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凍土의 獨裁者 이야기 3/ 김정은은 누구? 2/ 고수석이 전하는 김정은의 잔인한 권력 탐험1(장성택 처형 등) - 인민무력부장傳 - 권력투쟁史

상림은내고향 2021. 9. 18. 22:03

凍土의 獨裁者 이야기 3/ 김정은은 누구? 2

■ 고수석이 전하는 김정은의 잔인한 권력 탐험1 중앙일보 통일문화연구소 연구위원

  2015.09.11 

고수석의 김정은 살인정치 이야기

(1) 김정남 선택이 실수

 

북한 현대사에서 장성택(1946~2013)만큼 스토리가 많은 사람이 없다. 김일성의 사위, 김정일의 매제, 김정은의 고모부. 북한에서 ‘신(神)’으로 모셔지는 김씨 부자들과 이런 관계가 그의 인생을 대변한다. 공식 직위인 노동당 행정부장, 국방위원회 부위원장, 정치국원은 장식에 불과했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김씨 부자와의 이런 관계가 그에게는 ‘독’이 됐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최고 권력자와의 관계는 불가근불가원(不可近不可遠)이 무병장수의 최고 비결이다.

 

장성택은 김씨 부자들에 대해 너무 많이 알고 있었다. 신의 ‘착한 면’만 보아야 하는데 ‘추악 면’까지 봤던 것이다. 그러다보니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으려고 했다. 하나님이 아담에게 선악과 나무의 열매를 따먹지 말라고 지시했지만, 아담이 열매를 따 먹을 것과 같은 상황이다. 북한 고위 인사는 그의 죽음에 대해 “김씨 일가에 들어온 장씨가 김씨가 되려고 하다가 제거됐다”고 평가했다.

 

장성택은 2008년 8월 뇌졸중으로 쓰러진 김정일(1942~2011)을 보면서 그의 사후를 고민했다. 당시 장성택은 당 행정부장에 있었다. 김정일은 2007년 말에 국가안전보위부, 인민보안부, 중앙검찰소, 중앙재판소 등 국가의 공안을 총괄하는 행정부장에 장성택을 앉혔다.

 

장성택의 머리 속에는 어린 김정은 보다 13세 많은 그의 이복형 김정남이 그려져 있었다. 장성택은 배포가 크고 1995년 이후 베이징에서 생활하면서 터득한 개혁·개방에 대한 마인드를 가진 김정남을 좋아했다. 장성택은 북한이 3대 세습으로 이어지면 민심이 동요하고 국제적으로 망신거리가 될 것으로 생각했다. 따라서 북한이 두 차례의 핵실험 이후 거듭되는 유엔 제재 속에서 살 길은 개혁·개방을 서두르는 길 밖에 없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장성택은 김정남을 선택한 것이다.

 

장성택은 김정남이 어릴 적부터 귀여워했다. 장성택·김경희 부부는 김정남의 어머니 성혜림(1937~2002)이 1974년부터 모스크바에서 요양하자 그를 키우다시피 했다. 자식이 없었던 김경희는 조카 김정남을 아들처럼 아꼈다. 그래서 김정남의 중국 생활비를 부담하고 베이징과 마카오에 저택을 사 주기도 했다.

 

장성택은 김정일에게 틈날 때마다 김정남 얘기를 설명했다. ‘장자 상속론’을 폈던 것이다. 하지만 김정남은 후계자로서 결정적인 단점이 있었다. 정실 소생이 아니라는 것이다. 김정일이 일종의 ‘바람’을 피워 나은 자식이라 유교적 전통이 강한 북한 사회에서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하지만 장성택은 자신의 권력으로 그것이 가능하리라 ‘착각’을 했다. 그러다보니 김정은이 섭섭한 마음을 가질 수 밖에 없었다. 김정은이 2000년 8월 스위스 유학을 마치고 귀국하자마 김정일의 지시에 따라 자신에게 ‘제왕학’을 가르쳐 준 사람이 ‘딴 마음’을 먹고 있어서니 말이다.

 

당시 김정은은 조선 건국 초기 태종 이방원이 생각났을 것이다. 자신을 후계자로 밀어줄 것으로 굳게 믿었던 삼봉(三峰) 정도전(1342~1398)이 배다른 동생 이방석을 세자로 밀었던 역사가 있었기 때문이다. 김정은은 600여년 전의 이방원과 감정이입이 됐을 수 있다.

 

김정은의 눈에는 아버지가 쓰러진 뒤 ‘김정일 대리인’으로 행사하는 장성택이 정도전으로 비쳐졌다. 오래전부터 장성택의 ‘욕심’을 알고 있던 김정일은 사망하기 전에 김정은에게 “네가 40살이 되기 전까지는 장성택을 살려 두어라”라고 당부했다. 어린 김정은이 권력을 공고화하기 이전까지는 장성택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성격이 급한 김정은은 그때까지 참지 못했다. 그리고 2013년 12월 12일 방아쇠를 당겼다. (계속)

 

(2) 권력에 도취되면

장성택은 권력에 도취됐다. 본인도 그렇지만 주변에서 그렇게 만들었다. 특히 2012년 8월 대규모 대표단을 이끌고 중국을 방문했을 때 홍콩의 명보(明報)는 ‘북한의 섭정왕 장성택이 방중했다’가 보도했다. 대표단은 모두 30명이 됐는데, 김정일 국방위원장 다음으로 큰 규모였다. 이는 장성택이 북한의 2인자임을 과시하려는 것으로 비쳐졌다. 중국도 국빈급이 묵는 댜오위타이에 장성택의 숙소를 마련해 주었다.   

 

중국의 이런 배려가 장성택의 운명을 재촉했다. 특히 ‘섭정왕’이란 표현이 김정은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에게 비수로 꽂혔다. 섭정왕은 청나라의 도르곤을 연상하게 만든다. 도르곤은 청 태조 누르하치의 14번째 아들로 2대 황제 홍타이지가 사망한 뒤 어린 조카를 황제에 앉히고 섭정왕이 됐다. 도르곤은 청나라의 기틀을 다지는데 큰 공을 세웠지만 어린 황제에게는 버거운 존재였다. 명보가 장성택을 이 도르곤에 비유한 것이다.   

 

장성택은 방중 기간에 후진타오 국가주석과 원자바오 총리를 만났다. 후진타오 주석에게 김정은의 방중 문제를 언급했다. 하지만 후진타오는 그 해 가을에 있을 당대회에서 정치국 상무위원의 인선을 놓고 장쩌민 전임 주석과 전면전을 벌이던 중이라 북한 문제에 신경을 쓸 형편이 아니었다.   

 

장성택은 김정은의 방중을 확정하지 못하고 귀국했지만 김정은에게 마치 큰 성과가 있었던 것처럼 큰 소리를 쳤고 김정은도 일단 방중단을 치하하는 자리를 만들어 주었다.   

 

장성택은 중국 방문 이후 기세가 오를 대로 올랐다. 조선시대 중국으로부터 책봉을 받은 임금처럼 행세를 했다. 자연스럽게 김정은의 눈에 좋게 보일 리가 없었다. 뿐만 아니라 장성택의 득세를 오래전부터 고깝게 지켜보던 빨치산 혁명 2,3세대들에게는 절호의 기회가 됐다.  

 

장성택의 사형 판결문에 ‘수도 및 중앙기관에 손을 깊숙이 뻗쳐 자신의 부서를 아무도 건드리지 못하는 ’소왕국‘을 만들었다’고 적고 있다. 장성택은 억울할지 몰라도 경쟁자들이 보면 그의 행동은 오해를 사기에 딱 좋았다.   

 

권력에 도취되면 상대방이 얕잡아 보인다. 권력의 속상이 그렇다. 장성택의 눈에는 자신의 경쟁자들이 우습게 보였다. 빨치산 혁명 2,3세들은 2013년 1월부터 장성택의 오른팔과 왼팔인 이용하 노동당 행정부 제1부부장과 장수길 노동당 행정부 부부장에 대한 문제를 제기했다. 그러면서 최용해 노동당 비서를 그들의 맏형으로 내세웠다. 그 때부터 조직적으로 ‘장성택 사냥’에 들어갔다. (계속)

 

(3) 장성택 사냥①

▲2013년 4월 25일 인민군 창건 기념일 인민군 예식. 장성택(오른쪽)은 김정은이 경례를 할 때에도 손을 올리지 않는 모습을 보였다. [중앙포토]

 

‘장성택 사냥’은 2013년 1월부터 서서히 시작됐다. 사냥을 위한 칼은 조연준(78) 노동당 조직지도부 제1부부장이 잡았다. 조 제1부부장은 조직지도부의 터줏대감이다. 권력 서열은 정치국 후보위원으로 20위 정도다. 하지만 조직지도부가 북한의 사상·인사 등을 통제하는 막강한 기구라 그의 힘도 만만치 않았다. 조직지도부를 알면 조선노동당이 보인다고 할 정도다.  

 

조 제1부부장을 포함한 빨치산 혁명 2,3세들은 2013년 1월 모임을 갖고 장성택의 수하였던 이용하 당 행정부 제1부부장, 장수길 당 행정부 부부장 등의 월권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면서 장성택을 잡기 위한 수순에 들어갔다.

 

두 사람의 월권행위는 군 총정치국 산하의 회사인 ‘승리무역회사’를 통한 이권개입이었다. 장수길이 중국 기업에게 빚진 5,400만 위안(한화 98억 원) 대신으로 나선시의 일부 땅에 대한 이용권을 그들에게 주었다. 당시 장성택은 이미 권력에 도취돼 이들의 월권을 통제하려는 마음이 없었다. 

 

혁명 2,3세들은 최용해 당 비서를 맏형으로 내세우고 장성택 제거 이후 젊은 세력으로 세대 교체도 결의했다. 실제로 장성택 제거 이후 실세로 등장한 ‘삼지연 8인’ 가운데 5명이 신진 그룹이다. 한광상· 김병호· 박태성· 마원춘, 홍영칠 등이다. 이들 가운데 한광상· 김병호· 마원춘은 최근에 모습을 보이지 않고, 박태성은 평안남도 책임비서, 홍영칠은 노동당 기계공업부 부부장으로 건재를 과시하고 있다.  

 

장성택에 대한 본격적인 내사는 2013년 4월부터 착수했다. 조직지도부의 지휘하에 국가안전보위부와 군 보위사령부가 나섰다. 국가안전보위부는 장성택의 개인 비리를, 군 보위사령부는 장성택의 판결문에 기록된 ‘소왕국’인 노동당 행정부의 비리를 조사했다. 장성택의 실수 가운데 하나가 군 보위사령부를 장악하지 못한 것이다. 군 보위사령부에 자기 사람을 심어 놓았다면 그렇게 허망하게 당하지 않았을 수 있었다.  

 

장성택은 국가안전보위부를 손 안에 쥐고 있었다. 장성택이 맡고 있던 당 행정부가 국가안전보위부를 통제했기 때문이다. 당 행정부는 2007년 말에 부활하면서 국가안전보위부, 인민보안부(한국의 경찰청), 중앙검찰소, 중앙재판소 등 공안기관을 담당했다. 게다가 김원홍 국가안전보위부장은 한 때 장성택의 부하였다. 그래서 조 제1부부장은 당 행정부의 비리를 군 보위사령부에 맡겼다.

 

내사는 장수길에서 시작됐다. 나선시의 전체 사업과 전혀 관계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나선시의 일부 땅에 대한 이용권을 중국에 팔면서 확실한 ‘빌미’를 제공했다. 어느 누가 국가 소유의 땅을 개인의 목적으로 사용한 것에 분개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장성택을 고깝게 보던 세력들에게 기다렸던 기회가 온 것이다. (계속)

 

(4) 장성택 사냥 ②

▲김정은 국방위 제1위원장(오른쪽 둘째)이 2012년 11월 19일 고모부인 장성택 국방위 부위원장(오른

쪽)과 제534군부대 기마훈련장을 찾아 말을 타고 있다. 김정은 뒤는 최용해 총정치국장. [중앙포토]

 

장성택은 부하들이 내사를 받고 있다는 첩보를 듣고도 태연했다. 더 가관인 것은 중국이 2013년 4월 북한 내부 동향을 역으로 전달하고 모든 공직에서 물러날 것을 권고했는데도 나 몰라라 했다. 왜 그랬을까? 총기가 흐려져도 너무 흐려졌다.

 

노동신문은 12월 9일자에 “장성택은 사상적으로 병들고 극도로 안일해졌으며 마약에 손을 댔다”고 밝힐 정도였다. ‘죄인’으로 만들기 위해 다소 과장될 수 있지만 전혀 근거가 없는 내용은 아니다. 북한 고위 인사는 “장성택이 지나치게 자기 주변을 안일하게 판단한 것이 목숨을 재촉했다”고 말했다.

 

장성택은 2013년 11월 중순 자신의 오른팔과 왼팔인 이용하 당 행정부 제1부부장과 장수길 당 행정부 부부장이 공개 처형되는 것을 눈으로 볼 수 밖에 없었다.

 

그러면 장성택은 어떻게 사냥감이 됐을까? 김원홍 국가안전보위부장이 12월 12일 특별군사재판 법정에 읽은 판결문은 대부분 사실에 근거한 내용이다. A4 용지 5장 분량의 판결문 가운데 ‘석탄을 비롯한 귀중한 지하자원을 임의로 팔아치웠고’라는 문장이 있다.

 

판결문에 언급한 석탄은 수출용이 아닌 국내용으로 발전소와 가정에 사용하는 것이었다. 이를 중간에 가로채 수출하여 이득을 취한 것이다. 그 돈으로 여기저기에 돈을 뿌리며 방탕한 생활을 일삼았다. 장성택은 2009년 한 해에만 비밀금고에서 약 460만 유로(한화 60억원)를 꺼내 탕진하기도 했다.

 

그리고 중국에 숨겨두었던 3억 달러(한화 3300억원) 문제로 장성택은 완전히 궁지에 몰리게 됐다. 돈은 반드시 흔적을 남기는 법이다. 그 돈이 자신에게 부메랑이 될 줄은 몰랐다.

 

이 상황에서 장성택을 구해 줄 사람은 김경희 밖에 없었다. 부인이자 김정은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의 고모였다. 하지만 이들은 몇 해 전에 별거한 상태였다. 두 사람은 외동딸인 장금송이 2006년 8월 프랑스 유학 도중 파리의 한 빌라에서 수면제 과다 복용으로 자살한 이후 멀어졌다. 장금송은 집안에서 출신 성분이 떨어지는 연인과의 결혼을 반대하고 평양으로의 귀환만 독촉하자 이를 비관해 자살한 것으로 알려졌다.

 

일설에는 장금송은 김경희가 낳은 딸이라 아니라 장성택이 바람을 피워 낳았다는 얘기도 있다. 그래서 장성택은 김경희의 ‘구박’을 피해 장금송을 프랑스로 보냈고, 장금송의 자살도 김경희의 사주로 생각했다는 것이다. 장금송의 자살 이후 부부싸움은 잦았고 장성택의 여성 편력증이 심해져 이혼까지 했다는 소문도 있다.

 

김경희는 장성택의 처형에 개입하지 않았다. 남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2013년부터 거의 뒷방 노인네 취급을 받았다. 결국 장성택은 ‘2인자’로서 자신을 지킬 수 없었다. 처형 직전까지 김 제1위원장을 만나게 해 달라고 졸랐지만 공허한 메아리에 불과했다. (끝)

 

(5) 장성택과 최용해①

▲북한 김정은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이 평양에서 지난 8월 1일 `2013년 동아시안컵 축구대회`에서 우승한 여자 축구선수들을 격려한 뒤 양궁경기를 관람하고 있다. 왼쪽부터 최용해 인민군 총정치국장, 김 위원장, 장성택 국방위원회 부위원장, 김양건 노동당 통일전선부장(대남 비서), 김경희 노동당 비서. [사진 중앙포토]

 

사람이 살다보면 여러 사람을 만나게 된다. 인연이 악연이 되기도 하고 악연이 인연이 되기도 한다. 장성택과 최용해는 인연이 악연이 된 경우다. 권력이란 참 얄궂은 것이 그렇게 죽을 만큼 좋아했던 사람을 모른 체 지나가게 되는 날이 오게도 한다.

 

두 사람의 나이 차이는 4살이다. 장성택이 1946년생이고 최용해가 1950년생이다. 두 사람이 가깝게 지내게 된 것은 김정일 국방위원장 때문이다. 김정일이 자신보다 8살 어린 최용해를 친동생처럼 돌보면서 자연스럽게 장성택도 최용해를 귀하게 여겼다.

 

두 사람을 적절하게 비유한 말이 있다. 장성택이 ‘여우’라면 최용해는 ‘표범’이다. 장성택은 속내를 잘 드러내지 않지만 최용해는 평소에 말이 없다가 나설때라고 생각하면 공격적으로 변해 기질이 아버지 최현(1907~1982)과 닮았다.

 

두 사람이 결정적으로 친해진 것은 1989년 평양에서 열린 제13차 세계청년학생축전이다. 당시 장성택은 노동당 청소년사업부 부장으로 노동당의 행사 책임자였고, 최용해는 세계청년학생축전 준비위원회 위원장이었다. 그 행사는 1988년 한국이 88올림픽을 성공적으로 개최하자 북한이 자극을 받아 축전을 국가적인 행사로 준비해 성대하게 치렀다.

 

두 사람은 ‘환상의 콤비’를 이루며 그 행사를 성공적으로 치뤘다. 두 사람은 행사가 끝난 뒤 ‘노력영웅’ 칭호를 받았다. 두 사람은 그 이후 승승장구했다. 장성택은 1995년 당 조직지도부 제1부부장으로 승진했고, 최용해는 1996년 김일성사회주의 청년동맹 제1비서에 올랐다. 북한의 노동당과 청년단체를 이끄는 핵심 인력으로 급부상했다.

 

하지만 누구나 시련이 있기 마련이다. 최용해는 1998년 뇌물 수수 등이 드러나면서 제1비서에서 해임됐다. 이 사건은 13년이 지나 장성택이 처형될 때 최용해를 살려주는 구실이 된다. ‘사정의 칼날’이 장성택의 측근들로 확대되면서 최용해도 위험해졌다. 그 때 김정은이 최용해가 1998년 이후 장성택과 완전히 결별했다며 “그를 건드리지 말라”고 지시했다. 김정은은 최용해 마저 그 사건에 휘말리게 되면 그의 우군이 완전히 없어지게 되는 상황이었다.

 

장성택도 최용해처럼 힘든 시기가 있었다. 1970년대 말 분파조성 혐의로 1년여간 강선제강소 노동자로 일했고, 2004년에도 같은 이유로 2년여 동안 실각하는 등 고초를 겪었지만, 그때마다 김 위원장의 매제라는 배경과 김 위원장의 신뢰 덕분에 재기했다.

 

장성택과 최용해가 두 사람이 더욱 죽이 맞은 것은 북한 경제에 대한 생각이었다. 최용해는 황해북도 당 책임비서(2006~2010)를 하면서 “북한이 경제적으로 안정되기 위해서는 민생경제를 부활시켜야 한다”고 말할 정도로 경제관이 유연했다. 이런 유연성이 장성택과 맞아 떨어져 경제특구 추진에 힘을 모을 수 있었다.

 

두 사람은 1998년 사건 이후 한 동안 떨어져 있다가 다시 만난 것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뇌줄중으로 쓰러진 2008년 이후다. 황해북도 당 책임비서로 있던 최용해는 2010년 9월 정치국 후보위원, 당 비서로 평양에 복귀했다. 장성택도 같은 기간에 정치국 후보위원, 당 중앙군사위원회 위원이 됐다. 두 사람은 김정일에 이어 김정은의 사람들로 다시 뭉치면서 새로운 북한을 만들 꿈에 부풀어 있었다.

 

하지만 두 사람은 이미 혈기 왕성하고 순수하게 일하던 40대가 아니었다. 이제는 권력을 놓고 사생결단을 벌려야 하는 60대가 돼 버렸다. (계속)

 

(6) 장성택과 최용해②

▲2013 9월 북한 정권수립 65주년 열병식에서 사열을 받고 있는 김정은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오른쪽). 최용해 당시 북한군 총정치국장(가운데)과 장성택 당 행정부장(왼쪽)의 모습도 보인다. [사진 조선중앙 TV캡쳐]

 

2010년에 다시 만난 장성택과 최용해는 김정은 정권을 준비해야 했다. 장성택은 김정일 때부터 맡아왔던 경제를, 최용해는 한 번도 맡아본 적이 없는 인민군을 맡게 됐다. 최용해는 2010 9월 김정은과 함께 ‘대장’ 에 임명됐다. 그리고 2년 뒤 사실상 인민군을 통제하는 총정치국장으로 승진한다.

김정일이 생전에 인민군을 최용해에게 맡긴 것은 김정은에게 가장 두려운 존재가 될 수 있는 ‘인민군을 장악해라’는 뜻이었다. 최용해는 항일 빨치산 출신인 아버지의 후광으로 오래전부터 인민군의 노장들과 인연이 있었다. 따라서 그의 군부 통제는 어려워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군 경험이 없는 사람이 갑자기 대장 계급장을 달고 낙하산을 타고 내려오니 불만을 가진 군인들도 있었다. 그가 지난해 4월 해임될 때도 그 영향이 컸다.

장성택과 최용해가 결정적으로 틀어지게 된 것이 일반경제와 군경제의 충돌이었다. 장성택은 2012 6월 일반경제의 개선을 위해 농장과 공장의 생산량 가운데 30%를 생산자가 자유롭게 매매할 수 있는 ‘6.28’ 조치를 도입했다. 장성택이 선호했던 중국식 개혁의 북한판이었다. 이 조치로 인민군은 ‘쏠쏠한 재미’가 빼앗겼다. 김정일의 선군정치 이후 인민군은 농장과 공장에서 수탈을 일삼았기 때문이다.

인민군의 수익이 대폭 감소하면서 군경제가 타격을 입자 최용해는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이영호 군 총참모장이 항의하며 나섰다가 2012 7월에 숙청을 당했고 최용해가 군부를 대표해 나설 수 밖에 없었다. 장성택은 이영호 총참모장이 제거되자 자기의 세상이나 된 듯 인민군이 독점했던 외화벌이 사업과 지하자원 사업에 손을 대기 시작했다. 장성택은 당시 국방위원회 부위원장이었다.

장성택의 거침없는 행보에 최용해는 과거의 인연을 생각하면 그럴 수 없지만 자신의 위치를 고려하면 할 말은 해야 했다. 특히 지하자원은 총정치국장이 관할하는 부분이 많았다. 최용해는 장성택의 요청을 거절하기 시작했다. 당시 최용해는 2013년 초반부터 김정은의 지시로 마식령 스키장에 꽂혀 있었다. 김정은은 2013 5, 8, 11월에 마식령 스키장을 방문했고 12 30일 최고급 밍크코트를 입고 개장식에 갈 정도로 자신의 기념비적 사업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최용해는 장성택의 요청을 들어 줄 여유가 없었다. 게다가 권력에 취해 있는 장성택을 꼴보기 싫어했다. 총정치국장이 도와주지 않으면 지하자원에 손 댈 수 없다. 따라서 장성택은 인민군의 반대를 무시하고 ‘임의로’ 지하자원에 손댔다. 그의 사형 판결문에 나오는 지하자원에 대한 죄가 추가되는 과정이다.

장성택이 처형되는 과정에서 최용해도 ‘처형 쓰나미’에 휩쓸릴 뻔 했지만 김정은의 도움으로 피할 수 있었다. [장성택傳(5)] 참조. 최용해는 장성택의 몰락을 멀리서 지켜볼 수 밖에 없었다. 젊은 시절 같이 술 마시고 토론하고 아픔을 나누기도 했지만, 권력·돈 앞에서는 부모·형제도 싸우는데 하물며 사회에서 만난 사람이야… ()

 

(7) 장성택과 이설주

▲김정은 부부(가운데)가 모란봉악단 단원 사이에 앉은 최용해(왼쪽 둘째)?김기남?김양건 등과 함께 공훈국가합창단과 모란봉악단의 합동공연을 관람했다. [사진제공=노동신문]

 

장성택이 처형된 원인 가운데 김정은 북한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의 부인 이설주의 과거가 발각됐기 때문이라는 소문이 한 때 유행했다. 사설 정보지 ‘찌라시’를 통해 염문설이 퍼졌고 이설주가 장성택의 소개로 김정은을 만났다는 내용이 알려지면서 설득력이 더해졌다.
 
하지만 그 염문설은 오래가지 않았다. 남재준 당시 국정원장이 2013 12월 국회 정보위원회 보고에서 그것이 낭설이며 사실이 아니라고 하면서 염문설은 일단락됐다.
 
그러면 왜 그런 소문이 났을까? 그것은 장성택 처형되기 두 달 전부터 북한 매체에서 이설주가 사라졌기 때문이다. 그러자 온갖 상상력이 동원되면서 장성택과 이설주의 염문설은 장성택이 처형되기 하루 전날 삽시간에 퍼졌다. 그러나 장성택이 처형 된 지 5일 뒤 이설주가 김정일 사망 2주기 행사장에 나타나면서 염문설은 쏙 들어갔고, 남 전 원장의 발언으로 염문설은 거짓으로 판명됐다.
 
그러면 장성택과 이설주는 어떤 관계였나?
 
장성택은 2007년 말 노동당 행정부장으로 취임하면서 산하 인민보안부(한국의 경찰청) 소속의 합주단을 대폭 증원했다. 당시 인민보안부 합주단은 촌스러운 악단이었다. 장성택은 그 합주단을 왕재산 경음악단과 보천보 경음악단 못지않는 ‘미녀 악단’으로 변모시켰다.
 
이 때 평양 금성학원을 졸업한 이설주가 인민보안부 합주단의 오디션에 응모했다. 금성학원은 북한의 예술가를 양성하는 최고의 중등교육기관이다. 김정일의 기쁨조 출신 가운데 이 학원 출신이 많다. 보천보 경음악단의 전혜영· 이분희도 이 학원 졸업생이다. 금성학원은 평범한 가정의 자녀가 신분사회의 벽을 뚫고 출세할 수 있는 유일한 출로이기도 하다.
 
이설주는 1989 9 28일 함경북도 청진시 출생으로 장성택과 동향이다. 장성택은 자신과 같은 지역 출신인 이 미녀에게 반해 인민보안부 합주단의 대표 가수로 발탁했다.
 
2009
1월에 후계자로 지명 받은 김정은은 그 해 봄에 인민보안부 합주단을 시찰하면서 이설주를 만났다. 눈이 크고 오동통하며 귀여운 미녀를 좋아하는 김정은은 이설주에 주목했고 김정일이 2009 5월에 만든 은하수 관현악단으로 이적시켰다. 이설주는 이 악단의 대표 가수가 됐다. 그리고 김정은은 2010년 가을 이설주와 결혼식을 올렸다.
 
염문설은 평소 여자라면 사족을 못 쓰는 장성택의 여성 편력이 호사가들의 상상력을 자극시켜 생산되고 확산된 측면이 있다. 당시 장성택의 권력을 보면 이설주 보다 훨씬 예쁜 여성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권력의 ‘쓴맛’을 이미 맛 본 장성택이 굳이 무리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또한 국가안전보위부가 김정은과 결혼식을 올리기 이전에 이설주의 뒷조사를 샅샅이 했을 것이고, 과거 중전을 간택할 때처럼 ‘영부인’으로서의 결격 사유가 없는지를 조사했을 것이다. 따라서 염문설은 북한 사정을 모르는 사람들의 상상력의 결과로 볼 수 있다.
 
그러면 장성택이 처형되기 두 달 전에 왜 이설주가 공식석상에서 사라졌을까? 이설주가 사라지기 두 달 전에 은하수 관현악단 소속 예술인 10여명이 음란 동영상을 찍은 혐의로 처형을 당했다는 소문이 퍼졌다. 그 가운데 보천보 경음악단 출신의 성악가수로 이름을 떨쳤던 현송월도 포함돼 있었다. 하지만 현송월은 2014 5월 북한 걸그룹 모란봉악단 단장으로 건재함으로 보여줌으로써 ‘현송월 처형’은 거짓으로 밝혀졌다.
 
현송월은 김정은의 애인이었다. 김정은은 결혼하고도 5살 연상인 현송월을 자주 만났다. 문제는 여기서 생겼다. 현송월의 ‘입’이 화근이었다. 평소 이설주와 친한 현송월이 이설주에게 자랑 삼아 김정은과의 관계를 털어놨다. 그 소문은 은하수 관현악단에 이미 퍼져 단원들이 여기저기서 수군거리고 있었다. 뒤늦게 알게 된 이설주는 김정은에게 물었다. 이에 격분한 김정은이 현송월이 소속된 은하수 관현악단에 ‘철퇴’를 내렸다. 이설주는 친한 언니와 남편의 만남에 마음이 편할 리가 없었다. 따라서 공식석상에 나타나지 않았던 것이다.
 
남재준 전 국정원장은 2013 10월 국회 정보위원회 전체회의에서 “은하수 관현악단 단원 10여명의 총살설은 사실”이라고 확인했으며 “이들의 처형이 이설주의 추문과 관련됐는지는 확인되지 않았다”고 밝혔다. 그리고 이병호 국정원장은 2015 4월 국회 정보위원회 전체회의에서 “지난달에도 음란 동영상 추문에 휘말렸던 은하수 관현악단 총감독 등 예술인 4명이 간첩 혐의로 처형됐다”고 밝혔다.
 
이런 공포 분위기 속에서 현송월은 살아남았고 김정은이 2012년에 만든 모란봉악단을 이끌고 있다. 김정은은 최근 모란봉악단 소속 예술인들을 노동당 창건 70주년 행사에 기여했다며 특별 진급시키고 그들에게 국가 최고의 영예인 ‘인민 예술가’ 칭호와 훈장을 수여했다.

다음은 [장성택傳(8)] 장성택과 한국편입니다

 

(8) 장성택과 한국

▲한국무역협회방문한 북한 경제시찰단. 오른쪽앞줄부터 박남기단장. 장성택 당중앙위원회 1부부장, 김히택당중앙위원회 1부부장, 박봉주, 송호경 [사진 중앙포토]

  

‘장성택=북한의 개혁·개방’. 장성택에게 붙어다닌 수식어다.

