餘談3/ 2021.05.25 내로남불링, 내로남불리시, 내로남불러…- 신달자(시인)의 이야기
餘談3/ 2021
05.25 내로남불링, 내로남불리시, 내로남불러…
영어사전에 올라갈 판
제 部族 잘못엔 눈감는 부족주의는 前근대 정치
우리 편만 무조건 감싸면 마피아·야쿠자나 마찬가지
대통령은 부족장이 아니다
내로남불, 집권 세력의 표리부동과 허위의식을 꼬집는 한국 대중의 촌철살인이다. 온라인 국어사전엔 이미 올라갔다. 웹스터 영어사전에 등재될 가능성도 있다. 얼마 전 뉴욕타임스는 ‘naeronambul’을 한국 정치를 읽는 중요한 키워드로 제시한 바 있다.
내로남불에 딱 들어맞는 영어식 표현은 무엇일까? 한평생 시를 써온 60대 중반 미국인 은사께 여쭸다. 은사께선 온종일 생각해 보았지만 ‘자기 편의적 위선(self-serving hypocrisy)’ 정도밖엔 안 떠오른다 하셨다. “영어의 어떤 단어도 내로남불만큼 날카롭게 정치인의 표리부동을 꼬집지 못한다”며 “앞으로 ‘내로남불링(naeronambuling)’하는 ‘내로남불리시(naeronambulish)’한 녀석을 보면 ‘내로남불러(naeronambuler)’라 부르겠다!” 하셨다. 시인의 위트에 웃음을 터뜨리면서 이 단어가 영어권 정치학 교과서에 실릴 수도 있겠다 싶었다.
실제로 게리맨더링(gerrymandering·선거구 변경), 필리버스터(filibuster·의사 진행 방해), 머드슬링잉(mudslinging·흑색선전), 머크레이킹(muckraking·사생활 캐기) 등 영미에서 흔히 쓰는 정치 용어는 모두 내로남불처럼 구체적 정치 상황에서 인구에 회자됐던 풍자와 해학의 신조어였다. 내로남불은 더 널리 사용될 가능성이 있다. 그 한마디에 근현대 정치사의 가장 중요한 문제가 집약돼 있기 때문이다.
근대국가 형성 과정은 낱낱이 쪼개져서 대립·투쟁하던 부족 단위 지방 권력을 해체하고 통일국가로 재편하는 거대한 통합의 역사였다. 그 과정은 필연적으로 수많은 전쟁을 야기했다. 유럽의 근대국가 형성 과정은 전쟁의 연속이었다. 나폴레옹 전쟁(1803~1815)에서만 650만명이 사망했다. 중국의 근현대사 역시 지속적 군사화 과정이었다. 1912~1928년의 짧은 기간에만 군벌 1300여 명이 출현해 대규모 전쟁을 140여 회 벌였다. 아직 진행 중인 아프가니스탄 전쟁도 지역 맹주들 사이의 부족 전쟁을 종식하는 과정이다.
전쟁으로 병합된 여러 지역 다문화의 인간들을 새로운 국가의 국민으로 만들려면 보편법 확립이 급선무다. 지역·부족·인종·성별·신분의 차이를 넘는 보편법이 없다면 근대국가란 있을 수 없다. ‘법 앞의 평등’이야말로 근대국가를 지탱하는 최고의 헌법적 가치다. 반면 신분·성별·가문·지역·직종으로 나뉜 전근대 사회에선 전통과 관습이 더 중시됐다. 공평무사한 보편법 확립보다는 “우리 가문, 우리 혈족, 우리 지역”이 더 우선시됐다.
전근대 부족 전쟁에 참여한 부족의 성원은 오로지 부족의 이익에 복무했다. 설령 잘못이 자기 부족에 있다 해도 집체적 생존을 위해 적대적 부족을 향해 총칼을 휘둘렀다. 부족 단위의 공동 생활에선 인류적 보편 도덕보다 부족의 계율, 부족장의 명령이 더 중시될 수밖에 없다. 조직의 비밀을 절대 발설하지 말라는 마피아의 ‘오메르타(Omertà·묵계)’나 오야붕에게 무조건 복종하는 야쿠자의 ‘기리(義理)’도 마찬가지다. 결국 내로남불의 뿌리는 전근대 부족주의와 암흑 세계의 불문율이다.
지난 4년 대한민국의 집권 세력은 내로남불을 일삼아 왔다. 집권 세력 개개인의 사적 일탈보다 더 큰 문제는 자기편 내로남불러들은 무조건 다 감싸주는 대통령의 내로남불링이다. 부족민의 상처를 핥아주는 부족장, 대자(代子)를 안아주는 마피아의 대부(代父), 꼬붕의 뒷배를 봐주는 오야붕의 모습과 과연 다른가? 어떻게 대한민국의 집권 세력이 그토록 내로남불리시할 수 있나?
자신들만 민주 세력이라 믿는 허황된 선민의식, 스스로 ‘진보적’이라 여기는 오도된 자기 확신, 적대 세력과 사생결단한다는 낡은 운동권의 망념 때문이다. 마피아적 집단주의, 파당적 진영 논리에 빠져 있기 때문이다. 현 집권 세력의 상습적 내로남불링은 ‘법 앞의 평등’을 훼손하는 반민주적 헌법 짓밟기다. 특히 통치자의 내로남불링은 법률을 도구 삼아 법치를 파괴하는 노골적 독재 행위다. 대한민국은 그들만의 부족국가가 아니다. 법의 지배를 받는 잘 발달된 자유민주주의 국민국가다.
어쩌다 ‘naeronambul’이 K정치의 키워드가 됐나? 해결책은 단 하나, 민주공화국의 시민들이 나서서 ‘내로남불 정권’을 무너뜨리고 공명정대한 ‘내불남불 정권’을 세우는 길밖에 없다. 그래야만 ‘naeronambul’이 국제정치학 교과서에 실릴 때 법치 재건의 아름다운 고사로 기록될 수 있다.
조선일보 송재윤 캐나다 맥매스터대 교수·역사학
05.25 돈으로 깨달은 것들
딸이 건넨 봉투에 “네가 무슨 돈을…” 하시던 어머니 함박웃음에
‘행복도 돈이 드네’ 웃던 짠순이 딸, 지인에 돈 빌려줬다 속앓이
청포도·치킨 못 산 장바구니엔 푸성귀… 인생 진리도 돈에 깨닫네
돈이 좋다. 돈이 있으면 맨밥에 김치 올려 끼니를 때우는 대신 요즘 유행하는 로제 떡볶이를 사 먹을 수 있고, 친구가 비싼 밥을 먹으러 가자고 할 때 밥값은 누가 내나 절절맬 필요 없이 화끈하게 한턱 낼 수도 있다. 혹자는 제아무리 돈이 좋다 한들 행복까지 살 수 없는 노릇이라 외치기도 하지만 아니, 나는 분명 보았다.
오래간만에 집에 내려간 딸내미를 시큰둥하게 대하다가도 흰 봉투를 건네받자 함박웃음을 지으시던 내 어머니의 얼굴을. “아유, 네까짓 게 돈이 어디 있다고 이런 걸 줘, 주기는!” 하면서도 봉투를 어루만지며 액수를 가늠해 보시던 내 어머니의 손끝을. 봉투가 두둑하면 두둑할수록 어머니의 미소 또한 환해지는 광경을 이 두 눈으로 똑똑히 목격했으니 그 잘난 행복도 돈으로 살 수 있다고 여길 수밖에. 이러한 까닭으로 돈을 좋아한다. 너무너무 좋아해서 애가 다 탄다. 쥐면 꺼질까 불면 날아갈까 쓰면 당연히 없어지겠지 하는 마음으로 통장에 차곡차곡 넣어두고는 이따금 눈으로 더듬기만 한다. 이상, 짠순이라는 소리를 길게도 했다.
/일러스트=이철원
그렇게 하루하루 짜디짜게 살아가던 어느 날, 무척이나 가까운 사람으로부터 곤란한 부탁을 받게 되었다. 다름 아닌 돈을 빌려 달라는 것이었다. 그가 청하는 액수는 나의 한 달 치 생활비에 육박했다. 돈을 빌려주면 사람도 잃고 돈도 잃는다는 사실을 익히 들어 오기는 했지만 두말 않고 계좌번호를 물었다. 언제 돌려 달라는 당부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까지 하지 않아도 알아서 갚을 사람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세상에 예외란 없었다. 그 뒤로 펼쳐진 상황은 늘어놔 봤자 입만 아프니 생략하겠다. 간단히 말하자면 내 돈 갚을 생각은 않고 자기 할 건 다 하고 다녀서 돈 빌려준 사람 복장 뒤집어 놓는 그 뻔한 얘기 말이다. 처음에는 부글부글 속이 끓어올랐다. 저럴 돈이 있으면 내 돈부터 갚아야 되는 거 아니야? 끓던 속이 차차 가라앉으면서는 그 사람이 염려스러웠다. 혹시 맨정신으로는 견디기 힘든 일이 있어서 돈이라도 펑펑 써대면서 시름을 달래고 있는 걸까? 그리고 결국에는 내가 걱정되기 시작했다. 아이 씨, 다음 달 카드값 어떻게 내지?
마트에 가면 장바구니에 청포도부터 담곤 했었는데, 먹으면 좋지만 안 먹어도 그만인 청포도를 사는 일이 나의 유일한 사치였는데, 한 푼이 아쉬우니 그 앞을 그냥 지나친다. 안 그래도 짜게 사는 인생, 청포도 한 송이만큼의 달콤함조차 허락되지 않는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섧다. 빈 장바구니를 팔에다 끼우고 마트 안을 휘적휘적 걸으며, 돈을 빌려 가는 사람은 많은데 갚는 사람이 드문 이유에 대해 생각해 본다. 그러나 아무리 헤아려 보아도 답은 나오지 않고 어쩜 그렇게 뻔뻔하게 굴 수 있을까 하는 의문만 깊어진다. 다만 확실한 것은, 나라고 무어 특별한 사람이 아니므로 나 역시 언젠가 그 뻔뻔한 인간이 되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다는 사실이었다. 그리하여 다짐해 본다. 남에게 아쉬운 소리 할 상황을 애초에 만들지 않겠노라고. 멀리에서 풍겨오는 치킨 냄새에 콧구멍이 분당 백이십 회의 속도로 벌름거림을 느끼며 장바구니에다 푸성귀를 담는다. 현대판 자린고비가 따로 없구먼. 내가 이다지도 궁상떨고 있다는 걸 그이는 알까? 허허 쓴웃음이 났다.
그로부터 반년이 지났다. 불우 이웃에게 기부한 셈치고 시원하게 잊으려는 참이었다. 그런데 그가 먼저 돈 얘기를 꺼내 왔다. 잠자코 기다리면 해결될 문제였는데 쓸데없이 끌탕을 하며 저이를 원망했나 싶어 미안한 마음이 들려는 찰나,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가 이어졌다. 꼭 같은 금액을 한 번만 더 빌려줄 수 없겠냐는 것이었다. 한숨이 절로 새어 나왔지만 사정사정하는 그의 목소리가 어찌나 간절한지 거절할 재간이 없었다. 저번에 빌려 갔던 돈까지 합쳐 이때까지는 꼭 갚아 달라고 신신당부하는 나에게 “응응, 고마워” 하며 멋쩍은 웃음을 웃는 그였다. 약속한 날로부터 한참이 지났다. 그러나 그에게서 연락은 오지 않았다. 도대체 무슨 사정이 있어 깜깜무소식일까 싶었는데 여기저기 놀러 다니느라 바쁘신 모양이었다. 돈을 빌려주면 사람도 잃고 돈도 잃는다는 이야기가 또다시 떠올랐다. 전에는 그 말이 귓등으로도 들리지 않더니만 이제야 뼛속 깊이 새겨진다. 인생의 진리도 돈을 내고 나서야 깨달을 수 있는 것이로구나. 역시 돈이 좋긴 좋다.
조선일보 이주윤 작가
06.02 흔하다고 가치 없나? 스마트폰은 이 시대 국보
▲휴대전화를 뜯어보면 한국 경제사를 알 수 있다. 휴대전화는 우리 시대를 보여주는 훌륭한 문화유산이다. 왼쪽부터 최초 국산 휴대전화, 세계 첫 MP3 뮤직폰, 세계 첫 카메라 내장폰, 세계 첫 TV폰, 세계 첫 손목시계폰. [사진 폰박물관]
스마트폰은 이 시대의 부처다. 하루 24시간 우리와 함께한다. 스마트폰이 없는 세상은 이제 상상하기 어렵다. 서양화가 황주리(64) 개인전 ‘그대 안의 붓다’(8일까지 서울 노화랑)에도 스마트폰을 든 부처가 여럿 등장한다. 캔버스·돌·접시·시계 등에 먹고, 자고, 사랑하고, 기도하는 현대인의 하루하루를 담은 그림 곳곳에 황 작가는 스마트폰을 슬쩍 끼워 넣었다.
비디오 아티스트 백남준(1932~2006)도 생각난다. 1960년대부터 ‘TV 부처’ 연작을 내놓은 그에게 텔레비전이 부처라면, 21세기 호모 모빌리쿠스(Homo Mobilicus)에게 스마트폰은 부처와 다름없다. 한낱 전자부품 뭉치인 스마트폰이 우리를 기쁘게, 화나게, 슬프게, 즐겁게 하고 있다.
경기 여주에 세계 유일 폰박물관
이병철씨, 3000여점 모아서 기증
통신강국 한국의 발자취 보여줘
지속적인 유물 수집·연구 숙제로
▲서양화가 황주리가 그린 '그대 안의 붓다'.
스마트폰의 역사는 길지 않다. 휴대전화 원조로 꼽히는 무선 송수신기 SCR-536(일명 핸디토키)을 미국이 선보인 건 1941년, 올해로 꼭 80년이 됐다. 국내에 휴대전화 서비스가 시작된 건 서울올림픽이 열린 1988년이다. 이전엔 안보를 이유로 이동통신을 민간에 널리 개방하지 않았다. 국산 첫 휴대전화는 삼성에서 미국 제품을 가져다 개발한 SH-100이다. 올림픽을 맞아 우리 기술력을 보여주려고 했다.
하지만 이 전화기는 한국에서 구할 수 없다. 올림픽 개막식 당일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위원 47명에게만 증정됐기 때문이다. 일반인용(SH-100AㆍSH-100S)은 이듬해 출시됐다. 당시만 해도 휴대전화를 쓰려면 무선국 허가를 받아야 했다. 주민등록증만한 허가증이 필요했다. 88년 우리나라에서 처음 쓰인 외국 휴대전화가 500만원 대였는데, 국산 첫 휴대전화는 165만원이었다.
경기도 여주시에 세계 최초, 세계 유일의 별난 박물관이 있다. 폰박물관이다. 현재 시립으로 운영되지만 박물관 산파는, 아니 산모는 이병철(70) 전 폰박물관장이다. 20여 년 수집한 휴대전화 3000여 점을 2016년 여주시에 기증했다. 폰박물관에서 그를 만났다.
이씨는 2000년부터 휴대전화를 수집하기 시작했다. 집에 보관해온 아날로그 휴대전화가 어느 날 눈에 띄지 않았다. 서울 황학동 벼룩시장을 뒤졌으나 똑같은 모델을 찾을 수 없었다. “이것도 산업문화 유산인데, 놔두면 다 없어지겠네.” 정신이 번쩍 들었다. 있는 돈 없는 돈 들여 휴대전화를 모았다. 각종 잡지·인터넷 정보를 찾으며 휴대전화 역사와 발전도 공부했다. 2008년 여주 자택에 사립박물관 형태로 처음 열었다.
“2007년 국산 첫 상용 휴대전화 SH-100A를 구하며 박물관 설립을 결심했습니다. 무려 여섯 번 시도한 끝에 손에 넣었어요. 한국에 없는, 외국에 수출한 국산 휴대전화와 외국산 전화도 빠뜨리지 않으며 양과 질 모두 세계에 하나밖에 없는 박물관을 열었습니다.”
이씨는 현대판 고고학자를 자부한다. 땅속에 묻힌 오랜 유물을 발굴하는 사람만이 고고학자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른바 산업고고학이다. 지금은 너무 흔해, 쉽게 버리는 것도 시간이 흐르면 물시계·해시계처럼 국보·보물이 될 것으로 믿는다.
“현대인을 이해하려면 메소포타미아 점토판이 아니라 산업혁명 이후의 기계부터 알아야 하지 않을까요. 선진국에선 다양한 산업기술박물관을 만들어 공장·철도·자동차 등 산업유산을 보존합니다. 반면 우리는 광복 이후 산업유산 가운데 무려 45%가 사라졌어요. 80년대 이후 우리 삶을 가장 크게 바꾼 게 휴대전화입니다. 단군 이후 우리가 만든 물건 가운데 세계인이 가장 많이 쓰는 게 휴대전화죠. 우리가 1등이니 가장 한국적인 것이요, 세계인이 보편적으로 쓰니 가장 세계적인 것 아닌가요.”
/20세기 후반 최고 발명품인 휴대전화의 모든 것을 정리해온 이병철 전 폰박물관장. 박정호 기자
/경기도 여주 폰박물관 바깥에 세워진 조형물. 왼쪽부터 스마트폰 시대를 활짝 연 아이폰 2G, 원조 휴대전화 핸디토키, 세계 첫 MP3 뮤직폰. 박정호 기자
이씨는 유물만 모은 게 아니다. 각 물건의 내력을 공부했다. 기계 뒤에 숨어 있는 사람들의 땀과 정성을 캐냈다. 열 손가락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 없듯, 휴대전화 하나하나 사연이 없는 게 없다. 2년 전 그가 낸『수집가의 철학』은 전화로 본 한국 현대사쯤 된다.
일례로 그는 2008년 우연히 인터넷에서 삼성 폴더형 SCH-800 회로기판에 적힌 ‘할 수 있다는 믿음’ 일곱 글자를 발견했다. 1998년 IMF 외환위기 때 나온 기기다. 그가 동일 모델을 분해해 보니 역시 같은 문구가 있었다. “처음에는 외환위기 극복 의지로 이해했습니다. 그런데 수출품에는 해당 글귀가 없었어요. 그 미스터리를 풀어봤습니다. SCH-800보다 2년 전 먼저 출시돼 히트한 모토로라 스타택을 뛰어넘겠다는 무명 엔지니어들의 열정이었어요. 그런 믿음이 오늘날 휴대전화 강국을 만든 힘이 아닐까요. 이후 세계 최초의 최소형 폴더, 듀얼 폴더, MP3 뮤직폰, 카메라 내장폰, 손목시계형 전화, TV폰등을 잇달아 내놓았으니까요.”
이씨가 모은 유물은 감정가 30억원에 이른다. 여주에 앞서 2014년에는 울산시에 2000여 점을 내놓았다. 울산에 들어설 산업박물관에 기증하는 조건이었다. 하지만 정권이 바뀌며 산업박물관 건립은 유야무야 됐다. “울산 기증품은 현재 울산박물관 창고에 있어요. 문화는 정치에서 벗어나야 하는데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세계 10위권 경제국가인 우리의 또 다른 얼굴이지요.”
