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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34/ 국방13/ 백선엽 장군의 6.25전쟁 비망록7/ 161-①② 경기 광주~강원 횡성을 밤새 이동한 미 3사단에 혼쭐난 중공군 - 184(完)-(1)(2) 내무부 장관 제안하는 이승만과 군인의 삶 다짐하는 ..

상림은내고향 2021. 8. 10. 20:49

대한민국34/ 국방13/ 백선엽 장군의 6.25전쟁 비망록7/ 

161-①② 경기 광주~강원 횡성을 밤새 이동한 미 3사단에 혼쭐난 중공군

(19) 현리 전투

너무 깊이 들어왔던 중공군

 

미 3사단은 경기도 광주에 주둔하고 있던 부대였다. 따라서 이들이 짧은 시간 안에 기동을 시작해 강원도 횡성 일대에 도착하는 일은 결코 쉬운 작전이 아니었다. 우선 시간이 촉박했다. 중공군은 맥없이 물러서는 한국군 3군단의 후미를 쫓아 현리를 넘어 속사리에 진출한 뒤 새로운 돌파구 확대에 나선 형국이었기 때문이다.

 

중공군의 선두는 이미 속사리까지 진출한 상황이었다. 동쪽에서는 내가 이끄는 국군 1군단이 신속한 기동을 펼쳐 대관령을 막아 중공군 공세의 선봉을 꺾으려 했고, 그 서쪽에서 경기도 광주로부터 이동한 미 3사단이 현리에서 속사리로 이어지는 국도를 차단해 중공군 공세의 확산을 막으려 하는 모습이었다. 용평의 한국군 3군단 간이 비행장에서 밴 플리트 미 8군 사령관이 홀연히 날아와 지시를 내렸고, 그 내용을 수령한 사람이 한국군 1군단장인 나와 미 3사단의 유진 라이딩스 장군이었다. 미 3사단은 밴 플리트 미 8군 사령관의 지시가 내려지기 전에 먼저 기동을 시작했다.

 

▲중공군 공세를 꺾기 위해 경기도 광주에서 강원도 횡성 일대로 급격 기동한 미 3사단은 중공군 허리를 끊고 저들의 5단계 2차 공세를 막았다. 사진은 미 3사단이 중공군에게 공격을 가하는 모습이다.

 

중공군 공세가 본격적으로 벌어지기 시작한 지 하루가 지난 뒤인 5월 17일이었다. 미 3사단의 선두부대는 당일 밤 11시 경에 횡성 일대에 도착했다고 육군본부의 <현리-한계 전투>는 소개하고 있다. 그러나 이 시점에 이르자 중공군 수뇌부는 적지 않게 당황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공세의 확장에 따른 전선 보급선의 길이가 계속 늘어나고 있었던 까닭이다. 아울러 서부전선의 미군 전투사단이 기동을 시작하고, 공세를 벌였던 동부전선의 서쪽이 미 2사단의 견고한 방어에 의해 막힌 점이 불안해 보였기 때문일 것이다. 아울러 가장 동쪽의 공격을 맡았던 북한군의 진격이 한국군 1군단 방어에 걸려 순조롭지 않았던 점도 공세의 확장을 막고 있었다.

 

육군본부 전사 기록에 따르면 중공군 지도부는 공세를 벌이고 난 뒤 이틀이 지난 5월 18일에 공격을 중지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최고 수뇌부의 공격 중지 명령이 전선 부대에게 직접 전해진 시점은 5월 22일이었다. 그러나 그 무렵에는 이미 중공군에게는 아주 불리한 상황이 펼쳐지고 있었다. 우선 중공군의 보급에는 현저한 문제점이 드러나고 있었다. 5월 22일이라고 한다면 중공군의 총공격이 벌어진 뒤로 6일이 지난 시점이었다. 중공군은 보급 능력에 문제가 있어 공세를 벌이다가도 길게는 1주일, 짧게는 4~5일을 이어가지 못했다. 따라서 그 무렵의 중공군은 모든 전선에서 공격력이 크게 줄어들고 있었다.

 

놀라운 미군의 기동

그런 상황에서 미 3사단의 기동은 매우 적절했다. 그들은 5월 17일 기동을 시작한 뒤 5월 19일에는 예하 7연대와 65연대를 강원도 평창의 장평리에 집결시킬 수 있었다. 결코 순조로운 기동은 아니었다. 내가 나중에 미군 관계자들로부터 들은 내용에 따르면 그들은 일거에 막대한 사단 병력과 장비를 동부전선으로 옮기기 위해 중간 구간을 설정한 뒤 셔틀 방식으로 트럭을 몰고 또 몰았다. 주간은 물론이고 밤에도 계속 차를 몰아야 했던 까닭에 수송부대 요원이 그를 다 감당하지 못했을 정도였다. 그런 경우에는 일반 전투 사병 중 트럭을 몰 줄 알았던 대원이 나서서 차를 몰았다고 한다. 내가 알기에는 그렇게 이동한 거리가 약 500리, 지금 기준으로 환산하면 200㎞를 상회했다고 한다.

 

지금의 상황에 견주면 별것 없는 거리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당시의 아주 열악했던 도로사정, 더구나 그곳이 대개 산간과 협곡으로 이어지는 경기 북부와 강원도 산간 지역이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매우 놀라운 기동 속도였다. 미 3사단은 그렇게 부지런히 길을 달려 강원도 일대에 집결해 중공군 추격에 나섰다. 강원도에 집결한 뒤 미 10군단에 새로 배속한 미 3사단의 공세는 자연스레 속사리까지 진출한 중공군의 후미(後尾)를 끊는 일에 모아질 수밖에 없었다. 중공군 추가 병력의 진입을 차단한 뒤 앞에 진출한 중공군을 섬멸하면서 공세의 확산을 막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②편에 계속>

 

<①편에서 계속>

그를 위해 미군이 주목한 지역이 바로 운두령(雲頭嶺)이었다. 이곳은 이름 그대로 높은 지형이어서 고개 근처에 자주 구름이 끼는 곳이다. 중공군이 한국군 3군단을 추격하기 위해 진출한 속사리로부터 북쪽으로 10㎞ 지점에 있으며 해발 1300여m의 최령봉, 1577m의 계방산 사이에 난 고개다.

 

아울러 중공군에게는 치명적인 요지(要地)에 해당했다. 현리를 넘어 하진부리 등으로 진출하기 위해 거쳐야 하는 유일한 도로였던 까닭이다. 이를 테면, 현리에서 속사리를 거쳐 다시 하진부리로 향하려 할 때 인마(人馬)가 거치는 유일한 통로였다는 얘기다. 따라서 상황은 묘하게 반전(反轉)의 형국에 도달한 느낌이었다. 아군이 북쪽으로 진출하면서 유일한 통로였던 오마치 고개를 제대로 간수하지 못해 중공군에게 호되게 당했듯이, 이번에는 남쪽으로 오마치를 넘어 속사리에 진출한 중공군이 운두령을 제대로 확보하지 못해 미군에 의해 절체절명의 위기에 빠질 수 있었기 때문이다.

 

미 3사단이 강원도에 집결한 뒤 중공군 격멸 작전에 나선 시점은 대관령 등 지역에서 움직였던 우리 1군단의 기동 시간과 비슷했다. 그들 또한 5월 21일 65연대를 서쪽, 7연대를 동쪽 부대로 포진한 뒤 진격을 시작했다. 중공군은 미군의 기동이 그처럼 빨리 이뤄지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따라서 중공군은 운두령 일대를 그대로 방치한 뒤 속사리로 진출한 상황이었다.

 

▲1951년 5월 중공군 대규모 공세가 벌어지기 전 임진강 일대에서 수색 작업에 나섰던 미 3사단 부대원들의 모습이다.

 

중공군 공세 종말

미 3사단은 속사리와 하진부리를 잇는 길에서 잠시 지체를 해야 했다. 중공군에게 밀린 한국군 3군단 병력의 퇴각 때문이었다고 한다. 한국군 3군단의 어지러운 퇴각으로 인해 잠시 그 전면에서 밀고 내려오던 중공군에게 역습을 당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미 3사단은 서쪽 공격부대인 65연대를 속사리 방면으로 기동토록 한 뒤 우측을 강화하면서 결국 5월 22일 공격을 재개했다고 한다. 미 3사단이 운두령 일대를 확보한 시점은 당일인 5월 22일 오후 6시 무렵이었다. 그로써 중공군의 공세는 크게 꺾이고 말았다. 중간의 요로를 미 3사단이 신속하게 확보한 뒤 중공군 부대의 앞과 뒤를 절단하면서 중공군의 공세 종말점을 크게 앞당겼다는 얘기다.

 

이제 중공군이 현리와 속사리, 하진부리를 지향하면서 펼친 공세 때문에 생겨났던 커다란 포켓(주머니)의 양쪽이 서서히 댕겨지고 있었다. 주머니 안쪽으로 깊이 들어왔던 중공군은 그들 스스로 재촉한 공격의 속도 때문에 오히려 아군의 강력한 덫에 걸려든 꼴이었다. 따라서 주머니 양쪽의 선은 가운데에 깊이 파인 안쪽을 옆에서 댕기면서 전선 전체를 북상시키는 모습으로 변하고 있었다. 중공군이 한반도에 참전한 뒤 벌였던 대규모 공세의 막바지였던 1951년 5월 16일의 5단계 2차 공세의 종결을 알리는 상황이었다. 중공군은 비록 한국군 3군단을 와해시킬 정도의 전과(戰果)를 올렸지만, 그는 극히 작은 부분적 승리에 해당했다. 총력을 기울인 공세였음에도 전체 의도를 제대로 관철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중공군은 한국군에게 치명적인 패배를 안기는 데 성공했지만, 공세를 이어가면서 돌파구를 확대해 전략적으로 국면을 전환하는 일에서는 전혀 성공하지 못하고 말았다. 아울러 스스로 지닌 역량의 한계를 처절하게 깨닫는 결과도 있었다. 중공군이 5단계 2차 공세 뒤에는 휴전 직전까지 대규모 공세를 다시는 벌이지 못했던 이유이기도 하다. 아무튼 5월 23일 이후로는 상황이 완전히 반대의 국면을 이루고 말았다. 유엔군은 중공군 공세의 종말을 확인한 뒤 전선 전면을 북상시키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미 3사단도 북상을 시작했고, 우리 1군단도 지금의 휴전선 북방 한계선인 고성까지 진출했다.

 

그러나 후유증이 크게 남았다. 미군에게는 전혀 그런 흔적이 없었다. 현리에서 중공군에게 허무하게 무너진 한국군의 상황이었다. 아주 많은 포로가 중공군에게 잡혔다는 점은 통탄할 일이었다. 아울러 한국군에게는 상징적인 측면에서 매우 치욕적인 결과가 생기고 말았다. 적이 내려오는 현장에서 한국군이 어떻게 싸우는가를 냉정하고 치밀하게 지켜본 미군 수뇌부의 판단이 칼날처럼 한국군 지도부를 향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162-①②치욕스런 현리 전투 이후, 처참한 한국군 상황

(19) 현리 전투

중공군의 몰락

 

중공군 공세는 그렇게 막을 내렸다. 6.25전쟁 초반에 참전해 다섯 차례에 걸쳐 벌어졌던 중공군의 대규모 공세는 그로써 자취를 감췄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들은 1953년 7월 27일의 휴전협정 조인을 10여 일 앞둔 1953년 7월 14일 강원도 금화 지대의 이른바 ‘금성 돌출부’라는 곳을 향해 마지막 대규모 공세를 펼친다. 그 금성 돌출부 대공세를 제외하고서는 나머지 전쟁 기간 동안 중공군은 1951년 5월의 5차 2단계 대공세를 끝으로 더 이상의 대공세에 나서지 않는다. 아마도 나서지 않았던 것이 아니라 나서지 못했다고 해야 옳을 듯하다. 현리 전투가 벌어진 5차 2단계 공세를 계기로 그들은 더 이상의 대규모 공세가 자신들에게 결코 유리하지 않다는 점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당시의 중공군 5차 2단계 공세는 1951년 5월 23일에 접어들면서 중공군의 급격한 패퇴와 아군의 신속한 북상이라는 국면으로 끝을 맺어가고 있었다. 그러나 전체적인 국면 전환을 꺼렸던 미군 지도부의 판단에 따라 공세는 38선을 훨씬 넘어서는 북한 지역으로의 진출을 허용하지 않았다. 대관령과 오대산 일대에서 공세를 벌이던 중공군을 꺾고 북상을 시작한 수도사단의 기세는 거침이 없었다. 수도사단은 북상하면서 중공군에게 등을 보이며 쫓겨 내려왔던 국군 3군단의 패잔 병력을 수습했다. 나는 북상하는 수도사단의 뒤를 좇아 인제와 원통까지 올라갔다.

 

중간에 수습하는 3군단 병력은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다행히 아군인 수도사단에 의해 수습이 되고는 있었지만, 계급장은 고사하고 무기마저 제대로 손에 쥔 병력은 거의 보이질 않았다. 눈이 녹아내린 산골의 물을 마시면서 5일간 중공군에게 쫓기며 험준한 강원도 산악을 넘고 또 넘어야 했던 피로감이 그대로 전해지는 모습이었다.

 

우리 1군단은 여세를 몰아 동쪽으로는 간성과 거진까지 진출했다. 그곳에 진출하는 동안 적의 저항은 보이지 않았다. 서부전선에서도 아군의 진격은 거칠 게 없었다. 그곳에서도 순조롭게 38선을 확보했다. 그런 여러 상황으로 볼 때 중공군과 북한군은 더 이상의 공세를 펼칠 힘이 없다고 여겨졌다. 따라서 전선이 요동칠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그렇게 소강 국면으로 흐르고 있던 시점이었다. 그로부터 이틀 정도가 지난 5월 25일로 기억한다. 강릉에 주둔하고 있던 우리 1군단에게 전갈이 왔다. 밴 플리트 미 8군 사령관이 이곳 강릉을 방문한다는 내용이었다. 당시 강릉에는 우리 육군본부의 전방지휘소가 있었다. 전선을 지휘하기 위해 육군 참모총장이었던 정일권 장군이 임시로 와 있던 곳이었다.

 

밴 플리트 미 8군 사령관이 강릉을 방문한다는 전갈을 듣고 정일권 참모총장과 나, 전방지휘소 소장인 이준식 준장 등이 비행장에 나가서 그를 기다렸다. 그가 탄 비행기가 강릉 비행장의 먼 하늘에 다시 모습을 나타냈다. 곧이어 밴 플리트 사령관이 비행기에서 내려 우리에게 다가왔다.

 

▲대규모 공세를 펼쳤지만 낙후한 보급선, 체계적인 전투 역량의 부족으로 중공군은 저들의 공세의도를 전혀 달성하지 못했다. 대규모 공세 뒤 아군에게 붙잡힌 중공군 포로들.

 

미 8군 사령관의 가혹한 통보

그는 며칠 전에 내가 그를 처음 보던 그 모습 그대로 굳어 있었다. 한국의 육군참모총장인 정일권 장군이 영접하는 자리였음에도 웬일인지 우리와는 제대로 인사를 나누려고도 하지 않았다. 아무래도 현리 전투에서 기록한 한국군의 패배가 그의 마음속에 두꺼운 앙금으로 갈아 앉아 있기 때문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아니나 다를까. 성큼성큼 큰 걸음으로 우리 앞으로 다가온 밴 플리트 사령관은 인사말도 없이 통보부터 했다. “지금부터 한국군 3군단을 해체한다. 아울러 한국 육군본부의 작전통제권도 없어진다. 육군본부의 임무는 작전을 제외한 인사와 행정, 군수와 훈련에만 국한한다. 한국군 1군단은 내 지휘를 받으며, 육군본부 전방지휘소도 폐지한다”고 했다. 아주 단호한 표정이었다.

 

한국의 작전지휘권이 소멸하는 순간이었다. 한국에서 벌어지는 전쟁에 한국군이 지휘권을 행사하지 못하고 이를 미군, 나아가 유엔군 총사령관에게 위임하는 조치는 6.25전쟁 초반에 이뤄졌다. 당시 한국군으로서는 전쟁을 수행할 준비가 턱없이 부족한 상황이었다. 따라서 김일성 군대의 기습적인 남침에 효과적으로 대응하기 위해 이승만 대통령이 서한을 통해 1950년 7월 14일부로 맥아더 장군에게 작전권을 위임한 적이 있다.

<②편에 계속>

 

<①편에서 계속>

그 뒤로 미군은 한국에 주둔하는 미 8군 사령관을 통해 한국군을 통제하면서 작전을 펼쳤다. 그러나 실제적으로는 상당한 부분을 한국군의 자체적인 지휘에 맡기는 내용이었다. 따라서 미군 군단에 배속한 한국군 부대를 제외한 대부분의 한국 육군은 정일권 참모총장의 지휘를 받으며 전투를 수행하고 있던 상황이었다.

 

1951년 5월 25일 강릉의 미 해병대 비행장에 나타난 밴 플리트 미 8군 사령관의 통보는 그 전까지 이뤄졌던 일부 한국군 부대에 대한 한국 육군본부의 지휘 통제권마저 회수하겠다는 내용이었다. 아주 침울한 내용일 수밖에 없었다. 그런 밴 플리트의 통보를 듣는 정일권 참모총장의 분위기는 매우 무거웠다. 그는 한 마디도 하지 않은 채 밴 플리트의 말을 듣고만 있었다. 나 역시 그런 무거운 분위기에 젖어 있었다.

 

밴 플리트 미 8군 사령관은 말을 다시 이어갔다. “해체한 한국군 3군단의 9사단은 미 10군단에 배속하고, 3사단은 한국군 1군단에 배속한다. 그리고 한국군 1군단은 내 지휘를 받는다”고 했다. 이어 밴 플리트는 정일권 참모총장의 가슴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당신은 곧장 대구로 돌아가라”고 했다. 사실 매몰차다고 해도 좋을 내용의 통보였다. 밴 플리트의 말대로 한다면 이제까지 한국 육군본부가 한국군 군단을 지휘했던 일은 불가능해진다. 미 8군이 통제하던 전선의 전체 상황과는 달리 한국군 군단 만큼은 대한민국 육군본부의 지휘 아래에 있었지만, 이제 그마저 불가능해진다는 얘기였다.

 

▲현리 전투의 패배로 한국군은 작전지휘권을 모두 유엔군에게 박탈당한다. 그 직전 국군 부대를 방문한 이승만 대통령에게 백선엽 1군단장(오른쪽 끝)과 육군참모총장 정일권 장군(왼쪽에서 둘째)이 안내를 하고 있다.

 

“한국군 교육이 필요하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한국군 2군단은 일찌감치 1950년 말 중공군 공세에 이미 무너져버려 예하 사단이 뿔뿔이 흩어져 있는 상황이었다. 남아 있던 군단은 내가 이끌고 있던 1군단과 3군단이었으나, 그 3군단은 직전의 현리 전투에서 다시 무너지고 말았다.

 

현리 전투에서 맥없이 물러나 전선 전체에 커다란 위기를 불러왔던 3군단을 이 기회에 완전히 해체한 뒤 남아 있던 1군단을 미 8군에 배속함으로써 한국군의 실질적인 작전 지휘권을 모두 거두겠다는 얘기였다. 내 추측이지만, 당시의 밴 플리트 미 8군 사령관은 현리 전투의 책임을 정일권 참모총장에게 직접 묻고 있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사실 한국군 3군단의 현리 전투는 미 8군 사령관에게 극도의 경계감을 가져다줬을지 모른다. 그는 현리에서 일단 물러선 3군단의 유재흥 군단장을 전화로 찾아 “하진부리는 반드시 지키면서 물러서지 말라”고 거듭 당부했다고 한다. 그럼에도 3군단은 하진부리를 넘어 횡계, 다시 영월 방면으로 물러서고 말았다.

 

뒤에 처진 3군단 병력은 군단본부가 통제를 하지 못해 방태산 등 험준한 강원 산악을 넘고 또 넘으며 중공군에게 쫓기다가 철저하게 무너진 상황이었다. 그런 점을 주시하고 있던 미 8군 사령관에게는 특단의 조치가 필요하다는 점이 깊이 마음에 새겨졌을 것이다. 그런 혼란스러운 양상을 막기 위해 밴 플리트는 한국군 작전지휘권의 전권을 회수하는 조치를 강구했을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실제 육군본부의 전사 기록 등에는 우리 3군단이 하진부리에서 횡계리, 다시 영월로 쫓기면서 전방의 부대를 제대로 수습하지 못한 점이 군단의 해체를 부른 가장 직접적인 원인이라고 적고 있다.

 

성이 많이 난 듯 보였던 밴 플리트 사령관이었다. 그러나 그는 가혹한 내용의 통보를 마친 뒤 비행장 활주로에서 간이 막사를 향해 가면서 정일권 총장과 내게 이런 말을 했다. “이제 한국군은 장교를 육성해야 한다. 미국의 웨스트포인트 같은 학교를 만들어서 장교를 키워야 한다. 우선은 한국군 장교들을 미국에 보내 교육을 받도록 해야 한다”고 했다. 밴 플리트 사령관에게는 전선 상황에 따른 현실적인 조치가 한국군의 작전지휘권의 회수였다. 그러나 그는 더 먼 곳을 내다보고 있었던 것이다. 밴 플리트 사령관은 현리 전투를 통해 장기적으로 한국군의 전투 능력을 제고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점을 절실히 깨닫고 있었던 듯하다.  

 

163-①② 필사의 각오가 부족한 한국군 3군단의 아쉬운 모습

(19) 현리 전투

전쟁의 분수령

 

강원도 깊은 산골의 현리라는 곳에서 1951년 5월 벌어진 전투는 하나의 커다란 분수령(分水嶺) 그 자체였다. 물의 흐름이 갈라지는 그런 분수령이라는 의미다. 이를 테면, 1950년 6월 25일 김일성이 기습적으로 벌인 전쟁의 흐름이 이 현리 전투라는 대목에 이르러 크게 방향을 튼다는 뜻이다.

 

한반도의 전쟁에 은밀하게 뛰어들었던 중공군은 1~3차 공세를 벌이면서 전선을 평양~원산 이북으로부터 전쟁 발발 전의 대치 접점이었던 38선 이남까지 밀고 내려오는 데 성공했으나 4차 공세에 접어들면서 무겁고 강한 미군의 힘에 부딪힌다. 조금씩 균열을 보이던 중공군의 공세는 5차 공세 2단계에 접어들면서 바닥을 드러내고 만다. 중공군의 최고 지도부가 ‘이 전쟁에서 우리가 이기기는 힘들다’고 판단한 시점이 있다면 아무래도 현리 전투가 벌어진 1951년 5월 말일 것이다. 스스로 그런 판단을 내렸다면 한반도의 싸움에 뛰어들어 사실 상 모든 전투를 이끌고 있던 중공군으로서는 새로운 전기(轉機)를 마련해 그에 올라탈 수밖에 없었다.

 

현리 전투는 흔히 대한민국 군대가 6.25전쟁 중에 맞이한 최악의 참패로 말해진다. 그 점은 사실이다. 3년 여 동안 벌어진 그 전쟁에서 한국 군대가 벌였던 현리 전투는 매우 기록적인 패배에 해당한다. 앞에서도 적었듯이, 공격 선두에 나섰던 중공군 1개 중대 병력에 의해 후방의 유일한 퇴로였던 오마치 고개를 빼앗긴 뒤 9사단과 3사단 등 한국군 3군단은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한 채 그대로 무너지고 말았기 때문이다.

 

그 싸움에서 무너진 3군단장 유재흥 장군을 역시 최악의 패장(敗將)으로 거론하는 사람도 많다. 군단 책임자로서 유재흥 장군이 져야 할 몫의 책임은 아주 무겁고 크다. 그 점을 부인할 수는 없으나 그 한 사람에게 모든 책임을 물을 수는 없다. 미군과의 소통이 부족해 작전상의 엄중한 의미에도 불구하고 기계적으로 그은 작전구역이라는 이유 때문에 결국 유일한 퇴로를 미 10군단에게 내줬고, 미 10군단은 알몬드 군단장의 허술한 판단에 따라 그곳을 빈 채로 그냥 두고 말았다. 이 점을 따지면 유재흥 장군의 책임이 가장 무겁다.

 

그러나 전사 기록을 보면 유재흥 군단장은 이 고개의 중요성 때문에 당시 상황을 육군참모총장이었던 정일권 장군에게 몇 차례에 걸쳐 언급했다고 한다. 군단 차원에서 옆에 함께 늘어선 미군과의 소통과 협력을 제대로 이루지 못한 유재흥 장군의 실책은 크지만, 그를 보완해주지 못한 육군본부의 책임 또한 가볍지 않다. 3사단과 9사단의 사단장 또한 현리 전투의 기록적인 참패에서 비켜갈 수 없다. 퇴로가 막혔다고 해서 그대로 싸움 없이 물러서는 군대는 있을 수 없다. 현리의 지형은 앞서 소개한대로 사주방어(四周防禦) 진지를 만들어 적과 싸울 경우 미군의 유력한 공중 보급을 받을 수 있는 모양새였다.

 

▲중공군은 초반의 맹렬한 공세에도 불구하고 시간이 흐를수록 보급이 바닥나면서 아군의 반격에 큰 피해를 입었다. 북한지역 철로에 미 공군기가 투하한 네이팜탄이 터지는 모습이다.

 

한 사람의 잘못이 아니었다

따라서 퇴로가 막혔다고 해서 무작정 뿔뿔이 흩어져 물러날 게 아니라 죽기를 각오하고 적과 싸움을 벌여야 하는 게 우선이었다. 그런 각오만이라도 있었다면 현리 전투의 기록적인 참패는 없었을지도 모른다. 아니, 오히려 미군의 강력한 공중보급을 바탕으로 오마치를 점령한 중공군을 후방에서 압박하며 전방에서 다가오는 중공군의 공세에 맞설 수 있었을 것이라는 얘기다. 그런 여러 가지 가능성을 헤아리지 못한 채 중공군의 공세에 허무하게 물러서 부대전체를 급기야 거대한 혼란의 상태인 분산(分散)으로 몰고 가 참패를 맞았던 두 사단장의 책임 또한 막중하다. 그런 여러 가지 요인이 겹쳐 나타난 기록적인 참패가 바로 현리 전투라고 할 수 있다.

 

전체적으로 보자면 이는 당시 전선에 섰던 한국군의 수준이 반영된 결과였다. 건국과 함께 겨우 제대로 무장하기 시작한 한국군으로서는 실전 경험이 턱없이 부족했을 뿐만 아니라, 화력과 장비 또한 보잘 것이 없었다. 아울러 부대 전체를 끈끈하게 묶는 조직력도 크게 부족한 상태였다. 그런 한국군의 약점을 전선에 마주섰던 중공군은 정확하게 간파했다. 그에 따라 중공군은 참전 이래 줄곧 한국군을 골라 공격을 펼쳤다.

<②편에 계속>

 

<①편에서 계속>

중공군은 국공(國共) 내전과 항일(抗日) 전쟁의 경험이 높이 쌓인 부대였다. 따라서 다양하고 복잡한 전술을 구사할 줄 알았던 군대였다. 그들은 우회와 침투, 매복과 기습, 종심(縱深) 기동과 포위 등의 다양한 전법을 사용하며 한국군을 집요하게 공격했다. 그런 중공군의 공세에 자주 무너지고 말았던 국군은 결국 현리에서 기록적인 패배를 당하면서 씻을 수 없는 회한(悔恨)을 남겨야 했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국군 장병이 그들에게 포로로 붙잡혔고 3군단이 지녔던 적지 않은 양의 장비와 화력도 빼앗기고 말았다.

 

그러나 이 전투는 중공군에게도 심각한 결과를 불러왔다. 중공군은 현리 전투를 포함한 5차 2단계 공세에서 스스로 커다란 문제를 드러내고 말았다. 공세 지속의 기간이 매우 짧다는 점이었다. 우선 미군의 강력한 반격으로 밀어붙이던 전선은 줄곧 막혔고, 보급력이 떨어져 미군의 반격이 펼쳐질 경우 병력의 희생이 막심했다.

 

▲화려한 전술을 선보였던 중공군은 공세 뒤 5일 이상이 흐르면서 아군의 반격에 쉽게 갇혔다. 1951년 3월 횡성에서 미군에게 붙잡히는 중공군 포로를 촬영한 사진이다.

