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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재윤의 슬픈 중국7] <61회> 권력에 걸림돌이 되면...옛 동지도 반역자일 뿐 - <70회> 정치·행정·군사 3권 장악한 서열 1위 빅브라더의 죽음

상림은내고향 2021. 8. 20. 18:54

[송재윤의 슬픈 중국6] 조선일보 캐나다 맥매스터대 교수

2021.06.12

<61회> 권력에 걸림돌이 되면...옛 동지도 반역자일 뿐

<문화혁명 초기 중공중앙의 서열 1위부터 4위까지: (왼쪽부터) 마오쩌둥, 린뱌오, 저우언라이, 천보다/ 공공부문>

 

제갈량(諸葛亮, 181-234)은 눈물을 흘리며 아끼던 장수 마속(馬謖, 190-228)을 처형했다. 어리석게도 산 위에 진을 쳤다가 위(魏)나라 군대에 포위되어 휘하의 병사들을 죽음으로 내몬 군사적 패착의 책임을 엄중히 물었던 것. 이후 읍참마속(泣斬馬謖)의 고사는 사사로운 정에 얽매이지 않는 공정한 법 집행의 의미로 널리 사용되어 왔다.

 

제갈량은 법과 원칙을 세우기 위해 마속을 처형했지만, 마오쩌둥은 혁명의 미명 아래 권력을 놓지 않기 위해 동지들을 차례로 제거했다. 1969년 11월 독방에 감금된 류샤오치(劉少奇, 1898-1969)가 의료 방치로 쓰러진 후, 채 한 해를 못 넘겨 마오쩌둥은 천보다(陳伯達, 1904-1989)에 정치적 사형선고를 내렸다. 그 이듬해엔 린뱌오(林彪, 1907-1971)를 대역 죄인으로 몰아 파멸시켰다.

 

읍참마속과는 정반대의 정치 행위였다. 그 행위를 뭐라 부를 수 있을까? “모훼소기(謨毁少奇, 모략으로 류샤오치를 제거함)” “돌파백달(突罷伯達, 돌연히 천보다를 파면함)” “조폭임표(嘲爆林彪, 조소하며 린뱌오를 폭격함)”는 어떨까. 신조어들이지만, 음모를 짜서 아랫사람을 제거하는 비정한 보스를 질타할 때 유용할 듯하다. 마오는 아랫사람을 처단할 때 제갈량처럼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 스스로 배신자와 반역자를 단죄한다고 선언했기 때문이었다. 31년간 마오쩌둥을 섬겼던 천보다의 비참한 몰락이 그의 비정(非情)함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혁명 사상 집필자 천보다의 몰락

1930년대 말 연안 시절부터 천보다는 등 뒤에서 마오쩌둥의 연설문, 지시문, 논설 문장 등을 집필하는 유령작가로 암약했다.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성립 이후 천보다는 스탈린 탄생 70주년을 경축하는 “스탈린과 중국혁명”(1949)을 발표했다. 마침 마오쩌둥이 스탈린의 고희 축하연에 초대되어 공산권 지도자의 한 명으로 난생 처음 모스크바을 방문할 즈음이었다. 대원수를 접견해야 하는 마오쩌둥을 위해 천보다는 미리 스탈린에 아첨하는 사전 포석을 깔아놓는 기지를 발휘했다. 2년 후, 천보다는 마오쩌둥 사상을 정립하는 두 권의 책 <<마오쩌둥사상을 논함>>(1951)과 <<마오쩌둥, 중국혁명을 논하다>>(1951)를 발표했다. 이로써 천보다는 자타공인 “마오쩌둥 사상”의 최고 전달자가 됐다.

 

1950년대 초부터 중공중앙의 굵직한 정책이 입안될 때마다 천보다는 정부의 공식 입장을 정돈해서 문서화했다. 그는 중국공산당 “공동 강령”의 초안을 작성했고, 헌법 초안도 집필했다. 1950년대 마오쩌둥이 가장 심혈을 기울였던 “농업 합작사” 관련 결의안들도 천보다의 작품이었다. 대약진운동(1958-1962) 당시 “농촌인민공사조례 9장 60조”의 모든 항목을 천보다가 직접 작성했다.

 

마오쩌둥이 “인민공사, 좋다!”고 하면, 천보다는 식당, 양식, 공급제 등등 모든 문제들을 꼼꼼히 점검해 인민공사의 구체적 청사진을 짰다. 마오쩌둥도 인민공사의 발명권은 천보다에 있다고 말했을 정도였다. <<마오쩌둥 선집>>을 포함해 마오쩌둥 명의의 대다수 저서들은 천보다의 손길을 통해서 정리되었다. 1958년부터 격주로 발행된 중공중앙 최고의 기관지 <<홍기>>의 편집장이 바로 천보다였다. 문혁 직전 사청운동(四淸運動, 1963-1965)의 밑그림 “사회주의 교육운동 23조”도 천보다가 작성했다. 문혁 초기 중공중앙의 기본강령 “5.16 통지”도 천보다가 정리했다. 문혁 초기 <<홍기>>지의 모든 사론(社論)들 역시 천보다의 지시 하에서 작성되고 출판됐다.

 

<문혁 초기 중앙문혁소조의 영도자들: 왼쪽부터 장칭(江靑), 천보다(陳伯達), 캉성(康生), 장춘차오(張春橋). 마오쩌둥은 1966년 천보다를 중앙문혁소조의 조장으로 임명했다./ 공공부문>

 

31년 간 천보다는 마오쩌둥만을 위해, 마오쩌둥의 의도에 따라, 마오쩌둥의 명의를 빌어, “마오쩌둥 사상”을 짜고, 급기야 마오쩌둥을 인격숭배의 대상으로 만든 마오쩌둥의 브레인(brain)이었다. 천보다를 영혼 없는 꼭두각시라 볼 수만은 없다. 인간의 관계는 상호적이다. 마오쩌둥이 천보다를 이론가로 썼던 만큼, 천보다는 마오쩌둥에 영향을 끼치고, 또 그를 이용했다 볼 수 있다. 문혁 시절 마오는 천보다를 중앙문혁소조의 조장에 임명했다. 중공중앙에서 그의 서열은 마오쩌둥, 린뱌오, 저우언라이 다음으로 제4위까지 올랐다. 그의 지위는 마오의 부인 장칭과 마오의 정보통 캉성보다 높았다.

 

사마천(司馬遷, 대략 기원전 145- 미상)이 그린 이사는 진시황을 지배하는 법가혁명의 주동자다. 어쩌면 천보다 역시 마오쩌둥을 만든 중국 공산혁명의 주동자라 볼 여지도 있다. 그러나 천보다의 역할은 이사에 못 미쳤다. 이사는 진시황의 최후까지 막후에서 최대의 권력을 휘둘렀지만, 천보다는 문혁의 절정에서 마오쩌둥에 버림을 받았기 때문이다. 1970년 중공 9기 2차 전회에서 천보다는 권력을 잃고, 곧 인신의 자유를 박탈당했다.

 

마오 “천보다, 요설과 궤변으로 동지들을 기만했다”

천보다의 정치적 파멸은 이른바 “천재 논쟁”과 “국가주석 논쟁” 등 두 가지 미묘하고도 부조리한 정치적 입장의 충돌에서 시작됐다. 이 두 논쟁은 1970년 8월 23일 중공 9기 2차 전체회의에서 헌법 수정안을 둘러싸고 전개됐다. 린뱌오와 천보다는 류샤오치가 파면된 후에도 국가주석의 직위를 견지하자는 주장을 펼쳤다. 그의 야심을 의심하는 반대세력에 맞서기 위해 그는 마오쩌둥에 직접 국가주석에 취임해 달라 요청했다. 아울러 린뱌오와 천보다와 수정 헌법의 전문에 다음 구절을 삽입해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했다.

 

“마오쩌둥 동지는 당대 가장 위대한 마르크스-레닌주의자다. 마오쩌둥 동지는 천재적으로, 창조적으로, 전면적으로 마르크스-레닌주의를 계승, 호위, 발전시켰으며, 마르크스-레닌주의를 참신한 단계로 제고했다.”

 

이 구절에서 “천재적으로, 창의적으로, 전면적으로”라는 세 구절은 린뱌오가 편집한 “마오쩌둥 어록집” 소홍서(小紅書) 재판의 서문에서 적힌 글귀였다. 그 세 구절의 저작권은 물론 린뱌오에 있었다. 린뱌오는 그 세 마디를 수정 헌법의 전문에 삽입함으로써 마오쩌둥의 절대 권위에 올라타려 했다. 천보다는 이론적으로 린뱌오를 뒷받침했다.

 

린뱌오의 야심을 경계했던 마오쩌둥과 중공중앙의 지도자들은 즉각적으로 반발했지만, 바로 다음 날 (8월 24일) 천보다는 “마오주석의 겸양(謙讓)을 이용해서 ‘마오쩌둥 사상’을 폄훼하는 세력이 있다”며 공격의 포문을 열었다. 이 발언은 그러나 천보다를 삼키는 태풍의 눈이 돼버렸다. 다음 날, 마오쩌둥은 린뱌오와 천보다 관련 토론을 중단시킨 후, 장고에 들어갔다. 거의 한 주 후 (8월 31일) 마오쩌둥은 짧고도 강력한 대자보 “나의 견해 하나”를 작성했다. 이 “대자보”에서 마오쩌둥은 천보다가 “동지들을 기만했다”고 비판하면서 분노의 언어를 쏟아 놨다.

 

<1969년 4월 초 제9기 인민대표대회에서 투표함에 투표하는 중공중앙의 영도자들: 왼쪽부터 서열대로 마오쩌둥, 린뱌오, 저우언라이, 천보다, 캉성, 장칭, 장춘차오, 야오원위안/ 공공부문>

“나와 이 ‘천재 이론가’ 천보다 사이에 함께 일을 도모한 30여년의 세월이 있다. 일련의 중대한 문제에 대해선 단 한 번도 우리의 의견이 합치된 적이 없었다. 조화로운 배합을 이룬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이번에는 조화롭게 배합될 수 있었는데, 천보다는 돌연히 기습적 공격을 취해서 바람을 일으키고 불길을 지펴 혹시나 천하에 혼란이 없을까 저어하며 루산을 잿더미로 만들고 지구의 자전이라도 멈출 기세를 보였다! 역사가 및 철학가들 사이에서 그치지 않는 이 논쟁은 결국 우리의 지식이 선천적인가, 후천적인가, 유심론적 선험론이냐 유물론적 반영론이냐의 문제다. 우리는 오직 마르크스-레닌주의의 입장만을 견지해야 한다. 천보다의 요설과 궤변을 뒤섞어선 절대로 안 된다.” (마오쩌둥, “나의 견해 하나,” 1970년 8월 31일)

 

마오쩌둥이 천보다의 발언을 마르크스의 유물론을 부정하는 요설과 궤변으로 폄하하는 순간이었다. 자신을 천재로 치켜세웠다는 표면적 이유였다. 불과 일주일이 못돼 중공중앙은 천보다에 대한 철저한 조사를 선포했다. 전당이 동원되어 천보다를 비판하는 이른바 “비진정풍(批陳整風)”이 일었다. 특별조사팀은 천보다의 반혁명 죄행을 드러내는 대량의 물증, 증언 및 방증 자료까지 찾았다고 발표했다.

 

천보다는 순식간에 “마르크스주의자를 가장한 야심가, 음모가”로 전락했다. 해를 넘겨서 1971년 1월부터 천보다는 비참하게 짓밟혔다. 그는 공산당에 잠입한 “국민당 반동분자”로 류샤오치와 함께 반당 음모를 꾸미고 있었다는 오명이 씌워졌다. 그는 곧 “반공(反共)분자, 트로츠키파, 반역도당, 특수간첩, 수정주의 분자”로 몰려 가혹하게 단죄되었다. 1971년 9월 13일 소련으로 달아나던 린뱌오의 비행기가 격추된 바로 그 날, 천보다는 악명 높은 친청(秦城) 감옥에 수감됐다.

 

천보다 “문혁은 광기의 시대...그때 나는 미치광이”

1976년 9월 마오쩌둥이 사망한 후, 천보다는 곧바로 다시 체포되어 “린뱌오 장칭 반혁명 집단” 재판의 주동인물로 18년 형을 선고받았다. 주군 마오쩌둥에 버림받아 이미 6년 가까이 영어의 몸이 돼 있던 천보다는 문혁 시절 주군의 뜻을 받들어 광란의 선전선동을 행했다는 이유로 다시 12년 간 복역했다. 1988년 10월 17일 만기 출소한 천보다는 이듬 해 9월 20일 심근경색으로 사망했다. 죽기 직전 유일하게 그를 방문했던 전기 작가 예융례(葉永烈, 1940-2020)에게 천보다는 회한의 일생을 돌아보며 말했다.

 

<1980년 11월 20일, 4인방과 함께 법정에 선 천보다의 모습: 왼쪽부터 장춘차오, 천보다, 왕홍원, 야오원위안, 장칭/ 공공부문>

“나는 큰 죄를 범한 사람이오. 문화대혁명 때 나는 미욱하기 그지없었소! 내가 진 죄는 너무나 크오. 문혁은 광기의 시대였소. 그때 나는 한 명 미치광이였소. 나의 일생은 비극이오. 나는 비극의 인물이오. 원컨대 사람들이 나의 비극에서 교훈을 취하길 빌 뿐이오.” (葉永烈, <<陳伯達傳>>, 제1장)

 

1970년 12월 18일 에드가 스노우(Edgar Snow, 1905-1972)와의 대담에서 마오쩌둥은 “지금까지 인격숭배는 필요했지만, 앞으로는 약화돼야 한다”는 입장을 표명했다. 이미 천보다를 자신의 “천재성”을 강조했다는 이유로 유심론자로 몰아 비판하고 파면한지 100일 정도 지난 후였다. 1960년 내내 마오의 인격숭배는 극단으로 치닫고 있었다. 왜 갑자기 그는 인격숭배의 광열을 제어하려 했을까?

 

문혁 이전부터 마오를 인격신으로 격상시키고 숭배의 대상으로 삼은 두 인물은 군부의 린뱌오와 사상계의 천보다였다. 아이러니컬하게도 마오쩌둥 인격숭배가 강화될수록 린뱌오와 천보다가 권력도 공고해졌다. 인격숭배의 절대군주 밑에선 권신들이 무소불위 권력을 휘두른다. 마오는 린뱌오와 천보다의 결탁을 보면서 두 사람 모두를 제거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듯하다. 군대의 수장 린뱌오와 이념의 리더 천보다가 합쳐지면 곧 “마오쩌둥” 자신이 돼버리기 때문이었다. 두 사람의 결탁을 해체하기 위해서 마오는 우선 천보다를 쳤다.

 

현 중국의 국가이념 ‘마오 사상'은 천보다가 정립한 것

독재자에 영혼을 팔아 최고의 영예를 누렸던 재사(才士)는 영원히 복권되지 못했다. 1970년 천보다는 4인방의 주역인 장칭과 캉성 등에 맞섰던 이유로 정치적 사망을 선고받았다. 놀랍게도 1980년 그는 다시금 법정에 불려나와 4인방과 한 패로 몰려 다시금 역사의 칼날을 맞아야만 했다.

 

<문혁 포스터: 중국공산당 주석 마오쩌둥과 부주석 린뱌오가 홍위대를 검열하고 있는 장면/ 공공부문>

오늘날 중국 헌법 전문에 국가이념으로 명기된 “마오쩌둥 사상”은 마오가 인정하는 “천재적 이론가” 천보다가 정립한 중국혁명의 이론이었다. 시진핑 주석은 “마오쩌둥 사상”이 “중국 인민을 암흑에서 벗어나 새로운 중국을 건설할 수 이게 지도해준” 이념이라 칭송한다. 한데 그 “마오쩌둥 사상”을 정립한 천보다는 스스로의 일생을 미욱한 인물의 광기가 빚어낸 비극적 과오라고 술회했다.

 

천보다가 저질렀다는 자신의 그 죄과란 과연 무엇일까? 스스로 혼신의 힘을 바쳐 “마오쩌둥 사상”을 정립한 “사실”을 말할까? 아니면 그가 국민당의 특수간첩으로서 마오쩌둥에 반역했다는 문혁 시절 그에게 들씌워진 그 “혐의”를 인정하는 걸까? 곧 이어지는 린뱌오의 죽음 속에 해답이 암시돼 있다. <계속>

 

<62회> 몽골 초원 위 떨어진 비행기에 시신 아홉이...

<린뱌오 일가를 태우고 소련으로 향하다 추락했다는 트리던트 운수기의 모습/ 공공부문>

 

1971년 9월 13일 새벽 2시 30분 경 영국제 HS-121 트리던트(Trident, 삼지창) 운수기가 굉음을 울리며 몽고의 은드르항(Öndörkhaan) 부근으로 추락했다. 몽고인 목격자에 따르면 추락하는 비행기의 꼬리에서 불길이 치솟았다. 날이 밝자 비행기가 떨어진 초원 위엔 불에 탄 시신 아홉 구가 나뒹굴고 있었다. 몽골의 수도 울란바토르에서 파견된 몽골 외무부에 따르면 형체를 알 수 없이 짓뭉개진 시신들이었다.

 

아홉 구의 시신 중에서 딱 하나에서만 신분증이 발견됐다. 그 주인은 바로 당 서열 제2위로서 마오쩌둥의 후계자로 지명된 린뱌오(林彪, 1907-1971)의 장남 린리궈(林立果, 1945-1971)였다. 나머지 시신의 신원은 미상이었다. 몽골 측 현장 조사에 따르면, 사망자들은 모두 50세 이하로 추정됐다. 아홉 구 중 여성의 시신은 단 하나였는데, 당시 50대였던 린뱌오의 와이프 예췬(葉群, 1917-1971)이라고 보기엔 너무나 젊어 보였다.

 

몽골 초원 오지에 추락한 비행기...린뱌오 사망

1971년 말, 소련의 KGB는 비밀리에 의료단을 사건 현장에 파견해서 비행기 잔해 속에서 불에 탄 린뱌오와 예췬으로 추정되는 시신의 두개골을 가져갔다. 린뱌오는 1938년-1941년 사이 모스크바에서 머리 부상의 치료를 받았다. 그 때문에 소련은 린뱌오의 진단서를 다수 보유하고 있었다. 소련 측은 린뱌오의 진단서와 두개골의 특징을 비교한 후, 현장의 그 사체가 린뱌오의 시신임을 확인했다. 이후 2차 조사를 통해서 린뱌오의 시신 우측 폐부에서 딱딱하게 굳은 결핵 흔적을 발견했다고 한다. 이 사실은 1990년대까지 극비에 부쳐져 있었다.

 

중국 측 공식 문건은 비행기 추락의 원인을 연료 부족이라 얼버무린다. 소련은 기장이 레이더를 피하기 위해 저공비행하다 고도를 잘못 맞춰서 추락했다고 설명한다. 이후 연료부족, 소련 요격 설, 중국 군부의 포격 설까지 나돌았으나 추락 원인은 지금도 밝혀지지 않았다. 이른바 “린뱌오 사건”은 여전히 베일에 휩싸여 있다.

 

아직도 밝혀지지 않은 린뱌오 사건의 진상

사건 발발 닷새 후인 1971년 9월 18일 중공중앙은 마오쩌둥의 승인을 얻어 정식으로 “린뱌오 반도 출국에 관한 통지”를 발표했다. 서두에 사건의 개요가 16자로 압축돼 있다.

