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토의 소식1/ 2017.11.01 "北 고위간부들, 코앞의 적은 美 아닌 LPG" - 2018.01.15 황병서, 왜 갑자기 몰락했나 - 2018.12월 31일 “北 류경호텔은 선전탑, 내부 불 안 들어오는데 외부는 화려한 LED쇼”
동토의 소식1
2017.11.01 "北 고위간부들, 코앞의 적은 美 아닌 LPG"…대북제재로 LPG가격 폭등하자 동요
▲북한에서 과학자·교육자에게 제공되는 아파트 내부 모습. /조선중앙TV 캡처·데일리N
국제 사회의 대북제재로 북한의 액화석유가스(LPG) 가격이 급등하면서 평양의 고위 간부들이 크게 동요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31일 북한 전문매체 자유아시아방송(RFA)은 최근 대북제재로 북한 내 LPG 가격이 급등하면서 일부 간부층이 LPG 품귀현상에 동요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RFA는 최근 평양을 다녀왔다는 국경의 한 소식통을 인용해 “국제 사회의 대북제재로 큰 피해를 보는 곳이 평양인 것 같다”며 “올해 겨울을 어떻게 견딜 것인가가 평양시 간부들과 가족들의 제일 큰 걱정거리가 되었다”고 전했다.
LPG는 김정은 집권 이후 평양에 건설된 ‘굴뚝 없는’ 아파트의 난방과 취사에 사용되고 있는 주요 에너지원이다. 또 평양 화력발전소에서 나오는 온수로 난방을 할 수 있는 수준이 못 돼 평양에 거주하는 간부층은 유가가 오르는 것보다 LPG 가격이 오르는 것이 더 큰 걱정거리인 것으로 전해졌다.
한 소식통은 “평양의 미래과학자거리, 여명거리, 창전거리를 비롯한 아파트들은 애초 굴뚝없이 설계돼 이곳 사람들은 겨울철 이동용 가스통으로 난방을 하고 식사를 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함경북도의 한 소식통에 따르면 지난해까지 LPG를 한 번 충전하는데 중국인민폐로 200위안, 20kg LPG통은 400위안이었다. 하지만 최근 대북제재 이후 20kg LPG통은 800위안으로 가격이 두배로 훌쩍 뛰었다.
대북제재로 LPG 가격 급등 현상은 한동안 지속될 것으로 보여 평양시 고위 간부들은 크게 동요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한 소식통은 “LPG 가격이 천정부지로 치솟으면서 김정은을 떠받드는 평양시 핵심 간부층들이 크게 동요하고 있다”며 “오죽하면 평양시에서 미국이 아니라 LPG가 코앞에 닥친 적이라는 말이 돌겠느냐”고 반문했다.
조선일보 이경민 기자
11-02 日언론, 김정은 비밀연설문 입수…내부 위기상황 적나라하게 담겨
북한이 내부적으로 심각한 전력부족 상황에 시달리고 있는 정황을 드러내는 김정은 노동당 위원장의 비밀연설문이 공개됐다.
마이니치신문은 1일 특집기사를 통해, 김정은 위원장이 올 5월3일 노동당과 국가경제기관의 책임 간부들을 대상으로 한 연설문을 입수해 그 내용을 공개했다.
‘전력문제를 해결하여 경제강국 건설의 돌격로를 열어나가자’라는 제목의 이 연설문은 노동당 출판사가 발간한 책자로, 19페이지에 걸쳐 게재됐다.
마이니치는 이 책자가 연설 이후인 5월 25일에 발행됐지만, 당 기관지인 노동신문 등 북한 언론은 이에 대해 일체 보도하지 않았으며, 노동당 내부 학습용으로 작성된 것으로 보인다고 전했다.
김정은은 “전력문제는 경제강국 건설에서 최우선으로 해결해야 하는 가장 중요하고도 긴박한 문제”라며 단도직입적으로 전략문제 이야기를 꺼내며 연설문을 시작했다.
연설문은 이어 “전력 사정이 절박해 생산 차질을 초래하고, 인민의 생활에 불편을 끼치고 있다”, “전력은 생산이며 전력의 증산은 곧 생산의 성장이라고 할 수 있다”라며 북한의 힘든 전력 사정을 지적했다.
김정은은 북한 경제건설의 관건인 전력이 얼마나 위기 상황인지 적나라하게 밝혔다.
그는 연설문에서 “화력발전소와 수력발전소에서 전력 생산을 늘릴 수 없는 주된 원인은 석탄과 물 부족이다”, “석탄 공업 부문, 철도 운수 부문에서는 화력발전용 석탄 보장에 최우선적으로 힘을 넣고, 1주일 분 이상의 예비 석탄을 마련해야 한다는 위대한 장군님(김정일)의 유훈을 관철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김정은은 또 전력의 유효한 활용을 위해 국가통합 전력 관리 체계를 도입했다며 “전력이 부족하기 때문에 당분간 국가적으로 중시해야 하는 단위에 전기를 우선하는 규율을 세워야 한다”고 제시했다.
그러면서 “귀중한 전력을 낭비하는 것은 중대한 범죄 행위”라며 “전력 사용의 한도 초과, 불법 전기 사용에 대해서는 재정적, 법적 제재를 가해야 한다”고도 했다.
또 “앉아서 걱정만하는 우국지사가 아니라 문제를 하나라도 해결하는 실천가형 간부가 필요하다”면서 당 간부가 앞장 서서 ‘절약투쟁’을 펼치라고 요구했다.
김정은은 연설에서 구체적인 절전 방법까지 언급했다. 그는 “간부들이 밤에 사무실에서 일 할 때 실내등 대신 탁상등을 이용하면 적잖은 전기를 아낄 수 있다”, “주택이나 기관 청사의 복도 조명에 자동감지기를 설치하는 등 절약 방법을 개발하고 도입해야 한다”고 말했다.
또, 많은 전력을 소비하는 건축물 설계는 허가하지 않겠다며, 평양에 완공한 뉴타운 여명거리를 에너지 절약형의 모범으로 지적하며 북한 전국으로 확산하라고 명령하기도 했다.
이에 더해 중소 규모 발전소를 곳곳에 건설하겠다며 “전력 생산지와 소비지를 접근시키면 전력의 중도 손실을 줄일 수 있고, 전쟁의 관점에서 유리한 점이 많다”고도 했다.
아울러 태양광이나 풍력발전 등 자연에너지를 활용해야 한다는 생각을 나타내며, 주체적인 ‘핵동력 공업’을 창설해 원자력 발전소의 조기 건설도 촉구했다.
이에 대해 마이니치는 머지 않은 미래에 북한에 대규모 원전이 완성될 가능성이 있다며, 이는 핵무기로 전용할 수 있는 플루토늄을 대량으로 생산할 수 있다는 의미라고 해석했다.
【서울=뉴시스】
11.06 "北 죽음의 땅, 풍계리… 항문 없는 기형아 낳고 나무도 안 자라"
['6차례 핵실험' 北 길주군 출신 탈북자 21명 증언 들어보니…]
- 北 "방사능 누출 없다"지만…
탈북민 "우물이 모두 마르고 두통 등 원인 모를 '귀신병' 고통
黨진상품이던 산천어 씨 마르고 송이버섯은 진상품 목록서 빠져"
- 길주 주민들 평양 출입도 금지
"풍계리 흙·물 소지한 주민들 열차서 잡혀 정치범 수용소로"
북한이 여섯 차례 핵실험을 실시한 함경북도 길주군 일대가 '죽음의 땅'으로 변해가고 있다는 증언이 이어지고 있다. 길주군 출신 탈북자들은 "나무를 심으면 80%가 죽고, 우물이 말랐다. 기형아 출생도 생겼다"고 증언했다. 북한은 핵실험을 할 때마다 "방사능 누출이 전혀 없었고 주변 생태에 어떤 영향도 주지 않았다"고 했지만 실제 주민들의 증언은 이와 많이 다른 것이다.
탈북민이 참여한 북한 연구 단체 샌드연구소(구 통일비전연구회·대표 최경희)가 작년 7월부터 올 9월까지 길주군 출신 탈북민 21명을 심층 면담해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풍계리와 인근 주민들은 여섯 차례 핵실험으로 다양한 피해를 입은 것으로 나타났다. 길주군 출신 탈북자 A씨는 "길주군의 산부인과 병원에서 항문과 성기가 없는 기형아가 출생했다는 얘기를 길주의 친척으로부터 들었다"고 말했다. 탈북자들은 "길주는 핵실험 장소인 풍계리 만탑산에서 내려오는 물이 한데 모이는 바가지 모양의 지형이기 때문에 길주군 주민들은 모두 풍계리에서 내려오는 물을 먹는다"며 "방사능오염이 걱정된다"고 했다. 이 지역 탈북자 B씨는 "길주에 남은 가족과 통화했는데, 6차 핵실험 직후 풍계리 우물이 다 말랐다는 얘길 들었다"고 했다. 서균렬 서울대 원자력학부 교수는 "풍계리 지반 붕괴로 위가 함몰했기 때문에 밑에는 완전히 금이 갔을 것이고, 지하에 큰 공동이 생겨서 지하수가 모두 밑으로 빠졌을 가능성이 있다" 며 "토양까지 방사능에 오염되는 문제가 생겼을 것"이라고 했다.
길주 출신 탈북민들은 북한이 핵실험을 실시할 때 일반 주민들에게는 제대로 알리지 않는다고 증언했다. 풍계리에서 2차 핵실험까지 경험했다는 C씨(2010년 탈북)는 "1차(2006년 10월), 2차 핵실험(2009년 5월) 당시 풍계리에 있는 군관 가족만 갱도에 대피시켰다"며 "일반 주민들에게는 전혀 알리지 않았다"고 했다. 풍계리에는 핵실험장을 관리하는 군인들과 군 소속 농장에 소속된 농민 일부가 거주하는 것으로 전해졌다. C씨는 "핵실험 전에 (핵물질을 주입하지 않고 기폭장치 성능을 실험하는) 고폭 실험을 두 번 정도 하는데 주민들을 동원해 구덩이를 깊게 파고 폭발 실험을 한다"며 "풍계리에서 강물에 팔다리가 다 잘려나간 시체가 둥둥 떠내려 오는 것을 직접 목격했다"고도 했다. 김태우 전 통일연구원장은 "외국의 경우에도 고폭 실험을 하면서 인명 피해가 발생한 사례가 있다"면서 "인명을 경시하는 북한에서 고폭 실험을 하면서 얼마나 안전을 고려했는지 의문"이라고 했다.
북한의 잦은 핵실험으로 길주 지역 특산품이던 산천어와 송이버섯이 사라졌다는 증언도 나왔다. 길주 출신 탈북민 D씨는 "1980년대부터 길주의 특산품인 산천어와 송이버섯이 (중앙당 고위 간부들에게 진상하는) '9호 물자'로 평양으로 올라갔는데 2006년 핵실험 이후 이들이 진상품 목록에서 빠졌다"며 "최근 핵실험으로 산천어 씨가 말랐다는 얘길 들었다"고 했다. 길주군 산림 공무원 출신 탈북민 E씨는 "길주 지역 산에 묘목을 심으면 80% 이상이 죽는다"며 "제대로 심지 못한 부분도 있겠지만 다른 지역에 비해 더 많이 죽는다"고 했다. 길주군 주민들은 원인을 알 수 없는 귀신병(두통)으로 고생하는 것으로 조사됐다.
북한 당국은 길주군 주민들의 평양 출입을 막고 있다. 6차 핵실험 이후 함경북도 길주를 다녀왔다는 대북 소식통은 "평양의 대형 병원에 예약했던 길주 주민들이 6차 핵실험 이후 평양 출입을 거부당했다"고 전했다. 북한은 길주군의 실상이 외부에 전해지는 것도 철저히 차단하고 있다. B씨는 "풍계리와 길주의 흙과 물, 나뭇잎 등을 갖고 국경으로 가던 주민들이 열차에서 체포돼 정치범 수용소에 갔다"고 했다.
한편 통일부는 지난달부터 길주 출신 탈북민 30명을 대상으로 방사능 피폭 검사를 실시 중이다. 정부 관계자는 "연말쯤 검사 결과가 나오면 후속 대책을 수립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조선일보 김명성 기자
11.18 북한 병사의 기생충, 두루미의 脫北
北에 아토피 없는 건 기생충 많은 탓
젊은이들 왜소한 것은 천일염 부족 때문
북한 가던 두루미는 배고파 남으로 온다
JSA 귀순 북한 병사에게서 많은 기생충이 나왔다는 보도에 서울대 의대 신희영 교수(연구부총장)에게 들은 얘기가 생각났다. 신 교수는 북한 의료 지원차 2003~08년 여섯 번 방북한 경험이 있다. 서울대 의대 통일의학센터 교수들이 금강산 온정리를 찾아가 주민들 기생충 검사를 한 적이 있다. 95%가 기생충을 갖고 있었다. 인분을 비료로 쓰는 데다 구충제가 부족해서다. 신 교수 팀이 기생충 약을 지원해주겠다고 했더니 북측은 "공화국엔 그런 병 없다"며 거절했다. 포장을 '영양 증진제'로 해서 건네줬더니 그제야 받더라는 것이다.
신 교수는 "남한엔 기생충은 없는 대신 아토피가 많고, 북한엔 아토피는 없고 기생충이 많다"고 했다. 둘 사이 상관관계가 있다는 설명이다. 아토피는 신체 면역 시스템이 스스로를 공격해 생기는 증상이다. 남한 사람들 몸은 기생충에 의한 외부 공격이 사라지자 자기 몸을 적으로 인식하고 스스로를 괴롭힌다는 것이다. 아직 가설(假說)이지만 설득력이 있었다. 북한 사람들 몸은 외적(外敵)인 기생충에 맞서느라 자기를 공격할 여력은 없다는 뜻이다.
신 교수는 북한 젊은이들이 왜소(矮小)한 건 1996~97년 홍수와 관련 있다고 했다. 당시 북한 서해안의 천일염 염전들이 파괴되면서 소금이 부족해졌다. 북한 당국은 중국에서 암염(岩鹽)을 수입해 대체했다. 그런데 암염엔 바닷소금과 달리 요오드 성분이 없다. 요오드는 미역, 생선 같은 해산물을 먹어도 보충할 수 있다. 하지만 내륙 사람들은 해산물 먹을 기회도 없다. 결국 갑상선 기능 저하증이 광범위하게 생겼다. 키가 안 크고 몸이 붓고 지능 수준이 떨어진다. 탈북자 건강 진단에서도 요오드 부족이 뚜렷하다는 것이다. 어제 신 교수에게 다시 확인해봤더니 2012년 국내 기업이 호주산 천일염을 북에 지원해주는 사업을 추진했다가 일이 잘 풀리지 않았다고 한다. 북한은 암염에 요오드를 추가하는 공장을 두 군데 만들어 요오드 부족에 대처했다는 것이다.
또 하나 인상적인 얘기는 신 교수가 북한에 백신을 지원해주면서 겪은 일이다. 백신을 가져다줬으나 "냉장고가 없다"며 난처해했다. 백신은 부분적으로 살아있는 생물이라 냉장 보관이 필요하다. 다음번엔 냉장 설비도 갖다줬다. 그랬더니 "전기가 수시로 끊겨 냉장고가 있어봐야 못 쓴다"고 했다. 할 수 없이 그다음엔 소형 발전기를 지원해줘야 했다.
사람들 보건 수준이 이런데 자연이 멀쩡할 리 없다. 국제연합 식량농업기구(FAO)의 2013년 발표를 보면 1990년 이후 20년간 북한 산림의 32.4%가 사라졌다. 다락밭을 만드느라 민둥산이 된 것이다. 북한 주민들은 산불이 나도 끄지 않는다고 한다. 자기 손으로 불을 냈다가 들키면 처벌받지만 자연 산불이야 누구의 책임이 아니다. 끌 이유도 없다. 나무가 타 없어지면 밭이 생긴다. 이런 식으로 산이 밭이 되면 토양이 침식되고 그 토사가 하천에 쌓인다. 비가 조금만 세게 내리면 홍수 피해가 난다. 국제기구 선정 '세계 10대 재난 취약 국가'로 북한이 늘 꼽힌다.
서울대 김성일 교수(산림환경학) 설명에 따르면 철원 평야에 두루미가 오기 시작한 것은 1990년대 후반부터다. 두루미는 전 세계에 3000마리가 안 된다. 그 가운데 많을 땐 1000마리가 겨울에 철원을 찾는다. 그 두루미들은 원래 북한의 안변 지역으로 가던 두루미들이다. 원산 바로 아래다. 그런데 식량 부족으로 주민들이 논에 떨어진 낙곡(落穀)까지 걷어가게 됐다. 그러고도 남은 낙곡은 오리, 염소, 거위 등을 풀어 주워 먹도록 하는 바람에 두루미가 먹을 게 남지 않았다. 그러자 두루미들이 안변을 떠나 80㎞ 남쪽 철원으로 오기 시작한 것이다. 북에 억류됐다 풀려난 흥진호 선원들 말로는 북한 사정이 전보다 나아진 것 같다고는 하지만, 참 갑갑한 이야기다.
조선일보 한삼희 수석논설위원
11.22 北, 황병서 처벌한 건 軍비리 덮었기 때문
대북 소식통 "김정은에게 뇌물 문건 보고되는 것 막아"
북한군 서열 1위인 황병서 군 총정치국장과 김원홍 총정치국 제1부국장이 처벌받은 것은 총정치국 간부들의 비리 문건이 김정은 노동당 위원장에게 보고되는 것을 막았기 때문으로 알려졌다.
북한군 소식에 정통한 소식통은 21일 "대북 제재로 군 외화 벌이 기관들이 타격을 입은 가운데 총정치국 조직부 간부들이 산하 외화 벌이 기관에서 무리하게 뇌물을 상납받다가 적발됐다"며 "이 내용이 김정은에게 보고돼야 하는데 황병서·김원홍이 '제 식구 감싸기' 차원에서 덮어버렸다"고 전했다. 하지만 총정치국의 비리는 노동당 조직지도부 계통으로 김정은에게 보고된 것으로 전해졌다. 앞서 국정원은 20일 당 조직지도부가 당에 대한 군 총정치국의 '불손한 태도'를 명분으로 검열을 단행했다고 밝혔다.
대북 제재로 타격을 받은 군부가 김정은의 '자력 자강 노선'에 어긋나는 대규모 물자 지원을 요구한 것이 처벌 이유라는 관측도 나온다. 북한 소식통은 "유엔의 대북 제재 결의 2375호 시행으로 군부 소속 외화 벌이 기관들의 주요 수입원인 석탄·광물·수산물 수출이 막히면서 피복·식량·휘발유·디젤유·식용유 등 물자 구입에 차질이 생겼다"며 "군부가 김정은에게 물자 지원을 요청한 것이 문제가 됐다"고 전했다. 국책 연구소 관계자는 "김정은이 지난 10월 당 중앙위원회 전원 회의에서 제시한 방침이 자력 자강인데 군부가 '지원' 운운하며 최고 지도자의 방침에 반기를 듯 셈이니 군을 책임진 황병서와 총정치국이 연대책임을 진 것"이라고 했다.
이번 검열은 김정일이 1997년 당 조직지도부를 시켜 간부 수천 명을 숙청해놓고 숙청 책임자를 처형한 '심화조 사건'을 연상시킨다는 분석도 나온다. 고위급 탈북민 A씨는 "지금 흐름을 보면 황병서·김원홍 등 2013년 장성택 처형에 앞장섰던 인물들이 차례로 곤욕을 치르고 있다. 한마디로 토사구팽"이라며 "장성택 숙청의 기획자로 알려진 조연준 전 당 조직지도부 1부부장도 무사하지 못할 것"이라고 했다.
유동열 자유민주연구원장은 "김정은이 장성택 처형을 주도한 황병서·김원홍·조연준을 숙청하고 장성택의 명예를 회복해줄 가능성도 있다"고 했다.
김명성 기자
11.24 북한 주민 사망 31%가 '감염병'
한국 5.6%와 엄청난 격차… 북한의 결핵 신고율 세계 2위
B형간염은 한국 80년대 수준, 말라리아도 휴전선 인근 빈발
JSA(판문점 공동경비구역)를 통해 귀순한 오모(25) 북한 병사가 결핵·B형 간염·기생충 등 각종 감염병에 걸린 것으로 확인된 가운데, 이 같은 감염병이 북한 주민들에게 광범위하게 퍼진 것으로 나타났다. 오씨는 북한 감염병 실태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축소판이나 마찬가지였다.
국립중앙의료원과 WHO(세계보건기구) 등 국내외 전문기관에 따르면, 북한 주민들은 오씨에게서 발견된 결핵·B형 간염과 말라리아 등 각종 감염병에 시달리고 있다. 감염병은 세균이나 바이러스, 기생충과 같은 여러 병원체에 의해 감염돼 발병한다. 국립암센터 기모란 교수는 "감염성 질환은 북한 주민 사망 원인의 31%를 차지해 한국(5.6%)에 비해 월등히 높다"고 말했다.
감염병 가운데 결핵 발생률(2016년 기준)은 인구 10만명당 513명으로, 한국의 76.8명보다 6.7배나 높다. 결핵 사망자(1만1000명) 역시 한국(2209명)의 5배 수준이다. 특히 북한에서 결핵 관리 사업을 하는 유진벨재단의 조사에 따르면 여러 결핵약에 내성을 보여 치료가 어려운 다제내성 결핵 환자가 전체 결핵 환자의 31.4%(2012년)로 세계 최고 수준인 것으로 나타났다. 유진벨재단은 북한의 다제내성 결핵 환자가 매년 4000~5000명 발생하는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결핵 비상 상황인 셈이다. 2015년 기준 북한의 결핵 신고율은 남아프리카공화국에 이어 세계 2위다.
만성 간염이나 간암으로 발전될 가능성이 큰 B형 간염은 한국의 80년대처럼 보균자가 전체 인구의 6~11%로 추정된다. 모기 등이 감염시키는 말라리아는 휴전선 인근 지역에서 빈발해 한국의 경기·강원 일부 지역까지 전염시키고 있다. 이종구 서울대 의대 교수는 "결핵과 B형 간염은 제대로 치료하지 못하면 만성질환이 될 가능성이 크다"면서 "통일 이후에 북한 주민을 치료하면 비용과 시간이 많이 들어 북한 주민들에 대한 치료약과 예방 백신 지원 등이 시급하다"고 했다. 현재도 국제기구에서 결핵약 보급에 나서고 있지만 결핵 사망률은 여전히 높은 상태다.
국내 들어온 탈북 주민들의 건강 실태 조사에서도 결핵의 심각성을 알 수 있다. 탈북 주민들의 5.4%가 결핵으로 조사(2013년 국정감사)됐다. 전문가들은 "결핵 감염자 대부분이 25~54세 경제활동 인구에 집중돼 있다"고 말했다. 결핵연구원 김희진 원장은 "북한의 실제 결핵 실태는 알려진 것보다 더 심각할 수 있다"고 말했다.
김동섭 보건복지전문기자
11-28 짐 싸는 北식당 종업원들… 보위부원 통제속 귀국길
동아일보·채널A 공동취재
中, 대북제재 고삐… 단둥 르포
▲목격된 北식당 종업원들 26일 오후 북-중 접경지역인 랴오닝성 단둥시 압록강변에서 북한 식당 종업원들이 줄지어 한 소규모 호텔로 이동하는 장면이 본보와 채널A 취재진에 포착됐다. 단둥=정동연 특파원 call@donga.com
26일 오후 북-중 접경지역인 랴오닝성 단둥시 압록강변의 한 소규모 호텔에 짐을 푸는 북한 식당 종업원과 이들을 통제하는 보위부 요원 등 약 20명의 일행이 포착됐다. 본보와 채널A 취재진은 단둥 시내에서 캐리어를 끌면서 줄지어 한참을 호텔로 이동하는 이들을 추적했다. 한 식당 종업원에게 ‘북한으로 돌아가야 하는 거냐’고 묻자 답을 하지 않은 채 앞에 있는 남성을 “책임자 동지”라며 불렀고 이 남성 역시 답을 거부했다. 이날은 주말이라 중조우의교는 통행을 쉬었다. 대북 소식통은 “다른 지역의 북한 식당이 폐쇄돼 단둥을 거쳐 북한으로 돌아가기 위해 하룻밤을 머문 것으로 보인다”며 “중국 내 북한 기업 및 식당 퇴출 등 중국의 대북 압박 강화와 관련해 주목할 만한 모습”이라고 말했다.
단둥에서는 조만간 북한 무역대표부와 무역상 등 접경지역 무역 관련 북한 측 관계자들이 모두 북한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얘기까지 돌면서 긴장감이 높아지고 있다. 대북 소식통은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이 북한 김정은 노동당 위원장에게 특사 면담을 거부당해 분노한 것인 만큼 지금보다 대북 압박을 더 강화할 것”이라고 말했다.
중국 당국이 밀무역 단속을 강화할 뿐 아니라 북-중 무역 자체를 축소 및 제한하자 이를 회피하려는 밀무역 수법도 다양해지면서 북-중 간 충돌과 사고도 발생하고 있다.
올해 9월경 북-중 접경지역인 랴오닝성 단둥시 한 부두 인근의 압록강. 8월 15일부터 북한산 수산물 수입이 금지된 이후 몰래 수산물을 싣고 오던 중국 선박이 뒤집혀 선원 9명이 사망했다. 강화된 단속을 피해 한꺼번에 많은 수산물을 실었다가 발생한 사고였다.
취재 결과 단둥 일대에만 100여 개의 크고 작은 부두가 압록강을 따라 줄지어 있었다. 중국은 9월 수산물 관련 세관인 훈춘 취안허 해관 폐쇄 이후 접경지역 부두마다 해양경비병을 배치해 순찰했지만 코앞이 북한 땅이어서 수산물 수입업자들이 마음만 먹으면 언제라도 수산물을 밀수할 수 있는 환경이었다.
북한에 수산물 양식장을 보유한 중국 업자는 “내 양식장에서 가져온 건 수입이 아니다”라며 수산물을 들여오고 있고 당국이 이를 묵인하고 있다고 현지 소식통은 전했다.
내년 1월 9일까지 북-중 합작기업을 포함해 중국 내 북한 기업은 모두 철수하라는 중국의 조치 역시 북한 측이 꼼수를 통해 회피하는 움직임이 포착됐다. 사실상 중국 영주권을 갖고 있는 북한 국적자를 가리키는 조교(朝僑)에게 지분 일부를 넘기고 북한 식당을 명목상 공연을 하는 비영리기관으로 바꾸는 사례도 있다는 증언이 나왔다. 중국의 해당 대북 제재는 영리기관에만 제한된다.
한편 북-중 접경지역을 관할하는 북부전구(戰區) 소속 78집단군은 실전훈련에 돌입했다. 26일 중국 국방부는 북부전구의 ‘옌한―2017’ 훈련이 실전 단계에 들어갔다고 공식 웹사이트를 통해 밝혔다. 정확한 훈련 기간과 장소 등은 밝히지 않았으나 78집단군은 유사시 한반도에 투입되는 부대로 알려져 있다.
단둥=윤완준 특파원 zeitung@donga.com·정동연 채널A 특파원
11-29 “9월 美 폭격기 비행 뒤 北 주민들 사이에서 ‘곧 망한다’ 소문 퍼져”
日언론 “‘김정은만 죽여주면 좋을 텐데’ 얘기도”
미군의 전략폭격기가 지난 9월 동해 북방한계선(NLL) 이북을 비행한 이후 북한 주민들 사이에서 미군의 실제 공습 가능성에 대한 두려움이 확산되고 있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28일 일본 산케이신문 계열 석간 후지에 따르면 일본인 납북 피해자 지원 단체 ‘구출회’의 니시오카 쓰토무(西岡力) 회장은 최근 도쿄도내에서 한 강연을 통해 “북한 내부 인사로부터 들은 얘기”라며 이같이 밝혔다.
앞서 미 전략폭격기 B-1B ‘랜서’ 편대는 9월23~24일 동해상의 남북한 경계선인 NLL을 넘어 북한 쪽 국제공역을 비행했지만, 북한은 당시엔 이 같은 사실을 파악하지 못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와 관련 니시오카 회장은 “미군 발표를 통해 (폭격기 비행) 사실을 알게 된 김정은 북한 조선노동당 위원장이 원인 조사를 지시한 결과, ‘레이더 설비가 오래돼 스텔스 기능을 갖춘 폭격기의 비행은 파악할 수가 없다’는 보고가 있었다고 한다”고 설명했다.
니시오카 회장은 “(북한 당국은) 이 문제를 극비로 하고 있지만, 이미 주민들 사이에선 ‘(미군 폭격기가) 평양 상공까지 왔던 것 같다’, ‘우리나라(북한)는 곧 망한다’는 등의 소문이 퍼지고 있다”면서 “‘(미군이) 김정은만 죽여주면 좋을 텐데’란 얘기까지 나와 국가안전보위성에서 발설자를 찾고 있다”고 덧붙였다.
이와 관련 석간 후지는 “미국의 대북 군사적 압력이 확실히 효과를 발휘하고 있는 것 같다”고 전했다.
(서울=뉴스1)
12-14 北서 또 피바람? 황병서 출당·김원홍 수용소행說
북한 황병서 총정치국장과 김원홍 제1부국장의 처벌 수위가 중징계에 가깝다는 보도가 나오면서 북한 내부 동향에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지난달 국정원은 국회에서 열린 정보위원회 북한 관련 동향보고 간담회에서 황병서와 김원홍을 비롯한 총정치국 소속 정치 장교들이 처벌을 받았다는 첩보가 입수돼 주시하고 있다고 밝혔다.
지난 10월 노동당 제7기 2차 전원회의 인사개편에서 ‘2인자 자리’를 굳힌 최룡해 노동당 조직지도부장(추정) 주도로 당 지도부가 당에 대한 불순한 태도를 문제 삼아 군 총정치국에 대한 검열을 진행해 이들을 처벌했다는 것이다.
당시 국정원은 황병서와 김원홍에 대한 처벌 수위는 구체적으로 밝히지 않았는데 숙청 수준까지는 이르지 않았을 것이라는 관측이 많았다. 김정은 노동당 위원장 집권 6년 차를 맞아 체제도 안정기에 접어들어 피를 부르는 숙청이 필요하지 않다는 것이다.
그보다는 김정일이 표방한 ‘선군정치’로 권한이 커진 군에 대한 당(黨)의 ‘군기잡기’라는 분석이 더 많았다. 집권 이후 당 중심의 국가 체제로 돌아가려는 김정은이 군에 대한 당의 통제를 강화하는 차원에서 20년 만에 군 총정치국을 검열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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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황병서가 출당되고 김원홍이 수용소에서 수감생활을 하는 등 숙청에 가까운 중징계를 받았다는, 대북 소식통을 인용한 언론 보도가 나오면서 공포정치 조짐이라는 해석도 나온다.
특히 당 국가 체제인 북한에서 당적을 제거하는 출당 조치는 엄중한 수위의 처벌로, 정치적 생명이 끝났다는 의미인데 황병서의 출당이 사실이라면 북한 내의 권력구도 변화가 꽤 클 것으로 예상된다.
황병서와 김원홍은 지난 2013년 장성택의 숙청을 주도한 이른바 ‘삼지연 8인방’으로 김정은 시대 북한 권력의 핵심 주축으로 통한다. 황병서는 최룡해의 뒤를 이어 군 서열 1위인 총정치국장에 올라 최근까지 ‘서열 2위’였고 김원홍도 한때 국가안전보위상(한국의 국가정보원장)을 지냈다.
대북 전문가는 “공포정치나 내부 권력 투쟁보다는 군에 대한 당의 통제력 강화 일환일 가능성이 더 높다”며 “다만 재기가 어려운 수준의 출당 조치가 맞는다면 다른 군간부 엘리트에까지 상당한 충격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통일부 당국자는 12일 기자들과 만나 이에 대해 “관련 동향을 주시하고 있는데 공식적으로 확인된 사실은 없다”고 말했다. 국가정보원도 “확인해 줄 수 없다”고 전했다.
한편 통일부에 따르면 황병서는 지난 10월13일 만경대 혁명학원 창립 70돌 중앙보고대회를 마지막으로 북한 공식 매체에 등장하지 않고 있다. 김원홍은 지난 10월8일 김정일 당 총비서 추대 20돌 중앙경축대회 등장한 것이 마지막이다.
(서울=뉴스1)
12.24 "北교화소, 굶주림·전염병에 3일에 10명씩 죽어나가"
한 번 들어가면 살아서 나오기 힘든 것으로 악명 높은 북한 12호 전거리교화소에서 여전히 사망자가 속출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고된 강제노동에 굶주림, 전염병 등 국제 사회의 거듭된 규탄에도 불구하고 북한의 인권실태는 조금도 바뀌지 않은 것으로 풀이된다.
23일 미국의 북한 전문매체 자유아시아방송(RFA)은 일본 매체 ‘아시아프레스’를 인용, 최근 12호 전거리교화소의 인권유린 실태를 보도했다. 12호 전거리교화소는 주로 중국에서 강제북송된 북한 주민이 많이 수감되는 곳으로 밀수나 한국 드라마를 시청하다 적발된 사람, 각성제를 사용한 사람도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최근 이곳을 출소한 30대 북한 여성의 증언에 따르면 3일에 한 번씩 10구가량의 시체가 실려 나와 인근 산에서 소각되는 것으로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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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자가 속출하는 원인은 영양실조와 전염병으로 하루에 배급받는 식량은 450g 정도의 옥수수를 갈아만든 식사가 전부이다. 이에 비해 노동강도는 매우 세 교화소 내에 있는 뱀이나 쥐를 잡아먹어야 할 정도다. 또 위생 관리가 안 되는 상황에서 좁은 방에 너무 많은 사람들이 갇혀있다 보니 전염병이 한 번 발생하면 여러 명이 죽어나가는 것으로 전해졌다.
또 구타와 가혹 행위 때문에 다리가 부러져 불구가 된 사람도 있고, 거의 반 시체 상태로 형기를 마치고 풀려난 사람도 있다고 RFA는 보도했다.
이곳에 수감된 사람은 남성은 약 2000명, 여성은 약 600명으로, 남성은 인근 광산 채굴이나 목공 작업에 투입되고, 여성은 목공과 가발 만들기에 배치되는 것으로 전해졌다.
수감자 중 일부는 가족이 자주 면회를 와서 식량을 넣어주고 간수들에게 돈을 쥐여줘 겨우 살아남았지만 면회 올 가족조차 없는 사람들은 사망할 확률이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지난해 한국 통일연구원이 발간한 ‘북한 교화소’에 관한 보고서에 따르면 전거리교화소는 하루 1~2명이 사망하고, 전염병이 발생하면 하루에 30~50명 이상이 사망했다.
미국 ‘북한인권위원회’가 지난 10월 발표한 보고서에 따르면, 양강도를 제외한 북한 모든 지방에 한 개 이상의 교화소가 있고, 전거리교화소, 개천교화소를 비롯해 확인된 곳은 6곳, 미확인된 곳만 19곳으로 알려졌다.
지난 23일 조아킨 카스트로 미국 하원의원은 미국의 소리(VOA)와의 인터뷰에서 북한 김정은에게 인권유린을 자행하고 억압 정권을 세운 것에 대해 책임을 물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또 그는 북한 붕괴 등 여러 시나리오에 대해 미국 정부와 군은 준비돼 있다고 언급하며, 정보위 활동 등을 통해 파악한 정보에 따르면 김정은이 강한 지도자가 아니라고 말했다.
이경민 기자
12.27 탈북민 88% "北서 영상물 봤다"… 한류는 北 무너뜨릴 '트로이 목마'
[오늘의 주제: 빗발치는 총탄 뚫고, DMZ 지뢰밭 넘어 귀순하는 北병사들… 이들은 北서 한류 접한'새 세대'] 인기 드라마, 일주일이면 北으로 들어가… 北선 南노래 한두 곡 알아야 '세련된 사람'
黨간부부터 최전방 군인까지 몰래 시청… 한류가 北정권 장악력에 균열 내고 있어
北, 단속조 만들고 밀수 막으려 난리지만… 장마당, 軍과 뇌물로 통하며 한류시장 형성
5발의 총상을 입고 사경을 헤매던 북한군 병사가 기적처럼 깨어났다.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그가 갈망했던 것은 무엇일까. 의식이 돌아온 후 병실에서 그는 걸그룹 소녀시대가 부르는 '지(Gee)'를 들었다. 소녀시대와 영화를 좋아한다는 그는 북한에서 한국 문화를 접한 이른바 '새 세대'로 불린다. 지난 21일 중서부전선 비무장지대(DMZ) 지뢰밭을 뚫고 귀순한 10대의 북한 군인도 마찬가지다.
국내 입국한 탈북민을 대상으로 매년 진행하는 연구 조사에 따르면 10명 중 8명(88%·2016년 조사)이 북한에 있을 때 한국 영상물을 접한 적이 있다. 인기 드라마는 일주일 정도 지나면 북한에 들어간다. 2000년대 초반 한류를 주도했던 드라마 '천국의 계단' '가을동화' '대장금'은 북한에서도 단연 인기가 좋았다. 북한에서 한 번이라도 남한 영상물을 접해본 사람들이 가장 많이 본 드라마로 꼽는 프로그램은 '천국의 계단'이다. 최근에는 드라마·영화뿐 아니라 '1박 2일' '전국노래자랑' 같은 예능 프로그램도 인기다. 북한 주민 사이에는 남한 노래 한두 곡 정도는 부를 줄 알아야 '세련된 사람'이라는 소리를 듣는다고 한다. 북한 가요는 '사상'만 강조하지만 한국 노래는 '사랑'을 주제로 인간의 감정을 노래한다는 점에서 남다른 의미로 다가온다.
북한 내 한류는 외부 정보 접촉이 제한된 북한 주민들에게 남한을 이해하는 기회의 창이다. 북한 주민들은 평소 당국으로부터 교육받은 '썩고 병든 자본주의 남한'이 아닌 '자유와 인권이 보장되며 경제적으로 발전한 남한'을 경험한다. 한국의 발전상 및 민주화에 대한 인식은 자연적으로 북한 체제에 대한 불만과 불신으로 이어진다.
일반 주민은 물론 당·정·군 고위층과 통제가 심한 최전방 정예 군인까지도 한류의 유혹을 떨치지 못하는 게 현실이다. 북한 당국은 "외부 사조에 대한 단속과 제국주의 사상·문화 침투 봉쇄"를 강조하며 체제 결속을 강화하고 있다. 비(非)사회주의 행위를 단속하는 별도의 단속조를 운영하고, 북한 내 유입 통로인 국경 밀수를 엄격히 차단하는 조치를 취했다. 그러나 단속에는 한계가 있다. 시장화와 연계된 조직이 생겨나고 뇌물로 인한 봐주기 현상이 만연하고 있다.
한국 영상물 시청을 위한 기기는 북한 장마당에서 인기리에 거래되는 품목이다. 북·중 접경 지역에서 북한 내륙으로 이어지는 밀수망(網)은 국경경비대 및 간부들과 조직적으로 연계되어 있다. 한국 영상물 시청을 위한 기기들도 빠른 속도로 진화하고 있다. 일명 '노트텔'로 불리는 EVD 플레이어, 중국산 저가 태블릿 PC가 인기다. 북한말로 엠피오(MP5)라 불리는 디지털 기기도 중국을 통해 북한으로 유입되는데, 기존의 USB보다 더 작은 마이크로 SD 카드를 사용하는 게 특징이다. 녹화기와 텔레비전을 연결하여 '알판(VCD)'으로 시청하던 방식을 넘어 다양한 디지털 기기가 북·중 국경을 통해 북한 내륙으로 유입된다.
기기의 진화로 한국 영상물 시청이 빠르게 확산되고 있다. 특히 장마당을 통해 거래하는 까닭에 인적·물적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경제적으로 궁핍한 군인들이 뇌물을 받고 지역 간 이동을 무마해 주는 사례도 발생하고 있다. 장마당 상인은 군인과 조직적으로 연계하면서 북한 사회에 '한류 시장'을 형성하고 있다. 북한 군인처럼 한국 영상물 유통을 막아야 하는 이들이 오히려 더 많이 시청하는 북한은 변화할 수밖에 없다.
선군정치 이념 아래 군부의 위상과 권력이 막강한 북한 체제에서 군인의 기강은 체제의 유지·변화 여부와 직결된다. 북한 군인들이 외래문화를 접하고 의식과 행위 양식이 변한다는 사실은 체제 내구력을 약화시키는 요인이다. 한국에 대해 적대감 대신 '나도 저런 나라에서 살아봤으면' 하는 동경이 생기고 체제에 대한 충성도와 결속력이 떨어진다.
단순한 호기심과 재미 위주로 한국 영상물을 시청하는 경우도 있다. 단순 시청이 곧 체제 변화라는 거시적 변화로 직결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사상 통제와 학습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지고 처벌이 강도 높게 진행됨에도 여전히 북한군 내에서 한국 영상물 시청이 근절되지 않는다는 점은 북한 당국의 통제와 장악력에 한계가 있음을 보여준다. 사상 통제와 학습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뇌물을 주고 단속을 무마할 수 있는 구조라는 점에서 장악력이 지속적으로 떨어지고 있다.
북한이 '화성 15호'를 발사하며 핵 무력 완성을 자랑하지만 안으로부터의 균열과 틈새는 체제 변혁의 가장 큰 위협 요인이다. 한국 드라마와 K팝이 '21세기의 트로이 목마' 역할을 하고 있다. 더 공세적인 외부 정보 유입을 통해 북한 주민이 북한 정권의 실체를 인식하고 사회 변화를 이끄는 주체가 될 수 있도록 방법을 찾아야 한다. 소녀시대 '지(Gee)'에 열광하는 최정예 군인들을 보며 김정은은 그 노랫말처럼 '깜짝 놀라 몸이 떨려 잠도 못 이룰지' 모른다. '제국주의 사상 문화' 침투를 봉쇄하기 위해 김정은이 엑소(EXO)의 노래처럼 '으르렁으르렁'대도 북한 주민이 '한류'를 즐기는 것을 막지는 못할 것이다. 부드러운 힘 '소프트 파워'이기 때문이다.
강동완 동아대 교수·부산하나센터장
12.27 北정권의 고민거리 된 지 오래… 김정은 "非사회주의 섬멸하라"
기자가 본 '북한의 한류 중독'
"선생님, 매일 숨어서 남조선 영화를 볼 게 아니라 차라리 남조선 가서 인간답게 살아요."
양강도 혜산 출신으로 대학에 다니던 서옥화(이하 가명)씨는 2013년 함께 한국 드라마를 보던 교수에게 한국에 갈 것을 제안했다. 교수는 제자의 말에 동의했다. 사제가 동반 탈북한 첫 사례다. 한국 드라마를 함께 보고 남한 사회를 동경하며 동반 탈북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
청진 출신 최미연씨는 "한국 영화를 보면서 '남조선에서 태어났으면 좋았겠다'는 생각을 수도 없이 했다"며 "남조선 '알판'(영화·드라마 CD)을 중국에서 받아 팔기도 했다"고 했다. 최씨는 "중학생 아들도 친구들과 알판을 돌려봤다"며 "덕분에 2014년 탈북할 때 아들을 설득하기가 쉬웠다"고 말했다. 평양에서 군 복무 중이던 2016년 탈북한 오은국씨는 드라마 '태양의 후예'를 보고 송중기와 송혜교의 팬이 됐다고 했다. 이 때문에 "먼저 탈북한 가족이 한국에 오라고 했을 때 거부감 없이 탈북을 결심했다"고 했다.
북한 주민의 한류 콘텐츠 '중독' 현상은 북한 정권의 고민거리가 된 지 오래다. 김정은 노동당 위원장은 지난 23일 막을 내린 제5차 당 세포위원장 대회 연설에서 "지금 미제와 적대 세력들이 우리 내부에 불건전하고 이색적인 사상 독소를 퍼뜨리고 비사회주의적 현상들을 조장시키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있다. 비사회주의적 현상과 섬멸전을 벌리라"는 지시를 내렸다. 하지만 한국 드라마 단속기구인 '109상무'에서 근무하다 2014년 탈북한 안영실씨는 "단속하는 당 간부들이 한국 드라마를 더 많이 본다"며 "힘없는 사람들이 주로 단속에 걸리는데 뇌물 2000달러를 내면 눈감아 준다"고 했다.
김명성 기자
12.29 북(北)에 억류됐던 어느 종교인이 털어놓는 실상
“라면 맛 알게 된 북한 군인들, 남한 동경하게 돼”
⊙ 최근 한 모임에서 북한 억류상황과 주민들의 생활상 밝혀
⊙ “김일성 빼고 하나님 넣으면 되고, 김정일 빼고 예수님 대입하면 된다”고 강연한 걸 빌미로 특대형 국가전복음모죄로 종신형 선고받아
⊙ “100달러면 10년 군대 복무해야 받을 수 있는 당원증을 즉시 구입할 수 있어”
⊙ “겨울날 산에 올라 곡괭이질… 수용생활 두 달 새 몸무게 23kg 빠져 팔다리 못 움직이고 숨 쉬기 힘들어 잠도 못 자”
▲2011년 12월 20일 아침 북한 개성으로 향하는 출입구인 경기도 파주 통일대교에서 군 관계자가 몰려든 취재진을 통제하고 있다. 북한에 3년 가까이 억류됐다가 최근 풀려난 한 종교인은 강연에서 구금 당시 상황과 북한 민생의 실상에 대해 밝혔다. 사진=조선DB
북한에 3년 가까이 억류됐다가 최근 풀려난 한 종교계 인사가 구금 당시 상황과 북한 실상에 대해 밝혔다.
그는 1997년부터 100차례 이상 북한을 오가며 고아원과 노인 요양시설 지원, 빈민 구호 활동 등 인도주의 사업을 해왔다. 2015년 1월 북한 나선 지역에서 평양으로 이동하던 중 북한 당국에 의해 체포되기도 했다. 같은 해 12월 ‘국가 전복’ 혐의로 무기(無期)노동교화형을 선고받은 뒤부터 3년 가까이 억류생활을 하다 최근 병보석으로 석방됐다.
뼈만 남은 아이들
▲2014년 11월 30일 북한 주민들이 벌거숭이산 넓은 면적에 수십만 그루의 나무를 심었다고 조선중앙TV가 보도했다. 종교인의 강연에 따르면 함경남도의 산지(山地)는 ‘벌거숭이’ 민둥산이라고 한다. 그는 “30년간 나무 심어도 복원이 어려울 듯하다”고 했다. 사진=조선DB
이 인사는 최근 국내 모임에 참석해 북한 사정에 대해 설명했다. 자신이 지금껏 실행해 온 대북 인도 지원 민간 사업과 기독교 전도(傳道) 활동, 억류 후 수용생활 등에 대해서도 자세히 이야기했다.
연단에 선 그는 조곤조곤 설명하는 어조였지만 말뜻은 단호했고 내용은 분명했다. 북한에 억류될 당시의 사정과 인도 지원 사업의 성공 사례들, 수용생활의 고단함을 회고할 때는 감회에 젖은 듯 탄식이 묻어나오기도 했다. 강연 후반부로 갈수록 그의 기력은 오히려 더 생기와 활력을 찾은 듯 보였다.