장성택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조심스럽게 추진했던 개혁·개방의 선봉장이었다. 그래서 남북관계의 개선에 관심이 많았다. 그는 중국이 있지만 한국과의 협력이 더 도움이 된다고 생각했다. 중국은 북한이 대하기는 너무 크고 역사적으로도 버거운 상대였다. 국경을 맞대고 있는 나라가 자기보다 덩치가 크면 일단 겁부터 나기 마련이다. 그래서 ‘우리민족끼리’라는 명분을 내세워 한국과의 경제협력을 확대하려고 했다.

2002
년 경제시찰단으로 한국에 내려 온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장성택은 89일 동안 삼성전자, 현대자동차, 코엑스 등 대기업을 포함해 벤처기업과 백화점, 놀이공원 등을 두루 둘러봤다. 방한 이후 그는 한국에 왔던 박봉주 화학공업상(현재 총리) 등과 함께 북한의 개혁· 개방을 추진했다.

그가 한국에 관심이 많았던 단적인 사례는 탈세 등의 혐의로 중국 정부에 체포된 양빈 신의주 특별행정구 초대 장관의 후임으로 고() 박태준(1927~2011) 포스코 명예회장을 생각한 것이 대표적이다.

하지만 장성택은 새로운 경제정책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노동당·군부와 마찰을 빚었고 2004년 측근의 호화 결혼식에 참석한 것이 발각되면서 ‘분파 조장’ 혐의로 실각했다. 그러자 그가 추진하려고 했던 북한의 개혁·개방은 속도가 늦어졌다. 그는 2년 동안 고생을 한 뒤 2006 1월 다시 노동당으로 복귀했다. 직책은 당 수도건설부 제1부부장이었다. 그리고 2007 12월에는 국가안전보위부, 인민보안부 등 공안을 책임지는 당 행정부장으로 임명되면서 화려하게 부활했다.

장성택은 17대 대통령에 당선된 이명박 당선자에 관심이 많았다. 현대건설 회장 출신의 대통령 당선자이기 때문에 북한의 경제개발에 뭔가 돌파구를 마련할 수 있겠다 싶었다. 그러던 차에 김정일이 2009 9월 평양시 현대화 사업의 일환으로 ‘평양 10만호’ 건설을 장성택에게 맡겼다. 김정일이 제시한 완공 시점은 2012 12. 3년 남짓한 기간에 아파트 10만 채를 짓겠다는 야심 찬 계획이었다.

중책을 맡은 장성택이 기댈 곳은 한국· 중국 밖에 없었다. 하지만 두 나라 모두 만만치 않은 상황이었다. 2006년과 2009년 두 차례 핵실험을 한 이후라 손을 벌리기가 어려웠다. 그의 고민거리는 3가지였다.

첫째, 아파트 공사에 필요한 시멘트, 모래 철근 등 건자재였다. 할 수 없이 지하자원을 중국에 팔아야 했다. 이 과정에서 장성택은 북한 내 지하자원의 유통과정을 알게 됐다. 이것이 ‘장성택 처형 판결문’에 지하자원이 들어가게 되는 ‘먼 이유’가 된다.

둘째, 건설 속도를 높이기 위해서는 레미콘이 필요했다. 사람을 동원하는데 한계가 있었다. 장성택은 한국 기업인의 도움으로 중국을 거쳐 레미콘 2대를 구했다. 이 레미콘은 아파트 건설에 효자 노릇을 하면서 건설 속도를 높였다.

셋째, 아파트 주민들을 위한 상하수도관이 필요했다. 김정일은 “도시를 건설하면서 상하수도 시설을 제대로 하지 않은 채 아파트만 많이 건설하다보니 비가 조금만 와도 물이 제대로 빠지지 않고 도로에 물이 차서 주민들의 생활에 많은 지장을 주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래서 장성택은 상하수도관을 중국산보다 한국산을 찾았다. 하지만 당시 남북관계는 금강산 박왕자씨 피격 사건과 천안함 폭침 사건 등으로 한국에 도움을 요청하기 어려웠다.

 

장성택은 한국을 포기하고 중국과 손을 잡았다. 북한의 지하자원을 중국에 팔아 평양 10만호 건설을 진행했다. 하지만 중국의 소극적인 협조로 속도를 내지 못했다. 핵실험이 발목을 잡았던 것이다. 평양 10만호 건설은 장성택의 처형 판결문에 명시한대로 대부분의 건설기지를 폐허로 만들었다. 판결문은 ‘교활한 수법으로 중요한 건설 부문을 심복들에게 넘겨주어 돈벌이 수단으로 삼게 함으로써 평양시 건설 사업을 고의로 방해했다’고도 명시했다.

북한 전문가나 정부 관계자들은 장성택이 김정일 사후에 북한의 개혁·개방을 안정적으로 이끌어 주길 바랐다. 이유는 3대 세습이라는 전근대적인 체제보다는 ‘깨어 있는 사람’이 북한을 통치하는 것이 통일에 도움이 될 것으로 판단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역사는 얄궂게도 반복되고 말았다. 김정은이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3대 세습을 이어 받았다. 장성택이 그렸던 북한의 미래가 김정은이 그리는 북한과 우연히도 맞을 수 있다. 이방원이 정도전을 제거했지만 그의 정책을 받아들였듯이…

 

(9) 장성택과 중국

▲2012년 8월 베이징에서 열린 북중 황금평-나선 경제지구 개발회의에서 친더밍 당시 중국 상무부장과 합의문에 서명한 뒤 자축하고 있는 장성택 당시 북한 국방위원회 부위원장. [사진 중국 상무부 홈페이지]


장성택은 중국을 부러워했다. 사회주의를 유지하면서 경제성장을 해내는 중국이 신기하게만 보였다. 그래서 김정일· 김정은 부자에게 북한도 중국의 길을 따라야 한다고 자주 말했다. 북한이 자본주의 시장경제를 일부 도입한 2002년 7.1 경제관리개선조치, 2012년 6.28조치 등 도발적인 실험도 장성택의 잔소리 탓이다.

결과는 ‘절반의 성공’이었다. 장성택은 농장과 공장의 생산량 중 30%를 생산자가 자유롭게 매매할 수 있게 조치했더니 지금의 장마당처럼 시장경제가 자연스럽게 활성화됐다. 북한이 UN 제재를 받으면서도 버티는 원동력이 되고 있다. 반면 농장과 공장을 수탈해 왔던 조선인민군에게는 장성택이 ‘눈에 가시’였다. 결국 그에게 부메랑으로 돌아왔다. 장성택은 2004년 혁명화 교육을 받았고, 2013년 처형되기 전에는 인민군 보위사령부의 타깃이 됐다.

중국은 장성택에게 불가근불가원이었다. 배울점이 많은 것은 사실이지만, 너무 많이 따라가다보니 내부에서 견제구가 날아왔다. 과유불급(過猶不及)이라 권력이란 원래 그런 것이다. 새로운 제도는 기존 권력자의 기득권을 뺏을 수 밖에 없고, 그 과정에서 권력투쟁이 발생하기 마련이다.

장성택은 김정은이 권력을 잡자마자 중국에 바짝 다가섰다. 그 동안 잔소리 한 것을 행동으로 옮길 수 있는 기회였다. 하지만 불가근불가원해야 한다는 사실을 잊어버렸다. 중국은 어린 김정은 대신에 평소 중국을 동경했던 장성택이 훨씬 편했다. 중국의 말을 잘 따르는 장성택을 밀어주는 것이 미래에 대한 투자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후진타오 국가주석과 원자바오 총리가 2012년 8월 중국을 방문한 장성택을 만났다. 그에게 애정이 담긴 조언으로 북한의 법률 정비, 국경 지역과의 협력, 토지 세제 개혁, 기업 투자 장려, 세관 개선 등을 주문했다. 이유는 외자를 유치하기 위한 선결과제였기 때문이다. 중국 지도부는 장성택과 손을 잡는 것이 중국이 가는 방향과 부합된다고 판단했다.

하지만 이것이 장성택에게 비수가 됐다. 김정은은 장성택에 대한 중국의 대접에 시샘이 났고,인민군은 중국에게 북한을 판다며 장성택을 공격했다. 중국에서 받은 화려한 대접이 오히려 독(毒)이 된 것이다. 장성택에 대한 불만 세력은 장성택의 돈을 뒤졌다. 1980년대부터 귀금속을 모아온 장성택은 2009년 한 해에만 비밀금고에서 약 460만 유로를 사용할 정도로 거침이 없었다. 또 해외 도박장을 출입한 것도 문제가 됐다. 불만 세력들에게 공격당할 빌미가 많았던 것이다.

그리고 장성택이 실수한 것이 있었다. 중국에 대해 몰랐다. 중국은 장성택이든 그 누구든 자신의 말을 잘 듣는 사람이 필요했을 뿐 장성택 개인을 좋아한 것이 아니었다. 장성택 처형 이후 중국이 북한에 차갑게 대한 것이 장성택 때문이라는 해석이 있었지만, 그것은 순진한 생각이다. 중국은 장성택 보다 북한의 제3차 핵실험 때문이었다. 중국은 지난 10월 10일 북한 노동당 창건 70주년 행사에 류윈산 정치국 상무위원(서열 5위)를 보내 북·중 관계를 가볍게 복원시켰다. 장성택의 그림자를 지우는 것은 시간 문제였다.

중국은 북한 내부에 장성택과 같은 사람을 친중 인사로 만들려고 한다. 제일 가능성이 높은 사람은 최용해 당 비서다. 그는 2013년 김정은의 특사로 중국을 방문했고, 지난 9월 중국의 전승절 기념행사에도 시진핑을 만났다. 지금은 지방에서 혁명화 교육을 받고 있다고 알려졌지만 조만간 복귀할 것으로 예상된다.

DA 300

 

장성택은 중국이라는 ‘화로’에 너무 가까이 다가가는 바람에 타버렸다. 강대국의 접대에 조심해야 했는데 말이다. 2인자는 자신의 분수를 알고 절제하는 것이 최선이다. 저우언라이(周恩來)가 세상 사람들에게 보여준 것이 바로 절제였다.
다음은 [장성택傳(끝)] ‘제2의 장성택’을 기다리며 편입니다.


(끝)'제2의 장성택'을 기다리며

12 12일은 장성택이 처형된 날이다. 2년 전 장성택은 죽음을 앞두고 살려고 발버둥쳤다. 죽음을 앞둔 사람이면 일부를 제외하고 그럴 수 밖에 없지 않을까. 특히 장성택은 자신이 누명을 썼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더욱더 매달렸다. 12 12일 군사법정에게 사형 판결문을 읽는 김원홍 국가안전보위부장에게 “원수님(김정은)을 만나게 해 달라”고 애원했다.

하지만 버스가 이미 지나간 뒤였다. 김정은이 장성택을 만나 줄 가능성은 없었을 뿐더러 김정은의 주변 사람들이 이를 허용할 리가 없었다. 결국 장성택은 하고 싶은 말을 못하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장성택이 처형된 소식을 듣고 김정은은 어땠을까?


대북 소식통은 “장성택이 처형된 날 김정은은 눈물을 흘렸다고 들었다”고 말했다. 그 이유에 대해 그는 “주변 사람들의 요구로 어쩔 수 없이 처형했지만 너무 서둘렀고 앞으로 자신을 지켜 줄 커다란 버팀목 하나를 자신 손으로 제거해 후회했다”고 덧붙였다.

김정은은 자신을 둘러싼 권력 싸움에서 조연준 조직지도부 제1부부장을 비롯한 기존 세력과 군부 원로그룹 등을 견제할 친인척 세력 가운데 한 사람을 제거한 것이다. 김경희(고모), 김여정(동생), 김정철() 등이 있지만 그래도 장성택이 필요했다. 장성택이 북한을 바꾸려는 욕심이 지나쳐 자신에게 도전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장성택이 ‘장씨의 나라’를 만들 만큼의 배짱은 없었다.

하지만 권력은 냉정하다. 그렇기 때문에 권력이다. 그 누구라도 도전할 가능성이 1%라도 보이면 제거해야 한다. 권력자 주변 사람들은 설령 그럴 마음이 없더라도 권력자가 오해할 소지를 만들지 말아야 한다. 김정은은 장성택 처형 뒤 5일 만에 김정일 2주기(12 17) 추모행사장에 모습을 보였다. 1년 가까이 끌어 온 장성택 사건을 처리하고 자신의 존재감을 보였다. 그 자리에 장성택의 부인인 김경희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지금 장성택의 그림자는 북한에서 거의 없어졌다. 장성택 주변 사람들은 처형되거나 권력에서 물러나 생사가 확인되지 않는 사람들도 있다. 일부는 일정 기간 혁명화교육을 받고 말직으로 복귀한 사람도 있다. 복귀한 사람들은 북한의 외화벌이에 앞장섰던 사람들로 장성택 처형 이후에도 필요한 사람들이다.

북한은 내년 5월 제7차 노동당 대회를 앞두고 벌써부터 대대적으로 선전하고 있다. 노동신문은 연일 ‘당 제7차 대회를 혁명의 전례없는 최전성기로 빛내이자’, ‘당 제7차 대회를 맞으며 혁명적인 사상공세의 포성을 더욱 높이 올리자’ 등의 제목으로 보도하고 있다. 김정은은 제7차 노동당 대회를 통해 세대교체를 대대적으로 할 것으로 전망된다. 김정은이 그 동안 인사를 통해 보여준 모습을 한 단어로 정리하면 ‘실리’ 또는 ‘실력’이다. 조그만 실수도 용납하지 않는다.

김정은이 과정보다 결과를 좋아하는 스타일이다. 그러다보니 관료들은 몸을 살리려는 경향이 농후해지고 있다. 이럴 때 장성택 같은 사람이 필요하다. ‘권력의 화신’이 아니라 ‘전략가’로서의 장성택이 필요한 것이다. 김정은 주변 사람으로 장기적인 비전이 있고 개혁 성향이 강하며 성과를 낼 수 있는 사람이다. 김정은이 이런 사람을 키우지 못하면 북한은 계속 제자리를 걸음을 할 수 밖에 없다.

지금 북한은 작지만 변화를 시작했다. 장성택이 추진했던 장마당은 경제의 주역이 됐고, 중앙 특구 5곳과 경제개발구 19곳은 더디지만 투자유치 설명회를 개최하는 등 준비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김정은은 이런 변화에 속도를 올릴 전략가가 필요하다. 당 제7차 대회가 그런 사람들을 위한 무대가 될 것으로 예상된다. 장성택은 갔지만 ‘장성택 키즈’들이 그 날을 기다리고 있다.

그 동안 [장성택傳]을 사랑해 주신 네티즌 분들에게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내년에는 [김정은 탐험]으로 찾아 뵙겠습니다.
고수석 통일문화연구소 연구위원
 ko.soosuk@joongang.co.kr

 

●[인민무력부장傳] 

(1) 초대 인민무력부장 최용건 

 

북한의 인민무력부는 한국의 국방부에 해당한다. 군사관련 외교업무와 군수·재정 등을 맡고 있다. 과거 국방위원회 산하의 군사집행기구였지만 지난 6월부터 국방위원회를 확대 개편한 국무위원회로 산하로 들어갔다. 이에 따라 인민무력부는 인민무력성으로 바뀌었고 인민무력부장도 인민무력상으로 호칭이 변경됐다. 이런 변화는 1948년 민족보위성으로 출범한 이래 4번째다. 1972년 인민무력부, 1998년 인민무력성, 2000년 인민무력부, 2016년 인민무력성으로 바뀌었다. 현재 박영식 인민무력상은 권력서열 16위다. 계급은 대장이다. 북한군을 대표하는 인민무력상(편의상 인민무력부장)들의 면면들을 알아보고 그들의 눈으로 북한 권력의 변화를 알아보고자 한다.

 

최용건 군사 능력 뛰어났지만 정치력에서 김일성에 밀려

초대 인민무력부장은 최용건(1900~1976)이다. 당시는 민족보위상으로 불렸다. 조국과 민족을 보위하는 인민군대라는 뜻에서 그렇게 지어졌다. 최용건은 1948 2 8일 조선인민군을 창건하면서 그 직책에 올라 1957년까지 맡았다. 북한 현대사에서 최용건 만큼 화려한 이력을 가진 사람도 드물다.

 

그는 중국 황포군관학교 교관, 동북항일연군 제7군단장·제2로군 참모장, 민족보위상, 서해안방어사령관, 인민군 차수,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 정치국 상무위원, 국가부주석 등을 역임하면서 북한 현대사에서 김일성 다음 가는 위치에 있었다.

 

▲평양 대성산 혁명열사릉 최고 상단에 위치한 최용건의 흉상이다. [사진 중앙포토]

 

특히 최용건이 항일투쟁시기에 맡은 중국 황포군관학교 교관, 동북항일연군 제7군단장·제2로군 참모장 등은 김일성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위치였다. 김일성은 당시 동북항일연군 제1로군 제6사장을 맡을 때 였다. 최용건 부대가 정규군이었다면 김일성 부대는 빨치산 수준이었다.

 

그리고 최용건은 10대 원수였던 중국 인민해방군의 주더(朱德), 저우언라이(周恩來), 허룽(賀龍) 등과 절친했다. 따라서 북·중 관계는 최용건이 도맡아 했다. 예를 들면 중국 정부 수립 20주년 기념식에 최용건이 단장으로 참석할 정도였다. 엄밀히 따지면 최용건이 김일성을 대신해 북한을 통치했어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화려한 스펙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역사는 승자를 중심으로 쓰여지는 법. 북한의 역사는 김일성에 충성하는 최용건의 모습만 그리고 있다.

 

두 사람의 첫 조우는 1941년 소련 하바로프스크에서 열린 항일연합군 지휘 간부회의에서다.

 

소련은 1930년대 후반에 연해주에 거주하는 한인들을 카자흐스탄과 우즈베키스탄 지방으로 강제 이주 시킨 뒤 1940년대에는 만주에서 오는 중국인 및 한인 유격대원들을 환영했다. 결국 모든 동북항일연군 부대의 생존자들은 1940년부터 1941년 사이에 소련으로 탈출했다.

 

12살이나 어린 김일성이 먼저 하바로프스크에 온 최용건의 숙소를 찾아가 인사를 드렸다. 당시 그들의 나이는 최용건 41, 김일성 29살이었다. 그 이후 최용건이 소련 88여단 참모장과 정치위원으로 활동할 동안 김일성은 대위로 근무했다.

 

두 사람의 운명이 바뀐 것은 1945년 북한으로 들어오면서 부터다. 소련이 김일성을 미는 분위기가 조성되면서 김일성이 권력의 정점에 먼저 다가갔다. 소련은 1948년 초대 내각을 구성하면서 김일성을 수상, 최용건을 민족보위상에 앉혔다. 김일성의 판정승이었다.

 

▲1958 10월 북한에서 마지막으로 철수하는 중국군을 평양역에서 환송하는 북한 수뇌부. 왼쪽부터 최용건, 중국 인민지원군사령관 양롱, 김일성이다. [사진 중앙포토]

 

최용건은 민족보위상으로 6.25전쟁을 치른다. 김일성이 최고사령관이었고 최용건은 조선인민군 총사령관이었다. 하지만 최용건은 남침에 반대할 정도로 전쟁에 소극적이었다. 따라서 전쟁은 김일성 최고사령관, 김책 전선사령관, 강건 총참모장 라인으로 참전했고 그는 서울방어와 인민군 재건을 지휘했다.

 

최용건은 전쟁 도중 팔에 부상을 입어 수술을 받기도 했다. 북한은 김일성이 부상 당한 최용건을 위로해 주고 따뜻하게 대해 주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김일성은 6.25전쟁 이후 1953년 최용건에게 대장 보다 한 단계 높은 차수 계급장을 달아주었다. 김일성은 최용건의 존재감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외국에 다녀오면 그를 위한 선물을 준비하기도 했다. 김일성은 최용건을 자신의 사람으로 만들고 싶어했다. 그래서 자신의 심복이었던 김책이 6.25전쟁 중에 사망한 뒤로 최용건을 가장 신뢰했다. 최용건이 환갑이 된 1960 6월에 생일상을 차려주면서 노력영웅칭호까지 붙여 주었다.

 

▲최용건(맨 오른쪽)이 함경남도 함흥시 기계공장을 방문했을 때의 모습이다. [사진 중앙포토]

 

북한은 6.25전쟁 이후 전쟁 복구 사업에 바빴다. 그래서 국방은 6.25전쟁이 참전한 뒤 계속 북한에 주둔했던 중국 인민해방군에 의지했다. 중국군은 1958년 완전 철수했다. 따라서 민족보위상의 역할이 지금 인민무력상 만큼 크지 않았다. 김일성은 중국과의 친분 때문에 6.25 전쟁 이후에도 그를 계속 민족보위상에 앉혔다. 중국군이 철수할 시작할 즈음에 그는 군복을 벗고 정치인으로 변신했다.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 정치국 상무위원, 국가 부주석을 역임했지만 평생 군인으로 살아온 그는 썩 마음에 내키지 않았다. 김일성과는 1960년대 북한 군대에 김일성 우상화가 퍼지면서 틀어지기 시작했다. 자신의 심복이었던 김광협, 김창봉 민족보위상이 차례로 숙청되면서 자신도 연금상태가 됐다.

 

▲류사오치 중국 국가주석이 1963 9월 평양을 방문했을 때 김일성과 최용건이 그를 영접하고 있다. 김일성 뒤로 최용건이 보인다. [사진 중앙포토]

 

이제 그에게 남은 것은 마지막 인생을 어떻게 정리하는가였다. 병명은 알려지지 않았지만 그는 오랫 동안 병환으로 침대에 누워 있었다. 북한은 김일성이 한해 두해 늙어가는 최용건을 몹시 가슴아파했다고 기록했다. 그리고 최용건은 1976 9월에 사망했다.

 

북한은 1976 9 20일자 그의 부고란에 ‘최용건 동지는 자기 생애의 마지막 순간까지 당의 유일사상체계를 확고히 세우고 그 어떤 어렵고 복잡한 환경속에서도 추호의 동요도 없이 오직 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께 끝없이 충직했다’고 적었다.

 

(2) 김평일 때문에 숙청된 김광협 

최용건이 1957년 북한의 민족보위상(인민무력부장)에서 물러난 뒤 그 바통을 이어받은 사람은 그의 심복이었던 김광협(1915~ ·)이다. 김광협의 사망 연도에 점이 찍혀 있는 것은 언제인지 몰라서다. 부수상까지 오를 정도로 한때 권력 서열 6위까지 올랐다가 ‘반() 김일성’ 세력으로 몰리면서 하루아침에 제거됐다. 1970년 조선노동당 제5차 대회에서 당적이 박탈당한 이후 행방이 알려지지 않았다.

 

▲김광협 [사진 중앙포토]

 

 김광협은 김일성의 둘째 부인인 김성애의 오빠다. 그는 김일성 아들 김정일에 눈에 가시였다. 김정일과 김성애의 사이가 좋지 않아 그 영향이 김광협에게로 영향을 끼친 것이다. 후계 결정 과정에서 김광협은 김성애의 아들인 김평일을 밀었다. 외조카를 미는 것은 당연했다. 당시 분위기도 김정일보다는 김평일에 쏠렸다. 강하게 반대하며 유일하게 김일성에 대들은 사람이 최현이다. 최현은 제4대 인민무력부장이라 제4편에서 자세하게 다룰 예정이다.

 

 김정일이 김평일에 쏠리는 분위기를 반전시킨 것은 1967년 조선노동당 제4기 제15차 전원회의다. 이 회의에서 김정일은 갑산파를 숙청했다. 갑산파는 1930년대 양강도 갑산군과 그 인근지역에서 김일성의 항일무장투쟁을 도와준 사람들이다. 특히 김일성의 항일무장투쟁 가운데 최고봉으로 꼽히는 보천보 전투를 도와 해방 이후 고위직에 올랐다.

 

 갑산파의 대표적인 사람은 박금철(당 서열 4), 이효순(당 서열 5), 김도만 등으로 숙청 당시 당내 실세들이었다. 이들이 숙청된 가장 큰 이유는 김일성 유일사상체계 확립에 장애가 됐기 때문이다. 당시 김정일의 나이는 25. 갑산파 숙청 이후 항일빨치산 출신 가운데 일부 군인들은 몰락의 길을 걸었다.

 

김광협도 그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김광협은 항일빨치산 출신으로 1940년 동북항일연군 제2로군 정치위원으로 활동했다. 그 자리는 최용건이 제2로군 참모장이 되면서 김광협에게 물려주었던 것이다. 같은 해 11월 소련 하바로프스크로 넘어가 소련 88여단 제4 7연장으로 군사훈련을 지휘했는데, 최용건이 88여단 참모장과 정치위원으로 역임해 둘은 동북항일연군 시절에 이어 더 각별해졌다.

 

해방 이후 김광협은 안길 등과 함께 목단강 분견대를 인솔하고 목단강 지역에 이동해 경비사령부 부사령으로 활동했다. 북한에 들어온 것은 1947년이다. 그 다음해에 창건하는 조선인민군의 작전국장을 맡았다. 최용건 민족보위상 겸 총사령관, 강건 민족보위성 부상 겸 총참모장, 김광협 작전국장 등으로 조선인민군의 라인이 짜여졌다.

 

▲김광협은 1958 11월 김일성이 6.25전쟁 이후 세번째로 중국을 방문했을때 군사대표단장 자격으로 김일성을 수행했다. 사진은 김일성(사진 왼쪽)이 우한(武漢)에 머물렀던 마우쩌둥이 찾아가 악수를 나누고 있다. [사진 중앙포토]

 

6.25전쟁 시절에는 강원도 일대로 쳐내려온 조선인민군 제2군단장을 맡았다가 작전 실패로 해임됐다. 1951년 김책 전선사령관의 사망하면서 그 자리를 이어받아 복권했다. 6.25전쟁 이후 조선인민군 총참모장이 됐다.

 

김광협은 1957년 제2대 민족보위상에 오르면서 군인으로서 최고의 영예를 얻었다. 1958년에는 군사대표단장으로 소련, 중국, 체코, 베트남을 방문했다. 중국은 김일성을 수행하면서 갔다. 김일성과 함께 베이징을 거쳐 마우쩌둥이 머물렀던 우한(武漢)을 찾아가기도 했다.

 

▲김광협은 1965 4월 김일성이 인도네시아 수카르노 대통령을 만날 때 수행원으로 함께 갔다. 왼쪽부터 김일성, 통역 수카르노. [사진 화보집 조선]


순탄하게 민족보위상을 지내던 차에 위기가 찾아 온 것은 1962년이다. 그 해는 쿠바 위기의 발발로 북한이 제4기 제5차 전원회의에서 경제건설과 국방건설을 병진하겠다고 발표했다. 지금 김정은이 추진하는 핵무력-경제 병진 정책의 원조격이다.


김광협은 경제·국방 병진정책을 도입하는 과정에서 당 지도부와 갈등을 빚었다. 구체적인 내용은 밝혀지지 않았지만 김광협은 이 정책에 소극적이었던 것으로 파악된다. 경제·국방 병진정책 속에 김일성의 우상화가 조금씩 스며들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김광협은 민족보위상 재직을 마지막으로 군생활을 마쳤다. 그 이후 최용건처럼 정치인의 길을 걸었다. 1966 10월 제2차 당대표자회에서 정치위원회 상무위원 6명 가운데 한 명으로 선출되기도 했고 1967년에는 부수상이 되기도 했다. 이에 앞서 1965 4월 김일성의 수행원으로 인도네시아를 방문했다. 하지만 재미를 보지 못했다.

 

 1960년대 후반부터 불기 시작한 김일성 유일사상체계의 바람은 너무 거셌다. 여기에 후계자 문제가 겹치면서 김광협은 버틸 수 없었다. 1970 7월에 열린 당 제4기 제21차 전원회의에서 김일성 유일사상화를 위한 사상 투쟁이 강조되면서 유일사상화에 비토적인 자세를 보인 김광협은 역사에서 사라졌다. 그리고 1970 11월에 열린 노동당 제5차 대회에서 당적이 박탈당했다.

 

/김평일 [사진 중앙포토]

  

김광협은 경제·국방 병진 노선과 김일성 유일사상체계 확립 등과 같은 제도적인 문제보다 자신의 외조카를 후계자로 옹립하려는 움직임 때문에 낭패를 본 것으로 추정된다. 1963년 자신의 동생인 김성애가 김일성과 결혼했지만 1964년부터 정치에 뛰어든 김정일을 우습게 본 것이다. 결국 김성애와 김평일에게 줄을 선 사람들은 하나 둘 씩 역사속에서 사라져갔다.

 

(3) 청와대 습격 ‘1·21사태’ 배후 김창봉

3대 민족보위상(인민무력부장)은 김창봉(1919~·)이다. 김창봉하면 떠오르는 장면은 1968년 청와대 습격 사건이다. 국가원수를 시해하려던 사건이라 한국이 발칵 뒤집혔다. 북한의 무모한 도발이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이 사건은 북한 군부들이 1968 2 8일 조선인민군 창군 20주년 기념에 때 맞춰 한국의 박정희 대통령을 암살하려는 시도였다. 김일성에 대한 과잉충성의 산물로 알려져 있으며 1970년대 초반까지 한국을 해방하고 김일성의 환갑을 서울에서 지낸다는 계획이었다.

 

▲김신조(사진 왼쪽에서 두 번째) 1968 1 21일 청와대 습격 실패 후 유일하게 생포된 공작원이다.[사진 중앙포토]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이 1972 7·4남북공동성명을 위해 평양을 방문했을 때 김일성 주석이 청와대 습격 사건에 대해 “내부 좌익 맹동 분자들이 저지른 일이지 결코 내 의사나 당의 의사가 아니었다”고 사과했다. 그리고 김정일 국방위원장도 2002년 한국미래연합 대표 자격으로 방북한 박근혜 대통령에게 “미안한 마음이다. 그 때 그 일을 저지른 사람들이 응분의 벌을 받았다”고 유감을 표했다.

 

김일성과 김정일이 그 일에 관여한 지 여부는 전문가들 사이에 의견이 엇갈려 진실이 가리기는 현재로서는 어렵다. 다만 김일성과 김정일이 자신들은 모르는 일이고 ‘내부 좌익 맹동 분자’, ‘그 일을 저지른 사람’으로 지적한 사람은 김창봉이다.

 

김일성이 지적한 ‘내부 좌익 맹동 분자’인 김창봉은 1919년 함경북도 경원군에 태어나 1938년 동북항일연군 제1로군 제5사에 소속돼 안길(1907~1947)의 지휘 아래 항일빨치산 활동을 했다.