 

창황출도(倉惶出逃), 황급히 도망을 갔지만

낭패투적(狼狽投敵), 적에의 투항에 낭패를 겪어

반당반국(叛黨叛國), 당을 배반하고 국가에 반란을 일으켜

자취멸망(自取滅亡), 스스로 멸망을 자초했다.

 

<문혁 초기 마오쩌둥과 린뱌오는 중공 서열 1위와 2위로 중공중앙과 군부를 완벽하게 장악하고 손발을 맞춰 가며 정국을 주도했다./ 공공부문>

 

증인 및 증거 조사에 따르면, 린뱌오는 1971년 9월 13일 극비리에 “삼지창”(트리던트) 운수기에 오를 때 수년 간 그를 보위한 경위원을 쏴죽이고 비행기에 올랐다. 비행기는 몽골 너머 소련을 향했다. 린뱌오의 목표는 소련 수정자본주의에의 투항이었다. “확실한 소식통에 따르면, 국경을 지난 비행기는 몽고의 은드르항 부근에서 추락했다.” 이어지는 원문의 번역은 다음과 같다.

 

“린뱌오는 장시간에 걸쳐 ‘반당반국’을 계획했다. 특히 중앙 9기 2차 전체회의(1971.8.23-9.6) 이후 계급투쟁과 두 갈래 노선투쟁이 시작됐다. 그 결과 린뱌오라는 이 자본주의 야심가, 음모가의 정체가 다 폭로되었고, 그는 총 파산을 맞았다. 9기 2차 전회에서 국민당의 오랜 반동분자, 트로츠키주의자, 반도, 특수간첩, 반혁명 수정주의분자 천보다(陳伯達, 1904-1989)는 감히 그토록 미치광이처럼 공격해댔다. 그의 반당, 반9대(9차 전국대표대회, 1969.4.1.- 4.24), 반(反)마르크스-레닌주의, 반(反)마오쩌둥사상의 검은 배후는 바로 린뱌오였다. 천보다 노선은 실제로는 린뱌오-천보다 노선이었다”.

 

1971년 10월 6일 중공중앙은 “중발[1971]65호”에서 다시금 전국 각 성, 시, 자치구 및 군구의 조직에 린뱌오의 사태를 규탄했다. 이 통지문에서 중공중앙은 “9차 전국대표대회(1969.4.1.-4.24) 이래, 특히 9기2차 전회부터 중공중앙은 마오쩌둥을 영수로 하는 무산계급사령부와 린뱌오를 우두머리로 하는 자산계급사령부 사이의 투쟁이 지속됐다”고 규정했다.

 

이어지는 설명에 따르면, 당내에 자산계급 사령부를 구축한 린뱌오는 그의 아들 린리궈의 조직를 통해 베이징, 광저우, 상하이 등지에 비밀 파시스트 특무 조직을 만들고 “여론을 조작하고, 특수간첩을 훈련하고, 간부들을 매수하여” 반혁명 반란을 일으키려 했다. 또한 그들은 마오쩌둥이 남방을 순시할 때 상하이 부근에서 열차에 폭약을 설치해서 암살하려 했다.

 

<린뱌오 일가의 가족사진: 왼쪽부터 딸 린리헝, 부인 예췬, 린뱌오, 아들 린리궈/ 공공부문>

마오쩌둥 지시에 따른 암살인가

물론 중공중앙의 공식 발표를 곧이곧대로 믿기는 힘들다. 당시 린뱌오는 마오쩌둥의 그늘 아래서 최고의 권력을 누리고 있었다. 그는 국공내전의 영웅이었다. 만주 전역에서 그는 다섯 달 동안 지린(吉林)성 창춘(長春)을 철조망으로 에워싸고 수많은 민간인을 꼼짝없이 굶어죽게 만드는 잔인한 포위전으로 만주에서 국민당을 패주시킨 주인공이었다. 여세를 몰아 린뱌오는 베이징과 천진을 함락했고, 최남단의 하이난다오(海南島)까지 진격하는 극적인 무훈(武勳)을 세웠다. 그 결과 린뱌오는 1955년 “중국 10대 원수(元帥)”로 추대됐다. 당시 그는 주더(朱德, 1886-1976)와 펑더화이(彭德懷, 1898-1974)에 이어 군 서열 제3위로 꼽히는 영예를 누렸다.

 

<1959년 10월 1일, 톈안먼 광장에서 건국 10주년을 맞아 열병식을 거행하는 국방부장 린뱌오/ 공공부문>

 

1959년 루산(廬山)회의에서 마오쩌둥은 대기근의 참상을 고발하고 직간(直諫)했던 당시 국방장관 펑더화이를 파면하고, 대신 신경쇄약으로 대외활동을 접고 있던 린뱌오를 급히 불러와 국방장관에 앉혔다. 이후 린뱌오는 마오쩌둥에 절대적 충성으로 보은했다. 1960년대 초반 린뱌오는 군대를 앞세워 전국의 마오주석 인격숭배의 열풍을 이끌었다. 문혁 시기 린뱌오는 승승장구했다. 1966년 8월 1-12일 개최된 중공 제8기 11차 전체회의에서 린뱌오는 류샤오치를 대신해서 당 서열 2위에 올랐다.

 

1969년 제9차 전국인민대표대회에서 린뱌오는 공식적으로 마오의 후계자로 지명됐다. 이미 지난 회에서 다뤘듯 린뱌오는 “국가원수”의 직위 존폐와 “마오쩌둥 천재론”을 둘러싸고 마오쩌둥과 부딪히긴 했다. 마오쩌둥은 천보다를 파면시킴으로써 린뱌오를 구석으로 몰아가는 정치적 압박을 가하고 있었다. 그렇다 해도 설마 당 서열 2위의 린뱌오가 군사정변을 기획했을까? 80세를 바라보는 마오쩌둥을 축출하고 권력을 찬탈하기 위해서?

 

게다가 린뱌오는 1969년 3월 소련과의 군사충돌을 배후에서 지시했으며, 공개적으로 소련을 규탄하는 강경 발언을 쏟아냈었다. 그런 린뱌오가 어떻게 소련으로의 망명을 꾀할 수 있나? 중공중앙의 발표는 상식적으로 납득되기 힘들었다. 확증은 없지만, 많은 연구자들은 그날의 비행기 사고가 마오의 지시에 따른 암살이라 추측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린뱌오, 마오쩌둥을 제거하려 했나

가령 1983년 5월 8개국에서 동시 출판된 야오밍러(Yao Ming-le, 가명)의 <<린뱌오의 음모와 죽음(The Conspiracy and Death of Lin Biao>>에 따르면, 중공중앙의 공식발표는 진상을 가리는 연막에 불과했다. 허술한 군사반란의 “571공정” 계획은 린뱌오가 아니라 그의 아들 린리궈와 그의 동료들이 짰다. 이들과 달리 린뱌오는 더 치밀한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그는 또 한 번의 중·소 무력충돌을 일으킨 후 마오쩌둥과 저우언라이를 지하 벙커 “옥탑산(玉塔山)”에 대피시켜 제거하고, 스스로 권력을 잡아 전국적인 반(反)마오쩌둥 캠페인을 벌이려 했다. 반란 음모를 미리 알아낸 마오쩌둥은 린뱌오 부부를 베이징 서부의 빌라에 초대한 후 그들의 차량을 폭파했고, 다음날 급히 소련으로 도망하던 린리궈의 비행기는 몽골 상공에서 추락했다. 추락한 비행기 속엔 린뱌오와 예췬의 시신이 없었다는 몽골 측 최초 조사와 일치한다.

 

이 책의 근거에 관해 많은 논란이 뒤따랐다. 책의 저자가 소련 KGB 혹은 타이완 정보부의 요원이란 설도 있었고, 중공중앙의 요원으로 중국 공군과 연결된 인물이란 설도 있었다. 다만 천재 전략가 린뱌오가 대역(大逆)의 군사반란을 기획하는데 그토록 허술했을 수 있을까? 의구심을 자아낼 수밖에 없다.

 

<서구 여러 나라에서 출판된 야오밍러의 “린뱌오의 음모와 죽음”/ 공공부문>

 

때문에 “571” 군사반란은 린뱌오가 아니라 그의 아들 린리궈이 몇 개월 전에 기획했으며, 린뱌오는 자신의 아들 린리궈에 납치된 상태였다는 주장이 잇따랐다. 당시 린리궈는 린뱌오의 오른팔 우파셴(吳法憲, 1915-2004)의 도움으로 공군에서 상당한 권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공군 내 그의 직위는 사령부 부주임이자 작전 부(副)부장이었는데, 중요한 문서를 모두 살펴 볼 수 있는 요직이었다. 린리궈는 마오쩌둥과의 권력 투쟁에서 아버지 린뱌오가 큰 위기에 봉착했음을 감지했다. 린뱌오에 대한 공격은 곧 집안 전체의 몰락이라 생각한 린리궈는 공군 내부의 동지들을 규합해서 군사반란의 밀모(密謀)를 시작했다는 설명이다.

 

린리궈의 약혼녀 장닝(張寧, 1949- )과 린뱌오의 딸 린리헝(林立衡, 1944- )의 증언에 따르면, 린뱌오와 예췬은 문제의 9월 12일 마오쩌둥의 만찬에 불려간 게 아니라 베이다이허(北戴河)의 요양지에서 그들과 함께 머물고 있었다. 중공중앙의 공식문서에 따르면, 아버지 린뱌오의 안전을 걱정한 린리헝은 저우언라이에게 그들의 도주 계획을 알렸다. 그 결과 린씨 일가가 급하게 도주하는 비행기에 모종의 폭약이 장착됐다는 얘기가 된다.

 

<린뱌오의 딸 린리헝(林立衡, 1944- )의 모습. 왼쪽 사진은 린리헝과 저우언라이(1966), 오른쪽 사진은 마오쩌둥에 경례를 올리는 린리헝의 모습 (1965)/ 공공부문>

 

여러 추측만 난무할 뿐 “린뱌오 사건”의 진상은 아직도 드러나지 않았다. 린뱌오 사후 4인방은 “반도 린뱌오 집단”에 대한 공격으로 꺼져가는 문혁의 불길을 다시 당겼다. 이 사건을 계기로 마오쩌둥은 린뱌오와 결탁된 군부의 이른바 “린뱌오 집단”을 일제히 소탕했다. 정치국 상무위원회에 대한 중앙군사위원회의 영향력을 근본적으로 배제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1980년 덩샤오핑은 “심판 린뱌오-장칭 반혁명 사건”의 재판을 통해 4인방과 동급으로 린뱌오 집단의 생존자들을 단죄했다.

 

린뱌오의 죽음, 문혁의 음모정치 폭로하는 계기

린뱌오는 그렇게 역사의 악인으로 폄훼됐지만, 허망한 그의 죽음 뒤엔 변화의 불씨가 뒤따랐다. 그 당시를 살았던 다수 중국인들의 회고에 따르면 급작스런 린뱌오의 추락은 그들을 혁명의 미몽에서 깨어나게 한 중대한 사건이었다. 문화혁명이 음모 정치, 권모술수로 범벅된 저열한 권력 암투임을 여실히 보여줬기 때문이었다.

 

술렁이는 여론을 되잡기 위함이었을까. 1970년 10월 14일 중공중앙은 린뱌오 집단이 직접 작성했다는 “571 공정 기요(紀要)”를 전국에 배포했다. 린뱌오 집단의 군사반란 계획서인데, 그 안엔 이 집단의 정치적 의제가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이제 문혁의 절정에서 작성됐다는 군사반란의 계획서를 깊이 뜯어보자. <계속>

 

<1971년 10월 14일 중공중앙이 공개한 “571공정 기요”의 이미지. 이 문서는 린뱌오 집단이 군사반란을 일으키기 위해 작성한 구체적인 혁명의 기획안이었다./ 공공부문>

 

<63회> 총칼로 권력 잡은 자, 2인자의 총칼을 두려워한다

<1966년 9월 톈안먼 홍위병 접견식. 오늘쪽부터: 마오쩌둥, 린뱌오, 저우언라이, 장칭, 캉성/ 공공부문>

 

한고조(漢高祖) 유방(劉邦, 기원전 247-195)은 천재적인 군사전략으로 자신을 도와 천하통일의 위업을 이룩한 최고의 개국공신(開國功臣), 국사무쌍(國士無雙)의 명장 한신(韓信, 기원전 ?-196)을 제거했다. 한신이 모반하지 않을까 늘 의심했기 때문이었다. 린뱌오 역시 천재적 군사전략으로 마오쩌둥을 도와 중화인민공화국을 세운 희대의 명장이었다. 린뱌오도 한신처럼 정치권력의 정점에서 불운의 최후를 맞았다.

 

한신과 린뱌오 모두 탁월한 군사적 능력이 액운을 자초했지만, 그들의 모반 혐의는 권력자가 지어낸 이야기일 수 있다. 누구든 마상(馬上)에서 권력을 잡아 황제의 지위에 오르면 군부의 실력자를 두려워한다. 총칼로 권력을 잡은 자는 언제든 총칼에 그 권력을 잃을 수 있기 때문이다. 마오쩌둥은 늘 군사반란을 경계했다. 심지어는 나무나 바위까지 자객으로 의심하는 병적인 히스테리에 시달려야 했다. 절대 권력자가 측근의 2인자를 제거해야 하는 까닭이 거기에 있다.

 

571공정 기요, 린뱌오의 반란 계획서인가

중공 서열 제2위의 국방장관이자 국무원 부총리였던 린뱌오(林彪, 1907-1971)는 급히 소련으로 망명하다 몽골 상공에서 가족과 함께 잿더미로 돌아갔다. 중공중앙의 발표에 따르면, 린뱌오는 암암리에 당내에 자본주의 사령탑을 건설한 후, 군을 동원해 마오쩌둥을 암살하고 당과 정부를 장악하려 했다. 이 음험한 프로젝트의 코드네임은 “571 공정(工程, 프로젝트)”이었다. 중국어에서 숫자 “571”(우-치-이)은 “무기의(武起義)와 발음이 같다. 곧 린뱌오가 군부의 장성들과 공모하여 무장봉기를 획책했다는 얘기다.

 

중국의 라오바이싱(老百姓, 일반백성)은 중공중앙의 발표를 쉽게 받아들일 수 없었다. 린뱌오가 누군가? 250만 군부의 수장이자 마오쩌둥의 공식 후계자였다. 그는 문혁의 최고 수혜자였다. 무엇보다 린뱌오는 마오쩌둥 신전의 최고 제사장(祭司長)이었다. 그가 왜 표변해서 마오쩌둥을 암살하고 자본주의를 되살리려 했을까? 그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로선 상식적으로 납득할 수 없었다. 린뱌오 추락사는 실로 기괴한 사건이었다.

 

이미 6년 간 문혁의 광풍 속에서 인민들은 날마다 공포와 불안에 떨고 있었다. 그동안 인민들은 마오쩌둥의 훈시를 맹신하며 온갖 형태의 비투(批鬪), 문투(文鬪), 무투(武鬪)에 휩싸였다. 우붕(牛棚, 사설 감옥)에 서로를 가두고 감시하고 학대해 왔다. 급기야 그들은 문혁의 목적 자체를 의심하기 시작했다. 문혁은 결국 지저분한 권력투쟁이었나? 중국의 인민은 1인의 권력욕을 충족시키기 위해 동원된 막장 혁명 드라마의 엑스트라였던가?

 

<문혁 시기 린뱌오의 위상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포스터. “마오쩌둥 어록”을 손에 든 린뱌오가 마오쩌둥과 함께 홍위병을 접견하고 있다. “광휘의 방양, 위대한 창거(創擧, 창조적인 거업)! 마오주석의 제 8차 문화혁명 대군 검열!” “최고 지시: 그대들은 국가 대사에 관심을 갖으라! 무산계급 문화대혁명을 끝까지 진행해야 한다!/ 공공부문>

 

린뱌오의 죽음은 혁명 신화를 무너뜨렸다. 민심 이반의 쓰나미를 막기 위해 마오쩌둥은 출구전략을 모색했다. 린뱌오 역모의 스모킹건(smoking gun)을 만천하에 공개하는 정공법이었다. 사람들의 눈앞에 증거를 보여줌으로써 린뱌오의 대역죄를 믿게 하려는 의도였다.

 

1971년 11월 14일, 중공중앙은 마오쩌둥의 명령에 따라 “혁명정변의 강령 ’571공정 기요'에 관한 통지문을 전국에 발송했다. 이 통지문엔 지금은 금서가 된 린뱌오의 반란 계획서 “571공정 기요(紀要)”가 첨부돼 있었다. “571 공정 기요”는 군사반란의 정치적 의의와 투쟁 전략이 기록돼 있다.

 

문건의 작성자는 린뱌오의 아들 린리궈(林立果, 1945-1971)와 그의 동지 3인이었다. 린뱌오가 소련으로 도주한 1971년 9월 13일, 이 3인 중 1명은 체포됐고 나머지 두 명은 베이징에서 비행기를 타고 도주하다 권총 자살했다. 마오쩌둥 사상의 이론가 천보다(陳伯達, 1904-1989)와 린뱌오와 연결된 군부의 5인은 “린뱌오 집단”이 되어 1980년 법정에서 16-20년 유기 도형(徒刑,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반역도당 매국노 린뱌오의 반혁명 수정주의 노선을 철저히 비판하라!” 인민의 공적으로 전락한 린뱌오의 위상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포스터/ chineseposters.net>

 

“통치 집단 상층부가 부패하고 무능해 고립무원 상태”

린뱌오가 군사반란의 주동자였다면, “571 공정 기요”는 린뱌오의 뜻에 따라 그의 아들 린리궈가 작성한 반란의 계획서였다. 반면 린뱌오가 만약 그의 아들에 납치된 상태였다면, 이 문서는 전적으로 린리궈가 거친 상상력을 발휘해 구성한 쿠데타의 시나리오였다. 구체적으로 이 문건은 1) 가능성, 2) 필요성 3) 기본조건, 4) 시기, 5) 역량, 6) 구호와 강령, 7) 실시 요점, 8) 정책 및 책략, 9) 비밀보호 및 기율, 이상 9항으로 구성돼 있다.

 

1970년 8월 루산회의(제9기 2차 전회) 이후 마오쩌둥과 린뱌오의 갈등이 표면에 드러났다. 문건의 작성자들은 그 상황을 다음과 같이 파악한다.

 

“정국이 불안정해지면서 통치 집단의 내부모순이 첨예해지고, 우파 세력이 대두하고 있다. 군대는 압박을 받고 있다. 10년 동안 국민경제는 전에 없는 정체를 보인다. 군중과 기층의 간부들, 부대의 중·하 간부들의 실제 생활수준이 하락했다. 불만 정서가 날마다 커져간다. 감히 분노하지만 결코 말하진 못한다. 심지어 분노조차 할 수 없어 입을 닫아 버렸다. 통치 집단 내부의 상층부가 매우 부패한데다 우매하고 무능하여 고립무원의 상태에 이르렀다.”

 

그들은 “정치 위기가 깊어지고 권력탈취가 일어나 중국에선 점진적이고 평화적인 변화의 방식으로 전개되는 정변이 진행 중”이라 파악했다. 이 정변은 문인들에겐 유리하고, 군인들에겐 불리한 상황으로 전개되고 있었다. 때문에 문인들이 이끄는 “반혁명의 점진적 변화”를 저지하기 위해선 “폭력 혁명을 통한 급진적 변혁”가 필요하다. 사상, 조직, 군사 모든 면에서 혁명의 조건이 무르익었다는 낙관 위에서 그들은 “무장기의”의 초읽기에 들어갔다. 요컨대 이 문건은 군이 직접 나서서 부패한 권력집단을 일소하고 새로운 혁명정권을 세워야 한다는 대역(大逆)의 계획서였다.