그는 프레젠테이션 자료를 TV 모니터 화면에 띄워놓고 강연을 시작했다. 주로 북한 인도 지원 사업에 관한 사진들이었다. 극심한 기아에 허덕이는 북한 아이들, 식량 지원과 선교 활동의 기록들, 전답을 경작하는 모습과 교육 사업 결과물 등 사진이 담고 있는 장면은 다양했다.
이 인사는 먼저 북한의 기아 상태를 설명하며 말문을 열었다. 그는 “탁아소마다 마치 콩팥 이상이나 말기 암 환자처럼 복수로 가득한 배와 뼈만 남은 아이들이 수두룩하다”며 “마른 강냉이를 먹고 연명하는데, 걷지도 못한다”고 말했다. 또 “북한은 1997년도부터 300만이 아사했고 780만이 영양실조 상태”라며 “지금도 고아원 하나에 3000명의 아이들이 수용돼 있다”고 말했다.
그는 북한의 이른바 ‘고난의 행군’ ‘천리마 및 만리마 운동’ 등으로 많은 주민이 죽거나 다쳤다고 말했다. 고관들은 여성을 노리갯감으로 삼았고, 그로 인한 사생아(私生兒) 비율이 높다고 했다. 병영 내에서 군인들도 많이 죽는다고 했다.
영양실조로 인해 학생들의 발육상태도 부진하다고 그는 말했다. 14~18세 중고등학생 나이의 아이들이 한국의 초등학생 정도의 체격이라는 것이다. 남벌(濫伐)로 인한 자원 고갈도 심각하다고 했다. 함경남도의 산지(山地)는 대부분 ‘벌거숭이’ 민둥산이라고 했다. 이 인사는 “30년간 나무를 심어도 복원이 어려울 듯하다”고 말했다. 사진으로 본 평양의 기차들 또한 그의 비유대로 ‘폐차’ 같았다. 문짝과 창문조차 제대로 없었다.
“남조선 사람들은 어떻게 이렇게 ‘맛있는 것’ 먹나”
▲2009년 4월 7일 북한 조선중앙TV가 광명성2호 발사 장면을 최초로 공개하면서 당시 발표한 뇌졸중 이후 김정일의 모습. 이 종교인의 헌신에 한때는 북한 인도 지원사업에 대해 김정일의 지원까지 있었다. 그는 “언젠가 북한 당국에서 편지 하나를 보내오더라. ‘이분들이 하는 일에 대해 일절 방해하지 말라’는 식의 ‘무사통과증’ 같은 내용이었다”고 회상했다. 사진=조선DB
이인사는 이같이 곤경에 처해 있는 북한 주민들을 돕고자 해외동포 기업가들과 함께 인도적 지원 사업을 추진해 나갔다고 한다. 그는 “해주, 사리원, 청진, 함흥 등 1만350명의 북한 주민들을 책임진다는 생각으로 먹이고 입혔다”고 말했다.
“라면 공장을 운영해 4만 개의 국수 제품을 만들고 해당 공장에서 일하는 주민들에게 급여와 식량을 지급했다. 선양에 있는 라면 20억원어치를 사서 트럭 1500대에 나눠 실어서 원산 고아원과 군인들에게 지급했다.”
이 인사는 “한국 라면의 맛을 알게 된 북한 군인들은 적개심 가득했던 눈빛을 고치고 남한에 대한 동경심을 키웠다”고 말했다. 북한 군인들은 “어떻게 남조선 사람들은 이렇게 맛있는 것(라면)을 먹을 수 있느냐”며 신기해했다고 한다. 그는 “18년간 수만 톤의 식량 지원을 했다”고 밝혔다.
그의 지원 사업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후원자의 기부로 안경 80만 개를 기증했고, 의사 출신이 북한 주민을 치료했다. 양로원을 짓고, 영어 교육을 했으며, 개성공단 재가동을 위한 운동도 했다. 가발공장 운영, 블루베리 경작 자문 등을 했고, 함경북도 내 큰 호수를 논으로 탈바꿈시키기도 했다. 위생 관리를 위해 2000명 이상이 들어갈 수 있는 대형 목욕탕을 지었으며, 도서관도 지었다. 북한 스포츠 선수들의 설비 등도 지원했다.
이 종교인의 헌신에 한때는 해당 지원 사업에 대해 북한 김정일의 전폭적인 지원까지 있었다고 한다.
“언젠가 북한 당국에서 편지 하나를 보내왔다. ‘이분들이 하는 일에 대해 일절 방해하지 말라’는 식의 ‘무사통과증’ 같은 내용이었다.”
그에 따르면 18년간의 대북 인도 지원 사업 추진을 통해 150번가량 북한을 방문했다고 한다. 그런 그가 왜 3년 가까이 감옥살이를 했던 것일까.
“곡사포로 당신을 죽이고 싶다”
이 인사는 억류 당시를 회상했다. 그는 “평양 및 나진 선봉 등 북한에 지원 사업을 하러 갔다가 조사 당국에 잡혀 10개월을 조사받았다”며 “국정원과 관계됐는지, 미국과 관계됐는지 등 18년간 내가 북한에서 인도 지원 사업을 벌인 것들을 조사하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처음에는 ‘최고존엄 모독’으로 사형이 구형됐다. ‘수령과 인민을 갈라놨다’는 이유였다. 이후 ‘특대형 국가전복음모죄’로 변경돼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그는 “북한 조사 당국이 ‘계급적 원수는 용서할 수 없다’고 했다”고 말했다.
“‘계급적 원수는 절대 안 변한다’는 북한의 철학이었다. 일종의 ‘씨암탉’ 개념이다. 공산당의 철칙으로, 계급적 원수는 새끼를 쳐서 계속 북한 사회를 불온하게 만들기 때문에 제거해야 한다는 의미다.”
그는 “실컷 도와줬는데 결국은 그렇게 됐다”며 안타까워했다. 그가 과거 했던 발언들도 문제가 됐다.
“한 강연에서 ‘북한은 (김씨 부자 숭배 등으로) 신학적 오리엔테이션이 잘 활성화돼 있다’ ‘김일성을 빼고 하나님을 넣으면 되고, 김정일을 빼고 예수님을 대입하면 된다’는 등 얘기하며 북한에서의 기독교 전도의 중요성을 강조한 적이 있다. 그러면서 (북한의 김씨 왕조 우상숭배 비판을) 조금 세게 했다. 북한 관리들이 어떻게 알았는지 그걸 녹음한 것을 들이밀었다. 당시 제일 계급이 높았던, 김일성주의에 도취된 조사관은 나를 ‘그냥 죽이고 싶지 않다. 곡사포로 널 죽이고 싶다’고까지 말했다.”
최고존엄, 즉 수령 모독죄에서 다시 특대형 국가전복음모죄가 씌워지고 죄명 몇십 개가 더해졌다고 한다. 당시 그는 겨울철에 두 달간 중노동을 한 결과 몸무게가 23kg이나 빠졌다고 한다. 팔다리가 움직이지 않았고 손가락도 굽혀지지 않았다고 한다. 급격하게 살이 빠져 숨 쉬기가 힘들어 밤에 잠을 못 잤다고도 했다.
“겨울날 산에 올라가 곡괭이질을 했다. 중노동에 몸 위에서는 땀이 흐르는데 발은 양말 4개를 신고도 너무도 시렸다. 새카맣게 동상이 걸려 의사에게 보이니 ‘조금만 더 지났으면 절단했어야 했다’고 했다. 여기에 여러 가지 합병증이 더해졌다.”
북한 감독관, “당신을 친구 삼고 싶다”
그는 금식기도를 하며 고된 노역을 버텨냈고, 몸 상태가 좋지 않아 병원에 들어가서는 성경을 읽으며 마음을 다잡았다고 한다.
“한 발짝도 움직일 수 없고 창문도 없이 그대로 앉아 있는 병원은 수용소보다 편했지만 역시 감옥 같은 곳이었다. 그래도 잠자는 시간 말고는 성경을 자유롭게 읽을 수 있었다.
나의 강인한 신심에 놀란 한 북한 감독관은 ‘이번 사건만 아니면 당신을 친구 삼고 싶다’고까지 말했다. 나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고, 나의 설교 내용 5년 치를 독파하며 자신도 모르게 감화된 것이 아니었을까 싶다.”
이 종교인은 당시를 회고하며 “사실상 내가 VIP였더라”고 말했다. 50명 정도의 감시 및 보조인원이 자신이 혼자 있는 옥사를 관리했으니 일종의 특별대우 아니냐는 역설적 얘기였다.
“그때가 내가 목회를 한 지 30년이 되던 해였고 환갑에 이른 나이였다. 나도 모르게 깃든 매너리즘을 치유할 수 있었던 기회였다. 내가 당시 좀 흔들려서 ‘한 6개월 정도 수도원을 다녀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주님께서) 그걸 다 들으시고 거의 완벽한 수도원을 2년 넘게 다녀올 수 있도록 해주신 것 아닌가 싶다. 당시의 억류 생활이 나의 영적 청춘을 회복시켰다.”
이 인사는 병원과 수용소에 있을 때 TV로 북한의 뉴스를 접하고 북한서적도 100여 권 정도 읽었다고 한다. 당시 북한 보도에서는 정식 뉴스에서조차 미국에 대한 심한 욕설과 폭언, 증오, 적개심 등을 표출했고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비방도 일삼았다고 한다. “그냥 죽이면 안 된다. 때려죽이고, 말려 죽이고, 태워 죽여야 한다”고 극언했다고 한다.
그는 “지원 사업을 통해 북한을 오가고 억류 생활하는 동안 공산주의의 폐해를 직시하게 됐다”고 했다.
“교육도 의료도 무상이지만 병원에는 치료약이 없다. 학교에는 공책이 없다. 공산화의 의미가 없다. 인민들의 배급량은 줄었다. 달러 가치는 높아 100달러면 10년 군대 복무해야 받을 수 있는 북한 당원증을 즉시 구입할 수 있을 만큼 암시장이 발달했다. 북한 관료사회는 형식주의와 거짓 보고가 일상이다. 그로 인한 북한의 인적, 물적 피해는 공식 집계된 것보다 훨씬 많을 것이다.”
이 종교인은 “북한을 지금도 잘 모르지만 억류돼 수용 생활을 하면서 하나는 제대로 느꼈다”고 말했다. “그동안 나는 베풀고 주는 자로서만 다녔지, 주민들의 고난에 직접 동참하지 않았다. 수년간 구금되면서 북한 주민들의 고통을 절실히 느꼈다.”
“그래도 인도적 지원해야”
▲동해선 북한 쪽 출발역인 금강산청년역 근처에서 북한 주민들이 철도 보수를 하고 있다. 이 종교인은 강연에서 자신을 억류한 북한을 여전히 용서하고 사랑한다고 말했다. 그는 “인도적 지원에 대한 논란이 분분하지만 그래도 그들을 살려야 민족의 장래가 있다”며 “인도적 지원이 없으면 생계가 어려운 친남파(親南派)는 죽고, 적대적인 고위급들은 어떻게 해서든 살아남는다”고 말했다. (사진과 기사 내용은 직접 관련 없음) 사진=조선DB
강연 말미에 이르러 그는 북한과 달리 “하나님이 축복해 주신 대한민국은 전 세계에서 상위 5%, 10% 이상에 드는 국가”라며 “앞으로 교회가 바로 서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는 “‘은혜를 원수로 갚은’ 북한을 여전히 용서하고 사랑한다”면서 “인도적 지원에 대한 논란이 분분하지만 그래도 그들을 살려야 민족의 장래가 있다. 인도적 지원이 없으면 생계가 어려운 친남파(親南派)는 죽고, 적대적인 고위급들은 어떻게 해서든 살아남는다”고 말했다.
그는 “고난은 통과하지만 번영은 통과하기 힘들다”면서 “어려움은 이겨내도 번영은 도취돼 쓰러진다. 잘산다고 자만하지 말고, 하나님이 회복할 기회를 주실 때 정신 차리고 새벽기도에 나가야 한다”고 말했다.⊙
글 : 신승민 기자 월간조선 1월 호
12.30 탈북 핵과학자, 北에 끌려간 뒤 자살
미국 자유아시아방송
"한국 망명하려다 中 공안에 잡혀… 구금 중 독극물로 목숨 끊어"
탈북했다가 중국 공안에 체포돼 북송된 북한 핵융합 과학자가 보위부에 구금 중 독극물로 자살했다고 미국의 자유아시아방송(RFA)이 29일 현지 소식통을 인용해 보도했다.
자살한 핵 과학자는 평양시 은정구역 과학2동에 위치한 국가과학원 물리연구소에서 핵융합 분야를 담당한 실장급 간부인 것으로 전해졌다.
이 과학자는 지난 11월 4일 중국 선양에서 체포돼 11월 17일 신의주로 송환된 탈북민 일행 가운데 한 명인 것으로 알려졌다. 방송은 "(핵 과학자가) 신의주 보위부에 끌려와 독방에 구류된 지 불과 몇 시간도 안 돼 자살했다"며 "조사도 받기 전이라 탈북 동기나 경로 등을 알아내지 못한 상태"라고 설명했다.
핵 과학자는 북한에서 최고의 대우를 받지만 방사능 노출 우려 때문에 탈북을 시도하는 경우가 적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RFA는 "자살한 과학자가 자신이 진행하는 연구에 대해 불안감을 호소하고 정신불안 증세를 보여 한동안 휴가를 받았다"며 "여행증명서 없이 북·중 국경 부근의 친척 집에 갔다가 사법기관에서 쫓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 중국으로 넘어갔던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그러나 이 과학자의 탈북 시기와 경위 등은 밝혀지지 않았다.
대북소식통은 "북한 당국이 핵 과학자들에게 아파트·식량·고기·식당 이용권 제공 등 많은 특혜를 주고 있지만 이들은 허술한 안전장비에 의지해 방사능을 맞으면서 핵실험을 한다"고 전했다. 그래서 "그곳에서 빠져나오려는 사람이 적지 않다"는 것이다.
과학자 출신의 탈북민 서승규(가명)씨는 "김일성대와 김책공대 핵물리학부는 지원자가 없어 성적이 가장 높은 순위로 강제 배치한다"고 했다. 북한 공안기관 출신 탈북민 김도철(가명)씨는 "2000년대 초반 평성과학원 핵 과학자 2명이 중국으로 탈북해 수배 전단을 뿌리며 잡으러 다닌 적도 있다"고 전했다.
김명성 기자
2018.01.15 황병서, 왜 갑자기 몰락했나
北 권력 2인자' 軍총정치국장 은퇴
장성급 처형에도 방관하다가 숙청… '김정은의 軍장악력 하락' 분석도
북한 권력의 2인자로 꽤 오랫동안 권력을 누려오던 황병서 인민군 총정치국장이 갑자기 현직에서 물러났다. 평양 내부에서는 고령으로 은퇴했다는 소문이 돌지만, 대북 정보 기관 분석과 탈북자들의 증언을 종합하면 내막은 숙청으로 알려지고 있다.
최룡해 후임으로 인민군 총정치국장을 맡은 황병서는 노동당 조직지도부에서 군 간부사업을 하던 사무직 간부 출신이다. 그는 최룡해보다 군관(장교)들의 인물 신상에 밝은 강점이 김정은의 눈에 들었고 아부·아첨으로 승승장구했다.
그의 몰락은 지나친 아부·아첨에서 시작됐다는 관측이 많다. 김정은 시대에선 군인들이 많은 수난을 겪고 있다. 김정일 사망 직후 그와 의형제 사이였던 오극렬 노동당 작전부 부장이 먼저 위기에 내몰렸다. 최정예 특수부대인 작전부를 관장하고 있는 오극렬이 나쁜 마음만 먹으면 김정은에게 큰 위협이 될 수 있었기에 그는 '눈엣가시'였다. 오극렬은 모든 권력을 내려놓고 온갖 아부를 바친 다음 간신히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고 한다.
능력 있는 장군으로 꼽히던 리영호 인민군 총참모장은 김정은 초기 최룡해와의 갈등으로 숙청된 후 처형됐다. 장성택을 따랐다는 이유로 인민보안부, 내무군의 장성급 간부들도 무더기로 공개 처형됐다. 변인선 인민군 총참모부 작전국장은 중국과의 갈등을 풀어보려다가 밉보여 고사총에 맞아 죽었고 현영철 인민무력부장은 김정은이 참석한 훈련대회에서 졸다가 처형당했다.
▲북한 김정은 노동당 위원장이 6차 핵실험 관계자를 위해 개최한 축하 연회 장면을 조선중앙TV가 2017년 9월 10일 보도했다. 이 자리에서 김정은은 고위 간부들에게 핵개발 책임자인 리홍섭 핵무기연구소장을 소개했다. 군부 서열 1위 황병서 군 총정치국장이 상장(별 3개)인 리홍섭에게 깍듯하게 경례하는 모습이 포착됐다. /조선중앙TV
인민군 총정치국장 자리는 군인들의 애로사항을 풀어주고 그들을 방어해주는 게 주 임무다. 하지만 황병서는 김정은의 감정을 풀어주는 해결사로서 아첨하는 데 급급했다. 많은 군 간부가 처형당하는데도 아무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총정치국 소속 간부들은 한 명도 죽은 사람이 없는데, 다른 장성급과 고위 장교들이 무수히 희생당하다 보니 군부 내 갈등이 고조됐다고 한다.
유엔 제재가 본격화되면서 외화벌이 회사들을 거느린 총정치국도 흔들렸다. 총정치국이 인민군 물자 공급에 실패하면서 식량공급이 악화된 것이다. 특히 총정치국 주도로 군인들이 농민들의 식량을 헐값에 강제 수매한 게 결정타가 됐다.(김정은은 농업 개혁의 일환으로 농사 소출의 3할을 국가 세금으로 내고 나머지는 농민 몫으로 인정하는 3:7제를 도입했다.)
농민들이 군량미 수매 거부를 벌이며 식량 개별 비축에 들어가자 군량미 확보가 잘 안 돼 인민군대가 굶주리게 됐다. 그러자 "핵과 미사일에는 천문학적 돈을 쏟아부으며 종사자들에게 온갖 혜택을 주는데 군인들은 총살과 굶주림밖에 남은 게 없다"는 불만이 퍼지며 김정은에게 불똥이 튀었다. 최근 입국한 군관 출신 탈북자는 "대표적 군관양성학교인 강건군관학교에 생도가 미달될 정도로 군대의 인기가 폭락했다"고 전했다.
이런 사태에 누군가는 책임을 져야 했는데, 황병서가 결국 '제물'이 됐다는 게 북한 소식통들의 전언이다. 20년간 검열의 무풍지대였던 총정치국에 대한 검열이 진행됐고 간부 한 명이 '미국 은행'이라고 불릴 정도로 엄청난 달러를 몰래 숨겨놓고 있음이 드러났다고 한다.
총정치국이 쑥대밭이 되면서, 총정치국 소속이 아닌 군인들의 한(恨)은 잠깐 풀렸으나 김정은의 군 장악력은 현저하게 떨어졌다는 분석이 나온다. 이런 움직임은 김정은 체제가 생각보다 견고하지 않다는 징표로도 해석할 수 있다.
강철환 북한전략센터 대표
01-30 北에 신종독감 확산… 8만여명 감염
백신-치료제 부족… 4명 숨져
노동신문, 피해상황 언급없이 보도
평창 남북교류 앞두고 방역 비상
북한에서 신종 독감이 발생해 지난해 12월부터 8만여 명이 감염됐고 이 중 어린이 3명 등 4명이 사망한 것으로 나타났다. 최근 민통선 인근 강원 지역에서 발생한 북한 내 구제역에 이어 독감까지 퍼지면서 평창 겨울올림픽과 남북 교류 행사 때 철저한 방역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국제적십자사연맹(IFRC)은 ‘북한 A형 인플루엔자 발병’ 보고서를 통해 지난해 12월부터 올 들어 이달 16일까지 A형(H1N1) 신종 독감에 걸린 환자 수가 8만1640명, 의심사례는 12만7000여 건에 이른다고 발표했다고 미국의소리(VOA) 방송이 28일(현지 시간) 보도했다. 북한 노동신문도 28일 ‘신형 독감과 그 예방대책’이라는 기사를 실었으나 정작 북한 내 피해 상황은 전하지 않았다.
북한에서 유행하는 A형 신종 독감은 국내에서도 유행하는 독감이다. 다만 북한에서는 백신 및 치료제 부족 등 열악한 보건 환경으로 상대적으로 심각한 감염병에 해당한다. VOA에 따르면 북한의 요청으로 세계보건기구(WHO)는 백신과 치료제 오셀타미비르 3만5000여 정을 지원했고, 현재 5000정이 현지에 도착한 것으로 알려졌다.
일각에선 북한 선수단과 예술단 등이 방남하는 과정에서 신종 독감이 국내에 퍼질 가능성에 대해 우려하고 있다. 이에 전문가들은 국내에는 치료제가 충분하고 백신으로 예방할 수 있어 크게 우려하지 않아도 될 것으로 보고 있다. 조용균 가천대 길병원 감염내과 교수는 “신종 독감은 2009년에 이미 국내뿐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크게 유행했다. 우리나라 국민들은 이 독감 바이러스에 집단면역이 된 상태라 다시 크게 유행할 가능성은 별로 없다”고 했다. 정부는 북한 선수들이 들어오는 모든 육로 지역에서 열 감지기 등을 설치해 독감 전파에 대비하고 있다.
신종 독감에 걸리면 대개 고열과 두통, 근육통을 동반하고 인후의 염증, 통증, 기침 등 호흡기 증상이 나타난다. 박기준 질병관리본부 검역지원과장은 “발열이 발견되면 문진을 한 뒤 선수단 및 올림픽조직위 측에 알리고, 타미플루 처방을 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백태현 통일부 대변인은 29일 “독감 발생 관련 동향을 계속 지켜보고 검역에 만전을 기하겠다”고 밝혔다.
신나리 기자 journari@donga.com·이진한 의학전문기자·의사
01월 30일 북한내 中기업들도 대거 짐쌌다…北에 직격탄
중국내 北 기업들 퇴출 이어
車·광물 등 합작회사 10여곳
유엔제재 따라 10일전후 철수
대북소식통 “中당국 지시인듯”
北 직격탄…경제난 점점 가중
이달 중순을 전후로 북한에 합작·합자 형식으로 진출한 중국 기업들이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대북 제재 결의에 따라 대거 철수한 것으로 파악됐다. 국제사회의 대북 제재로 중국 내 북한 기업에 이어 북한 내 중국 기업들마저 철수하면서 북한의 경제난이 심화되고 있는 것으로 분석된다.
30일 복수의 대북 소식통에 따르면 북한 내 중국 기업들이 유엔 안보리 대북 제재 결의 2375호에 따라 이달 10일을 전후로 철수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들 기업은 주로 합작·합자 형식으로 2000년대 초반 이후부터 북한에 진출한 자동차 및 자전거, 광물, 경공업 회사들이다. 자동차 회사의 경우 2007년부터 북한에 합자 형식으로 진출해 대형·중형 트럭 등을 생산한 화천자동차회사(華晨汽車), 북한과 합자해 트럭을 조립해 판매한 조선김평(金平)합영회사가 포함됐다. 2013년부터 북한에 자동차를 수출한 화타이자동차회사(華泰汽車) 등도 철수했다. 대북 소식통은 “중국 기업의 철수는 사실상 중국 당국의 지시에 따라 이뤄진 것으로 알고 있다”고 전했다.
2005년부터 북한과 합자 형식으로 자전거를 조립해 판매한 중조평진(平津)자전거합영회사도 북한을 빠져나왔다. 북한에 수십억 위안을 투자해온 철강, 탄광, 금광, 동광 등의 북·중 합작 광물 회사와 북한 담배 공장과 합작 기업인 지린(吉林)성의 백산연초합영공사도 중국으로 철수했다. 합작·합자 형식은 아니지만 북한에 진출한 화웨이(華爲)와 중싱(中興·ZTE) 등의 중국 통신회사도 더 이상 사업을 지속할 수 없다고 판단해 북한을 나온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해 11월 베이징(北京)-평양 노선을 잠정 중단한 중국국제항공공사(에어 차이나)도 최근 완전 철수를 결정했다. 북한 내부에 정통한 또 다른 소식통은 “중국 기업들이 대거 빠져 나오면서 북·중 관계는 최악의 상황으로 치닫고 있다”고 말했다. 중국 상무부는 지난해 9월 “조선의 실체(기업) 혹은 개인이 중국 역내에 설립한 합자·합작 경영기업이나 외자 기업은 120일 안에 폐쇄해야 하고, 중국 기업이 역외에 조선과 설립한 합자·합작기업도 안보리 결의에 따라 폐쇄할 것을 요구한다”고 밝혔었다. 중국 상무부는 북한 내 중국 기업의 철수 상황에 대해서는 이후 공식 입장을 밝히지는 않았었다.
베이징 = 김충남 특파원 utopian21@munhwa.com
02월 05일 “황병서, 해임 후 사상교육…김원홍은 해임·출당”
정보위 보고…“총정치국 검열결과로 황병서 해임되고 후임에 김정각”
“풍계리 3번 갱도, 언제든 핵실험 가능…열병식서 각종 미사일 공개가능성”
북한 인민군 총정치국에 대한 검열로 황병서가 해임되고 후임에 김정각 인민무력성 제1부부장이 임명됐다고 국가정보원이 5일 밝혔다. 국정원은 또 북한 풍계리 핵실험장의 3번 갱도가 언제든 핵실험을 할 수 있는 상태이며 2월 8일 열병식에서 각종 미사일을 공개할 가능성이 있다고 전망했다.
국정원은 이날 국회 정보위원회 전체회의에서 이같이 보고했다고 강석호 국회 정보위원장 등이 브리핑을 통해 전했다.
국정원은 “지난 10월부터 3개월간 당 조직 지도부의 주도로 총정치국에 대한 검열이 진행됐다”면서 “검열 결과 황병서는 총정치국장에서 해임됐고 현재 고급당학교에서 사상교육을 받는 것으로 추정된다”고 말했다.
또 “제1부국장 김원홍은 해임 및 출당 처분을 받았고 부국장 염철성과 조국진은 강등 후 혁명화 교육을 받는 등 다수 간부가 해임 또는 처형됐다”면서 “황병서 후임으로는 전 인민무력성 1부상인 김정각, 조직부국장에 손철주, 선전부국장에는 이두성이 각각 임명된 것으로 보인다”고 보고했다.
앞서 국정원은 지난해 11월 국회 정보위 업무보고시 “최룡해의 주재하에 당 지도부가 불순한 태도를 문제 삼아 군 총정치국에 대한 검열을 진행 중”이라면서 “총정치국 검열은 20년만에 처음”이라고 밝힌 바 있다.
국정원은 또 북한 풍계리 핵실험장과 관련, “2번 갱도는 6차 핵실험 이후 방치된 상태며, 4번 갱도에서는 굴착공사가 진행 중”이라면서 “3번 갱도는 언제든 핵실험을 할 수 있는 상태”라고 밝혔다.
이어 “영변에 있는 5MW 원자로가 현재 정상 가동 중”이라며 “2년째 가동 중이어서 재처리 가능성을 주시하고 있다”고 정보위 자유한국당 간사인 이완영 의원이 전했다.
이 의원은 북한의 2월8일 건군절 행사와 관련, “(국정원은) 2월8일 건군절 재지정은 70주기를 계기로 정규군의 의미를 부각하려는 의미로 보인다고 평가했다”고 말했다.
이어 “북한 작년 12월 초부터 평양 미림비행장에서 병력 1만2천명을 동원해 열병식을 준비 중이고 각종 미사일의 공개 가능성이 있다”고 밝혔다.
한편 이 의원이 2월8일 건군절 지정이 “4월 25일 건군절에서 처음으로 바꾼 것”이라고 말한 데 대해 더불어민주당 정보위 간사인 김병기 의원은 “건군절이 4월25일을 2월8일로 옮긴 것은 처음이라고 했는데 그렇지 않다. 원래 2월8일이다가 1978년 김정일에 의해 4월25일로 됐다가 이번에 다시 환원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밖에 국정원은 북한 김정은 활동 동향에 대해 “금년 공개 활동은 작년 동기 대비로 절반 수준인 6회”라면서 “민생 부분의 현장 시찰에 치중하고 있고 군부대 방문 등 군사활동은 없었다”고 밝혔다. <연합뉴스>
02.13 "김여정 南방문 성과"… 北 당·정·군, 영접 총출동
노동신문에 文대통령 사진은 처음
여전히 "핵 문제 꺼내면 남북 파탄"
북한이 '김여정 특사'의 한국 방문 성과를 대대적으로 홍보하고 나섰다. 노동신문은 김여정과 문재인 대통령이 함께 있는 사진을 1면에 연일 게재했다. 노동신문이 문 대통령의 사진을 쓴 것은 처음이다.
▲김영남·김여정, 평양 귀환 - 김영남(가운데) 북한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이 11일 밤 평양 국제공항에 도착해 북한군 명예위병대(의장대)를 사열하고 있다. 노동신문은 12일 김여정 노동당 중앙위원회 제1부부장이 한국 방문을 마치고 귀환했다고 보도했다. /노동신문
평창 동계올림픽에 참석했던 김여정 등 북한 고위급 대표단은 11일 밤 평양공항에서 북한군 명예위병대(의장대)의 영접을 받았다. 공항에는 김영철 노동당 부위원장 겸 통일전선부장, 양형섭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부위원장, 리수용 당 부위원장, 리용호 외무상, 박영식 인민무력상, 최부일 인민보안상 등 당·정·군 고위 인사들이 대거 마중을 나왔다. 조선중앙통신은 "내외의 기대와 관심을 불러일으킨 고위급 대표단의 이번 남조선 방문은 북남 관계를 개선하고 조선반도의 평화적 환경을 마련하는 데서 의의 있는 계기가 됐다"고 했다.
▲북한 노동신문이 12일 자에 삼지연관현악단 공연 관람 등 김여정의 방남 활동 소식을 전하면서 문재인 대통령 사진을 게재했다. /노동신문
노동신문은 11일 김여정 일행의 청와대 방문 소식을 7장의 사진과 함께 전했다. 김여정이 꼿꼿한 자세를 취하고 있는 장면 위주로 실렸다. 12일 자에도 김여정 등이 전날 문 대통령과 함께 북한 예술단의 공연을 관람한 소식을 여러 장의 사진과 함께 전했다. 신문은 고위급 대표단이 이낙연 총리 주재 오찬과 임종석 청와대 비서실장 주재로 열린 환송 만찬에도 참석했다는 소식도 보도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북한은 '핵 문제를 꺼내면 남북 관계가 파탄 날 것'이라는 주장을 이어갔다. 대남 선전 매체 우리민족끼리는 이날 개인 논평에서 "(남한의) 괴뢰 국방부와 외교부의 우두머리들이 민족의 보검이며 평화의 상징인 우리의 핵을 함부로 모독하면서 망신스러운 놀음을 벌려놓는 것이야말로 무지하고 쓸개 빠진 추태"라고 했다. 그러면서 "남조선 당국은 대화 상대방을 자극하다가는 북남 관계에 바라지 않는 결과가 빚어질 것임을 똑똑히 알아야 한다"고 했다.
김명성 기자
02-14 “김정남-장성택 처형은 ‘후계논의’ 도청한 저우융캉 밀고 때문”
2012년 북한의 2인자였던 장성택이 중국을 방문해 후진타오(胡錦濤) 당시 국가주석에게 김정남을 북한의 최고지도자로 하고 싶다는 의향을 밝혔고, 이 정보가 김정은 북한 노동당위원장에 전달된 것이 김정남 암살의 발단이 됐다는 주장이 나왔다고 NHK가 13일 보도했다. 김정남은 1년 전인 지난해 2월 13일 말레이시아 콸라룸푸르 국제공항에서 맹독인 VX로 살해됐다.
NHK에 따르면 중국 정부 관계자는 이 사건에 대해 6년여 전에 사망한 김정일의 후계문제가 배경에 있다고 밝혔다. 김정일 사망 뒤 8개월 지난 2012년 8월 당시 북한의 2인자였던 장성택이 베이징(北京)에서 후진타오 당시 주석과 개별 회담했을 때 “김정일의 후계자로 김정남을 올리고 싶다”는 의향은 전달했다는 것이다.
이 회담을 당시 중국의 최고지도부 멤버였던 저우융캉(周永康) 정치국 상무위원이 부하를 시켜 도청했고 이를 이듬해인 2013년 초 북한 최고지도자가 돼 있던 김정은에게 밀고했다고 중국 정부 관계자가 NHK에 밝혔다.
이후 장성택은 2013년 12월 국가반역죄 등으로 북한에서 처형됐고 김정남은 지난해 2월 말레이시아에서 암살됐다. 중국 정부는 저우융캉이 전달한 정보가 김정은의 역린을 건드려 사건의 발단이 된 것으로 보고 있다고 이 관계자는 전했다.
장성택은 2013년 “반당, 반혁명적인 행위를 했다”는 이유로 모든 직무에서 해임된 뒤 당에서 제명됐고, 특별군사재판에서 사형판결을 받았다.
저우융캉이 왜 김정은에게 정보를 전달했는지 구체적인 이유는 알 수 없으나 당시 저우융캉을 겨냥한 부패수사가 시작됐던 상황이었고 그로서는 북한과의 파이프를 이용함으로써 지도부의 움직임을 견제하려 한 것일 수 있다는 시각이 나오고 있다고 NHK는 전했다.
저우융캉은 이후 2015년 6월 부패 및 국가기밀누설죄로 무기징역 판결을 받았다. 당시 관영 신화통신은 “일부 범죄사실의 증거는 국가의 기밀에 관련돼 재판소가 비공개로 했다”고 전했다. 이 관계자는 북한에 대한 밀고가 국가기밀 누설죄에 해당한다고 판단됐다고 주장했다.
저우융캉의 판결 모습은 중국 국영TV로 생중계됐다. 과거 새까맸던 머리털이 새하얗게 변해 법정에 나온 저우융캉의 모습에 중국 국민들은 충격을 받았다. 중국 최고지도부 경력을 가진 사람이 부패 등의 죄로 유죄판결을 받은 것은 저우융캉이 처음이었다.
중국 정부는 김정남 암살사건에 대해 시종 침묵을 지키고 있으나 이번에 확인된 정보는 앞으로 북중관계를 판단하는 데 있어 중요한 열쇠가 될 것으로 보인다고 NHK는 분석했다.
도쿄=서영아 특파원 sya@donga.com
02.16 "특별 배급 많을거라더니" 北, 김정일 생일에 식용유와 신발 한켤레 지급
김정일 생일(광명성절)인 2월 16일은 북한의 최대 명절 가운데 하나다. 일반 가정에 술과 식량을, 어린이들에게는 교복과 학용품, 과자 등을 나눠준다. 특히 올해는 설날과 겹치면서 특별 공급에 대한 주민들의 기대감은 그 어느 때보다 높아졌다고 한다.
16일 미국의 북한 전문 매체인 '자유아시아방송'에 따르면 북한은 올해 특별배급으로 가구당 식용유 한병과 천으로 만든 신발(지하족) 한켤레를 제공했다. 이 매체는 (술과 고기, 해산물 등) 주민들의 예상과 달리, 열악한 배급으로 실망감이 큰 상태라고 보도했다.
자유아시아방송은 일본 매체 아시아프레스의 이시마루 지로(Ishimaru Jiro) 오사카사무소 대표의 말을 인용해 “2월 초부터 올해 설에 특별 공급이 많을 거라는 소문이 퍼졌고 사람들이 크게 기대했지만, 배급 내용을 듣고 많이 실망한 상태”라고 보도했다.
▲광명성절을 맞아 조선 인민군, 근로자, 학생 등이 평양시내 김일성, 김정일 동상을 찾아 헌화하는 모습. /조선중앙TV
북한의 부실한 명절 공급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지난해 4월 15일, 김일성 국가주석의 생일인 태양절 배급품은 술 한 병과 소금에 절인 도루묵 1kg에 불과했다. 또 지난 2015년 노동당 창건 70주년을 맞은 날에도 지방 주민에게 기름 한 병과 과자만 공급해 불만이 컸다.
탈북자단체인 NK지식인연대 김흥광 대표는 “예전의 경우 떡이라도 먹게 찹쌀을 특별 배급했지만 이번에는 없었고 상류층 이외의 일반 가정의 경우 명절 식자재조차 구하기 쉽지 않았을 것”이라며 “북한이 김정일 생일로 주민들의 민심 달래기에 나섰지만, 경제적 어려움으로 인해 역부족한 상태”라고 말했다.
또 김정일 생일과 설이 겹치면서 북한 시장의 물가가 급등했다는 소식도 있다. 국제사회의 대북제재 강화 상황에서 식자재의 공급이 줄었지만, 명절로 수요가 늘면서 가격이 상승하고 있는 것. 특히 북한이 아이들을 위해 과자를 선물로 주면서 밀가루 가격이 급등한 것으로 알려졌다.
김흥광 대표는 “지난 12일, 취재원을 통해 북한 물가를 파악한 결과 기름, 설탕, 고기 등의 가격이 12월에 비해 급등했다”며 “기름과 전기 등 에너지가 부족해 현지 공장의 가동률은 10%대까지 떨어졌고, 주민들도 북한 당국에 대해 기대감이 전혀 없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익명을 요구한 탈북자 출신 방송인 김모씨는 “지난 1994년 고난의 행군 이후 배급이라는 문화가 거의 사라지면서, 당국에 다한 기대감조차 없는 상황”이라며 “북한이 겉으로는 공산주의이지만, 명절 음식 대부분을 중국 등 외부에서 들여온 재료를 구입해 사용하는 자본주의 체제가 많이 들어온 상황”이라고 말했다.
박성우 기자
02.19 장마당 늘며 시장화된 北경제, 제재 충격 커졌다
[북한, 무역의존도 50% 육박… 對中 의존도는 90% 넘어]
'경제봉쇄' 수준 제재… 中도 이행
수출 급감하자 외화 부족 시달려… 통치자금·권력층 수입 크게 줄어
유류 공급 중단되자 전력난 극심… 주민 젖줄인 장마당도 곧 영향권
南北대화 통해 '제재 수위 낮추기'
국제사회의 고강도 대북 제재가 북한 경제에 심각한 타격을 주고 있다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김정은이 올 들어 남북대화에 적극 나서는 것도 대북 제재를 피하거나 수위를 낮추기 위해서라는 것이다.
북한 전문가들은 "김정은 집권 후 대외 무역과 시장화가 급격히 진행되는 상황에서 고강도 제재가 이어지자 북의 수출입 길이 막히고 외화 부족도 심각하다"고 보고 있다. 김정은의 통치 자금과 권력층의 수입이 급감한 것은 물론이고, 주민들의 생명선인 장마당까지 조만간 영향권에 들어가리라는 전망이다.
전문가들은 1~2년 전까지만 해도 대북 제재 효과가 별로 없다고 했지만 지금은 분위기가 사뭇 달라졌다. 당시엔 "북한이 사회주의 폐쇄 경제라 제재해도 소용없다"거나 "안보리 제재는 대량 살상 무기(WMD) 관련 품목에만 국한돼 효과가 제한적"이라는 시각이 다수였다.
하지만 지금은 장마당 발달과 시장화 진전으로 북한에 사실상 '준(準)자본주의'가 출현하고 있다. 무역 의존도는 2010년 이후 크게 높아져 현재 50%에 육박한다. 전 세계 평균이 60% 정도다. 북의 대중(對中) 무역 의존도는 90%가 넘는다. 국책 연구소 관계자는 "우리 정부의 5·24 대북 제재로 대남 농·수산물 판매가 막힌 북한이 중국에 석탄·철광석 판매를 급격히 늘린 결과"라고 했다.
김정은 집권 전(2011년) 200여 곳이었던 장마당은 현재 400곳이 넘는다. 중국에서 수입한 물품이 장마당 매대에 오르고, 수출로 번 달러·위안화가 장마당의 '실탄'이 돼준 것이다. 이제는 장마당을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무역을 할 수밖에 없는 구조가 됐다.
이런 상황에서 유엔 안보리의 제재가 대량 살상 무기 중심에서 무역 제재로 완전히 바뀌었다. 2016년 3월 유엔 결의 2270호로 민생 목적 외의 북한산 석탄·철·철광석은 수입이 금지됐다. 북한산 석탄 수입 전면 금지(2321호), 북한산 지하자원·수산물 수입 금지(2371호), 북한산 섬유 수입 금지와 대북 석유 수출 제한(2375호), 해외 노동자 24개월 내 송환(2379호) 조치도 이어졌다. '경제 봉쇄 수준'에 이른 것이다.
중국의 달라진 태도도 북한에 큰 타격을 주고 있다. 과거 제재에 뜨뜻미지근하던 중국은 미국 트럼프 행정부 출범 이후 안보리 결의를 비교적 충실히 이행 중이다. 서울대 김병연 교수 분석에 따르면, 작년 북한의 대중 수출은 37% 감소했으며, 제재가 완전히 작동하면 올해는 90% 이상 급감할 전망이다.
수출이 급감하자 북한의 각 기관·단체가 산하 무역 회사를 통해 김정은에게 상납하는 '충성 자금'이 크게 줄어든 것으로 알려졌다. 북한 소식통은 "수출로 막대한 돈을 챙겨온 권력층의 생활이 빠듯해졌다"며 "북한이 연초부터 파상적 대남 평화 공세로 전환한 것도 이 때문으로 보인다"고 했다.
유류 공급 중단으로 가격이 급등하고, 전기 공급도 차질을 빚는 것으로 알려졌다. "대북 제재의 파도가 올해는 주민들의 젖줄인 장마당까지 미칠 것"이란 말이 나온다. 김병연 교수는 "최근 수출 감소로 구매력이 떨어졌기 때문에 올해부턴 수입 물량도 줄어들 것"이라며 "안보리 제재가 북 장마당에 대해선 '지연된 폭탄(delayed bomb)'이 될 것"이라고 했다. 전직 통일부 관리는 "지금 대북 제재의 고삐를 바짝 조이면 북한의 셈법을 바꿀 가능성이 커진다"고 했다.
이용수 기자
02.19 北, 어린이 동원 해 외화벌이 강행
공연에 출연하는 어린이들은 한 달에 식용유 1리터를 받는 것이 전부
▲ 공연하는 북한어린이 / photo by 자료사진
북한이 유치원과 소학교 어린이들을 동원해 중국과 해외 관광객들을 위한 각종 공연을 펼침으로써 외화벌이를 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공연에 출연하는 어린이들은 유치원과 소학교 수업에서 제외 된 채 공연연습에 동원된다고 소식통들은 전했다.
최근 양강도의 한 소식통은 “새 학기가 시작되면서 중학교로 진학하는 학생들을 대신해 소년회관 어린이예술소조를 새로 뽑고 있다”며 “예술소조에서 활동하다가 뒤늦게 중학교로 진학하는 학생들은 학업성적이 형편이 없다”고 말했다고 RFA가 전했다.
“혜산시 혜명동에 위치한 소년회관에는 유치원으로부터 소(초등)학교에 이르는 60여명의 어린이예술소조가 있다”며 “어린이예술소조는 혜산시 각 유치원과 소학교들에서 음악에 소질이 있는 어린이들을 선발해 조직했다”고 소식통은 덧붙였다.
소식통은 “예술소조에 속한 어린이들은 혜산세관을 거쳐 들어 온 중국인 관광객들을 대상으로 소년회관과 김정숙예술극장, 혜산영화관들에서 다양한 공연을 펼치고 있다”며 “어린이들이 공연에 출연한 대가로 특별한 지급받는 것은 없다”고 강조했다.
소식통은 또 “예술소조에 속한 어린이들은 공연을 준비하고 공연에 전념해야 하는 사정으로 해당 유치원과 소학교에 출석하지 않는다”면서 “때문에 유치원과 소학교에서 가르치는 기초적인 교육을 전혀 받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라고 설명했다.
이와 관련 함경북도의 한 소식통도 “중국과 외국인 관광객들을 상대로 공연을 하고 있는 어린이 예술소조는 함경북도 청진시와 나선시, 회령시와 온성군, 명천군에 5곳에 다 합쳐 3백 명 규모로 조직돼 있다”고 밝혔다.
소식통은 “외국인들을 위한 관광코스에는 어린이예술소조 공연이 필수로 들어 있다”며 “공연관람 대가로 외국인 관광객들은 시간과 장소에 따라 다르지만 대략 중국인민폐 7위안부터 12위안, 달러로 1.2달러부터 2달러까지 지불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소식통은 “공연에 출연하는 어린이들은 점심과 저녁식사를 보장받고 한 달에 식용유 1리터를 받는 것이 전부”라며 “보상은 미약하지만 자식들을 예술계로 발전시키기 위해 부모들은 앞 다퉈 자식들을 예술소조 활동에 참여시키려고 한다”고 강조했다.
글 | 박주희 뉴포커스 기자
03.03 결혼식날 나무심는 北 신랑·신부
3월 2일은 북한의 ‘식수절’(우리의 식목일)이다. 노동신문은 2일 1면 사설을 통해 “산림복구전투의 승패는 당원들과 근로자들의 사상정신력에 의하여 결정된다”며 “봄철 나무심기에 한사람같이 떨쳐나 애국의 땀과 열정을 아낌없이 바치자”고 주문했다.
김정은 “산림복구전투는 자연과의 전쟁”
산림복구에 주민총동원 내려 전력 투구
모든 기관들에 산림 ‘담당제’ 실시
텃밭에서도 나무모를 키우라고 지시
해외 대사관에 "나무모 반입해라" 요구
밤에는 땔감용으로 불법도벌 여전
산림복구는 김정은 노동당 위원장의 역점사업이다. 김정은이 2014년 11월 중앙양묘장을 현지지도하면서 “벌거벗은 산림을 그대로 두고 이제 더는 물러설 길이 없다”며 “전후 복구건설 시기 온 나라가 떨쳐나 잿더미를 털고 일떠선 것처럼 전당, 전군, 전민이 총동원돼 산림복구전투를 벌일 것”을 촉구했다.
2015년 2월 김정은은 당, 군대, 국가경제기관 책임일꾼들에게 “지금 나라의 산림은 영원히 황폐해지는가 아니면 다시 일어서는가 하는 갈림길에 있다”며 “산림복구전투는 자연과의 전쟁이므로 전체 인민이 떨쳐나서게 하라”고 강조했다. 아울러 김정은은 “각 도에도 양묘장을 건설하고 앞으로 10년 안에 나라의 모든 산을 푸르게 할 것”을 지시했다.
▲북한은 모든 성·중앙기관·공장·기업소들에 나무심기·관리를 떠맡기는 담당제를 실시하고 있다. ‘담당림(林)’의 나무심기에 동원된 내각 육해운성 종업원들과 평안남도 주민들 [사진 조선중앙TV캡처]
2023년까지 나무 65억 그루를 심는다는 북한 당국의 산림복구계획에 따라 주민들은 추운 날씨도 아랑곳없이 ‘나무 모 키우기’ 등 산림복원에 총동원됐다. 지난 1월 30일 노동신문은 “자연과의 전쟁인 오늘의 산림복구전투에서 나무 모는 총탄과 같다”며 “올해에 더 많은 나무 모를 생산하기 위해 투쟁하는 함경남도 신흥군”을 소개했다.
