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도현의 전쟁 이야기3/ 스푸트니크 쇼크 - 주코프
남도현의 전쟁 이야기3/ 조선일보
■스푸트니크 쇼크
① 독일의 로켓 기술을 차지한 미국의 자신감
그날의 충격(1)
공포를 느끼다 1957년 10월 5일 소련의 관영매체들은 다음과 같은 소식을 일제히 세계를 향해 전했다.
"어제 위대한 소비에트연방은 세계 최초의 인공위성 스푸트니크 1호를 우주에 성공적으로 올려놓았습니다. 스푸트니크 1호는 현재 최대 950km, 최소 230km의 타원형 궤도를 96분마다 선회하면서 신호를 보내오고 있습니다. 이것은 당과 인민의 위대한 승리이자 자랑입니다."
이 소식을 접한 미국은 엄청난 충격에 휩싸였다. 지금이라면 인공위성과 그 발사체 분야에서 소련이 업적을 이룩한 것 정도로 단순하게 생각할 수 있겠으나, 당시 미국은 이를 평범한 과학적 성과로만 분석하고 있을 처지가 아니었다. 냉전이 개시되면서 새로운 대립각을 세워 치열하게 경쟁하던 공산권의 맹주 소련이 체제 경쟁에서 앞서고 있다는 상징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사변이기 때문이었다.
/소련이 인공위성을 먼저 발사하는데 성공했다는 뉴욕 타임스의 보도
보통의 사람들은 당대 최고의 과학적 성과라 할 수 있는 인공위성을 먼저 쏘아올렸을 정도라면 모든 과학 기술 분야에서 소련이 미국을 앞서고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하지만 그보다 당장 현실적인 문제는 두려움이었다. 스푸트니크 1호의 성공은 바로 미국 본토 위로 폭탄이 날아올 수 있음을 의미했기 때문이었다. 그것도 그냥 폭탄이 아닌 무시무시한 핵폭탄일 가능성이 컸다. 다시 말해 그 동안 미국에서 연구 중이던 대륙간탄도탄을 소련이 먼저 보유하고 있음을 뜻하는 것이었다.
인공위성으로 인해 미국이 느낀 충격은 곧바로 공포로 바뀌었다. 후일 미국의 대통령이 된 상원의원 린든 존슨이 "소련은 이제 육교 위의 아이들이 지나가는 차를 향해 돌을 던지듯 우리 머리위로 폭탄을 퍼부을 것이다"라고 한탄했을 정도였다.
거대한 제2차 대전을 승리로 이끈 미국은 전후 세계 질서의 유일 축으로 존재하기를 바라고 있었다. 비록 소련이 동구권의 맹주가 되어 미국과 맞서려 했지만 미국은 북극곰을 그다지 심각한 상대로 여기지는 않았다. 전쟁 당시 소련이 독일 전력의 80퍼센트를 상대했고 노고도 컸지만 미국이나 영국의 원조가 없었으면 버티기 힘들었을 것이라고 폄하했을 정도였다.
/상원 의원 당시의 린든 존슨. 그는 소련의 위협에 노출된 미국의 상황을 한탄했다.
미국의 자신감에 드리워진 먹구름
또한 냉전의 대립이 처음으로 열전으로 분출된 한국전쟁에서 미국은 UN군을 이끌고 즉각 참전했지만, 소련은 북한과 중공에게 무기만 대주면서 직접적인 충돌을 피했을만큼 직접 충돌을 꺼렸다. 핵폭탄이나 장거리 폭격기 같은 무기체계에서 압도적인 우세를 보이고 있다고 판단한 미국은 이러한 소련의 소극적 반응을 당연한 것으로 여겼을 정도였다.
소련이 1955년 수소폭탄의 제작 및 실험에 성공함으로써 미국과의 전략적 핸디캡을 단축하였지만 이때까지도 미국은 어느 정도 안심하고 있었고 그럴만한 충분한 이유도 있었다. 미국은 거대한 대양에 의해 소련으로부터 멀리 떨어져있는데 반해, 소련은 미국의 동맹국, 우방국, 점령국 등에 포위되어 있었다. 더욱이 미국은 중폭격기나 항공모함과 같은 장거리 타격 플랫폼을 가지고 있었지만 소련은 그러지 못했다. 비록 한국전쟁에서 갑자기 등장한 미그기로 인해 소련의 항공기 제작 기술이 생각보다는 뛰어난 것을 깨달았지만, 당시 소련에게는 미국의 B-36과 견줄만한 장거리 전략폭격기가 없었다. 물론 이런 판단이 나중에 미국의 착각이었음이 확인되었지만 적어도 겉으로 드러난 소련의 모습만 보면 그 당시에는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1950년대 소련을 위협한 미국의 주력 폭격기들이었던 B-36, B-52, B-58.
이러한 항공 플랫폼의 차이와 더불어 멀리 떨어져 있는 지리적인 여건과 해군력의 격차로 말미암아 소련은 미국을 직접 타격하기 곤란했다. 또한 전략폭격기와 해군력 외에도 미국은 소련을 압도할 만한 하나의 주먹을 개발하고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장거리 미사일이었다. 미국은 지난 전쟁 당시에 최고의 기술을 보유했던 독일의 로켓관련 전리품과 기술자들을 확보할 수 있어 이 분야도 앞선다고 자부했다.
이처럼 소련을 단지 땅덩어리만 크고 병력만 많은 후발 군사대국 정도로만 보고있던 미국은 소련이 먼저 인공위성을 쏘아 올렸다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에 뒤통수를 강타당한 느낌이었다. 소련이 자신들을 쫓아오는 줄 알았는데 정작 자신들이 한참 뒤진 형국이었다. 하지만 자존심 문제를 넘어 소련이 우주를 통해 미국의 하늘을 마음대로 넘나들며 핵무기로 공격할 수 있다는 생각에까지 이르게 되자 충격은 엄청난 공포가 됐다.
/이후 인류사에 엄청난 영향을 끼친 최초의 인공위성 스푸트니크 1호의 모형
② 자만에 빠져있다 소련 인공위성에 놀란 미국
그날의 충격(2)
자만에 빠져 있던 미국
사상 최대의 전쟁을 승리로 이끌고 그 여세를 몰아 전후 새롭게 구축된 세계 질서를 선도하는 미국은 그들의 힘을 대내외적으로 과시하는 데 거침이 없었다. 1957년 1월부터 1958년 7월까지로 설정된 ‘국제 관측의 해(IGY)’ 기간 중 대기권 탐사를 위한 인류 최초의 인공위성인 ‘뱅가드’를 1958년 안에 발사하기로 세계에 천명하였던 것도 그런 자신감의 발로였다. 미국이 이렇게 장담하였던 데는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다.
제2차대전 말기에 등장한 독일의 V-2는 세계를 놀라게 하였지만 종전으로 말미암아 수많은 업그레이드 계획이 중단되었다. 이를 전리품으로 확보한 미국은 독일의 인력과 노하우를 이용하여 중단된 프로젝트를 능가하는 차세대 장거리 미사일 개발에 이미 착수한 상태였다. 궁극적으로 독일이 미국 본토 타격을 목표로 ‘Amerika Rakete’로 명명하고 추진하였던 ICBM(대륙간탄도탄 미사일)의 실현이 목적이었다.
/A9와 A10의 2단 조합으로 설계된 Amerika Rakete. 독일에서 미 본토 타격을 목표로 하였던 일종의 대륙간탄도탄 미사일이었다.
적어도 6000km 이상 비행하여 적진 깊숙이 타격할 수 있는 발사체를 보유하고 이를 핵폭탄과 결합한다면 미국은 전후질서에 있어 군사적으로 더이상 상대할 대상이 없을 것 같았다. 때문에 미국은 육·해·공 각 군별로 경쟁적으로 장거리전략미사일 개발을 실시하였다. 이런 과정이 수시로 언론이나 관영 매체를 통해 대대적 홍보되었을 만큼 미국은 자신감에 충만하였다.
1955년 9월 미 해군연구소는 미사일 개발과 별도로 위성 개발에도 나섰는데, 이는 새로운 장거리 발사체를 평화적인 용도로도 사용한다고 선전하기 위함이었다. 1957년 8월 마침내 사정거리 6000km 수준의 아틀라스 로켓의 개발이 완료됨으로써 미국의 장담은 예정대로 실현될 것으로 보였다. 미국은 전인미답이었던 우주개발의 거대한 첫 걸음을 당연히 그들이 내디딜 것으로 생각하였다. 바로 그때 소련으로부터 소식 하나가 들려왔다.
흐루시초프가 소련이 사정거리 8000km에 이르는 세계 최초의 ICBM인 R-7 로켓을 실전에 배치하였다는 선전이었다. 하지만 미국은 이를 무시하였다.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이를 공산주의자들의 허풍 정도로만 여겼던 것이었고 특히, 발표 주체가 과장을 잘하기로 유명한 흐루시초프였기 때문에 더욱 믿지 않았다. 아니, 그보다 소련이 그런 과학 기술을 보유하고 있을 수가 없다는 만용에 가까운 확신이었다.
허풍이 아니었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 인류 최초의 인공위성 스푸트니크 1호가 지구궤도 진입에 성공하였다는 소식이 세계로 긴급타전 되었던 것이다. 소련은 R-7을 개량한 R-7A 로켓을 추진체로 하여 80kg의 위성을 지구 궤도에 올려놓았다고 선전하였는데, 이 내용은 그야말로 공포 그 자체였다. 그 정도 추력을 가진 로켓이라면 소련이 핵탄두를 탑재하여 미국까지 날려 보낼 수 있는 힘을 가진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었다.
미국에서 당시까지 개발된 그 어떤 로켓도 인공위성을 궤도 위에 올릴만한 힘을 가지지 못하였다. 최초 구상한 뱅가드 위성의 무게도 그때까지 개발 된 발사체의 추력을 고려하여 불과 1.6kg 정도였다. 소련은 그때까지 미국이 개발하고 있던 그 어떤 로켓들도 쫓아오지 못할만큼 크게 앞서고 있는 대 추력의 로켓을 보유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미국은 이를 몰랐고 설령 일부 정보를 획득하였어도 믿지 않고 있었다.
/1957년 소련이 선보인 세계 최초의 ICBM인 R-7. 사실 무기로써의 효용성은 없었으나 지금도 러시아 우주선의 발사체의 베이스가 되고 있을 만큼 뛰어난 로켓이다. 스푸트니크 1호도 이 로켓에 의해 우주로 날아갔다.
그런데 후일 밝혀진 자료에 따르면 정작 흐루시초프를 포함한 소련 지도부는 인공위성을 그리 탐탁지 않게 생각하였다. 당시 소련의 인공위성 발사계획을 주도하였던 인물은 R-7 로켓을 만든 세르게이 코롤레프였는데, 그 또한 초창기 대부분의 로켓 개발자들처럼 로켓을 무기보다 우주개발의 발사체로써 연구하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해 무기에만 관심을 가지고 있던 당국자들을 적극 설득하였다.
그는 R-7로 인공위성 발사에 성공하면 소련의 ICBM 보유가 공식적으로 입증된 것과 마찬가지라고 설파하였다. 당국은 반신반의하였지만 R-7의 능력을 테스트해보고 싶은 생각에 이를 승인하였다. 이처럼 간신히 동의를 얻어 시험삼아 농구공 크기의 스푸트니크 1호가 발사되었지만 앞서 언급한 것처럼 그 후폭풍은 미국을 절망에 빠뜨릴 만큼 엄청났다. 소련은 재미삼아 돌을 던져보았는데 상대편은 실명이 될 만한 충격을 받은 것이었다.
소련 당국 스스로도 놀랄 만큼 서방이 상상 이상으로 혼란에 빠지자 신이 난 흐루시초프와 그동안 장거리미사일의 효과에 대해 반신반의하던 소련 군부는 R-7 및 스푸트니크 개발의 아버지인 코롤레프를 순식간에 영웅으로 만들어버림과 동시에 대대적인 대 서방 정치 공세를 강화하여 미국을 곤혹스럽게 만들었다. 적어도 그 순간만큼은 미국이 당장 맞대응하고 나올만한 것이 없었다.
