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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이탈주민(탈북민) 이야기3/ 탈북 지성인들이 말하는 북한2/ 김철추/ 2014.02.06 10:05 김일성 생가 문짝을 통째로 뜯어간 김모 청년- 2016.01.25 물부족으로 아파트 고층을 기피하는 평양 시민들

상림은내고향 2021. 10. 30. 17:57

북한 이탈주민(탈북민) 이야기3/ 탈북 지성인들이 말하는 북한2

■ 김철추 - 얼굴없는 탈북자 - 조선일보

▶독자여러분께 말씀드립니다 필자는 북한에서 오랜 기간 중앙기관에서 근무하다가 한국에 온 지 얼마 안 되어 아직 한국식 글과 문장표현을 잘하지 못합니다. 북한식 말투와 표현을 쓰는 것 이해바랍니다. 제가 쓰는 글은 북한에서의 실제 사건들입니다. 직접 보고 체험하거나 비밀문건으로 보관되어 있는 사건 기록철을 본 것에 기초한 진실입니다. 등장인물 이름도 실명이라는 것을 밝힙니다. 추상적이거나 추리가 아닌 북한에서 발생한 실제 사건들이라는 것을 알려 드립니다. 김철추

 

2014.02.06 김일성 생가 문짝을 통째로 뜯어간 김모 청년

결국 3대가 돈 앞에 허무하게 무너지는 북한의 60년 혁명교양사업

김모씨는 북한에서 제1위의 기본 대학이자 북한 로동당과 정부 간부들을 가장 많이 배출한 김일성종합대학에서 물리학과를 3학년까지 다녔다. 24살 김씨는 대학 내에서 너무나도 노골적으로 진행되고 있는 교원들에 대한 뇌물강요와 학생 초급간부들의 금품 강요, 학비지원 단절 등으로 고민이 깊어만 갔다.

 

어떻게 하면 목돈을 벌어 생계를 유지해볼까 궁리에 궁리를 거듭하던 그는 누군가로부터 “한국으로 가라. 이왕 가려면 빈손으로 가는 것보다 만경대에 있는 김일성 생가의 유물 한 점이라도 갖고 가면 많은 돈을 받을 수 있다”는 말을 듣게 됐다.

 

그는 만경대 혁명사적관 관리원을 통하여 만경대 유적 중 다른 것은 다 새 것으로 교체된 것이고 부엌에서 방안으로 들어가는 문짝(대략 60 80Cm정도의 사립문)만이 김일성이 어려서 살 때부터 있었던 물건이라는 것을 알아냈다. 그는 이전부터 알고 지내던 만경대 혁명사적관 여성 강사에게 돈을 주고 당시 무장보초를 서고 있던 보안원에게 말을 시키면서 주의를 다른 곳으로 돌리게 했다. 그 사이 자신은 출입문이 있는 반대쪽 다락 뒤로 넘어들어가 부엌에서 방안으로 들어가는 문을 뽑아가지고 달아났다. 2011년 3월말 사건이었다.

 

그 다음 날 문짝이 사라진 사실을 발견한 만경대 고향집 관리원이 사적지 관리소 당 비서에게 보고하면서 평양시당에까지 보고가 올라갔다. 이어 중앙당에도 통보가 되자 당간부들이 사색이 되어 만경대로 달려갔다. 당시 몰려든 간부들 승용차가 거의 100여대에 달했다.

 

중앙당은 지금까지 혁명전통 교양을 60년 이상 진행해왔는데 ‘조선의 심장’이라고 하는 만경대 생가의 문짝을 도난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충격에 빠졌다. 당은 즉시 국가안전보위부와 보위사령부, 인민보안부, 최고검찰소에 문짝을 찾아오라는 비상지시를 내렸다. 또 평양시를 비롯한 전국 각지의 각 인민반을 통하여 문짝의 그림을 그려 회람하게 하고, 그것을 본 사람은 즉시 보위부나 보안기관에 신고하라는 특별 지시를 비밀리에 내렸다.

 

달아난 김모는 문짝을 가지고 남포시 강서구역 태평리에 있는 산골 집에 숨어 있으면서 수사가 좀 가라앉기를 기다리다가 보름 후에 황해남도 해주시에 내려가 개인집에 거처를 정했다. 이어 해주에서 중국 대련(大連)항으로 가는 석탄 수출 배를 이용해 탈북하려다 불행히도 숙박검열에 걸려 체포됐다. 그는 해주시 보안소에 구류됐다.

 

이 사실을 통보받은 인민보안부에서는 즉시 해주시로 내려가 김모를 압송해 평양시 보안국 구류장에 구금하고 심문을 진행하였다.

 

그런데 국가안전보위부와 보위사령부에서 이 문제는 정치 문제이기 때문에 자기네들에게 신병을 넘기라고 요구했다. 하지만 인민보안부는 자기들이 체포한 사람이므로 자기들이 심문 처리하겠다고 맞섰다. 결국 중앙당의 결정에 따라 김의 신병은 국가안전보위부에 넘어갔고, 국가안전보위부는 조사를 마친 뒤 그와 그의 가족 3대를 멸족시켰다. 화가 난 김정일의 지시에 따른 것이다.

 

사건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만경대 문짝을 도난당한 책임을 따지기 위하여 중앙당조직지도부 부부장 민병철을 책임자로 하는 중앙당 검열그루빠(그룹)가 인민보안부에 내려갔다. 2011년 4월 중순이었다. 중앙당 그루빠가 인민보안부에 내려가자 당시 국방위원회 인민보안부장이었던 주상성은 인민보안부 전체를 검열하지 말고 연관부서인 경비훈련국만 검열하라고 권고했다.

 

이 사실을 보고받은 김정일은 대로하여 감히 중앙당 검열에 대하여 반발하였다고 주상성을 상장(중장)에서 상좌(중령과 대령 사이)로 강직시키고 인민보안부장에서 해임시켜 평안남도 대동군 보안서장으로 좌천시켰다. 이어 한 달쯤 지난 2011년 5월 말, 주상성을 고령을 이유로 모든 직무에서 해임해 버렸다.

 

주상성은 인민무력부 3군단장을 하다가 인민보안부장으로 부임을 했었는데, 당시 보안기관에 대한 이해가 전혀 없어 보안원들을 군대와 같이 강하게 단련시켜야 한다며 매주 월요일 아침 인민보안부 요원들을 국별로 대열 훈련을 하게 했다. 이 때문에 주상성이 낙마하자 보안부 요원들은 대단히 좋아했다.

 

하지만 새 인민보안부장으로 인민무력부 작전국장인 이명수가 부임하자 보안부 조직원들의 불만은 더욱 높아졌다. 이어 이명수도 실각되고 인민무력부 부총참모장으로 있던 최부일이 후임으로 임명했다. 문짝 하나가 엄청난 풍파를 일으킨 것이다.

 

이 사건은 김일성 혁명사상으로 북한 내의 모든 간부와 주민들을 튼튼히 무장시켜 주체혁명 위업을 완수하자며 60여 년 동안 진행하여 온 북한의 혁명전통교양사업 결과가 돈 앞에선 얼마나 무력한지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김일성에 이어 김정일 정권이 홍보해온 인민중심의 사회주의가 김정은 시대에 얼마나 더 지속될 수 있겠는가.

 

2014.02.13 현상금 1만달러가 내걸린 희대의 북한 은행강도범

가짜 수류탄 던져 4만2000달러 털었다가 3족이 처형

북한에서 공화국 영웅칭호나 훈장, 표창장, 김일성이나 김정일의 이름을 새겨넣은 시계를 포상으로 주고 여기다 거액의 현상금을 내걸고 수사를 진행한 전례없는 사건이 발생했다. 현상금은 북한돈도 아니고 미국돈 1만달러였다.

 

2003년 5월말경 사회주의 이상이 넘쳐난다는 평양의 중심인 김일성광장에서 약 200m 떨어진 곳에 있는 중앙무역은행에 무장 강도가 들어와 대낮에 미화 4만 2000달러를 강탈해가지고 달아나는 중대한 사건이 발생했다. 범인은 인민무력부 2군단 포병대대에서 포차를 운전하던 26살 난 박모라는 청년이었다.

 

그는 8년 동안 군사복무를 하면서 제대로 먹지를 못해 결핵에 걸렸다. 이후 평양시 만경대구역 광복거리 당상동에 있는 자기 집에 와서 병 치료를 하다가 돈이 없어 치료를 제대로 못하자 “이래도 죽고 저래도 죽을 바에는 한번 강도질이라도 해서 돈을 써 보고 죽자”라고 작정했다. 자식 치료할 돈이 없어 한탄하던 부모는 범행을 도왔다. 내각 문화성 자재상사 부원으로 일하던 아버지는 가짜 수류탄을 만들어주었다. 나무를 수류탄 모양으로 깎아 검은 칠을 한 뒤 영화촬영 때 사용하는 수류탄 심지를 박아 넣은 것이었다. 그의 어머니는 장마당에서 중국산 장난감 권총을 사가지고 왔다. 박모는 이 무기들을 가지고 낮 12시경 중앙무역은행을 습격하였다

 

▲2006년 보도된, 북한 함경북도 단천역 근처의 암시장에 붙어 있다는 벽보.‘ 선군정치 바람에 백성 굶어죽는다! 군대들에게만 주지말고 인민들부터 쌀을 달라’는 내용을 주민들이 지켜보고 있다. 이 화면은 2006년 5월말 한 탈북자가 촬영해 일본 후지TV에 제공한 것을 MBC가 보도했다.

 

자기의 연인이었던 여성과 함께 택시를 타고 중앙무역은행 앞에 가서 택시와 여성을 대기시키고 혼자 무역은행 2층에 올라가서 점심 금고 정리를 하고 있던 여성 은행직원 4명에게 권총을 들이대고 금고에서 4만2000천 달러를 강탈하였다.

 

이어 “소리치면 죽이겠다”고 위협하면서 나무수류탄의 심지를 뽑은 뒤 수류탄을 집어던졌다. 수류탄에서 연기가 나면서 당장 터질 듯 돌아가자 은행직원들은 바닥에 납짝 엎드렸다. 그 틈에 그는 2층에서 뛰어내려 대기하고 있던 택시를 타고 평양시 사동구역 송신동까지 가서 택시운전기사에게 100달러를 던져준 뒤 연인과 달아났다.

 

이 사건을 보고 받은 김정일은 사회주의 망신이라고 하면서 무조건 잡아내라고 하며 수사기관들에 그를 잡으면 포상금 1만 달러를 주겠다고 비밀리에 선포하고 전국적인 수사를 진행하도록 하였다. 당시 택시운전수가 박모와 애인의 얼굴 그림을 그려냈는데, 여성의 얼굴 표상은 근사하게 그려냈지만 박모의 얼굴은 전혀 닮지 않은 모습으로 그려냈다. 얼굴 그림은 전국에 배포됐다.

 

박모 연인의 부모들은 당시 리비아에 의료진으로 나가 있었고 연인은 만경대구역 광복거리 칠골동에 있는 사촌언니의 집에서 살고 있었다. 당시 평양시 방어사령부 보위원으로 근무하던 사촌형부가 수사 사진을 보고 처제를 체포하여 자기 보위부에 데리고 가서 심문하자 박모의 연인은 “3000달러를 받았지만 처음엔 내용도 모르고 따라 갔었다”고 고백하였다.

 

수사기관은 그 여성을 통하여 남자의 집을 알아낸 뒤 그의 진짜 사진을 전국에 배포해 수배에 들어갔다. 박모는 연인에게 3000달러를 주고 2만달러는 자기의 병 치료로 고생한 어머니에게 주고 나머지를 가지고 달아났다. 평양시를 벗어나기 위하여 인민무력부 총참모부 산하 경무관에게 300달러를 주고 그의 오토바이를 타고 초소들을 통과하여 강원도 원산시로 갔다.

 

박모는 원산에서 자기 집에 전화를 해서 수사결과를 알아보다가 전화도청으로 위치가 노출되어 체포조가 원산으로 내려가자 중국으로 달아날 생각으로 함경남도 고원군으로 건너갔다. 그는 그곳에서 점심을 먹으러 식당에 들어갔다가 식당에 있던 경무부 경무원(군사칭호 당시 하사)에게 체포되었다. 그 경무원은 마침 식당에 들어와서 “너무 배가 고프니 밥 한 그릇만 달라”고 애걸하고 있던 참이었다.

 

결핵을 오래 앓고 신체가 약했던 박모는 반항 한번 제대로 못 해보고 잡히고 말았다. 그를 잡은 경무원은 북한 역사상 처음으로 미화 1만 달러의 포상금과 보름동안의 포상휴가를 받았다.

 

박모가 평양을 벗어날 때 300달러를 받고 도주용 오토바이를 빌려주었던 인민무력부 총참모부의 경무관은 총살되었다. 박모가 잡히기 전까지 그의 어머니는 “아들한테서 돈은 하나도 안 받았으며 사건 자체를 모르고 있었다”고 우기다가 아들이 잡혀 사실이 드러나자 산속에 묻어 놓았던 돈을 찾아내 전부 반환하였다. 이후 박모와 그의 가족은 물론, 박모의 연인과 연인의 온가족도 김정일의 지시로 3대가 멸족되었다.

 

이 사건은 북한에서 인민대중 중심의 사회주의가 세상에서 부러운 것이 없다고 선전해오던 것이 얼마나 허황한 것인가를 다시 한 번 만천하에 과시한 희비극이었다. 또한 이 사건은 아무리 오래동안 사상교육을 했어도 먹을 것이 없고 돈이 없으면 수령과 당에 대한 충성심이 한낱 헛껍데기에 불과하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준 사건이었다.

 

우리 한반도, 나아가 세계의 평화를 위하여 인류에게 핵무기 도발을 하려는 어리석기 그지없는 김정은의 독재정권이 하루빨리 종식되도록 대한민국 국민들이 적극적으로 나서주길 바란다. 햇볕정책은 김정은 독재정권을 연장시키는 허망한 정책이라는 것을 똑바로 알고 허위와 거짓의 진창 속에서 북한주민들이 벗어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란다.

 

2014.02.28  2010년 평양에서 3000명 시위, 1000명 체포…인민들의 첫 대규모 집단 행동

정부가 해외취업 미끼로 돈 사취하자 항의, 인민의 첫 승리

1995년도부터 시작된 북한의 일명 ‘고난의 행군’으로 약 10년 동안 300만 명이 넘는 아사자가 발생했다. 그러나 2009년도까지는 주민들이 악착같이 돈을 벌어 국가의 배급 없이도 살 수는 있게 되었다.

 

그러나 국고가 텅 비고 경제적 인플레가 형성되자 김정일과 김정은은 2009년 12월 기습적인 화폐개혁을 단행하였다.

 

화폐개혁으로 사람들 사이에 “인민들이 좀 살 만하니 정부가 인민들의 주머니 돈을 털어낸다”는 비난이 쏟아지자, 화폐개혁을 주관하였던 당시 당 계획재정부장 박남기를 미국과 남조선 정보기관의 지령을 받은 간첩으로 몰아 총살해버렸다. 또 그의 가족 3대를 요덕에 있는 15호 정치범관리소로 보내고, 강연회를 통해 이를 인민들에게 홍보하는 비열한 만행을 저질렀다. 그러나 많은 인민들은 이에 속지 않고 “박남기만 애매하게 ‘보쌈’에 걸려 죽었다”고 이구동성으로 말하였다. 화폐개혁 실패의 책임을 박남기한테만 떠넘긴다는 것은 북한에서 비상식적인 일이다. 이런 큰 정책이 김정일이나 김정은, 당의 비준 없이 추진됐다는 발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다. 김정일은 TV 프로그램이나 신문의 편집까지도 다 보고 관할했었다.

 

▲일을 마치고 지하철로 향하는 평양 여성들. 2002년 촬영/교도통신

 

아득바득 먹고 살기 위하여 저축하였던 돈을 국가에 다 몰수당하고 또다시 식량난 등 생활의 어려움에 처하자 주민들은 노골적으로 김정일과 김정은을 향한 불만을 드러냈다.

 

그러던 중 평양시 당국은 2006년도부터 주민들에게 중국 대련에 있는 양초공장에 데리고 나가 일을 하도록 해주겠다면서 40세 미만 여성 약 500명한테서 1인당 400달러를 거둬들였다. 또, 다른 사람보다 먼저 데리고 나가고 좋은 자리를 주겠다며 평균 400~500달러를 뇌물형식으로 더 받고 나아가 여성들을 희롱까지 하는 사건이 터졌다. 이른바 ‘장성무역회사 사건’이다. 이 회사는 평양시 인민위원회(한국으로 보면 서울시청) 도시경영국 산하 기관이었다.

 

피해자들은 2006년부터 2010년까지 4년 동안 속기만 했다면서 자기들의 돈을 돌려달라고 장성무역회사에 항의했다. 이에 박춘봉 사장은 자기는 그 돈을 하나도 안 쓰고 평양시 인민위원회에서 그 돈을 썼다며 인민위원회로 책임을 떠넘겼다. 하지만 평양시 해당부서에서는 자기들은 그 돈에 대해 모르니 돈을 준 장성무역회사에 가서 찾으라며 책임을 회피했다.

 

화가 난 피해자들은 각자 개인적으로 간부들을 찾아가 “권력을 이용해 돈을 찾아주면 그 돈의 절반을 주겠다”고 제안하기도 했다. 이에 당시 김정일의 정치 권모술에 환멸을 느끼던 일부 간부들은 그들에게 “집단적으로 중앙당에 찾아가 김정일에게 직접 평양시 인민위원회와 장성무역회사에 대한 억울함을 호소하면 돈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부추겼다.

 

그 말을 들은 피해자들은 서로 연락을 취하며 각기 형제, 친척, 친구들을 대동한 채 정해진 일시와 장소에 모이기로 했다. 2010년 4월 17일 오전 10시쯤, 이들은 ‘중앙당 1접수’ 문 앞에 모여 국가기관이 개인들의 돈을 사기로 떼먹고 돌려주지 않고 있으니 김정일과 당이 이 억울한 사연을 해결해달라며 약 1시간 동안 항의 겸 호소를 하는 시위를 벌였다. 접수실 앞에는 1000명 정도가 모였고, 그 주변엔 2000명 정도가 모여 여차하면 합세할 요량으로 기회를 보고 있었다.

 

▲평양시 창광거리에서 단발머리 북한 신여성이 여성 교통안전 보안원 옆을 지나가는 모습. 2007년 10월3일 촬영./청와대 사진기자단

 

이날 사건은 노골적으로 반(反)김정일·김정은, 반당, 반정부 시위는 아니었으나 개인적으로가 아니라 집단적으로 중앙당 1접수 앞에까지 몰려가 항의를 한 것은 전례없는 일이었다. 특히 정수분자(精粹分子)들만 살고 있는 평양시민들 속에서 일어난, 북한사상 첫 대중적 시위이자 반사회주의적 행동으로서 상징적인 의미가 있는 사건이었다.

 

집단적인 행동을 제일 무서워하는 김정일은 화가 나 “사회주의 사회에서 있을 수 없는 대중적 시위행동”이라며 평양시 인민보안국에 지시하여 시위자 전원을 잡아들이라고 지시했다. 즉시 평양시 보안국 기동순찰대 2000명이 투입되어 중앙당 접수 앞에 모여 있는 1000여명을 잡아가자, 주위에서 기회를 엿보던 2000여명은 자진 해산했다.

 

중앙당 간부들이 김정일에게 “1000여명의 사람들을 다 잡아 처리하면 화폐교환으로 가뜩이나 심리가 뒤틀어진 많은 사람들이 시위를 확산시킬 수 있다”는 보고를 했다. 이에 김정일은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와 내각에 “조사단을 만들어 그들의 제기사항을 구체적으로 파악하고 대책을 세우라”고 지시하였다.

 

조사단은 평양시 인민보안국에 가서 구류소에 억류되어 있던 사람들을 만나 사태를 파악한 뒤 평양시 인민위원회와 장성무역회사에 잘못이 있었다고 김정일에게 보고했다. 보고를 들은 김정일은 평양시 인민보안국에게 시위대를 전원 석방하라고 지시하고 평양시 모란봉구역 재판소엔 재판을 빨리 진행해 돈 떼인 사람들에게 돈을 돌려주라고 지시하였다. 평양시민들의 첫 대중적 항의신소(抗議伸訴) 운동은 이렇게 인민의 승리로 끝난 셈이다.

 

그러나 장성무역회사에서는 이미 돈을 다 탕진하였기 때문에 모란봉구역 재판소가 회사에 남은 돈 8000달러와 잡화상품류 2만달러어치만을 몰수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 돈으로 500여명의 피해자들에게 다 변상하기가 힘들자 간부들과 안면이 있는 사람들에게만 전액 보상을 해주고 다른 사람들에겐 제대로 보상을 해주지 않았다. 보상을 제대로 못받은 일부 피해자는 7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돈을 돌려달라며 모란봉구역 재판소 앞에 매일 400~500명씩 집단 항의를 하고 있다고 한다.

 

장성무역회사 사장 박춘봉은 이전에 김정일의 여동생 김경희가 부장으로 있던 경공업부에서 과장으로 근무하면서 김경희와 친분관계를 쌓았기 때문에 사법처리를 면하고 석방됐다. 재판소는 그에게 계속 사장으로 있으면서 돈을 벌어 갚으라는 결정을 내렸다. 사건에 연루된 힘 없는 회사 관계자 3명은 각각 13년, 9년, 7년의 노동교화형을 선고받았다. 이에 분개한 많은 주민들은 평양시 중구역 오탄동에 있는 박춘봉의 집으로 찾아가 집 대문을 도끼로 부수며 난동을 부리기도 하였다.

 

위 사건은 평양시민들이 처음으로 북한정권 하에서 중앙당에까지 집단적으로 몰려가 김정일에게 항의신소를 진행한 첫 대중적 봉기로 기록될 것이다.

 

평양 시민들은 각성되어가고 있다. 김정일의 독재정권을 물려받은 김정은이 이제라도 인민을 위한 참신한 새 민주정치를 실시하지 않는다면 각성되어가는 평양시민들의 거센 대중폭동에 직면할 수 있음을 똑바로 인식해야 한다. 김정은 정권은 김일성의 말을 잊지 말라. “착취와 압박이 심한 곳에는 무조건 반항이 있기 마련이다.”

 

2014.03.06 룡천폭발사건은 반체제 인사들의 거사,

북한 애국 남아들이 숨죽여 부르는 저항의 노래

최근 북한의 애국적인 남아들은 이런 노래를 부르고 있다.

 

1. 구천에 사무쳤네 백성들 원한소리

피눈물 고이였네 억울한 이 세상

산촌아 말해다오 부모처자 빼앗기고

백성의 등뼈 갉는 이 세상 어이 살리

 

2. 칼집에 꽂힌 장검 보습을 벼리여서

사래긴 논과 밭을 갈았으면 좋으련만

나서라 형제들아 김정은이 몰아내고

가슴에 쌓인 원한 장부답게 풀어보자

 

눈에 힘을 주고 숨 죽여 이 노래를 부르는 사람들은 10년 전 룡천을 잊지 않는다. 2004년 4월 22일, 북한 평안북도 룡천군역 화차 대피선에서 낮 12시쯤 거대한 폭발이 일어났다. 개천-태성호 물길 공사용으로 중국에서 수입해온 질안비료 한 방통(100t)이 폭발하고, 그 폭발로 인해 옆에 연결돼 있던 유리를 실은 화차가 같이 폭발하면서 수많은 유리조각들이 파편으로 비산(飛散)했다.

 

새벽에 신의주역에서 내려와 룡천역 대피선에 세워둔 2개의 화차에서 그날 오전 11시 30분쯤 전기기관차의 고압선이 원인 모르게 끊어져 화차 지붕에 닿으면서 전기 불꽃방전이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그것을 본 많은 사람들이 무슨 일인가 하여 화차 주위에 몰려들었고, 특히 오전 수업을 마치고 점심을 먹기 위해 집으로 가던 룡천소학교(초등학교)의 어린 학생들이 화차 주위에 많이 몰려들었다. 이 때문에 12시 쯤 발생한 폭발로 어른들보다 초등학생들 사상자가 더 많이 발생하였다.

 

▲룡천 폭발사건 당시 건물이 대파된 룡천 초등학교 모습.

 

당시 폭발로 60~70여명이 현장에서 즉사하고 1000명이 넘는 부상자가 발생하였는데, 화차 가까이 있던 사람들은 거의 사망하고 유리 화차가 폭발하면서 비산한 유리조각으로 초등학생 등 많은 사람들이 중상을 입었다.

 

룡천군은 신의주시에서 평양 방향으로 약 15km 정도 떨어져 있다. 룡천역 화차 대피선은 기본 역에서 1000m 정도 떨어져 있었고, 폭발 현장에는 직경 약 15m, 깊이 10m 정도의 큰 웅덩이가 생겨났다. 철길은 뭉텅 끊어졌으며 룡천군 읍소재지의 거의 모든 공공건물들과 사택들은 폭풍으로 무너지고 벽체에 금이 갔다. 이에 전국적으로 돌격대를 꾸려 룡천으로 가서 중국과 한국을 비롯한 각국에서 지원해준 자재를 가지고 기존 건물을 다 허물고 새로 공사를 했다. 룡천 폭발사건은 도대체 어떻게 일어났는가?

 

북한 당국은 폭발 당시에는 우연히 일어난 사고로 북한 내외부에 홍보하는 한편, 내부적으로는 국가안전보위부에서 김정일 암살을 위한 의도적인 폭발이라고 하면서 4년동안 꾸준히 사건을 수사했다.

 

의도적이라고 보는 근거는 이렇다. 폭발 당일 김정일은 중국방문을 마치고 북한으로 귀환하여 낮 12시 쯤 신의주역을 통과하게 되어 있었다. 이틀 전에 중국에서 질안비료와 유리 두 방통을 수입해온 단위(기관)에서는 기관차가 없다고 하면서 폭발 당일 폭발성 위험 물질을 신의주역에 그대로 방치해두고 있었다.

 

북한에서는 탄광과 광산을 비롯한 공사장들이 대부분 뇌관을 장약한 질안비료를 발파용으로 사용하고 있다. 질안비료는 전기불꽂방전으로는 폭발이 불가능하고 오직 뇌관을 터뜨려 폭발하게 되어 있는데, 사건 당시 폭발원인은 애매하였다. 폭발한 화차는 원래 김정일이 탄 열차가 낮 12시 쯤 통과할 신의주역에 있었다.

 

그런데 당일 새벽 0시 쯤, ‘낮 12시 쯤에 김정일이 탄 열차가 신의주역을 통과하니 만반의 준비를 하라’는 통보를 받은 신의주역 역장은 새벽 1시 쯤에 역에 나와 순찰을 하다가 역에 서있는 문제의 화차들을 보고 룡천역 화물차 대피선으로 이동시킨 것이다. 이 사건 이후 신의주역 역장은 수령결사보위에서 큰 공을 세운 것으로 평가돼 노력영웅 칭호를 받았다.

 

그날 김정일이 탄 열차는 사전 통보와 달리 신의주역을 낮 12시가 아닌 11시에 지나갔고 룡천역을 통과하지 않고 천마산 방향으로 들어갔다. 천마산 방향으로는 일반 열차는 통과하지 못하며, 김정일이 탄 1호 열차만 통과하게 되어 있었다. 천마산에 김정일의 초대소가 있기 때문에 일반인들은 통행도 금지되어 있다. 결국 김정일이 천마산 초대소로 들어간 후에 폭발이, 그것도 룡천역에서 일어나게 된 것이다.

 

폭발사건을 수사한 국가안전보위부는 ‘열차의 이동 경로가 중국에서 휴대폰(손전화)을 이용해 알려졌다’고 김정일에게 보고했다. 이에 이에 김정일은 화가 나 북한 내의 모든 휴대폰을 회수하고 전국에 휴대폰 사용을 금지시키는 한편, 중국 전화를 갖고 있는 사람들을 다 잡아들이라고 불호령을 내렸다.

 

북한에서는 2003년에 처음으로 휴대폰을 1270달러에 팔아주면서 사용을 허가했는데, 결국 이 사건으로 휴대폰을 사서 이용하던 사람들은 돈만 떼였다고 불만이 많았다. 그때 사용되던 휴대폰은 중국 카드를 넣으면 중국과 통화되고 북한 카드를 넣으면 북한과 통화하게 되어 있었는데, 지금은 오직 북한 카드만 사용하게 개조하고 다시 도입이 된 것이다.

 

신의주역에 철도노동자로 가장시켜 보위원을 침투시키고 사건을 끈질기게 추적하던 보위부는 ‘2008년 초에 철도성 8,9호 담당 부상(차관 격)이었던 서남식은 남조선에서 6·25 시기 파견한 간첩이었다’고 하면서 그를 체포하고, 그의 돈에 매수돼 간첩이 된 철도성 간부 7명과 문화상(장관 격)이었던 김진성을 체포·총살하고 비로소 룡천사건이 마무리됐다고 김정일에게 보고했다.

 

북한에서는 룡천사건을 한국정보기관이 조작한 것이라고 간부들에게 통보하였지만 실제로는 김정일의 독재정권에 항거한 정의로운 애국자들의 소행이었다는 것을 많은 간부들이 알고 있었다.

 

룡천 사건에서 보듯 북한에도 저항의 움직임이 불시에 터져나오고 있다. 가장 참혹한 김정일 시기에도 그랬다. 지금 김정은 독재에 항거하는 자유롭고 정의로운 애국투사들에 의해 김정은과 그를 추종하는 독재의 아성은 반드시 준엄한 심판을 받게 될 것이다.

 

2014.03.31 인민보안부(경찰)와 보위사령부(군)의 비극적 충돌

2006년 5월쯤 북한에서 또다른 비극적인 사건이 발생했다. 평안북도 신의주시 ‘민포보안소 사건’이라고도 하는 이 사건은 당시 민포보안소에서 보안원(경찰관·대위)으로 근무하던 박 모라는 사람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지역 보안소의 중앙 기구는 인민보안부다.

 

북한은 군대와 국가안전보위부, 인민보안부의 군사칭호에 구분이 없이 다 같다. 절도사건을 수사하던 박 모는 평안북도 의주군에 증인 확인조서를 받으로 가야 하는데 길은 멀고 차는 없었다. 이에 오토바이 등록차 오토바이를 끌고 보안소로 찾아온 민포동 주민의 오토바이를 빌려 타고 의주군에 있는 증인을 찾아가게 되었다. 그가 빌려 탄 오토바이는 아직 차량번호가 없었으나 박 모는 자기가 보안원이기 때문에 초소들에서 이해해주리라고 생각하고 떠났다.

 

그런데 신의주는 인근 압록강이 깊고 넓어 밀수나 탈북이 어려운 상황이지만 의주군 쪽 압록강은 물이 얕고 폭이 좁아 적절한 밀수장소로 활용돼왔다. 이 때문에 신의주에서 의주로 가는 길에는 국가안전보위부, 인민보안부, 보위사령부, 국경경비대 산하 4개의 검열초소가 있어 오가는 차량과 사람들의 증명서와 소지품을 검열하게 돼있다.

 

▲경기도 연천군 비무장지대 건너 북한 초소에서 북한군 경계병들이 앉거나 서서 이야기하고 있다.

 

이 초소들 중 3개는 박 모가 신의주시 민포보안소 보안원이고 나름대로 연관 기관이기 때문에 그대로 통과를 시켜줬는데 보위사령부(군) 초소는 달랐다.

 

이 초소는 오토바이 번호가 없다며 박 모를 통과시켜주지 않고 ‘걸어가서 일을 보고 돌아오는 길에 오토바이를 찾아가라’고 하였다. 이 초소는 보위사령부 산하 초소라는 위세를 이용해 악독하게 구는 바람에 인근 주민들과 그 곳을 지나다니는 사람들의 원성이 자자했다. 박 모로서는 달리 방법이 없었다.

 

아무리 사정해도 안되자 박 모는 할 수 없이 걸어서 의주에 가 확인조서를 받은 뒤 초소로 되돌아왔다. 시간은 어느덧 오후 2시가 돼 있었다. 오토바이를 타고 불과 한두 시간만에 다녀올 수 있는 거리를 장시간 걸어서 갔다온데다 시간은 촉박한데 초소에서는 점심시간이라 또 기다리라고 하니 박 모는 저으기 화가 났다.

 

근 1시간을 기다렸는데도 초소 문을 열어주지 않자 박 모는 사정을 이야기하려고 초소 담장을 넘어 들어갔다. 그런데 병사 3명이 나와서 그를 약 30분 동안 집단구타하고 많은 피를 흘리는 그를 밖으로 밀어냈다. 초소 밖에서 기다리던 사람들이 그를 치료해주었다. 초소 안에서는 병사들이 북한의 5000원권 화폐를 무더기로 쌓아놓고 주패(카드)도박을 하고 있었다. 그들은 밖에서 기다리는 사람들은 안중에도 없었다.

 

박 모는 다시 1시간 가량 기다리다가 불만이 폭발, 권총을 장탄하고 다시 담장을 넘어 들어갔다. 그가 다시 담을 넘어 들어가자 병사들이 달려들어 또 구타하려고 하였다. 이에 박 모는 권총을 달려드는 병사들에게 발사했다. 6발을 쏜 뒤 총으로 자살을 하려는 순간 불발이 되는 바람에 체포됐다. 박 모가 쏜 총에 2명이 죽고 1명이 중상을 입었다.

 

▲지난해 12월 북한 조선중앙통신이 장성택 전 국방위원회 부위원장의 처형 소식을 전하면서 보도한 사진. 사진에서 장성택은 국가안전보위부 요원으로 추정되는 군인 2명에게 목과 팔을 붙들린 채 고개를 숙이고 있다. 당시 장성택의 눈가 주변과 양손이 검푸른빛과 갈색 빛을 띠고 있어, 그가 보위부에서 고문을 받았다는 추측이 제기됐다.

 

이 사건은 국가적인 중대사건으로 분류돼 당시 인민보안성(후에 인민보안부로 개편)과 보위사령부가 조사에 들어갔다. 인민보안성은 조사 후 정당방위로 인한 과실치사 사건으로 판정, 박 모를 기관에서 철직시키기로 하고 김정일에게 제의서를 올려 비준을 받았다. 사람들은 악독했던 초소 군인들이 응분의 벌을 받았다며 고소해하면서 박 모를 지지했다.

 

그런데 차후에 보위사령부에서는 박 모를 고문해 허위 자백을 받아냈다. 즉, 자기네 산하 병사들은 잘못이 하나도 없고 박 모가 보위사령부에 한을 품고 있다가 불의에 습격하여 병사들을 사살했다는 것이다. 이에 박 모를 평양시 순안구역에 있는 강건군관학교(한국의 육사 격) 종합사격장에서 공개처형하겠다고 김정일에게 보고, 비준을 받아냈다.

 

결국 박 모는 억울하게 처형되고 가족은 평안북도 피현군 산골로 추방되었다. 박 모의 처형을 목격한 사람들은 이미 죽은 사람을 묶어놓고 쐈다고 증언할 정도로 사전에 끔찍한 고문을 받은 상태였다.

 

재앙은 박 모에게만 그치지 않았다. 연좌죄로 신의주시 보안서장은 대좌에서 중좌로 강등되어 평안북도 룡천군 보안서 부서장으로, 신의주시 보안서 정치부장은 상좌에서 소좌로 강등되어 평안북도 철산군 보안소 2부 부장으로 좌천됐고, 민포보안소 소장은 철직·제대조치됐다.

 

이 사건은 보위사령부와 인민보안부 사이의 피맺힌 알력관계를 극명하게 보여준 사건이었다. 이 사건에 대해 많은 보안원들은 ‘보안성이 보위사령부에게 또 한방 얻어맞은 사건’이라며 김정일의 독재 권력을 비난하였다. 김정일이 보위사령부의 편을 들어준 것은 ‘선군정치’ 구호 하에 군을 우대하는 정책을 편데다 박 모에게 죽은 병사들이 다 국가급 간부들의 자식들이라는 것을 감안했기 때문이다.

 

죽은 병사 3명은 인민무력부 연유국장(중장)과 철도성 부참모장(중장) 및 중앙당 과장의 자식이었고, 중상자도 중앙기관 국장의 자식이었다. 북한의 보위사령부는 간부집 아이들만 갈 수 있는 곳이다. 일반 부대는 식량보장이 제대로 되지 않고 훈련도 힘들기 때문에 간부집 자식들은 보위사령부나 보위부, 보안부 등 권력을 행사할 수 있는 곳만 골라서 간다.

 

2014.04.10  평양 중심에 있는 중앙역사박물관에서 벌어진 희대의 금불상 도난 사건

북한의 중심은 평양이고 평양의 중심은 김일성광장이라고 한다. 그만큼 김일성광장을 중심으로 중앙당,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만수대의사당, 내각, 외무성, 교육성, 농업성, 무역성, 금속공업성을 비롯한 중앙기관들과 중앙여맹 등 많은 중요기관들이 밀집되어 있다.

 

또한 김일성광장 앞에는 중앙역사박물관과 중앙미술박물관이 있는데, 거기에는 옛날부터 내려오는 국보급 작품들이 많이 진열되어 있다. TV에서 북한의 김일성광장이 나올 때 광장 앞에 ‘백두의 혁명정신으로’라는 간판이 걸려있는 건물이 중앙역사박물관이다.

 

▲2011년 김일성 광장에서 열린 김정일 추모대회. 오른쪽으로 '백두의 혁명정신'이라는 간판이 걸린 중앙역사박물관이 보인다.

 

이곳은 매일 밤 11시부터 호위사령부 산하 군인들과 평양시 보안국 순찰대원들이 완전무장을 한 채 2시간 간격으로 순찰을 하는 곳이다. 중앙역사박물관에는 권총을 찬 인민보안부 경비훈련국 산하 일개 분대병사들이 24시간 무장보초를 선다. 또 매 방마다 배당된 담당 관리원들은 아침 9시부터 오후 5시까지의 참관시간이 끝나면 모든 중요 물품들을 금고에 보관하고 봉인을 한 뒤에야 퇴근하게 되어 있다.

 

이렇게 경비가 살벌하고 완벽하다고 하는 중앙역사박물관에서 2004년 4월쯤 금품 도난 사건이 발생했다. 후에 판명되었지만, 범인은 하루 전날 낮에 먼저 박물관에 들어가 참관을 하며 탐색한 뒤 박물관 내 화장실에 들어가 잠복을 했다.

 

새벽 1~2시쯤 이미 박물관 직원들은 다 퇴근했고, 보초병들도 출입문들을 다 봉쇄하고 졸고 있었다. 범인은 이를 틈타 화장실에서 나와 2층에 있는 금품 진열실에 들어가 고려와 신라시기 금불상 9개를 주머니에 넣고 다시 화장실로 들어갔다. 이어 오전 10시 30분쯤 참관을 마치고 나가는 것처럼 유유히 밖으로 빠져나갔다.

 

중심지이고, 무장보초들이 있고, 또 지금까지 도난사고가 한 번도 없었으니 담당 관리원은 안이하게 생각했을 것이다. 그는 금품들을 금고에 보관하지 않고 그대로 진열장에 둔 채 그냥 퇴근했다. ‘설마’가 사람 잡은 셈이다.

 

▲북한의 중앙역사박물관 내부 모습. 고구려 광개토왕비가 보인다.

 

담당 관리원이 출근해 아침 일정대로 독보(讀報ㆍ노동신문이나 당정책 문건을 읽는 일)에도 참가하고 간부들 방과 중앙 홀, 복도를 청소하고 나서야 자기가 담당한 방에 가서 진열대에 있던 금불상 9개가 없어진 것을 확인했다. 그가 이 사실을 당 조직과 경비초소에 통보한 것은 대략 오전 10시 40분쯤이었다. 이미 범인이 박물관 구내를 벗어나 종적을 감춘 뒤였다. 급히 박물관 모든 출입문을 봉쇄하고 평양시 인민보안국 수사국이 출동해 박물관 안에 있던 사람들을 수사했지만 헛수고였다.

 

도난당한 금불상 9개 중 6개는 모조품이었다. 이 6개는 원래 진품이 없었다. 나머지 3개는 진품이었는데, 일본에 있는 조총련을 통해 구입한 것으로 중앙역사박물관에 딱 3개 밖에 없는 고려와 신라시기 진품 불상이었다. 유리장 안에 진열되었던 진품 금불상 앞에는 ‘일본 조총련에서 김정일에게 올린 선물’이라는 간판도 놓여 있었다.

 

이 사실을 보고받은 김정일은 화가 나서 펄쩍 뛰면서 모든 검찰, 보위부, 보안부, 보위사령부 등을 총동원해서 무조건 찾아내라고 불호령을 내렸다. 당국은 그날부터 즉시 평양시를 봉쇄하고 수색에 나섰으나 훔친 자는 이미 자기 집에 도착해 훔친 물건들을 안전장소에 묻어놓은 뒤 안도의 숨을 쉬고 있었다. 보위부·검찰소·보안부가 나서 범인 검거에 나서는 한편, 인민반을 통해 금불상을 가지고 있는 사람을 보면 신고하라는 회람까지 돌렸지만 범인은 잡히지 않았다.

 

그 후 6개월이 지나서 뜻밖에 국가과학원 자재상사에서 부원으로 근무하던 김모씨가 외화를 탕진하고 돈을 마구 쓴다는 신고가 국가과학원 보위부에 들어왔다. 신고자는 김씨의 친구. 김씨가 그 전에는 생활형편이 그리 좋지 않았는데 최근에 친구들을 자주 초청해 집에서 좋은 술과 고기를 대접하는 등 뭔가 이상하다는 것이었다. “요즘 큰 돈벌이를 했냐”고 물었더니 취중에 김씨가 “하룻밤을 밝히면 하늘에서 돈이 떨어진다”고 했다는 말도 했다.

 

중앙역사박물관 도난사고로 긴장되어 있던 보위부에서 무작정 그를 잡아다가 고문을 했다. 그는 고문을 견디지 못하고 범행을 실토했다. 그는 범행 3개월 뒤 함경남도 무산군으로 출장을 갈 때 불상 9개 중 1개를 가지고 올라가 이전에 알고 지내던 무산군 사람을 통해 중국 사람에게 20만 달러를 받고 팔았다고 털어놓았다.

 

그는 골동품에 대해 아무 지식이 없었지만 그가 판 것은 신라시기 진품 금불상이었다. 북한에서 자재상사에서 근무하는 사람들은 방방곡곡으로 출장을 다니기 때문에 그는 아무 의심을 받지 않고 무산군 국경지역에 가서 물건을 팔고 돌아올 수 있었다. 그런데 돈이 많아지자 마구 탕진하다가 결국은 친구의 신고로 덜미를 잡혔다.

 

수사 당국은 그가 묻어두었던 나머지 불상 8개도 찾아냈다. 수사 결과를 김정일에게 보고하자 김정일은 어떤 수단과 방법을 다해서라도 중국에 넘어간 불상을 무조건 찾아오라고 중앙당에 지시하면서 절도범과 판매에 가담한 자들은 물론이고 그들의 가족 3대를 엄벌하라는 호령을 내렸다. 결국 김씨와 판매에 가담했던 4명은 사형됐고, 그들의 가족들은 14호 정치범관리소로 넘겨졌다.

 

한편 중앙당 39호실 사람들은 판매선을 추적, 중국 상해까지 가서 금불상을 구입한 중국 상인을 만났다. 그 상인은 원래 매매가격의 10배인 200만달러를 요구했다. 그게 안 되면 한국에 가지고 가서 팔겠다면서 버텼다고 한다. 결국 북한은 200만달러를 주고 불상을 찾아왔다.

 

이 사건에서 보듯 북한사람들 머리 속엔 ‘이제는 죽어도 사람다운 생활을 한번 해보자’는 강한 인식이 자리잡아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예전엔 상상할 수 없었던 일이 언제든지 벌어질 수 있는 것이다.

 

2014.04.21 김정일, 뇌출혈 이후 정신착란적 숙청 광풍

‘망둥이 제 새끼 잡아먹는다.’ 동류(同類)나 친척 간에 서로 싸우는 것을 비유한 말이다.

 

김정일 독재정권을 돌이켜보면 매일 매시각 간부들과 주민들에 대한 숙청이 끊이는 날이 없었다. 특히 김정일이 뇌출혈로 쓰러지기 직전에는 횡포가 더욱 심해졌다. 북한에서는 김정일이 뇌출혈로 쓰러진 것을 초특급 비밀로 하였기 때문에 그 사실을 아는 사람이 몇 명 없었다. 설사 아는 사람들도 기밀 발설죄로 처형될까 두려워 입을 열지 못했다.

 

이 때문에 2008년 9월 9일 공화국 창건 60돌 기념행사에 김정일도 나타나지 않고 사상 처음으로 노농적위대 열병식이 오후 3시에 열리는 일이 벌어졌다. 오죽했으면 김정일의 여동생 김경희가 죽었기 때문에 김정일이 너무 슬퍼서 못 나온다는 유언비어가 돌았겠는가. 유언비어 발설자를 잡겠다고 국가안전보위부와 인민보안부 10호실이 나섰으나 잡지 못하였다.

 

요즘 와서 김정일이 죽기 전에 더 많은 사람들을 죽이려는 정신착란증이 왔었다고 많은 간부들과 주민들이 말하고 있다. 2007년 초에 김정일은 갑자기 당시 중앙당 조직지도부 1부부장이자 중앙당 본부 당 책임비서이었던 이제강을 불러 지금 중앙당이 너무 비대해졌으니 한 사람이 두 가지 이상의 직무를 겸직하도록 하고 사람들을 많이 축소하여 중앙당에서 내보내라는 지시를 내렸다.

 

▲조선중앙TV가 2012년 1월 8일 방영한 기록영화에서 북한 김정일(오른쪽)이 김정은(제일 왼쪽)과 함께 군사훈련 참관도중 담배(동그라미 안)를 손에 쥐고 있는 장면이 공개됐다. 김정일은 2008년 뇌졸중으로 쓰러진 뒤에도 담배를 계속 피웠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로 인해 중앙당 조직지도부에서는 중앙당 각 부서들을 재검토하고 부원 이상부터 부부장까지 약 100명을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와 내각 성 기관을 비롯한 각급 중앙기관들에 그들의 급수에 맞게 재배치하였다. 범죄나 과오 때문이 아닌 단순한 기구조정이기 때문에 동일한 급의 간부로 배치해준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중앙당에서 그들이 해임·전직되는 다음날 즉시 그들이 살던 집을 회수하는 조치를 취한 것이다. 북한에서는 중앙당, 인민무력부, 국가안전보위부, 인민보안부 등 특수 성급 단위들은 비밀보장을 위해 다른 기관 사람들과 한 아파트에서 살 수 없다고 하면서 각기 자기 기관의 아파트를 따로 건설하여 관리하고 있다.

 

중앙당에서 다른 기관으로 이동 배치된 사람들은 겨울이 다가오는 상황에서 집을 잃고 한지에 나가게 되었다. 그들이 배치된 기관들에서는 당장 배정해 줄 집은 없다며 기관 청사 안에 방을 하나씩 내주어 거기에서 그들이 가족들과 같이 살도록 조처해주었다.

 

이동 배치된 사람들은 시멘트 바닥의 냉방에서 추운 겨울을 가족들과 같이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니 가족들을 볼 면목도 없고 참으로 난감한 상태에 놓이게 되었다. 하여 중앙당에서 해임 이동배치된 과장급 이상 9명의 사람들은 이 조치를 재정경리부에서 하였다며 공동으로 김정일에게 연명 탄원서를 올리었다.

 

탄원서를 받아본 김정일은 그들이 집단적으로 자기와 당에 도전하였다고 하면서 이제는 자기 곁에 없는 사람들이니 처형하라고 지시하고 온 가족을 15호 정치범관리소에 보내라고 하였다.

 

그들의 가족들은 아버지가 중앙당 간부로 일하다가 왜 전직이 됐고, 억울하게 죽고, 자신들이 정치범관리소에 가게 되었는지 영문도 몰랐다. 처벌된 가족 중 한 사람은 원통함을 참지 못하고 끝내 김정일과 김정은에 대한 반항의 표시로 북한을 탈출하여 2013년 대한민국에 입국하는데 성공하였다.

 

김정일은 또 당 조직지도부 제1부부장 리제강에게 탄원서에서 비판받은 재정경리부를 집중 조사하라고 지시했다. 조사 과정에 재정경리부에서 23개의 무역회사를 운영한다는 것을 보고받은 김정일은 ‘중앙당이 무슨 무역회사를 많이 운영하는가’라며 서경회사와 같은 큰 회사는 39호실 산하 대성지도국에 이관하고 나머지 회사들은 해산하여 재정경리부는 회사운영을 못하게 하라고 지시하였다.

 

▲리제강 전 조직지도부 제1부부장이 김정은과 손을 잡고 찍은 기념사진. 리제강은 김정은은 공식 등장하기 전인 2010년 6월 교통사고로 사망한 것으로 발표됐으나 사실은 김정일에 의해 숙청된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재정경리부는 거의 모든 과에서 무역회사를 직접 운영하고 있었는데 조사 과정에서 많은 부정부패가 드러났다. 조사 결과를 보고받은 김정일은 자기가 재정경리부장을 직접 겸하겠다고 나서 사업보고를 받았다.

 

이 과정에서 재정경리부 과장 이상 급의 많은 간부들이 해직되어 지방으로 추방되었다. 부장으로 있던 리봉수는 함경북도 김책시 농장원으로 쫒겨갔고 부부장급에서는 15과 담당 김형 부부장만 제외하고 모두 해직되거나 강등됐다. 북한에서는 이 사건을 ‘2007년도 중앙당 숙청 사건(일명 봉수 부장 사건)’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리제강은 재정경리부와 긴밀히 연관되어 있는 중앙당 3호 청사(대남사업 담당)의 비리가 더 심하다고 보고하였다. 이에 다시 중앙당 3호 청사에 대한 집중 조사가 시작되고 김정일이 그렇게 사업을 잘한다고 칭찬하던 통일전선사업부 부부장 최승철을 비롯한 11명의 과장급 이상 간부들이 한국 정보기관의 검은 돈을 받아먹은 간첩 혐의로 잡혀가 처형됐다. 김정일은 3호 청사를 당장 해산해버리라고 불호령을 내리었다.