대북소식통은 “북한당국이 모든 성·중앙기관·공장·기업소들에 나무 심기과제를 떠안겼을 뿐 아니라 나무는 나무를 심은 기관에서 책임지고 살려내도록 하는 ‘담당제’를 실시했다”고 전했다. 그는 “이로 해서 학생·종업원들이 학교·공장 구내에서도 나무 모 키우기에 매달리고 있으며 ‘나무 모밭’에 낼 거름확보 등에 총동원되고 있다”고 밝혔다.
실제로 조선중앙TV는 지난달 26일 ‘온 나라의 수림화, 원림화를 위하여’라는 제목의 편집물을 통해 학교 구내에서 나무 모 심기를 하는 평안북도 태천군 태천고급중학교(우리의 고등학교) 학생들과 결혼기념으로 나무심기하는 신랑·신부들도 소개하며 그들의 애국심을 높이 평가했다.
▲김정은 북한 노동당 위원장은 2015년 2월 ’산림복구전투는 자연과의 전쟁이므로 전체 인민이 떨쳐나서게 하라“고 지시했다. 조선중앙TV는 지난달 26일 결혼기념으로 나무심기를 하는 신랑·신부들을 소개하며 이들의 애국심을 높이 평가했다. [사진 조선중앙TV캡처]
아울러 그는 “일부 단위들에서 ‘나무 모 생산은 전시에 탄약을 생산하는 것과 같다’며 곡식이나 채소를 심던 텃밭에서도 나무 모를 키우도록 함으로써 주민들의 불만을 자아내고 있다”고 전했다.
북한당국이 산림 황폐화의 심각성을 인식하고 ‘산림복구전투’에 주력하고 있는 가운데 동원에 시달리는 주민들의 불만도 속출하고 있다.
북한경제부문에서 근무한 고위 탈북민 김모씨는 “김정은 시대 들어 산림복구를 부쩍 강조하다 보니 간부가족들로 묶어진 ‘산림조성작업반’도 조직하고 ‘충성맹세’를 한다”며 “당위원회의 지시에 따라 어쩔 수 없이 ‘간부가족작업반’에 소속돼 매일 수십 리길을 오가는 간부 부인들도 불만을 토로한다”고 말했다.
계속해서 김씨는 “국내뿐 아니라 외국에서 일하는 일꾼에게도 산림복구과제가 과다하게 부여된다”며 “‘주재국에서 좋은 수종의 나무 모들을 반입하라’는 지시가 내렸고 이를 실행하던 중 ‘외국 나무 육종은 북한기후에 적합지 않다’는 의견이 제기되자 매년 1인당 500∼1000달러를 중국주재 북한대사관에 보내 중국에서 묘목을 사들이도록 조치하고 있다”고 털어놨다.
▲학교구내의 양모장에서 나무 모 심기를 준비하는 평안북도 태천군 태천고급중학교학생들. [사진 조선중앙TV캡처]
북한당국이 산림복구에 주민들을 총동원하며 해마다 ‘전투’를 반복하고 있지만 산림 황폐화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함경북도 무산군에서 살던 탈북민 박지순(가명)씨는 “주민들이 통제에 못 이겨 나무심기에 동원되지만 밤에는 땔감을 위해 불법도벌을 하고 화전을 사고팔기도 한다”고 밝혔다.
최근에는 북한관영매체도 화전개발을 멈추지 않으며 산림복구를 무책임하게 하는 단위들을 공개 비판하고 있다. 조선중앙TV는 지난달 26일 방영한 ‘뜨거운 애국의 한마음을 안고 산림복구전투에 떨쳐나서자’라는 제목의 코너에서 “아직도 산에서 강냉이가 자라고 있는 평안북도 벽동군”이라고 질타했다.
방송은 “심지어 나무를 심어도 사람들이 강냉이 자라는데 지장이 된다고 나뭇가지를 잘라버린다”며 “개인 이기주의만 남아있다”고 지적했다. 대체연료와 식량이 부족한 북한 상황에서 당국의 산림복원대책 한계가 느껴지는 대목이다.
김성일 서울대 산림과학부 교수는 “주민 노력총동원을 통한 나무 심기만으로는 산림복원이 어렵다”며 “나무 심기, 식량문제, 에너지 문제 등을 패키지로 가지 않으면 북한은 산림을 잃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북한 당국의 통제에 못 이겨 ‘산림애호’라고 씌여진 구호판만 세워놓은 황해북도 평산군의 민둥산모습 [사진 조선중앙TV캡처]
김수연 통일문화연구소 전문위원 kim.suyeon1@joongang.co.kr
03.19 김정일이 김정은에게 주는 세 가지 교훈
방향 틀리면 백성 더 힘들고핵 무기로 모든 일 해결 못해
나라 문 닫아선 경제 망가져 '先代 유훈'도 버리는 용기를
▲리 소테츠(李相哲) 일본 교토 류코쿠대학 교수
김정은 위원장 귀하.
저는 옛날 북만주로 불렸던 중국 흑룡강성 삼강 평원 일대의 작은 마을에서 태어나 소년 시절을 보냈습니다. 1930년대에 한반도에서 이주해온 개척민들이 모여 산 이 마을은 당시 해마다 풍년이 들어 민심이 후했는데, 마을 사람들은 항상 고국을 그리워했습니다.
그들의 유일한 즐거움은 라디오 방송에서 흘러나오는 북한 음악을 듣고 영화를 보는 것이었습니다. 70년대 중반 중국인들은 북한에 반해 있었고, 간혹 상영되는 북한 영화는 중국 인민들에게 감동을 주었습니다.
그 후 중국에선 천지개벽의 변화가 일어나고 국가 체제를 바꾸었으나 북한은 사회주의를 버리지 않고 체제를 지켰습니다. 그 대신 북한은 먹는 문제도 제대로 해결 못 하는 나라로 전락했습니다. 소년 시절 동경해 마지않던 북한이 왜 오늘날 가난한 나라가 돼 버렸을까요.
제가 쓴 저서 '김정일 전기' 집필을 끝내고 당신 아버지의 일생을 돌아보며 허무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아버님 일생에서 얻은 세 가지 교훈을 전해주고자 합니다.
우선 아버님은 너무 힘든 인생을 살았습니다. 생전에 지구를 열 바퀴나 돌 수 있는 거리를 현지 지도 길에서 보냈고 하루에 4시간밖에 잠을 자지 않았다고 들었습니다. 그게 사실이라면 지구상에 아버님처럼 부지런한 지도자가 어디 있겠습니까. 70년대 중반 북한 매체는 매일 800만t 알곡 생산 고지 점령이 눈앞에 다가왔다고 보도했습니다. 그런데 40년 넘게 흐른 지금도 식량 생산량은 500만t 선에서 헤매고 있습니다. 지향하는 방향이 틀리면 지도자가 열심히 일할수록 백성은 더 힘들어지고 나라 사정이 더 나빠진다는 교훈이 떠오릅니다.
둘째로 아버님은 '총대'(무기·힘)가 세면 모든 일을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한 듯합니다. 한국을 압도하는 힘을 갖기 위해 100만이 넘는 군대를 만들고 미사일과 핵개발에 매진해 왔습니다. 하지만 핵을 가진들 그걸 어디에 쓰겠습니까. 지금 당신은 핵만 완성하면 나라가 무사태평하리라 여기는 듯합니다만 소련은 수천발의 핵을 갖고도 무너졌습니다.
핵이 없으면 이라크나 리비아처럼 미국으로부터 공격받을 것이라고 생각할지 모릅니다만, 미국은 핵도 없고 강한 군대도 없는 쿠바를 침략하지 않았고, 베트남 같은 사회주의 나라도 핵을 가지려고 하지 않으면 압박하지도 공격하지도 않습니다.
마지막으로 아버님은 주민들이 자본주의에 물들지 못하게 나라의 문을 닫아걸고 정보를 차단한 채 북한이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나라라고 선전했습니다. 그런데 왜 수많은 주민이 목숨 걸고 탈출했을까요. 바깥세상을 북한 주민들도 알기 시작했기 때문일 겁니다. 지금 세상은 정보를 차단해버리면 돈줄도 차단되는 법. 정보를 통제하니 장사도, 경제도 망가진 것입니다.
김 위원장은 지금 역사를 좋은 방향으로 이끌거나 거꾸로 돌릴 수 있는 기회를 손에 쥐고 있습니다. 4월에는 한국 대통령을 만나고, 5월에는 미국 대통령을 만날지 모릅니다. 이 기회를 놓치면 역사의 죄인이, 잡으면 민족을 구한 영웅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려면 집착을 버려야 합니다. 다 버릴 필요도 없고 먼저 핵을 내려놓아 보세요.
해야 할 일이 하나 더 있습니다. 선대의 유훈 가운데 현실에 맞지 않는 교시는 과감히 버려야 합니다. 사회주의 국가인 중국이 경제적으로 성공한 제일 큰 이유 중 하나는 건국 영웅인 모택동의 교시를 일부 부정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회담 몇 번으로 나라는 변하지 않습니다. '실사구시(實事求是)'가 필요합니다.
지금 북한의 현실은 핵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누가 압력을 넣어서가 아니라 쓸모없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실을 직시하는 용기가 있다면 먼 훗날에 민족의 역사를 바꾼 지도자로 기억될 수도 있습니다. 건승을 빕니다.
조선일보
03-29 [김정은-시진핑 회담]김정은, 첫 외국방문-정상회담 데뷔
시진핑 띄운 김정은 “마땅히 中부터 방문, 나의 숭고한 의무”
정상회담 배석자, 北보다 中이 많았다
집권 7년 만에 북한 땅을 벗어난 김정은 북한 노동당 위원장의 첫 외교무대는 중국 베이징이었다.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이 마련한 환영연회에서 밝힌 김정은의 축사는 자못 엄숙하기까지 했다.
“나의 첫 외국 방문의 발걸음이 중화인민공화국의 수도가 된 것은 너무도 마땅한 것이며 조중(북-중) 친선을 대를 이어 목숨처럼 귀중히 여기고 이어나가야 할 나의 숭고한 의무입니다.” 김정은이 이렇게 ‘저돌적’으로 관계 복원에 나서자 시 주석도 적극 화답했다. 두 정상의 첫 만남은 시종일관 화기애애하게 이뤄지며 이른바 ‘공산당 브로맨스’로 이어지는 모양새다.
○ 7년 공백 털어버린, 25시간 동안의 베이징 일정
최고지도자 간 만남이 없던 7년의 더께를 걷어내기 위해 두 정상은 분주히 손을 내밀었다. 중국 신화통신은 “시 주석의 초청으로 김정은 위원장이 중국을 비공식 방문했다”고 전했지만 북한 노동신문은 김정은의 축사를 전하며 “우리(북한)의 전격적인 방문 제의를 쾌히 수락해 주셔서 감사하게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번 두 정상의 만남이 서로의 적극적인 필요성에 의해 성사된 것이라는 점이 엇갈린 정상회담 배경 설명에서 여과 없이 드러난 셈이다.
최근까지 냉랭했던 관계가 무색할 만큼 김정은은 1박 2일간 중국과 주파수를 맞추는 데 집중했다. 북-중 정상회담은 물론이고 연회나 오찬 자리에서도 끊임없이 두 나라의 녹슬지 않은 친선과 우의, 연대를 확인했다. 분위기도 화기애애했다. 북한 매체들은 28일 “김정은 동지와 리설주 여사, 습근평(시진핑) 동지와 팽려원(펑리위안) 여사께서 가정적 분위기에서 마주 앉으신 오찬회장은 시종 화기롭고 혈연의 정이 차 넘치였다”고 묘사했다.
김정은은 처음 만난 시 주석의 마음을 얻기 위해 선대가 남긴 유훈까지 꺼내들었다. 그는 연회 축사에서 “장구한 기간 공동의 투쟁에서 서로 피와 생명을 바쳐가며 긴밀히 지지 협조해 온 조선 인민과 중국 인민은 실생활을 통해 자기들의 운명이 서로 분리될 수 없다는 것을 체험했다”고 말했다. 지난해 시 주석의 경고에도 핵폭주를 이어갔던 것과는 전혀 다른 태도였다.
▲부인 리설주 대동하고… 집권 7년 만에 처음으로 중국을 방문한 김정은 북한 노동당 위원장(왼쪽에서 두 번째)과 부인 리설주가 26일 베이징 인민대회당에서 열린 환영행사에서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왼쪽에서 세 번째), 펑리위안 여사와 함께 환영장으로 들어서고 있다. 사진 출처 조선중앙통신
○ 한미와 물꼬 튼 김정은, ‘시진핑 잡기’
김정은은 선대에서는 실패했던 비핵화 협상을 이번에는 이뤄내겠다는 입장을 연초부터 밝혀왔다. 더군다나 상대는 대북 공격을 옵션으로 놓고 있는 역대 가장 강력한 미국의 ‘매파 행정부’다. 북-미 대화는 한 달 남짓 남은 상황. 이런 절박함에 김정은은 시 주석의 마음을 빠르게 얻는 데 집중했다.
김정은은 “강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잇닿아 있는 형제적 이웃인 두 나라에 있어서 지역의 평화적 환경과 안정이 얼마나 소중하며 그것을 쟁취하고 수호해 나가는 것이 얼마나 값비싼 것인가를 똑똑히 새기고 있다”고 말했다. 다소 ‘뒤늦은’ 방중에 대해서는 “의리상 도의상 나는 당연히 적절한 때에 시진핑 서기 동지를 만나 상황을 알려야 한다”고 말했다. 결국 대화 판이 벌어진 ‘때’가 됐으니 왔으며, 지금 상황에서 중국의 이해와 도움이 필요하다는 입장을 내비친 것으로 보인다. 18일 시 주석의 재선출에 대해 달랑 세 줄짜리 축전을 보냈던 것과는 달리 직접 ‘시 황제’를 만나서는 그를 한껏 치켜세웠다.
김정은은 일회성 만남이 아니라 이번 만남을 계기로 북-중 교류를 확대하겠다는 의사를 적극 밝히기도 했다. 그는 “이번 방문에서 중국 동지들을 만나 전략적 소통을 강화하고 전통적 우의를 심화하길 원한다”며 “이후 기회를 만들어 총서기 동지(시 주석)와 자주 만나고 상호 특사 파견, 친필 서신 등 긴밀히 소통해 고위급 회담을 양국 양당 관계의 새로운 수준으로 발전시키고자 한다”고도 말했다.
김정은은 27일 평양으로 출발하기 전 시 주석과의 마지막 오찬에서도 “북-중 우의가 매우 귀중하다. 선대 지도자들의 숭고한 의지를 따르고 비바람 속에서도 본래의 북-중 우호 관계를 유지한 것을 계승 발전시킬 것”이라고 재차 밝혔다. 국경을 넘기 전 단둥에서는 이례적으로 시 주석을 향한 ‘감사 전문’까지 내 “우리를 성심성의껏 맞이하고 극진히 환대하여준 당신(시 주석)과 그리고 중앙과 베이징시의 간부들과 인민들에게 충심으로 되는 사의를 표한다”고 마지막까지 감사 인사를 하고 돌아갔다.
신나리 기자 journari@donga.com
‘비핵화 단계별 보상’ 요구한 김정은
“한미, 단계-동시적 조치땐 비핵화”… 시진핑과 정상회담서 조건 밝혀
“조건없는 핵폐기” 美와 진통 예고
시진핑 “혈맹 복원” 방북 초청 수락
트럼프 “김정은, 인류에 좋은 일 할 기회”
김정은 북한 노동당 위원장이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과의 회담에서 “한미가 단계적이고 동시적인 조치를 취하면 한반도 비핵화 문제는 해결될 수 있다”고 말했다. 비핵화를 위한 조건으로 미국의 ‘단계적 보상’이 필요하다고 밝힌 것이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행정부가 ‘조건 없는 비핵화’ 원칙을 고수하고 있는 상황에서 시 주석과의 회담으로 북-중 혈맹을 복원키로 한 김정은이 비핵화를 위한 구체적인 대가를 요구하고 나온 만큼 문재인 대통령이 그려온 한반도 비핵화 프로세스가 작지 않은 도전에 직면할 것으로 보인다.
중국중앙(CC)TV와 북한 조선중앙통신은 김정은이 시 주석 초청으로 25∼28일 중국을 비공식 방문해 북-중 정상회담을 가졌다고 28일 일제히 보도했다. 김정은은 회담에서 “김일성 주석과 김정일 총서기의 유훈에 따라 한반도 비핵화 실현은 우리의 시종 불변의 입장이며 (나는 올해 들어) 평화적인 대화를 제의했다”고 강조한 뒤 “한미가 나의 노력에 선의로 응답해 평화 안정의 분위기를 만들고, 평화 실현을 위해 단계적이고 동시적인 조치를 취하면 비핵화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말했다. 비핵화를 요구하려면 테러지원국 해제, 평화협정 등 미국의 반대급부가 동시에 나와야 한다는 것이다.
이에 시 주석은 “전통적인 중조(북-중) 친선은 ‘피로써 맺어진 친선’으로서 세상에 유일무이한 것”이라고 혈맹 관계 복원을 천명한 뒤 △고위급 교류 △북-중 교류 협력 촉진 △한반도 평화 발전 추진 △인민 교류 왕래 강화 등을 제시했다. 사실상 대북제재 완화에 나설 수 있다는 것으로 해석된다.
시 주석은 회담에서 김정은의 방북 요청을 수락하고 정상 간 상호 방문과 특사 파견 등 ‘북-중 밀월외교’도 복원하기로 했다.
트럼프 행정부는 일단 대북제재 압박 태세를 유지하겠다고 강조했다. 백악관은 27일(현지 시간) 북-중 정상회담에 대해 “(미국의) 최대 압박 작전이 북한과의 적절한 대화 분위기를 조성하고 있다는 추가 증거”라고 자평했다. 청와대는 29일 양제츠 중국 외교담당 정치국 위원이 시 주석 특별대표로 방한해 북-중 정상회담 결과를 설명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트럼프 대통령은 28일 오전(현지 시간) 트위터에 “이제 김정은이 자기 인민과 인류를 위해 바른 일을 할 좋은 기회를 갖게 됐다. 우리의 만남을 기대하시라!”라고 강조했다. 김정은의 중국 방문에 대해 트럼트 대통령이 처음으로 의견을 밝힌 것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어젯밤 중국의 시진핑으로부터 그와 김정은의 만남이 매우 잘 진행됐고 김(김정은)이 나와의 만남을 고대하고 있다는 메시지를 전달받았다”고 밝혔다. 그러나 대북 제재를 유지하겠다는 점도 강조했다.
문병기 기자 weappon@donga.com / 베이징=윤완준 / 뉴욕=박용 특파원
04-01 고려호텔에서 바라본 평양 시민들의 모습
▲남북평화 협력기원 남측예술단이 지난 31일 방북해 1일 첫 공연을 앞 둔 가운데 예술단이 머물고 있는 고려호텔에서 바라 본 평양시민들의 모습. 2018.4.1 평양공연 사진공동취재단
▲평양공연 사진공동취재단
04-02 北축구팀 떠나는 노르웨이 감독, “경제상황 나빠 더 머물수가 없어”
北, 제재로 해외경기 상금 못받아
▲예른 아네르센 북한 남자 축구대표팀 감독(55·노르웨이·사진)이 경제난을 겪고 있는 북한에 더 이상 머물고 싶지 않다고 밝혔다.
아네르센 감독은 계약 만료일인 지난달 31일 로이터통신과의 인터뷰에서 “북한의 경제상황이 좋지 않기 때문에 머무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2016년 5월에 부임한 그는 1991년 팔 체르나이(헝가리) 이후 북한의 두 번째 외국인 감독이었다. 그의 부임 당시 노르웨이에서는 유엔 제재 대상인 북한 감독을 맡는 것이 적절한가라는 논란이 일었다. 아네르센 감독의 연봉은 10억 원가량으로 알려졌고 부인과 평양 고려호텔 스위트룸에 머물며 차량과 운전사를 지원받았다. 당초 북한의 요청에 따라 2022년 카타르 월드컵까지 북한 팀을 이끌고 싶다던 그였지만 이날은 “머물고 싶지 않다”며 재계약은 없다고 선을 그었다. 그가 이끈 북한은 지난해 동아시안컵 본선(4위)에 올랐지만 유엔 제재 때문에 4위까지 주어지는 상금을 못 받기도 했다. 로이터통신은 “북한 경제에 큰 타격을 입힌 유엔 제재가 스포츠에도 악영향을 끼치고 있다”고 분석했다. 이에 앞서 그는 지난해 말 해외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북한에 머물면서 가장 힘든 일은 외롭다는 것과 사고방식의 차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정윤철 기자 trigger@donga.com
04.03 평양공연 관람으로 북한 주민의 마음을 한 번 더 농락한 김정은
아무리 힘없는 백성들을 업신여겨도 그렇지···
▲남한 가수들의 평양 1차 공연이 끝난 후 김정은이 손을 흔들고 있다. 옆에서 박수치는 이는 도종환 문체부장관./ 평양공연 공동취재단
1995년 4월, 일본의 프로레슬러 출신 참의원인 안토니오 이노키가 릭 플레어 등 스타선수들을 대거 이끌고 평양에 나타났습니다. 그리곤 모란봉 기슭의 5.1경기장에서 여보란듯이 ‘국제프로레슬링대회’를 개최했습니다.
당국자들은 ‘민족최대의 명절인 4.15일을 기념하기 위해 진행되는 국제적 규모의 체육대회’라고 했지만 주민들은 한편에서, 놀란 가슴을 쓸어내렸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미국식 자본주의를 비판할 때마다 들고 나오던 바로 그 ‘프로레슬링경기’가 평양에서 열렸기 때문입니다.
승패가 이미 정해져 있는 줄도 모르고 가슴 조이며 안토니오 이노키를 응원했던 기억이 납니다. 이후 같은 부대에서 근무하던 경비중대장이 영창에 들어갔는데, 이유인즉 그 ‘프로레슬링경기’를 녹화한 테이프를 주변 친구들에게 돌리다가 ‘비사회주의 그루빠’에 걸렸다는 것입니다.
그보다 먼저인 1983년 10월, 군단선전대(문선대)의 한 친구가 ‘비사회주의’에 걸려 출당당하는 변고가 일어났었습니다. 오로지 노동당입당 때문에 10년간의 군복무를 묵묵히 견뎌온 친군데 출당이라니, 더하여 생활제대라니! 주변 사람들이 속상하다고, 난리도 아니었습니다.
그래도 그 친구의 출당엔 ‘이유’가 있었습니다. 당에서 그렇게 하지 말라던 주패(카드)를 어디서 배웠는지, 그리고 어떻게 만들었는지 손수 그림을 그려서 마음이 통하는 친구들과 밤새 놀다가 그만 중앙당 검열조에 걸렸다는 것이었습니다.
출당당할 만 하네.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듬해 설날, 그러니까 그 친구가 출당당한지 꼭 3개월 만에 전군에 김정일의 ‘선물주패’가 보급되었습니다. 소대당 한세트씩 공급됐는데 부대들엔 주패를 놀 줄 아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하는 수 없이 그 출당당한 친구에게서 주패놀이를 배웠던 ‘비사회주의분자’들이 구분대로 내려가 날밤을 새워가며 주패놀이를 전수해 주던 기억이 납니다. 그리고 얼마 후 그 출당당한 친구가 부대를 찾아와 ‘복당시켜 달라’고 오열하던 기억도 납니다.
이번엔 남조선 노래가 문제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과거 김정일이 남조선 노래를 좋아했다는 이야기는 소문을 통해 들었었지만, 역시 비공개였고, 북조선 인민들의 정서에 대놓고 반하는 정도는 아니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김정은도 남조선 공연을 직접 관람하지는 못할 거란 관측도 내 놓았었습니다.
하지만 지난 2일자 노동신문엔 김정은이 ‘남조선 예술인들의 공연을 보았다’는 소식과 함께 ‘남조선 음악인’들과 찍은 사진이 대문짝만 하게 실렸습니다. 공연 당일인 1일자 신문에선 ‘자본주의 예술은 썩어빠진 부르주아 생활양식을 류포시킨다’고 비난했음에도 말입니다.
과거엔 주민들의 기강을 바로잡겠다며 ‘사회주의 생활양식을 침해하는 자들을 엄격히 처벌한다’는 내용의 포고문을 시도 때도 없이 발포하던 김정은이었습니다. ‘남조선 드라마를 보거나 노래를 부르다 적발되는 경우 현장에서 체포해 엄정히 처단하라’고 으름장을 놓기도 했죠.
이랬던 김정은이 ‘남조선 노래’를 듣고 ‘남조선배우’들과 기념사진까지 찍었으니 ‘비사회주의’의 왕초가 따로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무리 힘없는 백성들을 업신여겨도 그렇지 어떻게 백주에 ‘너희가 안 되는 걸 나는 해도 된다’고 시건방을 떠는지 이해가 되질 않았습니다.
북조선 인민들의 생각도 저와 다르지 않을 거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과거와 달리 이번엔 남조선 노래에 맞춰 머리 위로 손을 흔들거나 노래를 따라 부르는 사람도 있었다고 했는데, 그렇게 온 나라 국민의 행동을 조작하고 마음까지 농락하는 김정은 정권이 정말 오래갈 수 없다는 생각도 해 보았습니다.
나는 아무행동이나 할 수 있고, 말을 마구 뒤바꿀 수 있으며 북한 전역을 거짓말의 왕국으로 만들 수 있다고 믿고 있는 김정은 정권이 정말로 어디까지, 얼마나 갈 줄은 지켜봐야하겠지만 말입니다.
글 | 김성민 자유북한방송 대표
4.10 北방송 레드벨벳 통편집했지만… 주민들, USB 몰래 구해서 봐
南예술단 공연실황 은밀히 유통
1일과 3일 평양에서 열린 한국 예술단의 ‘봄이 온다’ 공연 이후 가수 백지영이 부른 노래 ‘잊지 말아요’가 북한에서 최고 인기를 얻으며 빠르게 확산되고 있다고 북한 소식통이 8일 전했다.
소식통은 “남조선 예술단의 평양 공연을 동영상으로 담은 USB메모리(휴대용 저장장치)가 벌써 북-중 국경 시장에서 몰래 유통되고 있다”며 “동평양대극장 공연(1일)은 1부, 류경정주영체육관 공연(3일)은 2부로 소개돼 팔린다”고 말했다. 북한은 남측 예술단 공연 실황을 아직 TV로 방영하지 않았다.
소식통은 “공연을 몰래 본 사람들은 백지영이 부른 ‘잊지 말아요’를 가장 좋아한다”고 했다. 이 노래는 2009년 방영된 TV 드라마 ‘아이리스’의 주제곡이다. 남북 간 ‘제2차 6·25전쟁’을 막기 위해 목숨을 걸고 임무를 수행하는 첩보원들의 이야기를 다룬 이 드라마는 지금도 북한에서 인기리에 몰래 유통되고 있다. 드라마 주제곡으로 듣던 한국 노래를 실제 가수가 평양에 와서 직접 불러 주민에게 큰 감동과 충격을 줬다는 것이다.
소식통은 “사람들이 아이리스는 꿈과 같은 상상 속 이야기라고 생각했는데, 주제곡을 부른 가수가 직접 평양에 온 현실에 놀랐다”며 “백지영이 (북한 최고 악단인) 모란봉악단보다 노래를 훨씬 잘 부른다는 평가도 받는다”고 덧붙였다.
특히 이 노래의 후렴구인 ‘우리 서로 사랑했는데/우리 이제 헤어지네요/같은 하늘 다른 곳에 있어도/부디 나를 잊지 말아요’는 남북의 안타까운 분단 상황을 연상시킨다. 당시 공연 현장에서도 이 가사에 눈물짓는 북한 관객이 유독 많았다.
현장에서 공연을 관람한 김정은도 백지영의 노래에 각별한 관심을 보였다. 예술단을 이끌고 평양에 다녀온 도종환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은 “백지영이 ‘총 맞은 것처럼’을 부르고 나자 김정은은 ‘어느 정도 레벨의 가수냐, 저 노래는 최근 노래냐’고 물었다”고 5일 전했다.
유통되는 USB메모리엔 북한 중앙방송이 4일 공연 소식을 전할 때 통째로 편집했던 걸그룹 ‘레드벨벳’의 공연도 담긴 것으로 알려졌다. 북한은 당시 남북 예술단 합동공연 소식을 3분 20초가량 방영했지만 이선희의 ‘J에게’ 외에는 우리 가수의 이름이나 노래, 발언을 무음으로 처리했다. 특히 화제를 모았던 레드벨벳의 무대는 통째로 들어냈다. 소식통은 USB메모리 영상을 본 북한 주민도 레드벨벳 노래 ‘빨간 맛’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전했다.
북한에서 빠르게 퍼지고 있는 USB메모리는 중국에서 누군가가 한국 녹화방송을 복사해 돈을 받고 북에 유통시켰을 가능성이 크다. 북한에선 주로 돈 있는 권력층이 이런 영상을 요구한다. 평양 출신 탈북자는 9일 “중국에서 밀수된 동영상은 수요가 가장 많고, 가장 비싸게 팔리는 평양으로 직행한다”고 말했다. 또 다른 탈북자도 “요즘 외부 동영상을 가장 많이 퍼뜨리는 사람들은 이런 영상을 단속하는 보안원(경찰)들”이라며 “보안서에 압수한 각종 영상물이 다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북한은 전기난으로 지방에서 TV를 거의 볼 수 없지만 태양광 등을 통해 충전시켜 USB메모리 저장물을 볼 수 있는 ‘노트텔’이란 기기가 광범하게 퍼져 있다.
한국 가수가 평양에서 부른 노래가 북한에서 큰 인기를 얻은 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한 탈북 청년은 “2002년 윤도현밴드의 평양 공연 후 가요 ‘너를 보내고’가 전국에서 엄청난 인기를 끌었다”며 “당시 청년들이 모이면 이 노래를 불렀다”고 말했다. ‘잊지 말아요’도 당분간 북한 최고 인기 가요 반열에 머물 것으로 예상된다.
그러나 남북 유화 모드에도 불구하고 북한 당국은 여전히 한국 가요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일본 아사히신문은 8일 “양강도 삼수군에서 금지된 한국 가요 50여 곡을 듣고 춤을 춘 16, 17세 청소년 6명이 지난달 22일 공개재판을 받았다”고 전했다. 이들은 가요를 USB메모리에 복사해 다른 이들에게 전달하려고도 했다. 신문은 “반국가음모죄로 2명은 중범죄자들이 가는 교화소에 갔고, 4명은 노동단련형 1년을 선고받았다”고 전했다.
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 도쿄=장원재 특파원
04.10 남조선 드라마보고, 노래 불렀다는 이유로 처형되는 사회
▲ 북측 가수와 열창하는 레드벨벳 / photo by 뉴시
리설주를 대동한 북한 김정은이 한국의 레드벨벳, 백지영, 윤도현, 가왕 등과 어깨 나란히, 사진을 찍었다. 집권초기부터 남조선 노래의 유입을 철저히 단속하라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던 김정은이다.
남조선 가수들이 무대에 오를 때마다 박수도 치고 열렬히 호응했는가 하면 가을공연 제안을 문재인 대통령에게 전해달라며 자신은 “김정은 위원장에게 전하겠다”고 희떠운 농담을 던지기도 했다.
그래서 김정은이 남조선음악을 매개로 남북교류의 새로운 장을 만들어 간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아래는 자유북한방송이 입수한 북한 내부문건으로 왜 북한이, 한류를 그토록 꺼리는지에 대한 이유가 적시되어 있다.
위 문건에서 북한은 ‘지금 적대세력들은 정치사상강국, 군사강국의 위용을 떨치며 주체혁명의 최후승리를 향해 폭풍노도쳐 내달리는 천만군민의 힘찬 진군을 가로막아 보려고 최후발악하고 있다’고 적고 있다.
또한 ‘적들은 대조선붕괴전략’것을 세워놓고 ‘우리 제도를 내부로부터 분렬와해시키기 위한 심리모략전에 총력을 집중하고 있다’면서 이것이야말로 ‘제4종의 새로운 전쟁방식이다’고 강변한다.
문건을 통해 북한당국의 주장을 좀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면〈적들의 사상문화적 침투전략이 지난 시기에는 침략의 길잡이였지만, 오늘날에는 침략의 주역으로 대두했다〉는 것이다.
오늘날 사회주의를 수호하는 투쟁은〈반동적인 자본주의사상과 퇴페적인 부르죠아생활문화를 혁명적인 사상공세와 혁명독재의 장검으로 무자비하게 쓸어버리는 것〉이라고 강조하기도 했다.
이를 위해〈남조선 록화물을 시청, 류포시키는 행위를 반국가행위로 락인하고 그와의 투쟁에 떨쳐나서도록 포고도 발포하였으며 범죄자들에게는 인민의 준엄한 심판을 내리기도 하였다.〉고 내부사정을 털어놓기도 했다.
그러면서〈록화물을 몰래 보고 류포시키면서...사회의 정치적안전에 위험을 조성하고있는 현상들〉에 대한 각이한 사례와 처형의 행태들을 아래와 같이 나열했다.
〈평안북도의 어느 공장 로동자로 일하던 안모놈은 군사복무를 하면서 불순록화물들을 시청, 류포한 범죄로 과오제대되였으나 개준하기 위해 노력할 대신 2015년 7월경부터 로골적으로 괴뢰영화들을 구입하여 시청하기 시작〉했고〈불순록화물의 시청, 류포를 막기 위한 법기관의 역할이 강화되자 교묘하게도 20여명의 사람들로부터 은밀한 방법으로 시청하겠다는 담보서까지 받고 10여편의 성록화물들을 류포시키였으며 2016년 1월부터는 순진한 처녀들에게 일생을 같이 하자는 달콤한 말로 구슬리거나 좋은 영화를 보여주겠다고 유혹하여 끌고 가서는 성록화물들에서 성관계장면만을 골라 시청시키면서 추잡하고 변태적인 방법으로 성불량행위를 감행 하였다.〉는 것이다.
때문에〈안모놈은 혁명의 준엄한 심판을 받고 처형되었다.〉는 식이다. 또, 남한 드라마를 보거나 한류를 받아들였던 북한주민 다수가 어떻게 처형-처벌 됐는지를 자랑처럼 늘여놓기도 했다.
끝으로 문건은 〈공화국형법 제60조는 록화물을 반입, 제작, 복사, 보관, 류포, 시청하였을 경우에는 우리 제도를 와해전복하려는 적들의 책동에 가담한 반국가범죄행위로 규정하고 엄격히 처벌〉하고 있음을 강조했다.
이랬던 북한당국이 남한 가수들의 공연을 주민들의 즐길 거리로 공개할 수 없었다는 건 너무도 자명한 이치다. 김정은과 그의 충성스런 ‘기쁨조’가 함께 관람한 ‘봄이 온다’가 정치적 이슈-이벤트라고 지적받는 이유이기도 하다.
04.11 대남총괄 김영철, 김정은 원탁에 못 앉고 뒷자리에
- 北 노동당 정치국 회의 공개 김영철, 아직 톱10에 들지 못한 듯 총정치국장 김정각은 회의 불참
남북정상회담엔 "북남 수뇌 상봉" 미북정상회담엔 "朝·美 대화" 두 회담 표현 미묘하게 달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9일 노동당 중앙위원회 정치국 회의를 주재했다. 노동당 정치국 회의가 열린 것은 김정은 집권 이후 9번째이며, 2015년 2월 이후엔 처음이다.
오는 27일과 내달 또는 6월 초에 열릴 예정인 남북, 미·북 정상회담을 앞두고 북 지도층 내부를 단속하고 한목소리를 모으려는 것으로 해석된다.
북한 조선중앙통신은 10일 정치국 회의 장면을 담은 사진 3장을 공개했다. 사진에서 김정은은 정치국 상무위원 전원(4명) 및 위원 14명 중 7명과 중앙 원탁에 앉았다. 나머지 위원 7명 중 러시아 출장 중인 리용호 외무상을 제외한 6명과 후보위원(12명)들은 내각 부총리들과 함께 뒷자리에 배석했다.
▲北최고 권력기구인 노동당 정치국 회의 - 지난 9일 열린 노동당 중앙위원회 정치국 회의에서 정치국 상무위원(4명)과 위원(13명)들이 손을 들어 표결하고 있다. 원탁에 앉은 이는 김정은 노동당 위원장부터 시계 방향으로 최룡해 당중앙위 부위원장, 박광호 당중앙위 부위원장, 박영식 인민무력상, 리수용 당중앙위 부위원장, 태종수 당중앙위 부위원장, 김평해 당중앙위 부위원장, 양형섭 최고인민회의 상임위 부위원장, 리명수 인민군 총참모장, 박봉주 내각 총리, 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 원탁에 앉지 못한 정치국 위원 6명도 뒷자리에 앉아 손을 들고 있다. 오른쪽 3명은 뒤쪽부터 안정수 당중앙위 부위원장, 김영철 당중앙위 부위원장, 최부일 인민보안상. 왼쪽 3명은 오수용 당중앙위 부위원장, 박태성 당중앙위 부위원장, 로두철 내각 부총리. 정치국 위원은 현재 14명이지만 리용호 외무상이 러시아 출장 중이라 13명만 회의에 참석했다. 오른쪽 구석에 정치국 후보위원인 김여정 당중앙위 제1부부장도 보인다. /조선중앙통신 연합뉴스
주목되는 것은 대남 정책을 총괄하는 김영철 노동당 중앙위원회 부위원장 겸 통일전선부장이 정치국 위원이면서도 원탁에 앉지 못했다는 것이다. 고위 탈북자 A씨는 "김영철의 노동당 내 위상이 아직 톱10 안에 들 정도는 아님을 보여준다"고 했다. 작년 10월 실각한 황병서의 후임으로 인민군 총정치국장에 오른 것으로 알려진 김정각의 모습도 이날 보이지 않았다. 총정치국장은 당연직 정치국 위원 또는 상무위원이기 때문에 정치국 회의에 반드시 출석해야 한다. 대북 소식통은 "아직 당대회나 당중앙위원회 전원회의 등을 통해 당직 인사를 하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라고 했다.
노동당 정치국은 당의 모든 사업을 조직·지도하는 최고 권력 기구로 정치국 상무위원과 위원(발언권·표결권 있음), 후보위원(발언권만 있고 표결권은 없음)으로 구성된다. 정치국 회의는 중요 국면마다 열렸다. 2011년 12월 30일 김정일 사망 직후 열린 정치국 회의에선 김정은을 최고사령관에 추대했다. 2012년 7월 15일 회의에선 리영호 총참모장을, 2013년 12월 8일 회의에서는 김정은의 고모부인 장성택 당 행정부장을 각각 해임했다.
김정은은 이 자리에서 남북 정상회담은 '북남 수뇌 상봉과 회담'이라고 부르면서, 미·북 정상회담은 '조·미 대화'라고 했다. 두 회담에 대해 미묘하게 다른 표현을 쓴 것이다. 정부 관계자는 "남북 정상회담에 대해선 성공을 확신하는 반면, 미·북 정상회담은 아직도 확신을 못하는 것 같다"고 했다.
북한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회담 성사 가능성을 반신반의하는 분위기였다. 실제 지난달 헬싱키에서 열린 1.5트랙(반관반민) 회의에 참석한 북한 외무성 관리들은 "조·미 수뇌 상봉이 잘될지 모르겠다"며 미국에 대한 불신감을 드러내기도 했다.
김명성 기자
04.17 "김정은의 담대함과 솔직함은 없는 자의 허장성세"
北 김정은의 "땅딸보" 발언 화제 정상 국가 지도자像 보여주고자 활달하고 인간적 모습 연출하지만 北 지도자들이 견식 있고 능수능란한 모습 보여줄수록 나라는 가난해지는 사실 직시해야
▲리 소테츠 일본 류코쿠대학 교수
김정은 북한 노동당 위원장이 지난달 초 한국 특사단을 만나 "난 땅딸보"라는 농담을 했다는 한 언론 보도를 놓고, 한국 정부 관계자가 "어렵게 만들어진 한반도 긴장 완화 분위기를 해치는 보도를 삼가 달라"고 했다고 한다. 한국과 미국 정보 당국으로부터 흘러나오는 얘기를 종합해보면 김정은의 키는 169~172㎝ 정도인 것 같다. 굽 높은 구두를 신기도 한다는데 확인된 바는 없다.
김정은은 "농구를 하면 키가 큰다"는 어머니 고용희의 말을 듣고 농구를 열심히 했다는 믿을 만한 증언이 있다. 어릴 때는 농구공을 안고 자기도 했다고 한다.
김정은이 정말 땅딸보라고 하는 '그런 가볍지 않은 농담'을 했다고 해도 놀랄 만한 일은 아니다. 아버지 김정일은 스스로를 '난쟁이 똥자루'라고 했었다. 납북 여배우 최은희가 처음 저녁 초대를 받았을 때, 김정일은 "남조선 아이들이 나보고 식물인간이라고 떠들어 대는데 어떻습니까?"라며 한 말이다.
김정일의 나이가 지금 김정은과 비슷한 30대 중반이었을 때였다. 그런데 두 사람의 농담은 본질적으로 다르다. 김정일은 자신의 '결점'을 완전히 드러내는데 주저함이 없었고, 김정은은 자신의 신체적 특징을 부정하는 방법으로 "나는 땅딸보가 아니지 않으냐"고 얘기한 것 같다. 두 사람 모두 콤플렉스와 허영도 있지만, 김정일이 더 자신감을 보였다고 할 수 있다.
두 사람을 비교해 본다면 김정일은 인간적인 부분이 많았다. 어린 김정남을 스위스에 보내 놓고 아들 생각이 나서 전화통을 붙들고 엉엉 울었다는 일화가 남아 있고, 병 치료차 프랑스로 떠난 고용희 생각이 나서 서로 사랑했던 시절 함께 들었던 '뒤늦은 후회'에 눈물을 하염없이 흘렸다는 증언도 있다.
그런데 김정은은 다르다. 스위스 유학 시절 평양과 나눈 전화 대화를 직접 들었다는 정보 관계자의 증언에 따르면 '담배를 끊어라'(김정은은 중학교 때부터 담배와 술을 즐겼다)는 여자 친구를 향해 입에 담지 못할 쌍욕을 했다고 한다.
/일러스트=이철원
김정일은 또 막내딸인 김여정을 부를 때면 '귀엽고 귀여운 우리 여정아'라고 부를 정도로 가족에게 살뜰한 편이었다. 자기를 보좌한 참모들을 작은 실수로 처형한 적도 없다.
그런데 김정은은 이유야 어떻든 어린 시절 자기를 안아 준 고모부를 처형하고, 같은 아버지를 둔 이복형(異腹兄)을 독가스로 죽였다. 김정은의 동의 없이 김씨 일가 친족을 죽일 수 있는 세력이 북한에는 없다.
그런 이미지를 불식시키기 위함인지, 요즘 김정은은 정상 국가의 지도자 모습을 보여 주려고 애쓰고 있다. 부인 리설주를 대동하고 한국 특사단 일행을 마중했고 평양을 방문한 한국 예술인들과 만났을 때는 농담까지 섞어가며 환대했다고 한다
김정은 주위 사람들도 열린 태도를 보이고 있다. 리설주가 김정은 위원장을 '우리 남편'으로 불렀다는 사실이 그렇다. 한국 특사단을 평양 옥류관에 초대한 김영철은 "원래 평양 인민들은 냉면을 두 그릇씩 먹는다"며 1인 2그릇을 권했다고 한다.
하나 남북 정상회담을 앞두고 벌어지고 있는 이런 일들을 보며 필자는 확신한다. 김정일처럼 김정은도 국제 외교 무대에 화려하게 등장했지만 본질적으로 북한 지도자는 변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평양에서 비행기로 1~2시간 정도면 갈 수 있는 베이징을 차량이 21개나 되는 1호 열차를 타고 시속 50㎞로, 50여 시간을 허비하며 다녀간 것은 할아버지 때부터 이어온 전통이다. 지난주 열린 최고인민회의에 김정은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한국인이나 외국인을 만났을 때는 스스럼없고 '솔직한 모습'을 보이면서도 법규(法規)를 초월하는 존재로 있고 싶어 하는 욕망은 김일성과 김정일 모두 그랬다. 김정은도 두 사람과 다를 바 없는 것이다.
북한의 3대(代)에 걸친 지도자들은 견식도 있고, 활달하고, 심지어 인간적이기도 했고, 외교에 능수능란한 모습을 보여 주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그들이 '잘하면 잘할수록' 나라는 점점 가난해졌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김정은은 70년 전 한국에 전기를 공급했던 북한이 지금은 경제 규모가 한국의 삼성전자 한 개 회사의 10분의 1 정도밖에 안 되는 나라로 전락(轉落)했다는 사실을 직시해야 한다. 문재인 대통령도 이 점을 상기(想起)하고 대화에 임할 필요가 있다. 김정은의 담대함과 솔직함은 없는 자의 허장성세(虛張聲勢)일 가능성이 매우 크기 때문이다.
조선일보
04.17 개처럼 벌어 김정은에 상납…BBC "北 해외노동자는 현대판 노예"
“여기선 ‘사람’이 아니라 ‘개’다. 굴욕적인 상황을 견뎌야 한다(eat dirt).”
탐사 프로 '파노라마', 러시아·폴란드 등 北 노동자 취재
"수입 대부분 김정은 일가 사치와 핵·미사일 개발 쓰여"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아파트 건설현장에서 일하는 한 북한 노동자가 한 말이다. 영국 BBC 탐사보도 프로그램 ‘파노라마’팀은 이처럼 러시아, 폴란드, 중국 등에서 일하는 북한 노동자들을 심층 취재해 영상 일부를 16일(현지시간) 공개했다. BBC는 이들 북한 노동자들을 '현대판 노예(modern-day slavery)'라고 표현했다.
방송에 따르면 해외서 일하는 북한 노동자들은 근무지에서 먹고 자며 쉼 없이 일한다. 폴란드에서 일하는 한 북한 노동자는 “어떤 휴식도 허락되지 않는다”고 전했다.
폴란드 북서부 슈체친에서 북한 노동자를 감독하는 한 감시관은 BBC에 “이들에겐 무급 휴가는 허락되지만, 공기 마감이 다가오면 휴식도 없이 일한다. 8시간만 일하고 집으로 가는 폴란드 사람과 달리 할 수 있는 한 오래 일한다”고 전했다. 외신에 따르면 러시아, 폴란드, 중국 등서 머무르는 북한 노동자는 15만 명에 달한다. 폴란드 조선소에는 약 800명의 북한 노동자가 용접공 등으로 일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유럽연합(EU)에서 북한의 해외 강제노역을 연구한 네덜란드 출신 법학 교수 클라라 분스트라는 2014년 폴란드에서 용접공으로 일하던 북한 노동자가 화재로 사망하기 직전까지 하루에 최소한 12시간 이상 일을 해왔다고 말하기도 했다.
