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護國8/ 6.25 전쟁 이야기1/ 지도로 보는 한국전쟁 - 실제 전투에서 용감한 병사들은? - 인천상륙작전

상림은내고향 2021. 9. 9. 21:27

 護國8/ 6.25 전쟁 이야기1

■ 지도로 보는 한국전쟁

시대 1950~1953

20세기의 그 어떤 전쟁보다도 민간인의 희생비율이 높은 한국전쟁은 미국과 소련이 실시한 한반도 분단정책에 의해 예고된 전쟁이었다. 또한 두 강대국이 만들어 놓은 냉전의 대리전 양상을 보였다.

 

1948년 한반도에는 38선을 사이에 두고 노선이 다른 두 개의 정부가 수립되었다. 당시 소련의 지원을 받으며 무력 통일을 준비하고 있던 북한은 미국의 아시아 전략 변화를 기화로 소련의 스탈린과 중국의 마오쩌뚱을 설득하여 전쟁에 관한 동의를 얻어냈다. 당시 미국은 1949년 6월 남한에 주둔한 미군을 철수시킨 데 이어, ‘애치슨라인’이라 불리는 극동방어선에서 한국과 대만을 제외시킨 상태였다.

 

1950년 6월 25일 새벽, 우수한 장비와 전쟁 경험(국공내전 참전)으로 무장한 북한군은 무방비 상태에 가까웠던 남한을 공격하여 한 달 만에 경상도를 제외한 전지역을 장악하게 되었다. 하지만 북한군의 일방적인 공세는 남한군의 낙동강 방어선 저지와 유엔군의 참전으로 주춤거리기 시작했다.

 

1950년 9월 15일, 유엔군은 인천 상륙작전을 시작으로 북한군에 맹공을 가하여 9월 말 38선 이남의 지역을 재장악하였다. 그리고 10월 하순에는 청천강 이북으로 유엔군이 진입하였고, 10월 26일에는 남한군 제6사단이 압록강변의 초산에 도달하였다. 유엔군과 남한군의 공격이 거세지자 중국은 ‘항미원조(抗美援朝)’를 외치며 30만 명을 파병하였다. 인해전술을 앞세운 중국군의 공격으로 1951년 1월 4일 서울은 다시 북한군의 수중에 들어가게 되었다. 이후 양측은 38도 선 부근에서 치열한 공방을 계속했다.

 

전쟁이 교착 상태에 이르자 북한에서는 휴전을 제의했지만, 남한에서는 민족 분단이 영구화될 것을 우려하여 전국적인 반대 시위가 일어났다. 이러한 열망을 외면한 채 유엔군과 공산군은 1953년 7월 27일 휴전 협정을 체결하여 3년여에 걸친 한국전쟁은 종전이 아닌 휴전의 상태로 일단락 짓게 되었다.

 

한국전쟁은 한반도를 폐허로 만들었으며, 상호간의 적개심을 키워 분단 상황을 고착시키고 말았다. 이와 함께 세계는 미국과 소련 중심의 동서냉전이 더욱 심화되었고, 중국도 강대국으로 성장하는 발판을 마련하는 등 국제 질서를 크게 변화시켰다. 아울러 패전국으로 실의에 빠져 있던 일본은 전쟁특수로 다시 일어설 수 있게 되었다.

 

/한국전쟁의 발발

 

/유엔군의 참전

 

/중공군의 참전

 

/휴전협정 조인

 

■ 한국인이 뽑은 한국 전쟁사의 명장들 TOP10

https://www.youtube.com/watch?feature=player_detailpage&v=siJlMqMPWH0 

 

■ 2016.04.25 당시 대대장의 高地戰 체험 증언 - 실제 전투에서 용감한 병사들은?

/영화 '고지전'의 한 장면.

 

비벼대는 싸움

무미건조한 전사 기록에는 포연 속에서 뒤엉켜 싸웠던, 그리하여 사라져 간 수많은 인간들의 이야기는 잘 등장하지 않는다. 戰史는 전투조직을 주인공으로 삼아 기술하기 때문이다. 1952년 수도고지와 지형능선 전투에서 어떤 상황이 실제로 벌어졌는가를 알아보기 위해 참전자들을 찾아서 증언을 들어 보았다.

 

 1948 11월에 육사 7기생으로 졸업, 임관한 박찬긍(朴贊兢·육군중장 예편·총무처장관 역임) 6·25가 터졌을 때는 7사단의 중대장이었다. 25일 새벽 동두천 근방에 적의 포탄이 떨어지자, 마침 그날 연대 주번 사령이었던 朴 소령은 연대에 비상을 걸었었다. 그 뒤 포항 근교의 안강 지역에까지 후퇴했다가 9월에 北進을 개시, 원산을 거쳐 함경북도 부령 바로 밑에까지 올라갔다. 그러나 중공군의 개입으로 후퇴를 시작, 흥남에서 철수, 묵호에 상륙하여 동해안 전선을 맡게 되었다. 얼마 있다가 수도 사단 1연대 중대장으로 부임했다. 그는 제1차 미국 보병학교 유학 장교단에 뽑혔다. 1년간 유학을 한 뒤 1952 4월 수도 사단에 복귀, 1연대 3대대장(중령)이 되어 곧 수도고지 전투와 지형능선 전투에 투입되었다.

 

 총무처장관을 그만둔 직후 필자를 만난 박 장군은 “그때의 고지 쟁탈전은 휴전회담이 무르익어 가는 과정에서 벌어져 한 치의 땅이라도 더 차지하자는 조바심으로 해서 양쪽 주력(主力)부대끼리 비벼대는 혈투였다”고 말했다.

 

 “수도고지 전투가 본격화되기 전의 일인데, 그때 군단장은 백선엽(白善燁) 장군이었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백 장군은 적에 대한 정보를 캐기 위해서 포로를 잡아오도록 지시했습니다. 대대장인 제가 1개 소대를 데리고 748고지 바로 밑으로 야습을 나갔습니다.

여기서 중공군 한 명을 잡긴 잡았는데 아군(我軍)의 총격을 받아 창자가 터져 나왔다. 그때 아군 교통호는 한길이나 되는 땅굴이었다. 이 속으로 축 늘어진 포로를 끌고 가야 했다. 겨우 부대까지 데려오긴 했다. 군단 사령부에서는 빨리 포로를 후송하여 포로 신문반에 넘기라고 독촉했다.

 

 박 중령은 위생병을 시켜 응급조치를 하게 한 뒤 겨우 소속 부대 이름만 캐내고 차에 태워 군단 사령부로 출발시켰다. 그 포로는 군단 사령부로 가는 도중에 사망하고 말았다.

 

 박 소령이 속한 1연대는 7 20일쯤 26연대와 교대하여 수도고지에서 물러나 그 뒤 10월까지 지형능선 전투에 여섯 차례 투입되었다. 당시 부대 운용은, 전투 지역에 부대를 들여보내 병력 손실이 심하면 뒤로 빼내 휴식 겸 보충을 시킨 뒤 다시 전투부대와 교대시켜 고지로 보내는 식이었다.

 

박찬긍 씨 증언.

“보통 1개 대대로 고지 전투를 시작, 3일쯤 지나 보면 800명의 대대병력에서 300여 명이 없어져요. 없어진다는 것은 죽거나 다친다는 뜻인데, 有效 병력이 아니니까 없어진 것이나 다름없지요. 死傷者의 비율을 보면 10~20%가 사망자, 나머지는 부상자예요. 전투 중엔 부상자의 비율이 높을수록 부대의 전투 능력은 떨어지지요. 왜냐하면 부상자의 간호와 후송을 위해서 성한 병력이 동원되어야 하니까 전투력이 약화될 수밖에 없지요. 당시 중공군의 포병 화력은 미군의 포병 증강에 대항, 상당히 보강되어 있었습니다. 당시 양쪽은 전략적 출혈전을 벌인 셈입니다. 땅값이 피로써 지불되는 그런 전투였지요. 포격전은 장관이었습니다.

 

 우리 쪽의 20개 포병 대대가 수도고지에 집중 포격을 퍼붓는 것을 보면 꼭 불꽃놀이 같았습니다. 워낙 한꺼번에 포탄이 떨어지니까 개별적인 폭발음은 안 들리고 교향악단의 연주음처럼 종합된 소리가 나는데 우르렁우르렁 하는 천둥소리 비슷하게 들리더군요. 지형능선과 수도고지에는 20년생 소나무가 빽빽이 들어차 있었습니다.

 

포탄이 땅과 충돌해서 터질 때는 보통 땅과 45도 각도를 이루며 파편이 쫙 퍼집니다. 참나무의 밑 둥지가 그대로 잘려 버리는데, 대강 지상 150cm 부근에서 잘리더군요. 포격이 계속되니까 잘린 나무가 또 얻어맞아 가루가 되고, 남은 그루터기도 또 얻어맞아 없어져 버려요. 바위도 땅도 포격으로 부서지고 가루가 되면서 나중에는 먼지와 나무 가루가 뒤섞여 밟으면 20~30cm쯤 푹푹 빠집디다. 포격이 시작되면 이 먼지가 눈보라처럼 날리는데 M1을 겨냥하면 가늠자가 안 보일 정도였습니다.

 

푹 들어가면 먼지, 물컹하면 屍身

박찬긍의 증언은 계속된다.

 “고지로 기어 올라갈 때 당시의 1개 분대가 갖추어야 할 기본 장비는 1인당 M1소총과 카빈과 야전삽 한 자루씩 갖고, 거기에다가 50발 가량의 수류탄과 마대 50장씩 지고 갔습니다. 일단 고지 점령에 성공하면 이 마대에 흙을 퍼 담아 엄폐물을 만듭니다. 그런데 먼지밖에 퍼 담을 것이 없으니까 마대가 가벼워요. 포탄이 떨어지면 폭풍에 마대가 통째로 날아가 버리기도 했습니다. 나뭇가지가 있으면 마대끼리 서로 얽어 놓을 수 있을 터인데, 나무라고는 포격으로 다 가루가 되고 부러진 소총자루밖에 보이지 않았어요.

 

 이런 상황이니 시신(屍身)을 수습할 시간도 없었습니다. 시신을 그냥 버려두니까, 밟아서 푹 들어가면 먼지고, 물컹하면 屍身이었어요. 포격이 시작되면 하늘이 안 보였어요. 온 산이 빨갛게 피어오르고…. 8, 9부 능선까지는 그냥 올라갔습니다. 공격이 개시되는 것은 보통 새벽, 먼동이 트기 전인데, 8부 능선에 도달하면 날이 밝아 오지요. 8, 9부 능선에서 수류탄을 까 던지면서 올라가 고지를 점령하는 겁니다.

 

 1개 중대 병력이 8, 9부 능선에 산개(散開)해 있다가 일시에 소리를 지르며 일어나 高地를 향해 뛰어 올라가야 하는데, 이때 고지를 점령하느냐, 못하느냐가 순간적으로 결정됩니다. 돌격이 누구에 의해서 발기(發起)되느냐 하면 고참 분대장에 의해서 됩니다. 고참 분대장이 선도하여 수류탄 세 발을 연달아 던지고 일어나 고함을 지르면서 돌격할 때 얼마나 많은 사병들이 일어서서 뒤따라 주느냐가 성패(成敗)의 관건이었습니다. 1개 중대 병력 중에 40~50명만 일어나면 고지 점령에 성공했습니다. 

 

“중공군 목을 잘라 오라.

 고지 점령에 성공해도 안심할 여유가 없었다. 진지 주변에 흙주머니를 쌓는 등 준비를 하다가 보면 어둑해지고 공포 속에서 중공군의 공격을 기다려야 하는 것이었다. 대체로 중공군은 초저녁부터 산을 기어오르기 시작했다. 피리를 불고 꽹과리를 치고 5색 신호탄을 쏘면서 올라오는데 “와~ !” 하는 소리를 지르기도 했다. 신병들은 이 ‘음향 효과’에 일찍부터 질려버리는 것이었다. 12시쯤 되면 고지(高地) 쟁탈전이 한바탕 벌어지면서 피비린내가 자욱하게 깔리고 주인이 뒤바뀌든지, 점령 기간이 하루 더 연장되든지 하는 것이었다.

 

보통 한 대대가 2, 3일만 고지를 유지하면 성공적이었고, 그 뒤에는 다른 대대와 교대했다. 수도 사단에는 8개 대대가 있었는데 모두 10여 차례씩 고지 쟁탈전에 투입되었다.

 

 당시 신병들의 사상율(死傷率)은 고참보다 평균 2배나 높았다고 박찬긍 당시 대대장은 말했다. 병력 손상이 워낙 많으니까 훈련도 제대로 안된 신병들을 계속 보충하여 쓰지 않을 수 없었다.

 

 “지형능선 전투 때였습니다. 우리 중대의 반이 신병이었습니다. 야간의 고지 전투에서 수류탄을 던지는데 안전핀도 안 뽑고 마구 던져요. 날이 밝은 뒤에는 불발 수류탄을 회수하여 왔습니다. 연대장에게 건의하여 중대원들을 끌고 내려와 신병 1인당 수류탄을 세 발씩 주어 수류탄 던지는 연습을 시킨 뒤 다시 올라갔습니다. 어떻게 보면 피차간에 전술도 작전도 없는 출혈전이었습니다. 하도 양쪽이 치열하게 비벼대니까 전과(戰果) 보고도 못 믿게 되었습니다. 우리 쪽 시신도 수습할 수 없는 판에 敵의 사상자를 어떻게 헤아립니까. 대충 과장된 보고가 올라갔는데 이것이 축적되면 터무니없는 전과가 되는 거지요.

 

 한번은 중공군 전사자(戰死者)의 목을 잘라 오라는 명령이 박 대대장에게 떨어졌다. 박 중령은 고참 하사관을 적진으로 들여보냈다. 이 하사관은 밤중에 카빈 한 자루와 마대 하나를 갖고 약 400m를 포복하여 잠입했다. 그때 시신은 워낙 많이 널려 있어서 손으로 머리를 더듬어 피아를 구별하기만 하면 되었다. 중공군임을 확인한 하사관은 대검으로 목을 잘라 머리를 마대에 집어넣고 국군 쪽으로 기어왔다. 어둠 속에서 피아간의 대치선을 구별 할 수가 없었다. 이 하사관은 아군 전선의 후방에 도달했는데도 마대를 끼고 계속 포복만 하다가 절벽 옆에서 피곤을 못 이기고 잠에 빠지고 말았다. 날이 밝아도 일어날 줄을 몰랐다. 이때 주먹밥을 나르는 노무자가 하사관의 옆을 지나가다가 너부죽이 엎드린 사람을 발견했다. 옆에 마대가 있어 열어 보았다. 기겁을 한 노무자는 마대를 절벽 아래로 던져 버리고는 제 갈 길을 가버렸다. 뒤늦게 일어난 하사관은 없어진 중공군 목을 종일 찾아 헤맸다고 한다.  

 

이런 격전에서는 어떤 병사가 용감한가.  

박 전 장관은 이렇게 말했다.

 “평소에 얌전하고 내성적인 사람이 전투에서는 용감합니다. 보통 때 우락부락하고 큰소리치는 사람들은 막상 전투가 시작되면 겁을 먹습니다. 이런 현상은 어떤 전투 지역이든지 공통적인 것입니다. 급박한 사태에 직면했을 때는 얌전한 사람이 침착, 냉철해지고 우락부락한 사람들은 덤벙댑니다.

 

특히 방어전에서는 공포가 더해요. 어둠 속에서 다가오는 敵軍을 기다려야 한다는 것은 심장을 죄는 공포지요. 능동적으로 공격할 때에는 공포심을 느낄 여유가 없지요. 특히 중공군이 꽹과리치고 피리불면서 소리 지르고 올라올 때는 적이 굉장한 세력인 것처럼 과대평가를 하기 쉽지요. 어둠 속에서 상황 판단도 안 되고 동료들이 옆에 버티고 있는지 없는지도 잘 모르게 되면 꽁무니를 빼고 깊어지는 것입니다. 방어선은 강둑과 같아서 한쪽이 무너지면 순식간에 와해돼 버려요. 최초의 이탈을 막는 것은, 내 옆에 우리 편이 든든하게 지키고 있다는 확신입니다.

| 조갑제(趙甲濟)조갑제닷컴대표 

 

■ 2016.06.22  6·25 미군의 첫 지상군 제 24보병 사단이 거둔 '전략적 승리'

⊙ 대대장은 부상, 연대장은 사망, 사단장은 포로가 됐지만…
⊙ 남침 6일 만에 미군의 부산 도착 소식은 국민과 한국군에게 용기를 줘
2주간에 걸친 성공적인 지연전으로 한국군과 UN군의 반격 토대를 마련

민병돈
1935
년생. 휘문고·육사·국방대학원 졸업 / 육사 전임강사, 고려대 강사 (독어독문학),
20기계화보병사단장, 특전사령관, 육사 교장 (중장), 경민대 석좌교수.

▲1950년 6월28일 서울에 들어온 북한군 탱크. 미 스미스부대는 탱크를 앞세운 북한군의 남진을 저지해 유엔군이 상륙할 수 있는 시간을 벌었다.

태평양전쟁이 끝난 1940년대 후반의 미국. 한 평범한 가정의 가장이 교통사고로 사망하자 가족 생계가 막막해졌다. 직장생활 경험도 없는 미망인이 시작한 ‘막일’로는 아들 형제를 키우며 살아가기가 힘겨웠다. 일찍 철이 든 두 아들은 이런 사정을 알고 고민하다 입대하면 군대에서 봉급을 받을 수 있다는 말을 듣고 형제가 의논한 끝에 어머니를 위해 군에 입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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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 버질 월포드(Virgil Wolford) 16살 랜섬 월포드(Ransome Wolford) 형제는 육군 사병으로 지원했는데 나이가 너무 어리다는 이유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2년을 기다린 후에야 형제는 육군에 입대할 수 있었고 훈련을 마친 후 일본에 주둔하는 제24보병사단에 배치됐다
  
 
당시 일본은 전쟁에 참패하며 대도시들은 미군 폭격으로 초토화하고, 산업도 황폐화하여 굶주림 속에 죽어 가는 사람들의 수가 헤아릴 수 없이 많아 전체가 지옥으로 변해 있는 형국이었다. 이 ‘지옥’이 미() 주둔군에게는 ‘낙원’이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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년간 태평양과 오키나와에서 처절한 지옥고()를 치른 뒤 일본 본토 주둔군이 된 미군은 위풍당당한 점령군으로 나타나 겁에 질리고 배고파 죽을 지경인 일본 국민의 눈앞에서 막강한 달러화()와 풍족한 물자를 가지고 무소불위(無所不爲)의 힘을 과시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효자 버질 월포드와 랜섬 월포드 형제가 일본에 도착한 것이다
  
 
형제는 이국의 풍경과 생활환경에 어리둥절해하며 병영생활에 적응해 가고 있었다. 그 당시 미군 장병들의 생활은 청교도 정신이 충만한 미국 사회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초호화판이었다. 미군은 정신이 풀어질 대로 풀어져 ‘역전의 용사’다운 모습은 사라지고 ‘군복 입은 관광객’이 되어 있었다
  
 
어느 날 월포드 형제는 점심식사하던 중 그날, 1950 6 25일 새벽 일본에서 멀지 않은 코리아라는 나라에서 북한의 남침으로 전쟁이 발발했다는 뉴스를 들었다. 그들은 이 뉴스를 그들과는 관계없는 남의 나라 이야기로 무심히 흘려보냈다. 이 전쟁이 그들의 운명을 송두리째 바꿔 버릴 것이라는 사실을 까맣게 모른 채
  
 
이튿날 부대 분위기가 뒤숭숭하게 돌아가기 시작하면서 미국이 이 전쟁에 참전할 것이며 이 부대도 곧 그 전장에 투입될 것이라는 소문이 돌았다. 소문이 현실로 바뀌면서 부대는 출동준비 명령을 받았다. 그때부터 2~3일간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게 돌아가는 가운데 그들이 소속된 보병대대는 비행장으로 이동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미군의 신속한 참전

6·25 전쟁 발발 6일 만에 부산에 도착한 미군은 1950년 7월 4일부터 오산 방어 전선에 투입됐다. 
사진=국가기록원 제공

 

  며칠 전 본국으로부터 지상군 투입을 지시받은 미 극동군사령관 맥아더(Douglas MacArthur) 원수는 제8군 사령관 워커(Walton Walker) 중장에게 우선 제24보병사단을 선발대로 투입할 것을 명령했다. 이어 군사령관의 명령을 받은 제24사단장 딘(William F. Dean) 소장은 선박으로 한국 부산을 향해 이동할 사단의 본대에서 비교적 군기가 서 있는 제21연대의 제1대대에 구경 105mm 곡사포 1개 포대(중대, 6)를 배속하여 대대급 특수임무부대(Task Force)를 편성한 후 대대장 스미스(Charles B. Smith) 중령 지휘하에 7 1일 부산 수영비행장으로 공중 이동하도록 조치했다 
  
 
부산에 도착한 스미스 특수임무부대(Task Force Smith)는 즉시 북상하여 그 이튿날인 7 2일 아침 8시에 대전에 도착했다. 이는 그 당시 한국의 열악한 도로사정으로 볼 때 대단히 신속한 기동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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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일 오후 스미스 특수임무부대(증강된 대대규모)가 평택에 도착한 후 대대장 스미스 중령은 지원 포병대대장 페리(Millero Perry) 중령과 함께 예하 소총 중대장 및 포대장들을 대동하고 더 북쪽으로 진출하여 오산을 지나 그 북방의 죽미령(竹美嶺) 일대를 정찰한 후 그곳 두 개의 고지를 방어진지로 선정했다. 남북으로 관통하는 국도의 좌우(동서)에 위치한 표고 100m 90m의 야산이지만 방어에 유리한 지형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대대에 배속된 구경 105mm 곡사포대는 그 고지들의 1800m 후방에 진지를 정했다 
  
 
스미스 특수임무부대는 야간 행군으로 그 이튿날인 5일 새벽 3시에 대대장이 선정한 진지에 도착하여 장병들이 어둠속에서 비를 맞으며 각자 지정된 위치에 호를 파기 시작했다. 그 작업을 버질과 랜섬 월포드 형제도 함께 했다. 작업이 끝난 새벽 5시에 둘이 함께 호 속에 들어가 자리 잡고 계속해서 내리는 비를 맞으며 춥고 배고프고 피곤한 몸으로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경험이 일천한 이들 형제가 함께 같은 호 속에 배치된 것은 분대장의 배려 덕분이었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점령지 일본에서 일본인들의 ‘극진한 서비스’를 받으면서 극락에서나 누릴 법한 호강을 하며 지내던 귀하신 몸들이 지금은 낯선 코리아의 오산 북방 이름 모를 고지에서 ‘지옥의 고통’을 당하고 있는 중이다
  
 
이른 아침, “전투가 시작되기 전에 미리미리 무엇이든 먹어 두라”는 지휘자의 지시에 따라 대원들은 배낭에서 시레이션(C Ration·휴대식량)을 꺼내 비를 맞아 가며 덜덜 떨면서 젖은 비스킷과 통조림 고기로 고픈 배를 채웠다. 그러는 사이 밤새 멀리서 들려오던 포()소리가 이제 가까운 데서 나는 폭음으로 증폭되어 들려왔다
  
 
아침에 비가 그쳐 가고 있는데 735분 “수원 남쪽에 적 탱크 8대가 남하하고 있다”는 상황이 전파됐다. 북쪽을 주의 깊게 바라보는 장병들의 눈에는 아직도 적의 움직임이 보이지 않고 있는 가운데, 처음으로 직면하게 된 실전상황 앞에 장병들의 긴장은 더해만 가고 기분 나쁜 침묵이 분위기를 압도하고 있었다


  
전투의 시작

▲총탄에 구멍 난 헬멧을 보고 있는 미군.
  

  “꽝, 꽝”, 천지가 진동하는 폭음이 갑자기 장병들 등 뒤쪽에서 들려오자 모두가 깜짝 놀라 몸을 움츠렸다. 1950 7 5일 아침 816, 6·25 참전 미 지상군의 야포가 적을 향해 초탄을 발사한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한동안의 시간이 지난 후 보병대대의 박격포들도 사격하기 시작했다. 고지에서 바라보니 적 부대가 마치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분산도 하지 않은 채 종대 대형으로 탱크들을 앞세우고 유유히 다가오고 있었다
  
 
적이 아군 방어진지에 접근하자 보병 대전차화기인 구경 75mm 무반동총()과 구경 2.36인치 로켓포들로 적 탱크들을 집중 사격하여 명중했지만 적의 소련제 T-34탱크를 파괴하지는 못했다. 이렇게 되면 아군은 사기가 떨어지고 적은 사기가 오르게 되어 있다. 적이 고지의 방어부대 소총사거리 안에 이르자 참호 속의 장병들은 소총, 기관총 등 소화기 사격으로 맞섰다. 이때부터 쌍방 보병들 간에 치열한 공방전이 벌어졌다
  
 
미군들의 피해가 속출하는 가운데도 버질과 랜섬(월포드) 형제 역시 흥분하여 적을 향해 총을 쏘고 또 쏘았다. 제정신이 아니었다. 이러는 가운데 적과의 거리는 점점 더 가까워지고 겁에 질려 몸을 움츠린 소년병 형제의 몸은 점점 호 속으로 가라앉았다. 잠시 후 이 호에서는 더 이상 총소리가 나지 않았다. 과부가 돼 어렵게 살아가는 어머니에게 경제적으로 도움이 될까 하여 군에 입대한, 이 갸륵한 소년병 형제가 여기서 이렇게 생을 마감한 것이다. 
  
 
대대장 스미스 중령과 예하 중대장들의 용감하기 이를 데 없는 전투지휘에 장병들은 흔들림 없이 적의 치열한 공격을 막아 내고 있었다. 열흘 전까지만 해도 일본에서 호강하던 ‘군복 입은 관광객’의 모습에서 지금 이곳에서는 강한 전사의 모습으로 바뀌어 있는 것이다. 유능한 지휘관의 리더십은 참으로 불가사의하고도 위대하다
  
 
예상 밖으로 강한 저항에 직면한 적 제4사단은 포병의 화력지원을 받는 2개 연대로 스미스 특수임무부대를 포위공격하고 탱크들은 방어진지 측방으로 우회하여 진지 후방의 곡사포대를 향해 돌진해 들어왔다. 이에 포대는 공격해 오는 적 탱크들을 곡사포로 직접 조준사격하여 선두의 적 탱크 2대를 파괴했다. 안타깝게도 더 이상 적 탱크를 쏠 수 없었다. 포대가 가진 대()전차고폭탄(HEAT)이 단지 6발뿐이었기 때문이다. 결국 포대는 적 탱크에게 유린당하고 말았다
  
 
고지에서는 지금 쌍방 보병들 사이에 공방전이 한창이다. 스미스부대의 고전이다. 이 부대가 포병 1개 곡사포대( 6)로 증강되었다고는 하지만 대대 병력은 편제상의 정원에 반() 정도밖에 되지 않는 406명이었다. 이 보병406명을 표고 100m 90m의 두 고지에 나누어 배치하여 기세등등한 적 2개 연대의 공격을 막아 내느라 악전고투하고 있는 중이다
  
 
날씨마저 구름이 끼어 공군의 근접항공지원(C.A.S)도 받지 못하고 대대에 배속된 105mm 곡사포대의 화력지원도 받지 못하고 있다. 적의 포격으로 포대와의 사이에 전화선이 끊어지고 무전기마저 파손되어 보병대대와 포대 사이에 교신이 어렵게 된 데다 이어서 적 탱크가 포 진지에 돌진하여 포대를 유린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스미스 특수임무부대는 아침부터 지금까지 4시간 동안 버티며 힘겹게 고지를 확보하고 있는데 적은 포위망을 압축해 오고 있다.  


  
로켓포를 메고 직접 전투에 참여했다가 포로가 된 사단장

▲미군 제24사단의 방위계획에서 가장 중요했던 평택·천안 방어선이 무너지고 대전까지 적에게 점령됐다. 이 전투에서 사단장 딘(Dean) 소장(가운데)은 적의 포로가 됐는데 그는 전투 중 로켓포를 직접 어깨에 메고 전투를 벌이기도 했다.
  

  그동안 대대는 전사자와 부상자가 속출하여 병력이 많이 감소했다. 스미스 중령은 지금의 상황에서 중과부적임을 알면서도 부대가 전멸을 당하면서까지 이 고지를 지킬 필요는 없다고 판단하여 철수할 것을 생각하고 있다. 자기 자신도 부상한 몸으로 효과적인 전투지휘를 계속하기 어렵다는 점을 고려한 것이다.
  
 
이번 방어전에서 스미스 특수임무부대(대대)는 배속받은 포대 134명을 포함한 540명 병력 중 3분의 1 181명이 전사 또는 실종하고 그 밖에 대대장 스미스 중령을 포함한 대다수의 병력이 부상했으며 대대의 구경 4.2인치 박격포 2문과 75mm 무반동총() 2정 등 중화기를 포함한 각종 장비를 잃었고 배속된 포대도 야포와 트럭 등 대부분의 무기 및 장비를 잃었다
  
 
마침내 그는 적의 공격이 계속되는 상황에서 근접 항공지원과 포병 화력지원도 받지 못하면서 상당한 피해를 각오하고 철수를 단행하여 평택을 지나 안성에서 제34연대 제3대대와 합류한 후 다음 날(6) 천안으로 후퇴했다. 7일 천안에서 사단장 딘 소장은 평택지역에서 후퇴해 온 제 34연대장 러블리스(J. B. Loveless) 대령을 힐책, 해임하고 새로 과감하고 유능한 마틴(R. R. Martin) 대령을 연대장으로 임명하고는 그에게 기대를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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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 아침 8시 천안 방어전에서 신임 연대장 마틴 대령은 부하들이 보는 앞에서 자신이 직접 2.36인치 로켓포로 적 탱크를 쏘았으나 오히려 적 탱크의 반격으로 장렬히 전사했다. 사단은 5일 오산지역 방어전의 시작으로부터 성공적인 지연전으로 한국방어를 위한 시간을 벌어 주었지만 19일 대전지역 방어전에서 사단이 적의 포위공격을 받아 고전할 때 사단장이 직접 새로 보급된 신형 구경 3.5인치 로켓포를 메고 적 탱크를 쏘아 파괴하는 모습을 부대원들 앞에서 보여주며 독전했지만 결국 사단은 와해되고 그 자신도 측근들로부터 분리되어 홀로 사흘을 굶어 가며 산야를 헤매다가 적에게 포로가 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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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참전 미군 선두부대 제24보병사단이 2주간에 걸친 지상전으로 적의 상대적 우세 앞에 만신창이(滿身瘡痍)가 되어 ‘전술적 패배’를 당하기는 했지만 성공적인 지연전으로 한국군과 UN군의 반격에 토대를 마련한 ‘전략적 승리’를 거두었던 것이다. 이 부대가 북한의 남침 6일 만에 한국땅 부산에 도착했다는 소식은 그 즉시 언론보도를 통해 퍼져 나가 실의에 빠진 한국 국민과 당황했던 한국군에게 용기를 주었고 북한과 그 배후 소련 및 중공(중화인민공화국) 수뇌부에, “북한이 남침해도 미국이 참전하지 않을 것”이라는 그들의 판단이 오판이었음을 알게 해 주었다.
  
 
이는 마오쩌둥(毛澤東)의 중국공산군이 국공내전(國共內戰)에서 승리하여 장제스(蔣介石)의 국부군(國府軍)을 몰아내고 1949 10 1일 중국대륙에 중화인민공화국을 선포함에 따라 미국의 트루먼 대통령이 한반도의 적화(赤化)는 곧 일본의 적화로 이어질 수 있고 그것이 미국의 가상 적국인 소련과 중공의 태평양 진출로 이어져 미국의 안보에 악영향을 줄 수 있다는 위기의식에 기인한 것이었다.

 

■ 2016.06.22 문서로 본 6.25 전쟁…미군, 북한의 남침 알고 있었다

▲21일 국립중앙도서관 본관 1층 전시실에서 개막한 '6·25 전쟁, 미 NARA 수집문서로 보다'전시는 6·25 동란을 다시 살펴보는 자리다. 

 

전쟁은 어떻게 일어났을까. 미군은 정말 북한군의 남침을 몰랐을까. 이번 전시 기획위원으로 참여한 양영조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군사연구부장과 함께 주요 문서를 살펴봤다.

 

◇미군, 북한 남침 알고있었다?

6·25 동란이 발발한 직후부터 미국 정부 내에서는 북한군의 남침 예견 실패를 놓고 책임 공방이 뜨거웠다. CIA, 극동군사령부를 비롯한 합동참모본부 등의 정보 부서들은 서로 책임을 회피하느라 바빴다. 

