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익희의 新유대인 이야기2]/ [11] 유대인의 영국 이주와 美연준 탄생 역사 [中] - [20] 금융 명문 로스차일드 <상> 국제 자본가의 탄생새창으로 읽기
[홍익희의 新유대인 이야기2] 전 세종대 교수 조선일보
2021.05.25
[11] 유대인의 영국 이주와 美연준 탄생 역사 [中]
네덜란드 유대인이 주식 시스템 이식… 영국을 금융허브로 만들다
▲1690년 7월 1일 아일랜드 드로그헤다의 보인강을 가로질러 벌어진 결전에서 네덜란드 빌럼 3세의 군대는 영국의 마지막 가톨릭 왕 제임스 2세의 군대를 격파했다. 제임스 2세는 프랑스의 가톨릭왕 루이 14세와 아일랜드 가톨릭의 지원을 받았지만 징발한 농민 위주였던 보병 부대는 잘 훈련받고 무장한 빌럼 3세의 군대를 이겨낼 수 없었다. 얀 위크, ‘보인 전투의 윌리엄 3세’, 1690~1695년경, 네덜란드 영국 대사관 소장. /위키피디아
영국 엘리자베스 여왕 시대의 유명한 해적 드레이크가 1573년에 노략질한 약탈물의 가치는 60만파운드에 해당했다. 당시만 해도 영국의 가장 큰 수입원은 양털 수출이었는데 1600년 수출액은 100만파운드에 불과했다. 이렇게 양털 수출과 해적질에 의존하던 후진국 영국이 어떻게 세계를 제패하는 대영제국으로 비상하게 되었을까?
크롬웰의 항해조례, 네덜란드 유대 무역업자들 영국으로 자리를 옮기다
스페인의 무적함대를 격파하고 해상권을 장악한 영국의 엘리자베스 여왕이 죽은 뒤 제임스 1세와 그 뒤를 이은 찰스 1세는 전제정치로 의회와 대립했다. 국왕과 의회의 대립은 내란으로 치달아 1645년 크롬웰이 이끄는 의회군이 승리했다. 칼레해전의 승리로 해상권을 장악한 영국은 이를 어떻게 해서든지 국부 증대에 활용해야 했다. 크롬웰은 1651년 <항해조례>를 발표한다. 유럽 다른 나라들이 영국 및 영국 식민지와 무역하려면 반드시 영국이나 영국 식민지 배만을 사용해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한마디로 해운과 무역 업계에서 네덜란드를 배제하겠다는 의도였다. 네덜란드의 유대 무역상들에게 위기가 닥쳤다.
▲영국 의회 자료실에 보관된 권리장전 두루마기를 펼쳐 보이는 모습. 왕과 왕비의 간섭 없이 의원을 선출할 자유와 의회 내 표현의 자유 등 13항목의 자유를 규정한 내용이 담겼다. /영국 의회 동영상 화면
영국과 네덜란드 사이에 1차 전쟁이 벌어졌다. 3년여 전쟁 끝에 영국이 이겨 네덜란드 해안과 항구를 봉쇄했다. 해상무역에 종사하는 네덜란드 유대인들로서는 다른 방법이 없었다. 유대인들은 그들의 대표인 랍비 ‘마나세 벤 이스라엘’을 영국에 파견해 1656년 네덜란드 유대 무역상들의 영국 이주를 허가받았다. 1290년 유대인들을 추방한 전력이 있는 영국이 경제 부흥을 위해 비공식적으로 유대인들을 다시 받아들이기로 한 것이다. 이로써 해상봉쇄로 어려움을 겪었던 세파르디계 유대인 무역업자들이 먼저 도버해협을 건넜다. 곧 세계 무역 네트워크와 교역 경쟁력이 네덜란드에서 영국으로 이동한 것이다.
프랑스-네덜란드 전쟁, 유대인들 빌럼 3세를 돕다
1658년 크롬웰이 사망하자 영국은 11년 만에 왕정이 복고되었다. 한편 유럽 대륙에서는 프랑스의 태양왕 루이 14세가 네덜란드 침공 야욕을 드러냈다. 네덜란드는 인구도 적은 데다가 해군 중심 국가여서 프랑스 육군을 대적하기 힘들었다. 게다가 프랑스와 영국이 도버 밀약을 맺고 네덜란드를 협공하기로 했다. 1671년 전쟁이 임박하자 사람들은 오라녜(오렌지) 가문의 빌럼 3세를 위기에 대처할 지도자로 추대했다. 네덜란드는 육지에서 막강 프랑스군과, 해상에서 무적함대를 격파한 영국 함대와 맞서야 하는 절체절명의 순간에 직면했다. 당시 오라녜 공 빌럼을 도운 사람들은 주로 유대인들이었다. 특히 전쟁 자금과 군수품을 조달한 것은 세파르디계 유대인 그룹이었다.
빌럼 3세는 그들 대표인 안토니오 모세 마차도와 자코브 페레이라를 조달장관이라고 불렀다. 유대인들은 뼈를 묻는 각오로 빌럼 3세를 도왔다. 왜냐하면 스페인에서 쫓겨난 그들은 이제 자신들의 마지막 안식처인 네덜란드마저 패망하면 또다시 정처 없는 방랑길로 내몰려야 하기 때문이었다. 유대인들은 빌럼이 주도하는 ‘전쟁기금 모금기구’에 적극 협력했다. 그들은 국제적인 친족 연락망 곧 전 세계 유대인 디아스포라 망을 통해 엄청난 자금을 끌어들였다. 이 자금 덕분에, 네덜란드는 1672~1673년 악전고투 끝에 프랑스와 영국의 동시 침공을 격파해 유럽 전역을 깜짝 놀라게 했다. 전비 조달 능력, 곧 돈의 힘은 이토록 강했다.
영국은 의회의 요구로 1674년 네덜란드와 휴전했다. 네덜란드는 프랑스 루이 14세의 야심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영국과의 관계를 개선할 필요를 느꼈다. 이를 위해 빌럼 3세는 1677년 요크 공 제임스 2세의 딸이자 자기의 사촌인 메리와 결혼했다. 네덜란드는 6년간의 전쟁 끝에 프랑스를 물리치고 1678년 평화조약을 맺었다.
1689년 빌럼 3세(윌리엄 3세)의 영국 왕위 계승, 유대 금융자본 따라와
그 뒤 영국에서는 자식이 없는 찰스 2세가 서거하자 동생 제임스 2세가 왕이 되었다. 제임스 2세가 당시 국교인 성공회 대신 가톨릭을 옹호하고 전제정치를 펴자 혁명이 일어났다. 의회는 네덜란드의 빌럼 3세 부부를 영국의 공동 왕으로 추대하여 불러들이는 공작을 진행했다. 그들은 1688년 6월 말 네덜란드의 빌럼 3세 부부에게 영국의 자유 수호를 위해 군대를 이끌고 귀환하도록 초청했다. 빌럼 3세가 영국 왕 찰스 1세의 딸 메리의 아들로 외가 쪽으로 영국 왕실 혈통이었고, 그의 왕비 메리 스튜어트가 영국 왕위 계승 서열 1순위였다.
▲1688년 런던 화이트홀 궁에서 오라녜 공 빌럼과 메리 스튜어트에게 왕관을 바치는 상·하원 의원들. 화이트홀 궁은 16세기 중반부터 17세기 말까지 영국 군주의 주된 거주지였다. 에드워드 매슈 워드의 1867년경 그림, 영국 의회 소장. /위키피디아
사실 빌럼 3세도 미리 영국 입성을 준비하고 있었다. 용병을 모으는 한편 그는 유대인 은행가 프란시스코 수아소로부터 은화 200만 길더를 빌려 군자금을 확보했다. 군자금 모집 총비용 700만 길더 중 400만 길더는 국채로 발행되어 대부분 유대 금융가들이 사주었다.
그해 11월 빌럼·메리 부부는 1700문의 대포를 탑재한 53척의 군함들과 이를 뒤따르는 수백 척의 선박에 기마병 3000명, 보병 1만 명을 이끌고 영국에 상륙했다. 대단한 위용이었다. 제임스 2세의 입장에서는 네덜란드의 침공이었지만, 빌럼의 입장에서는 제임스 2세의 탄압을 저지하기 위한 혁명군이었다. 그러자 영국 귀족과 지방 호족들도 잇달아 빌럼 진영에 가담했다. 사위 부부가 장인을 공격하는 얄궂은 판이었다. 12월 11일 제임스 2세는 왕실 인장을 템스 강에 버리고 도망쳤지만 다음 날 잡히고 만다. 빌럼은 사형될 공포에 사로잡혀 있는 제임스 2세를 풀어주어 프랑스로 건너가게 했다.
1688년의 사건은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통치자를 교체했기 때문에 무혈혁명 곧 ‘명예혁명’이라 불린다. 이듬해 2월, 빌럼(윌리엄) 부부는 의회가 제출한 ‘권리선언’을 승인한 다음 공동 왕위에 올랐다. 윌리엄 왕을 따라 영국으로 건너간 인원이 무장 병력을 포함하여 3만여 명이었다. 민간인 가운데 반 정도가 유대 금융인들로 세파르디 유대인 3000명과 아슈케나지 유대인 5000명 등 8000여 명이 이때 영국으로 옮겨갔다. 맨 앞에서 이 유대 금융인들을 이끌었던 페레이라의 아들 이삭은 영국의 병참장관이 되었다.
네덜란드의 빌럼 3세 공작이 영국 왕 윌리엄 3세가 되어 양국을 동시에 통치하게 되자 그의 경제관과 금융에 대한 시각을 잘 알고 있는 네덜란드 유대인과 금융자본이 속속 영국으로 건너갔다. 마차도와 메디나 같은 유대 금융인들은 1689년 영국에 도착하자마자 네덜란드식 주식시장을 런던에 도입했다. 이처럼 유대인 금융업자들이 네덜란드를 부흥시켰던 사업 방식이 고스란히 영국으로 건너갔다. 이후 유대인들의 선진 기법이 영국의 금융·세제·행정 전체를 개혁했다. 윌리엄 3세는 유대인들의 의견을 받아들여 네덜란드식 국채 발행제도 도입과 더불어 영국 동인도회사를 개혁했을 뿐 아니라 네덜란드의 경험을 살려 재무부와 상무부 조직도 만들었다. 이로써 네덜란드 경제는 쇠퇴하기 시작했고 영국은 짧은 시간에 선진적 체계와 금융산업 토대를 구축할 수 있었다.(참고; <제국의 미래>, 에이미 추아 지음, 이순희 옮김, 비아북)
[영국, 네덜란드로부터 해상국가와 국제금융의 바통 넘겨받아]
명예혁명 이전 영국은 오랫동안 종교 간, 민족 간 전쟁터였다. 그들은 서로 보복하는 유혈 참사의 악순환에 빠져 있었다. 그러나 윌리엄과 메리가 즉위하면서 모든 것이 달라졌다. 1689년 영국의회는 ‘권리장전’과 ‘관용법’을 통과시켰다. 이는 새로운 시대의 출발을 알리는 신호였다. 권리장전의 내용은 제임스 2세의 불법행위를 열거한 뒤 의회의 동의 없이 법률 제정이나 세금 징수를 금지하며 의회를 자주 소집할 것과 국민의 재산을 강탈하지 않을 것 등을 규정하고 있었다. 또 유대교와 개신교도들에게 예배의 자유를 허용하는 ‘관용법’ 덕분에 유대인들은 어느 때보다 자유롭게 영국 사회로 진입해 금융혁명과 산업혁명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이를 토대로 영국은 세계의 패권 국가로 비상하게 된다.
이후 네덜란드는 세계 최고의 해상 국가로서의 지위와 국제 금융 중심지의 바통을 영국에 넘겼다. 이에 따라 저리로 대규모 금융 지원을 받은 영국 제조업은 나날이 발전했다. 그리고 무역 확대와 식민지 개척도 속도를 냈다. 그 뒤 영국은 세계 교역과 식민 정책을 주무르는 제국으로 탈바꿈했다. 네덜란드의 전성기와 유대인들의 네덜란드 체류 기간이 무섭도록 일치한다. 참으로 무서운 민족이다.
[12] 유대인의 영국 이주와 美연준 탄생 역사 [下]
유대인들 영국 전쟁자금 모아주고 화폐 발행권을 쥐다
1913년 제이피 모건이 주도해 만든 미국의 연방준비제도는 영국의 영란은행 시스템을 그대로 모방해 설립되었다. 그렇다면 영란은행은 어떻게 만들어진 것일까?
▲19세기 말과 20세기 초 몇 차례 공황과 금융 위기를 겪으며, 서방 강대국 중 중앙은행이 없는 유일한 나라였던 미국에서도 중앙은행 설립 필요성이 대두됐다. 1913년 12월 23일, 우드로 윌슨(가운데 책상에 앉은 사람) 대통령이‘연방준비법(The Federal Reserve Act )’에 서명했다. 영란은행 시스템을 그대로 모방한 민간 은행 연합체 형태인 미국의 중앙은행, 연방준비제도(연준·Fed)의 시작이었다. 윌버 커츠의 그림 ‘연방준비법 서명'. /우드로 윌슨 대통령 도서관
윌리엄 3세, 유대 금융인들에게 전쟁 비용 긴급 협조를 요청하다
1688년 네덜란드에서 건너 온 윌리엄 3세가 영국 왕위 계승 이후 처음 부닥친 난제가 재정 적자 문제였다. 심각했다. 영국은 50여 년에 걸쳐 전쟁을 치르다 보니 국고가 바닥나 있었다. 세금을 올렸지만 전쟁 비용 조달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전비가 모자라자 1692년에 네덜란드 방식의 국채 발행 제도를 도입했다. 일종의 재정 혁명이었다. 그간 군주에게 빌려주던 대부 방식을 국채로 대체했기 때문이다. 국채를 발행하기 위해서는 의회의 동의를 받아야 했기 때문에 재정 악화를 견제하는 효과와 더불어 의회의 보증 효과가 있었다.
그러나 국채 발행조차도 한계에 부딪혔다. 시중에 국채를 소화할 자금이 넉넉하지 않았다. 국채 발행이 힘들게 되자 더 이상 재정 충당 방법이 없었다. 왕으로서 가장 화급한 문제는 당장 눈앞에 닥친 프랑스와의 전쟁 비용 마련이었다. 당시 프랑스는 영국보다 인구가 4배나 많았고 모든 산업에서 앞서 있을 뿐 아니라 군사력도 영국보다 훨씬 강했다. 특히 영국은 비치 해드 해전에서 프랑스에 대패한 뒤 강력한 해군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있는 터라 수십 척의 전함 건조 비용이 시급했다.