/바이코놀 우주기지에 있는 세르게이 콜로레프의 석상. 그는 소련의 초기 우주 개발을 이끈 위대한 엔지니어였다.
③ 다급해진 미국, 독일 V2로켓의 아버지 폰 브라운에게 손을 내밀다
미국, 절망에 빠지다
스푸트니크 1호의 충격이 있은 지 불과 한 달 후인 11월 3일, 소련은 생명체를 최초로 우주에 보내는 업적을 거두었다. 라이카라는 이름의 개를 태우고 발사된 스푸트니크 2호의 무게 500kg는 소련이 마음만 먹으면 미국의 어디에도 핵폭탄을 떨굴 능력이 있음을 보여주는 확실한 증거였다. 소련의 발표에 미국이 대응할 수 있는 것은 우주에 멀쩡히 살아있는 개를 보내 죽게 만들었다는 비난뿐이었다.
미국의 정책자들은 한계에 절망할 수밖에 없었으나 그렇다고 국민들의 사기까지 떨어뜨리지는 말아야 했다. 미국은 언론을 통해 자신들도 충분히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대대적으로 알렸고 조만간 인공위성을 궤도에 올릴 것이라고 선전하였다. 우리도 충분히 능력이 있는데 단지 점검에 점검을 거듭하는 사이에 소련이 먼저 발사에 성공하였을 뿐이라는 논리였다.
/스푸트니크 2호에 실려 최초로 외계로 나간 생명체로 기록된 개 '라이카'. 우주에서도 생명체가 살 수 있음이 입증됐다.
그러면서도 뒤로는 사업 주체였던 미 해군에게 최대한 빨리 뱅가드 위성을 발사하도록 채근하였다. 뱅가드는 스푸트니크 2호의 0.5퍼센트에도 미치지 못하는 1.4kg이어서 이것만으로도 발사체 능력이 비교되었다. 민망스러울 만큼 커다란 격차였지만 그런 자격지심은 다음 문제였다. 당국은 미 해군에게 애당초 1958년 여름으로 예정되었던 뱅가드 TV3호의 발사 계획을 앞당겨 무조건 1957년도 안으로 발사하도록 재촉하였다.
이처럼 이미 양국의 발사 능력의 우위는 명확히 결정된 상황이었지만 그렇다고 해를 넘겨서는 곤란하였다. 그만큼 미국은 다급했고 어쩔 수 없이 1957년 내로 인공위성을 발사하겠다고 대대적으로 공표한 미 해군은 밤낮으로 개발에 전념하였다. 당국의 선전을 철저히 믿은 미국인들은 조속히 미국도 멋지게 인공위성을 쏘아 올려 구겨질대로 구겨진 서방 세계의 자존심을 회복하여 주기를 바랐다.
드디어 1957년 12월 6일, 뱅가드 TV3호를 탑재한 개량형 아틀라스 로켓이 카운트다운 종료와 함께 힘차게 엔진을 점화하였다. 그런데 자신만만하였던 미국의 기대는 불과 1초도 가지 못해 물거품이 되었다. 로켓은 요란한 소음과 함께 불과 1m 정도 뜨고 난 뒤 옆으로 쓰러지면서 대폭발하는 참담한 모습을 생생하게 보여 주었다. 더불어 미국의 절망은 끝없는 나락으로 빠져들게 되었다.
/발사 직후 폭발하는 뱅가드 TV3호. 이 사건으로 미국의 자존심도 함께 무너졌다.
독일에서 온 이방인
이러한 뱅가드의 참담한 실패를 안타깝게 바라보던 한 사람이 있었다. 그는 소련이 인공위성을 쏘아 올리기 훨씬 이전부터 자신이 연구한 결과를 조금만 응용하면 충분히 인공위성을 쏘아 올릴 자신이 있었다. 그는 이를 실현하고 지원받기위해 평소 정책 당국자들을 찾아다니며 인공위성의 효과에 대해 역설하던 인물이었다. 하지만 키를 쥐고 있던 당국에서는 그다지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195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미국 당국도 소련과 마찬가지로 인공위성은 단지 과학적 성과 외에 별다른 매력이 없는, 그저 그런 분야로 여기고 있었고 로켓은 주로 폭탄의 운반체 정도로만 생각하여 장거리 미사일 개발에만 신경을 쓰고 있었다. 그래서 최초 뱅가드 프로젝트에 투입된 자금도 ICBM 개발에 투입된 연구비에 비하면 미미한 수준이었다. 이럴 정도였으니 이 과학자의 호소를 귀담아 듣지 않았던 것은 당연하였다.
/발사에 성공하는 아틀라스 B 로켓. 미국도 폭탄 운반체로서의 매력 때문에 인공위성보다 로켓 개발에 매진했다.
그는 당국이 소련의 성공에 놀라 아틀라스 로켓을 개조하여 뱅가드 위성을 발사하기로 결정하였을 때 아직 실험 단계에 있던 아틀라스 로켓으로는 어렵다는 점을 역설하였다. 대신 자신과 그가 이끄는 미 육군 로켓개발팀에게 기회를 준다면 한 달 안에 반드시 인공위성을 쏘아 올리겠다고 장담하였다. 하지만 미국의 정책 당국은 애써 그의 호소를 외면하고 뱅가드 프로젝트를 추진하던 미 해군에게 우선권을 주었다.
그 이유는 이 인물이 패전국 독일 출신의 과학자 베르너 폰 브라운이기 때문이었다. 그는 전쟁 당시 세계를 놀라게 한 독일의 비밀 병기인 V-2 로켓의 개발 주역이었고 이후 미국으로 건너와 육군에서 주피터 로켓 등을 개발하였다. 하지만 엄밀히 말해 일종의 전리품으로 미국에 끌려온 과학자여서 이 사람과 그가 이끄는 팀에게 미국의 자존심을 회복하는 중대임무를 부여하는 것이 마땅하지 않다고 판단한 것이었다. 하지만 무리하게 추진하였던 뱅가드 위성 발사가 그의 말처럼 처참하게 실패로 돌아가자 이제는 그나마 가지고 있던 알량한 자존심마저 휴지통에 넣을 수밖에 없게 되었다. 어쩔 수 없이 당국은 폰 브라운을 중심으로 한 100여명의 독일 출신 엔지니어들이 로켓 제작에 매진하고 있던 미 육군 로켓개발팀에게 손을 내밀 수밖에 없었다. 그만큼 미국은 경황이 없었다. (계속)
/독일에서 온 과학자들을 주축으로 구성된 미국 육군 로켓개발팀과 팀을 이끌던 당시의 베르너 폰 브라운(맨 오른쪽).
④ 미국이 1kg 위성 발사에 성공하자 소련은 1300kg 위성을 발사하고...
다시 도전하다
폰 브라운이 이끄는 미 육군 로켓개발팀이 선택한 추진체는 1956년 발사에 성공한 주피터 로켓이었는데 족보로 따진다면 V-2의 직계 손자뻘이 되었다. V-2를 개발한 독일 페네뮌테 로켓개발팀은 전쟁 전인 1927년에 인공위성의 개발을 목표로 결성된 민간 과학단체인 독일 우주여행협회가 전신이었다. 그들은 발사체로 일련의 로켓을 시험 제작하였고 그 중 A4 로켓이 V-2로 제식화되었고 미국으로 넘어와 한 단계 더 큰 발전을 이루었다.
무기로서 전용 가능성이 큰 로켓의 발전에 이처럼 전쟁은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컴퓨터도 존재하지 않았고 CAD는 상상도 못하던 시절에 무려 35,000여 번이나 설계도를 직접 손으로 그렸다 지웠다하면서 로켓 제작에 매진하였던 폰 브라운은 V-2가 발사에 성공하는 날, 그의 스승이며 연구소 소장이었던 발터 도른베르거에게 이렇게 외쳤다. "오늘은 달까지 100km가 가까워진 날입니다"
/페네뮌테 박물관에 전시 중인 V-2 로켓의 모형. 존재하는 모든 액체추진 로켓의 아버지라 부를만한 걸작이다.
이렇듯 연합군을 공포에 떨게 만든 신무기를 만드는 와중에도 인공위성에 대한 무한한 꿈을 한 번도 접지 않았던 폰 브라운은 드디어 꿈에 그리던 절호의 기회가 부여되자 밤낮을 가리지 않고 제작에 열중하였다. 냉전은 지난 전쟁보다 그에게 더 큰 기회를 만들어 준 것이었다. 그는 주피터 로켓을 조금만 더 개량하면 인공위성을 충분히 지구 궤도에 올릴 수 있을 것으로 굳게 확신하고 있었다.
폰 브라운은 주피터 로켓에 2퍼센트 부족한 마지막 추력을 더하기 위해 위성 주변에 부스터(추력 보조용 보조로켓)를 부착하였다. 이렇게 탑재된 위성이 우주궤도에 진입할 수 있는 초속 7.9km의 제1우주속도에 이르도록 총 3단계에 걸쳐 단계적으로 추력을 얻는 방법으로 개조된 로켓을 주피터 C라 명명되었다. 폰 브라운과 그의 팀은 당국의 명령이 떨어지자마자 불과 한 달 만에 모든 준비를 완료하였다.
아무리 이전부터 구상을 하고 준비를 하였어도 지금은 감히 재현하기 어려운 엄청난 개발 속도였다. 바로 냉전의 모습이기도 했다. 소련의 스푸트니크 1호가 발사되고 넉 달이 지난 1958년 1월 31일, 어둠이 내린 한밤중에 케이프 케너베럴에 있는 로켓 발사 실험장에서 조명을 받고 있던 주피터 C 로켓이 인공위성 익스플로러 1호를 탄두 부위에 탑재하고 긴장된 모습으로 카운트다운에 들어갔다.
/익스플로러 1호를 탑재하고 발사대기 중인 주피터 C 로켓.
그렇게 되찾은 자존심
불과 50일전 뱅가드 로켓의 처참한 실패를 목격했던 미국의 수많은 관계자들은 초조해 질 수 밖에 없었다. 피가 마르는 카운트다운이 드디어 0이 되자 주피터 C는 엄청난 굉음과 함께 오렌지색 불꽃을 뿜어내며 요동치더니 하늘을 천천히 올라가기 시작하였다. 시간이 갈수록 가속도를 더 한 로켓은 기다란 화염 흔적을 하늘에 남기고 순식간 어둠 속 저 높은 곳으로 사라져 가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 미국은 자랑스럽게 익스플로러 1호가 지구 궤도를 선회하고 있음을 온 세계에 공표하였다. 인류 3번째이며 미국 최초의 인공위성인 익스플로러 1호는 이로써 지난 넉 달 동안 소련의 공세에 기가 꺾여있던 미국의 자긍심을 회복시켜 주었다. 대다수의 평범한 미국인들은 비록 시작이 소련에 비해 조금 늦었지만 이제 미국이 우주개발에서도 곧바로 최고가 될 것으로 생각하였다.
/기자회견장에서 익스플로러 1호 모형을 자랑스럽게 들어 올리는 개발팀.
하지만 천신만고 끝에 우주로 날아간 익스플로러 1호는 무게가 불과 1kg 조금 넘는 초소형 위성으로 스푸트니크에 비한다면 비교가 되기 힘들만큼 작았다. 반면 그로부터 석 달 후인 1958년 5월 15일 발사된 소련의 스푸트니크 3호는 무게가 1,300kg이 넘었고 지구자기장, 태양복사 관측 장치 등을 갖춘 본격 실험 위성이었다. 이처럼 당시 미국과 소련의 격차는 엄청나게 벌어져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각론적인 비교는 정책당국자들과 군부지도자들만 뼈저리게 인식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일반 국민들이 이러한 세세한 사항을 알 필요도 없었고 굳이 당국이 나서서 알릴 필요도 없었다. 단지 미국도 인공위성을 쏘아 올릴 능력이 있다는 사실만 입증하면 그것으로 충분하였다. 이런 의도처럼 익스플로러 1호는 추락했던 자존심을 회복하고 정치적으로는 소련의 공세에 대응할 만한 호재가 되기에 충분하였다. 하지만 이런 분명한 격차는 미국이 사람을 달에 먼저 보내는데 성공한 새턴 5호 로켓이 개발되기 전까지 통상적으로 소련이 발사체 기술에서 미국을 앞서 나간 것으로 평가 되고 있다. 그 만큼 출발부터 미국은 소련에 한참 뒤져 있었던 것이고 이러한 우주를 향한 소련의 앞서기와 미국의 추격은 1970년 초까지 국력을 모두 투입하다 시피 하는 피 말리는 경쟁으로 불을 뿜게 되었다.
