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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진단 18/ 만남의 역사 - 남북 대화 및 이산가족 상봉 - 남북 비교 - 햇볕정책은 실패했다 - 2017.12.08 [김은성 전 국정원 차장 ] "DJ 청와대 지시받고 6개 은행 동원해 3000억 조성했다"

상림은내고향 2021. 10. 25. 22:05

북한 진단 18/ 만남의 역사  햇볕정책

■ 만남의 역사 - 남북 대화 및 이산가족 상봉

2015.08.25  사진으로 본 남북회담의 역사

▲1972년 7월 4일 이후락 중정부장이 북한과 합의한 7개항의 남북공동성명을 발표하고 있다.

 

 

▲1972년7월4일 남북한은 분단 4반세기만에 처음으로 72년 5월이전부터 정치적 레벨의 비밀협상을 계속추진한 끝에 자주적인 평화통일원칙등 7개항에 합의 이를 공동성명으로 서울과평양에서 동시에 발표했다.

 

7.4 남북공동선언 

1972년 7월 4일 오전 10시 남북 간 정치적 대화통로와 한반도 평화정착 계기를 마련하기 위해 발표한 남북한 당사자 간의 최초의 합의 문서이다. 

 

 

▲1972년 8월 29일 남북적십자 회담이 열리고 있는 평양으로부터 전송사진을 수신하기 위해 서울의 적십자 연락 사무실에 수신장치를 가동하고 있는 동양통신.

 

남북고위급회담

2000년 6월 13일, 평양 순안공항에 도착한 김대중 대통령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반갑게 맞이하고 있다.

▲남북정상회담 

6.15선언

1948년 한반도가 분단된 이후로, 두 당국의 대표가 처음으로 만난 회담이다. 김대중은 이 정상회담과 햇볕정책을 통해 한반도 평화를 증진시킨 공로로 2000년 노벨 평화상을 받았다.

 

〈6·15 남북 공동 선언〉은 대한민국의 대통령 김대중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방위원장 김정일 사이의 회담을 통해 5개 조항으로 작성되었다. 이 안은 남북한의 체제공존을 인정하고 있다는 점에서 남북연합과 일정부분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10.4선언

이후 2007년 10월 4일, 2차 회담에서는 평양개성고속도로를 통한 육로 방문이 합의되었고, 일정 첫 날인 10월 2일 9시 5분 대한민국의 대통령 노무현은 국가 원수로서는 최초로 도보로 군사분계선을 넘어갔다.

 

▲2000년 7월 30일 서울 신라호텔에서 열린 제 1차 남북 장관급회담에 앞서 남측 박재규 통일부 장관(오른쪽)과 북측 전금진 단장이 악수를 나누고 있다.

제 1차 남북장관급회담

 

2000년 7월 29일부터 31일까지 서울에서 진행되었다. 회담에서 쌍방은 남북 정상들의 역사적인 평양 회담과 6.15 남북공동선언의 중대한 의의를 강조하고, 공동선언을 성실히 이행해 나가기 위하여 합의하였다.

 

 

▲1985년 9월 21일, 남북 이산가족 고향방문단 및 예술공연단교환 공연. 기자들이 북에서 온 아들 서형석씨와 노모 유묘술씨를 취재하고 있다.

 

 

▲2014년 2월 22일, 오전 금강산호텔에서 열린 작별상봉에서 박운형 할아버지(93)의 아들 박철 씨가 북측 가족들에게 큰절을 올리고 있다.

 

남북이산가족상봉 

남북 이산가족 상봉은 1971년 8월 12일에 대한민국의 대한적십자사가 한국전쟁 또는 한반도 분단 때문에, 남과 북으로 헤어져 살고 있는 이산가족들의 실태를 확인하고, 서로 소식을 전하거나 상봉을 하기 위한 목적으로 실시한 〈이산가족찾기 운동〉을 계기로 시작되었다.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적십자사간의 합의에 의하여 1985년 9월, 서울과 평양에서 최초로 이산가족 고향방문단과 예술공연 교환 행사가 이루어졌으며, 최근에는 2014년 2월에 이산가족 상봉 행사가 진행된 바 있다. 

사진/ 조선일보 DB

 

2000년 남북 정상회담 당시 북한군 의장대 사열

▲역사적인 남북 정상회담이 열리는 오는 27일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국군 의장대 사열을 하게 된다. 사진은 2000 6 13일 남북 정상회담 당시 북한군 의장대 사열 모습

 

▲1차 남북정상회담. 2000년 6월 13일 평양순안공항에 도착한 김대중대통령과 직접 영접나온 북한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포옹하고 있다

 

1▲차 남북정상회담. 2000년 6월 13일 김대중 대통령과 북한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평양 백화원 영빈관에서 열린 남북정상회담에 앞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1차 남북정상회담. 2000년 6월 13일 평양순안공항에서 김대중대통령과 북한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북한군 의장대를 사열하고 있다.

 

▲1차 남북정상회담. 2000년 6월 14일 김대중 대통령과 북한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평양 백화원 영빈관에서 열린 정상회담에서 합의문 서명 후 맞잡은 손을 들어올리고 있다.

 

▲1차 남북정상회담. 2000년 6월 15일 김대중 대통령과 북한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평양 백화원 영빈관 1호각에서 열린 대표단 환송오찬에서 활짝 웃으며 건배하고 있다.

 

▲2차 남북정상회담. 2007년 10월 2일 평양 4.25 문화회관 광장에서 노무현 대통령과 북한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북한군 의장대를 사열하고 있다.

 

▲2차 남북정상회담. 2007년 10월 2일 평양 4.25 문화회관 광장에 도착한 노무현 대통령과 북한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악수하고 있다.

 

▲2차 남북정상회담. 2007년 10월 3일 노무현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백화원 영빈관에서 열린 정상회담에 앞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2차 남북정상회담. 2007년 10월 4일 노무현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백화원 영빈관에서 열린 환송오찬에서 환한 표정으로 대화하고 있다.

 

▲2차 남북정상회담. 2007년 10월 2일 노무현 대통령과 권양숙 여사가 2007 남북정상회담을 위해 평양으로 향하며 군사분계선을 도보로 넘고 있다.

 

▲2차 남북정상회담. 2007년 10월 3일 노무현 대통령 내외와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백화원 영빈관에서 열린 정상회담에 앞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본 기사는 조선닷컴에서 작성된 기사 입니다

 

2015년 08월 19일  지뢰에 당하고… 돈은 더 주고… 대화에 목매고…

개성공단 임금인상 논란

최저임금 5% 인상 합의

돈 상당부분 당국서 유용

 

지뢰도발 관련 군사회담

남측 제의는 거부 가능성

 

유엔군 사령부 군사정전위원회가 비무장지대(DMZ) 지뢰도발사건과 관련 북측에 장성급 군사회담을 제의했지만, 북한이 이를 거부할 것으로 전망된다. 북한이 개성공단 임금인상에는 합의하며 실리를 취하면서도 천안함 폭침 때와 같이 군사 도발에 대해서는 ‘모르쇠’로 일관하며 또 다른 도발을 준비하는 이중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19일 한 대북소식통은 “북한이 이번 군정위의 군사회담을 받아들일 가능성이 없어 보인다”면서 “천안함 때와 같이 도발을 부인하고 각종 증거에 대해 침묵하면서 남한 사회의 분열을 꾀하는 전략을 쓰고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군정위는 지난 10일과 13일 2차례 북측에 장성급 군사회담을 제의하는 메시지를 전달했지만, 북한은 이에 응하겠다는 의사표시를 하지 않았고 향후에도 응하지 않을 것으로 알려졌다. 군정위는 지난 2010년 3월 천안함 폭침 사건 직후에도 북측에 장성급 군사회담 개최를 제안했으나 북한은 회담을 거부했다. 장성급 군사회담은 2009년 3월 열린 이후 한 번도 열린 적이 없다. 이같이 휴전선 부근의 긴장감이 높아지는 상황에서 북한은 지난 6개월간 지지부진했던 개성공단 임금협상에는 17일 전격 합의했다. 이와 관련 북한이 10월 10일 노동당 창건일 등 각종 기념일에 필요한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일단 실리를 취했다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양욱 한국국방안보포럼 연구위원은 “북한은 현재 10월 당 창건일에 모든 초점을 맞추고 있기 때문에 그 분위기를 반전시킬 우려가 있는 군사회담 등에 응하지 않을 것”이라며 “현금을 빠르게 얻을 수 있는 개성공단 임금 인상은 협의해 이를 각종 행사에서 활용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천안함 때도 이 같은 북한의 태도 때문에 해결된 것이 없고, 도발은 계속 이어졌다”면서 “우리 정부는 더욱 고강도의 압박을 가해야 하며, 확성기를 통한 대북심리전도 확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개성공단은 기업들이 동남아 등보다 우수한 노동력을 저렴한 가격에 공급받는다는 장점이 있다. 그러나 북한 당국이 현금인 인건비를 일괄적으로 받은 후 근로자들에 지급하는 방식이기 때문에 이 과정에서 당국이 임금 일부를 유용하고 있다는 지적은 계속돼왔다. 북한은 근로자 임금에서 각종 세금 명목으로 30%가량을 걷는다. 나머지 임금 역시 일반 근로자들과 개성공단 근로자 간 임금격차가 크다는 이유로 생필품으로 지급하고 있다. 당국의 사정에 따라 조정될 수 있기 때문에 유용이 쉬운 구조라는 것이다. 유현진 기자 cworange@munhwa.com

 

2015.08.25 남북공동보도문

남북 공동보도문 1.남과 북은 남북관계를 개선하기 위한 당국회담을 서울 또는 평양에서 빠른 시일내에 개최하며 앞으로 여러분야의 대화와 협상을 진행해 나가기로 했다. 2.북측은 최근 군사분계선 비무장지대 남측지역에서 발생한 지뢰 폭발로 남측 군인들이 부상을 당한 것에 대하여 유감을 표명하였다. 3.남측은 비정상적인 사태가 발생하지 않는 한 군사분계선 일대에서 모든 확성기 방송을 8월25일 12시부터 중단하기로 하였다. 4.북측은 준전시 상태를 해제하기로 하였다. 5.남과 북은 올해 추석을 계기로 이산가족 상봉을 진행하고 이를 위한 적십자 실무접촉을 9월초에 갖기로 했다. 6.남과 북은 다양한 분야에서 민간교류를 활성화하기로 했다

- 안준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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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대통령은 25일 북측이 지뢰 도발에 대해 유감을 표명하고 남측은 대북 확성기 방송을 중단키로 합의한 데 대해 “이번 합의는 우리 정부가 북한의 도발에 단호히 대응한다는 원칙을 일관되게 지켜나가면서 다른 한편으로 대화의 문을 열어놓고 문제 해결을 위해 노력한 결과”라며 “이번 합의가 앞으로 남북 간의 신뢰로 모든 문제를 풀어나가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고 민경욱 청와대 대변인이 전했다.

 

박 대통령은 “북한이 확성기 통한 심리전 중단을 요구했지만 정부는 흔들림 없이 원칙을 고수하면서 회담에 임했다”면서 이렇게 말했다. 박 대통령은 또 “그동안 북한 지뢰 도발과 연평도 포격 도발 등 각종 도발로 끊임없이 우리 국민들의 안위가 위협 받아왔다”며 “이런 상황을 더 끌고 가지 않기 위해서는 이번에 북한의 확실한 사과와 재발 방지 필요하다고 판단했다”고 밝혔다.

 

박 대통령은 이어 “정부와 군을 믿고 큰 동요나 혼란 없이 차분하게 일상 생활에 임한 국민들의 단합되고 성숙된 대응이 당국자 접촉에서 의미 있는 결과를 가져왔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이제부터 중요한 것은 이번에 남북이 합의한 구체적인 사업들이 후속 회담들을 통해 원활하게 추진돼서 남북 간의 긴장이 해소되고 한반도 평화와 발전을 위한 전기가 마련되도록 하는 것”이라고 했다.

 

박 대통령은 “무엇보다 분단으로 인한 이산가족의 고통부터 치유하고 남과 북이 서로 교류하고 민간 활동이 활발해져서 서로 상생의 기회 가질수 있도록 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남북은 올해 추석을 계기로 이산가족 상봉을 진행하고 이를 위한 적십자 실무 접촉을 9월 초에 갖기로 합의했다.

이동훈 기자

                                                

 

이번 공동보도문을 통해 남한이 획득한 영구적인 가치가 있다.  북한의 “유감”보다 “비정상적 사태”란 문구이다. 이는 군사도발은 물론 북한의 모든 비정상적 행위를 대북방송으로 제압하거나 길들일 수 있는 합법적 근거를 공개 문서화한 셈이다. 

 

즉 과거 박왕자씨 피살사건이나 개성공단 폐쇄협박처럼 우리 민간인을 향한 비정상적 사태가 발생했을 경우에도 대북방송의 지렛대로 활용할 수 있는 분명한 지지점을 만들어 놓은 것이다. 

 

북한의 이념통치는 크게 수령 신격화와 남한에 대한 주적교양으로 구성돼 있다. 만약 수령께 충성하지 않으면 누구라도 배신의 원수로 처단하겠다고 그어놓은 북한 내부의 분단 휴전선인 것이다. 그 체제연명을 위해 북한은 기어이 다시 도발할 수밖에 없는 고약한 체질이다. 

 

그래서 “비정상적 사태”란 문구에 라선형으로 집약시킨 이번 대북방송의 잠정 중단 모양은 언제든 즉시 거세게 다시 튕겨 일어날 수 있는 용수철이라고 볼 수 있다. 다만 이를 위해 우리 정부가 지금부터 차곡차곡 준비해야 할 것들이 있다.

 

우선 전연지역 대북심리전방송이 단순히 군 심리전 개념이 아닌 총체적인 분단 관리 개념으로 확대될 수 있도록 새 용어부터 미리 생각해 둬야 한다. '통일방송' 내지 '평화의 방송'이라고도 할 수 있다. 

 

우리측 지역인 ‘평화의 집’에서 합의된 공동보도문이어서 북한이 약속을 뒤집으면 그 책임을 추궁하는 압박의 의미로 탄생시키면 충분히 영구고착 될 것같다.

 

다음은 단계화 전략이다. 그 첫 걸음은 이번 공동보도문 1항의 실행 주도권이다. 빠른 시일 내에 서울이나 평양에서 당국회담을 개최하여 여러 분야에 걸쳐 대화와 협상을 진행하자고 한 것만큼 그 기회를 이용하여 우리가 원하던 것들을 과감히 제안해야 한다. 

 

북한이 수용하면 좋은 일이요, 거부해도 상관없다. 남한 주도의 평화 피로감이 쌓일수록 북한 권력층은 체제불안에 전전긍긍 수밖에 없다. 그걸 만회하기 위해 지금껏 내부결속 충전용으로 온갖 도발을 반복해 왔는데 이제는 비굴한 정치꾼들이 항상 북한에 대화를 구걸하던 한심한 한국이 아니다. 

 

이번 고위급회담을 통해 온 국민, 아니 전세계가 직접 눈으로 본 대북심리전 핵폭탄을 대한민국이 보유하고 있지 않는가,

 

그렇듯 평화의 단계를 과감한 제안과 실행압박으로 계속 격상시키면 가진 것이란 선군정치밖에 없는 북한은 또다시 물리적 억제력을 운운할 수밖에 없고, 그러면 우리는 고작 전원 스위치 하나로 평화의 더 큰 양보를 또다시 추가로 얻어낼 수 있다.  

 

이번 남북고위급회담 공동보도문에서 크게 아쉬웠던 점은 우리 정부가 북한의 “사죄”대신 “유감”이란 표현을 허용한 점이다. 처음부터 김정은 최고사령관, 혹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호 명의로 된 구체적 명시의 ‘최고사죄’로 압박하여 북측 명시의 ‘일반사죄’로 양보해도 충분히 가능했을 것이다. 

 

전쟁하겠다면서도 전쟁에 반드시 있어야 될 군 최고 대표자인 황병서를 남한에 보낼만큼 다급했던 북한이었으니 말이다. 더구나 중국의 야심찬 전승 열병식을 앞두고 잘 못 선택한 북한의 전쟁선포 시간이 남한에는 분초마다 정치외교의 귀한 이익이었는데도 말이다. 

 

어차피 저들이 뱉어놓은 48시간에 쫒기던 북한인데 한숨 자고 낼 만나자고 해도 될 남한의 여유를 나흘간의 마라톤회담으로 북한에 조금씩 빼앗긴 결과가 아닌가 싶다. 

 

또한 개인적으로 불필요했다고 느껴졌던 조항은 제4항이다. 북한이 준전시상태를 해제하기로 했다는 내용인데 그 4항이 공동보도문 전체의 전제로 역이용될 가능성이 있어서이다. 

 

북한이 유감표명을 했기 때문이 아니라 마치 준전시 상태 해제 조건으로 대북심리전 방송이 굴복해서 숨 멎은 것처럼 북한내부 선전용의 근거가 될 소지가 크다. 2항에서 북한이 고개를 숙였는데 굳이 준전시 상태 해제를 문서화 할 필요까지 있었나 싶다. 

 

5항인 이산자가족 상봉준비를 위한 실무접촉이나 6항인 민간교류 활성화는 여러 측면에서 생산성이 있다고 본다. 북한의 “유감”을 넘어 평화의 양보까지 덤으로 받아냈다는 의미에서, 그리고 차후 “비정상적 사태”를 추궁하고 대응할 수 있는 우리 주도의 넓은 영역을 그려놓았다고 평가할만하다. 

 

무엇보다 이번 남북고위급회담 공동보도문의 최고성과는 우리 국민에게 보여준 평화의 자신심이라고 본다. 선한 평화가 아니라 강한 평화가 궁극엔 국가와 개인의 명운도 지켜준다는 너무도 당연한 그 진리의 과시였다고 말이다.   

장진성 뉴포커스 발행인 

 

2016년 06월 14일  73% “北정권과 대화 불능”… 70% “통일, 개인 도움안돼”

보훈처·정치학회 1600명 설문  

김정은 核프로그램 집착에  

학습효과 쌓여 신뢰도 저조  

20·30대 상대적으로 불신 커  

 

55% “통일,남한에 이익”불구  

자신에 도움될거라는 인식 낮아 

 

73%의 국민은 통일 논의 상대로 북한 정권을 ‘대화와 타협이 가능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으로 조사됐다. 또 우리 국민은 북한을 지원과 협력 대상이라기보다는 적대와 경계 대상이라고 인식하는 경향이 강한 것으로 나타났다.  

 

하지만 ‘통일이 자신들에게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라는 응답이 70%에 달해 통일·안보 교육 등 나라사랑 교육과 정책 수립의 방향 전환 논의가 필요한 것으로 지적됐다.

 

국가보훈처와 한국정치학회가 한국리서치에 의뢰한 ‘한국사회 내 갈등 요인과 통일에 대한 유권자 인식조사 교차분석’ 자료를 토대로 장승진 국민대 정치외교학과 교수가 분석한 결과에 따르면 우리 국민의 북한 정권에 대한 신뢰도는 크게 낮은 것으로 파악됐다. 과거 김대중·노무현정부에서 햇볕정책을 통해 대북 지원에 나섰지만 북한이 핵무기와 미사일 개발 프로그램을 포기하지 않은 상황에 관한 학습효과가 쌓여 김정은 정권에 대한 신뢰도가 낮아진 것으로 파악된다. 조사는 지난 4월 20일∼5월 12일 전국 성인남녀 1600명을 상대로 실시됐다.  

 

장 교수는 ‘청년층의 통일의식과 결정요인’ 보고서에서 북한 정권 신뢰도를 분석한 결과 ‘대화와 타협이 가능하다’는 응답비율은 26.8%, ‘대화와 타협이 가능하지 않다’는 73.2%로 나타났다. 국민 10명 중 7명은 북한 정권과의 통일 논의 자체가 이뤄지기 어렵다고 판단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 같은 북한 정권에 대한 낮은 신뢰도는 85%의 응답자들이 ‘북한 주민들은 우리와 같은 민족’이라고 생각한 것과는 대조를 이뤘다.  

 

특히 20대와 30대의 북한 정권에 대한 불신이 높았다. 연령대별 분석 결과 20대와 30대는 각각 76.1%와 75.8%가 ‘대화와 타협이 가능하지 않다’고 답했다. 다음은 60대(74.0%), 40대(70.1%), 50대(69.9%) 순이었다. 이 같은 응답비율은 20대와 30대가 더 이상 북한 체제에 대한 환상을 갖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하지만 우리 국민은 통일이 국가 전체 차원에서는 이익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이익이 자기 자신에게 개인적으로 돌아올 것이라고 기대하지 않는 것으로 조사돼 눈길을 끌었다. ‘통일이 대한민국에 얼마나 이익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는가’를 묻는 것에는 응답자의 55%가 긍정적으로 답했다. ‘통일이 사회적으로 전혀 이익이 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는 응답자는 8.2%에 불과했다. 이에 비해 ‘통일이 자신에게 얼마나 이익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는가’라는 질문에 긍정적으로 답한 응답자는 30%에 그친 반면에 70%의 응답자는 ‘통일이 자신에게 이익이 되지 않을 것’이라고 답변했다. 

 

장 교수는 “한국인의 통일의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특징은 20∼30대 청년층의 상대적으로 낮은 통일의식”이라고 지적했다. 장 교수는 “이들의 통일의식이 40대 이상 장년층에 비해 상대적으로 낮은 원인은 북한 주민이 같은 민족 또는 동포라는 동질성을 덜 느끼는 동시에 북한 사회에 대한 지식수준 역시 상대적으로 낮게 나타났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그는 “앞으로 한국사회 통일교육은 청년층에 더 이상 통일의 당위를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통일이 이뤄져야 할 이유를 새롭게 고민하고 이를 청년층의 삶의 문제로 연결하는 질적 변화가 요구된다”고 조언했다. 

 

조원빈 성균관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한국사회 계층갈등과 남북통합’ 보고서에서 북한에 대한 인식을 조사했다. 응답자들은 지원대상에 4.18점, 협력대상에 4.83점, 적대대상에 5.76점, 경계대상에 6.70점을 부여했다. 0점은 전혀 동의하지 않는 경우고, 10점은 전적으로 동의한다는 의미다. 조 교수는 “정부는 대북정책이나 통일정책을 수립하고 집행할 때 국민의 적극적인 지지를 획득하기 위해서는 일반 국민이 피부로 느낄 수 있는 정책 내용을 포함해야 한다”고 밝혔다. 

정충신 기자 csjung@munhwa.com 

 

2015-08-10  남북 군사회담의 산증인 김국헌 전 국방부 군비통제관의 비망록

“전역 각오하고 이종석의 선전수단 철거 지시 버텨… 조영길 장관, ‘당신만 대북 전문가냐’ 버럭”

⊙ 남북 군사회담의 북측 ‘총감독’은 김영철 정찰총국장… 1996년 강릉 남북 고위급회담부터 현재까지 현역으로 활동

⊙ 2000년 남북 정상회담 참석… 회담 의제에 군사 관련 사항 없어 ‘수행원’ 노릇만

⊙ 북측, 정확한 일기예보조차 “우리 장병 자극한다”며 선전수단 철거 요구… 盧武鉉 정부, 2004년 ‘6·4 합의’로 대북 선전수단 철거 수용

 

 

  인천 아시안게임 폐막일이자 노무현·김정일의 10·4 선언 7주년 날이었던 지난 10 4, 북의 권력 실세 황병서 인민군 총정치국장을 비롯한 최룡해 당 비서 겸 국가체육지도위원장, 김양건 당 통일전선부장 겸 대남담당 비서 등 일행 3명이 김정은의 전용기 편으로 인천에 도착했다.
 
 
이들 3인방에 이어, 지난 10 15일에는 남북 고위급 접촉을 위한 군사당국자 접촉에 북한 측 수석대표로 김영철 정찰총국장도 등장했다. 그는 2010년 천안함 사건을 주도한 배후로 지목해 온 인물로, 2007 12 7차 남북 장성급군사회담 이후 7년 만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아시안게임에 참석한 북한 선수단을 격려하기 위해 방문했다지만 고단수의 정치적 계산이 깔린 ‘깜짝쇼’ 성격임이 분명하다. 그 정치적 계산이란 것은 다름 아닌 5·24 조치 해제를 위한 남북 대화에 북한이 모든 것을 걸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현재 북한의 비상상황을 수습하기 위해 김정은은 체면 불구하고 최고 전문가가 현장에서 파악하고, 판단하고, 결심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5·24 조치는 북한의 천안함 폭침 도발로 초래된 것으로, 북한의 사과와 재발방지 약속 없이는 해제할 수 없다는 것이 정부의 원칙이다.
 
 
류제승(柳濟昇) 국방부 정책실장도 남북 대화에 직접 참여하지는 않았으나, 1990년대 이후 남북 군사대화를 주도한 군비통제관실에 근무하며 대북문제에 대한 전문성을 이어받고 있다. 따라서 김양건 대남비서-김관진(金寬鎭) 청와대 국가안보실장, 김영철 정찰총국장-류제승은 남북협상의 진검승부(眞劍勝負)를 위한 구도일 것이다.
 
 
그러나 지난 10 30일로 예정됐던 제2차 남북 고위급회담이 무산되면서 남북관계는 오리무중(五里霧中) 상황으로 변했다. 북한이 대북 삐라 살포를 문제 삼았기 때문이다. 탈북자들이 날려 보내는 전단은 김정은 정권엔 치명적 무기다. 이를 어떻게 해서라도 막으라는 김정은의 오더가 떨어진 상황인 듯이 보인다.
 