 

그러던 중 '워싱턴 뉴스'가 1950년 9월 1일과 10월 5일에 "극동군사령부의 정보참모부장인 윌러비 소장이 1950년 3월10일에 북한군의 남침을 정확하게 예측했었다"라는 기사를 실었다. 미 국무부 문서에 따르면, 미 극동군사령부가 "1950년 3월 10일에 6월 경 북한군이 남침할 것이라는 정보를 입수하고 상부에 보고했다"라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후 북한은 소련과 중국의 지원을 약속받아 1950년 6월 25일 일요일 새벽, 38선 전역에서 남침을 개시했다.

 

양 군사연구부장은 "윌러비가 전쟁 가능성을 예측했다는 건 그 분의 증언 등으로 이미 알려진 사실"이라며 "하지만 대중이 이 문서 자체를 실제로 보는 건 이번이 처음"이라고 말했다. 

 

◇소련의 한국전쟁 개입시 미 합참의장 브래들리의 복안

6·25 동란 초기인 1950년 7월10일 미 합참의장 브래들리 장군이 소련군이 전쟁에 개입할 경우에 취해야 할 방책에 관해 논한 문서다. 소련군의 개입은 곧 제3차 세계대전을 의미하는 것이었기에 신중할 수밖에 없는 문제였다. 

 

당시에 소련이 한국전쟁에 대한 개입을 극비로 추진하고 있어서 미 정보당국은 소련이 직접적으로 개입하고 있지 않다고 판단하고 있었다. 이 문서는 미 합참의장 브래들리 장군이 소련군의 직접적인 개입이 확인될 경우 미군은 무조건 일본으로 철수하거나, 전면전을 준비해야 한다는 입장이었음을 보여준다. 

 

양 군사연구부장은 "전 세계의 정보력을 동원해서 소련군이 개입 여부를 판단, 직접 개입하지 하지 않았다는 결론을 내리고 소련군이 개입할 경우의 정책 노선을 적은 문서"라고 설명했다. 

 

◇마오쩌둥과 스탈린의 모스크바 회동 문서 

1951년 2월 초 모스크바를 방문한 마오쩌둥과 스탈린의 회담에서 중국과 소련이 6·25 동란에서 협력을 합의한 사항이 기록된 CIA 정보 보고서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그해 4월5일 작성된 내용으로

▲중국은 한국전쟁에서 포기하지 않으며, 전력을 다해 계속 싸운다.

▲중국은 50만 명의 병력을 추가 파견한다

▲미국이 만주 폭격을 요청한 맥아더에 동의하는 경우 소련은 중소상호원조조약과 중소 동맹에 의거 일본의 미군 기지를 폭격한다

▲한국 파병으로 중국 내 병력이 부족한 요새를 강화하기 위해 중국은 소련군이 중국 내에 주둔하는 것을 환영한다.

▲한국 전선을 강화하기 위해 소련은 국제 의용군을 조직해 한국에 파병한다.

▲소련은 중국에 탱크와 트럭, 연료와 탄약 지원뿐 아니라 해공군 병력을 파견한다.

▲중소 국경의 주요 지점에 대규모 군수품 기지를 세운다 등의 내용이다. 

 

양 군사연구부장은 "마오쩌둥의 모스크바 방문은 1951년 1월 말부터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으며, 마오쩌둥과 스탈린의 회동은 6·25전쟁의 전개 양상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었다"고 전했다.

뉴시스 

 

■ 2016.07.27 한국전쟁 중 미군 전사자 5만4천260명...이중 최후의 전사자는 누구?

한국전선에서 부상당한 전우를 이끌고 가는 미군장병

 

검푸른 여름 밤 하늘에 둥근 달이 휘엉청 밝게 떠있다. 귀뜨라미 소리만 들릴 뿐 세상은 고요하다. 갑자기 여기 저기서 조명탄이 하늘 높이 치솟는다.

 

“휴전이다! 전쟁이 끝났다!” 국군 장병들이 참호 밖으로 뛰어나오며 환호성을 지른다.

 

1953 727일 밤 마침내 전쟁이 끝났다. 유엔군과 공산측 간에 정전협정이 이날 오전 10시 판문점의 한 막사 안에서 조인되었다. 그리고 그 협정에 따라 같은 날 밤 10시 정각을 기해 모든 전투행위가 끝난 것이다.

 

“아아 잊으랴 어찌 우리 이 날을 조국의 원수들이 짓밟고 오던 날을....

 

사병들이 노래를 부르고 춤도 춘다. 그러나 사단 지휘소 안의 장교들은 전혀 기쁜 기색이 없다.

 

“통일도 이루지 못하고 이렇게 허무하게 전쟁이 끝나다니…망할 놈의 중공군들만 내려오지 않았어도 민족의 통일은 이루었을텐데.” 사단장이 침통하게 한마디 내뱉는다.

 

휴전선 너머 어느 인민군 사단 지휘소에서도 분위기는 마찬가지다. 깡마른 체구의 사단장이 주먹을 불끈 쥐고 “원쑤 미제 승냥이들만 들어오지 않았어도 남조선해방은 완수했을텐데…”하고 탄식한다.

 

사병들이 각종 군가를 부르며 휴전을 축하하고 있는 동안 박선욱 중위는 산등성이에 홀로서서 별들이 찬란한 밤하늘을 바라본다. ‘저 북쪽 하늘 아래 어딘가에 리영혜는 살아있을까? 살아있더라도 이제 다시 만나기 어렵게 되었구나. 어쩌면 우리는 평생 다시 만나지 못하게 될지도 모른다. 몇 년이 걸려도, 아니, 몇십 년이 걸려도 나 박선욱은 리영혜, 당신을 꼭 만나고 말거야. 우리는 꼭 만나야해! 부디 살아만 있어줘, 살아만 있어줘…’ 이렇게 마음 속으로 외치는 그의 눈에 눈물이 고이고 달빛에 반사되었다.

 

필자는 중편소설 “전쟁과 사랑”에서 한국전쟁이 끝나던 날의 전선 상황을 위와 같이 묘사했다.

 

그런데 바로 그 날 오전 3 20분에 미군 하사관 한 명이 한국전선에서 숨을 거두었다. 그가 바로 한국전쟁의 마지막 전사자였다. 유엔군 대표와 북한군 그리고 중공군 대표가판문점에서 휴전문서에 서명을 하기 약 8시간 전 판문점에서 24km 떨어진 미해병대 야전병원에서는 군의관들과 간호병들이 한 부상병을 긴급히 치료하고 있었다.

 

부상병은 22세 해병 하사였다. 그는 전날 밤 중공군이 쏜 박격포탄에 오른쪽 다리에 중상을 입고 앰뷸런스에 실려 이 야전병원으로 긴급 후송되었다. 군의관들은 피를 많이 흘린 그에게 다량의 피를 수혈하고 3명의 군의관이 5시간 동안 필사적 노력을 다했으나 이 해병하사는 끝내 숨을 거두고 말았다. 그때가 1953 727일 오전 320. 오전 10시로 예정된 휴전조인을 겨우 6시간 40분 앞둔 시점이었다,

 

당시 TIME지 보도에 의하면, 해병 위생병들은 이름이 공개되지 않은 이 해병 하사의 시신을 하얀 천으로 덮은 다음 자리를 떴고 백열전등 하나만이 외로이 한국전쟁 마지막 전사자의 시신을 밝혀주고 있었다" 한다.

 

한국전쟁 3년 동안 한국에서 죽은 미군은 총 54260명이었는데, 이 중 전사자는 33643, 질병, 사고에 의한 사망자 등은 2267명이었다고 한다. (미국 국방부 통계)

 

한국전쟁 휴전 63주년에

워싱턴에서 조화유

 

■ 2016.08.16 투철한 군인정신으로 빚은 역사적 응징보복작전 - 몽금포작전

 

북한 도발에 대한 최초의 원점 타격으로 강력한 응징에 성공한 작전. 투철한 군인정신으로 생사의 위험 속에서도 전우를 끝까지 지켜낸 영해 수호의 귀감이 될 만한 작전. 바로 역사적인 응징보복작전인 몽금포작전을 가리킨다. 오늘은 몽금포작전이 펼쳐진 지 67주년이 되는 날이다. 작전의 성공을 기념하며 그날을 되돌아보고 당시 승전을 이끈 공정식 전 해병대사령관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국군 최초 적 도발원점 타격한 쾌거

몽금포작전은 6·25전쟁 발발 1년 전인 1949 8 17일 우리 해군이 처음으로 북한의 도발원점과 지원전력을 타격한 쾌거이다. 당시는 아군 함정뿐 아니라 미군 군사고문단장이었던 로버트 장군의 전용 보트 납북사건 등 북한의 도발이 빈번했던 때. 손원일 해군참모총장은 끊임없이 거듭되는 북한의 도발에 대응하기 위해 단호한 결단을 내리고 이승만 대통령의 승인을 받는다. 몽금포작전은 그렇게 시작됐다.

납북된 미국 군사고문단장 전용 보트가 황해도 몽금포항에 계류 중이라는 사실을 확인한 해군은 함명수(해사1) 소령 등 20명의 정보부대 특공대원과 6척의 함정으로 전단을 구성한다. 16일 오전 2시 인천항을 출항한 해군은 적의 감시망을 피하기 위해 백령도 남쪽을 멀리 돌아 이튿날 오전 몽금포 앞바다에 도착했다. 작전은 보트를 찾아오거나 여의치 않을 경우 폭파하는 것이었다.

17일 오전 6시 기습을 시작했으나 예상외로 격렬한 적의 저항으로 쌍방 간 치열한 전투가 전개됐고 특공대원들을 지휘하던 함 소령은 총상으로 부상을 당한다. 더구나 대원들이 탄 보트 5척 가운데 4척이 적의 총탄에 기관고장을 일으켜 멈추고 만다.


공정식 소령, 일촉즉발 위기 구해

일촉즉발의 위기를 구한 것은 바로 통영함을 이끌던 공정식(해사1) 소령. 공 소령은 중기관총을 발사하며 포로가 될 위기에 처한 함 소령과 대원들을 구출하고 적 함정 4척을 물리쳤다.


또한 적 승조원 5명을 생포하고 함정 1척을 나포했다. 비록 목표로 했던 미 군사고문단장의 보트는 되찾아 오지 못했지만 작전은 대성공으로 끝났다.


몽금포작전은 예상 밖의 전과를 거둔 성공적인 작전이었다. 그러나 당시 무초 주한 미국대사가 이를 ‘한국군의 불법적인 38선 월경 사건’으로 규정하며 우리 정부에 항의했고 작전을 수행한 특공대의 포상은 이뤄지지 못했다. 북한은 이 작전을 정치적으로 이용해 6·25전쟁의 도화선이라고 선동했고 일부 학자들이 이에 동조하기도 했으나 소련 붕괴 이후 6·25전쟁이 북한의 주도 아래 중국, 소련이 지원해 이뤄진 침략전쟁이라는 사실이 밝혀져 더 이상 논란의 여지가 없게 됐다.


2015
9 15일 전승비 제막…몽금포작전 영웅 기려

해군은 몽금포작전 영웅들을 기리기 위해 2012 9월 전승비 건립사업에 착수해 2015 9 15일 인천 월미공원에서 제막식을 했다.

또 지난 4 2일 공정식 전 해병대사령관과 함명수 전 해군참모총장의 서훈식을 이들의 모교인 해군사관학교에서 거행했다.

이승복 기자 yhs920@dema.mil.kr

 

■ 2016.10.20 "지평리전투의 영웅 몽클라르 기억하세요"

[주간조선: 몽클라르 장군 전시회 개최 김성수 '지평사모' 대표]  

"한국전쟁에 참전할 수 있다면 육군 중령이라도 좋다. 계급을 낮춰도 좋으니 나를 한국으로 보내 달라."

1950 7, 당시 프랑스 막스 르젠 국방차관에게 육군 중장이 던진 말이다. 이 말을 한 주인공은 프랑스의 랄프 몽클라르(Ralph Monclar·1892~1964) 장군이다. 당시 중장이었던 그가 계급장까지 떼며 이렇게 말한 이유는 무엇일까. 1950 6 25, 탱크를 앞세운 북한군이 남한을 기습공격하며 한국전쟁이 발발했다. UN 안전보장이사회는 유엔연합군을 한국에 파견하기로 결정했다. 프랑스 역시 유엔군의 파병이 결정되었지만 한국에 파병할 여력이 없었다. 6·25전쟁 발발 당시 프랑스는 인도차이나, 알제리 등에서의 식민지 전쟁으로 병력 보충에 어려움이 많았다. 이에 프랑스는 1950 7 12명의 시찰단만 한국에 파견하기로 결정했다.

 

▲랄프 몽클라르 장군. /지평사모

 

이 결정에 반기를 든 한 사람이 있었다. 바로 랄프 몽클라르 중장이다. 부족한 병력을 채우기 위해 몽클라르 장군은 전국을 순회하며 모병(募兵)을 실시했다. 그 결과 전국에서 1300여명에 달하는 병력이 모였다. 몽클라르 장군은 직접 이들을 이끌고 한국전쟁에 참전할 생각이었다. 여기서 생각지도 못한 문제가 발생했다. 막스 르젠 국방차관이 “미국의 대대는 육군 중령이 지휘하는데 중장인 당신이 대대장을 맡는다는 건 말이 안 된다”고 반대했다. 이에 몽클라르 장군은 중장 계급장을 떼고 중령의 신분을 자처했다. 공산군의 침략으로 백척간두에 놓인 한국을 돕는 일이라면 몽클라르 장군에게 강등은 아무 문제가 되지 않았다. 몽클라르 장군이 한국에 왔을 때 나이는 58세였다. 그는 목숨을 걸고 한국전쟁에 참전해 경기도 양평의 지평리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중장에서 중령으로

 지평리전투가 끝난 지도 65년이 흘렀지만 여전히 몽클라르 장군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있다. 바로 사단법인 ‘지평리를 사랑하는 모임’(이하 지평사모)이다. 지평사모는 지난 9월 1일부터 10월 31일까지 수림아트센터에서 ‘몽클라르 장군 추모 유품·사진전’을 무료로 개최한다. 지난 9월 20일 서울 동대문구 홍릉로 118 수림아트센터에서 열리고 있는 전시회를 찾았다.

 

입구에 들어서자 이젤 위에 고정된 몽클라르 장군의 사진들이 보였다. 몽클라르 장군의 빛나는 훈장과 군모 역시 프랑스에서 건너와 전시 중이었다. 흑백사진 속의 안경 낀 몽클라르 장군은 카리스마가 넘쳤다. 여러 사진 가운데 파병 직전 찍은 몽클라르 장군의 빛바랜 가족사진이 한눈에 들어왔다. 몽클라르 장군 옆에는 만삭의 부인과 아들이 있었다. 어린 아들과 딸을 임신한 부인을 두고 몽클라르는 6·25전쟁에 참전한 것이었다. 이 전시회가 개최될 수 있었던 건 지평사모의 김성수 대표(법무법인 아태)의 노력 덕분이다. 수림아트센터에서 만난 김성수 대표는 전시회를 개최한 이유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김성수 대표. /양수열 영상미디어 기자

 

“한국은 당시 유럽에서는 이름도 알려지지 않은 작은 나라였다. 그런데 한국의 자유를 위해 계급장까지 떼어내고 온 사람이 몽클라르 장군이다. 비록 국적도 인종도 다르지만 오늘날 우리가 본받아야 할 분이라고 생각한다.

 

김성수(73) 대표가 지평사모를 결성하게 된 계기는 무엇일까. 그는 경기고·서울대 법대를 나와 판사를 거쳐 법무법인 아태 대표변호사로 있다. 사건을 맡을 때마다 늘어나는 송사(訟事)기록을 보관할 장소가 필요했다. 수소문 끝에 구한 장소가 경기도 양평군 용문면이었다. 공교롭게도 용문군은 지평리 부근이었고, 김 대표는 6·25전쟁의 상흔이 남아 있는 지평리를 자주 지나치게 됐다. 그때 지평리전투의 영웅 몽클라르 장군에 대해 처음 알게 됐다. 김 대표의 설명이다. “지금까지 이런 분을 몰랐다는 게 부끄러웠다. 오늘의 한국이 있었던 배경에는 몽클라르 장군 같은 외국 용사들의 헌신을 잊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김 대표는 2009년에 지평사모를 결성했다. 현재 회원 수는 100여명에 달한다. 전시회에 참여한 정희주 사진작가는 “몽클라르 장군이 승리로 이끈 지평리전투를 통해 청년들이 깨닫는 바가 컸으면 한다”고 말했다.

 

▲한국전선을 방문한 맥아더 사령관(오른쪽)과 만나는 몽클라르 장군(왼쪽). /지평사모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인천상륙작전 못지않게 지평리전투는 중요하다”고 김 대표는 설명했다. 지평리전투는 1951 2 13일부터 15일까지 벌어진 산악 전투이다. 당시 중공군은 국군과 유엔군의 전선을 밀어내며 파죽지세로 남진하고 있었다. 그 당시 지평리까지 무너지면 전쟁의 패색이 짙어지는 절체절명의 상황이었다. 하지만 몽클라르 장군이 이끈 프랑스 대대가 중공군을 강타했다. 몽클라르 장군이 이끄는 프랑스군은 총탄이 완전 바닥나자 총검술로 중공군과 맞섰다. 결국 중공군은 프랑스군에 패퇴했다. 지평리전투에서 승기를 잡게 되자 사기가 높아진 유엔군은 다시 북진을 재개할 수 있었다.

 

몽클라르 장군은 1951년 12월 지휘권을 인계하고 프랑스로 돌아갔다. 그 후 그는 프랑스 파리에서 1964년 작고했다.

 

김성수 대표는 2010년 몽클라르 장군의 딸 파비앙 몽클라르 여사와 사위인 듀포 대령을 한국으로 초청하기도 했다. 그때 파비앙 여사는 당시 아버지가 지휘소로 사용하던 지평리 주조장을 직접 찾았다. 당시 파비앙 여사는 김성수 대표에게 “조국인 프랑스에서도 아버지의 삶은 잊혀져가고 있는데, 한국에서 아버지를 이렇게 기억해주다니 정말 감사하다”고 말했다.

 

▲지평리 전투 프랑스군 참전용사 추모비 앞에서 클라르 장군의 딸 파비엔느 몽클라르씨(왼쪽)가 남편 버나드 듀포씨와 함께 비문을 읽고 있다. /조선일보DB

 

당시 파비앙 여사는 아버지의 자서전을 책으로 펴낼 생각이었다. 하지만 프랑스의 그 어떤 출판사도 출간을 해주려고 하지 않았다. 수익성이 떨어진다는 이유에서였다. 이 소식을 들은 김성수 대표는 파비앙 여사에게 이런 제안을 했다. “프랑스에서 출간이 어렵다면 한국에서 먼저 출간하는 건 어떻겠느냐. 내가 한국에서 몽클라르 장군의 자서전을 출간할 수 있도록 돕겠다.” 이렇게 2011년 탄생한 책이 바로 ‘한국을 지킨 자유의 전사’라는 제목의 몽클라르 자서전이다. 2년 뒤 이 자서전은 프랑스에서도 출간이 됐다. 파비앙 여사 역시 아버지처럼 한국에 대한 사랑이 크다. 지난해 그는 조선일보의 통일나눔펀드에 동참하며 “하늘에 계신 아버지가 한국의 통일을 본다면 ‘신이 우리의 희생에 보답을 주시는구나’라며 매우 기뻐하실 것 같다”고 말했다.

 

지금도 김성수 대표는 몽클라르 장군을 알리는 일이라면 두 발 벗고 나서고 있다. 김성수 대표는 “어린 학생들이 반드시 이 전시회를 봤으면 한다”며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후손들이 오늘의 한국을 만든 분들이 누구인지를 알아야 내일이 더 빛나는 한국이 될 것이다. 젊은 친구들이 몽클라르 장군의 정신을 계승할 수 있도록 더욱 노력하겠다.”

김태형 주간조선 기자 

 

■ 2016.10.28 동강 전선 북한군 총공격설 제보한 홍윤희씨의 절규

⊙ 육사(陸士) 합격 후 후퇴 과정에서 북한군 위장 입대… 위생병 근무 중 첩보 듣고 탈출

⊙ 워커 사령관, 미 해병 1연대 투입해 북한군 유인작전 저지… 인천상륙작전 기틀을 마련

⊙ 1950년 간첩죄로 사형선고… 1973년 미국으로 망명해 65년간 소명 자료 수집에 평생 바쳐

⊙ 2013년 애플먼 메모 발견으로 재심에서 간첩죄 무죄 판결… “훈장은 못 줄망정 간첩이라니…”

 

 

영화 〈인천상륙작전〉의 열기 속에 가슴 한편이 아려오는 노인이 있다. 6·25전쟁 낙동강 전투 때 인민군 총공격을 제보했다가 오히려 간첩으로 몰려 사형선고까지 받았던 홍윤희(洪允憙·86)씨는 “나의 역할이 없었더라면 〈인천상륙작전〉이란 영화도 없었을 것”이라며 헛헛하게 웃었다.


지난 8 2일 서울 시내 커피숍에 그가 나타났다. 대한민국이 공산군의 침략으로 숨통이 끊어지기 직전, 20세 북한 군인이었던 그는 북한군을 탈출해 유엔군에 결정적 제보를 했고 그의 제보에 의해 워커 8군사령관은 병력을 재배치해 벼랑 끝 전세를 역전하고 수십만의 인명을 구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도리어 간첩 혐의로 체포돼 갖은 고문 끝에 사형선고까지 받고 무기수로 있다 형집행정지로 풀려나 밑바닥 생활을 전전했고, 박정희(朴正熙) 정부가 좌익경력자 예비검속을 위한 ‘사회안전법’을 시행하려 하자 1973년 가족과 함께 도망치듯 미국으로 떠났다.


육사에 입교했으나 전쟁 발발로 북한군 위장 입대

홍씨의 파란만장한 인생은 영화보다 더 드라마틱하다. 1950 6 1일 홍윤희씨는 처음 도입한 4년제 육군사관학교 입학시험(육사 10)에 합격해 입교했다가, 보병학교로 전교해 간부후보생 과정에 입소하기로 했다. 장남으로 가족 부양의 책임 때문이었다. 이미 2년 동안 육군본부 감찰실 조사과에서 하사관으로 근무한 경력 덕분에 간부후보생 과정 입교엔 문제가 없었다.


7
1일 입교를 일주일 앞두고 전쟁이 발발했고, 북한군이 사흘 만에 서울을 점령하자 그는 고립됐다. 당시 그의 나이 스무 살이었다. 낙오한 그는 산에서 은신하다 7 1일 신당동에 있는 고향(경북 문경) 친구 박철순(朴哲淳)의 집에 숨어들었다. 박철순은 공산당원이었다.


죽음의 공포에 떨면서 다락방에 숨어 지내던 홍씨는 친구인 박철순의 권유도 있고 “일단 의용군에 입대한 후 기회를 봐서 탈출해 원대 복귀하겠다”라고 생각했다. 7 10일 공산당 간부인 친구 형이 보증해 의용군에 입대할 수 있었다. 친구의 형은 홍씨가 당시 북한의 부수상이었던 《임꺽정》의 저자, 벽초 홍명희(洪命憙) 선생의 친척이라는 내용의 추천서를 써줬다.


홍씨는 “신분은 ‘서울대학교 학생’으로 속이고, 이름은 ‘홍관희’라는 가명으로 7 10일 인민군에 입대했다”며 “북한군 점령 지역 후방 행정을 담당하는 경남행정단체(경남부대)에 배속돼 60여 명의 부대원과 부산을 목적지로 의용군을 따라 계속 남하했다”고 했다.


홍씨는 8 17일 전선이 소강상태에 빠져 남행이 지체되면서 경남부대가 해산되자 8 24일 대구 근처의 전선에서 인민군 제1사단에 편입돼 ‘위생병’으로 배치받고 탈출 기회를 엿보게 됐다.


당시 인민군은 낙동강 전선에서 마지막 총공격을 준비하고 있었다. 홍씨는 위생병 편입 이튿날인 8 25일 그곳에서 극비 정보인 인민군의 부산 점령을 위한 ‘9월 총공격 계획’을 접한다. 9 1 0시를 기해 전장 서쪽에 위치한 인민군 제1군이 먼저 진격해 국군을 유인하고, 48시간 후 북쪽에 있는 인민군 제2군이 총공세를 펼친다’는 내용이었다. 위생반장의 발설로 고급 정보를 안 홍씨의 마음은 다급해졌다. 만일 국군과 연합군이 미리 알면 불리한 전세를 단번에 역전시킬 수 있을 것이란 생각이었다.


목숨 건 탈출로 ‘북한군 낙동강 총공세’ 제보

▲1950년 8월 23일 백선엽 1사단장(오른쪽)이 사령부를 방문한 콜린스 미 육군참모총장(가운데)과 워커 8군사령관(왼쪽 끝)에게 전황을 설명하고 있다. 사진=백선엽 장군 제공


 
8월 31일 밤 10시경에 기회가 찾아왔다. 보초가 잠시 자리를 뜨면서 경계가 허술해진 틈을 타, 홍씨는 옆에 자고 있던 인민군의 총을 집어들고 남쪽으로 뛰었다. 그는 다음날 새벽 4시쯤 가산(架山) 근방에서 국군들을 만날 수 있었다.


홍씨는 즉시 국군에게 북한군이 서부 지역에서 ‘유인전술’을 쓴 다음 북부 지역에서 ‘총공세’에 나설 것이라는 정보를 알려줬다. 9 1일 오후 5시에는 대구 미 8군사령부로 가 5시간 정도 디브리핑까지 했다. 홍씨는 “동경의 극동군사령부는 그날 오후 정보관을 급파해 북한군의 총공격 임박과 북한군의 위치, 탱크와 중장비의 위치와 은닉상황 등에 대해 물었다”고 했다.


당시의 전황은 이랬다. 7 31일 워커 장군은 낙동강 Y라인(왜관 작오산 303고지-수암산-유학산-군위-보현산 라인)을 마지노선으로 설정해 유엔군의 전열을 정비해 북한군의 남진을 저지하려 했다. 9 1일 북한군이 서부에서 강공으로 나와 전선이 붕괴할 조짐을 보이자, 워커 장군은 북부를 방어하는 유엔군 병력을 빼내 서부전선의 방어를 시도하려 했다.


이때 홍씨가 탈출해 “서부의 북한군 공격은 유인전술에 불과하고, 북부의 북한군 제2군이 10일 내 부산을 점령하기 위해 총공세를 감행할 것”이라 제보했던 것이다. 홍씨의 제보대로 북한군은 9 3일부터 9일까지 총공격을 감행했다.

 

▲미국의 대표적인 6·25전쟁사 전문가인 로이 애플먼. 그는 그의 저서 《낙동강에서 압록강까지》에 홍윤희씨의 총공격 제보 사실을 메모로 남겼다. 애플먼은 한국전쟁사를 집필할 당시 홍윤희의 소재를 파악하지 못해 홍윤희 관련 메모만을 남긴 채 김성준의 기록을 인용하고 말았던 것이다. 사진=구글이미지
 

— 홍 선생님의 제보에 유엔군사령부는 어떻게 군사적으로 대응을 했습니까.
“워커 8군사령관은 북부의 유엔군의 서부전선 지원을 중단하고, 부산에서 인천상륙작전을 위해 승선 대기 중인 미 해병 1여단을 그날 오후 1시 맥아더 원수의 승인 없이 서부전선에 긴급 투입했습니다. 워커 사령관의 변칙적 조치로 부산 교두보 방어에 성공하면서, 인천상륙작전을 통해 북진의 계기를 마련했던 것입니다. 북부 유엔군을 서부로 이동했더라면, 그 틈을 이용해 북부의 북한군이 총공세에 나서 파죽지세로 부산을 점령했을 것입니다. 워커 장군의 해병대 투입은 ‘신의 한 수’에 해당하는 전술이었습니다.

미국의 대표적 6·25전쟁사 전문가인 로이 애플먼(Roy E. Appleman) 6·25전쟁의 초반에 관한 공식적 전사기록인 《낙동강에서 압록강까지(South to the Nakdong, North to the Yalu)(1961년 간행)를 집필하면서 ‘홍윤희씨의 디브리핑 정보는 그날 밤 동경 극동군총사령부에 보고됐고, 9 1일 워커 사령관이 해병대 서부전선 재투입을 제기하자 해군 측이 강하게 반발했었다’며 홍씨의 제보 내용을 참고했다.


영웅에서 반역자로 추락

대구 달성군청에 주둔한 육군정보국은 홍씨의 신원을 확인하고 그를 육사 입교 전 소속인 육군 감찰관실로 원대 복귀시켰다. 9 5일 홍씨는 육군본부에서 10 1일자로 육군종합학교 입교를 통보받는다. 하지만 이게 웬일이란 말인가. 9 11일 아침 헌병들이 들이닥쳐 다짜고짜 홍씨를 연행해 갔다. 부산소년원에서 모진 구타와 고문, 협박이 시작됐다.


헌병대는 홍씨가 북한군에 입대한 사실을 문제 삼아 간첩 혐의를 씌웠다. 군 검찰은 “9 3일 군위에서 아군과 교전하였다”고 가짜 신문조서를 작성했다. 탈출한 후에 국군과 교전이라니! 결국 그는 이적행위(국방경비법 제32)로 군사재판에 회부돼 1950 9 20일 사형을 선고받았다.


홍씨는 1950년 군사법원에서 7사단 감찰관실에서 함께 근무했던 허향(許香) 변호사의 도움으로 무기징역으로 감형된 후 최종 10년형을 받고 부산형무소에 수감됐다. 나중에 다시 5년형으로 형기가 줄어 1955 9월에 가석방됐다. 애국자는 하루아침에 전과자로 전락했다.


홍씨에게 사회는 창살 없는 감옥이었다. 홍씨는 “‘이적 행위자’라는 주홍글씨를 숨기고 시멘트공장과 석산에서 일을 했다”면서 “1956년 재심탄원서를 육본에 제출했고 1973년 허향 변호사 도움으로 재심 작업에 착수했으나 군법회의 기록을 찾을 수 없어 재심을 청구할 수 없었다”고 했다.


1973
12월 박정희 정부가 좌익경력자 예비 검속을 위한 ‘사회안전법’을 제정해 홍씨를 예비검속 대상자로 분류하자 가족들을 데리고 쫓기듯 미국으로 떠났다. 홍씨는 “이민이 아니라 망명이었다”고 말했다. 홍씨는 미국 정부가 6·25전쟁 기록을 비밀해제 하기만을 기다리며 샌프란시스코에서 식료품점과 식당 등을 운영하며 정착했다. 나중엔 버클리대학 체육지도사(피라미드볼 프로그램)로 생계를 이어갔다.


‘김성준 소좌 총공세 제보설’의 오류를 규명

▲2000년 워싱턴의 미 육군군사연구소(CMH)에서 만난 리처드 고렐 박사(오른쪽)와 홍윤희씨. 고렐 박사는 홍씨가 ‘애플먼 메모’를 발견할 수 있도록 홍씨에게 문서목록을 제공했다. 사진=홍윤희
 

홍씨는 1989년 버클리대 도서관에서 6·25전쟁 기록을 보다가 경악했다. 일본 사학자 고지마 노보루(兒島襄) 1952년 발간한 《조선전쟁》(문예춘추 간행)이라는 책을 읽다가 깜짝 놀랐다. 북한군 총공격 계획을 제보한 것이 자신이 아닌 ‘북한군 제13사단 제19연대 작전참모 소좌 김성준(金成俊)’이라고 바뀌어 있었던 것이다.


자신 외에도 제보자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자료를 모으기 시작한 홍씨는 미국의 로이 애플먼 전사, 일본 고지마 전사, 미 국립문서보관소(NARA)와 부산 용호동 문서보관소 등 방대한 자료를 뒤졌다. 홍씨는 한국 국방부 및 미국 육군 군사연구소에서 발간한 《한국전쟁사》에도 북한군 총공격 계획을 제보한 사람이 ‘김성준 소좌’로 기록돼 있는 것을 확인했다. 홍씨는 “조국에 대한 배신감이 끓어올랐고, 내 명예를 찾는 데 여생을 바치기로 결심했다”고 했다.


홍씨는 이때부터 미국과 한국을 넘나들며 관련 자료를 수집했다. 홍씨는 미국 국립문서보관소에서 미군 제1기병사단이 작성한 포로심문 보고서를 뒤졌다. 2000명 이상의 포로와 귀순자 심문조서 가운데 김성준의 심문 기록을 발견했다. 북한군 장교 포로 명단에는 김성준이 1953 8 7일 북한으로 송환되었다고 적혀 있었다. 자신 외에는 아무도 총공격 정보를 제보한 사실이 없다는 것도 확인했다.