/스푸트니크 발사체인 R-7A와 주피터 C를 비교한 실측 모형. 이것만으로도 초기 우주개발과 ICBM 분야에서 소련이 앞서가고 있음을 한눈에 알 수 있다.
⑤ 미국, 소련의 공격에 대비해 인터넷을 개발하다
쇼크라고 기록된 사건
지금까지 소개한 것처럼 냉전 초기였던 1957년에 발사된 스푸트니크 1호는 서방 세계에 이른바 ‘스푸트니크 쇼크’ 혹은 ‘스푸트니크 위기’라고 언급되는 엄청난 충격파를 불러왔는데 이는 소련의 예상을 크게 벗어난 수준이었다. 재미있는 점은 그 여파가 우주 개발이나 군비 확장 측면에서 당연히 먼저 나타났지만 현재 우리 실생활에서도 그 흔적을 엿볼 수 있다는 사실이다.
지금까지 미국은 각 군, 방산업체, 연구기관별로 장거리 로켓과 인공위성 제작을 따로 진행하고 있었을 만큼 개발 체계가 중구난방이었다. 이런 혼란 속에서 당장 앞선 기술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확인된 소련과 경쟁을 벌여 이기기를 기대한다는 것 자체가 무리였다. 당연히 효율적으로 우주 개발을 진행하기 위한 조직이 필요하였고 1958년 7월 29일 미 항공우주국(NASA)이 창설되었다.
/1958년 발행된 미국 보이스카우트 잡지에 수록된 스푸트니크 관련 기사. 미국이 느낀 충격 정도를 짐작할 수 있다.
이렇게 탄생한 미 항공우주국은 이후 미국뿐만 아니라 전 세계 항공우주산업 연구의 메카가 되었다. 어느덧 오랜 세월이 흐르면서 조직의 구성과 형태에 여러 차례 부침이 있었지만 여전히 미 항공우주국은 중요한 우주 개발을 통합하여 주도하고 있다. 이는 권한과 책임의 집중을 명확히 한 조직 개편의 올바른 방향을 보인 사례로 기록되었다. 굳이 우주 개발이 아니더라도 본받아야 할 모습이 아닌가 생각된다.
다음으로 교육 제도의 혁신을 거론할 수 있다. 초기 경쟁에서 소련에 뒤진 원인을 조사한 미 당국은 학력 수준, 특히 이공계 수준이 소련과 비교하여 유독 뒤떨어졌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에 교육 과정을 대대적으로 혁신하고 지원하였는데, 특히 수학과 같이 그 동안 등한시 하여오던 기초 학문 분야에 많은 예산을 투입하였다. 그 성과는 오늘날 미국이 기초 학문의 선진국이 되는 성과를 가져왔다.
외국 인력에 대한 개방 정책도 미국 사회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미국은 이민자들과 그 후손으로 이루어진 나라이면서도 정작 후발 이민자들의 유입에 대해서는 현재도 많은 제한을 가하고 있다. 하지만 선별적으로 이민이 쉬운 경우가 있는데 바로 고급 인력들이다. 폰 브라운의 예에서 알 수 있듯이 외부 인력에 대한 배타적인 태도보다 이들을 적극 받아들이고 이용할 줄 아는 개방적인 자세가 사회 발전에 공헌 할 수 있음을 깨달았던 것이다.
/설립 초기 NASA를 방문한 아이젠하워 대통령을 안내하는 폰 브라운.
그리고 오늘
어쩌면 스푸트니크 쇼크가 현재 우리 삶에 가장 큰 영향을 주고 있는 것 하나만 꼽으라면 단연코 인터넷이다. 어쩌면 이것은 인공위성보다 인류의 삶을 획기적으로 변화시키는데 더 큰 역할을 담당하였다고도 해도 과언이 아니다. 스푸트니크 쇼크를 겪으면서 미국은 유사시 소련 미사일의 공격으로 미국의 주요 통신망이 파괴되었을 경우 국가의 비상 경영과 군대의 지휘를 위한 별도의 비상 통신 수단의 구축이 필요함을 깨닫게 되었다.
연구 결과 기존의 유선전화 통신망 이외에 케이블이나 무선 데이터 교신 같은 여러 종류의 정보이동 수단을 이용하면 원거리 상에 있는 서로 다른 이기종 컴퓨터간의 정보 공유가 가능하며, 이것은 기존 유선 전화망과는 다른 또 하나의 통신 수단이 될 수 있음을 알게 되었다. 이때 군과 주요 기관 간에 시험적으로 구축에 성공한 정보 통신망이 오늘날 인터넷의 시초라고도 할 수 있는 아파넷(ARPANET)이다.
/아파넷 개발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 레너드 클라인록 UCLA 전산학과 교수.
이렇게 시험 삼아 구축된 아파넷 망이 1970년대 초에 기관이나 군이 아닌 일반에게도 공개되어 미국 내 50여개 대학과 연구소들이 이 통신망으로 연결되었는데 그 활용도가 기하급수적으로 증가되었다. 이때 일반 대중들이 이용할 수 있는 아파넷이 따로 분리되었는데 이것이 발전하여 오늘날 세계를 실시간으로 하나로 묶는 거대한 정보 통신망인 인터넷으로 발전 되었다.
지금부터 50년 전 농구공만한 인공위성이 우주로 보내졌고 그 전대미문의 에피소드는 커다란 사변이 되었다. 처음에는 상대방에 대한 위협과 이에 응전한 자존심의 대결로 비화되었으나 50여년이 지난 지금은 우리의 실생활에도 많은 긍정적 영향을 주는 결과를 가져왔다. 지금 앞에서 쓰고 있는 인터넷도 그렇고 위성을 통한 국제전화와 TV중계도 우리가 현재 누리고 있는 혜택이다. 역사의 아이러니라고 하여야할까?
이제는 ISS(국제우주정거장)를 함께 만들어 이용하고 우주왕복선 퇴역 후 미국 우주비행사들이 러시아의 소유즈 우주선으로 ISS를 오고 갈 만큼 어느덧 우주는 국경을 초월하여 전 세계가 협력하는 공간으로 바뀌었다. 최근의 우크라이나 사태처럼 미국과 러시아의 관계가 삐걱거리고 일부에서는 이를 신 냉전의 시작이라고도 언급하지만 예전의 대립 시절로 회귀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엄청난 변화라 할 수 있다.
/R-7A 로켓에 실려 우주를 향해 발사되는 스푸트니크 1호. 당대는 물론 지금까지도 인류사에 엄청난 영향을 끼친 사건의 주인공이다.
■주코프
① 트루먼 대통령이 '인류운명이 걸린 프로젝트'라며 무색 콜라를 개발한 사연
보고서에 수록된 내용
독일이 항복한 지 얼마 되지 않았던 1945년 6월 초, 연합군 총사령관인 아이젠하워가 보낸 한통의 문건이 트루먼 대통령에게 전달되었다. 지난 6월 5일, 베를린에서 열린 연합군 지휘부와 소련군 수뇌부 간에 있었던 회담의 결과 보고서였다. 그런데 전후 질서 구축에 관한 대부분의 중요 사항은 이미 위정자들이 결정한 상태여서 전선에서 전쟁을 지휘하던 군인 간에 협의할 특별한 현안은 그리 많지 않았다.
어쩌면 그 동안 명성만 들어왔던 상대방 최고 지휘관을 직접 마주대한 것이 최대 관심사였다.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잘 싸웠다는 칭찬이 서로 오고갔지만, 그들은 결코 상대방이 진정한 친구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따라서 전후, 경쟁 대상이 확실한 상대방에 대한 사소한 정보도 결코 소홀히 할 수 없었다. 그래서 아이젠하워의 보고서는 회담 내용보다 소련군 지휘부를 분석하는데 의의가 있었다.
/베를린에서 회담을 개최한 승전국 지휘관들. 좌에서 우로 몽고메리, 아이젠하워, 주코프, 타시니.
그런데 보고서를 꼼꼼히 읽던 트루먼은 흥미로운 내용을 발견하였다. 한 소련군 지휘관이 콜라를 요구했는데, 그것도 아무도 모르게 은밀히 보내줄 수 있냐는 것이었다. 회의 도중 휴식 시간에 아이젠하워가 권한 코카콜라를 처음 마셔본 소련 장군이 그 맛을 잊지 못하여 다음 날 사적으로 요청을 한 것이었다. 문제는 그가 공개적으로 콜라를 즐기면 나중에 자본주의에 물든 변절자라는 꼬투리를 잡힐까봐 전전긍긍하였다는 점이었다.
투르먼은 천만 대군을 지휘한 소련군 최고 지휘관마저 음료수를 마시는데 눈치를 보아야 할 만큼 소련이 경직된 체제라는 것을 깨닫고 혀를 찰 수밖에 없었지만 더불어 그의 약점을 잡을 수 있는 좋은 기회로 보았다. 즉시 보드카로 보일 수 있도록 무색의 콜라를 개발하라는 지시가 코카콜라 사에 전달되었다. 그러면서 이는 ‘인류의 운명이 걸린 중대한 프로젝트’라는 부연 설명을 붙였다.
이렇게 단 한 사람을 위해 유일무이한 무색 콜라가 개발되었고 즉시 30상자 분량이 보드카 병에 담겨 대서양을 건너가 그에게 전달되었다. 당시의 시대상을 엿볼 수 있는 에피소드지만 이후의 세계사를 살펴본다면 ‘인류의 운명’이라는 거대한 수사를 언급할 만한 일이기도 했다. 물론 이후 콜라가 어느 정도 영향력을 행사했는지는 불분명하지만 적어도 극히 사적인 요구를 미국이 국가적인 문제로 인식했을 만큼 그의 위상은 상당히 컸다.
/콜라는 전쟁 중에도 최전선까지 공급된 미국인의 기호품이었다. 이를 처음 맛 본 한 소련군 장군의 요청으로 유일무이한 무색 콜라가 개발되었다.
알기 어려웠던 인물
독소전쟁을 진두지휘하고 전후 냉전시기에 소련의 정치인으로도 커다란 역할을 담당한 게오르기 주코프(Georgy Konstantinovich Zhukov, 1896~1974)가 바로 그 주인공이다. 그는 전쟁사에 커다란 발자국을 남겼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잘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라 할 수 있다.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소련의 장군이었다는 사실 때문인데, 오랫동안 냉전의 최일선이었던 국내에서 소련의 인물이나 그들의 활약에 대해 자세히 알기는 어려웠다.
직간접적으로 우리 현대사에도 영향을 끼쳤지만 제2차 대전은 남의 전쟁이라는 느낌이 강하다. 특히 지구 반 바퀴 떨어진 유럽 전역은 철저하게 제3자의 입장일 수밖에 없는데 그렇다보니 내용을 오해하는 경우도 종종 있다. 많은 이들이 미국과 영국이 주도한 연합국이 독일을 굴복시킨 것으로 알고 있지만, 승리의 1등 공신은 무려 2,000만 명의 국민을 희생시키며 처절히 싸웠던 소련이었다.
/제 2차 대전 당시 소련군 최고 지휘관이었던 게오르기 주코프. 그는 현대사에 많은 발자취를 남긴 인물이었지만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지 않다.
냉전으로 인해 정보가 막히고 미국을 주인공으로 삼은 할리우드 영화를 접하며 우리는 이런 내용을 제대로 몰랐다. 그래서 제2차 대전 당시의 장군이라면 아이젠하워, 몽고메리, 패튼 같은 승장이나 롬멜처럼 극적 요소가 풍부한 인물만 아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오로지 군사적인 관점으로 본다면 제2차 대전을 장식한 뛰어난 지휘관들은 정작 따로 있었고 특히 패전국인 독일에 그런 인물들이 많았다.