마지막 수단으로 윌리엄 3세는 네덜란드 시절부터 친하게 지냈던 유대 금융가들에게 긴급 협조를 요청했다. 그런데 왕이 요청한 돈은 너무 큰 금액인 120만 파운드였다. 이는 어느 몇 명이 나서서 해결할 수 있는 금액이 아니었다. 그런데 문제는 그 큰돈을 마련하여 왕에게 빌려준다 해도 재정 적자가 날로 심해지는 형국에 돈 받을 가능성이 희박했다. 그렇다고 모른 체할 수도 없는 난처한 입장이었다. 유대 금융인들의 고민은 깊어졌다. 그들은 궁리 끝에 영국 내 반유대 감정을 고려해 우선 윌리엄 패터슨 등 스코틀랜드 금융인들을 끌어들여 앞에 내세웠다.
▲워싱턴 DC의 미국 연방준비제도(연준·Fed) 건물. 미국은 1913년 영국 영란은행 시스템을 모방해 연준을 설립했다. /위키피디아
유대 자본, ‘전쟁기금 모금기구’를 주식회사 영란은행으로 전환
이때 유대인들은 또 한번의 기발한 발상을 하게 된다. 그들은 ‘전쟁기금 모금기구’를 만들어 돈을 모아 국왕께 빌려드리는 대신 모금기구가 왕실 부채증서를 담보로 ‘은행권’을 발권할 수 있게 해달라고 요구한 것이다. 그들로서는 금괴를 출자하고 그만큼의 은행권을 발행해 쓰는 것이어서 밑질 게 없는 장사였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더 중요한 것은 모금기구를 영란은행으로 전환해 최초로 은행권을 찍어 낼 수 있는 발권력을 쥐게 된다는 점이었다. 유대 상인들의 제안은 왕에게도 솔깃했다. 왕은 120만 파운드를 연이자 8%로 빌리는 대신 이자만 지급하고 원금은 영구히 갚지 않아도 되는 조건이었다. 그 무렵 시중금리가 연 14%였던 상황에서 8% 금리는 나쁜 조건은 아니었다.
주식 공모로 탄생한 ‘민간’ 중앙은행
그리하여 영국 중앙은행은 주식 공모를 통해 설립 자금을 모집했다. 당시 영국 왕이 요구한 120만 파운드가 필요했으나 런던 상인 1286명에게서 주식 공모 형태로 거둬들인 돈은 80만 파운드에 불과했다. 공모된 금액이 목표액에 많이 부족했음에도 다급한 영국 정부와 의회는 1694년 7월 의회 입법을 통해 영란은행(BOE; Bank of England)의 창립을 허가했다. 영란은행은 주주들 가운데 2000파운드 이상 응모한 상인 14명에게 이사 자격을 주었다. 영란은행은 국채를 받고 정부에 80만 파운드를 빌려주었는데, 일부는 은행권 형태로 지불되었고 그만큼의 금괴는 은행에 남아 지불보증금으로 보관되었다. 정부는 이 은행권으로 프랑스와 싸우기 위한 전함을 건조했다. 이것이 영란은행 지폐의 원조였다. 덕분에 프랑스는 전비 마련에 어려움을 겪었지만 영국은 쉽게 전비를 마련했다.
이때부터 유대 금융 권력이 주도하여 암스테르담에서 그들이 했던 금융 방식을 토대로 영국의 금융 혁명을 일사천리로 밀어붙였다. 먼저 의회가 ‘국가 채무에 대한 의회의 지불 보장’을 법으로 제정토록 하여 이를 근거로 1694년 경제특구인 ‘시티 오브 런던’에 영란은행을 설립했다. 이 민간은행이 정부로부터 특허은행 칙허를 받아 잉글랜드와 웨일스 지역의 은행권에 대한 독점 발권력을 소유하게 되었다. 윌리엄 3세의 칙허에 의해, 금 세공인들은 금을 보관하고 보관 영수증을 발행할 수 없게 되었다. 그들이 갖고 있던 금조차 모두 영란은행 금고에 보관해야 했다. 윌리엄 왕은 유대인들에게 화폐 주조권을 독점적으로 행사할 수 있는 환경까지 만들어 주었던 것이다. 이렇게 왕과 유대 상인들의 이해관계가 절묘하게 맞아떨어져 탄생한 것이 영국의 ‘민간 소유’ 중앙은행이다. 그것은 동시에 현재에 이르는 국제 금융 역사의 시작이기도 하다.
설립 멤버 패터슨 쫓겨나다
참고로 은행이 설립되고 1년 뒤 은행 창립의 주역이었던 스코틀랜드 금융인 윌리엄 패터슨은 영란은행 이사 자리에서 물러났다. 대부분의 유대 주주들은 익명을 원했다. 그들은 고대로부터 박해와 학살 속에서 살아왔기 때문에 유대 이름이 드러나는 것을 원치 않았다. 패터슨은 많은 영란은행 주주들의 이름이 드러나지 않았기 때문에 주주들과 일하기 힘들었을 뿐 아니라 이사들 간의 정책 대립에서 밀려났다. 영란은행 설립 초기에 간판스타로 쓰였던 패터슨이 결국 유대 금융인들에 의해 ‘팽’ 당한 것이다.
화폐의 발행과 국채를 묶어놓은 구조
이렇게 강력한 새로운 금융 수단이 생기면서 영국의 재정 적자는 수직 상승했다. 쉽게 돈을 빌릴 곳이 생겼기 때문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제도는 국가 화폐의 발행과 국채를 영구적으로 묶어놓는 구조였다. 그래서 국채를 발행하면 화폐가 늘어나는 구조가 되었다. 그렇다고 국채를 상환하면 국가의 화폐를 폐기하는 셈이 되므로 시중에 유통할 화폐가 없어지게 된다. 따라서 정부는 영원히 채무를 상환할 수 없는 구조가 되었다. 경제도 발전시켜야 하고 이자도 갚아야 하므로 화폐 수요는 필연적으로 늘어날 수밖에 없었다. 이 채무에 대한 이자 수입은 고스란히 은행가의 지갑으로 들어갔으며, 이자는 국민의 혈세로 부담해야 했다. 이때부터 통화량 증대는 정부가 경제 상황을 감안하여 그 증감 정도를 주도하는 것이 아니라 대출로부터 기인하는 이상한 역사가 시작되었다.
이자율 2%대로 떨어져, 산업혁명의 원동력이 되다
이렇게 영국의 금융 혁명은 윌리엄 3세를 따라 온 유대 금융인들이 주도했다. 이들은 이후에도 필요할 때마다 정부 채권을 인수해 중앙은행의 기본 틀을 잡았다. 1751년 영란은행은 아예 정부 부채의 관리를 떠맡았다. 이때 유대인들은 또 한번의 기발한 금융 상품을 선보였다. 여러 종목의 국채를 상환 기간을 없앤 일종의 영구채 형태로 통합한 만기가 아예 없는 영구 공채를 발행했다. 이후 약 200년에 걸쳐 영국이 발행했던 콘솔채(consols)가 바로 그것이다. 정부가 상환 의무를 지지 않는 대신 매년 이자를 영원히 지급하는 조건으로 발행한 공채다. 영국뿐 아니라 세계의 투자자들이 콘솔채를 사들이자 국·공채 가격은 폭등했다. 표면 금리가 정해진 국·공채 가격이 올라간다는 것은 국·공채의 실질 금리가 떨어짐을 뜻했다. 국·공채의 시중금리는 1755년 2.74%까지 떨어졌다. 당시로서는 누구도 생각지 못했던 대단한 저금리였다. 이러한 저금리의 지속이 거대한 자본이 필요했던 산업혁명의 원동력이 되었다.
[영란은행을 본떠 만든 미국 연방준비제도]
▲1694년 영국 수도 런던의 경제특구‘시티오브런던’에서 진행된 영란은행 설립 승인 모습. 유대금융인들은 오랜 전쟁으로 전쟁 자금이 필요했던 왕에게 돈을 빌려주는 대신 왕실 부채증서를 담보로 은행권 발권 권한을 받았다. 조지 하코트 작, ‘런던 로열 익스체인지에서 영란은행의 설립’. /게티이미지코리아
미국 근대 산업사와 금융사를 살펴보면, 영국 자본이 많이 미국으로 흘러들어갔다. 당시 미국 근대산업사의 주역은 단연 제이피 모건이었다. 제이피 모건은 런던의 로스차일드와 합작으로 노던증권이라는 지주회사를 설립하여 미국의 철도산업과 철강산업은 물론 금융산업을 주도했다. 아울러 미국에 불어닥쳤던 몇 차례의 공황과 금융 위기 시에 방패막이가 되어 중앙은행 역할을 훌륭히 해냈다. 하지만 개인의 역할에는 한계가 있었다. 이로써 20세기 들어 미국에도 금융 위기 시 이를 막아줄 영국의 영란은행과 같은 중앙은행이 필요하다는 공감대가 형성되었다. 이로써 1913년 미국이 중앙은행을 설립할 때 그들은 영란은행 시스템을 그대로 모방했다. 미국 연방준비제도가 영국의 영란은행을 본떠 만들어진 민간은행연합체인 이유이다. 연준은 지금도 매년 수익의 6%를 주주들에게 배당금으로 지급하고 있다.
[13] 혈액형 발견한 의과학자 오스트리아 출신 란트슈타이너
염소피 수혈 악몽 끝냈다… 11억명 생명 구한 유대인 의과학자
▲1900년 카를 란트슈타이너는 서로 다른 피를 섞으면 적혈구가 뭉쳐 덩어리를 이루는 현상을 발견, 사람의 핏속에는 항체 반응을 일으키는 서로 다른 항원이 있다는 것을 밝혀냈다. 이를 근거로 1901년 혈액형을 A형, B형, C형(후에 O형으로 변경)으로 분류했고, 1년 뒤 그의 제자들이 AB형도 찾아냈다. 란트슈타이너가 혈액형을 발견하기 전에는 환자가 너무 많은 피를 흘려 죽는 경우가 많았다. 의사들은 환자를 살리기 위해 송아지나 염소 피를 수혈했지만 많은 사람들이 오히려 고통 속에 죽어갔다. 란트슈타이너가 목숨을 건 ‘도박 수혈’로부터 인류를 구한 것이다. 그의 발견이 1955년 이후 약 11억명의 목숨을 구했다는 추산도 있다. 프랑스 화가 쥘 아들레르의 그림 ‘염소 피의 수혈’(1892), 파리 의학사 박물관 소장. /AFP
인류의 생명을 제일 많이 구한 의과학자는 누구일까? 과학자들의 업적을 소개하는 한 웹사이트는 생명을 많이 구한 의사(醫師)이자 의학을 연구하는 과학자인 ‘의과학자(醫科學者)’ 분야의 1위로 혈액형을 발견해 안전한 수혈을 가능하게 한 카를 란트슈타이너를 꼽았다. 그가 구한 생명은 1955년 이래 약 11억명 정도로 추산되었다.
카를 란트슈타이너가 혈액형 분류를 규명해주기 전까지 수혈은 죽음과의 도박이었다. 과거에는 환자가 과다 출혈로 죽는 경우가 많았다. 특히 임신부의 22%가 출산 시 과다 출혈로 사망했다. 과거 의사들은 이런 위급 환자에게 마지막 희망의 하나로 다른 사람의 피나 송아지, 염소 피를 수혈하기도 했는데, 많은 사람이 시커먼 오줌을 싸며 고통 속에 죽어갔다. 부검해보면 핏줄 속에 피가 뭉쳐있었다. 20세기 초까지만 해도 혈액형이라는 개념이 없이 수혈이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재수 좋으면 살고, 재수 없으면 죽었다. 이러한 목숨을 건 도박 수혈로부터 인류를 구한 의과학자가 카를 란트슈타이너다. 그는 초인적인 의과학자였다. 그가 연구한 의학 분야만 6가지이다. 생화학, 면역학, 병리해부학, 바이러스학, 혈청학, 알레르기학. 카를은 깨어있는 시간의 90%를 연구에 몰입했다.
화학·면역학 등 6가지 분야서 연구
카를은 여섯 살 때 언론인이었던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홀어머니의 보살핌 속에 외동아들로 자랐다. 그는 17세에 빈 의대에 입학해 23세인 1891년에 졸업했다. 유대인 가운데 특히 의사나 의학 연구자가 많은 이유는 그들이 신봉하는 ‘세상을 고친다’는 뜻의 ‘티쿤 올람’ 사상에 인간의 병든 몸을 고치는 것도 티쿤 올람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카를은 유대인답게 의대생 시절부터 어떤 삶이 더 값진 것인지, 어떤 삶이 하느님 보시기에 합당한 삶인지에 대해 숙고를 많이 했다. 곧 환자를 돌보는 의사의 삶과 의학 연구를 통해 많은 생명을 구할 수 있는 의과학자의 삶 중 어떤 삶이 더 값진 것인지를 놓고 고민했다. 카를은 후자의 길을 걷기로 결심했다.
그는 의대 시절부터 서로 다른 의학 분야가 접목될 때 위대한 발견이 가능하다는 걸 알았다. 그래서 졸업 후에도 여러 의학 분야를 공부해 이를 융합하는 과정에서 의미 있는 결실을 맺어야겠다고 마음먹고 평생 공부를 목표로 정했다. 카를은 화학이야말로 의학에 꼭 필요한 요소라고 생각했다. 그는 에른스트 루트비히 실험실에서 박사 후 연구를 시작해 골수암에 대해 연구하다 더 많은 가르침을 받기 위해 생화학 분야에서 가장 유명한 3명의 스승 밑에서 돌아가면서 배우는 방법을 택했다. 그는 취리히의 한취(Hantzsch) 연구소, 뷔르츠부르크의 에밀 피셔(Emil Fischer) 연구소, 뮌헨의 밤버거(E Bamberger) 실험실에서 수년간 배움에 정진했다. 그는 이 기간에 스승들과 공저로 많은 논문을 발표했다.
▲오스트리아 지폐 모델이었던 란트슈타이너 - 오스트리아 1000실링 지폐의 카를 란트슈타이너. 1997년 처음 발행해 오스트리아가 유로를 쓰기 시작한 2002년까지 통용했다.
