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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도현의 전쟁 이야기2/ 2차 대전 독·소 데미얀스크 전투 - 디에프 상륙 - 르카르노 조약 - 만슈타인 - 비하인드 워 - 오토카리우스

상림은내고향 2021. 8. 15. 13:10

남도현의 전쟁 이야기2/ 조선일보

2016.07.15. 2차 대전 독·소 데미얀스크 전투

1942년 2월 8일, 남북으로 나뉘어 동시에 진격한 소련군 선도 부대들이 마침내 잘루츠예에서 조우했고, 곧바로 후속 부대들이 속속 자리를 잡으며 전선을 단단히 연결시켰다. 그렇게 모스크바와 레닌그라드를 연결하는 중간에 위치한 데미얀스크(Demyansk) 일대에 형성된 지름 20㎞의 포위망 안에 약 10만명의 독일 제 2군단이 고스란히 갇혔다. 그런데 이는 소련, 독일 모두 처음 겪는 생소한 순간이었다.

 

/데미얀스크 비행장에 착륙한Ju-52 수송기에서 보급품을 하역하는 모습. 공군의 지원 덕분에 고립된 독일 제2군단은 계속 저항할 수 있었고 결국 승리했다. /독일 연방문서보관소 제공  

포위당한 독일군, 보급품
공수작전으로 소련군에 승리

1941년 6월 22일, 독일의 침공으로 독·소전쟁이 발발한 이래 포위전은 수없이 있어왔던 레퍼토리였다. 하지만 지금까지 예외 없이 포위한 주체는 독일군이었고 반대로 그물 안에 갇혔던 것은 소련군이었다. 그리고 그 결과는 독일에는 영광을, 소련에는 참혹함을 안겨줬다. 민스크, 스몰렌스크, 키예프 등에서 수없이 벌어진 포위전에서 무려 300여만명의 소련군이 고스란히 섬멸됐던 것이다.

 

 하지만 이번에 데미얀스크에 형성된 거대한 포켓은 최초로 소련이 성공한 포위였고, 반대로 독일은 처음 겪는 위기였다. 그런데 그동안 있었던 전과 때문에 독일은 포위된 적을 섬멸하는 효과적인 방법에 대한 노하우가 있었던 반면 수없이 포위당하며 섬멸되기만 했던 소련은 자신들이 포위망을 완성한 이후에 어떻게 후속 공격을 해야 하는지 제대로 몰랐다.

독일의 사상 초유의 공수작전

 

 이러한 낯선 상황에서 시작한 전투는 이후 두고두고 교훈으로 삼을 만한 엄청난 선례를 남겼다. 미시적으로는 압도적인 적에게 포위당했어도 살아남는 혁신적인 방법을 발견하는 훌륭한 기회가 됐지만, 거시적으로는 이후 엄청난 참화를 불러온 잘못된 선택을 이끄는 동기가 됐기 때문이다. 그래서 비록 데미얀스크 전투는 독·소전쟁에서 벌어진 전투 중에서 그다지 규모가크지 않지만 많은 의의를 가지고 있다.

 

/아돌프 히틀러. /위키피디아

 

앞에서 소련군이 독일군을 포위했다고 설명했지만 당시 상황을 살펴보면 고립을 스스로 자초한 측면이 크다. 당시 제2군단은 단독으로 포위망을 뚫고 독일군 본진이 위치한 로바트 강 서쪽으로 탈출할 수 있는 역량이 충분했으므로, 결코 소련군이 뛰어나서 포위망을 완성한 것은 아니었다. 사실 후퇴가 맞았지만 히틀러(Hitler)가 현지 사수를 엄명하면서 어쩔 수 없이 그들은 데미얀스크에 남게 됐던 것이다.

 

 히틀러가 이런 결정을 한 이유는 모스크바에 대한 집념 때문이었다. 독·소전쟁이 발발한 이래 파죽지세로 공세를 펼쳤던 독일은 모스크바 부근까지 다가갔지만 일찍 다가온 겨울 혹한으로 고생하다가, 1941년 12월 5일 시작된 소련군의 대반격을 받고 이듬해 1월 말까지 약 150여㎞를 밀려나야 했다. 이때 일부 부대들은 소련의 진격을 저지하기도 했는데 데미얀스크를 사수한 제2군단도 그중 하나였다.

 

하지만 좌우 부대들이 밀려나면서 위기에 처했다. 일반적으로 이런 경우라면 함께 후퇴해야 했지만 히틀러는 나중에 모스크바에서 가까운 데미얀스크를 발판으로 공세를 재개하고자 현지 사수를 명했고 결국 포위당했다.

소련군이 봉쇄만 하고 있으면 제2군단은 배고파서라도 항복할 수밖에 없는 처지였지만 히틀러는 살릴 수 있다고 자신했다. 당시 독일에는 세계최강을 자부하는 공군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히틀러는 이미 공군 수뇌부로부터 항공 수송을 통해 제2군단의 생존에 필요한 1일 270t의 보급이 가능하다고 보고받은 상태였다. 이에 사상 초유의 공수 작전이 개시됐다. 그렇게 73일이 흐른 4월 22일, 독일군 본진과 고립된 제 2군단을 연결하는 통로가 뚫려 포위망이 무너질 때까지 1만4500여회에 이르는 비행을 통해 6만5000여t의 각종 물자와 3만여명의 증원 병력이 보급됐다.

 

이처럼 놀라운 보급 작전을 바탕으로 제2군단이 강력하게 저항하자 소련은 4배나 많은 40만의 병력을 투입하고도 독일군 섬멸에 실패했다. 결국 데미얀스크 전투는 5월 20일, 소련군이 방어로 전환하면서 독일의 승리로 종결됐다. 포위된 10만의 병력을 공수 보급을 통해 살려내고 오히려 불리한 전황을 반전으로 이끈 독일은 전쟁사에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반면 그물 안에 먹이를 잡아 놓고도 놓친 것도 모자라 크게 다치기까지 했던 소련에 데미얀스크 전투는 그야말로 대망신이었다. 그러나 이때 얻은 독일의 자신감과 소련의 굴욕은 이후 독·소 전쟁사를 완전히 바꾸는 하나의 계기가 됐다.

 

/10만명의 독일 제2군단이 히틀러의 명을 받아 데미얀스크를 사수하다가 적진에 고립돼 포위됐다. 이후 이곳을 두고 격전이 벌어졌는데 그 결과는 독·소전쟁의 향방을 가르는 스탈린그라드 전투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상황 다른 스탈린그라드 전투에
데미얀스크와 같은 전략 썼다가 참패
 

히틀러, 과거 경험 안주하다 대실패

 

 그로부터 6개월이 지난 11월 22일, 소련 남부의 스탈린그라드 일대에서 비슷한 상황이 재현됐다. 독일 제6군이 도심 일대에 몰려있을 때 소련군이 좌우에서 진격해 포위망을 완성한 것이었다. 데미얀스크 전투의 승리를 기억하고 있던 히틀러는 또다시 공수 작전을 펼쳐 제6군을 지원하는 동안 외부에서 구원군이 뚫고 들어가 포위망을 분쇄할 생각으로 현지 사수를 엄명했다.

 

하지만 이번에 고립된 제6군은 무려 33만명이어서 데미얀스크의 3배가 넘었던 반면 공군이 수송할 수 있는 능력은 그때와 차이가 없었다. 데미얀스크 전투가 공군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능력이었음을 히틀러는 간과한 것이었다. 그는 달콤한 기억 때문에 공수 작전을 만병통치약으로 생각했으나 변동성이 크고 다양한 전쟁터에서 과거의 성공 사례가 다음에도 무조건 같은 결과를 낼 수 없다는 점을 외면했다.

 

반면 소련의 대응은 달랐다. 독일군 본진을 최대한 멀리 밀어붙여 통로 재개통을 막았고 동시에 충분한 포병으로 대대적인 타격을 가한 후 기갑부대로 압박해 포위망 제거에 들어갔다. 지난 전투에서 치욕을 겪었던 소련은 포위망 섬멸 방법을 다양하게 연구했고 마침내 결실을 본 것이다. 결국 소련의 대승으로 끝난 스탈린그라드(Stalingrad) 전투는 독·소전쟁의 방향을 바꾼 거대한 전환점이 됐다.

 

경영도 마찬가지다. 노키아나 야후처럼 한때 최고로 군림했지만 어느 날 갑자기라는 표현이 걸 맞을 정도로 몰락한 기업의 사례를 찾는 것은 그다지 어렵지 않다. 실패의 이유는 많지만 과거의 성공에서 얻은 경험을 과신하는 행태도 그중 하나다. 전쟁도, 경영도 과거의 성공은 단지 참고 자료일 뿐이다. 판단을 내려야 하는 이라면 항상 기억해야 할 명제라 할 수 있다.

 

■디에프 상륙

2015-08-24

(1)독일군의 본토점령을 두려워한 영국군이 고안한 기습작전

영국, 두려움에 떨다

 

해가 바뀌어 1942년이 되었음에도 영국의 현실은 여전히 암담하였다. 비록 지난해 6월 시작된 독소전쟁으로 인하여 독일의 신경이 동부전선으로 급격히 돌려지면서 영국해협전투 당시 같은 불벼락은 줄어들었고 더불어 독일군의 영국 본토 상륙가능성은 제거되었다. 하지만 전 세계 곳곳에서 벌어진 여러 전장에서 영국의 참담함은 갈수록 더해가고 있었고 회생될 기미마저 보이지 않았다.

 

그냥 브리튼 섬에 웅거하고 있는 것이 최선의 방어책이었지만 문제는 이러한 방어 상의 이점은 반대로 커다란 장애물이기도 하였다. 영국은 생존에 필요한 대부분의 물자를 해상을 통하여 외부에서 공급받고 있었기에 만일 이 생명선이 차단된다면 더 이상 항전을 할 수 없었다. 비록 막강한 영국 해군이 생명선을 수호하는데 적극 나서고 있었지만 늑대 같은 독일의 U-보트들에게 곤혹을 치루기 일쑤였다.

 

/U-보트의 공격을 받은 영국의 상선. 독일 해군은 열세였지만 이런 비정규전 방식으로 대부분의 물자를 외부에서 조달하던 영국을 곤혹스럽게 만들었다.

 

영국 본토 밖의 상황을 살펴보면 에게 해의 요충지인 크레타에서 쫓겨난 뒤로 독일과 전선을 마주하고 있는 유일한 장소는 북아프리카였다. 하지만 이곳에 배치된 영국원정군은 독일의 주력도 아닌 별동대 수준의 독일아프리카군단(DAK)에게 일방적으로 몰려다니기 바빴다. 아시아에서의 상황도 마찬가지여서 Z기동부대가 일본군에게 무참히 격파되며 말레이반도를 피탈 당하였고 버마와 인도도 위협을 받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굳이 다행이라면 가장 현실적인 위협이라 할 수 있는 독일군 대부분이 러시아 평원에서 북극곰과 건곤일척의 혈투 중이었고, 일본의 진주만 기습으로 그동안 우호적이기는 하였지만 중립을 유지하던 미국이 영국 편으로 참전하게 되었다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당시 소련은 독일의 일방적인 공격에 패배가 예견 될 만큼의 위기 상황이었고 미국은 전쟁을 선언하였지만 정작 아무런 준비도 되어있지 않은 상태였다.

 

그나마 우위인 해군으로 하여금 본토를 바다에서부터 엄중히 방어해내는 것을 제외하고 이런 참담한 상황에서 영국이 할일이라고는 딱히 없었다. 가끔가다 장거리 폭격기들을 독일 영공으로 날려 보내 폭탄을 떨어뜨리고 오기는 하였지만, 이것은 독일을 타격하여 전략적, 전술적으로 효과를 얻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우리도 독일의 중심부를 공격한다' 정도의 효과를 얻기 위한 최소한의 행위였을 뿐이었다.

 

/전함 프린스 오브 웨일즈와 순양전함 리펄즈로 구성된 Z기동부대가 일본의 공격을 피하려 회피 기동을 벌이고 있다. 하지만 영국은 참담한 패배를 맛보고 말레이반도에서 물러나야 했다.

 

필요한 반전의 기회

정작 군사적 효과도 하나도 없고 잘못하면 자국의 귀중한 조종사들과 폭격기들을 소모시킬 수 있는 이러한 무모한 폭격작전을 벌인 가장 큰 이유는 그 만큼 영국 국민들의 사기가 한없이 추락하여 있었기 때문이었다. 비록 허접한 이탈리아군을 상대로 북아프리카에서 반짝 승리를 거두기도 하였지만, 1939년 이후 추축국들의 공세에 영국은 독일과 마주한 여러 전장에서 일방적으로 밀려다니고 있었다. 이러한 연속된 패배는 자국민들에게 엄청난 절망감을 안겨주었다. 특히 1940년~1941년 사이에 있었던 영국해협전투는 윌리엄 정복왕(William I of England) 이래 처음으로 섬나라 영국이 대륙의 공격자로부터 점령당할 것이라는 예상을 들게 만들 만큼 호되었다. 그만큼 영국인들이 느낀 위기의식과 패배감은 컸다. 때문에 이런 어려움을 반전시킬 계기가 영국 위정자들에게는 필요하였다.

 

/북아프리카 전선에서 독일군에게 격파된 영국군 전차들. 도처에서 수세에 몰린 영국은 반전의 기회를 잡아야 했다.

 

이때 원래는 같이하기 힘든 사이였지만 나치라는 공통의 적 때문에 자연스럽게 한편이 되어버린 소련이 영국에게 제2전선을 만들어 달라고 애원하였다. 독일군의 대부분을 거의 혼자 상대하고 있던 소련은 체제멸망까지 예견될 정도로 1941년을 호되게 보낸 상황이었다. 겨울이 되면서 전선이 정체되었지만 해가 바뀌었어도 여전히 전망이 좋아 보이지 않았던 소련은 어떻게든 독일의 전력을 분산시키고자 하였다.

 

불굴의 신념으로 영국의 전시 상황을 이끌던 처칠은 소련의 계속된 제2전선 구축 요구에도 부응하면서, 사기가 떨어질대로 떨어진 국민들에게 용기를 불어넣어주기 위한 특단의 대책을 고심하였다. 그러던 1942년 3월, 영국군 연합작전국장으로 새로 부임한 마운트배튼(Louis Mountbatten, 1st Earl Mountbatten of Burma)경이 처칠을 찾아와 기습상륙작전을 제안하였다.

 

마운트배튼의 주장은 독일의 점령지에 소규모의 영국군을 기습 상륙시켜 혼란을 야기한 후 신속히 귀환시키자는 것이었다. 그는 언젠가 연합군이 독일군을 격멸하고 유럽 대륙을 해방시키기 위해서 결국 상륙작전이 필요한데, 여기에 관한 노하우를 미리 축적하기 위해서라도 이러한 도전은 시도해 봐야한다고 주장하였다. 비록 소규모였지만 생각지도 못하고 있던 공세 작전에 대해 처칠은 상당히 흥미를 느꼈다.

 

/빅토리아 여왕의 증손으로 마지막 인도 총독을 역임한 마운트배튼이 적진에 상륙작전을 펼치자고 제안하였다.

 

(2) 1차대전 때 실패 경험을 잊고 다시 방심한 처칠

적진에 상륙을 결심하다

 

어쨌든 장기적으로 볼 때 영국은 유럽 대륙에 상륙하여야 했다. 그러려면 선봉부대가 독일군을 밀어내고 후속 보급과 지원이 가능한 교두보를 신속히 확보하는 것이 가장 큰 선결과제였다. 따라서 장차 있을 수도 있는 대규모 상륙 작전을 대비해서라도 육군, 해군 및 공군이 유기적으로 작전을 펼칠 수 있는 지휘체계, 전투체계, 보급체계 등에 대한 소규모의 실험적 작전이 요구되었다.

 

그렇다면 궁극적으로 추후 본격 상륙이 예견되는 지역과 관련이 있는 곳을 우선 목표로 삼아야했다. 당연히 영국 본토와 가까운 도버해협 연안이 작전지역으로 떠오를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비록 의지는 있었지만 막상 이런 구상을 시험하기에 당시 상황은 너무 좋지 않았다. 1942년 초는 나치가 전 유럽을 석권하던 극성기였고, 그처럼 막강한 독일이 점령하고 있던 프랑스 북부해안은 그야말로 철옹성이었다.

 

/독일은 대서양 연안을 요새화하여 연합군의 상륙에 대비하였다.

 

따라서 적진 한가운데나 다름없는 이런 점령지역에 아무리 소규모라 하더라도 단지 시험적 목적으로 부대를 상륙시키는 제안에 대해 당연히 위험하다는 반대의견도 많이 나왔다. 하지만 상륙작전에 대한 의지가 컸던 마운트배튼은 오히려 최초에 구상하였던 특수부대인 소수의 코만도보다 규모가 훨씬 큰 사단 급 부대의 기습상륙작전을 검토하였고 이를 처칠에게 보고하였다.

 

마운트배튼은 경무장한 소규모 부대대신 기갑장비를 갖춘 사단급 부대의 상륙작전을 직접 실현하여 많은 효과를 얻고자 했다. 우선 장차전에 관한 경험을 쌓고, 해협 일대의 독일군 방어태세에 대한 구체적 정보 획득을 얻음과 동시에 적진 한가운데인 유럽대륙에서 독일군을 타격하는 모습을 대내에 보여줘 영국민에게는 용기를 주고, 소련에게는 생색을 낼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였던 것이다. 이에 대해 처칠도 전적으로 동의하였다.

 

1942년 4월 4일, 마운트배튼은 참모부에게 세부 작전안을 짜서 보고할 것을 지시하였고 1942년 5월 영불 해협 연안의 프랑스 항구도시 디에프(Dieppe)가 목표지점으로 결정되었다. 디에프는 영국 본토와 직선거리로 80여 km 정도여서 전투기가 상륙군을 엄호할 수 있을 것으로 평가되었다. 또한 원래 작은 항구가 있는 휴양지여서 상륙 환경이 좋았고 추후 연계가 편리할 것으로 평가되었다.

 

/영국에서 가까운 프랑스의 휴양지 디에프가 작전 예정지로 결정되었다.

 

과거에서 교훈을 얻지 못하다

참모부는 코만도가 사전에 침투하여 외곽인 바랭빌(Varengeville)과 베르네발(Berneval)에 설치된 해안 포대를 파괴하면 주력 침공부대가 디에프 해안에 접한 푸르빌(Pourville)과 푸이(Puys)로 나뉘어 상륙하여 정박한 독일군 함정을 파괴함과 동시에 현지에 주둔 중인 독일군 거점을 초토화시킨 후 해가 뜨고 조수가 밀려오기 전에 유유히 퇴각한다는 세부계획을 수립하여 보고하였다.

 

하지만 작전안이 너무 낙관적이다 보니 오히려 군부 내에서도 반대가 격렬하였고 미국과 구성한 연합군 총참모부에서도 너무 황당하다고 승인을 거부하였다. 그러나 계획을 주도한 마운트배튼과 이를 후원한 처칠은 작전안대로 강행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런데 자신만만한 마운트배튼은 상륙작전에 대해 모르고 의욕도 충만하여 그러려니 할만 했지만 처칠은 예전의 경험에서 전혀 교훈을 얻지 못하였다.

 

/제1차 대전 당시인 1916년 갈리폴리에서 철군하는 영연방군. 당시 작전을 계획한 처칠은 상륙작전이 얼마나 많은 준비가 필요한지 뼈저리게 깨달았지만 다시 방심하였다.

 

처칠은 영국의 해군장관이었던 제1차 대전 당시에 오스만트루크 제국의 전략요충지인 갈리폴리(Gallipoli)를 점령하기 위하여 제대로 준비도 안 된 상태로 상륙작전을 감행시켰던 적이 있었다. 그러나 엄청난 사상자와 더불어 역사에 길이 남을 참패를 당하였고 본인도 책임을 지고 사임하였던 뼈아픈 경험이 있었는데, 어찌 된 일인지 처칠은 그때를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였던 것이다.

 

영국은 상륙부대를 적진까지 움직일 능력이 있었지만 막상 해안가에 설치된 독일의 견고한 방어막을 너무 우습게 생각하였다. 문제는 상륙 이후의 전투는 육지에서 벌어지지만 영국은 사전 포격이나 폭격으로 독일의 방어망을 무력화 시킬 준비가 미흡하였다. 당시 독일의 주력 대부분은 동부전선에 투입되어 있었지만 그렇다고 프랑스 주둔 중인 부대가 결코 만만한 상대는 아니었다.

 

/노획한 프랑스제 전차로 무장한 1941년 프랑스 주둔 독일군의 모습. 동부전선에 비해 2선급 부대들이었지만 그렇다고 전투력이 만만하였던 것은 아니었다.

 

(3) 독일군 함정에 빠져 거의 전원이 사살 혹은 체포 당한 캐나다군

자신감을 넘어선 자만감

 

당시 디에프를 담당한 독일군은 2,500여 명의 병력을 갖춘 제302사단 예하 제571연대로 훈련 상태 및 무장이 상당히 충실한 편이었다. 상륙 예상지점을 감제할 수 있는 목지점마다 요새화된 진지를 구축하여 놓아서 소수임에도 상륙군 보다 훨씬 유리한 조건에서 방어전을 벌일 수 있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독일군의 강점은 계속된 전쟁 덕분에 실전 전투경험이 풍부하다는 점이었다.

 

이에 비하면 상륙작전의 주공으로 선정 된 캐나다 제2사단은 실전 경험이 전무하였다. 이 부대는 1939년 영국이 독일에 선전포고하자 캐나다가 자원병을 모집하여 긴급히 대서양을 건너 이동 전개시킨 부대였다. 하지만 1940년 6월 영국에 도착하고 난 후 정작 전투에 투입되지 못하였다. 그 즈음 프랑스에 파견하였던 영국 원정군은 변변히 싸워보지도 못하고 독일군에게 쫓겨나 브리튼 섬으로 도망친 상황이었다.

