凍土의 기막힌 이야기5/ 북한 ‘똑바로’ 알기5/ 북한의 교육 환경 - 재일동포 북송 60년 - 신천학살사건 - 말폭탄 공장 - 북한의 인권백서
凍土의 기막힌 이야기5/ 북한 ‘똑바로’ 알기5/
■ 북한의 교육 환경
□ 2016-06-15 북한도 과외를 한다
“한국 민족 유전자(DNA) 속에 과외가 있다.” 김영삼 정부 때 교육개혁위원회 상임위원과 교육인적자원부 장관을 지낸 이명현 서울대 명예교수가 자주 하던 우스갯소리다. 한국 사람들이 가는 곳이면 어디든 자녀에게 과외를 시키는 모습을 빗댄 말이었다. 학생들을 성적 하나로 줄 세우지 말자고 당시 장관은 호소했지만 부실한 공교육에 학부모들의 ‘성적 지상주의’까지 겹쳐 사교육 열기는 식지 않았다.
▷북한은 유치원 2년-소학교 5년-초급중학교 3년-고급중학교 3년 학제다. 유치원 후반 1년의 높은반을 포함한 ‘12년제 무상 의무교육’을 자랑한다. 하지만 무상교육은 엘리트 학생 교육을 위해 1984년에 세운 평양제1중학교와 각 도의 제1중학교에만 해당된다. 나머지 학교들은 국가 지원이 없어 학부모들이 내는 돈으로 연명하는 실정이다. 유치원 높은반의 경우 아이들이 먹을 쌀과 식기는 물론 낮잠 잘 때 베는 베개까지 챙겨가야 한다.
▷소학교 학생을 둔 북한 학부모들이 가장 관심 갖는 과목은 수학이다. 돈 안 드는 기숙학교인 제1중 합격에 수학이 결정적이기 때문이다. 제1중 입학시험에서 수학은 다른 과목과 달리 3차까지 치르는데 만점도 다른 과목의 2배인 100점이다. 학부모들은 우수한 수학교사가 있는 소학교 교장에게 뒷돈을 내고 자녀를 들여보내 수학소조(그룹) 활동을 하게 하고, 이것만으로는 모자라 학교 밖에서 과외교사를 찾는다. 학부모 10명이 돈을 모아 집까지 사주면서 과외교사를 모셔온다니 우리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다.
▷제1중에 붙으면 전국 단위로 학생을 선발하는 중앙대학에 합격할 가능성이 커지고, 졸업한 뒤 교사 의사 법관이 될 수 있다. 군복무도 중졸자는 10년이지만 대졸자는 3∼5년만 하면 된다. 당 간부가 되기 위해서라도 대학 졸업장은 필요하다. 성분이 좋아야 간부가 되던 시절에는 ‘간부집 자식들은 돌대가리’라고 비아냥거렸지만 지금은 옛말이 됐다. “학력-경제력-권력이 서로 맞닿아 있다’는 김정원 한국교육개발원 선임연구위원의 진단이 우리 현실과 다르지 않은 것 같아 섬뜩해진다.
이진 논설위원 leej@donga.com
□ 2016.07.04 월급 한국돈 5백원...북한의 교사들은 무엇으로 사는가?
/사진출처=조선DB
북한의 교사(교원)들에 대해 김일성은, ‘학생들을 혁명의 계승자로 키우는 직업적 혁명가’라고 했고, 김정일은 ‘나라의 미래를 키우는 원예사’라고 했다. 그래서일까. 지난 6월동안 자유북한방송이 만나본 교사출신 탈북민들은 나름의 긍지와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
2016년 1월 국내에 입국한 김순철(41살)씨는 “북한에서의 교사는 학생들을 혁명의 믿음직한 계승자로 키우는 직업적 혁명가로서, 학생들을 당과 수령께 끝없이 충직한 주체혁명의 공산주의 혁명가로 키우는 것이 교사의 주된 임무다”고 했다.
평양시 중구역의 한 초급중학교 교사였던 김선화(39살)씨는 “교원은 아이들에게 수학과 자연만 가르치는 게 아니라 생활총화와 정치학습 등을 통해 아이들의 정치적 생명을 책임지고 이끌어 주는 정치적 생명의 어머니다”고 말하기도 했다.
{북한에선 예, 체능 교사들을 제외한 거의 모든 교사들이 단임을 맡고 있으며 특별한 사유가 없는 한 1학년 때 맡은 학생들을 졸업 때까지 담임하게 됨. 담임선생은 학생들이 속한 정치조직의 책임자도 겸임함으로 소년단 및 청년조직의 지도원을 역임하고 있음. 편집자 주}
형님과 동생이 이미 한국에 와 있었지만, 단임 했던 아이들이 졸업할 때까지 학교를 떠날 수 없었더라는 신의주의 김한중(46살)씨는 “북한의 교원들은 ‘직업적 혁명가, 나라의 미래를 키우는 원예사’라는 정신적 양식에 기대어 어제와 오늘을 살고 있다”며 강한 자부심을 드러냈다.
하지만 교사의 월급이 일반 노동자의 월급과 같거나 적지 않느냐는 질문 앞에선 입술을 깨물었다. 기관기업소 위주로 실시되고 있는 배급도 학교에선 제대로 주지 못하지 않느냐는 질문 앞에선 한숨을 내 쉬었다.
교사출신 탈북민들이 말한 북한 교사들의 월급은 북한 돈 2000~3000원 정도다. 시장에서 쌀 500그램 정도 구입이 가능하고 한국 돈으론 500원 정도라고 보면 된다. 배급능력도 학교는 늘 꼴찌고 그렇다고 해서 교사의 체면에 장사도 어렵다.
그렇다면 북한의 교사들은 무엇을 먹고, 어떻게 살아갈까.
첫째는 북한만의 독재 시스템이 교사들을 먹여 살리는 듯했다. 북한의 어느 학교를 막론하고 아침 첫 일과는 김 부자 초상화나 동상에 대한 정성사업부터 시작된다. 김 부자의 초상화를 쓸고 닦은 후에는 아침독보가 있고 매주 토요일엔 생활총화가 있다.
이 외에도 집단체조, 각종 군중(보고)대회, 명절날의 헌화 등 수많은 정치행사들에 학생들이 동원된다. 김 부자에 대한 충성을 강요하는 정치행사는 없는 날이 없으며 이 사업을 장악, 통제하는 사람이 교사다. 그리고는 학생들이 어른이 될 때까지 따라다니는 ‘정치생활 평정서’도 교사가 작성한다.
이 지긋지긋한 행사에 빠지거나 건성건성 참가하고도 ‘평가’를 잘 받으려면 학생이나 부모들은 단임선생에게 뇌물을 바쳐야한다. 물론 여기엔 ‘선생들이 어렵게 산다는 전제가 깔려 있다’고 교사출신 탈북자들은 이구동성으로 이야기 했다.
다음으론 북한의 교육강령에도 적시되어 있는 ‘1개월간의 농촌지원전투’와 같은 연중행사다. 이 외에도 각종 노력동원이 있고 시기별 ‘전투’가 있다. 이런 노력동원은 아이들에게 참으로 힘든 일이지만 당의 방침임으로 빠질 수가 없다. 빠질 수 있는 단 하나의 방법은 역시 뇌물이다.
이 외에도 학교는 학생들에게 여러 가지 명목으로 세외부담을 강요한다. 학교 및 교실 꾸리기, 난방용 화목과 꼬마계획에 근거한 토끼가죽 회수 등 감당하기 어려운 부담을 아이들에게 짊어지운다. 그 엄청난 부담 중 일부는 당연히 교사들의 몫이다. 교사도 먹고 살아야 하니까.
다는 아니겠지만 도시의 교사들, 그 가운데서도 예체능 및 외국어 교사들은 저녁시간과 방학을 이용해 잘 사는 집의 ‘가정교사’로 둔갑하기도 한다. 북한에서도 1중학교(수재학교)나 외국어대학 같은 좋은 학교에 가기위해선 개별교육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가장 기본적으로 교사들이 ‘먹고 사는 건’ 학부모들의 동정이라고 교사출신 탈북자들은 입을 모았다.
오늘의 북한에서 교사들이 힘들게 산다는 건 다 비밀 아닌 비밀이다. 학부모들은 자기자식을 위해 애쓰는 선생을 위해 뭔가를 주고 싶어 하고, 없는 살림에도 제 자식을 더 내세워 달라는 부탁차원에서 쌀이며 돈을 기꺼이 바친다.
잘사는 사람들은 제 자식을 내 세우기 위해 뇌물을 돈을 쓰기도 하는데, 이런 전적으로 교사를 ‘먹여 살리는’ 학부모도 있다.
결국 교사가 동정의 대상이 되고 뇌물의 수혜자가 되는 셈이다. 그래도 먹고 살기위해 참아야 하는 북한의 교사들은 때로 학습참고서나 영어단어장, 영어번역책 등을 학생들에게 강매하는 책장사가 되기도 하고 담사나 견학을 구실로 장사물건을 날라주기도 한다.
장사하는 아내를 위해 아이들이 보지 못하는 이른 새벽에 도매시장에서 물건을 떼, 아내에게 가져다주곤 했다는 한 탈북교사는 “직업적인 혁명가가 교원이라는 건 말짱 거짓말이다. 나부터 말은 그렇게 하고 다녔지만, 아침부터 저녁까지 먹고사는 문제만 고심했던 것 같다”고 실토했다.
또 틈만 나면 학급아이들을 동원해 내 집 텃밭 농사를 시켰다는 또 다른 탈북자는 “지금 생각하면 부끄럽기도 하지만, 달리 살아갈 방법이 없었다”면서 “교사들에게 월급을 제대로 주고 배급을 제대로 주었다면 누가 이런 짓을 하겠냐”며 안타까움을 토로했다.
그러면서 그는 "교권이 무너진 사회, 존중은커녕 교원이 비아냥 거리가 된 사회가 북한이다. 교원은 학생들을 고객으로 생각하는 장사꾼이 되어 버렸고 학생들조차 교원을 동정의 대상으로 여기고 있다"며 가슴을 쳤다.
조선일보 글 | 박명주 자유북한방송 기자
□ 2016.07.27 북한 교과서의 6.25 정전협정에 대한 궤변
북한의 교과서는 1953년의 7월 27일 6.25전쟁 휴전을 어떻게 설명하고 있을까.
개정판 <김일성혁명력사>(고급 중학교 1학년용) 교과서는 7.27일 정전협정체결에 대해 “세계《최강》을 자랑하던 미제침략자들은 선군으로 억세여진 조선인민군과 우리 인민앞에 무릎을 꿇고 정전협정문에 도장을 찍었다. 그처럼 가렬 처절하였던 3년간의 조국해방전쟁은 우리 인민의 빛나는 승리로 끝났다.“고 쓰고 있다.
또한 “미제는 조선전쟁에 저들의 륙해공군과 15개 추종국가군대, 남조선괴뢰군과 일본군국주의무력을 포함하여 200여만의 대병력과 숱한 최신무기들을 다 동원하였다. 그리고 세균무기와 화학무기까지 사용하면서 가장 야만적이고 잔인한 전쟁방법과 수단을 다 썼다. 그러나 미제가 얻은것은 시체와 죽음뿐이였다“는 궤변을 늘어놓고 있다.
그러면서 아래와 같은 조국해방전쟁의 종합전과를 나열하고 있다.
적살상 및 포로 156만 7 128명
그중 미제침략군 40만 5 498명
비행기 격추, 격상 및 로획 1만 2 224대
함선 격침, 격파 564척
땅크, 장갑차 파괴 및 로획 3 255대
자동차 파괴 및 로획 1만 3 350여대
각종 포 파괴 및 로획 7 695문
"이렇게 날조된 교과서와 선전지침에 따른 전쟁영화, 전쟁관련 소설, 전쟁기념관만 접하게 되는 북한의 학생들은 당연히 남한과 전혀다른 6.25전쟁과 7.27 휴전에 대한 인식을 갖기 마련이다"고 한 북한인민해방전선 최정훈 사령관은 "남한 학생들에게도 전쟁을 일으킨 장본인이 김일성이란 것과 6.25전쟁의 올바른 역사 등을 학습시킬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 재일동포 북송 60년
주간조선 2539호 2918.12.31자 이장훈 국제문제애널리스트
□ 탈북 재일동포 소송전 김정은 日 법정에 호출
▲ 1960년대 북한행 소련 수송선에 승선하는 재일동포들. photo 일본 정부 사진공보
1959년 12월 14일 일본 니가타(新瀉)항.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조총련·조선총련)계 재일동포 234가구, 975명이 옛 소련 군함을 개조한 수송선 쿠리리온호와 토보르스크호에 올라 북한 청진항으로 떠났다. 재일동포 북송선 제1진이었다. 당시 재일동포들은 일본인들의 차별에서 벗어나 ‘지상낙원’을 간다는 기쁨과 설렘으로 들떠 있었다. 북송사업이 가장 활발했던 해는 1960년으로 48회에 걸쳐 1만2460가구, 4만9036명이 이주했다. 이후 북송은 1984년까지 계속됐으며 총 186차례에 걸쳐 9만3340명이 북한 땅을 밟았다.
소련 배로 재일동포들을 실어 나르던 북한은 1971년 만경봉호를 제작해 북송을 전담시킨다. 이 때문에 만경봉호는 재일동포들에게 끔찍한 북송사업을 상징했다. 3500t 규모로 정원이 300명이었던 만경봉호는 북송사업이 중단된 1984년 이후에는 화물선으로 사용됐다. 만경봉은 김일성 생가인 만경대 부근의 낮은 언덕(45m) 이름이다. 여기에 오르면 대동강과 주변의 만 가지 경치를 볼 수 있다는 뜻으로 이런 이름이 붙었다.
만경봉호와 만경봉 92호의 역사
북한 정권은 만경봉호가 낡아서 더 이상 운항할 수 없게 되자 1992년 만경봉 92호를 제작했다. 1992년 4월 김일성 80회 생일을 맞아 조총련계 상공인들이 40억엔을 모아 제작비를 냈다. 9700t급으로 최대속도는 23노트, 탑승인원은 350명이다. 만경봉 92호는 2002년 부산 아시안게임에 북한 응원단을 싣고 다대포항까지 내려왔다. 만경봉 92호는 니가타항 등 일본을 오가기도 했다. 그러다 일본은 2006년 7월 북한이 장거리 미사일 시험을 강행하자 만경봉 92호의 입항을 금지시켰다. 그랬던 만경봉 92호는 2018년 2월 평창 동계올림픽을 맞아 북한 예술단을 태우고 강원도 묵호항에 왔었다.
북한 정권의 재일동포 북송사업이 2019년으로 60주년을 맞는다. 이 사업은 역사상 유례가 없는 ‘국가적인 사기(詐欺)’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북송된 재일동포들은 최소한의 인권도 보장받지 못한 채 차별대우에 시달렸다. 이들 가운데 재일동포 배우자를 따라간 일본인 처와 자녀 등 일본 국적자도 6000여명이 있었다. 북송사업이 시작될 당시 북한 정권은 재일동포의 노동력과 재력을 필요로 했다. 재일동포를 흡수해 한국과의 체제 경쟁에서 앞서겠다는 의도도 있었다. 일본 정부로선 대부분 일제강점기에 끌려와 불만을 가진 한국인을 내보낼 필요가 있었다. 일본과 북한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진 셈이었다. 북한 정권의 지원을 받은 조총련은 온갖 감언이설로 재일동포들을 속여 북송선을 타도록 했다. 일본에서 차별대우를 받던 재일동포들은 사람답게 살아보겠다면서 북한으로 떠났다.
하지만 재일동포들은 북한에서 ‘째포’ ‘반쪽발이’라고 불리며 무시와 괄시의 대상이 됐다. 특히 재일동포 중 상당수는 폐쇄된 독재사회에서의 낯선 삶이 너무 힘들어 불평을 늘어놓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북한 정권은 “자본주의에 물들었다”며 이들을 정치범수용소에 감금했다. 북한 정권은 또 재일동포들을 ‘일본의 스파이’로 취급하며 최하층인 ‘적대계층’으로 분류해 감시했다. 요덕수용소에서 10년간 감금됐던 북송 재일동포 3세 강철환 전 조선일보 기자는 북송된 재일동포들 중 20%가 정치범수용소에 끌려갔다고 밝혔다. 이들이 정치범수용소에 감금된 이유는 탈북 기도, 일본인 처의 고향 방문 청원서 제출, 당 지시 불응, 불건전한 사상 표출 등 다양했다. 재일동포들은 재능이 아무리 뛰어나도 당·정·군 간부가 될 수 없다. 이들 중 97%가 남쪽 출신으로 북한에서 살아본 경험도, 친척도 없었다.
▲ 2018년 8월 19일 도쿄지방재판소 앞에서 북한을 탈출한 재일 한인 납북자들이 북한 정부에 피해 보상과 납북자 송환을 요청하는 가두시위를 벌이고 있다. photo 휴먼라이트워치
충성헌금 강요받은 ‘째포’들
북한 정권은 이들이 일본에 거주하고 있는 친인척에게 송금받는 것을 허용했다. 그 이유는 이들이 받는 돈을 빼앗기 위해서였다. 북한 정권은 북송된 재일동포들을 사실상 인질로 활용한 셈이었다. 실제로 북한 정권은 이들의 일본 거주 친인척들에게 정치범수용소 석방과 상봉 대가로 5000만〜1억엔의 기부금이나 물품 등을 요구했었다. 북한 정권은 또 김일성과 김정일 생일 등 주요 행사 때마다 일본으로부터 송금을 자주 받는 재일동포들에게 각종 훈장을 수여하고 이에 대한 대가로 ‘충성 헌금’을 강요하기도 했다.
북한 정권은 재일동포들을 일본 내 친인척의 송금액에 맞춰 차등화해서 대우했다. 재일동포들의 일본 거주 친인척이 북한에 투자를 하거나 연간 1만달러 이상을 송금하는 경우, 이들에게 평양 시내 아파트에 거주토록 하는 등 호화스러운 생활을 보장해주었다. 연간 1만달러 미만을 송금하는 경우에는 기본적인 의식주와 월 1〜2회 육류 및 수산물을 지급했다. 반면 일본으로부터 전혀 송금을 받지 못하는 제일동포들은 일반 북한 주민보다도 훨씬 가혹하게 다루었다. 북송된 재일동포의 절반 정도인 이들은 대부분 탄광 등 힘든 직장에 배치돼 고된 노역에 시달리면서 비참한 생활을 해야만 했다. 게다가 북한 정권은 탈출을 우려해 보위부를 통해 이들의 일거수일투족을 면밀히 감시했고 평양과 개성 및 군수공장 밀집지역 등에는 이들의 거주를 엄격히 제한했다. 물론 조총련 간부 출신의 경우 일부 극소수는 북한에서 고위직을 지내는 등 출세하기도 했다.
하지만 세월이 흐를수록 송금은 줄어들 수밖에 없었다. 일본 거주 친인척들의 송금은 1990년대 들어 바닥을 드러냈다. 북송된 재일동포와 가까운 친척들이 사망하면서 그 아래 세대는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는 북한의 친척들에게 더 이상 돈을 보내주지 않았다. 특히 1990년대 중·후반 고난의 행군 시기에 송금이 끊어진 재일동포들 중 상당수는 굶어죽을 수밖에 없는 상황까지 몰리게 됐다. 게다가 일본 정부는 2000년대 들어 북한 정권의 핵과 미사일 개발에 대한 제재조치로 조총련의 대북 송금을 대폭 제한했다. 일본 정부는 2016년 2월 북한으로의 현금 반입신고 하한금액을 기존 100만엔 초과에서 10만엔 초과로 하향 조정했다. 또 인도적 목적의 10만엔 이하를 제외하고 북한에 대한 송금을 원칙적으로 금지했다. 이에 따라 북한 정권에 그동안 ‘꿀단지’ 역할을 해왔던 조총련과 일본 거주 친인척들의 송금이 사실상 끝나게 됐다.
조총련 송금액 1조엔 규모
조총련은 1955년 5월 25일 도쿄에서 북한 노동당의 사주에 따라 초대 한덕수 의장을 중심으로 결성됐다. 광복 이후 일본에 남은 동포 60만명 중 50만여명은 서로 돕고 살자는 선전·선동에 속아 조총련에 가입했다. 재일동포들은 조총련의 실체를 모르고 신용조합을 만들고 학교와 병원을 세우는 데 기부했다. 조총련은 1980년대 말~1990년대 초반까지 말 그대로 ‘평양행 현금 파이프’ 역할을 톡톡히 해왔다. 평양에 있는 ‘안택상 거리’와 ‘김만유 병원’은 북한에 돈을 보낸 조총련 기업인들의 이름을 딴 것이다. 북한 ‘노동당의 일본 지부’로 활동해온 조총련이 지난 수십 년간 북한 정권에 갖다 바친 돈이 1조엔은 될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조총련은 북송사업으로 드러난 북한의 실상, 북한 정권의 일본인 납치 사건, 북한의 잇따른 핵과 미사일 실험, 김일성·김정일·김정은의 3대 세습 독재에 염증을 느낀 재일동포들의 탈퇴로 회원 수가 5만여명도 채 되지 않을 정도로 유명무실해졌다. 일본 정부도 각종 대북 제재 조치를 통해 북한과 조총련과의 연결고리를 끊어버렸다. 조총련이 2013년 일본 금융기관에서 빌린 7억8000만달러의 대출금을 갚지 못하자 압류당한 도쿄 중심지에 있던 조총련의 본부 건물이 경매로 넘어가기도 했다.
북송됐던 재일동포들 중 일부는 2000년대 초부터 북한을 탈출해 한국 또는 일본으로 건너오고 있다. 최근까지 일본에 살고 있는 재일동포 탈북자는 250여명에 달한다. 이들은 누구보다도 앞장서 북한 정권의 차별대우와 비인간적인 탄압 사례를 일본은 물론 국제사회에 알리고 있다. 특히 이들은 북송사업을 주도한 조총련을 해체시키기 위한 활동에도 적극 나서고 있다. 실제로 재일동포 2세인 가와사키 에이코(75) 일본 시민단체 ‘모두 모이자’ 대표는 2018년 2월 조총련과 북한이 주도한 재일동포 북송사업이 반인도적 범죄라고 주장하면서 국제형사재판소가 직접 조사해줄 것을 요청했다. 가와사키 대표는 네덜란드 헤이그에 있는 국제형사재판소를 방문해 김정은과 허종만 조총련 의장의 처벌을 위한 조사요청서를 제출했다. 교토 출신인 가와사키 대표는 조총련이 설립한 조선인학교 고급부 3년생이던 1960년 17세의 나이에 북송선에 올랐다. 하지만 지상낙원으로 선전했던 북한의 실정은 딴판이었다. 김일성 사망(1994년) 이후 고난의 행군 때 수많은 사람이 굶어죽어 가는데 핵과 미사일을 개발하고 금수산태양궁전을 짓는 북한 정권을 보면서 북한에 대한 모든 미련을 버리고 탈출을 결심했다고 밝혔다. 가와사키 대표는 2003년 중국과의 국경을 넘어 2004년 일본으로 돌아왔다.
▲ 김정은의 모친 고용희. 1973년 만수대예술단 무용수로 일본을 방문했을 때 모습. photo 마이니치신문
북 상대 5억엔 손배소송
특히 가와사키 대표는 2018년 8월 재일동포 탈북자 4명과 함께 도쿄지방재판소에 북한 정권을 상대로 5억엔(당시 환율로 420만달러)에 달하는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했다. 북한 정권이 재일동포들을 속여 귀국하도록 유인한 뒤 굶주리게 했을 뿐 아니라 신분차별, 이동의 자유 등 가장 기본적인 인권까지 침해했기 때문에 소송을 제기했다는 것이다. 가와사키 대표 등 재일동포 탈북자들을 대변하고 있는 시라키 아츠시 변호사는 “도쿄지방재판소가 2019년 1월이나 2월 게시판을 통해 북한 정권의 대표인 김정은에게 언제 몇 시까지 출두하라는 호출장을 고시할 것”이라고 밝혔다. 일본 법률에 따르면 민사소송은 국가를 상대로 할 수 없지만 북한은 일본과 공식 수교를 하지 않고 있기 때문에 법률상 국가로 인정하지 않을 수 있다. 때문에 북한을 하나의 법인처럼 상대해 소장을 송달할 수 있다. 또 피고소인의 주소지 등이 불분명할 경우 ‘공시송달’을 하는 제도가 있다. 일본 민사소송법 110조와 112조에 따르면 재판소가 게시판을 통해 공개적으로 소장이 접수됐다고 알리고 외국의 경우 6주가 지나면 송달됐다고 간주한다는 것이다. 시라키 변호사는 “승소하면 북한 정권에 인권 침해를 당한 수많은 피해자가 이 대열에 동참할 것”이라면서 “북한 정권은 정정당당하게 일본 법원에 나와서 반론을 제기하길 바란다”고 밝혔다.
가와사키 대표 등은 또 일본 정부에도 책임을 물어야 한다는 입장이다. 유엔 북한인권조사위원회(COI)는 2014년 최종보고서에서 북송사업을 납치로 분류한 바 있다. 보고서는 북송사업이 일본적십자사의 지원 속에 이뤄졌다고 지적했다. 시라키 변호사는 “일본 형법 226조에 따르면 강제력을 동원해서 데려가는 약취(납치)와 속여서 데려가는 유괴란 조항이 있다”면서 “고소인들은 20세, 17세, 14세, 11세, 3세라는 어린 나이에 속아서 사실상 유괴돼 북한으로 갔다”고 지적했다. 시라키 변호사는 “일본 정부는 재일동포 북송사업을 지원했기 때문에 가해자란 무거운 짐이 있다”면서 “일본 정부도 사죄하고 일본인 납치와 동등하게 취급해 북한 정부에 해결을 촉구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가장 출세한 인물은 김정은 모친
북송된 재일동포 중에서 가장 출세(?)한 인물은 김정은의 모친 고용희다. 1952년 일본 오사카에서 태어난 고용희는 10세 때 만경봉호를 타고 가족과 함께 북한에 갔다. 제주에서 태어난 아버지 고경택은 조총련 간부 출신이다. 고용희는 평양에서 만수대예술단 무용수 시절 김정일의 눈에 들어 결혼했다. 고용희는 2004년 5월 프랑스 파리에서 암 치료를 받다 사망했다. 북한 정권은 2016년 5월 제7차 당 대회를 계기로 조총련과 재일동포를 격려하는 등 띄우기에 나섰다. 그 이유는 조총련과 재일동포의 과거와 같은 자금 지원을 이끌어내려는 의도는 물론 김정은의 모친이 재일동포이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안찬일 세계북한연구센터 소장은 “생모의 출신이 일본이기 때문에 김정은에게는 일종의 뿌리라는 인식이 존재할 가능성이 있다”고 지적했다. 김정은이 북송된 재일동포 가운데 상당수가 비참하게 숨졌다는 것을 모를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정은 모친이 재일동포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최소한 정치범수용소에 갇혀 있는 많은 재일동포들을 석방하고 인권탄압을 중지해야 할 것이다. 김정은은 지금까지도 모친이 재일동포라는 사실을 북한 주민들에게 밝히지 못하고 있다. 게다가 할아버지 김일성은 백두산에서 활동한 적이 없다. 부친 김정일은 백두산 밀영(密營)이 아니라 러시아 하바롭스크 인근에서 태어났다. 하지만 북한 정권은 김정은 집권 이후 ‘백두혈통’이라는 점을 강조해왔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김정은은 ‘백두산 줄기’가 아니라 ‘후지산 줄기’라고 말할 수 있다.
고용희는 북한의 만수대예술단 무용수로서 유일숙이란 예명으로 일본을 방문한 적이 있다. 당시 만수대예술단은 1973년 7월 30일부터 9월 17일까지 사상 처음으로 도쿄, 나고야, 오사카, 히로시마 등 일본 전국을 순회공연했다. 만수대예술단의 일본 공연은 재일동포들을 북한으로 많이 끌어오기 위해 교묘하게 기획된 것이었다. 만수대예술단의 공연을 보고 감동해 북한으로 건너간 재일동포들이 지금까지 얼마나 생존하고 있는지는 전혀 알 수 없다. 지상낙원이라고 속여 끌고 간 재일동포들을 ‘인질’ 삼아 돈을 뜯어온 북한 정권이 진정으로 ‘우리 민족끼리’를 주장할 수 있을까.
□ 2019.12.19 북한 연출, 조총련 주연, 일본 정부 조연의 ‘거대 사기극’
60주년 맞아 되짚어본 재일교포 북송사업
▲1959년 12월 14일 북송 재일교포 1진을 태우고 일본 니가타 항을 떠날 채비를 하고 있는 소련선박 트보르스크. 이 날부터 1984년까지 9만3000여 명의 재일교포가 니가타 항을 통해 북한으로 건너갔다. [중앙포토]
문재인 대통령이 이달 초 도올 김용옥의 『통일, 청춘을 말하다』란 책을 읽고 난 뒤 국민들에게 일독을 권했다. 유시민의 유튜브 채널 ‘알릴레오’에 출연하여 대담한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대통령의 추천에 따라 이 책을 사 읽다가 84쪽에서 진도가 나가지 못하고 몇 번을 반복해 읽었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모친 고용희가 재일교포 출신이란 점을 얘기하던 중 나오는 대목이다.
문대통령 추천한 도올 저서엔
‘더 도덕적, 더 매력적인 북한 선택’
‘지상낙원’ 믿고 갔다 비참한 삶
9만여 피해자의 아픔엔 왜 눈감나
▶유시민=“북송선을 탄 사람들이 대부분 고향이 남쪽 사람들인데 왜 그렇게 대거 북한으로 이주하게 되었는지 이해가 가질 않아요.”
▶김용옥=“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북송선에 전혀 강제성은 없었다는 것입니다. (중략) 냉전체제 하에서 자본주의 국가에서 사회주의 국가로 민족 대이동이 이루어진 유일한 사례라고 하죠. (중략) 당시 일본에 살고 있던 조선인의 입장에서 볼 때 북한 사회가 남한 사회보다 더 도덕성이 있었고, 삶의 조건도 더 매력이 있는 것으로 느껴졌다는 것이죠. 이런 역사를 우리는 객관적으로 반추해봐야 합니다.”
▶유시민=“아∼정말 중요한 말씀을 하고 계시군요.”
북송 교포들의 선택은 지역별 할당량을 채우기 위한 조총련 간부들의 독촉 내지 강권이 일부 있었다고는 해도 형식상으로는 ‘자발적’인 방식으로 이뤄졌다. ‘신생 사회주의 조국 건설’의 일원이 되겠다는 사명감 내지 애국심을 가진 사람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보다 많은 절대다수는 누구나 배불리 먹을 수 있고 교육과 의료비가 전액 무상이란 선전에 혹해 생면부지의 땅으로 갔다. 도올의 말처럼 교포들이 찾아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더 도덕적이고 매력적인 나라’였을까. 그들은 자신의 선택을 후회하지 않고 북한에서 행복한 삶을 살았을까. 북송은 설령 강제동원은 아니었다 해도 그 본질은 ‘거대한 사기극’이었다. 북송 교포 출신의 탈북자 몇 사람만 만나봐도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다.
북송 재일교포 탈북자와의 인터뷰
▲북송선 출항을 보도한 일본 신문들의 기사에는 ‘희망’이란 단어가 등장한다. 도쿄의 재일 한인역사자료관 전시물. 예영준 기자
만 60년 전인 1959년 12월 14일, 재일교포 975명을 태운 제1차 귀국선이 일본 니가타(新潟) 항을 출발해 청진으로 향했다. 북한이 ‘귀국사업’이라 부른 북송의 시작이었다. 1984년까지 모두 9만3339명이 북송선을 탔다. 초기이던 1960년 36차 북송선에 고지(高知)현의 교포 2세 소년 문주현(현재 71세)도 포함되어 있었다. 2000년 탈북해 서울에 살고 있는 문씨를 17일 만났다.
“북한은 돈이 필요 없는 사회라고 선전해서 그렇게 믿었다. 누구나 상점에서 필요한 물건을 필요한 만큼 갖고 나와 먹고 쓰는 사회인 줄 알았다. 그런 믿음은 청진항 도착 순간부터 깨졌다. 허허벌판에 아무것도 없는 시내 모습, 환영나온 학생들의 행색이 일본과는 너무 달랐다. ‘잘못 왔다’며 당혹해 하던 아버지의 표정을 잊을 수 없다.”
북한으로 간 것을 후회하며 살았나.
“나는 수영 선수가 되겠다는 꿈이 있어 북한행에 반대했는데 아버지는 ‘조국에서 수영하면 된다’고 했다. 웬걸, 청진은커녕 평양에도 수영장이 없었다. ‘나를 왜 데리고 왔나’고 원망하며 한 달 동안 아버지와 말을 안 한 적도 있다. 아버지도 후회 속에 살다 돌아가셨다. ‘아버지는 어디 가 하소연할 데도 없으니 네가 이해하고 용서하라’던 어머니 말씀이 잊혀지지 않는다.”
생활은 어땠나.
“그나마 우리는 다른 사람들에 비하면 고생을 덜 하고 잘 산 축에 속한다. 어머니가 갖고 간 일본제 세이코 시계 50개 덕분이다. 생활이 쪼들릴 때마다 그것을 간부들이나 군 장교들에게 몰래 팔았다. 사무직으로 일하던 아버지 월급이 1원 60전이던 시절 북한 돈 300원을 받았다. 어머니는 ‘지상낙원이라고 해서 왔더니, 자본주의 사회에서 열심히 일해 번 물건을 팔고 살아야 하는 게 안타깝다’고 했다. 50개가 다 떨어진 뒤로는 일본에 남은 친척이 방문단으로 올 때마다 시계를 갖다 줬다. 교포들 중에는 모든 게 무상이란 말만 믿고 이불조차 안 갖고 온 사람들의 생활은 정말 비참했다.”
재일교포는 북한에서도 차별받았다고 하는데 사실인가.