홍씨는 계룡대 육군본부 법무감실에 의뢰해 자신에 대한 재판기록을 찾아 나섰고, 1999 6월 부산 용호동 육군문서보존소에서 1950 9 20일자 계엄고등군법회의 재판기록을 찾아냈다.


홍씨는 “제9사단 파일에서 붉은 인주와 푸른 잉크색이 선명한 ‘홍윤희 적전비행 이적행위 계엄고등군법회의 소송 기록’을 확인한 순간 무릎을 꿇고 오열했다”며 “대부분 군법회의 기록이 소각 폐기됐음에도 내 기록이 9사단 파일 내에 남아 있던 것은 기적에 가까운 일”이라고 했다.


그곳에는 홍씨가 ‘북한군 총공격 정보를 보고하기 위해, 단기 4283(1950) 9 2일 오전 6시에 귀순하였다’고 날짜의 오류가 있었다. 홍씨는 “2011 5 30일 애플먼 메모를 발견해 보니 내 기억대로 탈출날짜가 1950 9 1일 새벽으로 제대로 돼 있었다”며 “전사의 김성준의 귀순일자는 9 2일 새벽으로 기록하고 있다”고 했다.

 

▲2011년 5월 30일 홍윤희씨가 국사편찬위원회에서 찾아낸 로이 애플먼의 메모. 애플먼은 이 메모에서 “홍윤희씨가 처형된 것으로 생각해 출판마감에 쫓겨 대신 김성준 소좌를 인용했다”고 언급했다. 이 메모는 2014년 열린 재심에서 무죄판결을 내리는 데 결정적 증거로 작용했다. 사진=홍윤희
 

홍씨는 재심을 위해서는 군법회의 기록 외에 전쟁 기록이 필요했다. 홍씨는 1999 9월 대니얼 페트로스키(Daniel Petrosky) 8군사령관에게 1950 9 1일 저녁 제2차 유엔군사령부 정보팀의 심문관 면담과 심문 기록을 열람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요청했다. 미군 측은 “1951년 동경의 극동군사령부의 화재로 문서가 소실됐다”는 답변만 주었다. 6·25전쟁 참전용사인 매케인(MaCain) 상원의원을 통해 유엔군과 극동군사령부 극비문서 해제를 요청하기도 했다.


홍씨는 “2001년 다시 워싱턴의 미 국립문서보관소를 방문했으나 기록은 찾지 못했다”면서 “대신 김성준이 포로수용소에서 다른 포로들로부터 총공세설을 들었을 뿐 총공세 제보와는 무관하다는 것을 확인했다”고 했다. 1950 2차 심문에서 김성준은 심문관의 질문에 “총공격이 시작됐다고는 들었으나 내용은 모른다”고 답해 사실상 9 1일 저녁 820분에 귀순한 김성준이 총공세 사실을 몰랐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홍씨는 “작전 실패로 귀순했다는 김성준이 대한민국의 명운을 가른 북한군 총공격설을 제보한 인물이라면 한국군에 편입돼야지 왜 북으로 돌아갔겠느냐”며 “1999 10월 김성준의 상관인 제13사단 포병연대장 정봉욱(鄭鳳旭) 중좌(1950 8 22일 귀순, 예비역 육군소장), 19연대 장교인 안정일(安鼎一)(반공연맹 총무 역임) 등 같은 사단에서 근무한 인물들이 그의 존재를 모르고 있다는 점이 수상쩍었다”고 했다.


NARA
기록에 의하면, 김성준은 1953 87일 포로교환 때 북한으로 넘어갔다. 김성준은 위장 귀순일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미 육군 군사연구소(US Army Center of Military History) 고렐(Gorell) 박사는 “김성준 관련 한국전쟁사의 역사 오류는 중대한 사건”이라며 “한국에서 발생한 사건임으로 한국에서 기초조사로 관계증인과 문건을 찾아 홍윤희 관련 사실을 반드시 바로잡아야 한다”고 지적했다.


— 북한 쪽으로 홍 선생님의 병적조회를 해보시지는 않았습니까.
1994 7월 북한 유엔대표부에 1950 8월 하순 인민군 제1사단 직할위생반 홍관희(洪寬憙)의 기록유무 확인을 수차 요청했으나 1995 8월 미군 폭격으로 기록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황봉수 영사의 회신을 한 차례 받았을 뿐입니다. 6·25전쟁사 관련 문건을 검토하면서 9월 총공세가 대한민국 운명의 분수령이었다는 역사학자들의 평가를 보고 당시의 제 역할에 대해 전율했습니다.


군사편찬연구소 연구원의 사실 왜곡

▲홍윤희씨가 국사편찬위원회 자료실에서 자신의 학생시절과 육사생도시절 사진을 테이블 위에 놓고 회상에 잠겨있다. 사진=홍윤희

 
홍씨는 김대중(金大中) 대통령과 클린턴 대통령에게 관련된 자료를 첨부하며 협조를 요청했다. 김대중 대통령 시절 청와대는 처음에는 홍씨의 청원이 타당하다는 것을 인정했다. 2000 9 16일 홍씨가 샌프란시스코에서 날아와 배석한 가운데 청와대에서 관계부처 연석회의까지 열렸다.


홍씨는 “그날 그 자리에서는 내가 ‘최초 제보자’라는 증명을 찾는 데 적극 지원하기로 약속했다”면서 “그런데 그 후 공보비서실과 민정비서실은 ‘적화통일을 저지하고 전세를 역전시킨 이 사건에 대한 텔레비전 방영과 신문보도는 남북대화에 악영향을 미칠 소지가 있다’며 지원을 중단했다”고 했다. 정연주(鄭淵珠) 사장의 KBS도 특집 프로그램으로 편성했다가 난색을 표하며 접었다고 한다.


홍씨는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담당자의 태도도 석연치 않았다”고 했다. 청와대 비서관은 군사편찬연구소의 기초조사 과정을 확실하게 감독하겠다고 약속했으나, 군사편찬연구소 Y모 연구원은 홍씨가 그동안 한국과 미국을 넘나들며 수집한 모든 기초조사 자료를 제공하면서까지 진상규명을 간청했으나 심드렁해 했다고 한다.


— 왜 군사편찬연구소 담당자가 홍 선생님을 믿지 않았다고 생각하십니까.
“김성준 소좌의 계급이 주는 무게감도 클 겁니다. 홍윤희는 육사생도였지만, 북한군에선 계급도 없는 졸병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말하자면 ‘일개 졸병이 사단과 군단이 움직이는 그 어마어마한 작전을 어떻게 알겠어’라는 생각으로 기존의 전사를 손대려 하지 않았을 겁니다.
 


— 군사편찬연구소는 홍 선생님의 자료 제공에 대해 추가 조사를 했습니까.
“추가 조사는커녕 제 자료를 왜곡했습니다. 군사편찬연구소는 제게 준 공문서에서 ‘당시 아군의 적정판단은 민원인(홍윤희)의 주장처럼 본인의 정보 제공만으로 이뤄진 것이 아니고 각 부대의 정보(G2) 판단을 종합해 이뤄진 것’이라는 논리를 폈습니다.


홍씨는 “군사편찬연구소 담당자는 또 다른 총공세 정보를 예를 들며 ‘낙동강선 중앙의 적은 낙동강선을 강력하게 도하공격 하였으며, 북부와 남부전선에서도 총공세를 감행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고 주장했다”며 “제가 제보를 하지 않아도 이미 미군들은 다 파악하고 있었다는 의미로, 저의 제보를 물타기 하려는 것이었다”고 했다. 홍씨의 설명이 이어진다.


“군사편찬연구소 연구원은 CIA 6·25전쟁 상황보고(1950 9 1일자)를 예로 들며 제보 가치를 격하했습니다. 그런데 이 문서는 ‘미 제1기병사단과 한국군 제1, 6사단이 전개하는 왜관 동쪽에서 의흥에 이르는 전선은 적과 경미한 접촉 외에는 정지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remained static with only light contacts with the enemy)’로, 오히려 저의 제보(북한군의 북부 유엔군의 서부 유인작전)를 뒷받침하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담당자는 황당하게도 ‘북부와 남부에서도 총공세를 준비하고 있다’로 해석해 놓았습니다. 군사편찬연구소 담당자의 심각한 사실(史實) 왜곡입니다.


법원, 재심에서 홍씨 주장 받아들여

2003 11월 홍씨는 법원에 ‘총공격 제보자’라는 기록을 제출하며 국방경비법 위반에 대한 재심을 청구했으나 고배를 마셨다. 홍씨는 정부 차원의 기초조사 기대를 단념했다. 그러나 명예회복을 위한 싸움을 멈출 수는 없었다. 미 육군 군사연구소 고렐 박사는 홍씨에게 자신들이 추천한 파일을 검색해 보라고 알려줬다.


이명박(李明博) 정부 때 돌파구가 마련됐다. 홍씨는 과천에 있는 국사편찬위원회가 10여 년 전부터 NARA에서 한국전쟁 관련 기록을 복사 수집하는 데 착안, 청와대 김병기(金炳箕) 국방비서관에게 “NARA 파견관에게 지시해 파일을 복사해 오면 검색해 보겠다”고 했다. 2010 9월 청와대는 국사편찬위원회에 파일 복사를 지시했다.


2011
5 30일 저녁 무렵 국사편찬위원회 열람실에서 NARA 문서파일을 검색하던 홍씨는 ‘Hong’이라는 단어를 발견하고 실신하고 만다. 6·25전쟁 공간사 집필자인 로이 애플먼 중령이 1954년 《한국전쟁사》를 집필하면서 ‘미 정보국이 1950 9 1일 홍씨가 귀순해 북한군 총공세 정보를 제공해 도쿄의 극동사령부에 전달했다’라고 적은 메모를 발견했던 것이다.


‘홍의 정보’라는 메모에서 애플먼 중령은 ‘더 이상 홍윤희의 기록을 찾지 못해 처형된 것으로 생각했다. 홍씨의 역할을 확인할 수 없는 상황에서 출판마감에 쫓겨 대신 김성준 소좌를 인용했다’고 언급했다. 모든 의문이 해소된 것이다. 홍씨는 용기를 얻어 2011 6 17일 변호사 없이 재심을 청구했다. 2012 6 8일 법원은 충분한 이유가 있다며 재심 결정을 내렸다. 재판부는 “오랜 세월 동안 6·25전쟁의 실상과 자신의 무고함을 밝히기 위해 노력해 온 피고인에게 위로가 되기를 바란다”고 밝혔다. 애플먼 중령의 메모가 명예회복의 결정적 증거가 된 것이다.


홍씨가 그렇게 꿈에 그리던 명예회복은 일 년 뒤에 이뤄지게 된다. 검찰에서 ‘즉시 항고장’을 제출하면서 브레이크를 걸었다. 우여곡절 끝에 2014 6 24일 열린 재심에서 법원은 ‘간첩죄’에 대해 무죄 확정 판결을 내렸다. 이로써 84세의 노인은 63년 만에 자신에게 씌워졌던 ‘간첩’이라는 주홍글씨를 지울 수 있게 됐다. 홍씨는 “애플먼의 메모는 재심을 청구하는 데 결정적 증거로 작용했다”고 했다.


그리고 국가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소송에서 법원은 홍씨에게 위자료 4억원을 지급하라며 원고 일부 승소 판결을 내렸다. 홍씨는 지난 세월을 회상하며 눈물을 흘렸다. 미국의 일간지 《뉴욕타임스(NYT)》는 2014 1 4일 ‘한때 반역자로 몰렸던 사람이 이제라도 영웅의 지위를 얻고 싶어 한다’는 제목의 기사로 홍씨의 사연을 상세히 보도했다.


“생전에 인민군 총공격 제보자 공인받고 싶어”

▲2001년 5월 1일자 《성조지(Stars & Stripes)》는 홍윤희씨가 1950년 9월 1일 북한군 총공격설을 제보한 지 50주년을 맞아 특집으로 소개했다. 사진=홍윤희

 

홍씨는 “군사편찬연구소는 북한군 9월 총공세에 대한 한미합동토론회 개최를 위한 비용을 대겠다는 것도 거절했다”며 “심지어 재심 무죄에 결정적 영향을 미친 ‘애플먼 메모’를 전달해도 사실을 바로잡지 않고 깔아뭉갰다”고 했다. 홍씨는 “국가존망 위기에 관한 정보제공 사건 기초조사는 당연히 국가가 솔선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번복, 거절, 기피, 묵살, 궤변, 변질 등으로 진실규명을 방해하는 군사편찬연구소 담당자를 대할 때면 분노를 넘어 절망하게 된다”고 했다. 


— 총공격설 제보로부터 66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만 우리 군은 왜 핵심적 첩보를 제공한 사람을 체포했을까요.
“부산 감찰실 직원들과 회식하며 북한군 총공격설을 이야기했는데, 유엔군사령부에서 디브리핑을 할 때 약속한 함구령(gag order)을 위반한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1950 9 5일 한반도 상황은 아비규환이었습니다. 한국 정부와 육군본부, 유엔군사령부가 부산으로 후퇴하고, 돈깨나 있는 사람들은 배편으로 부산을 떠나는 상황이었습니다. 이런 와중에 김일성이 10일 이내에 부산을 점령하기 위해 대대적인 공세를 가한다는 이야기가 퍼지면, 정부 입장에서 감당하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 재심에서 무죄 결정을 받았는데, 계속 문제 제기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육사에 합격해 장래가 촉망되던 아들이 졸지에 사형수로 변한 모습에 아버지는 충격을 받고 돌아가셨어요. 재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음으로써 ‘이적행위자’라는 낙인은 벗었지만,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북한군 총공격 제보자’라는 것을 공인받고 눈을 감는다면 여한이 없겠습니다.”⊙

[월간조선 2016 10월호 / =오동룡 월간조선 기자, 사진=서경리 월간조선 기자]

 

■ 2016-06-24 “어머님, 이 편지를 받으신다면 제가 돌아가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제가 어머님을 사랑한다는 것을 꼭 기억하세요. 이 편지를 받으시게 된다면 그건 제가 다시 돌아가지 못한다는 뜻일 겁니다. 어머님, 이제 시간이 별로 없습니다. 총을 정비하고 분대원을 준비시켜야 합니다. 1952년 7월 23일 전투 현장에서 쓴 리처드 페이의 편지 일부

 

 

“어머님, 사랑합니다. 제가 어머님을 많이 사랑한다는 것도 꼭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이 편지를 받으시게 된다면 그건 제가 다시는 어머님 곁으로 돌아가지 못한다는 뜻일 겁니다. 부디 건강하시길 바랍니다.

 

1952 7 23일 개성 근처 전투 현장. 리처드 페이(당시 20)의 손이 빨라졌다. 어림잡아 1분에 500발의 포탄이 주변에 떨어지고 있었다. 주춤했던 북한군 3000여 명이 포위망을 좁혀 오고 있었다. “몇 시간 뒤에는 적이 총공격을 퍼부어 아군의 위치가 노출될 것”이라는 말이 돌기 시작했다. 군종장교가 곧 그의 편지를 받으러 올 것이다. 사실상의 유서였다. 어머니에게 가급적 많은 글을 남기고 싶었다. 마음이 다급해졌다. “어머님, 이제 다시 준비하러 가야 해서 시간이 별로 없습니다. 제 총을 정비하고 분대원들을 준비시켜야 합니다.

 

그날 그가 목숨을 잃었다면 이 편지는 어머니에게 보내졌을 것이다. 다행스럽게도 그는 전투에서 살아남았다. 생과 사의 기로에서 썼던 이 편지는 3년간의 파병 생활을 마친 뒤 1954년 귀국할 때 돌려받았다. 죽음을 앞두고 느낀 가족에 대한 사랑을 그는 평생 소중하게 간직했다. 

 

이 편지는 2004년 페이가 별세한 뒤 자신의 이름을 따 똑같이 리처드라고 이름 지은 아들이 집에서 발견했다. 그리고 이 편지는 미 해군 예비역 대령인 아들이 2015년 한미 연합 군사연습인 키리졸브에 참가할 때 한국 해군 통역장교인 서정대 중위에게 전달하면서 한국으로 돌아왔다. 서 중위는 이 애틋한 사연을 본보에 제보하게 됐다.

 

다른 6·25전쟁 참전용사들처럼 아버지도 전쟁의 참혹함에 대해 가족에게 다 말해주진 않았다. 아들은 “한국의 겨울이 정말 춥다는 것과 한국전쟁에 참전한 게 평생 가장 자랑스러운 일이란 것은 수도 없이 우리에게 말씀하셨다”고 회고했다

 

1952 6월 개성 인근에서 군복무 중이던 아버지 리처드 페이 씨. 당시 스무 살이던 해병대 청년은 전투 직전 가족에게 편지를 썼다. 이 유서는 2004년 해군 예비역 대령인 첫째 아들이 뒤늦게 발견해 최근 한국군에 전달했다. 리처드 페이 씨 제공

 

1932년생인 아버지는 미 해병대에 입대해 1951년 겨울 산악전 훈련을 받은 후 1952년 초 한국으로 파병됐다. 전투 중 다리에 총상을 입기도 했고 편지에 쓴 내용처럼 적군의 포위로 숱한 고통을 겪기도 했다. 이후 공적을 인정받아 1978년 판문점에서 한국전쟁종군기장을 받았고 1995 6월 미국 워싱턴에서 열린 한국전쟁기념관 개관식에도 참석했다. 아버지는 당시 “개관식에서 한국인들과 함께 행진한 것이 내 인생 중 가장 감동스러운 순간이었다”고 가족에게 말했다고 한다. 

 

한국과의 인연은 이후에도 계속됐다. 아버지가 1975년 일본 나고야국제학교 사무차장으로 부임했을 때였다. 8세짜리 재일교포 정홍준에게 영어를 가르쳐 주었다. 아들은 “홍준이는 우리의 5번째 형제였고, 지금도 그의 아이들과 사촌처럼 어울리고 있다”고 말했다

 

해병대였던 아버지 페이 씨의 영향을 받아 딸 1명과 아들 3명 등 자식 4명이 모두 해경 또는 해병대에서 근무했다. 아들은 역시 대를 이어 한국과 인연을 맺었다. 1987년부터 2015년까지 팀 스피릿, 키리졸브, 을지프리덤가디언 등 한미 연합 연습에 8번이나 참가했다. 미국 정부에서 한국훈련 참가기간이 총 60일 이상 되면 수여하는 한국방위근무기장을 받았다 

 

아들은 “1987년 처음 부산에 왔을 때 예상했던 것보다 더 감정이 복받쳐 올랐다”고 말했다. 그가 탄 배의 함장은 “김치는 냄새가 나니 먹지 말라”고 권고했다. 하지만 용기 내어 먹어 본 김치는 정말 맛있었다. 지금도 제일 좋아하는 음식으로 김치를 꼽는다. “사촌 부인이 한국 출신이어서 덕분에 맛있는 김치를 자주 먹을 수 있다”고 그는 말했다

 

아들은 요즘 6·25와 아버지를 기리기 위해 새로운 계획을 세우고 있다. 휴전선부터 남쪽까지 도보로 걸으며 아버지와 한국을 느껴 볼 생각이다. 처음에는 서해안부터 동해안까지 휴전선을 따라 걸어가려 했지만 전쟁의 아픔과 한반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북에서 남까지 걸어가는 게 맞다고 생각했다 

 

30년 동안 지켜본 한국을 그는 이렇게 표현했다.

 

“한국의 변화, 한국군의 현대화를 눈으로 직접 보았습니다. 19세 군인부터 제독까지 모두 친절한 것이 인상 깊었어요. 한미동맹 구호인 ‘같이 갑시다’만큼 둘 사이를 잘 표현한 말이 없는 것 같아요. 제게 한국은 친근하고 아름다운 나라입니다. 

노지현 기자 isityou@donga.com

 

■ 2016년 10월 19일 “할아버지, 총들고 高宗 곁 지켜… 난 6·25 터지자 자원입대”

언더우드 100주기맞아 訪韓한 손자 리처드 언더우드

연세대를 설립한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 선교사와 고종황제가 그에게 하사한 사인참사검. 언더우드 선교사의 손자 원득한 전 서울외국인학교 교장이 지난 11일 이 보검을 연세대에 기증했다. 연세대 제공

 

연세대 설립자인 선교사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의 손자 원득한 전 서울외국인학교 교장이 지난 12일 언더우드 사망 100주년 기념식을 맞아 연세대를 방문, 언더우드관 앞을 걷고 있다. 곽성호 기자 tray92@


1885
년 4월 5일 제물포항(현 인천항). 선교사 헨리 아펜젤러와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가 조선 땅에 발을 디뎠다. 언더우드는 후에 ‘원두우’라는 한국 이름까지 갖고 1915년 연희전문학교(현 연세대)를 설립해 우리나라 대학 교육의 선구자가 됐다. 연희전문학교의 재단법인 인가(1917년 4월 7일)를 6개월가량 앞둔 1916년 10월 12일 세상을 떴다. 그리고 언더우드 사망 100주년을 맞은 올해 그의 손자인 리처드 언더우드(89·한국명 원득한) 전 서울외국인학교 교장은 고종황제가 할아버지에게 하사한 보검을 연세대에 기증함으로써 언더우드 가문의 한국 사랑을 이어갔다. 연세대가 주최한 언더우드 100주년 기념행사에 참석하기 위해 한국을 찾은 원득한 전 교장을 지난 13일 서울 종로구 수송동 서머셋팰리스서울호텔에서 만났다.

 

원 전 교장은 사실 할아버지를 직접 만난 적이 없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11년 뒤에 태어났기 때문이다. 그가 아는 할아버지는 아버지에게 들었거나 할아버지 저서를 통해 간접적으로 접한 게 전부다.


부끄럽지만 미국에서는 사망일을 별로 의미 있게 보지 않기 때문에 처음에는 100주년 행사에 참석해야 하는 건지 고민했다고 유창한 한국어로 말문을 연 그는 인터뷰 내내 할아버지에 대한 존경을 드러냈다.


특히 조선 왕실(이후 대한제국 황실)과의 인연을 소개할 때는 눈빛에 자부심이 넘쳐났다. 원 전 교장의 할머니인 릴리어스 호턴 언더우드는 조선을 찾은 최초의 서양 여의사였다. 할머니는 1888년 입국해 제중원 부인과에 근무하면서 왕비(명성황후)의 주치의를 맡았다. 이전에 왕비에게는 전담 의사가 없었다. 당시 남성은 자신보다계급이 높은 여성의 몸에 손을 댈 수 없었는데, 왕이 아니고서야 왕비보다 높은 계급의 남성이 있을 리 만무했다. 이에 미국 선교부에 여의사를 요청했고, 그에 따라 조선에 온 게 원 전 교장의 할머니였다.
 


할머니는 명성황후와친구가 됐다. 결혼할 때는 고종황제 부부가 온갖 선물을 보내왔다. 명성황후가 직접 수놓은 12쪽 병풍, 고려 도자기, 엽전 등을 말 여러 마리에 실어 보냈다. 원 전 교장의 할아버지도 고종황제와 가까워져 속마음을 터놓을 수 있는 사이가 됐다. 원 전 교장은왜놈들(그의 표현이다)이 명성황후를 시해한 이후로는 할아버지가 총까지 챙겨 들고 고종황제 곁을 지킨 적이 많다독살을 걱정한 고종황제를 위해 할아버지가 집에서 음식을 한 뒤 자물쇠가 달린 상자에 담아 경복궁으로 보내면 열쇠를 갖고 있는 고종황제가 직접 상자를 열어 잡수시면서 한동안 살았다고 한다고 소개했다.
 


이번에 연세대에 기증한사인참사검’(四寅斬邪劒)도 고종황제의 선물이었다. 원 전 교장은가보로 남길 수 있는 보검을 기증하기로 한 이유에 대해제가 (언더우드 가문) 3대인데 4, 5대로 내려가면 아무래도 한국과의 연계가 점점 희미해지지 않겠느냐집에 두는 것보다 대중이 볼 수 있는 곳에 기증하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고 설명했다. 그는처음엔 미국 박물관에 둘까도 생각했지만, 역시 사람들이 유품을 보며 할아버지에 대해 생각할 수 있는 곳은 연세대 아니겠느냐고 말했다.
 


언더우드 가문의 중요한 교육 철학은 자신들이선진국출신이라고 해서 한국인을 절대 무시해선 안 된다는 것이었다. 이들은 오히려 한국인을 마음 깊이 존경했다. 선교사 언더우드는 한국에서 태어난 아들 호러스 호턴 언더우드(한국명 원한경) 박사가 미국에서 대학교를 마친 뒤 한국에 돌아오기 싫어하자, “내가 학비를 대서 너를 키웠으니, 최소한 3년은 내가 시키는 대로 하라며 아들을 한국으로 불러들였다. 그리고 일부러 한 양반 집안에 들여보내 6개월 동안 영어는 아예 쓰지 않고 한국어와 한자를 배우게 했다. 한국인들이 비록 못사는 사람이 많지만 잠재력은 어느 나라 사람보다도 뛰어나다고 높이 평가했기 때문이란다. 이런 가르침을 받은 원한경 박사도 한국 사람에 대한 존경심을 품게 됐다. 자신도 자식들을 북한산성, 남한산성, 경북 경주 등으로 데리고 다니며옛날 한국 사람들이 이뤄 놓은 걸 봐라. 얼마나 뛰어난 민족이냐라고 가르쳤다.
 


원한경 박사는 일제강점기에 연희전문학교 3대 교장을 지냈는데, 광복 후 학교에서 다시 교장을 맡아 달라고 하자 거절했던 이야기는 유명하다. 그는일본 사람이 지배하던 시절 한국인이 교장을 하면 아무것도 아닌 일로 잡혀가고 징역을 살 수도 있지만, 미국인인 나는 일본인들이 건드릴 수 없으니까 내가 교장을 맡았던 것이라며한국인의 정부가 들어선 상황에선 당연히 한국인이 교육을 책임지는 게 맞다고 교장직을 사양했다.
 


한국 및 한국인에 대한 애정은 자연스레 원득한 전 교장에게로 이어졌다. 서울에서 태어난 원 전 교장은 15세 때까지 한국에서 살다가 1942년 미국으로 들어갔다. 미국에서 고교를 마치고 군에 입대했는데, 광복 이후 한국으로 배치됐다. 한국과의 인연이운명이라고 생각한 그는 미국에 돌아갔다가 6·25전쟁이 발발하자 자원해 재입대했고, 소위 계급장을 달고 한국으로 복귀했다. 함흥, 원산, 흥남 등지에서 포로 심문을 담당했고, 휴전회담이 시작될 때는 문산에 배치돼 통역을 맡았다.
 


특히 북한에 머물며스파이역할까지 해본 경험은 한국 사회를 더 깊이 이해하는 기회가 됐다. 1947년 원 전 교장은 하사관으로 평양에서 3개월을 보냈다. 당시 서울에는 구소련의 연락장교가 여러 명 있었고, 평양에는 미군 연락장교 2명이 있었는데 원 전 교장은 표면적으로 연락장교 차량을 운전하는 역할로 북한에 들어갔다. ‘운전병신분을 활용, 원 전 교장은 차량을 일부러 고장 내 수리공장을 찾아가 북한 사람들을 만났고, 이렇게 쌓은 친분을 통해 서류나 사진 등을 넘겨받아 서울로 보냈다. 그는그때 김일성까지 직접 볼 기회가 있었는데 당시엔 김일성이 계급이 높은 사람이 아니어서 그가 열심히 외쳐대면 들어주는 사람도 있고 무시하는 사람도 있고 그런 수준이었다고 회고했다.
 


원 전 교장이 군인 시절부터 한국인을 존중했던 일화 한 토막. 한 번은 서울 시내 좁은 길에서 자전거를 탄 한국인이 빨리 비켜주지 않는다고 미군이 밀어버린 적이 있었다. 바로 뒤에서 이 모습을 목격했던 원 전 교장은 즉시 상부에 보고해 해당 미군이 징계를 받게 했다. 원 전 교장은평양에 있을 때 내가 탄 차량이 다가가자 북한 아주머니가 논두렁으로 뛰어들길래 이유를 물었더니소련군은 길가에 한국인이 걸어가면 차로 치어서 논에 빠지게 하니까 차라리 먼저 뛰어드는 게 낫다고 하더라이런 일을 비일비재하게 저질렀던 소련군보다는 낫겠지만, 미군이라도 한국인을 깔보는 듯한 행동을 할 때는 분명히 처벌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원 전 교장은 제대 후직업을 한국에서만 가졌을 정도로 한국에 대한 애정이 깊다. 서울외국인학교 교사로 출발, 1961년 교장에 오른 후 1992년까지 자리를 지키고 은퇴했다. 중간에 안식년을 이용해 미국에 돌아가 1970년 럿거스대에서 교육행정학 석사를 따고 온 것을 제외하면 줄곧 한국에서 생활했다. 1970년대에는 연세대생들의 시위를 진압하려는 경찰이 서울외국인학교 쪽으로 진입하자 경찰 책임자를 따로 만나 학교에서 경찰을 몰아내고 연세대 학생들까지 지켜낸강단을 보이기도 했다. “대학생들이 시위하는 캠퍼스에 직접 들어가기 부담스러우니 우리 학교를 캠퍼스 진입에 이용하는 모양인데 그럼 우리도 시위를 하면 경찰을 철수시키겠느냐는 게 그의 설득 논리였다. 직접 한국 학생들을 가르친 적은 없지만, 원 전 교장은 한국식 교육에 대해서도 조심스럽게 조언을 했다. 그는교육현장을 떠난 지 24년이 돼 현재의 한국 학교 교육을 전혀 모른다다만 과거에 한국 학교는 외우는 것을 더 강조했던 기억이 난다. 그걸 좋다, 나쁘다 할 수는 없지만 미국식 교육과는 차이가 있는 부분이라고 말했다.


은퇴 후로는 미국에 돌아가 살고 있지만, 원 전 교장은 한국 생활의 추억을 항상 마음 깊이 간직하고 있다. 원 전 교장은 4∼5년에 한 번씩 한국 땅을 밟는다. 자신이 몸담았던 서울외국인학교 행사, 할아버지와 관련된 연세대 행사 등에 맞춰 오기도 했지만, 그냥 문득 한국에 오고 싶어 찾아온 적도 있었다고 한다. 최근 서울 시내에 멧돼지가 출몰한다는 한국 언론의 기사까지 미국에서 챙겨 봤다고 할 정도다. 원 전 교장은대개 선교사들이 연세대 오른쪽에 모여 살았는데, 아버지는 반대편에 집을 지어서 나는 오히려 연희리(현 연희동)에 사는 한국 아이들과 놀면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논밭에 얼음이 얼면 아이들끼리 썰매를 타던 것, 남사당패 놀이를 즐겨 봤던 추억, 여성들의 그네 타는 모습에 반했던 기억, 한국 아이들과는 비교가 안 될 실력임에도 열심히 제기를 찼던 경험 등이 불과 얼마 전 일처럼 생생하다고 말했다.
 


원 전 교장은이제는 나도 늙어서 몸이 약해지고, 무엇보다 한국에서 알던 친구들이 하나둘씩 세상을 떠나가는 게 슬프다그래도 이번에 입국 다음 날(10) 30여 년 동안 서울외국인학교 교장으로 있을 때 함께 근무했던 직원 25명을 만나 저녁 식사를 한 게 가장 기억에 남을 것 같다며 아련한 미소로 인터뷰를 마무리했다.

김성훈 기자 tarant@

 

■ 2017.07.27 6.25전쟁 휴전 64주년...대북 유격대원을 기억해야 하는 이유 

▲칼라 사진에 담긴 6·25 당시 적지에서 유격활동을 벌인 8240부대원들의 모습./ 국가기록원

 

6·25 전쟁의 포성이 멎은 지 64년이 되었다. 6·25 전쟁사 가운데 상대적으로 잘 알려지지 않은 부분이 대북 유격전에 관한 것이다. 특히 1950 6월 전선이 고착되면서 미군 주도하의 대북 유격전이 광범위하게 벌어졌다.

 

 주로 북한 주민들로 구성된 수만 명의 대북 유격대원들은 열악한 장비와 희박한 생환 가능성, 신분보장의 불확실성에도 불구하고, 휴전이 될 때까지 북한 지역에서 특수작전을 수행했다. 그들은 오로지 고향을 되찾고 자유민주주의를 북한에 정착시키겠다는 일념 하에 공산주의자들과 싸웠다.

 

 이들의 피눈물 나는 활동의 결과, 15~20만 명의 공산군은 동해와 서해안과 후방 지역에 묶여 있어야만 했고, 휴전협상에서도 UN군이 절대적으로 유리한 입장을 차지할 수 있게 만들었다. 결과적으로 백령도 이남 서해 5개 도서확보와 서해 NLL 획정에도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하지만 대북유격부대의 활동은 휴전 후 오랫동안 체계적인 연구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했다. 유격대원들이 전쟁 기간 동안 민간인 신분이었고, 미군 부대의 지휘를 받았으며무엇보다 이들의 출신 연고가 대부분 북한 지역이었기 때문에 북한에 거주하는 대원들 친인척들의 안전 문제 등으로 자신들의 활동을 감추어 온 것 등이 그 이유였다.