방송에 따르면 특히 이들 벌이 대부분은 북한에 보내진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호화로운 생활(lavish lifestyle)을 지원하기 위해서"다.
https://youtu.be/FJc1ElDY020
북한 노동자들의 실태 고발한 영국 BBC 탐사 프로 '파노라마' 영상 일부. [유튜브]
러시아에서 일하는 한 북한 노동자는 그와 동료들이 수입의 대부분을 ‘캡틴’으로 알려진 중개자를 통해 북한에 넘긴다고 방송에 말했다. 그는 “일부는 ‘당 자금’이라 하고, 일부는 ‘혁명 자금’이라 한다. 이 돈을 조달할 수 없는 사람들은 해외에 머물 수 없다”고 했다. 몇 년 전만 해도 이 액수는 한 달에 1만5000루블(약 26만원)가량이었는데, 현재 두 배로 늘었다는 게 이들 증언이다.
태영호 전 영국 주재 북한 공사는 이 자금이 “김(정은) 일가의 사치나 핵·미사일 개발 등에 쓰인다”고 말했다.
앞서 1월 CNN도 러시아 건설현장서 노예 같은 생활을 하는 북한 노동자의 실태를 보도한 바 있다. 당시 보도에 따르면 이들이 버는 돈의 80%는 김정은에게 직송된다. 유엔은 이 돈이 연간 5억 달러(약 5337억원)에 달할 것으로 추산하기도 했다.
유엔 안전보장이사회가 지난해 12월 2019년까지 북한 노동자를 모두 본국으로 송환하는 내용의 대북 제재 결의안 2397호를 만장일치로 채택했지만 실효성에 대해선 회의적이란 분석도 나온다. 당시 CNN은 “얼마나 많은 북한 노동자들이 러시아 등에 있는지 파악이 안 된다”며 “그들의 송환을 보장할 수 없다”고 전했다.
황수연 기자 ppangshu@joongang.co.kr
04.24 북한 황해도서 버스 추락 … 중국인 여행객 32명 사망
북한에서 22일 오후 7시 중국인 관광객 32명이 숨지고 2명이 다치는 대형 교통사고가 발생했다. 북한 주민 4명도 사망했다.
남북회담 대비 보수 도로서 사고
시진핑 “사고 처리에 전력 다하라”
23일 중국중앙방송(CC-TV)은 메인뉴스를 통해 “북한 황해북도에서 중국 관광객 34명이 탄 버스가 다리에서 추락하는 대형 교통사고가 발생했다”고 보도했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은 “외교부와 주 북한 중국 대사관은 즉시 필요한 모든 조치를 취하고, 북한 관련 부처와 협조해 사고 처리에 모든 힘을 다하라”는 내용의 중요 지시를 내렸다. 리커창 총리도 “구체적인 사고 상황을 정밀 조사하고 구조와 치료 등 사후 처리에 힘쓰라”고 지시했다.
루캉(陸慷) 중국 외교부 대변인은 이날 정례 브리핑에서 “이번 사고로 숨진 중국인 동포와 북한 주민에게 깊은 애도를 표시한다”며 “부상자와 희생자 유족에게도 심심한 위로를 전한다”고 말했다.
그는 “중국 외교부는 의료 전문가를 포함한 수습팀을 파견해 북한과 협조해 구조와 치료 작업을 진행했다”고 밝혔다.
미국의 북한 전문매체 NK뉴스는 중국판 CNN격인 영문 채널 CGTN이 이날 오전 트위터를 통해 관광버스가 다리에서 추락해 30명 이상이 숨지는 사고가 발생했다고 알렸지만, 곧 삭제됐다고 보도했다. 북한 국영방송은 아직 사고 소식을 보도하지 않고 있다.
NK 뉴스는 베이징의 중국 여행사 관계자를 인용해 개성 관광 후 평양으로 돌아오던 중 사고가 발생했으며 개성-평양 고속도로는 현재 대대적인 보수공사가 진행중이라고 보도했다. 이 공사는 27일 열리는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국무위원장 간 정상회담 준비 차원이라고 NK뉴스는 분석했다. 그러면서 평양과 사리원을 잇는 고속도로가 전면 통제되고 있다고 보도했다.
사고를 당한 여행단에는 베이징 여행사 소속 시찰단과 중국 랴오닝(遼寧)성 선양(瀋陽) 관광객이 섞인 것으로 알려졌다. 사고 직후 평양에서 오후 10시경 두 대의 앰뷸런스가 경적을 울리며 출동하는 장면이 목격됐다고 이 매체는 덧붙였다.
베이징=신경진 특파원 shin.kyungjin@joongang.co.kr
05.02 김정은의 '속죄' 이유? 마오쩌둥 손자 사망說
"6·25때 전사한 큰아버지 묘 다녀오다 지난달 北서 교통사고死" 佛 RFI, 중화권 매체 인용 보도… 中, 사상자 34명 신원 안밝혀
지난달 중국인 관광객 32명이 숨지고 2명이 다친 북한 황해북도 교통사고 때 마오쩌둥(毛澤東)의 유일한 손자인 마오신위(毛新宇·48·사진)도 숨졌다는 말이 나오고 있다고 프랑스 국제라디오방송(RFI) 중문판이 1일 해외 중화권 매체들을 인용해 보도했다.
RFI에 따르면 사고를 당한 관광단은 '항미원조전쟁 승리 65주년 기념 방북 문화교류참관단'이었다. 참가자 대부분이 6·25전쟁 참전 중국 장성의 자녀들이거나 마오쩌둥을 숭배하는 홍가회(紅歌會) 간부들로 알려졌다. 특히 사망자 중에는 마오의 차남 마오안칭(毛岸靑·2007년 사망)의 독자인 마오신위가 포함됐다는 설이 제기되고 있다고 RFI는 전했다.
마오신위는 군사과학원에서 마오쩌둥의 군사전략사상을 연구해온 군인으로, 2010년 당시 최연소(40세)로 소장에 진급했다. 10년간 정협 위원을 역임했으나 지난 3월 시진핑 정권 2기 출범 때 물러났다. 미국 소재 반중 매체 신탕런(新唐人)은 "마오신위는 과거 다섯 차례 방북한 적이 있고 그중 1986년과 1990년에는 김일성을 만난 적이 있다"고 보도했다.
그의 사망설이 맞는다면 마오쩌둥은 북한에서 아들과 손자를 잃은 셈이 된다. 마오의 장남 안잉은 6·25에 참전했다가 미군의 폭격으로 사망했고, 막내 안룽은 어려서 죽었다. 이번에 사고를 당한 관광객들은 사고 당일 마오안잉의 묘소를 참배했던 것으로 전해졌다.
중국 정부는 사상자들의 신원을 전혀 공개하지 않고 있다. 일부 해외 친중 매체들이 사상자 34명 가운데 홍가회 간부 등을 포함한 26명의 명단을 보도했으나, 나머지 8명의 신원은 확인되지 않고 있다. 사망자 중에는 '홍가회' 왕궈쥔 단장, 다이청 명예단장도 포함된 것으로 알려졌다. RFI는 "마오신위 사망설의 진위는 아직 확인되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미국의 중화권 매체인 보쉰 등은 김정은이 이번 사고 때 보인 이례적인 행보가 마오신위 사망설과 관련됐을 수 있다고 보도했다. 김정은은 사고 발생 직후인 지난달 23일 새벽 6시 30분 중국 대사관을 찾아 리진쥔(李進軍) 중국대사를 위로했다. 당시 그는 중국 지도부 앞으로 '속죄'란 표현이 담긴 위로 전문(電文)도 보냈다.
조선일보 베이징=이길성 특파원
05.07자 주간조선 2506호
■‘죽음의 북한 여행’ 탑승객은 마오 신봉 사이트의 좌파 인사들
▲ 지난 3월 9일부터 북한 여행단 모집에 들어간 중국 싱훠여행사 홈페이지.
지난 3월 전격적인 중국 방문으로 국제 무대에 데뷔한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그로부터 한 달 뒤 다시 한 번 묘한 행태로 국제사회를 놀라게 했다. 지난 4월 22일 밤 황해북도 봉산군에서 발생한 관광버스 교통사고로 사망하거나 부상한 중국 단체관광객 34명을 전용열차를 편성해 중국으로 후송하고, 평양역까지 나와 직접 전송한 것이다. 리진쥔 주북 중국대사와 함께 후송 열차 앞에 선 김정은은 시종 침통한 표정이었다.
이 사고가 발생한 직후부터 김정은의 행보는 파격적이었다. 사고 다음날인 4월 23일 새벽 평양 주북 중국대사관을 방문해 애도와 위로의 뜻을 전했고 이날 저녁에는 치료 중인 부상자를 찾아 위로했다. 4월 25일에는 빠른 본국 후송을 원하는 중국 측의 뜻을 받아들여 전용열차 편성을 지시했다. 김정은은 이날 시진핑 국가주석과 리커창 총리, 리잔수 전국인민대표대회(전인대·국회 격) 상무위원장에게 공동으로 보낸 위로 전문에서 “비극적인 교통사고로 많은 중국 관광객들이 사망한 것과 관련하여 중국공산당과 정부, 전체 중국 인민과 유가족들에게 가장 심심한 애도와 사고의 뜻을 표한다”면서 “나와 우리 당과 정부는 이번 사고를 놓고 책임을 통절히 느낀다”고 했다. 또 “중국 동지들에게 그 어떤 말과 위로나 보상으로도 가실 수 없는 아픔을 준 데 대하여 깊이 속죄한다”고도 했다. 조선중앙통신 등 북한 관영매체들은 이런 김정은의 행보를 사진과 함께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그동안 중국 관광객이 북한 내에서 교통사고 등으로 사망하거나 북·중 국경지대 거주 중국인이 탈북 북한 병사에 의해 살해당하는 등 크고 작은 사건이 적잖았지만 북·중 양국은 일절 이런 사실을 공개하지 않고 조용히 처리해왔다. 2011년 중국 단체관광객 27명과 17명의 상무시찰단이 탄 두 대의 대형버스가 평양 인근 도로 결빙 구간에서 미끄러져 7명이 사망하고 10명이 부상했을 때도 양국 관영 매체들은 사고 사실만 간단하게 보도했다. 북측은 실무 책임자들이 병원을 방문해 위로하는 정도의 성의를 보였다. 이런 전례에 비춰 보면 김정은이 이번 사고 수습 과정에서 보인 공개적인 사과 행보는 전례가 드문 일이었다.
이런 북한과 달리 중국 관영 매체는 이번 사고에 대해 철저하게 로키(low-key)로 일관하고 있다. 사고 직후인 4월 23일 중국 관영 신화통신은 “4월 22일 오후 6시경 북한 황해북도에서 34명의 중국 관광객을 태운 관광버스가 다리 아래로 추락해 32명이 사망하고 2명이 중상을 입었다”면서 시진핑 주석과 리커창 총리가 사고 수습에 만전을 기할 것을 지시했다고 보도했다. 하지만 구체적인 사고 원인이나 사상자 명단 등 추가 보도는 전혀 나오지 않고 있다. 중국 외교부도 정례 브리핑에서 외신기자들의 질문이 나오면 ‘응급조치를 취했고, 북한과 협조해서 사고를 잘 수습하고 있다’는 정도 이상의 언급은 하지 않고 있다
미·북 회담 앞두고 북·중 관계 다지기?
김정은의 이런 행보에 대해 단순히 인도주의로 해석할 수 없는 정치적 배경이 있는 것 아니냐는 관측이 나온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을 코앞에 두고 있는 김정은으로서는 이번 사고로 어렵게 회복된 북·중 관계가 훼손되는 것을 방치할 수 없었을 것이라는 분석이다. 미·북 회담이 예상과 달리 안 좋은 방향으로 흘러간다면 북한은 제재로 인한 경제난를 이겨내기 위해 중국에 기댈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중국 시사평론가 덩위원은 BBC 인터뷰에서 “중국 민간에서 북한을 원망하는 여론이 일기 전에 어떤 형태로든 제스처를 취할 필요가 있었을 것”이라고 했다.
이번 사건이 북·중 관계 해빙과 함께 재개 움직임을 보이고 있는 중국인 관광객 북한 방문에 악재가 되지 않도록 하려는 고려일 수도 있다. 북핵 제재가 본격화되기 전 북한은 연간 4400만달러의 관광 수입을 올려왔으며, 북한을 찾는 관광객의 80%는 중국인이다. 중국 여행사들은 최근 새로운 북한 관광상품을 내놓고 모객을 시작하는 등 북핵 압박 속에 중단됐던 북한 관광을 재개하려는 조짐을 보이고 있다.
하지만 이런 배경을 감안하더라도 김정은이 ‘통절한 책임’ ‘속죄’라는 용어까지 동원해 이번 사고에 대해 사과를 한 것은 과한 측면이 있어 보인다. 북·중 양국이 내놓고 말을 하지 못할 다른 이유가 있는 것 아니냐는 말까지 나온다.
항미원조 65주년 기념 6박7일 여행
이번 사고를 당한 중국인 단체관광객은 일반 관광객이 아니었다. 마오쩌둥과 레닌 등을 신봉하는 중국 좌파 인터넷 사이트 우여우즈샹(烏有之鄕) 산하에 있는 싱훠(星火)여행사가 항미원조(抗美援朝·6·25 참전을 부르는 중국식 명칭) 65주년을 기념해 이번 여행단을 꾸렸다. 여행단 정식 이름도 ‘항미원조 전쟁 승리 65주년 기념 중국 인민 북한 방문 문화교류 참방단’인 것으로 전해졌다. 2003년 베이징에서 만들어진 우여우즈샹은 마오쩌둥을 신봉하고, 중국의 개혁개방을 반대하는 좌파 성향의 인터넷 매체이다. 그 산하에 있는 싱훠여행사는 여전히 공산주의 지배 체제를 유지하고 있는 북한과 쿠바를 비롯해 러시아의 레닌 유적, 유럽 마르크스 유적 등을 탐방하는 여행상품을 팔고 있다.
참가자 중 확인된 인물은 우여우즈샹 편집장이자 싱훠여행사 사장인 댜오웨이밍과 마오쩌둥 관련 다큐멘터리영화 등을 감독한 중국 관영 CCTV 아이신 감독의 부친 등이다. 이외에 중국홍가(紅歌)회 회원, 6·25 참전 중국 장군들의 자녀 등 좌파 성향 인사들도 다수 포함된 것으로 알려졌다.
싱훠여행사는 지난 3월 9일부터 이번 여행단 모집에 들어갔다. 이 여행사는 웨이보(중국판 트위터)에 올린 모집 글에서 ‘올해는 항미원조전쟁 승리 65주년’이라면서 ‘항미원조의 위대한 정신을 널리 알리고 지원군 선열의 휘황한 업적을 회고하기 위해 북한 여행단을 모집한다’고 썼다. 여행사 홈페이지에 따르면 이번 여행 일정은 4월 18일부터 24일까지 6박7일로, 관광상품 가격은 1인당 5900위안(약 100만원)이다. 북·중 국경지대인 단둥에서 집결해 열차 편으로 평양으로 간 여행단은 첫 이틀 동안 평양 시내와 남포 등지를 둘러보는 것으로 돼 있다. 평양에서는 만수대와 천리마동상·인민대회당·김일성광장·주체사상탑 등을 찾고, 남포에서는 서해갑문·고구려 고분 등을 둘러보는 일정이다. 사흘째 일정은 평안남도 회창군에 있는 중국인민지원군 열사능원을 방문해 마오쩌둥의 아들로 6·25 당시 사망한 마오안잉(毛岸英) 묘소를 참배하는 코스로 돼 있다. 나흘째는 개성을 당일로 방문하고 평양으로 돌아오는 일정이 잡혀 있다.
돈줄 급한 북, 상감령전투 지구도 개방
사고가 난 닷새째 일정은 원산을 방문해 둘러보고, 오후에 상감령 지구를 방문해 원거리에서 상감령의 크고 낮은 봉우리들을 지켜보는 것으로 돼 있다. 여행단은 상감령을 방문하고 평양으로 돌아가던 길에 봉산군 지역에서 사고를 당한 것으로 보인다. 싱훠여행사는 북한 전역에 걸쳐 다양한 코스의 여행 상품을 갖고 있지만 상감령 방문을 일정에 넣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북한 당국도 처음으로 중국 여행객에 이 코스를 개방했다고 한다.
상감령전투는 6·25 후반기인 1952년 10월 14일부터 40여일간 강원도 철원군 김화읍 북방 저격능선과 삼각고지 일대 인근에서 우리 군과 미군, 중공군 사이에 벌어진 고지전이었다. 미군 7사단과 한국군 2사단, 중공군 45사단과 29사단 등 총 10만병력이 참전했다. 중국 측에 따르면 59차례나 서로 고지를 뺏고 뺏기는 치열한 전투가 전개됐으며, 양측을 합쳐 3만명 이상이 전사했다. 중국 측은 막강한 미군을 상대로 이 전투를 승리하면서 오성산 방향으로 향하던 연합군의 진격을 저지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 전투를 배경으로 한 영화를 만들고 기념관을 짓는 등 대대적인 선전도 해왔다.
우리 군에서는 이 전투를 ‘저격능선 전투’로 부르는데, 중국군이 점령하고 있던 저격능선을 확보하면서 연합군이 승리한 전투로 기록하고 있다. 서로 주장이 엇갈리고 있는 것이다.
이번 여행단의 방문지에 상감령이 포함된 것은 각별한 의미가 있다. 김정은 집권 이후 7년간 냉각됐던 북·중 관계가 회복되는 시점에 혈맹의 역사가 담긴 상감령까지 중국 관광객에게 개방해 양국 관계 회복 분위기를 고조시키겠다는 의도였던 것이다. 이렇게 계획한 행사가 대형 교통사고로 얼룩져버린 것이다. 일부 네티즌들은 다리 아래로 추락한 버스가 폭발하지 않았는데도 탑승자 38명 중 36명(중국인 32명, 북한인 4명)이 사망할 정도로 피해가 컸던 점을 들어, 음주운전 등 북측에 귀책 사유가 있는 것 아니냐는 추측도 제기하고 있다.
마오쩌둥 손자 포함설
중국 당국이 이 사건을 조용히 처리하고 있는 데 대해서 다양한 관측이 나오고 있다. 이번 여행단에 참여한 인사들이 좌파인사들이라는 사실은 사고 이틀 뒤인 4월 24일 밤 중국의 대표적인 좌파 논객인 쿵칭둥 베이징대 교수가 올린 웨이보 글을 통해 알려졌다. 그러나 이 글은 하루 뒤 삭제됐다. 쿵 교수는 이후 BBC 방송의 확인 요청도 거절했다고 한다.
사상자 명단이 전혀 나오지 않는 것도 의문이다. 중국은 최근 해외에서 발생하는 대형 교통사고와 관련해 피해 사실과 피해자 명단을 속속 공개해왔다. 국민들에게 해외여행 시 안전에 주의할 것을 환기시키기 위한 의도였다. 2년 전인 2016년 대만 관광버스 화재사고로 중국인 관광객 26명이 사망했을 때도 사고 당일 명단이 나왔다. 반면 이번에는 사고가 발생한 지 1주일이 지난 시점에도 명단이 발표되지 않고 있다. 이 때문에 이번 여행객 중에 거물 인사가 포함된 것 아니냐는 소문이 무성하다. 해외 반중 언론에서는 그 인물이 마오쩌둥의 유일한 손자인 마오신위(毛辛宇·48)라는 미확인 보도까지 나왔다. 이런 인물이 들어 있어서 김정은이 전용열차까지 편성하고 직접 평양역까지 배웅을 나간 것 아니겠느냐는 추산이다.
중국 입장에서 찝찝한 구석이 있을 것이라는 분석도 있다. 중국 당국은 미국의 강력한 압박 요청에 따라 지난해 북한 관광을 중단했다. 그런데도 싱훠여행사는 작년 7월 북한 관광 여행단을 이끌고 평양을 방문하는 등 북한 관광 상품을 계속 팔아왔다. 북한 관광 자체가 제재 대상인지 여부는 논란이 있지만, 강도 높게 북한 관광을 통제해온 중국 당국으로서는 스스로 구멍이 있음을 자인하는 꼴이 된다는 것이다.
05.17 황영조보다 느린 북한 철도… 레일 15만개 걷어내고 새로 깔아야
김정은도 "철도 낡아 민망하다"
일반열차 시속 20㎞, 마라톤 속도… 속도 높이면 교량 붕괴나 탈선
레일부터 우리 수준으로 깔고 고속철까지 연결하면 158조원
열차로 유라시아 대륙 연결하고 중국 동북 3성 시장 열리지만 실제 물류 개선 효과는 지켜봐야
16일 열기로 했던 남북 고위급회담에 참석할 예정이었던 5명의 북측 대표단에는 김윤혁 철도성 부상(副相)이 들어가 있었다. 낙후된 철도 재건이 북한의 최우선 관심사라는 것을 보여주는 장면이다. 북핵 문제의 실마리가 풀려가면 남북 경제 협력을 본격화한다는 판문점 공동선언문에도 '1차적으로 동해선 및 경의선 철도와 도로들을 연결하고 현대화한다'는 내용이 들어가 있다.
문제는 남북 모두 '철도 연결'이라는 두루뭉술한 표현을 사용하고 있지만, 일단 시작하면 단순히 끊어진 철길을 잇는 수준에서 그칠 수 있는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북한 철도는 노후한 데다 보수도 제대로 이뤄지지 않아 대부분의 노선이 시속 20㎞대로 운행할 정도다. 남북 철도를 시베리아·중국·만주·몽골 등 4개의 대륙횡단철도와 연결한다는 구상까지 현실화하려면 사실상 북한 주요 철도를 모두 걷어내고 새로 깔아야 한다. 전력 공급망, 철도 교량, 터널 개보수 등까지 포함하면 막대한 자금이 들어가게 된다. 북한 철도 재건은 남북한 경제에 모두 도움이 될 것이라는 전망과 '퍼주기식 지원' 논란을 피할 수 없다는 시각이 엇갈린다.
북한 철도, 노후화로 제기능 못해
"북한 철도 소문 들었어요. 우리가 만든 레일로 다 새로 깔아야죠."
지난 15일 경북 포항시 현대제철 포항공장의 대형압연공장 주변에는 25m 길이의 철도 레일들이 겹겹이 쌓여 있었다. 국내에서 유일하게 이 공장에서만 철도 레일을 생산한다. 노경철 대형압연부 부서장은 "1개당 1.5t 쇳덩어리지만, 안전과 직결되기 때문에 길이는 1㎜, 높이는 0.3㎜ 오차만 허용될 정도로 정밀 가공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남북 철도 연결이 추진될 경우 생산량을 늘릴 수 있게 된다는 기대감이 공장 안팎에서 느껴졌다. 북한 철도는 레일 노후화 등이 심각한 상태고, 황해도 송림시 황해제철소에서 철도 레일을 만들지만 품질이 국제 기준에 못 미친다. 노 부서장은 "연간 6만7000개 정도 생산이 가능하다"고 말했다.
◇평균 시속 20㎞에 불과한 북한의 철도
북한 철도 노선은 5226㎞에 달해 남한 (3918㎞)보다 길지만, 97%가 단선이다. 단선 상태로 모두 교체할 경우 현대제철에서 만드는 레일 42만개 이상이 들어가게 된다. 다 걷어내야 할 지경이지만, 노선이 100㎞ 이상인 주요 간선 철도 10여개가 우선 교체 대상이 될 가능성이 높다. 한국교통연구원 등 추산에 따르면, 선로 교체와 대피선·보조선 설치용 등을 감안해 약 15만개의 레일이 필요하다. 레일 1개당 187만원이니 레일 교체 비용만 2800억원에 달한다.
북한은 화물의 90%, 여객의 60%를 철도에 의존하고 있지만, 전력 부족과 철로 보수 방치 등으로 철도 상황은 최악이다. 평양에서 신의주를 거쳐 베이징까지 주 4회 운행하는 국제 열차가 시설이 가장 좋다고 하는데, 평양~신의주 225㎞를 가는 데 5시간이 걸린다. 평균 시속이 45㎞에 불과하다. 최고 간부들이 이용하는 특별열차를 제외하고 급행·준급행·완행·통근 등 4가지로 구분되는 일반 열차의 평균 시속은 20㎞에 불과하다. 마라토너들과 비슷한 속도다. 속도를 높이면 노후 레일이 견디지 못해 탈선 사고가 나거나, 교량 붕괴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불비(不備)해 불편하고 참으로 민망하다"고 할 정도다. 이런 치부를 내보이고 철도 현대화를 원하는 것은 경제 건설에 대한 의지가 확고하다는 의미라고 전문가들은 분석한다. 안병민 한국교통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북한 법 규정에 '혁명의 전취물(戰取物)'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는 것은 토지와 철도 두 가지뿐인데, 철도를 내놓고 남한 도움을 받겠다는 것은 그만큼 경제 건설 의지가 있다는 것으로 볼 수 있다"고 말했다.
◇고속철까지 건설하면 최대 158조원
국토교통부, 한국철도기술연구원 등은 지난달 남북 정상회담에서 합의된 경의선과 동해선 연결과 보수에만 6조원 이상이 필요할 것으로 추산한다. 경의선 연결과 현대화에 1조5000억원 정도, 동해선 연결과 현대화에 4조9000억원이 들어간다는 계산이다.
하지만 북한 철도 재건에 들어갈 자금은 현재로서는 '추정치'를 벗어나지 못한다. 북한은 토지보상비가 없고 인건비도 낮지만, 기본 설비조차 갖추지 못한 철도가 상당수여서 비용을 종잡기 어렵다. 다만, 본지가 단독 입수한 북한 철도성의 '원산~금강산철도 개간 투자 제안서'를 보면, 원산시에서 금강산국제관광지대까지 118㎞ 철도를 대대적으로 보수하는 데 들어갈 비용을 자체적으로 추산한 액수를 확인할 수 있다. 철로 노반 보강, 기존 레일 철거, 전력 공급 개선 등 16개 항목을 포함해 총 3억2343만달러(약 3500억원)의 사업비를 추산했다. ㎞당 단가가 35억원 정도다. ㎞당 300억원대인 우리 철도보다 비용이 크게 낮다. 그러나 기본적인 재건 수준을 넘어 복선화·전력 및 신호 방식 교체 등이 병행될 경우 비용은 더 불어나게 될 것으로 보인다. 4년 전 금융위원회는 북한 철도 개발 비용을 약 83조원으로 추산했다. 일부 연구기관에서는 한반도종단고속철도(54조원)를 포함해서 북한 철도를 남한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데 필요한 자금이 158조원에 달할 것으로 전망한다.
◇한반도 철도, X자형에서 H자형으로
북한 철도 재건 과정에서 일제가 식민지 수탈, 대륙 침략 병참 기지의 2가지 목적으로 부설한 한반도 철도망의 전체적인 개편이 가능하다는 것은 주목할 부분이다. 일제는 한국 철도를 지하자원 개발형, 항만 연결형, 대륙 침략형 등 3가지 유형으로 만들었다. 전체적인 노선이 서울을 중심으로 X(엑스)자형이 됐다. 동서 간 연결 철도가 부실하다. 정부는 이런 점을 보완하기 위해 서해안 경의선, 동해안 동해선을 축으로 하고 비무장지대를 횡단하는 노선을 만들어 H(에이치)자형으로 만들려고 한다.
◇컨테이너 운송, 대륙횡단열차 106개 vs. 화물선 1만2000개
북한은 중국과 3개 노선, 러시아와 1개 노선이 연결돼 있다. 남북을 잇는 철도가 여기에 연결되면 시베리아횡단철도(TSR)·중국횡단철도(TCR)·만주횡단철도(TMR)·몽골횡단철도(TMGR) 등 4개의 대륙횡단철도를 통해 유라시아를 넘나들게 된다. 남북 철도 연결로 중국 동북 3성 1억명의 거대 소비 시장을 안마당으로 삼게 된다는 경제적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 하지만 '대륙과 연결된다'는 물류 측면의 효과는 막연한 기대로는 곤란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전문가들은 이런 비교를 한다. 컨테이너선의 경우 20피트(약 6m) 컨테이너 1만2000개를 수송하지만, 시베리아횡단열차는 53개 화차에 각각 2개씩 106개 정도에 불과하다. 또 중국횡단철도와의 연결은 신의주를 넘어가 산둥반도 밑 쑤저우까지 내려가야 하는데, 컨테이너선으로 인천항 등에서 바로 이곳으로 연결하는 것이 시간, 비용상 유리하다. 북한 철도 개선 지원을 '대륙과 연결한다'고 포장하고 경제적 효과를 부풀리는 것은 곤란하다는 말이 나오는 이유다.
[北 기차 도시락 '곽밥' 메기 조림, 닭고기 냉채… 일반실엔 없는 고급음식]
북한의 여객 열차도 도시락을 판매한다. 경제난으로 사라졌다가 4년 전부터 다시 등장한 것으로 알려졌다. 곽에 담겨 있다고 '곽밥'〈사진〉이라고 부른다. 철도성 평양청년열차상업관리소 등이 담당하는데, 계절에 따라 총 15종류 이상이 판매된다. 햇쑥밥, 김밥, 완두콩밥, 섭조개밥, 팥밥 등이다. 여름철에는 김밥에 메기 조림, 닭고기 냉채, 가을에는 완두콩밥에 채콩볶음, 두부전, 창란젓 등이 주요 메뉴다. 일반 열차에서는 판매되지 않는다. 한 북한 전문가는 "곽밥을 파는 기차를 탈 정도라면 경제력이 있는 상류층이라고 봐야 한다"고 말했다.
철도가 시속 20㎞에 불과한 데다 시간표를 어기기 일쑤라 북한 주민들은 대부분 '써비차'라는 트럭을 이용한다. 불법 영업 화물차다. '서비스차'가 변형된 말이다. 북한에서는 차량을 이용하는 행위를 '써비를 준다'고 표현하기 때문에 이런 신조어가 나왔다고 한다. 국영기업소, 군부대 등이 돈벌이 차원에서 하던 것인데 몇 해 전부터는 민간에서도 운영할 정도로 일반화됐다. 북한의 트럭들은 5만㎞마다 공훈 표지를 부착하는데 20개씩 붙인 트럭들도 적지 않다고 한다.
조선일보 이진석 논설위원
05-18 “마사지 받는다고 생각하시라우” 내가 본 北의 열악한 교통 실태
● 웜비어 이용 여행사 통한 ‘北 나선-청진-경성’ 여행기
● 나선~청진 비포장도로…몸은 요동치고, 머리는 천장에 부딪히고
● 폴크스바겐 택시, 이용하는 사람 없어
● 그래도 미소 짓는 북한 주민들…“南北 편견 극복이 먼저”
https://youtu.be/n2b_xEFNoSg
▲나선 시내 비포장 도로 위에 주차된 폴크스바겐 택시들. 이용하는 승객이 별로 없어 보였다.
○“우리 측 도로 사정이 좋지 않다.”
이번 남북 정상회담에서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이 솔직한 발언에 나는 놀라움을 감출 수가 없었다. 열악한 내부 사정을 외부 세계에 굳이 알리고 싶어 하지 않는 게 북한이기 때문이다. 내가 북한의 낙후된 농촌 마을을 촬영하려고 할 때마다 그곳 주민들은 매우 민감하게 반응했다.
나는 2013년 11월, 함경북도 나선시와 청진시, 경성군을 다녀왔다. 영국, 호주, 러시아에서 온 외국인 관광객 5명과 함께였다. 내가 북한을 가게 된 것은 일종의 궁금증 때문이었다. 2012년 여름, 북한자유연합 등 보수단체가 대북 전단, 일명 ‘삐라’를 북한으로 날리기 위해 임진각에 모인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당시 삐라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기획하고 있던 나는 카메라를 들고 임진각으로 향했다. 평화를 상징하는 임진각에서 거센 충돌이 일어났다. 삐라를 날리려는 보수단체와 이를 저지하려는 진보단체 및 지역 주민, 그리고 이들을 말리려는 경찰들까지 뒤엉켜 몸싸움이 벌어졌다.
삐라로 인해 생긴 남남 갈등. 과연 북한 주민들은 남한이 살포하는 삐라를 어떻게 생각할까? 호기심이 생긴 나는 북한이 허용하는 외국인 투어에 대해 알아봤다. 그러나 내 국적이 캐나다라고 하더라도 한국에 살기 때문에 북한 투어를 할 자격이 되지 못했다. 궁여지책으로 ‘캐나다에 거주하는 대학생’으로 서류를 제출해 북한행 여행 비자를 받았다. 공교롭게도 북한 여행 중 정치선전물을 훔치려 했다는 이유로 북한에 억류됐다가 혼수상태로 고국 미국으로 돌아가 사망한 오토 웜비어가 택했던 여행사를 통해 북한에 들어갔다.
○‘미스터 김’의 딸 걱정
당시 전에 없던 새로운 여행상품이 나왔는데, 함경북도 나선시, 청진시, 그리고 경성군을 돌아보는 코스였다. 중국 옌볜에서 차를 타고 국경 세관을 거쳐 나선시에 도착했다. 우리 일행은 마중 나온 안내원과 함께 미니밴을 타고 나선시 식당으로 향했다.
세관에서 나선 시내로 가는 길은 고불고불했지만, 양방 2차선 도로는 깨끗한 편이었다. 창문 밖 풍경은 보통의 농촌 마을과 다를 바 없었다. 다만 김정은 위원장과 사회주의를 찬양하는 슬로건이 드문드문 보였고, 시내로 들어서자 그것들은 더욱 자주 눈에 띄었다.
호텔 앞에는 광장 같은 공간이 있는데 바닥에 금이 많이 나 있으며 울퉁불퉁했다. 남한이라면 이러한 공간을 주차장으로 썼으리라.
나선 시내 도로에 다니는 자동차 중에는 택시가 가장 많은 듯했다. 택시 대부분은 폴크스바겐. 나선에서 택시비는 1km당 중국돈 4위안(약 670원)이라고 했다. 그러나 택시를 타는 사람들은 별로 보이지 않았다. 택시 대부분은 항상 어딘가에 주차돼 있었다. 2013년 당시 서울 택시요금인 2km당 3000원에 비하면 나선 택시가 반값 수준으로 저렴하지만 북한의 국민소득을 고려한다면 일반 주민에게는 매우 비싼 교통수단이다.
나선은 경제특구 지역이다. 중국과 국경을 맞대고 있어 중국에서 들여오는 제품을 즐겨 사용하는, 북한에서 매우 잘사는 도시다. 다만 밤이 되면 도로에 가로등이 켜지지 않아 껌껌한 도로를 달릴 수밖에 없었다. 도로변에 있는 식당 몇 곳에만 불이 켜졌고, 대부분의 상점은 문을 닫았다. 나선시 식당에서 저녁을 먹는 도중에 갑자기 불이 나간 적도 있다. 그럴 때면 식당 종업원이 배터리로 작동하는 스탠드 조명을 가져와 불을 밝혀줬다. 몇 분 후에 다시 전기가 들어오기도 했다.
위성사진에 나온, 남한 대비 어두컴컴한 북한은 외국 언론이나 보수단체가 북한의 열악한 전기 사정을 보여주기 위해 주로 사용하는 이미지다. 북한의 전기 사정이 열약한 건 사실이다. 다만 사회주의 사회에서는 옥외광고가 없다. 옥외광고 없는 사회에선 그만큼 전기가 덜 필요하다. 따라서 위성사진으로만 북한의 전기 상태를 판단하기에는 무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나선의 한 호텔 로비에서 호텔 종업원들과 대화를 시도했다(물론 북한에서의 모든 인터뷰는 몰래카메라로 촬영했다). 내가 남한 발음의 ‘조선말’로 말을 걸자 신기해하는 눈치다. 북한 사람들도 남한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자식 걱정을 많이 했다. 자신의 자식이 평양에서 대학에 다녔으면 좋겠다고 말하는 사람이 많았다.
호텔의 내 방 침대에는 전기장판이 깔려 있었다. 덕분에 매우 따뜻하게 잘 수 있었다. 그러나 온수가 나오지 않았다. 로비 직원에게 그 점을 얘기하자 그는 “그럴 리 없다”며 대화를 회피하려는 기색이 역력했다. 아무래도 따뜻한 물이 나오지 않는다는 사실이 조금 부끄러웠던 것 같다.
우리 일행은 나선에서 밴을 타고 여기저기 다녔고, 도로에 차가 없으니 막히지 않아 좋긴 했다. 안내원 말고도 전직이 교사였다는 한 북한 남성이 동행했는데, 그와 친해지면서 여러 가지를 물어볼 수 있었다. 그는 “핵은 자위(自衛) 수단이다, 핵이 없으면 미국이 이라크를 침략했듯 북한을 공격할 것”이라고 했다. 남한 보수주의자들은 “남한이 퍼준 돈으로 북한이 굶어 죽는 주민들을 살리지 않고 핵을 만들거나 군인들에게만 혜택을 준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그는 “남한이 돈을 주든 말든 핵은 항상 만들고 있었다”고 했다. 그리고 “남한 원조가 군인들에게 갔다면, 그것은 북한 주민의 자식들에게 간 것이나 마찬가지”라고도 했다. 북한 인구의 상당 비율이 군에 속해 있기 때문이다. “내 배가 고프더라도 우리 자식이 배불리 먹었다면, 거기에 대해 뭐라 하는 부모가 세상에 어디에 있느냐”고도 했다.
그는 남한이 살포하는 삐라에 대해서는 “비겁한 행동”이라며 치를 떨었다. “삐라 속에 약품을 넣기도 한다”고 하자 “약품은 적십자를 통해 공식적으로 보낼 것이지, 왜 비겁한 방식으로 보내느냐며,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고 말했다. 그와의 인터뷰는 북한을 여행하는 일주일 내내 이어졌다. 이제부터는 그를 ‘미스터 김’이라고 부르겠다.
○트럭과 리어카와 소달구지
나선에서 어느 중학교에 방문했다. 거기 학생들이 닭싸움하는 모습은 한국과 비슷했다. 학생들과 영어로 대화할 수 있는 시간이 주어졌는데, 아이들의 영어 실력은 우수한 편이었다(성적이 우수한 학생들이 다니는 학교로 보였다). 아이들은 곧 평양으로 견학을 간다며 들떠 있었다. 담임교사는 내가 무슨 말을 하나 궁금했는지 자꾸 내 주위를 맴돌았다. 그의 ‘감시’를 피해 아이들에게 남한에 대해 아는 것이 있는지 물어봤더니 교육을 받은 듯 대답을 회피했다. 이후에도 대답하기 곤란한 질문이면 못 알아듣는 척하는 북한 주민들을 종종 만났다.
이때까지만 해도 버스를 운전하는 기사와 별로 대화를 나누지 못했지만, 이후 그는 점점 마음을 열었다. 그는 한국 대학의 등록금이 얼마나 되는지, 삼성이 휴대전화 외에 무엇을 더 만드는지 궁금해했다.
며칠 후 나선에서 청진으로 이동했다. 나선을 빠져나오기 전 우리 일행은 철조망으로 둘러쳐진 공간에 차를 세워야 했다. 총으로 무장한 군인들이 여권을 가져갔다. 다시 여권을 받아 이동할 때까지 30분가량 걸렸는데, 당시 우리 밴 근처에 있던 한 여자 군인은 나를 향해 미소 짓기도 했다.
나선을 벗어나자 다른 함경북도 관할시 소속의 다른 안내원이 우리를 맞이했다. 운전기사는 출발 전에 우리에게 “마사지 받는다고 생각하고 3시간을 잘 버텨달라”고 당부했다. 길이 울퉁불퉁하다는 말을 우회해서 한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도로 사정은 심각한 수준이었다. 과속방지턱이 쉼 없이 연결된 도로를 3시간 동안 달리는 것 같았다. 몸이 오르락내리락 덜덜 떨려 잠을 청할 수도 없었다. 한번은 머리가 천장에 닿을 정도로 버스가 심하게 요동치기도 했다. 우리 일행은 안전벨트도 없이 좌석 손잡이를 꽉 붙들고 세 시간을 버텼다.
창밖 농촌 풍경은 남한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산에 나무가 없다는 걸 빼고는. 역시나 김정은과 사회주의 체제를 찬양하는 슬로건이 자주 나타났다.
북한에 도착한 첫날 안내원이 버스에서 바깥 풍경을 촬영하지 말라고 당부했지만, 나는 DSLR 카메라로 버스 바깥을 몰래몰래 촬영했다. 그러던 중 갑자기 앞에 앉아있던 안내원이 뒤로 돌아 내게 오더니 버럭 화를 냈다. 밖에 있던 어느 주민이 내 카메라를 보고 불편하다고 신고했다는 것이다. 믿기 힘든 얘기지만 나는 카메라를 끌 수밖에 없었다. 대신 몰래카메라를 켰지만.
청진으로 향하는 도로에는 차선이 없었다. 소달구지와 리어카, 트럭이 한데 뒤섞여 다녔다. 트럭들은 시도 때도 없이 경적을 울려댔다. 도로가 워낙 좁고 울퉁불퉁, 고불고불해 반대 방향에서 오는 차량에 경고하기 위해서다. 도로 위에서 리어카와 소달구지를 끌고 다니는 북한 주민들은 무척이나 힘들어 보였다. 그들의 최종 목적지는 어디일까, 거기까지는 얼마나 걸릴까. 우리 버스가 마침내 청진에 도착했다. 버스에서 내려 땅을 밟으니 비로소 살 것 같았다.
○평양에서 온 마사지사들
청진 시내는 나선만큼 깨끗했다. 나선처럼 자전거가 많이 다녔고, 신호등 없는 도로에서 길안내원이 깃발을 든 채 신호등 역할을 하고 있었다. 차량이 많진 않아서 길안내원의 업무가 크게 어려워 보이지는 않았다. 청진은 외국인 관광객들이 거의 처음으로 발을 디딘 도시라고 했다. 촬영은 그만큼 쉽지 않았다.
청진에서 새롭게 합류한 안내원은 내가 DSLR 카메라로 김일성 동상을 어떻게 촬영했는지 보여달라고 했다. 김일성 목이 조금 잘려 촬영된 장면이 나오자 그는 매우 기분 상해하며 재촬영을 요청했다.
▲서울 지하철처럼 청진 시내 트램에는 승객들로 가득하다.
청진 시내에도 소달구지가 다녔다. 길 한복판에 롤러블레이드를 타는 아이들과 함께 소달구지가 지나가는 재미있는 장면이 포착됐다. 차량은 많지 않았는데, 차가 보인다 싶으면 외제차일 정도로 외제차가 은근히 많았다. 아우디 A6와 벤츠 S클래스 등 중대형 외제차도 목격했다. 나선과 청진 모두 시내에 이 많았는데 서울 지하철의 출퇴근 시간과 비슷하게 붐볐다.
청진의 안내원은 남한에 대해 많이 궁금해했다. 남한 사람들이 북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길에는 차가 얼마나 많은지, 어떤 차들을 주로 타는지 등을 물어봤다. 그는 일본부터 유럽까지 자동차 브랜드를 죽 읊었다. 그런데 현대차는 알고 있었지만, 기아차는 처음 들어보는 듯했다. 그는 “북한에선 자가용이 없어도 불편하지 않다”고 했다. “자전거를 타면 건강에도 좋지 않으냐”며 웃음을 지어 보였다. 북한에 있는 동안 자전거 경주대회를 TV로 흥미롭게 보는 주민들의 모습을 자주 목격했다.
청진에선 김정은과 사회주의 체제 찬양 포스터와 유명 화가들의 그림 판매소를 간 적이 있다. 멋진 그림도 있었지만 중국 세관에서 문제가 될 수 있다는 말을 듣고 구매하진 않았다. 상점 여직원은 “북에서 산 그림을 중국에 가져가 비싸게 파는 이들이 있기 때문”이라고 귀띔했다. 그러면서 불만 섞인 목소리로 “북한 길거리에 김정은 위원장을 찬양하는 문구가 너무 많다. 이런 슬로건이 자신에게 득될 게 없다. 더 이상 새로 설치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고 말했다. 비록 간접적으로나마 불만을 터뜨린 것이지만, 북한에 머물면서 처음 접한 북한 당국에 대한 비판적 시각이었다. 김정은 위원장에 대해 불만이 없는지, 미스터 김에게도 물어본 적이 있다. 그는 “질문 자체를 이해할 수 없다”며 “북한 주민에게 이런 질문을 하는 것은 금기”라고 했다.
청진에서 갑작스러운 군사 훈련으로 도로에 무장한 군인들이 배치됐고, 우리가 탄 버스는 어느 식당 주차장에 정차했다. 주차장 문은 굳게 닫혀 밖을 볼 수 없었다. 청진에서 경성으로 이동할 때는 열차를 이용했다. 이 열차는 청진에서 함경남도 함흥 구간을 오가는 열차였다. 열차 내부엔 침대도 배치돼 있었으나 승객은 눈에 띌 정도로 많지 않았다.
열차는 시끄러웠고, 덜컹댔고, 속도가 일정하지 않았다. 평균시속은 60km 정도로 느껴졌다. 기차 밖으로 달리는 차량보다도 느린 경우도 있었다. 창밖으로 다른 열차들을 목격하기도 했는데, 열차마다 사이즈도, 상태도 달랐다. 사이즈가 큰 것은 그만큼 속도가 빨라 보였다. 열차는 비포장도로를 달리는 버스보다는 더 편했다.
버스를 출발시키기 전 ‘마사지’ 받을 준비를 하라던 버스기사의 말처럼 우리 일행은 정말로 마사지를 받으러 가게 됐다. 경성에서 예정에 없던 마사지숍에 가게 됐는데, 마사지사는 대부분 20대 초중반의 평양 출신 여성이었다. “한국에서 손님이 왔다”며 노래를 부르고 반기는 모습에 감동했다. 그들은 의사 못지않은 사회적 지위를 누린다고 했다. 나를 담당한 마사지사는 한국의 의료 기술이 얼마나 발달했는지 궁금해하며 “통일이 되면 제주도에 꼭 가보고 싶다”고 했다.
경성에서 나선으로 다시 이동하면서 한 번 더 ‘마사지’ 받을 각오를 하고 버스에 올랐다. 역시나 길 상태는 엉망이었고, 반대편에서 오는 차량 혹은 리어카와 우리 버스가 부딪칠까봐 조마조마했다. 나선에서 보내는 마지막 밤에는 호텔을 몰래 빠져나와 옆에 있던 노래방에 갔다. 여종업원들은 북한 찬양 노래를 불렀다. 내가 서양 노래 좀 틀어달라고 하자 잠깐 고민하더니 틀어주었다. 다소곳하게 북한 찬양가를 부르던 그녀들이 서양 음악에 맞춰 신나게 춤을 추는 모습을 보고 정말 놀랐다. 한편 화장실에 가던 길에 옆방에서 대마초를 피는 북한 주민을 목격했다.
▲나선 시로 향하는 길에 만난 버스 창밖 풍경들. 산에는 나무가 드물다.