 

3호청사 담당 중앙당 비서이었던 김용순은 간부들과 주민들 속에서 신뢰가 있었기 때문에 공개적으로 처형하지 못했다. 대신 교통사고라는 비극을 조작하여 죽이는 교활한 수법을 사용했다. 2010년에는 자기에게 그렇게 충성하였던 리제강도 교통사고를 일으켜 죽이는 만행을 저질렀다. 다른 죄를 씌워 처형하려 했으나 마땅한 범죄 사실이 없었기 때문이다.

 

김정일은 집권 전 기간 간부들과 주민들에 대한 숙청사업을 끊임없이 했다. 하지만 위의 사례들에서 보듯 죽기 전에는 더욱더 광기를 부리며 수많은 무고한 사람들을 처형하는 피바람을 불러일으켰다.

 

2014.05.12  김일성 얼굴이 든 돈을 마대에 담아 버린 北주민들…북한의 화폐개혁 참상

2009년 12월 1일 북한이 조선중앙은행 명의로 화폐개혁을 선포하였다. 북한에서는 일명 ‘고난의 행군’이라고 하면서 1990년대 초부터 주민들에게 식량배급을 해주지 않아 많은 주민들이 굶어죽는 비극이 발생했다.

 

1992년도 전국적인 인구조사를 한 뒤 계속 인구조사를 하지 않고 있다가 김정일의 특별지시에 따라 16년 만에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와 내각 중앙통계국의 주관 하에 2008년 7월 전국적인 인구 조사를 진행하였다. 김정일도 1990년대 초반부터 2008년까지 많은 사람들이 굶어 죽은 것을 알았기 때문에 과연 몇 명이나 죽었는지 확인하기 위해 이런 지시를 한 것이다.

 

국가 중대사가 아니면 출장이나 여행을 중지하라고 기관과 동사무소를 통해 공표한 뒤 집중적인 인구조사를 실사한 결과 총인구가 2330만명 정도로 확증됐다. 큰 사회적 동란이 없었다면 약 2800만명에 이르러야 하는데 470만명 정도의 인구가 사라진 것이다. 고난의 행군 시기를 거치면서 약 320만명의 아사자와 150여만명의 실종자가 발생한 것이다. 이에 중앙당은 김정일의 지시라면서 최고인민위원회 상임위원회와 인민보안부, 국가안전보위부가 연합해 행방불명자들을 무조건 찾아내라고 엄명을 내렸다.

 

실종자가 많은 것은 생활고 때문이었다. 주민들은 국가의 식량배급이 중지되자 어떻게든 먹고 살아남기 위하여 다니던 공장과 농장에 출근하지 않고 장사를 하며 생계를 이어갔다. 장사를 할 수 없는 사람들은 집을 나와 떠돌며 동냥을 하거나 깊은 산속에 들어가 뙈기 농사를 지으면서 목숨을 연명해갔다.

 

이에 따라 공장이나 농촌의 생산물을 통해 국가 은행에 입금되어야 할 돈줄은 말라버렸다. 그 대신 장사를 하는 개인들의 주머니에 돈이 들어가게 됐다. 또 장사를 하는 주민들은 은행에 저금을 하면 돈을 찾지 못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집안에 돈을 감추고 놓고 절대 내놓지 않았다. 북·중 국경지역의 중국 상인들이 북한에 물자를 가지고 나와 팔고 받은 북한 화폐를 중국에 가지고 들어가 중국 돈이나 미국 돈으로 바꾸어 달라고 하면서 내놓지 않는 현상도 많이 나타났다. 북한은 국고가 텅 비자 돈을 다량으로 찍어낼 수밖에 없었다. 당연히 인플레가 조성되면서 경제는 더욱 진퇴양난에 빠져들었다.

 

이에 김정일은 당시 중앙당 계획재정부 부장이었던 박남기에게 해결책을 찾으라고 지시하였다. 박남기는 국가재정기관의 전문가들과 합의를 한 뒤에 화폐교환을 건의했다.

 

김정일은 이에 응해 주민들의 주머니에 들어가 있는 돈과 중국 상인들에게 있는 북한 돈을 무용지물로 만들고 국고를 채우기 위한 작전에 들어가게 되었다.

 

먼저 중앙은행 사람들은 2009년 6~7월 은행에서 찍어낸 북한 돈 5000원짜리를 대량으로 들고 전국 곳곳의 금 생산지역으로 갔다. 이들은 인민생활고를 해결하기 위하여 금을 수집한다고 속여 개인들이 가지고 있던 금을 사들였다. 북한에서는 원래 개인들의 금 거래가 법적으로 금지되어 있지만 국가가 식량공급을 못하게 되자 주민들은 산에 들어가 금을 캐거나 강에서 사금을 채취했다. 이렇게 모은 금은 g당 북한 돈 10만원 정도로 불법 밀매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국가가 합법적으로 금을 수매하였다는 확인서를 발급해준다니 사람들은 너도 나도 금을 가지고 나와 팔게 되었다. 금 1g당 20만원씩을 받았다. 이렇게 1단계로 먼저 전국을 돌아다니며 금을 회수했다. 이어 2002년 화폐개혁을 위하여 발행하였다가 실행하지 못해 보관해오던 돈을 가지고 화폐개혁을 단행하였다.

 

지금 북한에서 사용되는 화폐는 모두 2002년도에 발행된 돈이다. 원래는 12월말 경에 하려고 하였는데 금을 거두어들이면서 비밀이 탄로되자 12월 1일 전격적으로 화폐교환 발표와 함께 구 화폐를 사용할 수 없음을 공표했다. 각 세대 당 30만원 한도 내에서만 신 화폐를 교환해주는 충격적인 조치를 취했다. 이에 금을 캐 돈을 벌었다고 좋아하던 사람들이 곳곳에서 자살하거나 국가를 원망하는 비극이 벌어졌다.

 

화폐를 원만히 발행하지 못하여 교환이 12월 1일부터 7일까지 지연되자 평양시를 비롯한 전국에서 아비규환이 벌어졌다. 어떤 사람은 30만원을 초과하는 돈은 무용지물이 되고, 어떤 사람은 교환할 30만원도 없고, 시장들은 문을 닫아걸었다. 이어 불법적으로 거리와 골목에서 음식과 옷가지들을 내다파는 대소동이 벌어졌으나 정부는 통제를 하지 못했다.

 

화폐개혁 이전 북한 돈으로 5000원 하던 돼지고기 1kg이 화폐개혁 후 70만~100만원이 되었고, 1000원 하던 담배 한 갑은 30만원으로 거래되면서 주민 원성은 하늘을 찌를 듯했다.

 

화폐개혁으로 모아두었던 돈이 휴지조각으로 변하자 많은 사람들은 “화장실에 가서도 쓰지 못할 파지(破紙)”라며 김일성의 사진이 있는 구 화폐들을 마대로 담아가지고 전국방방곡곡의 사람들이 많이 볼 수 있는 장소와 오물장들에 뿌려 김정일에 대한 불만을 노골적으로 표출했다. 김일성과 김정일의 사진을 자기 목숨보다 더 소중히 여겨야 한다고 사상교육을 그렇게 집요하게 하였지만 인민들의 피와 땀으로 벌어들인 돈을 한순간에 빼앗은 김정일에 대한 항거는 이런 식으로 표출됐다.

 

국가안전보위부와 인민보안부에서 구 화폐를 반환하지 않고 길에 뿌리는 사람을 잡으려고 하였지만 한 명도 잡지 못하였다. 보위원들과 보안원들도 역시 인민의 편에 서서 잡을 마음이 없었고, 그 사실을 보고 신고하는 사람이 단 한명도 없었기 때문이다.

 

2014.05.22 북한 최초의 '도적부대', 보위부와 결탁한 사연

북한에서 평양시를 무대로 도적질을 일삼던 ‘도적부대’가 2010년 체포되었다. 정부 배급제로 겨우 생계를 유지하던 주민들은 배급이 끊기자 먹고살기 위해 부득불 인가가 많은 평양으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장사를 하거나 하다못해 동냥을 하더라도 큰 도시가 나았다.

 

이 틈에 먹고살 별 뾰족한 방법이 없는 사람들은 도적으로 변했는데 점차 조직적인 모습을 띠기 시작했다. 북한 정권은 인민대중 중심의 사회주의 사회라고 숱하게 선전해왔지만, 인민들의 의식주도 보장해주지 못하면서 결국 도적부대들을 양산하게 된 것이다.

 

 

먹고 살기가 어려워지면서 북한에서도 '묻지마 범죄'가 기승을 부리고 있다. 2010년에는 조직원 7명(여자 1명 포함)으로 구성된 도적단이 검거돼 공개 총살당하기도 했다.

 

그런데 이 도적들을 잡고 사회 치안을 지켜야 하는 소위 ‘인민보안원들과 검찰소 검사들’이 그들과 합세하여 같이 도적질한 것을 나누어 먹기 시작했다.

 

이 때문에 평양 시민들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은 도난과 강도를 당하면서 사태 해결을 요구했으나 북한의 당과 정부는 보안부에 체포지시만 할 뿐 사태 해결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았다. 후에 드러났지만, 모든 도적부대는 보안기관의 철저한 보호 속에 범죄를 저지르고 있었다. 북한 말로 ‘고양이에게 소대가리를 맡기는’ 격이었다.

 

2010년 4월 초 호위사령부 산하 동양무역회사 부사장은 평양시 중구역에 있는 중앙무역은행에 가서 1만2000 유로를 출금해 본사로 가기 위하여 지하철 승리역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인파 속에서 열차를 타려다가 돈이 든 지갑을 도난당하였다.

 

평양시 도적단은 신사복 차림에 서류가방을 옆에 끼고 인파 속에 섞여 있다가 기차나 버스가 왔을 때 사람들이 먼저 타겠다고 경쟁하는 틈을 타 절도 범죄를 저질렀다. 그날도 그런 기회를 이용하여 돈지갑을 훔친 것이다.

 

도적들은 조직 내 규율에 따라 훔친 지갑 속의 돈 액수를 확인하지 않고 대장에게 가져다 바치었다. 평양시 서성구역 서산동에 살고 있던 대장은 ‘깡다’라는 별명을 갖고 있었다. 평양시 돈을 깡그리 다 가지겠다는 의미로 지은 별명이라고 한다. 그는 그날 범행에 가담한 자들에게 100달러씩을 나누어주었다.

 

그런데 그 다음날 도적들이 다시 승리역에 범행을 하러 갔다가 전날 돈지갑을 도난당한 부사장을 발견했다. 그는 마치 넋나간 듯이 오가는 사람들에게 돈지갑을 보지 못했느냐며 묻고 다녔다. 이 모습을 본 도적들이 그에게 다가가 “도대체 얼마를 잃어버렸느냐”고 물었더니 그는 1만2000 유로와 700달러가 들어있었다고 했다.

 

그 말을 들은 한 도적은 패거리들 몰래 혼자 대장을 찾아가 돈지갑에 그렇게 많은 돈이 들어 있었으니 자기에게 1000달러만이라도 줘야하지 않느냐고 했다가 매만 죽도록 맞았다.

 

그는 다시 승리역으로 가 부사장에게 “내가 돈지갑을 가진 사람을 알려줄테니 3000달러를 주겠느냐”고 제의했다. 이에 부사장이 흔쾌히 응하면서 그를 호위국 보위부에 데리고 갔다. 호위국 보위부에서는 문제의 도적을 3일 동안 고문해 범죄조직에 대한 자백을 받아낸 뒤 야밤 기습작전으로 도적 30여명을 체포했다. 이어 구체적인 조사 결과를 김정일에게 보고하였다.

 

▲배급이 끊기자 생계를 위해 일자리를 찾아 나선 북한 주민들은 평양으로 몰려들었다. 사진은 2007년 6월 초 평양 고려호텔 주변에 설치된 가판대에서 주민들이 튀김 등을 사는 모습.

 

도적들과 보안부가 밀접하게 관련돼 있다는 보고를 받은 김정일은 호위국 보위부와 인민보안부 검찰국이 합동하여 사건을 마무리하라고 지시하였다. 그 후 3개월에 걸쳐 평양시 각 지역에 분포돼 활동하던 도적부대 조직원 70여명과 평양시 서성구역 보안서 서장 및 정치부장 등 40여명의 보안원들이 체포되었다.

 

그런데 절도조직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놀라운 사실들이 밝혀졌다. 그들은 절도행각을 벌이기 전 조직에서 먼저 훈련을 하고 검정을 통과해야 했는데, 훈련은 자전거를 세워놓고 뒷바퀴를 세게 돌린 뒤 1분 사이에 손가락을 바퀴살 사이에 100번 정도 넣었다 꺼내는 것이었다. 물론 바퀴살에 손가락이 닿아서는 안된다.

 

이런 훈련을 통과해야만 ‘현장’에 나갈 수 있으며, 범행이 성공하면 훔친 돈지갑 안에 돈이 얼마나 있는지 확인하지 않고 지역 조장에게 바쳐야 했다. 이 규정을 어기면 보안기관에 통보해 ‘교화’를 보냈다.

 

도적부대 조직은 대장, 부대장, 참모장과 각 지역 조장들로 편성되어 있었는데 여성들의 금목걸이와 금반지는 강제로 덮쳐 빼앗는 방법을 사용했다. 이런 강탈한 물건을 시장에 내다파는 전문 여성조도 편성돼 있었다.

 

범죄조직과 결탁한 평양시 보안국의 지하철 보안원들은 지하철 입구에 서서 오가는 사람들을 단속하다가 지방 사람들과 돈이 있어 보이는 사람들을 단속실에 데리고 가 가방과 주머니를 검열한다. 이어 몸 어디어디에 얼마의 돈을 소지하고 있는지를 도적들에게 몰래 알려줘 훔치게 한 다음 훔친 돈을 5:5 비율로 나누어 가졌다. 심지어 도적들과 함께 다니면서 보호막을 쳐주는 등 범행에 가담하기도 했다.

 

이런 현상은 크게 보면 모두 먹고살기 위한 것이다. 가족을 거느린 보안원들과 검사들이 국가 배급이 제대로 안되는 상황에서 월급만으로 먹고살기 어렵게 되자 범죄조직과 결탁한 것이다. 도적을 잡아도 담배 한 갑 생기질 않으니 너도나도 같이 나눠먹고 살자는 생각으로 결탁하게 된 것이다.

 

당시 검거된 조직은 북한 최초의 도적부대로 기록됐다. 조직원 7명(여자 1명 포함)은 결국 형제산구역 하당 시장에서 공개 총살됐고, 서성구역 보안서장과 정치국장은 출당 철직돼 지방으로 추방됐다. 또 약 40명의 보안원들은 교화형을 받고 교화소에 감금됐다. 이 사건은 많은 도적부대들 중 한 부대의 예에 불과하다.

 

지금도 평양시를 비롯한 북한 도시들에는 크고 작은 범죄조직들이 법기관의 보호 속에 활보하고 있다. 이는 인민대중 중심의 사회주의라는 북한 정권의 선전이 얼마나 허구이고 김정은 정권의 인민 기반이 얼마나 허약한지를 잘 보여주는 사례다.

 

2014.06.03  대형 재난이 끊임없이 발생하는 북한이 박 대통령 물러나라고 한다니…

북한에서는 지금도 전국 방방곡곡에서 다양한 인명피해 사고가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지만 현 정권에서는 전혀 대책을 세우지 않고 있다. 특히 북한의 중심지라고 하는 평양에서 심각한 사고가 더 자주 일어나고 있으며 그 피해는 말할 수 없을 정도이다.

 

그런데도 이번에 한국에서 세월호 참사가 일어나자 북한이 박근혜 대통령에게 사죄하고 물러나야 한다고 보도했다니 이건 정말 어처구니 없다.

 

북한에서는 이런 현상을 흔히 ‘다 꿰진 자기 집 문 앞에서 구멍 난 남의 집 문을 흉본다’고 한다. 북한에선 인명피해 사고가 나면 유언비어라고 하면서 말을 하지 못하게 통제하고, 피해자 가족에겐 자식을 나라에 바치었다고 생각하라고 강요하며, 피해보상금은 한 푼도 안주었다.

 

실례로 2005년도 12월 초 평양시 대동강구역 문수동에서 중구역 평양1백화점까지 운행하는 버스가 대동강의 옥류교를 지나다가 운전사의 부주의로 옥류교 난관을 부수고 강으로 추락한 사건이 있었다.

 

▲지난달 평양에 있는 23층 아파트가 붕괴된 후 붕괴 현장 인근에서 한 간부가 피해자와 주민들 앞에서 사과하고 있는 모습.

 

아침과 저녁 출퇴근시간에만 운행됐던 이 버스는 주로 평양음악무용대학·연극영화대학·체육대학 교직원들과 학생들이 이용하고 있었다. 사고가 난 오후 6시30분 쯤은 가장 붐비는 퇴근시간이라 차 안에 교직원들과 대학생들 100여명이 빼곡히 탑승해 있었다. 버스가 옥류교를 지나는 순간 앞에 고장난 무궤도버스가 서있는 것을 뒤늦게 발견한 운전사가 충돌을 피하려고 급히 핸들을 꺾었다. 버스는 옥류교 난관을 부수고 대동강으로 추락하였다.

 

강은 폭이 500m정도이고 깊이가 10m정도 밖에 안됐지만 구조수단이 전혀 구비되어 있어 한 명도 구조하지 못했다. 3일 동안 옥류교 교통을 완전봉쇄한 뒤에야 겨우 버스를 건졌으나 희생자 시신은 15일 정도 지나서야 대동강 하류에 쳐놓은 그물에서 건져올릴 수 있었다.

 

그러나 해당 보위부와 보안부에서 피해자 가족들과 버스사업소에 소문을 내지 말고 말하면 법적으로 처벌하겠다고 하여 피해자 가족들은 다 키운 자식들을 잃고도 상소는커녕 말도 한마디 못하고 말았다.

 

이런 한심한 상태의 북한이 세월호 참사로 대한민국 온 국민이 가슴아파하며 애도하고 대통령이 거듭 사과하는 것을 비난하다니, 얼마나 뻔뻔하고 파렴치한 인간들이 독재를 실시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북한의 중심이라고 하는 평양시도 겉으로 보기에는 화려한 것 같지만 실상은 다르다. 모든 아파트의 지하에는 힘 없고 돈 없는 수많은 빈민들이 인민보안부 호안국 반항공부에 돈을 주고 임시 입사증을 발급받아 살고 있다. 매년 7~8월 장마철에는 지하층 절반이 물에 잠겨 주민들은 가재도구를 위층 복도에 올려놓고 복도에서 숙식하곤 한다. 하지만 인민을 위한다는 당 간부들은 좋은 집에서 살면서 이들을 위한 아무런 대책도 세우지 않고 있다.

 

▲이번에 평양시 평천구역 안산동에서 23층 아파트가 붕괴되는 사고가 발생한 것은 오직 속도보장만을 요구하는 정권이 야기한 비극의 한 단면이라고 볼 수 있다.

 

김정일 통치 시기 10만 세대의 살림집을 건설해 평양시민들에게 2012년 4월 15일까지 선물하겠다고 대대적으로 선전했다. 그러나 김정일이 죽고 나자 정권을 물려받은 김정은은 북한주민들의 생활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마식령스키장과 승마장 건설에 부대들과 자재를 돌렸다. 이 때문에 살림집 건설이 중지되고 북한 주민, 특히 핵심군중이라고 하는 평양 시민들 사이에 불만이 팽배하자 이를 무마시켜보려고 급히 아파트건설을 밀어붙이다 대형 참사가 발생한 것이다.

 

북한에서 아파트를 건설할 때 벽체는 철근을 대고 시멘트 콘크리트 타입을 하고 층층 사이에는 부재를 덮는데 부재에 들어가야 할 철근은 설계대로 들어가지 않았다. 나아가 건설자들이 철근과 시멘트를 비롯한 건설자재를 몰래 훔쳐 팔아먹어 건설에 필요한 자재가 부족한데다 양생 시일도 단축을 해버리니 고층아파트들이 하중을 이겨내지 못하고 붕괴되는 것이다.

 

굵기 12mm 이상의 철근을 사용하여 철근 조립을 하라는 규정이 있지만 실제로는 10mm도 안 되는 낡은 철근을 사용한다. 또 300마르카의 강도가 보장되는 시멘트와 모래 및 자갈 혼합비율을 최소한 4:4:2도 유지해야 하지만 150마르카도 안되는 시멘트를 3:5:2 비율도 안되게 혼합해 아파트를 건설한다. 이 때문에 과거 평양시 락랑구역 통일거리 건설때도 20층짜리 아파트 2동이 동시에 붕괴되면서 건설에 동원됐던 군인 500명 이상이 사망하는 대형사고도 있었다.

 

지금 상당수 평양시 아파트들은 벽체에 금이 가고 언제 붕괴될지 모르는 위험한 상태에 놓여 있다. 아파트 4면에 아래위 10m 간격으로 한 줄 씩 철근으로 띠를 두르고서 겨우 지탱하는 아파트가 허다하다. 많은 주민들이 언제 죽을지도 모르는 그런 불안한 상황에서 다른 곳으로 갈 수 없어 마지못해 살고 있다.

 

김정일이 살아있을 때 평양 만경대구역 광복거리에선 1989년 13차 세계청년학생축전을 위해 급하게 건설공사가 진행됐다. 졸속 공사를 하다보니 후생시설도 없고 전기도 제대로 들어오지 않았다. 수도에 물도 나오지 않아 대변을 보고 비닐봉지나 종이에 싸놓았다가 날이 어두워지면 창밖으로 던지기도 했다. 이 때문에 사람들은 아파트 아래로 다니지를 못했으며, 온 거리에 역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겨울에는 주민 중 동상환자가 무수히 발생해 손발을 자르지 않으면 안되는 상황도 나타났다.

 

이외에도 평양 주민들의 생활고와 인명피해 상황을 이야기하려면 끝이 없다. 그런데도 주민들의 안전한 생활 보장을 위해 노력하지 않고 핵실험과 미사일 발사실험에만 매달리는 김정은 정권은 조만간 인민의 준엄한 심판을 받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2014.07.08 "나는 감히 김대중·노무현 정권이 북한 3대 세습을 가능케 했다고 말할 수 있다"

북한 정부와 주민들은 1998년 2월 김대중 대통령이 취임하면서부터 적화통일에 대한 큰 기대와 희망을 품었다. 원래는 그 전에 김영삼과 김대중의 민주세력이 단합하여 대한민국에서 대통령이 나와야 한다는데 중점을 두고 대남작전을 하다가 두 김씨의 분열로 노태우씨를 이기지 못하였기 때문에 희망이 안 보인다고 했다.

 

이어 1992년 김영삼씨가 대통령에 당선되자 그에 대해 민주주의의 배신자라고 하면서 노동신문의 사설과 논평을 통해 욕을 많이 했다. 그러면서도 김일성은 1994년 서울에 가서 김영삼 대통령을 만나겠다고 했다. 김정일은 이에 완강히 반대했었다.

 

그러다가 1998년 김대중씨가 당선되자 일체의 시비중상을 중지하고 지켜보다가 한국에서 햇볕정책으로 나오자 기회라고 여기고 북한에서 주장하는 외유내강의 작전으로 나오기 시작하였다.

 

남한의 북한지원정책은 1984년 10월 한국에서 수재(水災)가 발생했을 때 북한이 약간의 지원을 해온 것에 대한 보답의 일환으로 시작됐다. 초기 북한지원정책은 무엇보다 한 겨레, 한 동포라는 차원에서는 대단히 의미있는 정책이었다.

 

▲1984년 북한은 남한의 수해 복구와 경제교류를 지원하기 위해 쌀과 시멘트 등을 판문점과 인천, 북평항을 통해 남쪽으로 보내왔다.

 

하지만 북한당국은 남한 정부와 국민들의 아낌없는 지원에 호응해 응당 자주, 평화, 민족대단결에 기초한 평화통일 방향으로 나아가야 했는데도 오히려 핵무기와 인간살육무기 연구와 개발을 시작했다. 김정일은 나아가 남남갈등을 조성하고 대립과 분열, 적화통일의 길로 내달았다.

 

북한 상황을 정확히 파악하지 못한 김대중·노무현 대통령 집권 시기의 햇볕정책은 김정은 3대 세습을 가능케 했다. 왜 그렇게 볼 수 있는가?

 

1995년 하순부터 북한에서는 식량 배급과 생활필수품 배급이 거의 중단됐다. 배급체제로 지탱되던 북한 체제 자체가 붕괴될 긴급 상황에 놓인 것이다.

 

일반 기관과 기업소는 물론이고 군인들과 군수공장, 심지어 중앙기관조차 식량 확보를 못해 조직 붕괴 임계점까지 도달하였을 때 김대중씨가 대통령에 취임(1998년 2월)하면서 김정일 정권은 기사회생하게 됐다. 이후 중국의 일정한 지원과 2000년 7월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북한 방문도 북한 체제 회복에 도움이 됐다.

 

그 당시 러시아가 북한에 40만Kw의 전력을 무상지원해주겠다고 하였으나 북한에는 그만한 용량의 전력을 받을 만한 변전소가 없었다. 북한은 중국에게 그 전기를 받아 분리하여 북한에 공급해줄 것을 요청하였으나 거절당했으며, 결국 러시아 전기를 받을 수 없었다.

 

김정일은 이산가족상봉을 전제조건으로, 또 핵무기를 포기한다고 거짓말을 하면서 한국정부로부터 끊임없는 지원을 받기 위해 노력하였었다. 그러나 한국과 유엔이 지원한 식량과 기타 모든 물자들은 주로 중앙기관 간부들과 군수공장 직원들, 군인들에게 지급됐다. 굶주리는 일반 주민들에겐 마지못해 총 지원량의 극히 일부만 지급됐다. 2000년 6월 김대중 대통령의 북한방문은 전쟁까지 치른 남과 북이 냉전상태에서 평화체제로 나아갈 수 있는 획기적인 사변이었다. 그러나 자신의 영구집권과 사치를 위해 동족의 아낌없는 성의를 악용한 김정일에 의해 정상회담은 오히려 역사의 오점이 되었다. 또 김정일의 비열한 거짓과 기만으로 김대중 대통령이 비전향 장기수들을 북한으로 돌려보냄으로써 사회주의 사회에 대한 의심과 불만이 싹트고 있던 북한 주민들에게 ‘사회주의는 승리하고 자본주의는 멸망한다’는 오판을 다시 하게 만들었다.

 

▲2000년 6월 김대중 대통령이 평양 순안공항에서 북한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악수하는 모습(위)과 7년 뒤인 2007년 10월 노무현 대통령이 평양시 4.25 문화회관 광장에서 김 국방위원장과 만나 악수하는 모습.

 

김대중·노무현 대통령의 평양방문과 6·15, 10·4 공동선언은 동족상쟁을 막고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전환시킬 수 있는 중요한 계기였으나 김정일은 그것을 악용하여 오히려 전쟁준비에 박차를 가했다. 2007년 10월 노무현 대통령이 평양방문을 마치고 돌아간 다음 김정일은 중앙당 책임일군들을 모아놓고 ‘최근 남조선에서 정상들이 오가고 비전향 장기수들이 귀환하고 이산가족상봉이 진행된다고 해서 많은 간부들과 당원들, 근로자들이 정치적 각성과 계급적 의식이 흐려지고 있는데 사상교양사업을 더욱 강화하여야 한다’고 다그쳤다.

 

또 ‘계급적 원수들의 착취적 본성은 승냥이가 양으로 될 수 없듯이 절대로 변하지 않는다’고 하면서 높은 정치적 신념을 간직하고 원수들과는 웃으며 백번을 입 맞추다가도 언젠가 한번은 뒷덜미를 물어뜯어서라도 미제와 남조선 괴뢰들을 쳐부수고 조국을 통일하여야 한다’ 고 하면서 지금 남조선과의 평화공존은 일시적이라고 노골적으로 말하였었다.

 

그러면서 우리는 제국주의자들의 봉쇄정책 때문에 고난을 겪고 있지만 우리 대(代)에는 잘 살 생각을 하지 말고 후대들에게 통일된 조국, 부강한 조국을 넘겨주기 위해서라도 핵무기를 비롯한 현대적 무장장비 연구와 개발 사업을 절대로 약화시키지 말고 강화하여야 한다고 하였다.

 

북한은 또 남한과 각국의 북한 지원에 대해서도 김정일이 백전백승의 담력을 지닌 탁월한 세계적 지도자이기 때문에 남조선 정상들과 러시아의 푸틴, 2002년 5월 박근혜 당시 의원이 평양에 찾아와서 가르치심을 받고 돌아갔다며 김정일의 위대성을 선전하는 자료로 이용하곤 했다. 식량을 비롯한 지원물자도 주민들에게 공급하지 않고 김정일의 이름으로 간부들과 군인들, 군수공장들, 평양시민들에게만 주면서 선전활동만 해왔다.

 

이렇게 대한민국 정부와 국민들이 지원해 준 식량과 일체의 지원물자는 김정일 정권 유지와 세습에만 도움을 주었지, 한반도의 평화와 안전에 기여하지 못하고 오히려 북한의 핵무기와 군사장비 개발에 기여했다.

 

그러다가 2008년 2월 이명박 대통령이 당선되자 그동안 은밀히 서해 해상 사건의 보복으로 준비하였던 천안함 폭침과 연평도 포격을 감행했다. 또 남한과의 모든 교류와 협상을 진행하던 통전부 부부장 최승철과 내각 책임참사이던 전금철을 비롯한 11명을 남조선 정보기관의 돈을 받아먹은 배신자라고 하면서 총살하고 온 가족은 정치범관리소로 보내는 비열한 만행을 감행하면서 남한과의 모든 연계를 단절하였다.

 

이처럼 김대중·노무현 정권 시기 북한에 맹목적인 지원을 하지 않았다면 김정은 3대 세습은 결코 이루어지지 못했을 것이라고 나는 감히 말할 수 있다.

 

2014.07.15  북한군 내 왕따 현상의 끔찍한 비극, 희생되는 아까운 청춘들

사회주의를 내거는 북한에서는 태어나서 늙어 죽을 때까지 집단생활을 하여야 한다. 이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집단생활을 하는 군대와 당의 청년돌격대에서 ‘외톨이 만들기’, 즉 북한식 왕따문화에 희생이 되고 있다.

 

북한에서 따돌리기를 가장 쉽게 당하는 부류는 일반 평민의 자식들이다. 상류 가정에서는 자식들을 군대에 보내도 집에서 가까운 곳에서 편한 보직에 근무하도록 로비를 한다. 또 소속 부대 지휘관들에게 자주 찾아가 뇌물을 주면서 자식을 잘 돌봐주고 승진도 일반 평민 출신들보다 빨리 시켜달라고 부탁한다. 이 때문에 군 내부에서는 대부분 간부집 자식들 중심으로 무리가 형성된다.

 

집안에 돈도 없고 부모들의 지위도 낮으면 온갖 모욕과 험한 심부름을 하면서 심한 스트레스에 시달려야 한다. 평민의 자식들은 얼마 되지 않는 급식량도 사관들이 빼앗기기 때문에 욱하는 마음에 충동적으로 행동하기 쉽다. 갑자기 총기를 들고 자기에게 못되게 굴던 사람들을 쏴죽이고 자결하거나, 무턱대고 탈영했다가 다시 잡혀와 맞아죽는 비참한 일들이 반복되고 있다.

 

군 생활은 1~2년이 아니다. 일반 병종도 10년은 복무해야 한다. 974호위부대는 13년 동안 군 생활을 하며 부모 형제들에게 편지도 못하게 되어 있고, 경보·저격 특수부대도 13년을 복무한다. 그 긴 시간동안을 따돌림 속에서 생활한다면 온전한 정신상태를 유 지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북한 초병 한 명이 신의주 인군 압록강변에서 근무를 서고 있는 모습. 2009년 7월./뉴시스

 

그래서 북한에서는 군과 돌격대에서 제대되어 오는 사람들을 석기, 즉 머리에 든 것이 하나도 없는 돌대가리라고 부른다. 군대에 입대하여 처음에 신병훈련이라는 것을 하는데 원래는 6개월이던 것을 병사들이 힘들어서 탈영이 많고 사관들의 구타가 심해지자 3개월로 단축하였다.

 

부모들이 돈이 없어 부대에 면회도 못 오고 상급자에게 뇌물을 바치지 않아 따돌림을 당하는 병사 중에는 식당에서 조금 주는 밥마저도 떼우고 배가 고파 민가에 얻어먹으려고 탈영하는 병사가 많이 나온다.

 

2010년 4월 초에 인민보안부 8총국(도로총국) 본부 경비를 보는 경비소대에서 따돌림을 받은 병사가 너무 배가 고파 점호 이후 민가에 나갔다가 잡혀 들어왔다. 이에 소대장과 분대장은 자기들 소대와 분대를 망신시키었다고 하면서 밤 12시 경에 그를 어두운 구석에 데리고 가서 거의 2시간동안 집단구타를 해 내장파열로 죽게 하였다. 이렇게 자기 병사를 때려죽이고도 군율강화 중에 일어난 치사 사건으로 무마되고 말았다.

 

2007년 가을 강원도 문천시 고암동에 있는 해군사령부 산하 동해함대 문천 전대(戰隊)에서는 김정일의 현지 시찰을 맞이하기 위해 중앙당과 인민무력부, 국가안전보위부 행사총국에서 내려와 만단의 준비를 하고 대기하고 있었다.

 

그런데 부대에서 몇년동안 따돌림을 당해 외톨이로 고민하던 하사관 한 명이 그날 또 지휘관들에게 욕을 먹고 야간 위병근무를 나갔다. 그는 같이 나간 병사의 탄창까지 빼앗은 뒤 전대 지휘관들이 있는 곳을 습격, 가지고 간 AK자동보총 50여발을 연발로 쏘아 약 10여명의 지휘관들을 사살하고 자살했다. 당연히 김정일의 현지시찰은 취소됐다.

 

2005년 봄에는 철도경비대에서 한 대대참모가 여병사들의 초소를 습격해 강간하고 여병사들을 인질로 끌고 달아난 사건도 있었다. 사건이 일어난 자강도 희천시에 있는 개마고원(일명 개고개)에는 산이 깊고 기찻굴(터널)이 많은 곳이지만 철도 경비 근무 자체는 여성들만으로도 충분히 할 수 있는 것이었다. 또 남성 병사들의 숫자가 전체적으로 부족해 그곳까지 파견할 병력이 없었다. 여성들도 오지인 그곳에서 근무하는 걸 꺼리자 당국에선 ‘여병사의 수기’라는 홍보용 영화를 만들기도 했다.

 

초소당 대략 4~5명의 처녀 병사들이 생활하면서 교대로 기차터널 보초도 서고 순찰도 진행하는데 낯선 사람들이 다가오면 무섭고 긴장하여 총을 발사하는 경우가 많이 있었다. 그런데 그날은 대대참모가 올라오기 때문에 마음 놓고 그를 맞아들인 것이다. 하지만 대대참모는 초소시찰을 온 것처럼 하고 무기검열을 한다면서 무기들을 다 거두어 무기고에 넣고 열쇠를 잠궜다. 이어 권총을 뽑아들고 서로 묶도록 한 뒤 교대로 한 명씩 강간을 했다. 또 두 명은 초소에 묶어놓고 두 명은 인질로 삼았는데, 한 명은 탄약과 수류탄을 휴대하게 하고 또 한 명은 다른 무기들을 휴대하도록 하였다.

 

그 후 철길 순시를 나왔던 사람들을 통해 초소가 습격당한 것을 알고 그 대대참모가 근무하던 철도경비대의 한 개 대대 병사들을 동원하여 수색에 나섰으나 대대참모는 동굴 속에 들어가 수류탄을 던지고 총을 쏘면서 인질들을 죽이겠다고 위협하였다. 그러자 대대장이 인질들까지 다 죽어도 좋으니 사살하라고 명령하여 그 동굴에 발사관을 발사하여 동굴을 메워버리고 대대참모와 두 명의 여 병사들을 사살하였다.

 

후에 확인한데 의하면, 대대장보다 군복무도 오래 하고 나이도 많았던 대대참모는 나이가 어린데도 집안토대가 좋아 출세가 빨랐던 대대장이 상급이랍시고 자기를 멸시하고 많은 대원과 지휘관들 앞에서 노골적으로 비난하자 불만을 품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이에 총기사건을 일으켜 자기는 죽고 그 연대책임으로 대대장을 자리에서 쫒겨나게 하려 했던 것이다. 그러나 집안토대가 좋은 대대장은 오히려 사건을 빠른 시일 안에 종결하였다고 보고되어 연대 참모장으로 승진을 하였다.

 

북한에선 이런 사건과 유사한 사건들이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다. 다만 언론 자유가 없는데다 사회주의에 나쁜 영향을 주는 사건은 절대 말하지 못하게 하기 때문에, 항간에서는 이런 일이 있는 줄 거의 모르며 알아도 말을 못하고 있다.

 

특히 북한에서 당의 핵심부대라고 하는 청년돌격대에선 돈이 없으면 거지나 무지렁이로 온갖 구박과 멸시를 당하다가 결국 상대를 죽이고 자살하는 현상이 빈발하고 있다. 또 돌격대에 있는 여성들을 무리로 달려들어 강간하고 죽이는 비참한 현실이 꼬리를 물고 나타나 남성중대와 여성중대를 서로 다른 지방으로 이주시키는 일도 있었다.

 

이렇게 북한의 청년들은 인생의 가장 귀중한 청춘시절을 군과 돌격대에서 허무하게 10여년을 보내면서, 부모들이 간부가 아니고 집에 돈이 없다는 이유만으로 따돌림을 당하고 온갖 구박과 멸시를 받으며 죽지 못해 살아가고 있다. 북한의 썩을 대로 썩은 세습 독재정권을 끝장내지 않으면 이런 비극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2014.07.24 김정일의 아들로 가장한 초대형 사기사건

2002년 12월 북한에서 도저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희귀한 초대형 사기사건이 발생하였다. 김정일의 비자금을 마련하던 대외보험총국에 대 낮에 김정일의 아들로 가장한 인물이 찾아와 미화 3만달러를 사취해 달아난 것이다. 대외보험총국은 당시 중앙당 조직행정부 1부부장이었던 장성택이 직접 관장하던 기관이다.

 

범인은 인민보안성 산하 131(원자력)지도국의 간부부원이었다. 북한에서 원자력 분야에서 일하는 사람은 방사능 피해 등 치명적인 피해에 노출될 수 있기 때문에 대부분 다른 곳으로 옮겨가고 싶어한다. 그러려면 뇌물을 제공해야 한다. 뇌물로 쓸 돈이 없었던 범인은 자기 얼굴을 잘 분장하면 김정일과 비슷해질 수 있다고 판단, 치밀하게 연구해 사기극을 벌였다.

 

범인은 자기 부인을 대외보험총국 총국장을 찾아가게 했다. 부인은 총국장에게 간 뒤 ‘중앙당 서기실 80호(김정일의 가계를 보는 부서)에서 전화가 왔다’며 자기 남편과 총국장을 연결시켜줬다. 범인은 전화통화에서 총국장에게 ‘오후 2시에 중앙당에서 대외보험총국의 사업을 파악하기 위해 나갈 것”이라고 통보하였다.

 

이어 범인은 중앙당 청사 앞에 서있는 고급 승용차(당시 216번호를 단 벤츠) 운전사에게 100달러를 주면서 자기를 약 2km 떨어진 대외보험총국청사 앞에 데려다 달라고 했다. 대외보험총국은 중앙당 근처 러시아 대사관 뒤쪽에 있었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북한군 1112군부대를 시찰하면서 수행 중인 군부지도자들과 함께 웃고 있다. 이 사진은 2006년 11월4일 공개한 것이다./조선중앙통신

 

그는 당시 김정일과 수행 고위간부들이 현지시찰을 나갈 때마다 입던 연한 회색빛의 동복을 착용, 고위 신분이라는 인상을 주도록 위장하였다. 오후 2시에 청사 앞에 나와 기다리던 대외보험총국장과 당비서는 먼저 전화 통지를 받은 뒤라 고급 승용차에서 내리는 그에게 깍듯이 인사를 하며 정중히 맞이하였다. 총국장과 당비서가 마중 나와 맞이하자 청사 보초를 서던 보안원도 경례를 하면서 신분증 확인을 하지 않았다.

 

외부인 출입이 엄격히 통제되는 대외보험총국에 무난히 들어간 그는 약 2시간동안 대외보험총국 청사 곳곳을 다니며 사업 지도를 하고 총국장 방에 들어가 잘못된 부분에 대한 지적을 한 뒤 갑자기 ‘당에서 돈이 필요하니 미화 3만달러를 가져오라’고 총국장에게 지시하였다. 그의 외모가 너무나도 김정일과 비슷하다보니 총국장은 아무런 의심 없이 부기실 금고를 열고 3만달러를 가져다 주었다.

 

돈을 받고 난 범인은 당비서에게 ‘저녁 6시에 모든 직원을 회의실에 대기시켜 놓으라. 내가 직접 김정일 비서에게 보고하고 다시 내려와 김정일비서의 이름으로 감사의 뜻을 전하겠다’고 하였다.

 

총국장과 당비서는 너무도 황송하여 그를 깍듯이 바래주고 저녁 6시에 총국의 전체 직원들을 회의실에 모이게 했다. 그런데 6시 30분이 지나도 아무런 소식도 없자 그때서야 의심이 생기고 당황한 총국장은 낮에 있은 일을 장성택에게 보고하였다.

 

장성택은 어이가 없어하며 즉시 대외보험총국에 내려와 욕설을 하며 꾸지람을 했다. 중앙당에서 돈이 필요하면 몇 명의 사람이 내려오고 자기도 전화를 했을 것이 아니냐고 하면서 총국장과 당비서를 머저리라고 몰아세웠다.

 

즉시 사건을 보고받은 김정일은 우리 가문의 명예와 관련된 문제이니 절대 소문내지 말고 수사를 하여 무조건 잡으라고 불호령을 내렸다.

 

▲북한 정권수립 기념일인 9.9절을 일주일 앞둔 개성의 외각지역. 금안골노동당사에 주민과 학생들이 집회준비로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다./조선일보DB

 

북한에서 김정일 가문에 대하여 특급비밀로 하고 설사 알고 있어도 사실을 누설하면 정치범관리소에 잡아가니 누구도 말을 못하고, 누구도 알지 못하는 현실을 이용한 아주 대담하면서도 주도 세밀한 사건으로 일반 주민들이 알면 안 되는 사건이므로 보위부와 보안부, 검찰기관에서는 공개는 하지 못하고 은밀히 사건수사를 진행하였다.

 

그런데 다행인 것은 대외보험총국이 보유하고 있는 모든 외화의 화페 번호를 기록하여 보관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에 수사기관들은 북한 전역의 외화상점들과 식당 등 외화를 쓰는 기관들에 사기당한 화폐의 번호를 통지하고 그 화페를 지불하는 사람은 무조건 신고하라는 지시를 하였다.

 

이후 수사 진척 없이 4개월이 지난 2003년 4월 말, 평양시 보통강구역에 있는 경흥외화상점에 한 여성이 문제의 100달러짜리 화폐를 들고 나타났다. 그녀는 상품을 사려다가 판매원의 신고로 보위부에 체포됐다.

 

당초 범인은 범행 직후 부인에게 ‘사건수사가 끝날 때까지 절대로 돈을 쓰지 말고 보관해놓으라’고 했지만 부인은 아들이 학교에서 봄철 체육대회를 하는데 돈이 필요하게 되자 남편 몰래 400달러를 들고 나갔다. 그는 달러가 필요하다는 자기가 잘 아는 여성을 찾아가 달러를 주고 북한 화페를 받았다. 미 달러를 교환한 그 여성은 아무 영문도 모루고 외화상점에 상품을 사러갔다가 체포된 것이다. 이어 범인도 체포됐음은 물론이다.

 

수사 결과를 보고받은 김정일은 범인 가문을 멸족시키라는 지시를 내리었다. 이에 범인의 직계가족 뿐 아니라 팔촌까지 보위부에 체포됐다. 엄격한 통제사회라는 북한에선 이처럼 남한에서도 상상할 수 없는 희한한 범죄들이 발생하고 있다. 한 사람이 모든 권력을 쥔 경직된 사회에서 통할 수 있는, 어이 없는 범죄들이다.

 

2014.08.11 덴다, 총탄, 돌이돌이, 위폐, 무기...북한의 추악한 지하경제

김정일 시기에는 매년 1월 1일에 중앙당 38·39호실 산하 지도국들과 무역은행들이 중앙당의 지시에 따라 3000만 달러를 모아 김정일에게 새해 선물로 바치었다. 김정일의 생일인 2월 16일에는 2160만 달러를 의무적으로 바쳤다. 지금도 북한 주민들은 성인 1인당 매년 충성의 외화벌이로 금 0.2g씩을 선물로 바쳐야 한다.

 

대흥지도국에서 독점 판매하는 북한산 송이버섯 판매 대금은 몽땅 김정일의 혁명자금으로 들어가기 때문에 다른 회사나 개인들이 송이를 따서 팔다가 잡히면 형사처벌을 받게 되어 있다.

 

한에 형성돼 있는 지하경제의 많은 몫은 마약생산과 판매, 무장장비 수출, 위조달러 제조판매에서 생겨난 것이다. 마약은 평양시 상원군 식송리에 있는 인민무력부 청사관리국 군상관리소라는 기관에서 비밀리에 생산된다. 이 기관의 김성훈이라는 사람은 대좌 계급을 달고 ‘얼음(아이스)’이라고 하는 마약을 생산·판매해서 벌어들인 거액의 외화를 김정일에게 상납함으로써 공화국 2중 노력영웅 칭호를 받기도 했다. 그가 이끄는 조(組)는 2000년 한 해에 8억 달러를 벌어들였다는 설도 있었다. 김성훈은 형식적인 직위는 대좌였지만 사실은 보위사령부 군상관리소 소장이었다.

 

2002년 9월 김정일이 영웅대회를 한 뒤 금수산기념궁전 앞에서 대회 참가자들과 기념사진을 찍을 때 군인 대열 2번째 줄에 서 있는 사람과 웃으며 악수를 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그가 바로 김성훈이었다.

 

그러나 김성훈은 마약을 생산하면서 자기도 모르게 마약에 중독됐다. 북한 당국은 마약 생산 비밀을 감추기 위해 그와 그의 가족을 15호 관리소로 보내버렸다. 하지만 김성훈이 잡혀가는 과정에서 비밀이 노출되자 당국은 평양시 순안구역 재경리로 마약생산 기지를 옮긴 뒤 현재까지 마약을 계속 생산하고 있다.

 

▲지난 2003년 북한 화물선‘봉수’호 선원들이 1억5000만 호주 달러 상당의 헤로인 밀수 혐의로 호주 시드니에서 체포됐다. /조선일보 DB

 

생산된 마약은 국가안전보위부 312조와 보위사령부 31부 사람들이 외교여권을 가지고 외국에 나가 마피아조직 등에 판매하고 있다. 또한 함경남도 흥남시에 있는 흥남비료공장 6직장에서 같은 마약을 전시용품으로 생산하여 국가에 상납하고 있다. 마약은 333g을 포장하여 내가는데 겉으로 보면 포장한 초콜릿처럼 보인다. 한 박스에 333g짜리를 60개씩 넣어 20kg으로 포장한다.

 

인민무력부 군의국 산하 조선인민군 11호 종합병원 명신무역회사에는 변상호라는 사람이 사장으로 있다. 상좌 계급을 달고 있는 그는 회사에서 ’덴다’, ‘총탄’, ‘돌이돌이’라고 하는 마약들을 생산하여 대남연락소 123·128 공작원들에게 외국에 가지고 나가 팔게 한다.

 

아이스라는 마약은 사람의 중추신경을 마비시키는 현재 북한주민들 사이에 많이 사용되는 마약이다. 이제는 함흥시와 남포시, 순천시, 사리원시를 비롯한 전국의 방방곡곡에서 주민들이 자체로 집에서 생산하여 사용하거나 판매한다. 일종의 생계수단이기도 하다.

 

아이스는 원래 호주에서 수입한 마황에서 뽑아낸 에페트린을 주원료로 했으나 마황 수입이 중단되자 화학물질인 페놀과 초산을 합성하여 생산하게 됐다. 이렇게 생산한 제품은 얼음같다고 하여 ‘얼음’으로 불리기도 한다. 북한에서는 10대 청소년 다수가 이를 사용하고 있다. 평양에서 아이스 1g당 20~25달러에 거래되고 있다.

 

아이스는 사람의 뇌를 자극시키는 흥분제같은 역할을 한다. 이 때문에 코나 입으로 흡입하면 힘이 솟아 호전적이 되거나 흉기로 사람을 찔러 피를 보도록 충동하는 효과가 난다. 아이스는 초기에 군인용으로 생산됐다. 출전을 앞둔 군인들에게 이 약을 흡입케 해 그들을 인간백정으로 만들려는 목적이었다.

 

또다른 마약 덴다는 사람의 신경을 마비시키는 마약이다. 북한 당국은 처음엔 전시에 부상한 군인들을 위한 진통제로 사용했는데 지금은 다량을 생산하여 외화벌이에 이용하고 있다. 이 마약은 3mm 정도의 직경과 1mm 정도의 두께로 되어있는 알약인데 100캄마(앰플, cc 용량 단위)짜리 1만 알은 헤로인 1kg에 해당한다. 이 약에 중독되면 견딜 수 없는 고통에 시달리게 된다. 이 때문에 이 마약에 중독되어 가산을 다 팔고 가정이 파탄된 사람들이 많다. 평양에선 이 약 한 알은 2달러에 판매되고 있으며 중독자들은 하루 30알씩 이 약을 가루내어 코로 흡입하고 있다. 이 약을 처음 사용하는 사람이 100캄마짜리 2알을 흡입하면 뇌졸중으로 급성사망하게 된다. 이 약은 주로 평양과 지방의 돈 많은 사람들이 전문적으로 쓰고 있다.

 

이렇게 북한에서는 전쟁준비라는 명목 하에 사람의 탈을 쓴 인간백정을 만들어내는 것도 모자라 지금은 그것을 국제사회의 비난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외화벌이를 하여 김정은이 탕진하고 군사장비 강화와 핵개발에 광분하고 있다.

 

마약 생산 판매와 함께 북한 지하경제의 큰 부분을 차지하는 위조달러는 김정은의 서기실에서 직접 주관하여 평양시 형제산구역 서포 3동에 위치한 인민무력부 정찰총국 기관 안에 있는 지하갱도에서 제작한다.

