할 것 같다. 학생과 교사 사이의 간격이 너무 없어서 그게 좀 걱정이 된다. 더구나 우리 아이들 같은 경우에는 북한에서 탈북하는 동안 배우지 못한 것들을 더 많이 배워야 하는데 선생님들이 그 점을 이해를 못하시는 것 같았다.
북한에서는 사교육 받는 애들이 실제 써먹는 게 별로 없어서, 우리 애들은 학원 받지 않고 학교 교육만으로 한다고 하니 담임선생님은 오히려 좋아하시는 것 같았다. 학교가 다른 학교에 비해서 체험 활동도 많고 사교육 절반으로 줄인 학교라 우리에게는 다행이었다.
북한에서는 교사들이 학부모가 찾아오는 걸 좋아하는데, 한국에서는 별로 그런 것 같지 않다. 아이들 소풍 전날, ‘선생님 도시락은 안 싸와도 됩니다.’ 라는 알림장을 보니 정말 신기한 세상이다.
북한에서 교육을 받고 온 것이 도움이 되었던 것인지 일단 우리 아이들이 학급에 들어가서는 공부에서 밀리지 않았다. 성격도 활달한 편이라 친구들과도 잘 지내서 다행이다. 둘째가 좀 고집스러워서 말 바꾸기를 굉장히 힘들어하긴 하지만.
요즘 정부와 하나원에서 많이 해주니 탈북자들이 많이 도태되어 있는 것 같다. 지금까지 헛산 것을 다시 메워야겠다는 생각에 더 열심히 살아야 한다. 사실 한국 생활이 스트레스를 많이 받기는 하나, 아이들을 생각하면서 극복해야 한다는 생각을 한다. 환경을 이겨내야 한다는 마음을 강하게 먹고 있다.
북한의 학교생활
북한에서는 제1고등중학교를 졸업하면 무조건 대학에 붙여준다. 공부를 아주 잘하면 태생을 넘어 팔자를 고쳐준다. 제1고등중학교를 가려면 초등학교 4학년에 입시 시험을 본다. 나는 큰 아이를 제1고등중학교에 보내려고 공부를 열심히 시켰다.
담임선생님이 엄한 분이셨는데 사소한 일로 아들에게 매를 들었다. 그렇게 맞은 이후 아들은 선생님을 보고 싶지 않다고 했다. 공부를 잘할 리가 만무했다. 이런 식으로 점점 친구들 소리가 없어진다.
학교에서 교과서가 바뀌는 것만 해도 2년이나 걸린다. 교재가 나와도 종이가 없다보니 출판이 안 되는 것이다. 전국적으로 교재가 나가기까지 3년은 족히 걸린다. 정해진 교재를 누구에게 먼저 분배하는지도 참 정하기 힘든 일이다.
교사도 하나부터 열까지 다 돈으로 결정되다보니 교사 역시 인맥관계를 잘 형성해야 한다. 교사를 하기도 엄청 피곤한 일이다. 담임 맡기도 힘들다. 학부모, 교장선생님의 눈에 들기가 힘들다. 결국 학부모들에게서 신임을 얻으면 학급을 맡는데 도움이 되기는 한다.
내 학생 중 한 명이 재간은 있는데 키가 작아서 군에 가지 않고 대학에 바로 진학했다. (원래는 군에 갔다 나와서 대학 가는 것을 더 좋게 쳐준다.)
설날에 하루 내게 인사차 왔는데, ‘공부해서 뭐합니까! 라고 하더라. 자기는 4.5가 나왔는데 3점 맞은 동기가 다음날 5점으로 올라 있었다는 것이었다. 북한은 학점도 하나부터 열까지 다 뇌물로 바꿀 수 있다.
나는 통신대를 맡았었는데 학생을 일 년에 두 번 즉 여름방학에 20일, 겨울방학에 10일간 본다. 주간 생들이 공부하는 것에 비하면 통신대 학생들은 장난이라는 이유로 통신대 아이들의 숙제는 돈을 안주면 아예 보지를 않는다. 정말 엉망이다. 점수를 돈으로 팔고 사고한다.
내 사촌동생이 공부를 제일 잘하는 상을 받았는데 삼촌이 돈으로 상을 샀기 때문이었다. 사실 사촌 동생이 실력이 낮은데 우리 삼촌이 검열과에 아는 사람이 있고 돈을 주어서 불합격인 그 아이를 합격시켰다.
도 시험, 중앙시험에서 결국 실력 있는 애들이 떨어지고 사촌동생이 붙는 상황이었다. 전국적으로 제일 큰 상인데, 이런 상도 이렇게 다 돈으로 사고 판다. 교사들 자질도 항상 문제되고, 정말 말로 다 못할 형편이다. 매해마다 교사 자질 평가를 하긴 하는데 다 눈가림이다.
학교생활의 비리와 교사로서의 후회
북한에서는 학교에서 아이들이 쓰는 종이 같은 학용품들도 모두 학부모들 주머니에서 나오는 것이다. 학부모들이 그저 학교를 움직이고, 나아가서 나라를 움직이는 것이다.
교사로서 학생들에게 장래희망에 대해서 묻는 것 자체가 미안한 일이었다. 어차피 그들에게 장래희망은 그저 말장난일 뿐이었다. 어린아이들에게 저 하늘에 떠가는 구름을 솜사탕으로 속이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교사는 언어도둑이 되었다. 북한에서 학생을 교육하는 것은 비극적인 일이라고 생각했다. 북한 당국은 다음 세대를 왜 교육하는지에 대한 큰 그림이 없다. 교육의 나아갈 청사진이 없었다. 김일성 김정일 부자의 우상화가 목적이라면 목적이랄까.
이제와 북한에서의 삶을 돌이켜 보면, 나를 포함한 교사들이 세상을 너무나 모르고 살았다는 생각에 기가 막힐 따름이다. 나 자신이 교사로서 아이들에게 말도 안 되는 것들을 가르쳤다는 점이 부끄럽고, 북한당국에 배신감이 밀려온다.
40년 동안 그런 곳에서 살았다는 것. 아니, 결국은 제대로 산 게 아니다. 그게 너무도 억울하다! 우리 애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겠는가? 우리 제자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겠는가? “당을 위해서 목숨을 바쳐야 한다.” 고 했던 지난날들을 생각하면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다.
군관 부인으로 남편과 멀어지다
북한에서 군관 가족으로 살면서 상처를 받은 점에 대해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나의 남편이 군인이었고 통신부문에서 일했다. 북한에서 군관 아내들은 결국 남편 직급이 본인들의 직급이나 다름없다.
군인 중에서 통신 쪽은 아무런 권력이 없기 때문에 나 또한 직급도 파워도 없는 상황이었다. 여자가 일단 군관한테 시집가면 자기가 하던 일을 그만 두어야 한다. 남편을 따라다니면서 시골 이곳저곳으로 이사를 다녀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나는 남편을 따라다니지 않고 음악교사로 일을 계속했다. 그러다 남편이 여자부대로 옮겨 가게 되었다. 북한에서 여자가 군대에 가면 순결성이 다 없어진다고 보면 된다. 이동훈련, 동기훈련을 받는 동안 그때마다 남자 군인들은 여자 군인들과 같이 산다고 하더라.
나의 남편도 훈련을 나갔는데 한 달 째 집에 들어오지를 않았다. 그래서 내가 여자부대로 따라가 보았더니 남편이 반바지 바람으로 밖으로 나오 는 것이었다. 주위에 여자들이 가득한데 어떻게? 나는 괘씸하기도 하고 당황스러웠다.
그런데 그런 날들이 연속되었다. 그리고 밖에서 훈련받는 여자군인들 또한 모두 어디엔가 기대고 싶어 하는 마음이 왜 없었겠는가? 애아버지가 인정도 많고 외모도 멋있게 생겨서 여자군인들이 많이 기대고 싶어 했던 것 같다.
하루는 우리 집에 휘하의 병사들을 데리고 온 적이 있었는데 여자 부하들이 내가 있는데도 내복 바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것이었다. 북한에서 여자 군대들은 완전히 개방이라고 보면 된다더니!
나는 신랑 앞인데도 내복만 입지 못한 채 겉옷까지 갖춰 입고 있는데, 부하 여자군인들이 내복 바람으로 오가는 것을 보는데, 너무 깜짝 놀라고 화가 나기도 하고 그때부터 좋지 않은 감정이 시작되었다.
이런 광경을 실제로 보니 나는 주체 못하는 의심과 분노로 남편을 대했다. 여군들이 계속 따라다니고, 남편은 일주일에 한 번씩 집에 오던 것도 더 이상 오지 않게 되었다.
둘째를 2004년에 출산했는데, 딸이라고 하니 아예 나를 찾아오지도 않았다. 심지어 집에 왔을 때에도 애를 들여다보지 않는 것을 보면서 내가 느꼈던 슬픔과 억울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나는 급성 설사증이 와서 정말 죽다 살아난 적이 있었는데 남편도 부대에 출근하지 못했다. 그런데 대대정치지도원이란 여자가 나를 호출하더니, 바로 반말을 하면서, ‘아니, 통신 참모 왜 안 내보내네?’ 라고 말하는 것이다.
내가 아파서 직장에 못 갔다고 하니, 그렇다고 왜 남편을 집에 두냐는 것이었다. 진단서를 뗐다고 하니까, ‘네가 아파서 받은 진단서가 무슨 상관인가, 통신 참모는 출근 시켜야지!’ 라며 다짜고짜 화를 내는데 아내로서 너무 자존심이 상했지만 아무런 대응도 하지 못했다.
군부대 생활하는 애아버지와 꼭 10년을 함께 살았는데, 결국 가정생활이 파경으로 흘러갔다. 여자로서 당한 것에 대한 분노가 담겨져 내가 더욱 치를 떠는 지도 모르는 일이지만, 군부대는 기강도 없고 성적으로도 타락했다. 군부대는 정말이지 엉망이다!
북한에서는 자본주의는 ‘하품하는 동안 금이빨 뽑아가는 사회’라고 교육받았지만 그와는 반대로 북한 사회 곳곳에서 남의 것을 빼앗아 자기 배를 채우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나는 남한소식이나 외부 소식이 굉장히 차단된 상태에 살고 있었지만, 남편은 군인인데도 북한 사회의 모순을 더 잘 알고 있었던 것 같다. 남편은 ‘김정일이 나쁜놈이야!’ 라고 단호하게 말했다.
두서없는 회상을 마무리하며
지금 남한에서의 나의 삶은 만족과 감사로 가득 차 있다. 현재 최대의 꿈은 두 아이중 하나만이라도 외국으로 유학을 보내는 것이다. 한국에서 잘나가는 공무원으로 키우고 싶다. 아이들이 잘 돼서 이 사회의 당당한 일원이 되는 것이 어미로서 바라는 첫 번째이자 가장 큰 소망일 것이다.
두 번째 소망은 나에 관한 것이다. 내가 더 공부하고 싶고, 더 배우고 싶다. 내 직업도 갖고 싶다. 나도 꿈꿀 수 있다는 것! 그것은 참 멋진 일인 것 같다.
남한의 자유를 당연하게 여기는 사람들은 이 자유가 얼마나 소중한지 잘 모르는 것 같다. 꿈을 향해 달려갈 수 있는 것은 너무나 행복한 삶의 조건이다. 그리고 열심히 달려가는 것은 내 몫이다. 꿈을 꿀 수 있고, 꽃 피울 수 있다는 것. 그게 너무 좋은 것이다. 나의 미래에 박수를 보내며 지난날의 회상을 마친다.
출처 : 북한인권시민연합
2014-04-22 2004년 용천역 폭발, 2014년 진도여객선 침몰… 남북이 드러낸 민낯
▲2004년 4월 22일 발생한 용천역 폭발사고의 최대 희생자는 670여 명의 사상자가 발생한 용천소학교 학생들이었다. 폭발로 3층이 무너지고 형체만 남은 용천소학교가 잔해 정리를 하던 모습. 동아일보DB
정확히 10년이 흘렀다.
2004년 4월 22일 낮 12시 10분경 평안북도 용천역에서 거대한 폭발이 연이어 일어났다. 15m 깊이 웅덩이가 생길 정도로 강력한 폭발은 순식간에 160여 명의 목숨을 앗아갔다. 부상자는 1300여 명. 공공건물과 가옥 8100여 동이 파손됐다. 사망자의 절반과 중상자의 상당수는 어린 학생들이었다. 역에서 약 200m 떨어진 용천소학교가 최대의 피해자였다. 무너진 학교 지붕 아래서 몸으로 학생들을 덮은 채 숨진 여교사가 발견되기도 했다.
당시 동아일보에 입사한 직후 사회부에 배속되어 경찰서 수습기자를 끝낸 지 며칠밖에 안 됐던 기자는 북한 출신이란 이유로 사건 보도의 중심에 뛰어들어 정신없이 보냈다. 그래서 더욱 기억이 생생하다. 남쪽엔 용천역 폭발이 김정일 암살 시도라고 믿는 사람들이 적잖다. 중국을 방문했던 김정일이 바로 이날 오전 4시경 귀국했고 8시간 뒤 폭발이 있었기 때문이다.
북한은 사고 원인에 대해 질안비료(질산암모늄) 화차들과 유조차를 갈이(위치 재변경)하던 중 부주의로 유조차와 고압선이 접촉했고 이때 발생한 스파크가 화재를 일으켜 유조차와 비료 화차가 연쇄 폭발했다고 발표했다. 폭발 원인은 논리적으로 타당하다. 질안비료가 약간의 유류와 혼합되면 ‘초산폭약’이라는 폭발물로 변한다. 168명이 희생된 1995년 미국 오클라호마 주정부 청사 테러, 202명이 숨진 2002년 인도네시아 발리 테러에 이런 초산폭약이 사용됐다.
그런데 훗날 기자가 파악한 화재의 원인은 전기 스파크가 아니었다. 기자는 우연한 기회에 사고 뒤 현장 수습을 했던 한 탈북자를 만난 적이 있다. 그는 용천역 직원 중 유일한 생존자인 한 선로 감시원의 진술을 보위부 조사요원으로부터 전해 들었다며 기자에게 들려주었다. 이 감시원은 당시 용천역 입구 감시초소에 있다가 목숨을 건졌다. 감시원의 말에 따르면 용천역 화재 원인은 꽃제비(노숙인)들의 석유 도둑질 때문이었다는 것이다.
당시 역 주변에는 수많은 꽃제비들이 중국을 오가는 열차를 노렸는데 비료 1kg을 훔치면 옥수수 2kg을 바꿀 수 있었고 석유는 더욱 비쌌다. 따라서 꽃제비들이 경비원 몰래 유조차에서 석유를 훔치다 누군가의 담뱃불 같은 원인으로 불이 났을 것이라는 이야기였다. 석유 도둑이 꽃제비가 아닌 호송원일 가능성도 있다. 북한에선 호송원이 물자를 뽑아내 팔아먹는 일이 예사롭기 때문이다. 석유 도둑질이 대규모 인명 피해를 동반한 폭발로 이어지는 사례는 나이지리아 같은 후진국에선 흔히 볼 수 있다.
선로 감시원은 폭발이 김정일 암살시도설과는 거리가 멀다고 했다. 김정일이 곧 지나갈 역이면 구내에 사람들이 돌아다닐 수도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실제 4월 22일 정오의 용천역은 김정일을 맞이할 준비를 하던 긴장된 모습이 아니라 여유로웠던 일상의 풍경이었다.
어떻든 그날 용천역에서는 불길이 치솟았고 역 직원들은 물론 인근 주민들까지 몰려와 화재 진압에 나섰다. 그러나 몇십 분 뒤 유조차가 폭발하면서 전부 사망했다. 화재를 처음 목격한 생존자는 아무도 없었다.
폭발사고로 제일 살판이 났던 곳은 보위부였다. 사고를 혁명의 수뇌부를 노린 테러로 규정하고 공안정국을 조성했고 2002년 11월부터 시작돼 2만여 대가 보급돼 있던 휴대전화 서비스도 중단시켰다. 보위부는 도·감청 준비가 안 된 휴대전화 서비스에 불만이 크던 차였다.
북한에서는 1980년대 중반 용천역과 유사한 폭발사고가 또 있었다. 함경북도 화성에서 군수용 폭약을 실은 화차들에 화재가 발생해 폭발한 것이다. 당시 기관사는 불이 나자 역에 정차됐던 열차를 외진 곳으로 몰고 갔다. 호송병들도 기차에서 내리지 않고 끝까지 불을 끄다 산화했다. 이들의 희생으로 엄청난 폭발에도 농가 몇십 채만 무너졌다.
여기서 언급하고 싶은 것은 재난 앞에서 보여준 북한 사람들의 희생정신이다. 용천역 사고 때 화염 속 유조차로 달려간 사람들, 제자를 구하기 위해 제자의 몸을 덮고 숨진 여교사, 함북 화성에서 불붙은 화차를 몰고 간 기관사들이다. 북한 사람들의 이런 행동이 총살에 대한 공포로 어쩔 수 없이 발휘되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잘못된 인식이다. 어려서부터 교육받은 희생정신과 책임감으로 체질화된 것 때문에 본능적으로 나온 행동들이다. 북한은 점점 부패돼 뇌물과 도둑질 없이는 살 수 없는 사회가 되고 있지만 다행스럽게도 아직 의협(義俠)은 죽지 않았다. 남쪽의 1950년대처럼 말이다.
가라앉는 배에 수백 명 아이들을 내팽개치고 먼저 도망친 선장과 선원들을 보면서 어떻게 하면 저런 무책임한 행동이 나올 수 있을까 생각해보았다. 2003년 대구 지하철 참사 때에도 기관사는 “곧 출발한다”고 방송하고 혼자 뺑소니쳤다.
혼자 살아남아 병실에서 젖은 돈을 말리던 세월호 선장 모습에서 냉혹한 자본의 논리에 인간성을 잡아먹힌 인간의 표본을 보았다. 통일이 되면 저런 사람들이 북한 사람들 앞에서 돈을 흔들며 ‘선진국 국민’ 행세를 할까봐 우려스럽다.
10년 전 2004년 4월 북한 용천은 “나도 살자”는 도둑질이 참극을 만들었다. 2014년 4월 진도 해상에선 “나만 살자”는 이기주의가 비극을 키웠다. 꼭 10년을 간극으로 간접 체험한 남북의 두 인재(人災)가 서로의 민낯을 드러낸 것 같아 착잡해진다.
2014-05-17 최룡해 ‘솔직한 변명’에 좌천?
대북 고위 소식통이 전하는… 崔 총정치국장 해임 배경
▲최룡해 북한 노동당 중앙위원회 비서가 지난달 말 갑작스럽게 북한군 총정치국장직에서 해임된 것은 김정은 노동당 제1비서에게 군의 실태에 대해 솔직하게 털어놓았다가 진노를 샀기 때문인 것으로 알려졌다.
13일 북한 권력층 동향에 밝은 대북 고위 소식통에 따르면 최룡해는 지난달 말 김정은이 포병부대를 방문한 자리에서 “싸움 준비가 되지 않았다”고 질책하자 “이대로 10년만 가면 군이 전쟁을 할 수 없게 된다”고 직언했다. 최룡해는 이 자리에서 북한군의 전투장비가 노후화됐고 연료가 없어 훈련을 하지 못한다면서 식량이 부족해 탈영병이 속출하고 있다고 보고했다.
이어 최룡해는 “군인들 사이에 전쟁을 해도 승산이 없다는 분위기가 확산되고 있다”고 발언하기도 했다고 이 소식통은 전했다. 이에 김정은은 “그것을 해결하라고 당신을 총정치국장 시킨 것 아니냐”며 화를 내면서 “당장 그만두라”고 했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 조선중앙통신은 지난달 28일 김정은이 이틀 전 제681군부대 산하 포병 구분대를 방문해 “싸움 준비가 잘되지 않았다”고 지적하며 “이곳 지휘관들의 마음은 싸움마당을 떠나 있는 것 같다”고 질책했다고 보도한 바 있다. 이 구분대는 170mm 자주포를 운용하는 북한군 핵심 포병부대다.
이 통신은 또 김정은이 “지금 일부 지휘관이 군인들을 다른 사업에 동원시키며 훈련을 뒷자리에 놓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군인생활 개선을 위해 부업도 하고 부강조국 건설에서도 한몫해야 하지만 항상 싸움준비를 첫자리에 놓아야 한다”고 강조했다고 전했다. 포병들의 준비태세를 김정은이 질책하자 현장에서 군인들이 부업(농사)과 건설에 과도하게 동원되고 있기 때문이라고 변명했음을 암시해주는 대목이다. 이 소식통은 “최룡해는 전에도 김정은에게 군의 열악한 실태를 설명하며 대책을 세워야 한다고 여러 차례 이야기했지만 김정은에게도 대책이 없긴 마찬가지”라고 덧붙였다.
한편 이 소식통은 황병서 신인 군 총정치국장과 관련해 “김정은을 후계자로 내세우는 과정에 (김정은의 생모로 그동안 고영희로 알려져 온) 고용희의 절대적 신임을 받아 승진한 인물”이라며 “현재 노동당 조직부 1부부장도 겸직하고 있어 엄청난 권력을 틀어쥐었다”고 밝혔다.
2014-05-27 평양아파트를 붕괴시킨 건 ‘부패’다
평양 중심부에는 모든 건물의 신축이 금지돼 있다. 가장 큰 이유는 상하수도망 같은 도시 하부구조가 너무나 열악하기 때문이다. 1990년대 초반 평양건설대 교수에게서 들은 바로는 중구역의 경우 아예 상하수도망 도면이 없다고 한다. 그도 그럴 것이 현재 평양 중심부 상하수도망은 일제강점기에 건설한 것인데, 광복과 전쟁을 거치며 도면이 사라졌다.