 

 신종태 전쟁과 평화연구소 교수의 <6·25 전쟁과 대북유격전 연구>(2010)라는 박사학위 논문은 유격부대의 활동을 이해하는 데 많은 도움을 주는 자료다신 교수의 논문은 단순히 유격부대의 현황을 소개하는데 그치지 않고, 그들의 활동이 6·25 전세 전반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광범위하게 분석하였다. 신 교수는 특히 2010년 당시까지 생존해 있던 유격부대원들에 대한 증언을 채집하여 수록함으로써, 논문의 사료적 가치도 높혔다.

 

 

휴전 64주년을 맞아 논문에 소개된 유격전 현황과 부대원들의 증언을 일부 요약해서 소개한다.

 

▲서울 서초구 양재동 시민의 숲에서 열린 유격백마부대 제64주기 추도식 모습./서울남부보훈지청 

 

대북 유격부대의 창설 배경

 북한 지역의 유격부대는 UN군이나 한국군이 의도적으로 창설한 것이 아니다. 대부분의 무장단체는 투철한 반공청년들에 의해 자발적으로 만들어졌다. 1950 10 UN군은 북한 지역 대부분을 점령하고 통일을 목전에 두고 있었다. 하지만 그해 11월 중공군이 불법 개입함으로써 UN군과 한국군은 북진 2개월 만에 남으로 철수를 할 수밖에 없었다.

 

 이들은 군인도 아니었고, 무장단체도 아니었다. 북진하던 UN군과 국군이 후퇴하자, 갑자기 피난길이 막힌 북한의 시군구 면 단위 치안대와 반공 청년단체들 대부분이 향토에서 반공 무력항쟁의 길을 택했다. 하지만 이들은 불타는 애국심과 죽음을 초월하는 충성심, 자유와 향토방위라는 대의명분으로 단결되어 있었다.

 

 피난길이 막힌 수많은 북한 주민들이 공산당의 학정을 피해 목숨을 걸고, 도서지역으로 탈출했다. 이들은 선편을 이용해 남쪽으로 피난할 수 있었지만, 향토수복의 염원에 불타 고향과 가까운 지역에 있는 도서를 근거지로 남아서 항전을 하며, UN의 반격을 기다렸다.

 

▲중공군 복장을 하고 북한으로 침투하기 직전의 8240 유격부대원들 모습./국가기록원

 

1951 1월 미군은 유격대의 존재를 인식하고, 이들을 활용할 방안을 찾기 시작했다. 이해 3 미군은 서해안 일대의 무장대원들을 통합 지휘할 준비를 갖추었다모두 20여개의 유격부대가 탄생했다.

 

이처럼 유격부대들은 미8군 예하부대로 승인받음으로써 무기와 탄약 등을 보급받고, 부대별로 작전구역을 할당받았다. 이렇게 편성된 유격부대에 제8240부대 동키 1, 2, 3, 4, 5… 등의 부대명칭이 부여되었고, 유격전이 본 궤도에 올라서게 되었다. 1952년 말경 모든 유격부대는 미 8군으로부터 미 극동사령부 직할 부대로 이관되었다. 

 

열악한 무기와 보급품   

서해도서로 피난 나왔던 청년들은 공산군과 싸우고자 하는 열망으로 가득했지만, 체계적인 군사훈련을 배운 이들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들 대부분은 무기를 다룰 줄 알았고, 강인한 체력을 가진 자들이 많았다. 1951 3월부터 백령도에 있는 미군에 의해 67명의 간부가 비로소 유격전 교육을 받게 되었다.

 

 이들은 낙하산과 범선 등으로 적진에 침투하여 다양한 정보수집과 요인납치, 보급로 차단, 동조세력규합, 적후방교란 등의 작전을 펼쳤다. 하지만, 충분한 훈련을 거치지 못한 수많은 대원이 침투 과정에서 목숨을 잃거나 포로가 되기도 했다. 6·25 전쟁 당시 UN군은 가용한 모든 방법을 동원해 북한 지역에 수많은 유격부대원을 침투시켰으며, 그들의 활동으로 결정적인 정보를 수시로 확보할 수 있었다.

 

 북한 서해안 도서지역에서 처음 조직된 유격대원들은 맨주먹에서 시작할 수밖에 없었다. 옹진의 학도 유격대의 경우는 무기가 없어서 우산대, 유리병을 이용해서 사제 소총과 폭탄을 만들어 공산군을 기습하고, 거기서 노획한 총과 수류탄으로 무장하고 유격전을 전개했다.

 

▲북한 지역에서 활동한 유격부대원들의 모습.

 

초기 유격부대는 해군으로부터 일부 무기와 탄약, 구호품을 받았지만, 극히 일부 병력만이 무장할 수준이었다. 이들은  굶주림과 싸워야 했다. 하지만 1951 3월 이후 본격적으로 미군의 지원이 시작되면서 상황이 나아지기 시작했다.

 

 미군들은 전과에 따라 보급품 지급수준을 결정하였기 때문에 유격부대는 자신들의 생존을 위해서라도 전과를 올릴 수밖에 없었다. 1951 7월 보고된 자료에 의하면 유격부대의 전투 가능인원은 총 7000여 명인데 비해 무기는 3400여 정으로, 열악했던 당시 유격부대의 무기 보급 수준을 엿볼 수 있다.

 

 식량과 피복 보급 사정도 열악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대화도 주둔 백마유격부대의 경우 1951 5월 하순경 6척의 어로 선단을 편성하여 연평도 근해에서 다량의 조기를 잡아 인천에서 판매하였다. 그러나 그 중 3척의 배는 어획물과 선박을 가지고 도망가 버렸다. 이들의 신분이 민간이었기 때문에 처벌이 제대로 이루어질 수도 없었다.

 

휴전협정 문서에 서명하는 양측 대표.

 

휴전 후에도 많은 유격부대원들이 적진에 남아

 이런 열악한 상황에서도 유격부대원은 점점 증가하여 한때 2만 명을 넘었으며, 휴전 후에 남한에는 13000명 이상의 유격군이 존재했다.

 

 당시 미군은 미 육군 200명의 운용비용으로 유격대 1만 명을 지원하고 있었다. UN군의 유격대 운용이 얼마나 큰 경제적인 군사운용이었는지 단적으로 말해주는 대목이다. 8군 사령관이 UN에 제출한 보고서에는 “백령도 기지 사령부는 정규군 1개 사단과 맞먹는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고 할 정도로 유격부대는 엄청난 역할을 수행하고 있었다.

 

 유격대원들은 특정 작전이 끝나면 대부분 사전 약정된 해안지역에서 아군의 복귀 선박과 접선하여 퇴출하거나, 육로로 아군 지역으로 귀환하곤 했다. 하지만 이들이 적지에서 정확한 시간에 임무를 마치고 귀환 장소까지 나오기란 하늘의 별 따기만큼 어려웠다. 각자 알아서 빠져나와야 했다. 수많은 유격대원이 부상당한 상태에서 혹은 장기간의 통신 및 보급이 중단된 상태에서 무사 퇴출에 실패했다. 한 부대의 경우 북한에 침투한 800명 중에 26명만 생환했다.

 

 1953 7 27일 휴전 당시 북한 지역에서 활동하던 수많은 유격부대원에게 사전 퇴출 지시를 내리지 못한 사례가 많았다. 일부 유격부대는 수일 내 휴전이 되리라는 것을 알지 못하고, 분대나 소대 규모로 적 후방에 침투하였다.

 

 북한에 대원들을 투입하는 데 관여한 일부 유격부대 간부들은 휴전협정 체결 후에도 그들을 구해내야 한다는 도덕적 책임감에 벗어나지 못해 개인재산을 털어 그들의 귀환을 추진하기도 했다. 국제적 분쟁거리를 만들지 않기 위해 정부 도움 없이 적어도 휴전 후 2년간 동지들끼리 필사적으로 적지 잔류 동료를 구출하기도 했다.

 

 또한 휴전 협정 전에는 유격대원들의 활약으로 북한지역 서해도서 전체를 우리가 차지하고 있었지만, 협정체결 후에는 고스란히 적의 영토가 되면서 이들 도서지역에 남아 있던 유격대원들이 후퇴하는 데도 큰 위험이 따랐다. 이런 사례는 UN군 전쟁지도부, 한국정부, 유격부대 현장 지휘관들과의 정보 교류가 허술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다. 

 

생존 유유격부대 활동 3년을 군경력으로 인정받지 못해

1. 김찬수(전 백마유격부대 전투원, 평북 대화도에서 참전, 백마유격부대 부회장)

대화도 점령시 찍은 백마부대원들의 사진. ‘대화도에서’라는 글이 새겨져 있다./월간조선

 

1954 2 24일 백마유격부대는 UN 사령부 명령으로 해체되었다. 전쟁기간 중 유격부대원들은 급여도 없었으며, 표창장도 없었다. 그러나 백마유격부대원들은 대한민국을 지키기 위해 적지에서 목숨을 걸고 싸웠다. 아직도 이와 같은 유격부대의 공적을 제대로 인정해주지 않는 국방부의 처사를 이해할 수 없다.

 

 유격부대의 공적 중 빼놓을 수 없는 것 하나는 서해 각 도서지역에 자유를 찾아 피난 온 북한 주민들의 남한 후송작전이다. 수 만명의 북한 주민들을 수송선박이 가용하는 한 안전하게 유격부대의 보호 아래 백령도나 기타 안전도서로 이동시켰다.

 

 평북 철산지역에서 근접한 가차도 탈환작전에서는 UN 공군기가 유격부대 작전선박(조양호)을 적선으로 오인 폭격함으로써 60여 명의 부대원이 몰사하는 사건도 있었다.

 

 6·25 전쟁 후 많은 유격부대원이 한국 육군으로 편입되었으나, 지난 3년간 적지에서의 전투기간은 군복무기간으로 인정해 주지 않았다. 분명히 유격부대 간부들이 한국군 장교로 현지 임관이 가능했던 것은 전쟁 간의 경력을 인정했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현재도 그 기간을 현역 복무로 인정해주지 않아 연금 수혜대상이 되지 않는 일부 유격부대원들이 있다. 반면 한국 육군에 복무한 참전자들은 전쟁 기간의 군복무 기간을 3배로 계산하여 많은 사람이 연금 수혜대상이 되고 있다. 유격대원들을 이와 같은 혜택에서 배제하는 것은 형평성의 원칙에 어긋난다고 생각한다
 

▲황해도 지역의 반공청년들이 창설한 구월산 유격대의 모습. 여성대원들이 많이 보인다. 

 

전쟁 후에는 여성이라는 이유로 보훈 대상에서 제외

2. 00 (, 전 유격부대 전투원 겸 대화도 피난민 아동 초등학교 교사, 정주지역 및 대화도에서 참전)

▲유격백마부대원들이 활동했던 북위 40도선 부근 지역. 대화도에 백마부대 본부가 있었다.

 

평북 정주에서 단신 대화도로 피난와서 유격부대에 입대했다. 당시 대화도 유격부대에는 약 100여 명의 여성유격대원이 있었다. 당시 대화도 피난민 중 학령기에 도달한 아동들이 많아 초등학교를 건립하여 공부하게끔 유격부대에서 조치하였다. 피난민들이 갈매기알과 전복 등을 채취하여 인천시장에서 판매한 자금으로 학용품을 사 나누어주었다.

 

 북한 간첩이 피난민으로 가정하여 대화도에 침투, 식수원에 독을 넣는 것을 사전에 탐지하여 체포한 적도 있다. 여성 유격대원들도 남성들과 같이 수시로 적지 침투를 하였으며, 외삼촌은 끝내 내륙 작전에서 전사하였다. 전쟁 후에는 여성들이라는 이유로 보훈대상이 되지 못했다.

 

 남한 지역에서 단 한 사람의 연고도 없이 오게 된 여성 유격대원들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 속에서 살아왔다. 유격활동이 북한 거주 친척에게 불이익을 줄 것이 염려되어 단 한 번도 이산가족 상봉신청을 하지 않았다.

 

북한 주민의 협조로 유격 작전 성공 

3. 노조회(전 백마유격부대 군수참모, 대화도에서 참전)

/노조회씨./ 월간조선

 

평북 정주 출신으로 오산여자 중학교에서 교사활을 하다가 UN군이 북진해 올 때 반공치안대 활동을 하였다. 중공군의 개입으로 미처 피난을 가지 못해 북한군에 체포되었다. 많은 우익청년과 함께 평북 철산의 모나즈 광산에 끌려가 강제 노역을 하였다. 당시 광산에는 수 천명의 우익 인사들이 수용되어 사실상 노예상태에서 강제노역을 하였다.

 

 강제수용소를 탈출, 대화도로 건너와 유격부대에 가담했다. 당시 UN군은 유격부대의 전과에 따라 군수품을 지원하였으며, 기타 부족장비는 적지에서 노획하여 사용할 것을 강조했다. 그 같은 상황에서도 부대원들은 어렵게 선박 구매 자금을 모아, 부산에 내려가 침투작전용 발동선을 확보했다.

 

군수참모로서 가장 어려웠던 점은 대원들의 식량조달과 무기, 탄약의 보급이었다. 무기들도 소련제, 중공제, 북한제, 미국제 등이 뒤섞여 수리부속의 조달에도 어려움이 많았다. 흡연자들은 담배를 구할 수 없어, 목화잎이나 뽕잎 등을 담배 대용으로 사용했다.

 

 이런 상황에서도 대북 유격작전이 가능했던 것은 북한 지역에 침투하면 대부분의 현지 주민들이 유격대원들을 적극적으로 도와주었고, 대원들의 가족과 친지들이 현지 첩보원 역할을 해주었기 때문이다. 

 

어느 유격부대장 

4. 한봉덕(전 백마유격부대 대대장, 대화도에서 참전, 백마유격부대 전우회장)

 ※ 백마유격부대장 김응수에 대해 증언한 내용

서울 서초구 "양재 시민의 숲" 충혼탑 앞에서 6.25 당시를 회상하고 있는 백마부대원들. 맨위쪽이 유격백마부대 창설 부대장인 김응수씨다. 김씨는 2003년 작고했다./ 월간조선

 

김응수 부대장은 신의주 지역에서 교사를 하다가 UN군 철수 시 반공치안대원들과 함께 대화도로 철수 하였다. 군사교육 경험이 있는 김 부대장은 전쟁이 끝날 때까지 부대를 지휘했다. 뛰어난 능력과 피난민들을 우선적으로 보호하는 박애정신으로 부대원들뿐 아니라, 주민들로부터도 신뢰와 존경을 받았다.

 

 특히 그는 500여 회에 달하는 전투를 진두지휘하여 승리로 이끌었으며, 지인용을 겸비한 덕장으로 부대를 단결과 화합으로 통솔하였다. 부대원들은 서해 도서지역 모든 유격부대 중에 김응수 부대장이 지휘한 부대가 가장 혁혁한 전공을 세웠다고 생각하고 있다.

 

 전쟁 후 부대장의 생활은 비참하고 불행했다. 재정적으로 궁핍하여 서울에서 전우회가 개최되면 여비가 없어 빌려서 회의에 참석해야 하는 처지였다. 담배 한 갑도 마음 놓고 피울 수 없을 만큼 곤궁한 생활을 하였다.

 

 이러한 사정을 감지한 전우회 회원들이 약간의 여비를 거두어 주곤 하였으나, 이를 극구 뿌리치며 회원들이 모은 돈을 단 한 번도 받지 않았다. 노년에는 노쇠한 신병으로 거동이 불편하여 지팡이에 의지하여 다닐 정도로 쇠약해졌다.

 

 국가를 위해 생명을 걸고 고립무원 적지에서 유격전을 하며 충성을 바쳤지만, 노후대책은 아무것도 없었다. 2000년대에 UN군 참전단체에서 미국 정부를 상대로 집단 보상을 청구할 때 김응수 부대장은 절대 백마유격부대원들은 참여하지 않도록 만류를 한 바 있다. 전쟁 당시 아무 조건을 바라지 않고 미군으로부터 많은 무기와 보급품을 지원받아 고향 수복과 자유를 위해 싸웠는데 지금 와서 그 약속을 저버린다고 하는 것은 도리에 맞지 않다는 것이다

 이상흔 조선pub 기자

 

■ [인천상륙작전]

해군·해병대 전승 기념 행사 낙동강에 집중한 북한군 허 찔러 전사자 13명 내고 놀라운 성과 세계 3대 상륙작전 중 하나 꼽혀

작전명 크로마이트(Chromite).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이 훗날 “성공 확률은 5000분의 1이었다”고 술회했던, 위험천만한 인천상륙작전의 명칭은 철광석의 이름에서 따왔다. 크로마이트란 무의미한 이름을 일부러 붙였을 만큼 작전 보안에도 철저했다.  

 

2013.09.15일은 인천상륙작전 63주년이다. 해군과 해병대는 13일 인천 월미도에 안보전시관을 여는 것을 시작으로 15일까지 전승기념 행사를 연다. 15일 인천 앞바다에선 세종대왕함 등 함정 10여 척과 항공기 20여 대, 상륙장갑차 20여 대가 참가해 인천상륙작전을 재연하는 행사를 하고 맥아더 동상에 헌화한다.

 

 

 1950년 9월 15일부터 17일까지의 3일은 낙동강까지 밀렸던 한국전쟁을 수세에서 공세로 반전시킨 날이었을 뿐 아니라 전사(戰史)에도 기록된 날이다. 군사전문가들은 인천상륙작전을 제1차 세계대전 때 터키의 갈리폴리상륙작전, 제2차 세계대전 때 프랑스의 노르망디상륙작전과 더불어 세계 3대 상륙작전의 하나로 꼽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이학수 해군사관학교 박물관장은 “인천상륙작전은 20세기 마지막 대규모 상륙작전”이라며 “다른 상륙작전에서 연합군이 많은 피해를 봤던 것과 달리 인천상륙작전 때 아군의 피해가 거의 없었다는 점도 얼마나 성공한 작전이었는지 보여 준다”고 말했다.  

 

갈리폴리상륙작전 때 연합군은 20만5000여 명, 노르망디상륙작전 때는 8975명의 전사자가 발생했다. 국방부 군사편찬위원회 자료에 따르면 인천상륙작전 당시 전사자는 국군과 유엔군을 합쳐 15일 9명, 16일 4명 등 모두 13명이었다

 

 그런 인천상륙작전은 일대 도박이었다. 작전회의에서 다른 장군들이 고개를 갸웃거리자 맥아더 장군이 “반드시 성공한다. 아무도 이렇게 섣부른(brash) 짓을 할 줄은 모를 테니까”라고 말했다는 일화는 작전이 얼마나 모험이었는지를 보여 준다. 당시 소령으로 참전했던 공정식 전 해병대 사령관은 “인천 앞바다는 조수간만의 차가 6m나 되고 물이 차 있는 만조시간은 2시간밖에 안 될 뿐 아니라 항로가 구불구불하고 좁아 작전이 불가능한 지형이었다”며 “미국 내에서도 맥아더 장군을 지지하는 사람은 없었다”고 전했다. 하지만 맥아더 장군은 “육지에서 반격할 경우 10만 명의 목숨을 담보해야 한다”는 논리로 반대자들을 설득했다.  

 

맥아더 장군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배후지역의 섬에 병력을 상륙시켜 뒤에서부터 일본군을 무력화한 ‘개구리 전법(Leap Frogging)’으로 전세를 역전시킨 적이 있다. 북한군이 낙동강 전투에 몰두하고 있어 인천은 상대적으로 허술할 것이니 그때처럼 적의 허리를 끊을 수 있다는 맥아더(유엔군 사령관) 장군의 예측은 주효했다.  

 

합동군사대 해군 교관인 김창섭 중령은 “전쟁 발발 직후 마오쩌둥(毛澤東)이 김일성에게 서울지역의 방어를 위해 인천에 견고한 방어진지를 쌓을 필요가 있다고 충고했다”며 “김일성은 그러나 낙동강 전선의 전력을 메우기 위해 인천 쪽 병력 일부를 낙동강으로 보내 방어를 상대적으로 소홀히 했다”고 설명했다. 연합군은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으로 13일 만인 9월 28일 서울을 탈환하고, 이후 평양을 거쳐 압록강까지 치고 올라갈 수 있었다.

정용수 기자

 

2016.07.11 최초공개 -6·25 전쟁 인천상륙작전 성공 투입된 LST 문산호 선장 선원 명단

⊙ LST 문산호(汶山號), 6·25전쟁 당시 여수철수작전·장사동상륙작전에 투입 ⊙ 민간인 신분의 선장과 선원 장사동상륙작전 중 전원 전사(戰死) ⊙ 최영섭 전 해군 대령(백두산함 갑판사관)·임성채 해군역사기록관리단 군사편찬과장 노력으로 문산호 선장·선원 이름 66년 만에 세상으로 ⊙ “민간인이었던 문산호 선장과 선원 애국심 굉장했다”(최용남 백두산함 함장·최영섭 갑판사관)

 

▲1950 9 15일 장사상륙작전에 투입된 문산호의 모습.
 

1950년 6월 25일 새벽 남침한 북한은 강원도 동해안의 옥계, 정동진, 금진 등에 549육전대 1800명을 상륙시켰다. 묵호경비부사령관(김두찬 해군 중령)은 즉각 육군과 경찰 연합인 ‘합동 묵호 전투부대’를 편성하고 맞섰다. 아군의 화력으로 장기간 전쟁 준비를 해온 적에 대항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북한군의 박격포격이 점점 치열해졌고 아군은 철수를 결정할 수밖에 없었다.


묵호경비부사령관은 퇴각을 위해 LST 문산호(汶山號)에 ‘동시 동원령’을 내렸다. 동시 동원령이란 선박은 물론, 민간인 신분인 선장(船長), 선원(船員)까지 동원하는 것이다. 당시 문산호는 석탄 적재를 위해 묵호항에 있었다.

 

▲1950 9 16일에 만들어진 문산호 선장과 선원 명단. 위에서부터 황재중(선장), 이찬석, 이수용, 권수헌, 부동숙, 박시필, 윤은현, 안수용, 이영룡, 한시택, 김일수 이상 11. 이 명단은 이들이 장사상륙작전에서 사망하자 육군이 해군 측에 인사 처리를 부탁했고, 이 과정에서 만들어진 것이라고 한다.

 

LST는 ‘전차 상륙함(Landing Ship, Tank)’의 준말이다. 선체가 넓적하고 평평한 구조여서 해안 깊숙이 진입이 가능하고, 뱃고물에는 출입구가 있어 사람 및 물자를 나르기 편하다. 문산호는 1943 9월 인디애나의 제퍼슨빌(Jeffersonville)에서 건조했다. 태평양 함대에 배치, 2차 세계대전이 끝날 때까지 활동했다. 1947 2월 한국 정부에 매각되어 문산호라는 새로운 ‘함명(艦名)’을 부여받았다. 교통부(交通部) 산하 대한해운공사(大韓海運公司) 소속으로 밀가루, 석탄 운반 등이 주 임무였다.


전투에 투입된 문산호는 퇴각하는 묵호 전투부대를 태우고 포항으로 철수했다. 아군은 철수에 성공했지만, 그곳에 남은 대부분의 주민은 북한군 549육전대와 처절한 전투 중이었다. 해군본부는 문산호에 묵호 전투부대를 다시 전투지에 투입하라고 명령했다. 1950 6 28일 문산호는 묵호 전투부대와 무기를 싣고 포항에서 묵호로 이동했다. 이동 중인 6 29일 오전 2시경, 묵호 근해에서 문산호는 정체불명의 포격을 받았다. 민간인 신분의 승무원 1명이 사망했다.

문산호를 공격한 배는 USS CL-119, 미국 경순양함 주노(Juneau)였다. 포격을 받은 문산호는 항해를 멈췄다. 배에 타고 있던 강점복 중위(해군정보장교)는 상륙주정(上陸舟艇)으로 주노함에 가서 문산호가 한국 함정임을 알렸다. 더 이상의 피해는 없었지만 이 사건으로 문산호는 포항으로 회항했다.

주노함의 문산호 타격은 대한민국 해군 수뇌부가 UN군에 대한민국 해군이 아직 묵호항에 남아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지 않았기에 벌어진 일이었다.
 

 

여수철수작전

▲1950 7 27일 여수철수작전 때 우리 해군 최초의 전투함인 백두산함은 문산호를 엄호했다.


1950
7 26일 북한군 사단은 순천을 점령하고 여수로 남진해 왔다. 북한군 사단은 김일성의 ‘비밀병기’였다. 부산을 측면 공격해 단번에 한반도를 적화통일 하기 위해 준비한 회심의 카드였다. 6사단은 북한군 내에서도 정예부대로 통했다. 이 부대 병력은 전원 중공이 국공내전을 통해 정권을 장악할 때 뛰어난 전투력을 발휘한, 전투경험이 풍부한 ‘조선의용군들’이었다. 6사단의 임무는 빠른 속도로 호남을 장악하고 진주와 마산을 거쳐 부산을 기습 공격하는 것이었다. 이날 오전 최용남 ‘PC-701 백두산함’ 함장은 문산호 황재중 선장에게 이같이 부탁했다.

“선장님, 어려운 일을 맡아주셔야겠습니다. 지금 적군이 순천에 들어와 우리 육군과 싸우고 있습니다. 우리 육군은 병력도 적도 무기도 부족해 힘겨운 전투를 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적과 싸우면서 이곳(오동도)으로 후퇴해 올 것입니다. 선장님이 후퇴하는 우리 장병을 수용해 후송하는 막중한 임무를 맡아주셔야겠습니다. 지금처럼 램프(경사로)를 부두에 대놓고 대기해 주십시오. 백두산함 지시가 있기 전에는 절대 배를 떼지 마십시오. 한 명의 병사라도 살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 백두산함은 화력으로 문산호를 엄호하겠습니다.


쏟아지는 적탄에도 버틴 문산호

▲좌초한 대한민국 민간 상륙정 문산호와 장사상륙작전에 참전한 국군 제1유격대대(명부대) 소속 학도병.
 

황 선장은 “함장님 지시하신 바를 잘 알았습니다. 명심하고 지시하신 대로 하겠습니다. 우리도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국가 위해 싸워야 할 책무가 있습니다. 염려 마십시오”라고 답했다. 최 함장은 “정말 고맙습니다. 오늘 밤 이응준 장군과 이형근 장군이 문산호에 타실 겁니다. 잘 모셔주십시오”라고 했다. 황 선장은 “네, 잘 모시겠습니다”라고 했다. 최 함장과 황 선장은 악수하며 눈빛으로 서로 신의를 교환했다.

1950
7 27일 새벽 우리 육군과 경찰 혼성부대는 여수역 서북쪽 약 5000m에 있는 석천사(石泉寺) 능선에서 적을 저지했으나, 6사단 제1연대는 새벽 6시경 시내로 진입했다. 후퇴를 시작한 육군부대는 속속 최 함장의 지시를 받고 대기하던 문산호로 들어왔다. 이응준 장군(서남지구 전투사령관)과 이형근 장군(2사단장)도 승선했다. 이응준 장군은 일본 육사(26) 출신으로 국군 창군의 산파역을 맡은 인물이다. 이형근 장군은 이응준 장군의 맏사위로 그 또한 일본 육사(56) 출신이다. 1946년 한국군의 모체인 국방경비대가 창설되자 대위로 입대, 이후 국방경비대 총사령관, 2사단장, 3군단장, 초대 합참의장, 육군참모총장 등 요직을 두루 거쳤다.

새벽 630분경 문산호가 대기하고 있던 부두 앞 약 300m 언덕에서 격전이 벌어졌다. 박격포탄이 부두에 떨어지고 기관총탄은 불꽃을 날리며 하늘에 피어올랐다. 백두산함은 문산호에 대한 엄호사격을 했다. 아군 병사들은 포복으로 사격하며 문산호 램프로 들어왔다. 적탄에 맞아 피 흘리는 전우를 끌어 들어오는 병사도 많았다. 적 소총과 기관총탄이 문산호에 집중됐다.

문산호는 적탄을 맞으면서도 최후의 병사 한 명까지 구출하려고 버티고 서 있었다. 마지막 병사가 뒷걸음으로 문산호 램프를 밟았다. 최 함장은 문산호에 출항명령을 내렸다. 문산호는 램프를 걷어올리고 앵커() 체인을 감았다. 백두산함은 언덕에 포진한 적군에게 기관총과 함포를 퍼부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백두산함의 호위를 받은 문산호는 무사히 무슬포 해역에 이르렀다.

 

장사상륙부대는 이름만 제1유격대대였을 뿐 경남 밀양에서 불과 보름 정도 훈련을 받은 앳된 10대 학도병이었다. 트럭을 타고 전선으로 향하는 학도병들.
 

최 함장은 문산호에 묘박(錨泊) 지시를 했다. 이응준 장군은 황 선장에게 “고맙습니다. 우리 부대를 구하려 너무 수고 많았습니다. 이 은혜 두고두고 잊지 않겠습니다”라고 했다. 황 선장은 “최 함장의 명령에 따른 것입니다. 조국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라고 했다. 문산호가 여수철수작전을 성공적으로 완수하는 순간이었다.


최 함장의 지휘로 문산호를 엄호한 백두산함은 우리나라 최초의 전투함이다. 1945 11 11 3군 중 가장 먼저 창설된 해군은 전투함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판단, 미국에서 사들이기로 결정했다. 군함 구입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해군의 전 승조원이 월급에서 5~10%씩을 냈다. 이렇게 모은 성금은 18000달러. 여기에 이승만 대통령이 42000달러를 보탰다.

손원일 해군참모총장은 6만 달러를 가지고 1949 10 1일 미국으로 건너가 군함을 샀다. 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43 11 8일 건조한 군함으로 제2차 세계대전 종전 후 1948 5월 미 상선학교 연습함으로 이관되어 사용되던 비교적 신형 함정이었다. 우리 해군은 산 함정을 백두산함이라 이름 지었다. 백두산함은 최초의 전투함답게 대한해협에서 부산항 부두시설을 파괴하려고 침투하던 북한 수송선을 격침하는 공로를 세웠다.


6
·25전쟁이 일어난 날 북한은 후방인 부산 지역을 교란하기 위해 특수부대원을 태운 함정을 대한해협 쪽으로 우회 침투시켰다. 이때 최용남 함장이 이끄는 백두산함은 이 배를 발견하고 격침해 버렸다. 개전 첫날 육군은 6사단 7연대를 제외하고는 방어전에 실패해 전부 무너졌는데, 해군은 괄목할 승리를 거둔 것이다. 이 전공이 없었다면 북한군 특수부대는 부산에 상륙했을 것이고 그로 인해 한국은 커다란 혼란에 빠졌을 것이다.


장사동상륙작전에 투입된 문산호

▲유엔군이 북한군에 밀리자 더글러스 맥아더(Douglas MacArthur) 유엔군 총사령관은 인천상륙작전을 계획했다.

 

유엔군이 북한군에 밀리자 더글러스 맥아더(Douglas MacArthur) 유엔군 총사령관은 인천상륙작전을 계획했다. 낙동강을 최후의 보루로 밀고 밀리는 전투 중에 인천상륙작전을 감행해 서울을 탈환한다는 구상이었다. 상륙전은 그의 장기(長技)였다. 태평양전쟁 때 남태평양의 수많은 섬을 점령하며 필리핀을 거쳐 일본의 코앞 오키나와까지 상륙해 온 ‘상륙전의 귀재’가 바로 맥아더 장군이다.

그런 맥아더 장군도 인천상륙작전은 ‘5000 1의 도박’이라고 말했을 만큼 성패(成敗)를 예측하기 쉽지 않은 작전이었다. 빠른 조류, 지원 함정들이 함포사격 하기에도 불리한 얕은 수심, 심한 조수 간만(干滿)의 차 등 대부대의 상륙을 불가능하게 하는 모든 악조건을 두루 갖춘 탓이다.


맥아더 장군은 인천상륙작전의 성패가 기만전술에 있다고 봤다. 어디가 목표인지를 숨기려는 유엔군과 알아내려는 인민군의 정보전이 치열했다. 맥아더는 미() 5해병 연대원들에게 ‘군산(群山)’이란 이름을 흘리면서 인천에서 작전을 펼치기 하루 전 동해안 장사(章沙)에서 양동(陽動) 작전을 펴기로 했다. 작전명 174. 장사동상륙작전은 이렇게 시작됐다.

작전에는 여수철수작전을 성공시킨 문산호가 투입됐다. 1유격대대 4개 중대(772)를 태운 문산호는 1950 9 15일 새벽 4시 반, 장사동 해안에 도착했다. 부산을 떠난 지 이틀만이었다.