 

“마오쩌둥의 호시절도 오래 갈 수 없다”

이 문건 속에서 마오쩌둥은 1950년대 미공군 폭격기 “B-52”라는 암호명으로 불린다. 아마도 최고영도자를 그저 노쇠한 “미 제국주의의 폭격기”라 폄하하려는 의도인 듯하다.

 

“B-52의 호시절도 오래 갈 수 없다. 초조하고 불안해서 그는 몇 년 내로 후사를 안배할 수밖에 없으니 우리에 대해서 절대로 방심하지 않는다. 손이 묶여 꼼짝하지 못하느니 차라리 결사항전에 나서야 한다. 정치에선 상대가 공격해오길 기다렸다 제압하지만, 군사행동에선 선수를 쳐서 상대를 제압한다. 우리나라의 사회주의 제도는 현재 엄중한 위기에 휩싸여 있다. 붓을 든 트로츠키파가 제멋대로 마르크스-레닌주의를 변조하고 왜곡해서 사익을 추구하고 있다. 그들은 거짓된 혁명의 언사로 마르크스-레닌주의를 대체해서 중국 인민을 사상적으로 기반하고 몽폐하고 있다······. 그들의 사회주의는 실제로는 사회 파시즘이다. 그들은 중국의 국가기구를 서로 잔인하게 학살하고 서로 헐뜯고 싸우는 고기 가는 기계로 뒤바꿔버렸다 "

 

<린뱌오의 아들 린리궈가 주동적으로 작성했다고 알려지는 군사정변의 계획서 “반혁명정변 강령 <<“571공정” 기요>> (영인본), 기밀 첨부 1”>

 

문건 속에서 말하는 “붓을 든 트로츠키파”는 구체적으로 장칭(江靑)과 함께 4인방을 이루는 장춘차오(張春橋, 1917-2005), 야오원위안(姚文元, 1931-2005) 등을 가리킨다. 그들이 제멋대로 마르크스-레닌주의를 왜곡해서 인민들을 죽음의 협곡으로 몰아넣었다는 비판이었다. 당시로선 상상도 할 수 없는 발언이었지만, 불과 10년이 못 돼 이 주장은 만인의 상식이 됐다. 4인방에 대한 이들의 비판은 문혁 이후 4인방에 내려진 법정의 판결과도 공명한다. 문혁의 절정에서 린뱌오 집단이 4인방에 사형을 선고한 셈이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1980년 11월 20일 중국의 최고인민법원은 소위 “린뱌오 집단” 6인을 4인방과 함께 특별법정에 세워 단죄했다. 법정의 공식명칭은 “린뱌오·장칭 반혁명집단 사건 심사”였다. 4인방은 린뱌오가 가족과 함께 추락사한 후, 1974년 반년에 걸쳐 린뱌오와 공자를 동시에 비판하는 이른바 “비림비공(批林批孔)” 운동을 광적으로 전개한 주체였다. 어떻게 “린뱌오 집단”이 4인방과 함께 “반혁명집단”의 법정에 함께 설 수 있나? 상충되는 이 두 세력을 “반혁명집단”으로 묶음으로써 최고 인민법정은 마오쩌둥에 면죄부를 부여했다. 문혁의 책임을 마오쩌둥을 기민하고 오도한 린뱌오 집단과 4인방에 전가하기 위함이다.

 

<1980년 11월 28일, 4인방과 린뱌오 반혁명 집단의 특별법정/ 공공부문>

 

“마르크스-레닌주의 외피에 진시황의 법을 쓰는 중국 역사상 최대의 봉건 폭군

문혁 이후 류샤오치의 명예는 복권되었지만, 린뱌오 집단의 반역행위는 오히려 더 강력하게 단죄됐다. 린뱌오 사건은 흔히 철안(鐵案, iron case)으로 불린다. 확고부동하게 결정된 번복 불가능한 사건이란 의미다. 문혁 시기 다른 사건들은 의안(疑案, 의심스런 사건), 현안(懸案, 계류 중인 사건), 원안(冤案, 원통한 사건), 가안(假案, 거짓 사건), 착안(錯案, 착오의 사건) 등으로 불리는 상황과 대조된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아마도 이 문건은 마오쩌둥에 대한 강경한 어조의 비판을 담고 있기 때문일 듯하다.

 

“당내와 국가의 정치생활은 봉건 전제 독재 방식의 가부장제 생활로 변질됐다. 당연히 우리는 그가 중국을 통일한 역사적 위업을 부정하지 않는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우리들 혁명가들은 역사상 역사에서 그가 마땅히 누려야 할 지위를 인정하고 지지한다. 다만 현재 그는 중국 인민이 그에게 준 신임을 남용하여 반면의 역사로 치닫고 있다. 그는 이미 오늘날의 진시황이 됐다. 중국인민에 대한 책임과 중국역사에 대한 부책 때문에 우리들의 기다림과 인내는 한계에 달했다. 그는 진정한 마르크스-레닌주의자가 아니다. 그는 당시 공자와 맹자의 길을 가면서 마르크스-레닌주의의 외피를 쓰고 진시황의 법을 집행하는 중국 역사상 최대의 봉건 폭군이다!”

 

현재 중국에서도 용인될 수 없는 강한 어조의 마오쩌둥 비판이었다. 사상적 직격탄, 이념의 핵탄두였다. 마오쩌둥을 전근대 중국의 황제였다면 이 “발칙한” 언사는 최악의 불경죄에 해당한다. 당시의 현실에서 마오쩌둥은 황제보다 더 높은 최고영도자였다. 그는 날마다 인민의 눈동자에 강림하는 인격신이었다.

 

당시 이 문서는 전국 모든 곳의 개개인에 전달됐다. 저우언라이를 비롯한 중공중앙의 리더들은 이 “불경스런” 문건이 민간에 전해지면 안 된다고 건의했지만, 마오쩌둥은 듣지 않았다. 린뱌오가 마오쩌둥을 직접 공격했음이 알려지자 많은 사람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국가 안의 “깊은 국가”(deep state) 속에서 자행된 권력암투의 비릿한 피 냄새를 맡았기 때문이었다.

 

현재 ’571 공정 기요'는 금서...“린뱌오, 누명 쓰고 희생” 재평가도

중국국방대학의 대표적 문혁사가 왕녠이(王年一, 1932-2007) 교수는 린뱌오 역시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의문의 추락사로 희생됐다고 주장한다. 린뱌오는 국가주석의 직위 존폐 여부를 놓고 마오쩌둥과 대립했지만, 부주석으로서 공식 회의석상에서 자신의 의견을 발표했을 뿐이었다. 왕교수는 묻는다. 부주석의 개인적 견해의 표명이 어떻게 권력찬탈의 혐의가 될 수 있나? 아울러 왕교수는 “571 공정” 자체가 린뱌오가 아니라 그의 아들 린리궈가 구상한 허술한 몽상일 뿐이었다고 주장한다. 설혹 “571공정 기요”가 날조된 문서는 아니라 해도 아들의 일탈을 근거로 린뱌오를 반역도당의 수괴로 몰아갈 수는 없음은 법상식이다.

 

중국 군부의 10대 원수(元帥) 천이(陳毅, 1901-1972)의 아들 천샤외루(陳小魯, 1946-2018)는 문혁이 막을 내린 후 40년이 지나서 당시를 돌아보며 다음과 같이 술회했다.

 

“오늘날 ’571공정 기요'를 보면 갈수록 명확해집니다. 실상 많은 일들을 린뱌오는 모르고 있었죠. 게다가 ’571공정 기요'는 당시에는 기층의 모든 사람들에게 전달된 문건이었죠. 이 문건은 많은 문제를 제기합니다. 사실 당시 “마오쩌둥 혁명노선”을 지향한 게 바로 문혁의 병폐였었죠. 그 문건의 논거는 당시 기준으로는 우파 언론에 해당했지만, 오늘의 관점에서 보면 올바른 견해였소. 이후 4인방을 비판할 때 썼던 바로 그 논리죠. 때문에 오늘날 도리어 “571공정 기요”는 극비의 문건이 됐소. 절대로 외부로 유출할 수가 없죠!”

 

<1974년 “비림비공” 운동 당시의 포스터/ 공공부문>

 

1970년대 초 중국의 전 인민이 린뱌오의 아들 린리궈가 주동적으로 작성했다는 바로 그 군사 쿠데타의 계획서를 읽어야만 했다. 반면 오늘날 중국에선 그 문서는 금서 목록에 올라 있다. 당시엔 린뱌오 부자의 대역죄를 드러내기 위해 이 문서를 강제로 읽혔지만, 오늘의 관점에선 “571공정 기요”의 내용이 인류의 상식에 부합한다. 언젠가 중국을 지배하는 권력의 진자가 반대 방향으로 움직일 땐, 린리궈가 오히려 영웅의 신전에 안치될 수도 있다. 시대가 변하면 과거사 역시 새롭게 해석되고 평가되게 마련이다. <계속>

 

<64회>“사회주의 파괴 금지” 중국 헌법 1조가 부리는 무소불위 마법

<“빈과일보”가 폐간된 2021년 6월 26일 최종판을 들고 시위하는 홍콩의 청년들/ https://therisingyouth.info/hong-kong-bids-farewell-to-apple-daily/ >

 

지난 6월 24일 홍콩의 자유언론 <<빈과일보>>가 중국공산당 정부의 탄압으로 폐간됐다. 전 세계가 이구동성으로 중공 정부를 규탄하자 중공 기관지 <<환구시보>>(영문판, The Global Times)는 “<<빈과일보>>는 폐간됐지만, 홍콩의 언론자유는 건재하다”며, 내정간섭을 멈추라 부르짖었다. 언론사를 문 닫게 하고 언론인들을 줄줄이 잡아가면서 대체 무슨 근거로 홍콩의 언론 자유가 건재하다 주장을 하고 있나? 그 주장의 논리적 근거는 놀랍게도 중화인민공화국의 <<헌법>>이다.

 

중화인민공화국 <<헌법>> 총강 제1조는 “그 어떤 조직이나 개인의 사회주의 제도 파괴도 금지된다”고 명기하고 있다. 중공 정부는 <<빈과일보>>가 중국 헌법이 허용하는 언론의 자유를 넘어 사회주의 제도를 파괴하는 활동을 일삼았다고 주장한다. 실제로 <<빈과일보>>는 최근 10년 간 홍콩의 반중 시위를 지지하고 옹호하는 기사를 집중적으로 게재해 왔다. 중공 정부는 중국 헌법 총강 제1조에 따라 사회주의 제도를 부정하고 파괴하는 <<빈과일보>>를 합법적으로 폐간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중국 헌법에 근거해 ‘빈과일보’ 폐간 당연”

서구의 비판자들은 “미니헌법”이라 불리는 홍콩 <<기본법(基本法)>>을 근거로 홍콩의 자유를 옹호하지만, 그 역시 간단하지 않다. 홍콩은 기본법을 통해서 외무(外務)와 군사안보를 제외한 모든 방면에서 자율권을 보장받지만, 특별행정자치구로서의 홍콩의 지위는 중국헌법 제31조에 근거하고 있다. 홍콩 기본법 제22조는 중앙인민정부가 홍콩의 내치에 개입할 수 없도록 명시하지만, 제158조에 따르면 전국인민대표회의 상임위는 홍콩기본권에 대한 유권해석을 내릴 수 있다. 교묘하게 감춰져 있었지만, 1997년 반환 이후 홍콩의 자치 근거는 언제나 중국의 헌법이었다.

 

<“경찰은 폭력을 중단하라! 언론 자유를 사수하자!” 2019년 홍콩 시위대의 모습/ https://niemanreports.org/articles/18-weeks-and-counting-how-hong-kong-media-is-covering-the-mammoth-protests-and-fighting-for-its-own-survival/>;

 

덩샤오핑은 “일국양제”의 원칙을 내세워 국제 사회에 적어도 2047년까지 홍콩의 자율권을 보장했건만, 시진핑은 19세기적 “자강의 중국몽”을 내세워 그 약속을 깨는 조치를 이어가고 있다. 이미 중공 정부는 “일국양제”의 외피를 벗어던졌다. 국제 사회의 비판에 더욱 강경하게 맞서며 홍콩의 탈자유화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결국 문제의 핵심은 개인의 자유를 근본적으로 제한할 수 있는 중화인민공화국의 사회주의 헌법이며, 전체주의적 대민지배와 전일적 일당독재를 정당화하는 중국공산당의 레닌주의적 당헌(黨憲)이다. 세계인의 상식이지만, 중국은 공산혁명의 최종 목적을 위해 개인의 자유와 인권을 제약하고 박탈할 수 있는 “인민민주독재”의 사회주의 국가이다.

 

그럼에도 지난 반세기 미국은 중국의 정치체제는 그대로 내버려 둔 채 “묻지 마!” 경제 공생을 추구해 왔다. 닉슨의 외교노선은 경제적 자유화가 정치적 민주화로 이어진다는 나이브한 낙관에 근거하고 있었다. 그 결과 인류는 현재 “중국 딜레마”에 봉착해 있다.

 

닉슨, 중 경제 자유화가 민주화로 이어진다고 낙관

아이젠하워(Dwight Eisenhower, 1890-1969) 행정부(1953-1961)에서 8년 간 부통령을 역임했던 닉슨(Richard Nixon, 1913-1994)은 당시 강경한 반공 투사로서 명성이 자자했다. 닉슨과는 달리 아이젠하워는 상업이 경제적 번영을 보장하며 공산독재 권력에 대한 인민의 저항을 추동한다는 개방적 사고 하에 한국전쟁 직후부터 중국과의 무역 및 국과 정상화를 추진하려 했다. 다만 당시의 완강한 반공 분위기를 뚫을 수 없어 그 계획은 실현될 수 없었다.

 

1959년 미국 상원의 외교위원회는 이른바 “콘론 보고서(The Conlon Report)”에 따라 중국과의 관계 정상화 가능성을 타진하기도 했었다. 이후 1966년 미 상원은 “고립 없는 봉쇄(containment without isolation)” 전략에 따라 보다 적극적으로 대중국 포용정책의 가능성을 검토했다. 물론 냉전의 정점에선 중국과의 대화가 요지부동 한 걸음도 나아갈 수 없었다.

 

닉슨은 대통령 취임 2년 전인 1967년 10월 월남전의 절정에서 <<포린 어페어스(Foreign Affairs>>지에 “베트남 이후의 아시아(Asia After Viet Nam)”란 중요한 기고문을 실었다. 닉슨은 대중 봉쇄정책은 미국에 막대한 군사비용을 초래할뿐더러 핵전쟁의 위험을 고조시킨다고 분석했다. 아울러 그는 “고립 없는 봉쇄”보다 더 적극적인 “압박과 설득”(pressure and persuasion)의 전략을 모색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나아가 아시아의 비(非)공산 국가들이 미국의 지원 아래서 경제 번영과 군사 안보를 확립할 때, 중국이 침략 야욕을 버리고 이념적 고립 상태를 벗어나 국제 사회의 일원이 될 수 있다는 논지를 전개했다. 이후 닉슨의 외교전략이 그대로 담긴 적극적인 데탕트의 청사진이었다. (Richard M. Nixon, “Asia After Vietnam,” Foreign Affairs, Vol. 46, [Oct. 1967]).

 

대통령 취임 이전부터 닉슨은 헨리 키신저에 밀명을 내려 적극적으로 중국과의 대화를 추진토록 했다. 닉슨은 37대 대통령에 오른 직후, 중국과의 국교 수립을 은밀히 추진하기 시작했다. 그는 문혁의 광풍 속에서 만신창이가 된 중국이 소련과의 군사충돌로 외교적으로 고립됐던 바로 그 위기의 모멘트를 파고들었다. 빈곤의 트랩에 빠진 비대한 대륙국가 중국을 슬그머니 당겨서 자유주의 시장경제로 유인하려는 외교 작전이었다.

 

1971년 4월 10일 세계 탁구선수권대회에 참가 차 일본 나고야에 있던 미국의 선수단이 특별 초빙을 받아 베이징을 방문하는 이른바 핑퐁외교의 드라마가 펼쳐졌다. 이어지는 미·중 물밑대화 끝에 닉슨은 1971년 7월 15일 텔레비전 생방송으로 이듬해 중국을 방문할 계획이라 발표했다.

 

< 1972년 2월 21일 베이징에서 1시간가량 진행된 마오쩌둥과 닉슨의 회담. 왼편부터 저우언라이, 통역 탕원성(唐聞生, 1943- ), 마오쩌둥, 닉슨, 키신저/공공부문>

 

1972년 2월 21-28일 중국을 직접 방문한 닉슨은 베이징, 항저우, 상하이를 돌며 전 세계를 놀라게 했다. 2월 21일 닉슨은 중국공산당 총서기 마오쩌둥과 1시간 동안 회담을 했다. 그 짧고도 강렬한 만남으로 닉슨은 한국전쟁 이래 적대적인 미·중 관계를 청산했다. 미국 외교사 최고의 반전(反轉)이자 냉전의 빙하를 녹이는 세계사적 대전환이었다.

 

1972년 2월 21일, 베이징에서 마오쩌둥을 만난 미국의 37대 대통령 리차드 닉슨은 의미심장한 한 마디를 남긴다.

 

“오랜 세월 동안 중화인민공화국에 대한 나의 입장은 마오 주석 및 저우 총리와는 완전히 달랐소. 이제 세계의 상황이 바뀌었음을 인정했기에, 한 국가 내부의 정치철학이 중요한 게 아니라는 점을 이제 우리가 인정하기에 오늘 이 만남이 성사될 수 있었소. 중요한 것은 [한 국가의 정치철학이 아니라] 세계에 향한, 또 우리 미국에 대한 그 나라의 정책입니다.” (<<닉슨회고록 The Memoirs of Richard Nixon>>에서)

 

“정치철학”의 차이 따윈 일단 덮어두고 대외 정책의 유·불리만을 근거로 국가 관계를 재정립하자는 발상이었다. 냉전 시기 이데올로기 대립을 종식하고 실용적인 윈윈의 경제 공존을 모색하는 데탕트 외교 전략의 시작이었다. 닉슨의 이 한 마디가 이후 반세기 미국의 대중 정책을 결정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닉슨의 방중을 성사시킨 반대급부로 마오쩌둥은 미국의 승인을 얻어 유엔 안보위원회에 가입하는 외교적 쾌거를 거머쥐었다. 장제스의 중화민국은 타이완 공화국으로 국명이 바뀌어 구석으로 밀려났다. 닉슨의 적극적 구애 끝에도 마오는 미국과의 국교 정상화 및 경제적 협력 관계의 체결까지 나아갈 순 없었다.

 

결국 마오 사후 2년이 지난 1978년 12월 덩샤오핑은 개혁개방의 시대를 개창했다. 대기근의 참상과 문화혁명의 광기를 겪은 후였지만 중공정부는 공산주의 이념 자체를 비판하거나 폐기하지는 않았다. 대신 레닌주의 정치체제를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을 적당히 뒤섞어서 “중국 특색의 사회주의”라 명명했다. 자본주의와 공산주의는 물과 기름처럼 서로 섞일 수가 없지만, 덩샤오핑은 실사구시(實事求是)를 외치며 “맨발로 미끄러운 강바닥을 조심조심 건너자!” 했다.

