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진단 14/ 종합3/ 중앙 동아 문화일보
북한 진단 14/ 종합3/ 중앙 동아 문화일보
■ 중앙일보
2016.04.02. 북한·중국의 기묘한 애증사
1956년 김일성 정권 당시 ‘종파사건’으로 중국과 긴장관계 시작… 정상외교로 양국관계 유지해왔지만 베이징 발 대북 영향력의 실효성은 미지수
▲중국은 오랫동안 한반도의 안정을 자국의 핵심이익으로 내세워왔다. 때문에 북한이 핵실험으로 국제사회에 도발을 일으켜도 중국은 사실상 무덤덤한 반응이다. 중국은 북한을 보호해야 할 이웃으로 여기는 것일까? / 사진·중앙포토
북한이 지난 1월 6일 핵실험에 이어 2월 7일 장거리 미사일을 발사하면서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제재를 추가로 받게 됐다. 문제는 북한이 무역의 90%를 의존하는 중국이 얼마나 안보리 제재에 협력하느냐, 또 북한의 대중 경제의존이 중국의 영향력 증대로 이어질 수 있느냐 여부다. 6·25전쟁의 참전 이래 북한과 혈맹관계를 이어온 중국의 대북 레버리지는 여전히 유효한가?
‘순망치한(脣亡齒寒)’ 동맹에서 ‘골칫거리’ 이웃이 됐나?
▲지난해 10월 10일 북한 김정은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오른쪽)과 중국의 권력 서열 5위인 류윈산 공산당 정치국 상무위원이 북한 노동당 창건 70주년 열병식에서 손을 잡고 인사하고 있다. 김정은은 이 날 25분 간 연설했다. / 사진·중앙포토
중국은 한반도를 순망치한(脣亡齒寒)의 관계로 이해한다. 역사상 중국은 자국에 맞선 세력과 국경을 맞대지 않기 위해 ‘완충지대’ 역할을 한 한반도에 몇 차례 무리한 파병을 시도했다. 명나라는 임진왜란 때, 청나라는 청일 전쟁 때 한반도에 파병했다가 국력이 기울어 망국으로 치달았다. 중화인민공화국이 1950년 북한에 파병을 결정한 것도 비슷한 맥락에서 해석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국은 오랫동안 한반도의 안정을 자국의 핵심이익으로 내세워왔다. 그 때문에 북한이 핵실험과 장거리 미사일 발사로 국제사회에 도발을 일으켜도 중국은 북한에 대한 국제사회의 강력한 제재에 반대하리라는 게 학계의 지배적인 분석이었다. 과연 중국은 북한을 보호해야 할 이웃으로 여기는 걸까? 과연 북한은 중국에 여전히 동맹일까, 아니면 ‘부담’일까? 기묘하게 얽힌 북중관계의 역사에 비춰 오늘의 양국관계를 가늠해보았다.
북한 김일성 정권의 뿌리는 1936년 전반기에 세워진 동북항일연군(東北抗日聯軍)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동북항일연군은 중국공산당이 일본의 괴뢰국인 만주국(1931년 3월~1945년 8월) 내에서 조선인과 중국인의 항일 무장조직을 모아 편성한 부대다.
동북항일연군은 1935년 모스크바에서 열렸던 코민테른(국제공산주의 혁명조직) 제7차 대회의 결정에 따라 결성됐다. 제국주의에 대항해 싸우기 위해 공산당 주도로 좌우나 민족을 망라해 다양한 항일조직을 결집, 통일인민전선을 이뤄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중국공산당도 ‘8월 테제’를 발표해 이에 호응하면서 제2차 국공합작을 주창했다.
북중, ‘동북항일연군’으로 공산당 역사 공유
▲1975년 김일성을 만난 덩샤오핑은 “해방전쟁이 20년 이상 계속됐던 인도차이나와 달리 한반도는 정전협정이 발효 중”이라며 김일성의 대결정책에 반대의사를 분명히 했다. / 사진·중앙포토
만주의 중국공산당은 이를 바탕으로 ‘항일반만(抗日反?)’이라는 원칙만 일치한다면 국민당 계열을 포함한 우파 무장 단체와도 손잡고 흡수한다는 방침을 세웠다. 이에 따라 중국공산당 계열의 동북인민혁명군은 부농으로 이뤄진 토착 무장단체나 국민당 계열의 의용군, 지역 마적단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항일 무장단체를 흡수해 동북항일연군을 꾸렸다.
조선인 무장조직들도 여기에 참여했다. 통일전선 원칙에 따라 다양한 성향의 조직이 합쳐지면서 공산당의 색채는 비교적 엷어졌다. 동북항일연군에서 가장 높은 지위였던 조선인은 김일성이 아닌 제2로군 참모장을 맡은 최용건(1900~1976)이었다. 최석천이라는 이름으로도 알려졌던 그는 중국 공산당의 초기 혁명 활동에 참여한 인물이다. 최용건과 군관학교 동기였던 저우바우중(周保中, 1902~1964)이 동북항일연군 2로군 총사령 겸 정치위원이었다. 최용건은 황푸군관학교에서 교관으로 근무했다. 이는 중국과 북한의 인적 네트워크 핵심에 해당한다.
정식 명칭이 중국국민당 육군군관학교였던 이 학교의 교장은 장제스(蔣介石, 1887~1975)였으며, 저우언라이(周恩?, 1898~1976)가 정치부 교관이었다. 훗날 중화인민공화국의 건국 10대 원수가 되는 녜룽전(?榮臻, 1899~1992), 예젠잉(葉劍英, 1997~1986)도 교관으로 활동했으며 쉬샹첸(徐向前, 1901~1990) 역시 1기생으로 졸업 뒤 교관을 맡았다.
최용건은 이런 상황에서 이 학교의 교관으로 활약하다 1926년 중국공산당에 가입했다. 당시 무정부주의 독립운동 단체인 의열단의 단원 출신으로 모스크바 동방노동자공산주의학교에서 공부했던 오성륜(1898~1947)도 함께 교관으로 활동했다. ‘1국 1공산당 원칙’에 따라 중국의 조선인 공산주의자는 자체 공산당을 창당하지 못하고, 중국공산당에 입당해 그 지시에 따라야 했다. 중국공산당이 중국과 만주의 공산주의 단체를 흡수한 근거이기도 하다.
이렇게 세워진 동북항일연군에서 김일성도 한 자리를 맡았다. 허난(하남)성 출신의 중국공산당원 양정위(楊靖宇, 1905~1940)가 총사령이던 1군의 휘하에서 제2군 제6사단을 김일성이, 제2군 제4사 제1단장을 최현이 각각 맡았다. 최현은 현재 북한의 노동당 비서 최룡해의 아버지다.
이때 오성륜은 제1로군 제2군 정치주임을 맡았다. 북한의 육군사관학교 격인 평양의 강건종합군관학교에 이름을 남긴 강건(1918~1950)은 제1로군 제3사 제9단 정치위원이었다. 동북항일연군 1로군 산하의 최현, 김일성, 박달, 박금철 등은 1937년 ‘보천보 전투’를 벌였다. 이는 당시 한국에서 보도돼 김일성이란 이름을 처음으로 일반인에게 알렸다.
이후 만주에 주둔했던 일본 관동군과 만주국군이 1939년 경부터 대규모 토벌전과 귀순공작을 병행하자 동북항일연군 상당수가 궤멸했다. 활동이 곤란해진 생존자들은 1940년 12월말 얼어붙은 헤이룽강(아무르강)을 건너 소련 극동지역으로 몸을 피했다.
중국 공산당 출신 ‘연안파’, 북한 핵심으로 도약
▲1992년 한중 수교가 이뤄지자 북한은 “동맹보다 국익을 더 위한다”며 중국을 비난했다. 그동안 중국은 북한을 지정학적으로 중요한 이웃으로 여겨왔지만 북한은 호락호락 중국의 영향권에 머물지 않았다. / 사진·중앙포토
소련군은 1941년 7월 독일군의 침공이 시작되자 일본군의 북진에 대비해 제88독립저격여단을 창설하고 야영지에 머물던 동북항일연군 출신들을 포함시켰다. 여단 병력의 대부분은 중국인으로 조선인은 10%를 넘지 않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 여단은 제2차 세계대전 종전 뒤 만주와 북한의 일본군 무장해제에 동원됐으며 이곳의 조선인은 대부분 북한 정권의 핵심부를 이뤘다. 이처럼 황포군관학교와 동북항일연군, 소련군 88여단에 이르기까지 중국과 북한의 공산주의자는 중국공산혁명 초기와 제2차 세계대전 기간 중 항일전쟁에서 함께 싸웠다.
이에 따라 외부 관측자들은 베이징과 평양 사이에 일종의 공동체 정신이 잔존해왔을 것으로 짐작해왔다. 보이지 않는 정책 공조와 정보 공유를 위한 소통 채널이 있을 것이라는 추정도 나온다.
건국 초기 중국과 북한을 잇는 중요한 인적 채널 중 하나가 북한에서 연안파로 불리는 일련의 인물들이다. 북한에서 연안파는 중국공산당의 고위층과 연결되는 조선인들로 해방 뒤 북한정권 건설에 참여했던 인물을 가리킨다. 그중 방호산(1916~?)은 1939년 연안으로 와서 항일군정대학을 수료하고 중국 공산당 팔로군에 파견됐다. 그는 1945년부터 반국민당 전투에 참가하기도 했다. 중국은 국공내전이 승리로 끝나자 군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조선인 출신으로 이뤄졌던 인민해방군 3개 사단을 북한으로 ‘귀국’시키는 내용의 ‘중조비밀군사협정’에 따라 방호산은 조선계 중국인 1만 명이 주력을 이룬 166사단을 이끌고 귀국했다. 이 사단 병력은 실전 경험이 풍부해 북한 인민군의 주력을 이뤘다. 그 결과 6·25전쟁 때 처음으로 한강을 건너고 호남 지역을 석권한 뒤 마산 부근까지 진출했다. 이때 방호산은 영웅 칭호를 얻었다.
1949년 이후 북한에서 연안파가 크게 부상했다. 자연스레 김일성은 자신의 세력 유지를 고민하게 됐다. 이런 고민은 6·25전쟁계획에서 연안파를 배제한 것으로 나타났다. 1950년 5월 김일성은 베이징에서 마오쩌둥을 만났지만 6·25전쟁 계획을 알리지 않았던 것으로 전해진다.
평양이 중국과 군사정보를 공유하기 시작한 것은 6·25전쟁에 중공군이 참전한 직전인 1950년 9월 28일로 알려졌다. 당시 중국인민지원군 총사령관이던 펑더화이(彭德懷, 1989~1974)가 전쟁을 북중연합 지휘로 수행하면서 북한 인사를 부사령관으로 임명해 상호 연락을 담당하도록 요구했기 때문이다. 이때 연안파인 박일우(1903~1955)가 그 자리를 맡게 됐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왼쪽)이 1989년 11월 중국을 방문하는 김일성 당시 주석의 특별열차에 올라 환송하고 있다. 1980년대 후반 이후 김일성은 외교, 김정일은 내정을 주로 담당했다. / 사진·중앙포토
김일성은 연안파가 자신의 권력에 도전할까 봐 노심초사했다. 그는 결국 박일우를 우편상으로 좌천시키는 수를 쓴다. 이에 박일우는 “마오쩌둥의 허락도 없이 어떻게 나를 삼류 장관 자리로 보내느냐”며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당시 중국은 6·25전쟁 동안 연안파를 북한과의 소통 채널로 삼기 위해 지원했고 연안파는 이를 활용해 북한에서의 권력 장악을 시도하던 차였다. 김일성은 이 시기를 회고하면서 “전쟁 기간 중 사대주의가 극심했고 전후 참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며 노골적으로 불편해 했다. 결국 김일성은 1955년 12월 박일우를 해당행위자로 몰아 출당 조치했다.
북중 간의 균열이 표면으로 드러나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1956년 종파사건이었다. 소련의 스탈린 격하운동 등의 영향으로 북한 노동당의 연안파와 소련파가 손잡고 김일성을 당 위원장직에서 끌어내리려고 시도했다.
김일성이 전후 복구자금 마련을 위한 소련 방문으로 자리를 비운 사이 최창익 등 연안파는 박창옥을 주축으로 하는 소련파와 손잡고 세력을 결집했다. 하지만 최용건이 이를 포착해 김일성에게 알리자 그는 급히 귀국했다.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전원회의에서 연안파 윤공흠이 “인민들은 헐벗고 굶주리며, 집도 없이 토굴 속에서 병마에 시달리는데 정부는 이런 처참한 현실을 무시하고 군수공업 중심의 중공업 우선정책을 펴고 있다”고 연설했다. 하지만 그는 친 김일성 세력에 의해 단상에서 끌어내려졌고 그 자리에서 출당당했다.
후진타오, 김정일에게 “전략적 대화” 강조
이에 연안파는 중국에 도움을 청했다. 이 소식을 접한 펑더화이 국방부장이 곧바로 평양을 찾은 데 이어 소련도 아나스타스 미코얀(1895~1978) 부총리를 보내 김일성을 압박했다. 김일성은 어쩔 수 없이 출당시킨 인사들을 복당시켰으나 이들이 북한을 떠나자 다시 연안파와 소련파에 대한 대대적인 숙청에 나섰다.
그해 10월 헝가리 민주화혁명이 벌어지면서 소련은 더 이상 북한에 압력을 넣을 형편이 못됐다. 중국도 평양의 정치 상황을 들여다볼 처지가 못 됐다. 이에 따라 김일성은 연안파를 대대적으로 숙청했으며 외국의 내정 간섭을 거부하기 위한 목적으로 중국군을 포함한 모든 외국군을 북한에서 철수시켰다. 이때 중국은 북한에서 핵심소통 채널의 대부분을 잃었다.
당시 중국은 새롭게 조성된 중소 분쟁의 와중에 북한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싶어했다. 이를 위해서는 북한과의 소통 및 정보 채널의 회복이 필요했다. 그러나 한 차례 호된 경험을 한 김일성은 중국을 조심스럽게 대했다.
1949년부터 약 30년간 주중 북한대사 가운데 연안파 관련 인사가 단 한 명도 없었다. 이 자리는 국내파와 만주파가 차지했다. 같은 기간 북한 외상 4명(박훈용·남일·박성철·허담) 중에도 연안파는 전혀 없었다. 이 밖에도 김일성은 친중 인사에게 주요 직책을 맡기지 않았다.
중공군 철수 직전인 1958년 저우언라이는 처음으로 북한을 방문해 양국관계를 돈독하게 하려고 시도했다. 그해 ‘북중 간 지도자 상호방문 협정’이 이뤄졌다. 이로 인해 양국 지도자는 빈번한 상호방문을 통해 핵심 사안을 심도 높게 논의하고 조정할 수 있게 됐다. 북중 정상외교의 시대가 간신히 열리게 된 것이다.
양국 정상외교는 북중관계의 핵심이었다. 중국 입장에선 양국 간 채널 가동을 통해 북한에 관한 정보수집의 기회로 이끌 계기가 됐다. 김일성은 마오쩌둥, 덩샤오핑, 장쩌민, 후진타오 등 중국 역대 주석에 접근할 수 있는 기회를 확보했다. 북한의 1인자는 방중 시 중국의 모든 정치국 상무위원을 만날 수 있는 기회도 얻었다. 이는 양국 관계가 돈독하든 그렇지 않든 간에 1958년의 양국 간 공식 협정에 따른 일상적인 활동이다. 이 협정에 따라 양국 정상은 수시로 만났지만 한편으로 여러 가지 문제를 낳기도 했다.
우선 정상끼리 만나다 보니 중국 외교부와 북한 외무성 등 공식 기관은 공식적인 외교 채널에서 소외될 수밖에 없었다. 북중관계에서 이들은 핵심을 맡지 못하고 의전이나 맡는 기관으로 전락한 것이다. 평양 주재 중국대사관은 타국에서는 기본적으로 하는 정부수집 임무를 전혀 할 수 없는 것은 물론 중국 외교부 고위 관료도 북한의 고위급 인물을 거의 만날 수 없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대신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 산하의 대외연락부가 북한 관리에 깊숙이 개입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북한과 중국은 국가 대 국가가 아닌 당 대(對) 당 관계를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는 셈이다. 하지만 대외연락부는 당의 기관으로서 핵심적인 외교 의사결정을 하는 곳이 아니라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중국 공산당 대외연락부는 2006년 북한의 핵실험 직전 북한이 실험을 하지 않을 것이라고 잘못된 보고를 올리기도 했다. 북한의 조선노동당 대외연락부도 제대로 기능을 하지 못하기는 마찬가지였다.
1958년 설정된 북중 간의 기묘한 외교관계는 21세기에 와서도 별반 변화가 없었다. 2010년 5월 베이징에서 김정일을 만난 후진타오가 “양국 간 전략적 대화가 중요하다”며 전략적인 측면을 강조한 점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중국외교, ‘한반도 평화와 안정’에 주력
최근 중국을 들여다보면 다량의 탈북자 정보를 필요로 하지만 북한으로부터 충분한 정보를 확보하지 못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는 북중이 오랫동안 정상 수준에서만 교류하다 보니 상세한 정보는 공유되지 못하는 것으로 해석된다. 중국이 북한의 핵과 장거리 미사일에 대한 핵심 동기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것도 마찬가지다.
김일성은 신 중국이 들어선 1949년 이후 중국 및 소련과 동시에 동맹협정을 맺길 원했다. 모든 동맹관계는 기본적으로 세력 균형이 목표다. 중소갈등 상황에서 중국과 북한은 전략적 목표를 달리했다. 중국은 소련을, 북한은 미국을 최대 위협으로 간주했기 때문이다.
1961년 북중 우호조약에 서명될 당시 양국은 동상이몽의 상태였다. 많은 학자가 이를 바탕으로 북한과 중국이 서로 신뢰하는 동맹이 아니라는 주장을 편다. 북중동맹은 시작만 봐도 삐걱거릴 수밖에 없는 관계라는 것이다.