침략자이고 패전국이어서 독일의 장군들에 대해 모르는 것은 어쩌면 충분히 이해할 만한 일이다. 그들 스스로 과거를 자랑할 수 없는 입장이어서, 뛰어난 전공을 세웠어도 업적을 드러내지 못하였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서 승전국이었던 소련 장군들에 대한 정보는 무지에 가까웠다. 오히려 지금도 많은 이들은 유럽 전역에서 군사적으로 가장 커다란 역할을 담당한 나라가 소련이었다는 사실 자체를 생경하게 받아들일 정도다.
지금은 이해가 되지 않겠지만 1990년대 이전에 소련이나 소련의 인물들에 대해 심도 있게 알아보려면 종종 의심의 눈초리를 받았을 정도였다. 그러했던 영향 때문에 제2차 대전에 대해 오랜 세월 동안 편중된 정보만 습득할 수밖에 없었고 당연히 제대로 알지 못하였다. 그래서 군사적 업적만 놓고 본다면 주코프는 당연히 가장 먼저 언급 될 만한 인물 중 하나였지만 이처럼 군사 외적인 이유 때문에 알기가 어려웠다.
/수많은 할리우드 영화나 TV시리즈를 접하면서 은연 중 독일을 물리치는데 미국의 역할이 큰 것으로 착각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실제로 가장 큰 역할을 담당한 것은 소련이었다.
② 소대장에서 불과 2년만에 연대장으로 초고속 승진
혼란의 시대가 그를 군인으로 이끌다
주코프는 1896년 모스크바 인근의 스트렐코프카에서 가난한 농민의 아들로 태어났는데 집안이 어려워 10대 초반에 제화공의 도제로 들어갔다. 열심히 일한 결과 인정받을 만큼 실력이 늘었는데 만일 전쟁이 없었다면 그는 단지 평범한 제화공으로 삶을 마쳤을 것이다. 1914년 제1차 대전이 발발하자 주코프는 제정 러시아 군대에 징집되었는데 신병훈련소에서 탁월한 성적을 보여 정예병이라 할 수 있는 기병대원이 되었다.
1916년 두 차례에 걸쳐 성 게오르그 십자장을 수여받았을 만큼 전선에서 맹활약 하였고 그 공로를 인정받아 하사관으로 승진하였다. 영웅이 시대를 만들 수도 있지만 주코프의 생애를 보면 그는 철저하게 시대가 만든 영웅에 해당되는 경우였다. 아주 평범한 삶을 살아가던 그를 군인의 길로 인도한 제1차 대전도 그렇지만, 1917년 10월에 벌어진 혁명은 그의 인생을 완전히 바꾸었던 것이다.
/적백내전 당시의 적군(赤軍)의 모습. 1922년까지 계속된 내전으로 말미암아 건국 초기 소련은 그야말로 혼란의 연속이었다.
나중에 주코프는 자서전 등에서 자신이 혁명의 주체인 것처럼 미화하였지만 당시 최전선에서 근무하다 티푸스에 걸려 요양 중이었기 때문에 정작 혁명에 가담할 수 없었다. 1918년부터 적백(赤白)내전이 격화되자 그는 의지와 상관없이 적군(赤軍)에 강제 입대하게 되는데 여기서 본격적으로 공산주의 이념을 교육받았다. 이후 공산당에 가입하고 1920년까지 계속된 내전에서 기병대 하사관 신분으로 열심히 싸웠다.
내전이 끝난 후 주코프는 장교로 임관할 기회를 잡게 되었고 초급 지휘관으로 부임한지 얼마 되지 않았던 1921년 탐보프에서 일어난 농민 반란 진압에 투입되었다. 탐보프 반란은 적백내전 종료 후 볼셰비키 세력 간에 일어난 일종의 권력 투쟁이었는데, 실패하였기에 소련 역사에서는 폭동으로 묘사하였지만 1년간 지속되며 무려 24만 명의 인명 피해를 남겼던 커다란 사건이었다.
한때 동지들을 상대로 독가스를 살포하면서까지 잔인하게 진압을 주도한 인물이 이후 주코프에게도 많은 영향을 주었던 투하체프스키였다. 이때 주코프는 일선 소대장으로 많은 활약을 펼쳐 훈장을 수여받았고 불과 2년 후인 1923년에는 제39기병연대장이 되었다. 제1차 대전과 곧이어 이어진 혁명, 내전으로 말미암아 초기 적군에 능력 있는 인재가 그만큼 부족해서 가능하였던 초고속 승진이었다.
/1923년 주코프는 제39기병 연대장이 되었다. 소대장에서 불과 2년 만에 연대장이 되었을 만큼 초고속 승진이었다.
피의 시절에 살아남다
1924년, 주코프는 고급 장교 육성반에 입교하고 이듬해에 독일로 교환 연수를 떠났을 만큼 소장파 장교들 중에서 선두를 달렸다. 이처럼 군부의 중책이 될 만한 인재들을 발굴하고 군 현대화에 앞장섰던 인물이 탐포프 반란을 제압한 투하체프스키였다. 1925년, 불과 32세의 나이에 소련군 총참모장에 오른 투하체프스키는 기존 소련군을 단지 덩치만 커다란 전 근대적인 군대라고 규정하고 개혁을 시도하였다.
투하체프스키는 전차와 전투기를 새로운 군대의 핵심으로 보았고 이를 중점 육성하였다. 그렇게 기계화부대와 공군을 이용한 입체적인 공격 전술이 이후 소련군의 핵심 전술이 되는 ‘종심타격이론’이다. 그런데 이런 노력은 기존 전술을 신봉하는 보수적인 기득권층에 의해 심하게 비토되었다. 특히 지난 1만 년 간 전장에서 기동부대를 담당하던 기병대의 반발이 컸다. 하지만 정작 기병대의 지휘관이었던 주코프는 전혀 다른 생각을 하였다.
/내전 당시 백군 제압에 혁혁한 전공을 세워 붉은 나폴레옹이라 불린 미하일 투하체프스키. 그는 혁신적인 기동이론을 입안하였지만 숙청을 당하며 이를 실현하지 못하였다.
이후 주코프가 이룬 전과를 살펴보면 그가 투하체프스키의 영향을 직간접적으로 받은 것은 틀림없다. 다만 그의 이론이 타당하다고 생각한 것과는 별개로 1920년대의 주코프는 야전의 말단 지휘관이다 보니 총참모장이자 소련군의 핵심인 투하체프스키와 가까이 접촉하기는 어려웠다. 역설적이지만 투하체프스키와 물리적으로 가깝지 않았던 당시의 현실이 이후 종심타격이론을 실현하는 기반이 될 수 있었다.
1930년대 말에 불어 닥친 피의 대숙청 과정에서 군부의 핵심들이 대거 제거 당하였다. 그 중에는 투하체프스키도 있었는데, 이때 그를 따르던 수많은 이들이 함께 처형되거나 강제 수용소에 보내졌다. 대숙청은 순전히 스탈린의 독재 권력을 강화하는 과정에서 벌어진 아귀다툼이었지만 상황이 워낙 공포 그 자체다보니 군 내부에서 투하체프스키에 관한 이야기를 입에 올리는 것조차 금기시 되었다.
본격적으로 실세가 된 제2차 대전 이후의 행적과 달리 초급 장교 시절 주코프는 권력이나 군의 헤게모니 다툼과 거리를 두고 있었고 특별히 무고를 당하지 않을 만큼 주변에 적도 만들지 않았다. 이후 여러 자료를 살펴보면 그는 표면적으로 스탈린에게 충성을 다하였지만 특별히 좋아하지는 않았다. 이런 처신 덕분에 많은 이들이 제거되어 나간 1930년대 들어서도 그는 계속 승승장구 할 수 있었다.
/1935년 당시 소련의 다섯 원수들. 이중 투하체프스키를 포함한 앞줄의 세 명은 대숙청으로 인하여 처형당하였다. 이처럼 순식간 공백이 생기면서 소련군의 지휘 체계는 엉망이 되었다.
③ 일본 관동군 6만명을 궤멸시키고 영웅이 되다
일본을 응징하다
주코프는 엄격한 군기 확립과 전투태세 유지에 유명하였고 특히 훈련에서 우수한 지휘 능력을 선보였다. 그런데 재미있는 점은 이 당시에 그처럼 유능한 사람 뿐만 아니라 무능한 이들도 벼락출세를 하였다는 점이다. 대숙청 절정기에 지휘 체계가 붕괴되었다는 소리가 나올 정도로 많은 장교들이 제거되면서 그 공백을 군사적 능력은 전무하지만 오로지 당성만 투철한 이들이 메우면서 벌어진 일이었다.
주코프의 명성을 널리 떨치게 되는 최초의 기회가 저 멀리 극동에서 찾아왔다. 1937년 일본은 중일전쟁을 일으켜 몽골 지역으로 침략을 가속화하였다. 이는 혁명의 혼란기를 수습하고 영향력 확대를 노리던 소련과 마찰을 불러왔다. 만주국과 몽골이 충돌을 벌였는데 만주국은 일본의 괴뢰국이었고 몽골은 소련의 후원을 받아 독립한 역사상 두 번째의 공산주의 국가였다. 즉, 이들의 충돌은 일본과 소련의 대결이었다.
/할힌골 전투 당시의 일본 관동군. 당시 일본은 소련에 비해 지상군 전력이 현격히 뒤졌지만 그동안 계속된 승전으로 말미암아 자신의 능력을 정확히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1939년 5월 11일, 불시에 벌어진 일본 관동군의 도발에 격노한 소련은 극동군 전력을 증강하고 부대 조련에 성과가 뛰어났던 주코프를 파견했다. 당시까지만 해도 피로 얼룩진 대숙청의 공포가 아직도 이어지고 있어 주코프는 모스크바에서 멀리 떨어진 극동으로의 파견을 오히려 다행스럽게 생각하였다. 없는 죄도 만들어버리는 대숙청의 불똥이 언제 어디로 튈지 몰랐던 무서운 시기의 자화상이었다.
소련 극동군은 총 57,000여명이었고 일대에 전개한 관동군 예하 일본 제6군은 75,000여명이었다. 병력은 관동군이 앞서지만 장비의 규모나 질에서는 극동군이 우세하였다. 사실 청일전쟁 후 일본은 거듭된 승전만 거듭하다보니 자만에 도취되어 있던 상황이었다. 그렇다보니 질적 격차를 계속 안이하게 여겼다. 반면 소련은 러일전쟁의 치욕을 기억하며 일본에 대한 경계나 평가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현지에 부임한 주코프는 광대한 몽골 초원이 대규모 기갑부대가 기동전을 펼치기에 적합한 장소임을 깨달았다. 그는 그동안 연구하여 왔던 투하체프스키의 종심타격이론을 사용하기로 결심하였다. 사실 투하체프스키가 비명횡사하였지만 스탈린이 군사적 이론까지 금지하였던 것은 아니었다. 다만 사람들이 워낙 공포를 느껴 숙청된 이와 관계된 것이라면 무조건 금기시 하였을 뿐이었다.
/극동으로 부임하여 소련-몽골 연합군을 지휘한 주코프가 몽골의 실권자인 초이발산과 환담을 나누고 있다.
이론을 실현하다
지난 5월 11일 최초 교전 후 일시적으로 소강상태였던 전선은 7월 2일 관동군이 할하 강을 건너 공격을 개시하면서 다시 불타오르기 시작하였다. 할힌골 일대에 포진한 일본 6군 주력을 일거에 궤멸시킬 생각을 하고 있던 주코프는 전선의 상황이 유리하다고 판단된 8월 20일, 공격 명령을 하달하였다. 소련 전차들은 신속히 6군의 좌우를 파고들어가 포위망을 완성하고 적 후방 보급소를 점령하였다.