 

<1972년 2월 방중 당시 만리장성에 간 닉슨과 그의 부인/ 공공부문>

 

1979년 1월 29일-2월 5일 덩샤오핑은 미국을 방문해 본격적으로 국교 정상화를 추진했다. 그해 3월 1일 워싱턴과 베이징에 양국의 대사관이 설치됐다. 일사천리로 전개된 미·중 관계의 정상화는 좋든 싫든 닉슨 패러다임의 실현이었다. 덩샤오핑은 닉슨의 대중 외교 전략을 붉은 카펫처럼 밟고서 개혁개방의 물꼬를 텄기 때문이다.

 

“미국, 중국의 도광양회 전략에 말려들었다”

2020년 7월 23일 미국 국무부 장관 폼페이오(Mike Pompeo, 1963- )는 캘리포니아 요르바 린다(Yorba Linda)의 닉슨 대통령 도서관/박물관을 찾아 미국 대중정책의 일대 전환을 알리는 의미심장한 연설을 했다. 지난 반세기 미·중 관계를 지배해 온 미국 외교의 기본 노선을 부정하고 비판하기 위함이었다.

 

폼페이오의 연설에 앞서 미국 정부의 중요 인물 3인이 나서서 중국을 먼저 때린 바 있다. 중국을 타격하는 1번 타자는 국가안보고문 오브라이언(Robert O’Brien, 1966- )이었다. 그는 2020년 6월 24일 아리조나주 피닉스에서 “중국공산당의 이데올로기와 글로벌 야심”을 고발했다. 그는 미국의 정가, 학계 및 언론계는 암묵적으로 중국의 경제적 자유화는 중국의 정치적 민주화를 추인한다는 근거 없는 낙관 위에서 2001년 중국을 WTO에 가입시키고, 중국 내 인권유린과 지적 재산권 침해에 눈을 감아왔다며 포문을 열었다.

 

제2번 타자는 FBI국장 레이(Chris Wray, 1966- )였다. 그는 2020년 7월 7일 중국공산당의 첩보행위가 미국에 대한 경제적·안보적 위협”을 경고하면서 놀랍게도 중국이 1억 5천만 미국인의 신상정보를 해킹했다고 발표했다.

 

이어서 법무부장관 바(William Barr, 1950- )가 타석에 들어섰다. 그는 7월 16일 미시간의 포드(Gerald R. Ford) 대통령 기념관에서 세계 경제와 정치질서를 위협하는 중국정부의 전체주의적 야욕을 비판했다. 그는 덩샤오핑의 영악한 “도광양회(韜光養晦)” 전략에 순진한 미국의 전략가들이 말려든 결과, 미국이 전체주의 국가 중국의 경제적·기술적 웅비에 복무하는 어리석음을 범했다고 지적했다.

 

마지막 4번 타석에 들어선 폼페이오는 앞선 3인의 연설이 “지난 수십 년간 쌓인 미·중 사이의 심대한 불균형”을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위한 치밀하게 기획된 이념전의 포탄이라 정의했다. 이어서 그는 미국의 경제, 미국의 자유, 나아가 세계의 자유 민주주의 국가들에 대한 중국의 위협을 구체적으로 설명하면서 중국공산당의 행동방식을 근본적으로 고쳐야 한다고 일갈했다. 그는 중국공산당이 “잠재적 동맹국들을 소외시키고, 국내외의 신뢰 기반을 무너뜨리며, 지적 재산권과 예측 가능한 법의 지배를 거부하는” 등 구소련이 범했던 오류를 반복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미국이 구소련을 붕괴시켰듯 중국공산당의 지배구조를 근본적으로 바꾸겠다는 포부를 드러냈다. 대중(對中) 이념전쟁의 선전포고가 아닐 수 없었다.

 

<2021년 7월 1일 호주 멜번에서 개최되는 반중국 시위의 포스터. 호주에 체류하는 반중 아티스트 “Badiucao” 트윗/ https://twitter.com/badiucao/status/1410090858607628289/photo/1>;

 

이어서 등장한 바이든 행정부의 대중 전략 역시 트럼프 행정부의 전략을 그대로 이어가고 있다는 분석이 최근 미국 언론의 주류를 이루고 있다. 바이든 행정부는 일본, 인도, 호주와 함께 쿼드(Quad) 협의체를 발족시키고, 타이완과의 경제협력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또한 중국 기업에 대한 트럼프 정권의 블랙리스트를 더 확장하고, 틱톡(TikTok)을 포함한 중국 앱(app)에 대한 금수 조치를 이미 강화했다.

 

반세기전 닉슨은 중·소 분쟁의 틈을 파고드는 기민한 쐐기전략으로 냉전의 수렁에서 극빈의 나락에 떨어진 중국을 바깥세계로 끌어당겼다. 자유무역과 경제적 연대가 냉전의 빙하를 녹이고 독재의 발톱을 뭉갠다는 닉슨의 확신은 탈냉전을 종식하는 세계사적 변화를 추인했다. 중국의 경제성장은 그러나 중국 정치의 자유화로 이어지지 않고 있다. 닉슨 방식의 외교 전략은 실효성을 잃었나? 트럼프에서 바이든으로 이어지는 대중 강경노선은 닉슨 패러다임의 종언을 상징한다. 돌이켜보면, “정치철학”은 묻지 않고 “정책”의 유·불리만을 따지는 실용주의 외교노선 역시 냉전 시기의 로맨티시즘이 아닐까. <계속>

 

〈65〉약탈·방화·강간 저지르면서 해방군 자처한 소련군

<1968년 체코슬로바키아 프라하에서 시민들이 소련의 탱크부대를 조롱하며 “파시스트! 고홈!” 등의 구호룰 외치고 있다. https://www.nytimes.com/2018/08/20/world/europe/prague-spring-communism.html

 

마음이 교만한 정치인들은 과거사를 제멋대로 주물러서 세상을 우롱한다. 틈만 나면 그들은 얕은 지식을 끌어와 역사의 맥락에서 벗어난 허황된 주장을 마구 펼친다. 이념의 “죽창”을 휘두르는 그들은 늘 목소리가 격하고 눈초리가 사납다. 오도된 확신일까? 정치적 연막일까? 결국 “내 편 네 편”을 갈라 정치적 편익을 취하는 얄팍한 선동의 기술일 뿐이다.

 

얼마 전 한 인사가 고교생들을 향해 1945년 8월 한반도에 진입한 소련군은 해방군이며 미군은 점령군이라 부르짖었다. 그 주장의 근거란 게 고작 당시 북한을 점령한 소련군 극동 25군 사령관 치스차코프(Ivan Chistyakov, 1900-1979)의 포고문이었다. 요즘은 초등학생도 소련군의 프로파간다만 보고 “소련군=해방군”이라 단정하진 않는다. 그 당시 스탈린(1878-1956)이 자행했던 대규모 정치탄압, 계급학살, 종족몰살(genocide), 대민테러의 사례를 익히 듣고 읽어서 알기 때문이다. 하물며 미적분 문제를 척척 푸는 고교생임에랴.

 

점령, 적국 군대의 무장을 해제하고 항복을 접수하는 일

소련군을 해방군이라 미화하는 세력은 언필칭 미군을 “점령군”이라 비난한다. “점령”이란 한국어 단어의 부정적 함의를 오용해서 미군이 남한을 식민지 삼으려 했다고 둘러치는 교묘한 선동에 불과하다.

 

1945년 8월 일제 패망 직전 미·소는 공히 1945년 2월의 얄타협정에 따라 남·북한 영토의 점령을 서둘렀다. 여기서 ‘점령’이란 이국 군대가 한 나라의 영토에 들어가 그 나라를 지배하는 적국 군대의 무장을 해제하고 항복을 접수하는 “군사 점령(military occupation)”을 의미한다. 침략, 침공과는 달리 ‘점령’이란 단어 자체엔 침탈, 식민화 등의 부정적 함의는 없다. 그 자체는 그저 객관적이고 중립적인 군사적 개념일 뿐이다.

 

<1968년 체코슬로바키아의 수도 프라하에서 소련군에 맞서는 한 청년/ https://www.nytimes.com/2018/08/20/world/europe/prague-spring-communism.html>;

 

70년 소련의 역사를 돌아보면, 소련군은 수많은 나라들을 점령했다. 어느 나라를 점령하든 소련군은 늘 “해방군”을 자처했다. 그들이 부르짖는 “해방”이란 제국주의 지배체제를 허물고 부르주아 계급의 착취구조를 무너뜨린다는 판에 박힌 마르크스-레닌주의의 구호일 뿐이었다. “해방”의 선전과는 달리 소련군이 가는 곳엔 약탈, 방화, 강간, 학살 등 수많은 반인류적 범죄가 끊이지 않았다.

 

중공 정부 말단 관원도 소련군을 해방군으로 미화하지 않아

구체적 사례를 보자. 볼셰비키 혁명 직후 소련군은 우크라이나 침공(1917-1920)을 감행했다. 그 결과 10년 쯤 지나 우크라이나에선 수백만에서 최대 1천만 명이 아사하는 홀로도모르(holodomor)의 참상이 벌어졌다. 그밖에도 트로츠키와 스탈린 등이 이끈 폴란드 침공(1920), 스탈린 주도의 조지아 침공(1921), 독·소 비밀 조약 이후 폴란드 침략(1939),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 핀란드 침공(1939-1940), 영·소 합동 작전의 이란 침공(1941), 자유화 운동을 탱크로 짓밟은 헝가리 부다페스트 침공(1956), 프라하의 봄을 빼앗은 체코슬로바키아 침공(1968), 8년에 걸쳐 50만에서 200만의 인명 피해를 낳은 아프가니스탄 침공 (1979-1989) 등등 “해방”의 깃발을 들고 인민의 자유를 짓밟는 소련군의 만행은 끊임없이 이어졌다.

 

현재 중공 정부의 말단 관원도 소련군을 해방군으로 미화하는 우(愚)를 범하진 않는다. 1945년 8월 9일부터 파죽지세로 만주에 진입했던 소련군의 반인류적 범죄 실상을 잘 알기 때문이다. 만주로 진격한 소련군은 잔류하던 일본 민간인 아녀자 1천여 명을 비참하게 강간·살해하는 이른바 “거건먀오(葛根廟, 갈건묘)” 대학살을 일으켰다. 이어서 소련군은 랴오닝의 선양(瀋陽)에서 사흘간 법망을 완전히 벗어나 강간, 약탈, 방화 등 반인류적 범죄를 이어갔다. 소련군의 만행을 참다못한 하얼빈 시민들은 “홍색(紅色) 제국주의 타도”의 구호를 외치며 저항할 정도였다.

 

<1945년 8월 만주의 하얼빈을 점령한 소련군의 모습/ 공공부문>

 

북 진격한 소련군 강간 약탈에 신의주 시민 시위..100여명 학살당해

1945년 북한으로 진격한 소련군이 갑자기 순한 양떼로 돌변했을 리 없었다. 강간, 약탈 등 두 달 넘게 이어진 소련 점령군 병사들의 비행과 만행에 격분한 신의주 시민들과 학생들은 1945년 11월 23일 소련군의 총탄을 맞서며 격렬한 시위를 벌였다. 소련 측 군사보고서에 따르면, 그날 100백여 명의 학생들이 학살당했고, 700여명이 부상을 입었다.

 

1945년 8월 미국은 일제 치하의 한반도 38선 이남을 점령했고, 소련은 이북을 점령했다. 미·소 분할점령의 결과 남한엔 미국식 자유민주주의 체제가 이식됐고, 북한엔 스탈린식 공산 전체주의 정권이 들어섰다. 개개인이 누리는 인간의 기본권과 경제수준을 보면, 남한은 이미 “해방”됐지만, 북한은 여전히 “해방”되지 못하고 있다. 국제사회의 모든 지표가 웅변하는 세계인의 상식이다.

 

그럼에도 몽매한 정치인들은 특정의 과거사를 함부로 오려내선 맘대로 찢고, 가르고, 짜고, 깁고, 섞고, 엮고, 깎고, 비틀고, 부풀리고, 우려먹고, 튀겨먹는 교활한 날조, 허황된 조작을 이어간다. 그들은 왜 그토록 역사왜곡과 거짓선동에 몰두할까? 1971년 1월 중공 최고의 영도자 마오쩌둥이 갑작스레 개진한 “비림비공(批林批孔)” 운동 속에 그 해답이 엿보인다.

 

<1950년 경 북한 지역에서 한 미군이 벽에 걸린 스탈린의 초상화를 가리키며 웃고 있다/ 공공부문

 

비림비공 운동, 린뱌오를 비판하고 공자를 비판하라!

중공서열 제2위로 마오쩌둥의 후계자로 지목됐던 린뱌오는 1971년 9월 13일 가족과 함께 소련으로 망명하던 중 추락사했다. 거의 3년 반이 지난 1974년 1월 18일, 마오쩌둥은 린뱌오와 공자(孔子)를 동시에 비판하는 기상천외한 정치운동을 개시했다. 이른바 “비림비공” 운동이었다.

 

한(漢)나라 무제(武帝, 재위 기원전 141-87)가 유가오경(儒家五經)을 제국의 이념으로 채택한 이래 공자는 인의예지(仁義禮智)의 보편가치를 선양하는 상징적 인물로 존숭돼 왔다. 전근대 중국의 역사를 싸잡아 해방 이전의 봉건시대라 규정하는 중국 마르크스주의의 단선적, 기계적, 이분법적 역사관에 따르면, 공자는 지주계급의 이익을 대변하는 “봉건”적 지배이데올로기의 아이콘이다.

 

문화혁명 당시 홍위병들은 “낡은 사상, 낡은 문화, 낡은 풍속, 낡은 습관”을 박살내자는 “파사구(罷四舊)”의 구호 아래 전통시대 유산을 근본적으로 청산하려 했다. 중국의 각지에선 공묘(孔廟)와 관련 문물을 조직적으로 파괴하는 반달리즘(vandalism)의 광풍이 일어났다. 1966년 12월 산둥성 취푸(曲阜)에 몰려간 홍위병들은 공자의 유골을 훼손하기 위해 무덤을 파헤치고 유물을 대량으로 훼손했다.

 

물론 문혁 시절 제2인자였던 린뱌오는 파사구의 광풍을 부추기고 주도했던 선전선동의 핵심 인물이었다. 그런 린뱌오가 놀랍게도 공자와 함께 비판을 당하는 급반전의 막장 드라마가 펼쳐졌다. 린뱌오가 공자와 동급으로 비판당한 이유는 과연 무엇일까? 그들은 과연 어떻게 린뱌오와 공자를 엮는 역사의 마술을 부렸을까?

 

<1974년 비림비공 운동의 포스터, “넓고 깊게 비림비공의 투쟁을 전개하라!”/ 공공부문>

 

린뱌오가 죽고 나서 그의 가택이 초토화됐다. 이른바 “초가(抄家)”의 과정에서 집안 한 구석에 숨겨져 있던 현판이 하나 발견됐다. 그 현판 위엔 “극기복례(克己復禮)”란 네 글자가 씌어 있었다. <<논어(論語)>><안연편(顔淵)>편에 등장하는 “극기복례”는 개개인의 사리사욕을 극복하고 공명정대한 보편가치를 실현하라는 공자의 가르침이다. 2천 년 내내 널리 쓰여 중국인의 입에 속담처럼 달라붙은 바로 그 글귀가 “비림비공”의 도화선이 됐다.

 

린뱌오 집에 있던 ‘극기복례(克己復禮)’ 현판이 도화선

1974년 2월 중공중앙의 기관지 <<홍기>>에는 “베이징대학, 칭화대학 대비판조”가 작성한 “린뱌오와 공맹지도(孔孟之道)”란 제목의 격문이 실렸다. 유명 대학 학생들의 입을 빌었지만, 마오쩌둥의 지시에 따라 장칭의 사주로 급히 작성된 “비림비공” 운동의 선언문이었다.

 

“린뱌오가 거주하던 검은 소굴엔 도처에 유가 사상의 쓰레기가 널려 있었고, 공학(孔學)의 썩은 내음이 진동했다. 갈수록 더 많은 사실이 증명하듯, 반동적인 공맹지도가 바로 린뱌오 수정주의의 중요한 원류였다. 린뱌오 일당은 정치상 자본주의 복원에 힘썼을 뿐만 아니라 사상적으로도 당의 이론적 기초를 바꾸려 했다. 또한 조직적으로 투항자를 부르고 배신자를 받아들여 사당(死黨)을 결성하고 반혁명의 대오를 규합하여 책략 상 크게는 반혁명 양면작전을 구사하며, 음모의 궤계(詭計)를 썼는데, 공맹지도에 기대고 매달렸다.”

 

이어서 이 격문은 “극기복례”가 “노예제를 되살리려 했던 공자의 반동 강령”이라 규정한 후, 공맹의 가르침을 따르는 린뱌오는 “자본주의를 되살리려 한 늑대 같은 야심가”라 비판한다. 공자가 노예제의 복원을 희구했듯 린뱌오는 자본주의의 복구를 염원했다는 주장이다. 린뱌오는 류샤오치가 주자파로 몰려 숙청된 틈에 제2인자의 지위에 오른 문혁 최대의 수혜자였다. 린뱌오가 왜 공자를 숭배하며 자본주의를 되살리려 했을까? 문혁을 직접 겪었던 그 어떤 중국인도 납득할 수 없었다. 린뱌오를 공자의 제자로 모는 언어는 그만큼 허황되고 일방적이었다.

 

<1971년 “군민 비림비공 대회”/ 공공부문>

 

“린뱌오는 공자의 천명론, 천재론을 이용해서 유물론에 반대하고, 중용(中庸)의 도를 이용해서 유물변증법에 반대하고, 유가의 ‘덕(德), 인의(仁義), 충서(忠恕)’를 이용해서 마르크스주의 계급론에 반대하고, 변증유물론과 역사유물론에 대항해 전면적인 공격을 퍼부었다.······ 유가가 선양하는 인성론(人性論)은 일종의 허위의 유심주의 이론이며, 선험(先驗)의 초계급적 인성을 의미한다. 공자가 말하는 ‘어진 마음(仁心)’은 사람을 사랑하는 것(愛人)이며, 맹자가 말하는 어진 마음은 나면서 절로 있는 사람의 성선(性善)을 의미한다. 그들은 진정 계급을 가리지 않고 모두를 사랑했던 사람들이었나? 가당치도 않다.······ 수정주의자의 우두머리 린뱌오의 무리가 공자를 존숭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거기엔 심각한 계급적, 역사적 근원이 있다.······ 우리는 반드시 마오 주석과 당 중앙의 영도 아래서 철저한 무산계급 혁명정신을 발양하고, 비림비공 투쟁의 새로운 승리를 쟁취해서 마르크스주의, 레닌주의, 마오쩌둥 사상이 영원히 무산계급의 사상 진지를 점령할 수 있게 해야 한다!”

 

린뱌오는 문혁 내내 “마오쩌둥 어록”을 편찬해서 전국의 마오쩌둥 인격숭배를 주도했던 인물이었다. 그런 린뱌오가 창졸간에 공자의 숭배자로 둔갑했다. 그 혹독한 비판의 근거는 “극기복례”의 현판 하나였다. 1971년 시작된 “비림비공”의 돌풍은 최소 반년 간 수그러들지 않았다. 앞으로 살펴보겠지만, 이 음험한 정치운동의 실제 표적은 서주(西周) 시대 주공(周公)에 비견되던 저우언라이(周恩來, 1898-1976)였다.