 

한국전쟁에 참전해 1950 12월 제12사단장, 1951 4월 제8군단장을 역임했다. 1953 7월 소장으로 진급하여 제7군단장을 맡았다. 1959 7월 조선인민군 총참모장에 임명됐고 1962 10월부터 1968 12월 숙청당할 때까지 민족보위상을 맡았다.

 

민족보위상에 오른 김창봉은 과욕을 부렸다. 당시 군부는 김일성의 핵심 집단이었고 빨치산 출신들의 주도권을 쥐고 있었다. 지금과 달리 군대 내의 당의 유일사상체계가 정착되지 못했고, 당의 군에 대한 지도도 허술했다. 기고만장했다.

 

때 마침 조선인민군 창군 20주년 기념이 다가오자 ‘대형사고’를 치고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 사건은 무장게릴라 31명이 청와대 대통령 관저로부터 500m 거리까지 잠입했다가 교전 끝에 27명이 현장에서 살해됐고 3명을 탈출했으며, 1명은 생포된 것으로 끝났다.


뿐만 아니라 하루 뒤 22일에는 북한 원산 앞 공해상에 있던 미국 국가안전국(NSA) 소속 정보함 푸에블로호(USS Pueblo)를 나포했다. 생존한 승조원 82명과 유해 1구는 평양으로 압송된 후 사건 발생 약 11달이 지난 그해 12 23일 판문점으로 귀환했다. 미국은 항공모함과 구축함을 급파해 북한을 압박했지만 결국 영해 침범을 인정하고 북한과 승무원 송환해 합의했다.

 

▲김창봉은 1 21일에 있었던 청와대 습격을 주도했고 하루 뒤 22일에는 강원도 원산 앞 공해상에서 미국 정보수집함 푸에블로호 나포를 지시했다. [사진 중앙포토]

 

김창봉은 이 사건의 실패로 문책을 받지 않았다. 당시 김창봉은 김일성의 막대한 신임을 얻고 있었고 군사 업무에 관한 한 당의 간섭을 별로 받지 않았던 터라 그냥 넘어갔다. 문제는 김창봉과 대립각을 세우고 있던 김영주(김일성 동생) 당 조직지도부장이 김일성에게 이들의 전모를 보고하면서 터져 나왔다.

 

김영주는 김창봉이 호화별장을 지어놓고 방탕한 생활을 한 행위, 특수훈련을 이유로 군() 인민위원회 등의 사무소를 습격한 행위, 심지어 인민위원장을 납치한 행위, 당의 지시와 명령에 불복한 반당 행위 등을 김일성에게 낱낱이 보고했다.

 

▲김영주 노동당 조직지도부장은 김창봉 숙청에 앞장섰는데 그는 김일성의 동생이기도 했다. [사진 노동신문]

 

 김창봉은 자신의 목에 칼이 들어오는 것을 예감하고 이를 만회하기 위해 더 무모한 행위를 저질렀다. 그것이 ‘이승복 사건’이란 이름이 붙여진 울진·삼척지구 무장공비 침투사건이다. 하지만 이것마저 김창봉에게 도움이 되지 못했다.

 

결국 김창봉은 1969 1월 조선인민군 제4기 제4차 전원회의에서 숙청됐다. 김일성은 이 회의에서 “1956 8월 종파사건 때보다 김창봉의 죄가 더 크다. 8월 종파사건은 주동자들이 뒤에서 쑥덕거리며 당의 유일사상을 헐뜯었지만 당의 군사노선을 건드리지는 않았다. 하지만 김창봉은 당의 군사노선을 전부 엎어놓았다”고 비판했다.

 

김창봉 숙청 이후 군대에 유일사상체계 확립을 위한 정치위원제가 실시됐고 중대 단위에는 정치지도원이 파견됐다. 군대 내 모든 명령서에는 군사 간부 혼자서 서명하지 못하고 정치위원도 서명을 해야 효력이 발생했다. 이를 계기로 당 조직지도부는 군대에 대한 당 사업을 완전히 장악했고 조직지도부에서 군대 내 정치일꾼들을 담당하는 부부장과 담당과를 신설했다.

 

▲북한 당국은 김창봉을 숙청했던 것과 달리 원산항에 있던 푸에블로호를 1995년 초 현재 위치한 대동강변으로 가져와 계급교양 도구로 활용하고 있다. [사진 우리민족끼리]

 

김창봉 숙청은 1967년 박금철· 이효순 등 갑산파 제거에 이어 두 번째 항일빨치산에 대한 숙청이며 1970년에 있는 세 번째 항일빨치산 숙청의 징검다리가 됐다. 세 번째 항일빨치산의 숙청때 2대 민족보위상인 김광협이 포함됐다. 이로써 항일빨치산 가운데 김일성 직계인 제1로군 출신 항일빨치산들만이 북한 정치의 남게 됐다. 최현 민족보위상, 오진우 총참모장, 한익수 총정치국장 등이 그들이다.

 

(4) 최현, 숨겨진 김정일 킹메이커()

수령님(김일성), 김정일 동지를 후계자로 삼아야 합니다.”

 

 이 말이 북한의 역사를 바꾸게 될 줄을 누가 알았을까. 이 말을 굳이 비교하자면 귄터 샤보프스키 동독 선전담당 비서가지체없이 지금부터라는 한 마디로 베를린 장벽을 무너뜨린 것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이 말의 주인공은 최현(1907~1982) 인민무력부장이다. 지금 최용해 국무위원회 부위원장의 아버지다. 북한은 1972 12월 사회주의 헌법을 채택하고 최고인민회의 제5기 제1차 회의를 열어 민족보위성을 인민무력부로 개칭했다. 따라서 최현은 1969 1월 제4대 민족보위상에 올랐다가 1972년부터 개칭된 인민무력부장을 맡았다.


최현은 1960년 후반 김일성 후계자 문제를 놓고 치열한 권력싸움을 벌일 때 끝까지 김정일을 옹립했다. 당시 분위기는 김일성과 둘째부인 김성애 사이에 태어난 김평일에 쏠려 있었다. 김일성도 김성애의 입김 탓에 누구를 할지 고민하고 있을 때였다.

 

최현은 권총을 들고 다니면서 김평일을 지지하는 사람들을 협박했다. 하지만 더 중요했던 것은 김일성의 귀에 얘기를 하는 것이었다. 당시 절대권력을 쥔 김일성의 마음을 돌리려면 목숨을 걸어야 했던 시절이었다. 다들 김일성의 눈치를 보던 시절에 최현이 나선 것이다. 최현은 김일성과 사적으로 자유롭게 얘기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그는 김일성과 독대를 통해 이 글의 서두에 했던 말을 했던 것이다.

 

▲김일성의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6권의 첫 장에 실린 사진. 사진 왼쪽부터 최현, 김일성이다. [사진 중앙포토]

 

김일성은 다른 사람은 몰라도 최현의 말을 귀담아 듣는 사람이었다. 김일성은 자신의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6권의 첫 장에 최현과 찍은 사진을 게재했고, 4권에는백전노장 최현이라는 제목으로 35페이지를 할애해 그를 추억할 정도로 각별한 사이였다.

 

두 사람은 1933 9월 중국 왕청현 소왕청 마촌에서 처음 만났다. 둘 다 모두 동북항일연군 제1로군 제2군장 왕더타이(王德泰) 밑에 있을 때였다. 『세기와 더불어』 4권에는 최현이 비록 5살 위였지만 처음 만났을 때김일성 대장님이라고 불렀다고 적혀 있다. 초면이라 그럴 수 있고, 김일성 우상화에 따라 조작했을 수도 있다.

 

▲최현(사진 중앙)이 항일혁명시기에 만주에서 김일성(사진 왼쪽), 안길과 함께 기념 사진을 찍었다. [사진 중앙포토]

 

 이렇게 만난 두 사람은 서로 깊은 전우애를 나누었고 최현은김일성의 남자가 됐다. 김일성이 회고록에서 최현에 대해 서술한 부분은 다음과 같다.

 

최현은 매우 솔직하고 소탈한 사람이다. 그는 보는대로 말하고 생각나는대로 표현하는 사나이다.”
최현은 일평생 비관을 모르고 살아온 낙천가였으며 어떤 폭풍속에서도 앞으로만 돌진해온 탱크 같은 사나이였다.”

 

▲평양 혁명열사릉에 있는 최현의 반신상[사진 중앙포토]

 

최현은 김일성의 최대 위기였던 1956 8월 종파사건때 김일성을 결사옹위했다. 이 사건 이후 김일성은 최현에 대한 고마움의 표현으로 그를충신이라고 불렀다. 지금도 최현 집안을충신 집안으로 불리는 이유가 이 때부터다. 이런 깊은 관계로 최현은 1972년 김일성에 독대를 신청해 김정일의 실력을 하나 둘씩 열거했다.


김정일은 1967년 노동당 제4기 제15차 전원회의에서 박금철, 이효순 등 갑산파를 숙청하는데 큰 역할을 했으며, 이 회의를 계기로 조선노동당 내에 김일성 주체사상으로 유일사상체계를 구축하는데 중심이 됐다고 그를 띄웠다.
 


그 외에도 당 선전선동부 문화예술지도과장으로 문화예술 부문을 지도해백두산 창작단’, ‘피바다 가극단’, ‘만수대 창작사등을 창설해 북한 문화예술계의 돌풍을 일으켜 1970년 당 선전선동부 부부장으로 승진한 점도 내세웠다. 김일성 역시 이런 점을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1970 11월에 열린 노동당 제5차 대회에서 당 중앙위원으로 세워야 한다는 원로들의 주장을 일단 보류시켰다. 김일성은 본인의 둘째 부인 김성애를 삐딱하게 대하는 김정일이 거슬렸다.

 

▲1984년 발표된 북한 영화 `혁명가`의 한 장면, 최현(사진 오른쪽)을 주인공으로 했다. [사진 조선중앙TV 캡처]

 

하지만 최현의 완강한 설득과 충정어린 고견에 마음이 흔들렸다. 그리고 그의 말대로 후계자로 김정일을 결정했다. 이 소식을 들은 김정일이 최현에 대한 고마움은 어땠을까? 은인이자 평생 보답해야 할 사람이었을 것이다. 김정일은 그를 주인공으로 하는혁명가라는 영화를 만들어 전국에 보급했다. 그에 감사하는 마음은 최현의 아들 최용해로 이어졌고, 김정일 사망 이후는 김정은이 아버지의 마음을 이어받아 최용해를 곁에 두고 있다. 최용해는 현재 당 서열 5위이며 장성택이 사망한 이후 김정은이 의지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다(계속).

 

(5) 최현, 숨겨진 김정일 킹메이커(하)

김정일 조직비서동지께서 건강하시오?”


최현 인민무력부장이 1982 사망할 즈음에 병상에서 그를 문병 사람들에게 이렇게 물었다고 김일성의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4권에 기록돼 있다. ‘김정일 바라기였던 최현은 자신이강추했던 김정일이 후계자로 성장하는지 궁금했던 모양이다.

 

▲노동신문에 게재된 최현 인민무력부장의 부고. [사진 노동신문]


김정일은 1980년 노동당 제6차 대회에서 정치국 상무위원이 되면서 공식적으로 후계자로 임명됐다. 김정일의 후계 수업은 사실상 1973년 조직비서를 맡으면서 시작했다. 이에 앞서 후계자 논의는 1971 11월 당 제5기 제3차 전원회의에서 공식적으로 제기됐다. 하지만 김일성이 제지하면서 일단 보류됐다. 시기상조와 혈연적 연계에 따른 심적인 부담감으로 작용한 듯하다.

 

최용건 민족보위상, 김영주(김일성 동생) 조직비서, 김일 비서 등이 1972 6 정치위원회에서 재차 김일성에게 의견을 올렸. 하지만 퇴짜를 맞았다. 김일성은 김정일이 서른 밖에 되지 않았다고 계속 반대 이유를 밝히고 다른 사람을 찾아 것을 주문했. 항일 원로들은 김일성이 김평일에게 마음이 있다는 것을 눈치 챘고 어쩔 없이 김일성의 결심을 기다릴 밖에 없었다. 미적거리는 김일성을 찾아 이를 뒤엎은 사람이 최현 인민무력부장이었던 것이다.

 

최현의 ‘무데뽀’ 덕인지 김정일은 마침내 1973년에 개최된 당 제5 7차 전원회의에서 조직지도부장 겸 조직비서, 선전선동부장 겸 선전비서에 올랐다. 이로써 공식추대 이전에 후계자의 자리에 올라섰고 1974 2월에 열린 당 제5기 제8차 전원회의에서 후계자로 추대됐.


최현은 1969년부터 1976년까지 인민무력부장을 맡는 동안 가장 업적이라면 김정일을 후계자로 만든 것이다. 최현이 인민무력부장
맡았던 때는 김일성의 유일사상체계와 김정일의 유일지도체제를 다져 갔던 시기로 북한군에 변화가 없었던 시기였다. 아울러 7.4 북공동성명(1972) 발표되는 데탕트 무드가 한반도에 조성돼 남북한에 군사적인 긴장 상태가 없었다. 최현은 1976 5 오진우에게 인민무력부장을 넘겨준 1980 10 노동당 6 대회에서 정치국 위원과 당중앙군사위원회 위원으로 선출됐다. 그리고 2 사망했다.


영화혁명가에서도 그려졌듯이 최현은 삼국지 장비의 이미지 뿐만 아니라 인간적이고 의협심이 강하며 의리가 있는 사람이었다. 탈북
가운데 최현의 얘기를 들은 사람들도 이구동성이다. 김일성도 자신의 회고록에서 최현을 최대한으로 미화했다. 최현은 군사뿐 아니 정치에도 밝은 지휘관이었고, 유능한 군사작전가· 노숙한 정치일꾼· 세련된 선동가였다고 평가했다. 아울러 최현을 싸움꾼으로만 다면 그것은 근시안적인 평가라고 덧붙였다.

 

▲김일성(사진 중앙) 북한 지도부들이 최현 인민무력부장의 장례식에 참석해 애도하고 있다. 사진 오른쪽부터 이종옥, 김정일, 오진우, 김일성, 김일, 김영남 [사진 노동신문]

 

최현이 사망한 뒤 노동신문에 미스테리한 사진 한 장이 실렸다. 노동신문은 1982 4 11일자 4면에 최현의 시신 앞에 김일성 등 주요 간부들이 애도를 표시하면서 머리를 숙인 장면을 게재했다. 김일성을 중심으로 김일, 오진우, 김정일, 이종옥 등 정치국 상무위원들이 배석했다. 여기서 눈에 띄는 장면은 김정일만이 머리를 숙이지 않고 정면을 똑바로 응시하고 있는 모습이다. 존경이 사무쳐서인지 섭섭

 

한 점이 있었는지 현재로서는 정확히 알기 어려워 궁금증이 남는 대목이다.

 

(6)] 19년 집권, 최장수 인민무력부장 오진우

 5 인민무력부장은 오진우(1917~1995). 1976년부터 사망할 때까지 19 동안 인민무력부장을 맡았다. 1948 조선인민군 창건 이래 최장수다. 재임 기간으로 따지면 2위인 김일철 7 인민무력부장(11)보다 8년을 더했다.

 

▲평양 대성산 혁명열사릉에 있는 오진우 반신상[사진 중앙포토]


깡마른 얼굴에 호전적인 생김새와 판문점 도끼 만행 사건(1976), 아웅산 테러(1983) 등에 직간접적으로 관련돼 한국인들에게 깊이 각인돼 한국 사람들에게 북한 인민무력부장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게 하는 인물이 오진우다.

 

오진우는 조선인민군 창건 이래 가장 화려한 군경력을 가졌다. 조선인민군 원수, 국방위원회 1부위원장, 총정치국장, 총참모장 등을 역임해 김일성·김정일 다음 가는 넘버3. 노동당에서도 마찬가지였다. 1980 노동당 6 대회에서 정치국 상무위원이 이후 사망 때까지 자리를 지켰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은 2016 5 노동당 7 대회에서 개회사를 읽으면서 항일혁명투사들 가운데 김일, 최현, 오백룡, 오진우, 최광, 임춘추, 박성철, 전문섭, 이을설 9명을 거명했다. 수많은 항일혁명투사 가운데 이들을 언급한 기준은 없지만 인민무력부 가운데 최현, 오진우가 포함됐다.

 

일복이 많아서 그런지 오진우는 인민무력부장에 임명된 지 3개월 만에 8.18 도끼만행 사건을 처리해야 했다. 1976 8 18일 오전 11시께 판문점 공동경비구역 내 사천교 근방에서 미루나무 가지치기 작업을 하던 유엔사 경비병들을 북한군 수십 명이 도끼 및 흉기로 구, 살해한 사건이다.

 

미국은 사건 다음날인 19 북한군의 행위를 비난하며 휴전 처음으로 전쟁준비 태세인 데프콘2 발령하고 미드웨이 항모전단, F-111 전폭기 20, B-52 폭격기 3 등을 한반도에 배치했다. 여차하면 북한을 초토화하겠다는 의지였다. 북한도 이에 질세라 군대와 노동적위대 북한의 모든 정규군과 예비군 병력을 전투태세에 돌입했다.

 

하지만 사건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한미 연합군이 사건 발생 사흘 뒤인 8 21 북한에 사전 경고한 다음 문제의 미루나무를 단하면서 끝났다. 미국은 당시 대선이 한창인데다 베트남 전쟁이 끝난 시점에서 한반도에서 전쟁을 원하지 않았다. 그래서 미국은 주체가 명시되지 않은 김일성의 유감 표명을 받아내고 사건을 서둘러 수습했다.

 

오진우는 돌발사태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 1968년에 발생한 푸에블로호 사건 이후 8 만에 발생한 미국과의 대치상황에 겁부터 났던 것이다. 미군이 막강한 화력을 한반도에 배치해 놓고 미루나무를 자르겠다고 경고하자 보고만 있을 밖에 없었다. 미군이 확전 하려고 하지 않은 것만으로도 감사해야 상황이었다. 위기를 넘긴 오진우는 절치부심했다. 하지만 급한 일이 생겼다. 김정일의 대한 지도권 확립을 돕는 것이었다. 후계자가 김정일이 노동당을 장악한 군대를 장악하려는 시기였다. 하지만 군대가 노동당보 쉽지 않았다.

 

▲김일성(사진 왼쪽) 1985 8 만경대 야외수영장을 김정일과 오진우(사진 오른쪽) 함께 방문했다. [사진 중앙포토]

 

오진우는 1970년대까지 김정일보다 김일성 사람이었다. 군대내에서 김정일 사람이라고 있는 사람은 혁명 2세대들로 오극렬, 두남, 김강환, 최상욱 정도였다. 나중에 이들은 김일성 사망 이후 김정일의 최측근이 된다. 하지만 김일성 사람이었던 오진우는 대부분 사람들이 김정일을당중앙으로 호명하던 시기에 당중앙에 대한 언급을 피하는 그에 대해 소극적인 태도를 취했다. 김정일이 동당을 장악하여 돌풍을 일으키면서 자행되는독주혹은전횡 부담스러웠던 것이다.

 

오진우가김정일의 남자 되는 시점은 1977 11월이다. 김일성이 군대 장악에 어려워하는 김정일을 지원하기 위해 조선인민군 7 선동원 대회를 열었다. 자리에서인민군 10 준수사항 제시하면서 군대에서 김정일의 유일지도체제 구축을 위해 그의 결정 철저히 준수할 것을 지시했다.

 

연설이 있은 이후 1978 인민군 창건일이 2 8일에서 4 25일로 변경됐고, 이듬해인 1979년부터 김정일의 군에 대한 적극적 역할이 재개됐다. 4 25일은 김일성이 1932 만주 안도현에서 항일유격대를 창건한 날짜다. 김정일은 조선인민군이 항일혁명전통 계승한 군대임을 강조함으로써 항일무장투쟁에 참가했던 수뇌부들로부터 지지를 얻었다.

 

▲김정일(사진 왼쪽) 1984 인민무력부 관계자들과 환담 나누고 있다. 김정일의 오른쪽에 오진우 인민무력부장, 연형묵 비서가 보인다. [사진 중앙포토]

 

오진우는 김정일을 후계자로 키우려는 김일성의 마음을 읽은 김정일에 대한 소극적인 자세에서 적극적으로 돌아섰다. 이후 오진우는 사망할 때까지 최현의 뒤를 이어 김정일이 후계자로 안착하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노동신문은 1995 2 26일자 1면에 오진우의 부고를 실으면서김정일 동지를 가장 가까이에서 보좌했다 기록했다.

 

이는 인민무력부장 가운데 1면에 부고가 실리는 번째 사례다. 번째는 최용건 1 인민무력부장이다. 2 김광협, 3 김창 등은 정치적 숙청으로 언제 사망했는지 알려지지 않았고 4 최현은 노동신문 2면에 실렸다. 최용건·오진우가 1면에 실린 것은 선인민군의 창건과 발전에 기여한 공로가 남달랐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북한이 2009 오진우(사진 가운데) 말년을 소재로 예술영화 `백옥` . [사진 조선중앙TV 캡처]

 

북한은 2009 오진우의 말년을 소재로 2부작 예술영화백옥 제작해 그를 기념하는 날을 즈음에 방영했다. 오진우를백옥 유한 것은 그의 삶이 당과 수령을 변함없이 순결하게 끝까지 받들었다는 의미에서다. 그의 아들은 오일정 노동당 민방위 부장이다.

 

(7)] 최광, 숙청돼 탄광으로 19 김일성 앞에선?

19년 동안 인민무력부장으로 조선인민군을 호령했던 오진우의 사망 이후 그 자리를 이어 받은 사람은 최광(1918~1997). 김정일은 오진우가 사망한 이후 8개월 동안 인민무력부장 자리를 공석으로 비워두었다. 그 자리를 비워둔 이유는 정확하게 알려지지 않았다. 최광은 인민무력부장이 되기 이전에 총참모장(1988~1995)으로 오진우와 함께 조선인민군을 이끌었다.

 

▲북한 영화 `백옥`에서 최광 총참모장이 오진우 인민무력부장에게 군사동향을 보고하고 있다. [사진 조선중앙TV 캡처]

 

최광이 바로 인민무력부장이 되지 못한 것은 과거의 일과 관련된 것으로 보인다. 최광은 김정일에게 미움을 받아 숙청된 적이 었다. 최광은 1969 1 조선인민군 당위원회 4 4 전원회의에서 민족보위상(인민무력부장) 김창봉 등과 함께 숙청돼 광산노동자로 전락했다. 공식적인 숙청 이유는 정책의 불이행, 군벌관료주의화였다. 당시 그의 직책은 총참모장(1963~1968)이었다. 북한군의 총참모장은 우리의 합참의장과 같은 실권자다.

 

역사속에서 사려졌던 최광이 부활한 것은 1977 황해남도 인민위원장을 맡으면서다. 8년만에 복권한 것이다. 이후 그의 인생은 (심장마비) 때까지 탄탄대로를 달렸다. 조선인민군 원수, 정치국 위원, 국방위원회 부위원장 ··군에서 주요 요직을 거쳤다.

 

군인으로서의 명예회복은 1988 그가 군복을 벗을 당시 직책이었던 총참모장에 복귀하면서 이뤄졌다.

 

19 만이다. 얼마나 감격스러웠는지 최광은 총참모장에 임명된 김일성을 대면하는 자리에서 무릎을 꿇고 울었다고 한다. 북한에 숙청됐다가 복권을 하는 경우가 더러 있다. 최광과 같은 혐의로 같은 시기에 숙청됐던 김철만(1920~ 생존) 2경제위원장 방위원도 시기는 모르지만 복권해 왕성한 활동을 했다.

 

▲최광(사진 가운데) 인민무력부장이 1995 10 김일성광장에서 열린 조선노동 창건 50주년 기념 행사에서 김정일(사진 오른쪽), 이을설(사진 왼쪽) 등과 박수를 치고 있다. [사진 노동신문]

 

최광이 총참모장·인민무력부장으로 있던 시기는 제1차 북핵위기와 고난의 행군(1995~1997) 등으로 북한 건국 이후 최대의 위기를 맞은 때였다. 최광은 오진우 인민무력부장이 사망한 이후부터 김정일에 이은 북한 군부의 2인자였다. 따라서 내우외환에 앞장서야 하는 위치에 있었다. 이 시기에 김정일 시대의 통치이념인 선군정치가 탄생했다.

 

최광의 별명은독종이다. 항일빨치산 시절과 6.25전쟁때의 활약과 인생의 고비마다 오뚜기처럼 불굴의 의지로 일어났기 때문이다. 연의 일치인지 오뚜기 인생의 대명사인 덩샤오핑(1904~1997) 사망한 이틀 뒤에 최광이 사망했다.

 

▲최광(사진 오른쪽) 총참모장 시절인 1994 6 중국을 방문해 강택민 중국 가주석과 악수하고 있다. [사진 중앙포토]

 

그의 사망은 ‘막강 권력’ 인민무력부장 시대의 마감을 예고했다. 인민무력부장은 제3대 김창봉부터 군부의 대명사가 됐다. 최현을 거쳐 오진우가 맡으면서 명실상부한 권력의 핵심 자리로 올랐다. 김일성 사망과 고난의 행군을 거친 뒤 김정일 시대가 되면서 군의 위상이 변했다. 김정일은 선군정치를 표방하면서 “조국보위도 사회주의 경제건설도 인민군대가 맡자”고 강조했다.

 

사업으로 군대가 금릉2동굴과 청류다리 공사를 맡으면서 군인들이 국가건설에 투입됐다. 그러면서 조선인민군의 핵심 보직인 민무력부장, 총정치국장, 총참모장의 역할에 변화가 생겼다. 군의 정치사업을 총괄하던 총정치국장이 군부대 서열 1위가 됐고, 총참모장이 작전국· 정찰국 현역군단들을 지휘하면서 서열 2, 인민무력부장은 후방총국·대외사업국 외교·지원사업을 맡으면서 서열 3위로 밀려났다. 인민무력부장은 휘하에 전투 병력이 없는 장군이 버렸다.

 

이런 군부의 역할 변화는 김정일이 군을 두려워한 점도 있다. 과거 김창봉 사례를 경험한 김정일이 군부가 언제든지 정권의 위협 요소 있다고 판단해서다. 총정치국장이 군부 동향을 확실히 장악함으로써 군부 쿠데타 정권을 위협하는 요소를 사전에 차단할 있게 만든 것이다. 지금도 체제는 유지되고 있다.

 

(8) 군부핵심 "넘버 3" 김일철 생사여부 누구도 몰라

군부 내 ‘넘버 3’ 인민무력부장. 최광 인민무력부장이 사망한 뒤 인민무력부장 자리는 김일철(1930~ 생존)의 손에 쥐어졌다. 명실상부 김정일 시대에 인민무력부장이다. 김정일은 1994 김일성 사망 이후 최고지도자가 됐지만 3년간 유훈통치를 마치고 1997 비서에 추대되면서 자신의 시대를 열었다.

 

▲2006 1 북한 국방위원회로 주최로 열린 설날 경축공연장에서 김정일 국방위원장(사진 왼쪽), 김영춘 총참모장, 김일철 인민무력부장(사진 오른쪽) 박수를 치고 있다. [사진 노동신문]

 

김정일이 1998 9 인민무력부를 인민무력성으로 개칭하면서 김일철을 인민무력상(이하 인민무력부장) 앉혔다. 인민무력부가 1972 민족보위성에서 바뀐 26 만이다. 그러다가 2 뒤인 2000년에 다시 인민무력부로 돌아갔다.

 

김정일은 최현-오진우-최광으로 이어졌던막강 권력인민무력부장이 두려웠는지 해군에서 잔뼈가 굵은 김일철 해군사령관을 선택했. 이로써 최광이 사망한 1997 2 이후 인민무력부장을 공석으로 뒀다가 1 7개월 만에 자리를 채웠다.

 

김일철이 인민무력부장으로 임명됐을 때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했다. 김정일이 최고지도자가 되면서 군부 조직을 총정치국, 총참모부, 인민무력부 등으로 세분화했고 국방위원회가 최고지도기관으로 승격되면서 인민무력부는 후방총국·대외사업국 등 군사외교·지원사업을 맡는 기관으로 전락했다. 그래서 해군사령관 출신인 김일철을 앉혀도 무방했던 것이다.

 

당시 군부의 실질적인넘버 1’ 총정치국장에 조명록(1928~2010), ‘넘버 2’ 총참모장에 김영춘이 맡고 있었다. 이들은 1995 10 임명됐다. 최광이 인민무력부장을 맡고 있었지만 항일혁명 1세대와 유훈통치 기간을 감안해 원로 차원의 대우였지 과거와 같은 실권 없었다. 19 동안 인민무력부장을 맡았던 오진우가 아니었다. 실제적으로 군부는 조명록-김영춘 라인이 이끌었다. 둘은 김정일의 사람들이었다. 특히 조명록은 해방 이후 김정일을 등에 업고 귀국했던 사람으로 김정일과 깊은 인연이 있다.

 

▲김일철 인민무력부장(사진 왼쪽) 2000 9 제주도에서 열린 1 남북 국방장관회담에 참석해 조성태 국방장관과 건배하고 있다. [사진 중앙포토]

 

김일철이 한국 사람들에게 기억되는 장면은 2000 9 제주도에서 열린 1 남북 국방장관회담에서다. 분단 이후 처음 열리는 남북 국방장관회담에 왕별을 어깨에 달고 나타난 모습에 한국 사람들의 시선이 쏠렸다. 회담에서 김일철과 한국의 조성태 국방장관은 군사적 긴장완화와 평화보장, 군사분계선과 비무장지대를 개방해 남북을 연결하는 철도를 건설하기로 합의했다. 회담의 결과로 개성공단을 시작할 있었다.

 

김일철은 2007 평양에서 열린 2 남북 국방장관회담에도 북한 대표로 나왔다. 인민무력부장을 오진우에 이어 번째(11) 래한 셈이다. 한국은 김장수 국방장관으로 바뀌었다. 김일철은 회담을 끝으로 내리막길을 걸었다. 2009 2 인민무력부장을 김영 총참모장에게 물려주고 인민무력부 1부부장으로 물러났고, 그해 4 국방위원회 부위원장에서 위원으로 강등됐다.

