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여담 2021-08/ 08월 02일(월) 벽화 빙자 범죄 - 08월 31일(화) 법무부 장차관의 갑질
오후여담 2021-08/ 문화일보
08월 02일(월) 벽화 빙자 범죄
이도운 논설위원
인류는 구석기 시대부터 동굴과 무덤 등에 그림을 그려왔다. 선사 시대 벽화에는 동물과 사냥이 자주 등장하는데, 숭배와 풍요 기원이 목적이었다고 전문가들은 해석한다. 역사학자들에게는 당시의 사회상을 연구하는 귀중한 자료가 된다. 이집트의 피라미드에서 발견된 벽화는 그 자체가 인류사이고, 고구려·백제·신라 고분 벽화는 한국사의 보고(寶庫)다.
근·현대에 들어오면서 벽화는 주술과 역사에서 정치와 사회의 영역으로 넘어온다. 정책의 수단이 되거나, 대중에게 메시지를 전달하는 미디어로 발전했다. 미국에서는 1920년대 대공황 시기에 실업자가 된 예술가들을 구제하기 위해 공공시설에 벽화를 그리도록 했다. 말하자면 ‘어용’ 벽화였지만, 벤 샨 같은 작가는 그마저도 예술의 경지로 끌어올렸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웃 나라 멕시코에서는 사회주의 리얼리즘 계열 화가들이 벽화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멕시코 혁명 정부도 아즈텍 등 역사를 신화화하고, 계몽 정책을 찬양하는 일련의 벽화를 그리도록 예술가들을 동원했다.
1980년대 들어 미 뉴욕의 슬럼가에서 그라피티(graffiti)라는 새로운 벽화가 등장한다. 그라피티는 이탈리아 말로 낙서라는 뜻인데, 남의 영역에 허락을 받지 않고 무단으로 그린 것을 말한다. 주로 흑인과 빈곤층의 좌절과 저항 의식을 글자와 그림 형식으로 스프레이 페인트를 이용해 표현했다. 그러나 타인의 재산권 등을 훼손하는 행위이기 때문에 대부분 국가에서 범죄로 분류된다. 1996년 루디 줄리아니 뉴욕시장은 ‘깨진 유리창’ 이론에 근거해 그라피티를 지우기 시작했는데, 3년 만에 강력 범죄가 75%나 감소했다는 통계도 나왔다. 그러나 몇몇 그라피티는 예술적으로 워낙 뛰어날 뿐만 아니라, 키스 해링의 ‘마약은 쓰레기다’ ‘안전한 섹스’ 같은 전향적 메시지를 담은 작품도 나오면서 재평가가 이뤄지기도 했다.
서울 종로구 관철동의 중고서점 벽에 그려진 ‘쥴리의 남자들’ 벽화를 둘러싸고 정치적 논란이 뜨겁다. 표현의 자유와 명예 훼손, 여성 혐오까지 다양한 논쟁이 벌어진다. 벽화든, 코미디든, 표현의 자유와 정치적 풍자는 폭넓게 인정돼야 한다. 그러나 사실(fact)에 근거하지 않은 일방적 공격은 풍자가 아니라 비난, 비방일 뿐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08월 03일 원자력안전委의 ‘변심’
이신우 논설고문
청와대가 비행기 추락 사고를 당할 ‘가능성’이 있다고 청와대를 폐쇄하지는 않는다. 이미 적으로부터의 공격을 차단할 수 있는 안전망이 가동 중이기 때문이다. 원자력 발전소도 마찬가지다. 그런데도 원자력안전위원회는 지난해 완공한 신한울 1호기를 7개월이 되도록 운영 허가를 내주지 않았다. 이유가 황당하다. 비행기 추락사고 시 안전성 등을 문제 삼은 것이다. 심지어 북한 장사정포나 미사일 공격 이야기도 나왔다. 이렇듯 심모원려의 원안위가 올여름 폭염과 전력 부족 ‘가능성’에는 이상할 정도로 민감하게 반응했다. 원전 가동을 아낌없이 허가해준 것이다.
원래 8월 말까지로 예정됐던 신월성 1호기는 정비 일정이 갑자기 앞당겨져 지난달 18일부터 가동에 들어갔다. 안전을 이유로 15개월을 끌어온 신한울 1호기도 운영허가를 받았다. 신고리 4호기, 월성 3호기도 마찬가지다. 원전 정비와 재가동 결정에 관한 사항은 원안위의 고유한 소관이다. 그런데도 김부겸 국무총리가 “정비 중인 원전의 조기 투입에 적극 나서겠다”고 밝히자마자 원안위가 알아서 기는 형국이 돼버렸다. 하지만 총리 지시 하나로 원안위가 그렇게 빠른 속도로 변절을 했을까?
원안위는 원자력 안전성을 기술적으로 확인하는 독립기구다. 게다가 이번 원안위는 과거와 성격부터 전혀 다르다. 위원 8명 중 원전 전문가는 단 1명뿐이다. 위원장은 원전 전문가라지만 대표적 탈핵 인사다. 나머지는 아예 원자력과 인연조차 없다. 사회복지학·행정학·변호사·의학·지질학·금속학 전공자들로 오로지 공통점은 원전 혐오자라는 것뿐이다. ‘모태 원전 반대론자’인 이들 위원이 갑자기 평소의 신념을 꺾고 원전 가동 찬성으로 돌아선 배경은 무엇이었을까. 혹시 만에 하나 블랙아웃(정전 사태)이라도 발생할 경우 여론의 분노를 두려워 한 ‘보이지 않는 손’이 작용한 것은 아닌지 의심스럽다.
만일 이것이 사실이라면 원안위의 독립성 훼손과 배임 행위 조장으로 연결될 수 있는 큰 사건이다. 독립성 수호를 위해서라도 행동하는 양심이 요구되는 시점이다. 강요된 침묵 탓에 여론으로부터 ‘죽을래 위원’ ‘신내림 위원’이라는 모욕이나 당할 수는 없지 않은가. 신념에 따른 내부 고발자를 보호하는 국민권익위원회가 여러분을 기다리고 있다.
08월 04일 올림픽 종목 생살부
이도운 논설위원
4일 저녁 많은 시청자를 TV 앞으로 끌어들일 도쿄올림픽 야구 한·일전. 2008년 베이징올림픽 이후 13년 만에 야구가 올림픽 경기로 부활하면서 열릴 수 있었다. 올림픽 종목은 처음부터 붙박이인 종목도 있지만, 시대와 개최 지역에 따라 늘 변해왔다. 첫 근대 올림픽인 1896년 아테네 대회에서는 육상과 수영·체조·레슬링·역도·사이클·사격·펜싱·테니스 등 9개 종목 53개 세부 경기에서 각국 선수들이 기량을 겨뤘다. 당시 사이클은 100㎞ 경주로 트랙을 무려 300바퀴 돌아야 했다. 9명이 참가해 2명만 완주했다.
1900년 파리 대회에 세계에서 가장 인기 있는 스포츠인 축구와 골프·럭비·수구·양궁·요트·조정·줄다리기 등이 추가됐다. 줄다리기는 1900∼1920년 대회까지 인기 종목 가운데 하나였지만,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참가국 간 정치적 갈등이 남아 있는 상황에서 ‘위험 종목’으로 분류돼 퇴출됐다. 1904년 세인트루이스 대회 당시 펜싱에는 싱글 스틱이란 세부 종목도 있었는데, 목검으로 상대방의 머리를 공격해 피가 나면 이기는 종목이었다.