 
실무선에서 이를 집행해야 할 김영철 정찰총국장은 2004 6월 남북 선전수단을 철거한 장본인이다. 북은 지금 “남은 밀어붙이면 된다”는 김대중-노무현 이래의 경험에 기대를 걸고 선전수단 철거에 혈안이 돼 있는 것이다. 오늘날 남북의 정황은 10년 전과 비교해 크게 달라진 것이 없는 것이다.
 
 
나는 1950년대 3년 동안의 정전협상 이래 남북 간 그리고 미·북 간에 치열하게 전개됐던 1990년대, 2000년대 초의 군사회담 경과를 정리하고자 한다. 국방부 군비통제관실 과장으로 첫발을 내디뎠고, 이후 차장·국장으로 군비통제관실에 근무하면서 한국군 장교 가운데 최장인 9년 동안 남북 군사회담을 지켜본 사람으로서 이를 기록으로 남겨야 한다는 일말의 책임감도 있는 것이 사실이다.
 
 
남북 문제는 현재도 진행 중이고, 앞으로도 계속될 일이기 때문에 보안상 또는 대북전략상 내용을 소상히 밝히기 어려운 점이 있다. 그러나 관계된 실무자들의 기억이 흐려지기 전에, 또 관련 문서가 남아 있을 때, 그 대강을 정리해 둠으로써 역사 보존의 의의와 함께 남북 군사회담에 임하는 후배들에게 참고가 되기를 바란다.


 
, DMZ 헬기 격추사건 발생하자 北 직접접촉 시도

▲지난 9월 15일 판문점에서 열린 남북 군사당국자 접촉에서 김영철 정찰총국장(왼쪽)과 류제승 국방부 정책실장이 악수를 하고 있다

 

  미·북 군사회담이 본격적으로 거론된 것은 1994 12월부터다. 1994년에 보비 홀 준위의 피격사건 이래로 미·북 간 접촉의 필요성이 제기돼 이 문제가 본격화됐다. 1994 12 17일 북한군이 군사분계선 인근 강원도 금강군 이포리 상공에서 미군 정찰헬리콥터 OH-58C를 격추시킨 사건이다.
 
 
이 사건 발생 직후 빌 리처드슨(Bill Richardson) 미 하원의원이 북한을 방문, 북측과 협상을 타결하면서 사건 발생 13일 만인 12 30일 헬기조종사 보비 홀 준위와 함께 격추 당시 사망한 데이비드 하일먼 준위 유해가 송환됐다.
 
 
이때 미국과 북한은 각자의 필요에 따라 대화의 창구를 열고자 했고, 그것은 군사정전위원회(Military Armistice Commission·MAC) 1990년대 초 이래 사실상 무력화돼 양측의 접촉이 단절됐기 때문이다. 미국은 토머스 허바드(Thomas Hubbard) 국무성 한국과장(주한 미국대사 역임)을 보내 이 문제를 처리하려고 했고, 허바드는 “보비 홀 준위를 석방하면 미·북 군사접촉을 열도록 하겠다”는 각서를 북한 측에 써 주었다.
 
 
미·북 간의 직접적인 접촉 창구를 희망했던 북한은 절호의 기회를 맞았고, 미국도 북한군과의 접촉이 필요했던 것이다. 미국은 ‘유엔사와 북한군 간에 군사정전위원회 외에 접촉채널을 갖는 것을 배제하지 않는다’는 정전협정의 한 조항을 들어 어떻게든 북한군과 접촉을 하고자 했다. 1953년에 만든 협정 문안에 이러한 예외조항이 포함돼 있었던 것이다. 역시 미국은 세계적인 국가 운영을 하는 나라라는 생각이 들었다.

▲1994년 12월 30일 판문점에서 군사분계선을 지나 남측 지역으로 넘어오고 있는 헬기조종사 보비 홀 준위. 미·북 협상은 사건 발생 2주 만에 신속히 타결됐다.

 

  당시 나는 박용옥(朴庸玉) 국방부 정책실장(육사21, 국방부차관 역임) 아래 군비통제관실의 협상전략과장으로 대북 협상을 총괄하고 있었다. 국방부로서는 한반도의 군사문제를 논의하는 접촉점이 뉴욕이나 베이징, 평양이라면 모르겠으나, 서울 또는 판문점에서 열리는 것은 동의하기 어렵다는 입장을 명확히 했다. 나는 이러한 입장을 담은 ‘유엔사-북한군 간 대화 절차(procedure)’를 유엔사에 제시하고 이를 관철하려고 노력했다.
 
 
‘정전문제에 관한 국제연합군과 조선인민군 간의 장군급 대화를 위한 절차’는 정책실장 박용옥 장군과 유엔사 부참모장 마이클 헤이든(Michael Hayden) 소장의 협상에 의해 이뤄졌다. 헤이든 장군은 현역 공군대장 신분으로 미 중앙정보국(CIA) 국장에 임명됐고, 5년 동안 국가안보국(NSA) 국장까지 맡았던 인물이다.
 
 
주요 내용은, 첫째 이 대화가 ‘유엔사-북한군 대화’라는 것을 명백히 했다. , ‘미국과 북한 간의 접촉’이 아니라 ‘유엔사-북한군 간의 대화’임을 미 측에 인식시킨 것이다. 둘째로, 이것은 정전협정에 입각해(in accordance with the Armistice Agreement) 진행한다는 것을 분명히 했다.
 
 
셋째로, 대표는 미군, 영국군, 그리고 태국, 또는 필리핀 등 제3의 유엔군 및 한국군 대표 4명으로 하며 그 대표들은 ‘동등한 발언권(equal voice)’을 갖는다는 것을 규정했다. 회의의 원활한 진행을 위해 미군 장성이 선임장교(senior officer) 역할을 하기로 했다.
 
 
전문과 총 6개 조로 구성된 이 절차는 한국군이 미군 등 다른 유엔군 대표와 동등한 발언권을 갖는다는 것을 명기한 점에서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동등한 발언권’은 한반도 문제에 한국군이 미군과 동등한 자격으로 참여하는 것을 의미했다. 이후 유엔사 대표는 헤이든 장군에서 마이클 던(Michael M. Dunn) 장군(美국방대 총장 역임, 예비역 공군중장)으로 교체됐고, 한국군은 정철호(鄭喆皓) 공군준장, 금기연(琴琦淵) 공군준장 등이 참여했다.


 
썰렁한 순안공항

2000 6월 남북 정상회담에 따른 후속조치로 남북 군사회담의 본격적인 장이 열렸다. 나는 군비통제관

으로 국방부를 대표해 수행원 자격으로 평양행 전용기에 올랐다. 6 13일 오전 1025분 김대중(金大中) 대통령을 비롯한 우리 일행을 태운 비행기가 순안공항에 내렸을 때, 조화(꽃술)를 손에 든 수만 명의 환영인파, 인민군 육·해·공 의장대가 “김정일 만세”, “결사옹위”를 외치고 있었다. 공군기와 미군기로 위풍당당한 우리의 성남 서울공항을 연상했던 나의 기대는 공군기도 하나 없는 허허벌판 공항이라는 데에 말문이 막혔다.
 
 
갑자기 환영인파의 함성이 폭풍우처럼 커지는가 싶더니 공항 입구 저편에 갈색 인민복 차림의 파마 머리를 한 키 작은 남자가 뒷짐을 지고 붉은 카펫을 걸어오고 있었다. 김정일(金正日) 국방위원장이었다. 그가 환영인파의 구호에 느릿한 박수로 화답하자 평양시민들은 발을 동동 구르며 열광하기 시작했다. 두 정상은 55년 만의 악수를 나누고 의장대를 사열한 후 나란히 승용차에 올라 행사장으로 이동했다.
 
 
자동차로 평양시내로 이동하는 중 신호등 대신 교통안내원이 수신호로 교통을 통제하고 있었다. 평양 주요 거리는 20여 층의 초고층 아파트가 들어서 있었으나, 인민대회장으로 가는 길을 둘러보니 ‘계획된 도시’라는 인상을 받았다. 23일 평양 체류 일정 동안 안내원이 배정돼 행사 때마다 버스에 동승해 행동을 같이 했다.
 
 
내가 안내원에게 “평양은 23일 정도의 관광코스면 적당하다”고 하자, 그는 기분이 언짢은 듯 아무런 대꾸를 하지 않았다. 정상회담에서는 북한 측이 꺼리는 국군포로 문제나 북핵 문제는 회담 테이블에 오르지도 못했다. 숙소인 고려호텔과 인민문화궁전에서 열린 남측 방문단 환영만찬에서 맛본 북한 음식은 담백했다. 특히 옥류관의 온면(溫麵)은 면과 육수로 맛을 낸 듯 은근한 중독성(中毒性)으로 남측 인사들로부터 호평을 받았다.
 
 
정상회담 마지막 날, 남한 대표단은 동명왕릉을 찾았다. 동명왕릉은 1974년 김일성대학 발굴단에 의해 동명성왕, 즉 주몽(朱蒙)의 무덤임이 확인됐다. 동명왕릉으로 가는 길은 요철(凹凸)이 심해 차가 덜컹거렸고, 늘어선 전봇대는 성냥개비처럼 가늘어 우리의 1960년대를 연상케 하는 등 북한 경제의 실상을 느끼게 했다. 자전거와 같은 교통수단이 없어 하염없이 걷는 북한 주민들이 안타깝기만 했다.
 
 
동명왕릉에 대한 북한 사람들의 자부심은 대단한 듯했다. 하지만 남한 학자들은 고구려 주몽이 도읍했던 곳이 졸본(현 중국 랴오닝성)인데 왕릉이 왜 평양에 있는지도 수수께끼라며 반신반의했다. 동명왕릉의 벽화에 등장한 인물들이 신라시대 왕릉에 등장하는 인물과 퍽 다른 북방계통의 인물이라는 점이 꽤 인상 깊었다


 
제주 ‘다금바리’에 매료된 북측 인사들

남북 정상회담 이후 남북 간의 긴장완화에 따라 남북한의 문제는 군사적인 긴장완화와 신뢰구축, 경제·사회적인 협력, 두 가지 축()으로 실행되어야 한다는 것을 정부에서는 분명히 했다. 특히 국방부에서는 군사적 신뢰구축(confidence building)을 위한 남북 간의 접촉이 반드시 이뤄져야 한다는 것을 주장했다.
 
 
이는 마치 새가 두 개의 날개로 날듯, 수레가 두 개의 바퀴로 굴러가듯, 반드시 병립해야 하며, 단순히 정치적인 화해 제스처나 대북원조, 이산가족 찾기 등으로 남북대화가 한정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북측에 요구했다. 물론 정부도 국방부의 이러한 주장과 요구를 반영하기 위해 노력했다.
 
 
남북 군사회담이 성사된 결정적인 계기는 박재규(朴在圭) 통일부장관이 2000 9 1일 평양에서 열린 제2차 남북 장관급회담에서 김정일과 만나 “이 문제를 빼놓고서는 남북관계가 순항할 수 없다”는 취지로 설명한 후, 김정일이 이를 수용하면서 성사됐다.
 
 
남북 간의 접촉을 위한 남북 군사 당국 간 접촉은 9 13일 북한 측이 김일철 인민무력부장 명의의 서한을 보내 “남북 군사대화를 갖자”고 제의하면서 시작됐다. 북측은 회담 장소를 홍콩 또는 베이징 등 제3국에서 개최하자고 제의해 왔으나, 우리 측은 장소가 어디든 회담 개최 자체가 더 중요하다는 판단하에 북측 제의에 동의했다. 그러나 이후 북측은 “제주도에서 하는 것이 좋겠다”고 수정 제의를 해 왔고, 이에 대해 우리 측은 동의했다.
 
 
앞서 9 12일 김용순 노동당 비서가 박재경 인민군 총정치국 부총국장(대장)을 대동하고 추석선물로 송이버섯을 들고 서울에 왔다. 돌아가는 길에 제주도에 들른 그는 그곳의 풍광(風光)과 ‘다금바리’ 회에 매료돼 회담 장소를 제주도로 정했다고 전해진다. 이리하여 제1차 남북 국방장관회담은 2000 9 25~26일 양일간 제주도에서 열린 것이다.
 
 
나는 남북 군사당국 간의 회담진행 사항을 유엔사에 소상히 알렸다. 우리가 유엔사에 알려야 할 의무는 없으나 나와 유엔사 부참모장 마이클 던 소장과의 상호신뢰가 중요하게 작용했기 때문이다.
 
 
나는 던 장군에게 “남북 간 대화가 이뤄지더라도 유엔사의 권위와 책임 또는 미국의 이익을 간과하는 남북만의 협의가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라며 “우리는 유엔사와의 긴밀한 협의하에 남북 군사대화를 할 것”이라는 것을 분명히 했다.


 
러포트 사령관의 好意

▲현역 공군대장 신분으로 국가안보국장(NSA) 재직 시절의 마이클 헤이든 장군. 유엔사 부참모장 시절, 김국헌 장군과 함께 ‘유엔사-북한군 간 대화절차’ 프로토콜을 만들었다.

 

  유엔사도 나의 서신에 신뢰를 표시했다. 여기에는 1995년 이래 유엔사-북한군 장성급 회담의 진행 과정에서 국방부와 유엔사 간 긴밀한 협의와 협조가 그 바탕이 됐던 것이다. 국방부는 북한군과 대화하기 전에 어젠다의 선정, 협상전략에 이르기까지 유엔사와 긴밀히 협조했으며, 군비통제관은 회담 후 반드시 그 결과를 유엔사에 임무수행 보고(debriefing)를 해 주었다. 여기에는 군사정전위 연락장교였던 정영도(鄭永道·3 8) 당시 대령이 중요한 중간역할을 했다.
 
 
이러한 국방부와 유엔사의 신뢰를 바탕으로 유엔사는 남북 군사회담에서 국방부를 믿고 지켜보겠다는 입장을 보였다. 이것은 2000 8 26일 리언 러포트(Leon LaPorte) 유엔군사령관 겸 주한미군사령관이 국방부장관에게 보낸 서한(書翰)에서 구체화됐다. 러포트 대장은 “남북 국방장관회담에 있어 미국은 필요한 협조를 하고, 특히 미국이 남북대화에 방해물(hindrance)로 비치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는 입장을 표명했다.
 
 
이러한 러포트 사령관의 서한은 미국 정부의 공식적인 입장이긴 했으나, 미국 측이 이러한 입장을 취하기까지는 러포트 사령관을 비롯한 유엔사 참모진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제주도에서 열린 1차 남북 국방장관회담에서 남북 간의 ‘신뢰구축’이라는 것은 북측이 의도하는 바가 아니었다. 이 문제를 두고 양측은 밤을 거의 새웠지만, 신뢰구축이라는 용어는 끝내 사용하지 못하고 ‘남북 간의 긴장완화를 위해 노력한다’는 일반적인 표현으로 그치고 말았다.

▲2000년 6월 남북 정상회담에서 김국헌 장군이 김정일과 악수하고 있다. 김 장군은 대통령 수행원 자격으로 국방부를 대표해 평양을 방문했다.

 

  서방 세계의 상식으로는 군비통제(軍備統制)를 위한 전제조건으로 긴장완화를 위한 ‘신뢰구축’을 내세우지만, 북한은 군비통제를 구체적인 것으로 판단해 ‘군비통제=군축(軍縮)’으로 보는 것이다. 남녀가 사귀어 보고 정이 쌓이면 결혼하는 것이 우리의 입장이라면, 북한은 우선 결혼을 해 보고, 그 다음 남녀가 성격이 맞는지 따져 보자는 격인 것이다.
 
 
사실, 이때 제1차 남북 국방장관 회담에 임하는 북측의 목표는 두 가지였다고 본다. 첫째는 남북대화가 경제·사회뿐만 아니고 군사적 측면에서도 이뤄지고 있다는 것을 보이는 ‘명분적인 차원’, 둘째는 6·15 공동선언에서 남북철도 연결을 합의한 데 이어 남북 장관급회담에서 도로 연결을 추가하는 것을 염두에 둔 것이다.
 
 
당시 북측으로서는 철도·도로를 연결해 개성공단을 건설하고 이를 통한 외화 획득을 염두에 두었고, 이를 위해서는 어느 정도의 불편도 감수할 수 있다는 속셈하에 회담에 임했던 것이다. 따라서 1차 남북 군사실무회담은 경의선 철도·도로 연결을 위한 군사보장 문제가 주 의제가 됐다.
 
 
남북 양측은 이 문제를 정전협정에 입각해(based on the Armistice Agreement) 처리한다는 것을 분명히 했다. 경의선 철도·도로를 연결하는 문제는 비무장지대(DMZ)와 군사분계선(MDL)을 통과하는 문제였으며, 이는 바로 DMZ MDL의 관할권을 행사하는 유엔군사령관과 조선인민군사령관 사이의 협의를 거쳐 이루어져야 할 사안이었던 것이다.
 
 
북측은 이 문제를 지적하며 “유엔군의 동의를 얻을 수 있겠는가”라고 물어왔고, 군비통제관인 나는 북측 실무자 유영철 대좌와의 협의에서 “그 문제에 관한 한 걱정 말라”는 식의 답을 주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내가 그러한 답변을 한 것은 러포트 사령관의 서한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 ‘남북 간의 군사회담에서 정전협정에 관한 논의는 유엔군사령관을 대신해(on behalf of) 한국 국방부장관에게 위임한다’는 구절이 있었기 때문이다


 
‘관할권’ 문제를 영국 케이스로 해결

▲2000년 9월 27일 제주도에서 열린 제1차 국방장관급회담에서 김국헌 장군이 김일철 인민부력부장(왼쪽)과 악수하고 있다. 가운데가 조성태 국방부 장관이다.

 

  우리 측은 제1차 남북 국방장관급회담 이후에 경의선 철도·도로 연결을 위한 남북 군사실무회담을 제안했으나, 북측은 “남조선은 정전협정 당사자가 아니다”라며 유엔사 측과 협의를 주장했다. 북한은 DMZ 도로연결 기회를 통해 경제적 실익도 챙기면서 동시에 한미동맹을 흔들어 보려는 기회로 삼았던 것이다.
 
  DMZ
도로연결을 남북이 추진하면서 여러 가지 장애물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러포트 사령관이 서한에서 밝힌 대로 정전협정에 관련한 사항에 관해 우리 국방부에 협상을 위임한다 하더라도 그 위임의 범위가 ‘관할권(Jurisdiction)’에 관한 법적 문제까지 포함하는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나는 DMZ MDL에 대한 유엔군사령관의 관할권을 존중하면서도 남북 간에 인원과 차량이 오가는 것을 별 지장 없이 하는 현실적 요구를 다 같이 충족시킬 수 있는 방법을 두고 고민했다. 경의선 철도·도로 공사를 진행할 때, 공사가 완료된 이후에도 수많은 인원과 차량이 DMZ MDL을 통과할 것인데, 이때마다 일일이 유엔군사의 승인을 받아서 추진하기는 대단히 번거롭고 사실상 어렵다는 것이었다.
 
 
나는 두 가지 문제를 두고 던 장군과 수차에 걸쳐 어려운 협의를 해 나갔다. 그러던 중, 나는 절충안으로 ‘관리권(Administration)’이라는 개념의 아이디어를 던 장군에게 제시했다.
 
 
, 법적으로는 유엔군이 관할권(Jurisdiction)을 갖되, 실제적으로는 운용에 불편이 없도록 한국군이 ‘행정적인 관리권(Administration)’을 갖자는 것이다. DMZ에서 일어나는 정전협정 위반사항이나 출입은 ‘관할권’에 해당하고, 관리구역 내의 공사·인원과 장비의 통행은 ‘관리권’에 속한다는 것이다. 법적인 형식을 갖추는 엄격한 절차는 준수하되, 실제적으로는 지장이 없는 운영의 묘()를 기하자는 것이다.
 
 
나는 런던대 킹스칼리지에서 4년간 유학하는 동안, 영국이 ‘99년 리스(lease)’ 또는 ‘999년 리스’ 제도를 두어, 아랍 부호들이 돈을 아무리 많이 내더라도 토지의 소유권은 완전히 이전하지 않고 결국 영국에 귀속하게 하는 법적 장치가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여기에서 힌트를 얻어 던 장군에게 이야기를 했더니, 그는 “좋은 아이디어”라며 ‘관할권’ 문제를 해결하는데 적극 협조했다. 이로써 남북 간의 문제를 ‘정전협정에 의거하여 처리한다’는 핵심문제가 해결된 것이다.

 

▲2000년 9월 12일 제주를 방문 중인 김용순 노동당 비서(오른쪽)가 북제주 ‘분재예술원’을 둘러본 후 성범영 제주 분재예술원장 내외에게 격려의 휘호를 써주고 있다.

 

  결국 미국의 ‘관리권’ 양해에 따라 그해 10 18일부터 11 16일까지 4차례의 군사정전위 비서장급 회의를 통해 비무장지대 일부 구역을 개방해 남과 북의 ‘관리구역’으로 하는 데 합의했다.
 
 
그리고 11 17일 유엔사와 북한군은 제12차 판문점 장성급회담에서 ‘비무장지대 일부 구역 개방에 대한 국제연합군과 북한군 간 합의서’를 채택했다. 이 합의서에 따라 남북 양측은 2000 11 28일 판문점 북측지역 통일각에서 처음으로 제1차 남북 군사실무회담을 개최할 수 있었다.
 
  2000
11월부터 개최된 제1차 남북 군사실무회담에 한국 측에서는 김경덕 군비통제차장을 비롯한 4명이, 북측에서는 유영철 대좌를 비롯한 4명이 참가했다. 우리 대표단은 국방부에서 수석대표 외에 1, 통일부에서 1, 건교부에서 1명이 참여했다. 당초 경의선 문제만을 중심으로 논의가 진행됐으나, 2002년부터 동해선 문제가 추가로 논의됐다.
 
 
우리는 회담에서 “경의선-동해선”이라고 언급한 데 반해, 북측은 “동해선-경의선”으로 언급했다. 즉 북측은 동해선을 연결해 금강산관광을 트려는 목적이 있었고, 우리는 경의선을 연결해 개성공단을 건설하려는 의도가 컸던 것이다.
 
 
결국 2002 9월 경의선과 동해선 철도·도로공사의 군사적 보장합의서의 타결을 보았고, 이에 따라 철도·도로 건설을 위한 공사가 시작됐다. 공사는 경의선 지역에서는 제1건설단, 동해선 지역에서는 제2건설단이 창설돼 담당했다. 공사를 진행하면서 발생하는 북한 측과의 접촉 또는 협조는 군비통제관실이 담당했다.
 
 
그러나 철도·도로 연결 공사를 진행하면서 또다른 장애물이 나타났다. 바로 남북 관리구역 내에서 이뤄지는 통행권 문제와 지뢰제거 문제였다. 당시 유엔사 측에서는 던 장군의 후임으로 부참모장 제임스 솔리건(James N. Soligan) 공군소장이, 국방부에서는 김경덕(金暻德) 군비통제차장(육사30기·예비역 육군소장·국방개혁실장 역임)이 협상 상대였다. 솔리건 장군은 던 장군과 달리 원칙을 중시하는 군인이었다. 나는 국방부를 대표해 유엔사 부참모장 솔리건 장군과 심도 있는 논의를 통해 약정(Terms of Reference)을 체결하며 이 문제를 해결했다


 
, 남북군사회담 본격화하자 ‘선전수단 철거’에 매달려

▲2000년 9월 1일 남북 장관급회담 우리 측 수석대표인 박재규 통일부장관이 함경북도 동해안 지역에 머물고 있는 북한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찾아가 조찬을 갖기에 앞서 악수를 하고 있다.

 

  2차 남북 국방장관회담 개최 협의를 위한 군사실무회담이 2002 10월 개최됐다. 2차 회담에서 북측이 노린 것은 DMZ에 설치된 남측의 선전수단을 제거하는 것이었다. 북측은 이를 얻어 내기 위해서 갖은 방법을 다 동원했다.
 
 
우리 측에서는 이 문제는 ‘쌍방 간의 군사적 신뢰가 발전되는 데에 따라 검토한다’는 정도로서 우리의 주도권을 최대한 확보하는 데에 주력했다. 남북 간의 군사적 신뢰가 발전되는 것에 따라 검토한다는 것은 결국 우리 측에 주도권이 있는 것이며, 우리 측이 보아 이 문제의 진척이 불완전하다고 판단될 때는 언제든지 선전수단 철거를 중단하도록 했다.
 
 
북과의 협상전선에서, 남북한의 확성기·전단 등 선전수단을 제거하는 문제에 가장 어려움이 많았다. 사실 북측이 남북 군사회담에 나오게 된 주요 동기도 남측의 선전수단 제거에 맞추어져 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1972 7·4 공동성명 이래 우리는 2000년 이후 북측에 대한 전단살포를 중단했고, 심리전 방송도 우리 장병들의 정서함양을 목적으로 했다. 그런데도 북측은 회담장에서 굳이 이 확성기들을 제거하고자 안간힘을 썼다.
 
 
우리 측이 그들에게 “우리 확성기 방송이 무엇이 대단하다고 북측을 자극하느냐”고 반문했지만, 북측은 “우리 지역에 비가 올 것이라는 남측의 정확한 일기예보조차도 우리 장병을 자극하게 된다”고 하였다. 또 그들은 “자유로(自由路)에 오가는 차량의 앞등(전조등)도 우리에게 관측된다”며 “남측에 자동차가 얼마나 많길래 늦은 밤에도 이렇게 통행이 많으냐”고 했다.
 