 

바닥 보인 중공군 체력

들이 참전 이래 줄곧 보이던 패턴은 반복적으로 나타났다. 공세 시작 뒤 4~5일이 지날 경우 체력이 급격하게 떨어진다는 점이었다. 처음에는 기만적이면서 은밀하며 다양한 전법으로 아군에게 커다란 위협으로 다가오지만 그를 지속적으로 이끌어갈 우직한 힘이 부족했던 것이다. 거리로 따지자면 공격 동선(動線)이 보통 50㎞를 넘을 시점이었다. 이 정도의 거리를 이동하며 화려하게 공세를 펼치다가 중공군은 그 이상을 넘어설 경우 체력이 뚝 떨어지고는 했다. 보급선이 길어지면서 그를 위한 수송능력에 문제가 생겼기 때문이었다. 미군의 막강한 공군기들은 그런 중공군을 집요하게 다뤘다.

 

전선에 선 중공군의 보급력이 미 공군의 정밀한 폭격으로 크게 떨어지면서 중공군은 공세를 이어가기 어려웠고, 그로부터는 아군의 공격 그물에 갇혀 막대한 인명의 희생을 감수해야 했다. 그를 상징적으로 드러냈던 게 바로 중공군의 5단계 2차 공세 때의 이른바 현리 전투였다.

 

중공군은 현리에서만 한국군을 제압하는 것으로 당시의 공세를 마무리해야 했다. 미 2사단의 서쪽 견부(肩部)는 강했고, 동쪽 또한 대관령에서 한국군 1군단에 막혀 공세를 접어야 했다. 미 3사단의 신속한 기동으로 인해 운두령에서는 오히려 퇴로가 막혀 상당수의 중공군이 사상하거나 포로로 붙잡혔다. 중공군 수뇌부가 계획한 내용은 거의 현실로 이뤄진 게 없었다. 한국군 3군단을 무너뜨리고 전선을 일부 뚫었지만 현격한 체력의 차이로 오히려 아군의 포위망에 상당수의 병력이 갇히면서 피해는 아주 컸다. 한국군 3군단의 2개 사단과 미 10군단 지휘를 받았던 한국군 5, 7사단을 먼저 소멸한 뒤 미군의 역량도 크게 무너뜨리겠다는 당초의 구상은 물거품처럼 사라지고 없었다.

 

중공군은 아마 그 시점 어디에선가 ‘이 전쟁에서 우리가 승리를 거두기는 불가능하다’는 생각을 했을 것이다. 일정한 패턴에 따라 다소의 우세를 차지하는 데 성공했지만 그런 양상에 따라 전투를 이어갈 경우 더 큰 희생을 감수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그 점에서 현리 전투는 분명한 분수령이었다. 앞쪽의 흐름과 뒤쪽의 전쟁 흐름이 크게 갈라지는 그런 분수령 말이다. 정확한 통계는 어떤지 잘은 모르겠으나, 중공군은 당시 5차 2단계 공세에서 피해가 매우 컸던 것으로 알고 있다. 중공군이 참전한 이래 가장 큰 피해를 당한 전투를 꼽는다면 아무래도 이 전투일 것이다.

 

결과적으로 보면 이 전투를 기점으로 전쟁의 양상은 크게 바뀐다. 대규모 병력이 한꺼번에 움직이며 펼치는 기동전의 패턴은 거의 사라지고, 전술적 차원에 멈추는 소모적인 고지전(高地戰)이 그 자리를 대체한다는 점이다. 중공군은 전략적인 판단을 그 무렵에 내렸을 것이다. 그때까지의 방식으로는 더는 이어가기 힘든 전쟁이라는 판단을 내린 중공군 수뇌부는 결국 약 한 달 뒤인 1951년 6월 소련의 제안에 따라 휴전협상에 나서기로 결심한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전선에 불쑥 솟아있는 고지에서는 늘 싸움이 붙었다. 소모적인 진지전이 잇따라 벌어질 조짐이 나타나고 있었던 것이다.

 

164-①② 나라 군대를 전부 훈련시키기로 결정한 밴 플리트

(19) 현리전투(끝)

방어에 약했던 군대

 

나는 그 무렵 담배를 많이도 태웠다. 하루에 거의 3갑 정도를 물었다. 눈을 뜨고 움직이는 동안은 거의 담배 개비를 입에 물고서 보냈다고 해도 좋을 정도였다. 타들어가는 담배와 함께 내 마음도 그렇게 태워졌을 것이다. 전쟁은 그렇게 일선에 선 군인에게 감당하기 힘든 스트레스로 다가온다. 그런 스트레스에 저항하기 위해 담배는 줄곧 내 손가락 사이에 감겼다.

 

전쟁에서 공격과 방어는 거치지 않을 수 없는 과정이다. 공격을 할 때도 있고, 방어에 나서 적을 맞아야 할 때도 있다. 큰 흐름으로 보자면 신생 대한민국의 군대로 막 걸음마를 배운 상태에 불과했던 국군은 형편없는 장비와 화력만으로도 잘 버텼다. 김일성 군대가 벌인 기습 남침에 눈물겹다고 해도 좋을 정도의 분투를 거듭했다.

 

그럼에도 하나의 양상을 지적하자면 국군은 공격에는 능했으나, 방어에 있어서는 치명적인 약점을 드러냈다. 싸우려는 의지는 약하지 않았고, 기개 또한 만만치 않았다. 그러나 전쟁은 싸우려는 뜻과 상대에 대한 깊은 적개심 등의 감정적인 요소로만 벌일 수 없다. 다양한 국면에 예상치 못한 변수가 늘 등장하기 때문이다.

 

▲공산군의 침략으로부터 대한민국을 지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미군 고위 장성. 왼쪽부터 콜린스 당시 미 육군참모총장, 리지웨이 도쿄 유엔군 총사령관, 밴 플리트 미 8군 사령관, 한 사람 건너 백선엽 1군단장.

 

전쟁 초반의 기습적인 남침에 대응하지 못해 낙동강 전선에 밀렸다가 맥아더 장군의 인천상륙작전으로 적이 급히 쫓기기 시작할 때 아군의 진격은 매우 눈부셨다. 그러나 압록강을 넘어 은밀하게 참전한 중공군에게 역습을 당하면서 방어라고 할 수 없는 무질서한 후퇴와 분산으로 비참한 경우에 놓인 적이 대부분이었다. 그 이후 벌어진 중공군과의 전투에서 국군은 과감한 공격을 펼치다가도 면밀한 전략을 세우고 들이닥치는 중공군에게 잇따라 참패를 당하고 말았다. 앞에서도 잠시 소개했지만, 중공군은 그런 한국군의 상황을 ‘부동(浮動)’이라고 표현했다. 물에 떠서 이리 저리 떠다니는 상태를 일컫는 말이다.

 

적을 소멸하려는 공격과 함께 방어는 전투의 수행에서 결코 가볍게 볼 수 없는 행위다. 어느 군대의 역량을 살필 때 오히려 방어력이 공격력에 비해서 높은 점수를 차지한다. 공격이 방어에 비해 오히려 조금은 더 수월하다는 얘기다. 방어는 적의 일격으로 전선이 허물어졌을 때 다음의 후퇴지역으로 이동하면서 접적(接敵)을 유지하며 침착하게 싸워야 하는 일이다. 고도의 훈련과 아주 높은 조직력, 혼란의 상황을 관리하는 능력 등이 모두 필요하다. 그런 방어에 침착하게 임할 수 있을 만큼의 훈련은 당시 국군에게 절대 부족했다. 지휘관의 연령과 경험이 모두 일천했고, 장비와 화력도 매우 뒤떨어진 상태였다. 장병에 대한 교육도 체계적으로 이뤄진 적이 거의 없었다.

 

현리 전투는 아마도 그런 국군의 약점이 집중적으로 드러난 싸움에 해당할 것이다. 싸우려는 의지가 적지 않았던 국군을 좀 더 집중적으로 교육시키고 훈련시킬 시간과 물리적인 여유가 없었던 점이 당시 전투에서 벌어진 한국군 참패의 진정한 원인이라는 생각이다.

 

밴 플리트의 신념

따라서 당시의 현리 전투의 책임을 어느 몇 사람에게 집중적으로 돌리는 일은 마땅치 않다. 그럼에도 미 8군 사령관 밴 플리트 장군은 한국군의 작전 지휘권을 모두 회수했고, 3군단을 해체했다. 모욕적인 조치이기는 했으나 지휘 상에서 드러낸 한국군 수뇌부의 치명적인 결함을 생각하면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일이기도 했다. 그러나 밴 플리트라는 인물은 그런 조치 뒤에 한국군을 위해 획기적인 작업에 착수한다. 그 전까지 드러났던 한국군의 약점을 보완하기 위한 교육과 훈련이었다. 이 점에서 밴 플리트는 한국군대에게 매우 고마운 존재였다.

 

그에 앞서 전선에 부임했던 미 8군 사령관이 전혀 생각지 않았던 일을 그가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로서도 현리 전투에서 드러난 한국군 지휘능력의 결정적인 약점은 매우 충격적이었다. 이 상태로 군대를 유지한다는 일이 앞으로 벌어질 전투에서 얼마나 위험한가를 깨달았던 것이다. 그로 인해 한국군은 전혀 새로운 차원의 군대로 거듭 나는 기회를 잡는다.

 

강릉의 비행장에서 1군단장이었던 나와 강릉 전방지휘소로 나와 있던 정일권 참모총장에게 3군단의 해체를 언급했던 밴 플리트는 이어 우리에게 “한국군은 이제 체계적인 훈련이 필요하다”고 했다. 그의 결심은 곧 현실로 이어졌다. 현리 전투가 끝난 뒤 한 달여의 시간이 흐른 1951년 7월 미 8군은 한국군을 위한 체계적인 훈련계획을 수립해 실행에 옮긴다. 당시 세워진 것은 야전훈련사령부였다. 영어로는 FTC(Field Training Command)로 일컫는 부대였다. 밴 플리트 사령관의 특별 명령에 따라 세워진 사령부는 한국군의 새로운 훈련체계를 실행에 옮기는 기구였다.

 

미 9군단에서 토마스 크로스(Thomas Cross) 부군단장이 사령관을 맡았다. 이어 그 예하에 제2차 세계대전을 야전에서 지내 경험이 풍부하고 자질이 뛰어난 미군 장교와 하사관 150여 명이 각 미군부대에서 뽑혀 왔다. 사령부가 세워진 곳은 내가 이끄는 한국군 1군단 지역의 양양이었다. 이곳에서 한국의 군대는 전혀 새로운 모습으로 태어날 참이었다.

<②편에 계속>

 

<①편에서 계속>

먼저 훈련을 받아야 했던 대상은 국군 3사단이었다. 현리 전투에서 기록적인 패배를 당한 뒤 밴 플리트의 명령에 따라 해체한 3군단에서 내가 이끄는 1군단 예하로 새로 배속한 부대였다. 밴 플리트는 내게 “시험 삼아 먼저 새로 배속한 한국군 3사단을 그곳에서 훈련시켜라”는 명령을 내렸다. 훈련의 강도는 매우 셌다. 일반 장병은 물론이고 사단장까지 교육과 훈련을 받아야 할 정도였다. 기간은 모두 9주였다. 부대의 훈련으로 따질 때는 제법 긴 시간이었다. 일선에서의 모든 부담을 떨치고 훈련을 받는 부대는 그 교육과정에 전력을 기울여야 했다.

 

미군은 한국군 훈련과 교육을 위해 매우 치밀한 프로그램을 마련했다. 장병들은 먼저 개인화기를 다루는 법부터 다시 배웠다. 전술 훈련과 장비를 다루는 방법 등도 교육했다. 분대와 소대, 중대, 다시 대대 차원의 전술 훈련은 아주 엄격했다. 일정한 수준을 설정한 뒤 그에 미치지 못하는 부대가 나오면 처음부터 훈련을 다시 받았다.

 

▲현리 전투를 계기로 밴 플리트 미 8군 사령관은 한국군에게 체계적인 훈련을 받도록 했다. 재무장한 한국군을 사열하고 있는 밴 플리트 사령관(가운데 서 있는 사람들 왼쪽)의 모습이다.

 

거듭 태어나는 국군

당시 3사단장은 백남권 준장이었다. 그 역시 훈련에 훈련을 거쳐야 했다. 사단장 이하 모든 부대원이 함께 훈련을 받고, 대대 테스트에 이르러 전술 훈련의 합격점에 미치지 못하면 과정을 다시 이수해 테스트를 또 치러야 했다. 그런 엄격한 훈련과 교육을 거친 뒤 사단은 다시 일선으로 나갈 수 있었다. 미군은 엄격한 훈련을 거친 한국군 사단에게 전투 중에 상실하거나 망가진 장비와 무기를 새 것으로 바꿔줬다. 혹독한 훈련 뒤에 미군의 새 장비와 무기로 사단을 보충할 수 있다는 점 때문에 한국군 사단들은 매우 열심히 훈련에 임했다. 3사단을 시작으로 이듬해까지 한국군 10개 사단이 모두 이 훈련을 받았다. 따라서 한국군 거의 전부가 새로 태어날 수 있었다. 그런 점 때문에 우리가 훈련을 거쳤던 양양은 사실 현재 한국 육군의 요람(搖籃)이라고도 부를 수 있었다. 그러나 그에서 그치지 않았다.

 

밴 플리트는 1951년 12월 한국군 보병장교 250명을 선발해 포트 배닝의 미국 보병학교에 보냈다. 100명의 포병장교는 별도로 포트 실의 미군 포병학교에 파견했다. 초급 지휘관의 능력에 따라 전투의 승패가 갈린다는 그의 신념 때문이었다. 그에 앞서 미국을 유학 차 다녀온 고급 장교들은 있었으나 대규모로 한국군 각급 장교가 미국에 가서 체계적인 교육을 받는 일은 처음이었다. 밴 플리트는 그런 한국군 교육을 위해 열과 성을 다 했다. 1951년 12월에는 대구에 참모학교를 만들었고, 이듬해 1월에는 4년제 정식 육군사관학교를 진해에 열었다. 1950년대 내내 펼쳐진 이런 미국 유학 교육과정을 거친 한국군 장교는 어림잡아 1500명 정도에 이른다.

 

밴 플리트의 신념이 한국군을 새로운 군대로 태어나도록 한 셈이다. 이로써 세계 최강 미군의 ‘체계’가 한국군에게 옮겨지고 있었다. 그 의미는 단지 군사적인 측면에서만 머물지 않았다. 미군이 지닌 미국의 문명적 바탕이 우리 사회로 신속하게 이식(移植)하는 계기로도 볼 수 있었다. 현리 전투는 우리 입장에서는 입에 다시 담기 싫은 참패였다. 그럼에도 현리 전투를 계기로 한국군이 새로 무장하면서 거듭 태어날 수 있었다는 점은 아주 다행이었다. 그 전기(轉機)를 몰고 온 주인공은 밴 플리트 장군이었다. 그로써 우리가 전화위복(轉禍爲福)의 국면을 이끌어낸다면 그것은 커다란 축복이었다.

 

165 용문산에 다가선 중공군에게 큰 피해를 준 한국군 6사단

(20) 용문산의 설욕

싸우려는 의지

 

현리에서 한국군 3군단이 중공군의 대병력에 의해 처참하게 무너지던 그 무렵이었다. 한 쪽은 제가 지닌 병력을 크게 허물었고, 다른 한 쪽은 정신을 차려 적에게 용감하게 대항함으로써 상대에게 커다란 피해를 입혔다. 모두 한국군이었다. 그럼에도 싸움의 결과에서 이토록 커다란 격차를 이룬 이유는 무엇일까.

 

이제부터는 용문산 전투를 소개할 작정이다. 적에게 터무니없이 무너진 한국군은 3군단, 중공군에게 씻을 수 없는 아픈 상처를 남겨준 군대는 6사단이었다. 둘은 전력상으로 드러나는 차이가 있을 수 없었다. 대한민국 건국 뒤 군문을 세우고 불과 2년도 지나지 않아 김일성 군대가 일으킨 6.25전쟁의 소용돌이로 깊숙이 휘말려 들어간 점이 다르지 않았다. 또한 당시 한국군 모두가 그러했듯이 변변찮은 무기와 장비로 무장했을 뿐이고, 전쟁이 벌어진 뒤 급히 부산과 인천 등을 통해 들어온 미군에게 곁눈질과 어깨 너머로 현대식 군대의 싸움 방식을 배워가며 전투에 임하던 상황이었다. 미군은 끊임없이 물자를 부산으로 실어 올려 한국군과 유엔군 모두에게 후방을 받쳐주고는 있었지만 한국군 자체로서는 면모를 크게 일신할 시간적인 여유가 없었다.

 

▲휴전 직전인 1953년 중공군과 막바지 전투에 나선 국군들이 휴식을 취하고 있다. /라이프 제공

 

따라서 국군 3군단과 미 9군단에 배속한 상태에서 싸움을 수행해야 했던 6사단은 물리적인 측면에서 차이를 드러낼 수는 없었다. 그럼에도 3군단은 허무하게 중공군의 공세에 무너지면서 6.25전쟁 중의 한국군이 맞았던 최대의 참패를 기록했고, 6사단은 보기 좋게 중공군에게 회심의 일격을 안겼다. 그 차이를 빚은 것은 다름 아닌 ‘싸우려는 의지’였다. 3군단은 일선을 뚫은 중공군 소수 병력에 의해 후방의 전략적 지형을 내준 뒤 싸우려는 의지를 모두 상실하고 말았다. 지휘와 통제는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누가 지휘관인지, 누가 일선에서 소총을 들고 적을 맞아 싸워야 하는 병사인지를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커다란 혼란에 휩싸여 제 살 길만을 찾아 물러서기에 바빴다.

 

그러나 6사단은 달랐다. 그들은 앞에서 다가오는 중공군의 대병력을 침착하게 지켜봤으며, 그들의 공격이 몰릴 곳에 미리 두터운 벽을 쌓았다. 그리고 적이 다가서자 죽기를 무릅쓰고 싸우고 또 싸웠다. 결과는 대규모의 승리였다. 줄곧 한국군을 얕보며 전선을 오갔던 중공군은 이로써 싸우려는 마음으로 뭉친 한국군에게 호되게 당하고 말았다. 이 또한 중공군이 마음을 크게 다잡은 뒤 추진했던 5차 2단계 공세의 흐름 속에서 벌어진 전투였다. 서부전선에서 대규모 병력으로 서울을 공략하던 중공군은 5차 2단계 공세가 임박하면서 주력을 중동부 전선으로 돌렸다. 은밀하게 중동부 전선으로 병력을 이동시킨 중공군 수뇌부는 5월 16일 강원도 인제의 현리 일대와 경기도 북부 지역으로 강습(强襲)을 벌이고 나왔다.

 

용문산 전투는 그런 중공군의 대공세 흐름 속에서 5월 18일부터 이틀 동안 벌어진 싸움이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중공군은 이 싸움에서 참패를 당하고 말았다. 아주 많은 수의 병력을 잃었고, 한국군과 미군이 벌인 강력한 반격의 덫에 갇힘으로써 전략적 의도의 좌절은 물론 전선 전체의 지휘 상에서 적지 않은 손실을 입고 말았다.

 

경기도 양평 용문산

당시의 천후(天候)는 싸움의 양쪽에게 핑계를 댈 만한 기회를 주지 않았다. 날씨는 대개 맑았으며 아침부터 오전 한 동안까지는 안개가 끼어 오히려 공습(空襲) 능력이 강한 아군 측에 다소 불리하다고 해도 좋을 정도였다. 강원도 산간에 비해 기온은 높아서 적과 맞서 싸우기에는 무리가 전혀 없었다. 싸움이 벌어졌던 용문산이라는 곳은 경기도 양평에서 남한강과 북한강이 합류하는 지점의 삼각주 지형에 있는 산이다. 큰 싸움이 벌어지는 곳은 대개 옛 전장(戰場)이기 십상이다. 지형의 생김새가 우선 그렇고, 사람과 물자가 다른 지역에 비해 수월하게 이동하는 주요 길목이라는 점에서 그렇다.

 

남한강과 북한강이 만나는 지역이어서 교통으로 볼 때 사람의 왕래가 매우 잦을 수밖에 없는 곳이 용문산 일대였다. 전사 기록을 보면 이곳은 원래 국가의 운명이 위태로워지는 전쟁을 맞았을 때 나라를 지키려고 했던 의병(義兵)들이 집결했던 곳이라고 한다. 고구려와 백제, 신라가 한반도에서 힘겨루기를 한창 벌이고 있을 무렵 삼국통일의 야망을 가슴에 지니고 있던 신라의 진흥왕이 이곳에 군대를 주둔시켰다는 기록도 전해지고 있다. 아울러 고려시대에도 고려의 군대가 이곳에 산성(山城)을 쌓고 침략한 몽고군과 일전을 벌이기 위해 머물렀다는 설명도 있다. 일본군이 침략한 임진왜란 때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고 한다. 승병과 의병들이 나서서 이곳에 머물면서 북상하는 왜군을 맞아 전의(戰意)를 다졌던 곳이라는 설명도 따른다. 이와 같은 역사적 기록을 보더라도 이곳이 전술적으로 꽤 중요한 지역이라는 점을 충분히 알 수 있을 것이다. <②편에 계속>

 

<①편에서 계속>

6사단은 이에 앞서 사창리라는 곳에서 전투를 벌였다. 이 전투는 앞에서 소개한 적이 있다. 아울러 6사단은 이미 여러 번 언급한 부대였다. 1950년 6월 25일 전쟁이 벌어지면서 6사단은 매우 유명해졌다. 강원도 춘천의 전면을 방어하던 사단으로서 한국군 중에는 거의 유일하게 기습 남침한 북한군의 전술적 의도를 차단한 부대였기 때문이다. 아울러 기동력이 매우 탁월했다. 영월 일대에 있던 광물(鑛物) 회사들의 트럭을 징발해서 사용할 수 있었던 까닭에 다른 국군 사단에 비해 월등하다고 해도 좋을 기동력을 확보하고 있었다. 따라서 부대의 형편은 전반적으로 다른 한국군보다 나은 편이었다.

 

하지만 낙동강 전선에서 맥아더 장군이 이끌었던 인천상륙작전으로 전세가 반전(反轉)의 국면을 맞았을 때 너무 빨리 북진한 점이 아쉬웠다. 이들은 압록강을 향해 거침없는 질주를 거듭해 압록강 초입의 초산진에 먼저 당도했다. 당시 모든 국군 부대가 흉내를 낼 수 없을 정도의 기동이었다. 

 

▲전투 중 국군에 의해 붙잡힌 중공군 포로의 모습이다. 중공군은 참전 뒤 전투가 잇따르면서 급격한 체력 저하 현상을 보여 막대한 인명 손실을 입었다.

 

6사단장의 선택

그러나 그 점이 화근(禍根)이었다. 그들은 적유령 산맥의 깊은 그늘에 몸을 숨긴 채 매복해 있던 중공군의 덫에 걸려들고 말았다. 당시에 국군 2군단의 6사단과 7사단, 8사단이 모두 비슷한 형편에 놓였지만 중공군 참전 직후의 전투로 인해 한국군 2군단이 해체의 길을 걷는 순간에서 6사단의 발 빠른 기동은 결정적인 계기로 작용했다.

 

그 뒤 6사단은 어려운 전투를 수행했다. 그러다가 중공군 5차 4월 공세에 결정적인 패배를 당하고 말았다. 위에 적은 사창리 전투였다. 경기도 가평의 사창리라는 곳에서 벌어진 전투는 6사단과 중공군 20군 예하의 58사단, 59사단, 60사단이 벌인 싸움이었다. 약 3일 동안 벌어진 사창리 전투에서 6사단은 퇴로(退路)에 관한 숙고(熟考)가 부족해 결국 지휘 상의 커다란 혼란을 야기했으며, 마침내 중공군 거대 병력에 의해 공격을 받아 장비와 화력은 물론이고 절반에 가까운 병력을 손실하고 말았다. 이 싸움은 6.25전쟁 중 아군이 꼽는 결정적인 패배의 하나에 해당한다.

 

당시 패배는 충격적이었던 듯하다. 싸움을 지휘하고 있던 미 9군단장의 입장에서는 분명히 그랬다고 보인다. 사창리 전투에서 6사단이 커다란 혼란을 보이면서 기록적인 패배를 맞이한 뒤 미 9군단장인 윌리엄 호그(William M. Hoge) 중장은 사단을 찾아갔다. 앞에서도 잠시 적은 내용이다. 그는 6사단장인 장도영 준장에게 “당신이 군인이냐?”라고 일갈할 정도로 화가 났던 모양이다. 장도영 사단장은 그런 호그의 호통에 한 마디도 대꾸할 수 없었다고 한다. 기록적인 패배를 당한 사단장이 그런 상황에서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그런 과정을 겪었던 6사단이었다. 신속하게 후방의 병력으로 병력을 재편해 다시 싸움터에 나선 입장이었다. 그러나 싸움에서의 패배는 쉽게 잊을 수 없는 법이다. 초산진에서 중공군의 매복에 걸려 당한 쓰라린 패배 이후 사창리에 이르는 동안 6사단 장병들의 마음속에는 중공군에 대한 두려움이 한껏 커졌던 상태였다. 장도영 사단장은 그 점에 깊이 주목했던 듯하다. 여러 번의 패전을 거치는 동안 두껍게 가라앉았던 상대에 대한 두려움을 불식하지 못한다면 다시 싸움에 나서도 승산은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그는 그런 점에서 싸움의 요체를 잘 잡아낸 사단장에 해당한다. 무기와 장비가 제아무리 뛰어나도 마음 복판에 자리를 잡은 두려움이 없어지지 않는다면 싸움다운 싸움을 해나가기 어려운 법이기 때문이다.

 

166 첫 패배에 대한 설욕 의지로 철모에 붉은 '결사(決死)' 글씨로 새긴 6사단

(20) 용문산의 설욕

5만 대 1만의 싸움

 

용문산 일대의 전투 환경은 중공군에게 유리했다. 이곳의 지형적 특징은 물이 많다는 점이다. 남한강과 북한강이 만나는 곳이라서 그랬다. 아울러 북쪽으로는 홍천강도 흐르고 있다. 모두 수량이 풍부한 강이다. 그곳에는 또 울창한 삼림이 이어져 있다. 강이 흐르는 곳이라서 그곳으로 자락을 내리는 산의 경사면도 퍽 큰 편이다.

 

중공군은 도로를 따라 기동하는 법이 드물었다. 당시까지는 그랬다는 얘기다. 도로로 기동하기에는 사정이 어려웠다. 탁월한 미 공군의 공격력 때문이었다. 도로로 기동할 경우 미 공군의 파괴력 강한 공격에 속수무책으로 놓일 수밖에 없는 상황이어서 그랬다. 따라서 중공군은 1950년 10월 말 참전 이래 늘 산악으로 기동을 펼쳤다. 그를 감안하면 용문산 전투가 벌어지던 당시 지역적 특성으로 볼 때 중공군은 특유의 산악 기동을 활발하게 펼칠 수 있는 상황이었다. 단지 6사단에게 유리한 점이 있었다면 주변을 모두 감제(瞰制)할 수 있는 가장 높은 고지인 용문산을 선점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미 9군단의 배치 상황은 서쪽이 한국군 2사단, 중앙이 한국군 6사단, 동쪽이 미 7사단이 늘어서는 모양새였다. 중공군은 5월 16일 강원도 현리 일대로 병력을 몰아 강공을 펼친 뒤 다른 병력을 이동시켜 미 9군단 전면을 압박했다. 이번에 중공군이 싸움 상대로 고른 쪽은 한국군 6사단이었다.

 

▲한국군 포병 병력의 105㎜ 야포 발사현장을 시찰하고 있는 밴 플리트 미 8군 사령관(오른쪽).

 

장도영 사단장은 설욕(雪辱)을 다짐하고 있었다. 6사단장으로 부임한 뒤 맞은 사창리 전투에서의 패배를 일거에 만회하면서 중공군에게 뼈아픈 일격을 가하려는 마음이 강했다. 그는 따라서 어느 경우에도 물러서지 않고 다가오는 적을 맞받아칠 각오였다. 그는 주(主)저항선 전방으로 경계부대를 보내기로 했다. 적이 어떻게 움직일 것인가를 미리 파악해보고자 앞으로 내세우는 부대가 경계부대다. 적이 어떤 규모로, 어떤 경로를 거쳐, 어떤 방식으로 공격하느냐 등을 두루 살피기 위해 전진시켜 배치하는 부대다.

