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도현의 전쟁 이야기4/ 장군의 이름을 받들어 - war & tech - 섬나라 공격 - 북-중 열병식 - 풀퀴 전투기
남도현의 전쟁 이야기4/ 조선일보
■장군의 이름을 받들어
(1) 독일 해군에 습격당한 영국 해군, 복수의 기회를 노리다
치열했던 건함경쟁
1888년 독일은 야심만만한 젊은 황제 빌헬름 2세가 즉위하면서 적극적인 대외 팽창 경쟁에 뛰어들었다. 그러한 일환으로 20세기에 들어 강력한 해군력을 구축하기 시작하였는데, 이는 지난 400년간 제해권을 장악하고 있던 영국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었다. 그런데 독일은 선박, 특히 군함 건조 및 운용에 관한 노하우가 그다지 많지 않아 표준이라 할 수 있는 영국의 군함을 카피하는 방식을 택하였다.
1905년 12월, 영국은 전함 건조에 워낙 많은 비용이 들다보니 전함과 순양함의 중간 체급에 해당하는 순양전함(Battle Cruiser)을 만들어 전력을 보충하였다. 순양함의 날렵함에 전함의 화력을 보강한 새로운 전투함의 등장은 무거워서 순항 속도가 느린 기존의 장갑순양함(Armored Cruiser)의 퇴조를 불러왔다. 이에 자극 받은 독일도 1907년도부터 폰데어탄(SMS Von der Tann)을 시작으로 순양전함의 건조에 착수하였다.
▲나폴레옹을 물리친 프로이센의 명장 게르하르트 폰 블뤼허. 그런데 20세기에 그의 이름을 따서 명명한 전투함들의 말로는 좋지 않았다.
이에 따라 장갑순양함은 한창 제작 중에 있던 한 척을 마지막으로 하여 완전히 건함 계획이 취소되었다. 비록 구시대의 설계 사상에 따라 제작된 장갑순양함이다 보니 속도가 느렸지만 210mm 포를 무려 12문이나 장착하여 전함과 맞먹는 화력을 자랑하였는데, 독일은 이 마지막 장갑순양함의 이름을 워털루 전투의 승장인 프로이센의 명장 블뤼허(Gebhard Leberecht von Blucher)의 이름을 따서 명명하였다.
1914년 제1차 대전이 발발하였다. 그런데 막상 남대서양의 포클랜드 인근에서 있었던 소규모 국지전 외에 영국과 독일간의 해상 충돌은 없었다. 하지만 독일은 비록 객관적인 해군 전력이 영국에 비하여 열세였음에도 그동안 꾸준히 증강하여 세계 2위 수준까지 올라선 그들의 능력을 보여주고 싶었다. 사실 전쟁이 벌어진 이상 이 정도의 거대한 전력을 사용하지 않는다는 것도 말이 되지 않았다. 독일은 군사적 성과는 미미할지라도 영국 본토에 대한 직접 공격이 영국에게는 불안감을, 반대로 독일에게는 사기를 올릴 수 있는 효과가 크다고 판단하였다. 독일 해군은 이에 따라 1914년 말부터 2차례에 걸쳐 함대를 은밀히 발진시켜 영국의 동부 해안에 기습적인 불벼락을 날려주었다. 영국인들은 그들의 자랑인 해군이 앞바다도 방어하지 못하였다는 사실에 불안감을 느꼈다.
▲20세기 들어 건조된 신조함이었지만 순양전함이 본격 등장하기 시작하자 독일의 마지막 장갑순양함이 되어버린 블뤼허.
최초의 함대 간 대결
1915년 1월 23일, 3번째로 영국 본토에 대한 공격 임무를 하달 받은 독일 함대가 키일 항을 출발하였다. 영국에 불벼락을 날릴 함대는 3척의 순양전함과 4척의 경순양함 그리고 장갑순양함 블뤼허로 구성되어 있었다. 히페르(Franz Ritter von Hipper) 제독이 지휘하는 독일 함대는 북해의 도거뱅크를 향해 다가갔고 거기서 서쪽으로 변침하여 영국 동부 해안으로 갈 예정이었다. 그런데 이번 작전은 그 동안 망신에 절치부심하던 영국 해군성 첩보국들이 파견한 스파이들의 활약 덕분에 내용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다. 영국 해군은 6척의 순양전함을 주축으로 하여 9척의 경순양함, 35척의 구축함으로 이뤄진 대규모 영접 사절단을 준비하여 독일 함대 진출 방향으로 출동시켰다. 주력함만 해도 2배가 넘는 규모였고 당연히 정면으로 충돌한다면 독일이 이길 가능성이 없었다.
▲도거뱅크로 항진하는 독일 순양함 데플링게르, 몰트케, 자이들리츠(좌에서 우). 하지만 이들의 출동을 영국 첩보 기관은 사전에 파악하고 있었다.
1월 24일 오전 7시 14분, 독일 함대 우현을 담당하던 경순양함 콜베르크(SMS Kolberg)가 영국 함대의 경순양함 오로라(HMS Aurora)를 발견하고 곧바로 교전에 들어갔다. 제1차 대전 최초의 함대간 대결인 도거뱅크 해전이 시작된 것이었다. 처음 보고를 받은 히페르 제독은 오로라를 인근 해역을 초계하는 함정 정도로 생각하고 간단히 제거할 생각으로 함대를 변침하여 급속 전진하도록 명령하였다. 그런데 그 순간 최전방에서 초계를 하던 경순양함 스트랄순드(SMS Stralsund)가 대규모의 영국 함대를 발견하였다는 보고를 해왔다. 동시에 북북동 방향에서 끝없이 뿜어져 나오는 영국 함대의 엄청난 연기를 확인한 히페르는 정면 충돌은 승산이 없음을 깨달았다. 만용을 부려 응전하기보다 함대의 보존이 우선이라 생각한 그는 지체 없이 독일 함대에게 회항 명령을 하달하고 도망가기 시작하였다.
히페르는 영국 함대를 쉽게 따돌릴 수 있을 것으로 판단하였지만 추적자들은 고속을 자랑하는 순양전함들이어서 함대간의 거리는 점점 줄어들기 시작하였다. 더구나 독일 함대의 맨 뒤는 속도가 가장 느린 블뤼허였다. 히페르는 블뤼허에 맞추어 함대 전체의 후퇴 속도를 조절하고 있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 간격이 더욱 좁혀지자 마침내 독일 함대는 영국 함대의 포사정권에 들어오게 되었다.
▲제1차 대전 최초의 함대 간 대결인 도거뱅크 해전의 서막을 개시한 영국의 경순양함 오로라.
(2) 영국 해군 협공에 침몰한 독일 전함 블뤼허를 히틀러가 20년 뒤 부활시키다
블뤼허의 최후
비티(David Beatty) 제독이 지휘하는 영국 함대는 과부하로 보일러가 터질 정도인 29노트의 쾌속으로 독일 함대를 맹렬히 추격한 끝에 드디어 한 시간 정도 지난 8시 50분경 가장 앞서 달려가던 순양전함 라이온(HMS Lion)이 독일 함대의 가장 뒤에 처져있던 블뤼허를 포 사정권 안에 넣었다. 곧바로 지체 없이 포격이 개시되었고 9시 10분, 첫 명중탄이 블뤼허에 작열하였다.
그러자 블뤼허 인근에 있던 4척의 독일 전투함들이 뒤로 돌아 라이온을 목표로 대응 사격을 개시하였다. 이렇게 교전이 벌어진 틈을 타서 라이온을 뒤따라오던 영국의 순양전함 타이거(HMS Tiger), 프린세스 로얄(HMS Princess Royal), 뉴질랜드(HMS New Zealand), 인더미터블(HMS Indomitable)도 포격을 개시할 만한 위치에 도달하게 되었고 비티 제독은 각 함마다 상대를 하나씩 맡아 포격을 가하도록 명령하였다.
▲도거뱅크 해전 당시 영국의 순양전함 라이온은 블뤼허에게 처음 명중탄을 날렸다. 하지만 독일 해군의 집중적인 반격을 입고 대대적인 수리를 요할 만큼 커다란 손상을 입었다. /위키피디아
1시간 정도 계속된 격렬한 포격전 속에 독일의 순양전함 자이들리츠(SMS Seydlitz)와 데플링게르(SMS Derfflinger)가 결정타를 맞고 크게 파손 당하며 전투 능력을 상실하였다. 이 와중에 제일 먼저 영국의 밥이 되어 여러 발의 명중탄에 피격당한 블뤼허는 속도가 17노트까지 떨어져 대열에서 완전히 탈락하였다. 그러자 영국 함대는 후위 함들에게 블뤼허의 처리를 맡기고 본진은 계속하여 독일 함대를 추격하였다.
마치 사자 우리에 날개가 부러진 채 떨어진 한 마리의 독수리 처지가 된 블뤼허를 손보기 위해 뉴질랜드, 인더미터블, 경순양함 아레추사(HMS Aretusha), 미티어(HMS Meteor)가 떼거리로 달려들었다. 격렬한 포격이 이어진 후 구축함들이 마지막으로 다가와 차례차례 어뢰를 발사하였고 마침내 블뤼허는 바닥을 하늘로 보이고 도거뱅크의 심연으로 가라앉으면서 최후를 맞이하였다.
그런데 블뤼허가 침몰한 바로 그 시각, 독일 잠수함의 반격을 우려한 영국 함대가 추격을 포기하면서 영국과 독일 간에 벌어진 최초의 함대함 대결인 도거뱅크 해전은 미지근하게 막을 내렸다. 승자인 영국은 독일 함대를 끝까지 쫓아가 격멸시키지 못했다는 이유로 몇몇 장성들이 문책 당하였고, 패전한 독일은 제대로 싸워보지 못하고 도망쳐 나온 데에 대한 카이저의 분노로 해군 참모총장이 교체되는 홍역을 치렀다.
▲집중타를 얻어맞고 침몰하는 블뤼허의 최후. 도거뱅크 해전에서 양측 합쳐 유일하게 격침된 전투함의 불명예를 얻었다. /위키피디아
새로운 탄생 이처럼
격렬한 싸움에도 불구하고 직접 충돌을 회피한 독일의 전술 때문에 이번 해전에서 양측을 통틀어 유일하게 침몰당한 함정은 바로 블뤼허였다. 블뤼허는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한 채 792명의 승무원이 전사하고 260명의 승무원이 포로로 잡히는 치욕을 당하여 프로이센을 지켜낸 명장의 이름에 먹칠을 하였다. 독일은 이러한 치욕을 잊지 않았고 블뤼허의 이름으로 복수할 날을 묵묵히 기다렸다 .
제1차 대전 종전 시점까지 여전히 세계 2위를 자랑하던 독일 해군은 패전 후 베르사유 조약에 따라 철저하게 해체되었다. 엄청난 국력을 투입하여 만들어낸 수십 척의 전투함들이 승전국들에게 전리품 대상으로 떠오르자, 독일 해군 잔존 대원들은 마지막 자존심을 지키고자 나포되어 정박 중인 영국의 스캐퍼플로(Scapa Flow)에서 자침을 감행하였다. 그렇게 함정들이 사라져 간 이후 독일 해군은 연안이나 겨우 경비할 수준으로 전력이 급락하였다.
▲1919년 6월 21일 스캐퍼플로 억류 중 자침한 독일 해군의 순양전함 힌덴부르크. 수십 척의 전투함들이 연합국 노획의 굴욕을 피하려 스스로 최후를 선택한 이 사건을 마지막으로 한때 세계 2위였던 독일 해군은 사라져버렸다. /위키피디아
어느덧 세월이 흘러 1935년 7월, 정권을 잡은 나치가 베르사유 조약을 일방적으로 파기하고 재군비에 나서면서 전력 증강의 일환으로 키일 조선소에서 2척의 18,000톤급 최신 중순양함의 건조에 착수하였다. 건조된 이 중순양함들은 203mm의 대구경함포 8문과 105mm의 부포 12문으로 중무장하여 지난 전쟁에서 완전히 몰락한 후 우여곡절 끝에 재탄생한 독일 해군의 자랑거리가 되었다.
제1차 대전 당시 맹장이었던 히페르 제독의 이름을 따서 초도함이 히페르 제독함(Admiral Hipper)으로 명명된 이 중순양함은 모두 5척이 건조되어 독일 해군의 중간급 주력전투함으로 사용될 예정이었다. 야심만만하게 제작한 히페르 제독함은 제2차 대전이 발발하기 바로 직전인 1939년 8월 25일 취역하였고 함께 건조하던 2번함은 전쟁 발발 후인 9월 20일 전선에 데뷔하였다.
그런데 2번함의 이름이 블뤼허로 명명되었다. 위대했던 명장의 이름으로 함명을 부여받았지만 이름값을 제대로 발휘하지도 못하고 20여 년 전 북해 한가운데서 적들에게 일방적으로 공격 당하여 비참하게 바다 속으로 사라져간 마지막 장갑순양함 블뤼허의 명예를 회복하기 위해서였다. 이렇게 허망하게 사라졌던 블뤼허의 이름은 다시 한 번 바다 위에 당당히 등장하였다.
▲1937년 6월 8일 진수식을 갖는 새로운 블뤼허. 이 최신 중순양함에게는 지난날의 치욕을 씻어내야 할 무언의 의무가 부과되었다.
(3) 노르웨이 오슬로 점령에 나서다가 47년된 해안포에 걸려 침몰하다
북유럽 침공에 나서다
폴란드를 점령한 히틀러에게 이제 다음 상대는 20년 전 독일에게 패전의 아픔을 안겨주었던 프랑스와 영국이었다. 그런데 지난 전쟁 당시에 해상이 봉쇄당하여 패전에 이르렀던 기억 때문에 독일은 이들을 상대하려면 먼저 사전 정지작업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였다. 연합국 해군을 대등하게 상대할 수 없어도 적어도 앞바다인 발트 해와 북해에서 영국이 마음 놓고 활동할 수 없도록 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거기에 더해 앞으로도 전쟁을 계속하려면 전략 물자인 철광석의 확보가 상당히 중요한데, 당시 독일은 스웨덴에서 상당량을 도입하고 있었다. 스웨덴 북부의 키루나에서 채굴된 철광석은 노르웨이의 나르빅까지 육상으로 운송된 후 북해를 거쳐 독일로 들어왔다. 만일 연합국이 막강한 해군력을 앞세워 이 중요한 통로를 차단하려 나설 경우 독일이 이를 저지할 방법이 마땅치 않았다.
▲순양함 히페르 제독호에서 내린 독일군이 상륙을 준비하고 있다. 독일의 노르웨이 침공전은 제2차 대전 당시 독일 해군이 벌인 최대 규모의 작전이었다.
독일은 해군이 봉쇄당하지 않고 원양으로 쉽게 나갈 수 있고 또한 전략 물자의 안정적인 공급로를 확보하기 위해 덴마크와 노르웨이 점령을 결정하였다. 독일은 결심이 서자 망설이지 않고 곧바로 1940년 4월 7일 침공을 단행하였다. 육지로 맞닿은 덴마크는 육군이 불과 반나절 만에 굴복시켰지만 발트 해 건너의 노르웨이를 점령하려면 해군이 공격의 중추로 참여하여야 했다.
하늘에서 공군이 보호하겠지만 세계 최강의 영국 해군과 북해에서 만나게 될 경우 결코 생존을 장담 할 수 없었다. 때문에 최대한 신속하게 노르웨이를 점령 할 필요가 있어서 독일 해군의 전부라 할 수도 있는 총 42척의 함정이 침공전에 투입되었다. 이는 제2차 대전 전체를 통틀어 독일 해군이 활약한 최대의 작전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노르웨이의 해군력이 상대가 되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상륙부대를 싣고 있는 독일 함대는 노르웨이 인근으로 다가간 후 오슬로, 크리스챤산드, 베르겐, 트론하임, 나르빅, 잉게르순드 등의 요지를 동시다발적으로 점령하기 위하여 분산하였다. 이는 노르웨이 특유의 피요르드 해안 때문에 불가피하게 선택한 공격방법이기도 하였다. 이때 노르웨이의 수도 오슬로를 점령하기 위해 출동한 부대가 쿠메츠(Oskar Kummetz) 제독이 이끄는 전단이었는데 이 기함이 바로 블뤼허였다.
▲함께 출동한 순양함 엠덴에서 바라 본 블뤼허. 영국 해군의 행동이 개시되기 전에 기습적으로 발트 해를 건너 노르웨이까지 다가가는 데는 성공하였다. 하지만 이들은 그곳에서 지옥을 보았다.
또 다시 당한 비참한 최후
독일 공군이 빈약한 노르웨이 공군을 격파하는 동안 공수부대가 낙하하여 공항이나 교량 같은 요지를 순식간 점령하였다. 그런데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소수의 경무장 공수부대가 거점을 오래 동안 확보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결국 승리는 배를 타고 온 증원군이 이들로부터 거점을 인수인계 받고 예상되는 적의 반격을 완전히 평정할 수 있는 수준까지 되어야 달성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블뤼허는 순양함 뤼초우(Lutzow), 엠덴(Emden)을 거느리고 인근 해역에 대기하고 있다가 공수부대의 작전이 개시되자 해안가로 돌진하였다. 전술적으로 깎아지른 협곡 안으로 함정이 진입하는 행위는 상당히 위험하지만 상륙군을 내려놓기 위해서 어쩔 수없이 이런 방법을 선택하였고 이미 전의를 상실한 노르웨이의 반격은 크게 예상되지 않았다. 그런데 엠덴이 사전에 설치해 놓은 기뢰에 부딪혀 피해를 입으면서 상륙 작전이 지연되었다.