 
휴전선상에 세워 놓은 선전문구를 제거하는 문제에 있어서도 우리는 북측이 이를 어떻게 수용하는가를 떠보기 위해서 군사분계선에서 상당히 떨어진 소위 ‘존엄구호(尊嚴口號)’를 제거하라는 요구를 했다. 우리는 신성불가침한 김일성(金日成), 김정일에 대해 북측이 과연 존엄구호를 제거하겠는가에 대해 반신반의(半信半疑)했다.
 
 
그러나 의외의 일이 벌어졌다. 북측은 어떻게 해서든 남측의 확성기를 제거하겠다는 일념으로 판문점에서 20km 떨어진 신성불가침의 존엄구호를 철거했던 것이다. 북한군과의 협상은 이런 문제를 둘러싼 장기 지구전(持久戰)의 전선이었다.

 

▲마이클 던 소장(맨왼쪽) 등 유엔사 소속 장교들이 1999년 7월 2일 서해 교전 및 북한 경비정 영해침범 사건을 논의하기 위한 유엔사-북한군간 장성급 회담에 참석하기 위해 판문점으로 걸어 들어가고 있다.

 

  그러나 노무현(盧武鉉) 정부가 들어선 2003년 이후 남북 군사회담에서 선전수단 철거는 예정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대북 유화적 태도를 보이며 남북관계를 유지하려 했던 당시 청와대는 이종석(李鍾奭) 국가안전보장회의(NSC) 사무차장(통일부장관 역임) 지휘 아래 선전수단을 전격 철거하는 데 합의하도록 우리 측 회담 실무자들에게 압박을 가했던 것이다.
 
 
선전수단 철거는 김대중 정부 때도 들어주지 않은 요구사항이었던 것이다. 나는 이종석 차장의 회담타결 압력을 “우리 장관의 직접 명령 없이는 절대 응할 수 없다”고 버텼다. 하루는 NSC 상임위 회의에 참석했던 조영길(曺永吉) 당시 국방부장관(갑종172, 예비역 대장)이 나를 불렀다. 조 장관은 “당신만 대북 전문가냐”고 버럭 화를 냈다.
 
 
이종석 사무차장이 “NSC 상임위에서 결정한 사안에 대해 왜 실무자들이 말을 듣지 않느냐”고 장관을 질책한 것이다. 장관을 최후의 ‘비빌 언덕’으로 삼았던 나는 장관에게 그 말을 듣고 한편으로 허탈했다. 나는 조기 전역까지 각오하고 이를 거부하려 했다. 한편으로는 ‘장관이기 이전에 군인인 장관도 오죽이나 답답했으면 내게 저럴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당시 정책기획관실 장광일(章光一) 차장(육사31, 국방부 정책실장 역임)의 눈물 어린 만류가 아니었다면 아마도 나는 그때 군복을 벗었을 것이다.
 
 
결국 2004 5월 금강산에서 남북이 제1차 장성급회담으로 만났다. 남측은 제1, 2차 연평해전의 재발을 막자는 데 목적이 있었고, 북측은 대북 심리전 수단을 장성급 회담의 조건으로 슬그머니 밀어 넣으며 철거에 매달렸다.
 
 
그해 6 4일 설악산 켄싱턴스타호텔에서 개최된 제2차 남북 장성급회담에서 이른바 ‘6·4 합의서’로 불리는 ‘서해해상 충돌방지 및 선전활동 중지 및 수단철거에 관한 합의서’에 합의했다. 이어 ‘6·4 합의서’ 이행을 위한 부속합의서도 6 10일 개성 자남산여관에서 열린 남북 군사실무회담에서 양측은 44시간 무박3일의 피 말리는 담판을 벌이며 합의서를 만들었다


 
남북 군사회담의 다섯 개 前線

▲2003년 9월 4일 리언 러포트 유엔군사령관이 조선호텔에서 열린 ‘극동포럼’ 창립 조찬강연에서 연설을 하고 있다. 러포트 사령관은 경의선 철도·도로 연결에서 국방부에 상당부분 재량권을 허용했다.

 

  남북 군사회담은 다섯 개의 프론트(전선)에서 이뤄진다고 볼 수 있다. 강릉 잠수함 침투사건, 연평해전, 서해교전 등은 최초 발생부터 최종 처리에 이르기까지 총 다섯 가지 무대에서 사건이 다뤄지고 처리됐다. 전투에 참여하는 장병들의 노고와 희생은 이루 말할 필요 없이 크지만, 실제 전투가 끝난 다음 북측과 담판해야 하는 문제는 또 하나의 지루한 전투를 치러야 하는 것이다. 사실상 교전은 전체 사건 과정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첫째, 전선은 북한과의 협상장에서의 대결이다. 회담장이 판문점, 서울, 혹은 평양이 되었든, 북한 측과 마주 앉는 자리는 전투 못지않은 또 하나의 전선(front)이다. 공산주의자에게 있어 ‘협상은 전쟁의 연속이다’는 논리에 따라 남북 간의 협상은 또 하나의 전쟁이 되는 것이다. 적의 의도를 탐색하고 의지를 시험하며, 이를 극복 돌파할 수 있는 전략과 협상전술을 모색하는 광범위한 작전이 전개되는 것이다.
 
 
두 번째의 전선은 국내에서의 관련 부처 간 이뤄지는 내부적인 의견조율이라는 전선이다. 남북문제는 통일부, 국방부, 외교부, 국정원이 모두 관여하며 이를 청와대에서 총괄 조절하는 모양새를 갖추게 된다. 이러한 여러 부처의 입장은 그 사안을 보는 시각과 또는 부처의 입장에 따라 다양한 견해가 있을 수 있다. 이를 어떻게 정리해 하나의 통일된 입장을 만들어 내느냐 하는 것 역시 중요한 전선이 되는 것이다.
 
 
세 번째의 전선은 주한미군과의 전선이다. 주한미군과 국방부와의 조율은 한미 양국의 공동의 이해와 연합방위 체제라는 대전제하에, 이를 조절하는 과정에서 국방부와 유엔사 또는 연합사, 주한미군사령부 간에 어느 정도의 긴장이 불가피하다. 따라서 이것 또한 하나의 전선이라고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네 번째 전선은 국회다. 북측과의 협상 또는 북측과의 대결이 이뤄지는 과정은 국회를 통해 국민에게 보고되며, 이 과정에서 여야의 입장 차이에 따라, 또는 진보냐 보수냐에 따라 신랄한 비판이 있을 수 있다. 이에 대한 정부의 입장을 국회의원을 통해 국민들에게 자세하게 설명해 국민의 이해를 구하는 ‘정치의 장’으로서의 전선이 있게 마련이다.
 
 
다섯 번째 전선은 언론을 비롯한 국민의 여론이다. 국회에서 완전히 수렴되지 않은 다양한 언론, 사회단체에 의한 의견의 분출이 있을 수 있다. 이들의 이해를 구하는 것 또한 어려운 과업이 된다.

 
 
원스타 김영철 소장, 박용옥 준장에게 “박 준장”이라며 하대

▲2002년 9월 18일 강원도 고성 통일전망대 인근에서 열린 동해선 철도·도로 연결공사 착공식에서 색색이 발파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다. 연기 뒤로 병풍처럼 둘러 있는 금강산 구선봉이 보인다.

 

  다섯 개의 전선 가운데 먼저 북측과의 대결에서 그 의지와 판단력이 어떻게 단련을 받았는가를 예로 들겠다. 남북 장성급회담에서 북측은 자신들이 소장(少將)을 내보내면 우리 측도 소장이 나와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북측의 소장은 원 스타이며, 우리 소장은 투 스타다.
 
 
군사실무회담에서 북측에서 대좌가 나오고 우리 측에서 준장이 나감으로써 여기에 대해 우리 국내에서 비난과 항의가 빗발쳤고, 특히 예비역 장성들의 항의가 빗발쳤던 경우를 상기하지 않을 수 없었다.
 
  1992
년 남북 고위급회담 때 남북기본합의서에 불가침 분야 부속합의서를 협의하기 위해 군사분과위원회 회담이 열렸을 때, 원스타인 북측 김영철 위원장(소장)은 카운터파트인 박용옥 당시 군비통제관(준장)에게 “박 준장, 박 준장”하며 계급체계를 악용해 회담의 기선을 제압하려 했다. 당시 노태우(盧泰愚) 정부는 그해 6월 박용옥 준장을 소장으로 ‘특진’시키는 일도 있었다. 이것을 시작으로 북측은 회담 때마다 계급 문제를 들고 나왔다.
 
 
공산권의 군제(軍制)와 서방권의 군제에는 약간의 차이가 있다. 공산권의 대좌는 사실 독일의 상좌(Senior Colonel)에 해당하는 것으로, 서방권의 대령(Colonel) 이상이라고 보아야 한다. 그리고 직책상으로도 북측 유영철 대좌가 부국장의 직책을 갖고 있었고, 그에 대응해 우리 측도 군비통제 차장인 김경덕 장군(준장)을 내보내는 것이 크게 모양새가 어긋나는 것은 아니라고 당시에는 생각했던 것이다.

 

▲2004년 6월 29일 남북 장성급회담 2차 실무대표회담이 남측 수석대표 문성묵 대령과 북측 수석대표 유영철 대좌 등이 참석한 가운데 경기 파주시 홍원연수원에서 열렸다. 남북은 군사분계선(MDL) 지역의 1단계 선전수단 제거 결과를 서로 확인하고 2단계 제거 작업에 대해 협의했다.

 

  그러나 국민 일반, 특히 예비역 장성들의 김대중 정부의 햇볕정책에 대한 반감이 겹치면서 남북 군사회담에서 계급조정 문제까지 극도의 반감이 표출됐다. 따라서 장성급회담에서는 반드시 북측과 우리 측이 별의 숫자를 맞춰야 한다고 북측에 요구했다. 만약 우리 쪽에서 투 스타가 회담에 나간다면 북측에서도 투 스타(중장)가 나와야 한다고 주장했다.
 
 
결국 북쪽은 안익산 소장(해군 여부 불분명)을 내보냈고, 우리도 원 스타인 박정화(朴貞和) 제독(해사30, 해군작전사령관 역임)이 회담에 나갔던 것이다. 이때 북측에서 소장이 나올 때 남측에서 준장이 나와도 북측이 장성급회담을 파행시키지는 않을 것이라는, 적의 의도에 대한 확실한 간파가 있었기에 이러한 주장을 계속할 수 있었던 것이다. 전장에서 승리는 적의 의도를 간파할 때 담보되는 것이다.
 
 
얼마 전 남북 고위급회담을 위한 군사당국자 접촉에서 북한 측 수석대표 김영철 정찰총국장의 상대로 류제승 정책실장이 맞는 것이다. 더구나 천안함 폭침을 주도한 김영철을 회담 대표로 내보내는 것은 독일이 이스라엘에 나치 전력자(前歷者)를 대사로 임명하는 것과 마찬가지 도전이다. 이 도전을 받아 준 것만 해도 우리가 너무 많은 것을 양보한 것이다.
 

  조이 제독의 교훈

▲남북 장성급군사회담 부속합의서에 따라 2014년 6월 16일 서부전선 무력부대 오두산전망대에서 군인들이 대북선전용 대형 확성기를 철거하고 있다.

 

  공산주의자와의 협상이 얼마나 어려운 것이며 또 얼마나 단호한 자세와 의지를 갖고 임해야 하는가를 보여주는 가장 뚜렷한 보기가 바로 6·25전쟁 정전협상이다. 이것을 당시 유엔군 측 수석대표 찰스 터너 조이(Charles Turner Joy) 제독은 《공산주의자들은 어떻게 협상하는가(How Communists Negotiate)》 첫 장에서 정확히 지적하고 있다.
 
 
“공산주의자들은 엉겁결에 회의에 참석하거나 황급하게 협상에 들어가는 일이 없다. 먼저, 그들은 주의 깊게 무대를 설정한다. 체면을 유지하기 위해, 그리고 유리한 협상환경을 만들어 실리를 챙기기 위해, 교섭이 진행될 장소의 환경을 세심하게 고려한다.
 
 
정전협상이 공산 측 점령 아래 있는 개성과 판문점에서 열리게 된 것도, 조이 제독이 공산 측 대표단장 남일(南日) 총참모장(외무상 역임)보다 4인치나 낮은 의자에 굴욕적으로 앉게 된 것도 그들의 계획된 협상전술이었다. 북한이 2000년과 2007년 두 차례 남북 정상회담을 평양에서 열 것을 고집한 것도 이 같은 이유에서다.
 
 
조이 제독이 꿰뚫어 본 바에 의하면, 공산주의자들에게 협상은 본질적으로 ‘정치심리전을 통한 전쟁의 연속’이며 그것은 필연적으로 지구전의 양상을 띤다. 협상에 있어 그들은 크게 두 가지 뚜렷한 전술을 구사한다.
 
 
우선 살라미(Salami) 전술로서 문제를 일괄적으로 타결하지 않고 몇 개로 나눠 그 각각을 전부 새삼스럽게 제기하는 계략을 사용한다. 각각의 살라미에 대해 벼랑끝 전술(blinkmanship)을 구사한다는 것이다. 이를 통해 상대가 지칠 때까지 최대한의 신경전을 펴며, 이를 통해 상대를 거의 넉아웃시킨다는 것이다.
 
 
조이 제독은 “공산주의자들은 협상이 일단 시작되면 합의를 향한 진행을 지연시키는 것이 상대방의 입장을 약화시키는 경향이 있다고 믿는다”면서 “그들은 서양 사람들은 일을 시작하면 그 일을 완성하려고 서두르는 경향이 있다는 것을 이용해 이득을 보려 한다”고 했다. 조이 제독은 “공산 측은 2+2=6이라고 제안하고, 합의를 끊임없이 지연시킴으로써 유엔군 측이 2+2=5라고 동의하도록 만들려고 한다”고 말했다.

 

▲1951년 7월 회담장으로 향하는 헬리콥터 앞에서 리지웨이 유엔군사령관과 함께 포즈를 취한 유엔군 측 대표들. 왼쪽부터 크레이기 소장, 백선엽 소장, 수석대표 조이 해군제독, 리지웨이 대장, 호데스 소장.

 

  나는 그의 지적에 전적으로 동감한다. 북한은 남북대화나 북핵협상, 6자회담에서 의제를 잘게 잘라 장애물을 조성하고 그 장애물을 하나둘 치울 때마다 대가를 얻어 내는 살라미 전술로 재미를 보았다.
 
 
그들은 남북관계의 진전을 국내정치에 이용하려는 역대 남한 정부의 조급증을 이용해 쌀과 비료, 노벨평화상에 목말라하는 김대중 전 대통령의 조급증을 이용해 달러와 6·15 선언을 받아 냈다.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에서 지도력을 상실하고 임기 만료 전 북핵만이라도 해결하려고 매달리는 미국의 부시 행정부의 약점을 간파해 9·19 합의라는 미봉책을 만들어 냈다. 하지만 북한은 미국을 비웃기라도 하듯 핵실험과 장거리탄도미사일을 발사했다.
 
 
정전협상 당시 유엔군 측은 의제로 ‘한국을 횡단하는 비무장지대 설정’을 내걸었다. 하지만 북한 측은 먼저 38선을 양쪽 사이의 군사분계선으로 설정하는 데 합의하자고 주장하고 나섰다. 당시 전선(戰線)의 상황을 보면, 유엔군 측이 점령한 38선 이북 지역이 공산군 측이 점령한 38선 이남지역보다 훨씬 넓었다. 공산 측은 자신들에게 일방적으로 유리한 내용을 협상의제로 제시해 놓고, 그 전제 위에서 모든 논의를 시작하자고 주장한 것이다. 조이 제독은 이를 두고 “속임수가 숨어 있는 의제”라고 말했다.
 
 
북한 측 행태는 오늘날에도 변함이 없다. 이명박(李明博) 정부 출범 이후 북한 측이 6·15 공동선언이나 10·4 공동선언의 이행을 남북 간 대화재개의 전제조건으로 내세워 온 것이 그렇다. 북한은 우리가 지난 10년간의 대북정책을 반성하고 새로운 대안을 모색하는 것을 원천봉쇄하면서 ‘대북 퍼주기’를 담보하는 두 공동선언부터 수용하라고 요구한 것이다.
 
 
나는 남북 군사회담을 지휘하며 조이 제독이 그의 책에서 말한 내용들을 주문(呪文)처럼 외우고 다녔다. ‘회담을 열자는 공산 측 제의에 서둘러 반응하지 마라’, ‘공산 측과 협상할 팀은 최고의 자질을 갖춘 사람들이어야 한다’, ‘공산주의자들은 상대편이 양보하면 이를 상대편이 약하다는 신호로 본다’, ‘공산 측과의 회담주제는 주의 깊게 검토해야 한다’, ‘공산주의자와의 약속은 믿지 마라. 그들의 행동만 믿어라’ 등 조이 제독이 말하는 회담 노하우는 회담 실무자들이 가슴에 새겨야 하는 ‘잠언’인 것이다.
 
  1976
년 판문점 도끼만행 사건 당시 주한미군이 데프콘3(defcon-3)에 돌입하고, B-52 폭격기가 북한 상공을 비행하며 재밍(jamming)을 걸어 북한군의 통신을 마비시키자 김일성이 비로소 판문점에서 미국 측에 사과했던 것이 지금까지 북한이 협상에서 백기(白旗)를 든 유일한 예라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유엔사 장교들과 긴밀한 관계 유지해야

▲제임스 솔리건 유엔군사령부 부참모장. 그는 2000년 이후 수없이 열린 남북 군사회담이 원활히 진행될 수 있도록 막후에서 역할을 담당했다.

 

  남북 군사회담에서 신경 써야 할 두 번째 전선은 주한미군이다. 남북회담에 관한 한 주한미군은 유엔사의 모습으로서 우리에게 다가오게 된다. 대부분의 한국군 장교에게 있어서는 한미연합사(CFC) 또는 주한미군사(USFK)가 익숙하고, 유엔사는 1953년 정전협정의 체결로써 그 책임을 다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갖기 쉽다. 하지만 정전상태에서 정전관리의 책임을 갖는 것은 유엔군사령관이다.
 
 
유엔사 참모는 일부 연합사 참모와 겹쳐지는 인원도 있지만, 유엔사 업무만을 수행하고 있는 참모장교도 상당수다. 이들은 자칫 한국군이 연합사만을 중시하고 유엔사를 경시함으로써 자신들의 책임과 역할과 기능이 간과되고 있는 것이 아니냐는 우려와 불안을 갖고 있었다.
 
 
그런데 남북관계에 대한 유엔사의 입장을 결정하는 데 있어 유엔군사령관의 판단을 보좌하는 것은 주로 이들 참모이다. 때문에 유엔사 참모들의 이해와 협조를 구하는 것이 대단히 중요하다. 나는 군비통제관으로서 마이클 던, 제임스 솔리건 등 유엔사 부참모장을 주로 상대했다.
 
 
던 장군과는 유엔사-북한군 장성급회담 진행과정에 있어서 긴밀한 협조와 협의가 있었기에 상호 간에 깊은 신뢰가 있었다. 이를 바탕으로 복잡한 문제를 비교적 쉽게 풀어 갈 수 있었다. 그러면서 나는 던 장군과 그 휘하 장병들에게 국방부가 그들을 존중하고 있다는 것을 수시로 강조했다.
 
 
로마 교황은 삼중관을 쓰고 있다. 그리스도의 지상 대리자, 로마의 대주교, 바티칸시국의 왕이라는 세 가지 지위와 역할을 상징한다. 세 가지 지위는 셋이자 하나인 성부(聖父), 성자(聖子)와 성신(聖神)이 하나인 삼위일체(三位一體)의 원리와 통한다고 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유엔군사령관, 한미연합군사령관, 주한미군사령관의 지위와 위상은 셋인 것 같지만 결국 하나이다. 우리는 이러한 유엔군사령관의 지위와 책임, 권한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다는 것을 기회 있는 대로 그들에게 강조했다. 유엔사의 위상과 기능이 간과될지도 모른다는 유엔사 참모의 일말의 불안과 우려는 이러한 나의 설명과 약속으로 상당부분 해소됐다. 이를 통해 그들의 적극적인 협조를 얻을 수 있었다


 
DJ의 “한반도에 전쟁은 없다”는 발언에 진땀

‘정치의 장()’으로서의 국회의 보고 도 회담 실무자들에게는 까다로운 문제다. 2000 6월 남북 정상회담이 끝난 후 서울에 돌아왔을 때 성남 서울공항에서 김대중 대통령은 “이제 한반도에 더 이상의 전쟁은 없다”는 요지의 대국민 성명을 발표했다. 그 직후 국회 국방위원회에서 한나라당, 특히 군 출신 국회의원들은 질책과 함께 강하게 항의했다. “도대체 아직까지 전선에서 100만의 남북 군대가 대치하고 있는 상황에서 한반도에 더 이상 전쟁이 없다는 것은 무슨 소리냐”라는, 어떻게 보면 당연한 항의가 쏟아졌다.
 
 
그날 국방위에서는 이와 비슷한 유의 질문이 소나기처럼 쏟아졌고, 조성태(趙成台) 국방부장관(육사20기·예비역 대장)의 답변에 전 국방위원, 아니 전 국민의 관심이 모아졌다. 조 장관은 이렇게 답변했다.
 
 
“이번 정상회담 후에 대통령이 ‘한반도에 더 이상 전쟁이 없다’고 하신 것은, 첫째, 한반도에 더 이상 전쟁이 없기를 바라는 ‘바람’이고, 둘째로는 우리의 국가와 군사적 대비로써 반드시 전쟁이 없도록 하겠다는 ‘다짐’, 그리고 우리의 능력을 통해 이것을 가능토록 하겠다는 ‘믿음’을 합해 말씀하신 것입니다.
 
 
국회의 답변이 또 하나의 전선이라는 것은 바로 이처럼 어떠한 질문이 어떻게 얼마나 쏟아질지 모르는 상황에서 어느 정도 문제를 핵심적으로 요약해 답변하는가에 대한 분초(分秒)를 다투는, 또 하나의 전선인 것이다.


 
김영철, 남북 군사회담의 ‘북측 총감독’

공산주의자들은 회담 장소라는 ‘무대’에 어떤 사람들을 ‘연기자’로 내보낼까. 조이 제독은 “공산주의자들은 협상팀을 대단히 주의 깊게 선발한다. 대표단 요원 선정시 지적 능력이 첫 번째 고려요소이며, 평판·계급 및 직책은 두 번째 고려요소이다. 지구력 그리고 논리성에 대항하는 냉철한 처신이 정전회담 대표단의 가장 중요한 특성처럼 보였다”고 했다.
 
 
실제로 정전협상에 한국군 대표로 참석한 백선엽(白善燁) 예비역 대장은 “회담장에서 마주 앉은 이상조(李尙朝) 소장은 독기 서린 눈으로 나를 쏘아보다가 ‘상가(喪家)의 개만도 못한 미 제국주의자들의 노예’라는 메모를 끄적여 보이기도 했다”며 “파리가 이마에 붙어도 눈 하나,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고 했다.
 
 
오늘날에도 대남, 대미 협상에 나서는 북한 측 대표단은 북한이 선발한 최고의 엘리트들이다. 북한의 김영철을 비롯해 북한 측 대표들은 남북 군사회담을 30년 이상 주도하고 있을 정도의 베테랑급들로 구성돼 있다. 북핵 협상에 나섰던 미국 외교관들이 북한 외교관들의 협상능력에 혀를 내둘렀다는 것은 잘 알려진 이야기다.
 
 
이들 중 내가 대면했던 인물들에 대한 인물평을 간략하게 하려 한다. 1996년 강릉지역 잠수함 침투사건부터 2004년까지 10년 동안 나와 적수로 다퉈 왔던 김영철 정찰총국장은 남북 군사회담의 ‘총감독’이라고 불릴 만한 인물이다.
 
 
그가 얼마 전 남북 장성급회담장에서 나의 후배인 류제승 정책실장과 대좌해 회담을 하고 있는 모습을 보고 북한의 간부정책은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곧 사라질 것 같은 북한 정권이 오늘날까지 버티고 있는 것도 이러한 전문화한 간부정책에 있는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이에 비해 우리의 남북 군사회담 조직은 허약하다. 과거 국방부 정책실 산하 군비통제관실에서 대북정책과 군축을 담당하던 것을 조직과 인원을 4분의 1 수준으로 대폭 축소했다. 현재 남북 군사회담은 국내파트를 담당하는 정책기획관실 내의 북한정책과가 맡고 있는 실정이다. 과거 군비통제관실의 군축과는 신설된 국제협력관실로 넘어갔다.
 
 
이런 상황에서 장교들이 1~2년 ‘철새’처럼 머물다 가는 구조가 반복되면서 회담 전문가 양성은커녕 북한이 해군사령부, 인민무력부, 총참모본부 명의의 성명을 날리면 대응기관이 어디인지 헷갈리는 촌극도 벌어질 수 있는 것이다. 우리의 대북정책을 제대로 추진하려면 국방부 내의 군비통제관실과 같은 대북정책과 군비통제를 전담할 수 있는 국() 단위 이상의 조직을 반드시 만들어야 한다.
 
 
나는 2000 9월 제주 남북 국방장관 회담 때 처음으로 그의 위상을 확인했다. 그날 밤 회담을 마무리하는 공동성명을 갖고 협상할 때 북측 대표는 유영철 대좌였고, 우리 측 실무대표는 나였다. 물론 외무부의 송민순(宋旻淳) 북미국장, 김희상(金熙相) 국방대 총장도 있었지만, 조성태 장관의 결재를 받아야 할 실무대표는 나였다.
 