“처음에는 안 그랬는데 1976년 무렵부터 도시에서 쫓겨난 사람이 많다. 김일성 사진이 있는 신문을 접어서 보관했다는 등의 이유였는데 나도 아오지 탄광으로 가서 제탄공으로 일했다. 일본에 남아 있던 친척 중에 조총련 간부를 하던 분이 1980년 평양 ‘광복거리’ 조성 사업을 할 때 일본 돈 1000만엔을 기부하고 우리 가족의 행방을 물어 아오지까지 찾아왔다. 그 때 100만엔을 주면서 ‘곧 좋은 일이 있을 것’이라 했는데 한두 달 뒤 청진으로 돌아왔다.”
/연도별 북송 인원수
문씨의 증언은 대전에 사는 이창성씨나 서울에 살다 별세한 오수룡씨 등 필자가 접한 다른 재일교포 출신 탈북자들의 증언과 대동소이하다. 지금까지 재일교포 탈북자 200여 명이 일본으로 돌아갔고, 한국에는 그보다 약간 적은 사람이 살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들 가운데 일부는 북송사업에 협력했던 일본 정부를 상대로 손해배상소송을 냈다. 국교가 없던 북한과 일본 정부를 대신하여 양측 적십자사가 체결한 협정에 따라 북송사업이 진행됐다.
소수 민족으로서는 과도하게 높은 재일교포의 존재에 부담을 느낀 일본 정부는 북송사업에 적극 협력했다. 기시 노부스케(岸信介) 내각의 1959년 결정문에는 “재일 조선인은 치안상 문제가 되고, 재정적으로 부담이 되고 있다”는 표현이 나온다. 치안·재정 부담이란 당시 재일교포의 생활보호대상자 비율(4명에 1명꼴)이 일본인의 8배에 이르고 사회주의 성향이 강했던 사실을 가리키는 것이다. 일본 언론도 비판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북한 당국의 초청을 받고 현지 취재를 한 일본 기자들은 북한이 보여주는 것만 보고 돌아와 ‘지상 낙원’ 선전에 동조하는 듯한 내용의 르포기사를 쏟아냈다.
북한의 실상은 언론이 아니라 문씨의 부친처럼 ‘속았다’고 깨달은 교포들이 일본에 남아 있던 가족에게 보낸 편지를 통해 알려졌다. 북한 당국의 검열을 거쳐 배달된 편지는 “듣던 대로 조국은 지상 낙원이다”는 찬양 일색이었다. 하지만 남은 가족들은 사전 약속한 암호로 진실을 알 수 있었다. “내가 도착한 뒤 편지를 세로쓰기로 보내면 남은 식구들도 하루빨리 귀국선을 타고, 가로쓰기로 보내면 절대 오지 말라.” 불행히도 남은 가족들이 받은 편지는 가로쓰기였다. 이런 편지도 있었다. “여기서의 생활은 일본의 ○○○처럼 풍요롭다.” 편지에 쓰인 ○○○는 일본 빈민가 지명이었다.
북한에서는 재일교포 북송 사업이 어떻게 알려져 있을까. 태영호 전 주영북한대사관 공사에게 물었더니 이런 답이 돌아왔다.
“동서 체제 경쟁이 치열하던 시절, 동독에서 서독으로 탈출하는 사람이 많았다. 사회주의 진영 전체의 체제 우월성에 흠집을 내는 일이었다. 같은 분단국가인 한국에서 반대의 상황을 만들어내면 이를 만회할 수 있었다. 그래서 소련이 북송을 적극 지원하게 된 것이다. 교포들이 타고 간 귀국선도 소련 배였다. 하지만 북한에서 재일교포들은 높은 지위로 올라갈 수는 없었다. 지식인 출신도 행정직 정도에 그치고 당 일꾼이 되기는 어려웠다. 내가 일하던 외무성에도 재일교포는 없었다. 자본주의 생활 경험 때문에 김일성 유일영도체제를 잘 따르지 못했기 때문이다. 중학교 친구 중에도 교포가 있었는데 북한식 회의 방식에 적응 못 하고 자기 의견을 솔직히 이야기하다 주의를 받곤 했다.”
요컨대 북송사업은 체제 우월성을 국제적으로 과시하고 싶었던 북한과 조총련, 범죄율 높고 사회주의에 경도된 잠재적 위험집단을 ‘정리’하고 싶었던 일본 정부가 주범과 종범, 공범으로 가담해 벌어진 ‘사기극’이었다. 북한의 선전에 속고 교묘하게 연출된 집단광기에 휘말려 돌아오지 못할 해협을 건넌 9만3000명은 거대 사기극의 피해자였다. 그들의 굴절된 삶에 대한 일말의 연민이라도 있다면 도올과 같은 발언을 공공연히 하진 못할 것이다.
비단 북송사업에 관한 기술뿐 아니라 도올의 저서에는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문제 삼고 북한에 도덕적 우위를 두는 것으로 해석될 만한 언술들이 곳곳에 등장한다. 개인이 어떤 역사관을 갖고 어떤 책을 쓰든 자유민주주의 국가인 대한민국에서 문제 될 것이 없다. 하지만 그런 역사관에 바탕을 둔 저서를 두고 “우리의 인식과 지혜를 넓혀주는 책”이라는 문 대통령의 추천에는 동의할 수 없다. 백번을 양보해도 북송사업에 대한 기술만은 ‘사람이 먼저’라는 대통령이 추천할 대목이 아니다.
중앙일보 예영준 논설위원
■1950년, 황해도 신천학살 사건의 진실
▲북한이 6·26 전쟁 중 미군이 저질렀다고 주장하는 이른바 ‘신천대학살 사건’의 진실을 추적한 책이 나왔다.
한화룡 백석대 기독교학부 교수가 펴낸 「전쟁의 그늘- 1950, 황해도 신천학살 사건의 진실」(포앤북스)은 남한에는 잘 알려지지 않은 신천학살 사건에 대한 전모가 자세하게 그려져 있다.
북한은 신천사건을 “미군이 저지른 학살”이라고 주장하며 반미교육과 계급교양의 구심체로 삼고 있다. 북한 김정은은 작년 11월 말 신천박물관을 찾아 “조성된 정세와 혁명발전의 요구에 맞게 우리 군대와 인민들 속에서 반제반미교양, 계급교양을 더욱 강화해 천만 군민을 반미대결전으로 힘 있게 불러일으키기 위해 찾아왔다”고 말했다.
신천학살 사건은 1950년 10월~12월 사이 북한 황해도 신천군 일대에서 벌어진 대규모 민간인 학살 사건을 말한다. 북한은 이를 두고 미군이 저지른 학살이라고 주장하며, 1958년 3월 김일성 지시에 의해 이곳에 신천박물관을 지어놓고 반미교육의 중심지로 활용하고 있다.
북한이 신천에서 미군에 의해 학살되었다고 주장하는 민간인 숫자는 3만5383명이다. 그 밖에도 안악군에서 1만9000여 명, 은율군에서 1만3천명을 비롯, 황해도 일대에서만 12만여 명의 주민들이 미군에 의해 학살되었다고 주장한다.
「전쟁의 그늘」 저자인 한화룡 교수는 “북한 김정은 체제도 반미노선을 걷고 있기 때문에 북한에서 이 사건은 계속 강조될 수밖에 없다”며 “남북 간의 진정한 평화와 화해를 위해 우리도 사건의 진상을 정확하게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신천학살 사건은 미군과는 관계없는 일"
한 교수가 이 책을 펴내는 데는 3년이 걸렸다고 한다. 그는 “신천학살 사건은 남한 사람들은 아무도 모르고, 북한 사람들은 모두가 아는 사건”이라며 “국내에서는 이 사건에 대한 자료가 워낙 부족한데다가 그나마 있는 자료들도 부정확한 부분이 많아 사건의 정확한 사실 관계를 파악하는 데 어려움이 많았다”고 말했다. 다음은 한 교수와 일문일답이다.
-이 책을 쓴 배경은 무엇인지요.
“1990년 미국 유학 시절 당시 월간조선(1990년 12월호)을 사서 보았는데, 그곳에 조선족 행상 이연화의 <목탄차로 다니는 공화국>이란 기사를 읽은 것이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 후 북한에 대한 관심 생겨 독학으로 북한에 대한 공부를 시작했고, 그 결과 2000년 「4대 신화를 알면 북한이 보인다」라는 책을 펴냈습니다. 이 과정에서 신천학살 사건을 알게 됐습니다. 하지만 여러 사정으로 본격적인 연구를 하지 못하다가 2010년부터 자료를 수집하기 시작했고, 이후 3년간의 연구 시간을 할애해 올해 5월 드디어 책을 출간하게 된 겁니다.”
-책에서 신천학살 사건은 미군과 아무 관련이 없다고 하셨는데요.
“북한은 1950년 10월17일 미군이 신천에 들어왔고, 다음날인 18일부터 여러 장소에서 학살했다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이같은 북한의 주장은 당시 미군의 행보와 각종 전사자료, 현지 월남자, 탈북자 등의 증언 등을 통해 완전히 허구임이 밝혀졌습니다. 1950년 10월 유엔에 의해 38선 돌파가 결정된 후 미군 각 부대는 오직 평양을 향해 서로 경쟁하면서 파죽지세로 밀고 올라갔습니다. 당시 미군은 신천을 그냥 지나쳐 갔습니다.”
-미군이 신천 쪽으로 전혀 진입하지 않았다는 말씀입니까.
“당시 전사와 월남자들의 증언에 의하면 18일 밤 10시경에 미군을 태운 트럭 한 대가 신천에 처음 나타났고, 다음날 오전(19일)에 1개 정찰 소대가 트럭을 타고 들어왔습니다. 그 직후 미군 탱크 3~4대와 보병들이 신천을 통과해서 지나갔습니다. 따라서 북한이 미군이 학살을 시작했다는 17일~18일에는 미군이 신천에 있지 않았습니다.”
▲북한의 대표적인 반미(反美) 계급 교양 학습장인 신천박물관(황남 신천)에서 강사가 참관객들에게 전시 자료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조선DB
인민군의 학살과 황해도 지역의 우익 세력 봉기
-그렇다면 신천사건의 본질은 무엇이고 왜 일어난 겁니까.
“신천학살은 전쟁이라는 비정상적인 시기에 좌·우익이 갈라서 서로 죽이고, 보복을 하는 과정에서 벌어진 사건입니다. 물론 그 시발은 인민군에 의해 시작됐습니다. 1950년 9월15일 인천상륙작전으로 전세가 뒤바뀌자 인민군과 공산당원들이 후퇴하면서 우익 인사들을 체포하고 학살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 참극은 북한의 점령 지역이었던 남한(예: 대전형무소 학살)은 말할 것도 없고, 평양, 함흥 등 북한 전역으로 이어졌습니다.”
한 교수는 “북한군의 학살은 황해도도 예외가 아니었는데, 황해도 도당은 10월11일 철수 명령과 함께 청치보위부와 내무서에 ‘반동들을 색출해서 무자비한 숙청을 감행하라’는 명령을 내려보냈다”며 “이 지시를 받은 신천, 안악, 은율 등지의 내무서에서 수많은 우익 인사들과 가족들을 체포해 처형했다”고 말했다.
이후 벌어진 상황을 한 교수의 「전쟁의 그늘」에서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인민군과 공산당원의 우익 인사 검거와 처형으로 우익 인사들의 목숨이 경각에 달린 상황으로 내몰렸다. 유엔군 입성을 앉아서 기다릴 수 없다고 판단한 우익 세력들은 10월13일 재령을 시작으로 황해도 일대에서 반공 봉기를 일으켰다.
갑자기 재령에서 우익 봉기가 일어나자 후퇴하던 인민군 수백명이 봉기군을 진압하기 위해 재령으로 되돌아와 이들과 전투를 벌였다. 숫자와 화력에서 열세인 봉기군은 많은 희생자를 내고 후퇴했다. 이후 재령읍을 다시 장악한 공산당원들과 인민군들은 숨어 있는 봉기군을 색출하기 위해 집집마다 뒤지면서 불을 지르고, 찾아낸 사람을 그 자리에서 잔인하게 죽였다.
신천에서도 13일 저녁 봉기가 일어났다. 봉기군에 쫓겨 간 공산당원들은 밤에 야음을 틈타 신천읍을 공격했다. 이 과정에서 좌익 세력이 신천 온천을 장악했고, 수많은 기독교인이 학살당했다. 10월16일~18일 사이 우익 치안대와 인민군 사이에 교전이 벌어져 쌍방에 수많은 사람이 죽거나 다쳤다.
18일~19일 사이 미군이 신천을 통과하던 때에는 봉기군과 인민군들 사이의 전투로 이미 길거리에 시체가 즐비하게 널린 상황이었다.
10월19일 신천 일대를 장악한 우익은 마을마다 치안대를 조직해 질서를 유지하는 한편, 부역자 숙청과 잔비(殘匪) 소탕에 나섰다. 이 과정에서 매일 같이 피의 복수가 시작됐고, 어쩌다 노동당이나 직업동맹에 들어간 사람들까지 처형되는 등 수많은 억울한 희생자가 발생했다.
두달 넘게 이어진 보복의 악순환
당시 9·28 서울 수복 후 황해도 일대에서 북진 퇴로가 차단된 인민군 패잔병들과 공산당원들은 구월산에 들어가 빨치산 활동을 했는데, 그 수가 3000명에 달했다. 우익 치안대는 이들과 거의 매일 전투를 치루었다. 빠치산들은 구월산을 거점으로 그 주변의 은율군, 안악군, 신천군 등지의 부락을 습격하여 약탈, 살인, 방화를 자행했다.
1950년 12월7일 유엔군이 중공군에 밀려 후퇴하기 시작하자 철수하는 과정에서 우익 세력들은 그동안 사안이 경미하다고 판단해서 지켜보고 있던 좌익분자들과 가족을 다시 잡아들여 처형했다. 그들이 작당해서 또 다시 보복을 할까 두려웠기 때문이다.
1950년 12월22일 이후부터 그해 월말까지는 좌익들의 대대적인 보복이 시작됐다. 이웃과 친척이 서로 죽고 죽이는 과정에서 전 가족이 몰살 당하는 경우가 속출했다. 이렇게 10월부터 12월까지 좌우익 간에 서로 죽고 죽이는 피의 보복이 계속 반복된 것이 신천학살 사건의 본질인 것이다.
한 교수는 “유독 신천 일대에서 가장 강력한 반공 봉기가 일어난 이유에 해대 신천의 유별난 지역적 특수성과 역사적 상황이 맞물린 결과”라고 분석했다.
“신천과 재령을 중심으로 한 황해도 일대는 종교적, 경제적, 역사적 차원에서 다른 지역과 적지 않은 차이를 보였습니다. 종교적으로는 기독교가 부흥했고, 경제적으로는 중산층이 두텁게 형성됐으며, 역사적으로는 민족주의 운동이 활발했던 곳입니다.
이런 곳에서 해방 후 공산당에 의해 토지개혁이 실시되자, 이에 대한 불만과 신분 역전에 대한 울분, 개인적인 모욕에 대한 원한, 기독교에 대한 탄압 등으로 중산층, 상인, 중소지주, 자작농, 기독교인, 각종 반공지하단체들의 불만이 팽배해 있었습니다.
이러한 때 인민군이 후퇴하면서 많은 사람을 학살했고, 이후 부모·형제나 친척들이 피해를 입은 사람들의 복수심이 폭발하면서 학살극이 벌어진 것입니다. 전쟁의 와중에 혈육이 참혹하게 살해당한 현장을 보고 모두 제정신을 잃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1950년 10월, 함흥에서 퇴각하는 인민군에 의해 학살당한 우익 인사들의 시신을 수습하는 모습. 당시 함흥 지역에서 발굴된 시신만 1만2700명에 달했다고 한다.
북한 당국이 미군에게 덮어 씌우는 이유
한화룡 교수는 “신천학살은 6·25 전쟁 당시 북한 지역에서 좌우익 간에 벌어진 수많은 학살 중 가장 규모가 크고 비극적인 사건이었다”며 “하지만 북한 측에서 주장하는 신천학살의 희생자 숫자 3만5천명은 과장되었을 가능성이 많다”고 말했다.
당시 목격자의 증언을 종합하면, 학살 규모가 그 정도에 이르지 않았고, 특히 북한 측이 주장하는 자료가 오락가락하는 등 신빙성이 떨어진다는 것이다. 한 교수는 “현재 신천에서 이루어진 학살의 규모를 정확하게 추정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고 말했다.
한 교수는 북한이 신천학살의 책임을 미군에게 전가하는 이유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북한이 미군에 의해 3만5천명이 학살당했다고 주장하는 이유는 먼저 10월13일 우익에 의해 봉기가 일어난 사실을 은폐하기 위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반공 무장 봉기는 북한 체제의 치부를 드러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북한은 좌익이 수많은 사람을 학살한 사건도 숨겨야 했고, 수많은 사람이 북한 체제를 떠나 월남한 사실을 감추어야 했습니다. 그래서 모든 책임을 미군에게 돌려서 자신들이 저지른 잘못은 감추고, 미제에 대한 증오심을 불러일으킴으로써 통치의 정당성을 확보하고자 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는 “사악한 독재자나 체제는 거짓말을 일삼고 또 그 거짓말을 근거로 폭력 행사를 정당화 하고 있다”며 “북한 당국이 주장하는 거짓말 중 핵심이 6·25를 미국이 일으켰고, 수많은 양민을 학살했다는 것”이라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제가 신천학살 사건에 대한 책을 쓴 이유는 이 사건의 진실을 밝힘으로써 북한 당국이 더 이상 거짓말을 근거로 주민들에게 폭압적인 통치를 하지 못하게 하기 위한 목적이 있습니다. 한마디로 북한의 민주화에 일조하기 위해서라고 할 수 있습니다. 미군이 무고한 양민을 죽인 것이 아니라, 좌우익 간에 살육이 일어난 것이며, 그 살육이 북쪽으로 후퇴하면서 먼저 반공인사와 종교인들을 잡아다가 죽인 북한 당국의 행위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을 알림으로써 북한 주민들의 잘못된 증오심을 풀어주는 데 제 책이 기여했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서로의 잘못을 인정하고 고백하는 자세 필요"
한 교수는 “책에서 비록 북한 당국이 학살의 비극을 가져왔지만, 그 와중에 과도한 폭력으로 반응한 반공 우익과 종교인들의 잘못도 드러냈다”며 “서로의 잘못을 인정하고 고백할 때 남북 간의 진정한 화해를 이룩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북한 당국은 신천에서 미군에 의한 대규모 학살이 이루어졌다는 선전을 중지해합니다. 사실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후퇴하면서 우익 인사들과 종교인들을 학살한 잘못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와 동시에 신천에서 우익 봉기군 출신들이 포로로 잡은 공산당원들을 적법절차 없이 죽인 사실을 인정하고, 단지 노동당에 가입하거나 그 가족이라는 이유로 사람들을 죽인 잘못을 고백해야 합니다.”
그는 특히 “전쟁 시기 일부 기독교인들이 보복에 가담해 수많은 사람을 살상했다”며 “기독교인들이 사랑과 정의와 관련해 신자다운 모습을 온전히 나타내지 못한 것을 반성해야 한다”고 말했다.
“지금까지 한국 교회는 신천사건 자체를 잘 모르고 있습니다. 한국 교회는 신천학살에 일부 기독교인들이 연루된 사실을 인지하고, 그들이 신천일대에서 과도하게 폭력을 행사하여 수많은 인명을 살상한 죄책을 회개하고 고백해야 합니다. 저는 한국 기독교계에 이 사실을 알려서 연대 책임의식 아래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남북 간에 참된 화해를 도모하고자 이 책을 내 놓은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한 교수는 “당시 신천에서 일어난 폭력사태를 통제할 수 있는 공권력이 부족해서 이런 비극이 발생한 측면이 크다” 며 “우리 정부와 국민들은 신천학살 사건을 통해 역사적 교훈을 얻고, 앞으로 예상되는 북한 정권 혹은 체제 급변사태에 철저히 대비해 다시는 이같은 비극이 되풀이 되지 않도록 준비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상흔 조선pub 기자
■ 북괴의 말 폭탄
□ 2017.09.10 "입에서 늘 화약 냄새 풍겨야"… 낯설고 살벌한 '북한식 말폭탄'
섬뜩한 욕설·협박 누가 왜 만드나
'두 놈의 영국 기자 나부랭이들이 써낸 모략 도서 내용을 가지고 우리 공화국의 존엄을 엄중히 모독하는 특대형 범죄를 감행했다… 공화국 형법에 따라 극형에 처한다… 임의의 시각에 임의의 장소에서 추가적인 절차 없이 즉시 집행될 것."(8월 31일 북한 중앙재판소 대변인 담화)
'미국을 믿고 무용지물인 사드에 기대를 걸며 설쳐댄다면 비참한 개죽음밖에 차례질(얻을) 것이 없다.'(9월 4일 노동신문)
최근 북한이 우리나라를 상대로 한 비방·협박이다. 북한은 핵·미사일 실험을 강화하는 동시에 말폭탄 수위도 점점 높이고 있다. 핵 공격을 언급하며 한국을 협박할 것이라는 예측도 나온다. 최근 그 선전·선동에서는 낯설면서도 섬뜩한 협박이 진하게 풍긴다. 이 살벌한 문장들은 누가 만들어내는 것일까.
"선전·선동에서 화약 냄새 풍겨야"
북한은 '남조선 혁명'이라는 대남전략 노선을 토대로 대남 선전·선동과 비방을 계속해 왔다. 조선노동당 정무국(김정은 이전에는 비서국)과 국가 최고기구인 국무위원회에서 선전·선동 기본방침과 과제를 정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후 당·정·군 차원에서 각각 역할에 맞는 내용을 작성해 전파한다. 노동당 선전선동부에선 노동신문·조선중앙통신·조선중앙 TV를 통해 비방 성명과 기사 등을 내보낸다. 대남사업을 전담하는 노동당 통일전선부에선 아시아태평양위원회(아태위) 등 산하 기구 이름으로, 국무위 소속 조국평화통일위원회(조평통)는 조평통 및 민족화해협의회 명의로 성명을 발표하고 있다. 군의 경우 조선인민군 총정치국 산하 적공국(敵工局·일명 563부대)에서 대남확성기 방송, 전단 살포 등을 담당하고, 정찰총국에서 대남사이버전을 벌인다. 통일전선부 출신의 탈북민 장철현씨는 "대남 선전·선동 업무는 북한 최고 명문대학인 김일성 종합대학이나 김형직 사범대학 어문학부 출신이 주로 선발된다"고 했다. 학교장이 문장력과 학교 성적이 좋은 학생을 추천하면 당에서 사상 검토와 가정환경 조사를 거쳐 뽑는 것으로 알려졌다.
1970년대 초반까지 선전·선동부에서 일했던 김정일은 대남 선전·선동을 특히 강조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김정일은 조선중앙TV 아나운서들에게 "입에서 항상 화약 냄새가 풍겨야 한다"고 말했다고 한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북한 아나운서인 74세 리춘희다. 김정일 총애를 받은 리춘희는 1994년 김일성 사망, 2006년 1차 핵실험, 2007년 2차 남북정상회담 소식을 알렸다. 2011년 12월 김정일 사망을 발표한 이후 한때 방송에 나오지 않아 은퇴설이 나왔지만 2016년 1월 북한 4차 핵실험 방송을 하면서 재등장했다. 이후 5, 6차 핵실험과 장거리 미사일 발사 등 북한 중대발표가 있을 때마다 방송에 나오고 있다. 한 고위 탈북민은 "북한 방송원(아나운서)은 뉴스에 환희, 분노, 슬픔을 표정과 어투, 목소리로 함께 전달하도록 훈련받는다"며 "리춘희는 대남 선전·선동 분야에서 김씨 일가 대(代)를 이어 인정받은 사람"이라고 했다.
"죽탕치다" "각을 뜨다" 등 낯선 욕설
북한말을 연구한 서울대 이현복 명예교수(언어학과)는 "북한 비방 성명은 교양 없고 때로는 우습게 들리기도 하지만 사실 무서운 내용일 때가 많다"고 했다. 대남 비방에는 북한 욕이 자주 나온다. 북한 노동신문과 조선중앙TV는 북한 표준말인 문화어를 사용해야 하지만 대한민국과 일본, 미국 등을 비난할 때는 예외다. 대남 비방에 단골로 등장하는 '죽탕치다'라는 표현은 '쳐서 몰골을 볼품없이 만들다'라는 뜻으로, 북한에선 가장 심한 욕에 속해 일상에서 거의 쓰이지 않는다고 한다. '쑥대밭을 만들겠다'의 경우 모조리 없애버리겠다는 뜻으로 이 역시 북한에선 잘 쓰지 않는 심한 욕이다. '각을 뜨다'의 경우 사지를 자른다는 의미이다.
북한 비방 성명에는 '앉을 자리, 설 자리도 모르고 헤덤비는 무지한 짓거리' '천벌이 내린 듯 기절초풍하였고' '어리석은 잠꼬대' 등 우리 공식 성명에는 사용하지 않는 표현이 많다. 이현복 명예교수는 "북한은 공식 문서에서도 문어체 대신 구어체를 자주 사용한다"며 "선전·선동의 경우 특히 북한 대중들이 이해하기 쉬운 어휘를 골라 쓴다"고 했다. 한 탈북민은 "북한 문학에선 소설 '임꺽정' 작가 벽초 홍명희 선생의 사실주의가 큰 영향을 끼쳤다"며 "이것이 북한의 대남 비방에도 드러나는 것 같다"고 했다. 선군(先軍)정치 영향을 받아 군사 용어가 자주 나오는 것도 특색이다.
이 같은 비방 성명은 북한 아나운서가 읽었을 때 효과가 커진다. 높은 억양으로 단어 하나하나에 힘을 주면서, 절규하듯 격앙되고 분노에 찬 목소리로 말한다. 김정일은 '방송원 화술'이라는 교본을 통해 "방송원들의 말은 대중을 일깨우는 돌격 나팔이 돼야 한다"고 말했다.
우리 대통령 악담만 수십 가지
북한의 대남 비방 수위는 대한민국 정권에 따라 변해왔다. 이는 대통령에 대한 표현으로 가늠할 수 있다.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에게는 파쇼도당, 괴뢰도당, 부정부패 왕초, 역도, 협잡배 등 수식어를 썼다. 김영삼 전 대통령에 대해선 정치매춘부, 정치협잡배, 사대매국노, 민족반역자, 문민역도, 문민괴수라고 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의 경우 파쇼광신자, 괴뢰통치배, 남조선 집권배로 비방하다 2000년 6·15 공동선언 이후 남조선 집권자로 순화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에게도 직접 이름을 거명하며 비난하는 걸 자제했다.
이명박 전 대통령 이후 북한은 비방을 재개했다. 특히 김정은 집권 이후 강도가 세졌다. 이 전 대통령에게는 괴뢰 역도, 정신병자, 불구대천의 원수, 리명박 쥐○○, 2MB(메가바이트), 정치적 저능아라고 했다. 박근혜 전 대통령에 대해선 청와대 암○, 악근혜, 악담을 퍼뜨리는 아낙네, 온 국민을 다 잡아먹을 마귀○이라고 했다. 한승호·이수원 북한학 박사는 '김정은 시대의 대남비방 분석' 논문에서 "김정은은 정치적으로 등장하기 위한 준비가 김정일에 비해 단시일에 이루어진 만큼 권위를 강화할 필요가 있었다"며 "강력한 대남 비방을 통해 주민들에게 '최고존엄'에 대한 충성심과 존경심을 자극한 것"이라고 했다.
유동열 자유민주연구원 원장은 "김정은 집권 이후 각 기관이 충성경쟁 하듯 앞다퉈 대남 비방을 하고 있다"고 했다. 북한 중앙재판소(최고 재판소에 해당)는 지난달 31일 대변인 담화를 통해 본지와 동아일보 사장, 특정 기자에 대해 "극형에 처하겠다"고 협박했다. 신문에서 영국 특파원이 쓴 책 '조선자본주의공화국'을 소개한 게 이유였다. 대남 기구나 관제 언론이 아닌 중앙재판소가 협박에 동원된 건 이번이 처음이다. 이어 지난 1일에는 조선기자동맹 중앙위원회에서 대변인 성명을 내고 "추악한 괴뢰매문가들의 반공화국 모략망동을 무자비하게 짓뭉개버릴 것"이라고 했다. 김정은의 여동생 김여정이 선전선동부 부부장을 맡으면서 북한의 경쟁식 대남비방이 강화됐다는 의견도 있다. 김여정 부부장 임명 이후 '북한 괴벨스(나치 선전 담당)'로 불리는 김기남 선전선동부장과 리재일 제1부부장이 지방 협동 농장에서 육체노동을 하는 '혁명화 교육'을 받고 복귀하기도 했다.
통일부 관계자는 "김정일 때는 낮은 단계에서 높은 단계로 서서히 비방 수위를 높였다면 김정은은 곧바로 최고 수준의 비방을 하는 것도 특징"이라고 했다. 북한의 대남비방은 주체와 형식, 내용으로 분류된다. 가장 낮은 단계는 노동신문에서 논평을 쓰거나 외곽 단체 명의로 성명을 내는 것이다. 다음 단계는 당 공식기구 관계자가 기자 질문에 대한 답변 형식으로 비방하는 것이며, 이후 공식기구에서 대변인 담화나 성명 등을 발표한다. 이 기구 역시 조국평화통일위원회부터 국방위원회까지 서서히 올라가고 이에 따라 비방 수위도 높이는 게 김정일 스타일이었다. 이에 비해 김정은은 중간 과정을 생략하고 곧바로 최고 기구 수준에서 비방하고 나머지 기구들이 따라오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유동열 원장은 "우리 정부나 언론이 북한을 비판하면 김정일 정권은 2~3일 후 이에 맞대응하곤 했는데 김정은 정권은 반나절이나 하루 만에 반응한다"면서 "김정은의 급한 성격을 반영하는 것 같다"고 했다.
트럼프에는 '패거리'가 고작
국방부 관계자는 "북한은 잇따른 핵·미사일 실험 이후 특히 미국에 대한 협박 수위를 높이고 있다"고 했다. 북한은 지난달 14일 김정은이 괌 포위사격 방안에 대해 보고받았다고 밝혔다. 김정은은 "일단 미국의 행태를 좀 더 지켜보겠다"고 했다가 지난달 29일 비행거리 2700㎞의 중거리 탄도미사일을 발사했다. 북한이 미국을 위협한 뒤 작전 계획을 공개하고 실제 행동에 옮긴 건 처음이다. 북한은 그러나 이처럼 미국을 위협하면서도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에 대해선 '트럼프패' 이상의 직접적인 비판은 삼가고 있다. 문재인 대총령의 경우에도 싷명 언급은 하지 않고 '현 집권자' '남조선집권자'로 지칭하고 있다. 향후 협상을 고려한 조치로 풀이된다.
신원식 전 합참 작전본부장(예비역 육군 중장)은 "결국 북한은 미국과 핵 협상을 통해 미국을 위협하지 않는 선에서 핵보유국 지위를 얻으려 할 것"이라며 "만약 이렇게 되면 한국은 북한 핵 협박에 24시간 노출되고 말 것"이라고 했다.
전현석 기자
□ 09-23 “최고 제재” vs “최강 대응”… 美-北 정면충돌
‘말폭탄 전쟁’에 한반도 긴장 고조
트럼프, 北자금줄 완전차단 돌입… “깡패정권 지원 기관 용납 못해”
김정은, 사상 첫 개인 성명 발표… “늙다리 미치광이 불로 다스릴 것”
트럼프 “김정은 미치광이” 트윗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북한 김정은이 ‘치킨 게임’처럼 조성하고 있는 한반도 긴장 국면이 그야말로 건드리면 터질 듯한 상황으로 치닫고 있다. 한쪽의 우발적 행동이 군사적 충돌로 이어질 가능성이 어느 때보다 높아졌다는 우려도 나온다.
김정은은 21일 성명을 내고 “미국의 늙다리 미치광이를 반드시, 반드시 불로 다스릴 것이다. 트럼프가 역대 가장 포악한 선전포고를 해온 이상 사상 최고의 초강경 대응조치 단행을 심중히 고려할 것”이라고 밝혔다고 북한 매체들이 22일 보도했다. 트럼프 대통령이 유엔 총회 기조연설에서 북한에 대해 “미국과 동맹을 위협하면 완전히 파괴할 것”이라고 한 데 대한 공개 반발이다. 김일성 이후 북한 김씨 일가 최고지도자가 자신 명의의 성명을 내고 미국 대통령을 겨냥해 도발 의사를 밝힌 것은 김정은이 처음이다.
김정은은 이어 “말귀를 알아듣지 못하고 제 할 소리만 하는 늙다리에게는 행동으로 보여주는 것이 최선”이라고 강조했다. 이와 관련해 유엔 총회 참석차 뉴욕을 방문 중인 리용호 북한 외무상은 기자들과 만나 “(김정은이 밝힌 초강경 대응 조치는) 아마 태평양에서의 역대급 수소탄 시험일 것”이라고 말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초강력 제재, 즉 북한과 거래하는 모든 기업과 개인을 제재하는 이란식 세컨더리 보이콧(제3자 제재)을 추진할 것임을 강조했다. 그는 21일(현지 시간) 뉴욕에서 열린 한미일 정상회의 모두발언에서 북한과 교역하는 금융기관은 미국 금융망에서 퇴출시키고 북한과 거래하는 제조업 에너지 정보기술(IT) 분야 기업과 개인에 대해서도 제재하는 내용의 행정명령에 서명했다고 밝혔다. 트럼프 대통령은 “인류에 가장 치명적인 무기를 개발하려는 북한의 자금줄을 차단할 것”이라며 “범죄를 저지르는 깡패 정권을 재정적으로 지원하는 기관들을 용납할 수 없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트위터에선 “김정은은 자기 인민들을 굶주리게 하고 죽이는 일을 개의치 않는 미치광이(mad man)가 분명하다. 그는 전례 없는 심판대에 오르게 될 것”이라고 압박했다.
북-미가 말 폭탄을 넘어 저주에 가까운 위협을 주고받으면서 한반도 정세는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상황에 빠져들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은 유엔 총회 기간에 전쟁불가론을 설파하면서도 한미일 공조를 바탕으로 한 대북 제재에 주력할 수밖에 없다는 입장이다. 문 대통령은 한미일 정상회의에서 “미국의 독자 제재 조치는 북한의 비핵화를 이루는 데 큰 효과가 있을 것”이라며 대북 세컨더리 보이콧을 지지했다.