이를 잘 보여주는 사건이 1963년 9월 당시 중국 국가주석이자 군사위원회 주석인 류샤오치(劉少奇, 1898~1969)의 평양 국빈 방문이다. 북한은 중국과 달리 소련의 원조가 절실한 데다 소련으로부터 방공장비를 대규모로 들여오려고 했기 때문에 중국을 냉정하게 대했다. 당시 들여온 소련의 방공장비는 지금도 북한 방공망의 핵심을 이루고 있다. 북한은 중소 갈등 시기에 중국과 소련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며 국익을 극대화하려고 했지만 이런 복잡한 상황은 북중동맹에 ‘신뢰 결핍’이라는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왔다.
북한은 중국을 벼랑끝으로 몰아가는 위험한 방식으로 자신의 국익을 추구하기도 했다. 이를테면 북한은 중국이 문화 혁명으로 시끄럽던 시기에 북중관계 복원을 시도했다. 방식은 기묘했다. 정상회담이나 고위급 방문이 아닌 모험적인 도발을 이용한 것이다.
북한은 1968년 1월 미국 해군 군함 푸에블로함을 납치했다. 그러면서 중국에 미 제국주의에 대항하는 연합전선에 함께 서겠다는 분명한 입장을 요구했다. 중국은 워싱턴에 대항하는 성명을 발표할 수밖에 없었다. 1969년 4월 북한은 미국의 EC-121 정찰기를 격추시켰다. 중국은 다시 한 번 북한의 편에 설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마오쩌둥은 북한의 이러한 벼랑 끝 정책을 완전히 지지하지는 않았다. 당시 중국은 미국과 비밀리에 수교협상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미국과의 수교는 중소 갈등 상황에서 중국의 현실적인 선택이었다. 따라서 북한의 도발을 지지한다는 중국의 성명은 북한에 대한 최소한의 성의를 보이기 위한 립 서비스에 불과했다.
1970년대에 들어 북한과 중국의 입장 차이가 더욱 벌어지기 시작했다. 중국의 경우 혁명 외교의 중요성이 서서히 감소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 결과 김일성이 마오쩌둥에게 한반도에서 미국을 몰아내고 공산주의 혁명을 이루는 데 중국의 역할을 강조했지만 마오쩌둥은 그의 생각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1975년이 되면서 양국 입장은 결정적인 사건으로 틈새가 벌어졌다. 당시 중국의 도움을 받던 공산단체 크메르루지가 프놈펜을 점령하며 캄보디아를 적화했다. 북베트남군은 사이공 점령을 위한 최후 공세 중이었다. 인도차이나의 적화는 시간문제였다.
베이징을 방문해 마오쩌둥을 만난 김일성은 한껏 고조된 상태였다. 베이징에서 열린 환영만찬장에서 그는 “잃는 것은 군사분계선이요, 얻는 것은 조국 통일”이라는 연설을 했다. 이어 그는 “군사적인 방식으로 통일을 이룰 황금 같은 기회다. 한시 바삐 이 엄청난 기회를 잡아야 한다”라며 마오쩌둥을 설득하려고 했다.
마오쩌둥이 어떤 대답을 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당시 저우언라이 총리와 덩샤오핑 상무부총리는 고개를 저었다. 김일성을 만난 덩샤오핑은 “해방전쟁이 20년 이상 계속됐던 인도차이나와 달리 한반도는 (중국도 서명한) 정전협정이 발효 중”이라며 김일성의 대결정책에 반대를 분명히 했다.
중국은 적절한 정치적 해결책이 나올 때까지 한반도의 평화와 안정을 유지하는 데 관심을 가졌다. ‘한반도의 평화와 안정’은 현재까지 중국이 외교정책에서 반드시 언급되는 말이 됐다.
중국은 역사적인 상황을 앞두고 있었다. 1971년 8월 헨리 키신저 미국 국무장관의 베이징 비밀 방문, 1972년 2월 21일 마오 주석과 리처드 닉슨 미 대통령 간의 정상회담 이후 대미 수교(1979년 1월)를 눈앞에 두고 있었기 때문이다. 중국엔 역사적인 기회였다.
핵과 미사일 개발, 북한만의 ‘홀로서기’
▲베이징에 위치한 북한대사관의 모습. ‘주체’만 강조하는 북한의 체제 특성이 최근 중국으로 하여금 대북 지렛대 역할을 하기 어렵게 만든다는 평가가 많다. / 사진·중앙포토
덩샤오핑의 지도로 개혁·개방에 나선 중국은 경제발전을 위해 동북아 평화와 안정이 절실했기에 한반도에서 대결정책을 추구한 북한과 갈등을 벌일 수밖에 없었다.
1980년 1월 중국 외교부장 황화(黃華)는 내부 연설에서 “가까운 장래에 두 한국이 통일되는 것은 어려워 보인다. 우리는 한반도에 미군이 계속 주둔한다는 미국과 일본의 입장을 공유한다. 한반도의 안정이 지역 전체의 안정에 기여할 것”이라는 발언까지 한 것으로 알려졌다.
중국에 중요한 것은 북한이 아니라 미국이었던 것이다. 중국은 대미수교로 통상 대상인 서방과의 관계회복에 급물살을 타고 싶었다. 외교적으로는 미국으로부터 ‘중국을 대표하는 정부는 중화인민공화국’이라는 ‘하나의 중국’ 원칙도 인정받았으니 국익은 물론 명분에서도 이보다 더 좋은 일은 없었던 것이다.
이는 분명히 북한의 대남 혁명전략과 일치하지 않는 것이었다. 이에 따라 북한은 홀로서기를 시작했다. 그 핵심은 핵과 장거리 미사일 개발이었다. 북한의 핵과 장거리 미사일 개발을 중국을 믿을 수 없기 때문이라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는 이유다.
1983년 10월 중국의 설득으로 북한은 남북대화에 나서겠다고 했으나 다음날 아웅산 테러 사건을 벌였다. 중국이 북한을 제대로 설득하지 못하고 있다는 게 분명해졌다. 이 밖에도 북한은 중조 우호조약 25주년 기념으로 중국 북해함대의 자국의 항구 방문을 요청했지만, 중국은 이를 거절했다. 중국은 당시 한국과 접촉하면서 북한과의 군사관계를 축소하겠다는 의도를 갖고 있었다.
덩샤오핑은 1987년 5월 만남에서 김일성에게 이렇게 말한 것으로 알려졌다. “모든 나라는 상황에 따라 나름의 문제가 있다. 모든 이슈에 대해 똑같은 입장을 요구할 순 없다. 우리도 마찬가지로 당신의 통일 계획을 지지한다. 하지만 이는 장기 목표가 돼야 한다.” 이런 와중에 1992년 8월 한중 수교가 이뤄졌다. 북한은 “동맹보다 국익을 더 위한다”며 중국을 비난했다.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중국은 북한을 역사적으로, 지정학적으로 중요한 이웃으로 여겨왔다. 하지만 북한은 호락호락 중국의 영향권에 머물지 않았다.
최근 북한의 대중국 경제의존도가 높아지고 있는 게 사실이다. 때문에 중국이 외교적으로는 물론 경제적으로도 북한에 영향력이 있을 것이라는 주장이 많이 나왔다. 하지만 북한의 대중 경제의존이 반드시 중국의 영향력 증대로 이어질지는 여전히 미지수다. 북한 경제 자체가 대외 교역에 의존하지 않는 독특한 구조를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주체만 강조하는 북한의 체제 특성이 중국이 대북 지렛대 역할을 하기 어렵게 만들고 있다.
- 채인택 논설위원 ciimccp@joongang.co.kr
2016.05.01 최신 북한 책자로 본 ‘김정은 북한’의 속살
<김정은 담화집> <조국해방전쟁승리기념관> <문수 물놀이장> <조선지도> <평양> 등 5종 분석… 3대 세습 안착한 김정은의 야심과 전시관·오락시설 등 변모하는 평양 문화를 적극 홍보
▲<월간중앙>이 세종연구소 정성장 통일전략연구실장을 통해 단독입수한 북한 책자와 문서 자료들. 위에서부터 시계방향으로 <조선지도> <김정은담화집> <평양> <조국해방전쟁승리기념관> <문수 물놀이장>.
한 북한관련 매체가 2014년 대학생들을 상대로 설문조사를 실시했다. 북한에 대해 과연 얼마나 정확하게 알고 있는지를 묻기 위해서였다. 그해 4월 20일부터 8월 11일까지 4개월에 걸쳐 대학생 4000명을 대상으로 한 심층 설문조사다. 조사 대상 대학생들에게 간단한 OX 퀴즈가 제시됐다. 북한과 관련된 질문 14개를 던지고 참-거짓을 가려내는 식이다. 당시 출제된 질문 몇 가지를 추려보면 다음과 같다. (괄호 안이 정답)
“우리는 1㎜의 편차 없이 장군님 하시던 그대로 모든 사업을 해나가야 한다”
① 2013년 개장한 동양 최대 규모의 스키장은 북한 마식령 스키장이다.(O)
② 북한 행정구역 가운데는 ‘자강도’도 있다.(O)
③ 북한의 국화는 진달래꽃이다.(X)
④ 유엔 통계에 따르면 북한의 1993년 인구가 2121만 명이며 20년 동안 380만 명가량 늘었다.(O)
⑤ 북한 헌법상 최고주권기관은 국방위원회다.(X)
북한의 국화는 진달래꽃이 아니라 목란이다. 또 헌법상 최고주권기관은 최고인민회의이다. 실질적인 최고 지도자가 김정은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이기에 이를 오해한 경우가 있을 수 있다. 당시 이 조사 결과, 전체 평균 점수는 100점 만점에 54점으로 나왔다. 조사를 진행한 매체가 내린 판단은 “북한에 대한 대학생들의 지식이 전반적으로 크게 부족하다”는 것이었다.
비단 한국 대학생뿐 아니라 많은 사람이 북한에 대해 잘 모르고 있거나 균형감 있는 인식이 부족한 실정이다. 이는 북한이 워낙 폐쇄적인 국가여서 내부 정보가 바깥으로 거의 드러나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다. 특히 2010년 3월 발생한 천안함 폭침사건 이후 우리 정부가 취한 ‘5·24 대북 제재조치’로 남북간의 교류가 거의 끊기다시피 하면서 사정은 더 안 좋아졌다. 북한의 내부 사정을 알 수 있는 통로가 더 좁아진 것이다.
이런 가운데 <월간중앙>이 그동안 우리가 잘 몰랐던 북한의 속살을 들여다볼 수 있는 북한 책자와 문서 자료들을 대량 입수했다. 외교안보분야 전문가인 세종연구소 정성장 통일전략연구실장을 통해 최근 입수한 자료다. 이번에 공개되는 북한 문서는 소책자 <위대한 김정일 장군님을 영원히 높이 우러러 모시고 장군님의 유훈을 철저히 관철하자>(이하 <위대한 김정일 장군님을…>) 안내 책자 <조국해방전쟁승리기념관> 안내 책자 <문수 물놀이장> <조선 지도>(전도) 브로슈어 <평양> 등이다
1. 소책자 <위대한 김정일 장군님을…> | 김정은, 김정일 사망 직후 ‘유훈 관철’ 맹세
▲북한판 테마파크 <문수 물놀이장> 소개 책자는 103쪽에 달하는 컬러 화보집이다. 북한 주민들이 최대한 자연스럽고 즐겁게 이용하는 모습을 부각시켰다.
소책자 <위대한 김정일 장군님을…>은 김정은 국방위원회 제 1위원장이 아버지 김정일 국방위원장 사망(2011년 12월 17일) 직후인 2011년 12월 31일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책임 일꾼들과 벌인 담화를 소개하고 있다. 조선노동당출판사가 2013년 1월 펴냈고, 본문이 11페이지 밖에 안 되는 얇은 핸드북 형태로 제작됐다.
이 책자에는 특히 김정은이 아버지 김정일 사망 직후 느낀 소회를 털어놓는 장면과 ‘김정일 유훈 관철’을 지상 과업으로 제시하는 장면이 나온다. 김정은은 당시 담화에서 “(김정일) 장군님을 잃고 보니 더더욱 사무치게 그리워진다. 지금도 장군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는 것만 같다”고 비통함을 나타냈다. 김정은이 김정일의 영결식 장면을 TV로 생중계할 것을 지시한 대목도 나온다. 다음과 같다.
“영결식이 진행된 수도의 100리 연도에서 장군님께서 가시면 안 된다고 몸부림치던 인민군 군인들과 인민들의 모습은 연출해내라고 하여도 할 수 없고 재현할 수도 없습니다. 나는 영결식 행사 장면을 비롯해 애도기간에 보여준 인민군 군인들과 인민들의 모습이 장군님을 따르는 참모습이기 때문에 텔레비전으로 다 내보내라고 하였습니다. 이번에 세계가 우리의 일심단결이 어떤 것인가 하는 것을 똑똑히 보았을 것입니다.”
김정은은 그러면서도 앞으로 자신에게 맡겨진 소임을 다하겠다는 각오를 드러냈다.
“내가 슬픔에 잠겨 있는 우리 군대와 인민을 맨 앞에서 일 떠세우겠습니다(기운차게 세우겠습니다). 나는 내일 (2012년 1월 1일) 금수산기념궁전에 계시는 (김정일) 장군님께 경의를 표시하고, 영원히 순결한 양심과 도덕의리를 지니고 장군님의 유훈을 철저히 관철하며, 장군님께서 걸으신 길을 굳건히 이어나갈 결의를 다지고자 합니다.”
세종연구소 정성장 실장은 “책자를 살펴보면, 김정일 사망 직후 당시 김정은은 ‘김일성→김정일→김정은’으로 이어지는 3대 세습을 확고히 하고 자신의 집권 체제를 최대한 신속하게 안착하는 데 최우선 목표를 두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고 설명했다. 실제로 김정은은 “위대한 장군님의 유훈을 무조건 끝까지 관철하려는 것은 나의 확고한 의지”, “우리는 1㎜의 편차도 없이 장군님께서 하시던 그대로 모든 사업을 해나가야 한다” 등 김정일 계승 의지를 여러 차례 드러냈다.
북한의 최고 지도자로 등극한 김정은이 ‘인민생활 향상’을 최우선과제로 설정한 것도 눈길을 끈다. 김정은은 “(김정일) 장군님의 유훈을 관철하는 데서 가장 중요하고 선차적인 문제는 인민생활을 향상시키는 것”이라며 “현 시점에서 인민들의 먹는 문제, 식량 문제를 푸는 것은 가장 절박한 요구”라고 강조했다.
김정은이 ‘김정일 우상화’에 신경을 집중했다는 점도 알 수 있다. 김정은은 “조의 행사 관련 편집물에 장군님 영상을 정중히 모시도록 해야 한다”, “장군님 태양상을 야외에 계속 모시지 않도록 하라”, “장군님 서거 100일 추모회 때에는 태양상을 야외에 모시고 추모 분위기를 조성해야 한다” 등 지시사항을 일일이 제시했다.
2. 컬러 화보집 <조국해방전쟁승리기념관> | 한국전쟁의 김일성 업적 기린 전시관, 전쟁 유물 전시해
▲김정은의 3대 세습 안착 의지가 엿보이는 담화집 <위대한 김정일 장군님을…>.
안내 책자 <조국해방전쟁승리기념관>은 2014년 북한 외국문 출판사가 펴낸 140쪽짜리 컬러판 형태다. 북한은 ‘조국해방전쟁’이라고 정의하는 한국전쟁에서 김일성의 업적을 기념하기 위해 1953년 8월 17일 ‘조국해방전쟁기념관’을 개관했다가 ‘승리’의 이름을 따 1974년 4월 11일 현재의 위치로 이전한 ‘조국해방전쟁승리기념관’으로 다시 문을 열었다. 이후 정전 60주년을 맞은 2013년 7월 기념관을 새롭게 개건했다. 지상 3층에 연면적 5만1000여㎡의 기념관은 한국전쟁뿐 아니라 일제 강점기 시절, 한국전쟁 후 반미 활동과 관련된 혁명 사적물 300여 점과 전쟁유물 12만여 점을 전시하고 있다.
기념관 개건에 맞춰 펴낸 것으로 보이는 안내 책자는 기념관 곳곳을 담은 컬러 사진 화보집이다. 안내 책자 앞부분은 기념관 중앙홀 정면에 우뚝 서 있는 김일성 입상 사진을 담았다. 김일성이 젊었을 때 모습을 재현한 입상이다. 세종연구소 정성장 실장은 “김일성의 청년 시절과 닮은 김정은의 모습을 연상하도록 의도적으로 이렇게 배치한 것으로 보인다”고 분석했다.
안내 책자는 ‘항일혁명투쟁관’을 “김일성 동지께서 인민의 첫 혁명무력을 창건하시고 항일무장투쟁을 승리에로 조직영도하신 자료들이 전시돼 있다”고 소개했다.
기념관은 김일성이 일제 강점기 시절 지휘한 보천보 전투 관련 자료들을 한 곳에 모아 보관하고 있다. 1953년 7월 김일성이 정전협정 문건을 비준하는 장면이 찍힌 사진도 전시돼 있다. 기념관 부지 한쪽에는 ‘노획무기전시장’을 마련해 한국전쟁 때 북한군이 전리품으로 얻은 한국군과 미군의 당시 무기 일부를 전시했다.
3.북한판 워터파크’ <문수 물놀이장> - 27개 물미끄럼대와 16개 수조, 북한주민 자연스러운 모습 부각
▲한국전쟁 당시 김일성의 업적을 기념하는 전시관에 대한 140쪽 짜리 홍보집 <조국해방전쟁승리기념관>.
또 다른 안내 책자 <문수 물놀이장>은 평양 대동강 기슭에 있는 ‘북한판 워터파크’를 홍보한 103쪽의 화보집이다. 1994년 준공된 문수 물놀이장은 2013년 5월 김정은의 개건 공사 지시로 그해 10월 15일 다시 문을 열었다. 27개의 물미끄럼대와 16개의 수조를 갖추는 등 북한이 김정은 시대를 대표하는 오락시설로 선전하는 곳이다.