상륙부대는 이름만 제1유격대대였을 뿐 이들은 경남 밀양에서 불과 보름 정도 훈련을 받은 앳된 10대 학도병이었다. 실탄을 채 10발도 쏴보지 못한 이들이 대부분이었다. 군에서 보급받은 것이라곤 소련제 장총과 배낭, 인민군 군복, 물 약간, 건빵 한 봉지, 미숫가루 세 봉지가 전부였다. 원래 이 작전은 위험한 임무 특성상 미 8군이 수행해야 했지만, 미군은 “실패할 위험이 크다”는 이유로 우리 군에 떠넘겼다.

대규모 병력을 동원하기 어려웠던 육군은 훈련도 제대로 받지 못한 학도병들에게 작전을 배정했다. 부대장 이명흠 대위 이름을 따 ‘명()부대’로도 불렸던 이들을 태운 문산호는 장사동 근해에 함미닻을 투묘(投錨)하고 해안으로 접근해 들어갔다. 이명흠 대위가 손가락으로 접안(接岸) 장소를 가리켰다. 황 선장은 너무 위험하다고 했다. 이 대위는 작전 지점이라며 접안을 지시했다. 황 선장은 위험을 무릅쓰고 그곳으로 뱃머리를 돌렸다. 날씨가 도와주지 않았다. 때맞춰 내습(來襲)한 태풍 ‘케지아’ 때문에 암초에 걸린 것이다. 북한군의 집중포화가 시작됐다.


“바다에 빠져 고기밥이 되는 것보다 육지에 올라가 까마귀밥이 되는 게 낫다.” 이 대위의 상륙(上陸) 명령이 떨어졌다. 새벽 5시 반이었다. 해변까지는 50m. 파도 높이는 4~5m에 달했다. 배는 옴짝달싹하지 못했다. 배에서 나오던 대원들은 해발 200m 고지에 포진한 북한군 2군단 예하 101보안부대의 기관총 세례에 차례로 쓰러져갔다.

류병추 장사상륙참전유격동지회장은 “총알이 비 오듯 쏟아졌고, 죽고 사는 기로에 선 게 실감나지 않을 정도로 정신없었다”고 회상했다. 많은 대원이 거센 파도에 휩쓸려 바닷속으로 빨려들어 갔다. 대부분의 탄약도 바다에 유실됐다.


상륙작전 과정에서 선장·선원 전사

▲영덕군이 복원한 문산호. 영덕군은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을 위해 학도병들이 큰 희생을 치른 장사상륙작전 전승기념공원 조성사업을 추진 중이다.


장시간의 사투(死鬪) 끝에 ‘명부대’는 상륙에 성공했다. 황 선장과 선원들도 함께였다. 문산호에 파견됐던 미 해군 쿠퍼 상사는 해군본부에 문산호와 명부대의 상황을 알렸다. 해군본부는 인왕(LT-1)호를 현지에 급파했다. 명부대의 상륙 다음날인 1950 9 16일 오전 7시 현지에 도착한 인왕호는 문산호 구출에 착수했지만, 실패하고 부산으로 철수했다. 이 사이 유격대원들은 해안선을 따라 이동하며 적진지를 파괴하고, 도로와 교량을 폭파했다. 이 과정에서 ‘유격전의 귀재’로 불렸던 군사고문 전성호 대령, 황 선장과 선원 전원이 전사했다.

살아남은 이들은 장사동상륙작전이 인천상륙작전의 교란작전인지도 모른 채 북한군 정예 병력과 악착같이 싸웠다. 명부대의 기세에 인민군은 포항에서 대규모 병력을 빼 장사 해안으로 출동시켰다. 이 와중에 맥아더 장군의 인천상륙작전이 성공, 전쟁의 주도권이 아군으로 넘어왔다.

해군본부는 1950 9 18일 상륙부대의 철수를 지원하기 위해 LST 조치원호를 현지에 보냈다. 조치원호가 현장에 도착한 것은 다음날인 9 19일 오전 6시였다. 적의 공격 탓에 배를 해안에서 200m쯤 떨어진 바다 한가운데에 세웠다. 상륙 당시와 비슷한 상황이 재연됐다. 북한군은 아군이 다시 상륙을 기도하는 것으로 알고 더욱 맹렬한 사격을 가했다. 대원 다수가 적탄에 맞아 쓰러지거나 높은 파도에 휩쓸려 익사했다.


조치원호와 함께 이들을 데리러 온 미() 해군 LT(해난구조함) 함장 피어드 소령은 “군장을 벗어 던지고 살아남는 데 집중하라”고 명령했다. 대원들은 혼신의 힘을 다해 헤엄쳐 배에 올랐다.

류병추 회장은 “병사 목숨을 아끼는 미군 태도에 감동했다. 부산항에 도착하자 국군 지휘부는 ‘어떻게 살아 돌아왔느냐’는 반응이었다. 상륙작전에 학도병과 일반 화물선을 투입한 점을 보면 희생돼도 그만이라는 생각이었던 것 같다”고 했다.

상륙부대 학도병 39명은 적의 공격과 구명대가 유실되는 급박한 상황 속에서 배에 오르지 못했다. 이들 중 많은 이가 복귀하지 못하고 적의 포로가 되거나 죽음을 맞았다. 일부는 우리 군이 북진(北進)하는 과정에 합류했다.

북한군의 포로가 되었다가 탈출한 고규혁씨는 훗날 《버림받은 충혼》(1993)이라는 수기를 펴냈다. 살아서 부산으로 돌아온 학도병들은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했다는 소식을 듣게 되지만, 곧 다른 작전들에 투입되고, 이들이 장사상륙작전을 실행했다는 사실은 묻혔다.


한국전쟁의 비사()가 세간에 공개된 것은 생존해 있던 당시 ‘상륙부대’ 학도병들이 1980 7 14일 ‘장사상륙작전 유격 동지회’를 결성하면서다. 동지회는 경기도 양평 소재 청운사 주지 스님과 함께 전국적 모금운동을 펼쳐 1991 9 14, 장사상륙작전을 감행하던 그날을 기해 장사리 해안에 위령탑과 전적비를 세우고 지금까지 매년 위령제를 올리며 꽃다운 영혼들의 넋을 기리고 있다. 이들의 노력에 힘입은 덕인지 1997 3 6일 문산호가 세상 밖으로 나왔다. 장사리 앞 해안을 수색하던 해병대 제1사단 대원들이 바닷속 갯벌에서 문산호를 발견한 것이다.


문산호 선장과 선원의 발자취

▲최영섭 전 해군 대령(백두산함 갑판사관). 그는 여수철수작전 때 만난 문산호 선장과 선원의 애국심이 상당했다고 회고했다

 

학도병들과 문산호는 역사 속에서 부활했지만 그렇지 못한 이들이 있다. 문산호의 선장과 선원들이다. 민간인 신분으로 전쟁에 투입돼 철수작전, 상륙작전을 수행한 이들의 이름은 어디에도 없다. 목숨을 바쳐 나라를 구한 이들을 기억할 수 있는 단서는 전혀 없을까.

 

《월간조선》은 이들의 명단을 입수했다. 최영섭 예비역 해군 대령을 통해서다. 그는 한국군 첫 전투함인 백두산함의 갑판사관 겸 항해사·포술사였다. 경기 고양시 일산 자택에서 최영섭 대령을 만났다.

 

― 문산호 선장과 선원들의 흔적은 어떻게 찾게 된 것입니까.
“이름없는 영웅들을 같이 기억하고 기리지 않는다면 누가 앞으로 국가와 공동체의 위기에 나서주겠습니까. 제 나이가 90(1928년생)이 다 되어 갑니다. 4년 전쯤인가 ‘버킷리스트(죽기 전에 꼭 하고 싶은 것을 적어놓은 목록)’를 적었는데 그중 하나가 문산호 전사자에 대한 신원 확인입니다. 제가 그들의 영혼을 기리기 위해 한국선주협회, 해기사협회, 해운조합 등에 연락해서 흔적을 찾으려 했는데 전혀 없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임성채 해군역사기록관리단 군사편찬과장에게 부탁했습니다. 임 박사가 제 부탁에 해군이 보관하는 자료란 자료는 모두 뒤져 명단을 찾아냈습니다.

동석한 임성채 해군역사기록관리단 군사편찬과장에게 ‘덕분에 문산호 선장·선원의 이름이 66년 만에 빛을 보게 됐다’고 하자, 그는 “할 일을 했을 뿐”이라며 자신을 낮췄다.

임 과장이 찾아낸 문산호 선장·선원 명단은 이들이 장사상륙작전에서 사망하자 육군이 해군 측에 인사 처리를 부탁했고, 이 과정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임성채 해군역사기록관리단 군사편찬과장.

 

6·25전쟁 중에 이름없이 죽어간 영웅들이 많은데, 하필 문산호 선장과 선원들에게 관심을 가진 이유가 무엇입니까.

“제가 우리의 첫 전투함인 백두산함의 갑판사관 겸 항해사·포술사였습니다. 1950 7 26일 여수철수작전 당시 문산호를 백두산함이 엄호했지요. 그때 문산호 선장을 처음 봤는데, 애국심이 보통이 아니더라고요. 아주 용감했어요. 선원들도 마찬가지였고요. 

 

― 문산호 외에도 조치원호, 안동호 등의 LST가 차출돼 활약하지 않았습니까.
“다른 LST의 선장과 선원은 전쟁으로 전사하지 않았습니다. 문산호 분들만 돌아가셨지요.

 
― 문산호 선장과 선원의 유가족은 국가로부터 전혀 지원을 받지 못하나요.

6·25 전사자 연금을 받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 유가족은 만나보셨나요.
“만나진 못했지만 황재중 선장 따님은 지금 치매에 걸렸다고 하더군요.

 

― 선원들의 유가족은 찾지 못했습니까.

“선원 3~4명의 자식은 찾았습니다. 모두 어렵게 살고 있죠.

그가 말을 이었다.

“내가 최근에 죽었다가 살아났어요. 나이를 먹으니까 몸이 예전 같지 않아. 제 꿈은 문산호에 탔던 민간인들에 대한 추모사업을 하는 겁니다. 미국, 이스라엘 군대가 강한 이유를 아십니까. 국가를 위해 목숨 바친 것을 국가가 알아주기 때문입니다. 이게 국가의 책무입니다. 우리 국민의 책무이기도 하고요.”⊙

| 최우석 월간조선 기자  

 

2016.07.18 1950년 인천상륙작전에 18세 해병으로 참전한 해럴드 엘런스 목사

▲ photo 염동우 영상미디어 기자

 

66년 만의 귀환이었다. 노병(老兵)은 인천상륙작전 기념관의 인천 앞바다 모형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공중에서 엄호하는 전투기와 바다 위에 늘어선 함선, 해안에 정박한 상륙정까지 인천상륙작전을 실제와 흡사하게 재현해 놓은 디오라마(diorama)였다. 노병이 보고 있는 건 자신의 인생을 바꾼 사흘이었다.

 

지난 7 8일 연세대 교정에 있는 상남관에서 만난 해럴드 엘런스씨는 약간 흥분한 듯 보였다. 전날 인천상륙작전 기념관을 돌아본 여운이 아직 가시지 않은 듯했다. 인사를 하며 내민 손 위로 녹색 에메랄드가 박힌 반지가 보였다. 왼손엔 빨간색 보석이 박힌 반지가 있다. “녹색 반지는 박사가 되었을 때, 루비 반지는 군대에서 각각 받았지요.” 엘런스씨는 7 3일부터 6일까지 연세대에서 열린 2016 국제성서학회에 참석하기 위해 한국을 찾았다. 양손의 반지는 그의 다채로운 이력을 잘 보여준다. 신학자이자 개신교 목사인 그는 대령으로 예편한 퇴역군인이다. 그의 첫 전장(戰場)이 바로 한국이었다.

 

 1950 7 16, 제 열여덟 번째 생일날이었습니다. 징집 통지서가 날아왔어요. 그때 저는 대학교 2학년에 재학하고 있었습니다. 일찌감치 성직자가 되겠다고 마음을 정했던 참이었지요. 통지서를 받아들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님, 저에게 왜 이러시는 겁니까.’ ”

 

6주간의 훈련을 마치고 배치된 곳은 미 해병1사단. 보직은 M2중기관총 사수였다. 엘런스씨가 한순간 원망하며 찾았던 하나님, 혹은 운명은 그를 한국전에서 가장 결정적인 전장으로 데려다놨다. 1950 9 15일의 인천이었다.

 

북한군은 1950 6 25일 일요일 새벽 38선 일대에서 일제히 남침 공격을 감행했다. 북한군은 나흘 만에 수도 서울을 함락한 뒤에 파죽지세로 낙동강 전선까지 밀고 내려왔다. 탱크 하나 없던 국군은 속수무책으로 밀려 내려갔다. 낙동강 방어선이 무너지면 대한민국은 북한 공산군의 수중에 떨어지는 순간! 수세에 몰린 연합군이 택한 타개책이 바로 크로마이트 작전(Operation Chromite), 즉 인천상륙작전이었다.

 

인천은 상륙지점으로 치명적인 단점이 있었다. 가장 큰 문제는 조수간만의 차였다. 밀물과 썰물 때 조수의 차가 최고 9m, 최소 7m가량이었다. 바닷물이 빠지면 수백m의 갯벌이 드러났다. 이 말은 선봉으로 상륙한 병력이 다음 물때까지 최소 9시간 이상 추가 지원 없이 버텨야 한다는 걸 의미한다. 발을 옮기기도 힘든 갯벌에 병사들을 내려놓을 수는 없으니 말이다. 잘못하면 병력이 차례로 괴멸될 수도 있는 위험한 작전이었다.

 

또 다른 문제는 방파제였다. 안전하게 육지에 오른다 해도 견고한 방파제를 넘어야 했다. 나무 사다리를 걸쳐놓고 오르는 동안 적군에게 무차별 공격을 받을 가능성이 다분했다. 그럼에도 연합군사령관 맥아더는 인천을 고집했다. 성공만 하면 적군의 병참로를 단번에 끊을 수 있는 교두보가 확보되기 때문이었다. ‘성공 확률은 5000분의 1도 안 된다’는 해군 내의 격심한 반대 속에 작전이 수립됐다.

 

디데이(D-day) 9 15, 10군단이 조용히 서해를 거슬러 올라갔다. 연합군 75000여병력의 어깨에 한반도의 명운이 짊어져 있었다. 10군단 예하에는 미 해병 1사단과 미군 7사단이 소속되어 있었다. 해병 1사단은 제1해병연대와 제5해병연대로 이뤄져 있었다. 간척사업의 결과 지금은 해안선이 거의 일직선 형태지만 당시 인천은 반도 모양이었다. 가장 바깥쪽에 위치한 월미도는 가느다란 다리로 육지와 연결되어 있었다. 인천에 상륙하려면 반드시 월미도 해안을 거쳐야 했다. 5해병연대가 월미도 상륙을 맡았다. 5연대가 1연대에 비해 상대적으로 전투 경험이 많았기 때문이다.

 

새벽 5시 월미도 해안에 로켓이 퍼부어졌다. 상륙 예정 시각은 630. 전투기의 공중 엄호를 받으며 5연대 3대대가 해안으로 향했다. 도착한 시각은 633. 연합군이 거짓 정보를 흘린 탓이었는지, 북한은 인천에 추가 병력을 보내지 않았다. 5연대 3대대는 북한군의 저항을 뚫고 월미도를 점령했다. 지휘함으로 공식 보고가 들어간 시각은 8. “오늘만큼 해병대가 자랑스러운 적이 없었다.” 맥아더 장군의 일성이었다. 이제 관건은 다음 물때까지 월미도와 육지 사이를 가로막는 것이었다. 인천 시가지 쪽에서 월미도로 추가 병력이 오는 걸 막기 위해서였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파도의 방향이 육지를 가리켰다. 1730, 나머지 병력이 상륙주정에 옮겨 탔다.

 

엘런스씨는 1해병연대 소속이었다. 해변에 무사히 닿은 다음엔 상륙 거점(beach head)을 확보하기 위해 움직였다. 그는 5명의 기관총 사수로 이뤄진 분대의 분대장이었다.

 

“그때 저는 열여덟 살이었습니다. 해안을 향해 다가가는 배 안에 앉아 과연 오늘 밤이 올 때까지 내가 살아 있을 수 있을까 하는 두려움을 느꼈지요.

 

▲ 상륙작전이 성공한 다음 날인 9 16일 대형 상륙함 4대에서 물자가 하역되고 있다.  

 

‘소년들의 전쟁’ 

인천상륙작전 기념관 야외에는 방파제를 오르는 병사들을 재현한 조형물이 있다. 엘런스씨는 조형물을 보고 한동안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고 했다.

 

“슬픔이 되살아났습니다. 그날 어린 군인들은 너머에 뭐가 있을지도 모르고 공포와 싸우며 나무 사다리를 올랐어요. 앞으로 갈 수도 없는데 뒤로 갈 수도 없었어요. 전쟁의 본질을 그대로 보여주는 조형물입니다.

 

같은 시각, 상륙부대를 엄호하기 위해 인천항 내항까지 들어간 구축함에 적의 포탄이 쏟아졌다. 사망자가 나오기 시작했다. 연합군은 디데이 3일 전부터 인천 해안을 포격했다. 참호 깊숙이 숨어 있는 적군과 엄폐된 해안포까지 없앨 순 없었다.

 

엘런스씨가 번뇌와 싸우며 인천으로 향했던 그날, 경상북도 영덕군에서도 또 하나의 상륙작전이 펼쳐졌다. ‘장사상륙작전’이다. 한국 학도병으로 구성된 772명이 9 15일 부산을 떠나 영덕군 장사리로 향했다.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을 위한 일종의 교란작전이었다. 당시 영덕군은 북한군 점령지였다. 장사상륙작전에서 학도병 200여명이 죽거나 다쳤고 나머지는 행방불명됐다.

 

여든넷의 노병은 잠시 열여덟 살의 소년으로 돌아간 듯했다.

 

“국가가 아이들을 제물로 바친 겁니다. 그들은 열여덟, 열아홉 살짜리를 그저 전장으로 내몰았을 뿐입니다. 만약 마흔 살 이상의 군인만 전쟁에 참전하게 했다면 전쟁이 일어났을 것 같습니까.

 

연합군은 북한군 인천경비여단과 18사단, 31사단을 격파하고 인천을 되찾았다. 미군의 피해는 예상보다 작았다. 9 15일 당일 전사한 병력은 21, 1명이 실종되고 174명이 부상당했다. 대승이었다. 크로마이트 작전이 한국전쟁사 아니, 세계전쟁사에 길이 남을 주요 상륙작전으로 기록되는 순간이었다. 한국전쟁 전체 전세가 순식간에 역전됐다.  


군목이 되어 다시 전장으로

 다음 날 한강진격작전이 시작됐다.

 

1해병연대와 5해병연대는 각각 경인국도의 북쪽과 남쪽으로 갈라져 서울로 진격했다. 한강변을 따라가던 엘런스씨의 분대는 강 너머의 북한군을 발견했다. 사격을 퍼붓자 위치를 파악한 북한군이 응사를 했다. 분대원 3명이 그 자리에서 숨졌다. 2명은 중상을 입었다. 엘런스씨는 물론 중상을 입은 쪽이었다.

 

왼쪽 넓적다리 안쪽의 동맥이 끊어졌다. 멈추지 않고 콸콸 흘러나오는 핏줄기를 보며 엘런스씨는 마음속으로 절규했다. ‘하나님 당신이 어떻게 저에게 이러실 수 있습니까?’ 죽음이 실체를 갖고 다가오고 있었다. 이때 의무병이 그를 찾아냈다. 즉시 병원선으로 옮겨졌다. 배 안에서 받은 수술은 다행히 성공적이었다. 9 18일 그는 한국을 떠났다. 일본의 미군기지를 거쳐 고국으로 돌아갔다. 미국의 퇴역군인 병원에서 한 달간 치료받은 뒤 전역 명령을 받았다.

 

“집에서도, 학교에서도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습니다. 한국에서 제가 어떤 일을 겪었는지 말입니다. 전쟁에 대해 떠드는 사람은 그곳에 있어본 적이 없는 사람입니다. 정말로 그곳에 있었던 사람은 전쟁에 대해 얘기하지 않습니다. 전쟁에는 인간성 혹은 생명 같은 건 없습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내가 그곳에서 어떤 생각을 했는지 얘기하려 해도 제대로 전달할 방법이 없습니다. 말을 꺼내는 순간 전쟁터에서 느낀 고독이 되살아날 뿐입니다.

 

신학대학을 졸업하고 목사가 된 그는 고독 속으로 되돌아가기로 했다. 군목(軍牧)의 길을 택한 것. 1953년의 일이다. “두 가지 이유에서였습니다. 하나는 외롭게 고통받는 병사들에게 성직자가 얼마나 필요한 존재인지 알기 때문입니다. 다른 하나는 가정환경이었습니다. 제 형제들이 전쟁터에 있었습니다. 제가 한국전에 참전했을 때 제 남동생은 독일에서 정보요원으로 복무하고 있었어요. 제 형제들과 그 아들들이 복무한 기간을 합치니 170년이 되더군요. 제 결심을 더욱 공고하게 한 건 베트남전입니다. 1955년 베트남에서 전쟁이 시작되고, 1964년부터 50만명의 젊은이들이 미국을 떠나 전쟁에 투입됐습니다.

 

일반에게 잘 알려지진 않았지만 한국전쟁에도 성직자들이 참전해 죽음에 맞선 병사들의 영혼을 지켰다. 1기병사단 소속이었던 에밀 카폰 신부가 그 예다. 중공군에 포위되자 퇴각 명령을 뒤로하고 부상병의 곁을 지켰던 그는 1951년 서른다섯의 나이에 벽동 포로수용소에서 병사했다. 약을 훔쳐 다른 포로들을 살리고, 죽기 직전까지도 동료 군인들의 고해성사를 들은 그의 행적은 뒤늦게 알려졌다. 2013년 오바마 미 대통령은 카폰 신부에게 명예훈장(Medal of Honor)을 추서했다. 미국 군인이 받을 수 있는 최고의 무공훈장이다.

 

10년간 육군 군목으로 복무한 엘런스는 베트남, 파나마, 베이루트 등 미군이 가는 곳에 함께했다. 대령으로 예편한 후에는 예비역으로 군이 부를 때마다 달려갔다. 군목을 교육하는 일도 그의 몫이었다. 덕분에 한국도 서너 번 방문했다. 주한미군에 소속된 100여명의 군목을 교육하기 위해서였다.

 

군목에게 필요한 자질이 무엇인지 물었다. “군대는 ‘독재가 허용되는’ 조직입니다. 군목은 명령의 위계 사이를 잘 넘나들며 각각의 군인에게 다가가야 합니다.

 

신을 섬긴다는 성직자가 전쟁을 인정할 수 있는 걸까. 단호한 답이 돌아왔다. “전쟁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그러나 전쟁이 일어났을 때 하나님은 그 자리를 피하지 않았습니다. 전장으로 들어와 인간들을 구원하려 했습니다. 많은 시간이 흐른 후에야 깨달았습니다. 하나님은 말똥(더러운 것)을 이용해 꽃을 피우신다는 걸 말입니다.

 

‘한국전쟁에도 그 얘기가 적용되는가’ 묻자 엘런스씨는 미소를 지었다. “오늘의 대한민국을 보세요. 잿더미에서 꽃을 피워내지 않았습니까. 절대적인 비극은 없습니다.

 

인터뷰 자리에는 엘런스씨의 지인인 이성일 연세대 영문과 명예교수가 동석해 있었다. 이 교수는 “(엘런스씨가) 다리가 불편하셔서 인천 자유공원의 맥아더 장군 동상을 못 보여드려 아쉽다”고 말했다.

 

노무현 정부 시절인 2004년부터 좌편향 세력들이 맥아더 동상을 철거하자는 주장을 계속해오고 있다. ‘우리민족연방제통일추진회의’(연방통추) 등의 단체다. 이들은 맥아더 장군을 가리켜 ‘점령군 두목’이라는 표현을 쓰기도 했다. 급기야 2006년엔 동상을 훼손하려는 움직임도 있었다. 이태식 전 주미대사는 “당시 헨리 하이드 미 하원 외교위원장이 노무현 당시 대통령에게 ‘맥아더 장군 동상을 훼손하느니 미국으로 돌려달라’고 편지를 썼다”고 지난해 열린 자신의 출판기념회에서 말했다.

 

엘런스씨는 66년 전의 사흘을 마치 얼마 전에 겪은 것처럼 또렷이 묘사했다. 나무 사다리에 매달려 방파제벽을 오르는 소년들의 뒷모습을 그는 얼마나 자주 떠올린 걸까. 19509 15일 여명을 뚫고 해안에 상륙한 젊은이들이 없었다면, 2016년의 우리에겐 ‘장군님’을 비난할 자유도, 역사를 되돌아볼 권리도 없었을지 모른다.

 




한국전쟁을 다룬 영화들

노르망디 상륙작전과 함께 세계전쟁사의 주요 장면으로 꼽히는인천상륙작전’, 인해전술의 대명사로 기록된중공군 참전등 드라마틱한 요소가 많아서인지 한국전쟁은 미국과 한국에서 꾸준히 영화화됐다. 휴전 얼마 후인 1955년엔원한의 도곡리 다리가 제작됐다. 영화매쉬’(1970), 그레고리 펙이 맥아더 역을 맡아 그의 삶을 영화화한맥아더’(1977)도 있었다. 통일교에서 4000만달러 이상을 들여 인천상륙작전을 소재로 해 제작했지만 흥행엔 실패한 영화오 인천’(1981)에선 로렌스 올리비에가 맥아더 장군 역을 맡았다. 한국에서는태극기 휘날리며’(2003), ‘고지전’(2011) 등이 제작됐다.

이번엔인천상륙작전이다. 오는 7 27일 동명의 제목으로 개봉한다. ‘내 머리 속의 지우개’(2004), ‘포화 속으로’(2010)의 이재한 감독이 메가폰을 잡았다. 영화인천상륙작전은 전투 장면 중심의 전쟁영화보다는 첩보영화에 가깝다. 인천상륙을 돕기 위해 비밀리에 대북 첩보작전을 펼친 이들을 중심으로 스토리가 전개된다. 북한군으로 위장해 인천 사령부로 잠입한 해군 첩보대위장학수’(이정재)와 그의 정체에 대한 의심과 경계를 늦추지 않는 북한군의 인천 방위사령관림계진’(이범수) 사이의 긴장이 주요 줄거리다. 맥아더 장군 역할은 배우 리암 니슨이 맡았다. 7 13일 서울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그는맥아더 장군 역을 제안받고 이 전쟁이 얼마나 중요한지 흥미를 느꼈다고 말했다. “맥아더를 연기하기 위해 조사를 많이 했다 “‘미국에서 가장 위험한 인물이란 책을 읽고 맥아더 장군이 얼마큼 논란이 많은 인물인지 알 수 있었다. 이런 전설적인 인물을 연기하게 돼 영광이라고도 했다. 영화인천상륙작전 8월 초 미국에서도 개봉될 예정이다.

글 | 하주희 주간조선 기자

 

2016.07.23  "인천상륙작전 성공 이끈 X-레이 작전

[영화 '인천상륙작전' 실제 주인공 함명수 前 해군참모총장]  

1950년 8월 24일 새벽 1시 30분, 어선 백구(白鷗)호가 인천 영흥도 십리포 해안에 상륙했다. 17명의 청년이 배에서 내렸다. 스물두 살의 함명수(咸明洙) 소령이 이끄는 우리 해군 첩보부대원들이었다. 22일 후인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을 성공으로 이끈 'X-레이 작전'은 이렇게 시작됐다. 이들은 영흥도를 거점으로 월미도와 인천에 잠입한 뒤 북한군 해안포대 위치와 수, 병력 배치 등 고급 정보를 수집해 맥아더 사령부에 보고했고, 맥아더 원수는 이를 토대로 상륙작전을 실시했다. 맥아더가 "한국 해군을 다시 보게 됐다"고 말할 정도로 X-레이 작전에 참여한 우리 해군첩보부대를 극찬했다고 한다. 27일 개봉하는 '인천상륙작전'은 X-레이 작전에 참여한 해군의 활약을 그린 영화다.

 

 당시 함명수 소령과 작전 중 전사한 고(故) 임병래 소위, 고 홍시욱 삼등병조(하사) 등 3명은 미국이 외국군에게 주는 최고훈장인 은성무공훈장을 받았다. 12일 서울 해군회관에서 만난 함명수(88) 전 해군참모총장은 "첩보부대원도 훌륭하게 잘했지만 훈장은 당시 영흥도 주민이 받아야 했다"고 말했다. "영흥도에 도착하고 나서 깜짝 놀랐어요. 북한은 그해 6월 28일 서울을 점령한 이후 이승엽을 서울인민위원회 위원장(서울시장)으로 앉혔는데, 영흥도가 이승엽 고향이었어요. 섬에 친척이나 아는 사람이 많았을 거 아녜요. 그런데 남녀노소 모두 첩보부대를 도와줬어요. 어민들은 인천 왕래하는 배를 서로 내주겠다고 하고. 섬 주민들이 협조하지 않았었더라면 작전은 성공하지 못했을 겁니다."

 

▲함명수(88) 전 해군참모총장이 12일 서울 해군회관 앞에서 거수경례를 하고 있다. 6·25 발발 2개월 만인 1950 8월 함 전 총장이 이끈 첩보전 'X-레이' 작전은 9 15일 인천상륙작전 성공의 토대가 됐다는 평가를 받는다. /장련성 객원기자

 

첩보작전요원으로 총각만 뽑아

―부대원 17명 모두 총각이었다고요.

 "전부 독신자로 뽑았습니다. 가족한테 작전을 누설할 수도 있으니까요. 약혼녀에게 아무 연락도 못 하는 바람에 파혼당한 대원도 있었어요. 떠나기 전 부산 자갈치시장에 모여 소주를 나눠 마신 후 머리카락과 손톱, 발톱을 깎아 각자 사물함에 넣었어요. 작전 중 전사하게 되면 그거라도 유족에게 남기려고요."

 

―선물로 받은 중령 계급장을 바다에 던졌다고요.

 "대원들이 제가 작전을 앞두고 중령으로 상신됐다는 걸 알고 인천으로 향하는 배에서 계급장을 선물했는데 그걸 던졌지요. 부대원들에게 '내가 중령 계급장 다는 것보다 이 작전 성공하는 게 더 중요하다'고 그랬지요."

 

 ―작전은 어떻게 진행됐습니까.

 "김순기 중위와 임병래 소위가 인천에 잠입해 북한군 보안원으로 활동하고 있던 권씨라는 사람을 만났지요. 김 중위가 인천경비부에서 근무할 때 권씨를 정보원으로 활용했었습니다. 권씨가 '살기 위해 북한군에 협조하고 있을 뿐 대한민국 해군에 충성하겠다'고 하더군요. 권씨 통해서 통행증을 만들 수 있었고, 대원들이 월미도 방어진지 구축 공사장 등에 위장 취업해 정보를 수집할 수 있었습니다."

 

 ―X-레이 작전에서 2명이 전사했지요.

 "인천상륙작전을 이틀 앞둔 9월 13일 철수 명령이 떨어졌어요. 잔무 처리를 위해 첩보대원 6명을 섬에 남겼습니다. 그런데 9월 14일 북한군 대대병력이 영흥도로 쳐들어왔어요. 임병래 소위와 홍시욱 삼등병조가 적을 유인하는 사이 나머지 대원 4명이 숨겨 놨던 보트로 탈출했습니다. 섬에 있던 의용대원에 따르면, 임 소위와 홍 삼등병조는 권총으로 자결했다고 합니다. 포로가 돼 고문을 이겨낸다는 건 상식적으로 있을 수 없습니다. 기밀을 지키기 위해 그런 선택을 한 거지요."

 

▲인천상륙작전 첩보부대장 당시 함명수 소령. /함명수 제공

 

영흥도 거점으로 북한군 정보 수집

섬주민 모두가 첩보부대 도와

훈장은 그들이 받았어야…

아군 2명은 기밀 지키기 위해 포로 되기 전 권총으로 자결

 

몽금포 작전서 다리 잃을 뻔

함 제독은 일제 강점기였던 1928년 평양에서 태어났다. 그는 당시 최고 수재들이 갈 수 있었던 평양사범학교에 입학했다. 수학을 매우 잘했다고 한다. 함 제독은 광복이 되자 수학교사 대신 군인의 길을 택했다. 1946년 2월 해군사관학교 전신인 해군병학교에 1기로 입교했다. "해방 이후 상당히 혼잡했습니다. 나라를 지키는 군대에 힘이 있어야 한다는 걸 절실히 느꼈어요. 군인의 길을 걷는 게 나라를 위해 제일 충성하는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1946년12월 함 제독을 포함해 61명이 해군 소위로 임관했다. 그는 해군 작전국 정보과장(소령)으로 있던 1949년 8월 몽금포 작전을 진두지휘했다. 북한에 빼앗겨 황해도 몽금포항에 있는 것으로 알려진 미 군사고문단장 윌리엄 로버츠 준장의 전용보트를 탈취하거나 폭파하는 임무였다. 북한군 경비정 4척을 격침하고 경비정 1척을 나포했으며 북한군 120여 명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렸지만, 함 제독은 총상을 입었다. 왼쪽 허벅지에 관통상을 입고 오른쪽 무릎뼈가 깨지는 중상이었다.