 

위조달러를 너무도 똑같이 만들기 때문에 사람의 눈으로 확인하기 어렵고 심지어 위폐감별기도 식별해내지 못한다. 위조달러는 주로 대남공작원들과 해외 공관들에 공작자금으로 많이 배포되고 있다. 2007년경에 그 곳에서 일하는 간부가 위조달러 두 박스를 몰래 가지고 나온 뒤 무역은행 직원의 협조를 얻어 진짜 달러와 바꿔치기해 중국으로 내보냈다. 이것이 들통나면서 북한과 중국이 갈등을 빚자 북한 당국은 비밀보장을 위하여 가담자들을 사형시켜 버렸다.

 

이 소문이 평양시에 나돌자 국가안전보위부와 인민보안부에서는 인민반들을 통하여 남조선 괴뢰들이 공화국의 내부를 혼란시키기 위하여 개성공단을 통해 위조달러를 유포시키고 있다고 주장하는 한편, 주민들을 향해 위조달러를 가지고 있는 사람을 보안기관에 신고하라고 촉구했다. 위조달러는 한 박스에 25만 달러씩 포장됐다.

 

▲북한이 위조한 것으로 의심되는 100달러짜리 지폐들/AP뉴스

 

최근에는 개인들이 컴퓨터를 가지고 위조달러를 제작해 시장에서 암거래를 하고 있는데 위폐 100달러짜리는 진폐 10달러로 거래된다. 무역회사에 근무하고 있는 사람들은 위조달러를 사가지고 중국 등 외국에 나가 거액을 거래할 때 1만달러에 10장까지 끼워 사용하고 있다. 이렇게 가짜 미국 달러를 해외에 유포시키는 것은 외화벌이도 하고 국제사회에서 미국을 고립시키기 위한 작전이라고도 한다.

 

정찰총국 산하 연락소들과 보위사령부, 국가안전보위부에는 혁명자금 마련을 위한 공작조가 있다. 이들은 배에다 무장장비를 가지고 바다에 나가 마피아들은 물론이고 심지어 소말리아 해적들한테까지 무기를 판매하여 많은 외화를 혁명자금 명목으로 김정일에게 바치었다.

 

이렇게 북한은 국제적으로 금지되어 있는 마약과 위조화페, 무장장비를 불법적으로 가지고 나가 많은 외화를 벌어들이고 있다. 불법적인 이런 물자들을 가지고 다른 나라로 나가는 사람들은 ‘216통장’이라고 하는 카드를 가지고 다니는데 그것을 소지하고 있는 사람은 북한 내에 있는 모든 세관 검사와 통제에서 면제된다.

 

2005년경 중앙당 35호실 산하 123연락소 소속 여성 2명이 중국에서 많은 외화를 가지고 기차편으로 평양으로 들어오다가 신의주 국경세관에 도착했다. 한 세관원이 젊고 예쁜 여성들이 216통장을 꺼내들자 그것을 믿지 않고 짐을 검열하였다가 보위부 정치범관리소에 가족들과 함께 잡혀가고 세관장을 비롯한 간부들은 해직되고 말았다. 이후 모든 세관들은 216통장을 무사통과시키고 있다.

 

이 외에도 북한에서 많은 외화를 벌어들이는 사업은 제2자연과학원 연구사들이 이란, 시리아, 나이지리아 등 외국에 나가서 군사무장장비 합동개발과 합동연구를 함으로써 이루어진다. 특히 이란 및 시리아와는 미사일 분야와 핵실험 합동 연구를 진행하면서 거액의 외화를 벌어들이고 있다.

 

이런 사업은 주로 외국에 나가있는 제2경제위원회 대표들이 계약을 하는데 무장장비 판매 사업은 거래계약서가 없이 진행되는 사업이므로 많은 돈을 개인이 숨길 수 있다. 이 때문에 북한 간부들은 제2경제위원회 상주 대표로 외국에 나가는 것을 가장 선호한다.

 

중앙당 기계사업부 직속으로 되어 있는 흑연무역회사와 중앙당 조직군사부 직속으로 되어 있는 백두산지도국(일명 216지도국)에서 근무해야 외국에도 많이 나가고 외화도 벌수 있기 때문에 국가급 간부로 등용되기보다는 그런 기관에서 부원으로 근무하는 것을 더욱 선호하고 있다.

 

이처럼 국제법에 어긋나는 불법행위로 번 돈으로 김정일은 호화생활을 했고, 지금 김정은은 그 돈으로 핵무기 개발과 미사일 개발에 박차를 가하면서 한반도와 세계의 평화를 위협하고 있다. 불을 즐기는 자는 결국 그 불에 타 죽고 말 것이다.

 

2014.08.20  2만명이 처형된 북한 심화조 사건의 끔찍한 비극

소위 ‘심화조 사건’의 첫 시작은 평양시 용성구역 안전부(현재 인민보안서)에서 일어났다. 발생지역 이름을 붙여 ‘용성 사건’이라고도 한다. 심화조라는 말은 간부들의 경력을 심층적으로 파악하는 일을 담당하는 조직을 뜻한다.

 

심화조 사건의 주인공인 채문덕은 당시 사회안전성(현재 인민보안부) 정치국장으로 막 임명됐다. 김정일은 그에게 김일성의 유훈이라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일제강점 시기 아버지의 고향 만경대에 최 지주라는 지주가 있었는데 그가 아버지의 가문을 착취했다. 그의 아들 최성택은 남조선으로 달아나 군 장성이 되었고 다른 자식들은 아직도 북한에서 이력을 속이며 살아가고 있는데 잡지를 못했다. 또 광복 후와 6·25시기 악질적인 반공단체이었던 서북청년단 잔당들이 많이 남아있다….’ 김정일은 이렇게 말한 뒤 채문덕에게 그들을 꼭 잡아서 숙청하라고 지시하였다.

 

▲2013년 12월 16일자 노동신문에서 김정일 사망 2주기를 하루 앞두고 게재한 김정일의 생전 시찰 모습 사진./노동신문

 

북한의 많은 고위급 간부와 인민들은 1994년 7월 8일 김일성이 사망한 후 김정일의 독단과 횡포에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김정일은 그들이 언젠가 자기에게 반기를 들 수 있다고 직감했다. 이에 조금이라도 의심이 가는 간부들을 숙청하고 물갈이하기 위하여 채문덕에게 심화조를 조직하라고 지시했다. 전국 모든 간부들에 대한 뒷조사를 하라는 얘기다.

 

심화조를 조직하기 위해 먼저 선전작업에 들어갔다. ‘6·25전쟁 때 미국 지시로 훈련을 받은 서북청년단 특공대가 김일성이 있던 용성구역 건지리 최고사령부를 불시에 습격해 김일성을 테러하려다가 실패했다. 하지만 지금도 그들은 무기들을 감추어 놓고 때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다’는 식이었다.

 

이어 ‘용성구역 룡추동 뒷산에서 미국산 무기와 수류탄 및 많은 탄알들을 찾아냈다’고 TV에 방영하면서 ‘계급적 원수들의 본성은 변하지 않는다’는 선전을 해댔다. 이어 1997년 초에 사회안전성 본부에 채문덕을 책임자로 하는 중앙상무조가 조직되고, 전국 모든 도·시·군 안전부들에 심화조를 만든 뒤 간부들의 경력을 재조사하라는 지시를 김정일 이름으로 하달하였다.

 

첫 시작은 중앙당 농업담당 비서였던 서관히에 대한 사건이었다. 그에게 1996년에 김정일로부터 비료 수입대금으로 받은 미화 300만달러를 탕진하였다는 죄목을 들이댔다. 당시 사회안전성 교화국 7교화소(황해북도 사리원시에 있음)에서 교화생활을 하던 서관히를 평양시 만경대구역 봉수동에 있는 사회안전성 구류장에 넣고 모진 고문을 가했다.

 

결국 서관히로부터 서북청년단의 지원을 받아 북한의 농사를 망치게 하려 했다는 자백과 함께 농업위원회 위원장을 하다 죽은 김만금도 공범이었다는 진술을 받아냈다. 또 중앙당 본부 당 책임비서 문성술이 서북청년단 부단장이었고 평안남도 당 책임비서 서윤석과 황해남도 당 책임비서 피창린, 중앙검찰소 당 비서 김기선, 강원도 당 책임비서 림형규 등 많은 사람들이 서북청년단 단원이었다는 자백도 받아냈다.

 

곧바로 피의 숙청이 시작됐다. 평양시 형제산구역 십미리에 있는 사회주의 애국열사릉에 있던 김만금의 시체를 파내 총살했다. 문성술은 평양시 형제산구역 안전부 구류장에 가두고 고문을 했으나 자백하지 않고 반항을 하자 설사약을 먹이고 3일동안 물 한 모금 안 줘 죽게 했다. 서윤석은 예심국 구류장에서 갖가지 고문을 가해 모든 뼈마디를 부스러뜨려 죽였다. 림형규·피창린·김기선 등도 모진 고문 끝에 총살됐으며, 가족들은 당시 사회안전성 교화국에서 관리하던 18호 관리소로 보내졌다. 용성구역의 70세 이상 인민들도 대부분 서북청년단 특공대원이라는 누명을 쓰고 처형됐다.

 

수많은 사람들이 잡혀온 관리소는 인원 수용이 한계에 다다라 1998년 여름에 함경남도 대흥군에 17호 관리소를 새로 만들어야 했다. 수용자들은 야밤에 무장 성원들의 호송 하에 새 관리소로 집단 이주되었다.

 

평양시 강남군 안전부에서는 강남군 당 책임비서를, 자강도 희천시 안전부에서는 희천시 당 책임비서를 고문하다가 때려죽이는 사건도 일어났다.

 

김정일은 심화조가 큰 공을 세웠다며 채문덕과 주민등록국장이었던 박창선에게 공화국영웅칭호를 주었다. 또 심화조에서 일한 모든 성원들에게 국가수훈표창을 주며 ‘사람잡이’에 내몰았다.

 

▲김정은 집권 후 숙청된 4인방.

 

이렇게 약 2년 동안 2만 여명의 사람들이 총살되거나 관리소로 보내졌다. 마지막 단계에서 중앙당 군수담당 비서이었던 전병호와 사법·검찰 담당 비서이었던 계응태에 대한 검토에 들어갔을 때 여론의 불만이 고조됐다. 김일성 정권에 충성했던 많은 간부들과 주민들이 다 간첩이라면 어떻게 지금까지 나라가 유지되었겠는가 하는 목소리가 터져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이에 김정일은 국가안전보위부와 보위사령부가 합동으로 사회안전성에 대한 조사를 하라고 지시하였다.

 

조사 결과 사회안전성이 진행한 심화조 사건이 오로지 채문덕의 복수심과 개인 공명심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결론을 만들어냈다. 이에 김정일은 중앙당 성원들로 검열 그룹을 보강하여 강하게 처벌하라고 지시하면서 자기는 심화조 사건을 몰랐던 것처럼 외면하였다. 그러면서 “사회안전성이라는 말만 들어도 치가 떨린다”며 명칭을 인민들을 보호하는 기관이라는 의미의 인민보안성으로 고치라고 지시하였다.

 

2000년도 초부터 시작된 반(反)심화조 조사는 7월에 채문덕에 대한 사형을 집행하고, 9월에 사회안전성 참모장이었던 황진택(상장)과 주민등록국장이었던 박창선(소장)을 비롯한 사회안전성의 장성 10여명을 공개 체포하고, 전국 각지 안전부의 심화조에 소속됐던 약 6000여명의 안전원들을 총살하거나 교화소에 보내는 것으로 막이 내렸다.

 

평양시에서는 ‘김정일의 인덕정치가 관리소에 갔던 사람들의 억울함을 풀어주었다’면서 피해자들을 옥류관과 연못관, 평양면옥을 비롯한 큰 식당들에 불러모아 식사를 대접하면서 위로해주는 시늉을 했다. 하지만 토론시간 때 김정일의 인덕정치에 대한 찬양은 없고 안전원들의 악착같은 만행에 대한 규탄 목소리만 나오자 위로연을 중지시켰다.

 

한편 김일성 가문을 착취했다는 만경대 최 지주의 딸은 이력을 위장하고 함경북도 무산군 상업관리소 소장으로, 그의 남편은 무산군 행정위원회 국장으로, 아들은 국경경비대 부소대장으로 군사복무를 하다가 1997년 말 18호 관리소에 잡혀왔다. 이들은 이듬해 4월에 온 가족 3명이 옥수수가루(일명 속도전가루) 한 배낭씩만 메고 탈출을 하여 무산군까지 가 국경을 넘으려다가 20여 일만에 결국 체포됐다. 두달 뒤 최씨 여인은 이주민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교수형을, 남편과 아들은 총살을 당했다.

 

북한에서는 이처럼 김일성과 김정일 시기를 거치면서 수많은 사람들이 억울하게 처형당하는 비극적인 사태가 끊임없이 계속됐다. 김정은이 장성택 일파를 숙청하는 등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전철을 밟고 있다. 업보는 사라지지 않는다. 나는 그들의 업보가 조만간 폭발할 것이라 확신한다.

 

2014.09.15 앞에만 넥타이를 매는 비정의 도시 평양

김정일은 일찍이 “사람은 앞에만 넥타이를 맨다”고 하면서, 모든 것이 풍족하지 못한 평양의 도시 미화 작업은 간선도로 중심으로 앞부분만 대대적으로 꾸미면 된다고 했다. 그 모습을 촬영해 전 세계에 선전하고, 평양에 오는 외국인들이 평양시를 황홀한 공원 속의 도시로 인식하도록 만들라고 지시했다. 평양시는 실제로 그렇게 꾸며졌다.

 

평양에 가보면 큰 도로 앞은 깨끗하고 화려해 보이지만 뒤를 돌아가보면 주민들의 문화후생시설이 없는 것은 물론이고 도로포장도 제대로 되어 있지 않다. 특히 주변 구역들의 주민생활조건은 말할 수 없이 열악하다.

 

▲작년 7월 북한 개성에 폭우가 내린 뒤 주민들이 길 위의 빗물과 진흙을 치우고 있다 /AP

 

우선 평양시의 가장 심각한 상황은 화장실 상황이다. 도로변은 물론이고 상점이나 식당들에도 화장실이 없기 때문에 평양 사람들은 길거리에서 볼일을 본다. 남자가 조용히 돌아서거나 여자가 쪼그려 앉으면 길거리 모든 곳이 화장실이 된다.

 

이렇게 모든 것을 허위와 가상으로 하기 때문에 외국인들이 오면 정해진 관광코스에 의해서만 움직이게 하고 자유롭게 움직이지를 못하게 하는 것이다.

 

지금도 그런 형식 위주의 도시미화작업은 계속되고 있다. 디자인이 좋은 아파트나 봉사시설을 건설할 때에는 시민들이 살고 있는 아파트를 마음대로 허물어버린다. 주민들이 집이 없어 길거리에 나앉아도 상관하지 않고 오직 평양의 도시 미화를 살리는데만 집중하고 있다.

 

실례로 최근 평양시 중구역 종로동에 40층짜리 고층아파트를 건설하여 평양시를 웅장하게 만든다고 하면서 중구역 만수동·경상동의 주택들과 봉사기관(아동백화점 포함)들을 완전히 철폐함으로서 많은 주민들을 고통 속으로 내몰았다. 2010년에는 김정일이 중국에 갔다 와서 평양시도 중국처럼 거리를 꽃으로 장식하라고 하여 평양 시민들 사이에서는 그야말로 아비규환이 일어났었다.

 

실패한 화폐개혁의 진통이 채 가시기도 전에 또다시 거리장식을 한다면서 평양시 각 구역별로 경쟁을 붙였다. 심지어 탁아소 유아들과 유치원생들, 학교 학생들, 인민반·기관·기업소 종사자들로부터 북한 돈으로 평균 5만원 이상을 걷어가지고 주요 도로 주변에 화단을 조성했다. 생화(生花)가 없다보니 비닐 꽃을 만들어 화단을 꾸렸다. 꽃을 바치라는 독촉을 못이긴 주민들이 밤에 화단의 꽃을 도적질해서 그 다음날 다시 바치는 일이 빈발하자 화단에 보초를 세웠다.

 

이처럼 평양시 당국이 주민들의 생활에는 관심이 없고 오직 수뇌부의 권위를 세우는 일에만 몰두하기 때문에 곤궁한 생활에 쫒긴 주민들은 각종 범죄사건을 일으키고 있다.

 

2010년 11월 초 평양시 형제산구역 하당시장에서 여성 3명과 남성 1명에 대한 공개 재판과 총살형이 집행되었다. 50대의 남성과 20대의 여성은 부녀지간이었다. 이들은 집이 없어 처음에는 부부와 아들, 딸 등 식구 4명이 모란봉구역 비파동 아파트 지하 4평짜리 공간에서 살았다.

 

그후 1996년에 제대로 먹지 못하여 병에 걸린 처가 사망하고 아들과 딸이 아버지와 같이 살다가 1999년에 아들이 군대에 나갔다. 남은 아버지와 딸은 좁은 집에서 단 둘이 살다가 결국은 연인관계가 되는 너무나 어이없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군사복무를 10년 하고 돌아온 아들이 그 사실을 알게 되면서 그들의 관계를 갈라놓으려고 하자 아버지와 딸이 공모하여 아들을 살해하는 비극적인 사건이 벌어졌다. 그 사건은 한동안 평양에서 화제가 되었다.

 

40대의 한 여성은 와이프가 사망한 보위사령부 보위원과 재혼하여 자기 아이를 임신하자 남편이 보위원으로 매일 집에 들어오지 못하고 한 달에 한두 번 들어오는 것을 이용하여 본처의 아들 2명을 굶기고 때려 죽이는 사건도 발생했다.

 

평양시 기관 및 기업소들과 인민반들에 배치된 요원들은 많은 사람들이 공개재판 및 처형장에 참가하도록 하고 현장재판을 진행한다. 먼저 평양시 검찰소 기소검사가 그들의 범죄내용을 밝히고 변호사가 매 피고인들에게 자기들의 죄를 인정하고 달게 벌을 받겠다고 말하게 한 다음 판사가 인민참심원 2명과 합의하여 범죄자들에게 사형을 언도한다. 동시에 그 판결에 대하여서는 상소할 수 없으며 평양시 인민보안국이 현지에서 즉시 사형을 집행해야 한다는 결정을 내린다.

 

군중 앞에 나서서 자기들의 범죄를 인정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자기들처럼 당과 국가 앞에 범죄행위를 하면 안된다는 교훈을 주면 관대히 용서받을 수 있다는 예심원의 말을 믿고 안도의 한숨을 쉬며 공개재판장에 나왔던 범인들은 그때서야 발악을 한다. 그러면 보안원들이 가설천막으로 끌고 들어가서 포박을 하고 입에 재갈을 물리고 마스크를 채워서 다시 끌고 나온다. 그새 다른 보안원들이 박아놓은 말뚝에 묶어놓고 한 명 당 각각 3명씩 나와 서서 사형지휘관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이름으로 범죄자를 향하여 단발로 쐇!” 하는 명령을 내리면 사격수들이 자동보총으로 3발씩, 즉 사형수 1인당 9발씩 쏴서 사형을 집행하였다.

 

이렇게 북한에서는 생활환경과 생계유지의 어려움 때문에 불가피하게 감행되는 범죄행위가 늘어나고 있으며 거의 매 분기당 한번씩 평양시 형제산구역 하당시장, 선교구역 무진동 개울가, 락랑구역 토성 등에서 공개재판 뒤에 교수형과 사형을 집행하고 있다.

 

매번 사형시에는 한 주일 전부터 기관 및 기업소들과 인민반, 고등중학교에 공고해 공개재판에 평양 시민들과 학생들이 참가하도록 한다. 공개재판을 보여주며 당과 국가를 배신하는 행위와 범죄를 저지르면 그 누구라도 가차 없이 총살한다는 공포의 메시지를 주입하고 있다.

 

이렇게 암흑의 세계에서 북한 주민들은 굶주림과 공포 속에서 불안하게 살아가고 있지만 김정은은 평양시에 유흥시설과 아파트를 많이 건설하여 주민들이 행복하게 살고 있는 듯이 TV와 신문, 방송을 통하여 허위선전을 계속하고 있다. 하지만 자루 속의 송곳은 감출 수 없는 것처럼 결국 그 진상은 낱낱이 밝혀지고 독재세력은 역사의 준엄한 심판을 받게 될 것이다.

 

2014.09.19 김정일이 중앙당 간부들에게 문전박대 당한 사연

김정일 "중앙당에는 간신들만 있다"

김정일은 살아 생전에 그 누구도 믿지 않았다. 스스로 독재와 폭압 정치를 하였기 때문에 어느 누구도 자기에게 속마음을 털어놓지 않을 뿐더러 업무에 대해 사실대로 보고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김일성으로부터 체계적으로 정권세습 훈련을 받아온 김정일은 1980년 10월 노동당 6차 당대회에서 정치국 상무위원 겸 중앙당 조직비서가 된 이후부터는 김일성도 무시할 정도로 오만해졌다. 그는 오직 자기의 독재체제 수립과 개인의 향락만을 추구하면서 자기를 ‘당’이라고 표현하도록 하는 등 정치적 터전을 다져왔다. 당시 중앙당을 완전히 장악한 김정일은 중앙당의 부장자리를 독점한 채 각 부서의 부부장들을 통해 독재정치를 펼쳐왔다.

 

그러다가 1994년 7월 김일성이 사망하자 북한에서는 김일성을 추모한다고 하면서 애도기간에 술을 마시는 사람은 누구든지 출당시키고 해고시켰으며 심지어 총살에 처하기도 했다. 이 때문에 특히 간부들은 7월 이후 술을 좋아하던 사람들도 술을 마시지 못하였다.

 

▲김정일이 생전에 함경남도 함흥 반도체 재료공장을 방문해 현지지도하는 모습. 오른쪽 끝이 그의 매제이자 당시 권력 2인자였던 장성택. 조선중앙통신은 2009년 7월 1일 이 사진을 보도했다.

 

1994년 12월 30일 중앙당에서는 김정일의 명의로 중앙당에 근무하는 전체 성원들에게 부식물과 술 20병씩 선물을 주었다. 이제는 술을 마셔도 된다는 공식적인 지시는 없었지만 새해를 맞이하여 술을 마셔도 괜찮다는 일종의 암시로 받아들여졌다. 하지만 당 간부들은 여전히 공개적으로 술을 마시지는 못하였다.

 

12월 31일, 1994년 마지막 날 밤 12시경에 김정일은 당시 중앙당 조직행정부 1부부장이었던 장성택에게 ‘오늘은 술을 좀 마셔보자’고 하면서 차에 고급 술을 2박스(40병)를 싣고 장성택과 함께 러시아대사관 앞에 있는 중앙당 부부장들이 거주하는 아파트로 찾아갔다.

 

가장 먼저 1층의 어느 집 앞에 도착해 초인종을 누르자 부부장 한 명이 나왔다. 그는 문 앞에 김정일이 서 있자 당황하여 어쩔 줄을 몰라 쳐다만 보았다. 김정일이 ‘무엇을 하고 있었는가’라고 묻자 그는 입에서 술 냄새가 나고 방에서는 술상을 치우는 소리가 나는데도 겁에 질려 김일성의 노작 학습을 하고 있었다고 거짓말을 하였다.

 

기분이 잡친 김정일은 ‘노작 학습을 잘하라’고 한 뒤 걸음을 옮겨 2층의 다른 부부장 집으로 갔다. 그 역시 술을 마시다가 나와서는 ‘TV를 보고 있었다’고 거짓말을 하였다. 이어 중앙당 과장들 아파트에 가서 두 집을 찾아가 보았지만 역시 같은 소리였고 부원들 집에 찾아갔어도 역시 같은 소리를 하면서 누구도 집에 들어가자고 청하지 않았다. 결국 김정일은 자기가 믿는다는 부부장 2명과 과장, 부원들 집 앞에서 처참하게 망신만 당하고 문전거절 당하는 수모를 당했다.

 

너무나 억이 막힌(기가 막힌) 김정일은 돌아서서 장성택에게 ‘중앙당에는 전부 간신들만 있다’고 하면서 마지막으로 중앙당에 갓 들어온 보조부원의 집에 찾아갔다. 군 복무를 하고 김일성종합대학을 졸업하고 중앙당에 근무하던 30살가량의 젊은 보조부원은 집 문앞에 서 있는 김정일에게 허리 숙여 인사를 했다. 그는 ‘무엇을 하고 있었는가’라고 묻자 ‘새해를 맞아 장군님이 중앙당 성원들에게 선물로 주신 술을 혼자 마시고 있었는데 영광스럽게 장군님이 찾아주시었다’고 하면서 ‘허락하시면 집에 모시겠다’고 말하였다.

 

대번에 기분이 좋아진 김정일은 장성택에게 차에 있는 술을 다 가져오라고 하여 그 집에 들어가 밤새 술을 마시었다. 김정일에 거짓말을 하였던 사람들은 그 다음날 즉각 해고되고 온 가족이 정치범관리소로 이주되었다. 반면 보조부원은 김정일로부터 때가 묻지 않은 견실한 사람이라는 평가를 받고 김일성고급당학교를 추천받아 졸업했으며, 현재 과장으로 근무하고 있다.

 

이 이야기를 후에 공개적으로 거론한 사람은 당시 조직부 1부부장 겸 본부 당 책임비서이었던 이제강이었다. 그는 중앙당본부 성원들이 모인 강연회에서 ‘간부들이 양봉음위(陽奉陰違·겉으로는 명령을 받드는 척하면서 속으로는 배반)를 하면 안 된다’고 강조하면서 ‘장군님도 인간인데 개인적으로 친지의 집에 찾아갈 수도 있다’고 말했다.

 

김정일의 광포한 전횡을 보여주는 또다른 사례가 있다. 2002년경 김정일은 ‘인민들이 식량이 없어 굶주리고 있는데 간부들 사이에 관혼상제를 크게 하면서 식량을 낭비함으로써 일심단결로 뭉친 당과 대중과의 혈연관계를 이탈시키는 행위들이 있다’며 그런 현상을 뿌리 뽑으라고 지시하였다. 그후 또 ‘수입 대 지출이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간부숙청작업이 벌어지자 간부들은 돈을 가지고 있어도 쓰지 못하게 됐다.

 

그러던 중 어느 날 김정일이 점심시간이 지나 오후 2시30분경에 중앙당의 어느 부부장을 찾았는데 그가 아직 점심식사 후 출근하지 않았다는 보고가 들어왔다.(중앙당은 낮 12시부터 2시까지 점심시간이다) 무슨 일인지 알아보라고 하여 해당 부서에서 알아보니, 그 부부장은 관혼상제를 검박하게 하라는 김정일의 지시를 지키기 위해 점심시간에 직계 가족들만 모아놓고 조용히 딸의 결혼식을 하고 있었다.

 

이 사실을 보고 받은 김정일은 의외로 ‘나에 대한 도전이고 반당적 행위’라며 노발대발하였다. 자기는 음식낭비를 하지 말라고 했지 가족의 행사를 당에 보고하지 말라고 하지 않았다고 하면서 그 부부장을 반당혁명분자로 처형하고 가족을 정치범관리소에 보내게 하였다.

 

이렇게 김정일이 너무나도 광포하게 간부들을 도마 위에 올려놓고 칼탕을 치니 간부들은 생존을 위해 극도의 아부를 해야 했다. 물론 진심으로 우러나는 충성심은 없었다. 이런 상황을 김정일도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집권기간 내내 ‘나에게는 충신이 없다’며 잔인하고 무자비한 숙청의 칼을 휘둘렀던 것이다.

 

2014.09.23 남한 선수들에게 패하면 6개월 중노동시켰던 북한

'마라톤 여왕' 정성옥은 김정일 찬양으로 초호화 대접

1999년 8월 스페인에서 진행된 세계여자마라톤경기에서 북한의 사회안전성(지금의 인민보안부) 산하 압록강체육단의 마라톤 선수 정성옥이 1등을 하였다. 당시 정성옥의 나이가 25세라고 하였는데 원래 나이는 28세였다.

 

정성옥은 황해남도 해주시에서 소학교와 고등중학교를 다니면서 처음에는 문학을 좋아하여 문학소조(小組)에 다니다가 교내 달리기에서 1등을 한 다음 해주시 체육구락부 육상소조에 다니면서 단거리 육상을 전공하였다.

 

그런데 북한에서 한때 마라톤으로 유명했던 신금단(당시 압록강체육단 마라톤 지도원)이 여자마라톤 선수 선발을 위해 해주구락부에 왔다가 정성옥을 보고 ‘너는 마라톤 체질’이라고 하면서 압록강체육단 선수로 데려갔다. 압록강선수단이라고 하면 누구나 가고 싶어 하는 곳이고 또 평양으로 갈 수 있다고 하니 정성옥은 마다할 수 없었다.

 

그렇게 평양으로 올라온 정성옥은 경기 성적에 크게 성과가 없다가 1998년 중국 베이징마라톤경기에서 3위를 하고 돌아와 공훈체육인 칭호와 중위의 군사칭호를 받았다. 그때까지 신금단의 제자 중 공훈체육인은 한 명도 없었다.

 

▲1999년 9월 12일 해주시에서 열린 환영대회에서 정성옥이 군중 환호에 답하는 모습.

 

1999년 스페인에서 열린 마라톤경기에 북한에서는 당초 선수파견계획이 없었다. 그런데 당시 평양시체육단에서 마라톤 선수로 있던 김창옥의 집에서 자기네가 비용을 내겠으니 자기 딸이 경기에 참가하도록 보내달라고 제기하여 받아들여졌다. 그때 김창옥을 보내면서 정성옥도 그의 보좌선수로 함께 출전하도록 허가되었다.

 

그 대회에서 정성옥이 뜻밖에도 우승 후보인 일본선수들을 제치고 1등을 했다. 김창옥은 10등에 머물렀다. 정성옥이 1등을 한 뒤 게양대에 걸 북한 깃발이 준비되지 않아 시상식이 지연됐을 정도로 그의 우승을 기대한 사람은 드물었다.

 

정성옥의 우승은 자국 선수의 우승을 기대했던 일본에 타격을 가하는 한편 일본 조총련에 힘을 실어주었다는 점에서 특별났다. 여기다 결승 테이프를 통과한 정성옥이 기자들의 소감을 묻는 질문에 ‘결승선에 장군님(김정일)이 서서 성옥아 힘을 내서 어서 오라 하고 부르기에 장군님을 그리며 달렸다’고 대답한 것이 외국신문에 실리면서 김정일을 감동시켰다.

 

김정일은 자기의 위상을 높여준 정성옥을 위해 100만 평양시민들을 동원한 요란한 가두 환영식을 열어주었다. 또 김영남을 비롯한 국가 간부들이 옥류관에서 그의 우승을 축하하는 만찬회를 차려주었고, 정성옥은 공화국영웅 칭호와 인민체육인 칭호, 벤츠 380형 고급승용차, 금시계, 평양시 보통강구역 서장동의 고급아파트 등 푸짐만 선물을 받았다. 그때까지 북한은 체육인들에게 노력영웅 칭호는 주었어도 공화국영웅 칭호는 부여하지 않았다. 그 칭호는 전사자를 비롯해 특출한 공을 세운 사람들에게만 부여해왔다. 정성옥에게 준 차는 당시 안전성에서 안전상으로 있던 백학림 차수가 타던 차와 같은 급이었다.

 

또 우승 상금 6만 달러를 북한 역사상 처음으로 정성옥의 이름으로 무역은행에 예금시켜 주었고 김정일은 그 돈을 정성옥이 전부 사용하도록 해주라는 특별지시를 내렸다. 이 때문에 북한 주민들은 이구동성으로 ‘말 한마디 잘한 덕을 단단히 받는다’며 경기 잘하는 것보다 말을 잘하여야 한다고 쑤군거렸다.

 

▲2003년 10월 23일 북한 마라톤 영웅 정성옥(가운데)과 유도 영웅 계순희(뒤쪽)가 민족평화축전 '명예손님'으로 참석하기 위해 고려민항편으로 제주 공항에 도착해 비행기 트랩을 내려오는 모습.

 

정성옥은 원래 말이 없고 가정생활이 어려워 많은 사람들이 동정하여 도와주었는데 출세하고 나니 교만해지고 너무 건방지게 놀아 주위 사람들이 다 떨어져 나갔다. 당연히 그를 험담하는 사람들도 늘어났다.

 

정성옥이 경기 참가를 위해 스페인에 갔을 때 해주시 어느 수산사업소에서 화물차를 운전하던 그의 아버지 정영택은 사람을 치어 죽이는 바람에 까까머리로 재판을 받고 있었다(북한에서 예심을 받을 때에는 먼저 머리부터 중처럼 깎아버린다). 하지만 딸이 우승을 하자 교양처리 무죄로 석방되어 딸의 운전수가 되었다.

 

정성옥이 1등을 하자 압록강체육단 정치부장은 해주에 있는 정성옥 가족을 환영행사가 열리는 평양으로 데려오기 위해 직접 해주시로 내려갔다. 그때 시장에서 두부 장사를 하던 정성옥의 어머니 이춘희는 딸이 1등 한 것을 모르고 있었다. 그는 정치부장이 ‘딸이 근무하는 압록강체육단에서 왔다’고 하자 ‘그 년이 또 돈 보내달라고 합디까?’라고 대꾸해 많은 사람들을 웃겼다.

 

이후 정성옥의 온 가족은 평양시 보통강구역의 고급아파트에서 호화로운 생활을 하게 된다. 정성옥은 최고인민회의 대의원까지 되었고 2001년 3월 평양시체육단에서 마라톤을 하던 김중원과 결혼식을 올렸다. 김정일은 그들에게 평양시 락랑구역에 독립가옥을 지어주었으며, ‘장하다 우리의 정성옥‘ 이라는 노래와 정성옥을 주인공으로 하는 ’달려서 하늘까지‘ 라는 영화까지 만들어주었다. 정성옥은 결혼 후 평양체육대학에 가서 2년간 공부한 뒤 조선마라톤협회 부서기장을 거쳐 지금은 서기장을 맡고 있다.

 

지난 시기 북한에서는 체육인들이 국제대회에 나가 한·미·일 선수들에게 패하면 징계를 했다. 패배자는 인민보안부 교화국에서 관리하는 18호 관리소로 보내졌는데 한국 선수들에게 패하면 6개월, 미국 선수들에게 패하면 4개월, 일본 선수들에게 패하면 3개월 간 중노동을 시켰다. 혁명의식을 강화한다는 명분이었다. 이에 대한 체육인들과 인민들의 불만이 커지자 지금은 사상투쟁으로 대체됐다.

 

북한의 또다른 스포츠 영웅 계순희는 1996년 7월 애틀랜타 올림픽에서 ‘유도의 신‘이라 불리던 일본의 다무라 요코를 꺾고 금메달을 따냈다. 이후 여러 국제대회에서 우승을 하며 북한의 간판 운동선수로 이름을 날렸다. 히지만 그는 정성옥처럼 대접받지는 못했다. 집도 다른 사람이 살던 헌 집을 받았으며 다른 우승자들과 거의 대등한 대우를 받았을 뿐이다.

 

두 사람의 차이는 정성옥의 우승소감이었다. 경기 성적도 중요하지만 김정일이나 김정은의 개인우상화를 선전하는 말을 잘하게 되면 대접이 확 달라진다. 이런 일을 보고 겪으면서 국제 사회와 접촉할 기회가 있는 북한인들은 발언 하나하나에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없게 된다. 하지만 이런 터무니 없는 행태가 과연 얼마나 오래 갈 수 있겠는가.

 

2014.10.06  김정은의 덩치를 김일성 덩치로 만드는 김씨 일가의 건강연구소들

북한에서는 김일성 때부터 만년장수를 보장한다고 하면서 김일성 일가의 건강관리에 많은 인력과 돈을 소모하였다.

 

김일성이 살아있을 때에는 호위사령부 산하에 ‘천년바위처럼 변하지 않는 청춘을 유지시킨다’는 뜻의 ‘청암산’연구소가 평양시 대성구역 미산동에 위치하고 있었다. 또 금수산의사당(현재 금수산태양궁전) 주석부의 금수산의사당 경리부 산하에는 만년청춘의 건강을 보장한다는 ‘만청산’연구소가 평양시 보통강구역 서창동에 자리 잡고 있었다. 이 연구소들에는 각기 150~200여명의 연구사와 실험조수들이 특별우대를 받으며 김일성의 만수무강을 위한 연구를 하고 있었다.

 

호위국 산하 청암산연구소 연구사들과 모든 직원들은 군복을 입고 일했으나 1994년 김일성이 사망한 뒤엔 기초과학연구원에 전속되면서 군복을 벗었다. 기초과학연구원은 1982년 김정일의 생일 40돌을 맞아 만수무강을 보장한다고 하면서 평양시 대성구역 룡북동에 만든 만수무강연구원이다.

 

이 연구원 산하에는 7개의 연구소가 있었다. 각 연구소의 임무는 다음과 같았다.

 

▲1소―주로 김정일이 좋아하는 술과 음료수 등 식료품을 연구개발

▲2소―산삼·인삼·버섯을 비롯한 자연산 건강식 재료를 연구도입

▲3소―범고기를 비롯한 노루·곰·소·꿩 등 각종 육고기 분야를 연구

▲4소―주로 남새와 과일류를 연구

▲5소―바다와 강의 물고기를 연구

▲6소―김정일과 김정은이 제일 좋아하는 담배를 인체에 좋게 제작하는 연구

▲7·8·9소―김정일 가문의 전형적인 고질병이라고 할 수 있는 비만·동맥경화·고혈압으로 인한 뇌출혈을 전문적으로 연구(8소엔 청암산연구소가 소속, 9소엔 만청산연구소가 소속)

 

▲지난달 25일 북한 조선중앙TV에서 방영한 김정은의 기록영화인 '인민을 위한 영도의 나날에'에서 다리 저는 모습으로 걷고 있는 김정은의 모습./조선중앙TV

 

2005년 김정일은 기초과학연구원에 자기의 비만과 고혈압을 치료할 수 있는 연구에 성공하는 연구사에게 태평양 한 가운데에 금상(金 像)을 세울 수 있는 막대한 상금과 대우를 해주겠다고 하여 연구사들의 거의 전부가 그 분야에 대한 집중연구를 하였었다. 연구원에는 김일성종합대학의 생물대학, 화학대학, 의학대학을 졸업한 약 2000명 정도의 전문 연구사들과 1000명가량의 실험조수들, 2000명가량의 노동자들과 농장원들이 종사하고 있다.

 

기초과학원 연구사들은 의학분야와 생물학분야가 발전된 나라들에 연수를 많이 내보내고 있다. 이들은 금수산의사당 경리부 산하로 있다가 후에 중앙당 재정경리부 15과로 소속된데 이어 2009년부터는 국방위원회 직속으로 김정일과 김정은의 만수무강을 보장하는 사업을 맡아 하고 있다. 국방위원회 소속이 되면서 연구원의 간부들과 3급연구사 이상은 군사칭호를 받고 군복을 입고 있다. 김정일 사망 후에는 전적으로 김정은의 건강을 책임지고 있다.

 

2009년부터 김정일의 후계자로 지목된 김정은의 작은 덩치를 김일성의 풍채처럼 만든다고 하면서 속성으로 살을 찌게 하는 일도 기초과학연구원이 맡아 진행하였다. 이외에도 평양시 룡성구역 룡추동에는 금수산의사당 경리부 산하에 남방과일 전문 연구소인 금수산1연구소가 있으며 식료품을 전용으로 생산하고 있는 룡성428특수식료공장도 운영되고 있다.

 

▲지난 2010년 12월 29일, 김정일이 뇌졸중 후 불편했던 왼손을 쓰는 장면이 조선중앙TV에 방영됐다. 김정일이 왼손으로 옷장 문을 여는 모습이다.

 

이처럼 북한에서는 김정은의 직계가문과 최고위 간부들의 건강보장을 위하여 특수단위를 곳곳에 세우고 많은 인력과 돈을 아낌없이 투자하고 있다.

 

김정은 가문의 직접적인 병치료를 담당하는 전문병원으로는 평양시 보통강구역 서창동에 봉화진료소가 있다. 봉화진료소의 의료진은 북한에서 최고의 지식과 경험을 가진 의학자들로, 우선은 토대(출신성분)가 최고로 좋은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다. 아무리 의술이 높아도 토대에 조금이라도 흠집이 있으면 봉화진료소에서 근무할 수 없다.

 

봉화진료소 의사들은 평양시 동대원구역 신흥동에 있는 북한 적십자종합병원의 기술부원장과 과장이라는 직을 겸하면서 적십자병원에서 일반주민들을 대상으로 실험을 진행한 다음에야 김정은과 직계가족들, 최고위 간부들의 병 치료를 진행한다. 먼저 누가 어떤 병에 걸려서 봉화진료소에 찾아오면 그 병에 맞는 일반주민을 대상으로 실험수술이나 시험치료를 하여 결과가 나온 다음에야 봉화진료소 대상자의 치료를 진행할 수 있는 것이다.

 

북한 봉화진료소에서 치료받을 수 있는 대상은 김정은과 그의 직계가족들, 중앙당 조직부 부부장 이상들과 중앙당 비서들, 각 도당 책임비서들,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부위원장, 내각 총리·부총리, 국방위원회와 인민무력부·보위부·보안부 수장들만이 치료를 받을 수 있다.

 

그 아래 급은 평양시 대동강구역에 있는 평양산원의 옆에 있는 남산병원에서 치료를 받을 수 있다. 남산병원 대상자들은 중앙당 부원 이상과 부부장 아래 급들과 내각의 상(相·장관급)들과 부상들, 각 군당 책임비서, 인민군대 사단장 이상급, 빨치산 자녀들과 다른 나라에 나가 있는 대사의 자녀들이 진료권을 발급받아 치료를 받을 수 있다

 

다음 아래급의 간부들은 적십자병원, 의학대학병원, 김만유병원, 평양 1·2·3 병원 등 중앙급 병원의 진료과에서 발급받은 진료권을 가지고 치료를 받을 수 있다.

 

이렇게 북한에서는 김정은을 비롯한 전체 주민의 1%로 밖에 안되는 간부들만을 위한 전용병원들이 존재하고 있다. 무상치료제를 시행한다고 하지만 일반주민들은 페니실린 주사 한 대를 맞으려고 하여도 암시장에 나가 사서 맞아야 한다. 반면 김정은과 고위간부들은 조금만 몸이 불편해도 외국의 고가 약을 사다 쓰고, 특히 김정은은 여러 주치의를 제쳐놓고 외국의 유능한 의사들을 초청하여 치료를 받고 있다.

 

2014.10.08 황병서를 호위하던 선글라스 사나이들의 정체를 밝힌다

10월 4일 인천에서 진행된 아시안게임 폐막행사에 북한의 총정치국장 황병서, 중앙당 근로단체 담당비서 최룡해, 중앙당 통전부 담당 비서 겸 부장 김양건이 기습적으로 참가하는 전례 없는 상황이 발생하면서 한국사회에 큰 파문이 일어났다.

 

이는 일종의 ‘기습 외교’이다. 기습 외교는 북한의 고질적이며 전형적인 외교방법 중 하나로, 군대가 적진을 기습하듯 전격적으로 펼치는 외교를 말한다.

 

이번에 ‘기습 방한’에서 가장 특이한 것은 전례 없이 황병서에게 호위원(경호원)들이 붙은 것이다. 더욱 특이한 것은 그들이 색안경(선글라스)를 착용했다는 것이다. 북한에서는 아무리 경호원이라 할지라도 상급자 앞에서 선글라스를 착용하면 도덕적으로 불성실한 것으로 간주되면서 그런 행위 자체가 허용되지 않는다.

 

그런데 황병서의 이미지와 몸값을 올려주기 위한 것으로 보이는 그 경호원들은 과연 정체가 무엇이길래 선글라스까지 착용하며 그토록 당당한 모습을 보였는가?

 

▲인천 아시안게임 폐막식에 참석하는 북한 황병서 군 총정치국장이 4일 오전 인천 오크우드호텔에 경호원들과 함께 들어서고 있는 모습. /뉴시스

 

황병서가 대동한 경호원들은 이전에 김정일이 자기의 친위대라고 하던 974부대 요원들 중에서 선발된 사람들이 분명해 보인다. 황병서를 따라온 목적은 황병서의 신변호위보다는 그를 감시하기 위한 것이라는 게 북한에서의 내 경험에 따른 판단이다. 그들은 김정은도 근접호위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총정치국장 황병서도 이들을 함부로 통제하거나 부릴 수 없다.

 

이들과 달리 963 부대로 불리는 북한의 호위사령부는 중앙당 및 초대소들과 연관 단위의 외곽경비를 주로 담당한다.

 

김정은의 현지시찰 시에 옆에서 근접호위를 서고 김정은의 집이나 집무실을 호위하는 요원들은 전국 각지의 집안토대(출신성분)가 좋은 고등학교 졸업생들 중 선발해서 입대시키는 974부대 요원들이다. 이 업무는 북한 로동당 6과(과거엔 5과)가 담당하고 있다.

 

974부대에 들어가면 하전사(하사관과 일반 사병)로 13년간 복무해야 하는데 복무기간 동안엔 부모를 비롯한 외부인 그 누구에게도 편지를 하거나 접촉을 할 수 없게 되어 있다. 군 복무를 마치면 본인이 희망하는 대학으로 가서 졸업한 뒤 거의가 자기 지방의 당 일꾼으로 성장하게 되어 있다.

 

이들은 과거 김정일이 ‘내가 지방 당에 파견하는 전권대표’라고 했을 정도로 중앙의 신임이 대단히 높다. 이들은 인민무력부 산하 각 군사대학들이나 김일성종합대학, 보위대학, 보안부대학 등에서 위탁교육을 받는다. 이어 군관학교를 졸업하고 군관(장교)이 되면 중앙당 조직부에서 만 30살이 지나면 여성을 선발해 장가도 보내주고 그 가족은 평양시 룡성구역 화성동에 있는 가족거주지역에서 살게 해준다. 하지만 외부에 있는 사람은 자기 부모라도 접촉할 수 없다.

 

그들은 평상시 모든 생활조건이 최상, 최우선으로 보장된다. 거의 모든 식품과 담배까지도 외국에서 수입한 좋은 것들이다. 그들이 보유하고 있는 화물차는 대부분 독일산 벤츠인데 차번호도 중앙당 차번호나 고위급 차번호인 ‘216―’을 달고 다니기 때문에 보안원들도 단속을 할 수 없게 되어 있다. 216은 김정일의 생일인 2월 16일을 상징하는데 김정은 시대 들어와서는 216 대신 전승기념일로 치는 727을 차번호로 사용하고 있다.

 

그들이 부대 내에서 생활하다가 집이나 친구들에게 편지를 했다거나, 나가서 사회 사람들을 접촉하거나, 승인 없이 연애를 하면 인민보안부에서 관리하는 18호관리소로 보내져 10년간 혁명화(중노동을 통한 사상개조)를 해야 한다. 혁명화를 마치면 귀가시키지만 이미 많은 기밀들을 알고 있기 때문에 항상 해당 보위부의 감시와 통제를 받는다.

 

13년 동안 모든 것을 참고 호위사업을 잘 하면 제대할 때 최상의 우대를 받는다. 하지만 규정 위반이나 비위가 적발되면 계급 강등이 되거나 강제 전역이 되어 한 집안이 망하기도 한다. 이 때문에 간부들은 자식들을 그 곳에 보내려고 하지 않는다.

 

형제나 자식 등 직계가족 중에 974부대에서 복무하는 사람이 있으면 죄를 지어도 중앙당의 지시로 교양처리라는 판결을 받고 석방되게 되어 있다. 김정일과 김정은의 측근에서 무장을 하고 근접호위를 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집안에 불미한 사건이 일어난 것을 알면 도발이나 실수라도 할까봐, 또 그들에게 최대의 조건을 보장해주어야 충성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그렇게 우대해주는 것이다.

 

974부대는 중대까지만 있고 그 위의 상급은 중앙당에서 직접 지휘하고 있다. 그들은 초소에서 근무를 설 때 출입허가가 없는 사람이나 호위사령부 사람들이 실수로 들어와도 예고 없이 실탄을 발사하여 사살하기도 한다. 실제로 그렇게 억울하게 죽은 사람들이 있다.

 

북한군은 군복을 입으면 모표와 단추 등 금속부분을 매일 번쩍번쩍하게 닦아야 하는데 974부대 요원들은 이전에 김정일이 ‘나의 친위전사들에게는 군복의 금속부분에 금을 섞어 제작하여 매일 닦지 않아도 빛이 나게 해주라’고 하여 금과 동을 혼합하여 제작해주었다. 그들은 총정치국장이나 중앙당비서라고 하여도 절대로 지시를 따르지 못하게 되어 있고 오직 김정은과 중앙당 담당 부서의 담당관 지시만 듣게 되어 있다.

 

이런 상황들을 종합적으로 감안할 때 이번에 황병서를 호위한 사람들은 김정은이 특별히 임무를 주어 동행시킨 974부대 요원들이 분명하다는 판단이다.

 

2014.10.15 새벽에 음주운전 질주하던 김정일, 그를 단속한 교통경찰들의 운명

김정일은 주로 새벽 1~3시 사이에 술을 마시고 혼자서 차를 운전하며 호위원도 없이 평양시를 순회하는 습관이 있었다. 평양시는 버스를 제외한 거의 모든 차들(이전의 216번호 차, 지금의 727번호 차들과 별 통행증을 소유한 차들은 제외)이 저녁 7시가 되면 뛰지 못하게 되어 있으며 야간통행증이 있어야 통행이 가능하다.

 

버스는 저녁 11시, 지하철도는 저녁 10시 30분까지만 운행하기 때문에 저녁 11시 이후 야간 출근 혹은 퇴근으로 걸어서 오가는 사람들 몇 명을 내놓고 평양거리는 조용하다.

 

특히 저녁 12시 이후로는 오가는 차나 사람도 없고 동상이나 사적지와 야외등까지 다 불을 끈다. 또 네거리에 서 있던 교통보안원들은 저녁10시에 다 들어가고 단속초소들까지 다 잠들기 때문에 고요한 적막감이 흐른다. 이 시각에 김정일은 술을 마시고 혼자서 차를 몰고 고속으로 질주하면서 평양시를 돌아보는 습관이 있었다.