6·25전쟁 때 평양은 미군의 집중 폭격으로 폐허가 됐다. 북한은 40만 명이 살던 평양에 42만 발의 폭탄이 떨어졌다고 주장한다. 전후의 평양 사진에 남아있는 건물은 일제강점기의 화신백화점 단 하나뿐이었는데 그것이 현재의 평양 제1백화점이다.
전쟁이 끝난 뒤 북한의 최우선 목표는 집을 빨리 짓는 것이라 상하수도망을 새로 설계할 여유가 없었다. 또 당시만 해도 기존의 상하수도망도 쓸 만했다.
북한이 자랑하는 속도전의 원조는 전후 평양 건설에서 비롯됐다. 1958년 평양에선 14분마다 살림집 1채씩이 건설됐다. 이를 두고 북한은 ‘평양속도’ ‘평양시간’이라고 내세웠다. 그리고 조립식 공법으로 7000채분의 자재로 2만 채를 건설했다는 자랑도 빼놓지 않는다.
이렇게 급히 건설했어도 그때 지은 아파트가 붕괴된 적이 없었다. 1992년 통일거리 건설장에서 고층아파트가 붕괴돼 내부 미장을 하던 군인 1개 대대 500여 명이 몰살된 것을 비롯해 크고 작은 건물 붕괴가 있었지만 적어도 1950년대 지은 아파트는 무너지지 않았다. 이는 역설적으로 지금 건설하는 아파트의 안전기준이 얼마나 허술한지를 보여준다.
한국 언론들은 이달 13일 발생한 평양 23층 아파트 붕괴 원인이 ‘속도전’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핵심 원인은 아니다. 진짜 원인은 부패에 있다.
북한 간부들은 아파트 건설을 아주 좋아한다. 떨어지는 돈이 상당하기 때문이다. 남쪽 사람들은 북한 아파트가 국가 자재로 건설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북한은 중요 건설장에 공급할 시멘트와 철강이 태부족이다. 중요 건설장은 스키장 유원지 기념관 민속공원같이 김정은이 지으라고 지시한 곳을 말한다.
평양의 대다수 아파트는 힘 있는 기관들이 건설허가를 따서 짓는다. 건설되면 일부는 자기들이 갖고 나머지는 건설비를 뽑기 위해 판다. 모든 자재는 건설기관들이 자체로 구입한다. 대개 중국에서 수입하기 때문에 달러로 거래된다. 이 수입권도 수도건설총국이나 2경제(군수 부문) 같은 극히 일부 기관이 독점하고 있다.
아파트를 지으려면 비용과 뇌물이 많이 든다. 건설비를 줄이려면 불량 자재를, 그것도 적게 쓰는 수밖에 없다. 무너지지 않을 만큼만 지어 파는 기관이 가장 장사를 잘하는 셈이다. 한때 부실 아파트의 대명사로 꼽히던 1970년의 ‘와우 아파트 붕괴사고’ 같은 일이 40여 년이 지난 지금 평양에서 재연되고 있는 것이다.
북한은 석회석이 풍부함에도 불구하고 전력난 때문에 시멘트 생산량이 적고 질도 형편없다. 북한에선 시멘트 강도를 나타내는 단위로 ‘마르카’를 쓰는데 180마르카 이상을 고강도 시멘트로 분류한다. 북한산은 보통 120마르카 내외다. 이런 시멘트는 아파트 건설에 쓸 수가 없는데도 북한 내부에서 잘 팔린다고 한다.
같은 아파트를 지어도 도심이면 비싸게 팔린다. 제일 비싼 곳은 중구역인데 100m² 정도의 아파트는 3만∼4만 달러, 160m²는 7만∼8만 달러에 팔린다.
평양 도심의 건물 신축 금지 규정은 사실상 오래전에 권력과 돈 앞에 무용지물이 됐다. 평양 중심부는 지금 온통 공사판이다. 창전거리처럼 아예 일정한 구획 전체를 허물고 새로 건설한 곳은 상하수도망을 만들 수 있다. 문제는 도심에 틈만 있으면 비비고 올라가는 아파트들이다. 이런 아파트는 설계도도 없는 상하수도망에 대충 연결된다. 모르는 사람은 평양의 외관만 보고 “못 사는데 건물들은 괜찮네” 하고 감탄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진짜로 감탄을 받아야 하는 ‘평양의 기적’은 땅 밑에서 겨우 기능을 하는 80년 넘은 된 녹슨 좁은 배관들이다.
평양은 주택난이 심각해 구매 수요는 충분하다. 1990년대 초반 약 200만 명이던 평양 인구는 20년 뒤엔 350만 명까지 늘어났다. 여기에 거주신고 없이 몰래 평양에 사는 일명 ‘미거주자’도 70만 명 이상으로 당국은 파악하고 있다.
당국은 평양 인구를 줄이려고 일부 지역을 황해도에 편입시키는 식의 대책도 내놓았지만 실패했다. 북한에선 평양에 살아야 그나마 사람대접을 받기 때문이다. 지방에서 돈 좀 번 사람들은 돈보따리를 싸들고 올라와 뇌물을 뿌리며 평양 거주권을 따기 위해 필사적이다.
반면 1990년대 이후 경제난이 겹치면서 평양에선 신규 주택이 거의 건설되지 못했다. 주택난이 심했다. 인구가 두 배나 늘어난 지금은 창고와 지하실 옥상에도 자리가 없다. 이번에 붕괴된 아파트에 완공도 되기 전에 사람들이 들어가 살았던 이유도 이 때문이다. 이런 사정 때문에 평양에서는 2000년대 후반부터 다시 주택 건설 붐이 일고 있다.
평양의 아파트 가격은 1990년대 이후 한 번도 떨어지지 않고 매년 상승세다. 집을 지었다 하면 팔리니 질이 문제가 될 리 없다. 몇 년 전 북한 아파트 공사현장을 몰래 촬영해온 동영상을 보고 기겁을 했다. 건설 중인 아파트 창문 위치가 층별로 오락가락이다. 그런데도 다 짓고 보면 그럴듯하니 희한하다.
나중에 한국 기업들이 북한에 마음대로 진출할 때가 오면 나도 평양에 파견될 가능성이 있다. 가서 살려면 집부터 사야 한다. 하지만 평양의 부실 공사판을 보면 도저히 도심에서 살 자신이 없다. 이번 아파트 붕괴를 보고 확실히 결심했다. “나중에 평양에 돌아가면 교외에 내 손으로 집을 직접 지어야지.”
2014-06-02 “평양에 가면 집은 내 손으로 직접 지어야지”
평양 중심부에는 모든 건물의 신축이 금지돼 있다. 가장 큰 이유는 상하수도망 같은 도시 하부구조가 너무나 열악하기 때문이다.
1990년대 초반 평양건설대 교수에게서 들은 바로는 중구역의 경우 아예 상하수도망 도면이 없다고 한다. 그도 그럴 것이 현재 평양 중심부 상하수도망은 일제강점기에 건설한 것인데, 광복과 전쟁을 거치며 도면이 사라졌다.
6·25전쟁 때 평양은 미군의 집중 폭격으로 폐허가 됐다. 북한은 40만 명이 살던 평양에 42만 발의 폭탄이 떨어졌다고 주장한다. 전후의 평양 사진에 남아있는 건물은 일제강점기의 화신백화점 단 하나뿐이었는데 그것이 현재의 평양 제1백화점이다.
전쟁이 끝난 뒤 북한의 최우선 목표는 집을 빨리 짓는 것이라 상하수도망을 새로 설계할 여유가 없었다. 또 당시만 해도 기존의 상하수도망도 쓸 만했다.
북한이 자랑하는 속도전의 원조는 전후 평양 건설에서 비롯됐다. 1958년 평양에선 14분마다 살림집 1채씩이 건설됐다. 이를 두고 북한은 ‘평양속도’ ‘평양시간’이라고 내세웠다. 그리고 조립식 공법으로 7000채분의 자재로 2만 채를 건설했다는 자랑도 빼놓지 않는다.
이렇게 급히 건설했어도 그때 지은 아파트가 붕괴된 적이 없었다. 1992년 통일거리 건설장에서 고층아파트가 붕괴돼 내부 미장을 하던 군인 1개 대대 500여 명이 몰살된 것을 비롯해 크고 작은 건물 붕괴가 있었지만 적어도 1950년대 지은 아파트는 무너지지 않았다. 이는 역설적으로 지금 건설하는 아파트의 안전기준이 얼마나 허술한지를 보여준다.
한국 언론들은 이달 13일 발생한 평양 23층 아파트 붕괴 원인이 ‘속도전’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핵심 원인은 아니다. 진짜 원인은 부패에 있다.
북한 간부들은 아파트 건설을 아주 좋아한다. 떨어지는 돈이 상당하기 때문이다. 남쪽 사람들은 북한 아파트가 국가 자재로 건설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북한은 중요 건설장에 공급할 시멘트와 철강이 태부족이다. 중요 건설장은 스키장 유원지 기념관 민속공원같이 김정은이 지으라고 지시한 곳을 말한다.
평양의 대다수 아파트는 힘 있는 기관들이 건설허가를 따서 짓는다. 건설되면 일부는 자기들이 갖고 나머지는 건설비를 뽑기 위해 판다. 모든 자재는 건설기관들이 자체로 구입한다. 대개 중국에서 수입하기 때문에 달러로 거래된다. 이 수입권도 수도건설총국이나 2경제(군수 부문) 같은 극히 일부 기관이 독점하고 있다.
아파트를 지으려면 비용과 뇌물이 많이 든다. 건설비를 줄이려면 불량 자재를, 그것도 적게 쓰는 수밖에 없다. 무너지지 않을 만큼만 지어 파는 기관이 가장 장사를 잘하는 셈이다. 한때 부실 아파트의 대명사로 꼽히던 1970년의 ‘와우 아파트 붕괴사고’ 같은 일이 40여 년이 지난 지금 평양에서 재연되고 있는 것이다.
북한은 석회석이 풍부함에도 불구하고 전력난 때문에 시멘트 생산량이 적고 질도 형편없다. 북한에선 시멘트 강도를 나타내는 단위로 ‘마르카’를 쓰는데 180마르카 이상을 고강도 시멘트로 분류한다. 북한산은 보통 120마르카 내외다. 이런 시멘트는 아파트 건설에 쓸 수가 없는데도 북한 내부에서 잘 팔린다고 한다.
같은 아파트를 지어도 도심이면 비싸게 팔린다. 제일 비싼 곳은 중구역인데 100m² 정도의 아파트는 3만∼4만 달러, 160m²는 7만∼8만 달러에 팔린다.
평양 도심의 건물 신축 금지 규정은 사실상 오래전에 권력과 돈 앞에 무용지물이 됐다. 평양 중심부는 지금 온통 공사판이다. 창전거리처럼 아예 일정한 구획 전체를 허물고 새로 건설한 곳은 상하수도망을 만들 수 있다.
문제는 도심에 틈만 있으면 비비고 올라가는 아파트들이다. 이런 아파트는 설계도도 없는 상하수도망에 대충 연결된다. 모르는 사람은 평양의 외관만 보고 “못 사는데 건물들은 괜찮네” 하고 감탄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진짜로 감탄을 받아야 하는 ‘평양의 기적’은 땅 밑에서 겨우 기능을 하는 80년 넘은 된 녹슨 좁은 배관들이다.
평양은 주택난이 심각해 구매 수요는 충분하다. 1990년대 초반 약 200만 명이던 평양 인구는 20년 뒤엔 350만 명까지 늘어났다. 여기에 거주신고 없이 몰래 평양에 사는 일명 ‘미거주자’도 70만 명 이상으로 당국은 파악하고 있다.
당국은 평양 인구를 줄이려고 일부 지역을 황해도에 편입시키는 식의 대책도 내놓았지만 실패했다. 북한에선 평양에 살아야 그나마 사람대접을 받기 때문이다. 지방에서 돈 좀 번 사람들은 돈보따리를 싸들고 올라와 뇌물을 뿌리며 평양 거주권을 따기 위해 필사적이다.
반면 1990년대 이후 경제난이 겹치면서 평양에선 신규 주택이 거의 건설되지 못했다. 주택난이 심했다. 인구가 두 배나 늘어난 지금은 창고와 지하실 옥상에도 자리가 없다.
이번에 붕괴된 아파트에 완공도 되기 전에 사람들이 들어가 살았던 이유도 이 때문이다. 이런 사정 때문에 평양에서는 2000년대 후반부터 다시 주택 건설 붐이 일고 있다.
평양의 아파트 가격은 1990년대 이후 한 번도 떨어지지 않고 매년 상승세다. 집을 지었다 하면 팔리니 질이 문제가 될 리 없다. 몇 년 전 북한 아파트 공사현장을 몰래 촬영해온 동영상을 보고 기겁을 했다. 건설 중인 아파트 창문 위치가 층별로 오락가락이다. 그런데도 다 짓고 보면 그럴듯하니 희한하다.
나중에 한국 기업들이 북한에 마음대로 진출할 때가 오면 나도 평양에 파견될 가능성이 있다. 가서 살려면 집부터 사야 한다. 하지만 평양의 부실 공사판을 보면 도저히 도심에서 살 자신이 없다. 이번 아파트 붕괴를 보고 확실히 결심했다.
“나중에 평양에 돌아가면 교외에 내 손으로 집을 직접 지어야지.”
2014-06-06 김정일은 왜 아버지가 죽은 장소를 흔적도 없애버렸을까
묘향산 초대소 완전 철거
김일성 사망한 휴양시설로 귀빈 접대 장소…건물 있던 곳엔 나무만 드문드문
북한 김일성 주석이 1994년 7월 8일 사망한 장소로 알려진 묘향산 초대소가 철거된 사실이 확인됐다.
이 초대소가 자리했던 묘향산 남동쪽 자락(북위 39.972도, 동경 126.321도)을 촬영한 구글어스 위성사진을 살펴보면 2004년 2월 5일 찍은 사진에는 건물이 뚜렷하게 보이지만 2013년 10월 2일 사진에서는 완전 철거돼 사라지고 없는 것.
커티스 멜빈 미국 존스홉킨스대 한미연구소 연구원은 4월 24일 미국의 한 북한전문 웹사이트에 이러한 내용을 공개했다.
평양에서 직선거리로 120km 남짓, 평안남도와 북도, 자강도가 맞닿은 지점에 자리한 이 초대소는 김 전 주석이 애용한 휴양시설로 잘 알려져 있다.
1990년 10월 방북한 가네마루 신 일본 자민당 부총재 등 외국 귀빈을 영접하는 데도 자주 활용됐다.
1994년 7월 25일로 예정돼 있던 김영삼·김일성 정상회담 때도 이 초대소가 김 대통령 일행의 숙소로 정해져 있었다. 사망 당시 김 주석은 사전점검 차원에서 이 시설에 머무르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직후 공개된 북한의 기록영화 ‘수령님은 영원히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7월 초 이 초대소에서 진행한 관련 회의 등 김 주석의 마지막 활동을 전하고 있다.
2004년 촬영한 첫 번째 사진을 보면 묘향산 초대소는 가로 200m, 세로 100m 내외의 대형시설이다. 2월 촬영해 눈에 덮인 모습이지만 공들여 지은 건물임을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다.
위성사진 범위를 확대해보면 동쪽에는 근무자 숙소로 보이는 집단건물이, 남쪽에는 호수가 자리하고 묘향산 자락을 관통하는 터널을 통해 향산읍 시가지로 이어지는 도로도 찾을 수 있다.
관리하지 않은 채 방치한 듯 가네마루 부총재 방북 당시 일본 ‘산케이신문’이 방문객들의 설명을 전한 기사에 따르면, 초대소는 산기슭에 위치한 흰색의 서양풍 건물로 내부에는 전면이 유리로 된 원형 레스토랑이 있어 경치를 내다보며 식사를 할 수 있는 구조다.
레스토랑 맞은편에는 세계 각국에서 김 주석에게 보낸 선물을 진열한 국제친선전람관도 있었다. 반면 2013년 촬영한 두 번째 사진에서는 건물이 완전히 사라져 평지가 됐고, 묘목으로 보이는 나무만 드문드문 심어져 있다.
눈길을 끄는 것은 주변 지원시설이나 진입도로 등은 남아 있는 반면 초대소 건물 자체만 사라졌다는 사실.
1980년대 초 건축한 초대소가 노후화하자 신축을 위해 철거한 것으로도 볼 수 있지만, 인근 풍광이나 주변시설 지붕이 심하게 녹슬어 있다는 점 등을 감안하면 제대로 관리하지 않은 채 방치한 것이라는 추정이 더 설득력 있어 보인다.
정보분석 분야에서 일했던 한 전직 군 관계자는 “그간 조부인 김 주석의 이미지를 차용해 권력 승계에 활용해온 김정은 체제의 행보를 감안하면 김정일 국방위원장 사망 이전에 철거됐을 개연성이 높다고 봐야 할 것”이라면서 “김일성·김정일 부자관계가 대외적으로 알려진 것과는 사뭇 달랐다고 유추할 수 있는 근거”라고 말했다.
황일도 기자 shamora@donga.com 출처 주간동아 936호(5월 7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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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기사를 보면서 조금은 놀랐고 이상한 생각도 들었습니다. 저 별장을 허물라고 지시할 사람은 김정일밖에는 없습니다.
아시다싶이 북한에 김일성, 김정일이 쓰던 별장은 정말 많습니다. 관리하는 인력도 전혀 부족함이 없구요. 그래서 저 별장이 허물어진 것은 관리나 노후 때문은 아닌 것 같습니다. 지어진지도 30년 밖에 안되면 신축에 드는 별장이고요.
그냥 김정일이 무슨 이유로 없애버리라고 하니 없애버린 것일 겁니다. 아버지가 죽은 장소가 김정일에게 없애버려야 할 곳이라면 그 이유가 궁금합니다.
저 별장은 꽤 잘 지은 곳이고, 김일성이 매우 아끼던 곳이고, 자주 찾아갔습니다. 아버지가 좋아하던 별장을, 더구나 아버지가 죽은 곳을 아들이 없애버린다는 것은 쉽게 납득이 되지 않네요.
물론 아버지 죽은 곳이니 김정일이 가기 싫어서 가지 않았고, 그러니 앞으로도 쓸 일은 없다 이렇게 판단했을 수도 있습니다. 쓸 일이 없으면 그냥 유지하기도 그렇고, 또 나중에 김 씨 왕족이 사라지면 어떤 누군가가 그곳에서 휴양소를 차려놓을 수도 있으니 그런 치욕을 당하느니 없애버렸을 지도 모릅니다.
그렇지만 북한에 김일성 관련 기념물, 기념비, 사적지가 오죽이나 많습니까. 그 많은 곳들을 다 인력들이 달라붙어서 보존하고 세뇌에 이용하는데, 다른 하찮은 곳도 다 관리보존하면서 아버지가 죽은 저런 역사적 가치가 있는 건물을 없애버리다니 좀 의아하기도 합니다.
예전에 북한에선 김정일이 아버지를 죽였다는 소문이 퍼졌습니다. 남북정상회담해서 남북이 가까워지고, 심지어 통일이라도 된다면 김정일이 제일 피해자가 되니 아버지를 죽였다는 것이죠.
이것 외에도 말년에 김일성과 김정일의 사이가 매우 안좋았습니다. 김일성이 김정일에게 너무 실망해서 그에게 넘겼던 권력을 말년에 다시 빼앗아오려 시도했다는 설이 유력합니다.
아버지를 독살한 들이라면 그 죄의 현장이 남아있는 것이 두려울 수도 있지 않을까. 저 사진을 보고 제가 제일 먼저 든 생각이었습니다.
하지만 그건 제 생각일 뿐이고, 김정일이 왜 하필 저 별장을 저리도 싹 밀어 흔적을 없애버렸는지 그건 본인만 알겠죠. 그리고 그 본인은 지금 미라가 돼 아버지 옆에 누워있습니다.
이 미스터리는 나중에 과연 밝혀질 수 있을까요?
2014-06-19 ‘평화로운 나라’ 한국 52위, 北 153위
IEP, 162개국 범죄-군사지표 분석…
한국 ‘이웃나라와 관계’ 낮은 점수
한국이 세계에서 52번째로 평화로운 국가라는 조사 결과가 발표됐다.
매년 ‘세계평화지수(GPI)’를 작성해 발표하는 국제 비영리 싱크탱크 ‘경제평화연구소(IEP)’는 18일 발표한 ‘GPI 2014’에서 한국의 올해 평화지수가 지난해 46위에서 6계단 하락한 52위라고 밝혔다. 2012년에는 51위였다.
호주 시드니에 본부를 둔 IEP는 올해 세계 162개국을 대상으로 22개의 범죄 군사 사회 관련 지표를 평가해 1∼5점을 매겨 순위를 정했다. 1점에 가까울수록 평화로운 상태를 뜻한다.
한국은 1.849점으로 인구 10만 명당 재소자 수, 강력범죄 발생 수, 테러리스트 활동, 소형화기 접근성, 난민 수 등 세부항목에서 1점을 받았다. 하지만 이웃 나라와의 관계(4점), 핵·중화기 수(3.3점), 갈등에 따른 사망자 수, 폭력시위(이상 3점) 항목에서 부정적인 평가를 받았다.
가장 안전한 국가로는 아이슬란드(1.189점)로 3년 연속 1위에 올랐다. 이어 덴마크 오스트리아 뉴질랜드 스위스 핀란드 캐나다 일본 벨기에 노르웨이가 순서대로 2∼10위를 차지했다. 가장 평화롭지 못한 국가로는 3.65점을 받은 시리아가 선정됐다. 북한은 153위였다. 북한은 2012년에 151위, 지난해엔 155위였다.
2014-06-24 내가 북한 해커를 반기는 이유
“해킹이란 게 뭔 말이네?”