 

경계부대로 선택한 부대는 2연대였다. 장도영 사단장은 좌측에 19연대, 우측에 7연대를 배치한 뒤 2연대를 전방으로 보냈다. 아울러 사단장은 전방으로 나아가는 2연대장을 불러 “어떠한 경우에도 철수하지 말고 진지를 사수하라”고 명령했다. 이런 사단장의 강력한 지시에 따라 2연대장은 예하 3개 대대를 전방에 포진시킨 뒤 사주방어(四周防禦)형 진지를 구축하고 적을 기다렸다. 마침 전방의 경계부대로 나아간 2연대는 사창리 전투에서 먼저 적에게 등을 보임으로써 사단 전체의 와해 국면을 초래했던 부대이기도 했다. 전사 기록에 따르면 당시 사창리 전투에서의 치욕을 씻기 위해 2연대는 철모에 붉은색 페인트로 ‘결사(決死)’라는 글자를 쓴 뒤 전투에 나섰다고 한다.

 

죽을 각오로 임하다

육군본부가 펴낸 <1129일 간의 전쟁 6.25>에는 당시의 상황이 자세하게 드러난다. 그에 따르면 장도영 사단장은 2연대를 전방의 경계부대로 내보내기 전 군장(軍裝) 검사를 벌였다. 그는 2연대 장병들을 앞에 두고 “지금까지 우리 부대는 전투에서 한 번도 패한 일이 없는데 사창리 전투에서 망쳐 놓았다. 이 오명을 씻기 위해 너희는 죽음을 각오하고 싸워야 한다. 한 발짝도 물러설 생각하지 말고 전초(前哨) 진지를 사수하라. 진지를 끝까지 지키고 있는 한 사단장은 모든 것을 지원하겠다”고 말했다.

 

철모에 붉은색 페인트로 ‘결사’라는 글자를 써놓은 것은 2연대 장병들이 사단장의 훈시를 들은 뒤였다고 한다. 사단장은 장병들에게 한 가지를 분명히 약속했다. 목숨을 걸고 전초 진지에서 싸우는 한 사단장은 모든 것을 지원하겠다는 내용이었다. 싸움은 마음으로만 이뤄지지 않는다. 나를 죽이려는 적이 다가오는 싸움에서는 말이다. 그런 싸움에서는 모든 사람이 마음을 한 데 뭉치는 일이 중요하다. 그러나 마음의 결의만이 존재한다면 그런 이야기는 설득력이 떨어진다. 장도영 사단장은 그 점을 분명히 했던 것이다.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 전초의 진지를 지원하겠다는 점 말이다.

 

결론을 먼저 이야기하자면, 용문산 전투는 사단장 이하 모든 장병의 굳은 의지가 뭉쳐졌고, 그 뒤 장병들의 분투(奮鬪)를 지원하는 사단장의 실행(實行)이 효력을 발휘한 싸움이었다. 이 점은 나중에 상술하겠지만 용문산 승리의 골간(骨幹)을 이룬 매우 훌륭한 요소에 해당한다.

<②편에 계속>

 

<①편에서 계속>

중공군은 현리 전투에 이어 미 9군단의 정면을 곧 압박하기 시작했다. 그럴 경우 전투의 조짐은 여러 곳에서 모습을 드러낸다. 전방에서 중공군의 이동이 활발해지고, 적의 척후(斥候) 행위도 자주 보인다. 그러면서 부대가 지니는 긴장감이 높아진다. 전선 너머의 중공군 활동이 잦아지면서 미 9군단도 채비에 들어갔다. 서쪽의 국군 2사단, 동쪽의 미 7사단은 전초에 나가있던 부대들을 불러들여 주저항선에 세웠다. 그에 따라 6사단의 경계부대로 나가있던 2연대만이 남은 상태였다. 2연대가 지닌 전투 식량은 1주일 치였다. 그럼에도 2연대 장병들을 죽을 각오로 진지를 지키며 적을 기다렸다.

 

당시 전방의 전초 진지로 갔던 2연대 장병의 각오는 어땠을까. <1129일 간의 전쟁 6.25>가 채록한 증언이 하나 있어 여기에 소개한다. 책은 증언자의 신분을 당시 6사단 2연대 1대대 참전용사라고만 적었다. 그 내용이다.

 

후방 지원 준비 완료

“그 당시 우리 대대는 대대장이 없어 부대대장 진명섭 대위가 대리근무를 하고 있었다. 사창리에서 패배하고 실의에 빠져 있던 어느 날 우리 대대는 연대장으로부터 ‘홍천강 남안의 미사리 일대에서 중공군의 공격을 저지하라’는 임무를 부여받았다. 우리 대대가 용문산 서쪽의 몰래재를 넘을 때 부대대장은 ‘드디어 우리 모두에게 마지막 기회가 왔다. 우리가 죽을 각오하고 싸운다면 반드시 큰 공을 세울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손톱과 머리카락을 잘라 유서와 함께 고향에 보내고 훗날 국립묘지에서 만나자’라고 하자 전 대대원이 결의에 찬 모습으로 손톱과 머리카락을 잘라 봉투에 넣었다.”

 

▲동굴 진지에서 공격 명령을 대기하고 있는 중공군 병사들 모습. 손에 쥔 방망이 형 수류탄이 눈에 띈다.

 

중공군은 늘 많았다. 풍부한 인구를 지닌 국가라서 그랬을 것이고, 사력(死力)을 다 해 당시의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기 위해 제가 지닌 총력을 퍼부었기 때문에 그랬을 것이다. 2연대는 당초 많아야 1만 여 명의 중공군을 대적(對敵)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그러나 중공군은 63군 예하 3개 사단으로 한국군 6사단을 겨냥하고 나왔다. 병력의 수만으로 볼 때 5만 명을 넘는 규모였다. 그런 적을 맞아 싸우는 쪽은 6사단이었고, 그 앞을 막고 전방을 사수하려는 부대는 6사단의 2연대뿐이었다. 죽어서도 지키겠다는 의지가 없고서는 결코 이뤄지기 힘든 싸움이었다.

 

6사단의 결의는 만만치 않았다. 우선 사단 27포병대대를 동원해 전방을 지원하기로 했다. 아울러 미 9군단 소속의 92, 987 자주 포병대도 동원했다. 또 그 나머지 군단의 포병부대들도 용문산 후방에 포진지를 구축하고 지원준비를 마쳤다. 가장 든든한 대상이었던 미 공군도 미 9군단의 요청에 대비해 막강한 공군력을 6사단의 전방에 투사(投射)할 준비를 끝냈다. 중공군의 실력도 상당한 수준이었다. 용문산 일대를 공격키로 하고 나선 63군은 다른 중공군 부대처럼 국공(國共)내전과 항일(抗日)전투에 참가했던 전투 경험이 풍부한 부대였다. 예하 187, 188, 189 사단은 1951년 2월에 압록강을 건넌 뒤 임진강 북쪽에 도달한 데 이어 중공군 5차 1단계 4월 공세에서 임진강 설마리 전투에 참가했다.

 

전사 기록에 따르면 그 중 188사단은 설마리 전투에서 큰 공을 세워 ‘영웅’ 칭호를 받은 연대장이 2명에 이르렀다. ‘강한 지휘관 아래에 약한 졸병은 없다’는 말도 있듯이, 그런 중공군 부대의 병사들 또한 사기가 아주 높은 편이었다고 한다. 중공군은 용문산을 넘어 아군의 서부전선 후방을 공략할 의도였다. 강원도 현리에서 한국군을 먼저 소멸시킨 뒤 여세를 몰아 미군의 유생역량을 없애면서 전선을 휘청거리게 만든 뒤 용문산에서 틈을 뚫어 서부전선의 미군 주력을 궁지에 몰아넣겠다는 계산이었다.

 

중공군이 공격을 벌이기 시작한 정확한 시점은 1951년 5월 17일이었다고 한다. 중서부 전선 일대에서 강력한 공세를 벌인 뒤 중공군 예봉(銳鋒)이 곧 모습을 드러냈다고 한다. 용문산 일대의 한국군 6사단 2연대 앞이었다. 이튿날인 5월 18일 중공군 본대가 출몰하기 시작했고, 곧 용문산 일대는 뜨거운 격전장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167-①② 저녁에 강을 건넌 중공군, 6사단 2연대 전진기지로 다가서다

(20) 용문산의 설욕

얼씬거리는 중공군 그림자

 

본격적으로 전투가 벌어지기 전에도 중공군은 6사단 전면에 가끔씩 모습을 드러냈다고 한다. 전투가 벌어지기 3일 전인 1951년 5월 15일에는 한국인 민간복으로 변장한 중공군이 가평 남쪽의 도로에서 아군의 수색대 눈에 띄었고, 10여 명의 중공군이 강변을 따라 내려오는 장면도 나타났다. 그러나 결정적인 내용이 없었다. 포로를 잡아 중공군의 동태를 구체적으로 파악해야 했는데도 사정은 그렇지 못했다. 따라서 장도영 사단장은 각 연대에 중공군 포로를 반드시 잡아야 한다는 주문을 했다. 사단장의 지시에 따라 각 연대는 전면의 수색과 정찰을 강화하면서 중공군 포로를 잡아들이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5월 16일에는 적지 않은 중공군 병력이 가평 읍내에 집결했다는 정보가 들어왔다. 그에 따라 정밀한 정찰을 강화한 결과 최소 연대 규모의 중공군 병력이 남쪽으로 이동하고 있다는 사실도 파악했다. 전방의 경계부대로 나섰던 2연대 또한 중공군 포로를 잡아들이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다가 2연대에서 결국 중공군과의 교전 끝에 포로 한 명을 붙잡았다. 6중대 병력이 수색 도중 중공군과 조우해 격렬한 전투를 벌인 끝에 잡은 포로였다.

이 포로를 통해 중공군 대규모 병력이 곧 용문산 일대를 향해 공격을 벌일 것이라는 사실을 파악했다. 중공군 공격은 5월 18일 시작했다. 전사의 기록에 따르면 전투가 벌어지던 5월 18일의 일기는 좋지 않았다. 가랑비가 내리고 있었으며 하늘은 퍽 흐린 상태였다. 대규모의 적은 이미 5월 17일 밤의 야음을 틈타 홍천강 북안에 당도했으리라 보였다.

 

▲중공군 포병 화력이 전투에 나서기 전 사열을 받고 있다.

 

장도영 사단장은 상당히 치밀하고 과감한 계획을 세운 상태였다. 특히 2연대를 전방의 경계부대로 내세우면서 끝까지 진지를 사수하라고 지시한 점은 눈에 띄는 내용이었다. 2연대가 지키는 진지는 지형적으로 뚜렷한 특징을 하나 지니고 있었다. 전방에서 내려오는 중공군이 이곳 2연대의 진지를 돌파할 경우와, 그렇지 못한 경우가 그 때문에 크게 갈린다.

 

전방 경계부대라고는 했지만 사실 2연대는 단순한 경계 근무를 벌이는 임무가 아니었다. 그곳을 목숨으로 지켜야 하는 책임이 있었다. 따라서 어떻게 보면 주저항선에 올라선 핵심 전투부대였다고 해도 좋았다. 2연대로 하여금 중공군을 그곳에서 목숨을 걸고 저지하라는 지시를 내린 장도영 사단장은 나름대로 지형적인 이점을 정확하게 노렸다.

 

중공군이 2연대에 막혀 머무는 저지선의 북방은 개활지에 가까웠다. 높은 산간 지형과는 전혀 반대의 모습을 지닌 장소였다. 높아 봐야 기껏 구릉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의 나지막한 산지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강변과 평탄한 지면의 연속이었다. 따라서 홍천강을 도하해 남하하는 중공군은 2연대 저지선에 막혀 머무는 동안 2연대 후방의 강력한 아군 포격에 몸을 드러내야 하는 형국이었다.

 

후방에 배치한 막강한 포병

앞에서도 설명한 대목이지만 6사단의 전투를 위해 미 9군단과 사단본부는 상당한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특히 후방에 강력한 포병화력을 전개하고 적을 기다리는 상황이었다. 사단의 27포병대대는 물론이고, 미 9군단을 비롯한 각 예하부대의 포병화력이 6사단의 전투를 지원하기 위해 강력한 포를 늘어놓고 있었다. 따라서 중공군은 2연대 저지선을 신속하게 뚫지 못하면 후방으로부터 날아오는 아군의 강력한 포병 화력에 몸을 숨기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장도영 사단장은 이를 정확하게 간파했던 셈이다. 따라서 그는 2연대장 송대후 중령에게 반드시 저지선을 사수하도록 명령했던 것이다.

 

전투가 벌어지면서 드러나는 중공군의 동선(動線)도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었다. 바로 용문산 때문이었다. 해발 1157m의 용문산은 주변 모두를 감제(瞰制)하기에 안성맞춤인 고지에 해당했다. 인근 산간 지역의 어느 산에 비해 높은 곳이었기 때문이다. 이곳에 올라선 아군은 중공군이 대규모의 병력을 이동시킬 경우 정확하게 그 행로를 파악할 수 있었다. 따라서 6사단 2연대의 저지선에 걸려 신속하게 이동하지 못하는 중공군은 낮은 구릉과 평탄한 벌판 지형에서 몸을 감추기 힘들었다. 용문산의 높은 고지에서 정확한 관측을 통해 중공군 병력이 몰려 있는 장소를 실시간으로 파악했던 아군은 후방의 포병부대에 신속하면서 빈틈없이 포격 지점을 알려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울러 중공군이 2연대의 저지에 막혀 평탄하고 너른 지형에 머무는 동안 강력한 미 공군의 공습 능력도 극대화할 수 있었다. 따라서 2연대가 막대한 중공군의 병력을 얼마 동안 저지할 수 있느냐는 점은 용문산 전투의 승패를 가를 수 있는 결정적인 요소였다. 장도영 사단장은 그런 사정을 감안해 2연대의 진지 사수(死守)를 지시했던 것이다.

<②편에 계속>

 

<①편에서 계속>

홍천강 남쪽은 미사리라고 하는 곳이다. 강변을 끼고 있어 그 일대는 대부분 평탄한 지형이다. 이곳에는 2연대의 1대대가 늘어섰다. 5월 18일 오전 10시 경에 중공군 기마병들의 모습이 먼저 아군의 시야에 나타났다. 그 수는 점차 불어나고 있었다. 전사의 기록에 따르면 중공군은 오후 들어 상당수의 병력이 홍천강 너머에 집결한 상태였고, 어둠이 깔리기 시작한 오후 7시에 강을 넘기 시작했다고 한다. 수심은 1.5m 정도였으며, 중공군은 약 100명 정도씩 강에 뛰어들어 헤엄을 쳤다고 전사는 소개하고 있다.

 

전방에 추진했던 소대는 중공군의 본격적인 도하(渡河)와 함께 중대 진지로 돌아와 적을 맞았다고 했다. 그러나 2연대는 전방에 돌출(突出)한 형국이었다. 동쪽으로 인접했던 미 7사단 경계부대, 서쪽으로 늘어섰던 한국군 2사단의 경계부대가 모두 후방으로 철수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2연대는 좌우가 다 뚫려 고립(孤立)의 형태를 보이는 진지에 갇혀 있는 모습이었다. 게다가 중공군은 수적으로 매우 우세했다. 좌우에 늘어선 아군과의 연계 없이 다가오는 대규모의 중공군을 맞아 싸우는 일은 죽음을 무릅쓰지 않고서는 불가능했다.

 

고립된 고지의 힘겨운 싸움

이런 점 때문에 2연대의 전투는 고전(苦戰)의 연속이었다. 중공군은 대규모 기동전을 벌이기 전에 늘 펼치던 사전 포격은 생략한 상태였다. 그저 부지런히 강 북안에서 헤엄을 쳐 물을 건넌 뒤 기관총과 방망이 수류탄을 들고 끊임없이 고지에 다가서고 있었다. 중공군은 오직 전진(前進)만이 유일한 목적인 듯했다고 전사는 설명했다. 2연대 1대대의 방어선에 걸려 얼마나 많은 병력이 죽거나 다치느냐에는 관심이 없었다고 했다. 오로지 아군의 저지선을 뚫고 2연대 진지를 건너 뛰어 아군의 후방으로 진입하는 데에만 관심이 높았던 듯했다는 이야기다.

 

▲용문산 전투가 벌어지고 있던 무렵 미 해군은 막강한 화력을 앞세워 북한 전역을 공격했다. 1951년 함흥 지역을 강타하고 있는 전함 미주리 호의 함포.

 

그런 중공군에게 아군의 주방어선이 어디인가를 알아내는 일은 중요했다. 최종적으로 6사단의 주저항선을 뚫어야 용문산 일대를 장악할 수 있다는 판단 때문이었을 것이다. 중공군은 시간이 갈수록 수가 크게 불어났다. 미 7사단 지역 전면을 저항 없이 통과한 중공군도 국군 6사단 2연대 정면으로 몰려들고 있었다. 이들은 2연대 전면에 좌우로 늘어선 2대대와 1대대를 과감하게 공격했다. 주로 방망이 수류탄을 던져 넣는 방식으로 접근했다. 아군은 먼저 박격포 공격을 벌였다. 그리고 다가서는 적에게 집중적인 사격을 가하면서 대응했다. 중공군의 희생은 컸다. 그러나 수적으로 우수한 그들은 인명의 희생을 염두에 두지 않고 계속 다가섰다.

 

후방에서 나중에 강을 건너 다가선 중공군 부대는 오직 전진을 재촉했다. 조금이라도 빨리 용문산 일대로 진입하기 위해서였다. 그런 의도가 성공할 경우 중공군은 2연대 저지선을 넘어 몸을 가리기 쉬운 용문산 일대의 산자락으로 들어설 수 있었다. 아군의 강력한 포격과 공습을 피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래야 했다. 아군의 후방 포병화력이 불을 뿜었고, 미군의 강력한 공군기들이 날아들었다. 잔뜩 구름이 낀 날씨 속에서도 미 공군기는 24회를 출격했다고 전사는 적고 있다. 아울러 후방으로부터 아군의 포탄이 날아들면서 홍천강 남안 일대 개활지는 섬광과 폭음, 그리고 그로부터 나오는 초연(硝煙)이 가득한 싸움터로 돌변했다.

 

그러나 중공군은 쓰러지고 또 쓰러지면서도 쉼 없이 다가섰다. 막대한 병력을 앞세운 중공군의 그런 인해전술(人海戰術)로 2연대의 전방 지지들이 휘청거리기 시작했다. ‘결사(決死)’라는 글씨를 전투모에 쓰고 분전을 거듭하는 2연대 1, 2대대의 장병들이 조금씩 밀리고 있었다.

 

168 쉴새없이 몰아친 중공군의 인해전술에 조금씩 밀려난 한국군

(20) 용문산의 설욕

3대대 353고지 혈투

 

6사단 2연대의 배치 상황은 원래 이랬다. 전방 좌측에 2대대, 우측은 1대대, 후방은 3대대였다. 전방 좌우에 있던 2대대와 1대대는 중공군과의 접전에서 밀릴 경우 다음 진지로 이동한다는 계획을 미리 세워둔 상태였다. 그럴 경우 당초 후방에 있던 3대대가 중공군 전면을 막아서고 다시 그 후방의 우측으로는 1대대, 좌측으로는 2대대가 늘어설 계획이었다. 막대한 수적인 우세로 전방의 1대대와 2대대를 공격하던 중공군은 결국 아군의 저지선을 넘어서고 말았다. 따라서 계획에 따라 1대대와 2대대는 다음의 축차(逐次)진지로 이동했다. 연대장 송대후 중령의 지시에 따라서였다. 그러나 그 무렵에 중공군은 이미 1대대와 2대대 저지선을 넘은 상태였다.

 

▲6.25전쟁 중에 박격포 훈련을 하고 있는 국군.

 

당시 상황을 자세히 적고 있는 육군본부의 <1129일 간의 전쟁 6.25>는 그 때의 모습이 저지선을 이미 넘어선 중공군의 후미를 아군이 따라가는 형국이었다고 소개한다. 그러나 마침 미 공군의 강력한 공중사격으로 아군의 전방 저지선을 넘은 중공군들이 산간의 숲 사이로 몸을 숨겼다고 했다. 1대대와 2대대는 그런 틈을 타서 신속하게 다음 축차진지로 무사히 이동했다. 다음으로 적을 전면에서 맞아야 했던 3대대의 위치는 지금의 청평호로부터 6㎞ 정도 떨어진 353고지였다. 이제는 3대대가 전면으로 나서서 중공군을 맞아 싸워야 할 차례였다. 그곳으로부터 우측으로 3㎞ 떨어진 나산에는 1대대가 전방 임무를 완수한 뒤 신속하게 이동해 자리를 잡았고, 좌측으로는 역시 전방의 저지선에서 철수한 2대대가 427고지에 진지를 편성하고 전투태세를 갖췄다. 따라서 중공군의 주공(主攻)은 가운데 진지에 자리를 잡은 3대대 정면으로 몰릴 형국이었다.

 

중공군의 핵심 목표는 용문산 점령이었다. 가장 높은 고지를 점령함으로써 세를 구축한 뒤 아군의 서쪽 후방을 치고 들어간다는 계획을 마련한 상태였기 때문이다. 중공군의 그런 전략적 의도를 관철하기 위해서는 한국군 6사단 2연대 3대대가 지키고 있는 353고지를 반드시 뚫어야 했다. 중공군의 대규모 병력이 신속하게 용문산으로 다가서기 위해서는 반드시 이곳을 거쳐야 했던 까닭이다. 따라서 한국군 6사단 2연대의 1대대 및 2대대의 1차 저지선을 넘은 중공군은 3대대를 향해 공격을 벌일 게 분명해 보였다. 중공군 공격이 벌어진 뒤 하루가 지난 5월 19일 저녁에는 그런 중공군 동향을 알리는 첩보들이 속속 들어오고 있었다.

 

나팔수와 정훈병

전사 기록을 보면 흥미를 끄는 장면이 하나 눈에 띈다. 당시 3대대의 진지 사수(死守) 결의 또한 대단했다고 한다. 대대장은 김두일 대위였다. 그는 진지를 견고하게 다져 적을 맞을 채비에 나서는 한편 행정병과 노무자들도 소총을 잡고 전투에 나서도록 했다고 한다.

 

부대에 남아 있는 인력 중에 소총을 들고 적에 맞설 수 있는 사람은 모두 나서서 싸우자는 전원 결사 의지의 표현이랄 수 있겠다. 아울러 김두일 대위는 아이디어 하나를 냈다. 전투에 나서는 아군 병력의 사기를 드높이기 위해 중대마다 한 명씩 나팔수를 뽑기로 했다는 것이다. 싸움에서 소리의 역할도 적지 않은 법이다. 옛 전쟁에서 공격에 나서는 신호를 북, 후퇴를 알리는 소리로는 징 등 금속소리를 냈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중공군은 참전 이래 줄곧 피리와 꽹과리 소리를 사용해 공격을 펼쳐왔다. 그에 대응하기 위한 방편으로 김두일 대위는 나팔을 생각했던 모양이다. 전사가 소개하는 또 하나 흥미로운 대목은 3대대장이 정훈병을 배치했다는 점이다. 지휘관의 의지와 전투 방식을 효율적으로 부대원들에게 전달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그런 방식으로 싸움을 끝까지 펼쳐 죽음으로써 진지를 지키겠다는 의지가 엿보이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아무튼 전선에 선 6사단 2연대 병력은 싸우려는 의지로 단단히 뭉쳐 있었던 셈이다.

<②편에 계속>

 

“이대로 물러서면 다 죽는다”한 마디 외침에 벌어진‘기적’

<①편에서 계속>

중공군의 공격은 밤을 타고 벌어졌다. 5월 19일 오후 7시 무렵이었다고 했다. 중공군은 소대 규모의 부대를 보내 기습을 펼쳤다. 저녁 식사를 마친 3대대 취사장이 먼저 공격을 받았다. 뒷정리를 하던 소대원과 노무자들이 쓰러졌다. 그들은 반격을 받고 곧 사라졌다. 대규모 공격을 앞에 둔 탐색전 성격의 교전이었다. 그로부터 1시간이 지난 뒤에는 고지를 향해 중공군이 대거 올라오고 있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본격적인 중공군의 공격이었다. 접전이 벌어지기 시작한 시점은 밤 10시 무렵이었다. 중공군은 따발총 사격에 앞서 방망이 수류탄을 대거 진지에 던지면서 몰려들었다.

 

3대대 각 중대는 박격포로 우선 적의 예봉을 꺾으면서 부지런히 사격으로 대응했다. 중공군의 시체가 진지 앞에 쌓이기 시작했다. 그런 정도의 중공군 공격으로 무너질 3대대 장병들의 각오는 아니었다. 결국 1차 접전은 중공군이 퇴각하면서 마무리 지어졌다. 그러나 중공군은 곧 다시 몰려왔다. 중공군의 공격은 줄곧 한 지점을 향해 집중하는 모양으로 나타났다. 한 지점을 돌파해 종심으로 기동을 펼친 뒤 후방으로 진입해 아군을 포위하려는 의도에서였다. 2차 공격을 펼치는 중공군 또한 한 지점만을 선택해 공격력을 집중했다. 3대대 전체가 위기에 휩싸였다.

 

위기에서 벌어진 기적

육군본부의 <1129일 간의 전쟁 6.25>가 적고 있는 흥미로운 장면이 하나 있다. 당시 전투에 참가했던 장병들의 증언을 채록했던 내용이라고 보인다. 전투는 계획한 여러 요소에 의해 틀이 만들어지지만, 때로는 전혀 의도하지 않은 우연의 요소가 개입해 승패를 가르는 경우가 적지 않다. 책자가 소개하고 있는 내용 또한 그런 우연의 요소에 해당한다. 그만큼 전투는 예측할 수 없는 변수가 많이 따르는 법이다. 책에 따르면 3대대장 김두일 대위는 지휘관의 의지와 심정을 부대원에게 충분히 전달코자 중공군 공격에 앞서 정훈병을 각 중대에 배치했다고 위에 적었다.

 

정훈병은 대대장이 자신의 뚜렷한 목적을 지닌 채 선발한 사람이다. 그러나 그 정훈병이 이상한 기적을 만들어내고 말았다. 대대장이 의도한 것과는 전혀 동떨어진 결과였다. 중공군의 거듭 이어진 공격에 대응하던 과정에서 그런 일이 벌어졌다. 중공군은 5월 19일 밤 10시 무렵에 2차 공격을 벌인 뒤 40분이 지났을 때 다시 3차 공격에 나선다. 당시 중공군이 집중적으로 노린 곳은 3대대 10중대 방어지역이었다고 한다. 쉴 새 없이 벌어지는 중공군의 공격에 부대원들은 소대장을 중심으로 강력하게 맞서 싸웠다고 한다.

 

▲1951년 중공군 공세에 맞서 야포로 사격을 하고 있는 미 해병대원들.

 

그러나 수적으로 월등했던 중공군은 막심한 인명 피해는 아랑곳 하지 않은 채 계속 몰려들었다. 숨을 돌릴 틈도 없이 밀어붙이는 중공군에 의해 10중대가 흔들렸고, 급기야 중대장 또한 ‘이젠 더 막기 힘들다’는 판단을 했기 때문인지는 몰라도 엉겁결에 고지 후방으로 후퇴하고 말았다. 그는 퇴각하다가 정신을 차렸다고 했다. ‘이래서는 안 된다’는 자각(自覺)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는 무거운 발걸음을 돌려 다시 물러났던 고지로 다가가 발을 들였다. 그의 눈앞에는 후퇴해 고지를 내려간 중대장의 모습이 사라지자 우왕좌왕하고 있던 부대원들이 우선 보였다. 그의 뇌리에는 절망감이 찾아들었을 장면이었다.

 

그러나 그 때 ‘기적’이 벌어졌다고 한다. 대대장의 지시로 뽑은 정훈병이 다시 나타난 중대장을 보고서는 대원들을 향해 소리를 쳤다고 한다. “중대장이 다시 나타났다. 다시 싸우자. 이대로 물러나면 우리는 모두 죽는다”는 내용이었다. 그와 함께 중대 나팔수가 나팔을 들어 힘껏 불었다고 한다. 기적은 그 다음에 벌어졌다. 우왕좌왕하며 중공군 공격에 마지막을 내줬을지도 모를 중대원들이 다시 정신을 차리고 총을 들어 중공군에 맞서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거의 무너질 것처럼 보였던 상대가 다시 눈을 반짝이며 총을 들 때 공격을 벌였던 쪽은 크게 당황하게 마련이다. 그런 일이 353고지에서 벌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이 기록은 틀림이 없을 것으로 나는 생각한다. 당시 정훈병을 맡았던 서기종 일병은 그런 공로 때문에 사병으로서는 좀체 받기 힘든 미국의 은성훈장을 받았기 때문이다. 서 일병은 전투에서 드러나는 우연의 요소였다. 그러나 우연의 요소만으로는 기적과도 같은 승리가 벌어지지 않는 법이다.