A형·B형‐ 사람마다 다른 혈액 분류
그 뒤 카를은 1년간 외과의사 밑에서 공부했다. 그 무렵 현미경을 들여다보던 의과학자들은 혈액 속에서 세균들이 죽는 모습을 관찰했다. 도대체 혈액 속 무엇이 세균을 죽이는 것일까? 의과학자들은 이 무엇에 ‘항체’라는 이름을 붙였다. 카를의 배움 욕구는 항체를 다루는 면역학으로 넓혀졌다. 그는 1896년 빈 대학 위생연구소 세균학자 막스 폰 그루버 박사의 조수가 되어, 3년간 면역 메커니즘과 항체의 특성에 대해 연구했다. 이후 카를은 원인 모르게 죽어간 많은 환자들의 사망 원인을 알아내기 위해 병리해부학을 공부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1898년 그 분야에서 가장 유명한 세균학자 안톤 바이크셀바움 빈 의대 병리해부학과 교수를 찾아가 무급 조교로 일하겠으니 받아달라고 간청하여 승낙을 받아냈다. 의대 졸업 동기들은 임상 의사로 돈을 잘 벌고 있을 시기에 카를은 무급으로 연구에 정진하기로 한 것이다. 1899년 카를은 병리해부학 교수 자격증을 취득한 뒤에도 10년간 바이크셀바움 교수의 조교로 일했다. 카를은 대학에 출강하며 외국 의사들에게 병리해부학 강의를 하는 한편 법의학자로 매일 사체를 해부하며 사망 원인을 분석하는 일에 매달렸다. 병리학 강의가 생계를 위한 일이었다면 사체 해부는 연구를 위한 일이었다. 그는 10년 동안 3639구에 달하는 사체를 부검했다.
▲노벨생리의학상을 받은 1930년 무렵 카를 란트슈타이너. 그가 1901년에 발표한 혈액형 분류가 그 중요성을 인정받고 노벨상 수상자로 결정되기까지 29년이 걸렸다. /게티이미지코리아
카를은 수혈하다 이물질이 뭉쳐 쇼크나 황달을 일으키는 원인을 밝히기 위해 혈액에 대해 연구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의사들은 사람들의 피는 모두 같다고 생각했다. 1900년 그는 두 종류의 혈청이 더해지면 어떨 때 적혈구가 뭉쳐 덩어리를 이루는 응집 현상을 발견했다. 그는 응집 현상이 혈액의 종류가 서로 다르기 때문에 일어난다고 보았다. 인간은 외부 물질로부터 몸을 보호하는 단백질인 항체를 갖고 있는데, 인간의 혈액에 항체 반응을 일으키는 두 가지 종류의 항원이 있다고 그는 보았다. 어떤 사람은 A만, 또 어떤 사람은 B만, 항원이 하나도 없는 사람도 있었다. 수혈은 특정 혈액형끼리만 가능하고, 그렇지 않은 혈액형끼리 수혈하면 항체가 ‘이물질’로 간주해 위험한 결과를 초래한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그는 이를 근거로 1901년에 혈액형을 A형, B형, C형(후에 O형으로 변경)으로 분류했고, 1년 뒤 그의 제자들이 두 항원을 모두 갖고 있는 AB형도 찾아냈다. 1914년 리처드 루이손에 의해 혈액에 구연산나트륨을 첨가하면 응고되지 않는다는 사실이 알려져 이후 혈액이 보관되어 필요할 때 수혈할 수 있게 되었다.
1차 대전 이후 카를은 오스트리아를 떠나 네덜란드 헤이그에 있는 병원에서 일하다 1923년 뉴욕 록펠러 의학연구소의 초청으로 처음으로 개인 연구실을 배정받아 면역과 알레르기를 연구했다. 카를이 1901년에 발표한 혈액형 분류는 그 중요성을 인정받는 데 29년이나 걸려 1930년 노벨 생리의학상을 받았다. 카를은 노벨상을 받은 이후에도 연구를 게을리하지 않아 1940년에 Rh-형 혈액이 있음을 밝혀내어 안전한 수혈 방법을 완성하고 3년 후 눈을 감았다. 세계인의 절반 이상이 수혈을 받는다고 하니 그가 이룬 공로가 얼마나 중요한지 새삼 고마움을 느낀다.
코로나 시대 의과학자 지원 필요
우리나라 의대는 가장 우수한 인재들이 모이는 곳이다. 하지만 아쉬운 점은, 우수한 의사들은 많이 배출되지만 의료 산업의 미래를 짊어질 의과학자들은 극히 적은 실정이다. 환자를 돌보는 임상의에게 중요한 덕목은 성실성이지만 의과학자에게는 이에 더해 미래 의료 환경에 대한 통찰력과 소명의식이 함께 요구된다. 그들이 백신 개발, 암과 치매 정복 등 새로운 의료 기술을 개발할 인재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의사는 수만명을 살리지만, 의과학자는 수억명을 살릴 수 있다. 하지만 문제는, 의사는 안정된 삶이 보장되지만 의과학자는 경제적 불편과 불투명한 미래와 맞서야 한다. 그들에게 헌신만을 요구할 게 아니라 의과학자 양성을 위해 필요한 제도적 보완과 그들이 꿈을 펼칠 수 있는 의료 벤처 생태계의 활성화가 절실하다.
다양한 업적 남긴 ‘수퍼 닥터’… 폐렴 구균 첫 발견하고
소아마비가 세균 아닌 바이러스성 질병인 것 규명해내
카를 란트슈타이너는 혈액형 분류로 수많은 생명을 살렸을 뿐 아니라 다양한 연구 분야에서 많은 업적을 이루었다. 그는 유대인답게 무엇을 하든 항상 동료들과 함께했다. 점심에는 팀원들을 모아놓고 각자의 연구 결과를 공유하면서 토론을 즐겼고 밤에는 그의 집에 모여 같이 논문을 썼다. 이러한 방식을 통해 그는 동료와 함께 폐렴 구균을 발견하고, 매독의 면역학에 대한 새로운 사실을 알아냈으며, 알레르기 반응이 면역계 반응이라는 증거를 최초로 발견했으며, 소아마비가 세균이 아닌 바이러스성 질병임을 최초로 밝혀냈다,
그리고 카를은 364편의 값진 논문을 통해 “혈청학, 바이러스학, 면역학, 알레르기학' 등 4가지 의학 분야의 기초를 닦았을 뿐 아니라 3600여 사체 부검을 통해 병리해부학을 한층 더 발전시켰다. 그는 기초의학 거의 전 분야를 섭렵한 마지막 의과학자였다
[14] 척박한 환경 이겨낸 유대인들의 지혜와 끈기
약속의 땅? 2000년만에 정착한 땅엔 물도 기름도 없었다
이스라엘이 건국되기 30년 전부터 유대인들은 슬금슬금 가나안(팔레스타인)으로 모여들었다. 영국이 1차 대전이 끝나면 유대인의 ‘민족적 고향’인 나라를 가나안에 세우도록 지원하겠다는 ‘밸푸어선언'을 1917년에 했기 때문이다. 이때 유대인들은 가장 먼저 그 땅에 대학부터 세웠다. 물리학자 알베르트 아인슈타인과 러시아 태생 생화학자이자 훗날 이스라엘 초대 대통령이 되는 하임 바이츠만은 세계를 돌며 자금을 모아 테크니온 공대와 히브리 대학을 설립, 각각 1924년과 1925년에 문을 열었다. 교육이 앞으로 탄생할 이스라엘의 장래를 책임질 것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1946년 이스라엘 남부 네게브 사막, 홍해와 통하는 아카바만 인근 키부츠에서 감자를 심고 있는 초기 유대인 정착민들〈위 사진〉. 네게브 사막은 이스라엘 땅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지만 여름이면 기온이 섭씨 40도 이상으로 오른다. 이스라엘은 1960년대 초 이 사막에서 대규모 관개 사업을 시작했고, 국토 최남단 도시 에일라트에 첫 해수 담수화 플랜트를 건설했다. 현재 네게브 사막은 많은 지역이 포도, 석류, 무화과, 오렌지 등 유실수를 심고 가꾸고 수출도 하는 농토로 개발됐다〈아래 사진〉. /위키피디아·게티이미지뱅크
그 무렵 주로 러시아와 동구에서 박해를 피해 가나안으로 모여든 유대인들은 살길이 막연했다. 이때 이들을 보살핀 사람이 프랑스의 에드몽 로스차일드였다. 그는 유대 이주민들에게 농사지을 땅을 사주고 정착 비용을 지원했다.
하지만 유대인들은 또 다른 문제에 봉착했다. 척박한 사막성 광야라 물이 턱없이 부족했다. 이스라엘 연평균 강수량은 한국의 3분의 1에 불과해 농사는커녕 생활용수도 모자랐다. 초기 정착민들은 물을 구하려 겨울 우기에 내린 빗물이 고여 있는 저지대에 모여 살았다. 하지만 습지 모기들이 말라리아를 옮겨 많은 사람이 죽었다. 그러자 1920년대에 유대인들은 모기를 피해 구릉 지대 꼭대기로 촌락을 옮겼다. 지금도 이스라엘에 가면 사람들이 높은 곳에 집을 짓고 살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산꼭대기에 물이 있을 리 없다는 것이 문제였다. 지하수조차 얻기 어려운 사막 국가인 이스라엘의 유일한 수자원은 갈릴리 호수인데 이마저 해수면보다도 220m 낮은 땅에 위치해 있어 농업용수나 식수로 쓰기 어려웠다. 유대인들은 갈릴리 호수 물을 멀리 산꼭대기까지 파이프로 연결해 모터로 끌어올려 식수로 썼다. 하지만 이 귀한 물을 사람만 먹고 살 수도 없었다. 물을 최대한 아껴 농사도 지어야 했다.
유대인의 새로운 시도, 점적 관개(Drip Irrigation)
유대인들은 효율적으로 농작물에 물을 줄 수 있는 방법을 연구했다. 그 결과 스프링클러로 작물 위에서 물을 뿌리는 대신 파이프와 고무 호스를 이용해 뿌리 근처에 정확하게 필요한 만큼만 물방울을 떨어뜨리는 컴퓨터 제어 기술을 개발했다. 이 점적 관개(Drip Irrigation) 기술은 물을 일반 관개 농법의 40%만 쓰고 생산량은 50% 증가시켰다.
▲1964년 이스라엘 에일라트의 홍해 아카바만 해안에 건설 중인 해수 담수화 플랜트 모습. /위키피디아
그럼에도 갈릴리 호수의 물만으로는 턱없이 부족했다. 유대인들은 이미 사용한 물을 다시 쓰는 재처리 기술을 개발했다. 지금은 오·폐수의 92%를 재처리하여 농업용수로 쓴다. 이스라엘은 세계에서 물을 가장 알뜰하게 쓰는 나라로, 물 재이용률이 세계 1위다. 이스라엘은 동북부 갈릴리 호수에서 시작해 남부 네게브 사막까지 전국의 물 저장 시설을 1964년에 완공된 국가 수로와 연계해 나라에서 통합 관리하고 있다. 그래도 물이 모자라자, 이스라엘 정부는 바닷물을 민물로 만드는 해수 담수화 기술 개발을 국가 정책 목표로 삼아 연구에 총력을 기울였다. 1965년 국토 최남단 에일라트(Eilat)에 첫 해수 담수화 플랜트를 건설했다.
갈릴리 호수에서 퍼 올린 물과 담수화 과정에서 끌어올린 바닷물은 사막 어느 암반층에 함께 저장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비상이 걸렸다. 식수로 쓸 물에 녹조가 낀 것이다. 그들은 궁리 끝에 녹조를 먹고 자랄 수 있는 먹성 좋은 물고기를 투입하는 아이디어를 냈다. 그러나 세상에 섭씨 38도의 사막 온수, 민물과 바닷물의 중간 염도에서 살 수 있는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았다.
없어서 만들어버린 새로운 ‘잉어’
놀랍게도 유대인들은 없으면 만들기로 했다. 그들은 독일인들이 오랫동안 개량한 ‘독일 가죽잉어'에 주목했다. 비교적 높은 수온에서 견디며, 얕은 바닷물에서도 살 수 있고, 환경 적응력이 뛰어나면서도 녹조 등 식물성 퇴적물을 좋아하는 물고기였다. 유대인들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독일 가죽잉어와 먹성 좋고 덩치 큰 이스라엘 토착 잉어를 교배해 생명력 강한 새로운 품종을 개량해냈다. 녹조 문제를 해결한 이 잉어는 이스라엘에서 개량되었기 때문에 ‘이스라엘 잉어’라 불렸다.
원래 중세 유럽 수도원에서는 단백질 공급용으로 잉어를 양식하기도 했다. 그중에서도 독일 수도사들이 비늘을 쉽게 제거하려는 목적으로 비늘 없는 잉어만을 골라 오랜 세월에 걸쳐 품종 개량한 것이 독일 가죽잉어였다. 하지만 유대인들은 식용으로 가죽잉어를 다시 비늘이 있는 품종으로 개량했다. 유대인 율법의 정결법인 ‘코셔’에 따라 비늘 없는 생선은 먹어선 안 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독일 가죽잉어와 달리 이스라엘 잉어는 비늘이 있다. 이렇게 품종 개량된 이스라엘 잉어는 살이 많은 데다, 배설물로 비료도 만들었다. 이스라엘 잉어의 개발 과정은 문제가 생길 때마다 언제나 새로운 생각과 방법으로 해결해가는 유대인 특유의 문제 해결법을 보여준다.
마침내 1948년, 유대인들은 2000여년에 걸친 방랑과 차별, 추방, 박해, 학살을 이겨내고 지금의 이스라엘을 건국해 정착했다. 그러나 하느님이 그들에게 약속했던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은 실제로는 너무나 척박했다. 게다가 주변 중동 국가와 달리 석유 한 방울 나지 않았다. 하지만 유대인들을 끈기와 열정으로 척박한 현실을 약속의 땅으로 만들어나갔다. 어쩌면 신이 유대인에게 준 진정한 선물은 ‘약속의 땅’이 아니라 약속의 땅을 일굴 수 있는 ‘끈기와 열정’일지 모른다.
한국에 들어온 이스라엘 잉어, ‘향어’라는 이름을 받다
먹을거리가 부족했던 시절인 1973년 우리나라는 성장 속도가 잉어보다 2배 이상 빠른 이스라엘 잉어 치어 1000마리를 들여왔다. 그 뒤 양식에 성공해 1978년부터 전국 호수에서 대대적인 가두리 양식이 시작됐다. 우리 양식업자들은 독특한 향이 나는 물고기 맛을 선전하고자 이를 ‘향어’라 불렀다. 향어는 1990년대 후반까지 공급이 많아 유료 낚시터에서 인기를 끌었다. 그러나 1997년부터 수질 보호를 위해 호수의 가두리 양식장이 사라지면서 향어 양식은 쇠퇴하기 시작했다.