북한의 도로 상태는 북한의 열악한 환경을 여실하게 보여준다. 그러나 내가 만난 북한 사람들 대부분은 밝아 보였다. 길거리에서 마주친 그들은 내게 미소를 지어 보였고, 일을 구하고자 장마당 주위를 맴도는 이들도 웃음을 잃지 않으며 친근감을 보여줬다. 간혹 남한 사람들은 이러한 북한 사람들의 웃음을 가짜로 여긴다. 사전에 짜인 각본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내가 본 ‘북한의 미소’는 할리우드 최고의 배우도 연기할 수 없는, 자연 그대로의 미소였다.
행복이란 돈 외에도 여러 가지를 따져봐야 하는 것이다. 열악한 환경에 있다고 곧 불행한 것은 아니다. 우리는 동포를 대할 때 이러한 편견을 버려야 한다. 교류는 교감이 되고, 교감은 평화를 낳을 것이다. “도로 사정이 좋지 않으니 비행기 타고 평양에 오시라. 기다리고 있겠다”는 김정은 위원장의 말에 희망을 가져본다.
조현준
●1981년 서울 출생
●중앙대학교 연극영화과 학사, 아카데미예술대학교 멀티미디어커뮤니케이션 학과 석사, 동국대학교 영화영상제작학과 박사
●미국 ABC방송국 교양프로그램 프로듀서
●現 계명대학교 언론영상학과 교수
●영화 ‘시계’ ‘삐라’ ‘황색바람’ 등 연출
05. 21 北 외화벌이 비밀무역… 리정철 통해 드러났다
WSJ 보도 "와인 5만병 등 조달… 제재 피하려 1만달러 이내 송금"
지난해 말레이시아에서 발생한 김정남 암살 사건에 연루돼 조사를 받다 추방된 북한인 리정철〈사진〉을 통해 북한이 어떻게 국제사회의 제재를 피해 외화벌이를 하고 있는지 드러났다고 월스트리트저널(WSJ)이 18일(현지 시각) 보도했다.
WSJ에 따르면 리씨는 겉으로는 말레이시아에서 아내, 두 아이와 함께 수영장과 체육관이 딸린 아파트에 살면서 가끔 일식 샤부샤부집에서 한국 소주를 마시는 평범한 사업가였다. 그러나 말레이시아 당국이 리씨로부터 노트북 3대와 휴대전화 4대, 태플릿PC 1대 등을 압수해 분석한 결과, 그의 본모습은 북한의 외화벌이와 비밀 무역에 앞장선 공작원이었다.
리씨는 수십만달러 상당의 야자유와 비누를 미국과 유엔의 제재 대상인 북한 군부가 관리하는 회사로 수출했다. 감시의 눈을 피하기 위해 야자유 등을 실은 배는 말레이시아에서 중국 다롄을 거쳐 북한 남포로 들어갔다. 그는 유엔의 사치품 제재를 피해 25만달러 상당의 이탈리아산 와인 5만 병을 북한에 조달하기도 했다. 북한이 중거리 미사일 발사에 이용할 수 있는 산업용 중고 크레인 구입을 시도하기도 했다.
신문은 리씨가 어떤 방법으로 유엔 제재를 피했는지 구체적으로 설명하지는 않았지만, 말레이시아 업자와 문자메시지 내용 등을 통해 간접적으로 보도했다. 리씨는 현지 업자들에게 '1만달러 이상은 송금하지 말라' '서류에는 기념품과 목걸이 등의 구입 대금으로 적으라' 등으로 메시지를 보내기도 했다. 2016년 8월엔 2만5000달러를 한꺼번에 송금할 일이 생기자 "큰 금액이라 위험하다"는 문자메시지를 주고받기도 했다.
대니얼 러셀 전 미 국무부 동아시아태평양 담당 차관보는 "리정철의 사례는 이례적이지 않다"며 "북한은 이런 사람들로 구성된 군대가 있다"고 했다. WSJ는 "오는 6월 12일 미·북 정상회담이 실패로 끝나더라도 북한은 이미 구축해놓은 (리씨 같은) 해외 네트워크를 통해 제재 압력을 완화할 것"이라고 했다.
조선일보 워싱턴=조의준 특파원
05-31 “김정은은 흡혈귀”…北주민 2명, BBC에 이례적 비난
“김정은은 마치 흡혈귀가 피를 빨아먹는 것처럼 우리로부터 돈을 빼앗아가고 있다.”
북한에서 일반 주민들의 솔직한 속마음을 듣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방문객들은 철저히 감시를 받고 외부 세계와의 의사소통은 철저히 차단되기 때문이다.
영국 BBC 방송의 ‘빅토리아 더비셔’ 프로그램은 북한 일반 주민들이 최고 지도자 김정은 노동당 위원장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아보기 위해 지난 수개월 간 극비리에 많은 북한 주민들과 접촉했다. 그 결과 2명으로부터 솔직한 생각을 들을 수 있었다고 29일 보도했다.
이들은 자신들의 신분이 드러날 경우 강제수용소로 보내지거나 심지어 죽음을 맞을 수 있는 위험을 무릅쓰고 BBC에 김정은에 대한 자신들의 생각을 털어놓았다.
시장 상인 선희(가명)라는 여성은 “(북한)사람들은 대부분 김정은에 대해 장삿꾼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남편 및 두 딸과 함께 살고 있는 그녀는 “사람들은 김정은이 우리와 다르지 않다고 말한다. 다만 그(김정은)는 우리의 돈을 빼앗아가고 있을 뿐이다. 그는 흡혈귀처럼 어떻게 우리의 돈을 빼앗을 것인지만을 궁리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BBC는 선희의 신분이 탄로나는 것을 막기 위해 그녀를 가명으로 처리하는 등 필요한 모든 노력들을 기울이고 있다. 그녀의 신분이 드러나면 그녀뿐만 아니라 그녀의 가족 3대가 모두 강제수용소로 보낼질 수도 있다.
데일리 NK에 따르면 선희처럼 시장에서의 판매에 직간접적으로 삶을 의지하는 북한 사람의 숫자는 500만명을 넘는다. BBC는 이번 취재에 데일리 NK의 북한 내 취재 네트워크로부터 많은 도움을 받았다.
북한에서 시장 거래는 북한 체제의 강경한 공산주의 입장을 많이 약화시키고 있다. 국가의 배급 체계가 무너지고 북한에 대한 외국의 제제가 계속되는 상황에서 시장 거래는 북한 주민들에게 먹고살 수 있는 길을 제공하고 있다. 북한은 지난 1990년대 중반의 ‘고난의 행군’ 운동을 다시 펼칠 수 없는 입장이다.
선희씨는 그러나 김정은에 대해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시골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고 말했다. 김정은이 시장 활동에 간섭하지 않고 내버려두고 있기 때문이라고 그녀는 설명했다.
시장은 북한 주민들에게 먹고 사는데 필요한 여러 물품들을 제공해주기도 하지만 동시에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나 소문들을 알려주기도 한다. 선희는 “미국 대통령이 (북한으로)오고 있다는 얘기를 시장에서 들었다”라고 말했다. 그녀는 “(북미)회담에 대해 사람들은 많이 알지 못한다. 그러나 누구나 다 미국을 좋아 하지 않는다. 우리가 가난한 것은 미국이 우리를 갈라놓았고 남한과 접촉하지 못하도록 막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라고 덧붙였다.
선희씨는 또 과거 한국과 미국에 적대적이던 북한의 선전 체제도 바뀌고 있다고 말했다. 그녀는 “그들(북한 당국)은 우리가 남한과 잘 지내야 한다고 말한다. 모든 사람들이 더 잘 살기 위해서는 미국과도 평화롭게 지내야 한다고도 말한다”고 밝혔다. 이는 중요한 변화이다.
북한 인민군에서 일하는 철호(가명)는 “내 소망은 죽을 때까지 아프지 않고 남들을 부러워 하지도 않으면서 잘 사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또 부모 세대와 자식 세대들도 그러한 삶을 살았으면 좋겠다고 덧붙였다.
그는 삶에 대해 불만을 털어놓는 사람들이 많다고 밝혔다. 철호는 “때때로 잘못 말했다는 이유로 보위부에 끌려가는 사람들이 있다. 사람들이 갑자기 실종되는 일도 많았다. 그러나 최근에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고 있다”고 전했다.
그가 말하는 실종은 강제수용소에 보내지는 것을 말한다. 국제 인권단체 앰너스티 인터내셔널에 따르면 북한 강제수용소에 수용된 사람들은 약 2만명에 이른다.
선희씨는 강제수용소에 대해 사회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테러 행위라고 비난했다. 그녀는 많은 북한 사람들이 남한에 대해 알고 싶어하며 때문에 위험을 무릅쓰고 한국 드라마 등을 본다고 말했다.
【서울=뉴시스】
주간조선 2511호
■北 인민보안성 내부 교화문건 단독 입수 (A4 11장 분량)
김정은 집권 이후 북한 내부의 물질만능주의 세태가 심각한 수준에 이른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탈북자들에 따르면 장마당이 활성화되고 ‘장롱 속 달러’가 위력을 발휘하면서 뇌물이면 안 되는 일이 없는 사회가 돼버렸다는 것이다. 특히 탈북자들은 북한 내부에 만연해 있는 매춘과 마약에 대한 증언도 심심치 않게 한다. 1g에 50위안 정도에 거래되는 ‘얼음’(필로폰)에 중독된 생계형 매춘녀들이 ‘카라오케이’(북한판 노래방) 등에 광범위하게 퍼져 있다는 것이다.
주간조선은 한 대북 소식통을 통해 북한의 이런 충격적인 사회상을 보여주는 내부 문건을 입수했다. 2016년 말 북한 인민보안성1이 작성한 이 문건은 A4용지 11장 분량으로, 자신들이 적발한 마약·매춘 사범의 구체적 사례들을 고발하고 있다. 이 문건에는 ‘모든 일군들과 근로자들은 경애하는 김정은 동지의 두리에 굳게 뭉친 일심단결의 위력으로 사회주의제도의 정치적 안전을 믿음직하게 보위해 나가자’라는 제목이 달려 있는데, 내용상 내부 주민 교육용으로 작성된 것으로 보인다. 이 문건을 발췌해 소개한다.(문건의 문장을 그대로 옮겼고, 이해하기 힘든 북한식 용어와 해설이 필요한 부분에는 별도 주석을 달았다. 전문은 홈페이지 하단 '전문보기'에서 볼 수 있다.)
최근 사회에서 벌어지는 범죄행위들의 심각성으로부터 국가보위성 특별군사재판소에서는 사회의 안정과 인민의 리익을 침해하며 날뛰던 인간쓰레기들을 선군의 총대로 무자비하게 쓸어버리였습니다.2 이번에 당과 혁명, 조국과 인민의 이름으로 준엄한 철추를 받은 범죄자들은 하나와 같이 인간의 초보적인 량심마저 다 줴버리고3 사상적으로 변질될 대로 변질되여 딴 세상을 꿈꾸면서 적들이 바라는 대로 추잡하고 변태적인 범죄행위만을 추구한 반당, 반혁명, 반국가적 범죄자들입니다.
평안북도 어느 군의 어느 공장에서 로동자로 일하였던 안모놈은 지난 시기 군사복무를 하면서 불순 록화물들을 시청, 류포한 범죄로 과오 제대4되였으나 개준5하기 위해 노력할 대신 공화국법에 전면 도전하여 2015년 7월경부터 로골적으로 성록화물6과 괴뢰영화들을 구입하여 시청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놈은 불순록화물의 시청, 류포를 막기 위한 법기관의 역할이 강화되자 교묘하게도 20여명의 사람들로부터 은밀한 방법으로 시청하겠다는 담보서까지 받고 10여편의 성록화물을 류포시키였으며 2016년 1월부터는 순진한 처녀들에게 일생을 같이하자는 달콤한 말로 구슬리거나 좋은 영화를 보여주겠다고 유혹하여 끌고 가서는 성록화물들에서 성관계 장면만을 골라 시청시키면서 추잡하고 변태적인 방법으로 성불량행위를 감행하였습니다.
함경남도 어느 군에서 무직자로 생활하던 박모놈은 괴뢰 성록화물과 색정도서 등을 꺼리낌없이 시청하면서 거기에 나오는 장면을 재현하여 나 어린 처녀들을 포함한 40여명의 녀성들의 정조를 무참히 유린하는 짐승도 무색케 하는 야만적인 방법으로 성불량범죄행위를 감행하였습니다. 놈은 2012년 7월부터 수십 차에 걸쳐 제놈7의 딸과 같은 19살의 나 어린 처녀를 돈과 물건으로 유혹하여 제놈의 집으로 끌고가 마약을 사용하면서 불순 성록화물의 장면대로 성관계를 재현하다 못해 성흥분제까지 써가며 변태적인 성불량행위를 감행하였습니다.
평안북도 어느 군의 어느 한 공장에서 로동자로 일하던 강모놈은 지난 시기 도박행위와 마약밀매행위로 2차례나 법적 처벌을 받았으나 개준할 대신에 공화국법에 도전하여 ‘성관계는 인간의 본능이다’고 로골적으로 줴쳐대면서8 2013년 3월 공모자인 리모놈과 함께 16살 나 어린 처녀를 제놈의 집에 끌고 가 마약을 사용하면서 교대적으로 성폭행하는 범죄를 감행하였으며 이미 전부터 치정관계를 가지고 있던 김모 녀성의 집을 찾아가 공모자인 리모놈에게 성관계 방법을 배워준다고 하면서 리모놈이 중학교를 갓 졸업한 그 녀성의 나 어린 딸을 벌거벗기고 추잡한 짓을 하도록 강요하는 한편 그들이 보는 앞에서 김모 녀성과 마약을 사용하면서 변태적인 성관계를 가지였으며 그것도 성차지 않아 김모 녀성의 딸에게 야수같이 달려들어 성폭행하는 추악한 범죄를 감행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놈은 너절하고 추잡한 방법으로 수십 차에 걸쳐 김모 녀성의 모녀만이 아니라 나 어린 처녀들과 유부녀를 비롯한 수십여 명의 녀성들을 돈과 물건으로 유혹하거나 강제로 끌어들여 변태적인 방법으로 륜간함으로써 녀성들을 정신도덕적으로, 육체적으로 완전히 타락시키는 천추에 용납 못할 범죄행위를 감행하였습니다.
함경남도 어느 군에서 무직자로 있던 박모놈은 지난 시기 돈에 환장한 나머지 사람들의 사상의식, 계급의식을 마비시키는 독소인 마약을 제조9하고 사용, 밀매하거나 도박행위 등 온갖 범죄행위들을 감행함으로써 우리 사회의 고상한 정신도덕적 풍모와 건전한 생활양식을 무참히 란도질하였습니다.
놈은 ‘마약을 제조하는 길만이 살아갈 수 있다’고 줴치면서 2010년 10월부터 2015년 8월까지 기간에 7차에 걸쳐 자기 집과 여러 장소들에서 마약제조 물질을 구입하여 낮과 밤이 따로 없이 마약을 제조하여 2400여US$를 사취하는 범죄를 감행하였으며 이미 전에 마약 사용과 도박행위 범죄로 하여 법적 처벌을 받았으나 개준할 대신에 여러 장소들에서 마약중독자들과 100여차에 걸쳐 16g의 마약을 사용하는 범죄를 감행하였습니다.
함경남도 어느 군에서 무직자였던 박모놈 역시 돈에 환장이 된 년놈들과 공모하여 10여차에 걸쳐 5㎏의 마약을 제조하는 범죄행위를 감행하였으며 2009년 3월부터 2016년 2월 기간 40여차에 걸쳐 2.8㎏의 마약을 10여명에게 밀매하였을 뿐 아니라 2008년 8월부터 2016년 2월 기간에 10여명의 불순한 자들과 수백g의 마약을 2000여차 사용하는 범죄행위를 감행하였습니다.
평안남도 어느 군에서 부양10으로 살고 있던 오모년은 성록화물을 구입, 류포한 범죄로 법기관에 단속되여 법적 처리를 받았지만 자기의 죄과를 뼈저리게 뉘우치고 개준할 대신에 성록화물을 비롯한 불순 록화물들을 구입하여 시청하는 반국가범죄행위를 서슴지 않고 감행하였으며 2009년 11월부터 2016년 2월 기간에 4차에 걸쳐 자기 집과 여러 장소들에서 2㎏의 마약을 제조하고 400여차 사용하는 범죄를 감행하였습니다.
지어 년은11 ‘마약을 제조하는 길만이 뭉치돈을 벌 수 있는 길이다’고 공공연히 지껄이면서 각성된 군중과 법일군들의 눈을 피해가면서 생산한 마약을 20명의 대상들에게 160여차 밀매하여 수천만원의 자금을 사취하였으며 사람들을 정신육체적으로 타락시키는 반당 반국가 범죄행위를 꺼리낌없이 감행하였습니다.
평안남도 어느 군에서 부양으로 살고 있던 지모년 역시 성록화물을 시청, 류포시키면서 불건전한 자들과 변태적인 성불량행위를 감행하였을 뿐 아니라 2011년 9월부터 2015년 12월 기간에 2.6㎏의 마약을 제조하여 10여명의 불건전한 자들과 380여차에 걸쳐 마약을 사용하고 밀매하는 범죄행위를 감행하였습니다.
신의주시 역전동에서 살고 있는 부양 리모는 2013년 7월부터 2016년 4월까지 압강동 부양 김모를 비롯한 여러 대상들에게 중국 돈 65웬을 주고 마약을 밀매받거나 부당한 성관계를 가지였으며 남자 대상들로부터 받은 마약 3.65g을 김모를 비롯한 여러 사람들과 공모하여 27차에 걸쳐 사용하는 범죄행위를 감행하였을 뿐 아니라 이 기간 13차에 걸쳐 동하동 부양 김모의 집에서 해방동 무직자12 장모 외 여러 남자들을 대상으로 매음행위13를 하거나 매음거간행위를 하는 범죄행위를 감행하다가 적발처리되였습니다.
특히 신의주시 역전동에서 살고 있는 부양 리모는 2015년 4월부터 2016년 3월까지 돈벌이를 목적으로 피현군과 염주군의 무직자들을 자택에 데려다 무단숙박시키면서 그들에게 군부대 로동자인 최모 등 10명의 남자들을 소개해주어 자기 집과 민포동 부양 리모의 집에서 12차에 걸쳐 매음행위를 조장시켰으며 련상 2동 부양 김모로부터 중국 돈 300웬을 주고 마약 2g을 넘겨받아 여러 대상들에게 밀매하고 흡입기구까지 보장해주는 범죄행위를 감행하다가 적발처리되였습니다.
신의주 건재공장 로동자 박모는 2010년 4월경부터 2012년 5월 중순경까지의 기간 4차에 걸쳐 화교인 조모를 비롯한 5명의 대상들과 공모하여 950g 정도의 마약을 중국에 밀수하는 범죄행위를 감행하고 법기관에 거짓자수하였으며 개준하지 못하고 2016년 3월 21일 마약 1.2㎏을 밀매하는 행위를 감행하다 적발처리되였습니다.
신의주 모방직공장 로동자 최모는 2013년 4월부터 2014년 3월까지 기간 신의주 방직공장 로동자 장모에게 중국 돈 2천여웬을 주고 성불량행위를 하는 과정에 썩어빠진 자본주의 성록화물에서 나오는 말세적인 방법들을 습득하여 성록화물을 재현한 성불량행위를 감행하면서 장모를 비롯한 5명의 녀성들과 30여차에 걸쳐 11g의 마약을 공모 사용하고 자기의 성행위를 손전화기14로 4차에 걸쳐 동영상 촬영 제작하여 공모시청하다가 적발처리되였습니다.
신의주 체육기구공장 로동자 김모는 2009년 8월경부터 2014년 12월까지 기간 본부동 부양 박모를 비롯한 여러 대상들과 50여차에 걸쳐 마약을 공모사용하였으며 박모의 기억기에 입력되여 있는 적대국 성록화물 1편을 넘겨받아 시청하고 군사 복무 중에 있는 백모에게서 괴뢰TV극 2편과 괴뢰불순 출판물 50여편이 입력된 TF카드15를 넘겨받아 신의주 압록강종합식료공장 로동자 오모, 박모와 21차에 걸쳐 시청 류포시킨 범죄로 법적 처벌을 받았으나 개준하지 못하고 사상적으로 변질되여 박모와 비법 부부생활을 하면서 이미 시청하였던 적대국 성록화물을 재현하여 자기들의 변태적인 성불량행위 장면들을 손전화기로 촬영 제작16하여 혼자서 또는 공모시청하다가 적발처리되였습니다.
신의주시 락청 2동에서 살던 김모는 정치사상생활에 전혀 참가하지 않고 돌아치면서 2009년 2월경 남중동 부양 리모로부터 미국과 괴뢰영화라는 것을 알면서도 CD알판17을 밀매받아 시청 류포시키고 마약밀매행위로 로동교화 10년형을 받고 병보석방된 후 자택에서 치료를 받을 대신 개준하지 못하고 교화 중 병보석방자, 교화출소자, 로동단련대 출소자들을 찾아다니며 성록화물과 반공괴뢰영화들을 시청 류포시키는 행위를 감행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김모는 우리의 내적자료를 수집하기 위해 책동하고 있던 중국인 화교 왕모년과 비법 중국 손전화 련계18를 하면서 4.5㎏의 마약을 밀매하고 년으로부터 끌어들인 적대국 성록화물들과 괴뢰영화들을 시청 류포시키다가 재범관계로 법기관에 단속되여 취급받던 중 검열성원의 목을 칼로 베고 도주하는 범죄행위를 감행하였으며 자기의 행위가 우리 당정책과 공화국법에 심히 도전하는 엄중한 범죄행위이며 우리의 정치사상적 진지를 와해파괴하려는 암해행위로써 적들의 책동을 도와주는 리적행위, 역적행위라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사상적으로 완전히 변질되여 신의주시 개혁동에 사는 리모와 수차에 걸쳐 마약 사용과 성록화물을 시청하고 변태적인 성관계를 가진 것을 비롯하여 자기 조국을 배반하고 중국으로 도주하려하거나 여러 명의 녀성들과 추잡한 성생활을 일삼는 범죄행위를 감행하다 적발되여 인민의 준엄한 심판을 받았습니다.
신의주시 민포동 부양 문모는 2012년 8월부터 2015년 10월까지 기간 제약자 신의주시 민포동 부양 문모는 2012년 8월부터 2015년 10월까지 기간 제약자재공급소 로동자 박모가 기업소창고에서 비법적으로 빼낸 마약 제조물질을 그와 공모하여 1t을 넘겨받아 10여차에 걸쳐 흥남 제약공장에서 일하는 박모 외 3명에게 밀매주고 박모, 한모와 공모하여 마약 160여g을 밀매하거나 8차에 걸쳐 공모사용하는 범죄행위를 감행하다가 적발처리되였습니다.
신의주시 친선 2동에서 살고 있는 김모는 2016년 1월 13일 지난 시기 마약 밀매 과정에 외상으로 소비한 물건값을 해결하기 위하여 화폐장사를 하는 신의주시 동중동 부양 김모의 집에서 돈을 꾸려다가 그가 응하지 않자 사람을 죽여서라도 돈을 빼앗아 가질 목적으로 김모의 집 부엌에 있던 저가락으로 김모의 가슴 부위를 여러 번 찌르다 못해 가스곤로로 김모의 머리를 내리쳐 무참히 살해한 후 그의 몸에 있던 현금 15만원과 중국 돈 994웬을 강도해가지고 도주하는 범죄행위를 감행하다 적발처리되였습니다.
신의주시 동상동 무직자 리모는 2013년 11월부터 2014년 4월까지 기간 2차에 걸쳐 가짜돈을 만들어 가지고 다니면서 피해자들에게 자기를 믿게 한 다음 사람이 없는 곳에 유인하여 손칼을 뽑아들고 위협하는 방법으로 손전화기 2대를 강도한 것을 비롯하여 지난 기간 많은 개인재산을 속여 가진 범죄를 감행하다 적발처리되였습니다.
지금 사회의 이모저모에서 제도의 안전을 해치는 적대적 범죄행위들이 나타나게 된 근본원인은 우선 신념이 떨떨한 일부 일군들 속에서 여기저기 눈치를 보면서 당적 원칙, 계급적 원칙을 고수하지 못하고 인맥, 물맥관계에 얽혀 제 살 궁리만 한 데로부터 법적투쟁의 도수를 높이지 못한 데 있습니다.
평안남도 어느 군에서 부양으로 살고 있던 오모년과 지모년은 성록화물을 구입, 류포한 범죄와 마약밀매범죄로 여러 번 단속되였지만 해당 단속일군들에게 돈과 물건을 찔러주고 죄과를 무마시키였으며 신고자들을 알아내서는 폭행을 비롯한 여러 가지 방법으로 공갈하여 좋지 못한 사회적 여론을 조성하였습니다.
그리고 이번에 법적으로 처리된 년놈들은 대부분이 범죄전과자들로서 이미 전에 마땅히 엄하게 처벌받아야 하였으나 해당 법기관들에서는 형벌을 약화시켜 사회정치적 안전을 해치는 범죄자들이 또다시 머리를 쳐들게 하였습니다.
원인은 다음으로 일부 기관, 기업소책임 일군들 속에서 기업소 운영과 사회적 과제 수행을 구실로 종업원들과 주민들에게 ‘외화벌이’19 ‘더벌이’20 등의 과제를 주면서 로동행정규률을 심히 문란시킴으로써 범죄자들이 범죄를 감행할 수 있는 공간들을 조성시킨 데도 있습니다.
지금 일부 기관들에서는 종업원들과 주민들을 ‘지원자금 조성’의 명목 밑에 조직사상 생활에서 류리시키고 장악통제를 전혀 하지 않고 있는 데로부터 그들 속에서는 끼리끼리 밀려다니며 술판, 먹자판을 벌리고 패싸움을 비롯한 강력범죄행위를 일삼고 있습니다.
전문보기
1 인민보안성: 북한 경찰 2 북한에서도 범죄를 처벌하기 위한 재판이 열린다. 재판 전 예심에서는 수사도 진행한다. 통상 노동교화형, 3년형, 10년형, 총살형 등의 판결이 내려진다. 총살형의 경우 공포 심리를 유도하기 위해 공개된 장소에 사람들을 모아놓고 인민재판식으로 진행한다. 공개재판은 대부분 총살형으로 결론난다. 3 줴버리고: 저버리고 4 과오 제대: 불명예 제대 5 개준: 새롭게 바꾸는 것 6 성록화물: 북한 주민들은 포르노라는 표현은 잘 모른다. 원래는 황색 비디오로 불리다 최근 성록화물로 표현이 바뀌었다. 7 제놈: 자기 자신 8 줴쳐대면서: 지껄이면서 9 북한 내 마약은 3~4가지로 나뉨. 화학약품을 이용해 만든 것과 물담배처럼 피우거나 은박지에 두고 코로 흡입하는 종류가 있다. 99% 북한 내부에서 생산한다. 화학공장 또는 제약공장마다 마약을 만드는 특수작업반을 두고 있다. 이곳에서 만든 마약은 외화벌이를 위해 북·중 국경지역에서 거래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탈북자들도 구체적인 마약 거래 가격은 알지 못한다. 10 부양: 시집간 여자를 말한다. 북한은 사회주의 노동법에 따라 통상 55세까지 일한다. 그러나 시집을 가거나 건강이 좋지 않을 경우 의무노동에서 벗어날 수 있다. 시집을 갔다해도 상당수 여성들은 일을 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11 지어 년은: 심지어 그년은 12 무직자: 직업이 없는 사람. 북한은 국가 차원에서 모든 이들에게 직업을 부여한다. 그러나 배급이 끊긴 이후 출근하지 않는 사람들이 크게 늘었고 통제의 손길이 닿지 않은 지방에는 무직자가 꽤 많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13 최근 북한 장마당 등에서 북한 돈 5000원(1달러)을 주고 매춘하는 사건이 발생하고 있다고 한다. 14 손전화기: 휴대폰. 북한 내부에는 고려링크, 외국계인 오라스콤 등의 통신사가 있다. 휴대폰 보급 대수는 약 400만대 정도로 추정된다. 중국에서 가져와 국경지역서 사용하는 휴대폰 수도 1만대 이상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경우 중국 통신망을 이용한다. 15 TF카드: 휴대폰에 끼우는 메모리카드 16 북한에도 화질이 좋은 휴대폰들이 많다. 사진과 동영상 촬영도 가능하다. 17 CD알판: 한국의 CD로 보면 된다. 가격은 탈북자들도 잘 모른다. 18 손전화 련계: 손전화기로 연결하면서 19 북한은 전 국민에게 연간 2달러 정도의 충성 외화벌이 과제를 할당한다. 북한 전체 주민이 2000만명이라면 약 4000만달러가 어떤 식으로든 만들어져 김정은 체제로 모아진다. 군인들은 석탄을 캐 팔기도 하고 배를 만들어 물고기를 잡아 중국에 판매한다. 제약공장은 특수작업반을 두고 백도라지(아편)를 만든다. 가장 쉽게 외화를 벌 수 있는 수단이 마약이다. 중국에 마약을 팔기 위해 중간에 조직폭력배와 연계된 인사들도 있다. 20 더벌이: 외화벌이 이외에 추가로 돈을 벌기 위해 하는 일이나 과제. |
월간조선 07월 호
■“대충 식당 대충 먹고 간다!” 급식 불만 낙서 사건 발생... 북한군 식단 실태는?
“강냉이에 염장무... 3~4 숟가락 정도가 한 끼 식사량”
▲북한 병사들의 도열식. 사진=조선DB
북한의 한 군부대에서 급식 상태에 불만을 제기하는 낙서 사건이 일어난 가운데, 북한군 식단 수준에 대한 세간의 관심이 모이고 있다. 애초에 군부에서 지급하는 급식 수준 자체가 열악한데, 그마저도 간부들이 대부분을 빼돌려 사병들의 불만이 커지고 있다는 것이었다.
함경북도 한 소식통은 지난 1일 ‘자유아시아방송’(rfa)에 “9군단 산하 한 부대에서 간부들이 사병들에게 돌아갈 식량을 빼돌리는 데 대한 불만으로, 일부 군인들이 식당 벽에 ‘대충 식당에서 대충 먹고 간다’는 낙서를 하는 사건이 발생했다”고 전했다. 그의 말이다.
▲배급 식량을 나르는 북한 주민들
“최근 군 간부들이 여러 가지 이유를 대면서 군인들에게 차례로 지급되는 물자를 빼돌려 군인들의 식생활은 점점 어려워지고 있다. 이번 사건도 간부들의 식량 빼돌리기에 불만을 품은 군인들이 참다 못해 낙서로 불만을 제기하는 데까지 이르렀다. 이 사건과 관련해 인민군 해당기관에서 낙서 사건의 주모자를 색출하는 것과 동시에 군인들의 식생활에 무관심한 후방부서(병참부서)에 대한 조사도 함께 진행하고 있다. 이번 조사를 통해 낙서 사건 관련자들은 물론, 물자를 빼돌린 간부들도 엄중한 처벌을 받을 것으로 보인다.”
북한군 간부들의 식량 갈취와 사병들의 식단 실태는 어떨까. 《군복 입은 수감자 – 북한군 인권 실태 보고서》에 따르면 북한 병사들의 영양실조 여부를 묻는 질문에 총 응답자의 64.3%가 ‘있다’고 답했다. ‘90% 이상의 병사들이 영양실조’라고 답한 증언자도 여럿이었다. 응답자의 27.1%는 동료 군인이 영양실조로 죽는 것을 직접 목격했고, 10%는 다른 부대의 군인이 같은 이유로 죽었다는 사실을 들었다고 답했다. 어쩌다 쌀이 지급되기라도 하면 중간 간부들이 팔아먹는다고도 했다. 해당 보고서에 나온 북한군 출신 인사들의 증언이다.
사례1: “허약자가 60% 있었어요. 식량 공급이 잘 안 됐어요. 한 끼에 그냥 밥으로 따지면 3~4 숟가락 정도였어요. 강냉이가 쌀이었어요. 반찬은 시기마다 다른데 염장무를 먹으면 잘 먹는 거였어요. 저희 같은 경우는 시기마다 나오는 채소를 먹었어요. 염장무는 3~4 쪽 잘게 썬 거를 줬어요.”
▲북한의 강냉이죽 또는 강냉이밥.
사례2: “김정은이 집권을 하면서 전 부대에 백미를 공급하라는 지시가 있었는데, 그게 되나요. 쌀이 없는데 그게 되나요. 백미 공급을 한 달 했던 거 같아요. 하니까 부대 내에서 이때라고 해서 후방 시설을 보는 사람들이 100% 팔아먹는 거죠. 옥수수로 바꿔서 먹이는 거죠.”
사례3: “군대 나온 지 1년 6개월 만에 신병 훈련 끝나고 첫 훈련 받을 때였어요. 군대는 허약(영양실조) 걸린 애들은 부대 경비나 시키고 그러는데. 어떤 애들은 (허약해도) 남보다 잘하고 싶은 애들이 있잖아요. 자기도 훈련 나간다고 한 거예요. 그래서 데리고 나갔는데 보름만인가. 훈련 나가면 7일 동안 먹을 거를 안 주고 하는 훈련이 있거든요. 풀뿌리 캐 먹고 그러면서 버티는 건데, 얘가 연락이 안 돼서 하루 지나서 찾았는데 죽었더라고요.”
《2017 북한인권백서》에 나온 사례를 봐도 북한군의 식량 배급 실태는 열악해 보인다. “오빠가 말하는 게 강냉이밥에다가 염장 무를 줬다고 했어요. 우리 오빠는 집에서 외아들로 태어나서 군사 복무를 하기 전에 학교 다닐 때는 검은 음식은 먹지 않았어요. 그런데 군사 복무하고 와서 가리는 음식 없이 다 먹었어요. 무도 잎이 달린 거를 씻지도 않고 염장해서 줬다고 했어요. 그거 먹을 때는 영양이 달리니까 전혀 짜지 않아서 그냥 먹었는데, 먹고 나서 속이 안 좋아지면 물을 먹는다고 했어요. 그런데 너무 짠 거를 먹어서 간에 병이 왔다고 했어요. 오빠는 신체가 약하니까 그거를 견디지 못하고 병이 왔어요.”
▲군용 트럭에서 식량을 내리는 북한 병사들.
작년 11월 JSA 공동경비구역으로 귀순하다 북측의 총격을 입고 이송된 북한 병사 오청성의 배 속에는 강냉이와 기생충이 전부였다. 당시 오청성을 긴급 수술한 이국종 아주대병원 교수는 "우리나라 사람에게서는 발견할 수 없는 기생충이 발견됐다. 외과의사로서 20년 동안 볼 수 없었고, 교과서에서나 볼 수 있는 기생충이었다"고 말했다. 이 교수는 "소장에서 발견된 음식물이 변에 가깝게 굳어 있었는데, 섭식에 문제가 있었을 것으로 보이는 대목이고 실제로 영양 상태도 불량하다"고 덧붙였다.
글=신승민 월간조선 기자
07.23 夜景만 화려해지면 평양이 베이징 되나
주민 생활용 전기도 없는데 호텔 벽면에 조명장치 10만개 설치
실리보다 겉모습에만 집착하면 김정은 '北의 덩샤오핑' 될 수 없어
▲리 소테츠 일본 류코쿠대 교수
얼마 전 북한을 다녀온 영국 건축가 올리버 웨인라이트씨는 평양시와 주변에 있는 거대하고 화려하게 꾸민 건축물들을 둘러보고 처음에 깜짝 놀랐다고 한다. 그러나 이내 건물마다 빠짐없이 김일성·김정일 동상이 세워져 있고 초상화가 걸려 있는 것을 보고, 이는 거대한 무대 세트임을 알아챘다. 그는 이런 건축물에 대해 '독재자 패션(dictator chic)'이라고 명명했다.
구체적으로 김정은 시대에 만든 동양 최대의 마식령 스키장과 평양의 맨해튼이라 불리는 여명거리 초고층 아파트 단지, 문수대 물놀이장 등은 '김정은 패션'이라 부를 만하다. 중국 진나라 시황제 이래로 독재자들은 크고 위압적인 축조물을 좋아한다. 스케일은 작지만 북한의 지도자들도 크고 화려한 건축물을 선호한다.
김일성·김정일 시대에 북한은 옛 소련을 흉내 내 거대한 건축물을 많이 지었는데 그 가운데서 제일 가관은 만수대 언덕에 세워진 김일성 동상이다. 세계 최고 크기를 자랑한다는 높이 23m의 이 동상은 금불상처럼 표면에 황금을 입혔다. 동체는 동을 사용했는지 그보다 더 무거운 금을 사용했는지 8000만 조선 민족의 몸무게에 해당한다고 한다.
중국에서도 한때 마오쩌둥 주석 동상 건립 붐이 일어났었다. 문화대혁명이 일어나고 얼마 안 된 1967년 5월, 베이징 칭화대학 부속중학교 홍위병들이 대학 구내에서 제일 아름다운 건물이던 청나라 시대의 대문을 부수고 그곳에 마오쩌둥 동상을 세웠다. 그 후 약 3년 동안, 2000개 정도의 마오 동상이 각지에 세워졌다.
마오쩌둥 자신은 건국 초기만 해도 동상 제작에 부정적이었다. 건국 초기 선양(瀋陽)시가 자신의 동상을 세우려고 하자 마오는 "동상은 풍자적 의미밖에 안 된다(只有諷刺意義)"며 반대했다.
실용주의자인 덩샤오핑도 이런 겉치레에 반감을 갖고 있었다. 1978년 북한을 방문한 덩샤오핑이 금빛으로 번뜩이는 김일성 동상을 보고 그 자리에서 북한 간부를 향해 이 동상에 중국 인민이 지원한 돈이 얼마 들어갔느냐고 따져 물었다. 그 후 중국은 북한에 대규모 무상 원조는 하지 않기로 했다. 현재 마오쩌둥의 동상은 개혁·개방이 잘 안 된 곳에만 간혹 남아 있다. 중국에서는 한때 "(마오쩌둥) 동상이 있으면 개혁·개방이 안 된다"는 말이 유행했었다.
싱가포르 미·북 정상회담 이후 일부 '식자'들은 스위스 유학 경험이 있는 김정은에 대해 실리를 중시하는 지도자이며 북한의 덩샤오핑이 될지 모른다는 기대를 걸고 있다. 그 증거로 싱가포르 나들이에 중국 국기가 새겨진 항공기를 거리낌 없이 탔고 언론 노출도 개의치 않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싱가포르 나들이에서 보여준 '김정은 패션'에서 확인된 것은 김정은도 실리보다 겉치레를 좋아하고 외국의 '원조'는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는 북한식 사고방식에 갇혀 있다는 사실이다. 이틀 정도면 끝낼 여행길에 비행기를 석 대나 동원했고 무게 4t이나 되는 벤츠까지 가져갔다. 싱가포르 정부가 공짜로 제공한다고 하자 미국 대통령보다 더 비싼 방을 썼다.
평양 시내에서 제일 높은 건축물로 알려진 105층의 류경 호텔은 착공하고 30년이 넘도록 아직 내부 장식도 마치지 못했는데 정작 겉치레부터 시작했다. 지금 '호텔(외벽) 전체가 그대로 대형 텔레비전 화면인 듯, 움직이는 야경을 형상화하기 위해 건물 표면에 무려 10만 개의 점광원(LED 조명장치)을 부착하고 있다'고 6월 22일 자 '오늘의 조선'은 전하고 있다.
주민들의 생활용 조명에 필요한 전기도 제대로 공급하지 못하는 북한이 평양 야경(夜景) 만들기에 몰입하고 있다니, 김정은 시대에 들어와서도 북한은 근본적으로 변하지 않았다고 할 수밖에 없다. 북한이 진정으로 변하려면 이런 사고방식, 겉모양을 중시하는 '패션'부터 고쳐야 한다. 주민들이 가슴에 달고 다니는 휘장을 내려놓게 하고 수령 동상을 줄이든가 없애는 용기가 없는 한, 김정은은 북한의 덩샤오핑이 될 수 없다.
조선일보
07.26 외신이 본 북한판 귀족학교, 만경대혁명학원
평양에 주재하는 프랑스 통신사 AFP는 26일 '북한판 귀족학원'이라고 할 수 있는 만경대혁명학원 사진을 보내왔다. 사진들은 지난 4월과 6월에 촬영한 것들이다.
평양에는 미국의 AP와 프랑스의 AFP 등 2개의 서방 통신사가 주재하고 있는데, 취재 활동은 북한측의 안내에 따라야 하고 기사와 사진도 검열을 받아야 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만경대혁명학원은 1947년 문을 열었다.
처음 이름은 '평양 혁명자유가족학원'이었다. 이름 그대로 항일투쟁 과정에서 희생된 사람들의 유자녀들을 교육하는 기관이었다. 이후 한국전쟁 전사자와 대남 침투요원, 정권 고위간부의 자녀들도 선발했고 이름도 만경대혁명학원으로 바꾸었다.
'만경대'는 김일성의 생가가 있는 평양의 마을이다. 북한에서는 '혁명의 요람'이요, '태양의 성지'로 성역화된 지역이다. 이 학교의 학생들은 자연스럽게 백두혈통을 정당화하고 지켜주는 역할을 부여받으며 북한 세습체제의 핵심으로 성장하게 된다.
김일성은 학교 건설 때부터 시작해 생전에 백차례 이상 학교를 방문해 각별한 관심을 보였다고 한다. 김일성의 조카인 김선주가 교직원을 맡기도 했을 정도로 이 학교는 북한 정권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았다.
학생들은 모두 기숙사 생활을 하는데 중·고등학교 과정 6년에 군사교육 2년을 더해 8년 동안 북한식 엘리트 교육을 받는다.
만경대혁명학원은 올해 개교 71주년을 맞았다.
교가의 내용은 이렇다. "혁명을 위하여 배우자 / 백두산 장수 힘 키우자 / 우리들은 주체위업 빛내 갈 만경대의 아들들이다."
지난해 개교 70주년 행사에서 한 졸업생은 이렇게 말했다. "만경대의 물과 공기만을 마시며 자라난, 달리는 살 수 없는 만경대의 아들답게 제1 기수가 되어 전군에 앞장 해서 나가겠습니다."
▲생물실습교실. 동식물의 모형과 그림, 사진이 벽에 장식되어 있다. [AFP=연합뉴스]
▲태권도 수업 시간. [AFP=연합뉴스]
▲사격훈련을 하는 평양 만경대혁명학원 학생들. [AFP=연합뉴스]
▲4학년이 되면 개인 무기를 수령하고, 이후의 학교생활은 병영생활과 마찬가지다. 아침 기상부터 저녁 취침까지 군인과 다름없다. 유격훈련 등 군사훈련도 받는다. 7, 8학년에는 실전훈련을 받는데 탱크 실습도 포함된다.
졸업생의 명단은 북한의 통치권력 자체다.
1기 졸업생인 연형묵과 최영림은 총리에 올랐고 인민무력부장을 지낸 김영춘과 국방위 부위원장을 지낸 오극렬도 이 학교 출신이다. 처형된 장성택, 해임된 리영호도 졸업생이다.
최근 핵심 실세로 떠오른 최용해, 북미 정상회담의 주역으로 활동한 김영철도 만경대혁명학원 출신들이다.
▲평양 만경대혁명학원 복도의 반미 포스터. [AFP=연합뉴스]
'5점의 총창으로 조국과 부모의 원쑤를 갚자'
학교 복도에 미국에 대한 적개심을 돋우는 포스터가 붙어 있다. 앳된 얼굴의 남녀 학생이 창으로 미군을 찔러 죽이고 있다. 창은 커다란 펜이다.
위 사진은 6월 15일에 촬영한 것이다. 6월 12일 싱가포르에서 북미 정상회담이 열린 이후 평양에서 반미 구호와 선전물이 자취를 감추었다고 하니 이 포스터도 철거됐을지 모른다.
중앙일보 최정동 기자
07.28 폭염에 갈 곳 없는 北 노병들... 옥수수밭 지키며 오두막서 연명
김일성 위해 6.25 전쟁 참전했으나 극빈의 생활고만 겪어
/사진=조선DB, 뉴시스
6.25 전쟁에 참여한 북한군, 이른바 '참전 노병'들의 형편이 열악한 것으로 알려졌다. '자유아시아방송'(rfa)은 지난 27일(현지시간) 평안도 소식통을 인용, 북한 노병들이 무주택자로 떠돌이 생활을 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평안남도의 소식통은 최근 북한 당국이 마을마다 강연회를 열어 "1950년대 전쟁노병들은 백두의 혁명정신을 이어받아 수령과 조국을 지켜낸 사상과 신념의 강자라고 선전했다"고 밝혔다.
그러나 "선전과는 달리 지금 노병들의 처지는 당국의 혜택이 전혀 없다"며 "어떤 노병은 자녀들이 모시지 않아 홀로 연명하거나 개인의 옥수수 뙈기밭을 지켜주면서 오두막에서 연명하고 있는 형편"이라고 지적했다.
평안북도의 소식통은 "올해는 중앙의 지시로 시 당에서 직접 노병들의 집을 방문하고 있다"지만 "당 간부들의 방문은 형식적이어서 며칠 지나면 노병들의 식량 공급도 보장되지 못한다"고 털어놨다.
소식통은 "노병들은 '북한을 위해 피 흘리며 싸웠지만 당국에서는 필요할 때만 선전물로 이용하고 있는 게 아니냐'며 불만을 제기하고 있다"고 말하기도 했다. 이어 "정치행사나 훈장수여보다 실질적으로 노병들이 여생을 편하게 보낼 수 있는 정책을 펴는 것이 우선"이라고 지적했다.
이와 관련, 탈북작가 이주성씨가 국제펜망명북한센터 문학지에 발표한 실화(實話) 수기 '노력영웅의 소원'은 북한 노병들의 실상을 적나라하게 묘파한다. 영웅 칭호와 훈장까지 받은 노병도 먹을 것이 없어 아사한다는 비극적 내용이다.
이씨는 이 글에서 "노력영웅 (칭호를 받은) 주인공도 굶주림을 참다못해 훈장들과 먹거리가 될 만한 것을 바꾸어 보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이하 이야기의 핵심 부분을 인용한다.
〈밤색 옷 칠을 한 작은 나무함을 꺼내 방바닥에 내려놓고는 텅 빈 장롱문을 닫는다. 나무함은 가로 세로 붉은 천 포장 띠로 묶여 있다. 그는 띠를 풀어 헤친다. 길게 한숨을 몰아쉬고는 손을 천천히 움직인다. 나무함 뚜껑을 열어 놓으니 그 속에는 금박으로 된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국장이 찍혀 있는 빨간 비로도 천의 주먹 크기의 네모 박스 3개가 들어 있다.
조심히 박스를 하나씩 방바닥에 꺼내놓는다. 나무함 안에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노력영웅 훈장 증서’ 금박 글씨로 박힌 검은 밤색의 마분지로 되어 있는 두터운 훈장증서가 보인다.
