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도현의 전쟁 이야기1/ 짧았던 독립, 기나긴 교훈-1차 대전 후 폴란드가 독립에 성공한 진짜 이유 - 6.25장군들 - 김종오 장군 - 반공포로 석방
남도현의 전쟁 이야기1 - 조선일보
남도현
DHT AGENCY 대표
E-mail : knclogix@yahoo.co.kr
젊은 시절부터 역사에 관심이 많아 취미로 세계사, 전쟁사 및 군사에 관한 공부를 하다가 온라인에 연재하여 많은 인기를 끌었다. 6·25전쟁 제60주년 사업단 블로그, 학술지인 계간『본질과 현상』, 시사지인 주간『시사저널』, 공군 발행 월간『공군』, 부정기 간행물『기상』, 대중지인 월간『Den』, 월간『MAXIM』등을 비롯한 여러 매체에 글을 썼다. 현재 네이버캐스트, 국방부 정책블로그, 육군 발행 월간『육군』, 방위산업진흥회 발행 월간『국방과 기술』, 전쟁기념관 발행 월간『전쟁기념관』에 기고를 하고 있다. 강연 활동도 하고 있다. 책도 많이 썼다. 주요 저서로는 『잊혀진 전쟁』,『GUN』,『숫자로 풀어가는 세계 역사 이야기』,『전쟁, 그리고』,『2차대전의 흐름을 바꾼 결정적 순간들』,『끝나지 않은 전쟁』,『히틀러의 장군들』,『히든 제너럴』,『발칙한 세계사』,(공저)『무기 바이블 2』,(공저)『BEMIL의 비밀스런 군사이야기』등.
· 성균관대학교 무역학과 졸업
· 럭키금성상사, 한국자동차보험 등 근무
2015-11-27
■짧았던 독립, 기나긴 교훈(1)
(1)(2) 1차 대전 후 폴란드가 독립에 성공한 진짜 이유
독립에 대한 열망과 기회
제1차 대전이 끝난 후 국제 질서 재편에 나선 승전국들은 폴란드의 독립을 승인하였다. 한때 동유럽의 강자로 군림하였으나 18세기말에 이르러 프러시아, 오스트리아, 러시아에 의해 완전 분할되어 흔적도 없이 사라졌던 폴란드는 어언 150여년이 지난 후에 다시 독립국이 되었다. 이처럼 폴란드가 역사에 다시 등장하게 될 수 있었던 것은 폴란드인들의 줄기찬 저항 의지와 독립에 대한 끝없는 열망에 힘입은 바 크다.
하지만 1919년에 있었던 3·1운동의 실패에서 알 수 있듯이 약소국이 단지 열망만 있다고 압제를 물리치고 독립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실질적으로 폴란드가 독립을 쟁취하게 된 가장 큰 이유는 전후 질서 재편의 목표가 패전국을 철저히 응징하여 전쟁의 재발을 막는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이때 승전국이 패전국을 응징하기 위해 그럴듯한 명분으로 삼았던 것 중 하나가 '민족자결주의'였다.
그래서 민족자결주의는 패전국에 속해있던 피지배민족들에게만 해당되었다. 전쟁 전 오스트리아-헝가리, 터키는 많은 피지배 민족을 거느린 제국들이었는데, 힘을 약화시키고자 이들이 지배하고 있던 여타 민족들을 민족자결주의라는 명분으로 독립시켜 패전국들을 갈기갈기 나누었다. 사실 승전국인 영국, 프랑스, 미국, 일본 등이 지배하고 있던 피지배민족들이 훨씬 많았다. 그렇지만 승자들의 손아귀에서 벗어난 독립국은 없었다
/3.1운동은 민족자결주의에 고무되어 벌어진 거사였다. 하지만 국제정세에 눈이 어두워 민족자결주의가 승전국들이 전후 질서를 재편하기 위한 그럴듯한 명분이었음을 알지 못하였다. /남도현
다행히도 폴란드는 패전국 독일, 오스트리아, 그리고 한 때 연합국이었지만 승전국은 아니었던 소련 사이에 위치해 있었다. 러시아를 타도하고 건국된 소련은 단독으로 동맹국 측과 강화하여 전선에서 이탈하였고 더구나 반제국주의, 반자본주의 이념을 주창하였기 때문에 공공의 적이 되어버린 지경이었다. 때문에 전후 동맹국 측과 러시아 지배 지역에 속하여 있었던 수많은 중소국가들이 독립하였다.
이들 국가들을 하나하나 살펴보면 핀란드,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 폴란드, 체코슬로바키아, 헝가리, 유고슬라비아 등이었는데 이중에서도 가장 커다란 국토와 인구를 포용하며 탄생한 나라가 바로 폴란드였다. 하지만 감격적인 독립과는 별개로 신생국의 헤게모니를 장악하기 위한 내부 문제가 건국 초기부터 불거져 나왔다. 당연히 이런 모습은 극심한 국론 분열을 가져왔다.
<②편에 계속>
/제 1차대전 종전 후 독일, 오스트리아-헝가리, 러시아 사이에 있던 많은 약소민족들이 민족자결주의를 명분으로 독립하였다. /남도현
동유럽 평원의 새로운 주인이 된 폴란드
<①편에서 계속>
새로운 지배자가 되려하다
강대국들을 설득하여 폴란드 독립을 주도하였던 드모프스키(Roman Dmowski)와 민족주의자들에 의해서 구성된 '폴란드 민족 위원회(KNP)'는 중앙 집권적인 정부가 지배하는 강력한 폴란드 민족 국가를 구상하고 있었던데 반하여, 군국주의적 성향이 강한 피우스츠키(Jozef Klemens Pilsudski)는 폴란드의 주도하에 수많은 피지배 소수민족들을 포함하는 연방 국가의 건설을 주장하였다.
결국 무력을 손에 쥐고 있던 피우스츠키가 정부를 양도받아 권력을 행사하게 되었고 그의 뜻대로 폴란드는 신생국답지 않은 넓은 영토와 많은 인구를 아우르는 대국을 향한 첫 걸음을 시작하였다. 폴란드인들은 바르샤바를 중심으로 하는 물산이 풍부한 동유럽의 평원 지대에 대대로 자리 잡고 살고 있었는데, 문제는 이 지역이 지리적으로 명확한 단절점이 없어서 딱히 국경을 정하기 힘든 곳이라는 점이었다.
그렇다보니 주변의 여러 민족들이 섞여 있었고 쌍방의 합의 없이 명확한 국경을 획정하기도 곤란하였다. 하지만 피우스츠키는 폴란드인들이 있는 곳이면 무조건 폴란드의 영토로 간주하고 다른 민족은 피지배 대상으로 보았다. 극우파들은 오랜 식민지 기간에도 불구하고 폴란드인들이 교육, 과학기술은 물론 문화, 예술에 대한 기본적 소양이 풍부하므로 당연히 새로운 지배자가 되어야 한다고 자부하였을 만큼 우월의식이 컸다.
/폴란드 의장대의 호위를 받는 피우수트스키의 동상. 폴란드인의 존경을 받지만 상당히 민족주의 경향이 강하여 주변 이민족까지 지배하려는 야심을 노골적으로 보인 인물이었다. /위키피디아
더불어 폴란드인들은 유럽에서 가장 고집이 가장 쎄다고 할 만큼 선민의식이 강하였다. 그 자부심이 어느 정도였냐면 무조건 탄압만으로 폴란드를 통치하기가 힘들 것으로 판단한 제정 러시아가 러시아령 폴란드를 처음에는 자치왕국으로 변경시켜 주는 등, 정작 러시아의 신민들에게는 허용되지 않던 정치적 대접을 펼쳐 폴란드인들의 환심을 사려고 하였을 정도였다.
그러나 러시아인들에 대해 우월감을 갖고 살아왔던 폴란드인들은 자치권 정도에 만족하지 않았다. 그들은 1830년, 1863년 등 수차례의 무력 봉기를 감행하였고 그 때문에 폴란드라는 이름이 아예 지도에서 사라져 버렸다. 이처럼 원래부터 자부심이 충만하였던 폴란드인들이 제1차대전 후 갑자기 닥친 힘의 공백기에 새롭게 나라를 만들고 거대한 동유럽 평원의 새로운 주인이 되자 한마디로 눈에 보이는 것이 없을 정도가 되었다.
/제 1차대전 당시 프랑스의 전쟁 영웅이었던 페탱이 1919년 폴란드군 창설을 축하하기 위해 방문하여 사열을 받고 있다. 폴란드군은 건군 직후부터 주변국과의 충돌에 투입되었다. /남도현
■짧았던 독립, 기나긴 교훈(2)
(1)(2) 독립하자마자 호전적으로 주변 영토 확장에 나선 폴란드
모두를 적으로 만든 정책
폴란드를 지배하였던 러시아는 완전히 사라져 버리고 그 후계자인 소련도 반사회주의 국제연대에 의해서 소외를 당한데다 적백내전에 빠져 혼란한 상태였다. 다른 지배자였던 독일은 패전국이 되어 베르사유 조약 서류에 순순히 서명을 해준 뒤 굴욕의 시기로 빠져들었다. 더불어 또 하나의 원수였던 오스트리아-헝가리는 그야말로 산산 조각이 나서 알프스 산속의 조그만 약소국으로 순식간에 전락하였다.
이처럼 폴란드는 신생 독립국이었지만 그들을 방해할 세력이 없었다. 항상 그렇듯이 긍정적인 자부심이 너무 강해서 이것이 오만한 자만심으로 바뀔 때는 문제가 발생한다. 오랜 기간 식민지를 경험하였고 그 때문에 고생하였던 세월이 길어서 그런지 모르겠으나 신생 폴란드는 독립하여 국가를 수립하자마자 자국 내에서 순식간에 소수 민족으로 전락한 슬라브, 게르만 등 비폴란드인들의 지배자로 행세하였다.
하지만 더 큰 문제는 그것으로도 만족하지 않고 대외 팽창을 적극 시도하였던 점이었다. 폴란드는 건국한 바로 그 해인 1918년, 역시 신생국인 체코슬로바키아와 실레지엔을 놓고 분쟁을 벌였다. 이는 앞으로 주변국과 계속 이어질 끝없는 충돌의 시작이었다. 폴란드는 쉽게 부러지지 않는 자부심이 있었지만 문제는 스스로를 너무 과대평가하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이후부터 툭하면 전쟁을 불사하는 호전적인 모습을 감추지 않았던 것이다.
/폴란드군을 막기 위해 이동 전개 중인 체코슬로바키아 기병대. 실레지엔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하며 독립 이듬해인 1919년 폴란드는 역시 신생국인 체코슬로바키아를 공격하여 국지전을 벌였다. /위키피디아
독립하자마자 시작한 폴란드의 적극적인 팽창 정책을 나름대로 혼란의 시대를 호기로 삼아 최대한 영토 확장에 성공하였던 시도라고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신생 독립국이 내실을 다져 국가를 튼튼히 하는 것보다 외부로 팽창을 먼저 선택하였다는 것은 상당히 문제가 있는 정책이었다. 결국 폴란드의 이런 모습은 제2차 대전 발발 당시 주변 모두를 적으로 만드는 원인이 되었다.
폴란드가 겨우 독립한 신생국이었지만 당시의 여건을 고려한다면 부국으로 성장할 수 있는 가능성은 상당히 컸다. 우선 지난 150여 년간 폴란드를 분할 점령하였던 독일, 오스트리아, 러시아가 이제는 스스로의 생존을 걱정할 정도로 상황이 반전되었으므로 이들로부터 정치, 외교적 간섭은 당분간 불가능하였다. 또한 폴란드의 영토와 이곳에 존재한 산업기반은 제1차 대전의 화마로부터 비껴나 있었다.
<②편에 계속
/1920년대 바르샤바의 모습. 신생 독립국이었지만 폴란드는 부국으로 발전할 수 있는 잠재력이 컸던 나라였다. /위키피디아
독일-소련과 충돌했다가 오히려 화를 불러오다
<①편에서 계속>
끊임없는 도발
하지만 폴란드가 국력 신장보다 영토 확장 경쟁에 먼저 뛰어들었다는 것은 그다지 옳은 선택이 아니었다. 앞에서 설명한 체코슬로바키아와의 분쟁도 그렇지만 같은 시기인 1919년부터 1921년까지 폴란드는 혁명의 와중에 혼란스러웠던 소련을 상대로도 호기롭게 전쟁을 시작하였다. 역시 명분은 폴란드인들이 많이 사는 옛 제정 러시아 지역을 영토로 합병하기 위해서였다.
이러한 정책은 단기간 내 영토를 확장하는데 성공하였지만 결국 소련으로 하여금 혼란이 수습되면 폴란드를 반드시 손봐야겠다고 결심하도록 만들었다. 폴란드는 소련이 계속하여 혁명의 혼돈 속에서 헤매고 있기를 바랐지만 그것은 착각이었다. 소련은 1920년대 중반에 혼란을 종결하고 오히려 제정 러시아를 훨씬 능가하는 강대국으로 급속히 변모하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1920년 8월 폴란드-소련 전쟁 당시 방어 진지 속에서 경계 중인 폴란드군. 소련의 내정이 혼란하였던 시기에 있었던 폴란드의 도발은 소련에게 반드시 복수하겠다고 결심하도록 만들었다. /남도현
거기에다가 폴란드는 신생 소국인 리투아니아와 1920년 8월부터 10월 사이에 전쟁을 벌였다. 두 나라 사이에 영토 분쟁이 표면적인 이유였지만 근본적인 원인은 정치적인 방법이 아닌 무력으로 리투아니아를 통합하여 대 연방을 구상하려는 폴란드 위정자들의 욕심이 빚은 결과였다. 16세기에 리투아니아를 합병하여 200여 년간 동유럽을 지배했던 과거를 재현하고자 했던 것이다.
이와 더불어 역시 같은 시기인 1919년부터 1921년 사이에는 국경지대인 북부 실레지엔을 사이에 두고 독일과 충돌을 벌였다. 패전으로 사기가 급속히 저하되었고 군비의 제한을 받은 독일은 자원 의용군들이 나서서 격렬히 싸웠지만 폴란드의 공격에 적극적인 저항을 하지 못하였다. 이때 자존심을 상한 독일은 폴란드를 반드시 두들겨 버려야 할 대상으로 삼게 되었는데, 1939년 폴란드 침공 시에 독일 군부가 가장 환호하였을 정도였다.
한마디로 1918년 독립 이후 1920년 초반까지 폴란드는 오래 동안 억눌려 온 그들의 자존심을 거침없이 표출하였지만 사실 자만심이 너무 커져 버린 시기였다. 폴란드는 한때 그들을 지배하였던 주변의 강국들이 겪고 있던 어려움이 영원할 것으로 믿고 있었고 16세기 중동부 유럽을 휘젓던 과거의 영화가 부활된 것으로 착각하였던 것이었다. 그들은 이런 좋은 시절이 계속되기를 원하였지만 그것은 한 낯 꿈이었다.
/대폴란드 건설을 명분으로 1920년 리투아니아를 공격하여 승리를 거둔 직후의 군사퍼레이드. 이처럼 폴란드의 팽창은 주변국과의 관계를 소원하게 만들었다. /위키피디아
■짧았던 독립, 기나긴 교훈(3)
(1)(2) 10년만에 꺾여버린 신생 폴란드의 위상
바뀌어 버린 상황
군국주의적인 파쇼 정권이 극단적인 방향으로 국가를 경영하고 있었지만 훌륭한 잠재 조건에도 불구하고 신생 폴란드는 아직까지 약소국이었고 스스로 내실을 충실히 다지지도 못한 상태였다. 그리고 그동안 숨죽이고 있던 독일과 소련이 1930년대가 되자 폴란드의 독립 이전처럼 감히 넘볼 수 없는 강력한 상대가 되어 버렸다. 더구나 그들은 폴란드와 우호적으로 지낼 생각을 눈곱만큼도 하지 않았다.
제1차대전 후 탄생한 폴란드는 계속적인 전쟁으로 영토를 급속히 확대하여 순식간에 많은 주변 민족을 거느린 대국이 되었지만 단지 영토상으로 그랬던 것뿐이고 내면의 발전은 정체되어 1926년에 이르러서는 피우스츠키가 행한 친위 쿠데타에 의해 급속히 파시스트 국가로 변모하면서 민주주의는 말살 되어 버렸다. 멋진 독립국의 이상은 10년도 되지 않아 내홍을 겪으며 사라져 갔던 것이다.
내적으로 정치적인 혼란을 불러오고 외적으로 이웃과 대결을 추구하던 정책의 영향 때문에 폴란드는 무한한 성장 잠재력에도 불구하고 실질적인 국력의 향상 없이 단지 영토만 큰 농업국으로만 정체되어 있었다. 그리고 독립한지 10년이 지나 1930년대가 시작되자 소련과 독일의 위협에 눈치를 볼 수밖에 없는 처지로 순식간 바뀌게 되었다. 이들을 상대로 호기롭게 전쟁도 벌이던 시절은 이미 멀리 가버린 상태였다.
/1936년 바르샤바를 방문한 프랑스군 총사령관 가믈랭(우)을 안내하는 폴란드군 총사령관 리츠시미그위. 주변에 친구가 없어 멀리서 동맹을 구했지만 위기의 순간에 도움을 받지 못하였다. /위키피디아
하늘을 찌를 듯 자신만만하였던 신생 폴란드의 자만심은 순식간 종언을 고하고 다시 한 번 강대국 위협에 살아남기 위해서 몸을 낮추어야만 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한때 자신만만하게 칼을 섞었던 소련과 독일의 위협은 단지 외교적인 수사가 아니었다. 그들은 꼬투리만 잡으면 실제로 행동을 보이려는 만반의 준비를 하였고 가시적인 위협도 수시로 보여주었다.
비록 1932년에 소련 그리고 1934년에 독일과 간신히 불가침조약을 체결했으나 그것이 폴란드의 안보를 담보해주는 것은 당연히 아니었다. 폴란드는 조약의 충실한 이행을 원하였지만 소련과 독일은 언제라도 조약을 휴지조각으로 만들 수 있는 위치였다. 특히 독일은 오스트리아와 체코슬로바키아를 무혈점령하였고 소련도 발트3국과 폴란드에 대한 연고권을 공공연히 공언할 정도였다.
<②편에 계속>
/1939년 8월 23일 전격적으로 체결된 독소불가침 조약의 주역인 소련 외상 몰로토프(좌)와 독일 외상 리벤트로프. 폴란드에게 위험이 눈앞에 다가온 순간이었다. /남도현
독일과 소련에 동시에 침공당해 멸망하다
<①편에서 계속>
자부심만으로 지키지 못한 나라
이제 폴란드가 믿을 구석은 독립의 후견역할을 하였던 영국과 프랑스였으나 이들 국가들은 폴란드로부터 너무 멀었다. 더구나 이들 국가들은 독일, 이탈리아의 노골적인 도발에 제대로 된 강력한 대응 한 번 하지 못하고 달래주며 아슬아슬한 평화를 구걸하기에 바빴다. 한마디로 깡패가 국제질서를 좌지우지하는 전체주의 득세의 시기였다. 누구나 예견할 만큼 새로운 전쟁은 눈앞에 보였다.
폴란드는 제2차 대전의 도화선이 되었다. 단찌히와 폴란드 내 독일 민족의 탄압을 핑계 삼아 1939년 9월 1일 나찌 독일의 침입이 시작되었다. 이것만도 폴란드에게 벅찬 상황이었는데 사전에 폴란드를 분할하기로 약정하였던 소련이 동시에 동부에서 밀고 들어오는 최악의 경우를 맞이하면서 폴란드는 한 달도 못되어 독립된 지 불과 20년 만에 패망을 맞이하는 불쌍한 신세가 되었다.