 

169 중공군의 인해전술에 필사의 각오로 맞선 국군

(20) 용문산의 설욕

다시 몰려든 중공군

 

앞 회에서 적은 이야기가 심금을 울린다. 정훈병의 커다란 외침은 기적적인 승리로 이어졌다. 다 쓰러뜨렸다고 본 상대가 다시 일어설 때 사람은 겁을 집어 먹는다. 다시 일어서는 사람의 투혼을 보면서 그는 사기가 꺾이고 만다. 아마 그런 공훈 때문에 서기종이라는 정훈병은 미국의 은성훈장을 받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서기종 일병은 그냥 우연의 요소에 불과하다. 그가 당긴 ‘불씨’는 죽어서라도 진지를 지키려고 했던 3대대 모든 장병의 튼튼하고 굳센 투지의 ‘기름’이 없었다면 그냥 사그러들 수도 있었다. 결국 그 싸움에서 중공군을 물리친 데에는 죽을 때까지 싸우려는 의지를 다졌던 6사단 장병들의 몫이 가장 컸고, 서 일병은 그를 촉발하는 좋은 요소로 작용했을 뿐이다. 그렇게 353고지의 혈투는 끝을 맺었다. 중공군은 의지를 되살린 3대대 10중대의 투혼에 꺾여 고지에서 퇴각했다고 한다.

 

▲참전 초반의 중공군들이 대열을 지어 행진하는 모습의 사진이다. 중공군은 참전 초반에 막대한 병력의 우위를 앞세워 유엔군을 집요하게 몰아붙였다.

 

중공군은 5월 20일 새벽 1시 무렵에 고지에서 물러섰다. 백병전을 감행하며 총이 아니면 칼로도 맞서 싸우는 6사단 2연대 3대대 장병들을 넘어설 수 없었던 것이다. 전사는 중공군이 6사단 2연대 3대대 353고지에서 한국군의 강렬한 저항에 맞닥뜨려 물러선 뒤 3대대의 그 고지와 우측의 1대대가 늘어선 나산, 좌측으로 427고지에 선 2대대의 전선을 6사단의 주저항선으로 착각했을 수도 있다고 적었다.

 

그랬을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 공격을 펼칠 때 상대의 주저항선이 어디인가는 파악하기 쉽지 않다. 지키는 쪽에서도 주저항선은 가장 큰 화력과 병력이 몰려 있는 곳이어서 방어의 중점에 해당한다. 중공군으로서는 정신없이 날아드는 미군의 공군기와 머리 위로 쉴 새 없이 퍼부어지는 아군의 후방 포병화력 때문에 차분하게 6사단의 주저항선을 파악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중공군은 결국 군의 예비사단이었던 189사단을 동원해 공격에 나섰지만 효과를 거둘 수 없었다고 한다. 중공군의 기세는 그로써 꺾이기 시작했다. 6사단 2연대 장병의 놀라운 투혼이 그에 커다란 몫으로 작용을 했지만, 다른 요소를 또한 거론하지 않을 수 없다.

 

앞에서 적었듯, 사단장이 2연대를 전방의 경계부대로 내세운 뒤 진지의 사수를 명령한 것도 당시 전투에서 거둔 승리의 큰 요소다. 중공군이 2연대 저지선을 넘을 경우 아군의 공습과 후방 포병화력에 의한 공격은 제대로 효과를 거두기가 힘들었다. 지형적 특성 때문이라는 점을 앞에서도 언급했다. 아울러 6사단은 미 9군단의 지원을 이끌어내 2연대 방어 구간에 적절한 화력망을 형성했다. 1~3대대 사이에 놓인 구간, 특히 1대대와 3대대 사이에 치밀한 화력 집중 지역을 미리 설정해 적을 대거 살상하도록 만들었다. 육군본부의 전사는 그렇게 설정한 살상지대가 적에게 심각한 피해를 안겼다고 소개하고 있다.

 

2대대 427고지 혈전

353고지에서의 전투는 그렇게 단락을 맺었다. 그러나 2대대가 진지를 편성해 적을 기다리고 있던 427고지에서도 싸움이 불붙었다. 2대대의 427고지 또한 중공군이 용문산을 점령하기 위해 진격할 때 거쳐야 했던 중요한 지점에 해당한다. 비록 353고지에 비해서는 중요도가 다소 떨어진다고 해도 중공군이 그곳을 뚫는다면 용문산 진출에 한 발짝 크게 다가설 수 있는 곳이었다. 2대대의 투혼 역시 다른 2연대 장병들에 못지않았다. 임무는 막중했지만 몸은 거듭 이어지는 격전에 시달려야 했다. 2대대는 앞서 적은대로 1대대와 함께 홍천강 남안 쪽으로 전진 배치했던 부대였다. 강을 넘은 중공군의 1차 공격을 막은 뒤 미리 설정한 후방 축차진지로 급히 이동해 다시 적과 싸워야 했던 상황이었다.

 

5월 19일 전방 지지에서 철수해 급히 427고지로 이동한 2대대는 북쪽에 5중대, 북서쪽에 6중대, 남쪽에 7중대를 배치한 뒤 적을 기다리고 있었다. 아울러 427고지 중앙에 81㎜ 박격포 진지를 구성했고, 중공군을 정면으로 맞이해야 했던 북쪽 진지의 중대에는 기관총 1개 소대를 추가 배치했다. 예비는 따로 둘 형편이 아니었다. 대대 전원이 나서서 적과 싸워야 했기 때문이었다. 전방 진지에서 급히 이동해 다시 427고지로 올라서 진지를 편성한 2대대의 사정은 사실 후방에서 적을 맞았던 3대대에 비해 나빴다.

 

우선 1차 접전을 치른 뒤 급히 축차진지로 이동한 상태였고, 격전이 이어진 뒤여서 식량을 비롯한 보급이 문제였다. 특히 전방 진지로 나아갈 때 받았던 식량이 거의 떨어진 상황이었다. 따라서 수적으로 크게 우세한 중공군과의 싸움, 떨어져가는 식량으로 인해 발생하는 허기, 신속한 진지 이동 때문에 생긴 체력 저하의 어려움에 봉착해 있었다. 게다가 적은 재빠르게 이동해 진지에 다가서고 있었다. 중공군은 2대대 장병들이 진지 편성 뒤 개인호를 막 완성하고 잠시 몸을 뉘일 때 쳐들어왔던 모양이다. 더구나 상대의 허(虛)를 교묘하며 집요하게 파고드는 중공군의 방식이 또 선을 보였다. 당초 2대대 장병들은 중공군의 공격 지향점을 서쪽으로 예상했다.

<②편에 계속>

 

<①편에서 계속>

427고지의 서쪽은 기동이 수월한 곳이었다. 길이 나 있어 사람의 통행이 편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중공군은 북쪽으로 다가섰다. 전사 기록에 따르면 427고지의 북쪽은 암석과 급경사로 이어지는 능선을 몇 차례나 넘어야 했던 곳이다. 그럼에도 중공군은 그곳을 거쳐 고지에 다가섰다고 한다. 상대 의중의 허점을 잘 파고드는 중공군 특유의 전법이기도 했다. 기록에는 당시 2대대 장병들은 세 끼 정도를 굶은 상태였다고 나온다. 따라서 몸과 정신이 많이 지쳤을 법하다. 진지를 점령한 지 2시간도 지나지 않은 시각에 중공군은 공격을 벌이면서 고지를 향해 올라왔다.

 

미 포병장교의 맹활약

허기와 피로에 지쳤지만 2대대 장병들은 다가서는 중공군을 향해 맹렬한 사격을 가했다. 중공군 또한 쉽게 물러서지 않았다고 한다. 압도적인 병력의 우세는 늘 중공군의 제파(梯波)식 공격으로 나타난다. 계단의 각 단계가 이어지듯이 물결처럼 쉬지 않고 밀려드는 방식의 공격이다. 그럴 경우의 중공군에게 아군은 적지 않게 당한 경험이 있다. 중공군 참전 초반에 벌어진 평안북도 일대의 전투와 1950년 12월 크리스마스 공세 때의 싸움, 서울을 다시 내줬던 1.4후퇴 당시의 격전 등에서도 중공군은 예의 그런 방식의 공격으로 아군을 몰아붙였다.

 

▲1951년 춘계 공세에서 중공군은 대규모 기동전으로 국면을 뒤집으려고 했으나 낙후한 보급력과 전술상의 한계 등으로 많은 수가 포로로 잡히는 등 심각한 피해에 직면했다.

 

6사단 2연대 2대대 427고지를 향한 중공군의 공세는 약 3시간 동안 이어졌다고 한다. 인해전술이라고 해도 좋을 제파 방식의 끊임없는 공격이었다. 이런 중공군의 공세에는 물러서지 않고 목숨을 걸고 끝까지 싸우려는 의지와 함께 화력의 집중적이면서 효율적인 운용이 필요했다. 초반에 막대한 수적 우세로 아군을 몰아붙였던 중공군의 전법에 우리가 밀렸던 것은 그를 잠재울 화력의 효과적인 운용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사정이 많이 달랐다. 전사가 소개하는 대목 중의 하나가 그렇다. 당시 주변을 감제(瞰制)하기 가장 좋은 용문산이 우리 수중에 있었다는 점이다.

 

아울러 당시 6사단이 운용하고 있던 27포병대대에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유럽전선에서 활약했던 미 고문관이 한 사람 와 있었다. 그는 카스트로 소령이었다. 육군본부의 전사는 카스트로 소령이 풍부했던 야전 경험을 바탕으로 용문산에 포진한 27포병대대에서 큰 역할을 했다고 소개하고 있다. 카스트로는 용문산의 높은 곳에서 2연대의 싸움을 지켜보면서 각 대대의 전면 방어진지 외곽을 향해 27포병대대의 화력이 정확하게 투사될 수 있도록 도왔다는 것이다. 전사의 소개에 따르면 특히 5월 19일 밤에는 사격지휘본부에서 밤을 새워가며 화력지원을 요구하는 각 일선 대대 전면의 적군을 향해 정확하게 포탄을 퍼붓는 데 큰 기여를 했다. 카스트로 소령 역시 3대대의 서기훈 일병처럼 당시의 공로 때문에 미 은성훈장을 받았다. 중공군은 2연대의 각 대대 진지를 돌파하기 위해 군의 예비였던 사단까지 투입해 전선을 뚫어보려 나섰지만 결국 작전에서 실패했다. 진지를 사수하려는 6사단 장도영 사단장 이하 모든 장병들의 투지가 우선 크게 작용했다.

 

그와 함께 적의 동향을 미리 파악하기 위해 정보에 매우 민감했고, 적이 다가설 곳곳에 강력한 화망(火網)을 구성하는 치밀함이 크게 작용했다. 지형적인 이점을 제대로 고려해 적이 발을 들이게 해서는 안 될 곳을 정확하게 가려 그곳을 철저하게 막아낸 전술적인 안목도 매우 돋보였다.

 

170-(1)(2) 오랑캐 몰살시킨 호수,‘파로호’이름 낳았던 그날의 승리

(20) 용문산의 설욕

방어에 취약했던 국군

 

나는 60여 년 전의 전쟁을 몸소 겪으면서 우리가 싸움에 능하지 못한 민족이라고 생각한 적은 거의 없다. 단지, 그 때의 싸움에서 우리가 일정한 패턴을 드러내는 면은 있었다. 앞에서도 잠시 언급했던 내용이다. 흥이 우선 빨리 도지고 일찍 시든다. 공격의 리듬에 올라탈 때에는 아주 눈부신 면이 있다. 기개도 좋고 활력이 넘친다. 따라서 일정한 공세(攻勢)가 만들어지면 그 위에 올라타고 나아감이 빠르고 거세다. 누구도 막을 수 없을 정도의 기세가 자연스레 이뤄진다. 아울러 위기에는 잘 뭉친다. 생사(生死)와 존망(存亡)이 걸린 위기의 극점에서는 의기가 한 데 잘 어울린다.

 

그러나 전쟁은 공격만 있을 수 없다. 그에 반드시 따르는 일이 방어다. 당시의 전쟁에서 방어에 취약한 국군의 면모는 자주 드러났다. 북진의 대열을 경쟁하듯 펼치다가 느닷없이 나타난 중공군에게 뼈아플 정도로 자주 당하고 말았다. 공격에 나서는 동작이 빨랐다가도 방어에는 매우 취약해 후퇴가 분산(分散)과 극심한 혼효(混淆)로 이어지면서 막심한 피해를 입었다.

 

위기에는 강했지만 그 요소가 풀어질 때면 늘 정신의 자세도 함께 풀어지는 경우가 많았다. 따라서 평온한 상태가 오면 전비(戰備)를 충실히 채우는 일이 적었다. 이런 몇 가지 면모가 어디에서 비롯하는지는 잘 모르겠다. 전투를 수행하는 군인의 눈으로 보면 아무래도 부단한 훈련과 치밀한 조직능력이 뒤를 따르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생각을 한다.

 

▲용문산을 공격하려다가 실패한 중공군은 아군의 반격에 밀려 도망치다 큰 희생을 감수했다. 당시 작전에서 포로로 붙잡히고 있는 중공군들.

 

그를 이룰 만한 시간적, 물리적 여유가 우리에게는 없었던 점이 클 것이다. 해방의 격변기에 겨우 몸을 추스르고 일어선 대한민국과 그 군대였기 때문이다. 그런 맥락에서 볼 때 용문산 전투는 특기할 만하다. 후방의 미군 포병화력과 미 공군의 공습능력이라는 점을 제외하면 용문산 전투는 한국군 1개 사단이 전쟁의 중요한 흐름 속에서 거의 단독으로 중공군을 맞아 승리를 거둔 싸움이다. 나는 용문산에서 6사단이 중공군에게 맞서 싸워 큰 승리를 거뒀다는 소식을 조금 늦게야 알았다. 내가 주둔하고 있던 강릉의 1군단에서다. 당시 나는 밴 플리트 미 8군 사령관의 지시에 따라 현리 일대를 뚫은 중공군을 대관령에서 저지하기 위해 나름대로 분주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래도 나는 6사단의 분투가 자랑스러웠다. 중공군에게 가장 약한 군대로 여겨져 그 예봉(銳鋒)의 우선 접전(接戰) 대상으로 꼽혔던 한국군이었다. 따라서 6사단이 거의 단독으로 그들에 맞서 싸움을 벌인 뒤 심각한 피해를 안겼다는 점이 마음속의 커다란 위안이 아닐 수 없었다.

 

승리 기념해 지은 ‘파로호’

용문산 전투는 당시 싸움에 이승만 대통령이 ‘파로호(破虜湖)’라는 이름을 지으면서 더 유명해졌다. 용문산 전투에서 거둔 6사단의 전과(戰果)가 화천 저수지 일대로 확산하면서 얻은 일이다. 이승만 대통령은 과거 우리의 왕조시대 때 ‘오랑캐’라고 불렀던 북방의 침략자라는 의미에서 중공군을 로(虜)라고 명시했고, 이어 그를 깨뜨렸다는 점에서 파(破)라는 글자를 적었다.

 

그런 점에서 볼 때 대한민국으로서는 당시의 승전보가 오랜 가뭄 끝에 내리는 단비와 같았을 것이다. 나도 화천 저수지 일대를 ‘파로호’라고 새로 이름 짓는 경사를 지켜보면서 많은 생각에 젖었다. 아래위로 크게 흔들리면서, 중공군에게는 물에 떠다니는 그 무엇을 지칭하는 ‘부동(浮動)’이라는 형용까지 받으며 지리멸렬한 싸움 방식을 선보이던 우리 군대의 틀을 벗어나는 방법은 무엇일까라는 점이었다.

 

아무튼 당시 6사단이 거둔 승리의 끝은 화려했다. 6사단의 2연대는 정말 눈부신 투혼을 발휘했다. 초전에서 함부로 무너지지 않았으며, 이어 벌어진 고지의 방어에서도 막대한 병력의 중공군 공세를 침착하게 꺾었다. 중공군은 참전 이래 늘 보여 오던 전술로 나섰지만, 한국군은 용감하게 그를 맞받아쳤다. 후방의 화력과 치밀한 방어막 형성은 중공군의 커다란 희생으로 이어졌다.

 

중공군의 기세는 완연하게 꺾이고 있었다. 6사단 2연대가 홍천강 남안에서 용문산으로 이어지는 길목을 강인한 투지로 막아내고 있던 시점이었다. 그러니까 중공군이 2연대 3대대와 2대대의 353고지와 427고지를 공격하다가 차츰 좌절로 접어들던 무렵이었다.
<②편에계속>

 

용문산 전투에서 아군보다 190배 이상의 사망자를 낸 중공군

<①편에서 계속>

당시 6사단을 지휘하던 미 9군단은 5월 19일 밤 전격적으로 예하 모든 부대에 공격명령을 내렸다. 용문산을 지키면서 중공군 공세를 막았던 흐름을 공격으로 전환한 것이다.

 

우선은 두 단계 진격 작전을 통보했다. 1단계와 2단계 공격 진출선을 상정해 정해진 시점까지 그곳으로 공세를 펼치라는 내용이었다. 우선은 청평과 홍천강을 연결하는 선으로 진출하고, 나아가 가평과 북한강 및 의암을 잇는 선까지 나아가는 일이었다. 공격 시점은 5월 20일 새벽 5시였다. 이 공격 명령을 받은 6사단장 장도영 장군은 19연대를 좌측, 7연대를 우측에 포진한 뒤 전방에서 중공군 공세를 꺾은 2연대에게 전방의 적이 물러나는 퇴로를 막으라고 지시했다.

 

중공군은 이미 등을 보였고, 그것을 되돌릴 의지와 힘도 없어 보였다. 산발적인 소규모의 교전이 벌어졌지만 큰 흐름에서 중공군은 패주(敗走)의 상황에 휩싸인 뒤였다. 아군의 진격은 신속했다. 중공군은 산발적으로 반격을 펼쳤지만 큰 흐름을 막을 수는 없었다.

 

아군끼리의 오인에 의한 총격전이 벌어질 정도로 중공군의 저항은 미미했다. 이튿날 오후에 접어들면서 6사단 좌측의 19연대, 우측의 7연대는 전방에 돌출한 진지에서 중공군과 격전을 벌였던 2연대와 연계할 수 있었다. 용문산에 다가서고자 했던 중공군 전체는 5월 21일 새벽 3시를 기점으로 전면 철수에 들어섰다. 1차 진출선까지의 진격은 순조로웠다. 2연대 전방 2개 대대가 진출했던 홍천강 남안까지 6사단 각 연대의 연계와 진출이 이뤄지면서 중공군이 의도했던 용문산 전투는 정식으로 막을 내린 셈이었다. 육군본부 전사 기록에 따르면 당시까지의 아군 손실은 전사 26명, 부상 294명, 실종 74명이었다.

 

중공군의 참패

그에 비해 중공군은 사망 4944명, 부상 1만 여명, 포로 15명이었다. 강력한 아군의 화력에 의해 중공군은 사망자가 아군에 비해 훨씬 많이 발생했던 것으로 보인다. 6사단은 5월 24일부터 미 9군단 예하 각 사단과 함께 북상하면서 추가적인 작전을 벌인다. 화천 저수지까지 60㎞를 진군하는 과정이었다. 특히 6사단 좌측을 맡았던 19연대는 미군 등 유엔군과 함께 지암리에서 중공군 180사단을 크게 꺾는다. 아울러 2연대와 7연대는 화천 일대로 계속 적을 추격하면서 북상해 5월 28일 화천발전소를 탈환하는 데 공을 세웠다고 한다.

 

▲1951년 중공군의 대규모 춘계 공세에 맞서고 있는 미군 해병 포병들이 적진을 향해 사격준비를 하고 있다.

 

파로호라는 새 이름이 등장하는 것은 그 무렵의 작전 성과 때문이다. 신속하게 북상하며 적을 추격한 6사단은 5월 29일 화천발전소와 구만리 고개라는 곳을 점령해 적의 퇴로를 차단했다. 중공군 2만 명 정도가 6사단이 차단한 구역에 갇혔다고 한다. 중공군 패잔병은 결국 6사단의 차단 지점을 우회하기 위해 화천저수지를 헤엄쳐 건너려다 적지 않은 수가 익사했다고 한다.

 

미군의 공습도 불을 뿜었다. 당시에는 밴 플리트 미 8군 사령관의 의지에 따라 전선에서 사용하는 탄약량에 거의 제한이 없었다. 따라서 도주하는 중공군에게 미 공군과 아군의 포병은 막대한 화력을 쏟아 부었다. 미군의 네이팜탄 공격이 더 이어지면서 무수한 중공군의 사체가 화천저수지 일대에 나뒹굴기도 했다.

 

중공군은 그런 도주 과정에서 2만 4천여 명이 사망한 것으로 전사는 기록하고 있다. 아울러 8000여 명의 포로도 잡혔다. 6사단이 강인한 의지로 용문산 일대를 막아 중공군의 예기를 꺾은 결과였다. 중공군의 피해가 막심하다는 결과가 알려지면서 이승만 대통령은 마침내 화천 저수지에 ‘파로호’라는 이름을 지었던 것이다. 싸움의 방식, 커다란 지향은 전투를 이루는 중요한 요소다. 그러나 이 역시 싸우려는 뜻을 지닌 사람만이 쌓고 이룰 수 있는 법이다.

 

용문산 전투는 그런 점에서 우리에게 많은 것을 일깨운다. 허약한 대상으로만 비쳤던 한국군은 어느덧 싸우고 물러서는 과정에서 뭔가를 배워 일어나고 있었던 것이다. 용문산 전투의 주역 6사단은 그런 점을 자신 있게 보여줬던 셈이다.

 

171-(1)(2) 항공 보급로 끊겨 한계 달한 공산군, 휴전카드 꺼내들어

(21) 고지전의 시작

피로에 지친 중공군

 

6.25전쟁의 큰 기류가 전환기에 접어들고 있었다. 중공군은 드디어 대규모 공세로써 한반도에서 벌어진 전쟁의 국면을 자신에게 유리한 쪽으로 잡아갈 수 없다는 점을 절실히 깨달았다. 그 시점은 앞에서 적은 현리 전투와 용문산 전투 등이 벌어졌던 중공군의 이른바 5차 2단계 공세 뒤였다.

 

중공군은 1950년 10월 참전 이래 줄곧 대규모 공세를 벌이고 나왔다. 그 내용은 이미 적은 그대로다. 그런 공세에서 중공군은 전략에 강한 면모를 보였다. 전술 또한 접전이 벌어진 초반에는 매우 강력했다. 아군이 보기에 매우 낯선 전법을 펼치면서 나왔기 때문이었다. 아울러 유엔군 모두를 압도할 만한 병력의 우세에 기댄 측면도 많았다. 장비와 화력에서는 뚜렷한 격차를 보인다 해도 전쟁은 어디까지나 사람이 수행하는 법이다. 중공군은 그 점에서 아주 강했다. 국공(國共)내전과 항일(抗日)전쟁을 통해 다져진 중공군 각 장병의 노련한 경험은 아군과의 초반 접전에서 매우 강한 힘으로 작용했다.

 

그러나 중공군의 한계 또한 제법 뚜렷했다. 각종의 전법은 현란하다고 해도 좋을 정도로 발달한 상태였으나 그 뒤를 받쳐줄 총체적인 힘이 약했다. 공군이 발달하지 못해 한반도 깊숙한 전선으로 뛰어든 중공군의 보급로는 미군의 공습에 번번이 끊기고 말았다. 식량을 비롯한 장비와 화력에서도 후방의 너끈한 힘이 받쳐주지 못하는 바람에 전선에 나선 중공군 각 장병의 힘은 쉽게 달렸다. 공세를 지속할 수 있는 튼튼한 힘이 결여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그들의 대규모 기동전 방식의 공세는 아주 많은 수의 병력 희생을 감수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렇게 벌인 다섯 차례의 대규모 공세로 인해 중공군은 1951년 6월에 이르면서 체력이 거의 바닥을 보이고 있는 상태였다. 전선을 겨우 지탱할 수는 있었지만 참전 이래 줄곧 벌였던 대규모 공세에는 더 이상 나설 수 없다는 판단이 내려졌던 것이다. 유엔군 또한 상황이 좋지 않았다. 유엔군이라고는 하지만 실제 그 힘을 이끌고 있던 존재는 미군이었다. 미국의 수뇌부 또한 한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전쟁에서 확실한 승리를 장담할 수 없었다. 한반도에서 공산군과 벌이고 있던 전쟁이 자칫 잘못 관리할 경우 소련과 중국을 직접 상대로 펼치는 제3차 세계대전으로 번질 가능성이 엿보였기 때문이다.

 

▲6.25전쟁이 벌어지기 전 모스크바를 방문한 중공군 최고 지휘자 마오쩌둥(앞줄 왼쪽서 둘째)과 소련의 최고 권력 스탈린(셋째). 1951년 중반에 접어들어 이 두 사람은 6.25전쟁 휴전회담 카드를 검토하기 시작했다. /백선엽

 

소련의 스탈린과 중공군을 막후에서 지휘하고 있던 중국의 마오쩌둥(毛澤東)은 그런 상황 속에서 먼저 휴전회담을 카드로 뽑아들고 나온다. 치밀한 계산을 마친 상태였다. 그들은 워싱턴에서 만들어지고 있던 휴전의 기류를 먼저 읽었다. 아울러 대규모 공세로 한반도의 전쟁을 승리로 이끌어갈 가능성이 없는 상태란 점을 스스로 잘 알고 있었다.

 

휴전회담 분위기 형성

그런 두 기류가 결국 휴전회담을 가동하는 방향으로 양쪽을 모두 이끌고 있었다. 워싱턴에서는 그 무렵 잦은 회의가 열렸다. 1947년에 시작한 미국의 국가안전보장회의(NSC)와 합동참모본부, 도쿄의 유엔군 총사령부가 서로 이어지는 회의였다. 이런 회의를 통해 이제 한반도에서의 전쟁은 과거와는 전혀 다른 휴전회담의 분위기로 흐르고 있던 상태였다.

 

나는 그 무렵 강릉 일대를 관장하던 1군단장으로서 분주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전쟁이 휴전으로 분위기를 달리 한다고 해도 전선 일부를 담당하는 군단 사령관으로서 해야 할 일이 많았기 때문이다. 이전에 소개한 알레이 버크와의 만남은 그 과정에서 있었다.

 

그는 내가 전쟁 중에 자주 접했던 미 해군의 최고위 장성이었다. 그는 나중에 전설적인 미 해군 장성의 반열에 오른다. 나는 그의 도움을 받아 부지런히 전선을 북상시키고 있었다. 1군단 예하의 수도사단과 11사단은 긴밀하게 움직이면서 설악산 일대의 산악전을 승리로 이끌어 차분하게 전선을 북쪽으로 올리고 있었다. 알레이 버크 당시 미 7함대 5순양함대 사령관은 미주리 등 전함(戰艦)과 구축함을 동원해 우리 1군단에는 크게 부족했던 화력을 뒷받침했다. 함포 사격을 해주는 그들의 지원으로 우리는 전선 전면에 버티고 있던 북한군을 계속 몰아내면서 전선을 고성 인근으로 확장하고 있었다.

<②편에 계속>

 

<①편에서 계속>

미 8군 사령관 밴 플리트와도 교분이 깊어진 것은 그 무렵이었다. 그는 앞서 소개한 대로 우리 1군단이 신속하게 기동해 현리 전투에서 뚫린 전선의 동쪽을 막아 중공군의 발길이 들어서지 못하도록 했다는 점을 깊이 인정하는 눈치였다. 그는 가끔씩 부관만을 대동한 채 강릉의 비행장으로 날아와 나를 찾았다. 그는 자신이 스스로 싸온 샌드위치 박스를 들고 나와 강릉이나 주문진 해변 모래사장이 앉고는 했다. 이런 저런 일을 묻기도 했고, 가끔씩은 중요한 작전 전개에 대해 심정을 털어놓기도 했다. 그 중의 하나가 바로 ‘고저 상륙 작전’에 관한 내용이었다.

 

고저 작전은 앞에서도 소개한 적이 있다. 중공군 대규모 공세가 현리 전투를 마지막으로 끝을 맺자 전선은 잠시 소강상태에 빠지던 무렵이었다. 그 당시의 중공군 수뇌부와 소련의 스탈린 등 공산군 전체는 대규모 공세 뒤의 여러 상황에 대비하고 있었다.