 

▲제2 남북 국방장관 회담이 2007 11 평양 송전각 초대소에서 열렸다. 김장수 국방장관(사진 왼쪽) 김일철 인민무력부장(사진 오른쪽) 악수하고 있다. [사진 공동취재단]

 

그리고 그는 2010 5 국방위원회 위원 인민무력부 1부부장에서도 해임됐다. 북한 조선중앙통신은 김일철의 해임 사유를연령 관계(80)’라고 밝혔지만 여러 가지 정황에 비춰 설득력이 떨어졌다. 왜냐하면 조명록 총정치국장은 김일철보다 2살이 많았는데도 현직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당시 그의 해임을 놓고 그에게중대 과오 있지 않는가 하는 궁금증을 낳기도 했다. 김일철은 해임 이후 아직 활동이 소개되지 않고 있다. 사망했으면 노동신문에 부고가 실렸을텐데 아직까지는 부고 기사가 없다. 올해로 87세다. 


(9) 김영춘, 쿠데타 발각 이후 어떻게 살아났나?

 김영춘(1936~생존) 인민무력부장은 군부 내 대표적인 ‘김정일의 남자’였다. 최현·오진우 인민무력부장이 군부 내에서 김정일을 최고지도자로 만들었다면, 김영춘은 그들의 바통을 이어받아 김정일을 최고지도자로 안착시키는데 큰 역할을 했다.

 

▲김영춘 총참모장(왼쪽 둘째) 2005 10 노동당 창건 60주년 기념 열병식에 참가해 김정일 국방위원장, 조명록 총정치국장, 김영춘, 김일철 인민무력부장(사진 오른쪽부터) 등과 함께 경례를 하고 있다. [사진 중앙포토]

 

김영춘이 일약 스타가 것은 1995 함경북도 청진시 6군단 사건을 진압하면서다. 6군단 사건은 군대 정치위원을 중심으로 지휘관들이 쿠데타를 모의, 발각된 것으로 김정일 체제에 대한 불만이 표출된 것으로 알려졌다. 정치위원은 군대 정치·사상을 담당하는 람으로 쿠데타를 사전에 감시해야 하는데, 오히려 쿠데타를 모의한 것이다. 사건으로 장성급을 포함한 간부 40여명이 처형됐고 400여명이 숙청됐다.

 

공교롭게도 당시 6군단장은 김영춘이었다. 김영춘은 인민군 작전국장(1986)으로 일하다 과오를 범하고 지방 여단의 부여단장으로 천됐다가 군수동원 총국장(1993) 거쳐 6군단장(1994)으로 부임했다. 군단장이 부대 내에서 쿠데타 모의가 있다는 것을 모를 도로 은밀하게 진행됐다. 당시 정치위원들은김정일의 남자 김영춘을 쿠데타 모의에서 제외시켰던 것이다. 이들의 쿠데타 모의는 민군 보위사령부에 발각돼 수포로 끝났고, 사건에 연루되지 않았던 김영춘은 쿠데타 진압을 도와 1995 10 총참모장으로 승진했다.

 

6군단 사건은 고난의 행군 시기(1995~1997) 군대가 외화벌이에 나서면서 빚어진 사소한 갈등이 쿠데타로 확대·해석되면서 많은 람이 사망했다는 얘기도 있다. 떨어지는 낙엽도 조심해야 시기에 시범 케이스에 걸려들었다는 주장이다. 특히 중국 국경 인접부대인 6군단은 군대가 부러워하는 외화벌이 군단이라 시범 케이스로 안성마춤이었다. 감시 체계가 철두철미한 인민군에서 쿠데타를 모의한다는 자체가 불가능하다는 현실이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

 

진실여부는 역사에 남겨두더라도 김영춘은 사건으로 기사회생했다. 김영춘은 총참모장(1995~2009) 이후 14 동안 많은 일이 발생했다. 대포동 1 발사(1998), 1 연평해전(1999), 2 연평해전(2002), 대포동 2 발사 1 핵실험(2006) 굵직한 사건들이 많았다. 김영춘이 사건들을 주도한 것은 아니지만 총참모장으로서 상당한 역할을 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김영춘이 인민무력부장을 맡은 것은 2009 2월이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후계자로 지명된 지 한 달 뒤였다. 김정일 국방위원장 2008 8월 뇌졸중으로 쓰러지고 후계자 승계 작업이 빨라지면서 이뤄진 조치였다. 군부 내 ‘넘버 2’인 총참모장은 평양방어사령관지낸 이영호에게 넘겨졌다. 야전 지휘관에서 행정을 담당하는 인민무력부장을 맡았으니 따분했을 것이다.


김영춘은 2010 9 3 당대표자회에서 김정은이 후계자로 공식화 이후 주요 행사의 주석단에서 보이지 않았다. 현철해 등과
김정일의 남자들이 가는 것으로 받아졌다. 직책은 인민무력부장이지만 뒷방 노인 신세로 전락해 버렸다.

 

▲김영춘 인민무력부장(오른쪽에서 둘째) 2011 12 28 평양 금수산태양궁 앞에서 열린 영결식에서 김정일 운구차량을 호위하고 있다. 김영춘 앞에는 영호 총참모장이 보인다. [사진 중앙포토]

 

그러나 김영춘은 김정일 사망(2011 12) 김정은과 함께 운구차를 호송한 8 가운데 명이 되면서 김정은 시대에도 존재감을 유지하는 했다. 하지만 권력은 나눠 가질 없는 법이고김정일의 시대에서김정은의 시대 변했다. 김영춘은 2012 4 인민무력부장을 김정각 총정치국 1부국장에게 물려주고 노동당 군사부장으로 물러났다. 한직은 아니지만 김영춘에게는 명예직에 가까운 리였다. 이로써 김정일 집권 17 동안 인민무력부장은 최광-김일철-김영춘 3명으로 끝나는 순간이다.

 

올해로 81세인 김영춘은 지난해 경사를 맞았다. 지난해 4 김일성 탄생일을 맞아 현철해와 함께 조선인민군 원수 칭호를 수여받았. 조선인민군에서 원수 칭호를 받은 사람은 현재 김정은을 포함해 3명이 된다. 과거 조선인민군 원수 칭호를 받은 선배는 오진우, , 이을설 등이 있었다.

 

(10)] 흙수저 출신 김정각 7개월 천하로 물러나  

 김정각(1941~생존)은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정권을 잡은 뒤 2012 4월 처음으로 임명한 인민무력부장이다. 최용해 총정치국장, 이영호 총참모장 등 김정은을 뒷받침하는 군부 인사들에 비해 존재감은 다소 떨어지는 편이다.

 

최용해는 김일성의 항일빨치산 동지인 최현 인민무력부장의 둘째 아들로 김정은의 ‘영원한 2인자’가 될 사람이다. 이영호는 김일성의 항일빨치산 시절 주치의였던 이봉수(1901~1967) 전 만경대혁명학원 원장의 아들이자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친구였다. 만경대혁명학원은 혁명 유자녀들과 당·정의 고위간부 자녀들만 입학하는 특별학교다. 이영호는 조선인민군을 ‘김정은의 군대’로 만들 사람이었다.

 

이에 비해 김정각은 최용해· 이영호처럼 든든한 ‘아버지의 빽’이 없었다. 인민무력부장 재임 기간도 겨우 7개월 밖에 되지 않는다. 하지만 더 짧게 한 사람도 있다. 김격식 인민무력부장이다. 그는 6개월 동안 맡았다

 

▲김정각(사진 왼쪽) 북한 인민군 총정치국 제1부국장이 2011 7월 은하수극장 개관을 축하하는 음악회를 관람하고 박수를 치고 있다. 사진 오른쪽부터 김정일, 이영호 총참모장, 김정은, 김정각. [사진 노동신문]

 

김정은 시대의 군부 인사는 예측불허였다. 김정은은 장성들의 별을 붙였다 뗐다 하는 등 어린아이 장난치듯이 군부를 가지고 놀았다. 김정은의 ‘군부 길들이기’라고 해석할 정도로 김일성-김정일 시대에는 찾아 볼 수 없는 행태였다.

 

김정각은 김정일 운구 8인방 가운데 한 명이었다. 당시는 총정치국 제1부국장으로 조명록(1928~2010) 총정치국장이 건강상 이유로 활동을 못했던 2007년부터 총정치국을 맡았다. 군부에서 촉망받는 사람이었다. 이로 인해 김정각은 김정은 시대에도 승승장구할 것으로 예상됐다. 하지만 정치는 생물이고 권력은 수학공식이 아니다.

 

김정은은 집권한 지 얼마 되지 않은 2012 7월 군 작전에 대한 실질적인 명령권을 가진 이영호 총참모장을 날려버렸다. 군부 숙청의 신호탄이었다. 군의 경제권을 민간으로 넘기려는 김정은의 정책에 부정적인 입장을 보이다가 숙청된 것으로 알려졌다. 그 자리는 현영철로 채워졌다. 그리고 4개월 뒤에는 김정각도 인민무력부장에서 물러나게 했다. 7개월 밖에 안 된 김정각을 물러나게 한 이유는 그의 건강 문제로 알려졌다. 김정은이 집권한 지 1년도 채 되지 않는 동안 총참모장과 인민무력부장을 해임시킨 것이다.

 

이처럼 김정은은 군부의 중요 직책을 필요할 때 수시로 교체함으로써 군 수뇌부를 긴장시키고 그를 통해 충성을 확보하려고 했다. 김정은 시대에 인민무력부장은 김정각-김격식-장정남-현영철-박영식으로 이어져 집권 5년 동안 5명이 바뀌었다. 김일성-김정일 시대와는 사뭇 달랐다.

 

▲김정각(김정은에서 왼쪽으로 두번째)이 인민무력부장에서 물러난 뒤 2013 4 15일 평양체육관에서 열린 김일성군사종합대학과 김일성정치대학간의 체육경기를 관람하면서 박수를 치고 있다. [사진 노동신문]

 

김일성 집권 46년 동안 5(최용건-김광협-김창봉-최현-오진우)이 인민무력부장 자리를 지켰고, 김정일 집권 17년 동안 3(최광-김일철-김영춘)이 인민무력부장을 맡았다. 현재 김정각은 김일성군사종합대학 총장으로 재직하고 있다. 김일성군사종합대학은 군 엘리트를 양성하는 곳으로 김정은이 2002년부터 2007년까지 이 대학 특설반을 다닌 것으로 알려졌다. 김정각으로서는 나쁘지 않은 직책이다.

 

 하지만 정치적으로는 거의 해임됐다. 2012 4월에는 당 정치국 위원에서 물러났고 2013 1월에는 국방위원회 국방위원에서도 해임됐다. 현재 국방위원회는 확대·개편돼 국무위원회로 개명된 상태다. 그나마 정치적으로 남아 있는 직책은 당 중앙위원회 위원 정도다.

 

 김정각은 인민무력부장에서 물러난 뒤 대외활동이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그러다가 지난해 12 17일 금수산태양궁전에서 열린 김정일 사망 5주기 중앙추모대회에서 모습을 보였다. 올해로 76세다.

 

(11) 북한 최정예 부대 철수시킨 김격식

1948년 인민무력부가 창설된 이래 최단명한 인민무력부장이 김격식(1938~2015)이다. 2012년 11월 김정각의 뒤를 이어 인민무력부장에 임명됐지만 2013년 5월 물러났다. 딱 6개월이다. 그러나 6개월 이후에 옮긴 자리가 총참모장이니 별로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을 것이다. 북한 군부 넘버3에서 넘버2가 됐으니 말이다. 하지만 총참모장직도 3개월만에 해임됐다. 김정은 시대에 벌어진 ‘군부의 수난’의 한 단면을 보여주고 있다.

 

▲김격식 총참모장(왼쪽에서 세번째)이 2013년 5월 동해안 `8월25일 수산사업소`를 방문한 김정은의 지시사항을 메모하고 있다. 사진 왼쪽부터 이영길 총참모부 작전국장, 장정남 인민무력부장, 김격식, 최용해 총정치국장 [사진 노동신문]

 

김격식은 서해 4군단장 시절 김영철 군 정찰총국장(현 통일전선부장)과 함께 2010년 3월 천안함 폭침사건을 기획하고 지휘한 사람으로 알려졌다. 또한 같은 해 11월 발생한 연평도 포격 도발사건 역시 김격식이 지휘했던 4군단이 주도하면서 군부 강경파의 상징적인 인물이 됐다.

 

그는 우리에게는 군부 강경파이지만 북한 군부에서는 ‘참군인’으로 존경 받았다. 김정은 시대의 군부는 정치군인들이 활개를 쳤다. 최용해·황병서 총정치국장, 김원홍 국가안전보위부장, 김영철 군 정찰총국장 등 노동당이나 군부내 정치부서 출신들이 야전군 출신보다 득세를 하고 있다. 그래서 김격식을 따르는 후배 군인들이 많았다고 한다.

 

김격식은 또 명령에 죽고 명령에 사는 군인이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 예로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2002년 개성공업지구를 지정할 때 군부가 반대했다. 이유는 개성이 서울까지 직선거리로 불과 60km이며 북한이 유사시 가장 빨리 서울을 공격할 수 있는 요충지역이어서였다. 그래서 인민군 최정예 6사단과 64사단, 62포병연대 등이 포진해 있었다. 이 부대들의 장사정포 사거리는 50~60km로 서울을 사정권에 넣는다.

 

개성공단이 들어서려면 부대들을 개성 송악산 뒤로 물러나게 해야 했다. 군부들의 반발은 만만치 않았다. 심지어 김정일의 명령인데도 쉽게 따르려고 하지 않았다. 이를 해결한 사람이 김격식이다. 당시 그는 2군단장으로 개성지역 군부대의 책임자였다. 김격식은 “장군님의 명령이다. 우리는 장군님의 명령에 복종하는 전사들이다. 철수한다”며 선배들과 후배들을 설득했다고 한다. 불만이 있던 군부도 김격식이 김정일의 명령에 따르자 순순히 부대를 송악산 뒤로 옮겼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2007년 4월 김격식 총참모장(오른쪽에서 세번째) 등 군부 인사들을 데리고 해군 제790부대를 시찰하고 있다. [사진 중앙포토]

 

김격식은 총참모장을 두 차례나 맡았다. 이미 언급한 대로 2013년에 3개월 동안 총참모장을 맡았던 기간 한 것 외에도 2007~2009년사이 그 자리를 차지했다. 제대로 된 총참모장은 그 때 한 셈이다. 당시는 남북한 간에 군사적 긴장이 없었다. 두 번째 남북정상회담이 2007년 10월 평양에서 열려 군사적 긴장완화 등이 논의되던 때였다. 남북국방장관회담도 그해 11월 평양에서 열렸다.

 

총참모장을 두 차례나 맡은 사람은 김격식 외에 최광 전 인민무력부장이 있었다. 김격식이 인민무력부장이나 총참모장을 그만 둔 이유는 밝혀지지 않았다. 그는 2013년 8월 총참모장에서 물러난 뒤 2014년 4월까지 국방위원회 위원을 역임했다. 그 이후 별다른 공식활동이 없다가 노동신문 2015년 5월 11일자 4면에 그의 부고가 실렸다. 노동신문은 “암성중독(암으로 인한 건강악화)에 의한 급성호흡부전(곤란)으로 사망했다”고 보도했다.

 

(12) 50대 소장파 장정남 등장...군심 흔들려

김정은 시대 북한 군부의 계급장은 롤러코스터였다. 올라갔다가 내려오고 다시 올라가고. 대표적인 사람이 김격식 후임으로 인민무력부장에 임명된 장정남이다. 제11대 인민무력부장이다. 장정남은 인민무력부장으로 재직하는 1년 1개월(2013년 5월~2014년 6월)동안 4차례나 계급이 바뀌었다.

 

▲장정남 인민무력부장(사진 오른쪽)이 2013년 5월 평양에서 열린 공연을 김정은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사진 왼쪽 둘째)과 함께 보고 있다. 사진 왼쪽부터 이설주, 김정은, 최용해, 장성택, 장정남. [사진 노동신문]

 

장정남은 2013년 5월 인민무력부장이 되면서 인민군 중장(한국의 소장)에서 상장(한국의 중장)으로 승진했다. 대부분의 인민무력부장이 대장 시절에 그 자리에 올랐는데 의외였다. 김정은식의 전격 발탁이었다. 김정은은 항일빨치산의 2·3세이거나 군부내 정치군인 출신인 ‘금수저’를 제외하고 ‘빽’없이 실력만으로 버텨 온 사람을 찾고 있었다. 자기 사람을 키우고 싶었던 것이다. 그가 바로 장정남이었다. 장정남은 동부지역 최전방인 1군단장을 역임하는 등 야전에서 잔뼈가 굵은 사람이었다.

 

장정남은 60~70대 원로들이 좌지우지하던 북한군에서 50대 초반에 인민무력부장이 되면서 한 때 이영길 총참모장보다 서열이 앞설 만큼 능력과 패기를 인정받았다. 단적인 예로 장정남은 인민무력부장이 된 지 3개월 만에 대장 계급장을 달았다. 초고속 승진이었다. 그런데 그것도 잠시. 6개월만인 2014년 2월 갑자기 상장으로 강등됐다. 그러다가 1개월 뒤에 다시 대장으로 승진했다. 결국 2014년 6월 현영철에게 인민무력부장을 물려주었다.

 

▲장정남 인민무력부장(붉은 원)이 2014년 3월 김정숙해군대학과 김책항공군대학 교직원들의 사격경기를 지켜보고 있다. [사진 노동신문]

 

군부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인민무력부장이 이런 수모를 당했으니 군심(軍心)은 뒤숭숭할 수 밖에 없었다. 김정은의 변덕 탓인지, 60~70대 군부 원로의 견제 탓인지 여기저기서 군부 인사에 대한 불만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우선 원로 군인들은 장정남의 전격 발탁을 놓고 “이 나라가 어떻게 해서 세워졌는데…”, “수령님·장군님이 어떻게 나라를 지켰는데…” 등으로 과거와 비교하는 말들을 쏟아냈다고 한다. 그러다가 입을 함부로 놀린 사람들은 뒷통수를 맞았다. 대표적인 사람이 현영철 인민무력부장이다. 그 얘기는 다음 편에서 언급할 예정이다.

 

김정은의 변덕은 잦은 인사에서 나타났다. 인민무력부장 뿐만 아니라 군부내 넘버 2인 총참모장도 이영호-현영철-김격식-이영길 등으로 수시로 교체됐다. 김정은은 자기 사람으로 키우기 위해 곁에 두었다가 실적이 없거나 마음에 들지 않으면 멀리 보내버렸다. 권력 주변에서는 불가근 불가원(不可近不可遠)이 불문율이다.

 

장정남은 인민무력부장에서 물러나기 한 달 전에 당중앙군사위원회 위원에 포함됐다. 당중앙군사위원회는 그동안 유명무실했다가 2010년 9월 김정은이 부위원장이 되면서 실질적인 군사정책기구가 됐다. 장정남은 인민무력부장 시절에 존재감이 거의 없었지만 당중앙군사위원회 위원 시절에도 마찬가지였다. 인민무력부장에서 물러난 지 한 달 뒤에 다시 상장으로 강등됐다.

 

대북소식통은 “장정남이 상장으로 강등되면서 강원도 철원북방에 배치된 5군단장으로 좌천됐다”고 말했다. 그 근거로 장정남이 2016년 5월 이을설 사망에 따른 국가장의위원회 위원으로 올라 여전히 현역으로 활동하고 있다는 것이다.

 

 (13) 총살됐다는 현영철 어쩌면 살아있나

현영철(1949~·) 재임 중에 총살을 당한 것으로 알려진 번째 인민무력부장이다. 국정원은 현영철이 총살을 당한 이유로 김정은에 대한 불만 표출과 수차례의 지시 불이행 때문이라고 국회 정보위원회에 보고했다. 국정원은 현영철이 총살을 당했다고 주장했지만 북한이 공식적으로 발표하지 않아 사실여부는 두고 봐야 듯하다. 현영철의 혐의는 반당·반혁명이다.
 

▲현영철 인민무력부장이 2015 1 북한군 서부전선 기계화타격집단 장갑보병 부대의 동계훈련에 참가해 장갑차에서 훈련을 지휘하고 있다. [사진 노동신문]

 

현영철은 국정원의 주장이 맞다면 김정은에 대한 어떤 불만을 표출했을까? 태영호 주영 북한대사관 공사는집에서 나눈 얘기가 도청되는 바람에 처형됐다 밝혔다. 국정원과 태영호의 말이 맞다면 현영철은 집에서 김정은에 대한뒷담화 하다가 도청된 것으로 파악된다.
 

고위 탈북자들이 전해주는 뒷담화의 내용은 이렇다. 김정은이 2012, 2013 목선을 타고 전방 방어대를 시찰할 군인들이 물에 반쯤 잠길 때까지 목선을 미는 것을 보고 현영철이어린 지도자는 이런 것을 선전하느냐 비판했다고 한다. 이후로도 현영철은 김정은을어린 지도자 자주 표현했고어린 지도자를 모시기가 너무 힘들다 투덜댔다고 한다.
 

어린 후계자들이 가장 듣기 싫어하는 말이어리다 표현이라고 한다. 속에자신을 깔보고 있다 뜻이 내포돼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성격이 급하고 감정 조절이 어려운 김정은이 말을 들었으면 아마 참지 수도 있다.
 

▲현영철 총참모장(사진 왼쪽) 2012 북한군 534군부대 기마중대 훈련장에서 말을 타고 있다. 사진 왼쪽부터 현영철, 최용해 총정치국장, 김정은 국방위원회 1위원장, 장성택 국방위원회 부위원장. [사진 중앙포토]

 

현영철은 김정일 시대에 나갔던 군인이었다. 2006년부터 백두산 서쪽 · 국경지대를 담당하는 8군단장으로 복무했다. 8군단장은 군수 공장이 밀집돼 있는 자강도의 경비를 책임지는 자리다. 이후 20010 9 김정은과 함께 대장 계급장을 달았다. 군부 내에서 김정은의 세습 기반을 닦는 권력의 핵심 역할을 했다. 그리고 이영호 총참모장이 2012 7 물러나자 차수(대장과 원수 사이의 계급) 승진하면서 자리를 이어받았다. 승승장구 자체였다.
 

하지만 3개월 대장으로 강등됐고 급기야 2013 5 전방 5군단장으로 좌천되면서 계급도 상장(한국의 중장)으로 내려왔다. 2014 6 다시 대장으로 승진하면서 12 인민무력부장이 됐다.

▲현영철 인민무력부장이 2015 4 러시아 모스크바에서 열린 국제안전 토론회에 참석해 연설하고 있다. [사진 러시아 국방부]


현영철은 엄밀히 말해김정일의 남자이지김정은의 남자 아니었다. 장신이었던 현영철은 단신인 김정일을 만나면 무릎을 굽혀 눈높이를 낮출 정도로 그에게 절대적인 충성을 보였다. 김정일은 생전에 현영철을 매우 중시했고 특별한 대우를 했다는 얘기가 많다. 그래서 김정은과 함께 대장으로 승진시킨 것으로 추측된다. 이영호 총참모장의 후임으로 현영철이 임명된 것도 김정일의 용인술을 간파한 당시 최용해 총정치국장과 장성택 국방위원회 부위원장의 작품으로 있다.

그런 탓에 현영철은 김정은에 대한 거부감보다 김정일에 대한 충성심이 강했다. 현영철의 바로미터는 김정일이었다. 따라서 현영철의 눈에 비친 김정은은어린 지도자로만 보였을 것이다.


 
현영철은 국정원이 총살됐다고 국회에 보고했지만 통일부 ‘2017 북한주요인사 인물정보에는 여전히 생존자로 분류돼 있다. 2 6 조선중앙TV 반영된 기록영화백두산 훈련 열풍으로 무적의 강군을 키우시어 현영철이 등장하기도 했다. 북한은 동안반당·반혁명’, ‘최고존엄 모독 훼손 혐의로 처형된 사람들은 기록영화에서 삭제했다.

 

(14) 김정은 고민끝 최종선택한 박영식은 누구

박영식 인민무력상(인민무력부장) 정치군인 출신이다. 야전 지휘관 출신들이 오던 자리에 총정치국 조직부국장에서 발탁됐다. 총정치국은 군대의 정치사업을 추진하고 간부 선발, 군사작전 명령서에 대한 당적 통제를 하는 기관이다. 쉽게 말해 조선인민군 내에서 넘버1 조직이다.

 

▲박영식 인민무력상이 2015 6 15 김정은 국무위원장과 함께 모란봉악단 공연을 관람하고 있다. 김정은 오른쪽은 황병서 총정치국장이다. [사진 노동신문]

 

동안 인민무력부장은 대부분 야전 지휘관인 총참모장을 거쳐서 오는 경우가 많았다. 역대 인민무력부장 13 가운데 김광협, 김창봉, 오진우, 최광, 김영춘, 김격식, 현영철 7명이 총참모장 출신이다. 인민무력부장 가운데 총정치국 출신이 맡은 것은 박영식이 처음이다.

박영식은 장정남에 이은 군부 내에서 김정은식 번째 발탁 인사였다. 총정치국 조직부국장은 총정치국장 다음으로 가는 위치로 승진이 보장되는 자리다. 현철해 인민군 원수, 김수길 평양시위원회 위원장이 자리를 거쳐 갔고 현재는 조남진 중장(한국의 소장) 맡고 있다. 따라서 박영식은 언젠가는 중용될 것으로 점쳐져 왔다.
 

하지만 총정치국 출신이 군수·장비·건설·군사외교 민방위 업무를 수행하는 인민무력부장에 것은 이례적이다. 전임자 김수길 평양시 위원장처럼 정치적으로 빠지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박영식을 발탁한 것은 전임자 현영철의 불미스러운 사건으로 인한 군부의 동요를 사전에 차단하기 위한 포석으로 풀이된다


김정은은 현영철의 반당·반혁명에 대한 휴유증을 조기에 진화하고 인민군대의 유일사상체계를 다지기 위해 총정치국 출신이 필요했던 것이다. 박영식은 2014 4 총정치국 조직부국장으로 오면서 중장( 2)에서 상장( 3)으로 진급했고 2015 6 현영철 다음으로 인민무력부장에 임명되면서 대장( 4)으로 승진했다. 초고속 승진이다.

 

▲박영식 인민무력상(김정은 왼쪽) 2015 7 8 김일성 사망 21주기를 맞아 김정은 위원장을 포함해 군부 고위인사들과 함께 금수산태양궁전을 참배했다. 앞줄 왼쪽부터 조남진 총정치국 조직부국장, 이영길 총참모장, 황병서 총정치국장, 김정은, 박영식 인민무력상, 김원홍 국가안전보위상, 노광철 상장. [사진 노동신문]

 

김정은 인사 스타일의 특혜자라고 있다. 현재 박영식은 인민무력부장으로 1 7개월을 재직하고 있다. 김정은 시대 인민무력부장으로서 최장수다. 앞으로 박영식의 운명은 모를 일이다. 김정은이 군부 잦은 인사로신뢰 주기보다는긴장 유발 전략을 사용해 왔기 때문이다.
 

북한 언론은 박영식을 호명할 인민무력상으로 적고 있다. 지난해 6 최고인민회의 13 4 회의에서 국방위원회를 확대·개편해 국무위원회로 바꾸었다. 과거 인민무력부가 국방위원회 산하였다가 지금은 국무위원회 산하로 들어갔다. 아울러 인민무력성으로 개칭했다. 따라서 인민무력부장이 인민무력상이 것이다.


()  남북한 책임자 10년만에 만날 있을까

인민무력부장은 북한 군부의 상징이다. 시리즈는 인민무력부장을 통해 북한 권력의 변화를 조망해 보고자 했다. 북한 연구가 김일성-김정일-김정은에만 초점이 맞춰져 있어 이들 중심의 역사에 대한 반성에 따른 것이다.

 

인민무력부장은 김일성 시절부터 선군정치를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북한에서 김씨 3부자 다음으로 의미 있는 요직 가운데 하나다. 특히 김일성 시대의 인민무력부장은 지금과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위세가 등등했다. 김일성 집권 46 동안은 항일빨치산 활동을 함께 했던 최용건-김광협-김창봉-최현-오진우 5명이 자리를 지켰다. 가운데 최용건·김광협·오진우는 노동당의 꽃이라고 있는 정치국 상무위원까지 올랐다.
 

▲노동신문에 부고가 실린 인민무력부장들이다. 왼쪽부터 최용건, 최현, 오진우, 최광 그리고 김격식이다. [사진 중앙포토]

 

인민무력부장은 최용건부터 시작해 현재 박영식까지 13명이 맡았다. 가운데 최장수는 19 동안 인민무력부장을 맡았던 오진우(1917~1995)였고 최단명은 김격식(1938~2015)으로 딸랑 6개월만 자리에 있었다. 인민무력부장에 재임하는 동안 현영철 처럼 공개처형을 당한 것으로 알려진 사람도 있다.

 

현재 인민무력부장은 조선인민군 내에서 넘버3이다. 인민무력부장은 김정일 시대부터 군수·장비·건설·군사외교 민방위 업무 군정(軍政) 기능만 맡게 됐다. 무력 전반을 지휘하거나 군사작전· 교육 훈련 등에 대한 감독을 포함한 군령(軍令) 기능은 총참모장이 가져갔다. 넘버1 인민무력부장과 총참모장의 정치활동을 감시하는 총정치국장이다.


 
계급으로 보더라도 이들 조직의 서열을 있다. 황병서 총정치국장과 이명수 총참모장은 대장과 원수 사이의 계급인 차수이며 박영식 인민무력상(인민무력부장) 대장이다. 우리에게 없는 계급인 차수가 대장보다 단계 위다. 지난해 6 북한 정부 조직 개편때 인민무력부는 국방위원회가 확대·개편된 국무위원회의 지도를 받게 됐으며 명칭도 인민무력성으로 변경했다.

 

아래는 역대 인민무력부장 명단이다.

                                                                      

한반도는 최근 북한의 신형미사일 발사와 김정남 피살 등으로 긴장국면이 조성되고 있다. 미국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의 대북 정책은 과거 오바마 행정부 보다 강경해질 조짐이다. 3월초에 시작할 한미 연합군사훈련 이후 다시 한반도에 긴장을 고조시킬 것이다.
 

우리 기억 속에서 가물가물해졌지만 남북국방장관 회담을 다시 꺼내본다. 회담은 2000 제주도와 2007 평양에서 차례 열렸다. 북한측에선 회담 모두 김일철 인민무력부장이 나왔고 한국은 조성태· 김장수 국방장관이 회담에 참석했다. 회담의 공통 주제는 긴장완화와 평화구축이었다.