▲1980년대 말 청주댐 양식장의 향어 모습. 우리나라는 1973년 이스라엘잉어 치어 1000마리를 들여와 1990년대까지 전국 호수에서 양식했다. /연합뉴스
향어는 이후 초기 투자비가 적게 드는 논에서 키우는 양식 방법이 개발되며 다시 각광받기 시작했다. 게다가 2018년 우리 국립수산과학원은 유대인들보다 한술 더 떠 일반 향어보다 성장 속도가 40%나 빠른 ‘육종향어’를 개발했다. 18개월 만에 평균 3.4㎏까지 성장하는 이 자이언트 향어는 비린내가 없으며 육질이 쫄깃하고 식감이 좋아 횟감으로 인기가 높다. 게다가 값도 착해 1㎏에 8000원 정도다. 매운탕도 잔가시가 없고 살이 많아 국물 맛이 달콤하고 진하다. 유대인이 식용으로 개량한 ‘가죽잉어’가 머나먼 우리나라로 넘어와 ‘향어’란 이름으로 우리를 살찌우니, 참으로 독특한 인연이다.
[세계 최첨단 해수 담수화 기술을 보유한 이스라엘]
이스라엘 국토의 대부분은 사막으로 항상 물 부족에 허덕였다. 주변 나라와도 늘 물로 인한 분쟁이 생겼다. 그래서 이스라엘 정부는 일찍이 1960년대 수자원 개발을 국가적 목표로 정하고 GDP의 5%를 물 연구·개발에 투자했다. 그렇게 개발한 것이 특수한 막으로 염분을 걸러내는 역삼투압 방식 해수 담수화 기술이다. 이 기술은 비용이 많이 드는 게 약점이었는데, 이스라엘은 태양열 발전과 접목하여 세계 최저 수준인 t당 52센트 정도의 전기료만 투자하면 바닷물을 담수로 바꿀 수 있는 획기적인 첨단 기술을 선보였다. 그 결과 이스라엘은 세계 최대 규모의 담수화 플랜트로 물을 자급자족하는 나라가 되었다. 그뿐만 아니라 최첨단 해수 담수화 기술을 더욱 발전시키고 응용해 폐수 처리, 신재생에너지 분야에서도 세계 최고의 기술을 보유하게 되었다. 유엔은 2025년이 되면 세계 인구의 20%인 27억명가량이 심각한 물 부족 상황에 직면할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21세기 물 산업은 20세기 석유 산업 규모를 넘어설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15] 러일전쟁 승리한 일본… 그뒤엔 유대인의 물밑지원
러시아의 박해에 분노한 유대인, 러일전쟁 때 일본 밀어줬다
만주에 세력을 넓힌 러시아가 압록강 주변에서 벌채 사업을 하다 1903년 4월 압록강 하구 의주 용암포를 기습적으로 불법 점령하자 일본과 러시아는 일촉즉발의 상태에 놓이게 된다. 이후 일본과 러시아는 한반도와 만주에 대한 통치권을 놓고 수차례 협상을 벌였다.
다급해진 일본은 “만주는 러시아가, 한국은 일본이 나누어 갖자”고 제안했다. 그러나 러시아는 “만주는 전적으로 우리 것이고, 한국에 대한 일본의 경제적 권리는 인정하지만 그 이상의 정치적 권리는 인정 못 한다”고 선을 그었다. 이후 1903년 9월 러시아는 일본에 최후 통첩안을 던졌다. ‘한반도를 북위 39도선을 경계로 북쪽은 러시아, 남쪽은 일본이 지배하자’는 분할 통치안을 역으로 제안했다.
▲만주와 조선에 대한 지배권을 놓고 대립하던 러시아와 일본은 1904년 초 전쟁으로 치달았다. 일본이 연전연승한 배경에는 해외 국채 발행을 통해 확보한 막대한 군자금의 힘이 있었다. 국제 금융계의 실력자였던 유대인 제이컵 시프가 일본을 위해 거액의 국채 판매를 알선해준 덕분이었다. ‘평양 북쪽에서 충돌하는 일본과 러시아 기병대’, 일본 메이지 시대의 화가 구로키 한노스케의 그림, 미 의회도서관 소장. /위키피디아
러일전쟁 시작되다
협상은 결렬되었다. 일본은 전쟁이 불가피하다고 판단했다. 1904년 2월 6일 일본 함대가 인천에 정박 중인 러시아 군함 2척을 격침시키고 남양만과 백석포에 군대를 상륙시켜 서울을 점령한 후 북진했다. 일본 함대는 러시아 극동함대 사령부가 있는 뤼순(旅順)항으로 직진해 공격을 개시했다. 이것이 러일전쟁의 시작이다. 일본이 노골적으로 조선 정복욕을 드러낸 것이다. 이후 일본군은 압록강 전투에서 승리하여 만주로 진격했다. 일본이 강대국 러시아와 전쟁을 한다는 것 자체가 무리라고 보았던 서방세계는 일본의 연전연승에 깜짝 놀랐다.
유대인과의 운명적 만남
러일전쟁 때 일본 전비는 청일전쟁 때보다 8.5배나 많았다. 당시 일본 GDP 6.6년치 규모였다. 일본은 전쟁자금을 국내외 국채 발행으로 충당했다. 이 중 40%가 해외 차용이었다. 전쟁 지속가능 여부는 전적으로 얼마나 많은 자금을 해외에서 얻을 수 있는가에 달려있었다. 당시 런던 채권시장에서 신용등급이 낮았던 일본이 어떻게 그 큰돈을 빌릴 수 있었을까?
해외차용 임무는 일본 중앙은행이 맡았다. 책임자는 다카하시 고레키요(高橋是清·1854~1936) 부총재였다. 그는 전쟁 직후 전비를 마련하라는 특명을 받고 런던으로 날아 갔다. 다카하시는 런던 금융가에 제법 지인들이 있었지만 누구도 일본 국채 인수에 응하지 않았다. 일본이 이미 런던에서 발행한 국채가 인기가 없었을 뿐 아니라, 전쟁 위험 리스크 때문에 회피했던 것이다. 그 무렵 런던에서 발행된 국채 이자율을 보면 멕시코, 그리스, 에콰도르가 4%, 중국과 쿠바가 5%인데 비해 일본은 6%로 신용등급이 가장 낮았다. 다카하시는 금융기관을 찾아가 1000만파운드 국채 발행을 협의한 결과, 일단 절반만 발행하자는 제의를 받았다.
이 무렵 그는 런던의 한 친구가 초대한 만찬에서 우연히 미국 투자금융회사 ‘쿤-롭사’ 대표 유대인 제이컵(야곱) 시프(Jacob Henry Schiff·1847~1920)와 나란히 앉았다. 시프는 러일전쟁에 큰 관심을 보였다. 다카하시는 그에게 전황을 상세히 설명하고 국채 발행의 어려움을 토로했다. 다음 날 시프는 나머지 절반을 자기가 인수하겠다는 의사를 밝혀왔다. 지금 돈으로 50억달러에 달했다. 알고 보니 그는 로스차일드 가문의 미국 대리인으로 국제 금융계에 꽤 영향력 있는 인물이었다.
일본군이 압록강 전투에서 승리를 거둔 후, 일본은 1200만파운드 규모의 두 번째 국채 발행에 나섰으나 국제 금융계는 일본 국채 인수에 미온적이었다. 일본이 러시아 극동함대 본부 뤼순항을 신속하게 점령하지 못하자 승전 전망이 불투명하다고 봤기 때문이다. 이번에도 시프가 발 벗고 나서서 뉴욕과 런던에서 동시에 국채를 발행토록 해주었다.
▲‘일본’과‘러시아’라고 쓰인 곰과 개로 보이는 동물 두 마리가‘한국’이라는 뼈다귀를 놓고 다투는 가운데, 담장 밖의 세계는“그냥 한판 붙으라”고 부추기고 있다. 미국 만화가 밥 새터필드의 신문 만평, 1904년 미국 타코마 타임스 게재. /위키피디아
시프, 치밀하게 러시아 혁명을 지원하다
왜 제이컵 시프는 일본을 지원했던 것일까? 그는 러시아가 유대인을 박해하는 데 분노하고 있었다. 러시아 차르(군주)는 혁명 세력을 다독이기 위해 의도적으로 유대인들을 핍박했다. 유대인들을 발트해와 흑해 사이에서만 살도록 거주지를 제한했다. 차르의 유대인 억압 조치는 국민의 반(反)유대주의를 자극했다. 게다가 흉흉한 소문이 돌았다. 유대인들이 기독교도 소년을 잡아가 종교의식을 위해 죽인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곳곳에서 유대인들이 학살되었다. 시프는 율법의 가르침에 따라 러시아 유대인들을 구해야겠다는 책임감을 느껴, 자신의 부와 정치적 역량을 총동원했다. 그는 1906년 미국 유대인위원회(AJC) 창설을 주도해 러시아와 동구 유대인들이 미국으로 이민 올 수 있도록 미국 정부를 압박해 이민 문호를 확대했다.
러일전쟁 당시 사실 은밀한 전쟁은 러시아 내부에서도 진행되었다. 시프를 위시한 유대 금융인들은 유대인 레온 트로츠키가 주도하는 혁명을 지원했다. 한편 1905년 1월 일본이 뤼순항을 점령하는 과정에서 러시아군 2만2000명을 포로로 잡았을 때, 시프는 포로들에게 볼셰비키 혁명의 정당성을 교육시켜 이들이 귀국하면 혁명 전선에 참여하게 만들었다.
시프, 일본 국채 발행에 독일도 끌어들이다
일본이 만주 전투에서 우세를 보이자 세계는 경이로운 눈으로 일본의 연전연승을 지켜보았다. 이런 분위기는 일본의 3차 국채 발행에 긍정적 영향을 미쳤다. 이번에는 시프가 일본 국채의 이자율을 낮춰주도록 금융가들과 직접 협상을 벌였다. 1905년 3월 3000만파운드의 일본 국채가 4.5% 금리로 발행되었다. 1905년 6월경 시어도어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이 러일전쟁을 중재하고 나섰을 무렵 일본 정부는 다카하시에게 네 번째 국채 발행을 지시했다. 하지만 런던 금융계의 반응이 좋지 않았다. 일본이 큰 규모의 국채를 너무 자주, 너무 많이 발행한다는 것이었다. 그러자 시프는 독일을 끌어들여 미국, 영국, 독일이 각각 1000만파운드를 인수하는 4차 국채 발행을 성사시켰다.
▲러일전쟁 군비 마련을 위한 국채 발행을 맡았던 다카하시 고레키요(오른쪽) 일본은행 부총재와 발행을 도운 유대인 은행가 제이컵 시프(왼쪽). /위키피디아
러시아, 금융전쟁에서 지다
근대 이후의 전쟁은 본질적으로 금융 전쟁이다. 시프가 지원하여 판매한 대규모 일본 국채는 일본이 승리하는 데 결정적 힘이 되었다. 일본이 국제 금융시장에서 계속 상상을 초월하는 외자를 도입한 반면, 러시아는 처음에 프랑스에서 자금을 조달했으나 나중에는 국내에서조차도 국채 발행이 불가능한 상태가 되었다. 게다가 당시 러시아는 전국적으로 혁명이 일어나 일본은 유리한 입장에서 러시아와 평화협정을 맺을 수 있었다.(출처 : ‘러시아의 유태인 학살에 분노, 일본을 밀었다’, 강영수 전 코트라 관장, 월간조선 2004. 3월호)
한국의 운명을 결정한 포츠머스 강화조약
1905년 9월 시어도어 루스벨트가 중재한 포츠머스 강화조약에서, 일본은 러시아로부터 한국은 물론 뤼순과 다롄의 조차권과 사할린까지 양도받았다. 대신 루스벨트는 일본이 요청한 막대한 배상금은 묵살했다. 루스벨트는 부통령 시절 ‘조선인은 자치 능력이 없어 일본의 지배를 받아야 한다’고 말했던 인물이다. 게다가 포츠머스 강화조약 두 달 전 일본 총리 가쓰라와 미국 육군장관 태프트 사이에 ‘필리핀과 조선은 각각 미국과 일본이 차지한다’는 ‘가쓰라-태프트 밀약’이 맺어진 상태였다.
루스벨트가 한국을 일본에 넘겨준 사실을 모르는 고종은 1905년 10월 루스벨트에게 친서를 보내고, 패전국 러시아에 매달렸지만 다음 달 11월 일본과 ‘을사늑약’을 체결하게 된다. 이로써 한국의 외교권은 일본에 넘어갔다. ‘과거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는 말과, ‘용서는 하되 잊지는 말자’는 유대인 경구가 떠오르는 대목이다. 전후 제이컵 시프는 천황의 초청으로 일본을 방문해 외국인으로 처음으로 최고훈장을 받은 뒤 우리나라도 방문한 바 있다.
[러일전쟁의 배경, 아관파천(俄館播遷)]
1894년 청일전쟁 패배로 청나라는 일본에 막대한 전쟁 배상금을 지불하고 영토까지 할양해야 했다. 러시아가 요동 반도의 할양을 반대했음에도 일본이 뤼순항을 차지하게 되자, 러시아는 일본의 영향력이 너무 커질 것을 우려해 독일과 프랑스를 끌어들여 ‘삼국간섭’으로 요동 반도를 다시 청에 반환하게 만들었다. 나아가 러시아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요동반도를 연결하는 동청철도를 건설하여 만주 지역으로 세력을 뻗쳤다.
1895년 10월 명성왕후가 일본군에 의해 살해당하는 을미사변이 일어나고, 일본군과 친일 세력에 의해 경복궁에 감금당한 고종이 이듬해 2월 탈출해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한 사건이 ‘아관파천’이다. 이 사건으로 일본의 영향력과 친일 내각이 붕괴되고 고종의 신변을 확보한 러시아의 영향력이 커져, 친러 내각이 구성된 뒤 1897년 10월 대한제국이 건국되었다. 이듬해에 러시아가 청나라와 비밀동맹을 맺어 일본이 반환한 뤼순(旅順)과 다롄(大連)을 조차하여 해군기지로 쓰자 일본의 분노는 극에 달했고, 1904년 2월 대한제국의 운명을 가름하는 러일전쟁이 발발하게 된다.