안내 책자는 “비단에 수를 놓은 문양처럼 경치가 아름답다 하여 ‘문수’라 불리우는 지구에 12만5000㎡의 부지 면적을 차지하고 있는 문수 물놀이장은 평양시에 꾸려진 물놀이 장들 중에서 규모가 가장 크다”고 소개했다. 안내 책자는 또 북한 주민들이 물놀이장에서 물 폭포를 맞고 있는 모습, 물 미끄럼대를 활강하는 모습, 튜브를 이용해 물놀이를 즐기는 모습 등 다양한 장면을 담았다. 정성장 실장은 “안내 책자에서 북한 주민들이 최대한 자연스럽게 이용하고 있는 모습을 부각시킨 것이 특징”이라고 설명했다.
4. 2009년 판 <조선 지도> | 1대150만 축척 전도, 동해를 ‘조선해’로 표기
▲2009년 판 <조선지도>(전도). 동해가 조선해로 표기된 부분이 눈에 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지도출판사가 2009년 펴낸 <조선지도>는 한반도를 1대 150만의 축척으로 담은 전도이다. 지도 맨 윗부분에 ‘우리 조국은 하나의 지맥으로 이어진 삼천리 금수강산입니다’라는 김정은 어록이 소개돼 있다. 한반도를 둘러싼 서해·남해·동해를 각각 ‘조선서해·조선남해·조선해’라고 표기한 부분이 눈길을 끈다. 울릉도와 함께 독도도 지도 맨 오른쪽에 작게 표시해뒀다.
북한 수도 평양을 안내한 브로슈어(2012년 지도출판사 제작)는 관광객 소개용으로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평양대극장, 대동문 영화관, 만경대 학생소년궁전, 평양산원, 개선청년공원, 조국해방전쟁승리기념탑, 당창건기념탑, 조국통일3대헌장기념탑, 옥류관, 능라인민유원지 물놀이장, 류경원, 인민야외빙상장, 양각도국제호텔, 평양고려호텔 등 평양을 대표하는 시설물을 사진과 함께 홍보했다. 특히 만경대 고향집과 금수산태양궁전에 대해선 각각 ‘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께서 탄생하시어 어린 시절을 보낸 곳’, ‘위대한 김일성 동지와 김정일 동지를 영생의 모습으로 길이 모시려는 염원에 의해 꾸려진 주체의 최고 성지’라는 주석과 함께 맨 위에 눈에 띄게 배치했다.
▲브로슈어 <평양>에 소개된 평양 시내의 시설물들.
5. 1000문 1000답 <조선에 대한 이해> | 한국전쟁 “미국 북침에 맞서 승리한 전쟁”이라 선전
앞서 세종연구소 정성장 실장은 지난 3월 관광객 안내용 책자인 <조선에 대한 이해>(전 10권)를 공개한 바 있다. 지난해 7월 북한 외국문출판사가 발간한 이 책자는 자연, 역사, 정치, 군사, 경제, 문화, 민속, 관광 및 투자, 인권, 통일문제 등 주제별 질문과 답변 형식으로 북한을 소개해놓았다. 1권당 100문 100답으로 정리돼 있다. 총 10권으로 구성돼 있으니 말하자면 ‘1000문 1000답 북한 들여다보기’인 셈이다. 정성장 실장은 “<조선에 대한 이해>를 꼼꼼히 들여다보면 모래성과 같은 북한 내부의 허상이 파악된다”고 말했다.
책자 내용 가운데 그 동안 우리가 잘 몰랐던 북한의 속살을 드러낸 대목, 그리고 북한이 힘주어 강조한 대목 등을 몇 가지만 추려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책자에 언급된 설명이 학계에서나 국제적으로 ‘공인된 사실’과 다른 경우가 적지 않아 ※ 표시와 함께 각주를 달았다.
☞ <조선에 대한 이해>(역사)
Q: 조선 사람은 언제, 어디서 기원했는가?
A: 인류 발생의 첫 시기인 100만년 전에 평양을 중심으로 한 대동강 유역에서 기원했다. 대동강문화는 황하문화, 인더스강문화, 닐강(나일강)문화, 양강(티그리스·유프라테스강) 문화와 더불어 세계 5대 문명을 이루고 있다.
<※ 국제적으로 공인된 인류 4대 문명 발상지는 기원전 4000~3000년경 형성된 메소포타미아(티그리스·유프라테스강) 문명, 인더스 문명, 이집트(나일강) 문명, 황하 문명이다. 북한은 ‘북방 민족의 한반도 유입설’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 대신 “100만년 전 원인(猿人)들이 남긴 검은모루 유적 등 구석기시대와 신석기시대 유적들이 대동강 유역에 집중돼 있다”는 주장을 앞세워 대동강문명을 세계 4대 문명에 추가돼야 할 5대 문명 중 하나라고 주장한다.
☞ <조선에 대한 이해>(정치)
Q: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가(國歌)는 무엇인가?
A : 1947년에 창작된 ‘애국가’이다.
<※ 북한의 ‘애국가’는 우리나라의 ‘애국가’와 제목만 같을 뿐 다른 노래다. ‘아침은 빛나라 이 강산 은금에 자원도 가득한 삼천리~’로 1절이 시작된다. 월북 시인 박세영이 작사, 광산 노동자 출신 음악가 김원균이 작곡했다. 북한의 국기(國旗)는 우리나라에서 ‘인공기’로 알려져 있는데, 가운데 붉은색은 항일혁명 선열들의 붉은 피를, 흰색은 하나의 혈통을, 푸른색은 공화국의 자주권을, 붉은 별은 공화국의 발전 전망을 상징한다. 북한의 국화(國花)는 목란, 국조(國鳥)는 참매, 국수(國樹)는 소나무, 국견(國犬)은 풍산개이다.>
Q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가기구의 특징은 무엇인가?
A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가기구는 본질에 있어 인민 대중의 수중에 장악된 사회에 대한 정치적 지배의 기본 무기로서, 종래의 모든 국가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특징을 갖고 있다. 그 특징은 국가기구가 인민대중의 요구에 의해 만들어진 기구라는 것이고, 인민대중의 이익을 위해 복무하는 기구라는 것이다.
<※ 북한은 김정은을 수식하는 타이틀로 노동당 최고 직책인 ‘당 제1비서’를 가장 앞세운다. 그 다음이 국가기구 최고 직책인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 군 최고 직책인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의 순서다. 그래서 “조선노동당 제1비서이시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이시며,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인 김정은 동지께서는 ~”이라고 부른다. 북한 헌법 11조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조선 노동당의 영도 밑에 모든 활동을 진행한다’고 규정해 당의 지도를 국가기구보다 더 중요시하고 있다.>
(군사)
Q: 조국해방전쟁은 어떻게 시작되었는가?
A: 미제(미 제국주의)가 1950년 6월 25일 이른 새벽 남조선의 이승만 괴뢰도당을 사촉하여(사사로운 일을 재촉하여) 전면적인 무력침공을 감행함으로써 시작됐다. 조선전쟁은 사실상 1950년 6월 25일이 아니라 그 이전부터 시작되었다. 미제는 이미 1947년부터 공화국 북반부에 대한 무장도발을 끊임 없이 감행하면서 국부적인 전쟁을 해마다 계단식으로(단계적으로) 확대하여왔다.
<※ 북한은 한국전쟁을 ‘미국의 북침에 맞서 승리한 전쟁’이라고 주장한다. 휴전협정을 맺은 1953년 7월 27일을 ‘전승절’로 기념하는 것도 그래서다. 하지만 북한 주장은 사실과 다르다. 한국전쟁과 관련해 국제적으로 공인된 사실은 ‘1950년 6월 25일 새벽 북한 공산군이 남북군사분계선이던 38선 전역에 걸쳐 불법 남침했다’는 것이다.>
- 글·사진 김형구 기자 kim.hyounggu@joongang.co.kr
■ 동아일보
2015-08-29 북한의 ‘대남일꾼들’
▲2007년 2월 27일부터 3월 2일까지 평양 고려호텔에서 열렸던 20차 남북 장관급회담에 참석한 남북회담 대표들이 ‘종결회의’를 마치고 공동보도문을 발표하고 있다. 이 회담은 평양에서 열렸던 남북 당국 간 마지막 공식회담이 됐다. 북한 수석대표였던 권호웅 내각책임참사(오른쪽 가운데 앉은 사람)는 2008년 이후 행방이 묘연해 대남정책 실패의 책임으로 숙청됐다는 설이 나돈다. 동아일보DB
2000년대 초중반 남북 관계가 문자 그대로 팡팡 돌아갈 때 우리 측 회담 대표로 나섰던 한 인사는 ‘충격적인’ 장면을 목격했다며 후일담을 전했다. 언론에 공개되는 전체회의 모두발언 부분에서 “계속 이런 식으로 나오면 당장 철수하겠다”며 탁자를 쾅쾅 내리치던 북한 수석대표가 문을 걸어 닫고 비공개 회의로 전환되자 갑자기 ‘읍소 모드’로 전환하는 것을 두 눈으로 똑똑히 봤다는 것.
“선생, 우리 사정 뻔히 알지 않습네까. 민족의 장래를 생각하는 셈 치고 통 크게 한번 도와주시라요….”
매년 우리 정부가 북한에 쌀 30만∼50만 t, 비료 20만∼30만 t을 지원할 때의 이야기다. 말이 차관(借款)이지 사실상 거저 주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북한이 매년 식량수급 계획을 짤 때 우리의 지원분을 ‘상수(常數)’로 놓았던 시절이다.
필자도 남북회담 취재차 평양을 방문했을 때 난감한 경험을 한 적이 있다. 만찬 도중 취재진 안내를 맡은 40대 초반 북한 인사의 가슴에 달린 배지 모양과 형태가 조금씩 다른 것이 궁금해 “배지가 왜 다르냐”고 묻자 벼락같이 화를 낸 것.
‘초상휘장’을 배지라고 부른 것이 최고 존엄에 대한 모독이라며 “동무는 다시는 공화국 땅에 발을 들여놓지 못하게 하겠다”고 위협했다. 만찬 분위기는 어수선해졌고 남북 당국 간 연락관 협의가 몇 차례 이뤄진 뒤에야 사태는 일단락됐다.
공개된 자리에서 나온 ‘김 씨 일가’에 대한 불경한 발언에 즉각 문제 제기를 하지 않을 경우 문책 대상이 되는 탓에 북측 인사가 ‘오버’한 것 같다는 우리 당국자의 설명을 들을 수 있었다.
‘대남일꾼’으로 산다는 것
직급도 다르고 하는 일도 다르지만 이른바 북한의 ‘대남일꾼’이 살아가는 방식이다. 남북대화나 교류협력 사업의 일선에서 북한을 대표해 남측 인사를 상대하는 것을 업(業)으로 하는 사람들이다. 김일성이나 김정일의 얼굴이 선명한 초상휘장을 달고 남북 관계의 현장을 누비는 만큼 ‘국가대표’라는 자부심도 강하다. 이미 체제 경쟁이 끝난 상황인데도 ‘사회주의 조국’의 우월성과 ‘우리 민족끼리’의 당위성을 설파해야 하는 이들은 당성(黨性)도 강하고 논리 무장도 철저하다.
통일전선부는 대남일꾼들을 지휘하는 사령탑과도 같다. 통전부의 지휘 아래 조국평화통일위원회 같은 대남전위기구나 아태평화위원회, 민족화해협의회 같은 곳에 몸담고 있는 사람들이 전면에 나서 ‘남북 대결’을 치른다.
순환보직 개념이 없는 북한에서 한번 대남일꾼은 영원한 대남일꾼이다. 업무에 대과(大過)가 있거나 사망하지 않는 한 ‘검은 머리가 파뿌리 되도록’ 남북 관계의 현장을 누벼야 하는 숙명을 타고난 존재이기도 하다.
과거 기사를 검색해 보니 1991년 당시 46세의 나이로 기자를 안내하는 역할을 맡았던 백문길의 이름을 찾아볼 수 있었다. 수많은 남북 접촉의 현장에 모습을 드러낸 단골 일꾼이다. 이제는 일흔이 됐을 그는 회담의 진전이 더디거나 양측 간 첨예한 견해차로 신경전이 벌어지면 어김없이 나타나 기자들에게 말을 걸어왔던 기억이 있다.
“당신네 대표단이 뭐라고 설명했는지 모르겠지만 진짜 문제는 바로 이것”이라며 ‘심리전’을 펼치는 것이 백문길의 장기. 취재진을 통해 우리 대표단의 속내를 읽어보려는 의도도 있었을 것이다. 쓰고 나오는 모자도 다양했는데 2008년 기사에는 ‘민화협 상무위원’이라는 직함이 눈에 띄었다.
‘술’을 이겨라
남북회담을 보는 또 다른 재미는 양측 회담일꾼들이 벌이는 불꽃 튀는 신경전이다.
45세의 나이에 일약 남북 상급(相級)회담(장관급회담의 북한식 표현) 대표단장이 된 권호웅은 20년씩 차이가 나는 남측 수석대표에게 까칠한 언행을 자주 해 구설에 오르곤 했다. 1998년 민간대표단으로 방북한 지 9년 만인 2007년 2월 20차 장관급회담 남측 수석대표로 방북한 이재정 통일부 장관에게 “상상할 수 없는 도약을 했다”며 기선 제압을 시도한 뒤 회담 역사를 장황하게 설명하는 등 이 장관을 가르치려 했다.
술을 둘러싼 에피소드도 부지기수다. 평양에 온 남측 대표단의 감성을 자극하고 실수를 유도하기 위해 북한의 대남일꾼들이 사용하는 ‘전가의 보도’인 셈이다.
2003년 1월 노무현 당시 대통령 당선자의 특사로 임동원-이종석 전 통일부 장관이 방북했을 당시의 일이다. 두 사람의 김정일 면담은 결국 불발로 끝났지만 2002년 10월 경제시찰단 일원으로 서울을 찾았던 장성택이 ‘빚을 갚겠다’며 성대한 만찬을 베풀었다고 한다.
두주불사(斗酒不辭)형으로 알려진 장성택은 연신 “쭉 냅시다(‘원샷’을 하자는 뜻)”를 외쳤고 술이 약한 이종석 전 장관은 얼마 안 가 한계상황에 이르렀다. 하지만 국가정보원이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 처방해 준 ‘약물’의 힘으로 겨우겨우 버텨낸 것으로 알려졌다.
부담스러운 ‘접대’
장성택 자신도 서울 방문 당시 마신 술 때문에 곤욕을 치른 적이 있다. 열흘간 전국 18개 지역 38개 산업시설과 연구소 등을 방문하는 일정을 소화했는데 장성택은 밤마다 남측 인사들이 베푸는 주연(酒宴)을 만끽했고 룸살롱을 찾았다는 미확인 첩보가 나돌기도 했다. 오비이락일 수도 있지만 장성택은 지방으로 좌천됐고 2004년 방북했던 당시 정동영 통일부 장관이 안부를 묻자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남조선에서 폭탄주를 너무 많이 먹은 탓에 몸을 버렸다. 지금은 조금 쉬게 하고 있다”고 답했다고 한다.
종종 남측 요인에게 ‘은밀한 접대’를 제의하기도 하는 듯하다. 지금은 공직을 떠난 한 당국자의 증언이다.
“부담이 적은 회담이었던 것 같다. 남북 관계가 좋았던 시절이어서인지 회담도 순조롭게 진행됐다. A는 작정한 듯 ‘바람이나 쐬자’며 나를 어디론가 데려갔는데 우리 식으로 따지면 룸살롱이었다. 의도를 뻔히 알겠기에 술맛이 싹 달아나더라. 한두 잔 홀짝거리다가 ‘피곤해서 쉬고 싶다’는 핑계를 대고서야 겨우 빠져나왔다.”
가차 없이 가해지는 ‘팽(烹)’
남북 관계의 부침은 대남일꾼들의 거취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결국 남북 관계에서 목표로 하는 성과를 이뤄내고 전리품을 챙겨야 하는 것이 대남일꾼들이 존재하는 이유이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대남일꾼들에게는 ‘햇볕정책’이 유지되던 김대중-노무현 정부의 10년이 그리울 수도 있다. 알게 모르게 손에 쥘 수 있는 ‘기념품’도 꽤 있었던 모양이다.
1990년대 초반부터 회담일꾼으로 남북 관계의 현장을 누비다가 통전부 부부장으로 남북 관계를 실무적으로 총괄하던 최승철의 운명은 줄타기와도 같은 대남일꾼의 삶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최승철을 만났던 우리 당국자들은 그의 캐릭터에 대해 “한마디로 호방하고 자신감 넘치는 성격이었다”며 “다른 대남일꾼들과 달리 즉석에서 ‘내가 책임지고 관철시키겠다’는 식의 말을 자주 하곤 했다”고 말했다.
2007년 10월 2차 남북정상회담 당시 군사분계선(MDL)에서 노무현 대통령을 영접했을 정도로 잘나갔지만 이제는 공식 석상에서 자취를 감췄다. 한 대북소식통은 “이명박(MB) 정부로 정권교체가 이뤄진 뒤 남북 관계에 별문제가 없을 것이라고 호언장담했지만 상황이 급반전하면서 숙청을 당한 것으로 안다”고 전했다.
너무 뻣뻣해도, 지나치게 비굴해도…
대남일꾼들의 잔혹사는 최승철로 국한되지 않는다. 2008년 이후 행방이 묘연한 권호웅은 대남정책 실패에 책임을 지고 총살당했다는 설이 나돌았고, MB 정부 출범 이후인 2009년 초 대남사업의 2인자 반열에 올랐던 원동연 통전부 부부장의 모습도 보이지 않는다. 2010년 천안함 폭침 이후 남북 관계 개선을 위한 담판협상 대표로 나섰던 류경 국가안전보위부 부부장 역시 2011년 처형됐다. 김정은 체제 들어 양봉음위(陽奉陰違·보는 앞에서는 순종하는 체하고 속으로는 딴마음을 먹음)하고 박수도 건성건성 쳤다는 이유로 비명횡사한 장성택의 최후는 말할 것도 없다.
2000년대 초반까지 남북 관계의 전면에 나섰던 임동옥 김용순 전금진 송호경 같은 사람들이 김 씨 일가의 최측근으로 천수(天壽)를 누린 뒤 예우를 받으며 퇴장한 것과는 사뭇 다른 결말이다.