 

/영국이 독일에 선전포고를 하자 영연방 국가들이 지원에 나섰다. 영국으로 향하는 선박에 오르는 캐나다 제1사단 22연대 병사들.

 

처음에는 독일의 상륙에 대비하여 해안 방어 임무를 수행하였지만 런던을 태워 버릴 것 같았던 대대적인 독일의 공습이 11월부터 뜸해지면서 이후 2년간 하염없이 시간만 흘려보냈다. 이처럼 기간이 길어지고 일견 무료해지자 자원병으로 구성된 캐나다 병사들은 전쟁의 무서움을 망각하게 되었고 언제쯤이나 실전에 투입되어 폼 나게 총을 쏘아 볼 것인지만 학수고대하던 상황이었다.

 

디에프 일대의 요새화된 적진지를 정면으로 공격하려는 무모한 작전에 이러한 5,000여 명의 캐나다군을 주축으로 하여 1,000여 명의 영국 코만도와 약간의 미군, 프랑스군의 투입이 결정되었다. 연합군 총참모부나 영국군 일각에서 계획이 너무 어설픈 계획이라고 격렬히 반대하였지만 마운트배튼을 비롯한 작전 입안자들은 독일군보다 공격에 나선 병력이 많기 때문에 기습만 된다면 성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역사에서 항상 그래왔듯이 자만감으로까지 변질될 정도로 자신감이 너무 충만해서 제대로 앞뒤 가리지 않고 무모하게 뛰어들었던 자들의 결과가 좋았던 적은 없었다. 더구나 제2차 대전이 발발하고 그때까지 영국은 독일을 이겨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됭케르크에서, 발칸에서, 북아프리카에서 도망 다니기만 하였음에도 이때만큼은 모든 우려에도 불구하고 반드시 성공할 것이라 맹신하였다.

 

/처칠은 지난 전쟁에서 호된 경험을 당했음에도 마운트배튼을 신뢰한 나머지 문제점 파악을 게을리 하였다.

 

호랑이 굴에 뛰어든 하룻강아지

기상사정 등의 이유로 몇 차례의 연기 끝에 1942년 8월 19일 새벽, 230여척의 각종 함정에 6,000여 상륙 병력을 분산하여 실은 영국함대가 야음을 틈타 디에프를 향해 출발하였다. 1940년 6월 독일에게 쫓겨 됭케르크에서 피눈물을 뿌리며 도망쳐 나온 지 2년 만에 드디어 연합군은 주빌리작전(Opration Jubilee)으로 명명한 디에프 상륙작전을 통하여 다시 대륙으로 진군을 개시한 것이다.

 

함대는 동트기 전에 해변 가까이 접근하는데 성공하였고 다행히도 아직까지 독일이 눈치를 채고 있다는 정보는 포착되지 않았다. 제일 먼저 디에프 항 외곽에 위치한 해안포대를 무력화시키는 임무를 부여받은 코만도부대가 04시 50분경, 바렌빌 절벽에 위치한 6개의 해안 포대를 차례대로 파괴한 후, 계획에 의거 오전 07시 30분경 퇴각하는데 성공하였다. 멋진 출발이었지만 그것은 디에프에서 연합군이 올린 유일한 전과였다.

 

/본대 상륙 전에 침투하여 포대를 파괴하기로 예정된 코만도 대원들. 이들이 디에프 상륙작전 당시에 유일하게 전과를 올렸다.

 

거의 같은 시각 디에프 서쪽으로 상륙한 새스캐치완연대는 약 5km 내륙에 떨어진 푸르빌에 주둔중인 독일군을 기습하기 위해 진격을 개시하였다. 그러나 그들이 상륙한 지점은 처음 계획하였던 장소에서 상당히 떨어진 곳이어서 시(Scie) 강을 도강하여야 목적지에 다가갈 수 있었다. 하지만 도강 장비를 보유하지 않은 연대는 부득불 강을 건너기 위해 교량을 통과하여야 했다.

 

하지만 그들이 다리에 들어섰을 때 이미 독일군은 교량 양편을 은밀히 포위한 상태였다. 초청하지 않은 손님들을 맞을 준비를 완료한 독일군은 캐나다군이 모습을 드러내자 지체 없이 사격을 가하기 시작하였다. 어디서 총탄이 날아오는지 미처 파악하기도 전에 다리 주변은 수많은 캐나다군의 무덤이 되어 버렸다. 간신히 살아남은 잔여 병력이 할 수 있는 행위는 처음 상륙한 해안가로 돌아가 상륙정을 타고 후퇴하는 것뿐이었다.

 

그들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갔지만 정작 해안가에 도착해서 알게 된 사실은 그들이 타고 온 상륙정이 조류에 떠내려갔다는 것이었다. 결국 685명이 상륙한 새스캐치완연대는 전사 151명, 부상 269명, 포로 266명이라는 기록을 전사에 남기고 임무를 마감하였다. 하지만 이것도 같은 시각, 디에프 동측해변인 베르네발, 푸이 일대에 상륙한 부대의 참혹함에 비한다면 그나마 약과였다.

 

/해안가에서 사살당한 캐나다군 시신을 점검하는 독일군.

 

(4)독일군 총탄을 피하기 급급하다 몰살당한 영국 상륙군

지옥으로 변한 해안가

새스캐치완연대가 무참히 살육 당하던 바로 그 시각에 디에프 동측해변으로 왕립연대가 상륙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들은 상륙 개시 이전에 이미 독일군 초계함의 정찰에 걸려들어 해상에서부터 치열한 교전을 벌인 상황이었다. 이 교전으로 말미암아 순식간에 상륙정 대열이 흐트러져 총 23척 중 단지 7척 만이 원래 목표한 해안에 간신히 상륙할 수 있었다. 당연히 해안가의 진지를 파괴하는 기습 작전은 감히 펼쳐볼 엄두도 내지 못하였다.

 

오히려 해안에 도착하자마자 황당한 현실에 직면하였다. 그들은 눈앞에 펼쳐진 높은 해안 옹벽으로 인하여 더 이상 내륙으로 진격할 수 없음을 깨달은 것이었다. 이들이 우왕좌왕할 때 만면에 미소를 머금은 독일군이 옹벽 위에서 캐나다군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간신히 해변에 도착한 왕립연대원들이 독일군 포화에서 숨을 곳이 없음을 깨닫게 되는데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왕립연대는 높은 해안 옹벽에 가로막혀 더 이상 전진할 수 없었다. 그들은 위에서 공격하는 독일군에 의해 처참하게 죽어갔다.

 

처음에는 죽음을 각오하고 무모한 항전도 하여 보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항복 외에 그들이 선택할 방법이 전혀 없다는 사실을 통감하였다. 얼마간의 교전 후 디에프 우측에 상륙한 왕립연대원 556명은 200명이 전사하고 264명이 포로가 되는 결과를 남기고 전멸되었다. 사실 이런 우려 때문에 처음부터 디에프 상륙작전이 무모하다고 비판한 이들이 많았던 것이었는데 그들의 예상은 우려대로 현실화되었다.

 

이처럼 무모하게 시도된 선도부대의 침투가 참담한 실패로 끝나자 후속할 본진의 상륙은 더욱 어려운 상황이 되었다. 그만큼 처음부터 계획 자체가 부실하였던 것이었다. 통상적으로 상륙작전은 선도부대가 은밀히 침투하여 통로를 개척한 후, 해안가를 방어하는 적의 거점에 대하여 대대적인 사전 포격이나 폭격을 가하여 방어군을 최대한 제압한 후 본진이 상륙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런데 막강한 영국해군이 본격적인 해안타격을 펼쳐보기도 전에 오히려 독일군 해안포대들이 바다에 떠 있는 영국함대를 향하여 불을 뿜었다. 이로 인하여 전초부대가 몰살한 것 가지고도 모자라 화력을 지원하여야 할 함대는 대열이 흐트러졌고 연속해서 상륙할 부대들의 진용까지 무너져 버렸다. 그렇다면 이 시점에서 본진의 상륙에 대해 고민을 하여야 했는데 영국군은 작전을 계속하기로 결정하였다.

 

/선도 상륙부대가 궤멸되어 가는 중에도 후속 상륙이 계속 이루어졌고 결국 이는 피해를 늘렸다.

 

무능의 극치

한마디로 앞으로의 상황을 뻔히 알면서도 죽음의 늪에 아군을 아무런 생각 없이 밀어 넣는 무책임한 행위였다. 이것은 결코 용감한 행동이 아니고 전후좌우 사정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어처구니없는 만용이었다. 그 시점에서 진정한 용기는 실패를 인정하고 곧바로 후퇴를 실시하여 잔존 병력의 안위를 챙기는 일이었다. 하지만 당시 영국은 이것이 용기라는 사실을 인정하려 들지 않았다.

 

2년 후에 벌어진 노르망디 상륙작전에서 연합군의 엄청난 화력투사에도 불구하고 벙커 속에서 살아남은 독일군의 반격으로 상륙한 연합군 병력들이 많은 피해를 보았던 사실에서 알 수 있듯이 상륙군을 완벽하게 보호하기는 사실 힘들다. 그런데 디에프 상륙작전에 투입된 영국 해군의 화력은 처음부터 상륙군을 엄호하기조차 곤란한 수준이었고 더구나 야음을 틈타 작전이 개시되어 공군의 도움도 불가능하였다.

 

/디에프 시내에서 체포된 캐나다군. 항복 이외에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이러한 영국의 만용은 단지 선도부대의 몰락으로만 끝낼 수 있었던 그날의 비극을 더욱 크게 확대하는 결과만 가져왔다. 영국군 본진은 먼동이 터오기 시작하던 오전 5시 20분경부터 디에프 정면을 향하여 몰려갔으나 그것은 뻔히 예견되는 죽음의 행렬이었다. 이미 사전 상륙을 위한 정지 작업은 실패하였고 제대로 된 제압 포격이나 항공 폭격도 기대 할 수 없었다.

 

더구나 상륙군은 동시다발적으로 넓게 펼쳐 해안가에 상륙한 것이 아니라 독일 해안포대의 사격을 피해서 무계획적으로 해안가에 다가갔고 이들은 이미 조준을 완료하고 있던 독일군의 손쉬운 타격대상이 되었다. 상륙하는 족족 순서대로 독일군의 표적이 되었던 영국군은 공격은커녕 당장 독일의 총탄을 피할 수 있는 곳을 향하여 뛰어다녀야만 하였다. 하지만 독일군의 화망을 피해 해안가를 벗어나기조차 힘든 상황이었다.

 

더구나 보병과 함께 상륙하여야 효과적인 작전을 펼칠 수 있는 전차들도 포탄의 세례를 피해 중구난방으로 해안가에 투입되었다. 결국 전차의 도움을 받지 못한 보병들은 경무장상태로 간신히 대오를 정렬하여 보았지만 모이는 족족 독일군의 시야를 벗어나지 못하고 순차적으로 제압당하기 시작하였다. 반면 홀로 떨어져 해안가에 내동이 쳐진 전차들도 포탄 세례를 받고 차례로 불타올랐다.(계속)

 

/피격당하여 불타는 상륙전과 전차, 그리고 부상당한 캐나다군의 모습.

 

(5)-①②지옥으로 변한 상륙지 상황을 모르고 계속 병력을 상륙시킨 영국 지휘부

참담한 결과

아무리 보병과 전차들이 독일군의 공격을 피해 제각각 상륙하면서 협조하기 어려운 상황이 되었다 해도 디에프 해변의 모습은 비극이라기보다 차라리 코미디에 가까웠다. 상륙정에서 빠져 나온 전차들은 진격은커녕 해안가 자갈밭에 궤도가 빠져 허우적거리다 제자리에서 빙글빙글 돌기만 하였다. 그보다 황당한 점은 이미 고장이 나서 작동이 불능인 전차들도 있었다는 점이었다.

 

애당초 상륙정들은 병력을 투입시킨 후 해안가에 대기하고 있다가 작전을 마치고 귀환하는 병력을 즉시 싣고 철수시키기로 예정되어 있었다. 그러나 대다수는 상륙전부터 피격을 당하였고 그나마 해안에 접안한 상륙정들도 차례차례 공격을 받아 격파되거나 조류에 떠 밀려갔다. 결국 해안에 상륙하여 살아남은 병력들도 작전을 마치고 귀대할 수단이 없어져 자연적으로 고립되어 전멸될 상황이었다.

 

일부 부대가 해안가를 벗어나 마을 안으로 진입하였으나 그것은 단지 총알을 피해 살아남기 위한 발악이었을 뿐이지 작전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행동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구축함 캘프(HMS Calpe)에서 해군과 육군을 각각 나누어 지휘하던 휴즈-할렛(John Hughes-Hallett) 제독과 로버츠(John H. Roberts) 소장은 이러한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따로 명령을 남발하였다.

 

/많은 장비들이 해안가에 빠져 기동이 되지 않거나 고장이 발생하였다. 한마디로 총체적 난국이었다. /위키디피아

 

덕분에 날이 밝아 온 07시 경까지 지옥으로 변한 해안가로 예비 병력의 추가 상륙은 중단되지 않고 계속 이루어졌다. 한마디로 한심함의 극치 이외에는 마땅히 떠오를 단어가 없을 정도였다. 그 결과 해군의 상륙정들은 독일군의 요격에 막혀 차례차례 침몰하였고 여기에 타고 있던 병사들 대부분도 해안가에 도착하기 전에 전사하였다. 영국 지휘부는 09시가 되어서야 해안의 비참한 현실을 겨우 알게 되었고 11시에야 퇴각 명령을 내렸다.

 

날이 밝아 오면서 영국 공군이 출격하여 후퇴 병력 엄호에 나섰으나 즉각 독일 공군에게 제압당하였다. 영국해협전투 당시에 해협을 건너가 영국 본토위에서 싸웠던 독일 전투기들은 짧은 체공시간 때문에 작전에 제약이 많았었는데, 독일 공군의 홈코트인 디에프는 정반대의 상황이었다. 단 반나절의 공중전으로 영국은 119기의 전투기를 잃었고 이것은 제2차 대전 중 영국 공군이 하루에 입은 최고 손실량이었다.

<②편에 계속>

 

/상륙부대의 탈출을 돕기 위해 출격하였다가 디에프 해안에서 격추된 영국 공군의 스핏화이어 전투기. 제2차 대전 당시 영국 공군의 최대 손실이 이곳에서 기록되었다. /Bundesarchiv 제공

 

<①편에서 계속>

그리고 교훈

오전 12시 30분경, 탈출하지 못하고 고립된 연합군이 항복함으로써 디에프 전투는 막을 내렸다. 10여 시간의 전투로 인한 결과는 영국에게는 참혹 그 자체였다. 6,000여 상륙 병력 중 약 1,300여명의 전사자를 포함하여 3,500여명의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대부분은 상륙 직전이나 직후에 전투도 못해보고 해안가에서 피해를 입었고 그나마 해안가를 벗어난 2,000여명도 탈출로가 제압되면서 포로가 되었다.

 

반면 적은 병력이었고 전차도 없었지만 내선 기동의 이점을 최대한 발휘해 멋지게 방어에 성공한 독일군의 피해는 340여명 전사 혹은 실종에 부상 250여명이었고 총 46기의 공군기만 손실 당하였을 뿐이었다. 3배가 넘는 압도적인 전력으로 디에프에 시험적인 침공 작전을 시도하였던 영국군의 도전은 불과 2,500여 독일군의 방어에 막혀 전사에 길이 남을 철저한 참패로 기록되었다.

 

/디에프 현지에 조성된 캐나다군 전사자 묘역. /위키디피아

 

디에프 상륙작전은 지금까지 살펴 본 것처럼 방파제의 높이도 몰랐을 만큼 사전 정보 획득에 허술하였고 병과간의 협조도 찾아보기 힘들만큼 엉성하였으며 이원화된 지휘 체계로 인하여 지휘부는 실시간 작전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도 못하였다. 처칠은 이러한 비참한 결과에 대해 실망하였고 이것은 이후 루즈벨트나 스탈린의 집요한 요구에도 불구하고 프랑스 북부해안에 대한 상륙작전을 꺼리는 이유가 되었다.

 

그러나 영국인들은 이때 얻은 뼈아픈 교훈을 절대로 잊지 않았다. 디에프의 비극은 정보의 중요성을 새삼스럽게 되새기는 계기가 되었다. 작전을 거시적으로 통합 지휘할 수 있는 체계가 필요하며 만일을 위해 대안도 충분히 준비되어야 함을 깨달았다. 더불어 해안 진지를 무력화시키기 위한 화력 지원 방법과 상륙군의 투입 및 교두보 확보 방법 등에 대해 철저히 연구하였다. 그 결과가 2년 후 노르망디 해안가에서 발현되었다.

 

비록 엉뚱하다고도 생각될 만큼의 만용과 철저한 준비도 없이 작전이 개시되었고 수많은 젊은이들이 해안가에서 비참하게 생을 마쳤지만 이들의 실패는 이후 연합국에 의한 유럽 해방과 동시에 소련에 의한 유럽 전체의 공산주의화를 방지하여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하는 귀중한 밑거름이 되었다. 그런데 아무리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라 하지만 꼭 이러한 한심한 실패를 겪지 않고 성공하는 방법은 없는지 궁금할 뿐이다.

 

/디에프에서의 아픔은 2년 후 흔히 사상 최대의 작전이라 일컬어지는 노르망디 상륙작전 성공의 밑거름이 되었다. 하지만 안이함으로 인해 겪은 아픔은 너무 컸다. /위키디피아

 

■로카르노 조약

①프랑스는 비스마르크에게 당한 굴욕을 보복하려고...

서명만으로 이룰 수 없는 평화 [上]

복수극에서 비롯된 새로운 위험

 

1925년 10월 26일, 스위스 남부의 휴양 도시인 로카르노에서 유럽의 안전 보장을 약속하는 중요한 조약이 체결되었다. 1919년 제1차 대전을 종결짓기 위해 조인되었던 베르사유 조약의 미비 사항을 보완한 일종의 후속 조치였는데, 승전국인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벨기에와 패전국인 독일, 그리고 새롭게 탄생한 신생 독립국들인 폴란드, 체코슬로바키아 사이에서 체결된 '로카르노 조약(Pact of Locarno)'이다. 이처럼 얼마 지나지 않아 수정이 요구되었을 만큼 베르사유 조약은 체결 당시부터 말이 많았다. 독일 국내에서 조약을 거부하자는 거센 반발을 불러왔을 정도로 패전국에게 일방적으로 가혹하였던 점이 가장 큰 문제였다. 패전국이어서 당연히 평등한 강화조약을 맺을 수는 없었겠지만 전쟁의 모든 책임과 이에 관한 배상 의무를 독일에게만 지우는 것은 너무 무리라고 일부 승전국들도 우려하였을 정도였다.

 

/불평등한 베르사유 조약의 내용이 알려지자 국회의사당 앞에 모여 항의 집회를 여는 독일 국민들.

 

이렇게 혹독하다고 할 만큼 일방적으로 불리한 제약을 내세워 독일을 철저하게 응징하는데 앞장섰던 나라가 프랑스였다. 그 이유는 1871년에 패전한 보불전쟁의 굴욕과 제1차 대전 당시의 엄청난 피해를 복수하기 위해서였다. 전통적으로 프랑스의 경쟁 대상은 영국이었지만 인접한 독일과 그리 원만한 사이도 아니었다. 특히 나폴레옹 전쟁과 보불전쟁을 치르면서 한 번씩 상대에게 굴욕을 안긴 이후부터 적대적인 관계로 바뀌었다.

 

보불전쟁 패전의 굴욕을 만회하려던 프랑스는 제1차 대전에서 천신만고 끝에 승자의 위치에 서자 독일을 최대한 옭아매려 하였다. 사실 이번 전쟁에서 가장 많은 물적, 인적 피해를 입었던 나라가 프랑스이기도 했다. 4년 동안 전선의 대부분이 프랑스 영토 내에 형성되어 치열한 싸움이 벌어졌고 그 결과 복구에 많은 시간과 비용이 필요할 만큼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 하지만 이런 물적 손실도 흘린 피에 비하면 약과였다. 당시 프랑스는 전선에 뛰어들어 싸웠던 20~40대에 이르는 성인 남성의 70퍼센트 정도가 전사상을 당하였다. 한마디로 한 세대가 사라져 버렸다는 의미였다. 어쩌면 이런 피해를 입고도 그대로 있기를 바란다면 어쩌면 그것도 무리일지 모른다. 복수극을 어느 누구도 말릴 수는 없었을 만큼 프랑스의 집요함은 대단하였고 결국 많은 나라들이 프랑스의 주장에 동조하였다. 그 결정판이 라인란트(Rheinland)의 군사적 점령이었다.

 

/아르곤 전투 당시 포격에 몰살된 프랑스군의 모습. 이처럼 제1차 대전 당시 가장 많은 피해를 입은 프랑스의 독일에 대한 복수의 집념은 대단하였다.

 

불안한 평화를 지키려하다

라인란트는 독일 서부의 남북을 가로지르는 라인 강 일대를 뜻하지만 통상적으로 강 서쪽의 저지대를 의미한다. 이곳은 주로 독일계 주민들이 거주하지만 독일과 프랑스 사이에 놓여있기 때문에 프랑스계 문화와 언어를 사용하는 상당수의 주민들이 대대로 살아오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그래서 두 나라 사이에 분쟁이 있을 때마다 갈등의 배경으로 단골로 등장하는 지역이 되었다. 프랑스는 베르사유 조약으로 독일의 군비를 제한하는 것만으로는 안심할 수 없어 프랑스와 가까운 독일 영내에 군대를 주둔시켜 독일을 감시하고자 하였다. 영토의 합병이나 정치적으로 통치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만일 전쟁이 재발한다면 이번에는 프랑스가 아닌 독일 영토 내에서 싸움이 벌어지기를 희망하였고 그러한 일환으로 프랑스와 접하고 있는 라인란트를 군사적으로 점령한 것이었다.

