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41/ 국방20/ 간첩 이야기/ 한국의 마타하리 김수임을 낚은 것은 '사랑'아닌 ' 붉은 돈' - 대북방송
대한민국41/ 국방20/ 간첩 이야기
■울프독의 전쟁사 - 작성자 울프독
-1- 한국의 마타하리 김수임을 낚은 것은 '사랑'아닌 ' 붉은 돈'
종북들의 '인간' 놀이
인터넷을 자주 드려다 보면 편협한 좌경 흐름은 나름대로 한 체제를 구축하고 있다. 북한이 해킹 공격은 물론 댓글과 반정부 컨텐츠의 포스팅 분야까지 힘을 집중하고 있다는 정보에서도 발견되는 원칙이다.
'인간'이라는 측면에서 봤을 때 북의 졸개들이 했건, 남의 얼빠진 종북들이 했건 그들의 활동에 세 가지의 반국가적이고 허위적인 카테고리가 있다.
하나는 독립이나 건국의 민족 지도자나 창군의 원로에게 가당치 않은 친일의 누명을 씌워서 명예를 훼손시키는 짓이고, 다른 하나는 남한 정부가 죄없는 양민을 좌익분자의 누명을 씌워 처형했다는 억지고 마지막은 공산 분자로 처단 된 좌익 분자들을 세인의 감성을 흔들만한 테마적 인물로서 변신시켜 치껴 세우는 것이다.
부연하자면 첫째의 사례는 김백일, 백선엽 장군을 친일파로 씹는 것이고 두 번 째는 공비 토벌을 말할 때마다 상투적으로 나오는 소리고 세 번째가 이제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닌 여자 공비 정순덕과 이 글의 주제 인물인 여자 간첩 김수임을 걸고 넘어지는 사례다.
▲1950년 부터 1963년까지 살인과 강절도 행각을 되풀이하며 공비질을 하다가 체포 된 정순덕. 23년간 복역하고 나와서 힘들게 살다가 2004년 사망하였다. 좌익들은 그녀를 지리산 여장군, 한국의 잔 다르크라고 미화하고 있다.
아래 글은 종북들이 '비련의 여인'으로 미화한 한 여인에 대해서 쓴 것이다. 국군 사상 최대의 이적 간첩 행위를 저질렀던 김 수임이라는 여자 간첩이다.
여간첩 김 수임은 한국의 마타하리라는 별칭이 있을만큼 맹활약을 해서 미군 애인으로부터 중요 정보를 빼돌렸을 뿐더러 이 중업이라는 국군 와해 작업 주도의 주범이며 남로당 군사 담당 간부를 육군 형무소에서 탈옥시켜 월북시키는 부역 행위를 했었다.
좌익 인간들은 김수임이 북으로 도망친 연인과 단지 사랑만을 했을 따름이고 아무런 간첩 행위를 하지않았는데도 이승만 정부가 고문과 날조로서 그 녀를 국가 반역자로 만들고 처형했다고 주장하고 있다.그래서 한없이 가엾고 불쌍한 사람이 김수임이라는 교묘한 각색의 이야기를 주장하고 있다. 놀랍게도 우리나라 대표 지식인 그룹인 문인들 중에도 이 시각에 동조하는 분들이 많았었다.
진실을 밝혀보겠다고 시작한 일이 자료를 모아가면서 이 작업이 상당히 어렵다는 사실을 깨닫지 않을 수가 없었다.
현재의 젊은 층에 김 수임을 모르는 사람들이 많은 사실에 놀랐었고 또 김 수임에 관한 여러 출판물들의 내용들이 중구난방인 것에 놀랐었다. 김 수임의 같은 경력에 관해서 이 책은 이렇게 말하고 저 책은 저렇게 말하고 또 그 책은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이 부정확의 혼돈들은 좌익들이 여러가지로 각색한 국가 흠집내기의 거짓 시나리오가 헤엄쳐 다닐 간격들을 만들어 주어 진실을 밝히는 작업을 더욱 어렵게 하고 있다.
다시 말하지만 김수임에 대해서 글을 쓸려고 했던 나의 처음 목적은 단순했었다. 그 녀가 진짜 간첩질을 했었다는 정도만 밝히는 것이었다. 허나 김 수임이라는 국가 안보에 관련된 역사적 인물에 관한 정보가 이렇게 엉망인 것이 심히 우려스러워 원래의 목표 범위를 대폭 넓히기로 하고 내나름대로 반 년 가깝게 심도있는 조사를 했었다..
재주많았던 김수임
/김수임
김 수임은 1911년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15세, 4학년 때 학교의 배려로 무료로 다니던 이화 보통 학교를 의붓아비 최 씨에 의해서 중퇴당했다. 최씨는 학교에서 끌어낸 어린 그녀를 포천에 사는 늙은 머슴에게 단돈 25원에 팔았다. 이런 어린 아이를 강제로 사다가 아내로 삼겠다는 인간이나 비록 의붓딸이지만 상품으로 팔아서 푼돈을 벌어보겠다는 인간이나 그 수준이 짐승스럽기는 꼭 같다고 보아야 하겠다.
하지만 김수임이 학교에 나오지 않은 것을 이상하게 생각한 학교 담임 강정희 선생이 수소문 끝에 그 녀가 팔려간 곳을 알아내고 달려가서 구출해냈다. 김수임은 인정많은 강 정희 선생의 도움으로 탈출하여 복교하고 졸업을 했다.
김 수임 관련 서적의 거의 전부가 그 녀가 11세에 민며느리로 팔려갔지만 어느 목사의 도움으로 탈출하여 이화 보통학교로 들어갔다고 설을 주장하는데 위의 말은 강 정희 선생의 아드님 증언이므로 더 설득력이 있다.
민며느리란 어린 아들이 있고 여성 노동력이 필요한 신랑 쪽의 집과 너무 가난하여 입 하나라도 줄이려고 딸을 시집 보내기를 원하는 신부 집의 이해가 떨어져서 아직 혼기에 어울리지도 않은 어린이들끼리 예약 결혼을 하고 나이어린 신랑 집에 어린 신부가 입주하는 것이다. 대개 당장 어린 신랑과 합방도 못하고 죽도록 노동을 하는 것이다. 김 수임은 어린 신랑에게 팔린 것이 아니니까 민며느리가 아니다.
김 수임 집안은 조금 복잡하다.그 녀의 어머니는 오씨, 김씨, 최씨등의 남성들과 세 번이나 결혼했는데 김 수임도 자기 진짜 성이 김 씨인지, 최 씨인지 혼동 된다고 말한 일이 있었다.
힘들게 보통학교를 졸업 한 정순덕은 미국 여선교사 캐럴 여사에게 소개되어 인연을 맺었다. 영리한 그 녀의 재능을 알아본 캐롤 여사가 그 녀를 수양 딸로 삼아 이화여전 영문학부에 진학을 시키게 된다. 졸업 후 10년 넘게 선교 사업분야에서 미국인 선교사들을 돕던 그 녀는 1943년 캐롤 여사의 소개로 당시 세브란스 병원장 홀 박사의 비서겸 통역으로 들어갔다.
그 녀는 한국 문학사와 한국 정치사에 적지 않은 비중을 남긴 시인 모 윤숙씨 [대표작“렌의 애가”]와 절친했었다.모 윤숙은 시인으로도 유명했지만 해방 후 이 승만 박사를 도와 외교 관계에서도 상당한 업적을 남겼었고 반공 활동에도 크게 기여했었다.
그녀의 친일 활동을 한 것을 거론하는 사람도 있으나 그 녀의 반공 활동으로 6,25 적 치하 백일간 죽을 고생을 하며 도망쳐 다닌 것은'목이 길어서 슬픈-- '하는 시를 지은 노 천명 시인이 적극적으로 부역 활동을 했던 것과 크게 대조 된다
모 윤숙과 김 수임은 이화 여전 영문과 2학년 터울의 선후배 관계였으나 나이 차이는 한 살 차이로서 졸업 후 두 사람은 수년간 성공회 일반 기숙사에서 룸 메이트로 같이 살면서 절친해졌다.
모 윤숙의 회고에 의하면 김 수임은 영문 마태 복음을 줄줄히 외었었고 피아노도 잘 쳤고 춤에도 세련 된 재주 덩어리였었다. 더구나 심성도 고왔고 사교성도 많아 주변에서 사랑받은 사람이었다는것이다. 간첩질과는 이미지와 너무 맞지않은 사람이라는 말이 었다.
미군 대령 베어드와의 만남
해방 후 그 녀는 좀 더 보수가 좋은 미군 전용 반도 호텔로 근무지를 옮겼다.
/반도 호텔 - 현재의 롯테 호텔 자리
여기서 그 녀는 한 남자와 운명적인 만남을 한다. 반도 호텔의 한 방을 사무실로 쓰던 주한 미 24 사단 헌병 참모였으며 한국 경찰의 수석 고문을 지내던 베어드 대령과 사랑에 빠져 동거에 들어갔다.
말에 의하면 베어드 대령이 본국의 부인과 이혼하고 김수임과 결혼하겠다는 감언이설로 그녀를 끈질기게 꼬였다고 한다. 베어드가 김수임 사건이 터졌을 때 나이가 56세인 것을 보면 두 사람의 나이 차이가 20년 가까이 된다. 상식적으로 말이 안되는 프로포즈였다.
/김 수임의 가장 유명한 사진
다른 애인 이 강국
그러나 베어드를 만나기 전 김 수임에게는 사귀던 한국인 애인이 있었다. 이 강국이라는 잘 생기고 잘 배운 인간이었다. 이 강국은 경성 제국 대학을 졸업하고 독일의 베르린 대학에 유학을 다녀온 당시의 최고 엘리트였다.
김 수임의 운명을 수렁으로 끌고 들어갔던 이 엘리트는 경성제국 대학 시절 일본인 미다케 교수에게 오염되어 공산주의자가 되었고 이를 한국에서 실행해보겠다는 급진 좌익분자였었다.유학중 독일 공산당에 입당한 국제파 좌익이기도 하였다.
/북한 외무성 부상 이강국- 경기도 양주 갑부의 자식이었다.
이 강국은 김 수임과 만났을 때는 처자식이 있는 유부남이었다.그의 부인은 현재도 명동에 있는 S 호텔 사장의 여동생이었다. 그런 그의 처지는 비록 김수임과 '필'이 꽂혀서 사랑하는 사이가 되었다지만 쉽게 결합할 대상이 아니었다. 김 수임은 베어드와 동거하면서도 이 강국과의 연인 관계는 계속 유지하였다.
해방이 된 후 이 강국은 좌익 활동을 본격화하였다.외면적으로는 여 운형의 건국준비위원회에서 활약을 했으나 내면적으로는 남로당 리더 박 헌영의 중요한 참모였었다. 이 강국은 내연관계인 김 수임의 미군 동거남이 한국 경찰의 실력자라는 사실을 여러 가지로 이용했다.
이 강국의 원격 조종
남로당의 활동에 물러터진 태도로 일관하던 미 군정(軍政)은 군정 일년도 되지 않아 발생한 좌익 주도의 정판사(精版社) 위폐 사건에 화들짝 정신이 들어 폭력적으로 날뛰던 남로당의 섬멸에 나섰다.
정판사 위폐 사건은 일본이 식민지 조선에서 발행해서 그 때까지 남한에서 통용되던 구화폐를 남로당이 활동 자금 마련을 위해 대량으로 위조했던 사건이다. 이 위폐 사건의 규모가 얼마나 컸던지 남한에 인플레이션이 일어날 정도였다.
1946년 5월 이 이 사건이 터지고 미군정이 비로소 본격적으로 남로당 소탕에 나서자 그 해 9월 박 헌영은 북으로 도주했었고 이어서 이 강국을 비롯한 남로당 간부들도 같이 줄을 지어서 북으로 도주하였다.
박 헌영이 이끄는 남로당은 북으로 도주했으나 38선에 가까운 황해도 해주에 본부를 차리고 남한 파괴 공작에 혈안이 되었었다.북으로 도주한 이 강국은 미군 고위층과 동거하는 김 수임과 비선(秘線)을 열게 된다.
김 수임의 이부 동생 최 만용과 함께 남로당 간부 김 형육이 그 녀를 찾아와 이 강국의 편지를 전하며 그 반응을 살폈다. 최만용의 아버지가 김수임을 포천의 늙은이에게 인신매매한 인간이었다. 아비는 그럴지 몰라도 두 남매의 사이는 좋았던 것으로 보인다.
김 형육은 박 헌영 월북 후 이 주하와 함께 남로당 조직을 끌고 있던 김 삼룡의 오른팔격인 간부였다.두 놈들의 보고에 그 녀가 아직도 이 강국을 잊지 못하고 있고 협조의 가능성이 있다고 본 이 강국은 자기 심복 신 경희를 여섯 번이나 파견하여 김 수임과 접선하게 했다.
이 강국이 옛 연인이라는 인연으로 개척했던 비선(秘線)의 김 수임은 참으로 이용 가치가 큰 공작 자산이었다. 이 강국은 계속 자신에 대한 줄을 풀지 않고 있었던 김 수임을 최대로 가동했다.
그는 먼저 달콤한 말과 함께 자신의 사랑은 변하지 않았다는 것을 부단없이 강조하였다. 그리고 이 강국과 김 수임 서로가 엮인 미래 청사진도 같이 제시하였다.
머지않아 남조선은 남로당의 주도로 공산화 될 것이며 자신은 조선 반도에 집권하는 공산 정부의 지도층의 한 사람이 될 것이니 그 때가 되면 자신은 그 녀와 꼭 결합하여 백년해로 할 것이라는 사실이었다. 김 수임은 이 강국의 달콤한 말에 현혹되었는지 좌측으로 기울기 시작하였다.
영어가 유창하였던 그녀는 시인 모 윤숙이 영어를 할 줄하는 여성들을 모아 만든 낭랑클럽이라는 사교 클럽에 가입하고 미군인사들의 모임을 자주 가졌었다. 한미 양국의 고급 정보를 쥔 사회 상층의 인물들이 참석했을 것이니 김 수임은 이 파티에서 이 강국을 위한 정보를 다량 입수할 수 있었을 것이다. 물론 이면에는 훨씬 더 큰 물질적인 유혹이 자리잡고 있었다.
미 정보 기관의 보고서를 보면 이 낭랑 클럽은 그 설립 연도가 1948년 아니면 1949년이라고 추정하고 있다. 낭랑 클럽은 특히 정부가 부산에서 피난살이를 할 때 활발히 움직였는데 외면적으로는 미군과의 친선을 도모해야 하는 한국의 궁색한 형편도 있었지만 내면적으로 미군 고위층에서 정보를 뽑아내기 위한 한국 정부의 은밀한 지원이 있었다.당시 미군은 국군의 작전과 군수, 인사권까지쥐고 있어 국군으로서 이런 방면의 정보가 필요했었다.
반면 미군 정보기관은 반대로 김 수임 사건후 이 사교 모임을 통해 미군의 기밀이 북한으로 넘어가지 않을까 우려하여 감시했었다. 하지만 이 모임을 주도한 모 윤숙은 이 강국이 아직 남한에 있을 때 김 수임과
언쟁을 하고 헤어졌다고 말하고 있다.다 이강국과의 관계를 은폐하려던 김수임의 입김이 느껴지지만 --
김 수임 그 녀의 옥인동 집은 매우 크고 화려한 집이었다. 그 녀는 자기 집을 사교 모임의 장소로 삼고 자주 파티를 열었다. 그 녀는 1950년 6월 16일, 6,25 발발 아흐레 전 고등 군법회의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한국 전쟁 발발 직후 처형되었다.
그 녀를 꼬셔서 동거를 했던 존 베어드 대령이 북한 스파이 혐의로 체포되어 죽음의 길을 가고 있던 김 수임에게 보인 행동은 아주 비열했다. 그는 김 수임 사건이 불거지자 일단 모 윤숙을 찾아와서 이 승만 박사에게
구명 운동을 해달라고 말하고는 부랴부랴 미국으로 도주하였다.
그리고 미 본토에서 있었던 미군 조사에서 김 수임과 같이 동거한 사실조차 부인했으며 그 녀의 이적 행위에 어떤 도움이 되는 행위도 하지 않았다고 강하게 부인했다.
김 수임이 그 녀가 처한 상황에서 내린 현실적인 판단에서 이 강국을 버리고 택했던 베어드는 전하는 몇 가지의 정보만으로도 아주 야비한 인격의 소유자임을 집작케 한다.
나이 50 대의 군고위층에 재직하면서 여자에게 한 눈을 판 저열한 인품의 수준을 보여주었는데 그는 부인과 이혼하고 김 수임과 결혼하겠다는 말을 깨끗이 엎어버리고 본국에 사는 와이프와 자식을 서울로 불러와 두 집 살림을 하였다.
인간 김 수임이 격동기의 한국을 살면서 주어진 환경을 최대로 활용하려고 노력하였던 끝에 얻어낸 것은 자신의 죽음과 자기의 유일한 피붙이인 아들이었다. 아들에 대해서는 글 말미에서 소개한다
/김 수임과 세브란스 병원의 치과 과장 부스 박사.30년대 말.
김 수임을 간첩으로 유도한 것은 ‘돈?’
먼저 그 녀가 어떻게 이 강국의 꼬임에 넘어가서 남로당의 동조자가 되었는지를 추리해본다. 그녀가 진짜 골수 공산주의자로 세뇌되어 남로당의 앞잡이가 되었을 가능성은 별로 커 보이지 않는다.
첫째, 그 녀는 어렸을 때부터 개성의 교회에 다녔고 미션계 이화 여전에서 기독교적인 분위기에서 교육을 받았었고 정동 교회의 독실한 신자였다. 그 녀를 거두어서 수양 딸로 길러준 선교사 캐럴 여사와의 인간적인 교감이나 신앙적 감화도 컸었다.
더구나 김 수임은 1942년 세브란스 병원에 취직하기 전에 10년간 선교사들과 선교 업무에 종사했었다. 그런 그 녀가 비록 이강국과의 관계로 공산주의에 어느 정도 경도는 되었을 망정 기독교 종교와 상극인 그 이념에 목숨을 걸 정도로 푹 빠졌다는 것은 조금 어울리지가 않는다.
이 강국과의 사련(邪戀)에 빠져 인생을 망쳤다는 일반인의 인식도 그 녀의 나이를 보면 조금 이해가 안 간다. 그 녀가 나이 30을 조금 넘은 1943년에 세브란스 병원에 폐렴으로 입원한 이 강국을 만나 해방 후까지 사랑을 나누었는데 그가 월북한 무렵에 김 수임은 베어드 대령에게 일생을 걸고 정을 옮긴 뒤였다.
[그의 결혼 약속을 진지하게 믿었다 한다.]
북에 있는 이 강국의 유혹이 가열되었을 때 그 녀의 나이 역시 30대 후반으로 접어들고 있었다. 사랑의 불장난에 신세를 망치는 10대의 첫 사랑 놀음이 아니라 머릿속에 감성보다는 이성, 연애보다는 계산의 현실 인식이 꽉 차가는 상황이었었고 나이였었다.
그 녀가 그렇다면 어떻게 남로당의 협조자로 넘어갔을까 ?나는 그 녀가 남로당을 위한 간첩질을 한 것은 박 헌영의 남로당이 그 녀에게 가한 금전 공세에 넘어간 것이 확실하다고 본다.그 녀와 남로당 인간들과 엮은 발걸음을 쫓아가 보면 유난히 ‘돈’이 걸린 흔적이 많이 보인다.
남로당원 누구에게 자금을 대주었다던가 차를 사서 동생에게 주었다던가등의 이슈가 나오는데 가장 거액의 돈이 걸린 사건은 네 가지다.
그 하나다.해방후 북한이 남한보다 더 빨리 화폐 개혁을 하고 그 때까지 북한 지역에서 사용되던 일제 조선은행 발행 조선 은행권을 회수했었다. 말하자면 일본이 조선에서 통행시키던 화폐였다.
그러나 남한에서는 여전히 이 돈을 사용했었다.김 일성 집단은 북한에서 쓸모가 없어진 구 조선 은행권 지폐를 남로당에게 공작금으로 넘겨주었다. 남로당 공작금의 규모가 무척 커서 그 운반에 트럭이 동원되어야 했다.
38선과 서울 사이에는 여러 검문소가 있어서 엄중한 검문을 했었다. 거액의 돈을 실은 트럭이 검문되지 않고 통과하기는 쉽지가 않은 상황이었다.김 수임은 베어드 대령에게 부탁해서 미군 트럭을 빌려 화폐 화물을 서울로 옮겨주었다.
미군 트럭이 운행했으니 한국 군경이 검문인들 제대로 했을 리가 없다.이 거액을 성공적으로 운반을 해주고 김 수임에게 떨어진 수고료만도 어머어마 했을 것이다.
그리고 두 번째다.
남로당은 김 수임에게 남로당 군사책 이 중업을 탈출시키는 활동비로 800만원을 주었었다. 쌀값으로 환산한 현대의 화폐 가치는 약 8억-10억 정도의 거액이다. [이 점 아래에서 더 자세히 이야기 하고자 한다.]
공작에 성공하고 챙긴 돈이 상당할 것이다.
그리고 세번째다
김 수임이 남로당으로부터 공여받은 최다 금액은 옥인동 19번지에 있었던 김 수임의 호화 주택이었다.
남로당에서 거액을 투자하여 옥인동에 호화 주택을 사서 아지트 겸 김 수임의 활동 무대로서 샀었다. 이 집은 넓은 정원이 있던 이층 집으로서 200평 정도 되는 호화 주택이었다는 수사 당국의 기록이 지금도 남아 있다. 이 집의 구입할 때 김 수임의 이부 동생 최 만용이 집을 보러 다녔다고 한다. 김 수임은 이 집에 1948년 겨울부터 거주하기 시작했다. [이 집에 대해서 뒤에서 더 설명하겠다. ]
마지막이다. 자가용과 운전수까지 두고 돈을 물쓰듯 썼던 김수임의 사치스런 생활도 그런 증거의 하나다.그 녀가 당시 돈을 어마어마하게 버는 기업을 경영하는 것도 아니었고 지금과 같은 고액 연봉자도 아니었다.
위의 증거들은 종북들이 말하는 사랑이 아니라 정보 가치 큰 그녀에게 북의 남로당들이 돈의 융단 폭격을 했다는 것을 말해준다.
-2- 한국의 마타하리 김수임을 낚은 것은 '사랑'아닌 '붉은 돈'
김 수임 무죄설
한국인에게 아프디 아팠던 격동의 시기가 지났고 경제 개발의 단계를 거쳐 선진국 말석이라도 차지하게 된 21세기가 되었다.그간 김 수임은 TV나 여러 매체에서 끊임없이 다루어져 세간의 관심에서 벗어난 일은 없었다. 여자 간첩에, 미군의 현지처에, 그리고 공산당 거물의 연인에, 여기에 돌도 안된 갓난 아들을 놔두고 총살이라는 극단 방법으로 최후를 맞은 그 녀는 여러모로 영원한 세간의 이목을 끌만한 흥행성이 있던 여인이었다.
80년대 불기 시작한 민주화 운동의 기류에 끼어들어서 한국 사회에 자리잡은 진보, 또는 종북이라는 사람들은 자신들의 좌파 브랜드를 강화하기 위한 전략으로서 택한 여러 메뉴 중에 김 수임이 들어간다.