 

지금 돌이켜보면 우리가 그런 때도 있었나 싶을 정도로 아련한 추억이 돼 버렸다. 남의 일이면 그렇게 감상에만 젖을 수 있는데 우리 일이고 해결해야 할 과제다.

 

남북국방장관 회담이 다시 열려야 한다. 지금 생각하면 어림도 없는 소리다. 하지만 현재의 긴장 국면을 해결하려면 방법 외에는 다른 선택이 없어 보인다. 만나서 지루한 말싸움이 이어지더라도 만나야 한다. 만에 실마리를 차지 못하면 찾을 때까지 다시 만나서 풀어야 한다. 북한과 일본이 현재의 유엔 대북제재 국면에도 불구하고 중국, 몽골, 동남아시아 등에서 만나 그들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노력하는 모습에서 지혜를 찾을 있다. 전쟁 중에도 회담은 있다.
 

그리고 미국을 설득하고 이해를 구할 필요가 있다. 세계를 경영하느라너무나 바쁜미국의 귀를 잡고 우리의 입장을 전달해야 한다. 독일 통일의 초석은 빌리 브란트(1913~1992) 아니라 콘라드 아데나워(1876~1976) 깔아 놓았다. 아데나워의 친서방정책이 미국·유럽을 안심시켰고 그들의 도움을 구할 있었고 빌리 브란트의 동방정책으로 승화될 있었던 것이다.
 

지금까지 [인민무력부장傳] 애독해 주신 네티즌 여러분들에게 감사드립니다. 현실적인 어려움이 많았지만 많은 자료를 드리지 못한 점이 아쉬움으로 남습니다. 추가로 확인되는 자료는 업데이트 하도록 하겠습니다. 거듭 감사드립니다.
고수석 통일문화연구소 연구위원 ko.soosuk@joongang.co.kr

 

■ 고수석의 김정은 분석 - 중앙일보

■ 2017.01.15 신년사 암송 들볶이는 1월은 또다른 ‘고난의 행군’

 

 

북한은 1월이 되면 김정은 신년사로 몸살을 앓는다. 모든 부문에서 신년사 학습을 필수적으로 하기 때문이다. 노동신문은 이를 ‘신년사 학습 열풍’이라고 표현했다. 예를 들어 노동신문은 지난 5일 함경남도 함흥시 당위원회가 신년사 학습을 올해 사상사업의 첫 공정으로 삼고 ‘신년사 학습 열풍’을 세차게 일으키고 있다고 보도했다. 이 외에 평안남도 당위원회, 원산시 인민위원회 등도 마찬가지라고 선전했다. 강계뜨락또르연합기업소에서 근무한 탈북민 김철광씨는 “신정 연휴(1~3)를 쉬고 난 뒤 출근하는 4일부터 신년사 학습에 매달려 보통 3월까지 신년사를 손에 들고 있다”고 말했다.

 

신년사는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교시로써 1년 동안의 분야별 정책추진 과제를 담고 있다. 모든 당위원회, 행정기관, 기업소, 협동농장은 신년사를 토대로 사업계획을 수립한다. 신년사가 발표되는 1 1일 낮 12 30 (평양시간 12) 전 주민들은 동시에 의무적으로 라디오와 TV 중계방송을 시청한다. 그리고 각 시·도 및 단체, 공장, 기업소별로 신년사 관철 결의모임과 궐기대회를 거의 한 달 동안 진행한다.

 

 

평양시는 지난 5일 김일성광장에서 군중대회를 열었다. 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 박봉주 총리, 최용해·김기남·최태복·오수용·곽범기 등 당 중앙위원회 부위원장 등이 대거 참석했다. 이는 신년사의 중요성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이날 보고자로 나선 김수길 평양시 당위원회 위원장은 “신년사를 삶과 투쟁의 좌우명으로 삼고 뜻깊은 올해를 위대한 승리의 해로 빛내자”라고 강조했다. 

양력설로 휴일인 1일엔 대충 들어

신년사를 접하는 북한 주민들의 마음은 편치 않다. 신년사가 발표되는 1일에는 집에서 김정은의 연설을 대충 듣다가 가족·친척들과 윷놀이나 주패(카드)를 한다. 신년사를 대충 듣는 이유에 대해 탈북민 김씨는 “의무적으로 TV 시청을 하지만 어차피 출근하면 지겹도록 신년사를 공부하고 외워야 하기 때문에 명절만큼은 집에서 편히 쉰다”고 말했다. 천리마제강연합기업소· 황해제철연합기업소 등 큰 기업소에 근무하는 사람들은 1일 출근해 한자리에 모여 신년사를 TV로 시청한다. 그리고 당위원회, 내각 등 정부기관 사람들도 마찬가지로 출근해 신년사 학습을 위한 준비를 한다.

 

신년사 교육은 각 당위원회 선전선동부가 주관한다. 노동신문은 지난 4일 평안남도 당위원회의 경우 선전선동부가 신년사의 기본사상과 내용을 보여주는 체계도 3만부와 신년사 학습자료 5만부를 만들어 도 안의 당조직들에 배포했다고 밝혔다. 신년사 학습은 우선 원문학습에서 시작, 녹화방송과 노동신문을 보거나 체계도·학습자료 등을 반복해서 읽으면서 진행한다. 그리고 학습한 것을 놓고 연구발표모임 등을 통해 신년사에서 부문별로 제시한 과업을 토론한다. 탈북민 김씨는 “신년사 학습을 자기 과제와 결부해야 할 뿐 아니라 열성당원이나 사업장 간부들은 신년사를 통달할 정도로 외워야 하기 때문에 1월은 개인적인 ‘고난의 행군’으로 생각한다”고 말했다. 올해 신년사는 1100여자 정도다. 간부가 아닌 일반 직장인들은 해당 부문만 외워도 괜찮다. 예를 들면 경제 부처는 경제부문, 대남 부서는 남북 관계, 공장·기업소는 산업부문 등에 관련된 내용 정도를 암송한다. 

  ‘신년사 통달 경연대회’ 열기도

북한은 주민들의 신년사 학습을 독려하기 위해 ‘당근’을 제시하고 있다. 북한의 각 대학이나 공장·기업소는 설날이나 김정일 생일(2 16), 김일성 생일(4 15)을 맞아 신년사 전문을 통째로 암송하는 ‘신년사 통달 경연대회’를 연다. 대학은 암송대회 수상자들에게 표창장과 함께 관련 과목에 최고 학점을 수여한다. 직장은 대규모 축하공연의 VIP석 초대권, 평양 등 대도시 탐방 등을 선물한다. VIP석은 수상자가 시·도 당위원회 위원장 등 간부들과 나란히 앉을 수 있기 때문에 눈도장을 찍을 수 있는 좋은 기회다. 또한 신년사 통달 경연대회가 몇 달에 걸쳐 진행되기 때문에 경연대회 기간에 대학·직장에서 빠질 수 있다. 단위 직장에서 우승하면 군·시·도 경연 대회에 나갈 수 있기 때문에 암송에 자신있는 사람은 도전해 볼 만하다.

 

그리고 이동의 자유가 없는 북한에서 경연대회에 참석하게 되면 편의를 제공받을 수 있다. 일이나 공부도 하지 않고 바깥 바람도 쐬고 일석이조(一石二鳥). 함경남도 흥남제련소에서 근무한 탈북민 이소연씨는 “만경대·주체탑 등 평양을 구경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져 이를 악물고 외우기도 했다”며 웃었다. 이씨는 “경연 대회에 참가하려는 사람들이 스터디 그룹인 ‘통달 모임’을 만들어 서로 외운 내용을 수정해 주기도 한다”고 덧붙였다. 최근 들어 휴대전화의 보급으로 문자방(메시지를 주고받는 채팅방)을 통해 신년사의 중심내용과 올해 주민들이 해야 할 과제들을 공유하기도 한다. 전국의 모든 당원들은 다가오는 설날(1 28)에 올해 신년사를 읽고 세포(말단 기층조직)마다 부가되는 문답식 경연에 참여해야 한다.

 

이런 특혜가 있는 반면 ‘채찍’도 있다. 신년사 암송에 게으름을 피울 경우 승진이나 노동당 가입 등에 불이익을 받을 수 있다. 북한 주민들은 매주 토요일 열리는 생활총화에서 암송 상태를 확인받는다. 생활총화는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는 자아비판과 동료의 과오를 지적하는 상호비판을 하는 정치행사다. 그 자리에서 생활총화를 주재하는 세포비서가 개인별 암송 상태를 기록한다. 세포비서는 당의 가장 말단 간부로 당원들의 조직생활을 관리하는 사람이다. 세포비서의 평가가 승진과 노동당 가입 등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또한 암송 상태가 불량한 사람은 퇴근을 제때에 못한다. 벌칙으로 1시간 정도 남아서 암송하고 검사를 받은 뒤 퇴근해야 한다. ‘원수님(김정은)에 대한 충성심이 부족하다’는 비판도 함께 받는다. 

암송 상태 불량하면 퇴근 제때 못해

노동신문은 신년사 전문을 통달한 사람들이 벌써 나왔고 앞으로 더 나올 것이라고 연일 선전하면서 신년사 학습을 부추기고 있다. 함경북도 청진정제소금공장에 근무했던 탈북민 강금철씨는 “북한 주민들이 바라는 것은 신년사 내용이나 학습이 아니라 1월이 빨리 지나가기를 기대한다”고 말했다. 1월이 지나면 덜 들볶인다고 한다.

 

올해 김정은의 신년사 가운데 전문을 암송하려는 북한 주민들에게 고민거리가 하나 생겼다. 김정은이 신년사 끝부분에 “언제나 늘 마음뿐이었고 능력이 따라서지 못하는 안타까움과 자책 속에 지난 한해를 보냈다”고 술회했다. 이 대목은 오류가 없는 존재로 규정된 북한의 최고지도자인 수령이 직접 자신의 오류를 인정한 것이다. 자신을 제외한 모든 북한 사람들이 했던 생활총화를 김정은이 북한 주민들 앞에서 한 셈이다. 신년사 통달 경연대회를 준비하는 북한 주민들이 이 대목을 어떻게 할지 궁금해진다.

 

김정은의 이번 ‘자아비판’을 놓고 한국에서도 그 의도에 대한 해석이 분분하다. 국책연구기관인 국가안보전략연구원은 ‘2017년 김정은 신년사 특징과 전망’에서 김정은이 이례적인 자아비판을 통해 대대적인 숙청과 물갈이, 즉 ‘정풍운동’을 전개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그 근거로 김정은이 지난달 25일 평양체육관에서 폐막한 제1차 전당초급당위원장대회에서 “전당적으로 세도와 관료주의, 부정부패 행위를 근본적으로 없애기 위한 대책을 강하게 세워 나가야 한다”고 강조한 것을 제시했다. 김정은이 그동안의 실정에 대한 책임을 당과 내각의 관료들에게 떠넘기기 위한 사전 포석의 의미가 내포돼 있다고 분석했다. 김정은이 먼저 자책하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간부들의 ‘책임성 자아비판’을 유도하려는 의도라는 것이다. 또한 김정은이 북한 주민들이 TV로 보는 앞에서 머리를 숙인 것은 최고지도자로서의 경험 부족이라는 지적도 있다. 엄현숙 서울통일교육센터 전임강사는 “나이가 어린티가 아직 몸에 배어 있으며 머리를 숙이는 장면이 자연스럽게 나왔다”고 평가했다.

김정은 자아비판 놓고 해석 분분

이와 반대로 국정운영에 대한 자신감의 표현이라는 평가도 있다. 탈북민 인터넷신문인 뉴포커스를 운영하는 장진성 대표는 “북한식으로 자신감을 지극히 겸손한 태도를 보여준 통치 행위”라며 “한국식 어법과 정서로는 이해하기 어려울 수 있다”고 설명했다. 자신을 낮춤으로써 스스로 ‘애민 지도자상’을 보여주려는 의도가 깔려 있다는 분석이다. 이렇게 해석이 나눠짐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탈북민들은 북한 주민들이 그대로 암송해 발표할 것으로 전망했다. 장 대표는 “북한 주민들이 김정은의 자아비판에 큰 의미를 두지 않을 뿐 아니라 신년사가 여러 관계기관의 검증을 거쳐 완성된 김정은의 교시로서 절대화 돼 있는 만큼 그대로 암송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탈북민 강씨는 “오히려 마음속으로 김정은에 불만이 있는 사람들은 그의 ‘자아비판’을 더 부각시킬 수도 있다”고 전망했다.

 

■ 2017.01.27 “매 들고 무릎 꿇리고, 김정은 실제로 키운 건 생모 아닌 김옥”

 

김정은 북한 노동당 위원장은 생모 고용희(1953~2004)의 무덤을 일반인에게 공개하지 않고 있다.(※당초 고영희로 알려졌으나 미국 거주 중인 김정은의 이모부 이강의 인터뷰 통해 고용희로 밝혀짐) 평양 대성산 혁명열사릉 부근에 고용희 탄생 60주년인 2012 6 16일 초호화 묘로 조성해 놓고 노동당과 군부 간부 등만 단체참배를 허용할 뿐이다. 커티스 멜빈 미국 존스홉킨스대 연구원은 무덤을 공개하지 않는 이유에 대해 “고용희가 재일동포 출신이라는 점과 그 친척 중에 탈북자가 있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고용희의 여동생 고용숙과 오빠 고동훈은 탈북해 각각 미국과 유럽에 살고 있다. 

 

숙청설 돌던 김옥 알고 보니

여기에 더해 새로운 주장이 제기됐다. 북한 호위사령부(한국의 대통령 경호실) 출신의 대북 소식통은 “김정은을 실제로 키운 사람은 고용희가 아니라 김옥(김정일의 마지막 부인)”이라며 “김정은은 생모보다 자신을 키운 김옥에게 더 많은 정이 들었다”고 밝혔다. 아울러 그는 “생모인 고용희는 무용수 출신이라 그런지 육아에 관심이 많지 않았고 김정은은 고용희에 대해 각별한 애정을 못 느꼈다”고 주장했다. 이는 고용희가 자신들의 아이들을 돌보기 위해 김옥을 발탁했다는 설을 뒷받침하고 있다. 고용희는 김옥과 친했다고 한다. 대북 소식통은 “김옥의 할아버지가 도쿄대를 졸업한 수재라 재일동포 출신인 고용희가 김옥에게 각별한 호감을 가졌다”고 밝혔다.

 

김정일이 생모인 김정숙(1917~49)을 우상화한 것에 비해 김정은은 고용희의 우상화에 다소 소극적이다. 노동당 중앙위원회 영화문헌편집사가 2012년 만든 기록영화 ‘위대한 선군조선의 어머님’(85)을 제작하게 하고 노동신문 2012 2 13 4면 서사시에 ‘평양어머님’ 정도를 깜짝 등장시킨 게 거의 전부다. 자식 된 기본 도리에 머무는 수준이다.

 

김정은의 육아교육은 김옥이 담당했다고 한다. 그것도 호되게 훈련을 시켰다는 것이다. 대북 소식통은 “아기들마다 차이가 있는데 김정은은 세 살 넘어서야 겨우 말이 트였다”고 말했다. 말이 늦게 트인 데다가 성격이 섬세하고 눈물이 많아 각별한 배려가 필요한 아이였다고 한다. 대북 소식통은 “김옥은 김정은이 최고지도자의 자식이지만 때로는 매를 들기도 하고 말썽을 피우면 방구석에 무릎을 꿇리고 양손을 들게 했다”고 말했다.

[“김정일보다 22살 아래인 김옥 반말 사용”]

1964년생인 김옥은 북한의 예체능 고등종합 교육기관인 금성학원 출신으로 평양음악무용대학에서 피아노를 전공했다. 그리고 보천보전자악단과 함께 김정일 시대를 대표하는 왕재단 경음악단의 피아니스트가 됐다.

 

김정일과의 인연은 1980년대 후반 왕재산 경음악단에서 눈에 띄어 김정일의 기술서기로 들어가면서 시작됐다. 기술서기는 노동당 정치국 후보위원 이상 간부들의 건강을 보살피는 직책으로 주로 간호사들 중에 선발된다. 김정일에게는 여러 명의 기술서기가 있는데 이들은 일반 간부의 기술서기와 달리 우리의 비서에 해당하는 업무를 담당한다. 김옥이 그 가운데 한 명이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김정은의 ‘가정교사’ 역할을 하게 됐다.

 

탈북민 인터넷 신문인 뉴포커스 장진성 대표는 김옥의 성격을 알 수 있는 얘기를 들려 주었다. 장 대표는 “김옥이 김정일보다 나이가 22살 아래지만 아무 거리낌없이 반말을 하는 사이였다”고 말했다. 그런데 김정일은 오히려 그런 모습을 즐겼고 감상하듯 웃으며 넘겨 버리곤 했다고 한다. 또 장 대표는 “정치국 위원, 당 비서들도 그런 지위를 누렸던 김옥에게 김정일을 숭배하듯 최고의 경어를 썼고 머리를 조아렸다”고 덧붙였다. 장 대표는 노동당 대남부서인 통일전선부 ‘101 연락소’에서 근무했다. 대북 소식통은 “김정은은 그런 김옥의 엄격한 지도를 받으며 성장하면서 어릴 때와 달리 대범해졌다”고 설명했다. 그는 또한 “북한에 ‘담벽도 문으로 생각하고 밀고 나간다’는 말이 있는데 김정은은 한번 결심하면 완강하게 밀고 나가는 고집 있는 사람이 됐다”고 덧붙였다.

 

김옥은 김정일의 군부대 및 산업시설 시찰 등 현지지도 수행은 물론 외빈 접견에 참석할 정도로 그의 신임이 두터웠다. 대북 소식통은 “김옥이 그런 업무를 수행할 정도로 정치·군사·외교·경제 분야에서 ‘똑소리’가 났다”고 말했다. 김옥은 김정일의 방중·방러 때마다 동행하면서 그를 보좌했다. 아울러 조명록(1928~2010) 전 국방위원회 제1부위원장이 2000년 미국을 방문해 매들린 올브라이트 국무장관, 윌리엄 코언 국방장관 등과 면담할 때도 수행원 자격으로 배석했다. 대북 소식통은 “지금도 김정은이 김옥의 능력을 높게 평가해 자문을 구할 때가 많다”고 털어놓았다.

 

김옥은 2004년 고용희가 유선암으로 프랑스 파리에서 사망한 이후 퍼스트 레이디 역할을 했다. 그리고 그 역할은 김정일이 사망할 때까지 이어졌다. 김정일과의 사이에 아들(13) 1명 낳았다. 

[고용희 사망 이후 퍼스트 레이디 역할]

김정일이 2008 8월 뇌졸중으로 쓰러지자 김옥의 역할은 더 커졌다. 김정일은 20여 년 동안 자신의 곁에서 ‘1급 참모’ 역할을 해 온 김옥을 더 믿고 의지했다. 김정일은 애당초 부자 세습에 다소 회의적이었다고 한다. 정세현 전 통일부 장관은 2004 12월 베이징에서 만난 루중웨이(陸忠偉현대국제관계연구원장이 북한 고위 관료에게서 들은 내용이라며 “김정일이 ‘내 대()에서 부자세습이 가능하겠나’라고 털어놓았다”고 전했다. 대북 소식통도 “김정일은 자신이 후계자가 되는 과정에서 벌어진 권력 싸움을 자식들에게는 더 이상 물려주고 싶지 않았다”고 말했다.

 

김정일은 권력을 장악하는 과정에서 갑산파 사건(1967), 급진 군부세력(69~70), 김동규 사건(76) 등 세 번에 걸쳐 대대적인 숙청을 강행했다. 첫 번째와 두 번째는 김일성 지시에 따른 것이고, 김동규에 대한 숙청은 김정일이 직접 지시했다. 그래서인지 김정일은 김동규 사건을 가장 마음 아파했다고 한다.

 

김동규는 김일성의 항일빨치산 동료로 1974년 김정일이 후계자가 되는 데 적극 찬성했던 인물이다. 그 바람에 김일성-김일(1910~84?국가 부주석)에 이은 권력 서열 3위를 유지할 수 있었다. 당시 김일성은 건강에 문제가 있어 업무에 관심을 쏟지 못했기 때문에 실질적인 2인자였다. 그런 김동규가 76 6월 정치위원회 회의에서 김정일을 비판한 것이다. 모든 것을 김정일 중심으로 운영하는 것과 후계 작업을 지나치게 서두르는 것을 문제로 지적했다. 아무리 김동규라도 김정일과 지도부는 내버려 둘 수 없었던 것이다. 그 결과 김동규를 포함해 그에 동조했던 이용무 군 총정치국장, 지경수 당 검열위원장, 지병학 인민무력부 부부장 등을 숙청했다.

 

그런 과정을 거쳤던 김정일은 ‘세습을 하면 내부적으로 웃음거리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됐고 다른 방법을 찾아보려고 했다. 대북 소식통은 “김정일은 중국식 집단지도체제, 태국식 입헌군주제 등을 고려했지만 건강 문제가 생기면서 그런 생각을 접었다”고 말했다.

 [김옥 평양 인근 거주, 친정 일부는 수용소행]

김정일은 건강 이상이 생긴 이후 대리통치를 장성택·김경희 부부에게 맡겼다. 그리고 동향보고는 김옥을 통해 받았다. 김옥의 능력과 판단을 신뢰했기 때문이다. 당시 김옥의 직책은 국방위원회 과장으로 알려졌다. 대북 소식통은 “장성택 등 당·군 간부들이 김정은을 후계자로 추천했지만 김정일은 김옥의 추천을 더 비중 있게 들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김정은을 추천한 이들은 고용희의 장남인 김정철이 여성스럽고 유약한 반면 김정은은 승부욕이 강해 김정일을 닮았다고 본 것이다. 『김정일의 요리사』라는 책을 쓴 후지모토 겐지도 “김정일이 김정철에 대해서는 ‘여자 같다’며 못 미더워했다”고 말했다. 대북 소식통은 “김정철은 여성 관계가 복잡했고 일본을 자주 드나들면서 자본주의에 너무 빠져 후계자로서 부적절했다”고 말했다.

 

김정일은 사망하기 이전까지 김옥과 가장 많은 시간을 보냈다. 이 때문에 최고 권력에 오른 김정은은 아버지의 비밀을 가장 많이 알고 있는 김옥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를 고민했다고 한다. 자신을 키워 준 것에 대한 고마움은 있지만 반면에 자신에게 부담스러운 존재이기도 했다. 대북 소식통은 “이를 눈치챈 김옥은 김정은이 집권하자마자 과거 김정일이 자신에게 준 비자금을 그에게 바치면서 ‘더 이상 정치에 관여하지 않겠다’고 맹세하고 구명을 요청했다”고 말했다. 이에 김정은이 감동을 받아 김옥의 요청을 들어주었다고 한다.

 

반면 통치자금의 일부를 관리하고 있던 장성택은 달랐다. 장성택은 중국에 숨겨놓은 비자금을 이런저런 핑계를 대면서 김정은에게 주지 않았다. 김옥과 장성택의 차이점이었다. 대북 소식통은 “김옥에게 ‘신의 한 수’를 가르쳐준 사람이 김정일일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한때 김옥의 숙청설이 나돌았다. 미국의 자유아시아방송(RFA)은 지난해 7월 “김옥과 그의 친정 식구들이 김정은이 집권한 지 1년도 채 되지 않은 2013 7월께 정치범 수용소로 보내졌다”고 보도했다. RFA는 “김옥의 남동생인 김균이 고용희가 사망한 이후 김옥이 김정일의 총애를 받자 안하무인 격으로 행동한 것이 결정적인 이유가 됐다”고 설명했다. 김균은 2011 45세에 김일성종합대학 교원에서 일약 총장 직무를 대리하는 제1부총장으로 발탁됐다.

 

하지만 김옥은 현재 평양 인근에 살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다만 친정 식구 가운데에 일부가 RFA의 보도대로 정치범 수용소로 보내졌다고 한다.

 

■ 2017.01.31 김정은이 하급간부 빈소 찾은 이유

▲북한은 지난 23 김정은 위원장이 강기섭 민용항공총국장 빈소를 찾은 모습을 공개했다. [노동신문]

 

북한이 하급간부의 장례식장을 이례적으로 찾은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조문하는 모습을 지난 23 공개했다. 노동신문은 이날 김정은이 지난 22 노동당 중앙위원회 후보위원인 강기섭 민용항공총국장의 빈소를 찾아 깊은 애도를 표시했다고 보도했다. 노동신문은 김정은이 빈소를 찾아 북한 고위 간부들과 함께 고인의 시신 앞에 깊이 머리를 숙이는 장면과 고인의 얼굴을 만져보며 슬퍼하는 모습을 게재했다. 김정은이 동행한 고위 간부는 황병서 총정치국장, 최용해 국무위원회 부위원장, 이명수 총참모장, 박영식 인민무력상 등이다.

궁금해지는 것은 김정은을 포함한 북한 고위간부들이 총국장이 누구이길래 대거 조문을 갔을까다. 총국장은 고려항공 민간항공 부문을 관장하는 기관의 수장이지만 북한 권력 서열로 따져보면 100위에도 끼지 못한다. 노동당 중앙위원회는 후보위원보다 높은 위원만 해도 100명이 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들은 그의 빈소를 찾았을까?

▲김정은 노동당 위원장이 강기섭 민용항공총국장의 빈소를 찾아 애도를 표하고 있다. [노동신문]

 

총국장의 역할 때문이다 대북 소식통은 총국장이 고려항공 민간항공 부문을 관장하면서 김정일·김정은의 호화사치품, 달러 등을 항공기로 수완좋게 수송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그는밀수품 불법 물품들도 총국장이 문제없이 처리해 고위 간부들로부터 사랑을 받았다 덧붙였다. 따라서 총국장은 이런 역할 때문에 김정일·김정은 뿐만 아니라 고위 간부들과도 특별한 관계를 맺어 것이다. 총국장은 2011 12 김정일 장의위원회 232 위원 가운데 171위를 차지하기도 했다.

강기섭의 시신은 평양 형제산 구역의 신미리에 있는 애국열사릉에 묻혔다. 애국열사릉에는 홍명희(1888~1968) 내각 부수상, 백남순(1929~2007) 외무상 등이 묻혀 있다. 황병서는 영결식 애도사에서강기섭 동지는 나라의 항공운수발전에 적극 이바지했으며 평양국제비행장 항공역사를 훌륭히 일떠세우는 크게 기여했다 추모했다.

군인들이 조문에 대거 참석한 것은 민용항공총국이 인민군 공군 산하기관으로 총국장은 소장(한국의 준장) 계급을 달고 있었기 때문이다. 북한 전문가들은이번 조문이 김정은과 총국장이 특별한 관계이거나 김정은의 따뜻한 애민 이미지를 부각시키기 위한 이라고 설명했다.

 

■ 2017.02.12 김원홍 잡은 조직지도부는 당 조직생활 통제

조직지도부는 노동당의 전문부서 가운데 핵심부서로 당 조직생활을 통제하고 당조직들을 통해 국가기관을 지도감독한다. 조직지도부가 핵심인 이유는 간부당원에 대한 간부인사권을 쥐고 있고 이들을 감시하는 모든 공안기관들의 당조직 생활을 감독·통제하기 때문이다. 한때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른 김원홍 전 국가안전보위상(한국의 국가정보원장)이 해임된 것도 조직지도부의 조사를 받은 뒤였다.

조직지도부란 이름은 산하 당위원회의 모든 조직부들을 ‘지도’한다는 뜻에서 따왔다. 중국 공산당은 ‘지도’가 빠진 조직부가 있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조직지도부 산하 간부(조직비서)들에게 겸손을 최고의 덕목으로 강조했다. 그 이유는 조직비서들이 공개직위는 낮지만 실제 권력이 많기 때문이다. 만약 조직비서가 당원들 앞에서 자기 권한을 인위적으로 부각시키는 언행을 반복하면 바로 해임된다. 그래서 조직비서 대상 인사 기준의 우선 항목이 과묵과 겸손이다. 조직지도부에서 주민들이 생활총화를 담당하는 부서는 당생활지도과다.

 

▲평양승강기공장 근로자들이 생활총화를하고 있다. [노동신문]

 
조직지도부는 1000명 정도로 그들만의 권력집단이라고 할 정도로 폐쇄적이다. 자신들이 해외 출장을 가지 못하는 것은 물론이고 보안을 명목으로 해외 출장을 다녀온 사람들조차 상대하는 것을 불경죄로 여긴다. 혹시나 외국 사상에 물들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다. 조직지도부가 최근에 영입한 해외 근무자는 이제강(1930~2010) 전 조직지도부 제1부부장의 아들인 이용남 뿐이다. 그는 주러시아 북한 대사관 당비서를 역임했다. 조직지도부에서 잔뼈가 굵었던 아버지의 후광을 톡톡히 입은 결과다.

 

조직비서들은 해당 당위원회에 소속돼 있을 뿐 모든 보고나 지시는 당 위원회의 최고 책임자인 당 위원장을 거치지 않는다. 평양시에서 가장 높은 사람은 김수길 평양시 당위원회 위원장이다. 평양시장에 해당하는 차희림 인민위원장보다 높다. 하지만 평양시 조직비서는 김수길 당 위원장에게 보고하지 않고 중앙당 조직지도부에만 보고한다. 탈북민 장진성 뉴포커스 대표는 “김정일이 조직비서들의 보고라인을 오직 상급 당 조직부로만 한정시킨 것은 그들의 주된 업무가 당 내부사업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내부 사업 가운데 가장 큰 권한은 인사권이다. 당 위원장이 어떤 인물의 입당, 승진을 추천하더라도 그 인사에 대한 최종 승인권은 당 위원회 조직비서에게 있다. 조직비서의 주된 업무가 내부 동향 및 관리라서 평소 축적된 자료와 평가 기준을 토대로 자격여건을 최종 결정한다.
 

북한은 현재 조직지도부장이 공석이다. 김정일은 1973년 조직지도부장이 된 이후 사망할 때까지 그 자리를 다른 사람에게 넘기지 않았다. 지금은 김정은 노동당 위원장이 맡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 김정은을 보좌하는 제1부부장은 조연준, 김경옥이 맡고 있다. 조직지도부 제1부부장은 공개직위는 장관급이지만 간부들의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을 정도로 실제 권한은 그 이상이다.