잔인하다는 이유로 1회 만에 없어졌다. 말을 타고 하키를 하는 폴로도 1900년대 초·중반까지 5차례 올림픽 종목에 편입됐지만, 역시 위험한 데다 비용이 너무 많이 들어 정식 종목에서 제외됐다. 20세기 중반까지 올림픽 종목은 아니었지만, 비공식적으로 각국 선수들이 기량을 겨누는 낚시·모터사이클·연날리기·비둘기 레이싱·열기구·인명 구조 경기도 열렸다. 비둘기 레이싱은 참가한 비둘기들이 전부 도망쳐서, 인명 구조는 물에 빠뜨렸다 건져 인공호흡한 사람이 사망하는 사고가 생겨 폐지됐다.
우리나라 국기(國技)이자 메달밭이었던 태권도가 올림픽 종목이 된 것은 1984년 동맹국인 미국이 개최한 LA올림픽 때다. 또 다른 국민 스포츠 가운데 하나인 골프는 2016년 리우올림픽 때부터 공식 종목이 됐는데, 박인비 선수가 초대에 이어 2대 금메달에 도전한다. 첫 대회 이후 124년 만에 33개 종목, 339개 세부 경기로 늘어난 도쿄 대회에는 시대 변화에 맞춰 서핑·스케이트 보딩·스포츠 클라이밍 등 레저 스포츠가 대거 첫 종목에 편입됐는데, 일본은 개최국의 이점을 살려 야구·소프트볼뿐만 아니라 가라테도 새 종목으로 끼워 넣는 데 성공했다.
08월 05일 노사연 ‘잘 될 거야’
김종호 논설고문
‘내가 힘들고 외로워질 때 내 얘길 조금만 들어준다면/ 어느 날 갑자기 세월의 한복판에 덩그러니 혼자 있진 않겠죠/ 큰 것도 아니고 아주 작은 한마디/ 지친 나를 안아주면서/ 사랑한다/ 정말 사랑한다는 그 말을 해준다면/ 나는 사막을 걷는다 해도/ 꽃길이라 생각할 겁니다/ 우린 늙어가는 것이 아니라/ 조금씩 익어가는 겁니다’. 2014년 발표된 노래로, 들을 때마다 울컥해진다는 중·장·노년층이 많은 노사연(64)의 ‘바램’ 일부다. 김종환 작사·작곡으로, 누구나 공감할 가사와 애잔한 멜로디의 감성을 노사연 특유의 음색과 가창력으로 극대화했다.
어릴 때부터 남달랐던 그의 가창력은 그의 큰이모이면서 본명은 김명선인 가수 현미도 감탄하게 했다. 1978년 단국대 재학 중이던 그는 제2회 MBC 대학가요제에서, 김욱 작사·작곡의 ‘돌고 돌아가는 길’로 금상을 받고 가수로 데뷔했다. 발라드나 포크록인 그의 노래 대다수는 슬픔을 머금은 바람이 불어와 가슴을 적시는 듯하고, 그리움을 품은 파도가 밀려와 심장을 흔드는 듯하다. ‘저만치 앞서가는 님 뒤로/ 그림자 길게 드린 밤/ 님의 그림자 밟으려 하니/ 서러움이 가슴에 이네’ 하고 시작하는 김욱 작사·작곡의 ‘님 그림자’도, ‘우리 만남은 우연이 아니야/ 그것은 우리의 바램이었어/ 잊기엔 너무한 나의 운명이었기에’ 하는 박신 작사, 그의 작은이모부 최대석 작곡인 ‘만남’도 그렇다. ‘못내 아쉬운 이별이/ 어느새 그리움 되어/ 설레이는 더운 가슴으로/ 헤매어도 바람일 뿐/ 끝내 못 잊을 그날이/ 지금 또다시 눈앞에/ 글썽이는 흐린 두 눈으로/ 둘러봐도 하늘일 뿐’ 하는 송영석 작사, 최대석 작곡 ‘이 마음 다시 여기에’ 열창을 들으면서 더러는 펑펑 울기도 한다. ‘허전한 마음에 밤길 걸으면/ 당신의 얼굴이 보여요’ 하는 김미선 작사, 최대석 작곡 ‘우리에겐’도 마찬가지다.
그런 그가 처음으로, 빠르고 경쾌한 댄스곡을 지난 6월 28일 발표했다. 2018년 싱글 앨범 ‘시작’을 내놓은 지 3년 만의 싱글 ‘잘 될 거야’다. ‘어떤 아픔이라도 다 이겨낼 거야/ 지금은 비록 힘들겠지만/ 어두운 밤이 지나면 또 해가 뜨잖아/ 괜찮아 걱정 마’ 하는 그의 노래를 통한 위로와 희망의 메시지가 가슴에 와 닿는 것은 남녀노소가 다르지 않을 것이다.
08월 06일 불신 키우는 주택통계 왜곡
문희수 논설위원
문재인 정부는 이제 부동산 문제에 속수무책인 모양이다. 집값·전셋값이 마냥 오르건만 집값이 너무 높아 지금 사면 낭패를 볼 것이라는 소리나 하며 내 집 마련에 고심하는 국민의 속을 뒤집어 놓는다. 이러니 ‘정부 말과 거꾸로 가야 피해를 안 본다’는 비아냥까지 나온다. 이런 판에 주택통계까지 왜곡한다. 불리한 통계는 물타기로 희석하고 유리하게 써먹을 만한 것은 부풀리는 게 어느새 관행처럼 돼버렸다.
홍남기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지난달 28일 대국민 담화문에서 밝혔던 주택 통계가 그랬다. 집값 변동의 중심인 서울만 봐도, 홍 부총리는 올 주택 입주물량이 8만3000가구로, 과거 10년 평균치(7만3000가구)에 견주면 평년 수준이라며 문 정부의 공급 부족을 반박했다. 그러나 이틀 후인 지난달 30일 국토교통부 자료에 의해 허구로 드러났다. 이 자료에선 올 아파트 입주물량은 4만1000가구로, 최근 5년 평균치(4만2000가구)보다 3.0% 적다. 홍 부총리의 ‘주택’이 국토부 ‘아파트’의 두 배를 넘는 건 아파트 외에 다세대·오피스텔·단독주택·공공임대까지 끼워 넣었기 때문이다. 부족한 아파트 말고 빌라나 임대주택에 살라는 권유나 다름없다. 게다가 그는 5년이 아니라 10년 평균치와 비교했다. 주택 공급이 적었던 때의 이전 정부 실적까지 소환한 물타기로 평균치가 줄면 올해 수치가 돋보이게 된다. 10년 평균치를 쓰면 국토부 분석처럼 올 아파트 입주물량도 감소에서 증가(9.9%)로 둔갑해 부동산 대란의 원인인 공급 부족이 감춰진다. 치졸하다.
이런 왜곡과 억지 해석은 한둘이 아니다. 25번째 대책으로 2025년까지 83만 가구를 공급한다는 지난 2·4대책은 주택 공급이 아니라, 택지를 확보하는 것이었다. 실제 주택 공급은 2028년쯤에나 가능하다. 서울 아파트 공시가가 4년간 86% 올랐는데도 시세 상승률은 17%에 불과하다고 강변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이 정도면 왜곡을 넘어 국민을 속이는 분식(粉飾)이다. 국민은 한편에선 집 사려고 ‘영끌’로 안간힘을 쓰고, 다른 편에선 정부를 믿었다가 ‘벼락 거지’와 전세 난민이 됐다고 한숨짓는다. 그런데도 이 정부는 책임을 회피하며 입맛에 맞는 수치만 부각해 호도하기에 급급하다. 분노와 불신이 갈수록 커지는 이유를 정부만 모르는 것인가.