북한 정권을 위해 목숨을 걸고 일한 대가로 얻은 것은 노력영웅 훈장과 국기훈장 1급 3개를 비롯해서 공로 메달만도 수십 개나 되었다. 그러던 그가 수개월째 낟알 구경을 하지 못해 죽음을 눈앞에 두고 마지막 선택을 하고 있었다.
심재만의 아내는 자식들이 하늘나라에 떠난 지 몇 달 동안 낟알 한 알 없이 지냈다. 풀만 먹다 보니 풀독이 올라 온몸이 부어 며칠을 앓더니 끝내 남편을 남겨두고 먼저 세상을 하직했다.
아내마저 없는 심재만을 보다 못한 동네 사람들이 두부비지와 술을 뽑고 남은 찌꺼기를 가져다 줬고, 심재만은 그것을 조금씩 먹으며 목숨을 부지했었다. 그것도 며칠간이다. 어디서 도움받을 데가 없어진 심재만은 산에 올라가 풀뿌리며 나무껍질을 벗겨 먹다 움직일 기력이 없어지자 산마저 가지 못하고 집에 들어 누워버렸다.
그는 굶주림을 참다못해 혹시나 돈이 될 만한 물건이 없나 집안을 뒤적거리다 훈장들과 먹거리가 될 만한 것을 바꾸어 보려고 생각했다. 자식들과 아내가 굶어죽었을 때도 팔려고 생각지 않던 영웅훈장을 죽음이 목전에 다다르자 먹을 것과 바꾸기로 결심했다.
‘위대한 수령님께서 수여해 주신 영웅 메달과 훈장들인데 쌀을 얼마나 받을 수 있을까? 아무리 못 받아도 강냉이(옥수수) 50kg은 받을 수 있겠지? 조금씩 죽을 쑤어 먹으면 죽지는 않을 거야.’
한 집, 두 집 문을 두드려 노력영웅 훈장과 국기훈장들을 낟알과 바꿀 수 없는가 물어 보았더니 한 사람 같이 머리를 가로 저었다. 밀가루 빵을 팔고 있는 아낙네에게 훈장들이 들어 있는 나무함을 들이밀며 빵 한 개와 바꿀 수 없는가 하고 애원해 보았으나 시끄럽다는 욕설뿐이다.
노력영웅 메달과 훈장이 옥수수 빵 한 개와도 바꿀 수 없는 동조각에 불과한 것임을 심재만은 그때에야 알게 되었다.
다음날 아침, 회령시장 입구에서 멀지 않은 길거리에 심재만 노력영웅이 싸늘한 시체가 되어 누워 있었다. 하늘을 향해 눈도 감지 못하고 숨을 거두는 순간 그는 무슨 생각을 했을 것인가.〉
글=신승민 월간조선 기자
2018.09.03 주간조선 2523호
■9·9절 70주년 맞는 북한
‘빛나는 조국’ 탄생의 진실
▲ 북한 당정군 고위간부들이 2008년 9월 9일 정권 수립 60주년 기념식을 갖고 있는 모습. photo KCNA
‘인공기(人共旗·인민공화국기)’는 북한이 각종 주요행사 때 내걸어 놓는 깃발을 말한다. 북한의 ‘국기(國旗)’인 인공기의 명칭은 ‘홍람오각별기(紅藍五角星旗)’ 또는 ‘람홍색공화국국기’(藍紅色共和國國旗)이다. 북한은 그동안 인공기를 김일성이 만들었다고 선전해왔다. 하지만 실제로는 북한을 점령했던 옛 소련이 제작한 것이다. 일본이 제2차 세계대전에서 항복하면서 북한의 평양에 진주한 옛 소련 제25군 군사위원인 니콜라이 레베데프 소장은 1947년 북조선 임시인민위원회 부위원장 김두봉을 불러 “북조선에서도 국가를 세워야 할 테니 새 국기를 만들 필요가 있지 않느냐”고 물었다고 한다. 당시 김두봉은 “태극 문양이 들어간 국기를 사용하면 어떻겠느냐”고 제안했지만 일언지하에 거절당했다고 한다. 이후 몇 달이 지나 모스크바에서 제25군 사령부에 인공기의 도안을 보내왔다고 레베데프 소장의 통역이었던 고려인 출신 박일 전 교수가 밝혔다. 박 전 교수는 인공기의 도안을 한글로 번역해 김두봉에게 넘겼다는 것이다. 인공기는 모스크바 디자인제작소에서 제작한 것이었다. 아이러니한 것은 북한에선 광복 이후 한국에서와 마찬가지로 태극기가 사용돼왔다. 1948년 4월 김구가 김일성을 만나러 평양을 방문했을 때도 태극기 아래서 연설했다. 그러다 1948년 7월 10일 북조선 인민회의에서 태극기가 폐지되고 새로운 국기로 인공기가 제정됐다. 김두봉은 연단 뒤에 있던 태극기를 끌어내릴 것을 지시했고 대신 인공기를 게양시켰다. 김일성을 비롯한 모든 참석자들은 박수를 쳤다고 한다. 인공기에 대한 이런 역사적 사실은 북한이 철저하게 소련의 ‘괴뢰(傀儡·꼭두각시)’였다는 것을 증명한다.
소련이 만들어준 인공기
오는 9월 9일은 북한 정권이 수립된 지 70주년이 되는 날이다. 북한은 1948년 8월 25일 의회 격인 최고인민회의 제1기 대의원 선거를 실시한 뒤 같은해 9월 2일 최고인민회의 제1기 1차 회의를 소집하고 9월 9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창건을 대내외에 선포했다. 북한에선 9월 9일이 9·9절 또는 국경절로 불린다. 9·9절은 조선노동당 창건기념일인 10월 10일과 함께 북한의 사회주의 5대 명절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북한의 5대 명절은 새해(1월 1일), 김정일 생일(2월 16일·광명성절), 김일성 생일(4월 15일·태양절) 등이다. 이 중에서 가장 성대하게 행사가 치러지는 날은 김일성 생일과 9·9절이다. 북한 정권은 그동안 9·9절을 맞아 각종 행사를 개최하고 군사력을 과시하고자 열병식(군사퍼레이드)도 해왔다. 특히 이번 9·9절은 ‘공화국’ 수립 70주년인 만큼 대규모 행사를 벌일 것으로 보인다. 김정은 국무위원회 위원장은 지난 1월 1일 신년사에서 정권 수립 70주년을 ‘대경사’로 기념할 것이라고 예고한 바 있다.
▲ 2008년 9월 9일 북한 정권수립 60주년 기념 열병식에서 여군들의 행진 모습. photo 위키피디아
북한 정권이 9·9절 행사를 대대적으로 거행해온 이유는 국가 수립의 정통성을 과시하려는 목적 때문이다. 북한 정권은 지금까지 ‘공화국’을 자주적으로 창건했다는 점을 내세우면서 한국의 건국을 미국 제국주의(미제)의 앞잡이들이 주도한 것이라고 폄하해왔다. 하지만 역사적으로 볼 때 북한은 말 그대로 소련의 꼭두각시였다는 점이 분명하게 입증된 사실이라고 말할 수 있다. 소련의 독재자 이오시프 스탈린은 1945년 9월 20일 “북조선에서 민주정당과 사회단체들의 광범위한 블록에 기반을 둔 부르주아 민주정권을 창설하라”고 연해주 군관구와 제25군 군사위원회 등에 비밀암호 지령을 내렸다. 소련군이 북한을 점령한 지 한 달도 되지 않은 시점에서 스탈린이 내린 이런 지시는 애초부터 소련이 북한에 위성정권을 세우겠다는 속셈을 갖고 있었다는 것을 말한다. ‘부르주아 민주정권’이란 북조선공산당을 중심으로 하는 친소(親蘇) 인민민주주의 정권을 의미한다.
스탈린의 이런 지시에 대해 소련군 총정치사령관 요시프 쉬킨 중장은 1945년 12월 25일 당시 외무인민위원회(외무부의 전신)의 뱌체슬라프 몰로토프 위원장에게 보낸 ‘북한의 정치 상황’이라는 비밀보고서에서 “부르주아 민주주의 정권수립은 아직 결정적으로 달성되지 못하고 있다”면서 “우리가 앞으로 북한에서 철군할 경우 국가 이익을 보장할 수 있는 민족민주간부들을 양성하는 데는 4∼5개월의 기간이 더 필요하다”고 밝혔다. 이런 보고서의 내용으로 볼 때 소련은 북한에 진주할 때부터 자국의 정치·경제·군사적 이익을 보장할 단독정부를 구성할 의도였다고 말할 수 있다. 특히 보고서는 1945년 12월 27일 한반도 신탁통치를 결정한 모스크바 3상회의에 앞서 작성된 것으로, 소련이 남북한 단일정권 수립에 찬성한 것처럼 알려진 것과는 달리 북한에 단독정부를 수립하려고 했음을 보여주는 증거라고 말할 수 있다. 쉬킨 중장은 1945년부터 1949년까지 소련군 총정치사령관에 있으면서 북한을 비롯해 동유럽 국가 등 2차 대전 이후 소련이 점령한 지역에서 소비에트 국가 창설을 총괄했던 인물이다. 그는 당시 스탈린 서기장의 총애를 받았으며 비밀경찰 체카(옛 소련 KGB의 전신)의 우두머리였던 라브렌티 베리아에 이어 제3인자라는 말을 들었다.
당시 소련은 북한을 위성국가로 만들기 위해 국가 성립에서 집권세력의 양성에 이르기까지 자국의 이익을 도모하기 위한 식민지 정책을 철저하게 추진했다. 이런 정책의 계획과 집행은 쉬킨 중장이 총괄했다.
쉬킨 중장이 만든 나라
제25군이 중심이 된 소련 군정은 1945년 12월 17일 북조선공산당 제3차 확대회의를 열어 김일성을 제1비서에 앉혔고, 1946년 2월 8일 사실상의 정권기관인 북조선 임시인민위원회를 창설해 역시 김일성을 위원장에 앉혔다. 김일성의 양손에 당과 행정권을 쥐여준 셈이다. 당시 북조선 임시인민위원회는 소련의 신탁에 의한 북한의 단독정부를 의미한다. ‘임시인민위원회 구성에 관한 규정’ 제3조를 보면 ‘북조선 인민위원회는 북조선에 있어서의 중앙행정주권기관으로서 북조선의 인민사회단체국가기관이 실행할 임시 법령을 제정·발표할 수 있는 권한을 갖는다’고 적시돼 있다. 중앙행정주권기관으로서 법령을 제정한다는 것은 바로 정부를 말하는 것이다. 단독정부를 누가 먼저 수립했는지는 이를 보면 분명하게 알 수 있다.
그런데도 북한 정권이 정부 수립을 대외적으로 공표하지 않았던 것은 남북 분단의 책임을 한국에 돌리려는 의도였다. 유엔이 승인한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 정부가 1948년 8월 15일 출범하자 북한은 1948년 9월 9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공식적으로 선포했다. 당시 레베데프 소장은 “북한에서 시행된 일련의 정치 일정은 모두 소련 공산당 중앙위 지령에 따라 군정이 주도한 것으로 외형상 북조선 공산당과 인민위원회 이름으로 발표한 것”이라고 밝혔다. 이런 내용들은 모두 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 국방부, 외무부 등의 문서보관소에 깊숙이 파묻혀 있던 비밀문서와 자료에서 발굴된 것이다. 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는 자국에 살고 있던 고려인 2~3세 가운데 대학 교육을 받은 정치·군사·경제·정보·교육·기술·문화 등 분야별 전문가 428명을 다섯 차례에 걸쳐 북한에 급파했다. 소련은 북한 정권을 창설하면서 이들을 당과 정부의 부책임자로 앉혀 소련을 대신해 사실상 정권을 관리하도록 했다.
당시 소련 군정이 북한 정권을 이끌 지도자로 내세운 인물은 김일성이라는 소련군 대위였다. 김일성의 본명은 김성주(金成柱)로 1912년 4월 15일 평양 교외 농가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김형직은 초등학교 교사로 기독교 선교활동을 했다. 어머니 강반석도 기독교인이다. 김일성은 어려서부터 어머니 손에 이끌려 교회를 다녔다. 김일성은 일찍이 부모를 따라 만주로 건너가 14세 때 길림에서 중국 공산당 청년조직에 가담해 지하활동을 벌이다 체포돼 수개월간 감옥살이를 했다. 이후 김일성은 만주에서 중국 공산당 산하 동북항일연군 소속으로 빨치산 활동을 벌였다. 일본 관동군이 1939년부터 만주에서 대대적으로 빨치산 토벌에 나서자 김일성은 1940년 소련 연해주로 도주했다. 소련 극동군은 1942년 일본과의 전쟁에 대비해 하바로프스크 인근 바츠코예에 중국인과 조선인으로 구성된 제88국제여단을 만들었다. 김일성은 제88국제여단의 1대대 대대장으로 복무하면서 교육과 훈련을 받았다.
▲ 1945년 10월 14일 평양시 환영행사에 처음 나타난 김일성. 뒷줄 우측 첫 번째가 레베데프. photo 위키피디아
김일성을 면접한 스탈린
스탈린은 1945년 9월 초순 김일성을 비밀리에 모스크바로 불러 4시간 동안 면접하면서 북한의 지도자가 될 수 있는지를 알아봤다. 이후 소련 군정은 스탈린의 지시에 따라 김일성을 지도자로 만들기 위해 총력을 기울였다. 레베데프 소장은 스탈린이 당시 김일성을 북한의 지도자로 낙점한 이유에 대해 “김일성이 비록 학식과 공산주의 이론을 갖추지는 못했지만 소련에 충성할 것을 약속했기 때문이라고 본다”고 밝혔다. 레베데프 소장은 또 “김일성이라는 이름(본명은 김성주였지만)이 북한 주민들에게 ‘항일투쟁 민족영웅’으로 널리 알려져 지도자로 부상시키기에 용이했던 점도 영향을 줬을 것으로 생각한다”고 지적했다. 미국 중앙정보국(CIA)도 1949년 작성된 ‘김일성의 정체’라는 제목의 비밀문서에서 “실제로 항일운동을 펼쳤던 ‘김일성 장군’이 존재했지만, 어느 순간 사라졌고 그 자리를 김일성으로 개명한 김성주가 차지했다”고 밝혔다. CIA는 2011년 기밀 해제된 이 문서에서 “김성주가 영특하지는 않았지만, 스탈린에게 높은 신임을 얻었다”고 지적했다. 스탈린은 1946년 7월에도 김일성과 박헌영을 모스크바로 불러 또다시 면접했다. 평양 주재 소련 정보기관이 김일성의 무식과 독단적 스타일을 문제 삼아 북한의 지도자를 박헌영으로 교체하는 것이 좋겠다고 스탈린에게 건의했기 때문이다. 두 번째 면접에서도 스탈린은 김일성을 최종 결정했다.
소련은 이처럼 북한 정권 수립과 지도자 발탁까지 모든 과정에 개입했다. 심지어 소련 군정은 1947년 말 북한의 국호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으로 정하고 공산당 중앙위원회의 승인을 받았다. 북한의 국장(國章)을 보면 상단에 붉은 별이 있고, 국호가 적힌 붉은 리본으로 감싼 농작물 이삭이 공업을 나타내는 상징물을 둘러싸고 있는 모양이다. 이 디자인도 소련의 국장 형태를 그대로 차용한 것이다. 소련 군정은 북한 정권을 수립하기 두 달 전에 초대 내각과 최고인민회의 의장단 명단을 작성해 스탈린에 보고하고 일부 수정 지시를 받기도 했다. 북한은 헌법을 비롯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조선노동당 강령에 이르기까지 모든 법과 제도 등을 소련을 모델로 삼았다. 북한은 1970년대까지만 해도 소련의 식민지나 다름없었다. 북한의 이른바 집권 엘리트들은 대거 모스크바로 유학, 당시 선진국이었던 소련의 문물을 그대로 베껴갔다.
지금도 북한 인민군은 열병식에서 행진할 때 소련의 붉은군대처럼 무릎을 펴지 않고 다리를 꼿꼿하게 편 채로 걷는다. 절도가 있고 힘찬 모습을 보이기 위한 행진 방법이다. 소련이 붕괴된 이후 요즘은 많이 사라졌지만 러시아에 가면 머리에 붉은 꽃 리본을 단 유치원생들이 줄지어 행진하는 모습을 아직도 볼 수 있다. 이는 현재 북한에서도 볼 수 있는 모습이다. 평양과 모스크바는 이처럼 닮은꼴이 많다. 심지어 교통경찰의 수신호도 똑같다. 소련을 건국한 블라디미르 레닌과 공산주의 독재체제를 구축한 스탈린의 시신이 방부처리돼 미라로 보존되고 있듯이 김일성과 김정일의 시신도 금수산태양궁전에 안치돼 있다.
북한은 이번 9·9절 70주년을 맞아 ‘빛나는 조국’이라는 제목으로 대(大)집단체조(매스게임) 공연을 선보일 예정이다. 북한은 2002년 김일성의 제90회 생일을 맞아 평양 능라도 5·1경기장에서 집단체조 공연 ‘아리랑’을 처음 선보인 이래 2004년과 2006년을 제외하고 2013년까지 거의 매년 체제선전과 외화벌이 목적으로 집단체조 공연을 벌여왔다. 북한은 2014년부터 지금까지 핵과 탄도미사일 시험발사 감행에 따른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대북제재 조치 등으로 외국인 관광객이 급감하자 ‘아리랑’ 공연을 중단한 상태였다. 집단체조 공연의 주제는 경제적으로 부강한 국가를 건설하자는 내용일 것으로 보인다. 김 위원장이 지난 4월 20일 개최된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제7기 3차 전원회의에서 ‘핵·경제 병진 건설 노선’의 종료를 공식 선언하고 ‘경제 건설 총력 노선’을 제시했기 때문이다. 아울러 북한은 이번 공연에서 핵무기를 보유한 ‘정상국가’에 대한 자신감을 표출하는 내용을 선보일 것으로 관측된다. 특히 3대 세습을 정당화하고 김 위원장의 리더십을 강조할 것이 분명하다.
북한 정권이 말하는 ‘빛나는 조국’은 헌법에 명시됐듯이 ‘김일성과 김정일의 나라’라는 뜻이다. 또 앞으로 김정은의 나라로 자리매김하겠다는 것이다. 특히 소련군 대위에서 일약 북한의 지도자로 등극한 김일성은 ‘김일성 민족’의 창시자가 됐다. 김정일은 1994년 7월 8일 김일성이 사망한 지 100일이 지난 이후 담화에서 “지금 해외동포들은 조선민족을 ‘김일성 민족’이라고 부르고 있다”면서 “조선 민족의 건국 시조는 단군이지만 사회주의 조선의 시조는 위대한 김일성 수령 동지”라고 강조했다. 김정은도 2012년 4월 15일 김일성 생일 100회 열병식에서 “김일성 민족의 백년사는 파란 많은 수난의 역사에 영원한 종지부를 찍고 우리 조국과 인민의 존엄을 민족 사상 최고의 경지에 올려 세웠다”고 밝혔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소련의 꼭두각시로 탄생한 북한 정권이 9·9절 70주년을 계기로 ‘김씨 왕조’임을 대내외에 선포할 것이 분명하다.
이장훈 국제문제애널리스트
09.22 북한 집단체조공연 연습장에 대소변 악취가 진동하는 까닭
▲북한은 정권 수립 70주년을 맞아 9월 9일 평양 5·1경기장에서 대(大)집단체조와 예술공연‘빛나는 조국’을 선보였다. 사진은 공연 관중석에 '자주' '평화' '우호' 단어가 영어와 한자 카드섹션으로 표시된 모습. 4·27 판문점회담 당시 남북 정상이 끌어안는 모습이 스크린에 상영되고, 비둘기 모양 드론이 경기장을 날아다니기도 했다. /조선중앙TV
집단체조는 북한이 세계 최고의 '경쟁력'을 가진 품목이다. 10만 명이 한치의 오차도 없이 펼치는 대규모 군무(群舞)와 카드섹션은 도저히 인간의 그것이라고 믿기 어려울 정도다.
북한에서 집단 체조는 체조 그 이상을 의미한다. 집단 체조는 국가의 정책을 알리면서 주민들을 참여시키는 방법이다.
북한의 집단 체조는 1947년 김일성의 지시에 의해 첫선을 보였다. 이후 1971년 11월 ‘집단 체조 창작단’이 만들어지면서 북한만의 독특한 체조가 탄생하게 됐다.
북한을 대표하는 집단체조는 2002년 4월 김일성 탄생 90주년을 맞아 선보였던 아리랑이다. 10만명이 동원되는 '아리랑' 공연은 북한 체제를 찬양하는 내용과 일사불란한 체조와 춤, 카드섹션으로 유명했다.
아리랑은 홍수 피해가 심각했던 2006년 한 해만 건너뛰고 2013년까지 매년 이어졌다.
김정은은 2014년부터 이 공연을 중단했다. 이 공연 준비를 위해 어린 학생들이 몇 달 동안 학교도 가지 못하고 혹독한 연습을 한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인권 유린' '아동 학대' 논란이 끊이지 않은 걸 염두에 둔 결정이란 분석이다.
태영호 전 영국 주재 북한 공사는 자신의 저서 《3층 서기실의 암호》에서 "북한 주민에게 아주 큰 호응을 얻었다"고 했다.
그러나 김정은은 2018년 9월 9일 정권수립 70주념을 기념하기 위해 5년 만에 집단체조 공연 재개를 결정했다.
▲북한의 체제선전용 집단체조인 아리랑 공연이 2007년 8월 27일 평양 능라도 5·1 경기장에서 열리고 있다. 조선DB.
'아리랑'에 이어 올해 정권수립 70주년을 맞아 5년 만에 공개한 체제선전용 집단체조는 '빛나는 조국'이다. 문재인 대통령과 래퍼 지코 등 특별수행단은 9월 19일 평양 능라도 5·1경기장에서 이 공연을 관람했다.
문 대통령은 몸을 앞으로 숙여 관심 깊게 공연을 지켜봤고, 김정숙 여사는 안경을 끼고 공연에 집중하는 모습을 보였다.
문 대통령은 지난 5월 판문점 정상회담 당시 기념사진이 카드섹션으로 나타나자 흐뭇한 미소를 짓기도 했다.
문 대통령은 '빛나는 조국'을 관람한 후 15만 명 앞에서 연설했다. "그 감격을 말로 표현할 수 없습니다." "김 위원장과 북녘 동포들이 어떤 나라를 만들어 나가고자 하는지 가슴 뜨겁게 보았습니다."
2014년 발간된 유엔 북한인권조사위원회 보고서에서 한 탈북자는 집단체조와 관련 "여름에 뜨거운 햇볕 아래 콘크리트 바닥 위에서 연습하다 기절하는 일이 흔했다"며 "급성 맹장을 참아가며 연습한 7, 8세 소년이 치료를 제때 받지 못해 숨졌다"고 증언했다.
전직 국정원 고위 간부는 기자에게 이렇게 이야기 했다.
"제가, 북한에 갔을 때 제일 놀랐던 게 무엇인지 압니까. 집단 체조 연습장에 악취가 진동하는 것이었습니다. 무슨 냄새냐고 물어보니, 연습 중에는 화장실을 가지 못하게 해 연습장에게 배설을 해서 나는 것이라고 하더군요."
평양예술단 단장을 역임한 탈북자도 비슷한 이야기를 했다.
"가장 큰 문제는 화장실이다. 행사 한 달 전부터는 전체 예행연습을 하는데 대기시간부터 행사가 끝나는 시간까지 3시간이 넘는다. 화장실을 자주 가지 못하게 물을 주지 않는다. 가고 싶더라도 금지다. 때문에 남자아이고 여자아이고 그냥 서서 참고 참다가 배설을 한다. 연습장엔 악취가 진동할 수밖에 없다. 연습장 뒤에서 이런 자기 자식들의 모습을 보며 흐느껴 우는 부모들의 모습도 흔하게 볼 수 있다."
앞서 잠깐 언급했지만 집단체조에 동원되는 학생들은 6개월가량 학업을 전폐하다시피하고 연습에 매달려야 한다. 한 탈북 학생이 말하는 경험담이다.
"다리를 일자로 펴는 훈련을 하느라 밤새도록 집에 가지도 못한다. 다리에 멍이 들고 허리는 끊어질 듯 아프다. 몇 달을 그러고 나면 문어다리가 된다. 공연이 끝나고 귤 9개와 과자 사탕 한 봉지씩을 받고는 수령님 은혜에 감사하며 어쩔 줄 몰라 했다."
북한 말고는 세계 어디서도 찾기 어렵게 된 '파시즘 정치예술'을 보고 문 대통령은 "감격을 말로 표현할 수 없다"고 했다.
문 대통령은 집단체조 '빛나는 조국'이 아이들이 똥오줌을 참고 참다가 연습장에서 옷을 입은채로 배설하면서 연습한 작품이란 사실을 알았을까. 알았다면 "감격을 말로 표현할 수 없다"고 극찬하진 않았을 것이다.
문 대통령은 "김정은 위원장과 북녘 동포들이 어떤 나라를 만들어가고자 하는지 가슴 뜨겁게 봤다"고 했다. 문 대통령은 북한의 어떤 모습을 본 것일까.
글=최우석 월간조선 기자.
월간조선 10월 호
■북한 최고의 스포츠 스타는 女마라토너 정성옥
⊙ 북한, 이긴 경기만 녹화방송으로 보도
⊙ 2010년 월드컵에서 브라질과 善戰했던 북한팀, “수비만 하지 말고 적극적으로 공격도 하라” 김정일 ‘지도’ 따르다가 포르투갈에 참패 소문
⊙ 1999년 세비야 육상선수권대회 마라톤 우승자 정성옥, “결승지점에서 장군님이 어서 오라고 불러주는 모습이 떠올라 끝까지 힘을 냈다”
▲1999년 세비야 세계육상선수권대회 여자 마라톤에서 우승한 후 귀국 퍼레이드를 하는 정성옥.
2018 팔렘방 아시안게임이 끝났다. 국내에서의 열기와 인기가 예전 대회만 못했다. 아시안게임뿐 아니라 2016 리우올림픽도 마찬가지였다. 전문가들은 당분간, 적어도 10년 이상 이러한 분위기가 이어질 것으로 본다. 국제대회에 대중적 관심이 떨어진 것은 일시적 현상이 아니라 한국 스포츠의 패러다임이 바뀌는 과도기적 흐름이라는 진단이다. 엘리트 스포츠가 생활체육으로 바뀌는 것이 변화의 핵심이다. 국가가 주도하여 소수(少數)의 엘리트를 키우고, 국제대회의 성적을 국위(國威) 선양과 국민 사기를 드높이는 수단으로 활용하던 시대가 저물어 간다는 뜻이다. 대신 취미와 건강관리의 연장선상에서 스포츠를 즐기는 인구가 급증했다. 시설도 늘었고 종목도 다양하다. 우리 사회의 성격이 근본적인 차원에서 진화했다는 방증이다.
그렇다면 북한은 어떨까? 북한 주민들은 올림픽·아시안게임이 열린다는 사실을 알까? 스포츠 경기에 열광하는 팬들이 있을까? 중계는 해줄까? 북한 주민들이 생각하는 최고의 스포츠 스타는 누구일까? 북한 당국은 스포츠를 어떤 관점에서 육성하고 지원할까?
북한 주민들도 올림픽·아시안게임이 열린다는 사실은 안다. 보도 시간에 이러저러한 국제대회에 북한 선수단이 참가했다는 뉴스를 전하기 때문이다. 이번 경우도 메달 획득 소식은 전했다. 단, 영상은 내보내지 않았다. 중계권 구입을 하지 못해서라는 이야기가 있다. 여자 농구(은), 카누(금, 동), 조정 등은 남북 단일팀이 출전했는데 이에 대한 보도는 하지 않았다. 금년 7월 대전에서 열린 코리아오픈 탁구 단일팀의 혼합복식 우승 소식은 자세히 전했기에, 비(非)보도의 배경이 궁금하다.
생방송 중계 없어
▲2010년 6월 15일 남아공 월드컵에서 북한은 세계 최강 브라질에 맞서 善戰했다. 이 경기는 이례적으로 북한에서도 생방송했다. 사진=조선DB
북한 스포츠 중계의 특징은 생방송 중계가 없다는 것이다. 원칙적으로, 북한은 자기들이 진 경기는 중계하지 않는다. 이긴 경기만을 녹화해서 방영할 뿐이다. ‘수령님의 지도를 받아 불굴의 정신으로 싸움에 나선 전사(戰士)’들이 패배했다는 것은 심각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북한식 체제선전의 출발점은 ‘수령은 완벽하며 오류가 없는 존재이기에 이를 모든 인민이 100% 따라야 한다’는 것이다. 수령이 하라는 대로만 하면 무조건 이긴다. 그런데 졌다. 수령의 지도에 문제가 있었든지 선수들이 수령의 지도를 제대로 이행하지 못했든지 둘 중 하나다. 문제는 어느 쪽이든 인정할 수가 없다는 점이다. 북한 주민들도 모든 경기에서 이기기만 할 수는 없다는 것은 다 알고 있다. 하지만 ‘지는 경기’를 TV를 통해 생방송으로 생생하게 전달하는 것은 완전히 다른 문제다.
물론 예외도 있다. 1966년 이후 북한이 44년 만에 본선에 나선 2010년 월드컵이 그것이다. 북한은 역사상 최초로 생중계를 했다. 6월 15일 첫 경기에서 북한은 세계 최강 브라질을 맞아 나름 선전(善戰)했다. 결과는 1대2 패배. 54분까지 0대0이었고 끈질긴 수비로 버티며 간간이 역습에 나서며 브라질을 위협했다. 89분 지윤남의 득점도 기술적 완성도가 높았다. 명예로운 패배였다.
문제는 다음 경기였다. 김정일이 브라질전(戰)을 시청하다 “수비만 하지 말고 다음부터는 적극적으로 공격도 하라”고 ‘지도’했다는 소문이 돌았다. 소문의 진위를 확인할 길은 없다. 다만, 북한이 수비 일변도의 축구를 하지 않은 것은 사실이다. 이 경기마저 패하면 16강 탈락이기에, 초반부터 승부를 걸어야 했다는 것도 진실이다. 6월 21일 대(對) 포르투갈 전은 세계적인 화제를 모았던 경기다. 1966년 8강전에서 북한은 포르투갈에 3대0으로 앞서다 3대5로 역전패(逆轉敗)했다. 세계 축구계의 신화(神話)로 남은 일전이다. 44년 만의 복수전. 그때는 에우제비오, 2010년에는 호날두라는 슈퍼스타가 포르투갈을 이끌었다. 결과는 후반전에만 6골을 내준 북한의 0대7 참패. 이 경기를 북한에서 TV로 지켜본 탈북자에 따르면, 북한 중계진은 0대5 이후 거의 멘트를 하지 못했다고 한다.
최고의 스타 정성옥
북한에는 프로 스포츠나 취미와 이어진 스포츠 산업이 존재하지 않는다. 스포츠는 기본적으로 체제선전의 도구다. 선수 선발과 양성도 처음부터 끝까지 국가가 주도한다. 수준은 상당한 편이다. 1972년 뮌헨올림픽에서 올림픽 사상 첫 금메달을 획득한 이래, 국제대회에서 꾸준히 성적을 낸다. 탁구의 이분희, 유도의 계순희, 체조의 배길수 등은 한국에서도 인지도가 있다. 그렇다면 탈북자들이 기억하는 ‘최고의 스타’는 누구일까? 딱 한 사람이다. 정성옥이다.
1999년 제7회 세비야 세계육상선수권대회 여자 마라톤 우승자 정성옥은 다양한 요소가 겹치면서 북한의 한 시대를 대표하는 아이콘이 되었다. 일단 출전 자체가 숱한 우여곡절을 넘어선 드라마다. 당시 정성옥은 국가대표이기는 했지만 후보선수였다. 1996년 애틀랜타 올림픽 20위가 주요 대회 최고 성적이었다. 에이스 김창옥을 위한 페이스메이커가 1999년 세계대회에 나선 그녀의 임무였다. 김창옥은 1998년 방콕 아시안게임에서 120m를 남기고 막판 스퍼트로 일본 선수를 제치며 은메달을 획득한 선수다.
여기까지는 팩트다. 이 대목부터는 당시 북한 체육계에 떠돌았다는 ‘소문’을 옮긴다. 1999년 북한팀의 작전은 정성옥에게 김창옥을 위해 희생하라는 정도가 아니었다. 1999년이라면 ‘고난의 행군’ 직후다. 출전권은 있었지만, 북한은 선수들을 스페인까지 파견할 돈이 없었다. 입상 가능성도 전무(全無)했다. 북한 선수뿐 아니라, 아시아 여자 마라토너 가운데 아무도 상위 랭커가 없었던 시절이다.
불참으로 분위기가 굳어지는 상황에서, 김창옥이 출전비를 모두 부담하겠다고 나섰다. 어떻게 자금을 마련했는지는 모른다. 코치와 임원, 동료 선수의 항공료, 체재비를 모두 내겠다는 이야기였다. 북한에서는 외국에 다녀오는 것은 어떤 경우라도, 중동에 노무자나 러시아에 벌목공으로 가는 경우라도 많은 사람의 꿈이며 로망이다. 김창옥 덕분에 선수단 전체가 소원을 풀었다는 분위기였다.
북한 육상계 내부에 정성옥에 대한 ‘소문’도 돌았다. 남자 대표선수 김중원과 정성옥이 연인 사이라는 것은 비밀도 아니었다. 《동아일보》 주성하 기자는 한 칼럼에서 ‘정성옥이 임신을 했는데, 세비야 대회 몇 개월 전 중절수술을 했다. 김중원은 중국의 성(省)급 마라톤에서 우승한 뒤 상금 일부를 떼서 정성옥에게 개엿과 개소주를 만들어 먹였다’고 썼다. 김중원은 1998년 9월 베이징 마라톤 우승자다. 정성옥은 여자부 3위였다. 주성하 기자가 말한 내용은 아마 그 무렵의 이야기일 것이다. 그래서 정성옥은 완주도 쉽지 않다는 것이 합리적인 예상이었다.
원로 체육기자 조동표가 통역 자청
▲우승 직후 “결승지점에서 장군님이 어서 오라고 불러주는 모습이 떠올라 끝까지 힘을 냈다”고 말한 정성옥은 이후 북한 체제선전에 많이 활용됐다.
다시 팩트로 돌아가자. 1999년 8월 29일 레이스 당일, 정성옥은 초반부터 선두권으로 치고 나왔다. 내내 선두권을 유지하며 ‘백공오리(105리·마라톤의 북한식 표현)’를 내달렸다. 전 세계 전문가들과 중계팀은 당황했다.
존재조차 몰랐던 선수였기 때문이다. 어떤 까닭인지 정성옥의 유니폼에는 국기도 없었다. 중계진과 해설자가 ‘저 선수가 누구죠? 어느 나라 선수입니까?’를 서로 묻는 가운데 시간이 흘러갔다. 한참이 지나서야 중계진은 ‘북한, 정성옥’이라는 소개를 할 수 있었다. 마침내 2시간26분59초의 기록으로 1위로 골인. 2위인 일본의 이치하시 아리와 레이스 막판까지 접전을 펼치며 불과 3초 차이로 우승을 거머쥔 치열한 승부였다. 이 우승은 남북을 통틀어 아직까지 유일한 세계육상선수권대회 금메달이다. 김창옥은 10위로 골인했다.
중계진보다 더 난리가 난 곳은 조직위원회였다. 우승자 인터뷰를 해야 하는데 한국어를 할 줄 아는 사람이 단 한 사람도 없었다. 육상의 꽃 마라톤 우승자의 인터뷰 없이 기사를 쓸 수는 없는 것 아닌가. 바로 그 순간, 노신사(老紳士) 한 분이 통역을 자청했다. 한국의 원로 체육기자 조동표(당시 74세, 2012년 작고)였다.
이것도 정성옥 개인에게는 우연이 겹치며 찾아온 행운이었다. 조동표 기자의 현지 취재는 회사 차원의 출장이 아니었다. 언론사 퇴직 후 자비(自費)를 들여 마련한 일정이었다. 전 세계로 타전(打電)된 정성옥의 우승소감 첫마디는 “결승지점에서 장군님이 어서 오라고 불러주는 모습이 떠올라 끝까지 힘을 냈다”였다.
조 기자께서 생전에 신명철 전 《스포츠서울》 편집국장(현 SPOTV 편집위원)에게 밝힌 바에 따르면, “이 말을 듣고 잠깐 고민했지만, 당사자의 말을 가감 없이 전달하는 것이 통역의 본분이라 생각하고 정성옥의 발언을 그대로 옮겼다”고 한다. 이 통역이 없었다면 이 뒤로 이어진 정성옥의 신데렐라 스토리도 규모와 강도가 훨씬 줄어들었을 것이다.
북한에서는 바로 난리가 났다. 당일 저녁 12시가 다 된 시각에 긴급뉴스를 시작으로 모든 언론이 정성옥의 우승을 대서특필했다. 방송국·신문사로 축하편지와 엽서가 쇄도하고 재방송 요구가 빗발쳤다. 문학작품이 창작되고 기념우표까지 발행되었다. 9월 4일에는 100만명이 운집한 정성옥 환영 평양시민대회가 열렸다.
북한 체육인들은 공적에 따라 체육명수, 공훈체육인, 인민체육인, 노력영웅, 공화국영웅 등의 칭호를 받는다. 정성옥에게는 북한 체육인 최초의 공화국영웅 칭호가 주어졌다. 그 밖에 평양 보통강구역 주택 입주, 벤츠 S550 선물, 우승상금 5만 달러 개인소유 허용,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등이 정성옥이 누린 영예다. 엄격한 신분제 사회인 북한에서 지방 노동자 가족이 평양 귀족사회의 중심으로 단번에 수직 상승을 한 것이다.
아버지에게 효도, 연인에게 의리 지켜
▲북한이 발행한 정성옥 기념우표.
북한 당국과 주민이 열광한 이유가 있다. 정성옥의 우승이 수백만이 굶어 죽은 ‘고난의 행군’을 극복한 상징이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당사자가 밝힌 것처럼 ‘장군님의 은혜’로 거둔 승리가 아닌가. 북한은 전문 체육인으로 뽑힌 선수들에게 별도의 식단을 제공한다. 1인당 섭취 칼로리를 계산하여 ‘노르마’를 공급한다. 이것은 북한체제의 자존심이다. ‘고난의 행군’ 때는 이런 지원이 불가능했다. 주성하 기자에 따르면, 옥수수 국수를 물에 불린 국수죽이 당시 선수들의 주식이었다고 한다. 체력 소모가 많은 마라톤 선수들에게는 턱없이 부족한 음식이다. 모든 것이 부실한 상태에서 기적적으로 거둔 우승이라는 것을 당국도 알고 주민들도 알았다. 동원이나 조작 없이, 북한의 모든 주민이 자발적으로 감격하는 분위기가 한동안 지속된 배경이다.
정성옥이 필사적으로 달려야 했던 이유는 따로 있다. 가족의 생명이 달려 있었기 때문이다. 고향 황해도 해주에서 화물차 운전기사로 일하던 정성옥의 아버지는 대회 얼마 전 사망 사고를 냈다. 우승을 해서 사면을 받지 않으면 어떤 처벌을 받을지 알 수 없었던 상황이었다. 우승 이후, 정성옥 아버지의 ‘대인(對人) 사고’는 ‘없던 일’이 되었다. 효녀 심청의 해피엔딩 스토리다. ‘세계챔피언’의 이미지에 흠집이 나면 곤란하기에 북한은 정성옥의 2000년 올림픽 출전을 막았다. 김정일의 지시였다는 소문이 이때도 돌았다. 그래서 세비야 대회가 정성옥의 마지막 레이스다.
김중원은 정성옥이 유명해졌으니 ‘이제 나 같은 건 거들떠보지도 않을 것’이라며 낙담했다고 한다. 하지만 정성옥은 의리를 지켰다. 2001년 3월 김중원과 결혼했다. 2001년 4월, 휠라·하이네켄 등이 후원한 북한 최초의 개방형 국제마라톤대회에서 신랑 김중원은 2시간11분48초의 기록으로 우승한다. 지원용 차량에 탑승해 남편을 응원하며 ‘힘내라요!’라고 소리치던 정성옥의 모습은 다큐멘터리로 제작되어 북한 전역에 방송되었다. 김정일이 직접 결혼음식상을 보낸 결과가 뜨거운 부부애와 우승으로 결실을 맺었다는 것이 그 프로그램의 메시지였다고 한다.
정성옥은 김중원에게만 의리를 지킨 것이 아니다. 2003년 10월 제주도에서 열린 한민족 문화축전 당시 정성옥이 우리 측 관계자에게 조동표 기자를 꼭 만나게 해달라고 청했다. 그리고 제주도를 찾아간 조 기자에게 북한에서부터 미리 준비해 온 선물을 전하며 “1999년 당시 뜨거운 민족애를 느꼈다. 정말 감사했다”고 거듭 인사를 전했다고 한다.
정성옥 발굴한 신금단
정성옥 스토리는 다른 지점에서 우리 현대사와 이어진다. 1974년생 정성옥을 1985년 9월에 발탁해 어린 시절부터 체계적으로 훈련시킨 인물이 있다. 신금단이다. 1964년 도쿄(東京)올림픽, 10분간의 부녀상봉으로 유명한 그 신금단이다. 신금단은 1960년대 중반 연이어 세계신기록을 갈아치우며 여자 800m 2분 벽을 최초로 돌파한 기념비적 육상인이다. 연세 드신 탈북자들은 ‘신금단은 중성(中性)’이라는 소문이 돌았다고 기억한다. 1960년대의 사진을 본 전문가들은 중성이 아니라 XO 여성이었을 것이라 추정한다.
신금단은 문제가 없지만, 1972년 뮌헨 올림픽 여자배구 3·4위전에서 한국을 꺾고 동메달을 차지한 북한 선수 가운데는 ‘남자’로 의심할 수밖에 없는 선수가 분명히 있었다. 김정복이다. 지금처럼 검사가 엄격하지 않아 적발되지 않았지만, 당시 경기를 했던 우리 선수들은 지금도 억울한 마음을 감추지 않는다.
이 대회 사격 소구경 라이플 금메달리스트 이호준도 세계 체육계에 커다란 파문을 남겼다. 우승 직후 기자회견에서 “적의 심장을 쏜다고 생각하며 사격했다. 김일성 대원수께서 출발 전에 적과 싸우는 것처럼 사격하라고 했다. 나는 그대로 따랐을 뿐이다”라고 발언했다. 2차 기자회견에서 북한 측이 “인용이 잘못되었다”고 물러서지 않았다면, IOC가 스포츠맨십을 위반한 행동으로 지목하여 국제적인 논란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글 : 장원재 ‘사단법인 배우고 나누는 무지개’ 대표
월간조선 10월 호
■정치 전면에 등장한 北 장막 속의 ‘3층 서기실’
당 조직지도부가 담당했던 대외관계 업무도 총괄하는 등 권력 핵심
⊙ 김정은 설득해 김정남 암살과 장성택 처형도 기획
⊙ 김씨 일가의 집사 역할 하다가 2015년부터 몸집 1.5배 불리며 권력화
⊙ 김창선 평창올림픽 때 남한 방문으로 첫 모습 드러내
⊙ 3층 서기실은 美 백악관, 南 청와대 비서실 흉내 내기 위한 것
▲북한 노동당 서기실이 김정은을 설득해 김정남 암살과 장성택 처형을 실행한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 5월 태영호 전 공사가 《3층 서기실의 암호》라는 책을 출간하면서 북한 권력의 핵심인 노동당 서기실의 실체가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특히 북한 막후에서 움직이던 서기실이 몇 년 전부터는 몸집을 불리며 정치 활동 전면에 나서고 있다. 서기실은 장막 뒤에 숨어 가장 은밀하고 위대하게 김정일·김정은 부자를 신격화하고 세습 통치를 유지하기 위한 권력을 움직였다. 태 전 공사는 책에서 이렇게 설명했다. “3층 서기실은 북한 주민들도 잘 모르는 조직이다. 서기실이 어느 건물 3층에 있어서 붙여진 별칭이 아니라, 3층 규모의 건물 전체를 쓰고 있어서 유래된 이름이다. 더 정확히 말하면 김정은의 집무실이 있는 당 중앙 청사가 3층 규모인데, 이 청사에서 김정은의 사업을 가장 근접해서 보좌하는 부서를 3층 서기실이라고 한다.”
서기실은 우리의 청와대 비서실이나 비슷하다. 전국적으로 모든 기관들에서 제기되는 문제들을 종합해 보고를 하는 기관이다. 서기실의 막강한 힘은 정보에서 나온다. 이는 북한에서 발생하는 모든 정보와 권력이 이곳에 모이게 되고 막후에서 강력한 권한을 행사하기 때문이다
2015년부터 키워 온 당 서기실 대외업무 총괄
▲북한 노동당 본관 앞에서 김정일과 주민들이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월간조선》이 입수한 정보에 따르면 김정은 집권 이후 2015년부터 현재까지 노동당 서기실은 기존에 비해 1.5배 정도 확대된 것으로 알려졌다. 서기실이 확대되면서 기존 당 조직지도부에서 하던 대외관계 업무를 서기실에서 총괄하게 됐다. 서기실은 과거 김정일 시대에서는 베일에 꽁꽁 싸여 노출된 적이 거의 없었다.
정통한 대북 소식통은 “김정은의 지시로 인해 노동당 서기실이 기존보다 1.5배 커졌고, 과거 당 조직지도부가 관장하던 국제문제를 모두 서기실에서 총괄하게 됐다. 김정일 시대의 막후 정치로 김씨 일가의 권력을 유지시키던 서기실이 전면에 나선 것은 놀라운 사건이다”고 말했다.
김정은이 서기실의 규모를 늘리며 국제문제를 이곳에서 관리하게 한 것은 다른 의도가 있을 것이다. 김정은은 내부 결속 강화로 북한을 이끌던 김정일과 달리 대외정책을 통해 돌파구를 마련할 것이라는 분석도 나오고 있다. 과거에는 노동당 조직지도부, 외무성, 통일전선부에서 남북관계와 국제문제에 대한 전략을 김정일, 김정은에게 보고하고 실행했다.
이 소식통은 “김정일 시대 조직지도부, 외무성, 통전부가 모든 대외문제를 주도했다. 하지만 서기실이 대외부문을 가져가면서 김정은 자신이 직접 챙기겠다는 의미로 보여진다”면서 “과거 대외정책에 관해 아이디어도 짜고 하던 3개 부서는 실행하기 급급하다”고 말했다.
이어 “김여정도 공식적으로 조직지도부 소속이긴 하지만 김창선과 서기실 일을 같이 하고 있다고 보면 된다. 즉 김정은은 동생인 김여정과 함께 대외전략을 짜겠다는 것이다. 물론 서로에 대해 잘 아니까 어떤 면에서 보면 업무의 효율성이 날 수도 있다”면서 “반대로 생각하면 더 위험하다. 자기들끼리 만들고 실행하다 보면 잘못한 부분이 분명히 나온다. 과거 간부들에게 일을 시키고 잘못하면 처벌했지만 이제는 간부들이 자신이 한 것도 아닌데 벌을 받게 생겼다”고 했다.