MB는 자신의 회고록 ‘대통령의 시간’에 “(류경의 처형은) ‘한국에 기밀을 누설했다’거나 ‘서울에서 MB 면담을 요청했다가 실패했는데 즉각 평양으로 돌아오지 않고 하루 더 머물러 있었고 이에 대해 김정일이 크게 화를 냈다’는 보고가 있었다”고 적고 있다.
김양건 통전부장의 경우 예외로 볼 수 있다. MB 회고록에는 북한이 정상회담의 조건으로 △옥수수 10만 t △쌀 40만 t △비료 30만 t △아스팔트 건설용 피치 1억 달러어치 △북측의 국가개발은행 설립 자본금 100억 달러 지원 등을 요구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2009년 대북 비밀접촉에 나섰던 임태희 전 대통령실장의 증언이라며 “김양건이 그대로 가면 죽는다고 해서…”라며 “논의 내용을 확인해 준 것뿐이지 합의한 것은 아니다”라고 회고했다.
이 내용이 사실이라면 김양건은 자존심을 버리고 남측에 지원을 구걸한 격이지만 그는 김정은 체제 들어서도 대남총책으로 승승장구하고 있다.
재량권은 없고 책임은 무한대
북한 문제를 ‘내재적 시각’에서 보는 쪽에서는 MB 정부 이래 남북 관계가 적대적 대결로 반전되면서 북한 내 대화파가 살아남을 수 있는 생태계가 파괴됐다는 주장을 펼치기도 한다. 남북 관계가 경직되면서 북한에서도 이른바 ‘리뷰’ 과정이 있었고 해당 부문에서 일한 사람들에게 책임을 묻기 시작했다는 분석이다.
정보당국에서 일했던 한 인사는 “북한 내에서도 ‘우리가 남측에 퍼주기 했다’ ‘일방적으로 끌려다녔다’는 비판론이 제기됐던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개성공단을 위해 군사전략 개념도 바꾸고 군부대까지 이전했고, 금강산 개발권도 내줬는데 ‘공화국’에 실질적인 이득이 된 것이 뭐냐는 불만이 나온다는 것.
전직 장관급 인사도 “남북 관계에서 성과가 안 나면 전전긍긍해야 하고, 그렇다고 성과를 위해 ‘구차한 부탁’을 하다가 누군가 상부에 찌르면 본인의 목숨이 위태로워진다”며 “모르긴 해도 북한 내에서 가장 직업 스트레스가 심한 직역 중 하나일 것”이라고 말했다.
재량권은 거의 없으면서도 책임은 무한대로 져야 하는 불편한 자리라는 것.
남북 대화는 계속되어야 하기에…
고위급 접촉 공동보도문의 잉크가 채 마르기도 전에 북측 수석대표인 황병서 군 총정치국장이 목함지뢰 및 포격 도발과 관련해 남조선 당국이 ‘근거 없는 사건’을 만들었다며 “일방적 행동으로 상대측을 자극하는 행동을 벌일 경우 군사적 충돌을 불러올 수밖에 없다는 교훈을 찾았을 것”이라고 오리발을 내민 것은 살아남기 위한 호구지책(糊口之策)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북한이 2011년 5월 중국 베이징 등에서 열린 남북 비밀접촉에서 정상회담 일정을 협의했다는 사실을 일방적으로 공개한 것도 스스로의 보호본능 발동으로 보인다. 당시 북한은 조선중앙통신을 통해 “북측에서 볼 때는 사과가 아니고 남측에서 볼 때는 사과처럼 보이는 절충안이라도 만들어 내자고 하면서 우리 측에 제발 좀 양보해 달라고 애걸했다”는 주장을 했다.
심지어 북측은 “정상회담을 빨리 추진하자고 하면서 돈 봉투까지 거리낌 없이 내놓고 그 누구를 유혹하려고 꾀하다가 망신을 당했다”며 남측의 회담일꾼들을 몰아붙이기도 했다.
※덧붙임: 더 적나라한 남북 관계의 에피소드를 취재했지만 전부 기사화하지는 못했습니다. ‘대남일꾼’들의 활동은 앞으로도 계속되어야 하고 미우나 고우나 남북 관계를 최일선에서 다룰 대화의 파트너이기 때문입니다.
하태원 기자 triplets@donga.com
2015-09-25 전쟁 능력 없는 北, 南 ‘양보’로 죽다 살아나다
▲9월 3일 베이징에서 열린 중국 전승절 행사에서 사열하는 박근혜 대통령과 귀빈들.
8월 22일 어간 전쟁이 날 뻔했다. 김정은이 사상 최초로 최후통첩과 준전시, 전시상태를 한꺼번에 선포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북한 매체들이 준전시라 주장하고, 황병서와 김양건이 사태를 가라앉힘으로써 전쟁은 없던 일이 돼버렸다. 이는 북한과 김정은의 ‘내공’을 짐작게 하는 일대 사건이 아닐 수 없다.
‘으쓱’해진 이는 박근혜 대통령이다. 이 사건을 겪고 중국 전승절 행사에까지 다녀온 박 대통령은 ‘통일외교’를 외쳤다.
그는 통일 단초를 잡아놓고 그런 주장을 하는 것일까. 말로 하는 ‘통일대박’ ‘통일외교’ 말고, 통일에 실질적으로 다가가는 행동력을 갖고 있는 것일까.
겪은 일도 ‘복기(復棋)’를 해보면 새로운 면이 발견된다. 8·25 합의에 이르기 전 남북은 어디까지 달려갔고, 어디에서 회군했는가. 그리고 이 사건에서 죽다 살아난 쪽은 어디인지 살펴보기로 하자.
북한의 때리고 어르기 전술
전쟁의 기운은 남북이 포격을 주고받은 직후인 8월 20일 오후 5시쯤 인민군 총참모부가 서해의 군(軍) 통신선으로 전통문을 보내오면서 감돌기 시작했다. 인민군 총참모부는 ‘8월 20일 17시부터 48시간 내 대북 심리전 방송 중지하고 모든 수단을 전면 철거할 것, 이를 이행하지 않으면 군사적 행동을 개시할 것’이라는 최후통첩을 해왔다.
5시 10분쯤, 이를 보고받은 박근혜 대통령이 국가안전보장회의(NSC) 상임위원회 소집을 지시했다. 6시부터 열린 이 회의에서 최윤희 합참의장과 한민구 국방부 장관, 김관진 국가안보실장이 북한의 도발 개요와 우리 군의 대응 태세 등을 보고하자, 박 대통령은 “북한 도발에 단호하게 대응하고 만전의 대비 태세를 유지하는 동시에 주민 안전에 최선을 다하라”고 지시했다.
김정은이 이를 따라 했다. 그날 밤(북한 발표에 따르면 11시 전으로 추정됨) 조선노동당 중앙군사위원회 비상확대회의를 긴급 소집한 것. 이에 대해 조선중앙방송은 “(다음 날인) 21일 17시부터 조선인민군 전선 대련합부대들이 진입이 가능한 완전무장한 전시 상태로 이전하며, 전선지대에 준전시 상태를 선포함에 대한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김정은을 가리킴) 명령을 하달했다”고 보도했다.
인민군의 대량군주의적 기동전술
전선지대에는 바로 준전시임을 선포하고, 전선 대련합부대는 다음 날 오후 5시부로 전시 상태로 이전하라는 ‘이원적’ 명령을 내린 것이다. 여기에서 주목할 것이 ‘전선 대련합부대’이다.
우리는 전선 대련합부대를 군단으로 이해하는데, 군단보다는 큰 부대다. 우리 군은 인민군 육군이 ‘대량군(大量軍)주의적 기동군 전술’을 구사한다고 본다. 이는 제2차 세계대전 때 독일 육군이 선보인 전격전(電擊戰)에서 비롯됐다.
1차 대전 때까지의 지상전은 보병이 전선을 따라 길게 참호를 파고 그 위에 기관총을 걸어놓고 싸우는 것이었다. 기관총이 불을 뿜는 한 진지는 돌파하기 어려웠다. 그때 영국 육군이 무한궤도 위에 기관총탄을 견뎌내는 강판을 두르고 역시 기관총을 쏘며 전진할 수 있는 ‘원시 전차’를 개발했다. 제1차 대전이 끝난 후 열강은 전차 개발에 매진했다.
제2차 대전이 일어나자 3호 전차를 앞세운 독일 육군은 프랑스가 국경선을 따라 구축해놓은 강력한 진지인 마지노선을 우회 돌파했다. 그리고 돌파구를 확대해 전 전선에서 공격해 들어가고, 기갑부대를 계속 돌격시켜 단시간에 전략거점(Center of Gravity)을 점령했다. 개전 35일 만에 파리를 점령한 것. 그후 전격전은 보편화했다.
미국을 비롯한 서방국가들은 여기에 항공력을 추가해 ‘공지(空地)기동전’ ‘입체고속기동전’을 만들어냈다. 항공기와 미사일로 적을 격멸한 후 전차와 보병을 태운 장갑차를 돌격시키는 것이다.
소련군은 항공력이 부족해 공지전 능력을 갖추지 못했다. 하지만 병력이 월등히 많아 기갑(전차)은 물론이고 보병부대까지 대량으로 반복 돌격시켜 구멍을 내고, 그곳으로 기동부대를 진격시킨다는 개념을 세웠다. 1파, 2파, 3파의 반복된 공격으로 구멍을 내는 것을 ‘제파식(諸波式) 공격’, 뚫은 통로로 기동부대를 투입해 승기를 잡는 것을 대량군주의적 기동전술이라고 한다.
▲무사만루의 기회를 1득점으로 끝내버린 8·25 합의. 김관진 안보실장(오른쪽)이 황병서 총정치국장과의 합의를 서둘지 않았더라면, 우리는 북한과 중국, 미국, 일본을 모두 끌고 나가는 기회를 잡았을 것이다. 사진제공=통일부
이를 북한 육군이 도입했다. 인민군 육군은 군사분계선 서쪽에서부터 4-2-5-1군단(전연군단)을 놓고, 그 뒤에 기갑·기동군단(기동부대)인 815-820-620-806부대를 배치했다. 유사시 전연군단은 예하 사단을 재편성해 1, 2, 3, 4파를 정하고 한 곳을 선택해 반복 가격한다. 그리하여 구멍이 뚫리면 후방에 대기하던 기동부대를 우겨넣어 돌파구를 확대하고, 전략거점인 서울로 돌진한다.
국군은 밀집방어로 대응한다. 여덟 개 군단 가운데 7군단만 ‘예비’로 남겨놓고, 수도-1-5-6-2-3-8의 일곱 개 군단을 GOP선에 촘촘하게 세워놓은 것이다.
전쟁에서는 공자(攻者)가 주도권을 행사하므로 방자(防者)는 종속변수가 된다. 북한 군단은 공격 지점을 선택해 부대를 집중할 수 있으니 공격 지점에서는 인민군 세력이 우세해진다. 기만전술도 추가한다. 소수 전력을 엉뚱한 곳으로 침투시켜 방자가 주력이 투입되는 곳으로 부대를 보내 두텁게 막는 것을 방해한다. 그리고 제파식 공격을 퍼부으니 국군의 GOP(일반전초) 방어선은 뚫릴 수밖에 없다.
그리하여 통로가 열리면 인민군은 20만 명에 달한다는 특작부대(게릴라부대)도 동원한다. 이들을 AN-2기나 직승기(헬기)에 싣고 가서, 기동부대가 가려는 길 좌우로 뿌려 기동로를 확보해주는 것이다. 기동부대는 이들을 장갑차에 태워 전력거점까지 돌격해 풀어놓는다. 서울로 스며든 이들은 큰 건물을 장악하고 그곳의 시민을 인질로 잡는다. 인질 때문에 마지막 방어부대인 수도방위사령부는 제대로 반격하지 못한다.
‘6일전쟁’과 거부작전
이 지경이 되는 것을 막기 위해 한미연합군은 작전계획 5027에 공군과 육군 포병이 중심이 된 ‘거부작전’을 마련해놓았다. GOP선 뒤에 알파-브라보-찰리-델타라는 가상선을 정해놓고, 그중 한 선에서 GOP선을 돌파한 인민군을 멈춰 세우는 것이다.
우리 군은 GOP선에서 민간인 통제선 사이를 ‘FEBA(Forward Edge of Battle Area, 전투지역전단)지역’으로 부르며 ‘비워’뒀다. 그곳이 강력한 화력을 퍼부어 GOP선을 돌파한 인민군을 격멸하는 거부작전의 무대다.
1967년 이스라엘군이 거부작전의 ‘절정’을 보여줬다. 병력이 월등히 많은 이집트와 시리아가 양쪽에서 대량군주의적 기동전술을 펼치려고 대부대를 집결시키자, 이스라엘은 공군기를 기습적으로 출격시켜 그 지점을 타격했다. 이 폭격으로 두 나라 군대가 궤멸하면서 우왕좌왕하자, 이스라엘은 거꾸로 기갑부대를 돌격시켜 6일 만에 승리를 거머쥐었다(6일전쟁).
한미연합군도 이러한 거부작전을 하고 싶기에 ‘정찰’에 총력을 기울인다. 북한군이 기동할 조짐을 보이면 워치콘(대북정보감시태세)을 상향해 정찰전력을 배가하는 것이다. 평시엔 워치콘 4를 유지하는데, 그때는 한국의 금강 정찰기와 미국의 U-2기를 하루씩 번갈아 띄워 북한 지역을 정찰한다. 목함지뢰 사건 후 워치콘은 3으로 격상됐다. 그렇게 되면 오전엔 금강, 오후엔 U-2식으로 정찰비행을 크게 늘린다.
한미연합군이 강력한 ‘역격(逆擊)’을 할 수 있다는 것이 인민군에겐 스트레스다. 이 부담을 뚫고 서울까지 진격하려면 전연군단과 후방의 기동부대 간에 호흡이 잘 맞아야 한다. 전연군단이 큰 희생을 치르며 통로를 개척했는데, 한미연합군의 강력한 역격을 겁내 기동부대가 돌격하지 않으면, 기진맥진한 전연군단은 궤멸된다. 이 때문에 인민군이 작전회의를 열면, 기동부대의 돌격 문제를 놓고 전연군단장과 기동부대장이 싸움을 벌인다고 한다.
이 문제를 죽기 직전의 김정일이 정리했다. 김정일은 전연군단장들의 주장이 옳다고 보고, 평시 두 부대는 독립적으로 작전하지만, 유사시가 되면 전연군단장이 기동부대를 작전통제하도록 했다. 그리고 나온 말이 ‘전선 대련합부대’다. 전선 대련합부대는 평시에는 한 개 군단이지만, 유사시에는 2개 군단이 된다.
26사단 포병이 사격한 이유
8월 20일 이후 북한이 이러한 공격을 준비할 것으로 예상됐기에, 우리군은 역격이 포함된 대응책을 만지작거렸다. 그리고 북한의 행태가 ‘때리고 어르기’라는 데 주목했다. 북한은 8월 20일 오후 4시 전후 28사단 지역으로 14.5㎜ 고사총 1 발과 76.2㎜ 평사포 2발을 발사하고, 4시 50분쯤 김양건 명의로 김관진 안보실장 앞으로, “현 사태를 수습하고 관계 개선을 논의할 용의가 있다”는 전통문을 보내왔다. 그리고 오후 5시쯤, 서해 군 통신선으로 앞에서 밝힌 최후통첩을 보내왔기 때문이다.
우리 군은 묵살 전략으로 나가기로 했다. 5시 15분 26사단 포병대대로 하여금 K-55 자주포 29발을 발사하는 것으로 응답한 것이다. 북한은 28사단 지역으로 포탄을 쐈는데, 26사단 포병대대로 하여금 대응사격을 하게 한 것은, 그 지역에서는 26사단 포병대대가 최고의 사격술을 가졌기 때문이다.
28사단이 관할하는 무적태풍전망대 앞 비무장지대에는 유명한 격전지 ‘베티 고지’가 있다. 26사단 포병대대는 그 고지 앞 북한 쪽 비무장지대 200×400m 지역에 29발을 모두 떨어뜨리는 ‘놀라운‘ 사격술을 펼쳤다.
그리고 6시쯤 박 대통령이 NSC를 열어 단호한 대처를 주문했다. 북한도 강공으로 나왔다. 그날 밤 노동당 중앙군사위를 열어 준전시를 선포하고, 21일 오후 5시부로 전선 대련합부대의 전시 전환을 지시한 것이다.
다음 날(21일) 박 대통령은 모든 일정을 취소하고 육군 3군사령부를 방문해 “북한 도발을 용납할 수 없다”고 쐐기를 박았다. 그리고 우리도 ‘때리고 어르는 전술’로 나갔다. 합참과 통일부가 북한에 대화하자는 통지문을 보낸 것이다.
북한은 김이 빠졌는지 더 이상 때리는 전술을 펴지 않았다. 전선 대련합부대가 전시로 전환하기 1시간 전인 오후 4시, 김양건이 ‘23일 판문점에서 김관진 실장과 1대 1 접촉을 하자’는 응답을 보내온 것이다. 오후 6시, 한국은 ‘회담을 하려면 총정치국장 황병서가 나오라’고 대꾸했다.
다음 날(22일) 오전 9시 35분, 북한은 ‘황병서가 김양건과 나갈 터이니 김실장은 홍용표 통일부장관과 나오라’고 했다. 한국은 대답을 주지 않고 오전 11시쯤 휴전선 남쪽에서 발사해 평양의 핵심 시설도 격파할 수 있는 슬램-ER 탑재형 F-15K 전투기를 미 공군기(F-16)와 함께 출격시켜 시위비행을 하게 했다 그리고 25분 뒤 ‘좋다’는 답을 보내자, 12시 45분 북한도 OK를 보내왔다.
‘때리고 어르는 전술’은 우리 것이 통한 것으로 판단됐다. 그때까지 북한군이 일부 포병부대를 ‘방열(사격준비)’시킨 것은 확인됐지만, 대량군주의적 기동전술을 구사하려 기동에 들어간 기미는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자신감을 가진 청와대는 북한이 말한 최후통첩 시한을 2시간 남긴 오후 3시, 판문점 접촉을 발표했다.
오후 6시 30분 판문점 회담이 열리자, 황병서와 김양건은 대북확성기 철거만 집요하게 주장했다. 우리는 목함지뢰 사건에 대한 사과와 재발방지 약속 등을 요구했기에, 회담은 평행선을 달렸다.