08월 09일 ‘정치 말괄량이’ 길들이기
이미숙 논설위원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말괄량이 길들이기’는 수다스럽고 기가 센 부잣집 딸 카트리나가 페트루치오와 결혼하면서 얌전하고 부드러운 여성으로 바뀌는 과정을 코믹하게 그린 희극이다. 16세기 말에 쓰인 셰익스피어의 초기 작품인데 연극은 물론이고 발레로도 만들어질 정도로 인기가 있다. 최근 국립발레단이 무대에 올린 ‘말괄량이 길들이기’는 여성 혐오 및 장애인 비하 논란이 일어 일부 안무를 바꾸기도 했다. 오드리 헵번이 주연을 맡은 1960년대 뮤지컬 영화 ‘마이 페어 레이디(My Fair Lady)’도 비슷한 내용이다. 빈민가 출신 여성을 단기간에 세련된 귀부인으로 교육시키는 실험에 내기를 건 언어학자 헨리 히긴스 교수와 친구 휴 피커링 대령의 얘기다. 빈민가 출신 여성 일라이자 역을 맡은 헵번은 혹독한 언어교습 끝에 상류층의 우아한 어법을 구사하는 데 성공하고 히긴스 교수와 사랑을 이루게 된다.
‘말괄량이 길들이기’와 ‘마이 페어 레이디’는 자신의 태도나 언어 습관을 바꿔 해피엔드에 이르는 스토리인데, 이 이야기의 미국 정치 버전은 조 바이든이다. 2008년 대선 당시 버락 오바마 민주당 후보는 자신의 약점을 보완해줄 러닝메이트로 30년 경력의 상원의원 바이든을 꼽았다. 그러나 말실수가 많은 데다 유세 때 여성 유권자들과의 과도한 접촉이 약점으로 꼽혔다. 오바마 선거팀은 바이든에게 “연설 텍스트 밖으로 절대 나가지 말라”고 주문했다. 바이든은 자존심이 상했지만, 오바마 팀의 전략에 따라 자신을 변화시켰다. 덕분에 부통령 재임 중 설화(舌禍)나 스캔들은 없었고, 바이든 시대도 열 수 있었다.
국민의힘에 입당한 윤석열 전 검찰총장의 발언 스타일과 태도가 연일 논란이다. 여권의 ‘검수완박’ 논리를 ‘부패완판’으로 받아치던 거침없는 화법은 이제 발목을 잡는 요인이 됐다. 더불어민주당은 ‘국민 밉상’으로 몰아가려는 듯 공격을 하고 국민의힘에서도 본선 경쟁력을 걱정하는 기류가 역력하다. 윤 전 총장에게 필요한 것은 혹독한 학습과정을 단기간에 이겨내고 사랑을 이룬 ‘마이 페어 레이디’의 헵번처럼 한국판 ‘마이 페어 젠틀맨’이 되기 위한 훈련이다. 정치 입문 후 첫 휴가를 다녀온 그가 서초동의 칼잡이 검사 습성을 벗고 여의도 정치 화법에 신속히 익숙해질지 궁금하다.
08월 10일 '에어컨의 날’
박민 논설위원
요즘 같은 폭염에 공감할 기념일이 있다. ‘에어컨 감사의 날’(Air Conditioning Appreciation Day)이다. 전 세계의 기념일을 알려주는 ‘Days of the year’에 따르면 매년 7월 3일은 에어컨 탄생을 기념하고 본격 사용에 앞서 상태를 점검하는 날이다. 오늘날과 같은 전기식 에어컨은 1902년 7월 미국 코넬대학 전기공학 석사 윌리스 캐리어에 의해 개발됐다. 캐리어는 높은 습도로 품질 유지에 어려움을 겪던 인쇄소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에어컨을 개발했다. 이후 캐리어는 회사를 설립해 극장, 백화점, 호텔, 병원 등에 에어컨을 공급했다.
에어컨의 발명은 인류 역사에 엄청난 기여를 했다. 우선, 생활 패턴을 완전히 바꿨다. 여름에도 영화 관람, 쇼핑, 외식 등 오락과 소비가 가능해졌다. 에어컨 보급이 확대되는 1920년대를 기점으로 더위로 인구밀도가 극히 낮았던 아프리카, 서·남아시아 지역에 현대식 인프라를 갖춘 도시들이 탄생했다. 미국 선벨트 지역에도 댈러스, 라스베이거스 같은 수백만 인구의 대도시가 조성됐다. 에어컨은 습도도 조절해 불쾌지수를 낮춤으로써 생산성을 획기적으로 높였다. 싱가포르의 국부 리콴유는 한 인터뷰에서 “에어컨은 열대 지역 개발을 가능하게 해 문명의 성격을 바꿔놓았다”며 “총리가 되고 가장 먼저 한 일은 정부 청사에 에어컨을 설치하는 것이었고, 그것이 공공부문의 효율성을 높였다”고 말했다.
한국도 고도성장 과정에서 공무원들이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지금은 기업 등 민간 부분이 발전을 이끌지만 코로나 사태에서 보듯이 국가적 난제에는 여전히 공무원이 역할을 해야 한다. 그러나 최근 기업과 시민들 사이에서 청와대나 정부가 차라리 아무 일도 않고 가만히 있었으면 좋겠다는 말이 나온다. 정치방역에 몰두하다 백신 수급을 제대로 지휘하지 못한 청와대, 26차례 대책을 발표하고도 부동산 가격을 천정부지로 올려놓은 국토교통부, 성추행 피해 여중사의 자살과 부실급식 논란도 부족해 해외파병 장병들에게 백신을 공급하지 않아 부대원 90%가 코로나 확진 판정을 받게 한 국방부, 코드인사와 부당감찰로 검찰 권력 비리 수사를 막은 법무부. 이런 정부 기관들의 경우 차라리 에어컨 가동을 중단해 업무 효율성을 낮추는 것이 어떨까.
08월 11일 펫심 대선
이현종 논설위원
민심보다 펫(pet)심? 국민의 68%가 반려견을 키울 정도로 생활문화가 정착된 미국은 신임 대통령의 ‘퍼스트 도그’에 대한 관심이 늘 뜨겁다. 정치적 견해가 달라도 반려견·반려묘에 대한 사랑은 윤활유 역할을 한다. 이 때문에 대선 후보가 연설회장에 반려견을 데리고 다니기도 한다. 그래서 ‘네 발 달린 비밀병기’라고 불린다. 문재인 대통령도 청와대 입성할 때 사상 처음으로 유기견인 ‘토리’를 퍼스트 도그로 삼으면서 긍정적 효과를 톡톡히 누렸다.
국내 반려인이 1500만 명을 넘어서는 상황에서 이번 대선전에서 벌써 반려견·반려묘를 앞세운 경쟁도 뜨겁다. 자녀가 없고 강아지, 고양이만 7마리를 키우고 있는 국민의힘 윤석열 예비후보가 가장 적극적이다. 공식 인스타그램과 별도로 자신의 반려견 이름을 딴 ‘토리스타그램’을 만들어 매일 2∼3장씩 일상을 올린다. 평소 다리를 벌리고 앉는 습관 때문에 ‘쩍벌’ 논란이 벌어지자 토리스타그램에 ‘마리와 금쩍(쩍벌 금지)’ 사진을 올렸다. 반려견 마리가 뒷다리를 벌리고 앉아 있는 사진을 올리며 매일 0.1㎝씩 줄여나가자고 글을 달았다. 머리를 돌리는 ‘도리도리’ 습관과 관련해서도 고양이 나비와 함께하는 사진을 올리며 ‘나비와 도리도리 점검’이라는 글을 달았다. 전시·기획 전문 회사를 운영했던 부인 김건희 씨가 사진도 찍는 것으로 알려졌다.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후보도 9일 경기 여주시의 반려동물 테마파크 조성 현장을 찾은 데 이어, 캠프 비서실장인 박홍근 의원이 국회에서 동물자유연대 등과 동물보호법 개정 관련 토론회를 열기도 했다. 경기지사로 있으면서 반려견 놀이터 및 고양이 입양센터 조성, 길고양이 중성화 보호사업 등 관련 정책을 활발히 추진했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이낙연 후보도 지난 6월 부인 김숙희 씨와 서울 보라매공원 반려견 놀이터를 찾았고, 지난달엔 망원한강공원에서 열린 ‘런댕이 산책 챌린지’에 참석해 반려인들과 함께 개를 산책시켰다. 정세균 후보는 60년 전 잃은 반려견 ‘부엉이’도 소환했다.