사랑때문에 할 수없이 남로당 거물을 도와 간첩질을 하다가 체포되어 희생당한 비련의 여주인공이라는 설정이 더욱 발전하여서 김 수임은 애인을 숨겨준 죄 밖에 없으며 그 죄는 짧은 형기의 범인 은닉죄 밖에 적용할 형법이 없다는 황당무계한 소리가 나왔었다.
그 녀가 재판정에서 자기 방어를 위해서 했었던 그 유명한·진술,
-저는 한 남자를 사랑한 죄밖에 없습니다.-라는 말이 후세에 그 녀의 모든 것을 덮어버리고 그 녀를 변호하는 증언으로 사용되고 있다.
급기야는 미국 문서 보관소에서 기밀 해제한 서류를 분석해서 이 강국이 미국의 간첩이며 김 수임은 그를 도운 죄 밖에 없는데 한국 당국이 억울한 그 녀를 잡아 고문으로 강제 자백을 받아 간첩으로 몰아 죽였다는 억지 소리까지 나왔다..
1 편에서도 언급했지만 1996년 미국에서 기밀 해제되어 공개 된 서류가 있었다.
김 수임 사건이 터진 뒤에 미군이 그 녀의 애인 베어드 대령이 이적 행위 했는지 알아 보기 위해서 심문한 기록인 200쪽의 베어드 보고서는 아래와 같이 밝히고 있다.
베어드가 부정적인 여성의 교제로 미군의 명예는 실추 시켰으나 그가 일련의 간첩 혐의에 동조했다는 것은 인정할 수가 없다는 점이다.
이 보고서의 말미에 김 수임의 사진 2장이 첨부되어 있고 '알려진 것과 실제 외모는 차이가 있다'라고 말했다. 요염한 스파이의 이미지와 달리 수수한 인상을 주는 보통 한국 여인의 모습이라는 말인가 보다.
미국 국가 기록 보존소에서 발견한 이 기록은 진보들이 김 수임 무죄론을 변명하는데 자주 인용된다.그러나 이 기록을 잘 보면 그런 침소봉대할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금방 알 수가 있다.
즉 이 조사의 결론은 베어드가 그의 정부(情婦)김 수임의 간첩질에 관여한 증거가 없다는 말이다. '절대' 김 수임이 간첩이라는 증거도 없다는 뜻이 아닌데도 한 이름난 진보 정기 출판물이 이 조사 보고서를 호도해서 크게 보도하고 있고 이 것이 인터넷 여기저기에 퍼져 있다.
한마디로 여기서 한 사실을 밝히고 이야기를 하기로 한다.
나는 6.25 전 서울 시경 경찰 사찰계에서 근무하셨던 박 종순 여사에게 김 수임이 과연 어떤 여자였는지 물어보았다. 그 녀는 김 수임의 수사에 참여하여 행상으로 변장하고 잠복 근무까지 했었다. 그 녀는 일언지하에 김 수임이 의심할 바 없었던 간첩이라고 말했다.
먼저 간첩 김 수임이 저질렀던 가장 유명하고 또 극형을 피할 수없었던 대표적인 이적행위를 소개한다. 그 녀의 최대 이적 행위는 남로당의 국군 침투 책임자 이 중업의 탈옥과 월북을 들 수가 있다.
1949년 2월 말 남로당 조직부장 이 중업이 체포되었다.이 중업은 당시 남로당 군사담당 간부로서 해방후 1947년 군부대에 침투하여 좌익 세력을 양성하고 제주도 4.3사건등을 주도한 공산당 거물이었다.
그는 군내 좌익분자 강 태무와 표 무원, 양 부역자 장교들의 부대 인솔 월북도 지휘하였다. 이 중업은 대한민국에 말할 수없는 피해를 준 인간으로서 한국 정부의 입장에서 절대 용서할 수없는 악질 이적 분자였다.
그가 체포 되자 북에 있던 박 헌영은 그의 구출을 지시하였다. 이 중업이 체포되자 북한은 당시 남한과 북한 사이에 밀무역 형식으로 거래되던 루트를 통해 김 수임에게 해주산 배 상자로 위장한 박스에 거액을
담아 보냈다. 그 액수는 무려 800만원이나 되는 돈이었다.[그 액수가 현재 8-10억원에 해당한다는 말을 1 편에서 소개했었다.]
김 수임은 재간을 부려 이 거물 빨갱이를 육군 형무소에서 탈옥시켜 북으로 보내 버렸다.그 녀는 구출작전에 북에서 보낸 엄청난 자금을 물 쓰듯하였다.그녀는 이화여자 대학교의 재학생이며 남로당원인 이 옥순이라는 학생에게 큰 돈을 주고 이 중업 탈옥 지원을 지시하였다.
이 옥순은 육군 형무소의 모 중사에게 접근하여 몸을 주고 사귀었다. 유성 온천까지 다녀오는 등, 정이들대로 들게 하고 그의 도움으로 이 중업을 탈출시켜 김 수임 집 근처에 미리 얻어놓은 집에 무려 7개월이나
은익시켰다.
이 중업이 김 수임 집에 숨어 있었다는 설이 압도적인데 이것은 얻어놓은 집에 숨어 있었다는 설보다 조금 신빙성이 떨어진다. 경찰의 추적이 있다는 가정 아래 움직였을 남로당에서 중요한 거점인 김 수임의 정체까지 한꺼번 들어날 이런 짓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해 10월 김 수임은 베어드에게 개성에 사는 어머니가 위독해서 의사를 보내야 한다라고 거짓말을 하고 대사관 차를 빌렸다. 윌트라는 미국인 중사가 호위하는 중에 머리를 노랗게 물들여 멀리서 보면 서양 사람같이 변장을 한 이 중업을 의사 복색으로 꾸미고 이 옥순을 간호사 옷을 입혀 북으로 보냈다.
여러 검문소를 지나 [당시 남한 땅인]개성을 통과하고 황해도 배천 못미쳐에서 이 중업을 내려주어 삼팔선을 넘어가게 하였다
이 중업은 월북 후 간첩들과 공비 남파에 적극활동을 했다. 이 탈출 과정은 차를 운전했었던 김 수임의 이부 동생 최 만용이 체포 된 뒤에 자백한 것이다. 이렇게 구해낸 이중업은 50년대 말 김일성 정권이 처형해버렸다. 이 글의 조연인 이강국이나 박헌영도 죽임당함을 면치 못했다.
김 수임의 옥인동 호화 주택
이 호화주택은 이 완용의 아들이 살던 집으로서 2층 양옥이다. 대지가 200평으로서 일층에 파티를 위한 홀이 있었고 큰 정원도 있었다. 현재 근처 평당 시가가 현재 무려 평당 2,500만원에서 3,000만원이나 되니
이 집은 적어도 50억 내지 60억원의 가치를 가지고 있다고 하겠다.
역사 기록들은 이 집을 그녀의 정부 베어드 대령이 마련한 집이라고 말하고 있다.아무리 부자 나라의 육군 대령이라지만 무슨 돈이 있어서 그런 호화 주택을 [결혼할 사람도 아닌 김 수임을 위해] 사랑의 불장난만을 위한 장소로 샀을까?
두 사람의 살던 곳은 원래 충정로에 있던 미쿠니 아파트였었다. 이 아파트는 지금 도로 확장으로 앞 부분이 잘려나가 볼품없는 재건축 대상의 아파트가 되었지만 일본 시절에는 세련된 고급 아파트였었고 해방후 미군 장교들의 숙소로 사용되었었다.
▲1950년 서울 수복 전투의 유명한 사진에 멀리 온전한 상태의 미쿠니 아파트가 보인다.
미군들은 50년대 말까지 이 아파트를 장교 숙소로 사용하다가 내자 호텔로 옮겨갔다. 이곳에서 다시 마포로의 가든 호텔을 월세로 얻어 옮겼다가 현재는 용산 기지내에 드래곤 힐이라는 아파트를 건축해서 사용중이다. 이 곳 미쿠니 아파트에서 김 수임과 베어드 대령은 동거했었다.
▲반쪽 난 미쿠니 아파트의 오늘 날 모습[초록 건물]
옥인동 집이 베어드 것이 아니라는 것은 김 수임의 체포 후에 베어드가 부랴부랴 옥인동 집에 돌아와서 짐을 대강 추려 작은 가방에 담아 떠났다는 사실에서 짐작할 수가 있다. 자기 집이라면 이렇게 간단히 떠나지는 않았을 것이다.
김 수임이나 이 강국 두 사람 다 경제적으로 풍성하지는 못했었다. 그 녀가 해방 전에 이 강국과 사랑에 빠져 두 사람만의 사랑을 나눌 비밀 보금자리를 공덕동에 얻었었는데 온전한 집도 아니고 작은 셋방이었다.
두 사람 다 돈이 없었던 것이다.두 사람의 사랑 행적은 주변 동네 사람들에게 다 노출되었고 말들이 많아지자 두 사람은 동네를 떠나야 했다.
그런 김 수임의 경제적 능력에 어떻게 이 엄청난 집을 살 수가 있었겠는가 ? 김 수임이 이런 거액의 돈을 남로당에서 빨아대서 대형 주택을 샀었거나 또는 남로당이 이곳에 투자했던 것은 다 김 수임과 남로당의 공통의 이익이 합치되었기 때문임에 틀림없다.
남로당은 포섭한 부역자들을 매수하고 또 이런 집을 당의 아지트로 이용하기 위해서 주택을 사서 공여하는 비밀 공작을 했었다.
한 사실을 보자.
김 수임의 집을 압수수색 했을 때 권총 세 자루와 실탄만 200발이나 나왔었다. 그리고 그녀와 남로당과의 연계를 증명해주는 수십건의 서류가 나왔었다. 더구나 결정적인 증거가 되는 이 강국 서명의 편지가 발견되었다. 모두 그녀가 남로당의 공작원으로 일하고 있었다는 것을 증명해준다.
남로당 당원들은 이 집을 거점으로 삼아 비밀리에 출입하였다. 감 수임외에 비슷한 호화주택 사례가 보인다. 남로당은 군부 뿐만아니라 경찰에도 침투하여 공작원을 심었었다. 경찰의 중요 프락치중 한명이 한 기백이라는 경감이었다.
남로당은 중부 경찰서 근무 한 기백 경감에게는 장충동에 시가 백만원의 호화 주택을 사주고 이를 자기들 무기를 보관하는 아지트로도 사용하였다. [이를 남로당 용어로 '보관 사업'이라는 부른다.]
김 수임은 베어드 대령등으로부터 미국 철수의 정확한 시기등의 정보를 뽑아 남로당에 넘기고 있었다. 미군을 통해 얻는 고급 정보의 대가로 그 녀는 팔자를 고칠만한 보수를 남로당에 요구했을 것이다. 좀 더 좋은 정보를 얻기 위해서 미군들을 상대로 사교 활동을 할 큰 집이 필요하다고 핑계를 댔을 수도 있다
하여튼 남로당이 제공한 자금으로 이 집을 구입한 김 수임은 이 집을 자기 명의로 샀을 가능성이 크다.체포 된 남로당원 하나가 김 수임이 이 집을 ‘ 당의 것이니까’ 하고 언급했었다는 자백이 기록에 있다. 자기 명의지만 집의 진짜 주인이 남로당임을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김 수임은 이 집에서 재벌 마님처럼 살았다. 잠복한 수사 기관원들이 지켜보니 수시로 외국인들을 불러서 파티를 하고 또 말한대로 남로당원들이 들락거렸다. 유명한 수필가였으며 김 수임의 후배인 전 숙희씨가 이 집을 방문하니 화려한 실내에서 우아한 실크 드레스를 입은 김 수임이 맞이하더라는 것이었다.
이 집이 김 수임의 명의로 되어 있다는 것은 그 녀가 사형선고를 받자 수양 어머니 캐롤 선교사와 면회하여 그 녀에게 집을 양도했었고 나머지 자기 소지품들은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 도와주는데 쓰라고 말했다는 점에서 들어나 보인다
김수임의 흔적을 찾아서
김 수임에 관한 책자들은 어김없이 그녀의 아지트가 옥인동 19번지에 있었다고 쓰고 있다.나는 이곳을 찾아보기로 했다. 일단 등기부를 떼어보니 옥인동 19번지는 다섯 필지로 분할되어 있었다.
▲김 수임이 살던 집터에 새로 들어선 집.
본 주인 이 완용의 아들이 아마도 여러 채의 집들을 사들여 헐고 대형 건축물을 세웠을 것이다.그 곳 19번지 여러 필지의 대지 위에 김 수임이가 살던 시절의 집을 유추해볼만한 근사한 2층 가옥이 있었다.김 수임의 집은 대지가 200평이 넘었었고 근사한 정원이 있었으며 집은 이층집이라고 했다. 이층이라도 평범한 2층 집이 아니라 샹데리아가 천정에 붙은 대형 파티장이 있는 호화 이층집이라고 했다.
▲대문 밑으로 촬영한 내부
방문한 저택은 위의 조건과 딱 맞았다. 집이 매우 크고 상당히 클래식한 분위기를 풍겨서 혹시 김 수임이 살던 집이 아닌가 했는데 관계 서류를 찾아보니 2000년대에 들어와서 새로 신축한 집이었다.
등기부를 다시 거슬러 올라가며 찾아보니 이 곳 부동산은 1967년도에는 정부 소유였었고 정부가 건축한 건물이 이 해에 건축물 대장에 등재 되어 있었다.그 전에 있던 집을 헐고 새로 지었다는 말인데 김 수임의 집으로 강력 추정되는 이 집터가 정부 소유였던 것이 관심을 끈다.
6-70년대 청와대 경호실은 대통령 경호상 효자동 대통령 출입 하는 도로 변 주택들을 다량 매수해서 정부 직원들이 살게 한 일이 있었다. 그러나 이곳은 대통령 통행로에서 서쪽으로 한 불록이나 떨어진 옥인동인데 그럴 매수의 대상이 되었던가 의심스럽다. 주변 이웃에게 물어보니 이곳에 사는 분은 민간 주민이라고 했다.
김 수임 가옥터로 강력히 추정되는 이 집이 정부 소유로 있었다는 것은 김 수임이 죽고 나서 남로당 공작금으로 산 이 집을 당국이 몰수했다는 가능성을 강하게 암시하는 것인데 그 녀가 처형당하기 전 유언으로 집을 넘겨준 캐롤 여사는 아무 것도 못 받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3- 한국의 마타하리 김수임
김 수임의 최후
구속중인 김 수임이 언제, 어디서, 어떻게 처형당했는지에 관한 기록도 정확하게 전해오지는 않고 있다.여러 가지 설만 이 책 저 책에 전해져 내려온다. 하나는 북한군이 서울로 진입 했을 때 서대문 형무소[교도소]에서 처형되었다는 설이고 다른 하나는 그 녀가 수색의 군처형장에서 총살당했다는 설이고 또 다른 하나는 김수임이 이 강국과 사랑을 속삭이던 한강가에서 총살당했다는 설이다.
한 책에는 서대문 형무소에서 어느 중령이 그 녀를 직접 총살했다는 믿기 힘든 소리도 기록 되어 있다. 그러나 서대문 형무소는 군인이 아니라 민간이 관리하는 형무소였다, 그런 곳에 군인이 있을 이유가 없다. 그리고 6.25 북한군이 서울 진입 당시 서대문 형무소에서는 직접적인 처형은 없었다. 황망중에 형무소 직원들이 대다수의 좌익수들을 그냥 놔두고 철수했었다.
이때 석방된 좌익사범들중에 국회 프락치 사건의 주범 노 일환등이 들어 있었다. 북한군의 서울 점령 뒤 이 서대문 형무소에서 석방된 좌익수들은 보도 연맹원들과 손잡고 대대적인 우익 학살에 나선다. 정신이 든 정부는 대전에서부터 보도 연맹원들이나 재소자들을 가차없이 처단했는데 이것이 부작용을 낳아 지금에는 큰 논쟁꺼리가 되었다.
김 수임이 군법회의에서 사형을 언도받은 것은 1950년 6월 16일이고 그 아흐레 만에 6.25사변이 터졌다.수색 군 사형 집행장으로 이송되어 형 집행당할 법적 시간적 여유도 없었다. 그 녀가 처형된 것은 서울이 북한군에게 함락당하기 직전인 1950년 6.28일 이전인데 해제된 베어드 파일에 의하면 그 녀가 죽은 날이 1950년 6월 28일이라고 한다. 반면 용산 소재 육군 형무소에 수감하고 있던 중요 좌익수들은 전쟁 발발과 동시에 발빠르게 처형되었다.
먼저 이 주하, 김 삼룡의 거물 남로당의 거물들은 전쟁 다음 날, 6월 26일 남산으로 끌려가 바로 처형되었고 이 중업에 이어 국군 내부의 공작을 담당하였던 남로당 군사 담당 이 재복도 이곳에서 처형되었다. 좌익 분자 수사를 담당하였던 김 창룡이 직접 처형했다는 말도 있다. 이들은 군 관계 범죄가 많아 육군 군법회의에서 사형 선고를 받았었고 김 수임도 사법기관의 재판소가 아니라 군사 재판을 받았었다.
김 수임이 용산에 있던 군 형무소에 수감되어 있었다는 사실은 모 윤숙 시인이 쓴 수기에서도 그 녀가 용산에 있는 군 형무소로 그 녀를 면회 갔었다는 사실로도 증명된다. 용산에 있었다는 군 형무소는 서빙고 동에 있는 비비안 빌딩 앞의 미군 시설로서 현재는 미군의 정보 여단이 사용하고 있다. 이 건물은 일본군 일개 사단이 경성에 주둔하고 있었던 일제 시절 일본군의 형무소였다고 한다.들어가 보면 아주 허접하게 되어 있고
서대문 구치소와 구조가 매우 비슷하다.
▲주한 미 육군 정보 여단이 사령부로 쓰고 있는 전 일본군 형무소. 서빙고 역앞 비비안 빌딩 바로 옆.
김 삼룡, 이 주하를 처형한 남산은 동빙고 동에서 가까운 남산의 남쪽 기슬로 추정된다. 현재 남산 순환 도로가 통과되고 있는 도로 아래 어느 후미진 골짜기이겠지만 이것 역시 정확히 알아 볼 수가 없다.그렇다면 이미 사형 선고를 받은 김 수임도 북한군 침공과 함께 이 남산 기슭에서 사형 당했거나 용산 형무소 내부에서 급히 처형당했을 가능성이 제일 크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하지만 더 알아 보자
김 수임의 후배이며 수필가인 전 숙희씨는 김 수임 일생에 대한 글을 썼었다. 이 글에서 김 수임은 한강변에서 총살당한 것으로 하고 있다 김 수임이 이 강국과 사랑을 나누었던 한강변에서 석양에 처형되는 형식으로 드라마틱하게 글을 맺었는데 나는 전 숙희씨가 선배 모 윤숙씨와 인연이 닿고 있음에 주목하고 이 한강변 처형설에 유력한 가능성을 걸고 일단 추리를 해보았다.
김 수임과 친했던 모 윤숙씨는 이 승만 대통령을 포함 정부 인사와 교분이 짙어 김 수임의 최후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알고 있으리라고 본다. 육군 형무소의 A급 공산 분자들은 특무대장 김 창룡이 직접 남산으로
데려가 처형했던 반면 나머지 B급 이하 좌익 분자들은 그대로 두고 있다가 전황이 나빠지고 급한 상황이 되자 남산보다도 더 가까운 서빙고 역 근처 한강변으로 데려가 처형했을 가능성도 배제하지는 못한다.
육군 형무소와 서빙고 역 옆 이곳은 불과 2-300미터 정도의 거리 밖에 되지 않는다.
그리고 이것은 서울이 위급하게 된 27 일 심야, 또는 자정이 넘어 28일이 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베어드 보고서에 김 수임이 1950년 9월 28일 처형되었다고 되어 있는데 북한군은 28일 새벽에 서울에 들어왔었다.앞서 서대문 형무소에서 육군 중령이 처형했다는 것은 이 용산 소재 육군 형무소 책임자가 중령이었고
그가 심야 한강변의 처형을 지휘했었기 때문에 나온 말인지도 모른다.
북한군이 서울을 점령하고 불과 수일간 이곳 서빙고 역 부근 한강변에서 우익 인사나 국군 낙오병들이 연달아 처형되었는데 여기서 다수의 좌익 사범들이 처형된 것에 보복하기 위해서 인상이 짙다. 이들 우익 인사의 사체는 그대로 강변에 유기되어 그대로 부패하여 갔다.
유엔군인 미 7사단 보병과 한국군 17연대가 수륙 양용 장갑차를 타고 건너편 반포에서 이쪽 서빙고 지역으로 도강하던 그 해 9월 25일에도 수백 구의 부패한 사체들이 강변에서 그대로 버려져 있었다.
김 수임의 아들
김 수임은 1949년 11월 베어드와의 사이에 혼혈아 아들을 낳았다. 낳은 곳은 청량리 소재 서울 위생 병원.그 녀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이곳에서 6개월 동안이나 입원해있다가 아기를 출산했다. 장기 입원의 이유는 알 길이 없다. 그리고 반 년도 안 되어 체포되고 처형되었으니 그 핏덩어리 아들의 운명에 관심과 동정심을 안 가질 수가 없다.
그 아들은 1951년도에 출판 된 김 수임 수사 담당 오 제도 검사 수기에도 소개되어있다. 오 제도 검사가 김 수임의 무기 은익 자백을 받고 그 녀와 같이 심야에 옥인동 집을 급습했을 때 안방에서 일하는 아줌마에게 안겨 자던 갖난 아이가 있었다.그 아기는 김 수임의 혼혈아 자식이었다. 아기는 오래간만에 나타난 엄마와 아줌마를 번갈아 가며 무척 울었다. 이를 본 오 제도 검사는 가슴이 무너지는 것 같았지만 냉정을 지키며 김 수임이 대접하는 맥주를 사양했다고 회상하고 있다.
어느 책에는 김 수임이 아들을 낳았고 그 불쌍한 아들은 김 수임 사후 청량리 밖에 버려졌다고 말하고 있는데 좀 넌센스가 있는 풍문인 듯하다 .그 김 수임의 아들은 그녀가 처형 당한 후에 시립 위생병원에서 아기를 낳을 때 해산을 돌봐 준 안 귀분 수간호사에게 양자로 입적되었다. 아기는 친엄마의 성을 따서 김 원일이라는 한국식 이름이 지어졌다.
안 귀분씨는 입양한 김 수임의 아들 김 원일씨를 지성으로 키웠다. 김 원일씨는 잘 크다가 중학 2학년 때 동급생들이 간첩의 아들이라는 놀림에서 비로소 자신의 뿌리를 알았다고 한다. 안 씨는 이런 환경에서 아들을 키우지 못하겠다고 판단하고 미국으로 이민을 갔다.까닥 잘못했더라면 돌봐주는 사람없이 혼혈의 외모를 하고 비참한 한국 하류의 인생의 살았을 김 원일은 훌륭한 양모의 보살핌으로 잘 자라서 목사가 되고 미국 라 시에라 신학 대학에서 교수 생활을 하였다.[2000 년 확인시] 경상도 출신 양어머니에게서 영향을 받은 듯, 그는 경상도 엑센트가 들어갔지만 아직도 한국어를 유창하게 구사한다.그는 아들로서 친어미에 대한 그리움을 삭이지 못하고 틈이 나면 한미 양국을 오가며 친어미의 흔적을 찾았다.