 

못된 정치가들은 상습적으로 역사를 악용한다. 역사학이 정치에 복무할 때 어김없이 “비림비공”의 코미디가 연출된다. 소비에트 프로파간다를 근거로 소련군을 “해방군”이라 부르짖는 촌극과 다르지 않다. 그 모두가 배운 무식자(learned ignoramus)의 견강부회(牽强附會)다. 영어의 표현을 빌면, “우리 지성에 대한 모독이다(an insult to our intelligence).” <계속>

 

〈66“중화민족 부흥”… 문혁 때 죽였던 공자 다시 불러낸 까닭은?

<1974년 경 비림비공 운동의 포스터. 린뱌오가 공자를 안고 쓰러져 있는데, 뒤에 “극기복례(克己復禮)”의 현판이 있다. “린뱌오와 콩라오얼(孔老二, 공자의 비칭)을 철저히 비판하라!”/ 공공부문>

 

문혁 시기 중국의 관변학자들은 공자(孔子, 기원전 551-479)를 노예제의 복원을 희구했던 노예주의 대변인이라 비판했다. 그들은 공자를 “공씨 둘째 아들” 쯤을 의미하는 “콩라오얼(孔老二)”이라 불렀다. “콩라오얼의 추악한 면모” “콩라오얼의 죄악(罪惡) 일생” “콩라오얼 죄악사(罪惡史)” 등등 문혁 시대의 정치 포스터뿐만 아니라 아동용 만화도 공자를 역사의 죄인으로 몰고 갔다.

 

문혁 이후 만신창이로 내버려졌던 공자는 2000년대 중반부터 중국공산당의 부름을 받고 다시 살아났다. 2008년 베이징 올림픽 개막식 스타디움에서 아이들이 세계를 향해 외친 한 마디는 바로 “유붕자원방래 불역낙호(有朋自遠方來 不亦樂乎! 멀리서 친구가 오니 즐겁지 아니한가!)”라는 “공자님 말씀”이었다. 이후로 공자는 “중화민족”의 정신적 스승으로 숭상되고 있다.

 

중공정부는 대체 왜 공자를 되살려야만 했을까? 마르크스-레닌주의와 마오쩌둥 사상만으로는 14억의 다민족 국가를 다스리기 버거웠나? 경제규모 세계 2위의 대국에 걸맞은 소프트 파워가 필요했나? “중화민족의 부흥”을 위해선 새로운 중화주의의 이념이 필요했나?

 

<2010년도 6월 20일 당시 부주석이었던 시진핑은 호주 왕립 멜번 공과대학에서 중의학 공자학원 설립의 제막식을 거행하고 있다./ Foreign Policy>

 

시진핑, 집권 전부터 유가 부흥운동 추진

현 중국공산당 총서기 시진핑(習近平, 1953- )은 비림비공(批林批孔) 운동이 전국적으로 개시되던 1974년 1월 아홉 번의 실패 끝에 중국공산당에 입당했다. 이듬해 그는 공·농·병(工·農·兵) 학원(學員)의 자격으로 지방 영도자의 추천을 받아 칭화(淸華)대학에 입학했다. 그는 누구보다 공자를 역사의 악인으로 몰아가던 당시의 분위기를 잘 기억하고 있을 터다. 그럼에도 그는 집권 전부터 작심한 듯 유가(儒家) 부흥운동을 추진했다.

 

2014년 9월 24일 공자 탄신 2565년 국제학술 연구토론회에서 시진핑은 “공자와 유학의 연구는 중국인의 민족특성을 인식하고, 오늘날 중국인의 정신세계의 역사적 유래를 인식하는 중요한 길”이라고 말한 바 있다. 시진핑의 강력한 후원 아래서 중국 교육부는 2019년까지 6대륙의 수십 개 국에 530개의 “공자학원”을 설립했으며, 조속히 그 숫자를 1000개로 확대한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중공 정부의 지원 하에 공학(孔學, 공자의 가르침)이 ‘중국 특색의 사회주의’와 접붙은 어색한 상황이다. 과연 유학이 마르크스-레닌주의와 마오쩌둥 사상과 조화롭게 공존할 수 있을까?

 

<2020년 8월, 캐나다 토론토에서 거행된 공자학원 반대 시위/ twitter.com>

 

마오쩌둥 사상과 유학이 공존할 수 있나

물론 공자는 중화문명의 상징적 인물이다. 그는 2500년 전 춘추시대 노나라에 태어나 수신(修身)의 방법과 선정(善政)의 원리를 간명하고 진솔한 언어로 설파했다. 그의 행적이 담긴 <<논어(論語)>>는 동아시아 각국에서 성경처럼 읽혔다. 그가 편찬·정리했다는 유교의 고경(古經)은 중화제국 및 동아시아 제국(諸國)의 국가이념이 됐다. 그의 행적은 동아시아 사인(士人)들의 귀감이 되었고, 그의 혼령은 공묘(孔廟)에 배향됐다.

 

그가 설파한 인·의·예·지(仁·義·禮·智)는 국경을 넘고 문화를 가로지르는 인류의 보편가치라 할 수 있다. 오늘도 공자는 석가모니, 소크라테스, 예수와 함께 기축시대(the Axial Age) 4대 성인(聖人)으로 칭송되고 있다.

문제는 불과 40-50년 전 중국공산당이 공자를 불러내 역사의 법정에 세워놓고 헐뜯고 깨물고 짓밟았다는 사실이다. 그 역사의 법정에서 공자의 변호인은 단 한 명도 없었다. 그 역사의 법정에 나선 모두가 피고인 공자를 매도하고 폄훼하고 타격했다. 마오쩌둥은 중국의 역사에서 암세포 도려내듯 공자의 유산을 청소하려 했다.

 

그 모든 과정이 날마다 매스컴을 타고 전국의 모든 인민에게 보도됐다. 공자는 “비림비공”의 구호 아래 회생불능의 타격을 입는 듯했다. 공자 비판은 곧 유가 비판으로 확산됐다. 이어서 법가를 재평가하고 유가를 비판하는 “평법비유(評法批儒)” 운동이 일어났다. 이때부터 중국철학사는 “유법투쟁(儒法鬪爭, 유가와 법가의 투쟁)”으로 해석됐다. 물론 그 배후는 최고영도자 마오쩌둥이었다.

 

마오쩌둥 “유가, 입으로만 인의도덕 외치며 역사의 시계 거꾸로 돌려”

마오쩌둥은 적대세력에 대해선 비타협, 불관용, 무자비의 원칙으로 일관했던 공산-근본주의자(communist fundamentalist)였다. 그는 또한 무산계급의 혁명 의지에 불을 지피면 단시간에 역사적 비약을 이룰 수 있다고 믿었다. 오늘날 중국헌법의 이념적 기초로 명기된 “마오쩌둥 사상”이란 공산-근본주의와 돈키호테적 낭만주의(Quixotic Romanticism)의 결합이 아닐까?

 

1950-60년대 내내 마오쩌둥은 “제국주의,” “봉건주의,” “관료-자본주의,” “수정주의”와 투쟁했다. 그런 그의 심리 밑바탕엔 극단적 이분법과 적·아(敵·我)의 구분이 깔려 있었다. 그가 구사한 이분법은 속류 마르크시즘의 “유물변증법”에 기초하고 있었다. 스탈린 시대 “소비에트 유물변증법”에 따르면, 모든 철학의 문제는 “의식과 존재”의 관계로 환원된다.

 

철학적 테제로서 엄밀성은 떨어지지만, 그 정치적 함의는 명료하다. 공자, 맹자, 칸트, 헤겔 등등 그 어떤 사상가가 무슨 사상을 설파했든, 그 누구도 자신의 계급적 한계를 벗어날 수 없다는 주장이다. 유물변증법에 따르면, 인간은 누구나 계급의 대변자며, 구조의 수인(囚人)일 수밖에 없다. 한 사람의 존재(계급, 재산 등)가 그들의 의식(정치성향, 가치관)을 미리 결정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변증유물론의 관점에서 공산주의 이론가들은 세계철학사를 무산계급을 대변하는 진보적 “유물론” 대 착취계급을 대변하는 반동적 “관념론”의 투쟁으로 묘사한다.

 

 

<1978년 베이징 시가 풍경: “마르크스주의, 레닌주의, 마오쩌둥 사상 만세!”/ 공공부문>

 

중국의 관변 철학자들 역시 중국사상사의 전 과정을 “유물론(唯物論)”과 “유심론(唯心論)”의 대립투쟁으로 해석했다. 이들의 관점에 따르면, 유물론은 근로대중의 이익을 대변하며 유심론은 착취계급의 이익을 대변한다. 인류의 역사를 선(善)의 진영과 악(惡)의 진영 사이의 대립·투쟁으로 파악하는 마니교적 이분법(Manichaean dichotomy)이었다.

 

1973년 8월 5일 마오쩌둥은 중국 역사에서 전개됐던 “유법투쟁(儒法鬪爭)”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역대로 어떻게든 행동을 하고 무슨 일이라도 성취한 정치가는 모두 법가였다. 그들은 법치를 주장했으며, 후금박고(厚今薄古, 현대를 중시하고 고대를 경시)했다. 유가는 입으로만 노상 인의도덕을 외치면서 후고박금(厚古薄今)을 외쳤으니, 그들은 역사의 시계를 거꾸로 돌렸다.” (<<毛澤東年譜 1949-1976>> 第6卷, 490)

 

마오쩌둥답게 2천 년 중국사의 가치 체계를 180도 뒤집는 발상이었으나 새로운 건 아니었다. 이미 1920년대 “5.4운동” 때부터 공자 비판은 이미 거세게 일었다. 1937년 4월 29일 현대중국 문학의 거장 루쉰(魯迅, 1881-1936)은 공자를 비판하면서 “중국의 우민들처럼 그렇게 공자를 이해하는 자들은 아마도 세계 어디에도 없을 듯하다”고 적은 바 있다. 20세기 초부터 중국의 지식인들은 경전의 기록을 의심하고 검증하는 이른바 “의고풍(擬古風)”에 휩싸여 있었다. 중화제국의 몰락은 곧 공자로 상징되는 유교적 세계관의 붕괴를 의미했다. 그러한 맥락에서 문혁 시기 공자 비판은 20세기 초부터 진행된 의고풍이 최극단이었다.

 

문혁 당시 관변학자들 “공자는 노예제를 지키려했던 사상가”

문혁 당시 중국의 역사학자들은 공자를 노예주의 대변인이라 비판했다. 역사학자들뿐만 아니라 전국 각지의 공장 및 노동현장에서 고된 노동을 마친 후 마오쩌둥 사상과 혁명의 이론을 공부했던 전국 각지의 노동자 집단도 집체적인 공자 비판에 나섰다. “비림비공” 운동이 한참이던 1974년 중공중앙의 기관지 <<홍기>>제1기에 실린 그들의 주장을 소략하게 소개하면·······.

 

“공자는 완고하게 노예제를 지키려 했던 사상가였다.” “공자의 모든 언동은 노예 해방의 위대한 역사적 흐름에 정면으로 맞부딪혔다.” “공자는 복고적이고 퇴행적인 정치적 입장 때문에 노예들에게 맹렬한 공격을 받았다.”

 

“[공자가 되살리려 했던] 주도(周道)란 서주 노예제 전성시기 주공이 건립한 일련의 제도다. 노예제가 몰락하던 시기, 공자는 망령되이 역사의 발전을 막고, 주도(周道)를 회복하려 했다.” “공자는 멸망한 노예제 국가를 부활시키고 단절된 노예주의 세습을 기도했다.”

 

“공자는 <<춘추>>를 편찬하여 여론상 노예주 계급의 반혁명적 전정(專政)을 강화하려 했다.” “공자는 노예에 대한 노예주의 착취와 억압을 지키기 위해 역사 왜곡을 극진히 했다.” “공자는 몰락한 노예주 계급을 대표해서 역사를 왜곡하는 악랄하고 용렬한 선례를 개창했다.”

 

물론 <<논어>> 어디를 읽어 봐도 공자가 명시적으로 노예제도를 옹호하거나 노예제도의 회복을 주장한 대목은 없다. 그럼에도 당시의 지식인들은 공자가 노예제를 옹호한 역사의 반동임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 이유는 간단했다.

 

당시 중국의 역사학자들은 마르크스의 5단계 역사발전론을 기계적으로 중국사에 적용한 결과였다. 그들의 도식에 따르면, 주공(周公)이 통치하던 서주(西周)는 노예제 사회였다. 이어지는 춘추시대는 대규모 농민 봉기의 빈발로 노예제가 급속하게 와해되던 급변기였고, 전국시대는 대지주의 봉건제가 노예제를 대체했다.

 

<1974-6년 경 중국의 포스터: “유가와 법가의 투쟁사를 연구하여, ‘비림비공’을 더욱 심화하자!”/ 공공부문>

 

춘추시대의 혼란기를 살았던 공자는 오매불망 주공을 흠모하며, 주공이 세운 서주의 예제(禮制)를 되살리려 했다. 마르크시즘의 도식에 따르면, 주공의 예제란 다름 아닌 노예제 사회의 신분질서 및 정치체제에 불과했다. 그러한 관점에서 중국의 지식인들은 공자가 급속하게 무너지는 노예제의 복원을 시도했다고 맹렬한 비난을 퍼부었다.

 

전국시대의 맹자(孟子, 대략 372-289) 역시 노예제 옹호자의 오명을 써야만 했다. 당시 중국의 학자들에 따르면, “어진 정치(仁政)”의 이상도 맹자가 노예제를 복원하려는 역사적 반동(反動)의 구호였다. 맹자 역시 계급 모순이 첨예하던 전국시대에 산발적으로 일어나던 농민 봉기의 현실은 외면한 채 제후들만 보고 “어진 정치”만을 설파했다. 노예주 제후들을 향해 “어진 정치”를 설파한 맹자를 과연 노예주의 대변이라 부를 수 있을까? 문혁 시기엔 그러한 의문 제기조차 반혁명 행위로 간주됐다.

 

“유학, 천하를 다스리는 원리... 공자는 중화민족의 정신적 스승”

오늘날 중국에선 문혁 시절 전국을 도배했던 계급투쟁, 영구혁명 등의 구호는 좀처럼 찾아볼 수 없다. 대신 중국공산당은 부강(富强), 화해(和諧), 평화 등을 최고 가치로 내세우고 있다. 이에 부응해 중국의 연구자들은 유학을 천하를 다스리는 “치리(治理, governance)”의 원리로 재해석하고 있다. 한때 노예주의 대변인으로 매도됐던 공자가 중국공산당의 후원 위에서 “중화민족”의 정신적 스승으로 재평가되고 있다.

 

<산둥성 취푸에 건립된 세계 최대의 공자상(孔子像), 높이 72미터/ 공공부문>

 

공자의 극적인 부활은 역설적으로 마르크스-레닌주의와 마오쩌둥 사상을 내건 중국공산당의 이념적 위기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오늘날 중국은 세계 최고의 빈부격차와 도농차이를 보인다. 중국공산당은 유가의 화해(和諧)와 치리(治理)를 전면에 내세워 계급투쟁과 사회갈등을 무마하려 한다. 공자를 죽이든 살리든 중공 정부는 변함이 없다. “중화민족의 부흥”의 깃발을 들고 유교를 선양(宣揚)하지만, 속셈은 “공산당 일당독재”의 강화일 뿐이다. <계속>

 

〈67소수민족 겁주고 옥죄는 봉쇄 전략...‘중화민족’은 누구인가

<“초원 인민들은 열렬히 화궈펑(華國鋒, 1921-2008) 주석을 옹호합니다!”1976년 문혁이 막을 내린 후, 화궈펑을 지지하는 네이멍구 몽고족의 모습/ 공공부문>

 

1996년 여름 네이멍구(內蒙古, 내몽골)의 후허하오터(呼和浩特)시 교외의 한 라마교 사원을 방문했을 때, 필자는 법전(法殿) 앞에 진열된 오백 나한상(羅漢像)의 코들이 하나 같이 모두 깨져 있는 참혹한 장면을 목격했다. 1967년 베이징에서 몰려 온 홍위병들의 만행이라고 가이드가 설명했다.

 

중국 정부의 공식통계에 따르면, 문혁 시절 네이멍구에선 34만6000명의 몽고족이 구속됐고, 그 중에서 2만7900명이 처형됐다. 1981년, 네이멍구의 당서기 저우후이(周惠)는 문혁 당시 79만 명의 몽고족이 구속되거나 밀실에서 조사를 받았다고 폭로했다. 1989년 발표된 네이멍구 공산당위원회의 자료에 따르면, 희생자의 총수가 48만 명에 달했다. 서구 학자들의 추산에 따르면, 50만 이상이 구속되어 10만 명이 목숨을 잃었다. 아마도 피해자의 총수는 영원히 안 밝혀질지도 모른다.

 

대약진운동(1958-1962)과 문화혁명(1966-1976)은 네이멍구 뿐만 아니라 중국의 모든 소수민족들에겐 끔찍한 악몽의 시간이었다. 마오쩌둥이 계급투쟁을 강조할수록 소수민족 고유의 전통과 문화는 설 자리가 좁아졌다. “계급투쟁”은 소수민족의 전통적 생활양식을 송두리째 뒤흔들었다. 그런 점에서 문화혁명은 전국 각지에 산재하는 소수민족들을 겁주고 억누르고 옥죄고 아우르는 중국공산당의 “봉쇄 전략(containment strategy)”일 수도 있었다.

 

<티벳의 수도 라싸로 몰려간 홍위병들은 “파사구(罷四舊)”의 구호를 외치며 라마교 고찰(古刹)의 유물들을 송두리째 파괴했다./ https://tibetmuseum.org/revisiting-the-cultural-revolution-in-tibet/>;

 

중국 현대사의 최대 난제 “통일된 다민족 국가”

오늘날 중화인민공화국은 강력한 중국공산당 정부가 중앙집권적으로 통치하는 극히 예외적인 ‘대륙 국가’(continental state)로 남아 있다. 2010년 통계에 따르면, 중국인의 91.51% (대략 12억 정도)이 한족(漢族)으로 집계되고 나머지 8% (1억 5백 만 정도) 이상이 55개 소수민족으로 분류된다.

 

기원전 221년 최초의 통일을 이룬 후, 역대의 중화제국은 적어도 “중국 본토(China proper)” 내에서는 통일 정부의 성립을 지향했고, 장시간에 걸쳐 단일한 행정체제를 유지해 왔다. 1790년 청 제국은 지속적인 팽창 및 병합의 과정을 거쳐 만주, 몽고, 신장, 티베트를 포함하는 1470만 평방킬로미터의 광활한 영토를 확보했다. 최후의 유목제국을 세운 준가르족(族)처럼 청나라 군대에 도륙당해 소멸된 민족도 있지만, 다수의 소수민족은 청 제국의 마지막까지 상당한 자치권을 유지하고 있었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전 세계 식민지 민중들 사이에서는 미국의 28대 대통령 윌슨(Thomas Woodrow Wilson, 1856-1924)이 제창한 민족자결주의가 널리 퍼져나갔다. 1911년 공화혁명으로 청 제국이 해체된 직후였다. 민족자결주의에 따르면, 티베트족, 위구르족, 몽고족, 만주족은 스스로 단일민족에 의한 독립적 민족국가를 세울 수 있는 천부(天賦)의 권리를 갖는다. 공화혁명을 통해 등장한 신생의 민국(民國)은 통일정부 근처에 이르지도 못했는데, 전국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수많은 군벌들이 출현해 대규모 전쟁을 벌이던 때였다. 만약 전국의 소수민족들이 민족자결의 원칙에 따라 독립국을 세운다면, 한족 중심의 중국 영토는 전성기 청 제국 영토의 절반 이하로 축소될 판국이었다.