지난해 이맘때쯤 평양의 간부들 속에 해킹의 기초 개념을 배우는 바람이 불었다. 중앙에서 해킹 공격에 대비해 보안을 강화하라는 지시가 하달됐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터넷이 무엇인지 모르고 평생을 산 간부들이 해킹이 뭔지 아는 것은 어불성설. 그래서 전문가들이 나서 속성교육을 시켰다. 그래도 이해를 했을지 의문이다.
해킹 교육 바람이 불게 한 원인 제공자는 국제 해킹 그룹인 ‘어나니머스’였다. 어나니머스는 작년 4월 북한의 고려항공 등 해외를 대상으로 하는 주요 5개 사이트에 디도스 공격을 하고, 대남용 선전사이트 ‘우리민족끼리’를 해킹해 1만5000여 명의 회원 명단을 공개했다. 북한 입장에서는 회원 명단 공개보다 더 몸서리치는 일이 있었으니 바로 어나니머스가 ‘우리민족끼리’ 메인 화면에 김정은과 저팔계를 합성한 사진을 올려놓은 것이었다.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어나니머스는 북한에 선전포고까지 했다. 핵무기 야욕 포기, 김정은 퇴진, 자유민주주의 도입, 인터넷 접속 자유화라는 4가지 요구를 들어주지 않으면 “북한 내부망을 공격해 비극의 날(日)로 만들겠다”는 것이다.
북한으로선 어느 하나도 들어줄 수 없는 요구였다. 하지만 정말 어나니머스가 북한 인트라넷의 수백 개 홈페이지에 김정은과 저팔계 합성사진을 올리는 데 만약 성공한다면 이는 북한 체제에선 도저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나는 것이었다.
어나니머스가 정한 D데이는 6월 25일이었다.
북한은 급히 대책 마련에 나섰다. 간부 교육과 별개로 조선컴퓨터센터에서 부랴부랴 ‘붉은별 3.0’이 개발됐다. 붉은별은 북한이 독자 개발한 컴퓨터 운영체제이다. 2.0까지는 마이크로소프트(MS)의 ‘윈도 7’을 베껴 만든 것인데, 3.0은 애플의 ‘맥 OS X’를 베꼈다.
북한 보안성은 각 기관, 기업소의 인트라넷 관리자들을 불러 회의를 열고 “무조건 붉은별 3.0과 백신을 설치하라”고 지시했다.
드디어 6월 25일이 왔다. 이 창과 방패의 대결은 뚜껑을 열어본 결과 어나니머스의 대참패였다. 그들은 북한의 홈페이지에 저팔계 합성사진을 띄우는 데 실패했다.
오히려 이날 진짜 ‘비극의 날’은 한국에 찾아왔다. 청와대와 정부 기관, 새누리당, 언론사 등 16개 기관의 홈페이지가 디도스 공격을 받아 다운된 것이다. 7월 1일 한국의 30여 개 홈페이지가 다시 한 번 대규모 해킹 공격을 받아 접속이 차단됐다. 공격을 받은 사이트들에서는 모두 ‘어나니머스가 해킹했다’라는 문구가 발견됐다. 어나니머스가 북한과 남한을 착각한 것인지 아니면 북쪽이 뚫리지 않자 남쪽이 화풀이 대상이 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아무리 미국 국방부나 중앙정보국(CIA)까지 턴다는 어나니머스지만 북한처럼 인터넷과 동떨어진 극도의 폐쇄적인 인트라망 앞에선 속수무책이었다. 그들이 ‘직결봉사(웹서핑)’ ‘탁상환경(메뉴)’ 따위의 붉은별의 용어부터 이해했을지 모르겠다.
가령 한국은 홈페이지에 접속하려면 ‘아이디와 패스워드를 입력하라’는 메시지부터 뜨지만 붉은별은 ‘관리자통과어를 입력해 주시오’라고 뜬다. 북한에서 아이디는 ‘통과어’, 패스워드는 ‘확인’이라고 한다.
어나니머스도 두 손을 든 붉은별 운영체제이지만, 정작 실체를 알고 보면 어처구니가 없어 입이 딱 벌어질 정도다. 붉은별은 해킹만 불가능한 것이 아니라 컴퓨터를 활용한 대부분 작업이 불가능하다. 유럽의 웹 분석업체 스캣카운트가 2011년 북한의 컴퓨터 운영체제 점유율을 분석한 결과 북한 컴퓨터 운영체제의 97.25%가 MS 기반이었고, 1.68%가 애플 맥이었다. 붉은별의 점유율은 0.5%도 안 됐다. 붉은별은 북한에서도 버림받은 운영체제인 것이다.
어나니머스 공격 때 반짝 설치됐던 붉은별 3.0도 한 달도 안 돼 버림을 받았다. 어나니머스의 해프닝은 북한에 “해킹은 우리가 일방적으로 하는 것인 줄만 알았는데, 당할 수도 있다”는 교훈을 주었다.
문제는 누구한테 당하느냐이다. 인터넷으로 연결된 전 세계 어느 곳이나 두더지처럼 쑤시고 다녀 악명이 높은 어나니머스도 북한이란 외부와 단절된 우물 속을 파고 들어가는 데는 실패했다. 하지만 북한의 진짜 위험은 외부가 아닌 바로 이 우물 안에 도사리고 있다.
일각에선 북한의 정예 해커가 3000명이 넘고 CIA를 능가하는 실력을 가졌다고 주장한다. 이런 주장을 믿진 않지만, 개인적으론 북한에 고급 해커가 정말 3000명이나 있었으면 좋겠다. 3만 명이라면 더욱 좋다.
북한이 해킹을 하려면 중국으로 나올 수밖에 없다. 해외에 북한의 젊은 인재 수천수만 명이 나와 인터넷에 접속하면 세계가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보게 되고 북한도 알게 된다.
거짓된 세뇌는 진실 앞에선 쉽게 무너진다. 한창 진실에 목마른 북한 젊은이들이 거짓과 기만으로 꾸며진 김정은 왕국의 실체를 깨닫게 되면 이는 장기적으로 북한에 매우 큰 위협이 된다. 아마 해커들을 외국으로 제일 내보내고 싶지 않은 사람은 김정은일지도 모른다.
몇 년 전 국내 언론이 보도한 ‘평양시민 210만 명 신상정보 유출’은 북한의 진짜 위협이 무엇인지를 대표적으로 보여준 사례다. 평양 핵심계층 수백만 명의 이름 생년월일 주소 직업 가족관계 혈액형 등의 정보가 한국에 넘어간 것은 폐쇄적인 북한에 너무나 충격적인 일이었다.
정보화 시대와 담을 쌓고 살 수 없다고 판단해 애써 주민 전산화를 해놓았더니 북한 내부 누군가가 고작 휴대용 저장장치(USB 메모리) 한 개로 다 빼낸 것이다. 혹여 가짜 정보인가 싶어 기자가 직접 유출된 신상정보와 평양에 알고 있는 지인들의 신상정보를 대조했더니 다 일치했다. 단 한 명의 내부 정보기술(IT) 관계자가 이처럼 어마어마한 일을 한 것이다. 돈 때문이었든, 체제가 싫어서였든 앞으로도 이런 일은 계속 반복될 여지가 크다.
북한에 실력 있는 해커들이 늘어날수록 이는 북한엔 양날의 칼이 될 수밖에 없다. 열심히 갈면 갈수록 나중에 베인 상처도 더 깊을 것이다.
2014-06-29 6.29 선언과 북한에서 접했던 동아일보 보도들
사랑하는 북녘동포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올해는 유난히 덥습니다. 서울에선 5월부터 반팔을 입고 다니는데, 왜 이리 덥냐 했더니 올해 5월이 지구 기상관측 이래 가장 더운 5월이었다고 합니다.
미국 국립해양대기청에 따르면 5월의 평균 기온은 15.54도로 20세기 평균보다 0.74도나 높았다고 합니다. 기온 1도차에 따라 지구 어느 곳에선 생물들이 죽고 살고 하는데 0.74도는 결코 적은 숫자가 아닙니다. 5월에 기온이 특히 높았던 나라 5개 중에 한국이 포함됐습니다.
아마 6월도 마찬가지인 것 같습니다. 벌써 저는 집에서 선풍기를 틀고 있으니 말입니다. 그런데 돌아보면 한국에서 가장 뜨거웠던 6월은 2014년 6월은 아닐 것이란 생각이 듭니다. 제 생각엔 지금으로부터 27년 전인 1987년 6월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때 남쪽에선 전 국민이 민주화를 위한 항쟁으로 전두환 독재정권을 끝내버렸습니다. 물론 그 독재는 북한과 비교되지도 않는 독재이지만 말입니다.
아스팔트 위에서 뜨거운 땀을 흘리던 그때, 최루탄 연기에 눈물 콧물 다 흘리며 백골단의 구둣발에 짓밟혔을 그때가 한국에선 가장 뜨거운 열정의 6월이 아니었을까 생각합니다.
물론 저는 당시 북한에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때 노동신문과 방송을 통해 흥분 속에 보았던 6월 항쟁의 사진과 화면들이 아직도 기억이 생생합니다. 6월 항쟁의 시작은 여러분 누구나 다 아는 박종철 학생이 경찰에서 고문 받다가 숨졌던 사건이 계기가 됐습니다.
당시 경찰은 박종철 학생이 고문으로 죽자 언론에 “조사 중에 책상을 툭 치니 억하고 죽었다”고 발표했습니다. 그때 한국 언론에는 중앙정보부 요원들이 상시 주재하고 있으면서 모든 기사를 감시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하지만 한국의 언론은 죽지 않았습니다. 특히 그때 제일 활약했던 언론이 지금 제가 일하는 동아일보였습니다. 당시 동아일보는 박종철 학생이 고문을 받다가 죽었다는 내용을 취재한 뒤, 다른 신문들이 정보기관의 위협과 압력에 주춤하고 있는 와중에도 1면에 관련 기사를 실었습니다.
박종철 학생 검안의사의 증언을 확보하고, 물고문으로 사망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내용을 과감하게 보도했고 이어 ‘고문 추방 캠페인 시리즈’까지 과감하게 냈습니다. 그때가 동아일보의 전성기였습니다.
당시 동아일보는 거리에서 구하기도 어려웠고, 동아일보를 감시하고 막아야 할 수사정보기관원들까지 나중에 동아일보에 전화를 걸어 기자들을 격려했다고 합니다. 거리에 나가면 시위대가 동아일보 기자들을 보고 환호했고, 이들을 보호해주었습니다.
동아일보의 활약이 뛰어나다보니 북한에서 당시 6월 항쟁을 보도한 기사도 거의 다 동아일보를 인용한 것이었습니다. 동아일보에 따르면 전두환 괴뢰정권이 이랬다더라, 저랬다더라는 것이죠.
그때 저는 동아일보의 이름을 확실히 머릿속에 기억했습니다. 그리고 그때로부터 16년 뒤인 2003년 북한을 탈북해 온 저는 동아일보 기자 채용 공고를 보고 입사원서를 냈고, 시험을 통과해 기자가 됐습니다.
제가 입사하니 6월 항쟁 때 활약했던 그 용감한 기자들이 바로 제 선배로 일하고 있었습니다. 정말 감격스러웠고 영광스러운 일이었습니다. 박종철 고문 기사로 동아일보는 그해 한국기자상을 받았습니다. 그 한국기자상을 받았던 선배들이 지금도 동아일보의 논설주간과 전무 등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그때 동아일보의 활약은 ‘박종철 고문살인 범국민대회’를 이끌어냈고 그해 6월 9일 시위에 나섰던 연세대 이한열 학생이 최루탄에 맞아 쓰러진 것을 계기로 10일부터 온 국민이 거리에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제가 지금 그 연세대 대학원을 다니고 있습니다.
이후 시위는 전국 도시들로 번졌고, 학생도, 회사원도, 주부도 시위대열에 합세했습니다. 결국 6월 29일 전두환 정권은 국회에서 간선제로 뽑던 대통령을 국민이 직접 대통령을 뽑는 직선제로 바꾸겠다고 선언하기에 이르렀습니다.
바로 내일이 그 6월 29일입니다. 그 이전까지 음모와 술수로 국회의원들을 조종해서 만들어지던 대통령이 그때부터 국민들의 투표로 선출되게 된 것입니다. 한국의 민주화는 그렇게 이뤄졌습니다.
6월 항쟁은 8.15해방과 4.19혁명에 이어 한국의 제3의 해방의 날로 꼽히기도 합니다. 지금도 나이가 좀 드신 분들은 당시의 기억을 흥분 속에서 회상합니다. 그때 거리에서 최루탄을 맞으며 민주주의 만세를 목청껏 부르던 대학생들이 기자가 되어 지금 저와 함께 일하고 있습니다.
동아일보는 북한에서도 유명한 신문입니다. 김일성의 부친 김형직이 1920년대에 동아일보 지국장을 지냈고, 김일성도 회고록에서 동아일보를 제일 많이 인용했습니다. 4.19혁명, 백지광고사태, 6월 항쟁을 거치면서 동아일보는 한국 역사에 뚜렷한 족적을 남겼습니다.
제가 지금까지 5년 넘게 방송을 하면서 수많은 이야기를 했지만 정작 자기가 10년 넘게 일하고 있는 회사에 대해선 한 번도 이야기하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제가 입사했던 이후 10여년간은 이렇다 할 사건이 없었습니다. 민주화된 남쪽 사회는 더는 목숨을 내거는 기자가 필요하지 않게 됐습니다.
독재정권 때는 기자가 그냥 사실만 보도해도 박수를 받았지만, 이제는 전문성이 있어야 인정받는 시대가 됐습니다. 여기에 과학기술 발달로 이제는 신문 대신 인터넷과 스마트폰으로 뉴스를 보는 시대가 와 많은 신문사들이 적자를 보기 시작했습니다.
저도 권력에 굴복하지 않는 용감한 기자가 되고 싶었지만, 아직 시대가 제게 기회를 주지 않고 있습니다. 하지만 희망은 있습니다.
북한에서 27년 전의 남쪽처럼, 전 인민이 독재정권에 항거해 일떠서는 그런 순간이 만약에 온다면 저도 그 순간을 여러분들과 함께 하고 싶은 꿈이 있습니다. 저도, 여러분도 그 희망과 꿈을 간직하길 바라며 지금까지 서울에서 주성하였습니다.
2014-07-03 마타하리 여간첩은 어떻게 만들어졌나-1탄
유우성 사건이 한창 사회의 이슈가 되고 있는 와중에 또 하나의 간첩조작 의혹이 불거졌습니다.
바로 원정화 사건입니다. 때마침 원정화가 지난해 8월인가에 출소했습니다.
이 블로그에 오랫동안 오신 분들은 아시지만, 나는 이 사건이 보도된 직후부터 의문점이 많은, 많이 부풀린 간첩사건이라고 했습니다.
아래 글을 읽기 전에 위에 걸어놓은 링크를 읽어보시면 몇 년 전에 제가 어떻게 이 사건을 어떻게 분석했는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2009년 나는 천성관 검사의 검찰총장 지명을 지켜보면서 원정화 사건에 대해 논평했습니다.
지금에 와서 원정화 사건은 다시 부각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나온 정황들을 보면 내가 당시 추정했던 것과 별 다르지 않은 것 같습니다. 당시 개인이 이렇게 추정할 정도로 어처구니없는 의혹 투성이었지만 한국 언론들은 별 의문없이 넘어갔습니다. 간첩이란 언론에서도 무서운 단어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풍토 속에서 숱한 간첩사건들이 터져나왔습니다. 간첩 사건 하나씩 터질 때마다 한국에 온 2만6000명의 탈북자들은 죄인의 시선을 받으면 움츠러듭니다. 그래서 저는 이런 사건이 정말 기분이 나쁩니다.
저는 유우성과 원정화 두 사람이 간첩질을 하지 않았다는 주장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너무 실체에 비해 부풀려졌다는 것입니다. 두 사건을 거치면서 앞으로 대한민국은 손쉽게 거물 간첩 하나 만들어내던 시대를 넘어서길 바라는 바입니다.
아래는 신동아가 원정화 사건에 대해 2차례에 거쳐 추적해 보도한 내용 중 1편에 해당하는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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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신동아’ 11월호에는 탈북 여간첩 원정화(40) 씨 단독 인터뷰 기사가 실렸다. 원씨가 간첩혐의로 구속돼 5년간 복역 후 출소한 지 석 달 만의 일이었다. 원씨는 인터뷰에서 북한과 중국에서의 행적과 가족관계는 물론 국내에서의 활동내역, 2008년 7월 구속된 이후 검찰 수사와 재판 과정에 대해서도 자세히 설명했다.
‘신동아’ 인터뷰 이후 원씨는 여러 방송매체에 출연해 비슷한 내용의 증언을 했다. 세간을 떠들썩하게 했던 사건의 주인공이라 그의 증언과 주장은 많은 사람의 관심을 받았다. 원씨는 2008년 10월 간첩 등의 혐의로 5년형을 선고받은 뒤 항소를 포기한 바 있다. 원씨의 주장은 2008년 당시 공소장, 판결문 내용과 비슷했다. 정리하면 대략 다음과 같다.
△1974년 함경북도 청진에서 태어났다. 북한공작원이던 부친 원석희는 1974년 남파 도중 국군에 사살됐다. 이후 혁명열사 가족으로 유복하게 살았다. 모친 최OO은 1976년 미술 관련 일을 하던 김동순과 재혼했다.
△학업 성적이 좋아 사회주의청년동맹(사로청)에서 일하고 금성정치대학에서 공부했다.
△특수부대 교육 중 다쳐 감정제대 한 뒤 국가재산탐오죄로 복역 후 1996년 중국으로 탈출했다.
△1998년 보위부에 포섭돼 간첩교육을 받고 중국으로 파견된 뒤 100명이 넘는 탈북자와 한국인을 북송시켰다.
△원정화 본인, 여동생 김희영(가명), 남동생 김민수(가명) 등 가족 대부분이 국가안전보위부(보위부)에 몸담았다.
△북한 보위부의 남파 지령을 받고 2001년 10월 국내에 잠입했다. 미군기지 등의 위치를 파악해 보위부에 보고했다.
△2002년 10월부터 2008년 7월까지 대북무역을 이유로 14차례 중국에 잠입, 보위부 요원인 단동무역대표부 부대표 김교학으로부터 지령을 받아 간첩활동을 수행했다. 정보요원과 황장엽 등에 대한 암살지령을 받았지만 실행하지 못했다.
원정화 인터뷰 내용이 보도된 후 몇몇 탈북 인사가 원씨의 주장에 의문을 제기하고 나섰다. 모두 북한과 중국에서 원씨와 친분이 있던 사람들이다. 이들은 하나같이 원씨 주장 중 사실과 다른 내용이 많다고 말했다. 제보자 중에는 중국에서부터 원정화와 가깝게 지냈으며 한국에서 한때 동거했던 여성도 있다.
제보자들의 등장
‘신동아’는 지난해 12월경부터 본격적으로 검증 취재에 나섰다. 제보자들의 증언을 듣는 한편, 2008년 사건 당시 원씨와 함께 간첩 혐의로 기소돼 4년간 재판을 받은 뒤 2012년 7월 대법원에서 무죄판결을 받은 원씨의 계부 김동순 씨와도 인터뷰를 진행했다. 김씨는 본인 사건의 수사기록과 재판기록, 원정화와 나눈 대화 내용이 담긴 녹취파일을 ‘신동아’에 제공했다.
김씨가 언론을 통해 원정화 간첩사건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밝힌 것, 원씨 사건의 수사기록이 언론을 통해 확인된 것 모두 이번이 처음이다. 김씨는 “언젠가는 진실이 밝혀질 사건이다. 왜 정화가 간첩이 됐는지, 왜 정화가 그토록 많은 거짓말을 했는지 난 알고 싶다”고 말했다.
1. 원정화 친부 원석희 의혹
수사기록과 판결문 등을 보면, 원정화의 주장은 언제나 가족관계에서부터 시작된다. 원씨는 그동안 자신의 친부 원석희 씨를 혁명열사로 소개하면서 “혁명열사의 유가족으로 상당히 풍족한 삶을 살았다”고 주장했다. 아버지 원씨를 포함해 가족 대부분이 보위부 관련 일을 하게 된 배경도 바로 이 때문이라는 것이 원정화의 일관된 주장이다. 원정화의 주장은 공소장과 판결문에 그대로 실려 있다.
그러나 기자는 최근 원씨의 친부와 관련해 다른 증언을 들을 수 있었다. 2008년 4월 탈북해 한국에 들어온 70대의 강OO(인천 거주) 씨를 통해서였다. 강씨는 “1970년대 초 함경북도 부령군 고무산의 한 병원에서 의사로 일할 당시 원석희 씨를 알게 됐다”며 증언을 시작했다.
“부령군 고무산 시멘트공장 내에 있는 병원에서 일할 때다. 당시 원석희 씨가 그 공장에서 노동자로 일하고 있었다. 그 공장은 일하기 싫어하고 문제 많은 사람을 모아 국가에서 일을 시키는 곳이었다. 당시 20대 중반이던 원씨는 발이 넓고 말주변이 좋은 사람이었으며 거짓말도 많이 하는 사람이었다. 협심증을 앓아 우리 병원을 자주 찾았다. 원석희 씨와 최OO 씨 사이에 딸이 둘 있었는데, 둘째가 정화였다. 원석희 씨와 최OO 씨가 이혼하는 과정, 최OO과 김동순 씨가 재혼하는 과정을 모두 지켜봤다. 이들 가족과 냇가로 고기를 잡으러 간 적도 있다.”
강씨에 따르면, 1970년대 초반 원석희 씨는 모르핀(마약)에 중독돼 당으로부터 감시를 받고 있었다. 당에서 “원석희를 잘 살펴라”는 지시가 내려왔을 정도다. 강씨는 “원씨는 최OO과 이혼한 뒤 함흥 의 어느 요양소로 간 걸로 안다. 협심증 때문에 일찍 죽었다는 말도 들었다”고 말했다. 강씨는 또 “2008년 4월 탈북 직전 청진의 한 식당에서 원정화의 모친인 최OO과 원정화의 동생을 만나 인사를 나눴다. 청진에서 사우나를 운영한다고 들었다.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어 보였다”고 말했다.