어쩌면 내년 대선 때는 강아지·고양이 선거운동원도 볼 수 있을지 모를 일이다. 사람의 선거운동은 법으로 제한되지만, 아직 반려동물을 이용한 선거운동에는 제약이 없기 때문이다.
08월 12일 닉슨의 ‘달러 쇼크’ 50년
이신우 논설고문
기원후 3세기 ‘팍스 로마나’에 조금씩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래도 로마는 여전히 지중해를 둘러싼 대륙들로부터 끝도 없이 재화가 흘러들어오고 나가는 곳이었다. 당시 로마의 주 화폐는 데나리우스 은화였다. 수억 개의 주화가 대륙 간에 통용됐으며, 그 규모는 19세기 들어와서야 기록이 깨질 정도였다. 그런 와중에 통화 인플레는 갈수록 심해져 갔다. 로마 황제들은 폭증하는 예산과 재정난을 해결하기 위해 은화를 녹여 비금속을 섞어 새 주화를 찍어냈다. 원래 순은이었던 데나리우스는 이런 식으로 함유량이 줄어들면서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 시절 마침내 은 함유량이 2%에 그치게 된다.
20세기 들어 로마의 데나리우스가 수행했던 역할을 이어받은 것이 미국 달러화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세계 각국이 브레턴우즈 체제에 합의한 데 따른 변화다. 미국은 이후 금 1온스를 35달러에 바꿔주기로 하면서 국내 물가와 세계 통화의 안정이라는 막중한 임무를 훌륭하게 수행하고 있었다. 하지만 리처드 닉슨 미 대통령은 어느 날 갑자기 달러를 더 이상 금으로 바꿔 주지 않겠다고 폭탄 선언한다. 이른바 ‘닉슨 쇼크’였다. 발표 날짜가 1971년 8월 15일이니 딱 50년 전의 일이다. 그 후 지금껏 달러의 가치는 어떻게 변화했을까. 최근 금 1온스는 1800달러 정도에 거래되고 있다. 닉슨 쇼크 때의 35달러와 비하면 지금의 달러 가치는 1.94%. 대략 2%에 지나지 않는다. 데나리우스의 은 함유량이 2%까지 떨어진 것과 흡사하다.
달러 역시 데나리우스가 그랬던 것처럼 통화 인플레이션은 멈출 기세를 보이지 않는다. 미국 정부의 재정 상황은 3세기 로마 정부와도 쌍생아다. 국내총생산(GDP) 대비 정부 채무 비율은 제2차 세계대전 때를 넘어선다. 코로나19 방역으로 더 악화한 재정 적자가 무려 3조 달러에 이른다. 이는 국제 신인도 하락으로 연결될 수밖에 없다. 2021년 3월 기준 세계 각국 외화 준비에서의 달러 구성 비율은 59.54%까지 떨어지고 있다. 여전히 60%라지만 최고 기록인 87%에 비하면 엄청난 추락이다. 이대로 갈 경우, 달러화는 50년 후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미국 하버드 대학의 케네스 로코프 교수는 “모두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비관적”이라고 경고하고 있다.
08월 13일 김길후 화백 ‘혼돈의 밤’
김종호 논설고문
“작품에 작가의 개입이 빠져야 감동을 줄 수 있다고 나는 믿는다. 내 작업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자아(自我)를 지우는 일이다. 내가 그리는 게 아니라, 붓이 그린다고 생각한다. 구름이 바람결에 움직이면서 형상이 바뀌듯이, 작품도 보는 사람마다 다른 것을 보기를 바란다”. 한국과 중국의 화실을 오가며 창작하는 세계적인 미술가 김길후(60) 화백의 말이다. 그는 노자(老子)·플라톤·사르트르·들뢰즈 등 동서양의 사상을 두루 깊이 섭렵했다. 그가 ‘어둠’을 그린 작품 속에 ‘빛과 희망’이 깃들어 있다고도 한다.
1988년 계명대 회화과를 졸업한 그는 정체성의 완전한 재확립을 위해, 김동기였던 이름을 2013년 개명하기에 앞서 분신에 해당하는 작품 전체이던 1만6000여 점을 1999년 불태워 없앴다. “그때까지 내가 추구했던 것들은 사라져야 할 대상이었다. ‘성공의 대상’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 욕망을 없애야 했다”고 한다. 그러고는 ‘동양의 일필휘지와 서양의 표현주의를 아우른 작품 세계’를 열었다. “궁극의 세계는 심오한 흑(黑)과 백(白)의 절제된 만남 속에서 그 깊이감을 들여놓을 수 있다. 특히 검은색은 블랙홀과 같은 우주의 본질을 담기에 부족함이 없다”고 여겨, 종이·하양·검정을 표현의 주축 요소로 삼았다. ‘검은 눈물(Black Tears)’ 연작이 나온 배경이다. ‘비밀의 화원’ ‘현자(賢者)’ ‘무제’ 등의 연작도 그 연장선이다.
미술평론가 윤진섭은 이렇게 말한다. “김길후는 허공에 긴 칼을 휘두르는 검객일 수도 있고, 흐드러지게 춤을 추는 춤꾼일 수도 있다. 무당이나 춤꾼은 행위를 드러내지만, 흔적은 남기지 않는다. 그는 화가이기 때문에 행위를 하고 흔적을 남긴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진한 춤을 추는 무당(shaman)이다. 신명에 빠져 붓 춤을 추면서, 태곳적의 영기(靈氣)를 불러내, 예술이 지닌 치유의 기능을 임재하게 하는 샤먼의 역할을 한다.” 김길후 개인전 ‘혼돈의 밤’이 서울 종로구 소격동 학고재갤러리에서 지난 7월 21일 개막했다. 오는 22일 끝난다. “예술이 도대체 뭔지 궁금해서 여러 나라를 다니며 해답을 찾는 모습의 작품들”이라고 한다. ‘혼돈의 밤’은 만물이 소생하기 전의 원시 상태를 가리킨다. 작품 23점을 둘러보며 전율을 경험하는 사람이 많다.
08월 17일 전기차 ‘반값 배터리’ 경쟁
문희수 논설위원
전기차 경쟁이 점입가경이다. 최근 미국 정부도 2030년 미국 신차 판매의 절반을 전기차·수소차·플러그인하이브리드 등 무공해 친환경차로 달성하겠다고 밝혔다. 조 바이든 대통령은 특히 “미국 자동차 산업의 미래는 전기차에 있다”고 강조했다. 이 목표대로라면 미국에서 전기차 판매는 앞으로 연평균 40% 이상 급증할 전망이다. 이미 유럽과 중국은 2035년까지 내연기관차 판매 금지를 발표했다. 전기차 시대가 예상보다 훨씬 빨리 다가오고 있다.