 

/라인란트에 주둔한 프랑스군. 내심 프랑스는 이 지역을 합병할 의도까지 노골적으로 내비쳤다.

 

하지만 프랑스는 독일이 보불전쟁의 전리품으로 알사스와 로렌을 가져갔던 것처럼 내심 이번에 라인란트 지역을 프랑스의 영토로 강제 병합하려는 의도도 있었다. 하지만 이런 시도는 다른 연합국들의 반대로 무산되었고 차선책으로 선택한 것이 15년간 군사적으로 점령하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이 기간 동안 라인란트를 독일에서 영구 분리시켜 프랑스의 괴뢰국으로 만들려는 시도도 노골적으로 벌였다.

 

이처럼 프랑스는 라인란트 분리 독립을 위한 정치 공작을 펼쳤으나 다수를 차지하는 독일계 주민들의 저항으로 결국 실패하였다. 사실 이러한 시도는 처음이 아니라 이전에도 있었던 역사의 반복이었다. 유럽을 제패한 나폴레옹이 독일 통일의 기운을 사전에 차단하고자 1797년 라인지역의 중소 제후국을 압박하여 ‘라인동맹’을 결성시키고 이를 프랑스 보호령으로 선포하여 통치하였던 적이 있었다. 때문에 강화조약으로 모자라 군사적으로도 점령 당한 라인란트 지역은 독일의 불만으로 말미암아 베르사유 체제를 위협하는 일종의 뇌관과도 같은 지역이 되었다. 결국 승전국들은 이를 보완할 새로운 장치가 필요했고 협조적이었던 독일 바이마르 정부도 새로운 평화 체계를 만들기 위해 머리를 맞대었는데, 그 결과물이 바로 서두에 소개한 로카르노 조약이었고 조약의 주요 팩트가 바로 라인란트였다.

 

/위태로운 유럽의 평화를 지키려 하였던 로카르노 조약의 주역들 (좌에서 우로 독일 스테츠만, 영국 챔벌레인, 프랑스 브리앙)

 

②모두가 양보한 로카느로 조약, 히틀러에게 무참히 짓밟히다

서명만으로 이룰 수 없는 평화 [下]

모두가 조금씩 양보하다

 

로카르노 조약의 기본 입장은 제1차 대전 이후 획정된 1919년 체제를 다시 한 번 공고히 확인하는 것이었다. 1919년 체제로 인하여 중동부 유럽에 많은 신생 독립 국가가 탄생하고 더불어 국경에 엄청난 변화가 생겼는데 이 때문에 곳곳에서 분쟁이 수시로 발생하였다. 그런데 해당 지역이 패전국인 독일, 오스트리아-헝가리, 그리고 전쟁 중 단독 강화하여 승전국의 대접을 받지 못한 소련의 옛 영토였다.

 

패전국들과 새롭게 등장한 공산주의 종주국 소련의 힘을 약화시킬 목적으로 전쟁 전에 이들이 지배하고 있던 소수 민족들의 독립을 허락하면서 많은 신생국들이 탄생한 것이다. 이때 내세웠던 명분이 이른바 ‘민족자결주의’였는데, 이는 철저하게 패전국에게만 해당되는 사항이었다. 당시 승전국인 영국과 프랑스는 전 세계에 더 많은 지역과 민족들을 강압적으로 지배하고 있었지만 이들 지역에서 독립한 국가들은 없었다.

 

/민족자결주의는 3.1운동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하지만 이는 제1차 대전 당시 패전국을 분할처리하기 위한 목적으로 이용되었을 뿐이었다.

 

이처럼 세세한 세부 규정이 미비한 관계로 베르사유 조약으로 지엽적인 분쟁을 완벽히 통제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로카르노 조약은 현 국경선의 준수와 추후에 분쟁이 발생할 경우에 평화적으로 처리할 구체적 방법을 규정한 것이다. 비록 체결 이전부터 문제가 많다는 평가를 받고 있었지만 그래도 전쟁보다 평화가 백 번 낫다고 생각하였기에 어떻게든 한 번 맺은 베르사유 조약 체제를 최대한 살리려 노력한 것이었다.

 

각론으로 들어가면 독일과 인접한 프랑스, 벨기에, 폴란드, 체코슬로바키아와의 새로운 국경선을 독일이 절대 준수하도록 다짐받았고 만일 문제가 발생하면 무력에 의한 해결이 아닌 국제 사법재판소(ICJ)의 결정에 따르도록 하였다. 이와 동시에 키를 쥐고 있던 프랑스를 설득하여 라인란트에 진주한 프랑스군을 철수하도록 하되 이 지역을 영구히 비무장지대로 남기도록 결의하였다. 어떻게 생각한다면 프랑스군의 라인란트 철수만을 뺀다면 전체적으로 베르사유 조약을 재확인한 것에 불과하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패전국의 굴욕을 감내하여 제약을 받고 있던 독일이 국제 사회의 일원이 될 수 있도록 국제연맹에 가입하는 길을 열어 놓았고, 너무 과하다고 평가된 배상금 경감에 따른 별도의 협상을 실시하기로 결정하였다. 즉, 서로에게 조금씩 양보하여 유럽의 평화를 수호하자는 결의였다.

 

/1919년 독일과 소련 사이에 여러 신생 독립국이 탄생하였고, 이 때문에 국지적인 분쟁이 계속 이어졌다./사진=미 육군사관학교

 

지키려는 자, 깨려는 자

1925년 조약의 체결과 동시에 1926년 예정대로 독일이 국제연맹에 가입하였고 1930년에는 프랑스 군대가 라인란트에서 철군함으로써 로카르노 조약을 차근차근 이행시켰다. 이러한 협정을 이끌어 낸 각국의 수반이었던 영국의 챔벌레인(Sir Joseph A. Chamberlain), 프랑스의 브리앙(Aristide Briand), 독일의 슈트레제만(Gustav Stresemann)은 공로를 인정받아 1926년 노벨평화상을 공동 수상하였다.

 

이 조약을 이끌었던 주역들은 무력에 의한 강압과 통제, 그리고 철저한 복수가 아닌 협상과 양보만이 앞으로 아름다운 평화를 가져올 것으로 굳게 믿고 있었다. 그런 이상을 바탕으로 체결된 로카르노 조약은 끔찍하였던 제1차 대전의 악몽을 하루 속히 치유하고 모두가 함께 공생하는 새 시대를 펼쳐줄 기반이 될 것으로 여겨졌다. 불안정하고 국지적인 분쟁이 계속 벌어지던 유럽에 드디어 서광에 비치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로카르노 조약을 성사시킨 주역들이 함께 모여 웃고 있다. 이제 더 이상 유럽에서 잔인한 전쟁은 없을 것 같았고, 이들은 그 공적을 인정받아 1926년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다.

 

하지만 평화주의자들의 이상향이 쉽게 이루어지도록 역사는 그냥 내버려두지 않았다. 프랑스군이 철군하고 한동안 양국의 평화지대로 존속하던 라인란트에 군화발이 다시 들리기 시작한 것은 암울한 미래의 시작이었다. 1936년 3월 7일, 히틀러는 라인란트에 군대를 일방적으로 주둔시키면서 베르사유 조약과 로카르노 재확인을 파기하였다. 히틀러에게 평화라는 의미는 모두가 자신의 발밑에 굴복하는 것이었다.

 

히틀러는 독일에게 굴욕을 안겨주었던 모든 조약들의 파기를 주장하며 정권을 잡은 후 즉시 재군비를 선언하였다. 라인란트의 군사적 점령 그리고 이어서 1938년에 있었던 체코슬로바키아의 수테덴란트 합병처럼 로카르노 조약에서 정하였던 모든 내용을 나치는 철저하게 무시하였다. 그리고 이것으로도 만족하지 못한 히틀러는 조약에서 규정되고 확인된 폴란드와의 국경도 인정할 수 없다고 선언하였다.

 

로카르노의 주역이었던 조셉 챔벌레인의 이복동생인 아서 챔벌레인(Arthur N. Chamberlain)이 평화를 지키기 위해 노력하였으나 문제는 독일 측 상대방이 그의 형과 얼굴을 마주하던 슈트레제만 같은 위인이 아니라 히틀러라는 악마였다는 것이었다. 그는 히틀러로부터 평화를 준수하겠다는 서명을 얻어내었지만 그것만으로 평화가 얻어질 수 없음을 얼마 지나지 않아 깨닫게 되었다. 이듬해 사상 최대의 전쟁이 시작된 것이었다. 한마디로 악마에게 서명은 하나도 중요하지 않았던 것이다.

 

/1938년 9월 아서 챔벌레인이 우리 시대의 평화를 지켰다고 자화자찬하며 치켜든 뮌헨 회담 협정문. 하지만 불과 1년 후에 제2차 대전이 발발하면서 협정문은 단지 히틀러의 서명이 담긴 휴지 조각이었음이 밝혀졌다.

 

■만슈타인

① 2차대전 때 맥아더 보다 뛰어났다고 평가받는 장군은?

역사에 패장으로 기록된 이

역사를 돌이켜 보면 위대한 장군들의 영웅담을 쉽게 발견할 수 있는데, 너무 당연하지만 이들 대부분은 승자의 이야기다. 사실 패장에 대한 기록은 그다지 많지 않고 여기에 대해 관심을 갖는 이들도 별로 없다. 그런데 확실히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 하나 있다. 설령 전투에서 패했어도 전쟁에서 승리하면 승장으로 기록되지만 그 반대인 경우는 패장으로 기록된다는 사실이다. 이런 이유로 수많은 훌륭한 성과를 거두었음에도 역사에는 패장으로 알려진 이들이 있다. 경우에 따라서는 사가(史家)들도 안타깝다고 여겨서 상세한 기록을 남기기도 한다. 그러한 예에 가장 부합되는 이를 하나만 꼽으라면 단연코 카르타고의 맹장이었던 한니발이다. 그는 로마를 패망의 위기까지 밀어 붙였지만 역사에는 패장으로 기록되었다. 하지만 역사에 남긴 그의 유명세는 제2차 포에니 전쟁의 승장인 스키피오를 능가할 정도다.

 

/한니발은 위대한 장군이었지만 승자가 되지는 못하였다. 이처럼 놀라운 전과를 올렸으면서도 역사에는 패장으로 기록된 이들이 있다.

 

비록 한니발만큼은 아닐지라도 사상 최대의 전쟁이었던 제2차 대전에서 활약한 수많은 장군들 중에도 뛰어난 패장이 있었다. 군사 분야에 관심이 없는 사람들에게 당시 활약한 장군 중 생각나는 이를 묻는다면 흔히 맥아더, 아이젠하워, 패튼, 몽고메리 등의 승장을 언급한다. 그런데 이들은 전공보다 영웅을 미화하려는 당시 선전 매체의 선전 덕분에 실제로 거둔 업적 이상으로 많이 알려졌다. 반면 당시 같은 승전국이었지만 주코프 같은 소련 장군들은 냉전시기를 거치며 서방 세계에 많이 알려지지 않았다. 그럴 정도이니 패전국 장군들에 대해 아는 사람들이 그리 많지 않은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 사막의 여우로 유명한 롬멜 정도가 알려진 정도지만 사실 그도 선전 매체의 영향 등으로 말미암아 업적에 비해 과잉포장 된 인물이다. 오히려 당시 독일군에는 그와 비교할 수도 없을 만큼 엄청난 군사적 업적을 남긴 장군들이 많았다.

 

전문가나 밀리터리 마니아 사이에서 제2차 대전 최고의 장군을 손꼽으라면 많은 사람들에게는 금시초문일 수도 있는 인물이 항상 선두권에 들고는 한다. 그것도 승전국의 장군이 아닌 패전국 독일의 장군인데, 그는 후대에도 물론이지만 당대에도 뛰어난 장군으로 손꼽는데 인색하지 않았던 인물이었다. 독일의 육군 원수였던 프리츠 에리히 폰 만슈타인(Fritz Erich von Manstein, 1887~1973)이 바로 그 주인공이다.

 

/제2차 대전 당시 독일 육군의 원수였던 에리히 폰 만슈타인.

 

처음부터 군인의 길을 가다

만슈타인은 베를린에서 프로이센 귀족이며 포병대장이었던 에두아르트 폰 레빈스키의 열 번째 아들로 태어났는데, 아들이 없는 이모부 게오르크 폰 만슈타인의 아들로 입양되면서 만슈타인이라는 성을 얻게 되었다. 그의 조부와 외삼촌들은 1870년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에 참전한 장군들이었고, 외가 쪽으로는 훗날 탄넨베르크 전투의 승장이자 바이마르 공화국의 대통령이 된 파울 폰 힌덴부르크와도 인척관계였다.

 

양아버지인 게오르크도 독일 제국군의 육군 중장까지 올라갔던 무인이었다. 그는 한마디로 독일 최고의 군인 명문가 출신으로서 엄청난 후광을 업고 태어난 셈이었다. 당시 유럽에서 고급 장교는 상류 계급에 속하였기 때문에 대를 이어 군복을 입는 경우가 흔하였다. 그는 이런 가정환경 탓인지 1900년 불과 13세의 나이에 베를린에 있는 6년 과정의 학생군사훈련단(Cadet Corps)에 입학하였다. 우리에게는 생소하지만 서구에는 직업 군인이 되려는 청소년을 대상으로 하는 정식 중등 교육 과정의 군사학교가 있다. 당시 독일의 청소년 군사학교는 복종, 동료애, 임무 수행을 교육 방침으로 삼고 군국주의 사상에 부합하는 인재를 키워내는 곳이었다. 이러한 가정 환경과 교육 때문에 만슈타인은 다양한 의견을 수렴하는 민주적 가치관을 혐오했고 상부의 명령에는 절대 복종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캘리포니아 학생군사훈련단의 행사 모습. 이처럼 서구에는 직업 군인을 꿈꾸는 청소년을 위한 중등 교육 과정이 있다. 만슈타인도 이런 길을 거쳐 군인이 되었다.

 

졸업 후인 1906년 그는 제3근위보병연대에 장교 후보로 입대하여 본격적인 군인의 길에 들어섰다. 1913년 프로이센 육군대학(Prussian War Academy)에 입교하였는데, 이곳은 독일군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고급 참모가 되기 위해서 반드시 거쳐야 하는 코스였다. 그야말로 엘리트들의 요람과 같은 곳이었는데, 주목할 만한 점은 흔히 기갑부대의 아버지라 일컬어지는 하인츠 구데리안이 동기였다는 사실이다.

 

이 둘은 후일 프랑스 전역에서 독일의 트레이드마크가 된 전격전의 신화라는 기적을 이끈 가장 중요한 인물이라 할 수 있다. 이처럼 제2차 대전사에 커다란 발자취를 남긴 만슈타인과 구데리안은 함께 수학하면서 서로의 사상을 가장 충실히 이해하고 협조를 아끼지 않는 동지가 되었고, 이후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시공을 초월해 많은 후배 군인들로부터 존경받는 장군으로 전사에 커다란 발자국을 남겼다.

 

/참모대학이라고도 불리는 프로이센 육군대학은 독일군 최고의 엘리트라면 반드시 거치는 교육 코스였다.

 

② 히틀러는 군부의 환심을 사기 위해 정적을 살해하고...

굴욕을 느꼈던 군부

1914년 제1차 대전이 발발하자 만슈타인은 일선 야전부대의 참모장교로 근무했는데 초급 장교로는 특이하게도 서부전선과 동부전선에 모두 참전했다. 그 이유는 아마도 그가 참모였기 때문이 아닌가 추측되는데, 당시 야전부대의 참모들은 대부분 팀장이라 할 수 있는 지휘관이 영전할 때 함께 옮겨가는 경우가 많았다. 전쟁 내내 최전선에서 근무한 그는 여러 차례 부상을 당하기도 했지만 이러한 참전 경험은 이후 커다란 자산이 되었다.

 

전쟁 후 베르사유 조약에 따라 독일군이 대대적으로 감군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능력을 인정받아 현역에 남게 되었다. 승전국은 다양한 방법으로 독일군을 옥죄려 했지만 역설적이게도 이런 제한은 독일군이 소수정예화 되는 계기가 되었다. 강제적으로 감군을 하게 되다 보니 실력이 뛰어난 이들만 선별적으로 군에 남게 되었고 이후 이들은 제2차 대전 당시 독일군을 이끌었다.

 

/초급 장교 시절의 만슈타인. 그는 제1차 대전 당시 최전선의 야전부대의 참모로 복무하며 부상을 입기도 하였다.

 

만슈타인은 1920년에 중대장, 1922년에 대대장을 거치며 지휘관으로서 자질을 익혔고, 1927년에 국방성 병무국이라는 이름으로 비밀리에 유지되던 총참모부에 복무하며 참모 경력을 쌓았다. 승전국들은 총참모부를 독일군의 핵심이라 낙인찍어 전후 설치를 금지하였다. 그래서 마치 비밀결사 같은 모습으로 존속할 수밖에 없었는데, 그러한 조직의 일원이었다는 사실은 그의 능력이 뛰어났음을 유추할 수 있게 해준다.

 

만슈타인은 굴욕적인 베르사유 조약에 제대로 저항하지 못할 만큼 대외에 무기력하고 내부적으로 혼란만 야기하는 바이마르 공화국에 강한 불신감을 가지고 있었다. 대다수의 독일인들에게 1919년에 성립한 공화국과 민주주의는 상당히 낯선 제도였다. 만슈타인뿐만 아니라 군부 인사 대부분이 어려서부터 군국주의 교육을 받아온 관계로 의회에서 벌어지는 정쟁을 혼란으로 단정할 정도였다. 그래서 나치가 1934년에 베르사유 조약을 일방적으로 파기하고 재군비를 선언하자, 그는 이를 적극 지지했다. 하지만 단지 이를 가지고 만슈타인이 나치라거나 나치에 가까웠던 인물이라고 말하기에는 곤란한 점이 많다. 굳이 괴링이나 카이텔 같은 골수가 아니더라도 베르사유 조약 자체가 독일에게 워낙 굴욕적이었기 때문에, 독일 군부가 이러한 히틀러의 정책에 찬성한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현상이었다.

 

/1919년 베르사유 조약의 내용이 알려지자 분노한 독일 국민들이 의회에 모여 항의 집회를 하고 있다. 보수적인 독일 군부는 특히 이를 굴욕적으로 받아들였다.

 

혼란의 시기

바이마르 공화국 당시 독일 군부는 정부와 사이가 원만하지 않았다. 이전까지 군부는 통일과 제국 성립의 전위대답게 독립적인 권력과 다름없었고 실제로 제1차 대전 말기에 참모차장 루덴도르프가 정권을 잡고 권력을 휘두르기까지 하였다. 하지만 바이마르 공화국에서는 모든 세세한 내용을 의회에 보고하고 통제까지 받아야 했다. 당연한 절차지만 민주주의를 경험하지 못했던 당시 군부는 이를 모욕으로 생각했다.

 

아직 권력 기반이 단단하지 않던 집권 초기의 히틀러는 이런 상황을 정확히 꿰뚫고 군부의 지지를 얻음과 동시에 정적을 제거하기 위한 행동을 실시하였다. 1934년 에른스트 룀을 암살하고 돌격대(SA)를 붕괴시켰다. 돌격대는 나치당의 사병 조직이었는데 룀은 자신이 지휘하는 돌격대에 군을 합병하여야 한다고 주장하여 군부를 불안하게 만들었었다. 하지만 당시 히틀러의 당근이 군을 장악하기 위한 음모의 시작이라는 것을 아무도 몰랐다.

 

/돌격대는 일종의 사조직이었는데 군을 흡수하여야 한다고 주장하여 군부를 자극하였다. 히틀러는 군부의 지지를 얻음과 동시에 정적으로 떠오른 룀을 제거하고자 돌격대를 무력화시켰다.

 

만슈타인은 1934년 새롭게 탄생한 총참모본부 제1작전과장을 거쳐 1936년, 소장으로 승진하고 제1참모차장에 임명 되었다. 그가 거친 보직은 계급과 상관없이 독일군의 작전을 최종적으로 기안하는 실권을 가진 막강한 자리였을 만큼, 만슈타인은 재건되어 새롭게 탄생한 독일 육군의 핵심이었다. 군인으로서 만슈타인이 꿈꾸던 자리는 참모총장이었는데, 한걸음 더 목표까지 다가온 것이었다.

 

비록 나치 정권 당시 육군 참모총장은 최고위직이 아니었지만, 게르하르트 폰 샤른호르스트가 프로이센 초대 참모총장으로 군부를 이끈 이후로 독일 육군에서 참모총장이라는 자리는 그 이상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었다. 제1차대전 당시만 해도 실질적인 군부의 제1인자로서 군을 지휘하고 그에 따른 책임까지 졌던 마치 내각책임제의 수상과도 같은 권력자였다.

 

재군비 선언 이후 독일 육군에서 참모총장은 육군최고사령부 총참모본부의 수장, 즉 육군 총사령관의 참모장 자격으로 그 입지가 축소되었지만, 전통만큼은 여전했다. 육군 총사령관도 참모총장의 의견을 존중하여 협의를 거친 후 명령을 하달했다. 비록 제2차 세계대전이 격화되면서 히틀러가 이러한 모든 체계를 깨뜨려 버렸지만, 적어도 전쟁 초기까지만 해도 작전 수립에 대한 참모총장의 권한은 절대적이었다.

 

/초대 참모총장으로 언급이 되며 독일군의 자랑인 참모본부 제도를 처음 도입한 프로이센의 샤른호르스트. 이후 참모총장은 독일군 최고의 실력자를 의미하였다.