흥미로운 것은 2008년 원정화 간첩사건 당시 국가정보원(국정원)에서 강씨에 대해 조사를 했다는 사실이다. 강씨는 “국정원 요원들이 어떻게 알았는지 하나원에 있던 나를 찾아왔다. 원정화의 가족관계, 북한에서의 생활에 대해 아는 대로 다 말해줬다”고 말했다. 그러나 검찰의 공소장, 법원의 판결문 어디에도 강씨의 증언, 특히 원정화의 부친 원석희에 대한 강씨의 주장은 확인되지 않았다. 원정화의 주장과 배치되는 증언임을 알면서도 고의로 기록에서 배제했다는 의혹이 일 수 있는 대목이다.
원정화의 친부에 대한 강씨의 진술은 계부 김동순 씨가 2008년 검찰 수사와 재판 과정에서 주장했던 것과도 대부분 일치했다. 김씨는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원정화가 자기 친아버지를 모른다고 하는데 모두 거짓말이다. 원정화가 고등중학교 재학 시절 친아버지의 집에 가서 두 달 정도 살다온 적이 있다. 최근 정화를 만나 ‘너 진짜 아버지를 모르냐’고 물었더니 ‘안다’고 실토했다.”
2. 원정화의 중국 행적
취재 중 만난 탈북 여성 박모(40) 씨는 “1999년경 중국에서 정화를 알게 됐고 이후 가깝게 지냈다. 2000년 말까지 정화가 동생 부부 등과 같이 살던 연길의 S아파트에도 자주 갔었다”고 말했다. 박씨가 원씨와 자주 만났다는 시기는 원씨가 보위부의 지령을 받고 100명이 넘는 탈북자와 한국인을 북송시켰다고 주장하는 때와 거의 일치한다. 박씨는 이 부분에 의문을 제기했다.
“당시 정화는 몸이 많이 안 좋아 거의 집에만 머물고 있었다. 탈북자를 체포해 북송시키는 일을 했다는 건 상상할 수 없다. 만약 그랬다면 탈북자인 나부터 북송시켰어야 하는데, 그러지 않았다. 당시 정화는 특별한 돈벌이가 없었고, 한족인 동생 남편이 중고자동차 밀수 사업을 해서 번 돈으로 살았다.”
‘100명 이상 북송’은 원씨의 보위부 간첩 사실을 뒷받침하는 결정적인 증거 중 하나다. 그러나 수사와 재판 과정에서 원씨가 북송했다는 사람 중 신원이 공개된 사람은 경기도에 거주하던 40대의 윤모 씨뿐이다. 7명이 확인됐다는 보도도 있었지만, 정확한 건 아니었다. 당시 원씨를 수사한 합동수사본부는 “원씨가 중국에서 실종된 사람들 중에서 실종자 윤씨를 정확히 지목했다”고 밝히기도 했다(2008년 8월 27일 국민일보). 판결문에는 실종자 윤씨에 대해 이렇게 나와 있다.
“피고인(원정화)은 1999년 9월경 중국 연길 서시장 꼭대기에 있는 노래방에서 종업원으로 위장취업해 있을 때, 손님으로 놀러 온 남한 사람 윤○○(남, 47세, 경기도 거주)을 알게 된 다음 … 보위부 박○○ 과장에게 “윤○○이 내가 탈북자라고 이야기하자 관심을 보이며 전화번호를 주면서 호텔에서 만나자고 하는 것을 보니 북한 정보를 수집하는 남한 정보기관 사람이거나 그 앞잡이일 수 있다”는 취지로 보고했다. … 박○○, 김진길 및 위 중국 공안 복장을 한 중국깡패들이 윤○○의 방으로 들어와 수갑을 채우고, 방 안을 뒤져 북한에서 찍은 사진이 많은 것을 확인한 다음 북한 보위부 요원들의 아지트인 두만강호텔 301호실로 납치해 갔다. 피고인은 1999년 1월경부터 2001년 10월경까지 중국 연길·훈춘 등지에서 위와 같은 방법으로 탈북자, 북한 관련 자료를 수집하는 대한민국 사람들 등 총 100여 명을 두만강 호텔로 약취하였다.”
원정화 씨는 최근 기자와 전화통화를 하는 과정에서 자신이 중국에서 북송시킨 한 탈북여성에 대해 털어놓은 바 있다. 그런데 그 사람이 공교롭게도 앞서 소개한 박모 씨였다. 판결문에 등장한 남성 외에 원씨가 북송시켰다는 사람의 신원이 처음으로 확인된 것이다. 다음은 이와 관련해 기자가 원씨가 나눈 대화 내용이다(당시 기자는 박씨에 대한 취재 내용을 알리지 않고 원씨와 대화를 나눴다).
▼ 박OO 씨를 알고 있나.
“아~ 박OO 언니. 나보다 한 살 많다. 우리 집(연길 S아파트)에도 몇 번 왔다. 얼굴이 예쁘다.”
▼ 그 여자가 탈북자라는 건 알고 있었나.
“처음엔 몰랐는데 나중에 언니가 말해줘서 알았다.”
▼ 당시는 탈북자들을 북송시키는 일을 주로 할 때인데, 왜 박OO 씨는 북송시키지 않았나.
“북송시켰다. 그런데 무슨 빽이 있는지 며칠 만에 다시 중국으로 돌아왔다. 나도 깜짝 놀랐다. 지금 그 언니는 한국에 있다. 내가 하나원에 있을 때 어떻게 알았 는지 하나원으로 찾아온 적이 있다. 그 후에는 만나지 못했다.”
기자는 대화 내용을 박씨에게 들려주고 의견을 들었다. 박씨는 이렇게 답했다.
“새빨간 거짓말이다. 나는 중국에 있는 동안 보위부 등에 잡혀 북송된 적이 없다. 오히려 내가 정화에게 연길에서 유명한 사업가를 소개하기도 했다. 그리고 정화는 하나원에서 나온 뒤 석 달가량 내가 살던 의정부의 오피스텔에서 딸을 키우면서 나와 같이 살았다. 그러다 집을 나갔는데, 이후 연락이 끊겼다. 내가 기억하기로 정화는 당시 중국에서 만난 아이아빠를 찾기 위해 한국에 들어왔다.
나와 같이 살면서 당시 갓 100일을 넘긴 아이를 중국에 있는 계부에게 인편으로 보냈다. 정화가 군인을 포섭하기 위해 결혼정보업체에 등록해 군인을 소개받았다고 TV에 나와 얘기하는 걸 들었는데, 당시 내가 결혼정보업체에서 일하면서 남남북녀 결혼사업을 하고 있었고 정화도 나를 통해 업체에 가입했다. 내가 정화에게 ‘한국에서 빨리 정착하려면 안정적인 직장이 있는 남자를 만나는 것이 좋다’며 공무원, 군인 등을 소개해줬다.”
3. 가족의 보위부 활동 의혹
원정화는 본인을 포함한 대부분의 가족이 보위부와 관련됐다고 주장해왔다. 판결문에는 원씨의 두 동생도 각각 보위부 요원과 보위부 운전기사였다고 적시돼 있다. 원씨와 사업관계에 있던 조선족 김OO 씨는 “보위부 직원인 북한 단동무역대표부 부대표 김교학이 원정화의 계부 김동순을 회장님으로 불렀다”고 말해 원씨 부녀의 간첩 의혹을 부추겼다. 원씨도 검찰 조사에서 “김동순은 장군님의 전사”라고 진술했다. 그러나 김동순 씨는 원씨의 주장을 반박했다.
“우리 집안은 출신성분이 좋지 않아 보위부 요원이 나올 수가 없다. 우리 집안에 노동당원은 나 한 사람뿐이다. 보위부가 파견한 간첩이라는 원정화의 주장은 사실이 아니다. 정화의 두 동생도 보위부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기자는 취재 과정에 김씨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증언을 한 탈북자에게서 들을 수 있었다. 북한에서 원씨의 이복동생 김희영(가명)과 가깝게 지냈다는 탈북자 J씨였다. J씨는 “2002~2003년까지 원정화의 동생 김희영을 만났다. 그러나 김희영이 보위부 요원이라는 말은 들은 적이 없다”고 말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2002~2003년경, 김희영은 중국에서 살다가 북한으로 막 들어온 상태였다. 북한에 들어오는 과정에서 자백을 했는데, 우리 매형이 보위부에 아는 사람이 있어서 그 사람을 통해 보위부에 돈을 좀 내고서야 살아날 수 있었다. 북한에서는 탈북자가 자수를 해 다시 북한에 들어가도 감옥에 가야 한다. 그런데 김희영은 돈을 주고 무마한 것이다. 당시 희영이가 보위부에 얼마를 찔러줬는지는 잘 모른다. 만약 김희영이 보위부 직원이었다면 북한으로 들어올 때 보위부에 돈을 찔러주지는 않았을 것이다.”
J씨의 증언은 김동순 씨의 주장과도 일맥상통한다. 김씨는 “1999년 10월경, 혼자 탈북해 중국에서 살던 희영이가 미화 3000달러를 들고 몰래 북한으로 들어왔다. 당시 청진의 우리 집에는 희영이가 18세 때 낳은 딸이 있었다. 그런데 누군지 모르는 사람의 고발로 희영이가 수남구역 보위부에 체포돼 탈북 혐의로 1개월가량 구금 상태에서 조사를 받았다. 내가 찾아가 각서를 쓴 뒤에야 풀려났다. 희영이가 보위부 요원이었다면 있을 수 없는 일이다”라고 말했다.
앞서 소개한 J씨는 원정화 씨에 대해서는 “1994~1995년경에 만난 기억이 있다. 군대에 갔다가 감정제대(의가사제대)한 뒤에 집에서 놀고 있었다. 그냥 조용한 스타일이었던 걸로 기억한다”고 말했다.
4. 원한관계였던 간첩과 제보자
원정화 사건에는 수십 명의 증인이 등장한다. 대부분 원정화와 계부 김동순의 간첩혐의를 입증하기 위한 검찰 측 증인이었다. 이들 중 가장 눈에 띄는 사람은 김OO(40대) 씨다. 중국 연길에 주소지를 두고 있으며 무역업에 종사하는 조선족인 그는 검찰의 요청을 받고 한국에 들어와 원정화의 간첩 혐의를 증언했다. 그의 주장은 대략 다음과 같았다.
△원정화가 단동무역대표부 부대표 김교학에게 한국 군인의 신상정보를 전달하는 것을 봤다. △원정화의 여동생 김희영의 남편도 보위부 요원이다. △김동순이 북한-중국에서 상당한 지위에 있었다. △김동순이 “북한 정부에 연간 1억 원 이상의 외화를 바친다”고 말하는 걸 들었다. △김동순이 “내가 잘못되면 북한 보위부가 가만있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그러나 김OO의 증언은 김동순 씨의 간첩혐의에 대한 재판 과정에서 사실로 인정되지 않았다. 재판부는 김OO의 증언이 대부분 사실과 어긋난다고 판단했다. 김동순 씨는 “김OO는 재판 과정에서 중국 연길에서 본 북한 보위부 차량의 번호판을 ‘흰색 바탕에 빨간 글씨’라고 진술했다. 그러나 북한의 모든 차량 번호판이 흰색 바탕에 검은 글씨라는 것이 확인됐다. 김OO는 그런 식으로 거짓말을 늘어놓았다”고 말했다.
원정화 간첩사건이 원씨의 집에서 일하던 조선족 가정부 조모 씨의 경찰 제보로 시작됐다는 것은 이미 알려진 사실이다. 2005년경의 일이었다. 당시 조씨의 고발 내용은 “탈북여성이 씀씀이가 크고 중국에 자주 들어가 북한 사람들을 접촉한다”는 것이었다. 김동순·원정화 씨에 따르면, 당시 원씨와 조씨는 금전문제 등으로 갈등을 빚고 있었다. 원씨는 지난해 ‘신동아’ 인터뷰 당시 가정부와의 갈등에 대해 이렇게 말한 바 있다.
“가정부가 집에 있는 식재료를 빼돌리고 딸을 잘 돌보지 않았다. 가정부의 아들과 중국을 통해 대북무역을 같이 시작했는데, 많은 돈을 사기당했다.”
그런데 흥미로운 건 앞서 소개한 증인 김OO 씨가 원정화의 간첩 의혹을 처음 고발한 가정부 조씨의 아들이란 사실이다. 결국 원정화와 원한관계에 있던 사람이 한국에까지 들어와 두 사람의 간첩 혐의를 인정하는 결정적인 증언을 한 것이다. 이런 사실은 그동안 알려지지 않았다. 가정부 조씨는 원정화 사건을 제보한 공로로 상당액의 포상금도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김동순 씨는 “2006년 내가 한국에 들어올 당시 김OO는 나의 한국행을 돕는 브로커 일도 했던 사람이다. 그러나 돈만 날리고 실패했다. 그런 문제 등으로 나와도 사이가 좋지 않았다. 2007년경 나는 김OO를 마약혐의로 국정원에 신고하기도 했다. 김OO가 나와 정화에 대해 악감정을 가지고 검찰과 법원에서 사실과 다른 주장을 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탈북 이후 北 들어간 적 없다”
지난 2월 말, 원정화는 간첩사건 이후 처음으로 계부 김동순 씨를 서울 노원구의 김씨 자택에서 만났다. 이날 김씨는 원씨와의 대화 내용을 모두 녹음했다. 3월 초, 김동순은 ‘신동아’와 15시간가량 인터뷰를 진행하면서 원정화 사건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밝혔는데, 그 자리에서 기자에게 원정화와 자신의 대화가 담긴 녹음파일을 제공했다. “원정화의 거짓말을 밝혀줄 증거”라고 했다.
김씨는 인터뷰 내내 “원정화는 북한 보위부가 남파한 간첩이 아니다. 한국에 들어와 중국을 통해 대북무역을 하면서 일부 오해를 살 만한 일을 했지만, 절대 북한에서 파견된 간첩은 아니다”라고 강조했다. 그는 “내가 정화를 30년 키웠다. 일거수일투족, 습관, 잠버릇까지 다 안다”고 주장했다.
실제로 김씨가 제공한 녹음파일에는 원씨가 그동안 주장해온 것과는 상당히 다른 진술이 담겨 있다. 수사기록과 맞지 않는 내용도 적지 않다. 녹음파일 내용 중 논란이 될 만한 부분을 발췌해 게재한다.(대화 내용을 주제별로 정리했으며, 가능한 한 원문대로 실었다. 괄호는 문장의 흐름을 위해 기자가 임의로 넣은 것이다.)
1. 원정화 부친의 행적과 관련.
김동순 네가 무슨 간첩이냐? 그리고 내가 간첩이라는 증거가 있냐?
원정화 그렇죠. 아버지가 무죄를 받은 것만으로도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요.
김동순 네 친아버지인 원OO 씨가 너 태어나기도 전에 남파간첩으로 갔다가 사살됐다고 했지. 너 아버지 얼굴 모르냐? 변명하지 마. 너 (친)아버지 따라가서 두 달인가 살다가 왔잖아. 근데 니가 아버지를 몰라?
원정화 알아요. 미안해요. 그게 어떻게 된 거냐면….
2. 2006년 북한영사관에 들어가 지령을 받았다는 주장에 대해.
김동순 그리고 니가 북한영사관(심양)에 들어간 적이 있어? 언제 갔냐?
원정화 그건 맞아요. 김교학(당시 단동무역대표부 부대표)이 심부름 시켜서. 무슨 봉투를 갖다주라고 해서요. 그래서 봉투 갖다주고 나온 게 다예요. 그런데 그게 약점이 잡혀가지고. (영사관에 갔더니) 보초가 있더라고요. 못 들어가고 있는데, 대사가 나와서 나를 데리고 들어갔고 봉투만 주고 나왔어요.
3. 원정화가 보위부 상선으로 지목한 단동무역대표부 김교학과 관련.
(판결문에 따르면, 원정화는 2002년 10월 북한 보위부 직원 박○○의 소개로 김교학을 알게 됐다고 진술했다. 그리고 2008년 체포 당시까지 김교학으로부터 대부분의 지령을 받아 간첩활동을 벌였다고 주장했다.)
김동순 김교학이 네가 탈북자인 걸 아냐, 모르냐.
원정화 알아요. 내가 말했어요. (김교학에게) 북한에 가서 살고 싶다고 그랬어요.
김동순 처음엔 몰랐고?
원정화 네, 나중에 말했어요. (말했더니) 김교학이 놀라더라고요. 그런데 눈치는 챘었대요.
김동순 김교학이 (국군 정보사령부 요원) 이OO를 살해하라는 지시를 했다는 게 사실이야?
원정화 아니, 그건 아니고. 저기 김교학이가 그러더라고요. 국정원 직원하고….
김동순 국정원 요원을 하나 물어라? 그러니까 살해 지시는 받은 적 없지?
원정화 아, 없지. 그런 건 없지.
김동순 황장엽 살해 지시를 누가 했어?
원정화 황장엽 거처 좀 알아봐달라고. 김교학이 저에게 조국(북한)에는 얼마든지, 북한에 얼마든지 보내줄 수 있대요. 그러면서 황장엽이 사는 거처도 알아내고 뭐 어쩌고 그때부터. 그때부터 황장엽 (관련 얘기가) 시작된 거지.
김동순그리고 네가 김교학이하고 안 지가 12년 됐다고 하는 거는 거짓말이지?
원정화 아, 그건 거짓말이고. 그게 아니고 언제부터 (김교학을) 알았냐면, 안 거는 그때, 아버지, 2004년도인가 2005년도부터 알기 시작한 거고…. 나 진짜 그때는 (북한에) 가고 싶었어요.
김동순 그러니까 니가 (한국에서) 좀 살아보려고 했는데 잘 안 되고 하니까, 지금 가족 생각도 나고 하니까 (북한에 다시) 가고 싶었다는 거지?
원정화 예, 예.
(이와 관련 원씨는 지난해 ‘신동아’와의 인터뷰 당시 “북한으로 돌아가고 싶은데 상부에서는 계속 기다리라고만 했다. 그러다가 들어오라는 허락이 떨어졌는데, 도청을 통해 그걸 다 알고 있던 수사기관이 나를 긴급체포했다”고 주장한 바 있다.)
4. 보위부 파견 간첩 주장에 대해.
원정화는 북한 보위부가 직파한 간첩으로 알려져있다. 역시 보위부 요원인 단동무역대표부 김교학 부대표로부터 지령을 받고 움직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원씨는 최근 김동순 씨와 만난 자리에서는 이를 부인했다. 김씨가 “우리 집안에 노동당원은 나밖에 없다. 우리 딸 김희영은 보위부 문턱에도 가본 적이 없다. 네가 보위부에 언제 있어봤냐? 있어본 적 있어?”라고 묻자 “없어요. 나는 보위부의 ‘보’자도 모르는데”라고 답했다.
판결문에 따르면, 원정화는 2002년 10월 17일 북한 무산으로 들어가 청진시 보위부장으로부터 청진 출신 탈북자 명단을 파악하라는 지령을 받고 다시 중국에 들어왔다. 또 2006년 5월 두 차례에 걸쳐 중국 도문에서 여동생 김희영과 함께 북한 온성으로 들어가 보위부 직원으로부터 가짜 달러와 마약을 받아 돌아왔다. 그러나 원정화는 최근 김동순 씨를 만난 자리에서는 이런 사실도 부인했다. 김씨가 “니가 언제 북한에 간 적이 있냐. 탈북한 이후 니가 언제 북한에 들어갔냐”고 묻자 “맞아요. 난 (탈북한 이후 북한에) 가보지를 않았어”라고 답했다.
5. 검찰 조사 과정에 대해.
(김동순 씨는 ‘신동아’ 인터뷰 과정에서 “정화가 검찰에서 조사를 받을 당시 검찰이 술을 먹여놓고 진술을 받고 조서에 지장을 찍게 했다고 말했다”고 주장했다. 김씨가 제공한 녹음파일에는 그와 관련된 대화도 들어 있었다.)
김동순 니가 (진술조서에) 도장 다 찍었잖아, 지장.
원정화 술 하고….
김동순 아니 크게 말해봐. 술 먹여놓고 찍은 거라고? 조서에?
원정화응, 술. 아버지 녹음기하고 (제가 하는 말을) 녹음도(하시는 거예요).
김동순 무슨 녹음 이러고저러고 해. 아버지는 나중에 뭐 녹음하게 됐으면 당장 와서 하지. 그러면 걔네들(합동수사본부) (너에게)술 먹여놓고 그걸(조서 날인) 시킨 게 맞아?
원정화 아휴, 아버지. 말을 다 했어요. 아버지 복잡하게 안 하고 싶어.
사건 초기 수사팀은 김동순 씨를 원정화 씨의 상선으로 파악했다. 중국에서 남한을 상대로 대북무역을 하면서 10억 원이 넘는 공작금을 수년에 걸쳐 원씨에게 보냈다는 게 검찰의 판단이었다. 그러나 법원은 원정화-김동순 간에 이뤄진 무역거래를 정상적인 것으로 판단, 김씨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대북무역=간첩활동’ 공식이 깨졌다.
원정화의 판결문에는 북한 단동무역대표부 부대표 김교학이 2002년 10월부터 원씨에게 지령을 내리는 등 사실상 원씨를 담당한 북한 보위부 상선이라고 설명돼 있다. 그러나 김동순 씨와 원씨의 대화 내용에 따르면 판결문 내용의 신빙성에 의문을 제기하게 된다. 원씨가 김교학을 만난 시기를 2002년이 아닌 2004~ 2005년으로 밝혔기 때문이다.