[16] 소아마비 공포서 인류 구원, 러시아계 의과학자 소크
멸시 받던 유대인 소년, 소아마비 무료 백신 천사로
▲소아마비 팬데믹이 정점에 달했던 1952년 한 해 미국에서만 5만8000여 명이 발병해 3145명이 숨지고 2만1269명의 다리가 마비됐다. 33세이던 1947년 루스벨트 대통령이 설립한 소아마비 국립재단이 지원하는 연구 프로젝트를 맡은 유대인 의학자 조너스 소크는 마침내 1952년 3월 소아마비 백신 개발에 성공했다. 위 시사 만화는 1957년 퓰리처상을 받은 톰 리틀의 ‘왜 우리 부모님은 내게 소크 백신을 맞히지 않았을까?’. /게티이미지코리아
20세기 들어 뇌나 척수 신경조직이 손상되어 죽거나 하반신이 마비되는 폴리오 바이러스 전염병이 위세를 떨쳤다. 대공황 때 선출된 프랭클린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이 이 병에 따른 하반신 마비 환자였다. 루스벨트는 39세에 이 병에 걸렸지만 보통은 10세 전후 어린아이가 많이 걸려 이를 ‘소아마비’라 불렀다. 당시 미국에서만 환자가 매년 수만 명 발생해 미국인들에게 소아마비 전염병은 원자폭탄 다음으로 두려운 공포의 대상이었다. 이러한 공포에서 인류를 해방한 의과학자가 조너스 소크(Jonas Salk)다.
소크는 1914년 뉴욕 브롱크스에서 러시아 유대인 이민자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는 어린 시절 동네 아이들이 유대인이라고 욕하며 돌을 던지는 탓에 골목 맨 끝에 있는 히브리 학교 등굣길이 두려웠다. 소크는 말년에 의과학자가 된 이유에 대해 “어린 시절부터 유대인의 비극과 고통에 대해 많이 고민했다. 이런 사악한 고통의 고리를 끊으려면 뭔가 인류를 위해 큰일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고 회상했다.
소크는 13세에 영재 고등학교 조기 입학, 16세에 뉴욕시립대 화학과 조기 입학, 20세에 뉴욕 의과 대학원에 진학했다. 당시 뉴욕시 의사의 15% 이상이 유대인이었다. 하지만 그는 임상 의사보다는 많은 사람을 살릴 수 있는 의과학자가 되기로 마음먹었다. 그 무렵 만연하던 전염병 백신 개발에 헌신하는 길이 자신이 받은 소명이자 하느님의 기대에 부응하는 일이라 믿었다. 이후 소크는 뉴욕 마운트시나이 병원에서 수련의 과정을 밟은 후, 당시 바이러스 연구로 유명한 미시간대학 프랜시스 교수를 찾아가 바이러스 실험실에서 6년간 독감 백신을 개발하며 바이러스 연구 경험을 쌓았다.
하루 16시간 휴일 없이 연구
1947년 소크는 33세 나이로 피츠버그 의대 세균학 부교수로 초빙받아 바이러스 연구소 책임자가 되었다. 이후 루스벨트 대통령이 설립한 소아마비 국립 재단이 지원하는 연구 프로젝트를 맡게 되었다. 1950년쯤 소아마비는 세계적 대유행(팬데믹) 상태였다. 팬데믹은 오래갔다. 미국은 1952년에 정점에 달해, 환자가 무려 5만8000명 발생해 3145명이 사망하고, 2만1269명의 다리가 마비되었다. 일단 병에 걸리면 42.5%가 넘는 희생자가 발생했다. 어린 자녀를 둔 가정은 극심한 공포에 시달렸다. 일부는 아이들을 외딴 산이나 사막으로 대피시켰다. 소크는 공포의 바이러스에서 인류를 구하겠다는 일념으로 연구에 매진했다. 7년 동안 하루 16시간씩 휴일도 없이 연구에 매달렸다.
▲미 펜실베이니아주 피츠버그에서 소아마비 백신 연구에 몰두하는 조너스 소크. 뉘른베르크 전범 재판 그림으로 명성 높은 미국 일러스트레이터 에드워드 베벨의 1955년 작. /게티이미지코리아
백신 대량생산 방법에 몰두해
당시 소아마비 백신 개발을 위한 주류 연구가 숙주가 아닌 외부 환경에서 바이러스를 오래 배양하여 독성이 약해진 ‘약독화’ 바이러스를 이용하는 방법이었다. 하지만 이 방법은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바이러스 배양 자체에 오랜 시간이 걸렸고, 약화된 바이러스 독성의 동물시험 과정을 여러 차례 거쳐야 했다. 게다가 3종류의 폴리오바이러스 타입 모두에서 약독화된 바이러스를 얻어야 해서 시간이 오래 걸릴 수밖에 없었다. 전염병 공포가 극에 달하면서 대중과 지원 재단은 짧은 시일 안에 성과가 있기를 바랐다. 다른 연구자들이 약독화 바이러스 백신을 개발할 때, 소크는 단기간에 백신을 대량으로 만들려면 다른 방법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그는 독감 백신 연구 경험을 살려 포르말린을 이용해 바이러스의 생물학적 활성을 죽인 ‘불활성화’ 백신을 만들기로 했다.
천장 높은 공간서 아이디어 얻어
하지만 소크 연구팀은 200여 차례 실험에도 성공하지 못했다. 계속되는 실패와 시행착오에 심신이 지친 소크는 이탈리아 아시시 수도원으로 떠났다. 답답한 연구실에만 있다 천장이 높은 수도원에 오니 그의 사고 공간 역시 확 넓어지는 느낌을 받았다. 그때 번쩍이는 영감과 함께 아이디어가 떠올라 급히 연구실로 돌아왔다. 소크는 쥐 실험, 원숭이 실험 등을 연속으로 진행하며 심지어 원숭이 콩팥 세포를 믹서기에 갈아 바이러스 증식 실험을 해보기도 했다. 그러다 마침내 단백질 분해 효소(트립신)로 분리된 원숭이 콩팥 세포에서 폴리오바이러스 생산 수율이 현저하게 증가한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바이러스 대량생산 기술을 확보한 것이다. 이 바이러스들을 포르말린으로 죽여 불활성화한 ‘사균 백신’을 만들었다. 1952년 3월, 마침내 소크는 소아마비 백신 개발에 성공했다. 무엇보다 백신 대량생산에 성공한 것이다.
자신과 가족 상대 임상 시험
다음 문제는 임상 시험을 할 대상을 구하는 일이었다. 소크는 1953년 11월 자신을 대상으로 최초로 인체 시험을 실시했다. 그리고 그의 가족이 먼저 접종받는 모습을 대중에게 보여주며 임상 시험 참여를 설득했다. 그 결과 지원자 22만명을 모아 임상 시험을 진행할 수 있었다. 이렇게 해서 안전성이 입증되자 소크는 소아마비 백신 개발 성공 소식을 루스벨트 대통령 사망 10주기인 1955년 4월 12일에 맞춰 라디오를 통해 알렸다. 미국인들은 환호성을 지르며 축제처럼 기뻐했다. 이날은 국가적 경축일이 됐다. 백신이 보급된 지 2년 만에 소아마비는 90% 이상 감소했다.
태양에도 특허를 낼 건가요?
소아마비가 이렇게 단기간에 감소한 데는 소크 박사의 위대한 결단이 있었다. 여러 제약 회사가 특허를 사겠다고 제안했다. 백신 가치는 약 70억달러로 추산되었다. 그러나 그는 모두 거절했다. 생명과 의술을 돈과 연결할 수 없다는 그의 신념 때문이었다. 그는 백신을 무료로 공급했고 백신 만드는 방법도 공개했다. CBS 인터뷰에서 사회자가 물었다. “백신의 특허권자는 누구입니까?” 소크 박사는 답했다. “특허는 없습니다. 태양에도 특허를 낼 건가요?” 소크 박사 덕분에 백신은 전 세계에 빠르게 공급돼 소아마비를 퇴치했다.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소크에게 훈장을 수여하며 그를 ‘인류의 은인’이라 불렀다. 캘리포니아 주정부는 그를 위해 ‘천장이 높은’ 소크 생물과학연구소를 샌디에이고에 지어주었다.
▲앨버트 세이빈
또 다른 유대인 의과학자 앨버트 세이빈의 경구 백신
소크의 불활성화 백신이 대량 보급됐을 때 약독화 백신이 더 우수하다고 주장하는 또 다른 유대인 의과학자가 있었다. 폴란드계 유대인 앨버트 세이빈은 불활성화 백신은 3번 접종해야 하지만 약독화 백신은 1회 투여로 면역을 갖게 되는 장점을 부각했다. 또한 사탕이나 시럽 형태의 경구 투여는 점막 면역을 형성하기 때문에 주사로 접종하는 불활성화 백신보다 완벽한 면역성을 갖는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미 소크의 백신으로 많은 사람이 항체를 갖게 된 상황에서 약독화 백신의 대규모 임상 시험을 미국에서 하기는 현실적으로 어려웠다. 사빈은 해외에서 돌파구를 찾았다. 1958년 싱가포르와 체코, 이후 소련에서 무려 1500만명을 대상으로 임상 시험을 해 백신의 안전성과 효과가 입증되었다. 사빈의 백신은 1961년 사용 허가를 받아 1회 경구 투여의 간편함 덕분에 불활성화 백신을 제치고 주력 백신이 되었다. 당시 집중적 접종 캠페인에도 주사 맞기 싫어 접종받지 않은 어린이가 미국에서만 9000만명에 이르는 바람에 소아마비 발병이 다시 늘어났다. 이때 등장한 구원투수가 경구 백신이었다. 굳이 아이를 달래가며 아픈 주사를 놓는 게 아니라 사탕이나 시럽 형태 백신을 먹이면 되니 우선 간편했다. 이후 소아마비 발병 환자는 대부분 나라에서 사라졌다. 두 유대인 의과학자가 개발한 백신 두 종류는 공포의 대상이었던 소아마비를 퇴치했다. 참고로 이스라엘의 한 제약사가 집에서 복용할 수 있는 저렴한 ‘경구용 코로나19 백신’ 개발을 끝내고 임상 시험을 준비 중이다. (자료: ‘남궁석의 신약 연구사’ 백신, 소아마비 퇴치까지, 바이오스펙테이터 등)
[백신을 단돈 100원에 보급]
세계보건기구를 통해 보급되는 소아마비 백신 1개 값은 단돈 100원이다. 개발자 조너스 소크 박사가 백신을 무료로 공급했기 때문이다. 1993년 타임지가 그를 20세기 100대 인물에 선정한 이유는 백신 개발보다는 연구 성과를 인류의 공동 자산으로 함께 나눈 숭고한 과학자 정신에 있었다. 소크는 미국 대학생들이 가장 존경하는 위인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한편 소크의 값싼 ‘불활성화 백신’(사균 백신)이 이미 등장하여 ‘약독화 백신’(생균 백신) 개발이 돈이 안 됨을 알고 있음에도, 끈질기게 또 다른 소아마비 경구 백신을 개발한 유대인 의과학자가 앨버트 세이빈이다. 그는 독성이 약화된 ‘생균 백신’의 우수성을 믿었기에 끝까지 매달려 백신 개발을 성공시켰다. 이 두 유대인 의과학자가 인류를 소아마비 전염병에서 구출했다.
[17] 라디오와 TV 선구자 데이비드 사노프
“타이태닉 침몰” 전한 전보기사… 라디오·TV시대 열었다
오늘날 방송이 가능한 것은 독일의 개종 유대인 하인리히 헤르츠가 1887년 공기 중에 ‘전파(전자기파)’라는 것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아냈기 때문이다. 이를 기초로 이탈리아인 굴리엘모 마르코니가 1897년 모스 부호를 이용해 무선 신호를 주고받을 수 있는 전신기를 발명했다. 그리고 1906년 캐나다 출신의 미국 무선공학자 레지널드 페선던이 전파에 음성을 실어 전달하는 기술을 개발했다. 라디오의 기원이었다. 이후 라디오 방송의 상업화를 이끈 사람이 데이비드 사노프였다.
▲미국 매사추세츠주 동쪽 바다 난터켓섬의 전신 사무소에서 전신을 보내고 있는 젊은 시절의 데이비드 사노프. 러시아 민스크 태생의 유대인 이민자였던 사노프는 아버지를 일찍 여읜 뒤 고학하며 가족을 부양하다, 전보 배달부를 거쳐 독학으로 모스 부호를 익혀 17세에 무선 전신 기사가 됐다. 1912년 4월 타이태닉호 침몰 사고 때 뉴욕의 해안 전신소에서 SOS 메시지를 받아 전파하며 생중계하듯 침몰 소식을 전하며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그는 1921년엔 권투 헤비급 세계 타이틀전의 인류 최초 라디오 중계를 성사시키는 등 무선 전자 기기 회사 RCA와 방송사 NBC의 회장을 지내며 20세기 중반 거대한 미디어 제국을 지배한 라디오와 텔레비전의 아버지가 됐다. /게티이미지코리아
천재는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는 사람이 아니라, 이미 존재하는 데서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하는 사람이라는 말이 있다. 데이비드 사노프가 그랬다. 그는 미래를 내다보는 통찰력으로 라디오 시대와 TV 시대를 열었다. 그보다 먼저 라디오 방송과 TV 방송을 시작한 사람들이 있었지만, 그들은 공공성에 무게를 두었다. 그러나 사노프는 엔터테인먼트를 전면에 내세워 방송의 대중화를 이끌어냈다. 선구자 사노프의 통찰력 덕분에 현재의 방송 산업이 있다.
데이비드 사노프는 러시아 민스크 지방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 신동으로 소문나 그의 부모는 그에게 탈무드 학자가 되는 공부를 시켰다. 그러다 유대인 박해가 심해지자 1900년 그의 부모는 아홉 살 된 데이비드를 데리고 미국으로 이민했다. 아버지가 일찍 세상을 뜨자 가장이 된 그는 고학으로 신문팔이, 심부름꾼, 짐꾼, 유대회당에서 예배 중 노래하는 일을 하며 가족의 생계를 책임졌다. 15세 때 학교를 그만두고 전보 배달부가 됐다. 그런데 전보 배달부보다는 전보 기사가 돈을 더 많이 번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는 첫 월급으로 전신 기구를 샀다. 독학으로 모스 부호를 배웠고, 월급이 훨씬 많은 ‘아메리칸 마르코니’ 무선 전신 회사에 사환으로 취직했다. 이후 사노프는 무선 기술을 인정받아 17세에 무선 기사로 승진해 주로 선박과 해안 전신소에서 근무했다.