CCTV로 이를 지켜본 우리 관계자들은 황과 김이 김정은에게 받은 지시가 대북확성기 철거 하나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양측은 1시간쯤 자기주장을 펼치다 목이 아팠는지, 입을 다물고 버티기에 들어갔다. 이 ‘침묵의 지겨움’은 23일 오전 4시 15분, 정회를 함으로써 겨우 마무리됐다.
우리 군은 ‘북한은 말로만 싸운다’ 고 판단하고 자신감을 가졌다. 2차 회의는 23일 오후 3시30분 시작됐다. 그때 동·서해의 북한 잠수함 기지에 계류해 있던 잠수함정 50여 척이 사라진 것이 발견됐다. 우리 군은 인민군이 전시상태로 전환했을 수도 있다고 보고 긴장했다.
북한 해군의 수상함 전력은 우리에 비해 현저히 약하다. 따라서 우리는 북한 해군이 펼칠 수 있는 작전을 두 가지로 추정해왔다.
첫째, 수적으로 많은 잠수함정을 풀어 무제한 잠수함전을 펼치는 것이다. 우리 항구를 봉쇄하고 우리 수상함을 공격해 우리 함정들이 작전하지 못하게 한다. 이것이 성공했다고 판단되면, 두 번째로 공기부양정을 비롯한 모든 수상함에 특작부대인 해상저격여단원을 태워 초고속으로 인천이나 경기의 서해안으로 돌진시킨다.
北 잠수함정 기동의 한계
해안에 상륙한 해상저격여단원들은 해안가에 있는 건물을 장악하고 시민을 인질로 잡아 출동한 한국군과 대치한다. 옆구리가 찔린 한국군이 움찔할 때 군사분계선에 대기하던 인민군 전연군단이 제파식 공격으로 돌파구를 뚫고 그 틈에 특작부대를 대동한 기동부대가 서울로 돌격해 ‘역시’ 인질작전을 펼치는 것이다.
북한 잠수함정들은 기지를 이탈했는데 전방지대에선 대량군주의적 기동전술을 위한 인민군의 기동 움직임이 전혀 발견되지 않았다. 우리 군은 북한이 열세를 보인 회담에 힘을 실어주기 위해 ‘쇼’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최악의 상황에 대비해야 하는 만큼 인민군이 전시 상태로 전환한 것 같다고 판단했다.
북한 해군은 84척의 잠수함정을 가졌는데, 가동할 수 있는 것은 70척 이하로 판단된다. 그중 수리해야 하는 배가 있으니 실제로는 50척 정도가 움직일 수 있다.
평소 북한 해군은 1주일에 한두 척의 잠수함정을 출동시켜왔다. 바다가 어는 겨울 3개월 동안엔 기동하지 못하니(52주 중 12주) 연간 잠수함정 출동횟수는 40~80회, 어림잡아 50~60회가 된다. 잠수함정이 많은데도 이 정도밖에 잠수함을 출동시키지 못하는 것은 연료 부족 때문으로 판단된다. 그런데 갑자기 50척을 풀었다면, 잠수함 부대에 배정된 1년치 연료를 다 쓰겠다는 뜻으로 읽힐 수 있다.
이러한 판단을 한 전문가들은 ‘쓴웃음’을 지으며 50척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주목했다. 한미연합군은 워치콘을 2로 올려 더 많은 정찰 자산을 가동했다.
북한 잠수함정(연어급과 상어급)은 소형이라 하루에 2~3번 부상해 공기를 주입해야 계속 잠항할 수 있다. 수면으로 부상한 잠수함정은 정찰위성이나 초계기 등으로 찾아낼 수 있다. ‘예상 대로’ 북한 잠수함기지 앞바다에서 공기 주입을 위해 부상하는 잠수함정이 자주 발견됐다.
전문가들은 태풍 ‘고니’가 북상하는 것에도 기대를 걸었다. 태풍이 불어와 파고가 높아지면, 공기 주입을 위해 수면으로 부상한 잠수함정은 파도에 휩쓸려 쓰러질 수 있다. 그렇게 되면 잠수함정 하부에 있던 황산 등 배터리 용액이 흘러나와 승조원들이 사망할 수 있다.
따라서 작은 잠수함정은, ‘황천(荒天)’이 예보되면 ‘황천(黃泉)’으로 가지 않기 위해 전부 기지로 돌아온다. 전문가들은 고니가 접근하면 자동으로 ‘북한의 잠수함 쇼’가 중단될 것으로 보았다. 하지만 로미오급 등 큰 잠수함 몇 척은 공격을 위한 침투를 할 수도 있으니 신경을 곤두세우지 않을 수 없었다.
기지 주변에 숨은 북 잠수함들
그런 상황에서 다시 만난 4인은 같은 얘기를 주고받다 다시 길고 긴 침묵에 들어갔다. 날이 바뀌어 24일 오전 10시가 되자 박 대통령은 수석비서관 회의를 열어 ‘북한의 확실한 사과와 재발 방지가 필요하다’고 거듭 강조했다.
그날 박 대통령은 “우리 대표단을 그만 철수시키라”는 지시를 두 번이나 내렸으나 실무진이 반대해 이행되지 않았다고 한다. 이 회의 직후 우리 군은 미군의 B-52폭격기와 공격 원자력잠수함을 한반도에 배치하는 것을 미국과 협의한다고 발표했다. 잠수함정을 푼 북한에 슬쩍 겁을 줘본 것이다.
회담이 삐걱대며 이어지던 24일 오후 3시 30분쯤, 서해 북방한계선(NLL) 60㎞ 북쪽의 고암포에 북한의 공기부양정 20여 척이 출동하려는 움직임이 포착됐다. 잠수함정 출동에 이어 북한은 2단계 해상작전을 준비하려는 것인가, 아니면 쇼를 강화한 것인가. 그때 군사분계선 북쪽 일부 전선에서는 침투를 주임무로 하는 인민군 특작부대들이 DMZ 쪽으로 이동하는 것이 발견됐다.
우리 군은 북한 쪽에선 볼 수 없는 곳에 확성기를 설치했기에 북한은 절대로 확성기를 격파할 수 없다. 따라서 특작부대를 우리 쪽으로 침투시켜 확성기를 부수려는 것으로 추정됐다. 물론 쇼를 한다는 생각도 했다.
마비전의 핵심 ‘작계 5015’
전쟁은 고전적인 방법(대량군주의적 기동전술 등)으로만 하지 않는다. 금세기 들어 주요 국가들은 미사일과 항공력을 무한정 투사해 적군 지휘부와 공군 및 미사일 기지 등을 파괴하고 육군을 투입하는 ‘마비전’을 발전시켰다. 미사일과 항공력을 투입하는 동안 전선의 적군은 살아 있지만, 지휘부와 전략시설은 다 깨졌기에 꼼짝을 하지 못한다. 마비된 상태로 있는 것이다. 그 후 이들은 육군 기동부대를 투입해 섬멸한다. 2003년 미국이 펼친 ‘이라크 자유작전’이 바로 그것이었다.
북한도 600여 기로 판단되는 스커드-B와 노동미사일을 갖고 있으니 이를 일제히 발사할 수 있다. 핵탄두가 완성됐다면 그것을 단 대포동도 쏠 수 있다. 이것이 초전에 승부를 결정짓는, 대량살상무기(WMD)를 이용한 북한판 마비전이다.
지난 2년간 북한은 무더기 미사일 발사 훈련을 반복해왔으므로 대량군주의적 기동전술과 마비전을 동시에 펼칠 수도 있다. 그 신호가 잠수함정과 공기부양정, 특작부대를 가동한 것일 수도 있다.
이에 대비한 것이 작전계획 5015다. 이 작전은 북한이 미사일을 대량으로 기립(起立)시켰는지를 확인하고 단행한다. 이를 위해 미 공군 우주사령부는 KH-12 등 정찰위성을 북한 상공으로 띄워 깊이 내려가게 해, 북한의 미사일 기지를 촬영케 한다. 한국도 아리랑위성 등을 총 가동해 같은 작전을 펼친다. 그리하여 북한이 미사일을 대량 기립시킨 것이 발견되면, 우리 군의 현무-1, 2, 3과 ATACMS, 미 8군의 ATACMS, 미 해군의 토마호크 미사일 등을 일제히 발사해 북한 미사일 기지를 선제 타격한다.
이 작전은 신속성이 생명이므로 데프콘이나 워치콘의 상향 같은 예비조치 없이 곧바로 단행된다. 이는 바로 김정은을 노리는 것이라, 일명 ‘참수(斬首, 목을 베 죽이는 것)작전’으로도 불린다. 이것이 김정은에게는 공포이기에, 북한은 나름대로 훈련을 예고한 뒤에 미사일을 쏘는 훈련을 해왔다.
그런데 그때는 북한이 전시로 전환한다고 선포한 시간이 지난 다음이라 육군 미사일사령부와 공군 작전사령부는 비상 대기에 들어갔다. 그러나 북한은 미사일을 집단으로 기립하지 않았다.
준전시를 선포하면 북한은 교도대와 노농적위대, 붉은청년근위대 같은 예비군을 동원해야 한다. 이들의 수는 700만으로 추정되는데, 동원 이후 이들의 ‘입’은 120만의 인민군이 채워줘야 한다. 그러지 않아도 식량이 부족한 인민군이 동원한 예비군에게 얼마나 식량을 줄 수 있을까는 큰 궁금증이었다. 북한은 전선지대의 예비군을 ‘끝내’ 동원하지 못했다.
북한의 속셈을 짐작한 이들은 북한의 허상을 만천하에 드러내고 그로 인해 북한의 내부 모순이 격화되도록 2+2 회담을 서두르지 말고 계속 끌라는 주문을 했다. 합의가 늦어져 긴장이 계속되면, 박 대통령을 전승절 행사에 참가시켜야 하는 중국이 몸이 달아 북한을 압박할 것이라는 계산도 했다. 이는 북한과 중국의 틈을 벌어지게 하는 묘책이 아닐 수 없다.
지난 여름 박 대통령은 메르스 사태를 이유로 미국 방문을 취소했다. 한반도 긴장을 이유로 박 대통령이 방중(訪中)을 취소하면 미국과 일본은 쾌재를 부르고, 중국은 북한을 더욱 미워할 수 있다. 합의 지연이나 실패는 북한과 중국, 미국, 일본에 대해 우리가 주도권을 쥘 수 있는 절호의 기회로 판단됐다. 태풍 고니도 우리 편이었다. 물론 타협이 늦어지면 북한은 더 큰 위협으로 긴장감을 높였을지 모른다. 이에 흔들리지 않으려면 우리는 ‘전략적 인내’를 해야 한다.
이병기 “타결 서둘러라”
북한을 오래 다뤄온 국가정보원 쪽은 이렇게 판단했으나 청와대를 움직이지 못했다. 이병호 국정원장이 박 대통령과 가깝지 못한 것이 한 이유로 지적된다. 전임 국정원장인 이병기 비서실장은 국정원 판단과 반대로 경기 침체와 대통령의 방중을 위해 우리 대표단에게 조속히 타결할 것을 주문했다.
우리 대표단은 이 실장의 의중을 따랐다. 전문가들의 판단보다는 대통령을 위한 ‘정무적 판단’을 우선시한 것이다. 허망하게도 24일 밤, 우리는 유감 표명을 받는 선에서 타협하고, 다음 날 오전 2시 이를 발표했다.
중국은 전승절에 참여한 박 대통령을 극진히 대접했다. 그로 인해 30%도 안 되던 박 대통령 지지율이 50% 이상으로 치솟았다. ‘공간’을 얻은 박 대통령은 시진핑 등에게 한반도 문제에 대한 우리 의견을 전달할 수 있었다.
한반도 문제에 대한 중국의 공식 방침은 ‘한반도가 평화적으로 통일되는 것을 지지한다’이다. 우리의 발언이 이 범위 안에 있는 한 그들은 반대 의사를 표시하지 않는다. 반대를 표시해 전승절 행사에 어렵게 모신 ‘서방 인사’를 노엽게 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8·25 합의 후 북한 중앙방송에 출연한 황병서는 “남조선은 심각한 교훈을 얻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김관진 실장이 합의해주지 않고 회담을 끌었다면, 그리하여 박 대통령이 방중을 하지 못했다면, 중국은 북한에 크게 화를 냈을 것이고, 김정은은 그 화를 황병서에게 퍼부었을 것이다. 황병서는 제2의 장성택이 될 수도 있었던 것이다. 8·22 위기로 가장 큰 위험에 빠졌던 이는 황병서다. 죽다 살아난 그가 흰소리를 했다.
아쉬운 박근혜의 회군
북한 급변사태는 김정은이 장성택, 현영철에 이어 황병서 등 실세들을 불신해 처형하고, 그로 인해 김정은의 지시를 이행하지 못해 불안해진 2인자급들이 ‘거꾸로’ 김정은을 제거하는 형태로 일어날 가능성이 높다. 북한 급변사태가 일어나면 한반도를 평화적으로 통일할 가능성은 높아진다.
전승절 참석 이후 박 대통령은 어깨가 으쓱해져 ‘통일외교’를 외쳤다. 하지만 그는 통일의 단초를 얻을 수 있는 절호의 순간에 측근들에게 휘둘려 ‘결정적인 회군’을 해버렸다. 그 좋은 기회를 지지율을 높이는 데 다 쓰고 말았다.
비유해 말하면 8·22 위기는 다득점을 할 수 있는 ‘무사만루’의 기회였다. 이에 대해 북한은 압박 수비를 했는데, 그 분위기에 휩쓸려 1점만 내고 공격을 마무리했다. 합의를 하지 않고 끌었더라면 연속 득점으로 북한, 미국, 중국, 일본을 우리 페이스로 끌고 가는 연속득점을 할 수도 있었다. 그래놓고는 ‘아주 잘했다’며 자화자찬을 했다.
‘통일대박’이 박 대통령의 비전이라면 그는 관료와 국민에게 ‘전략적 인내’를 주문해야 한다. 노동당 창건일인 10월 10일 북한은 로켓 발사를 시도할 수 있다. 그 직전 시진핑이 미국을 방문하고 그 직후 박 대통령이 미국을 방문한다. 한반도에서는 또 한 번 큰 판이 벌어질 수 있는 것이다.
북핵 문제는 북한 정권을 붕괴시키는 것이 가장 좋은 해결책이다. ‘미생지신(尾生之信)’을 강조하는 박 대통령은 끈기가 강한 사람이다. 그런 그가 다시 기회가 왔을 때 국민과 함께 ‘전략적 인내’를 발휘한다면 통일대박은 현실화할 수 있다.
통일대박을 준비한다면 박 대통령은 병력을 줄이는 국방개혁법부터 개정해야 한다. 적은 병력으로는 북한 급변사태 때 안정화 작전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통일을 고대한다면 박 대통령은 우리 군을 정예화하고 북한 전문집단인 국정원의 의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3인방을 중심으로 한 측근의 정무적 판단에 경도되지 말고.
이정훈 편집위원 | hoon@donga.com
2015-11-16 “숙청 불안 北군부, 김정은 암살 시도 가능성” 美랜드연구소 브루스 버넷 연구원
“한국 통일대박 이루려면 北군부-中설득 선행돼야”
“북한 붕괴 이후를 철저히 대비하지 않으면 ‘통일 대박’은 어렵다.”
미국 주요 싱크탱크인 랜드 연구소의 브루스 버넷 선임연구원(사진)는 13일(현지 시간) 한미 언론인 교류 프로그램에 참여한 기자들과 만나 “김정은 노동당 제1비서 집권 초기에 비해 북한 체제의 불안정성이 더욱 커졌다”며 이같이 말했다. 버넷 연구원은 북한 붕괴 가능성에 대비한 시나리오 연구로 유명한 북한 전문가다. 이 프로그램은 한국언론진흥재단과 미국 동서센터가 주관했다.
버넷 연구원은 “김정은은 집권 이후 인민무력부장을 5번이나 교체했다”며 “그래서 군부 엘리트들은 ‘다음은 내가 당하지 않을까’ ‘차라리 김정은을 먼저 제거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불안감이 커지고 있다”고 말했다. 김정은이 군부 엘리트 세대교체에 성공했다는 일각의 평가를 일축한 것이다. 그는 “김정은 암살을 시도할 가능성도 있다”고 예측했다.
하지만 김정은이 제거되더라도 바로 북한 붕괴로 이어지지는 않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군부 엘리트들이 통일 이후 처벌을 우려해 통일을 방해할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버넷 연구원은 “동독 비밀경찰이 베를린 장벽 붕괴 당시 동독 지역 시위를 진압하지 않았던 이유는 서독 정부의 사면 약속과 연금 보장 때문이었다”고 소개했다. 그러면서 “한국 정부가 통일 이후 (통일 과정에서 협력한 이들에 대한) 전면적인 사면을 약속하고 신분을 보장할 것이라고 군부 엘리트를 계속 설득해야 한다”고 말했다.
버넷 연구원은 특히 중국의 역할을 강조했다. 북한이 붕괴하면 한국으로 오는 난민은 300만 명, 중국으로 가는 난민은 500만 명 정도로 예측했다. 그는 “중국은 난민 발생 등 북한 땅에 직접 진입할 이유가 많고 한국과 미국은 사실상 이를 막을 물리적인 힘이 없다”며 “중국은 국경선에서 50km 떨어진 지역에 자체 난민 수용소를 설치할 계획이 있다”고 말했다. 북한 진입 여부는 전적으로 중국에 달렸다는 얘기다. 위기가 발생할 때 중국 군대가 북한에 주둔하면 남북통일은 더욱 험난해질 수 있다. 그는 “중국은 통일 이후 중국 기업이 북한에서 사들인 부동산과 개발권 등을 유지하려고 할 것이므로 이에 대한 대비도 필요하다”고 말했다. 남북통일 과정에서 중국과 어떻게 협력할지 철저히 대비해야 한다는 것이다.