특히 서기실은 김정은의 결정에 큰 역할을 하고 있다. 2017년 암살된 김정은의 이복형 김정남도 서기실에서 김정은을 설득해 시행한 작품인 것으로 알려졌다. 또 고모부 장성택 처형도 서기실 지시로 이뤄졌다. 한 고위 관계자는 “서기실의 권력은 막강하다. 김정은이 하는 모든 결정은 서기실에서 시작해 여기서 끝난다고 보면 된다. 대표적으로 김정남 암살과 장성택 처형도 서기실에서 기획하고 김정은을 설득해 이뤄진 것이다”고 했다.
김정은 첫 비서실장 김창선은 누구?
현재 김창선이 북한 서기실의 공식적인 수장이다. 김정일 사후 김정은이 집권하게 되면서 공석이었던 서기실 실장 자리를 김창선이 맡게 됐다. 사실상 김정은의 첫 비서실장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김창선이 처음 모습을 드러낸 것은 2018년 2월 5일 김여정의 평창올림픽 개막식을 위해 방남 당시 북한대표단 지원 인력 중 한 명으로 참가했다. 이후 2018 제1차 남북 정상회담이 개최됨에 따라 정상회담을 위한 의전·경호·보도 실무회담 등 총 3번 북측 수석대표로 참석했다. 4월 27일에 열린 남북 정상회담에서도 김여정과 김영철을 레드카펫에서 동선 이동에 대한 손짓 지시 및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의 도보회담에서도 모습을 보이는 등 북측 비서실장의 역할을 수행했다.
과거 북한 서기실 수장들이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것과는 달리 김창선의 등장은 서기실이 공식 활동 무대에 등장했음을 보여준다.
김창선은 평소 ‘김씨 일가’의 살림살이를 책임지면서 김정은에게 올라오는 모든 보고를 관리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김창선은 중장(우리의 소장) 계급장을 단 군복을 자주 입고 북한 언론에 등장했다. 서기실은 원래 우리 청와대 부속실과 비슷하지만 정책 결정에는 관여하지 않고 최고 지도자와 그 가족의 일상을 돌보는 역할을 맡았으나 2015년 이후 달라졌다.
1944년생으로 알려진 김창선은 함경북도 명천군 출신으로 김일성종합대학 러시아과를 졸업했다. 김창선이 일찍부터 출세 가도를 달릴 수 있었던 것은 사별(死別)한 전처 류춘옥의 후광 때문으로 알려졌다. 류춘옥(당 국제부 과장 출신)은 김정일의 여동생 김경희와 ‘절친’이었다. 김일성이 광복 후 북한에 왔을 때 김정일·경희 남매를 류춘옥 집에 맡겼다고 한다.
당시 김정일 남매를 기르다시피 한 류춘옥의 모친은 지금도 살아 있는 황순희 조선혁명박물관장이다. 빨치산 출신인 황순희는 김정일에게 반말이 가능했던 유일한 인물로 알려졌다. 또 황순희의 남편은 6·25 때 가장 먼저 서울에 입성했던 ‘105탱크여단장’ 류경수다. 김창선은 2000년 김용순(대남비서)의 특사 방한 때 ‘박성천’이란 가명으로 김대중 대통령을 접견했다.
“김여정이 서기실 실세로 보여”
▲김정은 노동당 위원장의 중국 방문 영상에서 김 위원장이 베이징 인민대회당을 방문했을 때 김창선(붉은 원) 국무위원회 부장이 수행하는 모습.
김정은 집권 이후 서기실이 확대된 것은 미국의 백악관과 남한의 청와대 비서실을 모방한 것 아니냐는 것이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2018년 북한은 대외정책에서 변화를 가져왔다. 2차례 남북 정상회담, 김씨 일가 최초 남한 방문, 미·북 정상회담 등 새로운 모습을 보여줬다. 물론 그 변화 뒤에 숨은 속내는 알길이 없다. 하지만 북한이 2015년부터 서기실을 키우면서 대외정책을 관장한 것은 오늘의 이 상황을 미리 예측하고 움직였다는 뜻으로도 풀이된다.
한 대북 전문가는 “김정은이 서방세계에 자신의 변한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노력하는 것 같다. 하지만 그 변화가 자신의 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것인지 정말 북한 주민들을 위한 변화인지는 두고 봐야 알 것”이라며 “그동안 베일에 싸여 있던 북한 서기실이 김창선이 언론에 모습을 드러내면서 공개 활동을 시작한 것으로 보면 될 것이다. 또 김창선이 지난 평창올림픽 참석 당시 김여정을 보필하는 모습을 보면 김여정이 서기실의 실세로 보인다”고 말했다.
현재 김정은이 서기실을 통해 북한을 통치한다면 김일성과 김정일 시대에는 어땠을까.
김일성 시대에는 김일성이 총비서를 맡은 노동당 중심의 통치였다. 노동당 정치국 상무위원회의 위상도 높았다. 김정일이 후계자로 확정된 것도 정치국 상무위원회를 통해서다.
김일성-김정일 공동정권 시대로 일컬어지는 1980~1994년 김정일에게 권력이 대부분 넘어가는 과정에서 노동당의 역할이 축소되고 수령 권력의 절대화가 심화했다.
1994년 김일성 사망 이후 김정일은 절대적 수령으로서 통치했다. 서기실은 김정일을 실무적으로 뒷받침하는 조직으로 발전했다. 김정일 시대 노동당은 수령과 서기실 지시를 집행하는 실무집단이 됐다.
김일성 시대만 해도 노동당 내에 ‘집체 토의 체제’가 있었다. 김정일 시대에는 모든 사안을 수령에게 보고하고 결론을 받아 처리하는 ‘제의서 체계’가 수립됐다. 이 과정에서 서기실의 역할이 확장된 것이다.
김정은은 김정일이 구축한 서기실 시스템을 고스란히 물려받았다. 김정은이 틀어쥐고, 숙청하고, 안정화한 것은 기왕의 시스템이 그대로 작동된 덕분이다. 수령을 정점으로 한 서기실 중심 지도체제가 북한을 이끄는 것이다.
서기실의 역할은 각 부서에서 컴퓨터를 통해 주보와 일보를 제출받아 김정은에게 보고한다. 김정은이 서명을 하면 ‘친필비준문건’이 된다. 구체적 지시 사항을 적어 서명하는 경우도 있다. 김정은이 봤다는 표시만 한 문건은 ‘보아주신 문건’ 혹은 ‘당중앙위원회 지시’라고 표현한다. 김정은이 문건을 직접 읽는지, 제목만 보는지, 제목도 안 읽는지 알 수 없다. 특정 부서가 하루에 보고하는 문건만 수천 쪽에 달한다. 대다수 문건은 ‘3층 서기실’에서 읽어보고 중요한 문건만 보고될 수밖에 없는 구조인 것이다.
“서기실은 당의 조직이 아니라 수령의 조직”
서기실은 당의 조직이 아니라 수령의 조직이다. 조선왕조 때 왕명을 출납하던 승정원과 비슷한 측면이 있다. 태 전 공사는 서기실을 이렇게 묘사했다.
“3층 서기실이 실세 중 실세인 것은 시스템을 지탱하는 연결고리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김정은이 2015년까지 통일할 수 있는 방안을 만들라고 지시했다고 치자. 그러면 3층 서기실은 김정은의 지시라며 각 부서에 개별적인 하달문을 내려보낸다. 인민무력부는 남조선 공격 계획을 작성해 보고하고, 외무성은 대북 유엔 제재 극복 안을 강구해 제출하라는 식이다. 어떤 부서든 이 사안에 대해 총체적으로 접근할 수 없다. 그러나 이것이 가능한 3층 서기실이나 김정은에게는 모든 정보와 권력이 모이게 된다. 구체적인 정책이나 방안을 수립하는 기능이 없는 3층 서기실이 막후에서 강력한 권한을 행사하는 이유다.”
“모든 결정이 신(神)인 김정은의 머리에서 나온 것처럼 보여야 하므로 서기실을 직속으로 두고 보좌받는 것이다. 서기실과 김정은만이 각 부서가 어떤 안을 보고했는지 안다.
서기실 인사가 각 부서를 찾아오면 부장, 부부장이 문 앞에 나가 ‘오셨습니까’ 하면서 맞는다. 간부들이 반쯤 죽는다. 서기실 인사가 외무성에 나타나면 외무상도 그 앞에 딱 서서 꼼짝하지 못한다.
김일성 시대까지는 노동당 시스템이 제대로 돌아갔으나 김정일 시대를 거치면서 서기실이라는 비선 보좌 그룹이 생겼다. 현재 각 부서의 보고가 서기실에 집중되고 서기실이 김정은과 협의해 정책을 밀고 나간다. 서기실 인사들은 《노동신문》에 이름, 얼굴이 안 나오는 것은 물론이고, 격폐(隔閉)된 지역에 거주한다.”
북한 체제는 이 같은 시스템을 이용해 지금까지 3대에 걸쳐 이어오고 있다. 김정은이 선대(先代)보다 체계화된 조직을 만들게 된다면 통상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오래 지속될지도 모른다.⊙
글 : 정광성 월간조선 기자
주간조선 2527호
10.18 김정은 위한 거대한 세트장? 그들만의 ‘평양공화국’
▲ 평양 여명거리 준공식 모습. photo KCNA
“평양 시민 여러분, 이번 방문에서 나는 평양의 놀라운 발전상을 보았습니다. 김정은 위원장과 북녘 동포들이 어떤 나라를 만들어나가고자 하는지 가슴 뜨겁게 보았습니다.” 문재인 대통령이 9월 19일 평양 방문 둘째 날의 마지막 일정으로 ‘능라도 5·1경기장’을 찾아 북한의 집단체조 ‘빛나는 조국’을 관람한 후 평양 시민들에게 연설한 내용 중 한 대목이다. 문 대통령의 이런 연설 내용은 9월 18일 순안공항에 도착한 후 김정은과 함께 여명거리 등을 카퍼레이드 하면서 평양에 고층빌딩과 아파트들이 즐비한 것을 봤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여명거리는 평양 내 대표적인 신도시다. 90만㎡ 면적에 들어선 여명거리의 건축 연면적은 172만8000여㎡에 달한다. 70층짜리 건물을 비롯해 44동, 4804가구에 달하는 초고층 아파트가 들어서 있다. 김정은의 지시에 따라 북한 정권은 2016년 3월 18일부터 건설을 시작해 김일성 생일 직전인 2017년 4월 14일 완공했다. 북한 정권은 여명거리 준공식 때 외국 언론들을 대거 초대했다. 외국 언론들은 이곳이 미국 뉴욕의 맨해튼을 떠올리게 한다며 ‘평양과 맨해튼’을 합쳐 ‘평해튼(Pyonghattan)’이라고 이름을 붙이기도 했다.
문 대통령뿐만 아니라 방북 수행단 및 최근 들어 북한을 방문한 언론인, 체육인, 연예인 등 한국의 각계 인사들은 이구동성으로 평양의 ‘화려함’에 놀랐다는 소감을 피력하고 있다. 심지어 박지원 평화민주당 의원 등 일부 인사들은 평양의 모습을 보고 북한 정권과 김정은이 개혁에 적극 나설 것이라고 장담하고 있다. 특히 TV 등 일부 언론들은 영상과 사진들을 통해 평양의 변화된 모습을 연일 보도하고 있다.
‘비명거리’로 불린 여명거리
물론 평양이 변한 것은 사실이다. 2007년 10월 노무현 전 대통령이 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과 카퍼레이드를 했을 때 무채색의 낮은 건물들만 즐비했던 여명거리는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 말처럼 그때와 비교하면 엄청나게 달라졌다. 다양한 파스텔색으로 단장한 아파트들이 곳곳에 들어서 있다. 심지어 평양 출신 탈북자들도 변화된 모습에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김일성종합대학 출신으로 2012년 탈북한 김지영씨는 “평양이 변했다는 것은 더 말할 여지도 없고, 너무 많이 변해서 깜짝 놀랐다”면서 “너무 밝아지고 화려해진 느낌이 많이 들었다”고 밝히기도 했다. 평양 시민들의 모습도 달라졌다. 거리에는 획일적인 옷차림이 아닌 캐릭터 티셔츠를 입은 어린이, 밝고 화려한 색의 옷을 입고 하이힐을 신은 여성들, 손전화(휴대폰)로 통화하는 시민들, 택시를 타고 가는 시민들을 쉽게 볼 수 있다.
그렇다면 평양의 변화가 과연 북한 정권과 김정은의 개혁 때문일까. 무엇보다 먼저 김정은의 최대 업적이라고 불리는 여명거리가 세워진 배경부터 살펴볼 필요가 있다. 김정은의 지시에 따라 1년 만에 여명거리에 초고층 아파트를 건설한 것은 가히 ‘기적’이라고 말해도 과언은 아니다. 북한 노동당 기관지 노동신문은 “수소탄을 백 발, 천 발 쏜 것보다도 더 위력한 대승리가 이룩된 여명거리 건설장이야말로 만리마 속도 창조의 고향”이라고 자평하기도 했다.
여명거리 건설은 상당한 정치적 의미가 담겨 있다. 미국을 비롯해 유엔 등 국제사회의 강력한 제재 조치에도 불구하고 김정은의 의도는 여명거리 건설을 통해 제재에 굴복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보이려는 것이었다. 북한 정권은 여명거리 건설을 위해 군 병력은 물론 청년돌격대, 대학생 등 하루 3만여명을 휴일 없이 24시간 2교대로 동원했다. 심지어 북한 정권은 ‘하루에 한 층을 건축하라’는 비상식적이고 과도한 지시를 내리기도 했다. 한국 아파트의 경우 한 층 건설에 7~10일이 소요된다는 점과 비교해 볼 때 놀라운 속도라고 말할 수 있다. 게다가 여명거리 건설에 동원된 중장비도 거의 없었다. 그러다 보니 각종 사고로 많은 인명들이 희생됐다. 이 때문에 여명거리가 건설일꾼들의 ‘비명거리’라는 말을 듣기도 했다.
북한 정권은 시멘트를 비롯해 다른 지역들에 사용할 모든 자재를 투입했다. 북한 정권은 또 건설비가 부족하자 전국의 모든 기관과 공장, 협동농장, 인민반에 여명거리 아파트 한 가구의 건설비용인 1000달러, 무역일꾼에게는 2만달러, 해외파견 노동자에게는 1인당 500달러를 각각 납부하도록 강요했다. 북한 정권은 핵과 미사일 개발에 들어가는 자금을 제외하고는 여명거리 건설에 총력전을 편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김정은 집권 이후 평양에는 은하거리(2013년), 위성거리(2014년), 미래과학자거리(2015년) 등이 줄줄이 완공됐다. 문수물놀이장, 능라인민유원지, 미림승마구락부 등 위락시설도 만들어졌다. 평양 시내에서 제일 높은 건축물로 알려진 105층의 류경호텔은 착공하고 30년이 넘도록 아직 내부 장식도 마치지 못했지만 외벽에는 움직이는 야경을 형상화하기 위해 무려 10만개의 점광원(LED조명장치)이 부착돼 있다.
▲ 영국 건축비평가 웨인라이트가 촬영한 파스텔색의 평양 건물들 모습.
파스텔 색상의 과도한 사용
2015년 평양을 방문해 북한 정권이 자랑하는 건축물들을 둘러본 영국 건축비평가인 올리버 웨인라이트는 저서 ‘북한 내부에서(Inside North Korea)’에서 “평양은 체제 선전을 위한 거대한 세트장 같다”면서 “연극의 무대가 바로 평양”이라고 비판했다. 웨인라이트는 “김정은이 집권한 이후 북한 건축의 특징은 파스텔 색상의 과도한 사용”이라면서 “파스텔의 낙천적이고 모더니즘적인 분위기를 통해 김정은이 만들어낸 이미지는 번영하는 북한”이라고 지적했다. 웨인라이트는 “평양은 독재자가 도시 건축에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지 보여주는 좋은 사례”라면서 “평양은 김정은이 인민을 어린애 취급하는 놀이동산”이라고 혹평했다.
리 소테츠 일본 류코쿠대 교수도 “여명거리 초고층 아파트 단지, 문수물놀이장 등은 김정은 패션이라고 부를 만하다”면서 “생활용 전기도 제대로 공급하지 못하는 북한 정권이 평양 야경 만들기에 몰입하고 있다는 것은 김정은 시대에도 북한이 근본적으로 변하지 않았다는 것을 입증한다”고 비판했다. 영국 BBC 방송의 여행 프로그램인 ‘80일간의 세계일주’ 진행자로 유명한 마이클 페일린도 최근 평양을 방문해 제작한 다큐멘터리를 방송한 이후 가진 기자회견에서 “북한은 변화를 원한다. 그런데 그 변화가 주민들이 아닌 지도자가 원하는 방향인 듯해서 우려가 된다”고 밝혔다. 페일린은 평양 만수대 앞 김일성과 김정일 부자 동상을 촬영하면서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가 북한 안내원에게 혼쭐이 났던 에피소드를 밝히기도 했다.
평양의 진면목은 지금까지 외부인들의 눈을 통해 제대로 알려진 적이 없다. 한국은 물론 외국의 인사들이나 언론들이 북한 안내원이 없이 평양을 자유롭게 다니면서 실상을 샅샅이 살펴보거나 취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심지어 북한 주민들도 평양을 마음대로 출입할 수 없다. 평양은 북한 땅에 있는 일종의 ‘요새(要塞)’라고 볼 수 있다. 평양은 북한군과는 별개 조직인 호위사령부가 통제하고 있다. 호위사령부는 호위총국, 평양경비사령부, 평양방어사령부로 구성돼 있다. 평양경비사령부는 평양의 외곽에 경비초소를 설치하고 지방 주민들과 차량 등이 함부로 들어올 수 없도록 막고 있다. 평양경비사령부 외곽에는 평양방어사령부가 포진해 있다. 이처럼 철통같이 에워싸인 평양에 지방 주민이 들어오려면 특별통행증이 있어야 한다. 때문에 북한 주민들 중 대다수는 평양을 갈 수도 없고, 알 수가 없다. 북한 주민들도 모르는 평양을 한국 사람들이나 외국인들이 더욱 알 수 없는 것은 당연하다. 안다고 해도 ‘장님의 코끼리 만지기’와 같다고 말할 수 있다.
체코 주재 북한 무역대표를 지낸 뒤 2003년 한국에 망명한 탈북자 김태산씨는 지난 9월 20일 페이스북에 올린 글에서 “평양에서 수십 년 살아본 사람으로서, 방북한 한국 사람들이 평양이 매우 달라졌고 주민들이 살 만하다고 놀라는 모습들이 참으로 한심하다”고 밝혔다. 김씨는 “평양을 방문한 사람들 중에서 고층 아파트에 에어컨 실외기가 달려 있는 것을 본 사람이 있느냐”면서 “북한에서 개인이 더운 여름에 에어컨을 달고 산다는 것은 상상도 못 하는 일”이라고 지적했다. 김씨는 또 “겨울에는 겉보기에는 화려한 아파트에 사는 사람들이 온수 부족으로 너무 추워서 잠자리에서 손발이 얼어 잘라야 할 정도”라고 밝혔다. 김씨는 “전기가 부족해서 그 높은 아파트를 걸어서 오르내리고, 물을 못 올려서 아래층에서 양동이로 길어다가 여름철에 샤워도 못 하고 겨우 살아가는 처지”라면서 “그래도 평양이 살 만하다고 말할 한국 사람이 있으면 나와 보라”고 반문했다.
▲ 러시아 블로거 베케크리가 촬영한 북한 국경의 한 마을 모습.
평양을 조금만 벗어나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라는 국호를 사용하는 북한 정권이 가장 애용하는 단어는 ‘공화국’이다. 북한 정권이 발표하는 성명만 봐도 ‘우리 공화국’이라는 표현이 빠지지 않는다. 하지만 북한 정권이 말하는 ‘우리 공화국’은 이미 ‘평양공화국’과 ‘지방공화국’으로 분명하게 갈려 있다.
북한 정권은 1972년 12월 27일 헌법을 개정하면서 수도(首都)를 서울에서 평양으로 바꾸었다.(제11장 149조) 평양은 북한 정권이 수립된 1946년 9월 평안남도에서 분리돼 평양특별시로, 이후 평양직할시라고 명칭이 바뀌면서 북한의 정치·경제·사회·문화의 중심지가 됐다. 평양의 면적은 1100㎢로, 서울(605㎢)보다 두 배 이상 넓다. 인구는 지난해 기준 286만명으로 추정된다.
고구려의 수도였고, 고려시대에는 서경(西京)으로 불렸던 평양이 ‘혁명의 수도’가 된 것은 김일성의 교시에 따른 것이다. 김일성은 “평양은 조선 인민의 심장이며, 사회주의 조국의 수도이며, 우리 혁명의 발원지”라면서 평양에 대한 전후 복구 사업을 대대적으로 벌였다. 김일성은 또 1975년 3월 아들 김정일에게 15년간 평양을 새롭게 건설해 보라고 지시했다. 김정일은 “천지개벽을 일으켜 온 세상 사람들이 황홀경에 잠겨 평양을 바라보게 하겠다”고 다짐했다. 김정일은 주체사상탑을 비롯해 개선문, 대성산 혁명열사릉, 애국열사릉, 만경대혁명사적지, 조선혁명박물관, 동평양대극장, 만수대예술극장, 만수대의사당, 고려호텔, 창광원, 빙상관, 청류관, 인민대학습당, 국제문화회관, 평양 제1백화점, 김일성경기장, 5·1 경기장, 평양산원, 청년중앙회관, 4·25문화회관 등을 건설했다. 북한 웹사이트인 ‘우리민족끼리’는 북한에서 1975~1989년은 ‘혁명의 수도’인 평양에 현대적인 거리와 대형 건축물들이 집중적으로 건설됐던 시기라고 밝혔다.
김정일이 사망한 후 권력을 승계한 김정은이 가장 먼저 한 일은 2012년 2월 16일 조부의 미라가 있는 금수산기념궁전을 더욱 크고 화려하게 만들어 ‘금수산태양궁전’으로 개칭하고 부친의 시신까지 미라로 만들어 안치한 것이었다. 김정은은 또 2012년 4월 13일 평양 만수대 언덕에 있는 조부의 대형 동상 옆에 같은 크기의 부친 동상을 설치했다. 이처럼 세습을 정당화한 김정은은 정권의 합리화와 체제 유지를 위해 조부와 부친처럼 평양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나섰다. 김정은은 2013년 신년사에서 “평양을 주체조선의 수도, 선군문화의 중심지답게 더욱 웅장하고 풍치 수려한 도시로 만들 것”이라고 강조했다. 김정은의 이 같은 지시로 평양은 각종 전시성 건물을 짓느라 자금과 물자가 집중됐지만 지방은 방치됐다. 평양의 모든 도로에는 아스팔트가 깔리면서 많은 승용차들이 달리고 궤도전차가 운행되고 있지만 지방에선 도로들이 대부분 비포장인 데다 각종 인프라도 제대로 구축되지 않았다. 웨인라이트는 “평양을 조금만 벗어나자 허물어진 집들과 여기저기 구멍 뚫린 고속도로, 누렇게 녹슨 철탑들이 눈에 들어왔다”면서 “이런 곳들이 진짜 북한의 일상생활을 보여주는 건축물일 것이라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고 밝혔다.
그들만의 낙원
특히 주목할 점은 평양 시민들은 ‘선민(選民)’이라는 것이다. 평양 시민과 지방 주민들은 생활방식이나 혜택에서 하늘과 땅만큼 차이가 있다. 북한에서는 공민등록법에 따라 17세 이상은 공민증을 발급받는데, 1997년부터 평양 시민들만은 ‘평양시민증’을 별도로 발급받는다. 지방과 수도를 구별해 따로 수도시민증이라는 걸 발급하는 나라는 전 세계에서 북한이 유일할 것이다. 평양 시민들은 접경지역과 자강도, 라선, 개성을 제외하고 통행증 없이 시민증만 있으면 전국 어디든 여행이 가능하다. 평양 시민이 되려면 무엇보다 출신성분이 좋아야 하고 당과 수령에 무조건 충성해야 하고 전과 등 결격사유가 전혀 없어야 한다. 김일성은 “평양은 혁명의 수도인 만큼 오직 당의 유일사상으로 철저히 무장되고 당 정책을 받들고 한마음 한뜻으로 살며 일하는 사람들만 살 수 있다”고 강조했다. 평양 시민들은 ‘평양관리법’에 따라 식량과 연료를 우선적으로 배급받는다. 1990년대 후반 ‘고난의 행군’ 시절은 물론 북한의 배급 체계가 무너진 지금도 평양 시민에게는 식량배급이 계속되고 있다. 각종 식당, 병원 등 의료 시설과 상하수도 시설도 잘 돼 있다. 이 때문에 지방 주민들은 죽기 전에 ‘평양공화국’에서 살아보는 것이 소원이다. 평양 시민들은 특혜를 많이 받다 보니 충성심이 지방 주민들보다 투철하다. 게다가 북한 정권은 일부 불순분자(?)를 추방하는 방법 등으로 평양 인구를 적절한 수준으로 조절하면서 충성심까지 유도한다. 때문에 평양은 선택받은 자들만의 또 다른 세상이라고 볼 수 있다. 평양은 김정은에 충성하는 당·정·군의 간부들, 돈주들, 열성 당원 등 북한 전체인구의 10%만이 특권을 누리는 ‘낙원’인 셈이다.
아무튼 평양이 변했지만 ‘평양 착시효과’에 현혹돼선 안 된다. 북한 정권의 관리와 투자로 평양의 경제 사정만 나아졌을 뿐 대부분 지역들은 극도로 피폐한 상태이다. 북한 정권을 일방적으로 악마화해서도 안 되지만 ‘김정은이 핵을 포기하고 경제 발전에 나설 것’이란 ‘동굴의 우상(偶像)’에서도 벗어나야 한다.
이장훈 국제문제애널리스트
월간조선 11월 호 글 : 임헌조 범시민사회단체연합 공동대표 겸 사무총장
■민족통일대회 평양 방문기
태극기 배지 착용, 사진 촬영에 아무 제지 없어
⊙ “베트남이 親美로 돌아섰지 않았습네까? 우리를 고통에 빠트리거나 억압하지 않는다면 親美든 反美든 그게 중요하겠습네까?”(안내원)
⊙ 집체극 ‘빛나는 조국’에서도 反美구호 사라지고, 트로트 메들리 들어가
⊙ 호텔 밖으로 나가 주민들과 접촉하는 것은 여전히 통제
⊙ 단고깃집 간판 본 후 北 안내원에게 ‘동물권’ 얘기해 주자, 다음날 “근데, ‘동물권’은 너무하는 거 아닙네까?”
林憲祖
1966년 출생. 인하大 섬유공학과 졸업, 가톨릭대학교 문화영성대학원 석사 / 뉴라이트전국연합 사무처장, 선진통일연합 공동대표 역임. 現 범시민사회단체연합 공동대표 겸 사무총장, 사단법인 민생경제정책연구소 이사
▲평양에서 참관한 집체극 ‘빛나는 조국’의 한 장면. 평화·번영·통일이라는 단어가 보인다. 사진=임헌조
그리스 여행에서 돌아오는 길이었다. 10년 전 방문했을 때와 비교해 보면 아테네는 슬럼화되고 있었다. 2000년 전 화려했던 그리스문명이 포퓰리즘으로 망한 후, 오늘날 또다시 포퓰리즘으로 경제위기가 심화되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었다. 착잡한 마음을 안고 귀국한 직후 정부 당국자의 전화를 받았다. 평양에 가보지 않겠느냐는 전화였다.
“평양이요?”
“네, 이번에 민족통일대회가 평양에서 열리는데 보수 시민단체도 참여하면 좋을 것 같아 연락드립니다.”
잠시 망설였지만, 가기로 결정했다. 보수 성향의 한국교총 하윤수 회장 및 한국기독교총연합회 엄기호 목사와 이영훈 목사도 간다고 했다. 방북(訪北)을 결정한 이후 머릿속을 내내 맴도는 생각이 하나 있었다.
‘과연, 밖에서 보는 것과 안에 들어가서 보는 것에 차이가 있을까?’
남북 간, 미북 간 정상(頂上)회담이 연이어 성사되면서 한반도 정세가 어떻게 변화할 것인가에 대한 관심을 놓은 적이 없다. 그것이 평양 방문에 동의한 주요한 동기였다. 물론 제한적 방북일정과 쇼윈도 같을 평양시의 일면을 보고 섣부른 평가를 내릴 수는 없다는 것은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뭔가 북한의 변화를 읽을 수 있는 기회가 되지는 않을까 생각이 들었다. 여행에서 돌아오자마자 가방을 다시 싸면서 만감이 교차했다.
공군수송기를 타고 북한으로
▲방북단 일행은 어쩌면 대북침투훈련에 이용했을지도 모르는 공군수송기를 타고 북한을 다녀왔다.
10월 4일 목요일 오전 6시10분, 경복궁 동편 주차장에 방문자들이 모였다. 방문증과 안내서 및 이름표를 받았다. 쌀쌀한 날씨가 옷깃을 여미게 했다. 저마다 어울려 상기된 얼굴을 숨기지 않고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누구는 5년 만에, 누구는 10년 만에 방북하는 것이라며 자못 흥분된 목소리가 들려왔다. 대부분 낯익었다. 방송에서 봤거나 과거 악연(?)이 있던 인물들이었다. 뉴라이트 및 보수우파 운동 과정에서 논평과 성명서 등을 통해 치고받던 좌파 인사들이 다수 있었다. 보수 인사들은 찾기가 쉽지 않았다. 자유한국당과 바른미래당이 불참을 선언, ‘민족통일대회’지만 반쪽 행사가 된 것이다.
총 160명이 방문단을 구성했다. 급하게 일정이 확정되면서 공군수송기 3대가 배치되었다. ‘공군수송기라…. 6·25전쟁 이후 대한민국 공군기가 평양을 향해 날아간 적이 있었던가?’
“낙하산을 하나씩 배급해야 하는 거 아냐?”라는 농담 섞인 말들이 흘러나왔다. 그렇다. 특수부대원들이 낙하산을 메고 적진(敵陣)을 향해 날아가는 훈련을 했을지도 모를 수송기였다. 전쟁 영화에서나 봤던 공군수송기의 내부는 묘한 긴장감을 불러일으켰다. 전쟁물자와 군인을 싣던 공군기가 민간인을 태우고 휴전선을 넘고 있다니, 하나의 메타포(metaphor)였다. 이것이 긍정의 사인(sign)인지, 아니면 불안의 전조(前兆)인지 누가 알 것인가. 이 상징적 은유는 평양 방문 내내 나를 사로잡았다. 한 시간을 날아 우리는 평양공항에 내렸다
사진 촬영 제지 없어
▲민족통일대회 행사장 앞에서. 왼쪽부터 이태호 참여연대 정책위원장, 윤순철 경실련 사무총장, 필자.
평양은 맑았다. 옅게 깔린 구름과 청명한 하늘이 우리를 반겼다. 오랜만에 온 사람들이나 처음 방문한 사람들이나 흥분을 감추지 못하는 표정이었다.
“어서 오십시오. 환영합네다.”
말끔하게 차려입은 북한 측 인사가 공군기에서 내리는 방문 인사들에게 일일이 악수를 청하며 인사를 건넸다. 제복 차림의 북한 군인들과 공항 직원들이 우리를 안내했다. 평양공항은 여느 공항과 다르지 않았다. 우리나라 지방 공항 규모였지만, 제3터미널까지 있었고 깨끗했다. 활주로에는 북한 여객기가 여러 대 있었다. 타(他)국적기는 보이지 않았다. 터미널도 한산했다. 간단한 수속을 마치고 버스에 나눠 탔다.
버스가 도착한 곳은 2박 3일 동안 우리가 묵을 고려호텔이었다. 쌍둥이 건물이 다리로 연결된 고층 호텔이었다. 한국의 지방 호텔 수준이었다. 2인 1실로 방 배정을 했다.
나와 함께 방을 쓰게 된 분은 우리민족서로돕기운동 강영식 사무총장이었다. 강 사무총장은 남북교류가 한창일 때 북한을 여러 차례 방문한 적이 있었다.
처음 방문한 나로서는 그의 경험이 주요한 판단의 근거가 되었다. 강 사무총장에 의하면 예전에 북한은 태극기 배지를 일부 대표단 이외에는 달지 못하게 했으며, 사진 촬영도 굉장히 제한했다고 한다. 이번에는 달랐다. 우리 방문단은 사전에 통일부에서 나눠준 태극기 배지를 왼편 가슴에 달았지만, 어떠한 제지도 받지 않았다. 사진 촬영에도 제지나 제한이 없었다.
사라진 反美구호
▲차창 밖으로 보이는 평양 려명거리의 모습. 평양 거리에서 反美구호는 보이지 않았다.
평양 거리는 사회주의 체제답게 선전·선동 구호로 넘쳐났다. ‘당을 옹호하자’ ‘만리마 운동을 벌이자’ ‘수령에게 충성을 다하자’는 선전문구들이 차창을 통해 눈에 들어왔다. 하지만 반미(反美)구호는 발견할 수 없었다. 사라진 것이다. 북한을 여러 차례 방문했던 사람들도 놀라는 기색이었다.
민족통일대회 행사 중 발언들과 집체극(集體劇) ‘빛나는 조국’ 및 기타 환영 공연에서도 반미 언동은 단 한 구절, 한마디도 없었다. 버스를 같이 타고 일정을 함께한 북한 측 인사에게 조심스레 물어보았다.
“거리에도 공연 내용에도 반미구호가 없다. 발견하지 못했다.”
나는 그에게 답변이 거북하면 말하지 않아도 된다고 양해를 구하면서 말을 이었다. “베트남은…”이라고 말하려다가 순간 멈칫했다. ‘베트남이 반미에서 친미(親美)로 변한 것을 언급하는 것이 적절한가’ 하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방북 전에 통일부에서 받은 사전(事前) 교육에서 불필요한 논쟁이나 자극적인 언사는 피하라고 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기우(杞憂)였다. 그는 웃으며 말했다.
“베트남이 친미로 돌아섰지 않았습네까? 우리를 고통에 빠트리거나 억압하지 않는다면 친미든 반미든 그게 중요하겠습네까?”
국제문제 전문가나 북한 전문가들로부터 ‘북한이 친미로 돌아서고 있다’는 얘기는 들었지만, 그걸 직접 확인하기는 처음이었다. 방북단 일원인 좌파 인사 중 한 명은 “북한이 실용주의 노선으로 회귀했다”고 평했다. “어느 나라건 국민들의 먹고사는 문제가 최우선일 수밖에 없고, 이념보다는 경제와 실용을 택한 것”이라는 주장이었다. 다른 한편으로는 북한이 체제 보장 및 실질적 위협의 제거라는 측면에서 보아도 반미보다는 친미로 선회하는 것이 유리할 것이라는 관측도 가능하다.
‘되돌릴 수 없는 완전한 북핵 폐기’가 추진되면 미북 간에 대사급 교류가 이루어질 수 있을까? 얼마 전 김정은이 얘기한 것처럼 주한미군은 철수하는 것이 아니고 평화유지군으로 한반도에 주둔하게 될까? 그것이 정말 북한의 진심일까? 갖가지 의문이 떠올라 머리를 어지럽혔다.
나는 일행 중 몇몇에게 “북한이 반미에서 친미로 돌아서면, 남한에서 활동하는 좌파 운동권들도 반미노선을 접어야 하는 것 아닌가?”라고 물었다. 그들은 대답을 하지 않았다. 뜻밖의 질문에 말문이 막힌 듯했다.
내가 확인한 바로는 이미 남한의 좌파 진영 내에서는 고민이 시작됐다. 한반도에서 부는 변화의 바람은, 그 방향과 세기에 따라 커다란 충격으로 다가올 것이 분명하다. 양극단은 불편한 진실과 마주하게 될 것이다. 극좌(極左)는 반미구호를 전면에서 외치며 활동하다가 끈 떨어진 연처럼 북한의 변화에 황당해할 것이다. 극우(極右)는 북한을 군사적으로 쳐야 마땅한 미국의 태도에 입을 다물지 못하게 될 것이다. 이미 그 징조는 나타나고 있다. 연일 미국을 칭송하던 어느 우파 논객은 미북 싱가포르 정상회담 이후 ‘미국’ 대신 ‘양키’라는 표현을 서슴지 않고 있다.
외출이나 주민과의 접촉은 여전히 통제
▲평양 과학기술전당에서 공부를 하고 있는 학생들. 과거에 비해 통제가 많이 없어졌다고는 하지만, 주민들과의 자유로운 접촉은 할 수 없었다.
여러 차례 방북했던 남한 좌파 인사들의 언행을 통해 북한과 평양을 바라보는 것도 의미가 있었다. 그들은 이미 여러 차례 북한을 왕래했었기 때문에 변화의 바람에 민감했다. 사라진 반미구호에 대해 여러 차례 얘기가 나왔다. 조심스레 “북한은 친미로 가야 한다”는 주장을 펴는 사람도 있었고, 고개를 갸우뚱하는 사람도 있었다. 어느 누구도 반미노선을 고집하거나 주장하는 사람은 없었다. 카메라 셔터를 수시로 눌러대도 촬영을 제지하지 않는 북한의 태도 변화에 대해 놀라는 사람들이 많았다. 누구는 “예전에는 평양을 떠날 때 일일이 카메라를 체크하여 사진들을 삭제했다”고 말했다. 이번에는 그러지 않았다. 나는 900여 장의 사진과 동영상을 촬영했고 가져왔다.
그러나 활동의 자유까지 보장된 것은 아니었다. 고려호텔 밖으로 자유롭게 나가 다닐 수 없었다. 북한 주민과 자연스럽게 만나거나 대화 나누는 것을 통제한 것이다. 모두들 호텔 밖 5분 거리에 있는 평양역에 가고 싶어 했다. 그동안 북한을 수시로 드나들었던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다들 “예전과 비교해 많이 부드러워지고 변화를 체감한다”고 했지만, 어쩌면 여러 차례 온 사람과 처음 온 내가 느끼는 게 큰 차이가 없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말을 던졌다.
“다음에 올 때는 자연스럽게 평양역에 갈 수 있을까요?”
그들은 “글쎄요. 그러길 바라죠”라며 씁쓸한 미소를 머금었다.
돌아오는 날 오전 식물원에 갔다. 일정에 있던 행사였다. 식물원을 돌아보는 일정인 줄 알았다. 하지만 아니었다. 노무현(盧武鉉) 전 대통령이 방북했을 때 식수(植樹)한 나무 앞에서 추모식을 갖기 위한 것이었다. 노무현재단 관계자가 “나무를 중심으로 모여달라”고 요청했지만, 일부는 멀찍이 떨어져 그들이 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한편에서는 불편한 속내를 감추지 않았다. 노무현재단 사람들에게는 중요한 행사였을지 모르지만, 나를 비롯하여 적지 않은 사람들은 속은 듯한 기분이었다.
집체극 ‘빛나는 조국’
▲집체극 ‘빛나는 조국’의 한 장면. 교육·복지·과학기술 발전, 남북평화 등을 담은 구호들도 있었지만, 군사적인 구호들도 여전히 있었다.
문재인(文在寅) 대통령이 방북했을 때 초연했던 집체극을 그대로 보여준다고 해서 다들 관심이 높았다. 능라도 경기장엔 이미 평양 시민들이 가득했다. 수만 명이 넘는 관중이 우리를 반겼다.
나는 내심 긴장했다. 그 이유는 한 가지 기억 때문이었다. 2005년쯤으로 기억한다. 학생운동·노동운동을 하다가 전향해서 뉴라이트운동을 하던 시기였다. 하루는 운동권 후배 몇이 나를 저녁 식사에 초대했다. 북한에 다녀왔고 아리랑 집체극을 봤다고 했다. 공연 도중 반미구호를 외치던 얘기, ‘눈물 뿌리며 격하게 감동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얘기를 하던 후배가 갑자기 눈물을 글썽거리며 나에게 말했다.
“선배, 선배는 뉴라이트로 전향했기 때문에 통일이 되면 숙청될 수밖에 없어요.”
그는 “북한 중심으로 통일이 될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며 말을 이어갔다.
“하지만, 선배만큼은 우리가 탄원하여 숙청에서 제외될 수 있도록 선처를 요구할게요. 앞으로 제대로 사세요.”
말문이 막혔다. ‘하나의 집체극이 이 정도로 커다란 영향력이 있구나’ 놀랄 수밖에 없었다. 나는 “제대로 살기 위해 전향했다”고 말했지만, 그는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다.
당시 당황했던 경험이 생각나서 나도 모르게 긴장을 했던 것이다. 어깨를 돌리면서 긴장을 풀었다. 그냥 있는 그대로 보고 평가하기로 했다. 사전에 너무나 많은 얘기를 들었기 때문인지 몰라도, 대단한 규모와 일사불란한 집단체조 및 카드섹션에 입이 벌어지기는 했으나 특별한 감동은 없었다. 북한 주민을 상대로 한 계몽극이라는 느낌이었다. ‘고난의 행군을 이겨내고 과학기술 혁신으로 새로운 희망을 만들어 왔다’ ‘이제 모두가 하나 되어 번영의 통일조국을 건설하자’는 주제였다.
공연 마지막 부분에 특별코너를 넣어 남한의 전통가요(트로트)를 메들리로 부르는 장면은 독특했다. 이것은 예전에는 없던 부분이라고 했다. 부모님 세대의 향수(鄕愁)를 자극하는 구성진 노랫가락에 중국 조총련에서 온 나이 드신 아주머니가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이번 민족통일대회에는 일본과 중국 및 캐나다 등에서도 조총련 회원들이 조직적으로 참여했다. 아마도 이들을 위한 구성이 아닐까 생각해 봤다.
평화·번영·통일
▲‘빛나는 조국’ 공연이 끝난 후 집체극을 관람한 평양 시민들은 방북단에게 인사를 보냈다.
가장 인상적이었던 카드섹션은 ‘평화’ ‘번영’ ‘통일’ 세 단어였다. 나는 이 글자들의 배치에 주목했다. 북한은 이 단어의 순서대로 로드맵을 정한 것은 아닐까. 통일 후 번영이 아니라 일정하게 경제발전을 달성하여 번영을 이룬 후 통일을 하고자 하는 의도가 담긴 것으로 읽혔다. “자존심이 센 북한이 격차가 큰 현재 상황에서 당장 통일을 원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일행 중 한 사람이 말했다. 남한에서 적지 않은 사람들이, 통일이 되면 북한 주민들이 봇물 터지듯 남쪽으로 밀려들어 올 것이라고 걱정하곤 한다. 하지만 실제 통일의 과정은 다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해봤다.
주변을 돌아보았다. 멀리 질서정연하게 관람하는 평양 시민들이 보였다. 함께 방북한 주변 인사들을 봤다. 차분해 보였다. 공연 관람 후, “‘우리의 소원은 통일’을 부를 때 눈시울이 뜨거워졌다”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대부분 집체극의 스케일과 일사불란한 연출에 대해 얘기를 많이 했다. 반미구호가 사라지고 계몽적 내용이었기 때문에 남한에서 온 사람들에게는 감흥이 덜 했던 것 아닐까.
거리의 구호들과 선전물들은 사회주의 시스템에서 생산력을 높이기 위한 하나의 방편이다. 수십 년간 접하며 익숙해진 구호가 만성화되면 보다 효과적인 장치가 필요했을 터이고, 아마도 집체극을 통한 자극만큼 효과적인 것은 없지 않았을까 싶다. 공연을 하기 위해 준비하고 연습하는 사람들이나 완성된 공연을 보러 오는 사람들이나 마찬가지의 효과를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사상적 통일과 결의를 다지는 ‘내부용’으로서의 역할이 더 클 거라는 생각을 했다.
공연이 끝난 후, 북측 인사가 다가왔다.
“어땠습니까? 감동하셨습네까?”
그러면서 조심스레 불평을 늘어놓았다.
“제 옆자리에 남측 방문단 청년이 있었는데 공연 도중 잠을 자더라고요. 어찌 잠을 잘 수 있는지 이해가 안 갑네다.”
순간 나도 당황했다. 잠시 정적이 흘렀다. 나도 “이해가 가지 않는다”고 답했다. 호텔로 돌아오는 버스에서 생각해 봤다. 이번 방북단에 청년, 대학생 몇이 동행했는데, 아마도 그들 중 하나일 것이다. 누구는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집중하여 공연을 보았으나, 그 젊은이한테는 공연장의 음악과 폭죽소리가 따분한 자장가로 들렸던 것이다. 이해할 수 있었다. 요즘 남한 젊은이들에게 소위 운동권식 계몽극은 철 지난 유행일 것이다. 이미 대학가에 학생운동권이 사라진 지 오래되었을 뿐만 아니라, 이들에겐 도무지 감정이입을 할 수 없는 내용이지 않았을까.
젊은 세대들을 모아 통일을 주제로 토론을 해보면 사실상 관심이 없을 뿐만 아니라 시큰둥한 반응까지 보인다. 아무튼 이번 해프닝은 세대 간의 변화를 느낄 수 있는 좋은 경험 중 하나였다.
단고깃집에서
▲평양인민문화궁전에서 열린 민족통일대회. 북한측 인사들과 160명의 국내 정당·시민단체 관계자들이 참석했다.
평양 도심 한복판을 지날 때 단고기식당 간판이 눈에 띄었다. 개고깃집이다. 자연스럽게 화제에 올랐다. 북측 인사에게 “자주 먹느냐”고 물었다. 그는 입맛을 다시며 “맛도 맛이지만, 영양 만점”이라면서 “한 번 먹어봐야 한다”고 했다. 그에게 “이제 서울에서는 개고깃집을 찾기가 쉽지 않다. 남한에서는 심지어 진보 단체들까지 인권뿐만 아니라 ‘동물권(動物權)’까지 주장하여 더 난감해졌다”고 말해 주었다. 그는 ‘동물권’이라는 말을 처음 들어보는지, 고개를 갸우뚱하며 납득이 가지 않는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다음날, 아침을 먹고 오전 행사를 위해 버스에 탔다. 어제 대화를 나눴던 북측 인사가 옆자리에 앉으며 입을 열었다.
“근데, ‘동물권’은 너무하는 거 아닙네까?”
아침부터 생뚱맞았다. 어쩌면 밤새 ‘동물권’이라는 말이 그의 머리를 괴롭혔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도 동감”이라고 맞장구를 쳐주었다. “심지어 개헌운동 과정에서 대표적인 진보 단체들이 동물권을 기본권에 넣을 것을 강하게 요구했다”고 말해 주었다. 그는 어이없다는 듯한 반응이었다. “만약 통일이 되어 통일헌법을 만들 경우, 동물권과 관련해서는 북한과 보수 진영이 하나가 되어 반대해야겠다”고 익살을 부렸더니 난감해하는 표정을 지었다.