 

이전에 인민무력부 부장 겸 총정치국장이었던 오진우가 김정일과 같이 평양시 순안구역에 있는 사냥터에서 사냥을 하고 새벽까지 술을 마시고 서로 차를 몰고 평양시를 돈 적이 있다. 그때 모란봉구역 월향동에서 오진우가 가로등을 들이받아 혼수상태에 빠져 독일까지 가서 회복하고 돌아왔다.

 

▲2011년 8월 23일 김정일이 탑승한 것으로 알려진 번호판 없는 벤츠 리무진이 러시아 울란우데 거리를 달리고 있는 모습.

 

2000년경에 평양시 보안국 교통지도처 보안원(소좌)이 술을 많이 마시고 취하여 새벽2시경에 집에 가려고 중구역에 있는 평양대극장 앞에 서 있다가, 승용차 한 대가 질주해오자 도로 가운데 나가서 차를 세웠다. 그리고는 취해서 김정일을 알아보지 못하고 ‘왜 차를 규정초과 속도로 몰고 다니는가’ 하면서 ‘내가 평양시 보안국의 교통담당 보안원이니 나를 집까지 태워달라’고 지시하였다. 그러자 김정일은 그를 차에 태우고 당시 평양시 인민보안국 국장이었던 김정호(중장)의 집으로 데리고 가서 술에 취해 정신없이 자고 있던 그를 내려놓았다. 이어 김정호에게 보안원들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라고 호통을 쳤다.

 

그 다음날 국장 김정호는 중장에서 소장으로 강등되고 보안원은 출당·해직되어 온 가족과 같이 보안부에서 관리하는 18호관리소에 이주민으로 추방되었다.

 

2003년에는 평양시 보안국 교통지구대 산하 모란봉초소에서 근무하던 이 모라는 보안원(대위)은 4·25인민군 문화회관 앞 네거리에 낮 2시경에 오토바이를 세워놓고 오가는 차들이 교통질서를 잘 지키는가를 보며 단속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4·25문화회관 방향에서 고급 승용차가 번호판이 없이 고속으로 질주해 금수산기념궁전 방향으로 달려가자 그는 오토바이를 타고 추격하면서 정지신호를 보내었다. 그는 후에 ‘호위차도 없이 단독으로 달리기 때문에 김정일의 차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하고 나쁜놈이 번호도 없는 차를 몰고 금수산기념궁전을 폭파하려고 하지 않는가 해서 추적했다’고 고백하였다. 북한에서는 유일하게 김정일의 차가 번호를 안 달고 다니었다.

 

▲평양시내 여성 교통보안원(경찰관)이 하복을 산뜻하게 차려입고 근무를 하는 모습. 2007년 촬영./최순호기자

 

교통보안원이 오토바이로 추격하자 김정일은 김일성종합대학 앞에서 차를 세웠다. 보안원이 김정일의 차 앞에 오토바이를 세운 뒤 다가오자 김정일은 차유리를 내리며 왜 따라왔느냐고 따지었다. 보안원이 그제서야 김정일을 알아보고 깜짝 놀라자 김정일은 보안원에게 욕을 하고 다시 차를 몰고 갔다. 그날 저녁 그 보안원은 체포되었고 그의 온 가족은 18호관리소 이주민으로 추방되었다.

 

2004년 12월경에 평양시 보안국 산하 중구역 종로 교통지구대에서 근무하는 한 여성보안원(중위)은 다른 사람들이 다 퇴근한 뒤 혼자서 초소에서 쉬다가 새벽 2시경에 종로네거리 초소에 지휘봉을 들고 나가 서 있었다. 그런데 그때 만수대 방향에서 옥류교 방향으로 승용차 한 대가 질주해오자 그는 지휘봉을 들어 방향을 가리키면서 경례를 하였다.

 

야밤에 혼자 초소에 서있는 보안원을 본 김정일이 차를 세우고 ‘왜 동무는 퇴근하지 않고 초소에 서 있는가’ 라고 물었다. 그러자 그 여성보안원은 오늘 장군님이 지나가실 것 같아 초소를 지키며 장군님이 가시는 길의 안전을 살피고 싶었다고 말했다. 김정일은 참으로 기특한 보안원이라고 칭찬하고 떠나갔다. 그 다음날 김정일의 지시를 받은 인민보안성 정치국장이 직접 중구역 종로 교통지구대에 찾아가 김정일의 감사를 전달해주고 그 23살의 여성보안원에게 공화국노력영웅칭호를 수여해주었다. 또 종로교통지구대는 김정일이 직접 현지지도 한 곳으로 공인돼 평양시 교통지구대 참관 단위가 되었다.

 

김정일의 차를 세운 보안원들의 운명이 이처럼 극과 극으로 갈리듯 북한은 여전히 한 사람을 위한, 한 사람이 움직이는 예측 못할 사회이다.

 

2014.10.27  장성택 혼외 자녀 10여명 총살…과도한 세도 부리다 김정일때 이미 숙청 예고

북한 인민보안성 35국은 1996년 북한 전역에 있는 초대소들의 경비담당을 위해 새로 만든 부서이었다. 이 초대소들은 김정일이 건설한 것이다.

 

김정일은 김일성이 어려서부터 조국의 광복을 위하여 모든 것을 다 바쳐 싸워 조국을 해방하였으며, 6·25침략전쟁을 정의의 전쟁으로 맞서 미국과 15개 제국주의 나라들에 승리함으로써 한 세대에 강대한 미국과 일본 두 제국주의를 물리친 희대의 영웅이라고 추켜세우며 초대소들을 만들었다. 김일성이 나이가 많아져 휴식을 보장해줘야 한다는 명목으로 전국 각지의 경치 좋고 물 좋은 곳들을 골라 일반 주민들의 출입을 봉쇄하고 초대소와 별장들을 건설했다. 그는 김일성이 죽은 후 이 시설들을 단번에 자기의 것으로 만들자니 간부들과 인민들의 반대가 있을까 두려워 먼저 각 도·시·군 별로 1여관을 배속시켜 도당에서 이를 직접 관리하도록 하였었다.

 

그런데 1995년 당시 함경남도 도당 책임비서이었던 현철규가 함경남도 신흥군에 있는 신흥1여관(김일성의 초대소 자리)에서 도당 전원회의를 하고 나서 연회를 차리고 술을 마시며 여성들을 불러 북한에서 부르지 못하게 되어 있던 노래를 부르면서 부화방탕한 생활을 하였다는 신고가 중앙당에 들어왔다. 보고를 받은 김정일은 중앙당 검열조를 파견하여 함경남도에 대한 집중 조사를 하게 해 도당 책임비서를 비롯한 도 급 간부들을 대부분 해임시켰다.

 

그 다음 김정일은 인민보안부에 35국을 새로 결성하고 전국의 초대소와 별장들을 직접 관리하도록 하였다. 이렇게 되어 당시 중앙당 조직행정부 부부장이었던 장성택이 35국 사업을 직접 관할하면서 35국장을 자기에게 충실한 사람으로 임명하고 전국의 초대소와 별장들 중의 몇 개는 자기의 초대소 격으로 만들었다. 그리고는 자기에게 잘 보이는 측근들을 데리고 중앙당 5과로 모집된 여성들과 술판을 벌이고 놀면서 부화방탕한 생활을 즐기었으나 김정일은 전혀 알지 못하고 있었다.

 

▲북한 노동신문이 2013년 12월 13일 처형 직전 장성택이 군사재판에 끌려나오는 모습을 공개했다. 이 사진 속 장성택의 손과 얼굴에서는 고문의 흔적이 발견됐다. 얼굴(맨 왼쪽 사진)은 왼쪽 눈과 뺨이 붓고 멍들어 있었으며 수갑을 찬 오른손(가운데 사진)도 자줏빛으로 부어 있었다. 사진은 국가안전보위부원에게 목덜미를 붙잡혀 있는 장성택의 모습.

 

그러던 중 2003년 봄에 김정일이 자기의 서기 중 가족 담당 서기가 몸이 약해서 자주 앓는다고 하면서 그에게 ‘강원도 원산시에 있는 송도초대소에 가족을 데리고 가서 두 달 가량 휴식하면서 몸을 추켜세우고 오라’고 지시하였다.

 

그 서기는 지시에 따라 가족을 데리고 송도초대소로 내려갔다가 초대소 경비보안원이 장성택1부부장이나 보안부 35국장의 출입 승인 지시가 없이는 못 들어간다고 완강히 막아서 2시간 동안 기다리다가 끝내 못 들어가고 평양으로 다시 올라와 김정일에게 보고하였다.

 

보고를 받은 김정일은 화가 나서 ‘이 땅에 내 지시가 통하지 않는 곳이 다 있는가’라고 하면서 중앙당 조직부 1부부장 겸 본부 당 책임비서 이제강에게 도대체 누가 그런 짓을 했는지 구체적으로 파악하여 보고하라고 불호령을 내리었다.

 

중앙당 본부당과 조직지도부 검열부를 이끌고 사태의 진상을 구체적으로 파악한 이제강은 김정일에게 인민보안부 35국장을 자기의 측근으로 임명한 장성택이 일부 초대소에서 자기의 측근들과 파티를 열고 중앙당 5과로 선발되어 온 여성들과 부화방탕한 생활을 일삼아 왔다고 보고하였다.

 

노발대발한 김정일은 장성택을 모든 직무에서 해임시키는 한편 인민보안부 35국은 없애버리고 그곳에서 근무하던 병사들까지 다 제대시켜 버리라고 불호령을 내렸다. 35국장은 총살하라고 지시하였다. 이에 따라 장성택을 추종하며 따르던 35국장은 모든 책임을 지고 총살되고 장성택의 초청으로 초대소에 갔던 간부들은 해임·추방되었다.

 

장성택도 당시 김정일의 매부가 아니고 김경희의 공식적인 남편이 아니었다면 그때 이미 총살을 당하였을 것이다. 장성택의 측근으로 당시 평양시 건설총국장이었던 리학철, 평양시 청춘봉사관리국 국장이었던 강영철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총살되고 가족들은 정치범관리소로 이주민으로 끌려갔다. 장성택은 그후 2년가량 정계에 나서지 못하고 다시 중앙당조직 행정부 1부부장으로 재임용되었지만 그때부터 김정일의 지시에 의하여 장성택은 간부사업에 일체 개입하지 못하게 되었다.

 

▲김정일의 배다른 동생 김평일씨.

 

그때부터 북한 간부들은 장성택과 가까이 하다가는 언제인가 다시 김정일의 이복 동생 김평일이처럼 곁가지로 숙청될 수도 있겠다는 피해망상증으로 장성택을 은근히 멀리하여 왔다. 이렇게 장성택의 숙청은 이미 인민보안부 35국사건 때부터 기정사실화 되어 있었다.

 

실제로 작년 12월 장성택을 처형한 후 북한에서는 중앙당 5과 출신 여성들이 장성택의 자식을 10명 이상이나 키우고 있는 사실이 드러나 10대의 소년·소녀들까지 전부 총살하였다. 북한에서는 결코 그 어떤 2인자도 존재할 수 없음이 또다시 입증된 것이다.

 

2014.10.28  자본주의 경제 도입하라고 투서했던 김일성대 학생 11명, 비극적인 최후

1995년 하반기부터 시작된 일명 ‘고난의 행군’으로 북한 경제는 거의 마비상태에 이르게 되었다. 1998년부터 중국을 비롯한 세계 각국의 지원으로 자강도에 있는 제2경제위원회 산하 군수공장들과 전국의 금속공업성 산하 공장들은 거의 활성화되기 시작하였으나, 경공업성 산하 공장들을 비롯한 도·시·군 급 산하 공장들은 활성화되지 못하고 거의 정지상태에 있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하여 북한의 중앙당과 상임위원회, 내각은 심각한 논의를 거듭해오다 2001년 중순경에 당시 중앙당 경공업부장이었던 김경희가 책임지고 중앙당 경공업부·계획재정부,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내각 국가계획위원회·중앙통계국·경공업성·농업성을 비롯한 성급 기관들과 도급 기관들에서 선발된 각 분야의 경제 전문가들로 임시 경제대책위원회를 구성하고 연구심의를 진행하였다.

 

경제대책위원회 인원은 약 2000명 정도였는데 4개의 그룹으로 편성되어 그중 한 그룹은 평양시 보통강구역 은하동에 있는 인민보안성 정치국 혁명사적부 산하 평양답사관리소에서 사업을 진행하였다.

 

매 그룹들이 1년 동안 논쟁을 거듭하면서 경제활성화 방안을 논의한 결과, 최종적으로 ‘사회주의 경제관리체제를 부정하고 자본주의 시장경제체제를 도입하여야 하며 경제개혁을 하여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북한 김정은이 자강도 강계뜨락또르(트랙터)종합공장을 현지지도했다고 조선중앙통신이 작년 6월 22일 보도했다. 사진의 촬영일시는 공개하지 않았다. 이 공장은 북한의 대표적인 특급 군수공장으로, 포탄 등을 생산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 전에 1997년경 김일성종합대학 경제학부 경제학과 대학생 11명이 나라 경제를 발전시키려면 김일성의 내놓았던 사회주의 경제건설의 기본 노선과 경제사업체계를 폐기하고 자본주의 시장경제체제를 도입하여야 한다는 내용의 무기명 탄원서를 각기 왼손으로 자필하여 김정일에게 올려 보냈었는데 이 편지를 받아보고 김정일이 대로했다.

 

김정일은 국가안전보위부에 이 무기명 편지를 쓴 자들을 다 찾아내 처형하라고 지시했다. 이에 11명 중 9명은 잡혀 총살되고 2명은 자살하는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하였다. 이 11명의 가족들은 모두 국가안전보위부 15호 정치범관리소로 잡혀갔다. 하지만 그 후에도 나라의 경제를 발전시키고 인민생활을 조금이라도 향상시키려면 경제개혁을 하여야 한다는 무기명 투서 사건은 계속 이어졌다.

 

경제부문 전문가들 사이에선 사회주의 경제관리체계를 자본주의 경제관리체계로 바꾸어야 공장들이 활성화되고 인민생활이 향상된다고 하는 목소리가 점점 커져갔다. 또 전문가들 약 2000명이 모여 1년 동안 논의한 결과 자본주의 시장경제 관리체계로 이전하여야 한다는 결론이 나오자 정부에서는 군수공장과 금속부문을 비롯한 2급 기업소 이상 공장들을 제외한 일부 자그마한 시·군 급 공장들을 시험 삼아 운영해보기로 하였다.

 

이에 김정일은 실험적으로 량강도 혜산시에 있는 구리광산에 300만 달러를 주면서 ‘광산을 복구하고 광석을 채취하여 중국에 팔아서 나오는 자금으로 공장 활성화를 하고 공장 노동자들의 식량 문제도 해결해보라’고 지시하였다. 광산 측에서는 국가적인 이 실험을 위해 중국에서 전기를 끌어다가 굴(窟) 모양으로 땅을 파들어갔다. 하지만 구리 광석을 채취할 수 있는 깊이까지 파들어가는데만 자금 300만 달러를 다 소모했으며, 채취설비가 너무 낡은데다 중국이 전기공급마저 끊어버리자 광석은 캐보지도 못하고 갱들이 침수되고 말았다.

 

▲평양 김종태전기기관차종합기업소의 노동자들이 김정일 추모행사 중 생산력 증진을 다짐하고 있다. 왼쪽에 '슬픔을 힘과 용기로'라고 쓰인 간판이 보인다. 조선중앙통신이 2011년 26일 배포한 사진.

 

경제 활성화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전력 부족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다. 하지만 현재 북한에서 생산되는 전력의 근 70%는 군수공장으로 들어가는데 군수공장들도 전기가 모자라 생산을 제대로 못하는 상황에서 경공업 공장들에 전력이 제대로 공급될 리 없다. 이외에도 자제, 설비, 그리고 운송수단이 너무도 낙후하기 때문에 대규모 투자 없이 경제개혁은 어려운 상황이다.

 

북한은 공장에 출근하는 노동자들이 식량공급도 못받고 월급도 적기 때문에 출근해서 일하는 것보다 무단결근을 해서라도 장사를 하는 것이 가족을 먹여 살리는데 유리한 실정이다. 이런 상황에서 노동자들이 출근을 제대로 하지 않자 2005년경에 중앙당 지시로 초과 생산품을 시장에 넘겨서라도 노동자들의 식량을 보장해주라는 지시가 공장들에 이미 내려갔었다.

 

처음에는 무역회사들과 제2자연과학원, 기초과학원들이 먼저 연구사들과 노동자들의 월급을 10만원 이상까지 올려주었다. 이후 화폐개혁 이후 거의 1년동안 인상된 임금을 유지하지 못하다가 2010년경부터 다시 10만~20만원 정도로 월급을 주는 회사들과 기업소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특히 평양시에 그런 기관들이 많았다. 그러나 지금은 지방에서도 월급을 20만~30만 원 이상 주는 기관들이 많이 생겨났다.

 

더구나 지금은 김정일이 죽은 후 김정은이 주민들의 환심을 사기 위하여 2013년 3월부터 지방공장 노동자들에게까지 식량공급을 한 달에 보름이라도 주고 하루 전기도 4~5시간까지 공급하고 있기 때문에 지방공장들이 최대로 활성화된 시기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장기적으로 계속 높은 봉급 수준을 유지해줄 수는 없다. 여름이 지나면 수력발전소들의 전력생산이 떨어지기 때문에 전력 보장이 어렵게 되고, 가을이 지나면 지방산업 공장들은 자체로 원료와 자재 보장이 어렵게 되기 때문이다.

 

2014.10.30 김정일의 엽기 통치…평양에 난데 없이 나타난 기마특수부대

2009년 초 김정일은 ‘2012년 4월 15일까지 김일성 주석의 생일 100돌을 맞으며 주민들 생활이 크게 향상된 세계적 수준의 강성대국이 되면 먼저 평양시민들에게 온갖 가전제품이 갖춰진 총 10만 세대의 살림집을 선물로 주겠다’고 공표하면서 내각에 책임지고 살림집을 건설하라고 지시하였다.

 

그런데 북한의 중앙지도기관 중 가장 권력이 없는 내각으로서는 산하 중앙기관들에서 이미 다 건설하였거나 건설 중에 있던 아파트들을 다 포함시켜도 도저히 10만 세대 아파트 살림집 건설을 추진할 수 없게 되었다.

 

그렇게 되자 김정일은 2010년 가을 책임문제를 구실로 김영일 총리를 해임시키고 최영림을 총리로 임명하였으며, 내각 산하에 있던 수도건설부를 수도건설사령부로 승격시킨 뒤 국방위원회 직속으로 배속시켰다. 이어 당시 국방위원회 부위원장이었던 장성택에게 이 기관을 맡아 평양시 10만세대 살림집 건설을 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인민보안부 산하이었던 도로국(8총국)을 도로1군단으로, 인민무력부 도로국을 도로2군단으로, 속도전청년돌격대를 도로3군단으로 편성하며 8총국과 속도전청년돌격대 전원에게 인민군 군복을 입혀 수도건설사령부에 소속시키었다. 수도건설부 산하 건설기업소들도 군 지휘체계로 전환시키고 기업소 책임간부들에게 군사칭호를 주고 군복을 입도록 하였다. 김정일은 이렇게 건설 역량을 군 체제로 전환시켜야 10만 세대 살립집 건설을 명령식으로 제 기일 내에 건설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그때 평양시에는 10만 세대 살립집과 동시에 평양시 대성구역 안악동에 평양민속촌을 같이 건설하고 있었다. 이 때문에 인민군 총참모부 평양시 방어 군단으로 평안남도 강서군을 비롯하여 지방에 주둔하고 있던 3군단의 전체 병력을 평양시 건설에 동원시키게 되었다. 이렇게 되자 평양시에는 군복을 입은 병사들이 10만 명 이상으로 넘쳐나게 되고 밤낮 건설공사에 내몰린 그들은 배가 고파 큰 고통을 겪게 됐다. 이에 무자비한 민가 습격과 도적질, 강도질, 강간사건이 속출, 평양시 치안문제가 보안부의 역량으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게 되었다.

 

▲북한 김정은(오른쪽 둘째)이 조선인민군 534부대 직속 기마중대 훈련장을 시찰하는 모습. 조선중앙통신 2012년 11월 20일 보도.

 

이런 골치아픈 문제가 끊임없이 제기되자 김정일은 평안남도 덕천군에 주둔하고 있던 ‘폭풍군단’의 한 개 사단을 평양시 사동구역 미림동에 주둔하게 하고 야간에 평양시 건설에 동원된 군인들의 강도행위와 도적질을 저지시키라고 지시하였다.

 

그런데 군인들은 약탈과 도적질을 하다가 폭풍군단 사람들이 나타나면 잽싸게 먼저 아파트 사이사이 골목길로 달아나기 때문에, 폭풍군단으로서는 평양시내에서 총을 쏠 수도 없고 아주 난감하게 되었다. 이 사실이 보고되자 김정일은 폭풍군단의 실정에 맞게 훈련도 겸하면서 말을 타고 평양시 단속을 진행하라는 정말 어이없는 지시를 내리었다. 폭풍군단은 원래 기동성을 보장하는 기마특수부대이다.

 

이렇게 되어 평양시에 주둔한 폭풍군단의 한 개 사단은 연대별로 교대하며 낮에는 평양민속촌 건설장에 나가 일을 하고 밤에는 한 개 연대씩 동원되어 분대 단위로 지역을 할당받아 말을 타고 평양시를 순찰했다. 그들은 강도질과 도적질을 하는 병사들과 밤 시 이후에 다니는 사람들에 대한 대대적인 단속을 하였다.

 

처음 평양시민들은 밤 11시면 말을 탄 특수부대 병사들이 나타나 자기들의 집에 들어와 때리면서 먹을 것과 돈을 강탈하고 도적질을 일삼던 군인들을 단속하는 것을 환영하고, 또 영화에서만 보던 말이 콘크리트 포장도로 위로 뚜거덕 뚜거덕 말발굽소리를 내며 달리자 너무도 신기하여 밖에 나와 구경을 하였었다.

 

그런데 그들이 증명서 확인을 하지도 않고 밤 11시가 지나면 아무 사람이나 닥치는대로 때리고 잡아다가 가두고 신분 확인을 하고 내보내자 불만이 팽배했다. 김정일의 지시라고 하니 앞에서는 말을 못하고 뒤에서 ‘폭풍군단이 아니라 새로운 특수폭군부대가 평양시에 들어왔다’며 불만이 자자했다. 시민들은 “평양시에서 폭풍군단을 철수시켜야 한다”며 세계가 최첨단으로 나아가는 21세기에 평양시는 말을 타고 다니는 18세기로 되돌아가고 있다고 야유하는 말들을 하였다. ‘21세기 돈 키호테’라는 말도 그때 나왔다.

 

2014.11.26 김정은이 7.27이라는 날짜와 숫자에 집착하는 이유

1953년 7월 27일은 6·25전쟁 발발 3년 1개월 만에 정전협정이 조인된 날이다. 북한에서는 6·25전쟁을 미국의 비호 하에 한국군이 일으킨 침략전쟁이라고 지금까지 계속 우기고 있다. 북한당국은 탁아소부터 대학에 이르기까지 교육의 전 과정과 매해 6월25일~7월27일 진행되는 반미·반제국주의 행사들에서 일관되게 미국이 침략전쟁의 원흉이라는 주장을 되풀이, 북한주민들의 골수에 사무치도록 교육교양을 진행해 오고 있다.

 

그러나 김정일 정권때는 7.27이라는 날짜를 전승기념일로 선포하고 전승기념관과 전승광장을 건설해 주민들이 참관하도록 하면서도 당일은 그다지 크지 않은 명절로 지내왔다.

 

김정일은 7.27보다 자기 생일인 2.16이라는 숫자를 즐기면서 로동당 중앙위원회 후보위원 이상급들에게 자기 생일을 상징하는 2160100부터 간부급에 따라 하나씩 밖에 없는 차번호를 줬다. 해당 차량은 중앙당을 포함한 모든 지역에 통행증 없이 출입할 수 있는 특별권한을 부여받았다. 또 평양시 경비사령부 산하 10호 초소를 비롯한 북한의 전 지역 초소들에서 그 번호를 단 차와 차에 탄 사람들의 증명서를 확인하지 못하게 하는 특혜를 주었다. 이런 혜택을 받은 대상은 당에서는 도당 책임비서와 중앙당 부부장급 이상, 군에서는 군단장과 군단정치위원 이상, 내각에서는 각 성의 상(장관)급 이상과 특급기업소 지배인 이상 간부급들이다.

 

▲북한이 주장하는 전승기념일(정전협정기념일, 7월27일) 행사에 참가한 북한 퇴역 장병들이 김정은에게 인사를 하는 장면. 이 사진은 작년 8월 3일 조선중앙통신이 공개한 것이다.

 

북한에선 마약·위조달러·무기 장사를 하는 사람들에게도 2.16숫자가 표기된 일명 2.16특별통행증을 발급해주어 그들의 짐을 북한의 모든 세관들에서 보지 못하게 혜택을 부여해왔다. 김정일의 친위대라고 하는 974부대의 거의 모든 차들에도 2163333이라는 차번호를 달게 해 단속을 받지 않도록 해주었다.

 

2.16이라는 숫자를 합치면 9가 되는데, 장수를 의미한다는 9와 3이라는 수자를 무척 좋아했던 김정일은 자기 명이 제일 길 것이라고 선전해왔지만 오히려 평범한 사람들보다도 일찍 죽었다. 김정은의 생일 1월 8일도 숫자를 합하면 9가 된다.

 

김정일은 216과 9와 3이라는 수자를 무척 좋아하고 활용하였는데, 김정은이 김정일의 뒤를 이어 3대 세습을 시작하면서 처음부터 시작한 것이 7.27이라는 숫자에 집착하는 것이다. 우선 김정일의 생일에 맞추었던 모든 간부들의 차량번호 앞부분을 216에서 727로 바꾸도록 하였다. 하여 2010년부터 먼저 북한의 모든 군 간부들의 차번호에서 216은 없어지고 727로 대체됐다.

 

북한사람들은 일반인이든 군인이든 간부든 주패(카드)를 가지고 44A를 하는 것을 좋아한다. 이는 ‘사사뺑’ 혹은 ‘사사끼’라고 불리는데, 김정은이 3대 세습의 후계자로 공식화된 뒤 처음 내린 지시가 일본말처럼 사사끼를 놀지 말고 727을 놀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북한주민들은 727을 놀아보다가 재미가 없자 아직도 사사끼를 계속 놀고 있다.

 

이전에 김정일 시대에는 중앙당과 국가 간부들에게 주는 담배도 ‘영광’ ‘붉은별’ ‘락원’ 등 이름이었는데 2014년 7월27일부터는 김정은의 지시로 간부들에게 주는 최고급 담배를 7.27이라는 이름으로 바꾸게 했다. 또 간부들은 외국담배를 피우지 말고 7.27 담배를 피우면서 항상 전쟁에 대비하라고 독려하고 있다.

 

담배도 외국담배 수준으로 질 좋게 생산하라고 하여 평양에 있는 내 고향 담배공장에서는 지금 7.27담배를 생산하여 북한 내의 간부들에게 공급하고 외국 손님들에게도 선물로 주고 있다. 이렇게 김정은은 727이라는 숫자로 활용해 7월 27일이 전승기념일이라는 자기식 주장으로 선전공세를 강화하면서 주민들에게 전쟁열기를 고취하고 있다.

 

김정일이 죽고 김정은이 정권을 이어받은지 거의 3년이 됐지만 북한주민들의 생활은 크게 향상되지 못했고 세계적으로 가장 참혹한 인권유린 국가로 낙인이 찍혀 고립에 처해있다. 이런 상황에서 김정은은 북한주민들의 반발을 두려워하며 모든 것이 미국과 남조선 정권의 고립·압살 책동 때문이라고 거짓 선전을 계속하고 있다.

 

특히 현재도 남조선에 주둔하고 있는 미군부대는 북한을 겨냥한 1000개의 핵무기를 가지고 있다고 거짓 선전하면서 이에 맞서기 위해서는 당분간 못 먹고 못 살아도 핵무기실험에 더욱 박차를 가하고 전쟁준비에 만전을 기해야 한다고 북한주민들을 몰아세우고 있다. 하지만 727이니 216이니 하는 숫자에 대해 북한주민들은 이전만큼 순순히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 그런 숫자 놀음은 이제 수명이 다했다. 결코 오래 가지 않을 것이다.

 

2014.12.11 "北에 억류된 김정욱 목사는 北당국 발표와 달리 공작에 의해 끌려들어갔다"

작년 10월 초 밀입북했다가 북한에 체포된 김정욱 목사(51)는 10년간 북한과 중국 접경지역에서 선교사업을 해온 인물이다. 김 목사는 탈북하거나 친지 방문을 목적으로 중국에 온 북한 주민들에게 숙식을 마련해주며 성경공부를 시켜줬다. 올해 초에는 북한에 안정적으로 식량을 공급하기 위해 소규모의 국수공장까지 차린 것으로 전해졌다.

 

김 목사가 밀입북할 계획을 세울 당시 “중국에서 만나 전도한 평양의 고위 간부가 나를 보호해 주기로 약속했다”고 말했다고 한다. 하지만 김 목사는 입북한 후 체포됐으며 김 목사와 접촉한 북한 주민들까지 함께 붙잡힌 것으로 전해졌다. 김 목사는 올해 2월 27일 평양에서 기자회견을 가졌는데, “(남한) 국가정보원에서 돈을 받았고 그들의 지시를 따랐으며 북한 사람들의 스파이 활동을 주선했다”며 “북한 당국이 자비를 보여 풀어주기를 호소한다”고 말했다.

 

김정욱 목사는 북한 당국으로부터 무기노동교화형(무기징역)을 선고받고 아직도 북한에 억류 중이다. 정부는 지난 6월 김정욱씨 관련 문제 협의를 위해 북한에 실무접촉을 제안했으나, 북한은 “왈가왈부할 것이 못 된다”며 거부했다.

 

▲외신을 인용한 김정욱 목사의 북한 억류 사실 보도./YTN

 

하지만 최근 중국에서 확인한 결과 김 목사는 본인이 자발적으로 평양으로 간 것이 아니라 북한 국가안전보위부의 유인모략 책동에 끌려 들어가 체포된 것으로 드러났다. 평양에 들어가 북한에 지하교회를 세우고 민주정권을 세워 중구역 만수대 언덕에 있는 김일성, 김정일 동상자리에 교회를 세우기 위한 선교활동을 위하여 자발적으로 평양에 들어갔다는 북한당국의 발표는 거짓인 것이다. 최근 북한 보위부 정보원 등 소식통들의 이야기를 종합하면 사건은 다음과 같이 전개됐다.

 

김정욱 목사는 한국에서 기독교 목사로 활동하다가 종교생활을 못하게 하는 북한의 독재정권에 반발하여 교인의 양심으로 북한주민들이 믿고 의지할 만한 구심점을 마련해주기 위하여 중국 요녕성 단동(丹東)시에 들어갔다. 그는 거기서 친척방문 등으로 중국에 나오는 북한주민들을 대상으로 교회에 대한 인식을 주면서 중국에 있는 기간 그들의 일자리를 알선해주었다. 또 북한에서 너무도 못 먹고 못 살던 그들의 식생활 환경에도 관심을 돌리며 종교활동을 꾸준히 했다.

 

그런데 김 목사로부터 도움을 받고 북한으로 돌아가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낙원떡집’이라는 명판이 찍힌 각종 떡을 가지고 들어갔다. 단동에서 북한으로 들어가는 세관에서 멀지 않은 곳에 한 조선족 동포가 ‘낙원떡집’이라는 떡집을 운영하면서 김 목사와 함께 북한주민들을 도와주고 그들이 북한으로 돌아갈 때 무료로 떡을 한 지함(큰 박스)씩 지원해주었던 것이다. 하지만 불행히도 그것은 북한 보위부의 눈길을 끌었다.

 

북한 국가안전보위부는 중국에 친척방문을 갔다가 돌아오는 사람들의 일부가 신통히도 같은 떡집의 떡을 무료로 가지고 온다는 보고를 접한 뒤 중국 심양(瀋陽)의 북한영사관에 파견된 보위원들에게 “사연을 구체적으로 알아보라”는 지시를 내렸다. 떡과 같이 이미 가공되어 즉석으로 먹을 수 있는 식품은 각 세관에 상주하고 있는 국가품질감독국 대외상품검사소 요원이 음식물의 독성과 변질도를 분석한 뒤 돌려주기 때문에 ‘낙원떡집’은 당연히 주목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다.

 

심양주재 보위원으로부터 ‘남조선에서 온 선교사가 친척방문으로 오는 북한주민들을 대상으로 선교활동을 하며 예수를 믿는 신자로 만들고 그들이 북한으로 들어갈 때 낙원떡집의 떡을 무상으로 주어서 들여보낸다’는 보고를 받은 평양의 국가안전보위부에서는 약 40세 가량의 여성 보위원 한 명을 현지에 파견했다. 그는 친척방문자로 가장하여 단동시에 침투한 뒤 김 목사에게 접근하여 그가 전도한 북한사람들을 파악하기 시작했다.

 

북한에서는 오직 김일성만을 ‘조선의 하나님’으로 주민들에게 세뇌교육을 시키면서 종교는 인간의 사상을 좀먹는 아편이라고 하며 종교를 믿는 사람들을 무자비하게 숙청한다. 이 때문에 북한 보위부는 작심을 하고 이번 공작을 한 것이었다.

 

북한당국은 처음에는 김 목사를 유인하여 체포하려는 것보다 매수된 북한주민들의 명단을 알아내려고 하였는데 한 단계 더 나아가 한국정부와 국가정보원에서 선교사를 내세워 북한을 와해시키려고 한다는 구실을 마련하기 위하여 그를 평양까지 유인하여 체포하는 작전을 진행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침투된 여성 보위원은 김 목사에게 접근해 자기가 평양에 무사히 데리고 가서 교회활동을 안전하게 하도록 보장해주겠다며 끈질기게 유혹했다.

 

유혹을 받은 김 목사는 미지의 도시 평양에 들어가 볼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 그 여성이 인도하는대로 야밤에 배를 타고 북한의 평안북도 의주군으로 들어갔다. 사전에 국가안전보위부의 지시를 받은 국경경비대는 그가 무사히 강을 넘어 들어오도록 조치해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의주에서 신의주까지 가는 길엔 평안북도 보위부와 보안부, 국경경비대 초소가 있고 신의주에서 평양까지 가는 길엔 남신의주에 국가안전보위부10호 초소, 정주시에 인민보안부검열초소, 평안남도 평원군에 인민군 총참모부 경무초소, 평양시 순안구역에 경비사령부10호 초소가 있다. 이 초소들은 상시적으로 초소막을 설치하고 하루 24시간 검열을 삼엄하게 하고 있다. 내국인도 아닌 외국인이 이곳을 무단으로 통과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모든 초소들은 사전에 국가안전보위부의 통보를 받았고, 김 목사가 탄 차가 무사히 평양까지 들어갈 수 있게 허용해주었다.

 

북한당국은 김 목사가 평양에 들어온 뒤에도 즉시 체포하지 않고 평양시 락랑구역 통일거리 승리동에 집을 한 채 내주면서 그동안 중국에서 포교한 신도들을 만나보라고 기회를 주었다. 보위부에서는 유인전술로 김 목사가 신자들을 만나보는 것을 감시하면서 그에게 교회전수를 받은 북한사람들을 확인하고 체포하려 한 것이다.

 

결국 김 목사가 평양과, 남포 등 평양 주변도시에 살던 약 30명의 북한사람들을 만나는 것을 확인했다. 이어 3일이 지나 주위사람들이 모르게, 또 김 목사가 보위부의 유인작전이었다는 것을 눈치채지 못하게 저녁에 산책을 나가자고 한 뒤 현장에서 긴급 체포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그를 보위부로 압송하여 심문하면서 그가 한국정보기관으로부터 자금을 받아 북한주민들의 사상의식을 마비시키고, 북한 내부에 종교단체를 조직하고, 북한정부를 반대하도록 하기 위한 북한 반정부활동을 해오다가 평양까지 자발적으로 침투하였다가 잡힌 것으로 내외신 기자회견을 하도록 시켰다. 대한민국 정부와 국가정보원이 북한 체제 전복을 위해 매진하고 있는 것처럼 세계 언론을 호도하고 자신들이 정당하다는 것을 과시하도록 하는데 이용한 것이다.

 

김정욱 목사가 지난 2월 27일 평양에서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기독교한국침례회 동서 지방의 선인중앙교회 김정욱 목사입니다. 그 당시 노동당 창건 기념일을 앞두고 야간 특별 점검을 다니던 순찰자들에게 저는 처음에는 화교라고 거짓말을 하고 그것이 거짓으로 확인되어 또다시 중국 조선족이라고 하였다가 중국 말과 글씨가 안되어 할 수 없이 중국 단둥에서 대북선교사로 활동하는 기독교한국침례회 김정욱 목사이고 남쪽 국민이라는 사실을 밝혔습니다.

 

▼저는 어려서부터 반공교육을 투철하게 받았고 1군단 특공연대에서 5년간, 2군단 사령부를 폭파하는 훈련을 하면서 반드시 내 손으로 북쪽 체제를 박살내야 한다는 정신력을 길렀습니다. 북의 민심을 흔들고 현 정권과 정치 체제를 붕괴시켜야 내가 원하는 평양의 30만명이 예배할 수 있는 큰 교회와 북 전지역의 500여개의 큰 교회를 세울 수 있다고 생각하고 그것을 주관할 지하교회 본부를 만들기 위해서 평양까지 들어왔습니다.

 

▼제가 국경을 넘어오면서 가지고 온 것은 성경책, 교육교재, 여러 가지 기독교 책들과 32기가 메모리카드, MP3 100개, 각종 의약품, 여러 가지 식품들과 몰래 카메라, 성녹화물(음란물) CD 40장입니다. 북쪽 사람들에게 제가 선교활동한 모든 행위는 기독교의 사랑과 성경에서 벗어난 반공화국 범죄행위라는 것을 인정하면서 깊이 사죄를 드립니다.

 

▼이렇게 저는 중국 단둥에 나와있는 북쪽 사람들을 돈과 물건으로 유혹해서 지하교회 성도로 만들고 진정한 선교가 아니라 그들이 자기 나라를 뒤집어 엎는 반체제 인물이 되게 하려는 반(反)공화국 교육을 주고 지시를 주는 궁리를 하였습니다. 죄송합니다. 양국 간에는 좋은 시절이 있는데, 저로 인해서 안 좋은 점보다는 더 좋은 점, 우리 민족이 갈라진 지도 근 70년이 다 됐는데 하나가 될 수 있는 다리역할을 했으면 좋겠습니다.

 

2014.12.24 '뼁끼(페인트) 거사'에 실패한 북한 원산 주민의 비극

계속 감행되는 공개 처형

지금 세계가 국제형사재판소에 북한의 참혹한 인권유린에 책임 있는 자들을 기소하려고 하는 마당에 북한은 며칠 전 또다시 주민을 공개 처형했다. 희생자는 지난 7일 강원도 원산시 갈마시장에서 주민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총살됐다.

 

김정은은 집권 3년이 되어 오지만 그동안 주민들의 생활향상에는 관심이 없고 오직 자기의 정치적 위상을 세우는 데만 골몰해왔다. 강원도에 많은 돈을 들여 스키장을 건설하고 도처에 아버지 김정일의 동상을 세우는데 정신을 쏟고 있다. 심지어 유치원에서 대학에 이르기까지 전국의 어린이들과 학생들에게 동상 세우는데 필요한 동(銅·구리)을 바치게 한다. 학교 뿐 아니라 기업소와 각 인민반에도 ‘동을 바치는 것으로 충성심을 시험한다’며 압박하고 있다. 주민 원성이 높아지는 것은 당연하다.

 

이에 동상에 한을 품은 강원도 원산시의 한 주민이 지난 10월 어느 날 밤 시내 개선동에 세워져 있는 김일성 동상을 폭파하려고 마음먹었다. 하지만 폭약을 구하기 어렵자 대신 뼁끼(페인트)를 한 통 들고 갔다. 이어 동상에 페인트를 끼얹으려는 순간 잠복근무를 서고 있던 동상 경비 보안원에게 잡히고 말았다.

 

그는 사전에 동상이 있는 곳을 야간 답사를 했는데 동상 보초를 발견하지 못했다. 보초들이 야간에 잠복 근무를 한다는 것을 그는 까맣게 몰랐다. 이에 결행일 밤 페인트를 가지고 동상에 접근했다가 꼼짝 없이 체포됐다.

 

▲2013년 12월 22일 강원도 원산시에서 김일성 주석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새 동상 제막식이 열렸다고 노동신문이 23일 보도했다./노동신문

 

문제의 김일성 동상은 김일성이 8·15광복 후 러시아에서 북한으로 들어올 때를 기념하기 위해 건립된 것이다. 김일성은 당시 기차로 들어오다가 일본 패잔병들이 기차 굴(터널)을 폭파하는 바람에 러시아로 되돌아갔다가 군함을 타고 원산항으로 들어왔다. 북한 당국은 이를 기념한다고 하면서 항구가 있는 지역을 개선동으로 명명하고 거기에 김일성의 동상을 크게 세웠다. ‘

 

페인트 거사’에 실패하고 체포된 주민은 보안부에 구속되어 예심을 받으면서 자신이 처형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예감했다. 그는 악에 받쳐 반박을 하였다. “김정은과 당이 말로만 인민을 위한 정치를 한다면서 김정일 우상화를 위하여 많은 돈을 들여 동상을 세웠다. 그 돈이면 북한 사람들이 이팝(쌀밥)에 고깃국을 먹을 수 있지 않느냐!”

 

이 사건은 특대(特大)사건으로 인민보안부에 보고됐고, 인민보안부 예심국이 직접 내려와 예심을 진행하고 김정은에게 보고했다. 체포된 주민에 대해서는 ‘조선의 태양이신 김일성의 동상을 훼손하려고 한 반당·반혁명 분자’로 낙인 찍어 원산 시민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공개 총살했다. 그의 일가 식솔들과 사촌까지의 친척들은 모두 인민보안부 교화국에서 관리하는 18호 관리소로 보내졌다.

 

처형은 강원도와 원산시 인민보안국 보안원들이 수백 명이 동원되고 수천명의 강원도와 원산시 주민들이 모인 가운데 집행됐다. 죄목은 ‘당의 품속에서 자라나 키워준 은혜를 망각하고 조선의 최고 존엄인 김일성의 동상을 남조선 정보기관의 사주를 받고 훼손하려 하였다’는 것이다. 터무니 없이 대한민국 정보기관을 걸고 들어간 것이다.

 

지금 가혹한 인권유린 행위로 세계가 김정은을 국제형사재판소에 기소하자고 하는데도 북한은 아랑곳하지 않고 있다. 죄 없는 주민을 무자비하게 처형하는 김정은의 치떨리는 만행은 조만간 준엄한 심판을 받을 것이다. 

 

2014.12.26 북한 당비서 사무실에 침대가 있는 이유…온갖 뇌물이 판치는 세상

북한에서 1995년부터 일명 ‘고난의 행군’이 시작되면서 간부들의 돈에 대한 욕구는 끝없이 높아져 왔으며 아랫사람들을 통해 뇌물을 받는 등 돈을 만드는 수단과 방법도 다양해지고 있다.

 

과거 북한 당·군·정(黨·軍·政) 기관과 보위부, 보안부 간부들 상당수는 노년이 되어도 당에서 다 돌봐줄 것이라는 김일성과 김정일의 말을 믿었다. 이 때문에 뇌물을 받다가 괜히 얼마 먹지도 못하고 잘려 자녀들에게 후환을 남기지 말고 청렴결백하게 마지막까지 영예롭게 퇴역하는 것이 옳다는 생각들을 하였다.

 

하지만 이제 세태가 달라졌다. 김일성 부자의 말을 믿었던 사람들은 지금은 대부분 현직에서 은퇴했지만 후임 간부들을 만나면 ‘후회의 충고’를 하고 있다. “우리처럼 속고 살지 말고 권력을 손에 쥐고 있을 때 노후생활 준비를 잘 하고 자녀들에게도 잘 해주라”, “우리처럼 ‘성 쌓고 남은 돌이 되지 말라’”고.

 

이들은 과거 고위간부에 있을 때 ‘고난의 행군’ 시기에도 불구하고 부식물도 매일 중앙당 재정경리부에서 공급을 받았다. 또 그들의 친척들도 거의 중견 간부 자리에 있다보니 일상생활에서 크게 애로를 느끼지 못하였다.

 

반면 국가 배급제에 의거하여 살아오던 중견간부들과 북한주민들의 생활상 애로는 극도에 달하였다. 식량 배급이 되지 않아 굶주리게 되자 친척들 중 웬만한 자리에 있는 사람들은 모조리 찾아다니며 동냥을 구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웬만한 자리에 있는 간부들도 국가가 본인과 가족들에게 배분하는 식량 외에는 여분이 없었다.

 

간부들 입장에선 친척들로부터 “안 도와준다”는 원망소리를 듣는 것은 물론이고 스스로도 실질적인 생활고를 느끼게 됐다. 여기다 시장이 활성화되면서 돈만 있으면 무엇이든 살 수 있는 현실을 느끼면서 권력을 이용해 닥치는 대로 뇌물을 끌어챙기는 사람들이 속출했다. 상대가 돈이 없을 경우엔 돈이 될 수 있는 담배나 술 등 현물을 강제로 요구하기 시작하였다. 그렇게 번 돈은 상급 간부에게도 가져다 바치면서 상급 간부가 사후 방패역할을 해주기를 기대한다.

 

간부들이 돈을 버는 방식은 직급과 직위에 따라 각각 다르다. 가장 안전하게 뇌물을 받을 수 있는 직무는 중앙이든 지방이든 군·정권기관·공장·기업소의 당 비서들이다.

 

북한에서는 입당을 해야 우선은 사람값에 든다고 한다. 그 입당을 시킬 수 있는 권한과 간부들 인사 권한을 쥐고 있는 사람이 당비서들인데 이들이 바로 뇌물을 가장 많이 받는 사람들이다. 북한에서 입당하려면 남자는 돈을 바치고 충성을 하여야 하고 여자는 몸과 돈을 바쳐야 한다는 것은 공공연한 비밀이다. 하여 한때는 당비서들의 사무실에 있는 침대를 다 없애라는 중앙당 지시가 내려졌지만 지금도 당비서들은 밤늦게까지 일한다는 핑계로 사무실에 침대를 갖다 놓고 자기 산하 기관의 여성들을 입당시켜 준다며 성추행을 하고 있다.

 

보안부와 보위부는 돈 번 사람들을 골라 갈취한다. 주로 무역기관이나 외화벌이에 종사하는 사람들을 감시하다가 돈을 좀 벌었을 것 같으면 냉큼 잡아와 뇌물을 받고는 풀어주곤 한다. 또 무역이나 외화벌이 하는 사람들은 외국에 나갈 때 당비서와 담당보안원, 보위원의 보증서가 필요하기 때문에 그들이 돈을 요구할 때마다 뇌물을 바쳐야 한다.

 

요즘은 돈이 있는 사람들이 부동산 형식으로 아파트를 지어서 팔기 때문에 집을 매매하는 과정에서 ‘행정일꾼들’이 좋은 돈벌이 기회를 맞았다. 새집을 사거나 작은 집에서 큰 집으로 이주하는 사람들은 돈이 있는 사람들이기에 약 3000 달러를 바쳐야 하고, 돈이 없어 큰 집에서 작은 집으로 옮겨가는 사람들은 약 1000달러를 바쳐야 한다. 이주를 하려면 입사증(入舍證)이 필요한데 평양시 경우에는 입사증에 승인도장 14개가 찍혀야 한다.

 

북한에선 먹고 살기 힘들어지면서 범죄를 저지르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는데 돈 있는 사람들은 재판에 회부되기 전에 ‘교양처리’로 풀려날 수 있지만 돈 없는 사람들은 할 수 없이 재판 받고 교화소로 간다. 하지만 그 곳에서 주는 밥이래야 옥수수를 까지 않고 송이째 분쇄해 만든 높이 2Cm, 둘레 7Cm정도 되는 주먹밥 하나가 한끼 식사다. 수감자 가족이 두 달에 한번이라도 면회를 가야 재소자는 허약증으로 죽지 않을 판이다. 가족들은 이런 상황의 수감자를 빼내기 위해 간부를 찾아가 매년 1000달러 정도를 바쳐야 한다. 10년형을 선고 받았다면 1만 달러를 가져다 바쳐야 구해낼 수 있다.

 

▲북한 조선중앙TV는 작년 10월 31일 새로 제작한 기록영화 '백두산 훈련열풍으로 무적의 강군을 키우시여'에서 특수부대 군인들의 훈련장면을 공개했다. 군인들은 도끼로 복부를 강타하고 깨진 유리병에 눕는 등 잔인한 훈련 모습을 선보였다.

 

매해 3~5월에는 고교 졸업생들의 군대 징집이 진행되는데 이때는 군 간부들의 주머니가 돈으로 채워진다. 고위간부들이나 중견간부들의 자식들은 권세와 돈을 동원하여 좋은 보직을 얻는다. 즉, 뇌물을 받으며 살 수 있는 부대로 가거나 편하게 군생활을 할 수 있는 보위사령부·보위부의 초소들로 나가는 식이다.

 

일반주민들은 자녀들을 그런데 보낸다는 것은 꿈도 꾸지 못한다. 자식들이 군대에 나가면 대부분 허약증에 걸리기 때문에 부모들이 계속 면회를 가고 돈을 보내주어야 한다. 자식을 죽이지 않기 위하여 음식 상황이 조금이라도 더 좋은 공군이나 해군 등에 보내려 한다. 또 집에서 가까운 곳에라도 보내야 출장증명서를 떼지 않고 쉽게 면회를 갈 수 있기 때문에 빚을 내서라도 군 간부들에게 뇌물을 쓴다.

 

아파트를 건설할 때에도 먼저 건설 시작 때에 한 주택에 5000~8000 달러를 투자하고 아파트가 완공되면 가장 좋은 위치의 집을 가지고 한 주택에 2만~3만 달러를 받고 팔고 있다.