여기에 전기차의 핵심인 배터리를 놓고 반값 경쟁까지 벌어진다. 배터리는 생산 단가의 40%를 차지한다. 전기차는 엔진이 없어 가솔린·경유 등 내연기관차보다 부품 수가 40% 가까이 적다. 중국·일본이 반값 배터리 전쟁에 불을 붙였다. 세계 1위 배터리업체인 중국 CATL은 현재 주로 쓰이는 리튬보다 싼 나트륨 이온 배터리로 가격을 반값으로 내리겠다고 한다. 나트륨 배터리는 내연기관차의 연비 격인 주행거리가 짧아 저가 전기차용으로 평가받지만, 중국 업체들은 세계 최대인 내수시장 지배력을 토대로 기술 개발로 극복할 것이라고 호언한다. 세계 3위 일본 파나소닉도 LG에너지솔루션(2위)·삼성SDI(5위)·SK이노베이션(6위) 등 한국 업체를 겨냥해 토요타와의 합작회사를 통해 내년까지 반값 배터리를 내놓겠다고 발표했다.
한국엔 비상이다. 한국 배터리에 필수인 니켈·망간·코발트 등은 희귀하고 비싸다. 국가 간 자원경쟁도 치열하다. 특히 미국·유럽은 중국의 희토류 독점을 노골적으로 차단하려고 한다. 이런 판에 문재인 정부는 민간이 하기 힘든 자원개발·확보를 이전 정부의 적폐라고 몰며 책무를 외면한다. 반값 배터리의 성패는 판매 물량을 늘려 가격을 내릴 수 있는 ‘규모의 경제’를 누가 먼저 달성하느냐에 달렸다. 중국이 온갖 편법으로 자국 업체에 내수시장을 몰아 주는 이유다. 전기차는 정부·기업의 역량을 총동원해야 할 영역이다. 문 정부가 제 할 일은 않고 지원한다는 말 잔치만 하니 기업은 속이 탄다. 미국에 GM·포드와 합작회사를 세우고, 니켈 매장량 세계 1위인 인도네시아에 합작 공장을 추진하는 등 관련 업체들만 고군분투한다. 미래를 준비하는 기업들이 있으니 그나마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08월 18일 SNS 선거운동의 함정
박민 논설위원
좋은 평가를 받은 미국 대통령들은 대선 과정이나 재임 중 새로운 커뮤니케이션 기술을 적극 활용했다.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은 거실에 편안하게 앉아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보라는 식으로 대국민 라디오 연설을 했다. 대공황에 짓눌려 있던 국민은 “나의 친구들”로 시작되는 그의 부드러운 목소리와 낙관적 비전에서 위안을 느꼈다. ‘노변정담(爐邊情談)’이라 불린 이 연설을 12년 재임 기간 중 300회 이상 진행됐다. 존 F 케네디 대통령은 ‘기꺼이 TV란 미디어의 상품이 되고자 했던’ 최초의 정치인이었다. 젊은 시절 체중 미달에 늘 병치레를 하던 그는 유력 영화제작자인 아버지의 지원을 받아 이미지 구축 작업에 나섰다. 그는 젊음과 활력을 강조하기 위해 풋볼과 요트를 즐기는 모습을 TV에 계속 제공했다.
코로나19로 비대면 선거운동이 본격화되면서 6개월여를 남겨둔 20대 대선은 SNS 경연장이 되고 있다. 가족·반려견을 앞세운 감성 접근에서부터 메타버스 등 새로운 플랫폼 활용에 이르기까지 진화를 거듭하고 있다. 페이스북 팔로어(구독자) 54만 명을 자랑하는 이재명 경기지사는 이동 중에도 수시로 SNS 메시지를 작성하는 등 직접 소통을 중시한다. 윤석열 전 검찰총장은 페이스북 3개, 인스타그램 2개, 유튜브 1개 등 6개의 SNS 계정을 개설했고 인스타그램에서 요리하는 모습 등을 공개했다. 이낙연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의 인스타그램은 부인 ‘(김)숙희 씨의 일기장’ 시리즈를 통해 연애와 결혼 시절 사연을 웹툰 형식으로 전하고 있다.
SNS는 직접 민주주의의 실현을 앞당긴 측면이 없지 않다. 그러나 정치과정에 대한 유권자의 관여 확대가 바람직한 방향으로만 진행된 것은 아니다. SNS는 팬덤을 구축하는 데는 유리하지만 지지 후보에 대한 확증편향을 강화해 국민을 분열시킨다. 후보자 역시 타 후보 지지자나 중도파에 대한 접근 가능성이 줄어 결과적으로 대중과 유리될 수 있다. SNS는 후보의 가공된 이미지를 전달하므로 실제 소통 역량이나 리더십을 왜곡할 수도 있다.
링컨은 “모든 사람을 잠깐 속이거나 소수를 오래 속일 수는 있지만, 모든 사람을 영원히 속일 수는 없다”고 말했다. 어떤 미디어가 개발되더라도 결국 진실만이 최후의 승리를 가져다준다.
08월 19일 父子음악가 & 父女음악가
이미숙 논설위원
자식 농사는 마음대로 안 된다는 말이 있다. 한 분야에서 일가를 이뤘다고 해서 자녀에게 부모의 길을 걷도록 하기 어려운 데다 성공이 보장되는 것도 아니다. 타고난 심미안이 있어야 할 예술 분야에선 더욱 그렇다. 성공한 예술가의 자녀들은 초기엔 ‘부모 찬스’를 누리지만, 일정 단계가 지나면 부모의 명성이 짐이 되기도 한다. 거장의 자녀들이 자신만의 개성을 가진 예술가로 성장하는 게 흔치 않은 이유다.
정명훈(68) 전 서울시향 예술감독의 막내아들 정민(37) 씨가 최근 영국 런던의 클래식 매니지먼트 아스코나스 홀트와 계약을 했다. 다니엘 바렌보임, 사이먼 래틀 등 유명 지휘자들이 소속된 곳이라는 점에서 차세대 지휘자로 활동할 길이 열린 셈이다. 서울대에서 바이올린과 독문학을 전공한 그는 2007년 지휘자로 데뷔했는데 젊은 시절 정명훈을 빼닮았다는 평을 받는다. 이탈리아 밀라노 라스칼라 극장에서 부자가 잇달아 오케스트라 지휘자로 나서 주목을 받기도 했다.
소련 출신의 피아니스트 블라디미르 아시케나지(84)는 부자 피아니스트다. 2014년 내한 때 아들 보브카와 듀오 콘서트를 했다. 이탈리아의 테너 안드레아 보첼리(63)는 음반 ‘시(Si)’에 아들 마테오(24)와 부른 ‘내게 다가와 줘요(Fall on Me)’를 넣는 형식으로 아들을 데뷔시켰다. 마테오는 음악학교 학생이었는데 ‘아빠 찬스’로 예비 스타 대열에 올랐다.
피아니스트 겸 지휘자인 김대진(59) 한국예술종합학교 음악원 원장이 미시간 음대 교수인 바이올리니스트 파비올라 김(30)과 22일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듀오 리사이틀을 갖는다. 피아니스트 김선욱, 손열음, 문지영을 키운 김 원장의 이번 연주회는 제자가 아닌 딸과 함께하는 무대다. 연주회 팸플릿은 두 사람이 부녀 사이라는 것을 알 수 없도록 만들어졌다. 독립 연주자로서 아버지의 울타리를 넘어서겠다는 김 교수의 의지가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클래식 애호가들은 김 원장이 2001년부터 딸과 듀오 연주회를 해왔다는 것을 알고 있다. 섬세하고 지적인 연주로 정평이 난 김 원장이 화려함과 정확성을 겸비한 신세대 바이올리니스트 딸과 어떻게 호흡을 맞출지 기대가 된다. 두 사람은 모차르트와 드보르자크, 폴 쇼언필드 등의 작품을 연주한다.