 

③ 전차부대를 앞세워 폴란드를 한달만에 지도에서 지워버리다

숙청의 바람

만슈타인이 제1참모차장까지 승승장구하는 동안 그를 이끌어준 대표적인 인물은 육군 총사령관 베르너 폰 프리치와 참모총장 루드윅 베크였다. 사실 프로이센, 귀족, 참모출신들로 구성된 소수 특정 인맥이 독점하다시피 한 독일 군부의 핵심 집단은 제1차 대전 패배 이후 많이 약화되었지만 이를 증오하던 히틀러조차도 단번에 제거하지 못했을 만큼 상당히 뿌리가 깊었다.

 

덕분에 만슈타인은 출발부터 남과 달랐지만 이런 좋은 조건은 그가 염원하던 참모총장이 되지 못하도록 만들었다. 왜냐하면 최종 인사권자인 히틀러가 기존 독일 군부의 핵심 세력들을 극히 싫어했기 때문이었다. 만슈타인은 전쟁 내내 명령에 따랐지만, 히틀러는 그의 뛰어난 능력에 경외감을 표하는 것과는 별개로 프로이센 귀족 출신이라는 점을 문제 삼아 그를 완전히 믿지는 않았다.

 

/히틀러 집권 초기 군부를 이끌던 육군 총사령관 프리치(左)와 참모총장 베크(右). 이들은 만슈타인을 이끌어 준 실세 중의 실세들이었다.

 

1938년 히틀러는 군부를 장악하기 위해 대대적인 숙청을 단행했다. 프리치의 옷을 벗기는 것을 신호탄으로 해서 이듬해까지 프리치와 베크에 가까웠던 수많은 장군들을 강제 예편 또는 좌천시켜버렸다. 이때 만슈타인도 제18보병사단장으로 전보했는데 엄밀히 말하면 좌천이었다. 이 숙청으로 많은 친나치 성향의 인물들이 군부의 핵심으로 부상했지만, 그렇다고 흔히 피상적으로 떠올리는 피의 숙청 같은 경우는 아니었다.

 

그 동안 특정 인맥이 독일 군부를 좌지우지한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었으며 건전한 개혁을 위해서라도 이들을 한 번 정도는 정리할 필요가 있었다. 이듬해 전쟁을 앞두고 숙청시킨 많은 이들이 현역으로 다시 복귀했을 만큼 정치적 보복 차원은 아니었다. 어쨌든 이때를 기점으로 프란츠 할더, 하인츠 구데리안, 헤르만 호트, 에르빈 롬멜처럼 그 동안 아웃사이더로 있던 많은 소장파들이 서서히 부상하기 시작했다.

 

1939년 4월 만슈타인은 남부집단군 참모장으로 부임했다. 남부집단군은 폴란드 침공 시 포위망의 오른쪽을 담당할 부대였다. 이때 만슈타인은 이후 그의 트레이드마크가 된 기동전을 실전에 처음 적용해볼 수 있는 작전안을 기획하게 되었다. 당시 남부집단군은 제8, 10, 14군으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전통적인 전술에 따르면 이들 주력을 적당한 섹터로 나누어 함께 진군시키면서 폴란드군을 각개 격파해야 했다.

 

/1939년 9월 1일 국경을 가로지른 목책을 제거하는 독일군. 제2차 대전의 시작을 알린 유명한 사진이다.

 

더 강한 상대

하지만 만슈타인의 생각은 전혀 달랐다. 제1차 대전의 서부전선처럼 적을 일일이 쳐부수려하다가는 공격이 멈추어 지루한 공방전에 빠질 가능성이 있다고 본 것이다. 그는 주력을 나누지 않고 한곳을 정하여 전선을 돌파한 후 적진 배후까지 급속히 기동시켜 퇴로를 막아버림과 동시에 좌우에서 병진한 조공이 포위망을 막아버리는 것이었다. 신속하게 포위하여 항전 의지를 꺾어 항복을 유도하는 것이 작전의 요체였다.

 

만슈타인은 주력을 제10군에 집중시켜 돌파를 담당하도록 하고, 제8, 14군은 좌우에서 포위망을 형성하는 작전안을 내놓았고 남부집단군 사령관 게르트 폰 룬트슈테트는 이를 채택했다. 1939년 9월 1일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하면서 전쟁이 시작되었는데 이것이 새로운 세계대전의 시작이라는 사실을 그때는 몰랐다. 남부집단군도 노도와 같이 바르샤바를 향해 진군을 개시했고 한 달이 지난 후 폴란드는 지구상에서 사라져버렸다.

 

/만슈타인을 참모장으로 중용한 룬트슈테트. 그는 제2차 대전 당시 독일군 최연장자로 부하들로부터 많은 신뢰를 받았다. 때문에 히틀러도 그를 여러 번 내치고도 계속 중용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총참모본부가 3주 내에 끝내려고 했던 계획과 비교하면 시간이 많이 걸린 셈이었는데 그만큼 독일군은 아직 부족한 부분이 많았다. 독일군은 폴란드 침공전을 통해 다양한 전술을 시험적으로 사용하면서 기대에 못 미치는 부분도 있었지만 예상보다 훨씬 더 좋은 결과를 얻은 부분도 있었다. 그 중 핵심은 전쟁의 새로운 총아로 떠오른 기갑부대의 운용에 관한 부분이었다.

 

보수적인 군부의 핵심들은 기갑부대를 완전히 신뢰하지 않았지만, 만슈타인은 이를 통해 새로운 희망을 보았던 것이다. 그는 운용의 묘만 더 잘 살린다면 구데리안을 비롯한 소장파 장성들의 주장처럼 돌파의 중핵으로 기갑부대가 결코 손색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전선에서 드러난 일부 문제점들은 참고할 만한 사례나 경험이 부족하여 그랬던 것으로 보았고 충분히 개선이 가능할 것으로 판단했다.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했을 때 독일에 대해 선전포고를 한 프랑스와 영국이 장차전의 상대로 예정되어 있었지만, 적극적인 교전 의지가 없던 이들과 양면 전쟁을 피하려던 독일의 충돌은 막상 일어나지 않았다. 이제 폴란드를 평정한 독일은 서부전선에 전력을 집중할 수가 있었고, 이로써 일촉즉발의 거대한 전쟁은 예정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프랑스와 영국 연합군은 한마디로 폴란드와 차원이 다른 상대였다.

 

/기동 훈련 중인 프랑스군 기갑부대 소속의 R35 전차. 프랑스는 수적으로 독일보다 앞선 서유럽 최강의 육군 강국이었다.

 

④ 전차부대로 산악지대를 넘어 공격하자고 제안하다 좌천당해

가짜 전쟁

정작 독일에 대해 선전포고를 하였지만 적극적인 교전 의지가 없던 연합국 측과 당장 폴란드 점령에 몰입하던 독일의 충돌은 일어나지 않았다. 양측 모두 20여 년 전 서부전선에서 있었던 지옥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고, 다시 맞붙는다면 끔찍했던 과거가 재현될 것이라는 막연한 두려움을 안고 있었다. 프랑스군 일부가 국경 도시인 자르로 진격하였지만 폴란드의 항복이 확실해지자 회군하여 원위치하였을 정도였다.

 

이처럼 양측은 먼저 움직이지 못한 채 으르렁대기만 할 뿐이었다. 흔히 가짜 전쟁(Phoney War)이라고 불린 이 기간 동안에 훈련 중 포탄이 상대편으로 날아가면 “미안하다. 방금 것은 연습 중 실수였다”라고 확성기로 방송했을 정도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전쟁을 피할 수 없었다. 연합군이 이처럼 회피하자 전쟁의 시작은 전적으로 독일의 의지에 달렸는데 히틀러의 명령에 독일 육군 참모본부는 이미 계획을 수립한 상태였다.

 

/최전선에서 한가로이 시간을 보내는 영국 원정군 병사들. 선전포고를 하였음에도 독일과 연합국 모두 눈치만 보던 이 시기를 이른바 가짜 전쟁이라 한다.

 

참모본부는 제1차 대전에서 실패를 교훈삼아 당시 독일의 전략이었던 슐리펜 계획을 보완한 프랑스 침공 계획을 수립해놓았다. 참모총장 프란츠 할더의 주도로 기안된 이른바 황색 작전은 독일군 주력이 네덜란드와 벨기에를 돌파하여 파리로 진격하는 것이 골자였다. 최선책이라기보다는 마지노선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차선책이었고 사실 대안도 없어 보였다. 하지만 문제는 프랑스 또한 그것을 충분히 예견하고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마지노선 때문에 프랑스는 독일이 당연히 벨기에로 침공할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따라서 강력한 예비대를 국경에 포진시키고 있다가 독일군이 벨기에로 진입할 때 즉각 대응한다는 전략을 구상하고 있었다. 한마디로 플랑드르 평원은 제1차 세계대전 당시의 지옥이 재현될 장소로 지목되었고, 이것은 불가피해 보였다.

 

황색 작전에서 주공을 담당할 B집단군이 벨기에를 거쳐 프랑스로 쇄도하는 동안 만슈타인이 참모장으로 부임한 A집단군은 측면에서 프랑스군을 견제하는 조공 역할을 하기로 예정되어 있었다. 그런데 만슈타인은 성공을 위해서는 적이 예측하지 못하도록 초전에 기습하는 것이 필수인데, 황색 작전은 시간과 공간이라는 기습의 두 가지 요소 중 어느 것 하나 충족시키지 못한다며 강력히 비판하고 나섰다.

 

/황색 작전은 마지노선 외곽의 벨기에, 네덜란드를 통과해 프랑스를 침공하는 계획이었다. 하지만 이는 제1차 대전 당시 실패한 슐리펜 계획과 그다지 차이가 없었다.

 

예상치 못한 공간

만슈타인은 전혀 예측하지 못한 공간을 침공로로 이용함으로써 기습 효과를 달성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했다. 그는 프랑스군과 영국 원정군을 분리시키기 위해 주공을 B집단군이 아닌 전선 중앙의 A집단군으로 변경하고 기갑 세력을 이곳에 집중하여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통로를 급속 돌파해 적의 배후를 단절함으로써 일거에 대포위하여 섬멸하자는 이른바 낫질 작전을 주장했다. 이때 만슈타인이 제시한 회심의 통로는 아르덴 구릉지대였다.

 

이곳은 알프스만큼 험하지는 않지만 벨기에, 룩셈부르크, 프랑스, 독일의 자연적인 국경선을 형성할 만큼 중첩된 산악지대였다. 따라서 방어 입장에 있던 프랑스도 그랬지만 독일 역시 대규모 주력부대를 이곳을 통해 공격하겠다는 생각은 원천적으로 배제하고 있었다. 기술적으로 전차의 이동이 전혀 불가능하지는 않았지만, 대규모 기갑부대가 이곳을 신속히 통과할 수는 없다고 단정한 것은 너무 당연하였다.

 

/1939년 폴란드 침공 당시 독일은 전차를 집중 운용하여 효과가 크다는 점을 알았다. 하지만 산악지대로 기갑부대를 통과시켜 프랑스를 침공하자는 만슈타인의 의견에 대부분이 반대하였다.

 

만슈타인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아르덴이 최적의 공격 통로라고 생각했다. 그는 사전에 공병대를 투입하여 진격로를 미리 개척한 후 기갑부대를 은밀히 전진 배치시켜놓으면 전쟁이 개시되었을 때 이곳을 순식간에 돌파할 수 있으리라고 판단했다. 당시 연합군의 배치 상황을 고려할 때 만일 A집단군이 아르덴을 통과하여 스당 인근을 돌파한다면 연합군 주력의 배후를 순식간에 잘라버릴 수 있을 것으로 예상했다.

 

이것은 1939년 폴란드에서 남부집단군이 주력을 한곳으로 모아서 이를 창으로 삼아 전선을 찢고 들어가 배후를 타격함과 동시에 적의 주력을 대포위한 전략을 응용한 것이기도 했다. 그러나 육군 참모본부는 폴란드에서 이미 경험했음에도 불구하고 기갑부대의 집중 운용과 쾌속성에 대해서는 여전히 의문을 품고 있었고, 게다가 대규모 기갑부대가 산림지대를 돌파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하여 이를 기각했다.

 

하지만 만슈타인은 기각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고 계속해서 의견서를 육군 참모본부에 제출함과 동시에 주변에 황색 작전의 위험성을 역설하고 다녔다. 참모총장 프란츠 할더는 그의 이러한 행동에 격분한 나머지 만슈타인을 후방인 슈테틴에 새로 창설한 제38군단으로 좌천시켰다. 하지만 이 인사이동은 단지 똑똑한 참모 정도로만 알려진 만슈타인이 본격적으로 세상에 명성을 떨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독일 육군 참모총장 프란츠 할더는 만슈타인이 제1참모차장으로 있었을 당시에 제2참모차장이어서 막역한 사이였다. 하지만 황색 작전을 계속하여 만슈타인이 비토하자 이를 항명으로 판단하여 좌천시켜 버렸다.

 

⑤ 독일군 3400여명을 희생한 대가로 소련군 20여만명을 사상(死傷)시키다

승리의 주역이 되다

만슈타인이 제38군단장으로 부임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히틀러가 우연히 군단을 방문하였다. 그는 이때 ‘낫질 작전’을 설명하게 되었고 이를 경청한 히틀러는 바로 자신이 원하던 작전이었다며 적극 찬동하였다. 사실 히틀러는 제1차 대전 당시 실패한 슐리펜 계획과 별로 차이가 없던 황색 작전을 불신하던 중이었다. 갑작스런 총통의 지시를 받은 참모본부는 결국 만슈타인의 계획을 보완하여 프랑스 침공 작전을 재수립했다.

 

제2차 대전 당시 독일의 참전 내용을 살펴보면 갈수록 히틀러의 간섭이 커지면서 작전을 그르치는 경우가 많았다. 결과적으로 낫질 작전은 히틀러가 내린 얼마 되지 않는 올바른 간섭이었지만 역설적이게도 이때의 성공을 기점으로 이후 군부의 작전에 개입하는 빈도가 커져갔다. 1940년 5월 10일, 비밀리에 공병들이 미리 닦아놓은 아르덴 숲속의 이동로를 이용해 독일의 기갑부대가 진격을 개시했다.

 

/독일군 주력은 만슈타인의 주장대로 아르덴 고원지대를 치고나와 연합군 배후를 순식간 양단하였다. 결국 이는 프랑스 침공전 승리의 결정적 요인이 되었다.

 

만슈타인도 제38군단을 이끌고 센 강을 도하해 파리로 돌진해 들어갔다. 예상을 초과하는 속도로 적진을 돌파한 독일군이 연합군 주력의 배후를 차단하자 7주 만에 프랑스는 종말을 고하였다. 승자인 독일도 놀랄만한 전광석화 같은 대승이었는데 이후 역사에 이를 전격전이라 기록하였다. 이 공로를 인정받아 그는 중장으로 진급하였고 뛰어난 참모로 뿐만 아니라 전략적 안목을 가진 지휘관으로 두각을 나타내게 되었다.

 

1941년 6월 22일, 독일이 소련을 전격 침공하였다. 만슈타인은 레프 원수가 지휘하는 북부집단군의 선봉대라 할 수 있는 제56장갑군단을 지휘하며 소련 북부의 요충지인 레닌그라드를 향해 부대를 진격시켰다. 그의 부대는 개전 후 4일 만에 무려 300여 ㎞를 전진하는 놀라운 기동력을 과시했는데, 무주공산의 대지를 그냥 달려간 것이 아니라 첩첩이 방어막을 치고 있던 소련군들을 격파하면서 이룬 놀라운 전과였다.

 

독소전쟁 초기인 1941년 6월부터 10월 사이에 독일군이 보여준 연이은 대승은 소련군보다 월등히 많은 병력과 장비로 무장했기 때문이 아니었다. 사실 전쟁 내내 독일은 병력 및 장비가 열세였다. 이런 전력 격차에도 불구하고 무려 2,000㎞를 진격 했다는 것은 개전 초기 소련군 지도부의 무능함도 하나의 중요한 이유이겠지만 만슈타인과 같은 독일군 지휘부의 전술이 뛰어났기 때문이라는 것이 중론이다.

 

/1941년 제56장갑군단장 시절의 만슈타인. 그는 소련을 침공한 독일군 부대 중 최고의 돌파를 선보였다.

 

크림 반도를 제압하라

민스크, 스몰렌스크, 키예프에서 수십만의 소련군이 연이어 격파되어 나갔고 독일은 쉽게 이 전쟁에서 이길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소련의 항전 의지는 쉽게 꺾이지 않았고 결국 첫눈이 내리기 시작한 10월 말부터 독일의 진격은 서서히 둔화되었다. 바로 이시기에 만슈타인은 남부집단군 예하 제11군사령관에 전격 임명되었고 지지부진한 크림 반도 점령 임무가 부여되었다.

 

만슈타인은 크림 반도를 완전히 제압하려면 반도 남서쪽의 전략요충지인 세바스토폴의 공략이 전제되어야 하는데 이것이 상당히 힘들다고 예상했다. 세바스토폴 자체가 험한 지형을 바탕으로 크림 전쟁, 제1차대전, 러시아 내전 등을 거치면서 만들어진 난공불락의 요새였다. 1941년 10월, 독일은 세바스토폴을 제외한 크림 반도 대부분을 평정하였지만 그의 예측처럼 소련군의 격렬한 저항에 막혀 더 이상 도심으로의 진격이 저지되었다.

 

/크림 반도 공략을 상의 중인 제11군 지휘부. (좌에서) 작전참모 부셰, 사령관 만슈타인, 참모장 워홀러.

 

그러자 스탈린은 반격을 결심하고 12월 25일부터 세바스토폴 정반대 편인 케르치에 지원군을 투입시켜 양동 작전을 펼치기 시작하였다. 독일군이 세바스토폴에 정신이 팔려 있는 틈을 타서 장비가 변변치 않아 상륙이 순조로웠던 것은 아니었지만 소련 제44, 47, 51군이 케르치에 전개할 수 있었다. 뒤통수에 갑자기 위기가 닥치자 독일은 세바스토폴과 케르치 양쪽에 있는 소련군 중 어느 하나를 먼저 상대하여야 했다.

 

만슈타인은 어차피 세바스토폴에 갇힌 소련군은 요새 밖으로 나설 수 없으니 등 뒤에 등장한 적을 먼저 처단하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1942년 1월 15일, 독일군은 뒤로 돌아 일제히 공격을 개시하였다. 케르치에 교두보를 구축하고 반격 준비에 여념이 없던 소련군은 예상치 못한 독일의 일격에 당황하였다. 이후 4개월 간 벌어진 격전에서 만슈타인은 특유의 기동전으로 소련군의 허를 찔렀다.

 

남쪽에 위치한 소련 제44군을 격파하고 배후까지 일거에 달려 나간 것이었다. 독일군이 자신들 쪽으로 진격할 것으로 예상하던 북쪽의 제51군은 앞만 보고 있다가 뒤를 차단하여 버리자 허물어져 내렸다. 이른바 느시사냥 작전이었는데, 그 결과 소련군은 20여만 명의 사상자와 포로를 기록하고 물러났고 반면 독일군의 피해는 3,400여 명 수준이었다. 이제 남은 것은 케르치 일대에서 격전이 벌어지는 더욱 강력해진 세바스토폴의 소련군이었다.

 

/느시사냥 작전 당시 항복하는 소련군. 당시 만슈타인은 소련보다 적은 전력으로 압도적 대승을 이끌었다.

 

⑥ 히틀러, 스탈린 이름을 딴 스탈린그라드 점령에 집착하다가...

원수가 되다

다시 세바스토폴로 돌아왔지만 그 사이에 요새는 더욱 견고해졌다. 고민을 거듭한 만슈타인은 희생을 감수하며 점령할 것이 아니라 세바스토폴을 완전히 초토화시키기로 결심했다. 모든 것을 하나하나 점령하려다가 발목이 잡히고 결국 독일에게 독이 되어 돌아온 대표적인 사건이 1년 후에 벌어진 스탈린그라드 전투다. 만슈타인은 총참모본부에 요청해 동원할 수 있는 모든 포병 예비대를 세바스토폴 인근으로 집결시켰다.

 

1942년 6월 1일부터 천지를 찢는 무시무시한 독일군의 포격은 장장 열흘간 계속되었다. 드디어 지난 7개월간 독일의 공격을 물리친 세바스토폴의 요새들이 하늘을 향해 차례차례 뚜껑을 열었고 만슈타인은 보병들에게 돌격명령을 내렸다. 치열한 백병전 끝에 7월 3일 요새를 함락시킴으로써 8개월간 계속된 길고긴 무시무시했던 공성전을 승리로 이끌었고 그는 원수로 진급되었다.

 

/만슈타인은 세바스토폴 점령을 가장 자랑스럽게 생각했다. 이 전공을 인정받아 원수의 자리에 올랐고 좌측에 붙은 크림 반도 전투 기장은 그의 자부심이 되었다.

 

1942년 여름이 되자 독일은 모스크바라는 상징적 목표보다 코카서스의 자원을 염두에 두고 주공 방향을 남부로 바꾸고 기존의 남부집단군을 대폭 증강시켜 A, B집단군으로 나누었다. 8월 23일 개시된 이른바 청색작전에서 독일은 코카서스의 유전과 곡창지대를 차지하기 위해 A집단군이 남하하는 동안 B집단군이 스탈린그라드를 중심으로 하는 볼가 강 교두보를 장악하려 하였다.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작전의 본질이 변질되었는데, 그 이유는 도시의 이름이 스탈린그라드였기 때문이었다. 특히 히틀러는 자존심을 앞세워 스탈린이라는 이름을 딴 이 도시의 점령에만 집착하였다. 1942년 11월 22일, 앞만 보고 이전투구를 벌이던 30만 명의 독일 제6군은 소련군의 기습적인 포위에 의해 도심 안에 엄중 고립되었다. 독일 총참모본부는 스탈린그라드를 사수하느냐 아니면 후퇴하느냐를 두고 고심하게 되었다.