▲대어를 잡은 스카보리(Oscarsborg) 요새의 280mm 해안포. 무려 47년이나 된 구닥다리여서 독일은 이를 전력 외로 분류해 놓고 있었을 정도였다. 그러나 이 해안포는 대어를 낚았다.
블뤼허 전단이 협곡에 갇혀 오도 가도 못하던 바로 그 순간, 협곡 위에 배치되어 있던 오스카보리(Oscarsborg) 요새의 280mm 해안포가 불을 뿜었다. 독일도 존재를 알고는 있었지만 47년이나 지나서 전력 외로 분류하여 놓았을 정도로 구닥다리였던 포였다. 하지만 여기서 발사된 포탄들이 블뤼허의 갑판에 정확히 내려 꽂혔고 동시에 함께 해안에서 발사한 두발의 어뢰가 블뤼허의 옆구리를 강타하였다.
그것은 회복하기 힘든 치명타가 되었다. 보무도 당당히 취역한지 불과 반 년 만에 블뤼허는 침몰하기 시작하였다. 7시 23분 블뤼허는 바닥을 하늘로 보이면서 830명의 장병과 함께 가라앉았고 그 피해와 망신은 25년 전에 도거뱅크에서 보여준 선임 블뤼허의 그것을 능가할 정도였다. 블뤼허의 굴욕으로 오슬로 점령은 차질을 빚게 되었고 시간을 얻은 노르웨이 국왕과 정부는 항전을 선언하며 북부로 탈출할 수 있었다.
지금까지 소개한 것처럼 아무래도 독일 해군에게 블뤼허는 궁합이 맞지 않은 이름이라 할 수 있겠다. 제1차 대전 때도 그렇고 제2차 대전 때도 독일 해군의 전투함 중 제일 먼저 배의 밑바닥을 하늘로 보여주었는데, 그것도 건조되지 얼마 되지 않았던 신예함들이었기에 망신은 더욱 컸다고 할 수 있다. 프로이센의 명장 블뤼허는 무덤 속에서 "창피하니 제발 내 이름 함부로 사용하지 말라"고 외쳤을지 모르겠다.
■war & tech
<7> 전설이 된 독일 전차
독일군, 소련 전차 T-34 모방해 ‘판터’ 개발 결함으로 첫 전투 대패… 개선 후 ‘소련 킬러’로
독일 축구 국가대표팀을 흔히 ‘전차군단’이라고 부를 만큼 독일은 세계 전차(tank) 역사에 뚜렷한 발자국을 남겼다. 전차를 처음으로 만든 나라는 아니지만 가장 효율적으로 운용할 수 있는 적합한 구조와 승무원의 수를 과학적으로 산출해냈다. 무엇보다 전차를 이용한 새로운 전쟁 기법을 완성했다는 점이 독일과 전차의 이미지를 하나로 묶어 놓았다.
이는 전쟁사를 뛰어넘어 세계사에 커다란 변혁을 가져왔다. 제1차세계대전 당시 서부전선에서 있었던 4년간 모습은 참호를 뛰어넘지 못해 수백만 젊은이들이 고통 속에 죽어간 아비규환이라고 표현할 수 있다.
소련군 전차 성능에 놀란 독일
1939년 10월 폴란드 점령을 완료한 직후, 히틀러가 프랑스 침공 준비 지시를 내렸을 때 가장 강력히 반대에 나선 곳이 지난 전쟁의 악몽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던 군부였을 정도다.
독일 군부 또한 베르사유 조약이라는 굴욕을 주도한 프랑스에 대한 적개심이 높았다. 하지만 프랑스와 영국의 연합군보다 전력이 앞서지 않은 상황에서 전쟁을 개시한다면 제1차세계대전보다 더 참혹한 상황이 연출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히틀러가 계속 전쟁을 요구하자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바꿀 생각까지 했을 만큼 그들은 몸을 사렸다.
하지만 독일은 1940년 6월, 불과 6주 만에 프랑스를 굴복시켰다. 압승이었다. 이런 기적을 연출할 수 있었던 이유는 고루한 과거의 전통만 답습했던 연합군과 달리 독일군은 지난 전쟁에서 패한 이유를 철저히 분석해 속도와 집중을 통해 전력을 극대화한 전략을 펼쳤기 때문이다. 공군의 호위를 받는 집단화된 기갑부대로 상대의 종심(앞뒤로 늘어선 대형·진지·방어 지대 따위의 전방에서 후방까지의 거리)까지 순식간에 파고들어 전쟁 수행 의지를 꺾어버린 이른바 ‘전격전(電擊戰)’이었다.
이런 놀라운 전략의 선봉장 노릇을 한 전차만 놓고 봤을 때 독일군은 연합군의 3400여대보다 수량이 1000대나 적었다. 하지만 보병 부대에 분산 배치한 연합군과 달리 독일은 필요한 곳으로 최대한 집중시켜 공격력을 극대화했다. 선택과 집중이라는 전략을 구사한 것이다. 그런데 전쟁 전의 우려와 달리 쉽게 승리하면서 문제점도 발생했다.
1934년 히틀러가 재군비를 선언하기 전까지 독일은 베르사유 조약으로 전차 개발과 보유를 금지당했다. 때문에 주변국에 비해 전차 개발 능력이 떨어졌다. 우리가 막연히 생각하는 것과 달리 제2차세계대전 초기에 독일이 보유한 전차의 성능은 부족한 점이 많았다. 영화 등에서 묘사한 연합군 전차를 무지막지하게 압도하는 독일 전차는 정작 독일의 쇠퇴기인 1942년 이후에 등장했다.
히틀러의 전쟁 개시 요구에 몸을 사렸을 만큼 독일 군부는 이런 문제점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프랑스를 쉽게 꺾어버리자 이를 망각해버렸다. 이런 상황에서 1941년 소련을 침공해 6개월 동안 500여만명의 소련군을 소탕하고 약 2000㎞를 진격하는 놀라운 승리를 거뒀다. 하지만 소련이 항복하지 않고 독일을 물고 늘어지면서 전쟁은 대책 없이 늘어지기 시작했다.
이때 독일을 당황하게 만든 것 중 하나가 소련의 전차였다. 그중 T-34는 독일의 기존 전차로 상대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해야 했을 만큼 충격적이었다. 결국 승리에 안주하면서 잠시 주춤하던 중(重)전차 개발 프로젝트에 속도가 붙어 너무나 유명한 티거(Tiger) 전차가 1942년부터 전선에 등장했다. 하지만 당대 최강인 티거는 너무 비싸고 제작이 어려워 전선에 충분히 공급하기가 어려웠다.
새 전차 184대 투입, 40대만 가동
이때 독일이 선택한 방법은 어느덧 그들에게 부러움의 대상이 돼버린 T-34를 벤치마킹하는 것이었다.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서 자존심은 그 다음의 문제였고, 그렇게 해서 1943년 탄생한 전차가 판터(Panther)다. 청출어람이라는 말처럼 T-34를 모방했지만 성능은 훨씬 뛰어나서 종전 직전까지 독일의 주력으로 맹활약했다. 하지만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었다.
1943년 7월, 모스크바 남쪽 500여㎞에 위치한 쿠르스크(Kursk) 일대에서 역사상 최대의 기갑전이 벌어졌다. 사실 격전은 이미 예정돼 있던 상황이었는데, 이와 관련해 전해지는 이야기가 있다. 당시 독일 군부는 이왕 공격을 실시하려면 소련이 준비를 갖추기 전에 빨리 하자는 의견이 있었지만 히틀러가 개발 완료 단계에 있던 판터의 배치가 이뤄진 이후에 하자고 주장해 한 달 정도 실시가 연기됐다는 것이다.
진위 여부는 그렇다치고 어쨌든 검증도 제대로 거치지 못하고 서둘러 등판한 판터의 첫 실전 결과는 참혹했다. 이틀 만에 184대 중 겨우 40대만 전투가 가능했다. 문제는 피격당해 그런 것이 아니라 동력과 연료 공급 계통에 심각한 결함이 있어 싸워보지도 못하고 전선에서 이탈한 것이 대부분이었다는 점이다. 결국 이후 문제점을 해결해 전투에 투입될 수 있게 되기까지 6개월 정도의 시간이 더 필요했다.
이는 삼성이 야심차게 선보였다 단종이라는 아픔을 겪은 스마트폰 ‘갤럭시 노트7’ 판매 중단 사태와 유사하다. 애플의 아이폰7에 앞서 시장을 선점하기 위해 무리하게 출시한 게 화근이었다. 비록 판터는 데뷔가 실망스러웠지만 문제점을 해결하고 이후 독일 전차의 전설을 써내려갔다. 초유의 위기를 경험한 삼성도 과연 그럴 수 있을 것인지 궁금해진다.
<8> 독일군 참모본부 시스템
전력 뒤졌던 독일, 뛰어난 참모본부 덕에 승승장구 능력 있는 엘리트들이 작전 기획, 사령관이 최종 결정
업무의 양이 많아지고 규모가 커지면 자연스럽게 조직이 세분화되는데, 당연히 일을 가장 효율적으로 수행할 수 있도록 구성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하지만 이는 CEO처럼 전체를 관리하는 이의 입장에서 그렇게 되기를 원할 뿐이지, 실제로 조직이 커지고 세분화되면 그만큼 비효율성도 함께 늘어난다.
아이러니하게도 업무를 나누면 과부하가 사라져 일이 신속하게 처리될 것 같지만, 정작 결재나 협의 단계가 늘어나면서 이전보다 의사 결정에 시간이 많이 걸리는 경우가 생각보다 많이 발생한다. 어처구니없지만 중요한 사안이 최고책임자까지 보고가 늦어지면서 낭패를 보는 경우도 종종 있다.
또한 조직이 커지면 자연스럽게 부서 간에 이기적인 장벽이 생기게 된다. 그래서 생색낼 일이 생기면 어떻게든 간섭하려고 들다가도 문제가 벌어지면 자기 소관이 아니라고 오리발을 내미는 행태가 흔하다. 언론에서 자주 보도하다 보니 우리나라 정부 부처 사이에서 벌어지는 일로 생각하지만 사실 외국도 마찬가지다.
최근 미국의 우주 개발 프로그램을 보면 민간의 참여가 두드러진 사실을 알 수 있다. 미국은 소련과의 피 말리는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 1958년 미국항공우주국(NASA)을 만들어 결국 인간을 달에 먼저 보내는 데 성공했다. 냉전의 긴장과 맞물려 모든 길이 NASA로 통하던 시대다 보니 의사 결정은 커다란 덩치에도 불구하고 경이적일 정도로 신속했다.
하지만 인간을 달에 보낸 이후 규모가 대폭 축소됐음에도 NASA는 결정을 하나 하는 데 수년 이상이 걸릴 정도로 관료화가 극심하게 진행된 늙은 조직으로 바뀌었다. 그래서 나온 해결책이 상업적으로 이익을 낼 수 있는 분야는 민간이 담당하고, 장기간 시간이 소요되는 과학 분야는 NASA가 담당하기로 교통 정리했을 정도다.
소니, 비대해진 조직과 부서 이기주의로 몰락
그런데 합리적일 것 같은 민간 분야에서도 이런 현상은 흔하게 찾아볼 수 있다. 전자 산업계의 거인이던 소니가 몰락하게 된 이유를 보면, 비대해진 조직과 부서 이기주의 그리고 이에 따른 늦은 의사 결정을 꼽을 수 있다. 시대를 이끈 창조와 혁신의 아이콘이던 소니가 무기력한 조직으로 바뀌는 데 불과 10년도 걸리지 않았던 것이다.
아무리 똑똑하고 부지런한 CEO라도 일일이 모든 부분에 관여할 수는 없다. 그렇다고 기업이 비대해져서 부정적인 효과가 나타난다면 그것을 그대로 방치할 수도 없다. 이때 힘을 발휘하는 것이 바로 참모 시스템이다. 이들은 기업 전반에 발생하는 현황이나 문제점을 곧바로 취합하고 CEO에게 대안을 제시해 의사 결정을 돕는 역할을 한다.
오늘날 많은 기업들이 비서실, 기조실 등 다양한 이름으로 운영하는 참모 시스템은 그 기원을 군에서 찾을 수 있다. 모사(謀士)나 책사(策士)처럼 오래전에도 이런 역할을 수행하던 이들은 있었지만 현대식 기관으로서 참모본부는 독일군 초대 참모총장으로 일컬어지는 게르하르트 폰 샤른호르스트(Gerhard von Scharnhorst)에 의해 탄생했다.
이후 독일군 특유의 시스템으로 발전을 거듭한 참모본부는 다른 나라의 모방이나 시기의 대상이 됐을 정도였다. 특히 제1차세계대전에서 곤혹을 치르며 간신히 승리한 프랑스가 베르사유 조약으로 독일을 옥죌 때 독일군 참모본부의 해체도 포함시켰을 정도였다. 그러나 독일은 병무국이라는 이름으로 비밀리에 이 조직을 유지했다.
그 정도로 독일의 참모본부는 뛰어났다. 귀족, 평민 가리지 않고 철저하게 교육과 경쟁을 거쳐 실력으로만 선발한 엘리트들이 근무했다. 이들은 예하 부대의 지휘관에 비해 계급이 낮지만 작전을 기획하는 권한은 오히려 컸다. 전력이 뒤졌던 독일군이 전시에 효율적으로 가동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도 이와 관련이 많다.
▲지금은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참모본부와 이를 기반으로 하는 지휘 시스템을 확립한 프로이센의 명장 샤른호르스트. 흔히 독일군 초대 참모총장으로 불린다. <사진 : 위키피디아>
야전·정책 부서 간의 견제와 균형 달성
그런데 이와 관련해 반드시 유념해야 할 부분이 있다. 참모본부의 권한과 역할은 상당하지만 이들은 오로지 최고결정권자의 판단을 돕는 일만 담당했다. 즉, 각종 정보를 취합해 문제점을 파악하고 다양한 해결책을 제시하는 것이지 최종적인 판단은 사령관의 몫이었다. 당연히 일선 부대에 대해서 간섭하거나 관여할 수 없었다. 야전부대와 정책 부서의 견제와 균형을 통해서 군을 효율적으로 이끌었던 것이다.
제1·2차세계대전 초기에 승승장구하던 독일군은 이런 시스템에 문제가 생기면서 어려움을 겪기 시작했고 결국 패배했다. 1941년 모스크바 전투의 패배를 빌미로 히틀러(Adolf Hitler)가 군부를 대숙청하고 직접 독일 육군 최고사령관에 올랐던 사건이 대표적이다.
국가 원수는 군통수권자이지만 히틀러는 거기에 만족하지 않고 자신이 직접 전쟁을 지휘하고 싶어 했다. 이때부터 참모본부의 정책 조언 기능은 사라지고, 히틀러의 명령만 출납하는 기관으로 성격이 바뀌어 버렸다. 또한 히틀러에게 아부하는 이들이 참모본부 내 여러 요직을 차지하고 월권을 행사하면서 예하 부대의 지휘 계통에도 문제가 생겼다.
1944년 노르망디에 연합군이 상륙했을 때 독일 기갑부대의 출동이 지연됐던 사건은 그런 곪아버린 모순이 표출된 사례다. 어처구니없게도 주요 기갑부대의 지휘권을 히틀러가 직접 행사하다 보니 방어를 담당한 지휘관들은 옆에 있는 멀쩡한 전차를 그냥 지켜만 봐야 했던 것이다. 이때 조언 기능이 사라진 참모본부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결국 롬멜(Erwin Rommel)처럼 비선을 통해 직접 히틀러와 연결하려는 행태까지 나오면서 지휘계통이 무력화됐다. 이런 상황에서 이기기를 기대한다는 것은 무리다. 사실 치열한 것으로 따진다면 기업도 마찬가지다. 최초로 참모본부를 만들고 주변국의 부러움을 사기도 했지만 결국 전쟁에서 패한 독일의 모습은 조직을 관리하는 이의 입장에서 반면교사로 삼아야 할 사례가 아닌가 생각된다.
<9> 中 만리장성·佛 마지노선
1644년 4월 23일, 도르곤에게 투항 의사를 밝힌 오삼계가 난공불락의 철옹성이던 만리장성 산해관의 정문을 열었다. 그러자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10만의 청(淸)군이 진입을 개시해 만리장성을 넘었고, 그로부터 불과 한 달 만에 북경을 점령했다. 이로써 중원은 원(元)이 고비 사막 북쪽으로 밀려난 후 270여년 만에 다시 이민족의 지배하에 들어갔다.