 

 ―몽금포항에 로버츠 준장의 보트가 없었죠.

 "그래서 인민군 배라도 폭파해야겠다고 생각을 했죠. 그런데 적함에 오르다가 총에 맞았어요. 처음에는 어떤 놈이 뒤에서 나를 야구방망이로 때리는 줄 알았어요."

 

 ―부상으로 다리를 잃을 뻔했는데요.

 "병원에 입원했더니 한쪽 다리를 잘라야 한다더군요. '군대를 떠나 수학 교사가 될 운명이구나' 생각했는데, 미군 측에서 나를 주일미군 병원에 보내 수술을 시켜줬어요."

 

 ―부상당하고 약 1년 만에 X-레이 작전에 자원했습니다.

 "약 먹고 다리를 절면서 작전에 나섰죠. 나라가 풍전등화인데 누구나 그랬을 겁니다. 내가 그때 해군본부 정보국장으로 있어서 누구보다 상황을 잘 알지 않았습니까. 제가 손원일 초대 해군참모총장을 찾아갔더니 '또 지휘하려고 하느냐'면서도 허락하더군요."

 

 몽금포 작전은 우리 군 최초의 대북 응징 작전이었지만, 최근까지 역사적 평가를 제대로 받지 못했다. 북한이 몽금포 작전 때문에 6·25가 발생했다고 선전해왔기 때문이다. 군 당국은 몽금포 작전 66년 만인 작년 9월 인천 월미공원에 몽금포작전 전승비를 건립했다. 함 제독은 그를 구출한 공정식 전 해병대사령관(6대)과 함께 올해 4월 을지무공훈장을 받았다.

 

▲박정희 대통령·김종필과 함께:함명수(왼쪽) 제독이 1965년 해군참모총장 재직 당시 여름휴가를 맞은 박정희(가운데) 대통령과 김종필 민주공화당 당의장과 함게 경남 거제시 저도에서 불고기를 구워먹고 있다. /함명수 제공

 

 박대통령에 폭탄주 전수? 英해군장교들 병사 사기 높이려 맥주잔에 양주잔 넣어 주는 전통 '폭뢰주' 선보인 적 있어 

 

박정희 전 대통령과 '술친구'

함 예비역 제독은 "맹물만 마시고 얘기하긴 싱겁다"며 맥주를 주문했다. 그는 소문난 애주가다. 젊은 시절엔 안주가 나오기 전에 맥주잔에 소주를 부어 석 잔을 마시는 것으로 술자리를 시작했다고 한다. 함 제독이 해군작전부장(준장) 재직 시절 해군본부가 있던 명동 부근 포장마차에서 군복을 입고 자주 술을 마셨는데, 구두닦이 소년들이 "해군 장성이 포장마차에서 술을 마실 리가 없다. 가짜 별이다"고 신고해 헌병대가 출동했던 일도 있다.

 

 그는 박정희 전 대통령의 최측근이었는데, 이 역시 술과 연관이 있다. "5·16 당시 저는 해군참모차장이었지요. 그때 혁명군으로 참여한 해병대가 영등포에 있던 해군본부 앞을 지나는데 해군이 해병대에 정지하라고 하면서 양측 사이에 교전이 벌어졌어요. 이 일로 해군을 벌줘야 했는데 참모차장이던 저한테 책임을 묻더군요. 옷을 벗기거나 혁명재판에 회부해야 한다면서요. 그런데 당시 이성호 해군참모총장이 '참모차장이 무슨 죄가 있느냐. 나를 벌하라'고 두둔해줬고, 저는 함대사령관으로 물러나기만 했어요."

 

 ―박정희 대통령이 나중에 따로 불렀지요.

 "군부에서 털어서 먼지 안 나는 놈 없다고 제 사생활을 싹 다 뒤졌지요. 그런데 나오는 게 없거든요. 저는 그때도 집 한 채 없이 셋방살이하고 있었어요. 박 대통령이 저를 불러서 술을 한잔하는데 '재산을 어떻게 관리했길래 돈이 하나도 없느냐'고 묻더군요. 그래서 '제 재산은 국세청장이 잘 압니다. 술 마시느라 주세(酒稅)를 열심히 바쳐서 집에 재산이 없습니다' 그랬지요."

 

 ―박 대통령에게 폭탄주도 전수했다던데.

 "영국 해군은 폭뢰주(Depth Charge) 전통이 있어요. 영국 해군은 배 안에서 술을 마시게 하는데, 장교는 스카치위스키, 병사들은 맥주를 마시죠. 장교가 가끔 격려 차원에서 병사들 맥주잔에 스카치를 담은 양주잔을 떨어뜨려 주는데, 그 모양이 폭뢰 같아서 폭뢰주라고 해요. 그걸 박 대통령 앞에서 선보인 적은 있지요."

 

군인은 본분에 충실해야

포 사격 훈련 많이 시켜

돈 많이 쓴다고 욕먹었지만

평시에 땀 흘리며 연습해야

戰時에 피 적게 흘려

 

해군총장 마칠 때까지 셋방살이

 

함 제독은 36세이던 1964년 9월 중장 진급과 동시에 제7대 해군참모총장에 임명됐고, 1966년 9월 38세에 전역했다. 그때도 셋방 신세였다고 한다.

 

 ―언제 셋방살이를 면했나요.

 "박정희 대통령에게 전역신고를 하러 갔는데, 각하께서 돈을 좀 주셨어요. 그때 손원일 전 총장의 누님께서 혜화동에 살고 계셨는데 새집을 지어 이사하시면서 저에게 집을 싸게 내놓으셨지요."

 

 ―그런데도 함 제독을 음해하는 투서가 많았다고요.

 "제가 해군참모총장 취임하자마자 내 임기 동안에 장성 진급은 없다고 했고 실제로 그렇게 하니까 욕을 많이 먹었지요. 당시 동기인 해사 1기생들이 전부 장성으로 진급하니까 후배들이 별을 못 달아요. 그래서 해군을 개혁하려면 1기생은 더 이상 별 달면 안 된다고 생각한 거예요. 그러니까 불만도 많고 무능한 총장이라고 욕을 많이 했지요."

 

 ―식구들 불만도 많았을 텐데요.

 "아내는 남편을 남하고 비교하게 돼 있어요. 한쪽 귀로 듣고 한쪽 귀로 흘려야죠. 배 함장 하면서 포, 폭뢰, 엔진 등 전부 공부하려면 시간이 없어요. 계급이 올라가면 또 어떻게 싸울까 연구해야 하고. 나같이 머리 나쁜 놈은 나라 지키면서 돈 모을 재주가 없지요."

 

 ―해군에 전하고 싶은 얘기는요.

 "제가 현역으로 있을 때 강조한 얘기가 있어요. '평시출한유다(平時出汗有多) 하니 전시출혈유소(戰時出血有少)라'. 평시에 땀 흘리며 훈련을 열심히 해야 전시에 피를 적게 흘린다는 얘기죠. 저는 하도 포 사격훈련을 많이 해서 돈 많이 쓴다고 욕도 먹었지만 군인은 역시 위국헌신(爲國獻身) 본분에 충실하도록 노력해야죠."

 

 그는 함께 저녁이나 먹자며 국방부 근처 단골 삼겹살집으로 향했다. 앉자마자 맥주잔에 소주를 가득 채웠다.

전현석 기자  최원철 편집

 

2016.08.12  "우리가 발로 얻은 정보 갖고 맥아더가 상륙지점 결정"

[인천상륙작전 성공시킨 '엑스레이 작전' 수행한 노병 김순기]

해안포 위치·북한군 병력 파악

상륙작전 성공한 뒤엔 맥아더 옆에 서서 인천 들어가

해군 창군 70명 중 1명… 1963년 퇴역 뒤 일본 가 생활

▲90세 청춘 - 김순기(90)씨가 지난 10일 일본 교토의 자택 앞 텃밭에서 지팡이를 짚고 포즈를 취하고 있다. 그는 생애 최고의 순간으로 맥아더와 함께 행군하던 1950년 8월이 아닌 “아내와 이렇게 사는 지금”을 꼽았다. /교토=김수혜 특파원

 

1950년 8월 16일 스물 넘긴 청년 17명이 손톱·발톱을 깎고 머리카락을 잘라 군(軍) 사물함에 넣었다. 이틀 뒤 부산 자갈치시장에서 어선을 구해 엿새 걸려 인천 앞바다까지 왔다. 배가 뜨기 전까지 지휘관을 뺀 16명은 어디 가서 뭘 하는지도 몰랐다. 작전명 '엑스레이'. 임박한 연합군 상륙 작전에 앞서 적이 점령한 인천에 침투해 정보를 모으는 임무였다. 8월 24일 새벽 1시 30분 장교 4명과 사병 6명, 군무원 7명이 인천 영흥도 십리포에 몰래 내렸다.

 

그 뒤 3주간 22세 지휘관 함명수 소령을 도와 핵심 역할을 한 사람이 당시 24세의 김순기 중위다. 작전이 확정된 뒤 함 소령이 맨 먼저 부른 사람이 전쟁 전 인천경비사령부에서 정보장교로 근무했던 김 중위였다.

 

지난 10일 아흔 살 김 중위를 일본 교토에서 만났다. 관객 600만명 돌파를 목전에 둔 영화 '인천상륙작전'을 계기로 그와 연결됐다. 그는 개성 사투리로 간결하게 말했다. "행복한 세상이 오도록 선조들이 고생한 거 알아주면 좋갔어."

 

그는 "함 소령은 지휘자, 나는 필드 워커(field worker)였다"고 했다. 십리포에 내린 날 밤 김 중위는 인천 시내에 잠입해 전쟁 전부터 술친구로 지냈던 '인천 건달' 권상오씨와 접선했다. 북한군 보안원으로 위장(僞裝)해 부역하고 있었던 권씨가 통행증을 만들어와 대원들의 시내 잠입이 가능해졌다.

 

그는 "우리가 보낸 정보를 갖고 맥아더 사령부가 정확한 상륙 지점을 결정했다"고 했다. 대원 일부는 월미도 해안도로 보수공사 현장, 방어 진지 구축 공사장에 인부로 들어가 북한군 병력과 장비를 파악했다. 다른 일부는 서울 근교와 안양·서산까지 오가며 주민들 사이에 섞여 북한군 위치와 이동 상황을 알아냈다. 그는 미군 정보장교 유진 클라크 대위와 함께 배를 타고 해안선을 염탐했다. 어느 지점에 해안포가 있는지, 부두 내벽 참호 병력이 몇 명인지, 기관총은 어디 있고 고사포는 몇 문인지 샅샅이 파악해 사령부에 보고했다. 이들은 3주 뒤 철수할 때 북한군의 기습을 받았다. 17명 중 2명이 전사했다.

 

적진에서 보낸 숨 막히는 3주간을 돌아보며 '아흔 살 김 중위'는 "몇 번이나 죽을 고비를 넘겼지만 무섭진 않았다"고 했다.

 

▲영화 ‘인천상륙작전’에서 맥아더 장군의 지시로 대북 첩보작전 ‘엑스레이’에 투입된 한국 해군 첩보부대의 장학수 대위(이정재 분·뒷줄 맨 왼쪽)와 부대원들. /CJ E&M

 

그는 전사한 임병래 중위와 홍시욱 하사 얘기를 더 하고 싶어했다. "그들은 용사였어. 미간에 총알이 박혀 죽었지. 남은 우리는 상륙 작전이 성공한 뒤 맥아더 장군 옆에 서서 인천에 들어갔어. 그길로 서울 거쳐 압록강까지 올라가다 해군에 복귀했어."

 

그는 개성에서 태어나 인천 송도중을 졸업하고 1945년 11월 손원일 제독이 세운 '해방병단(海防兵團)'에 들어갔다. 해군 창군 멤버 70명 중 한 명이다. 1963년 중령으로 전역한 뒤에는 배도 타고 무역도 하다 일본으로 건너갔다. 지인 소개로 만난 일본인 사치코(幸子·68) 여사와 사이에 아들(38) 하나를 뒀다.

 

전쟁사 학자들은 인천상륙작전이 '기적'이었다고 평가한다. "인천은 갯벌이 넓고 조수간만의 차가 크다. 딱 두 시간, 만조에 물이 들 때 상륙해야 하는데 그 사이 적군이 대항하면 우리가 궤멸할 수 있었다."(임성채 해군역사기록관리단 군사편찬과장)

 

기적에 기여한 게 엑스레이 작전이었다. "이 작전은 항공사진, 통신 감청 같은 현대 과학기술로도 할 수 없다. 우리 군이 두 발로 뛰는 인 간 정보를 담당했는데, 그 중심 역할을 한 사람이 김순기 중위였다."(함명수 제독)

 

그때 목숨을 걸었던 노병들이 그 뒤 어떻게 살았고, 지금 어디 있는지 우리 정부는 모르고 있다. 지휘관 함 소령을 제외하면 다른 노병의 증언이 나온 것도 이번 인터뷰가 처음이다. 작전 참가자 중 국방부가 이름을 파악한 사람은 10명뿐, 나머지는 '7명'이라는 숫자로만 남았다.

교토=김수혜 특파원

 

2016.08.13  인천상륙 老兵에 경례하지 않는 나라

1950년 8월 24일 20대 첩보부대원 17명이 인천 영흥도 십리포 해안에 몰래 내렸다. 작전명 '엑스레이.' 이후 3주간 이들이 적군 치하의 인천에 잠입해서 알아낸 정보를 토대로 9월 15일 연합군 7만5000명이 인천상륙작전을 펼쳤다.

 

그 주역 김순기(90)옹을 인터뷰한 곳은 일본 교토에 있는 한 쇼핑몰 휴게용 의자였다. 장바구니 든 주부들이 왔다갔다하는 한쪽에서 귀가 어두운 김옹과 2시간 동안 목청을 돋워가며 6·25 얘기를 했다.

 

주변은 연립주택과 목조주택이 밀집한 서민 동네였다. 김옹은 자택 인터뷰를 한사코 거절했다. 그래도 어떻게 사는지 보고 싶어 인터뷰 뒤 '바래다 드린다'는 핑계로 뒤따라갔다. 그의 집은 예닐곱 가구가 한데 모여 사는 낡은 공동주택이었다. 한 집당 10평 남짓 돼 보였다. 집 안 좀 보자는 말이 안 나왔다.

 

김옹은 1945년 11월 해군 창군 멤버 70명 중 1명으로 군복을 입었다. 6·25 당시 우리 군이 낙동강까지 밀려갈 정도로 어려웠을 때 목숨을 건 작전으로 인천상륙작전 성공에 기여했다.

 

그런 그가 지금 국가에서 받는 지원은 월 2만엔가량이다. 충무무공훈장 두 건을 받은 데 따른 수당이다. 근속 20년이 되기 전에 전역해 군인연금은 없다. 우리 정부는 그를 인천상륙작전 기념식에 초대하거나 '증언을 듣자'며 찾아간 적도 없었다. 그나마 그는 작전에 참가한 노병 17명 중 복무 기록이 남아 있는 4 명 안에 든다. 6명은 이름 석 자만 있고, 7명은 아예 이름조차 남아 있지 않다.

 

김옹 자신은 정작 뭘 요구할 생각도 없었다. 생활이 어렵지 않으냐는 질문에 "만족하고 살고 있다"고 했다.

 

그는 3년 전 한국에 갔을 때 상륙작전 현장에 방문하고 싶었는데, 주변에 엘리베이터나 에스컬레이터가 없어 못 갔다고 했다. 우리 중 누군가가 업고라도 모셔갔어야 했다.

김수혜 도쿄 특파원

 

2016.08.24 인천상륙작전 그 후

대통령이 20일 영화 인천상륙작전을 관람했다. 인기가 한풀 꺾인 때라 의도가 궁금했는데 청와대의 설명이 있었다. "안보에서 국민이 분열하지 않고 단합해야 한다는 신념이 반영됐다"고 했다. 대통령은 광복절 경축사에서도 신념을 드러냈다. 사드 논란을 지목해 "정쟁의 대상이 될 수 없다"고 했다. 대통령은 영화를 통해 그 신념을 재확인한 듯하다.

 

감상은 저마다 다르다. 나는 영화를 보면서 '후편을 만든다면 어떤 내용이 될까' 생각했다. 인천상륙작전의 승리 뒤에는 북진과 후퇴, 공방과 교착으로 이어지는 긴 이야기가 있다. 후편에선 주인공도 다르게 묘사될 듯하다. 중공군 개입을 무시한 오판은 맥아더 군인 인생의 최대 실책으로 남았다. 맥아더 평전을 쓴 윌리엄 맨체스터는 "수많은 사람이 그 대가를 생명으로 치렀다"고 했다. 물론 한국인이 대다수였다.

 

인천상륙작전만으로 맥아더는 '한국의 구세주'라고 평가받을 만하다. 그렇다고 실책까지 사라지는 건 아니다. 영화가 묘사한 대로 맥아더는 치밀한 백전노장이었다. 그런 장수가 왜 오판했을까. 6·25전쟁사를 읽으면서 해답을 찾았지만 쉽지 않다. 대개 '승리에 취해 현실을 못 보고 일을 그르친 승자의 저주' 정도로 넘어간다. 백악관도 똑같이 중공의 개입을 오판했는데 맥아더 혼자 뒤집어썼다는 주장도 있다.

 

얼마 전 뜻밖의 책에서 흥미로운 글을 발견했다. 서울대 남기정 교수가 쓴 '기지국가의 탄생', 일본 작가 호사카 마사야스가 쓴 '쇼와 육군'이다. 이 책엔 미군이 태평양전쟁 패전 후 흩어진 일본군 참모를 6·25 직후 불러모으는 장면이 나온다. 그들이 한반도와 만주, 중국에서 수십년 동안 축적한 정보와 노하우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책 '쇼와 육군'은 '일본군 참모가 작전의 밑그림을 그렸다'고 했다.

 

그들에겐 아주 강한 선입관이 있었다. 중국을 업신여기는 태도다. 장난 같은 도발로 만주를 빼앗고 본토 침략 후엔 순식간에 남방과 내륙까지 먹었으니 만만해 보였을 것이다. 일제 장교들은 중국군을 "바보" "돼지"라고 불렀다고 한다. 무섭게 변하던 또 다른 중국군을 제대로 경험하지 못하고 전쟁을 끝냈다.

 

이런 집단을 모아 전쟁 자문단으로 재조직한 이가 맥아더의 정보 참모 윌로비였다. 투철한 반공주의자였던 윌로비는 당시 맥아더의 눈과 귀를 사로잡고 있었다. 일본의 전후 역사를 좌에서 우로 바꾼 이른바 '역(逆)코스' 정책을 주도한 거물이다. 맥아더는 정보를 그에게 의지했다. 맥아더의 오판은 그의 오판에서 비롯됐다. 왜 착각했을까. 일본 군부의 중국 멸시가 영향을 준 게 아닐까. 추론이지만 흥미로운 연구 과제인 듯하다.

 

6·25에 참전한 마셜 준장은 중공군을 '그림자 없는 유령'이라고 했다. 백선엽 장군은 그들이 다가오는 소리를 '마성(魔聲)'이라고 했다. 중공군은 치밀한 군대였다. 싸울 상대와 피할 상대를 정확히 구분했다. 소련의 스파이를 통해 유엔군의 진로와 한계까지 꿰뚫고 있었다. 맥아더는 인해전술이 아니라 정보에 밀렸다. 키신저는 6·25에서 가장 많은 것을 얻은 나라로 중공을 꼽는다. 전쟁을 통해 군사대국이자 아시아 혁명의 중심 지위를 확립했기 때문이다.

 

한국은 득실 모두 컸다. 국민이 생명을 잃었고 땅은 황폐해졌다. 대신 미국의 질서에 들어가 평화와 번영을 얻었다. 전쟁의 고난은 후대의 풍요를 통해 충분히 위로받을 수 있지 않을까. 다만 '중국 경시'의 결과만 따지면 한국은 틀림없이 최대 피해자다. 얻은 건 없고 잃은 것만 있다. 미·일의 선입관에 한국 국민은 고통이 더 커졌다.

 

한국과 중국에서 외교관을 지낸 미치가미 일본 공사가 쓴 책 '한국인만 모르는 일본과 중국'에 이런 글이 있다. '한국은 중국을 지나치게 크게 보는 것만이 문제가 아니다. 지나치게 작게 보는 경향도 있다.' 지금 사드 문제로 중국을 보는 시각도 비슷하다. 한쪽에선 보복에 대한 공포와 비관론, 한쪽에선 자신과 낙관론이 펼쳐진다. 미치가미는 이렇게 지적했다. '이중의 의미에서 한국은 중국의 실상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대통령은 광복절 경축사에서 "우리의 운명이 강대국의 역학관계에 의해 결정될 것이라는 피해 의식과 비관적 사고를 떨쳐내야 한다"고 말했다. 동의한다. 하지만 이를 위해선 먼저 역학관계를 정 확히 알아야 한다. 그 위에서 정책을 결정하고 상대를 납득시켜야 한다. 작년엔 '통일의 벗'처럼 중시하다가 올해는 '안보의 적'처럼 대하면 안 된다. 사드를 결정했다고 미·일에만 의존할 수 없는 게 한국의 지리적 위치다. 중국은 시간 축이 긴 나라다. 우리가 잊을 때 그들은 행동한다. '중국 공포'보다 '중국 경시'가 훨씬 안 좋은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

선우정 논설위원

 

2016.09.21  9월15일과 28일은 무슨 날?

▲김포로 이동중인 맥아더 장군과 해병대원들 모습(1950년). [국가기록원]

 

행정자치부 국가기록원은 인천상륙작전일(1950년 9월15일)과 서울수복일(1950년 9월28일)을 맞아 9월 이달의 기록으로 ‘기록으로 보는 인천상륙작전과 서울수복’으로 정하고 동영상 11건과 사진 25건, 문서 3건, 우표 1건 등 총 40건의 관련 기록물을 공개한다고 21일 밝혔다.

 

공개한 사진을 보면 1950년 9월15일 전개된 인천상륙작전의 전투 모습과 UN군의 활약상을 만나볼 수 있다.

 

인천상륙작전과 서울수복 사진 속에는 인천상륙작전 후 김포비행장으로 가는 맥아더 장군과 해병대원들, 인청항에 내리는 미군 제7보병사단, 물자보급을 위해 인천항에 정박한 연합군 전차상륙함 사진 등이 당시의 상황을 잘 보여준다.

 

또 인천상륙작전 후 인천으로 돌아오는 피난민 행렬, 어린아이에게 먹을 것을 주는 군인, 다친 아이를 치료하는 해군위생병, 홀로 길거리에 남겨져 울고 있는 아이의 모습 등이 담겨 있다. 이 사진들은 국가기록원이 2012~2015년 미국 국립기록관리청(NARA)로부터 수집한 기록물이다. [국가기록원]

 

▲맥아더 장군 무공훈장 수여식 모습(1950년). [국가기록원]

 

▲부상 당한 아이를 치료하는 해군 위생병 모습(1950년). [국가기록원]

 

▲서울수복 과정에서 잡힌 북한군 포로들 모습(1950년). [국가기록원]

 

▲인천상륙작전에서 잡힌 북한 포로들 모습(1950년).[국가기록원]

 

▲인천상륙작전에서 잡힌 북한군 포로를 검색하는 미군 모습(1950년). [국가기록원]

 

▲서울수복 후 태극기 게양 재현하는 모습(1954년). [국가기록원]

 

▲어린이에게 먹을 것을 주는 군인 모습(1950년). [국가기록원]

 

▲제17주년 9.28수도탈환 기념식 전경. [국가기록원]

 

▲인천항에 내리는 미국 제7보병사단 모습(1950년). [국가기록원]

 

▲인천상륙작전 후 돌아오는 남한 피난민들 모습(1950년). [국가기록원]

 

▲인천상륙작전 후 돌아오는 남한 피난민들 모습(1950년). [국가기록원]

 

▲서울수복 기념행사 사열식(1961년). [국가기록원]

 

▲1966년 9.28 서울수복 재현 모습. [국가기록원]

 

▲인천상륙 제14주년 기념식. [국가기록원]

 

▲서울수복기념 서울부산간 경주대회 모습(1961년). [국가기록원]

 

▲9.28 서울수복기념 행진 모습(1958년). [국가기록원]

 

▲인천상륙 10주년 기념식(1960년). [국가기록원]

 

▲1966년 서울수복기념 제3회 국제마라톤대회 우승자 인터뷰.[국가기록원]

 

▲환자를 돌보는 해군 군의 모습(1950년). [국가기록원]

 

▲유엔군이 서울 입성할 당시 환영하는 주민들 모습(1950년). [국가기록원]

 

▲길거리에 혼자 앉아있는 아이 모습(1950년). [국가기록원]

 

▲물자보급을 위해 인천항에 정박한 연합군 전차상륙함(1950년). [국가기록원]

 

▲1992년 9월 28일 서울수복 중앙청 국기게양 42주년 기념식. [국가기록원]

 

▲인천상륙작전 기념조각 모습. [국가기록원]

한영혜 기자 [출처: 중앙일보]

 

 2017 월간조선 3월호  

제2차 인천상륙작전을 아십니까?

1951 2 10일 한국 해군 수병 70, 해병대 100명이 인천 만석동 해안에 상륙
⊙ 당초 유엔군의 서울 공격에 앞선 위장상륙작전으로 기획되었으나, 인천 완전 탈환
⊙ 인천항 통한 군수물자 지원 가능해지면서, 3·15 서울재탈환 등 유엔군의 반격작전에 기여

▲제2차 인천상륙작전의 주역들. 왼쪽부터 노명호 소령, A. E. 스미스 제독, 통역관 최병해 대위, 김종기 소령, 최영섭 소위. 

 

  작년에 개봉한 영화 〈인천상륙작전〉은 약 705만명의 관객을 동원했다. 그런데 잘 알려지지 않은 또 하나의 인천상륙작전이 있다. 1951 2 10일 한국 해군·해병대가 벌인 제2차 인천상륙작전이다. 이 작전에 투입된 병력은 170명에 불과했다.   


 
맥아더 원수가 지휘했던 1950 9 15일의 제1차 인천상륙작전에 연합군 함정 261척과 71339명의 상륙군이 동원됐던 것을 생각하면 비교도 할 수 없는 소규모였다. 하지만 이 작전에 투입된 해군·해병 특공대는 인천시를 탈환했다. 이 작전은 그해 3 15일 유엔군이 서울을 재탈환하는 데 큰 도움이 됐다
  

 

  유엔군, 한국 철수 검토

 1950 10 25일 청천강 인근에서 중공군과 첫 전투를 벌인 후 국군과 유엔군은 후퇴를 거듭했다. 1951 1 4일 서울을 내준 유엔군은 1 8일에는 평택-안성-제천-삼척을 잇는 북위 37도선까지 후퇴했다. 설상가상으로 1950 12 23일 미8군 사령관 월튼 워커 중장이 교통사고로 사망했다. 1950년 여름 낙동강 교두보를 지켜낸 전선사령관의 죽음은 유엔군 장병들과 이승만(李承晩) 대통령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워커 중장의 후임으로 부임한 사람은 매튜 리지웨이 장군이었다. 그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유럽전선에서 용명(勇名)을 떨쳤다. 그는 이승만 대통령을 처음 만난 자리에서 말했다

 

     “대통령 각하, 여기 오게 되어서 기쁩니다. 저는 여기 머물려고 온 것입니다.

  
 
유엔군이 한국을 버리지 않을까 노심초사하던 노()대통령은 얼굴을 활짝 폈다. 이어서 리지웨이 장군은 1951 1 21일 〈우리는 왜 여기서 무엇을 위해 싸우는가〉라는 제목의 훈령(訓令)을 내려, 유엔군 장병들의 사기를 북돋았다.   


 
하지만 그 이면(裏面)에서는 유엔군의 한국 철수 논의가 진행되고 있었다. 이미 1950 12 6일 유엔군사령관 맥아더 원수는 콜린스 육군참모총장에게 ▲만주폭격 ▲중국 해안 봉쇄 ▲장제스군 투입 ▲증원군 파견 등을 요구하면서 이런 요구가 거부될 경우에는 전멸을 피하기 위해 유엔군을 일본으로 철수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미국 합동참모본부는 1950 12 29일 맥아더에게 보낸 작전지침에서 “단계적인 방어선에 따라 전투를 하면서 후퇴하다가 금강방어선에서 중공군이 우세한 전력을 집결시켜 유엔군을 압도할 것 같다고 판단하면 유엔군을 일본으로 철수시키도록 지시를 내리게 될 것”이라고 밝혔다

  
  1
·4 후퇴 후 상황은 더욱 급박해졌다. 1951 1 9일 미 합참은 맥아더의 요구를 거부하면서 “한반도에서 철수하는 것이 병력과 물자의 심각한 손실을 막기 위하여 꼭 필요하다고 판단하면 일본으로 철수해도 좋다”고 했다. 1 12일 미 합참은 한국 정부와 군인, 경찰, 공무원 및 그 가족 100만명을 제주도로 철수하는 계획을 검토했다. 1 13일에는 해리 트루먼 미국 대통령이 맥아더에게 친서를 보내 확전(擴戰)할 수 없는 이유를 설명했다

  
  
맥아더, “인천항만의 가치는 지대”

▲1951년 4월 3일 강원도 양양 전선을 시찰하는 맥아더 원수와 리지웨이 중장(뒤 왼쪽).  

 

  미국이 한반도 철수까지 고려하게 된 것은 서방세계의 전력(戰力)이 한국에 집중된 틈을 타서 소련이 서유럽을 침공할 것을 두려워한 영국·프랑스 등 동맹국들이 미국에 한국을 포기하자고 졸라댄 이유가 컸다. 유엔총회 의장과 캐나다, 인도 대표로 구성된 휴전위원회는 1951 1 13일 ▲현 위치 휴전 ▲평화회복을 위한 정치회담 개최 ▲한반도에서의 모든 외국군의 점진적 철수 ▲한반도 전체를 관리하기 위한 준비 절차 착수 등을 내용으로 하는 휴전안을 제시했다. 사실상 대한민국 포기를 전제로 하는, 중공과 북한에 유리한 내용이었다. 한창 승기를 타고 있던 중공은 1 17일 이를 거부했다. 마오쩌둥의 오만이 대한민국을 구한 것이다. 유엔은 2 1일 중공을 침략자로 규정하는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유엔에서 이런 외교전이 벌어지고 있을 때, 한반도에서도 전기(轉機)가 마련되고 있었다. 유엔이 중공에 휴전안을 제안한 다음 날인 1 14일 리지웨이 장군은 콜린스 육군참모총장, 반덴버그 공군참모총장, 스미스 CIA 국장 등과 만난 자리에서 이렇게 말했다.   


 
“작년 말 워커 장군 후임으로 부임한 후, 후퇴에 후퇴를 거듭했다. 지금 합참은 미군의 일본 철수를 계획하고 있다. 제대로 싸워 보지도 못하고 철수한다는 것은 패배를 의미한다. 내 자신의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는다. 철수할 때 철수하더라도 적과 접촉을 통해 적의 능력과 의지를 확인하겠다.

  
 
이에 따라 리지웨이 장군은 미 제25사단 제27연대에 위력수색정찰을 명령했다. H. 마이클리스 대령이 지휘하는 이 부대는 1 15일 새벽 전차, 포병, 공병 및 항공지원을 받으면서 오산에서 수원까지 진출했다. 이들과 부딪친 중공군 부대는 약간 저항하다가 북으로 도주했다.  


 
중공군의 전투력이 생각보다 시원치 않다는 것을 확인한 유엔군은 자신감을 얻었다. 리지웨이는 5개 사단을 동원해 북진반격작전에 들어갔다. 유엔군은 1 24일 원주를 탈환했다. 1 31~2 9일 유엔군은 군포, 안양, 수리산, 모락산, 청계산 및 관악산 일대까지 진출해 중공군과 격전을 벌였다. 국군 제1사단 15연대는 같은 날 노량진-영등포로 이어지는 선까지 진출했다. 중공군은 2 6일 주력을 한강 이북으로 철수시키는 한편, 관악산에 방어진지를 구축했다. 서울방어를 위해 인천에 주둔하고 있던 북한군 제17사단이 관악산으로 이동했다

  
 
이런 승세(勝勢)에도 리지웨이는 더 이상의 북진을 망설였다. 그는 맥아더에게 보낸 전문(電文)에서 이렇게 말했다


 
〈한강 이북으로의 공격은 현명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위험 요소가 너무 많습니다. 중공군의 계략에 말려들어 갈 염려도 있습니다. 8군의 능력도 미치지 못합니다. ‘서울탈환’은 군사적 경지로 보면 ‘바보짓’이라고 생각됩니다.  