 

■ 2017.02.12 ‘건성 건성’ 장성택, 생활총화 기록 빌미로 3년 후 처형

▲강원도 세포군 세포지구 축산기지건설에 참가한 황해북도여단 근로자들이 세포비서(오른쪽) 진행에 따라 자기 반성과 상호 비판을 하는 생활총화에 참가하고 있다. [노동신문]

 

북한 사람들에게 매주 토요일은 특별한 날이다. 생활총화를 하는 날이다. 생활총화는 40~50분 동안 각자의 업무와 생활을 반성하고 상호 비판하는 모임이다. 전 세계적으로 북한에만 있는 독특한 문화다. 탈북민 인터넷신문인 뉴포커스 장진성 대표는 “매주 토요일은 노동당으로부터 정신적 지배를 받는 날”이라고 표현할 정도다. 그래서인지 탈북민들은 북한에서 가장 하기 싫었던 일로 대부분 생활총화를 꼽는다. 자기 반성과 상호 비판을 죽을 때까지 매주 지겹도록 한다고 가정해 보면 지긋지긋하다. 생활총화에서 조직에 대한 의구심, 지도부의 정책적 오류, 체제에 대한 비판 등을 담은 발언은 추호도 용납되지 않는다. 수령의 충직한 전사로 살아왔느냐가 모든 총화의 기준이다. ‘나’는 없고 ‘수령’만 존재한다. 매일 수령만 생각하며 매주 수령에 입각해 자기를 돌아봐야 한다. 따라서 북한에서 생활총화는 주요한 사회통제 및 사상적 세뇌수단이다. 북한 전체 주민들의 몸과 머리를 하나로 되게 한다. 생활총화는 영아·의식불명환자를 제외하고 모든 북한 주민들이 의무적으로 참가해야 한다. 해외주재원이나 유학생들도 생활총화에는 의무적으로 참가해야 한다. 특히 문학예술부문에 근무하는 사람들은 2 1회씩 진행한다. 이들은 부르조아·수정주의 성향이 많이 노출될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당·군 간부들 가운데 고위직은 매주 토요일 생활총화에 참석하지 못할 경우 ‘생활총화 노트’로 대신한다. 

매주 토요일 정신적 지배받는 날
평생 자기반성·상호비판에 넌더리
총화의 기준은 수령 향한 충성심
사회 통제와 사상적 세뇌의 수단 

반성거리 없을 때 대비 비축해 둬야
매주 하다보니 자연스레 요령 생겨
김정일 집권하며 대폭적으로 강화
경제활동 늘면서 여성 참여 느슨

생활총화는 각자의 반성부터 시작한다. 예를 들면 몸이 아프다는 핑계로 아침 독보(독서보고회) 3번이나 빠졌다고 자신의 잘못을 털어놓는다. 잘못의 원인은 혁명적 각오가 확고하지 못하고 안일해졌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다음부터는 몸이 아프더라도 아침 독보에 꼭 참가하겠다고 다짐한다. 다음은 상호 비판이다. 비판은 타인에 대한 비타협적인 방식으로 진행한다. 그 소재와 대상은 다양하다. 근무시간에 미용실에서 파마를 했거나 머리를 사회주의 스타일에 맞지 않게 기르면 비판을 받는다. 대개 10명 이내로 구성된 분조에서 분조장도 분조원으로부터 비판의 대상이 된다. 비판에는 위 아래가 없다. 상대방에 대한 비판을 불성실하게 할 경우 ‘자유주의자, 조직이탈자’로 낙인찍히는 등 조직으로부터 배척되거나 심하면 소속기관의 ‘대논쟁’이라는 비판무대에 세워져 비판을 받고 엄중한 처벌을 받기도 한다.

 

세포비서가 경고·징계 조치하고 마쳐

생활총화는 세포비서가 그 행사에서 논의됐던 쟁점들을 평가하면서 경고·징계 등 조치를 한 후 마친다. 세포비서는 노동당의 최하위 말단 조직을 관리하는 사람으로, 유기체의 최소 단위인 세포에 비유한 것이다. 이 세포비서가 생활총화를 주관한다. 북한 주민들의 생사여탈권은 세포비서의 입에 달려 있다. 북한 주민들은 싫든 좋든 생활총화를 삶의 하나로 받아들이고 있다. 매주 토요일 생활총화를 하다보면 반성할 거리가 없을 때도 생긴다. 함경북도 회령시 회령고려약가공공장에 근무했던 김철민씨는 “반성할 거리가 없을 것에 대비해 잔머리를 굴려 반성할 소재와 양을 남겨두는 등 조절한다”며 “매주 생활총화를 하다보면 자연스럽게 요령이 생긴다”고 털어놨다.
 

생활총화는 주, , 분기, 연 단위로 나눠 진행된다. 월 생활총화는 매달 마지막 토요일에 진행하며 그 달에 나타난 결함을 종합적으로 비판한다. 분기 생활총화는 주·월 생활총화와 달리 기관 단위로 진행되며, 상급조직 간부들이 참석한다. 연간 생활총화는 12월 말에 진행하며 형식은 분기 생활총화와 같다. 장진성 대표는 “다람쥐 쳇바퀴 돌리듯 매주 반복되는 생활총화를 몇 개월씩 해 보면 자유세계에서 태어나 체질화됐던 사람도 개인의 정체성을 잃어버릴 수 있다”고 말했다.
 

북한이 생활총화를 시작한 것은 1962 3월 당 중앙위원회 제4기 제3차 전원회의 확대회의 이후부터다. 당시는 한 달에 한 번씩 개최했고 엄격한 참가를 강제하지 않는 느슨한 행사였다. 그러다 67년 이후 북한이 유일사상체계의 확립과 국제사회의 데탕트 분위기 등에 맞서 내부단속을 강화했고 김정일이 73 8월 ‘전당에 새로운 당생활총화제도를 세울데 대하여’를 발표하면서 강화됐다.
 

강화된 생활총화는 10명 내외로 묶어 기존보다 치밀하게 조직됐다. 북한 전체 주민이 빠짐없이 생활총화에 참가하도록 했다. 74 4월 발표된 ‘당의 유일사상체계 확립의 10대 원칙(현 당의 유일적 영도체계 확립의 10대 원칙)’에서 조직생활총화에 적극 참가하는 것을 명시함으로써 주민통제는 더욱 강화됐다. 10대 원칙’은 김일성 유일독재체제를 철저히 확립하고 대를 이어 김일성 일가를 높이 받들며 살아가도록 하기 위한 생활준칙과 행동규범이다. 그래서 생활총화를 시작할 때 자기 반성에 앞서 “유일적 영도체계 확립의 10대 원칙 몇 조 몇 항에는 이렇게 지적했는데 나는 이런 잘못을 범했다”는 말로 시작하는 것도 그 이유다.
 

이처럼 운영되는 생활총화는 당 조직생활의 일부다. 북한 주민들은 사망할 때까지 당 조직생활 속에서 살아야 한다. 당 조직생활은 7세때 조선소년단에 입단하면서 시작한다. 조선소년단은 한국의 보이스카웃, 걸스카웃, 해양소년단 등과 같은 청소년단체다. 7세는 북한에서 소학교 2학년에 해당한다. 북한의 학제는 유치원(1, 5)-소학교(5, 6~10)-초급중학교(3, 11~13)-고급중학교(3, 14~16) 등으로 12년제 의무교육을 하고 있다. 북한 사람들은 조선소년단 이후 김일성-김정일주의 청년동맹, 조선직업총동맹, 조선여성동맹, 조선농업근로자동맹 등에 가입하면서 조직생활을 이어간다.

 

세포비서에게 뇌물주고 빠지기도

조선여성동맹은 최근 여성들이 경제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면서 과거보다 느슨해 지는 편이라고 한다. 자강도 강계식료공장에 근무했던 강나영씨는 “생활총화하는 날에도 장마당에 나가 먹고 살려고 아둥바둥하는 여성들이 많아 세포비서들이 어쩔 수 없이 눈감아 주는 경우가 많다”며 “하지만 세포비서에게 사전에 알려주지 않으면 괜한 의심을 받을 수 있기 때문에 사전에 뇌물로 양해를 구하기도 한다”고 말했다.

 

장성택 전 국방위원회 부위원장이 처형되는 첫 단초가 당 조직생활에서 시작됐다. 장성택의 사형 판결문을 보면 ‘마지못해 자리에 일어서서 건성건성 박수를 쳤다’는 대목이 들어있다. 이는 2010 9월 제3차 당대표자회에서 김정은이 당 중앙군사위원회 부위원장으로 선출될 때 누군가 장성택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해 상부에 보고했던 것이다. 그 당시는 그냥 넘어갈 수 있었지만 숙청 대상이 되면서 비수로 돌아온 것이다. 생활총화 기록이 숙청하는데 가장 중요한 근거 자료가 된다. 따라서 숙청 대상에 올라오면 과거 생활총화의 모든 기록들이 수사기관에 전달되기 때문에 장성택이라 해도 빠져 나가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사망하기 3년 전의 기록이 결국 그의 생명줄을 쥐고 있었다. 장 대표는 “장성택은 2013 12월에 열린 정치국 확대회의에서 해임이 결정됐고 국가안전보위성의 특별군사재판으로 넘겨졌는데, 정치국 확대회의는 생활총화의 최상위 결정체”라고 설명했다.

 

■ 2017.02.14 "김여정, 현송월, 이설주 눈 밖에 나면 죽는다"

▲김정은 북한 노동당 위원장과 부인 이설주가 지난해 5 당창건 70주년 공훈국가합창단과 모란봉악단 공연을 관람하고 있다. [노동신문]

 

김정은 북한 노동당 위원장이 아끼는 여성 3인방의 위세가 갈수록 커지고 있다. 김여정 노동당 선전선동부 1부부장, 현송월 노동당 서기실 과장, 이설주(김정은 부인) 그들이다. 대북 소식통은 13지금 북한은김여정·현송월·이설주 밖에 나면 죽는다 말이 나돌 정도로 이들의 위세가 대단해지고 있다 밝혔다. 위원장의 여동생인 김여정(30) 최근 선전선동부 부부장에서 1부부장으로 승진했다. 대북 소식통은올해 김정은의 신년사에서 이례적으로 그의 자아비판이 들어가는데 과정에서 김여정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무결점의 신성한 존재인 수령이 본인의 과오를 인정하는 것은 김여정이 아니면 불가능했다 밝혔다.

김정은은 올해 신년사에서언제나 마음뿐이였고 능력이 따라서지 못하는 안타까움과 자책속에 지난 한해를 보냈다 자아비판했다


김여정이 이렇게 나서게 이유는 김정은이 한국의 촛불시위로 박근혜 대통령의 탄핵사태가 발생하는 것으로 보고 우려하자수령이 먼저 반성하는 모습을 보여야 인민들의 여론을 선제적으로 관리할 있다 조언해 신년사에 포함됐다는 것이다. 김여정은 2014 선전선동부에 입부한 직속상관인 김기남(88) 부장과 이재일(82) 1부부장을 혁명화 교육을 시켰고 지난해 최휘 1부부장을 지방농장으로 좌천시켰다. 지금은 권력 교체와 김정은 우상화 작업을 주도하고 있다.

대북 소식통은오진우(1917~1995) 인민무력부장의 아들이 해임되는 빨치산 세력들이 중앙 권력에서 배제되는 것도 김여정의 작품이라며김정은의 백두혈통 우상화 작업에 빨치산 세력들이 냉소적으로 보기 때문에 김여정이 이들을 쳐내는 이라고 설명했다. 태영호 주영국 북한대사관 공사도북한 엘리트층을 무서워하는 김정은이 항일 빨치산 세력을 숙청 이라며 “(빨치산은) 권력투쟁의 속성을 알고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들어내고 있는 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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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12 베이징 민쭈호텔 로비에서 포착된 현송월(오른쪽) 모란봉악단 단장의 모습. [중앙포토] 한때 김정은 애인이라는 설이 돌았던 현송월(39) 모란봉악단장이 최근 노동당 서기실 과장에 임명됐다. 서기실은 한국의 대통령 비서실처럼 김정은의 일거수 일투족을 최측근에서 보좌하는 조직이다. 서기실 과장은 내각 총리와 고위급 장성들 조차 눈치를 보는 북한 권력의 핵심으로 위세가 대단한 자리다. 대북 소식통은김정은이 북한판 걸그룹인 모란봉악단장을 서기실 과장으로 임명한 것은 극히 이례적이라고 밝혔다. 현송월은 서기실 과장으로 임명되기 이전부터 김정은의 총애를 등에 업고 권세를 휘둘러왔다.
 
현송월은 2015 12 모란봉악단의 중국 베이징 공연이 갑자기 취소되는 과정에서 그의 이름이 국내에 많이 알려졌다. 아울러 모란봉악단이 공연 3시간을 앞두고 취소되고 갑자기 귀국했는데 이유에 대해서도 관심이 쏠렸다. 공연 취소의 발단은 공연 내용 가운데 김정은 우상화 부분이 포함돼 중국측에서 이의를 제기하자 공연단이최고 존엄 내세우면서 일정을 취소됐다. 당시 관심은 누가 공연 취소 결정을 내렸을까였다.

대북 소식통은당시 방중단의 실질적인 단장은 김성남(64) 노동당 국제부 1부부장이었지만 현송월이 상부와 협의해 결정을 내렸다 밝혔다. 김성남은 · 관계에 심각한 영향을 줄까 전전긍긍했지만 현송월이 그런 김성남을 다그쳤던 것이다. 중국 외교부 관계자들조차현송월의 위세에 쩔쩔매는 김성남이 답답해 보였고 엄중한 · 관계를 맡을 능력이 있는지 의심스러웠다 강한 불만을 표출했다.

· 관계는 정부간 관계보다 () () 교류가 중요하다. 북한은 노동당 국제부, 중국은 공산당 대외연락부가 이를 맡고 있다. 그래서 김성남의 역할이 중요하다. 중국은 2015 모란봉 악단이 철수하는 과정에서 김성남이 보여준 모습에 실망한 것으로 풀이된다.

김성남은 김일성·김정일이 방중때 통역을 맡았던 1 통역사 출신으로 · 최고위급 회담에 빠짐없이 참석했던 북한 중국통이다. 최근 부부장에서 1부부장으로 승진했다. 김성남은 지난해 9 5 핵실험을 앞둔 하루 중국 베이징을 방문해 사전 통보하는 핫라인 역할을 수행했다. 장성택 국방위원회 부위원장이 2013 사망한 이후 김성남이 북한의 중국 창구 역할을 맡아왔다.이설주도 존재감을 높이고 있다. 이설주는 최근 주요보직에 자신의 사람을 앉히는 몸집 불리기를 시작했다. 급기야 공군 비행사 출신인 아버지를 김정은의 신변 보호를 담당하는 경호책임자로 배치하면서 영향력을 확대하고 있다. 과거 고운 자태로 독재자 김정은의 이미지를 자애로운 남편로 만들고 인민들에게 친근하게 다가가는 역할에 머물지 않고 있다.

이설주와 현송월은 은하수관현악단에서 만나 친자매처럼 지내는 사이다. 김정은이 5 연상인 현송월과 염문설이 있어 이설주와 현송월이사랑전쟁 벌였다는 소문도 있었다. 하지만 여부를 확인하기 힘들며 지금은 이설주가 전폭적으로 현송월을 신임하고 권력 핵심라인으로 양성하고 있다고 한다. 현송월이 여장부 스타일이며 친한 사람들에게는 싹싹하며 챙겨주는 성격이라 이설주를 보살펴 준다고 알려졌다.

대북 소식통은현재 북한을 실질적으로 움직이고 있는 사람은 김정은이 아니라 여성 3인방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 2017.02.15 "김정남은 미국 선제공격보다 무서운 존재"

/김정남 [사진 중앙포토]

 

김정은 북한 노동당 위원장은 김정남을 죽였을까?

김정남은 김정은에게 미국의 선제공격보다 무서운 존재였다. 자신에게 가장 위협적인 요소를 고르라면 당연히 김정남이었다. 최고 권력자에게는 외부 위협보다 내부 잠재 경쟁자가 두렵기 마련이다. 따라서 김정은에게 김정남은 언제나 골치덩어리였다.

김정남은 중국의 보호와 지원을 받고 있었다. 중국은 김정은의 대체로 김정남을 생각하고 있었다. 핵과 미사일로 말썽을 피우는 김정은과 언제까지 같이 있었지를 중국은 고민하지 않을 없었다. 중국의 개혁·개방을 이해하고 이를 실천할 있는 김정남이 중국의 입맛에 맞았다.

이런 중국의 속내를 알고 있는 김정은은 김정남이 눈엣가시였다. 중국도 밉지만 김정남이 싫었다. 중국은 자국의 이익을 위해 그렇다 치더라도 김정남이 그런 중국에 소극적이던 적극적이던 동조하고 있다는 정보는 김정은의 심기를 건드리고 있었다. 중국은 다롄(大連) 인근의 휴양지에 외부인의 출입을 금지시킨채 김정남을 포함한 북한의 고위 탈북자들을 모셔놓는 북한에게 은근히 압박을 가하기도 했다. 북한은 중국이 북한 내부에서 급변사태가 발생하면 언제든지 김정남을 중심으로 체제를 준비하고 있다는 의심을 가졌다. 어린 김정은의 눈에는 이런 중국보다 김정남이 위협적으로 닿았을 것이다.

따라서 김정은은 중국에게 자신이 유일한 대안이라는 것으로 보여줄 필요가 있었다. 김정은이 직접 지시했든지 밑에서 충성경쟁을 했든지 김정남의 암살은 어느 정도 예상돼 있었다. 여기서 의문점은 중국이 김정남의 암살을 암묵적으로 동의했는가 여부다. 중국이 김정남의 동선을 북한에 미리 알려주었다면 중국이 김정은을 인정한다는 시그널이다. 중국은 트럼프 행정부의 중국 압박정책에 북한이 필요해졌다. 따라서 김정은을 인정하고 그를 중국편에서 서게 하는 것이 유리하다고 판단할 있다.

김정은은 김정남의 암살을 통해 내부적으로 완전한 유일적 영도체계를 확립하려는 것으로 보인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사람으로 통칭되는 원로 세력들에게 자신 이외는 대안이 없다는 확고한 메시지를 던져주겠다는 의도로 풀이된다. 대북 소식통은김정남에게 호의적이었던 김원홍 국가안전보위상이 최근 해임된 것이 김정남 암살에 반대한 것도 하나의 원인이라고 밝혔다. 그는김원홍은 김정일의 장남으로서 김정남에 대한 애정이 남달랐다 덧붙였다.

김정은과 김정남의 악연은 2008 8 김정일이 뇌졸중으로 쓰러지면서 이미 예견돼 있었다. 김정일의 후계를 놓고 김정남설() 있었다. 김정남을 밀었던 사람은 장성택 국방위원회 부위원장과 김경희 노동당 부장이었다. 김정일이 자신의 후계절차를 맡긴 사람들이다. 장성택과 김경희는 오래 전부터 중국에 있는 김정남을 지원해 왔다. 이들 부부가 보기에 김정남이 오랜 외국 생활과 배포가 후계자감으로 마음에 들었다. 그리고 오랜 유교적 가치가 배어 있는 북한에서 장남이 후계자가 되는 것이 당연했다. 김정일이 후계자가 되는 과정에서도 이복 동생 김평일과의 경쟁에서 이길 있었던 것이장남 승계론이었다. 하지만 김정남은 정실 소생이 아니라는 단점이 있어 정통성에 문제가 있었다.

김정일이 2009 1 8 후계자를 고민 끝에 김정은으로 정하면서 후계자 경쟁은 끝났다. 하지만 김정은의 마음에는 앙금이 남아 있었다. 앙금이 2013 장성택 처형과 2017 김정남 암살로 끝나게 됐다.

 

■ 2017.02.17 공포정치 신그림자 3인방박태성·조용원·조남진 급부상

김정은식 공포정치를 뒷받침하는 신진세력이 북한 권력구조에서 급부상하고 있다고 북한 전문가들이 분석했다. 김원홍 국가안전보위상(한국의 국가정보원장에 해당) 해임을 주도하기도 했던 이들 세력에 대한 김정은 노동당 위원장의 신임이 점점 커지고 있다는 것이다.

김정은 신임 커지는 신진세력
김원홍 같은 도전세력 미리 제거
박태성 궂은일 도맡은돌격대장
조용원 최다 수행 … ‘면도날별명
조남진, 총정치국 2인자로 실세

만약 이번 김정남 피살이 북한의 소행으로 드러난다면 이번 사건에도 이들 신진세력이 어떤 식으로든 개입했을 가능성이 크다. 익명을 원한 정부 당국자는 16박태성(62) 평안남도위원회 위원장, 조용원(59) 조직지도부 부부장, 조남진(연령 미상) 총정치국 조직부국장 부서에 흩어져 있는 노동당 조직지도부 부부장급(차관급)들이 김정은식 공포정치를 부추기는 대표적인 이들이라고 말했다. 이들 박태성과 조용원의 경우 한국으로 망명한 태영호 주영국 북한대사관 공사가 지난달 바른정당 초청 간담회에서드러나지 않은 북한의 비선 실세 이름을 직접 거론하기도 했다.

 

조직지도부는 ·· 고위급 인사들에 대한 인사권을 노동당의 핵심 부서다. 고위급 인사들에 대한 모든 정보를 보유한 국가안전보위성, 인민보안성(한국의 경찰청) 공안기관들에 대한 감독도 조직지도부의 역할이다. 대북 소식통은김정은의 고모부인 장성택, 이영호 총참모장, 현영철 인민무력부장의 처형을 주도했던 조직지도부의 원로 조연준(80)·김경옥(80 추정) 1부부장들을 2선으로 물리고 김정은이 조직지도부 신진들을 주변에 등용했다 말했다.

 

 

박태성은 김정은 집권 첫해인 2012 8 조직지도부 부부장에 임명되면서 측근으로 부상했다. 현재 지방농장으로 좌천된 최휘 노동당 선전선동부 1부부장과 함께 사람이 노동당에서김정은의 오른팔, 왼팔 불렸다. 성격 자체가 저돌적인 박태성은김정은의 돌격대장으로 궂은일을 도맡고 있다. 조용원은 2015년부터 김정은의 수행 횟수가 점점 늘더니 지난해엔 황병서(40) 총정치국장을 제치고 수행 횟수 1(47) 기록했다. 조용한 성격의 그를 두고 내부에선일처리가 면도날 같다 평가가 나온다고 한다.

조남진은 내부에서 정치사업을 추진하거나 간부 선발 등을 담당하는 총정치국의 넘버 2. 고령의 황병서(77) 총정치국장을 대신해 총정치국의 실권을 쥐고 있다.

 

이들 3인방 외에도 김정은을 지근거리에서 보좌하는 조직지도부 출신들이 있다고 한다. 정부 당국자는조직지도부 출신이 공포정치를 선호하는 전략 마인드가 부족하고 자극적인 행동을 즐기는 스타일 때문이기도 하고, 조직지도부 특유의 조직 문화 때문이기도 하다 분석했다.

총인원이 1000 정도인 조직지도부는 북한 조직 중에서도 가장 폐쇄적이기로 유명하다. 보안 의식이 강해 해외출장을 다녀온 사람들을 만나는 것조차혹시나 외국 사상에 물들 있다는 우려가 있다 이유로 불경죄로 여길 정도라고 한다. 바깥 세상과 단절되면서 당연히 조직 문화와 조직원의 행동 성향이내부지향적인 무조건 충성파 흐를 수밖에 없는 구조다.

정부 당국자는이들이 정치 집단화하면서 김원홍 해임과 미사일 발사 등을 주도하고 있다김원홍처럼 언젠가 김정은에게 도전세력이 만한 사람들은 제거의 대상으로 보는 이라고 말했다. 전현준 동북아평화협력원장은정치경험이 미숙한 데다 피해의식이 강한 김정은의 주변엔 공포정치를 지지하는 아부꾼들만 득실댈 수밖에 없다 말했다.

 

■ 2017.02.19 중국이 김정남 내세워 정권교체 나설까 두려웠나

/로이터=뉴스1·AP=뉴시스

 

김정은 북한 노동당 위원장의 이복형 김정남의 피살은 전 세계를 충격에 빠뜨렸다. 김정은식 공포정치의 끝이 어디까지인지 가늠하기조차 힘들 정도다. 김정남의 피살은 어느 정도 예정돼 있었다는 게 정보 당국의 판단이다. 이병호 국가정보원장은 지난 15일 국회 정보위원회 간담회에서 “2012년부터 본격적인 북한의 김정남 암살 시도가 있었으며 오랜 노력의 결과로 된 것이지 암살의 타이밍에는 특별한 의미가 없다”고 말했다. 이 원장은 “김정남이 자신의 통치에 위협이 된다는 계산적 행동이라기보다는 김정은의 편집광적 성향이 반영된 것으로 평가된다”고 덧붙였다. 

이영호·장성택·김정남 모두 친중파
중국 심복에 자신이 제거될까 우려
중 다롄에 고위 탈북자 휴양 시설
북한 급변사태 대비한 플랜 B 의심

김정남이 생활비 지원 요구하며
“안 주면 망명하겠다” 협박설도

고분고분 복종한 김평일과 달리
귀국 명령에 불응해 피살 관측도

김정남의 피살 배경은 대략 세 가지 정도로 추론해볼 수 있다. 첫째, 중국에 의한 정권교체(regime change)설이다. 중국이 김정남을 경제적으로 지원하면서 보호해 왔다는 점이 이런 가능성을 뒷받침한다. 평양을 20년 넘게 방문한 재미동포 최모씨는 “중국은 대놓고 얘기를 하지 않았지만 김정은은 중국이 북한에서 급변사태가 발생하면 자신의 대체용으로 김정남을 끼고 있다고 받아들였다”고 전했다.

장성택 처형 후에도 피해의식 여전

김정은이 그렇게 생각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1400㎞를 국경으로 맞대고 있는 북한은 항상 중국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다. 김정은은 “중국을 믿지 말라”는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영향 탓인지 친중파(親中派)를 배척해왔다. 대표적으로 이영호 전 총참모장과 장성택 전 국방위원회 부위원장의 숙청이다. 북한 내부 사정에 정통한 한 인사는 “김정은은 이영호를 ‘중국의 심복’이라고 간주했고 중국의 지시에 따라 자신을 제거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중국은 여러 차례 북한 최고지도자들에게 개혁·개방을 권유했다. 그래야 변방과 동북아가 평화로워진다고 보고 있다. 하지만 북한은 중국의 요구에 소극적이었다. 그래서 중국은 내심 개혁·개방에 우호적이고 국제사회의 요구를 수용할 수 있는 북한 지도자를 원했다. 그런 측면에서 김정남이 중국에 제격이었다. 오랜 외국 생활을 통해 세상의 흐름에 눈을 떴고 국제적 감각을 갖춰 중국과 보조를 맞추기에 안성맞춤이었다. 게다가 친중파였던 장성택(2013년 처형) 전 부위원장도 김정남을 후계자로 밀어 중국은 김정남에 대한 기대가 클 수밖에 없었다.
 

이런 내막을 알고 있던 김정은은 장성택의 처형 이후에도 김정남에 대한 피해의식이 남아 있었다. 전현준 동북아평화협력원장은 “루쉰(魯迅)의 소설 『광인일기』에 나오는 주인공처럼 피해망상증이 너무 심해 김정남이 자신을 처형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 같다”고 분석했다. 중국 역시 핵과 미사일로 말썽을 피우는 김정은에 대한 감정이 쌓여 있었다. 특히 춘절(春節) 기간이자 시진핑(習近平) 국가주석의 취임을 한 달 앞둔 2013 2 12일 감행한 제3차 핵실험은 시진핑과 김정은의 관계를 악화시켰다. 중국은 북한에 핵·미사일 실험이 미국의 군사적인 간섭을 불러올 것이라며 자제를 요청했다. 미국의 핵항공모함·전략폭격기 등이 한반도에 출현하면 중국 또한 긴장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북한의 도발은 계속됐다. 더불어 장성택마저 처형되자 중국은 단단히 벼르게 됐다. 중국도 의도적이든 아니든 김정은이 오해할 만한 행동을 하기도 했다. 대북 소식통은 “중국이 다롄(大連) 인근의 휴양지에 외부인의 출입을 금지시켜 놓고 김정남과 고위 탈북자들이 그곳을 이용하게 했다”고 전했다. 이런 행동들이 김정은으로 하여금 ‘중국이 급변사태에 대비한 플랜 B를 세우고 있는 것 아니냐’는 의심을 사게 한 측면이 있다.

3대 세습, 사회주의에 안 맞아” 비판

이병호 원장은 김정남의 암살은 5년 전부터 준비돼 왔다고 한다. 대북 소식통은 “북한의 3대 세습에 비판적인 발언을 했던 김정남은 암살의 대상이었으며 언론에 자주 노출되던 시기를 피해 세인들의 관심이 떨어진 시기를 기다렸다가 최근을 선택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김정남은 후계자를 놓고 김정일과 한때 경쟁했다 30여 년간 헝가리·폴란드·체코 주재 등지의 북한 대사를 지내며 해외생활을 하고 있는 김평일(63·김정일의 이복동생)처럼 쥐죽은 듯이 살지 않았다. 2012 1월 김정남이 고미 요지(五味洋治) 일본 도쿄신문 편집위원과 주고받은 편지를 바탕으로 나온 『아버지 김정일과 나』에 따르면 김정남은 “근래의 권력 세습은 희대의 웃음거리가 아닐 수 없다”며 “3대 세습은 과거 봉건왕조 시기를 제외하고는 전례가 없는 일로 사회주의와 맞지 않는다”고 비판했다.
 

이렇게 ‘신경 쓰이는’ 존재인 김정남이 김정은의 출생의 비밀을 유포시킨 장본인이란 의심도 작용했을 수 있다. 김정남이 한때 “김정은은 김옥(김정일의 마지막 부인)의 아들로 1984년생”이라고 지인들에게 말하고 다녔다는 소문이 탈북자들 사이에 퍼진 적이 있다. 생모인 재일동포 출신인 고용희(1953~2004)의 존재조차 비밀로 해 온 김정은에게 ‘김옥 생모설’은 씻지 못할 모욕이었을 수 있다. 물론 ‘김옥 생모설’은 사실이 아닌 것으로 드러나고 있다. 정부 당국자는 김옥 생모설에 대해 “사실로 확인되지 않은 내용”이라고 부인했다. 64년생인 김옥의 나이를 감안할 때 84년생인 김정은을 낳기에는 너무 이르다는 것이다. 이 당국자는 “김옥이 19~20세에 김정일을 만나 애를 낳았다는 얘기인데 그렇게 일찍 김정일 곁에 가지 못했다”고 말했다. 김정남도 2010 6월 중앙SUNDAY와의 단독 인터뷰에서 “뭔 얘기인지 전혀 모르겠다”며 부인했다.
 