 

고저상륙 작전의 시도

그들은 우선 전력의 보강이 매우 시급한 상태였다. 중공군의 다섯 차례에 걸친 대규모 공세 뒤 공산군 전체는 심각한 체력 저하에 빠져 있었다. 후방으로 끊임없이 날아드는 미 공군기의 공습을 피하면서 전선에서 버티고 있던 대규모 병력에게 화력과 장비, 물자를 보급해야 했기 때문이다. 아울러 차후에 벌일 각종의 전투에 나서기 위해서 분주한 준비상태에 들어가 있었다. 워싱턴과 유엔 등도 다음의 상황에 대비하기 위해 휴전회담 등 모든 상황을 검토하고 있었다. 문제는 밴 플리트 장군이 이끌고 있던 한반도의 유엔군이었다. 전쟁이 소강상태에 접어들면서 유엔군은 자칫 나태한 분위기에 말려들 수 있었다.

 

당시 밴 플리트가 구상하고 있던 작전은 여러 가지였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백미(白眉)를 꼽으라면 역시 고저 상륙 작전이었다. 고저(庫底)라는 곳은 강원도 통천, 그리고 원산을 잇는 중요한 전략 목표였다. 이곳에 병력을 상륙시켜 점령한다면 한반도의 전선은 38선을 훨씬 웃돌아 평양과 원산을 향해 밀어 올릴 수 있었다. 고저를 수중에 넣는다면 대한민국은 강원도 북부 일원의 모든 곳을 장악하는 데 큰 걸음을 내디딜 수 있었다.

 

한반도의 최고 명산이라고 하는 금강산을 확보하면서 원산을 직접 겨냥해 작전을 벌여 향후의 전쟁 국면을 우리 쪽으로 크게 당겨 작전을 펼쳐갈 수 있었다. 따라서 고저 작전은 전쟁을 수행하는 군인으로서는 가슴을 뛰게 만드는 일이기도 했다.

 

밴 플리트 사령관은 나보다 28세 연상이다. 아버지뻘이랄 수 있었던 상관이었다. 그는 그런 나이 차이에도 불구하고 나를 가끔 찾아와 자신의 속내를 털어놓고는 했다. 고저 상륙 작전도 그 하나였다. 그는 어느 날 1군단장인 나를 찾아와 작전을 준비하라고 지시했다. 강원도 고저를 향해 진군한다는 내용이었다. 작전 지역으로 볼 때 우리 1군단이 주력(主力)을 담당할 수밖에 없었다. 군단 예하의 사단을 북진시켜 고저를 지향하면서 공격을 펼치는 한편 미군을 해상으로 이동시켜 고저에 상륙토록 한다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앞에서도 적었듯이, 그 작전은 끝내 펼쳐지지 못하고 만다.

 

밴 플리트는 지금 내 생각에는 매우 강한 공격형 스타일의 장성이었다. 장병의 평소 훈련을 중시하면서 내실(內實)을 다지는 데 주력하지만, 일단 상황이 생기면 강한 힘으로 적에게 맞서 제 전략적 목표를 성취하는 데 전혀 주저함이 없는 군인이었다. 그 점에서 당시 도쿄 유엔군 총사령관을 맡고 있던 매슈 리지웨이와 같았지만 두 사람에게는 다른 점이 하나 있다. 리지웨이는 정무적인 판단이 밴 플리트에 비해 매우 앞선다는 점이었다.

 

그 무렵의 워싱턴은 한국에서의 휴전 가능성을 보다 주의 깊게 들여다보고 있었다. 리지웨이는 그 점을 너무 잘 아는 군인이었고, 밴 플리트는 그보다는 전쟁에서의 종국적인 승리에 더 주안점을 두고 있던 군인이었다.

 

결국 고저 작전은 책상 서랍 속의 작전에 그치고 말았다. 한국에서의 전쟁이 자칫 제3차 세계대전으로 비화하지 않을까라는 워싱턴의 우려를 기민하게 파악하고 있던 리지웨이의 거부에 의해서였다.

 

172-(1)(2) 휴전회담 결렬 때 日군대 투입 검토했던 미군

(21) 고지전의 시작

휴전회담 시작과 우려

 

고저 상륙작전을 둘러싸고 벌어진 도쿄 유엔군 총사령관 리지웨이와 미 8군 사령관 밴 플리트 장군 사이의 이견과 갈등은 사실 지난 연재에서 이미 충분하게 언급한 내용이다. 그럼에도 이를 다시 꺼내는 이유는 당시의 두 사람 사이 갈등이 향후 펼쳐질 한반도 전쟁의 전체 기류를 잘 설명하는 대목이었기 때문이다.

 

전 회에서도 이미 언급했듯이 워싱턴 또한 휴전회담을 기정사실화하고 있었다. 그러나 휴전회담이 제대로 열리기는 할까, 열렸어도 성공적으로 회담이 벌어져 결국 협정에 조인할 수 있을까에 대해서는 자신이 없었다. 아무래도 공산 측의 입장을 뚜렷하게 파악할 수 없었던 까닭이다. 따라서 워싱턴이 강구한 방안의 큰 흐름은 ‘제한 전쟁(a limited war)’이었다. 테이블 위에서 벌어지는 회담과는 별도로 상당한 수준의 전력을 한반도에서 그대로 운용하면서 전쟁을 치른다는 구상이었다. 그러나 그 전제는 뚜렷했다. 한반도 밖으로 전쟁이 확산할 가능성을 분명히 차단하겠다는 것이었다.

 

그에 앞서 미국은 여러 가능성을 두고 면밀한 검토를 거친 흔적이 뚜렷하다. 전체적인 틀에서 보면 휴전을 추진하되 38도선 이남에서 대한민국의 통치권을 확실히 수립한다는 점은 뚜렷했다. 아울러 외국의 군대를 단계적으로 철수하며, 추가적인 조치로서 북한군에 대응할 한국군의 전력 강화를 허용한다는 내용이 들어있다. 그러면서도 워싱턴은 어떠한 경우든 한반도 밖으로 전쟁이 확산하는 일은 막겠다는 점을 분명히 밝혔다.

 

▲휴전회담이 막 열린 무렵인 1951년 7월 회담장인 내봉장 인근에서 북한군 병사가 트럭에 올라 있는 미군을 촬영하고 있다. /백선엽

 

따라서 회담은 회담대로 벌이되 종국적인 한반도 안정을 위해 공산군의 적대적 행위에 대해서는 징벌을 가하겠다는 얘기였다. 그럼에도 미국의 우려는 가시지 않았다. 당장 열릴 휴전회담이 곧장 결렬로 이어져 파국으로 흐를 경우에 대비해야 했기 때문이다. 이 경우를 대비한 워싱턴의 생각도 복잡했다.

 

1951년 7월 13일 미 합동참모본부가 당시 국방 장관이었던 조지 마셜(George C. Marshall)에게 보고한 내용이 있다. 한반도 전쟁에서의 휴전회담이 결렬될 가능성에 대비한 군사작전이었다. 그가 말한 바로는 미국은 전면전에 우선 대비해야 한다는 점을 명시했다. 아울러 북진을 추진해 전선을 청천강과 원산을 잇는 선으로 밀어 올려야 한다고 했다.

 

이와 함께 북한 지역 내의 모든 시설에 대한 공격제한을 해제해야 할 것이라고 건의했다. 중국 지역에 대한 폭격도 제한적으로 실시한다는 점도 들어 있다. 한반도에서 벌어진 공중 교전의 경우 한국과 만주, 즉 한만(韓滿)국경선을 고려하지 않고 추격해 공격키로 한다는 내용이었다.

 

일본 군대 동원 방안

가장 눈에 띄는 점은 일본군의 투입 가능성을 거론했다는 사실이다. 이 보고서에서 합동참모본부는 ‘일본 자위대의 조직과 훈련, 그리고 장비를 촉진한다’고 했다. 전면전에 다시 접어들었을 경우 일본의 군대를 투입할 수도 있다는 얘기였다. 그 다음으로 합동참모본부는 한국군의 방위력 증강을 위해 장비 등을 확대 보급할 가능성도 언급했다. 위에 소개한 미 합동참모본부의 건의 내용은 마셜 국방장관을 거쳐 최종적으로 트루먼 당시 미 대통령에게도 전해졌다. 미 국무부 또한 휴전회담 결렬을 대비해 합동참모본부에게 군사적 자문을 했고, 마셜을 거쳐 대통령에게 보고된 위 건의 내용 또한 국무부에도 전해졌다.

 

국방부가 펴낸 <6.25 전쟁사>를 보면 흥미로운 점이 또 하나 있다. 더글라스 맥아더 장군이 유엔군 총사령관으로 있을 때부터 나왔던 내용이었다. 바로 대만, 당시로써는 자유중국의 군대를 참전시키자는 건의였다. 미 합동참모본부는 마셜 장관에게는 건의하지 않았으나 이 방안을 가능성이 있는 대안의 하나로 검토 중이었던 모양이다. 미 국무부는 대만의 군대가 한반도에 참전할 가능성을 우려했던 듯하다. 국무부는 합동참모본부가 검토 중인 이 사안에 대해서 재검토가 필요하다는 입장을 전달했다고 국방부 <6.25 전쟁사>는 소개하고 있다. 그러나 단서를 달았다.

 

미 국무부는 대만이 한반도에 참전하는 대신 중국 본토에서 병력을 운용하는 사안에는 동의를 표시했던 것이다. 이는 중요한 사안이었다. 맥아더 유엔군 총사령관이 재직 때 대만의 한반도 전쟁 참전 가능성은 수면 위로 떠오른 적이 있다. 대만의 통치자 장제스(蔣介石)와 맥아더 장군의 합의에 따라서였다. 그러나 우선 이승만 대통령이 이에 부정적이었던 것으로 알고 있다.

<②편에 계속>

 

<①편에서 계속>

아울러 미국 워싱턴에서도 이는 한반도 전쟁의 새로운 확전 가능성을 얘기하는 것이어서 적극적인 검토 대상으로 떠오르지 못했다. 그런 사안이 결국 휴전회담의 개시 무렵에 그 회담이 결렬로 이어져 한반도에서 새로운 전면전이 벌어졌을 경우에 대비하는 한 방안으로 다시 거론됐던 것이다. 그러나 대만 군대의 직접 한반도 참전은 국무부로서도 위험하다고 판단했다. 대신 대만 군대가 중국 본토에 직접 상륙하거나 잠입해 한반도 전쟁에 뛰어들었던 중국 공산당과 새로운 전선을 형성하는 일에는 동의했던 것이다. 중공군의 전력(戰力)을 분산시켜 한반도에서 공세를 지속하지 못하도록 유도하겠다는 전략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아무튼 미국으로서도 휴전회담의 시작과 그 뒤 곧 이어질지도 모를 회담 결렬 가능성을 두고 다양한 대책을 마련했던 셈이다. 그에 따라 합동참모본부, 국무부, 국방부 등은 여러 차례에 걸쳐 방안을 검토하고 또 검토한다. 여러 방안이 나왔지만 전체적인 틀은 위에서 적은 대로다.

 

공산군이 우려했던 원산 상륙

두 차례의 수정 검토안을 만들면서 미 합동참모본부는 청천강~원산에 그은 북진 한계선을 철회하는 방안을 제안했고, 미 안전보장회의(NSC)는 합동참모본부의 수정안을 보고받고 휴전회담이 실패할 경우 한반도의 미 지상군과 공군의 실질적인 증원, 중국에 대한 해상봉쇄, 핵무기의 사용이 필요하다는 결론에도 도달했다. 그런 와중에 만들어진 방안 중의 하나가 원산에 대한 상륙작전이었다. 밴 플리트 미 8군 사령관이 제안했고, 리지웨이 도쿄 유엔군 총사령관도 우선은 이를 받아들였다. 이 작전이 펼쳐졌다면 승산(勝算)은 아군에게 있었다. 탁월한 해상 수송에 이은 상륙 능력, 압도적인 공군력, 지상군에 대한 보급력 등을 따질 때 그랬다.

 

▲공산군과의 첫 휴전회담이 열린 개성의 내봉장에서 자유진영의 기자들이 북한군 여중사에게 말을 걸고 있는 모습이다. /백선엽

 

그러나 작전에서의 희생도 감수해야 하는 형편이었다. 당시 공산군 측에서 가장 우려했던 대목이 유엔군의 상륙작전이었다. 그중에서도 공산군 측은 원산을 가장 유력한 유엔군 상륙지역으로 꼽고 있었다. 그 점은 우리도 마찬가지였다. 밴 플리트가 계획한 방안이 원산 남쪽에 있는 고저였다. 그곳으로 상륙작전을 감행할 경우 한반도의 전선은 크게 휘청거린다. 아군은 북상하는 발판을 만들어 직접적으로는 평양을 위협할 수 있었다. 따라서 전쟁의 국면이 크게 달라지는 작전에 해당했다. 공교롭게도 아군과 공산군 모두는 유엔군의 다음 상륙작전 가능 지역을 원산 일대로 꼽고 있었던 셈이다.

 

그에 따라 중공군은 원산 일대에 3개 군을 배치했다. 언제라도 기습적으로 닥칠지 모를 아군의 상륙작전을 막기 위해서였다. 따라서 아군이 상륙작전을 펼칠 경우 공산군과 격렬한 접전이 펼쳐져 인력과 물자의 희생은 아주 클 수 있었다. 이를 또 다른 전면전으로 간주해 개입할 수도 있는 소련의 움직임도 걱정거리였다.

 

결국 미 안전보장회의는 모든 가능성을 검토한 뒤 마지막으로 단안(斷案)을 내렸다. 확전 가능성을 가장 우려했고, 미국 여론의 반전(反戰) 분위기 등도 감안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들의 결론은 우선 휴전회담을 이어가면서 제한적인 전쟁을 하자는 것이었다. 그에 따라 현지에서 직접 전선을 이끌고 있는 밴 플리트 미 8군 사령관의 고민이 깊어갈 수밖에 없었다. 공격형 장성인 그의 기질과는 다소 동떨어진 주문이 ‘제한 전쟁’일 수 있었다. 전선의 사기는 떨어지고, 군기도 풀릴 조짐이 여기저기서 드러나기도 했다. 그런 매우 제한적인 전쟁 환경에서 그가 선택할 수 있었던 마지막 방안이 전선을 기점으로 들쭉날쭉한 고지(高地)를 정리하는 일이었다.  

 

173-①② 벤플리트 사령관, 백선엽 장군에 "중국어 할 줄 아느냐?" 물어

(21) 고지전의 시작

“중국말 할 줄 아느냐?”

 

밴 플리트 미 8군 사령관의 입장은 조금 난처했다. 워싱턴의 기류는 확전을 반대하는 상황이었고, 한반도 전선을 총괄하는 도쿄의 유엔군 총사령관 리지웨이의 생각 또한 그와 일치했다. 따라서 일선의 작고 큰 전투를 모두 지휘하고 있던 밴 플리트 사령관의 입지는 매우 좁을 수밖에 없었다.

 

휴전회담을 소개하던 대목에서 이미 언급한 내용이기는 하지만, 밴 플리트 사령관은 강릉의 1군단으로 어느 날 불쑥 나를 찾아와 “중국어를 할 줄 아느냐”고 물었다. 나는 “표준어 정도로는 중국인과의 소통이 가능하다”고 대답했다. 그는 아무런 말도 없이 고개만 끄덕이고 돌아갔다. 동해상에 떠 있던 미 7함대 소속 알레이 버크 제독 또한 그 무렵 언젠가 나를 찾아왔다.

 

알레이 버크는 “일이 생겨 급하게 이곳을 떠나야 한다”며 작별인사를 했다. 군 고위 장성 간의 이동은 서로 묻지 않는 게 당시로서도 예의였다. 나는 속으로 ‘무슨 일이 있겠지’라며 관심을 두지 않았다.

 

나는 곧 한국의 초대 대표로 휴전회담에 참석한다. 밴 플리트 장군이 “중국어를 할 줄 아느냐”고 내게 물었던 것은 회담에 중공군이 참석하는 점을 알고 했던 질문이었다. 그는 나를 휴전회담 첫 한국대표로 추천했고, 한국 정부에서도 그를 받아들였던 것이다. “일이 생겨 떠나야 한다”고 했던 알레이 버크 또한 휴전회담 석상에 대표로 나타났다. 그 또한 유엔군 총사령부에 의해 아군 회담대표의 한 사람으로 뽑혔던 것이다. 그렇게 해서 나는 당시로서는 적의 점령지였던 개성에서 열리는 휴전회담의 대표로 현장을 생생하게 지켜볼 수 있었다.

 

▲1951년 7월 처음 열린 공산군과의 휴전회담에 참석했던 유엔군 대표단. 오른쪽에서 둘째가 백선엽 당시 1군단장. /백선엽

 

처음 휴전회담이 열리면서 기대는 높았다. 특히 미군의 기대감이 꽤 높았다. 그러나 나는 속으로 ‘공산주의 사상을 품는 사람들과의 회담은 절대 쉽지 않다’고 생각했다. 회담은 내 예감대로였다. 각종 절차와 의제의 선정부터 난항의 연속이었다. 결과적으로 보면 그 회담은 2년을 넘게 끌어 1953년 7월 27일 단락을 맺었다.


그런 난항의 연속일 수밖에 없었던 회담이 벌어지면서 밴 플리트 미 8군 사령관은 나름대로 전선을 관리해야 했다. 일정한 작전선을 상정한 뒤 아군 병력을 그곳으로 진출시키려는 노력이었다. 그에 따라 대규모 기동전은 벌어질 수 없었으나 아군이 진출하려는 전선을 두고 적과의 치열한 접전이 펼쳐져야 하는 형국이었다.

 

새 싸움터는 중동부 전선

북한군과 중공군은 휴전회담을 시작한 뒤에 숨 고르기에 들어선 느낌이 들었다. 회담 전까지의 형세는 그들에게 불리했다. 중공군 위주로 펼친 대규모 공세가 모두 물거품으로 돌아갔고, 화천 저수지 등에서는 한국군 6사단을 비롯한 아군 반격작전에 밀려 상당한 인적, 물적 손해를 입었기 때문이었다.

 

그런 여파 때문인지 중공군은 주로 서부를 피하면서 중동부 전선의 산악 일대에서 반격을 펼치는 작전 형태를 보이고 있었다. 따라서 중동부 전선의 핵심적인 전략적 요충이 아군과 적군 사이에서 치열한 접전이 벌어지는 곳이었다. 휴전회담이 벌어지는 개성 일대의 서부전선은 고요했으나 그 동쪽으로 이어지는 곳은 매우 소란스러웠다.

 

이를테면 양측 모두 제한적인 전쟁에 들어선 분위기였다. 공산군 또한 회담 자체를 파국으로 몰아갈 의도는 없었다. 이미 여러 차례의 대규모 공세를 벌였으나 중공군은 그런 공세를 제아무리 벌여도 전쟁에서 궁극적인 승리를 거두기는 불가능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②편에 계속>

 

<①편에서 계속>

유엔군 또한 회담의 틀을 유지한다는 점에서는 공산 측과 다르지 않았다. 어떻게 해서든 휴전회담을 이어간다는 입장이었다. 그러나 휴전회담에서 주요 쟁점이 공산 측의 기만적인 태도로 해결을 보지 못할 경우 과감한 공격을 펼치도록 했다. 그러나 제한적인 영역에서였다. 그로써 회담 테이블의 공산 측을 강력하게 압박하기 위해서였다.

 

그런 분위기에서 본격적으로 벌어지기 시작한 게 고지전이었다. 그 전까지 벌어졌던 전쟁의 양상과는 매우 다른 전투였다. 전략적으로 중요한 지역을 두고 대규모 병력의 기동이 없는 대신, 한 곳을 뺏고 뺏기는 혈전으로 이어지는 싸움이었다. 그러나 상황은 결코 아군에게 유리할 게 없었다.

 

중공군과 북한군은 대규모 공세 뒤 북쪽으로 밀려나면서도 전략적 요충이랄 수 있는 고지 곳곳에 주목했다. 고지에 유개호(有蓋壕)를 만들었고, 산등성이 북사면 쪽에는 각 진지를 치밀하게 연결하는 교통호도 구축한 상태였다. 특히 중공군은 암반을 뚫고 들어간 견고한 진지를 많이 만들어 뒀다. 중동부 전선의 지형은 대개가 거칠고 험한 산지였다. 게다가 해발 1000m가 넘는 고지도 아주 여럿이었다. 이런 지형에서 중공군과 북한군은 유리했다.

 

특히 중공군은 참전 이래 줄곧 산악 기동을 펼치면서 싸움을 벌이던 존재였다. 그들의 이동은 주로 사람의 등짐, 작은 말과 수레 등이었다. 오솔길을 오가는 데 유리했고, 산악을 오르는 데 적당했다. 늘 그런 방도를 통해 산악기동을 펼치던 중공군이었으니 중동부 전선에서 고지전을 펼칠 때에도 그냥 하던 대로 움직이면 그만이었다. 아울러 그들은 포경이 커다란 야포를 운용하는 것보다 옮기기 쉬운 박격포 위주로 화력을 구성했다.

 

적에게 유리했던 고지전

이는 고지전을 수행해야 할 때 눈에 띄는 그들의 장점이었다. 그에 비해 아군은 산악기동이 그들만큼 수월치가 않았다. 트럭을 활용하는 편이었고, 대규모 기동장비도 발달해 있던 상황이었다. 너른 개활지에서 이동할 때는 안성맞춤이었으나 산악에 들어설 경우는 그 반대일 수밖에 없었다.

 

야포로 구성하는 화력에서도 유엔군은 105㎜와 155㎜ 등 견인과 이동이 상대적으로 수월치 않은 야포로 화망을 이루는 편이어서 박격포 위주의 중공군과 비교할 때 유리하다고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게다가 저들은 먼저 고지를 파서 견고한 유개호와 교통호 등을 만들어 놓은 상태였다.

 

▲휴전회담인 개성의 오랜 가옥 내봉장 안으로 공산측 휴전회담 대표들이 입장하고 있다. /백선엽

 

휴전회담은 지루하게 이어졌다. 공산 측의 수석대표로 나섰던 남일의 끊임없는 욕설과 협박이 매일 반복적으로 선을 보였고, 양측은 신경전 외에 달리 뾰족한 돌파구를 만들어내지 못하고 있었다. 앞에서도 소개했지만, 휴전회담에 참석하는 내 심정은 그리 편치 못했다. 이승만 대통령의 강력한 반발 때문이었다. 나는 형식적인 문제가 있던 터라 대통령의 친서를 받아 한국대표로 참석한다는 점을 분명히 밝혔지만 이 대통령을 비롯한 한국 정부는 회담에서 소외된 형국이었다.

 

첫날 회담이 열린 오후에 김종면 육군본부 정보국장이 판문점 인근의 회담대표 숙소지역인 평화촌으로 나를 찾아왔다. 회담대표 외에는 출입을 통제하는 곳에서 만난 동료라서 나는 그를 얼싸안고 반겼다. 김종면 국장이 나를 찾아온 데는 곡절이 있었다.

 

휴전회담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를 한국정부가 전혀 알 수 없는 상황이라고 했다. 돌아가는 분위기라도 파악을 해야 하는데 알려줄 사람이 없다고도 했다. 그러나 나 또한 휴전회담의 내용을 함부로 발설할 수는 없는 상황이었다. 회담대표가 서로 약속한 ‘내용을 일절 비밀로 해야 한다’는 규정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정공법을 택하는 게 좋다고 판단했다. 규칙을 어겨가면서까지 발설했다가는 유엔군 진영의 지적을 면치 못해 서로 불신만을 쌓을 수 있었던 까닭이었다. 그래서 나는 아군 회담 수석대표인 터너 조이 중장을 찾아갔다. 솔직하게 사정을 설명한 뒤 그를 설득하는 게 좋다는 생각에서였다.

 

나는 조이 수석대표의 막사에 들어선 뒤 그에게 “회담내용을 한국 정부에 공식으로 브리핑하는 게 어떻나”고 했다. 다행히 조이 중장은 내 청을 들어주기로 했다. 그래서 이튿날 평화촌을 다시 찾아온 김종면 국장은 조이 대표로부터 회담 시작 등에 관한 브리핑을 듣고 이를 한국 정부에 전달할 수 있었다.

 

회담장은 그런 분위기였다. 그러나 회담장에 들어서 공산 측 수석대표였던 남일의 욕설 섞인 험악한 말과 집요한 신경전 등을 지켜보는 일은 그리 유쾌하지 않았다. 테이블에서는 기묘하다 싶을 정도의 말싸움만 벌어지는 형국이었다. 그렇게 시간은 자꾸 흘러가고 있었다. 그러나 회담장인 개성의 동부 저쪽에서는 서서히 싸움을 예고하는 거친 구름이 몰려들고 있었다. 중동부 전선에서 거듭 대규모 작전을 수행하려고 했던 밴 플리트의 의도는 리지웨이 장군의 거부에 의해 막혔고, 그를 대신할 고지전이 속속 벌어질 판국이었다.

 

174 향로봉 쟁탈전, 밴 플리트의 단호한 지시가 빛을 발했다

(21) 고지전의 시작

8군 사령관의 호출

 

회담대표로서 자리는 충실하게 지키면서 내가 한국 회담대표로서 제안하고 발의해야 할 일은 소홀하지 않게 했다. 그러면서도 나는 회담이 지루하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었다. 공산 측 입장은 늘 비슷했다. 합리적이지 못한 내용을 들고 나와 생떼를 쓰다시피 자신의 주장만을 관철하려고 했다. 그런 회담 분위기가 허망하다는 생각이 점차 찾아들 때였다. 회담대표로 나섰지만 나는 엄연히 한국군 1군단장을 겸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마침 1군단 지역에서도 전선을 북쪽으로 밀어 올리려는 밴 플리트 미 8군 사령관의 의도에 따라 접전이 벌어지고 있었다.

나는 지루한 회담에 나름대로 착실하게 임하면서도 전쟁 국면의 변화에 깊은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다. 야전을 치렀던 전선의 지휘관으로서 몸에 밴 일이기도 했다. 당시 한국전선을 지휘하고 있던 밴 플리트의 심정은 어땠을까. 그는 워싱턴과 도쿄 유엔총사령부의 간여에도 불구하고 활발하게 전선을 누비고 다녔다. 그런 밴 플리트가 8 24일 휴전회담 대표의 숙소가 있던 평화촌의 남쪽 문산으로 찾아왔다. 그는 먼저 전화를 걸어 나를 호출했다. “향로봉 지역에 문제가 생겼으니 나와 함께 그곳을 가보자”는 내용이었다. 이어 그는 “문산으로 와서 같이 향로봉으로 가자”고 했다.

 

▲휴전회담 첫 한국 대표로 참석한 백선엽 장군(오른쪽)이 회담대표 캠프를 찾아온 한국 요인들과 환담하고 있다. /백선엽

 

마침 진전이 없던 회담은 잠시 중단된 상태였다. 나는 그의 전화를 받고 지프에 올라 타 문산으로 향했다. 나는 밴 플리트 장군이 언급한 ‘향로봉 문제’가 무엇인지 매우 궁금했다. 아무튼 미 8군 사령관이 직접 나서는 것을 보니 보통 이상의 문제이리라는 생각만 들었다. 밴 플리트 장군은 프로펠러 비행기 두 대를 가지고 와서는 문산에서 나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각자 비행기에 올라탄 뒤 우리는 간성 비행장을 향해 날아갔다. 이어 지프를 타고 진부령으로 곧장 달려갔다. 그곳 진부령 동쪽에는 내가 이끌고 있던 1군단 예하 11사단의 사단본부가 자리를 잡고 있었다. 여러 사람이 모여 있었다. 우선 11사단장 오덕준 준장과 미 10군단장 클로비스 바이어즈(Clovis Byers) 소장, 국군 1군단 부군단장 장창국 준장, 1군단 작전참모 공국진 대령 등의 얼굴이 보였다. 오랜만에 보는 얼굴들이어서 반갑기도 했지만 역시 작전이 우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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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단 지역에서도 밴 플리트 장군은 전선을 북상시키는 일에 열정을 쏟고 있었다. 그가 언급한 ‘문제’라는 것은 그런 전선의 북상 과정에서 향로봉 일대에 장애가 등장했다는 점이었다. 향로봉은 북쪽으로 금강산과 남쪽으로 설악산을 잇는 선상에서 가장 높은 산에 해당했다. 따라서 전술적으로 매우 높은 가치가 있는 곳이었다.