그 주장대로라면 원정화 사건에서 혐의가 인정된 2003년 1월부터 2005년 3월경까지 최대 5회에 걸친 간첩활동의 성립조건이 사라진다. 이 시기는 원씨의 주요 간첩활동이 이뤄진 시기다. 판결문에 따르면 그 시기 김교학이 원씨에게 지시했다는 주요 지령은 다음과 같다.
▲2003년 1월, 한국 정보기관 요원의 인적사항 파악 지시, 공작금 3000달러 지급.
▲2003년 6월, 정보기관 요원들의 동태파악 지시.
▲2004년 1월, 국군정보사 요원 이OO 살해 지시.
▲2004년 8월, 국정원 직원 살해 지시.
▲2005년 3월, 군사기밀을 빼내라고 지시, 정보사 요원 이OO 납치 시도, 공작금 8000달러 지급.
게다가 원씨는 김동순 씨와의 대화에서 김교학이 원씨가 탈북자라는 사실을 나중에야 알았다고 증언한다. 그 주장이 사실이라면 김교학과 원씨는 서로의 실체를 모르는 사이였다는 얘기가 된다. 이는 김교학과 원씨가 보위부의 지령을 주고받는 관계에 있었다는 사건의 대전제가 흔들릴 수도 있는 중요한 증언이다.
의문투성이 보위부 간첩
원정화 씨는 2008년 사건 당시 자신의 간첩 혐의를 모두 인정했다. 사건 당시 원씨와 관계된 많은 주변인물이 증인으로 채택돼 조사를 받았고, 그들의 증언을 통해 원정화의 간첩활동이 간접적으로나마 확인됐다.
그러나 수사 기록을 검토해보니, 이들의 진술은 대부분 “원정화로부터 ‘북한에 있을 때 내가 보위부 관련 일을 했다. 아버지(김동순)도 북한에서 고위직에 있었다’는 말을 들었다”는 식이었다. 원씨의 간첩 사실을 입증할 객관적인 증거는 찾기 힘들었다. 원정화의 자백이 없었다면, 사실상 공소유지가 불가능했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취재 내용, 새로운 증언, 원정화-김동순 두 사람의 대화 내용만으로 “원정화 사건이 조작됐다”거나 “원씨가 보위부 직파 간첩이 아니다”라고 주장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알려진 것과는 다른 증거들과 당사자인 원씨의 새로운 진술이 확인된 만큼 재조사의 필요성이 있다는 게 기자의 판단이다.
그런데 만약 원정화가 보위부에서 파견된 간첩이 아니라면, 그는 왜 스스로 간첩을 자처하고 5년간이나 감옥생활을 했던 것일까. 그 이유에 대해 김동순씨는 기자에게 이런 말을 남겼다.
“지난해 정화가 출소한 뒤에 전화로도 물어보고 만났을 때도 물어봤다. ‘왜 사실도 아닌 거짓말을 해서 스스로 간첩이 됐냐’고. 그랬더니 정화가 이렇게 말했다. ‘정보기관과 수사기관에서 (간첩혐의에 대해) 잘 말하면 김현희처럼 살게 해준다’고 했다고.”
지난해 첫 인터뷰 이후 기자는 오랜 시간 원정화 씨와 대화를 나눴다. 그 과정에서 기자는 원씨로부터 김동순씨가 들었던 것과 비슷한 얘기를 여러 차례 들은 바 있다. 원씨는 “정보기관 사람들이 ‘김현희처럼 살게 해준다. 100명 넘는 사람을 죽이고도 김현희는 지금 한국에서 잘 살고 있지 않으냐’고 해놓고는 이제는 나몰라라 한다”며 불만을 토로했다.
3월 초, 기자는 그간의 취재 내용을 원씨에게 알린 뒤 해명과 반론을 요구했다. 그러나 원씨는 구체적인 답변을 하지 않으면서 사실상 취재를 거부했다. 3월 7일 경기도 군포시 금정역 인근에서 만났을 때도 원씨는 “난 그동안 거짓말을 한 적이 없다. 난 분명히 북한 보위부에서 파견된 간첩이었다. 이미 법적인 처벌을 다 받았다. 내 과거 행적에 대해 더 이상 다투고 싶지 않다”는 뜻만을 전했고 이후 일방적으로 연락을 끊었다.
-1탄 끝-
한상진 기자
2014-07-08 아리랑 공연 뒤에 숨겨진 평양의 아픔
김정일이 ‘아리랑’을 왜 그리 좋아했는지 지금도 미스터리한 일이다. 그의 생전 예술 관련 행적을 보면 전통음악에는 통 관심이 없었던 듯 보였다. 그가 즐긴 것은 ‘보천보전자악단’ 같은 여성 밴드나 100여 명의 남성이 목청껏 소리를 지르는 공훈합창단이었다. 사석에선 한국이나 일본, 옛 소련 가요들을 즐겨 불렀다.
1991년 북한이 영화 사상 최대의 역작인 ‘민족과 운명’ 시리즈를 창작할 때 김정일은 아리랑을 주제가로 선정했다. 이 영화 시리즈는 현재 60부 넘게 제작됐으며 앞으로 100부까지를 목표로 한다. 이를 계기로 북한에선 아리랑이 최고의 브랜드로 떠올랐다.
‘통일아리랑’ ‘강성부흥아리랑’ 등의 가요나 소설이 잇따라 창작됐고 TV, 담배 등에도 아리랑 상표가 대거 쓰이기 시작했다. 북한 최초의 조립 스마트폰 브랜드도 아리랑이다.
뭐니 뭐니 해도 ‘북한’과 ‘아리랑’이란 단어를 조합하면 맨 처음 떠오르는 것은 남쪽에도 잘 알려진 연인원 10만 명이 동원되는 ‘아리랑 집단체조공연’이다. 2002년 처음 시작된 아리랑 공연은 수해 등으로 중단된 3년을 빼곤 지난해까지 매년 7월 말에 시작돼 두세 달간 진행됐다.
그러던 북한이 올해는 아리랑 공연을 하지 않겠다고 발표했다. 북한 소식통들에 따르면 관객도 없고 주민 여론도 매우 악화됐기 때문이라고 한다. 하긴 거의 똑같은 내용을 10년 넘게 반복하다 보니 보겠다는 사람이 있을 리 만무하다. 관객의 절대다수는 평양 사람들인데 해마다 보고 또 보니 질려 버리는 것은 당연한 일 아닌가. 강제로 관람 동원을 시키는 것은 오래전부터였다. 그렇게 해도 개·폐막 행사가 아니고선 관람석의 절반을 못 채웠다. 그렇다고 지방 사람들까지 대거 평양에 불러들이기엔 교통 사정이나 치안 통제력이 따라가지 못한다.
매년 공연과 관람에 억지로 동원되는 평양시민들은 ‘아리랑’이란 단어만 들어도 끔찍해한다.
실제로 화려한 아리랑 공연 뒤에 숨겨진 평양 사람들의 고통은 엄청났다. 가장 큰 부작용은 학생들이 훈련에 동원되는 반년 동안 공부를 못한다는 데 있었다. 가뜩이나 1고등중학교를 제외한 일반 중학교는 대학 가기도 힘든데 공연에까지 동원되다 보니 중학교 4학년부터는 졸업할 때까지 3년 동안 아예 공부할 엄두를 내지 못한다. 자식을 대학에 보내려는 부모들이 뇌물을 주고 자녀를 동원에서 빼내 따로 공부시키는 일이 보편화됐을 정도였다.
자녀가 공연에 동원된 부모들은 재정적 부담에 힘들어했다. 무더운 여름에 밤늦게까지 훈련을 하다 보니 자녀들에게 간식과 아이스크림을 사 먹을 돈을 따로 챙겨 보내야 하는데 평범한 가정들엔 힘에 부친 일이었다. 그렇다고 남들 다 사 먹이는데 자기 자녀만 축에 끼지 못할까 봐 부모들은 돈을 주지 않을 수 없었다. 이뿐만이 아니다. 매일 학급에서 두 명씩 돌아가면서 전체 학급이 먹을 국을 만들어 와야 하고 선생들의 식사도 챙겨야 했는데 이 역시 부모들끼리 은근히 경쟁하지 않을 수 없다. 공연 초기 몇 년 동안은 참가자들에게 TV를 선물로 주기도 했지만 부모들은 이미 그 이상의 돈을 썼다고 불만이 컸다. 설상가상으로 남쪽의 대북 지원이 중단된 뒤부터는 선물 값어치도 해마다 점점 줄어들었다.
매일 10만 명 이상이 움직이다 보니 크고 작은 불상사도 잇따랐다. 삼복더위엔 훈련 도중 일사병으로 쓰러지는 학생이 부지기수였고, 추위가 시작되는 10월 말엔 얇은 공연복 때문에 한 학생이 독감에 걸리면 다른 학생들까지 집단 감염됐다. 그래도 공연에 빠지면 안 되는 처지라 학생들 사이에서는 “맹장이 터져도 끝까지 버텨야 한다”는 말이 돌았다.
최근엔 늦은 밤에 귀가하는 학생들이 강도를 만나 봉변을 당하고 성범죄에 노출되는 일까지 발생하자 집이 먼 학생들의 경우엔 버스로 귀가시키는 배려(?)가 나올 정도였다. 몇 년 전엔 공연 뒤 집으로 돌아가는 사람들이 한꺼번에 몰리는 바람에 대동강 능라다리 난간이 무너져 많은 사상자가 발생하는 사건도 일어났다.
어쨌든 올해부터는 아리랑 공연이 없다고 하니 “보지도 않는 공연을 만드느라 왜 우리가 생고생을 해야 하느냐”고 불만이 컸던 평양 사람들로서는 만세라도 부르고 싶은 심정일 것이다.
아리랑 공연은 앞으로도 재개되기 어려워 보인다. 각종 거창한 명분을 내걸고 해마다 공연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던 ‘행사파’들이 거의 사라졌기 때문이다. 그들에 대한 보상이 없어진 것이 결정적 이유다. 북한은 초기엔 집단체조창작단을 비롯한 예술단체들과 간부들, 예술인들에게 훈장과 노동당 입당 등 정치적 보상과 각종 선물을 듬뿍 주었다. 하지만 10년 넘게 계속 줄 순 없는 일이다.
그나마 달러를 어느 정도 벌어다 주던 외국 관광객들도 요즘엔 많이 줄었다고 한다. 지금까지 공연을 본 해외 관광객은 10만 명 이상으로 추산되는데 대부분이 중국인이다. 그런데 악화되고 있는 북-중관계의 영향 탓인지 5월부터 북한을 방문하는 중국인 관광객이 급감했다. 한편 남북 교류가 활발했던 2005년 한 해에만 아리랑 공연을 관람한 한국인은 7730명이나 됐는데 2009년부터는 아예 사라졌다.
관객도 없고, 돈도 안 되는 아리랑 공연이 내년에 재개된다면 평양 사람들의 민심은 크게 악화될 것이다. 아리랑 공연은 아버지의 치적을 지워야만 환영받는 김정은의 아이러니를 대표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다.
하지만 북한의 아리랑에 대한 집착은 다른 곳으로 옮겨갔다. 지난달 북한이 아리랑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민요 아리랑’이란 이름으로 유네스코에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 신청한 사실이 알려졌기 때문이다. 아리랑은 2012년에 ‘한국의 서정 민요’로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됐기 때문에 남북이 신경전을 벌일 수밖에 없다.
아리랑은 우리 민족과 오랫동안 함께 숨 쉬며 해당 시대를 반영해 왔다. 21세기에 들어서도 북한에선 인민이 겪는 고통의 상징으로, 해외에선 분단의 상징으로 돼 버렸으니 아리랑은 지금도 구슬프다. 아프다.
2014-07-22 한국판 모텔? 평양의 목욕탕과 식당
옛날 어머님이 들려주셨던, 1960년대 말 북한에서 부모님이 연애하실 때 일이다.
하루는 두 분이 밤늦게까지 거닐다가 시내 중심 공원의 벤치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었단다. 두어 시간쯤 흘렀을까. 갑자기 벤치 밑에서 인기척이 나더란다.
깜짝 놀라 들여다보니 그 밑에서 안전원이 기어 나왔단다. 그는 멋쩍은지 “에이, 오늘 저녁은 시간 낭비했네” 하고 툴툴거리며 가더란다. 반동적이거나 퇴폐적인 이야기 또는 행위가 있나 숨을 참고 지켜보다 끝내 두 손을 든 것이다. 그런 이야기를 들으며 부모님 세대에는 연애조차도 꽤나 ‘혁명적’인 일이었다는 생각을 했다.
하긴 그땐 그런 시대였다. 평양도 아닌 지방 도시에서조차 반동을 잡겠다고 벤치 밑에 들어갔으니 말이다. 그로부터 40년이 넘게 흘렀다. 기술의 발달과 더불어 북한의 감시 방법도 진화했다.
지난해 여름 평양에선 주체사상탑 현대화 공사가 진행됐다. 명색은 탑 위 봉화의 조명을 발광다이오드(LED)로 바꾼다는 것. 이때 곳곳에 감시카메라(CCTV)도 함께 설치됐다. 그런데 평양 사람들도 잘 모르는 것이 하나 있었다. 보도 쪽에 바늘구멍 같은 적외선 감시카메라들이 몰래 설치됐다는 사실을…. 주체탑 주변은 평양의 연인들이 밤에 가장 즐겨 찾는 장소 중 하나다. 누군가 감시카메라를 통해 자신들을 지켜보며 낄낄거린다는 사실을 모른 채 깊은 밤 그 앞에서 진한 스킨십을 하는 연인들만 불쌍해졌다. 요즘은 평양의 처녀들이 몰라보게 과감해졌다고 한다. 여기에는 북한 지도층의 변화도 한몫했다. 김정은과 이설주가 공개석상에 팔짱을 끼고 나타나자 연인들이 환호했기 때문이다. 과거엔 남녀가 팔을 끼고 다니면 비사회주의 행위라고 단속했는데, 이제는 단속할 수가 없게 된 것이다.
바야흐로 여름이 왔다. 평양에도 연인들의 계절이 찾아왔다.
그런데 갈 곳이 마땅치 않다. 놀러 갈 곳도, 교통수단도 마땅치 않으니 기껏 대동강이나 보통강에 나가 산보를 하고 식당에 가는 게 전부다. 다행히도 평양은 수도를 가로지르는 강 옆에 차도가 붙어 있지 않은, 세계에서 몇 안 되는 도시이다. 그것만은 정말 좋은 점이다.
김정은 체제에 들어서 개선청년공원과 능라유원지가 새 단장을 하면서 이곳도 연인들의 인기 코스가 됐다. 이 공원과 유원지의 피크 타임은 저녁시간이다. 처녀들은 규찰대의 단속에 걸리고 싶어 안달이라도 난 듯이 한껏 섹시하고 특색 있는 옷차림으로 나간다. 그러자 놀이기구를 타기 위한 목적보단 처녀들을 구경하기 위해 총각들이 몰려온다. 단 이곳은 커플이 가기엔 사람이 너무 많고, 조용히 속삭일 수 있는 장소가 못 된다는 것이 흠이다. 남녀의 사랑이 무르익는 데 강 옆이든 놀이공원이든 장소가 중요할까마는….
평양의 문제는 무르익은 다음이다. 손만 잡아도 서로 불이 활활 타는데 이 불을 끌 곳이 정말 마땅치 않다. 서울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어서 오세요” 재촉하듯 뻘건 간판을 번쩍거리는 모텔, 여관 따위가 북한에 있을 리가 없다.
첫 번째 선택지는 집이다. 부모들이 다 출근하는 경우라면 낮에 번개처럼 집에서 만나면 된다. 그런데 이것도 평양이니까 이모저모 여의치 않은 점이 많다. 우선 평양은 주택 사정이 너무 안 좋아서 한 집에 3대, 4대가 사는 집이 대부분이기 때문에 낮이라고 해도 집이 비어 있기 쉽지 않다. 또 평양의 아파트엔 경비원이 지키고 있다. 처음 몇 번은 따로따로 올라가며 찾아가는 집을 거짓으로 말하면 되지만 자주 가게 되면 들키기 십상이다. 제일 큰 문제는 낮엔 본인들도 조직 생활에 매이다 보니 서로 시간 내기가 어렵다는 점이다.
돈이 좀 있는 남녀라면 그나마 약간의 선택의 폭이 있다. 제일 많이 활용되는 것이 식당이다. 단골이 돼서 식당 책임자를 알게 되면 돈을 좀 찔러줄 경우 방 하나를 내준다. 평양에는 칸막이가 돼 있는 식당들이 적지 않다. 그래야 장사가 되기 때문이다. 평양에선 좋은 음식 못지않게 찾기 어려운 것이 이런 조용한 공간이다. 그래도 몇 시간은 괜찮지만 하룻밤은 힘들다.
또 다른 대안은 목욕탕이다. 목욕탕 책임자에게 찔러주면 독탕을 몇 시간 내준다. 밤에 경비 서는 노인들에게 술과 안주, 약간의 돈을 찔러주면 하룻밤도 가능하다. 북한 당국은 식당과 목욕탕이 퇴폐의 온상이라며 주기적으로 단속하지만 이건 아무리 막아도 소용없다.
식당이나 목욕탕에 갈 돈이 없으면 방법이 없을까. 있다. 그냥 산에 오르는 것이다. 모기에 뜯길 각오는 물론 해야 한다. 평양의 중심부에서 제일 가까운 곳이 모란봉이고, 조금 떨어진 곳에 대성산이 있다. 모란봉엔 조용히 숨을 곳이 많다. 경치가 끝내주는 모란봉에 낮부터 올라가 불고기를 구워 놓고 어두워질 때까지 둘이 한잔하면 분위기가 끝내준다. 연인과 함께 어느 식당 가서 한잔할까 고민하는 한국의 오빠들도 이것만큼은 북한이 부럽다고 할지 모른다.
중요 국가기념일이나 정치 행사가 있는 휴일 밤이면 모란봉과 대성산에는 온통 전짓불이 번쩍거린다. 수색조가 산을 훑는 것이다. 그러면 덤불에 숨었던 연인들이 토끼처럼 뛰쳐나와 도망친다. 하지만 너무 열중하다 보면 민망하게 적발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이때는 무조건 찔러주어야 한다. 주머니에 돈이 없으면 단속원 주소를 따서 최대한 빨리 찾아가야 한다. 그나마 여름이니 산이라도 오르는 것이다. 바깥도 춥고 집 안도 춥고, 해마저 빨리 지는 겨울에는 지하철밖에 갈 곳이 없다.
김정은의 지시로 최근 평양엔 유원지와 수영장이 잇따라 문을 열고 있다. 하지만 놀이기구의 짜릿함도, 수영장의 찬물도 젊음을 식힐 순 없다. 아스팔트도 연인들도 뜨거워지는 아, 평양의 여름이다.
2014-07-29 “北 마식령서 버스 추락… 최고명문中 50명 사망”
올해 5월 24일 ‘김정일의 모교’인 평양제1중학교 3학년 학생 50여 명이 탄 관광버스가 강원도 마식령에서 굴러 떨어져 모두 숨졌다고 북한 소식통이 28일 전했다.
북한 소식통에 따르면 북한 최고 명문으로 알려진 이 중학교 학생들은 강원도 원산 송도원국제소년단 야영소에서 야영을 하기 위해 이동하다가 이 같은 참변을 당했다.
사고 장소는 경사가 가파른 강원 법동군 평양∼원산고속도로의 우회로인 마식령 옛 도로 오르막 구간으로 알려졌다. 버스가 도로 아래 마식령 골짜기로 떨어진 데다 학생들이 안전띠를 매지 않아 대형 참사로 번졌다. 사고 직후 북한은 군과 보위부 등을 투입해 사고 수습에 나서는 한편 외부에 소식이 흘러나가지 않도록 철저히 입단속을 했던 것으로 전해졌다.
사고로 숨진 학생들은 만 13세로 북한 고위급 간부 자녀가 다수 포함돼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평양시 보통강구역에 있는 평양제1중은 김정일이 나온 ‘남산고급중학교’의 후신으로 북한에서 최고의 수재들이 입학하는 명문으로 꼽힌다. 5월 13일 평양시 평천구역 아파트 붕괴 사고가 일어난 지 11일 만에 어린 중학생들이 참사를 당했다는 소식이 퍼지면서 평양 시내 민심이 뒤숭숭해졌다고 한다.
이에 앞서 올 1월 19일에도 마식령에서는 스키장으로 향하던 평양시민 30여 명이 버스 추락으로 숨졌다고 대북 소식통들이 전했다.
송도원 야영소는 김정은이 올해 들어 준공식을 전후해 네 차례나 찾을 정도로 특별한 관심을 쏟던 시설이다. 김정은은 지난해 5월 송도원 야영소를 세계 최고의 학생 야영소로 꾸미라는 지시를 내렸다. 이후 북한 최정예 건설부대인 제267군부대가 마식령 스키장 공사를 끝낸 지난해 11월부터 야영소 리모델링 공사에 투입됐다.
북한 당국은 특히 올 5월 2일 야영소 준공식 이후 이곳을 언론에 공개하며 남쪽의 세월호 사건을 비난해 왔다. 일주일 뒤 조선중앙방송은 “송도원 야영소 준공으로 온 나라에서 학생소년들이 기쁨에 넘친 웃음소리가 넘쳐나고 있지만 조국의 남녘땅에선 수학여행에 올랐던 어린 학생들이 생때같은 죽음을 당해 자식을 잃은 부모들의 곡성이 낮에 밤을 이어 울려 퍼진다”고 보도했다.
마식령에는 길이 4km 이상의 ‘무지개동굴’ 등 터널 3개가 뚫려 있으나 잦은 붕괴 사고로 막혀 차량들이 옛 고갯길로 자주 우회한다. 하지만 이 구간의 도로 폭은 차량 두 대가 지나가지 못할 정도로 좁고 도로 바깥쪽에는 가드레일도 없어 사고가 끊이지 않고 있다.