/히틀러가 직접 나와 폴란드로 진격하는 독일군을 격려하는 모습. 1939년 9월 1일에 있었던 독일의 폴란드 침공을 대부분의 역사서는 제2차 대전 발발일로 다루고 있다. /위키피디아
하지만 이것은 폴란드가 제2차 대전 내내 겪어야 할 비극에 비하면 그래도 순간이었을 뿐이었다. 폴란드를 구성하던 민족은 크게 슬라브인들과 유태인들이었는데 이들 대부분이 나치의 탄압 대상들이었다. 전쟁 내내 학살을 당하였고 전선의 등락에 따라 피해가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소련군의 포로가 되었던 군경을 포함한 폴란드 지도층 2만 2천여 명이 카틴에서 학살당한 것처럼 소련으로부터도 많은 피해를 입었다.
결국 1945년 해방 당시에 총 600만 명 이상의 인명 피해와 국부의 40퍼센트가 사라지는 물적 피해를 입었다. 그렇게 노골적으로 확장하였던 영토도 전후에 많은 지역을 상실하였고 인위적으로 국경이 서쪽으로 이동하는 수모까지 당하였다. 역사에 만약이라는 것은 없다지만 신생 폴란드가 허황된 대외 팽창 정책보다 주변과의 관계를 원만히 하고 힘을 모아 국력을 키우는 방향으로 나갔다면 어쨌을까?
물론 독일과 소련을 능가할 정도의 강대국은 아니었을지 모르겠지만 주변을 모두 적성국으로 만들어 힘없게 무너지는 최악의 경우를 쉽게 허용하지는 않았을 것 같다. 호기를 긍정적인 방향으로 살리지 못하고 그 이상으로 과대망상을 가져 결국 20년 만에 패망한 폴란드의 교훈은 시대와 국가를 초월한 반면교사라 하겠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욕심 많은 독일과 소련이 설령 그랬다하더라도 폴란드를 가만히 내버려 두지는 않았을 것 같기도 하다.
/폴란드는 제2차 대전 내내 혹독한 독일의 지배를 받았다. 1944년 바르샤바 봉기 당시 독일은 도시의 80퍼센트를 파괴하며 저항 세력을 굴복시켰다.
/위키피디아
■6·25의 장군들①
6·25 때 외아들 구출작전을 과감히 중지시킨 미군 장군
사령관의 명령
중공군의 참전으로 전세가 순식간 역전당한 후 서울의 재 함락이 예견되던 1950년 12월 25일, 미 제24사단의 일선 중대장으로 근무 중이던 샘 워커(Sam S. Walker) 대위는 유엔군사령관인 맥아더로부터 긴급 호출을 당하였다. 전선을 떠나 도쿄의 사령부를 서둘러 방문한 말단 야전 지휘관인 젊은 워커 대위는 맥아더의 집무실에서 거물과 마주하였다. 잠깐의 침묵이 흐른 후 담담하지만 서운한 표정의 맥아더가 무겁게 말문을 열었다.
“워커 대위! 부친의 순직을 진심으로 애도한다. 훌륭한 군인이었던 월튼 워커(Walton H. Walker) 대장(사후 추서)의 죽음은 우리 미국에게 커다란 손실이다. 나는 귀관에게 워커 대장의 유해를 알링턴 국립묘지까지 운구할 것을 지시한다.”
/1950년 10월 20일 평양을 방문한 맥아더를 영접하는 워커. 미 8군 사령관으로 전선을 진두지휘한 워커의 갑작스런 죽음은 그를 아끼던 맥아더를 몹시 침통하게 만들었다./트루먼 박물관
샘 워커는 6.25전쟁 초기에 미 제8군 사령관으로 피 말리는 낙동강방어전과 쾌속의 북진을 선두에서 이끌던 월튼 워커의 외아들이었는데 전쟁에 함께 참전 중이었다. 그런데 전선을 시찰하던 월턴 워커는 이틀 전에 서울 근교에서 벌어진 불의의 교통사고로 순직하였다. 이를 매우 안타깝게 여긴 맥아더는 아들을 불러 아버지의 시신을 본국으로 운구하도록 조치한 것이었다.
젊은 장교의 대답
그런데 최고 사령관으로부터 직접 명령을 받은 샘 워커는 다음과 같은 이유를 대며 반대했다. “각하! 저는 일선의 보병 중대장이고 지금 저희 부대는 후퇴 중입니다. 후퇴 작전이 얼마나 어려운지는 오히려 각하가 더 잘 아시리라 생각합니다. 이런 시점에 단지 부친의 유해를 운구해야 한다는 이유로 중대장을 교체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저는 전선으로 돌아가서 부대를 지휘하겠습니다.”
처음 언급한 것처럼 1.4후퇴 직전이었던 당시는 서울 포기를 예정하고 이후 어디까지 더 물러나야 할지도 감이 잡히지 않을 만큼 전황이 몹시 어려웠던 상황이었다. 은성무공훈장까지 수여받았을 만큼 저돌적이었던 샘 워커에게 이처럼 어려운 시기에 갑작스런 후방 전보는 더욱 용납되지 않았던 것이었다. 하지만 맥아더는 “이것은 명령이다”라고 간단히 말하고는 방을 나가버렸다.
/방한한 콜린스 미 육군 참모총장에게 아들 샘 워커를 소개하는 월튼 워커. 그는 자신의 뒤를 이어 군인이 된 아들을 자랑스럽게 생각하였다./미 육군
맥아더는 충실한 수하였던 월튼 워커의 죽음을 몹시 애통해하였다. 때문에 후퇴 와중에 최전선에서 근무하다가 혹시나 사상을 당할 수도 있던 그의 유일한 혈육인 외아들을 안전한 본국으로 전보시킴과 동시에 유해를 직접 운구하도록 조치하였던 것이었다. 이것은 어쩌면 유엔군사령관이라는 거대한 권력을 가진 자가 이들 부자에게 베풀 수 있었던 합법적인 마지막 배려였다고 볼 수 있다.
공과 사를 분명히 구분하던 샘 워커는 전선에 계속 남기를 자원하였지만 이처럼 자신의 의사에 반하여 워싱턴의 육군성에 근무하게 되었다. 이후 그는 베트남전쟁 등을 거치며 1977년에 미 육군 최연소 대장에 올랐다. 이것은 또한 미 육군 역사상 부자가 대장에 올랐던 아직까지 두 차례 밖에 없는 희귀한 예다. 이처럼 워커 부자는 노블리스 오블리제의 전형을 몸소 보여주었다.
아들을 포기한 장군
그런데 거대했던 6.25전쟁에서 워커 부자처럼 공과 사를 구별하며 맡은바 책임을 다하였던 다른 예는 의외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월튼 워커, 매튜 리지웨이에 이어 6.25전쟁 당시에 세 번째 미 제8군 사령관으로 활약한 인물은 제임스 밴 플리트(James A. Van Fleet)였는데, 당시에 그의 외아들인 제임스 밴 플리트 2세(James Van Fleet Jr.)도 미 공군의 중위로 함께 참전 중이었다.
/가장 어려웠던 시기에 유엔군 지상군을 책임졌던 밴 플리트 미 제8군 사령관. 그는 한국군의 아버지라고도 불릴 만큼 국군의 전력 증강과 훈련에 많은 도움을 제공하였다.
1952년 4월 2일, 밴 플리트 2세는 B-26 폭격기를 조종하여 평양 인근으로 출격했다가 실종되었다. 즉시 수색작전이 시작되었는데 사안이 사안인지라 미 제5공군 사령관이었던 프랭크 에베레스트 장군이 직접 수색 상황을 보고하였다. 그런데 밴 플리트는 묵묵히 듣고 있다가 담담하게 다음과 같이 지시하였다. “밴 플프리트 2세 중위에 대한 수색 작전을 즉시 중단하라. 적진 한가운데서의 수색은 너무 무모하다.”
아버지가 수색대원의 안전을 고려하여 외아들의 구출작전을 중지시킨 것이었다. 나중에 혼자 남아 눈물을 흘렸지만 그는 공과 사를 엄격히 구분하여 군의 최고 통수권자로써 단호한 명령을 내렸던 것이었다. 상당히 어렵지만 강한 지도자의 모습을 밴 플리트 장군은 이처럼 보여주었다. 그런데 그렇게 상심에 빠져있었지만 겉으로 표도 내지 못하고 전쟁을 지휘하던 밴 플리트에게 자기 가족의 편의를 봐달라는 권력자의 청탁이 들어왔다. <계속>
/1964년 8월 19일 전쟁 미망인이 된 며느리와 유일한 혈육인 손자를 데리고 방한하여 청와대를 예방한 밴 플리트. 그는 전역 후 한국의 경제 발전을 위해서도 많은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버지니아군사학교 마셜도서관
■6·25의 장군들②
아이젠하워 대통령 "내 아들을 후방으로 빼시오", 이유는?
권력자의 부탁
1952년 12월, 엄청난 전투기 편대의 엄중한 호위를 받으며 한 대의 여객기가 김포공항에 도착하였다. 비행기에서 내린 인물은 제2차 대전의 전쟁 영웅이자 차기 미국의 대통령으로 확정 된 드와이트 아이젠하워(Dwight D. Eisenhower)였다. 그는 선거 운동 기간 중 만일 대통령에 당선되면 6.25전쟁을 조속히 해결하기 위해 취임전이라도 한국을 즉시 방문하겠다는 공약을 내세웠고 이를 실천하려 방한한 것이었다.
/대통령 당선자 신분으로 한국을 방문한 아이젠하워. 그는 위험한 최전선도 마다하지 않고 찾아다니며 현장의 목소리를 경청하였다.
미국 역사상 대통령이나 대통령 당선자가 본토 밖의 최전선을 시찰한 것이 이번이 사상 최초였을 만큼 그야말로 획기적인 일이었다. 제2차 대전 당시 연합군 최고사령관이었던 오성장군 출신답게 그는 능수능란하게 전선을 누비며 의견을 듣고 현황을 파악하였다. 그런 그가 미 제8군 사령부를 방문하여 사령관이자 막역한 후배인 밴 플리트로부터 보고를 받기 시작하였다.
전선 현황에 대해서 브리핑을 조용히 듣던 아이젠하워는 의례적인 보고가 끝난 후 다음과 같이 한 가지 질문을 하였다. “장군, 내 아들 존(John S. D. Eisenhower)은 지금 어디에서 근무하고 있습니까?” 당시 아이젠하워의 아들도 6.25전쟁에 참전 중이었다. 존 아이젠하워는 그에게 둘째 아들이었지만 첫째 아들인 다우드가 어려서 병사하였기에 외아들과 다름없는 귀한 존재였다.
/제2차 대전 종전 직후인 1946년 초 스코틀랜드에 있는 컬진성을 함께 방문한 아이젠하워 부자. 전역한 부친과 달리 계속 군에 남은 아들 존은 6.25 전쟁 당시 대대장으로 복무하였다.
공과 사
이 질문은 아버지가 전쟁에 참전 중인 아들의 소식에 대한 지극히 사적인 질문이었다. 밴 플리트는 “존 소령은 미 제3사단 예하 대대장으로 현재 중부전선의 최전선에서 근무하고 있습니다”라고 의례적인 대답을 하였다. 그런데 다음에 이어진 아이젠하워의 부탁을 듣고 경악하였다. “사령관, 내 아들을 후방 부대로 빼주시겠습니까?” 이는 바로 얼마 전에 외아들을 잃은 밴 플리트가 듣기에 몹시 거북한 말이었다.
전혀 예상하지도 못한 부탁을 받은 밴 플리트는 얼굴을 붉히며 대답을 못하였다. 이런 심각한 분위기를 누구보다 잘 아는 아이젠하워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장군, 내 아들이 전사한다면 나는 가문의 영예로 받아들이겠습니다. 만일 포로가 된다면 적들은 미국과 흥정하려들겠지만 결단코 응하지 않겠습니다. 그런데 만일 국민들이 고초를 겪는 대통령 아들의 모습을 보고 이것은 미국의 자존심 문제이니 즉시 구출 작전을 펼치라고 압력을 가하면 분명히 장군은 많은 애를 먹을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단지 내 자식이 아니라 대통령의 자식이 포로가 되어 차후에 작전에 차질을 주는 일이 없도록 최소한의 예방 조치만 요청하는 것입니다.”
아이젠하워의 말을 들은 밴 플리트는 만면에 미소를 지으며 크게 답하였다. “각하! 즉시 조치하겠습니다.” 존 아이젠하워는 후방의 정보처로 옮겨 근무하게 되었고 이후 육군 준장을 거쳐 벨기에 주재 미 대사까지 부임하였다.
/미 제8군 사령관을 마치고 귀국하여 아이젠하워와 면담한 밴 플리트. 그는 "아들을 후방으로 전출시켜 달라"는 대통령의 요구가 사심에 의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았기에 흔쾌히 받아들였다.
앞서서 실천한 이들
아이젠하워의 부탁은 차기 군 최고 통수권자인 대통령 당선자라는 지위를 남용한 명령이 아니었고 전혀 그럴 의도도 없었다. 아이젠하워는 인사권을 가지고 있는 야전사령관에게 아버지가 아닌 대통령의 입장에서 공개적인 장소에서 당당하게 합리적인 부탁을 하였을 뿐이었다. 또한 아이젠하워의 의사를 정확히 파악한 밴 플리트의 화답도 단지 차기 권력자에게 잘 보이려는 보신책이 아니었음을 누구나 다 알았다.
6.25전쟁 당시 유엔군의 고위 지휘관과 그 아들이 동시에 참전하여 피를 흘린 경우는 지금까지 소개한 사례 외에도 많이 있다. 대표적으로 휴전 당시 유엔군사령관이었던 마크 클라크(Mark Wayne Clark) 대장과 그 아들 마크 빌 클라크(Mark Bill Clark) 육군 대위의 경우인데, 아들 빌은 금화 전투에서 중대장으로 복무도중 부상을 당하여 전역하게 되었고 결국 그 후유증으로 사망하였다.
이처럼 고위직의 자제들이 앞 다투어 남의 나라에서 벌어진 전쟁에 참전하였다는 점은 우리를 숙연하게 만드는 대목임에 틀림없다. 총 142명의 장성의 아들들이 참전하여 이중 35명이 전사하거나 부상을 입은 것으로 알려졌는데, 아들이 참전 의사를 밝혔을 때 대부분의 부모는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 그들은 노블리스 오블리제가 무엇인지를 정확히 알고 있었다.(계속)
/휴전협정에 서명하는 6.25 전쟁 당시 마지막 유엔군사령관 마크 클라크. 함께 참전한 그의 아들은 전상을 당한 후유증을 극복하지 못하고 사망하였다.
■6·25의 장군들③
마오쩌둥 아들의 유해가 북한에서 중국으로 이장되지 못한 까닭
북한을 찾는 여인
종종 11월이면 평안남도 양덕군 대유동에 있는 전몰 중공군 묘지를 백발의 중국 여인이 찾아오고는 하는데, 북한 당국이 나서서 그녀를 안내할 정도로 상당히 예를 갖춘다. 류시지(劉思齊)라고도 불리는 이 여인은 중국의 주석이었던 마오쩌둥(毛澤東)의 첫째 며느리다. 비록 현재 정부의 요직과 관련 있는 인물은 아니지만 북한에서 이 여인에 대해 신경을 써야할만한 나름대로 이유가 있다.
6·25전쟁에 참전하였던 그녀의 남편 마오안닝(毛岸榮)이 그곳에 묻혀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의 참전은 상당히 정치적인 성격이 다분하였다. 일부 자료에는 자원해서 참전하였다고도 하지만 참전 반대파의 의견을 누르기 위한 마오쩌둥의 지시로 전쟁터로 나갔다는 것이 중론이다. 지도층의 솔선수범을 보이기 위함이었지만 정작 마오쩌둥의 정적들은 그다지 마오안닝의 참전을 달가워하지는 않았던 것으로 알려진다.
/2006년 북한 당국자들의 안내를 받아 남편 마오안닝의 묘소를 참배하는 류시지.
고심 끝에 단행 된 참전
우리 입장에서 1950년 10월 25일 갑자기 등장한 중공군은 그야말로 청천벽력과도 같은 존재였지만 그들의 참전이 갑작스럽게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다. 이미 중국은 한반도에서 전쟁이 발발하자마자 만약을 대비하여 18개 사(師)로 구성된 25만의 동북 변방군을 만주 일대에 배치해 두었던 상태였다. 그리고 전세가 역전되자 여러 외교 채널을 통해 중공군의 개입을 공공연히 천명하고는 하였다.
하지만 미국은 중국의 이런 태도를 단순한 외교적 엄포로 평가절하 하였다. 가장 큰 이유는 중국이 수십 년간 지속되어온 중일전쟁 및 국공내전을 간신히 끝내고 국가를 건국한지 불과 1년도 되지 않은 신생국이었고 대만, 만주, 티베트처럼 산적한 문제들이 많아 한반도에서 벌어진 전쟁에 개입하기 어려운 상황이었기 때문이었다. 사실 미국의 판단처럼 실제로 중국 내에서 참전 여부와 관련한 논란이 많았다.
/1949년 10월 1일 정부 수립을 선언하는 마오쩌둥을 비롯한 중국 공산당 지도부. 국내에 산적한 문제가 많은 신생국이다 보니 미국은 중국의 6.25 전쟁 참전 가능성을 낮게 보았다.
바로 이때 스탈린이 참전을 권유하는 전문을 보내왔는데, 마오쩌둥은 이를 소련의 적극 개입으로 해석하는 실수를 범하였다. 마오는 중국이 한반도의 전쟁에 개입하면 스탈린이 적어도 공군을 참전시켜 줄 것으로 예상하였다. 하지만 10월 12일, 소련으로부터 직접 전쟁에 개입하기 곤란하다는 통보를 받은 마오는 만주에서 출병 준비에 여념이 없던 펑떠화이(彭德懷)를 즉시 소환하였을 만큼 참전을 원점에서부터 심각히 재검토하였다.
린바오(林彪)나 까오강(高岡) 등 권력 실세 대부분도 파병 유보를 강력히 주장하고 나섰다. 고심에 고심을 거듭한 마오는 적대국과 국경을 마주할 수 없다는 중국 역사의 오래된 전략에 따라 파병을 최종 결정하였다. 다시 말해 중공군의 참전은 많은 반대를 무릅쓴 마오의 전적인 결정에 의한 것이었다. 이때 소련의 지원을 얻어내지도 못하고 전쟁에 개입하는 결정을 내린데 대한 책임을 지고자 그는 장남 마오안닝을 참전하도록 조치했다.
/마오쩌둥은 자신의 선택에 대한 책임을 지는 의미에서 장자인 마오안닝에게 참전을 지시하였다.
그곳에 묻힌 사연
마오안잉은 그의 어머니인 양카이훼이(楊開慧)가 국공내전 동안 국민당군에게 피살당한 직후 겨우 목숨을 건져 세상을 전전하다가 제2차 대전이 끝나고 중국으로 돌아온 기구한 젊은 시절을 보냈다. 1949년 류시지와 백년가약을 맺었지만 아버지의 엄명에 따라 결혼한 지 1년도 못되어 젊은 아내를 남겨두고 전쟁터에 나가게 되었다. 하지만 처음 언급한 것처럼 일선에서 그를 그다지 반기지 않았다.
특히 전선의 소식이 별도의 비선을 거쳐 마오쩌둥에게 전달될 가능성 때문에 펑떠화이를 비롯한 대부분의 수뇌부들은 그의 참전을 탐탁지 않게 생각하였다. 그래서 최전선에서 근무하기를 희망하였던 마오안잉의 요구와 달리 후방의 사령부에서 근무하도록 조치하였는데 공교롭게도 안전하다고 생각하던 사령부가 미 공군의 맹폭을 받아 11월 25일, 28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아들의 전사 소식을 듣고 마오쩌둥은 잠시 눈시울을 붉혔지만 간단히 "전쟁에는 희생이 따르는 법"이라는 말만 남겼을 뿐이었다. 류시지는 시신만이라도 중국으로 가져올 것을 울면서 마오쩌둥에게 부탁하였지만 수많은 여타 중공군 전사자들과 형평이 맞지 않는다며 일언지하에 거절당하였다. 이러한 사연 때문에 그녀는 아직도 북한에 있는 마오안잉의 묘소를 찾고는 하는 것이다.