이자성의 난으로 인해 명(明)은 이미 붕괴된 상태였기에 청의 북경 점령은 싱거울 정도로 빨리 끝났다. 하지만 청은 지난 20여년간 만리장성 남쪽으로 내려오는 데 상당한 어려움을 겪었었다.
청 태조 누르하치나 태종 홍타이지 모두가 만리장성을 최후의 보루 삼아 뛰어난 방어전을 펼친 명의 명장 원숭환에게 좌절을 맛봤기 때문이다. 이처럼 성벽은 소수의 전력으로도 다수를 막아낼 수 있는 뛰어난 군사 시설이다. 특히 서쪽 끝 옥문관에서 동쪽 끝 노용두까지 약 6000㎞에 이르는 만리장성은 인류가 만든 모든 방어물의 백미라 할 만하다. 하지만 어이없게도 만리장성의 극히 일부라 할 수 있는 산해관이 뚫리면서 제국은 멸망했다. 만리장성이 완벽한 보호막은 아니었다.
사실 이것은 17세기에 처음 벌어진 일이 아니고, 그 이전에도 수시로 반복돼 온 역사였다.
이미 기원전 8세기경, 춘추시대부터 장성을 축조했을 정도로 한족은 북방의 유목민족을 막아내기 위해 애써왔다. 처음 대륙을 통일하고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른 진시황조차도 두려움을 느꼈을 만큼 그들은 위협적인 존재였다.
만리장성도 막지 못한 패망
▲폐허처럼 변한 마지노선 75㎜ 포대의 최근 모습. 당대 최고의 역량이 투입된 군사 건축물이었지만 프랑스가 항복할 당시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했다. 수세적인 군사 사상을 신봉하다 벌어진 참사였다. /이코노미 조선
하지만 그렇게 오랜 세월 국력을 쏟아부어 축성한 만리장성이 제국을 지켜내지는 못했다.
흉노·돌궐·선비·거란·여진·몽골·만주족 등이 수시로 만리장성 이남으로 영향력을 확대했고, 경우에 따라 대륙 전체를 지배한 시절까지 있었다. 따라서 중국 역사에서 만리장성이 방어 시설로 뛰어난 위력을 발휘했던 경우는 정작 많지 않았다.
물론 유목민족이 중원으로 남하하려 했을 때 만리장성은 상당히 돌파하기 어려운 장해물이기는 했다. 하지만 최전방이라 할 수 있는 이곳이 뚫려버리면 그다음은 크게 문제가 없다시피 했다. 오늘날 인류의 귀중한 문화유산으로 취급될 정도로 어마어마하지만, 앞에 소개한 사례처럼 만리장성은 일각이 무너지면 그 효과가 즉시 사라져버렸다.
지배자나 민족이 바뀌어도 동양사의 전범인 24사(史)를 이어 써내려갔을 만큼 중원을 차지한 이들은 과거의 역사를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군사적으로 투입 대비 효과가 미미한 만리장성에 계속 매달리는 우매한 행위를 반복했다. 경우에 따라서는 만리장성을 돌파해 중원을 차지한 이민족들도 마찬가지였다.
현실에 안주하며 사라진 도전의식
분명히 그들도 돌파든 우회든 아니면 상대방과 공모를 통해 문을 열어 주는 것처럼 만리장성을 무력화시킬 수 있는 방법이 많고, 주력 대부분을 거대한 성벽에 배치해야 하기에 일단 이곳이 뚫리면 다음 방어 전략을 구사하기 힘들다는 점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들은 눈에 보이는 만리장성에만 계속 의지하다가 화를 자초했다.
그런데 이는 현대 서양사에서도 발견할 수 있는 보편적 사례이기도 하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 승리했지만 당대 20~30대 남성의 70% 이상이 사상하는 혹독함을 경험한 프랑스는 앞으로 예상되는 전쟁을 연구하며, 방어가 최선의 방책이라는 결론을 도출했다. 분명히 참호전으로 일관한 지난 전쟁은 끝까지 방어에 성공한 쪽이 이겼다.
그 결과 등장한 괴물이 마지노선(Maginot Line)이다. 당대 최고의 토목 기술이 집약돼 독·불 국경 350㎞를 따라 건축된 이 거대한 요새에서 프랑스군은 안전하게 전투를 펼칠 수 있다고 내다봤다. 10년의 공사 끝에 1936년 마지노선이 완공됐을 때 독일도 이곳으로의 공격이 무모하다고 인정했을 정도였다.
▲천하제일관이라 불리는 만리장성의 동쪽 끝 산해관. 하지만 유사 이래 만리장성은 북방 민족의 남하를 막아내지 못했다. /이코노미 조선
하지만 제2차세계대전이 발발하자, 1940년 독일은 험준하고 중간에 룩셈부르크와 벨기에가 위치해 프랑스가 마지노선을 축성하지 않았던 아르덴 고지를 통해 프랑스를 침공해 불과 6주 만에 항복을 받아냈다. 그렇게 독일의 기습에 일방적으로 밀리는 동안 마지노선에 있던 100만의 프랑스군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만리장성이나 마지노선은 그 자체로는 흠잡기 어려운 훌륭한 군사 건축물이다.
하지만 고정된 시설에 의존해 스스로의 행동을 수세적으로 제한하도록 만들어버린 족쇄이기도 했다. 사실 정적인 방어물에 의지해서 동적인 전쟁에서 승리하기는 어렵다.
기업 경영도 이와 유사한 측면이 있다. 한국의 많은 기업들이 급속히 성장한 데는 도전정신도 한몫했다. 하지만 최근 2·3세 경영자가 전면에 나서면서 요식업처럼 내수에 안주하려는 경향이 보인다. 그렇게 수세적으로 변한 기업의 미래가 밝지 않을 것은 당연하다. 든든해보이지만 결국 나라를 구하지 못한 만리장성이나 마지노선은 그래서 충분한 반면교사가 될 수 있다.
[10] 무기 역사 이끈 ‘짝퉁’ - 미국 첨단 폭격기 B-29 부러워한 소련 불시착 비행기 그대로 복제해 Tu-4 개발
▲미국 폭격기 B-29(위)와 이를 그대로 복사한 소련 Tu-4 폭격기. Tu-4가 비록 짝퉁이었지만 B-29를 복제하면서 습득한 기술은 소련 전략 폭격기의 개발을 선도했다.
짝퉁이라는 말이 언제부터 쓰였는지는 모르겠으나 국립국어원에서 제작한 표준국어대사전에도 당당히 등재된 표준어이니, 그만큼 많이 사용하는 단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유사품, 모작(模作)과 같은 단어들에 비해 짝퉁은 저질, 불법처럼 부정적인 의미가 유별나게 강하게 풍긴다. 그런데 분명히 짝퉁 제작 행위가 불법이고 나쁜 것임에도 커다란 지하 시장이 존재하고 있다.
원작의 가격이 비싸서 짝퉁이라도 소비하려는 이들이 존재하고, 이런 욕구를 만족시켜 이득을 얻고자 하는 공급자들이 있기에 짝퉁 시장은 절대 사라지지 않을지도 모른다.
대개 짝퉁 하면 중국을 먼저 떠올리지만 한국도 이런 불명예로부터 결코 자유롭지 않다.
단속이 강화돼 국내의 짝퉁 생산은 예전보다 덜 하지만 여전히 짝퉁 시장이 존재한다. 쉽게 카피할 수 있는 콘텐츠나 소프트웨어 분야는 더하다.
이처럼 이익을 위해서라면 불법이나 편법도 마다하지 않는 것이 인간의 본성이라 할지 모른다. 누릴 수 있는 이익이 크면 클수록 짝퉁이 등장할 확률은 높다.
이익이 없다면 당연히 짝퉁이 나타날 수 없으니 어쩌면 경제 원리를 가장 충실히 따른다고 볼 수 있다. 경제 현상의 하나로 볼 수 있는 짝퉁을 자주 목도할 수 있는 분야가 또 있는데 바로 무기의 세계다.
물론 무기도 크게 보면 공산품이므로 일반 상품처럼 각종 권리가 보호되고 있다. 당연히 특정 무기를 국내에서 제작하기 위해서는 원저작권자로부터 라이선스를 받아야 한다. 국내에서 생산한 KF-16 전투기나 터키 현지에서 제작한 K-9 자주포가 그런 사례다. 사실 무기는 갈수록 고도의 기술이 필요하므로 자체 개발이 힘든 경우 라이선스를 받아 생산하는 경우도 많다.
무기의 세계에도 존재하는 베끼기
하지만 전시나 이에 준하는 위급한 상황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이기기 위해서라면 당연히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해야 한다. 상대의 무기가 좋으면 무단으로 복제해서라도 사용해야 한다. 물론 그저 베끼기만 해서는 제대로 된 위력을 발휘하기가 어렵지만 그렇게 해서라도 싸워야 한다. 어쩌면 짝퉁이 가장 먼저 탄생하고 적극적으로 사용된 분야가 무기라 할 수도 있다.
그런데 총, 칼처럼 쉽게 흉내 낼 수 있는 무기도 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무기의 제작에 많은 기술 요소가 투입되고, 이를 철저하게 비밀로 유지하면서 무단 복제도 힘들어졌다.
그래서 무기는 정식으로 값을 치르고 직접 도입하거나 기술을 도입해 생산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하지만 이것도 개발국과 우호 관계여야 가능하다.
무기는 아무리 돈이 많다 하더라도 쉽게 사거나 노하우를 얻을 수 없는 특수한 상품이다.
적대국 관계면 애로 사항이 더 많다. 대등한 수준의 무기를 보유하고 있다면 모를까, 그렇지 않다면 전력 격차를 메우기 위해서 무단 복제를 하게 된다. 그것도 전쟁의 향방에 커다란 영향을 끼칠 무기라면 더하다.
하지만 무기는 단지 겉만 그럴듯하게 흉내만 내는 것으로는 부족하다. 그 밑에 숨어 있는 기술이 더욱 중요한데 이는 철저하게 보호받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직접 무기를 노획해 분석해 보거나 간첩 활동을 벌여 기술을 습득하는 차선책을 사용한다. 일반 상품이라면 제소(提訴)도 가능한 불법적인 행위지만 무기의 경우는 이런 상식이 통용되지 않는다. 오로지 기술이 유출되지 않도록 막거나 어떤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확보하려 하는 창과 방패의 싸움만 있을 뿐이다. 무기의 세계에서 이런 보이지 않는 경쟁을 보여준 대표적 사례가 소련의 Tu-4 폭격기다.
베껴서 습득한 기술 발전시켜 Tu-95 개발
제2차세계대전 당시 미국은 B-29 폭격기를 앞세워 일본을 초토화했다. 이를 지켜본 소련에 첨단 기술의 집합체인 B-29는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소련은 미국에 기술 공여를 요청했지만, 종전 후 소련과의 관계가 적대적으로 바뀔 것으로 예상한 미국은 거부했다. 소련은 불과 종전 2년이 지난 1947년에 B-29를 그대로 복제한 소련 최초의 전략폭격기 Tu-4를 등장시켰다. 단지 겉모양만 같은 것이 아니라 완전 역설계를 통해서 모든 부분을 완벽할 만큼 그대로 재현했다. 너무 심하게 베끼는 바람에 미국에서 B-29를 생산하는 도중 실수로 생긴 흠집까지 그대로 재현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질 정도다.
이런 행위가 가능했던 것은 순전히 우연이었다. 1944년 일본 본토 폭격에 나선 B-29 폭격기들 중 사고로 인해 가까운 소련의 연해주로 날아가 비상 착륙한 폭격기가 있었는데 이를 나포한 것이었다.
압류한 B-29를 조사한 소련 기술진은 기존 소련의 폭격기와 차원이 다르다는 점을 깨달았다. B-29는 지금도 사용 중인 B-52의 개발에 영향을 줬을 만큼 기술 수준이 높은 걸작이다.
그래서 소련은 참고만 하기로 한 계획을 바꿔 B-29를 그대로 복제하기로 결정했다.
자존심은 다음 문제였다. 덕분에 소련은 냉전시대의 개막과 더불어 미국과 비슷한 수준의 핵폭탄 운반 수단을 확보하는 데 성공했다.
소련은 이렇게 습득한 기술을 바탕으로 현재도 활약 중인 Tu-95를 개발했다. 그래서 양국의 대표적 전략폭격기인 B-52와 Tu-95는 흔히 이복형제로 불렸다. 이처럼 기술 개발의 측면에서만 본다면 Tu-4는 나름대로 또 다른 길을 개척한 향도와 같은 역할을 담당했다. 중국의 공산품을 짝퉁이라고 폄하만 할 수 없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베껴서 습득한 기술이 짝퉁으로 끝나지 않고 다른 씨앗이 될 가능성도 크기 때문이다.
[11] 전차무용론 - 대전차무기 등장할 때마다 전차무용론 대두 기술향상으로 주요국 기갑부대 계속 운영
▲대전차 미사일에 관통된 이스라엘군 M60 전차의 포탑. 제4차 중동전은 전차무용론에 불을 지폈다.
‘전차무용론’은 군사 분야에서 오랫동안 갑론을박이 벌어지는 단골 주제 중 하나다. 요지는 대전차무기 발달로 인해 전차가 더 이상 효과적인 전투 수단으로 자리잡기 힘들다는 주장과 반대로 전차가 앞으로도 중요한 위치를 계속 차지할 것이라는 주장이 맞서는 것이다. 그런데 이는 효율성, 즉 경제적인 문제이기도 하다.
만일 도입하고 운영하는 데 들어가는 비용이 전차보다 대전차무기가 훨씬 비싸다면 이런 논쟁은 필요 없다. 물론 일선에서 당장 눈에 보이는 경제적 효용성을 따져가며 싸울 수는 없지만 전쟁을 거시적으로, 전략적으로 운영하는 것은 상당히 중요한 문제다. 왜냐하면 전쟁은 인류가 만들어 낸 최고의 소비 경제이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성능이 향상된 저렴한 대전차무기는 비싼 전차의 입지를 위축시켰다. 특히 욤키푸르(Yom kippur) 전쟁이라 불리는 1973년의 제4차 중동전은 이런 논쟁을 불러온 시발점이었다.
전쟁이 발발하자 이스라엘 기갑부대는 평소처럼 위치를 선점하고 이집트군을 맞이할 준비에 돌입했다. 그러나 그동안 굴욕을 당한 이집트의 대응은 달랐다.
이집트군은 사전에 AT-3 대전차미사일과 RPG-7 로켓을 보유한 특공대를 은밀히 침투시켜 이스라엘군 전차 진격로에 매복하고 있었다. 전차는 전차로 맞상대한다는 사고에 매몰돼 있던 이스라엘 기갑부대가 이집트군의 전차가 보이지 않아 속도를 늦춘 바로 그때 대전차미사일과 로켓이 사방에서 날아왔다.
AT-3, 이스라엘 전차 800여대 격파
순식간에 상공은 미사일이 내뿜는 매연으로 가득 찼고, 동시에 이곳저곳에서 정확하게 피격된 이스라엘군 전차들이 거대한 폭발음을 내며 연쇄적으로 폭발했다. 보이지 않는 적들로부터의 공격에 겁을 먹은 이스라엘 전차들은 전속으로 후퇴했다. 휴대용 대전차무기가 최고의 위력을 발휘한 순간이었다.
자료에 따르면 제4차 중동전쟁 기간 동안 최소 800여대의 이스라엘 전차가 AT-3에 격파된 것으로 알려졌다. 이전까지 세 차례의 전쟁에서 승리의 주역이었던 이스라엘 기갑부대가 이집트군의 대전차 무기에 의해 순식간에 궤멸되다시피 한 타격을 입었다는 소식은 세계 군사 관계자들을 경악시켰다. 당연히 전차무용론은 거세게 타올랐다.
그런데 전차무용론은 전차의 탄생과 더불어 생겼다고 해도 결코 과언이 아니다. 사실 1916년 최초의 전차인 영국의 Mk가 전장에 등장했을 때 독일군이 당황했던 것은, 그것이 강했기 때문이기보다는 낯설어서였다.
전쟁사를 살펴보면 그리 많은 시간이 지나지 않아 독일군은 전차를 요격할 방법을 하나둘씩 터득했다.
하지만 전차무용론이 공감을 얻었던 것은 당시 전차의 성능이 너무 미흡했기 때문이었다. 예상과 달리 Mk는 참호를 쉽게 뛰어넘지 못했고 기계적 신뢰성도 좋지 않았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종전이 되자 전차무용론은 더욱 급속히 퍼졌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가장 큰 이유는 전쟁에서 방어를 잘한 쪽이 승리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공격 수단으로써의 가능성은 여전히 상존해 진화를 계속했고, 1930년대는 여러 국지전을 통해 전차가 전장의 주역으로 새롭게 환골탈태하기 시작한 시기였다. 특히 독일과 소련은 오늘날까지도 영향을 주고 있는 대규모 기갑부대 운영에 대한 이론을 정립했다. 그렇지만 정작 전차를 사용하는 군부에서조차 그다지 신뢰하지 않았다.
▲전차는 여전히 지상전의 주역으로 꼽힌다. 사진은 T-22 전차.