전선 복귀한 군단장

북한군은 그곳 향로봉을 차지하기 위해 강력한 방어망을 일대에 펼치고 있다고 했다. 따라서 아군으로서는 향로봉 서쪽에 만들어진 북한군의 견고한 진지를 파괴하는 일이 급선무에 해당했으나 좀체 돌파를 하지 못하고 있다는 얘기였다. 내가 보기에도 그 문제는 가볍지 않았다. 향로봉을 장악하면 전술적으로는 매우 유리한 입장에 설 수 있었다. 동쪽으로 우선 긴 해안선이 있어 향로봉에서는 그쪽으로의 병력 이동을 모두 감제(瞰制)할 수 있었다. 아울러 서쪽으로는 펀치볼이라는 중요한 고지와 이어지는 곳이기도 했다. 남쪽으로도 동해안과 함께 내륙을 잇는 46번 도로를 감제할 수 있었다.

동해안의 전선을 방어하면서 적과 대치하고 있던 우리 1군단의 주요 화력은 사실 앞서 소개한 대로 동해상에 떠서 작전을 수행하고 있던 미 7함대의 함포(艦砲)에서 나왔다. 알레이 버크 제독이 그를 앞장서서 해결해 줘 우리 1군단은 전선을 유지하면서 차츰 적을 북으로 밀어내는 중이었다. 그러나 이번의 경우에는 달랐다. 북한군은 향로봉 서쪽에 견고한 진지를 구축함으로써 동해 바다에서 발사하는 함포의 화망에서 비켜설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오덕준 11사단장은 그곳에 105㎜ 야포를 발사하면서 공격을 펼쳐왔다고 했다.

<②편에 계속>

 

<①편에서 계속>
반드시 빼앗아야 할 고지임에도 불구하고 북한군은 향로봉 서쪽에 이미 아주 튼튼한 진지를 만들어 놓고 우리의 발길을 막아서는 형국이었다. 이 점이 밴 플리트 사령관이 언급한 ‘문제’의 실제 모습이었다. 오덕준 사단장은 나름대로 부단하게 고지 점령에 나섰으나 번번이 물러서고 말았다고 했다. 당시 11사단과 북한군은 향로봉과 이어지는 884고지를 몇 차례나 빼앗고 뺏기면서 혈전을 벌였으나 결국 승부를 보지 못한 상황이었다. 당시로서는 금강산에서 발원(發源)하는 남강을 사이에 두고 아군과 적군이 대치중이었다. 그런 상황 속에서 밴 플리트 사령관의 주재로 회의가 열렸다.

밴 플리트 사령관은 우선 내게 의견을 물었다. “당신 생각을 말해보라”고 했다. 나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입을 뗐다. “함포의 지원을 받아서도 적의 진지를 깨뜨릴 수 없고, 한국군이 보유한 105㎜ 야포로도 마찬가지라면 결국 155㎜를 동원해야 하는 것이 아니냐”고 했다. 105㎜와 155㎜의 차이는 야전을 경험했던 사람에게는 아주 확연하다. 앞의 105㎜는 적의 진지를 강타해도 겉만 파괴한다. 그곳에 유개호 등이 있을 경우에는 그 화력이 더욱 제한적이다. 그에 비해 155㎜는 땅을 뒤집어 놓는 힘을 갖추고 있다. 꿩 잡는 게 매라고 했다. 이럴 경우에는 역시 멀리 돌아갈 일이 없다고 나는 봤던 것이다.

밴 플리트는 내 발언을 듣고 생각에 잠기는 눈치였다. 짧지 않은 침묵을 보이던 그가 이윽고 입을 떼더니 “그래, 좋은 생각이야”라고 했다. 그러나 다음이 문제였다. 우리 1군단에는 155㎜가 없었던 것이다. 밴 플리트 역시 그 점을 우선 물었다. 155㎜를 어디서 구하느냐”고 했다.


155
㎜ 지원 받아내기

나는 망설이지 않았다. 즉시 “미 10군단장 바이어즈 장군으로부터 도움을 받는다면 해결할 수 있다”고 했다. 그러자 밴 플리트는 동석해 있던 바이어즈 군단장에게 “어떤가? 한국군 1군단에 155㎜를 지원할 수 있겠는가?”라고 물었다. 그러나 예상대로였다. 바이어즈 장군은 얼굴을 찌푸리면서 “10군단 상황도 별로 좋지 않다. 접전이 벌어지는 지역이 있어서 지원을 할 수 없다”고 했다. 아주 완고한 입장의 표시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큰 제스처를 쓰면서 그는 말했다. 사실 미 10군단도 펀치볼 일대에서 적과 벌이는 작전이 만만치 않은 상황이었다.

그러나 밴 플리트 사령관은 단호했다. 엄격한 목소리로 그는 바이어즈 10군단장을 향해 이렇게 말했다. “바이어즈 장군, 바로 한국군 1군단을 지원하라!. 밴 플리트의 목소리는 엄숙했다. 미군의 특징 중 하나는 토의는 자유롭게 하되 일단 명령으로 결정이 나면 그를 빈틈없이 이행한다는 점이다. 그 점에서 미군, 특히 장교들의 태도는 매우 분명했다.

 

▲전쟁터에서는 단호하기 짝이 없던 밴 플리트 미 8군 사령관은 이승만 대통령과의 친분이 매우 두터웠다. 두 사람이 환담하는 모습이다. /라이프 제공

 

밴 플리트의 명령은 곧장 현실로 나타났다. 그가 회의를 마치고 떠난 뒤 하루가 지나자 미 10군단의 155㎜ 곡사포 1개 포대가 11사단에 도착했다. 아주 신속하다고 해도 좋을 정도의 명령 집행이었다. 155㎜가 도착한 날은 마침 그동안 향로봉 일대를 덮고 있던 두터운 구름도 모두 걷혔다. 작전은 바로 다시 벌어졌다. 10군단으로부터 11사단에 도착한 155㎜ 야포는 곧장 향로봉 서쪽의 북한군 진지를 향해 불을 뿜었다. 동해상에 떠있던 미군 항모로부터 이륙한 함재기들도 향로봉 서쪽의 북한군을 맹렬하게 폭격하기 시작했다.

작전은 1주일 정도 이어졌다. 땅을 뒤집어 놓는 155㎜가 줄곧 11사단에서 불을 뿜고 미 함재기의 거센 폭격이 줄곧 이어지면서 결국 ‘문제’는 제거되고 말았다. 11사단의 전의가 크게 진작되는 계기이기도 했다. 뻔뻔하다고 해도 좋을 정도의 내 의견이 좋게 받아들여진 결과이기도 했다. 나는 미군의 도움을 받는 기회가 있을 경우에는 서슴지 않았다. 전시 중에 가장 소중했던 축척 5만분의 1 지도와 각종 화력, 공군력, 정보 등 필요하다면 가능한 한 최대의 지원을 이끌어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 내 습성이 밴 플리트 사령관에게 다행히 다시 통했던 것이다. 그러나 더 눈여겨 볼 점은 밴 플리트 사령관의 집념이었다. 그의 전의(戰意)는 그렇게 강했다. 반대 의견을 냈다가 결국 155㎜를 우리에게 지원한 바이어즈 장군은 얼마 뒤 한국 전선을 떠나고 말았다. 밴 플리트 8군 사령관의 질책성 인사라고는 볼 수 없지만, 아무튼 싸움을 벌이는 데 있어서 밴 플리트 장군의 자세가 얼마나 단호했는지는 짐작할 수 있다.

 

175 휴전회담으로 입장이 상반된 벤플리트

(22) 피의 능선 전투
1951
8월의 상황

1951 7월 들어 휴전회담이 처음 열리면서 분위기는 그 전의 상황과 매우 달라졌다. 앞서 소개한 그대로 대규모 부대 이동에 의한 기동전은 거의 사라졌고, 지금의 휴전선 일대를 중심으로 전략적 요충을 먼저 차지하면서 휴전회담을 유리하게 이끌어가려던 양측의 의도에 따라 고지전이 전투의 중심을 차지하기 시작했다. 서부전선은 상대적으로 고지전이 벌어지는 경우가 적었다. 산악이 발달하고 아군과 공산군이 밀고 밀리는 양상이 더욱 잦던 중동부 전선에서 고지를 사이에 둔 양측의 싸움이 잦아지고 있었다. 앞 회에서 적은 향로봉 전투도 그런 고지전의 한 일환이었다. 그보다 훨씬 잘 알려진 고지전이 이른바 ‘피의 능선 전투’라고 불렸던 싸움이었다.

고지전은 대규모 병력의 이동에 의한 기동전과는 양상이 매우 다를 수밖에 없었다. 정해진 한 지점을 두고 아군과 적군이 힘을 겨루는 싸움이기 때문이다. 이 경우에는 싸우려는 확고부동한 의지, 적 앞에서 물러서지 않으려는 투지 등이 매우 돋보인다. 그 점에서 우리 국군은 허약하지 않았다. 김일성의 공산군대가 기습적으로 벌인 전쟁에 대한 적개심이 가장 높은 군대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첫 휴전회담의 개최 뒤 이어졌던 각종 고지전에서 우리 국군은 뒤로 물러서지 않고 적을 향해 끊임없이 나아갔다. 상당한 성과도 올리면서 현대 전쟁에서의 전법을 깊게 알아갈 수 있었다.

‘피의 능선’이라는 곳은 지금의 강원도 양구군 동면 일원의 산악 지대다. 강원도의 대부분 지형이 그렇듯이 이곳 또한 산악이 특히 발달해 있었다. 높고 험준한 태백산맥의 여러 산악이 이곳에도 뻗치고 있으며 전체적으로도 평균 60도 이상의 경사를 이루고 있다. 동면 일대의 산악은 또한 800m에서 1300m의 표고를 보이고 있으며, 좁고 깊은 협곡이 중간 중간을 이루고 있다. 편평한 곳은 거의 없고 우뚝 솟은 산봉우리, 그 아래를 이루고 있는 좁은 협곡이 대부분이어서 지형은 기복이 매우 심했다. 아울러 강원도 산간 대부분이 그렇듯 수풀이 우거져 있다

 

▲1951 8월 접어들어 중동부전선에서는 고지를 점령하기 위한 혈전이 벌어졌다. 그 서막을 알렸던 양구 일대의 피의 능선을 전투 뒤 촬영한 사진이다. /백선엽

 

휴전회담이 열리면서 밴 플리트 미 8군 사령관의 마음은 오히려 급했다. 공산군은 앞서 소개한대로 1950년 말에서 이듬해 5월 말까지 펼쳤던 대규모 공세 실패와 유엔군의 반격으로 궁지에 몰린 형편이었다. 중공군을 비롯한 공산군 진영은 휴전회담을 빌미로 시간을 끌면서 나름대로 체력회복에 나서고 있었다. 그에 비해 유엔군 진영은 휴전회담에 대한 기대가 훨씬 높았다. 공산 측이 휴전회담을 자신의 체력회복과 전세만회라는 나름대로의 현실적인 목표에 맞춰 이용하려는 데 비해 유엔군은 휴전회담의 개최가 휴전을 기정사실화할 수 있다는 믿음을 지닌 편이었다.

미군이 주를 이룬다고는 해도 영국을 비롯한 16개 참전국가가 뭉친 집단이 유엔군이었다. 분위기에 따른 군기의 해이가 빨리 닥칠 수도 있는 형편이었다. 공산 측의 발 빠른 제안에 따라 열린 휴전회담은 유엔군의 그런 투지를 저하할 가능성이 충분히 있었다. 그런 분위기를 그대로 지켜보고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밴 플리트 사령관은 그에 따라 휴전회담이 벌어지고 있는 상황과는 달리 7월에 접어들면서 아군의 전선을 북상시키는 데 힘을 쏟고 있었다. 그런 맥락에서 벌어진 전투 중의 하나가 바로 ‘피의 능선 전투’라고 할 수 있다.

한국군과 함께 유엔군은 휴전회담과 상관없이 미리 설정한 진출 지역인 캔자스~와이오밍 선으로 나아갔다. 그 다음에 벌어진 일이 그런 주() 저항선의 전방 진지를 확보하는 일이었다. 전선의 들쭉날쭉한 진지를 고르게 다지는 일이기도 했다. 아군 쪽으로 깊이 들어온 적의 돌출 진지를 빼앗아 전선을 유리하게 관리하려는 목적이었다. 양구 일대에서는 미 2사단과 한국군 5사단 36연대가 나섰다. 양구 북방의 983고지를 중심으로 940고지, 773고지를 잇는 능선으로 진격해 그곳에 있던 북한군 12사단과 27사단을 몰아내는 작전이었다. 전투의 규모가 과거 중공군 대규모 공세 때에 비할 수는 없었으나 고지 전투는 좁은 곳에서 다량의 인명 피해를 부르는 경우가 많았다.

특히 이곳 양구의 983~940~773고지를 잇는 능선에서 벌어진 전투는 미군 1개 연대 규모, 북한군 1개 사단 규모 이상의 피해가 발생했다. 그 정도가 참혹해서 붙인 이름이 바로 ‘피의 능선(Bloody Ridge)’이었다. 휴전회담 뒤 벌어지는 피의 혈전을 알리는 서막(序幕)이라고 해도 좋을 싸움이었다.

<②편에 계속>

 

<①편에서 계속>
983
고지는 미 2사단이 진출해 있던 캔자스선으로부터 북방 3㎞ 지점에 있는 곳이었다. 아울러 문등리와 사태리를 잇는 능선의 흐름 속에서 주봉(主峰)에 해당했다. 이 능선은 남쪽으로 급격한 경사면을 이루고 있었다. 따라서 방어를 펼치는 적에게는 매우 유리했고, 그곳을 공략하려는 아군에게는 퍽 불리한 지형이었다. 다른 하나의 불리함도 있었다. 이곳이 가장 높은 능선을 이루고 있기 때문에 남쪽에서 움직이는 아군의 병력은 능선 위의 적군 시선에 속속들이 잡힐 수밖에 없었다는 점이다. 고지가 높은 곳에 있어 주변을 모두 감제(瞰制)할 수 있는 곳이었던 까닭이다. 아군이 진출해 있던 캔자스선 일대의 병력 이동이 모두 그곳에서 관측될 수 있었다는 얘기다.

따라서 앞으로의 상황에 대비해 아군이 더 원활한 작전을 펼치려면 이곳을 우선 확보해야 했다. 미군을 비롯한 아군의 이동과 진격 상황을 모두 감제할 수 있는 곳이라면 적은 그곳에서 우리에게 아주 수월히 포격을 가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병력의 이동과 작전의 전개는 따라서 많은 희생을 강요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공격에 나선 부대는 한국군 5사단 36연대였다. 그 전까지 중공군의 대규모 공세에서 약세를 면치 못했던 한국군으로 하여금 전투 경험을 쌓고 자신감을 찾을 수 있도록 하자는 차원에서 그렇게 결정했던 것이다. 전투의 지휘는 미 2사단장이 맡았다. 아울러 막강한 화력을 보태기로 했다

 

북한군으로서도 이 고지를 내준다면 위험했다. 남쪽으로 급한 경사면을 이뤄 방어하기에 가장 적합한 이 능선의 고지들을 아군에게 빼앗길 경우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한 거점을 잃기 때문이었다. 이에 따라 북한군 또한 상당한 채비를 갖춘 뒤 전투에 나서는 형편이었다. 북한군은 731고지에서 983고지로 이어지는 능선의 서쪽에 12사단 1연대, 940고지에서 773고지로 이어지는 능선 동쪽에는 27사단 14연대를 배치했다. 그러니까 2개 사단의 지원체계를 이룬 뒤 전투에 나서는 모양새였다. 아군의 포격에도 크게 대비한 상태였다.

우선 진지의 구축이었다. 그들은 화력에서 늘 유엔군에게 시달려야 했다. 무기의 체계와 화력의 강도 등에서 그에 미치지 못하는 수준을 지녔던 까닭이다. 이에 따라 아군 포격에 견딜 수 있는 유개호(有蓋壕)를 고지에 구축하는 한편 능선 북사면에는 교통호(交通壕)를 이리저리 연결했다. 나중의 전투에서도 확연하게 드러난 점이지만 이들은 그에 만족하지 않았다. 진지의 전방에 아주 많은 수의 지뢰를 깔아 아군으로 하여금 쉽게 능선 진지에 다가서지 못하도록 했다. 국방부 기록에 따르면 북한군이 당시 진지 전방에 매설한 지뢰는 약 5000발에 달했다고 한다.

그런 준비를 마치고 북한군은 전투에 대비하고 있었다. 남쪽으로 난 급격한 경사면에, 진지에 구축한 강력한 유개호, 아울러 능선 북사면 쪽에 치밀하게 파놓은 교통호, 진지 전면에 매설한 무수한 지뢰 등으로 인해 당시 983고지는 아군에게 매우 어려운 공격 목표에 해당했다. 공격하기가 결코 쉽지 않아 빼앗기 매우 힘든 고지, 이른바 난공불락(難攻不落)이라고 해도 좋을 곳이었다. 그 해에도 역시 여느 때처럼 비가 내렸다. 7월 들어서 장마전선이 찾아들고, 이어 8월까지 비가 자주 내렸던 편이었다. 8월 중순까지 자주 퍼붓던 장맛비가 서서히 멈추고 본격적인 한여름의 뜨거운 날씨를 선보이던 무렵이었다.

983
고지의 전투를 모두 지휘하는 미 2사단장 클라크 루프너(Clark L. Ruffner) 소장은 8 15일 공격 명령을 내렸다. 보병의 진격에 앞서 강력한 포병화력과 공중화력을 능선 일대에 먼저 퍼부으라는 내용이었다. 그의 명령에 따라 후방의 아군 포병화력이 일제히 붐을 뿜기 시작했다. 동해안의 미 7함대 소속 함재기들도 능선으로 향하면서 강력한 공중 화력을 선보였다. 8 16일 오전 8시 한국군 5사단 36연대는 미 2사단에 배속하면서 983고지 일대를 향해 진격하라는 명령을 받아들었다.

 

176-(1)(2) 지뢰와 기관총 무장한 북한군 고지에 오르고 또 올랐다

(22) 피의 능선 전투

맹렬한 선제 포격

 

육군본부 전사 기록에 따르면 이곳 983고지 일대는 잡목이 무성한 편이었다고 한다. 그렇게 굵지 않은 소나무를 비롯해 여러 종류의 잡목이 많았고, 잡초와 칡넝쿨 등이 우거져 있었다는 것이다. 울창한 정도는 아니지만 수목이 제법 자리를 잡았고 여름 한 철의 잡초 등이 무성한 땅이었던 듯하다.

8
15일 미 2사단장 루프너 소장의 명령에 의해 후방의 포병화력과 공중 화력이 먼저 나서서 사전 공격을 수행했다. 3일 뒤인 8 18일 오전 6 30분부터 다시 미 10군단과 2사단 7개 포병대대 126문의 야포가 능선을 향해 맹렬하게 공격준비사격을 펼친 뒤 30분이 흐르고 나서 한국군 5사단 36연대 황엽 대령은 공격 명령을 내렸다. 막강한 포병화력과 공중 폭격으로 982고지 등 적이 버티고 있는 진지는 곧 화염 덩어리로 변하는 듯했던 모양이다. 적의 진지에 정확히 떨어지는 아군의 포탄을 바라보면서 5사단 36연대는 곧 진지를 점령할 수 있을 것으로 믿고 전격적인 진격을 감행했다.

공격 선두에 나선 부대는 36연대 예하 2대대와 3대대였다. 이들은 능선을 향해 포복과 근접 전투를 벌이면서 진격하려 했으나 쉽지 않았다. 북한군이 능선 전방 여러 곳에 매설했던 지뢰가 폭발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디에 묻혀 있는지 전혀 알 수 없는 지뢰는 아군의 발목을 잡는 강력한 복병이었다. 이에 따라 36연대는 공격을 일단 멈췄다. 느닷없이 터지는 적의 지뢰에 의해 사상자가 많이 발생했기 때문이다. 이들은 따라서 후방의 아군 포병대에 추가적인 포격을 요청했다. 적의 진지 주변으로 포격을 집중해 땅에 매설한 지뢰를 우선 제거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1951 5월 산악 이동을 펼치고 있는 미 2사단 9연대의 모습. /미국 육군 제공

 

그에 따라 다시 후방의 아군 포병이 포격을 벌였다. 제법 긴 시간동안 아군의 후방 포병대는 적의 진지 주변을 면밀하게 포격했다. 아군의 진격 통로를 개척하기 위한 사격이었다. 적의 진지 주변은 곧 화염 덩어리로 변하는 듯했다. 아주 거셌던 포격이라 적의 진지는 물론이고 주변 또한 초토화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던 모양이다. 아군 진격 통로를 개척하기 위한 후방 포병대의 포격은 밤 8시에 벌어졌고, 강력한 포격이 벌어진 뒤 36연대는 다시 야간 공격을 감행했다. 그러나 이번에도 역시 앞서와 마찬가지의 상황이 나타났다.

아무래도 북한군은 아주 많은 수의 지뢰를 땅에 묻었던 듯했다. 야간 공격에 나선 아군이 진지 주변으로 접근할 때마다 또 다시 지뢰가 여기저기서 터졌다고 했다. 그에 따른 아군의 희생이 점차 늘어가고 있었다. 아울러 북한군의 기관총 사격도 멈추지 않았다. 고지를 빼앗으려는 사람과 그 고지를 빼앗기지 않으려는 이의 투지는 서로 아주 강했던 모양이다. 고지 전투에 나서 당당히 승리를 쟁취함으로써 새로운 면모를 보이고자 했던 한국군의 의지와 ‘이곳은 내줄 수 없다’며 버티려고 했던 북한군의 투지가 서로 엉켰던 듯하다.


진격을 막은 북한군 지뢰

특히 북한군은 진지에 견고한 유개호를 구축했던 것으로 보인다. 고지 전체를 맹폭했던 아군의 후방 포병 화력에도 그들은 살아남아 진지를 향해 올라오는 국군을 향해 계속 사격에 나서고 있었다. 적의 지뢰가 폭발할 때마다 발목을 부여잡고 울부짖는 아군의 모습이 줄을 이었다고 했다. 아울러 컴컴한 밤중에 급한 경사면을 오르려다 높은 고지에서 쏟아지는 북한군의 기관총 사격을 맞아 땅에 나뒹구는 국군 사병도 적지 않았다고 했다. 그러면서도 36연대 2대대와 3대대 장병들은 진격을 멈추지 않았다. 그러나 아군의 희생이 점차 심해지면서 연대장 황엽 대령은 철수 명령을 내리지 않을 수 없었다.

북한군은 예상했던 것보다 셌다. 앞에서도 여러 번 언급한 내용이지만, 전쟁 초기의 북한군은 낙동강 전선에서 아군의 강력한 반격에 밀려 전선을 돌파하지 못한 뒤 지리멸렬한 상태에 빠진다. 특히 맥아더 장군이 이끌었던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하고, 낙동강 전선에 틈을 내고 북상한 아군 육상전력에 밀려 평양 이북으로 패주한 뒤의 북한군은 정말 그랬다. 그들은 군대라고 할 수 없을 정도로 패잔(敗殘)의 명운을 비켜가지 못했다.

<②편에 계속>

 

<①편에서 계속>
상당수는 중국 만주 지역으로 넘어가 제법 오랜 시간의 재편(再編)을 거친 뒤에야 다시 한반도의 전선으로 복귀했다. 따라서 그 뒤의 공산 측 전투는 대개가 중공군의 몫이었다. 북한군은 화력과 장비, 인원 등의 여러 면모에서 주력을 형성할 수 없었다. 단지 동해안 일대의 작전만큼은 북한군의 몫이었다. 중공군이 1951 5 2단계 공세 때 중동부 전선으로 대거 이동해 아군과 격전을 벌인 것을 제외하고는 동부 전선의 대부분 전투는 북한군이 담당하는 편이었다. 특히 983고지의 ‘피의 능선’ 전투를 벌이던 무렵의 북한군은 다른 북한 군대보다는 형편이 조금 더 나았다.

983
고지 전투를 수행하던 당시의 북한군은 2군단 예하 2사단과 27사단이었다. 그리고 5군단 예하 12사단과 32사단이 주변에 모인 상태였다. 이들은 해안에 가까운 분지였던 이른바 ‘펀치 볼’을 점령한 뒤 수세를 공세로 바꾸려는 작전 의도를 지니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북한군 27사단은 2군단의 예비로 남아 있던 부대였다. 따라서 27사단은 아군의 대규모 반격 때 손실을 거의 입은 적이 없던 부대였다. 다른 북한군 부대에 비해 전투력이 높았다는 얘기다. 실제 이들은 후방의 105㎜ 야포 25문의 지원을 받고 있었으며, 각 연대는 6문의 82㎜ 박격포와 24정의 기관총을 보유하고 있었다. 그에 비해 아군의 주공(主攻)으로 나섰던 국군 5사단은 막 재편성을 거친 부대였다. 앞서 소개한 현리 전투에서 5사단은 좌측의 일선을 맡았었다. 그러나 중공군의 대규모 공세에 물러선 뒤 36연대는 재편성과 함께 부대교육을 받고 있다가 전투에 나섰던 상황이었다

 

공격 또 공격

36연대장 황엽 대령은 이튿날 동이 트면서 다시 공격에 나섰다. 그러나 결과는 역시 마찬가지였다. 2대대는 후방의 아군 포병화력 지원에 힘입어 포격으로 몸집을 드러낸 적의 경계진지를 제압하는 데는 성공했다. 이어 아군의 포격으로 열린 지뢰지대를 통과해 적진 가까이에 접근했다. 그러나 적의 유개호와 엄폐호(掩蔽壕)는 생각보다 견고했던 모양이다. 적은 결코 물러날 자세를 보이지 않으면서 방망이 수류탄을 던지고 기관총을 쏘면서 저항했다. 2대대는 더 이상 진격할 수 없었다. 아무래도 남쪽으로 급한 경사면을 보이고 있던 현지의 지형 때문이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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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대는 미군의 전차를 지원받으면서 고지 점령에 나섰다. 고지를 정면에서 치고 나아가기보다 다소 우회하는 길을 선택했다. 983고지 오른쪽에 해당하는 비득고개라는 곳으로 미 전차 1개 소대의 지원을 받으며 펼쳤던 측방 공격 또한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아주 험악한 산악의 고지에 들어선 적의 진지를 공격하는 일은 그렇게 어렵다. 정밀한 포격으로 그곳 진지의 상단을 타격하고, 위력적인 폭탄을 공중에서 투하해도 적의 견고한 진지는 쉽게 무너지지 않는 법이다. 그렇듯 적이 견고하게 두른 험악한 지형 위의 진지는 점령키가 매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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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례의 공격은 성과가 뚜렷하지 않았다. 36연대 2대대와 3대대는 진출한 곳에 급편(急編) 진지를 만든 뒤 차후의 공격명령을 기다리는 수밖에 달리 도리가 없었다. 그나마 3대대의 진출선이 한 때 983고지 8부 능선까지 도달했다는 점이 다행이랄 수 있었다. 그때까지의 전투 양상은 아군이 강렬한 포격에 이어 고지를 일거에 점령한다는 의도와 그를 어떻게 해서든 막으려는 북한군의 저항이 부딪히는 꼴이었다. 그러나 웬만해서는 승부가 쉽게 갈릴 상황이 아니었다. 36연대장은 따라서 작전의 방도를 바꾸는 데 착안했다고 한다.