지금까지 소개한 것처럼 미국과 중국의 지도층은 낯선 한반도까지 와서 국민들에게 모범이 되는 행동을 직접 보여주었고 그런 와중에 발생한 희생도 당연하게 생각하였다. 비록 뒤로 돌아서 아무도 모르게 눈물을 삼켰을지 모르지만 적어도 그들은 의연하게 행동하였다. 그런데 6·25전쟁사에 이러한 그들의 이야기는 있는데 정작 우리의 이야기는 찾기가 어렵다. 참으로 아쉬운 대목이 아닐 수 없다.
/2013년 10월 2일, 서울 광진구 쉐라톤 그랜드 워커힐 호텔에 위치한 월튼 워커 기념비를 방문한 월튼 워커 2세와 샘 워커 2세.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그들은 함께 6.25전쟁에 참전하였던 월튼 워커의 손자이자 샘 워커의 아들들인데 조부와 부친처럼 직업 군인의 길을 걸었다. 그들은 조부와 부친의 참전을 가문의 자랑으로 여기고 있다.
■가장 위험했던 순간 上
6·25 전쟁 유엔군이 한반도를 포기할 뻔 했던 순간
자신이 있어 선택한 방어선
최근 KBS에서 6·25전쟁 개전 직후인 1950년 6월 27일 이승만 정부가 일본 야마구치 현에 망명 정부 수립을 시도하였었다는 뉴스를 전하였다. 그런데 이는 새롭게 밝혀진 사실이 아니라 20년 전인 1996년 4월 14일자 연합뉴스를 통해서 이미 보도되었던 내용이다. 그때도 그랬지만 이와 관련한 정부 자료를 확인할 수 없고 미국이 만일을 대비하여 일본 측과 협의하여 세웠던 계획이 와전된 것이라는 반론도 있다.
어쨌든 수시로 이와 관련한 논쟁이 반복하여 불거져 나온다는 것은 한편으로 생각한다면 개전 초의 상황이 그만큼 몹시 불리하였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그런데 일본은 아니지만 전쟁 중에 망명 정부가 수립될 뻔한 적이 실제로 있었다.
/낙동강 방어선까지 밀리면서 공산군은 한반도의 90퍼센트를 지배하였다. 지도상으로 위기는 맞지만 사실 이는 유엔군이 필요에 의해 스스로 선택한 방어선이었다.
오랫동안 ‘6·25전쟁 당시에 대한민국이 가장 위기였던 순간이 언제였는가?’ 하는 질문을 하면 열이면 열 1950년 7월부터 9월 사이에 벌어진 낙동강 전투라고 대답한 이들이 많았다. 총 연장 200여 킬로미터의 낙동강 방어선의 어느 일각이라도 북한군에게 돌파되어 부산이 점령당한다면 그것으로 전쟁이 끝나는 상황이었으므로 상당한 위기의 순간이었음에는 틀림없다.
낙동강 방어전이 절정으로 치닫던 8월 중순의 상황만 놓고 본다면 남서쪽 마산 부근의 전선은 부산에서 40여 킬로미터에 불과했을 만큼 가까웠다. 가장 멀리 위치한 대구 북쪽의 전선도 100여 킬로미터 정도 남짓하였다. 일단 지도상으로만 놓고 본다면 한반도의 90퍼센트 이상을 북한군이 점령하고 있었는데, 이것은 국부와 인구의 90퍼센트를 북한이 차지하고 있다는 의미와 같았다.
하지만 낙동강 방어선은 시간을 얻기 위해 공간을 대신 내어주고 아군 스스로 선택한 방어선이었다. 개전 초기에 전력이 압도적이었던 북한군이 신속히 남진할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는 마음만 먹으면 쉽게 우회 돌파가 가능할 만큼 전쟁 초기에 전선이 연결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즉, 북한의 의도대로 진격이 이루어졌고 수세적 입장이었던 아군은 당장 눈앞에 출몰한 적만 막기에도 급급하였다.
왜관 인근에서 유엔군의 공습을 받고 격파된 북한군의 T-34 전차들. 이처럼 앞선 해공군력을 발판으로 증원군이 도착할 때까지 낙동강 방어선을 지켜낼 수 있었다.
미 제24사단이 신속히 참전하였음에도 그런 이유 때문에 7월 중순 금강 방어선까지 쉽게 무너져 내렸다. 결국 아군은 더 많은 증원군이 도착하여 전력의 균형을 맞추어야 위기를 극복할 수 있었고 따라서 시간이 절실히 필요한 상황이었다. 그렇기 위해서는 적의 우회 돌파가 가능하지 못하도록 전선을 촘촘히 연결할 필요가 있었다. 당장 전선을 축소하는 것 이외에 전략적인 대안은 없었다.
유엔군은 낙동강을 교두보 삼아 방어선을 구축하기로 결심하였다. 종심이 매우 짧았기에 상당히 위험을 수반한 전략이었지만 막아낼 자신감이 있었기에 선택하였던 것이다. 예상대로 전선이 줄어든 대신 촘촘히 연결이 이루어지자 북한군의 진격은 멈추었고 그 동안 전력을 증강시킨 아군은 반격에 나설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1950년 8월이 경과하면서 북한이 전쟁에서 이길 수 있는 가능성은 완전히 사라져버렸다.
몰랐던 위기의 순간
그렇다면 6·25전쟁 기간 중에 있었던 대한민국 최대의 위기는 언제였을까? 지난 1990년대 들어 미국에서 비밀이 해제된 여러 가지 문서가 공개되기 시작하면서 많은 사실이 새로 밝혀졌는데 이중에는 우리가 막연하게 생각하던 것과 달리 진정으로 위기였던 순간이 정작 따로 있었다. 1951년 1월초, 미국이 전쟁에서 완전히 손을 떼고, 즉 대한민국을 포기하고 한반도에서 물러날 준비를 하였던 적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중공군의 참전 이후 전쟁의 양상은 급격해 바뀌었다. 1951년 1월 4일 독립문을 지나 서울 도심으로 진입하는 중공군.
1950년 10월 25일, 중공군이 등장한 후 계속된 두 차례의 공세에 놀라 유엔군은 황급히 38선 일대로 도망쳐 내려왔다. 지연전이고 뭐고 할 것 없이 중공군과의 접촉을 거부하고 일사천리로 달려왔을 만큼 유엔군은 처음 접해본 중공군을 몹시 두려워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38선 일대에서도 적의 남진이 멈출 가능성은 그리 커 보이지 않자 유엔군은 또 다시 낙동강까지 물러날 의사를 표시하여 이승만 대통령을 크게 실망시켰을 정도였다.
하지만 더 무서운 계획이 따로 준비 중에 있었다. 12월 22일 미 합동참모본부는 “중공의 참전 의도가 북한 회복이 아니라 한반도에서 유엔군을 완전히 몰아내려는 것임이 명백해 진다면, 유엔군은 한반도를 포기하고 가능한 빨리 철수 한다”는 결정을 하였던 것이다. 구체적으로 중공군이 금강까지 진출하면 제주도에 한국 정부와 약 이백 여만의 한국인을 소개시키고 유엔군은 한반도에서 완전히 물러나간다는 계획이었다.
/서울을 다시 포기한 아군은 북위 37도선 일대까지 밀려났다. 그런데 만일 여기서 50여 킬로미터를 더 후퇴한다면 미군은 한반도를 포기하고 완전히 철군할 계획을 수립하여 놓았었다.
더구나 이 계획은 동요를 우려해 한국 정부에는 정식 통보하지 않아 우리는 사태의 심각성을 모르고 있었다. 바로 그 상태에서 중공군의 제3차 공세가 시작되었고 아군은 1951년 1월 4일 서울을 다시 내주고 1월 10일경 평택-삼척을 잇는 37도선까지 후퇴하였다. 여기서부터 금강까지는 불과 50킬로미터였다. 만일 조금만 더 후퇴한다면 그것은 대한민국의 종말이었다. 바로 그때 작은 반전의 기회가 찾아왔다.
■가장 위험했던 순간 下
중공군에 파죽지세로 쫓기던 유엔군, 수원에서 한번 반격해 보니...
서로 몰랐던 약점
아군은 지난 한달 동안 무려 300여 킬로미터를 뒤도 돌아보지 않고 후퇴하고 있었다. 특히 12월 5일 미련 없이 평양을 내준 이후부터는 제대로 된 교전도 없이 무조건 도망만 다닌 형편이었다. 막연히 중공군하면 압도적인 병력을 앞세운 인해전술을 생각하지만 정작 아군이 가장 밀려다녔던 당시에 양측 병력은 각각 40여 만으로 비슷한 수준이었다. 오히려 화력과 보급 측면에서 아군이 앞서고 있었던 상황이었다.
그런데도 이런 참담한 결과가 나온 이유는, 나중에 발간 된 미군 전사에서 언급되는 부분이지만 중공군이 잘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아군이 못해서였다. 심리전과 비정규전을 혼합한 생소한 중공군의 전술에 아군은 당황함을 넘어 공포를 느꼈다. 결국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후퇴만 하다가 제풀에 무너지고는 했다. 단지 몰라서 두려워했던 것이었다.
게다가 패배 의식에 가득 찬 병사들을 격려하고 사기를 북돋아주기 위해 노심초사하던 미 8군 사령관 워커가 교통사고로 사망하면서 일순간 지휘 체계에 공백도 발생하였다. 결국 1951년 1월 4일 서울마저 포기한 아군은 37도선에서 전열을 일단 재정비하고 있었으나 적극적인 항전 의지가 없어서 만일 중공군의 공세가 재개된다면 다시 낙동강 방어선까지 철수 할 것이라는 분위기가 팽배해 있었다.
/중공군 참전 초기에 포로가 된 미군. 아쉬움이 많은 북진 실패는 적이 강했기보다 제대로 몰라 벌어진 참사였다.
따라서 일선 부대나 장병들은 평택-삼척을 연결하는 북위 37도선 바로 뒤에 있는 금강은 그다지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정작 이런 막연한 예상과 달리 불과 50킬로미터만 더 밀린다면 미국은 유엔군을 즉시 철군시킬 예정이었고 그것은 대한민국의 종말과도 같은 의미였다. 결과적으로 1951년 1월 10일을 전후한 시기는 한반도에서 전쟁이 발발한 이래 최대의 위기상황이었다.
그런데 천만다행히도 중공군은 이러한 유엔군의 절박한 상황을 몰랐고 일단 진격을 서울에서 멈추었다. 그들도 서울 점령 이후 더 이상 공세를 유지할 수 없었을 만큼 힘이 완전히 소진된 상태였다. 당시 중공군은 보급에 문제가 많아 공세를 일주일 이상 지속하기 힘들었던 군대였다. 따라서 5일 정도 적의 공세를 막아낸다면 전세를 뒤집을 수 있었지만 적의 이러한 치명적인 약점을 아직까지는 몰랐다.
/서울 점령 후 옛 중앙청 앞에서 승리를 자축하는 공산군의 선전 사진. 하지만 공산군도 너무 지쳐 있어 더 이상 앞으로 나가기 곤란한 상황이었다.
그렇게 지나간 순간
만일 그 당시 상황에서 공세까지는 아니더라도 중공군이 공격하려는 시늉만 하였더라도 아군은 그냥 후퇴할 가능성이 컸다. 그랬다면 그것으로 전쟁은 끝이었고 대한민국은 존재하지 않았을 상황이었다. 유엔군은 중공군을 과대평가하여 회피만 하였지만, 막상 적도 아군의 위기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였던 것이었다. 결국 이러한 미세한 서로의 판단 착오가 위험천만한 순간을 조용하게 넘어가도록 만들었다.
이처럼 앞으로 어떻게 싸워야할지 막막해하고 있을 때 중공군이 추격을 멈추고 전선이 고요해지자 신임 미 8군사령관으로 부임한 매튜 리지웨이는 제한적인 교전을 통해 소규모의 승리라도 올릴 생각을 하였다. 전세를 뒤집겠다는 의도는 결코 아니었고 중공군 참전 이후 계속된 연이은 패배로 곤두박질치고 있는 아군의 사기를 잠시나마 회복하기 위해서였다. 그저 무턱대고 도망만 다니다가는 곤란하다고 판단하였던 것이다.
울프하운드(Wolfhound)로 명명된 이번 작전을 위해 미 25사단 27연대를 근간으로 1개 전차대대와 포병 및 공병을 증강한 전투단이 편성되어 청천강 전투 후 아군은 최초의 반격에 나섰다. 하지만 말이 선공이었지 위력 수색에 가까운 소극적인 작전이었다. 그런데 혹시나 하는 조바심에서 실시한 작은 움직임이었지만 울프하운드 작전은 6·25전쟁의 중대한 전환점이 되었다.
/울프하운드 작전 당시 위력 수색에 나선 제27연대원들의 모습. 이 작전은 벼랑 �에 몰린 대한민국을 살려낸 6.25 전쟁의 커다란 전환점이었다.
1월 15일 항공기의 엄호를 받으며 평택-오산을 연결하는 1번 국도를 따라 수원방향으로 개시된 이틀간의 작전 결과는 상당히 고무적이었다. 수원 부근에서 조우한 중공군은 상상 이상으로 보급 수준이 열악하여 가까운 시일 내에 도저히 공세를 재개할 수 없다는 사실이 확인되었던 것이었다. 신비스러운 군대로 여겨졌던 중공군의 취약점을 파악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면서 이제는 싸워볼 만하다는 자신감이 붙었다.
공교롭게도 이 작전은 철군을 기정사실화하고 대책을 논의하기 위해 방한한 미 육군참모총장 로우튼 콜린스 대장이 지켜보는 가운데 실시되었다. 중공군이 미국보다 결코 강하지 않다는 사실을 확실히 인지하면서 리지웨이는 대대적인 반격을 결심하였고 콜린스도 이에 동의하였다. 곧바로 아군이 전선을 다시 밀어 올리기 시작하면서 6·25전쟁 당시에 있었던 가장 위험했던 순간은 많은 이들이 모르는 사이에 지나가 버렸다.
/1951년 3월 15일 서울 재탈환한 직후의 국군. 극적으로 대한민국은 되살아 날 수 있었다.
■김종오 장군
(1) 6-25전쟁 이전에 북한군 1개 중대를 섬멸했던 김종오 장군
6·25전쟁의 미스터리
다음에 벌어질 일이 뻔히 예견되는 상황에서 예상과 달리 엉뚱하게 진행될 경우, 특히 그러한 결과가 나오게 된 이유도 정확히 알려지지 않고 단지 추측으로만 추론하게 될 경우 이를 미스터리로 취급하는데, 6·25전쟁 당시에도 이와 비슷한 사례가 많았다. 그 중 하나를 고르라면 북한군이 6월 28일, 서울을 점령한 이후 대책 없이 허물어져 가던 국군에 대한 추격을 멈추고 도심에서 3일간 지체하였던 경우다.
점령하자마자 새 세상을 열겠다며 인민재판을 열어 피의 학살을 자행하였던 그들이 특별히 없던 자비심이 갑자기 생겨나서 그랬던 것은 분명히 아니었다. 한때는 아군이 폭파한 한강다리 때문이었다고 추측하기도 했지만 3개로 구성된 한강철교 중 단지 하나만 폭파에 성공하였기에 북한군이 마음만 먹었다면 도하할 통로는 충분히 있었다. 그래서 이와 관련하여 다양한 의견이 주장되고 있다.
/한강 철교를 이용하여 도하하는 북한군 전차. 이처럼 파괴되지 않은 교량이 남아 있어서 마음만 먹으면 충분히 진격이 가능했다. 하지만 북한은 6월 28일 서울 점령 후 3일간 시간을 지체했고 이는 6.25 전쟁의 미스터리로 불린다.
남한 내에서 암약하던 남로당 계열의 봉기를 기다렸다는 의견, 북한군의 재편을 위해 그 정도의 시간이 필요하였다는 의견, 남한 정부의 투항을 유도하기 위해 시간을 주었다는 의견 등이 그렇다. 하지만 무엇보다 신빙성 있게 여겨지는 가설은 춘천-홍천 일대에서 펼친 국군 제6사단(청성부대)의 선전으로 말미암아 전선이 단절되면서 서울을 점령한 서부전선의 북한군이 제자리에 머물 수밖에 없었다는 의견이다.
그만큼 청성부대가 이룬 성과는 가히 전쟁의 초기향방을 결정한 의의가 대단한 승리였다. 당시 춘천 전투를 이끈 부대장 김종오(金鍾五, 1921~1966)는 비록 이후 치욕적인 패배도 겪었지만 전략적으로 가장 의미가 큰 승리를 이끈 6·25전쟁 최고의 용장으로 결코 모자람이 없는 인물이라 할 수 있다. 특히 그의 참전사를 순서대로 살펴보면 가장 고난했던 시기에 있었던 대한민국의 극적인 순간을 확인할 수 있다.
김종오는 충북 청원 출생으로 일본 주오(中央)대학에 유학중이던 1944년 강제징용당하여 학도병으로 입대하였다. 징용 후 견습사관생도로 훈련을 받은 후 소위로 임관하였으나 일본의 패망으로 실전참가없이 귀국하였다. 해방 다음해인 1946년 미 군정에서 이후 국군의 모태가 되는 2만5천명 규모의 '남조선 국방경비대' 설립을 발표하면서 60여명의 기간요원을 뽑았는데 김종오는 여기에 지원하여 국군의 창설요원이 되었다.
/합참의장 시절의 김종오. 그는 전쟁 초기 춘천 전투의 대승을 이끌어 북한의 전쟁 전략에 차질을 불러오게 만들었다. /합참
전쟁이전의 전쟁
1947년 그는 26살에 육군 제1연대장이 되었다. 지금 기준으로 따진다면 말도 너무나 과분한 직책이라 할 수 있을 것이지만 창군 초기에 참모총장을 비롯한 대다수의 장성급 지휘관들이 불과 20~30대의 청년들이었을 만큼 해방 조국에는 인재들이 너무 없었다. 사실 이점은 북한도 마찬가지여서 6·25전쟁 발발 당시의 북한군 총참모장이었던 강건(姜健)은 불과 32살이었다.
/국군의 모체가 되는 남조선 국방경비대의 창설행사 모습.
일본군 무장 해제를 위해 편의상 남북을 갈랐던 38선은 어느덧 국경 아닌 국경이 되어갔고 그러는 사이에 소소한 군사적 충돌이 수시로 벌어졌다. 공간사(公刊史) 자료에는 한 줄만 언급되어 있는 사실인데, 당시 벌어졌던 충돌에서 김종오는 혁혁한 전과를 보인 것으로 소개되고 있다. 특히 제6사단장으로 부임하기전인 1949년 5월 포천군 사직리에서 있었던 대규모 전투에서 북한군 1개 대대를 완전 섬멸하는 기습작전을 펼쳤다.
1949년 5월 5일, 춘천에 주둔하던 제6여단 8연대 소속의 강태무, 표무원 소령이 지휘하는 2개 대대가 지휘관들의 기만에 의해 월북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육사 2기 동기인 강태무와 표무원은 북한이 파견한 고위 간첩들이었는데, 비밀이 해제된 구 소련 문서에는 '남한 군대의 붕괴를 위해서 북한 첩보원 2명이 대대장과 장교로 복무했다'고 되어 있다. 이들은 6·25 전쟁 초기에 이른바 강표부대를 이끌고 남침의 선봉에 서기도 했던 철저한 프락치였다.