경제 시스템도 무기처럼 꾸준히 진화
국내 신문에도 보도됐을 만큼 전차무용론은 계속된 것이다. 1934년 5월 6일자 신문 기사에 따르면 ‘결국 장갑을 관통하는 포탄을 만들 수 있기 때문에 전차는 군축 의제로도 필요 없다’라는 내용이 기사화됐다. 당시는 일제강점기여서 우리와 아무런 상관이 없는 주제였음에도 이처럼 널리 알려졌다.
1937년 8월 26일 기사를 보면 더욱 구체적인데, 스페인내전 결과 ‘전차는 용맹한 보병에 의해 능히 제압될 수 있는 통조림 같은 무기’로 취급받았다. 흥미롭게도 당시 전차가 필요 없다고 주장하던 근거가 현재 전차무용론을 주장하는 이유와 동일하다는 점이다. 하지만 기사처럼 사라져 버리기는커녕 오히려 전차는 당당한 주역이 됐다.
제2차세계대전, 특히 유럽 전역은 전차 없이 싸우기조차 어려웠을 정도였다. 전쟁 말기에 욕심 많은 히틀러가 자신의 명령 없이는 전차부대의 이동까지 제한시켰을 만큼 모두가 원하는 전쟁 수단이 됐다. 물론 대전차무기도 함께 발전했지만 전차의 발전도 그만큼 비약적이었다.
이글 첫머리에서 전차무용론이 급격히 대두된 예로 제4차 중동전을 소개했지만 한 가지 간과한 부분이 있다. 정작 이 전쟁을 결정적으로 끝맺었던 것은 바로 이스라엘 기갑부대였던 것이다. 그리고 오늘날도 전차는 여전히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탄생 당시부터 전차는 필요 없다는 주장이 있었지만 그것이 맞았던 적은 없다. 그래서 재미있는 것 같다.
이런 현상은 무기뿐 아니라 경제 분야에서도 볼 수 있다. 인류는 폐쇄적 경제 시스템이 20세기에 있었던 대공황과 거대 전쟁들의 원인이라고 보고 꾸준히 개방을 확대했다. 하지만 최근 들어 이런 패러다임이 무너지는 모습이 나타나고 있다. 어쩌면 모든 이를 만족시킬 수 있는 완벽한 체제는 처음부터 없는지 모른다.
[12] 록히드마틴의 F-35 전투기
美, 공군·해군 모두 사용할 전투기 만들다 가격 급등
일반 제품도 비슷…日 가전, 기능 복잡해 소비자 외면
▲미국 해군 강습상륙함 아메리카 호에서 착함 중인 F-35B. 미 해병대와 영국 해군이 도입할 F-35 B형은 요구된 수직이착륙 성능 때문에 개발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사진 : 미 해군>
1월 30일 흥미로운 소식이 전해졌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올해 예정된 90대의 F-35 전투기 구매 비용 중 6억달러(약 6800억원)를 삭감하기로 록히드마틴과 합의했다는 내용이다. 트럼프는 유세 당시부터 F-35의 도입가가 통제 불능 수준으로 치솟아 반드시 이를 바로 잡겠다는 공약을 했고, 당선 후 록히드마틴에 압력을 넣었다.
처음에 록히드마틴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지만, 트럼프가 보잉의 F/A-18E 전폭기를 대안으로 거론하자 화들짝 놀라 꼬리를 내렸다. 할인 이후 대당 도입가가 정확히 얼마인지 밝혀지진 않았으나 상당한 세금을 절약한 것은 틀림없다.
트럼프가 미끼로 F/A-18E를 언급했지만, F-35가 미군의 차세대 주력기가 되는 것은 바꿀 수 없는 현실이다. 그럼에도 트럼프는 F-35의 개발·도입 과정에 많은 문제가 있다고 판단했다.
우선 그는 가격 급등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처음 F-35 도입 프로그램을 구상할 당시에는 대당 2000만달러(약 228억원)로 예정된 가격이 본격적으로 개발이 시작된 2002년에는 5000만달러로 상승했다. 2015년 F-35를 도입하기 시작했을 때는 무려 1억달러로 가격이 껑충 뛰었다. 그동안 물가 상승을 감안해도 처음보다 거의 5배 상승했다는 것은 트럼프로선 분명 불만스러운 점이었을 것이다.
‘팔방미인’ 전투기 개발 욕심이 화근
F-35의 가격이 급등한 것은 도입을 예정했던 2010년을 넘겼을 만큼 개발 과정 중 어려움을 겪었기 때문이다. 최신 기술들을 접목한 것도 그렇지만, 가장 큰 어려움은 당국에서 원했던 F-35의 콘셉트가 모든 임무에 투입 가능한 팔방미인 플랫폼이었다는 점이다.
1990년대 초반, 미 공군은 하위급으로 사용 중인 F-16 전투기의 대체 사업을 준비했다. 일반적으로 공군 전력은 고가의 상위급 전투기와 염가의 하위급 전투기를 적당한 비율로 구성한다. 상위급인 F-15 전투기의 후속 모델로는 스텔스기인 F-22가 결정된 상황이었기에 그때만 해도 작은 F-22, 즉 염가의 스텔스 전투기가 목표였다.
그런데 냉전이 끝나고 군비 감축 바람이 불자 프로젝트가 묘하게 바뀌었다. 당국이 미 해군에서 퇴역하기로 예정한 A-6 공격기, F/A-18 전폭기도 같은 신예기로 대체하는 것을 검토한 것이다. 그동안 공군·해군이 별도의 전투기를 운영했던 것을 동일 기체로 단일화하면 개발·도입 비용을 낮출 수 있다고 본 것이다.
함재기와 공군기의 구조가 많이 다르기는 하지만 개조하면 사용에 크게 어려움은 없다. 프랑스의 라팔M이나 러시아의 Su-33, MiG-29K가 기존 공군기를 함재기로 개량한 경우다. 하지만 문제는 조만간 퇴역 예정인 해병대의 AV-8 공격기와 공군의 A-10 공격기까지도 이 기체로 대체하겠다는 숙제가 추가됐다는 점이다.
AV-8은 구조가 상이한 수직이착륙기고, A-10은 저고도에서 저속으로 이뤄지는 지상군 근접 지원(CAS)에 최적화된 단일 임무기다. 그러자 이왕 판이 커진 이상 좀 더 비용을 낮추고자 개발 단계부터 노후 전투기의 대체를 예정한 많은 동맹국들의 참여를 유도했다. 이렇게 1993년 시작된 사업이 ‘합동 타격기(JSF)’ 프로그램이다.
우여곡절 끝에 2001년 록히드마틴 컨소시엄이 사업자로 선정돼 본격 개발이 시작됐으나 진행 과정이 순탄치 않았다. 물론 기본 플랫폼을 제외하고 용도별로 세부형이 다르지만, 마치 같은 차체로 스포츠카와 화물차를 만드는 것이 어렵듯이 많은 어려움이 발생하면서 예정된 기한을 넘겼고 개발 비용도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한때 시장을 석권했던 일본 파나소닉 캠코더.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지만 필요 이상의 기능을 많이 장착해 가격이 비쌌고,복잡한 만큼 고장도 많이 발생했다. <사진 : 위키피디아>
F-35 개발 늦어지자 캐나다 도입 취소
록히드마틴은 F-35가 본격 양산되기 시작하면 8500만달러(약 971억원) 수준까지 가격을 낮출 수 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것도 최초에 예정된 5000여대의 물량이 안정적으로 확보됐을 때나 가능한 이야기다. 이미 주요 개발 참여국 중 하나였던 캐나다가 기간이 늘어지고 비용이 상승했다는 이유로 F-35 도입을 전격 취소했다.
F-35는 차세대 전투기로 충분한 성능을 가졌다고 평가받는다. 하지만 과한 요구로 인해 자칫 이도저도 아닌 천덕꾸러기로 전락할 위험이 있다. 이는 비단 무기의 세계에서만 볼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일반 상품에서도 기본보다 혹은 최초의 능력보다 많은 것을 요구하다가 낭패를 본 사례가 많다.
1980년대 전성기를 누린 일본 가전제품의 특징 중 하나는 잡다한 기능이 많다는 점이었다. 버릴 때까지 한 번도 사용하지 않은 기능이 있을 정도였는데, 이는 필연적으로 가격 상승과 복잡한 구조로 인한 고장을 불러왔다. 한때는 네임 밸류 덕에 이런 단점이 드러나지 않고 넘어갔지만, 결국 일본 가전의 몰락 원인 중 하나로 작용했다.
만약 미국에서 F-35 대신 다른 대체 기종을 개발했다면 이미 오래 전에 배치됐을 것이고, 비용도 절감했을 것이다. 아무리 기술이 발전해도 모든 기능이 있는 무기를 제작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이는 소비자의 요구를 정확히 파악해야 살아남을 수 있는 일반 상품도 마찬가지다.
[13] 장수 무기의 비결
60년 전 개발된 ‘M60 기관총’ 여전히 사용 성능 개선 필요 없는 분야서 장수 제품 나와
최근 한 언론이 불법 조업 중인 중국 어선을 단속하는 해양경찰의 어려움을 보도한 적이 있다. 요지는 사격에도 불구하고 중국 어선들이 저항을 멈추지 않는다는 것인데, 그 이유가 작전에 사용한 M60 기관총이 설계된 지 60년 가까이 돼 성능이 떨어지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이런 이유로 미국은 M249, M240 같은 최신 기관총으로 대체 중이고 국군도 K3 경기관총을 개발해 사용 중이지만, 해경은 예산 문제로 대체 계획이 정해지지 않았으니 당국의 관심이 필요하다고 언급했다.
해경 장비의 현대화 노력이 필요하다는 취지의 보도였지만 사실과 다른 부분이 많다. 우선 중국 어선이 사격에도 피하지 않는 이유는 M60의 성능이 나빠서 그런 것이 아니다. 부득이 총기를 사용해 단속하게 됐지만, 해경의 원칙은 격파가 아닌 퇴거이므로 만일의 사고를 우려해 처음부터 격파나 살상 목적의 사격은 어렵다. 그래서 중국 어선이 겁내지 않는 것이다. 무기가 문제가 아니라 정책 때문에 벌어진 현상이다.
아스피린처럼 무기도 장수 제품 있어
두 번째로 최신 기관총으로 언급한 M249, K3는 사실 M60과 용도가 다르다. 물론 기관총의 기본적 임무는 제압이지만 7.62㎜ 구경탄을 사용하는 M60과 5.56㎜ 구경탄을 사용하는 M249, K3는 원론적으로 역할이 다르다. 그래서 현재 군도 여전히 M60을 대량 사용 중이다. 또한 애당초 기관총은 목표물을 조준해 정확히 타격하는 무기가 아니다.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오류는 설계된 지 60년 가까이 됐기에 성능이 떨어진다는 단정이다. 총도 일종의 공산품이므로 장기간 사용하는 데 한계가 있다. 하지만 단지 오래 전에 설계됐다고 성능이 떨어진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구형 모델이라도 최근에 제작된다면 신품이고 정비만 잘하면 내구연한 동안 성능을 발휘하는 데 문제없다.
우리가 쉽게 접하고 소모하는 상품 중에서 60년 전, 혹은 그 이전에 개발된 제품이 지금도 생산되고 소비되는 경우는 그리 많지 않다. 그래서 장수하는 제품을 스테디셀러라고 부른다. 아스피린 같은 약품이나 코카콜라 같은 음료수는 100년 넘게 꾸준히 생산하고 소비되는 대표적인 스테디셀러다.
그동안 많은 경쟁 기업들은 아스피린이나 코카콜라보다 잘 팔리는 제품을 만들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그러나 아스피린, 코카콜라는 여전히 최고의 위상을 가지고 있다.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는 클래식 음악, 미술, 문학 작품도 크게 보면 이 범주에 포함된다. 오래 전에 탄생했다고 성능이 떨어진다는 명제는 잘못된 것이다.
많은 기업가는 안정적으로 수입을 안겨주는 스테디셀러를 갖기를 원한다. 그러나 상품, 특히 공산품에서는 이루기 힘든 목표임에 틀림없다. 예를 들어 스마트폰 같은 경우는 최첨단을 상징하는 아이콘이지만, 자고 일어나면 바뀐다고 할 정도로 기능이나 트렌드의 변화가 극심하다. 제품 라이프 사이클이 짧은 것이다.
스마트폰처럼 최신만이 살아남을 것 같은 무기의 세계에서도 M60처럼 장기간 사용 중인 것들이 의외로 많다. 특히 가장 기본적인 무기라 할 수 있는 총기 분야에서 그런 현상이 두드러진다. 현재 최고의 소총으로 평가받는 AK-47이 탄생한 지 70년이 넘었으니 1957년 탄생한 M60도 그렇게 오래된 총이라고 보기 어려울 정도다.
▲1899년 출시된 아스피린은 지금도 전 세계에서 애용하는 해열 진통제다. <사진 : 위키피디아>
화약 사용하는 총은 진화 한계점 도달
이제 전쟁의 승패는 병력보다 무기의 질에 의해 결정 나는 시대가 됐다. 그래서 성능이 좋은 무기로 무장한 군대와 그렇지 못한 군대와의 대결은 이미 판가름 난 것과 다름없다. 제1차세계대전 당시에 사용하던 복엽기나 간신히 기어 다닌다는 표현이 적합한 전차로 오늘날 전쟁을 벌인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M60처럼 오래 전에 개발된 무기들이 여전히 현역이라는 사실은 경이롭기까지 하다. 경우에 따라서는 미사일이라는 단어조차 없던 시절에 탄생해 지금까지 활동 중인 것도 있다. 많은 나라의 군경이 주력으로 사용 중인 M1911 권총이나 M2 중기관총이 대표적이다.
탄생한 지 100년이 된 이들 총기가 여전히 만들어지고 주력 무기로 사용된다는 자체가 놀라울 뿐이다. 같은 시기에 음성 기록 매체는 축음기의 SP에서 턴테이블의 LP를 거쳐 CD 그리고 오늘날의 반도체 저장장치까지 쉬지 않고 변화했다.
사실 무기의 세계도 전반적으로 그렇게 진화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앞서 언급한 여러 총기들은 여전히 큰 역할을 하고 있다.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질 수 있었을까. 가장 중요한 이유는 총이라는 무기가 갖는 구조적 한계 때문이다. 휴대하기 위해 크기가 제한되다 보니 물리적으로 성능을 향상시키기 어렵다. 그래서 화약을 사용하는 총은 20세기 중반에 진화의 한계점에 도달했다고 본다.
아스피린도 마찬가지다. 신체 구조나 생로병사의 과정이 바뀌지 않는 이상 지금까지 가장 효과가 좋은 약품 중 하나로 인정받고 있는 것이다. 억지 같지만 스테디셀러는 변화가 필요 없는 제품에서나 가능한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모든 기업가가 장수 제품을 갖길 원하지만 이루기 힘든 목표일지도 모른다.
[14] 변혁을 이끈 한스 폰 젝트 장군
1차 대전 후 승전국 감시 피해 무기 개발, 독일군 육성 기업도 혜안·의지 가진 리더 있어야 위기 극복 가능
▲1936년 독일군을 사열하는 한스 폰 젝트(맨 오른쪽) 장군. 그는 놀라운 리더십으로 해체되다시피 한 독일군을 짧은 시간에 강군으로 만든 발판을 놓았다. <사진 : 위키피디아>
1919년 체결된 베르사유 조약은 독일, 특히 군부에는 엄청난 치욕이었다. 종전 당시의 전선만 놓고 본다면 결코 불리한 상황이 아니었으나 패배를 강요받았고 제1차세계대전 발발에 대한 책임까지 물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전차·전투기 등의 무기 개발과 보유를 금지당했고, 총병력도 10만으로 제한받았다.
그러나 독일은 불과 20년 후인 1939년에 제2차세계대전을 벌였고 1942년까지 유럽의 지배자처럼 행세했다. 엄밀히 말해 히틀러가 재군비를 선언한 1935년까지도 독일이 베르사유 조약을 준수했으니, 실제로 독일군이 대놓고 전쟁 준비를 할 수 있었던 기간은 겨우 4년밖에 되지 않았다.
경무장한 10만의 독일군이 불과 4년 만에 중무장한 300만 대군으로 급성장한 것이다. 물론 독일의 침략 행위는 비난받아야 마땅하지만 바닥까지 떨어졌던 독일군의 놀라운 변신은 가히 연구의 대상이라 할 수 있다. 이런 극적인 반전의 이면에는 묵묵히 어려운 시절을 이끌었던 한스 폰 젝트(Hans von Seeckt) 장군이 있었다.
젝트는 제1차세계대전이 끝난 다음 해인 1919년 7월 7일 독일 육군 참모총장에 올랐다. 하지만 한때 세계 최강을 자랑하던 육군은 겨우 간판만 남아있는 상태였다.
1차 대전 승전국, 패전국 독일 군대 축소
더구나 승전국이 눈엣가시이자 부러움의 대상이었던 독일 육군 총참모본부를 전격 폐지시키면서 불과 일주일 만에 자리에서 물러나야 했다.