 
유 대좌와 내가 밤 2시경 문안을 확정짓고 상부에 결심을 받는 것만 남았을 때, 우리는 조성태 장관이 임동원(林東源) 안보수석과 협의해 대통령의 재가를 바로 받을 수 있었으나, 유영철은 김일철 인민무력부장을 옆에 두고도 결재에 시간이 걸리기에 의아했던 기억이 난다.
 
 
혹시 총정치국장 조명록 차수를 거쳐 국방위원장에게 올라가느라 시간이 걸리는 것이라고도 생각했다. 그후 남북 군사실무회담 등을 30여 차례, 수백 시간을 북측과 회담하며 김정일에게 직접 결재를 받은 것은 대남업무에 정통한 김영철이었고, 김일철·조명록은 형식적 채널이었던 것이다.
 
 
그도 나처럼 남북 군사실무회담이나 장성급회담에서 회담장에 등장한 ‘배우’의 뒤에 있는 ‘감독’이었던 것이다. 감독이 모든 것을 연출하고 최종적으로 책임을 지듯, 김영철과 나는 10년 동안 남북 군사회담의 진행에서 실질적 책임을 졌던 것이다. 그러나 김영철과 나의 입장은 사뭇 달랐다. 그는 자신의 경험과 논리에 따른 주장을 김정일에게만 납득시키면 그만이었지만, 나는 국방부, 정부, 유엔사, 국회, 언론 등을 설득하느라 무진 애를 써야 했다.

 
 
유영철, 회담 중 뇌졸중으로 쓰러져

▲2010년 5월 28일 박림수 국방위원회 정책국장이 평양에서 가진 외신기자회견에서 “우리에게는 연어급이나 상어급 잠수정이 없다”며 천안함 폭침을 부인하고 있다.

 

  박림수 소장은 1990년대 초 남북 고위급회담 군사분과위원회 북측 위원으로 대좌 계급장을 달고 데뷔한 이래 근 20년 만에 소장이 됐다. 박림수는 90년대 중후반부터 이찬복 중장 밑에서 판문점대표부의 책임연락관으로 활동하면서 미군들로부터 달러를 수금해 가는 일도 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당시 유엔사-북한군 장성급회담의 산파역을 담당했던 나는 그때부터 그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
 
  2000
9월 남북 국방부장관 회담 때 북측 대표단에 그가 포함되지 않았던 것은 좀 의외였다. 아마도 미군유해 송환과정에서 미군들로부터 돈을 더 뜯어내지 못한 것에 대한 철직(撤職)이라도 당한 것 아닌가 추정한다. 그 후 회담에 나온 박림수는 상당히 고단해 보였고, 힘든 세월을 보낸 흔적이 역력했다.
 
 
박림수를 남북 군사회담에서 자주 대한 문성묵 군비통제차장은 내게 “박림수는 김영철이나 유영철과 달리 비교적 유연하고 솔직한 편”이라고 보고했다. 무리한 주장이나 요구를 할 때는 목청은 높이지만, 눈을 똑바로 마주치지 못하고, 휴식시간에는 “본심은 아니었으니 이해해 달라”며 미안해하기도 했다고 한다.
 
 
물론 이것이 온탕과 냉탕을 오가는 민완수사관의 수법일 수도 있어 우리는 경계를 늦추지 않았었다. 2010년 박림수는 외신기자회견에서 “천안호 사건은 남조선이 날조한 것”이라고 강변하면서도 어딘지 모르게 자신감이 없어 보였다고 그와 대좌했던 회담 실무자들은 이야기했다.
 
 
‘걸어다니는 법규(法規)’로 불린 유영철은 2004년 남북 군사실무회담 북측 단장으로 ‘6·4 합의’를 통해 대남심리전 체제를 해체한 인물이다. 당시 회담을 직접 지휘한 김영철 상장이 얼마 전 류제승 실장을 만나 탈북자 단체가 풍선으로 전단을 날리는 것에 대해 펄펄 뛴 것도 무리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2005
7월 군사실무회담 때 북측 단장인 유영철 인민무력부 대좌는 뇌졸중으로 회담 중 쓰러졌다. 우리 군 앰뷸런스가 ‘골든타임(golden time)’을 확보하기 위해 군사분계선을 넘어 그를 인계해 치료하는 상황까지 벌어졌다. 북측이 보안유지를 요구하는 바람에 언론엔 한 줄도 실리지 않았고, 북측이 사의를 표한 적도 있다.
 
 
그간 김영철이 정찰총국장으로 진급해 대남공작을 총지휘하고 있고, 박림수도 소장으로 진급해 정책국장으로 대남회담 공세를 진두지휘하고 있으나 유영철만 별 소식이 없는 것을 보면 건강에 문제가 생긴 듯하다.
 
 
그러나 유영철은 군사정전위 등에서 신출내기 유엔사 장교들에게 소위 회담의 ‘히스토리’를 읊어 대며 전의(戰意)를 상실시킨 인물이다. 그는 어떤 의제, 이슈가 나오든 관련 법규, 전례 등에 정통했고, 논리전개 능력도 탁월했다. 우리 측 대표들과 벌이는 논리의 용쟁호투(龍爭虎鬪)는 가히 볼 만했다. 특히 합의문 작성을 할 때 정확한 언어를 구사하는 것을 보고 언어감각이 발달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We agreed to disagree
 
 
인민무력부장 김일철 차수는 북한군 원로로서 내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그를 처음 만난 것은 2000 9월 제주도 남북 국방장관회담에서다. 당시 북한 측 대표단은 판문점→성남 서울공항→제주로 갔다. 당초 국정원은 판문점에서 김포공항으로 이동해 민간항공기로 제주에 도착하는 것으로 일정을 짰다.
 
 
회담 실무를 총괄한 나는 김보현(金保鉉) 국정원 3차장에게 “국방부는 모든 수단을 갖고 있다”며 성남 서울공항을 이용해 군수송기 CN-235편으로 제주로 가는 아이디어를 냈다. 김보현 차장은 흔쾌하게 일정을 재조정해 주었고, 북한 측 대표단과 기싸움을 벌일 수 있었다.
 
 
판문점에 도착한 북측 대표단을 영접하는 임무를 맡은 김희상 당시 국방대 총장은 이들과 거수경례를 할 것인가, 목례를 할 것인가를 두고 내부에서 논의가 있었던 기억이 난다. 결국 목례로 간단히 수인사를 했다.
 
 
김일철은 1933년생(81)으로 1968년 푸에블로호 사건 때 동해함대 참모장을 지냈고, 해군사령관을 거쳐 인민무력부장을 9년 동안이나 지낸, 우리의 백선엽 장군과 같은 인물이다. 조성태 장관과의 회담에서 7~8년이나 많은 연배인 김일철은 군 경력만큼이나 시종 담담하고 여유 있는 자세로 회담에 임했던 기억이 난다.
 
 
나는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관찰했다. 제주 한림수목원을 방문했을 때, 김일철은 분재(盆栽)들을 완상(玩賞)하며 높은 수준의 품평(品評)을 했던 일이 기억난다. 1930년대에 태어나 일제시대 교육을 받은 분들에게 느껴지는 성향과 교양의 단면을 간취(看取)할 수 있어서 흥미로웠다. 향후 5년 후에 통일이 된다면, 국방부 군사편찬위원회 북한군사팀에 ‘촉탁’ 자리라도 하나 보아 주고 싶은 심정이다.
 
 
역대 남북 군사회담 담당자들은 북한 측과 회담에서, 아주 사소한 제의나 문제제기에 있어서도 이겨 놓고 싸우는 자세와 정신으로 회담에 응했다고 자부한다. 사실상 지난 10여 년의 군사회담에서 우리는 항상 우위 속에서 적을 능가하였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여기에는 지금까지 군사회담을 담당해 왔던 김경덕 장군, 장광일 장군, 문성묵(文聖默) 장군(313기·국방부 정책실 군비통제차장), 이상철(李尙澈) 장군(육사38기·국방부 군비통제검증단장) 등의 탁월한 인재들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하였다고 믿는다.
 
 
외교관들이 잘 인용하는 말에 ‘We agreed to disagree(서로의 의견 차이를 인정한다)’라는 구절이 있다. 논리적으로는 모순되는 말이지만, 외교·협상 ·회담의 본질을 꿰뚫고 있는 말이다. 북측과의 30여 차례, 수백 시간의 담판을 이 한마디처럼 압축한 말도 없을 것이다. 나와 함께 남북대결의 전선에서 용왕매진(勇往邁進)한 동지들의 노고를 치하하며, 다함께 통일의 그날까지 일로매진할 것을 다짐한다.

출처 | 월간조선 2014년 12월호     글 | 오동룡 월간조선 기자   사진 | 서경리 월간조선 사진기자

 

2017년 04월 06일  북한 김일성경기장에 사상 첫 태극기 게양-애국가 연주

 김일성 경기장에 펼쳐진 태극기 (평양 사진공동취재단=연합뉴스) 5일 오후 북한 평양 김일성 경기장에서 열린 AFC 여자축구 아시안컵 예선 한국과 인도와의 경기에서 한국 여자축구대표팀 선수들이 태극기를 보며 애국가를 부르고 있다.

 

 평양에 걸린 태극기 (평양 사진공동취재단=연합뉴스) 5일 오후 ‘2018 여자아시안컵’ 예선 북한과 홍콩 경기가 열린 북한 평양 김일성경기장에 태극기를 비롯한 참가국과 아시아축구연명 깃발이 걸려 있다

 

1969년 개장 후 처음…1990년 남북 통일축구는 능라도경기장 개최

평양에선 2013년 이후 세계역도대회 이후 두 번째  

 

한국과 인도의 2018 여자 아시안컵 예선 B조 1차전이 열린 5일 북한 평양 김일성경기장.

 

장내 아나운서가 차분한 목소리로 “관람자 여러분, 인디아 팀과 대한민국 팀 선수들이 입장하겠습니다”라고 말했다. 

 

이윽고 양 팀 선수들이 경기장으로 들어왔고, 뒤를 이어 태극기가 인도 국기, 아시아축구연맹(AFC)기와 함께 입장했다. 

 

이후 장내 아나운서의 소개에 따라 인도 국가가 연주된 뒤 애국가가 울려 퍼졌다.

 

김일성경기장에서 태극기와 애국가가 등장한 건 1969년 경기장 개장 후 사상 처음이다.

 

1990년 10월 평양에서 개최된 남북 통일축구대회는 김일성경기장이 아닌 5.1경기장(현 능라도경기장)에서 열렸다. 

 

또 평양에서 애국가가 연주된 건 2013년 9월 세계역도대회 이후 약 3년 7개월 만이었다. 그동안 북한은 자국 내 애국가 연주 등에 부담을 느껴 홈에서 열릴 남북 대결을 제3의 장소에서 개최하곤 했는데, 이번만큼은 달랐다. 

 

AFC는 앞서 이번 대회 유치 조건으로 국가 연주 및 국기 게양과 관련한 국제경기 관례를 따른다는 각서를 북한으로부터 받았다. 

 

이 때문에 북한은 AFC 규정에 따라 애국가 연주와 태극기 게양을 막지 않았다. 경기장에 모인 북한 관중들도 애국가 연주에 차분하게 대응했다. 5천여 명의 북한 관중들은 애국가 연주에 일제히 기립해 예의를 갖췄다. 북한 주민들은 이번 대회 우승 경쟁국인 한국 여자축구대표팀을 응원하지 않았다.

 

대신 약체인 인도를 주로 응원했다. 응원의 수위는 크지 않았다. 뒤로 물러서서 수비만 하던 인도 선수들이 하프라인을 넘어 치고 나갈 때면 경기장이 서서히 시끄러워졌다. “(패스를)반대로”, “(앞으로)나가라”, “(상대 선수를)붙으라” 등의 외침이 터져 나왔다.

 

한국 선수들이 상대 골망을 흔들 때마다 “아…”하는 탄식이 관중석에서 흘러나왔지만, 야유나 비난의 목소리는 없었다.  

 

한국 대표팀은 전반전을 5-0으로 마쳤다. 하프타임이 되자 상당수의 북한 관중들이 경기장을 빠져나갔다.  경기장엔 약 2천500명의 관중이 끝까지 자리를 지켰다. 

 

북한 관중 중엔 거리낌 없이 축구 지식을 뽐내는 이들도 있었다. 후반전 초반 인도 골키퍼가 같은 팀 선수의 백패스를 잡아 페널티 지역 내 간접프리킥을 내줄 땐 한 관중이 “문지기가 멍청하구먼”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장내 아나운서가 “대한민국의 7번 리민아 선수가 득점했습니다”와 같은 방식으로 두음법칙을 적용하지 않은 것도 눈에 띄는 모습이었다.  경기장 내에선 금연이 철저하게 지켜졌다. 

 

개막전을 승리로 이끈 한국 여자 축구대표팀은 7일 사실상의 결승전인 북한과 한판 대결을 펼칠 예정이다. 

 

남북대결 때도 AFC 규정에 따라 해당 경기 때 태극기 게양과 애국가 연주가 진행된다. <연합뉴스> 

 

■ 군사력 비교

2015.06.25  6·25 전쟁 당시 北 군사력 南의 두배나 돼… 통계로 보는 6·25

 

1950년 6월 25일 북한군의 기습남침으로 개시돼 1953년 7월 27일 휴전이 성립되기까지 약 3년 1개월간 벌어진 6·25전쟁은 수많은 사상자와 피해를 준 가슴 아픈 사건이었다. 이 기간에 사망한 한국 군인들만 13만 7천여 명에 이르며, 320만여 명의 피난민과 10만여 명의 전쟁고아가 발생했다

 

 

2016.06.20   분단 70년 남북한의 미사일 기술, 어디까지 왔나?

2016 2 7, 북한은 광명성 미사일을 쏘아 올리며 또다시 한반도를 위기에 빠트렸다. 1998년 발사한 대포동 미사일 이후 6번째 장거리 미사일이었다. 1970년대 중국과 소련으로부터 미사일 기술을 습득한 북한은 조금씩 그 기술을 발전시켜 왔다. 대한민국 역시 1978년 백곰 미사일을 개발하며 북한과 미사일 경쟁을 펼쳤지만, 세계정세와 맞물려 사거리와 중량에 제한을 받아왔다.

 

조선닷컴 인포그래픽스팀

 

웃는 병사  우는 병사

▲2013 7 27일 평양에서 군사 퍼레이드에 참가한 북한 병사의 모습(왼쪽). 2015 3 11일 서울에서 의장대가 서있는 모습.(오른쪽)

 

▲2015년 10월 10일 평양에서 군사 퍼레이드가 끝난 후 북한 인민군 병사들이 귀대 준비를 하고 있다(위). 2015년 8월 15일 서울에서 광복절 퍼레이드를 끝낸 해병대 병사들이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아래)

 

▲북한 인민군 병사들이 2013년 7월 27일 평양에서 군사퍼레이드를 하고 있다(위). 주한미군이 지난 6월 28일 평택기지 '캠프 험프리스'에서 임무교대식을 하고 있다(아래).

 

▲2012년 4월 4일 평양에서 군사 퍼레이드를 관람하는 시민들의 모습.(위) 2015년 8월 15일 서울에서 광복절 기념 행사에 참여한 시민들의 모습. (아래)

 

▲2015년 10월 10일 북한 평양에서 군사 퍼레이드가 열린 가운데 참가한 북한 병사들의 모습. (위) 2017년 1월 25일 평창에서 동계 훈련을 하는 한국 병사들의 모습.(아래)

 

▲2013년 7월 26일 평양에서 북한 병사들의 모습.(위) 2015년 8월 25일 한국 해군들이 광복절 기념 행사에 참여해 행진하는 모습.(아래)

 

▲2013년 7월 25일 북한 의장대들이 묘지 앞을 지키고 서있다.(위) 2015년 4월 10일 서울에서 한국 의장대들의 모습.(아래)

 조선닷컴에서 작성된 기사 입니다

 

 

■경제력 비교

지난해 기준으로 북한의 국민총소득(GNI·명목)은 34조2360억 원으로 남한(1496조5930억 원)의 44분의 1 수준이었다

 

북한의 GNI 2012년에는 334790억 원으로 남한(12795460억 원) 38분의 1 수준이었으나, 2013년에는 338440억 원으로 남한(14411000억 원) 43분의 1 수준으로 격차가 더욱 벌어졌다.

 

15일 통계청이 내놓은 ‘2015 북한의 주요 통계지표’에 따르면, 북한의 인구는 2466만 명으로 남한(5042만 명) 2분의 1 수준으로 나타났다. 북한의 1인당 GNI 139만 원으로 남한(2968만 원) 21분의 1 수준으로 나타났다. 북한의 무역 총액은 761000만 달러로 남한(19818000만 달러) 144분의 1 수준이었다

 

수출은 316000만 달러로 남한의 181분의 1, 수입은 445000만 달러로 남한의 118분의 1 수준을 각각 기록했다. 북한의 발전설비 용량은 7253000㎾로 남한(93216000) 13분의 1 수준이었다.

 

북한의 시멘트 생산량은 667만5000t으로 남한의 7분의 1, 북한의 조강 생산량은 122만t으로 남한의 59분의 1 수준에 머물렀다. 

 

북한의 쌀 생산량(껍질을 벗겨내고 난 낟알 기준)은 215만6000t으로 남한(424만1000t)의 2분의 1 수준이었다.

 

인구 100명당 북한의 이동전화 가입자 수는 11.19명으로 남한(115.54명)의 10분의 1 수준이었다.

 

북한의 도로총연장은 2만6164㎞로 남한(10만5673㎞)의 4분의 1 수준이었고, 선박보유톤수는 북한 71만t, 남한 1392만t이었다.

 

통계청이 매년 발표하는 북한의 주요 통계지표는 북한 통계 홈페이지(http://kosis.kr/bukhan)나 국가통계포털(KOSIS·http://kosis.kr)을 통해 통계표 또는 전자책의 형태로 이용할 수 있으며, 모바일(http://m.kosis.kr) 검색을 통해서도 찾아볼 수 있다.

조해동 기자 haedong@munhwa.com

 

■ 사회적 격차

2016년 06월 24일  까마득한 南北 격차… 키 15㎝·기대수명 12년差

통계청 북한통계

北 영아사망률 南의 7.6배

南 국민총소득 北의 44배

 

6·25전쟁 발발 66주년을 맞은 가운데 종전 이후 각각 자유민주주의·시장경제와 사회주의 체제를 선택했던 대한민국과 북한 간 격차가 갈수록 벌어지고 있다. 정치적 이념 대립 속에서 비롯된 남북 간 체제 경쟁은 결과적으로 국내총생산(GDP) 세계 11위 ‘경제 강국’과 ‘세계 최빈국’이라는 경제력 차이뿐만 아니라 수명, 신장, 보건 등 전반에 걸쳐 비교 자체가 무의미할 정도의 상당한 격차를 보이고 있다.

 

24일 통계청 등에 따르면 남북한 간 ‘기대수명(출생자가 출생 직후부터 생존할 것으로 기대되는 평균 생존연수)’ 격차가 12년이나 벌어진 것으로 나타났다. 올해 북한에서 태어난 신생아의 기대수명은 남자가 66.2세, 여자가 72.9세였다. 반면 남한 신생아의 기대수명은 남자 78.4세, 여자 85.1세로 남한 주민이 북한 주민보다 12년 2개월을 더 살 것으로 추산됐다. 남북의 기대수명 차이는 영아 사망률에서도 크게 벌어진다. 북한의 영아 사망률은 신생아 1000명당 22명(2014년 기준)으로 남한(2.9명)의 7.6배에 달한다. 

 

심각한 북한 주민의 영양결핍은 남한과 북한 주민의 신체 및 건강 격차를 벌리고 있다. 지난 2013년 기준 남한 주민 1인 1일당 영양공급량은 3056㎉인데 반해 북한 주민은 2094㎉에 그쳤다. 이 같은 영양 상황의 차이는 남북한 성인들의 신장 차이로 나타나고 있다. 한국국제보건의료재단의 2014년 자료를 보면 남한 성인 남성의 평균 키가 173.3㎝인데 반해 북한 성인 남성은 158.0㎝에 그쳤다. 한 핏줄인데도 불구하고 남한에서 태어났느냐, 북한에서 태어났느냐 하는 차이가 15㎝의 신장 격차를 불러온 것이다. 청소년들의 신장 격차는 더욱 크다. 11세 남한 소년의 평균 키는 144.0㎝인데 비해 같은 나이 북한 소년은 125.0㎝로 차이가 19㎝나 벌어졌다.  

 

남북한 간 경제력 격차는 갈수록 벌어지면서 비교 자체가 무의미하다. 6·25전쟁 직후인 1960년 당시 북한의 1인당 국민총소득(GNI)은 137달러로, 남한(94달러)의 1.5배였다. 하지만 2014년 기준 남한의 명목 GNI는 1496조6000억 원으로 북한(34조2360억 원)의 44배에 달한다. 

박정경 기자 verite@munhwa.com

 

 

 

 

■허울뿐인 햇볕 텅책

■2015-09-12  ‘파란만장’ 남북경협사

소떼가 연 길, 北도발에 막혀도… 8배 훌쩍 큰 남북교역

‘파란만장’ 남북경협사 

▲1998년 6월 16일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이 소떼 500마리를 몰고 방북한 1차 ‘소떼 방북’ 당시의 모습. 소들을 실은 트럭이 경기 파주시 통일대교를 건너고 있다. 통일대교는 이날 하루 전에 개통했다. 동아일보DB

 

“탕탕!”  해가 떠오르고 있던 2008년 7월 11일 오전 4시 50분경 금강산 관광지구 인근. 보초를 서고 있던 북한 병사의 총에서 총성이 울리고 곧이어 치마를 입고 있던 53세 중년 여성이 숙소에서 3.3km 떨어진 해변에 쓰러졌다. ‘박왕자 씨 피격 사건’이다.

 

남북 관계는 곧바로 얼어붙었다. 북한은 “사망 사고는 유감이지만 책임은 전적으로 남측에 있다. 남측의 진상조사는 불허하며 대책을 세울 때까지 금강산 관광객은 받지 않겠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금강산 관광은 전면 중단됐다.

 

하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르면 몇 달, 늦어도 몇 년이 지나면 금강산 관광이 재개될 것으로 생각했다. 당시 금강산 관광은 10주년을 약 4개월 앞두고 있었고, 2005년 6월에는 누적 관광객 100만 명을 돌파한 뒤 사건 4개월 전에는 승용차 관광까지 실시할 정도로 자리를 잡아가고 있었다. 개성 관광도 두 차례 시범관광을 거친 뒤 2007년 12월부터 본격 실시돼 10만 명이 넘는 관광객이 선죽교를 보고 돌아왔다.

 

하지만 그때가 마지막이었다. 사건 발생 7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금강산과 개성 관광은 여전히 재개되지 못하고 있다. 갑자기 터진 사건으로 남북 경협이 중단된 대표적 사례다. 

 

금강산 관광뿐만 아니라 남북 간 갈등이 일어날 때마다 개성공단 폐쇄가 거론되는 등 늘 남북 경제협력(경협)은 언제라도 중단될 듯 아슬아슬해 보인다. 하지만 정작 실제 통계를 보면 5·24조치가 시행되는 중임에도 남북 간 교역액은 계속 늘고 있다. 뜨고 지는 때가 있을지언정 전체적으로는 성장해 온 셈이다.  

 

16일이면 폐쇄됐던 개성공단이 재가동을 시작한 지 2주년이 된다. 남북 경협의 위태로웠던 역사와, 그럼에도 성장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무엇인지 살펴본다.

 

▲소 500마리를 몰고 간 1차 ‘소떼 방북’ 당시 정주영 회장이 카메라를 향해 손을 흔들고 있다. 당시 83세였던 정 회장은 4개월 뒤 소 501마리를 몰고 2차 방북을 한 뒤 김정일과 면담했다(왼쪽 사진). 2008년 7월 금강산 관광지구에서 북한 보초병에게 피격 당한 박왕자 씨의 시신이 남측에 인도돼 국립과학수사연구소로 옮겨지는 모습. ‘박왕자 씨 피격 사건’ 이후 금강산 관광은 여지껏 중단된 상태다(가운데 사진). 2013년 4월 정부의 개성공단 체류인원 전원 철수 결정에 입주기업 관계자들이 공단에 남아 있는 물품을 옮기는 모습. 개성공단은 그해 9월에야 다시 가동됐다(오른쪽 사진). 동아일보DB

 

80년대 중반 시작… 현대 대우 코오롱 주도 

남북 경협의 ‘태동기’는 1980년대 중반부터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남북한의 경제력 차이가 크지 않았던 1984년 11월 15일, 제1차 남북 경제회담이 열린다. 그 두 달 전 남한에 대홍수가 났을 때 북한 적십자사가 수재 구호물자를 주겠다고 제의하면서 남한이 그것을 받아들인 것이다. 북한으로서는 남한이 재해를 입은 틈을 타 체제를 홍보하려는 목적이었겠지만 결과적으로 그 이전까지 대결 일변도였던 남북 관계가 바뀌는 새로운 전환점이 됐다. 

 

본격적인 시작은 1988년 7월 7일 노태우 대통령이 ‘민족자존과 통일번영을 위한 특별선언’, 이른바 ‘7·7선언’을 통해 남북 간 교역 문호 개방을 천명하면서부터다. ‘북방정책’ 추진의 시발점으로 평가받는 이 선언을 계기로 남북 경협은 급물살을 타게 된다.