 

이외에도 직급과 직무에 따라 다양하고 교활한 수법으로 뇌물을 받는데 돈은 꼭 미 달러로 받는다. 그것은 북한에서 지금 100달러당 북한 돈 80만원 정도까지 교환되지만 법적으로는 100달러당 북한 돈 1만 2000원으로 계산되기 때문이다. 즉, 뇌물을 받다가 잡혀도 달러의 법적 환율이 낮아 형사처벌이나 민사처벌의 벌이 약한 것을 이용하는 것이다.

 

돈을 뇌물로 바칠 때는 돈 봉투에 넣어주는 것이 아니고 담배에서 담배씨를 빼고 매 가치에 100달러 지폐를 말아 넣어 전달하는 경우가 많다. 담배 한 갑이면 2000달러를 넣을 수 있다. 이런 방법이 애용되는 것은 과거 김정일이 “간부들이 아랫사람들에게서 받는 담배나 술은 뇌물이 아니고 ‘도덕’이다”라는 헛소리를 했기 때문이다. 그는 북한을 지상 천국으로 만드다더니 뇌물 천국으로 만들어놨다.

 

2015.01.09  평양 만경대구역 보안서 쇠톱 이용해 집단탈출사건 발생하자…

2010년 9월 말에 평양시 만경대구역 장훈3동에 위치한 만경대구역 보안서 대기실에 구금되어 있던 약 30명 이상의 구금자들이 쇠톱으로 철창문을 자르고 집단적으로 탈옥하는 중대사건이 발생하였다. 북한에서는 일단 범죄자로 신고되거나 어떤 사건 조사 시에 연계된 자라는 진술이 나오고 도적질·강도질 등 각종 범죄현장에서 잡히면 각 보안서들에 있는 대기실들에 9일 동안 구금되고 조사를 받을 수 있다. 심지어 야간 순찰 시에 증명서를 소유하지 않은 사람이나 범죄의 요소가 있을 수 있다고 인정되거나 보안원들이 범죄자로 추측하는 사람들도 마찬가지 조치를 당한다.

 

보안기관에서는 금요일은 금요노동, 토요일은 토요학습, 일요일은 휴식일로 보기 때문에 구금날짜가 9일이라고 하지만 금요일에 잡아넣으면 금, 토, 일이 3번 들어가 18일간을 보안원이 단독으로 보안서장의 승인만 받고 구금시킬 수 있게 되어 있다. 일단 구금하면 그 사람 가족이나 근무하는 기관에 통보를 해주어야 하는데 제때에 통보를 해주지 않아 행방불명자로 신고하였다가 대기실에 잡혀간 것을 뒤늦게 확인되는 경우가 빈발한다.

 

대기실에 있는 기간에는 증거 인멸과 사전 말맞춤을 할 수 있다고 보고 면회를 절대 금지하고 있다. 대기실에서는 하루 세끼를 순수 옥수수를 대충 삶아서 준다. 옥수수는 알을 세어 먹을 정도로 적게 주기 때문에 가족들이 따로 음식을 넣어주지 않으면 15일 이내에 허약증상이 나타난다. 이 때문에 외부의 가족들은 없는 돈을 이리저리 융통해 근무 서는 보안원들에게 뇌물을 주면서 음식물이나 편지를 대기실 가족에게 넣어준다.

 

18일이 지나서 범죄자 확인시일이 더 필요하면 검찰기관과 합의를 하여 구금기간을 15일을 더 연장한다. 이렇게 되면 금, 토, 일을 합쳐 26일을 더 구금시킬 수 있다. 이렇게 도합 44일간을 범죄자가 아니라도 범죄확인 구금을 시킬 수 있다. 심지어는 다른 보안기관 대기실로 옮기면서 구금 기간을 계속 늘려 구금자의 인신 구속과 고통을 극대화한다. 오죽했으면 아무 죄도 확증되지 않아 곧바로 나올 수 있는 사람들까지도 고통을 못 견뎌 도주하였다가 되잡혀서 중형을 받는 경우도 있겠는가.

 

▲평양만경대구역 구글 위성지도 사진

 

2000년 경 당시 사회안전성(지금의 인민보안부)이 진행한 심화조 사건이 일어났을 때 까지 대기실은 그냥 콘크리트바닥에서 이부자리도 주지 않았었는데 대기실에서 많은 사람들이 맞아 죽고, 얼어 죽고, 병들어 죽고, 고통을 참지 못해 자살해 죽어나가면서 원망이 높아졌다. 이에 김정일이 사회안전성을 인민보안부로 고쳐 부르게 하고 중앙당 검열 후에 대기실들 바닥에 나무로 마루를 깔아주고 인민군 부대들에서 쓰다가 폐기된 낡은 모포도 주었다.

 

하지만 지금까지도 대기실에 잡힌 사람들이 범죄자라는 확증이 안 되었어도 저녁 11시부터 아침4시까지 자는 시간 5시간과 밥 먹는 시간 하루 세 번 30분씩을 합쳐 6시간 30분을 제외하고 나머지 시간에는 정좌로 않아서 움직이지 못하게 하고 말도 못하게 한다. 심지어 물이 보장되지 않아 세수도 제대로 못하여 대기실에는 이와 쥐를 비롯한 각종 벌레들도 많다. 대기실의 크기도 12m²에 30명 이상 밀어 넣어 밤에 잘 때에도 누워서 자지 못하고 앉아서 잠자게 하고 있다.

 

담당보안원이 진술서를 작성하고 감찰과나 수사과 과장들의 승인을 받아 각 구역이나 군, 혹은 시의 안전위원회에 체포동의서를 제출한다. 매 안전위원회는 당 책임비서가 위원장이고 조직비서가 부위원장, 각 보안서장, 보위부장, 검찰소장, 재판소장, 행정위원회 법무부장이 위원으로 구성되어 매달 2번 정도 안전위원회가 진행되는데 그때 체포 안이 비준되면 검찰소에서 정식 체포령장이 발급되어 해당보안서의 예심과로 이관되어 구류장에 들어가며 그때부터 주민권이 박탈되고 범죄자로 낙인찍힌다.

 

안전위원회에서 살인자라고 해도 체포동의안이 부결되면 체포할 수 없고 교양처리, 혹은 노동단련대로 보낼 수 있으며 죄가 없어도 안전위원회가 결정하면 재판을 걸치지 않고서도 온 가족과 같이 정치범관리소에 갈 수도 있고 예심기관으로 이관되어 재판을 받고 교화형을 받을 수도 있다. 이렇게 안전위원회 결과가 나오기 전까지 구금되어 있는 곳이 대기실이다. 대기실들의 창문은 12mm이상 철 살창을 대고 출입문은 철문으로 되어있고 밖에는 항상 보안원들이 근무제로 24시간 보초를 서고 있다.

 

그러한 상태에서 평양시 만경대구역 보안서 대기실 창문을 쇠톱으로 자르고 대기실에 있던 전원이 도주하는 비상사태가 발생한 것이었다. 만경대구역 보안서 대기실은 아파트3층에 위치하고 있었는데 청사가 담장과 연결되어 있어 따로 담장이 없고 아파트건물이 담장 역할도 하고 있었다. 이것을 이용하여 밤에 밖에서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긴 장대를 이용하여 음식물과 함께 쇠톱을 들여보낸 것이다.

 

전원이 도주한 것도 그렇지만 며칠에 걸쳐 12mm이상 철창을 절단하였는데 발견을 못했고 누구도 신고를 하지 않은 것이다. 이런 사실이 인민보안부에 보고되자 즉시로 보안부 간부들이 만경대구역 보안서에 내려가 현장을 요해하고 평양시를 봉쇄하고 그들의 사진을 돌려 수배령을 내리며 소동이 일어났었다. 종당에는 한 주일 내에 그들의 집과 친척들 집에 잠복하고, 배가 고파 시장들에 나올 것을 예견하고 수색나간 보안원들에게 전원이 다시 잡히고 주모자와 쇠톱을 넣어준 두 명은 총살하고 나머지 사람들은 중죄를 씌워 교화를 보냈다.

 

그날 근무를 섰던 보안원과 감찰과장, 만경대구역 보안서 서장은 해직 제대되어 평양시에서 지방 농장원으로 온 가족과 같이 추방됐다. 그후 전국의 보안서들에 있는 대기실과 구류장들에서 도주 사건이 다시 발생하지 않도록 창문들에 완전히 든든한 철근을 가지고 2중 3중으로 봉쇄하는 등 요란법석을 떨자 보안원들과 주민들 속에서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놀음’이라고 야유하는 말이 나왔다.

 

2015.01.22  北, 새해 농장원들에게 식량 못 줘… 올해 떼죽음이 날 것

1995년 중순부터 일명 고난의 행군이 시작되면서 식량문제가 가장 초미의 문제로 되었다.

 

북한에서는 (쌀은 곧 공산주의다)라고 하면서 봄, 여름, 가을, 밥 먹는 사람은 다 농촌동원을 나가야 한다고 하면서 전국의 학생들과 노인들까지 농촌동원을 하였으나 논과 밭의 거의 90% 이상이 강산성에 이루었으며 거의 모든 땅이 냉 습도가 70% 이상이고 이삭 비료를 비롯한 비료를 주지 못하고 농기계들도 없어 아직도 소를 가지고 농사를 하다 보니 수확량은 매해 감소 되어왔다.

 

매해 1월 초에는 화학비료가 없다 보니 중앙기관을 비롯한 전국의 전체 주민들이 퇴비를 생산하여 농촌에 가져다 바치고 영수증을 받아 내야 한다. 그리하여 2001년 임시 경제개혁위원회의 한 그루빠는 전문 농사 문제를 가지고 연구를 진행하였다. 내각 농업성과 각 도 농촌경영위원회와 오랜 농장원들까지 포함해 1년 동안 거듭하는 토의 끝에 사회주의 농촌협동화 체제를 부정하고 토지를 개인화, 가족화하여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하였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김일성이 내놓은 사회주의농업협동화 방침과 청산리 정신, 청산리 방법이 부정된다고 토의를 거듭하다가 한 가정을 본조로 하는 가족분조제를 도입하면 농장원들이 자체 수입을 위하여서도 농사를 잘 지을 것이라는 결론을 하고 시험적으로 2003년 각 도에서 2개 농장씩 가족 분조제를 실시하였다.

 

원래 해방 후 지주들에게는 3:7제를 실시하라고 강요하여 그렇게 하여왔지만 사회주의 농업체제에서는 가족단위로 토지를 나누어 주고 농사를 지어 7:3으로 국가에 바치도록 하였다. 그것도 수확량에 준하여 7:3 비율을 준 것이 아니라 나누어준 땅에서 지금까지 약 10년간 수확량의 평균기준을 수확량으로 정하고 거기에서 7:3으로 국가에 바치도록 하였다. 국가에서 정한 수확량보다 더 많은 수확을 하였을 때에는 국가에 바치지 않고 전량은 개인이 가지도록 하였다.

 

실례로 국가가 5t을 정해 주었는데 6t을 수확했으면 5t에 해당한 3.5t만 국가에 바치고 나머지는 그 가족이 가지도록 한 것이다. 이것을 받아들인 농장들에서는 처음에는 환성을 지르며 1년 동안 부지런히 농사를 지어왔다.

 

▲중국 단동과 맞닿은 압록강 황금평에서 북한 주민들이 농사일을 하고 있다./지해범기자

 

그런데 농기계도 없고 부림소를 빌려 쓰고 그 값을 국가가 지정한 대로 가을에 가서 낟알로 바치며 개인화되고 국가적인 지원도 크게 없이 가족 자체의 힘으로만 모내기와 파종, 김매기, 가을걷이를 비롯한 농사를 진행하고 나니, 시험 농장원들은 1년 동안 그야말로 힘이 빠지도록 일을 하였지만 결국 가을에 가서 남는 낟알은 없고 오히려 국가에 빚을지는 비참한 결과를 가져왔다.

 

그전에는 모내기나 김매기, 가을걷이를 동원 나온 사람들이 거의 해주었는데 가족들의 힘만으로 농사하고 땅은 완전히 산성화되었으며 농기계도 없이 또 가족분조제로 된 농장은 농촌경영위원회에서 비료도 안 대주고 비료를 주면은 가을에 가서 낟알로 바쳐야 했기 때문에 국가가 제정해준 수확량을 하지 못한데다 소 값, 비료 값까지 다 물고 나니 오히려 빚만 지게 된 것이다. 그것은 국가가 5t을 제정해준 논에서 3t의 수확량이 나왔어도 국가는 3.5t을 무조건 받아들이고 거기에 소 값, 비료 값까지 물으니 농사를 지은 농장원들은 자기들이 먹을 식량마저 남기지 못한 것이다.

 

이렇게 되자 처음에는 환성을 질렀던 농장원들이 사회주의사회에서 어떻게 이럴 수 있는 가고 하면서 못하겠다고 제기하여 그 문제는 1년 천하가 되고 말았었다.

 

2009년 평양에서 어느 한 지식인이 이러한 농촌 실태를 구체적으로 분석하고 해방 후 김일성도 ‘토지는 밭갈이하는 농민에게’라는 구호를 내걸고 토지개혁을 하였는데 현 실정에서 북한의 모든 땅을 개인들에게 나누어주고 국가에서 최소한 몇 년은 세금을 걷지 말고 농촌이 살 길을 열어주어야 한다는 간곡한 내용을 담은 편지를 김정일에게 올렸었다.

 

그는 자기의 신변을 생각하여 무기명으로 편지를 우편통에 넣었는데 김정일은 그 편지를 쓴 사람은 반당, 반혁명분자라고 하면서 국가안전보위부에서 무조건 잡아내라고 하였다. 편지를 쓴 사람이 자필로 쓰지 않고 컴퓨터로 인쇄하였기 때문에 끝내 잡지는 못하였다.

 

지금에 와서 다시 시작하는 농업전략이 이런 식으로 이뤄지는 것이라면 그것은 오히려 농장원들의 불만을 더욱 야기 시키고 사회주의 농업체제의 불합리성을 낱낱이 까밝히는 것으로 밖에는 되지 않는다. 그 때문에 사회주의 농업협동화를 자본주의 농업체제에 근거하여 개인화를 하면서 국가가 최소한 3년간은 세금을 면제해주고 농기계와 비료를 보장해주어야 농장원들이 생활의 안정을 찾고 땅을 잘 가꾸어 농사할 수 있다.

 

농장에서 주된 문제는 우선 농기계가 너무도 부족하고 있는 것도 모두 낡아 쓰지 못하며 도로는 소달구지나 트랙터 외에는 다니지 못할 정도로 좁고 한심하다는 것이다. 그 때문에 개인화를 한다고 하여도 이 문제와 농촌 전기문제가 결정적으로 해결되지 못하면 농촌 개인화와 가족분조제도 제대로 진행될 수 없다고 생각한다.

 

결과는 그대로 올해에 나타났다. 올해에 다시 시험적으로 몇 개의 농장을 가족분조제 형태로 다시 시작해보고 농사를 진행하였으나 역시 농사가 망하고 나니 2014년 농사를 지은 것을 당, 정, 군, 보위부, 보안부에서 농장에서 가을걷이하고 탈곡을 하면서 식량을 빼돌린다고 하여 저리 밭에서 싹 쓸어갔다. 2015년도 새해가 되었지만 농장원들에게 1kg의 식량도 주지 못하여 올해에 다시 아사로 떼죽음이 날 것이라고 북한주민들 속에서 아우성이 대단하고 있다.

 

특히 오히려 곡창지대라고 하는 황해도 농장원들의 아우성이 더욱 높아지고 있다. 이렇게 북한의 농업계획은 비참하게 막을 내리었다.

 

2015.01.30 미국은 승냥이(늑대), 일본은 여우, 한국은 시라소니

북한이 일본에 대해 한 하늘을 이고 살 수 없는 불구대천의 철천지 원수라고 북한 주민들에게 계급적 반일선전교양을 계속 하면서도 이번에 김정은 정권에서 북·일 정부회담을 가지고 납북자문제를 논의하게 된 것은 북한이 노리는 목적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북한에서는 김정일이 사망 후 김정은이 집권하여 3년이 돼오지만 세계적 판도에서 북한의 정치지도자로 이미지를 높이기 위하여 TV와 신문, 방송을 통하여 많은 홍보를 하면서 우선 중국주석과 동등한 위치에서 평양이나 북경에서 회담을 진행하여 만방에 과시하여야 하겠으나, 중국의 동의가 없어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다. 김정은이 지도자로 된 다음 중국주석처럼 세계가 관심을 가지는 정치인을 먼저 만나려는 의도로부터 평양을 방문한 몽골 대통령까지 김일성종합대학에 가서 강연하면서 사회주의보다 자유민주주의가 더 좋다는 내용의 발언을 한 것을 계기로 만나지 않고 오로지 중국주석과의 만남을 기대하였었다.

 

그런데 중국의 시진핑 주석이 대한민국 박근혜 대통령을 먼저 초청하여 만나고 김정은을 만나주지 않기 때문에 고심 끝에 다시 세계적 관심이 있는 일본의 아베 총리가 납북자문제해결을 위하여 평양을 방문하여 김정은과 회담하도록 하기 위한 작전으로부터 북한은 일본과의 정부급 협상을 시작하였다고 북한에서는 평가하고 있다.

 

북한에서 초보적인 안건을 가진 것은

 

첫째 납북자문제 해결이라는 항목을 가지고 전 총리 고이즈미처럼 일본 아베 총리가 평양방문을 하여 김정은과 공식회담의 기회를 가지도록 조성하며,

 

둘째 일본으로부터 납북자문제를 빌미로 지난 시기 36년간의 조선강점피해 보상금차원에서 1차적으로 100억달러를 받아내자는 것이다.

 

셋째 조총련에서 매해 북한에 바치는 납부금을 일본은행에서 자금을 선대하여 가져다주고 환불을 하지 못해 도쿄에 있는 조총련 중앙 건물이 매각된 사태를 시급히 막고 사멸되어 가는 조총련을 살리자는 것이며.

 

넷째 만경봉92호를 비롯한 북한 선박들이 일본에 자유롭게 입출항을 할 수 있도록 보장받아 대남, 대일공작사업을 더욱 활발하게 진행하자는 것이다.

 

다섯째 조총련 간부들을 비롯한 일본에 있는 재일교포들과 상인들이 평양을 비롯한 북한에 자유롭게 드나들며 낙후한 북한 경제사업에 발전된 설비들을 투자할 수 있도록 일본정부가 승인하도록 하자는 등 여러 가지 목적을 실현하기 위하여 일본과 납북자문제를 가지고 회담을 재계한 것이다.

 

또 일본정부와 극치의 상태까지 도달한 중국정부와 한국정부가 세계 여론에 동참하여 북한에 대해, 특히는 젊은 나이에 정권을 세습 받은 국방위원회 1위원장 김정은에 대해 호의적인 태도를 가지고 동조하며 지원해주지 않으면 북한은 단호하게 적국인 일본과도 손잡겠다는 강한 메시지를 보내려는 정치적 의도도 있었다. 이를 위해 북한에서는 일본에 신용성을 보여주기 위하여 먼저 국방위원회 직속으로 일본인 특별조사위원회를 내오고 국가안전보위부 부부장 서대하를 위원장으로 부위원장으로는 국가안전보위부 반탐국장 김명철, 인민보안부 주민등록국장 박영식을 임명하였다.

 

처음 북한에서는 일부 간부들이 반대도 했지만 초기 목적을 달성하고 일본에서 북한이 요구하는 일련의 조건들을 먼저 이행하고 일본총리가 일정한 액수의 돈을 가지고 오면 약 30명 정도의 납북자를 인정하고, 납북되어 대남, 대일공작기관에서 근무하지 않고 사회에 배출된 일본인들을 돌려보낼 의지가 있었던 것으로 보였다.

 

그런데 북한이 일본인 특별조사위원회를 제안하고 성의 있는 태도를 보였지만 일본 측이 조총련 중앙 건물의 매각을 중지하고 조총련간부들을 비롯한 재일교포들의 북한 방문 승인과 만경봉92호를 제외한 일부 북한 선박들의 일본 입출항은 승인하였다고는 하나 좀 더 성의 있는 입장이 아니라는 의도에서 북일 회담을 시간이나 보내는 식으로 끌고나간 것이다.

 

특히 공식적으로 확인되지는 않았지만 고모인 김경희가 김정은에게 할아버지 김일성이나 아버지 김정일이 일본으로부터 돈을 받을 수 없어서 못 받은 것도 아니고 일본과 조선은 대를 이어서도 풀 수 없는 피맺힌 숙적이라고 하면서 북한이 일본과의 납북자해결을 위한 회담을 완강히 반대하여 김정은이 고민 끝에 결심을 내리지 못해 시간을 끄는 연장전으로 나가고 있다는 말도 북한에서 퍼지고 있다.

 

이전에 1990년대 초에 김일성이 일본정치인 가네마루 신을 초청하여 만났을 때에도 일본의 손해배상문제를 단호히 배격하였으며 2002년도 당시 일본총리 고이즈미가 평양에 왔을 때에도 김정일이 인정한 일본인 납북자도 극히 제한된 분야에서 공개하였었는데 김정은이 할아버지 아버지의 정치를 계승한다고 하면서 대일문제에서 오류를 범하고 있지 않은가 하는 의문이 많이 제기되기도 하고 있다.

 

이로부터 북한에 형식적으로나마 조직된 일본인 특별조사위원회는 1945년 8월 일본 패망 후 조선에서 살다가 미처 일본으로 돌아가지 못한 일본인들과 조선인 남자와 결혼하고 일본으로 가지 못했거나 1970년대까지 북한으로 들어온 일본귀국자를 따라 들어온 일본 여성들에 대한 재조사로 일하고 있다고 북한에서 많이 말들을 하고 있다.

 

실제로 북한이 일본에서 납치한 납북자 중에 대남, 대일을 위한 공작사업에 동원된 사람들은 이전에는 중앙당 연락소들에서 관리하다가 지금은 인민무력부 총참모부 정찰총국에서 직접 관리한다고 하는데 그러면 국가안전보위부나 인민보안부에서는 알 수도 없고 알아볼 수도 없게 돼 있다.

 

최근에는 이번에 일본이 유엔에서 북한의 인권유린 행위를 고발하고 김정은을 비롯한 북한의 관련 있는 간부들을 국제형사재판소에 기소하도록 발기하고 제기한 나라 중의 하나라고 하면서 역시 여우 같은 일본과는 협상의 의의가 없다고 하면서 거의 단절상태로 들어가고 다시 러시아와의 외교협상에 몰입하고 있다. 북한은 미국을 승냥이(늑대), 일본을 여우, 한국을 시라소니 라는 동물이름에 많이 비유하며 비방 중상을 일삼고 있다.

 

이렇게 북한은 자기들 소기의 목적 달성을 위해 일본과 정부급 회담을 해왔지 결코 일본인 납북자를 인정하고 돌려보내라는 일본인민들과 국제사회의 요구에 의하여 진실한 마음으로 회담에 응한 것이 아니다. 북한에서 요구하는 조항을 일본이 다 수용해도 북한에서는 설사 납북자를 김정일처럼 일부 인정하고 돌려보낼 수 있어도 특수기관에서 근무한 사람들은 절대로 돌려보내지 않을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2015.02.04 김정일이 "곁에 없다"고 말하면 "지구상에서 살 수 없다"는 의미…신소질한 간부들 일가족 모조리 총살당해

2002년쯤 북한에서 최대 희비극이자 끔찍한 참상이 있었다.

 

당시 중앙당 조직지도부 검열 2과장으로 근무하고 있던 이영복은 자기와 같이 해군에서 군사복무를 마치고 김일성종합대학을 졸업하고 3년간의 3대혁명 소조기간을 현장에서 완벽하게 좋은 성적으로 끝냈다. 그는 중앙당에 들어온 뒤 쌍두마차로 불리던 당시 검열 3과장 신찬호가 자기를 제겨놓고 고려봉사 총국장 박두남, 중앙기간 담당 보안부장 김 모 등 3명과 친하게 지내며 고려호텔에서 자주 술을 마신다는 것을 알게 됐다. 야심과 질투가 일면서 김정일에게 3명이 자주 모여 않아 반당적인 모의를 하고 있다고 허위보고를 하였다.

 

친구들끼리, 특히 간부들이 끼리끼리 이유 없이 자주 모여 않는 것을 당에 자기의 속마음을 주지 않는 가족주의적인 종파행위로 판단하고 자기를 반대하는 행위라고 간주하며 그런 것을 가장 경계하던 김정일은 그 보고를 받자마자 당시 조직지도부 1부부장이자 중앙당 본부 당 책임비서였던 이제강에게 지시하여 조사를 해보게 했다. 하지만 반당적인 행동의 증거가 없어 인민보안부 교화국에서 관리하는 18호 관리소에 3명을 보내어 1년 동안 독신혁명화를 시키도록 하였었다.

 

가족들은 그대로 평양에 남겨두고 독신으로 관리소 혁명화 작업반에서 힘들어도 참고 1년 동안 일을 하고 다시 올라와서 이영복에게 복수하든가 자기들의 억울함을 풀었어야 했다. 하지만 성급하게도 그들은 이영복의 모함에 애매하게 걸려들었다면서 이영복의 야심과 질투에 대한 내용의 신소(탄원) 편지를 3명 이름으로 써서 우편을 통해 김정일에게 보내었다. 그런데 두 명이든 세 명이든 집단행동과 신소를 가장 싫어하던 김정일은 그들이 자기들의 결함을 인정하고 고치기 위하여 혁명화를 가서 자기들을 단련하면서 노력하지 않고 신소질을 하였다고 하면서 오히려 그들 가족마저 18호 관리소로 보내도록 명령했다.

 

김일성종합대학, 김책공업종합대학, 금성정치학교 등 북한의 일류급 대학들에서 공부하면서 쟁쟁하게 자라던 자식들까지 한 번에 다 이주민으로 끌려와 탄광의 갱에 들어가 온갖 멸시를 받으며 이주민생활을 하게 되자 더는 참을 수 없다고 생각한 3명은 이번에는 녹음기를 통해 직접 자기들의 음성으로 자기네는 아무 죄도 없으며 자기네가 장군님께 올린 신소 편지도 이영복이 감히 중간에서 가로채서 허위 보고를 하여 또다시 온 가족이 관리소 이주민으로 들어왔다며 억울한 심정을 직접 음성 녹음해 김정일에게 신소를 하였다. 그리고는 자기들이 처음에 보냈던 신소 편지가 잘못 들어가서 온 가족이 이주민으로 잡혀온 것으로 착각하고 이번에는 18호 관리소 경비대대 초소장으로 근무하는 한 사람을 자기들의 연락원으로 매수하였었다.

 

▲현재 운영 중인 북한 정치범 수용소

 

18호 관리소 보안원들은 평양시 순안구역에 있는 인민보안부 정치대학을 졸업하고 군관(장교)으로 승진하는 것이 희망이고 꿈이다. 하지만 그렇게 되기가 망막한데 전직 중앙당 과장, 중앙기관 보안부장, 고려봉사 총국장 등 쟁쟁한 간부들인데 그들을 도와주어 억울한 문제가 해결되면 자기네가 나가서 대학에도 보내주고 뒤를 봐주겠다는 말에 유혹되어 그들이 알려주는 대로 휴가를 내어 직접 녹음테이프를 가지고 평양으로 가서 신찬호와 가까운 친구였던 어느 한 중앙당 간부에게 직접 전달하였다.

 

신찬호가 억울하게 야심가 이영복으로부터 피해를 당하였다고 본 그 간부를 통하여 테이프가 직접 김정일에게 전달되었다. 그들의 억울한 하소연을 음성을 통하여 직접 들은 김정일은 자기들의 과오를 반성하지 않고 계속 신소질을 하는 이런 사람들은 이젠 ‘내 곁에 없는 사람들입니다.’ 라는 지시를 인민보안부에 내려 보내었다.

 

북한에서 김정일의 곁에 없다는 것은 지구상에서 살 수 없다는 지시로 인식되기 때문에 인민보안부에서는 2002년 5월 초에 18호 관리소 이주민들을 관리소 안에 있는 대동강변에 모아 놓고 감히 장군님을 믿지 않고 신소질을 계속하였다고 그들을 단죄하고 그들 3명은 물론 아무 죄도 없는 신찬호의 11살 난 막내아들까지 그들의 온 가족들을 다 총살하는 비인간적이며 야만적인 악행을 저지른 것이다.

 

또한 그들에게 유혹되어 테이프를 평양으로 직접 가지고 갔던 초소장도 억울하게도 그날같이 총살되고 그의 온 가족은 18호관리소 이주민으로 되었다. 그리고 테이프를 김정일에게 전달한 간부도 철직되어 평양에서 추방되었다.

 

이렇게 북한에서는 김정일이 자기 곁에 없는 사람들이라는 한마디에 미성년에 이르기까지 아무런 죄도 없는 억울한 사람들이 20명 정도가 한 날, 한 시에 온 가족이 함께 총살당하는 끔찍한 참상이 발생한 것이다. 그렇게 김정일에게 아첨하면서 사람 잡이를 하던 2과장 이영복도 결국은 야심과 질투가 너무 강해 애매한 사람들을 많이 잡았다는 많은 간부의 규탄으로 2년 후에는 국가안전보위부에서 관리하는 15호 정치범관리소에 가족과 함께 이주민으로 가고 말았다. 결국은 “남 잡이가 제 잡이로 끝났다”고 많은 간부가 야유를 하면서 북한에서는 현대판 유다라는 말까지 있었다.

 

2015.02.13 재범하면 인체 해부실험 진행하는 83호 병원으로 이송해버려

북한에서의 재판과정

북한에서 재판과정은 최고재판소를 최종단계로, 평양시와 각 도 재판소를 2차 단계로 각 구역, 군 재판소를 1단계로 구분하여 두 번의 상소를 할 수 있다. 원래는 매 구역, 군에 재판소가 있지 않고 3~5개 구역, 군에 지구재판소가 있었었는데 일명 ‘고난의 행군’이 시작되면서 각이한 형태의 범죄사건이 자주 발생하고 이혼율이 높아지면서 형사재판과 민사재판사건이 많이 진행되자 매 구역, 군에 2000년도부터 재판소를 내왔다.

 

형사재판은 각이한 범죄를 감행하고 보안서나 검찰의 예심을 받은 사람들을 재판하는 것이고 민사재판은 이혼이나 다른 사람의 돈을 대부하고 돌려주지 않는 등 민사사건을 재판소나 변호사에게 직접 고소하면 진행하는 재판이다. 그때부터 구역, 군보안서의 예심과에서와 검찰소에서 취급한 사건들의 재판을 구역, 군 재판소에서 진행한다. 재판에서 자기가 구형받은 형기가 억울하다고 상소를 하면 도 재판소로 이송되어도 보안국이나 도 검찰소에서 재 예심을 하고 2차 재판을 진행한다.

 

도 재판에서 받은 구형에 다시 상소하면 최고재판소로 이송되어 인민보안부 예심국이나 중앙검찰소에서 다시 재 예심을 하고 재판을 하는데 최고재판소에서는 판결할 때 본 재판결과에 대해 상소할 수 없다는 것을 선언한다. 그러나 북한에서는 일단 상소를 하여 범죄인이 무죄로 되거나 형벌이 감소하면 체포한 수사과나 감찰과 보안원이나 혹은 검찰소의 검사와 예심을 진행한 예심원이 철직(면직)되기 때문에 상소하지 못하도록 압박을 하기 일쑤다. 이 때문에 본인이 무조건 상소를 하여 2차 단계로 가면 ‘초록은 동색이라고’재판소도 같은 사법기관이니 피고를 지지하기보다는 자기 범죄에 대한 반성의 기미가 전혀 없는 것으로 보고 1차 재판에서 받은 구형보다 2배까지의 중형을 선고하기 때문에 조만(어지간)해서는 상소를 하지 못한다.

 

▲북한에서 재판 진행되는 모습/조선 DB

 

상소를 하기보다는 어떤 방법으로라도 돈을 구입하여 판사나 검사, 좋기는 재판으로 넘어가기 전에 담당 예심원에게 뇌물을 먹이는 것이 가장 큰 효과를 볼 수 있다. 뇌물을 잘하면 심지어 살인자도 교양처리 혹은 노동단련대로 끝낼 수도 있다. 범죄자를 체포하고 가족의 신원을 먼저 확인하는데 직계형제 중에 중앙당, 국가안전보위부, 인민보안부, 미그-21 이상 비행사, 잠수함이나 974친위대에서 근무하는 사람, 재일본 조총련간부와 친척이 되는 사람들은 일단 먼저 중앙당에 보고해야 한다.

 

위에 지적한 분야에서 근무하는 사람들은 형제들이나 가까운 친척 중에 교화형을 받으면 철직 제대되기 때문에 그 사람을 철직시킬 형편이 안 되면 아무리 중범죄자라도 한번은 교양처리를 받고 나오며 다시 재범하면 그 집 가문의 동의를 받아 가족명단에서 삭제하고 83호 병원으로 보내고 만다.

 

83호 병원은 인체 해부실험을 진행하는 곳으로 형제들 속에서 계속적인 범죄를 감행하는 사람이 있으면 일단 자기네가 철직되지 않고 직위유지를 위해 가문에서 삭제한다는 보증서를 쓰고 보내며 혹은 태어날 때부터이거나 심하게 앓아서 장애인이 되어 북한식으로 더 사람 구실을 하기 어렵다고 보면 특히 평양사람들은 평양에서 지방으로 이주시키지 않기 위하여 형제를 더는 찾지 않는다는 담보서를 쓰고 83호 병원에 보내면 다시는 살아서 나오지 못한다.

 

북한의 모든 사무실과 주민들의 살림집을 비롯하여 모든 방과 회의장들에 김일성, 김정일의 초상화가 걸려 있지만 재판장에는 국장만 걸려 있다. 구역, 군 재판소에는 판사 겸 소장 한명과 전문판사 1명, 서기 2명 외에 직원들이 몇 명 있고 변호사가 1명이 있다.

 

대체로 전문판사가 재판을 진행하고 소장이 특별히 부탁받은 것은 직접 한다. 형사재판이나 민사재판을 진행할 때에는 판사와 인민참심원 두 명이 기본 앞 석에 않는다. 인민참심원은 구역, 군 당위원회에서 공장, 기업소들에서 성실하다고 평가되는 노동자, 농민, 일반사무원들이나 인민반장들 속에서 선출하여 임명한다.

 

아래 석에 서기가 않아 재판과정을 기록하고 기소검사가 좌측에 않고 우측에 변호사가 않고 판사 앞에 죄인이 재판 전 과정 서 있으며 양옆에 두 명의 계호보안원들이 않아보다가 있을 수 있는 피고의 반항을 제지시킨다. 대체로 먼저 판사가 지금부터 피고 김 모의 범죄사건에 대한 재판을 시작한다고 선포하고 기소검사가 피고의 범죄사실을 읽는다.

 

그리고 피고의 범죄가 적용되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형법 몇 항, 몇 조에 의하여 몇 년의 교화형에 처할 것을 제기한다고 발언한다. 그다음 변호사가 발언하는데 변호사는 피고에게 검사가 말한 모든 범죄사실을 인정하는가 질문하고 인정한다고 하면 본인이 범죄사실을 인정하기 때문에 최소의 형량을 판결해달라고 형식상 말하는 것으로 끝낸다.

 

북한에서는 모든 재판에서 변호사의 역할은 전혀 없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판사가 잠시 휴회를 선포하고 나가서 인민참심원들과 검사와 같이 약 5분 동안 토론을 하고 들어와 거의 대체로 검사가 제기한 대로 형벌을 적용하는 것으로 재판을 결속한다. 공개재판이 아니고는 재판장에 다른 사람이 들어갈 수 없으며 판사는 판결하고 본 재판에 대하여 상소할 수 있다고 말하며 상소기일은 15일을 준다. 15일이 지나면 구류되어 있던 구류장에서 지정된 교화소로 이관시킨다.

 

2008년 중앙통계국에서 중앙당 지시로 인구조사를 진행하면서 확인된 결과 1995년 이후부터 식량공급이 되지 않아 먹고 살기 위한 각종 범죄현상이 많이 나타났다. 평양시와 각 도 소재지 도시를 제외한 북한의 모든 지방에서 40세 이상의 사람 중 50%정도가 교화소나 노동단련대 출소자들이다. 이들은 당과 보위부, 보안부, 사법검찰기관에 한을 품고 이제 전쟁이 일어나면 자기를 취급하였었던 사람을 먼저 쏘아죽이겠다는 말이 나돌 정도다.

 

이 지경에 이르자 김정일의 지시로 형사소송법을 검토하여 형량을 2배 정도 감소하는 것을 골자로 법이 개정돼 2011년부터는 새로운 형사소송법으로 재판을 진행하고 있다.

 

2015.03.13  평양서 "저 처녀들 서울말 씁네다"고 신고한 여인 오히려…

북한내 간부들과 주민 남녀노소 할 것 없이 한국 드라마와 영화의 인기가 대단하다. 미국이나 중국, 러시아를 비롯한 다른 나라 영화들도 많이 유통되고 한국 영화나 드라마가 특별히 인기 좋은 것은 우선 언어가 통하고 감정이 통해서다.

 

북한 TV에서 공식적으로 방영하는 영화는 중앙당 6부(작전부) 산하 46연락소에서 외화를 들여와 번역해서 중앙당 승인을 받는 절차를 따른다. 한국영화와 드라마가 들어오기 전에는 외국 영화를 재밌게 보았지만 최근에는 나이와 직업, 직무, 성별에 관계없이 한국 영화 드라마를 대부분 다 즐겨본다. 특히 2000년부터 한국영화와 드라마에 대한 열풍이 불면서 이를 보지 못한 사람들과 학생들은 밀리는 상황도 나타났다.

 

북한에서는 TV도 평일에는 중앙 채널 하나다. 그나마도 오후 5시부터 10시까지만 시청 가능하다. 토요일과 일요일에는 평양시민들만 보는 만수대 채널과 교육 채널이 있는데 끊임없이 김일성, 김정일, 김정은 3대 부자에 대한 선전영화나 소위 그들의 인민에 대한 덕성을 주제로 한 것이라 주민들이 TV를 시청을 싫어하고 한국 영화나 드라마를 보다가 잡히면 최악의 경우 사형까지 당하지만 지금은 거의 한국 영화 드라마 중독이다. 2005년까지는 주로 지인들을 통해 CD를 얻거나 시장에서 사서 보았지만 단속이 강화되면서 현재는 DVD와 USB를 이용하여 시청하고 있다. 2009년 인민보안부에 압수된 자료에 의하면 평양시에 도는 한국 영화와 드라마는 2000개 정도나 되는 것으로 알려졌다.

 

▲남북한의 과학자가 훗날 한국의 대통령이 된다는 주제로 이목을 모은 드라마 한반도의 한 장면. TV조선 제공

 

북한에서 한국 영화를 컴퓨터로 복사해서 팔다가 잡히면 거의 공개총살하거나 10년 이상의 징역형을 받는다. 지금처럼 한국영화나 드라마가 밀수로 북한에 들어가기 전에는 당, 군, 정, 고위급간부들에 한해서는 ‘적을 이기려면 적을 잘 알아야 한다’는 주장하에 한국 영화와 드라마를 참고 시사영화로 보여주었다. 하지만 이것을 간부들이 집에 가지고 가 보게 되고 이를 가족들이 또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형식으로 전파되고 복사돼 팔려나갔다.

 

최근에는 모든 시장에서 공개적인 거래는 아니지만, USB에 한국영화와 드라마를 복사해 판매하는 행위가 노골적으로 진행되고 있다. 특히 평안남도 평성시 시장과 남포시 강서구역 시장, 황해북도 사리원시 시장에서는 노트북을 가지고 나와서 내용을 현장에서 보여주며 선택해 살 수 있어 광범위하게 유포되고 있다. 단속반은 한국과 미국을 비롯한 외국 영화나 드라마 보는 것을 강력히 통제하면서 유포지들 색출에 나서고 있다. 특히 성인물을 유포한 경우에는 엄격히 처벌한다. 북한에서는 현재 한국영화나 드라마를 보거나 유포시키는 것을 특별 단속하지만 미국이나 중국을 비롯한 외국 영화나 드라마에 한에서는 대체로 뇌물을 받는 선에 해결한다.

 

인민군 보위사령부와 각 군부대 보위원들로 편성된 특별 단속반은 인민군대 내 유포된 한국 영화와 드라마 단속을 위해 구성됐다. 군인들에 한해서는 국가보위부나 보안부, 검찰이 단속처리를 할 수 없기 때문에 군에서 특별팀이 만들어진 것이다. 군인들에게 한국 영화와 드라마를 판매한 시민에 한해서도 그들이 인민군대를 와해시키려고 한다는 누명을 씌워 엄중히 처리한다. 중앙기관의 간부들은 참고 시사영화에 관심이 없지만 지인들과 단속반이 압수한 영화 드라마를 USB를 이용해 보고 있다.

 

평양시내에서도 한국영화나 드라마를 보고 학생들과 주민들 속에서 한국식 발언을 많이 하고 있기 때문에 이제는 한국영화를 보지 못하는 사람들은 오히려 바보 취급을 받고 있다. 한번은 평양시 모란봉구역 인흥 시장에서 떡을 팔던 여성이 시장 담당보안원에게 “저기 지나가는 처녀 대학생들이 서울말을 하며 간다”고 신고하자 그 보안원은 오히려 그 여성에게 “너는 어떻게 그들이 서울말을 하는지 아는가 하면서 너야말로 한국영화를 전문으로 보지 않는가”라며 따지는 웃지 못할 상황도 있었다. 또한 대동강구역의 어느 한 집에서는 아버지가 아들에게 오는 전화를 받았는데 그가 서울말을 쓰자 아들을 찾아 수화기를 넘겨주면서 “통일이 다 된 것 같다. 서울에서 전화 왔다”고 말한 사실이 알려지면서 웃음을 자아내기도 했다.

 

북한 간부들 속에서도 이제 북한사람들이 한국 영화와 드라마를 보는 것을 막을 수 없는 흐름으로 여긴다. 그들은 남조선정보기관이 북한인민들의 사상을 와해시키기 위해 한국 영화와 드라마를 북한에 유포시키는 공작이 성공했다는 말을 노골적으로 하고 있다.

 

2015.03.26 "천안함을 타격하라" 2010년 3월 인민무력부, 황해남도 과일군 해군부대에 특명

2010년 3월 26일 저녁 9시 20분쯤 백령도 근처 해상에서 대한민국 해군 초계함 천안함이 침몰하면서 해병 46명이 사망하는 대참사가 발생하였다. 당시 북한에서는 중앙당 통일전선부 산하인 반제민족민주전선의 이름으로 미제국주의자들과 남조선 괴뢰도당들이 북침전쟁도발의 구실을 마련하기 위하여 스스로 함선을 침몰시키고 공화국에 넘겨씌우는 비열한 도발행위를 감행하였다고 규탄했다. 조선중앙통신사는 군사논평원의 시사해설발언을 통해 천안함 침몰사건은 남조선 정부가 벌린 자작극이라고 발표했다. 또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양형섭 부위원장은 담화문을 발표하여 천안함 사건은 공화국과 전혀 관계없는 날조극이라고 비평했다.

 

북한에서는 조선중앙TV와 방송을 통하여 국방위원회 합동조사단을 남조선에 파견하여 천안함 사건의 진실을 밝혀내겠다고 큰소리쳤다. 북한의 전체 군대와 인민들에게 천안함 사건은 미제와 남조선정부의 철저한 조작극이라며 북한주민들이 미제와 남조선 괴뢰도당들의 북침전쟁도발책동에 경각심을 심으면서 전투동원 태세를 갖추도록 했다. 이렇게 천안함 사건이 미국과 남조선정부의 자작극 선전공세로 이어지면서 처음에는 북한 군인들과 주민들도 그렇게 믿었다. 북한에서는 왜 자기 병사들을 죽이면서까지 북침도발 행위를 진행하는지를 분노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만큼 북한 내에서도 작전에 직접 참가한 사람들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도록 특급비밀로 해온 것이다. 2010년 5월 중순 나는 퇴근하다가 이전부터 잘 알고 있던 박 모라는 사람(인민무력부 총참모부 작전국 부국장 출신)을 우연히 만났다.

 

당시 그는 군사칭호 소장을 달고 군 복무 하다 몇 달 전에 뇌혈전으로 제대해 집에서 치료를 받고 있었다. 오랜만에 만났으니 맥주라도 한잔하자며 식당으로 갔다. 맥주를 마시다가 식당 홀에 있는 TV에서 천안함 사건에 대하여 날조극이라는 보도가 방영되자 “왜 우리는 항상 먼저 도발 당하면서도 대책을 세우지 못하나”하고 그에게 묻자 그는 “알 만한 사람이 모르면 함부로 말하지 말라면서 천안함은 인민무력부 작전국 주도하에 인민군 해군에서 진행한 사건”이라고 말했다.

 

▲김정은 북한 노동당 제1비서(가운데)가 해군 잠수함 부대인‘조선인민군 제189군부대’를 시찰하는 모습./사진=노동신문

 

인민무력부에서는 1999년과 2002년 북방한계선(NLL)을 지키기 위해 서해 해상전투에서 북한군이 큰 피해를 당했기 때문에 이에 대한 보복조치로 최고사령부의 지시를 받고 은밀히 준비를 하여 진행한 사건이라고 말했다. 그가 근무하고 있을 당시에도 작전을 준비해 왔다고 말했다. 내가 왜 그 즉시 보복조치를 하지 않고 몇 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야 보복 했느냐고 물었다. 그는 즉시 진행하면 우리가 한 것을 세계의 모든 나라가 알게 되고 테러행위로 규탄할 수 있기 때문에 즉시 단행하지 않고 면밀하게 준비해 우리가 한 것을 모르도록 하기 위해 몇 년 지난 다음 작전을 수행했다고 말했다. 그러던 중 2010년 7월 평소 잘 알고 지내던 친구가 중앙 검찰소에 국가재산 탐오 절취죄에 걸려 구속됐다.

 

중앙기관에서 부국장으로 근무하던 그는 2007년부터 직위를 이용하여 많은 국가재산을 지방으로 빼돌려 도급기관 사람들을 통하여 팔고 거액의 돈을 횡령했다가 구속됐다. 평소 악인들과 관계를 맺어온 터라 그를 살리기 위하여 친척들과 친구들이 중앙당과 중앙 검찰소에 로비를 했다. 하지만 너무나도 많은 국가 재산을 절취한 것이 밝혀지면서 재판을 받게 됐다.

 

북한 형법에는 국가재산 10만 원 이상의 물자나 돈을 개인이 절취하였을 경우 범죄로 인정하며 100만 원 이상인 경우 대량 범죄사건으로 10년 이하의 교화형에 처하게 되어 있으며 500만 원 이상부터는 특 대량으로 최하 15년, 무기징역과 최악의 경우 총살형에 하게 돼 있다. 그는 3000만 원 이상의 국가재산을 절취하여 아랫사람들을 통해 팔고 돈을 받았기 때문에 특 대량으로 엄중처벌을 받게 되어 있었다.

 

그런데 친구들과 친지들의 구명 노력으로도 꺼내지 못했던 그는 이상하게도 2010년 10월 말 뜻밖에도 교양처리로 석방됐다. 하지만 그와 함께 국가재산을 팔아먹은 다른 사람들은 7~10년형을 받고 교화소로 갔다. 그의 집에서 술을 마시면서 어떻게 나오게 됐는가 묻자 그는 사위 덕에 쉽게 나오게 됐다고 했다.

 

그는 아들 한 명과 딸 한 명이 있었는데 딸이 황해남도 과일군에서 보안서에 근무하다가 그곳에 있는 해군군관과 만나 연예를 하다 그에게 시집을 갔었다. 처음에는 그의 사위 부모가 국가적인 높은 직위에 있어 그를 석방시킨 것으로 생각하고 물어보니 3월에 있었던 남조선 천안함 폭침 사건을 아느냐고 묻는 것이었다. 내가 TV보도를 통하여 들어서 알고 있다고 하자 그는 자기 사위가 천안함 폭침 사건에 참가해 그 공로로 공화국영웅 칭호를 받았고 그가 요청하면서 자기가 석방됐다고 말했다.

 

당시 그의 집에 와있던 딸이 하는 말이 자기 남편이 해군대학을 졸업하고 중국에 가서 2년 동안 잠수함 기관연수를 받고 돌아와 황해남도 과일군에 있는 해군부대에서 잠수함 기관장으로 근무하다가 이번 3월에 남조선에 가서 천안함을 폭침 시키는 작전에 직접 참가했다고 말해 놀랐다. 남조선과 세계가 사건 발생 후 테러행위라며 북한을 비난했기 때문에 즉시 표창을 하지 않고 2010년 10월 시일이 지나 세계 여론이 가라앉자 중앙당과 인민무력부 총정치국에서 내려와 천안함 폭침 작전에서 공을 세운 함장과 부함장, 기관장과 갑판장 등 네 명에게 공화국영웅칭호를 수여하고 다른 전체 참가자들에게도 국가수훈이 수여되었다고 말했다.

 

그때 중앙당에서 매 사람들을 개별담화하면서 사업과 생활에서 애로점이 무엇인지 말하라고 하자 그의 사위는 현재 장인이 예심 중에 있는데 한 번만 관대하게 용서해달라고 청했다. 중앙당에서는 중앙검찰소에 그를 교양 처리하여 석방하라고 지시했다. 원래 북한에서는 비행사들과 잠수함을 타는 사람의 부모와 형제를 비롯한 가까운 친척들이 범죄를 범하면 중앙당 합의를 진행하고 처리하게 되어 있는데 그는 직계 가족이 아니고 장인인데다 결혼식을 한지 얼마 안 됐기 때문에 개별적인 요청으로 석방됐다.

 

그의 사위는 또 군사칭호 대위로부터 소좌를 뛰어넘어 중좌의 군사칭호를 받고 부함장으로 승급했다고 그의 딸이 말했다. 이런 이유로 천안함 폭침 사건은 북한 총참모부 작전국 지휘 하에 황해남도 과일군에 있는 해군부대에서 집행한 사실을 확인했다. 하지만 북한에서는 이 사실을 알아도 말을 못하게 되어 있다. 비밀을 누설하면 잡혀갈 수 있기 때문에 그 누구에게도 말을 하지 못했다.

 

천안함 폭침사건은 북한이 1999년과 2002년 서해해상전투에서 당한 손실을 보복하기 위한 조치로 진행한 사건이다. 하지만 북한에서는 예전과 마찬가지로 강경 부인하면서 미국과 한국이 대북침략전쟁을 일으키기 위한 도발행위라며 오히려 북한 군대와 인민에게 전쟁준비에 나서도록 강조하고 있다.