약 2주간의 전투 끝에 6군은 6만 명 이상의 손실을 보고 전멸되었다. 속도와 집중을 통해 일거에 적을 제압한다는 투하체프스키의 전술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물론 주코프가 투하체프스키의 이론에 영향을 받았다고 이야기 한 적은 없지만 최초로 실천에 옮길 것은 이론의 여지가 없다. 이는 현대 기동전의 시작으로 흔히 여겨지는 1940년 프랑스 침공전 당시의 전격전을 실현시킨 독일보다 1년이 빨랐던 대단한 업적이었다.
/할힌골 전투 당시 BT전차를 앞세우고 돌격하는 소련군. 주코프는 이론으로만 생각하고 있던 대규모 기동전을 선보여 일본군을 궤멸시켰다.
주코프의 주도로 승리한 할힌골 전투의 결과는 이후 상당히 많은 영향을 끼쳤다. 우선 명확한 지리적 구분이 애매모호하여 분쟁의 실마리가 되었던 국경이 소련의 주장대로 확정되어 버렸는데 지금까지도 유효하다. 그리고 지난 러일전쟁만 생각하고 자신만만하게 일전을 벌인 일본 육군은 다시는 소련과 정면으로 싸워서는 안 된다고 느꼈고 결국 북방으로의 진출을 포기하게 되었다.
일본이 독일과 협공하여 소련을 공략하지 않고 남방으로 진공하며 태평양 전쟁을 일으킨 이유 중 하나가 이때 당한 트라우마였다. 말로는 복수 운운하였지만 1941년 소일중립조약을 서둘러 체결하고 대본영(大本營)이 해군의 주장대로 남방으로 진격하겠다고 하자 육군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을 정도였다. 결과적으로 주코프가 할힌골에서 이끈 대승은 독소전쟁이라는 가장 어려웠던 시기에 소련을 양면전의 위험에서 막아낸 예방주사가 되었다.
할힌골 전투는 역사적 의의가 컸지만 사실 군사적으로는 제2차 대전 당시의 어마어마한 여러 전투들과 비교 하다면 규모도 작고 그다지 인상적이지도 않다. 하지만 20세기 들어서 별다른 승리의 경험이 없던 러시아-소련에서 주코프의 전과는 모두를 흥분시켰다. 러일전쟁 이후 외세의 간섭까지 받은 적백내전까지 그야말로 연속된 수모 끝에 얻은 의미 있는 승리였다. 주코프는 영웅 칭호를 받고 순식간 대중의 관심 인물로 급부상하였다.
/소련을 두려워한 일본의 간절한 요청으로 1941년 4월 13일 소일중립조약이 체결되었다. 결과적으로 덕분에 소련은 가장 어려웠던 시기에 양면전쟁을 피할 수 있었다.
④ 독일 전차부대는 7주만에 육군 강국 프랑스를 완벽하게 제압하고
정예 부대를 이끌다
그런데 할힌골 전투의 승리는 소련에게 자존심을 회복시킨 것으로 그치지 않고 너무 자만하여 군사 도발을 주저하지 않도록 만들었다. 그들이 이긴 상대가 구시대의 무기와 전술로 무장한 일본군이었던 사실을 잊고 불과 보름 후인 9월 17일 폴란드와 발트 3국을 침공하면서 제2차 대전의 불길 속으로 뛰어든 것이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소련은 아직도 부족한 것이 많다는 교훈을 뼈저리게 얻게 되었다.
11월 30일, 영토 반환 요구를 거부한 핀란드를 압도적인 전력을 앞세워 전격 침공하여 이른바 겨울전쟁을 일으켰는데, 겨울 혹한과 핀란드군의 끈질긴 유격 전술에 걸려 곤혹을 치렀다. 우여곡절 끝에 승리하였지만 핀란드보다 10배나 많은 엄청난 피해를 대가로 바쳐야 했다. 이런 어이없는 결과는 한마디로 지난 대숙청의 후유증이었다. 많은 지휘관들이 제거당하면서 소련군의 체계가 엉망이 되었던 것이었다.
그때서야 심각함을 깨달은 스탈린의 눈에 주코프가 들어왔다. 1940년 봄, 대장으로 승진한 주코프는 키예프군관구 사령관에 임명되었다. 키예프군관구는 우크라이나에서 코카서스에 이르는 식량, 철광석, 석탄 그리고 석유가 무궁무진한 소련의 보물창고를 지키는 부대였다. 그런데 이곳을 노리던 인물이 있었는데 바로 히틀러였다. 히틀러는 독일이 반드시 차지하여야 한다고 주장하였는데, 이는 독소전쟁 발발의 중요한 이유 중 하나이기도 했다.
/돈바스(도네츠)를 소련의 심장으로 표현한 1921년 선전 포스터. 히틀러는 우크라이나에서 코카서스에 이르는 보물 창고를 독일이 지배하여야 한다고 믿었다.
주코프는 예하 부대를 시찰하였는데 준비가 몹시 불량한 것을 알고 실망하였다. 상당수의 장비가 구식에다가 정비도 제대로 되어 있지 않았고 병사들의 훈련 또한 부족한 상태여서 어디서부터 어떻게 손을 대어야 할지 엄두가 나지 않을 지경이었다. 하지만 소련군의 현실을 누구보다 잘 알기에 그저 한탄만 하고 있을 수는 없었다. 유럽에 전운이 깊게 드리우고 있으므로 당장 할 수 있는 부분부터 손보기 시작하였다.
바로 그때 주코프에게 반면교사로 삼을 만한 놀라운 싸움이 유럽 대륙 반대편에서 벌어졌다. 1940년 5월, 독일이 불과 7주 만에 유럽의 육군 강국 프랑스를 완벽하게 굴복시킨 것이었다. 외형으로 프랑스보다 앞서지 못했던 독일은 집단화된 기갑부대와 돌격로를 엄호한 공군의 입체적인 활약에 힘입어 일방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기갑부대를 앞세운 기동전에 대해 관심이 많았던 그는 크게 감명 받았다.
/파리에서 퍼레이드를 벌이는 독일군. 독일은 독창적인 전격전을 발판으로 불과 7주 만에 프랑스의 항복을 받아내었다.
총참모장에 오르다
주코프가 키예프에 부임 한지 얼마 안 된 6월 베사라비야와 북(北)부코비나 점령 임무가 하달되었다. 이 지역은 제1차 대전과 혁명의 혼란기를 거치면서 루마니아의 영토가 된 곳인데 소련은 이를 인정하지 않았다. 1939년 8월 독소불가침조약에서 이곳의 권리를 독일로부터 인정받은 소련은 국경에 50만 대군을 집결시켰다. 지구상에 루마니아를 도와 줄 나라는 없었고 6월 28일 주코프가 이끄는 소련군은 무혈 입성하였다.
눈에 뜨일 성과를 연이어 낸 주코프의 행적은 주목의 대상이 되었고 소련 내에서 위상이 높아져 갔다. 이처럼 그가 소련 군부의 실세 중 하나로 자리 잡아가기 시작하던 1940년 9월이 되었을 때 유럽의 상황이 심상치 않게 돌아갔다. 1939년 소련과 관계를 맺고 폴란드를 함께 침공하였을 만큼 눈치를 보던 독일이 1년도 되지 않아 순식간에 유럽을 제패해 버린 것이었다. 이제 소련과 독일의 밀월관계는 막을 내려야 했다.
/베사라비야와 북(北)부코비나를 점령한 후 연설을 하는 주코프. 무혈이었지만 이것은 명백한 도발이었고 이때의 원한으로 루마니아는 독일편에 붙어 소련 침공전에 참여하였다.
지난 겨울전쟁에서 소련군의 구조적 문제점이 극명히 드러난 상태에서 독일과의 전쟁은 감히 엄두가 나지 않았다. 스탈린은 대대적인 군 개편에 착수하면서 무능한 보로실로프를 실각시키고 신임 국방상에 겨울전쟁을 승리로 마무리 지은 티모셴코를 임명하였다. 독일이 보여주었듯이 이미 전쟁이 기갑, 기계화부대가 주도하는 시대로 바뀐 것을 통감한 티모셴코는 즉시 기동부대의 재건에 착수하였다.
하지만 대숙청 당시 사라진 것이 많아 당장 어떻게 할지 감이 잡히지 않던 티모셴코의 눈에 소련에서 유일하게 기동전을 시현한 주코프가 들어왔다. 그는 1941년 1월 주코프를 국방차관 겸 소련군 총참모장에 임명하고 기동부대 재건에 착수하도록 조치하였다. 스탈린이 군 최고사령관 자리에 있고 여전히 스탈린의 측근들이 한소리를 내고 있었지만 군 편제상 주코프는 최고의 위치에 오른 것이다.
재미있는 점은 당시 주코프는 독일과의 전쟁을 피할 수 없다면 소련이 먼저 공격하는 문제를 심각하게 고려하였다는 점이다. 스탈린의 반대로 말미암아 단지 계획으로만 끝났지만 사실 먼저 전쟁을 벌이기에 독일은 결코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지난 제1차 대전 당시에도 번번이 당하였고 특히 1918년에 체결된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은 말이 강화조약이지 실질적으로 항복이었다. 당연히 트라우마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1940년 키예프군관구를 방문한 국방상 티모셴코를 안내하는 주코프. 그는 주코프의 능력을 높게 평가하여 이후 스탈린에게 총참모장으로 추천하였다.
⑤ 인류 역사상 가장 참혹했던 전쟁이 터지다
그의 처세술
부대 개편에 착수한 주코프는 20개 기계화군단을 즉시 편성하려 하였지만 1942년 여름이 되어야 겨우 목표를 달성할 수 있을 것으로 예측하였다. 자신의 힘만으로 모든 것을 할 수 없음을 절감한 주코프는 대담하게도 스탈린에게 숙청된 장군들의 복권을 요청하였다. 내키지 않았지만 문제의 심각성을 깨달은 스탈린이 이에 동의하면서 수많은 이들이 죽음의 문턱에서 살아 돌아올 수 있었는데 이후 이들 대부분은 주코프의 든든한 지지 세력이 되었다.
이러한 사례에서 알 수 있듯이 이후 행적을 보면 주코프는 스탈린과 상당히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였다. 많은 이들이 스탈린을 두려워하고 감히 접근하지 못하였지만 주코프는 종종 자신의 의지를 관철시켰고 자서전 등에서 이를 자랑스럽게 소개하였다. 하지만 이는 겉으로만 그렇게 보였던 것이었다. 처세술이 뛰어난 주코프가 스탈린의 기분을 상하지 않도록 적절한 방법을 구사하며 신뢰를 얻는데 성공하였다고 보는 것이 옳다.
/베를린 점령 후 연합국 지휘관과 환담하는 주코프. 옆에 있는 로코소프스키 원수는 대숙청 당시 사형수 신분이었는데 주코프의 청원으로 복권되었던 대표적 인물이다.
군사적 능력을 빼고 본다면 주코프는 사실 상당히 출세 지향적인 삶을 살아 온 인물이었다. 스탈린의 눈에 들면서 권력과 연결이 되자 이런 성향을 가감없이 드러냈다. 자신의 입지를 높일 기회가 오면 결코 그냥 지나치지 않고 적절히 사용하였다. 그렇다보니 1940년 이후부터의 행적에서 알 수 있듯이 그의 업적은 과할 정도로 선전되었던 반면 실책은 최대한 감추거나 남의 탓으로 돌리고는 했다.
인간 주코프는 사소한 꼬투리도 잡히지 않으려고 끝까지 권력자의 눈치를 보았던 인물이었다. 피의 대숙청 기간을 무사히 빠져 나왔다는 사실만으로 그의 처세술을 알 수 있을 정도다. 반면 아랫사람들은 함부로 대하기 일쑤였고 마음에 들지 않으면 노골적으로 미워하였는데, 이 때문에 경쟁자들이나 부하들로부터는 성격이 오만하고 자만심이 강해 고집불통이고 옹졸하다는 소리를 많이 듣고는 했다.