일거에 고지를 점령할 수 없을 바에는 983고지 오른쪽의 940, 773고지를 먼저 집중 공격해 그곳을 확보함으로써 적을 새로 압박하는 방식이었다. 아울러 예비로 있던 1대대를 움직여 2대대를 지원키로 했다. 공격 목표를 세분화하는 한편 새로 발생한 공격 임무를 더 구체적으로 확정했다. 940고지, 773고지, 747고지로 우선 공격 목표를 다시 정했다. 이곳에 3개 대대의 각 2개 중대를 투입키로 했다. 72전차대대의 1개 소대를 지원받아 공격의 발판을 다시 다지기도 했다. 새로 확정한 공격 계획은 20일 자정을 넘기면서 실행에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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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7-(1)(2) 선발대“대한민국 만세!”외치자 북한군 와르르

(22) 피의 능선 전투
고지 뒤편으로 우회

먼저 773고지가 무너질 기세였다. 이곳에 자정의 야음을 틈타 다가선 5중대의 특공대는 고지 뒤쪽으로 접근하는 방법을 택했다. 정면으로 접근하는 2중대와 뒤쪽으로 접근한 5중대가 동시에 수류탄을 던지며 협격을 벌이자 북한군은 도주했다. 8 20일 새벽 2시에 773고지는 아군의 수중으로 넘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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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대의 선전(善戰)이었다. 983고지 일대를 잇는 능선에서 가장 먼저 773고지가 무너진 점은 적에게는 적지 않은 충격이었을 것이다. 북한군으로서도 이 983고지 일대가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했다. 목숨을 버려서라도 지켜야 하는 곳이라고 여겼을 것이다. 그만큼 강한 북한군의 저항을 뚫고 먼저 773고지를 허문 5중대의 공로는 매우 컸다. 그 우측에서 공격을 벌이고 있던 2대대는 당시 예비로 있던 1대대의 3개 중대 병력을 지원받아 지속적으로 치열한 공격을 펼쳤다. 5중대의 선전으로 공격의 발판을 새로 만들 수 있었던 2대대 또한 공격 나흘째인 8 21 940고지 일대의 능선을 확보하는 데 성공했다고 한다

 

▲후방에 포진한 미군 포병대가 전방의 아군을 지원하기 위해 포격을 벌이는 모습이다. /US ARMY 제공

 

문제는 983고지였다. 고지를 지키는 북한군은 강력한 저항을 굽히지 않았다. 그러나 5중대와 2대대의 공격에서 드러난 사실이 하나 있었다. 정면 공격만이 정답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정면을 공격하기 어려우면 측면을 살피고, 다시 그 후면을 살피는 일도 가능했다. 3대대는 그런 점에 착안했던 모양이다. 그런 정황 판단에 따라 3대대장은 2개 중대를 정면과 측면에 배치해 공격을 이어가는 한편 1개 중대를 우회시켰다. 우회부대로 뽑혔던 11중대는 야음을 이용해 우측방의 940고지를 돌아 983고지의 후면으로 접근했다고 한다.

북한군은 후면에 주의를 기울이지 못하고 있었던 듯하다. 전방으로 아군의 후방 포병화력이 집중적인 포격을 가하고 있었고, 전면과 측면으로 아군의 병력이 접근하고 있던 상황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11중대는 2개 소대로 적을 계속 견제토록 하면서 1개 소대를 은밀하게 적진으로 침투시켰다고 한다. 중대장은 침투 부대에게 “적이 보이지 않을 경우 총을 쏘지 말고 기도비닉(企圖秘匿)을 유지하라”고 지시를 했다고 한다. 은밀하게 침투하면서 의도를 드러내지 말라는 뜻이다. 그로써 중대장이 노렸던 효과가 무엇이었을까. 국방부가 펴낸 <6.25전쟁사>에는 이런 대목이 나온다. “적이 전면에서 공격하는 중대 주력에 집중하는 사이 고지 뒤편의 병력이 선봉으로 고지 정상에 올라 ‘대한민국 만세!’를 외치자 이 소리에 놀란 적은 측방으로 도주하기 바빴다”는 내용이다. 은밀하게 의도를 감추고 침투한 아군이 갑자기 지른 소리에 놀라 적이 스스로 무너졌다는 얘기다.


한층 노련해진 국군

국방부와 육군본부가 적은 이 전투의 기록을 보면 우리 대한민국 군대가 전쟁 발발 뒤 1년 반 정도의 혹독한 과정을 겪으면서 상당한 전투기법을 쌓고 있었다는 믿음이 생긴다. 북한군이 강력한 유개호와 교통호를 파놓고 강한 저항을 하고 있던 고지에 다가서면서 한국군은 매우 용감하면서도 침착한 면모를 보인다.

육군본부의 <1129일 간의 전쟁 6.25>를 보면 이런 증언이 나온다. 당시 5사단 3대대 11중대장의 얘기다. 그 내용은 이렇다. “피의 능선 주봉인 983고지 공격이 수차례의 돌격에도 북한군의 강력한 화력으로 번번이 실패했다. 이에 제3대대 11중대장은 진지에 대해 저돌적인 돌격을 시도한다면 손실만 있을 뿐 임무달성은 불가능하다고 판단해 돌격에 앞서 우선 상대방의 반응과 화력의 강도를 시험해 보기로 하였다. 그는 각 소대장들에게 그의 의도를 전달하고 돌격명령을 내리면 돌격사격은 가하되 기동은 하지 않도록 하였다. 그 결과 북한군의 화력이 생각보다 강력하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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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대장 정창호 중위는 이런 과정을 거쳐 983고지의 후면에 북한군 병력이 없다는 사실을 파악했던 모양이다. 결국 정 중위는 후사면 ‘습격’을 감행했고, 상대의 약점을 정확하게 파고들어 고지 점령에 성공했던 셈이다. 침착함, 지혜로움, 용기 등이 없으면 치열한 접전이 벌어지는 상황에서 이런 작전을 구사할 수 없는 법이다. 11중대가 983고지를 점령한 시점은 8 22 11 30분이다. 공격을 벌인 지 5일 만에 거둔 값진 승리였다. 이어 목표 고지 1㎞ 북쪽에 있던 855고지도 점령했다. 북한군은 강력한 저항을 펼쳤지만 결국 그보다 강한 투지를 보였던 우리 군대에 밀렸던 것이다.

<②편에 계속> 

 

<①편에서 계속>
육군본부의 전사 기록을 보면서 한 장면이 떠올랐다. 북한군의 비()인도적인 전투 방식 말이다. 나는 1950 8월 대구 북방 약 20㎞ 지점의 다부동에서 혈전을 거듭해 남침 김일성 군대의 정예 사단들이 벌였던 공세를 막아낸 일이 있다. 그로부터 약 한 달이 지났을 무렵 내가 이끌던 1사단의 12연대의 돌격으로 북한군의 낙동강 전선을 뚫고 북진했다. 전선을 뚫고 난 뒤 나는 곧장 지프에 올라 북한군이 점령하고 있던 전선 일대를 돌아본 적이 있다. 길목을 지키는 구릉 지역에 있던 북한군 진지가 눈에 자주 들어왔다. 그곳의 모습은 참담했다. 그러나 한 결 같이 눈에 띄던 모습은 기관총을 지닌 북한군 사병의 시신이었다.

그들은 발목에 쇠사슬을 묶고 있었다. 스스로 묶은 것이 아니라 묶였다고 해야 좋을 것이다. 아군의 공세에 뒤로 물러서 도망칠 수 없도록 기관총 사수의 발목에 쇠사슬을 묶어 결사적으로 저항토록 했던 것이다. 그들이 일선 병사를 전선으로 몬 뒤에도 그들이 도망치면 즉석에서 사살하는 독전대(督戰隊)를 운영했던 사실은 아주 유명하다. 983고지의 모습도 마찬가지였다고 한다. 육군본부가 채록한 증언에 따르면 당시 983고지에 혈전을 벌이며 올라섰던 우리 병사의 눈에도 기관총 앞에서 쇠사슬로 발이 묶인 채 숨져 있는 북한군 병사의 시신이 들어왔던 것이다. 고지 위에는 그런 모습으로 죽어 있는 북한군 사병들의 시신이 즐비했다고 한다

 

▲6.25전쟁에 참전한 미군이 산악전을 벌이고 있다. /US ARMY 제공

 

쇠로 발이 묶인 북 기관총 사수 

따라서 한 번 고지를 내줬다고 해서 쉽게 물러설 북한군이 아니었다. 36연대가 혈전 끝에 차지한 983고지 일대는 곧 북한군의 강력한 반격에 직면하기 시작했다. 격전에 격전을 거듭했던 5사단 36연대는 사실 많이 지쳐 있는 상태였다. 연대장 황엽 대령은 그런 점 때문에 일단 점령한 983고지의 방어 임무를 미군에 맡기고 싶어 했다. 그에 따라 상부에 이 상황을 보고했고, 미군 전선 사령관은 이를 승낙했다고 한다. 그러나 미 8군 사령부에서는 이를 거절하는 내용의 지시가 내려왔다고 한다. 8군 사령관은 “그럴 경우 한국군의 공적을 미군이 가로챈다는 오해를 받을 수 있다”고 했다. 그런 이유로 36연대가 일단 점령한 고지를 계속 지키라고 명령했다.

북한군은 고지를 내줬으나 곧장 다시 반격을 펼치고 나섰다. 지칠 대로 지친 36연대 장병들은 우선 그런 북한군의 공세에 직면하면서 다시 분투를 거듭해야 했다. 8 22일 밤 진지 회복에 바로 나섰던 북한군 1개 대대가 먼저 고지로 접근했다. 36연대는 이 북한군 대대의 공격을 잘 막았다. 그러나 그 다음에 펼쳐지기 시작한 북한군 공세에는 대응키가 어려웠다. 아군은 3일 뒤인 8 26일 새벽 2시에 다시 북한군의 역습을 받았다. 이번에는 1개 연대 규모의 북한군이 고지에 다가서고 있었다. 나름대로 대응을 했으나, 고지 위의 아군은 이들 북한군 1개 연대 병력에게 포위당하고 말았다.

고지를 사이에 두고 벌이는 싸움은 말을 하는 방식으로 표현하자면 보다 ‘직설적’이라고 할 수 있었다. 서로 눈에 뻔히 보이는 목표를 두고 훤히 드러나는 싸움의 방식으로 전투를 벌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눈에 띄는 희생이 분명하고 싸움의 전체 모습도 그 만큼 처참하다. 아울러 공격과 수비가 수시로 바뀔 수도 있다. 점령한 고지에서도 따라서 오래 버티는 일이 쉽지 않다. 983고지를 사이에 둔 당시의 싸움도 그랬다. 북한군이 8 28일 포위공격을 벌여오자 36연대장 황엽 대령은 우선 철수를 명령했다. 고지에 있던 병력은 옆의 940고지를 향해 이동했다.

미군 2개 중대가 그곳에 도착해 36연대 병력과 함께 다가오는 적의 공세를 막으려 안간힘을 썼으나 결국 도로에 그치고 말았다. 한 번 밀릴 경우 전세를 즉시에 만회하기는 아주 힘든 법이다. 일단 물러서서 차후의 전투계획을 다듬어야 했다. 북한군 공세는 매우 집요했고, 아군은 그에 다시 등을 보인 상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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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 곳곳에서 실수를 낸 미군의 어이없는 후퇴

(22) 피의 능선 전투
군단장의 작전 전환

8 27일 밤에 아군 병력은 940고지 일대에서의 싸움을 일단 포기했다. 그로써 983고지 일대를 모두 확보하고자 벌였던 아군의 공세는 일단 단락을 맺었다. 또 고되고 참혹한 혈전을 반복해야 할까. 고지를 빼앗기 위해서는 다시 나서야 했지만, 10군단장 바이어스 소장은 싸움의 방식을 조금 바꿔보기로 했다. 전투 범위를 너무 협소하게 가두면서 착오가 생겼다고 판단했다는 것이다.

육군본부 전사 기록에 따르면 바이어스 소장은 5사단 36연대가 940고지에서 철수해 접전이 벌어지기 전의 상태로 바뀐 뒤에 전체 상황을 분석해 새로운 판단을 한다. 이전까지 전투 지역을 제한해 전술적으로 오류가 생겼다고 본 것이다. 피의 능선 고지 일대만을 한정해서 전투를 벌임으로써 전체적인 힘의 행사에 문제가 있었다는 얘기였다. 따라서 바이어스 군단장은 군단 전 정면을 압박하면서 상대의 힘을 분산시킨 뒤 피의 능선을 점령하겠다는 생각이었다. 전방위적으로 상대를 몰아가면서 목표 지점을 탈취하겠다는 내용이었다. 그에 따라 미 10군단은 8 31일 아침 6시에 공격에 나설 수 있는 모든 역량을 전개한다.

피의 능선은 미 2사단의 9연대가 맡았다. 그 전까지 한국군 5사단 36연대의 공격 임무를 대신 떠안은 셈이었다. 가칠봉 일대는 같은 미 2사단의 38연대가 담당했다. 사족일지는 몰라도, 이 장면에서 미군의 석연치 않은 전투력이 등장한다. 미군은 당시로서는 세계 최강의 군대였다. 이 점을 부인할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한반도의 전쟁에 급히 뛰어든 미군은 적지 않게 서툰 장면을 연출하고는 했다. 1950 12월 크리스마스 대공세 뒤 중공군의 반격에 밀려 서울을 향해 밀려 내려올 때도 미 8군은 유엔군 전체의 철수계획을 성급하게 마련했다.

아울러 맥아더 장군의 인천상륙작전 뒤에 벌어진 미 10군단의 우회, 북진 당시의 평양~원산 방어선을 소홀히 다룬 점 등도 마찬가지다. 특히 중동부 전선의 핵심 역량을 이뤘던 미 10군단은 서부전선을 담당했던 미 1군단에 비해 여러 가지 면모에서 떨어졌다. 2차 세계대전 뒤 미군이 급격한 해체 과정으로 들어설 때 아무래도 군기와 조직, 훈련 등에서 제대로 준비를 못한 점이 그의 배경이었을 것으로 짐작한다. 1군단도 완벽하지는 않았으나, 나름대로 전투에 충실했다. 커다란 착오 없이 낙동강 전선의 전투를 치렀고, 북진에서도 핵심 역량을 잘 유지하며 행사했다

 

▲1953년 휴전 막바지에 이르러 벌어졌던 고지전 중 촬영한 미군 진지의 모습이다. /NARA

 

미군의 약한 모습 

그에 비해 미 10군단은 곳곳에서 실수를 드러내기도 했다. 맥아더 장군의 핵심 참모였던 알몬드 장군이 당초 10군단을 이끌면서 벌인 전투는 때로 석연찮은 판단과 작전으로 실수에 직면한 적이 적지 않았다. 그런 10군단의 면모가 아직 남아있었던 것일까. 피의 능선에 올라섰던 미 10군단 예하 2사단 9연대의 작전에서도 그런 면모 하나가 두드러진다. 육군본부의 <1129일 간의 전쟁 6.25>는 이런 대목을 하나 소개하고 있다. 당시 미 2사단 9연대는 얼마 전까지 한국군 5사단 36연대가 공격을 벌여 탈취했던 피의 능선 작전 지역을 담당했다.

2사단 9연대 3대대는 피의 능선에 오르기 위해 먼저 거쳐야 했던 940고지를 공격했다. 8 27일 한국군 5사단 36연대가 점령했다가 철수 명령에 따라 물러섰던 곳이었다. 8 31일 이곳을 향해 공격을 벌이던 미 9연대 3대대는 적을 향해 제대로 공세를 이루지 못했던 듯하다. 기록에 따르면 미 9연대 3대대 장병들은 겁을 집어 먹었던 듯하다. 공격다운 공격을 제대로 펼치지도 않은 채 3대대 장병들 중에는 뒤로 물러서는 사람이 적지 않았다고 했다. 공격이 벌어지자마자 부상자 후송을 한다면서 1명의 부상자를 끌고 4~5명의 병사들이 몰려 내려왔다는 것이다.

<②편에 계속> 

 

<①편에서 계속>
이는 전투지역의 이탈과 다름이 없었다. ‘무단’이라고까지는 할 수 없을지 몰라도, 그럴 듯한 이유를 핑계로 삼아 전투 현장을 벗어난 셈이었다. 이런 부상자 후송 병력이 매우 많았던 모양이다. 계속 그 수가 불어나면서 전투다운 전투는 벌어지지 못했다고 한다. 전투 현장에서 매우 중요한 요소인 군기가 사라졌다고 볼 수도 있었다. 이런 마음자세를 지닌 장병이 싸움을 제대로 수행할 수는 없다. 대대장의 명령이 먹힐 리도 만무했다. 결국 이들은 고지 전투를 본격 펼치기도 전에 무너져 내려왔다고 한다. 2사단장은 곧 3대대장을 해임하고 부대를 재편성할 수밖에 없었다.

최강의 미군이라고 해서 미군이 늘 최강일 수는 없다. 죽느냐 사느냐를 가르는 싸움에서 자만과 해이는 정말 커다란 금물(禁物)이다. 미군의 급격한 해체과정 뒤 풀어졌던 군대로서의 군기와 조직력이 아직 제대로 살아나지 않았던 점이 그 이유라고 해야 할 것이다. 아무래도 훈련의 부족이라고 볼 수 있었다. 2차 세계대전 종전 뒤 풀어졌던 분위기가 다시 조여지기 위해서는 미군으로서도 조금 더 시간이 필요했다고 볼 수 있었다. 2사단 전체, 나아가 미 10군단 모두가 그러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미 9연대 3대대의 그런 면모는 미 10군단의 일부 분위기만은 보여주고 있었다.


고립위기에서 물러선 북한군

그러나 미 10군단장 바이어스 소장의 분석과 판단은 나름대로 주효했다. 2사단 9연대 3대대의 공격 실패 이후 피의 능선 일대에서 벌어진 아군의 공세는 지지부진하면서 잘 펼쳐지지 않았다. 그럼에도 접전은 늘 벌어졌다. 1951 9월 초순의 답답했던 상황이 좀 더 시간이 흐르면서 나아지기 시작했다

 

▲1951 9월 격렬한 전투가 벌어졌던 피의 능선. /NARA

 

 피의 능선 서쪽에서 공세를 벌이고 있던 한국군 7사단, 가칠봉 일대를 공격했던 미 2사단 38연대가 제법 상대를 몰아가고 있었다. 바이어스 미 10군단장의 전면적인 압박에 의한 목표 탈취라는 공세의도가 어느 정도 효과를 거두고 있는 형국이었다. 북한군으로서 볼 때 고지 자체를 지키고 있더라도 그 후방이 상대에게 잠식당할 경우 위험한 상황이 나타난다. 고립된 지점에 적지 않은 병력을 남겨두고 지속적인 싸움을 벌일 수 없기 때문이었다. 983고지의 후방 차단 위험성이 점차 높아지면서 북한군은 이 점을 심각하게 여겼던 듯하다.

북한군은 아군 병력이 도달하기 전 피의 능선에서 물러난다. 기록에는 9 3일로 나온다. 아군은 북한군의 철수를 모르고 있었다고 한다. 결국 북한군 철수 사실을 알지도 못한 채 9 5일 미 2사단 9연대는 능선을 조금씩 올라 983고지를 점령하는 데 성공했다. 이런 전체 과정이 바로 ‘피의 능선 전투’라고 불리는 초기 대표적인 고지전이었다. 이곳 일대에 무성했던 잡목과 풀들은 이미 사라진 상태였다. 맹렬한 포격이 이곳에 집중적으로 쏟아졌기 때문이었다. 그 만큼 인명의 희생도 심했다. 기록에 따르면 피의 능선 전투에서 한국군 5사단 36연대는 전사 및 실종자가 154, 부상자가 816명이었다. 미군의 피해는 더 심각했다. 전사 및 실종자가 587, 부상이 1216명이었다.

6.25
전쟁 3년 여 동안의 모든 전투에서 공산군의 인명 피해는 아군에 비해 컸다. 평균적으로 보면 두드러지는 사실이다. 아무래도 미군이 지닌 강력한 공군력, 육상전력이 거느린 거센 화력 때문일 것이다. 북한군의 인명손실은 약 1 5000명 정도로 추정한다. 역시 아군의 피해를 훨씬 웃도는 수치였다. 막대한 인명의 희생을 감수하면서 아군과 적군은 접전과 격전을 벌여야 하는 상황이었다. 인명 희생에 비교적 둔감한 공산군들은 도저한 피의 번짐에 신경을 쓰지 않은 채 싸움을 걸어왔다. 그런 공산군을 맞아 우리도 피를 흘리면서 맞서 싸워야 하는 형국이었다.

그러나 시작에 불과했다. 피의 능선이라고 부르는 조그마한 고지를 점령하기 위해 이렇듯 많은 인명이 사라지는 일 말이다. 어떻게 보면 그 전까지 벌어졌던 대규모 기동전 등에 비해 훨씬 피를 많이 흘려야 했던 싸움들이었다. 격렬함이 더 했고, 그에 따르는 참혹함은 더 그랬다. 때로는 동시다발적으로 여러 곳에서 고지를 뺏거나 빼앗기지 않기 위한 싸움이 벌어졌다. 피의 능선 전투는 정말이지, 그 초입에 벌어졌던 하나의 싸움에 지나지 않는다. 휴전회담이라는 명분 내지는 그 이름과는 정말 어울리지 않는 현상이었다. 그럼에도 우리는 싸움터에서 결코 물러설 수 없는 상황이었다.

179-(1)(2) 창자가 끊어지는 고통이 서린 단장의 능선 전투

(23) 단장의 능선

창자가 끊어지는 고통이 서린 단장의 능선 전투


애를 끊는 아픔

 

중동부 전선에서 가장 큰 군사적인 역량을 지닌 아군의 부대는 미 10군단이었다. 바로 앞에서 소개한 ‘피의 능선 전투’에서도 미 10군단은 한국군 5사단 등과 함께 매우 고생스럽던 고지 전투를 수행하고 있었다. 그런 피의 능선 전투와 함께 그 무렵의 대표적인 고지전으로 손꼽히는 것이 ‘단장의 능선’이라고 불렀던 싸움이다. 원래 당시 싸움을 부르던 호칭은 영어가 우선이었다. 10군단 예하의 미 2사단은 피의 능선 전투를 마친 뒤 곧장 북상해 피의 능선으로부터 북방으로 11㎞ 정도 떨어진 곳에서 다시 북한군과 치열한 접전을 벌여야 했다. 그 역시 다른 고지전처럼 매우 많은 인명의 희생을 수반했다.


당시 전투의 참혹함을 목격했던 서방의 종군기자가 그 접전을 ‘Heart Break Ridgeline’이라고 적었다. 심장이 찢기는 듯 비통했던 능선이라는 뜻이었다. 우리는 이를 단장의 능선이라고 옮겼다. 맥락이 같은 말이고, 나름대로 우리식의 정서를 담은 번역이다. 단장(斷腸)이라는 말은 임진왜란의 구국 영웅인 이순신 장군의 작품이라는 곳에서도 나온다. “한산섬 달 밝은 밤 수루에 홀로 앉아, 큰 칼 옆에 차고 깊은 시름하는 차에, 어디서 일성호가는 남의 애를 끊나니”라는 내용이다. 마지막에 보이는 ‘애를 끊다’라는 말이 한자로는 단장(斷腸)이다. 창자가 끊기는 수준이니 그 고통과 비통함이 대단할 것이다

 

▲1951 9월 벌어진 단장의 능선 전투를 위해 기동 중인 미 2사단 9연대 장병들. /US ARMY 제공

 

지금의 휴전선은 이 단장의 능선을 확보하면서 동쪽의 펀치볼과 거의 같은 라인에 놓인다. 따라서 아군이 피의 능선에 진출하는 데 그쳤다면 동쪽의 펀치볼과 서쪽의 라인을 잇는 중간이 피의 능선을 향해 남쪽으로 10여㎞ 내려앉는다. 따라서 적의 입장에서 볼 때 이곳은 돌출부(突出部)에 해당한다. 그렇게 전선이 이뤄질 경우 아군은 적으로 하여금 돌출부에 머물면서 우리의 전선 양측을 공격하는 기회를 제공할 수밖에 없다. 그럼으로써 아군의 전선은 크게 불안정해진다. 그런 점 때문에 적의 돌출부 형성을 어떻게 해서든 막아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런 판단에 따라 미 2사단은 피의 능선에서 전투를 막 마친 병력으로 하여금 다시 북상토록 한다. 2사단은 그런 임무를 예하 23연대에 부여한다. 1951 9 5일 피의 능선 983고지를 무혈점령한 2사단은 9 12일까지 강원도 양구군 동면 사태리 인근에 있는 931고지를 확보하라는 명령을 받고 곧장 북상하는 길에 올랐다.


쫓기는 쪽은 북한군이었다. 그들은 피의 능선에서 상당한 인명의 희생을 냈다. 아울러 후방 차단의 위기를 느끼고서 피의 능선 983고지에서 벗어나 급히 북상한 참이었다. 따라서 그런 북한군이 11㎞ 북방에 있는 단장의 능선 일대에 견고한 방어막을 형성했으리라고는 보이지 않았다.


1
개 연대 앞세워 공격

그에 따라 선두에는 우선 사단 예하의 23연대가 섰다. 1개 연대의 병력으로도 우선 등을 보이고 쫓기면서 북상했던 북한군을 상대할 수 있으리라고 봤던 것이다. 나머지 9연대와 38연대는 피의 능선 전투에서 격전을 치른 부대였던 터라 선공에는 나서지 않았다.


사태리 일대에 있는 단장의 능선은 남에서 북을 향해 894고지, 931고지, 851고지로 이어진 곳이었다. 미군은 공격을 벌이기 전 이곳에 대한 관측을 통해 고지 일부에만 북한군이 들어서 있다는 점을 알아냈다. 따라서 그곳이 주 방어선이 아니라 전초(前哨)에 해당하는 진지라고 판단했던 모양이다. 그런 미군의 관측과 판단이 사실이었다면 그곳 일대에서는 격전이 벌어질 수 없었다. 미군은 여전히 북한군을 압도하고도 남을 강력한 화력과 장비를 보유한 부대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런 미군의 관측 및 판단과는 영 다른 현실이 눈앞에 나타나고 말았다.


이곳 역시 피의 능선 못지않은 인명의 희생이 나왔던 곳이다. 전투 기간으로 볼 때는 오히려 한 달 정도 접전을 벌여야 했던 진지였다. 그런 점을 감안하면 미군은 역시 오판을 했다고 볼 수 있었다. 북한군은 그곳에 피의 능선에 뒤지지 않는 강력한 방어망을 이어 놓은 뒤 아군의 북상을 기다리고 있었다. 전선의 지휘관 누구에게나 닥칠 수 있는 실수였다. 들어오는 정보와 관측 자료 등을 더 이상 의심할 수 없을 정도라고 해도 그 안에는 적의 기만과 은닉에 의한 내용의 오류 등이 들어있을 수 있다. 지휘관은 그런 점을 감안해 늘 신중한 판단을 내려야 한다. 내 판단이 맞지 않을 경우에 대비한 방책 또한 많이 품고 있어야 한다는 얘기다. 아무튼 미군은 북한군의 방어망이 대단치 않으리라는 판단에서 급히 23연대를 북상시켜 사태리 일대에 있던 험악한 산악 고지인 단장의 능선을 향하도록 했다. 북한군은 9 5일 피의 능선 983고지에서 몰래 빠져 나온 뒤 신속하게 병력을 이동시켜 단장의 능선 일대에 방어망을 이루도록 했다.

<②편에계속

 

미군을 상대로 850 고지에서 완강하게 버텨낸 북한군

<①편에서 계속>

북한군 병력은 수적으로 우세했다. 그들은 단장의 능선 894고지와 931고지 일대에 5군단 예하 6사단을 배치했다. 나머지 지역에는 2군단 예하 13사단이 늘어섰다. 포진(布陣)의 방식은 피의 능선에서와 거의 같았다. 전투 지역을 두 부분으로 나눠 각 한 쪽을 1개 군단이 맡도록 한 모습이었다. 피의 능선과 그 북쪽에 있는 단장의 능선은 지형이 비슷했다. 높고 험준한 산악이 거듭 이어지는 곳이다. 따라서 미군의 대규모 기동에는 불리했다. 단장의 능선 전투는 크게 보면 두 단계로 나뉘어서 펼쳐진다. 1단계 공세에서 미군은 고지를 확보하는 데 실패했다.


약 한 달을 끌어 2차 단계 작전이 펼쳐지면서 마침내 931고지를 확보함으로써 단장의 능선 전투는 아군의 승리로 끝을 맺는다. 1단계의 작전 개념은 병력을 축차적으로 투입하는 식이었다. 단장의 능선을 이루는 몇 고지에 순차적으로 아군의 병력을 접근시켜 하나씩 점령함으로써 종국에는 일대 고지를 모두 손에 넣겠다는 계산이었다.