한상준 기자 alwaysj@donga.com / 뉴욕=박용 특파원
□ 11월 16일 “천벌을 맞을 미치광이…” 트럼프 비난 수위높인 北… 北-美 대화설 사그러드나
북한이 아시아 순방에서 대북 압박을 강조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에게 ‘미치광이’ ‘패륜아’ ‘인간 오(誤)작품’ 등 비난 발언을 쏟아내고 있다.
16일 북한 노동신문은 ‘천벌을 맞을 미치광이를 죽탕쳐(쳐서 몰골을 볼품없이 만들다) 버릴 것이다’라는 제하의 기사에서 트럼프 대통령의 한국 국회 연설에 대한 북한 주민들의 논평을 소개했다. 리정명 류경안과종합병원 부원장은 “패륜아 트럼프가 다시는 세상을 소란케 하지 못하게 아예 아가리를 꿰매놓아야 한다”고 했고, 한영철 천리마구역 강선협동농장 작업반장은 “이 밥통 같은 자가 이번에 남조선에 날아들었다가 오금이 저려서 군사분계선 비무장지대에는 낯짝도 들이밀지 못했다는데 체통은 멧돼지 같아도 담은 쥐뿔만큼도 없는 놈”이라고 비난했다. 김성훈 김일성종합대 학생은 “우리 주체 조선의 청년 대학생들은 천하의 인간 오작품인 트럼프의 개나발을 절대로 묵과하지 않을 것이며 천추에 용납 못할 특대형 범죄의 대가를 기어이 받아내고야 말 것이다”라고 주장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 8일 방한 중 가진 국회 연설에서 북한의 핵·미사일 개발과 인권침해 실태 등을 비판하면서 김정은 노동당 위원장을 ‘폭군’ ‘잔혹한 독재자’로 불렀다.
노동신문은 전날에도 ‘미치광이 대통령이 저지른 만고죄악을 단죄한다’는 제목의 논평에서 “이르는 곳마다에서 줴쳐댄(지껄인) 트럼프의 망발들은 백악관의 대조선 적대시 정책의 최종 확언이고 우리 인민의 생존을 더는 허용치 않겠다는 공공연한 선전포고라고밖에 달리는 볼 수 없다”며 “최고존엄 중상모독, 북한 사회주의제도 비방, 인민 생활에 먹칠, 대북 압살 등의 ‘죄악’을 저질렀다”고 밝혔다. 특히 트럼프 대통령을 겨냥해 ‘박테리아’ ‘바퀴 새끼’ 라고 비난했다.
북한이 60일 넘게 도발을 중단하면서 북·미 대화 가능성이 고개를 들었으나, 트럼프 대통령에 대한 비난 발언의 수위를 높이면서 북·미 대화설이 다시 사그라질 가능성이 커졌다.
김영주 기자 everywhere@munhwa.com
□ 11.24 "미제 짜증납네다"→"미국×들 짱나" 北댓글부대, 한국 말투로 '번역'까지
'北사이버 공격 실태' 세미나 요원 300여명 한국 포털 가입, 카페·게시판에 유언비어 퍼뜨려
/일러스트=박상훈 기자 ps@chosun.com
"짜증납네다. 미제야말로 우리의 적입네다." → "아우 짱나. 미국×들이야말로 우리 주적이자나." 북한의 대남 사이버 심리전 조직들이 지휘하는 댓글 부대들이 북한 말투를 한국식 표현으로 바꿔주는 자체 검증팀까지 가동하고 있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북한식 표현이 섞일 경우 의심받을 수 있기 때문에 한국 네티즌들이 사용하는 말투로 '번역'하는 작업을 거친다는 것이다.
북한의 대남 사이버 공작 전문가인 유동열 자유민주연구원장은 23일 국민통일방송 주최로 열린 '북한의 사이버 공격 실태' 세미나에서 "북한이 대남 사이버 심리전의 일환으로 노동당 통일전선부와 군 정찰총국 등에 댓글팀을 신설하고 300명이 넘는 댓글 전문 요원을 운용한다"며 이같이 밝혔다.
유 원장은 "북한 사이버 댓글 요원들은 국내에서 불법으로 입수한 개인 정보를 갖고 국내 주요 포털 사이트의 영향력 있는 카페 등에 회원으로 가입하거나 공개 게시판, 토론방이나 직접 블로그 등을 개설한다"며 "이를 통해 우리 사회에 조작된 정보·여론, 유언비어, 흑색선전 등을 퍼뜨려 국론 분열과 시위 선동 등 사회 교란을 부추기고 있다"고 말했다.
최근 우리 국방부와 방산업체 등 국방 분야를 집중 공략한 악성 프로그램들에서도 북한식 표현이 다수 발견된 것으로 나타났다. 문종현 이스트시큐리티 이사는 "북한이 해킹을 위해 보내는 악성 코드에 련대(연대), 류포(유포), 최신 판본(최신 버전) 등 북한식 표현이 다수 발견됐다"며 "이를 나중에 한국식 표현으로 변경한 사례들도 많다"고 말했다. 문 이사는 "북한 해킹 조직이 최근에는 페이스북 등을 통해 군이나 정부기관의 요직에 있는 인사들과 친구를 맺은 다음 악성 코드를 보내는 방식으로 정보를 수집한다"며 "북한이 공격에 사용한 이메일에서도 북한 해커로 추정되는 개발자의 실명 등이 다수 발견됐다"고 했다.
조선일보 김명성 기자
■ 북한의 인권을 위하여
□ 2만 탈북자가 겪은 北 인권유린 歷史에 남기라
현병철 국가인권위원장이 11일 국내 거주 탈북자들에게 편지를 보내 "여러분들이 북에서 겪은 인권침해를 정부가 신고받고 기록하지 않아 그 고통과 억울함을 호소할 곳이 없었던 점을 대단히 유감스럽게 생각한다"고 밝혔다. 현 위원장은 "북에서의 인권상황을 되살리는 게 고통이겠지만 용기를 내서 북한에서 겪은 인권침해 사례들을 신고해달라. 이런 용기가 쌓이면 북한 체제가 변하는 기적이 일어날 것"이라고 했다. 편지는 2만1000여 탈북자 중 주소가 파악된 1만5000여명에게 보내졌다. 정부가 북한 인권 문제를 제대로 다루지 않아 온 데 대해 탈북자들에게 직접 사과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탈북자들은 북의 인권 상황을 온몸으로 겪은 증인이다. 그런데도 인권위는 출범 10년 동안 이들의 증언을 외면해왔다. 지난 3월에야 북한인권침해신고센터와 북한인권기록관을 신설해 북한주민과 납북자들이 북한 내에서 살해, 공개처형되거나 정치범수용소에서 당한 인권침해 사례를 신고받아 기록·보존하는 일을 시작했다. 유엔 같은 국제기구는 한참 전에 북한인권 특별보고관을 한국에 보내 탈북자들의 체험담을 토대로 매년 북한인권보고서를 만들거나 북한인권결의안을 통과시켜왔다.
정치권은 법무부 산하에 북한인권기록보존소를 두고 인권침해 사례를 기록·보존하도록 규정한 북한인권법 처리를 6년째 미루고 있다. 진보·좌파 진영은 다른 모든 가치보다 인권을 최우선시한다면서도 "북한인권을 제기해봤자 실효성도 없고 남북 관계에 부담만 준다"며 법안 처리를 가로막아 왔다. 위선적(僞善的)이란 말을 들을 만하다. 공소시효가 없는 반(反)인륜 범죄를 낱낱이 기록하는 것 자체가 인권유린을 자행하는 집단에 대한 견제장치다. 서독은 1961년부터 1990년 통일 때까지 4만1390건의 동독의 인권침해를 기록·보존해 이를 토대로 통일 후 인권유린 행위자들을 기소했다.
북한은 정치범 수용소 6곳을 비롯해 구류장과 노동단련대, 교화소 등 최소 480곳의 수용시설에서 북한 주민들을 짐승처럼 고문하고 공개처형해 왔다. 인권위는 민족을 대신해 역사의 공소장(公訴狀)을 작성한다는 마음가짐으로 탈북자들의 피맺힌 증언을 낱낱이 기록해 보존해야 한다. 범죄자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증거와 기록이다.
□ 2013. 07.05 정말 화나는 건 '北送 이후' 정부 태도다
라오스에서 체포된 탈북 청소년 9명이 중국을 통해서 북송(北送)된 데 대해 유엔 인권최고대표사무소 대변인은 "라오스와 중국 정부가 농 르풀망(국제법상 난민 강제 송환 금지) 원칙을 지키지 않았다는 것에 경악했다"고 했다. 미국의 북한 인권 운동가 수잰 숄티씨(氏)도 "중국과 라오스에 대해 책임을 물어야 한다"고 했다.
우리 외교부는 "라오스에 뒤통수를 제대로 맞았다"며 라오스에만 책임을 돌렸다. 중국에 대해서는 "탈북 청소년들이 북송되는지 몰랐을 것이며, 알았다 할지라도 개입하기 어려웠을 것"이라고 면죄부를 줬다. 라오스 주재 북한 대사관이 탈북 청소년들을 여행객으로 신분 세탁했기 때문이라고 친절한 설명까지 덧붙였다. 외교부가 서둘러 중국 책임론에 쐐기를 박고 나선 배경은 짐작이 간다. 부처의 명운이 걸린 한·중 정상회담이 임박한 상태에서 외교부 입장에선 '잡무(雜務)'에 해당하는 탈북자 문제가 흙탕물을 튀길까 염려했을 것이다.
탈북 청소년 북송 후폭풍이 몰아친 지난달 30일 한국·우간다 정상회담이 열렸다. 청와대 김행 대변인은 김일성으로부터 "안녕하세요"라는 한국말을 배웠던 우간다 대통령이 박근혜 대통령의 첫 초대장을 받게 된 배경과 의미를 출입 기자들에게 설명했다. 브리핑 말미에 '라오스 북송' 질문이 나오자 김 대변인은 "외교·안보 문제는 한목소리(one voice)를 내야 한다"며 외교부에 답변을 넘겼다. 그런 식으로 구분 짓자면 그날 정상회담도 외교부 소관이다. 대통령 홍보에 도움이 되면 청와대, 부담이 되면 해당 부처가 설명하도록 교통정리를 했다는 게 솔직한 설명일 것이다.
억지로 마이크를 건네받은 외교부도 라오스 북송 사태에 대해 말을 아꼈다. "알지 못한다" 또는 "말할 수 없다"는 답변으로 일관했다. 외교부가 그런 무성의한 답변을 '당당하게' 반복할 수 있었던 것은 "탈북자 업무는 국정원 몫인데 우리가 귀찮게 떠맡았다"는 심리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외교부는 외국 이민국에 억류된 우리 국민의 영사 업무까지 국정원 책임이라고 미룰 셈인가.
외교부는 탈북 청소년들이 북송되는 과정에서 "최선의 노력을 다했다"고 했다. 그런 말은 한 순간 한 순간 되짚어 봐도 "그때 그렇게라도 한번 해볼걸" 하고 아쉬움이 남는 대목이 없을 때 할 수 있다. 과연 라오스 대사관 관계자들은 탈북 청소년 아홉 명 속에 자기 가족이 포함돼 있었더라도 이번과 똑같이 행동했을까. 내 아들, 내 딸이 그 속에 있었어도 억류 기간 18일 동안 "라오스 정부가 잘해주기로 했으니 문제를 복잡하게 만들지 말고 조용히 기다리자"는 여유를 부릴 수 있었을까. 이런 질문에 가슴에 손을 얹고 "그렇다"고 답변할 수 없다면 "최선의 노력을 다했다"는 말을 함부로 해서는 안 된다.
탈북 청소년들이 라오스 이민국에 억류된 5월 10일부터 북한으로 강제 압송된 5월 28일까지 라오스 대사관이 실제 어떻게 움직였는지 국민은 정확히 모른다. 탈북 청소년들과 동행했던 주모 선교사 측이 전하는 얘기가 전체 진실은 아닐 것이라고 믿고 싶다.
다섯 명으로 꾸려진 초(超)미니 대사관이 라오스를 거쳐 가는 탈북자 연간 수백명을 빈틈없이 챙기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려운 일이다. 탈북자 중에는 거친 언행을 하는 사람도 있고, 이들의 탈북을 돕는 시늉을 하며 제 잇속을 챙기는 사기꾼도 있다고 한다. 이런저런 사람들에게 치이다 보면 진이 빠지고 타성에 젖게 되는 것도 이해가 된다. 또 라오스 정부가 탈북자 처리에 협조적이었던 종전 방침을 갑자기 바꾸고 '뒤통수'를 쳤을 때 사태를 뒤집는 것은 불가항력이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번 라오스 북송 사태는 가슴 아픈 일이긴 하지만 우리 정부에 모든 책임을 묻기는 힘들다.
정작 문제가 되는 것은 북송 이후 우리 정부 관계자들이 보이고 있는 태도다. 정부 부처마다 이번 사태를 귀찮아하고 짜증스러워하며 서로에게 책임을 떠밀고 있다. 이번 일에 대해 누구 하나도 사과하는 사람이 없고 자기들은 할 만큼 했다는 식이다. 북한에 압송된 사람들이 외국을 여행하던 대한민국 국민이었다면 이러지는 못했을 것이다. 라오스 탈북자 북송 사태 이후 우리 정부가 취하고 있는 태도는 탈북자 몇 명의 생명과 안위(安危)는 대수롭지 않다는 의식에서 비롯된 것으로 비친다. 우리 정부 관계자들의 마음가짐이 그렇다면 북송 과정에선들 정말 최선의 노력을 다했을까라는 의구심을 떨치기 힘들다. 그래서 정말 화가 난다.
조선일보
□ 2013.08.24 41년전 납북된 오대양號 선원, 이달초 탈북
41년 전 납북된 오대양호 선원 전욱표(68·사진)씨가 이달 초 압록강을 건너 탈북, 조만간 한국에 입국할 예정이다.
1972년 납북된 오대양61·62호 선원 25명 중 탈북에 성공한 사람은 전씨가 처음이다. 납북자가 탈북에 성공한 것은 2009년 귀환한 천왕호 선원 윤종수(71)씨 이후 4년 만이다.
전씨가 1974년 북한 묘향산에서 납북 어부 35명과 함께 사상 교육을 받으며 찍은 단체 사진은 2005년 최성용(61) 납북자가족모임 대표가 공개했다. 전씨는 이 단체 사진이 공개되기 전까지 정부의 전후(戰後) 납북자 명단에 포함되지 않았다. 정부 기록에는 오대양 61·62호 납북 선원이 전씨를 제외한 24명뿐이었다.
전씨는 단체 사진이 공개된 후 2010년 3월 납북 사실이 인정됐다.
전씨는 지난 11일 박근혜 대통령에게 보낸 탄원서에서 '나이가 68세로 되고 보니 여생을 고향 땅에서 살다가 묻히고 싶어 탈출하게 되었다'며 '박 대통령님, 도와주시기 바란다'고 썼다. 외교 소식통은 "전씨는 현재 안전한 곳에 머무르고 있으며 조만간 한국에 입국할 것"이라고 말했다.
▲41년 만에 탈북한 납북 어부 전욱표씨가 지난 11일 박근혜 대통령에게 구명(救命)을 요청하며 보낸 탄원서. /납북자가족모임 제공
북한 인권 유린을 조사하기 위해 방한한 유엔 북한인권조사위원회(COI) 조사관은 지난 12~13일 전씨의 고향인 경남 거제시 농소 마을을 방문해 전씨와 함께 납북됐던 선원들의 가족을 만나 피해 사실을 조사했다.
전씨의 탈북을 도운 최 대표는 23일 서울 연세대 새천년관에서 COI가 개최하는 공개 청문회에 증인으로 출석, 전후 납북자 피해 사실을 증언할 예정이다.
☞오대양호 납북 사건
1972년 12월 서해상에서 조업 중이던 쌍끌이 어선 오대양 61·62호가 북한 경비정의 공격을 받고 전욱표씨를 포함한 선원 25명이 황해남도 해주항으로 전원 나포됐다.
조선일보
□ 2016.01.29 기록해야 두려워한다
북한인권법이 곧 처리될 모양이다. 2005년에 처음 발의됐으니 11년 만이다. 그동안 '내정 간섭' '남북 대결 조장법'이라며 온갖 이유로 반대했던 야당이 이제라도 법안 처리에 일단 합의한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다. 그것이 선거를 앞두고 있기 때문이든 아니든 나중에 따질 일이다.
하지만 그동안 북한인권법 저지의 전선(前線)에 섰던 정치인들의 해명은 꼭 듣고 싶다. 그냥 시류나 당론 때문이 아니라 소신을 갖고 북한인권법을 반대했던 의원들이 꽤 있다. 대표적인 것이 2004년 미국에 서한까지 보내며 미국의 북한인권법 제정을 반대했던 당시 집권 여당 의원들이다. 열린우리당 소장파 의원 26명은 '북한 내정에 대한 간섭이며, 북한 정부의 몰락을 겨냥해 남북 대화를 중지시킬 수 있다'며 북한인권법 반대 서한을 보냈다. 서한을 접수하지 않겠다는 데도 굳이 주한 미국 대사관까지 찾아가 전달하는 퍼포먼스도 했다. 이것이 12년 전 서울 한복판에서 벌어진 일이다.
이 서한에 서명했던 의원 중 상당수는 여전히 야당에서 왕성하게 일하고 있다. 당시에는 초선(初選)이 대부분이었지만 지금은 야당 지도부, 국회 상임위원장, 지방자치단체장 등 핵심부를 차지하고 있고, 이번 총선에도 출마한다. 이들이 북한인권법의 국회 표결 때 어떤 선택을 하는지 지켜볼 생각이다. 찬성한다면 왜 생각이 바뀌었는지, 반대한다면 그 이유는 뭔지 듣고 싶다.
12년 전 그런 비상식적 행동을 했던 데는 운동권 출신의 관성(慣性)이 작용했을지 모른다. 미국의 대북 압박 정책으로 북한이 이 지경이 됐고, 그 과정에서 북한의 인권 탄압이 발생했다는 내재적 관점. 한때 대단한 이론으로 추앙받았던 '식민지 반(半)봉건사회론'에 입각한 운동권 논리. 그래서 정치처럼 공적(公的) 영역에 진입한 전직 운동권들은 과거와 어떻게 결별했는지 설명이 필요하다. 이런 요구를 사상 검증이니 색깔론이니 비난하는 정치인일수록 인사청문회 때 장관 후보자 집의 숟가락 개수까지 문제 삼는 걸 자주 봤다.
더불어민주당 인재영입위에 대법원이 2009년 이적 단체로 규정한 단체의 간부 출신 인사가 들어왔다. 그에게 지금 생각이 바뀌었는지를 물었다. "난 문학을 사랑했고, 김영삼 정부는 아직 권위주의 잔재가 남아 있었고, 당시에도 활동 방식에 대한 이견이 있었고…". 그런데 그가 이적 단체 간부로 활동했던 시기는 노무현 정부 때였다. 이런 식의 대답이니 30분 가까운 이야기를 듣고도 생각이 어떻게 바뀌었는지 알 수 없었다.
법이 통과되면 정부는 북한인권법에 근거해 김씨 왕조의 인권 유린을 기록으로 남길 것이다. 법무부에 기록을 보관하는 것은 형사소추까지 염두에 두고 있다는 의미다. 그것만 남길 게 아니다. 광화문 미국 대사관에 달려가 북한인권법을 반대했던 이들의 기록이 현재 남아 있다. 연방제 통일을 주장하다 슬그머니 제1야당에 둥지를 튼 일부 인사의 행적도 앞으로 기록될 것이다. 기록해야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정우상 정치부 차장
조갑제 닷컴에서 발취: 열린당: 구논회, 김교흥, 김태년, 김현미, 김형주, 백원우, 복기왕, 선병렬, 오영식, 우원식, 유승희, 이광철, 이기우, 이상민, 이인영, 이철우, 이화영, 임종석, 임종인, 정봉주, 정청래, 지병문, 최재성, 홍미영, 한병도 민주당: 김효석
□ 2016-03-04 북한인권법, 북한 주민에게 자유와 존엄성 인식하게 할 것
‘모든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자유롭고, 존엄성과 권리에 있어 평등하다.’
1948년 채택된 세계인권선언 제1조의 내용이다. 그 정신을 이어 받은 북한인권법이 드디어 제정됐다. 국회에서 논의한 지 11년 만이다. 북한인권법은 북한 주민도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가지며 행복을 추구할 권리가 있음”을 확인하고 있다.
이제 북한 주민 인권을 개선하기 위한 노력을 체계적으로 시작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국제사회는 오래전부터 북한 주민의 인권 침해에 대한 우려를 제기하고 이를 개선하기 위해 노력해 왔다. 유엔총회는 2005년 이후 매년 인권결의안을 채택했다. 미국 일본 등 개별 국가도 북한인권법을 제정했다. 특히 2014년 북한인권조사위원회(COI)는 “북한 내 광범위하고 조직적이며 체계적인 인권 침해가 지속되고 있다”고 결론을 내렸다.
비록 북한이 인권에 대한 간섭은 자주권의 침해라고 주장하고 있지만, 전 인류적 가치인 인권은 국제사회가 함께 보호 책임을 분담해야 한다는 것이 보편적 인식이다.
북한인권법 제정은 두 가지 측면에서 의미가 있다.
첫째, 국제사회와 함께 북한 주민들의 인권을 실질적으로 개선하기 위한 발판을 마련했다. 북한인권법은 북한의 인권 침해에 대한 자료 축적과 개선을 위한 다양한 활동을 제도적으로 뒷받침해 나갈 것이다. 이를 통해 북한 당국에 인권유린 행위를 중지하고 인권 개선 노력에 동참해야 한다는 경각심을 줄 수 있다. 아울러 북한 주민 스스로도 자신이 누려야 할 자유와 존엄성이 무엇인지를 인식하게 해 줄 초석이 될 것으로 기대한다.
둘째, 북한인권법 제정은 ‘행복한 통일’이라는 관점에서 의미가 크다. 우리가 꿈꾸는 통일은 남과 북 주민 모두가 자유와 평화, 그리고 행복을 누리는 것이다. 북한 인권 개선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질 수는 없다. 정부는 북한인권법을 기반으로 북한 주민의 인권 증진에 도움이 되는 정책을 하나하나 수립하고 일관되게 추진해 나갈 것이다.
북한 인권 실태의 파악뿐 아니라, 북한 인권 개선을 위한 중장기 로드맵을 마련하고 북한인권재단을 통해 북한 인권 개선을 위한 다양한 활동도 지원해 나갈 것이다.
정부는 국제사회와 함께 힘을 모아 북한이 하루빨리 핵과 미사일을 포기하고 인권 개선을 위해 노력하는 책임 있는 국제사회 일원이 되도록 최선을 다할 것이다.
북한도 국제사회의 인권 개선 노력에 반기만 들기보다는, 스스로 주민의 삶을 돌보는 데 힘써야 한다. 북한은 지금 왜 전 세계가 북한의 인권 상황에 대해 우려하는지, 진정으로 주민들의 삶에 도움이 되는 길이 무엇인지를 진지하게 생각하고 올바른 선택을 해야 한다.
홍용표 통일부 장관
□ 2016년 09월 02일 北정권 ‘인권범죄’ 낱낱이 기록, 끝까지 처벌한다
▲ 北학생들의 급식상태는? 북한 주재 외교관과 국제기구 대표들이 학생들에게 제공되는 급식의 영양성분 등에 대한 설명을 듣고 있다. 조선중앙통신은 외국 기관·기구 대표들이 평양에 위치한 중등학원을 방문했다고 1일 보도했다. 연합뉴스
- 北인권법 11년만에 4일 시행
유린행위 기록 처벌 근거로
인권증진 자문위원회 설치
홍일표 국제의원연맹의장
“실효성 확보가 최우선 과제 가해자·가해행위 공개해야”
발의 11년 만에 지난 3월 국회를 통과한 북한인권법이 오는 4일부터 시행에 들어간다. 이에 따라 통일부에 북한인권 증진에 관한 정책 자문 역할을 할 북한인권증진자문위원회가 설치되고 북한인권 증진을 위한 다양한 사업을 진행할 북한인권재단도 설립된다. 통일부에 설치될 북한인권기록센터가 북한 주민의 인권 정보를 수집해 기록하게 되며, 수집된 기록은 3개월마다 법무부에 이관돼 보관된다. 다만 북한인권법의 실효성을 높이기 위해 북한 인권유린 행위의 공개 등 후속 보완작업이 필요하다는 목소리도 나오고 있다.
북한자유이주민인권을 위한 국제의원연맹 상임공동의장을 맡고 있는 홍일표 새누리당 의원은 2일 성명서를 내고 “북한인권법의 시행을 환영한다”면서도 “실효성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고 있는 만큼 실효성 확보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고 밝혔다.
홍 의원은 각각 통일부, 법무부에 설치될 북한인권기록센터와 북한인권기록보존소에 관해 “북한에 대한 경고적 기능이 있지만 이것만 갖고는 부족하다”면서 “어떤 형식으로든 인권유린 가해자와 가해행위를 공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북한인권 유린 기록의 일부를 공개해 인권 범죄를 억제하고 인권 개선의 효과를 높이자는 것이다. 그는 “인권기록센터는 기록하는 데 의의가 있는 것이 아니라 이 기록을 토대로 중대한 인권범죄는 법정에서 처벌하겠다는 강력한 메시지를 북한에 보내는 데 있다”며 “기록의 공개가 북한에서 벌어지는 인권범죄를 상당 부분 억제할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홍 의원은 이어 “정부는 북한인권법에 규정된 남북 인권대화 조항에 따라 북한과의 인권대화를 추진해야 한다”며 “특히 이 대화를 통해 반인도적 범죄 등 중대한 인권범죄 가해자들에게 강력한 경고를 전달해야 한다”고 밝혔다. 홍 의원은 “제3국에 체류 중인 북한이탈주민이 수만 명에 이르는데 이들에게도 북한인권법이 적용돼야 한다”고 말했다.
박세희 기자 saysay@munhwa.com
□ 2016년 09월 09일 9월4일을 ‘北인권의 날’로 제정해야
김태훈 한반도 인권과 통일을 위한 변호사모임 상임대표
지난 1월의 4차 핵실험으로 유엔을 비롯한 국제사회로부터 제재를 받고 있는 북한이 또다시 핵실험을 강행했다. 북한은 9일 정권수립일을 맞아 5차 핵실험을 함으로써 고립을 자초하고 있다. 그러잖아도 국제사회가 세계 최악의 인권 상황에 대해 개선을 촉구하며 김정은을 제재 대상으로 지적하는 등 압박을 가하고 있다. 그럼에도 김정은 정권은 억압 정치에 따른 주민들의 고통은 아랑곳하지 않은 채 핵·미사일 개발에만 몰두하고 있다.
북한인권법은 국회가 지난 3월 2일 통과시킴에 따라 지난 4일부터 발효됐다. 11년 만에 통과돼 만시지탄이며 내용도 미흡하지만 여야 합의로 1표의 반대도 없이 포괄적이고 체계적인 북한 인권 개선의 제도적 틀이 마련된 것은 의미가 작지 않다. 지난해 6월 유엔 북한 인권 현장 사무소가 서울에 설치돼 활동 중이고, 지난 8월 1일에는 새 유엔북한인권 특별보고관도 임명됐다. 미국 정부는 지난 7월 의회에 제출한 북한 인권 침해 실태 보고서에서 김정은을 ‘인권 유린 가해자’로 규정하고 제재 대상으로 지정했다. 미국이 특정 국가 지도자를 인권 침해를 이유로 제재 대상으로 지목한 것은 초유의 일이다.
그럼에도 우리 사회는 여전히 북한 인권에 대한 관심이 저조하고 우려스러울 정도로 별 무감각이다. 지난 6월 일부 변호사 단체가 북한 주장에 동조해 북한 식당에서 탈출해온 종업원들의 인권 보장을 내세워 그들을 법원에 소환토록 한 것은 열악한 북한 인권 상황에 대한 우리 사회의 심각한 인식 부족과 오해의 단면을 보여준다.
그러므로 북한인권법이 시행되는 역사적인 날인 9월 4일을 ‘북한 인권의 날’로 제정해 북한 인권 문제에 대한 우리 국민의 관심과 이해를 획기적으로 증폭시키는 계기로 활용할 필요가 있다. 우연하게도 이날은 1989년 독일 통일의 물꼬를 튼 독일 라이프치히 니콜라이 교회의 월요기도모임이 시작된 날이기도 하다. 이날을 북한 인권의 날로 제정하면 북한의 인권 개선이 사회 통합과 통일 기반 구축에도 기여한다는 점을 부각할 수 있을 것이다. 이미 우리나라와는 무관한 캐나다 정부도 지난 2013년부터 9월에 북한 인권의 날을 제정해 기념행사를 해 오고 있다.
다만, 북한 인권의 날을 구체적으로 언제로 할지 그 기념일 날짜에 대해서는 여러 견해가 있을 수 있다. 우선, 북한인권법이 국회에서 통과된 3월 2일이나 이를 공포 제정한 3월 3일로 하자는 의견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이날들은 3·1절과 너무 근접해 의미가 퇴색할 우려가 있다. 또, 유엔북한인권 현장사무소가 개설된 6월 23일을 전후해 북한주간을 실시하면 된다는 견해도 있다. 그러나 6월에 북한주간을 실시하더라도 유엔과 별개로 우리나라가 주도해 북한 인권 개선을 시작하는 9월 4일의 중요성은 변함이 없을 것이다. 한편, 북한 인권의 보호 대상은 북한 주민들이므로 그들에게 의미가 있는 날로 정하자는 견해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북한 주민들 입장에서 의미가 있는 날, 예컨대 북한 정권에 의해 북한 주민에 대한 대량 학살이 자행되거나 민중봉기가 일어난 날 등이 어느 날인지는 뚜렷하지가 않다.
따라서 9월 4일을 북한 인권의 날로 제정하되, 정부가 주관하는 각종 기념일(紀念日) 및 기념주간 등은 원래 대통령령인 ‘각종 기념일 등에 관한 규정’에 의해 제정하므로 이 규정에 따라 9월 4일을 ‘북한 인권의 날’로 제정하든지, 아니면 4일부터 발효된 북한인권법 시행령으로 제정하면 뜻깊은 일이 될 것이다. 사드 배치를 반대하는 지역 이기주의 현실을 개탄하기에 앞서 북한 인권의 날 제정으로 그 근본 원인을 없애는 일이 절실하다.
문화일보
□ 2016.10.17 홍수에 떠내려간 北 주민 人權
'북한 당국이 자국 주민의 보호에 명백히 실패한 만큼, 국제사회는 반인도적 범죄에서 북한 주민들을 보호할 책임이 있다.' 2014년 2월 발표된 유엔 북한인권조사위원회 보고서의 결론이다. 이 보고서는 '현대사회의 어떤 국가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조직적이고 광범위하며 중대한 인권침해'가 북한 당국자들에 의해 이루어졌으며, 이에 대한 국제 공동체의 효과적 대응이 절실하다고 강조했다.
이후 북한 인권 증진을 위한 국제사회의 노력이 확대됐으나, 북한의 인권 상황은 여전히 암울하다. 북한은 국제사회와 우리 정부의 인권 개선 요구에 귀를 기울이기는커녕, 이를 '체제 전복', '내정간섭'이라고 비난한다. 그러면서 두 차례 핵실험과 22차례 탄도미사일 발사에 매달려 주민의 삶을 더욱 피폐하게 했다.
북한 노동신문의 수해 관련 최근 보도에서도 북한 당국의 인권에 대한 일그러진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김일성·김정일의 초상화를 지키느라 물에 떠내려가는 자신의 아내와 아이를 구하지 못했거나, 목숨을 잃은 사람들을 영웅인 듯 선전한 것이다. 북한 주민의 인권은 체제를 위해서는 언제든 희생될 수 있다는 북한 당국의 그릇된 인식을 여과 없이 보여주는 사례다.
/함경북도 지역 홍수 피해 모습. /연합뉴스
인간의 권리 중 핵심인 생명권마저도 존중받지 못하는 북한의 인권 상황을 어떻게 개선할 것인가? 북한 주민의 인간다운 삶, 행복한 삶을 보호하는 길은 무엇일까? 11년간 논의를 거쳐 여야 합의로 제정된 북한 인권법과 이에 따른 인권 정책은 바로 이러한 질문에 대답할 수 있는 방향으로 추진될 것이다. 우선, 북한 당국과 북한 주민에 대한 포괄적 접근을 통해 인권 개선 효과를 높일 것이다. 정부는 체계적인 북한 인권 조사와 기록을 통해 북한 당국이 스스로 인권 개선에 경각심을 갖도록 압박할 것이다. 동시에 북한 주민에게 인권에 대한 인식을 높이고 인권 개선이라는 희망을 주는 노력도 함께 해 나갈 것이다.
아울러 인권이라는 보편적 가치에 기초해 통일 정책의 공감대를 확산해 나갈 것이다. 인권은 국제사회와 인류의 발전에 기여할 뿐 아니라, 민족 구성원 모두의 자유와 행복을 보장하는 가치이다. 따라서 우리 국민과 국제사회의 공감과 지지를 얻을 수 있는 인권 개념을 활용해 통일 정책의 보편성과 지속 가능성을 업그레이드하고 평화 통일로 나아가는 디딤돌을 놓아야 한다.
민족의 미래뿐 아니라 세계 평화를 위해 국제사회와 함께 북한 비핵화에 단호히 대응하고 있듯, 북한 인권문제에도 한목소리를 내야 한다. 이를 위해 민간의 활동을 체계적으로 지원하고 유엔 등 국제사회의 북한 인권 개선 노력을 실효적으로 뒷받침하면서, 협력의 장을 넓혀 나가야 한다.
무엇보다 북한 주민의 인간다운 삶을 보장해 주는 것이 최우선 과제다. 북한 주민의 자유권과 생존권 등에 대한 추가적인 침해를 예방하고, 기본적 권리를 보호함으로써, 북한 주민의 인권을 증진하는 선순환 구조를 마련해 나가야 한다.
우리가 꿈꾸는 통일은 핵과 전쟁의 공포가 없고 민족 구성원 모두가 자유와 정의를 누리며, 차별과 불이익 없는 통일 한국을 만드는 것이다. 이를 위해 2500만 북한 주민의 인권 상황을 더 이상 외면하지 말고 관심과 관여를 늘려, 행복한 통일의 길을 열어야 한다.