그는 지난 4월 폰박물관장에서 물러났다. 아무런 조건 없이 기증했으나 박물관에 막상 설립 주체를 기억하는 증표 하나 없는 상황이 안타깝다고 했다. “여주시 요청으로 공채 관장으로 일했어요. 휴대전화 전문가가 없어 앞으로 박물관이 어떻게 운영될지 걱정이 큽니다. 급속하게 진화하는 유물을 계속 구입해야 하는데 예산이 거의 없거든요. 시장이 바뀔 때마다 박물관 정책도 흔들리고요. 이래서야 누가 박물관을 만들어 사회에 기증하겠습니까.”
이씨는 우리 말과 글에도 관심이 많다. 국어사전을 도반(道伴)으로 여겨왔다. 잡지·신문 기자 출신인 그는 시사주간지에서 교열·편집 책임자로 오래 일했다. 우리 말글의 오용을 시대·분야별로 훑은『모국어를 위한 불편한 미시사: 앙꼬빵 곰보빵 빠다빵』도 최근 냈다. 소통 측면에서 스마트폰과 겹치는 부분도 있다.
“스마트폰은 양날의 검입니다. 한국어를 무너뜨리는 역기능도 커요. 글은 인간의 정신과 얼입니다. 문장은 완전해야 하고요. 가장 중요한 게 어휘죠. 실생활에 사용되는 단어가 20만에 이릅니다. 단어 단어의 뉘앙스를 살렸으면 해요. 스마트폰 짧은 메시지로는 구현하기 어렵죠. 독서가 죽으면 좋은 글이 나올 수 없고, 우리 문화도 성숙할 수 없습니다.”
폰 박물관 끄트머리, 전시 공간 일부가 비어 있다. 휴대전화 소개가 2018년에 멈춰 있다. 혹시라도 박물관이 2018년에 정지되는 일은 없어야 할 터다. 세상은 벌써 5G(세대)를 넘어 6G로 달음박질치고 있지 않은가.
고종 전화 덕분에 목숨 건진 백범
/스웨덴 에릭손사 자석식 전화기. [사진 폰박물관]
백범 김구(1876~1949)는 전화 때문에 살아났다? 그렇다. 백범은 1895년 명성황후가 시해되자 일본군 장교를 때려죽였다가 사형 선고를 받았다. 이 사실을 알게 된 고종이 인천 감옥에 급히 전화를 걸어 사형을 면하도록 지시했다. 사형 선고 사흘 전 개통된 한성~인천 전화 덕분에 백범은 목숨을 건졌다.
당시 고종이 사용한 전화기는 스웨덴 통신회사 에릭손이 만든 자석식 전화기(사진)다. 가로 30.4㎝, 높이 78㎝, 두께 22㎝ 벽걸이형이다. 폰 박물관에서 실물을 볼 수 있다. 이병철 씨는 “고종 때 왕실에서 스웨덴제 벽걸이 전화기와 교환기를 썼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스웨덴에서 해당 모델을 구해왔다”고 말했다.
한국인이 처음 전화를 사용한 기록은 1882년 중국 톈진에 신문물을 배우러 간 김윤식의 일기에 나온다. 어화통(語話筒)이라고 썼다. 이후 전화기는 덕률풍(德律風·텔레폰), 전어기(傳語機)로 불렸다. 이씨는 “조선 말기의 풍운은 전화기에도 담겨 있다. 스토리 텔링이 풍성하다”고 했다.
중앙일보 박정호 기자
06월 09일 동·서양 구분 없는 ‘환생’ 이야기…‘영혼불멸’ 종교적 열망의 표현
▲ 환생 이야기는 동서고금을 넘어 이어지고 있다. 왼쪽부터 시계 반대 방향으로 오계선사의 환생으로 전해지는 시인 소동파, 헤르메스 신의 아들로 알려진 피타고라스, 환생과 윤회를 모티브로 한 영화 ‘클라우드 아틀라스’의 모습. 자료사진
환생
색계 어긴 스님, 자진 열반에 든 뒤 시인 소동파로 다시 태어나… 神의 아들이었던 피타고라스는 수많은 生 거치며 살아
우리의 삶과 영혼을 지배하는 환생은 ‘기억’… 애틋, 원망, 미안한 현재의 감정은 오랜 무의식 속에 새겨진 경험의 결과들
환생(윤회)의 이야기는 매혹적이다. 누군가는 진시황릉 병마용갱의 병사와 똑같은 얼굴로 현대 홍콩에 환생해서 고대의 사랑을 반복한다(주윤발과 임청하의 ‘몽중인’). 오래된 문명들은 그 문명 속에서 죽고 태어난 이들을 연결 짓는 기록으로 환생 이야기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불교가 깊이 뿌리내린 동양에서뿐 아니라 서양에서도 그렇다.
동양에서 신비로운 환생의 내력을 가지고 있는 유명한 인물로 시인 소동파를 꼽을 수 있다. 천하제일기서(天下第一奇書)라 일컫는 ‘금병매’는 환생을 키워드 삼아 읽어도 될 만큼 다양한 환생 이야기를 담고 있다.
주인공 서문경은 천하의 악인이지만, 그의 부인 오월랑은 선하며 불심이 깊어 자주 불법 강연을 듣는데, 어느 날 듣는 강연이 바로 저 소동파의 환생 이야기다. 이 이야기는 ‘금병매’와 비슷한 시기에 출간된 풍몽룡의 단편집 ‘유세명언’에도 매우 유사한 형태로 (그러나 보다 자세하게) 수록돼 있다. 이런 사실은 흥미로운데, 풍몽룡은 ‘금병매’의 실제 작가로 추측되는 인물 가운데 하나이기 때문이다(‘금병매’는 봉건사회의 어두운 핵심을 꿰뚫어 본 귀신 같은 천재의 작품이지만, 이 천재는 서양의 위디오니시우스만큼 자신의 정체를 꼭꼭 숨기고 있다).
송나라 영종 황제 시절의 이야기다. 사형사제 관계인 오계(五戒)선사와 명오(明悟)선사는 매우 가깝게 지내며 함께 수행했다. 오계는 주지스님이었으나 설법할 때도, 가르침을 펼 때도 명오와 함께했다. 어느 날 같은 절의 청일 스님은 누군가 산문 앞에 버린 홍련(紅蓮)이라는 갓난아이를 발견해 거두게 된다. 절 안 깊은 곳에 꼭꼭 숨겨서 기르던 이 여자아이는 어느덧 열여섯이 되고, 숨기려 해도 여성의 아름다움을 숨길 수 없게 된다. 어느 날 성장한 홍련을 보게 된 오계는 음심을 못 이기고 그녀를 범하고 만다.
얼마 후 이를 눈치챈 명오가 시(詩)를 지어 넌지시 그를 나무란다. “빨간 연꽃이 어찌 하얀 연꽃만큼 향기로울까?”(김진곤 역) ‘빨간 연꽃’은 물론 오계가 탐낸 ‘홍련’을 가리킨다. 오계는 모든 수행이 무너진 것을 부끄럽게 여기고는 그날로 목욕재계하고 열반에 든다. 깜짝 놀란 명오도, 색계(色戒)를 어기고 죽은 오계가 내세에 고통의 바다에 빠져들어 불법에 귀의하지 못할 것을 염려해, 오계를 뒤쫓아 내세로 가기 위해 바로 열반에 든다. 오계의 환생이 바로 소동파다. 그리고 평생 소동파와 교류하며, 그가 지옥에 빠지는 것을 막고 불법으로 이끈 친구가 명오의 환생인 불인(佛印)선사다. 환생해서도 계속되는, 지독한 사랑이 아니라 ‘지독한 우정’인 것이다.
이 매혹적인 이야기는 ‘금병매’의 결말을 염두에 둔다면 매우 의미심장한 복선으로까지 읽힌다. 주인공 서문경이 죽은 날에 태어난 아들이 효가다. 금나라의 침입으로 오월랑은 아들 효가를 데리고 피란길을 헤매고 있었는데, 그 와중에 보정선사라는 승려가 효가의 출가를 권한다.
오월랑이 하나뿐인 아들이 스님이 돼 속세 버리는 것을 슬퍼하자, 보정 스님은 잠자고 있던 효가의 머리를 지팡이로 짚어 비밀을 보여준다. 갑자기 효가의 또 다른 모습이 나타났는데, 그는 바로 아버지 서문경의 환생이었던 것이다. “효가가 갑자기 서문경으로 변했는데, 목에는 무거운 칼을 차고 허리에는 쇠사슬이 감겨 있었다.”(강태권 역) 효가는 악인 서문경의 환생이기에 구제받기 위해선 불가에 귀의해야 했던 것이다. 효가의 법명은 공교롭게도 환생해 소동파를 구제한 승려와 같은 이름, 바로 ‘명오’로 지어진다. 오계의 환생인 소동파를 명오가 구제했듯, 이번엔 서문경을 서문경의 환생인 효가가 명오가 돼 구제하는 것이다.
서양에서 환생에 관한 본격적인 이야기는 피타고라스로부터 시작한다. 그는 수학의 ‘피타고라스 정리’로 잘 알려져 있지만, 비밀스러운 종교적 공동체를 이끈 인물로도 유명하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제자 헤라클레이데스에 따르면 피타고라스는 헤르메스 신의 아들이다. 헤르메스는 불사 이외에 어떤 부탁이든 들어주겠다고 아들에게 약속했는데, 그는 살아 있을 때와 죽은 뒤의 모든 것을 기억할 수 있게 해달라고 말한다. 그리하여 그는 자신이 거치게 되는 수많은 생을 기억하게 된다. 어느 생에서는 트로이 장수 에우포르보스로 태어나, 미녀 헬레네의 남편이고 아가멤논의 동생인 그리스 영웅 메넬라오스에게 죽는다(‘일리아스’(17권)의 이야기). 그의 창이 메넬라오스의 방패를 뚫지 못한 까닭인데, 메넬라오스는 전쟁이 끝난 후 그 방패를 아폴론 신전에 바친다.
다음 생에서 그는 아폴론 신전에 가서 자신의 창이 뚫지 못해 목숨을 잃게 한 메넬라오스의 방패, 세월이 흘러 부식돼 버리고, 상아로 장식한 부분만 겨우 보존된 방패를 바라본다. 그는 사람뿐 아니라 동물과 식물로도 환생했으며, 또 하데스(저승)에 머물며 고난을 겪기도 했다(식물과 인간을 오가는 환생은 이제 보겠지만, 현대에 이르기까지 계속 반복되는 주제다. 하긴 ‘홍루몽’의 여주인공 임대옥 역시 강주초(絳珠草)라는 식물의 환생이다). 마침내 델로스섬의 어느 어부의 생을 거쳐, 환생의 과정은 피타고라스의 삶에 이른다. 그는 자신의 전생들을 알고 있었을 뿐 아니라, 길에서 얻어맞는 개의 울부짖음을 듣고서 그 개가 죽은 친구의 환생임을 알아보기도 한다. 이런 환생의 이야기는 단적으로 영혼 불멸이라는 종교적 열망의 표현인 것이다.
현대에 와서, 즉 세속화된 세계에 이르러, 서구의 환생은 종교가 아니라 문학의 영역으로 들어와 빛을 발한다. 제임스 조이스나 마르셀 프루스트 같은 작가들의 작품에서 우리는 매혹적인 환생의 이야기를 읽을 수 있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조이스의 ‘율리시스’는 더블린에서 일상적인 삶을 살아가는 주인공들의 단 하루 동안의 의식을 쫓는 작품이다. 몇 가지 주제가 종일 주인공들의 의식에 반복적으로 출현하는데, 바로 ‘환생’도 그렇다. 주인공 블룸에게 아내가 아침부터 묻는다. ‘머템사이코시스(Metempsychosis)’가 무슨 뜻인가요? 이 단어는 바로 고대 그리스인들에게 윤회를 의미한다. “고대 그리스인들이 그렇게 불렀던 거요. 그들은 예를 들어, 사람들이 동물이나 나무로 변할 수 있는 거라고 믿곤 했었지.”(김종건 역)
이런 환생에 대한 사념은 이후에도 계속 이어지는데, 가령 날아가는 새들은, 사람이 나무로 변하는 환생의 이야기를 떠올리게 한다. “나를 나무로 생각하는 거 아니야. 잘 보지 못하니. 새들은 냄새를 맡지 못하나? 윤회(輪廻). 사람들은 슬픔 때문에 누구나 나무로 바뀔 수 있을 거라고 믿고 있지.” 이런 생각의 바탕에는 그리스 신화 다프네 이야기가 자리 잡고 있다. 아폴론에게 쫓기다가 붙잡힐 지경에 이르자 월계수로 변한 다프네 말이다.
프루스트 역시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갑자기 되살아나는 기억을 설명하기 위해 죽은 이가 동물이나 식물로 환생하는 켈트인의 신앙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다. 가령 사별한 이들의 영혼은 나무 안에 사로잡혀 있다가, 우리가 우연히 그 나무 곁을 지날 때 우리와 더불어 살기 위해 우리를 부른다.
이렇게 종교와 문학 사이의 구별 불가능한 영역에서 신비한 환생의 이야기는 자라나 왔다. 환생은 이야기일 뿐일까, 아니면 정말 우리의 삶을 지배하는가. 정말 우리의 영혼을 지배하는 환생이 있다. ‘기억’이 바로 그것이다. 우리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는 것만으로 세상에 대한 앎을 얻진 않는다. 외부의 것들을 보고 듣는 감각적 지각은 늘 우리 내부 기억의 감시를 받으며 이뤄진다. 헤어진 연인을 10년 만에 보게 된다면, 연인에 대한 우리의 지각은 10년 전 기억의 감시를 받으며 이뤄질 것이다. 기억의 감시 속에 현재의 감정은 애틋할 수도, 원망스러울 수도, 미안할 수도 있다. 경험은 새롭지 않고 늘 기억의 환생과 함께 이뤄진다. 우리의 무의식 속에 깊이 새겨진 기억들도 있다. 예컨대 우리가 습득한 언어가 그렇다. 타인이 하는 말을 이해한다는 것은, 언어라는 내 안에 있던 기억의 환생과 더불어 타인의 목소리를 이해하는 것이다.
물론 환생이란 한 개인의 삶을 뛰어넘는 것이다. 기억도 그런가? 그렇다. 개개인은 죽지만, 기억은 개인을 넘어 환생한다. 잠깐 사는 우리는 장구한 과거의 기억을 현세에 비추기 위한 환등기와도 같다. 질 들뢰즈는 ‘차이와 반복’에서 환생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하나의 삶에 대해 말할 수 있는 것은 복수의 삶에 대해서도 타당하다…하나의 삶은 다른 삶을 다른 수준에서 다시 취할 수 있다. 이는 마치 철학자와 돼지, 범죄자와 성인이 거대한 원뿔의 서로 다른 수준에서 똑같은 과거를 연출하는 것과 같다. 이것이 바로 윤회라 불리는 것이다.”(김상환 역) 그야말로 우리는 ‘윤회하는 과거를 연출하는 자’인 것이다(워쇼스키 남매의 영화 ‘클라우드 아틀라스’도 그것을 보여주려 했다).
예를 들자면, 기나긴 분쟁의 역사 속 싸움터에서 마주쳤던 아일랜드인과 영국인이 서로를 바라보는 고유의 방식이 있을 것이다. 이 방식은 어디서 오는가. 바로 한 개인을 뛰어넘어 오랜 시간 무의식 속에 누적된 그들의 기억에서 온다. 유대인 수용소나 게르니카 등을 다룬 알랭 레네의 영화가 보여주듯 개인의 것이 아닌, “둘이 공유하는 기억, 여럿이 공유하는 기억, 세계 기억”(들뢰즈의 ‘시네마’)이 있다. 한 개인의 것이 아닌 그런 과거가 오늘을 사는 이 사람, 저 사람을 통해 환생한다. “모든 것은 마치 우주가 엄청난 ‘기억’인 것처럼 일어난다.”(‘베르그송주의’, 김재인 역) 그런 과거가 생을 결정짓는다면, 우리에겐 3월 1일이나 5월 18일 같은 과거가 현재를 사는 한 사람의 운명을 결정짓는 환생하는 과거일 것이다. 오계선사의 이야기가 그 환생인 소동파의 삶의 좌표가 됐던 것처럼 말이다.
문화일보 서동욱의 세계의 산책자 서강대 철학과 교수
06.10 라면의 추억
끅끅 울음 참는 기러기 아빠도 남자 붙잡는 여자도… 그 앞엔 라면
정치 논란, 재벌 이혼 소송에도 등장… 굴곡진 역사처럼 한국다운 맛
‘라면왕'을 추모하며 강고하게 스크럼 짠 면발을 끓는 물에 빠뜨린다
대학 시절 방학 때마다 친구들과 지리산 종주를 했다. 이른 새벽 구례구역에 도착해 역 광장에서 밥을 잔뜩 짓고 라면을 끓여 밥을 말아 먹었다. 남은 밥은 짊어지고 화엄사 옆 돌계단길을 올라 노고단으로 향했다. 점심 때가 되어 출출해지면 라면에 아예 식은 밥을 넣고 함께 끓였다. 국물이 졸아붙어 개죽처럼 돼도 맛있게 먹고 다시 걸었다.
야영장에 도착하면 라면에 김치, 참치 같은 것을 넣고 끓여 저녁을 먹었다. 설거지까지 싹 해놓고 배낭 깊은 곳에서 비장의 술병을 꺼냈다. 캡틴큐였다. 병 뚜껑에 한 잔씩 돌려 마시면서 역시 술은 위스키야, 하고 탄복했다. 누군가 말했다. 이렇게 좋은 술을 안주도 없이 마셔? 그러면 대꾸했다. 라면 끓여.
천왕봉 표지석 뒷면에 ‘한국인의 기상 여기서 발원되다’라고 쓰여있었다. 우리는 “라면에서 발원됐지”라며 킬킬거렸다. 라면은 가볍고 푸짐했기에 배낭에 넣어 갈 식량으로 최적이었다. 밥을 만 매운 국물은 다시 걸을 힘을 주는 휘발유였고 나트륨과 인공조미료는 흘린 땀을 보충하는 영양제였다.
라면을 정색하고 예찬하기는 어렵다. 라면은 그 태생이 대용품이며 밥을 대체할 수는 없다. 별미일 때 환대받지만 주식일 때는 천대받는다. 그러므로 그 치명적 약점은 일관성과 지속가능성이 없는 것이다. 불량식품이라고 할 수는 없으나 건강식품으로 분류될 수도 없다. 대개 라면은 평소 부엌일을 하지 않는 사람이 유일하게 완성할 수 있는 음식이다. 그 성별은 남자가 압도적으로 많아서, 혼자 사는 남자 또는 여자가 유고(有故) 상태인 남자가 장복(長服)하다가 위장이나 심지어 뇌에 이상이 생길 수도 있다.