 

돌이켜 보면 현대 중국사의 최대 난제(難題)는 청(淸)제국으로부터 물려받은 다민족의 방대한 영토를 “통일된 민족국가(民族國家, nation-state)”로 재편하는 일이었다. 사회주의 혁명을 내걸고 계급투쟁을 고취한 중국공산당의 입장에서도 계급모순보다 민족모순이 더 긴박하고 절실한 문제였을 수 있었다.

 

민족 모순 문제...소수민족 결속하려 ‘중화민족' 내걸어

1950년대 중공 정부는 스탈린의 ‘민족’ 기준에 따라 여러 소수민족들을 분류하기 시작했다. 1964년 중공정부는 중국에 존재하는 53개 소수민족의 실체를 인정했고, 이후 두 개의 소수민족이 추가됐다. 또한 중공 정부는 지속적으로 소수민족의 자치구를 늘려갔다.

 

< 낡은 유물들을 모두 모아놓고 불을 지르는 문혁 시기 홍위병의 모습/ 공공부문>

 

1947년 5월 네이멍구자치구가 처음 만들어진 후, 1990년까지 157개의 크고 작은 자치 단위가 들어섰다. 현재 중국엔 네이멍구자치구, 신장위구르자치구(1955), 광시(廣西)장족(壯族)자치구(1958), 닝샤(寧夏)회족자치구(1958), 티베트 자치구(1965) 등 다섯 개의 성(省) 단위 자치구가 만들어졌다.

 

건국 당시부터 소수민족 문제는 신생 “중화인민공화국”의 존폐를 결정하는 중대사였다. 과연 56개 민족들을 결속해서 14억 인구의 통일 국가를 유지하는 가장 효율적 방법은 무엇일까? 마침내 중공정부가 찾은 가장 쉽고도 효과적인 해답은 “중화민족(中華民族)”의 재건이었다.

 

<“중국의 소수민족 분포도”/ https://blog.richmond.edu/livesofmaps/2017/03/03/the-map-of-chinas-ethnic-groups/>;

 

시진핑, 중국공산당 100주년 연설서 “중화민족” 44회 밝혀

2021년 7월 1일 중국의 시진핑(習近平, 1953- ) 주석은 “중국공산당 성립 100주년 대회”에서 200자 원고지 40장을 넘는 장문의 강화문(講話文)를 낭송했다. 전문에 걸쳐 시 주석은 “중화민족”을 44회, “중국인민”을 32차례, “전국 각족(各族, 각각의 민족) 인민”을 네 차례 사용했다. 비슷해 보이지만, 이 세 단어는 엄격히 다른 정치적 의미를 갖는다.

 

오늘날 중국 헌법 서언(序言, 전문)엔 “중화인민공화국은 ‘전국 각족 인민’이 공동으로 창조한 통일적 다민족 국가”라 명기돼 있다. “전국 각족 인민”이란 중국 전역에 흩어져 살고 있는 56개 민족의 구성원들을 지칭한다. 반면 “중국인민”은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을 세우고 “국가 권력을 장악한” 주권자를 의미한다. “전국 각족 인민”은 “통일적 다민족 국가”의 구성원을 지칭하는 종족적(ethnic) 개념인 반면, 중국인민은 중화인민공화국의 공민을 가리키는 정치적 개념이다. 동전의 양면처럼 양자는 중국인의 두 가지 정체성을 보여준다.

 

문제는 “중화민족”의 모호한 의미다. 중화인민공화국이 “통일적 다민족 국가 “인데, “중화민족”은 대체 무슨 뜻일까? 중화대륙에 살고 있는 한족, 장족(壯族, 1692만), 회족(回族, 1058만), 만주족(1038만), 위구르족(1007만), 묘족(苗族, 942만)은 공히 “중화민족”의 구성원이다. 한국인 모두가 “우리 민족”이라 굳게 믿고 있는 조선족(233만) 역시 “중화민족”의 구성원이다. 중국밖에 거주하는 해외 다양한 중국계 화교도 모두 “중화민족”의 핏줄이다. 요컨대 중화민족이란 초민족적인 “중국인”의 집합체 정도를 의미한다.

 

2018년 헌법 수정안에 “중화민족의 위대한 부흥” 삽입

그런 논리대로라면, 유럽인 모두를 지칭해 “유럽민족”이라 부르고, 다인종의 미국이 미국인 모두를 지칭해 “아메리카 민족”이라 부를 수도 있다. 물론 오늘날 중국에선 그 누구도 유럽인 전체를 “유럽민족”이라 부르거나 미국인 전체를 “아메리카민족”이라 부르지 않는다. 그럼에도 중국의 영도자들은 거리낌 없이 초민족적 “중화민족”의 개념을 주야장창 상용한다.

 

급기야 2018년 3월 11일 “중화인민공화국 헌법 수정안”은 헌법 전문에 분명하게 “중화민족의 위대한 부흥을 실현한다!”는 구절이 삽입하기로 결정했다. 그 전엔 단지 “부강하고 민주적인 문명의 사회주의 국가의 건설”만을 목표로 내세웠는데, 이제는 “중화민족의 위대한 부흥”이 국가의 최고 목표가 됐다. 중국인민이 아니라 중화민족이 민족중흥의 주체로 우뚝 선 셈이다. 이제 중화인민공화국은 “통일적 다민족 국가”보단 “중화민족의 국가”로 재정립됐다.

 

<2021넌 7월 1일, 중국공산당 창당 100주년 기념 포스터: “중국공산당이 없으면, 새로운 중국도 없고, 중화민족의 위대한 부흥도 없다!”>

 

“중국 영토에 사는 사람들은 모두 중화민족”

“중화민족”의 연원을 파고 들면 1920년대 량치차오(梁啓超, 1873-1929)가 쓰기 시작한 “국족(國族)”이란 개념을 만나게 된다. 량치차오는 인종, 문화, 언어, 관습을 불문하고 중국 영토에 살고 있는 모든 사람들을 하나의 “중화민족”으로 묶는 “국족”이라는 개념을 고안했다. 량치차오의 “국족”은 본래 이질적인 습속의 상이한 민족도 장시간 한 나라에 살며 유전자를 섞으면 결국 하나의 “민족”이 될 수밖에 없다는 궤변이었다.

근대 민족국가의 기본 전제를 부정하는 억지 주장이지만, 그 정치적 효용은 매우 크다. 가령 시진핑의 강화문을 보면, “중화민족”의 정치적 함의가 그대로 드러난다.

 

“중국공산당의 강력한 영도가 지속되고, ‘전국 각족 인민’의 긴밀한 단결이 이어진다면, 사회주의 현대화 강국의 전면 건설 목표는 필히 실현될 것이며, 중화민족의 위대한 부흥은 필히 실현될 것입니다. 위대하고 영광되고 올바른 중국공산당 만세! 위대하고 영광되고 영웅적인 중국인민 만세!”

 

결국 중국공산당의 영도 아래 “전국 각족 인민”은 단결하라는 강력한 요구다. 14억 인구의 비대한 대륙국가을 유지하기에 “중화민족”만큼 편리한 개념은 없다. 문화, 언어, 습속이 다 다른 상이한 민족들을 하나로 묶을 수 있는 편의적 개념이 바로 “중화민족”이기 때문이다.

 

한족 91.5%..소수민족에겐 침략과 식민화 과정

1920년 9월 3일 공산당 입당 이전 마오쩌둥은 후난성의 “대공보(大公報)”에 게재한 기고문에서 중국 내 소수민족들이 모두 독립국을 세워야 하며, 나아가 중국의 27개 지방들이 독자적으로 27의 국가를 이뤄야 한다고 주장한 바 있다. 1930년대 초반까지도 마오쩌둥은 소수민족의 민족자결권을 인정하고 있었다. 1931년 마오쩌둥이 장시(江西) 루이진(瑞金)에 건립한 중화소비에트공화국의 <<헌법대강(憲法大綱)>> 14조는 중국 내 소수민족들의 자결권을 존중할 뿐만 아니라, 중국에서 벗어나 스스로 독립국을 건립할 수 있는 소수민족의 권리까지 승인한다. 1944년부터 소수민족에 대한 중국공산당의 태도가 달라진다. 이때부터 중국공산당은 티베트를 포함해 중국 지배 하 소수민족 지역을 모두 중국의 영토에 포함시켰다.

 

볼셰비키 혁명 직후 레닌은 민족문제의 해결을 위한 3단계 전략을 제시했다. 1) 집권 이전엔 소수민족에게 자결권, 특히 분리(分離)의 권리를 약속한다. 2) 집권 후엔 소수민족의 분리주의는 금지하고 자치권만을 보장한 후, 동화정책 펼친다. 이후 3) 중앙집권이 강화되면, 소수민족의 전통적·종교적·문화적 활동들을 모두 금지시킨다. 크게 보면, 중공 정부의 소수민족 정책 역시 레닌의 3단계 전략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의 성립은 소수민족들에게 어떤 의미였을까? 중국공산당이 선전하듯 봉건계급의 착취와 제국주의 침탈이 소멸된 “인민 해방”의 실현이었을까? 한족(漢族) 중심의 역사관에 따르면, 그 과정은 지속적인 문명화(文明化, civilization)의 장정(長征)이었다. 반면 주변부 소수민족의 입장에서 보면, 그 파란만장한 역사는 침략과 복속의 연속이었다. 같은 맥락에서 중화인민공화국의 건설과 사회주의 혁명의 추진은 소수민족에겐 식민화(colonization)의 과정으로 인식될 수 있다.

 

공산주의 이념, 소수민족 전통과 습속은 박멸 대상

사회주의자들은 집산화(collectivization)를 통한 재분배를 추구한다. 쉽게 말해, 가진 자의 재산을 몰수한 후 모두에게 균등하게 나눠준다는 이념이다. 그러한 과격한 사회 재편의 논리를 가진 자라면, 똘똘 뭉쳐 자기들만의 전통과 습속에 따라 살아가는 소수민족에 적대적일 수밖에 없다. 사회주의 정권 아래선 소수민족의 지배구조, 문화전통, 종교관념, 생활습속까지 박멸의 대상이 된다. 억압과 착취에서 인류를 해방시킨다는 공산주의 이념이 또 다른 제국주의의 논리가 된 소이가 거기에 있다.

 

근대 서구 열강이 문명화의 이름으로”백인의 책무”를 주장하며 아시아-아프리카의 “비문명 사회”를 식민화했듯 중국공산당은 공산화의 명분으로 “한족(漢族)의 책무”를 떠안고 55개 소수민족의 영토를 차례차례 접수하고, 복속시켰다.

 

<절대 다수의 한족(漢族)을 제외한 55개 소수민족의 단체 사진. 오늘날 중국에서 중화민족 혹은 중국민족은 이 모든 소수민족들을 포함하는 광의의 개념이다. https://www.ifreesite.com/population/ethnic-group-in-china.htm>;

 

원론으로 돌아가서 묻지 않을 수 없다. 56개 다양한 민족들이 공존하는 “다민족 국가”가 어떻게 “중화민족”의 나라로 거듭날 수 있나? 이 질문에 답하려면, 중국 전체인구의 91.51% 정도가 한족으로 분류된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열 명 중 아홉 명이 “중화민족”에 동의한다면, 나머지 한 명의 민족적 정체성 따위는 쉬이 무시될 수 있다. 결국 논리적으로 모순되는 “중화민족”이란 개념이 널리 상용되고 있음은 중국공산당의 통치가 “한족 중심”의 “다수 지배(majority rule)”임을 여실히 보여준다.<계속>

 

〈68〉 “종교의 자유 달라!” 문혁 말기 무슬림 순교자들

<중국 내 여러 지역에 살고 있는 후이족(回族)의 인구는 대략 1천1백만명 정도를 헤아린다. 후이족 외에도 위그루족, 카자크족, 우즈벡족 등 모두 열 개의 소수민족의 구성원들이 대다수 이슬람교도다. https://www.topchinatravel.com/china-muslim/muslim-in-china.htm>;

 

627년 광주(廣州, 현재 광둥성 광저우)에 중국 최초의 청진사(淸眞寺, 이슬람교사원)가 지어졌다. 이후 1400년의 세월 동안 이슬람교는 중국 전역으로 꾸준히 퍼져나갔다. 2014년 현재 중국 전역엔 모두 3만9135개의 이슬람사원이 있다. 그중 2만5000개가 신장 지역에 집중돼 있다.

 

오늘날 중국공산당 정부가 인정한 55개 소수민족들 중에서 10개 민족은 무슬림들이다. 중국 내 무슬림 인구의 정부 집계는 총인구의 0.45%(600만)에서 2.85%(3900만)까지 상이한 수치가 있다. 다른 민간의 집계는 6000만 명에서 8000만 명을 헤아린다. 쉽게 말해, 중국의 무슬림 인구는 최소 600만 명에서 최대 8000만 명에 달한다. 물론 이러한 큰 통계적 편차는 현재 중국에서 이슬람이 정치적으로 매우 민감한 문제임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2014년 시진핑 주석은 신장의 종교적 극단주의자들과 분리주의자들은 국가안전을 위협한다고 말한 바 있다. 이후 중국공산당 정부는 무슬림 소수민족에 대한 조직적인 감시망을 지속적으로 확대해왔다. 2017년 이래 신장의 인민대표대회는 서부지역에서 무슬림 여성의 히자브(hijab, 베일) 착용, 수염 기르기, 특정 이름의 사용까지 금지하는 시시콜콜한 반인권적 법령들을 채택했을 정도다.

 

<2020년 10월 8일, 영국 런던에서 중국의 신장 위구르 자치구에서 자행되는 인권유린과 제노사이드를 당장 멈추라며 시위하는 사람들/ https://www.icij.org/investigations/china-cables/british-lawmakers-call-for-sanctions-over-uighur-human-rights-abuses/>;

 

국제앰네스티 “중, 신장 지역 무슬림에 반인륜적 범죄 자행”

2021년 6월 10일 국제앰네스티(Amnesty International)는 50명이 넘는 전(前) 수감자들의 사실 증언에 기초해서 중국공산당 정부가 신장 지역의 무슬림들에 대한 반인류적 범죄를 자행하고 있다고 고발했다. 이 보고서에 따르면, 현재 신장 지역에서는 수십만 명의 무슬림 남녀들이 집단수용소에 갇혀서 날마다 고문에 시달리고 있으며, 수백만 명이 전 세계에서 가장 삼엄하고도 조직적인 ‘대중 감시(mass surveillance)’를 당하고 있다. 중공 정부는 무슬림 집단에 그들의 종교 전통, 문화 관습, 지방 언어까지 모두 포기하라는 거센 압박을 가하고 있다.

 

중공 정부는 이슬람교도들의 뇌리에 코란의 교리 대신 마르크스-레닌주의와 마오쩌둥 사상을 주입하고, “중화민족”의 일원이라 각인(刻印)하고 싶어 한다. 이슬람 분리주의자들에 의해 신장의 광활한 영토가 독립한다면, 중공 정부로선 너무나 큰 군사전략적, 경제적, 외교적 손실이기 때문이다. 통일 정책의 일환으로 중공 정부는 무슬림 교도들의 “사상 개조”를 꾀하고 있다.

 

“사상 개조”란 1940년대부터 중국공산당이 매번 정치운동을 벌일 때마다 전면에 내걸었던 구호였다. “낡고, 부패하고, 타락한 봉건적 사상 잔재”를 온전히 뿌리 뽑고 “새롭고 올바른 사회주의 사상”으로 개개인의 정신을 정화한다는 발상이었다. “사상 개조”의 캠페인은 1950년대 내내 중국 사회를 들쑤셨고, 문화혁명(1967-76) 시기 최고조에 이르렀다. 바로 그 점에서 오늘날도 중국에서는 소수집단을 향한 문화혁명이 공공연히 진행되고 있다.

 

무슬림 촌락에 끔찍한 학살극...마을 5명 중 1명 숨져

문화혁명 기간 내내 중국의 각지에선 크고 작은 학살이 끊임없이 일어났다. “슬픈 중국” 시리즈에서도 이미 다뤘지만, 문혁 연구자들은 일반적으로 1966년 8월 홍위병들이 1700여명 “계급천민”을 제거한 베이징의 “다싱(大興)구 대도살(大屠殺),” 1967년 8월-10월 66일간 8000명이 넘는 “흑오류(黑五類)” 계급적인을 일사분란하게 잡아 죽인 후난(湖南)성의 “다오(道)현 대도살,” 1968년 8월 10만-15만 명이 도륙된 광시(廣西) 대도살”을 문혁 3대 대학살 사건으로 꼽는다. 학살의 규모와 잔혹성 때문에 집중적인 조명을 받았지만, 이 세 사건들 외에도 문혁 기간 내내 크고 작은 학살극이 계속 이어졌다.

 

특히 1975년 7-8월 윈난(雲南)성 남부 샤뎬(沙甸) 지방의 일곱 개 1500여 호의 무슬림 촌락에선 무려 1800여명이 목숨을 잃은 끔찍한 학살극이 자행됐다. 전체 인구가 고작 7200여 명 정도였으니, 거의 21%, 다섯 명 중 한 명꼴로 목숨을 잃었다. 희생자들의 대다수는 중국 헌법에 보장된 종교의 자유를 외치며 저항한 이슬람교도들이었다. 그중엔 300명이 넘는 아이들과 노인들도 포함돼 있었다. 대량학살의 주체는 놀랍게도 중공중앙의 명령을 받고 현지에 급파된 인민해방군이었다. 문혁 이후 사인방(四人幇)이 과잉진압의 배후로 지목되었지만, 당시 중앙군사위 부주석의 지위에서 진압 명령을 내린 최종 책임자는 3년 반의 긴 유배 생활을 마치고 베이징에 복귀에 국가의 중대사를 도맡아 보던 덩샤오핑(鄧小平, 1904-1997)이었다.

 

/그림 <1975년 샤뎬사건의 피해자들이 죽은 동지들의 시신을 윈난성 성도 쿤밍의 이슬람사원에 안치하는 장면/ 공공부문>

 

비극의 발단을 추적해보면,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의 성립까지 소급된다. “인민 해방”을 내걸고 전국을 군사적으로 점령한 중국공산당은 “사회주의 혁명”의 기치를 들고 기존의 사회 체제를 허물기 시작했다. 후이족(回族)이 모여 사는 샤뎬은 수백 년 역사를 자랑하는 무슬림 군락(群落)이었다. “1949년 해방” 이전 그들은 채소 및 담배 농사에 종사했고, 작은 규모로 농작물과 축산물을 시장에 내다팔며 생계를 이어왔다. 1950년대 초반 인민해방군이 윈난성을 점령한 후 사회주의 정책이 시행되자 샤뎬의 후이족은 일대의 혼란에 빠져들었다. 중공 정부의 농업 정책에 따라 샤뎬의 후이족은 채소 농사 대신 곡물 재배의 업무를 할당받았기 때문이었다.

 

중앙집권적 명령경제의 폐단을 몸소 체험하면서 그들은 정부를 원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특히 대약진 운동 기간 후이족은 죽음의 벼랑 끝으로 몰려갔다. 마오쩌둥이 곡물 증산을 핵심으로 삼는 “이량위강(以糧爲綱)”의 구호를 외치면서 전국의 농촌을 닦달할 때였다. 지방의 현실을 무시한 중공중앙의 명령은 생존의 지혜를 파괴했다. 1959-61년 대약진의 돌풍은 샤뎬 지방에도 대기근의 쓰나미로 몰아쳤다.