하지만 젝트는 수송을 관장하던 군 요원들을 정부 교통부서로 보내 예전 업무를 계속 관리하는 식으로 총참모본부를 비밀리에 존속시켰다. 더불어 외부의 강요에 의해 대대적 감군에 들어가자, 최대한 엘리트만 선별해 남기면서 군을 소수 정예화시켰다. 제2차세계대전 당시 전과를 올린 많은 독일의 명장들이 바로 이때 키워졌다.
하지만 젝트가 이렇게 인력 관리를 철저히 했다고 독일군이 기회를 잡자마자 곧바로 강군으로 재건될 수 있었던 것은 아니다. 이미 전쟁은 사람보다 무기의 질에 의해 결정이 되는 시대로 접어들었기에 질적으로 좋은 무기를 보유하지 않고는 강군이 될 수 없었다. 그러나 당시 독일은 무기의 개발과 보유에 엄청난 제한을 받고 있었다.
비밀리에 전차·전투기 연구개발
젝트는 아무리 힘들더라도 좋은 무기의 개발과 보유를 포기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는 탄띠식 중기관총의 개발과 보유는 금지당했지만 탄창식 경기관총은 가능했던 베르사유 조약의 맹점을 파고들었다. 탄창식으로 개발하는 것처럼 보이도록 했지만 재군비 선언 후 탄띠식으로 완성된 MG34 기관총이 대표적인 사례다.
하지만 이는 항공기와 기갑부대의 창설을 미리 준비한 혜안에 비한다면 작은 사례일 뿐이다. 젝트는 공군이 장차 전쟁의 주역이 되리라 확신해 민항기를 개발할 때 군용기로 개조가 가능하도록 미리 준비시켰다. 제2차세계대전 당시 맹활약한 He 111 폭격기와 Ju 52 수송기가 그렇게 탄생했다.
젝트는 장차 전쟁에서 전차와 기갑부대의 역할이 클 것이라 생각해 연구와 인력 양성에도 힘썼다. 당장은 승전국의 제한과 감시를 받고 있어서 차량에 캔버스로 만든 전차 모형을 씌워 훈련했고 트랙터를 만든다고 둘러대며 기초적인 개발을 진행했지만, 결국 이렇게 얻은 노하우와 양성된 인력은 이후 유명한 독일 기갑부대의 초석이 됐다.
그래서 제2차세계대전 당시 독일군의 트레이드 마크가 된 전격전을 완성한 인물은 아니지만 젝트는 이런 군사 사상에 많은 영향을 끼친 인물로 손꼽힌다. 이 같은 노력으로 독일군은 차근히 내실을 다져놓아 기회만 되면 크게 성장할 준비를 완료한 상태였다.
망한 군대가 이처럼 짧은 시간에 다시 거대한 전쟁을 시작할 수 있을 만큼 기초를 다져놓았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그가 남긴 흔적이 얼마나 큰지 짐작할 수 있다. 제1차 포에니 전쟁에서 패한 후 와신상담해 23년 후에 제2차 포에니 전쟁을 시작한 한니발 정도를 제외한다면 세계 전쟁사에서 이런 사례를 찾기는 매우 어렵다.
1989년 유동성 지원을 시작으로 1999년 워크아웃, 2015년 4조2000억원 그리고 또다시 올해 5조8000억원의 자금 지원을 받으며 간신히 생명을 이어가는 대우조선해양을 보면, 젝트 장군 같은 인물이 왜 대단한지 이해할 수 있다. 30년 동안 그 정도의 지원을 받고도 여전히 바닥을 헤매고 있다면 결국 사람의 문제다. 굳은 의지와 혜안으로 위기를 극복할 능력을 가진 인물이 없었다는 뜻이다.
![]() 1925년 독일군 장교단을 방문한 젝트(가운데 뒷짐을 진 사람) 장군. <사진 : 위키피디아> plus point 젝트 장군의 ‘軍 인재 4유형’ 한스 폰 젝트 장군은 군대에는 4가지 유형의 인간이 있다고 강조한다. 첫째, 똑똑하고 부지런한 인간은 참모로 적당하다. 조직에서 가장 필요한 인재다. 둘째, 똑똑한데 게으른 인간은 지휘관에 적합하다. 지휘관은 전쟁터에서만 날쌔야지 평소 부지런하면 부하들이 힘들다. 셋째, 멍청하고 게으른 인간은 시키는 일은 군말 없이 하므로 사병으로 적당하다. 마지막으로 멍청한 데다 부지런한 인간은 작전을 망치고 동료까지 죽일 수 있으니 즉시 총살시키는 것이 좋다. 극단적인 표현일지 모르나 인사가 만사라는 금언을 생각한다면 충분히 이해가 가능한 내용이다. 어쩌면 단순명료하지만 이처럼 확고한 원칙에 따라 일을 했기에 단기간에 놀라운 성과를 이끈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기업 경영에도 필요한 원칙이다. |
[15] 독일 제트전투기 Me 262
최초 실전 배치 제트전투기, 성능 문제로 낭패 기업도 시장 개척 후 변화에 적응해야 지속 성장
▲Me 262는 최초로 실전에서 활약한 제트전투기다. 그러나 인상적인 전투 결과를 남기지는 못했다. <사진 : 위키피디아>
레이더와 공대공 미사일이 등장하면서 가시권 밖 교전이 본격 시작된 제3세대 전투기 시대 이전까지의 공중전은 근접해 기관총을 난사하는 방식으로 이뤄졌다. 상대방의 뒤에서 공격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어서 공중전이 개시되면 서로 좋은 위치를 잡기 위해 치열한 기동을 펼쳤다.
마치 그 모습이 개싸움 같다며 이러한 근접 공중전을 도그파이팅(Dog fighting)이라 부른다. 조종사의 기량도 중요하지만 일단 전투기의 급강하, 급상승, 급선회 같은 기동력이 좋아야 도그파이팅에서 이길 수 있다. 무엇보다 속도가 빠른 것이 좋은 위치를 잡을 수 있는 지름길이었다. 당연히 상대방의 뒤로 날아가기 쉽고, 반대로 상대에게 뒤를 잡혀도 빠른 속도로 도주한다면 위험에서 벗어날 수 있다.
열강들은 보다 빠른 전투기를 확보하기 위해 치열한 경쟁을 벌였다. 덕분에 제1차세계대전 종전 무렵 독일의 ‘Bf 109’, 영국 ‘스피트파이어’, 미국 ‘P-51’ 같은 전투기의 경우 시속 600~700㎞까지 속도를 낼 수 있었다.
하지만 프로펠러 방식으로는 더 이상 속도를 올리기가 불가능했다. 피스톤 엔진이 발휘할 수 있는 구조적인 한계와 공기의 저항 때문이었다. 이런 물리적 제약을 뛰어넘는 방법은 새로운 동력, 즉 제트 엔진을 사용하는 것뿐이었다. 그런데 제트 엔진은 이미 비행기가 등장하기 훨씬 이전부터 구상된 기술이다.
비록 실패했지만 루마니아 출신 항공공학자 앙리 코안다가 실험용 제트기를 만들었던 때가 라이트 형제의 비행이 성공한 지 불과 7년 후인 1910년이었다. 이처럼 더 빠른 속도를 낼 수 있고 더 무거운 비행체를 날릴 수 있는 제트 엔진을 이용한 전투기의 개발은 어쩌면 역사의 수순이었다. 당연히 열강들의 경쟁이 치열했다.
시속 800㎞ 비행 제외하면 성능은 최악
제2차세계대전 발발 직전인 1939년 8월에 인류 최초 제트기인 ‘He 178’의 비행에 성공했을 만큼 독일은 이 분야를 선도한 국가다. 1943년 11월에는 최초로 실전에 투입된 제트 전투기인 ‘Me 262’를 개발했다. Me 262는 당시 그 어떤 전투기도 흉내 낼 수 없던 시속 800㎞의 속도로 비행이 가능했다.
앞서 언급한 Bf 109, 스피트파이어, P-51처럼 그 이전에도 수많은 전투기가 존재했다. 하지만 Me 262를 시작으로 초음속 전투기가 등장하기 이전인 1950년대까지 활약한 초기 제트 전투기를 흔히 제1세대 전투기라고 정의한다. 마치 기원전, 기원후처럼 Me 262를 시작으로 전투기의 역사가 완전히 새롭게 쓰인 것이다.
독일 공군의 전투기 감독관인 아돌프 갈란트는 1943년 11월 Me 262를 직접 몰아본 후 즉시 양산을 주장했다. 당시는 독일 본토가 연합군의 폭격으로 위험했지만 전투기가 부족해 요격에 애를 먹고 있었다. 따라서 압도적인 성능의 Me 262가 질로써 양적 열세를 만회해 줄 회심의 무기가 될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양산에 이르기까지 상당히 고전했다. 히틀러가 Me 262를 폭격기로 사용하자고 주장하는 바람에 시간이 지체되기도 했지만, 2발의 범용폭탄을 장착하는 수준이므로 폭격기로의 개조가 그리 어려운 것은 아니었다. 사실 실용화가 늦었던 가장 큰 이유는 엔진 때문이었다.
Me 262에 탑재된 융커스 유모 004엔진은 연료 소모가 크고 겨우 80시간 정도만 사용할 수 있어서 신뢰도가 떨어졌다. 출력도 같은 시기에 탄생한 영국 롤스로이스의 더웬트 엔진의 60%에 불과할 정도로 힘이 부족했다. 제트기를 제일 먼저 만들고 제트 전투기도 최초로 실용화했지만 사실 심장인 제트 엔진의 기술력은 영국이 최고였다.
엔진도 문제였지만 연합군 폭격기 조종사들에게 충격을 안겨준 엄청난 속도를 제외한다면 전반적인 성능은 최악이었다. 가속력이 낮아 이륙 시 애를 먹었고 충분한 속도를 내기까지 시간도 많이 걸렸다. 급격하게 선회하면 실속이 돼 추락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했다. 엄밀히 말하면 1944년 8월의 첫 출격도 너무 성급했다.
같은 시기에 영국은 이보다 성능이 뛰어난 제트 전투기 ‘글로스터 미티어’를 완성했고, 미국은 ‘P-80’의 개발을 목전에 두고 있었다. 하지만 전쟁에서 승리할 것이 확실시되던 상황이었기에 서둘러 배치하지 않고 꾸준히 실험을 통해 성능 개선을 하던 중이었다. 결론적으로 Me 262는 너무 급했기에 먼저 모습을 드러낸 것뿐이었다.
[16] 독가스 개발한 독일 화학자 프리츠 하버
식량 문제 해결했지만 독가스 개발해 인류에 해악 기업도 소비자에게 피해주는 제품 만들지 말아야
▲프리츠 하버(왼쪽에서 두번째)가 제1차세계대전 당시 독일 군인들에게 화학 가스 개발을 지시하고 있다.
<사진 : 독일 막스플랑크협회>
1918년 스웨덴 왕립 과학원은 그해 노벨화학상 수상자로 독일의 프리츠 하버(Fritz Haber)가 선정됐다고 밝혔다. 공기 중에 무한정으로 존재하고 있는 질소를 저온에서 높은 압력을 가하는 방식으로 농축시켜 암모니아를 생산할 수 있는 합성법을 1908년에 발견한 공로를 인정한 것이었다.
그런데 이런 인공 암모니아 합성법은 화학상이 아니라 평화상을 수상받아도 모자람이 없는 업적이었다. 이렇게 만들어낸 암모니아를 이용하면 저렴한 가격에 질소비료를 대량으로 생산해 낼 수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 70억명이 넘는 인류가 먹고살 수 있는 결정적인 길을 열어준 것이다.
1900년 세계 인구는 약 16억명이었다. 약 10억명이었던 1800년에 비해 100년 동안 6억명 정도가 늘어난 것이지만 이로 인한 식량 문제는 심각했다. 19세기 중반의 아일랜드 대기근에서 보듯이 산업혁명 이후의 폭발적인 인구 증가와 이로 인한 식량 부족을 고려할 때 유럽인들의 신대륙 대거 이주나 제국주의 침략은 어쩌면 필연이었을지도 모른다.
당장 나의 배를 먼저 채워야 한다는 명분으로 제3세계 지역에 대한 혹독한 수탈과 착취를 제국주의자들은 당연한 것으로 여겼다. 수리 시설을 확충하고 개간을 통해 농경지를 추가 확보하더라도 기하급수적으로 늘어가는 인구를 먹여 살릴 수 있을 만큼 식량 생산량을 획기적으로 늘리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오래 전부터 퇴비 등을 사용했지만 지력을 회복하기 위해 주기적으로 휴경지를 둬야 해 불가피하게 놀리는 땅도 많았다. 이처럼 유럽이 인구 과잉과 식량 부족으로 고민이 많았을 때 신대륙에서 채굴된 칠레초석은 가히 복음이었다. 이것이 바로 자연 질소비료인데, 이를 사용하면 놀라울 정도로 생산량이 늘어났다.
▲옥시레킷벤키저는 가습기 살균제의 안전성을 충분히 검증하지 않고 판매해 수많은 사망자를 냈다. 사진은 지난해 한 대형마트에서 열린 ‘옥시 불매운동’.<사진 : 조선일보 DB>
영웅에서 독가스 개발한 전범으로 전락
하지만 유럽까지 운송이 어려워 가격도 비쌌고 자원이 한정돼 결국 식량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궁극적인 수단이 될 수는 없었다. 이처럼 고민이 많았을 때 싼 가격에 질소비료를 대량 생산할 수 있는 길이 열린 것이다. 덕분에 이후 식량 생산량은 늘어나는 인구를 감당할 수 있을 만큼 증가했다.
만일 하버의 업적이 없었다면 아직도 인류는 기아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을 가능성이 크다. 오늘날 세계 인구가 섭취하는 영양원의 약 3분의 1이 질소비료의 혜택에 의한 것이다. 질소비료가 없었다면 생존 가능한 인류의 최대치가 36억명 정도로 추산되니 그가 현존 인류에 끼친 영향은 가히 엄청나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처럼 놀라운 업적을 남긴 하버가 노벨상 수상자로 선정되자 엄청난 반발이 일어났다. 공기로 식량을 만드는 과학자라는 명예를 얻었음에도 제1차세계대전 당시에 독가스를 만들어내고 전선에 나가 연합군을 상대로 실험까지 실시한 경력 때문이었다. 그래서 제1차세계대전 후에 그에게는 ‘화학무기의 아버지’라는 악명이 붙었다.
전후 국제 사회가 화학무기 사용 제한에 동의하고 제2차세계대전 당시에 나치도 보복이 두려워 함부로 사용하지 못했을 만큼 그가 만든 독가스의 살상력은 엄청났다. 문제는 당국의 요청으로 어쩔 수 없이 개발한 것이 아니라 동료 학자이자 아내인 클라라 하버가 반대하며 자살했을 정도로 하버가 앞장서서 개발을 주도했다는 점이다.
이 때문에 업적과 별개로 국제 사회가 그의 노벨상 수상에 반대한 것이었다. 더구나 그는 제1차세계대전에서 독일이 패하자 전범으로 몰려 스위스로 피신한 상태였다. 이후 독일의 카이저 빌헬름 연구소의 소장으로 다시 영전해 독일의 화학 발전을 주도할 수 있었으나 1933년 나치의 등장과 함께 몰락했다.
유태인이었던 하버는 박해는 모면했지만 그토록 자랑스러워했던 독일에서 쫓겨나 1934년 스위스의 바젤에서 객사했다. 그런데 그가 남긴 그림자는 너무 짙었다. 1920년대 살충제로 만든 치클론 B(Zyklon B)가 동족인 수백만 유태인을 대량 학살하는 데 사용됐고 그렇게 죽어간 이 중에는 그의 친척도 있었다.
기업도 이익만 추구하면 위험에 빠져
하버는 수십억명의 인류가 더 살아갈 수 있는 결정적 방법을 만들었지만 수백만명의 생명을 고통 속에 죽어가도록 만든 인물이기도 하다. 아무리 위대한 과학자라도 모든 성과가 완벽하고 이성적일 수는 없다. 하지만 적어도 자신의 행위가 부정적인 결과를 가져올 수 있을 것이라는 예측은 충분히 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하버는 부족한 천재였다.
그런데 이런 모습은 기업에서도 발견할 수 있는 부분이다. 기업의 존재 이유는 이익을 내는 것이다. 하지만 이익만을 추구하다 보면 소비자의 권리를 침해할 수 있고 이를 넘어 피해까지 줄 수 있다. 옥시레킷벤키저를 비롯한 여러 회사에 의해 벌어진 국내 최악의 환경 재해였던 가습기 살균제 사건이 대표적인 사례다.