당시만 해도 국군은 급하게 창설되고 확장을 시작하였기에 아직 질서가 완전히 확립되지 않았던 과도기적 상태였다. 한마디로 사람도 조직도 무기 체계도 제대로 준비된 것이 없었던 혼란의 시기였다. 따라서 군 내부에 수많은 간첩들이 암약하며 여순사건처럼 공공연히 반란을 획책하였음은 주지의 사실이었고 이들을 퇴치하기 위해 많은 고민거리를 안겨 주기도 하였다.
/군 내부에서 암약하다가 지휘하던 부대를 속여 대동 월북한 강태무의 말년 모습. 이처럼 창군 초기에 군 내부에는 암약하던 간첩들이 많았다. /조선중앙TV
어쨌든 2개 대대의 월북사건에 분노한 국군 수뇌부는 5월 8일 보복차원의 대규모 공격을 실시하였다. 이때 사직리 인근에 포격을 가한 후 김종오가 이끄는 부대(정확한 단대호는 나와 있지는 않은데, 아마도 위치상 제7사단 예하부대가 동원되었을 가능성이 크다)가 38선 이북 3km지점까지 침투하여 이곳에 주둔하고 있던 38경비대 소속 북한군 1개 중대를 섬멸하는 특공작전을 펼쳤다.
(2)-①② 북한의 남침 당시 춘천 북방의 북한 전력은 남한의 5~7배
현격한 격차
기습 공격을 당한 북한군 1개 대대가 철수하는 국군을 쫓아왔는데 이마저도 안으로 깊숙이 유인하여 완전 섬멸한 것이 바로 사직리 전투다. 이렇듯 전쟁 직전까지 38선에서는 남북한 간의 국지적인 충돌이 상당히 많이 있었다. 문제는 이러한 전과로 말미암아 북한군의 능력을 과소평가하는 기류가 국군 수뇌부에 은연중 형성되었고 결국 이는 6·25전쟁 개전 초기에 커다란 낭패를 본 하나의 이유가 되기도 하였다.
김종오는 여러 보직을 이동한 후 1950년 6월 10일 대령으로 승진하여 춘천 북방의 38선을 담당하고 있던 몇 안되는 완전편성 사단인 제6사단장으로 부임하였다. 당시 국군은 제1, 2, 3, 5, 6, 7, 8사단과 수도경비사령부(전쟁 중 수도사단으로 바뀌었으며 현재의 수도방위사령부와는 무관)의 8개 사단 급 부대가 있었지만 3개 연대와 1개 포병대대로 완전 편성된 사단은 38선을 담당하던 제1, 6, 7사단뿐이었다.
/창군 초기 미 군사고문단의 지도로 훈련을 하는 모습. 해방 조국의 군대라는 자부심은 컸지만 부족한 부분이 너무 많았다. /남도현
하지만 완편이라 해도 3개 연대와 1개 포병연대 및 수많은 직할부대로 이루어진 오늘날 보병사단은 물론 당시 북한군 사단과 비교하여도 한없이 민망한 수준이었다. 6사단은 제2, 7, 19연대 및 제16포병대대로 구성된 약 1만 명 수준이었던 반면 춘천 북방에는 북한군 제2, 5, 12사단과 제603모터찌크연대로 구성된 3만5천의 제2군단이 포진하였다. 화력까지 계량화한다면 북한군이 약 5~7배 정도의 우위를 점한 상황이었다.
굳이 아군에게 유리한 점이라면 38선 바로 아래에 소양강을 비롯한 많은 하천들이 천혜의 방어선을 제공하고 있었다는 점이었으나 북한군의 압도적 전력은 이를 충분히 상쇄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하지만 북한군은 기습남침을 위한 만반의 준비를 완료한데 반하여 아군은 상당히 어수선한 상태가 더 큰 문제였다. 방어선 좌익인 춘천 북방을 담당하던 임부택(林富澤) 중령의 제7연대를 제외하고 제대로 준비를 갖춘 곳은 없었다.
6월 10일에 부임한 김종오는 인근 지형지물에 대하여 초보적인 숙지를 마쳤을 뿐이었다. 개전 당시 전선 우익의 인제 북방을 담당하던 함병선(咸秉善) 중령의 제2연대는 1950년 6월 20일 6사단 배속과 함께 서울에서 주둔지를 막 옮긴 직후여서 짐도 풀지 못한 상태로 적의 남침을 맞이하게 되었고, 사단 예비였던 민병권(閔丙權) 중령의 제19연대도 1950년 5월 1일 남원에서 공비토벌 후 원주로 막 이동을 마친 상태였다. 하지만 청성부대는 훈련과 경계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춘천 지역을 담당하던 제6사단 7연대의 1949년 부대 검열 모습. 이들은 훈련과 경계를 게을리 하지 않아 대승의 주역이 되었다. /남도현
암호명 폭풍
비상 경계령이 해제되면서 대부분의 장병들이 휴가를 가거나 모내기 지원을 나갔지만 6사단은 전쟁 직전 귀순한 북한군 병사의 증언을 바탕으로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특히 김성(金聖) 소령이 지휘하는 제16포병대대는 적이 진입할 예상 접근로에 화력을 집중하는 연습을 반복하였는데, 군의관까지도 포사격을 할 수 있었을 만큼 훈련 강도가 강하여 장병들이 힘들다는 푸념을 입에 달고 다녔을 정도였다.
개전 초기 북한 2군단은 화천에 군단예비인 5사단을 주둔시키고 자주포의 지원을 받는 2사단으로 하여금 춘천을, 603모터찌크연대의 지원을 받는 12사단이 인제를 돌파하려고 하였다. 주력인 고속기동부대를 인제방향으로 집중시킨 이유는 돌파할 강폭이 춘천 쪽보다 좁아서 도강에 유리하였기 때문이었다. 인제를 거쳐 홍천을 점령하면 춘천을 포위하는 형국이 되므로 춘천도 쉽게 함락시킬 수 있다고 판단하였던 것이다.
이렇듯 남침을 위한 만반의 준비와 계획은 2군단뿐만 아니라 이미 모든 북한군들이 완료한 상태였고 1950년 6월 25일 04시, 전 전선에 "폭풍"이라는 암호명이 하달되자 북한은 기습 남침을 시작하였다. 포연이 걷히고 춘천 북방에 출몰한 북한군 2사단이 38선을 넘어 모습을 드러내자 상황을 보고받은 김종오는 7연대장 임부택에게 당황하지 말고 평소 연습대로 방어전에 임할 것을 명하였다.
/창군 초기 국군이 보유한 최고 화기인 M3 곡사포로 훈련 중인 모습. 춘천에서 대승을 거둔 제16포병대대는 군의관까지도 포사격을 할 수 있을 정도였다. /군사편찬위원회 제공
7연대는 즉각 사전에 구축된 북한강 인근 진지에 투입되어 적을 효과적으로 차단하였다. 예상외의 저항에 막힌 북한군 2사단은 다음날 예하 6연대를 북한강 하천 부지로 투입하여 돌파를 시도하였다. 그러나 사전에 이곳을 적의 침공 통로로 예상하고 사격 훈련을 반복하여 왔던 16포병대대가 날린 불벼락이 머리위로 정확히 떨어지기 시작하면서 북한군 6연대는 해체 수준인 70퍼센트에 달하는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
우익인 인제를 담당하던 6사단 2연대 전면으로 남침한 부대는 603모터찌크연대의 지원을 받은 북한군 12사단이었다. 2연대는 현지에 투입된지 얼마 되지 않아 아직은 지형에 익숙하지 못한 상태였고 사단의 유일 주먹인 16포병대대도 춘천방어전에 투입되어 화력 지원을 받을 수 없는 상태였다. 때문에 춘천의 7연대에 비해 고전 할 수밖에 없었으나 이러한 불리한 여건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놀라운 선전을 벌였다.
/제603 모터찌크연대는 험준하고 길이 나빴던 중동부전선에서 북한군 제2군단의 고속기동부대 역할을 담당하였다. /남도현
(3) 북한군 중동부전선 전력의 절반을 소멸시킨 춘천대첩
신화가 탄생한 춘천
개전 초기 인제 관대리 일대를 경계하던 1대대의 경우 60퍼센트의 손실을 입었으나 소양강 마노진 나루터에서 적의 남진을 저지해 냈고, 현리를 방어하던 3대대도 30퍼센트 정도의 손실을 입었지만 진지 사수에 성공하였다. 특히 Su-76 자주포로 증강된 적의 주공이 신남으로 내려오자 20여명으로 구성된 특공조는 어론리 아랫다무리고개에서 적 자주포 2대를 파괴하여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이러한 아군 6사단의 강력한 저항에 북한군 2군단은 당황하였다. 특히 북한군 2사단의 춘천공략 실패는 이후 북한의 남침 전략 전반을 흔드는 결과를 불러왔다. 다급해진 북한군 2군단장 김광협(金光俠)은 인제를 거쳐 홍천방면으로 진격하던 12사단과 603모터찌크연대의 주력을 빼내 북한강 북쪽으로 회군시켜 춘천에 투입하였다. 이것은 북한군 2군단의 몰락을 가져오는 기폭제가 되었다.
/북한군 2사단이 춘천공략에 실패하자 홍천을 향해 남진하던 북한군 12사단 주력이 회군하여 춘천으로 향했다. 덕분에 위기에 빠진 국군 2연대에 대한 압박이 감소되었다. /남도현
인제 방면으로의 압박이 감소되자 2연대는 한숨을 돌렸고 마침 지원하러 원주에서 올라온 19연대와 김종오의 명령으로 춘천에서 긴급 전개한 16포병대대의 지원을 받게 되었다. 특히 19연대는 말고개에서 적 자주포 10대를 노획 및 파괴하는 전과를 올렸고 동시에 후방에 방열하고 있던 16포병대대가 일제히 불을 뿜어 고립된 북한 12사단과 603모터찌크연대의 잔류부대를 궤멸시키는 대승을 거두었다.
이후 전선의 단절을 우려하여 6월 29일 충주로 전략적 후퇴를 단행하였지만 6사단은 이처럼 서부전선에서 서울을 내주고 한강 이남으로 후퇴한 와중에도 중동부전선 일대의 북한군 전력의 반을 일거에 소멸시켜 버리는 대승을 거두었다. 이를 6·25전쟁 초기 국군이 이룬 유일한 승리로 '춘천대첩'이라고 하는데, 국군 6사단이 중과부적 상태에서 이룬 대승이어서 그 찬란함이 더 하다.
/낙동강 전투 당시에 격파된 북한군의 Su-76 자주포. 전차를 본 적이 없었던 국군 장병들은 종종 이를 전차로 오인하고는 했다. 6사단 19연대는 말고개 전투에서 10대의 자주포를 격파하는 쾌거를 이루면서 춘천 전투의 대미를 멋있게 장식하였다. /남도현
그러나 춘천대첩의 의의는 그 이상의 의미를 담고 있다. 바로 북한의 전략을 완전히 틀어버린 것이었다. 원래 북한군 2군단은 서부전선의 북한군 1군단이 서울을 공략할 동안 재빨리 남진하여 수원을 점령하는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다. 만일 이 작전이 실현되었다면 서부전선 일대 아군 주력부대의 퇴로가 차단되어 일거에 섬멸당할 가능성도 있었다. 그랬다면 그것은 대한민국의 종말과 같은 의미였다.
<②편에 계속>
<①편에서 계속>
국군의 자부심
그렇게 침략자는 춘천을 넘지 못하고 좌절하였다. 5대 1이상의 압도적인 전력을 동원하고도 작전을 실패한 치욕적인 결과에 대하여 김일성이 2군단장 김광협을 비롯한 예하 사단장들을 개전 일주일도 되지 않아 경질하여 버리는 초강경 문책 인사를 단행하였을 만큼 분노하였다. 그것은 그만큼 개전 초기에 2군단의 역할에 대해서 기대했던 것이 컸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아군이 낙동강까지 후퇴하였을 때 편제를 유지한 부대가 제1, 6, 8사단과 (급편)수도사단이었는데, 춘천대첩으로 인하여 1, 수도사단이 포위당하지 않고 후퇴할 수 있었고, 퇴로가 차단되었던 8사단이 태백산맥을 넘어와 전력을 보존할 수 있었다. 결국 6사단의 분전은 대한민국을 수호하는 결정적인 힘이 되었다. 이후 충주축선을 따라 일사불란하게 후퇴를 한 6사단은 충주, 수안보, 음성 등에서 수시로 반격을 가하여 북한군을 당황하게 만들었다.
/음성 전투 승전 기념 충혼탑. 대승을 거둔 6사단 예하 7연대는 전 장병이 일계급 특진하였다. /국가보훈처 제공
특히 음성에서 북한군 15사단을 기습하여 2,186명을 사살하는 대승을 거두어 전선 중앙을 순식간에 공백 상태로 만들기도 했다. 한마디로 김종오의 6사단은 후퇴는 있어도 패배를 모르는 국군의 자부심이었다. 신임 북한군 2군단장 김무정(金武亭)이 "6사단을 박살내어야 한다. 남조선 사단은 그것 하나다. 그것만 잡아 족치면 우린 중부 이남을 확 쓸어버릴 수 있다. 밀어 족쳐서 6사단을 격멸하고 사단장을 포로로 잡아 오라"고 하였을 정도였다.
그리고 낙동강에 최후의 방어선이 구축되었을 무렵 6사단은 신령을 중심으로 하는 돌출부를 담당하였고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북한군은 청성부대를 넘을 수는 없었다. 음성에서 굴욕을 겪으며 이를 갈던 북한군 15사단은 물론 함께 협공에 나섰던 북한군 8사단은 6사단의 강력한 방어망에 걸려 신령에서 하염없이 녹아내렸고 그렇게 1950년의 뜨거웠던 여름은 지나갔다.
/준장으로 진급하여 낙동강 방어전을 이끌던 1950년 7월 당시의 김종오. /백마고지 전투 기념관 제공
1950년 9월 15일, 6·25전쟁의 향배를 바꾼 결정적인 사건이 인천에서 벌어졌다. 피로써 낙동강을 막아내던 위기의 순간에 적의 뒤통수를 강타하여 순식간 전세를 역전시켜 버린 거대한 작전이 성공한 것이었다. 바로 인천상륙작전이었는데, 이와 동시에 낙동강가에서 분전하던 방어부대도 진지를 박차고 나와 반격을 개시하였다. 김종오가 지휘하는 6사단도 앞으로 나가기 시작하였다.
(4)-①② 통일 북진의 감격을 깬 중공군 개입
잠시 동안의 감격
피눈물을 흘리며 후퇴하였던 그 길을 그대로 거슬러 6사단은 북진을 하였고 충주, 원주를 거쳐 10월 3일에는 대첩의 현장이었던 춘천에 다시 발을 들여 놓았다. 인공 치하에서 수모를 겪던 춘천시민들은 감격에 겨워 청성부대를 맞이하였다. 그리고 10월 6일, 개전 당시에 불발탄으로 인해 파괴에 실패하였던 38선상의 모진교를 넘어 청성부대는 북으로 내달렸다. 이제부터는 통일을 위한 진군이었다. 청성부대는 국군 2군단의 우익에 배치되어 감격스런 북진에 나섰다. 당시 아군은 크게 평안도 지역을 담당할 미 8군과 별도의 지휘권을 부여받아 함경도 지역을 점령할 미 10군단으로 분리되어 있었다. 미 8군에는 미 1군단, 미 9군단, 국군 2군단이 편제되어 있었는데, 미 9군단은 아직 38선을 넘지 못한 채 후방작전을 벌이던 상태여서 미 1군단과 국군 2군단이 전선을 담당하였다.
김종오는 춘천에서 화천, 김화를 거쳐 신고산, 덕원을 통과하여 성천으로 부대를 진격시켰다. 6사단은 지리적으로 거의 한반도의 중앙부를 따라 북진하다보니 상당히 험준한 산악지대를 연속적으로 통과하여야 했다. 그리고 10월 20일, 순천으로 진격하여 김일성을 생포하기 위해 적진에 낙하한 미 187공수연대와 연결에 성공함으로써 돌파구를 확대하였다. 그러나 기쁨은 여기까지였다.
/김일성과 북한 지휘부의 도주로를 차단하기 위해 숙천과 순천 일대에서 벌어진 공수작전의 모습. /AP Photo
개전과 동시에 북한은 순식간에 낙동강까지 밀고 내려와 3개월간 공세를 지속하면서 위협을 가하였고, 그러한 와중에 전선이 뚫릴 결정적인 위기도 몇 차례 있었다. 반면 우리는 38선 이북으로 신나게 달려갔지만 별다른 교전도 없이 한반도 북부를 한 달 정도 정신없이 휘 젖고 다니다가 전선도 제대로 구축하지 못해보고 반환점을 찍은 왕복달리기처럼 뒤로 돌아 도망쳐 나오기 바빴다.
중공군의 대규모 개입으로 말미암아 벌어진 일이었다. 그런데 압도적인 중공군에 밀려 통일을 목전에 두고 후퇴할 수밖에 없었던 것으로 오랫동안 알고 있었다. 물론 중공군의 전격적인 개입은 6·25전쟁이 새로운 국면으로 변화하게 되는 결정적 전환점이 된 것은 맞다. 그렇지만 북진이 짧게 막을 내리고 실패한 모든 원인이 될 수는 없고 엄밀히 비판적으로 말하자면 그것은 핑계에 지나지 않는다.
<②편에계속>
/북진 당시의 모습. 통일을 향한 감격스러웠던 기억이지만 너무 성급하여 두고두고 아쉬움으로 남은 순간이기도 했다. /남도현
<①편에서 계속>
잘못 알고 있던 상식
막연히 100만 중공군 운운하지만 1990년 이후 밝혀진 사료에 따르면 유엔군이 후퇴에 들어가기 직전인 1950년 11월 당시에 공산군은 총 42만으로 중공군이 30만, 북한군이 12만 정도였다. 반면 아군은 국군이 22만, 미군이 18만, 기타 유엔군이 2만정도로 역시 총 42만이었으므로 공산군 측의 병력이 결코 많지 않았다. 오히려 제공, 제해권은 아군이 가지고 있었고 화력과 보급 또한 우세를 보이고 있었다.
다시 말해 중공군의 참전으로 공산군의 전력이 강화된 것은 맞지만 처음부터 압도적인 우위를 보였던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인해전술은 공산군의 실패로 막을 내린 1951년 4~6차 공세 당시에 절정을 이루었다. 그렇다면 얼추 비슷한 병력을 가지고도 전선을 구축하여 제대로 된 길항도 못해보고 속절없이 무너졌다면 결론적으로 실패의 가장 큰 원인을 당시 아군이 채택한 잘못된 북진방법에서 찾는 것이 옳다.
/얼어붙은 압록강을 건너 한반도 북부로 진입하는 중공군의 모습. 흔히 중공군하면 인해전술을 떠올리는 경향이 많지만 1950년 11월 당시는 피아의 병력이 비슷하였다. 결국 이 상태에서 일방적으로 밀렸다는 것은 북진방법이 잘못되었다는 의미다. /남도현
당시 북진 상황을 한마디로 정의한다면 중구난방이라 할 수 있다. 물론 당시 아군 수뇌부도 나름대로의 사정과 복안이 있었겠지만, 지금까지 공개된 자료와 당시의 상황을 리뷰해 보면 한마디로 조급증에 휘말린 어처구니없는 작전이었다는 결론에 쉽게 도달할 수 있다. 미 8군과 미 10군단을 분리하여 별도의 지휘권을 부여하고 경쟁을 시킨 것도 그랬지만 핵심은 이 정도의 문제가 아니었다.