둘째, 망명정부 연루설이다. 일본 산케이신문은 지난 17일 김정남이 망명정부를 계획하는 탈북자와 접촉했다는 정보가 있다고 보도했다. 그러면서 김정남이 여기에 가담하려 한다는 의심을 받아 북한 당국에 암살됐을 가능성을 제기했다. 정부 당국자는 “망명정부는 구상에 지나지 않았는데 김정은이 과민반응해 암살로 이어졌을 가능성이 있다”고 분석했다. 정성장 세종연구소 통일전략연구실장은 “해외에서 사치스러운 생활을 했던 김정남은 김정은에게 생활비 지원을 요구하면서 만약 이를 수용하지 않을 경우 망명할 수 있다고 협박한 것으로 알려졌다”며 “이와 같은 김정남의 망명 관련 보도를 김정은이 실제로 받아들여 충격을 받았을 수 있다”고 말했다. 일본 JNN방송은 18일 “탈북자 단체가 김정남에게 망명정부 수반을 제의했으나 거절당했다”고 보도했다.

중국에 “친중파 무자비한 죽음” 메시지

셋째, 북한의 귀국 명령 불응설이다. 김정남은 김평일과 달리 여러 차례 귀국 지시를 받고도 무시했다. 김평일은 2015 7월 평양에 일시 귀국해 대사관 업무 개선 방안을 건의하는 등 김정은 정권에 복종하는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김정남은 지난달에도 귀국하라는 지시를 받고도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다며 불응했다고 미국 자유아시아방송(RFA)이 전했다. 산케이신문은 김정남의 귀국 불응이 망명정부 연루설과 겹치면서 결국 살해된 것이라고 분석했다.

 

세 가지 가능성 가운데 중국에 의한 정권교체설에 무게가 실리고 있다. 중국이 실제로 포스트 김정은에 대비해 김정남 카드를 준비하고 있었는지는 분명치 않다. 이번 사건 후 중국 정부는 사태를 주시하겠다는 원론적 반응만 내놓은 채 침묵하고 있다. 다만 김정남 피살 관련 기사와 SNS 글들을 삭제하는 등의 통제 움직임에서 중국 정부의 당혹감을 알 수 있다. 정부 당국자는 “김정남의 피살은 중국에 친중파에 대한 죽음이 무자비할 것이라는 강력한 메시지가 담겨 있으며 전 세계에 북한은 중국에 좌지우지되는 속국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려는 것으로 파악된다”고 말했다.

 

■ 2017.02.19   , 테러 지정국 피하려 공작원 대신 청부 암살 시도

▲말레이시아 경찰이 지난 17(현지시간) 김정남 피살 사건 여성 용의자 2(점선) 데리고 쿠알라룸푸르 공항 터미널로 이동하고 있다. [AP=뉴시스]

 

김정남 피살 사건의 유력한 용의자로 북한 국적의 이정철이 체포됨에 따라 북한 배후설이 탄력을 받고 있다. 그러나 북한의 과거 요인 암살 사례와 비교할 때 이번 사건은 다른 점이 눈에 띈다. 우선 6명의 일당 중 앞서 체포된 2명이 외국인이란 점이다. 외국인을 끌어들인 다국적 청부 암살일 가능성에 무게가 실리고 있다. 또한 이들 용의자의 범행 수법과 도주 행태가 어설프다는 점도 과거와는 다른 점이다. 베트남 여권을 소지한 여성 용의자인 도안티흐엉(29)은 사건 발생 48시간 만에 범행 현장인 공항으로 되돌아오는 바람에 붙잡혔다. 아웅산 폭탄 테러 사건(1983)이나 KAL기 폭파 사건(1987) 등 과거 북한이 저질렀던 테러 사건의 범인들이 자살을 시도했거나 극렬하게 저항했던 것과는 확연히 다르다. 

외국인 포섭해 2~3주 속성 암살교육
베트남·인니·앙골라등 빈국 출신들
북한 국적 이정철 체포 못했다면
북 소행 못밝혀 미궁에 빠졌을 수도

정부 당국자는 18일 “북한이 2001 9·11 테러 사건 이후 테러 방식을 바꿨다”며 “2010년께부터는 훈련된 공작원 대신 현지인을 활용하는 방식을 쓰고 있다”고 말했다. 북한은 KAL기 폭파 사건 이후 미국으로부터 테러지원국으로 지정됐다가 2008년 북·미 간 핵 검정 합의로 해제됐다. 이후 북한은 테러지원국에 지정되지 않기 위해 자신들이 발을 뺄 수 있는 테러로 수법을 변경한 것이다. 이 당국자는 “북한이 ‘조선(북한)을 사랑하는 외국인’이라는 모임을 결성해 북한에 우호적인 외국인을 포섭해 2~3주 속성으로 암살 교육을 시키고 있다”고 전했다. 이 모임에 가입한 외국인은 베트남·인도네시아·앙골라·이라크 등 아시아·아프리카 국가 출신들이다. 정부 당국자는 “이들은 대부분 경제적으로 가난한 사람들로 구성돼 있어 북한의 유혹에 쉽게 넘어갈 수 있다”고 설명했다. 이 설명대로라면, 이번 사건의 결정적 용의자인 이정철(47)이 체포되지 않았다면 자칫 김정남 피살은 미궁에 빠진 채 영원한 미스터리로 남았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검거된 용의자들의 진술을 토대로 김정남 피살 사건을 재구성해 미스터리를 짚어본다

김정남 여행 패턴 파악 위해 1년간 추적

김정남은 지난 13일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 국제공항 제2청사에서 다국적 암살 용의자들의 테러에 쓰러졌다. 현지 언론이 “범행에 5초밖에 걸리지 않았다”고 했을 만큼 부지불식간에 벌어졌다. 암살 용의자들은 치밀한 계획을 꾸몄다. 사건 나흘 만인 17일 네 번째 용의자로 북한 국적의 이정철을 체포한 말레이시아 경찰은 “용의자들이 지난 1년간 김정남의 여행 패턴을 파악하기 위해 줄곧 그를 추적해 왔다”고 밝혔다. 현지 중문지 중국보는 “첫 번째 용의자인 베트남 여성 도안티흐엉과 두 번째 용의자인 시티 아이샤(25)가 범행 수일 전부터 각본에 따라 수차례 암살 동작을 연습했다”고 보도했다. 말레이시아 경찰은 여성 용의자들로부터 “각본을 만들고 암살 동작을 연습시킨 남성이 북한 사람처럼 보였다”는 진술을 확보했다. 앞서 일본 후지TV는 “범행 바로 전날인 12일 쿠알라루품르 공항의 현장 근처를 여성 용의자 2명을 포함한 남녀 6명이 액체 스프레이를 들고 걸어가는 모습이 폐쇄회로TV(CCTV)에 포착됐다”고 전했다. 김정남 암살 작전을 위해 용의자들이 1년여간의 관찰과 수차례의 예행 연습을 거친 뒤 현장 답사까지 마쳤다는 얘기다. 

인근 호텔에 묵으며 최소 네 차례 예행연습

김정남에게 직접적인 공격을 가한 베트남 여성 도안은 지난 4일 말레이시아에 입국했다. 범행 이틀 전인 11일 범행 장소인 공항 2청사로부터 13.9, 차량으로 16분 거리의 큐래식(Qlassic)호텔에 투숙했다. 1박에 35000원 정도의 중저가 호텔이다. 현재 말레이시아 경찰이 추적 중인 검은 모자의 남성 용의자 A가 도안의 호텔비를 모두 현금으로 지불했다. 이날 A는 도안과 함께 공항으로 이동해 독극물이 없는 천을 건네주며 적어도 네 차례 이상 예행연습을 시켰다. 천으로 사람 얼굴을 덮었을 때의 주변 반응을 파악하기 위해서였다. 범행 바로 전날인 12일 도안은 투숙 호텔을 바꿨다. 큐래식 호텔과 같은 블록의 시티뷰 호텔에 오후 2시쯤 체크인했다. 도안은 가위 한 쌍을 빌려 머리를 단발로 짧게 잘랐다. 18일 다시 찾아간 시티뷰 호텔의 매니저는 “콘택트렌즈가 많았다”면서 “짐가방과 손가방 그리고 테디베어가 손에 들려 있었다”고 도안의 인상을 전했다.
 

주말인 11일 도안을 포함해 아이샤와 다른 남성 용의자 4명 등 총 6명이 공항에 모여 적합한 장소를 물색했다. 현지 언론 더스타는 “공항 CCTV에 찍힌 이들 6명이 서로의 얼굴에 스프레이를 쏘면서 자못 즐거운 분위기를 연출했다”고 전했다. 

남성들은 50m 거리에서 공격 모습 지켜봐

사건 당일인 13일 오전 7시 도안은 시티뷰 호텔을 떠나 공항으로 향했다. A와 함께 쿠알라룸푸르 공항 제2청사 3층으로 들어온 도안은 비빅 헤리티지라는 식당에서 아이샤, 남성 용의자 B와 만났다. 이후 이정철과 남성 용의자 C도 잇따라 식당에 합류했다. A는 도안에게 독극물을 건넸다. 암살은 오전 859, 5초 만에 전광석화처럼 이뤄졌다. 도안은 A가 준 크림을 왼쪽 손에 낀 갈색 고무장갑에 바르고 김정남 뒤에서 얼굴을 가렸다. 그 사이 아이샤는 김정남 앞에서 액체를 뿌렸다. 남성 용의자 4명은 현장에서 50m 떨어진 비빅 헤리티지 식당에서 상황을 관찰했다. 김정남이 인포메이션 카운터에서 고통을 호소하는 장면도 근거리에서 확인했다.
 

926분 공항 택시 정류장에서 아이샤의 남자친구가 운행하는 택시를 타고 시티뷰 호텔에 돌아온 도안은 체크아웃을 한 뒤 호텔을 떠났다. 도안은 역시 같은 블록의 또 다른 중저가 호텔 스카이스타 호텔에 오전 10시쯤 새로 체크인했다. 도안은 14일 오후 저녁 식사를 하기 위해 의료용 마스크를 쓴 채 호텔을 떠났다.
 

15일 오전 630분 도안은 공항 2청사에 다시 나타났다. 820분 경찰에 체포될 당시 도안은 여권과 항공권을 소지하지 않은 상태였다. 도안과 따로 도주한 아이샤는 15일 오전 쿠알라룸푸르 도심 4성급 플라밍고 호텔에서 체포됐다. 이정철은 17일 밤 셀랑고르주 잘란 쿠차이 라마 지역에 있는 아파트에 머물다 경찰의 급습으로 검거됐다. 말레이시아 경찰은 CCTV와 검거된 용의자들의 진술을 바탕으로 나머지 남성 용의자 3명을 추적하고 있다.

 

■ 2017.03.05 박태성·조용원·조남진, 김정은 공포정치 주도 3인방

 

김정은 북한 노동당 위원장이 올해 신년사에서 느닷없이 자아비판을 했다. 북한에서 무오류의 신성한 존재인 수령이 본인의 과오를 인정한다는 것은 주체사상의 균열로 이어진다. 따라서 그 누구도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북극성-2형 발사, 김원홍 숙청 이어
김정남 암살 등 ‘잘 짜인 각본’ 따라
김정일 지도체제 구축 과정 답습

박태성 평남 당위원장은 ‘돌격대장’
조용원 지난해 김정은 수행횟수 1
조남진 총정치국 넘버2로 실권 잡아
“실리 중요시하는 전형적 예스맨들”

공교롭게도 우연의 일치인지 그 이후 두 달 동안 김원홍 국가보위상(한국의 국가정보원장)의 해임, 신형 중거리탄도미사일(IRBM) ‘북극성-2형’ 시험발사, 김정남 피살 등이 연이어 터졌다. 마치 ‘잘 짜인 각본’에 따라 진행된 인상을 준다. 게다가 오는 4 15일 즈음해 신년사에서 언급한 대로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시험발사를 강행한다면 우연이 아닌 계획에 의한 것임이 더욱 선명해질 것이다.
 

북한 안팎에서 갑자기 여러 가지 대형 사고가 연이어 터지고 있다. 김정은이 집권한 2012년 이후 올해가 그 어느 때보다 예측 불가능하고 변화무쌍한 한 해가 될 것으로 전망된다. 도대체 북한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걸까. 어떤 세력이 김정은과 함께 이런 공포정치를 주도하고 있는 것일까. 김정은 정권의 1등 공신인 김원홍을 해임하도록 김정은을 설득할 정도면 기존 원로세력이 아니라 새로운 세력일 것으로 추정된다.
 

한 대북 소식통은 “지금 김정은 주변에는 집권 초기 유일적 영도체계 확립에 1등 공신이었던 조연준·김경옥 등 조직지도부 제1부부장들이 2선으로 물러나고 조직지도부의 부부장 출신들이 신진세력으로 전면에 등장했다”고 말했다. 대표적인 인물은 박태성 평안남도 당위원장, 조용원 당 조직지도부 부부장, 조남진 총정치국 조직부국장 등 조직지도부에 있거나 거쳐 간 사람들이다. 모두 50~60대다.

전략 마인드 부족하고 자극적 행동

박태성은 성격이 저돌적이라 ‘김정은의 돌격대장’으로 그의 오른팔 역할을 하고 있다. 김정은의 궂은일을 도맡아 하고 있다. 조용원은 지난해 김정은의 수행 횟수가 황병서 총정치국장(40)을 제치고 1(47)를 기록했다. 현재 공석인 김정은 서기실장을 대행하고 있다. 서기실장은 한국의 대통령비서실장처럼 김정은의 일거수일투족을 최측근에서 보좌하는 자리다. 조남진은 군 내부에서 당 정치사업을 추진하거나 군 간부 선발 등을 담당하는 총정치국의 넘버2. 고령의 황병서(77) 총정치국장을 대신해 총정치국의 실권을 쥐고 있다.
 

전현준 동북아평화협력원장은 “이들 신진세력은 전략 마인드가 부족하고 자극적인 행동을 즐기는 스타일로 정치 경험이 많지 않고 피해의식이 강한 김정은 주변에서 공포정치를 지지하는 아부꾼”이라고 평가했다. 정부 당국자는 이들을 평가하면서 “조선시대 대표적 간신인 연산군의 임사홍, 인조의 김자점 등을 연상시키는 사람들”이라고 밝혔다. 임사홍(1445~1506)은 폐비 윤씨 사사 사건을 연산군에게 알려 갑자사화의 구실을 제공했고, 김자점(1588~1651)은 인조와 소현세자를 이간질시키는 등 온갖 모략으로 입지를 다진 사람이다.
 

김정일 시대를 살았던 기존 원로들(조연준·김경옥·김원홍)은 상황에 따라 수령 앞에서도 소신을 밝혔다. 하지만 신진세력은 아예 그런 모습을 찾아볼 수 없는 전형적인 ‘예스맨’들이라고 한다. 따라서 이들은 김정은이 정치를 잘하고 있다고 착각하도록 만들고 있다. 김정은이 누군가를 숙청하거나 도발 행위를 결정할 때 부추기기 일쑤라고 한다. 대북 소식통은 “김정은은 원로들의 잔소리를 듣기 싫어 하고, 원로들은 김정은이 두려울 뿐 아니라 말을 해도 소용없다는 생각을 한다”고 밝혔다. 아울러 그는 “원로들은 신진세력이 혁명정신이 없으며 돈과 사리사욕에 빠진 사람들이라고 평가한다”고 밝혔다.
 

신진세력이 국가보위상에서 해임시킨 김원홍은 북한 내부에서 강직한 성품으로 주변의 신망이 높다는 평가를 받고 있던 사람이다. 예를 들면 김원홍은 장성택의 처형을 놓고 격론을 벌일 때 “굳이 죽일 필요까지는 없지 않느냐”며 반대하는 소신을 밝힌 적이 있다고 한다. 김원홍은 비록 한때 장성택이 당 행정부장을 하면서 국가안전보위부를 감시하던 시절도 있었지만 그의 능력을 높이 평가하고 호감을 가졌다고 한다. 하지만 김정은의 지시로 처형이 결정됐고 그의 명령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김원홍은 국가전복 혐의를 받은 장성택을 국가안전보위부(현 국가보위성) 특별군사재판에서 처형했다

 

국정원은 지난달 27일 국회 정보위원회 전체회의에서 “국가보위성이 주민 통제를 심하게 하고 당 간부를 고문하며 김정은에게 허위보고를 한 게 들통나 김원홍이 해임됐고 연금 상태로 감금됐다”고 밝혔다. 국가보위성은 김정은 집권 이후 최고의 권부로 부상하면서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며 자신을 감시하는 당 조직지도부 관할 업무까지 관여했다. 국가보위성의 득세에 당 조직지도부는 체면을 구긴 상태에서 절치부심하다가 지난해 12월부터 2017 1월까지 대대적인 조사 작업을 하면서 국가보위성을 접수했다.
 

이는 김정은의 결심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김정은이 신진세력의 손을 들어준 것이다. 정부 당국자는 “북한에서 주변의 신망이 높다는 것은 김정은에게 언제든지 도전세력으로 오해를 받을 수 있기 때문에 언젠가는 숙청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돌이켜 보면 김정일 국방위원장도 마찬가지였다. 김정일이 1974년 후계자로 확정된 이후 김동규 국가 부주석 등의 숙청(76), 판문점 도끼 만행 사건(76), 아웅산 테러(83), KAL기 폭파 사건(87) 등 북한 안팎에서 대형 사고가 터졌다. 김정일은 이런 과정을 통해 유일지도체제를 확립했다.
 

이 과정에서 1등 공신은 3대혁명소조였다. 이는 주로 청년엘리트층(90%)과 젊은 당 일꾼과 정부 기관 핵심들로 구성됐다. 이들은 사회 전반에 사상·기술·문화 등 3대 혁명을 요구하고 실천하려고 했다. 이는 김일성이 마오쩌둥(毛澤東)의 부인 장칭(江靑)의 주도로 66년 시작한 문화대혁명에서 힌트를 얻었다. 김일성은 권력세습을 하기 위한 세대교체 명분으로 중국의 홍위병처럼 젊은 세대를 내세우는 대중적인 혁명운동이 필요했던 것이다.
 

3대혁명소조원들은 홍위병처럼 보수주의·경험주의·관료주의 등 낡은 사상에 빠진 간부들을 먼저 쳐내기 시작했다. 3대혁명소조는 74년 당 조직지도부에 ‘3대혁명소조지도과’가 신설되면서 중앙무대로 진출했다. 그리고 76년 ‘3대혁명소조지도부’로 확대하면서 국가정치보위부(현 국가보위성)를 소속시켰다. 이것이 현재 국가보위성이 조직지도부에 코가 꿰이는 기원이 된다. 조직지도부는 당·군·정의 인사권을 쥐고 있는 노동당의 핵심 부서다.
 

김정일을 수령으로 옹립하려던 3대혁명소조지도부는 당 조직지도부의 핵심 골간이 됐다. 전국에 파견됐던 3대혁명소조원들 가운데 검증된 열성 소조원들은 중앙과 지방 당위원회의 핵심 간부로 등용됐다.
 

이들 가운데 조연준(80)·김경옥(80대 추정) 조직지도부 제1부부장도 있었다. 조연준은 김일성종합대 정치경제학부를 졸업하고 함경남도 3대혁명소조지도 책임자로 활동했다. 함경남도 당 조직비서를 거쳐 79년 당 조직지도부 생활지도과장으로 승진한 뒤 부부장을 역임했다. 2012년 조직지도부 제1부부장으로 승진했다. 

문혁 홍위병처럼 3대혁명소조 활용

그리고 김경옥 제1부부장도 3대혁명소조 출신이다. 김일성종합대 정치경제학부를 졸업한 뒤 70년대 3대혁명소조지도원으로 시작해 줄곧 당 조직지도부에서만 일했다. 80년대는 당 조직지도부 검열담당 부부장을 역임하고 2008년부터 군 담당 제1부부장을 맡아 지금까지 왔다.
 

김정은 집권 초기 유일적 영도체계 확립의 주역인 이들은 고령으로 2선으로 후퇴할 예정이다. 대북 소식통은 “조연준은 ‘은퇴하고 싶다’는 얘기를 자주 하고 다니며 김경옥은 여전히 일에 욕심을 내고 있지만 조만간 두 사람이 물러날 것”이라고 말했다.

 

김정일이 ‘김정일 시대’를 열어갈 사람들로 3대혁명소조원과 함께했듯이김정은은 조직지도부 신진세력과 ‘김정은 시대’를 열어가려고 한다. 하지만 김정은도 그와 운명을 같이할 신진세력 역시 3대혁명소조 출신들이다. 차이점은 세대 차이 탓인지 혁명보다 실리를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다. 정부 당국자는 “신진세력이 감정 조절이 잘 되지 않는 김정은을 이용해 ‘아부’와 ‘예스맨’으로 공포정치를 유도하고 있고 대화·양보보다 대결·공격을 선호한다”고 분석했다.
 

올해 신년사에서 김정은이 이례적으로 자아비판을 한 것은 여동생인 김여정 선전선동부 제1부부장이 결정적 역할을 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대북 소식통은 “김정은이 한국의 촛불시위로 대통령이 탄핵되는 것으로 보고 우려를 표하자, 김여정이 ‘수령이 먼저 반성하는 모습을 보임으로써 인민들의 여론을 선제적으로 관리할 수 있다’고 조언했다”고 말했다. 임을출 경남대 교수는 “김정은이 마키아벨리적인 요소를 가지고 있는데 이를 희석시킬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던 장성택을 서둘러 처형함으로써 공포정치의 강도를 줄일 수 있는 장치가 없다”고 설명했다. 결국 김정은의 비위를 맞추려는 참모들이 중용될 수밖에 없는 환경이 돼버린 것이다.
 

■감정은의 잔인한 권력욕

■2016.02.17  김정은의 권력투쟁史

▲김정은은 전투기, 포사격 등 무기가 등장하는 곳에서 가장 기뻐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로동신문》은 김정은이 2016년 첫 軍관련 활동으로 인민군 대연합부대들의 포사격 경기를 시찰했다고 보도했다.

 

  2016 1 6일 오전 10 30, 북한발 인공지진 소식에 놀랐던 세계는 낮 12 30분에 발표된 북한의 ‘수소탄 시험 완전성공!’ 보도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더 큰 충격은 조선중앙방송이 공개한 김정은의 수소탄 시험 진행 명령서에 적힌 문장이었다. 김정은은 〈온 세계가 주체의 핵강국, 사회주의 조선, 위대한 조선로동당을 우러러보게 하라!〉고 썼다. ‘당()’을 김정은과 동격으로 보는 북한의 표현법을 고려할 때 ‘온 세계가 나 김정은을 두려워하게 하라!’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수소탄 시험으로 세계가 자신을 두려워하게 만들겠다는 김정은의 사고방식은 광기(狂氣)가 극한에 도달한 상태에서만 가능하다. 북한에 대한 압박과 제재를 수소탄 시험이라는 최악의 수단으로 극복하겠다는 김정은의 배짱은 다음 날 《로동신문》 1면에 직접 사인한 명령서 사진을 공개함으로써 다시금 확인됐다. 김정은은 압박을 받으면 받을수록 더 강하고 극단적인 방법으로 도발하고 있다.
  
 
이번 수소탄 시험을 계기로 본 김정은의 정신·심리적 상태를 유년기와 권력쟁취 과정을 통해 분석해 봤다. 그에게는 두려움이나 자제와 같은 코드가 아예 없는 것처럼 보인다. 김정은으로 하여금 합리적인 이성(理性)과 지성(知性), 본능(本能), 인식(認識)을 삼켜 버리게 한 것은 과연 무엇일까.    


  
집권 4년간 고위간부 130여 명 처형 
 

우선 김정은은 상대나 주민에게 공포와 두려움을 갖도록 하는 것이 자신의 가장 중요한 정치적 능력이라고 생각하는 듯하다. 김정은은 후계자로 지명되자 가장 먼저 이복형 김정남의 측근들을 제거했고, 고모부 장성택을 잔인하게 총살했다. 장성택을 총살한 직후 조선중앙방송에 등장한 김정은은 한때 흐트러진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얼마 후 14.5mm 고사총으로 인민무력부장 현영철을 형체도 없이 처형할 때는 아무 일도 없었던 듯 환한 웃음으로 나타났다. 집권 4년간 130여 명의 고위간부들을 처형, 숙청한 김정은은 군 고위간부들의 별을 뗐다 붙였다를 반복하며 절대권력을 즐기고 있다. 권력 2인자 황병서 총정치국장이나 박영식 인민무력부장, 최룡해 로동당 비서는 김정은 앞에서 굴종하는 모습까지 보이고 있다.
  
 
김정은은 현지시찰을 할 때 군인·주민들과 포옹하고, 악수하는 자연스러운 모습을 많이 보여준다. 어린이와 동물을 보면 매우 좋아하는 꾸밈없는 모습도 보인다. 김정은이 군 관련 행사 중에서 가장 즐거워하는 때는 포사격과 비행기 훈련 등 무기를 갖고 놀 때이다. 지난해 7월 ‘인민군 항공 및 반항공군 비행지휘성원들의 전투비행술경기대회-2015’ 행사장에서 전투기를 바라보는 김정은은 너무 좋아 어쩔 줄 몰라 하는 어린아이 같은 모습이었다.
  
 
그러나 김정은은 권력을 다루는 면에서는 히틀러 못지않은, 어떤 경우에는 히틀러보다 더 잔인하고 악랄한 모습을 보여준다. 권력에 관한 한 김정은은 한 치의 양보도 없는 절대 악()의 모든 수단을 총동원하고 있다. 수소탄 시험으로 세계가 김정은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면 그보다 더한 위협도 하겠다는 김정은의 심리상태를 알려면 김정은의 성장과정을 깊숙이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어린 시절, 좋아하는 분야에 강한 집착 보인 김정은

김정은의 수소탄 실험 진행 명령서. 그는 “온 세계가 조선로동당을 우러러 보게 하라”고 명령했다.

 

김정은의 유년시절은 권력과 야망이라는 두 가지 코드로 설명할 수 있다. 어려서 어머니를 잃고 계모 밑에서 눈치를 보며 성장한 김정은의 아버지 김정일(金正日) 10대 후반부터 이성(異性)에 집착했고 즐겼다. 대학시절에는 마음에 드는 여성을 보면 내각상이나 부상을 하는 아버지를 둔 친구들의 집을 빌려 즐길 정도였다. 김정일은 1968년경부터는 대학 동창생 리평의 부인이었던 성혜림과 비밀 연애를 시작했다. 1969년에 성혜림을 리평과 이혼시키고 동거에 들어가 1971년에 장남(김정남)을 낳았다. 아들을 밥상 위에 앉혀 놓고 밥을 먹을 정도로 자식사랑이 가득하던 1970년대 초 김정일은 또 다른 여성 고영희를 좋아하게 된다.
  
  1975
년부터 김정일 비밀파티에서 옆자리에 고정적으로 앉았던 만수대예술단 무용배우 고영희는 이듬해부터 동거하다시피 했다. 평양시 순안비행장 부근의 비밀별장인 ‘희영각’에서 청소를 담당했던 탈북여성의 증언에 의하면, 일주일에 두세 번 김정일과 고영희가 희영각을 찾아 폴라로이드 사진을 서로 찍어 주며 생일파티도 하고 포르노 영화도 보았다고 한다. 1977년 여름 어느 날 고영희가 침실에 갖추어 놓은 칫솔을 들고 “이건 저번에 내가 사용하던 칫솔이 아닌데 누구 다른 손님 오셨나요?”라며 경계심을 드러냈다고 한다. 김정일은 아버지 김일성의 독촉으로 1974년 김영숙과 결혼했는데 이 때문에 신경쇠약과 우울증을 앓게 된 성혜림은 1975년 병치료를 구실로 모스크바로 쫓겨났다.
  
 
당시 김정일의 여동생 김경희가 성혜림에게 “아들(김정남)을 내놓고 물러나라”고 요구했는데 그 무렵 김정일의 애인이었던 고영희는 권력세계의 비정함을 알 수 있었다고 한다. 1981년 김정일과 고영희 사이에 김정철이 태어나고 1984년에는 김정은이 태어났지만 공개적으로 살림을 꾸릴 수는 없는 처지였다. 김정일의 외조카 이한영씨가 쓴 책 《대동강 로열패밀리》에 의하면, 성혜림이 낳은 맏아들 김정남(1971년 출생) 1975년이 돼서야 김일성의 손자로 인정받았다고 한다.
  
 
아들 둘을 데리고 김정일이 제공하는 전국의 별장과 특각을 돌아다니며 떠돌이 생활을 했던 고영희로서는 자식들의 미래가 걱정됐다고 한다. 계모 김성애와 이복형제들에 대한 편애(偏愛)로 인한 김일성과 김정일의 갈등은 1990년대 들어 충돌양상으로 번진 것도 고영희를 두렵게 했던 원인 중 하나였다.
  
  1980
년에 김정남은 유럽으로 유학을 갔고, 김정철·정은 형제도 1990년대에 차례로 유학을 갔다. 김정남은 1991년에 북한으로 돌아왔지만 김정철·정은 형제는 1990년대를 유럽에서 보냈다. 감수성이 예민한 10대의 어린 시절을 부모와 떨어져 외국에서 보낸 김정은에게는 정상적인 인성이 형성되기 어려운 환경이었다. 스위스 유학시절 김정은은 학우들과 정상적인 관계를 형성하지 못해 멍청하다는 뜻의 ‘딤(dim)정은’이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학교에 출석하지 않는 날이 연중 100일을 넘어 성적도 하위에 속했다. 형 김정철과 달리 농구와 축구를 좋아하고 강한 승부욕을 보였다. 김정은은 마이클 조던의 광팬이었다. 그는 자신의 단짝 친구들에게 고급제품들과 북한의 별장 사진 등을 보여주며 과시하고 인정받으려 했다고 한다. 유학시절에 대한 동창들의 기억을 종합해 보면, 김정은은 공부에는 관심이 없는, 철부지 소년이었으나 자신이 좋아하는 분야에서는 강한 집착을 보였다.    