로스앤젤레스=우경임 기자 woohaha@donga.com
2016-03-25 치명적인 對北 해운제재, 주저할 이유 없다
이달 2일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결의 2270호 채택과 이를 보강하는 한미일 3국의 독자 제재로 북한은 새로운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되었다. 그러나 제재의 수위나 효과를 과대평가해 북한이 곧 굴복하고 나올 것으로 기대한다면 어림없는 착각이다. 핵무기 근처에 가본 적도 없는 이란에 대해 안보리와 미국이 가한 포괄적 전면 제재와는 달리 북에 대한 제재는 핵, 미사일 개발과 해외 노예노동에 한정된 부분 제재에 불과하다.
현행 제재가 아무리 철저하게 이행되더라도 북한이 최소한 1년은 버틸 수 있을 것이다. 특히 5월 말 7차 노동당 전당대회까지 김정은의 선택은 국제사회의 압박에 결연히 맞서는 최고지도자로서의 강단과 배포를 만천하에 과시하고 내부의 결속을 다지는 것뿐이다.
안보리 제재 중에서 북한의 외화 조달에 치명적 타격을 가할 수단은 연간 10억 달러에 이르는 북한산 석탄 수입의 금지와 해운활동 규제다. 다만 석탄 수입 금지는 핵과 미사일 개발 자금 조달과 관련된 거래에 국한돼 중국은 수입을 전혀 줄이지 않고도 성실히 결의를 이행하고 있다고 우길 수 있다. 중국이 북한의 정책 변화를 압박할 진정한 의지가 있는지는 석탄 수입 감축 실적이 말해 줄 것이다.
해운 제재에서 강력한 수단을 보유한 나라는 한국이다. 그런데 제재 이행에 모범을 보이려는 의지가 보이지 않는다. 안보리 결의 2270호 18항에 북한 향발 화물은 소유주와 용도를 불문하고 유엔 회원국 영토를 통과할 때는 검색하도록 의무화돼 있다. 북한에서 출발했거나 북한을 목적지로 하는 모든 선박은 유엔 회원국의 영해 내에서 국제법상 보장된 무해통항권(innocent passage)을 누릴 수 없다는 특별법을 안보리가 제정한 것이다. 23항은 북한 원양해운관리회사(OMM) 소속 31척의 선박을 자산동결 대상으로 지정했다. 그런데 이달 17일 북한을 출발한 ‘오리온스타’호가 우리 영해를 통과하고 있는데도 정부가 방관함으로써 한국은 안보리 해운 제재를 불이행한 첫 번째 국가라는 오명을 남겼다.
더구나 그 선박은 검색뿐 아니라 압류 동결 대상인데도 정부는 안보리가 유예한 무해통항권을 신성불가침의 권리로 옹호하고 있으니 어이가 없다. 2004년 5월 28일 서명된 남북해운합의서는 공해상에 설정된 작전구역(AO)에서도 남측의 사전허가와 지시에 따라 지정 항로를 통행하는 북한 선박에만 예외적으로 무해통항권을 허용하고 제3국에 편의치적한 선박도 적용 대상으로 하고 있다. 북한조차 사전허가 없이 상대방 작전수역에 진입하는 선박은 유해(有害)하며 나포 대상이라는 데 동의한 셈이다. 5·24조치는 AO 내에서 조건부로 허용하던 무해통항권마저 정지시킨 것이다.
중국이 핵, 미사일 개발 자금으로 전용된 증거가 없다는 이유를 들어 북한산 석탄 수입을 계속하고 우리 정부가 해운 제재 이행에 소극적 태도로 일관한다면 대북제재는 유명무실해질 것이다. 기고만장해진 김정은은 내친김에 핵, 미사일 개발 완료를 서두를 것이다. 반대로 중국이 북한산 광물 수입을 전면 금지하고, 북한을 출입하는 모든 선박이 다른 나라에서 검색을 받거나 입항을 거부당하고, 북한 소유 선박 31척이 압류되거나 발이 묶이고, 나아가 미국이 북한제재법에 따라 북한과 거래하는 3국 기업을 제재하고 북한을 자금세탁 우려국으로 지정해 국제금융거래시스템(SWIFT)에서 퇴출하는 조치까지 취한다면 북한은 1년 이상 버티기 어려울 것이다.
북한이 종말의 위기에서 탈출할 길은 대화 공세뿐이다. 6자회담이나 미북 회담에 나와 핵 폐기 대신 동결 카드로 제재 해제와 평화협정 등을 얻어내려고 시도할 가능성에 대비해야 한다. 북한이 비핵화를 결심할 때까지 압박 수위를 계속 높여 가지 못하면 핵 동결 이상을 달성하기 어려워진다. 제재가 효과를 발휘해 북한이 핵 포기를 결심하는 기적이 일어난다면 비핵화의 대가로 9·19공동성명에서 약속한 것 이상의 정치 경제적 보상을 요구할 것이다. 5자도 북한의 안보 우려를 해소하고 경제 발전에 필요한 과감한 패키지를 제공할 각오를 해야 한다.
비핵화 협상과 평화체제 협상의 선후 논란에 매몰될 필요도 없다. 중요한 것은 제재 완화와 정치경제적 인센티브 제공을 비핵화 진도와 엄격하게 연계하는 것이다. 제재가 완화될수록 북한은 비핵화를 거부할 체력을 회복하고 정치경제적 보상에도 흥미를 잃어버릴 것이다.
천영우 객원논설위원 (사)한반도미래포럼 이사장 아산정책연구원고문
2016-05-11 유성옥 국가안보전략연구원장 인터뷰
“북한 7차 노동당 대회는 김정은 당 위원장에게 밝은 미래의 축포가 아니라 어두운 역사의 길로 갈 것임을 예고하는 상징적인 계기가 될 것이다.”
국가정보원 산하 국가안보전략연구원 유성옥 원장(사진)은 10일 “김정은이 당 대회에서 국제사회의 대북 제재 흐름과 전혀 동떨어진 ‘세계 비핵화를 선도하는 지도자’라는 현실성 없는 인식을 드러냈다”며 이같이 강조했다. 유 원장은 노태우 정부에서 이명박 정부까지 국정원에서 대북 문제를 담당하며 대부분의 남북대화에 직간접으로 참여한 대북 전문가다. 서울 강남구 언주로의 연구원에서 그를 만나 당 대회에 대한 평가를 들었다.
―김정은이 당 위원장에 오른 이유는 뭔가.
“위원장이라는 심플한 명칭으로 당정군을 장악한 김정은의 1인 체제임을 강조하려 했다. 당 위원장은 1949년 북조선노동당과 남조선노동당이 합쳐 창당한 노동당에서 김일성이 맡은 직책과 유사하다. 할아버지 김일성을 따라 해 무력 통일이든 남조선 혁명을 통해서든 한반도 전체의 수반이 되겠다는 의도를 드러냈다.” 유 원장은 김일성이 당 위원장을 맡은 다음 해에 6·25전쟁이 발발했다는 점에서 같은 직위의 김정은이 연방제 통일을 내세우며 대남 위협에 나선 것을 심상치 않게 보고 있었다.
―김정은이 당 대회에서 언급한 것들이 실제 가능하다고 봤을까.
“핵심 측근들조차 시대착오적이라는 걸 알면서도 공포에 눌려 보고를 못 하니 김정은의 현실과 이상 간 괴리가 더 커지고 있다.” 유 원장은 이 대목에서 “김정은이 애민(愛民) 정치가 아닌 애기(愛己·자기사랑)와 우상화에 도취된 나르시시즘적 정치를 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김정은 체제의 실세는 누군가.
“오직 여동생 김여정뿐이다. 당 대회 이후 김여정의 활동도 공식화될 것이다.”
―북한 주민들은 당 대회를 어떻게 생각하나.
“북한 주민들은 ‘김정은이 얘기한 정치·군사 강국은 남의 집 일이고 경제는 우리의 현실’이라고 말한다. 당 대회 전 축제 분위기를 유지하려고 당국이 장마당에 물자를 공급했다. 하지만 국제사회의 대북 제재로 경제가 악화되면 당 대회의 민낯이 드러나고 주민 불만이 더욱 커질 것이다.”
―엘리트 탈북도 당 대회 개최에 영향을 미쳤을까.
“과거에는 ‘변두리 인물’들이 탈북했지만 이젠 국가안전보위부와 정찰총국 등 핵심 세력이 이탈한다. 원자로를 둘러싼 노심이 녹아내리는 격이다. 체제 불안을 막기 위해 당 대회를 기획했을 것이다.”
―당 대회 이후 체제가 어려워질 것으로 보나.
“김정은이 주장한 항구적 경제-핵 병진노선은 중국이 받아들이지 못한다. 중국도 ‘북한이 5차 핵실험까지 하면 김정은 체제를 붙들고 끝까지 가기 어렵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뭘 해야 하나.
“한국과 미국이 ‘레짐 체인지, 즉 김정은 정권을 교체해도 사회주의 체제는 그대로 유지되고, 개혁·개방과 비핵화를 지향하는 포스트 김정은 정권과 진정한 의미의 화해 협력을 하고 평화적 통일을 할 것’이라고 중국을 설득해야 한다. 북한 주민들의 생각을 변화시킬 실효적인 정책을 펴는 전략 마련에 외교 역량을 집중해야 한다.”
유 원장은 인터뷰 내내 “김정은의 핵 집착과 국제사회의 대북 제재는 통일 대박의 좋은 기회다. 김정은의 오판으로 마련된 기회를 절대 놓치면 안 된다”고 여러 차례 강조했다.
윤완준 기자 zeitung@donga.com
2016-06-16 국정원 “北, 통치자금 상납 독촉… 공관원들 탈출 조짐”
“탈북러시 가능성” 靑에 보고… 北 대외교역 규모 6년만에 감소세
국가정보원이 최근 청와대에 해외 북한 공관원들의 탈북 러시가 본격화될 가능성을 보고한 것으로 15일 알려졌다. 향후 북한 김정은 체제의 불안정성이 커질 것이라고 보는 청와대와 국정원의 정세 판단의 한 면을 보여주는 것이어서 주목된다.
정부 소식통에 따르면 국정원은 청와대에 “대북 제재 이후 북한 김정은 정권이 통치자금 부족 사태를 피하기 위해 해외에 주재하는 외교관들과 무역기관 종사자들에게 통치자금 상납을 독촉하고 있어 당장 통치자금 부족 사태가 닥치지는 않을 것”이라고 보고했다. 그러면서도 “제재 지속으로 북한의 해외 공관에서 통치자금 조달을 위한 돈을 마련하는 데 한계 시점이 다가올 것이고 이때부터 처벌, 송환 등 두려움을 느낀 해외 공관원들의 탈북 러시가 발생할 것”이라고 보고했다는 것이다. 국정원은 해외에 나와 있는 북한 근로자 등 북한인들의 탈출 확산 가능성도 청와대에 보고했고, 우리 해외 외교 공관은 북한인들의 탈출 러시에 대비하기 시작했다.
이런 가운데 북한 체제를 지키는 감시통제 기관인 국가안전보위부가 이달 초 지방 고위 간부들을 대상으로 ‘탈북 방지’ 강연회를 열었다고 미국 자유아시아방송(RFA)이 이날 보도했다. RFA는 일본 북한전문매체 아시아프레스 오사카(大阪) 사무소 이시마루 지로(石丸次郞) 대표의 말을 인용해 “중국 내 북한 식당 종업원의 두 차례 탈북이 이번 강연의 배경”이라며 “앞으로도 체제에 대한 불만과 한국에 대한 동경 때문에 계속 탈북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이라고 전했다.
한편 KOTRA가 이날 발표한 ‘2015년도 북한 대외무역동향’ 보고서에 따르면 지난해 북한의 대외무역 규모(남북교역 제외)가 6년 만에 감소세로 돌아선 것으로 나타났다. 전년 대비 18% 감소한 62억5000만 달러였다. 석탄, 석유 등 대중국 주요 무역 물품 단가 하락에 따른 무역 규모 감소 때문이었다. 북한의 최대 수출 품목은 석탄, 갈탄 등 광물성 고형 연료로 10억8000만 달러를 수출한 것으로 집계됐다. 북한의 최대 교역 상대국은 중국으로 지난해 북한 전체 무역의 91.3%(57억1000만 달러)를 차지했다.
윤완준 zeitung@donga.com
2016-07-07 북한 과학기술의 힘 어디서 나오나
북한은 경제 규모에서 우리의 44분의 1에 불과한 세계 최빈국이고 국가예산은 우리 국방예산의 5분의 1이다. 그런데도 핵무기를 개발하는 동시에 이를 괌 미군기지와 미국 본토까지 운반할 중장거리 탄도미사일 개발을 향해 거침없이 질주하고 있다.
2016년 2월 7일 ‘광명성 로켓’으로 ‘지구관측위성’이란 물체를 지구궤도에 올린 데 이어 지난달 22일에는 우주공간으로 쏘아 올린 무수단 중거리 미사일을 대기권으로 재진입시킬 능력도 보여줬다. 핵탄두를 무수단 미사일에 장착할 수준으로 소형화 경량화에 성공하면 미국의 대북 확장억지에 핵심적 역할을 하는 괌 기지까지 북핵 위협에 노출되는 상황이 된다.
사이버 분야에서도 북한의 실력은 예사롭지 않다. 2014년 김정은을 희화화한 영화 ‘인터뷰’를 제작한 소니픽처스에 사이버공격을 감행하는가 하면 올 2월엔 방글라데시 중앙은행을 해킹해 8100만 달러를 털어가는 실력을 발휘했다. 북한이 과학기술 분야에서 이렇듯 세계를 놀라게 하는 진전을 이룩한 비결은 무엇일까?
첫째, 이공계 최고 인재들을 본인 의사와는 무관하게 과학기술 인력으로 양성하고 이를 북의 사활이 걸린 핵무기, 미사일, 사이버 분야에 투입하는 체제와 집중력이다. 민간기업이 존재하지 않는 북한에서 자연계 영재들이 실력을 발휘할 곳은 제2경제위원회, 제2과학원, 국가우주개발국 등을 중심으로 한 군사과학 분야 국책연구소와 군수산업이다. 정보기술(IT) 분야 수재들은 정찰총국의 해커부대에 들어가 ‘최고 존엄’을 해치는 외국 기관과 기업을 응징하고 정보와 기술을 훔치는 사이버 전사로 활약한다.
둘째, 북한의 유별난 과학기술자 우대 정책이다. 김정은이 5월 7차 당 대회에서 제시한 과학기술강국과 지식경제강국 건설 비전은 허황된 야심으로 가득하지만 과학기술자들의 심장을 뛰게 하는 약속이 들어 있다. “과학자, 기술자들을 귀중히 여기고 내세워주며 그들이 과학연구 사업에 전심할 수 있도록 사업 조건과 생활 조건을 보장해 줘야 한다”는 내용은 북한에서 가장 신속하고 확실하게 이행되고 있는 약속이다.
평양에서 최고급 주상복합아파트 19동과 150개의 부대시설을 갖춘 미래과학자거리를 작년 11월 완공한 데 이어 올 3월 제2의 미래과학자거리(여명거리) 건설을 지시한 것이 과학기술에 부여하는 김정은의 정책적 우선순위를 상징한다. 최고급 주택에다 전용 백화점에서 생필품을 구입할 상품권까지 제공받는 파격적 대우에 감읍한 과학기술자들은 더욱 사명감에 불타 연구개발에 온몸을 던질 것이다. 국제적 제재와 고립도 연구개발을 막을 수는 없다.
무엇보다 기술개발 과정에서의 시행착오에 관대한 문화가 있다. 로켓 발사에 여러 번 실패해도 책임자를 문책했다는 소식은 없다. 시행착오를 거듭하면서도 과학기술자들이 주눅 들지 않고 책임 추궁을 당할 걱정 없이 성공할 때까지 연구개발에 몰두할 풍토를 만들어주는 것이 북한의 가장 큰 힘이다. 외국으로부터 기술 도입에 의존하지 않고 역설계를 통해 ‘주체적’으로 기술을 개발해야 하는 북한의 처지에선 실패는 성공으로 가는 길에서 당연히 거치는 필수적인 과정으로 여겨진다. 실패에 대한 공포심이 지배하는 우리의 연구 풍토와는 대조적이다.
한국항공우주연구원이 ‘나로호’ 개발 과정에서 보여주었듯이, 첫 시험 발사에 실패하면 여론의 몰매를 맞고 예산과 인력이 삭감될 것이라는 우려 때문에 우리는 2억 달러를 들여서라도 1단 로켓 완제품을 러시아에서 구입하는 안전한 방법을 선택했다. 우리 기술로 제작한 한국형 발사체를 언제 시험 발사할 수 있을지는 아직도 불확실하다. 북한이라면 분명 이 돈을 수십 번 시험 발사하여 기술 자립을 달성하는 데 투자했을 것이다.
무기 개발에서도 북한은 군사적으로 중요한 기술이면 성능이 열악한 시제품 수준이라도 일단 배치하고 계속 개량해 나가는 방법을 택한다. 북한이 1980년대부터 배치한 스커드 미사일의 정확도는 표적의 반경 2km 내에 떨어질 확률(CEP)이 50%에 불과하다. 우리의 기준으로 보면 표적에서 수십 m만 벗어나도 불량품으로 간주되어 개발책임부서는 감사와 실패 경위 소명에 시달린 나머지 개발 의욕을 상실하기 십상이다. 그 대신 일단 무기체계가 배치되면 기술 진보에 따른 성능 개량에는 소홀한 경향이 있다. 북한의 과학기술 정책에서 타산지석으로 삼을 것은 없는지 돌아볼 필요가 있다.
천영우 객원논설위원 한반도미래포럼 이사장 아산정책연구원 고문
2016-08-25 高角으로 쏘고도 사거리 500km… ‘최종 핵병기’ 손에 쥔 北
북한이 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SLBM) 개발에 성공하면서 북핵 대응책 전반에 비상이 걸렸다. 정부가 24일 김관진 국가안보실장 주재로 국가안전보장회의(NSC)를 긴급 소집한 것도 북한의 SLBM 위협이 ‘레드라인(금지선)’을 넘었다는 판단에 따른 것으로 보인다.
○ 한반도 전역 은밀한 핵 타격력 과시
북한이 24일 함경남도 신포 앞바다에서 발사한 SLBM은 ‘완벽한 성공작’으로 평가된다.