 
맥아더는 다음과 같은 답신을 보냈다.   


 
〈서울탈환은 군사적으로는 유효성이 적지만 외교적·심리적 효과는 크다. 김포비행장과 인천항만의 가치는 지대(至大)하다. 인천항만과 김포비행장 확보는 보급문제를 대폭적으로 해결할 수 있고, 8군에 대한 항공지원도 증대할 것이다.  


 
맥아더가 말한 ‘인천항만 확보’라는 과업을 수행한 것은 바로 한국 해군과 해병대였다.   
  


  
월미도를 포격하라

▲제2차 인천상륙작전 당시 한국 해군의 기함이었던 백두산함(PC-701함).  

 

  1·4후퇴 후 한국 해군은 인천 팔미도, 무의도, 영흥도, 덕적도, 연평도 일대의 해역(海域)을 봉쇄하는 임무를 수행하고 있었다. 기함은 PC-701(함장 노명호 소령)이었다. PC-701함은 해군 장교 부인들이 삯바느질을 하고 장병들이 월급을 떼서 모은 돈으로 구입한 한국 해군 유일의 포함(砲艦), 1950 6·25전쟁 발발 직후 부산에 상륙하려던 북한군 특수부대원들을 태운 적 수송선을 대한해협에서 격침시킨 바로 그 구국(救國)의 배 백두산함이었다. YMS-510(정장 함덕창 대위), JMS-301(정장 박기정 대위), JMS-302(정장 홍원표 대위), JMS-306(정장 최병기 대위), JMS-310(정장 모예진 대위) 등이 함께 작전을 수행했다. YMS는 미국 해군, JMS는 일본 해군이 사용하던 소해정(掃海艇)으로 소구경 화포를 장착한 200~300톤급의 배들이었다


  1951
2 1일 부산에 있던 백두산함은 유엔 해군 제95.14기동분대와 연합작전을 수행하라는 명령을 받고 오전 6시에 출항, 다음 날 오전 덕적도 앞바다에 도착했다. 노명호 소령은 해군해병 혼성부대를 이끌고 덕적도에 주둔하고 있던 김종기 소령을 만나 서해 도서(島嶼)의 적정(敵情)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김 소령은 1950 9 15일의 인천상륙작전 당시 해병 2대대장으로 참전했었다.   


 
그날 오후 백두산함의 노명호 함장과 갑판사관 최영섭 소위(해군대령 예편)는 미국 순양함 CA-75 헬레나함의 초대를 받았다. 영국 순양함 벨파스트함의 작전장교도 헬레나함에 올랐다. 헬레나함의 함장이 말했다


 
“지금 유엔 지상군은 수원에서 한강선으로 반격작전을 전개하고 있습니다. 우리 서해 해군전대(戰隊)는 지상군 전투를 엄호하기 위해 지난 1 25일과 28일 인천지역 적 진지에 함포사격을 실시했습니다. 맥아더 원수는 인천항을 확보하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함장은 테이블 위에 월미도 지도를 펼쳤다.  


 
“이 섬에 숨어 있는 적의 포()진지를 확인하고 싶습니다. 701(백두산함)이 이 지도에 표시한 표적에 대해 근접 함포사격을 할 수 있겠습니까? 적이 응사하면 우리 미국과 영국 함정이 엄호사격을 해 주겠습니다.  


 
노명호 함장이 말했다
 
“하겠습니다. 언제가 좋겠습니까? 
 
“내일 (2 3) 정오가 좋겠습니다.  


  2
3일 정오, 백두산함은 적군이 장악하고 있는 인천항 안으로 돌입, 월미도 전방 1000m 지점에서 적의 포대와 초소에 포격을 했다. 적도 즉각 응사해 왔다. 미국과 영국 순양함, 구축함 등도 적 진지를 포격했다. 작전 중 주포장 최석린 병조장이 대퇴부를 관통당하는 중상을, 조타사 임인정 수병은 경상을 입었다. 갑판사관 최영섭 소위도 다리에 총상을 입었다. 최영섭 예비역 대령의 회고다.   


 
“함교에서 지휘를 하고 있는데 총에 맞은 줄도 몰랐어요. 옆에 있던 신호수가 ‘갑판사관님, 바지에 피가 가득 괴어 있습니다’라고 하기에 보니, 바지가 피에 젖어 있더군요. 미국 헬레나함에서 ‘중상자를 빨리 데리고 오라’고 해서 중상을 입은 최 병조장과 함께 헬레나함으로 가서 치료를 받았지요. 술·담배와 먹을 것을 주더군요. 헬레나 함장은 ‘701함의 용전으로 적의 화점(火點)을 확인할 수 있었다’고 치하했습니다.  


  
수병들로 특공대 급조

▲작전에 참가한 병사들 중 70명은 육전 훈련을 받지 않은 함정 근무 수병들이었다. 

  

  백두산함은 월미도에서 작전을 마치고 돌아오면서 다시 덕적도에 들렀다. 덕적도 주둔 해병부대장 김종기 소령은 “그동안 수집된 정보에 의하면 인천 지역의 적은 아군의 반격 때문에 서울로 이동했으며, 시내의 적도 크게 동요를 일으키고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고 했다. 노명호 소령과 김종기 소령은 덕적도에 주둔하고 있는 해군·해병 혼성부대를 인천에 상륙시키기로 계획했다. 당시는 해군과 해병의 구분이 명확하지 않아 장병들이 해군과 해병을 오고 가거나 함께 근무할 때였다. 1차 인천상륙작전 당시에는 해병대 2대대장으로 활약했던 부대장 김종기 소령도 이때는 해군 소속이었다

  
 
노명호 소령, 김종기 소령은 2 8일 헬레나함의 함장, 영국 순양함 벨파스트함의 작전장교와 회동했다. 관악산 일대에서 한참 유엔군과 중공군 간에 전투가 벌어지고 있을 때였다. 작전계획은 갑판사관 최영섭 소위가 짰다. 2 10일 오후 6시에 덕적도 주둔 해군해병 1개 중대를 인천에 상륙시킨다는 계획이었다. 상륙지점은 인천기계제작소. 미국과 영국 해군이 엄호사격과 항공지원을 해 주는 가운데 백두산함 등 한국 해군 함정이 해군해병대를 상륙시키고, 이들이 적의 위치를 파악해서 알려주면 해상의 해군 화력이 적진을 때린다는 작전이었다.   


 
덕적도 주둔 병력을 수송하는 임무는 JMS-310(정장 모예진 대위)이 맡았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2 10일 오전 1010 JMS-310정이 덕적도에 도착했지만, 그때까지 병력이 집결하지 못했던 것이다. 병력이 섬 곳곳에 산재(散在)해 있었던 탓이었다. JMS-310정은 이날 오후 4시까지 인천 팔미도로 병력을 수송하게 되어 있었지만, 악천후와 간만(干滿)의 차이 때문에 시간을 지키는 것이 어려워졌다.   


 
그렇다고 작전을 중단할 수도 없었다. 노명호 소령과 김종기 소령은 각 함정에서 지원자 70명을 선발, 특공대를 편성했다. 백두산함의 갑판사관이던 최영섭 예비역 대령(당시 소위)은 “함정에 근무하던 수병(水兵)들로 급히 부대를 편성하다보니 총이 없었다. 캐나다 구축함에서 자동소총을 얻어다 나누어 주었다”고 회고했다

 

     기상대 고지 점령

▲특공대는 월미도에서 8문의 적 야포를 노획했다.
  

  2 10일 오후 430, 특공대원들은 JMS-302(정장 홍원표 대위)과 발동선 두 척에 분승해서 팔미도를 출발했다. 백두산함 갑판사관 최영섭 소위는 미국 해군장교 1, 통신병 두 명과 함께 JMS-302정에 승선했다. 백두산함, YMS-510, JMS-301, JMS-306, JMS-310정 등도 함께했다

 

     반석동 해안의 인천기계제작소가 상륙지점으로 결정된 것은 김종기 소령이 제1차 인천상륙작전 당시 이곳에 상륙해서 지형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인천상륙작전 때 이곳은 적색해안(Red Beach)이라고 불렸다

  
 
오후 6시부터 미국과 영국 해군 함정이 함포사격을 시작했다. 동시에 상륙부대는 목적한 지점에 상륙하는 데 성공했다. 김종기 소령은 특공대원들을 모아 놓고 말했다

 

     “이제 우리는 적지에 있다. 함포는 우리가 작전하는 이곳까지 도달하지 않는다. 너희들은 돌아가려 해도 보다시피 우리를 싣고 온 배는 이미 떠나고 없다. 나를 믿고 나의 명령에 따라 행동하지 않으면 너희들은 살아나지 못할 것이다. 이제 해군 병사인 너희들은 육전(陸戰)을 위해 훈련할 여가도 없고, 작전에 대해 설명할 여유도 없다. 너희들은 이곳에서 헤어져 각자 진격을 개시, 21시까지 이미 지시한 대로 인천기상대 고지에 집합하라. 21시까지 집합하지 않는 사람은 전사자로 간주한다.

  
 
이들이 상륙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덕적도에서 출발한 해병대 병력 100명도 같은 지점에 상륙했다. 월미도와 인천역 쪽에서 적탄이 날아왔다. 5개 소대로 편성된 이들 병력은 대부대가 상륙한 것처럼 위장하기 위해 “대대 앞으로!” “중대 앞으로!”라고 외치며 목적지인 기상대 고지를 향해 돌진했다. 그날 밤 9, 해병 3개 소대는 고지 서쪽에서, 해군 수병 2개 소대는 고지 북쪽에서 공격을 가했다. 소총, 따발총, 경기관총을 쏘며 대항하던 적은 얼마 후 시청방향으로 후퇴했다. 포로가 된 적을 심문했더니 “본 병력은 관악산으로 이동했고, 남아 있던 소규모 경비병력은 함포사격이 시작되자 대규모 부대가 상륙한 걸로 착각하고 도주했다”고 했다

  
 
부대원들이 기상대 고지에 집결하기 시작하자, 김종기 소령은 불을 피우고 큰 소리로 군가를 부르게 했다. 드디어 모든 대원들이 기상대 고지에 집결했다. 김종기 소령은 백두산 함장 노명호 소령과 헬레나 함장에게 발광(發光)신호를 보냈다. “특공대는 21시 기상대 고지를 점령함. 확인된 적군 전사 11. 아군 피해 없음.

  
 
김종기 소령은 적의 저항이 경미한 것을 보고, 내친김에 인천시청까지 점령하기로 했다. 그날 밤 11, 1개 분대 병력이 인천시청을 점령했다. 이들은 시청에 걸려 있던 인공기와 스탈린·김일성의 사진을 뜯어내 짓밟아 버렸다. 김종기 소령은 시청에 본부를 설치했다.     


  
적 전차 노획

▲1951년 2월 11일 월미도에서 노획한 적 전차. 맨 오른쪽은 최영섭 소위, 가운데는 기관사 강명혁 중위.

  

  다음 날인 2 11일 오전 6시 특공대는 월미도로 진격했다. 저항은 없었다. 이들은 남쪽 능선에서 적의 야포 8문을, 동남쪽 중턱에서는 고장 난 적 전차(戰車) 한 대를 노획했다. 최영섭 예비역 대령은 “701(백두산함) 승조원들 중에 손재주가 좋은 병사가 있어서 전차 엔진을 수리, 페인트로 차체에 701이라고 숫자를 적은 후 몰고 다녔다”고 했다. 이 전차는 작전이 종료된 후 다른 전리품들과 함께 부두에 보관되어 있었는데, 나중에 인천에 들어온 영국 해병대가 밤 사이에 가져가 버렸다. 백두산함의 노명호 소령, 김종기 소령이 영국군 사령부에 항의했지만, 돌려받지 못했다   


 
김종기 소령은 월미도를 점령한 후 백두산함과 헬레나함에 ‘07:00시 월미도 탈환. 적 야포 8문과 전차 1대 노획. 사기충천’이라는 발광신호를 보냈다.   


 
노명호 소령은 “우리 한국 해군이 인천을 점령했으니 시민들은 안심하고 생업에 종사하라”는 포고령을 내렸다. 해군 특공대와 해병대는 잔적(殘敵)을 소탕하면서 인천시 전체를 점령했다


▲백두산함의 갑판사관이었던 최영섭 예비역 해군 대령.

  

  인천탈환 소식을 접한 제95기동함대 사령관 A. E. 스미스 제독은 참모들과 함께 백두산함을 방문했다. 스미스 제독은 노명호 소령에게 작전 성공을 치하한 후, 한국 해군·해병대가 상륙했던 만석동 해안에 상륙하자고 했다. LCVP(상륙주정·Landing Craft, Vehicle and Personnel)에서 내린 스미스 제독은 마중을 나온 김종기 소령의 어깨를 두드리면서 말했다

  
 
“내가 해야 할 인천탈환 상륙작전을 귀관이 먼저 해 줘서 고맙소. 웰던(Weldone).  


 
스미스 제독은 참모들에게 “인천항만과 부두를 조속히 복구하라”고 지시했다. 스미스 제독은 LCVP를 타고 월미도 남쪽을 돌면서 우리 병사들이 노획한 적 전차를 수리하는 모습과 야포들을 관찰했다. 스미스 제독을 수행한 미국 해병대원들이 우리 장병들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았다. 2 15일 한국 해병대 1개 대대와 미 육군 특수공병여단이 인천에 상륙, 복구작업에 착수했다. 최영섭 예비역 대령의 말이다.   


 
8군 사령관 리지웨이 장군은 전선을 38선까지 올리고 한강 진출의 마지막 관문인 관악산을 점령하기 위해서는 적의 배후를 흔들 수 있는 교두보 확보가 절실하다고 판단, 미 극동군 해군사령관에게 인천지역에 위장상륙작전을 요청했습니다. 1950 9 15일 인천상륙작전과 함께 장사에 문산호와 학도병들을 투입, 위장상륙작전을 벌였던 것과 비슷한 맥락이었던 셈이죠. 그런데 위장작전을 목적으로 인천에 상륙했던 소규모 부대가 아예 인천시 전체를 탈환해 버렸으니, 스미스 소장도 깜짝 놀랐을 것입니다.  


 
해군은 현재 제2차 인천상륙작전 당시 해군·해병 특공대가 상륙했던 인천시 만석동에 기념비 건립을 추진 중이다. 대한제분이 만석동 공장 인근 녹지 일부를 부지로 제공했다. 제막식은 오는 5월 말이나 6월 초에 가질 예정이다.

배진영  월간조선 기자

 

2017.09.16 디에프 상륙작전과 장사 상륙작전

노르망디/인천 상륙작전 성공 이면엔, 디에프/장사 상륙작전 커다란 희생 있었다

■ 맥아더 장군 “장사 상륙작전이 인천 상륙작전 성공에 기여했다” 親筆로 평가

 

문갑식  월간조선 편집장 사진이서현 

▲디에프에서부터 아름다운 노르망디 해변이 시작된다.

 

노르망디 상륙작전이 벌어지기 2년 전 이곳에서 디에프 상륙작전이 펼쳐졌으나 영연방군은 처참한 패배를 당했다.

 

  현대 전사(戰史)에서 전쟁의 분수령이 된 상륙작전이 두 번 있었다. 2차 세계대전을 미국·영국·프랑스 연합군의 승리로 이끈 노르망디 상륙작전과 6·25의 승패를 단숨에 뒤바꾼 인천 상륙작전이 그것이다. 노르망디 상륙작전은 1944 6 6, 인천 상륙작전은 1950 9 15일 벌어졌다. 공교롭게도 노르망디 상륙작전과 인천 상륙작전의 성공 이면에는 디에프 상륙작전과 장사(長沙) 상륙작전이라는 커다란 희생이 있었다.  

 
  
노르망디 2년 전 참담한 실패로 끝난 디에프 상륙작전 
  “디에프에서 숨진 한 명이 노르망디에서 열 명 살려"

프랑스 노르망디 지방의 최북단에 있는 도시 디에프에서 1942 8 19일 영연방(英聯邦)군이 상륙했다. ‘주빌리(Jubilee) 작전’이 시작된 것이다,
  
  1942
년 독일군은 소련을 침공해 모스크바를 겨냥하고 있었고 영국은 독일 유보트에 의해 그해 5월과 6월에만 150t의 화물선 피해를 입었다. 북아프리카 영국군은 이집트로 후퇴했고 일본은 동남아시아의 영국 식민지를 점령했다. 영연방의 일원 호주의 다윈이 폭격당했고 인도마저 위험했다.
  
  1942
3, 영국 연합작전사령관 루이스 마운트배튼 경은 침공작전을 구상하고 있었다. 그 장소로 디에프가 선택됐다. 디에프 상륙작전의 D데이는 1942 7 4~8일 사이로 정해졌으며 작전명은 루터(Operation Rutter)였다. 7 7일 루터작전은 악천후와 독일 공군기의 공격으로 폐기될 뻔했다.
  
 
마운트배튼 제독은 끈질기게 처칠 수상을 설득했다. 결국 처칠은 작전명을 주빌리(Jubilee)라고 바꾸고 상륙작전을 허가했다. 디에프는 독일 육군 제302고수방어사단 예하의 2500여 명으로 구성된 제571연대가 방어하고 있었다. 잘 훈련되었으며 실전경험도 풍부했고 무장까지도 충분했다.

  ▲디에프에 있는 ‘주빌리 상륙작전’ 기념관이다.

 

  1942 8 19 1005명의 영국 코만도, 50명의 미 육군 레인저, 캐나다 2사단의 장교와 사병 4963명을 포함한 상륙병력을 분산하여 실은 영국 함대가 사우스 햄프턴 항을 출발해 디에프 기습공격에 나섰다. 237척의 배와 상륙정, 6척의 구축함을 포함한 함대가 해안으로 접근했다.
  
 
하늘에서는 영국·캐나다·자유폴란드·자유프랑스군의 전투기와 폭격기가 작전에 가세했다. 상륙작전은 처참한 실패로 끝났다. 1500명의 독일군 중 311명이 전사하고 280명이 부상을 입은 반면에 캐나다 제2사단에서만 총 6086명 중 1027명이 전사했고 2340명이 포로가 됐다. 거의 전멸한 것이다.
  
 
영국 코만도에서는 275명이 전사했고 미군 레인저에서도 3명의 전사자가 발생했다. 영국 해군에서는 구축함 1척과 상륙정 33척을 손실했으며 550명이 전사했다. 영국 공군은 수퍼마린 스핏파이어 64, 호커 허리케인 20, 보스턴 폭격기 6, P-51 머스탱 10대 등 총 110대를 잃었다.
  
 
연합군은 참패를 철저하게 분석했다. 제공권 장악, 항공지원, 지원폭격의 중요성을 깨달았고 상륙부대와 후방 지휘부의 연락, 상륙 시 전차의 돌파 등의 대책을 강구했다. 그게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성공시켰다. 훗날 “디에프에서 죽은 한 명이 노르망디에서 열 명을 살렸다”는 말이 그래서 나왔다.  


  
“인천 상륙작전을 성공시킨 ‘장사(長沙) 영웅’의 넋 어린 곳, 
  거친 파도 속 잠자던 영덕에는 이제 원전(原電)의 꿈이”

▲장사 해변에 있는 장사 상륙작전 기념탑이다.

 

  맥아더 장군의 유엔군이 인천을 향해 다가가던 그날 경상북도 영덕군 장사리에 772명을 실은 문산호가 접근하고 있었다. 14일 부산항을 떠난 문산호가 장사리에 도착했을 때 마침 ‘케지아’가 접근하고 있었다. 파고(波高) 3~4m에 달했고 설상가상으로 닻이 끊어져 문산호는 뭍을 앞두고 좌초했다.
  
 
육지에 가까운 바다 한가운데서 옴짝달싹 못하고 있던 문산호는 적의 좋은 먹잇감이 됐다. 772명의 학도병들은 이런 악조건 속에서도 장사리 해변에 상륙해 며칠간 인민군과 접전을 벌였다. 장사 상륙작전의 원래 계획은 사흘 정도 인민군의 주의를 분산시킨 후 후퇴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9 16일부터 인민군 제5사단의 정예부대인 2개 연대 규모의 부대가 T-34/85 전차 4대를 앞세우고 나타났다. 상륙부대는 9 19일까지 절대 열세 속에서도 간신히 상륙지점으로 되돌아와 해군이 지원한 LST 조치원호를 타고 귀환할 수 있었다. 이 과정에서 139명이 전사하고 92명이 부상을 입었으며 40여명이 적의 포로가 됐다.
  
 
이 작전으로 인천 상륙작전이 성공했다. 인민군은 장사 해변에 국군 2개 연대가 나타난 것으로 오판해 낙동강 전선에서 정예부대를 빼내기에 이르렀다. 맥아더 장군은 친필로 “장사 상륙작전이 인천 상륙작전의 성공에 기여했다”고 평가할 정도로 작전 자체는 성공적이었다.

▲장사 해변에 정박된 문산호는 당시 상륙작전에 쓰였던 배다.
바다에 가라앉은 문산호는 1997년 인양돼 수리를 끝낸 뒤 지금의 자리에 놓였다.

  

  장사 상륙작전은 어린 장병들의 피를 대가로 요구했다. 장병 대부분은 중학생, 고등학생으로 구성된 학도병이었으며 훈련기간은 2주에 불과했다. 부대의 유일한 지원장비는 LST 1척이었는데 상륙할 때 미 해군의 구축함 한 척이 함포 엄호사격을 해 주지 않았다면 땅을 밟아 보지도 못할 지경이었다.
  
 
보급 상태도 열악했다. 3일간만 전투를 진행한다고 딱 3일 동안 쓸 전투물자만 지급했다. 때문에 인민군 주력부대와 교전하는 뜻밖의 상황이 벌어지자 상륙 부대원들은 식량과 탄약 부족에 시달리게 됐다. 이런 조건에서 예정했던 기간 이상을 버틴 것은 기적에 가깝다고 군 전문가들은 평하고 있다.
  
 
더 어처구니없는 것은 1950 10 5일에서야 부대원들에게 입대명령과 036군번이 내려졌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큰 공을 세운 사람들에게 그때까지는 군번 없이 민간인 신분으로 싸우게 만들었다는 이야기가 된 것이다. 장사 해변에서 좌초된 문산호는 1997 3월 인양된 후 복원돼 장사 해변에 놓여졌고 지난해 기념공원이 설립돼 호국 영령들의 넋을 위로하고 있다.
  
 
기자가 장사 해수욕장에 갔을 때 때마침 태풍의 영향으로 거친 파도와 강한 바람이 모래밭을 때리고 있었다. 66년 전 학도병들이 상륙작전을 펼 때도 이와 비슷한 상황이었을 것이다. 이런 영덕 땅에 이제 원자력발전소가 건설된다고 한다. 조국을 지키려 흘린 피가 이제 에너지 기지로 바뀌는 것이다.

 

■인천상륙작전 성공 위한 양동(陽動)작전에 투입된 LST 문산호의 발자취 

최초공개 - 장사동상륙작전 중 좌초한 문산호(汶山號) 선장·선원 명단

최우석 월간조선 기자

 

⊙ LST 문산호(汶山號), 6·25전쟁 당시 여수철수작전·장사동상륙작전에 투입
⊙ 민간인 신분의 선장과 선원 장사동상륙작전 중 전원 전사(戰死)
⊙ 최영섭 전 해군 대령(백두산함 갑판사관)·임성채 해군역사기록관리단 군사편찬과장 노력으로 문산호 선장·선원 이름 66년 만에 세상으로
⊙ “민간인이었던 문산호 선장과 선원 애국심 굉장했다”(최용남 백두산함 함장·최영섭 갑판사관)

 

▲1950년 9월 15일 장사상륙작전에 투입된 문산호의 모습.

 

  1950 6 25일 새벽 남침한 북한은 강원도 동해안의 옥계, 정동진, 금진 등에 549육전대 1800명을 상륙시켰다. 묵호경비부사령관(김두찬 해군 중령)은 즉각 육군과 경찰 연합인 ‘합동 묵호 전투부대’를 편성하고 맞섰다. 아군의 화력으로 장기간 전쟁 준비를 해온 적에 대항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북한군의 박격포격이 점점 치열해졌고 아군은 철수를 결정할 수밖에 없었다.
  
 
묵호경비부사령관은 퇴각을 위해 LST 문산호(汶山號)에 ‘동시 동원령’을 내렸다. 동시 동원령이란 선박은 물론, 민간인 신분인 선장(船長), 선원(船員)까지 동원하는 것이다. 당시 문산호는 석탄 적재를 위해 묵호항에 있었다.

1950년 9월 16일에 만들어진 문산호 선장과 선원 명단. 위에서부터 황재중(선장), 이찬석, 이수용, 권수헌, 부동숙, 박시필, 윤은현, 안수용, 이영룡, 한시택, 김일수 이상 11명. 이 명단은 이들이 장사상륙작전에서 사망하자 육군이 해군 측에 인사 처리를 부탁했고, 이 과정에서 만들어진 것이라고 한다.

 

  LST는 ‘전차 상륙함(Landing Ship, Tank)’의 준말이다. 선체가 넓적하고 평평한 구조여서 해안 깊숙이 진입이 가능하고, 뱃고물에는 출입구가 있어 사람 및 물자를 나르기 편하다. 문산호는 1943 9월 인디애나의 제퍼슨빌(Jeffersonville)에서 건조했다. 태평양 함대에 배치, 2차 세계대전이 끝날 때까지 활동했다. 1947 2월 한국 정부에 매각되어 문산호라는 새로운 ‘함명(艦名)’을 부여받았다. 교통부(交通部) 산하 대한해운공사(大韓海運公司) 소속으로 밀가루, 석탄 운반 등이 주 임무였다.
  
 
전투에 투입된 문산호는 퇴각하는 묵호 전투부대를 태우고 포항으로 철수했다. 아군은 철수에 성공했지만, 그곳에 남은 대부분의 주민은 북한군 549육전대와 처절한 전투 중이었다. 해군본부는 문산호에 묵호 전투부대를 다시 전투지에 투입하라고 명령했다. 1950 6 28일 문산호는 묵호 전투부대와 무기를 싣고 포항에서 묵호로 이동했다. 이동 중인 6 29일 오전 2시경, 묵호 근해에서 문산호는 정체불명의 포격을 받았다. 민간인 신분의 승무원 1명이 사망했다.
  
 
문산호를 공격한 배는 USS CL-119, 미국 경순양함 주노(Juneau)였다. 포격을 받은 문산호는 항해를 멈췄다. 배에 타고 있던 강점복 중위(해군정보장교)는 상륙주정(上陸舟艇)으로 주노함에 가서 문산호가 한국 함정임을 알렸다. 더 이상의 피해는 없었지만 이 사건으로 문산호는 포항으로 회항했다.
  
 
주노함의 문산호 타격은 대한민국 해군 수뇌부가 UN군에 대한민국 해군이 아직 묵호항에 남아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지 않았기에 벌어진 일이었다.  


  
여수철수작전

▲1950년 7월 27일 여수철수작전 때 우리 해군 최초의 전투함인 백두산함은 문산호를 엄호했다.

 

  1950 7 26일 북한군 사단은 순천을 점령하고 여수로 남진해 왔다. 북한군 사단은 김일성의 ‘비밀병기’였다. 부산을 측면 공격해 단번에 한반도를 적화통일 하기 위해 준비한 회심의 카드였다. 6사단은 북한군 내에서도 정예부대로 통했다. 이 부대 병력은 전원 중공이 국공내전을 통해 정권을 장악할 때 뛰어난 전투력을 발휘한, 전투경험이 풍부한 ‘조선의용군들’이었다. 6사단의 임무는 빠른 속도로 호남을 장악하고 진주와 마산을 거쳐 부산을 기습 공격하는 것이었다. 이날 오전 최용남 ‘PC-701 백두산함’ 함장은 문산호 황재중 선장에게 이같이 부탁했다.
  
 
“선장님, 어려운 일을 맡아주셔야겠습니다. 지금 적군이 순천에 들어와 우리 육군과 싸우고 있습니다. 우리 육군은 병력도 적도 무기도 부족해 힘겨운 전투를 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적과 싸우면서 이곳(오동도)으로 후퇴해 올 것입니다. 선장님이 후퇴하는 우리 장병을 수용해 후송하는 막중한 임무를 맡아주셔야겠습니다. 지금처럼 램프(경사로)를 부두에 대놓고 대기해 주십시오. 백두산함 지시가 있기 전에는 절대 배를 떼지 마십시오. 한 명의 병사라도 살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 백두산함은 화력으로 문산호를 엄호하겠습니다.  


  
쏟아지는 적탄에도 버틴 문산호

▲좌초한 대한민국 민간 상륙정 ‘문산호’와 장사상륙작전에 참전한 국군 제1유격대대(명부대) 소속 학도병.

 

  황 선장은 “함장님 지시하신 바를 잘 알았습니다. 명심하고 지시하신 대로 하겠습니다. 우리도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국가 위해 싸워야 할 책무가 있습니다. 염려 마십시오”라고 답했다. 최 함장은 “정말 고맙습니다. 오늘 밤 이응준 장군과 이형근 장군이 문산호에 타실 겁니다. 잘 모셔주십시오”라고 했다. 황 선장은 “네, 잘 모시겠습니다”라고 했다. 최 함장과 황 선장은 악수하며 눈빛으로 서로 신의를 교환했다.
  
  1950
7 27일 새벽 우리 육군과 경찰 혼성부대는 여수역 서북쪽 약 5000m에 있는 석천사(石泉寺) 능선에서 적을 저지했으나, 6사단 제1연대는 새벽 6시경 시내로 진입했다. 후퇴를 시작한 육군부대는 속속 최 함장의 지시를 받고 대기하던 문산호로 들어왔다. 이응준 장군(서남지구 전투사령관)과 이형근 장군(2사단장)도 승선했다. 이응준 장군은 일본 육사(26) 출신으로 국군 창군의 산파역을 맡은 인물이다. 이형근 장군은 이응준 장군의 맏사위로 그 또한 일본 육사(56) 출신이다. 1946년 한국군의 모체인 국방경비대가 창설되자 대위로 입대, 이후 국방경비대 총사령관, 2사단장, 3군단장, 초대 합참의장, 육군참모총장 등 요직을 두루 거쳤다.
  
 
새벽 630분경 문산호가 대기하고 있던 부두 앞 약 300m 언덕에서 격전이 벌어졌다. 박격포탄이 부두에 떨어지고 기관총탄은 불꽃을 날리며 하늘에 피어올랐다. 백두산함은 문산호에 대한 엄호사격을 했다. 아군 병사들은 포복으로 사격하며 문산호 램프로 들어왔다. 적탄에 맞아 피 흘리는 전우를 끌어 들어오는 병사도 많았다. 적 소총과 기관총탄이 문산호에 집중됐다.
  
 
문산호는 적탄을 맞으면서도 최후의 병사 한 명까지 구출하려고 버티고 서 있었다. 마지막 병사가 뒷걸음으로 문산호 램프를 밟았다. 최 함장은 문산호에 출항명령을 내렸다. 문산호는 램프를 걷어올리고 앵커() 체인을 감았다. 백두산함은 언덕에 포진한 적군에게 기관총과 함포를 퍼부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백두산함의 호위를 받은 문산호는 무사히 무슬포 해역에 이르렀다.

▲장사상륙부대는 이름만 제1유격대대였을 뿐 경남 밀양에서 불과 보름 정도 훈련을 받은 앳된 10대 학도병이었다. 트럭을 타고 전선으로 향하는 학도병들.

 

  최 함장은 문산호에 묘박(錨泊) 지시를 했다. 이응준 장군은 황 선장에게 “고맙습니다. 우리 부대를 구하려 너무 수고 많았습니다. 이 은혜 두고두고 잊지 않겠습니다”라고 했다. 황 선장은 “최 함장의 명령에 따른 것입니다. 조국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라고 했다. 문산호가 여수철수작전을 성공적으로 완수하는 순간이었다.
  
 
최 함장의 지휘로 문산호를 엄호한 백두산함은 우리나라 최초의 전투함이다. 1945 11 11 3군 중 가장 먼저 창설된 해군은 전투함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판단, 미국에서 사들이기로 결정했다. 군함 구입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해군의 전 승조원이 월급에서 5~10%씩을 냈다. 이렇게 모은 성금은 18000달러. 여기에 이승만 대통령이 42000달러를 보탰다.
  