 

지휘부는 탈출을 요청했지만 히틀러는 이곳을 차지하자마자 뒤로 돌아 나오는 것이 아쉬워서 현지 사수를 명하였다. 대신 구원부대를 조직하여 독일 제6군을 구출하기로 결심했는데, 이렇게 탄생한 부대가 돈집단군이었고 사령관으로 만슈타인이 낙점되었다. 급하게 창설된 돈집단군에 부임한 만슈타인은 자신이 지휘할 배속부대를 살펴보고는 아연실색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실질적으로 구원 작전에 투입할 부대가 너무 초라했던 것이었다.

 

/만슈타인은 긴급 조직된 돈집단군을 이끌고 스탈린그라드에 포위된 제6군의 구출에 나섰다. 하지만 그에게 주어진 전력도 부족하였고 제약도 많았다.

 

전쟁의 균형추가 바뀌다

하지만 만슈타인은 망설일 시간이 없었다. 12월 11일 그는 빈약한 전력으로 200킬로미터를 전진한 뒤, 스탈린그라드에 고립된 제6군을 구출하는 공세를 시작하였다. 돈집단군은 순식간에 앞을 가로막던 소련군을 양단해 동쪽으로 밀어붙이는 기적과도 같은 괴력을 발휘했다. 12월 22일, 만슈타인은 스탈린그라드 서쪽 35킬로미터까지 접근하여 제6군에게 서쪽으로 탈출해 돈집단군과 전선을 연결하라고 지시했다.

 

하지만 히틀러의 현지사수 명령을 금과옥조로 여기던 제6군 사령관 파울루스가 주저하면서 탈출 기회는 무산되었고 더 이상 버틸 수 없던 만슈타인은 후퇴하였다. 고립을 자초하고 더 이상 외부의 도움을 기대할 수 없게 된 제6군은 1943년 2월에 소련군에게 항복했다. 도시에 고립된 독일군 33만 명 중 죽지 않고 포로가 된 병력은 9만 명이었으나 전쟁이 끝난 뒤 고향으로 살아서 돌아간 사람은 겨우 5,000명뿐이었다.

 

/히틀러의 후퇴 불가 명령을 제6군 사령관 파울루스(좌)가 맹종함으로써 천신만고 끝에 160여 킬로미터를 전진하여 탈출로를 연결하려던 만슈타인의 노력은 수포로 돌아갔다.

 

독소 전쟁 개전 1년간 무려 500만 명이 넘는 소련군이 죽거나 포로가 되었는데, 이와 비교한다면 스탈린그라드에서 입은 독일군의 피해는 상대적으로 아주 작았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를 기점으로 독소 전쟁의 균형추가 기울기 시작했다는 것은 잠재적인 독일의 전쟁 수행 능력이 그만큼 소련에 비해서 절대적으로 열세였다는 증거다. 이처럼 스탈린그라드의 패배는 독일에게 심각한 후유증을 남겼다.

 

제6군의 현지 사수 덕분에 코카서스로 진격했던 독일 A집단군이 안전하게 후퇴할 수 있었고, 이런 이유 때문에 만슈타인이 제6군을 구원하는 데 적극성을 보이지 않았다는 주장이 나오기도 한다. 하지만 당시에 만슈타인이 이용할 수 있었던 전력은 충분치 않았다는 점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오히려 다섯 배나 많은 소련군을 가르며 스탈린그라드 인근까지 무려 150킬로미터를 내달린 것 자체가 한마디로 기적이었다.

 

1943년 2월, 와해 된 남부전선의 제 부대를 통합하여 새로운 남부집단군이 창설되었고 만슈타인이 지휘관으로 부임하였다. 독일은 엄청난 손실을 입었지만, 단지 지도상에 그어진 전선만 놓고 본다면 지난 6개월 전으로 돌아온 것과 같았다. 그는 소련의 추격권 밖인 하리코프 서쪽으로 부대를 이동시키고 재정비에 몰두했다. 바로 이때 스탈린그라드에서 치욕을 입은 독일에 복수할 기회가 의외로 일찍 찾아오게 되었다.

 

/스탈린그라드에 고립되어 있던 독일 제6군은 항복하였고 이를 기점으로 전쟁의 균형추가 서서히 바뀌었다. 최대 33만 명에 이르렀던 독일 제6군 병사 중 전후 살아서 귀환한 자는 5,000명에 불과하였다.

 

⑦ 소련군 20개 사단을 도심으로 유인해 청소하다

놀라운 반격

스탈린그라드에서 대승을 거둔 소련은 전쟁 초기에 독일이 번개처럼 러시아로 밀려들어왔던 것처럼 이제는 독일을 그렇게 몰아붙이면 되는 것으로 착각하였다. 승리에 도취된 소련군은 역습에 대한 대비도 없이 하리코프로 몰려 들어갔다. 소련군은 도시 외곽에서 방어를 하던 독일군을 돌파해 기분 좋게 도시를 탈환했지만 사실 멋모르고 그물 안에 들어온 가엾은 하룻강아지 꼴이었다.

 

때를 기다리던 만슈타인은 소련군의 배후를 끊고 도심을 청소하도록 명령했다. 퇴로를 막은 독일군은 화력을 집중시킨 후 도심으로 진격을 개시하였고 3월 15일 전투가 종결되었을 때, 20여개 소련군 사단이 사라졌다. 독일군은 순식간에 하리코프와 벨고로드를 재점령하면서 스탈린그라드에서 소멸된 제6군에 대한 앙갚음을 했는데, 이를 제3차 하리코프 전투라고 한다. 이 전투는 독일이 제2차 대전 기간 중 성공한 마지막 공세였다.

 

/하리코프 도심에 몰려 있는 소련군을 소탕하기 위해 진격하는 친위장갑군단 소속의 전차들. 소련이 방심한 틈을 타서 만슈타인은 놀라운 반격전을 성공시켰다.

 

그런데 이 승리는 동부전선 중앙부인 쿠르스크 일대를 독일 쪽으로 불룩하게 돌출시키면서 독일과 소련 모두가 이곳을 놓고 일전을 벌일 수밖에 없는 당위성을 안겨주었다. 독일은 만일 이곳만 재점령한다면 전선을 축소시켜 전력을 회복할 시간을 벌 수 있을 것으로 판단했고, 소련의 입장에서는 당연히 이러한 독일의 예견된 진격을 막아야 했다. 독일은 전쟁의 주도권을 회복하고자 결심하고 성채 작전이라 명명한 공세를 준비했다.

 

만슈타인은 이왕 결전을 벌이려면 소련군 전열이 흩어진 지금 당장하자고 주장했지만 제9군 사령관 모델을 중심으로 하는 일부는 전력을 갖춘 후 시작하자는 의견을 피력했다. 사실 결과적으로는 만슈타인의 주장이 맞는 것 같지만 당시 독일의 상황을 고려하면 하리코프 전투 직후 계속 공세를 유지하기 어려웠던 것 또한 사실이었다. 이때 히틀러가 후자의 손을 들어주었고 이렇게 작전이 뒤로 연기되면서 소련군의 방어막은 공고해졌다.

 

90만 명의 병력과 당시 동원할 수 있던 최후의 전력과 다름없는 2,500여 대의 기갑 장비로 무장한 독일군과 150만 명의 병력과 3,500여 대의 기갑 장비를 준비한 소련군이 건곤일척의 대회전을 벌이게 되었는데, 독일의 계획을 간파하고 있던 소련군이 철통같은 방어막을 형성해놓은 후 먼저 공격을 개시하면서 전투는 시작되었다. 이른바 역사상 최대의 기갑전으로 유명한 쿠르스크 전투다.

 

/만슈타인이 하리코프를 탈환하자 전선에 거대한 돌출부가 생겼고 이를 놓고 독일과 소련은 역사상 최대의 기갑전을 벌이게 되었다.

 

강철의 무덤

작전 초기에 독일군은 소련군의 선제공격과 잘 갖춰진 대응 태세 때문에 돌파구를 형성하는 데 난항을 겪고 엄청난 피해를 입기 시작하였으나 전투가 계속되자 상대적으로 앞선 교전 능력을 발판으로 조금씩 진격에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그런데 바로 그때 이탈리아에 연합군이 상륙했다는 소식을 들은 히틀러가 이탈리아 방어가 시급하다고 판단하여 공세를 중단하고 주요 부대를 철수시켰다.

 

이제 독일군은 병력과 장비의 열세로 더 이상 공세로 나올 수가 없었고, 결과적으로 쿠르스크 전투는 동부전선에서 독일이 실시한 마지막 공세로 기록되었다. 확실히 독일군이 수세에 몰렸지만, 하리코프에서 뼈아픈 경험을 얻은 소련군은 무작정 앞으로 치고 나오지 않고 전선을 최대한 밀착시켜 독일군을 서서히 몰아붙였다. 독일군이 수세에 몰린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었고 이제 이를 극적으로 반전시키기는 어려워 보였다.

 

/쿠르스크 평원은 전차들의 거대한 무덤으로 바뀌었다. 전술적으로 소련이 더 큰 피해를 입었지만 독일은 더 이상의 손실을 감당하기 어려웠다.

 

만슈타인은 이제는 총통이 군부에 대한 간섭을 꺾고 동부전선의 총책임자로 자신을 지명해주기를 바랐다. 그는 히틀러가 뒤로 빠지고 자신의 책임 하에 전쟁을 치를 수 있다면 분명히 지금보다 더 잘할 수 있으리라고 자신하고 있었다. 군부의 많은 이들도 이러한 만슈타인의 의지에 공감했지만, 문제는 히틀러가 절대로 자신의 과오를 인정하는 인물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만슈타인은 자신보다 히틀러의 신임이 두텁고 말 주변이 좋은 중부집단군 사령관 클루게로 하여금 고집불통의 총통을 설득하도록 했으나, 히틀러는 전선의 지휘관들이 줄기차게 요구하는 지휘에 관한 재량권을 단호히 거부했다. 이제 만슈타인은 더 이상 자신이 전선에서 할 수 있는 것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기동전의 전문가인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극히 제한되어 있었다.

 

예하부대에 배치된 티거 같은 중전차를 사용하려 해도 총통에게 일일이 허락을 받아야 했다 설령 허락을 받아냈다 해도 현지사수만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히틀러의 명령 때문에 이를 효과적으로 사용할 수도 없었다. 만슈타인은 전략상 필요 없는 곳을 과감히 비워주고 이렇게 확보한 공간을 이용하여 기동전을 펼치기를 원했지만, 히틀러는 작전상 후퇴라는 개념을 전혀 인정하려 들지 않았던 것이다.

 

/히틀러는 만슈타인의 실력을 인정했고 적극 이용하였지만 귀족 출신이라며 가까이에 두려하지 않았다. 반면 만슈타인도 총통의 명령을 충실히 따랐지만 단지 그가 명령권자였기에 그랬을 뿐이었다.

 

⑧ 독일군 50만명을 희생해 소련군 150만명을 사상시키다

총통의 강요

이제 독일군이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은 후퇴뿐이었는데 철수에 대한 히틀러의 히스테리는 계속되었다. 하지만 히틀러의 명령을 좇아 무의미하게 현지사수를 한다는 것은 붕괴를 의미했다. 히틀러는 지원도 해주지 못하면서 독일의 젊은이들에게 무조건 현지에 주저앉아 싸우다가 죽으라고만 강요했다. 전쟁 중반기 이후 많은 독일군 부대들이 히틀러의 고집 때문에 이동의 제한을 받아 붕괴된 경우가 부지기수였다.

 

1943년 9월 전선의 상태가 악화일로로 치닫자, 만슈타인은 히틀러의 허락을 간신히 받아 남부집단군을 드네프르 강 연안으로 철수시켰다. 전략상으로는 오데사까지 일시에 후퇴해버리는 것이 동부전선 전체를 짧게 단축시키고 방어선을 좀 더 튼튼히 구축할 수 있는 좋은 방법이었지만, 히틀러가 일거에 200킬로미터를 후퇴시켜 주지 않을 것이 명약관화했기 때문에 이 정도도 그야말로 감지덕지할 형편이었다.

 

/표정만으로도 자신감을 알 수 있는 소련군의 모습. 1943년 가을 이후 독일이 이 전쟁에서 이길 가능성은 사라졌다.

 

남부집단군이 철수하면서 드네프르 강 연안에 기동전을 펼칠 수 있는 공간이 생기자, 만슈타인은 회심의 반격전을 구상했다. 그는 마침 제1, 2친위사단처럼 쿠르스크 전투 후에 시급히 재건된 핵심 기갑부대들을 사용해도 좋다는 허락을 받았다. 비록 그해 초 하르코프에서 보여준 것 같은 공세는 독일군의 여력으로는 더 이상 불가능했지만, 적어도 추격해 들어오는 소련군에게 심대한 타격을 안겨줄 자신은 있었다.

 

만슈타인을 쫓아온 소련군은 보르네슈전선군을 비롯하여 4개 전선군으로 이루어진 270만의 대군이었다. 루마니아군과 더불어 이를 막아내야 했던 남부집단군은 120만 명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렇기에 만슈타인은 즐겨 사용하던 대포위 전략을 사용할 수 없었고, 기갑부대를 송곳처럼 숨겨두었다가 소련군 전선의 취약 부분을 찢고 들어가 적의 종심을 타격한 뒤 곧바로 후퇴하는 식으로 치고 빠지는 전술을 반복하면서 소련군을 따돌렸다.

 

피아의 상황을 잘 알고 있던 만슈타인이 처음부터 노린 것은 승리가 아니라 적을 괴롭히면서 패배를 당하지 않는 것이었다. 1943년 가을이 되었을 때 전쟁에서 독일이 승리할 수 없음은 공공연한 비밀이 되었고, 전선의 지휘관들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아군의 피해를 최대한 줄이며 소련군의 공세를 누그러뜨리는 것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러한 전투도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드네프르 강변에 방어선을 구축하는 모습. 만슈타인은 천혜의 자연 지형을 이용하여 3배나 많은 소련군의 공격을 4개월 가까이 지연시켰다.

 

패할 수밖에 없는 이유

만슈타인이 지휘한 전투로서는 보기 드문 장기전이었던 드네프르 전투가 1944년 1월 말에 종결되었을 때, 단순히 서류상에는 소련의 승리로 기록되었지만 그것은 지리적으로 그들의 영토를 회복했기 때문에 그런 것이었다. 독소전쟁 전체를 살펴본다면 소련은 이제 겨우 독일이 전쟁 초기에 점령한 땅을 되찾았을 뿐이었다. 오히려 그 이면을 들여다보면 소련의 피해는 자못 심각한 지경이었다. 드네프르 전투에서 소련은 60만 명의 전사자를 포함해 150만 명의 희생자를 낸 반면, 독일의 피해는 50만 명 정도에 불과했다. 한마디로 소련의 전술적 패배라고 보아도 크게 문제가 없는 결과였다. 그러나 소련은 이를 쉽게 회복한 반면, 독일에게 50만 명이라는 피해는 쉽게 회복될 수 없는 엄청난 규모의 피해였다. 사실 이런 격차가 독소전쟁의 승패를 가른 결정적 이유였다.

 

/지친 보병들을 싣고 탈출에 나서는 독일군 전차. 만슈타인은 히틀러의 허락 이전에 코르산에 포위된 부대들에게 포위망을 빠져나오라고 명령했다.

 

약 1,000킬로미터에 걸친 남부집단군 관할 전선에서 지난 4개월간 벌어진 치열했던 공방전의 백미는 코르산에서 있었던 전투였다. 1944년 1월 500여 대의 전차로 중무장한 20여 만 명의 소련군이 6만여 명의 독일군을 포위해버렸는데, 이때 만슈타인이 망설이지 않고 구원부대를 즉시 투입함과 동시에 포위당한 제11, 52군단에게 포위망을 뚫고 나오라고 지시하였다. 덕분에 약 한 달간의 격전 끝에 고립된 독일군은 탈출에 성공했다.

 

이때 독일군이 탈출할 수 있었던 것은 그동안 순종적이었던 만슈타인이 보기 드물게 히틀러의 명령을 어기고 고립된 부대들에게 즉시 탈출을 지시했기 때문이었다. 당시에도 히틀러는 현지사수 후퇴불가를 외쳤지만 그렇게 하다가는 스탈린그라드의 비극이 재현될 것이 분명했기에 내린 용단이었다. 결국 히틀러가 마지못해 후퇴를 허락하였을 때는 이미 구출 작전이 종료된 뒤였다. 히틀러는 독일군의 후퇴에 동의하였으면서도 막상 만슈타인이 자신의 허락 이전에 부대를 철수시켰다는 사실을 알고 몹시 격노했다. 오만방자한 희대의 독재자는 자신이 허락한 시점에서는 탈출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은 전혀 인정하려 들지 않고 오로지 만슈타인의 판단만을 꼬투리 삼았던 것이었다. 이제 만슈타인과 히틀러는 서로를 원하지 않게 되었다.

 

/1943년 하르코프 전투 직전에 남부집단군 사령부를 방문한 히틀러. 사실 이때도 격려보다는 작전상 후퇴에 분노하여 이를 추궁하기 위해 온 것이었다. 항상 현지 사수만 외치던 히틀러는 만슈타인을 더 이상 필요로 하지 않게 되었다.

 

⑨ 히틀러, 소련군에게 공포의 대상인 만슈타인을 스스로 내치다

독일 스스로 맹장을 내치다

전쟁 개시 이후 만슈타인을 밀어붙인 적은 있었지만 단 한번도 제대로 이겨본 적이 없었기에 소련군에게 어느덧 그는 도저히 극복할 수 없는 공포의 대상이 되어버렸다. 소련은 만슈타인이 지휘하는 부대와 겨룰 때 전력이 뒤졌던 적이 거의 없었다. 그래서 그와 싸울 때 단지 겉으로 셀 수 있는 병력과 장비의 우위가 전혀 고려의 대상이 되지 못했다.

 

그런데 이러한 무서운 저승사자를 독일은, 아니 히틀러는 스스로 내쳐버렸다. 만슈타인은 허락된 범위 내에서 부대를 지휘하려 안간힘을 썼지만 히틀러는 만슈타인의 모든 것을 미워했다. 코르산 전투 후 만슈타인은 전열을 재정비하기 위해 남부집단군에 재차 철수를 지시했는데 패전과 전략적 후퇴를 구별하지 못한 히틀러는 이를 패전으로 인정했다. 아니, 만슈타인을 제거할 만한 명분을 찾았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1944년 티거 전차 부대를 점검하는 만슈타인. 하지만 전쟁 말기 들어서 아무리 일선 사령관이라도 총통의 허락 없이 전차부대를 움직일 수 없을 만큼 히틀러의 간섭은 극에 달하였다.

 

1944년 3월 30일, 히틀러는 만슈타인을 전격적으로 해임해버렸고, 이후 종전 때까지 재기용하지 않았다. 어려운 상황 속에서 한 명의 유능한 지휘관이 아쉬웠던 군부가 총통의 결정을 말렸지만, 독재자의 아집을 꺾을 수는 없었다. 아마 전쟁 중 전사했다면 롬멜을 몇 배 능가하는 전설이 되었을 만슈타인은 이렇게 전사에서 소리 없이 사라지게 되었고, 야인의 신분으로 독일의 비참한 패배를 바라보았다.

 

한마디로 만슈타인은 연합군과 독일군 모두 가장 유능한 장군으로 손꼽는 데 주저하지 않는 군인이었다. 독일 참모본부에서 근무한 킬만제그는 “전선에서 만슈타인보다 뛰어난 작전을 구사했던 인물은 없었다”라고 언급했을 만큼 독보적이었다. 만슈타인을 해임시킨 히틀러가 표면적 이유를 “그는 뛰어나지만 나치가 아니어서 믿을 수 없다”고 언급했을 만큼 총통도 능력만은 부인하지 않았다.

 

영국의 군사이론가였던 리들 하트는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만슈타인은 연합군에게는 가장 두려운 천재였으며 제2차 대전의 모든 지휘관 중 가장 유능한 인물이었다. 그는 스탈린그라드 이후 공세를 취하는 소련군 대병력을 유인해 포위 섬멸시키는 믿을 수 없는 기적을 만들었고, 그가 가는 곳에는 항상 승리가 따랐다. 만일 히틀러가 그의 작전에 관여하지 않았다면 역사가 달라졌을 것이다.”

 

/아들 게로와 함께 한 만슈타인. 아들의 전사 소식을 듣고도 묵묵히 부대를 지휘하였을 만큼 만슈타인은 공과 사의 구분이 엄격했다.

 

거절된 백의종군

연이어 굴욕적인 패배를 당한 소련에게 만슈타인은 결코 잊을 수 없는 미움의 대상이었다. 4년에 걸쳐 동부전선에서 셀 수 없을 만큼 수많은 전투가 벌어졌지만, 소련은 그를 제대로 이겨본 적이 단 한 차례도 없었다. 단지 결과만 놓고 소련이 이겼다고 우길만한 전투는 여러 차례 있었지만, 설령 그런 경우조차도 만슈타인이 패했다고 볼 수는 없었다. 이런 사실은 누구보다도 소련이 더 잘 알고 있었다.

 

소련이 자신을 미워한다는 것을 만슈타인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는 해임 후 1945년 1월에 거주하던 리그니츠에서 가족을 이끌고 서쪽으로 이사했다. 가족을 소련의 보복으로부터 보호하고 싶은 본능적인 이유에서였다. 이처럼 그는 평범한 가장이기도 했지만 그러고 나서 홀로 참모본부를 찾아가 백의종군을 요청했을 만큼 자신에게 주어진 의무를 죽을 때까지 다하려 했던 군인이기도 했다.