  
‘작은 대장’ 불리는 것 싫어해

▲김정은은 2009년 김정일 후계자로 등장했고 2012년 최고 권력자가 됐다. 그의 시기를 관통하는 핵심 단어는 바로 ‘강경 또 강경’이다. 사진은 김정은이 올해 신년사에서 제시한 과업을 철저하게 관철할 것을 촉구하는 대규모 군중 대회.

 

  일본인 요리사 후지모토 겐지는 자신의 책 《김정일의 요리사》와 여러 인터뷰에서 “김정일이 간부들에게 김정철, 김정은을 소개할 때 대장복을 입혔는데 김정은은 김정일을 만나러 온 군과 당의 간부들에게 큰소리를 치고 하대(下待)를 하는 등 어려서부터 권력지향적인 행동을 보였다”고 밝혔다. 김정은이 여덟 살 되던 해에 구슬 게임의 일종인 오델로 게임을 하다가 형(김정철)이 구슬을 놓치자 화를 참지 못하고 형의 얼굴을 향해 구슬을 던진 일도 있었다고 한다. 김정은은 10살 때의 어느 날 자신의 이모가 ‘작은 대장’이라 부르자 못마땅해하며 큰 소리로 화를 내는 바람에 이후 이모는 ‘김대장’이라 불렀다고 한다.
  
 
이런 일도 있었다. 2003년 김정일이 북한 함경북도 청진시를 현지시찰할 때 그곳에서 김정은이 대학 농구선수팀에 섞여 경기를 치렀다고 한다. 그런데 김정은이 속한 팀이 상대팀에 밀리자 김정은은 아버지 김정일과 어머니 고영희가 보고 있는 데서 농구공을 발로 차 버리고 경기장을 뛰쳐나갔다고 한다. 김정은은 자신의 기분을 제대로 통제하지 못하는 성격이었다.
  
 
김정일은 이런 김정은을 더 아낀 것으로 추정된다. 후지모토 겐지는 “김정일은 평소 당이나 군 간부들 앞에서 김정은에 대해서는 ‘나를 닮았다’며 만족스럽게 이야기했고 ‘김정철 그 녀석은 안 돼. 계집애 같아서’라고 했다”고 밝힌 적이 있다.
  
  2000
년 들어 아버지 김정일은 맏아들 김정남을 후계자로 삼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김정남이 ‘고난의 행군’ 후반기인 1996년부터 아버지에게 “나라가 살기 위해서는 문을 열어야 한다”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내가 후계자가 되면 개혁개방을 하겠다”고 주장하고 다니던 김정남은 1998년경에 아버지 김정일과 노선문제로 크게 싸우고 눈밖에 나 중국에 나가 있는 시간이 늘면서 후계자의 자리에서 멀어졌다.
  
 
김정남이 아버지와 크게 싸우고 눈밖에 났던 1990년대 말부터 고영희와 그의 측근들은 김정철·정은 형제를 후계자로 내세우기 위한 본격적인 작업에 들어가게 된다. 김정남과 그의 아들 일행 4명이 2001 5 1일 일본 하네다 공항에서 체포돼 중국으로 추방되는 사건이 벌어진 이후 북한군 내부에서는 김정은의 생모(生母) 고영희를 ‘존경하는 어머님’이라며 우상화하기 시작했다. 고영희가 어머님이 된다는 것은 그 아들이 후계자가 된다는 것을 의미하고, 그 아들이란 바로 김정일이 자신을 닮았다고 내세우던 김정은인 것이다.
  
 
김정은 집권 첫해인 2012 5월 북한 간부들을 대상으로 고영희 우상화 기록영화 ‘위대한 선군조선의 어머니’ 시청각교육을 실시했는데, 김정일과 고영희가 군부대를 시찰하는 장면이 영화의 대부분을 차지했다. 시찰했던 시기는 김일성 사망(1994) 이후였다. 1시간 25분짜리 영화의 마지막 부분에 어린 김정은과 고영희가 함께 있는 사진 3장이 나온다. “어머님께서는 존경하는 김정은 대장동지께서 자기의 실력으로 인민 앞에 나설 것”이라는 내레이션도 이어졌다.     


  
“개새끼! 조그만 새끼가 나를 죽이려고 해” 
 

다시 2000년대 상황으로 돌아가 보자. 2002 5월 고영희와의 경쟁에서 패하고 오랫동안 병치료를 하던 성혜림이 사망하면서 북한 내부 상황은 김정은에게 유리하게 돌아갔다. 그런데 2년 후 2004 5월 고영희 역시 유방암으로 세상을 떠나자 김정은은 위기감을 느꼈다고 한다. 김정은이 스무 살 때였다. 위기 타개책은 김정남 암살사건으로 이어졌다. 2004 11, 유럽의 오스트리아에 살고 있는 이종사촌 누이 김옥순을 찾아갔던 김정남이 암살당할 뻔했으나 사전정보를 입수한 오스트리아 내무부의 도움으로 가까스로 위기를 모면했다. 고영희가 사망하자 곧바로 경쟁자인 이복형 김정남을 암살하려 했다는 것은 김정남, 김정은 친위세력 간의 암투 역시 치열했음을 보여준다. 흥미롭게도 고영희가 사망한 이듬해인 2005년에 김정일 현지지도를 따라다니는 횟수가 가장 많이 늘어나기 시작한 사람이 바로 황병서 당시 당 부부장으로 2006년에는 가장 많은 횟수를 기록했다. 황병서는 2002년 군대 내에서 고영희(김정은 생모)를 ‘존경하는 어머님’이라고 내세우는 우상화 사업을 담당했었다고 한다. 2005년에 부상(浮上)한 또 한 사람은 혁명화로 처벌받은 장성택을 대신한 리제강 조직지도부 제1부부장이다. 김정일이 김정은 측근들에게 힘을 실어 준 것이다.
  
 
하지만 2007년을 계기로 상황은 역전돼 김정남에게 기회가 왔다. 고혈압과 당뇨 등 고질병을 앓아 온 김정일이 2006년 하반기부터 건강이 악화되자 김정남은 외국에서 아버지의 치료문제를 담당하면서 부상하기 시작했다. 2008 8월 여성군부대를 현지시찰하던 김정일이 뇌졸중으로 쓰러졌을 때에도 김정남이 큰 역할을 했다. 김정남의 요청으로 2008 10 24일 프랑스 뇌신경외과 전문의(專門醫·프랑수아 사비에르 루)가 베이징을 거쳐 평양으로 들어가 김정일을 치료하기도 했다. 미확인 뉴스와 소문이지만 당시 김정일이 사경을 헤매고 있을 때 장성택은 김정남을 내세우려 했다고 한다.
  
 
그러나 2008 9월경 의식을 차린 김정일은 김정남을 내세우려 하던 장성택을 견제하고 김정은을 다시 내세웠다고 한다. 김정일 뇌졸중 치료에서 핵심역할을 하면서 김정남에게 기회가 오는 듯싶었지만 2009 1 8일 김정은을 후계자로 지명하면서 다시 역전됐다. 2009 1 15일자 《연합뉴스》가 ‘북한 김정일, 3남 김정은 후계자 지명’이라는 첫 보도를 한 지 열흘 만인 1 24일 베이징 국제공항에 나타난 김정남은 일본기자들을 만나 “(후계자 문제는)아버지가 결정하실 문제”라고 밝혔다. 아직은 아버지의 결정이 완전한 것이 아니며 바뀔 수도 있고 그렇게 되면 자신에게도 기회가 올 것이라는 의미였다.
  
 
이렇게 되자 김정은은 김정남에게 노골적인 선전포고를 했다. 바로 ‘우암각 사건’이다. 김정남이 해외에서 후계자 경쟁이 끝나지 않았음을 강조하고 있던 2009 4 3, 평양시 중구역에 있는 우암각에 국가안전보위부 부원들이 들이닥쳤다. 그 자리에 있던 김정남의 측근들은 총격전 끝에 모두 체포됐다. 국가안전보위부를 장악한 김정은 측근들이 “김정남이 평양에 귀국한다”는 거짓 정보로 김정남의 측근들을 유인했다고 한다. 당과 군대, 보위부 등에 있던 김정남의 측근들은 줄줄이 체포됐고 이 소식은 중국에 있던 김정남에게 알려졌다. 다음 날인 2009 4 4, 김정남은 베이징에 있는 부인에게 전화를 걸어 “김정은이 내 동창들을 잡아갔어. 조심해야 하겠어”라고 했고, 3일 후 제3국의 친구에게 “당분간은 평양으로 돌아가지 않겠다”고 말했다고 한다. 그해 4월 말 김정남은 또 다른 친구에게 “개새끼! 조그만 새끼가 나를 죽이려고 해”라며 분노를 감추지 않았다.     


  
권력의 化身

▲김정은의 공포정치로 130여 명의 고위간부가 처형됐다. 왼쪽부터 리영호 인민군 총참모장, 장성택 노동당 행정부장, 현영철 인민무력부장, 변인선 총참모부 작전국장, 마원춘 국방위원회 설계국장, 한광산 노동당 재정경리부장.

 

  김정남과 김정은의 경쟁구도가 아버지 김정일의 뇌졸중으로 날카로워진 2009년은 후원세력들 간의 권력투쟁이 절정으로 치닫기 시작한 해였다. 2009년 8월 24일 밤 장성택의 형이자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위원 겸 차수였던 장성우(76세)가 사망했다. 장성택은 2006년 7월 사망한 형 장성길(중장)에 이어 두 형을 모두 잃었는데 모두 미묘한 시점에 형님들이 모호한 원인으로 사망한 것이다. 김경희, 장성택 부부는 김정남의 가장 강력한 후원세력이었지만 서서히 무력화하고 있었다.     

 

장성택을 필두로 한 김정남 측의 보복은 2010년 6월 2일 새벽 0시 45분, 당중앙위원회 제1부부장 리제강(80세)이 의문의 교통사고로 사망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김정남 세력과 김정은 세력, 다시 말해 장성택과 리제강 세력이 벌이는 피의 후계자 권력쟁탈전이 정점(頂點)에 도달했다. 리제강이 죽은 이틀 뒤인 2010년 6월 4일, 부드럽고 여유만만한 표정으로 김정남이 마카오에서 《중앙일보》 기자와 인터뷰를 했다.

 

그는 “아버지는 건강하고, 나는 유럽으로 망명하지 않을 것”이라고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 인터뷰가 있은 지 일주일도 안 된 2010년 6월 15일 KBS는 “김정일 위원장의 후계자로 떠오른 셋째 아들 김정은 측근들이 최근 장남 김정남을 암살하려 했던 것으로 전해졌다”고 보도했다. 중국 정부의 도움으로 2차 암살위협에서 벗어난 김정남의 분노는 2개월 이후 아버지 앞에서 폭발했다. 2010년 8월 26일, 창춘에서 중국 방문길에 나선 김정일을 만난 김정남은 동생의 암살위협에 분노를 터뜨렸다고 한다.

 

김정남의 항의는 여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노동당 창건 기념일 하루 전인 2010년 10월 9일 일본기자들을 만나 3대 독재세습을 비판하면서 개혁·개방을 주장했다. 후계자가 될 수 있는 기회를 빼앗긴 김정남의 마지막 저항이었다. 이후 여러 경로를 통해 김정은으로부터 최후통첩 식의 살해협박을 받은 김정남은 더 이상 언론에 나타나지 않았다. 김정은은 이복형 김정남과의 대결에서 승리를 하며 권력의 화신(化身)이 됐다.     

 

김정은의 성장과정이나 후계자 지명을 전후한 시기의 권력투쟁 방식을 보면 몇 가지 중요한 특징들이 있다. 목표에 대한 열정과 집요함, 행동에서의 공격성과 즉흥성, 수단과 방법에서의 무자비함이 김정은이 갖고 있는 권력의지의 특징이다. 집요하고 강력하며 무자비한 권력의지는 김정은이 성년이 된 이후 더 강해졌다.         

김정은, 2012년 리영호 사망 후 호전적으로 변해     

김정은의 권력의지와 심성은 2009년 1월 후계자로 지명된 이후 다양한 사례를 통해 알 수 있다. 김정은이 후계자가 된 지 열흘이 되던 2009년 1월 17일 북한 총참모부는 성명을 통해 “정전상태에 있는 우리나라에서 대결은 곧 긴장격화이며 그것은 막을 수도 피할 수도 없는 전쟁”이라면서 “전면대결 태세에 진입해 징벌을 가하겠다”고 협박했다. 이어 1월 30일 북한 조국평화통일위원회 대변인 성명에서는 “시간도 주었고 알아들을 만큼 충고도 하였다”며 도발을 시사했고 그해 말 제3차 서해교전을, 이듬해 2010년 3월에는 천안함 폭침을 감행했다. 2010년 11월에는 연평도 포격도발을 자행했다.     

 

서해교전과 천안함 폭침, 연평도 포격도발은 ‘샛별대장, 청년대장의 위대한 업적’으로 포장돼 2010년 9월의 당대표자회에서 김정은이 대장의 군사칭호를 받고 당중앙군사위원회 부위원장이 되는 데 기여했다. 2009년을 계기로 북한의 대남도발이 새로운 양상을 띠게 된 것은, 권력을 위해 수단과 방법,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극단적인 선택을 마다하지 않는 김정은의 권력욕에 기인했다. 통치자금 마련을 위해 2009년 12월 1일에 전격적으로 실시했던 화폐교환은 김정은의 또 다른 과격성을 보여주는 사례였다.     

 

2011년 12월 김정일이 심장마비로 사망한 이후 북한 지도자가 된 김정은은 2012년 들어 자신의 권위와 정당성을 남한사회로까지 확산하려 했다. 그해 북한 신년공동사설은 “경애하는 김정은 동지는 곧 위대한 김정일 동지”라고 했고, 뒤이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방위원회 정책국 공개질문장’ 형식으로 9개 항목의 질문서를 우리측에 보내 왔다. 곧이어 ‘겨레의 통일염원을 짓밟고 북남관계를 최악의 파국에 몰아넣은 이명박 역적패당의 10대 죄악을 결산한다’는 제목의 조국통일연구원 비망록도 발표했다.     

 

김정은은 군사적으로는 전방위적이고 전면적이며 공격적인 도발을 감행하고 남북관계에서는 북한의 정치적 우위를 강조하며 정당화를 시도해 왔다. 김정은의 집권 1년 차였던 2012년 북한은 남한의 대북정책과 언론이 김정은의 소위 ‘최고존엄’을 건드린다며 그해 4월 23일 ‘조선인민군 최고사령부 특별작전행동소조 통고’를, 같은 해 6월 4일에는 ‘조선인민군 총참모부 공개통첩장’을 발표하고 남한의 주요 언론사 좌표까지 공개하며 협박했다. 김정은 집권 1~3년 기간에 북한이 가장 민감하게 반응한 것은 바로 김정은의 ‘최고존엄’이었다.      

권력이 유일한 판단기준   

▲김정은에게는 없는 사진이다. 김정일(앞줄 왼쪽)과 성혜림 사이에서 낳은 어린 김정남(앞줄 오른쪽)과 김정일의 조카 이한영(뒷줄 오른쪽). 김정남은 이복동생 김정은에게서 암살당할 위기를 몇 차례 겪었다.

 

  김정은은 집권 첫해 모란봉악단을 새로 설립해 록키와 미키마우스 등 미국의 아이콘들을 과감하게 소개하며 변화를 시도했다. 그러나 2012 7월 리영호를 숙청하면서 본격적인 강경정책을 폈고, 그해 10월 리영호가 죽고 난 다음에는 더욱 호전적으로 변했다. 2012 12월 북한은 ‘은하 3호’ 장거리 미사일을 발사했고 2013 2월 제3차 핵실험을 실시했다.
  
 
김정은의 정치, 군사적 도발은 날이 갈수록 강도가 높아졌다. 2013 4월에는 개성공단을 폐쇄했고, 2013 12월에는 고모부 장성택을 공개 총살했다. 2015 4월에는 강건군관학교 마당에 군 주요간부들을 모아 놓고 현영철 인민무력부장을 절차도 없이 죽였다. 후계자 시절부터 지금까지 7년 동안의 김정은 집권시기를 관통하는 하나의 코드가 있다면 ‘강경 또 강경’이다. 이러한 강경대응 방식은 정치와 군사, 외교, 조직과 사회 등 모든 분야에서 나타나고 있다.
  
 
김정은이 분야와 대상을 가리지 않고 강경을 고수하는 이유는 김정은의 인식과 사고방식이 권력이라는 단 하나의 유일기준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김정은은 2009년부터 지금까지 북한의 대남(對南)도발과 남북관계, 북·중관계, 정치적 숙청과 주민통제 등 모든 선택과 결정에 있어 전후좌우를 고려할 것 없이 목적 하나에만 집중해 왔다. 이런 방식이 가능한 것은 북한 체제가 권력과 정권, 경제와 사회, 내각과 인민이 분리되어 자립해야 하는 시스템으로 변했기 때문이다. 김정은으로서는 권력을 강력하게 틀어쥐고 주민을 철저히 통제한다면 체제를 자기가 원하는 대로 유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번에 김정은이 수소탄 시험을 결정하면서 “세계가 나를 두려워하게 하라”는 명령서를 공개한 것은 권력을 위해서라면 어떤 희생과 손실도 두려워하지 않겠다는 극한의 광기(狂氣)에 빠져 있음을 보여준 것이다. 권력을 위한 자신의 모든 행동이 정당하다고 생각하는 김정은의 사고방식이 얼마나 위험천만한지를 알 수 있다.
  
 
북한에 대한 제재와 압박을 강화할 경우 김정은은 지난 반세기 넘게 쌓고 축적해 온 핵과 화학무기로 우리를 파멸시킬지도 모른다. 대한민국 정부와 국민이, 한·미·일(韓美日)과 유엔이 북한 김정은에 대해 신중하면서도 선제대응을 해야 하는 이유다.

김승철 북한개혁방송 대표

 

■ 2016-06-39 ‘김정일의 국방위’ 폐지… 본격 김정은 시대로

北 최고인민회의서 국무위원장 추대 

▲29일 열린 북한 최고인민회의 결정은 김정은 시대의 본격 개막을 알리는 신호탄이라고 볼 수 있다 

 

김정은은 2012 4월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으로 선출된 이후 지난 4년 동안 치적 쌓기와 잔혹한 측근 숙청으로 권력 기반을 다져왔다. 그러곤 마침내 당과 국가 최고 권력의 수위에 공식적으로 취임해 ‘유일 영도체계’로 지칭되는 1인 독재 지배구조를 완성했다. 다만 당과 국가의 명실상부한 1인자가 되면 권력은 커지지만 통치 실정에 대한 책임도 직접 떠안아야 하는 부담을 질 것으로 보인다. 

 

북한은 이번에 국가 최고 통치조직인 국무위원회를 신설했지만 그동안 이어져 온 비정상적인 국가통치운영 방식까지 정상화했는지는 좀 더 지켜봐야 할 것으로 보인다. 김정일은 1998년 주석제를 폐지하고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을 대외적 국가수반으로 만들었다. 이후 자신은 법제위원회 예산위원회와 함께 최고인민회의 일개 소속 위원회에 불과한 국방위원회를 비정상적으로 키워 국가 통치기구로 내세웠다. 한국으로 보면 국회 상임위인 국방위 위원장이 당을 장악하고 국가를 운영하는 식의 매우 기형적인 방식이었다.

 

북한의 이날 선택은 김정일 시절의 국방위원회 대신 국무위원회를 정부 조직의 최고위 기구로 만들어 국가 운영에 나서겠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국무위원회를 위원장과 부위원장 중심의 체제로 만들었다. 기존 국방위원회 부위원장 가운데 이용무, 오극렬이 빠지고 최룡해와 박봉주가 새로 포함됐다. 그리고 김기남 이만건 김영철 이수용 이용호 박영식 김원홍 최부일 등 당정군의 핵심 측근들을 국무위원회 위원으로 포진시켰다.

 

이날 회의에서는 국가경제발전 5개년 전략 목표를 제시하며 “내각은 당의 병진노선을 틀어쥐고, 에너지 문제를 해결하면서 인민 경제의 선행 부문, 기초공업 부문을 정상궤도에 올려 세워 인민생활을 향상시키겠다”고 밝혔다. 이는 북한이 핵·경제 병진 노선을 유지함으로써 핵개발을 포기할 뜻이 없음을 재확인한 것으로 풀이된다.

 

북한은 이번 최고인민회의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 통상적인 회기 일정까지 바꿨다. 최고인민회의는 매년 4월에 열리며 9월에 추가 회의를 열기도 한다. 김정은 집권 이후 6차례 열린 최고인민회의 모두 4, 9월 개최 공식을 벗어나지 않았다. 하지만 올해는 노동당 7차 대회 이후인 6월로 날짜를 변경했다. 7차 당 대회에서 김정은을 노동당 위원장으로 선출한 데 이어 국가수반으로 만들기 위해 정교한 사전 계획하에 일정을 짰다는 것으로 해석된다. 

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 2016년 12월 29일  김정은, 집권 5년간 340명 총살·숙청

국가안보硏 ‘北 실정 백서’ 

核·미사일에 3억달러 투입

 

김정은 북한 노동당 위원장이 지난 5년간 총살·숙청한 인원이 340명에 달하는 것으로 집계됐다. 또 핵·미사일 개발에도 3억 달러( 3600억 원)를 사용한 것으로 나타났다

 

29일 국가정보원 산하 국가안보전략연구원이 최근 펴낸 ‘김정은 집권 5년 실정(失政) 백서’를 통해 “김정은이 3대 세습권력을 공고히 하기 위해 고위 간부와 주민 340명을 공개 총살하거나 숙청했다”고 밝혔다. 처형·숙청된 간부들은 2012 3, 2013 30여 명, 2014 40여 명, 2015 60여 명으로 증가 추세를 보였다 

 

또 올해 들어서는 고위 간부 3명을 포함해 모두 140여 명이 처형된 것으로 파악됐다. 백서는 대표적인 처형 사례로 장성택·현영철을 비롯해 김용진·최영건 내각 부총리, 변인선 총참모부 작전국장 등을 꼽았다 

 

백서는 “일반 주민의 경우에도 올해 공개 처형된 주민 수는 8월 기준 60여 명으로 김정은 집권 이후 연 평균 처형자 수보다 2배 이상 많은 수준”이라고 지적했다. 이와 함께 백서는 “김정은 정권이 집권 5년간 경제 회생을 외면하고 29회의 핵 실험·미사일 발사에 3억 달러, 김 씨 일족 동상 건립 등 460여 개의 우상물 제작에 18000만 달러를 쏟아부었다”고 분석했다. 백서는 “북한은 2017년 김정은 우상화를 위한 막대한 재정 부담과 대규모 주민 동원으로 체제 균열이 가속화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정충신·박정경 기자 csjung@munhwa.com 

 

■ 2017.02.10 "장성택 사건으로 1000명 처형·2만명 숙청…전대 미문의 대규모 숙청사건"

지난 2013 12월 처형된 김정은 북한 노동당 위원장의 고모부 장성택 사건과 관련해 북한에서 1000명 가까이 처형되고 2만여 명이 숙청됐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탈북자 출신인 강철환 북한전략센터 대표는 10일 연합뉴스 인터뷰에서 “장성택 사건으로 노동당 간부 415, 산하 기관 간부 300여 명, 인민보안성 간부 200명이 공개 총살됐다”고 주장했다.

 

강 대표는 “처형된 간부 중에는 김일성 빨치산 동료 가족도 포함됐다”면서 “가족과 친척들이 수용소로 끌려가는 등 장성택 사건으로 적어도 2만 명이 숙청됐다”고 덧붙였다.

 

그는 지난해 7월 한국으로 망명한 태영호 전 영국 주재 북한공사를 비롯한 북한 고위직 출신 탈북자 6명의 증언을 토대로 이런 결론을 내렸다고 밝혔다.

 

강 대표는 “다음 주 네덜란드 헤이그에 있는 국제형사재판소(ICC)에 관련 자료를 제출하고 수사를 촉구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강 대표는 “장성택 사건은 북한에서 일어난 전대미문의 대집단 숙청사건으로, 역사에 묻어두기에는 너무나 끔찍한 일들이 많았기 때문”이라며 “김정은의 만행을 국제사회에 알려 법정에 세우겠다”고 말했다.

강영수 기자

 

■ 2017-02-09 예외 없이 토사구팽 당한 북한의 ‘저승사자’들

▲2013 11월 장성택 제거를 앞두고 김정은이 핵심 측근들과 삼지연 김일성 동상을 찾은 모습

군복을 입은 김원홍(오른쪽)이 뒤따르고 있다.

 

“올 것이 왔구나. 나만은 예외일 거라고 간절히 믿고 싶었건만.

평양의 비밀 장소에서 취조를 받은 김원홍 북한 국가보위상은 지금 이런 심정이 아닐까. 사실 그의 숙청은 오래전부터 예고된 일이다. 필자도 2년 전에 이 칼럼에서 “보위부 수장이 바뀌는 것은 시간문제”라고 전망했다.

 

김원홍은 기적을 기다릴 것이다.

“아직은 해임일 뿐. 내가 김정은을 위해 묻힌 피가 얼마인데 이렇게 죽일 리가 없다. 

 

노동당 조직지도부는 김원홍을 처형해 그가 갖고 있을 자신들의 약점을 영원히 묻고 싶을 것이다. 살려두면 언젠가는 복수할지 모른다. 

 

김정은에겐 김원홍의 숙청은 매우 골치 아픈 일일 것이다. 지금까지 말 한마디로 죽인 수많은 간부와는 달리 김원홍만큼 김정은 체제에 기여했던 인물도 없다. 그를 죽이면 김정은을 위해 다시 칼을 들겠다는 인물이 나오지 않을지 모른다. 당장 후임 보위상 임명부터 골치가 아프다. 심지어 “죽을 자리에 임명됐으니 내가 먼저 김정은을 제거해야겠다”고 역심을 품을지도 모른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까지 보위 기관의 수장은 김씨 가문의 저승사자 역할을 충실히 수행했지만 예외 없이 비극적 운명을 맞았다. 또 수장이 숙청될 때 다수의 부하도 순장조처럼 함께 처형됐고 가족들은 정치범 수용소에 끌려갔다 

 

1973년 국가정치보위부 출범 이후 초대 보위부장이었던 김병하는 토사구팽의 상징 같은 인물이다. 그는 1970년대 김정일의 후계 구도에 방해되는 인물들을 무자비하게 숙청해 악명이 높았다. 그러나 북한의 모든 권력을 움켜쥔 뒤 김정일은 김병하의 무소불위 권력이 두려워졌다. 김병하는 당의 조사를 받던 중 1980년 자살했다고 알려졌다. 그의 심복들도 대거 처형되면서 기세등등하던 보위부는 쑥대밭이 됐다. 김정일은 “김병하는 애매한 군중을 마구 처형하고 잡아가 당과 대중을 이탈시킨 반당 반혁명 종파”라고 규정했다. 하지만 이후에도 보위부에 잡혀간 사람이 석방된 일은 없다.

 

2대 보위부장인 이진수는 1987년 황해도 시찰 중 자다가 ‘밤나무 가스’ 중독으로 의문사했다. 이후 김정일은 한동안 보위부장 자리를 공석으로 비우고 1부부장에게 조직을 통솔하게 했다. 3대 보위부 수장인 김영룡은 김정일의 대학 동창이었지만, 그도 1998년 반당 반혁명 종파분자로 낙인찍혀 음독자살했다. 이후 10년간 보위부는 사회안전성과 군 보위사령부의 기세에 눌려 존재감을 잃었다. 

 

그랬던 보위부는 2000년대 말 류경 부부장이 김정일의 눈에 들면서 서서히 존재감을 회복했다. 남북회담을 통해 우리에게도 알려졌던 류경은 해외 반탐(방첩) 분야를 담당하면서 이중 공화국영웅 칭호를 받았던 머리가 비상한 인물이었다. 김정일은 보위부 간부 중에서 류경만을 수시로 독대하며 신임했다. 이러는 바람에 류경은 김창섭 정치국장 등 보위부 간부들과 장성택의 행정부, 이제강의 조직지도부에서 동시에 미움을 샀다.

 

김정일은 죽음이 닥쳐 온다는 것을 예감하자 아들에게 권력뿐 아니라 돈도 물려주고 싶었다. 

 

“무조건 100억 달러를 유치해 오라.

김정일은 이런 특명을 주어 2010 12월 류경을 남쪽에 비밀 특사로 파견했다. 비슷한 시기 가신이나 마찬가지인 이수용(가명 이철) 합영투자위원회 위원장을 중국에 보냈다.

 

이수용은 무산광산 철광으로 갚을 테니 100억 달러의 차관을 달라고 요청했지만 거절당했다. 중국 측에서 “무산의 생산 인프라를 고려할 때 갚으려면 100년이 걸리겠다”는 야유까지 받았다고 한다. 

 

류경이 가져왔던 제안은 지금까지 비밀이지만 정상회담과 경제협력을 미끼로 대규모 차관을 얻으려 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명박 전 대통령은 회고록 ‘대통령의 시간’에서 “2010년 류경이 서울에 와서 남북 정상회담을 합의했지만, 북한의 요구가 지나쳐 무산됐다”고 밝혔다. 

 

류경은 평양에 돌아가자마자 반탐 계열의 심복 10여 명과 함께 처형됐다. 내막을 깊이 알고 있는 북한 전직 고위 간부는 “서울에서 고급 여성 코트 등을 선물로 받았는데 이를 보고하지 않았던 것도 문제가 됐다”고 회상했다. 류경이 빠뜨린 선물 목록은 함께 서울에 동행했던 여성 수행원이 보고하면서 드러났다. 고위급 간부들에게 전달된 류경의 처형 사유는 “파벌을 형성하고 망탕짓을 했다”는 것이다. 해외 반탐 수장으로 한국뿐 아니라 해외에 나가 부화방탕하게 놀았다는 것. 그러나 이것 역시 표면적 이유일 가능성이 크다. 어쩌면 김정일은 어린 김정은에게 물려주기엔 류경이 지나치게 야심만만해 위험하다고 판단했을 수 있다. 

 

김원홍은 이런 보위부 비극의 역사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김정은은 김정일과는 다를지 모를 것이란 한 가닥 기대를 걸어보진 않았을까. 하지만 세습 독재 체제의 속성은 3대가 아니라 10대가 가도 변하지 않는다.

“세력이 커진 자는 반드시 죽는다.”◎

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