이승만 대통령의 밀명을 받들어 국군 7사단이 갑자기 진격 방향을 바꿔 전선의 중앙을 텅텅 비워버리고 평양으로 진격하였던 예에서 보듯이 북진 당시의 모습은 일사불란한 지휘체계가 아니었다. 인접 부대 간의 협조도 미흡하였고 성과 달성에 급급하여 툭하면 명령을 어겼고 이에 대한 질책도 없었다. 오로지 한만 국경을 향한 무제한 레이스였고 이러한 비상식적인 종대 질주는 전선을 갈가리 분리시켜 부대 사이에 거대한 틈을 만들어 버렸다.
/평양 입성 직후의 신상철 7사단장과 유재흥 2군단장. 비록 이승만 대통령의 명령에 따른 것이었지만 이들의 평양 진공은 명령 계통을 무시한 잘못된 행동이었다. /7사단 제공
스스로 만들어 버린 블랙홀로 생각지도 못한 중공군이 출몰하자 아군은 순식간에 배후가 차단되면서 급속히 각개격파 되었다. 전선을 촘촘히 붙이거나 아군끼리 긴밀히 협조하여 경계만 게을리 하지 않았다면 능히 격퇴할 수 있었던 중공군을 분리되어 있던 아군이 이길 수 없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였다. 각개 부대별로 서로 떨어져서 앞으로 나가기만 하던 아군은 갑자기 뒤에 등장한 중공군이 많아 보일 수밖에 없었고 순식간 전투의지도 소멸되었다.
(5)-(1)(2) 북진의 최전방에서 중공군에게 포위당한 6사단
급변한 상황
청천강을 넘은 유엔군은 오로지 앞만 보고 한만국경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신중하였던 스미스(Oliver P. Smith)가 지휘하는 동부전선의 미 해병 1사단 정도를 제외한다면 대부분의 유엔군 부대들은 하루 빨리 강가에만 도달하면 그것으로 전쟁이 끝날 것이라 낙관하고 있었다. 어느덧 적들은 보이지 않았고 이런 무제한의 레이스에 참가하여 선두를 달린 부대가 바로 김종오의 6사단이었다.
춘천대첩의 주역인 예하 7연대는 희천을 점령한 후 10월 26일 북한군 잔당의 간헐적인 저항을 물리치고 한반도의 최북단인 초산에 발을 들여 놓았다. 그리고 2시간을 더 북진하여 선발 1대대가 14시 15분, 드디어 꿈에 그리던 압록강에 도달하여 감격스럽게 수통에 물을 담았다. 이 내용이 대대적으로 보도되자 후방의 모든 국민은 드디어 통일이 된 것으로 여기고 감격하였다.
/압록강 물을 조심스럽게 수통에 담는 병사의 모습. 6사단 7연대의 압록강 도달 소식은 온 국민을 흥분시켰다. 하지만 이런 기쁨을 얻은 대가는 너무나 혹독하였다. /전쟁기념관 제공
그런데 바로 이 시점에 지금까지 맨 앞에서 북진을 독려하던 사단장 김종오는 불의의 차량사고로 인해 후송되는 불운을 겪었는데, 그것은 암울한 징조가 되었다. 이미 10월 19일부터 은밀히 압록강을 넘은 중공군 제38, 39, 40군(軍-서방측 개념으로 군단)으로 이뤄진 선발 참전 부대는 한반도 북부의 요지 일대로 소리죽여 남하하고 있던 중이었고 10월 24일에 이르러 예정대로 투입을 완료하였다.
그 중 38군은 7연대가 강가로 달려가고 있을 당시에 이미 초산의 깊은 산속에 매복하여 후속부대의 전개를 기다리던 중이었다. 중공군은 7연대가 예상보다 빨리 초산으로 다가오자 교전을 벌일 경우 한창 배치 중에 있는 주력부대의 위치가 발각될 위험이 있다고 판단하여 자신들을 지나쳐 앞으로 계속 전진하도록 일부러 방치하였고 아군은 아무것도 모르고 늑대들이 숨어있는 동굴 안으로 점점 들어갔다.
그리고 10월 25일 아침, 통일의 감격에 도취되어 북진 중에 있는 유엔군을 향하여 만반의 준비가 완료된 중공군은 전 전선에서 일제히 공격을 개시하였다. 이때까지도 중공군의 의미를 몰랐던 아군은 전진을 멈추지 않았다. 하지만 거의 대부분 전선에서 급속하게 전황이 반전되면서 선도부대가 국경에 도착한지 만 하루도 안 된 6사단에게도 27일 정오 긴급히 철수하라는 명령이 내려졌다. 하지만 이미 퇴로가 중공군에게 점령당한 상태였다.
<②편에 계속>
/은밀히 진입하여 매복한 중공군이 이미 퇴로를 차단한 상태였다. 김종오는 예하 부대에 장비를 파괴한 후 즉각 철수하라는 명령을 하달하였다. /남도현
병상에서 눈물의 후퇴 명령을 내려야 했던 김종오
<①편에서 계속>
눈물의 후퇴
그동안 무제한의 북진 레이스 당시, 사단과 분리되어 우측으로 진격하던 2연대도 중공군에게 포위당하여 서서히 무너지고 있었다. 병상 중에 있던 김종오는 "휴대할 수 있는 전투 장비를 제외한 모든 장비를 파괴 또는 소각하고 최선의 수단을 다하여 탈출하라"는 비장한 명령을 내렸는데, 결론적으로 사단에서 도와 줄 방법이 없으니 예하 연대는 알아서 탈출하라는 의미였다.
11월 6일, 초산의 포위망을 뚫고 사선을 넘어 개천으로 퇴각하는데 성공한 6사단의 잔여병력은 절반 정도였고 장비는 거의 망실된 상태였다. 지금까지 전쟁 발발 이래 최고의 전투력을 보여주었던 청성부대는 아군 최초로 수통에 물을 담는 대가치고는 너무 참담한 반대급부를 얻은 셈이었다. 온 국민에게 통일의 꿈을 꾸게 하였던 북진은 이처럼 악몽으로 바뀌게 되었고 눈물의 후퇴는 시작되었다.
비록 6사단이 끔직한 피해를 입었고 김종오도 굴욕을 맛보았지만 이때의 패배를 단지 6사단만의 잘못으로 단정 짖기는 무리한 형편이었다. 미 2사단 같은 경우도 부대가 해체될 정도의 심각한 타격을 입었을 만큼, 누가 누구를 도와 줄 형편이 되지 못할 정도로 전전선이 돌파당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한마디로 북진방법을 잘못 택한 유엔군 최고 지휘부의 책임이었고 이는 두고두고 비판받아 마땅하다.
/후퇴 당시 군우리에서 매복에 걸려 처참하게 격파당한 미 2사단의 장비들. 비단 6사단뿐만 아니라 이처럼 많은 아군 부대들이 어려움에 처하였다. /6.25전쟁 60주년 사업단 제공
병상에서 이를 악물고 후퇴작전을 진두지휘하였지만 김종오의 노력만으로 부대의 붕괴를 막을 수는 없었다. 아니 1950년 겨울의 악몽은 각개 부대의 노력만으로 사태를 해결할 수 있는 범위를 벗어났던 상태였다. 이듬해 1월 4일, 다시 한 번 서울을 적에게 내주고 후퇴에 후퇴를 거듭한 유엔군은 평택~강릉 선에 방어막을 형성하여 공산군의 진격을 겨우 멈출 수 있었다.
이처럼 북진 실패는 한마디로 방심이 이룬 어처구니없는 결과였지만 안타깝게도 지금까지 대부분의 핑계를 중공군에게서 찾아왔고 여기에 대해 특별히 문제를 삼지도 않았다. 하지만 북진이 제대로 된 방법으로 이루어졌다면 설령 성공하지는 못했더라도 1·4후퇴 같은 어처구니없는 순식간 몰락은 최대한 막을 수 있었을 것이다. 평양을 포기하고 불과 한 달 만에 서울을 다시 내주었지만 그동안 한 일이란 고작 교전을 삼가고 도망만 다닌 것뿐이었다.
/1950년 12월 24일, 폭파되는 흥남부두를 뒤로 하고 북한 땅을 떠나는 마지막 철수선 베거. 오랫동안 중공군의 참전을 1.4 후퇴의 핑계로 삼아왔지만 잘못된 북진 방법을 택한 우리의 잘못도 크다. /남도현
(6)-(1)(2) 중공군의 보급선 약점을 파악 못해 반격을 못했던 국군
정체된 전선
서울을 점령하였지만 사실 중공군은 보급에 문제가 많아 더 이상의 남진이 힘든 상태였다. 이를 재빨리 간파한 신임 미 8군 사령관 리지웨이(Matthew B. Ridgway)는 곧바로 강력한 화력을 발판삼아 전선을 38선 인근까지 다시 밀어붙였다. 여담으로 한반도가 그리 크지는 않지만 9개월 동안 상대방의 수도를 한번 이상씩 점령한 예를 전사에서 찾기가 힘들만큼 6·25전쟁 초기 1년 동안의 반전은 상당히 극적이었다.
/워커의 급서로 미 8군 사령관에 오른 리지웨이는 6.25전쟁 중 가장 어려웠던 시기를 극복한 인물로 맥아더 해임 후 유엔군 총사령관으로 영전하였다. /남도현
숨 돌릴 틈도 없었던 후퇴 상황이 종료되고 어느 정도 전선이 안정을 되찾아가던 1951년 3월, 국군은 대대적으로 인사개편을 단행하는데, 이 때 부상에서 회복한 김종오는 분신과도 같았던 6사단을 떠나 제3사단장으로 부임하였다. 신임사단장으로 지휘를 맞게 된 백골부대는 1950년 10월 1일에 38선을 최초로 돌파하여 북으로 내달림으로써 그날이 '국군의 날'이 되도록 만든 부대이기도 하였다.
당시 3사단이 속한 제3군단은 군사영어학교 동기로 비슷한 시기에 새로 부임한 유재흥(劉載興)이 지휘하였다. 그는 낙동강방어전에서 영천 방어에 혁혁한 전공을 세우기도 하였지만, 패전으로 인하여 개전 초에 7사단이, 북진 당시에 2군단이 해체되었을 당시의 지휘관이기도 했다. 이들 패전은 불가항력적인 여러 사유도 있었지만 새로운 군단장으로 영전한 결과만 놓고 본다면 공과에 비해 유재흥은 관운이 대단히 좋은 인물이었다.
/중공군은 심리전과 비정규전을 이용하여 공포를 증폭시켰다. 이런 전술이 낯설었던 미군과 국군은 상당히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남도현
그것은 한편으로 군단급 부대의 지휘를 맡길 만한 인재가 당시 국군에 그리 많지 않았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제3, 9사단으로 구성된 3군단은 강원도 인제 지역을 담당하고 있었는데 좌측으로 미 10군단과 우측으로는 국군 1군단과 연결되어 있었다. 그런데 그때까지 국군은 중공군에 대한 노이로제가 극심하였다. 꽹과리와 피리로 대변되는 것처럼 중공군이 구사한 심리전에 말려들어 상황파악도 제대로 못하고 무너지기 일쑤였다.
더구나 참전초기부터 부지불식간 국군이 보여준 이런 행태를 간파한 중공군은 이후 미군보다는 국군이 담당한 섹터로 돌파구를 만드는 전술을 자주 구사하였다. 사실 당시의 중공군은 보급에 상당한 문제를 앉고 있어서 공세를 통상 5일 이상 지속하기가 힘들었다. 따라서 설령 포위를 당하여도 결사적으로 항전만 한다면 화력이 앞선 아군이 중공군의 도발을 격퇴할 가능성이 많았다.
<②편에 계속>
지형을 이용한 방어선으로 3배 이상의 중공군을 격퇴했지만 후방 전략 거점을 빼앗긴 3군단
<①편에서 계속>
불길한 징조
실제로 지평리 전투의 미 2사단이나 가평 전투에서의 영연 27여단은 끝까지 저항하며 압도적으로 우세하였던 중공군을 붕괴시켰다. 하지만 국군은 심야에 산속에서 중공군의 꽹과리와 피리 소리만 들리면 급격히 전의를 상실하고 도망가기에 바빴다. 엄밀히 말하면 국군이 중공군에 대한 콤플렉스를 극복한 것은 1951년 5월말에 있었던 용문산 전투의 승리에서부터라고 보는 것이 맞다.
/중공군은 보급 능력에 문제가 많아 공세를 시작하면 일주일 정도밖에 위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하지만 이런 약점을 알기 전까지 아군은 계속 밀려나갔다. /남도현
이와 같이 중공군에 대한 거부감이 극심하여 국군이 주로 농락당한 시기는 적의 전술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중공군 참전 직후부터 1951년 5월 이전까지가 대부분이다. 그 중에는 국군 역사에 있어 최악의 굴욕으로 평가되는 현리 전투도 있었다. 이때 적이 목표로 하였던 주 공략 대상이 바로 3군단이었다. 김종오는 이 전투에서 결코 지우기 힘든 일생일대 치욕을 당하였다.
중공군 21개사(師-서방측 개념으로 사단)를 주력으로 하는 공산군은 5월 15일 인제 지역으로 주공을, 16일에는 가평 지역으로 조공을 투입하여 대공세를 감행하였다. 이른바 5월 대공세 혹은 춘계 2차공세라고도 불리는 제6차 공세가 시작된 것이었다. 인제지역으로 돌입한 공산군 주력은 3군단과 미 10군단의 전투지경선을 따라 급속히 전선을 돌파하면서 그 간극을 점점 넓혀 나갔다.
/중공군의 산악전 능력은 상상이상으로 위력적이었다. 야밤에 하루 동안 산길을 30킬로미터를 돌파하여 3군단 배후의 오마치 고개를 점령하였고 이것은 참패의 단초가 되었다. /남도현
그와 동시에 3군단의 우측이었던 태백산맥 서측 능선으로 북한군 5군단 예하의 4개 사단이 출몰하였다. 이들은 해발 1,519미터의 가리봉 일대를 통과하여 중공군과 연결함으로써 3군단을 배후에서 이중포위하려 하였지만 제3사단 22연대의 방어선을 뚫지 못하였다. 김종오는 험준한 지형을 십분 활용하여 5월 17일까지 약 3배나 많은 북한군의 집요한 공격을 모두 격퇴시킴으로써 정상적인 방어 편성을 유지하며 선전하였다.
그런데 바로 그때 국군 7사단 방어선을 돌파하여 3군단 좌측으로 내려온 중공군 60사 178연대 소속의 1개 중대가 하루 동안 무려 30킬로미터나 되는 험한 산길을 뚫고 들어와 후방의 전략적 거점인 오마치고개를 점령하여 버렸는데, 이것은 국군 3군단의 붕괴를 가져오는 전주곡이 되었다. 사실 이곳이 3군단의 배후를 연결하는 유일 통로가 맞지만 문제는 설령 이곳이 차단되어도 고립을 뜻하는 것은 아니었다는 점이다.
(7)-(1)(2) 천추의 한으로 남을 후퇴 명령
오판을 불러온 악몽
김종오는 좌측에서 중공군의 거센 공세를 받고 무너져 내리고 있던 9사단으로부터 오마치고개가 중공군에게 차단당하였다는 통보를 받았다. 그러자 그는 북한군 5군단을 상대로 선전하고 있던 3사단에게 철수를 명령하고 현진지 포기를 결정하였다. 퇴로의 차단을 우려한 나머지 천추의 한으로 남는 오판을 하였던 것이다. 안타깝게도 이러한 결정은 3군단의 급속한 몰락을 부채질하였다.
이는 사실 못내 아쉬운 대목이라 할 수 있다. 포위되었어도 보급과 화력 지원은 공중을 통해서 충분하였고 마음만 먹으면 오마치고개를 되찾는 것도 그리 어렵지는 않던 상황이었다. 문제는 전투에서의 패배보다도 후방 퇴로가 차단되었다는 사실하나 때문에 순식간 공황상태에 빠졌다는 것이었다. 어쩌면 전투에 임하는 부대가 퇴로를 먼저 생각하고 있었다는 자체가 그만큼 전투의지가 없었다는 의미이기도 하였다.
결과적으로 인근 벙커고지에서 진내포격이라는 초강수를 두면서까지 현 진지를 사수하여 중공군의 공세 확대를 무력화시켰던 미 2사단처럼 철저히 현 진지에서 저항하는 것이 맞았다. 하지만 김종오는 지난 북진 시에 지휘하던 6사단을 아군부대 중 압록강에 제일 먼저 도착시켰지만, 퇴로를 차단당하여 초산에서 부대가 무참하게 붕괴 당하였던 뼈아픈 기억을 한시도 잊지 못하였다.
/지평리 전투 당시 미 2사단 23연대는 5배나 많은 중공군에게 포위를 당하고도 결사적으로 저항하여 대승을 거두었다. 중공군은 보급에 문제가 많아 공세를 일주일 이상 지속하기 어려워 이처럼 현지를 사수하면 이길 가능성이 많았다. 하지만 국군은 현리에서 그렇게 하지 않았다. /위키디피아
도와 줄 수 없으니 알아서 탈출하라는 식으로 부대가 붕괴되었던 트라우마 때문에 그는 포위에 대해 심각한 거부감을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유일한 후방 통로인 오마치고개가 차단되었다는 소식은 충격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었고 초산전투의 악몽이 떠올랐던 것은 일견 타당하였다. 하지만 그때와 달리 이번에는 설령 포위가 되었어도 결사적으로 방어에 임한다면 적을 물리칠 가능성은 충분하였다.
화력이 앞서고 제공권까지 확보하고 있던 아군은 지난 여러 차례의 공산군 공세에서 지평리 전투, 가평 전투처럼 압도적인 적에게 포위당하였음에도 적을 격퇴하여 대승을 이끈 경험이 있었고 충분히 그럴 능력이 존재하였다. 그런데 아쉽게도 미군과 영연방군과 달리 국군들은 그런 경험이 없었다. 이런 사실을 간파한 중공군은 이후 공세의 주공 방향을 항상 한국군 쪽으로 향하였고 이번에 크게 당한 것이었다.
/현리전투 당시 붕괴된 3군단의 후퇴로. 말이 후퇴이지 엄밀히 말하면 도주였다. 그렇게 국군의 6.25 전쟁 최대의 굴욕을 겪었다. /육군 제공
3군단이 오합지졸 같이 패퇴하자 밴 플리트 장군은...
사상 최악의 참패
사수를 포기하고 3사단이 후퇴를 선택함으로써 상황은 최악의 국면으로 치달았다. 그동안 아군의 저항에 막혀 꼼짝 못한 북한군 5군단이 가리봉 일대까지 진출하면서 전선이 급격히 무너져 내리기 시작한 것이었다. 그나마 다행이었던 것은 북한군이 험준한 산악지역을 더 이상 넘지 못하여 오마치고개를 선점하고 있던 중공군 20군과 연결하는데는 실패했다는 점이었다.
이로 인해 방대산 일대가 차단되지 않았고 이후 이곳은 각개 분산되어 도망치던 3군단 패잔병들의 유일 탈출로가 되었다. 더불어 북한군 5군단의 동쪽 외곽에서 병행 남진하던 북한군 2군단의 공격도 수도사단에 의해서 좌절되었다. 좌측의 중공군과 달리 우측에서 공세를 가한 북한군의 이러한 연이은 실패는 그나마 불행 중 다행이었던 순간이었다. 한마디로 남북한군 모두 현리전투에서 무능의 극치를 연출하였던 것이었다.