수중사출 및 엔진 점화, 자세제어, 단 분리 및 대기권 재진입 등 비행시험 전 과정이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이뤄졌기 때문이다. 군 소식통은 “상당한 기술적 진전을 거둬 성공으로 봐야 한다”고 밝혔다. 통상 SLBM은 초기 개발 단계에서 300km 이상 비행하면 성공으로 판단한다. 이날 북한이 고각(高角)으로 쏜 SLBM을 정상 각도로 발사했다면 1000km 이상 비행이 가능했을 것으로 군은 보고 있다. 고체연료만 충분히 채우면 2000km 이상도 날아갈 수 있다는 점에서 북한이 연내 실전배치를 강행할 개연성도 배제할 수 없다. 특히 북한이 올 들어 비행시험 세 차례 만에 한반도 전역에 대한 SLBM의 타격 능력을 입증한 점은 우려되는 대목이다. 북한의 SLBM 대남 위협이 예상을 앞질러 현실화된 까닭이다.
이 때문에 군이 북한의 SLBM 기술을 과소평가한 것이 패착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군은 그간 북한의 SLBM 실전배치에 3, 4년이 걸릴 것으로 예상했다. 올 4월 북한의 SLBM 발사 때도 수중사출과 추진체 점화 등 ‘콜드론치(Cold Launch)’와 자세제어 등 일부 기술적 진전을 보였지만 비행기술은 확보하지 못한 것으로 평가했다. 당시 비행거리가 30여 km에 불과했다는 이유에서였다.
하지만 불과 4개월 만에 북한은 그 당시보다 16배 이상 날아가는 SLBM을 쏴 올려 군의 평가를 무색하게 만들었다. 군 소식통은 “북한의 4월 SLBM 발사 성공 주장을 간과한 측면이 있다”고 말했다. 북한이 고체연료를 탑재한 SLBM의 사거리를 의도적으로 줄였을 가능성을 무시해 위협 평가에 소홀했다는 얘기다.
○ SLBM 사거리 조절해 대남, 대미 핵위협 가속화
북한은 유도장치가 부착된 SLBM의 추가 발사로 사거리 확장과 정확도 향상에 ‘다걸기(올인)’할 것으로 보인다. 사전 포착과 요격이 힘든 SLBM은 기습타격 능력이 뛰어나기 때문이다.
특히 핵을 탑재한 SLBM은 적국의 핵 선제공격에서 살아남아 ‘제2격(Second Strike·보복 핵공격)’을 가할 수 있어서 ‘최종 핵병기’로 불린다. 북한이 핵탑재 SLBM을 확보하면 미국의 전략폭격기나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등 대한(對韓) 핵우산 전력에 맞설 수 있다고 보는 이유다. 사거리 500km 정도의 SLBM은 주한미군 기지와 미 증원 전력이 들어오는 한국 내 주요 항구와 비행장을 타격할 수 있다. 2000km 이상이면 북한 영해에서 일본 전역의 주일미군 기지가 사정권에 포함된다. 또 SLBM을 탑재한 잠수함을 서태평양 쪽으로 은밀히 이동시켜 괌 기지를 겨냥할 수도 있다. 괌의 앤더슨 기지는 B-1, B-2 스텔스 폭격기 등 핵우산 전력의 출격 기지다.
군 당국은 사드(THAAD·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로 북한의 SLBM을 요격할 수 있다고 밝혔다. 북한의 SLBM이 사드의 요격 범위(음속의 14배)에 들어간다는 것이다. 하지만 북한 잠수함이 후방으로 침투해 SLBM을 발사하면 레이더 탐지각도(120도)를 벗어나 대응이 어렵다. 또 탄도탄 조기경보 레이더를 후방지역에 배치해도 SLBM이 낮은 각도로 발사되면 대처하기 힘들다는 지적이 많아 새로운 접근법이 필요하다는 요구가 커지고 있다.
윤상호 군사전문기자 ysh1005@donga.com
2017-05-06 “김일성 6·25전쟁 일으켜 중국군 20만명 희생당해”
中관영매체 이례적 김일성 비판
▲6·25 장진호전투 기념비 제막식 6·25전쟁 당시 미군의 최고 작전 중 하나인 장진호 전투 기념비 제막식이 4일(현지 시간) 미국 버지니아 주 콴티코에 있는 미 해병대 박물관에서 열렸다. 제막식에는 조지프 던퍼드 미 합참의장(오른쪽)과 각군 참모총장, 장진호 전투 참전용사이자 기념비 건립을 주도한 스티븐 옴스테드 예비역 중장(가운데) 등 생존 참전용사들과 한국 측에서 박승춘 보훈처장(왼쪽) 등이 참석했다. 던퍼드 합참의장은 장진호 전투에 참전했던 부친과 함께 참석해 “지금도 모든 해병대원이 이 전투를 배우고 있다”고 한 뒤 한국말로 “같이 갑시다”라고 말했다. 주한 미국대사관 제공
북한 조선중앙통신이 중국의 대북 제재에 대해 ‘붉은 선(레드 라인)’을 넘어섰다며 비난하자 중국 관영 매체가 북한에서 가장 추앙받는 김일성까지 거론하며 비판하고 나섰다.
중국 공산당 기관지 런민(人民)일보의 해외판 소셜미디어 매체인 샤커다오(俠客島)는 4일 ‘북한 조선중앙통신의 중국 비판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는 제목의 평론에서 6·25전쟁에 대한 김일성의 책임론을 거론하기도 했다. 김일성이 한반도를 통일시키려고 전쟁을 일으키지 않았다면 중국군이 참전해 20만 명 가까이 전사하는 일은 없었다는 것이다.
평론은 이어 “북한이 자신들이 자주적 권리라고 생각하는 핵 개발을 중국이 반대했기 때문에 북-중 관계가 나빠졌다고 생각한다면 맞는 생각”이라고 지적했다. 이어 “북한은 자신들의 핵 개발을 반대하면 적이고 지지하면 벗이라고 하는데, 이런 시각에서 보면 이미 전 세계가 북한의 적”이라고 밝혔다.
그러면서 “북한은 70년 동안 반미(反美)의 교두보로 중국 대륙의 안보를 지켜왔기 때문에 중국이 북한의 모든 요구를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해 왔지만 이는 적반하장”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오히려 중국이 북한의 안보를 지켜 주었다는 것이다. 이에 앞서 조선중앙통신은 3일 논평에서 “1950년 이래 북한은 중국과 미국 사이에서 완충지대를 제공해 중국의 평화와 안전을 지켜줬다. 중국은 북한에 감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베이징=구자룡 특파원 bonhong@donga.com
■ 문화일보
2016년 02월 24일 黨·軍 간부에 공손→ 반말→ 쌍욕… 독선·패악 심해지는 金
▲ ‘예측 불허’ 김정은 북한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이 “우주개발사업과 관련한 대외 활동을 활발히 벌여 평화적인 우주과학 연구와 위성발사 분야에서 국제적인 신뢰를 증진시키고 협조를 강화해 나가야 한다”며 추가 장거리 미사일 발사 시험을 시사했다. 사진은 김 제1위원장이 19일 ‘광명성 4호’ 발사에 기여한 관계자들에 대한 노동당 및 국가 표창 수여식에서 연설하고 있는 모습. 연합뉴스
집권 초기 공개석상 경어쓰다
최근엔 나이 든 관료들에게도
“이 XX” 서슴없이 욕설퍼부어
老간부 앞서 나홀로 흡연에다
비오는데 혼자만 우산 쓰기도
간부들 생존위해 충성하지만
金에 대한 반발심 커질수도
“폭언, 불안정성 반영” 분석도
김정은 북한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의 예측불허 행동이 김정일 국방위원장보다 심각하다는 분석이 잇따르고 있다. 특히 김정은의 언행을 ‘독순술’로 분석한 결과 집권 초기에는 간부들에게 비교적 공손한 화법을 구사했지만, 갈수록 반말이 늘더니 최근에는 욕설을 서슴지 않는 것으로 나타났다. 3대 세습에 대한 김정은의 자신감이 높아지면서 예측 불가능성, 독선과 패악이 더욱 심해질 것이라는 전망이다.
◇나이 많은 간부에도 서슴없이 욕설 = 북한은 김정은의 매체를 통해 김정은 발언 중 정제된 내용만 보도하고 현지 시찰 등에서 즉흥적으로 나온 발언을 방송에서 그대로 내보내지 않는다. 24일 한 대북 소식통에 따르면 조선중앙방송 등에 공개된 김정은의 입 모양을 통해 어떤 발언을 했는지 유추하는 독순술(讀脣術), 즉 ‘립 리딩(lip reading) 기법’으로 2011∼2012년 집권 초부터 분석한 결과 화법이 상당히 많이 바뀐 것으로 나타났다.
분석법은 김정은의 육성을 담아 공개하는 신년 연설 등에서 어떤 단어를 말할 때 어떤 입술 모양인지 정밀 파악한 후 목소리가 제거된 다양한 방송 내용을 독순술 전문가와 북한 전문가들이 분석하는 방식이다. 이에 따르면, 집권 초기 김정은은 현지 시찰 등 공개석상에서 당, 군 간부 등에 경어체를 썼다. 그러더니 2014년부터 반말을 하기 시작했고 최근에는 욕설까지 자주 등장하고 있다. 나이가 지긋한 관료들에게 “야”, “이 개 XX”라고 부르는 것은 물론이고 심한 폭언까지 내뱉는 모습이 포착되고 있다. 김정은이 고령의 간부들 앞에서 혼자 담배를 피우거나 비 오는 시찰현장에서 혼자만 우산을 쓰고 나머지 노간부들은 비를 그대로 맞으며 김정은의 말을 수첩에 받아적는 모습들도 이런 언행과 연결된다.
김정은이 통치에 자신을 갖는 것을 넘어 지나친 독선, 패악을 부리고 있어 내부에서는 엘리트층의 반감을 사고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간부들은 겉으로는 생존을 위해 충성하지만 김정은에 대한 불안감에서 오는 불신과 반발심이 더욱 강화될 수 있다는 전망이다.
◇미국도 김정일, 김정은 독순술 분석 = 미국의 정보당국도 북한 정보를 파악하면서 이 독순술을 적극 활용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독순술 전문가뿐 아니라 심리학자, 사회심리학자, 정치학자, 경제학자 등이 모여 함께 분석하고 토론해 결과를 도출한다.
정보소식통에 따르면 미 정보당국이 김정일 위원장의 발언을 수년간 독순술로 분석해 온 결과, ‘김정일은 △굉장히 머리가 좋다 △결단력이 있다 △그러나 성격은 어디로 튈지 예측하기 어렵다’ 등 3가지로 압축됐다. 김정은 체제에 들어 언행 예측 가능성은 더 떨어졌다고 판단하고 있다. 조한범 통일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김정일도 반말을 많이 했지만 그들은 1973년 집권 초부터 직접 검증하는 과정을 거쳐 신뢰가 쌓인 관계였기에 김정은과 차이가 크다”면서 “김정은이 폭언을 일삼는 것은 그만큼 권력의 불안정성을 보여주는 측면도 있다”고 말했다.
유현진 기자 cworange@munhwa.com
2016년 03월 11일 北, 사이버테러 요원 6800여명… 고강도 공격 10배로
- 스마트폰 해킹으로 본 北의 사이버테러 실태
北 정찰총국 산하 각종 작전국 주도
사이버전지도국·11군단 등도 가담
정부 주요인사 스마트폰 20% 감염
전화번호·통화내역 등 정보 절취해
전자기파로 국가통신망 교란 우려
발신 불명의 문자 메시지안에 URL
함부로 클릭하면 악성코드 설치돼
디지털식 스마트폰은 도청 안되지만
자동 녹음한 뒤 해커 서버 송신 가능
사이버테러법 19代 국회선 물건너가
북한이 4차 핵실험과 장거리미사일 실험 도발을 강행한 후 국제사회가 전보다 강력한 대북 제재에 나서자 사이버테러로 맞서는 강대강 구도를 이어가고 있다. 사이버테러는 한국 정부의 주요 외교안보 인사들의 스마트폰을 해킹하고 주요 국가전산망 공격을 준비하는 정황이 드러나는 등 상당히 심각한 수준인 것으로 드러났다. 이 때문에 정부의 대책 마련이 요구되는 상황에서 국회에 계류 중인 사이버테러방지법에 대한 논란도 불거지고 있다. 점점 진화되는 북한의 사이버테러 방법과 조직, 대응 방안 등을 알아본다.
1. 북한 사이버테러 사태는
최근 국가정보원과 국무조정실, 국방부 등 14부처가 참석한 ‘국가사이버안전 대책회의’에서 지난 2월 말부터 3월 초 사이 북한이 정부 주요 인사 스마트폰 중 20% 가까이를 악성 코드에 감염시켜 전화번호와 통화내역 등 각종 정보를 절취하고 심지어 실시간으로 음성통화 내용까지 확보했다는 점이 드러났다. 특히 해당 스마트폰에 담긴 또 다른 주요 인사들의 전화번호가 추가로 유출돼 2차 피해도 우려되고 있다.
또 북한은 인터넷뱅킹이나 인터넷상 카드결제 시 사용되는 보안소프트웨어 제작업체의 내부 전산망도 일부 장악하고, 금융권 보안솔루션 공급업체의 전자인증서도 탈취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금융 전산망 대량파괴를 목표로 한 준비작업으로 파악됐다. 2013년에도 언론·금융사 전산장비를 파괴한 ‘3·20 사이버테러’가 발생했다. 정부는 감염 스마트폰에 대한 악성코드 분석과 차단, 해킹 경로 추적 등 긴급대응에 나섰다.
2. 주도하는 조직은
북한의 사이버테러는 상당히 세분화된 조직들에 의해 체계적으로 이뤄지고 있다. 가장 주도적인 조직은 정찰총국 산하 다양한 작전국들이다. 육·해상 정찰국, 해외정보국(옛 35실), 기술정찰국 등이 있다. 또 별도 조직으로 사이버전지도국(121국), 11군단이 있다. 총참모부 내 사이버전담부서, 노동당 내 통일전선부와 문화교류국은 다양한 사이버심리전을 병행한다.
이들은 주요 대상국인 미국과 한국의 인터넷이 상당히 발달돼 많은 정보가 있다는 특징을 악용해 저비용 고효율인 사이버 집중 공격을 벌이고 있다. 121국은 중국 선양(瀋陽), 베이징(北京) 등에 위치한 무역회사로 위장해 사이버테러를 감행하고 있다. 11군단에는 10개 직할 여단 4만여 명의 후방테러, 게릴라전 수행 가능 인력이 있고 문화교류국은 수백 개의 간첩망을 확보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3. 규모 점점 확대되고 능력도 진화
북한에서 사이버테러를 담당하는 인원은 점점 증가해 현재 6800여 명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졌다. 자유민주연구원의 분석 결과에 따르면 북한의 사이버테러 담당 인력 중 단순 기술 인력이 아닌 실제 작전에 투입되는 정예요원만 1700여 명에 달한다. 고급인력을 사이버테러 쪽으로 더 투입하다 보니 점점 더 고강도의 공격이 시도되고 있다. 올 2월 들어 북한의 해킹이 하루 18시간씩 기존보다 10배 강한 고강도 공격을 자행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국내 보안업체들은 2월에만 북한 의심 악성코드가 평상시보다 최대 10배까지 늘었다고 판단하고 있다. 북한은 지난해 사이버테러에 활용되는 좀비PC를 6만여 대 만들었는데, 올해는 벌써 1월에만 1만여 대의 좀비PC를 관리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됐다. 특히 북한이 최근 전자기파(EMP) 공격 등을 통해 국가정보통신체계를 교란시키려는 시도들도 우려되고 있다.
4. 주요 국가기관 테러 사례
북한은 그동안 2009년 청와대 등 정부기관을 대상으로 한 △7·7 사이버대란 △2011년 디도스 공격과 농협 전산망 공격 △2013년 3·20 사이버 테러 및 6·25 디도스 공격 △2014년 한국수력원자력 해킹 △2015년 서울메트로 해킹 △올해 1월 청와대 사칭 이메일 발송 등의 굵직굵직한 사건을 일으켰다.
특히 한수원 해킹의 경우 정찰총국 소속 해커들이 중국 서버를 이용해 우회적으로 10여 차례에 걸쳐 해킹 공격을 한 것인데, 원전 도면 및 설계도 등 각종 자료를 해킹하고 일부 직원들의 개인정보도 빼냈다.
그러면서 원전 가동중단을 요구하기도 했다. 지난 1월 청와대 사칭 이메일 발신지가 한수원 해킹 사건의 IP와 동일한 것으로 밝혀지기도 했다. 최근에는 SNS와 사물인터넷(IoT)을 활용한 방식으로 진화하고 있다.
5. 북한이 스마트폰 해킹한 방법은
북한의 스마트폰 해킹 방법은 ‘스미싱’이다. 국내에서도 매년 수만 건의 피해가 발생하는 스미싱은 스마트폰으로 발송된 문자메시지 안에 포함된 인터넷 주소(URL)를 클릭하면 스마트폰에 악성 코드가 설치되고, 동시에 범인에게 소액결제 인증번호가 전송돼 범죄자가 전자화폐 등을 구매하는 수법의 스마트폰 기반의 신종 금융사기다. 북한은 스미싱 수법으로 금융사기가 아니라 피해 스마트폰에 악성 코드를 심어 각종 정보를 빼 가는 것을 목적으로 했다.
6. 음성통화 실시간 엿듣기 가능한가
과거 아날로그 방식 휴대전화는 음성을 신호로 바꿔 전파에 실어날랐기 때문에 중간에 이를 가로채 엿듣기가 비교적 쉬웠다. 그러나 디지털 방식 휴대전화가 등장하면서 이 같은 방식은 기술적으로 매우 어려워졌다.
디지털 휴대전화는 음성을 신호로 바꾼 후 이를 다시 디지털화·암호화한 뒤 보내는 동시에 여러 개로 쪼개(코드분할) 복수의 기지국을 거쳐 전달하는 특성으로 인해 엿듣기가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다만 사용자가 통화할 때마다 이를 자동 녹음한 뒤 해커의 서버로 송신하게 명령을 내릴 수 있다. 이 경우 실시간에 가깝게 음성통화를 엿들을 수 있다.