08월 20일 자동녹음의 덫
이현종 논설위원
나도 모르게 상대방이 전화 통화 내용을 자동으로 녹음한다면 기분이 어떨까. 뒤에 이런 사실을 알게 되면 그런 사람과는 인연을 끊을 듯하다. 그런데 미국과는 달리 국내에선 자동 통화 녹음이 너무 일상적이라고 한다. 삼성 갤럭시폰은 간단한 조작이나 앱으로 자동 녹음을 할 수 있는 반면 애플의 아이폰이나 캐나다의 블랙베리 제품은 통화 중 녹음 기능이 없을 뿐더러 이런 앱을 설치하는 것도 어렵다고 한다. 코네티컷, 메릴랜드 등 미국 13개 주에선 쌍방의 동의가 없는 녹음은 불법이기도 하다.
지난 몇 년간 벌어진 대형 권력형 사건엔 자동 녹음된 파일이 항상 결정적 변수로 등장했다. 박근혜 전 대통령의 문고리 3인방 중 한 명인 정호성 전 부속비서관이 박 전 대통령, 최서원(최순실) 씨와 통화한 내용을 휴대전화에 녹음해 둔 게 특검에 압수되는 바람에 국정농단 사건의 결정타가 됐다. 정 전 비서관은 박 전 대통령이나 최 씨가 수시로 전화해 지시한 것을 잊지 않으려고 녹음해 뒀는데 수사에서 핵심 증거가 돼 버렸다.
또, 최 씨의 수행비서였던 김수현 전 고원기획 대표가 고영태, 노승일 씨 등 최 씨 주변 인물과 통화한 파일 2391개가 등장하면서 파문을 일으켰다. 이 녹음 파일에는 ‘박근혜를 죽이고 다른 쪽과 이야기하자’ 등 고영태와 측근들이 정치권과 결탁해 ‘국정농단 게이트’를 만들고 사익을 보장받으려 했다는 정황이 담겨 있었다. 조국 전 법무장관의 부인 정경심 교수도 아들과 통화한 내용이 녹음돼 있다가 범죄를 입증하는 데 중요한 단서가 됐다.
이준석 국민의힘 대표가 휴대전화 자동 녹음 때문에 곤경에 처했다. 윤석열 전 검찰총장과의 통화 내역이 녹취록 형태로 나돈 데 이어 원희룡 전 제주지사와 지난 10일 통화한 내역도 논란이다. 예전 바른정당 시절 손학규-유승민 갈등 때 유 전 의원에게 유리한 녹취록을 공개해 재미를 봤지만 이번엔 역풍을 맞고 있다. 윤 전 총장과 통화 내용 파일이 없다고 한 해명이 거짓말로 드러난 셈이고, 앞으로 이 대표와 통화하려는 정치인은 녹음이 되는지부터 확인해야 할 처지다. 정치인의 중요한 자산이 ‘신뢰’인데 이 대표는 이번 자동 녹음과 녹취록 공개로 신뢰를 잃고 말았다. 어느 누구도 이젠 이 대표에게 흉금을 터놓고 얘기하긴 어렵게 됐다.
08월 23일(월) 김좌진과 홍범도
이신우 논설고문
문재인 대통령과 영화 제작자들은 호흡이 잘 맞는다. 텔레파시라도 통하나? 2016년 12월 원전 폭발 사태를 그린 영화 ‘판도라’가 개봉되고 다음 해 6월 문 대통령은 “탈원전은 거스를 수 없는 시대의 흐름”이라며 신규 원전 건설 백지화를 포함, 원전 전면 재검토를 선언했다. 2015년 7월 개봉한 영화 ‘암살’에서 배우 조승우가 분한 김원봉은 의열단의 막후로 나온다. 당시 문재인 새정치민주연합 대표는 김원봉에 대해 “광복 70주년을 맞아 마음속으로나마 최고급의 독립유공자 훈장을 달아드리고, 술 한 잔 바치고 싶다”는 심경을 피력한다. 2019년 현충일 추념사에서는 공산주의자 김원봉을 ‘국군의 뿌리’라고 높이 평가했다.
2019년에는 영화 ‘봉오동 전투’가 상영됐다. 홍범도가 이끄는 독립군이 1920년 중국 지린(吉林)성 봉오동의 지형을 이용해 매복한 뒤 일본군 추격대대를 패퇴케 한 전투가 줄거리다. 이 영화를 계기로 홍범도가 재조명을 받게 되고 마침내 지난 15일 광복절을 맞아 홍범도 장군의 유해가 카자흐스탄으로부터 한국으로 귀환했다.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장됐고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됐다. 봉오동 전투를 성공리에 끝낸 홍범도는 곧바로 김좌진 장군이 이끄는 독립군에 합류하게 된다.
청산리 전투는 같은 해 10월 북로군정서 소속의 독립군 2500명을 이끈 김좌진 장군이 만주 허룽(和龍)현 청산리에서 일본군 제13·14·21사단을 상대로 격전을 치러 3개 사단을 와해시킬 정도의 전과를 올린 대첩이었다. 한국 무장독립운동에서 일본군의 가장 치욕적 패배였다. 하지만 이후 두 사람의 인생행로는 전혀 다르다. 김좌진 장군은 속속 포위망을 좁혀오는 일본군을 피해, 그해 초겨울 소만(蘇滿) 국경으로 이동했다. 김좌진 장군은 이곳에서 태반의 부하를 잃는다. 홍범도를 포함한 한인 공산주의자들과 소련군의 배신 때문이었다. 간신히 목숨을 건진 김좌진 장군은 그로부터 8년 후 한인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암살당했다. 그의 나이 42세였다. 불행히도 문 정권에서 김좌진 장군에 대한 기억은 사라졌다. 영화도 만들어지지 않는다. 당연히 건국훈장 추서도 없을 것이다. 좌파에게 김좌진은 반혁명 세력이다. 6·25전쟁 영웅인 백선엽 장군처럼. 그것이 이유일까?
08월 24일 박학기의 김민기 ‘친구’
김종호 논설고문
‘거리는 희미한 불빛 속에 뽀얗게 적셨죠/ 커다란 당신의 두 눈 속에 빗물 같은 눈물 흐르고/ 슬퍼하지 말아요 느끼지 못하나요/ 당신 곁엔 언제나 따스한 가슴 함께 있어요/ 우린 혼자 아니에요 언제 어디서나’. 특유의 미성(美聲)으로 ‘파스텔 톤의 목소리’라는 말을 듣는 싱어송라이터 박학기(58)가 작사·작곡해 부른 ‘내 소중한 사람에게’의 앞부분이다. 1989년 정규 솔로 앨범 제1집에 담아 발표했다.
서울예술대 재학 중이던 1988년 옴니버스 앨범을 통해 데뷔한 그는 직접 만들어 부른 발라드나 포크 명곡이 많다. ‘긴 밤 눈물로 지새고 잠든 그대의 등 뒤로/ 밤새 내리던 그 푸른 비도 걷혀가고’ 하는 ‘그대 창가로 눈부신 아침이’와, ‘마음을 비추는 거울이 있다면/ 우린 깜짝 놀랄 거야 내가 아닌 내 모습에’ 하는 ‘마음을 비추는 거울이 있다면’ 등.