영화 ‘우아한 세계’는 조폭이면서 기러기 아빠인 남자가 주인공이다. 마지막 장면에서 남자는 외국에 있는 가족이 보내온 동영상을 보며 라면을 먹는다. 허허 웃던 얼굴이 착잡해지더니 이내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다. 남자는 라면 냄비를 냅다 집어던진다. 잠시 후 남자는 끅끅 울음을 참으며 라면 찌꺼기를 치운다. 이 장면에서 나는 남자보다 라면이 더 불쌍했다.
라면 먹을래요? 라고 영화 ‘봄날은 간다’에서 여자가 물었을 때 남자는 그 사랑의 유통기한이 짧음을 감지했어야 했다. 여자는 집 앞까지 데려다 준 남자에게 커피 같은 전형 대신 라면이란 파격을 제안한다. 라면 끓이기도 전에 여자는 남자에게 묻는다. 자고 갈래요? 안치지도 않고 뜸들이지도 않는다. 그냥 붓고 끓인다. 남자는 사랑맛 MSG에 속절없이 빠져든다. 그리고 이내 라면이 눅눅해지자 묻는다. 어떻게 사랑이 변하니?
라면은 정치적이다. 대통령 부부가 라면 먹는 장면을 사진 찍어 그 소탈함을 선전했던 자들은, 정권 바뀌고 세월호 참사가 나자 체육관에서 쪽잠 자다 컵라면 먹은 장관을 ‘황제 라면’으로 쏘아붙여 쫓아냈다. 그가 카메라 없는 한식당에 가서 든든히 한끼 채웠으면 무탈했을 것이다. 쉽게 말해 그의 죄는 반대 세력의 전유물인 ‘서민 코스프레’를 건드린 것이었다. 평범한 회사원에서 삼성가 사위가 된 사람은 이혼 소송 도중 이렇게 말했었다. “아들은 나와 단 둘이 시간을 보내면서 라면을 처음 먹어봤고 사람들이 얼마나 라면을 좋아하는지 알게 됐다.” 이 부부에게 라면은 부동(不同)과 불화의 상징이었다.
라면은 고향의 맛이라기보다 한국의 맛이다. 한국 음식 귀한 외국에 살거나 여행하다가 라면을 먹을 기회가 생기면 맞아, 이거였어 하는 말이 절로 나온다. TV 채널을 돌리다가 김치 파는 홈쇼핑에서 라면에 김치 얹어 먹는 장면을 볼 때 그 맛이 어떤 것임을 정확히 아는 나는, 김치 대신 라면을 산다.
라면을 요리 반열에 올리긴 옹색하지만 한국 음식 집대성에서 뺄 수는 없다. 일종의 구황(救荒) 식품으로 개발된 한국의 라면은 값싼 대용식에서 별미의 간식이 됐다가 다이어트와 건강의 주적 신세가 됐다. 그러나 라면 한 그릇은 여전히 소시민이 감행할 만한 일탈이며 감당할 수 있는 해악이다.
한국을 세계 1위 라면 소비국으로, 농심을 세계 1위 라면 회사로 키운 ‘라면왕’이 별세했다는 소식을 듣고 굴지의 대기업을 일군 그의 형님보다 라면왕 동생이 전혀 꿀릴 게 없다고 생각했다. 중국의 납면(拉麵)이든 일본의 라멘이든 원조는 중요치 않다. 라면은 격동의 현대사를 거치며 한국인을 입맛으로 통합했다. 라면왕은 보잘 것 없던 즉석 식품에 인생을 바쳐 한국인을 한국인으로 만들었다. 그래서 오늘도 빨간색 강렬한 봉지를 뜯고 강고하게 스크럼 짜고 있는 라면을 끓는 물에 수장(水葬)하며 조의와 감사를 표한다. 잘 먹겠습니다.
조선일보 한현우 문화전문기자
06.12 “탕남음녀의 마굴” 손가락질...1930년대 경성은 아파트 전성시대
[뉴스 라이브러리속의 모던 경성]
대부분 독신자 임대 전용 ..카페여급부터 고관대작까지 살아
‘최근 ‘아파ㅡ트’ 업자중에는 ‘가임지대통제령’(家賃地貸統制令)때문에 방세는 갑자기 올릴 수 없으므로 ‘스팀’대를 예년보다 사오할씩 올리는 경향이 있다...기실 ‘스팀’이란 말뿐 불을 적게 때므로 방이 차서 견디기가 힘든데 이는 연료를 빙자하여 방세를 올린 것이나 다름없지 아니하냐고 ‘아파ㅡ트’ 유숙인들로부터 부내 각 경찰서에 투서가 연일 들어오고 있다.’(조선일보 1939년 12월 5일 ‘교활한 아파트’ 파란 부분을 누르면 옛날 기사로 연결됩니다)
신문에 이런 기사가 났다. 당국이 집세를 올릴 수없도록 규제하니까 집주인들이 연료비를 40~50% 올려 사실상 집세를 올린 게 아니냐는 샐러리맨들의 투서가 잇따른다는 내용이다. 82년전 경성에 갑자기 웬 ‘아파트’일까. 집세 규제는 또 무슨 소리인가.
▲1937년 준공된 서울 충정로3가 충정아파트. 서울 지하철 5호선 충정로역 앞 대로변에 있다. 준공당시엔 도요타아파트로 불렸다. 84년이 넘은 지금도 아파트로 쓰인다. 1932년 준공으로도 알려졌지만, 최근 연구에서 1937년 준공으로 밝혔다./김기철 기자
지난 4월 나온 책 ‘경성의 아파트’는 이런 궁금증을 풀어준다. 주거문화사를 연구하는 박철수 서울시립대 교수는 ’1930년대 식민지 대도시 경성은 아파트가 넘쳐나던 곳으로 아파트의 시대라 불러도 어색하지 않다'고 썼다. 박 교수가 책에서 밝힌 경성 아파트만 70여곳이다. 친절하게 부록에 경성 지도를 싣고 아파트 70여 곳의 이름과 주소, 규모, 준공 연도를 밝혔다.
일제는 중일전쟁에 돌입한 이후인 1939년 10월 땅값과 집세를 1년전인 1938년 12월말일 기준으로 되돌리는 비상조치를 단행했다. 앞의 ‘가임지대통제령’(家賃地貸統制令)이다. 하지만 편법으로 집세를 올리는 아파트업주들이 있었던 모양이다. 임대료 규제를 피하기 위해 월세를 받던 아파트를 호텔로 용도를 바꾸기도 했다.
◇'아파ㅡ트' ‘아파ㅡ트멘트’ ‘아파ㅡ트멘츠 하우스’
일제시대 경성은 인구 폭발의 도시였다. 3·1운동 직후인 1920년 25만, 1935년 40만, 1945년엔 100만에 육박했다. 1930년의 경우, 경성 인구 32만2000명 중 일본인은 약 8만7000명(27%)이었다. 집은 부족했고, 집값과 월세는 폭등했다. 요즘 주택난 뺨칠 정도였다. 이런 상황에서 남산동 미쿠니 아파트(1930년 준공)를 비롯, 황금·녹천장·취산·창경·덕수·관수정·광희 아파트와 미쿠니·히카리·도요타·스즈키·오타 등 일본식 이름을 딴 아파트가 속속 들어섰다.
‘아파ㅡ트’ ‘아파ㅡ트멘트’ ‘아파ㅡ트멘츠 하우스’같은 이름으로 불리던 아파트는 조선인들에겐 낯설었다. 지금 아파트와는 달리 대부분 독신 아파트로 임대주택이었다. 부엌과 욕실, 화장실은 물론 냉난방시설을 갖춘 곳이 많았다. 1층엔 공동 식당과 사교장, 당구장 같은 오락시설과 공동 목욕탕을 갖추기도 했다. 요즘 오피스텔이나 주상복합건물과 비슷했다.
▲지난 11일 오후 찾은 남산동 미쿠니 아파트.(왼쪽). 1930년 준공돼 미쿠니 상회 직원 사택으로 쓰였다. 지금도 아파트로 사용중이다. 오른쪽은 완공 직후 잡지 '조선과 건축' 1930년12월호에 실린 사진.외관은 준공 당시와 거의 바뀐 게 없다./김기철기자
◇경성의 랜드마크 ‘채운장 아파트’
‘아메리카 인디언의 모자와 같은 풍차를 보고 구라파 농촌으로 미리 짐작 마십시오. 이것은 멀리 그렇게까지 생각하실 것이 아니라 바로 수구문(水口門) 턱에 있는 ‘아파트’ 채운장의 물 퍼올리는 풍차입니다. 도시로서의 인구밀도가 많지 않고, 도시로서의 다른 시설이 제대로 된 바 없는 서울에서 이 ‘아파트’의 그림자를 볼 수있기는 수년 전부터 였습니다만 난쟁이 수염처럼 시답지 않게 보이던 것이 이제는 대경성의 실현을 앞두고 그 ‘수염’도 수염 구실을 하게 되었습니다.’(1935년 1월1일자 ‘대경성의 새 얼굴’특집)
조선일보 1935년 신년호는 객실 82개를 갖춘 4층짜리 아파트 사진을 실었다. 광희문 근처, 지금의 중구 장충동 1가에 들어선 이 건물은 1927년 착공해 7년만인 1934년에 완성된 경성의 랜드마크였다. 냉난방시설과 욕실을 갖춘 이 현대식 아파트는 순식간에 입주가 끝났다. 건축주는 아파트 부대시설로 ‘댄스홀’을 설치하겠다는 의욕을 부렸다.(당국 허가는 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채운장은 1972년까지 거의 원형 그대로 남아있었다. 이듬해 일부 철거가 시작돼 몇 년 후 모습을 감췄다.
▲조선일보 1939년12월 5일자 '교활한 아파트'. 당국의 집세 규제로 아파트 업자들이 방값을 올리는 대신 '스팀'비를 40~50%올려 사실상 집세를 올린다고 입주민들이 항의한다는 보도다
◇카페 여급부터 고관대작까지 아파트 입주
경성 아파트엔 누가 살았을까. ‘각 관청·은행·회사 등 각종 기관에는 여사무원이 있어 자기들의 전문한 기술과 능력에 따라서 한 역할을 맡아가지고 모든 사무를 처리하고 있으니 세상에서 말하는 ‘아파트걸’로써 장차 올사회의 실업가와 정치가의 첫 걸음을 걷고 있으며...’(1931년10월19일자 ‘취직線에 混戰하는 형형색색의 생활상’) 이 기사는 은행원, 회사원, 공무원 같은 전문직·사무직 여성을 아파트 거주자로 꼽고 있다. ‘경성의 아파트’(172쪽)는 카페 여급부터 고관대작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부류와 계층이 아파트에 살았다고 설명한다. 조선 최상류층에 속하는 경성 골프구락부 회원 일부도 아파트에 살았고, 고향을 떠나 유학온 학생들도 아파트 주요 입주자였다. 일본인과 조선인의 국적 구별은 쉽지 않고, 임대료의 차이만 있을 뿐이라는 얘기다.
◇'탕남음녀의 마굴?’
독신 남녀가 한 건물안에 사는 아파트는 경계의 대상이었다. 앞의 채운장 기사 말미엔 ‘그러나 앞으로 ‘딴스홀ㅡ’이 생기는 날이면 이 ‘아파트’가 한층 더 탕남음녀들의 마굴이 안 될까 걱정입니다'라고 썼다. 대중잡지 ‘삼천리’도 비슷한 우려를 했다. ‘가정을 떠나 부모들의 슬하를 멀리하고 하숙생활 ‘아빠트’ 생활을 하는 남학생 또는 여학생들이 서로 방문을 하고 찾아다니는 것이 쉬운 까닭에 그 접촉이 비교적 가정에 붙들려있는데 비하여 용이할 것이다. 더구나 전문학교 대학생들은 거의 순결치 못하다. 그래서 결국은 최후의 일선을 넘어서는 것이 자명의 리(理)다.’( ‘삼천리’ 1936년 11월호 ‘여학생행장보고서’ 198쪽) 아파트가 풍기문란의 소굴로 지목당한 것이다.
‘경성 아파트시대’의 흔적은 지금도 남아있다. 충정, 황금, 국수장, 취산, 청운장, 적선하우스, 남산동 미쿠니 아파트 등 7곳이나 된다. 황금, 국수장, 충정, 미쿠니 아파트는 지금도 일부 주거 시설로 사용하고 있어 근대유산 탐방 코스로 인기를 누린다
조선일보 김기철 학술전문기자
06.14 “우리 아이는 내 인생의 전부였어요”
응급실 중환 구역에 중년의 여성이 들어왔다. 계단에서 발을 헛디디는 모습을 목격한 이웃이 신고했다. 신고자는 그녀가 워낙에 지적장애가 있었다고 했다. 환자는 축 늘어져 움직이지 않았고 머리 앞쪽에 상처가 있었다. 넘어질 때 하중이 머리 앞쪽으로 쏠려 다친 것 같았다. 그 밖에 발목이 조금 부어 있는 것 외에는 특별한 손상은 없었다. 유심히 보자 환자의 손과 발과 얼굴 등에 잔 상처가 많았고 전반적인 위생 상태가 좋지 않았다. 지적장애가 심해 스스로를 돌볼 수 없는 상태였을 것 같았다. 나는 수액과 전반적인 검사를 지시했다.
보호자는 곧 도착했다. 체격이 왜소한 할머니였다. 일단 검사 결과를 기다려보자고 설명했다. CT 검사상 이마 앞쪽에서 소량의 뇌출혈이 보였다. 발목의 손상은 가벼운 골절이었다. 다행히 그 외에 큰 이상은 없었다. 뇌출혈 양이 많지 않아 중환자실 관찰만으로 회복될 것으로 보였다. 발목 또한 수술하지 않고 보존적 치료로 충분할 것 같았다. 나는 전공의에게 부상 정도를 보호자에게 설명하고 환자를 중환자실에 입원시키도록 지시했다.
/사십대의 아이
한참 다른 환자를 보고 있으니 전공의가 나를 찾았다. 뇌출혈이라는 말을 들은 보호자가 사전연명의료의향서를 쓰겠다고 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어떤 치료도 하지 않고 사망하게 할 수 있냐고 묻고 있다고 했다. 순간 조금 성이 났다. 사전연명의료의향서는 불치병에 걸렸거나 노쇠해서 사망이 예견된 사람에게만 적용된다. 환자는 아직 젊고 신체적으로 건강하며 충분히 치료가 가능한 정도의 손상을 입었다. 응급실에서 사전연명치료의향서가 적용될 사람이 아니었다.
순간 법이 보호자의 편의를 위해 악용되는 기분이었다. 안 그래도 환자는 지적장애가 있음에도 보호받지 못한 것으로 보였다. 생명을 그렇게 포기하면 안 되는 것이라고 단호하게 설명해야 했다. 나는 보호자를 불렀다. 할머니는 작은 키에 아주 마른 몸이었다. 나는 진료실 책상에 팔을 괴고 조금 따지듯이 물었다.
“보호자분. 안 돼요. 따님의 신체는 건강하다고요. 심하게 다치지 않아서 조금만 치료하면 회복될 것 같아요. 도대체 왜 그러시는 건데요.”
“괜찮아진다는 거죠?”
“네.”
“선생님. 우리 아이는 내 인생의 전부였어요.”
할머니는 사십대의 환자를 아이라고 불렀다.
“나는 이 아이가 태어날 때부터 돌봐왔어요. 남편은 떠나고 혼자서 아이를 키웠어요. 젊었을 때는 아이를 그럭저럭 돌볼 수 있었어요. 그런데 지금 나는 여든이 다 되어서 기력이 없는데 아이는 여전히 힘이 세요. 지금 내 몸으로는 아이가 전혀 감당이 안 돼요. 게다가 몇 달 전 대장암 진단을 받고 항암 치료중이에요. 병원만 오가도 기운이 없어요. 그렇다 보니 점점 아이가 다쳐요. 오늘도 잠들어 있는 사이에 아이가 계단에서 굴렀어요.”
책상 위를 괴고 있던 손이 거두어졌다. 어느새 내 손은 배꼽 아래에 정돈되어 있었다.
“저는 곧 죽을 건데 우리 아이가 험한 세상에 혼자 남으면 어떻게 될지 뻔해요. 아이가 먼저 떠나지 않으면 걱정이 되어서 편히 죽을 수가 없어요. 이 정도면 우리는 오래 산 것 같아요. 아이가 다쳤다고 병원에서 전화가 왔을 때, 이번 기회에 아이를 보내놓고 저도 곧 죽으려고 마음먹고 왔어요. 그런데 안 되는 거죠?”
“…네. 안 됩니다.”
“그렇군요. 미안합니다. 선생님.”
“아닙니다….”
할 말이 없었다. 마음이 어두워져 돌아섰다. 나는 자리에 주저앉아 머리를 싸맸다. 부끄러운 마음이 들었다. 나는 평생 한 생명을 돌봐온 사람에게 생명의 귀함에 대해 훈계하려고 한 것이었다. 환자는 치료받기 위해 중환자실로 올라갔다. 우리는 해당 사항이 없어 사전연명의향서를 받지 않았다. 보호자는 모든 것을 납득했다. 치료는 대략 두 주쯤 걸릴 예정이었다. 치료를 마치면 환자는 회복되어 집으로 돌아갈 예정이었다. 그러면 이제 환자는 다시 건강하게 살아갈 수 있을까. 그것은 나를 포함한 이 병원의 누구도 관심이 없는 일일지도 몰랐다.
조선일보 남궁인 이대 목동병원 응급의학과 교수·작가
06.23 이제야 이해되는 영웅들
6·25가 다가온다. 모두가 알고 있듯 6월은 호국보훈의 달이다. 이맘때면 늘 듣던 아버지의 영웅담을 절집에 들어온 이후로 다시는 들을 수 없게 되었지만, 지금도 어릴 적 이야기 속에 등장한 분들이 간혹 눈에 선하게 비친다.
누군가의 삶을 기억하는 일
자신의 삶 위해서도 꼭 필요
잊혀진 호국 영웅들에게 감사를
내 어릴 적 우리 동네엔 이상하게 생긴 무서운 아저씨가 살고 있었다. 팔다리가 하나씩 없고 늘 담배와 술에 절어 사는 사람이었다. 아저씨는 헝클어진 머리에 덥수룩하게 수염을 기르고 흉측한 모습으로 목발을 끼고 뚜벅뚜벅 우리 집에 놀러 오셨다. 나는 아저씨가 놀러 오는 것이 참 싫었다.
이쯤에서 눈치채셨겠지만, 그분은 상이용사다. 베트남 전쟁에 나갔다가 폭탄이 터져 상이용사가 되어 돌아온 분이다. 멀쩡하던 남편이 불구가 되어 돌아오자, 아내는 야밤에 몰래 보따리를 쌌단다. 그 뒤로 아저씨는 매일 소주병을 끼고 세상을 원망하며 살았다.
그런 아저씨가 집에 놀러 와 나만 보면 우리 아가 예쁘다며 ‘한 번만 안아보자’고 했다. 그런 아저씨가 얼마나 무섭고 싫던지…. 영화 ‘아저씨’ 속의 원빈처럼 잘생긴 아저씨도 아니고,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어딘가에 숨기 일쑤였다.