홍용표 통일부 장관
□ 2016년 11월 17일 유엔 北인권 결의 바라만 볼 것인가
성재호 성균관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자신에 대한 이견이나 불만 표출만으로 혈족이나 고위간부가 공개처형당하는 곳, 조건없는 시위가 민주주의 국가의 요건이라는 법원 판결로 수십만의 군중이 자신의 의사를 자유롭게 표현하는 곳. 이 상반된 두 모습이 또렷하게 대비되고 있는 곳이 한반도이다. 똑같은 혈연과 인연으로 ‘민족’이 가장 많이 언급되는 이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극단적 인권 침해는 개선해야 할 우선적 과제다.
우리가 안타까워하고 있는 사이 국제사회는 북한 인권 상황을 개선하기 위한 노력을 펼쳐왔다. 유엔은 2005년 북한 인권 문제를 관심사로 상정한 이후, 해마다 북한인권결의를 채택하고 있다. 2005년 유엔총회가 북한인권결의를 처음으로 채택할 당시에는 인도적 기구의 접근 허용을 촉구하는 차원에 그쳤다.
그러나 국제사회의 지적과 개선 촉구에도 북한 당국이 귀를 닫고 외면하며 오로지 정권 유지와 집권 세력의 안위에 몰두하는 사이, 북한 주민의 인권 상황은 악화를 거듭하고 있다. 그에 따라 해마다 채택되는 유엔 북한인권결의는 그 수위가 높아져 왔다. 정치범수용소 내의 인권 실태를 구체적으로 명시하고, 국제사회의 보호 책임을 명확히 하고, 북한인권사무소 설치를 결정하는 등 구체성을 띤 결의로 그 내용이 변화하고 있는 것이다.
지난 15일 유엔총회 제3위원회가 총회 제출을 위해 채택한 북한인권결의안도 새로운 접근과 내용을 담고 있다. 북한 인권에 대한 지속적인 결의안 채택은 구조적이고 심각한 북한의 인권 탄압 실상을 국제사회 모두가 공인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고, 그 지적의 강도가 높아지고 있다는 것은 국제사회의 바람과는 달리 북한 인권 상황이 더욱 악화하고 있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토마스 칸타나 유엔 북한인권특별보고관도 이번 북한인권결의안은 북한의 심각한 인권 침해에 대해 국제사회의 깊은 우려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평가하고 있다. 이전과는 달리 투표조차 없이 북한인권결의안이 컨센서스로 채택된 것도 북한의 인권 상황에 대한 깊은 우려와 무관하지 않다.
이번 북한인권결의안은 더 많이 달라졌다. 정치범 강제수용소 감금과 고문, 강간, 공개처형 등을 인권유린 사례로 적시하는 데 더해, 해외 노동자 착취에 대한 깊은 우려를 표시하고 있다. 열악한 인권 상황임에도 자원을 핵무기 및 탄도미사일 프로그램으로 전용하는 것을 심각하게 우려한다고 했다. 더욱이 인권 문제와 관련해 리더십이 통제하는 기관이 인권 유린을 자행하고 있다는 표현을 더함으로써, 인권 침해의 책임이 북한 지도자에게 있음을 분명히 하고 있다. 2014년 이후 북한 인권 상황을 국제형사재판소(ICC)에 회부해 책임자 처벌을 요청하고 있는 점에 비춰 그 책임 주체를 명시하고 있다는 점은 한층 구체화한 것이다.
이러한 상황은 우리로 하여금 안타까워하는 데 그치거나 국제사회의 노력에 무임승차만 하고 있어선 안 됨을 보여준다. 그 첫 출발은 2005년 발의된 이후 10여 년 만에 간신히 통과된 북한인권법이 정치권의 협조 미비로 인권재단조차 구성하지 못하고 있는 것을 해결하는 데서 시작해야 한다. 북한 주민의 참상을 개선하는 것보다 북한 정권과의 관계 유지나 개선이 먼저라고 보는 시각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도 납득이 쉽지 않다. 국내에서는 늘 인권을 앞세우면서, 북한 주민의 인권 문제에는 행동하지 않고 입조차 닫고 있는 이유를 정치적 해석에 떠넘기는 것이 정당하다고 볼 수 없기 때문이다.
문화일보
□ 2017년 12월 08일 “北 인권 눈 감아주면 협상테이블 나온단 생각은 오산”
▲ 송상현 유니세프 한국위원회 회장이 지난달 16일 한국위원회 사무실 앞에서 “북한 인권을 개선하려면 지속적으로 여론몰이를 해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송 회장 뒤쪽으로 보이는 조각상에 대해 송 회장은 “5대양 6대주 얼굴색이 다른 아이들이 모두 어깨동무하고 있는 모습”이라며 “하나의 세계(One World)를 강조한 것”이라고 말했다. 김낙중 기자 sanjoong@
송상현 前 국제형사재판소장
ICC에 김정은 회부 어렵지만
北인권규탄결의에 이름 명시땐
北지도층 사이 회의감 유발 가능
서구사회, 시리아 해결만 집중
수년 걸려도 北 여론몰이 해야
국제기구도 책임 추궁 나설 것
통일 뒤 北 수괴 강력 처벌해야
‘法지켜야 산다’개념 심어준 뒤
경제원조하면 부흥 효과 더 커
송상현(76) 유니세프 한국위원회 회장이자 전 국제형사재판소(ICC) 소장을 만나러 간다고 하자 한 법조인이 기자에게 “그분은 천재”라고 말했다. 또 다른 법조인은 “내 스승의 스승인 셈”이라며 “어지간한 법조인 중 송 회장의 영향을 받지 않은 이가 드물다”고 평했다. 김현 대한변호사협회장과 김난도 서울대 교수는 예전 문화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스승이자 은인으로 송 회장을 꼽았다. 직접 만난 송 회장은 어떤 질문에도 머뭇거림이 없었다. 북한 인권, 사법개혁 등 예민할 수 있는 이슈에 대해서도 거침없이 할 말은 하고 해법을 제시하는 ‘내공’은 한국인 최초로 국제기구의 수장(국제형사재판소장)을 지낸 화려한 경력보다 더 빛나 보였다. 해박한 지식을 바탕으로 한 날카로운 통찰력을 보며 왜 그를 ‘천재’라 칭하는지 알게 됐다. 죽은 뒤 ‘He made difference’(그는 변화를 이끌어냈다)라는 평을 듣고 싶다는 송 회장의 진심에서 제자들이 그를 스승 이상으로 예우하는 이유를 발견할 수 있었다. 송 회장의 인터뷰는 지난달 16일 서울 마포구 창전동 유니세프 한국위원회 사무실에서 진행됐다. 이후 이메일을 통해 추가로 이야기를 들었다.
―한 인터뷰에서 북한 인권 문제가 독일의 나치, 소련의 스탈린 때보다 더 심각할 수 있다고 말했다.
“나치가 유대인을 학살하려고 집단수용소를 만든 게 불과 몇 년이고, 패전한 뒤 자동으로 없어졌다. 스탈린의 굴라크(강제수용소) 그것도 30년 갔나? 결국 없어졌지. 그런데 북한 동포들을 얽매는 잔악무도한 집단학대는 사실상 70년 넘게 존재하고 있다.”
―ICC 법정에 김정은 북한 노동당 위원장을 세우기 어렵지 않나.
“제일 좋은 건 김정은을 ICC 법정에 세워 죄를 밝히고 응분의 처벌을 받게 하는 것이다. 그런데 과거에는 ICC가 없었다. ICC가 생기고 난 다음에는 ICC 설립에 관한 로마조약을 보면 ICC 재판권은 조약을 비준한 회원국에만 미쳐서 회원국이 아닌 북한은 대상이 안 된다. 또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에서 결의해 ICC에 회부하면 가능하다는 규정이 있지만 북한을 편 드는 중국과 러시아, 두 상임이사국이 거부권을 행사하면 안 되잖아. 그래서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한 것이다.”
송 회장은 최근 자신의 북한 인권에 대한 발언 중 ICC에 김정은을 세워야 한다는 부분만 부각된 것을 안타까워했다.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만큼 그 대안을 모색해야 한다는 의미였다. 이어진 얘기에서는 북한 인권에 대한 그의 절박함과 안타까움이 계속 묻어났다.
―다른 방법은 없나.
“그래서 지금 로마조약하에서 회원국이 아닌 극악무도한 범죄를 저지르고 있는 어느 나라 지도자를 ICC에 회부할 수 없을 때 어떻게 할지 대안적 방법을 많이 논의하고 검토한다. 유감스럽게도 서구 학자들이 주로 논의하는 대상은 북한이 아니라 시리아 사태다. 바샤르 알아사드 대통령이 자기 반대파 동족을 마구 죽이고 온갖 나쁜 짓을 다 하고 있는데 러시아 때문에 유엔 결의안도 처리가 안 되니 소위 ‘시리아 어카운터빌리티 패널(Syria Accountability Panel)’, 즉 시리아의 책임 추궁을 위한 전문가 집단이랄까, 이런 이름으로 임시기구를 만들 수 없을까 논의하고 있다.”
―북한에 대해서는 그런 움직임이 없나.
“북한 인권에 대해서는 이런 논의를 하는 곳이 아무 데도 없다. 우선 시리아가 서양에 지리적으로 더 근접한 것도 있고 시리아 출신 난민들이 수백만 명씩 유럽으로 가니 이해관계가 코앞에 닥친 것도 있다. 또 하나는 하늘에서 감이 떨어지지 않는다. 글로벌 이슈를 키우려면 그 나라가 외교 역량을 한껏 발휘해 노력을 기울여야 하는데 한국은 그런 게 없다. 시리아 사태와 관련해서는 나한테도 견해를 물어오기도 한다. 그럼 나는 항상 시리아와 상황이 비슷한 게 북한이니 ‘노스코리아 어카운터빌리티 패널(North Korea Accountability Panel)’도 해보자고 이야기한다. 시리아와 관련해서는 현 집권층을 법적으로 처단하자는 논의에 머물지 않고 언젠가 시리아가 새로운 희망을 갖고 새 나라를 건설하는 시점이 올 때를 대비해 준비하자는 논의까지 있다.
대표적인 게 ‘시리아 사법 쇄신 프로젝트(Syria Justice Innovation Project)’다. 알아사드 이후 새 나라가 됐을 때 법원, 검찰, 경찰 기능을 어떻게 빨리 회복하고 운영할 것인지 계획을 세우고 훈련도 시키자는 것이다. 시리아는 여기까지 논의가 돼 있다. 반면 북한은 나만 목이 아프게 떠들고 있다. 북한도 상황은 똑같다. 제대로 교육받은 판사, 바른말 하는 판·검사는 이미 김정은 할아버지, 아버지가 다 죽여서 김정은은 손댈 것도 없다. 나중에 김정은이 쫓겨나 북한이 독재자 손에서 풀려나면 수괴는 ICC가 처벌한다 해도 조무래기들은 자체 역량으로 처벌해야 하는데 지금 상태로는 불가능하다.”
여기까지 일사천리로 이야기를 풀어낸 송 회장은 한번 숨을 크게 들이마신 뒤 다시 북한 인권을 개선하기 위한 방안을 밝혔다. 자연스레 우리 정부에 대한 아쉬움도 드러냈다.
“북한 인권을 어쨌든 개선하려면 그런 식으로 계속 압박하고, 국제적으로 몇 년이 걸리더라도 지속적으로 여론몰이를 해야 한다. 그래야 각종 국제기구에서 심각하게 다루고 폐쇄적인 북한 사회를 뚫고 들어갈 수 있다. 이슈를 글로벌하게 해 놓으면 가만히 둬도 시리아처럼 ‘노스 코리아’에 대한 논의도 열린다.”
―한국도 당사자인데.
“당연하다. 우리가 다 책임을 뒤집어쓰게 될 것 아닌가. 북한이 어느 날 망하면 우리가 주도적으로 도와주고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그런 작업을 하자고 통일부도 만들고 법무부에 통일 담당과도 만들고 대법원에도 비슷한 게 있는데, 북한 땅문서를 갖고 피란 와 남한에 정착한 사람 땅은 나중에 어떻게 찾아주느냐, 주로 이런 논의만 한다. 물론 그것도 중요한데 그보다 먼저 북한의 사법부, 검찰 조직을 어떻게 구성하고 운영할 것인지는 별생각이 없는 것 같다. 남한에서 가서 다 할 수 없는 부분이다.”
―정부가 좀 나서 주면 좋을 텐데.
“문재인 정부는 역대 어느 정부보다 인류의 보편적 가치인 인권 문제에 대해선 굉장히 적극적이고 전향적인 생각을 갖고 있다고 보기 때문에 시간이 가면 무슨 조치를 하지 않을까 기대해 본다. 지금이야 하도 이런 일 저런 일이 많이 터져 정신이 하나도 없을 것으로 보이지만 정부가 북한 인권에 대해서도 제대로 관심을 표명하고 조치를 취하기를 희망한다.”
―정부가 유독 북한 인권 문제에는 목소리가 작아진다는 비판도 있다.
“그런 걸 나도 느꼈다. 북한 인권 문제가 나오면 입을 꾹 닫는다고 비판하는 사람도 많이 봤고, 실제로 그런 경우도 목격했다. 아마 남북 간 소통을 위해 북한을 협상테이블로 끌어내는 데 자꾸 인권 문제를 제기하는 게 장애가 되지 않느냐는 판단에 따른 것으로 생각된다. 그렇지만 우리가 북한 인권 침해에 눈을 감고 있어도 국제사회의 다른 사람들이 다 보고 있다. 우리 혼자 입 다물고 눈 가린다고 해서 정부가 원하는 대로 처리되는 게 아니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잘못 판단하는 것이다. 우리도 북한 인권에 대해 있는 걸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대범하게 대처하고 국제사회와 같이 소통하면서 지혜를 모았으면 좋겠다.”
그러고 보니 송 회장은 북한 인권 관련 활동을 해온 국제인사들로 구성된 ‘북한 인권 현인 그룹’의 멤버다.
―북한 인권 현인 그룹은 지금도 활동하나.
“위원이 8명인데, 나만 한국 사람이다. 호주 대법관 출신 마이클 커비 전 유엔 북한인권조사위원회 위원장, 영국 상원의원인 알톤 경 등 8명이 멤버다. 북한의 인권 위반 사태를 묵인하고 보고만 있어서는 안 된다고 해서 만들어졌다. 이정훈 전 북한인권국제협력대사가 사실상 사무총장 역할을 했는데, 정권이 바뀌고 난 다음에는 현인 그룹의 운명 자체가 어찌 될지 모르겠다.”
―유엔의 북한 인권 규탄 결의안에 김정은의 이름을 꼭 넣어야 한다고 주장해 왔는데.
“내 판단은 그렇다. 어차피 2500만 북한 동포는 엄격한 검열 때문에 아무것도 모른다. 단 김정은을 보좌하는 핵심들은 외국 소식을 다 접한다. 최고 존엄을 하느님같이 생각했는데 국제사회에서 나쁜 사람이라고 하면, 그런 이야기를 자꾸 들으면 회의가 들 수밖에 없다.”
―통일 이후 사법(justice)의 재건을 가장 강조하는 이유가 따로 있나.
“내가 2010년부터 꾸준히 국제사회에서 주장하고 있는 이론이 있다. 정의가 경제와 별개의 것이 아니다. 연관돼 있다, 단 정의가 먼저 칼을 휘두르고 난 뒤 경제 원조가 들어가야 효과가 더 크고 경제 부흥에 훨씬 도움이 된다는 이론이다. 얼핏 생각하면 경제 원조가 먼저인 듯하지만 반대가 돼야 한다. 우선 극악무도한 범죄를 저지른 지도층, 수괴 몇 놈을 강하게 처벌해 ‘죄짓고 못 사네. 몇십 년이 지나도 결국 감옥에 가는구나’라는 생각을 심어줘야 한다. 그게 바로 ‘법의 지배(Rule of Law)’다. ‘이 세상에 정의가 있긴 있네’라는 의식을 먼저 심어준 뒤에 경제 원조로 돈이 들어가야 정부가 떼먹어도 덜 떼먹고 정부에 붙어 기생하던 이들도 덜 까불고, 배분도 좀 더 잘된다. 이런 것 없이 바로 돈이 들어가면 그간 썩은 정부 안에서 부정 축재한 이들은 좋은 곳에 드러누워 살고, 일반 국민은 굶어 죽고, 다리 하나 지으라고 3000만 달러 보내면 1주일 만에 돈이 싹 없어진다.”
한국의 내로라하는 법조인의 법적 사고(Legal mind)에 오랜 기간 국제형사재판을 주재하면서 익힌 글로벌 감각이 더해져 나온 북한 인권에 대한 통찰이다. 송 회장의 거침없는 쓴소리는 북한과 김정은만을 향하지는 않았다. 제자들이 수두룩한 법조계에 대한 질타도 이어졌다. ‘법조계’ 운을 떼자마자 마치 준비한 듯 답이 이어졌다.
“참 걱정스러운 게 많다. 사법권 독립에 대해 좀 더 깊이 있게 천착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우리는 최근 역사에 비춰 권력이 센 행정부의 영향으로부터 독립하는 게 사법부의 독립이라고만 생각하는데 사법부의 독립은 행정부로부터의 독립뿐 아니라 무책임한 언론·여론·비정부기구(NGO)로부터의 독립도 있다. 하나하나가 몸가짐이나 마음가짐이 바르면 두려울 게 없고, 문제가 없을 것이다. 난 외국에만 나가면 한국 법조 인력의 우수성을 많이 선전하고 다니는데 최근 보면 가슴 쓰린 일이 한두 번이 아니다. ICC 소장으로 있을 때 어쩌다 시간이 나서 주말에 골프 칠 때도 꼭 혼자 쳤다. 둘만 나가도 뒷말이 나온다. 누가 식사 초대하는 것도 응한 적이 없다. 사적 초대에는 한 번도 응하지 않았다. 말이 한번 퍼지면 해명해도 막을 수 없다.”
―지금은 아예 법원과 검찰이 개혁 대상으로 지목되고 있다.
“많이 줄었지만 지금도 변호사가 돈을 많이 번다. 판·검사 밥 사주고 용돈 쥐여주는 일이 사라지지는 않은 것 같다. 그런 것부터 없어져야 한다. 검사들 스스로 먼저 그런 거 발동 거는 모습을 많이 봤다. 세상은 점점 맑아지니까 그런 부분은 차차 나아질 것이다. 법관은 중립적으로 무엇이 국민을 위한 판단인지, 무엇이 국제사회의 흐름에 동참하는 순리인지, 그런 걸 생각해 합리적으로 판단했으면 좋겠다. 지금 디지털 세상이 되니까 선진 각국에서 거의 이념적 대립이란 건 없어졌다. 있을 수도 없고, 필요도 없다. 하지도 않는다. 근데 우리나라만 이념으로 많이 분열돼 있는 게 늦둥이가 한술 더 뜨는 격이다.”
물어보려 했던 많은 질문에 대한 답을 뭉뚱그려 미리 해버린 듯해 하나만 더 물었다.
―검찰이 하고 있는 이른바 적폐수사에 대해서는 어떻게 보나.
“적폐가 뭔지 잘 모르겠다. 과거에 잘못한 걸 적폐라고 하겠지. 기준과 정도를 미리 국민이 납득할 만큼 알리고 그 범위 내에서 짧고 굵게 해서 딱 수사하고 처벌하고 잊어버리는 그런 게 필요한데, 이걸 혹시라도 정치적 목적으로 자꾸 끌어간다거나 하면 결국 부메랑이 된다. 지금 적폐수사하는 사람들이 나중에 그 대상이 되고, 그러는 동안에 나라가 골병든다. 그게 걱정이다.”
―대학 재학 중에 요즘으로 치면 행정고시, 사법시험을 모두 합격했다. 갈 수 있는 길이 행정부 공무원, 법조인도 있는데 계속 학교에 남은 이유가 있나.
“학교에 40년 있었고 교수로는 35년 있었다. 우리 때는 고시 합격자가 극히 적어서 어느 한쪽만 합격해도 그런대로 순풍에 돛 단 듯 갈 수 있었다. 일제 식민지 시대부터 내려온 패턴이다. 시험 패스하면 스무 살 대학생이 군수로, 판·검사로 가는 것. 그게 잘못됐다는 게 아니라 난 미국 유학을 하고 와서 국제사회를 보다 보니 판·검사하는 것보다 교수를 하는 게 더 자유롭고 창의적인 활동이라고 생각했다. 월급이 좀 적은 거 하나 말고는 내가 노력해서 머리를 잘 쓰면 훨씬 성과를 올리겠다는 생각이 있어서 그랬다. 그리고 법을 공부할수록 법을 통해 세상을 바꿀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공부도 아주 잘하고 강의도 아주 잘하셨다고 들었다.
“내가 한국에서 교수가 돼서 학계를 가 보니 다른 분야는 몰라도 법학에 있어서는 일제강점기보다 퇴보했으면 퇴보했지 앞선 게 하나도 없다고 판단했다. 교수들 논문 쓰는데 참고자료가 없어. 도서관도 책을 안 사고, 어학이 안 되니 외국 논문도 못 봐. 그러니 학술논문 각주에 ‘고시계’ 같은 수험잡지를 인용해. 논문도 아닌 글을 학술논문에 인용하고 뭐가 잘못된 건지도 모르는 풍토야. 또 교수를 채용하는데 연구 업적을 갖고 오랬더니 자기가 쓴 민법총칙 같은 교과서를 한 보따리 싸 가지고 와. 내가 다 갖다버리고 싸워서 바꿨어. 교과서는 학생들 필기 수고를 덜어주기 위해 나열식으로 정리한 건데 이것이 어떻게 학문 업적이냐고. 이름만 대면 알 만한 유명한 교수랑 거의 육탄전으로 소리 지르고 싸워서 서울대부터 완전히 바꿨어. 그리고 웃긴 게 법학 교수면 다 같은 법학 교수지, 민법은 같은 민법 선생끼리 자기 분야에 철옹성을 쌓고 다른 놈은 끼지도 못하게 하고, 절대 협력이나 소통도 없고, 자기 분야에서만 봉건영주가 돼 있어. 그걸 깨부수느라고 맞아 죽을 뻔했어. 근데 내가 떠나고 나니 지금은 다시 다 영지를 가진 봉건영주가 돼 있어. 법경제학도 내가 처음 한국에 도입한 분야야. 법이나 제도를 도입할 때 경제학적 효율을 따지는 것인데, 사실 신보수주의, 신자유주의 기조에 딱 맞는 분석틀이지. 그리고 내가 한국에 도입한 것 중 소송에 갈음하는 대안적 분쟁 해결 제도가 있어. 내가 새로 가져와 가르쳤어. 국제상사 중재로 돈 잘 버는 변호사들 다 내가 손때 묻혀가며 가르친 애들이야.”
―그분들이 가끔 밥은 사시나.
“어떤 놈이 밥을 사? 또 과목은 있는데 가르칠 사람이 없어서 해방 이후 한 번도 강의를 개설하지 못한 과목이 있어. 첫째가 지적재산권, 당시에는 무체재산권법이라고 불렀어. 당시 외국 제품을 그대로 베껴 다시 수출하니까 미국, 호주, 유럽에서 항의하고 난리야. 근데 우리나라에서는 지적재산권에 대한 개념 자체가 없었잖아. 그래서 내가 한국지적소유권학회를 만들어 강의도 했지. 내가 처음 교수 하면서 한국 법학계가 일본 법학계에 완전히 중독돼 있는 것을 보고 일본 법학 의존성을 내 세대가 끊어야겠다고, 이게 내 시대적 사명이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붙어 보니 잘 안되더라고. 서양에서 새로운 게 나오면 선배들은 일본식으로 용어만 좀 바꾼 걸 바로 베끼고 번역해 논문이라고 내고. 우리는 원전을 직접 보고 우리 법과 비교해서 이래저래 논문을 만들어내면 읽는 데 껄끄러울 수밖에 없었지. 우리 노력이 인정을 제대로 못 받길래, ‘아, 내 능력의 한계는 일본 법학에 대한 중독을 끊는 것까지구나. 그 위에 한국적 법학을 세우는 건 다음 세대의 임무구나’라고 생각했어.”
―후세대는 잘하고 있나.
“잘 몰라. 세상이 이런데 학문이 잘되겠나.” 북한 인권이나 사법개혁에 대해 얘기할 때는 진중한 자세와 목소리였는데, 교수 시절 에피소드를 이야기할 때는 입에 미소가 떠나지 않는 것을 보고 다양한 경력의 송 회장이 가장 아끼는 ‘경력’은 교수일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한국 사법부의 해외 진출이 점점 늘고 있다.
“더 늘어야지. 법원·검찰 다 국제적으로 참여하거나 진출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을 알고 있다. 단 언어적 소통과 국제적 감각이 부족해 한계에 부딪히는 모습은 종종 본다. 돈 다 대주면서 1년 이상 외국에서 공부하고 오라는 식인데 이게 참 효율이 없다. 과거에는 골프 치러 다녔고, 요즘엔 그건 줄었는데 이젠 자기 애 영어 가르친다고 자기는 공부 안 하고 애 뒷바라지만 한다. 또 ‘여기선 내가 밥할 테니 하고 싶은 공부하라’고 부인을 학교에 보낸다. 이런 걸 한국에서 보낸 사람들이 소상히 파악해 개선해야 하는데, 출장보고서는 기가 막히게 잘 쓴다. 그게 한국 교포들한테 물어서 대충 보고한 것인데. 법원·검찰이 외국 사례가 어떻고 하는 게 다 거기에 가 있는 애들이 그런 식으로 조사해서 올린 수준이다.”
분위기를 바꾸려고 편한 질문을 던졌다가 혼만 크게 났다.
―외국에 오래 계셨는데 가족은 싫어하지 않나.
“내가 무녀독남이라 안사람은 어머니 돌아가실 때까지 돌봐드리고 나 혼자 외국에서 밥 먹고 살았다. 소장이 뭐 별건가. 혼자 밥 해먹고 살면 되지.”
―일하시는 분이라도….
“ICC 소장을 했던 12년 동안 한국 기자들이 나한테 했던 질문이 똑같다. 첫째 질문이 소감이 어떠십니까. 두 번째가 월급이 얼마입니까, 관사가 좋겠군요 등등. 근데 국제기구 수장 중 관사가 있는 사람은 둘밖에 없다. 유엔 사무총장과 유네스코 사무총장. 국제기구 수장들 판공비는 1원도 없다. 사람이 오면 내 돈으로 커피 한 잔 사주고, 아니면 그냥 물을 마신다. 우리나라는 간이 배 밖으로 나왔는지 한국에 오기 싫다는 외국 학자나 국제기구 인사들을 1등석 항공권 줘서 강제로 불러다 대학교 명예박사 학위 주고 선물 보따리 들려 보내는데 뭐하는 짓인지 모르겠다. 그게 다 국민 세금이다. 우리나라도 선진국이다. 안 오려면 관 두라 그래. 다 한국은 오고 싶어 한다. 오면 적당히 대접하면 된다. 좋은 식당 데려가고, 비싼 선물 사준다고 좋아하지 않는다.”
실제 인터뷰가 진행되는 방의 테이블 위에도 500㎖ 생수 두 통만 있었다.
―인생의 목표가 있다면.
“With Law, We can change the world. 파이낸셜타임스 인터뷰에서 내가 했던 말이다. 나는 법으로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이다. 죽은 다음에 나에 대해 뭐라 뭐라 하는 건 듣기 싫고, 그냥 He made difference라는 말만 듣고 싶다.” 법으로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믿었던 한 학자이자 법조인은 이미 많은 것을 바꿔놓고 있었다.
인터뷰 = 민병기 기자 (사회부) mingming@munhwa.com
□ 2017년 12월 21일 사문화된 北인권법과 유엔 결의 13년
조영기 고려대 교수·북한학
유엔총회는 지난 19일 북한 정권의 주민에 대한 인권 침해를 규탄하고 즉각적인 개선을 촉구하는 북한인권결의안을 채택했다. 북한인권결의안이 2005년 처음 채택된 이후 13년째다. 결의안은 투표 없이 전원합의(consensus)로 진행됐다. 이는 북한 인권 실상에 대한 국제사회의 부정적 여론이 반영된 결과다.
이번 결의안은 북한 당국에 의한 조직적이고 총체적인 인권유린을 규탄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특히, 결의안은 2015년 이후 남북이산가족 상봉이 중단된 상황에 대해 우려를 표명하면서 생사 확인, 서신 교환, 고향 방문 등이 이뤄져야 한다고 강조하고, 북한 억류자에 대해서는 영사 접근, 생존 확인, 가족 연락 등의 합당한 조치를 촉구하고 있다. 또한, 유엔 안보리에 ‘가장 책임 있는 자’에 대한 제재와 국제형사재판소(ICC) 회부를 촉구하는 내용을 4년 연속 포함함으로써 인권유린에 대한 김정은의 책임을 명확히 했다.
13년째 유엔이 북한인권결의안을 채택한 것은 북한 인권이 개선되지 않고 최악의 인권 탄압 정권이라는 사실을 국제사회가 인정하고, 당국에 의해 인권유린이 일상적으로 자행되고 있기 때문이다. 인권결의안에는 인권유린의 사례로 고문, 강간, 공개처형, 연좌제, 강제노동, 해외 파견 노동자의 임금 착취 등을 적시했다. 이처럼 국제사회는 북한 인권유린에 대해 적극적으로 대처하고 있다.
북한인권정보센터는 최근 ‘2017년 북한인권백서’를 발간했다. 이 센터는 2003년부터 북한의 인권유린 실태에 대한 ‘NKDB 통합인권 DB’를 구축해 매년 업데이트하고 있는데, 15년간 6만8940건의 사건을 보관 중이다. 독일 통일 전 동독의 인권유린 실태에 대해 유사한 기능을 30년간 수행했던 서독의 잘츠기터 중앙기록보존소의 사건은 4만1390건이었다. 조사 방법과 대상에 차이가 있지만, 북한 인권유린 실태의 심각성을 짐작할 수 있다. 또한, 인권유린은 생명권과 개인의 존엄성, 자유권, 이주 및 주거권, 노동권 등에서 발생하고 있고, 연좌제가 모든 분야에 널리 적용되고 있다고 한다.
하지만 한국은 북한 인권 문제에 대해서는 의도적(?)으로 눈을 감는 모습만 보여 왔다. 2005년 8월 북한인권법이 처음 발의되자 친북 좌파들은 ‘북한인권법은 전쟁유발법’이라는 억지 선동과 주장을 내세워 제정에 반대해 왔다. 인권을 전가의 보도처럼 휘두르던 친북 좌파들의 민낯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그나마 ‘자동 폐기와 재발의’라는 우여곡절 11년 만에 북한인권법이 제정됐다는 것 자체에 만족할 수밖에 없다. 미국은 2004년 북한인권법을 제정했고, 일본은 2006년에 제정했다는 점에서 부끄럽지 않을 수 없다.
지난해 제정된 북한인권법은 북한 인권 개선을 위한 정부 노력, 국제 협력 강화 등 필요한 기본 조치가 담겨 있다. 그리고 북한 인권 개선을 위한 제도적 장치로서 북한인권재단을 설립한다는 조항도 포함돼 있다. 하지만 북한인권법이 제정된 지 1년이 지난 지금도 재단 설립은 감감무소식이다. 여야의 정쟁으로 이사진이 구성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국회에서 이사 추천 문제로 표류하면서 빈 사무실 임차료 등 국고 7억 원을 낭비했다.
법을 만들었다고 해서 북한 인권 문제가 해결되는 게 아니다. 실태조사는 객관적 자료조사와 함께 북한 당국의 반인륜적 행위를 예방하고 통일 이후 전환 정의의 자료로 활용하기 위한 것이다. 이젠 실제적인 행동을 할 때다. 북한인권재단의 정상화는 매우 시급한 과제다.
문화일보
□ 2018.08.28 "北인권단체마다 압수수색… 정부 압력에 후원 다 끊겼다"
김태훈 '한반도 통일과 인권을 위한 변호사 모임' 대표 인터뷰
"북한인권법 제정·시행 2주년을 맞는 올해가 북한 인권 운동사(史)에서 가장 어려운 시련의 시기입니다."
북한 인권 운동에 앞장서 온 '한반도 통일과 인권을 위한 변호사 모임'(한변)의 김태훈 대표는 지난 24일 본지와 가진 인터뷰에서 "북한 인권 단체들에 대한 기업의 후원금과 사회적 관심이 모두 끊기고, 단체들에 대한 사법당국의 계좌 추적과 압수수색 등 압력이 진행되고 있다"며 이같이 말했다. 통일부가 지난 6월 북한인권법의 '심장'인 북한인권재단 사무실을 폐쇄한 것은 광범위한 북한 인권 운동 탄압의 일각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한반도 통일과 인권을 위한 변호사 모임(한변)' 김태훈 대표가 지난 24일 서울 서초구 사무실에서 본지와 인터뷰하고 있다. 김 대표는“남북 정상회담 이후 북한 인권을 거론하는 것 자체가 금기시되고 있다”고 했다. /고운호 기자
김 대표는 문재인 정부 출범 이후, 특히 올해 두 차례 남북 정상회담이 열린 후 이 같은 현상이 두드러지고 있다고 했다. 그는 "(정상회담 이후) 북한 인권을 거론하는 것 자체가 금기시되고 있다"며 "지난해까지 유엔이 매년 반(反)인도 범죄자로 낙인찍은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지금은 친근한 이미지로 포장되고 심지어 김정은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북한 인권 얘기는 입 밖에도 꺼내지 않는다"고 말했다. 김정은이 정상국가의 지도자인 양 미화되면서 북한 인권 운동이 더욱 어려워지고 있다는 얘기다.
하지만 김 대표는 "지금이야말로 용기를 갖고 북한 인권 활동을 해야 할 때"라고 했다. 그는 "미국 워싱턴DC의 6·25참전 용사 기념비에는 '자유는 거저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라는 문구가 있다"며 "북한 인권 역시 쉽게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고 했다. 이어 "지금 어렵다고 북한 인권 활동을 포기하면 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의 아우슈비츠 만행을 외면했던 유럽 지식인들처럼 나중에 후회하게 될 것"이라고 했다.