/북한 선전 매체의 연출 선전 사진과 달리, 국군 3군단이 무참히 붕괴한 현리 전투 당시에 북한군도 군사적 무능을 연이어 보였다. 결론적으로 중공군이 위기를 만들고 미군이 수습한 전투였다. /남도현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번 무너지기 시작한 3군단의 붕괴는 가속화되었다. 유일 탈출구인 방대산으로 일거에 많은 병력이 몰려들기 시작하면서 엄청난 혼란이 가중되었는데, 그 혼잡도가 사람이 서 있으면 그냥 떠밀려서 앞으로 나아 갈 정도였다. 그리고 이러한 굴욕의 대열 속에는 말단의 사병은 물론이거니와 김종오를 포함한 3명의 장군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처럼 3군단은 총 한번 제대로 쏘면서 방어도 못해본 채 귀중한 장비를 내팽겨 치고 중구난방으로 무질서하게 후퇴를 하였다. 6·25전쟁 초기에 압도적인 전력의 열세로 말미암아 낙동강까지 밀려 내려 갈 때도 보지 못하였던 참담한 도주극이었다. 미군 전사에 '군기 빠진 오합지졸들의 나 살기 경쟁이었다'고 독설로 쓰여 있을 만큼의 한심한 패전이었다. 한마디로 변명의 여지가 있을 수 없는 최악의 참패였다.
이처럼 중동부 전선 중앙의 3군단이 붕괴되고 전선 전체에 압박을 불러일으키면서 전세가 급속히 악화되자 미 8군 사령관 밴 플리트(James A. Van Fleet)는 전략 예비대인 미 3사단과 미 187공수연대를 붕괴지역의 배후 거점인 운두령으로 긴급 전개시킴과 동시에 동해안을 담당하던 제1군단에게 대관령을 선점하도록 지시하여 중공군의 대공세를 가까스로 틀어막는데 성공하였다.
(8)-(1)(2) 현리전투는 작전상 후퇴가 아닌 무질서한 도망
최악의 참패
3군단은 3일 동안 무려 70킬로미터를 대책 없이 밀려나고 난 다음에야 겨우 후퇴를 멈출 수 있었다. 5월 19일∼20일까지 수습된 병력은 3사단이 34퍼센트, 9사단이 40퍼센트 정도였으며, 미군의 긴급 투입으로 겨우 전선을 안정화 시킨 5월 27일이 되어서야 70퍼센트의 병력과 30퍼센트 정도의 장비를 수습하였다. 곧바로 3군단을 방문하여 해체를 명령하였을 만큼 한심한 패전에 대한 밴 플리트의 분노는 대단하였다.
현리전투는 국군 역사상 최악의 참사였고 김종오는 그러한 굴욕의 핵심 당사자 중 하나였다. 현리전투는 패배였지만 그냥 패배가 아닌 비참한 패배였고, 후퇴였지만 작전상 후퇴가 아닌 무질서한 도망이었고, 붕괴였지만 혼자만의 붕괴가 아닌 모두를 위험에 빠뜨릴 수 있었던 한심함의 극치였다. 국군 역사에 있어 씻을 수 없는 오명이 되었지만 전투의 직접 당사자였던 김종오에게는 더더욱 참을 수 없는 치욕이었다.
초산에서의 악몽을 겨우 털어내고 새롭게 시작하려는 그에게 이런 무지막지한 모습은 믿을 수 없는 현실이었다. 6·25전쟁이 발발하고 김종오와 그가 지휘하였던 부대는 북한군에게 그야말로 타도대상 1순위에 해당되는 저승사자와 같았던 무서운 존재였다. 춘천에서, 음성에서, 신령에서 적에게 번번이 좌절을 안겨주었던 그가 중공군이라는 새로운 적을 맞아 두 번의 패배를 기록한 것이었다.
/1953년 금성 전투에서 포로가 된 국군의 모습으로 알려진 사진. 현리 전투의 참담함은 이를 훨씬 능가하였다. /남도현
초산의 실패는 굴욕이라기보다는 어쩔 수 없었던 시대의 상황으로 치부해 버릴 수 있고 비난까지는 힘든 불가항력적인 측면도 있었지만, 현리의 참패는 두말할 것 없이 본인의 과오도 컸다. 우선 영(令)이 제대로 서지를 않았다. 아무리 사단장이 선두에서 서서 현지 사수를 외쳐도 한번 겁먹은 장병들은 무기를 내팽개치고 도망 다니기에 바빴고 그것은 중간 간부들도 마찬가지였다.
사실 1951년 봄에 편제된 국군의 질은 형편없었다. 6·25전쟁 초기의 병력은 전투 경험은 많았으나 거의 소진된 상태였고, 북진과 더불어 새로 징집된 병사들은 제대로 훈련도 받지 못한 상태로 전선으로 나갔기 때문에 경험이 부족한 상태였다. 그것은 사병뿐 아니라 장군을 포함한 대부분의 장교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설령 그렇다하더라도 제대로 싸워보지도 않고 도망만 다닌 현리에서의 패배는 김종오를 당황하게 만들었다<②편에 계속>
/2015년 1월 2일 현리 전투 전적지에서 군단장 지휘로 신년 전투결의대회를 펼친 3군단. 두고두고 되새겨야 할 만큼 현리 전투는 국군의 역사의 치욕이었다. /유용원의 군사세계
현리 치욕을 반성하며 백마고지의 9사단장으로 부임하다
치욕과 반성
바로 그때 국군의 자부심을 회복하고 현리 전투의 굴욕을 상쇄하는 기념비적 전투가 근처에서 벌어졌다. 한때 그가 지휘하였던 6사단이 5월 18일부터 28일에 걸친 용문산-화천호 전투에서 장도영(張都映) 사단장의 지휘로 3개 사로 구성된 중공군 63군을 처참하게 수장시켜 버린 엄청난 대승을 거둔 것이었다. 그것도 바로 직전인 4월에 사창리에서 있었던 굴욕적인 패배를 극복하고 이룬 성과였다.
승리의 요인은 간단하였다. 심리적인 공포감을 극복할 수 있는 정신력 배양과 끝임 없는 훈련, 그리고 지휘 계통의 확립이었다. 비록 병력에서는 중공군이 압도적이었지만 아군은 제공권과 화력에서 이를 충분히 능가하고 있었다. 오히려 유엔군의 무시무시한 화력에 대해 중공군이 겪은 공포감은 국군이 생소한 중공군의 전술에 대하여 느꼈던 심리적 콤플렉스를 훨씬 능가했을 정도였다.
/6사단을 이끌고 용문산-화천호 전투에서 6.25전쟁 최대의 승리를 거둔 장도영. 바로 직전에 있었던 사창리 전투에서 굴욕을 맛보고 이를 교훈 삼아 준비를 철저히 하여 얻은 장도영의 승전보는 김종오에게도 영향을 주었다. /위키피디아
그만큼 초전에 아군이 포위되더라도 신념을 가지고 버티면 중공군을 이길 가능성이 충분히 있었다. 물론 임진강 전투처럼 일부 실패한 사례도 있었지만 지옥에서 탈출하는데 성공한 미 해병 1사단의 장진호 전투, 미 2사단의 지평리 전투 그리고 영연방군의 가평 전투는 이미 이를 입증한 것이었고 청성부대가 거둔 대승은 우리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주었던 것이었다. 김종오는 이를 충분히 인식하고 자신의 과오를 두고두고 곱씹었다.
복수의 날을 위하여 와신상담하던 그는 1952년 5월 30일 철원지역을 담당하고 있던 제9사단장으로 부임하게 되었다. 임지에 오르기 전 김종오 사단장은 상급 부대장인 미 8군 사령관과 미 9군단장을 연이어 만났는데, 그들은 한결 같이 9사단이 관할하고 있던 전방의 395고지의 전략적 중요성에 대해 언급을 하였다. 바로 피의 현장으로 역사에 기록되는 백마고지였다.
이승만 대통령은 자나 깨나 북진통일을 노래하였지만 1952년이 되었을 때 유엔군도 공산군도 1950년 6월~1951년 5월 사이에 있었던 기동전을 시도하여 상대를 완전히 제압하고 전쟁을 끝낼 생각은 없었다. 그냥 최초 전쟁이 일어나기 전과 비슷한 지역에 전선이 이뤄진 현재 상태에서 휴전하려는 암묵적인 시도만 있었다. 때문에 전투도 휴전을 하였을 때 유리한 위치를 점하는 방향으로 진행되었다.
/1951년 7월을 기점으로 전쟁은 휴전을 염두에 둔 고지전으로 바뀌었다. 당시에는 곧바로 휴전이 이루어 질 줄 알았지만 장장 2년간 전쟁은 계속되면서 전선의 고지들은 엄청난 피를 빨아들이는 블랙홀로 바뀌었다. /US ARMY 제공
(9)-①② 백마고지에서 원수 같은 중공군 38군을 만나다
시작된 고지전
이제 정전 혹은 전쟁 재발 시에 상대를 감제하기 쉬운 요지를 선점하기 위한 고지전으로 일관하면서 마치 제1차 대전의 서부전선과 같은 모습으로 전선이 급격히 변화하였다. 아군이건 적군이건 고지를 선점하면 참호를 깊게 파 엄폐호를 만들어 상대의 공격을 막았고 반대로 고지를 빼앗기면 이를 다시 회복하기 위한 어떠한 시도도 아끼지 않았다. 당연히 엄청난 피와 철이 요구되는 전투 행태였다.
백마고지가 특히 전략적으로 중요했던 이유는 그 특유의 위치 때문이었다. 백마고지를 아군이 점령한다 하더라도 북쪽에 백마고지를 내려다보는 더 높은 고지들이 많아 전술상 크게 유리한 측면은 없지만, 반대로 적군이 백마고지를 차지하면 철원-김화로 이어지는 평야지대를 모두 적에게 내주고 아군은 약 15킬로미터 정도 뒤로 물러나 전선을 구축하여야 했다. 한마디로 양보할 수 없는 요지였다.
그런데 백마고지를 놓고 싸우게 될 적은 아이러니컬하게도 초산에서 청성부대를 붕괴시켰던 중공군 38군이었다. 김종오가 두고두고 잊지 않았고 반드시 복수하여야 할 철천지원수를 외나무다리에서 만난 것이었다. 38군은 여타 중공군부대와 달리 백마고지 전투 투입을 위해서 오랫동안 후방에서 교육받았고 소련식으로 완편된 포병을 보유하여 화력도 막강하였다. 이처럼 적도 백마고지를 차지하기 위해 최선의 준비를 마쳐놓고 있었던 상태였다.
/남쪽에서 바라 본 백마고지의 모습. 이곳을 적이 점령하면 이군은 철원 평야를 포기하여야 했다. 그래서 반드시 지켜내야 할 곳이었다. /전쟁기념관 제공
제112, 113, 114사로 구성 된 중공군 38군의 병력은 9사단의 3배에 이르고 있어 인해전술로 아군을 압도할 예정임이 분명하였다. 굳이 아군에게 유리한 상황이라면 제공권과 후방 화력정도였지만 문제는 피아가 엉켜서 싸우는 고지전에서는 이러한 지원이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결국 마지막에는 적을 일일이 격퇴하여야 최종적인 승리를 얻을 수 있는 환경이었다.
복수의 기회를 엿보던 김종오는 결코 지난날을 잊지 않았다. 그동안 체득하고 수집한 중공군의 전술을 예하 장병들이 외울 정도로 철저히 교육시켰다. 더불어 중공군이 주로 작전을 벌이는 야간 사격 및 백병전 훈련도 지겹도록 반복하였다. 그리고 모든 참호는 유개호화 하였고 부상병 발생 시 이를 후송하기 위해 전력이 이탈되지 않도록 부상병이 대피할 수 있는 시설까지 구축하였다.<②편에 계속>
/395고지 일대에 참호를 구축하고 전투 준비 중인 9사단 병사들. /남도현
피로 물든 백마고지...열흘동안 7번이나 주인이 바뀌다
<①편에서 계속>
승리의 의지
드디어 10월 6일, 적이 발사한 포탄이 백마고지를 선점하고 있던 아군 진지에 작열하면서 피의 전투가 개시되었다. 포탄의 비가 그치면 중공군이 새까맣게 고지를 향하여 진격하여 왔고 포격에서 살아남은 아군은 죽기 살기로 이들을 물리쳤다. 그러나 인해전술에 밀려 최초 방어전에 실패하여 고지를 중공군에게 내어 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것은 끝이 아니고 시작이었다.
아군도 즉시 반격에 나서 불벼락을 퍼붓고 고지를 향하여 전진하였다. 다만 김종오는 최대한 불필요한 사상을 막고 전투력을 유지하기 위해 예비대를 적절히 활용하여 교대로 작전에 투입하였다. 하지만 설령 그렇다하더라도 아군의 희생을 막을 수는 없었다. 백마고지는 아군과 적들이 흘린 피로 벌겋게 물들어가고 있었다. 1952년 10월 6일부터 장장 열흘에 걸친 전투로 무려 12차례 쟁탈전이 벌어졌고 7번이나 고지의 임자가 바뀌었다.
/준비를 완료한 중공군 38군이 새까맣게 밀려오면서 혈전이 시작되었다. 이들은 지난 초산 전투에서 김종오에게 아픔을 안겨준 바로 그 부대였다. /남도현
해발 400미터도 되지 않는 작은 고지를 점령하기 위해 양측이 퍼부었던 포탄만도 무려 30만발로 추정될 만큼, 양보하지 않는 치열한 쟁탈전이 연일 계속되었고 하루에도 서너 번 주인이 바뀐 경우도 있었을 정도다. 그러나 정신력에서 앞선 9사단의 인내심은 중공군을 압도하였고 이런 놀라운 아군의 모습에 적들은 질려갔다. 중공군도 꽹과리나 피리 소리에 놀라던 그때의 국군이 아니라는 점을 잘 알고 있었다.
김종오는 전쟁 초기부터 일부 국군 장성들이 남발한 무조건 돌격명령을 철저히 배격하였다. 그는 비록 일본군 출신이기는 하였지만 효과가 미미한 무식한 '반자이돌격(萬歲突擊)'이 효과적인 전술이 아님을 잘 알고 있었고 이를 오히려 극도로 혐오하였다. 당연히 그는 백마고지전투에서도 최대한 아군의 출혈을 막으려 하였다. 어쩌면 그것은 병력이 중공군에 비해 절대 부족한 아군이 취하여야 할 불가피한 선택이기도 했다.
이런 생각은 전투 중 김종오가 참모들과 나눈 이야기에도 전하는데 전사에 나오는 대목이다. "이런 식으론 백마고지를 지키는 것이 불가능하다. 만일 아군이 한 번 더 고지를 빼앗기게 되면 아군을 안전 지역으로 완전히 대피시킨 후 최대한 모든 화력을 집중시켜 적을 일거에 괴멸시키고 다시는 빼앗기지 않는 작전을 세운다. 적에게 최대한의 인원 출혈을 강요하여 전투의지를 꺾어버리는 것이다."
/부대를 방문한 미 8군 사령관 밴 플리트를 안내하는 김종오. /백마고지 전투 기념관 제공
(10)-(1)(2) 중공군 38군의 절반을 죽인 백마고지의 빛나는 승리
피로 지켜 낸 고지
김종오는 화력만 제때 동원하면 아군의 피해를 최소화하면서 적에게 충분히 타격을 줄 수 있을 것으로 예상하고 있었다. 따라서 그는 이미 전투 이전부터 9사단이 속한 미 9군단장 젠킨스(Reuben E. Jenkins) 중장과 담판을 지어 포병지원이 절대 부족하지 않도록 사전에 엄중히 조치하여 놓은 상태였다. 젊은 국군 장군의 호기를 높게 산 젠킨스는 약속대로 김종오가 원할 때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결국 10월 15일, 9사단의 놀라운 분투에 중공군이 백기를 던졌다. 사실 중공군 38군은 지구에서 사라졌을 만큼 큼 더 이상 투입할 가용 자원도 없었다. 고지 주변에서 숫자만으로도 38군 전체 병력의 절반 정도인 무려 만4389구의 중공군 전사자가 확인되었다. 부상자까지 따진다면 38군이 전투를 더 이상 지속한다는 자체가 불가능하였다. 아무리 인해전술이라도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피해였다.
/9사단의 끈질긴 항전에 중공군은 엄청난 시신을 남기고 결국 백마고지에서 물러났다. US ARMY 제공
물론 아군의 피해도 컸다. 3146명의 국군이 고지를 지키기 위해 희생되었다. 하지만 6·25전쟁 내내 국군이 이렇게 엄청난 희생을 각오하고, 또한 두려워하지 않고 항전하여 대승을 거둔 경우도 그리 많지는 않다. 산의 높이가 1미터 정도 낮아졌을 정도로 고지는 황폐화하였는데, 능선의 모습이 마치 말 등처럼 생겼다하여 이후 백마고지로 명명되었고 9사단은 백마부대라는 영광된 호칭을 얻게 되었다.
백마고지 전투를 승리로 이끈 김종오는 초산의 원통함과 현리의 망신을 일거에 회복하였다. 특히 백마부대는 현리전투 당시에 그가 지휘하였던 3사단과 함께 3군단 소속으로 사상 최대의 굴욕을 당한 부대이기도 하였다. 따라서 9사단이 겪은 수모의 기억도 함께 날려 버린 셈이었다. 이 전투의 후유증이 얼마나 컸던지 중공군이 피를 부어대는 고지전투에 더 이상 매달리지 않도록 만들어 버렸다.
6·25전쟁 기간 동안 커다란 전투가 수없이 많았는데, 공교롭게도 그때마다 김종오는 역사에 당사자로 굵게 획을 그었다. 전쟁 초기의 춘천대첩과 전쟁 말기의 백마고지 전투는 위대함을 후세에 길이 전할 위대한 승리였고 전략적 효과까지 컸다. 또한 충주, 음성, 신령에서 보여준 방어전은 놀라운 지략 싸움이었다. 반면 초산의 패배는 아쉬움이, 현리의 망신은 믿지 못할 참담함으로 기록되었다.
<②편에 계속>
/백마고지 전투 직후 9사단을 방문한 유엔군 주요 지휘부와 김종오 장군(왼쪽부터 백선엽 참모총장, 밴 플리트 미 8군사령관, 김종오, 젠킨스 미 9군단장). /백마고지 전투 기념관 제공
"조국 통일도 못해보고 눈을 감으니 한스럽다"
<①편에서 계속>
뼛속부터 무인이었던 인물
6·25전쟁 당시 활약한 가장 인상적인 국군 지휘관을 거명하라면 제일 먼저 손꼽는 것이 다부동 전투와 평양 점령을 이끌었던 백선엽(白善燁)과 김종오라 할 수 있다. 백선엽은 거대한 대승보다 전쟁 내내 부대의 편제를 유지하고 무리하지 않은 작전 구사로 패배를 기록하지 않은 끈질김이 강점이었다. 그에 비하면 김종오는 대체로 모가 많았지만 어처구니없게 도도 던졌던 장군이라 할 수 있다.
당시 부관이었던 진종채(陳鍾埰) 예비역 대장의 회고를 보면 "완벽주의자에 가까웠다. 무슨 일을 하던 빈틈이 없고 또한 책임감이 강해 모시기가 여간 조심스럽지 않았다. 희비의 내색도 없고 화내는 일도 별로 없었다"고 회고하였다. 더불어 자상한 성격이어서 초산전투에서 와병 중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고립된 20여명의 사병을 직접 구출하여 차량에 탑승하고 함께 후퇴하였다.
/김종오의 신화가 시작된 춘천 전투를 기리기 위한 기념비. /6.25 전쟁 60주년 기념사업단 제공
그는 자신에게 부과된 책임을 완수하고 나아가서는 결코 싸워서 패하지 않고도 효과적인 지연전을 펼칠 수 있는 모든 전략, 전술을 구사하였고 되도록이면 불필요한 출혈을 막아 부하와 부대의 전력을 보호하려 하였다. 전쟁이 살상을 동반하는 것이지만 아군의 피해가 없도록 하는 것이 바로 승리의 지름길임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사실 이겼어도 아군의 피해가 크다면 바람직하지 않다.