“저 어린 것도 내가 싫다는데, 내 마누라인들 내가 좋겠습니까.” 아저씨의 넋두리와 원망의 눈빛은 나를 늘 불편하게 했다. 아저씨가 쓸쓸하게 집으로 돌아가고 나면, 불같은 아버지는 잠깐이지만 무섭게 나를 째려보곤 했다. 화가 난 아버지가 무서워 매일 눈치를 봐야 했다.
하는 수 없이 내가 먼저 타협안을 냈다. 100미터쯤 되는 아저씨 집까지 바래다주겠다고 했다. 그랬더니 그날 이후로 아저씨는 거의 매일, 하루에도 두세 번씩 오갔다. 아저씨의 기쁨은 오직 귀여운 꼬마가 집까지 바래다주는 것인 듯 보였다. 하지만 그리 호락호락할 내가 아니었다. 하루에 딱 한 번, 내 맘 내킬 때만 함께 가주기로 했다.
그때마다 아저씨는 왜 그리도 천천히 걷는지, 평소엔 두 다리 멀쩡한 사람보다 목발이 먼저 나가는 듯 보였는데, 나랑 걷기만 하면 몇 걸음 가다가 쉬고 담배 한 모금 피고, 내게 말 걸고, 대답 안 해주면 또 허공 바라보며 한숨짓고… 빨리 다녀오고 싶은데, 내 화를 어찌나 돋우시던지, 꼬마인 나도 ‘으윽’ 하며 참아야 했다. 그러던 아저씨는 몇 년 후, 돌아가셨다. 아버지는 몹시 슬퍼하셨다. 불쌍하다고, 안 됐다고, 몇 번이나 주저리주저리 중얼거리며 소주잔을 기울이셨다.
세월이 흘러 생각해보니, 어린 내게조차 무시당하던 그 아저씨는 다름 아닌 ‘영웅’이었다. 물론 누군가에게는 버림받은 인간이었고, 누군가에게는 연민을 느끼게 하던 쓸쓸한 존재였다. 또 전쟁터에서 몇 생명은 해치기도 했겠지. 하지만 상이용사가 된 이후의 삶이 얼마나 박복하고 비루했는지, 어린 내 눈에도 훤히 보였다.
나는 아저씨가 우는 모습을 아버지 곁에서 많이 봤다. 함께 간 부대원들은 죽고 혼자만 살아왔다며 울던 아저씨, 차라리 그때 죽었어야 했다던 그 말이 진심이었다는 것을 알게 된 건 그 뒤로도 한참 성장한 후였다. 요즘도 광화문을 지나다 보면, 간혹 ‘전우회’나 ‘해병대’ 등을 내세워 스피커를 켜고 다니는 차를 보게 된다. 솔직히 눈살이 찌푸려진다. 절 앞에서 외치는 타종교의 전도 스피커만큼이나 듣기 싫다. 하지만 동시에 저들의 삶을 우리가 너무 몰라주는 것은 아닌가 하고 생각할 때가 있다. 한때는 우리가 모르는 전쟁을 처절하게 겪었고,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다는 용사의 삶을 우리가 더 이해해주어야 하지 않을까 하고.
나는 요즘 어떤 일을 할 때, ‘이 일을 할 만한 가치가 있는가?’ 하고 스스로에게 자주 묻는다. “사람은 살아야 할 의미가 분명하다면, 어떤 고난도 견뎌낸다”던 철학자 니체의 말에 영향을 받아, 자꾸만 삶의 의미를 찾는 버릇이 생긴 것 같다.
누군가의 삶을 기억하는 일은 자신의 삶을 돌아보기 위해서도 필요한 일이다. 더 의미 있고 가치 있게 살아가는 길을 찾기 위해서라도 그렇다. 내 기억 속 상이용사 아저씨는 희망을 잃고 불행에 빠진 사람이었다. 그분은 전쟁에 참여하고 팔다리를 잃고, 이후 아내를 놓치고 미래를 빼앗겼다. 술을 마실 때마다 과연 지난 삶이 그럴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었는지 수도 없이 생각했을 것이다.
만약 아저씨가 살아 계신다면, 그때 무례하게 굴어서 죄송했노라 사과하고 싶다. 믿기지 않겠지만, 누군가에겐 생명의 은인이요, 영웅이었노라 힘주어 얘기해주고 싶다. 살아 계시다면, 친절하게 말동무하며 다시 한번 집까지 모셔다드리고 싶다.
중앙일보 원영 스님 청룡암 주지
07.08 어느 날 시각장애 노인 거지에게 일어난 일
‘말의 힘(The Power of Words)’이라는 제목의 유튜브 동영상이 많은 사람의 공감을 얻고(win the sympathy) 있다. 동영상은 홀로 길거리에 앉아(sit alone on a street) 잔돈을 구걸하는(beg for spare change) 나이 많은 시각장애 거지(old blind beggar)를 비추는 것으로 시작한다.
노인은 동냥 깡통 옆에 골판지 하나를 세워놓았다. 거기에는 “저는 시각장애인입니다(I’m blind). 제발 도와주세요(Please help)”라고 적혀 있다. 많은 사람이 그 앞을 오가지만, 대부분 힐끔 쳐다보고는(give a sideways glance at it) 그냥 지나쳐버린다(walk past him). 어쩌다 간혹 한두 사람이 그가 있는 쪽을 향해 동전을 던지고(throw the change in his direction) 갈 뿐이다.
/일러스트=김도원
그나마 깡통에 넣어주지도 않는다. 사회 서열 맨 밑바닥에 있는(be at the very bottom of the pecking order) 그가 혹시라도 말이라도 걸까 싶어 동전 떨어지는 소리와 함께 부리나케 도망가버린다(make off in all haste). 시각장애 노인은 던진 동전을 찾느라 애를 쓰다가(try to find the change) 겨우 찾아내서는 깡통에 집어넣는다(locate the coin and put it in the tin).
그런데 어느 날 한 젊은 여성이 지나가다가(walk by) 되돌아오더니(turn back) 골판지에 쓰인 내용을 유심히 들여다본다(have an eyeful of it). 그러더니 그의 허락을 청하지도 않고(without asking his permission) 골판지를 집어 들고 그 뒤에 뭔가를 써서(write on the back of the cardboard) 돌려 세워놓고는 제 갈 길을 간다(go on her way).
그때부터 정말 이상한 일(something truly odd)이 벌어진다. 예전엔 그냥 지나치던 사람들이 모두 돈을 보태주고 간다. 깡통이 차고 넘친다. 동전이 아니라 지폐를 놓고 가는 이도 많다. 게다가 그를 향해 내던지는 것이 아니라 허리를 숙여 건네주고(bend down to give it to him instead of chucking it at him) 간다.
며칠 후 그 여성이 다시 들른다(come by again). 지난번 그녀가 앞에 섰을 때 구두를 만져봤던(touch her shoes) 노인은 이번에 자기 앞에 선 사람의 구두를 만져보고는 그녀라는 걸 알아챈다. 그녀에게 묻는다. “그때 내 골판지에 뭐라고 써놓고 갔나요?”
그 여성이 거지 노인의 어깨를 어루만지며(stroke him on the shoulder) 대답한다. “같은 말을 썼어요(write the same). 다만 다른 단어로 표현을 바꿔봤어요(refine the expression with different words).”
그녀가 노인에게 인사하고 성큼성큼 자리를 떠나는(stride off) 뒤로 동영상에 비친 골판지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오늘 참 아름다운 날입니다(It’s a beautiful day). 그런데 저는 그걸 볼 수가 없네요(I can’t see it).”
위의 글을 메신저로 소개해주신 분이 말미에 이런 말을 덧붙여 보냈다. “‘자살을 거꾸로 하면 ‘살자’가 되고, ‘내 힘들다’를 거꾸로 하면 ‘다들 힘내’가 된다.”
조선일보 윤희영 에디터
07.15 부먹이냐 찍먹이냐… 탕수육 소스 논쟁의 시작은?
원래 ‘부먹’뿐… 바삭함 유지하려 소스 따로 배달해 ‘찍먹’ 생겨나
조선엔 호화 해장국 ‘효종갱’… 냉면 20그릇 자전거 ‘묘기 배달’도
역사 깊은 배달 음식, 코로나로 또 진화 중… 맛의 세계는 무궁무진
‘부먹·찍먹’은 탕수육에 소스를 ‘부어 먹느냐’(부먹), ‘찍어 먹느냐’(찍먹) 중 어느 쪽이 옳은지를 놓고 벌이는 논쟁이다. 음식에 별 관심 없는 분들에겐 하찮게 들리겠지만, 탕수육 마니아들에게는 대단히 심각한 주제다.
‘부먹’을 지지하는 이들은 ‘소스가 배어들었을 때 비로소 탕수육으로서 완성되며, 소스를 붓지 않았다면 단순한 고기 튀김일 뿐 탕수육이 아니다’라고 주장하는 반면, ‘찍먹’파(派)들은 ‘바삭함을 최대한 즐길 수 있게 소스를 살짝 찍어야지, 소스에 젖어서 퍼져버린 탕수육은 더 이상 탕수육이랄 수 없다’며 팽팽하게 맞서고 있다.
영원히 끝나지 않을 부먹·찍먹 논란의 원인 제공자는 다름 아닌 배달이다. 탕수육은 원래 부먹밖에 없었다. 찍먹이란 존재하지 않았다. 찍먹이 등장한 건 빨라도 1980년대 이후, 중식당들이 배달에 적극적으로 나서면서부터다. 지금도 그렇지만 탕수육은 짜장면, 짬뽕과 함께 가장 인기 높은 메뉴. 튀김옷을 입혀 튀겨낸 고기를 소스에 버무려 바로 손님상에 낼 수 있는 식당에서와 달리, 집에서 먹는 탕수육은 배달에 걸리는 시간 동안 튀김옷이 눅눅해지다 못해 심지어 흐물흐물해져 맛이 떨어졌다.
중식당 주인들은 어떻게 하면 탕수육을 최대한 맛있게 배달할 수 있을지 고민했다. 그러다 소스를 고기 튀김에 버무리지 않고 별도 그릇에 담아 배달하는 아이디어를 냈다. 손님이 소스를 고기 튀김에 직접 부어 먹도록 했다. 소스가 충분히 배어들지 않는다는 단점에도 확실히 덜 눅눅했다.
사람들은 차츰 배달된 탕수육에 소스를 붓지 않고 찍어 먹어도 맛이 괜찮다는 걸 알게 됐다. 찍먹의 탄생이었다. 찍먹은 갈수록 인기가 높아졌다. 이제는 중식당에서 먹을 때조차 소스를 따로 내주기에 이르렀다.
이처럼 한국은 배달이 음식 문화에 미친 영향이 크다. 배달의 역사도 긴 편이다. 조선 말기 문신·서예가 최영년(崔永年)이 쓴 ‘해동죽지(海東竹枝)’에는 효종갱(曉鍾羹)이라는 고급 해장국이 나온다. 국내 문헌에 기록된 가장 오래된 배달음식이 아닐까 싶다. 효종갱은 경기도 광주 남한산성의 명물 음식이었다.
송이버섯, 표고버섯, 소갈비, 해삼, 전복 등 값비싼 식재료를 배추속대·콩나물과 함께 초장에 섞어 하루 종일 끓인다. 밤에 국이 다 끓으면 항아리에 담고 솜으로 싸서 서울 고관대작 집으로 보낸다. 새벽[曉] 종(鍾)이 울릴 때쯤 도착한다 하여 효종갱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설렁탕은 일제강점기 경성(京城·서울)의 인기 배달 메뉴였다. 양반들은 맛있는 설렁탕을 먹고 싶었지만, 백정이 주로 운영하던 설렁탕 집에 가면 천민과 어울리게 되니 출입을 꺼렸다. 궁리 끝에 양반들은 설렁탕을 집으로 배달시켜 먹었다.
냉면은 식당에서 먹는 손님보다 배달시켜 먹는 이가 더 많았을 정도였다고 한다. 요즘은 오토바이를 타지만, 당시 배달꾼들은 주로 자전거를 이용했다. 길이가 150㎝나 되는 큰 목판에 냉면을 20그릇이나 얹어 오른쪽 어깨에 메고 왼손으로 자전거 핸들을 잡고 경성 도로를 달렸다.
지난 월요일부터 오후 6시 이후 2인 초과 모임 금지 등 사회적 통금이 더욱 엄격해지면서 음식 배달이 폭증하고 있다. 배달은 이제 식당의 생존을 좌우하게 됐고, 우리 식문화에 미치는 영향은 더욱 커질 전망이다.
배달이 부먹 찍먹에 버금가는 또 다른 변화를 가져올까. 이를 알아보려고 얼마 전 배민아카데미에서 펴낸 ‘배달도 되는 레시피’라는 요리책을 펼쳤다. 배민아카데미는 배달 앱 ‘배달의민족(배민)’을 운영하는 우아한형제들이 외식업 자영업자들에게 온·오프라인으로 제공하는 교육 프로그램. 배민이 요리책을 펴낸 목적은 배달 포장 음식을 최대한 맛있게 조리하는 팁을 외식업주들에게 알려주기 위해서다.
이 요리책에 나온 한식·일식·중식 레시피는 기존과 크게 다르지 않았으나, 양식에서는 눈에 띄는 차이가 있다. 파스타 소스, 특히 크림 소스의 경우 일반 매장이나 가정에서 바로 먹을 때보다 묽게 만들라고 조언한다. 배달되는 동안 소스가 식으면 굳을 수 있는데, 소스의 농도를 묽게 하면 식어도 굳지 않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가루 치즈는 소량만 아니면 아예 뿌리지 말라는 팁도 있다. 치즈가 불유쾌한 냄새의 원인이 될 수 있기 때문이란다.
앞으로는 파스타도 ‘진소(진한 소스)’와 ‘묽소(묽은 소스)’, ‘치뿌(치즈 뿌린)’와 ‘치뺀(치즈 뺀)’ 중 어느 쪽을 선호하느냐로 파(派)가 나뉠 수도 있지 않을까. 맛의 세계는 무궁무진하다.
조선일보 김성윤 음식전문기자
08.07 케냐서 염소 몰던 오주한, 70만 회원이 구해준 신발 신고 뛴다
마라톤 - 귀화 마라토너의 도쿄 도전
▲내 이름은 吳走韓… 내일 한국을 위해 달린다 - 오주한은 한국 국적을 얻은 지 1년여 만인 2019년 10월 도쿄 올림픽 출전권을 따냈다. 그해 11월엔 손기정 기념관을 찾았다. 1936년 베를린 올림픽에 일본 대표로 출전해 가장 먼저 결승점을 통과했던 고(故) 손기정 선생의 사진 앞에서 “금메달을 따겠다”는 각오를 다졌다. 오주한(吳走韓)은 ‘오직 한국을 위해 달린다’는 뜻이다. 자신을 발굴한 스승이자 ‘한국 아버지’였던 고(故) 오창석 감독이 지어줬다. 그는 8일 도쿄 올림픽 마라톤에 출전한다. /오임석 청양군청 트레이너 제공
“반드시 메달을 따오겠습니다. 저의 감독이었고, 대리인이었던 아버지를 위해서요.”
2007년 여름, 아프리카 케냐에 있는 작은 마을 투르카나에서 염소를 몰던 19살 청년 윌슨 로야나에 에루페가 햇빛을 피해 움막 밑에 누워 있었다. 멀리서 어떤 중년의 동양인이 걸어오는 게 보였다. 그 동양인은 에루페에게 이리저리 뛰어보도록 시켰다. 그러곤 고개를 끄덕였다. 훗날 그의 아들이 되는 오주한과 고(故) 오창석 전 한국마라톤 국가대표팀 감독의 첫 만남이었다.
◇오직 한국을 위해 달린다
케냐에서 귀화한 마라토너 오주한(33·청양군청)이 8일 삿포로에서 열리는 도쿄올림픽 남자마라톤에서 태극마크를 달고 뛴다. 오주한은 본인을 발탁하고 한국 귀화를 도왔던 오창석 감독을 지난 5월 하늘로 떠나보냈다. 오주한은 올림픽 출전을 위해 일본으로 떠나기 전 본지에 “아버지와 함께한 14년 전부가 늘 행복했다. 염소몰이였던 내 삶을 완전히 바꿔줬다. 하늘에서 보고 계실 아버지에게 올림픽 메달을 선물로 드리겠다”고 했다.
오주한은 마라토너의 인생을 시작한 뒤 14년 동안 오 감독과 동고동락했다. 친아버지가 거의 집에 들어오지 않아 사실상 어머니 밑에서 자란 오주한은 오 감독를 진짜 아버지처럼 대했다. 틈만 나면 품에 안겼고, 훈련 중 실없는 농담에도 입 벌려 웃었다. 오주한은 14년 마라토너 경력을 쌓는 동안 오 감독의 훈련 방식에 한 번도 반대하지 않고 따랐다.
▲필승 머리띠 두르고 - 한국 마라톤 대표팀 오주한(오른쪽부터)과 김재룡 감독, 케냐 출신 엘리자 무타이 코치가 6일 삿포로 숙소에서 선전을 다짐하며 주먹을 쥐어 보이고 있다. 고(故) 오창석 감독은 병세가 깊어지던 지난 4월 김 감독을 후임 사령탑으로 추천했다. /대한육상연맹
오주한은 첫 만남으로부터 4년 뒤인 2011년, 국제대회 경주마라톤에서 2시간9분23초로 우승했다. 염소를 몰며 한 달에 20달러(약 2만3000원)를 받던 청년이 상금으로 5500만원을 받았다. 고향에 있는 어머니와 형제, 자매에게 소와 염소 100마리 살 돈을 보냈다. 이 대회를 시작으로 총 8차례 국제대회에서 우승했다.
2016년 3월 서울국제마라톤에서는 개인 최고 기록인 2시간5분13초로 가장 먼저 결승 테이프를 끊었다. 당시 귀화 전이었기 때문에 한국 신기록으로 인정받지는 못했다. 2000년 이봉주가 세운 한국 기록 2시간7분20초보다 2분여 앞선다.
오창석 감독은 오주한이 2016년 리우올림픽에서 한국 선수로서 메달을 따길 바랐다. 2015년 귀화 추진 중 육상계 내부 중 일부가 반대했고, 약물복용 논란으로 막혔다. 말라리아를 치료하는 과정에서 복용했다는 해명은 끝내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리우올림픽이 지나간 2018년에 한 번 더 추진해 그해 7월 한국 국적을 얻었다. 오 감독과 글자만 같은 ‘청양 오(吳)씨’ 시조가 됐다. 이름은 주한(走韓). ‘오직 한국을 위해 달린다’는 뜻이다.