단지 잘 팔릴 수 있다는 이유만으로 사람에게 치명적인 물질을 별다른 고려 없이 쉽게 사용했다는 것은 두고두고 생각할 부분이다. 뒤늦게 일부 업체가 사과와 보상 입장을 표명했지만 여전히 현재 진행형인 이 사건을 보면, 기업은 100개의 좋은 제품보다 하나의 나쁜 제품을 만들지 않는 것이 더 중요할 수 있다.
keyword 프리츠 하버(Fritz Haber) 독일의 화학자. 질소와 수소로 암모니아를 합성하는 방법을 연구해 1918년 노벨 화학상을 수상했다. 하지만 제1차세계대전 당시 독가스 개발과 살포를 주도해 ‘화학무기의 아버지’라고 불린다. ![]() |
■섬나라공격
① 천하의 나폴레옹도 영국을 어떻게 할 수 없었던 이유
천혜의 방어막
고려를 침공한 당대의 슈퍼파워 몽골이 한반도를 석권하는데 그리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는 않았고 점령과 동시에 마음껏 수탈을 자행했다. 하지만 막상 고려로부터 항복을 받아내는 데는 무려 38년이라는 시간이 더 걸렸다. 그 이유는 고려 조정이 강화도로 도망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육지와 강화도를 가르는 한강 하구와 좁은 강화도 해협을 내륙에서 온 몽골군은 건널 수 없었던 것이었다.
물살이 빠르지만 강화도 해협은 그저 넓은 강 정도에 불과할 정도다. 그렇지만 기동력이 뛰어난 몽골군들이 바로 눈앞에 보이는 작은 섬으로 피난 가서 대응을 하지 않는 고려의 집권층을 응징할 방법이 없었을 만큼 그들에게 바다는 낯선 곳이었다. 그래서 병자호란 당시에도 남한산성이 아닌 애초 피난 목표였던 강화도로 조정이 일찍 피난하였다면 이후 양상은 상당히 달라졌을지도 모른다는 주장도 많다.
▲38년간 도읍 노릇을 한 강화의 고려궁지. 비록 좁은 해협이었지만 바다로 인하여 몽골의 침략을 모면할 수 있었다./사진=강화군청
사실 고려의 천도나 조선 조정의 강화도 피난 시도는 소수 권력층만의 안위를 도모하기 위한 무책임한 행동이라 할 수 있다. 나라로부터 보호를 받지 못하고 외적에게 내팽겨 친 백성들은 당연히 수탈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물론 조정이 보존되어야 전쟁을 계속 수행할 수 있지만 아쉽게도 역사를 살펴보면 이 때문에 그들이 안전을 도모하였다고 보기는 힘들었고 백성들의 고초에 대해 심각히 고민한 흔적도 그리 많지는 않다.
이처럼 우리 역사에서도 쉽게 찾아 볼 수 있듯이 바다는 국방 전략상 천혜의 보호막이라 할 수 있다. 특히 바다를 통해서만 접근할 수 있는 섬나라는 상대적으로 방어에 많은 이점을 누려왔다. 아무리 바다가 넓더라도 이동할 수 있는 수로가 극히 한정되어 있으므로 멀리서부터 외적을 막아낼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내륙 국가와 달리 전통적으로 섬나라는 강한 해군력을 키우는데 국방 자원을 우선 투입하였다.
반면 국경을 서로 맞대고 있는 내륙 국가들은 군비의 많은 부분을 육군에 투입하여야 하므로 해군을 증강시키기가 구조적으로 힘들다. 세계 최강의 군사력을 자랑하는 현재의 미국도 사실 전체 군비의 규모를 놓고 볼 때 육군은 해군이나 공군에 비해 상대적으로 규모가 작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은 주변에 강력한 적대국이 없기 때문에 기본적인 미국의 국방전략도 섬나라와 같다는 의미다.
▲버지니아 노포크 해군 기지에 정박 중인 미 해군 항공모함들. 미국은 섬나라처럼 강력한 해군과 공군으로 하여금 본토 밖에서 적대 세력을 격파한다는 국방 전략을 가지고 있다.
섬나라의 이점
이처럼 전통적으로 섬나라는 평시나 국력이 쇠퇴하였을 때는 바다를 철저히 보호막으로 이용할 수 있었고 반대로 국력이 강해지거나 대륙이 혼란한 틈을 노려 진출에 나섰을 때는 손쉽게 건너갈 수 있었다. 물론 이런 전략도 경쟁국을 압도할 만큼 해군력을 충분히 갖추었을 때 가능하다. 이웃한 일본도 이러한 이점을 많이 누렸지만 영국은 역사적으로 섬나라의 이점을 최대한 살렸던 나라다.
16세기 엘리자베스 1세 시절 스페인의 무적함대를 수장시키고 바다의 패권을 잡은 이후 영국은 외부의 침입을 바다에서부터 철저히 거부시켰고 반면 유럽이 혼란에 빠졌을 경우에는 캐스팅보트 역할을 자임하며 적극 개입하여 짭짤한 이득을 얻었다. 이를 흔히 균형자라고도 할 수 있겠지만 솔직히 영국의 개입으로 인하여 경쟁에서 패한 국가 입장에서는 너무나 얄미운 간섭의 극치라고밖에는 설명이 되지 않았다.
▲그레벨링건 전투에서 격파당하는 스페인 무적함대. 이후 영국은 400년 간 세계 바다의 패권을 거머쥐었다.
영국은 대륙의 패권을 잡은 1인자 편에 서지 않고 항상 아쉬움이 많을 수밖에 없던 2인자를 도와주고는 했는데 그 이유는 대륙을 일방적으로 제패하는 세력이 없도록 견제시켜 추후 자신들에게 향할 수도 있는 위협을 사전에 제거하기 위함이었다. 이러한 결과 역사적으로 대륙의 국가들은 한 번씩 돌아가면서 영국과 원수로 지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영국이 아무리 얄밉게 굴어도 강한 해군으로 바다를 차단하고 있어 응징하기는 쉽지 않았다.
오죽하면 나폴레옹은 당시 기술로는 불가능하였던 침략용 해저터널까지 구상했을 정도였다. 결국 영국을 때릴 현실적인 방법이 없자 빈대잡기 위해 초가집을 불태우는 것처럼 대륙봉쇄령이라는 극약처방까지 내렸고 결국 이것이 그의 종말을 앞당기게 되었지만 그 만큼 영국에게 피해를 주고 싶어 하였다. 하지만 이것은 비단 나폴레옹의 경우에만 국한 된 문제는 아니었다.
설령 점령까지는 아니어도 영국 땅에 돌이라도 한번 날려봐야 뭔가 가슴속에 응어리진 앙금이 풀릴 것 같은 느낌을 대대로 대륙의 패자들은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유럽의 생각과 달리 영국은 바다를 재패하며 세계를 계속하여 정복하여 나갔고 경쟁 국가들은 그런 영국을 보며 배 아파하였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영국에 돌 던질 방법을 궁리하던 대륙의 적들은 그 방법을 하나하나 찾아내기 시작했다.
▲유럽 세계의 황제로 군림하며 동맹을 원하는 페르시아 사절을 접견하는 나폴레옹. 하지만 그에게도 영국 해협 건너 영국은 마음대로 할 수 없었다.
② '막강 해군'을 가진 영국을 공격할 신무기가 탄생하다
대륙 국가의 고민
전통적으로 영국은 위협대상 가능성 있는 강국이 대륙에 등장하는 것을 철저히 거부하였다. 때문에 대륙에서 패권 쟁탈이 벌어질 경우 어느 한쪽이 일방적으로 우월한 지위를 얻지 못하도록 그때그때 편을 달리하며 개입하고는 했다. 나폴레옹 당시에는 반대 진영에 가담하였지만 19세기 말에는 프랑스와 같은 편이 되어 독일을 견제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노력만으로 영국으로 향한 모든 위협을 사전에 막을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영국도 로마제국, 노르만, 정복자 윌리엄처럼 대륙을 평정하였던 당대의 패자에게 무참하게 정복당하였던 역사가 있다. 어쩌면 바다에서 적을 막지 못하면 대륙으로부터 침략에 쉽게 점령당하였던 역사 때문이라도 해군력 확장에 힘을 기울일 수밖에 없었다. 이런 노력 결과 덕분에 영국은 단독으로 대륙을 봉쇄할 만큼 해군력이 강하였지만 상대적으로 육군은 미약하였다.
▲1815년 워털루 전투 당시 돌격하는 스코틀랜드 기병대. 이처럼 영국은 전통적으로 대륙의 약자 편을 들어 유일 강자의 대두를 막았다.
이것은 다시 말해 만일 바다가 뚫릴 경우 쉽게 외세에 의해 영국이 정복당할 수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었고 반대로 적들에게는 영국이 바로 눈앞에 뻔히 보이는 섬나라지만 바다를 건너 침공하기는 상당히 어려움을 뜻하는 것이기도 하였다. 고만고만한 세력들이 항상 어깨를 나란히 하고 경쟁하다보니 대륙 국가들의 입장에서 영국을 타도하기 위해 무작정 해군력을 키울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만큼 강한 해군을 보유한 섬나라 영국은 자국 방어에 유리하였고 반면 대륙의 일에 참견하는데도 편리하였다. 이처럼 영국에게 강력한 해군은 외적으로부터 그들의 안전을 담보하는 모든 것과 다름없었다. 비록 나폴레옹처럼 너무나 얄미운 영국을 때릴 현실적인 방법이 없던 적들은 분노에 떨다가 제풀에 지쳐 쓰러진 경우가 많았지만 그렇다고 그냥 쳐다보고만 있지는 않았다.
1870년 보불전쟁 이후 유럽에는 약간의 평화시기가 도래하였는데 이 기간은 역설적으로 지금까지 본적 없었던 사상최대의 전쟁을 준비하는 기간이기도 하였다. 흔히 ‘유럽에는 30년 평화는 없다’는 말이 있는데, 분열과 외세의 간섭으로 내전 중인 최근 우크라이나의 사태를 본다면 이는 아직까지도 유효한 법칙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런 묵시적 법칙에 걸맞게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였다.
▲우크라이나 내전에서 알 수 있듯이 수많은 나라와 민족이 섞여서 사는 유럽 역사에서 전쟁은 쉬지 않고 계속되어 왔다.
가능성이 보인 공간
제1차 대전이 발발하자 영국은 사전에 맺어 놓았던 조약 등에 의거하여 즉각 대규모 원정군을 파견하면서 또 다시 대륙의 문제에 적극 간섭하였다. 그런데 보통의 영국인들에게 전쟁은 몸에 직접 와 닿는 문제가 아니었다. 영국인들에게 있어 전쟁이란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군인들이 바다를 건너가 남의 땅에서 싸우는 것이라고 여겼고 이와 관련된 소식은 통제된 언론을 통해서 들려오는 내용이 전부였기 때문이었다.
예상치 못한 영국의 참전은 당연히 독일을 자극시켰다. 하지만 세계 최강이라고 자부하는 독일 육군이 보유한 대구경 거포로도 영국 본토에 포탄을 날릴 수 없었다. 전쟁 전 독일은 엄청난 건함을 통해서 세계 2위 수준의 막강한 해군을 보유하고 있었지만 수백 년의 전통을 가진 영국 해군에 비해서 여전히 열세여서 바다를 건너가 영국을 공격하기도 쉽지만은 않았다.
이처럼 영국에게 전쟁은 항상 유럽 대륙에서 일어나는 일이었다. 16세기 이후 계속적으로 부귀영화를 누려온 영국 본토는 그들의 자랑인 해군에 의해서 안전하게 보호받고 있었다. 지금 같은 각종 매체가 없다보니 영국인은 가끔가다 본국으로 송환된 부상병들이나 참전자들에 의해서 전쟁에 대해 간접적으로 체험하고 느끼고 있을 뿐이었다. 당연히 전쟁의 무서움과 두려움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하였다.
▲제 1차 대전 발발 당시의 평화스러운 런던의 모습. 영국인들은 오랫동안 외침을 받지 않아 전쟁을 군인들이 외국에 나가서 치르는 것으로 인식했다.
그러나 이전 세기와 달리 수많은 기술적 진보는 제1차 대전이 사뭇 다른 모습으로 진행될 것을 예견하였다. 그중에서도 이전과 가장 다른 모습을 보여줄 곳은 하늘이었다. 20세기 들어 본격적으로 등장한 비행체들은 인간들의 싸움터를 육지와 바다뿐만 아니라 하늘이라는 공간까지 확대시켰던 것이다. 즉 이번 전쟁에서는 하늘을 통하여 영국을 공격할 수 있는 한 가지 방법이 엿 보였던 것이다.
통로가 보였으니 이곳을 전쟁에 이용하려던 것은 인간의 당연한 본성이었다. 새로운 전쟁 수단을 만들고 이용하는데 인간은 징그러울 정도로 탁월한 모습을 보여 왔다. 인류사를 변혁시킨 최고 발명품중 하나라 할 수 있는 비행기도 탄생한지 불과 10년도 되지 않아 전쟁도구로 활용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비행기보다 먼저 출현하여 실용화된 거대한 비행선 또한 군사적 용도로 사용될 수 있음이 입증되어 있던 상태였다.
▲1903년 라이트 형제가 인류 최초로 비행기로 하늘을 난 거리는 37미터였다. 하지만 불과 10년 만에 인간은 이 문명의 이기를 전쟁의 도구로 이용하게 되었다.
③ 독일 비행선들은 한밤 런던 상공에서 폭격을 시작하고
하늘을 통한 길
제1차 대전이 발발하고 본격적으로 무기가 되어버린 비행기나 비행선은 사실 처음에는 전투 용도가 아니었고 주로 정찰 목적으로 사용되었다. 높은 곳에서 적의 동태를 감시한다면 차후 작전을 수립하고 수행함에 있어 많은 이득이 됨은 두말하면 잔소리였다. 비행체들은 이러한 목적에 정확히 부합되었다. 하지만 인간들은 새로운 문명의 이기를 단지 정찰 용도로만 쓰는 것에 만족하지는 않았다.
인간들은 하늘에서 지상을 공격하는 것이 상당히 효과적인 공격 방법임을 곧바로 깨닫게 되었고 이러한 목적을 위해 망설이지 않고 비행체를 사용하였다. 비록 초기에는 소량의 폭탄을 탑재하고 손으로 던지는 방법이어서 정확도가 몹시 허술하였지만 생각지도 못한 상태에서 하늘로부터 떨어져 내려오는 폭탄은 지상의 적들에게 많은 공포감을 불러 일으켰다. 원래 인간은 생소한 것으로부터 무서움을 많이 느끼기 때문이었다.
▲제1차 대전 당시 비행선에서 폭탄을 손으로 투하하는 영국군의 모습. 당연히 정확도가 떨어졌지만 지금까지 생각지도 않았던 하늘에서 공격을 받는 지상의 병사들은 공포에 떨 수밖에 없었다.
비록 직접적인 타격 전과는 미미하였지만 심리적으로 적에게 가한 효과는 기대 이상이었다. 이전처럼 앞만 가리면 적의 공격으로부터 자신을 보호 할 수 있었던 시절은 지나가고 머리 위도 조심하여야 하는 시대로 바뀐 것이었다. 비행기들이 빠른 속도와 높은 고도를 이용하여 대치하고 있는 전선을 넘나들며 자유자재로 상대의 배후까지 다가와 공격을 가할 수 있다 보니 전선이 입체화되기 시작하였다.
그것은 유사 이래 바다와 강력한 해군을 밑천으로 유유자적하던 영국을 뻔히 쳐다보면서도 마땅히 응징할 방법이 없었던 대륙의 국가들에게 좋은 힌트가 되었다. 바다 위에 있었던 압도적인 해군력의 차이와 달리 그때까지 하늘에서 영국의 존재는 미미했다. 독일은 이러한 아무도 선점하지 못한 무주공산을 통해 영국에게 지금까지 보아오지 못한 방법으로 회심의 주먹을 날릴 준비를 하였던 것이다.
제1차 대전 초기에 독일뿐만 아니라 연합군측도 영불해협을 건너서 상대를 공격할 만큼 장거리 항속능력과 폭장량을 갖춘 비행기는 없었다. 그런데 독일은 연합군측보다 기술적으로 한 걸음 앞선 월등한 성능의 항공체를 가지고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비행선이었다. 여타 국가들도 비행선이 있었지만 독일은 이른바 제펠린 백작으로 상징되는 것처럼 비행선의 제작 기술과 실용화에 있어 선두를 달리고 있던 나라였다.
▲최초 비행에 나선 그라프 제펠린의 LZ 1 비행선. 독일은 비행선의 개발 및 상용화에 선두를 달린 나라였다.
최초의 공습
독일은 영국에 비해 열세였던 해군과 참호에 가로막혀 돈좌된 서부전선의 상황으로 말미암아 영국 본토에 대한 상륙은 전혀 생각할 수 없었다. 하지만 심리적으로나마 영국에게 한방을 먹이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여 해군 함대가 몰래 영국 해안까지 다가가 기습 포격을 가하기도 하였다. 여기에 더해 하늘을 통한 공습 방법이 자연스럽게 논의되었고 이러한 목적을 수행할 플랫폼으로 독일 기술력의 총아인 비행선이 낙점되었다.
요즘 사용하는 최신식도 마찬가지지만 비행선은 구조상 속도가 느리고 적의 공격으로부터 방어력도 거의 전무하여 전투용으로 적합하지는 않다. 하지만 당시에는 적기의 요격으로부터 안전한 고고도로 상승하여 야간에 런던의 불야성만 보고 비행을 하면 목표까지 쉽게 도달 할 수 있었다. 이때는 등화관제라는 개념 자체가 없었기 때문에 환하게 밝혀진 런던은 그야말로 자연스런 표적지였다.