그에게는 한국에 양어머니 친척도 있었고 자기의 학교 동창들도 있었다.그런 인맥을 통해서 어머니의 흔적들을 뒤졌다.어머니의 학교 성적표를 포함해서 필요한 자료는 다 모았다.베어드 파일을 찾아 낸 것도 그 아들이었다.그는 이 파일을 바탕으로 어머니의 무죄를 주장한다.간첩이라는 손가락질을 받는 어머니 임에도 그는 조금도 개의치 않고 언론과도 기자회견을 했고 TV에도 출연하였다.
▲김 수임의 아들 김 원일 목사
[ 그는 아들로서 할 일을 했지만 그가 어머니를 그리워하며 찾아낸 자료들이 진보파들에게 의해서 김 수임 무고설을 주장하는 근거를 제공하여 주었다.]
그는 1990년대에 자기가 생부로 믿던 베어드 대령이 아직도 생존해서 켈리포니아의 어느 양로원에 살고 있음을 알게 되어 찾아갔다. 이미 죽은 어머니를 찾지 못하니 생부라도 찾고 싶은 생각에서 였으리라 그러나 김 원일 씨를 만난 베어드 씨는 원일 씨의 아버지임을 부인했다.
“자네의 진짜 아버지는 스미스라는 사람이야.“
김 원일 씨는 그냥 그 자리를 물러나오고 말았는데 베어드의 말에서 생각나는 한 사실이 되집어보게 한다. 앞서 말한 오제도 검사가 김 수임 옥인동 주택을 심야에 방문하여 가택 수색을 하였을 때 베어드는 집에 없었다. 대신 그 호화 주택의 이층에 한 영국인이 살고 있음을 발견하였다. 가택 수색으로 집안이 술렁거리자 윗층에서 잠자던 영국인이 내려와서 유창한 일본어로 오 제도 검사에게 무슨 일이냐고 물어봤다. 그는 항공 관계 정보 분야에서 일하고 있다고 했다. 정부가 운영하던 김포 공항은 아직 언어와 기술이 딸려서 외국인 관제사를 채용했을 가능성이 있다.
김 수임은 오 제도 검사에게 한사코 자신이 왜 체포되어 가택 수사를 받고 있는지 그 영국인에게 말하지 말도록 부탁했지만 오 제도 검사는 사실을 밝히지 않을 수가 없었다.[왜 감춰 달라고 했을까?]
김 수임이 공산 간첩이라는 오 제도 검사의 말에 그 영국인은 매우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그 영국인의 이름도 전해오지 않지만 양로원의 베어드 씨의 말이 사실이라면 김 수임의 집에서 발견된 영국인과 김 수임의 관계를 어떻게 상상해볼 수가 있다.
나이가 스무 살이나 차이가 나는데다가 본처와 이혼을 할 생각도 없이 자신을 농락하기만 하는 베어드라는 인간에게 식상해서 다른 안식을 찾던 김 수임이 인생 마지막의 연인으로 삼은 스미스라는 사람이 바로 그가 아니었을까?
2016.07.17 “27호 대원 과제 459페지 35번…” 평양 라디오 돌연 난수방송
북한이 15일 새벽 남파 공작 지령용 난수(亂數) 방송을 돌연 내보냈습니다. 대남매체인 평양방송을 통해 다섯자리 숫자를 잇달아 부르는 방식으로 12분간 방송했다는건데요. 첫 남북 정상회담이 열린 2000년 말 중단했던 걸 본격 재개하는 것 아니냐며 관계당국은 촉각을 곤두세운다고 합니다.
15일 자정 12분간…16년 만에 재개
장기은둔 공작원 깨우는 지령이나
사드 논란 틈탄 심리전일 수도
최근 대남공작도 디지털로 진화
첨단 ‘스테가노그래피’로 암호화
사진·음악파일에 기밀정보 숨겨
이번 방송은 정규 보도를 마친 0시45분부터 57분까지 이어졌는데요. 여성 아나운서는 “지금부터 27호 탐사대원을 위한 원격교육대학 수학 복습과제를 알려드리겠다”고 예고한 뒤 숫자를 읽어내려갔습니다. “459페지(쪽) 35번, 913페지 55번, 135페지 86번...” 식인데요. 미리 약속한 특정 책자의 페이지와 글자 위치를 의미한다는군요. 이를 조합해 지령 내용을 파악한다는겁니다
‘난수’라는 낯선 표현은 우리 일상에서 종종 쓰입니다. 뭔가 복잡하게 얽히거나 까다로운 일에 ‘난수표 같다’는 말을 쓰곤하죠. ‘27호 대원’은 무엇을 탐사하러 남한 땅에 온 건지, 27호라면 도대체 몇명이 활동 중이란 애기인지 궁금증이 커지는데요.
난수는 본래 무작위로 뽑아낸 숫자의 조합을 의미합니다. 하지만 첩보전 세계에선 정교하게 짜여진 숫자의 배열로 둔갑하죠. 노출이나 의미 파악이 어렵도록 하기위해 5개 안팎의 숫자로 방송 한 뒤 이를 풀어내도록 하는 방식입니다.
예를 들어 ‘13524’라고 하면 135쪽 24번째 글자(혹은 24번째 행 첫글자)를 의미합니다. 2006년 검거된 한 공안사범은 톨스토이의 고전 ‘부활’을 암호해독용 책자로 사용해 화제가 됐습니다. 어휘가 다양한데다 의심을 덜 받을 수 있기 때문에 이 책을 택했다는 게 당시 수사 관계자들의 귀띔입니다.
숫자를 이용한 암호 방식은 고대 로마에서도 쓰일 정도로 역사가 깊습니다. 난수방송은 국제 첩보전에서 여전히 유용하게 사용되는데요. 영국 비밀정보 기관이 운용하고 있는 것으로 추정되는 링컨셔 포처(The Lincolnshire Poacher)는 초강력 단파 난수방송의 대명사입니다. 키프로스 영국 공군기지에서 발신되며 여성 목소리로 숫자 5개를 부르는 방식이라고 합니다
▲간첩 혐의로 1992년 구속된 김낙중씨는 난수방송 해독에 필요한 난수표를 한약병에 숨겨 보관했다. [중앙포토]
대북정보를 다뤘던 전직 요원은 “난수표는 간첩 또는 첩보원 신분이란걸 노출하는 결정적 증거라 가장 민감한 품목”이라고 말합니다. 1996년 9월 강릉 침투 북한 잠수함 승조원들이 탈출 직전 제일 먼저 불태운 것도 난수표였다는군요. 상대 수중에 흘러들어가면 현재는 물론 과거의 공작활동까지 큰 타격을 입기 때문이겠죠.
그 활용 또한 워낙 다양해 첩보전에선 “살아있는 생물과 같은 존재”라고 불린다고합니다. 같은 난수표도 홀수 날짜에는 가로에서 세로로 해독하고, 짝수날에는 숫자에서 전부 1을 뺀 뒤 조합하는 등의 규칙이 부여된다는 겁니다. 음악 등을 결합해 중요도를 사전에 알리기도 한다는 데요. 북한 가요 ‘반갑습니다’가 나오면 별로 중요하지 않는 내용이거나 알맹이가 없는 기만용 방송이고, 혁명가요가 울리면 실제 지령이 떨어지는 등의 수법이란 설명입니다. 방송을 한두차례 되풀이하는 건 검증을 위한 것이라는군요.
첩보전도 인터넷과 SNS, 첨단 기술 등에 힘입어 진화를 거듭해왔습니다. 북한의 대남 공작도 예외는 아닌데요. 간첩 검거 발표 때마다 단골로 등장하던 무전기와 모스부호 송신기, 공작금 달러뭉치, 독침 등은 옛말이 된듯합니다.
최근 관계당국에 적발된 ‘PC방 간첩’은 인터넷 공간을 이용한 비밀통신과 관련이 깊어보이는데요. 요즘엔 최첨단 암호화 프로그램인 스테가노그래피(steganography)를 사이버 공간에서 사용하는 경우도 적지 않습니다. 기밀정보를 동영상이나 사진·음악 파일 안에 암호로 숨겨 놓는 방식인데요. 치밀하게 들여다보지 않고서는 꼬리를 잡기가 쉽지 않아 우리 수사기관이 골머리를 앓고 있다고 합니다.
과거방식으로 돌아간듯한 갑작스런 난수방송이 뭘 겨냥한건지 현재로선 불투명합니다. 사드(THAAD·고고도 미사일방어체계)배치 논란을 틈탄 테러·선동인지, 단순 심리전인지 말입니다. 정부 당국자는 “5년 혹은 10년 이상 장기 은둔해온 공작원을 일컫는 ‘슬리핑 에이전트(sleeping agent)’를 깨우려는 지령일 수도 있다”고 귀띔합니다.
이영종 통일전문기자 겸 통일문화연구소장 yjlee@joongang.co.kr
2016.09.27 軍 침투 간첩 92%가 위장 탈북자
北 NLL 도발도 더 위협적으로
2012년엔 주로 어선·상선 침범… 작년엔 北경비정·지도선이 93%
우리 군(軍)의 정보·동향 등을 캐내기 위해 북한이 최근(2012~2016년) 남파한 간첩이 13명에 달하며 이 중 12명(92%)이 이른바 '탈북자 위장 간첩'인 것으로 나타났다. 새누리당 이종명 의원이 26일 합동참모본부로부터 제출받은 '북한 침투·국지 도발' 자료에 따르면 북한은 군 관련 등 고위 정보를 빼내기 위해 2012년에만 6명의 탈북자 위장 간첩을 보내는 등 수년간 꾸준히 공작을 펼쳐왔다.
이 간첩들은 대부분 북한의 국가안전보위부(국가정보원 격) 출신으로 탈북자로 위장하기 위해 고도의 훈련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 2013년 탈북자로 신분을 속여 국내에 잠입한 보위부 출신 직파 간첩 A씨는 군사 정보 등을 빼내려 한 혐의로 법원으로부터 징역 7년형을 선고받았다. 2014년 탈북 위장 간첩으로 구속 기소된 B씨도 작년에 실형이 선고됐다. 정부 관계자는 "지난 이명박 정부 때부터 탈북자를 위장한 간첩이 남파 간첩의 주류가 되는 추세가 있었다"며 "박근혜 정부에선 이런 북한의 대남 간첩 전략이 더욱 공고화한 것"이라고 말했다.
북한의 대표적 대남 도발책인 서해 북방한계선(NLL) 침범은 더욱 노골화하는 양상이다. 지난 2012년 북한이 NLL을 침범한 19차례 중 17차례는 어선과 상선의 침범이었고, 경비정과 지도선은 2차례(1 0%)만 NLL을 넘어온 수준이었다. 그러나 작년에는 NLL 전체 침범 15차례 중 14차례(93%)가 경비정·지도선의 도발이었다. 군 관계자는 "NLL에서의 북한 도발이 더욱 위협적으로 변한 것"이라고 했다. 이종명 의원은 "핵·미사일 등 대량살상무기 개발을 통한 북한 위협과 더불어 간첩 침투 및 NLL을 활용한 북한 도발도 날로 진화하고 있다"고 했다.
양승식 기자
2017.04.24 김은성 전 국정원 국내차장, “일심회 간첩단 수사 막은 盧 정부 실세 못 밝힐 이유 없다”
4월23일의 3차 TV토론에서 홍준표 후보가 "위키리크스가 공개한 미국 대사관 문서에 따르면 노무현 정부 당시 민정수석이었던 문재인 후보가 일심회 간첩단 사건을 축소했다"고 주장했다. 홍 후보는 이어 당시 아주 많은 문서가 이들에 의헤 북한으로 넘어갔다고 덧붙였다. 문 후보는 이에 대해 "문서에 적혀있다고 모두 사실이면 성완종 리스트에 이름이 오른 홍 후보도 (의혹이) 사실이냐"고 했다. 그러자 홍 후보가 "성완종은 노무현 정부에서 두 번 사면받았다"며 "맨입으로 사면을 두 번씩이나 해준 거냐"고 했다.
이와 관련 독자들의 궁금증 해소를 위하여 일심회 사건과 관련된 과거 보도내용을 업로드 한다.
그에게 전화를 한 건 지난 5월 마지막 날이었다. 하루 전날 《동아일보》에 실린 김승규(金昇圭) 전(前) 국정원장의 전화 인터뷰 때문이었다.
김 전 원장은 국정원장 시절인 2006년 10월 ‘일심회’ 간첩단 사건을 수사 지휘했던 인물이다. 그는 이 사건을 수사 지휘하던 도중인 그해 10월 27일 돌연 원장직에서 물러났다.
당시 김 전 원장의 갑작스런 사퇴는 간첩단 사건 수사와 관련, 김 전 원장이 노무현(盧武鉉) 청와대의 386과 마찰을 빚다가 이루어진 것으로 분석하는 시각이 우세했다. 기자도 《月刊朝鮮》 2006년 12월호에 <내막(內幕)-‘386 간첩단’ 사건과 주사파(主思派)―김승규는 ‘청와대 386’들에게 패(敗)했다> 제하(題下) 기사를 쓴 바 있다.
김 전 원장 사퇴 당시 청와대는 “(김 원장) 스스로 용퇴하는 것”이라고 밝혔지만, 지난해 9월 폭로전문 사이트인 〈위키리크스〉는 노 전 대통령이 2006년 10월 26일 김 원장을 따로 불러 경질 의사를 밝혔다는 내용의 미국 외교 전문(電文)을 공개했다.
김 전 원장은 《동아일보》와의 전화 인터뷰에서 그동안 자신의 국정원장직 사퇴와 관련, 항간에 떠돌던 ‘사퇴 압력설’을 직접 내비쳤다. “청와대에서 사건 수사를 원치 않았다. 수사 도중 청와대로부터 ‘수사를 그만했으면 좋겠다’는 언질이 많이 왔다. 청와대 참모 대부분이 반대했다”고 말한 것이다. 수사를 반대한 사람들이 누구인가를 묻는 질문에 그는 “실명은 공개할 수 없다”고 말했다.
5월 마지막 날 기자의 전화를 받고 있는 상대편은 국정원 국내담당 차장을 지낸 김은성(金銀星)씨였다. 그는 김대중(金大中) 정부 시절 국정원 대공정책실 실장과 국내 담당 차장을 지냈다. 그에게 전화로 물었다.
―김승규 원장 인터뷰 기사는 봤습니까.
“네, 봤는데 저는 할 말이 없어요.”
―같은 성격의 정권이었는데 김대중 정부 시절에도 간첩 수사를 못하게 하는 일이 있었습니까.
“….”
한참을 침묵하던 그는 “김 기자! 나도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니까 시간을 좀 줘요” 하며 전화를 끊었다.
입은 있어도 할 수 없는 말도 많은 사람
그에게서는 며칠이 지나도 연락이 오지 않았다. 지난 6월 8일 그가 살고 있는 경기도 광주로 찾아갔다. 마주 앉은 그가 “참, 기자들이란…” 하며 껄껄 웃었다. 그는 요즘 좋은 책들이 너무 많아 하루 10시간 이상을 독서와 인터넷서핑으로 보내고 있다고 했다. 김 전 차장은 복권(復權)이 안돼 취업하는 것도 용이치 않은 상황이다. 경제형편을 물었더니 “참 매정한 세상”이라고만 답했다.
김대중 정부 시절 그의 위상을 생각하면 새삼 인생무상이란 말이 떠오른다. 그나마 교회에 나가면서 하는 성경공부, 그리고 기도를 허락해 주는 건강한 삶에 만족하며 살고 있다고 했다. 신앙심으로 마음의 평온을 얻은 탓인지 이전과 달리 그는 건강해 보였다.
“나는 입은 있어도 머릿속에 담고 있는 말 가운데는 할 수 없는 말이 많은 사람이라는 걸 잘 알지 않소. 여기까지 왔으니까 내가 아는 범위 내에서, 내가 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만 말하리다. 물어보소.”
김 전 차장의 부친 김영천(金永千·작고)씨는 대검찰청 차장 출신으로 4·3 사건 때는 제주에서, 여순반란 사건 때는 광주에서 검사장을 지낸 공안검사 출신이다. 김 전 차장이 국정원에서 대공업무를 수행했던 점을 감안하면 김 전 차장 가계(家系)는 2대째 종북좌파들과의 전쟁 일선에 서 있었던 셈이다.
우리는 서로 자세를 고쳐 앉고 본격적인 인터뷰에 들어갔다. 막상 인터뷰가 시작되자 이야기는 ‘일심회’ 간첩단 사건에서 김 전 차장 본인이 관련된 국정원 불법 도·감청 사건, 대공수사 문제, 국정원 개혁 문제, 안보 문제 등으로 이어졌다.
―요즘 통합진보당 사태를 계기로 과거 정부에서 대공(對共) 수사와 관련된 문제들이 많이 제기되고 있습니다. 김승규 원장이 언론 인터뷰에서 일심회 수사 당시 노무현 정권의 청와대에서 수사중단 압력이 있었다고 밝혔는데 가능성이 있는 일입니까.
“DJ때는 국정원 입장 이해”
▲2000년 4월 27일 청와대에서 당시 김대중 대통령으로부터 국정원 제2차장 임명장을 받고 있는 김은성씨. 이전까지 그는 대공정책실장이었다.
“충분히 가능성 있는 일이죠. 대통령이 직접 하거나 아니면 비서실을 통해 뜻을 전했을 것으로 봐요. 그러나 당시 국정원장이 대통령에게 사건의 실상에 대해 구체적으로 보고하고 바로잡지 않은 잘못이 더 크다고 저는 봅니다.”
―김대중(DJ) 정부 시절에도 유사한 일이 있었습니까.
“DJ 때에도 유사한 일은 있었죠. 하지만 그때는 국정원에서 대통령께 보고를 해서 납득을 시키면 대체적으로 국정원이 원하는 대로 했습니다.”
―예를 들면?
“국가보안법(國家保安法) 개폐 문제나 송두율(宋斗律) 방한시 수사 문제, 국정원 조직개편 등에 있어서도 대통령이나 비서실에서 억지를 부리지는 않았고 국정원의 입장을 이해했습니다. 제가 대전지부장 시절 고정간첩을 체포하여 실형까지 받아 냈는데 누구도 간섭하지 않은 일도 있었습니다.”
송두율은 2001년 인천국제공항을 통해 입국을 시도하다가 이틀 만에 공항에서 다시 독일로 되돌아갔다. 당시 국정원의 생각은 송두율을 잡아넣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고 한다. 독일 시민권자인 송두율은 입국허가의 전제조건으로 제시된 준법각서와 제3장소에서의 국정원 조사를 거부하고 돌아갔다. 노무현 정부 때인 2003년에 입국해 검찰조사를 받고 재판까지 받았다. 김 전 차장은 지금도 송두율이 간첩이라고 확신했다.
“송두율은 거물 간첩입니다. 당시 우리는 증거를 다 가지고 있었습니다. 국회정보위에 출석해서도 ‘송두율은 간첩이다, 명확한 증거를 가지고 있다’고 보고한 적이 있어요.”
―김승규 전 원장이 수사중단 압력자들의 이름을 밝히지 못하는 것이 국정원법 때문입니까.
“국가 기밀이나 직무상 지득(知得)한 비밀도 아닌 데다 국정원 관련법으로도 정무직은 해당되지 않습니다. 이름을 밝히지 못할 바에야 말을 말았어야죠.”
―김승규 전 원장이 최근에 와서 갑자기 일심회 사건을 이야기하는 이유는 뭣 때문이라고 봅니까.
“김승규씨가 일심회 문제를 이제야 언급한 것은 MB(이명박 대통령)나 안철수씨의 경우처럼 통합진보당 사태로 좌익, 종북 세력의 힘이 밀리는 듯하자 한마디 한 것으로 보이고 모두 같은 맥락으로 생각됩니다. 주변에서는 그동안 가만히 있다가 이제서야 그런 말을 한다고 화를 내는 사람이 많아요. 제가 보기에는 시(時)보다 세(勢)를 중시하는 것 같습니다.”
도·감청 없이는 간첩수사 불가능
―공안기관 수사요원들의 말을 들어 보면 도·감청(盜監聽) 없이는 간첩수사가 불가능하다고 하는데 간첩수사를 해 본 경험자로서 볼 때 정말 그렇습니까.
“적극적으로 간첩을 잡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면 도·감청을 하지 않고는 간첩수사가 불가능해요. 합법적으로 감청을 하려면 영장이 있어야 하는데 구체성을 요구하는 판사에게 심증만으로 영장을 청구할 수는 없는 법이니까요.
간첩수사는 다른 수사와는 달리 장기적이고 군사작전을 방불케 할 정도로 모든 수단을 동원해야 하는데, 특히 통신이 수사의 95%를 장악합니다. 도·감청 없이는 협조자의 제보 등 휴민트(humint·인간정보)에만 의지할 수밖에 없어 성과를 낸다는 것이 거의 불가능합니다.”
―그렇다면 간첩수사 때는 도·감청을 할 수밖에 없다는 말인가요.
“오랜 기간 정보, 수사 업무를 하다 보면 육감이란 것이 매우 정확하게 맞는 경우가 많습니다. 따라서 상황이 화급히 전개된다는 생각이 들면 법익(法益)보다 국익(國益) 우선이란 의욕이 앞서게 됩니다. 그 의욕을 옳고 그름이라는 이분법(二分法) 논리로만 판단할 수 있을까요.
모든 나라가 도·감청을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강대국은 모두 도청 선진국이라는 사실을 우리가 간과해서는 안 됩니다.
적(敵)은 우리의 법을 무시하고 덤빈다는 점을 감안할 때 전장(戰場)에서 싸우는 우리끼리만 법을 지켜야 한다는 사실이 무척 힘든 싸움이죠. 그렇다고 법을 지키지 않을 수도 없고….”
김 전 차장은 최근 읽은 책 중 가장 생각할 것이 많은 책이라며 마이클 샌델이 저술한 《정의란 무엇인가》를 집어들었다.
“실제 사건인데요. 2005년 5월 아프가니스탄에서 미(美) 해군 공작(工作)요원 4명이 비밀정찰 업무를 수행하다 만난 농부 2명이 위험시됐음에도 그냥 살려두었다가 결국 탈레반에 포위를 당해 공작요원과 구조대원 16명 모두가 사살되는 사건이 있었어요. 그렇다면 농부를 살려준 결정이 과연 정의로웠던 건가요.
여하튼 더듬이가 없는 정보기관을 외국의 정보기관이나 간첩, 산업스파이들이 두려워하겠습니까. 지금 우리나라는 보안부재 국가입니다. 이것이 우리 국가나 산업기밀 보호에 결정적인 취약점이 되고 있는 겁니다. 우리가 북한의 정보기관을 우습게 본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못할 일이 없겠죠.
정보기관에 대해서는 요원들의 국가관과 충성심, 양심을 신뢰해 주어야 합니다. 물론 정보기관의 부단한 신뢰회복 노력도 필수적이고요.”
“직원들 갈팡질팡”
▲2006년 12월 8일 민주노동당 당원들이 서울 서초동 검찰청사 앞에서 ‘일심회’ 간첩단 사건으로 구속 중인 당원들의 석방과 국가보안법 폐지를 주장하는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2000년 6·15 남북정상회담 이후 대공수사 부서의 분위기가 많이 위축됐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남북정상회담 후 대공수사국과 국내담당 부서 요원들은 수사국이 해체나 감축될 것을 우려하면서도 남북평화 무드를 이용해 북측의 대남공작이 더욱 활발해질 것에 대비해 대응업무를 강화했습니다. 요원들의 사기는 침체됐던 게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할 일을 방기한 적은 없었다고 자부합니다.