타이태닉 침몰 소식을 세상에 전하다
그러던 그에게 기회가 찾아왔다. 1912년 4월 14일, 영국을 떠난 대형 유람선 한 척이 빙산과 충돌해 좌초했다. 이때 뉴욕 해안 전신소에서 근무 중이던 사노프가 그 배에서 SOS 메시지를 받았다. 그 배는 다름 아닌 유명 인사 2200여 명이 탄 타이태닉호였다. 사노프는 우선 현장에 구조선을 급파하도록 조치하고 즉시 사방에 그 소식을 알렸다. 그러고 그때부터 3일간 밤낮으로, 사건 현장의 구조선들에서 전달되는 생존자 700여 명 명단 등을 뉴욕타임스 등 미디어에 내보내며 침몰 과정을 생중계했다. 안타까운 사고였지만 사노프는 맡은 책임을 훌륭히 해냈다. 주고받은 무선 신호를 분석한 기고문을 신문에 실어 이름을 알렸다.
▲RCA가 개발한 최초의 비디오 테이프와 레코더 광고에 직접 등장한 사노프 당시 RCA 회장. 미 시사주간지 타임 1954년 2월 15일 자에 실린 광고. /위키피디아
혁명적 아이디어, 일축당하다
사노프는 마르코니사에서 고속 승진하며 세상을 뒤바꿔놓을 아이디어를 내놓았다. 오늘날의 라디오 개념을 처음 생각해낸 것이다. 같은 무선 주파수를 사용한다면, 1대1 통신이 아니라 동시에 여러 명이 수신할 수 있다는 데 착안했다. 특히 사노프 아이디어의 혁명적 부분은 ‘보내는 내용’에 있었다. 사노프는 1915년 ‘라디오 뮤직박스’에 대한 계획서를 경영층에 제출했다. “저는 지금 무선을 통해 음악을 가정에 보내자는 것입니다. (중략) 그 수신기는 간단한 라디오 뮤직박스(오늘날 라디오) 형태로 만들 수 있으며 여러 가지 다른 파장에도 맞춰서 꾸밀 수 있습니다.”
그때까지 라디오는 메시지 전달 기구로서 주로 해운업에서 쓰고, 일부는 아마추어 동호회에서 취미로 사용하고 있었다. 그런데 사노프의 계획서에는 라디오가 피아노나 전화처럼 가정에서 사랑받는 새로운 가정용품이 될 것이라고 적혀 있었던 것이다. 회사 경영층은 이 아이디어를 상업의 상 자도 모르는 어처구니없는 생각이라며 일축해 버렸다. 안타까운 일이었다. 세계 최초 라디오 방송국이 1920년에 개국한 것을 보면 1915년의 그의 선견지명은 너무도 탁월한 것이었다.
마침내 열린 라디오 방송 시대
세월이 지나 1919년, 제너럴일렉트릭(GE)이 마르코니사를 사서 RCA(Radio Corporation of America·무선통신 전자제품 회사)를 만들었다. 새 회사에서 사노프는 영업부장을 맡았다. 1920년 세계 최초 방송국 필라델피아 KDKA가 개국하자 사노프는 마음이 바빠졌다. 그는 오래전부터 생각해왔던 상업성 라디오의 가능성을 스스로 증명해 보이기로 했다. 사노프는 무선통신을 즐기는 애호가들을 상대로 ‘인류 최초의 라디오 중계방송’을 감행했다. 1921년 7월 2일 세계 헤비급 타이틀매치 권투를 중계한 것이다. 놀랍게도 30만명이 ‘자체 제작한 수신기’로 사노프의 중계방송을 들었다.
▲데이비드 사노프의 아이디어에서 시작돼 1920년대 미 RCA가 개발·판매한 라디오 수신기‘라디올라’초기 제품. 켜고 끄는 스위치, 볼륨과 주파수 조절 노브만 달린 디자인은 이후 대량생산된 라디오의 표준으로 자리 잡았다. /게티이미지코리아
사노프는 1921년 총지배인으로 승진하자 자신이 6년 전에 제안했던 ‘라디오 뮤직박스’ 사업 계획서를 다시 회사 경영층에 내놓았다. 이번엔 그의 아이디어가 받아들여져, 음악뿐 아니라 뉴스, 스포츠 중계 등을 시간대별 프로그램으로 방송할 수 있게 고안한 라디오 뮤직박스가 만들어졌다. 그의 기술을 바탕으로 1922년 RCA는 라디오를 대량생산해 보급하기 시작했다. 라디오를 전국적으로 보급한다는 그의 계획에 처음에는 모두 반신반의했지만, 야구 중계가 시작되자 순식간에 250만대가 팔려나갔다. ‘라디올라(Radiola)’라고 한 이 75달러짜리 기계로 RCA는 돈방석에 앉았다. 사노프의 라디오는 새로운 소식과 음악, 스포츠 중계 등을 전해주어 사람들에게 활기를 불어넣었다. 그의 방송은 대공황과 세계대전으로 침울했던 20세기 중반 미국 사회에 희망을 가져다주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 사노프는 1926년엔 계열사로 NBC(National Broadcasting Company) 방송국을 설립해 전국에 라디오 방송을 시작했다.
혜안으로 TV 시대도 실현
사노프의 다음 관심은 1923년에 특허를 받은 텔레비전이었다. 그는 이를 상업용으로 키울 수 있다고 봤다. 사노프는 1923년 RCA 제작자 회의에서 TV 시대 출현을 예고했다. “저는 라디오로 들을 뿐 아니라 눈으로 볼 수 있는 텔레비전 시대가 머지않아 도래하리라 믿습니다. 아마 미래에는 모든 가정에 TV가 설치될 것입니다.” 하지만 경영층 반응은 미지근했다. 최초의 상업용 TV 수신기가 1939년에 나온 걸 감안한다면, 1923년의 그의 혜안은 이번에도 놀라웠다.
사노프는 대공황으로 어려운 와중인 1930년 RCA 사장으로 승진했다. 최고경영자가 된 그는 비로소 자기 생각을 실천에 옮길 수 있었다. 대공황으로 매출이 반감하는 경영난에도 불구하고 TV라는 새로운 분야에 투자를 대폭 늘렸다. 마침내 RCA는 TV 수상기를 만들어 1939년 세계 박람회에서 선보였고, 루스벨트 대통령의 개막 연설을 생중계했다. 이어 등장한 사노프는 다음과 같이 선언했다. “이제 우리는 소리에 영상을 더합니다. 온 사회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새로운 기술이 태어남을 저는 겸허하게 발표하려 합니다. 우울한 이 시대에 희망의 횃불이 되어 세상을 밝힐 기술을 말하는 것입니다. 또한 이것이 모든 인류에게 도움을 줄 수 있도록 그 창조적 위력을 사용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기계·전자공학의 발달이 빚어낸 이 기적은 한편으로 미국의 새로운 산업으로서 발돋움할 것입니다. 그리고 텔레비전은 미국 경제생활의 중요한 요소가 될 것입니다.”
사노프의 연설은 TV 상업 방송 시대의 도래를 선언한 것이었다.
[美 반독점 규제로 TV기술 급속 확산]
1941년 NBC방송국은 최초로 상업용 TV 방송을 시작했다. TV 보급이 한창일 때 2차대전이 터졌다. 그러자 사노프는 자원 입대해 준장으로 통신 부대를 지휘하다 종전과 함께 예편했다. 전쟁 뒤 그가 이끄는 TV 방송 산업은 다시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그는 1954년 컬러TV 개발과 보급에도 성공했다. NBC는 TV용 영화를 처음 제작해 새로운 길을 제시하기도 했다. 사노프는 1970년 79세로 은퇴할 때까지 무려 23년간 회장으로 재직하며, RCA를 세계적 대기업으로 키웠다.
텔레비전이 세계적 산업으로 크는 데는 미국 법무부의 공로도 한몫했다. 1954년 이전까지만 해도 RCA는 라디오와 텔레비전 부문 특허 1만여 가지를 갖고, 특허 판매 사업을 하고 있었다. 미국 법무부는 이러한 독점을 깨기 위해 1954년에 RCA를 기소했고, 1958년 반독점 행위에 대한 규제가 시작됐다. 이는 사실상 전 세계에 텔레비전 기술을 급속히 확산시키는 계기가 됐다. 덕분에 일본·독일·한국의 전자 산업이 크게 성장했다.
[18] 현대 컴퓨터의 아버지 존 폰 노이만
멍텅구리 계산기에 ‘뇌’를 접목... ‘논리 기계’로 바꿨다
오늘날의 컴퓨터를 만든 사람은 컴퓨터 공학자가 아니라 수학자인 요한 폰 노이만(John von Neumann·1903~1957)이다. 프린스턴 고등연구소는 평생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는 꿈의 연구소이다. 그곳의 첫 종신 교수가 앨버트 아인슈타인과 폰 노이만이었다. 둘 다 유대인이다. 아인슈타인이 대중에게 더 잘 알려져 있지만 폰 노이만이 우리 실생활에 더 많은 도움을 주었다. 폰 노이만은 수학자이자 동시에 화학, 물리학, 생물학, 컴퓨터공학, 경제학, 통계학에도 정통했다. 그는 원자폭탄과 수소폭탄 개발에 결정적 공헌을 했을 뿐 아니라 핵무기 개발을 돕기 위해 탄생한 컴퓨터를 보고 그 원시적 작동 방법에 일대 혁신을 가해 현대식 컴퓨터를 만들었다. 이 외에도 그는 경제학의 ‘게임이론’을 창안했을 뿐 아니라 물리학의 ‘양자역학’에 크게 공헌했고, 오늘날 ‘인공지능’ 개념의 창시자이다. 어떻게 한 사람이 이렇게 다양한 분야의 위대한 업적을 이루어낼 수 있었을까?
폰 노이만을 키워낸 아버지의 밥상머리 교육
▲존 폰 노이만은 1903년 헝가리 부다페스트에서 부유한 유대 금융인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존을 위대한 과학자로 만든 건 그의 아버지 막스 노이만의 정성이었다. 막스는 유대인답게 밥상머리 교육에 철저했다. 그는 저녁뿐 아니라 점심에도 집에 들어와 어린 자녀들과 함께 식사하며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막스는 긴요한 손님이 있을 때도 외식하지 않고 손님을 집으로 초대해 아이들과 함께 식사하며 어른들의 이야기도 듣게 해주었다. 아이의 단어 습득은 식사 자리에서 절반 이상이 이루어진다는 연구 결과가 있다. 보통 아이들이 만 네 살에 800~900단어를 인지할 때 밥상머리 교육을 받은 유대인 아이는 1500단어 이상을 안다고 한다. 이 차이는 크면서 점점 더 벌어진다.
존의 할아버지는 일곱 언어에 능통했다. 박해를 피해 떠돌이 생활을 했던 유대인들은 외국어 습득과 남다른 지식 보유가 그들을 사지에서 구해줄 수 있다고 믿었다. 막스도 아이들을 위해 라틴어, 영어, 수학 등의 가정교사들을 모셔 개인 교습을 시켰다. 아들의 지적 호기심이 남다른 것을 발견한 막스는 다양한 언어와 학문을 조기 교육했으며 많은 책을 사주었다. 그런데 존의 지적 호기심이 무척 강해 웬만한 책으로는 그의 지적 욕구를 채울 수 없었다. 막스는 아예 경매에 나온 도서관을 낙찰받아 아들 방을 책이 가득 찬 도서관식 서재로 만들어주었다. 존은 자기 방에 처박혀 46권짜리 세계사 전집과 심지어는 백과사전을 통째로 섭렵해나갔다.
존은 7국어를 익혔으며 독서 몰입도와 이해도가 남달랐다. 그는 역사를 좋아했고 수학에 대한 이해가 빨랐다. 존은 여덟 살에 영재들이 다니는 김나지움에 들어갔다. 학생들의 70%가량이 유대인으로 훗날 동창 중에서 노벨상 수상자가 대거 배출됐다. 그런 천재들 사이에서도 존은 군계일학이었다. 여덟 살 때 미적분을 풀었으며, 열 살 때 1년 선배인 유진 위그너(1963년 노벨물리학 수상자)에게 집합론과 정수론을 가르쳐줄 정도였다. 존에게 더 이상 가르칠게 없다고 판단한 수학 선생님은 당대의 수학자들에게 존이 고등 미적분을 배우도록 배려해주었다. 존은 열두 살 때 대학원 수준의 함수론을 독파했으며, 열일곱 살 때 논문을 쓰기 시작해 수학자로 이름을 날렸다.
▲‘에니악’ 같은 초기 컴퓨터는 거대한 방 하나를 다 채울 정도로 덩치가 큰 계산기였다. 하지만 중앙연산장치에 기억장치를 붙여 미리 저장된 프로그램을 실행하고 데이터를 처리하는 ‘폰 노이만 구조’가 적용되면서 비로서 ‘뇌’를 갖게 된다. 미국 일리노이주 아르곤 국립 연구소에서 1953년 가동되기 시작한 폰 노이만 구조의 컴퓨터 ‘AVIDAC’을 조작하는 컴퓨터 과학자 진 F 홀의 모습. 헝가리 태생의 유대인 존 폰 노이만은 미국으로 건너가 원자탄 개발에 결정적 공헌을 하고, 경제학의 ‘게임이론’을 창안했으며, ‘양자역학’에 공헌하고, 오늘날의 ‘인공지능’ 개념을 창시했다. 그 바탕에도 유대인 특유의 ‘밥상머리 교육’과 뜨거운 교육열이 있다. /미국 에너지부·위키피디아
대입 5년 만에 세 전공 이수, 박사 학위
존은 부다페스트 대학 수학과에 진학하고 싶었으나 아버지는 당시 눈부시게 성장하는 화학공학을 택해주길 바랐다. 존은 자신의 희망과 아버지의 뜻을 모두 충족할 방안을 찾아 1921년 부다페스트 대학에 진학해 수학을 전공하는 한편 취리히 스위스연방 공대에서 화학공학을 배우기로 했다. 부다페스트 대학은 시험 때만 출석해 최고 점수를 받았고, 주로 베를린 대학에서 수업을 들었다. 이후 취리히 대학으로 옮겨 화학공학을 전공했다. 동시에 그는 부다페스트 대학에서도 수학 전공과 물리학, 화학 부전공으로 5년 만인 1926년에 수학 박사 학위까지 끝냈다. 이때 이미 수학 기초론과 논리학에서 가장 유명한 수학자가 되었다.
존은 1926년 23세에 베를린 대학의 최연소 수학 교수가 되었다. 포커 게임을 좋아했던 그는 1928년 ‘실내 게임이론’ 책을 펴내 게임이론의 창시자가 되었으며, 독일 과학자들과 교류하며 수학 이론을 양자론에 적용하여 ‘양자역학의 수학적 기초’를 출간했다. 이렇게 그의 연구 주제는 다양했다. 그는 유대인답게 동료 학자들과 함께 연구하기를 즐겼다. 둘 이상이 함께 연구하며 토론할 때 개인의 독단과 편견에서 벗어날 수 있고, 불꽃 튀는 토론 속에서 새로운 깨달음과 창의성이 발현되는 등 시너지가 크다고 믿었다. 그는 수학을 경제학과 물리학에 접목해 새로운 이론들을 창시했다. 천재 학자로서 그의 명성은 전 세계로 퍼져 나갔다.