 

참다못한 샤뎬의 후이족은 지방 정부 당국을 향해 채소 농사를 할 수 있게 해달라고 요청했다. 그들의 요구는 1959년부터 1975년까지 줄기차게 이어졌지만, 지방 정부는 도리어 후이족의 정당한 요구를 짓밟았다. 격분한 후이족은 관료부패와 간부들의 횡포를 처벌하라 요구하며 강력한 저항을 이어갔지만, 그럴수록 더욱 궁지로 내몰렸다.

 

“종교는 생산성 저하 초래” 윈난의 무슬림, 종교 자유를 빼앗기다

사회주의 명령경제가 초래한 사회·경제적 모순과 부조리 위에 종교적 갈등이 중첩됐다. 정부의 불합리한 정책에 항의하는 후이족의 종교가 하필이면 이슬람교였다. 중공 정부는 오래전부터 샤뎬에 공작조(工作組)를 주둔시키며 후이족의 동향을 면밀히 감시하고 있었다. 공작조는 종교 활동이 생산력 저하를 초래한다며 종교의 자유를 더욱 제약했다. 문혁의 전조인 사청운동(四淸運動, 1963-1966)의 과정에선 그나마 3개 남아 있던 이슬람사원들이 모두 폐쇄 조치됐다. 후이족은 더욱 거세게 저항했다. 공안기구는 구속자를 늘려가면서 팽팽한 긴장 국면이 이어졌다. 그 절정이 바로 문화혁명이었다.

 

문혁 당시 중국의 홍위병은 소수민족 고유의 “사상, 문화, 풍속, 습관”에 대해 일말의 관용도 베풀지 않았다. 그들은 “파사구(罷四舊)” 깃발을 들고 소수민족의 고유문화를 말살하려 했다. 조반파 홍위병들은 샤뎬으로 몰려가서 후이족이 신성시하는 이슬람사원을 “봉건 보루”라 부르며 폐쇄했다. 그들은 이슬람 경전을 훼멸함은 물론, 사원의 제사장을 잡아와서 비투(批鬪, 비판투쟁)를 벌였고, 저항하는 사람들을 잡아와선 집단 린치를 가하기도 했다. 후이족은 집단 모독에 시달리고 백주의 테러에 무방비로 노출됐다. 홍위병은 마호메트 상(像)을 파괴하는 만행도 저질렀다.

 

<1974년 11월 17일 윈난성 카이위안(開遠) 다좡(大莊)의 무슬림의 쿤밍 방문 기념/>

 

1968년 3월 윈난성 혁명위원회가 설립되자 곧 인민을 조반파와 보황파(保皇派)로 양분하는 적대적 계급투쟁이 시작됐다. 샤뎬의 다수는 보황파로 몰려서 격심한 공격에 시달려야 했다. 1968년 12월 이어서 샤뎬에 진주한 군인 선전대는 200여 명의 후이족을 잡아서 정치집회를 열어 모욕을 준 후, 그 중 84명에 반군의 혐의를 씌워 단죄하고, 14명을 죽음으로 내모는 가혹 행위를 저질렀다. 군대가 이슬람사원에 주둔하면서 종교 활동은 원천적으로 금지됐다. 그 후로도 계속 샤뎬의 후이족들을 향한 광기어린 공격이 그치지 않았다.

 

참다못한 후이족은 1973년 10월부터 정부를 상대로 종교 활동의 허락을 요구했지만, 정부는 묵묵부답이었다. 격분한 촌민들은 폐쇄된 이슬람교사원을 다시 여는 강경책을 이어갔다. 지방 정부는 이를 반혁명행위라 규정하고 맞섰다.

 

1974년 말 샤뎬의 후이족은 본격적인 저항 운동을 시작했다. 800여 명에 달하는 샤뎬의 후이족은 윈난성의 성도 쿤밍(昆明)으로 몰려가선 “헌법에 보장된 종교의 자유를 보장하라!”며 격렬한 시위를 벌였다. 또 한 무리는 베이징까지 가서 예배의 자유를 인정하는 보다 현실적인 “민족종교 정책”의 실시를 요구하며 투쟁했으나······. 역시 근본적 해결책은 전혀 마련되지 않았다.

 

오히려 혁명위원회는 선제적으로 비(非) 무슬림 촌민들로 “민병 연합지휘부”를 결성한 후, 그들에게 총과 실탄을 지급해 그 지역의 순찰을 맡겼다. 이에 강한 위협을 느낀 후이족은 자체적으로 “샤뎬 민병단”을 결성해서 맞섰다. 보름이 채 못돼 인근 지대의 촌민들은 군대의 무기고를 털어 무장하기에 이르렀다. 이때부터 두 집단이 군사적으로 충돌하여 다수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중앙정부까지 나서서 두 집단 사이의 타협책을 마련하려 했으나 효과가 없었다.

 

<1975년 1월 샤뎬사건의 해결을 위해 베이징에 간 샤뎬 후이족 대표단/ http://www.muslimwww.com/html/2020/xueshu_0120/35286.html>;

 

인민해방군, 이슬람사원에 총격...양민 학살

급기야 1975년 7월 29일 중공중앙은 인민해방군 14군을 샤뎬에 투입했다. 다음 날 새벽 3시를 기해 부대는 샤뎬 민병단이 보위하던 이슬람사원에 총격을 가했다. 새벽 4시경, 후퇴했던 샤뎬 민병단이 기습적으로 반격을 가해 사원을 탈환하고 군병력의 화기까지 탈취하지만, 이미 수백 명이 목숨을 잃은 후였다. 이에 격노한 후이족 민병단은 몇 자루 총과 재래식 창칼 등을 휘두르며 격렬하게 저항했다. 점심나절부터 군부대는 대포를 쏘아댔다. 이후 7-8일에 걸쳐 군대와 민병단 사이엔 유혈의 무장투쟁이 이어졌다. 그 과정에서 900여명의 후이족이 학살당하고, 600여명이 부상당하거나 영영 불구가 됐다.

 

8월 4일, 157명의 남녀노소가 투항 의사를 밝히며 목숨만 살려 달라 간청했지만, 군대는 그들을 정조준해서 일제히 사격을 가했다. 갑작스런 총격에 비명도 못 지르고 쓰러진 시신들 틈에서 꿈틀거리거나 흐느끼는 사람들을 향해 확인 사살이 이뤄졌다. 확인 사살 후에도 세 명은 살아남았다지만······. 사망자의 총수는 1,600명에 달했고, 부상자와 불구자가 1,000명을 넘었다.

 

1975년 여름, 막바지로 치달은 문화혁명은 여전히 하늘과 땅이 뒤집히는 천번지복(天飜地覆)의 혼란상을 보이고 있었다. 국무원의 만년 총리 저우언라이가 세상을 떠나기 넉 달 전이었다. 최고 영도자 마오쩌둥이 숨을 거두기 불과 한 해 전이었다. 덩샤오핑이 최고영도자의 지위에 올라 “개혁개방”의 깃발을 들고 전국의 인민을 향해 “치부광영!(致富光榮, 치부하면 큰 영광이다)”이라 소리치기 불과 3년 전이었다. <계속>

 

<69회> 톈안먼 광장에 모인 200만 군중의 분노, 문혁 종식의 전조

<1976년 4월 4-5일, 톈안먼 광장에 운집해 저우언라이의 죽음을 추모하며 4인방을 향해 비판을 쏟아내는 베이징의 군중들/ 공공부문>

 

권력투쟁의 목적으로 마오쩌둥은 4인방의 선전·선동을 적극 활용했지만, 그들을 신뢰하진 않았다. 1975년 초 국무원의 만년 총리 저우언라이(周恩來, 1898-1976)의 건강이 급속도로 쇠약해지자 마오쩌둥은 덩샤오핑(鄧小平, 1904-1997)에게 군사·행정·정치의 3권을 떠넘기는 파격적 정부개편을 시도했다. 놀랍게도 4인방은 채 1년도 못 된 1976년 4월 7일 군중반란을 책동한 혐의를 씌워 다시금 덩샤오핑을 몰아낼 수 있었다. 저우언라이가 세상을 버린 지 석 달쯤 되던 날이었다. 4인방은 과연 어떤 방법으로 덩샤오핑을 몰아냈나?

 

마오, 쫓아냈던 덩샤오핑에 국정 책임 다시 맡겨

문혁이 개시된 후, 류샤오치와 함께 덩샤오핑은 반혁명적 수정주의 주자파의 우두머리로 몰려 곤욕을 치렀다. 1969년 11월 류샤오치는 독방에 유폐된 채 의료방치로 지병을 안고 쓸쓸히 고독한 혁명가의 일생을 마감했다. 덩샤오핑은 1969년 10월 아내 줘린(卓琳, 1916-2009)과 함께 장시성 난창 외곽의 농기구 정비소로 추방됐다.

 

1972년 11월 덩샤오핑은 마오쩌둥에 베이징으로의 복귀를 요청하는 간곡한 서신을 보냈다. 덩샤오핑을 수정주의자로 몰아 지방에 유폐시킨 장본인은 바로 마오쩌둥이었다. 이제 그는 다시 덩샤오핑을 불러와선 국정의 책임을 맡기려 할 절박한 필요를 느꼈다. 붉은 정치꾼들만을 앞세워 통치를 하기엔 국정 혼란은 가중되고, 민심 이반은 극심했기 때문이었다. 저우언라이가 병상에 누웠기에 더더욱 그의 곁엔 합리적인 정무의 관리자가 필요했다.

 

1973년 2월 22일, 3년 반의 유배 생활 끝에 베이징으로 복귀한 덩샤오핑은 곧장 국무원의 부총리에 임명됐다. 1975년 1월 5일, 덩샤오핑은 중공중앙 군사위원회 부주석 및 중국 인민해방군 총참모장으로 임명됐다. 마오쩌둥의 승인 아래 1975년 6월 초부터 덩샤오핑은 정치국, 국무원 및 중앙군사위원회를 관장하는 국가의 총지휘자가 됐다.

 

<“타도 류샤오치, 타도 덩샤오핑: 마오쩌둥 사상의 위대한 붉은 깃발을 높이 들고 류샤오치와 덩샤오핑의 자산계급 반동노선을 철저히 비판하는 대회/ 1967년 경>

 

1975년 1월 13일 저우언라이는 제4기 전국인민대표대회에서 이른바 농업, 산업, 국방, 과학기술에 걸친 이른바 “4대 현대화”의 원대한 계획을 선포했다. 계급투쟁 대신 경제건설로 국정의 방향을 트는 조치였다. 1975년 2월 1일 저우언라이는 은퇴를 선언했다. 국무원의 모든 직무는 덩샤오핑에 위임됐다. 5월 3일, 마오쩌둥은 4인방의 “교조주의”를 비판하면서 덩샤오핑에 중공중앙 정치국 회의를 주재하게 했다. 5월 12일 덩샤오핑은 중국대표단을 이끌고 전격적으로 프랑스를 방문하는 외교적 깜짝쇼를 이어갔다. 실로 놀라운 국면의 변화였다. 물론 그 배후는 마오쩌둥이었다.

 

마오쩌둥은 왜 덩샤오핑에게 대권을 일임하는 정치적 파격을 연출했을까? 그 역시 계급투쟁만으론 경제를 살리고 민생을 챙길 수 없음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동시에 마오는 군권을 확실히 장악하려 했다. 당시 중국 모든 지방에선 행정과 사법의 총지휘권이 군부가 이끄는 혁명위원회에 있었다. 마오는 덩샤오핑에 군권을 맡겨 “당이 총을 지배한다!”는 대원칙을 실현하려 했다. 마오쩌둥이 보기에 무너진 경제를 살리고, 불안한 군권을 장악하고, 혼란스런 중앙 정치를 이끌 유능한 관리자는 덩샤오핑 밖엔 없었다.

 

덩샤오핑은 기민하게 철도 교통의 회복을 국가개혁의 출발점으로 삼았다. 문혁의 광풍 속에서 전국 여기저기 철로가 두절돼 경제는 곤두박질치고 있었다. 막힌 철도를 뚫기 위해 덩샤오핑은 1만천 여명의 “반혁명분자”를 색출하고, 3천 명을 중범죄자로 단죄하는 대규모의 계급투쟁을 벌였다. 정치투쟁에 매몰된 철도노동자들을 모두 일터로 복귀시키자 1975년 4월부턴 전국의 철도가 순행하기 시작했다.

 

<1959년 대약진 운동 당시 정책을 토론하는 마오쩌둥(왼쪽)과 덩샤오핑(오른쪽)/ 공공부문>

 

곧이어 덩샤오핑은 철강 생산력의 회복에 박차를 가했다. 문혁의 광풍은 철강 생산량을 급감시켰다. 전국적으로 매일 평균 철강생산량이 목표치에 2천, 3천 톤이나 못 미치는 상황이었다. 생산 현장의 노동자들이 여러 분파로 갈려서 정치투쟁에 몰두했던 문혁의 참담한 결과였다. 철강 생산력을 복구하려면 무엇보다 생산 현장의 리더십에 유능한 관리자를 임명하는 경제적 합리성의 회복이 급선무였다.

 

덩샤오핑은 파업하는 노동자들과 태업하는 중간층 관리자들을 단호하게 처벌했다. 저장성 혁명위원회의 과격한 노동자들이 개혁에 저항하자 덩은 공작조를 급파해 굴복시켰다. 지난 주 살펴봤듯, 덩샤오핑은 윈난성 샤뎬의 무슬림 저항을 진압하기 위해 군을 파견해서 무려 1600명의 촌민들을 도륙하는 극한 조치까지 마다하지 않았다.

 

실용적 합리성, 치밀한 계획성, 무자비한 실행력······. 마오가 덩에게 원했던 바로 그 “비상한 재능”이었다. 전국을 붉은 혁명의 광열에 몰아넣고 있던 4인방으로선 배신감을 넘어 생존의 위협을 느낄 지경이 됐다. 4인방은 덩샤오핑을 정(正)조준해 반격을 개시해야만 했다.

 

저우언라이의 죽음, 들불처럼 번진 추모 열풍

1976년 1월 8일 아침 9시 57분, 국무원 만년 총리 저우언라이가 베이징 한 병원의 병상에서 조용히 숨을 거뒀다. 향년 78세. 여러 사람의 증언에 따르면, 저우언라이는 마오쩌둥의 명령을 그대로 이행한 충직한 조수에 불과했다. 특히 문혁 개시 후 6년의 세월 동안 마오쩌둥은 저우언라이를 꼭두각시처럼 움직여 중앙정치를 좌우해왔다.

 

저우언라이 역시 문혁에 큰 책임을 져야했지만, 중국의 대다수 인민은 그를 진정한 지도자로 존경하고 흠모했다. 문혁 초기엔 모두가 마오쩌둥의 주술에 걸려 있었기에 특별히 저우언라이가 표적이 될 리 없었고, 1973년 비림비공(批林批孔) 운동 이후부턴 4인방이 저돌적으로 저우언라이를 공격했기 때문이었다. 4인방은 그가 우경분자들을 되살려내 수정주의 주자파의 노선을 간다고 비판했다. 저우언라이를 향한 그들의 창끝이 덩샤오핑을 동시에 겨누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1976년 1월 8일, 베이징 톈안먼 광장에서 인민영웅기념탑을 향해 저우언라이의 초상화를 들고 행진하는 젊은이들의 모습/ 공공부문>

 

저우언라이 사후(死後), 중국 전역이 술렁였다. 들불처럼 전국에 거센 추모의 열풍이 일어날 조짐이 보였다. 사인방은 추모 열기를 전하는 언론 기사를 사전에 검열하고 삭제했다. 대규모 민중 시위를 미연에 차단하기 위함이었다. 인민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았던 저우언라이지만, 그에겐 대규모 국장(國葬) 따윈 허락되지 않았다. 오히려 중공중앙은 전국 각지에서 전개되던 추모 활동을 과도하게 제약하고 나섰다. 그럴수록 군중은 더욱 격심한 분노에 휩싸여 추모식을 거행했다.

 

1976년 1월 11일 저우언라이의 시신이 베이징의 파바오산(八寶山) 공동묘지에 안치될 때, 백만 넘는 군중이 추위에 벌벌 떨며 길거리를 매웠다. 저우언라이를 공격해왔던 4인방으로선 그런 군중의 움직임에 촉각을 곤두세울 수밖에 없었다. 저우언라이 관련 언론 보도를 통제하고 영화 상영까지 금지했지만, 추모의 파도는 더욱 거세졌다. 특히 난징(南京)에서 거행된 추모식에는 수십만의 군중이 모여들었다. 추모식이 대규모 정치집회로 바뀔까 우려한 지방정부가 기념관을 폐쇄하자 난징의 시민들은 더욱 격분했다.

 

1월부터 4월까지 중국 전역에선 중국 인민들이 저우언라이의 사진을 내걸고 공개적으로 그의 죽음을 애도했다. 3월 말 난징의 곳곳에선 저우언라이를 추모하고 4인방을 비판하는 대자보와 표어가 나붙었다. 급기야 3월 29일, 800여 명의 난징대학 학생들이 가두시위를 벌이면서 본격적인 투쟁에 나섰다. 3월 29일-30일 기차역에 몰려간 학생들은 10시간 넘게 먼 지방까지 달려가는 열차의 벽면에 페인트로 저우언라이 총리를 추모하고 4인방을 규탄하는 수많은 정치 구호를 과감하게 적었다. 전국에 저항의 메시지를 전하는 효과적인 전술이었다.

 

놀란 중공중앙은 배후세력의 조사에 들어갔지만, 난징 시민들은 더 큰 추모식을 개최하며 저항했다. 사흘 동안 무려 60만의 추모객이 모여들었다. 곧 추모 열기는 전국으로 확산됐다. 허난성 정저우(鄭州)에서도 4월 초부터 추모 행렬이 이어졌다. 급기야 4월 4일 청명절(淸明節), 베이징의 톈안먼 광장에는 대규모 군중이 화환을 들고 추모 시가를 읊으며 구름떼처럼 모여들었다.

 

<1976년 4월 4일, 톈안먼 광장에서 저우언라이의 죽음을 애도하는 군중의 모습. 누군가 기념탑에 붙여 놓은 추모시를 노트에 베껴 쓰고 있다. / 공공부문>

 

1976년 톈안먼 사건, 깨어나는 광장의 군중들

확인할 순 없지만, 그날 톈안먼 광장엔 흔히 2백만 군중이 운집했다 한다. 그 속엔 학생들, 가난한 농민들, 군인들, 고위간부의 자제들, 평범한 중년의 시민들도 다수 섞여 있었다. 1966년 홍위병 집회 때와는 달리 이번에는 정부의 감시와 규제를 뚫고 모여든 성난 군중의 집회였다. 시민들의 자발적 저항이란 점에선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성립 이래 유래를 찾기 힘들었다.

 

10년 내내 갈가리 찢겨 서로를 헐뜯고 짓밟는 문혁의 광기 속에서 지칠 대로 지친 민중이었다. 밀실을 벗어나 광장으로 뛰쳐나온 군중은 정당한 분노를 공유하고 있음을 확인했다. 그들은 대담하게 한 목소리로 중앙정치를 장악한 4인방의 만행을 규탄했다. 더 나아가 마오쩌둥의 오류를 지적하고 비판하는 목소리도 적잖았다.