 

/전쟁 말기 참모총장이었던 구데리안(우)은 흔히 기갑부대의 아버지라 불리는 또 하나의 명장이다. 만슈타인은 육군대학 동기인 그를 찾아가 백의종군을 요청하였지만 히틀러의 반대로 군복을 다시 입지 못하였다. /LIFE

 

종전 후인 1945년 8월 23일에 만슈타인은 슐레스비히에서 영국군에게 체포되었는데, 이때 소련이 폴란드와 크림 반도에서 자행된 학살 사건과 관련하여 그를 전범으로 기소해 벌을 주겠다며 신병을 인도해달라고 난리를 쳤다. 하지만 그는 런던 인근에 위치한 제11포로수용소에 수감되어 재판을 받았고 1949년에 18년 금고형을 선고받고 복무했으나 건강상의 이유로 1953년에 석방되었다.

 

사실 만슈타인은 영국과 별로 관련이 없어 소련이 재판권을 갖는 것이 타당했다. 예를 들어 영국군에게 체포된 클라이스트의 경우는 소련의 요구에 따라 1948년에 신병이 인도되었다. 하지만 만슈타인의 명성을 잘 알고 있던 영국은 얼떨결에 굴러 들어온 거대한 호박으로부터 알아내고 싶은 것이 너무 많아 소련의 요구를 거부했다. 한마디로 만슈타인은 그와 칼을 섞지 않은 상대로부터도 인정을 받았던 것이었다.

 

만슈타인이 수감 당시에 수많은 연합국 측의 군사 관계자들이 그로부터 군사적인 지식을 한마디라도 더 듣고 싶어서 줄을 섰다는 이야기가 전해질 정도인데, 그 군사관계자들 중 한 명이 바로 앞에서 언급한 리들 하트였다. 비록 적국의 패장을 대놓고 존경할 수는 없었지만 이처럼 만슈타인은 누구에게나 경외의 대상이었다. 하다못해 소련조차도 미워하는 감정 이면에 그에 대한 두려움을 함께 가지고 있었다.

 

/전후 기소되어 재판을 받을 당시의 만슈타인. 그에게 가장 많은 피해를 입은 소련이 직접 처벌하겠다고 신병 인도 요구를 하였으나 영국이 거부하였다.

 

⑩ "위대한 장군 한 사람이 사병 1만명의 피를 구한다"

군인으로서의 인생

종전과 동시에 다가온 냉전은 뛰어난 전략가 만슈타인을 그냥 야인으로 놔두지 않았다. 독일을 부흥으로 이끈 서독의 수상 아데나워가 그를 1955년에 새롭게 창설한 독일연방군의 군사고문으로 소환한 것이었다. 나토의 일원으로 서방을 최전선에서 보호하는 임무를 띠고 탄생한 독일군의 제1주적은 바로 철의 장막 동쪽에 있는 소련이었는데, 이들을 막기 위해 소련의 저승사자였던 만슈타인이 필요했던 것이었다.

 

만슈타인의 회고록과 전사에 기록된 그의 업적을 살펴보면, 놀라운 전과와 지휘 능력에 많은 사람들이 감탄하고 찬사를 보낸다. 하지만 이러한 뚜렷한 기록에도 불구하고 만슈타인의 업적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가장 큰 이유는 그의 처신 때문이었다. 비록 권력 주변에서 맴돌며 사익을 취하던 정치군인은 아니었지만 히틀러의 명령에 맹종하였던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전후 독일연방군 행사에 초대된 만슈타인. 정치군인이 아니었기에 전후에도 다양한 활동을 할 수 있었다.

 

할더에게 계속 낫질 작전을 주장하여 좌천당했던 것처럼 그는 부대를 지휘함에 있어서도 고집스러운 면이 없지 않았다. 그러나 히틀러의 엉뚱한 지시에 적극적인 항변 한 번 제대로 못하고 순종했던 것처럼 권력에는 약한 사람이었다. 또한 나치는 아니었지만 그의 부인은 광적인 나치 신봉자였고, 점령지에서 소련군 포로 대학살에 관여하지는 않았다고는 하지만 알면서도 방임했다는 등의 여러 비판이 제기되고 있다.

 

그래서인지 그가 쓴 회고록은 잘된 것은 자기 탓, 잘못된 것은 남의 탓으로 돌리는 자화자찬 수준에 불과하다는 극단적인 이야기까지 나오기도 한다. 하지만 여기서 먼저 이해해야 할 부분이 있다. 제2차 대전 종전 때까지 사실상 독일은 국민이 주권을 행사해본 경험이 없는 전제주의 국가였다는 점이다. 특히 귀족 출신이 많은 독일 군부의 지휘관 중 권위적인 최고 권력자의 명령을 함부로 거역하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처음 언급한 것처럼 만슈타인은 독일 역사상 최초의 민주 체제인 바이마르 공화국에 대해서 상당히 냉소적이었다. 전범재판에서도 그는 명령을 충실히 따르고 이행한 군인임을 내세웠으며, 군인과 군대에 민주적인 절차가 필요한지에 대해 의문시했을 정도였다. 사실 만슈타인뿐만 아니라 당시 많은 독일 군부의 장성들이 이러한 성향을 보인 데는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독일이 제대로 된 민주주의를 경험한 역사가 워낙 일천했기 때문이다.

 

/만슈타인은 민주주의적인 가치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였는데 젊어서 군국주의 교육을 받았고 바이마르 공화국 시절 같은 혼란한 시기를 거친 영향 때문이다.

 

뛰어난 전략가

만슈타인은 평소 지휘를 전쟁술 또는 전략 게임이라 불렀을 만큼 거시적으로 전장을 지휘했지만, 히틀러가 허락하지 않으면 실행하지는 않았다. 그는 히틀러가 독일군 최고 명령권자임을 끔찍하게 생각했으면서도 그가 내린 명령은 당연히 따라야 한다고 믿었다. 하지만 이런 모습 때문에 만슈타인을 정치 지향적이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왜냐하면 그는 태어나서 군복을 벗을 때까지 그렇게 길들여진 군인이었기 때문이었다.

 

제2차 대전이 워낙 거대했기 때문에, 이 시기에 활약한 장성급 이상의 지휘관들은 셀 수 없이 많다. 특히 수백만 명에 달하는 군대를 전쟁 내내 유지했던 독일, 소련, 미국, 영국의 경우는 오히려 장군의 수가 부족하여 전쟁 수행에 많은 곤란을 겪었을 정도였다. 그 정도로 많은 인물들 중에서 이 분야의 전문가들이 첫 손에 꼽는 데 주저하지 않는 만슈타인은 두말할 필요 없이 최대의 전쟁에서 가장 뛰어난 활약을 보여준 인물이었다.

 

/아내, 장남 게로와 함께 묻힌 만슈타인의 소박한 묘.

 

만슈타인은 무수한 승리를 엮어냈음에도 불구하고 패전국의 장군이었기 때문에 승장이라 할 수는 없다. 하지만 그 누구도 그를 패장으로 단정 지을 수 없다. 그는 권력자의 눈치를 보았지만, 그렇다고 아부하여 무조건 비위를 맞추려 하지도 않았다. 그는 군인으로서 전선에서 열과 성을 다해 싸웠지만 결코 군인의 지위를 벗어나지 않고 행동했기 때문에 전후에도 많은 존경을 받았다. 사실 명장인지 아닌지는 역사가 판단해줄 문제다. 왜냐하면 전쟁은 살육을 피할 수 없는 잔인한 시공간이어서 거기에서 나온 결과는 두고두고 평가를 내려야 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전쟁 자체가 바로 악이기 때문에 엄밀히 말해 전쟁에서는 선이라는 행위를 찾아낼 수가 없다. 굳이 고른다면 덜 악하고 보다 더 본분에 충실했던 경우만 호의적인 판단을 내릴 수 있을지 모른다.

 

“장군 한 사람의 명성은 사병 만 명의 피로 이룬 결과다”라는 이야기가 있지만, 이순신과 원균의 예에서 알 수 있듯이 같은 병사와 장비를 가지고도 승리를 이끄는 사람이 따로 있는 것을 보면 오히려 “위대한 장군 한 사람이 사병 만 명의 피를 구할 수 있다”가 맞는 말인 것 같다. 일방적인 후퇴에서도 뒤돌아서서 소련군을 곤혹스럽게 했던 만슈타인은 비록 전쟁에서는 패했지만, 전투에서는 항상 승리했던 명장이라 할 수 있다.

 

/침략자였던 독일의 지휘관으로 활약하였기에 국내에서는 그다지 많이 알려지지 않았지만 만슈타인은 한 시대를 주름잡은 뛰어난 장군임에는 틀림없다.

 

■만만치 않은 소련 1941년 모스코바 전투  2015.12.28

 파괴된 도심에서 탈출하는 키예프 시민들. 도시를 초토화시키면서 독일은 역사상 최대의 승리를 거두었지만 전쟁 계획은 뒤죽박죽이 되어버렸다. <출처: (cc) K. Lishko at Wikimedia.org>

 

잠시 멈춘 공세

1941년 9월 26일, 공식적으로 키예프 전투는 막을 내렸고 독일은 역사상 최대의 승전보를 올렸다. 하지만 그렇다고 전쟁이 종결된 것은 아니었고 소련의 저항은 계속 이어졌다. 독일은 여전히 공세의 주도권을 쥐고 있었지만 개전 후 석 달 만에 전쟁 계획은 완전히 뒤죽박죽이 되어버렸다. 연이어 경이적인 대승을 거두었음에도 애초에 수립한 시나리오대로 전쟁이 진행되었다고 보기는 애매한 상황이었다.

 

바바로사 계획(Operation Barbarossa)의 골격은 살아 있었지만 독일 침공군 주력이 키예프에 발이 묶이면서 사실상 여타 전선에서의 진격은 한 달간 중단되었다. 물론 휴전을 하였다는 의미는 아니지만 남부를 제외하고 의미 있는 교전은 벌어지지 않았다. 이제 논란이 많았던 키예프가 정리되었으니 독일은 처음에 세워놓은 계획대로 진격을 계속하면 되었다. 하지만 그것이 말처럼 쉬울 리는 없었다.

 

 애초 침공 계획에 의거, 2기갑집단이 원대 복귀하여야 했지만 너무 소모도 많고 지쳐 있었다. 4호 전차에 그려진 G마크가 구데리안이 지휘하던 제2기갑집단 소속임을 보여준다. <출처: Bundesarchiv>

 

먼저 키예프 공략을 위해 진격로를 돌려 남하하였던 부대들을 원대 복귀시켜야 했는데 핵심은 선봉에 서야 할 제2기갑집단이었다. 다시 500여 킬로미터를 북상시키는 것도 많은 시간이 걸리는 어려운 문제였지만, 그동안 너무 소모가 커서 원위치한 후에 전과 같은 전투력을 계속 선보일 수 있을지는 의문이었다. 사실 이는 제2기갑집단만의 문제가 아니라 당시 모든 독일군이 공통적으로 안고 있던 고민이었다.

 

독소전쟁이 발발한 후 석 달 동안 독일은 전사에 길이 남을 엄청난 진격과 전과를 선보였지만, 엄밀히 말해 1941년 8월 말까지 예정된 목표에 도달한 병단은 발트 해 연안을 따라 레닌그라드로 향하던 북부집단군(Heeresgruppe Nord) 하나밖에 없었다. 그것은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애당초 독일이 상정한 목표가 너무 과하였고 그만큼 소련을 만만하게 보았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목표가 컸던 만큼 엄청난 피로감이 밀려온 것은 당연하였다.

 

▲ 시간이 갈수록 독일의 소모도 커져 갔지만 제때 보충이 되지 않았다. <출처: Bundesarchiv>

 

연승과 함께 다가온 피로감

아무리 연이어 대승을 거둔다 해도 독일군 또한 소모가 따르는 것은 당연한 일인데, 문제는 제때 보충이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점이다. 8월 말까지 독일은 침공 당시 동원한 병력의 10퍼센트에 이르는 94,000여 명의 전사자와 346,000여 명의 부상자가 발생하였지만 이때까지 일선에서 필요로 하는 인원의 30퍼센트만 간신히 충원할 수 있었다. 당연히 기존 병력이 남은 공백을 메워야 했지만 그들도 너무 지쳐 있었다.

 

게다가 갈수록 보급이 제한을 받았지만 현지에서 약탈을 통해 조달할 수 있는 물품이라고는 일부 식량 정도 밖에 없었다. 노획하여 사용하려던 소련의 휘발유도 옥탄가가 너무 낮아 독일군 장비를 고장내곤 하였을 만큼 현지에서의 보급품 조달은 생각보다 어려웠다. 때문에 상당수의 물자를 본토에서 가져와야 했으나 소련의 열악한 교통망으로 말미암아 진격하면 할수록 어려움은 커져 갔다.

 

 전선에 투입되기 전에 퍼레이드를 벌이는 소련군. 엄청나게 패하고 있었지만 이를 능가하는 전력이 계속 전선에 공급되었다. <출처: 구 소련 선전사진>

 

설령 키예프 전투가 아니었어도 구조적으로 10월 초에 이르러 독일군의 진격 속도는 둔화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반면 시간이 흐를수록 소련의 방어선은 강화되었다. 스탈린의 아집 때문에 전술적으로 무의미한 여러 방어전에 매달리다가 엄청난 대패를 자초하고는 했지만 전선 전체를 놓고 볼 때 놀랍게도 소련군의 전력이 현저히 약화된 낌새는 보이지 않았다.

 

처음 언급처럼 석 달 만에 이런 문제점이 드러난 것은 독일의 계획이 생각보다 철저하지 못하였다는 증거다. 독소전쟁 이전에 있었던 여러 승리에 도취되어 너무 자만하고 있었던 것이다. 더구나 소련 침공 후부터 상상외의 대승을 연이어 거두다 보니 이런 어려운 사정을 일시적인 것으로 치부하였다. 이제 독일은 모스크바 점령이라는 한 가지 목표만 더 달성하면 이 전쟁에서의 승리는 확실하다고 생각했다.

 

▲ (좌)바바로사 계획 초안을 작성한 마르크스 제18군 참모장. 그는 주력을 양분하여 모스크바와 키예프의 동시 석권을 고려하였다.
(우)전쟁 전인 1930년대 말의 모스크바 시내의 모습. 소련의 수도였지만 워낙 큰 나라다 보니 단지 이곳을 점령한다고 해서 전쟁에서 승리하였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출처: 구 소련 선전사진>

 

모스크바의 정체성

독일이 소련을 침공하기로 마음먹은 이후부터 모스크바는 항상 논란의 중심에 서 있었다. 소련의 권력이 몰려 있는 수도이므로 전략적으로 당연히 탈취해야 할 대상임에는 이론(異論)의 여지가 없었다. 하지만 그곳의 점령이 전쟁의 종결을 의미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지난 역사가 이미 입증하고 있었다. 130여 년 전 나폴레옹은 보무도 당당히 모스크바에 입성하였지만 단지 그뿐이었다.

 

당시와 비교했을 때 철도 교통의 요지로 떠올랐다는 점 외에 모스크바의 위상은 그다지 바뀌지도 않았다. 사실 소련은 너무나 커다란 땅이어서 수도가 차지하는 전략적 위상이 폴란드나 프랑스만큼 크지 않았다. 이런 점은 오히려 소련이 더 잘 알고 있는 사실이어서 설령 모스크바를 잃는다 하더라도 당장 싸움을 멈추고 항복할 의사는 전혀 없었다.

 

독일에서도 단지 수도라는 이유만으로 서둘러 이곳을 점령할 필요가 있을까 하는 의문이 전쟁 전부터 일각에서 제기된 상태였다. 우선 전쟁의 방법이 바뀌었기 때문에 나폴레옹 시대처럼 바르샤바에서 스몰렌스크를 거쳐 모스크바에 이르는 동유럽 중앙 가도로만 군대를 진격시킬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렇다고 소련이라는 거대한 땅을 빗자루로 구석구석 쓸고 다니듯이 점령한다는 것은 400여 만의 대군을 동원한 독일로서도 가능하지 않은 일이었다.

 

그래서 독일은 핵심적인 몇몇 목표를 우선 선정하여 점령함과 동시에, 소련군을 섬멸하는 방법을 생각하였다. 1940년 8월, 제18군 참모장이던 마르크스(Erich Marcks) 중장이 지리적으로 부대 간 횡적 연결이 곤란한 프리페트(Pripet) 소택지(沼澤池)를 기준으로 침공군을 남북으로 양분시켜 모스크바와 키예프로 동시에 진격하는 침공 계획을 수립하였다. 독일 육군 최고사령부(OKH)에 제시된 그의 제안은 어느 정도 히틀러의 의중을 만족시켰다.

 

 1940년 당시 최고지휘부와 작전을 숙의 중인 히틀러. 독소전쟁 초기만 해도 히틀러가 군부의 의견을 완전히 무시하지는 않아 독일 육군 최고사령부(OKH)의 의견대로 모스크바를 주공으로 하는 침공안이 작성될 수 있었다. (전면 좌에서 우로 카이텔 국방군 총사령관, 브라우히치 육군 총사령관, 히틀러, 할더 육군 참모총장) <출처: (cc) Bundesarchiv at Wikimedia.org>

 

이제 남은 목표

‘나의 투쟁(Mein Kampf)’에서 언급하였듯이 우크라이나와 코카서스라는 실리적 목표를 우선시하였던 히틀러는 주공을 키예프로 향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 상태였다. 그런데 그는 군부의 생각과 달리 키예프와 더불어 동시에 점령할 또 다른 목표를 모스크바 대신 레닌그라드로 보았다. 사실 유럽의 시각에서 볼 때 모스크바보다 유럽과 러시아를 연결하는 관문인 레닌그라드가 차지하는 상징성이 더 컸다.

 

히틀러는 1940년 12월 총통명령 제21호를 하달하며 레닌그라드와 키예프를 동시에 점령한 이후에 모스크바로 향하라고 지시하였지만 여전히 군부의 생각은 달랐다. 그들은 승리에 대한 상징성 때문에라도 모스크바를 우선순위에서 배제할 수 없다고 보았고 오히려 주력을 이곳을 향해 배치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결국 독일은 북에서 남으로 레닌그라드, 모스크바, 키예프를 1차 진출선으로 정하고 침공군을 3개 병단으로 조직하였다.

 

침공 3개월이 지난 1941년 9월 말이 되자 예정대로 남부의 키예프는 함락되었고 북부의 레닌그라드는 독일군이 초입까지 다가갔다. 그런데 일선에서는 뭔가 잘못되어 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지금까지의 전과를 고려한다면 더 이상 소련의 저항은 없어야 했다. 사실 이 전쟁에서 승리하려면 점령보다 조속히 소련군을 붕괴시키는 것이 핵심이었다. 키예프 전투가 끝난 지금쯤은 그런 조짐이 보여야 했지만 전혀 그렇지 않았던 것이다.

 

이제 독일은 미루어 놓았던 모스크바를 점령함으로써 소련의 마지막 저항의지를 무너뜨리기로 결정하였다. 히틀러를 포함한 지휘부 내에서 주공의 지향점을 어디로 정할 것인지는 더 이상 논란거리가 되지 못하였다. 반면 지금까지 계속 그래왔듯이 스탈린은 대내외에 반드시 모스크바를 지키겠다고 선언하고 엄청난 대군을 속속 집결시키고 있었다. 독소전쟁의 전환점이 된 모스크바 전투(Battle of Moscow)는 이렇게 시작을 준비하고 있었다.

 

■Behind War

2016.08.21 'T1' 도입 반대한 맥아더, 獨·蘇에 밀려 뒤늦게 M16 개발

1925년, 미군은 기존 제식 소총인 M1903 대체 사업을 실시했다. 그리고 1928년, T1이 최종 후보작으로 선정됐다. 그러나 당시 육군 참모총장 맥아더는 도입을 거부했다. 재고가 많은 기존 탄 대신에 별도의 탄을 사용하면 보급체계에 문제가 생긴다는 이유였다. 맥아더의 생각은 충분히 타당했고 제2차세계대전에서 좋은 결과를 이끌었다. 하지만 30여년 후에는 오히려 변화를 막는 커다란 장애가 됐다.

 

군(軍)은 크게 사람과 무기의 조합으로 이뤄진다. 언제 벌어질지 모르는 전쟁에 대비하기 위해서 다양한 무기를 보유하는데, 그중 개별 병사들이 보유하는 소총은 가장 기본이 되는 무기다.

 

결론적으로 소총은 개별 병사가 단독으로 쉽게 휴대하고 사용할 수 있을 정도로 크기와 무게가 제한된다. 그런데 총탄을 발사해 목표물을 타격하는 종류의 무기는 일단 크고 무거워야 강한 위력을 발휘할 수 있다. 그래서 소총은 군이 사용하는 무기 중 가장 위력이 약한 무기라고 보면 된다. 이처럼 크기와 용도가 제한되다 보니 현대식 소총의 기본적 메커니즘과 스펙은 1841년 드라이제소총(후장식 강선소총)이 탄생한 후 지금까지 크게 바뀌지 않았다.

 

/M16 소총을 발사하고 있는 미군의 모습. /위키피디아

 

소총의 기능보다 군 운영 중시한 맥아더

하지만 개념과 외형은 비슷해도 1980년대 PC와 최신 PC의 능력 차이가 분명한 것처럼 당연히 소총의 성능은 꾸준히 향상돼 왔다. 그중 가장 커다란 변화라면 제2차세계대전 말을 기점으로 노리쇠를 일일이 작동시켜 한발씩 사격하는 ‘볼트액션소총’에서 연사가 가능한 ‘자동소총’으로 바뀌었다는 점이다. 단순한 차이 같지만 군의 주력 소총이 단발에서 연사로 바뀌는 데 거의 100년의 시간이 걸린 셈이다.