동물원에서
▲평양 중앙동물원 입구. 중앙동물원과 자연박물관은 상당한 수준이었다.
마지막 날, 태풍 때문에 돌아오는 일정이 늦춰졌다. 급하게 새로운 일정이 만들어졌다. 중앙동물원을 관람하게 되었다. 2박 3일 동안 철저하게 연출된 공간에서 평양을 보았는데, 이번에는 아니었다. 그동안 남측 방문단은 평양 일반 시민들과 스치며 만날 수 있는 기회가 전혀 없었다. 아마도 사전에 통제를 했기 때문이었으리라. 그러나 자연박물관과 동물원에 들어가니 구경 온 평양 시민들과 학생들로 넘쳐났다. 갑작스런 일정에 평양 시민들의 통제가 불가능했을 것이다. 가슴이 뛰었다. ‘뭔가 화면 뒤의 진실을 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상상을 했다. 하지만 상상과는 달랐다.
일단 시설이 너무 좋았다. 여느 선진국의 자연사박물관이나 동물원에 견주어도 빠지지 않는 수준이었다. 날씨가 좋을 경우 평균 하루에 4000명이 방문한다고 했다. 동물원 정문 앞 커다란 주차장엔 여러 대의 버스가 정차하여 사람들을 싣거나 내리고 있었다.
여느 동물원이 그렇듯이, 학생들이 신기한 듯 돌아다니며 전시물과 동물들을 구경했다. 선생님을 따라 줄 맞추어 가는 유치원생들이 곁을 지나갔다. 가족 단위의 관람객들도 보였다. 전혀 이상하지 않았다. 마치 어린이대공원에 온 듯한 느낌이었다.
앞서 언급한 평양역도 조만간 자연스레 다닐 수 있게 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전향에 대하여
▲평양공항은 우리나라 지방 공항 수준이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친해진 북측 인사는 내가 뉴라이트로 전향한 것이 신기한 듯 관심을 가졌다.
“한 번 자리 잡힌 사상이 변한다는 게 가능한 일입네까?”
아마도 공식적으로 전향하여 활동한 뉴라이트 인사로서는 내가 처음 방북한 것이 아닌가 싶다. 그가 “주체사상을 공부해 봤느냐”고 묻기에 내 경험을 얘기해 주었다.
1986년 직선제 개헌투쟁 과정에서 투옥되어 1년간 옥살이를 했는데, 당시 주사(主思·주체사상)에 정통한 정치범 중 한 명이 여러 날 동안 장시간에 걸쳐 교육을 했었다. 다들 그럴듯하다며 고개를 끄덕였는데 마지막 날에 일이 벌어졌다.
자신의 교육이 먹혀들자 신이 난 그 정치범은 자신의 경험을 한 가지 덧붙였다. “하루는 몸살을 깊게 앓아 헛것이 보인다며 신음하던 아내의 이마에 주체사상을 갖다 대고 ‘귀신아 물러가라!’ 했더니 병이 사라졌다”고.
그러자 “에이 미친놈아!” 하면서 다들 돌아섰다.
이 얘기를 해주자 북측 인사는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황당해했다. 그렇다. 그 시절, 주사든 마르크스주의든 제대로 된 운동권이 별로 없었던 것 같다. 전향에 대해서 진지하게 얘기하게 되면 사상논쟁으로 빠질 것 같아 더 깊게 나아갈 수는 없었다. 다행인 건, 그들이 내가 뉴라이트나 보수라는 것에 전혀 개의치 않고 친절했다는 점이다. 그는 공항까지 배웅하며 “다음에 올 때는 다른 뉴라이트, 보수 인사들과 함께 오라”고 했다.
어두워진 평양공항에서 대한민국 공군기를 타고 서울로 향하면서 많은 생각을 했다. ‘북한은 변하고 있는가?’ ‘보수우파는 항상 의심만 하면서 한반도의 근본적인 변화에 대해서는 뒤쫓아만 갈 것인가?’
합리적인 의심이야 당연히 필요하지만, 역사의 주인공은 의심하는 자가 아니라 문제를 해결하는 자가 아니던가. 나는 획기적으로 상황이 바뀌고 북한의 제재가 풀리면 많은 보수 인사와 우파 활동가들이 남북 간 민간교류에 앞장설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서울이 가까워 오면서 노란 불빛들이 많아지기 시작했다. 다른 어느 때보다 정겨워 보였다.⊙
11.01 "평양 마천루, 자원 엉뚱하게 쓴 사례… 오히려 가슴 아파해야"
안용현 논설위원이 본 북한 GDP의 허와 실
북한 경제학자가 최근 교도통신 인터뷰에서 "지난해 북한이 3.7%의 경제성장률을 기록했다"고 밝혔다. 북의 2017년 국내총생산(GDP)이 307억달러(약 35조원)로 2016년 296억달러보다 증가했다는 것이다. 이는 한국은행이 7월 발표한 '지난해 북 GDP 성장률 -3.5%'를 반박하는 성격이다. 최근 평양을 다녀온 여권 인사들은 "홍콩·싱가포르와 구별이 안 될 정도"라며 북 성장을 강조했다. 그러나 평양의 신축 건물만 보고 경제성장을 거론하는 건 어불성설이란 전문가도 많다. 북 GDP를 어떻게 봐야 할까.
◇북 GDP 어떻게 계산하나 GDP는 한 해 동안 그 나라가 생산한 모든 최종생산물의 시장 가치를 더한 것이다. 북 GDP를 계산하려면 북이 연간 생산한 각종 물품의 수량부터 알아야 하는데 이를 발표하지 않는 것부터 문제가 된다. 북 생산 자료는 국정원 정보활동 등을 통해 수집된다. 구리 생산량의 경우 항공 촬영을 통해 동광(銅鑛)에서 캐낸 원석량, 제련소 마당에 쌓인 원자재, 제련소 굴뚝에서 연기가 난 시간 등을 파악해 추산한다. 전직 국정원 간부는 "최고인민회의(국회 격)에 보고된 북 내부 자료를 입수해 철강·석유 등 중공업과 신발·펄프 등 경공업 생산량을 알아낸 적도 있다"고 했다. 이렇게 입수한 수량 지표를 가지고 한은이 북 GDP를 계산한다.
▲평양 스카이라인을 바꾼 여명거리가 화려한 조명을 뽐내고 있다. 여명거리는 작년 4월 준공됐다. /연합뉴스
가장 큰 문제는 북 최종생산물의 시장 가격을 모른다는 것이다. 근래 장마당(시장)이 발달했다고 하지만 수많은 물품의 북한 내 가격을 모두 파악하는 건 불가능하다. 그래서 한국의 시장 가격을 쓴다. 북이 신발 1만 켤레를 만들었다면 켤레당 한국 가격 1만원을 곱해 1억원으로 계산하는 식이다. 또 북 중간생산물 가격을 일일이 알 수 없어 부가가치율을 이용해 최종생산물 가격을 추산하는데 이 부가가치율도 우리 것을 쓴다. 한은 통계가 북 경제 현실을 반영하지 못할 가능성이 크다. 국책연구소 연구원은 "북 자신도 정확한 GDP를 모를 것"이라며 "북 경제학자는 3.7% 성장을 뒷받침할 구체적 자료는 제시하지 않았다"고 했다.
◇"대북 제재로 올해 북 GDP -5% 예상"
사회주의 경제 전문가인 김병연 서울대 교수는 최근 인터뷰에서 "지금 수준의 대북 제재가 유지된다면 올해 북 GDP 성장률이 -5%대 이하가 될 것"이라고 했다. 김 교수는 지난해 북 수출이 2016년보다 40% 가까이 줄어든 통계를 근거로 지난해 북 GDP 성장률을 -2~3%대로 추산했었다. 올해 북 수출이 평년보다 80~90% 감소할 것으로 예상되는 만큼 밀수가 폭증하지 않는다면 GDP 성장률은 -5%대로 떨어진다고 분석한 것이다. 실제 올 1~9월 북의 대중(對中) 수출은 작년 같은 기간보다 89.6% 줄었다. -5% 성장은 '고난의 행군' 시절 수치다.
▲2016년 겨울 북한 황해도 신평군에서 여성들이 장작을 메고 걷고 있다. 북 지방 경제는 계속 어렵다고 한다. /AP 연합뉴스
김 교수는 '평양 마천루'를 성장이 아니라 자원 배분 왜곡의 증거로 봤다. 서울 빌딩 숲은 '한강 기적'의 결과물로 등장했지만, 평양 마천루는 공장·도로 등 경제 건설에 사용돼야 할 자원이 김정은 치적 선전용으로 엉뚱하게 집중 투입된 사례라는 것이다. 그는 "평양 빌딩을 보고 손뼉을 칠 게 아니라 가슴 아파해야 한다"고 했다. 특히 몇 년에 걸쳐 세워진 건물들을 보고 한 해 생산을 기준으로 하는 GDP 성장이라고 하는 것은 '난센스'라고 했다. 일각에선 북 휴대전화가 600만대에 육박한다고 강조하나 정보통신업이 북 GDP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아직 미미하다고 한다. 한은 관계자는 "1990년부터 매년 추산해온 북 GDP 수치가 정확하지는 않더라도 그 추세는 맞는다고 봐야 한다"고 했다. 지난해 북 GDP(-3.5%)는 문재인 정부에서 계산한 결과인 만큼 대북 제재 효과를 강조하려고 일부러 낮췄을 가능성은 사실상 없어 보인다.
北이 이례적으로 3.7% 성장 주장한 속내는… "제재 효과 없다, 빨리 풀어라"
北 GDP 논쟁은 대북제재 연관
마이너스 성장 신뢰하는 측은 "제재효과가 이제 드러나는 것"
질 낮은 북 신발이 한은 계산대로 한국 가격에 팔릴 가능성은 없다. 따라서 북 상품에 단순히 한국 가격을 곱하면 북 GDP의 과대평가를 가져온다는 지적이 나온다. 빌딩이 올라간 평양 인구는 300만, 상황을 알 수 없는 지방 인구는 2200만명이다. 한은은 북 경제 규모를 연 30조원 이상으로 보지만 20조원대로 분석하는 전문가도 있다. 반면 GDP는 생산된 재화와 용역(서비스)의 총합이기도 하다. 북 장마당이 470여 곳으로 불어나면서 북 GDP에서 시장 중심의 서비스업이 차지하는 비중도 30%대로 커졌다. 한은이 도·소매업 증가 등을 감안하지만, 날로 확대되는 장마당 경제를 그대로 담아내기는 어렵다. 특히 '돈주'로 불리는 개인 자본가가 자기 돈으로 아파트를 지어 분양하거나 식품·의류 등을 만들어 판매하는 행위는 북 GDP에 반영하기 어렵다고 한은 관계자가 전했다. 이번엔 북 GDP의 과소평가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불확실한 북 GDP를 둘러싼 논쟁이 계속 생기는 이유는 대북 제재 효과와 연결되기 때문이다. 북 플러스(+) 성장을 강조하는 측은 '제재 효과가 없지 않느냐, 빨리 풀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반면 마이너스(-) 성장을 신뢰하는 측은 '제재 효과가 이제 본격화하는 것'이란 입장이다. "북 GDP가 정치적 숫자"라는 전문가도 있다. 김대중·노무현 정부 때는 GDP가 낮아야 대북 지원의 명분이 됐다. 반면 이명박·박근혜 정부 때도 낮은 GDP가 제재 효과를 증명하는 근거로 사용됐다는 것이다.
'돈줄' 석탄·철광석제재로 수출 막힌 후…北, 민간 전기료 올렸다
북 선전 기관이 연일 '제재 완화'와 '자력 갱생'을 강조하고 있다. 경제가 어렵고 제재가 고통스러울 때 자주 나오던 구호다. 북한 경제 전문가는 "최근 북이 전기료를 올렸다는 보도를 주목한다"고 했다.
그동안 북 경제는 광물 기업이 먹여살리다시피 했다. 석탄과 철광석 등이 북 수출의 절반을 책임졌고 지도부의 핵심 '돈줄'이었다. 전력 기업은 광물 기업에 전기를 비싸게 파는 대신 다른 기업과 민간에는 비교적 저렴하게 공급했다고 한다. 그러나 지난해 북 광물 수출을 전부 틀어막는 유엔 제재가 가동되면서 광물 기업이 예전 같은 전기료를 낼 수 없게 되자 민간 전기료를 올렸을 것이란 추정이 나온다.
작년 말부터 북한은 전례 없는 '경제 봉쇄' 수준의 제재를 당하고 있다. 중·러 가 국경 밀수와 유류(油類) 해상 환적 등으로 '뒷문'을 열어주고 있지만 한계가 있을 것으로 보인다.
트럼프 대통령이 '북핵 협상을 서둘지 않겠다'고 하고, 미국이 우리 정부의 남북 경협 과속에 제동을 거는 것도 대북 제재 효과가 이제 본격적으로 나타난다고 판단하기 때문일 수 있다. 북핵 최대 피해자인 우리 정부가 앞장서 '제재 완화'를 요구할 때가 아니다.
조선일보
11.01 북한의 '우리 민족끼리'에 한국의 보수 우파·중도는 없다
北, 월남자·해외 도주자 가족 등 '동요 계층' 규정하고 철저한 감시
정책 반대하면 '종파 분자'로 처단
북한이 즐겨 쓰는 '우리 민족끼리'는 한민족 모두를 지칭하는 말처럼 보이지만 실은 생각이 다른 사람들은 배제하려는 의도가 담겨 있다. 북한 사회안전부(현 안전성)가 만든 '주민등록 사업 참고서'를 보면 그 실상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주민을 출신 가정에 따라 25개의 성분(신분)으로 분류하고, 수령에 대한 충성도에 따라 3계층으로 나눈다. 요즘도 좋은 대학에 가서 좋은 직종에 종사하고 출세하려면 우선 성분이 좋아야 한다.
북한 당국이 만든 주민 분류 매뉴얼에 의하면, '일편단심 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와 경애하는 최고 사령관 김정일 동지를 위하여 몸 바쳐 싸워 왔으며 앞으로도 김일성·김정일주의 기치에 따라 끝까지 싸워나갈 사람들'을 '기본 군중에 속하는 계층(핵심 계층)'으로 규정한다. 이 사람들이 북한에서 '우리끼리'를 형성하고 누구를 끼워 주고 배제할 것인가를 결정한다.
'정치적으로 복잡한 문제들이 있는 사람들'은 '복잡한 군중에 속하는 계층' 또는 동요 계층으로 규정하고 감시·관리한다. '반동 단체 가담자' '의거 입북자' '월남자 가족' '포로가 되었다가 돌아오지 않은 자의 가족' '기업가 가족' '해외 도주자 가족' 등 31개 부류의 사람들이 여기에 속한다.
그리고 북한 정권 수립 전에 '재산을 가지고 있었던 자들의 후손' 즉 '지주 자본가 등 착취 계급의 잔여 분자'와 수령과 노동당의 영도를 따르려 하지 않거나 그럴 가능성이 있는 사람들은 적대 계층으로 분류해 격리 구역이나 강제수용소에 가둬 놓고 고립시킨다. 같은 민족이라도 정치 성향이 다르면 '우리 민족끼리'로 취급하지 않는 것이다.
당의 정책이나 수령에 반대하는 사람 또는 파벌을 만드는 사람은 '종파 분자'로 지목해 처단한다. 김정은의 고모부 장성택이 그랬고, 김정은의 이복형 김정남은 수령의 권위에 도전할 위험이 있다는 이유로 독살됐다.
/일러스트=이철원
사회주의나 공산주의를 통치 이념으로 하는 나라에서는 민족이나 친족보다 '이념'이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1950년대 말 중국에서는 마오쩌둥의 노선·이념을 비판하거나 반대한다고 의심되는 지식인 간부 약 60만명을 우파 보수로 몰아 감금하고 처형했다. 마오쩌둥은 이런 운동을 계급투쟁으로 규정하고 "계급투쟁은 해마다 해야 하고 날마다 해야 하며 시시각각 해야 한다"고 했다.
북한은 중국이 했던 계급투쟁을 70년 동안 계속해왔다. 북한 당국은 '우리 민족끼리'라는 이름으로 한국 국민도 북한식으로 단결해야 할 사람과 궤멸시켜야 할 사람들로 가르고 있다.
올해 10월 10일 자 노동신문에 실린 논평 '시대의 흐름에 밀려난 자들의 발악'은 자유한국당에 속하는 사람들을 민족을 등진 '반역의 무리'로 지목하며 "민족을 등진 반역 무리들이 아무리 쏠라닥질하며 대결 책동에 열을 올려도 남조선 각계의 지향과 의지는 막을 수 없다. 반역 무리의 파멸은 필연이다"고 했다.
북한 지배층의 가치관으로 보면 한국의 보수 우파는 궤멸돼야 하는 '적대 계층'이며, 중도 계층은 '동요 또는 복잡 계층'이 된다. 북한이 말하는 '우리 민족끼리'에 이런 사람들은 포함되지 않는다.
북한의 정책과 본질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와 같이 북한이 자주 즐겨 쓰는 개념들을 정확히 해석해야 한다. 지금 세계가 주목하고 있는 비핵화 문제는 북한이 갖고 있거나 가지려 하는 핵무기를 어떻게 처리하느냐 하는 문제인데, 북한 정권 담당자들은 '북한 비핵화'라고 말하지 않고 '조선 반도(한반도) 비핵화'라고 말한다.
북한이 비핵화 조건으로 제시한 '체제 안전 보장'은 더욱 애매하다. 체제 안전은 김정은의 안전인데, 어느 정도의 어떤 담보를 제공해야 안전하다고 여길지는 전적으로 김정은의 판단에 달려 있다. 미군이 한반도에서 철수해도 김정은은 안전하지 않다고 느낄 수 있다. 가까운 일본에도 미군이 있기 때문이다. 또 미군이 아시아에서 철군해도, 김정은은 안전이 담보되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미국이 핵무기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미국이 핵을 버리지 않는 한, 북한은 안전하지 않으므로 핵을 버릴 수 없다고 버틸 수 있다. 북한은 한국과 같은 민족으로 같은 언어를 쓰기 때문에 생각도 비슷하고 협력에도 문제없다고 한다면 큰 착각이다. '우리 민족끼리'라는 환상에서 벗어나야 비극을 막을 수 있다.
※리 소테츠(60) 교수는 중국 헤이룽장성에서 태어나 도쿄 조치(上智)대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지난해 저서 ‘김정일 전기’를 냈고 일본 주요 매체 북한 전문 분석·패널리스트로도 활동 중이다.
조선일보
11-24 죄수번호 429번… “밤마다 카메라만 바라보는 ‘벌 아닌 벌’ 받아”
[위클리 리포트]한국출생 ‘美 시민권자’ 김동철 박사
북한 억류서 석방까지 ‘31개월간의 악몽’
▲김동철 박사가 2016년 3월 25일 평양 인민문화궁전에서 가진 기자회견에서 눈물을 흘리고 있다(윗줄 왼쪽). 한 달 남짓 지난 4월 29일 최고재판소에서 10년 노동교화형을 받았다(윗줄 가운데). 김 박사가 올해 5월 9일 석방돼 미국 워싱턴 앤드루스 공군기지에 도착한 뒤 두 손을 들어 승리 표시를 하고 있다(윗줄 오른쪽). 이달 초 한국을 방문해 서울 청계천을 찾은 김 박사는 “풀려나 북한에서 수감된 얘기를 하는 것이 꿈만 같다”고 말했다. 구자룡 기자 bonhong@donga.com·동아일보DB
“평양에서 눈을 가린 채 자동차로 1시간 이상 달려 도착한 외진 산골의 이름도 없는 노동교화소에 갇혀 생활했습니다. 때때로 밤 10시까지 노동하며, 하루에도 몇 번씩 죽고 싶다는 생각이 들 만큼 고통스러웠지요. 이렇게 밖에 나와 말할 수 있게 된 것이 믿기지 않습니다.”
올해 5월 9일 북한에서 2년 7개월 억류됐다 석방된 한국 출생 미국 시민권자 김동철 박사(65)는 이달 3차례에 걸친 동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당시의 악몽을 떠올리며 이렇게 말했다. 그가 북한에서 풀려난 뒤 언론 인터뷰를 하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그는 그동안 미국에 머물며 치료를 받고 안정을 취하다 지난달 자신이 살았던 중국 지린(吉林)성 옌지(延吉)를 들러 이달 초 서울을 방문했다.
김 박사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첫 정상회담(6월 12일)을 싱가포르에서 갖기로 합의한 뒤 김학송, 김상덕 씨와 함께 풀려났다. 트럼프 대통령은 김 박사 일행이 도착하기 전 워싱턴 앤드루스 공군기지에서 부인 멜라니아 여사, 마이크 펜스 부통령 부부 등과 함께 새벽까지 기다리며 대대적인 환영 이벤트를 펼쳤고 이 모습은 전 세계로 생중계됐다.
○ 북한이 파놓은 함정에 걸리다
2015년 북한으로부터 노동당 창건일(10월 10일) 행사에 초대를 받은 김 박사는 나선경제특구에 위치한 두만강호텔에 머물며 행사 참석 준비를 하다 그해 10월 2일 체포됐다.
“오전 일찍 시 인민위원회 해외동포사업처를 방문해 달라는 연락을 받고 사무실을 찾아가 평양에 가져갈 선물 등을 상의하고 나오는 길이었습니다. 8인승 밴을 몰고 사업처 구내를 벗어나려는 순간 평소 알고 지내던 퇴역 군인 남성 A 씨가 자전거로 차를 가로막더군요.”
인사를 하려고 운전석 유리창을 내리자 그는 느닷없이 휴대용저장장치(USB)와 서류봉투를 차 안으로 내던진 뒤 자리를 떠났다. 의아한 생각에 그를 따라가려는 순간 시 보위부 간부가 차 조수석에 뛰어오르더니 ‘차를 남산(호텔)으로 돌리라’고 외쳤다. 음모에 빠졌다는 생각이 김 박사의 머리를 스쳤다. 나선의 남산호텔은 보위부가 주요 인물을 조사할 때 사용하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김 박사는 남산에 도착한 뒤 두 눈이 가려진 채 나선 연안의 비파섬으로 옮겨졌다. 그리고 한 달가량 조사가 진행됐다. 이후 USB와 서류 봉투에 핵 개발과 군사 정보 등이 들어있다는 등의 혐의가 적힌 1000여 쪽 분량의 서류가 만들어졌다. “내용이 맞지 않다고 부인해도 소용없었습니다. 다시 진술서를 쓰게 했고, ‘평양 가서 알아서 하라’며 조사서에 서명하라는 강요가 몇 차례고 반복됐습니다.” 조사 중 고문이나 심한 구타는 없었다. 대신 벽에 거의 얼굴을 붙이고 한 시간가량씩 세워두는 벌을 서야만 했다. “10년 넘게 대북 관련 사업을 하면서 많은 자선 활동을 했고 나선시 공무원이나 당 관계자들과도 두루 친밀하게 지냈는데 왜 이런 일이 생겼을까를 끊임없이 생각했지만 답을 찾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내린 결론은 북한이 미국과 협상할 때 이용할 미국인 인질로 내가 필요했을 수도 있겠다는 것이었습니다.”
평양으로 이송된 뒤 국가보위부 제3국에서 조사를 받았다. 보위부는 이미 김 박사의 죄목을 정해 놓은 상태였다. 그가 죄를 인정하지 않으면 화를 내고 벽을 보고 서있기를 시키고, 진술서를 다시 쓰게 하는 일이 반복됐다. “차라리 구타해서 맞고 끝나면 낫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습니다. 조사가 끝날 수 있게 죄를 만드는 일이 더 힘들었습니다.”
○ 날조된 사실로 채워진 인터뷰
체포되고 3개월이 지난 2016년 1월 11일 아침. 김 박사는 갑작스러운 호출에 억류돼 조사받던 초대소 문을 나섰다. 그가 이송된 곳은 평양 인민문화궁전 내 한 회의실. 그곳에선 CNN 소속 미국인 기자와 카메라맨이 기다리고 있었다. 외신 인터뷰를 한다는 것을 그때 처음 알았고 그의 억류 소식도 이때 처음 외부에 알려졌다.
두 달여 뒤인 3월 25일 평양 주재 외교 사절 등이 지켜보는 가운데 그는 다시 언론에 모습을 드러냈다. 이번에는 북한과 중국, 러시아 기자들이었다. 조선중앙통신 등 북한 언론은 그와의 인터뷰 내용을 자세히 보도했다. 주된 내용은 북한 체제와 최고지도자를 비방하고, 북한에 대한 기밀 및 군사 정보 등을 외부에 전한 혐의 등을 자백하고 참회한다는 것이었다. “CNN 인터뷰 때와는 달리 3월 인터뷰에선 어떤 질문이 나올지 미리 알려주고 혐의를 인정하는 내용을 말하라는 지시를 하더군요.”
김 박사는 당시 기자회견에서 “베이징 주재 동아일보사 특파기자 소개로 서울에서 남조선 통일부 대북정책관을 만났다. 북한 정보가 담긴 SD 카드를 넘겨주고 대가를 받았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는 모두 사실과 다른 날조된 이야기였다. “조사받는 고통을 끝내기 위해 한 말들입니다. 실명을 거론한 사람들에게 미안한 마음뿐입니다.”
○ 외로움에 떨며 죽음의 문턱을 경험하다
김 박사는 인터뷰가 진행된 2016년 4월 29일 열린 최고재판소에서 10년 노동교화형을 선고받았다. 이후 평양에서 자동차로 2시간가량 떨어진 산골의 노동교화소로 옮겨졌다. ‘죄수 번호 429번.’ 외진 곳에 위치한 교화소 철조망 안에는 허름한 단층집 한 채가 전부였다. 집에는 감방 9개가 있었는데, 그가 수감된 4호실 외에는 모두 비어 있었다. 군인 2명이 2시간씩 교대로 감시하고 방과 화장실에는 감시카메라가 24시간 돌았다. 산비탈에서 땅을 개간하거나 농사하는 게 대부분이었던 작업시간은 오전 8시부터 오후 6시까지로 정해져 있었지만 하루 작업량을 채우지 못하면 밤늦게까지 이어지기도 했다. 저녁에는 식사가 끝나면 밤 10시 취침 때까지 나무의자에 앉아 카메라만 바라보는 ‘벌 아닌 벌’을 서야만 했다.
감방의 희미한 전등은 취침 후에도 꺼지지 않았다. 수건으로 눈을 가리는 것도 허용되지 않아 잠을 제대로 이룰 수 없었다. 벽에는 ‘교화인 준칙 10가지’가 적힌 종이 한 장만이 붙어 있었다. 준칙 중에는 ‘성경책과 잡지를 볼 수 있다’는 항목도 있었다. “(이를 근거로) 성경을 요구했지만 ‘429번’에게는 줄 수 없다는 말만 되풀이하더군요.”
김 박사를 가장 괴롭힌 것은 외로움이었다. “동료 죄수도 없어 감시병 외에는 아무도 볼 수 없는 외로움이 가장 힘들었습니다.” 죽음의 문턱까지 가는 경험도 했다. 수감 중 뇌혈전으로 세 차례 수술을 받기도 했지만 지난해 12월 연탄가스에 질식돼 의식을 잃은 게 가장 위험했다. 교화소 경비병은 그를 이불 등으로 둘둘 말아 교화소 외곽 철조망 근처에 던져뒀고, 그는 하루 반 만에 의식을 되찾을 수 있었다.
○ 자선활동으로 목숨을 구하다
▲김동철 박사가 2008년 8월 북한 나선경제특구에 ‘두만강호텔’을 완공하고 두 달가량 지나 호텔 내에서 기념사진을 찍었다(아래). 입구에 호텔 이름이 한글과 영문자로 표기돼 있다. 김동철 박사 제공
김 박사는 미국에서 조선족 처를 만나 결혼한 뒤 2001년 옌지에 왔다. 처가의 고향이 북한이고 자신은 미국 시민권자여서 북한을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었다. 나선에 호텔을 지은 것은 나선시 김모 인민위원장의 권유가 계기였다. “‘미국인으로서 처음 하는 일이 된다’라는 말에 투자를 결심했습니다.”
중국인 사업가와 관광객 등을 겨냥한 호텔을 짓겠다고 하자 김 인민위원장은 원정리에서 나선으로 들어가는 길목에 위치한 1만 m² 규모의 옥수수 밭을 내주었다. 밭을 갈아엎고 그 위에 지하 2층, 지상 3층, 객실 80개짜리 호텔을 지었다. “부속 건물 공사비까지 포함해 총 250만 달러를 투자했고, 직원이 많을 때는 68명에 달했습니다. 나선 일대에서는 가장 큰 호텔이었지요.”
김 박사는 시의 외국인투자유치위원장도 맡아 나선지역 양식장이나 봉제공장 등에 중국 자본을 끌어오기도 했다. 또 자신이 번 돈과 외부 자선단체 지원 등을 합쳐 각각 70여 명의 아이들을 돌볼 수 있는 ‘두만강 유치원’과 ‘굴포 유치원’을 지었다. ‘청학동 요양원’(수용 인원 200명)과 ‘나선 장애인 요양소’(450명)도 지어 시에 기증했다. 2011년에는 지린성 훈춘(琿春)에 국수공장을 지어 국수를 나선 및 인근 농촌의 탁아소 유치원 요양소 학교 등에 직접 차를 이용해 날라주기도 했다. “평양의 조사관들이 봉사 기증 활동이 있어 죄는 사형감인데 교화형으로 줄었다고 하더군요.”
○ 석방 당일에야 석방 사실을 알다
북-미 정상회담을 앞두고 북한 억류 미국 시민권자 3명의 석방 여부가 화두가 됐다. 하지만 정작 김 박사는 석방 당일까지도 아무런 소식을 듣지 못했다.
“5월 9일 오전 사복을 던져주며 갈아입으라고 하더니 평양으로 데려왔습니다. 인민문화궁전에서 그날 오후 6시경 미국인 관리 3명과 재판관, 검찰 간부 등이 있는 방으로 들어가서야 석방 절차가 진행된다는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재판관은 A4 용지 반 장 분량으로 사죄문을 쓰게 한 뒤 “공화국 관련법에 따라 신병을 미국 측에 인도한다”고 말했다.
평양 순안공항으로 이동하기 위한 미니버스에서 30분가량 앉아 있자 김학송, 김상덕 씨가 올라탔다. 김 박사가 그 둘을 만난 건 이때가 처음이었다. 김학송, 김상덕 두 사람은 이전부터 교류가 있던 사이였다. 둘은 평양의 고려호텔 맨 위층에 머물며 조사를 받았다는 등의 대화를 나누며 석방을 기뻐했다. 이들이 고려호텔에서 억류돼 조사 받고 있을 때 올해 3월 마이크 폼페이오 미 국무장관을 수행했던 기자 등은 같은 호텔에 투숙했다.
평양과기대에서 근무하기도 했던 김상덕 씨와 김학송 씨는 각각 2017년 4월과 5월, 평양 순안공항과 평양역에서 긴급 체포된 뒤 적대행위 혐의 등을 이유로 조사를 받았다. “미니버스가 공항으로 출발하려 하자 저를 담당했던 조사관이 차창 밖에서 ‘나가면 여기서 있었던 일은 뭐든 공화국을 위해 좋은 말을 하라’고 하더군요.”
○ “외국 자본 투자 원하면 두만강호텔 돌려줘야”
김 박사 일행이 평양 순안공항에서 국무장관 전용기를 타고 이륙한 뒤 조금 지나 북한 영공을 벗어났다는 기내 방송이 나오자 기내에 있던 50여 명은 커다란 환호성과 함께 이들의 석방을 축하했다.
워싱턴 앤드루스 공군기지에 도착한 뒤 비행기 밖으로 나온 김 박사는 트럼프 대통령이 지켜보는 가운데 두 손을 번쩍 치켜들었다. “전용기에서 나와 마중 온 사람들을 보니 감격스럽기도 하고 이제 미국에 도착했구나 하는 생각도 들고 해서 안도와 감사로 절로 두 손이 올라갔습니다.”
공항에서 곧장 메릴랜드 국립병원으로 이동한 김 박사는 10여 일간 검진을 받았고, 전에는 없던 척추협착증과 당뇨, 고혈압 진단을 받았다. 의료진은 과로와 스트레스가 주 원인이라고 설명했다.
김 박사는 인터뷰 도중 두만강호텔을 되찾고 싶다는 희망을 거듭 밝혔다. “김정은 위원장이 평양이나 원산에 미국 등 외국 자본 유치를 원한다면 미국 시민권자의 첫 직접투자였던 두만강호텔을 돌려줘야 할 겁니다. 두만강호텔을 되찾을 수 있도록 도와줄 것을 미국 정부에도 건의할 예정입니다.”
김 박사가 석방된 뒤 지인을 통해 파악한 결과, 호텔은 나선시가 중국인에게 위탁운영을 맡기고 있다. 그가 중국과 북한을 넘나들며 운전했고, 때로는 구호 물품을 가득 싣고 다녔던 8인승 밴은 행방이 묘연한 상태다.
구자룡 기자 bonhong@donga.com
월간조선 12월 호
■외화로 돌아가는 뇌물공화국 북한
장마당에서는 달러로 거래하고 위안화로 거슬러줘
⊙ 직장 상사에게 뇌물 주고 출근 처리 후 개인 장사…, 미군 유해발굴 시작되면서 (미군)군번표가 인기상품 등장
⊙ 평양 노동자들의 평균임금은 4000원(암시장 환율로 50센트)… 한 끼에 1인당 100달러가 넘는 호텔 만찬 성업
⊙ 북한돈 ‘국돈’은 천덕꾸러기 신세… 당 간부들도 외화로만 뇌물 받아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의 북한 건설 노동자들. 해외 파견 노동자들은 북한의 주된 외화수입원이다.
안전원은 안전하게 먹고
당원은 당당하게 먹고
보위부는 보이지 않게 먹고
군대는 군데군데 먹고
검사는 검소하게 먹는다.
북한 전역에 널리 퍼진 말이다. 거의 국민가요 수준이라고 한다. 정말 모든 사람이 다 아는지 궁금했다. 그래서 배나무 배나TV에 출연하는 탈북자분들께 ‘안전원은 안전하게…’라며 말을 건네는 실험을 했다. 돌아오는 반응이 거의 일정했다. 바로 후렴구가 따라나왔다. 그리고 ‘이 말을 도대체 어떻게 아시느냐?’라고 깜짝 놀랐다.
북한은 뇌물공화국이다. 걸린 것을 봐달라거나, 기타 개인의 민원을 뇌물로 무마하는 정도가 아니다. 사회 전체가 뇌물로 작동하는 수준이다. 그래서 뇌물을 뇌물이라 하지 않고 ‘사업비’라고 한다.
뇌물의 경제학
예를 들어 보자. A라는 공장이 있다. 중앙에서 원자재를 대주지 않으니 생산은 불가능하다. 아예 공장을 돌릴 수 없는 지경이다. 그래도 어떻게든 책임 할당 생산량은 채워야 한다. 그래야 처벌을 받지 않는다. 위에서는 ‘자력갱생’의 정신을 강조한다. 말하자면 ‘무슨 수를 쓰든 너희들끼리 알아서 만들어 내라’는 강요다.
직원 B는 공장장에게 뇌물을 고인다. ‘이 돈을 받고 출근한 것으로 해 달라’는 뜻이다. 조금 더 뇌물을 고이면 공장 명의의 출장서를 발급받아 합법적으로 다른 지방을 오갈 수 있다. 거주이전은 물론이고, 여행의 자유조차 없는 북한에서 합법적 여행증명서는 상당한 이권이다. 마음 편하게 넓은 지역을 다닐 수 있기 때문이다. 단속을 피하기 위해 신경을 쓰고, 단속에 걸려 뒷돈을 찔러 주느니 차라리 이 편이 싸게 먹힐지도 모른다.
B가 하는 일은 개인 장사일 수도 있고 되거리(도매)일 수도 있다. 국내 소도매, 유통 등을 하기도 하고 때로는 중국과의 밀무역에 나서기도 한다. 취급 물품도 약초·버섯·잣 등 덜 위험한 것부터 금·파철·구리·마약·골동품·한국 드라마 CD·USB·스마트칩 등, 걸리면 생명에 지장을 주는 것까지 다양하다. 때로는 해외동포들의 의뢰를 받아 그들의 친인척을 중국까지 안내한다. 북한으로 돌아오는 민간 이산가족 상봉 용역 서비스를 제공하기도 한다.
취급 품목은 시류를 타기도 한다. 미군 유해발굴이 시작된 뒤에는 (미군)군번표가 고가(高價)에 거래되는 상품이 되었다. 이런 개인 활동을 통해 B는 가족의 생활비와 다음달에 공장장에게 고일 뇌물, 그리고 장사하는 도중에 사방에 틈틈이 찔러 주어야 하는 사업비를 마련한다.
공장장 C는 직원들에게 받은 뇌물을 4등분한다. 하나는 개인 수입이다. 두 번째는 상급기관에 올려 보내는 상납금이다.
세 번째는 정치일꾼들에게 바치는 돈이다. 북한의 모든 기관은 2중 명령체계다. 고유한 업무계통 지휘체계와 사상을 담당하는 정치적 지휘체계가 공존한다. 공장이라면 생산을 담당하는 라인과 직원들의 사상을 관리감독하는 라인이 있고, 군(軍)이라면 전투를 담당하는 라인과 군인들의 사상을 담당하는 라인이 공존하는 식이다. 당연히 정치 쪽 파워가 강할 수밖에 없다. 이들이 특정인에 대한 비판적인 보고서를 위에다 올리면, 실적이 아무리 좋아도 숙청을 면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북한에서 능력은 중요하지 않다. 김씨 일가에 얼마나 충성하느냐가 출세의 기준이다. 개인의 충성도를 평가하고 위에다 보고하는 것이 바로 정치라인이 담당하는 중요한 업무 가운데 하나다. 말하자면, 정치라인이 출세와 처벌의 목줄을 쥐고 있는 것이다. 북한의 모든 기관에는 그래서 실무와 정치 양대 라인의 보이지 않는 갈등과 고급인력들인 전문가들의 불만이 내재되어 있다.
C가 유능한 공장장으로 평가받으려면, 해야 하는 일이 하나 더 있다. 직원들이 고인 뇌물을 모아 장마당으로 가서 ‘생산품’을 마련하는 일이다. 이렇게 마련한 생산품을 ‘납품’하면, 서류상으로는 모든 직원이 출근해서 책임할당량을 차질 없이 생산한 것이 된다. 겉보기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이다.
‘외화로 돌아가는 경제’
▲북한의 고급 음식점 옥류관. 돈 이외에 ‘배급표’도 있어야 식당에 들어가 음식을 사 먹을 수 있다.
뇌물은 뇌물을 고이고도 그 이상의 이익 실현이 가능할 때 작동한다. 어느 경제학자는 “국민소득이 1000달러인 나라의 소비 수준이 3000달러라면, 2000달러 규모의 지하경제가 있다고 보아야 한다”는 말을 했다. 북한의 공식환율은 2018년 현재 1달러당 북한 돈으로 약 108원이다. 암달러 시장에서는 8000원이다. 공식환율과 시장환율에 무려 80배나 차이가 난다.
이 차이를 비집고 뇌물이 작동한다. 배나무 배나TV 김주성 이사에 의하면 평양 노동자들의 평균임금은 4000원이다. 암시장 환율로 50센트다. 그런데도 한 잔에 몇 달러나 받는 커피숍이 평양에 여러 군데 성업 중이고 한 끼에 1인당 100달러가 넘는 호텔 만찬도 자리가 찬다. 고객 중에는 외국인뿐 아니라 북한인 손님도 상당수라고 한다. 이 알다가도 모를 상황의 배경이 바로 ‘외화로 고이는 뇌물’과 ‘외화로 돌아가는 경제’다.
북한 당국이 북한 돈의 가치를 강제해도 주민들은 ‘국돈’을 믿지 못한다. 북한 돈은 엉터리 화폐라는 것을 모두가 안다. 그들이 믿는 것은 외화다. 그런 의미에서, 북한은 이미 자국 화폐 대신 달러를 화폐로 쓰는 달러라이제이션(dollorization)을 시행 중인지도 모른다.
이 이야기를 조금 더 풀어 보자. 북한의 쌀값은 상황에 따라 1kg에 3700~4500원을 오간다. 배급이 끊긴 지는 이미 오래 전이니, 월급만 가지고는 먹고살래야 살 수가 없다는 이야기다. 이론상으로는 먹고살 길이 없는 것은 아니다. 국정가격으로 생필품을 조달하면 된다.
문제는 국정가격 배급표를 타기도 어렵고, 뇌물을 고이고 배급표를 받아도 상점에 물건이 없다는 점이다. 배급표는 물건을 구입할 수 있는 증서다. 북한에서는 돈이 있다고 물건을 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내 돈으로 물건을 사더라도, 당국으로부터 ‘구입을 허락받아야’ 즉 배급표를 얻어야 비로소 물건을 손에 넣을 수 있다. 식당도 마찬가지다. 아무리 돈이 많아도 옥류관 냉면을 사 먹을 수 없다. ‘옥류관 식권’, 다시 말해 ‘옥류관에서 냉면 사 먹는 것을 당국이 허락하는 증서’ 없이는 아예 옥류관 출입을 할 수가 없다. 이 식권을 위조하여 유통했다가 걸린 사람이 있다는 보도도 있었다. 예외는 외화다. 달러나 엔화, 중국 위안화는 프리패스다.
장마당에서는 외화로 거래
배급표는 또 다른 이권이다. 시세의 20분의 1 가격으로 물건을 살 수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물건이 없다는 것이다. 물건이 없다면 배급표는 휴지나 마찬가지다. 그나마 가물에 콩 나듯 국정 상점에 물건이 들어와도, 미리 뇌물을 고인 경로를 통해 물건은 다른 곳으로 빠져나간다. 물론 서류상으로는 아무런 하자가 없을 터이다.
북한 당국도 외화의 위력을 안다. 과거에는 ‘외화와 바꾼 돈표’가 있었다. 재일동포 귀국자나 러시아 벌목공, 중동 노무자 가족들이 외화를 만지는 사람들이었다. ‘외화와 바꾼 돈표’는 ‘외화와 바꾼 돈표’ 전문상점에서 물건을 살 수 있는 또 다른 화폐였다. 그곳에는 국정상점에서 볼 수 없는 제품들, 예컨대 가전제품이나 고급 의류가 늘 진열되어 있었다고 한다. 북한 스스로가 자국 화폐를 2부리그 화폐라고 인정했던 셈이다.
고난의 행군 이후 북한 경제의 거의 모든 체계가 무너지고 재편되는 과정에서, 북한 주민들은 더 효율적인 방식을 선택했다. 장마당에서는 배급표 없이 자유롭게 물건을 직거래한다. 그리고 거래는 믿을 수 있는 화폐로 한다. 지금은 북한 전역의 장마당에서 달러, 엔화, 위안화로 물건을 사고 판다. 달러로 셈을 치르면 장사하는 할머니가 암산으로 환율계산을 마치고 위안화로 잔돈을 거슬러 주는 식이다. 위안화 소액권이 잔돈 거스름돈 용도로 북한에서 인기라는 기사도 있었다. 이런 풍경은 더 이상 신기한 일도 아니다
‘노동당 최대의 敵’ 장마당
장사하는 사람들이 매기는 물건 값을 북한에서는 ‘협정가격’이라고 부른다. 협정의 주체는 파는 사람과 사는 사람이다. 당국이 모든 것을 지시하고 지정하는 ‘국정가격’은 이미 서류상으로만 존재하는 가격이다. 정치권력은 북한 주민들 스스로가 매기는 ‘협정가격’에 아무런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한다.
협정의 주체에 당국은 없다. 이 점이 중요하다. 장마당을 통해 권력 밖에서 독자적으로 작동하는 힘이 생겼다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역사적으로, 전체주의 권력자들은 언제나 거의 하나의 예외도 없이, 그것이 어떤 종류의 힘이든, 내부에서 자신들의 통제를 벗어난 힘이 생기는 것을 두려워했다. 노동당 최대의 적(敵)은 그래서 장마당이다.
북한의 ‘국돈’은 장마당에서 찬밥 신세로 전락한 지 이미 오래다. ‘당비(黨費) 납부’ 말고는 국돈을 받는 곳이 없다.
‘국돈’을 믿지 못하는 건 일반 주민만이 아니다. 고위 공직자들도 다들 뇌물이나 부수입으로 연명하는데, 핵심계층인 그들조차 현물이나 외화로만 뇌물을 받는 것이 현실이다. 위아래를 막론하고, 모든 주민이 북한 돈을 엉터리라고 생각한다는 증거다.
북한 주민의 생계를 책임지는 것은 노동당이 아니라 장마당이라는 이야기가 나온 지 오래다. 그래서 노동당이 장마당을 물리칠 가능성은 거의 없을 터이다. 장마당이 누구를 더 신뢰하는지는 이미 판가름 났다. 장마당이 어느 방향으로 진화하며 어떤 변화를 가져올지, 향후 변화의 속도와 크기가 어떨는지 궁금한 이유다.⊙
글 : 장원재 배나TV 대표
12월 31일 “北 류경호텔은 선전탑, 내부 불 안 들어오는데 외부는 화려한 LED쇼”
美ABC “정치구호로 조명”
‘류경호텔은 세계 최고 높이의 선전탑.’
북한 정책 실패의 상징인 류경호텔이 전력난에도 불구하고 밤마다 10만 개 이상의 LED 조명쇼(사진)를 벌이고 있다.
31일 미국 ABC 방송은 ‘세계에서 비어 있는 최고 높이의 호텔이 북한 선전으로 빛난다’ 제목의 평양발 기사에서 “105층 규모(330m) 높이의 류경호텔이 건물 내부에 전기가 들어오지 않는 것과 달리 외부에는 북한 선전용 조명쇼를 매일 몇 시간에 걸쳐 진행 중”이라고 AP 통신을 인용해 보도했다. 류경호텔 꼭대기에는 빨간색과 파란색, 흰색 조명으로 빛나는 40m 높이의 인공기 모양 구조물이 있다.
조명쇼의 주 프로그램은 4분 정도로, 북한의 역사를 보여주는 애니메이션으로 시작해 자력자강과 혁명정신 등 사상 칭송, ‘혼연일체’ ‘백전백승’ 등 17개 정치 구호로 이어진다.
AP 통신은 “류경호텔은 공사가 완료될 시점이나 첫 손님을 맞을 날짜도 정해지지 않았고, 구조적 안전 여부도 불확실하다”고 전했다.
류경호텔은 그동안 전기 공급이 되지 않아 꼭대기에 비행기 경고용 전등을 제외하고는 불이 들어오지 않았다. 외부인에게는 실패의 상징으로, 북한 주민에게는 언급하지 말아야 할 대상으로 여겨졌다.
조명 디자인과 공연 프로그래밍을 맡은 김영일은 AP 통신에 “조명은 사람들에게 미래에 대한 자신감과 희망을 주기 위해 설치됐다”며 “조명쇼 중단 계획은 없다”고 말했다.◎
워싱턴=김석 특파원 suk@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