그는 "경제 규모가 세계 11위로 선진국 반열에 오른 대한민국이 북한 인권을 홀시(忽視)하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라고도 했다. 이어 "올해는 세계인권선언 선포 70주년으로 북한 인권 활동에서 굉장히 중요한 시기"라며 "깨어 있는 지식인과 시민들이 유엔의 문을 노크하고 호소해서 북한 인권의 심각성을 알려야 한다"고 했다.
한변은 북한인권법 시행 2주년(9월 4일)을 맞아 북한인권상을 제정하고, 다음 달 4일 제1회 시상식을 열 예정이다. 위축된 북한 인권 운동에 활력을 불어넣고, 음지에서 고생하는 단체들을 격려하기 위해서다. 김 대표는 "문재인 정부가 북한 인권 활동을 적대시하고,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북한 인권보다 비핵화 해결에 더 큰 관심을 가지고 있다"며 "이런 분위기에서도 대한민국 시민사회가 살아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상을 만들기로 했다"고 말했다. 북한인권법을 제대로 시행해야 한다는 촉구의 의미도 있다고 했다. 김 대표는 "북한인권상은 세계 최초로 시민사회가 만드는 상"이라며 "북한 인권 개선을 위해 노력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신청 가능하다"고 했다.
김 대표는 북한 인권 개선을 위해선 북한 주민의 알 권리를 보장하는 게 중요하다고 했다. 그는 "한변에서 탈북민들이 심각하게 생각하는 인권침해 설문조사를 했는데 알 권리라는 응답이 가장 많았다"며 "북한 인권 개선의 핵심은 북한 주민의 알 권리를 충족시켜 주는 것"이라고 했다. 이는 대북 방송과 전단 등 다양한 방식으로 외부 정보를 북한에 유입시키는 활동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으로 풀이된다. 그는 "북한 인권 활동에서 시민사회의 역할이 중요하다"며 "한국은 물론 전 세계의 시민단체들과 연대할 것"이라고 했다.
김 대표는 정부도 북한 당국과 인권 대화를 시작해야 한다고 했다. "북한인권법은 여야 국회의원 한 명의 반대도 없이 통과된 법으로, 북한과의 인권 대화를 명시하고 있다"며 "문 대통령이 다음 달 평양에 가서 (김정은에게) 인권 대화를 공식 제안해야 할 것"이라고 했다.
서울중앙지법 부장판사 출신인 김 대표는 2006년 국가인권위원회 인권위원으로 활동했다. 2013년 뜻을 같이하는 변호사들과 한변을 설립한 뒤 북한 정권의 인권침해 실태를 조사해 왔다. 법률적 증거를 수집하고 한반도 통일의 법적 기반을 마련하기 위한 연구도 하고 있다. 10년간 표류하던 북한인권법 통과를 위해 국회 앞에서 70회가 넘는 집회를 열기도 했다. 작년에는 주한 중국 대사관 앞에서 중국 정부의 탈북자 강제 북송에 항의하는 기자회견을 열었다.
조선일보 김명성 기자
■ 짓밟히는 인권
□ 2016.03.08 인권은 커녕, 性과 노동력 착취의 대상"
오늘 세계 여성의날 탈북여성 "성폭행도 잦아"
▲세계 여성의 날(8일)을 앞두고 7일 오전 서울 중구 프레스센터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탈북여성인 이은미씨가 북한의 실상을 고발하며 눈물을 흘리고 있다. /고운호 객원기자
"북한에는 '여자'가 없습니다. 성(性)과 노동력 착취의 대상이 있을 뿐입니다."
탈북여성단체인 뉴코리아여성연합(대표 이소연)이 세계 여성의날을 하루 앞둔 7일 서울 중구 프레스센터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북한의 여성인권 유린 실태를 고발했다.
북한에서 열차 승무원, 군 간호사, 협동농장원 등으로 일한 경력을 가진 탈북여성들은 "북한 내 여성들은 열악한 근무환경과 암암리에 벌어지는 성추행, 성폭행에도 '인권 유린'이라는 인식조차 하지 못한 채 살아가고 있다"고 했다. 북한에서 열차 승무원으로 근무했다는 김은미씨는 "열차에 군인 칸이 있는데, 저녁시간마다 전기가 차단되는 것을 노린 군인들이 여성 승무원이나 부정승차 등으로 걸린 여자들을 대상으로 성폭행하는 일이 자주 일어났다"며 "이런 일이 워낙 만연하다보니 여성 열차 승무원은 결혼 기피 대상이라는 말까지 있다"고 했다.
북한군 간호사로 6년간 근무하다 2014년 탈북했다는 최수향씨는 북한군 내 여성 군인들의 복무 실태와 상급자에 의한 성폭력에 대해 증언했다. 최씨는 "김정은 정권 들어 북한군 전체 병력 120만명 가운데 여군의 비율이 30~40%까지 늘었지만, 1년에 군복을 한 벌밖에 주지 않기 때문에 빨래라도 한 번 하면 제대로 된 옷도 입지 못하고 추위에 떨곤 했다"고 말했다. 그는 "한 여성 분대장은 늦은 밤에 사업보고를 명분으로 상급자에게 불려가 수시로 성폭행을 당했다"며 "나중에 원치 않는 임신까지 하고 이 사실이 알려져 불명예 제대를 당한 뒤 충격을 받아 자살했다"고 했다.
철도 방송원 생활을 하다 1999년 탈북했다는 정현정씨는 "북한이 중국 식당 등지로 여성 노동자들을 대거 파견하는 바람에 '평양시(市)에는 아가씨들이 씨가 말랐다'는 얘기까지 나돌았다"며 "관리자들은 이렇게 파견된 여성들을 한 방에 3명씩 재우며 서로를 감시하도록 시켰기 때문에 외출은 상상도 못 했다"고 전했다.
조선일보 김명성 기자
□ 2016.06.15 北, 건장한 사람도 6개월만에 후줄근하게 만드는 학교는?
/북한 주민의 생활 모습 / 사진출처=뉴시스
요즘 들어 우리 주변에는 중년을 넘긴 사람들이 우스갯소리로 자신의 나이를 소개하는 경우를 종종 목격한다. 예하면 50대 중반인 여성이 상대를 향해 "전 올해 5학년 5반입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고 말하면 서로 거부감 없이 자연스럽게 가까워 질 수 있는 분위기가 마련된다.
반면 북한에는 나이를 학년으로 표시하는 무서운 곳이 있다. 탈북민들의 증언에 따르면 이곳에서 지내는 사람들은 6학년이 가까워져 올수록 공포와 두려움에 싸인다고 한다. 그렇다면 주민들을 지옥과 같은 무서운 공포에 떠미는 곳은 어디일까?
북한은 도마다 국가안전보위부 산하의 도 보위부가 존재한다. 보위부에는 집결소라는 임시 예심감방이 있는데. 이곳에 구류된 대부분 사람들은 비법월경자들과 탈북과정에 중국 경찰에 붙잡혀 북송된 사람들이다.
현재 탈북민들이 가장 많이 도강하는 곳은 양강도와 함경북도이다. 중국 공안국은 장백현 마로구나 할 빈에서 잡아들인 탈북민들은 단둥에 집결한 후 북한에 호송한다. 반면 중국 심양에서 잡힌 탈북민들은 장백현을 통해 북한 양강도 보위부 집결소로 호송된다.
2015년 남한에 입국한 탈북민 강 씨는 중국에서 공안국에 잡혀 북송된 경험이 있다. 그는 지금도 보위부 집결소에서 당했던 끔찍한 일들을 잊을 수 없다고 증언했다. "보위부 집결소에 들어가면 제일 먼저 하는 인사가 '초절이'다. 가을김장 때 배추를 소금물에 담가 노근노근하게 만드는 과정을 초절이라고 하는데, 이곳에서의 초절이는 건장한 사람을 후줄근한 시래기로 만든다는 뜻으로 통한다."고 증언했다.
집결소에 구류된 주민들은 새로 들어온 사람들에게 "아무리 배고프고 보위원의 매질이 아파도 6학년은 넘겨야 살 수 있다."고 조언한다. 집결소에서 6개월은 버텨야 한다는 의미로, 이 시기가 가장 힘든 시간이라는 뜻을 암시한다.
북송 된 탈북민들을 집결소에서 처음으로 맞아주는 사람은 보위지도원과 계호원이다. 중국과 불법 밀수를 하다가 적발되어 보위부 집결소에 잡힌 사람들은 보통 한 주일이면 해당 거주지 분주소나 단련대로 인계된다. 하지만 중국에서 북송된 주민들은 3개월부터 1년 정도 이곳에 머문다. 있는 동안 수시로 보위원의 예심을 받으며, 심문 기간에 차려지는 매는 부지기수다. 대답이 늦으면 때리고, 영문을 몰라 눈을 껌벅여도 주먹을 안긴다.
남한으로 오려고 탈북했던 사람들은 보위원의 매질과 심문을 이겨야 한다. 하루에도 수시로 불러 내 트집을 잡아떼리는 보위원들의 지옥관문을 벗어나야 한다. 그들은 한결같이 돈을 벌기 위해 중국에 갔다고 고집한다. 만약 한국에 가기 위해 탈북했다고 자수하는 날에는 본인은 물론 가족들에게도 연좌제가 따른다.
또 다른 탈북민 혜산 출신 신 씨는 "집결소에서 6개월이 넘으면 기본적인 예심은 끝난다. 그래서 6개월 후에는 예심 결과에 따라 단련 대나 교화소에 갈 수 있다. 북한의 감옥은 어디 가나 비슷하지만, 차라리 힘든 노동을 강요당하는 것이 오히려 맘 편하다. 예심이 진행되는 반년 동안 주민들은 반생을 산 사람처럼 늙어간다. 그만큼 심리적 고충과 정신적 자극이 인간의 건강과 마음을 병들게 한다."고 증언했다.
"집결소에서 6개월을 넘겼다는 것은 다른 감옥에서의 힘든 과정도 이겨낼 수 있다는 표징이다. 주민들은 교화소에서 힘든 강제노역에 시달릴때마다 "우리가 집결소 6학년도 무사히 졸업했는데 조금만 더 기운을 내자"고 서로를 위로한다."고 전했다.
글 | 박주희 뉴포커스 기자
□ 2016.06.24 [유럽내 北노동자 강제 노동 조사한 브뢰커 네덜란드 라이덴大 교수]
"유럽은 김정은 현찰금고… 노동자 1명이 年 3만5000弗 송금"
폴란드 등서 수천명 '노예 생활'
週 6일·하루 12~16시간 일하고 담뱃값·맥주값 정도만 받아
北, 현지국의 감시 피하기 위해 노동자들을 개인사업자로 조작
우리가 실태 조사하는 동안 폴란드, 北노동자 신규 비자 중단
"북한은 국가가 아니라 '세계 최대 불법 인력 회사'다. 그들은 세계 각국으로 노동자를 보내 노예처럼 일을 시키고 착취한다. 유럽 땅이 김정은 정권의 '현찰 금고' 역할을 하는 것을 두고 봐서는 안 된다."
지난 6개월간 유럽 내 북한 노동자들의 강제 노동 실태를 조사한 렘코 브뢰커(Breuker) 네덜란드 라이덴대 교수는 23일 본지 인터뷰에서 "북한이 유럽에서 일하는 노동자 한 명에게서 얻는 연 수입이 최대 3만5000달러(약 4000만원)에 이른다"며 이같이 말했다. 북한은 전 세계적으로 5만~6만명을 내보내 일을 시키고 있다. 유럽에는 수천 명 수준 정도로만 알려져 있다. 한국학 전공인 브뢰커 교수는 노동법, 인권 전문가 등으로 구성된 다국적 태스크포스(TF)를 이끌며 폴란드를 중심으로 북한 노동자들이 처한 현실을 추적해왔다. 다음 달 6일 네덜란드에서 주요국 정부 관계자, 인권·노동 담당자들을 초청해 세미나를 열고 결과를 발표할 예정이다.
▲렘코 브뢰커 네덜란드 라이덴대 교수가 세미나 참석을 위해 한국을 방문해 23일 본지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한국학 전공인 브뢰커 교수는 지난 6개월간 유럽 내 북한 노동자들의 강제 노동 실태를 조사했다. /이태경 기자
―유럽 내 북한 노동자에게 관심을 가진 이유는.
"북한 땅에서는 더 끔찍한 인권 탄압이 벌어지고 있지만 우리가 당장 이를 위해 할 수 있는 것은 별로 없다. 하지만 유럽 땅에서 북한이 벌이고 있는 불법행위는 조금만 관심을 기울이면 바로잡을 수 있다. 또 이를 통해 북한 정권에 흘러가는 돈을 차단할 수 있다."
―조사 결과 북한 노동자들 실태는 어떠했나.
"폴란드 노동국을 통해 북한 노동자들을 간접 인터뷰했다. 용접공 등으로 일하고 있는 북한 노동자들은 매일 12~16시간씩 최소 주 6일을 일한다. 하지만 담뱃값, 맥주값 정도 빼고 이들에게 지급되는 돈이 거의 없다. 실제 자기 임금이 얼마인지도 모른다. 이들의 임금 수령서를 봤는데 50여 명의 서명이 똑같았다. 북한 감시관이 수령서를 조작하고 전부 본국으로 보내는 것으로 추정된다."
―돈을 제대로 못 받는 것 말고 다른 형편은 어떤가.
"2014년 한 폴란드 조선소에서 전경수라는 북한 용접공이 방화복도 제대로 갖추지 않고 작업하다 옷에 불이 붙어 타 죽었다. 또 북한 노동자들은 TV, 라디오, 신문, 인터넷도 없는 숙소와 일터만 오갈 수 있다. 말을 안 들으면 북한에 있는 '인질'(가족)이 해를 당한다. 해외에 노동자를 보낼 때 아내와 자녀 2명 이상 있는 사람을 우선적으로 보낸다고 들었다. 이들은 '현대판 노예'라고 봐야 한다."
―이런 일이 어떻게 유럽 땅에서 벌어질 수 있나.
"북한 당국은 능라도무역총회사 등을 통해 폴란드 기업과 계약하고, 이 기업들은 중개자 역할을 맡아 또 다른 현지 기업들에 노동자를 파견하는 복잡한 방식을 택한다. 또 노동자들을 개인 사업자처럼 위조하기도 한다. 이렇게 꼬아 놓아 현지 당국의 법망에 잘 안 걸리는 일이 많다. 값싼 노동력을 원하는 일부 유럽 기업의 이해와 맞물리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북한이 노동자들을 유럽에 보낼 때는 합법적 비자를 받지만, 이후에는 법망을 피해 온갖 불법을 저지르고 있는 것이다."
―노동자들에게서 착취한 돈이 얼마나 평양에 흘러들어 가나.
"유럽에서 일하는 노동자 한 명당 연간 3만5000달러를 북에 보낼 수 있는 것으로 추산된다. 폴란드에만 현재 북한 노동자가 공식적으로 800여 명 있고 비공식적으로는 훨씬 더 많다. 유럽 전체에 있는 북한 노동자 수를 정확히 알기 어렵지만, 유럽이 북한 정권의 '현찰 금고'가 되고 있는 셈이다. 같은 액수를 보내려면 중국에선 노동자 3~4배가, 아프리카에선 10배가 필요할 것이다."
―북한의 불법행위를 막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우리 팀의 조사가 진행되는 동안 폴란드 정부가 북한 노동자에 대한 신규 비자 발급을 중단하고 실태 조사에 나섰다. 하지만 한 나라로는 해결이 안 된다. 폴란드가 막히면 북한 정권은 다른 나라를 찾을 것이다. 북한이 노동자를 보내는 나라는 모두 국제노동기구(ILO) 회원국이다. 각 나라가 자기 땅의 북한 노동자들에게 ILO가 요구하는 근로 조건을 맞추도록 북한을 압박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조사 과정에서 북한 정권으로부터 압박은 없었나.
"난 과거에도 북한에 쓴소리를 많이 했지만 북한으로부터 위협을 받은 적이 없다. 하지만 이번에는 조사를 시작하기도 전에 북한이 외교 경로로 '최고 존엄 명예훼손'을 거론하며 조사 중단을 요구했다. 북한이 이렇게 예민하게 나온 것은 그만큼 강제 노동을 통한 수입이 중요하다는 것 아니겠나. 최근 경제 제재가 심해지면서 북한 당국이 더 예민해진 것 같다."
임민혁 기자
□ 2016.07.29 "北, 식당 종업원 집단탈북 책임자 6명 가족들 앞에서 공개처형"
▲지난 4월 중국 저장성 닝보시 북한 식당 종업원 13명이 집단 탈북해 한국에 입국했다. 사진은 종업원들이 탈북 배경 등을 조사 받기 위해 경기도 시흥시 북한이탈주민보호센터로 이동하는 모습/통일부 제공
북한이 지난 4월 중국 저장성(浙江省) 닝보(寧波) 류경(柳京)식당에서 근무하던 북한 종업원 13명이 집단 탈북해 한국으로 귀순한 사건의 책임자 6명을 공개 처형했다는 주장이 나왔다.
29일 연합뉴스에 따르면 최성룡 납북자가족모임 대표는 중국과 평양을 오가는 소식통의 말을 인용해 "북한은 김정은 노동장 위원장의 지시로 지난 5월 5일 평양 강건종합군관학교에서 안전교사(보위부 요원) 등 관련 책임자 6명을 공개 처형했다"고 말했다.
최 대표는 “공개 처형은 국가안전보위부, 정찰총국, 외무성, 인민보안성 간부 80여명과 해외파견 근무자들의 가족 100여 명이 지켜보는 가운데 진행됐다”고 밝혔다. 이어 "북한은 귀순한 종업원들의 가족을 묘향산 교육시설에 집단 구금한 뒤 사상교육을 벌인 것으로 알려졌다"고 최 대표는 전했다.
앞서 지난 4월 7일 중국 닝보 류경식당에서 근무하던 북한 종업원 13명이 집단 탈북한데 이어 지난 5월 말엔 중국 산시성(陝西省) 소재 북한식당에서 북한 여성 종업원 3명이 추가로 탈출해 서울에 도착한 것으로 알려졌다.
북한은 탈북 종업원들의 가족과 동료들을 동원해 기자회견을 여는 등 종업원들이 우리 정부에 의해 유인·납치당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손호영 기자
□ 2016년 10월 05일 “北, 전인민 강제노동 매년 1조원대 현금수탈”
▲ 북한 탈북자 두 명이 5일 오전 한국프레스센터에서 열린 북한반인도범죄철폐국제연대(ICNK) 주최 ‘북한 강제노동 실태보고서’ 발표 기자회견에서 강제노동 실태를 증언하고 있다. 김낙중 기자 sanjoong@
- 국제인권단체 ICNK 보고서 아동·여성 등 전국민 강제노동 가구당 평균 생활비 20% 수탈 근로자 월급 50배 뇌물 강요도 해외 노동자 착취 내부서 자행
북한 당국이 여성·아동·군인·일반 근로자 등 전 국민을 대상으로 노동 착취를 일삼고, 이들로부터 매년 최소 9억7500만 달러(약 1조867억 원) 이상의 현금 수탈을 하고 있다는 보고서가 공개됐다.
한국에 기반을 둔 국제인권단체인 북한반인도범죄철폐국제연대(ICNK)는 5일 한국프레스센터에서 ‘거대한 노예노동 국가, 북한’이란 제목의 북한 강제노동실태 보고서 발간 기자회견을 열고 북한 내부에서 체계적으로 자행되고 있는 강제노동 실태를 폭로했다. 최근 국제사회가 북한의 해외 파견 근로자들의 인권 상황에 대해 우려를 표명하고 있는 가운데 김정은 정권의 노동착취와 현금수탈이 국내에서도 자행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ICNK 보고서에 따르면 북한 당국은 사실상 전 국민을 강제 노동에 동원하고 있다. 보고서는 특히 북한의 모든 국가적 건설사업에 동원되고 있는 ‘돌격대’가 북한의 ‘현대식 노예제도’라고 문제를 제기했다. 돌격대는 북한의 중학교 졸업생들 중 출신 성분과 신체조건이 가장 떨어지는 학생들을 반강제적으로 징집해 구성되는데, 이들에게 인건비는 거의 지불되지 않고 노동 착취만 반복적으로 이뤄지고 있다는 것이다.
북한 당국의 주민 대상 현금 수탈도 심각한 상황이다. 국영 기업소 근로자는 월급의 50배에 달하는 현금을 매달 ‘뇌물’ 형태로 당 관계자에게 바치도록 강요당하는가 하면, 주부와 학생들은 정기적인 ‘경제과제’를 하달받아 퇴비, 폐지, 폐고무 등을 모아 당에 제공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런 식으로 북한 당국은 가구당 평균 생활비의 20%에 달하는 금액을 수탈해 간다. 액수로는 연간 북한 화폐로 7조5000억 원(북한 시장환율로 환산 시 9억7500만 달러)에 달한다. 보고서를 작성한 ICNK 산하 ‘열린 북한’의 권은경 대표는 “유엔 및 국제사회가 해외파견 노동자 강제노동뿐만 아니라 북한 내 전 국민 대상의 강제노동과 일부 현대식 노예제도에도 관심을 기울이고 해결책을 논의해야 한다”고 말했다.
박정경 기자 verite@munhwa.com
□ 2016.11.24 가톨릭 국제기구 "북한은 최악의 종교 탄압국"
▲ 사진출처=조선DB
북한이 여전히 세계 최악의 종교 탄압국 가운데 하나라고 국제 가톨릭 기구가 새 보고서에서 밝혔습니다. 이 단체는 북한에 의미 있는 정치적 변화가 없는 한 종교 자유는 기대하기 힘들 것이라고 전망했습니다. 김영권 기자가 보도합니다.
로마 가톨릭 교황청 직속기구인 국제가톨릭사목원조기구(Catholic charity Aid to the Church in Need)가 지난주 ‘2016 세계 종교자유보고서’를 발표했습니다.
이 단체는 2년마다 세계 196개 나라의 종교 자유 상황을 분석해 발표하고 있습니다. 보고서는 4쪽에 달하는 북한의 종교 실태를 설명하면서 여전히 세계 최악의 종교 탄압국 가운데 하나라고 지적했습니다.
북한은 세계 최악의 폐쇄국가이자 가장 억압적인 독재 정권이 통치하는 국가로 기독교를 서방세계의 내정개입을 위한 도구로 간주하고 있다는 겁니다. 특히 북한 정부는 헌법으로 종교의 자유를 보장하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지만 유엔 보고서는 이를 반박하고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유엔 북한인권 조사위원회(COI) 최종 보고서에 따르면 북한 주민들의 생각과 양심, 종교의 자유 권리는 완전히 무시되고 있다는 겁니다.
보고서는 북한이 워낙 폐쇄적인 국가여서 정확한 정보를 받기가 매우 힘들다면서도 지난 2년 간 캐나다와 한국의 여러 기독교인들이 체포돼 억류돼있다고 설명했습니다. 그러면서 국가전복 음모혐의로 무기 노동교화형을 선고 받고 복역 중인 한국계 캐나다인 임현수 목사를 자세히 소개했습니다.
북한 정권이 북한 주민들을 사랑해 자주 북한을 오가며 고아와 노인들을 오랫동안 돌봤던 임 목사에게 무기 노동교화형을 선고하고 제대로 캐나다 정부의 접근조차 허가하지 않고 있다는 겁니다.
또 한국인 김국기, 김정욱 선교사, 최춘길, 한국계 미국인 김동철 씨 등 여러 기독교인들이 복역 중이고 북-중 국경지역에서 북한 지하 교회를 지원하던 한국계 중국인(조선족) 한충렬 목사가 올해 살해됐다고 지적했습니다. 한 목사는 중국 창바이(장백)현 장백교회 담임목사로 20여년 간 대북지원과 북한 선교에 관여해 왔었습니다. 보고서는 중국에서 탈북민들을 돕는 선교사들이 주기적으로 위협과 공격을 받고 있다며 한 목사가 가장 최근의 예라고 지적했습니다.
국제가톨릭사목원조기구는 지난 2007년 세계기독교연대(CSW)가 종교 자유 개선을 촉구하는 보고서를 발표한 지 9년이 됐지만 여전히 변화가 없다고 지적했습니다. 그러면서 북한에 완전한 이념과 체제 변화로 이어질 수 있는 의미 있는 정치적 변화가 올 때까지 어떤 종교자유의 개선도 기대하기 힘들 것이라고 내다봤습니다.
한편 보고서는 종교를 탄압하는 핵심 국가로 북한과 시리아, 이라크, 중국 등 23개 국가, 종교를 차별하는 나라로 이란과 방글라데시 등 15개 나라를 지목했습니다. 특히 지난 2년 동안 세계적으로 종교 극단주의와 이로 인한 폭력이 전례 없이 기승을 부리고 있다며, 미 트럼프 차기 행정부가 박해 받는 소수 종교인들을 보호하는 데 보고서가 기여하길 바란다고 밝혔습니다.
독일에 본부를 둔 국제가톨릭사목원조기구는 145개 나라에서 연간 5천 개의 프로젝트를 진행하며 교회들을 돕고 있습니다.
VOA 뉴스 김영권입니다.
□ 2016-11-29 “아버지 권유로 탈북 했다가…” 파리서 北 실상 증언한 탈북 여성
"부끄럽고 고통스러운 경험이지만 지금부터 들려드릴 이야기는 저뿐만 아니라 북한 사람들이 모두 겪는 일상입니다."
어렵게 말문을 연 탈북 여성 박지현 씨(48)가 탈북과 인신 매매, 노예노동, 출산, 북송(北送) 그리고 재탈북 후 영국에 정착하기까지 굴곡 많았던 과거를 풀어놓았다. 24일 프랑스 파리 13구 국립동양언어대학에서 열린 국제 북한인권 심포지엄 '북한 정권의 인권 기록'에 참석한 청중 150여명은 끝내 눈물을 보였다. 프랑스 싱크탱크인 아시아센터가 마련한 행사였다.
함경북도 청진에 살던 박 씨는 1998년 삼촌이 굶어죽은 모습을 보고 아버지의 권유로 탈북 했다. 중국으로 간 박 씨는 곧 5000 위안(약 85만원)에 북동쪽 시골로 팔려갔다. "중국인 남편은 도박만 하고 저는 노예처럼 농사를 지었죠. 돈도 없고 주민 감시도 심해 도망칠 수 없었어요. 그 사이 낳은 아들만 바라보고 버텼습니다."
그렇게 6년을 이름도 국적도 없이 지내던 그는 갑자기 들이닥친 공안(公安)에 끌려갔다. 며칠 동안 발가벗긴 채 중국 경찰 앞에서 앉았다, 일어났다 반복했다. 몸속에 넣어두는 돈을 노린 것이다. 북한 노동교화소로 끌려간 그는 새벽 4시부터 밤 12시까지 '말, 소와 다를 바가 없이' 일했다. 그는 중국에 두고 온 아들을 만나려고 다시 탈북을 감행했고 인신매매로 생계를 유지했다. 하지만 간신히 만난 아들의 첫마디에 박 씨는 무너졌다. "엄마, 왜 날 버렸어." 중국인 남편에게서 '네 엄마가 너 버리고 도망갔다'란 말을 듣고 자란 것이다.
"그 아들이 커서 이제 17살이에요. 영국에서 대학을 다니죠."
박씨는 2008년 영국에 난민 자격을 얻어 북한인 남편과 중국에서 낳은 그 아들을 포함해 세 자녀와 함께 살고 있다. 박 씨는 훌쩍이는 청중들에게 "유럽 국가들이 탈북민에 관심을 가져달라"고 호소하고 이야기를 마무리했다.
이날 심포지엄에서는 국제 인권단체 '국경 없는 인권'의 윌리엄 포트레 사무총장이 전 세계 15개국에 파견된 북한 노동자 5만 명의 인권침해 실태를 발표했다. 그는 "해외에 파견된 노동자를 통해 북한은 연 12억~23억 달러(약 1조4160억~2조7140억 원)를 벌고 있으며 이 돈으로 핵개발을 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국제사회가 관심을 가지면서 최근 카타르가 북한 노동자 200명을 추방했고 폴란드도 신규 비자 발급을 중단했다"며 "국제사회의 지속적인 압박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파리=동정민 특파원 ditto@donga.com
□ 2017년 02월 09일 김규민 감독 “펀딩 참여 70%가 탈북자… 北실상 보여주는게 내 사명”
北인권 다큐 ‘퍼스트 스텝’ 내일 공개… 탈북자 출신 김규민 감독
“DJ·盧 北퍼주기, 核개발 조장”
탈북단체 대표들 목소리 담아
탈북자들이 크라우드 펀딩에 참여해 만든 북한 인권실상 고발 다큐멘터리 ‘퍼스트 스텝’이 국내에서 처음 공개된다.
이 다큐 연출자인 김규민(사진) 감독은 10일 서울 강남구 롯데시네마 브로드웨이점에서 출연자들과 펀딩 참여자들을 대상으로 시사회를 연다고 9일 밝혔다. 북한 체제 붕괴의 시작점이 되기를 바라는 의미를 제목에 담은 이 다큐는 탈북단체 대표와 탈북자 등 24명이 지난 2015년 4월 27일부터 5월 2일까지 미국 뉴욕과 워싱턴DC에서 열린 ‘제12회 북한자유주간 행사’에 참가해 국제사회에 북한의 인권 유린 상황을 알리고, 인권 개선 운동에 동참해주기를 호소하는 내용을 담았다. 이들은 미국 의회와 국무부, 헤리티지재단 등에서 개최된 각종 세미나, 토론회, 기자회견 등에 참가했다. 특히 유엔 본부에서 열린 북한 인권 행사장에 난입해 행사를 방해하는 북한 대표단을 탈북자들이 구호를 외치며 쫓아내는 장면도 담겨 있다.
탈북자 출신인 김 감독은 문화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총 제작비 4000만 원 중 1000만 원을 크라우드 펀딩으로 마련했다. 49명이 펀딩에 참여했는데 70%가 탈북자였다”며 “참여자들은 북한 인권실상과 탈북자들의 삶을 그린 영화가 많이 나와야 한다는 바람으로 1만 원부터 수백만 원까지 돈을 냈다”고 설명했다.
이 다큐에서 김성민 자유북한방송 대표와 박상학 자유북한운동연합 대표, 강철호 새터교회 담임목사 등 탈북단체 대표들은 북한 인권 운동의 어려움을 호소한다. 대북전단을 뿌리는 과정에서 국내의 좌파 인사들에게 린치를 당하는 고통을 겪었다는 것이다. 이들은 미국 국무부는 탈북단체들의 북한 인권 개선 운동을 적극 지원하고 일본 정부도 도움을 주는 반면 한국 정부는 소극적이었다고 비판하기도 한다.
김대중·노무현정부에서의 ‘북한 퍼주기’가 결과적으로 핵개발을 조장했다는 주장도 내놓는다. 이에 대해 김 감독은 “한쪽의 일방적인 주장만 담았다는 의견도 있지만 다큐를 조작할 수 없다는 생각에 있는 그대로 넣었다”며 “탈북단체 대표들은 북한당국으로부터 생명의 위협을 받으면서도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고 말했다.
앞서 이 다큐는 지난해 8월 홍콩의 북한 인권단체에서 연 ‘제4회 북한 인권영화제’에서 상영된 바 있다. 김 감독은 “극장에서 개봉해 많은 관객이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며 “하지만 그렇게 안 되더라도 유튜브나 부가시장 등을 통해 상영하겠다”고 밝혔다.
북한에서 연극배우로 활동하다가 2001년 탈북한 김 감독은 남녀의 사랑을 통해 남북 북단의 아픔을 표현한 영화 ‘국경의 남쪽’(2006년)에 연출부로 참여했으며 아버지와 아들의 탈북기를 담은 영화 ‘크로싱’(2008년)의 조감독을 맡았다. 그는 “2011년에 실화를 바탕으로 북한의 충격적인 기아 상황을 그린 ‘겨울나비’로 감독 데뷔했다”며 “앞으로 상업 영화도 만들 계획이지만 남북통일이 될 때까지는 북한의 실상을 보여주는 게 내 사명이라고 생각한다”고 강조했다.
김구철 기자 kckim@munhwa.com
□ 2017.02.11 북한의 솔제니친, 이번엔 詩로 '지옥'을 폭로
현역 北작가 추정 반디, 이르면 내달 첫 시집… 北현실 냉정한 묘사 - 누런 원고지에 연필로 詩 50편 '배뚱뚱이 金부자놈, 천하 왕도적' '굳어진 거지 시체 밟고 넘으며' '성분타령 없인 학급장 못해먹어' - 소설집 '고발' 해외서 좋은 반응 호기심보다 작품 문학성에 주목 美 등 20개국 18개 언어로 번역… 국내선 13일 한글 개정판 나와
조선작가동맹 중앙위원회 소속으로 북한 현역 작가로 알려진 '반디'의 첫 시집이 이르면 3월 말 출간된다. 반디는 '반딧불이처럼 북한의 어둠을 밝히겠다'는 의지가 담긴 필명(筆名)으로 탈북자 등을 통해 밀반출한 단편 7편을 묶은 소설집 '고발'이 2014년 한국에서 출간되면서 국내외로부터 '북한의 솔제니친'으로 집중 조명된 바 있다. 반디의 시가 공개되는 건 이번이 처음이다.
▲반디의 시집‘지옥에서 부른 노래’와 소설집‘고발’원고 묶음. 반출 당시 적발을 피하기 위해 김일성·김정일 저작집 사이에 숨겨 나왔다고 한다. 원고지 원본 사진은 작가의 필체 노출 등을 우려해 공개하지 않았다. /행복한통일로
시는 모두 50편으로 북한 내 궁핍과 그로 인한 인간 존엄성 파괴, 봉건제적 폐단 등을 꼬집는다. 반디가 직접 손으로 쓴 시집의 원제는 '지옥에서 부른 노래'. 시들은 질 낮은 누런 원고지에 연필로 쓰였다. 원고를 2013년 처음 입수한 도희윤 행복한통일로 대표는 "탈북하다 중국 변방대에 붙잡힌 한 여성으로부터 반디 작가의 존재를 전해 듣고 중국의 지인을 통해 원고를 받았다"며 "북한에선 제대로 된 펜과 종이를 구하기 어려웠을 것"이라고 말했다.