 

4월 5일 이른 아침, 정부는 베이징 주변의 군부대를 통원해 연합지휘부를 만들고, 광장의 남쪽과 북쪽을 동시에 봉쇄했다. 기념탑 아래 인민이 쌓아올린 추모의 화환과 팻말들은 이미 전날 밤에 철거된 후였다. 10만의 추모객들이 격분해서 광장 주변의 정부 청사들에 난입했다. 곤봉으로 무장한 대규모 민병대가 광장에 투입됐다. 곤봉을 휘두르며 해산을 외치는 민병대의 기세에 질려 겁먹은 군중들은 서서히 흩어져 집으로 돌아갔다. 그날 저녁 6시 무렵 광장은 텅텅 비었지만, 소수의 시위대는 10시까지 투쟁을 이어갔다 한다.

 

모처럼만에 일어난 군중의 저항은 그토록 허망하게 끝이 났지만, 그 여진(餘震)은 전국을 흔들었다. 무엇보다 모래알처럼 흩어져 있던 군중이 광장에 몰려나와 정부를 향해 분노의 감정을 표출했다는 사실만으로 1976년 4월 5일 톈안먼 광장은 저항의 공간으로 거듭날 수 있었다. 그날의 기억은 1978년 11월 베이징 시단(西單)을 대자보로 도배한 “민주장(民主墻) 운동”(1978년 11월-1979년 12월)으로, 10년 뒤엔 1989년 6월 4일 “톈안먼 민주화 운동”으로 이어졌다.

 

<1979년 베이징 시단(西單)의 “민주장 운동”/ 공공부문>

 

저우언라이 사후 4인방은 “반(反)덩샤오핑” 캠페인에 박차를 가했다. 2월 2일부터 덩샤오핑은 실제적으로 가택 연금 상태에 놓였다. 3월 3일 마오쩌둥은 다시금 문혁의 정당성을 재확인하는 통보를 반포했다. 청명절 톈안먼 사건 직후, 4인방은 덩샤오핑을 군중 시위의 배후로 지목했고, 덩샤오핑은 곧 모든 직무를 상실한 후 중앙정치 외곽으로 밀려날 수밖에 없었다.

 

다시 컴컴한 어둠이 밀려왔다. 그때는 감히 그 누구도 문혁의 종식을 예감하진 못했다. 오직 하늘만이 구시대의 종언을 알리는 거대한 전조를 내비쳤다. 1976년 7월 28일 새벽 3시 26분, 후베이의 탄광도시 탕산(唐山)에 강도 7.6의 대지진이 엄습했다. 최소 24만 2천 명, 최대 65만 명이 사망하고, 70만 명이 부상을 입는 자연의 대재앙이었다. 마오쩌둥이 세상을 버리기 불과 40일 전이었다. <계속>

 

<70회> 정치·행정·군사 3권 장악한 서열 1위 빅브라더의 죽음

< 1976년 9월 9일 마오쩌둥 사망 후 열흘 간 중국은 10일 간의 국장(國葬)에 들어갔다. 9월 18일엔 백만 군중이 추도식에 참가했다. 10월 8일, 중공 중앙은 마오쩌둥 기념관을 짓기로 결정한다./ 공공부문 >

 

하늘 아래 땅이 있는 형상의 “천지비(天地否)”괘는 <<주역(周易)>> 64괘(掛) 중 가장 불길한 점사(占辭)다. 반대로 땅 아래 하늘이 있는 “지천태(地天泰)”괘는 가장 융성하고 상서로운 앞날을 예고한다. 표면상 상식에 반하지만, 모든 게 끊임없이 변하고 있음을 상기하면 고개가 끄덕여진다. 천지비괘엔 하늘과 땅이 뒤집히는 대혼란이 숨어 있다. 지천태괘를 보면, 머잖아 천지(天地)가 제자리를 찾아가는 순리(順理)의 변화가 읽힌다.

 

문혁 10년의 대동란(大動亂) 동안 하늘이 무너져 내리고 땅이 갈라져 치솟았다. 이른바 천지번복(天地飜覆)의 카오스가 펼쳐졌다. 문혁의 참극이 막바지에 달할 땐, 하늘이 바닥으로 내려가고 땅이 맨 위까지 치솟았다. 어둠의 긴 터널이 끝나가고 있었지만, 인민의 대다수는 그 거대한 변화의 기운을 감지하지 못했다. 진정 동 트기 직전이 더 어둡고 폭풍의 전야가 더 고요한 법.

 

심근경색으로 두 번째 쓰러진 마오, 1976년 9월 9일 0시 10분 절명

1976년 9월 9일 마오쩌둥이 사망했다. 한 달이 채 못 돼 4인방이 전격 체포되었다. 곧이어 문혁 “10년의 대동란(大動亂)”은 공식적으로 종말을 고했다. 이후 2년의 권력투쟁을 거쳐 덩샤오핑(鄧小平, 1904-1997)은 “개혁개방”의 깃발을 들고 지치고 굶주렸던 인구 8억의 광활한 대륙에 제2의 혁명을 일으켰다. 실로 인류사에 흔치 않은 “지천태”의 격변(激變)이었다.

 

1976년 7월 28일 새벽 3시 42분 53초, 베이징에서 불과 120킬로미터 떨어진 중국 허베이성 탕산(唐山)에 강도 7.6의 대지진이 몰아쳤다. 불과 몇 분 내에 탕산의 대부분 건물들이 무너지고, 대부분의 철도와 고속도로가 끊기고, 수도관이 터지고, 통신시설이 모두 두절됐다. 중국사에 기록된 가장 참혹한 지진이었다. 정부 공식 통계만으로도 최소 24만 2천여 명이 순식간에 목숨을 잃고, 16만 4천여 명이 중상을 입었다. 물론 비공식 통계의 수치는 그 몇 배를 상회한다.

 

탕산 대지진 발발 32일 전, 6월 26일 마오쩌둥은 두 번째 심근경색으로 쓰러졌다. 중난하이 실내수영장 옆방에 마오의 병상이 마련됐다. 16명의 의사와 24명의 간호사로 구성된 전담 의료팀이 지근거리서 밤낮으로 마오를 돌봤다.

 

<  탕산(唐山) 대지진, 1976년 7월 28일/ 공공부문 >

 

마오의 병상 주변엔 의료팀 외에도 중공 중앙위원회 부주석 화궈펑(華國鋒, 1921-2008)과 왕홍원(王洪文, 1935-1992), 중공중앙위 정치국 위원 장춘차오(張春橋, 1917-2005)와 중앙 경위국(警衛局) 국장 왕동싱(汪東興, 1916-2015)이 머물며 불철주야 위급한 상황을 점검하고 있었다.

 

대지진 발발 당시 중난하이 마오의 병실도 무사할 순 없었다. 지진파가 땅이 뒤흔들며 지나자 건물 벽이 심하게 흔들리며 수영장의 물이 격하게 출렁였다. 공포에 질린 의료팀과 중앙위원들은 황급히 마오의 병상을 중난하이에서 가장 안전하다는 “202” 건물로 옮겼다. 탕산 대지진 발발 6주 후, 1976년 9월 9일 0시 10분께 마오쩌둥은 숨을 거뒀다.

 

27년간 중국공산당 서열 제1위 최고영도자로 군림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후부터 27년 동안 마오쩌둥은 중국공산당 서열 제1위의 최고영도자로 군림해왔다. 그는 정치·행정·군사 3권을 모두 장악하고 국가의 모든 대사를 최종적으로 결정했다. 교통, 통신, 정보, 군사 기술 등 현대국가의 기반 위에서 그는 전통 시대 어느 황제도 갖지 못했던 막강한 “권력의 인프라”(infrastructure of power)를 확보했다.

 

마오는 또한 조직적인 선전·선동의 기술을 발휘해 매스미디어를 전면 장악하고 대중의 의식을 정치적으로 지배했다. 문혁 시기 그는 단순한 정치지도자를 넘어 전 인민의 눈동자에 날마다 강림하는 인격신으로 군림했다. 그는 천신지기(天神地祇, 하늘의 신과 땅의 신)를 대신해 중국 인민의 심성을 파고들었다. 사람들은 “마오주석 만세!”를 외치며 하루를 시작했고, 날마다 그의 어록을 졸졸 암송했다. 요컨대 마오쩌둥은 전 중국의 역사에서 가장 강력한 정치권력, 행정대권, 군사력, 문화권력, 이념권력까지 장악하고 행사했던 ‘전체주의 정권’(totalitarian regime)의 ‘전제군주’(despot)였다.

 

마오가 사망한 1976년 9월 9일 중국의 언론엔 그의 죽음을 알리는 어떤 기사도 나지 않았다. 9월 9일 오후 4시에야 그의 죽음이 세상에 알려졌다. 9월 10일 전 중국의 모든 조간 1면엔 최고영도자의 죽음을 알리는 특대급 부고(訃告)가 실렸다. 부고의 표현을 그대로 빌리면, 마오는 “중국공산당, 중국인민해방군, 중화인민공화국의 창조자이며 영명한 영수”였다. 한 달이 넘도록 날마다 마오쩌둥의 죽음을 애도하고, 그의 업적을 칭송하고, 그의 사상을 학습하고, 유지를 계승하자는 취지의 기사들이 홍수처럼 쏟아졌다.

 

북한 김일성 조전...인민일보, 한 달 넘게 애도·칭송·결의

몇 가지 인상적인 기사만 추려보면, 9월 11일 인민일보 1면 오른편 상단엔 큼직하게 북한 김일성(金日成, 1912-1994)이 발신한 조전(弔電)의 원문이 게재됐다. 9월 14일엔 중국뿐만 아니라 “세계 각국의 인민의 마음속에 마오쩌둥이 영원히 살아있다”는 기사가 장식됐다. 9월 19일엔 수도의 1백만 군중이 모여서 추도대화를 거행했다는 기사가 실렸다. 9월 21일엔 “8억 인민의 서언(誓言)”이 실렸다. 10월 9일엔 중궁중앙이 “주석 기념관”의 건립과 <<마오쩌둥 선집>> 및 <<마오쩌둥 전집>>의 출판을 결정했다는 기사가 대서특필됐다. 10월 10일엔 다시금 “마오주석의 혁명노선을 계승하자”는 “억만 인민의 공동 염원”이 실렸다.

 

<  1976년 10월 22일, 인민일보 제1면. 4인방 반혁명집단의 중국공산당 찬탈 및 국가권력 탈취 음모를 분쇄한 화궈펑의 영웅적 업적을 기리고 중공중앙 주석 및 중앙군사위 주석 취임을 경국하는 군중 대회를 보도했다./ 인민일보  >

 

한 달 넘게 지루하게 이어진 애도, 칭송, 결의의 릴레이였다. 10월 13일에야 총리 화궈펑의 사진이 처음으로 <<인민일보>>제1면 중앙을 장식됐다. 뭔가 중앙정치의 큰 변화를 암시하는 큰 사건일 수 있었지만, 아직 물밑의 정치투쟁은 좀처럼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었다. 곧이어 화궈펑은 느닷없이 5.4운동의 아이콘 루쉰(魯迅)의 정신을 학습하자는 캠페인을 벌이기 시작했다. 인민의 애국심을 고취해 마오쩌둥의 부재에 따른 이념의 빈자리를 채우려는 듯했다.

 

급기야 10월 22일 놀랍게도 4인방의 체포가 대서특필됐다. 급격한 사태의 반전이었다. 마오쩌둥 사후 최소 한 달간 중앙 언론은 변함없이 4인방의 선전·선동을 그대로 옮겨 적었기 때문이었다. 4인방이 장악했던 언론에 몰아닥친 변화의 쓰나미였다. 그날 인민일보 제 1면엔 “4인방 반혁명집단의 이른바 ‘찬당탈권(簒黨奪權, 당을 찬탈해 권력을 탈취하려는) 음모의 분쇄를 열렬히 경축하고, 화궈펑 동지께서 중공 중앙 주석, 중앙군위 주석에 취임하심을 경축하는 수도 1백 50만 군민의 행진”이 대서특필됐다. 이례적으로 헤드라인은 붉은 글씨로 인쇄됐다.

 

그때서야 중국의 평범한 인민은 화궈펑이 정치투쟁을 통해 4인방을 제압하고 중앙권력을 온전히 장악했음을 알 수 있었다. 바로 전날까지도 중공 기관지들은 4인방에 대해선 일체 함구하고 있었다. 사후 밝혀지지만, 4인방은 이미 10월 6일 이미 긴급 체포된 후, 억류돼 있었다.

 

52세 연하 비서 장위펑 “주석님 가십니까? 이제 저는 어떻게 하죠?”

 

마오의 사망 진단을 내렸던 주치의 리즈수이(李志綏, 1919-1995)의 기록에 따르면······. 마오의 호흡이 멈추자 최후 14년간 그림자처럼 가까이서 그를 따라니며 모셨던 52세 연하의 비서 장위펑(張玉鳳, 1945- )은 울부짖었다. “주석님, 가십니까? 이제 저는 어떻게 하죠?” 마오의 부인 장칭(江靑, 1914-1991)이 장위펑의 손을 잡고 “울지 마, 내가 있잖아. 이후엔 내가 너를 쓸게!”라 말했다. 울음을 멈춘 장위펑은 웃음을 지으며 “장칭 동지, 고맙습니다!” 했다.

 

장위펑은 왜 울음을 터뜨렸을까? 사라진 주군을 향한 충성심이었을까? 정치적 반대세력에 대한 공포감이었을까? 장칭은 왜 시녀처럼 애첩처럼 14년 간 자신의 남편을 독점했던 어린 장위펑을 위로하며 흔쾌히 화해의 제스처를 보였을까? 절대 권력자가 사라진 후 더 큰 권력을 갈구했기 때문일까? 아니면, 본능적으로 정치투쟁의 피비린내를 맡았기 때문일까?

 

국무원의 만년 총리 저우언라이가 세상을 떠난 후, 4인방은 전국적으로 거세지는 추모 열기를 반혁명 세력의 준동이라 여겨 억압했다. 1976년 4월 4일-5일 베이징의 톈안먼에 수많은 군중이 운집해 4인방을 규탄했을 때, 4인방은 마오쩌둥을 설득해서 전격적으로 덩샤오핑을 몰아낼 수 있었다. 마오쩌둥은 그러나 게릴라 전사의 예리한 정치 감각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는 4인방이 국가를 운영할 수 없음을 잘 알고 있었다.

 

1976년 4월 7일 마오는 덩샤오핑을 파면하는 동시 화궈펑을 중공 중앙위원회 제1부주석이자 국무원 총리에 임명했다. 마오가 죽고 나면, 당연히 제1부주석이 주석의 지위를 승계하게 될 터였다. 화궈펑은 또 행정부를 도맡았던 저우언라이의 직무를 그대로 이어받았다. 이로써 화궈펑은 명실상부 마오의 공식 후계자의 자리에 올랐다. 화궈펑의 급부상은 4인방을 제압하는 마오 최후의 한 수였다.

 

수령이 떠난 세상에서 수령의 권위를 빌어 권력을 유지하려는 세력은 위기에 처할 수밖에 없다. 수령의 수족들이 다 모여 봐야 수령을 대신할 수 없기 때문이다. 4인방은 오로지 마오의 지시에 따라, 마오의 심기를 살피며, 문혁의 마지막 순간까지 마오쩌둥 사상의 깃발을 높이 들고 “진격 앞으로!”를 외쳐댔던 마오의 선전대원일 뿐이었다. 4인방에게 마오의 죽음은 자신들이 누려왔던 권력 기반의 붕괴를 의미했다.

 

<  마오의 만년 마지막 14년간 지근거리에서 비서로 활약했던 장위펑의 모습/ 공공부문  >

 

화궈펑, 맹수 생포하는 사냥꾼처럼 4인방에 올가미 걸어 제압

중공 중앙의 권력은 마오의 간택을 받은 화궈펑에 기울었다. 마오가 죽기 전 화궈펑에게 4인방 집단을 몰아내라는 유촉(遺囑)이 있었는지도 알 수 없다. 마오의 사후, 화궈펑은 야생의 맹수를 생포하는 사냥꾼처럼 치밀하게 덫을 치고 살금살금 다가가서 4인방의 모가지에 올가미를 걸었다. 문혁 “10년의 대동란”에 종지부를 찍는 정치드라마였다. 마오가 죽고 나서 채 한 달도 못 지나 1976년 10월 6일 소위 4인방과 베이징 대학과 언론사에 대거 포진해 있던 4인방의 선전대원들이 모두 체포되었다.

 

화궈펑이 4인방을 손쉽게 제압할 수 있었던 까닭은 무엇일까? 물론 예젠잉(葉劍英, 1897-1986), 천시롄(陳錫聯, 1915-1999) 등 군부의 실력자들이 의기투합해 화궈펑의 편에 섰고, 또한 중공중앙 판공청(辦公廳) 주임으로서 마오쩌둥의 신변안전을 도맡았던 왕동싱이 적극적으로 협력했기 때문이었다.

 

이미 한 달간 물밑 작업을 통해 의기를 투합한 군부와 경호대는 10월 6일 오후 3시 급기야 체포 작전을 수행했다. 치밀한 계획 아래 왕동싱은 <<마오쩌둥 선집>> 편찬 건으로 중난하이의 화이런탕(懷仁堂)에서 정치국 상임위원들을 불러 모았다. 저녁 8시 경, 미리 짜놓은 체포 시나리오에 따라 4인방이 차례로 붙잡혀 갔다.

 

체포조가 4인방을 덮칠 때마다 화궈펑이 그 앞에서 체포 영장을 읽었다. 상하이 노동자의 심벌 왕홍원(王洪文, 1935-1992)은 몸싸움을 벌이며 격렬하게 저항했으나 결국 “이렇게 빨리 잡힐 줄 몰랐다!”고 중얼거리며 끌려갔다. 장춘차오는 순순히 체포에 응했다. 야오원위안도 체포의 순간 “마오쩌둥 선집 제5권 출판 관련 토론을 하러 왔다! 어찌 감히!”라고 소리쳤다. 장칭 체포 작전엔 중공중앙 경위단(警衛團) 8341부대가 투입됐다. 사태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장칭은 방안에 놓인 개인용 비밀금고의 열쇠를 봉투에 넣어 밀봉한 후 그 위에 “화궈펑 주석이 열어볼 것!”이라 썼다 한다.

 

<  1981년 4인방 반혁명세력 재판. 왼쪽부터 장춘차오, 왕홍원, 야오원위안, 장칭/ 공공부문  >

 

마오쩌둥 생전 호가호위하며 최고의 권력을 휘둘렀던 4인방이었다. 그들은 왜 그토록 속수무책 무력하게 죄인의 멍에를 써야 했나? 군부의 핵심세력과 중공중앙 경위단은 4인방 대신 화궈펑을 지지했기 때문이었다. 화궈펑은 왜 4인방을 제거하려 했을까? 군부는 또 왜 그런 화궈펑의 계획에 동조했을까? 어쩌면 이유는 가장 단순한 데 있었다. 바로 1976년 4월 4-5일 베이징의 톈안먼 광장에 집결해 4인방의 죄악을 규탄했던 구름떼 같은 군중의 힘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그날 광장을 가득 채웠던 중국의 “인민 권력”(people power)은 과연 어디로 갔을까? <끝>

*2020년 4월 18일부터 시작한 ‘슬픈 중국: 문화혁명 이야기’는 이번 주 70회를 끝으로 막을 내립니다. 잠시 쉬었다가 가을이 오면 ‘슬픈 중국: 대륙의 자유인들 (1976- 현재)’을 이어가겠습니다. 독자님들의 성원과 사랑에 머리 숙여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