 

초기 남북 경협을 주도한 기업은 현대 대우 코오롱 등이었다. 7·7선언 이듬해인 1989년 1월, 정주영 당시 현대그룹 회장이 경제인으로서는 처음으로 북한을 방문해 ‘금강산 남북공동개발 의정서’를 체결했다. 금강산 관광의 시작이었던 셈이다. 물론 실현되기까지는 9년 넘는 세월이 필요했다. 

 

금강산 관광이 실현되기 전까지 남북 경협에서 활발한 활동을 벌인 것은 대우와 코오롱이다. 당시 코오롱상사는 1989년 홍콩 현지법인을 통해 북한으로부터 16만 달러 상당의 도자기와 인삼주 등을 구매해 오면서 북한 대성은행에 처음으로 신용장을 개설했다. 이는 남한 회사가 북한 은행에 직접 신용장을 개설한 첫 사례다. 또 2년 뒤에는 약 500만 달러의 양말 제조기를 북한에 수출했는데, 당시 북한이 ‘대한민국’으로 원산지 표기를 한 제품을 받아들였다는 점에서 관심을 끌기도 했다. 이때 코오롱은 기계관리 전문 기술자 2명을 현지에 파견해 북한에 양말 제조 기술을 지도하기도 했고, 이 역시 남한 기술자가 북한에 파견된 첫 사례로 기록된다. 

 

1990년대 초반에는 대우가 남포공단을 중심으로 경협을 이끌었다. 1992년 1월 김우중 당시 대우그룹 회장이 북한을 방문해 평안남도에 있는 남포공단 건설에 합의하고 돌아왔다. 9개월 뒤에는 남포공단 조사단이 방북했고, 이때까지만 해도 남북 경협은 확대 일변도였다. 

 

간첩 북핵 피격 도발… 남북 경협 ‘잔혹사’의 시작

남포공단 조사단이 방북한 1992년 10월 6일 바로 그날, 국가안전기획부(안기부)는 “거물급 간첩들의 지휘를 받아 1995년 적화통일을 목표로 암약해 온 ‘남한 조선노동당’ 가담자 95명을 적발하고 이 중 62명을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했다”고 발표했다. 이른바 ‘남한 조선노동당 간첩 사건’이 터진 것이다. 정치권은 공안정국으로 들어갔다. 약 일주일이 지난 뒤 정부는 대북 경협 사업을 당분간 중단한다고 발표한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이듬해인 1993년 북한이 핵확산금지조약(NPT)을 탈퇴하고 1994년 제1차 북핵 위기가 이어진다. 남북 경협이 위축되는 것은 당연한 일.

 

하지만 1994년 남북 정상회담 개최가 합의되면서 위기는 넘어가는 듯 보였다. 하지만 남북 정상회담 개최를 약 2주일 앞두고 북한 김일성 주석이 사망하면서 남북 관계는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혼돈 속으로 빠져든다. 미국이 영변 핵시설에 대한 폭격 계획까지 세우던 상황. 다행히 위기는 그해 10월 북-미 핵협상이 타결되며 넘어간다.

 

북핵 위기가 사그라든 후 경협은 다시 추진된다. 대우가 추진하던 500만 달러 규모의 남포공단 사업은 1995년 5월 정부의 승인을 받게 되고, 이듬해에는 대우와 북한 조선삼천리총회사가 반씩 투자한 ‘민족산업총회사’도 설립된다.

 

금강산 관광을 향한 현대의 발걸음도 빨라졌다. 1998년 2월 정몽헌 당시 현대건설 회장이 중국 베이징(北京)에서 북한과 접촉했고, 4개월 뒤 그 유명한 정주영 명예회장의 ‘소떼 방북’이 이뤄진다. 현재는 북한에 속한 강원 통천 출신의 정 명예회장은 6월 1차 방북 때 소 500마리, 10월 2차 방북 때 소 501마리를 합쳐 총 1001마리를 몰고 휴전선을 넘는 장관을 연출했다. 잘 알려진 대로 정 명예회장은 17세 때 가난을 벗어나기 위해 부친이 소 1마리를 판 돈 70원을 훔쳐 서울로 왔는데, 그때의 빚을 갚는 마음으로 1000마리에 1마리를 더 보탠 것이다. 1마리는 원금, 1000마리는 이자인 셈이다.

 

정 명예회장의 2차 방북이 이뤄진 다음 달 금강산 관광이 개시된다. 육로가 뚫리지 않았던 터라 현대상선의 관광선인 ‘금강호’가 관광객을 운송했다. 그리고 이날로부터 10년이 채 얼마 남지 않은 때 박왕자 씨 피격 사건이 발생한다.

 

현대그룹 관계자는 “사실 금강산 관광이 중단된 2008년은 ‘민족 화합’이라는 명분 외에도 내부적으로는 금강산 관광 사업이 흑자로 돌아서는 시기로 보던 해”라며 “가장 분위기가 좋았던 때에 갑자기 사업이 사라진 셈”이라고 설명했다.

 

앞서 2000년에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노동당 제1비서의 첫 남북 정상회담으로 6·15공동선언이 이뤄지고, 개성공단 설립도 추진된다. 2003년 6월 착공된 개성공단은 1년 후 시범단지에 15개 입주사가 입주계약을 맺은 후 점차 입주 업체가 늘어났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남북 정치 상황에 따라 개성공단은 늘 조마조마한 위기를 겪을 수밖에 없었다. 때로는 북한의 급작스러운 요구로 개성공단이 남북 갈등의 원인이 되기도 했다. 2008년 5월에 북한이 개성공단과 관련된 기존 법규와 계약의 무효를 선언하며 토지임대료와 임금 인상 등 조치를 취하라고 통보하면서 “이에 불응하는 남측 기업은 공단을 떠나도 좋다”고 선언해 공단이 폐쇄되는 것 아닌지 불안감이 높아지기도 했고, 2010년 4월 천안함 사건과 그해 11월 연평도 포격 사건이 연이어 터지면서 정부가 개성공단 방북을 일시 금지하기도 했다. 

 

급기야 2013년 4월에는 개성공단 폐쇄 결정으로 최대 위기를 맞았다. 북한이 당시 남북정세를 거론하며 “우리의 존엄을 조금이라도 훼손하려 든다면 공업지구를 가차 없이 차단, 폐쇄해 버리게 될 것”이라고 으름장을 놓았고, 연이은 대화 노력도 허사로 돌아갔다. 결국 공단에 체류하던 남한 인력들이 모두 철수하고 공단은 잠정 폐쇄됐다. 경협 보험금을 얼마나 받을 수 있을지 생각할 정도로 영영 문을 닫을 줄 알았던 개성공단은 8월 남북이 재가동에 합의하면서 9월 가동 중단 약 160일 만에 극적으로 다시 살아났다.

 

지난달도 북한의 목함지뢰 도발과 서부전선 확성기 포격 도발이 이어지자 개성공단 출입 제한 조치가 내려지는 등 다시 긴장감이 감돌기도 했다. 이렇게 아슬아슬했던 남북 경협, 과연 효과는 있는 것일지 의문이 생기지 않을 수 없다.

 

정치 상황과 별개로 성장하는 경협 

겉으로 드러난 정치적 군사적 상황만 보면 경협이 지난 30년간 어떻게 유지될 수 있었는지 신기할 정도다. 과연 얻는 게 뭐가 있을까 싶을 정도. 하지만 실제 통계를 보면 이런 역사적 상황과는 달리 남북 경협은 꾸준히 성장했음을 알 수 있다.

 

20년 전인 1995년 남북 교역 규모는 2억8700만 달러였지만 지난해에는 23억4300만 달러(약 2조7842억 원)로 8배 이상으로 늘었다. 때때로 뒷걸음질치기도 했지만 큰 흐름으로 보면 규모는 커진 것이다. 개성공단만 봐도 2008년 18개였던 입주 기업이 지난해 말 125개가 됐고, 2012년부터는 북측 근로자가 5만3000여 명이 됐다. 지난해 연간 생산액은 4억6997만 달러(약 5585억 원), 누적 생산액은 26억6974만 달러에 이른다. 정부가 대북 제재 수단으로 ‘5·24조치’의 기조를 유지하고 있음에도 경협은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

 

금강산 관광이 중단된 후로 남북 교역의 99.8%는 개성공단이 차지하고 있다. 수많은 위기에도 불구하고 개성공단 입주 기업들이 사업을 계속해 나가는 것은 역시 저렴한 인건비 때문이다. 개성공단의 최저임금은 월 70.35달러(약 8만4000원)로, 이마저도 6월에 5%를 인상한 것이다. 여기에 연장·휴일수당, 사회보장비 등을 합쳐 입주 기업들은 북측 근로자 1인당 인건비를 월 150달러 안팎으로 지급하는데, 베트남의 인건비도 370달러 정도 한다는 것을 생각하면 기업으로서는 충분히 이윤을 낼 수 있는 조건인 셈이다.

 

게다가 서울과 가까워 물류비도 아낄 수 있고 우리말과 역사를 공유하는 양질의 노동력을 갖추고 있다. 북한으로서도 부족한 외화를 벌어들일 수 있다. 아슬아슬한 위기 상황에서도 남북 경협이 버텨낼 수 있는 이유다.

 

위기 뒤에 기회가 오듯 현재 논의되고 있는 금강산 관광 재개가 실현된다면 남북 경협의 역사는 또 다른 전기를 마련할 것으로 보인다. 또 5·24조치로 북한에 직접투자가 어려워지자 최근에는 북한과 거래가 활발한 중국 지린(吉林) 성 창바이(長白) 조선족자치현을 통한 간접투자가 이뤄지기도 하는 등 경협의 또 다른 형태가 언제든 등장할 수도 있다. 하지만 역시 최고의 남북 경협은 통일이 아닐까. 그때야말로 남북 경협의 ‘잔혹사’에 종지부를 찍게 되는 날일 것이다. 

김성규 기자 sunggyu@donga.com

 

2016.02.12  햇볕정책으로 잃어버린 대북정책 20년...김정은 붕괴 방법은?

▲ 조선중앙TV 캡처

 

북한이 핵실험에 이어 인공위성을 가장한 대륙간 탄도미사일을 발사했다. 이는 핵실험에도 정신 못 차리고 미국과 유엔에만 의지해 대북제제만을 운운해온, 모든 문제를 중국 탓으로만 돌려온 대한민국이 불러온 당연한 결과다

북한의 핵-미사일은 지난 수십 년 간의 대한민국 정부의 대북정책이 설정했던 가설이 거의 완전하게 허물어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기능주의적 낙관론 또는 낙관적 기능주의의 붕괴다
우리가 선의(善意)를 가지고 공존-교류-협력-지원을 열심히 하다보면 그 정성이 북한 권력자에게 먹혀서 남과 북의 대등하고 호혜적인 평화체제, 상호불가침, 공동번영을 이끌어낼 수 있다고 보는 가설이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오늘의 시점에서 볼 때 이 가설과 전제는 순전한 헛발질이었다. 북한의 권력자들은 생물학적으로는 물론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다. 그러나 의식(意識)의 차원에서는 우리와 달라도 너무나 다른 종류다

햇볕론자들이 탈북자들의 말을 귀담아 들었다면, 황장엽 비서의 경고를 소중히 여겼다면 오늘 같은 똥밭에 넘어지는일은 없었을 것이다. 패착은 북한수령독재정권의 태생적 특수성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무지에서 비롯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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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3차 핵실험을 강행하는데도 수령독재정권의 명줄이 되어주는 개성공단은 계속해서 유지되었고, 천안함 폭침, 연평도 포격, 박왕자 피살과 같은 도발이 끊임없이 이어지는데도 대화로 문제를 풀어야 한다는 비겁한 변명들이 난무했다

그래서 새해 벽두부터 연이어 터진 김정은의 도발은 대한민국이 불러온 당연한 결과인 것이다. 북한의 수령독재 정권에 대해서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기 때문에 우리가 선의를 가지고 열심히 정을 베풀면 저들도 바뀔 것"이라고 설정하는 것은 너무나 순진한 짓이다. 그래서 김정은에게는 선의로만은 안 되고 '법치'가 불가피하다

첫째 '월등한 군사적 응징력' 확보가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월등한 군사적 응징력'은 고사하고 우리는 지금 '핵 보유국' 북한에 비해 '핵 없는 2류 국가'로 나가떨어지고 있다. 그런데도 당국자들은 툭하면 "혹독한 대가를 치르게 하겠다'고 호언장담한다. 혹독한 대가? 어떻게? 맨날 얻어터지기만 하면서도 보복 한 번 딱 부러지게 못 한 주제에 혓바닥 하나만은 돈 안 든다고 멋대로 쉽게 놀리고 있다

둘째 중국 탓만 하지 말고 문제의 중심이 우리에게 있다는 인식전환이 필요하다. 북한의 김정은 수령독재 정권은 대화와 타협의 대상이 아니라 제거해야만 하는 악마의 근원이라는 문제의식이 말이다. 우리는 대화하고 타협하려 하면서 남에게 압력을 가해달라고 하는 것처럼 비겁한 것이 또 어디있는가

북한의 김정은 정권의 목숨줄을 쥐고 있는것은 중국만이 아니다. 김정은 정권의 목숨줄은 북한주민도 쥐고 있다. 오히려 북한주민이 쥐고 있는 목숨줄이 중국보다 더 강력한것이다.

셋째 전략 전술의 문제다. 북한의 김정은 수령독재 정권을 어떻게 붕괴시킬까? 북한의 도발이 터질 때마다 요술방망이처럼 등장하는 한미군사적 시위는 김정은 수령독재정권에게 그 어떤 압력도 되지 못 한다는 것은 이미 삼척동자(三尺童子)도 아는 사실이다.

한미동맹은 북한의 침략으로부터 대한민국을 지키는 보검이지 북한문제를 해결하는 요술방망이는 아니다. 이번 북한의 도발에 한미군사훈련에서 북한수뇌부 참수작전도 함께 진행한다고 한다

정부의 비겁함과 국민우롱에 분노를 넘어 조소(嘲笑)를 보낸다. 북한을 이라크의 사담후세인이나 리비아의 카다피, 알카이다의 오사마 빈 라덴과 같이 생각하는 무지의 결과라 생각은 하지만 어쩌면 저렇게 국민을 상대로 사기를 칠 수 있는지 정부의 비겁함이 너무나 한심하다

그렇다면 군사적 방법으로도, 참수작전으로도, 경제봉쇄로도 붕괴시킬 수 없는 김정은 정권을 붕괴시킬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가? 그것은 북한내부에서의 혁명이다

대한민국은 북한내부가 변화할수 있는, 북한주민의 저항의식이 싹틀수 있는 귀중한 20년을 햇볕의 망령으로 잃어버렸다. 북한주민의 의식이 수령우상화에서 수령증오로 바뀔 때 한미동맹의 군사력도, 김정은 참수작전도, 경제봉쇄도 그 효력을 발휘할 수 있다

, 늦었다고 생각할 때 가 시작이다. 이제부터도 김정은과 북한의 2,300만 인민을 분리해서 생각하는 사고, 김정은은 반드시 제거 (除去)해야 한다는 의지를 가지고 북한문제를 풀어야 한다

어제 정부가 개성공단 중단을 결정한 것에 박수를 보낸다. 기능주의적 낙관론 에 빠져 잘못된 전략전술을 하다가 똥 밭에 넘어졌으니 똥이 더럽다고 말만하지 말고 과감하게 똥을 짚고 일어서야 할 때다

북한문제의 가장 중요한 열쇠 북한주민의 의식변화, 독일처럼 쿠바처럼 못하겠으면 비공식적으로라도 해야 한다. 장담 하건 데 남한에 정착한 탈북자가 3만명이 아니라 30만명이 된다면 북한의 수령독재 정권은 무너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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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명의 탈북자가 년간 북한에 비공식적으로  송금하는 돈이 100억원을 넘고있다. 이 돈은 지금 북한의 장마당경제를 이끌고 있고 주민의식을 변화시키는 가장 큰 역할을 하고 있다. 만약 탈북자가 30만명이 된다면 년간 1000억원의 돈이 북한지하경제로 흘러들어가게 된다.

햇볕론 자들이 독재자의 주머니에 쑤셔 넣은 비겁한 돈이 아닌, 정말로 북한주민의 의식변화를 이끌어 낼 수 있는 진정한 햇볕이 되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돈만 가는 것이 아니다. 자유민주주의 정신과 풍요와, 인간의 보편적 가치인 인권도 함께 들어가고 있다

여기에 남한내 탈북자들이 북한과 남한내 종북세력의 온갖 위협과 방해에도 10여년간 끊임없이 행동해온 대북라디오 방송과 대북전단 등 모든 심리전을 확대한다면 어떻게 될까김정은 수령독재 정권은  스스로 붕괴되게 되어 있다

중국이 아무리 북한 수령독재정권을 보호하여 저들의 방패막 으로 하려고 해도 대의명분에서 할 수 없게 된다. 한미동맹이 군사행동에 나서고 김정은 참수작전을 강행해도 북한을 위해 함께해줄 우방은 없게 된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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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 방영된 SBS사극 “육룡이 나르샤”에서 신조선 건국에 반대하며 두문동에 들어간 고려유생들 문제를 태종 이방원이 해결하는 모습이 방영되었다. 고려라는 절대 악을 제거하기 위해서 정몽주를 쳐내고, 두문동에 불을 질러버리는 태종이방원

이방원은 이렇게 말한다. “ 똥밭에 넘어졌는데, 어떻게 똥을 짚지 않고 일어설수 있겠습니까? 똥을 짚어야 일어날수 있는 것이지요. 삼봉선생과 아버지의 방식이 아닌 나는 내방식대로 세력을 만들겁니다.

백성의 절대악이 되어버린 고려를 끝까지 지키겠다고 고집하는 정몽주와 고려유생들을 설득해서 함께 새나라건국을 도모하겠다는 정도전의 기능주의적 낙관론에 일격을 가함으로써 신조선을 있게한 태종 이방원식, 전략전술 리더쉽이 오늘 대한민국에 절실히 필요하지 않은가 생각되는 장면이었다

김국평 탈북자/전 자유북한 방송국장

 

2016.02.15  金銀星 前국정원 차장 “김정일, 수금 다 안됐다고 김대중 訪北 연기시켰다.”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이 2000년 6월 15일 평양 목란관에서 열린 만찬에서 잔을 부딪치고 있다.

 

  김대중(金大中) 정부 때 국가정보원 국내담당 차장이었던 김은성(金銀星)씨는 <조갑제닷컴>에 자주 안보 관련 글을 써 올린다. 작년 12 30일 그는 독재자 김정일(金正日) 사망 후의 남북한 정세를 분석, ‘보수(保守)는 둥지에서 뛰쳐나와 핵()개발도 고려해야’라는 제목의 글을 썼다. 필자가 읽다가 흥미로운 대목을 발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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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주기식 원조가 저들을 상전으로 만들었다. 북한은 김대중 전() 대통령의 방북(訪北) 하루 전에 돈을 보내지 않으면 정상회담을 하지 않겠다는 전문(電文)을 보냈다. 이런 억지가 어디 있는가? 결국 경호와 통신기기 보완을 구실로 방북 일정을 하루 연기했다고 언론을 통해 발표했다. 앞으로 북한에 대한 모든 지원은 반드시 반대급부가 있도록 해야 한다. 식량을 직접 북한 당국에 인도하면 주민통제를 위한 배급용으로 이용하거나 옥수수로 바꿔 주민들에게 나눠 준다. 배급제도를 해체시켜 시장경제를 활성화시켜야 한다. 모든 물자에 대하여는 차관 형식을 밟아 지하자원 등의 현물(現物)상환이라도 반드시 받아내야 한다. 이래야만 그들에게 책임감을 주고 통일자금을 쌓아 나갈 수 있다.>
  
 
‘북한은 김대중 전 대통령의 방북 하루 전에 돈을 보내지 않으면 정상회담을 하지 않겠다는 전문을 보냈다’는 문장이 나를 긴장시켰다. 정부 발표를 부정하는 내용이기 때문이었다. 김 전 차장에게 전화를 걸어 설명을 들었다. 김씨는 이 문장의 엄청난 의미를 잘 모르는 듯 강조점 없이 평이하게 설명했다. 다음 날 그를 찾아가 만났다
  

  “돈 다 보낼 때까지 들어오지 말라”

“그날이 2000 6 10일인데, 김대중 대통령이 김정일을 만나러 방북하기로 한 612() 전 토요일이었습니다. 6 10일은 국정원 창설 기념일이고 직원들은 오전에 운동장에서 체육대회를 하였고, 저는 오후에 골프를 쳤으므로 기억이 또렷합니다. 체육대회가 열리고 있던 운동장 스탠드엔 임동원(林東源) 국정원장, 권진호(權鎭鎬) 해외담당 차장, 그리고 병중(病中)이던 국내담당 차장을 대리한 제(당시 對共실장)가 앉아 있었습니다
  
 
오전 1030분쯤이었습니다. 운동장을 가로질러 김보현(金保鉉) 5국장이 황급히 우리한테 왔어요. 그는 김대중-김정일 회담 준비업무를 맡고 있었습니다. 김 국장이 문서 한 장을 임 원장에게 건네면서 당황한 말투로 ‘정상회담 못하겠다고 합니다’는 취지의 이야기를 한 것 같습니다.
  
 
원장도 문서를 읽더니 안색이 변해요. 일어서면서 ‘차장들 갑시다’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본청 원장실로 옮겼습니다. 여기서 원장이 한 페이지짜리 문서를 회람시켰습니다. ()에서 보낸 전문이었는데, 두 문장 정도 되었습니다. ‘나머지 돈을 다 줄 때까지 회담을 연기한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요컨대 수금(收金)이 완료되지 않았으니 평양에 올 수 없다는 협박조 글이었습니다.
  
 
임동원 원장은 당황하기도 하고 화도 난 표정이었는데, 권 차장과 저에게 ‘좋은 아이디어가 없느냐’고 했습니다. 남북회담을 여러 차례 치르면서 경험한 전례(前例)가 있어 제가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북측에서 경호와 통신문제로 회담연기를 요청해 왔다고 발표하면 안 될까요.’ 북한과 회담할 때 늘 문제가 되는 게 경호와 통신이었거든요. 임 원장도 좋은 생각이라고 했어요. 15분 요담한 뒤 우리는 헤어졌습니다. 아마 그날 우리가 북측과 급하게 협의하여 이 문제를 해결했을 거예요.     


  
김대중 회고록도 정상회담 연기이유 제대로 안 밝혀

▲2000년 4월 27일 김대중 대통령으로부터 임명장을 받는 김은성 국정원 2차장(오른쪽).

 

  일요일이던 2000 6 11일 오전 청와대 박준영(朴晙瑩) 대변인은 “남북정상회담이 6 12~14일에서 13~15일로 하루 연기됐다”고 발표했다. “북한에서 준비가 덜됐다는 이유로 연기를 요청해 왔기 때문”이라는 설명이었다. 김정일은 그러나 방북 첫날인 6 13일 평양 백화원초대소에 머물던 김대중 대통령을 찾아가 만난 자리에서 “외신(外信)들은 미처 우리가 준비를 못해 (김 대통령을 하루 동안) 못 오게 했다고 하는데 사실이 아니다”고 말했다.
  
 
김은성 전 차장의 증언은 정부 발표와 청와대 측의 설명을 뒤엎는 것이다. 김대중은 회고록에서 평양 방문이 하루 연기된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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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돌연 북에서 평양 방문을 하루 연기해 달라고 요청했다. 10일 대남(對南)통신문을 보냈다. “기술적 준비관계로 불가피하게 하루 늦춰 13~15 23일 일정으로 김 대통령님이 평양을 방문토록 변경해 줄 것을 요청합니다.>
  
 
당시 대공(對共)실장 김은성씨가 보았다는 전문 내용엔 물론 그런 내용이 없었다. ‘하루 연기’가 아니라 ‘나머지 돈을 다 보낼 때까지 연기한다’는 엄포였다고 한다. 김대중-김정일 회담의 핵심 사안에 대한 김대중의 증언은 그동안 너무나 사실과 다른 점이 많다. 평양회담 준비에 핵심적으로 관여했던 다른 국정원 간부도 “연기 사유가 돈 문제였다”고 확인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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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 오전 ‘방북 불가’ 통보를 받은 국정원 측이 송금에 차질을 빚은 점에 대하여 북한측에 설명하고, ‘은행이 문을 여는 12일 중에 나머지를 송금할 것이니 하루만 연기하자’고 설득, 북측이 그날 오후에 다시 김대중 회고록에 나오는 그런 내용의 대남전문을 보냈을 가능성은 있다.
  
 
김대중 정부와 현대그룹이 평양회담 이전에 김정일에게 송금(送金)하기로 약속했던 45000만 달러를 다 받지 못했으니 ‘들어오지 말라’는 통보를 했다면, 떳떳하지 못한 비밀거래를 연상시킨다. 김은성씨 주장대로 수금 차질로 회담이 연기된 것이라면 김대중-김정일 회담의 본질적 성격은 ‘정상회담 구걸 행위’로 규정할 수 있다.     