그가 양희은이 1971년 발표한 김민기 작사·작곡의 ‘아침이슬’ 50주년 기념사업 총감독을 맡은 결과물인 CD 음반 ‘아침이슬 50년, 김민기에게 헌정하다’가 지난 7월 27일 나왔고, LP로도 오는 9월 중에 나온다. 후배 가수들이 주옥같은 김민기 노래들을 다시 부른 음반으로, 박학기가 부른 것은 ‘친구’다. 김민기가 경기고 3학년 때인 1968년 작사·작곡했으나, 서울대 미대 재학 중이던 1970년 공개했다. ‘갈 곳 없는 젊은이들의 쉼터’로 서울 명동 YWCA 건물에 문을 열었던, 노래·시낭송 등의 공간 ‘청개구리’에서 통기타를 치며 부른 뒤에 그의 처음이자 마지막인 독집 음반에 ‘아침이슬’ 등과 함께 담았다. 대중음악평론가 김작가는 “김민기가 ‘친구’를 처음 부른 그날, 한국 포크 음악이 시작됐다”고도 한다. ‘검푸른 바닷가에 비가 내리면/ 어디가 하늘이고 어디가 물이오/ 그 깊은 바닷속에 고요히 잠기면/ 무엇이 산 것이고 무엇이 죽었소’ 하고 시작한다. 처연하게 아름다운 노래가, 박학기의 음성으로 다시 철학적 사색에 젖어들게도 한다. ‘눈앞에 보이는 수많은 모습들/ 그 모두 진정이라 우겨 말하면/ 어느 누구 하나가 홀로 일어나/ 아니라고 말할 사람 누가 있겠소/ 눈앞에 떠오는 친구의 모습/ 흩날리는 꽃잎 위에 어른거리오/ 저 멀리 들리는 친구의 음성/ 달리는 기차 바퀴가 대답하려나’ 하고 끝난 뒤에도 오래 남는 여운 속에.
08월 25일 유통기한과 소비기한
문희수 논설위원
식품은 생산·제조된 후 먹지 못하고 보관 중 부패하거나 먹을 수 있는 기한을 넘겨 폐기되는 물량이 상당하다고 한다. 세계적으로 전체 식품 중 3분의 1이 그냥 버려지고 있다는 통계도 있다.
식품의약품안전처가 2023년부터 유통기한 표시제를 없애고 소비기한만 표시하기로 했다고 한다. 소비자들이 유통기한을 폐기기한으로 잘못 알고 식품을 버리는 사례가 많기 때문이다. 다만, 우유 등 유통과정에서 변질이 우려되는 일부 품목은 2031년까지 시행이 유예된다. 유통기한은 유통·판매 허용 기간이고, 소비기한은 식품을 먹어도 되는 기한이다. 소비기한이 지나면 당연히 폐기해야 한다. 유통기한보다 훨씬 긴 소비기한만 표시하면 식품 수명은 분명히 는다. 외식산업연구원 등에 따르면 미개봉 상태를 기준으로 요거트 소비기한은 유통기한보다 10일이 길다. 유통기한이 지났어도 10일까지는 먹어도 안전하다는 뜻이다. 계란 소비기한은 25일, 우유는 45일, 두부는 90일이 더 길다. 심지어 봉지라면은 유통기한 후 8개월까지 먹어도 되고, 냉동만두는 1년, 식용유는 5년, 참치캔은 10년까지 된다.
미국, 유럽, 일본, 중국 등을 포함해 소비기한 표시제를 사용하는 게 세계적인 추세다. 소비기한 표시로 바꾸면 폐기되는 식품을 줄여 자원 절약과 물가 안정에도 도움이 된다. 미국에서 버려지는 식품은 매년 약 200조 원 규모로, 이 중 20% 정도는 유통기한을 먹을 수 있는 기한으로 잘못 이해한 때문이라고 한다. 한국도 유통기한 표시로 인해 멀쩡한 식품이 버려지는 비용이 매년 평균 1조5000억 원 정도나 된다. 유통기한이 지나면 무조건 폐기하는 것은 물론, 유통기한이 임박한 식품까지도 먹으면 큰일 나는 줄 알고 반품·폐기하는 실정이다.
한국은 이미 수년 전에 소비기한 표시제 전환을 추진했지만 일부 소비자·유통·생산단체, 심지어 일부 언론까지 반대해 무산됐다. 식품·유통업체 등이 유통기한이 임박한 제품을 기부하려 하면 마치 못 먹는 식품을 주는 것처럼 오도하는 바람에 기부가 끊겨 보육원·양로원 등 사회복지단체들의 열악한 사정을 더 악화시키는 일들이 벌어지기도 했다. 소비기한 표시제가 안착하면 쓰레기도 줄이고 자원도 아끼고 기부도 더 활성화될 수 있다.
08월 26일 캠프 人事의 정치학
이도운 논설위원
인사(人事)는 메시지다. 역대 정권은 청와대와 정부, 집권당 핵심 인사의 구성으로 국정 운영 방향을 밝혔다. 1945년 대한민국 초대 내각은 이승만 대통령·이시영 부통령·이범석 국무총리 등 임시정부 요인을 비롯한 항일 운동가로 채워졌다. 독립 국가로서 당연한 일이다. 5·16으로 집권한 박정희 정권은 육사 출신이 장악했다. 당시는 군인이 엘리트였다. 역시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전두환 정권은 육사에 서울대 법대 출신 법조인을 더한 ‘육법당(陸法黨)’으로 정권을 운영했다. 노태우 정권에서는 육법당이 계속 득세하는 가운데 박철언이라는 외척이 정권 실세 노릇을 하기도 했다. 전·노 정권 모두 경제 분야는 철저하게 교수 등 전문가를 발탁했다.
김영삼 정권에서는 평생 민주화 투쟁을 함께한 상도동계가, 김대중 정권에서는 동교동계가 ‘이너 서클’을 이뤘다. 노무현 정권이 들어서면서 주류가 된 386 학생 운동권은 ‘코드’를 따지기 시작했다. 이명박 정권은 ‘고소영(고려대·소망교회·영남)’이란 비판을 받았고, 박근혜 정권에서는 초대 내각 장관 17명 가운데 10명을 공무원으로 채워 관존민비가 돌아왔다는 말이 나왔다. 문재인 정권은 노무현 정권 때보다 심한 캠코더(캠프·코드·더불어민주당) 인사로 비난을 면치 못하고 있다.
내년 대선을 앞두고 차기 정부의 인재 풀이 어떻게 구성될지도 관심이 쏠린다. 여권 선두를 달리는 이재명 경기지사 캠프에는 민주당 중진 의원들이 주요 보직을 채우고 있지만, 내부적으로는 이 지사가 성남시장 시절부터 인연을 맺은 ‘충성파’가 핵심이라고 한다. 이 캠프는 사람을 들일 때 ‘세평’ ‘필터링’을 통해 엄선하기 때문에 사고를 치는 인사가 없다는 자랑도 한다.
야권 선두 윤석열 전 검찰총장은 당 내외 세력은 물론 세대·지역·이념 및 역대 정권과의 ‘통합’ 메시지에 고심한다. 대변인으로 추천된 변호사는 안철수 국민의당 대표를 비난했던 전력 때문에 난색을 표했다고 한다. 향후 ‘철석 연대’를 고려한 듯하다. 캠프가 친이명박계 위주라는 비판을 의식해 친박근혜계 원로에게 인사 추천을 받기도 했다. 한때 갈등했던 이준석 국민의힘 대표와 가까운 인사를 핵심 보직에 영입하는 방안도 검토 중이다. 다른 여야 예비 후보들의 캠프 인사 정치도 곧 드러나게 될 것이다.
08월 27일 ‘거리 두기’ 순종의 비밀
박민 논설위원
1인칭 복수 대명사인 ‘우리(we, our)’는 우리나라에서 각별한 사랑을 받는다. 영어권인 미국에서는 자기가 다니는 학교나 회사에 대해 스스럼없이 ‘내 학교(my school)’ ‘내 회사(my company)’라고 부른다. 반면 우리는 압도적 지분을 보유해도 ‘내 회사’라고 부르면 비난을 받는다. 심지어 의미상 사용해선 안 되는 ‘우리 와이프’란 표현도 종종 사용한다.