반디는 1950년대생으로 현재 평양 인근에 거주하고 있다고 알려져 있지만, 확실한 신원은 파악되지 않는다. 통일부는 "검증할 방법이 없다"는 입장. 반면 국제PEN망명북한작가센터 관계자들은 "북한을 그리는 솜씨가 흉내 낼 수 없는 수준"이라며 "A급 북한 작가의 작품이 틀림없다"고 평가하고 있다. 도 대표는 "최근 소식통을 통해 반디 작가의 생존 사실을 확인했다"며 "북한 내부에서도 처절한 싸움을 계속하는 저항 세력이 있다는 사실을 알리고 싶어 한다"고 전했다.
시집에서 눈에 띄는 작품은 '신성천역(新成川驛)'. 3연으로 나뉜 9행짜리 짧은 정형시다. '따기군(소매치기)의 칼날에 낟알짐(곡식이 담긴 짐) 찢긴/ 녀인의 통곡소리 내 가슴도 찢는/ 아 신성천역 공산주의 종착역.' 신성천역은 평안남도 성천군에 있는 기차역으로 북한의 주요 물류 기지다. 이곳에서 목격한 인민의 곤궁한 일상을 통해 체제의 기만을 폭로한다. 도 대표는 "시의 성격이 작품 전체를 대표해 '신성천역'을 시집 표제로 삼는 방안을 논의 중"이라고 했다.
시 '성분타령 없이야'는 혈통과 가족의 공과(功過)가 사회적 위치를 결정 짓는 북한의 봉건적 신분 세습을 꼬집는다. '성분타령 없이야/ 내가 학급장 어찌 해먹어/…/네 할애빈 악질지주 네 아버진 대 브로카(밀무역 중개상)/네 삼촌은 반공단 네 사촌은 치안대였지.' 작가의 화살은 북한 독재자 김 부자(父子) 3대로 향한다. '성분타령 없이야/ 쟤넬 우리가 어찌 다스려/…/내 할애빈 백두혈통 내 아버진 락동강 핏줄/ 내 외켠(외가)은 피살자 내 처켠(처가)은 렬사자야.' 비판의 수위는 과감하다. 시 '오적타령'은 '이 도적놈 저 도적놈 그 중에도 왕도적은/ 배뚱뚱이 김 부자놈 천하제일 명적이라/ 온 나라의 공장 농촌 한엉치에 깔고 앉아/ 백주에도 뚝뚝 뜯어 제 맘대로 탕진한다'고 직격탄을 날린다.
최근 반디의 작품은 해외에서 더 큰 반응을 얻고 있다. 해외 판권을 담당하는 KL매니지먼트 이구용 대표는 "'고발'은 프랑스·일본·포르투갈·미국 등 20개국 18개 언어로 번역됐다"며 "북한 작가의 작품이라는 호기심보다 작품이 지닌 문학성에 더 주목한다"고 말했다. 지난달엔 한강 소설 '채식주의자' 번역으로 맨 부커상을 받은 데버러 스미스(29)가 '고발'을 번역해 영국 작가 단체 '펜(PEN)'이 주는 번역상을 받기도 했다. 프랑스 번역판 발문을 쓴 피에르 리굴로 사회역사연구소장은 "반디의 글은 저항의 신호이며 전 세계를 향한 부르짖음"이라 평했고, 영국 일간 가디언은 "이 짧은 북한 이야기가 국제적 스파크를 일으키고 있다"고 했다. 국내에선 출판사 다산북스가 '고발'을 첫 출간했던 조갑제닷컴에서 판권을 구매해 오는 13일 개정판을 출간한다. 3월 28일부터 나흘간 행복한통일로 주최 국제 콘퍼런스가 열려 15명의 해외 인사가 방한해 반디의 작품을 토론한다.
정상혁 기자
□ 2017년 04월 06일 “선교사 독침 살해… 김정은 등장後 종교탄압 가혹”
정베드로 북한정의연대 대표
北억류 선교사 송환촉구 회견
“韓·美·加·中 출신 7명 억류”
“성경책을 봤다는 이유로, 손금을 봐줬다는 이유로 수많은 북한 주민이 수용소 생활을 하고, 북한에서 전도하던 선교사들도 수없이 납북되고 있습니다.”
정베드로(사진) 북한정의연대 대표는 6일 “북한은 종교의 자유를 헌법으로 보장한다지만, 전혀 보장받지 못하는 게 현실”이라며 “북한은 ‘반(反)인도범죄’에 해당하는 종교인에 대한 차별과 탄압을 중단하고, 한국 정부와 국제사회는 선교사 송환에 나서야 한다”고 강조했다.
정 대표는 “김정은 노동당 위원장 등장 이후 종교탄압은 더 가혹해져 선교사를 독침으로 살해하고 있다”며 “현재 북한에 한국인 선교사 3명, 미국·캐나다·중국 출신 선교사 4명이 억류된 것으로 확인됐다”고 주장했다. 북한정의연대는 이날 오전 서울 중구 한국프레스센터에서 ‘북한의 사상·종교의 자유 및 강제억류 선교사 송환 촉구 기자회견’을 열었다.
이날 회견에 참석한 탈북자 임순복 씨는 “선량한 북한 주민들은 자기 목숨을 내놓지 않고는 신앙의 자유를 갖지 못해 핍박받고 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임 씨는 할아버지가 6·25전쟁 때 한국군에게 식량을 줬다는 이유로 5세 때부터 모든 식구와 함께 수용소에 끌려가 2010년 탈북하기 전까지 약 28년간 수용소 생활을 했다.
임 씨는 성경책을 갖고 있다는 이유로 보위부에 잡혀가 생사가 불투명한 한 의사의 사례를 공개했다. 임 씨는 “관리소에 근무하던 한 의사는 ‘세상엔 불쌍한 우리를 보살펴 주시는 하느님이라는 분이 있다’고 환자들에게 전하며 희망을 주던 분이었다”며 “2005년 어느 날 성경책을 갖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져 가택수색을 당했고, 지금은 가족 모두 관리소로 끌려가 생사를 알 수 없게 됐다”고 말했다.
임 씨는 “북한 주민은 심심풀이로 점을 보는 것마저도 미신을 믿는다고 처벌받을 수 있어 하루하루 두려움에 떨고 있다”고 밝혔다.
김성호 북한인권단체연합회 공동대표는 “인도적 선교활동 중 강제 구금돼 무기노동 교화형 판결을 받고, 매일 고통받는 대한민국 국민과 해외 선교사들이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기윤 기자 cesc30@munhwa.com
□ 2017.06.20 "웜비어는 살해당한 것" "북한에 책임 물어야" 미국 격앙된 목소리 거세져
북한에 1년 5개월간 억류됐다 혼수 상태로 풀려난 지 엿새 만에 사망한 미국 대학생 오토 웜비어(22)를 두고 미국에서 “북한에 책임을 물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북한이 여전히 억류하고 있는 미국인 3명에 대한 석방 요구도 거세질 것으로 보인다.
렉스 틸러슨 미 국무장관은 19일(현지시각) 웜비어의 사망에 애도를 표한 뒤 “미국은 웜비어가 부당하게 감금된 것에 대해 북한에 책임을 물을 것”이라고 밝혔다. 이어 "불법적으로 북한에 억류돼 있는 다른 미국인 3명의 석방을 요구한다”고 덧붙였다.
존 매케인(공화당) 상원 군사위 위원장은 “웜비어는 북한 독재자 김정은 체제에 의해 ‘살해당했다(murdered)’는 점을 분명히 한다”고 말했다. 또 “그는 생애 마지막 기간에 북한 국민들이 70여년간 겪었던 악몽 속에서 지냈다”고 비난했다. 매케인 위원장은 이어 “미국은 잔인무도한 권력들에 의해 미국 국민이 살해당하는 것은 용납할 수없고 용납해서도 안된다”고 말했다.
▲오토 웜비어가 억류된 직후인 2월 평양에서 기자회견을 하며 눈물을 흘리고 있다./AFP연합
북한을 수차례 다녀온 바 있는 빌 리처드슨 전 유엔주재 미 대사는 “웜비어가 억류돼 있는 동안 북한 외교관들을 20여차례 만났지만 그의 건강에 이상이 있다는 얘기는 전혀 듣지 못했다”며 “북한은 웜비어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지 국제사회에 밝혀야 한다”고 주장했다. 리처드슨 전 대사는 이어 “북한은 억류하고 있는 미국인 3명과 캐나다인 1명을 석방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웜비어가 태어나 자란 오하이오의 존 케이식 주지사(공화당)는 “북한이 웜비어에게 한 짓은 반 인륜범죄가 될 수 있다”며 “그의 죽음은 북한 정권의 사악하고 억압적인 본질과 인간 생명에 대한 무시를 분명히 보여줬다”고 지적했다.
롭 포트먼(공화·오하이오)상원의원도 “북한의 혐오스런 행동은 전 세계적 비난을 받아야 한다”며 “웜비어 가족은 그 어떤 가족이 겪어야 하는 것 이상으로 (고통을) 겪었다”고 말했다.
NYT는 익명의 정부 소식통을 인용해 구타설을 제기하기도 했다. NYT는 또 “그동안 북한에 억류됐던 여러명의 미국인 가운데 코마 상태로 귀국한 것은 그가 처음”이라며 “그의 죽음은 이미 긴장 상태에 있는 미국과 북한의 관계를 더욱 악화시킬 수 있다”고 전망했다.
앞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성명을 통해 애도를 표하면서 “미국은 희생자를 애도하는 동시에 북한 체제의 야만성을 다시금 규탄한다”고 말했다.
한상혁 기자
□ 2017.06.21 웜비어를 죽음의 땅으로 이끈 여행사 선전문구 보니
지난 20일 사망한 미국인 대학생 오토 웜비어의 북한 방문을 주선했던 여행사 ‘영 파이오니어 투어스’(Young Pioneer Tours)가 페이스북을 통해 “미국 시민에게 북한 여행을 더는 주선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뒤집어 말하자면, 이들은 여태껏 미국 시민의 북한 여행을 주선해 왔다는 뜻이기도 하다. 어떤 회사길래 겁도 없이 오바마와 트럼프의 백성을 ‘사회주의 락원’에 담갔다 빼는 짓을 반복해 온 걸까.
▲평양 여행중인 '영 파이오니어 투어스' 관광객들./영 파이오니어 투어스 인스타그램
#죽지 못해 환장한
영 파이오니어 투어스는 중국 시안(西安)에 본사를 둔 여행사다. 영국인 가레스 존슨(Gareth Johnson) 등 재중 외국인들이 재밌고 기괴한(interesting and bizarre) 경험을 제공하려 지난 2008년 회사를 세웠다 한다. 외국인이 세운 회사인 탓인지, 중국에 자리 잡은 회사임에도 홈페이지에 소개된 가이드 22명 중 중국인은 4명에 불과하다.
이들은 “니네 엄마가 가지 말라 하는 곳에 염가 여행(budget travel)을 보내준다”는 컨셉을 잡고 있다. 그 때문인지 여행지가 하나같이 정신 나간 곳 뿐이다. 아프리카나 미승인국(Unrecognized Countries) 등 정부가 허약해 안전보장이 불투명한 지역은 물론, 체르노빌(Chernobyl)까지 발을 들이고 있다. 참고로 체르노빌은 1986년 터진 원전 폭발 사고 여파가 아직도 있어, ‘이 지역 방사능에 오염돼 죽어도 아무도 원망치 않겠다’는 각서를 써야 들어갈 수 있는 곳이다. 심지어 이라크까지 여행을 보냈던 기록도 있다.
애초에 이 여행사 지사나 계열사가 있는 지역부터가 카자흐스탄의 도시 알마티, 세네갈 수도 다카르, 쿠바 수도 아바나 등 적잖이 비범한 장소들이다. 보통 사람이라면 돈을 주며 가라 해도 싫다 할 곳만 골라 진을 치고 있으니, 모험심 많고 호승심 솟는 젊은이들이 이 여행사에 관심을 기울였던 모양이다.
이들의 성업엔 미국 특유의 자유방임 풍조도 한몫한 듯하다. 미국은 자국민 여행 자유를 보장한다는 명목으로 전시상황인 나라 외에는 여행에 제한을 두지 않고 있다. 물론 우리나라처럼 법적으로 여행금지국가를 정해둔 나라도 적잖지만, 미국만 해도 큰 시장이니 이들이 여행 장사를 하는 데엔 별 지장이 없었던 것 같다. 당장 이들 홈페이지만 봐도 글로벌 여행사 주제에 영어 외 다른 언어를 지원하지 않는다.
아무튼 한국인 기준으로 보면 살아 돌아와 처벌받을 확률보다 현지에서 죽을 확률이 더 높은 헬게이트 같은 여행사니, 설사 이번에 웜비어 건을 무사히 넘겼더라도 장차 언젠간 한 번쯤 사고가 터졌으리라는 건 자명해 보인다.
그나마 웜비어 사건을 계기로 이런 위험한 여행사들이 상당히 몸을 사리게 될 듯하다. 자유아시아방송(RFA)은 미국의 북한전문 여행사 ‘뉴 코리아 투어스(New Korea Tours)’가 최근 비극적인 사건으로 인해 미국 시민권자에 대한 북한 여행 신청서를 받지 않기로 결정했다고 보도했다. ‘고려 투어스’(Koryo Tours)와 ‘우리 투어스’(Uri Tours) 등 다른 북한 전문 여행사들도 웜비어 사망 이후 미국인들에 대한 여행상품 판매를 재검토하고 있다는 입장을 밝혔다.
문현웅 기자
□ "집으로 돌아오는 마지막 여행 끝나… 아들의 표정, 평화롭게 바뀌었습니다"
[美 웜비어 사망]
- 웜비어씨 가족 '이별 성명'
"北 손아귀서 끔찍한 고문·학대" 직접적인 사망 원인은 안 밝혀
"슬프지만 우리 아들 오토 웜비어가 이제 집으로 돌아오는 마지막 여행을 끝마쳤다는 것을 알려야 합니다.… 우리는 평화 속에, 그리고 (북한이 아닌) 집에 있습니다."
북한에 장기간 억류됐다가 의식불명 상태로 송환돼 숨진 미국 대학생 오토 웜비어(22)의 죽음은 19일(현지시각) 가족이 발표한 성명을 통해 공개됐다. 오하이오주 신시내티에 거주하는 프레드·신디 웜비어 부부는 웜비어가 입원해 있던 신시내티주립대 병원을 통해 공개한 성명에서 아들이 이날 오후 2시 20분쯤 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세상을 떠났다고 밝혔다. 300단어가량의 길지 않은 성명이었지만 아들에 대한 그리움과 사랑, 비인도적인 북한 당국에 대한 비판, 아들을 응원해준 전 세계인과 의료진에 대한 감사 등을 담았다.
가족들은 "불행하게도 웜비어가 북한의 손아귀 속에서 당한 끔찍한 고문과 학대는 오늘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이 슬픈 소식 이외의 다른 어떤 결과도 가져올 수 없었다"고 북한의 악행을 비판했다. 이어 "지난 13일 웜비어가 신시내티로 돌아왔을 때 말을 할 수도, 볼 수도, 언어에 반응할 수도 없었다"면서 "우리는 그의 목소리를 다시 들을 수 없었지만, 그의 얼굴 표정은 (집으로 돌아온 후) 하루 만에 평화롭게 바뀌었다"고 했다. 가족들은 또 "신시내티주립대 메디컬센터의 의료진은 아들을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했다. 아들과 우리 가족을 생각하고 기도 속에서 지켜줬던 전 세계 모든 사람에게 감사한다"고 했다.
가족들은 그가 갑자기 죽음을 맞은 이유는 공개하지 않았다. 미국 언론들은 이날 오후 4시 40분 가족들의 성명이 나온 이후부터 그간의 사건 경과와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을 비롯한 각계의 조의 등을 시간대별로 자세히 보도했지만, 사망 경위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뉴욕=김덕한 특파원
□ 2017.06.23 이달초 北 "사실 웜비어가 아프다" 실토… 대화 코스로 가던 美北접촉이 틀어졌다
[웜비어 장례식, 미국은 지금… 강인선 특파원 신시내티 르포]
北核 무심했던 보통 미국인조차 "웜비어 죽음에 억장 무너져"
- 지난 5월 노르웨이 접촉 北외무성, 웜비어 상태 모른채 美와 인질석방 협상 테이블 앉아
- 6월 6일 뉴욕 접촉 北측, 웜비어 건강 체크하다가 혼수상태 뒤늦게 알고 자백
- 웜비어 다닌 고교서 '시민葬' 동네 입구부터 끝없이 이어지는 추모 리본과 성조기의 행렬
- 美국무 부장관 등 2500명 참석 조셉 윤 美대북특별대표, 유족에 文대통령 조전 전달
- 들끓는 여론에 美의회도 강경 "이젠 美·北간 '다음'은 없다" 대북 강경조치 쏟아져 나올 듯
북한에 억류됐다가 혼수상태로 귀국해 엿새 만에 숨진 미국 대학생 오토 웜비어(22)의 장례식이 22일(현지 시각) 그가 다녔던 와이오밍 고등학교 대강당에서 시민장으로 엄수됐다. 오하이오주 신시내티에 있는 이 학교 주변 가로수엔 이 학교의 상징색인 파란색과 흰색 리본이 매여 있었다. 일주일 전, 17개월 만에 집으로 돌아오는 웜비어를 환영하기 위해 친구와 동네 사람들이 매달았던 리본은 이제 그의 죽음을 애도하고 있었다.
웜비어의 죽음은 극적으로 열릴 뻔했던 미·북 대화를 탈선하게 만든 핵심 사건이었던 정황이 드러나고 있다. 트럼프 행정부의 한 고위 관리는 장례식 하루 전날인 21일 "트럼프 행정부 출범 이후 미·북은 억류 미국인 석방 문제로 탐색전을 하며 접촉 창구를 만들어볼 생각이었다"면서 "웜비어가 참혹한 모습으로 돌아온 데다 갑자기 사망하면서 이제는 미·북 간에 '다음'이 없는 상태가 됐다"고 했다.
▲웜비어 모교에서 '마지막 인사' - 22일(현지 시각) 미국 대학생 오토 웜비어(22)의 시신이 안치된 관을 그의 친구들이 운구해 장례식장인 오하이오주 신시내티 와이오밍 고등학교 대강당을 나오고 있다. 와이오밍 고교는 웜비어의 모교다. 웜비어 관은 그가 안장될 신시내티의 스프링 그로브 묘지로 이동했다. 북한에 17개월간 억류됐다 송환된 웜비어는 귀향 6일 만인 지난 19일 사망했다. /AP 연합뉴스
오바마 행정부 때 대화가 없었던 미·북은 트럼프 정부 출범 이후 접촉을 시도했다. 첫 시도가 지난 3월 초에 예정됐던 뉴욕 접촉이었다. 하지만 북한이 지난 2월 말레이시아 공항에서 김정은의 이복형 김정남을 화학무기로 암살하는 사건으로 미국이 강경 자세로 돌아서면서 이 접촉은 무산됐다.
2차 시도는 5월 노르웨이 오슬로에서 열린 1.5(반관반민)트랙 접촉이었다. 이때 조셉 윤 대북정책 특별대표는 북의 최선희 외무성 미국국장과 비밀리에 만나 웜비어 등 북에 억류된 미국인 4명의 석방을 논의했다. 대외적으로는 1.5트랙 접촉이 진행되는 것처럼 보였지만 막후에선 미·북 간 진짜 접촉이 이뤄지고 있었던 것이다. 이때까지만 해도 인질을 매개로 한 대화의 물꼬가 터지는 듯했다.
하지만 6월 6일 뉴욕에서 미·북이 다시 만났을 때 북측은 예상치 못한 사실을 털어놓았다. 북측은 "사실은 웜비어가 좀 아프다"면서 그가 의식이 없는 상태임을 밝혔다고 한다. 이 관리는 "노르웨이에서 미·북이 만났을 때까지만 해도 북한 외무성은 웜비어의 건강 상태를 모르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고 했다. 북 외무성이 억류 미국인 석방 문제를 논의하다가 도중에 이들의 상태를 점검하는 과정에서 비로소 웜비어가 혼수상태라는 걸 알게 됐다는 것이다.
▲성조기 넥타이 맨 웜비어 아버지, 아내 손 꼭 잡고… - 북한에 억류됐다 송환된 뒤 사망한 미국 대학생 오토 웜비어(22)의 아버지 프레드(앞줄 왼쪽)와 어머니 신디(앞줄 오른쪽)가 22일(현지 시각) 장례식장인 신시내티 와이오밍 고등학교에서 아들의 관이 영구차로 옮겨지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다. /AP 연합뉴스
버지니아대에 재학 중이던 웜비어는 지난해 1월 북한에 관광을 갔다가 평양 한 호텔에서 정치 선전물을 훔치려 했다는 혐의로 15년 노동 교화형을 선고받고 북한에 억류됐다가 혼수상태에 빠져 죽음에 이르게 됐다.
웜비어 가족이 사는 동네에 진입하면서 시작된 가로수 리본의 흐름은 끝없이 이어졌다. 골목길로 들어가도 마찬가지였다. 성조기를 내건 집도 있었다. 한 교회엔 "오늘 밤은 웜비어를 생각하고 기도합시다"라는 안내문이 내걸렸다.
장례식은 이날 오전 9시 가족과 지역 정치권 인사, 웜비어의 학교 친구 등 2500명이 참석한 가운데 1시간 동안 진행됐다. 강당에 들어가지 못한 수백명의 시민들은 학교 체육관에 설치된 스크린으로 웜비어의 장례식을 지켜봤다. 롭 포트먼 상원의원(공화)과 디나 파월 국가안보회의 부보좌관, 존 설리번 국무부 부장관과 조셉 윤 대북정책 특별대표 등도 장례식에 참석했다. 장례식장엔 웜비어의 생전 학교 생활 사진과 북한에서 입었던 재킷 등 유품이 전시돼 있었다. 포트먼 상원의원은 장례식 전 기자들과 만나 "북한은 가장 기본적인 인권과 인간의 존엄성을 짓밟았다"며 "(웜비어의 죽음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고 했다. 조셉 윤 대표는 이날 장례식에서 문재인 대통령이 웜비어 가족에게 보낸 조전을 전달한 것으로 알려졌다. 웜비어의 운구는 장례식 직후 인근 스프링 그로브 묘지에 안장됐다.
▲(왼쪽부터)생전엔 이렇게 건강했는데… ,北에서 재판받을 때 입었던 옷, 여권·학생증 등 유품들 - 22일(현지 시각) 미국 대학생 오토 웜비어의 장례식장이 마련된 신시내티 와이오밍 고등학교 대강당 안에는 건강했던 웜비어의 생전 사진(위 사진)과 그가 북한에서 재판받을 때 입었던 옷(중간), 북한에서 사용한 여권·지갑·계산기(아래) 등 유품이 전시됐다. /신시내티=강인선 특파원
웜비어의 사망은 북핵 문제가 아무리 시끄러워도 북한에 관심 없던 미국 보통 사람들의 감정선을 건드렸다. 북한이 관광 갔던 대학생을 '반죽음' 상태로 보낸 것을 보고 분노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워싱턴에서 만난 한 택시 운전사는 "그동안은 남북한도 잘 구분 못 했는데, 의식 없이 실려온 웜비어의 모습에 억장이 무너졌다"고 했다.
어이없는 죽음 앞에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북한은 잔혹한 정권"이라고 했고, 제임스 매티스 국방장관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고 했다.
미국 의회도 분노하고 있다. 북한 인권 문제와 북한 여행 금지 등 각 분야에서 대북 강경 조치가 쏟아져 나올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미 상원 외교위는 22일 조셉 윤 대북정책 특별대표에게 비공개 브리핑을 받을 예정이었다. 그러나 윤 대표가 이날 웜비어 장례식에 참석하면서 청문회는 일단 연기됐다.
트럼프 정부 관리는 이달 말 워싱턴에서 열리는 한·미 정상회담과 관련해 "만일 문재인 대통령이 정상회담에서 트럼프 대통령에게 북한에 유화적인 접근 방식을 제안할 생각이라면 웜비어 사망 이후 악화된 미국 내 대북 감정을 고려해 수위를 조절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렉스 틸러슨 국무장관이 지난 13일 웜비어 석방 소식을 공개한 배경엔 '김정은의 친구'를 자처하는 미국 프로농구(NBA)선수 출신 데니스 로드먼을 미·북 관계에서 배제하기 위한 것이란 얘기도 나온다. 로드먼이 김정은과 만난 사실을 공개하며 마치 '비공식적으로 북한에 파견된 미국 대사'처럼 행세하는 것을 트럼프 정부가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로드먼이 북한에 입국하던 13일 웜비어의 석방을 발표함으로써 로드먼의 역할이 없었음을 보여주려 했다는 것이다.
김선엽 기자
□ 2018.04.05 2018 북한인권정보센터 ‘군복 입은 수감자’ 보고서
구타·고문·처형에 의료 지원 부실까지... 북한군의 열악한 인권 실태
/판문점의 북한 병사들. 사진=조선DB
작년 한 북한군 관련 사건이 한국 사회를 놀라게 했다. 그해 11월 판문점을 가로질러 귀순한 북한군 오청성씨의 배 속에서 나온 ‘기생충’ 때문이었다. 당시 이국종 아주대병원 외과의사는 총상을 입고 쓰러진 오씨를 수술하며 이 사실을 밝혔다. 오랜 경력의 의사조차 “교과서에서나 보던 기생충”이라고 충격을 받을 정도로 크기와 마릿수가 상당했다.
오씨는 군내에서 나름 좋은 출신 성분이라고 알려졌다. 그럼에도 배 속에서는 옥수수 찌꺼기와 기생충만 다발로 나왔다. 북한 병사들이 얼마나 열악한 생활을 하고 있는지 적나라하게 보여준 사건이었다.
북한군의 실제 인권 실태는 어느 수준일까. 지난 2월 북한인권정보센터 북한군인권감시기구가 발간한 ‘군복 입은 수감자 – 북한군 인권 실태 보고서’의 핵심 내용을 정리했다.
1. 입대도 출신 성분에 영향받아... 군사들은 ‘입당’이 목표
북한은 성분 및 토대가 개인의 사회적 지위 획득 과정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군 입대 역시 성분 및 토대의 영향을 받는다. 군 입대 결정부터 부대 배치, 입당, 전역 후 대학 진학 기회, 직업 배치에 있어서 토대나 성분이 나쁠 경우 불이익을 받게 된다.
북한에서 남성은 만 14세가 되면 초모(징집) 대상자로 등록된다. 15세가 되면 두 차례의 신체검사를 받고 고급중학교 졸업 후 만 17세에 입대한다. 신체 기준은 신장 148㎝, 체중 43㎏ 이상이다.
2003년 3월 최고인민회의 결정에 따라 ‘전민군사복무제’가 실시됐다. 28세 미만의 미필 남성은 무조건 징집 대상이다. 김정은 정권부터는 군 복무자 수가 충족되지 않아 여성들에게도 의무복무제를 시행하고 있다.
/북한 노병들. 사진=뉴시스
70명의 북한군 출신 인사들에게 입대 희망 여부를 물었다. 그중 55.7%인 39명이 북한군 입대를 희망했다. 희망사유 중 ‘입당’이 가장 큰 비율(45.2%)을 차지했다. 한 인사의 증언이다.
“북한에서는 그때 당시 군사 복무를 해야 입당을 할 수 있고. 입당을 목표로 하는 거는 입당한 사람만 모든 인정을 해주고 그리고 직업도. 그 외에 아무데서도 혼인관계에서도 남자가 입당을 해야 여자들도 서로... 사회적으로 그런 흐름이었어요. 그거를 법칙으로 생각했어요.”
북한에서 군관이 아닌 사병의 경우 10년간의 장기 복무를 마치고 나면 대부분 사회에 나가 직장에 등록되거나 일부는 대학에 진학하게 된다. 이때 직장 배치 과정에서 ‘개인의 의향과는 무관하게’ 당국 명령에 따라 탄광, 광산, 농장 등에 수백, 수천 명 단위로 강제 배정되는 경우가 있다. 이를 ‘무리배치’라고 한다. 북한군 출신 인사의 증언이다. “의주에 있는 광산으로 배치받았습니다. 그런데 의주로 가니깐 못 살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2. 빈번한 군내 처형... 인권이라는 용어 들어본 적도 없다
북한군 내에서 인권 교육이 실시되었는지 여부에 대한 질문에 70명 응답자 중 69명(98.6%)이 ‘아니오’라고 응답했다. 인권 교육을 받았다고 응답한 사람은 단 한 명뿐이었다. 나머지 응답자들은 ‘인권’이라는 용어에 대해 들어본 적이 없다고 말했다. 관련 증언이다.
“부대를 유지하려면 폭력을 많이 사용합니다. 내가 군복무 할 때도 대체로 일과생활이나 내무생활을 부소대장이 책임을 지는데 부소대장이 주먹이 세면 빨리 모이고, 부소대장이 인정이 있는 사람이면 좀 느립니다. 그런 관계로 부소대장들이 이제처럼 말을 안 들으면 폭력을 사용했습니다.”
군내에서도 공개, 비공개 처형이 지속적으로 일어나고 있다. 북한 형법에 따르면 국가전복음모죄, 테러죄, 조국반역죄, 파괴암해죄, 민족반역죄, 고의적중살인죄 등을 저질렀을 때 처형 대상이 된다. 응답자 70명 중 41.4%인 29명이 군복무기간 내 공개처형을 목격했다고 증언했다. 개별처형, 집단처형은 물론 이미 사망한 병사의 시신을 총살로 다시 공개처형한 경우도 있었다.
“걔는 근무지 이탈자라고 반 혁명자라고 머리 없는 시체를 쏴 죽였어요. 군탄 놓고 쏘긴 쐈는데요. 어차피 죽은 몸이니깐...”
“7군단이나 8군단 정치지도원들이 뭐 쿠데타 일으킨다 하다가 몽땅 잡혀가지고 총살당했다.”
“평양시 만경대구역 7총국 150명이 총살당했어요. 한 개 중대라고 들었어요. 500m 밖에서 봤어요.”
3. 부실한 지원과 허약한 건강으로 인한 사망 사고
북한군의 열악한 훈련 과정에서 부실한 장비와 병사의 허약한 건강 상태가 인명피해로 이어진다. 70명 응답자 중 27.1%인 19명이 훈련 기간 중 병사의 사망을 목격했다고 밝혔고, 11.4%(8명)는 그와 같은 사건을 들은 적이 있음을 증언했다.
“훈련 도중 사망한 걸 봤습니다. 군 생활할 때, 분대장이 전사들이 제대로 집에서 먹지 못하고 오니까 10명 중 7~8명은 비틀비틀 하는데 철봉을 시키다가 떨어져서 죽었단 말입니다.”
“너무 힘드니까 배에다가 자총해서 자살한 병사가 있었어요. 부대에서 사망 소식을 집에 알려주지 않아서 병사 아버지가 아들 죽은 줄도 모르고 부대로 편지 보낸 적이 있었어요.”
▲2014년 1월 8일 북한 김정은이 조업을 앞둔 북한군 수산사업소를 방문한 모습. 사진=조선DB
“북한은 경제적으로 어려운 거죠. 군인들한테 부류기재를 새 거로 교체해 줄 경제적 조건이 안 돼요. 그러다 보니까 군대 조건이 안 돼서 그런 일이 생겨요. 웃 단위 사람들은 북한 군인 한두 명 죽는 거 아무렇지 않게 생각해요. 대한민국이나 뉴스화하지. 우리는 누가 한 명 죽으면 막 뉴스거리로 나오지 않아요. 북한은 누가 죽어도 몰라요. 북한에서 수영을 가르쳐주는 것보다도 자체로 해야 해요. 자체로 배워야 해요.”
10년간의 군 복무 기간 동안 북한 병사들은 강도 높은 훈련을 거치고 장시간 작업에 동원된다. 건설과 벌목에서부터 운전과 순찰에 이르는 광범위한 업무를 수행한다.
“북한 군대는 그냥 노동력이에요. 그냥 사회 건설의 대부분들을 군대가 맡아 하잖아요. 저희는 그때 김일성이가 1990년대 초반에 북한 군대에서 하이칼라식 담배를 보급하라고 해서 창평에 425담배공장을 건설했어요. 농장에 살림집 건설을 2000세대 했어요. 군인들을 무리제대를 시켜서 담배농장에 배치를 했거든요. 저희가 거기 건설노동에 동원됐어요. 다른 군단은 도로나 발전소 건설을 했다고 하더라고요. 우리 동네에는 군대 간 2명이 금강산발전소 건설하다가 죽었다고 하더라고요. 북한은 공사에 90% 이상이 노동력이에요.”
작업 중 사고가 발생해도 군의(軍醫)가 충분한 처방과 치료를 하지 않아 부상병이 사망하는 경우도 있다. 병원 입원 시 필요한 약품도 부족한 실정이다.
“주체포 굴을 파는 작업을 하다가 다쳐서 사망한 걸 본 적이 있습니다. 함마(망치)로 치다가 울려서 뒤에 바위에 팔이랑 다리랑 다쳤습니다. 한국에서는 치료하면 낫겠는데. 군의소에 가서 3일 후에 사망 소식이 왔습니다. 약이 공급이 안 되고, 군의라는 건 침도 놓을 줄 몰라요. 자격증만 있으면 군의예요. 정치사상적으로 (통과)되면 군의예요. 혈관을 찔러서 (주사) 놓을 줄만 알아요.”
“약이 없어요. 내가 상처 나서 곪으면 페니실린도 못 맞아요. 식염수를 곪은 데를 째고 나서 뽑고, 식염수를 하루에 한 번이나 이틀에 한 번 치료해요. 약이 특별한 게 없어요.”
/작년 귀순병사 오청성의 성분 자료. 그래픽=조선DB
병사들의 영양실조도 문제다. 1992년까지는 병사들이 활력을 찾고 회복하는 보양소가 만들어졌다. 그러나 보양소만으로 급증하는 영양실조 병사들을 전부 감당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임시방편의 일환으로 1~3개월간 병사들을 각자의 집으로 돌려보내고 건강을 회복시킨 뒤 복귀를 시켰다. 북한 당국이 아닌 해당 가족들이 군내에서 영양실조가 걸려 돌아온 자식을 돌봐야 하고, 10년 복무기간 동안 자식에게 식량을 지원해야 하는 부담도 지게 된 것이다.