아까도 언급했지만 송두율이 방한했을 때 위에서는 수사를 하지를 않았으면 하는 분위기가 사실 있었습니다. 하지만 우리 수사국 요원들이 직(職)을 걸고 수사를 벌이겠다며 고집을 꺾지 않아서 송두율이 입국을 포기하고 공항에서 독일로 되돌아갈 정도였으니까요.”
―국정원을 비롯한 공안(公安)능력 축소가 종북좌파의 발호를 가능하게 하고 급기야 종북좌파가 국회에 등원하는 결과를 가져온 게 아닌가요.
“검경을 비롯해 공안기능이 대폭 축소된 것은 사실이죠. 도대체 대공수사나 공작을 벌이는 것이 위에서 원하는 것인가를 몰라 갈팡질팡하는 상황도 없지 않아 있었고요. 직원들이 원장들의 사상을 의심하는 상황에서 사실상 포기했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니 종북좌익 세력에게 더 없이 좋은 활동여건을 마련해 준 것이죠.
현 정부에서도 반국가, 좌익투쟁을 한 자들이 민주화(民主化) 유공자가 돼 보상금과 생계비 지원까지 받고 있어요. 이들이 법원, 검찰, 군까지도 침투해 노골적인 종북활동을 벌이는 판에 국회 등원은 별일도 아니게 된 거죠.”
김 전 차장은 2005년 10월 국정원 불법도청 사건으로 구속됐다. 통신비밀보호법 위반으로 1년6월형을 선고받은 그는 복역 중 막내딸을 잃는 슬픔을 겪기도 했다. 영어(囹圄)의 몸이 된 아버지가 자신의 결혼식에 참석하지 못하게 된 것 등 신변을 비관한 막내딸이 세상을 스스로 등진 것이다. 국정원 불법도청 사건은 공인으로서, 또 가장으로서의 김 전 차장의 삶을 완전히 망가뜨려 놓았다.
노무현 정권이 도청 막은 이유
국정원 불법도청 사건이란 김영삼(金泳三), 김대중 정부 때 국정원이 사회 저명인사들을 대상으로 도청한 사건을 말한다. 김영삼 정부 시절에는 안기부 내 담당 부서 외에도 비밀 도청팀 ‘미림’이, 김대중 정부 시절에는 과학보안국이 도청을 주도한 것으로 알려졌다. 도청팀은 정계, 재계, 언론계 핵심인사 700여 명의 사적(私的) 대화를 도청했다.
당시 김승규 국정원장은 김영삼 정부 당시 X파일이란 것이 문제되자 2005년 8월 “DJ 시절에도 도청을 했다”고 국정원의 불법도청 사실을 국민 앞에 시인했다.
―정·재계(政財界) 인사들에 대한 도청 사건이 터지자 당시 노무현 정권 실세들이 도청당할 것이 걱정되어 김승규 원장으로 하여금 도청을 인정하는 양심선언을 시켜 도청자료를 폐기하고 도청을 하지 못하게 했다는 말들이 떠돌았는데 사실입니까.
“정확한 것은 알 수 없으나 저도 그런 말을 많이 들은 기억이 있습니다. 실세들의 비리(非理)나 정경(政經)유착, 종북활동 등을 국정원이 도청하고 있어 정권이 바뀌면 문제가 될 것을 우려했기 때문에 김승규 당시 국정원장으로 하여금 양심선언을 하도록 하여 도청을 강력히 막았다는 이야기였습니다.”
―국정원이 정치, 기업, 언론계 인사 등을 무차별적으로 도청한 것으로 알려졌는데요.
“무차별적 도청이라니?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급박하고 위중한 상황에 한해 극히 제한적으로 시행했고 주로 국익과 국가안보와 관련된 사항을 다루었습니다.”
―당시 국정원 고위간부들이 국정원 전·현직(前現職) 직원들을 대상으로 도청 시인 압력을 넣은 것은 사실입니까.
“저에게도 도청사실을 시인하게 되면 국회 정보위에서 도청을 하지 않았다고 선서한 것이 위증죄(僞證罪)로 처벌된다는 법적검토문까지 보냈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 그 문서를 파기해 달라는 요청도 왔고요. 또 제가 국정원을 떠난 후 연락이 한 번도 없던 모 정무직 간부는 돈봉투까지 보냈습니다. 저는 그 봉투를 직원에게 용돈이나 하라고 되돌려주었습니다.”
도청 시인에 보이지 않는 손 작용
―김승규 당시 국정원장이 도청 사건에 대응하는 방법이 잘못됐다고 보는 겁니까.
“김 전 원장은 대통령의 지시가 있었더라도 일단 시간을 두고 검토했어야 했습니다. 특히 전임자(前任者)들과 긴밀한 대화를 가지고 지혜를 짜내어 대통령을 설득했어야 했습니다.
김 전 원장이 도청사실을 인정하는 것을 보고 제가 임동원, 신건 전임 국정원장들에게 제의해 전임 원장들이 항의방문을 했지만 아무런 소득도 얻지 못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세상에 국가안보와 직결되는 가장 큰 현안을 무턱대고 양심선언한다는 게 말이 됩니까. 심지어 밑의 사람인 김만복 당시 기조실장의 압력에도 못 이겼다는 겁니다.”
―국민 앞에 잘못을 고백하는 건 당연한 일 아닌가요.
“순수한 차원에서 이루어진 것이라면 이해를 할 수 있겠죠. 뭔가 정치적인 목적이 있었다는 게 문제였죠. 그리고 도의상으로라도 전임 원장들에게 도청을 했는지 여부를 물어봐야 했습니다. 사법처리 받는 과정에서 뭔가 보이지 않는 다른 손이 움직인다는 느낌이었습니다.”
―보이지 않는 다른 손이란?
“아직 말할 때가 아니라고 봅니다. 제가 막상 검찰에 체포된 후 상황을 보니 국정원에서 온갖 물증과 자료를 모두 넘겨준 상태였습니다. 이건 조사가 아니라 확인과정에 불과했던 거죠. 제가 체포되기 전에는 도청을 시인한 요원들에 대해 다소 섭섭한 마음이 있었지만 정작 검찰에서 그걸 눈으로 확인하곤 할 말을 잃었습니다.”
―어떤 증거들이었습니까.
“70~80건에 가까운 불법감청 시인 진술서와 R-2장비(유선중계통신망 감청장비), 카스(휴대폰 감청장비) 사용지침서 등의 도청 증거였습니다. 조직에 30여 년을 몸담은 제가 모든 책임을 지는 것이 옳다는 생각이 들어 검찰 측에 제안을 했어요. ‘국정원 직원 소환을 최소로 하고 모든 책임을 내게 국한해 주면 검찰조사에 적극 임하겠다’고요.”
―그래서 도청 사건의 최고 책임자가 된 거네요.
“그런 셈이죠.”
불법도청 사건의 최고 책임자가 된 이유
―다른 전직 원장들은 사면 후 복권이 다 됐는데 김 전 차장만 복권되지 않은 것은 알려진 대로 도청 사건의 최고 책임자이기 때문이 아닌가요. 평생을 정보기관 생활을 했는데 숨겨진 현대사를 공개하는 것도 진실한 역사바로세우기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폄하된 국정원의 위상을 회복하는 데 도움이 되는 것 아닙니까.
“3년 전 제가 복권되지 않은 이유를 법무부에서는 조직범죄가 아니라 개인범죄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는 신문기사를 봤어요.
저는 검찰에서 도청과 관련한 구체적인 진실을 밝힐 수가 없었습니다. 국가 외교(外交), 안보에 미칠 파장이 두려웠습니다. 현직 원장이 국익과 안보를 무시하고 국정원 도청 사실에 대해 양심선언을 했다고 해서 저마저 모든 비밀을 털어놓을 수는 없었습니다. 저는 지금도 검찰조사에서 외교와 안보상의 기밀을 지켜 준 요원들에게 감사드리고 그분들이 진정한 애국자들이라고 생각합니다.”
―영원히 함구할 겁니까.
“현대사 중엔 잘못 알려진 부분이 많아요. 특히 역사바로세우기 운동이나 과거사진상규명위에서 왜곡되게 조사 발표한 것에 대하여는 정사(正史)를 규명하고 국정원에 대한 인식을 바로잡기 위해서 자료를 수집 중입니다. 국익과 안보에 이익이 되는 차원에서 구체적으로 공개하는 방안을 신중히 검토하고 있습니다.”
―‘진승현 게이트’도요?
“국익과 안보에 이익이 되는 선에서 검토하고 있다고 말씀드렸는데요? 어떻든 그 문제의 진상규명도 보탬이 된다면 공개할 용의가 있습니다. 제가 재판을 받을 때 재판장에게 쓴 탄원서도 빼돌려 언론에 넘긴 자들이었으니까요.”
‘진승현 게이트’란 김대중 정부 시절인 2001년 MCI코리아 부회장이었던 진승현씨가 금융기관으로부터 2300억여원을 불법대출 받고 주가를 조작해 비자금을 조성한 후 정·관계에 로비했다는 사건이다. 김 전 차장도 이 사건과 관련해 구속돼 실형을 살았다. 이 사건에 연루됐던 사람 중에는 “사건의 진실이 세상에 잘못 알려졌다”고 말하는 이들도 있다. 김 전 차장은 이 사건과 관련한 더 이상의 질문을 막았다.
―국정원은 도청 사건 후 도·감청 기기들을 모두 없앴다고 했는데 정말 없앴다고 봅니까.
“정말 없앤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김대중 정부 말기인 2002년 3월에 원장이 관련장비 일체를 용광로에 녹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 현장에 다수의 간부가 있었다는 이야기를 참석자로부터 들었습니다. 제가 검찰에서 조사받을 때도 원장이 도청장비를 폐기했다는 사실을 시인한 진술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도청장비가 따로 있는 것은 아닙니다. 같은 장비라도 합법적으로 쓰이냐 아니면 불법적으로 쓰이느냐의 차이만이 있을 뿐이죠. 불법장비라고 폐기하는 것은 차량사고를 낸 운전기사가 아닌 사고 차량에 죄를 씌워 폐차하는 꼴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렇다면 검찰조사를 받을 때 본 국정원이 검찰에 넘겼다는 R-2 등의 장비는 어떻게 된 겁니까.
“잘은 모르겠으나 후일을 위해 실무자들이 일부 샘플로 보관하고 있던 게 아닐까요?”
―도청 사건 후 국정원이 정말 불법감청을 안 한다고 보십니까.
“안 하는 게 아니라 못하게 만들어 놨죠. 저는 지금도 대간첩, 대테러, 대전복 그리고 마약, 위폐 등 국제범죄와 통상외교에 대해서는 반드시 감청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외교를 위해서 필요하다? 그런 사례가 있습니까.
“그것과 관련해서 제가 말을 했다면 저를 기소하지도 못했을 겁니다.”
풀리지 않는 오해들
―대공 문제 전문가로서 볼 때 통합진보당 내 종북좌파들이 북의 지령을 받고 있다고 봅니까.
“저는 그렇다고 봅니다. 이미 밝혀진 부분이 많잖아요? 요즘 다수의 사람들이 통진당의 실체를 고백하는 것을 볼 때 대다수 당원들도 속고 있었을 겁니다.
이 자리에서 말하고 싶은 것은 왜 저들이 그다지도 악착같이 북측을 옹호하는가입니다. 저들이 이념에 젖은 것 외에도 별도로 말 못할 사정이 틀림없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말 못할 사정을 규명하는 것은 수사보다는 정보 차원에서 접근해야 할 것입니다. 지금 국정원도 방법을 알면서 규명치 못하는 말 못할 어려운 사정에 처해 있을 것이라고 봅니다.”
―이승만(李承晩) 정부 때 국회프락치 사건과 지금의 통합진보당 국회진출 사태는 무엇이 같고 무엇이 다릅니까.
“양 사건 모두 좌익세력들이 국회를 통해 친북적인 입법활동과 정책간여를 통해 우리의 안보역량을 약화시키면서 북측에 유리한 대남혁명 여건을 만들어 주자는 점에서는 같죠.
그러나 국회프락치 사건은 남로당(南勞黨)의 음모공작에 의해 은밀히 추진되다 적발돼 강력히 응징된 데 반해, 통진당은 국민세금으로 보조금까지 받아 가면서 아예 드러내 놓고 반국가, 친북활동을 벌이면서 투표부정 등 범죄를 저질렀다는 점에서 매우 다르죠.”
―최근 인터넷 매체를 통해 활발하게 보수우파들을 위한 기고를 하고 있는데 특별한 이유가 있습니까.
“오랜 기간 안보기관에 근무해서인지 나라 장래가 너무 어둡게 보여서 해야 할 일을 하는 겁니다. 솔직히 제 여건에서 기고하기가 그리 쉬운 일은 아니지만 국민들이 모르거나 오해하는 부분이 너무 많아 좀 더 비밀스런 것까지 공개하고 싶은 마음도 있지만 보다 큰 차원에서 자제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정보기관의 용기 실험할 때”
―인터넷 기고 후 주변에서 격려는 받고 있습니까.
“우리가 현직에 있을 때는 우익인사들이나 선배들에 대해 조금이라도 배려하려는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하지만 이제 세상이 달라져서인지 격려전화 한 통도 없더군요. 격려를 바라고 하는 것은 아니나 맥이 빠지는 경우가 있죠. 30년을 근무한 내 출신기관까지 그러할진대 뭘 기대하겠습니까. 게다가 아직도 진승현이나 도청 사건에 대한 오해가 풀리지 않은 모양이니….”
―국보법 위반자 이석기씨는 노무현 정부 때 사면, 복권됐습니다. 좌파정권들은 제 편은 최대한 챙겨 주었던 것 같은데 그런 점에서 현 정부에 대해 섭섭한 마음은 없습니까.
“이명박 정권에서 저에 대해 복권을 해 줄 생각이 전혀 없는 듯해서 노태우 정권 때 받았던 보국훈장을 근거로 국가유공자 지정 신청을 했더니 2009년 6월 이명박 대통령 명의로 지정을 받았습니다. 그런데도 복권은 해 주지 않더군요.
현 정권 들어 청와대와 법무부 등에 세 번이나 탄원서를 냈는데도 긍정적 답변이 없었어요. 이번 8·15 특사는 정말 기대가 큰데 모르겠습니다. 30년을 죽어라 일만 한 사람에게는 배려가 전혀 없고 반국가 사범들은 민주화 희생자라 하여 보상금까지 주는데 섭섭한 마음이 어찌 없겠습니까.
하도 답답해서 몇 년 전에는, 기대를 한 것은 아니지만 결자해지 차원에서 김승규씨에게 도움을 요청한 적이 있고 박지원 의원에게도 야당에서 재를 뿌리는 게 아니냐고 화풀이를 한 적이 있습니다.”
―종북좌파 의원들이 앞으로 국회에서 어떤 일들을 할 것으로 보고 있습니까.
“뻔하지 않습니까. 당분간은 국면전환을 위해 근신하는 척할 겁니다. 그러나 반안보정책에 있어서는 결코 양보하지 않을 겁니다. 기회가 오면 삭발, 단식, 분신투쟁 등으로 국회를 난장판으로 몰아 갈 것이고 김선동 의원의 국회 최루탄 사건보다 확대될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지금은 정보기관의 용기를 실험할 기횝니다. 물의를 일으킬 각오를 하고라도 종북 의원과 보좌관 등 주변에 대한 철저한 정보활동을 벌여야 합니다. 정통 여야 정당이 지혜를 발휘해야 할 때이지만 민주당이 좌파정당으로 뿌리를 내려 가는 것이 걱정입니다.”
―국정원의 문제가 무어라고 보십니까.
“국정원은 조직의 민주화, 업무의 특성화, 요원의 전문화가 선결돼야 할 과제입니다. 민간정부 이후 명령과 복종 체계, 충성심, 상호 신뢰감, 집념과 용기 등이 상당 부분 훼손되고 말았습니다. 이는 국정원을 신뢰하지 않는 대통령들의 책임입니다. 원장만 자기 사람을 데려다 놓으면 다 되는 줄 아는데 큰 착각입니다.”
―어느 정권 때 국정원이 더 무력화됐습니까.
“노무현 대통령은 정권 출범 때부터 국정원 보고를 아예 무시해 버렸어요. 국정원 보고서를 읽어 주는 것을 큰 선심이나 쓰는 듯 말했다고 합니다. 그분은 아예 국정원이 불필요한 기관이란 인식이 깔려 있었던 거죠. 그러한 생각 때문에 도청 사건, 과거사 진상조사 등으로 국정원은 범죄집단이 돼 버렸고 직원들은 겁쟁이들이 됐습니다. 기능복원이 어렵게 돼 버렸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바꿔야 할까요.
“정권이 바뀌면 매번 되풀이되는 간부 목 자르기와, 밑도 끝도 없는 개혁, 부훈(部訓) 바꾸기 같은 짓을 없애야 합니다. 왜 5년마다 한 번씩 개혁을 해야 하고 지금의 잣대로 과거 업적들을 짓뭉개야 합니까. 저는 노태우 정권 시절 안기부 발전 실무 책임자로서 국정원장 임기제를 주장한 바 있습니다.”
―국정원의 대공수사 능력을 더 강화해야 하는 것 아닌가요.
“우리나라 모든 공안기관에서 대공수사는 가장 기피하는 직종이 돼 버렸습니다. 대공수사 요원에 대한 별도의 배려가 절실히 요청되는 상황입니다.
미국도 카터 대통령이 중앙정보국(CIA) 기능을 축소한 후 지금까지도 능력이 복원되지 않은 상태입니다. 그만큼 정보기관은 한 번 망가지면 회복이 어렵습니다. 그러다 보니 새로운 안보, 정보기관 숫자만 늘어나고 결국은 예산낭비만 하고 있는 겁니다.”
국정원의 개성공단 설치 반대
김 전 차장은 국정원 직원들의 안보의식에 대해 자신이 근무했던 시절의 경험을 예로 들며 “아직은 건전하다”고 말했다. 2000년 6·15 정상회담 직후 국정원 내부에서는 햇볕정책을 추진하는 정권에 대한 오해와 불신이 상당했다고 한다. 대공수사국 요원들이 남북회담을 하러 서울에 온 북측 인사들의 신변보호 업무를 맡게 되자 “간첩잡는 요원이 간첩을 보호한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며 반발하기도 했다고 한다. 개성공단 설치 반대도 그런 사례 가운데 하나다.
6·15 남북 정상회담 직후인 2000년 8월 현대아산과 북한 김정일(金正日)은 개성공단 설치에 합의했다. 이에 대한 국정원 국내 부서의 비판은 상당히 강했다고 한다. 개성공단 설치에 반대를 한 것이다.
―김 차장이 임동원 원장을 체포해야 한다고 했다거나 북한에 투자한 기업인들을 조사한다는 말이 당시 나돌았습니다. 김 차장이 개성공단을 반대하다가 오히려 조사를 받았다는 말도 있었는데 사실입니까.
“그런 말들은 저도 알고 있고 원장의 지시로 조사를 받은 적도 있습니다. 원장을 체포하라는 등의 이야기는 누군가가 나를 치려고 여의도에 유인물을 살포한 것으로 청와대에 보고되기까지 했습니다. 북한에 줄을 댄 몇몇 기업들은 제3국과도 연계되어 상당히 우려되는 바가 있어 제가 구체적으로 파악하라고 지시한 일이 있었는데 이것이 밖으로 샌 것 같았습니다. 사실 심각한 문제들이 많았으나 어찌할 수가 없었죠.”
―그래서 징계를 받지는 않았습니까.
“상부에서 저에 대한 직접적인 견제는 없었습니다. 타 기관을 시켜 저에 대해 뭔가 파악하고 청와대를 통해 저를 자르도록 촉구한 것은 알고 있지만 저로서는 같잖게 취급하고 문제 삼지 않은 기억이 있습니다. 저는 차장에 임명된 후 약 1개월 후 당시 모 실세들과 관계가 좋지 않아 제 참모들과 의논한 후 임동원 원장에게 강력히 사의를 표명한 일이 있습니다. 임 원장의 만류로 일단 보류했는데 그 때 그만 두었으면 아무 일도 없었을 텐데 제가 너무 미적거리다 오늘날 같은 신세가 된 것 같습니다.”
“세계 제1의 화약고는 한반도”
―국가안보를 위한 기고활동을 하고 있는데, 마지막으로 우리 안보를 위해 시급한 문제는 무엇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까.
“한미연합사 해체를 막아야 합니다. 북한에 대한 최선의 억제력은 미 지상군에 있습니다. 연합사가 해체되면 지상군도 단계적으로 철수하게 됩니다.
미국은 해·공군력을 강화하면 된다고 하나 그렇지 않습니다. 한반도에 전쟁이 일어나면 수도권이 전장이 되고 여기서 장기간 혼전이 벌어질 텐데 해·공군이 어떻게 폭격을 한단 말입니까. 미 해·공군은 북한이나 폭격하고 자국민 철수에 주력하게 될 겁니다.
중국이 G2 국가가 된 후 동아시아를 중심으로 동서 데탕트가 붕괴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 서해안에서 1차적인 조짐이 엿보입니다.
세계 제1의 화약고는 중동이 아니라 한반도입니다. 중동에는 아직 패권전쟁이 일어나지 않고 있습니다. 남한이 화해정책을 쓰면 전쟁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단세포적 사고방식을 버리고 한 차원 높이 생각해야 합니다. 진실로 슬기가 필요한 때입니다.”
긴 시간의 인터뷰를 끝내고 김 전 차장과 헤어졌다. 얼굴은 건강해 보였지만 감옥생활 등으로 다친 다리는 여전히 절고 있었다. 그가 등에 지고 있는 ‘무거운 진실’들을 내려놓으면 다리가 다시 좋아지려나?⊙
[월간조선 2012년 7월호 / 글=김성동 월간조선 기자]
■‘386 간첩’ 일심회의 정체...번듯한 직업갖고 공개적 활동
우리 사회를 강타한 386세대 운동권 출신 간첩 사건에 연루된 인사들의 과거 행적이 예사롭지 않다.
지금까지 공안당국의 수사 과정을 통해 ‘간첩조직’ 혐의를 받고 있는 일심회의 회원은 모두 5명. 이 가운데 가장 주목을 받는 인사는 ‘총책’으로 통하는 장민호(44)씨다. 마이클 장이라는 미국명도 가지고 있다.
서울 관악구 신림동 본적을 가진 장씨는 용산고를 졸업한 뒤 1981년 성균관대 국문과에 입학했다. 1년 만에 휴학한 장씨는 이듬해 미국 LA주립대학으로 유학을 떠난다. 대학을 마친 장씨는 1980년대 중반 미국의 한국계 신문에서 기자 생활도 했다고 한다.
장씨는 그러나 1989년 인생의 전환기를 맞는다. 재미동포이자 친북인사인 김모씨의 주선으로 북한에 가게 됐던 것. 당시 그는 북한 대외연락부에서 모스 통신교육과 주체사상 등을 교육 받았다고 한다.
방북 직후 미군에 자원 입대한 장씨는 주한미군으로 한국에 되돌아온다. 서울 용산과 대전 미군기지에서 물류시스템을 담당했다. 이 무렵 주한미군 고위 간부의 비서로 근무하고 있던 부인 강모(40)씨를 만나 결혼을 했다고 한다. 당시 결혼식 주례는 미국에서부터 알고 지낸 현 여권의 중진의원 A씨가 맡았다. A씨는 “주례를 섰는지 기억이 잘 안 난다”는 입장이다. 미군 관련 정보를 북한에 유출시키지 않았냐는 의혹이 나오는 것도 미군 근무 경력 때문이다.