 

2015.04.07  평양 봉쇄 마지막역 간리역에서 군인과 경찰 간 총격전 발생하자

간리역에서의 총격사건

2001년 12월 중순 대낮에 평양시 형제산구역 간리역에서 갑자기 요란한 총성이 울렸다. 병사와 보안원(경찰)들 사이의 총격전이 벌어졌다. 북한의 동서남북으로 가는 모든 열차가 통과하는 간리역은 역 중에 제일 복잡하고 평양시 봉쇄의 마지막 관문이다.

 

그날도 정상적인 업무일이었다. 그런데 평안북도 신의주에서 평안남도 남포(당시는 직할시)로 가는 열차가 느닷없이 멈춰 섰다가 평양시 봉쇄조의 집중 검열이 끝나고 나서야 서서히 출발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또 멈췄다. 이유는 봉쇄조의 한 보안원이 아이를 업은 젊은 여성이 증명서가 없어 단속하는 과정에서 문제가 생겼다. 여성은 자기 남편이 군관(장교)이어서 군인 칸에 타고 있다면서 모든 증명서를 남편이 보관하고 있으니 그곳에 가서 보여주겠다고 했다.

 

북한 열차에는 속칭 ‘쓰리군(도적놈)’들이 너무 많아서 남편이 군관이니 남편이 안전하게 보관하고 있다는 것이며, 군인 차 칸에는 아무리 부인이라 할지라도 같이 타지 못하게 돼 있다. 북한의 모든 열차는 군인들만 타는 전용차 칸이 따로 있으며 열차의 맨 마지막에 편성돼 있다. 군인들에 한해서만 좌석을 주며 일반 주민들은 경무원(헌병)들이 일체 그 어떤 조건이 있어도 타지 못하게 한다.

 

봉쇄조원이 그 여성을 데리고 군인 칸으로 가는 사이 정차시간이 지난 열차가 움직이기 시작하자 보안원은 시간을 끌기 위한 여성의 심리작전이라고 생각하고 화를 버럭 냈다. 그러면서 그 여성을 서서히 떠나는 열차에서 밀어 떨어뜨렸다.

 

여성은 안 내리려고 하고 보안원은 밀어 떨어뜨리자 아이를 낳고 시집에 가려고 폭이 좁은 치마를 입었던 여성은 열차 승강기 계단에서 그만 굴러 떨어지면서 몸을 가늠하지 못하고 서서히 떠나는 기차 바퀴에 깔려 결국 아이와 함께 그 자리에서 즉사했다. 이 때문에 떠나던 열차가 다시 서고 기차 바퀴에 토막이 난 여성과 아이의 시체가 있는 곳으로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보안원을 보고 “애매한 사람 죽인 개**”라고 욕하고 있을 때였다.

 

사람이 기차에 치여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열차에서 내려 시체가 있는 장소로 달려온 여성의 남편(군사칭호 중위)은 뜻밖에도 자기의 부인과 아이가 죽은 것을 보고 넋을 잃고 말았다.

 

▲북한 기차 운전자가 열차 후면을 바라보는 모습/조선 DB

 

▲훼손된 철도./신화통신

 

주위 사람들이 보안원이 죽였다고 하는 말을 들은 그는 보안원들을 무차별 폭행하기 시작했다. 반 토막이 난 자기의 부인과 아이를 보고 분노를 치밀어 짐승처럼 행동하자 한 보안원이 권총을 뽑아 그를 쏘아죽였다. 그때 군인 칸에 않아 그 광경을 그대로 지켜보던 하사관 한 명이 기차에서 내려 철길 홈에 엎드려서 있던 AK자동보총을 가지고 점발사격으로 보안원들을 보이는 대로 쏴죽였다.

 

북한의 큰 역에는 열차 승강기와 맞게 콘크리트로 플랫폼을 해놓았는데 그 플랫폼에 엎드려 사격하는 군인에게 보안원들은 권총을 뽑아들고 달려들었고 일반 주민들은 소리를 지르며 달아나기 시작했다. 아수라장이 됐다. 군인의 팔에는 기통수라는 완장을 하고 있었다. 북한에서는 군인들이 훈련 외에 움직일 때 총을 휴대하지 못하고 하는 데 기통수 만은 예외다. 기밀문건을 운반하는 사람이라 완전무장을 하고 30여발의 실탄도 소유하게 돼 있다.

 

기통수의 점발사격으로 보안원 8명과 보안원복을 입고 뛴 주민 1명이 총에 맞아 현장에서 사망했다. 여러 명의 부상자가 생겼다. 총성이 요란해지면서 경무관(헌병 장교)들과 경무원들이 기통수와 보안원들 사이를 가로막고 보안원들을 무장 해제하고 나서야 격전이 중단됐다.

 

그때에야 기통수 군인은 경무관 중 제일 직급이 높은 상관에게 다가가 자기는 어느 부대 기통수 누구라고 보고를 하고 기통수 임무에 따라 인민군 군관이 많은 사람이 보는 현장에서 보안원의 총에 맞아 죽는 것을 보고 자기 임무를 수행하였다고 보고했다. 그러면서 무기는 내놓고 중요임무 수행 중이라 임무를 완수했으니 처벌은 받겠다 하고 열차에 올라탔다.

 

인민군 기통수는 평화시기에도 항상 실탄을 장전한 무기를 휴대하고 다닌다. 기통수의 임무 세 번째에는 언제나 상관의 신변에 위험이 조성되거나 불의의 정황이 조성되면 자체의 결심에 따라 사격을 할 수 있도록 명시돼 있다. 기통수는 자기 임무를 수행하였다고 보고하고 중요 문건을 후송 중이었으므로 경무관들도 그 자리에서 체포할 수 없었다. 놀라운 것은 기통수가 군인 칸에 다시 올라타자 거기에 있던 군관, 군인들이 손뼉을 치며 통쾌하게 싸웠다고, 대단히 똑똑하다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

 

사건발생 이후 긴급하게 보위사령부와 인민무력부 검찰국, 보안성 수사국에서 나가 사건 수사를 진행한 결과 보안원들이 단지 증명서를 본인이 소지하지 않았다고 하여 아무 죄도 없는 여성과 아이를 죽게 한 사실이 인정됐다. 또 맨손으로 자기들에게 덤벼드는 군관을 총으로 쏴 죽였고 기통수가 총을 쏠 때에도 보안원들의 잘못으로 맞총질을 한 사실이 밝혀지면서 기통수는 무죄가 됐다. 정황에 대처하여 임무수행을 잘한 것으로 전사영예훈장 2급을 받았고 보안성의 상급간부들은 면직됐다.

 

이렇게 북한에서는 과거에도 지금도 군인들과 경찰들, 혹은 군인들 사이에 총격전이 자주 발생하고 있다. 2014년 8월에도 강원도 원산시에서 군인들과 보안원들이 총격전을 벌이면서 많은 사상자가 나와 보안부장 최부일이 대장에서 소장으로 강등된 사건도 있었다.

 

2015.04.27 보위부, 금강산발전소 건설부대 배치돼 불만 보인 중대원 몰살시켜

북한에서는 군대에서 총 한 번도 잡아보지 못하고 10년 동안 터널을 뚫는 특수기지 공사에 동원되어 일만 하거나 일반건설과 도로공사 등 건설전문 부대에서 근무하다가 제대하는 일명 ‘두더지부대’가 있다. 인민무력부 1여단은 전문 초대소나 별장을 비롯한 김정일·김정은의 고급건물을 건설한다.

 

김정일의 특별지시로 공사만 하는 전문 부대다. 공병국과 건설국, 도로국 산하 부대들은 군사훈련은 하루도 하지 않고 건설공사에만 동원되어 일만 한다. 특히 북한에서 대남공작의 일환이자 서울을 침수시키기 위하 방법으로 금강산발전소를 건설하면서부터 전문 금강산발전소 건설부대가 편성됐다. 그곳에 동원되는 군인들 사이에서는 각종 사고와 사건들이 끊임없이 발생했다.

 

2005년 함경남도 지구에 위치한 7군단 산하의 1개 중대는 금강산발전소 건설부대에 소속되면서 강원도로 전출 명령을 받았다. 2004년까지 각 군부대에서 연대나 대대를 교대로 금강산발전소 건설에 투입했지만 공사기간이 20년 넘게 예상되자 전문 금강산발전소 부대를 새로 편성했다.

 

이 때문에 부대개편이 진행되었으며 개편된 부대들이 중대단위로 기동을 시작한 것이다. 10년 동안의 군사복무도 지겨운데 전문갱도 건설부대에 소속하라는 상부 명령을 받은 중대장 이하 전 중대원들은 반발심이 극에 달했다. 하지만 군대 명령이라 어쩔 수 없이 기차를 타고 강원도 금강산발전소 건설현장으로 떠나게 되었다.

 

▲북한 안변청년발전소(금강산발전소)의 조정지(調整池) 사진./조선일보 DB

 

함경남도 함흥시에 있는 함흥역에서 기차 타기 전 군인들은 주둔지역에서 완전히 철수해야 해서 소지하고 있던 예비물자들을 주민들에게 내주고 술과 음식으로 맞바꾸었다. 열차에 오른 중대원들은 열차의 맨 뒤에 단 군인 차량에 단체로 올라타 기차가 떠나자마자 가지고 오른 술을 마시기 시작하였다.

 

중대장, 정치지도원과 3명의 소대장을 비롯한 군관(장교)들이 가운데 좌석에 자리 잡고 한 곳에 않아 술을 마시고 중대사관장(특무장)을 비롯한 부소대장들, 분대장들을 비롯한 사관들도 끼리끼리 모여 않아 술을 마셨다. 병사들 역시 차량 좌석에 않은 대로 분대 별로 술을 마셨다.

 

기차에 올라서부터 금강산발전소건설부대에 소속된 데 대한 울분을 술로 달래던 군관들은 물론 병사들도 거의 만취했다. 그러던 중 함경남도를 지나 강원도 천내군으로 들어서면서 보안원들과 경무관, 검열원들의 열차검열이 시작되었다.

 

열차 승무 보안원들은 왼쪽 팔에 단속보안원이라고 쓴 완장을 차고 총참모부 직속 경무관(헌병 장교)들은 경무관이라는 완장을 찬다. 보위사령부 산하 보위원들은 군관(장교)은 검열관이라는 완장을, 사관, 병사들은 검열원이라는 완장을 찬 채 검열을 진행하며 보안원들과 군관들은 권총을 휴대하고 사관, 병사들은 접이식 AK자동소총을 어깨에 메고 단속한다.

 

보안원들은 일반주민들의 증명서와 여행증명서, 짐들을 검열하고, 경무관들과 검열원들은 군인들과 보안원들의 증명서와 출장명령서들을 검열한다. 그런데 중대전원이 탄 차량에 검열원 2명이 들어가서 증명서검열을 시작하겠다고 하자 차량에서는 휘파람소리와 야유가 터져 나왔다.

 

원래 북한군 사이에 평상시에도 경무부와 검열원들은 눈엣가시였다. 같은 군인이지만 그들 부모들이 중앙이나 지방 당 간부들이고 이런 백으로 검열기관에 입대했다는 것 때문이다. 또 군 복무를 쉽게 하면서 뇌물도 받고 편히 지내며 군 복무를 마치고 대학에도 편히 갈 수 있는 특권층이라는 감정을 갖고 있다. 분명히 자기들과 다르다는 악감정을 가지고 있다.

 

검열원들이 병사들과 사관들에게 증명서를 보자고 하자 중대장에게 있다고 하여 차량의 중심에 않아 술을 마시던 군관들에게 가서 증명서를 확인하려 했다. 검열원들은 왜 병사들이 술을 마시고 떠들며 검열에 응하지 않느냐며 추궁하자 뒤에서 먼저 사관들이 달려들어 자기네보다도 계급도 아래고 나이도 어린 것들이 감히 자기들 지휘관을 추궁한다고 하면서 폭행했다. 검열원 2명에게 여러 명의 사관이 달려들어 폭행하자 검열원들이 어깨에 메고 있던 총을 쏘려하자 병사들까지 합세해 그들의 무기를 몰수하고 달려들어 제압했다. 취중이지만 건설부대에 가는 보복의 심정으로 흥분이 극에 달했다. 마치 야수의 소리를 방불케하면서 검열원들을 집단 구타했다.

 

싸움이 일어났다는 소리에 경무관들과 보안원들이 그 차량에 뛰어들어가려 했지만 병사들은 출입문을 봉쇄하고 그들을 계속 구타했다. 더구나 그들이 정신을 잃자 차량 밖으로 내던져 버렸다. 한 명은 그 자리에서 내장 파열로 즉사했고 다른 한 명도 역시 내장 파열로 병원에 실려갔지만 죽고 말았다.

 

이 사실을 보고받은 보위사령부에서는 최고사령부 지시라고 하면서 기관사와 경무관들에게 지시하여 열차에 탄 일반 주민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도중 역에서 절대로 세우지 말라고 명했다. 그냥 몰아서 강원도 고성군 방향으로 달리라고 하면서 고성역을 지나 중대가 탄 맨 뒤 차량칸을 분리하여 지정해주는 산골짜기에 정차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그곳 주둔지 부대에 역시 최고사령부 명령으로 한 개 대대에 완전무장을 시킨 채 그곳의 철길 옆 산에 매복을 명했다. 그리고는 중대가 탄 차량이 들어서면 집중사격으로 중대전원을 몰살시키라고 지시하였다.

 

술에 취해 아무것도 모르고 노래를 부르며 열차에서 그들이 탑승한 차량이 분리된 것도 몰랐던 군인들은 열차가 정차하면서 사방에서 요란한 총성과 함께 총알이 날아오자 아우성을 지르며 바닥에 엎드렸고 열차에서 밖으로 뛰어나오다가 총에 맞아 죽는 등 아비규환이 됐다.

 

최후에는 완전무장한 대대가 열차칸으로 돌격하여 비무장상태인 중대 병사들을 확인 사살했다. 병사들은 울면서 살려달라고 하며 손을 들었지만 한 명도 남김 없이 몰살했다. 결국 금강산발전소건설부대에 귀속되는 데 대해 불만으로 술을 마시고 검열원 2명을 구타하여 죽인 이유로 120명 정도의 중대는 몰살당했다. 심지어 싸움에 가담하지 않은 애매한 병사까지 한 사람도 살지 못하고 죽고 말았다.

 

사건 발생 이후 인민무력부 총정치국과 검찰국이 현장에 급파돼 사건을 수습했다. 이들이 내린 결론은 최고사령관 동지의 명령에 불복종하는 자들은 죽어 마땅하다는 것이었다. 또 그날 이후 열차는 물론 어디에서도 병사들이 술을 마시지 못하도록 하는 금주령이 최고사령관의 지시로 전군에 하달되었다. 이처럼 북한 군인들은 배치지가 싫다고 할 경우 최고사령관 명령 불복종이라는 죄 아닌 죄로 억울하게 죽는 현상이 많이 발생하고 있다.

 

2015.05.14 '바보 군단장' '3000달러 군사령관' 놀림받았지만 법 없이 살사람이었다

지난 4월 30일 인민무력부장이었던 현영철을 불시 체포 심문조사 없이 평양시 순안구역 석박동에 있는 강건군관학교 사격훈련장에서 처형하였다는 소식이 전해져 놀라게 했다. 김정은 아버지 김정일도 희대 독재살인자로 낙인찍혔는데 3대 세습을 이어받은 김정은은 북한에서 아버지를 능가하는 살인마로 불린다.

 

지금 북한의 간부들과 주민들은 오죽하면 ‘둘째 며느리가 들어와야 맏며느리가 무던한 줄을 안다’는 말을 할 정도로 김정은의 비인간적인 만행에 억이 막히고 공포에 떨고 있다.

 

현영철은 원래 북한에서 서해안 북부지구와 평안북도를 방어하는 인민군 8군단장으로 약 8년 근무하였다. 그때부터 현영철은 북한주민들의 열악한 생활환경을 바로잡아야 한다는 이념을 가지고 김정일의 독재정권에 항거했다. 자기식으로 자기의 권력한계에서 북한주민들의 안정된 생활을 위하여 노력하였다고 볼 수 있다.

 

평안북도에는 북한과 중국과의 무역거래 70%가 이루어진다는 신의주세관이 있고 중국과 불법 무역거래가 이뤄지는 바다가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다. 이 지구를 총괄하던 현영철은 불법적인 무역거래를 해서라도 북한주민들의 생활향상에 도움이 될 수 있는 일을 했다. 8군단 산하 모든 초소 단속에 걸렸다면 절대 처리하지 말고 놓아주도록 했다. 그리고 약 3000달러 정도 압수해 군단 병사들을 먹이기 위하여 노력하기도 했다.

 

이런 이유로 북한군 장성들 사이에서는 3000달러짜리 어리숙한 군단사령관이라고 비난받았다. 하지만 현영철은 이런 돈으로 자기의 잇속을 채우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나마도 군단병사들을 위해 쓰도록 하였다. 그는 오히려 다른 군단장들에게 군단장 봉급을 받으면 되었지 왜 부정축재를 하느냐 하면서 자기를 어수룩하다고 보지 말고 각자 자기가 맡은 도내 일반주민들의 생활을 도와주어야 한다고 말할 정도로 물욕이 없었다. 나름대로 북한주민들의 생활형편에 동정심을 많이 가지고 있었다.

 

▲현영철 인민무력부장./노동신문

 

물론 북한에서 현영철은 유능한 군사지휘관보다 물욕이 없고 병사들을 사랑하는 일명 ‘바보’군단장이라고 비난하였으나 현영철 자신은 자존심은 대단히 강한 사람이었다. 군단장으로 김격식처럼 우직하거나 독단적이 아니고 항상 정치부와 참모부와 먼저 합의하고 문제가 되는 일을 처리했다.

 

정치부나 보위부는 그가 법 없어도 살 수 있는 사람이라고 평가할 정도였다. 그렇기 때문에 현영철은 나이는 다른 사람들보다 젊지만 무엇보다 상부에 아첨할 줄 모르고 병사를 위하는 군단장으로 더 출세하지 못할 것이라고 북한의 간부들은 한결같이 평했다.

 

그런데 이영호가 총참모장으로 있다가 최룡해의 총정치국장 발령을 반대한 이유로 숙청되고 뜻밖에도 현영철이 총참모장이 되자 다들 깜짝 놀랐다고 했다. 아마도 김정은이 그런 형의 사람들을 좋아하는 가보다 하고들 생각하였다. 그런데 현영철은 김정은을 최고사령관이라기보다 어버이 같은 자기의 성정대로 자기의 아들보다 어린 김정은에게 군에 대해 잘 모르면 자기에게 철저히 의거하라는 제2의 장성택식 사고방식을 가지고 김정은을 대한 것이 이번 사단을 빚어냈다는 후문도 있다.

 

김정은이 주민들의 안정된 생활보장을 위하여 노력하지 않고 군부대만 찾아다니며 미사일 발사시험을 비롯한 각종 군종훈련에만 참가하는 것을 못마땅히 여겼다. 심지어 지도자가 경비행기 운전석에 앉아 운전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은 지도자라기보다 젊은 사람의 광기 어린 모험에 불과하다는 발언을 한 것이 이번 숙청의 발단이 되었다는 것이다.

 

현영철은 김정은이 지도자로서 군부대를 자주 다니지 말고 무게 있게 앉아 지시만 하면 자기네가 충성심을 가지고 제대로 군을 통솔해나가겠다는 의지를 내비쳤다. 최고사령관이 부대시찰을 자주 하니 부대 병사들과 초급 지휘관들이 최고사령관의 지시만을 받든다고 하면서 군 수뇌부의 명령이 제대로 집행되지 않아 화도 냈다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현영철과 변인선을 비롯한 군 수장들이 김정은의 무모한 전쟁 도발과 군에만 매달리는 저속적인 정치방식에 의견들이 분분해지고 있었다. 한편으로는 주변국 나라 지지도 받지 못하게 되자 김정은은 이들을 그냥 두지 않게 됐다는 것이다.

 

결국 군에 대한 근심을 덜어주고 김정은을 위해 한 말들이 김정은에게는 속을 뒤집은 꼴이 됐다. 김정은 영구집권에 불안감을 가지고 어린 나이인데다 피해망상증에 사로잡혀 있는 상황에서 결국 누구든 무자비하게 처형하는 길을 선택한 것으로 볼 수 있다.

 

2015.05.25 1월 1일과 2월 16일 박격포 쏴 기러기 사냥…철새까지 잡아먹은 김정일

북한에는 이젠 절기 때마다 날아오던 철새도 날아오지 않는다.

 

김정일 식성 때문이다. 김정일 식성은 참으로 특이했다. 선전을 할 때에는 항상 줴기(주먹)밥과 쪽잠을 잔다고 했지만 실지는 자기가 절대적인 권력을 가지고 있다는 변태적인 욕을 분출했다.

 

북한주민들의 피와 땀으로 벌어들인 외화를 먹고 마시는데 탕진하기 일쑤였다. 일반주민들의 생활에는 전혀 관심이 없고 오직 자기만의 방탕한 식생활과 자기 권력의 공고화를 위해 노력했다. 그리고 권력 승계에만 몰두했다.

 

김정일은 독특한 식성을 보장하는 많은 요리사를 데리고 있었다. 이미 공개된 일본의 요리사는 일본식 요리전문가이고 각 나라 대표 요리사를 선정하여 세밀히 검토를 진행한 뒤에 음식 보장을 하게 하였다.

 

북한에서는 김정일의 음식 보장을 위해 중앙당재정경리부에 8과와 9과가 있다. 그들은 매일, 매끼 김정일이 좋아하는 음식을 보장하는 전문부서이다.

 

김정일에게 가져가는 모든 식품을 관리하고 운반하는 사업을 8~9호 사업보장이라고 하는데 이러한 제품을 실은 비행기나 기차, 배, 차의 운송을 지체시키면 면직되거나 극심한 경우에는 사형당한다.

 

8호와 9호 제품을 마련하는 사업 중에는 매해 1월 1일과 김정일의 생일 2월 16일에 인민무력부와 제2자연과학원(국방과학원)에서는 박격포를 가지고 기러기를 사냥에 나서 1월 1일에는 1000마리, 2월 16일에는 2160마리를 잡아서 선물로 바쳤다. 박격포탄에서 TNT를 빼고 뇌관만 장약해 포알에 연추를 연결한 그물포를 형성하여 한 번에 20~30문의 박격포를 동시에 발사해 무리로 갈밭이나 육지에 내려앉아 먹이를 먹던 기러기를 포획한다.

 

▲북한땅이 바로 건너다보이는 오두산 통일전망대앞 임진강변 철새도래지에 재두루미(천연기념물203호) 십수마리가 찾아들어 둥지를 틀었다./조선일보DB

 

포음에 놀라 날던 기러기들도 그물 속에 걸려 잡히게 되어 있다. 기러기를 몰기 위하여 100리 지역에서부터 총을 쏘면서 기러기들을 포가 장전된 곳으로 모는 몰이꾼들로는 지방주민들이 동원된다. 기러기는 무조건 산채로 김정일에게 올려가야 하며 사냥 당시 죽은 것은 사냥 조원들이 먹는다.

 

그러면 김정일은 자기가 먹을 것을 선택하고 나머지는 평양시 룡성구역에 있는 고기가공공장에서 가공 포장하여 자기가 지정해주는 간부들과 국방과학자들에게 자기의 이름으로 보낸다. 술을 포함한 여러 가지 음식류들과 기러기 한 마리씩 선물을 주어 간부들과 과학자들의 환심을 받는다.

 

또한 국방위원회 인민보안부에서는 각 도, 시, 군 보안서들에 명령해 김정일의 생일에 맞춰 산 까치를 산 채로 잡아 216마리를 선물로 올려야 한다. 산 까치는 일반 까치보다 조금 작고 산에서만 사는데 매해 1월에 보안서들에서 사냥꾼들을 선정해 옹노를 각 곳에 놓아 산 까치를 잡기 시작한다. 잡는 과정에 잘못하여 죽거나 거기에 부엉이, 올빼미. 산비둘기를 비롯한 다른 새들이 잡히면 보안서에서 가져다 간부들이 불고기를 해먹는다.

 

새고기를 속으로 하여 만든 만두를 해먹기도 하는데 대단히 좋아한다. 그러나 우선 김정일 생일에 선물로 보낼 산 까치를 무조건 잡아야 한다. 그런데 산 까치가 많지 않아서 매해 그 일 때문에 보안기관 정치부 간부들의 신경이 예민해진다. 김정일에게 올려 보내는 선물사업은 정치부가 맡아서 진행하기 때문이다.

 

2002년경 어느 날에는 김정일이 밥을 먹다가 자기가 이전에 김일성과 같이 인도네시아에 갔을 때 그곳에서 먹었던 당나귀고기가 참 맛있었다고 하면서 그것을 가져오라고 지시하였다. 하여 중앙당재정경리부 8과에서는 특별비행기까지 출동시켜 인도네시아에 가서 당나귀 10마리를 실어서 평양으로 가져왔다. 그런데 갑자기 준비 없이 당나귀를 가져오니 보관할 장소가 없어 부득불 임시대책으로 평양시 룡성구역 룡추2동에 있는 4.28특수식료공장 마당에 보관하였다.

 

4.28특수식료공장은 금수산태양궁전 산하 공장으로 김정일과 중앙당과 군, 정부 고위급 간부들의 모든 식품을 생산하여 보장하는 공장이라 아무래도 당나귀를 가공하는 것도 그것에서 하는 게 마땅했다. 그런데 공장 야간경비를 서던 한 청년이 근무시간에 잘 수는 없고 갑갑하기에 마당을 돌며 순찰을 하다가 당나귀를 보고 갑자기 영화에서 이조봉건시대 양반들이 당나귀를 타던 생각이 나서 당나귀를 끌어 내여 밤새 당나귀를 탔다. 그런데 다음날 아침 마당에 난 당나귀 발자국을 본 사람들의 신고로 중앙당에까지 이 사실이 보고됐다.

 

즉시 중앙당에서는 경애하는 김정일장군님이 자실 당나귀를 탔다고 하여 국가안전보위부에 명령해 그를 체포하여 사상검토를 해보라고 지시하였다. 결과 김정일은 안중에도 없이 자기의 멋대로 감히 김정일에게 올릴 당나귀를 탔다는 죄로 청년은 보위부에 잡혀가 15호 정치범관리소로 추방되고 말았다. 4.28특수식료공장 간부들과 노동자들은 물론 그 소식을 들은 사람들과 그를 잡아 취급한 보위부 사람들도 중앙당 지시에 의해 그를 관리소에 보낸 사태를 보고 아연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무리 김정일의 독재정권이라고 하여도 순수한 호기심으로 당나귀를 타본 애매한 청년이 정치범관리소에 잡혀가야만 하는 것이 김정일 독재권력의 상징이었다. 이렇게 김정일의 까다로운 입맛을 맞추기 위하여 결국 새들까지 다 잡고 그것을 구실로 북한 간부들이 닥치는 대로 잡아먹으니 북한에서는 산에 가도 새를 볼 수도 없고 심지어 새들의 울음소리도 들어보기 어렵다. 거기에다 산들에 나무도 없으니 새들이 보금자리를 만들 거처지도 없고 크든 작든 관계없이 보기 어렵다. 산 짐승과 산새는 몸에 보약이라고 다 잡아먹으니 철새들조차 북한으로 날아오지 않는다.

 

2015.06.03  함경도에서 소도둑 범인 잡고 보니 살인범에 人肉유통자

2003년 10월말 북한 함경남도 단천시에서 발생한 실화다.

 

함경남도 단천시 검덕구에 있는 검덕광업연합기업소 산하 리파 젖소목장에서 밤중에 누군가가 목장을 습격하여 소를 잡아갔다는 통보가 연합기업소 보안서에 신고되었다. 소를 훔쳐간 절도범을 잡기 위하여 연합기업소 보안서에서는 단천시 보안서에 통보해 합동 수사를 진행하던 중 수사팀은 소고기를 다 먹지 않고 대부분은 시장에다 팔 수도 있을 것이라 판단을 했다. 그래서 단천시에 있는 모든 시장의 고기매장에서 고기를 샘플로 가져와 젖소고기를 찾기 위한 분석을 진행했다. 그런데 뜻밖에도 사람고기로 추정되는 고기가 나왔다.

 

즉시 단천시 보안서에서 보안원들이 나가 그 고기를 팔던 사람을 잡아다가 심문을 했다. 정육점 주인은 누가 소고기라고 하면서 눅은 가격에 주기 때문에 받아서 팔았다고 자백했다. 이 사실이 평양에 있는 당시 인민보안성으로 보고되자 보안성에서는 수사국에 명령하여 강력팀이 편성돼 단천시로 급파했다. 그 결과 함경북도 무산군에서 살다가 먹을 것이 없어 집도 팔아먹고 떠돌이 생활을 하던 40대 후반의 부부가 17세 정도의 아들을 데리고 다니면서 행각을 벌인다는 사실은 알게 됐다.

 

이들은 먹고살기 힘들게 되자 떠돌이 생활을 하는 일명 ‘꽃제비’라 불리는 남녀 아이들을 유인했다. 아들이 먹을 것을 주겠다고 유인해오자 살해한 뒤 근육을 도려내어 시장에 가지고 가 소고기라 하면서 장사꾼들에게 눅은 가격에 팔고 그 돈으로 쌀을 사다 먹은 사실도 밝혀냈다. 그야말로 극악한 만행을 저질렀다는 것이 밝혀졌다.

 

대체로 집에서 나와 떠돌이 생활을 하는 꽃제비들은 찾는 사람이 없어 행방불명이어도 알 수 없다. 이들이 살해당해도 목격자가 없으면 만행은 발각되지 않는다. 그러나 리파 젖소목장에서 소가 도난당해 수사하는 과정에서 뜻밖에 드러난 사건이다. 북한에서는 시장에서도 소고기를 팔지 못하게 되어 있기 때문에 일반사람들이 소고기를 잘 모른다. 소고기가 간혹 생겨도 감추어 놓고 몰래 팔기 때문에 그것을 사먹은 사람도 인육을 소고기로 알고 가져가 먹은 것이다.

 

/KBS 2TV 방송화면 캡처.

 

범인을 잡아 함경남도 단천시 시장에서 공개총살을 하겠다고 중앙당에 보고하자 중앙당에서는 아무리 먹고살기 힘들다해도 인민 대중 중심의 지상낙원이라 선전하는 사회주의 국가에서 사람을 살인하여 잡아먹고 시장에서 소고기로 위장하여 판매하였다는 사실을 공개하겠는가 하고 하면서 조용히 처리해버리라는 지시가 하달됐다. 결국 단천시 보안서 뒤 마당에서 그들 부부와 아들까지 3명을 총살하고 산에다 묻어버렸다.

 

북한에서 사람이 사람을 잡아먹는 첫 사건은 1980년대 후반 평안남도 평성시(현재는 평양시 은정구역)에서 발생했다. 당시 국가과학원 보일러공으로 근무하던 사람이 평성시 기차역에서 내리는 처녀들만을 은밀히 미행하여 사람 왕래가 적은 곳에서 납치하여 성폭행하고 죽여서 자기 집 부엌 바닥에 독을 묻고 거기에 여성들을 도륙하여 고기를 소금에 절여서 가족이 먹었다.

 

이 사실은 평안남도 문덕군 보안서장(당시 안전부장) 딸이 대학 방학 때 평성시에 있는 이모집에 갔다가 행방불명된 사건을 추적하면서 밝혀졌다. 이 사건이 북한에서 첫 인육을 먹은 소름 돋는 사건이었다.

 

일반 사람들의 자식은 행방불명 되어도 찾지 않아 모르고 있었다. 하지만 군 안전부장 딸이 없어지자 수사를 하다 결국 이러한 천인공노할 만행이 밝혀진 것이다. 당시 이 보일러공은 10명 넘는 처녀들을 잡아다 성폭행하고 살해하고 인육을 먹은 것이다. 당시 사회안전성 수사국의 수사로 이 사실이 밝혀졌으며 보일러공 부부와 자녀 2명 등 모두 4명을 전부 교수형에 처했다.

 

자녀는 나이도 어리고 인육이라는 것을 모르고 먹었지만, 사람고기를 맛본 자들은 꼭 사람을 죽이게 돼 있다며 가족 전체를 교수형에 처했다.

 

이외에도 1995년 후반기부터 시작된 일명 ‘고난의 행군’ 시기에 먹을 것이 없어 사람을 잡아먹다가 잡혀 사형을 한 사건들이 여러 차례 있었다. 특히 2004년 겨울 평양시 형제산구역 하당시장에서 소고기라고 하면서 싸게 팔자 너도나도 사서 집으로 갔는데 그 중 한 사람이 집에 가서 꽁꽁 언 고기를 물에 담가 녹이자 뜻밖에도 고기 속에서 사람의 손가락이 나왔다. 이들이 기겁하고 보안서에 신고를 하자 형제산구역 보안서 수사과에서 수사를 시작했다. 고기를 분석해보니 인육으로 판명되었다.

 

이 사실을 보고받은 인민보안성 수사국에서 강력팀을 편성해 형제산구역 보안서와 협력하에 하당 시장을 급습하여 사람고기를 팔았던 시장의 여자 상인을 체포했다. 여자 상인은 어떤 남자가 소고기라고 하면서 눅은 가격에 넘겨주기에 받아서 몰래 팔았다고 진술했다. 그때부터 약 한 달 동안 그 여자 상인을 시장 매점에 그대로 앉아 고기를 팔게 하면서 수사팀이 잠복했다가 인육을 유통해온 살인자를 체포하였다.

 

이 사람은 집을 나와 떠돌이생활을 하던 10대의 어린 꽃제비들에게 먹을 것을 사주며 유인해 살해한 뒤 토막을 내 소고기로 둔갑시켜 팔아넘긴 것이다. 당연히 이 자도 사형에 처했다. 북한에서의 이런 현상은 이제 놀랄만한 일도 아니라고 생각하니 무서운 현실이다.

 

2015.06.26 남파 공작원 북한 고향에 돌아와 인민군에게 살해당하자…

외국인 관광지 중 가장 유명한 평안북도 묘향산군에서 1990년 발생한 중대사건을 밝힌다. 이곳에는 냉전시대 사회주의 국가 각계각층 인사들이 북한을 방문하면서 혹은 김일성, 김정일이 외국방문 때 선물 받은 물품을 전시한 국제친선전람관이 있다.

 

1980년대 초 대남공작원 훈련을 받고 20대 초반부터 남파돼 대학을 다니며 활동하던 20대 후반 공작원(간첩)이 1990년 가을 사업총화 보고도 하고 활동지침과 자금을 받아가기 위하여 은밀히 평양으로 들어왔다.

 

그런데 그 시기 평안북도 묘향산군에 살고 있던 아버지가 칠순 잔치를 벌였다. 공작원은 차를 타고 갔다 오라는 중앙당 본부의 권유를 거부했다. 가족이나 주위 사람들이 군대에 간 것으로 알고 있기 때문에 조국 산천을 유람하면서 조용히 다녀오겠다면서 신변 호위원 2명과 함께 잔칫집으로 갔다.

 

그런데 묘향산에 도착한 뒤 공작원은 조용히 혼자 고향산촌을 돌아보면서 걸어가겠다고 했다. “남파돼서도 무사했는데 조국 땅에서 무슨 일이 생기겠느냐”며 호위원들에게 묘향산을 관광하고 오라며 등을 떠밀어 보냈다. 그리고는 혼자 어린 시절 뛰어놀던 농촌 길을 따라 걸으면서 집으로 가고 있었다. 그런데 길가에 서 있던 군인 6명이 담배를 한 대씩 달라고 하였다. 좋은 옷을 입고 좋은 가방을 들고 가는 그에게 접근한 군인들은 인민군대를 보니 반갑다고 하면서 가방을 열어 고급담배 한 갑씩을 주었다. 군인들은 가방 안에 좋은 술과 담배, 옷을 비롯한 여러 가지 좋은 상품들을 보고 달라고 하였다.

 

대남공작원은 평양에 와서도 초대소에만 머물다 보니 군대를 보지 못했고 북한사회를 알지 못했다. 그는 군인들의 요구에 자기 아버지 칠순잔치가 내일 있어 가는 길이니 집 주소를 알려주고 내일 저녁에 잔칫집으로 오면 아버지 상차림을 하고 나서 다 주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군인들은 만만하게 자기들에게 고급담배 한 갑씩을 주니 공작원이 겁을 먹고 그랬을 것으로 짐작하고 공작원 가방을 강제로 빼앗으려 덤벼들었다. 처음에는 인민군을 보고 반가워했지만 그들이 폭력을 행사하자 전문훈련을 받은 그는 군인들을 가볍게 제압한 뒤 집으로 갔다.

 

그런데 군인들이 소속된 부대 중대장은 부하들이 어디서 얻어맞았고 돌아왔다는 소식을 듣고는 “머저리들”이라고 욕하면서 당장 가서 군대의 맛을 보여주고 오라고 했다. 군인들에게 아버지 칠순잔치에 오라고 집 주소를 알려주었던 것이 화근이었다. 부대의 부소대장 중 한 명이 중대에서 싸움 좀 할 줄 아는 약 30명의 군인을 선발하여 공작원이 알려준 집으로 달려갔다.

 

묘향산관광을 갔던 호위원들은 북한 내에서 무슨 변고가 일어나겠는가? 하며 마음 놓고 묘향산 관광에 빠져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 공작원 부모들은 예견하지 못했던 아들이 집에 오자 좋아서 반기며 웃고 떠들었다. 그런데 갑자기 30명의 군인이 들이닥쳐 모조리 부수고 나이 많은 부모들까지 때리자 방어만 하면서 말리던 공작원이 그들을 쳐 쓰러뜨리기 시작하였다.

 

그가 거의 20명 정도를 때려눕히자 하사관 한 명이 집 마당에 나무를 쪼개는 위치에 박혀있던 도끼를 뽑아들고 그의 뒤 머리를 내리찍었다. 그가 쓰러지자 군인들은 돌아갔다.

 

부모들은 인민군대의 도끼에 맞아 쓰러진 아들을 안고 통곡했다. 공작원은 ‘적후에서도 죽지 않았던 내가 고향에 와서 억울하게 죽는다’는 말을 남기고 죽고 말았다. 부모들은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울고만 있었다. 얼마 후 관광을 마치고 돌아온 호위원들이 그 광경을 보고 너무도 놀라 즉시 중앙당에 통보하였다. 중앙당 담당자들은 즉시 현장으로 와 시신을 수습해 평양에 올라와 사실 그대로 김정일에게 보고하였다. 화가 난 김정일은 “인민군대 1개 사단을 잃은 것보다 더 큰 손실을 당했다”며 “공작원을 죽인 그 중대를 한 명도 남김없이 몰살시키라”고 지시하였다.

 

새벽 4시쯤 완전무장을 한 대남공작원 훈련생(준비생)들이 중대 마당 주위에 매복하고 중대병실에 들어간 사람이 인민무력부의 이름으로 중대장 이하 한 사람도 빠짐없이 중대병실 앞마당에 모이라고 지시하였다. 부대원들은 영문을 모르고 잠에서 깨어나지도 못한 채 병실 앞마당에 집합했다. 무장도 하지 않고 손에 아무것도 가지고 있지 않은 상태로 소대별로 집합해 서 있는 중대원들에게 기관총과 자동보총의 몰 사격이 쏟아지고 엎드려 부들부들 떨고 있는 사람들에게도 돌격하여 무자비하게 쏴 죽이었다.

 

공작원 훈련생들은 실제 많은 사람을 죽이는 경험을 쌓은 숙련된 조직원들이었다. 더구나 자기들의 유능한 선배를 살해한 자들에게 무자비한 복수를 한 것이다. 싸움에도 가담하지 않았던 영문도 모르는 병사들까지 한 사람 남기지 않고 몰살시켰다. 그들 가족에게는 조국을 위해 위훈을 세우다가 죽었다는 전사(사망)통지서만 보냈다.

 

또 공작원 관리를 잘하지 못한 중앙당 담당 부서 성원들과 호위원들은 출당, 파면시켰다. 비밀보장을 위해 인민보안부에서 관리하는 18호 관리소에 온 가족과 함께 이주민으로 보내었다. 물론 몰살당한 중대의 상급군관(장교)들도 마찬가지였다.

 

2015.07.10 김정은은 왜 평양공원 습격했나?

김정은은 3대 세습으로 권력을 넘겨받은 시작부터 독기를 부리기 시작하였다.

 

2008년부터 총정치국 사업에 관여하면서 정권계승을 시작한 김정은은 김정일이 중앙당, 인민무력부, 국가안전보위부, 인민보안부에 ‘동무들이 지금까지 나를 받들어 일을 잘해온 것처럼 앞으로 청년장군 김정은 대장동지를 잘 받들어 모시고 수령님이 개척한 주체혁명 위업을 완수하도록 하여야 하겠습니다’라는 지시를 내려 보내자 자기의 3대 세습이 확고해진다는 것을 확인했다.

 

2009년부터 국가안전보위부를 담당하면서 간부들에게 미국 산 ‘링컨’ 승용차 9대를 가져다주면서 환심을 사려고 하여 간부들의 비난을 받았다. 그리고 자기 권력 후계에 반대하는 세력들의 그 어떠한 돌발 행동이라도 할 것이 두려워 항상 긴장상태를 유지한 채 모든 문제에 대해 예민하게 반응하였다. 이로부터 청년장군 김정은의 공식적인 첫 지시가 2009년 6월 25일 국가안전보위부, 인민보안부에 하달됐다.

 

그의 첫 지시는 보안기관에 평양시 각 공원에 사람이 모여서 장기와 주폐(카드)를 놀면서 도박행위를 하고 있는데 무자비하게 숙청하라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중앙검찰소 부소장, 국가안전보위부 부부장, 인민보안부 부부장, 보위사령부 부사령관 등 4명을 중앙상무로 하는 6.25그룹을 조직해 평양시에서 도박행위를 완전히 근절하라는 것이었다.

 

도박으로 분류한 것은 장기와 주폐를 놀면서 경기의식을 높이기 위하여 가치도 없는 북한 돈 500원씩 지는 사람이 내기한 것이다. 도박 척결 이유는 공원에 삼삼오오 모여 앉아서 ‘왜 우리나라는 조선시대처럼 왕권이 계승되어야만 하는가?’ 하는 의문을 가지고 이야기한다는 소문을 들은 김정은이 그들이 시위라도 할 것이 두려워서였다. 그것을 막기 위한 사전대책으로 사람들이 공원에 모이지 않도록 하기 위한 작전을 벌였다.

 

▲평양 주민들이 공원에서 여가를 즐기는 모습./AFP

 

인민반 별로 회람을 돌려 공원에 나가지 말라고 공식적인 통보까지 하였다. 정년퇴직자들, 교대작업을 하는 사람들, 미 배치 대기자들, 러시아와 외국에 나가는 발령을 받고 대기하는 사람들 등 각계각층 사람들이 집에 있어봐야 TV도 나오지 않고 갑갑증을 풀기 위해 공원에 나와 적은 돈으로 흥밋거리 내기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런데 이것이 죄가 되어 인민보안부 산하 각 도 보안국에서 기동순찰대원을 평양에 올려 보내 평양시 인민보안국과 합동으로 2009년 7월 불시에 평양시 모든 공원을 여러 차례 기습했다. 주폐와 장기를 하면서 돈 내기 하던 사람들을 일시에 체포하였다. 나이가 70 넘은 노인들도 예외 아니었다.

 

이 때문에 2009년 8월 한 달 동안 약 700명의 사람이 공원에서 도박을 하였다는 죄로 재판을 받고 징역 2년에서 7년형을 받고 교화소에 보내졌다. 약 400세대가 평양시에서 추방되는 비극이 일어났다. 그 일이 있은 다음 평양시 주민들은 올림픽경기도 돈 걸고 하는데 오락 삼아 놀지도 못하게 한다면서 불만을 보였다. 공원에도 마음대로 나가지 못하고 눈치를 봐야느냐며 성토했다. 후계자의 첫 지시가 배려가 아니고 탄압이라며 김정은이 과연 우리를 먹여 살릴 수 있을까 하는 불안감을 보이기 시작했다.

 

2010년 9월 초 중앙당 4차 대표자회의를 한다며 중앙TV와 노동신문을 통해 홍보하고 세포(최후 말단 당 조직)로부터 시작하여 도당전원회의까지 대표선출을 7월까지 끝냈다. 그런데 8월 17일에 갑자기 김정은의 특별지시가 하달됐다. 평양시에 있는 미거주자들, 불법 체류자들(여행증명서 없이 평양에 와 있는 사람들), 꽃제비를 완전히 숙청하여야 당 대표자회의를 진행하겠다고 하면서 평양시에서 한 명도 남김없이 잡아내라는 것이었다.

 

김정은은 공식적으로 대표자회의에서 후계자로 공포되면 그를 반대하는 어떤 행위라도 용서하지 않겠다는 일정의 공포였다. 하여 국가안전보위부, 인민보안부, 중앙검찰소 합동 검열단을 출범시키고 집중적으로 숙박검열을 하고 공원이나 집 뒤, 오물장에서 사는 꽃제비들을 무자비하게 잡아들였다.

 

또 이들을 거주지역도 보안국으로 이송하여 집결소와 단련대에 보내었다. 이렇게 지방 사람들을 모두 내려 보내거나 각 보안서 대기실에 잡아넣었다. 그런데도 불안감을 가지고 있던 김정은은 2010년 9월 28일 당대표자회를 진행하는 기간을 전후로 27~29일까지 평양시민도 일체 밖으로 나다니지 말라고 기관과 인민반을 통해 통제하도록 하여 사흘 동안 평양시에 개미 한 마리 없을 정도로 조용하였다.

 

김정일은 그래도 김일성이 살아있을 때 25년 동안 중앙당에서 근무하면서 권력계승의 터와 지도력을 다지면서 중앙당간부들 위주로 지지 세력을 형성했다. 일명 혁명 1세대라고 하는 빨치산 출신들과 고급학교, 중학교, 대학을 다니면서 동창생들도 있어 그들의 지지력을 확보할 수 있었다. 또 김일성이 살아서 국방위원장과 최고사령관직을 넘겨주었기 때문에 권력 승계가 충분히 가능하였지만, 김정은은 권력 후계 시일도 없었고 북한에서 초중고 대학을 다니지 않았다. 이렇듯 동창 한 명 없다 보니 불안감이 가중됐다.

 

김정은은 권력을 차지하기 위하여 온갖 독기를 부렸다. 지금은 그것을 고수하기 위해 고모부까지 총살하는 패륜아 행각을 벌이고 있다.

 

2015.07.27 북한에서 신의 직장은 바로?

일반병사로 6년 이상 복무 하고 가정 토대가 좋은 사람들은 해당 부대 정치부에서 추천한다. 평양시 순안구역에 있는 강건 군관학교, 평안북도 태천군에 있는 최현 군관학교를 4년제 졸업을 하면 소위 군사칭호와 강건군관학교 졸업생들은 일반 보병부대 소대장으로, 최현군관학교 졸업생들은 경보, 저격, 육전대 등 특수부대 소대장으로 임명된다. 자강도 강계시에 있는 리제순군관학교는 국경경비대군관학교로 졸업하면 소위 군사칭호와 국경경비대 소대장으로 임명된다.

 

4년제 군관학교 전 기간 최우등 성적으로 졸업하면 중위 군사칭호를 준다. 정치일꾼 양성은 평양시 형제산구역 서포동에 있는 김정일 정치군사대학 정치반을 졸업하면 중위 군사칭호와 중대정치지도원으로 또는 부대 내 정치부로 파견돼 경무반을 졸업하면 경무관(헌병장교)로 파견한다.

 

기술부대와 기계화 부대들에는 개천군사기술종합대학, 정주포군관학교, 김책 공군대학, 함경남도 마전군에 있는 김정숙해군대학, 평양시 룡성구역에 있는 리광공병대학, 평양미림전자전대학 등 병종별 군사학교를 졸업하고 중위 군사칭호를 받고 해당 부대에 배치된다.

 

평양국방대학을 졸업하면 일반 졸업생은 중위 군사칭호를 받고 최우등 졸업생들은 상위 군사칭호를 받고 국방과학원(제2자연과학원)연구사, 제2경제위원회와 군 기술부대들에 파견된다. 군관학교를 졸업하고 소대장, 중대장, 대대장, 정치지도원을 하다가 연대장, 정치위원 이상 간부 임명을 받으려면 평양시 만경대구역에 있는 김일성군사종합대학 군사반이나 정치반으로 되어 있는 재직반을 나와야 한다.

 

김일성군사종합대학 재직반을 나오지 못하면 대대장, 연대 참모급 이상 승진하기 어렵고 50세 전에 제대를 시킨다. 북한에서 군관의 군사칭호를 수여할 수 있는 기관은 총정치국 간부부, 국가안전보위부 정치국 간부부, 인민보안부 정치국 간부부, 제2자연과학원 당위원회 간부부들에서만 정치국 결정으로 대좌까지 임명한다. 소장부터 장성은 최고사령관 명령으로 승진할 수 있다.

 

▲군관학교를 찾은 김정은과 환호하는 학생들. /노동신문

 

국가안전보위부는 산하에 평양시 만경대구역에 평양기술대학을 가지고 있으며 인민보안부는 평양시 순안구역에 보안부 정치대학을 가지고 있고 제2자연과학원은 평양국방대학을 가지고 있다. 김일성종합대학이나 김책공업종합대학을 비롯한 사회대학을 졸업하여도 위에 지적한 간부부들에서 가정 토대가 좋고 실력이 있는 사람들만 선발하여 군관으로 임명한다. 이 외에도 사회부문에 일하다가 최고사령관이나 중앙당의 추천으로 군부대 간부로 임명되면 군관이 될 수 있다.

 

중앙당 비서를 하다가 총정치국장으로 임명되면서 차수별까지 달았던 최룡해가 실례다. 군단급 이상 군부대지휘부들과 군사대학에서 교원을 하는 경우와 연구사들은 편제가 높기 때문에 1년에 한 번씩 별을 달기 쉽지만, 야전부대에서 복무하는 경우 직무가 조정되지 않으면 별을 달기 어렵다. 군관으로 복무할 때에는 독신군관합숙을 배정받아 생활할 수 있으며 군정지휘관들은 병사들과 함께 훈련에 참가하고 군관들은 따로 훈련을 진행한다.