2014-08-05 할아버지뻘 간부들 군기 잡는 김정은식 통치
올봄 북한군 부총참모장 오금철에게 김정은 앞에서 전투기를 타달라는 ‘청’이 전해졌다. 당시 오금철은 상장에 불과했지만 북한군에선 최고 원로로 꼽혔다.
그는 1995년부터 13년간이나 공군사령관을 지냈다. 반면 상관인 총참모장 이영길과 인민무력부장 현영철은 각각 2003년과 2006년에야 군단장급으로 진급한 후배이다. 총참모장 황병서는 2010년에야 중장 계급을 받은 민간 출신이다. 게다가 오금철은 빨치산 시절 김일성의 경호대장을 지냈던 오백룡 전 노동당 군사부장의 아들로 확실한 ‘백두혈통’의 ‘성골’ 출신이다.
이런 그에게 전투기를 몰아달라는 청탁이 전해진 것은 올해 김정은이 작정하고 군기를 잡겠다고 팔을 걷어붙인 이유 때문이다. 나이 콤플렉스를 안고 있는 김정은에겐 자신을 어린이처럼 바라보는 60, 70대 고령의 군부가 영 탐탁지 않았을 수 있다.
김정은은 군부에 “육체적 능력이 없으면 지휘관이 될 수 없다”는 지시를 내렸다. 다른 말로 하면 “나이 들었으면 군복 벗고 집에 가라”는 지시인 셈이다. 그뿐만 아니라 계급장을 기분에 따라 뜯었다 붙였다 하면서 군인들의 자존심을 바닥까지 구겨버렸다. 현 인민무력부장 현영철은 차수까지 진급했다가 1년도 안돼 상장까지 두 계급이나 강등되기도 했고, 전임 부장인 장정남은 1년 사이 계급이 4번씩이나 오르내렸다.
이런 수모에도 불구하고 군부 장성들의 기득권을 지키려는 몸부림은 필사적이었다. 그러나 장성택도 하루아침에 목이 떨어지는 시국에 살 길은 단 하나! 자신이 육체적 능력이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길뿐이었다.
생존의 몸부림은 육군에서 먼저 시작됐다. 3월 17일 김정은 앞에서 군단장 사격경기대회가 열렸다. 머리 흰 장성들이 잔디밭에 배를 깔고 사격을 하는 뒤에서 김정은이 좋아 어쩔 줄 모르는 사진이 북한 언론에 실렸다. 엎드려 사격만 한 것은 차라리 다행이었다. 며칠 뒤 사단장들은 군장을 메고 숨을 헉헉거리며 백두산까지 행군 경기를 벌였다.
육군에서 군단장들이 나섰으니 공군은 한술 더 떠서 67세나 되는 전직 사령관 오금철을 무대 위에 등장시키려 했다. 처음에 오금철은 거절했다.
“내가 비행기 탈 나이가 아니잖아.”
하지만 청은 집요했다. “그 연세에 비행기를 타면 공군은 누구나 육체적으로 준비됐다는 것을 보여줄 수 있지 않습니까.”
이에 오금철은 “몸이 아파서 비행기 조종이 힘들다”고 재차 거절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비행기를 타면 결사의 각오가 김정은을 감동시키지 않겠느냐”는 반론이 돌아왔다. 더는 거절할 구실을 찾지 못한 오금철은 결국 전투기를 탔다.
5월 10일 김정은은 레드카펫이 깔린 온천비행장에 전용기를 타고 나타났다. 이곳에서 열린 ‘전투비행술경기대회’를 보기 위해서였다. 오금철은 각 비행전단장들이 경기를 마친 뒤 직접 미그기를 몰고 하늘에 올랐다. 이게 정말로 김정은을 감동시켰는지 오금철은 지난달 17일 대장으로 진급했다. 상장에서 대장까지 19년이나 걸렸다. 황병서처럼 보름 만에 상장에서 차수까지 두 계급 진급한 인물도 있는데 말이다.
오금철이 비행을 두 번이나 거절했다는 이야기는 곧 장성들 속에 소문이 퍼졌다. 그 뒤에 따라붙은 그럴듯한 해석은 “거절한 실제 속내는 나이나 병 때문이 아니라 전투기 추락이 겁나서였다”는 것이었다.
실제 북한군 공군기들은 언제 떨어져도 전혀 이상하지 않다. 전투기의 수명은 기껏 40년에 불과한데 북한 전투기의 90% 이상이 수명이 30년이 넘은 것들이다. 헬기는 90% 이상이 20년이 지난 고물들이다. 북한군 전투기들은 인명을 중시하지 않은 구소련의 것인 데다 최근 러시아와 중국에서 부품을 수입하는 데 애를 먹고 있다. 사실상 북한 공군엔 탈 만한 비행기가 없는 셈이다. 올 들어 북한 미그 19기 3대가 추락했다는 보도가 얼마 전 한국 언론에 실렸지만 헬기도 2대나 더 추락했다는 사실은 아직 남쪽에 알려지지 않았다. 제일 좋은 미그기를 골라 탔을 것이 분명한 오금철은 다행히 추락되진 않았다.
공군 다음 순으로 해군에 육체를 어필(?)할 차례가 돌아왔다. 7월 2일 배를 한껏 내밀고 서 있는 뚱뚱한 김정은 앞에서 팬티 바람의 해군 지휘관들이 구호를 외치곤 10km 바다 수영에 도전하는 코믹한 사진이 북한 언론을 통해 공개됐다. 북한 소식통은 수영하는 사람들은 해군 전대장 이상 지휘관들이고 장소는 송도원이라고 전해왔다. 지난달 김정은이 지켜보는 미사일 발사가 잦았던 것은 전략미사일군이 다음 차례가 됐던 것 같다.
김정은은 장성들 앞에서 항상 활짝 웃는 모습이었다. 자기 말 한마디에 군부 노인들이 하늘과 바다, 땅에서 설설 기고 있으니 카타르시스도 느낄 것이다. 김정은을 웃게 만든 보상일까. 최근 군부 산하에 배속되는 외화벌이 회사들이 느는 것으로 알려졌다.
김정은이 한껏 기분이 좋을 때 “군 장비를 사올 돈이 필요하다”며 계산서를 들이민 것 같다. 또 장성들의 계급 널뛰기도 점차 줄어들고 있다. 노구를 던져 바닥을 박박 긴 보람이 있는 것이다.
김정은의 군기 잡기는 이제 노동당 간부들에게 옮겨갔다. 지난달 31일 노동당 고위간부들의 백두산 답사행군이 시작됐다. 보통 6박7일이 걸리는 코스이니 지금쯤 고령의 간부들은 백두산 어느 산비탈에서 무더위와 폭우 속에 헉헉대고 있을 것이다.
2014-08-08 한 납북 어부의 30년간의 북한 생존기
‘납북귀환자의 이야기’는 1975년 8월 동해 공해 상에서 어업을 마치고 귀항하던 중 납북되었던 어선 ‘천왕호’와 배에 탔던 선원 33명 중 한 사람인 최욱일 아버님에 관한 이야기이다. 남한의 가족과 납북자가족모임의 도움으로 극적인 탈북에 성공하여 2007년 1월 대한민국으로 귀환하였다.
납북된 33명중 22명은 모두 굶어 죽었다. 지난 3월 15일 북한인권시민연합은 제네바에서 열린 제99차 유엔 강제적·비자발적 실종에 관한 실무그룹 미팅에서 최욱일 아버님이 북한에서 자신을 포함한 납북자들의 생활을 증언할 수 있도록 하였다.
추적추적 내리는 봄비를 가로지르며, 경기도 안산에 살고 계시는 최욱일 아버님 댁을 방문했다. 납북된 지 32년 만에 황혼의 나이가 돼서야 재회하여 새로 시작한 신혼 부부 마냥 행복에 젖어있는 이들 노부부에게 아팠던 두 인생의 지난날들을 기억하게 하는 것조차 조심스러웠다.
아프지만 행복한 오늘이 있어 즐겁게 추억할 수 있고, 힘들게 버티고 이겨낸 세월이 있어 최욱일 씨 부인이 구수하게 부쳐낸 메밀김치 지짐과 한 잔 술이 더 맛나게 느껴지는 듯 했다. 아픈 그들의 지난날들은 오늘의 행복이 얼마나 소중하고 값진 것인지 분명한 메시지를 보내는 것 같았다. (편집자)
꿈과 함께 만든 기계배
내 고향은 강원도 주문진읍 교향리이다. 이 고장 토박이로 시집간 누나도 같은 동네에 모여 살았고 온 가족이 그렇게 같이 살았다. 원래 바닷가에서 나서 자란 나는 일찍이 나무배를 타고 고기잡이 일을 해왔었다. 자연스럽게 어깨너머로 배 위에서 하는 일들을 몸으로 익히면서 배우게 되었다.
21살에 일찍 결혼하고 계속 뱃일을 했다. 그러던 중 큰 배를 하나 장만할 생각을 하게 되었다. 아무래도 기계 배로 고기잡이를 하면 속도도 빠르고 힘도 더 세고 해서 더 많은 고기를 잡을 수 있을 것이라 믿었고 드디어 1974년 거금 3천 7백만 원(현재 가치로 환산하면 40억 원 정도는 더 될 것임) 돈을 들여 39톤급 기계 배를 마련했다.
혼자의 힘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었지만 모두가 희망과 꿈을 담아 아끼고 아껴서 장만한 것이었다. 그래서 그 배는 우리에게 너무나 소중했고 모두가 기뻐했다. 그렇게 우리의 꿈이 담긴 “천왕호”가 만들어졌다.
나 또한 이 배에 모든 희망을 걸었다. 삼 남매와 네 번째로 태어난 8개월 된 막내아들의 장래도 이 한 척의 배에 달려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렇게 소중했고 가족 모두의 기대가 담긴 배였다.
결혼 14년 만에 장만한 배를 보면서 이제 잘살게 될 내일만을 꿈꾸면서 기대도 컸다. 이제 큰 배도 마련했으니 먼바다로 출항할 준비가 되었다. 사실 이렇게 큰 배를 만들게 된 것은 당시에 가까운 바다에서는 고기가 잘 잡히지 않았다.
그래서 작은 배로는 고기를 잡아 봤자 적은 량 밖에는 잡을 수 없었고 여섯 식구 생계를 유지하는 데는 큰 보탬이 안됐다. 그래서 한번 크게 배 사업을 해보고자 한 것이었다. 1975년 8월 9일 섭씨 30도가 넘는 찜통더위에도 우리는 출항준비를 마치고 출항했다.
한번 먼 바다에 나가면 며칠씩 바다 위에서 있어야 했기 때문에 많은 것을 준비해야 했다. 어구 손질, 디젤유 4드럼, 냉동 오징어, 얼음 5톤, 25Kw용 전구 15개, 배의 기관용 부속품, 생필품 등을 준비했다. 그리고 33명이 “천왕호”에 탑승했다.
당시에 어획 목표량은 오징어 3만 6천 마리 정도였는데 당시 시가로는 3,4백만 원이 목표 수익이었다. 한번 항해를 떠나면 뭍에 있는 가족들은 초조한 마음으로 무사히 돌아올 때까지 힘든 생활을 해야 했다. 험난한 바다에 나가 혹시라도 일이 생길까 걱정되어 집에 있는 쌀을 다 털어서 배에 실었고 주머니에 돈을 두둑이 채워주었다.
배가 막 떠나려고 하는데 셋째 딸애가 부둣가로 달려나왔다. “아버지 알사탕 사줘” 하면서 애원하며 울면서 내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늘어졌다. 그때 내 윗옷 안주머니에는 돈이 얼마간 있었다. 항해 도중에 혹시나 경비대원들을 만나면 찔러줄 돈이었다.
형님은 배의 사무장이었던 나에게 요긴하게 쓸 비상금을 항상 챙기고 다니라고 말했었다. 그래서 나는 그날도 딸애의 울음도 뒤로하고 무작정 배에 올랐다. 북에 있는 30년 동안 그때 딸애의 울음소리가 귓전에 들려와 늘 내 가슴을 후비며 괴롭힐 줄은 미처 알 수 없었고 예상도 못 했다.
북한군에 묶여 버린 ‘희망’
당시에 우리 배 규모는 제법 되었지만, 장비는 충분히 갖추지 못했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은 무전기, 방향탐지기, 독도해역 지도와 컴퍼스 등이 전부였다. 그렇지만 우리는 선장 김익두의 오랜 경험을 바탕으로 멀리 공해 상까지 나가 고기잡이를 하곤 했었다.
공해 상에는 중국 배, 일본 배들도 많이 어로작업을 하였는데 우리는 종종 일본 배를 따라다니곤 했었다. 왜냐하면 일본 배들은 기계 장비를 잘 갖추고 있어 고기떼를 잘 탐지했었기 때문에 우리도 쫒아 다니면서 눈치껏 고기를 잡는 것이었다. 그래서 가끔은 일본 해역 부근까지 나가서 고기를 잡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1975년 8월 16일 조업 7일째 되는 날 우리는 그동안 잡아들인 오징어를 보며 돌아가서 좋아 할 처자식과 식솔들의 모습을 생각하며 만선의 기쁨을 누리며 좋아하고 있었다. 밤 11시 강릉 문화 방송에서 태풍경보가 있다는 것을 라디오로 듣고 서둘러 어구를 거두고 주문진항으로 뱃머리를 돌렸다.
1975년 8월 17일 조업 8일째 되던 날 새벽 4시쯤 되었는데 어디서 나타났는지 모르는 북한 경비정이 우리 배를 향하여 기관총을 쏘아대며 추격해 오고 있었다.
우리배가 멈추면 위협 사격이 멈추고 움직이면 다시 사격하고 그렇게 가다 멈추기를 반복하다가 결국 총 한 자루 없었던 우리는 저항도 못하는 사이에 권총과 기관총을 소지한 북한군 군관 1명과 병사 1명이 우리 배에 올랐다.
그리고 그들은 우리에게 “꼼짝 말아 움직이면 쏜다” 하고 엄포를 놓더니 우리 배를 북한경비정에 로프로 연결하여 북한해역으로 끌고 갔다. 우리 배 엔진 동력과 북한해군 배 엔진 동력을 포함하여 2척의 배가 함께 가동했는데도 6시간이나 걸려서 북한수역에 있는 어느 한 항구에 도착했다.
6시간의 거리는 우리배가 북한해군에 발견되던 당시 북한으로부터 상당히 멀리 떨어져 있었다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도 북한군은 우리배가 북한해역에 있었다고 했다. 북한군에게 끌려가는 배위에 꼼짝도 못하고 앉아 있는 동안 천 갈래, 만 갈래 생각이 다 들었다.
그동안 남한에서 들었던 소문들이 기억났다. 들었던 바대로 정말로 “북한에 도착하면 아오지 탄광으로 끌려가겠지?” 하는 생각도 들고 마음은 너무 착잡하고, 막막하고 억울했다.
왜 끌려가야 하는지 무슨 잘못을 했기에 사랑하는 가족이 아니라 아는 사람이라곤 아무도 없는 저 북한으로 가야한단 말인가? 배위에서 저항해 보고 싶었지만 북한군의 겨누고 있는 총부리를 보면서 엄두가 나지 않았다.
북한의 원산항에 도착하다.
배위에 상황은 한 마디 말만 했다가는 당장 무슨 피해가 날아올지 몰라 조마조마했고 그 속에서 우리는 더 애간장만 타들어 가는 것 같았다. 그런데 어디선가 북한 강원도 원산항에 도착했다는 말을 들었다.
우리가 도착하자 어느새 소문을 듣고 왔는지 모르지만 항구에는 환영인파로 보이는 많은 사람들로 북적였다. 아마도 북한군이 우리가 북한으로 월북했다고 허위로 미리 상부에 보고를 했었던 것 같았다. 그런데 조금 있더니 군인들이 호루라기를 불면서 다시 사람들을 돌려보내고 있었다.
도착하자마자 우리는 초대소라는 곳으로 보내졌다. 건물 외형이나 시설들이 꽤 괸찮은 편이었던 것 같았다. 대우도 그만하면 괸찮은 편이었다. 하지만 무엇을 먹어도 먹는 것 같지 않고 아무런 생각도 나지 않았다.
거기다가 배를 만들어서 1년도 타보지 못하고 잡은 고기와 배를 모두 빼앗길 것을 생각하니 억울하고 분통이 터져 잠도 오지 않았다. 밥을 먹어도 모래알을 넘기는 것 같았다. 한 일주일 동안 아무것도 안하고 그냥 시간만 보냈다.
한 주가 지나고 본격적으로 사상교육이 시작되었다. 초대소에서 하루 일과는 아침 6시에 기상, 아침체조 하고, 그리고 다시 숙소로 들어와 세수하고 7시에 아침식사하고, 8시 반부터 집중 강습을 받고 12시까지 계속됐다. 이렇게 아침일과가 끝났다.
강습은 한 번에 90분 동안 들었고 10분 동안 잠깐 쉬고 다시 두 번째 강의를 들었다. 점심을 먹고 약 한 시간동안 오침을 하고 오후 강습이 시작 되었고 3시간 동안 두 강습을 듣고 오후 강습 일정이 끝났다.
강습이 끝난 후 체육운동도 하고 저녘 식사를 하고 북한체제 선전용 영화를 보는 것으로 하루 일과가 끝나고 보통 저녁 9시에 잠자리에 들었다. 침대에 누워도 두고 온 처자식들이 눈앞에 얼른얼른 거리는 것만 같아 눈을 감아도 잠도 않고 긴 한숨만 나왔다.
그러니 김일성의 주체사상이니, 혁명역사니, 사회주의체제의 우월성이니 하는 것들은 사실 듣고 있어도 귀에 들어올 리가 만무했다. 우리가 가장 기다리는 소식은 우리를 과연 언제 돌려보낼까 이었다. 3개월이 지나고 6개월 지나도 돌려보낸다는 소식은 들리지 않았다.
기다리는 대답은 하지 않고 대신 계속 기다리라는 말뿐이고 “수령님의 교시가 있어야” 한다고 하니 어떤 동료들은 무의식적으로 불평을 하기도 했다. “사회주의 사회는 거짓말도 안한다고 하는데 왜 보내준다고 하고 보내주지 않느냐”고 불만을 토로했다.
결국 원산초대소에서 10개월의 시간이 지나갔다. 초대소에서는 구타나 고문 같은 행위는 없었으나 불평을 하면 요주 인물로 찍히고 나쁜 놈으로 취급을 하여 이런 말도 자주 할 수 없었다. 단지 하도 억울하고 답답하여 늘어놓은 푸념이었다.
동료들과 헤어지다
원산 초대소에서 생활한지 9개월쯤 되니 사회에 배치된다는 소리가 들렸다. 그때 처음으로 직감했다. 우리는 어쩌면 영영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겠구나. 지금까지 집에 돌려보낼 거라고 순진하게 믿고 있었던 것이 바보 같았다.
우리는 큰 버스에 타고 기차역까지 함께 가게 되었는데 가기 전에 우리를 인솔하는 5과 지도원 이라는 사람이 각 사람에게 북한 돈 200원과 가방 그리고 속옷과 세면도구, 겉옷을 챙겨주었다. 보내달라는 고향에는 안 보내주면 크게 선심이라도 쓰는 듯이 우리를 위로한답시고 안심시키려는 수작이었다.
그렇게 어찌할 방법 없이 30년 세월이 시작되었다. 새로운 곳에 정착하다 배치 받은 곳은 함경북도 김책시의 어느 한 시골 농장이었다. 이제 아는 친구 하나 없이 혼자가 되었다고 생각하니 가슴속으로는 하염없이 눈물만 나왔다. 의지할 사람도 말 친구를 해줄 사람도 없이 무인도에 홀로 남겨진 느낌이었다.
처음 도착하자마자 나를 인솔해 간 5과 지도원과 함께 내가 일하게 될 농장 관리워원장과 초급당 비서를 비롯한 간부들과 만났다. 해당 협동농장에 배치 받은 것을 환영하며 앞으로 일도 열심히 하고 당과 수령을 위해 성실히 생활하면 좋은 일들이 있을 거라고 위로해 주는 듯이 나에게 말을 건넸다.
하지만 생활 속에서는 처음에 환영인사를 할 때와 전혀 달랐다. 처음 거처할 집이 없어 늙은 노부부가 사는 윗방에 곁방살이로 들어갔다. 집이라고 말하기에는 너무나 불편했고 정 붙이기가 너무 힘들어 잠이나 겨우 잘 수 있는 곳이었다.
잠만 그곳에 자고 밥은 합숙 식당에서 먹었다. 남쪽에서 왔다고 특별히 심한 노동을 시키지는 않았지만 내가 하는 행동 하나하나를 다 지켜보고 있다는 것은 분명하게 느낄 수 있었다. 특히 말을 조심해야 했다. 둘이서만 말한 얘기가 다른 사람을 통해 여러 번 나에게 돌아오는 것을 경험했다.
그 이후로 나는 둘이 있을 때는 절대 속 깊은 얘기를 하지 않았고 얘기 한 내용을 기억하고 있어야 했다. 그래야 나중에 나에게 돌아온다고 해도 나를 보호 할 수 있었다. 세 명이서 모여 이야기 할 때는 아예 말조차 하지 않았다. 둘 중 누가 어떻게 보고할지 몰랐기 때문이다.
특히 한국이 북한 보다 좋은 점에 관하여 말을 하면 큰일이었다. 혹시나 주변 사람들이 한국에서는 사람들이 어떻게 사느냐고 물어보면 언제나 북한보다는 힘들고 어렵게 산다고 말을 해야 했다.
사실 내가 납북 되던 당시까지만 해도 한국의 경제 형편은 그리 좋지 못했다. 그래서 북한에서는 한국이 항상 그렇게만 살고 있다고 말했지만 속으로는 고향 한국이 언젠가는 더 발전하고 있을 거라고 근거도 없이 믿고 있었다.