군대를 제대한 1993년 그는 두 번째로 방북해 북한 김일성 부자(父子)에게 충성 서약을 하고 조선노동당에 가입한 혐의를 받고 있다.
장씨는 1993년부터 이듬해까지 국내 A사 마케팅 담당으로, 1994년부터 1995년까지는 통상산업부 산하 한국정보기술연구원 국제협력과장으로 일했다. 또 1995년부터 1998년까지는 한 대기업의 계열사에서 마케팅 팀장으로 근무했다고 한다.
그의 이름은 1998년부터 1999년까지 미국 실리콘밸리에서 정보통신부 산하 해외IT지원센터 마케팅 매니저를 지내면서 널리 알려졌다. 한국 벤처기술 분야 산업 역군으로 묘사됐다.
장씨는 1999년 당시 여권 핵심부가 2000년 총선을 앞두고 작성한 영입해야 할 ‘젊은 피 300명’에 뽑히기까지 했다. 오세훈 서울시장, 유시민 보건복지부 장관, 이종석 통일부 장관, 원희룡 한나라당 의원, 안철수 박사 등과 함께였다. 이 때문에 공안당국은 다른 인사들에 비해 다소 경력이 모자랐던 그가 어떤 연유로 그 반열에 올랐는지를 궁금해하고 있다.
이후 장씨는 나래디지탈엔터테인먼트와 스카이겜TV, 미디어윌테크놀로지 대표를 지냈다. 이 과정에서 수도권 DMB사업자로 선정되려고 시도하기도 했다. 이처럼 혈기 왕성한 사업가로 보여졌던 그는 남몰래 중국·태국 등지에서 10여차례에 걸쳐 북한 대외연락부 부부장 등과 접선한 것으로 드러났다.
사회활동도 활발했던 장씨는 성균관대를 중퇴했지만 이 대학 출신 모임에도 자주 참석해 동문들을 잘 챙겼으며 386세대 정치인들과도 친분을 이어갔던 것으로 알려졌다. 장씨가 광범위하게 형성한 인맥 가운데 일심회 회원이나 포섭 대상자가 더 있을 가능성이 높은 것이다.
자의든 타의든 일심회가 만든 대북보고문 40여건에 각종 정보를 제공한 인사들도 수사가 불가피한 형국이 됐다. 장씨는 수년 전 대남 활동에 대한 공로로 조국통일상까지 받은 것으로 알려져 그의 ‘공적’이 무엇인지를 밝혀내는 게 공안당국의 핵심 수사 과제이다.
장씨 다음으로 공안당국이 주목하는 인사는 최기영(40) 민주노동당 사무부총장이다. 최씨의 무게감은 지금까지의 수사 결과에서도 잘 드러난다. 일심회 회원 5명 가운데 차관급인 북한 대외연락부 부부장을 만난 조직원은 장민호와 최기영이다. 나머지 조직원들은 대외연락부의 과장급 인사를 만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한국외국어대 영어과 85학번으로 이념동아리인 민족사상연구회에서 활동했고 1986년 건국대 점거농성 사건에 연루돼 징역 1년6개월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 받았다.
열린우리당 임종석 의원이 전대협 의장으로 활동할 당시 전대협 사무국장으로 활동했으며 이 때문에 이듬해 경찰에 구속됐다. 한국전력에 입사해 노조 활동을 하다 해고됐으며 1995년에는 민노총 대외협력국장을 지냈다.
그는 2000년 1월 민주노동당 창당 당시 대표 비서실 국장으로 일했고 2004년 4월 17대 총선을 앞두고 권영길 전 대표의 전략기획팀장으로 경남 창원에 머물면서 선거운동을 도왔다. 이후 천영세 원내대표 비서실장으로 근무하는 등 당의 핵심 참모라는 평가를 받아왔다.
공안당국은 최씨가 2003년 장민호를 통해 일심회에 가입한 손정목에게 포섭돼 일심회에 가입한 뒤 국내의 각종 동향을 보고해 왔다고 밝혔다. 그는 2005년 8월 20~30일 중국 베이징을 방문해 일심회의 비밀 아지트로 알려진 ‘동욱화원’에서 북한 공작원을 만나 교육을 받았다고 한다. 이어 지난해 6월 윤광웅 국방장관 해임결의안 무산 경위와 당내 주요 당직자 인물 분석 자료를 손씨에게 전달한 혐의 등을 받고 있다.
민노당 당원 번호 5번인 이정훈(43) 전 중앙위원도 공안당국의 집중 수사 대상이다. 그는 고려대 82학번으로 대학 동기인 허인회 전 열린우리당 전국청년위원장과 친분이 깊다. 허씨가 전학련 삼민투위원장이었을 당시 고려대 삼민투위원장이었으며, 서울 미문화원 점거 농성사건으로 함께 구속됐다. 이씨가 구속될 당시 이해삼 민노당 최고위원은 “이씨를 장민호에게 소개한 인사가 허씨였다”는 취지의 발언을 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이씨는 정부 민주화보상심의위원회로부터 미문화원 사건에 대한 명예회복 조치와 함께 생활지원비로 3928만 여원을 받았다. 이씨는 서울 마포구 서교동에서 영어교재 회사를 운영하고 있다.
이진강(42)씨는 장민호씨가 대표로 있던 회사의 임원이다. 고려대 82학번으로 건국대 사태의 배후 인물로 지목돼 징역 1년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았다. 그는 장민호씨에게 포섭돼 일심회에 가입한 뒤 시민단체 동향 파악 및 조직원 구축 지령 등을 받은 혐의를 받고 있다.
이씨는 현 정권의 실세 중 한 명인 안희정씨의 1년 선배로 주사파 지하 조직으로 알려진 고려대 ‘애국학생회’라는 동아리에 함께 있었다.
장민호씨의 용산고 후배인 손정목(42)씨는 서울 목동에서 논술학원을 운영하고 있다. 연세대 83학번으로 국가보안법 위반 전력을 가지고 있는 그는 1998년과 올 6월 중국에서 북한 대외연락부 과장을 접촉한 혐의를 받고 있다. 이정훈씨와 함께 그는 북한 당국으로부터 ‘민족통일상’을 받았다는 단서가 포착됐으며 공작금 3000달러를 받은 혐의로 조사를 받고 있다.
출처 | 주간조선 2006년 11.13 글 | 강훈 조선일보 사회부 기자
■홍준표 후보가 문재인 후보에 문제제기한 일심회 사건이란?
'386 간첩단' 사건과 주사파...김승규 국정원장은 청와대 386들에게 패했다
취임 초부터 간첩잡기 독려
이른바 「386간첩 사건」이 언론에 보도된 직후 결정된 김승규(金昇圭) 국정원장 교체 배경을 두고 국정원 내부 알력설(說), 정권 핵심과의 불화로 인한 압력說 등 여러 가지 說이 난무하고 있다. 이 가운데 공통점은 「청와대 일부 386」과 金원장의 코드 불일치說이다.
한미(韓美)동맹·북핵(北核)문제 등 대북관(對北觀), 한미(韓美)FTA 문제 등에서 「청와대 일부 386」과 金원장의 견해가 달랐다는 것이다.
대북(對北) 화해정책에 무게 중심을 둔 386세력과 김승규 원장 간의 마찰은 출발부터 예정돼 있었는지 모른다. 金원장은 2005년 7월 취임하면서부터 「국정원 본연의 임무에 충실할 것」을 강조했다고 한다. 취임 초부터 간첩을 잡으라고 독려하고 나선 것이다.
이같은 「간첩잡기 강조」는 金원장의 평소 대북관(對北觀)을 보면 이해가 가는 부분이다. 金원장의 한 지인(知人)은 『金원장은 독실한 기독교 신자로 韓基總(한기총)의 對北 노선과 비슷한 시각을 가졌기 때문에 당연히 現 정권의 對北 노선과는 충돌할 수밖에 없는 사람』이라고 설명했다.
한기총(韓基總)은 개신교계 최대 연합기구로 63개 교단과 22개 단체로 구성된 협의체다. 진보적 입장의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KNCC)」와 대비되는 개신교의 보수적 목소리를 대변해 왔다. 이라크 파병 논란, 국가보안법 개폐 논란, 북한인권 문제 등에 대해 보수적 입장을 보여 왔다. 사학법(私學法) 개정 반대운동에는 중심에 서기도 했다.
내사 중단했던 사건, 다시 조사
金원장의 독려에 힘을 얻은 곳은 안보수사국팀이다. 안보수사국은 金大中(김대중)-盧武鉉(노무현) 정권이 이어지면서 국정원 조직 개편 필요성이 제기될 때마다 기구 축소를 염려해야 할 정도로 활동이 위축돼 왔다. 조직 명칭도 「대공수사국」에서 「안보수사국」으로 바뀌었다. DJ정권과 盧정권이 국정원의 「對共(대공)」 업무를 보는 시각을 반영하는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金원장의 독려는 큰 힘이 될 수밖에 없었다. 한 정보소식통의 말이다.
『金원장이 취임 초부터 안보 분야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안보팀들은 상당히 고무됐다. 金원장은 거의 변화 없이 기존 안보 관련 인원이나 조직을 끌고 나갔다.
일부 시도(市道) 지부에서는 원장의 이런 독려 때문에 내사를 중단했던 사건들에 대한 조사를 다시 시작하기도 했다. 안보수사팀에서는 「너무 독려하는 것 아니냐」는 「즐거운 불평」이 나올 정도였다』
이 소식통은 『최근 수원지검 공안부가 조사 중이라고 밝힌 민주노동당원 朴모씨의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 사건도 이런 과정에서 나온 것으로 안다』고 덧붙였다.
국가정보원은 지난 11월 초 북한에 밀입국해 군사정보를 알려 주고 인터넷을 통해서 김일성을 찬양하는 글 등 이적표현물을 게재한 혐의로 민주노동당원인 朴모씨를 체포, 검찰에 넘겨 현재 수사가 진행 중이다.
「386간첩 사건」 발생 초기 여당 거물 정치인 몇몇의 연루說과 시민단체 인사 등의 연루說이 거론되면서 386간첩 사건은 크게 확대될 것으로 예측됐다.
386간첩 사건은 「북한공작원 접촉 의혹 사건」 또는 「일심회 사건」 등으로 불린다. 사건을 보는 입장이나 시각에 따라 다른 명칭으로 불리고 있는 것이다. 국정원은 현재 이 사건의 공식 명칭을 사용하지 않고 있다. 다만, 검찰에 이 사건을 송치하면서 「국가보안법 위반 장○○ 등 피의사건」이라는 명칭을 사용한 것으로 알려졌다.
김승규 원장은 지난 10월26일 사퇴 의사를 밝힌 사흘 뒤인 29일 조선일보와 가진 인터뷰에서 『이번 사건이 「간첩단 사건」인지에 논란이 있다』는 질문에 다음과 같이 답변을 했다.
『간첩단 사건으로 보고 있다. 고정간첩이 연루된 사건 아닌가. 이미 구속된 5명은 지난 한 달간 집중적인 증거확보 등 수사를 통해 (간첩혐의가) 확실하다고 판단하고 있다. 이들 외에 이들과 연루된 인물들도 추적 중이다』
사건의 성격을 「간첩단 사건」으로 확신하면서 사건의 확대 가능성까지 언급한 것이다. 이에 대해 일부 언론은 「국정원 수사국 실무진에서는 간첩단 사건으로 몰고 가기에는 무리가 있는데 金원장이 밀어붙였다는 보도를 내보냈다. 이에 대한 한 국정원 직원의 설명이다.
『간첩단 사건과 관련 원장과 담당 실무자들 간에 마찰이 있었던 것처럼 알려졌는데 국정원에서 절대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없다. 국정원은 군대 못지않은 상명하복 체제를 갖추고 있다. 혹시 정보 분야는 몰라도 수사 분야는 상명하복에 더 철저하다』
「386간첩 사건」은 확대될 것인가?
그는 사건의 확대 가능성에 대해서는 부정적이었다. 『더 이상 확대도 축소도 없을 것』이라는 설명이다. 현재 거명되는 사람들 외에 새로운 인물이 등장하기는 어렵다는 뜻이다. 이와 관련 또 다른 정보 소식통은 간첩사건 수사의 경우 국정원장의 의지가 얼마나 영향을 끼치는가를 이렇게 설명했다.
『이번 사건은 김승규 원장 취임 이전에 진행되다가 내사가 중단됐던 것으로 알고 있다. 金원장 취임 후 다시 내사에 들어간 것이다. 안보수사국이 金원장 취임 후에 활력을 되찾은 데서 알 수 있듯이 원장의 의지 여하에 따라 사건은 확대될 수도 축소될 수도 있다. 물론 확대와 축소를 어떤 기준으로 봐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김만복(金萬福) 국정원장 내정자는 386간첩 사건에 대해 『우리 院(원)의 명예와 저 개인의 명예를 걸고 수사할 것』이라고 밝혔다.
현재 이 사건으로 구속돼 있는 사람은 「일심회」 총책으로 알려진 장민호 등 총 5명이다. 민주노동당 사무부총장 최기영, 前 중앙위원 이정훈, 학원사업가 손정목, 회사원 이진강 등이 장씨와 함께 구속됐다. 이들 대부분이 386 운동권 출신이었기 때문에 「386간첩단 사건」으로 불린 것이다.
국정원에 따르면 총책격인 장민호는 1989년과 1998년, 1999년 등 최소 세 차례 북한을 다녀왔다고 한다. 對南(대남)공작 부서에서 밀봉교육을 받고 김일성 부자에게 충성서약을 한 뒤 조선노동당에 입당했다는 혐의를 받고 있다. 장씨에게 포섭당한 나머지 4명은 정치권 및 사회정보를 제공해 왔다는 혐의를 받고 있다.
문제는 장씨에게 포섭된 국내 인사가 이들뿐만 아니라는 주장이 계속되고 있다는 점이다. 정치권, 재야인사 등의 포섭 리스트가 있다는 소문이 구체적인 이름까지 거명되면서 사라지지 않고 있다. 더 이상 사건 연루자가 나오지 않을 경우 사건을 축소했다는 의혹이 제기될 것이 명약관화한 것이다.
金원장, 취임 후 對北부서 확대
김승규 원장은 취임 직후 안보기능 강화를 위한 조직 개편을 했다고 한다. 안보수사국장과 단장에 과거 안보업무에 경험이 많은 인사들을 발령내는 한편, 외사·방첩·대(對)테러를 담당하는 6국과 7국을 세분화시켜 3개국으로 확대 개편했다. 對테러를 전담하는 11국을 신설했다. 1급 국장 자리와 그에 따른 보직도 증가하게 됨으로써 직원들의 사기를 높였다고 한다.
金원장은 고영구(高泳耉) 원장 시절 특정 지역에 치우쳤던 인사를 바로잡는 노력을 했다고 한다. 과거 김대중 정부 시절 영남인사들이 한직으로 내몰린 현상을 바로잡는다는 명분으로 高원장 시절에는 부산·경남 출신들을 이른바 「힘 있는 자리」에 앉혔다는 것이다. 특정 지역에 치우친 인사를 바로잡는다는 명분을 내세웠지만, 상대적으로 코드가 맞지 않는 기타 지역 인사들을 홀대하는 결과를 가져왔다는 것이다.
金원장은 高원장 시절 폐지됐던 대통령과 국정원장의 독대(獨對) 자리를 만들었다. 업무가 끝난 후에는 외부 인사들을 활발하게 만났다. 국정원장으로서 전임자인 高원장과 정반대의 업무 스타일을 보여 준 것이다. 高원장은 내성적인 성격 때문에 대통령에게 보고할 사항이 있으면 청와대 386 비서관을 통해서 보고했다고 한다. 반면 金원장은 대통령에게 직접 보고를 하자 그동안 보고를 받던 청와대 386들이 불쾌해했다고 한다.
국정원 직원들로서는 이런 일들을 원(院)의 위상강화와 본래의 기능 회복으로 받아들였다고 한다.
대북(對北) 화해정책에 무게 중심을 둔 386 세력과 국정원 대공(對共)기능 강화에 나선 김승규 원장의 충돌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 모른다.
金원장의 미국 방문
청와대 일부 386과 金원장의 충돌이 표면화되기 시작한 시기는 金원장이 비밀리에 미국을 방문한 지난 1월 말 이후라고 한다. 金원장은 비밀리에 미국을 방문해 포터 고스 美 CIA 국장을 만나 북한의 위조지폐 문제를 논의한 것으로 알려졌다. 한 정보소식통은 金원장의 극비 미국 방문은 북한 위조지폐 문제 때문만은 아니었다고 한다.
『金원장이 미국을 몰래 다녀온 것은 정권 차원이 아닌 국가 차원에서 대미(對美) 관계를 복원하기 위한 것이었다. 對美관계는 생명이 유한한 노무현 정권과 상관없이 지속되어야 한다는 게 金원장의 판단이었다. 金원장은 정보기관 간의 원활한 정보 교류를 위해 對美관계를 부드럽게 하려는 노력을 계속해 왔다』
문제가 발생한 것은 金원장의 미국 비밀방문이 아니라, 방문 후 국정원 부서장회의에서 한 金원장의 발언이 외부에 알려지면서라고 한다.
부서장회의에서 金원장은 한미(韓美)동맹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노 대통령이 「자주」를 강조하고 정부가 다른 길을 가더라도 우리 국정원은 여러 가지 특성상 미국과 호흡을 맞춰야 한다』는 취지의 발언을 했다는 것이다.
이런 발언이 국정원 내부의 고위간부를 통해 청와대에 알려지면서 일부 386과의 갈등이 표면화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金원장은 이후 청와대에 자신의 발언을 전한 것으로 지목된 모 부서장의 부서에 일을 지시할 때는 부서장은 배제하고 직접 그 부서 실무자에게 지시를 내렸다고 한다.
부서장회의에서의 발언 유출 후 직접 실무자에게 업무를 지시하기도 했다는 이야기에 대해 또 다른 정보소식통은 다른 견해를 말했다.
『金원장의 발언을 모 부서장이 유출했는지는 모르지만 그런 일로 인해 부서장을 배제하고 실무자들에게 업무를 직접 지시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金원장의 평소 업무 스타일이 그렇다. 결재서류에 팀장·과장의 전화번호가 들어가는데 서류를 보다가 궁금하면 직접 실무자에게 전화를 걸어 물어보거나 설명을 듣는 스타일이다. 金원장의 그런 업무 스타일이 와전돼 외부에 알려진 것 같다』
金원장, 정치적 중립 의지
김승규 원장의 정치적 중립을 확보하기 위한 노력도 金원장과 집권세력이 충돌하게 된 한 요인으로 분석된다.
여권의 참패에 가까운 패배로 끝난 5·31 지방선거가 대표적인 예다. 여권과 청와대 일부에서는 지방선거 패배 후 그 책임의 일단을 정보不在(부재)로 돌리는 시각이 있었다. 국정원이 선거동향을 제대로 파악해 보고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국정원을 이끄는 국정원장에 대한 시각이 고울 리 없다.
실제 金원장은 정치적 중립을 지키기 위한 확고한 의지가 있었던 것 같다. 한 정보소식통의 말이다.
『5·31 지방선거 당시 金원장은 선거동향과 관련된 어떠한 보고서도 작성 못하게 했다. 혹시 언론사에서 여론조사가 나오더라도 일부러 자세하게 알기 위한 관심 표명은 하지 말라는 지시였다. 다른 선거들도 마찬가지였다』
일부 청와대 386과 金원장이 「코드의 완전 불일치」를 드러낸 사건은 시민단체인 「선진화국민회의」가 만든 「한미 FTA 미래로 향한 다리입니다」라는 한미(韓美)FTA 홍보책자와 관련돼서다. 덕성女大 李元馥(이원복) 교수가 구성과 그림을 맡은 이 책자는 전체가 만화로 꾸며졌다. 지난 9월12일자로 발행된 이 책의 분량은 20페이지로 가격은 3000원이다.
주지하다시피 한미FTA 체결을 위해 가장 적극적으로 나서는 정부기관이 국정원이다. 국정원은 이 책자를 구입해 한미FTA 홍보에 활용했다.
문제는 이 책자를 만든 선진화국민회의를 이끄는 사람들의 면면이다. 이 단체의 공동상임위원장은 서울大 朴世逸(박세일) 교수, 李石淵(이석연) 변호사 등이고 사무총장이 徐京錫(서경석) 목사다. 盧武鉉 정부와 이른바 코드가 맞지 않을 뿐만 아니라 반대 진영에 있는 인사들인 것이다.
이 단체가 내세우는 주요 모토는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부정하는 左派的(좌파적) 역사관과 전체주의적 민족주의를 반대하며, 돈독한 韓美관계의 강화와 평화적 남북관계의 유지를 함께 도모한다』이다.
국정원은 이 단체가 만든 韓美FTA 홍보책자를 다량 구입해 홍보에 활용하려 했지만, 일부 청와대 386이 제동을 걸었다는 것이다. 이유는 『現 정권에 반대하고 있고, 지난 대선(大選)에서 상대편을 위해 일한 사람들에게 FTA 홍보를 맡길 수 없다』는 것이었다.
국정원 측은 『국가 중요 시책을 위한 일인데 네 편 내 편이 왜 중요한가』고 반박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고 한다.
이와 관련 선진화국민회의에 관계자는 『韓美FTA 홍보책자를 만들 때 국정원 측과 판매 문제 등의 사전 협의를 가졌던 것은 사실이다. 국정원뿐만 아니라 일반 기업체에서 구입을 약속했다가 취소하는 일도 있었다』고 밝혔다. 그는 『우리 단체와 국정원이 韓美FTA 홍보와 관련 협조 관계가 무너진 시기는 9월 중순경』이라면서 『청와대 쪽 386그룹이 문제를 제기했던 것으로 안다』고 덧붙였다.
청와대는 金원장의 사퇴 배경으로 외부 압력설을 보도한 언론에 대해 정정보도를 요청한 바 있다. 국정원 역시 지난 10월30일자로 낸 보도자료에서 「외부 압력설은 사실무근」이라고 발표했다.
어쩌면 외압에 의한 사퇴든 자발적 사퇴든 金원장의 사퇴 배경은 중요한 일이 아닐 수 있다.
김승규 원장은 국정원장 취임 당시부터 경질사유를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국정원장으로서의 그는 現 정권의 핵심 인사들과는 역사관·철학관·세계관이 너무 달라 보이기 때문이다.
금년 1월 신년사에서 「克世拓道(극세척도)」를 강조하면서 『최고의 도자기를 빚어 내기 위해 혼신의 힘을 기울이는 陶工(도공)의 심정으로 선진한국의 길을 열어 가는 데 최선을 다하겠다』고 다짐했던 金원장은, 좌경화된 세태에 맞서 간첩수사를 강행하다가 결국 옷을 벗고 말았다.
「386간첩 사건」 수사를 맡았던 국정원은 지난 11월13일 민주노동당 최기영 사무부총장과 사건의 총책으로 지목된 장민호가 윤영하는 회사의 직원인 이진강을 검찰에 송치했다. 장씨와 민노당 前 중앙위원 이정훈, 학원사업가 손정목은 사흘 전인 11월10일 검찰에 송치됐다.
국정원이 이들의 신병과 함께 검찰에 넘겨준 관련 기록만 100만여 쪽에 달한다고 한다.