◇돌아오지 않은 아버지
오주한과 오 감독은 2019년 초부터 케냐에서 도쿄올림픽을 준비했다. 평평한 흙바닥이 넓게 펼쳐진 케냐 앨도레트는 마라톤 훈련에 최적화된 곳이다. 도쿄올림픽이 연기되고도 다음 해를 바라보며 계속 훈련했다. 지난해 10월, 오 감독이 기침을 자주하고 피곤해하기 시작했다. 6개월을 참다가 올해 4월 11일에 치료차 한국에 잠시 다녀오기로 했다. 전날 오주한과 저녁을 먹으며 ‘케냐 비자도 갱신할 겸 기침만 치료하고 오겠다. 금방 올 테니깐 신경 쓰지 말고 올림픽에만 집중해라’고 했다.
그게 둘의 마지막 대화였다. 입국한 지 이틀 만에 오창석 감독은 의식을 잃을 정도로 증세가 악화했다. 코로나 자가 격리 기간 때문에 병원 치료를 받지 못했고, 18일에야 서울에 있는 병원으로 긴급 이송해 치료했으나 5월 5일 60세로 눈을 감았다. 사망진단서에는 ‘다발성 장기부전’이라고 써 있다. 오 감독의 동생 오임석 청양군청 트레이너는 “물에 있던 병균에 의해서 감염된 게 아닌가 생각만 한다”고 했다.
오주한은 별세 소식을 갑작스레 들었다. “인생 최악의 순간이었어요. 슬프고 혼란스러웠죠. 아버지 없이는 훈련을 어디서부터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으니까요. 하지만 올림픽은 점점 다가오고 있었고, 아버지가 세상에 없다는 사실을 인정해야만 했죠.”
오주한은 삿포로로 가기 직전 한국 마라톤계에 도움을 받았다. 그가 즐겨 신던 유명 브랜드 초록빛 신발이 있었는데, 전 세계에서 단종돼 구할 수 없었다. 오창석 감독과 절친했던 장영기 전국마라톤협회장이 돕기 위해 나섰다. 협회 회원 70만명이 전국 매장에 수소문했고, 대전에 있는 한 창고에 숨어있던 그 신발을 찾아냈다. 오주한은 이 신발을 신고 8일 마라톤에 나선다.
오주한은 가장 최근 대회였던 2019년 10월 경주마라톤에서 2시간08분42초로 통과했다. 가벼운 몸의 다른 마라토너와 달리 오주한은 탄탄한 근육질 몸을 가졌다. 근육질 몸은 쉽게 지치지 않기 때문에 삿포로의 덥고 습한 날씨에서 유리해 국내 마라톤계는 메달을 노려볼 만하다고 얘기한다.
“아버지는 저에게 늘 올림픽 메달로 동기 부여를 해줬습니다. 반드시 목에 걸고 돌아가겠습니다.”
조선일보 이영빈 기자
08.10 요즘 이름이 가장 궁금한 꽃 10가지
요즘 사람들이 가장 이름을 궁금해하는 꽃은 무엇일까요. 꽃이름을 알려주는 앱 ‘모야모’에 ‘랭킹’이라는 코너가 있는데, 이 코너에서 집계한 최근 한주(8월2~8일) 인기 질문 10가지를 소개합니다.
1위는 배롱나무였습니다. 배롱나무는 7월 초부터 10월 중순까지, 거의100일 동안 피는 꽃입니다. 원래 이름이 100 일간 붉은 꽃이 핀다는 뜻의 ‘백일홍(百日紅)나무’였는데, 발음을 빨리하면서 배롱나무로 굳어졌다고 합니다. 진짜 100일 가까이 우리 곁에서 진분홍 꽃망울을 터트립니다.
▲배롱나무. 은평한옥마을.
2위는 누리장나무입니다. 요즘 산에 가면 정말 흔하게 볼 수 있어서 랭킹 2위에 오른 것 같습니다. 누리장나무는 어른 키보다 약간 높게 자라는 나무인데, 요즘 붉은빛이 도는 꽃받침 위로 하얀색 꽃을 무더기로 피고 있습니다. 누리장나무는 이 나무에서 독특한 누린내가 난다고 해서 붙은 이름입니다.
▲누리장나무 꽃.
3위는 그냥 백일홍입니다. 백일홍은 배롱나무와 달리, 멕시코 원산의 국화과에 속하는 초본 식물입니다. 이 식물이 있어서 배롱나무를 그냥 백일홍이라 부르면 맞지 않습니다. 백일홍은 노란색, 자주색, 흰색 등 다양한 색이 있습니다. 요즘 화단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데, 꽃잎이 여러 겹인 겹꽃이 늘어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산촌인 전북 임실군 운암면 학암마을에 백일홍이 활짝 피었다. 100일가량 꽃이 피는 백일홍이 마을 입구의 휴경지 5500㎡에서 폭염에도 향기로운 꽃향기를 전하고 있다. /임실군 제공
4위는 나무수국입니다. 요즘 광화문 등 도심에 엄청 진출하고 있는 식물입니다. 광화문광장을 넓히는 공사를 하면서 광화문 곳곳의 도로를 좁히고 새 보도와 화단을 만들었는데, 이 화단에 나무수국을 많이 심은 겁니다. 무성화와 유성화가 같이 핀 것이 나무수국이고, 무성화만 남긴 것은 큰나무수국 또는 나무수국 ‘그란디플로라(Grandiflora)’입니다. 국가표준식물목록엔 큰나무수국은 없고 나무수국 ‘그란디플로라’만 있습니다. 큰나무수국을 나무수국의 한 품종으로 보는 것입니다.
▲광화문에 많이 심은 나무수국.
5위는 달맞이꽃입니다. 달맞이꽃은 바늘꽃과 두해살이풀로, 여름에 노란색 꽃이 잎겨드랑이마다 한 개씩 달립니다. 낮에는 꽃잎을 다물고 있다가 밤에, 대략 저녁 8시쯤 꽃잎을 펼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달맞이꽃은 어릴 적부터 보아온 아주 친근한 식물이지만 고향이 남미 칠레인 귀화식물입니다. 하지만 일찍이 우리나라에 들어와 자리 잡아 해방 즈음 널리 퍼져 요즘엔 전국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습니다.
▲달맞이꽃.
6위는 벌개미취입니다. 도심과 도로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연보라색 꽃입니다. 이르면 6월부터 초가을까지 피는 꽃이라 요즘도 한창입니다. 벌개미취는 피침형 잎이 한 뼘 정도로 길고 잎 가장자리에 ‘잔톱니’만 있어 거의 매끄럽게 보입니다. 줄기도 굵어 튼튼해 잘 쓰러지지도 않습니다. 키가 50cm 정도. 원래 깊은 산에서 자라는 야생화였는데, 요즘은 원예종으로 성공적으로 변신해 잘 정착한 꽃입니다.
▲벌개미취. 잎이 길이 12-19cm로 길다.
7위는 미국부용입니다. 역시 요즘 대세꽃 중 하나입니다. 속명(Hibiscus)에서 알 수 있듯이 무궁화와 꽃모양이 비슷합니다. 흔히 보이는 것은 대부분 꽃이 크고 잎이 타원형으로 갈라지지 않은 미국부용입니다. 미국부용은 여러해살이 풀이지만 그냥 부용은 제주도에서 자생하는 나무라 보기 쉽지 않습니다. 부용은 잎이 3~7개로 얕게 갈라지는 점이 다릅니다. 접시꽃은 비슷하지만, 꽃 크기가 좀 작고(지름 5-10cm, 미국부용은 15~20 cm) 줄기 아래에서 피기 시작해 위로 올라가며 피는 점이 다릅니다.
▲미국부용.
8위는 요즘 서울에서도 막 피기 시작한 상사화입니다. 상사화는 꽃이 필 때는 잎이 없고, 잎이 있을 때는 꽃을 볼 수 없는 특이한 식물입니다. 요즘 잎은 없이 꽃대가 올라와 연분홍색 꽃송이가 4~8개 정도 달려 있는 것이 참 아름다운 꽃입니다. 잎과 꽃이 서로 만나지 못해 그리워한다고 이름이 상사화(相思花)입니다.
▲막 피기 시작한 상사화.
9위는 박주가리였습니다. 요즘 도심 공터나 담장가, 숲 언저리, 시골 담장 등에서 철망 같은 것을 감고 올라가는 것을 흔히 볼 수 있습니다. 박주가리는 분홍색과 연한 보라색 중간쯤인 꽃 색도 독특하지만 꽃잎 안에 털이 잔뜩 나 있는 등 개성 가득한 꽃입니다. 그런데 박주가리는 놀랄 정도로 상큼한 꽃 향기를 갖고 있습니다. 박주가리를 보면 꼭 한번 향기를 맡아보기 바랍니다.
▲박주가리 꽃.
마지막으로 10위는 맥문동입니다. 요즘 화단이나 나무 밑 그늘 등에서 보라색 꽃줄기가 올라온 무리가 있으면 맥문동일 겁니다. 조경 소재로 많이 쓰기 때문에 도심 한복판이나 건물 화단에서도 맥문동을 보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맥문동(麥門冬)이라는 이름은 뿌리가 보리와 비슷하고 겨울에도 잎이 시들지 않는다고 붙인 이름이라고 합니다.
▲맥문동. 여의도공원.
08월 26일 수수료 없는 ‘동네 직거래’ 월 1500만명 이용…지역 커뮤니티로 ‘폭풍 성장’
■ 왜 당근마켓에 열광하나
‘당신 근처의 마켓’서 작명해 ‘캐롯’으로 美·英·日 등 진출… 코로나19로 생활반경 좁아지며 ‘동네 장터’로 자리잡아
가입자 2100만명·1인당 月평균 64회 방문·중장년층 비중 36%… 창업 5년 만에 기업가치 3조원 ‘유니콘 기업’으로 우뚝
“혹시 당근이세요?” “네 당근입니다.”
어색한 인사를 주고받은 이들 중 하나가 조심스레 쇼핑백 하나를 건넨다. 이제는 지하철역 출구, 아파트 정문, 동네 공원 등 주변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 모습이 됐다. 월간 이용자수(MAU) 1500만 명. 새로운 플랫폼 서비스가 나올 때마다 소외되기 십상이었던 중장년층의 비중은 36%를 넘어섰다. ‘특별한’ 숫자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모바일 데이터 및 분석 플랫폼인 앱애니(App Annie)에 따르면 지난 7월 기준 당근마켓의 1인당 월평균 이용시간은 2시간 2분, 월평균 방문 횟수는 이용자 1명당 64회에 달하며 2∼3위 서비스와 압도적인 격차를 보였다. 업계에서는 “유튜브 이후 이 정도로 체류시간과 방문 빈도가 높은 앱은 처음 본다”며 ‘경악스럽다’는 반응이 나왔다. 판교 지역 정보기술(IT) 기업에 근무하는 직장인들의 중고 직거래를 중개하던 게시판 수준의 서비스는 단 5년 만에 유니콘(기업가치 1조 원 이상의 비상장 기업)으로 올라섰다. 지난 18일에는 1789억 원 규모의 투자 유치로 기업가치만 약 3조 원을 인정받으며 롯데쇼핑(2조8855억 원)과 신세계(2조4515억 원)의 시가총액마저 단번에 뛰어넘었다. 지구 반대편에 있는 물건도 일주일이면 집 앞까지 가져올 수 있는 시대, 오히려 2시간이면 넉넉히 둘러볼 수 있는 ‘우리 동네’ 하나만을 집요하게 파고들어 국내 최대 지역생활 커뮤니티가 된 당근마켓 이야기다.
◇당근마켓 이야기 = 2015년 설립된 당근마켓은 카카오 출신 김용현·김재현 대표가 함께 창업했다. 중고거래라는 특별할 것 없는 서비스에 ‘지역 기반 서비스’를 결합해 대박을 치며 중고나라, 번개장터 등 기존 사업자를 제치고 중고거래 시장 1위 사업자로 올라섰다. 이제는 중고거래앱을 넘어 동네 주민을 잇는 일종의 지역 SNS로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특히 코로나19로 사람들의 생활 반경이 좁아지면서 동네를 기반으로 한 당근마켓의 서비스는 폭발적으로 성장했다. 당근마켓은 이번 투자금을 바탕으로 하반기 해외 진출에도 박차를 가할 방침이다. 이미 ‘캐롯(Karrot)’이라는 이름으로 캐나다, 미국, 영국, 일본 등에 진출해 운영 중이다.
◇당근마켓은 중고거래앱이 아니다 = 1500만 ‘당근러’(당근마켓 이용자)들이 들으면 무슨 소리인가 하겠지만 당근마켓은 중고거래앱이 아니다. 물론 당근마켓을 통해 동네 이웃들과 편리하게 중고거래를 할 수 있고, 대다수 이용자가 이를 목적으로 당근마켓에 접속하지만 애초에 당근마켓은 중고거래를 하려고 사업을 시작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당근마켓에는 대부분의 해외 중고거래 플랫폼이 수익모델로 채택하고 있는 거래 중개수수료가 없다. 당근마켓 관계자는 “앞으로도 중고거래에 수수료를 매길 계획은 없다”고 잘라 말한다. 거래액을 늘리기 위해 일정 부분 불가피한 전문 판매자의 유입 역시 철저하게 막고 있다. 중고거래는 당근마켓의 주력 분야가 아니라는 뜻이다.
당근마켓의 향후 행보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먼저 당근마켓만의 가장 큰 특징이라 할 수 있는 ‘지역 기반’ 원칙에 대해 이해할 필요가 있다. 판매자 혹은 구매자로 당근마켓을 이용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GPS를 기반으로 실제 해당 동네에 살고 있다는 인증을 받아야 한다. 오로지 같은 생활권에 사는 사람들 사이에서 거래가 이뤄져야 한다는 창업자의 의도가 깔린 장치다. 그래서 이름도 당근마켓(‘당’신 ‘근’처의 마켓)이다. 기업 규모가 수백 배 커졌어도 이 원칙만큼은 철저히 지키며 동네 장터를 표방해왔다. 오픈 초기 사용자도, 매물도 없어 서비스가 헛돌자 거래 가능 범위를 넓히거나 아예 없애자는 의견도 나왔지만 고집스러울 만큼 ‘동네 주민끼리 직거래’ 방침을 고수하며 지금은 당근마켓의 가장 큰 자산이 됐다.
덩치가 커지면서 여러 서비스가 추가됐으나 당근마켓의 모든 게시물에 여전히 공통적으로 표시되는 정보값이 있다. 바로 상품이나 서비스, 정보를 제공하는 사용자가 소속된 동네 이름이다. 여기에 당근마켓의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의 DNA가 모두 담겨 있다. 당근마켓은 ‘동네에서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제공하는 플랫폼을 지향한다. 당근마켓이 지금까지 악착같이 중고거래 서비스를 제공하며 사람들을 끌어모았던 것도 따지고 보면 ‘지역 커뮤니티 플랫폼’을 구축하기 위한 일종의 수단이었다. 김용현 공동대표 역시 여러 언론 인터뷰를 통해 “중고거래를 넘어 IT를 활용해 지역 커뮤니티를 하나로 묶는 게 당근마켓의 지향점”이라고 밝히기도 했다. 중고거래 사업모델은 당근마켓이 꿈꾸는 ‘당근 생태계’의 일부일 뿐 중고물품을 시작으로 지역 주민과 동네 상점이 당근마켓을 통해 소통하면서 이웃들이 얼굴을 맞대고 만날 수 있는 판을 만드는 것이 목표인 셈이다.
◇가로 vs 세로 = 당근마켓은 상품·서비스를 직접 제공하는 사업자가 될 수 없고, 그럴 의향도 없다고 밝혔다. 다만 인프라를 가진 지역 업체들이 당근마켓을 지역 주민들과 만나는 창구로 활용해주길 원한다. 음식 배달이나 택시처럼 사용자의 주문 빈도가 높은 플랫폼 서비스는 물론, 이사처럼 몇 년 단위로 사용하는 서비스도 우후죽순 쏟아지고 있다. 당근마켓은 이 같은 플랫폼들이 결국 당근마켓 안에서 지역 기반으로 서로 뭉칠 수 있다고 본다. 당근마켓이 지향하고 있는 유일무이한 지역 커뮤니티 모델도 고객의 생활을 장악하겠다는 목표를 두고 다른 플랫폼과의 경쟁이 불가피한 상황이다. 한 업계 관계자는 이를 “결국 가로와 세로의 싸움”이라고 표현한다. 카카오 등과 같이 개별 상품·서비스를 주제로 전국 단위의 플랫폼을 전개할 것인지, 아니면 당근마켓처럼 지역 기반 커뮤니티 플랫폼 위에 여러 서비스를 한 번에 펼칠 것인지의 차이를 빗댄 말이다.
이에 당근마켓 앞에 놓인 숙제도 만만치 않다. 신선식품, 청소, 반려동물, 교육 등 ‘당근’만의 영역을 넓히다 보면 여타 플랫폼 사업자들과 마찬가지로 소상공인 등 기존 사업자와 마찰을 빚을 수 있다. 현실적으로 서비스 정착 이후 이들을 상대로 중개수수료 책정 문제도 해결해야 한다.
이희권 기자 leeheken@munhwa.com
09월 06일 장미 이야기
3000년전 이집트 등서 처음 재배… 클레오파트라·나폴레옹의 황후 조제핀은 잠 잘때에도 곁에 둬
찔레·해당화 등 국내에 뿌리 내린 장미의 일종… 향수·의약품·패션 넘어 식용으로도 널리 활용
장미보다 할 이야기가 많은 꽃이 또 있을까. 명실공히 전 세계에서 가장 인기가 많은 꽃답게 장미는 다방면에 걸쳐 아주 오랜 역사와 풍부한 기록을 보유하고 있다. 무수히 많은 정원을 비롯해 사랑과 치유가 필요한 모든 공간 속에서 장미는 늘 우리 곁에 가까이 존재해 왔다. 정원이 아닌 곳에 핀 장미꽃은 있어도, 장미꽃 한 송이 없는 정원은 드물다. 장미는 정원 밖에서도 인류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미쳐 왔다. 의학과 향수, 요리, 패션 등 실용적 용도뿐 아니라 종교와 예술, 문학 등 분야를 망라한다.
장미꽃 하면 가장 먼저 떠올리게 되는 이미지는 이집트 클레오파트라 여왕, 혹은 로마 시대 네로 황제일 수도 있고, 각자 좋아하는 장미 향수 또는 장미향 가득한 대규모 축제 정원에서의 추억들, 혹은 좋아하는 사람에게 처음으로 장미꽃을 주었거나 받았던 추억일 수도 있다. 아마도 시대와 장소를 불문하고 장미꽃의 변하지 않은 불변의 속성을 가장 잘 표현한 것은 셰익스피어의 ‘로미오와 줄리엣’에 나오는 구절일 것이다. “이름이 뭐가 중요할까? 그 어떤 이름으로 불러도 장미는 똑같이 달콤한 향기가 날 것을.”