흔히 상승(常勝)장군으로 알려진 것과 달리 주코프는 군사적으로 여러 번의 엄청난 실책을 저질렀다. 사실 제2차 대전 같은 거대하였고 변화가 심하였던 전쟁에서 무조건 이기기만 했다는 것부터가 말이 되지 않는다. 하지만 비록 일부 잘못 알려지거나 과대평가 된 부분도 있지만 그가 남긴 발자국은 부인하기 곤란할 만큼 크다. 결국 거대한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는 것은 단점 못지않게 능력이 뛰어나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시작된 사상 최대의 전쟁
1941년 6월 22일 새벽, 독일군이 남북으로 2,000여 킬로미터에 이르는 전선에서 진격을 개시하면서 인류사에서 가장 참혹하였던 독소전쟁이 시작되었다. 대부분의 소련 전투기들은 날아보기 전에 파괴되었고 최전선의 소련군이 어리둥절 하는 사이에 독일군 기갑부대는 이미 전선을 돌파하여 소련의 후방을 휘젓고 있었다. 주코프는 당장 소련이 취할 수 있는 선택이 무엇인지 곰곰이 생각한 후 공간을 내주기로 결심하였다.
부족한 전력을 구축하는데 필요한 시간을 벌기 위한 고육책이었다. 그러나 스탈린은 한 발자국도 물러서지 말라는 명령을 하달한 것으로도 모자라 전면적인 반격을 지시하였다. 스탈린의 의견에 정면으로 반기를 들 만한 사람은 아직 소련에 없었고 이런 오판은 소련의 기록적인 패배를 촉진시켰다. 전쟁 발발 일주일 만에 12여 만이 전사상 당하고 30여 만이 포로가 되는 엄청난 패배를 당한 민스크 전투는 단지 작은 시작이었을 뿐이었다.
/민스크 전투에서 포로가 된 소련군. 개전 직후 소련은 연이어 경이적인 참패를 거듭하였는데, 스탈린의 후퇴불가 명령이 참패의 한 원인이 되었다.
이 전투 후 곧바로 양측 합쳐 100만 대군이 스몰렌스크 일대에서 재차 충돌하였는데 8월 5일 전투가 종결되었을 때 소련은 또 다시 30여만의 병력과 2,500대가 넘는 전차를 비롯한 수많은 장비를 날려 버렸다. 그런데 개전 초의 연이은 패전 당시에 주코프가 특별히 어떠한 역할을 담당하였는지에 대해서는 불분명하다. 하지만 당시 무조건 후퇴불가를 외쳤던 스탈린의 행적을 본다면 그가 할 수 있는 일이 그다지 없었다는 점은 확실하다.
스몰렌스크 전투의 패배가 확실시 되던 7월 말이 되었을 때 주코프의 눈에 들어온 것은 키예프였다. 키예프 정면을 선방하고 있던 50여 만의 소련군이 스몰렌스크의 붕괴가 확실시 되자 측면이 노출될 가능성이 커졌던 것이다. 총참모장이 되기 전에 이 일대를 담당하였던 주코프는 이를 상당한 위기로 인식하였다. 또 다시 참사가 재현될 것을 우려한 주코프는 키예프를 포기하자고 직언하였다.
하지만 연이어 비극을 잉태하였지만 아직도 자기의 잘못을 몰랐던 스탈린은 당연히 주코프의 주장을 묵살하였다. 하지만 놀랍게도 이번만큼은 주코프도 주장을 굽히지 않고 계속 철수를 주장하였다. 격노한 스탈린이 9월 12일 그를 총참모장직에서 해임하여 STAVKA(소련군 최고사령부)에서 축출하였다. 그런데 숙청은 아니었고 북부 요충지인 레닌그라드를 방어하는 책임자로 전보하였다. 적어도 스탈린은 주코프를 미워하지는 않았던 것이다.
/파괴된 교량 옆으로 급속 도하하여 진격하는 독일군 8기갑사단 소속 전차. 독일은 거대한 러시아 평원에서 유감없이 놀라운 기동전을 선보였다.
⑥ 히틀러와 스탈린의 운명을 뒤바꿔 놓은 전투
위기에 빠진 모스크바
8월 중순 경, 독일군이 레닌그라드 초입까지 다다른 상태였다. 그런데 도시 진입을 서둘던 독일 북부집단군이 히틀러의 명령으로 진격을 중지하면서 상황은 묘하게 흘러갔다. 남부의 키예프에서 벌어진 전투로 인하여 전선 중앙을 책임지던 독일 중부집단군의 주력 부대들이 대거 키예프로 이동하여 들어가면서 전선 곳곳에 공백이 발생하자 북부집단군의 단독 진격이 위험하다고 본 것이었다.
키예프는 66만의 소련군이 포위 섬멸당하는 대참사의 무대가 되었다. 비록 소련이 이런 희생을 원하였던 것은 아니지만 이 전투의 결과는 엄청난 파급효과를 가져왔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남부를 제외한 1,500킬로미터에 이르는 나머지 전선이 일시적으로 소강상태가 되었고 이렇게 얻게 된 약 한 달은 소련이 방어선을 구축하는데 천금 같은 시간이 되었다. 덕분에 모스크바와 레닌그라드는 살아날 수 있었다.
/간신히 목을 축이는 키예프 전투 당시 생포된 소련군 포로. 소련은 무려 66만 여명이 궤멸되는 역사상 최대의 참패를 당하였는데 이로 인해 얻은 한 달이라는 시간은 모스크바를 지켜낸 원동력이 되었다.
1941년 9월 13일, 주코프가 레닌그라드 현지에 부임하였을 때 소련군의 사기는 말이 아니었다. 그는 군기를 잡으려 휘하 장군들을 들들볶았다. 사실 주코프는 부하들로부터 인기가 많았던 인물은 아니었다. 어쨌든 총살까지도 불사하며 보인 강력한 리더십은 도시를 수호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독일도 이렇게 형성된 레닌그라드의 단단한 방어망이 앞으로 900여일 가까이 이 상태를 계속 유지하게 될 줄은 당시에는 몰랐다.
독일군 자체의 문제도 있었지만 풍전등화의 레닌그라드를 수호한 주코프가 스탈린의 눈에 다시 들어온 것은 당연하였고 두 달도 되지 않아 모스크바로 소환하였다. 당시 키예프를 점령한 독일은 전열을 재정비하여 새로운 공세를 재개하였는데 목표는 모스크바였다. 주코프는 모스크바 방위에 관한 전권을 부여받고 서부전선군 사령관에 임명되었다. 그는 민간을 동원하여 모스크바로 향하는 요소요소에 거대한 방어물을 구축하였다.
다행히도 독일군의 공세는 때마침 가을 우기와 함께 닥쳐 온 라스푸티차에 걸려서 오도 가도 못하는 상황이 되었다. 추위가 시작되며 땅이 단단히 얼자 옴짝달싹 못하던 독일군 전차들이 다시 시동을 걸었다. 독일이 11월 24일 모스크바의 출입구인 클린을 점령하자 스탈린은 주코프에게 모스크바 방어가 가능한지 솔직하게 답하라고 물었다. 주코프는 가능은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더 많은 예비대가 필요하다고 대답했다.
/레닌그라드에서 긴급히 소환된 주코프가 지도를 보며 방어전을 구상하고 있다. 그는 독일도 지쳐있기 때문에 누가 더 빨리 예비대를 동원하느냐에 따라 승패가 갈릴 것으로 보았다.
소련을 구하다
주코프는 독일군의 소모도 만만치 않음을 알았고 결국 누가 더 많은 예비대를 적시에 투입하는가에 따라 모스크바의 앞날이 결정된다고 보았다. 11월 28일 독일군 선도부대가 망원경으로 모스크바 교회의 첨탑이 보이는 30킬로미터까지 다가왔지만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바로 이때 러시아의 매서운 겨울 혹한이 다가왔다. 이는 소련에게 축복이었고 독일에게는 이 전쟁에서 이길 수 없음을 깨닫게 만든 결정타였다.
마침내 주코프는 은밀히 준비하여 공격 위치에 배치하여 놓은 120만의 병력에게 명령을 내렸다. 독일군은 모스크바로부터 100~200킬로미터를 밀려났고 소련은 기적적으로 살아났다. 1942년 1월 7일 소련은 독소전쟁 최초의 전략적 승리를 거머쥐었다. 스탈린은 주코프를 실질적으로 자신의 다음 자리이자 명목상으로 군부 최고의 위치인 소련군 총사령관 대리(혹은 총부사령관이라고도 해석함)에 임명하였다.
/소련의 강력한 저항과 겨울 혹한에 막힌 독일군이 항복하고 있다. 대부분의 독일군들은 그때까지 동계 전투용 피복도 제대로 공급받지 못하였다.
그런데 연속 된 패배로 조금씩 자신의 과오를 깨달아가던 스탈린이 모스크바 전투에서 승리를 맛보자 기고만장해졌다. 단지 지도에 그려진 전선만 보던 그의 눈에 르제프 돌출부가 보였다. 그는 즉시 대반격을 실시하여 이곳에 몰려있는 독일군을 완전히 격퇴시키라는 명령을 하달하였다. 주코프는 간신히 모스크바를 사수한 소련군의 능력을 벗어난 명령이어서 반대하였지만 결국 1월 8일 공세를 시작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소련은 더 이상 힘을 쓰지 못하고 진격 한 달 만에 제자리에 머물러야 했다. 장장 100여 일간 계속된 공세에도 불구하고 르제프에 고립되었던 독일군은 히틀러의 엄명에 따라 현지를 사수하는데 성공하였고 이제 급해진 것은 소련이었다. 주코프는 공세 중단을 스탈린에게 요청하였지만 거부당하였다. 결국 전세는 역전되었고 4월 들어 독일이 반격을 개시하자 소련군은 궤멸되었다. 이 전투에서 소련은 무려 50여만 명의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모스크바 전투와 연이어 계속된 르제프 전투는 스탈린과 히틀러 모두에게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군부의 반대를 무릅쓰고 공세에 나섰던 스탈린은 자신감을 완전히 잃고 군부의 작전에 더 이상 깊게 관여를 하지 않게 된 것이었다. 반면 히틀러는 자신의 현지 사수 명령이 결국 옳은 것이었다며 더욱 더 군부를 무시하고 작전 전면에 나서게 되었다. 그리고 이런 변화는 독소전쟁을 넘어 제2차 대전의 승패를 결정지었다.
/르제프역에서 장비를 하역하는 독일군. 히틀러의 후퇴불가 엄명에 도시를 사수하는데 성공하였지만 이때의 경험은 이후 독일에게 그다지 긍정적으로 작용하지 못하였다.
⑦ 히틀러의 고집 때문에 독일군 30여만명이 몰살당하다
블랙홀이 되어 버린 도시
히틀러는 모스크바라는 상징성을 포기한 대신 소련의 보물창고인 코카서스를 점령하기로 결심하고 1942년 6월 28일, 청색작전이라 명명한 공세를 재개하였다. 지나간 겨울에 있었던 소련의 극적인 승리를 무색하게 만들만큼 독일의 새로운 공격은 거침이 없었다. 그런데 600여 킬로미터를 순식간 내달려 볼가 강 인근까지 다가가면서 전선의 상황이 조금씩 이상하게 변해가기 시작하였다.
스탈린그라드를 놓고 일진일퇴의 공방이 벌어지기 시작한 것이었다. 독일이나 소련 모두 처음에는 이 도시에 그다지 의의를 두지는 않았다. 하지만 9월 말이 되도록 소련군의 격렬한 저항으로 도심 시가전이 계속 이어지자 모든 것이 바뀌었다. 특히 자존심 문제라 생각한 히틀러는 참모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코카서스 점령이라는 애초 작전의 본질을 까먹고 모든 것을 이 도시 점령에 올인하기 시작하였다.
/스탈린그라드 도심 폐허를 방패삼아 격렬히 저항하는 소련군. 히틀러가 이 도시에 모든 신경을 쓰면서 스탈린그라드는 피와 철을 빨아들이는 블랙홀로 변하였다.