신임원장의 역사관·철학·세계관에 달려
김만복 국정원장 내정자는 지난 11월1일 국정원장실을 방문해 김승규 원장에게 『(이번 사건 수사의) 시작은 원장님이 하셨지만, 확실히 마무리하는 일은 저의 책임』이라고 했다.
국정원이 「오래 전에 인지해 내사를 벌인 후 증거를 확보해 수사 착수에 들어갔다」는 「386간첩 사건」이 축소될지 확대될지는 金내정자의 역사관·철학관·세계관에 달려 있는 것 같다. 전직 국정원 직원은 金내정자에 대해 이런 말을 했다.
『金내정자는 평소 개인적으로 청와대 386 및 노 대통령 측근들과 자주 만나고 친하게 지냈다. 이런 인간관계가 「386간첩」 수사에 영향을 주지는 않을까 염려스럽다』●
출처 | 월간조선 2006년12월호 글 | 김성동 월간조선 기자
■영화 〈공작〉의 모티브가 된 ‘흑금성’ 박채서의 실체
2018.08.21 월간조선 09월 호 글 : 조성호 월간조선 기자
‘안기부 보고서’엔 ‘김정일 만났다’고 돼 있는데 20년 후엔 ‘안 만났다’고 부인… ‘흑금성’의 말은 어디까지 사실인가?
⊙ 박채서씨는 김정일과의 만남 부인했으나, 영화 〈공작〉과 김당 기자가 쓴 同名의 책 《공작》은 김정일과의 만남 다뤄
⊙ “흑금성 사건 관련자들, ‘(영화가) 사실과 다른데 박채서 혼자만 영웅처럼 나온다’고 말하더라”
⊙ “박채서씨는 무엇을 위해, 누구를 위해 공작원 역할을 했는지 의문”
⊙ 1995년 광고 회사 ‘아자 커뮤니케이션’ 설립해 MBC와 삼성 對北 사업에 끌어들여
⊙ 1997년 대선 앞두고 ‘오익제 월북’이란 악재 만난 DJ, “北風 막을 수 있는 박 선생이 도와달라”
⊙ 2010년 흑금성이 연루된 현역 육군 소장 간첩 사건과 관련, “기무사 요원은 회의 중인 육군 소장을 수갑 채워 연행”
▲지난 8월 8일 개봉한 영화 〈공작〉은 ‘흑금성’이란 암호명으로 활동한 대북(對北) 공작원 박채서씨를 모티브로 제작된 영화다.
영화에서 박석영(박채서의 극중 이름)은 국군 정보사령부 소령 출신으로, 국가안전기획부에 스카우트돼 북한 핵의 실체를 파악하기 위해 북한 내부로 침투한다. 북한 고위 간부의 신뢰를 얻은 박석영은 북한 김정일과도 만나는 것으로 영화는 설정하고 있다. 그동안 박채서씨는 김정일과 만났다고 알려져 왔었다. 1998년 흑금성 사건이 처음 터졌을 때에도 그가 김정일과 접촉했는지 여부는 초미의 관심사였고, 그가 김정일을 만난 건 거의 정설(定說)처럼 받아들여졌다.
김정일 만남을 둘러싼 의문
▲1998년 3월 18일 《한겨레》의 단독 보도(사진)로 대북 공작원 ‘흑금성’의 실체가 수면으로 떠올랐다.
최근 박채서씨는 김정일과의 만남을 부인했다. 지난 8월 11일 자 《중앙SUNDAY》와의 인터뷰에서 박씨는 ‘김정일과 만났느냐’는 질문에 “안 만났다”며 장성택이 북한에서 만난 가장 높은 사람이라고 밝힌 것이다. 다수의 언론은 〈공작〉 개봉 사실을 알리며 영화의 실제 주인공인 박채서씨가 실제로 김정일을 만났다고 전한 바 있다. 《오마이뉴스》 기자 출신인 김당(현 UPI뉴스 에디터)씨는 박씨와 오랫동안 친분관계를 맺어 왔다. 김당씨는 박채서씨의 행적을 추적, 박씨의 이야기를 다룬 동명(同名)의 책 《공작》을 발간했다. 이 책에서 김씨는 박씨와 김정일과의 만남을 제법 자세히 다뤘다. 김당씨는 책에서 “1%의 허구가 있다”고 밝혔지만, 두 사람의 만남은 긴장감 있게 묘사돼 있다. 영화는 그보다 먼저 출간된 책의 내용을 기반으로 제작돼 김정일과의 만남을 연출한 것으로 보인다. 물론 영화 역시 도입부에 “실화를 모티브로 만들어진 픽션”이라고 명시돼 있다.
그간 ‘흑금성’ 박채서씨를 둘러싼 행적엔 물음표가 따라다녔다. ‘이중간첩’이라는 설부터 그의 대북 공작이 실제보다 과장됐다는 얘기까지 돌았다. 박채서씨는 어떤 인물이길래 그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가 개봉되고, 북한 최고 권력자를 만난 것처럼 알려지기도 한 것일까.
흑금성의 존재가 세상에 처음 알려지게 된 건 20년 전인 1998년의 일이다. 그해 3월 18일 《한겨레》는 “안기부가 지난해 대통령 선거 때 특수 공작원을 김대중 국민회의, 이인제 국민신당 후보 진영에 침투시켜 북한 접촉을 유도하고, 이 과정에서 각종 정보를 조직적으로 입수하는 등 불법적 비밀 정치공작을 벌인 사실이 확인됐다”고 전했다. 이어지는 기사의 내용이다.
〈《한겨레》가 단독 입수한 안기부의 ‘해외 공작원 정보보고’ 자료에 따르면 “공작원을 베이징에 파견해 북쪽의 대선 관련 기도를 유도”한다고 돼 있어, 안기부가 북풍 공작을 적극 주도했음을 보여준다. 이 자료는 특히 안기부가 북한에 위장 포섭돼 활동 중인 특수 공작원 ‘흑금성’이 지난해 5월 밀입북해 받은 지령을 따르는 형식으로 97년 9월께 김대중 후보와 이인제 후보 진영에 침투한 사실을 드러내고 있다.〉
신문은 또 ▲흑금성이 1997년 10월 초 이인제 후보 진영의 ㅈ씨와 함께 베이징을 방문해 북한 쪽 인사들을 만나 대선에서의 협조 방안을 논의했고 ▲(흑금성은) 같은 방식으로 1997년 9월 말 국민회의 ㅈ의원에게 접근해 북풍 관련 정보 등을 제공하며 신뢰를 얻었다고 전했다.
김정일과의 만남에 대해 “상상에 맡기겠다”
흑금성 관련 보고서가 공개된 지 나흘 후인 1998년 3월 22일 박채서씨는 김당 당시 《시사저널》 기자와 인터뷰를 가졌다. 여기서 박씨는 자신에 대한 간략한 소개와 함께 ‘이중간첩’이라는 일각의 보도에 대해 부인했다. 김정일과의 만남에 대해선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당시 인터뷰 문답이다.
〈— 당신의 신분에 대해 여러 설(說)이 난무하고 있는데, 본인의 신원을 확실히 밝혀 달라.
“충북 청주 출신이고 93년 육군 소령으로 예편했다. 군에 있을 때는 국군 정보사에서 대북 특수 임무를 수행했고, 제대 후에는 안기부의 특수 공작원으로 일해 왔다. 신분을 더 자세히 밝힐 수 없는 사정을 이해해 달라.”
— 언론의 ‘이중간첩’이라는 표현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나.
“(웃으며) 무식하면 용감하다는 말도 있지만, 첩보 공작의 세계를 모르기 때문에 그런 추측 보도가 나온 것 같다. 그런 용어는 어느 쪽에서 보느냐에 따라 다르다. 나는 국가의 명을 받고 활동했지만 저쪽(북한)이 보기에는 포섭된 것이다. 이처럼 보는 시각에 따라 달라진다. 단, 나는 국익을 위해 조직이 시키는 대로 움직였을 뿐이다.”
— 당신의 안기부 정보 보고에 따르면, 김정일 총비서를 면담한 것으로 되어 있는데 과연 만났는가.
“(빙그레 웃으며) 상상에 맡기겠다. 너무 예민한 부분이니 ‘노코멘트’한 것으로 해 달라.”〉
안기부 ‘해외정보 보고서’(요지)의 흑금성 관련 내용 중에는, 그가 1997년 8월 22일 북한의 모란봉 지역 한 초대소에서 ‘35분간 비밀리에 김정일과 면담했다’는 기록도 있다. 200여 페이지에 달하는 이 자료는 박채서씨의 보고를 바탕으로, 안기부 해외조사실(실장 이대성)이 작성해 권영해 당시 안기부장과 이병기 2차장 등에게 보고한 것이라고 한다.
앞서 언급한 대로 박채서씨는 김정일과 만난 사실이 없다고 했다. 그렇다면 안기부가 보고서를 조작했거나 박씨가 거짓 보고를 했든지 둘 중 하나라는 결론이 나온다. 진실은 박채서씨만이 알고 있을 것이다.
지인들의 評 “(박채서는) 위험한 인물” “영웅이 되면 안 되는 사람”
《월간조선》은 박채서씨와 친분이 있었던 법조인 A씨에게 박채서씨가 어떤 인물인지 물어봤다. A씨는 박씨를 “복잡한 인물이면서 비상한 머리를 가진 사람”이라고 정의했다. A씨는 “휴전선을 비롯해 동·서해안을 동영상으로 촬영해 북한으로 넘기고, 탈북자 등 우리 측 정보도 (북한에) 넘겨준 인물”이라고 설명했다. 이어지는 A씨의 이야기다.
“처음에 박채서씨를 그리 나쁘게 보지 않았다. 정의롭고 국가를 위해 헌신하는 사람으로 알았다. 그런데 박씨는 북한에 그런 자료들을 다 넘겼음에도 스스로를 ‘간첩’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나는 그의 행위가 옳지 않다고 봤다. 시간이 흐르면서 박씨와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
A씨는 “영화 〈공작〉에 관련된 실제 인물들이 나를 찾아와 상담을 하기도 했다”며 “‘(영화가) 사실과 다른데 박씨 혼자만 영웅처럼 나온다’고 말하더라”고 전했다. 박씨를 잘 아는 주변 사람들은 A씨에게 ‘박채서가 어떤 일을 또 시작한 것 같다’고 귀띔했다고도 한다. A씨는 “박씨는 위험한 인물 중 한 명이라고만 알아 달라”고 덧붙였다.
박채서씨를 면밀히 관찰해 온 B씨도 “박씨의 행적엔 흐릿한 부분이 있다”며 “영웅이 되면 안 되는 사람”이라고 주장했다. B씨는 “공작원은 비밀 임무를 수행하다가 그 존재가 노출되면 그 즉시 자신을 숨기는 게 그 세계의 원칙이다. 때론 죽음도 불사해야 한다”고 했다. 그런 점에서 박채서씨가 언론이나 영화를 통해 자신의 행적을 밝히는 건 적절치 못하다고 B씨는 지적했다.
이처럼 A씨와 B씨는 대체로 박씨를 부정적으로 평가했다. 특히 B씨는 “안기부 보고서에 김정일과 만났다고 돼 있는 걸로 봐선 박씨가 그렇게 보고를 했기 때문인데, 이제 와 아니라고 하는 걸 봐선 그가 신뢰할 수 없는 인물이라는 점이 명확해진다”고 주장했다. B씨는 “황장엽 전 노동당 비서가 탈출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고(故) 이연길씨, 류경호텔 여종업원 탈북에 기여했던 사람들은 모두 국익(國益)과 애국심을 기반으로 움직였다. 그런데 박채서씨는 무엇을 위해, 누구를 위해 공작원 역할을 했는지 의문”이라고 재차 강조했다.
‘흑금성’ 박채서는 누구인가
박채서씨의 생애와 그가 북한과 벌인 사업, 1997년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벌어진 일련의 ‘공작’에 대해 알아보자. 박채서씨는 충북 청주고 나와 3사관학교(14기)를 거쳐 소위로 임관했다. 이후 소령으로 진급, 육군대학 과정을 거쳤는데 이때 박채서씨는 육대를 3등으로 졸업했다. 그후 국군정보사령부에 배치, 1990년부터 서울 대방동 소재 한미합동 902정보대의 A-23팀장으로 발령 받았다. 대방역 앞 미8군 공병대 창고 건물에 위치한 902정보대는 한국 측 A-23팀을 포함한 2개의 A팀과 다수의 C팀(전선공작팀)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A-23팀은 미국으로부터 자금을 지원 받아 미국 CIA와 함께 대북 우회침투 공작을 하는 비밀 조직이었다.
박씨는 자신이 직접 북한에 선을 구축, 정보를 수집해야 한다고 결심하고, 기존의 우회침투 방식에서 직접침투로 방향을 선회했다. 그 방편 중 하나로 선택한 게 ‘편승공작’이다. 대북 사업을 하는 사람에게 접근해 그 사업을 도와주는 방법으로 북한에 위장 침투하는 방법이다.
그러다가 만난 사람이 광고업을 하던 박기영씨다. 박기영씨는 박채서씨가 살던 서울 도곡동 대림아파트의 이웃사촌이었다고 한다. 박채서씨는 광고사업이 ‘편승공작’에 더욱 용이할 것이란 판단을 했고 두 사람은 의기투합했다. 1995년 12월, 두 사람은 북한 전문 광고기획사 ‘아자 커뮤니케이션’(이하 ‘아자’)을 설립했다. 박채서씨는 이 회사의 전무를 맡았다. 두 사람의 대북 광고 사업에 ‘물주’ 역할을 했던 사람이 정진석 현 자유한국당 의원의 형 정진호씨로 정씨는 당시 미진아이디(주)라는 회사를 운영하고 있었다. ‘아자’ 지분 관계도 정씨가 70%, 두 박씨가 각각 15%를 갖기로 합의했다. 그때 박씨는 이미 소령으로 전역한 상태였고 그해 3월, 국가안전기획부 서기관급 국가 공작원에 정식 채용돼 활동 중이었다.
박기영과 의기투합해 세운 ‘아자 커뮤니케이션’
1997년 2월 ‘아자’는 중국 베이징(北京) 캠핀스키 호텔에서 북한의 외화벌이 회사인 ‘금강산 국제관광총회사’와 북한 내 광고 제작에 전격 합의, 업계를 놀라게 했다. 당시 이 회사가 통일원(현 통일부)에 제출한 ‘방북 결과 보고서’에 따르면, 박씨를 비롯해 박기영 사장 사진감독 변모씨 등 세 명이 북한에 들어가 금강산 국제관광총회사 총사장 등의 영접을 받았다고 한다. 이들은 외국의 주요 인사를 위한 서재동 초대소와 금강산호텔 등에 묵으며 백두산 금강산 등지를 둘러봤다고 한다.
박채서・박기영 두 사람이 북한을 상대로 벌인 광고 사업의 계획은 대강 이러했다. 우선 일단 북한 내의 명소를 배경으로 한국 기업의 제품을 홍보하는 광고를 촬영하는 것이었다. 그 다음에 공항과 주요 도시에 입간판을 설치하고 남북한 연예인들이 공동 출연하는 CF 촬영으로 그 범위를 넓혀 나가고자 했다. 박기영 사장은 광고에 대한 개념이 전무한 금강산 국제관광총회사 직원 5명을 베이징 캠핀스키 호텔로 불러내 일주일에 걸쳐 전반적인 개념을 공부시켰다.
흑금성 문건이 공개됐을 당시, 박기영 사장은 모 언론에 “박 전무가 북한 내 고위층을 접촉하는 등 사실상 이번 사업을 성사시켰다”며 “박 전무는 대외적으로 우리 회사 전무 직함을 갖고 있지만 부인들끼리 친분이 있어 대가 없이 도와주었을 뿐 사실상 독립적으로 활동하는 대북(對北) 로비스트”라고 소개했다. 박 사장은 그러나 박채서씨의 구체적인 활동 등에 대해서는 “모른다”고 답했다.
‘아자’의 북한 광고 사업을 주선한 북측 관리는 김영수・리철이었다. 이 중 박채서와 동갑인 리철은 김일성대 경제학부 수석 졸업자로, 북한의 대외경제위원회 심의처장을 맡고 있는 인물이다. 집안도 좋아 그의 부친은 인민군 상장 출신이고, 장인 리길송은 양강도 당 비서, 부인은 《로동신문》 기자였다. 김영수는 국가안전보위부 소속이었고, 우리의 방첩(防諜)에 해당하는 업무를 맡고 있었다. 김당씨가 쓴 《공작》에는 박채서씨가 북한 관리들에게 접근하기 위해 일부러 ‘남조선 군부 부적응자’ 행세까지 했다고 적혀 있다. 이 역시 북측의 신뢰를 얻기 위한 고도의 공작이었던 셈이다.
‘아자 커뮤니케이션’, MBC와 삼성을 대북 사업에 끌어들여
박채서씨는 ‘아자’를 기반으로 원대한 사업 계획을 입안했다. 삼성 제품을 북한에 광고하고, MBC가 대북 광고를 전담하는 것을 골자로 한 계약을 북한과 추진한 것이다. 1997년 5월 26일 ‘아자’와 MBC는 북한을 방문해 달라는 초청장을 받았다. 당시 통일원은 ‘아자’의 방북 허가는 승인했지만, MBC에 대해선 ‘언론사 간 과당 경쟁이 우려된다’며 승인을 거절했다.
이런 가운데 북측에 지불하기로 한 첫 번째 중도금 날짜가 도래했다. 총 60만 달러였는데 아자와 MBC의 계약대로라면 두 회사는 이 돈의 절반씩을 부담해야 했다. MBC의 방북이 불투명해지면서 정진호씨가 60만 달러를 직접 가지고 중국으로 건너가야 했다. 순간 정씨는 ‘이 많은 현찰이 공항 검색대를 통과할 수 있을까’라는 걱정이 들었다. 정씨의 걱정과 달리 김포공항 검색 요원은 돈뭉치를 잔뜩 든 가방을 소지한 정씨를 아무런 제지 없이 통과시켰다. 이미 박씨가 손을 썼기 때문이었다. 정씨를 통해 돈은 북측에 무사히 전달됐다고 한다.
그해 10월 통일부는 돌연 MBC의 방북(訪北)을 허가했다. ‘아자’ 측에서는 “김영삼 대통령의 친서를 MBC를 통해 북측에 전달하기 위해 황급히 허가를 낸 것”이라고 주장했다. 물론 MBC 관계자들은 이 같은 사실을 부인했다. MBC는 방북해 다큐멘터리를 촬영할 지역을 답사한 게 전부였다고 한다. ‘아자’와 MBC의 관계는 다소 삐걱거렸다. MBC는 대금의 절반을 북한에 지불하기로 한 약속을 어떤 이유에서인지 지키지 않으려고 했다. 1998년 1월 ‘아자’는 MBC에 계약 파기를 선언하고 타 방송사와 계약을 맺겠다고 통보했다. 그제서야 MBC는 55만 달러를 출연하며 계약을 요구했다고 한다.
박채서씨는 삼성과의 사업에 가장 공을 들였다. 만약 삼성이 아자의 첫 번째 광고주가 되면 ‘아자’의 사업은 날개를 다는 격이 되기 때문이다. 당시 삼성은 유명 영화배우 안성기씨를 모델로 내세워 북한에서 삼성전자의 휴대폰 브랜드인 애니콜 광고를 촬영하겠다는 계획을 세운 것으로 전해진다. 그해 3월 12일 통일부는 윤종용 삼성전자 사장 일행의 방북을 허가했다. 그렇게 사업이 진행되던 중 《한겨레》 보도가 나오고, ‘아자’의 사업은 사실상 좌초됐다.
15대 대선 개입… 이회창·김대중·이인제 캠프 접촉
▲1997년 대선 당시 김대중 후보 캠프는 박채서씨로부터 北風 관련 정보를 은밀히 받아보았다고 한다. 1997년 12월 19일 국회 본관 앞에서 열린 대통령 당선 환영 행사장에 김종필, 박태준씨와 함께 들어서고 있는 김대중 대통령 당선자. 사진=조선DB
1997년 15대 대통령 선거 과정에 흑금성이 개입했다는 것도 흥미롭다. 가장 눈여겨볼 대목은 당시 김정일이 ‘김대중이 아닌 이인제가 당선돼야 한다’는 입장을 보인 것이다. 박채서씨는 이러한 동향을 북한 보위부를 통해 확인한 뒤 안기부에 보고했다고 한다.
안병수 북한 조평통 부위원장은 베이징에서 이인제씨의 동서인 조철호 《동양일보》 사장을 만났다고 앞서 안기부 보고서를 인용해 언급한 바 있다. 물론 조철호씨는 베이징에서 리철을 만난 적은 있으나 일반적인 동향에 대해 얘기를 나눴고, 이인제 후보 지원에 관한 논의는 없었다고 부인했다. 박채서씨는 당시 검찰에서 “1997년 11월 이후 이인제 후보의 지지율이 하락함에 따라 무산됐다”고 진술했다고 한다. 누구의 말이 맞는지 현재로선 확인이 어렵다.
박채서씨는 이인제 캠프뿐 아니라, 김대중·이회창 후보 측과도 선이 닿아 있었다. 이는 공작원의 속성이기도 하다. 유력 후보 측 모두와 선이 닿아야 차후에도 자신의 신분과 입지를 보장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당시 김 후보 측 라인은 정동영·천용택 의원이었다. 그러나 정·천 두 의원은 박채서를 별로 신뢰하지 않았다고 한다. 과거 중앙정보부와 안기부로부터 탄압을 받았다고 주장하는 김대중 후보 측의 성향상 공작원 신분인 박씨에 대한 거부감 때문으로 추정된다. 박채서씨에 대한 김대중 후보 측의 경계는 곧이어 180도로 바뀐다.
‘오익제 월북’으로 궁지 몰린 DJ, 박채서에게 ‘SOS’
▲1997년 새정치국민회의 고문이었던 오익제(좌측 두 번째)의 월북은 김대중 후보 측을 긴장시켰다. 이때 흑금성은 관련 정보를 국민회의 측에 넘겨줬다고 한다. 사진=MBC 뉴스 캡처
당시 김 후보 측은 오익제 천도교 교령의 월북(越北)으로 이른바 ‘색깔론’으로 정치 공세에 시달리고 있었다. 월북 직전까지 오익제는 새정치국민회의 고문으로 등재돼 있었다.
오씨가 월북한 지 3개월 뒤인 1997년 11월, 오익제는 김대중 후보에게 서한을 발송했다. 봉투엔 ‘평양우체국’이라고 소인(銷印)이 찍혀 있었다. 편지에서 오익제는 “선생님(김대중)께서도 이북의 영도자와 합의하여 통일을 성취하겠다는 소신을 표명하였다는 것을 저는 알고 있습니다. 제가 권고하고 싶은 것은 김정일 영도자님께서 1997년 8월 4일에 발표하신 로작 ‘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의 조국통일 유훈을 철저히 관철하자’를 어떤 일이 있어도 보셔야 한다는 것입니다”라고 적혀 있었다. 그러면서 “후광(김대중의 호) 선생님이 집권하시면 금세기 안에 통일성업을 성취할 수 있을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라고도 했다.
김당씨와 박채서씨는 ‘오익제 편지’를 북한의 김대중 ‘낙선 공작’의 일환으로 보았다. 실제로 북한이 자신들에게 유화적인 김대중 세력이 야당으로 남아 보수 여당을 견제하는 편이 더 낫다고 판단했다는 분석이 있다. 김대중 후보가 당선된다면 기업과 정당이 북한 편으로 돌아 북측 입장에선 선택지가 줄어든다고 본 것이다.