아마 세계 전사를 뒤져보아도 한사람의 지휘관이 이렇게 극과 극을 오가며 굵은 발자취를 남긴 경우는 그리 많지 않으리라 생각되는데, 초산 전투의 아픔보다는 춘천 전투 위대함이, 현리 전투의 굴욕보다 백마고지의 영광이 더욱 컸다. 그는 군단장, 군사령관, 합참의장, 육군참모총장 등의 요직을 고루 거친 후 육군대장으로 전역하였으나 1966년 불과 45세의 젊은 나이에 지병으로 타개하였다.
/김종오는 역사가 일천하고 부족한 것이 많았던 창군 초기에 국군의 명예를 높인 명장이었다. /남도현
유명을 달리하기 직전, 그는 "더 일할 나이에 조국통일도 못해보고 눈을 감으니 한스럽다"라는 마지막 유언을 남겼다. 관제 홍보영화에서 흔히 볼 수 있지만 막상 현실에서 찾기 힘든 것이 바로 김종오처럼 죽는 순간까지 국가와 민족을 걱정하는 것인데, 그는 살아 생전에 통일을 이루지 못한 사실을 죽는 순간까지 안타까워했다. 이렇듯 뼛속 깊은 곳부터 무인이었던 그를 최고의 명장으로 칭하는데 결코 모자람이 없다 할 것이다.
■반공포로 석방
① 이승만이 반공포로 석방하자 처칠이 "불쾌하다"한 이유
모두를 놀라게 만든 사건
3년이 넘게 계속되었던 6·25전쟁을 고찰하면 극적인 전투의 대부분이 최초 1년 동안에 벌어졌음을 알 수 있다. 1951년 7월 8일, 연락장교간의 예비회담이 개최되면서 양측 모두 휴전을 염두에 두고 대대적인 공세를 자제하였기 때문인데, 덕분에 전선은 현재의 휴전선 일대에서 고착되었다. 하지만 곧바로 휴전이 이루어질 것이라는 예상과 달리 전쟁은 그 후로도 2년이나 더 지속되었다.
그렇게 된 가장 큰 이유는 서로 자신이 유리한 방향에서 휴전을 이루겠다는 의지 때문이었다. 툭하면 정회와 속개가 반복되면서 이견(異見)을 조율하여 나갔는데, 그중 합의에 가장 시간을 많이 끌었던 난제가 포로 교환이었다. 마침내 2년 가까이 계속된 말싸움 끝에 1953년 6월 8일 포로 교환에 관한 원칙이 타결되자 휴전은 가시화되었다. 그런데 바로 그때 지금까지의 노력을 흔들어 버리는 엄청난 사건이 벌어졌다. 반공포로석방이었다.
/탈출에 성공한 반공포로가 서울에서 열린 환영대회에서 태극기를 흔들고 있다./사진=미국 문서기록보관소
6·25전쟁 말기에 있었던 가장 극적인 사건을 하나만 들라면 단연코 반공포로석방이다. 유리한 위치를 차지하기 위한 고지쟁탈전 외에는 대부분의 전선에서 교전을 멈춘 상황이었을 만큼 이미 전선에는 휴전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 그러했던 1953년 6월 18일에 단행된 전격적인 반공포로석방은 전 세계를 충격에 몰아넣었다. 이와 관련한 여러 반응을 보면 그 파급정도를 파악할 수 있다.
“전 세계 자유수호민의 찬양을 받을 것이다.”(조셉 맥카시 미국 상원의원)
“이승만 대통령은 진정한 애국자다.”(해리 트루먼 미국 전 대통령)
“유엔군의 권한을 침범한 무례한 행동이다.”(존 덜레스 미 국무장관)
“용서할 수없는 일방적인 처사다.”(런던타임스)
“대단히 놀랐고 불쾌하다.”(윈스턴 처칠 영국수상)
서방진영에서 조차 이처럼 극과 극의 평가가 나올 만큼 엄청난 센세이션을 불러일으킨 이유는 명분이나 심정적으로는 그것이 옳았지만, 법리적인 측면을 위반했고 특히 협상으로 전쟁을 종결 짖기 위해 애쓰던 유엔군 측의 노력에 찬 물을 끼얹었기 때문이었다. 자칫하면 휴전이 무산 될 가능성이 컸다. 하지만 대한민국의 입장을 무시하고 휴전을 종용하던 유엔군의 행동에도 문제가 많았던 것 또한 사실이었다.
/1952년 1월 5일 미 대통령 요트에서 회담 중인 트루먼과 처칠. 그들의 주요 의제 중 하나가 6.25전쟁이었는데 처칠은 조속한 휴전을 요구하였다. 이후 반공포로석방에 대해 정반대로 평가하는 재미있는 모습을 보였다./사진=미국 문서기록보관소
난제 중의 난제
미국은 조속히 휴전을 이루고자 하였지만 그렇다고 무조건 양보하면서 일처리를 할 수는 없었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포로 교환은 휴전 협상 개시 후 양측이 이견을 보인 가장 큰 난제였다. 원론적으로 양측이 잡고 있던 포로를 그냥 맞교환하면 되지만 그것이 그리 간단치 않았다. 우선 양측이 추산하고 있던 포로의 숫자가 실제로 공개된 명단과 차이가 많았고 특히 공산군 측 주장은 터무니없을 정도였다.
1951년 12월 18일 처음 포로 명부를 교환하였을 때, 전투 중 행방불명되어 공산군 측의 포로가 되었을 것으로 유엔군 측이 추산하고 있던 인원은 국군 88,000여명과 미군 11,500여명 등 총 10만 여명이었으나 공산군 측으로부터 넘겨받은 명부에는 불과 11,559명밖에 없었다. 당시에 유엔군은 그 열배가 넘는 총 132,474명의 포로 명부를 공산군 측에게 넘긴 상황이었다. 이런 상태에서 1:1 송환은 불가능하였다.
/1951년 11월 27일 군사분계선 설정을 하고 있는 유엔군 측 연락장교 제임스 머레이와 공산군 측 연락장교 장준산. 이때만 해도 곧바로 휴전이 성립될 것으로 보았으나 이후 포로 문제 때문에 회담은 2년이나 더 걸렸다./사진=전쟁기념관
공산군 측은 포로들이 자유의사에 따라 북한군에 재입대한 것이므로 송환 대상이 아니라는 주장을 펼쳤다. 많은 포로가 북한군으로 복무 중인 것은 사실이지만 이는 강압에 의한 것이었다. 최근까지도 북한을 탈출하여 제3국을 통해 귀순하는 생존 국군포로가 있다는 사실에서 충분히 알 수 있는 사실이다. 사실 당시에 제대로 해결보지 못한 국군포로 송환 문제는 지금까지 두고두고 곱씹어야 할 커다란 실책이었다.
또한 남북이 서로 다른 민족이 아니다보니 무조건 송환이 곤란한 경우가 많았다. 특히 인공 치하 당시에 강제 징집당하여 북한군이 될 수밖에 없었던 남한 출신 포로들은 북으로의 송환을 강력히 거부하였다. 자발적으로 체제를 선택한 일부를 제외한다면 그들이 지금까지 살아왔던 곳을 떠나 굳이 북으로 가야할 하등의 이유가 없었다. 거기에 더해 국민당 출신이었던 중공군 포로들 중에서 대만으로 가기를 원하는 이들도 많았다.
결국 줄다리기 끝에 1953년 5월 25일, 유엔군 측은 포로들이 중립국위원회의 심사를 받아 자유의사대로 거취를 결정할 수 있도록 하자는 수정안을 제시하여 공산군 측의 동의를 얻어내었다. 그들도 많이 지쳐 있던 상황이었던 데다가 이 정도면 충분히 얻을 것을 얻었다고 판단한 것이었다. 하지만 한국 정부가 협상 결과 자체를 받아들일 수 없다고 격렬히 반발하고 나섰다. <계속>
/휴전 후인 1954년 자유의사에 따라 대만(자유중국)으로 보내지는 중공군 포로들. 국공내전 당시 국민당군이었다가 강제로 전쟁에 동원된 이들이 많았다./사진=미국 문서기록보관소
남도현의 Behind War
② 유엔군 포로협상에서 국군포로 송환 문제는 방치되고...
성급하였던 타협
타결된 포로송환협정안에 따르면 포로들은 북으로 돌아갈지 남에 남을지 혹은 제3국으로 가게 될지 선택할 자유가 있었다. 그렇다면 우리가 고민하던 반공포로들의 강제송환을 원천적으로 막을 수 있는 최소한의 안전장치는 마련된 셈이었다. 하지만 당시에 정부가 강력하게 협정 안을 반발하고 나오게 된 데는 휴전과 관련한 문제가 복합적으로 내재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우선 협상타결에만 급급하여 국군포로 문제가 완벽하게 해결되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최초 유엔군사령부가 추산하던 국군 실종자 88,000여 명 중에서 귀환이 확정된 포로는 겨우 8,343명에 불과했다. 이 상태에서 15만 명 가까이 되는 공산군 포로의 송환을 자유의사에 따라 진행한다하더라도 약 10만 이상이 북으로 돌아갈 것이 확실하였다. 수치상으로 완전히 밑지는 거래였다.
/휴전 직후인 1953년 8월 12일 북으로 송환되는 친공포로들. 북으로 귀환한 후 사상성을 의심받지 않도록 벗어버린 옷들이 길가에 흩어져 있다. 사실 수치상으로 본다면 포로교환은 실패에 가까웠고 이때 생환되지 수많은 국군포로들은 지금도 문제가 되고 있다./사진=미 해군
명분상으로 유엔군 측은 자유 송환이라는 큰 틀을 유지하였다고 자평하였지만 휴전 타결에 너무 신경쓰다보니 소탐대실을 한 것이다. 특히 전쟁을 즉각 중지하겠다는 공약을 내세웠던 아이젠하워 정권은 내용보다 휴전이라는 결과물에 집착하였다. 이에 반하여 협상이 길어질수록 물리적 피해가 더욱 커질 수밖에 없던 공산군 측은 끝까지 휴전 회담을 정치적 선전의 장으로 이용하며 실리를 챙겼다.
3년 동안의 전쟁은 피아를 막론하고 모두에게 피곤함을 안겨주며 염증을 느끼게 만들었지만 협상장에서 공산군측의 인내심이 더 강했다. 결국 유엔군은 휴전을 강요하는 정치권의 압력과 상대의 전술에 말려들어 반공포로들만 구제하는 것으로 일을 끝냈다. 따라서 북한에 억류된 국군포로들을 찾아내어 송환할 수 있었던 절호의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이 때문이라도 정부는 협상안을 반대하였던 것이었다.
하지만 사실 이것도 명분이었고 진짜 이유는 휴전에 대한 불안감이었다. 통일을 이루지 못한 것은 둘째 치고 전략적인 우위도 점하지 못한 상태로 다시 분단된다는 것은 앞으로도 대한민국의 안전이 보장될 수 없다는 의미였다. 전쟁 내내 외부의 도움이 없었다면 생존을 장담할 수 없었기에 이 상태로 단지 포성이 멈추는 것은 의미가 없었다. 휴전은 말 그대로 전쟁을 쉬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대통령 당선자 신분으로 한국을 전격 방문한 아이젠하워가 전방에서 병사들과 식사를 하고 있다. 조속한 휴전을 공약으로 내세웠을 만큼 강력하였던 그의 의지도 포로 송환 문제가 완벽히 해결되지 못한 상태로 휴전이 이루어 질 수밖에 없었던 하나의 요인이었다./사진=미국 문서기록보관소
휴전보다 더 큰 걱정
포로송환문제의 타결은 바로 이러한 불안한 휴전이 목전에 다가왔음을 의미하는 것이었지만 정작 우리는 이후의 문제에 대해 아직 어떠한 대책도 준비된 상태가 아니었다. 만일 휴전과 함께 북한에 주둔한 중공군과 유엔군의 전면 철군이 동시에 이루어진다면 그것은 악몽과 같았다. 만일 그 상태에서 전쟁이 재발한다면 우리 스스로 전쟁을 치러낼 수 있을지 상당히 의문스러웠기 때문이었다.
결과론이지만 6·25전쟁 당시 유엔군의 즉각적인 참전은 북한이나 전쟁을 배후에서 조종한 소련도 예상하지 못하였을 만큼 빨랐다. 비록 미국이 대한민국의 탄생에 많은 영향력을 행사하였지만 안전까지 보장한 상황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냉전시대의 개막과 더불어 소련에게 밀릴 수 없다는 미국의 의지가 강력하게 작용하면서 대대적인 참전이 즉각 이루어지게 되었다. 하지만 휴전 이후에도 그럴 것인지는 논외였다.
유엔군이 다시 참전한다는 보장이 휴전협정안 어디에도 없었다. 중국은 강만 건너면 언제든지 한반도에 개입할 수 있고 또 하나의 배후인 소련도 북한과 국경을 맞대고 있었지만 휴전 후 유엔군이 한반도를 떠나면 다시 참전할 것인지는 미지수였다. 지난 1949년 미군의 철군이후 불과 1년도 되지 않아 침략이라는 참담한 아픔을 맛 본 우리 정부의 트라우마는 당연히 클 수밖에 없었다.
/휴전이 가시화 되자 통일 없는 휴전은 무의미하다며 연일 반대 데모가 벌어졌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휴전 이후에 대한민국의 안전보장에 대책이 없었던 것이 가장 큰 이유였다./사진=조선일보DB
우리 정부 또한 휴전을 막을 수 없고 그것이 대세임은 분명히 잘 알고 있었다. 이미 전쟁은 1950년 가을을 기점으로 미국과 중국이 주도하는 국제전으로 비화하였고 그들이 휴전을 결심한 이상 전쟁이 더 이상 확전될 가능성도 전무 하였다. 따라서 미국에게 휴전 이후의 안전을 보장해달라는 요구를 계속하던 상태였지만 반응이 미지근하자 차라리 전선에서 소규모 교전이 계속 벌어지는 형태로 전쟁을 지속시키는 것이 좋다고 판단하였다.
따라서 휴전을 지속적으로 반대하였고 그러기 위한 하나의 명분으로 그 전 단계인 포로송환, 그것도 국군포로들의 송환이 담보되지도 않은 타결 내용에 대해서 강력히 반대를 표한 것이었다. 비록 우리가 배제된 상태로 협상이 이루어지고 있는 상황이었지만 유엔군 측과 공산군 측 모두에게 우리의 협조가 없다면 휴전이 순순히 이루어 질 수 없음을 보여줄 필요가 있었다. <계속>
/1949년 인천항을 통해 철군하는 미 24군단. 1945년 해방 당시 38선 이남 일본군의 무장을 해체시키기 위해 주둔한 주한미군의 철수 후 불과 1년도 되지 않아 전쟁이 벌어졌기에 휴전 후 유엔군의 철군 가능성에 대한 우리 정부의 우려는 컸다./사진=미 육군
③ 이승만, 미군 따돌린 포로석방 작전으로 한미상호방위조약 끌어내
이승만의 의지
앞서 언급한 것처럼 포로송환 문제의 타결은 사실상 휴전을 뜻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정작 휴전 이후의 안전에 관하여 어떠한 보장도 받지 못한 우리 정부와 국민의 불안감은 더욱 증폭되었다. 전국적으로 휴전을 반대하는 대대적인 시위가 최고조에 이르렀다. 그 만큼 당시 대한민국은 가진 것이 없었고 부족한 것만 많았던 약소국이었다. 결국 정부는 대한민국의 안전한 미래를 지키기 위한 위험한 줄타기를 벌어야 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포로송환 협정이 조인되기 직전인 1953년 6월 6일, 헌병총사령관 원용덕 중장을 은밀히 불러 반공포로 석방을 모색하도록 지시했다. 대통령의 지시를 받은 원용덕은 육군 헌병사령관 석주암 준장 등과 협의를 거쳐 포로수용소의 경비를 담당하던 육군헌병대가 기습적으로 반공포로를 석방하여 도주시킨 후 사전에 약속된 인근 민가에서 안전하게 보호한다는 작전을 수립하였다.
/전국적으로 휴전을 반대하는 데모가 벌어졌다. 명목상 전쟁을 계속하자는 것이지만 실제로 원한 것은 휴전 이후의 안전보장이었다./사진=대통령 기록관
그런데 반공포로들은 원한다면 북으로 송환을 거부할 수 있는 길이 보장되어 있었다. 따라서 이 작전은 유엔군 측과 공산군 측을 자극하여 철저하게 휴전을 방해하려는 이벤트에 가까웠다. 아니 휴전 방해가 목적이 아니라 대한민국의 안전보장을 담보 받기 위한 시위였다. 이승만은 설령 우리가 이런 무리수를 두더라도 휴전을 막을 수 없음을 잘 알고 있었다. 역설적이지만 그래서 강공책을 쓸 수 있었던 것이었다.
전국 각지의 포로수용소에 밀사가 파견되었고 6월 18일 00시를 기해서 동시에 작전이 개시되었다. 명령에 따라 수용소를 경비하는 헌병대는 미군들을 따돌리고 27,000여 명의 반공포로를 석방하는데 성공하고 그날 06시에 중앙방송을 통해 ‘반공포로의 석방에 관한 담화문’을 발표함으로써 이를 공식화했다. 불안한 휴전을 반대하던 국민들은 우리의 의지를 만천하에 보여주었다고 환호하였다.
반면 북한과 중국은 경악하였다. 원하는 대로 포로송환이 매듭지어질 것으로 예상하던 그들은 전혀 예상하지 사태에 몹시 당황하였다. 최소한 10만 이상의 병력을 새롭게 보충하고 이를 전후 복구에 투입할 수 있을 것이라 예상했지만 이 상태로 포로송환이 제대로 이루어질지 도저히 자신이 서지 않았다. 그러나 이제는 이런 돌발 사태를 구실로 휴전을 깰 수 있는 시점을 넘어섰다는 것도 고민거리였다.
/이승만 대통령의 초상화를 들고 행진하는 반공포로들. 예상치 못한 전광석화 같았던 반공포로 석방은 국내외에 많은 파장을 불러왔다. 사실 이 사건은 석방보다 이슈를 만들기 위한 의도가 더 컸다./미국 문서기록보관소
벼랑 끝에서 얻은 한미상호방위조약
화가 났지만 파투(破鬪)내고 처음으로 돌아갈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이제 그들도 몹시 지쳐 있었고 지금까지 뒤에서 전쟁을 주도한 스탈린이 죽고 정권이 바뀐 소련도 더 이상 전쟁지속을 원하지 않았다. 협상장에서 공산군 측 대표단은 반공포로 석방에 대해서 엄청나게 항의를 하였지만 이를 빌미로 휴전 자체를 깨려고 하지는 않았다. 이승만은 공산군 측의 상황도 정확히 꿰뚫고 있었던 것이었다.
다만 자존심에 상처를 받았다고 생각한 공산군 측은 화천저수지 재점령을 목표로 제한적 대규모 공세를 벌여 그들의 의지를 과시하려 하였다. 바로 1953년 7월 13일 실시된 6·25전쟁의 마지막 공세인 중공군 제7차 공세다. 단지 자존심 때문에 예정하지 않은 공세를 벌였을 만큼 휴전에 대한 소련과 중국의 의지는 강했다. 그러나 누구보다도 놀랐던 것은 이승만의 예상대로 미국이었다.
지난 2년간 지루한 협상을 거듭하던 미국은 이제 사인만 하면 모든 것이 끝난다고 생각하던 중이었다. 그런 와중에 벌어진 방공포로 석방은 지금까지의 모든 노력이 틀어질 수 있다는 우려를 들게 만들었다. 당연히 엄청난 항의를 하였지만 이승만의 의도대로 일이 진행되었다. 미국은 로버트슨 국무차관보를 특사로 파견하여 휴전 직후 최대한 빠른 시일 내에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하겠다는 의사를 표하며 이승만 달래기에 나선 것이었다.