주코프는 이를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하였다. 그는 스탈린그라드를 미끼삼아 독일군을 도시에 잡아둔 후 외곽을 완전히 포위하여 일거에 소탕하기로 결심하고 이를 천왕성작전이라 명명하였다. 주코프는 100만에 이르는 엄청난 병력과 장비를 은밀히 동원하여 준비를 마친 후 11월 19일 진격을 개시하였다. 사흘 후 거대 포위망을 완성하였는데 이는 독소전쟁의 흐름이 바뀌는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약 8만 정도의 독일군을 포위망 안에 가둔 것으로 예상한 주코프가 그물에 33만의 독일군이 걸린 것을 알고 경악하였을 정도였다. 독일군은 히틀러의 현지 사수 엄명으로 말미암아 탈출하지 못하고 저항하였으나 결국 1943년 2월 2일 항복하면서 6개 월 간의 피비린내 나는 공방전이 막을 내렸다. 독소전쟁의 균형추를 바꾼 스탈린그라드 전투의 결과는 소련에게 자신감을 심어주었다.
스탈린그라드 전투에 직간접적으로 참여한 모든 소련군 지휘관들은 예외 없이 자신의 역할이 컸음을 자랑하였다. 주코프도 자서전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고 주장하였는데 스탈린을 대리한 소련 군부의 최고 수장이 이처럼 거대한 전투에 많은 역할을 한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고 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주코프는 같은 시기에 있었던 화성작전의 참패는 철저히 함구하는 이중적인 모습을 보였다.
/스탈린그라드에서 독일은 30만이 궤멸되었고 9만 명이 포로로 잡혔는데 이중 살아서 독일로 귀환하였던 병사는 불과 6천 명에 지나지 않았다.
승리 속에 감추어진 패배
독일의 모든 신경이 스탈린그라드에 집중 된 틈을 타서 주코프는 지난 겨울에 탈환하는데 실패한 르제프 돌출부를 완전히 제거해 버리고자 직접 작전을 입안하고 지휘하였다. 개요는 스탈린그라드 전투처럼 양측을 돌파하여 독일군을 일거에 포위 섬멸하는 것이었다. 자료마다 상이한 편이지만 주코프는 180만의 대군과 1,800여대의 기갑장비를 동원하였는데, 이는 스탈린그라드에서 있었던 천왕성작전보다 오히려 큰 규모였다.
하지만 공세를 시작한 소련군은 독일군이 깊게 파놓은 장애물에 걸려 허둥대다가 무너져 내렸다. 12월 20일 전투가 끝났을 때 얻은 20여만의 전사상자는 비록 여타 참패와 비교하여 크다고 할 수는 없지만 부인할 수 없는 창피한 결과였다. 하지만 주코프가 자신의 과오를 철저히 함구하였고, 스탈린도 명성을 얻은 주코프를 보호하기 위해 별다른 문책을 하지 않아 르제프의 악몽은 많이 알려지지 않게 되었다.
/주코프가 직접 입안한 화성작전 당시 르제프를 향해 돌격하는 소련군. 하지만 참패를 당하였는데 스탈린그라드 전투의 승리에 묻혀 그동안 치욕의 역사가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다.
이처럼 비밀리에 감추어버린 화성작전을 뒤로 하고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승리를 엮는데 조금이나마 발을 담군 주코프는 1943년 1월 소련군 역사상 9번째로 원수(元帥) 계급을 달게 되었다. 비록 판단 착오로 패배를 당하기도 하였지만 그동안의 공과를 따져 보고 현재 500만의 소련군을 대표하는 그를 그냥 놔두기는 곤란한 상황이었다. 재미있는 것은 스탈린이 원수에 오른 것은 그보다 두 달 늦은 3월이었다.
1943년 이후 주코프는 소련군 전체를 총괄하는 실질적인 수장이다 보니 이후 모든 전투에 관여하였다고 보는 것이 맞다. 그런데 이런 자리는 승리할 경우 자신이 관여하였다고 주장할 수 있지만 패배하였을 때는 일선 지휘관의 책임이라고 꼬리를 잘라버릴 수 있다. 그래서 소련의 대반격이 시작된 이후의 승리에는 예외 없이 주코프가 언급되지만, 같은 시기에 있었던 패배는 대부분 일선 지휘관들의 잘못으로 묘사되어 있다.
예를 들어 1943년 2월의 제3차 하르코프 전투의 참패는 남서전선군을 이끈 바투틴의 잘못이지만, 7월에 있었던 쿠르스크 전투의 승리는 자신이 모스크바에서 바투틴과 로코소프스키를 통솔하여 이끈 것이라고 자화자찬하였다. 하지만 전쟁 말기에 자진하여 야전 지휘관을 겸임하였던 것을 보면 결국 그도 배후에서 전쟁을 지휘하는 것보다 현장에서 승리한 장군이 더 많은 명성을 얻게 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음에 틀림없다.
/전쟁 말기인 1945년 1월 촬영된 주코프와 전선군 사령관들. 최고 지휘관이다 보니 주코프는 공은 자신의 것으로 과는 부하의 것으로 만들고는 했다.
⑧ 70만명의 손실을 감내하며 독일군을 완전히 몰아내다
다시 전선으로 달려가다
1944년 1월 27일 마침내 레닌그라드가 해방되었다. 점령하려는 독일과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반드시 사수해내려는 소련은 무려 872일간 치열하게 교전을 벌였고 마침내 그 승자는 소련이었다. 하지만 300여만의 인명이 죽어가는 엄청난 피해를 입었는데 그 중 상당수는 개전 초에 제대로 구호 받지 못한 민간인들이었다. 저항의 성지였던 레닌그라드 해방은 드디어 독일을 소련 땅에서 몰아내는 시발점이 되었다.
하지만 주코프는 여전히 조심스러웠다. 독일이 개전 석 달 만에 점령한 땅을 이후 소련이 완전히 되찾는데 3년이 걸렸다는 사실은 그만큼 독일이 쉽게 굴복시킬 수 없는 상대라는 의미였다. 이를 잘 아는 주코프는 전세가 급격히 바뀌고 있었지만 결코 서두르지 않았다. 이러한 주코프의 의견에 산전수전 다 겪은 야전 지휘관들도 동의하였고 개전 초기에 조급하게 서두르다 연이어 패착만 두었던 스탈린도 마찬가지였다.
/도심으로 진입한 소련군을 환영하는 레닌그라드 시민들. 872일 만에 이루어진 레닌그라드 해방을 시작으로 독일은 소련 땅에서 물러났다.
소련은 이미 압도적인 전력을 구축한 상태였지만 이것만 믿고 앞으로 달려 나가다가는 불의의 일격을 당할 가능성도 있었고 이미 그런 경험도 수차례 겪었다. 독일이 전세를 다시 반전 시킬 가능성은 전무하였지만 서두르다가 피해를 자초할 필요는 없었다. 묵묵히 기회를 엿보던 주코프는 공세를 벌인다면 전세를 크게 뒤흔들 거대한 작전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였다. 그는 1941년 이후 크게 변동이 없는 전선 중앙부를 주목하였다.
프스코프에서 체르니우치에 이르는 약 1,500여 킬로미터의 전선에 배치 된 80여만의 독일군을 일거에 밀어붙이면 예비대가 부족한 독일은 전선 전체에서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주코프는 이번 기회에 독일군을 소련 땅에서 완전히 몰아내기로 마음먹었다. 이를 위해 무려 300만에 이르는 대군과 독일보다 10~20배가 많은 전차와 야포가 곳곳에 조밀하게 배치되기 시작하였다.
소련은 나폴레옹 전쟁 당시에 맹렬히 싸우다 전사한 바그라티온 장군의 이름을 따서 이를 바그라티온 작전이라 명명하였다. 모스크바가 전선에서 멀다고 생각한 주코프는 해당 작전을 직접 지휘하기로 결심하고 현장으로 달려갔다. 그 만큼 이 작전에 걸었던 그의 기대가 컸다. 하지만 그보다 일선에서 야전군을 직접 지휘함으로써 자신의 명성을 만천하에 떨치려는 욕심도 함께 있었다.
/일거에 독일군을 소련 땅에서 몰아내기 위한 거대한 작전이 준비되면서 어마어마한 소련군이 전선 중앙으로 집중되었다.
독일을 몰아내다
1941년 모스크바 전투 후 군부의 작전에 크게 관여하지 않던 스탈린은 이번에는 직접 작전 개시 일을 지정하였다. 6월 22일이었는데, 이는 3년 전 독일이 소련을 침공한 바로 그날이었다. 소련의 전략은 단순 명료하여 그냥 압도적인 전력을 앞세워서 독일군을 격파하고 앞으로 내달리는 것이었다. 하지만 독일은 이런 소련의 단순함 때문에 실수를 하였다. 정면에 등장한 소련군은 기만이고 주공은 양쪽으로 파고들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었다.
엄청난 소련군이 돌진을 계속하자 그때서야 정면이 소련군의 주공 방향임을 알게 되었지만 너무 늦었고 독일군이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후퇴였다. 히틀러가 현지 사수를 명령했지만 해결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충분한 사전 준비를 마친 덕분에 소련군은 유례없이 공세를 지속할 수 있었는데 이는 독일의 예상을 벗어난 수준이었다. 진격 개시 지점에서 무려 700여 킬로미터를 달려온 후에야 전차의 시동이 꺼졌다.
/바그라티온 작전으로 생포된 독일군 포로들이 모스크바 시민들 앞에서 전시 행진을 벌이려 집결하였다.
처음부터 전선 중앙에 포진한 독일군의 전멸을 목표로 하였을 만큼 강도가 강했기에 점령지 탈환은 자연스럽게 다가왔다. 독일군 전사자 및 포로만도 50만이었는데, 이는 제2차 대전 당시에 독일이 당한 최대의 패전이었다. 독소전쟁 당시 가장 먼저 점령당하였던 벨로루시가 3년 만에 탈환되면서 전선은 전쟁 개시 이전의 수준으로 돌아갔다. 드디어 소련은 자국 땅에 들어와 있던 침략자를 완전히 몰아낸 것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도 18만의 전사자를 비롯하여 무려 70만의 인명 손실을 보았다. 거기에다가 당시에 독일이 보유하였던 것보다 두 배나 많은 3,000여대의 기갑장비를 손실하였다. 압도적인 전력을 앞세워 일방적인 대승을 이끌었다고 자화자찬하기에 너무나 커다란 피해였다. 이를 반대로 생각한다면 아직까지도 소련군의 전략이나 전술에 커다란 문제가 있었다는 뜻이기도 하였다.
이 같이 계속되었던 소련군의 엄청난 피해를 주코프 탓으로만 돌릴 수는 없지만 최고 지휘관이었던 관계로 책임을 면하기는 어렵다. 전후 그가 정치적으로 제명되거나 좌천되면 '동족을 죽인 장군'이라는 비난을 받고는 했는데, 총부리를 소련 국민에게 돌렸다는 뜻이 아니라 전쟁을 치루며 너무 많은 희생을 야기하였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코프는 1944년 7월 침략자를 몰아낸 영웅에 임명되었다.
/예카테린부르크에 있는 주코프의 동상. 그는 소련-러시아 사람들로부터 존경받지만 한편으로 승리를 위해 너무 많은 병사들을 희생시킨 인물이라는 비난도 받고 있다.
⑨ 히틀러의 오판으로 소련에 베를린을 내어주다
베를린으로 향하다
이제 이 전쟁에서 독일이 이길 가능성은 없었고 소련의 의지에 따라 종전이 결정되겠지만 한 가지 변수가 생겼다. 바그라티온 작전을 실시하기 바로 직전인 1944년 6월 6일, 미국과 영국을 주축으로 한 연합군이 노르망디에 상륙하면서 서부전선이 구축되었던 것이다. 1943년에 열린 테헤란 회담에 따라 전쟁의 진행 및 독일 점령 문제에 대해 사전 약속이 되어는 있었지만 자칫 독일 본토 점령을 연합국이 먼저 이룰 수도 있었다.