궁지에 몰린 김대중 후보는, 북한 상층부와 선이 닿는 박채서씨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직면했다. 김당씨의 책 《공작》에 따르면, 김대중 후보는 “나는 대통령이 되고 싶다. 대통령이 되려면 북풍을 막아야 가능하다. 그러니 북풍을 막을 수 있는 박 선생이 도와달라”는 입장을 보였다고 한다. 이때 공작원으로서 박채서씨의 능력이 발휘된다.
박씨는 1997년 8월 20일 평양에서 오익제와 우연히 만나게 된다. 안기부도 박씨의 보고를 통해 오익제가 월북해 평양에 있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안기부 보고와는 별도로 박채서씨는 정동영 의원에게 두 시간에 걸쳐 남북한 정세 및 북한의 대선 개입 의도, 특히 오익제 입북을 통한 ‘김대중 죽이기’ 공작이 이뤄질 수 있다고 귀띔했다. 나중에 새정치국민회의는 이 정보를 바탕으로 ‘북풍대책팀’을 꾸리게 된다.
권영해 안기부장을 비롯한 안기부 내 대북 강경파들은 오익제 월북을 계기로 그의 월북 경위와 편지 등에 관한 조사에 착수한다. 안기부의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 이 수사는 흐지부지되고 만다. 이 사건은 김대중 정부 출범 직후 이른바 ‘북풍 공작’으로 검찰 수사선상에 오른다. 권영해 부장을 비롯해 고성진 안기부 대공 수사실장 등은 구속되고, 안기부는 국가정보원으로 문패를 바꾸는 결정적인 계기로 작용했다.
결과적으로, 박채서씨는 김대중 당선에 크게 기여한 셈이 됐다. 박씨가 북한 관련 정보를 새정치국민회의 측에 제공했기 때문이다. 김당씨도 당시 《시사저널》에 이러한 취지를 담은 기사를 썼다. 정동영 의원은 아예 박씨를 찾아와 “대통령(김대중)을 만나 사실대로 다 전했다. 대통령께서 흑금성과 박채서를 별개의 인물로 오해했다고 한다”고 전했다. 정 의원은 “우리는 한마음이고 오직 한길을 가야 한다고 말했다”고도 전했다.
육군 소장 간첩 사건에 얽힌 秘話
그후 일반인들의 뇌리에서 잊힌 박채서씨는 12년 만인 이명박 정부 때인 2010년 또다시 입방아에 오르내린다. 이른바 현역 육군 소장 간첩 사건이다. 육군 소장 C씨가 박채서씨에게 야전교범을 비롯한 작전계획(작계) 등 군 보안자료를 넘겼다는 것이다. 박씨는 이자료를 북한에 넘겼다는 게 당국의 설명이다. 국가정보원과 기무사령부는 이러한 단서를 잡고 C씨를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했다. 이 과정에서 박채서씨도 국보법 위반 혐의로 구속됐다. 당시 기무사 관계자로부터 이 사건 전반에 대해 들었다는 D씨는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려줬다. 기무사 관계자는 D씨에게 “박채서는 간첩이 확실하다”고 강조하며 C씨 검거에 얽힌 비화를 들려줬다고 한다. 이어지는 D씨의 증언이다.
“기무사는 이미 오래 전부터 C씨가 박채서씨와 친분이 있다는 걸 파악했다고 합니다. 특히 C씨는 사단장 시절 박채서씨를 만나러 영외(營外)로 나갈 때 일종의 ‘회피기동’을 했다고 하더군요. 통상 사단장의 일거수일투족을 사단 기무부대가 파악하는데, 이를 따돌리려고 했다는 겁니다. 그러다 보니 혐의를 잡고 C씨를 구속하는 데까지 시간이 꽤 오래 걸린 것 같습니다. 그렇게 증거 확보를 한 뒤 재빨리 C씨의 신병을 확보한 거죠. 기무사 요원들이 그를 체포할 때 C씨는 회의 중이었는데, 그 자리에서 수갑을 채워 연행했다고 하더군요.”
C씨는 박씨의 3사관학교 선배다. C씨가 전격적으로 구속됐을 때, 현역 장성(將星) 간첩 혐의도 충격이었지만 군내에서는 ‘3사 출신에 전도가 유망한 한 장성을 과도하게 몰아붙인 것 아니냐’는 일종의 음모론도 조심스럽게 제기됐다. C씨는 노무현 정부 시절 ○군단 참모장(준장), 육군 ○사단장(소장)을 지낸 뒤 이명박 정부에서 상급부대 부(副)지휘관으로 영전한 상태였다. 별다른 사고만 없다면, C씨는 비육사 출신으로 중장 진급이 유력했다는 게 군내의 대체적인 시각이었다. D씨는 “C씨가 박씨를 친동생처럼 아껴 별다른 경계 없이 야전교범을 건넸을 수도 있다”면서 “문제는 그 상대가 박씨였다는 것이 아쉽다면 아쉬운 점”이라고 말했다. 이 사건으로 박채서씨는 대법원으로부터 징역 6년을 선고 받고 복역한 뒤 2016년 5월 만기 출소했고, C씨는 징역 2년을 선고 받았다.⊙
■심리전
2015-08-13 "준전시 상태에서 심리전을 포기하는 경우도 있나?"
지난 10년간의 대북 무장해제 사례 중 빼놓을 수 없는 것 중의 하나가 대북 선전물(삐라 등)을 포함한 대북방송 중단을 들 수 있다. 2004년 휴전선의 대북 방송인 ‘자유의 소리 방송’을 담당했던 金漢奎(김한규) 국군교육방송 PD(前 국군심리전단 작전계획장교, 2004년 소령 전역)는 “엄청난 심리전 효과를 거두고 있던 우리 측의 우수한 대북방송 장비를 북한의 낡은 선전방송 장비와 동급에 놓고 철거에 합의한 것은 궁극적으로 적을 돕는 역할을 한 셈”이라고 말했다.
대북방송 중단은 2000년 남북정상회담 때 상호비방을 중지하기로 합의하면서 시작됐다. 이때부터 정부의 공식 대북방송이던 KBS 사회교육방송(현 한민족방송)에서는 북한 체제 비판을 전면 중단했다. 2004년 6월에는 남북 장성급 군사회담 때 상호 비방방송을 전면 중지하기로 합의함에 따라 휴전선 일대에 울려 퍼지던 ‘자유의 소리 방송’도 중단됐다. 자유의 소리 방송은 휴전선의 확성기와 가청 거리가 50㎞인 FM라디오를 통해 방송되고 있었다.
김한규 PD는 “평상시에 전쟁을 하는 부대는 정보부대와 심리전 부대밖에 없다”며 “평시에 심리전을 벌이는 가장 큰 목적은 전쟁을 억제하기 위한 것인데, 지난 정권에서는 대북방송뿐 아니라 아예 심리전 부대까지 없애려고 시도했다”고 말했다. 김 PD는 “적을 상대로 심리전을 펼치던 자유의 소리 방송은 이후 국내 장병을 위한 교육방송으로 전환됐다”면서 이렇게 말했다.
“분단 이후 군사적인 문제로 남북관계에 합의를 이룬 적이 한번도 없었는데, 대북방송 중단은 너무나 쉽게 합의를 이루었습니다. 노무현 정부는 대북방송 폐지를 마치 대단한 업적인 양 내세웠어요.”
김 PD는 “김정일은 2000년 남북정상회담의 전제조건으로 대북 선전물을 보내지 말 것을 가장 먼저 요구했다”며 “그에 따라 2000년 4월 27일부터 모든 대북 선전물 발송이 중단되었다”고 말했다. “북한 주민들이 죗값을 물을 날이 올 것”
▲김한규 국군교육방송 PD(前 국군심리전단 작전계획장교).
대북방송과 선전물 발송 중단에 대해 탈북자들은 “북한 주민의 마지막 남은 희망조차 빼앗는 잔인한 짓”이라는 반응을 보였다. 1999년 탈북한 金聖玟(김성민) 자유북한방송 대표(탈북자 동지회장)은 “나 자신이 북한에서 군 생활 할 때 대북방송을 많이 들은 것이 탈북을 결심하는 데 큰 계기가 됐다”며 “외부 세계와 완전하게 고립된 북한 주민에게 삐라와 대북방송이 유일하게 외부 세계의 소식을 알려주는 수단”이라고 강조했다.
“지금의 북한은 10년 전과 많이 다릅니다. 주민들이 모여서 공공연히 김정일을 욕하고 정권을 비난합니다. 변화가 이렇게 심한 시기에 10년간 우리가 주도적으로 북한 주민의 의식화 교육을 했으면 자체 민주화 운동까지 일어날 수 있었다고 봅니다. 이런 중요한 시기에 김대중ㆍ노무현이란 사람이 나타나 북한 인민들에게 희망의 빛을 주기는커녕 좌절과 고통의 세월만 안겨주었습니다. 북한 주민들이 이 두 사람의 죗값을 물을 날이 올 것입니다.”
자유북한방송의 김금룡 국장은 3년 전 탈북한 후 한국에 왔다. 그는 북한군 간부로 있으면서 거의 매일 남한 라디오를 들었다고 말했다.
“부사관급 이상 군인들은 라디오를 쉽게 접할 수 있기 때문에 이들 대부분이 남한 방송을 듣습니다. 저도 야간 근무 때는 밤새도록 남한 방송을 들었어요. 저는 북한에서 부러울 것이 없는 軍(군) 간부였지만 매일 남한 방송을 듣다 보니 김정일 정권이 세상에서 하나밖에 없는 독재자라는 것과 자유가 무엇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김금룡 국장은 “남한의 대북방송에서 김정일 독재의 실상을 알려주고, 김정일을 가차없이 비판했기 때문에 일종의 대리만족감 같은 것을 느꼈다”고 말했다. 김금룡 국장은 대북방송의 중요성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북한 사람들은 이래도 죽고 저래도 죽는다며 희망을 잃은 지 오래입니다. 남한마저 자기들을 버렸다는 생각에 남한에 대한 적대감이 높아지고 있어요. 남한 사람들은 독재에 신음하는 북한 동포들을 절대로 버리지 않는다는 것을 끊임없이 알려야 합니다. 그러면 북한은 머지않아 내부에서 그냥 무너집니다. 戰時(전시)나 마찬가지인 분단국에서 심리전을 포기하는 경우도 있습니까?”
출처 | 월간조선 2008년 12월 이상흔
2016.02.13 남북 심리전 어떻게 변해 왔나
북한의 핵·미사일 도발로 남북관계가 꽁꽁 얼어붙었다. 개성공단 폐쇄까지 이어지면서 당분간 해법을 찾기 힘들 것이란 비관적 전망까지 나온다.
남북 심리전 어떻게 변해 왔나
평양의 입인 선전 매체들도 거칠어졌다. 11일 대남기구인 조국평화통일위원회는 정부의 공단 폐쇄 방침에 불만을 토로하며 박근혜 대통령을 맹비난했다.
정부는 개성공단 폐쇄 외에 비장의 무기로 맞대응하고 있다. 그중 하나가 대북 심리전이다.
사실 남북 간은 곳곳에서 심리전을 벌여 왔다. 남북 경협의 상징인 개성공단도 예외가 아니었다. 지난 2004년 12월 가동 직후 개성공단에선 화장지와 비누 등이 없어지는 일이 잦았다. 남측 물품의 질이 좋다는 입소문이 나면서 북한 근로자들이 하나둘 챙겨 갔기 때문이다.
처음 남한 기업주들은 이를 단속하려 했다. 하지만 정부는 “비용을 댈 테니 그냥 가져가게 놔두라”고 했다. 개성 주민들이 남한의 발전상을 스스로 깨닫는 게 더 유용하다는 심리전의 일종에서였다.
북한 근로자들에게 식사로 쌀밥에 고깃국을 제공하고 샤워를 할 수 있게 해준 것도 심리전 효과를 냈다. 한 입주기업 관계자는 “야윈 데다 위생 상태가 좋지 않던 북한 근로자들이 2~3개월 지나면 몰라보게 좋아지곤 했다”고 귀띔했다.
▲개성공단 북측 근로자들이 휴식 시간에 운동을 즐기는 모습. 개성공단은 큰 의미에서 북 주민을 대상으로 한 거대한 심리전 공간이기도 했다. [중앙포토]
공단 입주기업인에 따르면 북한 근로자가 “남한에 가서 이런 회사에서 계속 일했으면 좋겠다”고 속내를 털어놓기도 했다고 한다. 전단 한 장 대북 방송 한마디 없었지만 북한 주민을 변화시킬 수 있는 생생한 심리전의 현장이었다는 평가가 나오는 것도 이런 배경 때문이다.
북한 당국은 주민들이 남한 문물에 물들까 우려하다 고육지책(苦肉之策)을 쓰기도 했다. 간식으로 제공된 초코파이가 인기를 끌자 전전긍긍하다 공급 중단을 요청한 것이 대표적인 예다.
▶관련 기사 초코파이·통일냄비·73.87달러, '메이드 인 개성공단' 그동안…
하지만 본격적인 심리전은 역시 대북 확성기 방송을 통해 이뤄지고 있다. 대북 확성기의 위력은 지난해 8월 북한의 목함지뢰 도발로 고조된 긴장 국면에서 위력을 입증했다. 정부가 대북 확성기 방송을 재개하자 북한은 확성기 방송 중단에 사활을 걸었고, 결국 ‘8·25 합의’가 나왔다.
군 관계자는 “북한의 장거리 미사일 도발이 있은 7일 이후 최전방 지역에 이동식 확성기를 추가 배치했고 하루 6시간이던 대북 확성기 방송 시간도 확대했다”고 말했다.
반면 방송 출력이나 도달 거리에서 절대 열세인 북한은 대남 전단 살포에 치중하고 있다. 서울 도심까지 떨어진 것으로 확인됐지만 큰 위협이 되지 못하고 있다는 평가다.
심리전 수단에 확성기만 위력이 있는 게 아니다. 라디오나 대북전단 같은 고전적 방식도 여전히 먹히고 있다. 북한 사회의 폐쇄성이 크게 달라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대북 라디오 방송을 들어본 경험이 있는 탈북자들에 따르면 폐쇄적인 북한에서 외부 세계의 목소리로 전해지는 소식은 말 그대로 그들에게 ‘신세계’였다.
노동당 간부도 예외가 아니었다. “당 간부이던 남편이 몰래 대북 라디오를 듣길래 처음엔 ‘반동이구나’ 생각했다. 그런데 방송에 나온 탈북자들의 남한 정착 얘기를 접하고는 남편과의 동반 탈북을 결심했다”고 탈북자 이성순(가명)씨는 말했다.
사실 심리전을 먼저 시작한 쪽은 북한이었다. 1960년대 초반 체제 경쟁에서 우위를 점했다고 판단한 북한은 “사회주의 낙원으로 오라”고 확성기를 틀었으나 전세가 역전된 상태다.
▲설 다음날인 지난 9일 오두산전망대서 바라본 북한 초소. 앞에 대남확성기가 있다. 사진 강정현 기자
◆‘심야의 신세계’ 대북 라디오 방송 = 94년 사선을 넘어온 탈북자 김승철씨는 2007년 말부터 대북 라디오 방송 ‘북한개혁방송’을 시작했다. “라디오를 통해 외부 세계의 소식이 계속 전파되면 북한 내부에서 체제 변화의 에너지가 될 것”이라는 생각에서였다.
▲대북 방송 수신에 쓰인 라디오.
실제로 2002년 탈북한 박용현(가명)씨는 대북 라디오 방송을 듣고 남한행을 결심했다. 박씨는 “북한에서는 월남한 탈북자들이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 두메산골 등 최악의 환경에서 고생스럽게 산다고 선전하는데, 대북 라디오에 출연한 탈북자들이 남한에서 전기와 물을 펑펑 쓰고 있다고 하는 걸 듣고 충격을 받았다”고 말했다.
북한개혁방송의 설문조사에서 대북 라디오 방송의 효과를 엿볼 수 있다. 방송이 2008~2014년 탈북한 주민 150명을 상대로 지난해 말까지 벌인 ‘북한 주민 대북 라디오 청취 실태’ 보고서에 따르면 ‘북한에 있을 당시 매일 대북 라디오를 들었다’는 탈북자가 7%였다.
▶‘며칠에 한 번 들었다’ 6% ▶‘일주일에 한 번 들었다’ 7% ▶‘한 달에 두세 번 들었다’ 22%였다. 적어도 한 달에 한 번 이상 라디오를 청취한 경험이 있는 응답자가 42%로 절반에 가까웠다. ‘대북 라디오를 들은 적 없다’는 탈북자는 2%에 불과했다.
▲가장 청취율이 높은 시간은 밤 12시부터 새벽 2시까지였다. 가장 많이 들었던 프로그램은 ▶뉴스(24%) ▶노래(22%) ▶탈북자 소식(18%) ▶연속극(14%) ▶시사해설(9%)의 순이었다. 2002년 탈북한 이성순(가명)씨는 “북한은 외부 사상 유입 통제를 이유로 라디오를 못 듣게 해서 심야에 이불을 뒤집어쓰고 몰래 듣는 주민이 많다”고 전했다.
◆ 심리전의 '고전' 대북 전단 = 2010년 탈북한 안주연(가명)씨는 휴전선 일대에서 인민군으로 근무했던 오빠를 통해 ‘10분이면 월남이 충분합니다’고 적힌 대북 전단을 본 경험이 있다. 안씨는 “남한에서 날려 보내는 대북 전단은 ‘고난의 행군’ 등으로 지친 북한 주민들에게 한 가닥 삶의 등불이자 한국 사회에 대한 동경의 대상이 됐다”고 말했다.
80년대 남측에서 날려 보낸 한 대북 전단에는 여배우 강수연씨 사진과 함께 ‘강수연이 영화 한 편에 출연해서 받는 돈은 한 달에 80원 받는 북한 근로자 3300명이 받는 월급과 맞먹는 엄청난 돈이다’는 내용 등이 적혀 있었다고 한다.
2000년대 이후로는 대북 전단과 함께 치약이나 칫솔, 화장지, 스타킹, 스카프 등 생활필수품을 보내는 경우도 잦아졌다.
대북 전단에 대한 북한 당국의 대응 수위도 갈수록 높아졌다. 그만큼 위협을 느끼고 있다는 뜻이다. 60년대까지만 해도 북한은 남측이 살포한 전단은 허위라고 교육하면서 “보지 말고 찢어 버리라”고 지시했다.
70년대에는 “습득 시 보위부에 신고하라”고 다소 수위를 올렸다. 80년대 이후에는 “전단 발견 시 아예 보거나 줍지도 말고 즉각 안전부나 보위부에 신고하라”고 주민들에게 교육시켰다고 한다.
◆ 신형 심리전 무기 ‘스텔스 USB’= 최근엔 생활필수품이나 USB(컴퓨터 저장 매체) 살포에 이르기까지 갈수록 심리전 수단이 다양화·고도화되고 있다.
지난해 8월 자유북한운동연합 박상학 대표는 대북 전단 20만 장과 함께 북한 김정은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을 암살하는 내용을 다룬 코미디 영화 ‘더 인터뷰’가 담긴 USB 500개를 대형 풍선에 담아 북쪽으로 날려 보냈다.
북한에 보내는 USB는 겉으로 보기엔 저장 파일이 없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파일이 들어 있어 ‘스텔스(잠행) USB’라고도 불린다. 민간단체인 ‘자유북한방송’은 “지난해 6월 신의주 등 북·중 국경지역에 빨간색으로 된 남한 USB가 곳곳에서 발견돼 북한 당국에 비상이 걸린 적도 있다”고 전했다.
▲한 민간단체가 대북 전단을 실은 풍선을 북쪽을 향해 날리는 모습, 남한 대중가요나 영화 등 파일을 담은 USB(컴퓨터 저장 매체).
북한 당국에 회수된 USB엔 충무공 이순신 장군을 소재로 한 영화 ‘명량’과 김정은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 일가에 대한 내용, 남한의 발전상 등이 상세히 담겨 있었다고 한다.
탈북자 이성엽(가명)씨는 “우상화에만 주력하는 북한 방송은 재미가 없는데 한국 영화는 소재가 다양하고 만화처럼 재미있어 방법만 있으면 보게 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S BOX] 개성공단 북 근로자 채용 때 사상 검증 필수였다
▲개성공단이 2013년 4월 3일 북한의 일방적인 통행 제한 조치로 가동 중단된지 160여 일 만에 재가동된 뒤 북한 개성시 봉동리 개성공단 J&J에서 근로자들이 제품을 생산하는 모습. [사진 중앙포토]
‘개성공단 셧다운’으로 일자리를 잃게 된 공단 내 북한 근로자는 5만4763명(지난해 11월 말 기준)이다.
12일 정부 관계자에 따르면 북한 당국은 그동안 엄격한 선발 과정을 거쳐 공단 근로자를 뽑았다. 업무상 한국인과의 접촉이 잦을 수밖에 없어 사전 사상검증은 필수였다. 이런 과정을 거쳐 공단 근로자로 최종 선발되면 ‘로또’에 당첨된 듯 기뻐하는 주민이 많았다.
북한 근로자에게는 1명당 월급으로 약 130달러가 지급됐다. 미국의 마커스 놀런드 피터슨국제경제연구소(PIIE) 부소장은 2014년 3월 한 보고서에서 “북한 당국이 월급 130달러 중 약 40%를 사회보장, 출퇴근 혜택 등 명목으로 떼어 가고, 나머지는 북한 화폐로 지급하는데 환율을 제멋대로 부풀려 실제 근로자들이 손에 쥐는 임금은 2달러 가치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우리 정부와 국책연구기관은 북한 당국은 130달러 중 50달러 정도를 떼고, 나머지 80달러 정도를 북한의 공식 환율인 달러당 약 100원으로 계산해 8000원 정도를 주민들에게 지급한 것으로 분석하고 있다.
북한개혁방송 김승철 대표는 “일부 북한 근로자들은 공단 내 제품이나 원자재 등을 빼돌려 밀거래 시장에서 몰래 팔기도 했다”며 “그런 ‘부업’까지 이제 없어졌으니 근로자들의 불만이 커질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김형구 기자 kim.hyounggu@joongang.co.kr
2016.04.18 변하는 북한, 심리전으로 변화를 이끌어낼 중요한 시기
▲북한의 4차 핵실험에 대한 대응 조치로 정부가 대북 확성기 방송을 재개하기로 한 2016년 1월 8일 경기도 파주시 접경지역의 북한군 초병들이 초소를 나와 남쪽을 예의 주시하고 있다. /조선DB
우리 군(軍)이 북한의 도발이 계속되고 있는 것에 적극 대응, 비용 대비 효과가 높은 심리전을 강화함으로써 김정은 체제에 타격을 가하겠다는 전략아래 확성기 40대를 추가 도입키로 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지난 1월 8일 휴전선지역에서 대북 확성기 방송을 재개한 이후 3달 넘게 확성기 방송을 실시하고 있는 시점에서 취해진 이번 조치는 도발을 일삼는 북한을 더욱 압박하고 휴전선일대의 북한 군인들과 주민들에게 진실을 알리는데 일조할 것임이 분명하다.
북한체제에 균열의 골이 서서히 깊어가고 있는 오늘의 현황에서 대북 방송만큼 확실한 심리전 수단은 없으며, 북한주민의 의식 변화를 위해, 통일을 앞당기기 위해서라도 대북심리전의 확대는 필수이다.