그리고 북한 텔레비전에서 내보내는 것은 남한의 대학생들이 시위하고, 깡패들이 나오는 것만 보여주었다. 박정희대통령이 사망한 소식과 8·28 도끼 사건도 한국이 도발을 했다고 북한주민들에게 역설하는 것도 들었다. 북한 사람들은 북한정부가 보여주는 것이 전부인 것처럼 알고 있었지만 점점 고향 한국이 더 발전할거라고 굳게 믿고 싶었다.
결혼과 계속되는 감시
시간이 지나면서 배치 받은 곳에서의 생활에 잘 적응해 가고 있었다. 주변으로부터 내가 일을 잘하고 있다는 호평도 퍼지기 시작했다. 이곳으로 배치 받은 후에도 종종 나를 이곳까지 이송해 왔던 연락소 지도원이 가끔 찾아오곤 했다.
이 연락소 지도원이 나를 결혼 시키면 좋을 것 같다는 얘기를 내가 일하는 단위의 관리책임자들에게 귀띔을 해주었던 것 같다. 결혼을 하고 난 후에는 입당(북한의 조선노동당에 당원으로 가입함을 의미, 입당은 북한에서 성인남자라면 가정 이력에 특별한 문제가 없는 한 가입해야 하는 것으로 인식되고 있다. 그러므로 입당 여부는 배후자를 만날 때도 중요한 문제이다.)도 하게 되었다.
당원이 되고 나서는 분조장(북한의 농촌에서 7~8명으로 구성된 조의 팀장을 이르는 말)과 기술지도원 일도 하게 되었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더 이상은 올라갈 수 없었다. 나는 남보다 일을 더 잘하기 위해서 주간에는 일을 하고 야간에 공부하는 야간기술학교에도 다녔다.
당시에 북한에서는 농촌을 선진화 한다고 하여 농업전문학교가 생겼는데 강사들이 일주일에 세 번 직접 농촌 마을회관 같은 곳에 찾아와서 강의를 해주곤 했다. 그렇게 2년간을 열심히 다녀 농업 준기사 자격증을 받았다.
일을 잘 한다는 좋은 평가도 받았고 일정한 관리자로 그리고 기술자로 일 하게 되었지만 차별과 감시를 받는다는 생각은 떨쳐 버릴 수 없었다. 직접적으로 당한 것은 없었지만 뒤에서 나에 대해 이러쿵 저러쿵 얘기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내가 일도 잘하고 열심히 공부하면서 노력한다고들 겉으로는 얘기하지만, 안전부나 보위부 같은 사람들은 항상 내 속내를 알아보고 싶어 안달이었다.
당 일군이라는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열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을 모른다고 그들이 내 마음을 다 알 수 없는 것은 당연한 이치일 것이다. 그래서 나도 그 놈들한테 속을 다 내보이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북에 있는 자식들은 아예 대학에 가는 꿈조차 꿀 수 없었다.
북한에 있으면서 다른 곳으로 여행을 간다는 것은 사실상 거의 불가능했다. 사시사철 손에서 일을 놓기가 힘들었고 열흘에 한 번씩 쉬는 날이 있다고 해도 쉬는 날에는 텃밭 가꾸고, 김매고 하느라 너무 힘들었다. 여자들은 열흘 내내 흙 묻은 옷을 손빨래 하느라 온 하루를 보냈다.
가족들에게까지 감시를 받았다고 말하고 싶진 않다. 하지만 가족들에게도 내 마음 속 깊은 얘기를 솔직히 다 말할 수는 없었다. 나도 모르게 남한에 있는 가족들과 부모님 생각이 나 눈물을 흘리면 가족들은 고향생각이 나서 그러는 것이라고 여겼다. 나는 자식들에게 “내가 죽거들랑 내 뼈라도 내 고향에 묻어 다오…”라고 말하곤 했다.
고역과 아픔의 기억들
북한의 농촌에서는 아침 5시에 출근해서 해가 져야 일이 끝나는 것이 정상이었다. 하지만 이 시간동안 내내 일을 할 수는 없었다. 농촌이긴 했지만 식량이 없어서 쥐꼬리만큼 먹기 때문에 서너시간만 삽질하고, 밭, 김을 매고 나면 금방 허기가 졌다. 그리하여 어떻게 해서든지 시간을 보내는 것이 고역이었다.
도중에 중참이나 간식 같은 것은 꿈도 꿀 수가 없었다. 우리집 형편도 그리 넉넉한 편은 아니었지만 다른 사람들이 굶어 죽어가는 모습을 눈으로 직접 보는 것은 너무 힘들었다. 기차역마다 굶어 죽은 사람들이 널렸었고, 꽃제비(노숙자)들로 가득했다.
한 번은 회령이라는 곳에 가봤는데 열대여섯 살로 보이는 누나가 힘없이 거리에 쓰러져 있는 아홉 살 쯤으로 보이는 남동생위에 앉은 파리를 쫓아 주는 모습을 목격했다. 오고가는 중국 상인들이 먹을 것을 주길 바라고 앉아 있는 듯 했다. 정말로 눈 뜨고는 볼 수 없는 장면이었다. 이렇게 굶주림을 이기지 못해 죽어 가는 사람들을 수도 없이 목격했다.
우리 납북자도 예외는 아니었다. 박정원이라고 기관장 했던 사람도 굶어 죽었다. 장례식에 갔더니 동네 사람들이 부인이 먹을 것을 주지 않아 굶어 죽었다고 했다. 식량난이 지속되면서 여성들이 장사를 하는 것은 정부가 그런대로 묵인했지만 남성들이 장사를 하는 것은 정부가 엄격히 통제했다. 그리하여 남성들이 여성의 경제활동에 많이 의존하게 되었다.
중국 친척과의 연락
우리 집도 언제 굶어 죽을지 모르는 상황에 이르게 되었다. 당시에 나는 노동연한이 다 되어 정년퇴임을 한 상태였다. 그리하여 집 주변에 텃밭을 가꾸고 거기서 나오는 채소를 팔아 쌀을 사오면서 생계를 근근이 유지하는 정도였다. 그러던 중 94년도에 처음으로 부인이 중국에 있는 친척집을 방문하였다.
부인은 돌아오는 길에 중고 옷이며 신발, 밀가루, 외화 등을 가져와서 중국 친척집 방문은 마른땅에 단비가 내린 것처럼 우리 집 경제생활에 많은 도움이 되었다. 98년에 부인이 다시 중국에 들어갔다가 중국에 있는 친척들에게 내가 한국에 가족이 있다는 말을 했다.
그랬더니 중국친척들이 한국 가족을 찾는 것이 가능하다고 하면서 내가 편지를 쓰면 한국 가족에게 전달해 줄 것이라고 했다. 편지를 보내는 것도 매우 조심스럽고 나름의 작전이 필요했다. 나는 생각 끝에 부인 편에 편지를 보내지 않고 중국친척들을 만나는 대로 조카를 세관으로 내보내 달라고 했다.
그리고 나는 세관 앞에서 3일간 조카가 나오기를 기다리기로 했다. 2일 만에 세관에 나온 중국친척에게 담배 대 모양으로 된 편지가 들어 있는 담배 곽을 주며 한국 집 주소를 알려주었다. 편지에는 “처남한테 편지 받아 봐라, 간단히 내 소식을 전한다. 주문진 누나에게 소식을 알려주라. 소문은 내지 말아다오”라고 적었다.
중국의 조카가 한국과 연락을 한지 이틀 만에 한국에서 전화가 왔고 한국에 있는 우리 형님의 전화를 부인이 중국조카 집에서 받았다.부인은 한국 가족들의 집주소와 전화번호 그리고 현금 200달러를 받아 돌아왔다.
한국 가족과의 연락, 그리고 탈북
그렇게 한국가족들과 연락이 시작되었다. 하지만 굉장히 조심스러웠다. 만에 하나 한국과 연락을 주고받고 있다는 것을 이웃들이나 보위부원들이 알게 되면 언제 어떤 일이 벌어질지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국 가족과 연락을 다시 주고받은 이후로 한국에서 보낸 편지도 받았다. 편지를 받자마자 읽어 볼 새도 없이 눈물이 쏟아졌다. 그러나 한국에 오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그때가 2000년 이었다.
한국 가족은 그때부터 납북자 가족회와 함께 나를 한국으로 데려오기 위한 작업에 들어갔다. 그 후로는 나를 한국으로 인도하려는 사람들이 우리 집으로 찾아오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너무 겁이 나고 무서워서 어찌 해야 할지를 몰랐다.
급기야는 북한의 보위부원이 쌀을 가지고 아예 우리 집에 살림을 차리고 우리 가족과 함께 먹고 자기에 이르렀다. 나는 당 일군을 찾아 갔다. “나를 왜 감시하나? 탈북 안할 거다. 감시 시키지 말라”고 강력하게 요구했다.
그 이후로는 보위부 감시원이 집을 떠났고 한동안 감시망도 주춤해 지는 듯 했다. 이때 한국에서 나를 데리러 온 사람이 왔다. 나는 그 사람과 내가 미리 생각해두었던 장소에서 다시 만나기로 했다. 그 사람이 나와 함께 떠나면 분명 동네에 감시하는 눈이 많아 금방 보위부에 알려질 것이기 때문이었다.
나는 그날 저녁 그 사람을 만나러 가면서 가족들에게 “누가 물어 보면 내가 시장에 갔다고 해라. 만약에 내일에도 물어 보면 마찬가지로 시장에 갔다고 해라”라고 입단속을 시켰다.
나를 인도하러 온 사람은 국경경비대에 돈을 주면서 중국에 갔다가 다시 돌아오는 시간까지 약속 하고 나와 함께 국경을 넘었다. 중국에 처음 도착했지만 여전히 불안하고 초조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나는 가능한 빨리 한국영사관으로 가야했다.
국경 근처에서 몇 일간 숨어 지내다가 연길로 가던 중 나는 교통사고를 당했다. 그러나 한시가 급했다. 나는 급한 응급처치만 받고 병원을 나와 선양에 있는 한국총영사관으로 들어갔다. 2007년 1월 16일 드디어 꿈에도 그리던 내 고향 대한민국 인천공항에 도착하여 가족들과 재회하였다.
2014-09-02 앉아만 있어도 뇌물이 쌓이는 ‘물 좋은’ 北 간부 직책은?
“100원 떼먹은 놈은 자기비판하고 1000원 떼먹은 놈은 호상비판을 하며, 만 원을 떼먹은 놈은 주석단에 앉아 회의를 집행한다.”
북한 사람들은 누구나 다 아는 말이다. 생활총화와 같은 회의 때 대중 앞에서 잘못을 고백하고 반성하는 것이 자기비판이고, 비판 대상이 된 사람을 꾸짖는 역할이 호상비판이다. 주석단에 앉은 간부들은 비판 대상이 될 사람을 정하고 어떤 처벌을 줄지 결정한다.
하지만 불법 행위를 따진다면 가장 큰 처벌받을 사람들은 다름 아닌 간부들이다. 북한 간부들이 각종 제도와 규정의 잣대를 휘둘러 주민들을 착취해 부정 축재한다는 사실은 남쪽 사람들도 다 아는 것이니 새삼스럽진 않다. 배급과 월급으로 살 수 없게 된 지 수십 년째이고, 시장경제라 볼 수 있는 장마당이 없으면 살 수 없는 세상이 됐는데 간부들이 쥔 제도와 규정의 잣대는 과거 사회주의 유물이다 보니 휘두르면 걸리지 않는 사람이 없다.
그러다 보니 사람들은 “우리나라에선 살아있는 것 자체가 비사회주의고 비법(非法)이다”고 푸념한다. 법대로 살면 이미 오래전에 굶어죽었어야 한다는 뜻이다.
그런데 간부에도 레벨이 있다. 뇌물이 쏠리는 ‘물 좋은 곳’이 존재한다는 말이다.
서울대 통일평화연구원이 갓 탈북한 북한 주민 100여 명씩을 대상으로 4년째 매년 조사해 최근 공개한 보고서에 따르면 일반 주민들은 평균적으로 가계소득의 20% 정도를 뇌물로 바친다. 큰 장사를 할수록 뇌물액은 커져 소득의 50%가 넘기도 한다. 북에서 가장 잘사는 사람을 묻는 질문엔 4년째 중앙당 간부와 법 관련 종사자가 압도적 1, 2위를 차지하고 있다. 법 관련 종사자에는 검찰, 보위부, 보안서(경찰) 등이 속한다.
지난 칼럼에서 북한에서 가장 큰돈을 버는 사람들은 무역에 종사하면서 국가 돈을 떼먹는 간부들이라고 했다. 그러나 주민들 눈에는 국가 돈보다는 자기들 돈을 뜯어가는 사람들이 더 크게 보이기 마련이다. 서울대 연구원 조사에 따르면 주민들은 단속이라는 구실로 뇌물 받는 자리가 최고라고 인식하고 있었다.
부자 1위로 꼽힌 중앙당 간부는 워낙 출신성분이 빼어나게 좋아야 하니 사실상 타고나는 자리이다. 수도 많지 않다. 반면 2위로 꼽힌 법 종사자들은 웬만한 출신성분이면 평민 출신도 노려볼 수 있는 자리다. 한국으로 치면 사법시험을 통과하는 셈이다. 그런데 북엔 사법시험이 없고 법과가 김일성대에만 있으니 입학 자체가 곧 사시 합격이나 마찬가지다. 전국의 판검사는 모두 김일성대 선후배들이니 이들의 결속력과 군기는 정말 세다.
북에선 판사보다는 검사를 훨씬 더 선호한다. 법에 걸리지 않는 기관이나 기업이 없으니 가만히 앉아만 있어도 뇌물이 쏟아져 들어온다. 검사 몇 년이면 호화주택은 물론이고 자식들까지 다 새집을 사줄 수 있다. 기업을 상대로 하는 검사에 비해 직접적으로 주민들을 협박하거나 단속해야 하는 보위부 보안서는 좀 불쌍하고 비열해야 하는 자리다. 보안원들 속에는 “이건 사람이 할 짓이 아니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검사는 굳이 이런 말을 하지 않아도 되는 직업이다.
남을 잡아넣을 수 있는 칼을 쥐지 못했다면 도장을 틀어쥐고만 있어도 괜찮다. 큰돈을 다루는 무역 기관 사람들도 제품을 수출하거나 수입하려면 노동당, 무역성, 외무성, 인민위원회 등 도장을 받아야 할 곳이 10곳이 넘는다. 도장 하나마다 뇌물이 들어간다.
도장으로 돈을 가장 많이 버는 자리 중 하나는 각 지역 노동당 간부부(간부들을 관리하는 부서) 해외파견과이다. 외국에 노동자로 나가려 해도 담당자에게 200∼300달러를 주어야 한다. 평양의 경우 해외파견과에 1년만 있으면 몇만 달러는 기본으로 챙길 수 있다. 북한의 생활수준을 감안할 때 한국으로 치면 매년 10억 원 이상 뇌물을 받는 자리인 셈이다. 노동당 조직지도부 산하 간부들은 노동당 입당을 돈 받고 판다. 보통 500달러면 입당이 가능하다. 과거엔 10년 군 복무를 하면 입당시켜 주었지만 이제는 군인조차도 200∼300달러는 줘야 한다. 대학생은 훨씬 어려워서 건설장에 나가 입당하려면 공사 지원비와 당 비서 뇌물로 각각 3000∼4000달러는 써야 한다. 노동당원이 되지 못하면 간부가 될 수 없으니 어쩔 수 없다.
노동당 민방위부는 과거 가장 인기가 없는 자리였지만 최근 연간 장마당이 활성화된 뒤론 인기가 급상승했다. 북한에선 누구나 민방위 훈련과 비슷한 적위대 훈련을 무려 보름이나 받아야 하는데 이 기간 동안 장사를 못하면 손해가 크다. 요즘 평양의 경우 중심구역에선 훈련을 빠지는 대가로 20달러 상당의 15kg짜리 휘발유표 두 장이, 주변구역에선 한 장이 뇌물로 쓰인다. 1만 명만 훈련 불참을 눈감아주면 20만 달러가 생긴다. 그러니 구역당 민방위부장은 웬만한 무역회사 사장 저리가라 하는 자리가 됐다.
그러나 뭐니 뭐니 해도 최고의 부자는 중앙당 간부가 맞다. 주민들을 뜯어먹고 사는 간부들의 생살여탈권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위로 올라갈수록 뇌물액수는 점점 커진다. 손자뻘인 김정은에게 머리 조아리며 기를 쓰고 버틸 때에는 다 이유가 있는 법이다.
2014-10-21 김정은의 ‘문고리 권력’ 조연준
4일 인천공항에 내린 최룡해의 얼굴은 황병서 김양건에 비해 밝지 못했다. 기자의 질문에도 고개를 끄덕이며 건성으로 받았다.
경호 속에 앞서 가는 황병서의 뒤통수를 바라보며 최룡해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불과 5개월 전만 해도 황병서가 갖고 있는 국방위원회 부위원장, 군 총정치국장 직함은 최룡해의 것이었다. 왕별이 번쩍이는 차수 군복까지…. 하지만 지금은 다 빼앗기고 황병서가 북한의 실세임을 전 세계에 과시하는 마당에 끌려와 들러리 서는 굴욕적 신세가 됐다.
황병서 김양건은 지난해 11월 말 김정은과 함께 백두산 삼지연특각에 은밀히 모여 장성택 제거 작전을 모의했던 ‘어제의 동지들’이었다. 그때만 해도 권세가 하늘을 찌르는 장성택만 제거하면 최룡해의 세상이 열릴 줄로 믿었다. 하지만 최룡해 천하는 불과 반년으로 끝났다. 최룡해는 한직으로 밀렸고, 북한은 조직지도부가 거머쥐었다. 조직이 없는 최룡해의 한계였다. 최룡해의 파벌은 1990년대 말 김정일에 의해 숙청됐다.
김정일은 생전에 군부와 장성택의 노동당 행정부, 국가안전보위부라는 3개 조직의 상호 견제 시스템을 이용해 북한을 통치했다. 이 중 ‘선군정치’를 업은 군부 파워가 제일 셌다. 늙고 무식한 장성들은 김정일이 엉덩이를 두드려주면 아낌없이 충성을 바쳤다.
하지만 이 구도는 김정일 사망 반년 만에 장성택의 선공으로 무너졌다. 2012년 7월 군부파 수장인 이영호가 숙청됐고 노동당 행정부가 모든 권력을 움켜쥐었다. 하지만 1년 반 뒤 장성택이 숙청되고선 지금은 ‘組(조)피아 세상’ ‘만사組통’ 시대가 시작됐다.이 그림을 그린 책사는 조직지도부 1부부장인 조연준이다. 노회한 조연준은 군부를 꺾을 땐 장성택을, 행정부를 제거할 땐 최룡해를 밀었다. 나중엔 뿌리 없는 최룡해를 손쉽게 뽑아내고 최후의 승자가 됐다. 구호탄랑(驅虎呑狼) 이이제이(以夷制夷) 이호경식(二虎競食) 같은 삼국지의 계략들에 도통한 듯하다.
조연준에게 여한이 있다면 올해 77세로 늙었다는 것이다. 그것이 오른팔인 65세 황병서를 얼굴마담으로 내세우고 자신은 그림자 실세로 남은 까닭일 것이다. 최근 황병서에 대한 김정은의 신임이 날로 두터워지곤 있다지만 여전히 ‘어미새’ 조연준의 파워는 넘지 못하고 있다. 혹여 황병서가 배신한다 해도 조직지도부라는 뿌리에서 떨어져나간 줄기를 자르는 것쯤은 조연준에겐 일도 아닐 터이다.
대북 소식통에 따르면 오늘날 조연준은 각종 주요 비공개 회의를 주재하며 국가 정책까지 좌지우지하고 있다. 김정은은 그가 올리는 서류엔 무조건 서명한다고 한다. 후계구도에서 멀어져 있던 자신을 왕으로 밀어준 그보다 더 믿을 만한 사람을 찾긴 어려웠을 것이다.
김정은의 문고리를 틀어쥐고 권력을 행사하는 조연준을 보면 역사 속 ‘환관정치’가 환생한 듯하다. 조 씨를 비롯한 조직지도부의 ‘환관’들은 김정은 유일체제의 수호자로 자처하지만 사실상의 최대 수혜자이다. 장성택이 거머쥐었던 권력과 경제적 이권도 조직지도부에 빠르게 집중되고 있다. 한때 내로라하던 최룡해와 김양건을 황병서의 들러리로 세워 남쪽에 내려 보낼 정도다.
최룡해는 장성택 숙청에 가담했던 자신의 업보를 두고두고 후회할 것 같다. 그는 판이 이렇게 돌아갈 줄 몰랐을 것이다. 조연준보다 머리가 나빴던 것이 죄라면 죄다.
삼지연에서 함께 음모를 꾸몄던 보위부장 김원홍의 후회는 최룡해보다 몇 배로 더 클지 모른다. 군 보위사령관이던 김원홍은 장성택을 등에 업고 2012년 4월 보위부의 실세였던 우동측 1부부장을 밀어내고 그 자리를 타고 앉았다. 그때만 해도 조직지도부는 김원홍의 눈에 보이지도 않았다.
하지만 김원홍은 불과 3년 만에 목 떨어지는 날을 피 마르게 기다리는 신세가 됐다. 조직지도부가 군부에서 최룡해를 몰아내고 황병서를 올려 세웠듯이 보위부 수장도 조직지도부 아무개로 바뀌는 것은 시간문제가 됐다. 벌써 조직지도부는 김원홍의 아들 뒷조사를 하면서 압박해오고 있다 한다. 지금 김원홍이 할 수 있는 일은 기세등등한 조직지도부 환관들의 눈치를 살피는 푸들이 돼 자비를 구하는 것뿐이다. 물론 김원홍이 손에 쥐고 있는 황병서를 비롯한 조직지도부 실세들의 개인비리도 적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김정은의 문고리를 그들이 틀어쥐고 있는 한 잘못 건드렸다간 김원홍 3대가 멸족할 수 있다.