  
국정원이 送金責 

 2003 6 23, ‘남북정상회담 관련 대북비밀송금 의혹사건 등의 진상규명을 위한 특별검사’ 이○○씨는 현대그룹 정몽헌(鄭夢憲) 회장을 불러 송금 과정을 캐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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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사) : 북측에 45000만 불을 어떤 방법으로 지급하기로 하였는가요
  
 
(정몽헌) : 2000 5 23일부터 25일까지 금강산에서 부두기공식이 있어서 저와 김윤규 사장이 참석을 하였는데, 이때 아태(亞太)위원회 재정담당이라고 하는 사람이 저를 찾아와 부위원장의 심부름이라고 하면서 봉투 하나를 건네주었는데 봉투 안에 ‘돈자리(계좌번호)’라고 적힌 몇 장의 서류가 들어 있었습니다. 5월 중순에 제가 박지원 장관을 만나서 정부가 부담하여야 할 1억 불을 현대가 대신 부담하기로 하였기 때문에 아태 재정담당에게 우리가 45000만 불을 전부 송금하겠다는 말을 부위원장에게 전해 주도록 부탁하였습니다. 저는 북측으로부터 받아 온 서류 봉투를 보관하고 있다가 6 1일 해외 출국을 하면서 김윤규 사장을 불러 각사(各社) 사장들에게 전해 줘서 송금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하라고 지시를 하였습니다.>
  
 
여러 관련자들을 조사해 많이 알고 있는 이 검사는, 정몽헌씨에게 이렇게 정리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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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북송금 과정을 보면 현대건설과 현대전자는 해외에서 자금을 북한측 계좌로 송금한 것으로 확인되고, 현대상선만이 국내 은행으로부터 자금을 대출받아 송금하였습니다. 현대상선이 조달한 2억 불의 송금과정을 보면 국정원이 송금의 주체인 것으로 하면서 국정원 직원의 개인 실명(實名)을 이용하였으며, 미국 등 북한과 적대(敵對)관계에 있는 국가에 자금이동이 노출될 것을 염려하여 자금 흐름이 파악되지 않도록 하면서 6 9일 중으로 송금되도록 국정원과 관계은행인 외환은행의 긴밀한 협조까지 있었던 것으로 확인됩니다. 현대상선은 6 7일 이미 4000억원을 (산업은행으로부터) 대출받음으로써 송금 준비가 완료되었음에도 불구하고, 6 9일 오후 2시가 되어서야 국정원에 돈을 건네주어 송금 절차를 밟도록 하여 결국 은행 마감시간이 임박하여 어렵게 송금이 완료되는 등 상당히 급하게 돌아갔던 당시 상황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북측과의 합의는 6 12일 남북정상회담 전까지 45000만 불을 지급하기로 하는 내용이었으며, 2000 6 9일은 금요일로서 해외은행은 토요일 휴무인 관계로 당일 중으로 송금이 완료가 되어야 하고 그 기간 내에 송금이 잘못 처리되었을 경우 정상회담 개최에도 영향을 줄 수 있는 상황이었는데 송금이 잘못된 부분에 대하여 몰랐는가요?>
  
 
정 회장은 “남북정상회담이 하루 연기되었다는 사실을 접하고서 저도 송금에 무슨 문제가 있지 않느냐 해서 3개사 사장들에게 확인을 하니까, 모두 차질 없이 보냈다는 보고를 하였습니다”라고 했다.  

  
  
김정일 측 수취인 이름 잘못 써

▲2003년 2월 21일 개성공단 건설 협의차 북한으로 향하는 현대아산 정몽헌(사진 왼쪽) 이사회 회장과 김윤규 사장.

 

  검사가 다시 “(북측의) 남북정상회담 연기 통보는 6 10일 오후였고, 송금이 잘못된 사실이 확인된 것은 같은 날 오전으로서 이미 차질이 발생했는데 문제가 없다는 보고를 받았다는 말인가요”라고 캐묻는다. 정 회장은, “제가 분명히 상선, 건설, 전자 사장들에게 송금에 문제가 있는지 물었을 때, 모두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하였습니다”라고 했다.
  
 
검사는 “당시 송금을 담당하였던 외환은행은 국정원 쪽으로부터 수취인이 잘못 기재되었다는 사실을 통보받았으며, 현대 김충식 사장도 국정원 직원으로부터 송금이 잘못되었다는 연락을 받았다는 것으로 보아 이 건 송금결과에 대하여는 국정원이 먼저 알고 있었던 것으로 보여진다”고 설명했다.
  
 
검사는 이어서 이렇게 묻는다
  
 
“이 건 송금이 잘못 처리되었다는 부분에 대하여는 국정원이 내용을 파악하고 신속하게 수습을 시도하였지만, 6 10일이 토요일이었던 관계로 6 12일 월요일에야 정정이 될 수 있는 상황이었고, 결국 정상회담은 6 12일보다 하루 늦은 13일에 개최되게 되고, 이는 이 건 송금지연에 따른 결과로 보여지는데요. 국정원 직원 명의로 B.O.C(Bank of China) 마카오 지점, 계좌주() DAESUNG BANK로 송금한 4500만 불이 실제 계좌주인 ‘DAESUNG BANK-2’와 일치하지 않아서 송금처리 되지 않았던 것으로 확인이 되는데 이에 대한 보고가 전혀 없었다는 말인가요.
  
 
정몽헌 회장은 “그런 보고는 전혀 없었습니다”라고 했다. 검사는 다시 《내일신문》을 내놓고 묻는다.
  
 
2003 1 30일자 《내일신문》에 <정주영 전 현대그룹 명예회장은 ‘북한 개발권 대가로 2000 6월 남북정상회담 직전 싱가포르에 있는 북한 측 계좌로 5억 달러를 넣었다’라고 언급>하면서, 정 전 명예회장은 <남북정상회담이 당초 일정보다 늦어진 것도 ‘같은 해 6 11일까지 5억 달러 중 4억 달러만 북측에 지급해, 북측에서 김대중 대통령이 들어올 수 없다고 통보했다. 그래서 다음날(6. 12) 김윤규 현대아산 사장이 긴급하게 북경으로 가서 사태를 해결했다’>고 밝히고 있는데 어떤가요.
  
 
“정 명예회장님이 이렇게까지 자세하게 대북송금 관련 내용을 아시지도 못하셨을 뿐만 아니라, 저는 김충식 사장으로부터 송금이 잘못 처리되었다는 보고를 받은 사실이 없습니다.
  
 
검사는 “2000 6 11일부터 12일까지 김윤규 당시 현대건설 사장 겸 현대아산() 사장이 중국을 방문하였던 것이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는가요”라고 물었다.
  
 
정몽헌 회장은, “김윤규 사장이 무슨 일로 중국을 방문하였는지는 모르겠습니다. 혹시 이랬을 수는 있습니다. 제가 대통령을 수행하여 평양에 가게 되었기 때문에 중국을 통하여 평양으로 들어올 생각이었는지 모르겠습니다”라고 피했으나 곧 검사의 공격이 들어왔다.
  
 
“그러나 6 13일 정상회담이 이루어졌을 때 김윤규 사장은 평양으로 가지 않고서 귀국하였던 것을 본다면 그 이유는 아니었던 것 같은데 어떤가요.
  
 
정몽헌 회장은 “그 부분은 김윤규 사장에게 확인해 봐야 할 것 같습니다”라고 피했다.  

  
  
경호 위해 하루 연기?

▲2003년 6월 10일 김보현 전 국정원 3차장이 대북송금 사건 조사를 받기 위해 특검 사무실로 출두하고 있다.

 

  대북송금사건 특검은 평양회담 준비를 전담한 김보현 당시 국장(나중에 북한담당 차장으로 승진)을 불러 회담 연기 내막을 따졌다. 신문 기록에서 인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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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술인은 6. 10. 남북정상회담이 하루 연기된 전문(電文)을 받은 사실이 있는가요.
 
: 6. 10. 오후 4시경 국정원 상황실을 통해서 전문을 받아서 알고 있습니다.
  
 
: 위 전문을 받은 부서는 진술인이 국장으로 있던 대북(對北)전략국이 아닌가요.
 
: 5국이 중심이 된 별도의 상황실에서 전문을 받았습니다.
  
 
: 위 전문 내용에 회담이 연기된 사유에 대해서 기재가 되어 있었는가요.
 
: 기술적인 준비관계로 하루 연기한다고 되어 있었습니다.
  
 
: 회담이 하루 연기된 실질적인 이유는 무엇인가요.
 
: 2000. 6. 3. 임 원장과 제가 수행원(서○○ 당시 과장)을 대동하고 극비리에 판문점을 통하여 방북을 하여 그날 저녁 김정일 위원장을 만나게 되었는데, 김정일 위원장이, 김 대통령의 신변안전을 확실히 해야 한다. 12일 방북을 하루 앞당기거나 하루 늦추는 방안도 생각해서 혼돈을 주어야 한다고 주장을 하기에 임동원 특사가 일정을 (한 줄 보이지 않음) 고려할 때 하루를 앞당길 수는 없다고 답을 하였고 서로 결론을 내지는 아니하였습니다. 그리고 6. 4. 귀국한 바 있습니다. 그런데 6. 10. 연락을 받고 나서 직감적으로 ‘하루를 늦추는구나’라고 생각을 하였습니다.
  
 
: 최근까지 이 부분은 알려지지 아니한 부분이지요.
 
: 임동원과 북측의 김용순 사이에 이 점은 극비에 부치기로 합의된 내용인데 최근 언론 보도로 곤혹스러운 점이 있습니다.
  
 
: 연기가 된 실질적인 이유는 송금된 4500만 불이 계좌번호를 잘못 기재하여 북한 측 계좌에 늦게 입금된 것 때문 아닌가요.
 
: 관련이 없다고 봅니다.>
  

  “네 개 중 마지막 한 개를 받았다”

  김보현씨와 김은성씨의 말엔 차이가 있다. 김은성 전 차장은 북측의 회담 연기 통보를 접한 게 국정원 창설 기념 체육대회가 열리고 있던 6 10일 오전이라고 확신하는데 김보현씨는 그날 오후라고 주장한다. 김보현씨는 전문 내용도 ‘수금 차질’이 아니라 ‘기술적인 준비관계’였다고 했다.
  
 
김은성씨는 전문에 ‘하루만 연기한다’는 내용은 없었고, ‘수금이 완료될 때까지 무기 연기한다’는 취지였다고 기억했다. 김대중 정부는 2000 6 11일 오전 청와대 박준영 대변인을 통하여 ‘하루 연기’를 발표하도록 했는데, 김은성 전 차장은 10일 중에 남북 당국자가 비밀접촉을 통하여 이 문제의 해결방안에 합의했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특검(特檢)도 김윤규 현대아산 회장의 긴급한 중국 방문이 이와 관련이 있을 것이라 보고 추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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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 중 국정원과 현대그룹이 급히 움직여 송금 차질에 대한 북측의 오해를 풀고 은행이 문을 여는 12일에 나머지 돈을 보내겠다고 약속, 그날 오후에 북측이 공식적으로 ‘하루 연기’를 요청하는 전문을 또 내려보냈고 김보현 국장은 검사에게 그것을 얘기했을 가능성이 있다.
  
 
한국 시각 2000 6 12일 오후 6, 마카오 현지 시각 오후 5. 우리 정부의 대북 감청기관은 마카오 주재 북한 조광무역 상사에서 평양 중앙당에 긴급 보고하는 국제 전화 내용을 포착했다. 보고자는 조광무역 상사 총지배인 박자병(朴紫炳). 그의 보고 내용은 간단했다. <네 개 중 마지막 한 개를 받았다>는 것이다. 송금 차질을 빚었던 4500만 달러가 입금되었다는 표현이었다. 다음 날 김대중 대통령은 평양으로 들어갔다. 이 감청 내용은 대북송금 사건이 폭로된 2002년 가을 한나라당에 유출되었고 《월간조선》이 입수, 보도했다

출처월간조선 2012년 3월호   조갑제(趙甲濟) 조갑제닷컴대표

 

2016.09.20 햇볕정책은 실패했다

북한이 다섯 번째 핵실험에 성공했다. 그러나 우리는 속수무책이다. 북핵 앞에서조차 정치권은 국론의 심각한 분열상을 보이고 있다. 대통령과 여야 당 대표들이 머리를 모았지만 입장 차이만 확인했을 뿐이다.

 

이대로라면 광화문 한복판에서 핵폭탄이 터지고 수백만 명의 희생자가 나와도 정치권은 네 탓만 할 것이고, 정치권의 눈치를 보는 군은 북한에 보복 조치도 제대로 하지 못할 것이다. 미국은 무장하지 않은 폭격기를 보내 에어쇼나 하고 괌으로 돌아갈 것이다. 북한은 자신들은 모르는 일이라고 오리발을 내밀 것이고, 북핵을 대미 협상용이라고 선전하는 종북 좌파들은 미국 CIA의 음모라고 주장할 것이다. 중국은 주중 북한 대사를 불러 항의하겠지만 북·중 무역은 계속될 것이다. 야당은 햇볕정책을 버린 결과라고 할 것이고 북한에 특사를 보내라고 정부를 압박할 것이다. 다른 야당은 남아도는 쌀을 굶주리는 북한에 보내 인도적 차원의 지원을 하자고 할 것이다. 여당은 주먹을 쥐고 흔들면서 북한 타도를 외칠 것이고 핵무장을 하자고 할 것이고 미국은 핵무장을 반대할 것이다.

 

DJ의 유훈인 햇볕정책이 북핵 앞에 선 우리를 무기력하게 한다. 햇볕정책을 금과옥조로 받아들이는 호남 민심을 얻으려는 어떤 야당도 DJ의 유훈에 역행할 수 없다. 호남 지지를 잃는 야당은 차기 대권에 희망을 가질 수가 없기 때문이다. 진보 좌파 20%를 확보한 더불어민주당은 수도권과 호남의 호남인 20%의 인심을 얻어야 40% 표밭이 확보된다. 중도 우파 20%를 얻었다고 믿는 국민의당 역시 호남의 지지가 차기 대선 승리의 필수조건이 된다. 두 야당이 DJ의 햇볕정책에 당운(黨運)을 걸고 충성 경쟁을 하는 이유다.

 

유훈 정치에서는 작은 타협도 용납되지 않는다. 김정일이 장남 김정남 대신에 김정은을 후계자로 삼은 것도 북남무력통일이라는 김일성의 유훈을 가장 잘 지킬 것이라고 판단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김일성의 북남무력통일이라는 유훈과 DJ의 햇볕정책이라는 유훈이 한반도를 아마겟돈의 시발지로 만들 수도 있다.

 

DJ는 1994년 5월 12일 미국 내셔널프레스클럽(NPC) 오찬 연설에서 햇볕정책을 설명했다. 당시 연설에 의하면 햇볕정책은 다음 세 가지 가정에 근거하고 있다. 첫째, 배고픈 사람은 배를 채워주어야 한다. 둘째, 북한의 핵무기 개발은 미국과의 대화용이다. 셋째, 일본의 핵무장을 두려워하는 중국이 북한의 핵무장을 절대적으로 반대할 것이다. DJ에 설득된 클린턴 정부는 DJ의 제안대로 지미 카터 전 대통령을 북한에 보내 김일성과 협상하도록 했고 그해 북한과 제네바 합의를 도출했다.

 

DJ는 NPC 연설에서 햇볕정책을 반신반의하는 미국을 향해 "내가 말하는 것은 우리가 북한을 믿어야 한다는 것이 아니고 단지 북한의 진정한 의도를 시험해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라고 주장했다. 믿어보자는 말이었다. 문화혁명으로 잔뜩 웅크렸던 중국이 미국의 개방정책에 의해 문을 여는 모습에서 영감을 얻고, 강풍에 웅크렸던 행인이 햇볕에는 외투를 벗는다는 이솝우화를 인용하며 햇볕정책이 태어났다. 그러나 북한은 외투를 벗지 않았다. 외투 안에 칼을 숨겼기 때문이다. DJ는 중국을 오판했고 북한에 속았다. 북한의 김씨 일가와 지배층은 굶주리는 북한 주민을 염두에 두지 않는다. 북한 핵무기도 대화용이 아니고 북남무력통일용이다. 중국이 일본의 핵무장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으로 드러났다. DJ는 자신의 오판과 김정일에게 속은 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서서히 드러나는 북한의 핵개발 실상에도 1998년엔 "의도에 의혹은 있지만 확증이 없다"고 했고, 2000년엔 "김정일이 핵개발을 않겠다는 약속을 지키고 있다"고 발언한 것으로 보인다.

 

DJ는 NPC 연설에서 남북 간 힘의 균형을 강조했지만 북은 이를 깨뜨리려 한다. 무너진 힘의 균형은 1953년 휴전 이래 60여년을 전쟁과 평화의 중간지대에서 살아온 남한을 위협한다. 힘의 균형을 되찾아야 다음 60년을 전쟁 없이 살 수 있을 것이다.

 

힘의 균형점은 좌파들이 흔히 내세우는 국방자존심론이 아니라 주한미군과 사드가 제공한다. 남한에 주둔한 미군은 북한의 남한 핵 공격을 저지하고 사드는 미국을 북핵으로부터 방어한다. 바 로 한·미 간의 윈윈 전략이다. 이를 위해 국론 통일이 반드시 선행돼야 한다. 호남인들이 DJ의 오판과 북한의 속임수에 뿌리를 둔 햇볕정책을 과감히 버리고 DJ의 비(非)반미, 비용공, 비폭력 삼비(三非) 사상을 받아들여야 한다. 그래야 호남표를 원하는 야당들도 합리적인 대북정책과 적극적 한·미 관계를 받아들이게 되고 다음 60년의 평화가 가능해질 것이다.

이영작 서경대 석좌교수

 

2016.09.21  김진태 "과거 5300억원 대북송금, 국회 동의받았냐"

▲2003년 2월 14일 2003.02.14/김대중대통령의 대북송금관련 대국민기자회견을 박지원실장,임동원특보,조순용정무수석 등이 심각한 표정으로 듣고있다./조선DB

 

김진태 새누리당 의원은 20 "'대북송금 등 북한 핵개발 자금지원 책임 규명을 위한 청문회'를 열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김 의원은 이날 국회 대정부질문에서 "남북정상회담을 위해 김정일 계좌에 넣어준 현금 45,000만 달러가 어디에 쓰였는지 밝혀야 한다"며 이같이 말했다.

 

그는 "북한은 핵 개발을 위해 최대 15억 달러를 투입한 것으로 추산된다" "북한에 그럴 돈이 어디 있냐"고 지적했다.

 

김 의원은 "현금 45,000만 달러를 김정일 계좌에 넣어 준 2000년 대북송금 사건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이는 2003년 특검수사와 재판을 통해 확인된 사실"이라며 "지금 사드배치를 놓고 국회 동의를 받아야 한다고 난린데 그때 송금한 건 국회 동의를 받았냐. 당시 환율로 계산해 무려 5,300억원이나 되는 거금"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남북정상회담을 하기 위해 현금을 45,000만 달러나 갖다 바치고 결국 그 돈이 자금난에 허덕이는 북한의 숨통을 틔운 이 상황에서 그 누구도 어떠한 정치적, 법적 책임을 진 적이 없다" "당시 특검수사와 재판이 있었지만 그것은 대북송금이 있었냐 없었느냐에 국한된 문제였고, 지금은 북한이 핵을 개발한 상황이므로 완전히 다르다"고 주장했다.

 

김 의원은 "불법 폭력집회에 대응하기 위해 물대포를 쏜 것 가지고도 청문회를 여는 마당에 온 국민의 생존권이 달려있는 작금의 북핵사태를 놓고서 이건 너무나 당연한 것 아니냐"며 청문회 개최를 요구했다.

 

이에 황교안 국무총리는 "그당시 검찰이 최선을 다해서 수사했고 규명했고 또 혐의가 인정되는 부분이 있어서 기소했다. 그 당시로서는 확인할 수 있는 증거를 통해 처리한 걸로 본다" "오래된 것이고 실제로 어떤 것들이 밝혀질 수 있을 건지에 대해 고민해봐야 하니 신중한 검토가 필요하다"고 답했다.

뉴시스 

 

2016.09.22  박 대통령 “대화 위해 北준 돈 핵개발 자금돼”

박근혜 대통령은 22일 “비상시국에 난무하는 비방과 확인되지 않은 폭로성 발언들은 우리 사회를 뒤흔들고 혼란을 가중시키는 결과를 초래하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박 대통령은 이날 청와대에서 수석비서관 회의를 주재하면서 “국민들의 단결과 정치권의 합심으로 이 위기를 극복해내지 않으면 복합적인 현재의 위기를 극복해나가기 어려울 것”이라며 이같이 말했다.

 

대통령의 이 같은 언급은 최근 야권이 제기한 미르재단과 K스포츠재단의 강제 모급 의혹 등을 정면으로 비판한 것으로 풀이된다. 청와대는 그간 “근거없는 부당한 정치공세로 언급할 일고의 가치도 없다”는 입장이었다.

 

북한의 5차 핵실험과 관련해서는 “소위 대화를 위해 주었던 돈이 북한의 핵개발 자금이 됐다”며 “비핵화에 대한 북한의 의지가 없는 상황에서 협상을 하겠다고 시간을 보내는 동안 북한은 물 밑에서 핵능력을 고도화하는 데 그 시간을 이용했고 결국 지금과 같은 결과를 초래한 것”이라고 말했다.

 

박 대통령은 또 “다른 일부에서는 사드 배치 결정과 같은 우리의 자위적 조치가 북한의 5차 핵실험을 불러 일으켰다는 주장까지 하고 있다”며 “이것은 마치 소방서가 있어서 불이 났다고 하는 것과 같은 터무니 없는 논리”라고 했다.

 

▲박근혜 대통령은 22일 청와대에서 수석비서관회의를 주재한 자리에서 “대화를 위해 주었던 돈이 북한의 핵개발 자금이 됐다”고 말했다. [사진 청와대]

 

박 대통령은 북한 김정은을 향해 “주민의 민생은 철저히 외면한 채 천문학적인 비용을 들여가면서 핵무기와 미사일 개발에 광적으로 매달리고 있다”며 “북한 주민들의 삶은 아랑곳하지 않고 오직 정권 유지와 사리사욕만 생각하는 현실이 기가 막힐 뿐”이라고 했다

 

박 대통령은 “국민들도 국내·외적으로 어려운 경제 상황으로 마음이 편치 않으셨으리라고 생각한다”며 “안보와 경제가 지금 모두 힘든 상황이지만 골이 깊으면 산도 높다라는 말처럼 지금의 위기를 슬기롭게 극복하면 좋은 날이 올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강조했다.

 

이어 “국정의 최고 책임자로 위기 극복과 민생안정에 최선을 다할 각오로 임할 것”이라며 “정치권과 국민 여러분도 함께 힘을 모아서 최선을 다해줬으면 한다”고 당부했다.

황정일 기자 obidius@joongang.co.kr

 

2017.02.13  四字成語로 돌아본 대북정책 30년

# 프롤로그. 완벽하게, 남북 관계는 결딴났다. 교류 협력은커녕 대화조차 없다. 모든 통신선도 단절되었다. 확성기 비방 방송만이 남북을 오갈 뿐이다. 북한의 핵개발 탓이다. 그러나 남북 관계가 이렇게까지 흘러온 데에는 우리의 대북 정책도 한몫을 했다.

 

# 선견지명(先見之明). 노태우 정부는 '7·7 선언'과 '북방 정책'으로 남북 관계의 역사적 전환을 만들었다. 아직 냉전 시절이었지만 미리 내다보고 선제적으로 움직였다. 북한을 단순한 적이 아니라 통일을 향한 동반자로 규정했고 사회주의 국가들과도 관계 개선을 추진했다. 남북한의 유엔 동시 가입도 성사시켰다. 분단 이후 최초로 남북의 화해와 상호 불가침, 교류 협력을 규정한 기본합의서도 만들어냈다. 그야말로 탈냉전의 시대를 바라보면서 능동적으로 준비했던 것이다. 당시 중국과의 수교가 없었더라면 우리 경제는 이만큼 성장하지 못했을 것이다. 당시의 획기적 대북 정책이 없었더라면, 우리는 여전히 적대적 대결의 남북 관계만을 경험하고 있었을 것이다.

 

# 좌충우돌(左衝右突). 취임사에서 동맹보다 민족이 우선이라며 전향적 선언을 했던 김영삼 정부는 핵을 가진 자와는 악수도 할 수 없다고 강경 노선으로 돌아섰다. 불과 100일 후였다. 기업의 북한 투자도 장려되었다가 방문조차 불허되기를 반복했다. 인도적 지원조차 금지와 허용 사이를 오락가락했다. 도대체 정책 방향을 가늠할 수 없었다. 게다가 조금만 유연하게 개입 정책을 썼더라면 고난의 행군을 겪던 북한을 효과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었을 텐데, 붕괴하기만 기다렸다. 가만히 앉아서 통일 대통령이 될 상상만 했다. 소탐대실(小貪大失)이었다.

 

# 다다익선(多多益善). 남북 관계 발전은 김대중 정부의 최고 목표였다. 방법론으로 접촉을 통한 변화를 채택했다. 좀 더 자주 만나고 가능한 한 많이 주다 보면 북한이 변화하리라고 믿었다. 대북 정책 추진 원칙인 '화해 협력의 적극 추진' '퍼주기'를 해서라도 관계 개선을 하겠다는 공개적 선언이었다. '퍼주기' 비판에 억울해하는 모습을 보였지만 실제로는 애초부터 '퍼주기'를 작정한 것이었다. 그렇게 지원과 협력을 쌓아 가면 시간의 문제일 뿐 언젠간 효과가 나타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순진한 기대였다.