“집에서 도와주지 않으면 다 허약 걸려요. 나는 군생활을 3년 6개월만 했으니까 이 정도로 뻗혔습니다(참아냈습니다). 사단에서 뜯어 먹고, 대대에서 뜯어 먹고 하니까. 사관장도 군인에게 제공되어야 할 쌀을 남겨서 받아먹고. 너무나 팔아먹어요.”
4. 추위 노출, 수면 불허, 체력 학대... 빈번한 구타
북한군 출신 응답자 70명 중 75.7%인 53명이 구타를 당한 경험이 있다고 응답했다. 다음으로 15.7%인 11명은 다른 군인이 구타를 당하는 것을 목격했다고 응답했다. 빈도 역시 매일 발생한다는 응답이 21명(32.8%), 일주일에 1번꼴로 발생한다는 응답이 11명(17.2%)이었다.
“농사를 지으러 갔다가 거기서 제가 그때 고추 모를 훔쳐서 심어야 하는데 그거를 훔치지 못한 거예요. 3일을 나갔는데 훔치지 못하고 그냥 온 거예요. 허탕을 친 걸로 해서 그냥 맞았어요.”
“분대장이 부분대장을 많이 때리더라고요. (...) 분대를 세워 놓고 부분대장을 사람들 앞에서 때렸어요. 길들인다고 그랬어요. 주먹이랑 발로 차고, 훈련 도중에는 총탁으로 때렸어요.”
북한군 내에서 발생하는 가혹행위들의 양상은 실로 다양하다. 주로 추위 노출, 수면 불허, 체력 학대의 형태로 일어난다. 추위 노출의 경우, 비정상적으로 낮은 온도에 장시간 신체가 노출되는 상태를 의미한다. 북한 군대에서는 탈의하게 한 후 영하의 온도에 장시간 서 있게 하거나 차가운 물체에 신체의 일부를 결박하여 고통을 견디게 하는 가혹행위로 인해 군인들이 동상에 걸리는 경우도 있었다.
수면 불허는 개인의 수면권을 박탈하는 행위로, 증언자들은 최소 4~5시간에서부터 15일 이상 잠을 자지 못하는 등의 행위로 인해 고통을 겪는다. 마지막으로 체력 학대의 경우, 증언자들은 ‘달군다’는 표현을 쓴다. 강압적인 상황에서 땅에 떨어지는 낙법을 수백 번 이상 시키거나 운동장을 50바퀴 이상 달리게 하는 등이 포함돼 있다. 1990년대 이후 적절한 식량이 제공되지 않는 복무 조건을 고려할 때, 이 같은 가혹행위들은 북한 군인들의 건강에 상당한 악영향을 초래한다.
▲2013년 7월 24일 북한군 장병들이 정전협정체결 (7월 27일) 60주년을 사흘 앞두고 평양 인민무력부 청사의 김일성ㆍ김정일 동상 앞에서 결의대회를 가졌다. 사진=조선DB
“중대장이랑 정치지도원들이 일체 옷 다 벗겨 놓고 팬티만 입히고 그때 정말 추웠어요. 그게 1월 달인데 그때 막 살이 30분까지 괜찮았는데 1시간째 되니깐 살이 다 하얗게 쫙쫙 갈라지는 거예요. 한 10시간 있었던 것 같아요. 우는 애들도 많았어요. 병사들은 다 울고.”
“겨울에 철봉에 손을 묶어놨어요. (...) 철봉에 손을 묶어놓는 거는 보통이에요. 북한은 날아서 서는 훈련이 있었어요. 서지 못한다고 서라고 돌이나 곡괭이를 놓고 그러는 게 있었어요. 떨어져서 허리 다쳐서 피가 나는 경우도 있었어요.”
정리=신승민 월간조선 기자
■ [2018 북한인권백서]
월간조선 08월 호 글 신승민 월간조선 기자
(1) 생명권 침해 실태 “北 보위부는 고양이만 한 쥐들에게로 핏덩이 아기를 내몰았다”
“쥐들이 피 냄새를 맡고 갓난아기 눈을 파먹더라... 시체는 ‘태아에게서 약을 뽑는 데 쓴다’며 병원에 줬다”
⊙편집자註: 올해 들어 평창 동계올림픽 단일팀 결성, 두 번의 남북정상회담과 싱가포르 미북정상회담이 성사됨에 따라 ‘남북 유화 국면’이 지속되고 있다. 이달에는 평양에서 3차 남북회담이 예정돼 있다. 지난 4~5월 한창 ‘남북 교류’ 분위기가 무르익을 때는 한 설문조사상에서 북한 지도자 김정은 호감도까지 올라갔다. 김정은이 ‘귀엽다’는 말까지 나왔다. 3대 세습에 전체주의, 인민 탄압은 물론 고사포로 고모부를 처형하고 이복형을 독살한 체제의 지도자에게 ‘귀엽다’는 형용사는 자못 섬뜩했다.
이 같은 상황 속에서 최근 북한인권정보센터가 책 〈2018 북한인권백서〉를 펴냈다. 북의 숨겨진 실상은 작년보다 더 많이 발굴됐고, 각종 정보들도 풍부해졌다. 올해 북한 내 인권 탄압 사례는 총 7만 1473건으로 작년 대비 3.7% 늘었다. 특히 개인의 존엄성 및 자유권 침해(60.1%) 사례의 발생 빈도가 가장 높았다. 정보 집계를 위해 설문조사에 참여한 탈북민 중 인권 피해자 비율은 3만 6739명(85.5%)이었다.
북한의 ‘구밀복검(口蜜腹劍)’ 실상은 해방 후 분단 획책, 6·25전쟁, 냉전기 각종 도발, 핵·미사일 실험·도발, 국제사회와의 협상 파기, 천안함 폭침과 연평도 포격 등으로 증명돼 왔다. 유리걸식과 초근목피로 연명하는 북한 주민들의 인권 실태도 마찬가지다. 진실을 잊지 않기 위해 그 처참하고 아연한 실태를 꾸준히 기록해 나갈 필요가 있다. 남한은 물론 세계 각국이 알아야 할 진실이다. 언제까지나 순간의 쇼맨십이 진실을 가릴 수는 없는 법이다. 〈월간조선〉 뉴스룸은 북한 인권 실태를 말해주는 책 속 통계자료와 충격 증언을 5회에 걸쳐 요약·게재한다.
/사진=조선DB
1. 생명권 침해 실태
생명권 침해 사건에서는 공개처형과 비밀처형을 포함하는 사법적 집행이 4793건(62.4%)으로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으며, 즉결처형은 209건(2.7%)이고, 구금시설 내 고문과 만행의 결과에 의한 사망 등을 포함하는 다른 직접적 행동으로 인한 사망도 2294건(29.9%)으로 나타났다. 그 외에도 적은 수이지만 강간살해와 실험용 살해 사건도 보고되었다.
생명권 침해 사건의 발생 장소를 분석한 결과, 공공장소가 2951건(38.4%)으로 가장 높게 나타나며 보위부와 안전부 조사 및 구류시설에서 1095건(14.3%), 교화소 908건(11.8%), 정치범수용소 332건(4.3%), 집결소(교양소) 273건(3.6%), 단련대 201건(2.6%), 피해자의 일터 173건(2.3%), 피해자의 집 122건(1.6%)의 순서로 많이 발생한다. 이는 생명권 침해 사건 중 가장 높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사법적 집행의 한 유형인 공개처형은 주로 공공장소에서 이루어지며 비공개 처형은 주로 보위부 및 안전부 조사 및 구류시설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생명권 침해 사건 피해자의 주된 연령대는 미상의 비율이 36.7%(2820건)로 가장 높으며, 30대 18.9%(1452건), 40대 15.2%(1170건), 20대 15.8%(1209건), 50대 5.8%(444건), 10대 2.1%(165건), 60대 2.0%(150건), 10세 미만 1.1%(82건)의 순서로 나타났다. 이와 같이 생명권 피해자의 연령분포는 경제활동과 사회활동 대상자 비율이 높은 20~40대에 집중돼 있다.
1) 탈출과정의 살해
“2000년경 한 번은 별명이 ‘호패’라는 사람이 보위사령부 검열에 걸렸어요. 밀수를 했거든요. 그래서 답사숙영소에 잡혀 있으면서 조사를 받았어요. 답사숙영소는 백두산과 보천보에 답사 오는 사람들이 묵는 곳이에요. 각지에서 뽑혀서 관광 온 사람들이 거기서 자고 가요. 그런데 그 사람이 고문을 세게 받았는지 4층에서 뛰어내렸어요. 뛰어내린 후 도망가다 총에 맞아 죽었죠. 죽은 시신을 냉동 창고로 가지고 가서 얼렸다가 나중에 그 시체를 총살했어요.” (노OO, 남, 양강도)
▲북한 기관지 <로동신문>은 2013년 12월 13일 장성택 당 행정부장이 ‘국가전복 음모의 극악한 범죄’로 처형됐다고 보도했다. 사진=조선DB
“혜산시 집결소가 우리 집 주변에 있는데, 그곳 집결소에 구금되었던 남자 2명이 물 길러 나왔다가 탈출을 위해 강을 건너가다가 한 명이 총 맞아 죽고 한 명은 뛰어서 강을 건너가 잡히지 않았습니다. 이때가 2010년 여름이었습니다. 총을 쏜 사람은 호송담당 안전원이었습니다. 총 맞아 죽은 사람은 어디 사는지, 몇 살인지 모릅니다. 죽어서 압록강 위를 둥둥 떠내려갔는데도 아무도 시체를 건지지 않고 떠내려가게 했습니다. 우리 지역 주민들도 다 봤습니다." (OOO, 남, 양강도)
2) 우발적 충동적 살해
“2008년 3월쯤이었어요. 우리가 전거리교화소 2과 관리과로 가자면 산으로 가는 도로가 있습니다. 그 도로를 수리하는 작업이었는데 차수리반은 아래쪽을 작업하고 병원반은 위에를 작업했습니다. 그런데 점심때쯤 술 취해서 보안원이 와서 병원반 반장을 몽둥이로 때렸어요. 제가 작업하던 곳에서 10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서 벌어진 일입니다. 반장에게 일을 잘 안 한다고 생트집을 잡았습니다. 반장도 억울해서 대들고 싸우는 목소리가 점점 커졌습니다. 반장은 라진 사람입니다. 보안원이 화가 났는지 몸에 지니고 있던 권총으로 쐈습니다. 반장은 그 자리에서 즉사했습니다. 어디 맞은 거는 듣지 못했는데 머리를 맞았다고 합니다. 가서 보니 시체는 다른 수감자 옷을 벗겨서 덮어놨습니다. 피가 많이 나고 뇌도 피하고 터져서 나와 있었습니다. 보안원은 총으로 쏜 후에 좀 당황해하는 상태였습니다.” (이OO, 여, 함경북도)
3) 영아살해
“함경북도 출신 여자가 2007년 신의주시 보위부에 붙잡혀 있었어요. 중국에서 임신을 한 상태로 붙잡혀 왔는데, 보위부에서 이 여자를 신의주시 안전부 병원에 데려가서 강제낙태 시켰어요. 산모를 부축해야 해서 같이 따라가서 보게 된 거죠. 낙태시켜서 아이를 낳는다고 했는데, 막상 태어난 아이가 살아 있었어요. 그런데 그 핏덩어리 아기가 2시간 정도 우니까, 보위부원이 아기를 식당 바닥에다가 갖다 놓으라고 해서 식당에 두었어요. 거기에는 크기가 고양이만 한 쥐들이 있고 아주 더러웠는데, 그 더럽고 차가운 바닥에 아이를 내려놓으니 쥐들이 피 냄새를 맡고 와서는 갓난아기의 눈을 파먹었어요. 아기는 죽었죠. 그 아기 시체를 보위부원이 비닐에 싸더니 ‘태아에게서 약을 뽑는 데 쓴다’면서 병원에 줘버렸어요. 아기 엄마는 출혈이 심해서 업고 나가야 했어요. 병원에서 간단한 치료만 하고 다시 구류장으로 왔어요." (장OO, 여, 함경북도)
▲2011년 10월 25일 중국 공안들이 압록강을 건너 중국 영토에 올랐다가 북한 경비병들이 쏜 총에 맞아 쓰러진 한 40대 북한 주민을 둘러싼 채 내려다보고 있다. 사진=KBS 캡처
4) 공개처형
“공개총살이 있은 것은 2009년 5월 초였습니다. 처형자 이름이 최OO입니다. 당시 강원도 원산시에 거주하였습니다. 신성동에 가게 되면 원산시 항공대학교가 있습니다. 거기에 비행장이 있습니다. 항공대는 신성동 변두리에 있습니다. 거기가 금지구역이기 때문에 철조망이 쳐져 있습니다. 그 주변에는 훈련하느라고 군부 전화선로가 지나갑니다. 이 사람들이 토끼풀을 뜯으러 갔다가 그 주변에 전기선이 끊어진 것이 있어 그것을 잘라 가지고 갔습니다. 당시 자른 전기선으로 토끼장, 닭장을 엮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군부 전화선을 잘랐다는 이유로 원칙대로 말하면 나라의 신경선을 잘랐다는 죄로 시범으로 해서 강원도 원산시 동명산동 공지에서 공개총살 되었습니다. 강원도 보안서장, 원산시 보안서장 등이 나와서 주관했습니다. 공개재판을 했습니다. 원산시 검찰소에서도 나오고, 재판소에서도 나왔습니다. 가족은 아내와 아이가 있었다고 들었습니다.” (임OO, 남, 강원도)
5) 실험용 살해
“연구소에서 데리고 갔어요. 사람이 문어처럼 신체가 이상했습니다. 사람이 걷는 것도 온몸을 꼬면서 걸었어요. 그때 당시 인민반장 확인 받아가지고 가죠. 제가 인민반장이었습니다. 인체 해부시험이라고 하더라고요. 해부해서 실험하는 거라고. 죽는 거죠. 인민반장 확인을 하여 데리고 가고, 의학 연구 대상으로 데려간다고 그러더라고요.” (김OO, 남, 평안남도)
6) 고문과 만행의 살해
“청진시 집결소 가서 아이들이 배고프니까는 생강냉이를 막 뜯어 먹는단 말이에요. 우릴 데려간 경찰들은 오다가 술 먹는단 말입니다. 그 생강냉이를 뜯어 먹는 아이들을 보고 막 때리고 패고 하다 놓으니까 입안에 강냉이를 물고 죽은 겁니다. 지금도 말하기 쉽지가 않아요. 메고 있던 총으로 쳤단 말입니다. 다음에 구둣발로 차고 가슴을 딛고 머리를 차고. 그때 당시 임신부 애들도 더는 이겨내지 못하니까 자살했어요. 변소에 나가서 목을 메고 죽었어요. 임신 중이었으니까 아(이)를 둘을 죽인 거나 마찬가지지요. 그 죽은 둘(엄마와 아이)을 내 손으로 보고 묻고 하니까 내 가슴이 멍이 들었어요. 임산부 애들도 힘들었지. 너무 무리했지... 승냥이보다 못했어요.” (조OO, 남, 양강도)
▲북한 김정은이 2015년 10월 8일 나선시 수해복구 현장을 시찰하는 모습. 사진=뉴시스
7) 음식 제공 거부를 통한 살해
“제가 감방에 들어가니까 김OO라고 중국에 가서 기독교를 믿었다는 이유로 OO보안서 구류장에 있었습니다. 점심시간 돼서 밥이 들어왔는데 담당 계호가 ‘하나님 믿는 새끼는 밥 안 줘도 돼’ 하고서 밥을 안 주더라고요. 쟨 누가 취급하냐니까 보위부에서 취급한다고 하더라고요. 당시만 해도 OO보위부에 구류장이 없어서 보안서에 구류해 놨습니다. 그 젊은 아가 들어가서 3일 만에 죽었더라고요. 2002년에 사망했습니다. 그때 7~8월이니까 한참 덥잖아요. 엉덩이 밑에 구더기가 끓었거든요. 계호가 보더니 옆에 죄수 애들 시켜서 치우라고 하고 그러더니 꽁꽁 묶어서 질질 끌어가지고 갔습니다.” (김OO, 남, 함경북도)
(2) 자유권·존엄성 침해 실태 “인분 묻힌 고추를 먹으라고 강요... 하루 두 끼 먹기 위해 성폭행까지 당해왔다”
“그 언니가 예뻤어요, 보위지도원이 매일 (성폭행) 하다시피 했죠... 그런데 임신한 상태로
죽었어요, 밧줄로 묶여가지고 죽은 거예요”
▲2005년 8월 25일 서울에서 열린 반북 시위 도중 북한 군인역을 맡은 한 대학생(왼쪽)이 탈북자역을 맡은 다른 학생을 고문하는 장면을 연출하고 있다. 사진=뉴시스
2. 자유권·존엄성 침해 실태
개인의 존엄성 및 자유권 침해 사건은 2018년 7월 기준 4만 2924건이 보고되어 전체 사건의 60.1%를 차지하고 있다. 개인의 존엄성 및 자유권 침해 사건은 16개 전체 권리 유형의 2/3을 차지하고 있을 만큼 북한 인권 침해 사건의 절대적 비율을 차지하고 있다. 이것은 인권의 가장 본질적 부분인 신체의 자유를 포함하고 있는 자유권이 북한에서는 전적으로 보장되지 않고 있는 현실을 보여주는 것이다. 결국 북한 인권의 실질적 개선을 위해서는 북한 당국의 자유권에 대한 인식과 제도에 대한 개선이 우선되어야 함을 보여주고 있다.
유형별로 살펴보면 불법구금(63.1%), 고문 및 폭행(12.7%), 강제매춘 및 인신매매(9.3%), 납치/억류/유괴(5.4%), 불법체포(4.2%), 실종(4.0%) 순으로 나타나 불법구금이 최대 발생 사건으로 나타났다. 북한에서 개인의 존엄성 및 자유권 침해 사건은 불법체포와 구금, 그리고 구금시설에서 발생하는 고문 및 폭행이 전체의 79.9%를 차지한다.
해당 사건을 장소별로 분석한 결과, 보위부 및 안전부 조사 및 구류시설(30.7%)과 정치범수용소(11.3%)가 전체 42.0%를 차지하고 있어 이들 기관들이 개인의 존엄성 및 자유권 침해 사건 발생의 대표적 기관이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보위부 및 안전부 조사 및 구류시설의 비중이 높은 것은 1990년대 후반 대량 탈북 후 강제송환 되어온 탈북자를 조사 및 처벌하는 국경지대 보위부와 출신 지역 안전부에서 인권 침해가 많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해당 사건의 발생원인(죄명)을 분석한 결과, 국경관리범죄 44.3%, 형사범 24.1%, 정치범 18.5%, 연좌제 5.1%, 생활사범 2.0%, 경제범 0.8%의 순서로 나타났다. 국경관리범죄가 가장 높은 것은 1990년대 후반 탈북자들이 대량 발생함으로써 북한 당국이 탈북자 단속을 강화하고 이들을 강력하게 처벌하였기 때문으로 보인다.
1) 성적폭행
(1) 강간
“나는 부끄럽지만, 내가 2009년에 OOO 집결소에 왔는데 수감자 둘이 밤에 경비를 선단 말이에요. 보위원인 집결소 당비서라는 사람이 나에게 나오라고 하더라고요. 수감자는 윗사람 말 한마디에 나오라면 나오고 들어가라면 들어가니까. 따라갔더니 식당에 데리고 가서 소금을 그릇에다가 놓고 물 뜨라고 하더라고요. 얼빤해서(얼이 빠져서) 서 있으니까 ‘왜 안 해?’ 하면서 바지 벗으라고 하더라고요. 밑을 씻으라는 거예요. 가마를 걸었는데 그 옆에 자리에 옷을 벗고 누우라는 거예요. 내가 싫다고 하니, 강압적으로 올라타서 성행위를 하는 거예요. 강압적으로 하니까 창피스럽고, 어디다 (어떻게) 말해요? 그 후에는 많이 봐주더라고요. 나를 한 번 그랬으니까, 힘든 일도 아니 시키고. 내가 한국 노래 부른 것도 안 부른 걸로 해주고. 그런데 강간당한 사람이 나 하나만은 아니더라고요. 예쁜 아이들은 다 했대요.” (강OO, 여, 양강도)
▲2005년 8월 25일 서울 국가인권위원회 건물 앞에서 벌어진 반북시위 도중 두 여대생이 탈북을 시도한 북한 주민이 고문을 당하는 장면을 연출하고 있다. 사진=뉴시스
“보위부에서는 1년 있었는데, 한 달에 한 5~6번 정도 성폭행을 당했어요. 그 사람은 안전부 계호원이었어요. 보위부에서는 생활하지만 안전부 소속입니다. 이 사람이 성폭행했어요. 구류장 안에서 때리는데 어떤 때는 그 매를 안 맞기 위해서도 그렇고 하루에 두 끼씩 주는 것도 그 사람이 하라는 대로 안 하면 못 얻어먹잖아요. 그래서 성폭행당했어요. 카메라가 많이 있으니까 구류장 안에서는 많이 안 당했습니다. 그런데 정전 안 되면, 어떤 때는 전기 떼고 강간하고. 구류장에는 쇠창살이 있으니까, 가까이 오라고 해서, 나를 세워 놓고 젖가슴 만지고, 옷 다 벗기고 자기 성기를 그렇게 하라든지 했어요.” (이OO, 여, 함경남도)
(2) 성폭행
“한 번은 나를 보고 그러는 거예요. 그 나이 먹은 아바이가 나를 건너오라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안 가면 안 돼요 하고 나를 오라고 해서 계속 쳐다보니까 ‘이 간나 못 오겠나?’ 하면서 총을 꺼내 드는 거예요. 저희는 죄인이니까 죽일 권한이 있대요. 그래 계속 반항하기도 그렇고 해서 건너갔어요. 그래 자기는 눕고 나는 침대 끄트머리에 앉았는데 나를 보고 옷을 올리라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솔직히 옆방에 보위부 지도원들도 있고, 아무려면 옷티를 벗으라면 보다가 말겠지 이렇게 생각했어요. 그래서 더 올리라고 위협을 해서 올렸어요. 올리니까 갑자기 달려들면서 젖을 무는 거예요. 젖꼭지를. 근데 너무 순간에 무니까 아프니까 못 참겠더라고요. 창피하고 그걸 가릴 형편이 못 됐어요. 별난 괴상한 소리를 냈거든요. 그러니까 이 사람이 놀라서 떨어졌어요. 그게 그렇게 억울하더라고요. 2004년 10월달이에요.” (김OO, 여, 함경북도)
▲2015년 3월 3일 오전 서울 중구 한국프레스센터에서 탈북여성단체 뉴코리아여성연합 주최로 열린 '북한여성들의 인권실상을 알리고 인권개선 및 그 가해자 처벌을 위한 기자회견'에서 탈북여성들이 북한에서 겪은 인신매매와 성폭행 등 실태에 대해 증언하고 있다. 사진=뉴시스
“그 언니는 형을 15년 받고 들어왔는데 OO교화소에서 한 5년 정도 살았더라고요. 그 언니가 예뻤어요. 담당하던 보위지도원이 있었는데 그 사람이 거의 뭐 매일 (성폭행) 하다시피 했죠. 그런데 그 언니가 임신을 해서 한동안 복잡했어요. 그러다가 이제 보안과로 막 불려다니고 막 그랬거든요. 그런데 임신한 상태로 죽었어요. OO반에서 그 언니가 거기서 밧줄로 이렇게 묶여가지고 죽은 거예요. 2003년도예요. 근데 누가 죽였는지도 모르죠. 거기는 매일 선생님들한테 성폭행당하고 산다고 보면 돼요. 특히 OO반 같은 데는요.” (현OO, 여, 함경북도)
(3) 성추행 및 성희롱
“2010년 6월 정도에 군 보안서에 넘겨졌어요. 군 보안서 오니까 보위부에서는 그런 게 없었는데 군 보안서에서는 성추행이랄까 그런 경험이 있어요. 예심지도원이랑 단둘이 대화를 하는데 우리는 죄수복을 입으니까 앞이 헐렁헐렁한 옷을 입습니다. 앞에 손을 넣어서 가슴을 막 만지고 또 마지막에는 일어나서 나갈 때는 밑에도 손 넣고. 반항을 할 수가 없어요. 우리가 어떤 형을 먹는지는 그게 다 펜대 놀음이니까요. 들어갈 적마다 그렇게 하는데. 참는 수밖에 없죠.” (강OO, 여, 양강도)
2) 심리적 폭행 및 위협
“2008년도에 한국 드라마를 본 죄로 단련대에 구금되었습니다. 예심을 들어가기 전이었습니다. 기본 취급에서 그저 잠을 재우지 않고 수시로 깨워서 쓰게 하였습니다. 제대로 안 쓰면 크게 때리지는 않았지만, 말로 심하게 위협하고 협박하였습니다. 근데 성인 녹화물 같은 보지 않은 것도 인정하라고 막 강요하였습니다. 잠도 재우지 않았습니다.” (박OO, 여, 함경북도)
3) 불법구금
“2015년에 자식을 데리고 한국으로 오려고 하다가 잡혔어요. 경비대에 돈 다 줬습니다. 경비대가 자기가 돈을 받아먹고서는 보위부에 신고했습니다. 그러니까 중국 넘어도 못 서봤습니다. 물 닿기 전에 잡혔습니다. 아이들이랑 같이 잡혔습니다. 아이들은 석방 받고 저만 들어갔어요. 들어가서 구타를 당했어요. 손으로 때리고 발로 차고. 그러니까 솔직하게 안 말한다고. 시 보위부에서 20일 있었어요. 도 보위부에는 4개월 20일 정도 있었어요. 맞으면서도 끝까지 중국에 가려고 한 거라고 해서 교양처리 받았습니다. 당시에는 방침이 떨어져서 ‘99% 범죄, 1% 양심’이라고 해서 저한테 1%의 양심이 있다고 교양처리를 했습니다. 한국으로 다시는 안 간다라는 지장 찍고 왔습니다.” (정OO, 여, 함경북도)
▲2010년 5월 15일 오후 서울 종로구 인사동에서 북한정의연대 주최로 열린 'Rescue NK캠페인'에서 참가자들이 북한이 주민에게 기아로부터의 자유, 표현의 자유, 고문으로부터의 자유, 이동의 자유를 보장해 줄 것을 요구하는 퍼포먼스를 하고 있다. 사진=뉴시스
“교화소는 비료가 없었어요. 다 손으로 생 인분을 남새 포기에 놓았어요. 그러다가 조그마한 고추가 있었는데 따서 입에 넣는 거를 초병이 봤어요. 그래서 오라고 했어요. 갔더니 손에 쥔 게 뭐냐고 했어요. 거짓말 할 수 없어서 고추라고 했어요. 몇 개만 땄다고 했어요. ‘먹겠니?’ 했어요. 그래서 내가 이왕 딴 거 먹겠다고 했어요. 내가 처벌받을 거 생각하고 먹겠습니다 했어요. 인분 장갑에 똥이랑 비벼서 똥 비빈 고추를 먹으라고 했어요. 그거를 어떻게 먹습니까. 그래서 못 먹겠다고 하니까 ‘아 새끼’ (하면서) 구둣발로 찼어요. 사람이 그때 이렇게 태어나서 짐승보다 못하다는 거를 뼈저리게 느꼈어요.” (최OO, 여, 양강도)
4) 고문 및 폭행
“간첩 혐의로 OO보위부 지하 감방에 3개월간 구금되었습니다. 독감방입니다. 기본 하루에 4시간만 재우고 새벽 4시에 깨워서 팔굽혀펴기 수천 개를 시킵니다. 하고 나면 아침 7시가 됩니다. 밥을 먹으면 8시 반부터 살창에 제일 꼭대기에 가장 큰 족쇄가 있어서 거꾸로 매달리게 합니다. 손이 땅에 안 닿습니다. 40분간 해야 합니다. 40분이 40시간보다 더 오래가는 거 같습니다. 피가 거꾸로 몰리니까 토하고 그럽니다. 땀이 막 나고 오줌이 막 다 나온단 말입니다. 보위부원들이 철장 밖에서 왔다 갔다 하면서 비판하라고 그럽니다. 그거 하고 나면은 눈이 새빨개지고 몸이 퉁퉁 붓고 그럽니다. 끝나면 밥을 먹고 조금 쉬었다가 앉았다 일어나기를 3000개 시킵니다. 그래도 부인하면 담뱃불로 손을 지지기도 하고 전기 고문도 시킵니다. 참나무 몽둥이로 맞아서 손목뼈가 부러지기도 했습니다.” (김OO, 여, 평안북도)
(3) 생존권·건강권 침해 실태 “모자가 부둥켜안고 길에서 餓死... 교사·과학자·기술자도 굶어 죽어 소달구지에 실려 갔다”
“해안려관이 구호소였는데 그 안에서 아이를 가두어놓고 다 굶어죽게 해요. 제 조카 둘과 동생도 여기서 시체를 찾았거든요”
▲2011년 북한 덕천역 앞 쓰레기 더미에서 수거해 온 음식 꺼내 먹는 북한 아이들. 사진=당시 한나라당 정옥임 의원실 제공
3. 생존권·건강권 침해 실태
생존권(식량권) 침해 사건은 2215건으로 전체 사건규모(7만 1473건)의 3.1%를 차지하고 있다. 이는 북한 주민들의 생존권 침해 사건은 개인의 존엄성 및 자유권(60.1%), 이주 및 주거권(13.6%), 생명권(10.7%), 피의자와 구금자의 권리(4.1%)에 이어 적지 않은 비중을 차지함으로써 주민들의 생존권이 여전히 위협받고 있음을 의미한다.
식량권 침해 사건 중 아사(餓死)가 차지하는 비율이 94.8%(2099건)로 매우 높게 조사되었으며, 영양결핍으로 인한 질병(2.8%, 63건) 및 영양결핍으로 인한 고통(1.5%, 34건), 식량제공 거부 및 감량(0.9%, 19건)은 1% 정도로 매우 낮게 나타났다. 이는 1990년대부터 지속된 북한의 경제난과 배급체계의 와해로 인해 주민들의 식량권이 심각하게 침해당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특히, 주민들의 식량권 침해가 단순히 식량제공 거부나 영양결핍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대부분 굶주림으로 인해 죽음에 이르게 되는 사회, 경제적 상황을 반영하고 있는 것으로 분석된다.
아사에 비해 다른 유형들, 즉 영양결핍으로 인한 질병, 영양결핍으로 인한 고통, 그리고 식량제공 거부 및 감량은 매우 낮은 비율로 조사되었다. 그 이유는 북한의 심각한 식량 사정과 붕괴된 인민경제 영향으로 영양결핍 등의 허약 증세가 많은 경우 아사로 귀결되기 때문으로 보인다. 따라서 이는 북한의 사회, 경제적 환경에서 식량 사정이 그만큼 심각함을 나타내는 것이며, 결국 주민들의 생존권(식량권)이 크게 위협받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건강권 침해 사건은 767건으로 전체 사건규모(7만 1473건) 중 1.1%를 차지하고 있다. 법적으로 ‘무상치료제’를 표방하고 있는 북한에서 건강권 침해 사건 발생 비율이 해마다 적지 않은 비율로 나타나는 것은 제도를 뒷받침할 수 있는 시스템이 무너졌기 때문이다. 무상치료제를 뒷받침하는 시스템에는 치료 시설이나 인력, 병원의료 및 치료 체계 등이 포함된다. 건강권 침해 사건의 조사 결과, 이러한 시스템이 전반적으로 무너져 있음을 알 수 있다.
▲1997년 7월 11일 당시 서울 명동 조흥은행 앞에서 북한동포돕기 100만 인 서명 운동이 진행됐다. 사진=조선DB
특히, 주목할 것은 치료 시설과 인력이 부족해서 치료를 받지 못한 경우(154건, 20.1%)보다 시설과 인력은 있어도 환자가 치료를 거부당하거나 병원의 치료가 미비하여 건강권을 침해당한 경우(613건, 79.9%)가 월등히 높게 나타나는 것이다.
적정치료 거부 및 미비는 북한의 경제난으로 인한 의료 및 약품체계의 붕괴, 의료 서비스에 대한 계층별 불균등한 접근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병원의 의사와 간호사들은 당국으로부터 적정한 임금을 받지 못하기 때문에 환자가 돈을 가지고 와야 치료를 해주는 상황이 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자연히 돈이 많은 특권계층들은 손쉽게 의료 혜택을 받을 수 있다. 반면에 돈이 없는 일반 주민들의 경우 치료비를 낼 여건이 안 되어 의료 혜택을 받지 못하는 경우가 다반사이다.