 

군관복무를 하다가 제대되어 예비역으로 개편되면 1년에 한 번씩 보름 동안 중앙기관이나 각 도, 시, 군에 있는 해당훈련소에 가서 지휘관 강습을 받고 교도대나 노농적위대 지휘관으로 임명된다. 군관들에 한하여서는 본인과 가족들까지 정상 배급을 받으며 별에 한해서 제정된 월급과 가족생활비 2000원을 더 받는다.

 

군관들은 해당 부대지구에 위치한 군상공급소에 가서 1년에 한 번씩 받는 군관 식량 및 부식물 공급카드로 식량과 부식물을 공급받는다. 지금까지 북한에서 아무리 식량사정이 어려워도 군관들은 식량공급을 거의 정상적으로 받고 있다.

 

인민무력부, 국가안전보위부, 인민보안부, 제2자연과학원 성원들은 거의 80% 이상이 해당 기관에서 가지고 있는 살림주택 아파트를 배정받아 생활하고 있으며 야전군 군관들은 부대주위에 있는 군관사택을 배정받아 생활하고 있다.

 

북한에서 군관들은 넉넉하지는 못하지만, 식량을 공급받고 주택과 부식물도 거의 정상적으로 공급받으며 모자라는 양은 병사들에게 공급되는 식량과 부식물을 부정 축재하여 집에 가져다 소모하고 있다. 현재 북한에서 군 정치일꾼이나 간부부 사람들 대열부 사람들과 현직 부대 지휘관들은 많은 뇌물을 받고 있기 때문에 오히려 중앙당 사람들보다 더 많은 돈을 쓰며 다른 일반 사람들보다 넉넉한 생활을 하고 있다.

 

군관 중에 특히 보위사령부, 검찰소, 인민무력부 4.25 군사재판소 사람들은 군대에서 권력이 강하기 때문에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면서 많은 뇌물을 받아 풍족한 생활을 하고 있다.

 

2015.08.03  감자만 먹고 콩만 먹는 부대가 대부분인데 쌀밥만 먹는 부대는?

북한에서는 고등중학교를 졸업하고 17~18세가 되면 의무적으로 남자는 장애인이 아닌 이상 100% 군대에 입대하여야 한다. 2011년도부터는 1995년 이후 북한의 일명 ‘고난의 행군’ 시기에 출생한 아이들이 입대 나이가 되면서 입대병력이 많이 감소 되었다. 이 때문에 시력이 안 좋거나 키가 작아도 무조건 군대에 입대하게 되어 있다. 해마다 3월부터 고등중학교 졸업생들에 대한 신체검사를 진행하고 각 도, 시, 군에 있는 인민무력부 대열보충국 산하 군사동원부들에서 입대자 명단을 장악하고 5월 초부터 입대를 시킨다.

 

매해 7월에는 고등중학교를 졸업하고 군에 가지 못했던 일반 사회청년들로 징집하여 군대에 입대를 시킨다. 2011년부터는 고등중학교를 졸업한 여자들도 직접 대학에 가지 못하게 되었으며 군 복무를 4년 하여야 추천받아 대학을 가게 되어 있다. 남자들의 군대복무기간은 10년으로 보며 여자들은 하전사 5년, 군관은 7년을 하게 되어 있다. 김정일의 친위부대라고 하는 974부대는 중앙당 6과 대상으로 선발하여 군사복무기간에 일체 휴가를 가지 못하고 집에 편지도 하지 못하게 되어 있고 13년을 복무하고 제대되면서 대학에 갈 수 있다.

 

/조선닷컴

 

그 외에 기술 부대들에서는 초기복무 사관이라고 하전사 복무를 10년 하고 그대로 복무를 하지 못할 나이가 될 때까지 계속 한다. 군대에 입대한 후 각 사단에 있는 신병대대에서 일반부대는 3개월간 기술 부대와 특수부대는 6개월간 신병훈련을 진행한다. 최근에 군대에 입대하는 군인들의 영양상태가 좋지 않아 오전에만 훈련을 하고 오후에는 정치이론을 실내에서 진행하게 되어 있다.

 

김정은이 2011년 남자들의 군사복무기간을 13년으로 제정하였지만 너무 오랜 기간 군사복무를 시키면 부대의 규율을 바로잡기 힘들다는 여론이 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북한주민들 속에서 인민군대는 인민의 재산을 보호하는 것이 아니라 강도질과 도둑질을 하면서 사는 토벌대라고 비난이 많다는 보고가 나돌았다. 결국 인민무력부에서 완강히 반대를 하여 10년 만기 복무로 규정하였다. 신병훈련을 마치고 각 사단 대열부에서 신병들에게 군인 선서를 시키고 사단 산하 각 중대에 분산 배치를 한다.

 

부대에 배치되면 소대 단위로 병영생활을 시작하게 되며 그때부터는 부대별 훈련계획에 따라 군 복무를 하여야 한다. 현재 북한군에서는 국가적 보장이 잘 안 되어 군인들에게 피복과 신발을 비롯한 생활필수품을 제대로 보장하지 못하고 있다. 군복은 2년에 한 번씩 동기복과 하복을 공급하게 규정이 되어 있지만 제대로 공급되지 못한다. 신발은 6개월에 한 번씩 공급하게 되어 있으나 현재는 1년에 한 켤레도 보장하지 못하고 대열을 세워놓고 중대장과 중대 정치 지도원이 신발을 검열하여 제일 낡은 신발을 신은 군인들에 먼저 공급을 한다. 군인들의 식량은 90% 이상 옥수수로 공급되며 그나마도 수량이 모자라 한 끼에 200g을 공급받기 어렵다.

 

2011년도에는 평양시 부대들과 호위국, 특수 병종들에 옥수수가 보장되고 1군단, 2군단, 5군단들에는 옥수수가 보장되지 못하고 하루 두 끼씩 감자 3개를 공급하였다. 군부대들에서 식량사정이 어렵고 영양실조병사들이 많이 나와서 북한주민들에게 강제로 식량을 거두어들이고 있다. 그나마 형편이 조금 낳은 부대들은 공군사단들인데 비행장 주변에 콩을 심어서 군인들에게 콩비지라도 해주기 때문에 영양실조 군인들이 나오지는 않는다. 오직 친위대라고 하는 974부대만이 병사들에게 하루 세끼 쌀밥을 공급한다.

 

병사들에게 제대로 먹이지 못하기 때문에 오전만 훈련을 하고 오후에는 정치상학과 문화생활 그리고 자체 부식물 생산 작업을 진행한다. 북한군은 매해 12월 1일부터 한 달 동안 전군이 동기훈련에 들어가며 3월 1일부터 한 달 동안 하기 훈련에 들어간다. 또한 부대별로 최고사령부 작전지시에 기초하여 천리강행군이나 자기부대의 전술 사명에 따라 총참모부에서 나오는 강평원들의 감시하에 훈련에 들어간다. 2000년부터는 매 부대들 ‘오중흡 7련대 쟁취운동’이 시작되면서 그 명예를 쟁취하기 위한 부대별 훈련이 너무도 강도가 높아 많은 병사가 허약에 쓰러지면서 참지 못해 탈영을 거듭하고 있다.

 

이전에는 병사들에게 월급을 30원, 특수부대 병사들은 50원을 주었는데 지금은 화폐의 가치가 떨어지면서 병사들에게 80원, 특수부대 병사들에게는 120원 정도로 규정이 되어 있으나 그나마도 병사들에게는 주지 않고 중대에서 거둬들여 사관장들이 중대후방사업을 한다고 하면서 소모하고 있다. 병사들에게는 제정된 휴가기간이 없고 부대생활을 잘하고 결함이 없이 5년 이상 복무한 병사들에게 표창휴가라는 규정이 있다. 대다수가 자기 집에 가서 부대에서 필요한 식량과 물자구매로 무조건 군관 한명과 같이 집에 갈 수 있다.

 

표창휴가증을 가지고 가면 경무부에서 통과시키나 그 외에는 담배나 술을 경무관들에게 뇌물을 바쳐야 통과된다. 물자구매도 부모들이 간부라든가 아니면 힘이 있는 집 병사들만 갈 수 있다. 이렇게 북한에서의 군사복무는 입대할 때부터 부모들이 좋은 곳으로 가게 해주고 계속 관심을 가지고 돈을 보내주면 편하게 할 수 있다고 한다. 오죽하면 군대에 자녀를 내보낸 부모들은 자식과 같이 군사복무를 한다고 말한다.

 

부모들이 권력이 없고 돈이 없으면 10년 동안 군사복무 모든 기간 총은 구경도 못하고 일명 ‘두더지’부대에 나가 굴(터널)을 뚫는 공사만 하다가 굴이 무너지면서 죽거나 병신(장애인)이 되고 제대로 먹지도 못해 죽기도 한다. 이 때문에 부대 인근의 부락을 습격해 먹고, 탈영을 하여 집에 가지도 못하고 도둑질로 먹고사는 군인들도 많다. 북한주민은 군대를 ‘토벌대’라고 부르는데 인민을 지키는 인민군대가 아니고 인민을 착취하고 강도질하는 강도군대라고 한다.

 

2015.08.12 北의 목함지뢰 도발에 숨겨진 다섯가지 술책

지난 4일 DMZ를 순찰하던 대한민국의 국군 부사관 두 명이 북한이 몰래 매설해 놓은 목함 지뢰에 중상을 당하는 가슴 아픈 사건이 발생하였다. 그러면 이번에 폭발한 목함 지뢰를 왜 북한의 소행으로 볼 수 있는가?

 

올해 6월 또다시 철책을 넘어 온 북한군 병사 한 명이 DMZ안에서 하룻밤을 자고 귀순하는 사건이 일어났었다. 이 사건 후 북한군 병사들이 DMZ안에 들어와 작업을 하는 모습이 포착된 사건도 있었다. 그것은 벌써 그때부터 북한군에서는 한국군이 DMZ안에 들어온 북한군을 어떻게 감시하는가 하는 것을 관찰하기 위한 술책인 것이다. 그 후 감시가 덜하다고 느끼고 소위 다섯 가지 술책을 가지고 한국군 DMZ순찰 구간에 목함 지뢰를 매몰한 것으로 추정해볼 수 있다.

 

우선 첫째는 북한에서는 올해 8월 15일 광복 70주년과 10월 10일 노동당창건 70주년을 맞이하면서 김정은의 권위와 위신에 대하여 대대적인 선전을 진행하며 성과를 이룩하려고 하였으나 경제장성이 이루어지지 못하고 농사도 잘 안되어 주민들의 생활이 향상되지 못하여 북한의 간부들과 주민들 속에서 김정은과 노동당에 대해 불신임을 표시하면서 그 어떤 불의의 행동이라도 나타날 것이 두려워 북한주민들의 반당과 반정부적인 인식을 한국으로 돌리기 위한 하나의 술책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 면에서도 이번 역시 지난 시기의 반복된 도발처럼 목함 지뢰가 북한 것이 아니라고 강하게 반발할 것은 불 보듯 명백하다. 자기네는 항상 민족대단결에 기초한 평화적인 통일을 원한다고 하면서 이번에도 김정은의 초청으로 이희호 여사의 평양방북도 성사시켜준 것처럼 그 어떤 군사적 도발을 하지 않는다고 내외에 널리 선전하고는 뒤에서 이런 도발을 감행함으로 자기네는 그렇지 않은데 한국이 계속 자기네한데 도발을 감행한다고 선전하여 북한주민들의 경계심을 돌려보려고 술책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둘째로는 감히 DMZ를 통하여 탈북하는 북한군이 자주 발생하자 이번 사건을 통하여 ‘봐라, 남조선으로 가려고 해도 남조선군이 지뢰를 매설해 놓았기 때문에 가다가 개죽음을 당한다’하는 선전을 하여 북한군 병사들의 탈북을 막으려는 의도가 보이고 있다.

 

셋째로는 북한군의 사소한 도발도 용서하지 않고 원점과 지휘부까지 소탕하겠다고 한 한국정부와 군의 의지를 시험해보려고 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그것은 목함 지뢰를 북한군이 매설하는 것을 누구도 현장에서 직접 보지 못하였으므로 그 즉시 반격을 할 수 없다는 상황을 포착하고 목함 지뢰가 터진 다음 한국에서 어떻게 반응하는가에 따라 차후 도발계획을 세우려 한다고 볼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번 도발을 단순하게 생각하지 말고 더는 기회를 주지 말고 단호하게 징계하여야 한다.

 

넷째로는 한국에 도발을 한지 일정한 시일이 흘렀으므로 한국정치계와 국민들 속에 남남갈등을 조성하기 위한 술책도 담겨져 있다고 본다. 이번에도 역시 천안함 사건 때처럼 북한소행이냐? 아니다? 하는 식의 논의를 조성시켜 한국주민들 속에 북한의 소행보다 한국정부와 군이 국가안보의식을 높이기 위한 조작사건이라고 북한에서 선전할 것은 불 보듯 명백하다. 아직도 북한에서 목함 지뢰사건을 놓고 침묵을 지키고 있는 것을 보면 남남갈등이 어떻게 일어나고 있는가 하는 것을 보면서 그에 상응하게 대처하기 위한 술책이라고 볼 수 있다.

 

다섯째로는 올해 광복과 당 창건 70주년을 맞으며 북한주민들이 더는 고생하지 않게 해주겠다고 김정은이 직접 신년사에서도 말을 하였는데 생활은 더욱더 어려운 상황에 빠져들어도 유엔의 제재에 의해 어느 나라에서도 지원을 해주지 않아 고민을 하다가 이러한 도발이라도 하여 항상 평화와 국민안보를 중시하는 한국정부에서 ‘보채는 아이 젖을 준다’라는 생각으로 지원을 해주지 않겠는가 하는 막연한 생각이라도 가진 술책이라고 볼 수 있다. 이번에 이희호 여사의 방북을 승인할 때 광복과 당 창건 행사에 쓸 수 있는 돈이라도 듬뿍 가져다 줄 것이라 기대를 하였었는데 그것이 아니자 자극을 주어서라도 지원을 받아보려는 어리석은 자의 망상이라고 볼 수 있다.

 

이렇게 북한은 한국정부나 군에서 생각도 할 수 없었던 도발을 함으로써 정상적인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으로서는 이해가 되지 않은 사건을 벌였다. 그리고 자기네는 아무 관계도 없는데 또 자기네를 걸고 늘어진다고 보도나 성명을 통하여 도발의 단계를 한 계단 높이겠다고 할 수 있으므로 우리 한국정부나 군에서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사소한 요소도 허용하지 말고 단호하게 징벌하여야 한다. ‘불을 즐기는 자는 자기가 지른 불속에서 타죽는다’라는 속담에 있는 것처럼 김정은과 그에 추종하는 세력들은 도발을 거듭한다면 끝내 죽음 밖에 없다는 것을 똑바로 알고 다시는 이러한 도발행위를 하지 말고 평화의 마당에 나와야 한다.

 

2015.09.08  주인없는 금을 발견하고 일부만 당에 바쳤다고 평양에서 추방한 사건

2004년 평양시 룡성구역 룡궁동에서는 참으로 희귀한 일이 있었다. 북한에서는 아파트라고 해도 난방이 보장되지 않기에 겨울에 구멍탄을 빚는다. 여기에 불을 피워야 겨울을 지낼 수 있게 되어 있다. 구멍탄을 빚으려면 가루석탄에 진흙을 섞어야 하는데 평지 땅은 팔 수 없기 때문에 부득이 산에 가서 가랑잎과 부식토를 걷어내고 진흙이 나오면 퍼내서 석탄에 섞어야 한다. 평양시 룡성구역 룡궁동에 있는 인민무력부 산하 125호 악기공장에서 20년 넘게 노동자로 일해 온 박모라는 사람은 뇌진탕 후유증으로 하여 정신이 조금 빈약한 상태이었다.

 

2004년 초 가을인 9월 어느 날 월동준비를 위해 구멍탄을 빚으려고 수레를 끌고 뒷산에 올라갔다. 산에 올라가서 흙을 파야하는데 가까운 곳에 어떤 다른 사람이 흙을 파려고 가랑잎을 걷어내다가 나무관이 나오자 다른 곳으로 옮긴 장소를 발견하였다. 룡궁동은 6·25전쟁 시기 중국군 전상자 병동장소로 죽은 사람들의 시신이 많이 나오는 곳이었다. 그런 사실을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었으므로 먼저 흙을 파던 사람은 사람을 묻은 관이 나오는가 하여 다른 곳으로 장소를 옮긴 것이었다. 그러나 박 모는 부디 가랑잎을 걷어내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하고 관 밑의 진흙을 호미로 굵어 내리었다. 그런데 일정한 흙을 걷어내자 나무관이 부서지었다.

 

이미 오랜 기간 땅속에 묻혀있던 나무관이라 밑의 흙을 조금 걷어내자 무너진 것이었다. 그런데 그것은 사람을 묻었던 관이 아니고 50㎝ 정도의 사각형이고 높이가 20㎝ 정도 되는 나무상자였다. 그 곳에서는 시일이 오래되어 다 삭은 자전거 튜브가 있었고 그 안에는 비단 천으로 감은 어른의 손가락 두 개의 크기의 물체가 12개가 나왔다. 그것을 아무 생각 없이 흙을 파가지고 집으로 돌아왔다. 박씨는 그것을 방안에 놓고 구멍탄을 빚었다.

 

저녁에 그것을 다시 헤쳐 보며 색깔과 무게를 가늠해보다가 이상하다고 생각한 그는 다음날 한 개를 공장에 가지고 나가 전문 금광에 다니었던 공장 사람에게 보여주면서 혹시 금이 아닌가 물어보았다. 입으로 깨물어보고 금이라는 것을 확인한 그 사람은 상대측이 정신적으로 병이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금이 아닌 일반 철 덩어리라고 하며 본인이 보는데서 던져버리고 후에 찾아가졌다. 그래도 이상하다고 생각한 그는 마침 동네 가까운 곳에서 사는 과학원 금속연구사에게 한 개를 가져다가 분석확인해달라고 부탁하였다.

 

분석 결과 24k의 600g짜리 순금이라는 확인이 나왔다. 그가 산에서 주은 것이라고 하며 더 있다고 하자 그 연구사는 분석 확인해준 값으로 그 한 개를 가졌다. 12개 중 2개를 잃고 금이라는 것을 확인한 박씨는 남은 10개중 4개를 공장 당비서에게 가져다 바치었다. 그 4개가 인민무력부까지 올라가 김정일에 대한 그의 충성심이 인정되면서 로동당 입당이 허용됐다. 천연색TV, 냉장고, 재봉기를 비롯한 가전제품들과 옷가지들이 선물로 내려가 박씨에게 전달되었다. 그런데 소문이 나고 그가 정신적으로 조금 모자라다는 것을 아는 한 사람이 그에게 붙어 금이 더 있다는 것을 알고 그가 좋아하는 술을 먹였다. 박씨에게 술을 100병 주기로 하고 나머지 6개를 넘겨받았다.

 

6개를 넘겨받은 사람은 그것을 북한에 살면서 자기와 친하게 지내던 중국 화교에게 넘겨주고 거기에 맞는 미화 달러를 받았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그 중국 화교가 그 금을 밀수로 중국으로 넘기다가 국경 경비대에 걸리고 말았다. 화교는 평양에서 살았기 때문에 국경지역 실정을 잘 모르다가 걸리고 말았던 것이다. 국가의 승인이 없이 금을 밀수하려다가 적발됐기에 중국화교이지만 국가안전보위부에 잡혀가 범죄인 신세가 됐다.

 

금의 출처를 따지다가 화교에게 금을 판 사람이 잡혀가고 금을 우연히 찾은 박씨도 결국은 보위부에 잡혀가게 되었다. 보위부에서 확인 결과 그 금은 일제시기 평안남도 평원군에 있는 금 광산의 소유주였던 일본인의 첩이 묻어둔 금으로 확인됐다. 첩은 광복 후 소련군에 잡혀가 일본으로 강제 추방되면서 갖고 가지 못하자 묻어 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 금을 찾은 박씨 역시 보위부에 잡혀가 범죄자 취급을 받은 것이다. 그가 금을 우연히 찾아가지고 당에 그대로 전량을 가져다 바치지 않고 4개만 바쳤다는 부분이 죄가 된 것이다.

 

박씨는 당에서 받았던 선물을 회수당하고 본인이 직접 중국 화교에게 금을 판 것이 아니기 때문에 감옥으로 가지는 않았다. 대신 평양시에서 지방으로 추방당하는 비극을 맞았다. 같은 공장에서 금을 던지었다가 다시 찾아서 보관하고 있던 사람은 보위부에 잡혀가서 3일 만에 금을 반납하고 나왔으며 과학원 연구사는 절반을 잘라 금,은 수매상점에 가져다 국가수매기관에 수매하였으므로 남은 절반만 반환하여 결국 금 사건에서 조금이라도 이윤을 얻은 건 그 사람뿐이다.

 

사건 소식이 알려지자 많은 북한주민들은 그런 행운은 일명 ‘머저리’들에게만 찾아온다고 했다. 그것을 잘 감춰 두었다가 후에 조용히 쓰면 되는데, 잘못했다는 것이다. 금을 우연히 얻은 것도 희귀하고, 결국 평양에서 추방당한 일도 희한하다고 했다. 

 

2015.09.21 ICBM 도발-①②

"원수들과는 100번 웃으며 입 맞추다가도 한 번은 뒷덜미를"

북한의 미사일 도발은 1960년대 중순부터 대한민국과 미국, 일본을 비롯한 지구상의 모든 자본주의 나라를 겨냥해 끊임없이 이어져 왔다. 1964년 6월 29일 평양시 룡성구역에 제2자연과학원이라는 국방과학원을 창설하고 오늘에 이르기까지 계속 연구소들을 광범위하게 개선 확장시켜왔다. 이렇게 창설된 제2자연과학원은 평양국방대학과 룡성약전공업대학이라는 전문적인 연구사 양성대학을 가지고 연구사들을 키우고 러시아와 중국을 비롯한 발전한 다른 나라들의 선진국방과학기술을 습득하여 미사일을 비롯한 각종 군사무기개발을 진행했다.

 

1990년대 초에 노동 1호라는 미사일 발사를 시작으로 미사일 개발에 집착해온 김정일이 미사일개발 연구사들을 금방석에 앉혀준다고 하면서 북한이 식량공급을 못 하던 시기에도 제2자연과학원 연구사들에게는 정상적인 부식물까지 보장해주면서 군사무기개발을 서둘러 개발하도록 다그쳤다. 김정일은 총대에서 정권이 나오고 총대가 든든해야 지구상에 하나밖에 없는 사회주의를 지킨다고 하면서 대한민국과 세계에서 식량지원을 해주면 연구사들과 국방 분야에서 근무하는 사람들에게 우선으로 공급하면서 우대를 해주었다.

 

▲탄도미사일(ICBM)인 KN-08 미사일. /조선중앙통신

 

중앙당과 군의 간부들에게 ‘지금 일부 간부들 속에서 남조선 정상들이 오가며 교류가 진행된다고 하여 계급사상이 해이해지고 있는데 원수들과는 100번 웃으며 입을 맞추다가도 언제인가 한번은 뒷덜미를 물어뜯어서라도 꼭 수령님의 유훈인 조국통일 위업을 완수하여야 한다’고 하면서 자기가 모든 요구조건을 다 들어줄테니 대륙간탄도미사일과 수중 대 지상 미사일 연구에 박차를 가하라고 했다. 동시에 핵무기연구를 다그치라고 지시 하곤 하였다.

 

이렇게 김정일의 적극적인 비호 하에 북한의 제2자연과학원에서는 핵개발과 각종 미사일을 비롯한 군사무기연구에 박차를 가해온 것이다. 왜 북하 정권은 돈도 없고 주민들에게 식량공급도 못 하면서 핵개발과 대륙간탄도미사일개발에 집착하는 것일까?

 

이전에 김정일은 대류간탄도미사일과 수중 대 지상 미사일을 최신식으로 개발하고 핵탄두를 장약하여야 미국과 한국이 전쟁을 무서워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또 미국은 남북전쟁 이후 미국영토에서 전쟁을 해보지 않았기 때문에 자기들의 본토에 핵미사일이 한 발만 터져도 항복할 것이라고 선전을 해왔기 때문이다.

<②편에 계속>

 

미사일 도발은 北간부와 주민 회유하기 위한 고도의 수단

<①편에서 계속>

북한에서는 대륙간탄도미사일을 발사하면 요격당할 수 있기 때문에 수중 대 지상 미사일을 신속히 개발하여 잠수함에 장착해 미국 영토 내에 가까이 접근하여 불의에 공격할 수 있는 준비를 다그쳐야 한다고 하면서 군사력이 약하면 나라를 빼앗기고 일본강점기 때처럼 망국노 생활을 하여야 한다고 하면서 계속 강화해왔다. 이로부터 지금까지 계속 연구를 하고 실험을 해오면서 ‘위성발사’라는 가명 아래 대륙간 탄도미사일 발사 도발을 해오는 것이다.

 

1998년 8월 30일 제2자연과학원에서 ‘결사대’를 두고 ‘광명성’1호’를 성과적으로 발사하였다고 보고되자 북한에서는 TV와 방송을 통하여 당과 혁명에 충실한 과학자, 기술자들이 자체의 기술과 노력으로 인공지구위성을 궤도에 진입시켜 북한 위성이 드디어 하늘에 올랐다고 주장했다. 위성에서는 지금 ‘김일성 장군의 노래’와 ‘김정일 장군의 노래’가 전 세계에 울려 퍼진다고 북한의 간부들과 주민들에게 거짓 선동을 하였다. 그리고는 ‘광명성 1호’ 발사에 참가하였던 많은 연구사, 기술자, 군인들에게 노력영웅칭호와 박사학위를 비롯한 훈장과 학위를 주도록 하였다. 2006년도에 시험발사에서 실패하고 2009년 4월 5일 ‘광명성 2호’ 발사과정을 평양시 룡성구역에 있는 제2자연과학원 산하 10월 17일 위성연구소의 위성관제센터에서 본 김정일과 김정은은 과학자들이 큰일을 하였다고 칭찬했다. 또 함께 기념사진을 찍자는 연구사들의 제기를 들고 같이 사진을 촬영하고 앞으로도 계속 끊임없이 미사일 연구개발에 박차를 가하고 최신화하여 100년 숙적인 거만한 미국의 상통을 후려갈겨야 한다고 당부했다. 조국통일을 위한 성전에 연구사들이 많은 일을 하여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렇게 북한의 핵개발과 미사일도발을 비롯한 모든 군사무기의 연구개발과 시험은 김정일과 김정은의 비호와 지지 아래 제2자연과학원과 북한의 군수산업체 제2경제위원회의 합작품이라고 볼 수 있다. 결국 이번에도 김정은은 노동당 창건 70주년을 맞아 북한주민들 속에서 생활이 향상되지 못하자 그 반항이 자기에게 돌아올 것이 두려워 하고 있다. 이 때문에 또다시 미국과 남조선을 향한 도발을 행하면서 방위력 강화와 세계화의 수준에 올랐다고 선전함과 동시에 북한의 간부들과 주민들을 회유하기 위하여 당에 바치는 과학자들의 대축포 선물이라고 하면서 미사일 발사도발을 감행하려고 하는 것이다.

 

김정일이 자기의 장기집권과 후계세습을 위하여 북한의 간부들과 주민들을 기만하면서 미국과 자본주의 나라들의 고립, 압살정책에 대응하여 ‘선군정치’를 한답시고 주민 생활고와는 관계없이 핵과 미사일을 비롯한 군사무기 확장개발에만 몰두하였는데 김정은 역시 그 정치를 이어받아 끊임없이 핵과 미사일로 한반도와 세계의 평화를 위협하고 있다.

 

2015.09.24  북한 주민들 추석 때 기진맥진 하는 이유

북한에서도 추석은 민속명절로 지정되어 한가위라 부르며 추석 당일 하루 휴일이다. 한식날에는 한 해 농사를 시작하기 전에 농사를 잘되게 해달라는 의미에서 조상에게 제사를 하며 묘에 봄철에 새로 자라는 잡초를 제거하면서 풀을 뽑아준다. 추석에는 조상의 덕으로 지은 햇곡식으로 음식을 장만해 조상 묘를 찾아가 인사드리는 풍속으로 전해져 오고 있다. 그런데 한식은 중국민속명절이라고 하면서 휴일을 쳐주지 않기도 한다.

 

지금도 북한의 지방은 정부에서 공동묘지로 지정해준 산들에만 조상 묘를 쓰고 추석날에는 산에 있는 묘를 찾아간다. 평양은 지난 2000년도까지는 주변구역 산에 묘지를 두고 있었는데 김정일이 평양시의 풍치를 위해 묘를 없애라고 지시한 뒤 변화가 있었다. 지금은 평양시 주변구역에서도 기본 도로와 떨어져 있는 일부 지역에 주인 없는 묘들만 있을 뿐이다. 대부분 화장을 하여 평양시 각 구역에 있는 유골보관소에 보관하였다가 한식과 추석, 그리고 고인의 생일이나 기일에 유골함을 찾아가지고 와 집에서나 집주변 공원과 강하천들에서 제를 지내고 다시 유골보관소에 가져다 보관한다.

 

▲인천 옹진군 연평도 망향전망대에서 바라본 북한 황해남도 강령군의 한 공동묘지. /조선일보 DB

 

북한에서는 예전 묘를 쓸 때에는 차가 없어 평양시 인민위원회에서 버스를 동원해주어도 버스 대수가 적고 사람은 많아 기관에서 사업하여 차를 얻지 못하는 많은 사람이 평균 30~40리를 걸어가서 제를 지내고 돌아오곤 했다. 이 때문에 한식과 추석을 지내고 나면 사람들이 정말 힘 들어가지 못하는 사람들도 많았었다. 산에 가서 추석날이나 한식날에 제를 지내기 어려워 평양시에서 사는 대부분 사람은 부모들 묘를 파서 경유를 뿌리며 개인적으로 태워서 유골보관소에 보관하였고 조부모들 묘는 돌보지도 않는다. 유골함을 보관할 때에는 유골보관소에서 파는 사기단지에 화장한 유골을 넣고 나무함에 포장하여 보관하는데 보관비를 3만원을 내고 보관서 카드를 받아 보관하였다가 한식이나 추석에 카드를 가지고 가서 제를 지내고 다시 반납하여 보관하는데 5년간 한 번도 찾지 않으면 자동 폐기 처리한다.

 

한식이나 추석날 유골보관소에는 유골함을 찾으려고 온 사람들이 거의 1000~2000m 정도 줄 서는데 그날에는 매 구역 보안서 보안원들과 구역행정위원회 사람들이 총동원되어 줄을 세우는 일을 한다. 아침 일찍 가 줄서 유골을 찾아오는 시간이 평균 2~3시간이 걸려야 찾아올 수 있다. 다시 반납할 때에는 매번 3000원을 내야 한다. 이렇게 제를 지내기가 어려워 많은 사람이 유골 가루를 대동강이나 보통강에 흘려보내고 한식이나 추석에 사진을 놓고 강가에서 제를 지내는 사람이 많으며 모란봉에 유골함을 묻어놓고 제를 지내는 사람 또한 많다. 모란봉이 평양시 중심에 있어 교통이 좋고 경치도 좋다고 하면서 그곳에 자기들만의 장소를 정해 유골함을 묻어놓고 제를 지내는 것이다.

<②편에 계속>

 

꽃제비, 먹을 것 찾다가 유골까지 먹어

<①편에서 계속>

모란봉에 8만장의 유골함이 묻혀 있다고 하면서 평양시 인민위원회 도시경영관리국에서 각 인민반별로 회람을 돌려 경고한다. ‘모란봉에 유골을 묻고 제를 지내는 사람들은 발각되면 유골함을 임의로 소각하고 본인의 가족은 평양시에서 추방한다’면서 ‘스스로 유골함을 파내 유골보관소에 보관하라’고 지시했다. 또 모란봉관리소 사람을 동원해 모란봉을 수색하여 많은 유골함을 찾아냈으나 평양시에서 추방당할 것 같아 유골함 주인들이 나타나지 않자 주인이 없는 유골함이라며 소각하는 일도 있었다.

 

이일 이후부터 평양시 사람은 무서워서 유골함을 모란봉에 가져다 묻지 못하고 있다. 유물보관소에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 집에서 자체로 보관하는 사람도 많다.

 

▲쓰레기 더미 위에서 음식 먹는 꽃제비들. /조선일보 DB

 

이러다 보니 별난 에피소드도 생겼다. 어느 집에서는 가족이 밤에 자고 있을 때 꽃제비가 배가 고파 베란다를 통해 그 집으로 들어가 컴컴한 곳에서 먹을 것을 찾다가 선선한 방의 장식장 선반에 보관되어 있던 유골함 가루를 보약으로 착각하고 먹은 경우도 있었다. 꽃제비는 가족이 깨어나면서 붙잡혔는데 그때부터 그 집에서는 한식이나 추석날에 부모의 유골 가루를 먹은 그 꽃제비를 조상으로 앉혀 두고 그 앞에서 제를 지내고 식사도 잘 시키고 있다는 기막힌 사연도 등장했다.

 

북한에서는 생활고로 풍속이 잘 유행되지 않는다. 추석날에 남자들이 한복 저고리를 입는 현상이 거의 없고 여성들도 음식을 가득 이고 지고 다녀야 하므로 한복 저고리를 입지 않고 오히려 편하다고 바지를 입는다. 북한에서는 다른 날에는 꽃제비들이 찾아오면 때려서라도 쫓아내지만 추석에는 먹을 것을 주어서 보낸다.

 

속담에 ‘남의 제사상에 재를 뿌린다’고 하듯이 꽃제비를 쫓아 보내면 숨어 있다가 조상에게 제술을 붓고 제상에 놓았던 음식들의 모든 종류를 잘게 썰어 집 주변에 묻는다. 조상에게 바치는 것인데 꽃제비들이 그 음식을 도둑질해 먹으면 조상의 노여움을 사 하고자 하는 모든 일이 잘 안될 수 있다는 생각 때문에 그날만은 그렇게 하지 못하도록 먹을 것을 달라고 동냥하는 꽃제비들과 개들에게도 음식을 주어 보낸다. 개들의 경우 집주변에 묻어둔 음식을 파먹을 수 있기 때문에 그러므로 지금 북한에서 추석은 꽃제비들과 개들이 배 터져 죽는 날이라고 하면서 민속명절이 꽃제비와 개의 명절이라고 회자한다.

 

2015.10.06 남포 特大 성매매 사건-①②

북한에도 서울 강남같은 성매매 장소가…

2003년 4월경에 인민보안성 정치국의 긴급지시로 보안성 감찰국 일반감찰부는 비상출동을 했다. 남포시 와우도구역 보안서에서 근무하던 한 보안원(대위)이 보안성 정치국에 스스로 찾아와 자수한 것이 사건의 발단이 됐다.

 

사연은 평양의 어느 중앙기관 무역회사에 근무하던 그의 친구가 남포시에 있는 남포무역항에 출장을 가 항구구역 호텔에 숙박하고 있는데 나이 든 중년의 여성이 그에게 다가와 유혹했다는 것이다. 그녀는 “외지에 와서 고생한다. 예쁜 여성한테 안마를 받을 수 있다”면서 “100달러만 주면 가능하다”고 했다는 것이다. 북한에서는 보통 안마를 받으라고 하거나 물이 좋은 생조개를 사라는 속된 표현으로 여성 성매매 알선을 한다.

 

북한에서 100달러면 적은 돈이 아닌데 과연 100달러 수준의 여성은 어떨까 하는 호기심에서 그 여성의 유혹에 넘어갔다. 평양 사람은 여성을 따라 남포시 와우도구역의 어느 한 아파트로 갔다.

 

그런데 29세의 정말 예쁘고 아름다운 젊은 여성이 반겼다. 그녀는 맞아주고 같이 사우나를 하며 안마도 해주면서 2시간 가량 머물며 성적 욕구도 원만히 풀어주었다. 그런데 정작 재미를 보고 나와 보니 주머니에 여비 돈 3000달러 사라졌다. 객지에 나와서 돈을 털린 그 남성은 자신이 불법적인 성행위를 한지라 신고도 하지 못하고 자기의 친구이던 와우도구역 보안원에게 돈을 찾아주면 500달러를 주겠다고 했다. 그리고 여성의 집을 알려주었다.

 

돈을 찾아주면 500달러를 주겠다고 하니 보안원은 호언장담하며 여성의 집을 찾아갔다. 그런데 그 여성 집에 들어서는 순간 눈이 휘둥그레지며 정신을 잃고 말았다. ‘고난의 행군’으로 많은 사람이 굶어죽고 전기도 못 보는데 그 집 거실에서는 작은 분수까지 있었다. 물이 솟구쳐 나오고 세면장을 사우나로 개조하고 일본산 속옷을 입은 젊고 예쁜 여성이 반기며 맞아주자 보안원 역시 넋을 잃고 만 것이다. 보안원이라는 생각과 돈 찾으러 왔다는 사실을 망각한 채 친구처럼 그 여자와 성관계를 맺은 것이다.

 

그곳의 풀코스는 우선 사우나에 데리고 들어가 가벼운 안마를 해주는 것으로 시작했다. 그리고 큰 수건만을 몸에 걸치고 나와 맥주를 마시고 침대에서 즐기는 식이었다. 당시 북한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특대의 성매매 행위였다. 이렇게 한 코스를 도는 가격이 100달러였다. 남자를 유인해오는 중년의 여성은 이 여자의 어머니로 딸이 남성과 같이 옷을 벗고 들어가면 초면의 남자일 경우 주머니의 돈을 다 털었다. 남성을 한 번에 두 명 데리고 오면 가까이에 집을 잡고 해병 군관(장교)과 사는 31세의 맏딸을 찾아서 동생과 같이 봉사활동(?)을 하게 하였다.

<②편에 계속>

 

<①편에서 계속>

돈을 털린 남성들은 자신들이 한 행위 때문에 ‘꿀 먹은 벙어리’처럼 어디 가서 말도 못한다는 것을 이용한 행위였다. 그런데 평양친구의 돈을 찾아주겠다고 나섰다가 무료로 한 코스를 봉사 받고 나온 보안원은 고민에 빠지고 말았다.

 

친구를 볼 면목도 없고 저런 큰 사건은 틀림없이 남포시 간부들의 비호 속에서 진행되고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또 언젠가 발각이 되면 자신도 처벌받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평양에 올라와 인민보안성 정치국에 찾아와 자수한 것이다.

 

긴급 출동하여 3명의 여성을 체포하여 평양에 끌고 와 취조해보니 남포시의 많은 간부가 그 집에 찾아가 무료로 봉사 받고 눈감아주고 있다는 사실이 밝혀져 면직 처분됐다. 그 집에 가보니 돈을 얼마나 벌었는지 한 방에는 일본산 박스가 절반가량 있었는데 뜯어보니 다 여성속옷이었다.

 

속옷은 1회용으로 한 번 입고 버린다는 것이다. 사건을 파헤쳐보니 그 여성에게 두 번 이상 왔던 남자가 200명 이상이나 되었는데 증인 심문을 할 때 남성 대다수가 그 여성에게 100달러 돈이 아깝지 않았다고 하였다.

 

결국 조사 끝에 두 딸을 데리고 성매매와 도둑질을 한 어머니는 징역 14년, 맏딸은 징역 9년, 전문적으로 성매매한 둘째딸은 남포시장에서 공개 처형되었다. 그런데 처형 전에 그 여성이 보안원에게 한 말이 압권이었다. 자기가 사형된다는 것을 안 이 여성은 ‘다른 사람들은 고달프게 가늘게 길게 살지만 자기는 행복하게 짧게 굵게 살다가 간다’고 말하였다는 것이다. 이 말이 돌고 돌아 북한 전 지역 사람들이 모르는 사람이 없는데 모두가 하는 소리가 나도 그 여성처럼 ‘행복하게 짧게 굵게 살고 싶다’고 농담처럼 말한다는 것이다.

 

지금 북한에서는 이와 유사한 특대 성범죄행위가 성행하고 있다. 먹고 살기 어려울수록 더욱더 성행한다. 한 여성은 특대 성범죄로 재판을 받으면서 여성의 억울함을 호소하고 오죽하면 굴욕적으로 몸을 팔겠는가라면서 북한의 비참한 여성들의 운명을 한탄한다.

 

2015.10.15  북한의 술과 음식문화①②  북한의 인기있는 식당은 음식맛 아닌 여자의 미모?

남북한은 한 민족으로 반만년 역사를 자랑하지만 70년 분단이 가져다준 것은 정신과 이념의 차이는 상당하다. 음식문화에서도 많은 차이가 생겼다. 북한에서 일반 주민은 식당에는 가보아도 비싼 외화(달러를 비롯한 외국돈) 식당이나 가격이 너무 높아 일반주민들 속에서는 강도 식당이라고 불리는 합의제(북한 돈을 달러 환율로 환산해 받는 식당) 식당에 가서 술과 맥주, 음식을 먹기가 아주 어렵다.

 

외화식당에서는 맥주 한 병에 제일 싼 것이 2달러인데 1달러에 쌀을 2kg 살 수 있는 북한에서 외화 식당은 물론 합의제 식당에 가서 음식 먹거나 술, 맥주를 마시는 사람들은 간부들, 외화벌이를 하는 사람들과 대체로 보위부, 보안부를 비롯한 권력기관에서 근무하는 사람들이다.

 

간부들은 자기 돈을 내서 먹는 사람이 별로 없고 다른 사람이 내는 것을 먹기만 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간부들이 식당에 갈 때에는 한국에서 식당을 예약하는 형식인데 그날은 간부들이 식당에 가서 일반 사람들보다 잘 먹는 것을 다른 사람이 알면 안 되기 때문에 일체 다른 손님들은 받지 못하게 한다. 대신 식당책임자는 물론 주방에 이르기까지 모든 식당 종업원들의 한 끼 식사가 보장된다.

 

▲북한에서 만든 '도토리술'. /최원철

 

돈은 아래 사람들이 내고 예쁘게 생긴 접대원들은 간부들 옆에 앉아 술을 따라준다. 간부들이 술을 마시고 취하면 아양을 피우며 매장에 진열된 비싼 간식들과 음식들을 사달라고 조른다. 자기들도 챙겨 먹고 나머지 종업원들도 주방에서 자기네가 평소 먹고 싶었던 것을 요리해 먹으며 즐긴다. 그 식당에 예쁜 여성들이 없으면 예술인이나 대학생 중에 예쁜 여자들을 데려다가 10~20달러씩 주고 간부 시중을 들게 한다. 그래서 북한식당에는 젊고 예쁜 여성들이 있어야 인기가 있다. 그렇지 않을 경우 간부나 돈 있는 사람들도 제아무리 음식 맛이 있어도 자주 가지 않는다.

 

북한 간부들은 술을 마실 때 최고 고급안주로는 예쁜 여성이 술을 따라 주는 것이라고 노골적으로 말한다. 식당에 가서 예쁜 여성이 없으면 아래 사람들의 술 접대를 거절하고 가기 때문에 꼭 여성이 있어야 한다. 북한에서는 한 장소에서 다른 사람이 보지 못하게 하고 간부들이 고급술과 음식을 먹으면서 즐긴다. 하지만 남한에 있는 2차, 3차라는 술 문화는 없다. 술자리는 다 먹지 못해도 눈이 우선 만족하여야 한다며 푸짐하게 상을 차리고 먹는 것을 좋아한다.

<②편에 계속>

 

<①편에서 계속>

또한 평양아파트들은 대체로 같거나 비슷한 기관이나 직무의 사람들끼리 사는 환경에서 일요일에는 같이 사는 사람들이나 가까운 친척들이 모란봉이나 대동강가에 음식을 제각기 준비해서 나가 술과 맥주를 마시고 녹음기를 틀어놓고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며 오락회를 하면서 즐기는 풍습이 많다. 제각기 자기 집에서 특산물을 만들어서 온 가족이 같이 나와 즐기면서 스트레스를 풀어가는 것도 물론 간부들이나 돈이 있는 사람들만이 누릴 수 있는 것은 당연하다.

 

일반 주민들은 일요일에도 시장에 나가 장사를 해야 하고 한가로이 먹고 마시며 즐길 수 있는 시간이나 재정적 여유도 안 되기 때문이다. 모란봉이나 대동강가에 나가서 술과 맥주, 음식을 먹을 때 많은 사람이 지나다니며 보면서 잘 해서 나와 먹으면 사람들이 부러워하지만 잘 못해서 나가면 거지들이 잔치한다고 사람들이 비웃기 때문에 미리부터 잘 준비해서 나가야 한다.

 

북한에서 간부들은 ‘영웅호걸은 주색이 강하다’라고 하면서 은근히 술 주량을 자랑하며, 젊고 예쁜 여성을 즐기며, 세계가 금연의 시기인 지금에 와서도 담배를 피우지 않는 남자는 남자가 아니라고 하면서 지금도 얼마나 값비싼 담배를 피우는가에 따라 그 사람의 인기가 있는 것이다. 담배가격도 북한 돈 10원부터 5만원에 이르기까지 천태만상이다.

 

▲北 여성종업원이 서빙하는 모습. /조선일보 DB

 

이로부터 북한의 모든 남자는 돈이 없어도 싼 가격의 농태기라고 부르는 술과 신문지에 말아 피우는 잎담배를 많이 소모하고 있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금연은 많아도 술 소비량이 세계에서 1위라고 하여 처음에는 설마 하는 생각으로 믿지를 않았었다. 그러나 한국에 와서 살면서 전국 각지에 있는 많은 식당과 술집들에 매일같이 넘쳐나는 사람들을 보면서 대한민국이 잘산다는 의미를 가지게 되었다. 지인의 초청으로 처음으로 식당초청을 받아 술을 마시면서 2차, 3차라는 개념을 모르고 스스로 주량이 좀 있다고 생각하면서 주는 술을 다 받아 마시고 2차에 가서는 완전히 시체가 되어 집에 실려 들어가는 비참한 현실을 몇 번이나 경험하였다.

 

또한 한국에서 1차는 소주를 마시고 2차에서는 양주를 3차에서는 맥주를 마시면서 밤새 마시니 더욱 취하여 그 다음 날에는 아무 일도 못할 상황이다. 이렇게 한국의 술 문화는 너무 자주 회식이 조직되고 잦은 술자리라 몸에서 술을 받지 못할 정도로 부담스러울 때도 많이 생긴다. 이렇듯 남북분단 70년이 우리에게 가져다준 많고 많은 차이점을 하나하나 극복하면서 북한의 3대 세습독재를 끝장내고 자유민주주의 통일한반도가 나아갈 길을 개척하여야 하는 것이 우리의 사명이라고 생각한다

 

2015.10.19  성매매 여성 "왜 단속하나? 내 몸이지 국가 몸인가?" 보안원에 따져 묻자…

北여성 성매매 현실 

북한에서 여성의 사랑은 정결한 시내 물과 같이 오직 한 곳으로 흐르며 한 남성에 대한 영원한 집착이라고 표현된다. 여성의 정조는 ‘춘향전’이라는 영화가 나올 정도로 순결하다고 평가됐다. 그런데 최근 북한여성의 참된 사랑은 여지없이 무너지고 말았다.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다’는 속담에서 보듯 우선 김정일은 물론 주위 간부들에게 여성의 성을 선물하면서 아래에도 체계적인 흐름으로 이어져가자 농락된 여성 사이에 ‘성춘향’을 부르짖는 상황은 갔다며 1995년 일명 ‘고난의 행군’ 시기부터 먹고 살기 위한 차원에서 노골적인 성매매행위가 행해지기 시작했다.

 

지방에서는 기차역 앞과 시장을 비롯한 골목에서 여성의 성매매가 거의 노골적으로 진행되고 있으며 여성의 나이와 인물에 따라 가격도 다양하게 나타나고 있다. 평양시에는 각 공원과 역 앞, 그리고 대극장 앞, 개선영화관 앞, 모란봉과 매 지하철역 앞에 여성이 한 명 또는 두세 명 서 있으면 성매매하는 여성이다.

 

인물이 예쁘고 나이도 젊은 여성은 내외국인을 가리지 않는다. 심지어 많은 돈을 벌기 위하여 평양에 주재하는 외국대사관에 들어가 밤새 여러 남자를 상대하기도 한다.

 

실질적으로 평양시 락랑구역 토성에서 2002년 봄 외국인에게 성매매하면서 조선 여성의 절개를 더럽혔다며 보통강 신발공장에 다니던 여성을 비롯한 3인조 성매매원 전원을 공개 총살하였다. 이 여성은 거의 매주 토요일 약속된 시간에 평양시 대동강구역에 있는 보링관 앞 대동강가에 나가서 외국대사관에서 나온 차가 뒤 트렁크를 열고 기다리면 그 차 트렁크에 타고 대사관을 드나들며 성매매를 하였다는 것이다.

 

당국은 이를 공개하면서 조선 처녀의 절개를 돈 몇 푼 받고 팔아먹은 민족반역자라고 성토하며 총살하고 그들의 온 가족은 평양시에서 추방하였다.

 

2003년에는 평양시에서 여성의 성매매가 심해지니 김정일이 이것을 막으라고 인민보안성에 특별지시를 내리었다. 그해 가을 평양시 모란봉구역과 중구역 보안원들이 합동으로 밤 11시 모란봉을 포위하고 불의에 수색을 진행했다.

 

사람 발길이 덜 미치는 모란봉 산속에서 성행위를 하는 200쌍 정도의 남녀를 잡아들인 적이 있었다. 잡아서 조사해보니 15쌍 정도의 처녀, 총각들은 친한 사이인데 집이 없어 모란봉에서 성행위를 하고 있었다고 한 것으로 밝혀져 훈계해 돌려보냈다. 나머지는 3일간 구류처벌을 하고 근무하는 기관, 기업소에 통보하여 돌려보냈다.

 

성매매 여성이 보안기관에 잡혀 와 “왜 단속하는가? 내 몸이지 국가 몸인가?”하고 따져 묻자 보안원이 말문이 막혔다는 소문도 있다. 여성은 국가가 배급을 주지 못하니 이렇게 해서라도 가족을 먹여 살리고 사회주의를 지키는데 국가가 그것을 알아주어야 하지 않느냐며 반항한다는 것이다. 범죄자가 많은 북한에서는 일반적인 성매매 여성까지 감옥에 보낼 수 없기 때문에 조직적으로 대책을 세워 교양하라는 지시가 내려지면서 성매매 여성은 체포했다가도 다시 내보낸다.