언제부터 장미는 꽃의 대명사, 꽃의 여왕이 돼 오늘날에 이르게 됐을까? 장미꽃이 지구상에 처음 출현한 증거는 미국 콜로라도에서 발견된 장미 화석으로, 약 4000만 년을 거슬러 올라가지만, 인류가 장미를 재배하기 시작한 시기는 이집트, 바빌로니아, 페르시아, 중국 등 고대 여러 지역에 걸쳐 대략 3000년 전쯤으로 보고 있다. 기원전 2000년기 초기 크레타 섬의 크노소스 궁에서는 가장 이른 시기의 장미를 묘사한 프레스코 벽화가 발견됐다. 그 장미는 오늘날 우리가 즐기는 화려한 품종의 장미와는 많이 달랐다.
이집트 상나일 지역에서 들여온 로사 리카르디(Rosa x richardii), 로사 카니나(R canina) 등으로 추정되는데 모두 향기가 좋은 홑꽃 종류였다(안타깝게도 전자는 이미 멸종된 지 오래다). 당시 미노아 문명에서 장미는 화분에 재배됐던 흔적이 발견되기도 했다.
장미가 역사적으로 전 세계에 걸쳐 큰 인기를 끌게 된 데에는 아주 이른 시기부터 여러 신화와 전설 속에서 강한 상징성으로 자리매김한 이래로 꾸준히 왕실과 귀족들의 사랑을 받아온 덕이 크다. 기원전 14세기 이집트 파라오 투트모세 4세의 무덤 벽화에도 장미 그림이 나오는데, 장미의 흔적들은 무덤 안 곳곳에 있었고 미라에서도 발견됐다. 장미는 이승과 저승을 연결하는 꽃의 의미를 지니고 있었고, 이때 사용된 장미 역시 에티오피아에서 온 거룩한 장미 로사 리카르디였다.
이집트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클레오파트라 7세(기원전 69년∼기원전 30년)는 일상생활을 늘 장미와 함께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의 거처엔 장미꽃이 가득했고 공개석상에서도 늘 장미꽃이 뿌려졌다. 언제까지나 향기를 풍기는 여신으로 기억되길 바랐던 것이다.
▲ 로런스 알마타데마가 그린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1883).
그리스·로마 시대에 장미는 사랑의 여신 아프로디테(비너스)의 눈물로 피어난 꽃이 됐고, 사랑에 대한 강한 상징성으로 장미들이 큰 인기를 얻었다. 특히 오늘날에도 장미유나 장미수를 얻기 위해 많이 재배하는 다마스크 장미(R damascena), 로사 갈리카(R gallica), 로사 포이니키아(R phoenicia), 로사 카니나(R canina), 로사 알바(R x alba) 같은 장미들이 사랑을 받았다. 하지만 로마 시대에 장미는 허영에 가까웠다. 네로 황제는 병적으로 장미에 집착했다. 그는 파티가 열릴 때면 장미 화관을 쓰고, 어마어마한 양의 장미 꽃잎을 만찬장에 쏟아 부었다. 잠을 잘 때는 장미 꽃잎 베개를 사용하고, 수영장과 분수에도 장미수를 넣도록 했으며, 술과 디저트에도 장미 향을 첨가했다. 로마의 귀족들도 장미를 부의 척도로 삼아 경쟁적으로 커다란 장미원을 조성했다.
로마 제국의 멸망 후 장미에 대한 인기는 잠시 소강 상태로 접어들었고, 이슬람 세계에서 그 명맥이 유지됐다. 무슬림에게 붉은색 장미는 유일신 알라를, 흰색 장미는 예언자 무함마드를 상징했다. 티무르 왕자들의 정원과 타지마할의 정원에 장미원이 조성됐고, 페르시아 샤 압바스의 정원엔 붉은색과 노란색 꽃잎을 가진 다마스크 장미와 사향 장미가 피어났다.
혼돈의 중세 시대를 거치며 프랑크 왕국의 샤를마뉴 대제는 궁전에서 장미를 재배하기 시작했다. 유럽에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장미는 815년 건립된 독일 힐데스하임의 가톨릭성당에 식재된 장미(R canina)로, 1000년을 넘도록 살고 있다. 제2차 세계대전 때 연합군의 폭격으로 대성당이 파괴된 후에도 이 장미의 뿌리는 살아남아 다시 싹을 틔웠다.
12∼13세기 동안 중동 십자군 원정을 통해 다양한 장미가 유럽으로 도입됐다. 그중에는 원래 로마 시대 약효로 유명했던 로사 갈리카 ‘오피키날리스’(R gallica ‘Officinalis’), 반겹꽃의 자홍색 꽃이 피는 로사 갈리카, 그리고 분홍색과 흰색 줄무늬 꽃잎을 가진 로사 갈리카 ‘버시컬러’(R gallica ‘Versicolor’)도 포함됐다.
13세기 유명한 소설 기욤 드 로리스와 장 드 묑의 ‘장미 이야기’는 연인에 대한 사랑을 상징하는 장미가 있는 정원을 배경으로 다양한 인간군상의 신변잡기적 철학을 담고 있다. 그 시대 장미는 트렐리스를 타고 자라거나 정원을 두르는 울타리용으로 식재되기도 했다.
15세기 영국에서는 유명한 장미 전쟁(1455∼1487)이 발발한다. 랭커스터 가문의 헨리 6세 왕과 요크 가문의 귀족들 사이에 패권을 차지하기 위한 갈등이 불거져 무려 30년 동안이나 소규모 전투와 교전이 간헐적으로 계속됐던 전쟁이다. 마침내 전쟁은 랭커스터 가문의 승리로 마무리됐고 헨리 7세는 1486년 요크 가문 에드워드 4세의 딸 엘리자베스와 결혼해 새롭게 튜더 가문을 세웠다. 헨리 7세는 통합된 두 가문을 상징할 수 있도록 랭커스터 가문의 붉은 장미와 요크 가문의 흰 장미를 결합시킨 튜더 장미를 만들었다. 튜더 장미는 정권을 통합하고 민심을 추스르기 위한 헨리 7세의 강력한 이미지 메이킹을 위해 탄생한 화합과 통일의 상징이었다.
17세기엔 북아메리카의 새로운 장미들도 유럽으로 건너왔다. 대표적인 종은 100개 이상의 꽃잎을 가진 로사 센티폴리아(R centifolia)다. 양배추 장미라고도 불리는 이 장미는 강건하고 향기가 좋아 반 데 파스, 피에르 모린 등 유명 화가들이 꽃 그림을 그린 화보집에도 단골 아이템으로 수록됐다.
19세기 초 프랑스 나폴레옹의 황후 조제핀의 장미 사랑은 역사를 통틀어 가장 유명하다. 나폴레옹이 제국을 장악하는 동안 조제핀은 파리 외곽 20㎞ 서쪽에 위치한 말메종 섬을 1798년에 인수하고 1814년에 죽음을 맞이할 때까지 그곳에 자신만의 정원을 만들고 가꿨다. 말메종 정원엔 식물학자 에티엔 피에르 벵트나, 수석 원예가 앙드레 뒤퐁, 그리고 전속 화가 피에르 조제프 르두테 같은 쟁쟁한 인물들이 조제핀과 함께했다. 조제핀이 얼마나 영향력이 있었는지 영국과 전쟁 중에도 말메종으로 식물을 싣고 가는 배는 영국 해협을 통과하는 특별 여권을 부여받기도 했다.
그녀가 수집한 식물 컬렉션에는 250종에 달하는 장미가 포함됐다. 그녀는 고전 장미를 가장 많이 모은 수집가였고 몇몇 새로운 품종도 개발하기도 했다. 사탕수수 농장을 소유한 부유한 가문 출신의 조제핀은 원래 이름에 로즈가 들어 있어 결혼 전에는 로즈로 불렸고, 평소 장미향을 무척 즐기며 뛰어난 미모로 사교계를 사로잡았다.
프랑스 혁명이 발발하면서 단두대 이슬로 사라진 여왕 마리 앙투아네트의 식물 화가이기도 했던 르두테는 말메종 섬에서 조제핀의 식물 화가가 돼 제2의 전성기를 구가했다. 조제핀이 수집한 250종의 장미 가운데 117종을 그림으로 남겼고, ‘레 로제’(Les Roses)라는 아름다운 화보집에 수록했다.
조제핀이 말메종에 장미를 수집할 무렵은 중국에서 월계화(R chinensis) 등 흥미로운 장미들이 도입되고 있던 시기였다. 인공수분을 통한 육종 기술이 체계화되면서 새로 도입된 장미들은 유럽의 고전 장미들과 교잡을 통해 꽃의 색깔과 형태, 개화시기, 향기 등에 있어 혁신적 변화를 나타냈다. 역사상 동서양의 만남 중에 이보다 더 아름다운 사건이 있었을까? 장미의 새로운 시대는 1867년에 개막했다. 프랑스 리옹의 육종가 장 밥티스트 기요가 육종한 라 프랑스(La France)라는 하이브리드 티(hybrid tea) 품종의 탄생이 기폭제가 됐다. 1867년은 그 이전에 존재했던 고전 장미와 그 이후 쏟아져 나온 현대 장미를 구분 짓는 기준년이 됐다.
사계절 꽃 피는 중국산 야생장미와 향기가 뛰어난 유럽 야생종의 만남은 꽤 신선했다. 곧게 뻗은 가지 끝에 한 송이 커다랗고 아름다운 꽃이 달리는데, 한 번만 피고 마는 것이 아니라 반복적으로 피어나니 그때까지 없었던 장미의 신세계를 맞게 된 것이었다. 진홍색과 노란색, 보라색 등 새로운 꽃 색깔을 보게 된 것도 경이로운 일이었다. 그 외 플로리분다, 클라이머, 그랜디플로라, 랜드스케이프, 램블러, 관목 등 여러 계통의 장미들이 쏟아져 나왔다.
새로운 현대 장미 품종들은 여러 좋은 점이 많았지만 향기가 많이 약화됐다. 육종 과정에서 대부분 향기를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젊음을 위해 악마에게 영혼을 판 파우스트 같다고 하면 지나친 비약일까. 이에 대해 데이비드 오스틴이 1961년부터 내놓기 시작한 영국 장미들은 고전 장미의 매력을 부활시키기 위해 개발한 품종들로 근래에 인기가 아주 높다.
20세기를 지나 오늘날까지도 장미의 인기는 정원에서 정원으로 계속 이어져 왔다. 트렐리스나 아치에 자라는 장미는 영국의 히드코트 매너나 시싱허스트 같은 세계적인 정원의 필수 아이템이었다. 특히 시싱허스트의 화이트 가든에서 볼 수 있는 덩굴장미 로사 물리가니(R mulliganii)는 매우 아름답기로 유명하다.
▲ 로사 갈리카(Rosa gallica)
예로부터 우리나라에 뿌리를 내린 장미도 여럿 있다. 가령 꽃이 사철 계속 핀다는 뜻의 월계화(Rosa chinensis)는 15세기 강희안이 저술한 원예서 ‘양화소록’에도 기록돼 있다. 종명에 우리나라를 뜻하는 코레아나(koreana)가 붙은 흰인가목(R koreana), 찔레(R muliflora), 돌가시나무(R wichuraiana), 용가시나무(R maximowicziana), 그리고 바닷가에 피는 해당화(R rugosa), 노랑해당화(R xanthinoides)도 모두 이 땅의 장미들이다.
장미는 식용도 가능하다. 꽃잎에는 항산화 작용에 좋은 안토시아닌과 베타카로틴이 풍부하고, 로즈힙이라고 불리는 열매에는 천연 비타민 C가 레몬의 20배나 들어 있다.
향기와 꽃으로 인간의 마음을 사로잡고 지구 곳곳에서 사랑과 치유의 마법을 펼쳐 온 장미는 앞으로도 지구의 삶을 아름답게 만드는 일등 공신으로 영원히 남을 만한 꽃이다.
국립세종수목원 전시기획운영실장
■ 로사 갈리카(Rosa gallica)
장미과의 낙엽 관목으로, 프랑스 장미(French Rose)라고도 부르는데, 종명인 갈리카(gallica)는 프랑스를 뜻한다. 유럽 중남부가 원산지로 키는 1.5m까지 자란다. 5장 이상의 진분홍색 꽃잎을 가지며, 향기가 좋다. 중유럽에서 가장 먼저 재배된 장미 종류 가운데 하나다. 많은 현대 장미 품종이 로사 갈리카의 후손으로 육종됐다. 배수가 잘되는 사질 양토를 좋아하며 햇볕이 잘 드는 곳에서 잘 자란다. 겨울철엔 영하 25도까지 월동할 수 있다.
문화일보 박원순 국립세종수목원 전시기획운영실장
09.17 12년 고이 간직한 편지…참전용사와 여군 눈물 쏟은 상봉 [영상]
▲프리스트가 초3 때 수업시간 과제로 작성한 '참전용사 감사 편지'. 이를 받은 그래스버거가 12년 동안 소중히 간직해왔다. [인터넷 캡처]
“제2차 세계대전 참전용사 아저씨께, 히틀러로부터 우리를 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당신은 우리를 위해 목숨을 바쳐 자유를 만들었습니다.”
2009년 미국 오하이오주 로레인에 있는 어빙초등학교 3학년 다샤우나 프리스트는 교사가 수업시간 과제로 내준 감사편지를 또박또박 적어내려갔다. 아홉 살짜리 프리스트는 전쟁이나 참전용사에 대해 아는 건 별로 없었지만, 교사로부터 항상 나라를 지키는 군인에 대해 진심으로 감사해야 한다고 배웠기 때문에 주변에 제복 입은 사람들을 우러러봤다. 그리고 누구의 손으로 갈지도 모를 편지를 부쳤다.
프리스트의 편지는 오하이오주 스트롱빌에 사는 참전용사인 그래스버거(95)의 손에 배달됐다. 그래스버거는 2차 세계대전 중이던 1944년 18세로 징집돼 3년간 독일에 주둔했던 참전용사다. 2009년 83세였던 그래스버거는 뜻밖의 편지를 받고 감동의 눈물을 흘렸다. 그는 “이렇게 어린 아이가 전쟁에 관한 편지를 쓸 수 있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감동적이기도 하고 가슴이 찢어졌다”고 회상했다. 프리스트가 크레파스와 연필로 그린 성조기와 군용 헬멧을 보면서도 눈시울을 붉혔다.
▲제2차 세계대전 참전용사인 그래스버거. 그는 18살인 1944년 징집돼 독일에서 3년간 주둔했다. [인터넷 캡처]
그날 이후 그래스버거는 프리스트의 편지를 반듯하게 접어 항상 몸에 소지하고 다녔다. 호주머니에 넣거나 휠체어 방석 밑에 두는 등 한시도 몸에서 떼놓지 않았다. 그는 “이 편지 없이는 살 수 없을 정도”라며 애지중지했다.
기특하고도 친절한 소녀에게 답장도 썼다. “너의 편지를 받고 정말 기분이 좋았단다. 전쟁은 끔찍한 일이지만, 너와 많은 사람들을 자유롭게 할 수 있었다면 그만한 가치가 있는 일이란다”고 적은 뒤 프리스트의 학교로 보냈다. 하지만 프리스트가 답장을 제대로 받았는지는 확인하지 못했다.
/그래스버거가 프리스틴에게 답장으로 보낸 편지. [인터넷 캡처]
편지를 볼 때마다 소녀를 떠올리던 그래스버거는 21살 성인이 됐을 프리스트를 찾기로 결심했다. 하지만 프리스트가 다니던 어빙초등학교는 문을 닫았고, 교육청은 학생의 연락처 정보를 제공하기 꺼려했다. 그래스버거는 매일 밤마다 편지를 펼쳐두고 프리스트를 만나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그래스버거의 사연은 그 지역 시니어 레지던트의 서비스 이사인 질 파울로스키에게 알려졌다. 파울로스키는 “다른 사람이라면 쉽게 구겨서 버릴 만한 편지를 12년간 애지중지해왔단 사실에 크게 감동했다”며 프리스트를 찾는 일에 적극 나섰다. 그는 소셜미디어를 수차례 검색해 프리스트로 보이는 여성을 찾아냈고 개인 메시지를 보냈다.
프리스트는 낯선 사람이 보내온 메시지를 보고 깜짝 놀랐다. 메시지에 언급된 위문편지는 12년 전 프리스트가 보낸 것이 분명했다. 어엿한 여군이 돼 주 방위군으로 복무 중인 프리스트는 자신의 편지를 받았던 참전용사를 만날 수 있다는 생각에 설레었다. 파울로스키에게 즉각 답장을 보냈다.
그리고 지난 7월말, 그래스버거는 누군가 자신을 인터뷰하러 올 것이란 얘기를 듣고 부인과 함께 기다리는 중이었다.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은 군복을 입고 붉은 장미 꽃다발을 손에 쥔 프리스트. 그래스버거는 생전 처음 본 얼굴을 단박에 알아보고 “네가 그 소녀구나”라고 떨리는 목소리로 외쳤다. 그래스버거는 항상 소지하고 다니는 프리스트의 편지를, 프리스트는 챙겨온 그래스버거의 답장을 꺼내 서로에게 보여주며 눈물을 쏟았다.
/21살 군인이 되어 나타난 프리스트를 그래스버거가 한눈에 알아봤다. 틱톡 캡처
프리스트는 이제 곧 자신의 아들 키로와 함께 그래스버거를 다시 찾아갈 예정이다. 그래스버거는 이 사연을 보도한 워싱턴포스트(WP)와의 인터뷰에서 “프리스트는 내 셋째 딸이다. 12년을 찾아 헤맸고 이제 그 아이와 많은 얘기를 나누고 싶다”고 말했다. 이어 “이건 신의 신물이며, 너무도 완벽한 일”이라고 했다.
/서로에게 썼던 편지를 보여주며 눈물을 흘리는 두 사람. 틱톡 캡처
박형수 기자 hspark97@joongang.co.kr
♣ 신달자(시인)의 이야기
♡ 어머니의 아리랑
▲ 일러스트 = 안은진 기자 eun0322@
대지진이었다/지반이 쩌억 금이 가고/세상이 크게 휘청거렸다/그 순간/하느님은 사람 중에 가장/힘센 사람을/저 지하층 층 아래에서/땅을 받쳐들게 하였다/어머니였다/수억 천 년 어머니의 아들과 딸이/그 땅을 밟고 살고 있다.’
이 졸시(拙詩)는 ‘어머니의 땅’이라는 필자의 시다. 어머니라는 이름은 영원히 회자(膾炙)된다. 어머니는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 인류가 멸망한다고 해도 어머니는 자녀들의 흔적을 지키느라 어쩌면 이 땅을 지키는 존재로 남을지도 모른다.
어머니는 그렇다.어머니는 기쁜 자리에서는 빛나지 않는다. 기쁜 자리에서조차 젖은 손으로 어느 구석진 자리에 계신다. 그리고 자녀들의 표현하지 못하는 구석구석의 감정 이끼까지 챙기며 자신의 마음을 보탠다. 그리고 자녀들의 무거운 인생을 마음으로 들고 머리에 이고 사는 사람이 어머니다. 요즘 간절하게 이 나라를 떠받들고 설 수 있는 사람에 대한 그리움이 곡진(曲盡)하다. 그래서 오늘의 사회가 모성적 사회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을 어디에서건 맛보고 싶다.