▲독일 비행선들의 런던 폭격을 묘사한 그림. 영국은 전혀 생각지도 못한 사상 초유의 공격을 당하였다.
또한 하늘로부터 적의 공습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조차 하지 못하였던 시기였으므로 당연히 하늘을 통해 다가올 적들을 맞을 아무런 준비도 없었다. 비록 비행기의 등장과 함께 초기형 대공포도 등장하였지만 공갈포로 알려진 것처럼 성능이 뒤떨어졌을 뿐 아니라 당시에 운용하던 복엽전투기조차 고고도를 날아다니는 비행선을 잡기가 어려웠고 결정적으로 야간 전투가 곤란하였다.
전쟁 초반기인 1915년 5월 31일, 한밤중에 갑자기 폭음이 울리고 런던 도심에 불길이 치솟기 시작하였다. 아닌 밤중에 홍두깨 식으로 전혀 생각지도 못한 갑작스런 사태에 런던시민들은 경악하였다. 그때서야 고개를 들어 하늘을 쳐다보니 거대한 타원체들이 어두운 밤하늘에 떠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것은 독일이 얄미운 영국을 향해 돌을 던지기 위해 동원한 회심의 비밀병기 LZ-37 제펠린 폭격 비행선들이었다.
도심의 불빛만 보고 조용히 밤하늘을 날아 북해를 건너온 비행선들이 무작정 투하한 폭탄으로 런던 시내가 불타오르면서 영국 본토에 대한 사상 최초의 공습은 시작되었다. 아직까지 군사적으로 폭격의 효과를 크게 기대할 수는 없었던 시절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런던시민들은 엄청난 혼란을 겪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이것은 앞으로 계속될 공포의 작은 시작이었을 뿐이었다.
▲제펠린 비행선의 공습에 놀라 도망가는 런던 시민들. 전술적인 공습의 전과는 미미하였지만 전략적으로 영국인들에게 끼친 효과는 실로 대단하였다.
④ 독일은 영국을 굴복시키지 못했지만 미국은 일본을 굴복시켰다
더 큰 시련
최초의 공습 결과에 대만족한 독일은 이후 비행선을 수시로 출격시켜 얄미운 영국을 향한 분노의 돌 던지기를 계속하였다. 특히 1916년 9월 2일에 사상 최대 규모인 14기의 폭격 비행선들이 편대를 이루어 대규모 폭격을 감행하였고, 그 결과 수백 명의 런던 시민들이 사상당하는 전과를 거두었다. 이처럼 비행선에 의한 폭격 작전이 절정에 다다르면서 런던 전체가 아비규환의 소용돌이에 빠져들었다.
영국 국민들은 그들의 자랑인 해군도 하늘을 통한 공격으로부터는 영국을 보호해 주지 못하며 그 동안 군인들이 외국에 나가서 하는 것으로만 알았던 전쟁이 바로 자기 코앞에서 이뤄지고 있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깨달았다. 이후 독일은 패전국이 되었음에도 제1차 대전 내내 자국 영토 밖에서 싸움을 벌였던 반면 정작 안전하다고 생각하던 영국은 전혀 생각지도 못한 폭격으로 피해를 보았다. 이처럼 공습은 독일의 사기를 앙양하고 반대로 영국의 사기를 꺾는 데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20여년 후 제2차 대전이 발발하고 다시 한 번 영국은 하늘로부터 독일의 공격을 받게 되었다. 이번에는 지상을 바라보고 그냥 대충대충 던지는 짱돌 수준이 아니라 너무나 무서운 엄청난 바위더미였다. 1940년 7월 10일, 이른바 공군만의 전쟁으로 불리는 사상 최대의 항공전인 영국전투(Battle of Britain)가 개시되었고 이후 장장 1년간 독일은 런던을 중심으로 한 영국 남부의 요지를 불바다로 만들어 버렸다.
▲제2차 대전 당시 독일의 대대적인 공습으로 불타는 런던.
심리적 효과 정도나 노렸던 제1차 대전 당시의 폭격과는 한마디로 차원이 달랐다. 독일은 역사상 처음으로 하늘을 통하여 영국을 굴복시키고자 하였고, 수세에 몰린 영국은 한때 패전의 위기에 몰릴 만큼 엄청난 곤욕을 치렀다. 이는 영국 역사상 최대의 위기였지만 엄청난 인내심과 효과적인 대응, 거기에 더해 독일의 갈팡질팡한 작전 변경으로 영국은 초유의 국난을 기적적으로 극복하였다.
이러한 영국의 응전은 이미 20년 전 예방주사를 맞았던 뼈아픈 경험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예를 들어 레이더로 대변되는 조기경보망은 제1차 대전 당시 독일 비행선단의 공습에 속수무책으로 당하였던 경험에서 비롯된 산물이었다. 그때 런던 시민을 공포로 몰아넣으며 선보인 독일의 기막힌 공습 작전은 결론적으로 영국인들에게 훌륭한 면역 주사를 놓아주는 반대 효과가 나타나게 되었던 것이었다.
▲제2차 대전 당시 지하철에 대피한 시민들. 제2차 대전 당시의 뼈아픈 경험은 초유의 국난을 극복한 백신이 되었다.
더 이상 안전하지 않은 방패
반면 영국전투의 결과는 하늘을 통하여 섬나라를 정복하기가 얼마나 힘든 일인지를 알려주는 반증이기도 하였다. 심리적인 효과가 크지만 여전히 폭격만으로 적을 완전히 제압하기는 힘들다는 사실이 입증된 것이었다. 만일 독일이 공군의 작전과 병진하여 막강한 지상군을 영국에 상륙시킬 정도의 능력이 있었다면 역사는 상당히 달라졌을 것이라는 가정처럼 섬나라를 정복하려면 역시 충분한 해군력이 있어야 했다.
그런데 불과 5년 후에 영국처럼 강력한 해군을 앞세워 본토 방어와 대외 침략에 유리한 위치를 점하였던 섬나라였지만 하늘을 통한 공격에 결국 굴복한 사례가 등장하였다. 바로 일본인데 그들이 남방 진출을 감행하면서 잠시 졸고 있던 미국을 상대로 1941년 12월 도발을 감행하였다. 하지만 초반의 승리에도 불구하고 미국에 압도당하자 일본은 태평양 곳곳의 섬에 숨어들어가 옥쇄라는 극단적 방법으로 저항할 수밖에 없었다.
▲1945년 6월 1일 오사카 중심가를 폭격하는 미국의 B-29. 이때 쯤 일본은 미국의 대대적인 폭격을 더 이상 막을 수 없는 수준이었다.
그런데 이런 극렬한 저항은 결국 스스로의 피해를 무작정 키우는 원인이 되었다. 미국은 자국군의 피해를 최소한으로 막고자 일본을 해상에서 고립시키고 하늘에서 폭탄의 비를 퍼붓는 방법으로 일본을 말려버리려 하였던 것이었다. 하늘에서 쏟아 붓는 사상 초유의 엄청난 바위무더기에 일본 본토는 만신창이가 되었다. 그리고 마지막 결정타가 하늘로부터 꽂히는데 바로 핵폭탄이었다.
만일 일본이 이오지마나 오키나와 전투에서 순순히 항복하였다면 미국은 핵폭탄 대신 일본 본토 상륙을 감행할 수도 있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일본의 저항에 진저리가 난 미국은 엄청난 피해를 막고자 두 방의 불벼락을 일본에 날렸고 전의를 급속히 상실한 일본은 무조건 항복을 하였다. 물론 막 쓰러지던 고목에 도끼질을 한 겪이기는 하였지만 이것은 최초로 하늘을 통한 공격으로 섬나라를 굴복시킨 예가 되었다.
결국 강력한 해군과 바다에 둘러싸인 여건을 방패삼아 누리던 섬나라의 이점이 종말을 고한 것이다. 여담으로 영국이 해협터널 건설에 동의할 수 있었던 것도 더 이상 바다를 방패로 삼을 수 없음을 인지하였기 때문이라는 말도 있다. 국방을 위해 강력한 해군력이 여전히 필요하지만 더해서 하늘도 장악하여야 하는 시대가 되었다. 천여 년 간 이어진 패러다임이 불과 100년 만에 바뀐 것이다. 이래서 역사는 도전과 응전이라 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히로시마(좌)와 나가사키에 떨어진 핵폭탄 폭발의 모습. 극렬하게 저항하던 섬나라 일본은 하늘에서 거대한 일격을 당하고 마침내 항복하였다
■北 열병식
① 미국 본토까지 타격이 가능한 사거리 1만2000 km의 북한 KN-08 미사일
국제적인 관심사
시대와 체제를 초월하여 공개 열병식의 가장 큰 목적은 선전이다. 자국민에게 자신감을 불어넣는 효과와 더불어 적대국이나 주변국에게는 힘을 과시하는 좋은 기회가 된다. 당연히 이를 준비하고 실시하는데 많은 노력과 비용이 든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이번 10월 10일 평양에서 벌어진 북한군의 열병식은 많은 이들의 관심을 끌었으므로 나름대로 흥행에 성공하였다고 볼 수 있다.
사실 이전에도 북한의 열병식은 흔했지만 선보이는 무기나 장비가 그다지 인상적이지 않았고 정치 선동 행사 성격이 크기 때문에 해당 분야를 연구하는 관계자가 아니면 굳이 관심을 갖지도 않았다. 하지만 1990년대 이후 북한이 미사일과 핵폭탄을 중심으로 하는 전략적 타격 전력을 확보하면서 상황이 바뀌었다. 일본, 중국은 물론 대양 건너의 미국까지도 북한의 무력이 당장의 현실적인 위협 요소가 된 것이다.
▲1960년대 북한군의 열병식 모습. 북한군의 재래식 전력은 우리에게 당장의 위협이지만 무기나 장비가 국제적인 관심을 끌만한 수준은 아니었다. 따라서 북한군 열병식은 그다지 주목을 받지 못하였다. /남도현
당연히 북한 당국도 이를 잘 알고 있기에 선전 효과를 최대한 극대화하고는 했다. 아무리 최신이라도 전차, 야포 같은 전술 무기보다 몇몇 군사 강대국만이 보유하고 있는 전략 무기를 선보이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다. 경제력을 고려하지 않고 허황될 정도로 군사력 강화에 힘쓰다보니 어처구니없지만 북한은 일부 전략 무기의 보유에 성공하였다. 이로 인해 인민에게 가해지는 고통을 무시하고 이룬 결과지만 어쨌든 현실이다.
특히 ICBM(대륙간 탄도탄) 같은 장거리 미사일은 핵폭탄을 전제하지 않으면 무기로써의 위력이 반감되므로 자신만만하게 공개 행사에 선보인 것은 핵무기를 보유하고 있다고, 혹은 그렇게 믿도록 만들려는 것과 같다. 현재 북한은 단지 국력만 놓고 본다면 국제 사회에서 존재가 무의미할 정도다.
그래서 체제 선전의 모토로 내세우는 강성대국을 표현하는데 이렇듯 상식을 벗어난 전략 무기들이 좋은 소재가 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이번에 북한이 선보인 무기 중 휴전선에서 대전 인근까지 타격이 가능한 것으로 알려진 300mm 방사포 KN-09가 우리에게는 당장의 현실적인 위협으로 다가왔지만 2013년 열병식에서 처음 선보이고 이번에도 행사의 대미를 장식한 KN-08이 국제적인 관심 대상이 되었다. 그 성능이 공개되지 않았고 실전 배치 여부도 확인된 것은 아니지만 KN-08은 미국 본토까지 타격 가능한 사거리 12,000km로 추정된다.
<②편에 계속>
▲휴전선에서 대전권까지 타격이 가능한 것으로 추정되는 KN-09 방사포. 중국의 WS-1B를 모방한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남도현
북한 열병식 때 등장한 미사일은 모조품?
<①편에서 계속>
너무 과한 반응
그런데 이번에 등장한 KN-08은 2년 전과 비교하여 일부 차이가 있어 관심과 추측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미사일이 TEL(이동식 발사차량)의 운전석 위까지 놓여 있었고 탄두가 뾰족한 형태였던 2013년 행사 당시와 달리 이번에는 운전석 부분만큼 미사일의 길이가 짧아졌고 3단 로켓의 지름이 커진 대신 탄두가 뭉툭한 형태로 바뀌었다. 전반적으로 짧고 굵은 형태로 개량이 이루어진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북한은 방송을 통해 "다종화되고 소형화된 핵탄두들을 탑재한 위력한 전략로켓들"이라고 주장한 반면, 10월 11일 우리 군 관계자는 "핵탄두 탑재 가능성에 대해서는 아직 평가하기 어려운 상황"이라고 밝혔다. 사실 북한이 핵탄두를 1톤 이하로 소형화하는 기술을 아직 습득하지 못했다는 의견이 지배적이지만 북한 측의 주장을 일부 받아들인다면 소형 핵탄두의 개발과 별개로 다탄두 탑재 기술을 완성하거나 근접했다는 의미가 된다.
▲2013년 행사 때 등장한 KN-08. 3단 로켓 부위가 작고 탄두가 뾰족하며 이동식 발사차량 운전석 부근까지의 크기다. /남도현
여러 정보망을 통해 KN-08이 엔진 테스트를 완료한 것은 확인되었지만 아직 개발 중이고 실전 배치까지는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의견이 대부분이다. 따라서 2013년 최초 등장 당시에도 급조된 모형이라는 의견까지 있었다. 하지만 미사일 같은 전략 무기는 열병식에 모조품이 등장하는 것이 일반적이므로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그래서 2013년에는 아직 개발 중이었고 이번에 등장한 모델이 다탄두 탑재가 가능한 최종 완성형이라고 볼 수도 있다.
물론 이런 예상도 단지 추측일뿐이다. 북한이 아니면 KN-08의 정확한 성능을 알 수가 없고 당연히 끝까지 밝히지 않을 것이다. 이것은 북한뿐 아니라 미국, 러시아, 중국 같이 전략 미사일을 보유한 여타 국가들도 마찬가지다. 설령 그 존재를 밝혔어도 자세한 성능이나 위력이 알려진 전략 무기는 없다고 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추측과 예상만 난무하는 그러한 현상 자체가 전략 무기가 지닌 또 하나의 가치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날씨 관계로 열병식 시간이 바뀌었다고 시시각각으로 보도하였을 만큼 처음부터 많은 관심을 보여준 우리의 행태를 반추한다면 북한은 KN-08을 비롯하여 이번에 선보인 여러 무기들을 이용하여 원하던 소기의 성과를 거두었다고 볼 수도 있다. 북한이 선보인 신무기는 우리가 가장 우려해야 할 대상임은 맞지만 그렇다고 북한의 선전의도에 민감하게 반응을 보일 필요는 없어야 한다.
▲이번에 등장한 KN-08. 3단 로켓이 굵어지고 탄두가 뭉툭한 대신 전반적으로 미사일의 길이가 짧아졌다. 이런 변화는 많은 추론을 불러일으키고 있는데, 어쩌면 우리 사회의 이런 모습이 북한이 이번 열병식에서 노린 하나의 효과라 할 수 있다. /조선일보 DB
■중국 열병식
①② 중국의 화려한 열병식 뒤에 감춰진 고민
사상 최대의 열병식
중국군의 열병식은 1949년 중국 정부 수립 후 처음 시작되어 1959년까지는 매년 거르지 않고 11차례 거행되었다. 이후 내부의 여러 사정으로 말미암아 행사가 중단되었다가 지난 1984년 덩샤오핑의 주도로 건국 35주년을 기념하여 열병식이 부활되었고 이후 10년 단위 건국일이나 이번의 전승 70주년처럼 국가적으로 기념하여야 할 때를 선택하여 이벤트 형식으로 시행되고 있다.
군사관계자가 아니면 우리나라에서 특별히 관심을 가지지 않던 이전 14차례의 열병식과 달리 이번에 개최된 제15차 열병식이 유독 주목을 끈 이유는 알다시피 대통령의 참석 때문이었다. 오래전부터 미국이 불참을 권유했다는 보도도 나왔을 만큼 서방측에서 중국의 열병 행사를 부정적으로 보는 시각이 많다. 따라서 정부도 이를 의식하여 관련 당사국들과 사전에 많은 정책 조율을 거쳤던 것으로 알려졌다.
▲대통령의 참석으로 인해 이번 중국의 제15차 열병식에 대한 관심은 상당히 컸다. /조선일보 DB
아주 단순하게 생각한다면 열병식을 중국 내부의 행사로 치부할 수 있겠지만, 이토록 미국을 중심으로 한 서방측의 반발이 심했던 이유는 어느덧 G2로 불릴 만큼 미국과 중국의 대결 구도가 심해졌기 때문이다. 냉전시기에 모든 분야에서 극렬하게 경쟁하였던 미국과 소련의 대결보다 외견상 덜해 보이지만 현재 중국의 국력을 고려할 때 군사 분야에서의 경쟁 격화는 필연적이라 할 수도 있다.