그러나 승리에 도취되어 공세종말점을 넘어 작전을 펼치다 치욕적인 일격을 당하였던 르제프 전투와 제3차 하르코프 전투의 교훈을 잊지 않았던 주코프는 신중하게 생각하였다. 따라서 바그라티온 작전이 대성공으로 종결되었지만 충분한 전력을 다시 회복할 때까지 후속 공세를 중단하였다. 그런데 이러한 신중함은 공교롭게도 히틀러가 자신이 잘해서 소련군을 막아낸 것이라고 착각하도록 만들었다.
/노르망디 상륙작전이 실시되면서 독일은 양면전쟁에 빠졌고 연합군과 소련은 누가 먼저 베를린을 점령하느냐를 놓고 경쟁하였다.
그런데 히틀러의 오판은 이 정도 수준에서 머무르지 않고 동부전선에서 전력을 차출하여 서부전선의 연합군과 건곤일척의 대결을 벌이도록 지시하였다. 광란에 가까운 총통의 결정에 군부는 경악하였지만 항상 그래왔듯이 그의 결정을 저지할 방법이 없었다. 마침내 12월 16일, 독일은 서부전선에서 이른바 발지 전투를 시작하였고 그것은 제2차 대전 당시에 독일이 실시한 마지막 공세로 기록되었다.
그런데 독일 내부에서 먼저 반대하였던 공세다보니 예상 외로 기습의 효과는 대단하여 초전에 연합군은 상당한 곤혹을 치렀다. 당황한 연합군은 소련군에게 동부전선에서 협공을 개시해줄 것을 요청했고 그동안 묵묵히 전력을 재구축하였던 소련군이 이에 응하여 1945년 1월 12일 공세를 재개했다. 2월 2일 작전이 끝났을 때 소련군은 폴란드를 횡단하여 동프로이센을 비롯한 독일 동부 일대를 점령하였다.
이때 가장 앞장서서 독일군 진영을 신속히 파고들어간 소련군 부대가 주코프가 직접 지휘한 제1벨로루시전선군이었다. 이제 베를린까지는 불과 70킬로미터였고 여기까지 달려온 모든 이들은 당연히 제일 먼저 적의 심장에 깃발을 꽂고 싶어 했다. 당시 거리상으로 제1벨로루시 전선군이 가장 베를린에서 가까웠으므로 주코프는 당연히 자신이 영광의 주인공이 될 것이라 생각하였다.
/소련군은 순식간에 폴란드와 동프로이센을 횡단하여 독일 본토 앞까지 다가왔다. 독일이 이들을 막을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마지막에 부린 과욕
소련군 총사령관 대리라는 군부 최고 위치에 있었으면서도 굳이 주코프가 야전 지휘관을 겸한 이유는 바로 베를린 점령의 선봉장이라는 영광을 차지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스탈린이 오랜만에 군부의 작전에 관여하며 상당히 의미 있는 명령을 하달하였다. “누구나 베를린으로 진격할 수 있다. 먼저 차지하는 자가 임자다.” 경쟁을 유도하여 베를린을 점령하기 위해 이곳을 욕심내는 모든 이에게 길을 열어 준 것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여건상 모든 소련군이 베를린으로 향할 수는 없었다. 당시 주코프의 북쪽에는 로코소프스키의 제2벨로루시전선군, 남쪽에는 코네프의 제1우크라이나전선군이 있었는데 이들도 거의 베를린에 근접한 상황이었다. 이제 스탈린의 명령이 하달된 이상 이들에게 주코프는 상관이 아니라 경쟁자였다. 4월 16일, 마침내 독일의 마지막 숨통을 끓으려 250만의 소련군이 경쟁적으로 진격을 개시하였다.
/1000만의 소련군을 통솔하는 총사령관 대리라는 막강한 위치에 있었으면서도 베를린 점령을 직접 지휘하고 싶어 주코프는 제1벨로루시전선군 사령관을 겸직하였다.
북쪽으로 돌파한 로코소프스키의 부대는 순식간에 오데르 강을 건너 베를린 북동쪽으로 진출하였다. 남쪽에 있던 코네프의 부대는 엘베 강에서 미군과 조우한 후 베를린을 향해 북상하였다. 그런데 정작 베를린에서 가장 가까이 있던 주코프의 부대는 젤로 고지에 포진하고 있던 독일군의 저항에 막혀 제자리에 머물고 있었다. 돌파가 지지부진하자 주코프는 야간에 탐조등을 비춰가며 전투를 벌이는 무리수를 두다가 엄청난 피해를 당하였다.
이때 코네프가 베를린을 선점할 조짐이 보이자 주코프는 부하들을 마구 채근하여 4월 21일 젤로 고지를 돌파한 후 5월 2일 마침내 간발의 차이로 앞서 베를린을 점령하는데 성공하였다. 하지만 독일군의 3배 이상 되는 출혈을 감수하여야 했다. 소련군 내부의 경쟁으로 베를린을 빨리 점령할 수 있었지만 문제는 압도적으로 우세하였던 전쟁 막판임에도 불필요한 피해가 많이 발생하였던 점은 두고두고 비판의 대상이 되고 있다.
사실 베를린 전투는 이미 판가름이 난 상태였다. 소련이 250만의 대군에 6,000대의 기갑장비 그리고 7,500기의 전력을 동원한데 비하여 독일이 보유한 전력은 노약자로 구성된 국민돌격대까지 포함한 70만에 불과했고 보유한 장비나 중화기는 소모품이 부족하여 작동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하지만 이런 상태에서 순수 전투 병력의 사상자수가 양측 모두 약 30만 정도로 비슷하였던 점은 생각해 볼 점이 많다.
/젤로 고지에 설치된 전몰 소련군 추모비. 주코프는 베를린 선점의 영광을 차지하기 위해 엄청난 희생을 마다하지 않았다.
⑩ 독소 전쟁을 승리로 이끈 뒤 스탈린에게 토사구팽 당하다
영광 그리고 좌천
주코프는 1945년 5월 8일 소련을 대표하여 칼스호르스트 공병학교에서 개최된 항복 조인식을 주관하고 독일 주둔 소련군 사령관 겸 군정장관에 임명되면서 동독 지역을 다스리는 총독이 되었다. 6월 24일 모스크바 붉은 광장에서 열린 대대적인 승전기념식에서 그는 로코소프스키 원수와 함께 열병행사를 총 지휘하였다. 한마디로 주코프는 군인으로서 누릴 수 있는 모든 영광을 거머쥐었다.
하지만 전쟁의 종결은 장군이 역사의 주인공에서 물러나야만 한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그동안 전쟁에서 이기기 위해 군부에 힘을 실어주었지만 스탈린이 절대로 관대한 사람은 아니었다. 물론 과거와 같은 대숙청 시대로 회귀하기는 곤란하였지만 이제 그는 승전을 발판삼아 철권 독재자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가고자 하였다. 너무 커진 주코프도 당연히 토사구팽의 대상이 되었다.
/1945년 모스크바 전승 기념식 당시 제병부대를 총괄 지휘하는 주코프.
그런데 과시욕이 강했던 주코프는 아직 이런 변화를 눈치 채지 못하였다. 그는 수많은 모임에서 툭하면 스탈린은 그다지 한 것이 없고 소련의 승리가 자신의 업적이라며 농담 반, 진담 반처럼 자랑하고는 하였는데, 이런 소식이 스탈린의 귀에 들어갔다. NKVD(비밀경찰)가 즉각 조사에 착수하였고, 수장인 베리야는 지난 시절 피의 숙청을 주도한 잔인한 인물이었는데 평소 주코프를 싫어하였다.
그런데 어이없게도 주코프를 조사하니 드러난 가장 큰 흠결 사항이 베를린에서 귀금속을 약탈했던 것 정도였는데, 이는 크게 두 가지를 의미한다. 첫째 주코프의 자랑이 그다지 정치적 의도가 없는 허풍 정도의 수준이었고, 또 하나는 상당히 물욕이 강하였다는 점이다. 어떻게든 주코프를 벌주고 싶었던 베리야는 주변 인물을 고문하는 방법 등을 이용하여 억지로 반역 혐의를 만들어 1946년 4월 10일 모스크바로 소환하였다.
그런데 스탈린은 주코프가 면전에서 사죄를 고하며 몸을 낮추자 한직인 오데사군관구 사령관으로 좌천시키는 것으로 사건을 마무리 지었다. 전후 베리야의 음모로 많은 장군들이 무고되었는데 안하무인이었던 쿨리크만 사형당하고 나머지는 징역, 강등, 좌천처럼 대숙청 당시와 비교한다면 극히 경미한 처벌을 받았다. 하지만 이 사건은 주코프가 정치적으로 앞으로 어떻게 처신하여야 하는지 뼈저리게 깨닫게 해준 계기가 되었다.
/의외로 스탈린과 주코프가 함께 찍은 사진이 그다지 많지는 않다. 주코프는 스탈린으로부터 많은 권한을 허락받았지만 끝까지 몸을 낮출 줄 알았던 처세의 달인이었다.
수시로 바뀐 평가
인민의 영웅에서 순식간 찬밥 신세가 되었던 주코프는 스탈린 사후인 1953년에 국방차관으로 복권되었다. 좌천 시기 동안 권력과 정치에 대해 곰곰이 되새겼던 주코프는 흐루시초프가 베리야를 숙청할 때 적극 가담하였는데, 일설에 따르면 그를 직접 체포하여 총살했다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였다.
이후 1955년 정치국원과 국방장관이 되면서 그는 권력의 최고 핵심으로 부상하였다. 이후 주코프는 핵무기의 등장이 소련의 전략과 전술에 큰 변화를 미칠 것이라 보고 이에 따라 소련 지상군을 핵전쟁 시대에 걸맞게 대대적으로 개편하기 시작했다. 그는 핵전쟁이 발발할 경우 지상군의 생존은 기동력에 달렸다고 보고 군단급 편제를 해체하고 야전군을 완전 기계화, 차량화 된 5~6개 사단으로 구성하였다. 이러한 공로로 1956년 12월에 네 번째 영웅 칭호를 받았는데 이는 소련 역사에서 브레즈네프 외 유일한 사례다.
하지만 전략 핵무기를 전쟁억지력으로 활용하자는 흐루시초프에 대해 지상군을 중시하는 주코프는 대립하였고 결국 1957년 해임되며 축출되었다. 당과 군의 기득권 다툼에서 패해 야인이 되었던 것인데, 1964년 흐루시초프가 실각된 후 복권되었지만 더 이상 권력이 주어지지는 않았고 1974년 사망했다. 주코프는 그를 영웅으로 만들고 떠받들었던 소련 내에서도 정치적 부침이 있을 때마다 평가가 달랐다.
/1967년 말년의 주코프. 전후 소련 국방 분야에서 많은 활약을 펼쳤지만 권력의 부침에 따라 많은 우여곡절을 겪었다.
좌천되었을 때는 많은 실책을 범한 죄인으로 매도되기도 하였는데 과시욕이 크고 포용력이 넓지 않아 정적이 많았던 점이 가장 큰 이유였다. 상승장군으로 유명하지만 사실 주코프도 커다란 패배를 당하였다. 승리라고 주장할 수 있는 싸움조차도 더 많은 피해를 입은 경우가 비일비재했으며 당연히 이길 전투만 승리하였다는 혹평도 있다. 하지만 그는 틀림없이 가장 커다란 전쟁을 가장 높은 위치에서 지휘하여 최종적인 승리를 거둔 인물이었다.
인격적으로도 존경을 받고 다양한 방면에서 귀감이 된다면 더 할 나위 없지만 장군에게, 특히 전시에는 승리보다 앞서는 다른 평가 기준이 없다. 1975년 크리미아 천체연구소가 발견한 2132호 소행성을 그의 이름을 따서 주코프라고 명명하였다는 것도 그가 승장이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처럼 권력과 상관없는 대다수의 소련 국민들은 붉은 별로 기억하고 있을 만큼 주코프는 그래도 과보다는 공이 많았던 인물이었다.
/전쟁 당시 4번이나 격전이 벌어졌던 우크라이나 하르코프에 있는 주코프의 흉상. 이를 포함하여 그를 기리는 많은 조형물이 구 소련 곳곳에 설치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