그것은 왜 이리도 어려운가? 왜 이렇게 안 되나. 이 일을 누구에게 물어 봐야 하나. 이 나라 국민의 한 사람은 외롭고 춥다. 기대조차 안 하면 어쩌나 스스로 걱정이 된다. 그러나 시급한 것은 이러한 어머니 같은 정신의 길잡이가 불쑥 앞으로 나타나 국민을 이끌었으면 한다. 또한 그런 길잡이를 따르는 국민 의식도 필요한 시점이다. 오늘의 사회 실타래는 자꾸만 엉키고 있다. 꼬이고 다시 꼬이고 이제 풀리려나 하고 바라보면 더 엉켜 있다. 그래서 어머니가 그립다.
어릴 때 집안이 무엇인가 어지럽게 돌아갈 때, 도무지 실마리가 잡히지 않을 때, 그것은 어머니가 작심을 하면 꼭 풀리는 것이었다. 이상하게도 “알았다” 하시며 어머니가 움직이면 마술처럼 모든 게 제자리에 오게 되는 경험을 참 많이 했다. 그런 어머니가 필요한 시점이다.
무작정 힘을 실어 주는 사람이 어머니다. 못 생겨도 예쁘다고 해 주고 실수를 해도 괜찮다고 그래 다시 잘하면 된다고 해주는 사람이다. 조금 시원찮아도 그만하면 됐다고 추어주는 사람이다. 그리고 그 나머지 설거지를 어머니 손으로 해결하고 마지막 먼지까지 닦고 다시 정돈하는, 그래서 드디어 잘못된 자식도 감동으로 눈물 바다를 이루며 결국 제자리로 돌아오게 하는 사람이 어머니다.
무엇을 못하겠는가. 희생이라는 말의 동의어가 어머니 아닌가. 그냥 그렇다는 이야기다. 내 어머니 같으면 나보다는 먼저 너를 생각하고 내 앞의 이익보다 큰 것을 생각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해 본다. 그 희생은 단순하거나 몇 사람을 위한 게 아니다. 어머니의 희생은 고루고루 모든 집안이 편하게 하는 것이었다. 어머니야말로 가장 위로받아야 할 사람이었지만 자신은 저 아래에 파묻어 놓고 그냥 가족의 평안을 이끌어가려는 게 어머니 정신이었다.
그러나 내 어머니는 아버지에게만은 달랐다. 나는 지금도 어머니의 그 핏발선 고함을 잊지 못한다.
금방이라도 살인이 날 것 같은 무섭고 두려웠던 전쟁을 여러 번 보았다. 어머니가 아버지 옷자락을 부여잡고 늘어지면 아버지는 냉정하고 모멸차게 홱 어머니를 뿌리치며 나가시던 모습도 기억난다. 아버지는 어머니가 늘 독하다고 진저리를 치셨다. 원래 그렇다. 사랑받지 못하는 여자는 독하게 마련이다. 아버지는 상대도 안하겠다는 표정으로 과소하고 낮은 말로 몇마디 던지고 며칠씩 보이지 않았다. 어머니의 감정은 증폭되고 어머니의 병은 깊어갔다.
어머니는 외쳤다. “저 인간을 살아 있게 하는 신은 내가 가만 안 둔다”고 소리소리 치셨다. 그러나 어머니가 먼저 갔다. 그렇게 절절 끓는 한으로 아버지를 사모하던 어머니는 돌아가실 때 아버지를 걱정하셨다. 잘나가던 아버지가 아니라, 지갑도 비고 주변도 한적한 아버지를 자식들이 푸대접이라도 하면 어쩌나 어머니는 눈을 감으면서 그것을 걱정하셨다.
어이가 없었지만 나는 어머니를 이해할 수 있었다. 어머니의 그 격렬한 분노와 폭풍 같은 원망과 통곡은 다 사랑이었던 것이다. 늘 아버지를 기다렸고 늘 아버지를 위해 밥상을 마련하고 늘 아버지를 그리워했다. 다른 것은 몰라도 아버지의 사랑에 있어서는 걸인이었고 누추하고 배가 고팠다. 그것을 몰라주는 아버지를 향해 독설(毒舌)을 퍼붓는 것, 그것은 다른 언어의 사랑이었던 것이다.
내가 아는 어머니는 자랑하고 싶은 어머니였다. 내 자식이 이렇게 이렇게 되었거나 남편이 이렇게 이렇게 사랑해 준다는 말을 장에 가서 물건을 살 때도, 목욕탕에 가서도 하고 싶은 여자였다. 그런 평범한 여자였다. 그러나 어머니는 살아서 단 한번도 그런 자랑을 해 본 적이 없다. 자랑할 것이 없었다. 끝끝내 숨이 넘어갈 때까지 사랑받았다는 자기 인식 없이 돌아가신 것이다.
그러나 지극히 가정의 평화를 향해 견딘 무게는 하늘보다 높다. 대결과 이기심의 에너지를 새로운 힘만들기에 쏟는다면 모성(母性)시대는 살아날 것이다. 지금의 우리 사회가 내 어머니가 아니라 세상의 모든 어머니 같은 모성적 사회로 서로 어루만져주고 큰 목표를 향해 손을 잡았으면 하는 바람 간절하다.
♡ 肉筆은 무엇인가
▲ 일러스트=조연수 기자 choys@munhwa.com
나는 ‘컴퓨터 수다’라고 부른다. 절제 감각이 떨어지고 말이 많아지는 것이다. 펜으로 쓰는 것보다 쉽다고 느끼는 점이 없지 않다. 그래서 육필(肉筆)이 귀해졌다. 50년 후에는 육필의 희소가치가 있을 것이 뻔해 잡지사에서는 요즘 육필 시 원고를 청탁하는 경우가 많다. 물론 육필 시집도 없지 않다. 작고한 시인이나 작가의 육필이 지금 제법 대접을 받는 것을 보면 지금의 시인 작가들의 50년 후나 100년 후에는 보다 더 진귀한 보물이 될지 모르기 때문이리라.
여러 잡지사에서, 또는 개인이 육필 시를 써 달라는 청탁이 늘었다. 나도 다른 분들의 육필 원고를 보면 탐이 나고 더러는 그분의 책에 사인을 받기도 한다. 그 글씨를 보면 기분이 다르다. 그냥 메일로 받는 편지보다 특별하게 마음이 가고 긴 대화를 하고난 듯한 기분도 든다. 아마도 그래서 육필이라고 하지 않았을까. 그 육필이라는 말이 소름 돋으면서도 마음이 간다. 그래서 시작해 보는 일이다.
나는 요즘 펜으로 잉크를 찍는 구식 방법으로 시를 쓰는 연습을 해 보고 있다. 아날로그라는 고향 의식이 발동한 것도 아니고, 더더욱 미래를 대비해 값에 대한 집착을 하는 것도 물론 아니며, 뭔가 내가 나에게 마음을 더 진하게 바친다는 생각이나 사랑에는 시간과 노력을 바쳐야 한다는 생각을 했을 뿐이다. 물론 구식이다. 그러나 한 자만 틀려도 다시 써야 하고 다시 써야 하는 인내심을 내 안에서 불러내고 싶었던 것이 본심인지 모른다, 나는 너무 급하므로. 생각해 보면 그런 급한 성격은 좋을 게 없었다. 실수가 많고 후회를 하고 상처를 혼자 다 뒤집어쓴다. 그래서 그야말로 육필로 내가 읽은 책 중에 가장 좋았던 구절들을 베껴 써 보는 것으로 스스로를 견디고 인내하기 위한 취미 하나를 만들었다는 이야기다.
얼마를 갈지 모른다. 작심삼일(作心三日)이 눈에 보이지만 시작해 보는 것이다. 잉크가 마르기 전에 마음이 변할 수도 있지만 해 보는 일이다. 글자 한자 한자에 구부정한 내 마음이 바로설 수 있고, 글자 한 자에 내 비뚤어진 정신이 제자리로 돌아오고, 글자 한 자에 주저앉는 내 마음이 똑바로 설 수 있기를 바라지만 그 희망조차 뒤로 미룬다. 아무 조건없이 써 보려고 한다. 나는 그렇다. 무엇인가를 할 때 대가를 바란다. 이것을 해서 무엇을 얻을까? 나는 정확하게 내가 활동하는 만큼보다 몇 배를 더 바란다. 이는 내 생을 다해 참회해도 모자랄 것이다. 노력은 덜하고 소망은 과했다. 어쩌다가 노력보다 성과를 더 얻으면 모두를 내 운으로 받아들이고 더 나아가서는 내 능력의 과시로 스스로 단정할 때도 있었다.
나는 나 자신을 사랑하는 것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나이는 그야말로 지긋하다. 그런데 이 정도에서 그야말로 진심과 최선으로 나를 사랑하는 일은, 노력보다 더 얻는 일이 아니라 노력보다 덜 얻어서 그 분량을 남에게로 돌리는 어른이 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얼마나 마음 편하고 기쁘고 행복하겠는가. 결국은 오는 생의 끝이 있다면 그 순간에 매듭이 없으면 좋겠다.
나는 더 편하면서 작은 시간에 많은 것을 하고 싶은 도둑의 마음이 있었다. 나는 급하게 하면서, 야단스럽게 일하면서 완벽하기를 바란 것도 많다. 인내심 부족! 인내심 부족! 열 번을 외쳐도 모자랄 것이다. 좋은 구절을 골라 쓴다.
제일 처음 쓴 구절은 성경이었고, 그 다음은 프랑스 작가 생텍쥐페리의 ‘인간의 대지’(1939)다. 1935년 리비아 사막에 추락하면서 체험한 인간의 준엄한 극기의 현장 기록이다. 절망의 추락 현장에서 집에서 라디오 앞에 이지러진 얼굴로 절망에 휩싸여 자신을 기다리는 아내와 가족이 오히려 조난자라고 말하면서 그 조난자들을 위해 발뒤꿈치 살을 깎아내며 걷는 모습들을 나는 감동적으로 써 본다. 자신의 몸속에 자신보다 더 크게 자리하고 있는 가족을 지팡이 삼아 걷는 장면에서 나는 사랑의 의지가 곧 기적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어린왕자’의 한 대목을 쓴다. 내가 아주 좋아하는 장면을 골랐다. 어린왕자는 알약 하나로 일주일 동안 목이 마르지 않는 약을 파는 상인을 만난다. 왜 그 약을 먹느냐고 묻자 상인은 시간을 절약하기 위해서라고 답한다. 어린왕자는 그러면 몇 분이나 절약되느냐고 묻고, 상인은 53분이라고 답한다. 매주 53분은 오늘의 현대에서 때론 자동차 한 대보다 더 가치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어린왕자는 53분으로 샘을 향해 천천히 걸어가겠다고 말한다. 나는 이 말을 사랑한다. ‘샘’ ‘천천히’ ‘걷는다’는 이 시대에 인간이 찾아야 하는 핵심적 이데아다. 샘이라는 영원히 마르지 않는 희망과 믿음, 명상을 이끌어내는 느림의 미학, 몸을 움직이는 노동의 가치를 폭 넓게 이야기할 수 있다.
나는 연속 두 해나 프랑스 리옹의 아름다운 광장이라는 뜻을 가진 ‘벨쿠르’ 광장에 서 있는 생텍쥐페리와 어린왕자의 동상을 보고 왔다. 어린왕자와 그 작가를 만나는 일이 나에겐 새로운 인간적 힘을 불러일으키는 에너지가 된다.
스무 번을 읽어도 가슴이 철렁 내려앉으며 부끄러운 수치를 자신에게서 발견하게 되는 어린왕자의 목소리를 잉크로 찍어 오늘도 나는 펜으로 어린왕자를 베껴보는 것이다.6·4 전국 동시 지방선거가 끝났다. 지금부터다. 육필을 쓰는 마음으로 그들의 진심과 최선이 나라의 위로와 힘이 되었으면 한다.
♡ '엄마의 ‘때값’
1970년대 초반에도 목욕탕에 때밀이가 있었다. 배가 불러 임신 8개월쯤 돼 보이는 엄마는 용돈 중에 가장 요긴하게 쓰시는 것이 때밀이 요금이었다. 늘 기운이 없고 불편한 몸이어서 목욕을 즐기시는 엄마가 스스로 때를 밀기는 고통이었던 것이다. 엄마는 생각지도 않은 돈이 생기면 “때 몇 번은 밀겠네” 하시며 좋아하셨다. 그래서 우리가 어쩌다 용돈을 드리면 ‘엄마 때값’ 하고 드렸고 엄마는 활짝 웃으며 좋아하셨다.
그 웃음 한 삼십 년 나의 추운 손을 데우는 난로가 아니었겠는가. 이런 이야기를 아는 내 딸들은 지금도 명절이나 생일에 내게 용돈을 내밀 때 “엄마 때값” 하며 봉투를 쥐어준다. 아직도 돈을 주고받는 것이 어색해 딸들은 곧잘 봉투를 서랍에 넣어두거나 책상 위에 놓아 두기도 하는데 그것을 발견하고 내가 전화를 하면 “엄마 때값 봤어?” 한다.
딸들에게서 돈을 받으면서 나는 엄마를 생각한다. 참 띄엄띄엄도 드렸던 때값이었다. 흥부 처도 아니었는데 왜 그렇게 엄마에게 가는 돈은 늘 손이 오그라들었는지 당장 아이들 옷 한 벌이 더 급해서, 엄마 때값이라고 접어 두었던 돈은 언제나 석 장에서 한 장을 빼고, 두 장에서 다시 한 장을 빼 외롭게 한 장을 드렸던 기억이 지금도 뼈아프고 손끝이 저리게 울린다.
언젠가 민망하게도 훈장을 받게 되었는데 자기들도 기쁘다며 딸들이 축하금으로 봉투를 내밀었다. 지난번 생일·어버이날에도 ‘엄마 때값’ 어김없이 붙여진 말이다.
돈이라는 어색한 분위기를 이 말이 모두 활짝 웃게 만든다. 나는 때값에 대해 다시 생각했다. 엄마에게서 따온 말이기는 하지만 적어도 지금 나에게 딱 맞는 말이 아닐까 하고 생각한 것이다. 몸의 때가 아니라 마음의 때를 벗기라고 넌지시 엄마에게 귀띔하는 게 아닐까.
이제 나이 들면서 그 순하고 어리고 가냘픈 손목도 굵어지고 수줍음도 없이 많이도 뻔뻔해졌다. 핑계는 삶이었다. 살아내느라고 나는 이렇게 됐다고 나의 모순, 나의 부정, 나의 야망을 삶에다 걸어 버렸다. 삶은 사람을 이렇게도 만드는 것이라고 그래서 나의 탓이 아니라고 나를 그런 눈으로 바라보지 말라고 눈을 부라리고 살았다. 때론 잔인한 냉정함도, 무관심까지도, 운전중에 약간의 빗나감도 나는 삶에다 끌어다 놨다.
그러면 용서받을 것 같았다. 그러나 그것은 너무 이기적이지 않았는가. 삶이 어디 나 혼자만 가진 것인가. 삶에는 모두 욕지기가 나는 것 아닌가. 그런데 나만 생각한 것이다.
입으로는 사랑을 말하면서 진정한 사랑은 가둬 버렸다. 이것이 사는 방법이라고 사랑하지 못한 것도 삶에 걸었다. 몇 만 원짜리 가방을, 몇 십만 원짜리 옷을 사면서도 낭비가 아니라 이것이 나의 위로라고… 너희들이 언제 나를 위로했느냐고 하면서 말이다.
사실 나는 내 삶이 무거웠다고 그것이 남의 탓인 듯 말해 왔는지 모르겠다. 남의 삶은 이죽거리면서 나야말로 신선하게, 힘들게 살아 왔노라고.
나도 때가 많이 묻었다. 생각과 행동의 때 말이다. 살면 주름이 생기듯 때도 묻을 것이다. 주름은 남에게 폐가 되지 않지만 때는 행여 남에게 폐를 끼칠 수도 있다. 그래서 내 사랑하는 딸들이 “엄마 때값”하며 늙어 가는 엄마에게 애교를 부리는지 모르겠다. 나의 때를 딸들의 용돈으로 지우진 못하지만 딸들의 사랑으로 내 마음의 때를 밀어 깨끗하게 해야 하는 오늘 아침의 내 작심이 진정한 때값이 돼 줄 것이라고 입술을 문다.
그뿐인가. 이번 세월호 사건도 어쩌면 나같이 이렇게 너무 편안해진 이기심이 내 살같이 몸에 붙어 일어난 것 아닌가. 어디서 무엇을 챙겨야 하고, 어디에 무엇을 버리고 남겨야 할지 모르는 총체적 난관 앞에서 우리는 자꾸 무력해지려고 한다.
그리고 “늘 그래왔잖아” 하고 넘기려 한다. 그러나 그러면 안된다. 때밀이 수건으로 닦지 못하면 철사줄을 가지고서라도 있는 힘을 다해 이 사회의 눌러붙은 때를 벗겨야 한다. 그리고 조용히 우리의 삶을 복원해내야 한다. 우리들의 사랑하는 일상을 돌려받아야 한다.
“잘 있어요?” 하고 지인들에게 안부전화를 한다. 그러면 요즘은 모두 대답이 비슷하다. “아이구, 너무 어려운 시절이야.” 사람들은 말한다. 입조심, 옷조심, 모임조심 그리고 많은 계획을 무산시킨다. 그렇긴 하다. 요즘 밝은 색 옷을 입기도 거북하다. 왠지 미안해서다. 그러나 밝은 색의 옷도 입고 아침에 만나는 사람들과 밝은 웃음 있는 인사도 해야 하고 녹음 짙은 계절을 이야기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팽목항을 떠올리며 입을 다문다. 그렇다. 결코 잊어서는 안되는 것은 아무런 죄없이 자식과 부모를 잃은 사람들의 아픔이다. 그분들을 위로하려면 모든 계획을 취소할 것이 아니라 활기와 희망을 가지고 밝은 세상을 만들어가는 노력이 더 필요할 것이다.
계획된 일을 시작하자. 당당하게 결혼식도 하고 거리는 열정으로 가득 차야 한다. 그런 알싸한 일상은 우리가 마음의 때를 버릴 때 돌아올 수 있을 것인가. 어렵지만 희망을 가지자. “힘 내라고요!” 나는 이 말을 자주 사용한다. 나 자신에게도 아침마다 하는 말이다. 누구라도 손을 잡고 이 말을 한다. 누구도 이 말이 필요하지 않은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힘 내라고요!” 때는 어수선한 선거철이다.
♡ 그래도 대한민국 사랑하자
▲ 일러스트 = 안은진 기자 eun0322@
저도 지금은 온 몸 아프고 햇빛 보기가 어렵습니다. 다시 생각해 봅니다. 우리가 왜 건강을 지키며 성공을 말하며 행복을 말하는지, 지금 우리가 왜 그 희망의 도전 과정을 되새겨야 하는지 말입니다. 그 건강을 그 성공을 그 행복을 어디에 왜 사용하려고 했는지를 지금 자신들의 마음의 진실을 들어봐야 할 때라고 생각합니다.