29세에 프린스턴 고등연구소 종신 교수
1929년 미국 프린스턴대학의 베블런 교수가 존에게 양자역학 강의를 해달라고 초빙해 객원교수가 되었고, 1932년에는 아인슈타인과 함께 프린스턴 고등연구소 최초의 종신 교수가 되었다. 당시 그의 나이 29세였다. 그곳에서 아인슈타인은 우주를 통일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통일장 이론’을, 괴델은 신을 수학적으로 증명하고자 하는 연구에 빠져 별 다른 성과를 내지 못할 때, 가장 활발하게 연구 논문을 발표한 사람이 폰 노이만이었다. 그는 일생 순수수학 논문 60편을 발표했다. 하지만 그의 관심은 순수 학문에만 머물러 있지 않았고, 응용수학 논문 60편과 물리학, 경제학 등 다양한 분야의 논문 30편도 발표했다. 그렇다고 그가 연구만 하는 모범생은 아니었으며, 오히려 사교적이고 자유분방했다. 주변 사람들과 자주 파티를 열어 즐겼으며, 음악을 크게 틀어놓고 연구하고, 페라리 스포츠카를 타고 다녔다. 그 무렵 폰 노이만은 워낙 유명해 IBM, GE 등 대기업들, 또 군과 CIA를 대상으로 한 컨설팅 업무로 경제적으로도 부유했다.
폰 노이만은 1943년 핵무기를 개발하는 ‘맨해튼 프로젝트’에 참여해 일했다. 그러는 동안에도 친구이자 경제학자인 모르겐슈테른과 함께 쓴 ‘게임이론과 경제 행태’를 이듬해 출간해 게임이론 발전에 본격적인 시동을 걸었다. 이후 수소폭탄 실험 참가 때 피폭해 골수암과 췌장암에 걸렸다. 그는 죽음을 앞두고 가톨릭에 귀의하고 연구에 몰입했다. DNA와 RNA 구조를 최초로 예견하고 생물체와 기계의 결합 연구를 통해 인공지능 연구의 창시자가 되었다. 하지만 연구를 완성치 못하고 1957년 53세에 눈을 감았다. 그의 사후에 미완성 연구가 ‘컴퓨터와 뇌’라는 책으로 출간되어 후학들에게 방향을 제시해 주었다.
▲1943년 미 펜실베이니아대에서 군사 목적으로 개발한 초기 컴퓨터 ‘에니악(ENIAC)’의 모습. 계산만 할 뿐 기억 장치가 없었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폰 노이만은 저장된 프로그램으로 데이터를 처리하는 방식을 고안했다. /위키피디아
특허 안낸 ‘폰 노이만 구조’, IT산업 성장에 큰 공헌
‘맨해튼 프로젝트’ 참여 당시, 폰 노이만은 미군이 미사일 등의 탄도, 탄착점, 폭발력 등을 계산하기 위해 초대형 계산기 ‘에니악’을 개발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에니악은 1만8000여 진공관과 계전기 1500개를 장착한 무게 약 30톤의 거대한 기계였다. 그런데 이 초기 컴퓨터는 계산만 할 줄 알았지 기억 능력이 없었다.
폰 노이만은 에니악에 문제가 많다고 보았다. 이 컴퓨터에 일을 시키려면 외부 프로그램 방식이라 새로운 일을 할 때마다 사람들이 수천 개의 배선판 전기회로를 며칠 걸려 다시 세팅해야 했다. 이를 본 폰 노이만은 컴퓨터 공학자도 풀지 못하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획기적 이론을 개발했다. 바로 ‘프로그램 내장 컴퓨터’가 그것이다.
중앙처리장치(CPU) 옆에 기억장치(Memory)를 붙여, 프로그램과 데이터를 저장해 놓았다가 사람이 실행시키는 명령에 따라 작업을 차례로 불러내어 처리하는 개념이었다. 이로써 그는 계산 기능만 있는 멍텅구리에 뇌를 만들어 붙여 ‘논리 기계’로 탈바꿈시킴으로써 컴퓨터에 생명력을 불어넣었다. 이렇게 해서 1950년에 탄생한 에드박(EDVAC)이 최초의 프로그램 내장 컴퓨터였다. 스마트폰을 포함한 현재의 컴퓨터도 이 ‘폰 노이만 구조’가 기본이 되었다.
폰 노이만은 프로그램 내장 컴퓨터에 대한 특허를 내지 않아 연구 업적이 고스란히 인류 공동 자산이 되었다. 그가 특허를 냈다면 IBM 수익의 반은 폰 노이만 몫이라는 이야기가 있다. 덕분에 현대식 컴퓨터는 싸고 빠르게 전파되어 인터넷과 디지털 기술, IT 산업이 빠른 속도로 발전할 수 있었다.
[19] 도시들 운명 바꾼 구겐하임 미술관
“富를 흐르게 하라”... 구겐하임家, 미술관 짓고 자선사업
한국이 철강 산업과 조선 산업 강자로 부상하자 몰락하는 도시들이 있었다. 철강업의 쇠퇴와 함께 배 만드는 일감마저 빼앗겨 쇠락의 길을 걷던 스페인 북부 바스크 지방의 빌바오가 그런 도시였다. 이러한 빌바오를 유명 관광지로 탈바꿈시킨 건 구겐하임 미술관이다. 빌바오시가 1억유로(약 1380억원)를 들여 ‘도시 재생’ 사업의 하나로 유치한 미술관이다.
1997년 미술관이 공개되자 3년간 관광객이 약 4백만명 방문하면서 5억유로 경제적 효과를 도시에 안겨줬다. 빌바오시는 세금으로 1억유로 이상을 거두어 투자금을 조기에 회수했다. 이후 이러한 경제적 효과를 ‘빌바오 효과’ ‘구겐하임 효과’라고 불렀다. 환경오염이 극심했던 공업 도시 빌바오는 구겐하임 미술관을 시작으로 문화 예술 도시로 탈바꿈했다. 미술관 하나가 도시를 살려낸 것이다
▲철강·조선 산업의 쇠퇴로 쇠락하던 스페인 북부 빌바오는 1억유로를 투입해 유치한 빌바오 구겐하임 미술관으로 다시 태어났다. 1997년 10월 개관한 미술관은 3년 만에 400만 관광객을 끌어모으며 5억유로의 경제적 효과를 올렸다. 문화가 도시 발전에 미치는 긍정적 영향을 뜻하는 ‘빌바오 효과’ ‘구겐하임 효과’라는 말이 여기서 나왔다. 빌바오, 뉴욕, 베네치아 등에 미술관을 지은 구겐하임 가문은 “심장이 피를 인체에 흘려 보내듯 부자는 돈을 사회 곳곳에 흘려 보내야 한다”는 유대인 특유의 믿음에 따라 항공 산업과 예술, 자선 사업 등에 깊은 족적을 남겼다. /게티이미지코리아
네르비온 강가의 빌바오 미술관은 미국 건축가 프랑크 게리가 설계했다. 미술관은 커다란 조각 작품을 빚어낸 듯한 모습이다. 항공기에 쓰는 티타늄판이 곡선으로 이뤄진 표면을 감싸고 있다. 두께 0.38㎜의 얇은 티타늄판 3만3000개가 바람 부는 대로 자연스럽게 흔들리며 다채롭게 빛을 반사해 마치 물이 흐르는 듯한 모습을 보여준다. 기둥이 없는 철골 구조는 보는 각도에 따라 다른 형태를 나타내, 해체주의 건축 양식의 대표 사례로 꼽힌다.
▲1847년 미국으로 이주해 광산업과 제련업으로 성공했던 독일·스위스계 유대인 마이어 구겐하임(1828~1905). 1937년 재단을 설립해 맨해튼의 솔로몬 구겐하임 미술관을 세운 솔로몬이 그의 넷째 아들, 베네치아 구겐하임 미술관을 세운 페기가 그의 손녀다. /위키피디아
수많은 미술품을 사 모아 구겐하임 미술관의 토대를 구축한 사람은 페기 구겐하임이다. 그녀의 할아버지 마이어 구겐하임은 독일계 유대인 출신 스위스 시민권자로 1847년 미국 필라델피아로 이주했다. 처음엔 행상으로 시작해 난로 닦는 흑연 광택제와 커피 에센스로 돈을 벌었다. 유럽에서 섬유 제품을 수입해 큰돈을 모았고, 그 돈으로 콜로라도 은광에 투자한 게 대박을 쳤다.
그 뒤 알래스카, 멕시코, 칠레, 앙골라 등으로 광산업과 제련 사업을 확대해 ‘광산왕’이라 할 만큼 성공했다. 마이어는 아내 바르바라와 사이에 쌍둥이를 포함해 아들 8명과 딸 3명을 얻었다. 쌍둥이 중 하나는 병으로 일찍 죽었다, 나머지 아들들은 부친을 도와 막대한 재산을 일구었다.
부자는 인체의 심장 역할을 해야
유대인들은 부(富)를 하느님의 축복이라 여긴다. 하지만 그 부는 하느님이 올바른 곳에 쓰라고 자기에게 잠시 맡긴 것이라는 사실 역시 잘 알고 있다. 이른바 청지기론이다. 따라서 그 돈을 움켜쥐고 있으면 안 된다. 부자는 인체의 심장 역할을 해야 한다고 그들은 생각한다. 심장이 피를 인체 곳곳에 흘려 보내야 인체가 건강을 유지하게 된다. 곧 부자는 갖고 있는 돈을 사회를 위해 흘려 보내야 건강한 사회가 된다고 그들은 믿고 있다. 구겐하임 사람들 역시 모은 돈을 의미 있는 자선사업에 썼으며, 특히 예술 부문과 항공 분야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구겐하임 가문의 자선사업들
맏아들 이삭을 대신해 둘째 대니얼이 1905년 아버지 사업을 이어 받아 가문을 이끌며 항공기와 로켓 산업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많은 대학에 항공 연구소 설립 기금을 지원했다. 셋째 머리(Murry)는 처음에는 섬유류를 수입하다 1881년에 광산 경영과 제련 사업을 승계받았다. 그는 뉴욕 빈민들을 위해 치과 치료를 위한 재단을 설립했다. 넷째 솔로몬은 여러 미술관에 자금을 지원했을 뿐 아니라 나중에는 직접 재단을 설립해 미술관 건립 활동에 헌신했다. 다섯째 존 사이먼은 콜로라도 주지사를 지냈고, 요절한 아들을 추모하는 재단을 설립해 자연과학, 사회과학, 인문과학과 예술 부문에서 탁월한 업적을 낳은 사람들을 포상하고 있다. 여섯째 벤저민은 철강업을 하다 타이태닉 사고 때 구명조끼를 양보하고 의연한 죽음을 택한 신사로 유명하다. 그의 딸이 구겐하임 미술관들에 전시품을 기증한 페기 구겐하임이다. 그녀는 많은 예술가를 후원해 ‘예술가들의 천사’라는 별명을 얻었다.
▲구겐하임 가문의 손녀 페기 구겐하임(1898~1979)은 수많은 예술가를 후원해 ‘예술가들의 천사’로 불렸다. 30년간 살았던 이탈리아 베네치아 저택 안의 페기. 천장에 매달린 것은 알렉산더 콜더의 조각, 뒤로 보이는 것은 파블로 피카소의 그림이다. 이 저택은 그대로 베네치아 구겐하임 미술관이 됐다. /게티이미지 코리아
가문의 미술가 지원 사업은 넷째 솔로몬 구겐하임이 시작했다. 그는 자선사업을 하기 위해 1919년에 경영 일선에서 은퇴하고 1920년부터 다양한 근대 미술 작품을 수집했다. 자신의 미술품 컬렉션을 여러 도시에 임대 전시하기도 했다. 소장품이 늘어나며 자체 미술관 건립 필요성을 느꼈다. 1937년엔 솔로몬 구겐하임 재단을 설립해 뉴욕시와 미술관 건립 계획을 세우게 된다. 당시 최고 건축가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에게 설계를 의뢰해 추진했다. 부지 선정 등 여러 문제로, 1943년 설계한 건물은 솔로몬 사후 10년이 지난 1959년에야 완성됐다.
솔로몬 구겐하임 재단은 맨해튼의 솔로몬 구겐하임 미술관, 스페인 빌바오와 독일 베를린의 구겐하임 미술관과 이탈리아 베네치아의 페기 구겐하임 미술관을 운영하고 있다. 필자는 뉴욕 근무 시절 맨해튼 구겐하임 미술관을, 마드리드 근무 시절 빌바오 구겐하임 미술관을, 밀라노 근무 시절 베네치아 구겐하임 미술관을 관람할 기회가 있었다.
뉴욕 센트럴파크 오른편 89번가에 있는 맨해튼 구겐하임 미술관의 외양은 거대한 달팽이를 닮았다. 직사각형 주변 건물들과 대비되어 그 독창성이 두드러진다. 위로 올라갈수록 지름이 넓어지며, 계단이 없는 나선형 복도를 걸어가면서 작품을 관람할 수 있게 설계됐다. 2019년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으로 지정됐다.
베네치아 구겐하임 미술관은 맨해튼과 빌바오 구겐하임 미술관과 달리 아름다운 정원이 있는 아담한 단층 건물이다. 페기 구겐하임이 30년간 살았던 저택 ‘Palazzo Leoni’(사자들의 궁전)를 개조해 만들었다. 그의 취향과 그가 사랑했던 정취가 오롯이 묻어나는 곳이다. 그가 직접 수집한 피카소, 샤갈, 몬드리안, 칸딘스키 등의 현대 미술품 300여 점을 전시한다.
페기가 이렇게 미술품을 사 모으고 이를 대중에게 보여주기 위해 미술관을 건립하는 것은 그녀 나름의 철학 덕분이었다. 그녀는 투기장이 된 뉴욕 미술 시장을 보며 “투자 목적으로 그림을 사니 감상은커녕 창고에 넣어두기만 한다”고 한탄하며 “우리가 가진 위대한 보물을 보존해 대중에게 보여줄 의무가 우리에게 있지 않은가”라는 말을 남겼다.