 

한 번은 평양역에서 처녀가 아이스크림을 팔면서 거의 공개적으로 성매매한다는 신고가 접수돼 중구역 보안서에서 역에 나가 처녀를 잡아다 조사했다. 김책공업종합대학 학생인데 양부모가 ‘고난의 행군’ 시기에 굶어죽고 동생 둘을 데리고 억척같이 장사를 해 동생들을 먹여 살리면서 공부해온 여대생의 사연이 알려져 안타깝게 했다.

 

그녀는 공부가 하고 싶어 독하게 공부해 대학에는 입학했으나 생계가 힘들어 밤에는 평양역에 나와 객지에서 오는 사람에게 몸을 팔아 그 돈으로 생계를 유지했다. 이 사실 알게 된 보안서에서는 그 여성을 내보내면서 딱한 사정은 이해하겠지만, 공개적으로 하지 말라고 훈방한 사실도 있다.

 

이렇게 북한에서 여성의 성매매는 유흥이 아닌 먹고 살기 위한 수단으로 가족을 위해 죽지 못해 하는 일종의 직업이다. 북한에서는 성매매라고 하지 않고 ‘매춘행위’라고 하며 그런 일을 하는 여성을 ‘갈보’라고 부른다. 심지어 부모들이 미성년 딸까지 피눈물을 흘리면서 성매매를 시키며 심지어 부부 사이에도 부인이 성매매를 위해 남자를 데리고 들어오면 남편이 자리를 피해야 하는 쓰라린 상처를 감수하기도 한다.

 

설상가상으로 보안원들은 성매매 단속을 빌미로 예쁘고 젊은 여자를 붙잡고는 용서해준다면서 여성을 농락한다. 여성의 성매매를 막으라는 김정일의 지시가 나오자 지금은 젊은 여성이 직접 남자를 만나려 나오는 것이 아니고 나이가 든 늙은이가 남자를 만나 여성을 알선한다. 북한에서 이런 할머니를 ‘뚜쟁이’라고 부른다. 더욱더 심각한 문제는 여성들이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성매매하니 육체적으로 몸이 고달파 ‘아이스’라는 각성제 마약까지 한다. 이렇게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몸을 혹사당하고 있다.

 

2015.10.27  남에서 불금이라지만 북에선 악의 날이라는데…

북한에서는 중앙기관과 도·시·군급 기관에서 근무하는 자들은 매주 의례적으로 진행하는 금요 노동이 있다. 북한은 사회주의 도입 당시 소련에서 진행하던 공산주의 토요 노동을 그대로 받아들인 것이 북한의 금요 노동이다. 간부들과 사무원들이 무료로 의무적으로 하는 과제이다.

그래서 북한 간부는 한 주에 가장 좋아하는 날이기도 하고 가장 싫어하는 날이기도 하다. 가장 좋아하는 것은 일단 고위급간부이다. 이들에게 금요노동을 나간다는 것은 하나의 오락이고, 중견간부들은 농장에 나가서 들판에 앉아 맥주를 마시며 즐기는 날이기 때문이다. 하급간부와 사무원은은 뼈빠지도록 아프도록 일을 해야해 짜증만 가득해 제발 돌아오지 않았으면 하는 날이 금요일이다.

북한에서 가장 바쁜 철에는 늙은이와 어린이 할 것 없이 밥 먹을 수 있는 사람은 총동원한다. 모든 사무실을 봉쇄하고 한 사람 빠짐없이 금요 노동에 참가하라는 훈령이 내린다. 중앙검찰소에서 사무실을 검열하고 심지어 낮에 거리에 다니는 사람도 다 잡아서 이유 여하를 불문하고 농장에 내몰 때가 있다.

이 때에도 고위급 간부들은 지역을 할당해 나가 직접 일하기보다는 소풍을 나온 사람처럼 논과 밭두렁을 농장간부 안내 하에 시찰한다. 일명 지도사업을 하다가 중앙TV에서 촬영한다고 하면 논밭에 들어가 솔선수범하는 척하다 촬영이 끝나면 다시 지도사업을 한다. 지도사업 후에는 농장간부들을 모아놓고 말만 하면서 풀어줄 수 없는 애로 사항을 들어주면서 농장에서 잡아주는 개나 양을 먹으며 술까지 마시는 식으로 금요일을 보낸다.

중견간부 역시 금요일이면 즐거운 마음으로 현장 출동한다. 종일 사무실에 앉아 산하 기관에서 올라온 문건들을 검토하고 상급자에게 보고서 올리고 산하기관에 전화로 지휘하던 중견간부들은 누구나 할 것 없이 한 주에 한 번 오는 금요일에 사무실에서 나오는 데 기대감이 크다. 바깥바람도 쐬고 농장에 내려가 각 단위에서 준비해오는 맥주나 음식 농장간부들이 잡아주는 개나 집짐승들을 먹으며 즐거운 한 때를 보내고 돌아온다. 중견간부들은 금요 노동 나가기 전에 우선 자기의 상급자나 고위간부가 나가는 곳을 알아보고 이를 피해 다닌다.

 

▲북한 금요노동 현장. /조선중앙통신

 

하지만 전국적으로 중앙당 지휘 하에 농장에 보내는 퇴비나 고철수집, 최근 행해지는 대동강 과수농장과 평양시 10만 세대 살림집 건설현장에 나가는 것을 가장 꺼린다. 할 수 없이 일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2009년도 김정일이 지시한 평양시 10만 세대 살림집 건설과 중구역 만수동지구 낡은 아파트 제거는 중앙기관에 의무적으로 할당돼 한 달 동안 간부들이 금요일마다 험한 일을 해야 했다.

대동강 과수농장도 보안부만 하지 말고 중앙기관이 합세해 금요일마다 나가 지원하라고 김정일이 지시하자 간부들은 힘들다며 편법을 썼다. 이 업무를 군대와 돌격대에 지시하고서 후방사업을 해주겠다며 이들을 동원한 것이다. 대신 간부들은 금요노동 대신 맥주와 술을 마시며 즐겼다.

이처럼 정부 주도 공사장에 가면 먼지나 들이마시기 때문에 어지간한 당성이 강하지 않은 간부들은 기피한다. 북한에서 간부들이 생각하는 가장 신선한 금요 노동은 농장에 나가 땅의 향기도 맡으면서 집짐승을 잡아먹으면서 맥주를 마시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도·군급 간부나 중앙기관 하급간부와 사무원들은 금요일이면 온종일 도시락을 가지고 나가 뼈 빠지게 일을 하여야 하니 금요일이 오는 것을 죽기보다 더 싫어한다.

예쁘게 생기고 젊은 여성사무원은 금요일이면 현장에 나가 일을 하지 않고 간부 술시중을 들면서 편하게 하루를 보내지만 늙고 못생긴 여성과 일반 사무원은 온종일 험한 농사일을 상급자 몫까지 다해야 하니 운명이라서 금요일이 오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북한은 금요 노동이라면 간부의 직급에 관계없이 다 같이 한 주에 하루 육체적 노동을 하여야 한다고 강조한다. 하지만 하급간부와 일반사무원에게는 허리가 휠 정도로 고된 노동의 하루요, 간부들에겐 즐거운 하루 휴식으로 둔갑했다.

북한에서의 금요일은 간부와 일반사무원과 사이에는 하늘과 땅 차이다. 북한의 주민과 사무원은 북한 전체에서 1%밖에 안 되는 고위간부와 중견간부의 노예와 머슴에 불과하다는 것을 명백하게 보여주는 것이 금요일이다.

김일성, 김정일, 김정은 3대에 걸친 독재자들은 입만 열면 인민 대중 중심 사회주의 건설, 인민을 하늘처럼 스승으로 여긴다고 하지만 북한의 당과 대중의 일심단결은 불가능하다. 간부와 일반 인민들 사이에는 경계선이 명백하게 구분된다. 지난 10 10일 김정은이 노동당 창건 70주년 기념식에서 ‘인민’이라는 표현을 거의 100차례 언급하며 인민을 무척이나 생각하는 것처럼 했지만 허울좋은 개살구일 뿐이다.

인민을 위한다면 진정한 의미의 자유를 보장하고 개혁·개방을 해야 한다

 

2015.11.02 北간부들, 토요일을 싫어하는 이유?

북한에서 간부와 사무원이 가장 싫어하고 지루하고 고달프게 여기는 날이 토요일이다. 정규 생활일이라고도 한다. 토요일이면 간부들을 정치 사상적으로 재무장시키기 위한 정치학습 날이다. 이들은 오전 8시 출근 사무실과 복도 청소, 8 30분부터 세포(당의 최하급조직) 별로 모여 앉아 세포 비서나 혹은 지도 나온 상급 당 성원의 지도하에 전체 성원들이 한 주 동안 자기가 진행한 사업과 생활에서 잘못한 것을 비판하여야 한다.

토론 때는 먼저 자기가 발췌한 김정일 어록을 읽거나 당의 유일사상 체계 확립의 10대 원칙 중 한 조항을 읽고 거기에 기초하여 한 주 동안 자기가 잘못한 것을 솔직하게 얘기하고 결함이 나타난 원인을 분석하고 앞으로 다시는 결함을 반복하지 않겠다고 결의를 다진다. 또 세포 내 다른 사람의 결함을 찾아내 서로 비판하여야 한다.

국가 주도 중요 행사나 공무로 지방 출장길이어서 생활 총화에 못 나가면 올라온 즉시에 세포 비서나 아니면 부 비서를 찾아가 개별적으로 자기 생활에 관한 생활 총화를 하여야 한다. 그리고 10시부터 상급당에서 내려오거나 단위에서 학습 강사로 지정된 초급당 비서(전문적인 유급 당 일꾼)나 부 비서가 학습을 집행하여 11 30분까지 공부한다.

점심 후 2시부터 4시까지 오후 학습을 진행, 4시부터 강연회가 진행된다.


중앙당 강연회 참가증을 가지는 사람은 단위별로 버스를 타고 중앙당 앞 평양시 보통강 구역에 있는 인민문화궁전 6000석 회의실이나 체육관에서 열리는 강연회에 참가하여야 한다. 중앙당 강연회에는 중앙당 선전비서나 부부장들이 직접 강사로 출현한다.

다른 사람은 기관에 있는 회의실이나 강당에 모여 앉아 강연회를 청취하는데 중앙당 회의실조차도 여름에는 냉방이 안 돼 창문이란 창문은 다 열어놓고 부채질해가면서 강연을 듣는다. 나올 때에는 사람들 옷이 흠뻑 젖어서 나온다. 겨울에는 너무 추워서 강연회에 참가했다가 발에 동상을 입은 사람도 있다. 이렇게 토요 정치학습일을 보내고 나면 북한의 모든 간부가 학질을 앓았다 할 정도로 넋을 잃는다

 

▲교육을 받고 있는 북한 주민들. /조선일보 DB

 

토요일과는 중앙에서부터 군급 기관까지 간부에 한하여서는 매주 토요일이면 의무적으로 참가하여야 하는 일정이다. 간부 아닌 일반 당원과 근로자의 학습은 주간에 할 수 없게 되어 한 주에 평일 한번 8시간 노동을 끝내고 저녁 한 시간씩 위에서 내려오는 학습 제목과 강연 제목을 가지고 지정된 간부가 내려와서 집행한다.

일반 근로자 학습과 강연 강사는 매주 토요일 간부 토요 학습에 참가하는 사람으로 당 조직에서 선발된 강사이다. 중앙기관 간부 토요 학습만 강사는 1년에 한 번 한 달 동안 일절 직무수행을 하지 않고 평양시 동대원구역에 있는 김일성고급당학교에 가서 정치사상학습을 먼저 하여야 강사가 된다.

인민무력부와 국가안전보위부, 인민보안부는 자기 단위의 정치대학 강습에 참가한 사람이 강사를 한다. 중앙기관과 각 도에는 당 학교를 가지고 있으며 그러한 기관 당 학교는 기관 당 비서가 교장을 겸하고 있다. 당 학교에는 당 반, 직맹(직업근로자동맹), 청년동맹반, 농근맹(농업근로자동맹)반 등 근로단체조직별 초급간부양성반이 다 있다.

이외에도 간부들이 토요일에는 문답식 학습경연이라고 하면서 당의 유일사상체계확립의 10대 원칙을 그대로 통달하는 학습을 진행한다. 이 때문에 나이 많은 간부들은 특히 그것을 외우지 못하여 고통을 겪는다. 노 간부들은 젊은 상급 간부들이나 비서들에게 욕을 먹을 수밖에 없다.

매 주 토요일 주간 생활 총화를 하고 월에 한번 월 생활 총화, 석 달에 한 번 분기 생활 총화, 반년에 한번 상 반년 혹은 하 반년 생활 총화가 있다. 1년에 한 번 연간 생활 총화가 있는데 이때는 매 사람이 토론에 참가하지 않고 당 조직에서 가장 결함이 많은 사람을 선발해 좌석에 앉아있는 사람이 서로 비판을 하게 한다. 문화성 산하 예술인을 비롯한 전국의 예술인들은 황색 바람과 날라리 풍에 빨리 물든다고 하면서 2일에 한 번씩 생활 총화를 하게 되어 있다.

이렇게 매주 토요일에 진행되는 간부들의 정치학습 날에는 당 간부이나 군인, 보위부, 보안부 등 모든 기관 사람들이 다 참여해야 하는 날이라 북한의 모든 간부는 앞에서는 말을 못하지만 삼삼오오 금요일 다음 토요일이 없어지고 일요일이 되어야 한다고 수근거린다.

북한에서 당과 수령에게 가장 충실하다는 간부를 매주 토요일마다 모여 놓고 당정책 학습과 김일성, 김정일에 이어 김정은에게 충성을 강요하는 세뇌교육은 계속되고 있다. 질릴 대로 질린 북한 간부들 속마음은 더는 자녀보다 어린 나이에 세습으로 정권을 이어받은 김정은에게 아부하지 말고 김정은 타도 운동을 해줬으면 하는 것이다.

 

2015.11.09  北일요일 자동차 몰고 나갔다가는…

북한에서 간부들과 일반주민들의 생활에서 가장 고달픈 날 중의 하루가 일요일이라고 말할 수 있다. 대한민국과 같은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한 주 중에 토요일과 일요일 휴식하면서 가족과 더불어 한 주 피로도 풀고 새로운 힘을 충전한다 할 수 있다. 그러나 북한에서는 순전히 주민들을 기만하기 위한 날이다.

노동법으로는 매주 일요일 하루 휴식일로 지정 되어 있다. 그런데 그 일요일마저도 일 년 동안을 놓고 보면 불과 휴식할 수 있는 날이 불과 5~7일 정도밖에 안 된다. 그나마 농장원들은 매월 하루씩 매달 1일에만 휴식하도록 정해져 있다.

북한에서 휴식일은 오직 김일성, 김정일 생일과 1 1, 당 창건일 10 10, 공화국창건일이라고 하는 9 9일이다. 간부들은 명절에 항상 특별경비주간이 선포되면서 소속 기관에 나가 근무해야 하며 노동자들과 일반 사무원들도 적위대 군복을 입고 ‘김일성, 김정일 동지를 따라 배우기 위한 연구실’ 밤 경비를 나가야 하는 비참한 실정이다.

북한에서 절기별로 보면 총동원일이 많다. 봄철에는 ‘모내기동원’, 여름에는 ‘김매기전투’, 가을에는 ‘가을걷이 전투’, 겨울에는 ‘퇴비생산총동원’이 연속된다. 농촌지원 기간에는 일요일에 휴식 대신 밥 먹는 사람은 너나 할 것 없이 농촌지원을 나가야 한다.

 

▲모내기 하는 북한 주민들. /조선일보 DB

 

농촌지원 기간이 아니면 월 계획수행, 분기별 계획수행을 위한 온갖 이름으로 출근하여야 하며 국가적인 동원령을 내려 일요일에는 휴식을 못하게 돼 있다. 이 때문에 북한 주민들 속에서 이제는 일요일에 휴식한다는 개념은 완전히 없어지고 말았다.

북한에서는 매년 무슨 국가적 명절이 있을 때에는 ‘100일 전투’, 150일 전투’ 등 각종 동원태세에서 일요일 휴식을 못하게 하고 남북관계가 조금만 복잡해지고 한미군사훈련이 있으면 무조건 전투동원태세가 하달된다. 이때는 일요일에도 출근하여 일하기 때문에 북한간부들과 주민들 속에서 일요일은 그림의 떡이다.

일요일이 북한 간부들에게 더 고달픈 것은 사무실은 문이 잠겨 들어가지 못하고 현장에 무조건 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현장으로 나가는 것도 승용차를 이용할 수 없으므로 자전거를 얻어 타고라도 나가야 한다. 북한 전 지역에서 일요일에는 승용차를 탈 수 없게 되어 있다. 그전에는 평양시가 일요일에 못 다니게 되어 있고 다른 지방 도시들은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날짜를 정하여 승용차 이동금지를 해오다가 2005년경부터는 전국적으로 일요일을 고정하여 승용차가 다니지 못하게 되었다.

일요일에는 교통단속을 위해 나오는 보안부 교통단속차들과 김정일의 생일 날짜인 216(지금은 727)을 앞번호로 하는 고위급 간부들 차 외 승용차는 절대로 다닐 수 없게 법으로 정했다. 이를 어기고 차를 타면 간부들도 면직까지 당할 수 있다.

특히 평양에서는 일요일에 기름을 원료로 쓰는 모든 버스도 다닐 수 없고 전기를 쓰는 궤도버스와 무궤도전차는 매월 두 번째 주와 네 번째 주 교대로 정비를 한다고 하면서 운영하지 않고 지하철은 세 번째 주 일요일에 운영하지 않으므로 북한간부들에게도 일요일은 매우 고달픈 것이다.

 

농장을 비롯하여 일요일 동원되어 나가는 곳이 대체로 평양시 주변구역으로 평균 30~50리 정도 되는데 일요일 아침에는 평일보다 더 일찍 새벽 5시경에 도시락을 가지고 걸어서 작업하러 갔다가 걸어서 저녁에 다시 집으로 돌아와야 한다. 중앙기관 간부들에겐 일요일은 참으로 고통스러운 하루이다. 이 때문에 북한에서 중앙기관 간부들도 평시에는 타지 않아도 순전히 금요노동과 일요일 동원에 나갈 때 필요한 자전거가 필수다.

일요일에는 평양시 중심도로 한가운데로 자전거가 달리는 것이 허락되었기 때문에 자전거행렬이 상당히 많다. 겨울에는 퇴비 생산 명의로 방수옷도 입지 못하고 보통강에 들어가 얼음을 깨고 바닥의 진흙섞인 풀을 퍼 올려야 하는 고달픈 작업도 해야 한다.

매년 1월 일요일마다 진행한다. 이외에도 일요일은 공휴일로 정해 월급도 하지 않는 공짜노력이다. 기관이나 공장에 다니는 노동자와 시장에 다니는 사람들도 총동원령이 하달돼 농촌지원이나 건설현장에 동원된다. 심지어 학교와 유치원에서 일요일에 학부형 동원하는 일이 다반사다.

학부형들이 학교나 유치원에서 조직하는 작업에 동원되지 않으면 아이들에게 압력을 가하고 아이들에게 일요일에 일을 시키기 때문에 부모들이 아무리 힘들고 휴식을 하고 싶어도 할 수 없이 일을 나가야 한다. 정 나가지 못할 경우에는 선생들에게 돈이라도 바쳐야 한다. 이렇게 북한에서는 여러 형태와 방법으로 일요일마다 인력동원을 하기 때문에 가족이 함께 나들이를 간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다. 휴식조차 못하고 일 년 내내 모진 정신적, 육체적 고통에 시달리기 일쑤다

 

2015.11.19  보안부 예심과정① ② 

평양 만경대 산기슭에 자리한 이곳에서 비명이…

 북한 평양시 만경대구역 봉수동 어느 산기슭. 사람 발길이 닿지 않는 곳에 국방위원회 인민보안부 예심국이 자리 잡고 있다. 인민보안부 예심국에서는 북한 전역의 특수한 사건을 취급하는 중앙예심기관으로 예심원(심문관) 50명가량과 감옥 경비원과 건물 경비를 담당해보는 경비대와 구류장을 감독 통제하는 계호대와 범죄자 후송과 재판에 감시 보호 성원으로 동행하고 참석하는 특별계호대가 있다.

군 보안서 계호대는 대장만이 군관(장교)이고 나머지는 하사관이며 도 보안국은 군관과 하사관의 혼합으로 구성되어 있다, 하지만 중앙예심국의 계호대원은 모두 중위 이상 군관이다. 북한에서는 범죄자의 범죄사항을 해당 당위원회의 체포 동의하에 검찰소에서 발급해주는 체포영장이 있어야 대기실에서 구류장으로 이송된다. 이때 머리를 깎고 체포영장이 발급된 날부터 실질적인 교화생으로 본다.

아무리 살인을 하고 중범죄를 했다 해도 범죄자의 직계가족 중 김정일이나 김정은의 친위대 경호부대인 974부대에 있거나 잠수함이나 미그-19 이상 비행기를 타는 사람과 대남공작원이 있거나 중앙당 기본부서에서 근무하고 있다면 중앙당에 보고하여야 한다. 그리고 중앙당에서 체포하지 말라는 지시가 하달되면 무조건 석방하여야 한다. 범죄자가 중범죄자이어서 처벌하여야 할 경우에는 해당 성원을 다른 부대나 기관으로 이동시키고 범죄자를 체포하여야 한다.

 

▲한동대 북한인권학회 '그곳에는 사랑이 없다'展에서 소개된 '비둘기 고문을 당하는 수용자'. /세이지 제공

 

예심국 내에서 모든 범죄자는 얼굴을 들고 상대방을 쳐다볼 수 없다. 심문을 받기 위하여 오고 갈 때에도 죄인은 90도로 허리를 굽히고 다닌다. 허리를 펴거나 얼굴을 들고 계호원을 쳐다보고 주변을 살펴보면 계호원을 때리고 도주하려 했다는 명목으로 무자비하게 구타당한다. 예심원 방에 들어가면 한쪽 구석에 가로 세로 1m밖에 안 되는 죄수실에 범죄자를 가두고 철문 자물쇠를 채우고 예심을 진행한다. 예심원 은 그곳을 토끼장이라고 하면서 범죄자를 짐승보다 못하게 취급한다.

예심을 끝내고 구류장에 들어가면 무릎을 끊고 온종일 밥 먹는 시간과 2시간에 한 번 5분 동안 몸 풀기 시간을 준다. 그 외엔 새벽 5시 기상해 밤 11시 취침하기 전까지 절대로 몸을 움직이면 안 된다. 몸을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전체 감방 안 죄수까지 한꺼번에 무릎을 꺾고 서 있게 하거나 밤에 잠을 안 재우기 때문에 같은 감방 죄수들로부터 집단구타를 당한다.

감방 안에서 집단구타를 하면 아무리 살려달라고 소리쳐도 계호원들은 모르는 척한다. 어느 정도 때렸다고 생각하면 감방에 가서 비명을 지른 죄수를 불러서 철창에 족쇄로 손을 묶어 벌 세운다.

<②편에 계속> 

 

北 감방 지하에 TNT 매설한 이유는?

<①편에서계속>

구류장에서는 일주일에 한 번 모포를 털게 하면서 바람 쐬기를 15분간 시킨다. 하지만 벌점을 받은 감방은 하지 못하게 한다. 가로 2m 세로 3m에 복도 겸 화장대가 1m인 한 개 감방에 대체로 15~20명 정도 죄수를 감금하는데 예심국에는 이러한 감방이 14개가 있다. 3개는 여성 전용이다.

북한법상 지정된 예심 기일은 두 달로 되어 있고 재판 대기 두 달 합하여 넉 달이 감방 기일로 되어 있다. 하지만 평균 6개월 정도를 예심을 하면서 고통을 주면서 1차 재판한 뒤 억울하여 상소하면 2년 동안 감방에 두고 벌주기 때문에 보통 상소를 하지 못한다.

이러한 고통을 참지 못하고 자살하려고 하는 죄수도 있다. 이들은 예심을 받으러 나가거나 현지 확인을 나갈 때 길에서 혹은 다른 사람의 옷핀이나 큰 못을 얻어서 감방에 들어와 먹는 사람도 있다. 이것을 삥을 찼다고 말한다.

전에는 삥을 차면 병원에 데리고 나가 수술해주고 죽도 먹게 해주었지만 삥 차는 사람들이 많아지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지금은 삥을 차고 배가 아파 소리를 지르고 고통스러워해도 죽으라고 그대로 내버려둔다. 두 끼를 굶기고 시래기를 한 공기 먹인다. 그리하여 대변 볼 때 나오면 좋고 아니면 배가 터진 다음에야 병원에 데리고 가기 때문에 죽는 사람도 있지만 책임지는 사람은 없다.

감옥에서 밥 줄 때도 숟가락으로 삥을 차기 때문에 손잡이를 다 끊어버리고 머리만 남은 숟갈만을 주며 칫솔도 대를 끊어버리고 준다. 감방에서는 하루 세끼 똑같으며 옥수수를 송이채로 분쇄한 가루에 콩을 섞어 삶아서 직경 10Cm, 두께 3Cm 정도로 빚은 덩어리 한 개와 소금물을 준다.

그 때문에 가족이 면회 가서 기름기 있는 음식을 먹이지 않으면 허약해 죽는다. 매주 일요일에는 사식을 먹도록 하기 위해 면회를 시키는데 음식만 받아먹고 한마디 말도 하면 안 된다.

만약 면회 중 대화를 하면 면회가 중단되기 때문에 말도 못한다. 담당예심원과 예심국 간부들에게 가족이 뇌물을 많이 주면 매일 면회 할 수 있고 종일 예심원 방에 나가서 예심원이 주는 담배도 받아 피우고 심지어 술도 마시면서 편하게 생활할 수 있다. 예심국 구류장 아래 지하에는 1000kg TNT를 매설해놓았는데 유사시가 도래(전쟁이 일어나면)하면 죄인이 총구를 돌릴 사람으로 보기 때문에 이를 폭발시켜 구류장 안에 죄수들을 다 죽이게 돼 있다.

 

2015.11.23  불타는 산① ②

北 주민들이 소똥 싸들고 밤에 산으로 가는 이유는?

북한 산 대부분이 민둥산이다. 마을과 멀리 떨어진 깊은 산과 김일성, 김정일의 혁명전적지, 혁명사적지라고 하는 장소가 있는 주변 산을 포함하여 일명 ‘구호나무’라 하는 사적물이 있는 산을 제외하고 그렇다. 이 때문에 북한에서는 해마다 조금만 비가 내려도 피해를 본다. 집들 파손은 물론 인명피해도 상당하다. 교량과 길 곳곳이 파괴되어 교통이 마비되는 현상도 끊이질 않는다.

북한에서 1995년에 시작된 일명 ‘고난의 행군’시기부터 지금까지 거의 매일 북한 전 지역에서 산불이 났다. 북한에서는 그럴 때마다 또다시 한국의 국정원에서 북한의 거의 모든 산에 있는 군부대와 군수공장을 타격하기 쉽게 하기 위하여 간첩과 매수자를 동원해 산불을 일으키고 있다고 말한다. 산불 나면 즉시 각성하여 사소한 요소가 발생하더라도 보위부나 보안서에 신고하라고 인민반과 기관, 기업소를 통해 통보하기도 하였다.

 

북한 내 산불의 대부분은 북한주민이 화전을 일구거나 집에서 음식을 하고 추운 겨울을 살기 위한 땔감을 마련하기 위해 산불을 내는 것이다. 북한에서는 산 나무를 베거나 찍다가 ‘산림보안원’에 걸리면 교화 가거나 노동단련대에 갈 수 있고 그렇지 않으면 상당한 뇌물을 바치어야 한다.

마른 가랑잎과 나뭇가지들을 비롯하여 산에 있는 것은 다 주어다 때는 바람에 더는 없고 겨울에는 혹한이 닥치니 어쩔 수 없이 주민들은 먹고살기 위하여 결국 산불을 놓을 수밖에 없다. 산불이 일어난 현장을 조사해보면 대체로 1m 정도의 깊이와 직경 50cm로 구덩이를 파고 거기에 마른 소똥에 불을 붙인 뒤 조금 젖은 가랑잎을 구덩이에 가득 넣는다. 이렇게 2시간가량 지나면 산불이 발생한다.

소똥은 불이 붙어도 불길이 일어나지 않고 쉽게 불이 죽지도 않으면서 숯불처럼 천천히 타기 때문에 가랑잎이 마르면서 불이 나기 전에 불을 붙인 사람은 산에서 내려와 충분히 대피할 수 있는 시간적 여우가 있다. 이 방법이 소문 없이 퍼지자 너도나도 농촌에 흔한 마른 소똥을 마대에 넣어서 야밤에 산에 불을 지르고 나무가 죽으면 죽은 나무를 가져다가 땔감 마련하고 화전도 일구는 것이다.

이렇게 농촌 사람들이 먹고 살기 어려워 몰래 산불을 놓는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북한에서는 밤에 산불이 나는 것을 보는 사람도 많다. 북한 당국은 이 사실을 잘 알면서도 한국 정보기관 모략으로 돌리며 남북갈등을 조성시킨다.

<②편에 계속>

 

민둥산 북한 산에 그나마 나무 자라는 곳은 구호나무 있는 산이라는 데…

<①편에서 계속>
북한에서 혁명사적지라고 하는 곳과 김정일을 찬양하여 일제 강점기 파르티잔이 써놓았다는 ‘구호나무’가 있는 곳은 보위원들과 보안원들이 항시적으로 순찰하고 감시한다. 또 그곳에는 처녀 강사들이 주둔하여 살고 있기 때문에 불을 지르기 어렵고 그곳에 불을 놓아도 화전 하기 힘들다. 만약 불을 지르다 잡히면 자신은 물론 3대가 멸족되기 때문에 그런 장소를 피하고 화전을 일구어도 좋은 장소를 택해 산불을 지른다.

‘구호나무’는 김정일이 1942 2 16일 지구에서 한 명 밖에 나올 수 없는 ‘광명성’으로 조선의 성산 백두산에서 탄생하였다는 내용과 김일성, 김정일에 의해 일본이 곧 멸망한다는 내용, 김정일을 낳은 김정숙이 조선의 여장군이라고 선전 문구가 적혀 있다. 김일성, 김정일, 김정숙이 조선의 3대 장군이라고 하면서 북한주민에게 이들 3명은 하늘이 낸 인물이라고 미화시키고 선전하는 구호가 1940년대에 적혀 있었다는 나무를 말한다.

2005
년경 북한에서는 김일성 시체가 보관된 금수산기념궁전(지금은 김정일도 보관되면서 금수산태양궁전이라고 함) 무역회사인 능라888무역회사에서 함경북도 연사군에 있는 나무를 벌채하여 중국에 수출하면서 ‘구호나무’까지 베여 중국에 수출하는 사건이 있었다.

 

▲북한 광명성절(2 16)에 군수뇌부가 금수산태양궁전에서 참배하는 모습. /노동신문

 

그러자 북한에서는 심각한 정치적 사건이라며 국가안전보위부가 직접 연사군에 내려가 수사했다. 우연히 발생한 사건이지만 당국은 이를 간첩들의 행위라 하며 무역 담당 무역회사 직원과 벌목한 벌목사업소 지배인, 당비서를 줄줄이 좌천시켰다. 그리고 구호나무를 누가 베었는지 밝혀지지 않자 그 지역 나무를 벌목한 작업반장과 노동자를 무더기로 총살하는 일명 ‘연사 구호나무’사건이 있었다.

이토록 북한의 거의 모든 산이 민둥산화 한 것은 이런 직접적인 원인이 있었다.

북한이 매해 수해를 당하면서 피해를 방지하기 위해 나무를 심으라고 하면 낮에 나무를 심었다가도 밤에 다시 뽑아서 땔감으로 쓰기 일쑤다. 우연히 심었던 나무가 살아나면 농사를 못하기 때문에 일부러 나무가 죽도록 심기도 한다. 지금도 북한 주민은 한 떼기의 화전 밭과 땔감을 얻기 위해 거주지에서 아주 멀리 찾아가 산불을 놓으면 살길을 찾는다.

 

2015.11.30 北꽃제비 누구를 말하는 것인가?

북한 꽃제비라는 단어가 어디서 나왔고 왜 떠돌며 방황하는 아이에게 붙여졌는지 모르겠지만 원래 뜻은 아름다운 단어이다. 꽃제비는 집이 없고 부모 없는 사람이나 아이만이 아니고 집에서 부모에 의해 쫓겨 나거나 부모 학대를 피해 가출한 아이와 집이 없어 가족과 방황하는 아이도 많다. 꽃제비는 동냥할 수 있는 도시에 많다. 특히 평양에 집중돼 있다.

평양에는 대략 10개 인민반에 하나꼴로 오물장이 있다. 한 개 동에 15~20개의 콘크리트로 지은 오물장이 있다. 북한에서는 한 개 인민반에 약 30여 세대가 포함돼 있어 150~200개 인민반이 하나의 동을 이룬다. 이러한 한 개 오물장에 평균 5~8명의 꽃제비가 살고 있다.

오물장에는 온갖 오물을 버리기 때문에 이들은 음식 찌꺼기를 주워 먹는다. 또 음식물이나 나물이 썩고 부패하면서 김이 올라오기 때문에 집이 없는 꽃제비가 살기 좋은 장소다. 평양시 매 오물장은 주인이 있다. 이렇게 보면 평양시 한 개 구역에 10~15개 동이 있고 평양시에 23개 구역, 군이 있으니 여기에 있는 오물장마다 꽃제비의 ‘둥지’가 있는 셈이다. 북한 전 지역에서 올라온 꽃제비 숫자가 대략 짐작할 만 하다.

평양시를 제외한 다른 시, 군에서는 기차역과 장마당을 제외하고 꽃제비가 동냥과 도둑질을 해서라도 먹고 살 만한 곳이 없다. 그래서 북한의 꽃제비 60~70%가 평양시 단속 초소들을 피해 걸어들어와서 오물장에서 산다. 평양시 기본 중심구역 아파트는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빈집 털이 방지 차원서 경비를 둔다. 이 때문에 꽃제비가 집집이 찾아다니며 동냥을 할 수 없다. 하지만 경비를 서지 않는 일요일에는 꽃제비와 장사꾼이 집집이 찾아다니며 초인종을 눌러 귀찮을 정도여서 주민들은 아예 초인종을 끄고 살기도 한다.

 

▲시내 건물 계단에서 잠을 자는 꽃제비들. /조선일보 DB

 

지방에서는 먹고 살기 어려워 꽃제비에게 동냥을 주지 않고 때려서 쫓아낸다. 하지만 평양시민은 아이를 업거나 손을 잡고 찾아오는 꽃제비를 보면 먹다 남은 밥이니 옥수수나 돈을 조금씩 쥐여주기 때문에 더욱 잘 찾아다닌다. 그런데 꽃제비가 평양시를 활보하며 거리를 어지럽힌다는 지적과 더불어 도난 사건이 수시로 나타나고 시장에서 소매치기 현상이 증가하자 동정심에서 동냥을 주던 평양시민도 꽃제비에 대한 동정은 사라지고 찾아오면 때려서 쫓아버린다.

더구나 꽃제비가 찾아와서 동냥을 주면 소문이 나서 10명 이상 다시 찾아오기 때문에 좀처럼 동냥을 주지 않는다. 차라리 음식이 남으면 오물장에 버린다. 잘 사는 간부가 사는 아파트 주변 오물장은 힘이 센 꽃제비가 차지한다.

평양 당국은 2010 9월초 4차 당 대표자회의를 소집한다고 발표한 뒤 노동당의 최하 말단 조직인 세포로부터 도당에 이르기까지 대표선출이 끝났지만 8월 중순에 김정은이 후계자로서 첫 지시를 내렸다. 평양시에서 꽃제비 거주를 금지하고 미거주자들 체포에 나섰다. 고향에서 사기를 치거나 도둑질해 수배령이 내려지고 평양에 들어와 몰래 숨어 사는 자들까지 모두 잡아들이고 대표자회의를 개최하겠다고 하였다.

북한 전 지역 검찰소, 보안서에 긴급지시가 하달돼 색출령이 내렸다. 40일 동안 평양시 전 지역에 숙박검열과 야간순찰을 진행하여 꽃제비, 불법 거주자들, 도피범을 무자비하게 잡아들여 각 구역보안서 대기실에 감금했다. 또 본거주지인 지방 도 보안국에 넘겨주거나 집결소로 이송하였다. 이렇게 평양시 오물장에서 살고 있던 꽃제비를 잡고 오물장을 정리하고서 9 28일 당 대표자회의를 개최하였다.

꽃제비에 대한 동정심이 사라졌던 평양시민도 반감이 생겼다. 새로운 후계자가 등장하면 대체로 주민에게 먼저 배려정치를 해왔는데 방황하며 사는 꽃제비에게 먹을 것을 주며 데려가기는커녕 때리며 잡아가는 모습을 보고 동정했다고들 하였다. 이렇게 2010년 당 대표자회의를 계기로 평양시에서 꽃제비를 청산하였다고 하지만 1년 정도 지나자 다시 나타나기 시작했다.

꽃제비를 색출했지만 이들이 범죄가 없기 때문에 교화소에 보내지는 못하고 평양시에 불법 거주했다는 죄로 각 지방 노동단련대나 집결소에 보내여 강제노동을 시켰다. 구호소라고 하는 집단경유지로도 보냈지만 구호소 자체가 많은 꽃제비의 식량을 조달하기 어려워 다시 내보내자 이들은 다시 평양으로 모여들었다. 공산주의자들이 즐겨 부르는 ‘인터내셔널’ 노래에는 하느님도, 임금님도, 영웅도 거지를 구제하지 못한다고 돼 있다. 북한은 꽃제비를 방치하고 오히려 탄압하는 비참한 현실이다.

 

2016.01.12 김정은이 북한 인민무력부장들을 계속 숙청하는 이유

북한에서는 김정일이 그 어느 나라에도 없는 선군의 기발을 높이 들고 ‘선군정치’를 펴나가면서 ‘고난의 행군’을 타개하였다고 선전을 했다. 3대 세습자인 김정은도 아버지처럼 선군정치를 이어가겠다고 선포했다.

김정일은 김일성 사망 후 북한의 당·군·정 모든 권력을 장악하고, 1995 1 1일 평양시 만경대 구역에 있는 인민군대의 다박솔(키가 작은 소나무가 많이 있는 곳) 중대를 시찰한 것을 시작으로 ‘선군정치’를 시작했다. 1998년에 국방위원회 위원장이 된 김정일은 총대로 정권을 세우고 총대로 정권을 지킨다고 하면서 자기는 인민군대를 주력으로 조선혁명을 완수한다고 공식 선언하였다.

선군정치는 처음에는 인민군대가 ‘조국보위도 사회주의 경제건설도 우리가 다 맡자!’라는 구호를 하게 하면서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김일성 사망 후 최고사령관의 명령으로 처음으로 나온 것이 금릉2동굴과 청류다리 공사를 인민군대가 맡아 진행하라는 명령이었다. 이것을 시작으로 군인들을 국가건설에 투입하도록 하였다. ‘빨찌산’ 출신들인 오진우와 최광이 인민무력부장 겸 총정치국장으로 임명되면서 군의 행정과 정치를 총괄했는데, 1997 2월 최광이 사망하자 공군사령관으로 있던 조명록을 조선인민군 총정치국장으로 임명하면서 인민무력부장과 총정치국장을 분리했다.

또한 조선인민군 총참모장으로 김영춘을 임명하면서 총참모장이 작전국, 정찰국, 장비국을 비롯한 전투국들과 현역군단들을 지휘하게 하고 인민무력부장은 후방총국, 대열보충국, 대외사업국 등 부차적인 보장사업만 보게 하고 군 간부서열에서도 3번째로 밀려나게 되면서 군 권력을 상실하게 되었다. 이렇게 되면서 최광이 인민무력부장이던 시절까지는 인민무력부장이 막강한 권력을 소유하였지만, 김정일이 이후 군을 두려워하며 권력을 각개분산시키면서 인민무력부장은 거의 무용지물이 되고 병졸 없는 장군이 되고 말았다.

▲북한군 병사들이 이동하는 모습. /조선일보 DB

 

결국 ‘선군정치’가 선포되면서 총을 들고 군사훈련을 하여야 할 병사들이 10년동안 총은 한 번도 쥐어보지도 못하고 공사에만 동원되어 일만 하다가 제대하거나 일을 하다가 사고로 죽거나 굴이 무너지면서 팔, 다리가 부러지는 현상이 많이 나타났다. 식량보장도 제대로 못해 탈영병들과 도적, 강도가 성행되면서 외부세력으로부터 나라를 지키고 주민들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는 군대가 아니라 약탈하는 ‘토벌대’가 되고 말았다.

또한 김정일은 한두 사람에게 군의 통수권이 집중되는 것을 싫어하고 군에 공포심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군권을 분리시키면서 군 지휘관들에게는 힘을 주지 않고 정치지휘관들과 보위사령부에 힘을 실어주면서 군부파가 형성되기 시작했다. 군부파의 수장이었던 전 인민무력부장 김일철, 총참모부 작전국장이었던 리명수, 당시 2군단장이었던 김격식을 비롯한 군부파는 김정일의 선군정치를 철폐하고 군대의 병력수도 대폭 줄여 군대가 건설에는 동원되지 말고 군으로서의 사명만 수행하길 원했다. 정치지휘관들과 보위부가 군대에 대해 갖는 실권을 없애고 군 지휘관들에게 힘을 주어야 ‘일당백’의 군대로 키울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결국에는 김정일의 눈 밖에 나서 밀려나고 숙청되기 시작했다.

김정일 집권 시기에는 김정일이 철통같은 독재정권을 수립하였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참고 지내다가 김정은이 다시 ‘선군정치’를 하겠다고 하니 거기에 이미 쓴맛을 본 군인들은 응당 반대를 하게 됐다. 김정일 사망 후에 김정은은 자기의 나이가 어리다는 자격지심으로 더욱더 ‘선군정치’에 매달리면서 군인들에게 군 권력을 주지 않고 군대와 작전에 대해서는 하나도 모르는 정치지휘관들과 사람잡이만 할 줄 아는 보위사령부에만 권력을 주었다. 그 결과 군부의 이익을 주장할 수밖에 없는 인민무력부장들은 1년도 못하고 계속 교체되어 숙청되는 비극적인 운명을 맞았다.

총참모장을 하던 김영춘과 총정치국 조직부국장을 하던 김정각도 처음에는 ‘선군정치’를 지지하다가 본인들이 인민무력부장 자리에 앉고 보니 그것이 아니라는 것을 느끼고 반대하다가 해임됐다. 처음부터 ‘선군정치’를 반대하던 군부파들은 숙청되고 현영철은 결국 총살까지 됐다. 이렇게 ‘선군정치’라는 것은 김정일 집권 시기에 일명 ‘고난의 행군’이 시작되자 일시키는 노동자들에게 월급도 주고 식량도 주어야 하겠는데 그럴 형편이 되지 않자 월급도 가족의 식량공급도 필요 없는 군대를 국가대상건설에 동원시킨 것이다. 또 군사지휘관들에게 권력이 집중되는 것을 막고 정치지휘관들과 보위사령부에 군권이 분산되어 김정일에게 반기를 들 수 없게 만든 것이 소위 ‘선군정치’이다. 군대가 당과 행정권을 지휘한다는 의미가 아니라는 것이다.

김정은 집권 3년 동안에 김영춘, 김정각, 김격식, 장정남, 현영철 등 인민무력부장들과 이전 총참모장이었던 이영호와 같은 군인들이 계속 숙청되거나 해임된 것은 이러한 ‘선군정치’의 당연한 귀결이다. 때문에 김정은이 ‘선군정치’를 계속한다면 앞으로도 군부에서 반대파가 계속 나오게 되어 있다. 김정은은 자기 권력의 절대화와 장기화를 실현하기 위해서 북한 전역에서 조금이라도 자기를 반대하는 사람들에 대한 숙청을 끊임없이 진행하게 될 것이다.

 

2016.01.25 물부족으로 아파트 고층을 기피하는 평양 시민들

물은 그 어느 나라나 지역 할 것 없이 인간을 비롯한 모든 생명체들의 생활에 없어서는 안될 필수품중 가장 중요한 요소이다. 하지만 북한에서는 물이 북한주민들에게 가장 큰 아픔과 고통을 주고 있다. 북한 주민들이 충분이 먹고 살 수 있는 물이 북한에는 많이 있지만, 그것이 효과적으로 공급되지 못하고 오히려 피해만 주고 있는 것이다.

강하천 관리를 제대로 하지 않아 평양시 보통강은 북한주민들이 똥강이라고 부를 정도로 처참하게 오염되어 온갖 벌레만을 양성하여 평양시 주민들에게 고통을 주고 있다. 평양시민들에게 음료수를 보장해주는 대동강도 너무 오염되었고 그 물을 제대로 정수를 하지 못하여 수도로 공급하는 수돗물 속에서 흙과 지렁이가 섞여 나오고 맑은 물이 아니고 항상 뿌연 물이 나오며 소독약 냄새도 강하다. 그나마 그래도 평양시는 중심구역에 수도시설이 설치되어 수도는 집집마다 있다. 하지만 전기가 오지 않아 하루에 오전과 저녁에 각각 1시간씩만 수돗물을 보내준다. 그래서 온갖 그릇들에 물을 받아놓고 사용하여야 한다. 때문에 평양시민들은 집이 생기면 제일 먼저 공사를 하는 것이 1t이상 물을 담을 수 있는 물탱크를 세면장에 만드는 일이다.

 

▲북한 물 공급 현장. /조선일보 DB

 

주민들의 생활은 안중에도 없고 자기들의 권력 강화에만 몰두하는 김정은과 고위간부들은 옥류약수, 강서약수, 신덕, 양덕샘물이 나오는 곳에 다른 주민들은 출입도 못하게 막아놓고 자기들만 따로 먹는 음료수로 지정해놓았다. 또 막대한 돈을 탕진하며 수영장과 온천탕까지 만들어놓고 호화롭게 살지만 일반 주민들은 물로 인한 고생이 너무나 심하다. 오죽했으면 북한 주민들이 세 개의 ‘ㄹ’을 마음 놓고 걱정 없이 써보았으면 이제 당장 죽어도 한이 없겠다는 말들을 하겠는가.

세 개의 ‘ㄹ’은 받침에 ‘ㄹ’이 들어가는 물, , 쌀이다. 먹을 음료수는 모자라지만 많은 량이 아니라서 그런대로 유지한다. 하지만 생활용수의 경우 특히 고층아파트에서는 물이 없으면 세탁을 못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화장실을 이용하고도 물이 없어 온 집안과 그 집에서 사는 사람들의 몸에 냄새가 배여 밖에 나와서도 다른 사람들과 접촉하기 힘든 경우가 있다. 특히 김일성의 고향이라고 하는 만경대 구역 광복거리에는 사람들이 다니다가 인분벼락을 맞는다는 소문이 자자하고 밤에는 다니지 못하고 있다.

광복거리에 사는 사람들은 물이 안 나오자 대변을 비닐봉지에다 보고 창문 밖으로 던지기 때문에 길을 가다가 그것을 맞은 사람들이 수두룩하다. 지금 북한에서 53층짜리 아파트를 비롯하여 높은 고층 아파트를 건설하여 북한 과학자, 일반 주민들에게 무상 공급하였다고 홍보를 하지만 실제로 평양시 주민들은 아파트 10층 이상 올라가 사는 것을 누구도 원하지 않는다. 특히 간부들은 물 고생이 심한데다 전기가 안 오면 걸어 올라가야 하기 때문에 누구도 그런 집에서 살지 않는다.

 

▲북한 평양의 고층 아파트. /조선일보 DB


북한에는 지금도 조선시대처럼 물지게 장사꾼이 존재하고 있다. 특히 평양에서는 물10리터가 북한 돈으로 1000원에 팔리며 샘물이나 약수는 외화로 거래되고 있다. 간부들은 자기 집에 물이 떨어지면 소방차를 불러 모든 그릇에 물을 담아 보관하여 사용한다. 이렇게 고통을 겪으면서도 그래도 평양은 매일 조금씩 물을 보내주지만 지방은 일부 당, 보위, 보안기관을 제외하고는 수도화가 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강이나 개울물을 그대로 가져다가 먹는다.

강이나 개울이 없는 지방은 저수지나 논밭에서 흐르는 물을 그대로 먹는 지방도 많이 있으며 거의 대다수가 부락마다 우물을 파서 이용한다. 그래도 좀 나은 집은 쫄장을 박아 펌프를 사용하고 있다. 오히려 깊은 산골은 오염되지 않은 맑은 물이 산에서 흘러내리는 것을 그대로 사용하기 때문에 물 문제에서 평양보다 좋은 곳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평양시를 비롯한 북한 전 지역의 간부 집들과 돈 있는 사람들이 외국산 정수기를 사놓은 사람들도 많지만 전기가 오지 않아 제대로 사용할 수 없다.

북한 주민들은 음료수도 오염된 물을 사용한다. 그리고 밥을 짓고 그릇을 씻는 물도 부족하다. 그래서 그릇도 한번 대층 닦고 그대로 사용하는 정도이다. 세탁은 세탁기가 있어도 전기와 물이 부족하여 집에서 하기 힘들어 여름이나 겨울이나 강과 개울에 나가서 언 손을 불어가며 빨래를 하며 고달프게 생활하고 있다. 이렇게 북한 주민들은 다른 것은 못해주어도 물 문제만 해결되면 생활에서 다소 고통을 줄일 수 있다. 하지만 당은 다 해준다고 인민들을 우롱하고 유혹만 하고, 실제로는 하나도 해결해주지 않기 때문에 많은 원한을 품고 있다.

오래전 김일성 때부터 여성들을 무거운 부엌일에서 해방시켜주는 것이 당의 의무이며 목표라고 말하고 있다. 하지만 아직도 북한 사람들은 인간생활의 초미의 문제인 음료수와 생활용 물 부족으로 악조건에서 인간 이하의 생활을 하며 죽지 못해 살아간다고 이구동성으로 말들을 하고 있다.◎
- 김철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