 

# 전철답습(前轍踏襲). 노무현 정부는 그저 김대중 정부의 대북 정책을 이어갔을 뿐이다.

 

# 자승자박(自繩自縛). 시작은 호기로웠다. 기업인 출신답게 이명박 대통령은 실질적인 대북 정책을 선언했다. 남북 관계에서도 생산성을 내세웠다. 이념의 잣대가 아니라 실용의 잣대로 풀겠다고 했다. 그러나 천안함 폭침 사건이 발생하자 '5·24 조치'를 내걸었다. 정부 차원의 대응은 당연한 것이었지만, 시인할 리조차 없는 북한에 사과와 재발 방지까지 '5·24 조치'의 조건으로 내건 것은 너무 큰 칼을 너무 높이 든 셈이었다. 과유불급(過猶不及)이었고 결과는 진퇴양난(進退兩難)이었다. 그렇게 이명박 정부의 대북 정책은 끝나고 말았다.

 

# 교각살우(矯角殺牛). 남북 사이 신뢰가 중요하다며 박근혜 정부는 출범했다. 신뢰는 쉬운 사안에서부터 차근차근 쌓아나가야 한다. 그런데 가장 어려운 북핵 문제를 오히려 전면에 내세웠다. 선이후난(先易後難)이 아니라 선난후이(先難後易)였고, 그래서 '대략난감'이었다. 급기야 개성공단마저 폐쇄했다. 개성공단 임금이 얼마나 핵 개발에 사용되는지도 모르지만, 그 돈 없다고 핵 개발 못할 북한이 아닌데 말이다. 이로써 한반도는 냉전 시절로 돌아갔고, 지난 30년의 대북 정책은 도로무공(徒勞無功)이 되고 말았다.

 

# 에필로그. 3378. 이산가족 상봉 신청자 중 작년 한 해 동안의 사망자 수이다.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들만 돌아가시는 게 아니다. 남북 관계가 이런 사이 수많은 이산가족 어르신들이 세상을 떠나신다. 생전에 가족 얼굴 한번 보자는 그 작은 소망 하나 못 이루고, 애통하게.

조동호 이화여대 북한학과 교수

 

2017.06.12  北은 '한국 빠진' 대동강의 기적을 원한다

'개방 없는 개혁' 원하는 北에 '성공한 한국'은 체제의 위협

文 정부, 북한 경제 도우려 해도 김정은, 중심적 역할 안 줄 것

 

지난 1일 문재인 대통령은 "전쟁 위협이 사라진 한반도에서 남북을 아우르는 경제 공동체는 대한민국이 만든 '한강의 기적' '대동강의 기적'으로 확장시킬 것"이라고 말했다. 이 주장은 희망을 표시하는 것으로는 듣기 좋다. 하지만, 북한의 내부 정치 상황으로 볼 때 대한민국은 '대동강 경제 기적'에서 주도적 역할을 하지 못할 것이다. 김정은 시대에 들어와 조용히 실시되는 시장화 개혁 덕분에 북한 내 상황이 많이 개선됐다. 평양을 비롯한 대도시에 새로 지은 아파트도 많고, 김정일 시대에 상상하기도 어려웠던 자가용 차까지 생기고 있다. 북한 당국자들이 단속과 탄압을 그만두고 암묵적으로 시장화를 장려하기 시작한 것도 당연히 경제성장을 촉진했다. 필자는 김정은 정권이 '북한식' 개발 독재 모델로 조심스럽게 전환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음이 확실하다고 생각한다. 북한 서민들의 생활 개선이란 관점에서 보면 이것은 좋은 소식이다. 그러나 김정은의 북한식 개혁에는 한계도 많다.

 

한계 중 하나는 북한 엘리트 계층이 경제성장을 원하지만 정치적 안정과 체제 유지를 절대적 전제 조건으로 본다는 것이다. 그들은 경제성장을 가속하기 위해 정치 안정을 크게 위협할 수 있는 정책을 절대 추진하지 않을 것이다. 북한 엘리트층은 체제가 붕괴하면 권력을 유지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죽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체제 유지를 다른 어떤 것보다 중요시한다. 따라서 김정은의 정책은 덩샤오핑의 '개혁 개방'과 달리 '개방 없는 개혁'이다. 북한 정권은 시장경제를 장려하면서도 주민 감시를 완화하지 않았고 쇄국정책도 엄격히 실시하고 있다.

 

북한 민중이 외국의 생활을 알게 되면 앞선 수령들이 실시한 정책의 실패를 깨닫고, 체제 및 엘리트 계층에 불만이 커질 가능성이 크다. 그러다가 북한 결정권자들이 최악의 재앙으로 생각되는 혁명, 체제 붕괴, 독일식 흡수 통일이 일어날 수도 있다. 그러니 정치적 안정 유지를 위해 주민들이 외국 사정에 대해 잘 몰라야 하고, 외국인과 접촉하는 일도 될 수 있는 대로 막아야 한다.

 

북한 엘리트층이 볼 때 한국만큼 위험한 나라가 없다. 분단 직후만 해도 북한보다 상황이 어려웠던 한국이 그 후 이룬 눈부신 경제적 성공은 북한의 실패를 더 도드라지게 한다. 김정은은 실패를 거듭해온 시대착오적 정책을 점진적으로 포기하고 있다. 하지만 북한 정권은 세습인 탓에 과거 참담한 실패 책임이 김씨 일가에게 있다는 것을 주민이 깨닫게 되면 김정은 정권에 치명적 위협이 될 수 있다. 그 때문에 북한은 한국과 교류를 하더라도 '남조선에서 오는 위협'을 관리해야 한다. 그 방법은 한국인 직·간접적 접촉을 '순수 외국인'과 접촉하는 일보다 더 엄격하게 통제하는 것이다. 지난 5일 말라리아 치료 원조까지 북이 거부한 것은 이런 사정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식의 통제는 남북 교류 규모를 제한한다. 예를 들면 한국 투자자들은 공장을 방문했을 때조차 노동자와 직접 대화할 수 없고, 순수한 기술적 문제조차 노동당 또는 국가보위부를 거쳐야만 해결할 수 있다. 바꾸어 말해서 남북한 주민이 함께 일할 수 있는 공간은 개성공단과 같은 고립된 공업단지밖에 없을 것이다. 북한의 통제가 남북 교류를 불가능하게 하는 것은 아니지만 큰 걸림돌은 될 것이다. 한국은 북한에 대해 환상을 갖지 말아야 한다. 한국은 북한의 경제성장을 도와줄 수 있지만, 대동강 경제 기적을 일으킬 중심 세력은 아니다.

안드레이 란코프 국민대 교수·북한학

 

2017.06.16  '6.15 선언'의 망령이 부활하는 것을 막아야 한다!

▲6.15 공동선언 4돌 기념 우리민족대회에 참가한 남 북 해외 대표단이 2004년 6월 15일 인천 문학경기장에서 행진하고 있다. /조선DB

 

문재인(文在寅) 정권의 출범과 더불어 <6.15 남북공동선언>의 망령(亡靈)이 정치권에서 부활하려 하고 있다. <6.15 선언> 발표 17주년을 앞두고 이를 기념하기 위한 ‘남북 공동 행사’를 평양에서 개최하려 했던 ‘6.15 선언 실천 남측 위원회’의 시도(試圖)는 엉뚱하게도 북측의 호응 거부로 일단 무산(霧散)되었다.

 

그러나, 문재인 대통령이 취임 후 한 달을 넘기는 시점까지 그의 내각 구성을 마무리하지 못하고 있는 가운데도 그 동안 부분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청와대와 내각의 대북정책 관련 요직 인선 내용은 정부 체제 정비가 완결된 이후의 문재인 정부의 대북정책이 <6.15 선언>의 부활을 축으로 하여 과거 김대중(金大中)•노무현(盧武鉉) 정권 때의 ‘햇볕정책’으로 회귀(回歸)할 것임을 의심의 여지없이 예고하고 있다. 이미 내외의 언론은 문재인 정권의 대북정책에 ‘달빛정책’(Moonshine Policy)이라는 명패(名牌)를 달아주고 있는 실정이다. 이 같은 시점에서 우리는 <6.15 선언>을 다시 한 번 재조명(再照明)해 볼 필요성을 절감하지 않을 수 없다.

 

소위 <6.15 남북 공동선언> 2000615일 세상에 그 모습을 드러낸 이후 17년이 경과하는 동안 반드시 해소되어야 할 기본 문제가 해소되지 않은 채 방치되어 있다. 이 문서가 과연 대한민국 헌법과 합치하느냐의 여부를 가려내는 문제다. 특히 <6.15 선언>은 그 ②항에 대하여 대한민국 헌법 제3조의 ‘영토 조항’과 관련하여 위헌론이 제기되어 왔었다. 그러나 <6.15 선언> ②항은 문제의 헌법 제3조와의 갈등보다 더욱 심각한 헌법상의 문제를 안고 있는 문서다. <6.15 선언>은 대한민국 헌법의 특정 조항에 저촉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대한민국 헌법 그 자체와 충돌하고 있다.

 

대한민국 헌법은 제1조①항에서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라고 규정하고 있고 제1조②항에서는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고 규정하고 있다. 또한 헌법은 전문(前文)에서 대한민국의 국가이념이 ‘자유민주주의’임을 명시하고 제4조에서는 앞으로 실현될 통일조국의 국가이념도 ‘자유민주주의’로 못 박아 놓고 있다.

 

헌법은 또 대한민국에서 “사회적 특수계급의 제도는 인정되지 않으며 어떠한 형태로도 이를 창설할 수 없다”(11조②항)고 명시하고 있고 이어서 제8조①항에서 대한민국이 채택하고 있는 정당제도는 ‘복수정당제’이지만 ②항에서 모든 정당의 “목적ㆍ조직과 활동이 민주적”일 것을 요구하는 한편 ③항에서는 “정당의 목적이나 활동이 민주적 기본질서에 위배될 때는 정부는 헌법재판소에 그 해산을 제소”하고 “정당은 헌법재판소의 심판에 의하여 해산”되는 것으로 규정하고 있다.

 

이 같은 대한민국 헌법의 여러 조항들은 한 가지 사실을 명백히 하고 있다. 한 마디로 현행 대한민국 헌법체제 하에서 ‘계급주의’에 뿌리를 둔 공산주의 정당의 존재는 불법이라는 사실이다. 대한민국에서 공산주의 정당은 ‘창설’될 수도 없고 만의 하나 ‘창설’이 된다 하더라도 헌법 제8조③항에 의거하여 당연히 “정부의 제소”와 “헌법재판소의 심판”에 의하여 ‘해산’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2015년 헌법재판소가 ‘통합진보당’의 해산을 판결한 근거가 바로 여기에 있었다.

 

그렇다면 북한은 어떠한 존재인가? 이에 대한 해답은 북한, 즉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헌법에서 찾아야 한다. 북한은 최근 몇 차례의 헌법 개정을 통하여 헌법의 명문에서는 ‘공산주의’라든가 ‘맑스-레닌주의’라는 용어는 모두 삭제하고 이를 ‘김일성-김정일 주의’라든가 ‘주체사상’ 및 ‘사회주의’ 등의 용어로 분식(扮飾)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한 ‘공산주의 계급독재 국가’라는 사실에 이론의 여지가 없다.

 

북한 헌법에는 보통 사람들에 의하여 흔히 간과되고 있는 조항이 있다. 북한 헌법 제11조다. 이 조항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조선노동당의 영도 밑에 모든 활동을 진행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국가 위에 조선노동당이 군림하는 이상한 나라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북한의 실체를 이해하려면 조선노동당이 어떠한 정당인가를 알 필요가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는 조선노동당 ‘규약’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를 알아야 한다.

 

조선노동당 ‘규약’은 그 ‘전문(前文)’에서 조선노동당이 “자본주의 사상과 마찬가지로 국제공산주의 운동과 노동계급 운동에서 나타난 수정주의, 교조주의를 비롯한 온갖 기회주의를 반대하는 마르크스-레닌주의 정당”임을 명시하고 있다. ‘규약’에 의하면 조선노동당은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실시하고 “모든 당사업의 기본원칙으로 계급노선과 군중노선을 관철”하며 “온 사회의 혁명화, 노동계급화, 인테리화를 추진”하게 되어 있다.

 

나아가서 조선노동당의 ‘당면목적’은 “공화국 북반부에서 사회주의의 승리를 이룩하여 전국적 범위에서 민족해방과 인민민주주의 혁명과업을 완수하는 것”이고 ‘최종목적’은 “온 사회를 주체사상화하고 공산주의 사회로 건설하는 것”으로 설정되어 있다. ‘적화통일’이 조선노동당의 ‘최종목적’이다. 최근 정체불명의 사이비 ‘주체사상’으로 분식을 시도하고 있기는 하지만 조선노동당은 이론의 여지가 없는 공산주의 정당이다. 북한은 바로 이 같은 조선노동당의 일당독재 체제 하에 있는 나라인 것이다.

 

<6.15 선언> ②항에서 남측의 김대중(金大中)은 북한의 독재자 김정일(金正日)과 ‘남측의 연합제’와 북측의 이른바 ‘낮은 단계의 연방제’ 통일방안 사이에 ‘공통성’의 존재를 인정하는 데 합의했다.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 사실을 확인할 필요가 있다. ‘높은 단계의 연방제’나 마찬가지로 ‘낮은 단계의 연방제’도 ‘연방제’라는 사실이다.

 

‘연방제’에 관하여 북한과 남한의 친북세력들이 “중앙정부와 지방정부 사이의 권한배분”에 관한 둔사(가령 “과도적으로 국방권과 외교권을 지방정부가 행사하게 한다”는 식으로)로 분식과 호도를 시도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변경할 수 없는 분명한 사실이 있다. 그것은 북한이 말하는 ‘낮은 단계’의 경우에도 북한이 주장하는 ‘연방제’에서 남-북한은 각자의 ‘국가 주권’을 포기하고 ‘단일화된 주권’을 행사하는 ‘중앙정부’를 창립하는 한편 남-북한은 ‘주권이 박탈된 지방(支邦)정부’로 지위가 전락한다는 것이다. 요컨대, ‘연방제’ 하에서 남-북한은 별개의 ‘주권국가’로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국가’로 통합되는 것이다.

 

‘통일’된 ‘연방국가’에서는, 공산주의 정당인 조선노동당이 상부구조가 되는 공산주의 국가인 북한이 최소한 대등한 ‘지방정부’의 지위를 차지해야 한다. 당연히 공산주의 정당인 북한의 조선노동당이 ‘연방국가’ 안에서 합법적 지위를 확보하게 된다. 문제는 이것을 대한민국의 헌법이 허용하는 것이냐는 것이다. 이에 대한 정답은 이미 나와 있다. 앞에서 검토한 바와 같이 이 같은 일은 대한민국의 현행 헌법체제에서는 불가능한 불법적인 일이다. 대한민국의 헌법은 현재의 시점에서 공산주의 정당을 불법화시키고 있을 뿐 아니라 제4조를 통해 향후 통일이 이루어질 때도 공산주의 정당은 불법화시키도록 규정하고 있다.

 

대한민국의 헌법체제에서 남-북한의 ‘연방제’ 통일이 가능해지기 위해서는 두 가지 중의 한 가지 일이 먼저 발생하지 않으면 안 된다. 한 가지는 대한민국의 헌법이 먼저 개정되어 대한민국 안에서 공산주의 정당이 합법화되는 길이 열리는 것이다. 또 한 가지는 북한의 공산체제가 무너져서 북한에서 먼저 공산주의 정당이 불법화되는 길이 열리는 것이다. 현실적으로는 가까운 시일 안에 이 두 가지 일 중에서 그 어느 하나도 발생할 가능성이 없다.

 

이렇게 되면 문제는 분명해 진다. 대한민국 헌법이 먼저 개정되지 않거나 북한체제의 변화가 먼저 발생하지 않은 상황 하에서 문제가 되고 있는 <6.15 선언>의 ②항은 대한민국 헌법을 위반하는 것이다. 따라서 김대중은 2000615일 대한민국 헌법 하에서는 김정일과 결코 합의할 수도 없고 또 합의해서는 안 되는 일을 가지고 합의한 것이 된다. 대한민국의 현행 헌법체제 하에서 <6.15 선언> ②항은 원천적으로 무효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더군다나 ‘연방국가’의 ‘연방의회’(‘연방정부’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겠지만) 구성에 형식적인 ‘남북 동수’ 비율이 적용될 경우, 공산주의 체제인 북한의 ‘획일성(劃一性)’과 민주 체제인 남한 사회의 ‘분열성(分裂性)’을 고려한다면, 남측과 북측의 실제 구성 비율은, 21일의 남북한 인구비례에도 불구하고, 50 – 알파’ 대 ‘50 + 알파’로 오히려 북측이 다수를 점유하게 되리라는 것이 자명하다. 남측이 과연 이 같은 황당한 일을 수용할 수 있는가가 문제다.

문제는 거기서 그칠 일이 아니다.

 

2000615일 평양에서 김정일과 문제의 <6.15 선언>에 합의했을 때 김대중의 신분은 대한민국 대통령이었다. 대한민국 대통령인 그에게는 헌법이 부여하고 있는 책무가 있다. 대한민국 헌법은 제66조②항에서 대한민국 대통령에게 “국가의 독립ㆍ영토의 보전ㆍ국가의 계속성”과 함께 “헌법을 수호”하는 책무를 부여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대한민국 헌법은 제69조에서 대통령에게 취임에 즈음하여 “헌법 준수”를 선서하게 하고 있다. 비록 헌법이 같은 제66조③항에서 대통령에게 “조국의 평화적 통일을 위한 성실한 의무”를 부과하고 있지만 그 같은 의무는 어디까지나 “헌법 준수”의 테두리 안에서 정당화 되는 것이다.

 

따라서 <6.15 선언> ②항에 관하여 현직 대통령의 입장에서 김대중이 할 수 있는 일에는 한계가 있었다. 그가 굳이 문제의 ②항을 김정일과 합의하기를 원했다면 그는 마땅히 그에 앞서 대한민국 헌법을 개정하여 대한민국 헌법이 공산주의 정당을 합법화시킬 수 있는 길을 열어 놓았어야 했었다. 대한민국 헌법이 사전에 개정되지 않은 상황에서 그는 김정일과 문제의 ②항을 합의하는 것이 불법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대중은 현직 대통령으로 헌법위반이 명백한 <6.15 선언> ②항을 김정일과 의합함으로써 그가 “수호”하겠다고 “선서”한 헌법을 중대하게 위반하는 위헌행위를 저질렀다. 이는 형법 제911항의 “국헌문란죄”를 범하는 행위다. 국가반역 행위에 해당하는 것이다.

 

 <6.15 선언> 발표 후 17년이라는 긴 세월이 경과하는 동안 이 같은 중대한 문제가 대한민국 헌법을 관리하는 공공기관은 물론 헌법학자들에 의하여 전혀 논란의 대상이 되지 않았다는 사실은 충격적일 정도로 놀라운 일이다. 헌법의 핵심이 되는 토대가 이렇게 유린되었는데도 말이다. 게다가, 지금 우리는 문재인 정권의 출범과 더불어 그 동안 사실상 사장(死藏)되었던 이 불법적인 <6.15 선언>의 기사회생(起死回生)이 공공연해 지고 있는 상황을 목격하고 있다.

 

사실은 지금이라도 늦은 일이 아니다. 문 정권 자신이 능동적으로 그렇게 하기를 기대하는 것은 무망(無望)하더라도 민간의 헌법학 등 공법학계에서는 <6.15 선언> ②항이 공산주의 정당을 불법화시키고 있는 대한민국 헌법과 양립할 수 있는 것인지의 여부를 공론화하여 이 문제를 시원하게 매듭짓는 노력에 착수하는 것이 필요하다. 부관참시(剖棺斬屍)가 되는 한이 있더라도 헌법을 위반하면서 <6.15 선언>이라는 불법적 문건을 북한의 독재자와 합의한 김대중의 ‘국가반역 행위’에 대한 법률적 책임을 가려냄으로써 파괴, 유린된 대한민국 헌법을 살려내는 것도 더 이상 늦출 수 없는 국가백년대계(國家百年大計)의 하나임이 분명하다.

이동복 북한민주화포럼상임대표

 

2017.12.08 [김은성 전 국정원 차장 단독 인터뷰 ] "DJ 청와대 지시받고 6개 은행 동원해 3000억 조성했다"

주간조선 단독 인터뷰 

김대중 정부에서 국정원 2차장을 지낸 김은성(72)씨가 2차장 재직 시인 2001년 신건 국정원장(2015년 작고)의 지시로 6개 시중 은행을 동원해 3000억원을 조성했다고 폭로했다. 김씨는“당시 신 원장으로부터 ‘3000억원 조성은 청와대 회의에서 결정된 사항’이라고 전해들었다”고 밝혔다. 하지만 김씨는“3000억원의 용처와 전달 경로 등에 대해서는 알지 못한다”고 했다.

 

김씨는 최근 경기도 분당 자택에서 주간조선과 몇 차례 인터뷰를 갖고 자신이 직접 관여한 3000억원 조성과 관련된 구체적인 내용을 밝혔다. 현재 박근혜 정부의 국정원장들이 특수활동비 유용 혐의로 검찰 수사를 받고 있는 상황에서 국정원이 김대중 정권에서 거액의 비자금을 조성했다는 구체적인 내용이 내부 핵심 담당자에 의해 폭로되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김대중 정권은 2000년 6월 남북정상회담을 추진하면서 현대 그룹을 동원해 4억5000만달러를 조성, 국정원 계좌를 통해 북한에 송금한 바있다. 후임 노무현 정권은 이 대북 불법 송금에 대한 특검 수사를 벌여 관련자들을 처벌했었다.

 

김은성씨가 폭로한 ‘3000억원 조성’은 앞서의 대북 송금보다 1년 후의 일로서, 그 내용이 상당히 구체적이다. 김씨는 “2001년 상반기 어느날 신건 국정원장이 청와대 주례보고를 하고 오후 3시 반에서 4시쯤 카폰으로 나에게 전화를 걸어와 ‘시중 은행을 통해 3000억원을 준비하라. 청와대 회의를 통해 결론이 났다’고 지시했다”고 밝혔다. 김씨는 당시 신 원장의 전화를 받은 시간이 “은행 마감이 임박한 시점이었다”며“그래서 국정원 ○○단장에게 (3000억원을 조성하라고) 전화로 지시를 내렸다”고 말했다.

 

김씨에 따르면, 당초 국정원은 3000억원을 시중 은행 한 곳을 통해서 조성하려 했다고 한다. 하지만 은행 한 곳에서 그 같은 거액을 마련하는 게 여의치 않자 6개 은행 분산 조성으로 방향을 틀었다고 한다.

 

[단독 인터뷰 | 김은성 전 국정원 차장]

DJ 청와대 지시받고 6개 은행 동원해 3000억 조성했다”

 photo 조성호

 

김대중 정부에서 국정원 2차장을 지낸 김은성(72)씨가 2차장 재직 시인 2001년 신건 국정원장(2015년 작고)의 지시로 6개 시중 은행을 동원해 3000억원을 조성했다고 폭로했다. 김씨는 “당시 신 원장으로부터 ‘3000억원 조성은 청와대 회의에서 결정된 사항’이라고 전해들었다”고 밝혔다. 하지만 김씨는 “3000억원의 용처와 전달 경로 등에 대해서는 알지 못한다”고 했다.
   
   
김씨는 최근 경기도 분당 자택에서 주간조선과 몇 차례 인터뷰를 갖고 자신이 직접 관여한 3000억원 조성과 관련된 구체적인 내용을 밝혔다. 현재 박근혜 정부의 국정원장들이 특수활동비 유용 혐의로 검찰 수사를 받고 있는 상황에서 국정원이 김대중 정권에서 거액의 비자금을 조성했다는 구체적인 내용이 내부 핵심 담당자에 의해 폭로되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김대중 정권은 2000 6월 남북정상회담을 추진하면서 현대그룹을 동원해 45000만달러를 조성, 국정원 계좌를 통해 북한에 송금한 바 있다. 후임 노무현 정권은 이 대북 불법 송금에 대한 특검 수사를 벌여 관련자들을 처벌했었다.
   
   
김은성씨가 폭로한 ‘3000억원 조성’은 앞서의 대북 송금보다 1년 후의 일로서, 그 내용이 상당히 구체적이다. 김씨는 “2001년 상반기 어느날 신건 국정원장이 청와대 주례보고를 하고 오후 3시 반에서 4시쯤 카폰으로 나에게 전화를 걸어와 ‘시중 은행을 통해 3000억원을 준비하라. 청와대 회의를 통해 결론이 났다’고 지시했다”고 밝혔다. 김씨는 당시 신 원장의 전화를 받은 시간이 “은행 마감이 임박한 시점이었다”며 “그래서 국정원 ○○단장에게 (3000억원을 조성하라고) 전화로 지시를 내렸다”고 말했다.
   
   
김씨에 따르면, 당초 국정원은 3000억원을 시중 은행 한 곳을 통해서 조성하려 했다고 한다. 하지만 은행 한 곳에서 그 같은 거액을 마련하는 게 여의치 않자 6개 은행 분산 조성으로 방향을 틀었다고 한다. 이에 대한 김씨의 증언이다. “모 은행장이 ‘1개 은행에서 한꺼번에 3000억원을 마련하는 건 곤란하다’는 식으로 말했다고 ○○단장이 전화로 내게 보고했다. 그래서 ‘청와대 지시’라고 강조했더니 그 은행장이 500억원씩 6개 은행에서 대출하는 방법을 주선해줬다. 결국 6개 시중 은행에서 500억원씩 3000억원을 마련할 수 있었다.
   