세상이란, 삶이란 절대로 혼자 살아가는 게 아닙니다. 더불어가 아니면 세상이 아니고 삶도 아닙니다. 결국 우리는 더불어 함께 나빠지거나 좋아지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왜, 왜 우리들은 우리가 원하는 쪽으로 가지 않는지요. 왜 더불어 가는 삶이 저 강 건너 불빛처럼 보이는가요. 이번 ‘세월호’ 사고를 보면서 우리는 어쩌자고 이미 버렸다고 자부한 찌그러지고 음흉한 얼굴을 불쑥 내미는지 모르겠습니다.
그 지독한 이기심으로 이제 막 꽃 피어나는 연둣빛 아이들을 물속에 잠기게 한 게 아닌가 하는 자책은 오히려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실로 나는 거울 보기가 무섭습니다. 그 선장의, 그 선원들의 무책임하고 뻔뻔한 얼굴이 내 얼굴의 어느 한 부분에 달라붙어 있을 것 같아 차마 내 얼굴을 바라보기가 힘들다는 이야기입니다.
생명이란 그 대가를 치르는 일입니다. 우리가 다 부모님의 부름을 받아 이 세상에 생명으로 태어날 때는 거저 태어나는 게 아닙니다. 우리들의 생명은 대가를 치러야 합니다. 나의 생명은 공짜가 아닙니다. 남들을 배려하고 아파하고 희생하는 그런 아름다움을 우리 현실에서, 그것도 가장 어려운 여건에서 그 생명의 빛을 다할 때 생명의 대가를 치르는 것이지요. 그럼에도 울고 있는 부모님들을 향해 거짓 손을 내밀어 분통을 터트리게 하고 이 순간에 사기를 쳐 이익을 보겠다는 사람은 욕 한 번하고 그냥 넘어가더라도 그 선장이란 사람은 국민 모두가 결코 용서할 수 없는, 300명의 생명을 앗아간 살인범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아닙니다, 300명이 아닙니다. 그들의 부모도 이미 몇 천 번을 죽었습니다. 우리는 알고 있지 않은가요? 다른 나라에서는 그런 사고가 났을 때 모든 사람을 다 안전하게 내보내고 마지막으로 지친 모습으로 걸어 나오는 선장의 이야기를 들은 바 있습니다. 너무 부끄러워서, 대한민국 사람이란 것이 너무 창피해서 얼굴을 가리고 싶은 심정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자식을 잃은 사람들이여, 부모를 잃은 사람들이여, 이제부터 대한민국을 더 미워하지 맙시다. 결국 우리는 더 조국을 사랑하여 이 따위 사고를 일으키지 않게 우리가 눈 똑바로 뜨고 세상을 살펴야 하지 않겠는지요.
땅을 치며 울어도 풀리지 않는 자식 잃은 슬픔을 슬픔답게 하기 위해서라도 조금 더 너그럽게 우리들의 조국 대한민국을 사랑해야 한다고 꾹꾹 마음을 다지자구요. 지치고 지친 어머니들이여, 아버지들이여! 어쩌겠습니까. 통곡에서 이제 조금은 벗어나서 돌아간 우리들의 자식들을 위해 세상을, 인간을 바로잡아야 하지 않겠는지요.
네 네, 잘 압니다. 그 마음속 울부짖음으로 슬픔을 다 녹여낼 수 없다는 것을요. 압니다, 알아요. 그러니 돌아간 그 자식을 위해서라도 이렇게 울고만 있으면 안 될 것입니다. 몸과 마음을 추스르고 따뜻한 국물이라도 드셔야 합니다. 힘을 내십시오. 뻔뻔하게 밥을 드시고 눈물을 닦아야 합니다. 돌아간 자식들의 생을 이어가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것이 저 물속에 잠겼던 아이들의 따뜻한 소망일 것입니다. 생명의 대가를 치르지 못하는 파렴치한 인간들을 지켜봐야 하지 않겠는지요.
그럼요, 잘 압니다. 지금은 통곡하십시오. 그리고 네 네, 저라도 혹은 옆집의 누구라도 잡고 큰소리로 울며불며 그 애타는 가슴의 슬픔을 풀어내십시오. 말로 하십시오. 결코 침묵하지 마세요. 어머니 아버지들의 가슴이 터져 저 바다를 메우듯 잘해준 이야기, 그리운 이야기, 사랑한다는 이야기, 그 손을 그 머리를 그 등을 만져보고 싶어 가슴이 찢어질 것 같다는 아쉬운 이야기, 보고 싶어 죽겠다는 이야기를 털어내 보십시오.
우리들도 통곡합니다. 우리들도 가슴이 내려앉는 것 같습니다. 아니, 모두 내려앉아 버린 상태입니다. 네 네, 결코 침묵하지 마십시오. 그렇습니다. 그 아이들이 멀리 가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마음에 있으면 함께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이제 모든 슬픔을 가다듬고 새로운 시작을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가버린 아이들의 동생·언니 모든 다른 가족은 이 세상을 살아내야 하지 않습니까.
네 네, 그렇습니다. 힘을 내십시오. 물 한 모금 밥 한 술을 입으로 가져가세요. 그래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우리들의 조국 대한민국을 미워하거나 이따위라고 말할 수 없는 이유입니다. 우리의 조국 대한민국을 버리지 맙시다. 그래도 사랑하고 아껴서 저 물속에 잠겼던 우리 아이들의 혼을 위로하기 위해서라도 반듯한 조국을 만들어 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손사래를 치지 마세요. 이젠 정나미가 떨어져 이 조국을 떠나고 싶다고 말하지 마십시오.
우리는 서로 손잡아야 합니다. 마음을 다져야 합니다. 그래서 파렴치한 가짜들을 세상에서 몰아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럼에도 대한민국에 힘을 실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 바람났다, 바람 불어라
▲ 일러스트=안은진 기자 eun0322@munhwa.com
한글 사전은 바람을 ‘움직이는 공기의 흐름’이라고 풀이한다. 바람을 본 사람은 없으니 공기라고 말하는지 모른다. 바람은 다른 물체를 통해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는 것이다. 결코 직접적이지 않고 나무가 흔들리면 바람이 분다고 우리들은 말한다.
그러나 이 바람은 시인들에게는 어마어마한 은유로 쓰이고, 우리 생활에서는 수없는 바람이 등장한다. 예쁜 사랑을 연애라 하고, 어긋난 사랑을 바람이라고 하지 않던가. 엄마가 학교에 가는 것도 치맛바람이라고 하고, 집을 자주 나가는 여행도 바람들었다고 하며, 좀 더 진하게는 살바람이라는 말도 있다. 과다한 건 모두 다 우리는 바람이라고 한다. 바람 잘못나 인생이 끝장나는 사람도 있고, 바람 한 번 잘 나면 인생을 새출발하는 사람도 있다. 뭐든 지나치면 바람이지만, 제몫을 제대로 하는 좋은 바람도 세상에는 너무 많다.
그대는 지금 꽃바람 속에 있다. 개나리가 황금열차가 달리듯 현기증을 일으키게 하는 꿈결바람을 불게 하더니 연이어 산수유, 진달래, 목련, 벚꽃이 꽃바람으로 온통 가득한 거리에 그대가 있었다.
산들바람이라 했던가, 봄바람이라 했던가. 그대는 그 여리지만 풋풋하고 예민한 표정의 바람과 섞이며 걸어가고 있다. 무슨 단호한 각오를 했는지 눈은 빛나고 얼굴은 밝게 웃고 있고 걸음걸이는 리듬이 있다. 그대는 지금 봄바람 속을 걸어가고 있다. ‘해 볼까’가 아니라 ‘해 보겠다’는 의지를 가지고 그대는 걸어가고 있다. 도시 속을 가는지, 봄 들판으로 가는지 그것은 중요한 게 아니다. 그대가 어느쪽으로 가더라도 방향보다는 그대 마음속의 빛나는 의지가 더 중요하다. 그대는 지금 꽃바람 속을 가고 있으므로 결코 증오나 분노를 앞세우지는 않을 것이다. 증오나 분노는 다 녹여 흐르게 하고 용서와 이해와 미안해·고마워·사랑해를 말하면서 가고 있어야 한다. 그대의 마음에서 불어오는 바람. 그렇다, 그것이 바로 꽃바람이요 봄바람이다. 그대는 영원히 가을이 와도 지지 않는 꽃바람을 그대 마음속에, 그대 정신에 새겼을 것이다.
단절이 아니라 화해를 소리 내어 발음하는 그대의 거리는 햇살 쏟아져 내리고 꽃바람이 꽃잎을 열게 하는 따스한 공간이요 거리다. 말하자면 사랑의 거리다. 그대 옆에 친구가 있다. 손을 잡고 걸으면 앞으로 살아가야 하는 의문과 염려, 그리고 불투명한 미래에 대한 서로의 이야기는 잘 어울릴 것이다. 아직 오르지 못한 계단이 보이면 그대는 친구에게 같이 오르자고 말하면 좋겠다. 손을 잡고 같이 오르는 친구가 있다면 각자 아픔을 견디더라도 서로 큰 힘이 될 것이다. 서로서로에게 “힘내라구!” 그렇게 말하면서 말이다. 그대들처럼 지금 “힘 내라구!” 이 말이 필요한 사람은 없을 것이다.
가령 옆에 엄마나 아빠가 있다고 치자. 그대는 힘있게 엄마나 아빠의 손을 잡아드려라. 꽃길을 걸으며 마음 환하게 손잡고 걷는 시간이 앞으로 너무 많을 것 같지? 바로 지금 따뜻하게 손잡고 어리광스러운 애교를 부리며 꽃에 대해, 향기에 대해 이야기하렴. 그런 시간도 인생에선 그렇게 많지 않단다. 그렇다, 영원한 봄의 거리를 그대는 지금 걷고 있다. 그대 옆에는 마음이 절룩거리고 꽃바람이 어색하기만 하고 봄이야말로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
반항이 끓어오르고 윽박지르고 싶고 거리의 사람을 붙들고 소동을 부리려는 사람도 있다. 며칠 잠을 못자고 절망의 인생을 들고 하늘을 손가락질하는 사람도 있다. 그대는 그 사람들 속을 걸어가고 있다. 그대의 희망이, 그대의 웃음이, 그대의 진지한 믿음이 그들에게로 온유한 바람으로 불어갈 것을 나는 믿는다. 그대가 그런 훈훈한 바람이 되기를 말이야.
그래서 그대의 꽃바람은, 그대의 봄바람은 겨울 혹한 속에서도 분다. 그 바람은 그대의 마음, 그대의 정신, 그대의 행복감이 자아내는 바람이다. 그러므로 기온이 올라 무더운 여름이 와도 꽃바람은 분다. 모든 나뭇잎들이 마지막 수혈까지 나무한테 주고 지상으로 떨어지는 그때도 꽃바람은 분다. 꽃바람은 우리 마음에서 시동을 걸기 때문이다.
한 사람의 온유한 믿음의 바람이, 자신을 믿는 바람이, 스스로 자아내는 의지의 바람이, 이해와 사랑의 바람이, 이 세상 어떤 난폭한 바람이 불어도 부드러운 그대의 바람을 넘어뜨리지 못할 것이다. 그대는 꽃바람 속에 있다. 그 산들바람은, 희망의 바람은, 열심히 뛰며 일하는 사람이 모든 것에 감사하는 바람은, 순수한 바람은 우리들의 인생에 결코 멈추지 않는 바람이어야 할 것이다.‘
던지지 마라 / 박살난다 / 그것도 잘 주무르면 / 옥이 되리니’
이것은 나의 ‘불행’이라는 시다. 그대는 불행마저도 옥으로 만드는 힘이 있다. 마음에 꽃을 마음에 정신을 가다듬으며 살아내야 한다고 의지의 꽃을 피우면 바로 불행도 옥으로 재생산하는 기업이 되는 것이다.
그대가 있는 한 꽃바람은 가을에도 지지 않으며 겨울 혹한의 얼음장 위에서도 싱싱하게 피어날 꽃바람일 것이다. 나는 그대를 사랑한다. 그대는 우리들의 희망이다. 우리들의 봄이며, 우리들의 영원한 친구이며 우리들의 보물인 옥이 될 것이며, 언제나 가슴 떨리는 그리움이 될 것이다
♡ 여자의 일생…그리고 호칭들
▲ 일러스트 = 안은진 기자 eun0322@
나는 ‘가시나’로 태어났다. 다섯째 딸로 태어나 “또 가시나야!”로 내 인생은 출발했다.
딸 부잣집 다섯째 딸은 언제나 내 뒤를 따라다니고 가시나에서 소녀로, 다시 여학생이 되고, 아가씨가 되고, 다시 이름도 우쭐한 여대생이 되었다. 처녀에서 드디어 여자가 되었고, 어느 날 여류시인이라는 말에서, 신부라는 황홀한 이름에서 아내가 되고 엄마가 되었다. 그리고 무거운 이름, 며느리가 되기도 했다. 물론 주부라는 명예도 얻었다. 이름 따라 역할이 다 달랐지만 역할 이해가 되지 않은 채 여자의 일생은 막막했다. 집안이 내 손에 달렸지만 실세는 아니었다. 시어머님이 계셨기 때문이다. 이모·고모라는 호칭도 들었다. 새언니라는 이름도 저절로 붙었다. 어느 하나 가벼운 이름은 아니었다. 모두 책임이 따르는 이름들이었다.
더 무게가 있는 이름, 안사람에서 집사람이 되었고 집식구 그리고 처(妻)가 되었다. 더러는 여편네가 되기도 했다. 더 힘 있는 말은 아줌마였다. 여자·엄마·아내·며느리를 다 합친, 무게가 제법 나가는 아줌마 말이다. 거기 한국의 아줌마라고 하면 힘은 더 실릴 수 있다. 시대가 달라지면서 ‘여성’이라는 말에 힘이 실리게 되었다. 여류라는 말이 사라지고 여성시인이 되고 여성교수가 되었다. 여러 협회에 이사가 되거나 회원이 되면 여성회원, 여성이사가 되기도 한다. 그리고 나는 장모님이 되었고 드디어 할머니가 되었다.
이 이름들을 살아 내느라 진땀이 났다. 김연아처럼, 박지성처럼 넘어지고 또 넘어졌을까. 그만큼 넘어지면서 일어나는 것이 생활이었다. 그 어느 것도 쉬운 이름이 없었다. 그 어느 하나 벗을 수도 없는 이름이었다. 금메달은 없었다. 그러나 금메달은 반드시 받게 돼 있을 것이다.
가시나로 살 때는 편했을까. 세 살 어린 남동생과의 차별 때문에 나는 힘들었다. 늘 좋은 것은 동생 차지였다. 그 남동생이 태어나 준 것이 고마워 나는 언제나 양보했다. 대학 시절, 그 남동생 밥을 해 먹이며 자취를 했다. 반찬은 뭘 했느냐고 엄마가 전화를 하루 두 통씩 해댔다. 딸이라는 이름은 평생을 따라다녔다. 늘 약자였다. 계집애 소리는 서울 사람들이 불렀다. 왠지 근사한 이름 같기도 했다. 사근사근했다. 그러나 늘 고민에 빠져 있었고 열등감이 깊었다.
여대생이라는 말도 아름다웠다. 사과 향이 났다. 아가씨라는 말도 서울 사람들이 불렀다. 그 또한 향수 냄새가 났다. 그러나 무엇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몰라 방황하며 괴로웠다. 그리고 처녀라는 말에는 농도가 깊었다. 몸이 근질근질했다. 이 호칭은 시한부다. 그래서 즐겨야 하는데 고민만 하다가 기회를 다 놓쳐 버렸다. 여류시인이라는 말에는 더 무거운 표정 관리가 필요했다. 대학 졸업반 때의 일이다. 가슴이 뛰었다. 아마도 잘잘잘 가슴이 뛰고 향이 배어나는 시간은 어쩌면 여기까지인지 모른다. 나는 아내가 되었고 며느리가 되었고 엄마가 되었다. 한 가정의 주부가 되었다는 이야기는 이제부터 언덕에 오른다는 뜻이다. 아니 태산을 맨발로 오른다는 뜻이다.
많은 호칭을 살았지만 가장 힘겨운 것은 그래도 ‘엄마’였다. 그것은 도무지 일류가 될 수가 없었다. 늘 미안하고 늘 고마운, 그러나 내게 사랑이라는 깊은 의미를 뼛속 깊이 느끼게 해준 이름이었다. 아내, 안사람, 집사람은 어떤 것이었나? 여자로서 그래도 한 번은 들어 봐야 한다고 생각한, 이름도 아늑한 ‘아내’라는 호칭은 대가를 너무 많이 치러야 했다. 사랑을 받는 것보다 억지 사랑까지 내가 다 쏟아부어야 하는 아내라는 말을 나는 이미 졸업했다. 20년을 넘게 환자였던 그에게 너무 잘했다고 큰소리쳤지만, 아니다. 나는 탄식만 했지 그를 사랑하지 못했는지 모른다.
내가 손해만 본다고 느낀 남편과의 사랑에는 못해준 것이 많다는 생각을 지금에야 한다. 너무 힘겨운 것이 엄마였고 아내였지만 이 두 가지의 호칭 때문에 좀 더 잘 살아 봐야 한다고 두 손목을 아침마다 쥐었는지 모른다. 나를 사람으로 교육시킨 이름들이다. 나는 지금 그 두 개의 호칭에 감사하고 고개를 숙인다. 날마다 기도하게 하는 이름들이다. 그러나 정작 가장 좋다고 느끼는 것은 ‘할머니’라는 이름이다.
많은 것을 내려놓았고 안되는 것은 포기를 하고 남들을 존경하고 낮게 낮게 감사할 줄을 아는 이 나이가 좋다. 하느님이 너무 착하게 살았다고 20대로 돌려준다고 하면 아이구 아닙니다 하며 거절할 것이다. 나는 진심으로 ‘No’다. 혼자 외로운 아침도 저녁도 좋다. 그리고 나의 짝사랑은 무르익었다. 손주들은 이미 고등학생, 대학생이다. 내가 그리워하는 만큼 그들에게서 오는 것은 너무 미약하지만 그래도 그 손주들을 생각하면 가슴이 저릿하다. 분명히 짝사랑이 맞는데도 나는 지금 느긋하다. 그리고 행복한 할머니다.
생각만 해도 가슴이 저릿한 이 너무 젊은 남자들, 이 씩씩한 손주들의 자라는 키만큼 내 행복지수가 높아질 것이라고 오늘도 생각하며 고개를 숙인다. 바라는 만큼의 기도가 필요하다.
여자로서 세상을 바꾸는 힘은 내게 없지만, 아니 세상을 바꿔 보려는 노력도 해봤지만, 여기까지 살아온 힘은 세상을 들 수도 있을 것이다. 여자에게 붙는 많은 호칭만큼 여자는 힘이 센 것 아닌가. 오늘 하루를 소중하게 보내는 이 마음 여자의 이름으로.◎
문화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