전쟁의 광란 속 현대 미술을 지킨 페기 구겐하임
페기의 아버지 벤저민은 어린 딸의 고사리 손을 잡고 미술관을 데리고 다니곤 했다. 그러던 아버지가 타이태닉 사고로 황망히 떠나자 페기는 눈썹을 다 미는가 하면, 가족의 반대에도 서점에서 일을 했다. 서점 일을 하며 유럽 현대 예술과 사상에 눈떴다. 페기는 22세에 250만달러(현 시세 3410만달러)를 상속받았으며 신탁을 통해 매년 2만2500달러를 벌었다. 그녀는 당대 예술가들의 활동지인 파리로 갔다. 파리에서 결혼 실패 후 런던으로 건너가 화랑을 열었다. 2차 대전이 발발하자 많은 미술 수집가가 미국으로 탈출했지만 그녀는 오히려 파리로 들어가 매일 한 점 이상 작품을 사들였다. 그녀는 사재를 털어 유럽 예술가들의 망명도 도왔다. 페기가 도운 사람 중엔 마르크 샤갈, 이브 탕기, 막스 에른스트 등이 있었다. 나치의 공세가 거세지자 페기도 1941년 그림들을 이불보 사이에 넣어 미국으로 돌아왔다.
[프리다 칼로, 잭슨 폴록... 현대미술의 스타들 발굴]
페기는 뉴욕에 ‘금세기 미술 화랑(The Art of This Century Gallery)’을 열고 작품을 판매해 예술가들을 지원했으며, 자신도 거부가 되어 고가 미술품을 계속 수집할 수 있었다. 그녀는 새로운 미술가를 발굴하고 알리는 데도 열성적이었다. 페기가 연 ‘여성 작가 31인 기획전’을 통해 멕시코의 프리다 칼로가 미국 시장에 진출했다. 그 뒤 개최한 한 신인 공모전에는 미술관 목수가 그림을 출품했는데, 그녀는 이 무명 화가의 재능을 알아보고 작업 스튜디오를 마련해주고 매달 생활비를 후원하며 개인전도 열어줬다. 그렇게 탄생한 현대 미술의 스타가 잭슨 폴록이다. 페기는 폴록을 발굴해 후원한 것이 자기 인생의 가장 큰 성취라고 회고했다. 그녀는 2차 대전이 끝나자 유럽으로 돌아가 베네치아에 정착해 30여 년을 보냈다. 1976년 소장품 전부를 구겐하임 재단에 기증하고 눈을 감은 뒤, 자신의 집(현 베네치아 구겐하임 미술관) 정원에 묻혔다.
[20] 금융 명문 로스차일드 <상> 국제 자본가의 탄생
로스차일드, 나폴레옹 경고에도 대출사업 강행... 국제적 금융가 급부상
근대 이후 세계 역사를 이끌어온 힘은 왕 등 정치 세력이 아닌 상인과 금융 세력으로부터 나왔다. 실제로 세계사의 전환점이라 일컫는 네덜란드의 중상주의 발흥, 영국의 산업혁명과 전파, 신대륙의 눈부신 성장 등은 상인과 금융업자의 역사로, 특히 유대인에 의해 주도된 역사라는 사실을 부정할 사람은 드물 것이다.
로스차일드 가문은 지역 대부업 수준의 금융업을 온갖 혁신적인 아이디어로 ‘글로벌’ 금융산업으로 바꿔놓았다. 이들은 정보를 토대로 세계를 하나의 금융권으로 묶었고, 신속한 정보를 활용해 돈을 벌었다. 이렇게 축적한 천문학적인 자본과 저금리로 산업혁명을 세계로 전파했으며, 세계 각국에 금본위제를 확장시켰다. 로스차일드 가문이 이끈 금융자본주의의 역사를 살펴보는 일은, 금융경제의 흐름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3회에 걸쳐 알아본다.
▲하층민 유대인 상인이 독일 헤센 공국의 궁정 재정책임자에 오르는 순간 - 독일 프랑크푸르트의 게토에서 성장한 마이어 암셀 로스차일드는 고화폐 거래와 대부업으로 시작해 유럽의 전쟁통에 왕실과 귀족들의 신임을 얻어 환전 사업으로 가문의 기틀을 놓았다. 헤센-카셀 공국의 군주 빌헬름이 마이어 암셸 로스차일드에게 궁정 재정을 맡기는 모습을 묘사한 그림. 독일 유대인 화가 모리츠 다니엘 오펜하임의 19세기 작품, 영국 버킹엄셔 애스코트 이스테이트 컬렉션, 내셔널 트러스트 소장. /위키피디아
고물상으로 시작한 첫 사업
유대인 이야기의 사실상 클라이맥스는 로스차일드가(家)에서 시작된다. 이전까지는 스페인계 세파르디 유대인들이 주도해 왔다면, 로스차일드가 이후로는 독일계 아슈케나지가 유대인 사회를 주도하게 된다. 프랑크푸르트 게토의 마이어 암셀 로스차일드가 본격적으로 국제 금융업에 뛰어든 것은 18세기 말이었다. 당시 프랑크푸르트 유대인 집단 거주지 게토에는 150명 정도 살 수 있는 면적에 3000명 넘는 유대인들이 우리에 갇힌 가축처럼 살고 있었다. 마이어는 어려서부터 명석해 열 살 때 랍비양성학교에 입학했다. 그러나 부모가 모두 천연두에 걸려 일찍 죽는 바람에 열두 살 때 학업을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3년간의 랍비 교육은 그를 세계적 금융업자로 우뚝 서게 만든 지혜의 원천이었다. 마이어의 친구들은 대부분 랍비였다. 당시 랍비는 항상 주변 공동체 랍비들과 종교적인 의문점이나 정보를 교환하는 일이 생활화된 정보의 집합처였다. 정보는 곧 힘이자 돈과 직결되었다.
졸지에 소년 가장이 된 그는 외삼촌의 도움으로 하노버의 오펜하이머 은행에서 일하면서 동생들에게 매달 생활비를 부쳤다. 그는 금융업을 통해 5년간 세상을 배운 후 고향에 돌아와 게토에서 고물상을 시작했다. 당시 가게 앞에는 붉은 방패(독일어로 로트칠드)가 걸려 있었는데, 이것의 영어식 발음이 로스차일드였다. 유대인은 원래 성(性)이 없었다. 마이어는 이를 자기의 성으로 삼았다.
▲로스차일드 가문의 자택 - 로스차일드 가문의 출발점이 된 독일 프랑크푸르트 ‘유덴가세(유대인의 골목)’ 주택의 1890년 모습. /게티이미지코리아
18세기에 우편 판매 마케팅 도입
그 무렵 각국 화폐 수집을 취미로 하는 귀족이 많았는데 그들은 고(古)화폐에도 관심이 많았다. 마이어는 은행원 시절 쌓은 지식으로 부랑아들이 쓰레기더미를 파헤쳐 들고 오는 동전 중에서 희귀한 고화폐를 분별해 낼 수 있었다. 그는 귀족들에게 희귀 화폐를 팔러 다녔지만 문전박대를 당하기 일쑤였다. 그는 궁리 끝에, 옛날 동전 목록과 카탈로그를 정성껏 만들고 그 위에 향수를 뿌려 흥미를 보일 것 같은 부호들에게 속달우편으로 보냈다. 귀족들은 향기 나는 카탈로그를 받아보자 신기해했다. 그러자 상품을 갖고 방문해달라는 회신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그가 우편주문으로 고화폐를 판매한 사실이다. 그 옛날에 이미 ‘다이렉트 메일’(DM) 마케팅을 시작한 것이다.
그에게 기회가 찾아왔다. 마이어는 헷센-카셀 공국의 군주 아들인 빌헬름과 직접 고화폐 거래를 트게 되었다. 당시 헤센 영주는 용병부대를 외국에 보내 많은 돈을 벌어 대부업을 하고 있었다. 이후 마이어는 1769년 빌헬름으로부터 ‘궁정 어용상인’으로 지정받았으며, 자기 가게에서 세금을 걷는 대행업 허가도 얻어 큰 성공을 거뒀다. 마이어는 궁정상인이 된 이듬해에 16세의 신부 ‘구텔레’를 아내로 맞아 19명의 자녀를 얻었다. 그 가운데 9명은 전염병으로 일찍 죽어, 슬하에 5명의 아들과 5명의 딸을 두었다. 유대인의 관습에 따라 딸들은 사업에서 배제되고 아들 5명이 아버지 사업에 동참했다. 마이어는 아들들에게 다섯 개 화살의 예를 들며 어떠한 경우에도 단결할 것을 가르쳤다. 화살 하나하나는 부러트리기 쉽지만 다섯 개를 한꺼번에 부러트리기는 힘들다는 사실을 강조했다. 이후 다섯 개의 화살 묶음이 로스차일드 가문을 상징하는 이미지가 되었다.
명품 거래부터 채권·환전까지 맡아
이때 마이어에게 또 다른 기회가 찾아왔다. 그는 1776년 빌헬름이 용병 파견 대가로 받은 영국은행 어음을 맨체스터 섬유업체에 결제해야 할 금액과 연계시켰다. 이로써 빌헬름과 로스차일드는 서로 환전수수료를 아낄 수 있었다. 이렇게 마이어의 국제 어음결제가 시작됐다. 미국 독립전쟁 때 어음할인 규모가 커지며 큰 수익을 거뒀다.
빌헬름이 1785년 ‘빌헬름 9세’로 헤센공국 군주가 되자 그는 막대한 유산과 용병 장사 수입 대부분을 채권 거래에 투자했다. 로스차일드는 커피, 담배, 영국 직물 등 귀족들이 좋아하는 명품 거래로 부를 축적해 나갔으며, 1789년에는 비교적 큰 금액 채권의 할인 업무도 하게 되었다. 그의 아들들 역시 빌헬름과 은행들을 연결하는 중개인으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1789년 프랑스 대혁명이 일어나 유럽 전역이 전쟁에 휩싸였다. 마이어는 전쟁 통에 오히려 사업을 더 확대할 수 있었다. 헤센-카셀 공국의 재정 관리인이 된 마이어는 영국이 용병에게 지급하는 급여와 비용도 관리하면서 환전 사업을 국제적으로 키웠다. 당시 유럽 왕실과 귀족들 절반이 빌헬름의 고객이었다. 누군가에게 대출해준다는 것은 금화나 은화를 마차로 채무자에게 운반해주어야 하고, 매월 대출 이자 역시 받아와야 했다. 당시에도 환어음이 있었으나 은행 간 교환 절차가 복잡하고 시간이 많이 걸렸을 뿐 아니라 환전 수수료도 보통 10% 내외로 비쌌다. 로스차일드 형제들은 빌헬름의 일들을 도맡아 자기 일처럼 처리했다. 이후 마이어의 사업은 번창해 멀리 암스테르담, 파리, 런던 등 외국까지 거래가 확대되었다.
▲“다섯 아들이 힘 합쳐라” 5개 화살의 가문 문장 - 로스차일드 가문의 문장. ‘로스차일드’라는 성(姓)의 유래가 된 ‘붉은 방패’, 아버지가 다섯 아들에게 힘을 합쳐 살아가라고 가르치며 만든 다섯 개의 화살 묶음 그림 등이 그려져 있다. /위키미디어 커먼스
마침내 자신의 성을 딴 은행 설립
그 무렵 마이어는 빌헬름의 대출 업무를 처리하면서 차제에 ‘로스차일드 은행’을 설립했다. 당시 나폴레옹은 프로이센 정복 후 오스트리아를 압박하기 위해 전 독일에 오스트리아와의 거래를 중단시켰다. 하지만 빌헬름은 몰래 오스트리아와 돈 거래를 시도했다. 대형 은행들은 문제가 생길 것을 우려해 빌헬름의 제의를 거절했다. 로스차일드 은행이 그 일을 떠맡아 이를 계기로 국제적인 금융가로 부상했다. 다섯 아이들은 유럽 전역에 산재한 빌헬름의 채권 심부름을 위해 뛰어다니며 세상 돌아가는 국제 정세와 전쟁 판도를 유심히 살펴보면서 중요한 도시마다 자신의 일을 봐줄 하수인을 심어두어 정보 수집과 업무 편의를 도모했다.
마이어의 사업 변화에 프랑스 혁명만이 아니라 영국의 산업혁명 역시 큰 영향을 미쳤다. 빌헬름의 주요 고객이 영국이라 마이어는 채권 회수 관계로 영국을 몇 차례 방문했는데, 그는 싼값에 대량 생산되는 영국 면직물에 주목했다. 당시 영국산 직물이 유럽 대륙에서 가장 이윤이 많이 남았다. 그는 무역업도 직접 하기로 마음먹었다. 1798년 3남 네이선에게 제법 큰돈을 주어 맨체스터로 보냈다. 영국 직물의 직수입을 시도한 것이다. (계속)
유대인은 왜 돈을 잘 벌었나
대부분 문맹이었던 시절, 성경 읽으려 의무적 글 공부... 무역·금융업서 유리해져
유대인들은 서기 66년과 132년 두 번이나 로마제국에 반란을 일으켜 진 뒤, 민족 전체가 가나안에서 쫓겨나 뿔뿔이 흩어지게 된다. 이를 이산(離散), 곧 디아스포라라 부른다. 이후 디아스포라는 유대인 공동체를 의미했다. 로마제국과 싸우면서 국민의 절반 이상이 절멸하는 통에 사제 계급을 포함한 다른 종파들은 모두 소멸되고 바리새파만 살아남았다. 이때부터 유대교는 사제가 없는 평신도 종교가 되었다. 로마제국은 가나안에서 유대인의 흔적을 지우기 위해 지명 자체를 아예 가나안에서 팔레스타인으로 바꾸었다.
그 뒤 세계 곳곳에 흩어진 유대인 공동체들에는 종교적 의문점이 생겼을 때 공동체 랍비들 간에 편지로 의견을 나누는 전통이 생겼다. 이후 편지에는 상품 정보와 환시세 그리고 서로에게 도움이 되는 여러 정보 등이 포함되었고, 랍비들은 이 정보를 필요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그 뒤 장이 서는 곳에서 다른 지역 상품과 환시세를 훤히 꿰고 있는 사람은 유대인뿐이었다. 유대인들은 이를 이용해 무역과 환전업으로 많은 돈을 벌었다. 그리고 그들의 편지가 오가던 길이 상품 교역의 통상로가 되었다. 이렇게 유대인은 고대로부터 정보가 큰돈이 된다는 사실을 알았다.
당시는 대부분이 문맹인 시절이었는데, 유대인들은 사제 없는 종교를 지켜야 했기 때문에 남자들은 성경을 읽기 위해 모두 의무적으로 글을 배웠다. 이것이 무역과 금융업에서 그들의 독점적 지위를 더욱 강화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