/아이젠하워는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을 약속한 대가로 이승만의 휴전 동의를 얻어 냈다. 1954년 미국을 방문한 이승만을 영접하는 아이젠하워와 닉슨./사진=대통령 기록관
휴전을 공약으로 내세웠던 아이젠하워는 이승만의 노련함에 이끌려 한국 정부가 휴전을 막지 않으면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조속히 체결하여 주기로 약속하였다. 애초 아이젠하워, 덜레스 국무장관, 콜린스 육군참모총장 등 미국 전쟁 수뇌부 대부분이 한국에 대한 방위조약을 반대하였을 만큼 부정적인 견해가 컸었다. 하지만 반공포로 석방은 이를 일거에 뒤엎었고 이렇게 해서 체결 된 조약은 현재 한미동맹의 근간이 되고 있다.
반공포로석방은 즉흥적으로 나온 구상이 아니라 이처럼 치밀하게 국제정세를 제단한 후 그 방법론을 찾아 이룬 쾌거였다. 이를 이끈 이승만은 1951년 휴전협상 개시 이후 통일이 군사적으로 불가함을 일찌감치 깨닫고 그 이후를 생각하였던 것이었다. 그런데 반공포로 석방의 구체적 내용과 관련하여 그동안 막연하게 잘못 알고 있던 부분이 있다. 바로 거제포로수용소에 관한 내용이다. <계속>
/1953년 8월 8일 한미 상호방위조약에 가조인한 뒤 환담하는 이승만 대통령과 덜레스 미 국무장관. 한국 정부는 반공포로 석방이라는 극단적인 방법을 동원하여 휴전 후 안전을 보장하는 구체적 발판을 마련하였다.
④ 최대규모 거제포로수용소에서는 반공포로 석방이 한명도 없었던 사연
위키피디아 등 기존 자료에 오류
요즘 많은 이들이 온라인 백과사전인 위키피디아(Wikipedia)를 애용하지만 위키피디아엔 사실 곳곳에 오류가 있다. 거제도포로수용소(이하 거제도수용소)와 관련하여도 일부 오해할 수 있는 부분이 있는데 소개하자면 다음과 같다.
‘1953년 6월 18일 이승만 대통령의 반공포로의 일방적인 석방으로 27,389명이 탈출하였고~.’(* 2014년 4월 10일 검색 기준) 위 글은 마치 거제도수용소에서 27,000여명의 반공포로들이 자유를 찾아 수용소를 탈출한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소지가 많다.
/중소도시 규모인 최대 14만명의 포로까지 수용하였던 거제도수용소./사진=NARA
다음은 국군에서 요직을 두루 거치고 퇴역한 모 4성 장군이 최근 집필한 6·25전쟁 관련 책자에 수록된 내용이다.
‘이승만 대통령은 원용덕 헌병사령관을 불러서 거제도 포로수용소에 수용한 반공포로를 모두 석방하라고 지시한다. 6월 18일 밤 수용소의 문이 열리고, 반공포로 대부분이 자유의 몸이 되었다.’
이처럼 최대 14만 명의 포로를 동시에 수용하였던 거제도수용소에서 많은 반공포로들이 자유를 찾아 탈출하였고, 드라마나 각종 언론의 보도 자료에서도 그렇게 묘사되고 있다.
하지만 1953년 6월 18일 0시에 전격적인 반공포로석방이 이루어졌을 때, 정작 거제도수용소에서는 단 한명도 석방이 되지 않았다. 의외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엄연한 사실이다. 다음은 1996년 국책 기관인 국방군사연구소에서 발간한『한국전쟁의 포로』에 수록된 당시 포로수용소별 반공포로 석방 현황이다.
분리 수용된 포로들
반공포로 석방은 위에 언급한 8개 포로수용소에서만 있었다. 위 수용소들에서 석방된 총 27,389명이 공식적인 석방 인원이다. 그렇다면 본격적으로 포로수용소가 만들어지면서 제1수용소로 지정되었고 70% 이상의 포로가 항상 집결하고 있었을 만큼, 포로수용소의 대명사였던 거제도수용소에서 막상 단 한명의 반공포로 석방도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사실을 어떻게 이해하여야 할까?
그것을 이해하려면 거제도수용소에서 벌어진 잔혹사에 대해 먼저 알아볼 필요가 있다. 1950년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하고 아군이 북진을 개시하면서 체포되거나 투항한 공산군 포로들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기 시작하였다. 이에 따라 1950년 11월 최후방인 거제도에 수용소를 만들기로 결정하였고 1951년 6월말부터 포로들이 이송 수감됨으로써 본격적인 거제도수용소의 역사가 막을 올리게 되었다.
그런데 워낙 많은 포로들이 한군데 모여있다보니 거제도수용소는 이념갈등의 장으로 변하였고 반공포로들에 대한 친공포로들의 테러가 공공연히 자행될 정도로 운영상태가 엉망이었다. 이 과정에서 수용소장이 납치되는 어처구니없는 사태가 발생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결국 폭동을 강제 진압한 후 포로들을 성향 별로 분리시켰고 이후 휴전 직전에는 북송을 원하는 자들만이 거제도수용소에 몰려 있었다.
/해방구처럼 변한 거제도수용소에서 목총으로 군사 훈련을 하고 있는 친공포로들. 이후 발생한 폭동 진압 후 포로들이 분리되었고 이 때문에 반공포로 석방 당시에 거제도수용소는 작전 대상에서 제외되었다./사진=전쟁기념관
따라서 이곳의 경비를 책임진 미군의 감시망도 엄중하였고 만일 탈출하여도 섬 밖으로 나가기가 힘든 구조였지만, 그보다 우리 정부도 굳이 위험을 무릅쓰고 석방시킬 만한 반공포로들이 거제도수용소에 남아있다고 판단하지 않았던 것이다. 만일 이들 중 북송을 원하지 않는 자가 있다면 중립국감시위원회 심사를 받는 마지막 탈출 길도 남아 있었다. 이와 같은 이유로 규모가 가장 컸지만 역사적인 반공포로 석방에서 거제도수용소는 빠진 것이었다.
그런데 포로 석방이 국군 경비대의 도움이 있다고 쉽게 이루어진 것은 결코 아니었다. 미군 경비병들의 저지로 인하여 모두 61명의 고귀한 인명이 자유를 눈앞에 두고 생을 마감하였다. 그런데 그중 무려 47명이 부평에 있던 제10수용소 한곳에서 발생하였다. 하지만 부평 도심 한가운데서 있었던 이런 비극의 역사를 알고 있는 이들이 많지는 않다. 다음은 그때 그곳에서 있었던 비극적인 이야기이다.<계속>
/1952년 7월 포로수용소를 방문한 이승만 대통령. 열렬한 환영을 받고 있는 것으로 보아 반공포로들만 분리하여 수감되었던 수용소 중 하나로 판단된다./사진=정부기록사진집
⑤ 반공포로 탈출 때 부평수용소에서 대규모 사상자가 난 까닭
부평에 있었던 포로수용소
1951년 여름을 넘기며 6·25전쟁이 소강상태로 들어가자 포로관리도 서서히 체계가 잡히기 시작하였다. 최전선에서 잡힌 포로는 전방에 설치된 포로수집소를 거쳐 후방 각지의 수용소로 보내져 관리하는 시스템이었는데, 자료를 보면 키스테이션이라 할 수 있는 거제도 제1수용소를 비롯하여 부산 거제리, 부산 가야리, 영천, 대구, 광주, 논산, 마산, 부평 등 총 9개의 수용소가 운영되었다.
여담으로 공산군 측도 우리와 비슷하게 북한 각지에 14곳의 포로수용소를 운용하였는데 압록강 인근에 위치한 벽동수용소처럼 거대한 규모도 있었지만 정확히 규모가 파악 되지 않은 소규모 수용소도 있었다. 당시 북한에 설치되었던 수용소에 대한 정보가 단편적인 이유는 먼저 북한 스스로 공개한 내용이 없다시피 하고 처음 설명한 것처럼 포로교환 당시에 생환한 우리 측 포로가 적다는 것에도 기인한다.
당시 생포된 공산군 포로들이 어떤 기준에 의해 수용소가 나뉘어졌는지는 남아있는 자료가 빈약하여 확실히 알 수 없다. 어쨌든 도시 규모의 거제도수용소 말고도 중소규모의 수용소가 전국 각지에 있었는데 그중에서도 부평에 있던 제10수용소는 지리적으로 가장 전방에 설치된 수용소였다. 부평수용소가 정확히 언제 설치가 되었는지는 자료에 나와 있지 않지만 1951년 중순 이후인 것으로 추정된다. 전황을 분석하여 보았을 때 적어도 중공군의 제6차 공세가 실패하며 전선이 현재의 휴전선 일대를 중심으로 고착화 된 이후에나 그곳에 수용소설치가 가능하였을 것으로 판단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LIFE지 기자인 라우저(Michael Rougier)가 1953년 5월 경 촬영한 부평수용소의 사진을 보면 시설 대부분이 새 것이고 공사가 계속되는 점 그리고 마지막 번호인 제10수용소로 지정된 점을 고려할 때 1952년 이후에 설치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반공포로 석방이 있기 직전에 촬영된 부평 제10 포로수용소. 현재의 부영공원 자리인데 바로 이곳에서 엄청난 비극이 벌어졌다./사진=라이프
사실 인천은 공산군 포로 수용과 관련하여 인연이 많다. 1950년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 후 월미도에 수용소가 처음 만들어졌는데 바로 전사에 종종 등장하는 인천수용소다. 하지만 이는 부평의 제10수용소와 전혀 관련이 없는 임시 시설로 1·4후퇴 이후 기능이 사라졌다. 이와 별개로 인천에는 선편을 통해 부평수용소가 아닌 후방으로 이송할 포로들을 임시로 수용하던 시설이 인천항 부근에 있었다.
/1950년 인천상륙작전 직후 월미도 위락 시설에 임시로 설치된 포로수용소. 이는 이후 설치된 부평의 제10 수용소와 관련이 없다./사진=국립중앙도서관
비극적인 결과
반공포로 석방 당시 총 1,486명의 포로가 수용되어 있던 부평수용소는 대구수용소 다음으로 작은 규모였다. 최대 14만 명을 수용한 거제도수용소는 물론이고 3,000~10,000명 정도를 수용한 여타 수용소에 비해서도 작다고 할 수 있는데 그 이유는 불분명하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곳에 그러한 수용소가 있었고 거기에서 발생한 비극적인 역사가 알려지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다.
당시 수용소가 위치한 곳은 현재 인천시 부평구에 위치한 부영공원이다. 대단위 아파트 단지와 반환예정인 미군부대 사이에 놓여있는 부영공원은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근린공원이다. 하지만 현대사의 아픔이 그대로 담겨있는 역사적 장소인데도 불구하고 안타깝게 이를 모르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부영공원, 즉 부평 제10포로수용소가 위치한 곳은 한반도에서 가장 오래된 현대식 군사시설이었다.
/휴전 직후 촬영된 부평 미군기지의 모습. 구내에 비행장까지 있던 엄청난 규모로 1973년 까지 애스캄(ASCOM)이라는 이름으로 운영되었다. 이후 해체되고 많은 부분이 반환되었지만 제빵공장을 비롯한 일부 시설은 아직도 유지되고 있다./사진=미 육군
중일전쟁을 치르던 일제가 대륙 침략을 위한 배후 기지로 이용하고자 1930년대 말 부평에 육군조병창을 설치하였다. 이는 일제가 본토 이외에 유일하게 설치한 무기 제조 공장이었을 만큼 상당한 전략시설이었다. 1945년 일본 패망 후 미군이 진주하면서 이를 지원 시설로 이용하였고 1949년 미군 철군 후에 국군 병기대대가 접수하여 사용하였다. 전쟁이 발발하고 미군이 참전하며 다시 미군기지가 되었고 이때 포로수용소도 설치되었다.
미 제44공병단이 자리 잡은 북쪽 공터에 수용소가 들어섰는데 당시에 이곳은 동쪽과 남쪽으로 여타 미군 기지들이 몰려있고 북쪽과 서쪽은 드문드문 민가가 있던 허허벌판이었다. 따라서 기회만 잘 포착한다면 포로들이 안전하게 탈출할 가능성은 있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반공포로 석방이 있었던 8개 수용소 중에서 수용 인원도 두 번째로 적었던 부평수용소에서 대다수의 사망자가 나오게 된 이유는 무엇 때문이었을까?
역사적인 반공포로 석방 당시에 8개 수용소에서 탈출하다 숨져간 61명의 포로 중 47명이 부평수용소에서 발생하였지만 사실 이런 참혹한 결과는 충분히 예견되던 사항이기도 했다. 따라서 여타 수용소와 달리 부평수용소에서의 탈출은 감행하지 말았어야 했다. 비극을 잉태한 가장 큰 이유는 부평수용소의 경비 체계가 여타 수용소와 구조적으로 달랐기 때문이었다. <계속>
/부평 제10 포로수용소는 현재 부평 도심에 위치한 부영공원 자리에 있었다. 많은 곳이 반환되거나 택지로 개발되었지만 아직도 주변에 군 시설이 위치하고 있을 만큼 오래된 군사요충지였다.
6 국군은 탈출 도왔으나 미군은 총기 발사해 147명 사상
자유를 향한 탈출
국군 헌병대 1개 중대가 경비를 위해 파견 나가 있었지만 부평 제10포로수용소는 여러 미군부대가 주둔한 거대한 기지 한가운데에 위치하여 여타 수용소와 달리 미군의 감시를 이중, 삼중으로 받던 상태였다. 그래서 원용덕 사령관의 명령을 받고 파견나간 밀사가 미군의 지휘를 받던 국군 경비병원들을 사전에 접촉할 수조차 없었고 당연히 반공포로들에게도 거사와 관련한 지침을 전달하지 못하였다.
대부분의 자료에는 거제도수용소를 제외한 전국의 8개 수용소에서 동시에 석방이 전격 단행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지만 사실 부평의 제10수용소는 이때 함께 행동하지 못하였다. 부평수용소에 수용된 포로들은 그날 정오 확성기 뉴스를 통해서 비로소 거사 사실을 알게 되었을 정도였다. 포로들의 외부작업이 전면 금지되었을 만큼 미군의 감시망이 즉각 강화되었지만 거사 소식은 부평수용소의 포로들을 흥분시켰다.
/감시 초소에서 바라 본 부평수용소의 전경과 포로들의 모습. 당시 수용된 많은 반공포로들이 자유를 찾아 탈출하다가 비명횡사하였다. 철창 밖에 국군에서 파견 나온 경비병이 있었지만 미군기지 한가운데 위치하다보니 탈출 당시에 충분한 도움을 줄 수 없었다./사진=라이프
즉시 간부회의를 소집한 반공포로들은 그날 저녁 9시에 탈출을 감행하기로 결정하고 이러한 계획을 국군 경비병들에게 통보하였다. 그들에게 자유를 향한 열망은 그만큼 중요하였던 것이었다. 미군의 감시망이 엄중하여 애당초 부평수용소 포로들의 탈출을 자의반 타의반으로 포기하였던 헌병총사령부는 반공포로들의 굳은 의지가 전해지자 김길수 대령을 즉시 파견하여 외부에서 적극 지원하기로 조치하였다.
사전에 철책을 국군 경비대가 비밀리에 잘라놓고 인근 마을에는 탈출한 반공포로를 적극 보호해 줄 것을 고지하였다. 그러나 조짐이 심상치 않음을 눈치 챈 미군은 저녁이 되자 국군 병력을 전원 철수시켜 초소 경비를 미군으로 전면 대체하고 외곽은 당시 인근에 주둔하고 있던 미 해병대를 동원하여 2중으로 감시하였다. 그러한 긴장 된 상황 하에서 마침내 밤 9시 대대적인 탈출이 시작되었다.
수많은 포로들이 조를 짜서 일거에 철망을 뚫고 튀어나오자 철조망을 담당하던 미군 경비병들은 겁을 먹고 도망갔다. 하지만 바로 옆에 있던 헬리콥터 비행장에서 강력한 서치라이트를 수용소 방향으로 비침과 동시에 외곽에 대기하고 있던 미군들이 기관총을 비롯한 각종 화기를 응사하며 포로들의 탈출을 저지하였다. 바로 이 과정에서 수많은 인명들이 자유를 바로 코앞에 두고 희생당한 것이다.
/탈출한 반공포로들을 격려하기 위한 환영대회 장소에 설치된 조형물. 아쉽게도 탈출 과정에서 많은 이들이 사상 당하였는데 그중 대부분이 부평의 제10수용소에서 탈출을 감행한 포로들이었다./사진=정부기록사진집
잊혀진 역사의 현장
부평수용소에서 발생한 사망자 47명과 부상자 60명은 탈출에 나선 인원의 10퍼센트에 이르는 엄청난 수준으로 이점은 두고두고 많은 생각을 들게 하는 부분이다. 이때는 이미 우리 정부가 대통령 책임 하에 반공포로의 처리에 관한 정책을 확고히 공표한 상태였고, 유엔군사령부도 비록 불만이 많았지만 탈출한 포로들을 끝까지 추적하여 검거하지는 않겠다고 방침을 정해 놓은 상태였기 때문이었다.
그러한 비극의 현장이었던 부평수용소 터는 이후 미군부대와 국군부대를 거치며 군사 시설로 계속 이용되어오다가 1998년 인천시에 반환되어 2002년 부영공원으로 재탄생하면서 시민의 품으로 돌아왔다. 현재는 커다란 운동장들과 수목들이 인근 주민들에게 훌륭한 여가 시설을 제공하고 있지만 아쉽게도 이곳이 비극적인 역사의 장소임을 표시하여 주는 표식이 없고 그러한 사실을 아는 이들도 거의 없다.
/부영공원은 일제가 10년, 미군이 20년, 국군이 20년을 사용한 후 반환되어 인천시에서 사용한지도 15년이 넘었다. 이러한 역사에서 비극적인 역사의 현장이었던 시절도 있었는데 정작 이를 알리는 흔적은 없다.
지난 2013년 8월 26일, 부영공원에서 기형 맹꽁이가 출현 했다는 뉴스가 대대적으로 보도되었는데, 군부대가 주둔하면서 발생한 토양 오염 때문이라는 주장이 대두되었다. 인과관계가 명확히 밝혀진 것은 아니지만 설령 오염 때문이라도 일제가 기지로 만들어 10년을 사용하고 이후 미군이 20년, 국군이 20년 그리고 인천시에 반환 되어 공원으로 사용 된지가 15년이다 보니 책임 소재를 가리기 어려운 측면도 있다.
어쨌든 기형 맹꽁이의 등장은 환경 문제에 많은 경각심을 불러일으켜 인천시와 국방부가 협조하여 공원의 토양 정화 사업을 추진하기로 결정하였고 지역 환경 단체의 도움으로 맹꽁이의 서식지 이전도 실시되었다. 하지만 아쉽게도 바로 그곳이 그처럼 수많은 반공포로들이 피눈물을 흘리며 죽어간 장소라는 것은 망각하고 있다. 이처럼 다른 이슈에 가려져 부평 제10포로수용소에서 있었던 비극은 그동안 소홀히 취급되어 왔다.
친공포로들의 해방구 노릇을 하며 비극적인 이념갈등의 현장으로도 기록된 거제도수용소는 불행했던 시절을 반추하는 사적지가 되었지만 막상 자유를 찾아 목숨을 걸고 탈출한 반공포로들이 단발마의 비명을 지르며 쓰러져 갔던 부평수용소에 대한 역사는 완벽하게 잊혀져 버렸다. 아쉬울 뿐이다. 현재를 사는 우리에게 당장의 환경문제는 당연히 중요하지만 그렇다고 과거의 역사를 잊고 지내서는 곤란하다.(끝)
/지난해 8월 부영공원에서 발견된 기형 맹꽁이의 모습. 많은 이들에게 환경의 소중함을 일깨워 주는 계기가 되었지만 바로 같은 곳에서 60여 년 전에 있었던 비극의 역사를 기억하는 이들이나 안내문은 없다./사진=인천녹색연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