 

그런데 19세기 말에 기관총이 등장했다는 사실에서 알 수 있듯이 총을 연사하는 기술은 이미 오래전에 확보돼 있었다. 문제는 연사 시 발생하는 반동이 사거리와 정확도에 영향을 끼치는 점이었다. 반동을 잡으려고 초기 기관총 무게가 30㎏을 넘었을 정도였으니 들고 다니는 소총을 자동화하기는 생각보다 어려웠다.

 

/M1은 제2차세계대전 당시 최고의 소총이었으나 총탄 문제로 자동소총으로 진화하는 데 한계가 있었다. M1으로 행사 중인 미 해병 의장대. /이코노미조선

 

1914년 발발한 제1차세계대전이 방어자에게 유리한 참호전으로 일관하자 이때부터 공격자가 들고 다니며 사용할 수 있는 자동소총에 대한 필요성이 제기됐다. M1918 BAR 같은 초창기 자동소총이 등장했지만 현대 분대지원용 기관총보다 무거운 10㎏에 가까웠다. 반동을 잡으려고 권총탄을 사용하는 기관단총도 등장했지만 유효사거리가 불과 100m 이내였고 저지력과 정확도는 포기하다시피 했다.

 

결국 품질 좋은 자동소총의 개발은 종전 이후로 미뤄졌다. 1925년, 미군은 기존 제식 소총인 M1903 대체 사업을 실시했다. 이때 자동소총을 염두에 뒀지만 여전한 기술적 난제와 비용문제 때문에 노리쇠 작동 없이 방아쇠만으로 사격이 가능한 반자동소총으로 개발 방향을 선회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반동 문제가 여전히 발목을 잡았다.

 

1928년, 기존 7.62×63㎜탄을 대폭 축소한 7×51㎜탄을 사용해 반동을 잡은 T1이 최종 후보작으로 선정됐다. 테스트 결과 위력이나 사거리에서 크게 문제가 없음이 확인돼 관계자들을 흡족하게 만들었으나 당시 육군 참모총장 맥아더가 도입을 거부했다. 엄청나게 재고가 많은 기존 탄 대신에 별도의 탄을 사용하는 것이 보급체계에 문제가 많다는 이유였다.

 

군의 운영을 거시적으로 생각해야 하는 이의 입장에서는 제식무기나 보급품을 단순하게 통일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맥아더의 생각은 충분히 타당했고 제2차세계대전에서 좋은 결과를 이끌었다. 하지만 30여년 후에는 오히려 변화를 막는 커다란 장애가 됐다. 결국 우여곡절 끝에 1933년 기존 탄을 사용할 수 있도록 개조한 T3가 정식 소총으로 채택돼 1936년부터 양산에 들어갔다. 이것이 바로 너무나 유명한 M1 개런드 소총(이하 M1)이다.

 

/왼쪽 사진은 미 육군 참모총장 재직 시절의 맥아더(오른쪽 두번째)의 모습이다. 그는 탄약 보급 문제 등의 이유를 들며 T1 도입을 반대했다. 이는 결과적으로 소총 개발을 막은 장애 요인이 되긴 했지만, 제2차세계대전에서 좋은 결과를 이끌어냈다는 점을 고려하면 맥아더의 선택이 잘못됐다고 말하기 어렵다. 오른쪽 사진은 수원을 둘러보기 위해 지프차를 탄 유엔군 총사령관인 맥아더(차량 앞 쪽 탑승자)와 미군 장교들의 모습. /조선일보 DB

 

독일의 Kar98, 소련의 모신나강, 영국의 리엔필드처럼 당시 주력 소총은 분당 10발 내외를 발사할 수 있었지만 M1은 60발 정도 사격할 수 있었다. 당시 소련의 SVT-40, 독일의 G43처럼 여타 반자동 소총도 있었지만 성능 면에서 M1은 가히 독보적이었다. 한마디로 승전의 공신 중 하나였다.

 

하지만 M1은 탄생한 지 10년도 되지 않아 커다란 도전을 받았다. 전쟁 말기에 총의 역사를 새롭게 쓴 독일의 StG44가 등장한 것이었다. StG44는 불발로 끝난 T1처럼 보다 작은 규격의 탄환을 사용해 반동을 줄였지만 화력과 연사력은 뛰어났다. 이런 종류의 소총을 별도로 돌격소총이라 칭하는데, 전후 너무나도 유명한 AK-47과 M16의 탄생에 영향을 줬다.

 

냉전 시대가 개막하면서 소련이 지금까지도 최고의 소총으로 평가받는 AK-47을 내놓자 미국도 더 이상 M1으로는 부족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소련처럼 전혀 새로운 개념의 돌격소총을 만들려하지 않고, M1에 대한 신뢰가 너무 크다 보니 이를 자동화하는 방식으로 접근했다. 그렇게 해서 1959년 M14 자동소총이 탄생했다.

 

하지만 월남전에서 곧바로 문제가 드러났다. 기본적으로 M1을 자동화한 것이다 보니 연사 시 반동이 심했고 오히려 무게와 크기가 늘어나 휴대가 불편했다. 결국 1964년 5.56×45㎜탄을 사용하는 M16이 대항마로 결정되면서 M14는 5년 만에 2선으로 물러났다.

 

https://www.youtube.com/watch?feature=player_embedded&v=Fsa_C-gSYAQ

'M16' 소총이 발사되는 원리. /glitchunter313 유튜브 채널 

 

제2차 세계대전 후 'M1' 소총 한계 드러나

결과론이지만 만일 30여년 전 맥아더가 T1의 개발을 승인했다면 M14는 지금도 주력으로 사용되는 성공적인 자동소총으로 남아있을지 모른다. 1949년 실전 배치된 AK-47이 여전히 가장 많이 사용되는 소총이고, 현재 미군의 M4 카빈이 M16을 개량한 소총이라는 점에서 알 수 있듯이 아주 잘 만든 총은 오랫동안 사용될 수 있다. 비록 맥아더에 의해 좌절됐지만 T1은 그런 역사를 시작할 만한 자격이 충분했던 것이다.

 

하지만 분명히 M1은 탄생 10년 후에 있었던 제2차세계대전에서는 최고의 소총이었다. 1977년 “모든 사람들이 집집마다 컴퓨터를 들여 놓을 이유는 없다”고 이야기했던 이가 당대 IT 분야를 선도하던 디지털이큅먼트(DEC)의 창업자 켄 올슨이라는 점을 상기한다면, 아무리 전문가라도 30년 후까지 정확히 예견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래서 당시 맥아더의 결정이 선견지명이 없었다고 비판하기도 어렵다.

 

https://www.youtube.com/watch?v=lv9k2czwToM&feature=player_embedded

'M16' VS 'AK47' 성능 비교 영상. /mixflip 유튜브 채널

 

2016.08.25 [ BEHIND WAR  2차 세계대전 전투기]

항공강국 영국, 방심하고 독일에 비행기 엔진 공급…실수 잊고 소련에도 첨단 엔진 제공했다가 낭패

항공기 엔진은 최고의 기술력이 필요한 분야다 보니 제작 업체가 그다지 많지 않다. 특히 최신예 전투기에 장착되는 고성능 엔진의 경우는 더욱 그렇다. 영국의 롤스로이스는 미국의 제너럴일렉트릭(GE), 프랫앤드휘트니(P&W)와 더불어 엔진 시장을 삼분하는 강자다. 역사도 100년이 넘었고 꾸준히 좋은 제품을 만들다 보니 롤스로이스 엔진은 역사적으로 상당히 재미있는 일화를 만들고는 했다. 그중에는 역설적이지만 적을 돕는 아이러니를 연출한 사례도 있다.

/Bf 109(아래) 전투기와 Ju 87 급강하 폭격기. 제2차대전 당시 독일 공군을 상징하는 두 전투기의 탄생에 도움을 줬던 것이 영국 롤스로이스였다는 사실은 한마디로 역사의 아이러니라 할 수 있다.

 

제2차세계대전 당시 독일 공군은 전사에 길이 남을 만한 수많은 에이스를 배출했는데, 무려 100여기 이상의 적기를 격추시킨 수퍼에이스들을 일일이 거론할 수 없을 정도다.

 

獨, 자존심 버리고 英 엔진 도입

참고로 당시 연합국 최고의 에이스는 62기를 격추한 소련의 이반 코체더브지만 이는 독일 공군에서 200등 밖일 정도다. 작전기의 성능이 당대 톱클래스에 오를 만큼 좋았던 것도 이런 놀라운 결과가 나온 하나의 이유였다. 그중 에이스들의 애마로 사용된 Bf 109 전투기와 전격전을 앞장서서 이끈 Ju 87 급강하 폭격기가 대표적이다. 꾸준히 개량되기는 했지만 1930년대 초반에 개발된 이 전투기들이 종전까지 계속 사용됐다는 점은 그만큼 잘 만들었다는 의미다. 한마디로 Bf 109와 Ju 87은 제2차대전을 상징하는 대표 아이콘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롤스로이스를 떼어놓고 제3제국의 극성기를 상징하던 이들의 탄생을 설명하기가 힘들다.

 

 

독일은 기계 공업 강국이지만 제1차세계대전 패전 후 맺은 베르사유조약으로 인해 무기로 전용될 수 있는 품목의 개발과 제작에서 제한을 받아왔다. 따라서 히틀러가 재군비를 선언한 후 막상 전투기 개발을 시작했을 때 신뢰할만한 엔진이 없었다. 기체 제작은 자신이 있었지만 당장 심장 없이 좋은 전투기를 만들어내기는 어려웠던 것이다.

 

그런데 재미있게도 영국이 이때 독일에 엔진을 공급했다. 물론 영국도 최신형 엔진은 전략물자였기에 상업적 거래로 제공이 가능한 롤스로이스 케스트랄 엔진(이하 케스트랄)이 공급됐다. 반대로 독일은 이런 상황이 몹시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었지만 동체와 엔진을 분리시켜 신예기 개발에 소요되는 시간을 최대한 단축하려는 계획이 있었기에 우선 영국제 엔진 도입이 이뤄진 것이었다. 덕분에 독일 공군의 차기 주력기로 채택되기 위해 당시 치열한 경합을 벌이던 Bf 109, He 112, Ar 80, Fw 159의 4개 후보 기종 중 Fw 159만 제외하고 모두 케스트랄이 장착됐고 급강하 폭격기로 낙점된 Ju 87도 실험 1호기에 동종 엔진이 탑재됐을 정도였다.

 

이처럼 제2차대전 당시 위력을 떨친 독일 공군의 시작을 논함에 있어 롤스로이스의 엔진을 빼놓을 수 없다. 전쟁 내내 영국을 지겹도록 괴롭혔던 독일 공군의 주력 Bf 109와 Ju 87의 탄생에 도움을 줬던 것이 롤스로이스였다는 사실은 한마디로 역사의 아이러니라 할 수 있을 것 같다. 이런 결과는 영국에 커다란 교훈을 줬을 것 같지만 어이없게도 같은 실수를 곧바로 반복하고 말았다.

 

제2차대전 종전 무렵 등장한 제트 전투기인 독일의 Me 262는 전세를 뒤집지는 못했지만 이후 하늘의 주역이 바뀌었음을 알리는 이정표가 됐다. 그런데 당시 소련은 항공기 분야를 선도하는 나라가 아니었고 특히 제트기의 기술 기반은 취약했다. 이것은 전후 미국 주도의 새로운 세계 질서를 구축하는 데 있어 소련이 공산권 맹주로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할 수도 있었음을 뜻하는 것이기도 했다.

 

롤스로이스 엔진 받아 발전한 소련 항공기술

/한국전쟁 당시 서방 세계를 공포로 몰아넣은 소련의 미그 15 전투기. 군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영국 정치인들의 착각으로 소련에 제공된 롤스로이스 넨 엔진 덕분에 탄생할 수 있었다. /위키피디아

 

소련은 Me 262에 사용된 융커스의 유모 004 엔진을 노획해 복제했지만 출력 부족으로 차기 제트기의 심장으로 적당하지 않았다. 그런데 전혀 엉뚱한 곳에서 역사가 바뀌었다. 1946년 영국이 지난 전쟁의 동맹국이었던 소련에 우호의 증표로 최신형 제트 엔진인 롤스로이스 넨(이하 넨) 엔진을 선물한 것이었다.

 

영국은 1937년 세계 최초로 제트 엔진의 실용화에 성공한 나라답게 이 분야에서 앞선 노하우와 기술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Me 262도 엔진 문제 때문에 성능을 십분 발휘할 수 없었을 만큼 독일도 제트 엔진만큼은 영국에 뒤져 있었다. 그랬던 영국이 당시 소련산 제트 엔진의 추력을 2배나 상위하는 고성능의 최신 넨 엔진을 선뜻 제공한 것이다.

/롤스로이스사 로고. /롤스로이스 제공

 

소련도 전혀 기대하지 않았을 만큼 예상하지 못한 행보였다. 하지만 그것은 영국 군부가 극렬히 반발했을 만큼 장차 적으로 등장할 것이 명약관화한 국가에 전략 물자를 제공한 정치가들의 어처구니없는 행동이었다. 이렇게 건너간 엔진은 마침 새 비행기의 동체 시험까지 완료했지만 고민을 거듭하던 소련에 좋은 선물이 됐다. 소련의 미그 설계국은 굴러 들어온 호박을 신형 제트기에 장착해 실험한 결과 최고의 성능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확인했다.

 

순식간에 고민이 해결된 소련은 넨 복제에 전력을 기울여 클리모프 RD-45엔진을 만들었다. 이렇게 탄생한 넨의 ‘짝퉁’을 바탕으로 소련의 항공기 제작 능력은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그리고 불과 5년 만에 짝퉁 넨을 장착한 신예기가 등장했다. 그것이 바로 한국전쟁 당시에 갑자기 등장해 서방 세계를 경악시킨 미그 15다.

 

예고도 없이 등장한 정체불명의 이 제트전투기는 미국은 물론 영국도 애를 먹게 했다. 이후 소련(러시아)은 군용기 분야에서 미국과 유일하게 경쟁할 수 있었다. 이처럼 적을 이롭게 하는, 같은 실수를 반복하는 것이 언뜻 이해가 되지 않지만 1989년 정부 주도로 대대적인 구조조정을 겪었던 조선업이 최근 당시와 유사한 어려움을 겪으면서 다시 정부의 도움을 바라보는 것을 보면 결코 남의 일만은 아니라 할 수 있다. 아마도 인간은 과거의 아픔을 쉽게 망각하는 천부의 능력을 타고 나는 것 같다.

 

■오토 카리우스

① 적의 전차를 150대 이상 격파한 전설의 전차장

노병의 죽음

지난 1월 24일 매체를 통해 제2차 대전에 참전했던 독일의 퇴역 군인 오토 카리우스(Otto Carius)가 향년 92세의 나이로 별세하였다는 뉴스가 전해졌다. 군사 관련 온라인 커뮤니티 등을 통해 급속히 소식이 퍼져나갔고 모 중앙 일간지에서도 짤막하게 토픽을 전할 정도였으니 상당히 유명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사실 우리나라에서는 특히 일반 대중에게 그는 생소한 인물이다.

 

제2차 대전은 세계사에 엄청난 영향을 끼친 커다란 사건이다. 우리 또한 일본의 침략전쟁에 강제 동원되면서 엄청난 수탈과 핍박을 받았기에 이 전쟁이 결코 남의 일이 아니다. 하지만 유럽에서 벌어졌던 전역은 지리적 거리만큼이나 머나 먼 남의 이야기로만 느껴질 수밖에 없다. 대개 독일과 연합군의 싸움을 영화 등으로만 접할 정도다 보니 이 인물이 생소한 것은 어쩌면 인지상정이라 할 수도 있다.

 

올해가 종전 된 지 70주년이 되는 해일만큼 제2차 대전은 어느덧 오래전의 역사가 되었지만 워낙 규모가 커서 참전하거나 직접 경험한 많은 이들이 여전히 생존하여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무수한 참전군인 중 한명이라 할 수 있는 카리우스의 사망 소식이 우리나라에서도 관심을 끌었다는 것은 그 만큼 그가 인상적인 활약을 펼쳤다는 의미다. 즉 이후의 여러 평가와 관련 없이 그는 분명히 유명 인사다.

 

/말년의 오토 카리우스. 제2차 대전 활약한 최고의 전차 에이스였다.

 

대단한 전차 에이스

그렇다면 많은 이들은 카리우스가 뛰어난 장군이라 생각할 텐데 종전 당시 그의 계급은 중위였다. 중위도 장교이기는 하지만 사실 위관 급 장교는 병사만큼 흔하디흔하고 특히 전시라면 그 역할이 부각될 일도 그다지 많지 않다. 영화에서는 말단 병사들도 멋진 주인공이 될 수 있지만 전선에서 직접 총을 쏘지 않고 뒤에서 지휘하는 장군이 실제로는 거대한 전쟁의 주역이다.

 

하지만 카리우스는 마치 영화 속의 주인공 같은 참전 기록을 남겼고 이 때문에 유명한 인물이 되었다. 그는 전쟁 당시 독일군 전차부대에서 전차장으로 근무하며 150대 이상의 적 전차를 격파하는 무시무시한 전공을 세웠다. 전쟁 말기에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가면서 확인이 곤란한 경우가 많아 이 정도 전과만 알려져 있지만 비공식적으로는 200대 이상을 격파하였다고 보는 의견도 있을 정도다.

 

이는 무장친위대를 포함한 독일 기갑부대원 전체에서 2번째에 해당되는 대단한 기록이다. 참고로 제2차 대전 당시 독일에는 100대 이상의 적 전차를 사냥한 슈퍼에이스들이 9명이나 있었고 수십 대를 격파한 이들은 부지기수였다. 연합군에서 최고의 기록이 소련의 라프리넨코(Dmitry Lavrinenko)가 올린 50여대이니 당시 독일군 전차부대원들의 활약상이 어느 정도인지 유추할 수 있다.

 

/공식적으로 168대의 적 전차를 격파한 역사상 최고의 전차 에이스 쿠르트 크니스펠. 그는 종전되기 열흘 전 전사하였다.

 

함께 이룬 기록

카리우스를 포함하여 대부분의 독일 에이스들이 사용하던 전차가 당대 최강인 티거(Tiger)였던 점도 이런 기록이 나올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였지만 그 보다 더 큰 다른 이유가 있었다. 예정된 복무 기간을 근무하면 제대하거나 복무지를 후방으로 바꿀 수 있던 미군 등과 달리 독일의 병사들은 항복하는 날까지 혹은 전사하는 순간까지 싸워야 했던 운명이었다. 그래서 구조적으로 전과가 연합군 병사들보다 많을 수밖에 없었다.

 

전차는 여러 명의 대원들이 팀을 이뤄 작전을 펼쳐야하는 무기이므로 엄밀히 말해 그의 전과는 혼자만의 기록이 아니라 전차 대원들이 함께 이룬 기록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물론 전투 돌입 시 전차의 모든 상황을 종합적으로 지휘 통제하는 전차장의 역할이 당연히 크지만 함께 손발을 맞추는 팀원의 협조가 없이 이런 놀라운 기록을 남기기는 불가능하다.

 

따라서 카리우스는 비록 규모가 작지만 조직을 통솔하는 능력이 뛰어난 인물이라 할 수 있다. 그는 단위 전차뿐만 아니라 중대 단위의 부대를 지휘하여 놀라운 전과를 올리기도 하였다. 하지만 전사에 엄청난 기록을 남긴 그는 처음부터 전선의 맹수는 아니었다. 오히려 전 세계를 상대로 전쟁을 벌여서 당장 한 명의 병사도 아쉬웠던 독일군이 그의 자원입대를 거부하였을 만큼 신체적으로 허약하였다.

 

/독일의 수많은 전차 에이스들이 사용한 티거 전차. 제2차 대전 당시 활약한 모든 전차를 통틀어 가장 인상적인 전과를 올린 걸작이다.

 

② 자원한 군인의 길

자원한 군인의 길

오토 카리우스는 1922년 5월 27일, 프랑스와 가까운 국경 도시인 츠바이브르켄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친 오토 카리우스(시니어)는 제1차 대전에 참전한 예비역 장교로 제2차 대전이 발발하자 재소집되어 육군 소령으로 근무하였는데, 이런 가풍의 영향 때문인지 그는 18세가 되던 1940년에 입대를 자원하였다. 군국주의적이었던 프로이센의 영향을 많이 받은 독일에서 군인은 출세가 보장된 엘리트 직업이기도 했다.

 

하지만 의지와 달리 체중이 미달되어 두 차례나 입대가 거부되었는데, 이에 굴하지 않고 체중을 늘려 결국 신체검사를 통과하였을 만큼 그는 적극적이었다. 제104보충대대에서 군인의 길을 시작하였는데 체격이 왜소하여 상당히 많은 곤혹을 치렀다. 강해 보이기 위해 일부러 수염을 길렀을 정도로 의지는 충만하였지만 행군 도중 동료의 부축을 받아야 할 만큼 체력이 부족하였다.

 

이처럼 현실의 벽에 부딪혀 좌절하고 있을 때 기회가 찾아왔다. 한창 훈련 중이던 1940년 6월에 독일은 불과 7주 만에 연합군을 격파하고 프랑스의 항복을 받아내었다. 나중에 전사에 전격전(Blitzkrieg)으로 기록된 놀라운 승리였는데, 이때 전선 돌파의 주역이 전차부대였다. 전차를 분산 배치하지 않고 집단화한 대부대로 편성하여 적의 종심을 일거에 타격하자는 구데리안(Heinz Guderian) 같은 소장파 장군들의 주장을 택하여 이룬 결과였다.