시진핑 주석이 연설에서 “중국은 평화 발전의 길을 갈 것이고 영원히 패권주의를 추구하지 않고 영토 확장도 꾀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했지만, 정작 이번에 선보인 것의 상당 부분은 최신 공격용 무기들이었다. 물론 무기는 사용하는 목적에 따라 방어용으로 사용될 수 있지만 이번 열병식의 하이라이트라 할 수 있는 핵탄두 장착이 가능한 장거리 미사일은 명백한 공격용 무기이자 패권국의 상징이다.
사실 구 소련도 그랬지만 현재의 러시아나 중국의 장거리 미사일이 겨냥하고 있는 제일 목표는 미국이다. 당연히 미국의 전략 무기들도 이들을 겨냥하고 있다. 따라서 미국의 입장에서 볼 때 이런 타격 수단을 공개 행사를 통해 선보이는 것은 자신들에 대한 직접적인 위협이라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다. 이를 의식해서인지 차세대 대륙간탄도미사일(ICBM)로 알려진 둥펑(東風)-31B, 둥펑-41은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②편에 계속>
▲사거리가 14,000km로 미국 전역을 사정권에 넣을 수 있는 것으로 알려진 둥펑-41 다탄두 핵미사일. 많은 기대를 모았지만 이번에 열병식에서 공개되지 않았다. /조선일보 DB
<①편에서 계속>
그래도 두려운 상대
중국이 이 무기들을 공개하지 않은 것은 핵심 정보가 노출될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라는 주장도 있다. 하지만 이들 무기에 대한 주요 정보는 이미 많이 알려진 상태다. 사실 핵탄두 장착을 전제로 한 대륙간탄도미사일 같은 장거리 미사일은 초정밀 타격 무기가 아니라 안정적인 장거리 비행 능력이 우선시 되는 무기다. 그래서 장거리 로켓 분야에 관한 중국의 기술력을 생각한다면 미국 본토 전역을 공격할 수 있는 14,000km의 둥펑-41의 사거리가 그리 놀랍거나 새로운 것도 아니다.
오히려 이번에 등장한 주요 무기 중 눈길을 끄는 것은 정작 따로 있었다. 잉지(鷹擊)-12, 잉지-62, 잉지-83, 둥펑-21D인데, 모두 대함미사일이다. 항공기나 함정에 탑재하여 공대함, 함대함 공격용으로 사용하는 잉지 미사일은 서방권의 표준 대함미사일이라 할 수 있는 하푼(Harpoon)과 유사한 무기인데, 2014년 7월 7일자 연합뉴스 보도에 따르면 미 해군이 가장 우려하는 적성국 무기 중 하나로 평가된다.
▲미 해군이 우려하는 잉지-12 대함미사일. 하푼보다 사거리와 속도가 뛰어난 것으로 알려진다.
잉지-12만 해도 사거리가 약 120km인 하푼의 3배가 넘는 400km에 달하고 초음속으로 비행도 가능하여 현재 미 해군의 주력 전투함이 채택 중인 이지스 전투 체계를 무력화할 수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잉지-62, 잉지-83의 자세한 성능은 아직 밝혀진 것이 많지 않지만 이번 퍼레이드에 자신 있게 선보였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상당히 뛰어난 성능을 보유하고 있을 것으로 추측된다.
미국의 항공모함을 겨냥해서 만든 무기로 알려진 둥펑-21D는 현존하는 유일한 지대함탄도미사일(ASBM)이다. 움직이는 함정을 공격하는 대함미사일은 목표물을 추적하는 기능이 상당히 중요하여 대개 속도가 상대적으로 느린 순항미사일이다. 반면 1,800km의 사거리를 가진 둥펑-21D는 성층권까지 올라간 후 마하 10의 초고속으로 낙하 비행하여 공격하는데도 불구하고 움직이는 함정을 타격할 수 있을 만큼 기술력이 뛰어나다.
이처럼 위협적인 대함미사일을 이번에 대대적으로 선보였다는 것을 역으로 생각한다면 미 해군에 대해 느끼는 중국의 두려움이 그만큼 크다는 것을 반증한다. 사실 미국을 제외한 전 세계 해군력을 모두 합하여도 미 해군력의 절반 정도에 불과할 만큼 미 해군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중국의 힘을 과시한 이번 행사에서 당장 미 해군과 맞서기 어려운 중국의 고민도 함께 엿볼 수 있었다는 점은 흥미로운 부분이라 할 수 있다.
▲미국 항공모함을 목표로 개발된 지대함탄도미사일 둥펑-21D. 군사 퍼레이드에 다양한 대함미사일이 등장하였다는 것은 미 해군에 대한 공포가 크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풀퀴 전투기
(上) 냉전 초기 미-소 전투기의 모양과 성능이 판박이였던 이유
때로는 베껴서라도 해야 한다
"귤이 회수(淮水)를 건너가면 탱자가 된다"는 말이 있다. 어떤 생물이나 물건이라도 환경이 바뀌면 이에 맞춰서 변화한다는 의미로 받아들일 수 있는 격언인데, 탱자가 귤보다 맛이 없는지는 모르겠으나 본고장을 떠나면 아무래도 품질이 나빠진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는 말이다. 사실 김밥조차도 원조를 내세우며 마케팅을 펼칠 정도이니 농수산물이나 상품에 있어서 원산지의 중요성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그런데 이 속담은 반드시 그런 것이라 단정하기에는 조금 무리가 있다. 귤이 강을 건너면 탱자가 될 수도 있지만 경우에 따라 정반대로 한라봉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사실 청출어람(靑出於藍)이라는 말처럼 오리지널보다 나중에 나온 개량형이 좀 더 업그레이드 될 가능성이 오히려 더 많다. 현재 여성들의 필수 화장품이 된 비비크림은 한국에 와서 한라봉이 된 대표적인 케이스다.
무기의 경우도 이와 비슷하다. 대부분 시간이 갈수록 오리지널보다 훨씬 성능이 우수한 후속 작이 나온다. 그 이유는 상대방이 보유하고 있는 무기보다 품질이 좋아야 전쟁에서 이기기 쉽기 때문이다. 만일 상대보다 기술이 부족하다면 자존심을 접고 카피를 해서라도 우선 탱자라도 만들어 사용하지만 그렇게 노하우가 쌓이면 상대를 능가하는 한라봉을 충분히 만들 수 있다.
▲독일 의료계에서 피부 보호제로 사용되던 BB크림은 한국에 건너와 대중 화장품이 되었다. 귤이 건너와 한라봉이 되어버린 사례라 할 수 있다.
이에 부합되는 대표적인 사례가 제2차 대전 당시 독일이 만든 5호 전차 판터다. 1941년 독소전쟁 시작 당시에 독일은 소련의 기술력을 무시하였다. 하지만 전선에 홀연히 등장한 소련의 T-34 전차는 그때까지 독일이 보유한 모든 전차들을 가볍게 능가하는 성능을 발휘하였다. 경악한 독일은 부랴부랴 이에 맞설 수 있는 신형 전차 개발에 착수하였는데 시간을 단축하기 위해 T-34를 최대한 벤치마킹하였고 그렇게 판터 전차를 만들 수 있었다.
전쟁에서 승리한 자는 전리품 획득에 열을 올리는데 무기 분야에서 상대방이 보유한 뛰어난 기술은 당연한 획득 대상이다. 제2차 대전 말기부터 유능한 독일 기술자들을 미국으로 유치하기 위해 펼친 이른바 페이퍼클립 작전이 대표적인 사례다. 1945년, 동서 양측에서 연합군이 독일 영토내로 진입을 시도하면서 나치 독일의 멸망이 가시화 되자 뛰어난 무기를 개발하였던 독일의 수많은 엔지니어들이 살길을 찾아서 갈 길을 가게 되었다.
▲독일 5호 전차 판터는 경사장갑을 장착하여 방어력을 증대시켰는데, 이는 소련 T-34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이다.
그렇게 옮겨간 사람들
이들 중 대부분은 자의든, 타의든 어쩔 수 없이 미국이나 소련으로 가게 된 경우다. 적국의 엔지니어지만 차후 패권을 위해 이들을 적극 스카우트하는 데 미국과 소련은 결코 주저하지 않았다. 미국 내에서는 나치 전범들을 무차별적으로 받아들인다는 반대 여론이 들끓었지만 그렇게 미국으로 건너오게 된 많은 학자나 기술자들이 미국 과학계에 많은 역할을 담당하였던 점은 부인할 수 없다.
특히 이들 중 미국이나 소련의 우선 목표가 되었던 엔지니어들은 독일이 독보적으로 앞서있던 로켓과 제트기 관련 종사자들이었다. 이후 각자의 길을 찾아 미국이나 소련으로 넘어간 이들은 전후에 냉전이 개시되자 양측에서 만든 최신무기의 개발자가 되었다. 이들은 백지 상태에서 연구를 시작한 것은 아니었고 대부분 독일에서 진행하다가 중단되었던 프로젝트를 재개하였기에 시간을 단축시킬 수 있었다.
▲페이퍼클립 작전에 의해 미국으로 건너 온 104명의 독일 로켓 과학자들. 이들은 미국 과학계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이런 이유 때문에 냉전 초기에 미국이나 소련이 등장시킨 로켓이나 제트전투기들은 유사하게 닮아있다. 개발에 참여한 미국과 소련의 기술진들은 독창적으로 개발하였다고 강변하였지만 기본적인 구조뿐만 아니라 외양까지도 흡사하였다. 특히 이들 중에서 백미라 할 수 있는 F-86과 MiG-15는 형제지간이라고 불러도 별다른 이의를 제기 하지 못할 만큼 외양이나 성능이 막상막하였다.
F-86과 MiG-15는 패전으로 인하여 개발이 중단 되었던 메셔슈미트의 P.1101프로젝트와 포커울프가 심혈을 기울여 제작하였던 Ta-183의 아류작들로 보아도 무방할 정도다. 후퇴익 주익, 동체에 삽입시킨 인테이크, 그리고 노즐의 형태는 제1세대 제트기들의 기본 모양이 되었다. 따라서 P.1101은 F-86에 Ta-183은 MiG-15의 등장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고 단언할 수 있을 정도다.
이처럼 제2차 대전 후에 곧바로 다가온 온 냉전으로 말미암아 이후 미국과 소련의 무기가 세계 시장을 순식간 양분하게 되면서 본의 아니게 독일의 귤은 전쟁 당시의 적들에 의해 다양한 한라봉으로 변화하였다. 그런데 잘 모르는 사실이지만 많은 독일의 기술자들이 정치적 이유 때문에 제3국행을 택하면서 미국과 소련 외에 의외의 장소에서 귤이 한라봉이 되었던 경우도 있었다.
▲종전으로 인해 개발이 중단된 독일 포케울프의 Ta-183. MiG-15, F-86을 비롯한 많은 제트전투기에 영향을 주었다.
(下) 항공 강국이 된 스웨덴, 못된 아르헨티나...이유는
제3의 길
1953년 한국전쟁 휴전이 이루어지고 포로 송환이 개시되었을 때 전쟁 자체에 염증을 느껴서 남북 중 하나를 선택하여 귀환하는 것을 거부하고 인도나 브라질 같은 제3국으로 망명한 이들이 있었다. 제2차 대전에서 패한 직후 미국이나 소련이 아닌 중립지역의 국가들로 옮겨간 독일의 엔지니어들도 이와 비슷한 경우였다. 혹시나 있을지 모르는 보복이 두렵기도 하였지만 그들은 승전국으로 가는 것을 일종의 구속으로 생각하였다.
제2차 대전 당시에 아무리 세계가 편을 나누어 치고받았지만 그래도 지구상에는 중립을 유지하였던 국가들이 많았고 그중에는 독일에 우호적인 경우도 있었다. 남미의 아르헨티나, 칠레 등이 대표적이었는데, 이 때문에 전후 단죄를 두려워 한 독일의 많은 전범들이 이들 나라로 도피하였다. 아르헨티나로 도주하여 숨어서 살다가 1960년 이스라엘이 비밀리에 납치하여 유태인 학살 혐의로 단죄당한 아돌프 아이히만이 대표적이다.
▲리카르도 클레멘테라는 가명을 이용하여 아돌프 아이히만이 아르헨티나 입국에 사용한 적십자 난민 여권.
이러한 전범들의 도주극은 부패한 남미 정권의 공공연한 협조와 비호가 있었기에 가능하였다는 것이 통설이다. 아무리 악독한 범죄자라도 뇌물만 제공하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여권과 비자를 마음대로 내주었다는 사실이 최근 들어 밝혀졌다. 반면 이와 달리 전쟁 책임으로부터 상대적으로 자유롭고 고급 인력이었던 엔지니어들은 비록 공개적인 행보는 아니었지만 많은 환대를 받으면서 망명하였다.
경우에 따라 자신들이 가기를 원하는 국가를 골라서 망명하여 독일에서 연구도중 패전으로 중단된 프로젝트를 계속 수행하였다. 때문에 미국과 소련의 제1세대 전투기들이 등장하였을 때 그 동안 항공 산업이 특별히 앞서 있거나 기술적 기반이 충분하지 않았다고 생각하던 국가들에서 F-86, MiG-15와 맞먹는 제트기들이 생산되었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이 전쟁 당시 중립국이었던 스웨덴이 전후 제식화한 J-29 터난(Tunnan)전투기였다.
그 모양은 오히려 오리지널 베이스로 생각하던 포케울프 Ta-183의 재현이 아닌가 할 정도로 똑 같았다. 스웨덴이 독자적으로 개발하여 어느 날 뚝딱하고 만들었다고는 절대로 상상 할 수 없을 만큼 닮아 있다. 부인 할 수 없지만 이것은 독일의 귤이 발트해라는 회수를 건너가 한라봉이 된 경우였다. 그리고 이렇게 시작된 스웨덴 전투기의 역사는 오늘날 최신예 그리펜 전투기까지 기술력이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1950년에 제식화한 스웨덴의 J-29 터난 제트전투기. 미국의 F-86, 소련의 MiG-15처럼 고속에 적합한 후퇴익 형태였다.
결국 하기 나름
그런데 귤이 강을 건너는 정도가 아니고 대양을 건넌 경우가 있었는데 바로 대서양을, 그것도 밤낮은 물론 계절도 정반대인 곳까지 멀리 이동하여 한라봉이 되었던 경우가 있었다. 종전 전후로 아르헨티나로 망명하였던 이들 중에는 포케울프의 유명한 엔지니어인 쿠르드 탕크도 있었다. 그는 전쟁 당시 도살새라는 별명으로 유명한 Fw-190과 실험기 Ta-152를 비롯한 수많은 전투기를 제작하였던 인물이었다.
당크는 아르헨티나의 코르도바에서 옛 포케울프 직원들을 규합하여 종전으로 중단된 제트전투기 연구를 재개하였다. 독일에서보다 여건이 좋다고는 할 수 없었지만 그래도 아르헨티나 당국과 군부의 관심과 전적인 지원 하에 일사천리로 개발이 이루어져 1947년 I.Ae. 27 풀퀴(Pulqui) I로 명명된 실험기가 비행에 성공하였고 탕크는 이를 기반으로 본격적인 제트전투기 제작에 착수하였다.
▲아르헨티나 최초의 제트전투기인 I.Ae. 33 풀퀴 II. 여타 항공 선진국들과 거의 비슷한 시기에 최신예 전투기를 선보였다.
마침 아르헨티나 정부가 MiG-15의 심장이 되기도 하였던 고성능 롤스로이스 넨 엔진을 영국에서 도입하는데 성공하여 이를 장착한 후퇴익 제트전투기 I.Ae. 33 풀퀴 II가 1950년 7월 비행에 성공하였다. 적어도 드러난 성능만으로도 F-86이나 MiG-15와 맞먹는 당대 최고 수준의 전투기였다. 이로써 아르헨티나는 미국, 소련 등과 더불어 초기 제트전투기 개발의 주역으로 당당히 자리매김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런 아르헨티나의 거침없는 행보에 놀란 미국이 거의 무상에 가까운 저렴한 가격에 F-86 전투기를 공급하여 주겠다고 약속하며 양산을 막았다. 덕분에 한라봉이 될 수 있었던 풀퀴 II는 5기를 마지막으로 개발이 종료되면서 탱자로 생을 마감하였다. 이러한 아르헨티나 정부의 결정에 실망한 당크는 이후 인도로 옮겨가 인도 최초의 제트 전투기인 HAL HF-24 제작을 이끌었다.
회수를 건너온 귤이 퇴보하여 탱자가 될지 아니면 개량되어 한라봉이 될지는 결국 받아들이는 당사자가 하기 나름이다. 거의 같은 시기에 독일 과학자들을 수용하여 제트전투기 개발에 나섰던 스웨덴은 오늘날 뛰어난 기술력을 자랑하는 전투기의 강국이 되었지만 잘못된 오판으로 좋았던 기회를 스스로 날려 보낸 아르헨티나는 단지 박물관에 전시 된 과거의 흔적만 바라보고 있을 뿐이다.
▲체코 공군 소속의 JAS 그리펜 다목적 전투기. 현재 스웨덴은 최신예 전투기를 생산하여 수출까지 하는 몇 안되는 나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