7. 모바일 해킹 증가하고 있나
한국인터넷진흥원에 따르면 전체 악성 코드 유형 가운데 지난해 10월까지 미미하던 모바일기기 관련 정보유출 비중은 같은 해 11월과 12월 2% 수준으로 늘었다가 올해 1월에는 전체의 6%로 늘어나며 그 비중이 확대되는 추세다.
모바일기기에서의 정보유출은 스마트폰 등이 악성 코드에 감염돼 단말기 내 문자와 이용자가 입력한 이름 및 파일 등의 정보가 유출되는 상황에 해당한다. 특히 국정원에 따르면 북한은 2월 말부터 3월 초 사이 정부 주요 인사 수십 명의 스마트폰을 공격해 20% 가까운 스마트폰을 악성 코드에 감염시켜 통화 내용과 문자메시지, 음성통화 내용 등을 알아낸 것으로 나타났다.
8. 보안 앱 설치하면 방지할 수 있나
해킹은 창과 방패의 대결이다. 스마트폰에 내장된 백신이 대부분의 악성 코드를 잡아 주지만 해커들은 끊임없이 백신에 걸리지 않는 악성 코드를 만들어 낸다. 보안업체들이 백신을 지속해서 업데이트하지만, 북한이 업데이트의 속도보다 빠르게 백신에 잡히지 않는 악성 코드를 만들어 낸다는 의미다. 더욱이 한 명이 뚫리면 해당 스마트폰에 저장된 본인의 정보뿐만 아니라 타인의 정보까지 빠져나갈 수 있다. 현재까지 드러난 방식의 북한 해킹 시도에 당하지 않는 방법은 의심스러운 URL이나 알 수 없는 출처의 앱을 받지 않는 것이다.
9. 사이버테러법의 역사와 쟁점
사이버테러방지법 입법의 역사는 1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2006년 12월 당시 17대 국회에서 공성진 당시 한나라당 의원이 대통령 소속의 국가사이버안전위원회를 설치하는 내용의 ‘사이버위기 예방 및 대응에 관한 법률안’을 발의했으나 별다른 관심을 받지 못하고 자동 폐기됐다. 18대 국회에서도 공 의원이 비슷한 법안을 발의했지만 임기 만료로 폐기됐다. 19대 국회에서는 서상기 새누리당 의원이 대표 발의한 ‘국가 사이버테러 방지 등에 관한 법률안’이 현재 국회 정보위원회에 계류 중이다. 하지만 더불어민주당이 이 법에 대해 안건 조정을 신청함에 따라 여야 동수의 안건조정위원회로 넘겨진 상태다. 최장 90일까지 계류할 수 있어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19대 국회 내 처리 가능성은 사라진 상황이다.
10. 국제공조 방안
북한이 한국뿐 아니라 2014년 소니픽쳐스 해킹 등 미국, 중국 등 외국을 상대로도 사이버테러를 감행하고 있기 때문에 국제적 공조 대책이 필요하다는 지적도 나온다. 특히 북한이 동남아시아 서버를 통해 해킹을 시도하는 경우가 많아 협조가 절실한 상황이다. 최근 유엔을 중심으로 국가 간 사이버 안보 규범 문제가 논의되는 등 사이버안보 관련 국제규범이 강화되고 있는 추세이기도 하다.
유현진·임정환 기자 cworange@munhwa.com
2016년 05월 17일 北 박봉주의 예고된 숙청
황성준 / 논설위원
북한 노동당 7차 당(黨)대회는 나름 ‘정상으로의 복귀’를 위한 몸부림이었다. 아무리 기형적 체제라 하더라도 비상 전시(戰時)권력인 ‘국방위원회 체제’를 마냥 끌고 갈 수만은 없는 것이다. 또 권위와 카리스마를 물려받지 못한 김정은으로선 형식적이나마 자신의 권력을 승인해 줄 ‘대관식’이 필요했다. 36년이나 당대회를 열지 않은 것은 공산주의 역사에서도 유례가 없다. 가장 유사한 것이 1939∼1952년 13년 동안 당대회를 치르지 않은 소련 공산당 사례다. 1941년 6월 독일이 소련을 침공하자, 이오시프 스탈린은 국방위원회를 조직하고 위원장이 됐다. 그리고 국방위원회를 당 위에 놓았다. 그러다 스탈린의 건강이 회복 불능에 이르자, 1952년 10월 19차 당대회를 개최, 당 권력을 회복시킨다. 그리고 스탈린은 이듬해 3월에 사망한다.
북한 7차 당대회와 소련의 19차 당대회는 유사점이 많다. 첫째, 카리스마와 이데올로기 통치에서 공포와 테크노크라트 지배로 변한다. 과거 숙청은 주로 당 지도노선을 둘러싼 이념투쟁의 성격을 띠었다. 그러나 이념과 노선은 사라지고 개인적 공포만이 남게 된다. 둘째, 선군정치가 선핵(先核)정치로 바뀐다. 군사력을 핵무기와 탄도미사일 위주로 재편하고, 야전군보다는 기술관료에 대한 의존도가 높아진다. 셋째, 노동자당 혹은 인텔리당에서 관료당으로 전환된다. 당은 혁명성을 상실하고 하나의 행정기관으로 전락한다. 물론 다른 점도 있다. 첫째, 당시 소련은 공포의 비밀경찰 총수인 라브렌티 베리야와, 테크노크라트 대표격인 게오르기 말렌코프의 연합정권이었다. 그러나 북한은 김정은 1인 통치체제다. 둘째, 무엇보다도 베리야를 제거한 궁중 쿠데타를 일으킨 니키타 흐루쇼프가 북한엔 아직 안 보인다.
이번 당대회를 통해 가장 출세한 인물 중의 한 명이 박봉주 내각 총리다. 박봉주는 정치국 상무위원이 됐을 뿐만 아니라, 무력부서 출신이 아님에도 중앙군사위원으로 뽑혔다. 그러나 북한에서 가장 잠 못 이루는 사람도 박봉주일 것이다. 김정은은 당대회 이후 첫 공식 일정으로 기계설비 전시장을 시찰하면서 “자강력 제일주의만이 살길이고 만능의 보검”이라 강조하고, “수입병을 뿌리 뽑고 종지부를 찍으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현 북한 경제 상황을 살펴보면, 이는 사실상 불가능하다. ‘자력갱생’ 경제는 1990년대 ‘고난의 행군’을 지나면서 완전히 파괴됐다. 현재 북한 생필품 경제는 중국 수입에 의존하고 있다. 과거 소련은 석유 수출로 번 돈으로 생필품을 수입해 배급함으로써 버틸 수 있었다. 그러나 북한의 석탄 수출은 소련의 석유 수출을 대체할 정도가 되지 못하며, 그나마 국제사회의 제재로 막히고 있다. 결국, 박봉주는 얼마 후 모든 책임을 뒤집어쓰고 처형될 가능성이 크다.
북한 1% 특권층 생활상에서도 드러나듯, 북한 엘리트층의 성격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체제를 유지할 수 있는 이념적·물적 토대가 흔들리고 있다. 이념적 토대는 이미 상당히 붕괴된 것으로 보이고, 물적 토대도 경제 제재가 지속되면 타격을 받을 수밖에 없다. 문제는 대한민국이다. ‘분단 관리’가 아닌 ‘통일’을 추구할 의지와 전략이 있는지 의심스럽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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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09월 21일 北 레짐체인지 추진할 適期다
이미숙 국제부장
북한의 5차 핵실험 후 북한 레짐체인지(체제 교체)론이 공론화하고 있다. 박근혜 대통령은 지난 1월 북한의 4차 핵실험 후 개성공단 가동 중단을 결단하며 “핵 개발로는 생존할 수 없으며 오히려 체제 붕괴를 재촉할 뿐이라는 사실을 깨닫도록 실효적인 조치를 해나가겠다”고 밝혔다. 레짐체인지를 에둘러 말한 것이다. 협상을 통한 핵 문제 해결은 더 이상 가능하지 않다는 선언이기도 하다. 세계사를 봐도 체제 교체나 정권 교체 없이 해결된 경우는 없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이나 아르헨티나, 우크라이나 등 핵 개발을 시도했거나 핵을 보유했던 나라들은 모두 정권 교체 과정에서 핵 문제를 해소했다. 유신시대의 핵 개발 시도도 결국 박정희 전 대통령 시해 사건으로 막을 내렸다.
그렇다면 어떤 체제 교체냐가 문제다. 아래로부터의 봉기에 의한 동유럽식 혁명, 체제 내부의 쿠데타, 또는 외부 세력에 의한 김정은 패밀리 제거 등을 검토할 수 있다. 동유럽 방식은 외부에서 체제 내부로 정보를 집중 투입하며 반체제운동을 유도해야 하는데 북한에는 노조나 교회 등 구심점이 없어 현실적으로 쉽지 않다. 김재규식 궁정쿠데타도 장성택 숙청 후 사실상 어려워진 것으로 보인다. 오사마 빈 라덴 제거 방식을 쓰려면 한·미 당국이 정보와 기동력을 확보한 뒤 전광석화 식으로 실행해야 한다.
미국외교협회(CFR)는 2009년 버락 오바마 미 대통령 취임 당시 북한 김정일 사망과 급변 사태에 대비하라는 권고를 했다. 이런 제언과 달리 오바마 대통령은 “불량국가들이 움켜쥔 주먹을 편다면 손을 내밀어 잡겠다”며 협상을 제안했다. 북한이 2차 핵실험을 하며 판을 걷어찬 뒤에도 ‘전략적 인내’를 견지하며 북한의 변화를 기다렸을 뿐이다. 물론 ‘친북’ 불량국가들인 미얀마와 이란, 쿠바와 차례로 관계 개선을 함으로써 북한의 돈줄을 차단한 것은 평가할 만하다. 미국 입장에서는 오바마가 ‘타율’ 3할 이상인 명투수라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한국 입장에서 볼 때, 북한으로부터 네 번씩이나 핵 펀치를 맞고도 ‘확장 핵우산’만 되풀이했을 뿐 정면 대응을 하지 않아 ‘동맹’을 핵 인질로 방치한 셈이 됐다.
북한의 5차 핵실험 후 한·미 양국에서는 선제타격론에다 예방타격론, 그리고 체제교체론까지 본격 제기되고 있다. 유엔에서도 ‘민수용 제재’와 ‘원유 봉쇄’ 같은 초고강도 방안까지 다시 논의되기 시작했다. 북핵이 완성 단계에 진입하는 만큼 대북 제재도 당연히 ‘끝장 단계’로 가지 않으면 안 된다. 문제는 ‘핵 없는 세상’을 세계 공약으로 내걸었던 오바마 대통령의 임기가 대선 기준으로는 40여 일, 임기 기준으로도 4개월밖에 남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그가 유엔연설에서 북한의 핵이 모두를 위험하게 한다고 경고한 만큼 후임자를 위해 해결의 단초라도 마련해야 한다. ‘임기 말’은 국내 정치적으로는 ‘레임덕’일 수 있지만, 대외 정책에서는 오히려 좌고우면하지 않고 과감히 결행할 수 있는 시기도 된다.
이젠 핵전쟁 예방을 위한 선제적 자위 조치를 더 이상 미룰 수 없다. 국지전 확전 우려가 있는 선제타격보다는 알카에다 고위인사들 제거 때 동원했던 드론 작전 등을 통해 수뇌부를 제거하는 게 낫다. 한·미 공군이 10월 실시하는 레드 플래그 훈련이 주목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여기에다 ‘정보의 폭탄’을 북한 전역에 투하하는 방법도 병행해야 한다. 미국 대선 후보들은 훨씬 단호하게 중국 책임론을 제기하고 있다. 당분간 미·중 관계는 어려울 수밖에 없다. 미국이 여전히 중국을 압박할 군사 파워와 금융 네트워크를 갖고 있는 것은 다행이다.
한국은 북핵 문제 해결 없이 한·중 관계 정상화도 없다는 각오로 좀 더 주도적으로 결연하게 체제 교체 복안을 짜고 미국과 공조해 나가야 한다. 다만 미국의 세계 전략과 한반도 전략이 충돌할 때, 세계 전략을 앞세웠음을 잊어선 안 된다. 멀리는 가쓰라-태프트 밀약이 있고, 6·25 때 맥아더의 만주 폭격을 막은 해리 트루먼 대통령도 그랬다. 수시로 불거지는 주한미군 감축 및 철수론 역시 그런 맥락에서 나온다. 국제 정세가 변동하는 가운데 북핵 문제는 정점을 향하고 있다. 박 정부가 현명하고 정교하게 대응하면 오바마 대통령의 결단을 끌어내고, 중국의 대북 관여를 무력화하면서 북한 레짐체인지의 초석을 놓는 레거시를 남길 수 있을 것이다.
2017년 04월 04일 김정은 ‘최후의 기회’와 참수작전
김용호 연세대 교수·국제정치학
‘괵(馘)’이란 한자가 있다. 적장의 잘린 머리(또는 귀)를 뜻한다. 듣기만 해도 소름 끼치지만, 조선왕조실록이나 국조보감에 심심찮게 나온다. 영조 4년(1728년) 3월, 이인좌의 난을 진압하던 관군이 첫 승전보로, 난에 가담했던 역적의 잘린 머리를 보내오자 영조는 창덕궁 돈화문 문루에 올라 헌부수괵례(獻俘受馘禮)를 받는다. 난을 완전히 진압한 관군이 다음 달 도성으로 돌아오자 친히 숭례문까지 나아가 헌괵례를 받았다는 기록도 있다. 적장의 목을 베는 건 훨씬 이전에도 있었다. 평산 신씨의 시조인 신숭겸(申崇謙)은 고려 태조 왕건이 군졸로 변장, 탈출하는 동안 그의 갑옷을 입고 싸우다 전사해 목이 잘렸는데, 훗날 왕건은 금으로 그의 머리를 만들어 장사지내 줬다고 한다.
이웃 중국이나 일본도 마찬가지다. 나관중의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에서는 관우의 잘린 머리를 받아든 조조가 갑자기 뜬 관우의 눈에 깜짝 놀라 뒤로 넘어지는 장면이 묘사돼 있다. 임진왜란 때 평양을 점령했던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 측에 패한 뒤 참수돼 머리와 몸이 함께 묻히지 못했다고 전해온다.
요즘 참수(斬首·decapitation)란 단어가 일부 언론에 등장한 것은, 테러 단체 지도자 제거 작전에 동원됐던 장비와 부대가 한·미 합동군사훈련에 나타났기 때문이다. 이 작전은 서양인 인질에 대한 참수로 공포심을 자극하려는 테러 단체에 대한 미국의 보복 성격이 담겨 있다. 2003년 걸프전 당시 바그다드 이곳저곳을 숨어다니던 사담 후세인의 은신처를 찾아 F-117 스텔스 폭격기가 벙커버스터를 투하한 지 10여 년, 이젠 동원되는 무기도 F-22 랩터, 초정밀 미사일에서 참수 작전의 대명사인 무인폭격기 드론까지 다양해졌다. 오사마 빈라덴을 사살한 네이비실도 등장한다.
굳이 ‘참수’란 용어를 안 써도 북한에는 이미 강력한 경고다. 백악관이 군사적 대안도 고려하고 있다는 발언은 있었지만, 미국은 북한에 대해 ‘참수’라는 단어를 잘 쓰지 않는다. 우리 군도 유사시 북에 침투, 타격작전을 수행할 특수임무여단을 창설할 것이라며 참수 대신 ‘제거’란 단어를 사용했다.
수뇌부에 대한 참수 작전이 보도될 때마다 북한은 ‘최고 존엄’에 대한 모독이라며 청와대를 타격할 것이라고 협박해 왔다. 청와대가 비어 있는 지금 북한도 답답할 것이다. 전쟁이 나면 한국이 북한보다 잃을 게 훨씬 많다지만, 북한도 잃을 게 없는 건 아니다. 어쩌면 우리보다 치명타를 입을 수 있다. 2015년 8월, 목함지뢰 사건으로 남북한의 100만 대군이 서로 총부리를 겨누고 있던 당시 북측이 요구한 건 병력이나 무기의 철수가 아닌 확성기를 꺼 달라는 거였다. 전단을 풍선에 실어 띄워 보내면 전투기가 날아와 터뜨렸다. 그 정도로 불안하다는 얘기다. 북한은 핵으로 우리의 앞선 경제와 풍요를 위협하지만, 백두혈통의 세습에 집착하면 할수록 아킬레스건을 드러내는 것이다.
그렇다고 참수 작전이 만능은 아니다. 관우는 무묘(武廟)의 주신으로 성인의 반열에 올라 문묘(文廟)의 공자와 함께 많은 중국인이 신으로 모신다. 신숭겸 장군은 충절의 표상으로 오늘날에도 회자되며, 교황 클레멘스 8세는 고니시 유키나가의 죽음을 애도했다고 전해진다. 참수 작전은 정확한 정보와 정밀하고 신속한 타격이 필요하기 때문에 철저히 비밀을 유지해야 한다. 게다가 작전 이후의 불확실성도 면밀히 계산해야 하는 등 신중에 신중을 기해야 한다. 참수된 지도자는 대개 순교자가 되는 효과(martyr effect)가 있어 추종자들을 더욱 응집시킬 위험도 있기 때문이다. 오사마 빈 라덴의 제거 과정 못지않게 그의 시신을 장례 치르는 절차가 중요했던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지난달 31일, 도널드 트럼프 미 행정부는 북한의 석탄 기업과 외국 근무자 11명에 대한 무더기 제재를 가했다. 북한 핵에 대한 전략적 인내가 끝났음을 시사하는 것이다. 김정은의 할아버지 김일성은 나진-선봉 경제특구를 설치해 경제 개방의 시동을 걸었고, 지미 카터 전 대통령의 방북을 받아들여 미국과의 협상 물꼬를 트며 미군의 공격 위기에서 벗어났다. 복장과 외모에서 할아버지를 닮으려 노력하는 김정은이 자신을 향한 드론의 총구 앞에서 어떤 선택을 하느냐가 그의 미래를 결정할 것이다.◎
문화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