 
손원일 해군참모총장은 6만 달러를 가지고 1949 10 1일 미국으로 건너가 군함을 샀다. 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43 11 8일 건조한 군함으로 제2차 세계대전 종전 후 1948 5월 미 상선학교 연습함으로 이관되어 사용되던 비교적 신형 함정이었다. 우리 해군은 산 함정을 백두산함이라 이름 지었다. 백두산함은 최초의 전투함답게 대한해협에서 부산항 부두시설을 파괴하려고 침투하던 북한 수송선을 격침하는 공로를 세웠다.
  
  6
·25전쟁이 일어난 날 북한은 후방인 부산 지역을 교란하기 위해 특수부대원을 태운 함정을 대한해협 쪽으로 우회 침투시켰다. 이때 최용남 함장이 이끄는 백두산함은 이 배를 발견하고 격침해 버렸다. 개전 첫날 육군은 6사단 7연대를 제외하고는 방어전에 실패해 전부 무너졌는데, 해군은 괄목할 승리를 거둔 것이다. 이 전공이 없었다면 북한군 특수부대는 부산에 상륙했을 것이고 그로 인해 한국은 커다란 혼란에 빠졌을 것이다.  


  
장사동상륙작전에 투입된 문산호

▲유엔군이 북한군에 밀리자 더글러스 맥아더(Douglas MacArthur) 유엔군 총사령관은 인천상륙작전을 계획했다.

 

  유엔군이 북한군에 밀리자 더글러스 맥아더(Douglas MacArthur) 유엔군 총사령관은 인천상륙작전을 계획했다. 낙동강을 최후의 보루로 밀고 밀리는 전투 중에 인천상륙작전을 감행해 서울을 탈환한다는 구상이었다. 상륙전은 그의 장기(長技)였다. 태평양전쟁 때 남태평양의 수많은 섬을 점령하며 필리핀을 거쳐 일본의 코앞 오키나와까지 상륙해 온 ‘상륙전의 귀재’가 바로 맥아더 장군이다.
  
 
그런 맥아더 장군도 인천상륙작전은 ‘5000 1의 도박’이라고 말했을 만큼 성패(成敗)를 예측하기 쉽지 않은 작전이었다. 빠른 조류, 지원 함정들이 함포사격 하기에도 불리한 얕은 수심, 심한 조수 간만(干滿)의 차 등 대부대의 상륙을 불가능하게 하는 모든 악조건을 두루 갖춘 탓이다.
  
 
맥아더 장군은 인천상륙작전의 성패가 기만전술에 있다고 봤다. 어디가 목표인지를 숨기려는 유엔군과 알아내려는 인민군의 정보전이 치열했다. 맥아더는 미() 5해병 연대원들에게 ‘군산(群山)’이란 이름을 흘리면서 인천에서 작전을 펼치기 하루 전 동해안 장사(章沙)에서 양동(陽動) 작전을 펴기로 했다. 작전명 174. 장사동상륙작전은 이렇게 시작됐다.
  
 
작전에는 여수철수작전을 성공시킨 문산호가 투입됐다. 1유격대대 4개 중대(772)를 태운 문산호는 1950 9 15일 새벽 4시 반, 장사동 해안에 도착했다. 부산을 떠난 지 이틀만이었다.
  
 
상륙부대는 이름만 제1유격대대였을 뿐 이들은 경남 밀양에서 불과 보름 정도 훈련을 받은 앳된 10대 학도병이었다. 실탄을 채 10발도 쏴보지 못한 이들이 대부분이었다. 군에서 보급받은 것이라곤 소련제 장총과 배낭, 인민군 군복, 물 약간, 건빵 한 봉지, 미숫가루 세 봉지가 전부였다. 원래 이 작전은 위험한 임무 특성상 미 8군이 수행해야 했지만, 미군은 “실패할 위험이 크다”는 이유로 우리 군에 떠넘겼다.
  
 
대규모 병력을 동원하기 어려웠던 육군은 훈련도 제대로 받지 못한 학도병들에게 작전을 배정했다. 부대장 이명흠 대위 이름을 따 ‘명()부대’로도 불렸던 이들을 태운 문산호는 장사동 근해에 함미닻을 투묘(投錨)하고 해안으로 접근해 들어갔다. 이명흠 대위가 손가락으로 접안(接岸) 장소를 가리켰다. 황 선장은 너무 위험하다고 했다. 이 대위는 작전 지점이라며 접안을 지시했다. 황 선장은 위험을 무릅쓰고 그곳으로 뱃머리를 돌렸다. 날씨가 도와주지 않았다. 때맞춰 내습(來襲)한 태풍 ‘케지아’ 때문에 암초에 걸린 것이다. 북한군의 집중포화가 시작됐다.
  
 
“바다에 빠져 고기밥이 되는 것보다 육지에 올라가 까마귀밥이 되는 게 낫다.” 이 대위의 상륙(上陸) 명령이 떨어졌다. 새벽 5시 반이었다. 해변까지는 50m. 파도 높이는 4~5m에 달했다. 배는 옴짝달싹하지 못했다. 배에서 나오던 대원들은 해발 200m 고지에 포진한 북한군 2군단 예하 101보안부대의 기관총 세례에 차례로 쓰러져갔다.
  
 
류병추 장사상륙참전유격동지회장은 “총알이 비 오듯 쏟아졌고, 죽고 사는 기로에 선 게 실감나지 않을 정도로 정신없었다”고 회상했다. 많은 대원이 거센 파도에 휩쓸려 바닷속으로 빨려들어 갔다. 대부분의 탄약도 바다에 유실됐다.  


  
상륙작전 과정에서 선장·선원 전사

▲영덕군이 복원한 문산호. 영덕군은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을 위해 학도병들이 큰 희생을 치른 장사상륙작전 전승기념공원 조성사업을 추진 중이다.

 

  장시간의 사투(死鬪) 끝에 ‘명부대’는 상륙에 성공했다. 황 선장과 선원들도 함께였다. 문산호에 파견됐던 미 해군 쿠퍼 상사는 해군본부에 문산호와 명부대의 상황을 알렸다. 해군본부는 인왕(LT-1)호를 현지에 급파했다. 명부대의 상륙 다음날인 1950 9 16일 오전 7시 현지에 도착한 인왕호는 문산호 구출에 착수했지만, 실패하고 부산으로 철수했다. 이 사이 유격대원들은 해안선을 따라 이동하며 적진지를 파괴하고, 도로와 교량을 폭파했다. 이 과정에서 ‘유격전의 귀재’로 불렸던 군사고문 전성호 대령, 황 선장과 선원 전원이 전사했다.
  
 
살아남은 이들은 장사동상륙작전이 인천상륙작전의 교란작전인지도 모른 채 북한군 정예 병력과 악착같이 싸웠다. 명부대의 기세에 인민군은 포항에서 대규모 병력을 빼 장사 해안으로 출동시켰다. 이 와중에 맥아더 장군의 인천상륙작전이 성공, 전쟁의 주도권이 아군으로 넘어왔다.
  
 
해군본부는 1950 9 18일 상륙부대의 철수를 지원하기 위해 LST 조치원호를 현지에 보냈다. 조치원호가 현장에 도착한 것은 다음날인 9 19일 오전 6시였다. 적의 공격 탓에 배를 해안에서 200m쯤 떨어진 바다 한가운데에 세웠다. 상륙 당시와 비슷한 상황이 재연됐다. 북한군은 아군이 다시 상륙을 기도하는 것으로 알고 더욱 맹렬한 사격을 가했다. 대원 다수가 적탄에 맞아 쓰러지거나 높은 파도에 휩쓸려 익사했다.
  
 
조치원호와 함께 이들을 데리러 온 미() 해군 LT(해난구조함) 함장 피어드 소령은 “군장을 벗어 던지고 살아남는 데 집중하라”고 명령했다. 대원들은 혼신의 힘을 다해 헤엄쳐 배에 올랐다.
  
 
류병추 회장은 “병사 목숨을 아끼는 미군 태도에 감동했다. 부산항에 도착하자 국군 지휘부는 ‘어떻게 살아 돌아왔느냐’는 반응이었다. 상륙작전에 학도병과 일반 화물선을 투입한 점을 보면 희생돼도 그만이라는 생각이었던 것 같다”고 했다.
  
 
상륙부대 학도병 39명은 적의 공격과 구명대가 유실되는 급박한 상황 속에서 배에 오르지 못했다. 이들 중 많은 이가 복귀하지 못하고 적의 포로가 되거나 죽음을 맞았다. 일부는 우리 군이 북진(北進)하는 과정에 합류했다.
  
 
북한군의 포로가 되었다가 탈출한 고규혁씨는 훗날 《버림받은 충혼》(1993)이라는 수기를 펴냈다. 살아서 부산으로 돌아온 학도병들은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했다는 소식을 듣게 되지만, 곧 다른 작전들에 투입되고, 이들이 장사상륙작전을 실행했다는 사실은 묻혔다.
  
 
한국전쟁의 비사()가 세간에 공개된 것은 생존해 있던 당시 ‘상륙부대’ 학도병들이 1980 7 14일 ‘장사상륙작전 유격 동지회’를 결성하면서다. 동지회는 경기도 양평 소재 청운사 주지 스님과 함께 전국적 모금운동을 펼쳐 1991 9 14, 장사상륙작전을 감행하던 그날을 기해 장사리 해안에 위령탑과 전적비를 세우고 지금까지 매년 위령제를 올리며 꽃다운 영혼들의 넋을 기리고 있다. 이들의 노력에 힘입은 덕인지 1997 3 6일 문산호가 세상 밖으로 나왔다. 장사리 앞 해안을 수색하던 해병대 제1사단 대원들이 바닷속 갯벌에서 문산호를 발견한 것이다.  

 

2017.09.16 인천상륙작전 관련 최규봉 영웅신화 어디까지가 사실일까?

Victory has many fathers, but defeat is an orphan.이란 서양 격언이 있다. “승리는 아버지가 많고 패배는 고아다”라는 말이니까, 성공한 일에는 공로자를 자칭하는 사람들이 많고 실패한 일에는 아무도 책임지려 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인천 앞바다 작은 섬 팔미도에는 하얀 등대가 있고 그 아래 사진과 같은 기념비 하나가 있다. 거기에는 Douglas MacArthur(다글러스 매카앗서) 장군의 상반신 모습이 좀 어설프게 조각되어 있고 그 옆에는 "등대에 불을 밝혀라!"라는 제목 밑에 다음과 같은 글이 새겨져 있다. (MacArthur의 비교적 정확한 발음은 “매카앗서”이므로 이 글에서는 맥아더 대신 매카앗서를 쓰기로 한다. , 아래 기념비 글은 적힌 그대로 옮긴다).

  

“1950년 9월15일 한국동란 승리의 전기를 마련한 인천상륙작전은 제2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끈 노르망디 상륙작전과 더불어 불가능을 가능케 한 작전으로서 세계전사에 길이 남을 것이다.

 

그 작전을 성공하려면 팔미도 등대를 탈환, 점등해야 하므로 이를 위해 조직된 특공대는 유진 F. 클라크 미해군대위, F. 클락혼 미육군소령, 존 포스터 미육군중위, 계인주 육군대령, 연정 해군소령, 최규봉 KLO 고우트부대장 등 6명이었다.

 

9월14일 19시, 역사적인 인천상륙작전을 앞두고 "15일 0시 팔미도 등대에 불을 밝혀라"라는 다글라스 맥아더 사령관의 작전명령이 떨어졌다. 9월14일 22시 격전 끝에 등대는 점령하였으나 점등장치의 나사못이 빠져 점화불능 상태, 칠흙 같은 어둠속에서 기진맥진 엎드려 있던 중 우연히 등대 바닥에서 최규봉의 손에 잡히는 것이 있었다. 바로 그것이 나사못이었다. 그래서 특공대는 드디어 등대의 불을 밝히는데 성공하였고 성조기를 높이 게양하였다.

 

초조하게 기다리다 등대불과 성조기를 확인한 맥아더 사령관은 연합국함대 261척에게 인천앞바다로 진격명령을 내렸다. 이렇듯 팔미도 등대에 불을 밝혀 인천상륙작전을 성공하게 한 특공대 중 군인 5명에게는 미 은성무공훈장이 수여되었고 최규봉 부대장에게는 등대에 게양했던 성조기와 맥아더 장군이 친필서명한 사진이 증정되었다. 그 성조기는 최규봉부대장의 기증으로 현재 맥아더장군 기념관에 전시되어 있으며 사진과 감사장은 우리 전쟁기념관에 전시되어 있다.

 

이제 6.25동란 50주년을 맞아 팔미도 등대가 간직한 희귀한 역사와 특공대원의 빛나는 공적과 아울러 이 작전에서 희생된 KLO대원들의 젊은 넋을 기리고 길이 후세에 전하기 위하여 그들의 발자취가 깃들어 있는 이곳에 기념비를 세우는 바이다." 

 

이 기념비는 인천상륙작전 50주년인 2000년에 새워진 것인데, 기념비에 새겨진 글은 당시 국방부 신문 ‘승리일보’ 주간이었던 시인 구상 씨가 쓴 것이라는데 우선 문인의 글 치고는 문장이 그리 매끄럽지 못하다.

 

그러나 그건 문제가 아니다. 문제는 이 글의 중요한 부분이 사실과 많이 다르다는 것이다. 팔미도 등대 불은 최규봉을 비롯한 6명으로 조직된 특공대가 켰다고 했는데, 최씨는 트루디 잭슨 작전(Operation Trudy Jackson) 즉 인천상륙작전을 위한 사전 준비작전의 멤버가 아니었다. 매카앗서 장군의 정보참모였던 차알스 윌로비 소장이 쓴 책 MacArthur 1941-1951’에 의하면, 트루디 잭슨 작전 멤버는 클라크 해군 대위를 비롯해서 한국 해군중령 연정, 한국 육군대령 계인주, 미국 육군소령 노버그, CIA요원 클락혼 그리고 2명의 통신부대 위관급 미육군장교 2명 등 도합 7명으로 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러나 최규봉은 자기도 트루디 잭슨 팀 소속이었다고 주장했다.

 

이들 7명 중 4명은 일찍 인천을 떠나고 팔미도 등대 점등에 참가한 트루디 잭슨 팀 멤버는 클라크, 연정, 계인주 셋 뿐이었다. 그러나 클라크는 최규봉씨가 팀 멤버는 아니지만 팔미도에 있었다는 것은 인정했다. 클라크 회고록에는 최규봉 이름이 한번도 언급되지 않았으나 1957년 최씨가 성조기를 매카앗서 장군에게 선물하는 과정에서 미육군성이 클라크에게 물어서 최씨도 팔미도에 있었던 사실은 확인했다.

 

기념비에는 또 최규봉이 어둠 속에서 나사못을 찾았기 때문에 팔미도 등대 불을 켤 수 있었다고 적혀있는데, 이것은 최씨의 주장을 그대로 옮긴 것이다. 트루디 잭슨 작전 지휘관 클라크 대위가 남긴 회고록에 따르면, 당시 등대에는 아무 이상이 없었다. 그리고 최씨는 등이 전기로 작동하는 것이라고 했으나 클라크는 등에 새겨진 글을 보고 프랑스제 석유등이라고 분명히 밝혔다.

 

또 최규봉은 등대에 불이 켜진 후 미국 국기 성조기를 자기가 등대에 게양했다고 했는데, 지휘관 클라크 대위의 회고록에는 그런 얘기가 없다그러나 미육군성 문서에는 팔미도에 성조기가 게양되었으며(누가 기를 게양했는지에 대한 기록은 없다) 그 기는 나중에 최규봉씨가 가지고 있었다고만 기록 되어있다. 미육군성이 최씨의 말만 듣고 쓴 것인지 클라크의 확인을 받고 그렇게 썼는지는 알 길이 없다. 팔미도에 정말 성조기가 게양되었다면 사진이라도 한 장 남아있을 법 한데 현재까지는 그런 사진은 발견되지 못했다. 어쨌든 최씨는 이 성조기를 전쟁이 끝난 후 매카앗서 장군한테 기념품으로 보낸다.

 

그리고 팔미도 등대 점등 작전 참가 군인 5명에겐 Silver Star(은성무공훈장)가 수여되었으나 민간인 최규봉은 등대에 게양되었던 성조기와 매카앗서 장군이 친필로 서명한 사진을 받았다고 기념비에 적혀있지만, 그것도 사실과 좀 다르다. 클라크 대위와 연정 소령이 나중에 은성훈장을 받은 건 사실이지만, 최규봉이 매카앗서 장군으로부터 친필서명 사진을 받은 것은 인천상륙작전 7년 후인 1957년 얘기며 그가 그것을 받게 된 것은 최씨가 취한 어떤 행동 때문이다.

 

그 어떤 행동은 이러하다. 최규봉은 1957 8월 서울의 미국대사관을 찾아가 무관(웰즈육군대령)을 만난다. 그리고 매카앗서 장군에게 보내는 편지(본인이 직접 쓴 건지 번역사가 쓴건지 분명치 않지만 영어가 좀 서툴다)와 자기가 7년 전 인천상륙작전 때 팔미도 등대에 꽂았다는 성조기를 고급스런 자개무늬 상자에 넣어서 웰즈 대령에게 맡기면서 그 해 915일 인천상륙작전 7주년을 맞아 인천에 매카앗서 장군 동상 제막식을 거행할 때 장군에게 좀 전해달라고 부탁한다. 그러나 장군의 방한 계획이 없음을 알게 된 무관은 최씨의 편지와 성조기를 뉴우욕에 거주 중인 매카앗서 장군한테 보내기로 결정한다.

 

성조기와 최씨의 편지를 받은 매카앗서 장군 측근은 파티를 열어 그 선물을 장군에게 전달하기로 결정한다. 당시 77세의 퇴역 장군 매카앗서는 뉴우욕의 한 호텔에 기거하며 적적한 여생을 보내고 있었으므로 그를 위로할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을 지도 모른다. 하여튼 측근들은 그해 116일 파티를 연다. 파티에는 약 30명의 현역 또는 퇴역 장성들과 민간인 몇 명이 참석했다. 그러나 최규봉은 파티에 초청하지 않았다. 그 대신 장군의 친필서명 사진과 감사편지를 서울의 미국 대사관 무관 웰즈 대령에게 보내고 최규봉에게 전해주라고만 했다.(1957 미육군성 문서)

 

▲**이기붕 국회의장이 최규봉씨(오른쪽)와 악수를 하고 있다. 이 때만해도 최씨는 출세길로 들어섰다는 꿈을 꾸고 있었을 것이다.

 

그 선물을 받은 최씨는 당시 한국 이승만 대통령에게 아들을 양자로 바친 국회의장 이기붕 측근과 접촉, 매카앗서 장군의 편지와 사진을 이 의장을 통해 전달받는 형식을 취하도록 하는데 성공한다. 증정식은 그해 크리스마스 이브인 1224일 국회의장실에서 열렸다. 그런데 최씨의 행운은 거기서 일단 정지한다.

 

이 전달식에서 최씨를 본 이기붕 의장은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은데”라고 말한다. 그러자 거기 참석한 한 사람이 최규봉을 이범석 장군의 측근이라고 소개한다. 이범석은 당시 이기붕이 싫어하는 정적의 한 사람이었다. 이기붕의 얼굴에서 갑자기 웃음이 사라졌다. 고위공직 자리 하나 줄 것이라는 귀띔까지 받았던 최씨에게는 날벼락이었다. (“국경 없는 기자단” 서울 특파원 김비태가 Bridge(가교) 잡지 1997 3월호에 쓴 기사 참조) 이 행사는 주요 한국 신문이나 방송이 보도하지는 않은 것 같고 영자신문 The Korean Republic The Korea Times만 보도했다.

 

이런 일이 있은 후 몇 년 동안 최씨는 경제적 어려움을 겪은 듯하다. 그는 1962 85일자로 매카앗서 장군에게 경제적 도움을 요청하는 편지를 보냈다. 그 때는 장군이 별세하기 2년 전이라 그 편지가 전달되었는지 기록이 없어 알 길이 없다. 매카앗서 기념관에는 최씨의 편지만 보관되어 있다. 최씨는 자기가 팔미도 등대에 꽂았다는 성조기를 10만불(요즘 가치로는 100만불쯤 될듯)에 사겠다고 한 미국 신문사도 있었으나 거절하고 그 기를 장군에게 보냈다고 했다.

 

어쨌든 최규봉씨는 성조기를 매카앗서 장군에게 보내고 그 답례로 받은 장군의 친필서명 사진과 편지 덕분에 한국에서 영웅이 되었다. 1990년대 이후 한국 신문, 방송들에 많이 그를 소개했다. 그 사진과 감사편지를 최씨가 받게 된 경위를 모르는 사람들은 그를 매카앗서 장군이 인정한 인천상륙작전의 영웅으로 생각할 것이다. 서울의 전쟁기념관에도 그 사진과 편지가 전시되었다.(지금은 전시가 되지 않고 있다 한다.)

 

 

필자는 2016 1015일 자동차로 5시간 걸리는 미국 버지니아 주 노옵호오크 시에 가서 MacArthur Memorial을 방문했다. 그곳의 curator(관리인) Corey Thornton 씨는 내가 미리 부탁한대로 최규봉씨와 관련 서류 뭉치를 나에게 보여주었다. 그리고 문제의 그 성조기도 보여주었는데 그 기는 지금은 전시장에 있지 않고 창고에 들어있다고 했다. 그와 함께 성조기를 자세히 보았지만 최씨가 말한 작전명령 번호 같은 건 없었다. 다만 기의 가로 세로 길이와 기념관 자료번호(F6 139)만 적혀있는 평범한 성조기였다.

 

 

그곳의 archivist(고문서 전문가) James Zobel은 이런 말을 해주었다. 최규봉 씨가 2002년 그곳을 방문했을 때 인터뷰를 요청하자 응했는데 녹음기를 켜니까 갑자기 인터뷰를 중단했다고 말해주었다. 왜 그가 인터뷰를 중단했는지 알 길이 없다.

 

최씨가 KLO (Korea Liaison Office) 대원으로 한국전쟁에서 대공 첩보활동을 통해 유엔군을 도운 전공은 인정받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그가 인천상륙작전 당일 매카앗서 장군을 기함에서 만났다는 것은 사실이 아닌 것이 거의 확실해 보인다. 또 팔미도 등대와 성조기에 관한 그의 말이 과장되었거나 일부는 허위일 수도 있다는 느낌을 버릴 수가 없다.

 

역사는 가능한 한 정직하게 기록되어야 한다. 필자는 최규봉씨를 만난 적이 없을뿐 아니라 그에게 아무런 개인감정도 없다. 솔직히 이런 글을 쓰는 걸 망서리기도 했다. 그러나 역사학도의 한 사람으로서 역사가 가능하면 정확하게 기록되어 후세에 전달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이 글을 썼다.

  

클라크도 최규봉도 매카앗서 장군을 직접 만나지는 못했다

 

조선일보, 월간조선 등의 한국 신문, 방송 등을 통해 최규봉씨가 수십년 동안 계속 주장해온 것과 인천상륙작전 직전 2주 동안 인천 앞바다 섬들에서 정보수집 작전을 전개한 미해군대위 유진 클라크의 수기 내용을 비교해보기로 한다.

 

<1> 최규봉은 1950 818일 인천 앞바다의 덕적도 섬에서 클라크 대위를 처음 만났으며 그때 클라크로부터 Operation Chromite(인천상륙작전의 공식명칭) 이야기를 처음 들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클라크는 818일에 일본 토오쿄에 있었으며 826일에야 유엔군사령부 소속 육군소장 홈즈 대거와 해군대령 에드워드 피어슨으로부터 Operation Trudy Jackson(트루디 잭슨 작전 즉 인천상륙사전준비작전)을 수행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2> 최씨는 99일 매카앗서 사령부로부터 팔미도를 장악하라는 명령을 받고 그 섬에 있던 북한군과 여러 차례 총격전을 벌였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클라크 대위는 한국 해군중령 연정과 두 차례 팔미도에 들어가 보았으나 그 섬에 적군은 없었으며 등대의 석유등에도 별 문제가 없었다고 그의 수기에 썼다.

 

<3> 최씨는 915일 오전 0 40분에 팔미도 등대에 불을 켜라는 명령을 자신이 직접 매카앗서 사령부로부터 무전으로 받았으나 작은 나사 하나를 3시간 동안 찾느라 100분이나 늦은 오전 2 20분에야 점등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클라크 대위는 사령부로부터 오전 030에 점등하라는 지시를 받았으나 그 섬에 미리 가 있던 한국인 협조자들이 클라크와 연정을 적으로 오인하고 발포를 하는 바람에 20분 늦은 오전 0 50분에야 등대불을 켰다고 기록했다. 하필 그때 클라크가 2주 동안 작전본부로 쓰고 있던 영흥도를 향해 북한군이 처들어오고 있던 상황이었기 때문에 영흥도에서 머지 않은 팔미도에서 그런 아군끼리의 오인사격이 있었던 것 같다.

 

<4> 최규봉은 자신이 팔미도 등대불을 켠 후 자기와 클라크, 연정, 계인주, 클락혼이 작은배를 타고 매카앗서 장군이 타고있는 함정 Mount McKinley호로 가서 매카앗서 장군의 정보참모 윌로비 소장을 만났으며 그의 소개로 매카앗서 장군도 만났다고 주장했다.

 

▲위 사진이 그날 찍은 사진이라고 최씨는 주장했다.

 

 그러나. 후에 한국 해군참모총장을 지낸 함명수 제독은 위 사진이 인천상륙작전 개시일인 915일 찍은 것이 아니라고 말했다. 왜냐하면 사진에 보이는 두 미육군장교는 9월초에 이미 인천을 떠났기 때문이라고 했다. (함 제독과 그의 선배 이성호 제독은 ROKPC 703호 함정으로 클라크 팀을 지원했다. 이 제독도 후에 해군참모총장이 된다.)'

 

위 사진에서 미육군 군복을 입고있는 한국인은 얼굴 한쪽만 보여서 그게 최규봉(당시 28)이라고 판단하기는 어렵다.

 

 

위 사진은 인천상륙작전 직전의 2주동안 클라크 팀을 도와준 한국인 지원자들과 찍은 사진이다. 최규봉은 이 유명한 사진에 자기가 들어있다고 말한 적이 없다. 오른쪽으로부터 클라크 대위, 한 사람 건너 계인주 대령과 연정 중령이다. 최씨가 클라크와 같이 찍은 게 확실한 사진은 한 장도 없다.

 

클라크 대위는 수기에서 오직 자기와 연정 중령 그리고 계인주 대령만이 상륙작전 시작 직후 작은 통봉배를 타고 매카앗서 장군이 타고있는 함정을 찾아가 그 배에 탔다고 수기에 적었다. 이 부분에 대해 그가 쓴 것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날이 밝아 아침이 되자 클라크는 망원경으로 매카앗서 장군이 타고 있을 기함(旗艦) 마운트 매킨리 호(號)를 찾아냈다. 그리고 통통배를 타고 연정, 계인주와 함께 기함 쪽으로 접근해갔다. 기함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 그는 그의 해군 장교 모자를 벗어 손에 들고 흔들었다. 그러자 거대한 매킨리호 함상에서 누군가가 메가폰을 입에 대고 "접근하지 말고 정지하라!"고 소리쳤다. 매킨리호에서는 클라크 등이 타고있는 디젤엔진 통통선을 적의 자살특공 선박으로 의심한 것 같았다.

 

클라크는 통통선 선장(李씨로만 밝혀짐)에게 엔진을 끄라고 지시했다. 그러자 기함으로부터 소형 상륙정 한 척이 접근해 왔다. 거기에 탄 해군소위가 기관단총을 클라크 대위에게 겨누었다. "누구냐?" 소위가 물었다. "나는 미해군 대위 유진 클라크다. 사람 다치기 전에 총을 치워라!" 클라크가 대꾸했다. 소위는 기함으로 돌아가 함장에게 미해군 대위라는 자가 이상하게 생긴 작은 발동선에 타고 있다고 보고했다. 함장이 "그 자가 우리 해군 장교라는 걸 어떻게 믿을수 있나?"고 묻자 소위는 "우리 해군 장교모자를 쓰고 있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이렇게 해서 클라크가 먼저 기함에 승선, 신분이 확인되자 통통배에 남아있던 두 한국군 장교 연정과 계인주도 매킨리호에 올라갈수 있었다. 

 

매카앗서 장군은 팔미도 등대 불켜는 것 몰랐다

 

클라크 수기에는 자기 혼자 또는 연정과 계인주를 데리고 함상에서 매카앗서 장군을 만다는 말이 없다. 만일 만났다면, 수기에서 반드시 언급했을 것이다. 일개 해군 대위가 전설적인 5성 장군 매카앗서를 만났다면 그야말로 “가문의 영광”이다. 그런데도 수기에 전혀 기록이 없다는 것은 그가 장군을 직접 대면한 일이 없다는게 나의 판단이다.

 

다음과 같은 사실이 나의 판단을 뒷받침해 준다. 사실은 매카앗서 장군도 팔미도 등대 점등 작전에 대해서는 모르고 있었고, 오직 클라크 대위의 직속 상관들만 알고 있었던 것 같다.

 

1965년에 출판된 매카앗서 장군 회고록 "Reminiscences"(회고)를 보면, 장군은 인천상륙작전 비밀이 적에게 누설되지 않았음을 자랑하면서 이렇게 썼을 뿐, 팔미도 등대 얘기는 한마디도 없다.

 

"저 멀리 바다 위에서 불이 하나 반짝거리는 게 보였다. (인천항구로 들어가는 길목인) 비어수로에 항해등이 켜져 있었다. 적은 우리에게 완전이 기습을 당한 것이다. 적은 항해등도 끄지 않았다."

 

또 상륙 당일 장군을 바로 옆에서 취재한 미국 종군기자 칼 마이던도 TIME(1950 925일자)에 이렇게 썼다. "인천 항구쪽에서 깜박거리는 불빛이 보였다. 그것을 보고 도일 해군 제독이 매카앗서 장군에게 "적이 (고맙게도) 항해등까지 켜놓았군요"라고 말하자 장군은 "(그 놈들) 예의 한번 바르군"이라고 말했다." 장군이 타고 있던 군함에서 팔미도 등대까지는 상당히 먼 거리였으므로 등대불이 항해등처럼 보였던 모양이다.

 

권위있는 한국전쟁사로 유명한 In Mortal Combat (John Toland ) 187쪽에도 매카앗서 장군은 팔미도 등대 점등 보고를 받은 바가 없다고 기록되어있다. 또 매카앗서 비평서인 MacArthur: The Naked Emperor (벌거벗은 황제 매카앗서)에도 매카앗서는 details(지엽적인 일)에는 관심이 없는 지휘관이라고 말하고, 팔미도 점등 사실도 모르고 있었다고 적혀있다.

 

그런데 최규봉은 그 바쁜 상륙작전 첫날 그것도 오전 10시경에 자기가 다른 5명의 특공대원과 함께 매카앗서 장군을 함상에서 만났고, 소원이 뭐냐고 해서 팔미도에 게양된 미국국기를 선물로 달라고 했더니 장군이 허락하더라고 주장했다.

 

최씨가 매카앗서 장군을 면전에서 만난 일이 없다는 또 하나의 증거는 그가 장군의 키가 175cm에 불과했다고 월간조선 기자에게 말한 것이다,(2003 9월호 월간조선) 그러나 장군의 키는 6 feet 182cm여서 아이젠하워 대통령보다도 5cm가 더 컸다

 

영화 "인천상륙작전"에 대하여 

2016년 한국과 미국에서 동시에 개봉되어 흥행에 성공한 한국영화 "인천상륙작전"을 보면 클라크 팀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이 없고 임병래와 홍시욱을 포함한 한국인 17명이 모든 첩보활동과 전투를 도맡아 했으며, 팔미도 등대 점등도 한국인들만 9 14일 밤 팔미도에 들어가서 인민군과 싸워 이기고 등에 불을 킨 것으로 그려져 있다. 영화니까 스토리가 역사적 사실과 어긋나도 비난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이 영화를 역사적 사실로 믿어버리면 클라크 대위 같은 진짜 영웅들을 잊어버리는 결과가 되지 않을까 걱정이 된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인천상륙작전 준비작전의 최고지휘자는 유엔군 최고사령부가 직접 보낸 클라크 대위였다. 그는 그의 한국인 전우 연정이나 계인주와는 달리 전쟁이 끝난 후 자기 선전을 전혀 하지 않았다. 그는 생전에 인천에서 2주 동안 적어둔 일기를 50년 동안 벽장에 넣어두고 출판할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가 작고한 후 가족이 그 수기를 기억하고 그가 별세한지 2년 후 겨우 햇볕을 보게된 것이다. 이런 겸손한 영웅의 솔직한 일기가 책으로 발간된 것이 바로 The Secrets of Inchon이다.

 

▲MacArthur Memorial본관 정문에서 필자
조화유
재미 작가,영어교재 저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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