‘우리’라는 단어를 자주 사용하는 것은 집단주의적 성향이 강하기 때문이다. 김경일 아주대 심리학과 교수는 인간의 동기(motivation) 시스템과 ‘우리’라는 개념 간 흥미로운 상관관계를 제시한다. 토리 히긴스 컬럼비아대 심리학 교수에 따르면 인간은 ‘접근(Approach)’과 ‘회피(Avoidance)’라는 두 가지 동기 방향을 갖고 있다. 접근 동기는 바라거나 좋아하는 것을 이루려는 욕구를 통칭하며 회피 동기는 싫어하거나 무서워하는 걸 막고자 하는 욕구를 망라한다. 그런데 집단(우리)은 개인(나)에 비해 회피 동기에 민감하고 따라서 회피 동기에 입각한 정보에 더 쉽게 설득된다. 웬디 가드너 노스웨스턴대 심리학과 교수는 같은 내용이지만 1인칭 단수 대명사(I, Mine)만 사용된 책과, 1인칭 복수 대명사(we, our)만 사용된 책을 각각 읽은 실험자들을 대상으로 ‘사회와 개인의 딜레마 상황에서 어떤 것이 더 좋은 해결책인가’라는 질문을 던졌다. 그 결과, 단수 대명사 책을 읽은 그룹은 ‘개인의 자유’라고 대답한 비율이 높았던 반면 복수 대명사 책을 읽은 그룹은 ‘사회구성원 간의 조화’라고 답한 비율이 높았다.
최근 코로나 확진자 급증으로 방역 대책이 강화되면서 거리 두기의 비합리성을 지적하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만원 지하철은 방치하면서 결혼식 참석인원은 49명으로 제한하고, 대형 쇼핑몰 출입은 허용하면서 식당에서는 6시 이후 2명으로 제한하는 것을 납득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 사회는 여전히 선진국보다 방역 대책에 협조적이다. 이는 동료에게 피해를 주거나 타인의 비난을 받는 일을 피하겠다는 ‘회피 동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그러나 올 들어 14번째 거리 두기 연장 조치를 취한 정부가 코로나를 통제하지도, 연장 근거를 설명하지도 못하면 ‘개인의 자유’를 요구하는 저항이나 집단행동이 급속히 확산될 수 있다.
08월 30일(월) 文의 언론기피증
이미숙 논설위원
문재인 대통령은 역대 대통령 가운데 언론 접촉이 가장 적은 대통령이다. 취임 후 국내 주요 일간지와 대면 인터뷰를 한 바 없다. 언론계 인사들과의 공식·비공식 간담회도 거의 없다. 청와대 출입기자 신년 기자회견 외에 국내 매체와의 직접 인터뷰는 KBS의 ‘대통령에게 묻는다’가 유일하다. 반면 뉴욕타임스와 타임 등 해외 언론과는 개별 인터뷰를 해 내외신 역차별이냐는 지적도 나왔다. 가뭄에 콩 나듯 한 인터뷰는 늘 후폭풍이 일었다. KBS 인터뷰 땐 송현정 기자의 태도를 문제 삼는 강성 지지층의 문자 폭탄이 쏟아졌다. 뉴욕타임스 인터뷰에서는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이 대북협상에서 변죽만 울렸다”고 했다가 트럼프 측의 반발을 샀다. 타임은 “김정은에 대한 문 대통령의 일편단심은 망상에 가깝다”고 꼬집었다.
문 대통령은 지난해 기자협회보 서면 인터뷰 때 “기자들과의 직접적인 소통이 적다”는 질문에 대해 “국민과의 직접 소통에 방점을 두고 국민의 목소리를 직접 듣기 위한 다양한 기회를 마련하고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SNS 메시지 발신과 국민과의 대화, 간담회 등을 예로 들었다. 기자들의 질문에 즉답을 해야 하는 자리는 피하고, 하고 싶은 말만 일방적으로 하는 ‘대국민 쇼’에 집중한다는 말이다. 언론 기피증을 넘어 민주주의 사회에서 국민과 대통령을 연결하는 공론의 장으로서 언론의 역할을 부정하는 태도와 다름없다.
‘아는 만큼 보이고, 아는 만큼 사랑한다’는 말이 있다. 여당이 언론족쇄법을 밀어붙이는 것은 언론을 모르고, 언론을 불편해하는 문 대통령이 언론자유 원론만 얘기하며 침묵하기 때문이다. 유영민 대통령 비서실장은 지난 23일 국회 운영위원회에 출석해 언론봉쇄법에 대해 “입장을 낼 계획이 없다”고 했다. ‘묵시적 동의냐’는 야당 의원의 질문에 대해 “해석은 자유로이 하시라”며 오만한 태도까지 드러냈다. 미 백악관의 대통령 집무실 책상은 ‘결단(resolution)의 데스크’라고 불린다. 대통령제 국가에서 국사(國事)의 최종 결정권자는 대통령이라는 사실을 확인시켜주는 것이다. 언론봉쇄법에 끝내 문 대통령이 침묵한다면 결단의 책상 앞에 앉지 않겠다는 뜻이다. 책임을 지지 않으려 여당과 참모의 장막 뒤에 숨는 것은 대통령으로서 직무유기다.
08월 31일(화) 법무부 장차관의 갑질
이현종 논설위원
하나를 보면 열을 안다. 박범계 법무부 장관의 ‘인형 취재 강요’와 강성국 차관의 ‘우산 갑질’ 논란은 지금 법무부 내부 분위기가 어떤지를 시사한다. 강 차관이 지난 27일 아프가니스탄인들이 충북 진천 국가공무원인재개발원에 입촌한 상황에서 ‘정착 지원 관련 브리핑’을 계획했다. 당일 현지에 비가 시간당 10㎜ 이상 내리는 가운데 코로나 방역으로 실내에서 기자회견을 할 수 없게 되자 야외 기자회견을 강행했다. 서면 브리핑으로도 충분한 내용이다.
전날 박 장관은 아프간인 귀국에 직접 관여한 외교·국방 장관을 제치고 본인이 직접 공항에 나가 이들을 영접했다. 법무부 측은 박 장관이 인형을 나눠 주는 모습을 사진 기자들이 취재해주지 않는다고 보안구역 철수를 협박해 반발을 샀는데, 이날도 강 차관이 언론용으로 회견을 자청하면서 사달이 났다. 강 차관 비서가 우산을 옆에서 받치자 일부 기자가 비켜 달라고 요청했고, 이 직원은 결국 뒤에서 무릎을 꿇은 채 10여 분간 우산을 받치는 황당한 장면이 연출됐다. 이런 장면은 강 차관도 목격했고 현장에 나와 있던 법무부 간부가 위치까지 조정해줬지만 누구 하나 제지하지 않았다.
SNS에는 영국 엘리자베스 여왕을 비롯해 버락 오바마,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 등 세계 각국 지도자들이 직접 우산을 들고 있거나 다른 사람에게 우산을 씌워주는 사진이 줄줄이 올라왔다. 특히 2011년 11월 연평도 전사자 1주기 추모식에 참석한 김황식 총리가 장대비가 내리는데도 경호팀의 우산을 물리치고 40분간 비를 맞으며 행사를 진행했던 모습과 비교됐다. 이런데도 여당 의원들은 법무부가 아니라 당시 현장 기자들 요구 때문이라고 언론에 되레 책임을 돌리고 있다. 고민정 의원은 언론이 이 뉴스를 보도하는 이유를 “돈과 직결된 클릭 수 때문”이라며 전말(顚末)을 호도하고 있다.
추미애 전 장관은 윤석열 전 총장에 대해 “내 명(命)을 거역” 운운하며 전근대적인 인식을 보여줬는데, 이번엔 장차관이 ‘의전 행패’까지 보여주고 있다. 택시 기사 음주 폭행을 해도, 독직 폭행을 해도 자기 사람이면 끝까지 감싸다 보니 ‘인형·우산 갑질’까지 벌어지는 것이다. 자기편 인권만 보인다. 사람이 아닌 ‘우산이 먼저’인가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