 

/제2차 대전 발발 직전에 촬영된 제식 훈련 중인 독일 신병의 모습. 자원입대하였을 만큼 의욕이 넘쳤지만 카리우스는 체격이 왜소하여 훈련에 상당한 어려움을 겪었다./사진=bundesarchiv 제공

 

전차병이 되다

이처럼 그 동안 반신반의하던 효과가 극명하게 입증되자 독일은 소련 침공을 준비하면서 대대적으로 기갑부대 확장에 나섰다. 기존 병과에서 인원을 차출하였고 이때 카리우스도 기갑부대로의 전출을 희망하였다. 교전 중 즉시 포탄을 재장전하여야 하는 장전수처럼 뛰어난 체력이 요구되는 보직도 있지만 사실 실내가 협소하기 때문에 전차 승무원은 작은 덩치가 오히려 근무하기가 유리하다.

 

그런데 흥미로운 점은 아버지가 그의 기갑부대 지원을 반대하였다는 점이다. 전차가 전쟁의 총아로 떠오르던 중이었지만 반대로 가장 우선시되는 공격 목표가 되다보니 위험하다고 본 것이었다. 참전 경험이 풍부한 그의 아버지는 피격된 전차와 전사한 참혹한 전차병의 시신을 많이 목도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기갑부대가 자신에게 적합할 것이라고 확신한 카리우스는 발트해 연안의 푸트로스에 위치한 제7기갑보충대대로 전출하여 교육을 받게 되었다.

 

훈련을 이수한 그는 1941년 6월, 동프러시아에 주둔 중인 제20전차사단 예하 제21전차연대에 배치가 되는데, 소련 침공을 앞두고 새롭게 편성된 이 부대는 체코 산 38(t) 경전차로 무장하고 있었다. 당시 독일은 기갑부대원 양성 못지않게 전차의 공급을 늘리려 애를 썼지만 원하는 수요를 충족하기 어려웠다. 대안으로 점령지에서 노획한 전차를 대거 투입하였는데 38(t)도 그러했던 전차 중 하나였다.

 

/보병과 함께 진격하는 38(t) 전차. 카리우스가 처음 승차한 전차인 38(t)은 체코 산 임에도 독일이 즐겨 사용하였을 만큼 성능이 좋았다. 하지만 독소전쟁 개전 당시에는 어느덧 시대에 뒤진 전차가 되었다./사진=bundesarchiv 제공

 

최초의 실전

38(t)은 독일이 최초로 양산에 나선 1호, 2호 전차보다 성능이 좋아서 지난 1939년 폴란드 침공전, 1940년 서유럽 침공전에서 앞장 세웠을 정도였다. 독일군 부대 중에서 뮤즈 강을 제일 먼저 도하하면서 영불 연합군의 배후를 차단하는데 혁혁한 전공을 세운 롬멜의 제7전차사단이 사용한 전차이기도 하였다. 하지만 소련 침공을 앞둔 1941년이 되면서 돌파를 주도하기에는 성능이 부족한 신세가 되었다.

 

야지에서 기동력이 좋았지만 장갑이 얇았고 화력도 부족하였기 때문이었다. 이처럼 불과 1~2년 사이에 위상이 바뀌었을 만큼 제2차 대전 당시 무기의 진화 속도는 빨랐다. 카리우스는 장전수 보직을 부여받았고 곧바로 실전에 투입되었다. 그의 부대는 개전하자마자 브레스트-리토프스크, 민스크, 스몰렌스크 등에서 대 포위망을 형성하는데 일익을 담당하며 불과 두 달 만에 100여 만의 소련군을 붕괴시키는데 일조하였다.

 

이 당시 전투는 일방적인 독일군의 우세로 기록되고 있지만 각론적으로 들어가면 소련군의 격렬한 대응도 있었고 당연히 최전선의 병사들은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카리우스도 숱한 격전을 치렀는데 소련 전차가 발사한 철갑탄이 장갑을 관통하는 바람에 치아가 손상 되는 등의 부상을 당하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열심히 싸웠고 이를 인정받아 8월에는 간부 후보로 추천되어 교육을 받으러 본국으로 귀환하였다.

 

/1호 전차 차체를 이용하여 전차 조종 훈련 중인 모습. 전쟁 말기까지도 독일의 전차 승무원 양성 시스템은 상당히 체계적이었다. 좋은 평가를 받은 카리우스는 간부 후보생이 되어 훈련을 받기 위해 본국으로 귀환하였다./사진=bundesarchiv 제공

 

③ 전차부대 소대장이 된 카리우스

지휘관이 되다

카리우스는 제25전차보충대대에서 간부 교육을 받았으나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하여 장교가 되는 데는 실패하였다. 머지않아 동부전선의 호랑이로 명성을 날리게 되지만, 정작 군인으로서 그의 초창기는 이처럼 부족한 것이 많았다. 의외로 전사를 살펴보면 비슷한 이들이 종종 등장하는데, 예를 들어 352기의 적기를 격추한 역사상 최고의 전투기 에이스인 하르트만(Erich Hartmann)도 첫 출격에서 실수를 범하여 3일 동안 비행 금지를 당하였다.

 

그래도 카리우스는 간부 교육 과정 수료는 인정받아 하사 계급장을 달고 1942년 2월, 제21전차연대로 원대 복귀하였다. 당시 독일군은 모스크바 전투에서 패하면서 전열을 정비 중이었는데, 그동안의 격전으로 말미암아 간부가 부족하여 경험 많은 부사관들이 소대를 지휘하고는 했다. 이때 카리우스도 소대장 임무를 부여받았는데 문제는 정작 그가 지휘할 부대가 없는 것과 다름없다는 점이었다. 서류상으로 인가된 전차를 확보하지 못해 당장 전선에 투입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3월에 전차를 공급받아 편성을 마치고 다시 전투에 나설 수 있었지만 사실 카리우스는 지난해의 경험으로 말미암아 38(t)을 그다지 신뢰하지 않았다. 빈약한 방어력 때문이었는데, 특히 리벳으로 연결한 장갑판은 유폭 시 승무원들의 안전을 위협했다. 사실 이 점은 독일군 최고 지휘부도 절감하고 있던 상황이었다.

 

/카리우스는 간부 교육을 받고 소대장으로 원대 복귀하였다. 제2차 대전 당시 독일 전차부대원들은 검은색의 별도 군복을 착용하였는데 이 때문에 종종 친위대와 혼동하기도 한다.

 

빗나간 예상

하지만 환경만 탓할 수 없었던 카리우스는 가장 앞서서 적진을 탐색하는 정찰 소대장 임무를 부여받아 종횡무진 활약하였고 그 공로를 인정받아 뒤늦게 소위로 승진하였다. 마침내 6월이 되면서 그동안 2선급 전차로 무장하였던 제21전차연대도 3호, 4호 전차를 공급받으면서 전력을 향상시켰다. 하지만 사실 이들 전차도 소련군의 주력인 T-34와 비교한다면 성능이 열세였다.

 

지난 1941년 6월 독일은 자신만만하게 소련을 침공하여 전쟁을 벌였고 예상대로 연이어 대승을 거두었지만 시간이 갈수록 뭔가 잘못되고 있음을 깨달았다. 폄하하던 소련 무기의 성능이 예상을 뛰어넘는 위력을 발휘하였던 것인데 그 중에서도 전차는 가히 놀라움의 대상이었다. T-34, KV-1, KV-2 같은 소련제 전차에 당장 정면으로 맞서서 이길 있는 독일의 전차가 없었던 것이었다. 단지 그 동안의 경험과 소련군의 구조적인 지휘 체계 붕괴로 말미암아 승리를 거두고 있었지만 기본적으로 무기의 성능이 계속 뒤진다면 앞으로도 이기기는 곤란하였다. 이런 사실을 잘 알고 있던 독일도 이미 지난 1941년부터 현존하는 모든 전차를 압도적으로 제압할 수 있는 새로운 중전차 개발을 더욱 서둘렀다. 이렇게 해서 1942년 중반에 탄생한 걸작이 너무나도 유명한 6호 전차, 바로 티거였다.

 

우연히 다가온 인연

티거는 카리우스와 떼어 놓고 언급하기 힘든 전차인데 정작 인연을 맺게 된 것은 상당히 우연이었다. 1943년 1월 그는 티거 전차대원 양성을 위해 프랑스에 위치한 제500전차보충대대로 전근을 갔는데, 사실 이는 일종의 좌천이었다. 그는 지휘 실수로 말미암아 소대를 후퇴시켜 본의 아니게 중대 전체를 곤혹스럽게 만든 적이 있었는데, 이에 대해 문책을 받고 한직인 장교 클럽의 관리관으로 옮겨가 복무하였다.

 

여기서 자연스럽게 티거 전차 부대원들과 어울릴 기회가 많았는데, 이들로부터 전해들은 새로운 전차에 대한 평가는 그의 심장을 뛰게 만들었다. 38(t)로 인해 많은 어려움을 겪었던 그에게 승무원을 안전하게 보호하는 두터운 장갑과 원거리의 적도 쉽게 격파하는 티거는 동경의 대상이 되었다. 그는 제일 먼저 창설된 제502중전차대대의 2중대장인 쇼버(Hauptmann Schober)에게 부탁하여 그해 4월 예하 소대장으로 부임하였다. 중전차대대는 히틀러가 애지중지하였을 만큼 귀하게 생각한 정예 부대다 보니 여기에 배치된 장병들도 상당한 엘리트들이었고 자부심도 컸다. 그렇다보니 2선급 부대만 전전하고 한직에 있던 카리우스가 인맥을 통해 소대장으로 부임하자 부대원들이 그를 탐탁지 않게 생각한 것은 당연하였다. 더구나 체구가 왜소하다보니 경험 많은 동료 부사관 소대장들은 노골적으로 그를 무시할 정도였다. 하지만 이런 편견은 오래가지 못하였다.

 

/1943년 6월 촬영된 제502중전차대대 소속의 티거 전차. 카리우스도 이 무렵 소대장으로 부임하였다.

 

④ 전차 포탄 2발로 적 전투기를 격추시키다

고요했지만 격렬하였던 전선

독소전쟁은 거대한 소련을 배경으로 엄청난 돌격과 후퇴가 반복된, 상당히 동적인 전쟁이었다. 이전에 있었던 전쟁들과 달리 전차 같은 여러 종류의 기동 장비가 전선의 주역으로 등장하기도 했지만 군사 전략상 시간을 벌기 위해서 공간도 포기하고는 했기에 유독 변화가 컸다. 하지만 카리우스가 새롭게 몸담은 제502중전차대대의 레닌그라드 전선은 전혀 다른 양상으로 싸움이 진행되던 곳이었다. 전쟁 초기인 1941년 9월 레닌그라드에 대한 포위망이 완성된 후 장장 900여 일 가까이 제1차 대전의 서부전선처럼 양측 모두 참호를 깊게 파고 대치하였기 때문이다. 물론 표면적인 모습이 그랬다고 전투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중간 중간 마다 포위망을 돌파하기 위한 소련군의 간헐적인 공세와 이를 막고 레닌그라드를 점령하기 위한 독일군의 대응이 반복되면서 내부적으로는 상당히 치열했다.

 

레닌그라드 전투의 격렬함은 인명 피해 현황만으로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이곳을 포위하고 3년 가까이 압박을 가하던 독일군은 무려 60여만 가까운 전사상자가 발생하였다. 하지만 350여만 명의 소련군이 전사상 혹은 실종 당한 것 외에도 70여만 레닌그라드 시민이 희생된 소련에 비하면 독일의 피해는 극히 작은 규모였다. 그 만큼 전선이 정적이면서도 격렬하였고 따라서 일선의 병사들은 크던 작던 쉴 새 없이 싸움을 벌여야 했다.

 

/레닌그라드 성 이삭성당 앞에 배치된 소련군의 대공포 사격 모습. 레닌그라드 전투는 전선의 변동이 적었음에도 엄청난 사상자가 발생한 잔인한 싸움터였다.

 

하루에 이루어지지 않은 전과

이처럼 계속 싸움이 벌어지는 곳이다 보니 카리우스는 짧은 프랑스 생활을 마감하고 1943년 7월 전선으로 돌아오자마자 두 달 동안 쉼 없이 전투에 투입되었다. 덕분에 그는 생소한 티거 전차를 운용하는 능력을 빨리 키울 수 있었다. 한마디로 실전을 통해 배우고 터득하면서 실력을 키워나간 것이었다. 티거라는 엄청나게 그와 궁합이 잘 맞는 전차를 만나면서부터 카리우스는 차근차근 전과를 늘려갔다.

 

뒤에 언급할 말리나바 전투 같은 경우도 있지만 단지 그런 경이적인 전투만으로 150여대라는 어마어마한 적 전차 격파 기록을 남길 수는 없다. 그가 본격적인 전차 에이스로 활약한 기간이 약 2년이었는데, 사실 이 기간 동안 죽지 않고 종전을 맞은 것도 행운이었다. 무려 3,000여 만의 생명이 생을 마감할 만큼 죽음이 일상이었던 독소전쟁에서 카리우스는 죽지 않기 위해서라도 열심히 싸웠고 그러는 동안 전과는 자연스럽게 누적되었다.

 

당시 전선은 전략적으로 독일과 핀란드가 레닌그라드를 포위한 형태이면서도 레닌그라드와 볼호프 사이에 위치한 독일군이 소련군에게 협공당하는 모양새이기도 했다. 그래서 독일은 지도상으로 레닌그라드를 여전히 포위하고 있었지만 1943년 이후 전력이 열세에 놓이면서 군사적으로는 방어전을 펼치던 상황이었다. 이때 제502중전차대대는 위기가 발생한 곳으로 달려가 지원을 하는 소방수 역할을 담당하였다.

 

/레닌그라드 전선 부근의 마을에서 전투 준비 중인 제502중전차대대 소속의 티거 323호..

 

레닌그라드의 호랑이

11월 들어 소련이 레닌그라드 해방을 위한 대대적인 공세를 시도하면서 비테프스크 일대의 독일군 진지가 돌파 당하기 시작하였다. 즉시 이곳으로 출동한 제2중대가 격렬한 전투를 벌여 위기를 해소하였는데, 이때 그는 공석이었던 중대장 역할을 성공적으로 수행하였다. 카리우스를 경원시하던 부대원들은 어느덧 그를 철저히 따르기 시작하였고 동시에 소련군에게는 그의 악명이 널리 알려졌다.

 

사실 장군이 아닌 일개 위관 급 장교의 존재를 소련군도 잘 알고 있다는 것은 여러 이유가 있었겠지만 그 만큼 제502중전차대대가 활약한 레닌그라드 전선은 동일한 상대가 계속하여 싸움을 벌인 전장이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이처럼 상대방 병사가 누구인지 소문이 날만큼 오랫동안 반복하여 같은 곳에서 전투를 벌이다보니 카리우스는 전차로 전투기를 격추시키는 보기 드문 사례까지 연출하였다.

 

당시 소련은 대전차 공격기를 출격시켜 독일군을 괴롭혔는데 카리우스는 이들이 항상 같은 시간에 같은 방향으로 날아온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자서전에서 독일 최고라고 칭찬한 포수 크라머(Heinz Kramer)에게 적기의 진입 각도를 향해 미리 사격 준비를 시켜 놓고 단 2발로 격추시키는 전과를 달성하였다. 그 정도로 수모를 입은 소련군이 어떻게든 레닌그라드의 호랑이가 되어버린 카리우스를 잡아 벌주고 싶었던 것은 당연하였다.

 

/작전을 숙의하는 오토 카리우스와 대원들. 가장 우측이 그와 수많은 전과를 함께 올린 포수 하인츠 크라머. 이들은 전차의 주포로 적기를 격추시키는 기상천외한 전과를 올리기도 했다.

 

⑤ 20분 동안 17대의 소련 전차를 격파...어떻게?

반격에 나선 소련

1944년 6월 22일, 소련은 자국 영토에서 독일군을 완전히 몰아내기 위한 대대적인 공세를 개시하였다. 이때 소련 제1, 2발트전선군이 라트비아의 수도인 리가를 향해 쇄도하였는데, 만일 이곳을 소련이 점령한다면 북부의 나르바 일대에서 간신히 방어전을 펼치던 독일 북부집단군의 배후가 완전히 단절 수 있었다. 이들을 막기 위해 제502중전차대대가 긴급히 200여 킬로미터를 남하하여 라트비아로 이동하였다. 이때 카리우스는 8대의 티거를 이끌고 리가로 향하는 길목인 말리나바 점령에 나섰다. 하지만 정찰 결과 이미 20여대의 전차로 구성된 소련군 기갑부대가 이곳을 선점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런데 카리우스는 적 전차들이 일거에 작전을 펼치기 힘들만큼 말리나바가 협소하기 때문에 잘하면 이들을 모두 격파할 수 있을 것이라는 판단이 들었다. 그런데 당장 공격에 나설 수 있는 티거는 선두에서 정찰 중인 두 대 밖에 없었다. 티거의 강력함을 믿은 카리우스는 뒤에서 대기 중이던 나머지 6대의 전차들에게 측면으로 이동하라는 명령을 내림과 동시에 지체하지 않고 공격을 감행하였다. 순식간 전방에 있던 2대의 T-34 전차를 격파하자 일렬로 전진하던 소련군 기갑부대의 움직임이 멈추었다. 이를 놓치지 않고 카리우스는 순서대로 격파에 나섰다. 기습을 당한 소련군은 전차를 산개하려하였지만 길목이 좁고 주변이 습지대라 수렁에 빠져 헛돌았다.

 

/카리우스가 탑승한 제502중전차대대 2중대 소속 티거 217호. 초기형 티거는 궤도에 진흙이 말려 들어가 운행에 차질을 주기도 했는데 이를 방지하려고 사진처럼 1번 보기륜의 바깥 쪽 휠을 제거하여 사용하였다.

 

불멸의 전과

불과 20분도 안 되는 짧은 시간 동안 벌어진 전차전 끝에 카리우스는 단독 전과만으로도 17대의 소련군 전차를 격파하는 대승을 거두었다. 그가 이끈 제2중대 전체로는 24대의 적 전차를 섬멸하는 엄청난 전과였다. 이 전투로 카리우스가 일반 병사에게 수여 될 수 있는 최고의 훈장인 기사철십자장을 받은 것은 너무 당연하였고 독일 관영 매체는 그의 동정을 앞 다투어 보도하였다.

 

반대로 카리우스에게 격파당한 전차 안에 타고 있던 수많은 이름 모를 소련 병사들은 고통 속에 죽어갔다. 당연히 소련군에게 그는 반드시 처단하여야 할 불구대천지원수였다. 전쟁에서 명성이라는 것은 그 반대편의 상대에게는 아픔과 동의어였다. 그는 독일에서는 전쟁 영웅으로, 소련에서는 불구대천지 원수로 대접받았을 만큼 대단히 싸움을 잘했던 군인이었지만, 영화 속의 주인공처럼 총알이 그를 피해서만 다닌 것은 아니었다.

 

말리나바에서 대승을 거둔지 이틀 후인 7월 24일, 모터싸이클을 타고 정찰을 하던 중 카리우스는 매복한 소련군의 공격을 받고 목이 관통당하는 중상을 입었다. 그의 피습 소식이 전해지자 제2중대 전체가 중대장을 구하려 출동하였을 만큼 큰 사건이었다. 그는 즉시 독일 본토로 후송되었는데, 불과 한 달 만인 8월에 새롭게 편성 중인 제512중구축전차대대에 배속되어 다시 전선으로 달려 나가야 했다.

 

/예복에 '기사철십자장' 훈장을 단 오토 카리우스. 22세 당시의 모습인데 전선에서 고생을 해서 그런지 나이보다 들어 보인다.

 

그에 대한 평가

단 한명의 병사가 아쉬웠던 독일은 움직일 수만 있다면 부상병이라도 전선에 투입하였을 만큼 상황이 절박하였다. 1945년 4월 15일 루르 일대에서 포위된 독일 B집단군이 미군에 항복하면서 카리우스의 전쟁도 막을 내렸는데 당시 그의 나이는 불과 23세였다. 이후 대학에서 약학을 공부하고 사망 직전까지 고향에서 약국을 경영하며 왕성한 사회 활동을 벌였는데 ‘진흙속의 티거’라는 제목의 자서전을 집필하기도 하였다.

 

카리우스는 자서전에서 유태인 학살은 잘못된 행위라고 비판하였지만 히틀러와 나치에 대해 특별한 감정이나 입장을 언급하지는 않았다. 다만 국가가 전쟁을 벌인 이상, 설령 그것이 침략 전쟁이라도 나가서 싸우지 않는 것을 비겁한 행위라고 주장하였다. 그는 독일의 침략과 군인의 참전을 철저하게 별개라고 본 것이었다. 그래서 참전 군인을 전범으로 매도하는 전후 독일 사회의 일부 시각에 대해서는 크게 반발하기도 하였다.

 

독일의 침략을 부인하지는 않지만 카리우스는 국민으로서의 의무를 다하였다고 생각할 뿐이었다. 사실 제2차 대전 전까지의 독일인들은 짧았던 바이마르 공화국 시절을 제외한다면 민주주의에 대한 경험이 없었다. 따라서 이런 시기에 청소년기를 보내고 반복되는 나치의 선전에 노출되었던 그의 군국주의적 사고를 무조건 비판하기 힘들지도 모른다. 이처럼 같은 행위를 놓고 평가가 갈릴 수도 있다는 것, 어쩌면 그것이 바로 전쟁의 모습이다.

 

/말년의 모습. 운영하는 약국 이름이 ‘티거 약국(Tiger Apotheke)’일 만큼 티거 전차에 대한 자부심이 강했다. 그는 전 세계에서 찾아오는 방문객과 즐겨 어울렸는데 개중에는 그에게서 가장 많은 피해를 당한 러시아에서 온 손님들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