1) 아사
“장사 다니면서 죽은 사람 많이 봤어요. 함흥역전이라든지 죽은 사람들 얼굴을 흰 종이로 싹싹 가려놓고 그랬어요. 1995~96년도는 가는 곳마다 시체였어요. 그저 관도 없이 둘둘 말아서 소달구지에 실어가고. 그때는 아까운 사람들이 많이 죽었다고요. 과학자, 기술자, 교원들이 많이 죽었어요. 중학교 교원은 아이들을 통해서라도 먹을 것을 얻고 그랬는데 대학교 교원들이 많이 죽었어요. 김OO과 리OO이 OO중학교 교원인데 연로 보장 받아서 나왔다가 고난의 행군 시기에 책을 보면서 죽었어요.” (박OO, 여, 함경북도)
“친동생을 2001년에 함경북도 청진시에서 찾았는데 친동생 남편은 이미 죽었고 동생은 남자아이 두 명이랑 모두 누워서 죽어 있었어요. 길에서 아이와 엄마가 부둥켜안고 죽어 있었어요. 해안려관이 구호소였는데 그 안에서 아이를 가두어 놓고 다 굶어 죽게 해요. 길거리에 다니면 나라 망신이라고. 제 조카 둘과 동생도 여기서 시체를 찾았거든요. 조카는 9살, 7살이에요. 청진시 시설관리소가 있는데 거기서 하는 일이 아침에 죽은 시체를 시내에서 치우는 일을 해요.” (주OO, 여, 함경북도)
2) 영양 결핍으로 인한 질병
“꽃제비구호소(구제소)라고도 부르는데 하루 일과라는 게 먹고 체조 받은 것이 다입니다. 말도 못하고 그냥 가만히 있습니다. 강냉이 25~30알 주고 아이들 무릎 꿇고 벌 받고 있습니다. 거기선 꽃제비가 꽃제비를 교양한단 말입니다. 자그마한 교화소라고 할 수 있죠. 나갈 수 있는 건 자기 고장에서 데리러 올 때까지 기다려야 합니다. 그러니까 애매하게 기다린단 말입니다. 허약 걸려 죽는 게 한 달에 몇 번을 봅니다. 나도 영양실조 만나가지고 3단을 7번~8번 만났댔습니다. 영양실조 3단에 걸려봤댔는데. 나는 살 놈인지 마지못해 죽을 거 같았는데 끝까지 살았습니다.” (이OO, 함경남도)
▲북한의 대표적인 감 생산지인 강원도 안변군 주민들이 곶감을 만들기 위해 감을 깎고 있다. 사진=조선중앙TV 캡처
▲정월대보름을 맞아 북한 평양 시내 선교민족식당에서 민족 음식을 즐기는 평양 시민들. 사진=조선중앙TV 캡처
▲1999년 12월 5일 잘 곳이 없어서 중국 옌지 시내 건물 계단에서 잠을 자는 꽃제비들. 사진=조선DB
3) 영양 결핍으로 인한 고통
“먹은 것은 겨 가루에다 강냉이 가루 비빈 것을 한 수저씩 준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아버지가 말하는 것이, 예심기간에는 죄가 크지 않아도 6개월을 앉아 있어야 한답니다. 그래서 거기서 벌써 걷지 못하게 됐답니다. 교화소에 가서 나중에 걷지를 못하니까 내놨고, 내가 가서 아버지를 업고 나왔습니다. 아버지가 완전히 가뿐해졌습니다. 살이 빠졌습니다. 그래서 교화소에서 OO역까지 내가 업고 나왔습니다.” (장OO, 여, 황해북도)
4) 식량 제공 거부 및 감량
“1997년 흉년으로 식량난이 가중되어 김OO 가족(아버지, 어머니, 김OO, 여동생, 남동생 등)은 1년 배급량 중에 480㎏(기존 배급량의 40%)만을 배급받았으며, 그중 250㎏을 인민군에게 강제 지원하였습니다.” (김OO, 남, 함경북도)
5) 적정 치료 거부 및 미비
“남편은 간이 곪았는데 처음에 진단을 잘못 받아서 머리 열나고 그러니까 진료소에서는 감기인가 해서 감기약을 줬는데 몸에서 발작이 와서 다시 군 병원에 갔는데 수술이 잘못돼서 10일 만에 그 밑에를 째서 수술했는데 또 성과가 좋지 않았습니다. 20일 동안 수술을 3번이나 했는데 사람이 살아납니까? 사람이 죽게 생겼으니 평양에 데려가려고 했더니 군 병원에서 안 보내줬습니다. 자기들이 환자를 이렇게 만들어놨으니까 시끄럽게 되는 게 부담스러워서 그런 것 같습니다.” (최OO, 여, 평안남도)
“2015년 8월달에 남동생이 군사 복무 3년 정도 남았는데 손을 다쳐서 병원에 입원했어요. 병원에서 약을 주지 않고 자체로 해결하라는 거였어요. 군사 복무 힘들어해요. 배고프지, 다치면 약품도 없지. 통나무 메고 나르다가 떨어져 넘어지면서 붓고 손가락뼈가 어긋나고 괜찮다고 끊어진 것 아니니 병원에서 자체적으로 해결하라 했는데 돈이 없어서 저한테 전화했어요. 어떻게 해결했는지는 모르겠어요. 10년 군사복무 동안 배고픔을 참아야 하니까 힘들어했어요. 5년에 한 번 휴가 있지만 돈으로 지원해 줘야 할 수 있다. 대한민국의 지원에 대해 북한 주민은 몰라요.” (장OO, 남, 함경북도)
▲1997년 중국 허룽시 숭선진에서 바라본 북한 함북 무산군 인광리. 배낭을 멘 채 허리를 90도가량 굽혀 힘겹게 걷고 있는 할머니 앞에 '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 만세'라는 글귀가 눈에 띈다. 사진=조선DB
6) 적정 치료 시설 및 인력 미비
“1998년도 미공급 때에 그때 당시 위생이란 게 없었어요. 그때 시집에 있을 때 앓았었어요. 영양이 없으니까 쓰러지더라고요. 8~9월달에는 장티푸스 걸려서 엄마 집에 누워 있었어요. 세 번 쓰러졌어요. 난 돈이 없으니까 장마당에 레보노닌 약 먹으면 낫는데 난 못 먹고. 난 목숨만 안 떨어지고 다 죽은 상태예요. 저희 어머니가 우는 소리 들리는데 의식은 없고 하루는 저희 어머니가 보약이라고 해서 먹었는데 우리 남동생 아이 9달인데 남동생 아이 똥을 불에 구워서 그걸 먹인 거예요. 그래서 무슨 맛인지도 모르고 먹었어요. 그때 병원도 갔었는데 침대도 없고, 병원 앞마당에 사람이 장티푸스로 한 가득 이어서 못 들어가요. 치료, 약도 못 받고. 들어가지도 못해요. 언니가 날 바깥에 눕혀 놓고 자기가 줄 서서 날 안고 기대서 세우게 하고. 투시(기관지, 화병) 한 번 받고, 약은 못 받고. 병원 자체에도 약이 없었어요.” (연OO, 여, 함경남도)
(4) 노동권 침해 실태 “새벽 3시부터 밤 11시까지 시멘트·통나무 운반... 월급은 ‘5원짜리 강냉이 국수’ 한 그릇이 전부”
“‘노동해방’ 체제라면서, 영하 30~40도 엄동설한에 벌목공들은 새벽부터 죽기 살기로 일했다... 퇴비 더미에 3명이 깔려 죽어도 구출 시도조차 없었다”
/사진=조선DB
4. 노동권 침해 실태
노동권 침해 사건은 1716건으로 조사되어 전체 사건 규모의 2.4%를 차지하고 있다. 직위해지 및 강등 사건이 426건(24.8%), 임금체불 281건(16.4%), 강제노동으로 인한 침해 264건(15.4%), 열악한 작업환경(이로 인한 신체훼손 포함)으로 인한 사건 226건(13.2%), 직업선택의 자유 침해 224건(13.1%), 승진차별 134건(7.8%) 등으로 조사되었다.
북한은 여타의 사회주의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체제 수립 시기부터 ‘노동’을 강조하며 이른바 ‘노동자의 국가’를 전면에 내세우고 완전고용, 후생복지, 노동해방 등을 주장해 왔다. 그러나 북한 노동자들이 자유롭게 직장을 선정하고 적정한 임금을 받으며, 안정된 생활에 부합하는 배급과 생필품 보급, 복지혜택을 받은 적은 없는 것으로 보인다. 즉 북한이 내세우는 노동자 국가 이미지와 실제의 북한에서의 노동현실 간에는 매우 큰 괴리가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2003년 5월 북한 노동자들이 러시아 극동 지역의 한 제재소에서 일하는 모습. 사진=AP/조선DB
노동권 침해 사건의 발생 원인을 살펴보면, 연좌제 596건(34.7%)과 생활사범 505건(29.4%)이 가장 높은 비율로 조사되었다. 직업선택의 자유침해, 고용차별, 승진차별, 직위해지 및 강등 등의 가장 비율 높은 사건의 원인이 연좌제로 조사되었다는 것은, 북한 사회의 구조상 토대와 성분, 가족과 친인척의 죄로 인해 자신의 능력과 상관없이 노동권 침해를 당하는 사례가 많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집안 내력과 아버지의 직업에 따라 직장이 배치되고, 토대와 성분이 좋지 않다면 평생 단순 노동자로 살아야 하며, 잘못한 일이 없어도 가족과 친인척의 잘못 때문에 갑자기 자신의 일터에서 쫓겨나 생계에 어려움을 겪어야 하는 현상이 북한에서는 구조화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노동권 침해 사건은 연좌제 외에도 생활사범, 국경관리범죄, 경제범의 비율이 높게 나타난다. 이것은 북한에서 노동권 침해 사건의 원인(죄명)은 다양하게 적용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1) 직업 선택의 자유 침해
“직장 정할 때는 졸업 당시 자기 희망 적으라고 해요. 그런데 자기 희망한 데는 하나도 보내지 않았어요. 저는 졸업할 때 유치원 교양원 하고 싶다고 자기 희망원 써냈었는데 종축장에서 한 10년 일하고 결혼했어요. 종축장은 돼지를 키우는 곳이었어요. 저는 거기서 돼지사료를 포장하는 작업반에서 옥수수 농사도 짓고 콩 농사도 짓고 그랬어요.” (리OO, 여, 함경남도)
▲2011년 6월 9일 평양의 만수대지구 건설 현장에서 북한 건설자들이 일하고 있다. 사진=조선DB
2) 고용차별
“아버지가 당원이었지만 사람이 온전치 않으니깐 천대받고 그랬어요. 아버지는 군대 제대하고 OO탄광 화약고(화약을 만드는 공장)에서 근무를 서고 있다가 보위부에 죄인이 있어서 호송하러 나갔다가 중간에 차 사고로 다리를 다쳤어요. 이때부터 차별을 많이 받은 거죠. 아빠가 그렇게 되니깐 사람들이 본 체도 안 하고 도와주지 않았어요. 사고 나니깐 직장에서 나왔어요. 한 달에 배급을 얼마씩 준다고 했는데, 처음에 1년은 꼬박 받았는데 그다음부터는 1년에 2~3번. 그 배급 가지고는 식구들이 못 살잖아요. 그래서 아빠가 OO에 염소 밥 먹이러 들어갔는데, 거기서 반장이라는 사람이 아빠를 천대했어요. 이름은 거기다가 걸어놨지만, 사람이 일하고 싶어 해도 안 받아줬어요. 다리 하나를 완전히 못 썼어요.” (김OO, 여, 함경북도)
3) 임금체불
“월급은 한 달에 양성공이면은 1300원이고, 기계공은 실적에 따라 많으면 3300원이었어요. 저는 3000원 받았어요. 꼬박 받았는데 매달 주지 못하고 몇 달씩 밀려가면서 줬어요. 인민군대 지원비, 청년동맹비, 인체보험비(매달 300원, 사대보험비) 등 내는 게 많았어요. 떼기만 하고 한 번도 받아본 적이 없어요. 그리고 공장에서 제기되는 사회적 과제가 많았어요. 봄이 되면 나무 심기를 하고. 이런 게 너무 셀 수 없이 많았어요. 이런 거 떼고 나면 노임이 없어요. 한 달에 노임 탄 게, 잘하면 강냉이 국수 한 그릇 사 먹을 정도만 나왔어요. 그때 강냉이 국수 한 그릇에 5원 정도만 받았어요. 그것도 상당한 거였어요. 그것도 미누수 될 때가 태반이었어요. 그런 명목으로 다 제외했어요. 70~80 정도가 미누수였어요. 미누수는 월급이 3000원인데 다 제외해도 500원이 모자라면 다음에 또 제외해야 하는 경우예요.” (김OO, 여, 황해남도)
▲최초로 공개된 북한 제16벌목소의 빵통(벌목공 숙소) 내부. 당 간부들 머리 위로 김일성, 김정일 부자 초상화가 붙어 있다. 사진=조선DB
▲2007년 8월 27일 제복을 입은 북한 건설 노동자들이 평양의 김일성 동상에 헌화하기 위해 꽃을 들고 이동하고 있다. 사진=뉴시스
▲2011년 1월 7일 북한 매체 조선중앙통신은 북한의 중앙기관 정무원들이 농장벌에서 그해 첫 금요 노동을 하고 있는 사진을 보도했다. 사진=조선DB
“한 달에 한 번씩 나올 때도 있고 2~3달에 한 번씩 나올 때도 있었다. 우리 소대가 이번 달에 몇 입방을 했다 하면 사업소에 다 기록이 있다. 대표부에다 돈을 넣어 줘야만 월급을 다 내어 주는데 어떤 때는 미루는 경우가 있다. 그런 경우는 2~3달씩 미루는 경우가 있었다. 벌목공들은 산에 올라가서 죽기 살기로 엄동설한에 일을 한다. 영하 30~40도 내려가는데 신새벽에 벌써 5시 반, 6시면 나가서 저녁 9시 반까지 일을 한다. 겨울에 산에 올라가서 그렇게 죽도록 일해도 한 달에 100불(한국 돈 10만 원)도 못 벌거든요.” (박OO, 남, 양강도)
“2011년 7월부터 탄광에서 막일을 했습니다. 밖에서 삽질도 하고, 청소도 했습니다. 월급은 한 번도 못 받았고, 한 달에 강냉이 7킬로그램 정도씩 배급받았습니다. 생활이야 자기 집에서 텃밭하고 소토지 해서 강냉이로 1년에 1톤 정도 생산했습니다. 탄광에 매일 나가지는 않았고, 농사철에는 (농사할) 시간도 좀 받았습니다.” (양OO, 여, 함경남도)
4) 강제노동
“일은 누구나 다 해야 해요. 허약해서, 지네 연세가 많은 노인들, 그런 사람들도 웬만한 일은 다 해야 합니다. 저는 군 안전부 안에 경비소 같은 건물 짓는데, 거기 건설 나갔습니다. 또 안전부에 부업지가 있습니다. 강냉이나 콩이나 심고, 거기 가을철에 잡혔으니까 그거 일 해오고, 배추 다 수확해 들여오고, 안전부 청사 안에 횟가루 칠하고, 매 칸마다 돌아다니며 청소하고. 무보수 노력이니까 힘들어도 일이 많습니다.” (김OO, 여, 양강도)
5) 승진차별
“아버지는 좀 토대 차별을 당했어요. 지금 놓고 보면 그때 나는 어릴 때라 잘 몰랐는데, 자꾸 부모가 다퉈요. 엄마한테 오빠가 있었는데 월남을 했어요. 월남자 가족이었죠. 아버지는 노동당 가족이었죠. 아버지가 간부로 못 등용됐지요. 아버지는 기관지 천식으로 약 하나 써보지 못하고, 바쁠 때라 약도 못 구해서 죽었어요.” (박OO, 남, 강원도)
▲2013년 11월 TV조선 프로그램 <투데이 북한 사이드 스토리>에 나온 북한 주민들의 가을걷이 모습. 사진=TV조선 캡처
6) 열악한 작업환경(신체훼손 포함)
“제가 아는 친구가 교화소에서 일하다 죽었습니다. 부식공으로 일하고 있었는데 2008년 1월에 그날따라 비가 와서 나무가 젖어서 제 시간에 국을 못 끓였습니다. 그래서 선생이 현장 퇴비 작업장에 보냈는데 일을 하다가 퇴비가 무너지는 바람에 3명이 깔렸는데, 거기서 죽었습니다. 구출도 하지 않았습니다. 당시 제 친구와 함께 있었던 여자가 친구 옆에서 함께 작업했었는데, 후에 그 친구가 우리 집에 찾아왔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죽었는지 알게 되었습니다.” (이OO, 여, 평안남도)
“저는 교화소에 수감되었는데, 거긴 새벽 3시 기상하여 벽 만드는 미장에 필요한 돌을 날랐어요. 돌을 나르는데 먼지가 많이 날려서 폐병도 많이 생겼습니다. 잠은 11시에 자고 50㎏ 되는 시멘트도 나르고 애들이 힘들어서 많이 죽었어요. 저는 집 짓다가 갈비뼈를 다쳤어요. 2003년 가을에 아파트 짓는 곳에서 짐을 단가에 들고 옮기다가 2층에서 떨어졌어요.” (김OO, 여, 함경남도)
“림산에 가서 일하는데 정말 노예 노동을 강요당했습니다. 거기는 첫눈부터 녹지 못해서 쌓이다 보면 산에 가면 허리에 찹니다. 저는 통나무를 끌었습니다. 뜨락또르가 있긴 하는데 계속 고장 나고. 와이어로 나무를 끌어야 하는데 그렇지 않으면 사람 인력으로 끌어야 하는데, 5m 원목을 무조건 산에서 몇 대씩 끌어내리게 합니다. 아침에 여름에는 8시부터 하고 겨울에는 7시 30분부터 합니다. 7시까지 가야 합니다. 나무를 하다 보면 없어지니까 계속 멀리 가게 됩니다. 나무를 밧줄로 해서 산꼭대기로 해서 뜨락또르 길까지 끌어야 하니까 한 150m 끌어야 합니다.” (김OO, 남, 양강도)
▲1996년 6월 29일 북한 양강도 대홍단군 삼장노동자구세관 옆 도로에 세워진 트럭 아래로 3명의 북한 여성이 근심스런 표정으로 무언가를 기다리고 있다. 그 옆에는 짐꾸러미를 정리하는 남자들의 다리가 보인다. 사진=조선DB
7) 직위해지 및 강등
“아버지가 최OO라고, 그 당시 기업소 소장을 했거든요. 아들이 한국행 기도죄로 관리소에 간 다음에 지금 현재 도시경영사업소 노동자로 있습니다. 아들이 북한으로 잡혀 나오면서부터 해임됐습니다. 해임과정은, 북한에서는 자식이 이렇게 되면 군당에서 발령을 내리거든요. 그러면 끝이죠. 해임과정이라는 특별한 게 없죠. 자식을 잘못 키웠다는 걸로 해임됐습니다.” (김OO, 남, 함경북도)
8) 적정 노동시간 및 노동연령 위배
“여름에는 새벽 네 시 반에 깨워가지고, 하루에 내가 로동을 17시간을 했는지 18시간을 했는지. 여름에는 김매는 게, 강냉이가 얼마나 키가 큽니까. 그 사이를 김맬 때 얼굴이 다 긁히지. 감시병이 계속 감시를 하고. 비 오고 눈 오고 하는 날에는 일 좀 안 시켰으면 좋겠는데 그러거나 말거나 계속해서 일을 시킵니다.” (최OO, 여, 함경북도)
“탄광 일하는 시간은 끝이 없습니다. 자들은 뭐 100일 전투, 120일 전투, 300일 전투 그걸 많이 한단 말이오. 하나 끝나면 또 하고, 하나 끝나면 또 하고 그걸 많이 합니다. 그러니까 아침에 출근해서 갱내 들어가면 갱내 들어갈 적에 ‘너희 300톤 하고 나오라!’ 딱 과제 받고 들어간단 말이에요. 그걸 못하면 다음 교대가 오후 교대가 4시쯤 들어온단 말이에요. 그 사람들 들어와서 그냥 놉니다. 그냥 앉아서 우리가 계획할 때까지 놀다가 계획 끝나고 우리 나와서 그 사람들이 2차 들어가면 밤에 밤교대가 또 들어온단 말이오. 그러니까 갱내에서 그냥 살아야 됩니다. 원칙적으로는 8시간 노동이고 3교대로 하지요. 그런 건 의미가 없습니다. 그리고 전투가 끝난 다음에 아침 교대가 들어가고 집에 들어오면 보통 10시, 11십니다.” (고OO, 남, 함경북도)
▲2009년 12월 19일 북한 매체 조선중앙TV는 당시 김정일이 함경북도의 김책제철연합기업소와 청진광산금속대학을 현지지도했다고 보도했다. 사진=조선중앙TV 캡처
“아침 5시 반에 일어나서 저녁 10시 반에 들어와요. 11월부터 4월까지 동절기인데, 11시 되면 들어가요. 휴일이 없으면 없는 거예요. 한 달에 한 번이나 있으면. 날씨가 바람이 너무 불면 일 못해요. 나무가 잘 못 번지니까. 한 달에 한두 번. 쉬는 것도 없어요. 눈보라 쳐도 일하죠.” (김OO, 남, 강원도)
(5)·끝 재산권·재생산권 침해 실태 “소독도 안 된 감옥에서 강제 낙태 수술... 보위부는 칼로 각을 떠서 아이를 없앴다”
“돈을 모아 아들에게 사준 귀한 컴퓨터, 5개월도 안 돼 빼앗겨... 집에 있는 돈 다 가지고 (보위부에) 손발 닳도록 빌었다”
▲중국 사이트 '바이두' 네티즌들이 북한 김정은을 우스꽝스럽게 묘사해 놓은 이미지다. 평양의 한 윤활유 공장을 방문한 김정은이 기계에 북한 주민을 몰아넣고 고혈을 짜내는 모습이다. 사진=바이두
5. 재산권, 재생산권 침해 실태
재산권 침해 사건은 총 661건으로 전체 사건 규모의 0.9%로 조사되었다. 재산권 침해 사건의 사건 원인(죄명)을 분석한 결과, 재산권 침해 사건의 66.6%라는 높은 비율이 경제범죄로 분류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국가기관과 국가기관원이라는 명목으로 인민들 개인의 재산권을 침해한 사건들은 그 자체로 중대한 경제적 범죄 행위로 파악할 수 있다. 또한 재산권 침해 사건의 7.1%는 국경관리범죄로 분류되었는데, 이는 국경지역에서의 중국과의 밀수, 밀매 행위에 있어 국가기관의 단속과 검열이 기생적으로 벌어지고 있는 현재 북한의 현실을 보여주는 것이다.
북한에서는 중국과의 비법적 밀수, 밀매 과정에서 인민이 밀수와 밀매를 해오면 권력기관의 구성원이 배경과 권력을 이용해 단속 등으로부터 보호해 주고 이득의 일정 부분을 뇌물로 받아 챙기는 일종의 공생적 관계가 만연해 있다. 그러한 공생관계를 시기, 모함, 협박하여 또 다른 뇌물을 요구하거나 재산을 갈취하는 국가기관원들도 늘어나고 있어 국경에서 중국과 밀수, 밀매를 하며 경제생활을 영위하는 많은 주민은 항시 재산권 침해의 가능성으로 인하여 불안정한 삶을 살고 있는 것이다.
재산권 침해 사건의 발생 장소를 살펴보면, 피해자의 집이 318건으로 전체 발생 장소의 48.1%를 차지해 가장 높은 비율로 조사되고 있다. 이는 북한에서 개인 집이 현금과 장마당 매매 물품, 장사 물품의 보관소이기 때문에 국가기관의 단속, 검열이 개인 집으로 집중되었음을 보여준다. 또한 보위부 및 안전부 조사 및 구류시설에서 발생하는 재산권 침해 사건이 91건(13.8%)으로 나타났는데, 이는 강제송환된 탈북자와 수감자가 보유했던 금품 및 물품을 구금시설 내에서 강탈한 것을 의미한다.
한편 재생산권 침해 사건은 2018년 7월 기준 389건으로 전체 사건 규모(7만 1473건)의 0.5%에 해당한다. 재생산권이란 출산을 할 권리, 출산을 하지 않을 권리, 사적인 영역으로 보호받을 권리, 차별과 위협으로부터 보호받을 권리 등을 들 수 있다. 재생산권의 권리 침해 유형으로는 강제불임, 강제피임, 강제낙태, 강제임신, 강간·성추행·생식기 훼손 및 이로 인한 감염 등 5가지가 있다.
▲북한의 어린 아이들이 땔나무를 베어 짐을 지고 가고 있다. 사진=뉴시스
특히 강제낙태는 인간 생명권에 대한 심각한 위협일 뿐만 아니라 모성 건강에도 악영향을 미치는 중대한 인권침해 행위이다. 서구 사회에서 선택적인 ‘낙태’는 종교적, 이념적 신념에 따라서 중요한 쟁점이 되고 있다. 그러나 강제낙태는 어떠한 사유에 의해서도 허용될 수 없으며, 특히 인종적, 민족적, 종교적 차이를 배경으로 행해질 경우 더욱 강한 비판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다. 현재 북한에서의 강제낙태는 국내에서 임신한 임신부에게 발생하는 경우는 많지 않으며, 대부분 중국에서 임신 상태로 강제 송환된 탈북 여성들을 상대로 구금시설에서 벌어지고 있는 사건들이다.
재생산권 침해 사건이 발생한 사건장소를 분석한 결과, 서비스기관 혹은 정부기관이 103건(26.5%)으로 가장 많았고, 그다음으로 보위부 및 안전부 조사 및 구류시설 101건(26.0%), 집결소(교양소) 93건(23.9%), 단련대 36건(9.3%), 교화소 9건(2.3%), 정치범 수용소와 피해자의 집 각 5건(1.3%) 순으로 나타났다.
1) 재산권 침해 사례
(1) 강탈/절도(국가기관원)
“제가 2003년 비법월경죄로 강제송환 당해 무산군 군 보위부에 갇혀 있었습니다. 같은 감방에 있던 여자 하나가 중국 변방대에서 뺏기지 않고 돈을 가지고 나온 게 있었는데 거기 나와서 다 빼앗겼습니다. 이 여자가 돈을 달라고 몇 번 했습니다. 그랬다고 얼마나 맞았는지 3일을 돈을 달라 했는데 4일째는 돈 달라 소리도 못했습니다. 집이 백암군에 있는 아이인데 청진시 도 집결소 나와서 죽었습니다. 군 보위부에서 맞은 어혈 때문에 죽은 것입니다.” (김OO, 여, 평안북도)
▲2010년 8월 21일 압록강이 범람, 북한 평안북도 신의주시와 그 일대가 침수되는 등 홍수 피해를 입었다. 사진=조선중앙TV 캡처
“돌 지난 아이를 둔 아줌마가 앉아서 울고 있어서 ‘아주머니 왜 울고 있는가’ 했더니, 자기는 일을 도와주러 가는 길이었는데 좀 전에 군인 세 명이서 짐을 빼앗고 그 아주머니 젖을 빨아먹었다고. 그래서 보안서에 가자니까 보안서라는 게 다섯 개 리가 합쳐서 하나 있거든요. 어디서 그랬냐니까 령 꼭대기에서 그랬다고 하더라고요. 소름이 끼치더라고요. 나도 넘어가야 하는데 주머니에 돈이 많으니까. 이런 이야기를 많이 들은 사람들은 보통 다섯 여섯 명씩 모여서 건너가요.” (임OO, 여, 양강도)
“2015년도에 장인어른이 한국에 있는 처제에게 돈을 지원받고 옷깃에다가 돈을 감추고 오다가 국경 경비대에게 잡혔다고 합니다. 보위부에서 오래 있었습니다. 장인어른이 용서는 받았습니다. 담당 보위원이 3일 연속 집에 찾아와서 닭을 달라고 했습니다. 매번 두 마리씩 달라고 해서 줬습니다.” (정OO, 남, 함경북도)
(2) 금품강요
“보위부에서 뇌물 달라고 해서 준 적이 있어요. 뇌물을 달라고 직접적으로 하는 게 아니라 어떠한 사건이 있으면 엮어서 저를 가둬놓거든요. 여기서 살겠으면 ‘알아서 처리해라’라고 해요. 북한 돈은 이제 통하지 않아요. 빌 아니면 달러로 줘야 해요. 시장에서는 돈이면 그저 미국 돈, 중국 돈 다 써요. 한국에 전화 연결해서 무슨 연선 넘는 거 빌로 만 원 내라고 했어요. 한국에 돈 도와달라고 했어요. 한국에 친구가 저를 도와줬거든요. 200만 원 붙여줬거든요. 그런데 그거를 그 전화 작업한 아가 밝혔어요. 작업을 해준 사람이 밝히는데 그 전화기에 전화번호가 기록되어 있잖아요. 이게 누가 했는가 했는데 내 이름이 나왔어요. 그 담당보안원이 그래서 집에 한 번 찾아왔더라고요. 너는 전화 작업이 단련대로 끝날 수 있지만 너는 교화소 한 번 갔다 왔기에 교화소 한 번 가야 한다. 이렇게 해서 중국 돈 200원 주고 말았어요. 그런 식으로 압수해서 돈 빼앗고 그랬어요.” (소OO, 여, 평양)
▲북한 노동자들이 일하고 있는 모습. 사진=조선DB
“2014년에 언니가 정치죄로 보위부에 잡혀 있으니 법관들이 노골적으로 뇌물을 요구해 왔어요. 휘발유 10㎏ 해라 뭐 해라 수시로 와서 그랬어요. 그런데 몇 차례 줘도 아무 소식이 없으니까 지도원 동지 솔직하게 얘기해 주라고 우리 도와준다더니 도와주는 거 같지 않다고 따졌어요. 그랬더니 시 안전부 소장 집행위원회에 들어가서 통과되려면 중국 돈 만 원이 있어야 된다는 거예요. 집이랑 팔고 해서 아는 사람에게 돈 꿔 와서 바쳤어요.” (이OO, 여, 함경북도)
(3) 재산몰수
“언니네 집에 레자(바닥에 까는 카펫 종류)도 있었는데 그것도 없어졌고 방바닥이 완전 흙바닥에 있더란 말입니다. 보위지도원이 레자를 회수물품이라고 가져가 버렸단 말입니다. 레자에 여자 머리 그림이 있었거든요. 북한은 한국 상품이랑 그런 거 못 입게 하지 않습니까? 농촌에서까지 그럴 줄 몰랐습니다. 그 레자에 사람 머리가 있다고 담당보위원이 왔다 가고 다음날 보위지도원이 와서 가져갔다고 합니다. 우리끼리 너무 기가 막혀 둘이 부둥켜안고 울었습니다. 그게 사람 머리가 문제돼서 회수 당하는 거 보고 초상 난 집 같았습니다.” (최OO, 여, 함경북도)
“북한에는 컴퓨터가 그때는 정말 귀했습니다. 우리 동네도 컴퓨터가 한 대도 없었고 우리 군에도 몇 대밖에 없었습니다. 2013년도에 열심히 모으고 절약하고 해서 아들을 생각해서 컴퓨터 하나를 사줬는데 5개월도 가지고 있지 못하고 빼앗겼습니다. 아들이 모은 자료 중에 일본 책이 그러니까 출처가 없는 책이어서, 거기에 있는 자료가 몽땅 출처가 있어야 한단 말입니다. 북한이 지정해 준 곳 출처가 있어야만 허용되지 안 그러면 안 된단 말입니다. 우리 아들이 6개월도 채 쓰지도 못하고 컴퓨터가 걸렸습니다. 다른 것도 아니고 과학도서였는데 이상한 출처가 없는 도서가 몇 권 있다 해서 컴퓨터 회수 당했단 말입니다. 그리고 가서 집에 있는 돈을 다 가지고 가서 바치고 손이야 발이야 빌었단 말입니다. 그래서 엄중하게 처리해야 하는데 관대하게 처리해 준다고 하면서 한 3달 동안 도 청년동맹에 가서 3달인지 4달인지 사상검토를 받았습니다. 집에도 오지 못하고 거기 있으면서 받았습니다.” (장OO, 남, 함경북도)
▲2000년 1월 14일 한국자유총연맹 회원 200여 명이 서울 명동 중국대사관 앞에서 중국 정부가 탈북 주민을 북한에 송환한 데 대해 규탄하는 시위를 벌이고 있다. 사진=조선DB
2) 재생산권 침해 사례
(1) 강제불임
“이OO는 한 동네 살던 아이인데 1990년대 후반 난쟁이라는 이유로 강제불임 수술을 당했어요. 그 아이가 보안서 지도원 친척이어서 실려 가지는 않았어요. 그냥 그저 아 데려다가 시집가기 전에 애기집을 거꾸로 뒤집어놨다고 그랬어요.” (김OO, 여, 평안남도)
(2) 강제낙태
“서OO이었어요. 저희가 만났던 그때 임신 4개월 정도 되었었어요. 그런데 6월 말에 아기를 떼었어요. 그 아이는 자수해서 나간 아이였어요. 그런데도 엄청 맞았어요. 맞은 지 한 달이 지나도 제 살색으로 안 돌아올 정도로 때렸더라고요. 이후에 아이 뗄 때는 병원에 가서 의사도 물어보지 않고 산대에다가 묶어 놓고 강제로 아이를 떼었다고 했습니다. 중국에 가서 임신해 온 아이들은 사람으로 취급하지도 않는다고 그랬어요.” (김OO, 여, 함경남도)
▲1996년 6월 29일 양강도와 함북도의 경계를 이루는 대홍단군 삼장노동자구 세관 옆 공터에서 북한 주민들이 두만강 건너편 중국의 화룡시 숭선진 쪽을 쳐다보고 있다. 사진=조선DB
▲중국 화룡시 숭선진에서 바라본 함북 무산군 인광리. 베낭을 멘 북한 여성들이 경비병 앞을 지나가고 있다. 사진=조선DB
“내가 당시에 임신 7개월이었습니다. 보위부에서는 10일 정도 구류장에 앉아 있다가 OO시 산원으로 소파하러 갔습니다. 산원에서 탈출에 성공했습니다. 밤새 걸었기 때문에 피곤해서 정신없이 곯아떨어졌는데 30분도 안 돼서 트럭 오는 소리가 나더란 말입니다. 다시 OO시 보위부에 끌려가서 감방 안에서 수술을 했습니다. 감방 안에는 판자로 임시 수술대를 만들어 놨는데 소독도 안 되어 있지, 그런 곳에서 수술하면 우리는 죽음을 80% 각오해야 합니다. 얼마 후 같이 도망친 언니가 수술을 받고 돌아와서 하는 말이 ‘아이를 칼로 각을 떠서 없앴다’고 합니다. 내가 그때 북한 여자들이 왜 북한에 잡혀 와서 또 탈북하고 그랬는지 알게 되었습니다. 감방에 들어가니까 이렇게 사람대접을 안 해주는데 도망가는 게 당연한 겁니다.” (이OO, 여, 함경북도)
“2006년 1월 OO집결소에 있을 때 석 달 반 임신한 채로 있었는데 계호가 와서 병원으로 데리고 가서 낙태 수술 당했습니다. 나는 첫 번째 아이니까 안 떨구겠다고 우겼는데 계호들이 한족새끼라고 막 때렸어요. 병원 가서도 주사 같은 거 안 놓고 그냥 수술했어요. 출혈은 그래도 다행히도 일주일 정도 하다가 멈추었어요. 낙태 당했어도 1주일 후에는 다른 사람하고 똑같이 일을 했어요. 낙태 후 허리가 세게 아프고 빈혈이 세게 오고 했어요. 지금도 수업시간에 앉아 있다가 일어나면 눈앞에서 까매지고 어지러워요.” (최OO, 여, 평안북도) ◎
정리=신승민 월간조선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