조직지도부는 김일성대 출신이 다수인 북한 최고의 엘리트 집단이다. 이들은 앞으로 라이벌 세력의 등장을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이대로라면 김정은은 조직지도부에 조종당하는 신세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김정은은 이대로 쭉 잡혀 살 것인가, 아니면 반전을 만들어 자신의 유일천하를 만들 것인가. 피바람이 분 뒤 강호에는 이제 김정은과 조직지도부 단둘이 남았다. 지금은 김정은이 조직지도부에 업힌 형국이다. 조직지도부가 제일 경계하는 점은 김정은이 보위부와 호위사령부를 동원해 자신들을 하루아침에 제거하는 시나리오일 것이다. 그땐 판이 어떻게 바뀔지 모른다. 과거 환관들은 위태로워지면 궁중반란도 서슴지 않았다. 김정은은 당분간 환관들의 득세를 더 지켜봐야 할 것이다. 허나 그가 훗날을 도모하려는 생각이 있다면 김원홍의 목은 지켜줘야 할 것이다. 그게 목전의 승부처가 됐다.
▲공군부대 훈련을 참관한 북한 김정은 노동당 제1비서 옆에서 웃고 있는 북한의 두 실세 황병서 인민군 총정치국장(왼쪽에서 두 번째)과 최룡해 노동당 비서(왼쪽 사진). (사진= 노동신문 늙은이들의 아부 모습)
2014-11-04 평양서 벌어졌던 김정은 암살미수 사건 전말
평양에서 김정은 암살 시도가 있었던 날은 2년 전인 2012년 11월 3일이었다.
이날 김정은의 일정은 완공을 앞둔 평양 문수거리 복합편의시설 류경원과 인민야외빙상장, 롤러스케이트장을 시찰하는 것이었다. 이 시설들은 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몇십 m밖에 떨어져 있지 않다. 하지만 당일 아침 한 남성이 류경원 인근의 누운 향나무 아래에 교묘하게 숨겨져 있던 장전된 기관총을 발견해 즉시 보위부에 신고했다.
명백한 김정은 암살 시도였다. 암살자는 김정은이 세 곳을 걸어서 둘러보는 기회를 노렸던 것으로 추정됐다. 그럼에도 김정은이 예정대로 류경원을 찾은 것은 대단한 용기였다.
범인은 끝내 잡히지 않았다. 그러나 최고 극비인 김정은의 동선을 미리 알 수 있는 사람이 극히 적은 데다 세계에서 총기가 가장 엄격하게 통제되는 평양에 해외에서 기관총을 밀수해 올 수 있는 사람이라면 배후에 거물이 있는 게 분명하다는 관측이 지배적이었다. 곧 가장 유력한 용의자로 김정은의 고모부 장성택이 지목됐다. 김정은이 시찰한 시설도 장성택 휘하의 인민보안부 내무군이 건설한 것이었다. 현장에서 김정은을 영접한 사람들도 내무군 장성들이었다.
하지만 무턱대고 장성택을 체포할 수는 없는 일. 이때부터 은밀하고도 끈질긴 미행이 시작됐다고 한다. 그래서였을까. 이후 장성택은 갑자기 모습이 사라졌고 남쪽에선 숙청설까지 나왔다. 모습을 다시 드러낸 이후에도 이듬해 4월 중순까지 불과 열세 차례만 언론에 나타났다. 2012년엔 김정은의 시찰을 무려 102회나 따라다녔던 그였다.
김정은 암살미수는 지금까지도 북에서 극소수만 아는 철저한 극비 사안이다. 기자 역시 오래전에 정보를 받고도 정보원의 안전 때문에 지금까지 보도하지 않았다.
이 사건은 그런 일이 있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충격을 주지만 이후 북한에서 나타났던 비정상적 행태를 설명해주는 핵심 퍼즐이라는 점에서도 중요한 사건이다.
사건 직후 김정은 관저와 별장을 비롯한 전용 시설 30여 곳에 장갑차 100여 대가 새로 배치됐다. 한 달 뒤 우리 당국도 수상한 낌새를 챘다. 12월 초 우리 정부 고위 관계자는 “이전과 달리 최근 김정은이 현지시찰을 하면 중무장한 경호원이 등장하고 행사장 주변에 장갑차까지 출동한다”며 “북한에서 큰 시위가 있었거나 인사에 불만을 품은 사람이 나타나는 것 아닌가 추정된다”고 말했었다.
이런 분위기는 당시 북한 매체의 보도에서도 그대로 드러났다. 이전에는 김정은 시찰 시에 경호원이 노출되는 일이 거의 없었다. 무장도 권총뿐이었다. 하지만 암살 시도 이후에는 자동총을 메고, 헬멧까지 쓴 김정은 경호원들이 노골적으로 사진에 등장하기 시작했다. 골프 가방이나 기타 가방을 멘 경호원들도 사진에 등장했다. 가방 안에는 기관총이나 저격총, 수류탄 등 중무장이 들었을 것으로 추정됐다.
불안해진 김정은은 11월에 국가안전보위부를 두 차례나 방문해 적대분자 숙청을 지시했다. 같은 달 갑자기 ‘전국 분주소장 회의’와 ‘전국 사법검찰일꾼 열성자 대회’가 3일 간격으로 잇따라 열렸다. 분주소장 회의는 13년 만에, 사법간부 회의는 30년 만에 열린 것이었다. 김정은은 이 대회에 “소요·동란을 일으키기 위해 악랄하게 책동하는 불순 적대분자와 속에 칼을 품고 때가 오기를 기다리는 자들을 모조리 색출해 가차 없이 짓뭉개 버려야 한다”고 지시했다.
동시에 ‘불순분자 소탕 캠페인’이 시작됐다. 모든 기관들은 수시로 ‘불순분자 검거 실적’을 제출할 것을 요구당했다. 탈북자들은 당시 내부 공포 분위기가 극에 이르렀다고 증언했다. 북한은 이듬해에는 1월부터 준전시 상태를 선포하면서 4월 말까지 대내외의 긴장 상태를 최고조로 끌어올렸다.
암살 시도 이후 김정은 경호 반경도 두 배로 늘었다. 과거엔 저격 가능 범위를 2km로 보고 그 안에 개미 한 마리도 얼씬거리지 못하게 했다면 암살미수 사건 이후엔 집중경호 구간이 4km로 늘었다. 휴대용 미사일을 날릴 수 있다고 보는 2차 경호 범위도 20km에서 40km로 늘었다.
암살 시도가 김정은에게 큰 정신적 충격을 준 것은 분명해 보인다. 이후 김정은의 군부에 대한 불신도 극에 달해 군 수뇌부가 수시로 물갈이 됐다. 이듬해 7월까지 북한 군단장의 절반 이상이 교체됐다. 북한 장성들의 계급장 널뛰기가 시작된 것도 이때쯤부터였다.
요즘 김정은의 전용기 애용을 두고 남쪽에선 자신감의 표출이라고 분석하지만 그 반대일 수도 있다. 차량 이동은 경로가 길고 시간이 많이 걸려 일정을 미리 알고 폭발물을 숨겨놓으면 막기 어렵다. 반면 전용기는 공항과 관계자 몇 명만 통제하면 된다.
물론 남쪽의 레이더엔 김정은 전용기가 포착된다. 하지만 김정은이 한국군 코앞에서 목선을 타고 다니는 것을 보면 그는 미국이나 한국이 자신을 암살함으로써 ‘북한 붕괴’라는 혼란스러운 사태를 만들지 않을 것이란 확신을 가진 듯하다. 반면 활발한 대외 활동을 하고 있는 김정은이 3년 넘게 북한 절반이 넘는 지역을 방문하지 않고 있는 것을 보면 오히려 내부를 더 두려워하는 것 같다.
김정은 암살 시도자가 장성택이었는지, 그의 숙청이 이 사건과 어떤 연관이 있는지는 현재로서는 알 수 없다.
장성택이 처형되고 난 뒤 생전의 그가 김정은 옆에서 뒷짐을 진 사진이 남쪽 언론에 오르내렸다. 이렇게 오만했으니 눈 밖에 났다는 식이었다. 그게 바로 2012년 11월 3일자 사진이다. 그날 장성택은 무슨 생각이었을까. 이젠 영영 땅에 묻혀 알 길이 없다.
2014-11-18 한국 드라마 실시간으로 보고있는 평양주민들
한국에 처음 와서 밤늦게까지 독수리 타법으로 타자 연습을 하던 때가 어제 같은데 벌써 12년이 흘렀다. 방에 틀어박혀 혼자 인터넷을 배운다고 씨름하다 컴퓨터가 다운된 날에는 멀리 보이는 ‘컴퓨터 크리닝’이란 간판을 용케 찾아내 배낭에 본체를 둘러메고 찾아가기도 했다. ‘컴퓨터를 청소해주는 곳’이라고 생각해 왔는데 빨래만 잔뜩 걸려 있어 이상하다 싶었다. 하지만 세탁소일 것이라는 생각은 전혀 못하고 사장에게 기어코 메고 온 컴퓨터를 고쳐 달라고 말했다. 지금 생각해도 웃음이 난다. 첫 휴대전화를 중고폰으로 구입한 날에는 사용법을 익히느라 밤을 새웠다. 그때 나는 흡사 타임머신을 타고 30년 뒤 미래 세계에 뚝 떨어진 사람 같았다.
그래도 지금은 타자가 일상인 기자란 직업을 얻었고, 빠르게 변하는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흐름에도 올라타 방문자가 6200만 명이 넘는 블로그도 운영하고 있으니 타임머신 타고 온 것치곤 잘 적응한 것 같다. 하지만 최신 변화를 따라가긴 여전히 숨 가쁘다.
요즘 북쪽을 건너다 보면 저쪽은 나보다 더 정신없는 것 같아 안쓰럽다. 보위부 쪽 이야기를 전해 들으니 돌아버릴 정도라 한다.
내가 북에서 살 때는 비디오테이프 플레이어만 있어도 부잣집이었다. 그런데 이제는 북한에서도 액정표시장치(LCD) TV, 스마트폰, 태블릿PC를 어렵지 않게 살 수 있으니 북쪽 사람들은 최근 10여 년 새 30년을 훌쩍 건너뛴 셈이다. 밀려드는 첨단 기기의 홍수 속에 보위부가 수십 년 쌓아 왔던 통제 노하우도 물거품처럼 밀려가고 있다.
2000년대 초반 CD 플레이어가 북한에 급속도로 퍼져 한국 드라마를 빠르게 확산시키자 보위부는 집집마다 다니며 CD 플레이어에 검열 딱지를 붙이기에 바빴다. 급기야 2004년 ‘109상무’라는 불법 동영상 단속 전담 특수조직을 만들고 몇 년 뒤엔 ‘109연합지휘부’란 거창한 이름으로 승격까지 시켰다.
2005년 이후 CD와 휴대용 저장장치(USB)를 동시에 쓸 수 있는 데다 배터리가 장착돼 전기가 없어도 동영상을 볼 수 있는 MP4(일명 노트텔)가 퍼지자 보위부엔 비상이 걸렸다. 증거를 잡기가 너무 어려웠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CD룸엔 북한 영화를 넣고, 한국 영화는 USB를 꽃아 보다가 단속반이 뜨면 USB를 숨기고 북한 영화를 보았다고 우겨댔다. 이걸 단속하느라 정신없는 사이 요샌 더 골치 아픈 MP5라는 태블릿PC와 유사한 기기가 새롭게 등장했다. 이 기기에 장착되는 마이크로SD칩은 영화 수십 편을 저장할 수 있지만 손톱만 한 크기여서 최악의 경우 삼켜버리면 된다.
스마트폰과 태블릿PC에 익숙한 젊은 세대는 아예 블루투스 기능을 활용해 동영상이나 불륜 소설을 서로 전송해 주고받는다. 단속에 걸릴 것 같으면 삭제해버리면 그만이다.
보위부는 흘러간 과거가 그리울 것이다. 옛날엔 어쩌다 전기가 들어온 아파트 단지에 불시에 쳐들어가 전기 차단기를 내리고 집집마다 뒤지면 됐다. 한국 드라마를 보던 사람들은 멈춘 기기에서 테이프나 CD를 꺼낼 수 없어 꼼짝 못하고 잡혔다. 하지만 지금은 확실한 심증을 갖고 몸수색을 해도 증거물을 찾기 어렵다. 김정은이 스마트폰 생산을 독려하는 세상인지라 최신 기기를 무작정 빼앗겠다고 선포하기도 쉽지 않다. 그랬다간 보위원의 자식들부터 반동이 될지 모른다.
결국 보위부는 대세에 굴복해 최근 노트텔 사용을 합법적으로 인정하고 말았다. 올 10월 초까지 집집마다 다니며 조사를 한 뒤 승인된 기기만 쓰라고 엄포를 놓았다. 하지만 사람들이 노트텔 2대를 구입해 하나만 승인 받고, 하나는 숨겨놓고 몰래 본다면 방법이 딱히 없다는 것쯤은 자기들도 안다. MP5도 지금은 무조건 몰수하지만 나중엔 결국 노트텔처럼 사용이 허용될 것이다.
고위 간부들부터 앞다퉈 구매하는 LCD TV도 정말 골칫거리다. 평양에서 한국 방송을 직접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지난해까지 평양에서 살다 온 탈북자는 한국 방송을 집에서 봤다고 했다. 보위부 전파감독국 사람들은 남쪽에서 강한 출력으로 TV 전파를 쏘고 있어 막기 어렵다고 하소연한단다. 북한은 평양 주변에 안테나를 여러 곳에 세우고 시내를 향해 강한 방해 전파를 쏘고 있지만 잦은 고장과 전력난 때문에 방해 전파를 쏠 수 없을 때가 많다. 반면 평양엔 거의 모든 집에 축전기가 다 있다. 국가엔 막을 전기가 없지만, 개인에겐 몰래 볼 전기가 있는 것이다.
평양도 막기 어려운 판이니 남포를 비롯한 서해안 지역에선 한국 TV를 얼마든지 볼 수 있다. 특히 통제에도 불구하고 인기리에 밀매되는 휴대용 LCD TV를 갖고 산에 오르면 맘 편히 한국 TV를 볼 수 있다.
북한에서 볼 수 있는 한국 채널은 KBS를 위주로 SBS, MBC 프로그램이 두루 섞인 것이라 한다. 삐라에 거품을 무는 북한이 TV 송출에 대해선 한마디도 하지 않는 것이 선뜻 이해되지 않는다. 한국 정부가 삐라도 못 막아준다고 하는 판이니 어차피 말해봐야 본전도 못 찾을 것이라 판단한 걸까, 아니면 이런 프로그램 정도는 양호하다고 판단한 걸까. 만약 북한에 채널A의 ‘이제 만나러 갑니다’와 같은 프로그램을 송출한다면 그래도 침묵을 지킬 수 있을지 정말 궁금하다.
2014-12-02 평양 부모들 “악” 소리 나는 유치원생 뒷바라지
평양에도 유치원이 있다.
그런데 유치원 입학식이 끝나면 신입생은 한동안 교양원(교사)들의 이런 질문에 대답해야 한다. “철수 어린이, 아침에 뭘 먹었어요? 영희 어린이는?”
이것은 일종의 호구조사다. 아침 식사로 뭘 먹었는지 며칠만 조사하면 그 집 생활수준을 알 수 있다. 이런 일은 언제부턴가 당연한 입학 의례가 됐다. 각 가정의 형편을 파악하는 것은 교양원에게 제일 중요한 일이다. 유치원은 돈으로 시작해 돈으로 끝나기 때문이다.
부모는 유치원 입학 전부터 돈을 낸다. 벽지 비닐장판 페인트 횟가루 시멘트 청소도구 장난감 등 유치원에 필요하다는 항목은 수십 가지다. 대부분 유치원은 입학 때 북한 돈 8만∼10만 원을 내는 것이 일반적이다. ‘입학 턱’이라는 명목으로 유치원 교사들에게 4만∼5만 원어치를 접대해야 하는 일도 있다. 아무리 적게 잡아도 입학 전에 12만 원이 드는데, 11월 말 북한 환율로 약 15달러에 해당하는 돈이다. 얼핏 많아 보이지 않는다 하겠지만 쌀 20kg 또는 옥수수 100kg은 살 수 있는 돈이다. 이 정도 식량이면 4인 가정이 한 달 굶지 않고 살 수 있다.
부모들의 ‘유치원살이’는 거기서 끝나지 않는다. 매달 쌀 3kg과 식비 5000∼1만 원을 내야 한다. 반찬도 챙겨 보내야 한다. 유치원에선 점심에 국과 밥만 주고 그 외 간식으로 매일 우유 1잔과 과자 또는 빵을 한두 개씩 줄 뿐이다. 그뿐이 아니다. 교사들은 다음 날 갖고 와야 하는 각종 항목을 수첩에 적어 아이에게 보낸다. 거기에만 한 달에 5만 원 넘게 든다. 하지만 안 보낼 수는 없는 일. 못 가져가면 아이를 욕하고 벌을 세우거나 집으로 되돌려 보내는 교사들이 있다. 어떤 교사는 자기 생일은 물론이고 남편 생일, 집안 대소사 때까지 노골적으로 돈과 물건을 요구한다. 안 주면 아이에게 “너희 부모는 도덕도 없냐”고 욕하기도 한다.
교사가 요구하는 것을 잘 들려 보냈다고 마음 놓아서도 안 된다. 대청소나 환경미화 작업 때 노력 봉사를 요구하는 교사도 있고 도로 보수나 농촌 지원 등 ‘사회동원’을 대신해 달라는 사람들도 있다. 뇌물 요구는 더 많다. 교사들은 부모의 ‘열성’에 따라 아이에게 공부를 잘하거나 좋은 일을 했을 때 상으로 주는 빨간 별을 더 주거나, 싸움이 붙었을 때 한쪽 편을 드는 것으로 보답한다.
평양 유치원들도 해마다 자연관찰, 현장학습 등 행사가 늘고 있다. 체육대회도 예전엔 국제아동절인 6월 1일에만 있었지만 지금은 1년에 3번 이상으로 늘었다. 그때마다 부모들은 죽어난다. 심지어 돈이 없어 아이를 유치원에 안 보내거나 낮은 반을 건너뛰고 높은 반에 보내 빨리 졸업시키려는 부모도 많다.
평양은 교육열이 높은 곳이다. 아이 교육은 부모 재력에 따라간다. 교사들은 돈 내는 아이들만 따로 남겨 국어나 수학을 더 공부시켜 보낸다. 요즘 평양에선 유치원생 시절부터 피아노 배우는 바람이 불고 있는데, 유치원에서 배우려면 한 달에 10달러를 내야 한다. 더 많이 내면 선생이 집까지 찾아가 가르쳐준다.
이런 현실에서 아이들이 뭘 배울지 뻔하다. 누가 전학이라도 오면 아이들이 몰려와 “너희 엄만 뭐 하니”부터 묻는단다. “(장마당에서) 화장품 장사”라는 식으로 답하면 “돈 좀 빠지니(벌리니)”라고 되묻고 “그냥 그렇다” 하고 받아친단다. 아이들은 집에 가면 엄마들이 모여 장사 이야기를 하는 것만 보고, 유치원에선 부모 돈에 따라 대접받는다. 그러니 아이에게도 집안 경제력이 최대 관심사인 것이다.
평양 유치원에도 등급이 있다. 최고 명문인 창전거리 경상유치원은 비공식 입학금이 500달러다. 또 매달 50달러 이상이 추가로 든다. 김정은이 2012년에 이 유치원을 두 번씩이나 방문했다. 북한 언론은 “장군님의 사랑 아래 어린이들이 훌륭한 교육환경에서” 어쩌고저쩌고하는데 그 유치원 입학에 얼마 드는지는 북한에서 김정은만 모를 것 같다. 참, 이 유치원은 한국에서 방문한 사람들의 단골 관광코스이기도 하다.
유치원은 졸업할 때에도 돈이 든다. 북한엔 졸업식 때 학부모가 돈을 모아 선생에게 기념품을 주는 오랜 전통이 있다. 과거엔 옷이면 무난했지만 요샌 선생이 냉장고 컴퓨터 세탁기 등을 먼저 요구한다고 한다. “나도 돈 많이 써서 이 자리까지 왔는데 본전 뽑아야 할 것 아니냐”는 것이 교사들의 속셈이다.
기념품까지 주고 나면 고달픈 유치원은 드디어 졸업하지만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다. 소학교 초급중학교 고급중학교 대학이 더 큰 입을 벌리고 차례로 기다리고 있으니….
그러고 보니 평양 유치원들은 과거 남쪽 행태와 크게 다르지 않고, 심지어 부정적인 모습까지 빼다 닮은 듯하다. 물론 가정의 부담이나 노골적으로 갈취당하는 정도는 북한이 몇 수 위이다. 남북이 서로 경험을 교류한 적도 없는데, 악덕 행태가 닮아 있는 건 참 희한한 일이다. 요즘에는 너무 돈이 많이 들어 아이를 더 못 낳는다는 푸념까지 남북이 닮았다.
이러면서도 북한은 세금 없는 사회주의 무료 교육 제도가 있는 낙원이라고 남쪽을 향해 ‘자랑질’이다. 뻔뻔하다. 정작 북한 부모들은 각종 명목으로 매일 뜯기는 데 지쳐 유료 교육제도가 도입돼 그냥 정해진 돈만 내는 남쪽을 부러워하고 있다.
그나마 살기 좋다는 평양의 유치원들이 이 정도면 지방은 굳이 설명이 더 필요할까 싶다. 요즘 북한을 평등의 천국이라 떠들고, 이 말을 침 흘리며 들어주는 남쪽 사람들이 적지 않다고 해서 ‘지상낙원’ 평양의 유치원 생활을 소개해봤다.◎
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