   
당시 김은성 차장은 6개 은행을 통한 3000억원 조성을 승인한 후 신건 원장과 따로 만나 사후 보고를 했다고 밝혔다. 김씨의 증언이다. “국정원으로 돌아온 신건 원장이 ‘어떻게 됐냐’고 묻길래 ‘6개 은행에서 분산대출을 받았다’고 보고했다. ‘누가 찾아간다면서요?’라고 물어보니 신건 원장이 ‘청와대에서 알아서 하겠지. 우린 거기까지만 하기로 했다’고 강조했다. 신건 원장은 당시 ‘청와대 실세인 ○○○씨와도 얘기가 된 것’이라고 말했다.
   
   
김씨는 며칠 후 신건 원장과의 대화 속에 등장한 청와대 실세 ○○○씨와도 직접 만났다고 했다. “청와대가 거액을 조성하는 게 수상해 책임 소재를 분명히 가리려고 만남을 청했다”는 것이다. 당시 김씨는 청와대 ○○○씨와 서울 광화문 인근 식당에서 만나 이런 대화를 나눴다고 회고했다. “내가 ○○○씨한테 ‘정권 후반기에 은행에서 그런 거금을 빼면 정치문제가 된다. 6개 은행이 관련되어 있어 보안유지가 어렵다. 은행장 이하 본부 담당자들도 국정원의 요청으로 대출이 됐다는 걸 알 것이다. 자칫하면 정권이 넘어간다’고 따졌다. 그러자 ○○○씨가 ‘나만 한 게 아니다’라고 말해, 내가 ‘그럼 대통령님도 아시느냐’고 되물었다. 그는 (답을 못하고) 머뭇거렸다.
   
   
이 부분에 대해 김씨는 “대통령 몰래 3000억원을 조성했다면 자기들 맘대로 그런 결정을 내렸다는 말이 되고, 그렇다고 대통령이 안다고 할 수도 없으니, 난감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김씨는 대통령이 알고 있는지에 대해 분명한 대답을 못하던 ○○○씨에게 “‘나는 원장 지시를 받고 ‘3000억원을 조성하라’고 ○○단장에게 지시를 내렸다. 지휘계통하에 일을 처리한 거니 나와 연관시키지 말라. 감옥엘 가려거든 댁들이나 가라’고 했다”고 증언했다. “나중에 문제가 됐을 때 검찰이 ‘돈을 국정원 차장이 직접 마련했다’고 하고 청와대가 싹 빠지면 꼼짝없이 내가 엮인다. 그래서 나는 지시를 받고 지휘계통을 통해 돈을 조성했음을 청와대 실세 ○○○씨에게 강조한 것이다. 용처 또한 물어보면 괜히 엮일까봐 묻지 않았다.
   
   3000
억원 조성에 대한 김씨의 증언은 매우 구체적이지만 몇 가지 의문이 남는다. 아무리 청와대 지시라고 해도 어떻게 시중 은행 6곳에서 용도가 확실치 않은 500억원이라는 거액을 회계상 ‘흔적’ 없이 마련할 수 있느냐는 점이다. 3000억원을 어디에 어떻게 보관했는지도 의문이다. 이에 대해 김씨는 3000억원의 보관 방법과 용처에 대해서는 “모른다”면서도 “정부가 하는 건데 ‘자국’이 남겠나. 은행대로 다 재주가 있다”고 주장했다. 이와 관련, 시중 은행에서 대출 관련 업무를 오랫동안 맡아온 한 간부 직원은 “쉽지 않지만 방법은 있다”며 이런 말을 했다
   
   
“국정원이라 하더라도 500억원 정도의 거액 대출은 반드시 내역이 남는다. 따라서 정상을 가장한 ‘불법 대출’ 형식을 띠었을 가능성이 있다. 국정원이 일종의 회사(페이퍼컴퍼니)를 만든 뒤, 시중 은행들이 그 회사에 대출해주는 방식을 썼을 수 있다. 대출이 단번에 이뤄지진 않았을 것이고, 그에 따른 시간이 꽤나 소요됐을 것으로 짐작한다.
   
   
‘대출이라면 담보가 있어야 하지 않냐’고 묻자 그는 “국가기관, 그것도 정보기관에 담보를 요구할 금융기관이 몇이나 되겠느냐”고 반문했다.
   
   
이 시중 은행 직원은 “2000~2001년경 성행했던 이른바 공적자금이 이용되었을 가능성도 있다”는 추정도 했다. 당시 예금보험공사 등 정부기관이 공적자금을 집행하려면 국회의 동의를 얻어야 했지만 은행에 지급된 공적자금이 국정원 페이퍼컴퍼니에 대출된 후 은행이 이를 손실처리해버리면 추심할 방법이 사실상 없었다는 설명이다.
   

   3000억원은 어디로 갔나?

   그러면 김대중 정부는 3000억원을 어디다 쓴 것일까. 김대중 정권이 3000억원 조성 1년 전쯤 남북정상회담을 위해 45000만달러를 조성한 사실을 떠올리면 3000억원 역시 대북 프로젝트와 관련된 돈이 아니냐는 추측이 가능하다. 이와 관련, 김대중 정부 말 산업은행 총재를 지냈던 엄낙용씨는 올해 초 발간한 회고록에서 ‘2002년경 정부가 S그룹이 대북사업에 참여하도록 압박하고 있었다’는 취지의 내용을 S그룹 임원으로부터 들었다고 밝힌 바 있다. 엄낙용 전 총재가 S그룹 임원으로부터 이 같은 얘기를 들은 시점 역시 김대중 정부 말기다. 시기상 3000억원이 북한에 갔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현재 3000억원 조성 주장에 대해서는 김은성씨 외의 관계자 모두가 입을 닫고 있는 상태다. 김은성씨가 신건 원장 지시를 받고 조성 지시를 내렸다는 당시 ○○단장 김모씨, 김은성씨가 자금 조성 지시 후 만났던 청와대 실세 ○○○씨 등에게 김은성씨의 주장이 사실인지 여부를 이메일 등을 통해 물었으나 기사 마감 시점인 12 7일 현재까지 일주일이 넘도록 회신이 없는 상태다. 김은성씨의 기억에 남아 있는 6개 시중 은행 중 한 곳의 당시 은행장에게도 이메일을 보내봤지만 묵묵부답이었다. 3000억원 조성에 대해 알고 있을 법한 당시 국정원 간부들과도 접촉을 시도했지만 답을 들을 수 없었다.
   
   
하지만 3000억원 조성 주장을 방증하는 ‘흔적’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과거 국회에서는 김대중 정부 비자금 조성과 관련된 야당의 질의가 있었고, 김은성씨를 포함해 여기에 관련된 인물들도 대체로 일치한다. 구체적으로 2007 10 18일 김정훈 당시 한나라당 의원(현 자유한국당 의원)이 국회 정무위원회에서 이런 발언을 했다. “김대중 전 대통령 미국 비자금 사건 관련해 가지고 신건 전 원장, 김은성 전 국정원 2차장, 김○○ 국정원 직원, 김○○ 전 외환은행장, 이○○ 전 신한은행장을 증인으로 신청했습니다. 그런데 날치기 하면서 싹 다 삭제를 해버렸어요.(국정원 직원과 전직 은행장 이름은 주간조선이 익명처리한 것임.) 
   
   
당시 질의 배경에 대해 김정훈 의원실의 한 관계자는 “워낙 시점이 오래됐고, (김 의원이) 초선일 때라 정확한 기억이 없다고 한다”고 전했다. 같은 시기 한나라당 정무위 간사로 국회 업무를 총괄했던 이계경 전 의원도 ‘김대중 비자금’과 관련해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말했다. 익명을 요구한 전직 한나라당 관계자는 “뚜렷한 정황이 있었기에 당 차원에서 그들을 증인 신청했던 게 아니겠냐”면서도 “김대중 전 대통령의 개인 비자금이라는 것에 대해선 확신할 수 없다”고 했다.

 

[김은성 전 차장이 털어놓은 비화들]

“국정원 정보, 권력 입맛에 맞게 악용되면 앞으로 선거는 하나마나” 
“과거 찬양고무죄, 불고지죄 손보려다 국정원 반발에 부딪혀 못 했다” 
“DJ 지시로 세 아들 도·감청했었다”

 

김은성씨는 주간조선과의 인터뷰에서 국정원 차장 재임 시절 김대중 전 대통령(DJ) 일가를 도·감청했다는 증언도 했다. 이는 DJ의 지시에 따른 것으로, 도·감청 대상은 DJ부부와 세 아들(홍일·홍업·홍걸)이었다고 한다. 그는 “대통령이 내게 ‘아들 셋을 도청해서라도 관리를 잘하라. 그리고 그 결과를 보고하라’고 지시했었다”고 말했다.
   
   
그에 따르면, DJ의 세 아들 중 특히 삼남 홍걸씨는 이희호 여사의 친아들이라 특별관리 대상이었다고 한다. “한번은 대통령이 미국 유학 중인 홍걸씨와 전화 통화하는 걸 감청했다. 대화의 분위기를 보니 홍걸씨가 돈을 보내달라는 것 같았다. 당시 DJ는 ‘네가 미국에서 그 정도로 가치 있는 공부를 하고 있냐. 2만달러 이상은 절대 안 된다’며 그 청을 거절했다.
   
   
김은성씨는 “세 아들에 관한 정보 중 안 좋은 부분이 올라오면 대통령에게 보고하기 어려웠던 적이 많았다”고 회고했다. 대통령과 영부인에게 자녀 험담을 하는 것 같아 부담이 됐다는 것이다. 대통령 자녀 문제에까지 깊숙이 개입하는 바람에 신건 국정원장과도 사이가 매우 껄끄러웠다고 한다. 당시 권력 내부에선 김은성을 ‘김홍일계’로, 신건을 ‘김홍걸계’로 분류했을 정도로 두 사람은 평행선을 달렸다. 이에 대해 그는 “김홍일씨와 가까웠던 건 사실”이라며 “내가 도·감청을 하고 대통령에게 비밀을 직보도 하니까 신건 원장이 고깝게 봤던 것 같다. 그래도 김 대통령은 내 손을 들어줬다”고 말했다.
   
   
실제로 김대중 정부에서 일했던 전직 국정원 간부들은 그가 국정원장 못지않은 파워를 가졌었다고 평가했다. 한 전직 간부는 “임동원·신건 국정원장도 김은성 차장에겐 존대를 할 정도로 함부로 못 했다. 김 차장이 원장을 거치지 않고 대통령에게 직보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당시 우리나라에서 정보를 제일 많이 갖고 있던 사람 중 한 명이 김은성이었다”고 말했다.     


   
셋째 딸의 편지

이처럼 권력의 정점에 있던 그의 위상에 낙조가 드리우기 시작한 건 2001년 ‘진승현 게이트’가 터지면서다. 당시 그는 진승현씨가 부회장으로 있던 MCI코리아의 금융감독위 조사를 무마해주는 대가로 진씨로부터 5000만원을 받은 혐의로 구속기소되었다. 이후 징역 1년을 선고받고 복역하다가 2002 11월 가석방됐다. 법원은 그의 혐의와 관련해 ‘개인적으로 돈을 유용하지 않은 점을 참작한다’는 취지의 판단을 했다. 그는 당시 진승현씨로부터 받은 5000만원의 용도를 묻는 질문에 “국정원의 중요 임무 중 하나는 정권을 보호하는 것인데, 5000만원은 그런 용도로 쓰였다. 내 전임자 때부터 해왔던 일”이라고만 답했다.
   
   
그는 자신을 두 번째 영어(囹圄)의 몸으로 옭아맸던 국정원 도청사건에 대해서는 할 말이 많은 듯했다. 국정원 도청사건이란 국정원이 유선중계통신망 감청장비(R2)와 이동식 휴대전화 감청장비(CAS)로 국내 주요 인사들의 전화 통화를 불법 도청한 사건이다. 노무현 정권 출범 후 검찰은 김은성씨가 임동원·신건 전 국정원장의 지시로 정치권과 언론계 인사 다수를 불법 도청했다고 발표했다. 이 과정에서 그는 신건·임동원 전 원장과 함께 구속됐고, 그의 후임자였던 이수일 전 국정원 차장이 자살했다.
   
   
이 대목에서 그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국정원 도청사건으로 수감생활을 하던 2006 7월 결혼한 지 한 달밖에 안 된 셋째 딸이 “아빠가 힘들어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글을 남긴 채 스스로 목숨을 끊은 일이 떠오른 것이다. 그는 ‘국정원이 도청했다’는 사실을 당시 법정에서 인정한 자신의 상사에 대해 울분을 터트리며 “국정원의 도·감청은 국가안보 차원에서 봤을 때 정당한 행위인데 (모 국정원장이) 이를 인정하는 바람에 유죄를 선고받았다. 일국의 정보기관 책임자가 그걸 인정하면 어떡하나. 내 딸의 죽음에 그도 간접적인 책임이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구치소에 수감돼 있느라 딸의 결혼식에 참석하지 못한 걸 두고두고 후회한다”고 털어놓았다. 그는 세상을 뜬 셋째 딸이 검찰 조사를 받으러 떠나는 그에게 쓴 손편지를 보여주기도 했다. 편지에는 단정한 필체로 이렇게 적혀 있었다. “이 모든 일이 아빠를 정금같이 쓰기 위해 연단하신다는 것 꼭 믿고 오히려 기쁜 마음으로 받아들여. 힘들겠지만 그렇게 생각하도록 노력하고. 또 그렇게 기도하고. 지금 아빠를 믿지 않고 나쁘게 누명을 씌우는 사람들은 나중에 정말 많이 후회할 거야. 아빠가 싫어할 테니까 원망은 안 할게. 오히려 그 사람들 용서해달라고 기도해야지. 그치?   


   DJ
정부 실세 A씨 이야기 

   최고권력자의 신임을 받으며 권력 내부의 가장 은밀한 곳을 들여다본 탓에 그는 견제도 많이 받았다고 한다. DJ 정부의 최고 실세 중 한 명이었던 전직 국회의원 A씨와의 관계가 특히 삐걱거렸다는 게 그의 회고다. A씨는 DJ 정부에서 공천헌금을 받는 등 정치자금의 ‘중간 다리 역할’을 했다고 의심받았던 인물이다. 김은성씨에 따르면 DJ 정부 초창기만 하더라도 자신과 A씨와의 사이는 좋았다고 한다. 두 사람이 멀어진 결정적 계기는 A씨가 인사에 개입하는 듯한 정황을 그가 포착하면서부터다. 그의 회고다. “하루는 A씨가 해외 출국을 위해 공항 VIP실에 대기하고 있었다. A씨가 기자들 앞에서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더니 큰소리로 ‘이번에 국정원 국내 차장 갈 준비해’라고 말한 사실을 국정원 IO(정보담당관)가 내게 보고해왔다. 내 권위를 누르겠다는 게 A씨의 의도였던 것 같다. 나는 A씨와 친한 박지원씨(현 국민의당 의원)에게 전화를 걸어 ‘A씨에게 가만 안 둔다고 전하라’고 했다. 당시 박씨가 ‘내가 (A씨에게) 잘 말할 테니까 김 차장이 참으라’며 달래더라.
   
   
김씨는 자신이 모셨던 DJ에 대해서는 복잡한 감정을 갖고 있는 듯했다. 그는 인터뷰에서 DJ의 부정적인 면과 긍정적인 면 모두를 말했다. 그가 DJ와 처음 인연을 맺은 것은 1998년 대통령직 인수위에 파견근무하면서였는데 그때 DJ에 대한 인식이 긍정적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IMF로 온 나라가 고생하던 그때 김 대통령이 외국 기업에 직접 전화를 걸어 돈을 달라고 사정하는 모습을 자주 보았다. IMF를 빨리 극복하자고 공무원들을 다그치기도 했다. 김 대통령은 날이 추운데 난로도 안 피우고 일했다. 나이가 많았음에도 열심히 뛰는 모습을 보며 DJ에 대한 인식이 바뀌었다. IMF를 빨리 극복한 것은 DJ 덕이다.
   
   
그는 “DJ는 소위 말하는 ‘빨갱이’는 아니다. 좀 래디컬(radical·급진적인)한 분이지 용공은 아니다”라고 평가했다. 다만 DJ는 정치적으로 자신에게 반대 목소리를 내는 것에 대해선 민감하게 반응했다고 한다. 그는 2000년 남북정상회담 직후 DJ와 임동원 당시 국정원장에 대해 사상적 의구심이 제기될 때 국가보안법 개정·폐지와 관련해 ‘보수적’인 입장의 보고를 한 적이 있었다고 한다. 그때 DJ는 “그럼 나하고 국정원장을 국보법상 잠입 탈출죄로 감옥에 보내면 되지 않느냐”는 말을 했다고 그는 기억했다. 그는 “‘내 말 잘 들어라. 그러지 않으면 네가 감옥에 갈 수 있다’는 일종의 협박 같았다”고 회고했다. “국가보안법은 반드시 유지되어야 한다”는 입장을 지금도 고수하고 있는 그로서는 자신이 보좌했던 대통령에 대해 긍정과 부정의 감정이 교차할 수밖에 없는 듯이 보였다.
   
   
그가 10시간 가까운 인터뷰 중 털어놓은 비화는 다양했다. 그는 자신이 국정원(안기부)에 근무하면서 정당을 만드는 데도 두 번이나 개입했다고 밝혔다. 2000년 초 여당이었던 새정치국민회의가 새천년민주당으로 옷을 갈아입을 때 국정원 대공정책실장으로서 ‘재야인사와 386운동권을 신당에 합류시키는 역할을 담당했다’고 한다. 그는 5공화국 초 ‘관제 야당’이라 불렸던 한국국민당도 자신이 배후에서 조종해 만들었다고 주장했다.
   
   
김은성씨는 인터뷰에서 최근 국정원을 겨냥한 이른바 ‘적폐청산’ 수사에 대해서는 거세게 비판했다. 특히 그는 국정원 수퍼컴퓨터의 ‘메인 서버’에 외부인(국정원 적폐청산위원회 측)이 접속한 사실과 관련해 “국장 이상이 사인을 안 하면 접근을 못 하게 돼 있는 걸로 아는데 이들이 어떻게 접근했는지 의문”이라고 비판했다. 그는 “대통령을 비롯해 국회의원 시장·군수·도지사들의 정보가 수퍼컴퓨터에 다 입력돼 있다”며 “국정원 정보가 권력의 입맛에 맞게 악용되면 앞으로 모든 선거는 하나마나다. 과거 권위주의 정권 때 정보를 그런 식으로 악용했기 때문에 정보기관이 정치사찰, 정보정치의 오명을 뒤집어쓴 것 아니냐”고 지적했다.      


   
“對共 인력, 지금도 부족”  

지난 11 29일 국정원은 대공수사권을 타 기관에 이관하고 국가보안법상 찬양고무죄, 불고지죄와 관련된 정보 수집을 하지 않기로 했다고 밝혔는데 그는 이에 대해서도 크게 분노했다. 그는 “김대중·노무현 정부도 이와 비슷한 조치를 취하려다가 국정원 내부 반발에 부딪혀 못 했는데 이 정부가 해버렸다”며 우려를 나타냈다.
   
   
그는 “국정원과 기무사의 대공 업무 인력은 지금도 많이 부족하다”며 “국정원과 기무사에는 10% 정도 예비 대공 업무 인력을 둬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는 ‘응전자유화 계획’ 때문이라고 한다. ‘충무계획 3300’ ‘충무계획 9000’ 등으로 구성된 ‘응전자유화 계획’은 북한에서 대규모 난민이 남하할 경우를 대비해 세워둔 일종의 난민구호 계획이다. 대규모 난민이 남하할 때 국정원과 기무사가 대공용의점이 뚜렷한 북한 주민들을 예비검속해야 하는데, 그 임무를 수행할 예비 인력이 있어야 한다는 의미였다. 그는 “국정원이 무력화되면 북한 급변사태 시 응전자유화 계획을 제대로 실행할 수 있을지 의문”이라고 거듭 비판했다.
   
   
그는 국정원이 무력화되면 “간첩 수사 등 대공 수사에도 어려움을 겪을 것”이라며 “간첩 수사의 경우 국정원이 오랫동안 시간을 두고 수사해야 성과가 나온다”고 주장했다. 통상 간첩은 국내에 암약하는 경우가 많아 행적을 오랫 동안 사찰한 뒤 증거를 수집해야 검거할 수 있는데 이에 대한 정보를 국정원이 가장 많이 갖고 있다는 주장이었다. 그는 “간첩 수사를 제3의 기관이나 대민 업무가 많은 경찰이 전담하면 효율성이 떨어질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서훈 현 국정원장에 대해서는 “내가 종합판단과장으로 있던 1980년대 초반 정규 과정 공채로 들어왔다. 당시 대학가의 데모를 분석하는 업무를 맡았었는데 매우 고생스러운 일임에도 참 잘했다”고 회고했다. 특히 그는 “서훈 원장이 북한 문제에 관한 한 부국장급이 할 일임에도 ‘도맡아했다’는 식의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며 “두 차례 남북정상회담을 기획한 능력을 인정받아 대통령에게도 신임을 받았다”는 주장도 폈다. 실제 서훈 국정원장은 1·2차 남북정상회담 준비를 실무적으로 주도했던 인물이다. 1차 정상회담 때는 김보현 국정원 3차장-서영교 국정원 대북전략국장-서훈 국정원 대북전략조정단장 라인이, 2차 때는 김만복 국정원장-서훈 국정원 3차장 라인이 북한과 교섭했다는 게 정설로 알려져 있다.
   
   
김은성씨는 구속된 전직 국정원장 세 명(원세훈·남재준·이병기)에 대해서는 “일국의 정보 책임자들이 줄줄이 검찰에 소환되고 구속된 건 국정원으로선 망신스러운 일”이라면서도 “한 정권이 전직 국정원장 세 명을 감옥에 보내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비판했다. 그는 “정보 책임자들을 이런 식으로 구속하면 우방인 미국은 한국에 절대 정보를 주려 하지 않을 것”이라고 단언했다.
   
   
그는 국정원 퇴임 직전까지는 국내 정치 정보를 총괄했지만 초창기에는 대북·안보 관련 업무도 많이 맡았었다. 중앙정보부 시절에는 김일성 신년사, 북한군 동향 분석을 해왔고 안기부 시절엔 미국 CIA와 업무 협조를 하며 정세 분석 보고서를 작성하는 일들을 해왔다. 그 시절 그가 작성한 보고서는 이른바 ‘특상보고서’로 분류돼 대통령에게 보고될 만큼 빼어났다는 게 전직 국정원 간부들의 평이다. 그런 그에게 현재의 한반도 정세에 대해 묻자 “사실상 전면전에 돌입한 상황”이란 대답이 돌아왔다. “지금은 ‘데프콘 3단계’에 해당하는 안보적으로 매우 위급한 상황이다. 북한군은 완전 무장하지 않고 위장한 상태에서 남침하는 이른바 ‘경량화 훈련’을 받고 있어 그들이 빌딩이 많은 서울에 잠입·침투라도 하면 꼼짝없이 게릴라전으로 이어진다. 미군이 전면전에는 효과적으로 대응할 수 있을지 몰라도 게릴라전에 대한 대비는 미흡한 것으로 안다. 우리도 허술하긴 마찬가지다. 북한의 장사정포보다 게릴라전이 더 우려된다.
   
   
특히 그는 “문재인 정부 들어 한·미 관계에 파열음이 들리고 있다”고 했다. “현재 국정원의 여건상 미국 CIA 등과 북한 관련 정보를 공유하지 않으면 대북 정보 수집이 불가능하다. 한·미 동맹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우리는 정보에 있어 완전한 장님이다.
   

김은성은 누구?
   
   30
년 재직한 국정원맨 진승현 게이트, 국정원 도청사건으로 두 번 옥고
   
   1945
년생인 김은성 전 국정원 2차장은 서울 용산고와 서울대 정치학과를 졸업하고 1971년 중앙정보부 공채로 들어가 30년간 재직한 정통 ‘국정원맨’이다. 대전지부장, 대공정책실장을 역임한 뒤 김대중 정부 시절인 2000 4월 국내 정치를 담당하는 국정원 2차장에 임명됐다. 그의 본적은 서울이지만 선친인 김영천씨(전 대검찰청 차장)가 전남 장성 출신이라 호남 출신 동교동 실세들의 후원으로 국정원 2차장에 임명되었다는 후문이 있다. 김영천씨는 과거 오제도 검사 등과 함께 공안검사로 이름을 날렸다.
   
   
진승현 게이트와 국정원 도청사건에 연루돼 두 번의 옥고를 치른 탓인지 그는 많이 쇠약해 보였다. 그는 “심장 수술, 우울증, 공황장애 등으로 하루에 복용하는 약만 20여종”이라고 말했다. 그의 오른쪽 다리엔 보행 보조장치가 채워져 있었는데 무릎 연골이 망가져 수술을 받았다고 한다. 발바닥엔 염증도 보였고, 몸 곳곳엔 백반증이 드리워져 있었다.
   
   
당초 그와의 인터뷰는 요즘 문제가 되고 있는 국가정보원 특수활동비에 관한 취재를 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그는 김대중 정부 권력 핵심에서 벌어졌던 각종 비화들을 이틀간, 10시간가량 포효하듯 쏟아냈다. 그중 일부는 너무 은밀한 사안이라 기사화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의 자택 방 한쪽 책꽂이엔, 출소 후 정리한 각종 원고 바인더들이 빼곡히 꽂혀 있었다. 안보 현안을 비롯해 그간의 소회를 담담히 적은 수필, 그리고 성경을 필사한 것들이었다. 그에게 “회고록을 쓸 생각이 없냐”고 물었더니 “국가를 위해 정사(正史)를 남길 생각은 갖고 있다”고 했다. 그의 회고록에 어떤 내용이 담길지 궁금해졌다.

조성호  기자 chosh760@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