그러면 대북심리전수단의 확대가 왜 필요할까. 북한군 출신 탈북민들을 만나 1990년대 휴전선일대에서 근무할 당시 대북확성기 방송을 들은 경험이 있었냐고 물어보면 두 부류의 엇갈린 대답이 나온다.
첫번째 부류는 남한이 하는 대북방송과 북한이 하는 방해 방송이 뒤섞여 무슨 소린지 잘 알아듣지 못했다는 쪽이고, 다른 한 부류는 대북확성기 방송이 있어 야간 잠복근무를 설 때 심심치 않았다고 쪽이다. 다시 말해 야간 잠복근무를 서면서 대북방송을 귀담아 들었다는 이야기다.
그런데 그때까지만 해도 북한체제가 안정되어 있었고 한류도 들어가지 않았을 때이므로 대북확성기 방송의 실효가 그리 높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 북한의 상황은 그때와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2000년대 초부터 북한에 한류열풍이 불면서 그 바람을 타고 한국의 드라마와 영화가 들어가기 시작했다. 그 시기 고리타분하기 그지없는 북한의 이데올로기적 성향의 영화에 권태감을 느끼면서, 북한 영화와는 조금 색다른 소련을 비롯한 동유럽사회주의나라 영화에 올인 하던 북한 주민들이였다.
이들이 자유 분망하고 개성이 뚜렷하며, 남녀의 러브스토리를 비롯한 인간생활의 진면이 두텁게 깔린 한국의 드라마와 영화를 보고 감탄했고, 열광하기 시작했다. 북한의 성인치고 그 당시 폭발적인 인기와 함께 유행되던 한국 드라마 ‘가을동화’나 ‘겨울연가’를 보지 못한 사람이 아마 없을 것이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절대로 넘볼 수 없었던 금단 지역의 드라마를 보면서 북한주민들은 노동당으로부터 교육받았고, 그리하여 자신들이 알고 있었고, 지금도 세뇌당하고 있는 한국에 대한 모든 것들이 사실과 다름을 분명히 느꼈다.
수십 년 동안 지속되어온 거짓선전의 실체를 누가 배워주지도, 가르쳐주지도 않았으나 너무도 짧은 순간에 스스로 깨달아버린 것이다.
북한주민들은 한류를 통해 자기들이 살고 있는 곳과 잇닿아 있는 남조선이 발전하였고 잘 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금단의 땅, 남조선을 동경하게 되었다. 이 과정에 이들이 통상적으로 부르는 명칭도 남조선으로부터 한국으로 바뀌게 된다.
일반주민들도 그러하지만 특히 청년들의 한국에 대한 열망과 갈망은 이미 허용한계를 벗어난 지 오래다. 젊은 청년들치고 한국의 드라마 여러 편을 보고, 노래 수십 곡을 부르지 않은 사람이 없으며 유명연예인과 가수들의 이름도 알고 있는 정도이다.
이외에도 패션, 화장품, 식품 등 한류의 영향은 언어제한이 없고 문화나 풍습의 뿌리가 같은 북한이, 세계의 그 어느 지역보다 더 빨리, 더 깊숙이, 그리고 조용히 스며들었다.
한류의 영향은 군에도 산재해 있는바 현재 휴전선일대에서 근무하고 있는 군인들도 군에 나오기 전 한국의 영화나 드라마, 가요와 K팝을 몇 번 이상 다 접해본 사람들이다.
또한 철저히 경계하고 차단해야 할 “자본주의 사상문화적 침투”라고 북한이 표현하는 한류를 어릴 때부터 접하고, 시장경제원리가 적용되는 장마당을 알며 성장해온 군인들이다.
이들이 휴전선에서 잠복근무를 서다가 대북확성기에서 자기가 아는 노래, 입대전 자기가 즐겨 불렀던 노래, 자기가 좋아하는 가수의 노래가 나온다면 얼마나 좋아할까. 소리 내어 부를 수 만 있다면 큰소리로 따라 부를 것이다.
북한군은 국가로부터의 지원이 끊긴지 오래며 식량을 제외한 식용유와 군복, 내복 등 필수품을 자체로 조달하고 있다.
의식주면에서 식량, 에너지부족으로 인한 만성적인 피로와 무기력함, 지어 영양실조가 일상에 스며들어 있다. 장비와 물자보급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군복도 집에서 사서 보내는 경우도 다반사이며 배고픔을 달랠 길 없어 자기에게 차려진 군복을 비롯한 생필품을 시장에 되파는 현상도 보편화되고 있다.
군인들은 먹을 것과 입을 것도 제대로 입지 못하고 만성적인 피로와 배고픔에 시달리며 11년(132개월)이라는 세계최장의 군 생활을 하고 있다. 한마디로 장기간의 총체적인 부족현상 속에서 생활하고 있다.
이런 이유로 훈련에 대한 열의는 매우 부족하며, 지난시기 볼 수 있었던 군인들의 전투의지는 이미 물건너간지 오래다. 이 모든 것은 부대의 군기와 군 기강으로 직결되어 오늘 북한군의 정신상태는 매우 저하되어있다.
한마디로 10여 년 전에 휴전선에서 근무하던 북한 군인들과 지금 현재 휴전선에서 근무하는 군인들의 사상, 정신, 가치관의 차별화는 상상이상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오늘의 현황에서 대북심리전의 확대는 북한 주민들과 군인들에게 외부정보와 진실을 알려 그들의 동요와 이탈 가능성을 더 높일 것이며, 더 나아가 북한의 아래로부터의 변화에 기여할 것이다.
실지 북한의 많은 면에서 나타나고 있는 변화가 비록 정치적인, 제도적인 변화는 아니지만, 분명한 것은 이러한 변화들이 아래로부터의 변화이며, 주민들, 특히 젊은 청년들의 의식변화가 충분히 감지되고 있다.
더욱이 해외 북한 식당 종업원 13명의 집단 귀순에 이어 외교관 가족과 군 장교 등의 탈북 사실이 잇따라 전해지는 등 북한 체제의 균열 가능성이 높아지는 상황에서 대북확성기 방송을 비롯한 다양한 대북심리전을 과감히 늘이는 것은 이미 시작된 변화의 움직임을 확산시키기 위한 핵심수단이라고 생각한다.
지금이 바로 대북확성기 방송과 대북전단, 탈북민 북한인권운동가들이 진행하는 민간 대북방송을 비롯한 다양한 수단들을 동원하여 주민들과 군인들의 의식을 변화시키고 북한의 변화를 이끌어낼 중요한 시기이다.
글 | 백유민 자유북한방송 기자
■대북방송
2016.02.02 "동무들, 소대장 차리혁입니다" [오늘의 대북방송
소중했던 소대원들에게
동무들 안녕하십니까. 한때 동무들과 함께 군복을 입고 생사고락을 같이 했던 2342군부대 지휘소대장 차리혁입니다. 부소대장 함영광, 2분대장 이경철, 소대의 막내 조국철... 동무들과 함께 보낸 날들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5년이란 세월이 흘렀습니다.
부소대장은 이젠 제대돼서 사회(민간인)사람이 됐을 것이고 막내는 아직 군복무를 하면서 힘든 나날을 보내고 있겠구나~생각하니 가슴이 답답하고, 한편으론 미안한 마음도 없지 않습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씀 드리면 저는 지금 남조선에 와 있습니다. 대한민국 서울의 한 아파트에서 이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놀랄 걸 알지만...또 부소대장이랑, 2분대장이랑, 소대의 막둥이 국철이에게 이 편지가 가 닿을 수 없다는 것도 알고 있지만, 북조선인민들이 들을 수 있는 대북방송이라는 게 있다기에 혹시나 하는 마음에 마음으로부터의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나는 항상 동무들에게 어떤 역경 속에서도 우리는, 장군님의 전사라는 긍지를 가져야 한다고 말해왔습니다. 훈련 철이 되면 혹한의 추위 속에서도 ‘나를 따라 돌격 앞으로!’를 외쳤고 우리의 뒤에는, 우리가 지켜야할 조국이 있다고 입버릇처럼 말해왔습니다.
동무들도 기억하겠지만 나의 좌우명은 영원한 군인이었고 ‘군인에게 규율은 생명’이란 말도 늘 입에 달고 살았더랬습니다. 물론 어려움도 있었고 배고픔도 있었지만 동지들과 함께 했던 날들은 너무도 소중한 시절이었고 그 시절 우리는 조국을 지키는 군인의 자세에 대해 늘 격조높이 이야기 해 왔습니다.
그랬던 제가, 왜 지금 남조선에서 생활하고 있는지를 한 두 장의 편지로는 다 설명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오늘의 첫 편지를 통해 내가 무엇 때문에 고향을 등지고 대한민국으로 왔는지에 대해서만큼은 꼭 설명을 드려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동무들도 아다 시피 나의 제대는 나 개인과 무관한 연좌제 때문이었지만, 나는 이를 무겁게 받아들였습니다. 그리고, 나를 반겨줄 아무도 없는 고향이지만 인생을 새롭게 시작한다는 마음으로 그 땅을 밟았습니다.
하지만 그곳은 땅도 사람도 황폐할 대로 황폐해진, 법도 윤리도 모두 망가진 정말이지 생지옥 같은 세상으로 변모되어 있었습니다. 제대배낭을 풀어놓을 집도 없었고, 당장 주머니에 일전 한 푼도 없어 굶주림조차 면하기 어려웠습니다.
저도 하전사(사병)때 배고픔을 경험해본 적이 있지만, 하루 이틀도 아니고 삶 전체가 굶주림과 연계되어 있다는 건 정말 겪어본 사람이 아니고서는 알 수가 없는, 상상조차 하기 싫은 두려움의 나락이었습니다.
저 뿐이 아니었습니다. 2군단 6사단에서 부중대장으로 일하다가 제대되었다는 한 친구는 굶주림을 견디다 못해 시장 통 한구석에서 꽃제비들과 어울렸고 4군단의 또 다른 제대군관은 모질고 약아빠진 사회생활을 견디다 못해 끝내 목숨을 끊기까지 했더랬습니다.
이렇게 참담한 현실을 눈으로 보면서도 나만큼은 신념을 갖고 살자, 지금은 삶이 어렵고 힘들지만, 머지않아 이 땅에 강성대국의 시대가 올 것이며 조국이 어려움을 극복하면 인민들의 삶은 반듯이 낳아지게 될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습니다.
그렇게 희망을 잃지 않고 남들과 함께 부대기 농사도 지어보았고, 산에 올라 약초를 가꾸고 잣 이삭을 주우며 스스로의 마음을 달래기도 해 보았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잣 이삭을 주어가지고 산에서 내려오던 나는 산골짝에서 마을 처녀와 히히덕거리던 젊은 보안원과 마주치게 되었고 산에서 주은 잣을 모두 내 놓으라는 보안원의 요구에 거칠게 항의했더랬습니다.
그 순간, 어디서 나타났는지 또 다른 보안원이 가세했고 저들의 폭행에 맞섰던 나는 ‘민간인 반란자’가되어 차디찬 감방에 처박히게 됐습니다. 차라리 집 없고 먹을 것 없이 떠도는 신세보다 감옥이 더 낫다고 생각되던 그 순간, 불쑥 먼먼 하전사(사병)시절에 들었던 남조선 방송이 떠올랐습니다.
“인민군 장병들이여, 당신들은 지금 무엇을 지켜 청춘을 불사르고 있는가?!” “10년동안 당신들이 겪어야 할 고통의 무계를 생각이나 해 보았는가?”
온종일 귓가엔 그 시절 방송으로 듣던 남조선이야기며 노랫가락이 스멀거렸고 “넘어오라, 넘어오라, 넘어오라...새 삶을 찾아 남조선으로 넘어오라”고 누군가가 귓전에 속삭이는 것 같았습니다.
그렇게 저는 대한민국에 왔고 이곳에 와서 남조선 군인들도 자주 만난다만, 그리 굶주린다던 남조선 군인들의 식사량과 반찬거리는 인민군 련대장과 사단장도 울고 갈 형국이고, 복장 또한 하전사(사병)들에게도 군화가 공급되는 등 마냥 부럽기만 한 형편입니다.
저도 한국에 온지 얼마 안됐지만 차도 있고 정부로부터 배정받은 집도 있어 행복한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가 영화에서나 보던 냉장고도 갖추어 놓고 신선한 과일이며 동화에 나오던 ‘겨울딸기’도 때 없이 꺼내먹곤 합니다. 그래서 더 미안하고, 이 행복을 나의 옛 대원들과 나누면 얼마나 좋을까 하면서 항상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 소대장이던 시절 내가 여러분들에게 남겼던 층성스런 이야기들을 모두 지워버리라고 명하고 싶습니다. 우리의 최고사령관이었던 김정일은 우리를 기만했습니다. 김정은도 역시 여러분들을 기만할 것입니다. 우리들의 고향엔, 그리고 우리들의 공화국엔 미래가 없습니다.
‘혁명적 군인정신’이 우리의 지도부가 우리들에게 내린 충성경쟁의 명령이었다면, ‘강성대국의 꿈’은 헛되고 또 헛된 우리들 지도부의 감언리설입니다.
인생의 반을 더 살고 나서야 그 헛된 망상에서 깨어난 소대장 차리혁이 당부합니다. 오늘밤 기회가 된다면 자유롭고 풍요로운 대한민국으로 오십시오. 아니라면, 오늘 이 시각부터 스스로의 행복을 찾아 독재정권에 항거하십시오.
그것이 우리가 서로 만나는 길이고, 자유롭고 부강한 우리조국의 통일이 앞당겨 지는 길이라는 것을 말씀 드리며 오늘 편지는 여기서 마치겠습니다. 다음에 또 기회가 되면 저의 탈북경로며 남조선에서의 첫 삶을 이야기하려고 합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2016년 2월 옛 소대장 차리혁 부터.
2016-04-15 방통위는 무슨 이유로 對北방송 가로막나
북한 체제에 균열 조짐이 서서히 나타나고 있다. 정찰총국 간부를 비롯한 엘리트층 귀순과 해외 외화벌이 일꾼의 집단 이탈은 김정은이 직면한 심상찮은 도전의 일면을 보여주는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이를 김정은 체제의 근간을 흔드는 조짐으로 보고 환호하는 건 시기상조다. 지금은 북한에서 꿈틀대는 변화의 기운을 확산시켜 나갈 치밀한 전략을 펼쳐야 할 때다.
대북정책의 최우선 목표는 북한의 비핵화이고, 궁극적 목표는 통일이다. 비핵화 없이는 통일도 어렵다. 그런데 비핵화든 통일이든 북한의 긍정적 변화 없이는 실현 불가능하다. 경제 제재가 북한 지도부의 인식과 전략적 손익구조를 바꾸어 비핵화 결단을 내리게 만들 압박 수단이라면, 북한 주민의 의식을 바꿔낼 핵심 수단은 보다 많은 외부 정보에 접하게 해주는 것이다. 그 외부 정보를 전하는 가장 효과적 방법이 바로 대북 방송이다.
값싼 중국산 라디오를 장마당에서 쉽게 구할 수 있고 TV 수신기가 널리 보급된 오늘날, 방송만큼 파급력이 큰 정보 유입 수단은 없다. 전단 살포와 전방 확성기 방송 같은 원시적 수단과는 차원이 다르다. 문제는 대북 방송을 가로막는 국내법과 제도, 정치세력에 있다. 지상파 방송의 인허가, 주파수 할당부터 출력 향상까지 모든 단계에서 방송통신위원회의 승인이 필요하다.
방송법 제6조는 ‘방송은 국민의 알 권리와 표현의 자유를 보호, 신장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방통위에는 북한 주민의 알 권리를 보호하고 신장하는 데 거부감을 가진 위원들이 버티고 있다. 이들의 참여를 보장하는 현행 방통위 제도가 존속하는 한 대북 방송을 신설하거나 강화하는 것은 북한인권법의 국회 통과만큼이나 어렵다. 방통위 실무 관료들도 정권이 바뀌면 불이익이라도 받을까 봐 대북 방송에 몸을 사리기 마련이다.
북한 주민들이 들을 수 없던 시절에도 꾸준히 해오던 대북 방송은 공교롭게도 가청 인구가 폭발적으로 늘어나기 시작한 2000년대 들어 남북 화해의 제물이 되고 말았다. 대북 방송의 위력에 공포를 느낀 북한 당국의 끈질긴 요구를 못 이겨 2004년 6월 4일 남북 장성급회담에서 상호 비방 중단을 규정한 ‘6·4합의’(‘서해 해상에서 우발적 충돌 방지와 군사분계선 지역에서의 선전활동 중지 및 선전수단 제거에 관한 합의서’)가 타결되면서 대북 방송은 사실상 중단됐다. 정보기관이나 군에서 운영하는 심리전 방송도 북한을 자극할 내용의 편성을 자제하기 시작했다.
국내에서의 대북 방송 송출이 불가능해지자 탈북자와 북한 민주화 운동가가 중심이 된 민간단체가 우즈베키스탄 타지키스탄 등 중앙아시아에서 단파 전파를 임차해 하루 한두 시간씩 대북 방송의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2010년 북한의 천안함 폭침으로 ‘6·4합의’가 폐기됨에 따라 이명박 정부는 대북 방송을 재개하려 백방으로 노력했으나 방통위 문턱을 넘지 못했다. 심지어 ‘미국의소리(VOA)’와 ‘자유아시아방송(RFA)’이 극동방송 주파수를 빌려 송출하는 대북 방송을 북한 주민에게 더 잘 들리도록 송신탑을 옮기고 출력을 높이는 것조차 방통위 반대로 좌절된 적도 있다.
북한 사회 아래로부터의 변화 압력을 키우고 통일의 여건을 조성하기 위해선 대북 방송과 심리전 역량을 획기적으로 강화하는 것이 시급하다. 북한 주민이 마음만 먹으면 취향에 따라 다양한 대북 방송을 들을 수 있고 TV 지상파 채널에서 남한의 인기 프로를 골라 볼 수 있도록 정보 접근권을 보장할 방법을 강구해야 한다. KBS 한민족방송을 대북 방송으로 전환하고, 사용하지 않는 AM 주파수를 활용하는 것부터 시작해 방해 전파를 제압할 다양한 고출력 주파수를 대북 방송에 할당해야 한다. 민간 대북 방송 단체에 대한 재정 지원에도 인색하지 말아야 할 일이다. 방통위가 북한 주민의 알 권리를 신장하는 데 걸림돌이 된다면 관련 법을 개정해서라도 가능한 방도를 찾아야 한다.
군과 정보기관에서 운영하는 대북 심리전도 조직과 예산을 대폭 보강해야 한다. 대북 심리전 부서가 엘리트들이 기피하는 조직이 되는 현실을 방치해선 안 된다. 공무원과 군인의 제한된 지적 자원과 공급자 중심의 사고로는 최고의 콘텐츠 제작을 기대하기 어려우므로 민간 전문가에게 위탁하거나 활용하는 대책도 필요하다. 북한 지도부의 전략적 계산 공식을 바꿀 빈틈없는 제재와 병행해 ‘북한 주민의 의식화’에 집중적으로 투자할 때가 왔다.
천영우 객원논설위원 한반도미래포럼 이사장 아산정책연구원 고문
2016-07-22 알보르센 대표 “北에 드론 날려 한국드라마 담은 USB 살포”
▲인권재단(HRF)’의 토르 알보르센 대표는 20일 본보와의 단독 인터뷰에서 “드라마 등 외부 정보를 담은 휴대용저장장치(USB메모리)가 북한에 자유를 가져다 줄 것”이라고 말했다. 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한 방울씩 떨어지는 물도 언젠가는 컵을 가득 채우고 밖으로 넘칩니다. 북한에 외부 정보를 주입하는 노력이 계속 이어진다면 폐쇄된 북한 체제도 변화되는 분기점을 맞을 겁니다.”
미국 뉴욕에 본부를 둔 비영리단체인 ‘인권재단(HRF)’ 토르 알보르센 대표(40)는 20일 동아일보와의 단독 인터뷰에서 “외부 정보를 담은 휴대용 저장장치(USB메모리)가 북한에 자유를 가져다줄 것”이라고 말했다.
알보르센 대표는 2년 전부터 올해 5월까지 드론을 이용해 최고 존엄 모독이라며 북한이 강하게 반발한 할리우드 영화 ‘인터뷰’와 한국 드라마, 위키피디아 등을 담은 USB메모리 1000여 개를 북한 땅에 뿌렸다. 첨단 과학기술의 산물인 드론은 목표한 지점에 정확히 USB메모리를 살포하고 다시 돌아오기 때문에 흔적도 남지 않는다.
알보르센 대표가 한국을 방문한 건 탈북단체들과 드론의 활용도를 더욱 높일 수 있는 방안을 논의하기 위해서다. 그는 “지금까지 제3국에서 드론을 날렸다”며 “한국은 군사분계선(MDL)의 통제가 엄격하기 때문에 드론을 날릴 수 없었다”고 했다.
알보르센 대표가 말하는 제3국은 중국이었다. 그는 어떻게 중국에서 드론을 날릴 수 있었을까. 그는 “함께 활동하는 탈북단체가 대신해 주고 있다”며 “드론의 정확한 기술적 제원과 날리는 위치, 낙하지점 등은 보안상 말할 수 없다”고 답했다. 이와 관련해 한 탈북단체 대표는 “현재 중국에서 무게 2kg 정도의 물체를 매달고 20km 정도 날아갔다 돌아오는 드론이 600만 원 정도에 거래된다”고 전했다. 알보르센 대표는 드론과 USB메모리 구입 비용을 지원하고 있다.
알보르센 대표는 베네수엘라 출신이다. 그는 “북한 체제 수호의 첨병인 국가안전보위부가 베네수엘라 남성이 북한을 비판하는 자료를 뿌릴 것이라고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했다. 그는 2000년 우연한 기회에 요덕수용소 출신인 강철환 씨가 쓴 ‘평양의 어항’이란 책을 읽게 됐다. 그때 ‘북한을 변화시키는 일’을 필생의 과제로 받아들였다고 한다.
“북한 인권이 열악하다는 이야기는 13세 때 아버지에게서 처음 들었습니다. ‘피델 카스트로가 통치하는 쿠바보다 더 열악하다’고 말이죠. 직접 탈북자들을 만나 들어본 북한 인권의 열악함은 상상을 초월했습니다.”
알보르센 대표는 개인적인 아픔도 갖고 있다. 13세 때 어머니가 반정부 시위에 나섰다가 총에 맞아 쓰러지는 모습을 목격한 것이다. 그러나 당시 베네수엘라엔 어느 인권단체도 도움을 주지 않았다고 한다. 이후 그는 영국과 미국에서 역사학을 전공하며 공산주의 이념을 공부했고 2005년 직접 인권단체를 만들었다. 현재 HRF는 뉴욕 본부와 3개의 지역 지부를 두고 20명의 직원이 일하고 있다.
알보르센 대표는 “지구상에서 가장 억압적인 삶을 사는 북한 주민의 인권 개선에 개인적으로 제일 많은 시간을 투자하며 단체 예산의 10%를 사용하고 있다”고 했다. 지난해 단체 예산이 350만 달러(약 40억 원) 정도였으니 드론 프로젝트 등에만 4억 원 정도를 사용한 셈이다. 그는 “앞으로도 지속적으로 드론 프로젝트를 이어갈 것”이라며 “한국 정부와 국민들도 북한 체제를 변화시키는 데 많은 관심을 가져달라”고 당부했다.◎
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