처음에는 순조로웠던 작전

그러나 미군의 장점은 강원도의 험준한 산악 지형에서는 좀체 잘 발휘되기가 어려웠다. 세계 최강의 화력과 장비를 좁고 험한 산악지대에서 수월하게 펼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처음에는 미 2사단 23연대가 먼저 나서 단장의 능선 동쪽에 있던 북한군 엄호 진지를 공격했다. 이어 단장의 능선 중앙부에 있던 850고지를 공격해 점령한 뒤 차츰 북상하면서 나머지 고지를 빼앗겠다는 계획이었다. 기록에 따르면 9 12일 미 23연대는 단장의 능선 동쪽 지역에 해당하는 사태리 일대의 북한군 엄호 진지를 공격해 바로 이곳을 점령했다

 

▲산악 지형에서 중공군과 전투를 벌이고 있는 미 24사단 부대원. / US ARMY 제공

 

그러나 그 다음부터는 난관의 연속이었다. 엄호진지는 소수의 병력만 머무는 곳이어서 쉽게 빼앗을 수 있었으나 능선 중심부에 해당하는 850고지부터는 상황이 달랐다. 북한군은 이곳에서 완강한 저항을 펼쳤다. 결국 23연대의 발걸음은 850고지를 눈앞에 두고 멈췄다. 그에 따라 미 2사단은 9연대 1개 대대를 동원해 협격을 펼쳤다. 단장의 능선 남쪽 894고지를 이들로 하여금 공격케 함으로써 적의 방어력 분산을 노린 뒤 23연대로 하여금 850고지에 다가서도록 한 것이다. 그러나 북한군은 결사적으로 덤볐다. 23연대의 병력 희생은 시간이 흐를수록 커졌다.


공격 7일째인 9 18일에 이르러서야 23연대는 850고지를 손에 넣을 수 있었다. 이로써 능선의 중간 영역에 간신히 발을 들여놓을 수 있었다. 그러나 북한군은 후방에 있는 거점지역인 문등리로부터 지속적으로 병력을 보충 받을 수 있었다. 미군도 쉬지 않고 공격을 벌였지만, 북한군 또한 이에 간단없이 나서면서 죽거나 부상당한 인원의 대체병력을 후방으로부터 공급받을 수 있었다. 역시 피의 능선 전투와 흡사한 상황이 벌어지고 있었다. 미군으로서는 그런 방식의 싸움을 이어가기가 힘에 겨웠다. 병력의 희생이 나날이 커지고 있었던 까닭이다. 2주 동안의 작전에서 23연대의 인원손실은 950여 명에 달했다. 이 정도면 1개 연대로서는 공세의 한계에 봉착한 셈이었다.


그 무렵에 2사단장으로 새로 부임했던 로버트 영(Robert N. Young) 소장은 이런 방식의 공세 지속에 문제가 있다고 판단했다. 일정한 전기(轉機)를 마련하지 못한 채 그냥 고지에 다가선다면 인명희생만 클 뿐 작전성공에는 이르지 못한다고 봤던 것이다. 그로써 1단계 작전은 끝을 맺는다. 다른 방식에 의한, 양상이 전혀 다른 싸움을 벌여야 고지전에서 승리할 수 있다고 본 신임 2사단장의 판단은 옳았다. 그는 피의 능선 때와 같은 새 접근방식을 택하기로 했다. 전면압박과 우회를 통한 후방의 차단이 큰 지향이었다.

 

180-(1)(2) 위기의 순간에서는 연습만이 생명줄

(23) 단장의 능선
당황했던 미군

미군은 단장의 능선 전투 1단계의 결과가 나온 뒤 당혹감에 빠졌다고 한다. 육군본부 전사 기록에 따르면 미 8군 사령부는 6.25전쟁 참전 이래 미군이 직접 나서 조그만 고지 하나를 점령하기 위해 2주 동안 벌인 전투가 뚜렷한 성과를 거두지 못한 채 끝났다는 점을 충격으로 받아들였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이곳에서 물러설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이 단장의 능선은 앞에서 적은 대로 아군에게는 매우 중요했다. 물론, 적으로서도 결코 빼앗기기 싫은 곳이었다. 적으로서는 북에서 남쪽으로 향해 주머니 형태로 뻗어 나오는 전선 돌출부였고, 아군으로서는 서쪽의 미 9군단과 동쪽의 한국군 1군단 견부(肩部)가 위협을 받는 요충이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어떻게 해서든 적의 돌출부를 없애 미 9군단과 한국군 1군단 사이의 전선을 평형으로 잇기 위해서는 이곳의 미 10군단이 단장의 능선을 점령해야 하는 형국이었다. 이런 점 때문에 미 2사단은 재차 공격에 나서야 했다. 그러나 1단계 작전에서의 인명 피해가 극심했기 때문에 공격의 틀을 다시 짜야 했다

 

▲1950 12월 크리스마스 대공세 때 중공군에게 포로로 붙잡혔다 이듬해 2월 풀려난 미군의 모습. /트루만라이브러리 제공

 

북한군은 산간 도로에 대전차 지뢰를 매설해 아군의 전차 진입을 막고 있었다. 아울러 고지에 다가서는 미군에게 박격포로 포격을 가해왔다. 전차를 운용하기 힘든 상황이었고, 조그만 규모로 축차 투입한 병력은 북한군 박격포 포격에 무수히 넘어졌다. 신임 미 2사단장 로버트 영 소장은 피의 능선 전투와 마찬가지로 북한을 압박하는 새로운 방식으로 후방의 차단, 능선 전면에 대한 대규모의 공격을 구상했다. 우선 그는 단장의 능선 후방에 자리를 잡고 있는 문등리에 주목했다. 이곳에 전차를 포함한 일정 규모의 공격부대를 투입한다는 계획이었다.


그러나 문제는 전차 투입이 가능하냐는 점이었다. 사단장은 공병대대장에게 그 점을 문의했다. 새롭게 검토해 전차를 운용할 수 있도록 해 보라는 내용이었다. 공병대대는 조사에 나서 신중하지만 긍정적인 답을 찾았다. 공병대에 충분한 엄호를 보장한다면 도로를 보수할 수 있다는 답변이었다. 그에 따라 결국 미 2사단 공병대대는 산간 도로에 묻힌 북한군 대전차 지뢰를 제거하는 한편 길을 보수해 전차의 기동을 가능케 하는 데 성공했다. 그에 따라 전차 운용이 핵심인 2차 작전계획이 만들어졌다.


신임 2사단장은 이에 미식축구에서 최종적으로 점수를 얻어내는 ‘터치다운(Touch down)’이라는 작전 명칭을 부여했다. 23연대만을 앞에 세웠던 1차 작전의 틀을 완전히 바꿨다. 이번에는 사단 예하의 3개 연대가 모두 나서도록 했다. 그럴 경우 북한군의 화력은 자연스레 분산될 수밖에 없었다. 능선 전면에서 올라서는 미군을 막아야 했기 때문이다.


180
도 전환한 작전

예행연습이 가장 필요했다. 사단장은 각급 공격부대에 지형과 지물을 그대로 축소해 만든 사판을 만들어 앞으로 공격할 목표 지점 일대를 숙지토록 했다. 아울러 항공관측을 통해 적이 구성한 진지의 위치와 모습을 정확하게 파악했다. ‘터치다운’을 성공적으로 하기 위해서는 만반의 준비가 필요했다고 봤던 것이다. 2사단이 전면 공격에 나선 시점은 10 5일 밤 10시였다. 적에게 아군의 공격 기도를 눈치 채지 못하도록 931고지를 향해 나선 23연대는 조명과 별도의 지원도 없이 길을 나섰다. 마침 달도 뜨지 않은 칠흑 같은 밤이었다. 치밀한 예행연습 덕분에 초반에는 차분하게 작전이 펼쳐졌다.


그러나 모든 전투는 돌발적인 상황에 자주 직면한다. 예행연습을 거쳤다고는 하지만 실제 지형에서 움직여 본 경험이 미군에게는 없었던 것이다. 육군본부 전사는 당시 23연대의 일부 공격조들이 칠흑 같은 밤길을 가다가 그만 다른 길로 빠지고 말았다고 소개한다.


길을 잃은 공격조의 발길을 되돌리기 위해 일부 소대장은 고함을 질렀고, 북한군은 그 소리를 들었다. 그에 따른 북한군의 사격이 벌어지면서 23연대의 공격대열은 잠시 혼란에 빠지기도 했다. 그러나 군대에서의 연습은 위기 때 자신의 생명을 살리는 동아줄과도 같다. 사단장의 독촉에 따라 거듭 벌어졌던 예행연습의 효과가 그 자리에서도 나타났다고 한다. 잠시의 혼란을 극복하고 미 23연대는 곧 대오(隊伍)를 형성해 공격에 나설 수 있었다고 육군본부 전사는 전하고 있다. 사느냐 죽느냐를 다투는 싸움의 현장에서는 평소의 연습이 그렇듯 커다란 힘으로 작용하는 법이다.

<②편에 계속 

 

매설된 지뢰를 제거하고 美 탱크가 진입하자 손놓고 바라본 북한군 

<①편에서 계속>

23연대도 곧 고지를 향해 다가서기 시작했고, 능선 전면을 압박하는 나머지 연대 또한 예행연습을 차분히 벌인 덕분에 순조로운 공격에 나섰다. 강력한 공격력을 지닌 미군의 전차부대는 공병대대의 치밀한 작업을 기다리며 문등리를 향해 기동할 준비를 마쳤다. 23연대는 곧장 능선의 핵심인 931고지 정상으로 향했다. 북한군의 막바지 저항을 뚫고 동이 틀 무렵에는 마침내 정상에 올라 아침 8시 무렵 고지에 남아 있던 잔적(殘敵)을 모두 제압했다고 한다. 미군의 2사단 3개 연대가 동시에 접근하는 전면적인 압박 때문에 북한군은 화력을 집중할 수 없었던 것이다. 2단계 작전이 6일째로 접어들었다. 10 10 2사단 예하 72전차대대가 공병대대와 함께 북으로 진출하기 시작했다. 공병대대는 매우 열악한 작업환경 속에서도 차분하게 지뢰를 제거하고 전차가 다닐 수 있도록 길을 보수했다. 그 덕분에 미 전차대대의 운행은 매우 순조로웠다고 한다.

북한군은 미군 전차대대의 진격에 별다른 저항을 할 수 없었다고 한다. 지뢰를 잔뜩 매설한 도로에 미군의 전차가 진입하리라고는 생각지 못해 방어막을 펼쳐놓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설명이다. 그에 따라 미군 전차대대는 곧장 문등리에 도달했고, 이어 그로부터 4㎞ 북방에 있는 하심포까지 진출했다.

 

▲6.25전쟁 발발 직후인 1950 7월 낙동강 전선으로 추정되는 미 야전병원에서 부상병들이 치료를 받고 있다. /NARA 제공  

 

단장의 능선을 점령하다

마침 그곳 하심포에는 중공군 대병력이 출현하는 중이었다. 전투력이 다 한 북한군고 교대해 고지전에 나서기 위해 기동했던 중공군 병력이라고 했다. 미군 72전차대대는 무방비 상태에 있던 중공군을 기습했다. 미군 전차대대의 느닷없는 출현과 이어 벌어진 기습으로 중공군은 막심한 피해를 입고 산간지대로 도망쳤다고 육군본부 전사는 소개하고 있다.

후방의 깊숙한 곳에 미군 전차대대가 진출하고 931고지 등 핵심 지역이 점령당하면서 북한군의 분산(分散)은 속도를 더 해갔다. 그럴 경우에 그대로 고지에 남아 저항을 벌이는 일은 사지(死地)에 빠져 제 명을 재촉하는 것과 다름이 없다. 북한군의 와해는 급속도로 벌어졌다고 한다. 마침내 사단 예하 모든 전투부대는 돌격으로 공세를 전환했다. 한 번 등을 보인 북한군은 별다른 저항 없이 모든 지역에서 빨리 물러났다. 마침내 10 15일 미 2사단은 단장의 능선 핵심인 931고지를 포함해 동쪽으로 펀치볼 일대의 가칠봉까지 진출하면서 전투를 승리로 마감했다.

밴 플리트 미 8군 사령관의 의도는 전선을 굴곡 없이 평행으로 잇는다는 내용이었다. 적에게 돌출부를 내줄 경우 그런 의도는 이루지 못하는 법이다. 그런 맥락에서 볼 때 중동부 전선에서 단장의 능선 전투는 매우 중요했다. 2사단은 전사자 597, 84명의 실종자, 3000여 명의 부상자를 내며 그 중요한 전투를 성공적으로 수행했다. 이 전투는 휴전회담에도 영향을 미쳤다. 일방적인 주장만 펼치면서 국면을 어떻게 해서든 유리하게 끌고 가 보려던 공산군 측은 이 단장의 능선 전투가 막을 내리자 중단했던 회담을 다시 하자며 연락장교를 보냈다고 한다. 나름대로 미군이 나선 이 고지전이 어떤 결말을 맺는지 면밀하게 지켜봤다는 얘기다. 10 10일 단장의 전투가 끝난 뒤 보름이 지난 10 25일 양측은 중단했던 회담을 다시 열었다.

고지전은 참담한 인명의 희생을 전제로 한다. 단장의 능선은 그런 고지 싸움에서 판에 박은 듯한 사고의 지양과 창의적인 작전계획의 수립 및 운용이 왜 필요한지를 새삼 일깨운다. 아울러 생명을 다투는 모든 싸움에서 힘들고 고된 훈련이 왜 소중한지도 말해준다. 그보다 더 중요한 대목이 있다. 우리 대한민국 한 치의 땅, 한 움큼의 흙에는 그렇듯 한국군과 미군, 우방의 다른 참전국 장병들의 흥건한 피와 땀이 깊이 서려 있다는 점이다. 분단의 상황에서 우리 대한민국 국민이 현재 밟고 있는 땅은 공짜로 얻은 것이 절대 아니라는 사실이다.

 

181-①② 냉철한 군정가 테일러, 미 8군 사령관과 백선엽 장군의 첫 신경전

(24) 끝나지 않은 전쟁
신임 미 8군 사령관

나는 1952 7월 육군참모총장 자리에 올랐다. 이듬해 초에는 별을 네 개 달았다. 한국군으로서는 최초의 대장이었다. 개인적인 영광이랄 수 있었으나, 사실은 목숨을 바쳐 전선을 지탱한 이름 없는 장병들의 수고였다. 나는 그들을 대신해 대장이라는 자리에 올랐을 뿐이다. 참모총장 자리에 있으면서도 나는 수많은 고지전을 지켜봐야 했다. 대구의 육군본부에 앉아 전황판을 바라보면서 손에 땀을 쥘 때가 한 두 번이 아니었다. 그렇게 세월은 흘렀고, 우리가 바라지 않던 형태의 휴전협정이 맺어졌다. 휴전은 그저 휴전일 뿐이었다. 전쟁이 완전히 끝난 것은 아니었다는 얘기다.

2년 동안 한국 전선을 이끌면서 한국군의 자립과 발전에 커다란 기여를 했던 밴 플리트 미 8군 사령관의 퇴임을 지켜봐야 했던 일도 기억에 새롭다. 그 후임으로 왔던 사람이 맥스웰 테일러였다. 그는 제 2차 세계대전 막바지에 미 101공수사단장을 역임했다. 노르망디 상륙작전에서 독일군이 점령하고 있던 프랑스 땅 후방에 공수작전을 펼쳐 용맹을 떨쳤던 장군이었다. 그러나 그는 단순한 무인(武人)이 아니었다. 굳이 표현하자면 그는 노련한 군정가(軍政家)라고 할 수 있었다. 그는 나중의 미 육군 역사에서 차지하는 위상이 매우 높았던 인물의 하나였다. 지금 미 육군의 토대를 만드는 데 가장 큰 기여를 한 사람은 조지 마샬이었다. 그로부터 미 육군의 굵은 인맥이 대부분 자라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 조지 마샬에 버금갈 정도로 미 육군의 발전에 기여를 한 사람으로 맥스웰 테일러가 꼽힐 정도다

 

▲1953 2월 새 미 8군 사령관으로 서울 여의도 비행장에 도착한 맥스웰 테일러 장군(오른쪽 얼굴 보이는 이). 왼쪽은 전임인 밴 플리트 사령관이다/백선엽 장군

 

 퇴임을 앞둔 밴 플리트 미 8군 사령관은 1953 2월 어느 날 나에게 여의도 비행장에 가자고 했다. 그의 후임으로 한국에 부임하는 맥스웰 테일러를 영접하기 위해서였다. 공교롭게도 한국에 부임할 당시 테일러의 계급은 중장이었다. 비행기 트랩에서 내린 테일러는 우선 밴 플리트 장군과 활짝 웃으며 인사를 나눈 뒤 나와 처음 대면했다. 그보다 한참 젊은 내가 대장이라는 계급장을 달고 있던 점이 낯설었던 모양이다. 그는 웃음을 감췄고, 정중한 표정을 지은 뒤 나와 인사를 나눴다. 그는 부임 뒤 곧 대장으로 승진했다.


그의 첫 인상은 냉정하다 싶었다. 그의 평소 신념이 하나 있다. 지휘관은 어느 경우에서든 놀라지 말아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그래서 그는 그 내용을 늘 말하곤 했다. Commander never surprise”라고 말이다. 그는 휴전 뒤의 한국 상황을 바라보고 있던 군정가였다. 단순히 전선 관리를 위해 한국전선에 부임한 게 아니었다. 따라서 그는 전후의 한국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를 면밀하게 따지는 편이었다. 그런 테일러의 눈에 한국군은 미덥지 않게 비치는 적도 있었으리라 보인다.


육군참모총장의 통역

그는 나와 포병장교 진급을 두고 신경전을 벌인 적이 있다. 밴 플리트 사령관의 집념 덕분에 이미 한국군 포병은 착실히 발전하고 있는 상태였다. 그러나 각 사단에 속한 포병의 지휘관 계급이 너무 낮다는 점이 문제였다. 사단장은 소장이나 준장이었으나 예하의 포병 지휘관은 대개가 중령 정도였다. 현대전에 반드시 필요한 포병을 이해하지 못해 벌어지는 해프닝이 한 둘이 아니었다. 어느 사단장은 포병 지휘관에게 “사단에 가까이 와서 쏴라”는 엉뚱한 지시를 하는 경우도 있었다. 좌표와 사각(射角) 등으로 거리를 정밀하게 측정해 사격하는 현대 포병의 시스템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포병 지휘관의 계급을 올리는 일이 급선무였다. 나는 행정참모부장이었던 신응균 소장으로부터 포병 지휘관의 진급에 관한 계획을 보고받은 뒤 그를 실행에 옮기기로 했다. 17개 포병대대를 육성해 각 사단에 배치한 뒤 보포(步砲) 협동 시스템을 운영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한 일이었다. 그러나 새로 부임한 테일러는 그를 가로막고 나섰다. 보병 병과 대령 16, 중령급 장교까지 포함한 30명을 선발해 광주의 포병학교에 입교시킨 뒤 교육을 거듭하던 무렵이었다. 이들의 진급 방안이 거의 성사단계에 이를 무렵 테일러 사령관이 내게 전화를 했다.

<②편에 계속>

 

포병 박정희 준장 승진에 제동 걸어온 경무대  

<①편에서 계속>

서울의 동숭동 미 8군 사령부에 사무실에 들어서는 나를 향해 테일러는 “아무래도 한국군 포병 지휘관 단기 육성방안은 포기해야 하겠다”고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그는 이어 “포병장교는 하루아침에 육성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 평생을 두고 배워도 다 배울 수 없는 게 포병”이라고 했다. 냉정한 거절이었다. 처음 여의도 비행장에서 만났을 때의 냉랭했던 그의 인상이 떠올랐던 순간이기도 했다. 그러나 나는 포병전력을 키워 한국군을 가급적 빠른 시일 내에 현대화의 반석에 올려놓고 싶은 마음을 억누를 수 없었다. 나는 테일러 사령관에게 “그렇다면 우리 포병 지휘관 후보자들의 능력을 테스트라도 해봐야 하는 것 아니냐”고 했다.


사실은 새로 부임한 테일러와 나 사이의 날카로운 신경전이기도 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테일러의 의구심에는 당시 한국군 포병장교들의 입김도 작용했다. 자신들의 입지가 좁아질까를 두려워했던 한국군 포병장교들이 테일러에게 문제를 제기했던 것이다.


돋보였던 박정희 대령

나는 더 물러설 수 없는 입장이었다. 그 자리에서 나는 테일러 사령관에게 한국군의 인사는 한국 육군참모총장의 고유한 권한이라는 점도 완곡하게 설명했다. 아울러 “면밀한 심사를 거쳐 선발한 사람들이니 사령관께서 면담이라도 한 번 하는 게 좋다”고 권유했다. 그러자 테일러 사령관이 태도를 누그러뜨렸다. 그는 동석했던 라이언 미 군사고문단장을 바라보면서 “나 대신 한국군 포병 지휘관 후보자들을 면담한 뒤 보고해 달라”고 했다. 나는 그의 사무실에서 빠져나온 뒤 라이언 미 군사고문단장과 함께 강원도 춘천 북방의 소토고미를 향해 곧장 떠났다.


라이언 미 군사고문단장은 나와 각종 전선에서 고락(苦樂)을 함께 했던 사이였다. 그는 한국군의 사정을 다른 어느 미군의 고위 지휘관에 비해 잘 이해하는 사람이기도 했다. 나와 라이언 고문단장은 한국군 포병 지휘관 후보생들이 교육을 받고 있던 소토고미의 미 5포병단에 도착해 즉시 작업에 들어갔다. 5포병단장인 리처드 메이요 장군은 우리의 요구대로 즉석에서 교육 훈련 중인 한국군 포병 지휘관 후보생들의 명단을 꺼내 건넸다. 지금은 우습게 여겨질지 모르지만, 당시 라이언 고문단장의 면담 석상에서 한국군 육군참모총장인 내가 통역을 맡았다.

 

▲부산의 임시 서울대학교 교정에서 퇴임 직전 명예박사학위를 받은 밴 플리트 미 8군 사령관(앞줄 오른쪽에서 여섯째). /백선엽 장군

 

 육군 병과지만 포병 지휘관으로 진급을 앞두고서 훈련을 받고 있던 대령 16명이 차례대로 면담을 했다. 나는 우리 교육 후보생들의 말을 하나도 빼지 않고 그대로 영어로 통역하면서 라이언 고문단장에게 전했다. 한국군의 사정을 잘 알고 있던 라이언 고문단장은 충실하게 후보생들의 말을 경청했다. 면담을 모두 마친 뒤 라이언 고문단장은 우선 매우 흡족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모두 훌륭합니다. 이런 사람들을 어디에서 구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말했다. 그는 특히 후보자 명단에 올라 면담을 마쳤던 박정희 대령에게 강한 인상을 받았다는 말도 덧붙였다.


테일러 사령관은 라이언 군사고문단장에게 보고를 받은 뒤 더 이상 토를 달지 않았다. 그렇게 해서 한국군에는 16명의 포병 사령관이 탄생했다. 출범 초기의 혼란을 전쟁과 함께 겪으면서 성장했던 한국군에게 있어서도 16명 동시 준장 진급은 꽤 커다란 뉴스에 해당했다. 더구나 그들 모두가 포병이라는 점이 매우 특기할 만한 내용이었다. 여담이지만, 박정희 대령의 진급에 문제를 제기하는 전화가 걸려온 적이 있었다. 경무대의 전화였다. “남로당에 연루됐던 전력이 있지 않느냐? 진급 명단에서 빼자”는 내용이었다. 나는 이미 끝난 일로 생각하고 있었지만 경무대의 태도는 완강했다. 라이언 군사고문단장이 면담을 마친 뒤 극구 칭찬했던 박정희 대령이었다. 아울러 이미 재판을 거쳐 혐의를 벗은 뒤의 일이기도 했다.


한국군 현대화의 큰 흐름을 생각해보면 과거의 사소한 허물은 덮어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 나는 경무대 관계자에게 전화를 다시 걸어 “박정희 대령의 인사안은 건드리지 마라. 우리가 확정한대로 실행할 것”이라고 통보했다. 한국군 포병 지휘관 진급 문제로 테일러와의 사이는 더 가까워졌다. 냉정하고 까다롭기만 했던 그의 태도 또한 날이 갈수록 풀어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역시 냉정한 군정가였다. 한국군이 휴전 뒤의 상황을 어느 정도 관리할 수 있는지를 다른 누구보다 날카롭게 지켜보는 사람이었다 

 

182-(1)(2) 미군 큰 오점 남길뻔 한 금성전투

(24) 끝나지 않은 전쟁
중공군의 막바지 대공세

이 시리즈의 앞부분에서 이미 설명한 싸움이 1953 7 14일 강원도 춘천 북방에서 벌어진 ‘금성 전투’다. 당시의 미 8군 사령관은 역시 맥스웰 테일러였다. 아울러 나는 대구의 육군본부에서 전황을 열심히 들여다보고 있던 대한민국 육군참모총장이었다.


당시 싸움은 매우 중요했다. 휴전이 맺어진 7 27일을 보름 앞두고서 벌어진 전투였기 때문이었다. 그 전투에서 중공군은 약 30만 명을 동원해 금성 일대 아군의 전선이 북쪽을 향해 두드러져 있는 돌출부를 공격했다. 1951 5월 말에 벌어진 중공군 제5 2단계 공세 뒤에 처음 벌어지는 대규모 공세였다.


이 전투에서 중공군은 화천 저수지 일대를 노렸다. 대한민국 유일의 수력발전소가 있던 화천 저수지를 손안에 넣고, 춘천 지역을 위협하는 상태에서 휴전을 맺었다면 중공군은 3년여 벌어진 6·25전쟁 전체에서의 승리를 선전할 수 있었다.


맥스웰 테일러 미 8군 사령관에게도 그 전투는 매우 중요했다. 중공군의 대규모 공세를 막아내고 휴전협정을 맺는다면 그는 나름대로 자리에 충실하다는 평가를 들을 수 있었다. 반대의 경우라면 그에게는 매우 가혹한 결과였다. 화천 저수지를 내주고 겨우 휴전협정에 조인한다면 그는 역대 미 8군 사령관 중 가장 참담한 패전을 장식한 지휘관으로 전락할 수 있었다.


그 전투의 결과는 소상하게 다시 설명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단지, 중공군 공세가 벌어진 7 14일 오후 나는 그와 통화를 했다. “전선이 밀리는데 괜찮겠냐”는 내 질문에 그는 “아직 지켜볼 만하다”고 했다. 그러나 7 15일 새벽 1시경에 내게 전화를 걸어온 그의 목소리는 긴장감에 젖어 있었다.


새벽의 어둠을 가르고 받아든 전화통 속 그의 목소리는 피곤해 지친 듯도 했다. 그는 내게 “백 장군, 당신이 전선으로 가줄 수 있겠소”라고 물었다. 나는 “갈 수 있다”고 했다. 테일러는 “지금 장맛비가 내려 내 전용기를 대구로 보낼 테니 빨리 올라와 주시오”라고 말했다. 그의 요청에 따라 나는 빗속을 뚫고 여의도에 내린 뒤 다시 소토고미로 가서 전선을 이끌었다. 내 활약상을 이야기하고자 함은 아니다. 나는 미 8군 사령관의 다급한 요청에 따라 전선에 도착해 그동안의 전쟁을 통해 익힌 한국 육군의 능력을 선보였다

 

▲반공포로를 전격적으로 석방하기 직전 이승만 대통령(가운데 앉은 사람)이 백선엽 육군참모총장 등 군 주요 지휘관을 소집한 뒤 촬영한 사진. /백선엽 장군

 

내 명령에 따라 한국군의 모든 창고가 활짝 열려 물자의 이동이 벌어졌다. 아울러 제주도 모슬포와 논산에 있던 훈련 병력이 열차 편으로 급히 춘천에 모여들었다. 미군의 창고도 내 요청에 따라 활짝 열렸다. 아주 이른 시일 안에 병력이 움직이고 물자가 이동했다.


장관을 이뤘던 경춘가도

서울과 부산에서 급히 징발한 민간 트럭이 한국군과 미군의 창고에서 나온 화약과 전시 물자를 싣고 춘천으로 움직였다. 서울에서 춘천을 잇는 유일한 도로였던 경춘가도는 그런 트럭으로 거의 주차장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붐볐다. 우리 대한민국 건국 뒤에 벌어진 가슴 벅찬 장관이었다.


그런 우리의 역량은 결국 전선에서 대규모 중공군의 공세에 허덕이던 한국군 2군단의 뒤를 받쳤다. 물론 맥스웰 테일러 미 8군 사령관 또한 병력의 이동을 살피기 위해 경기도 포천 이동으로 와서 나와 만나기도 했다. 그렇게 해서 결국 중공군 공세는 이틀 동안 이어지다가 아군의 역량에 막혀 다시 걸음을 돌려야 했다.


이 전투는 미군에게 매우 인상적이었던 모양이다. 우선 맥스웰 테일러 미 8군 사령관은 전투 결과에 매우 흡족했다. 자칫 커다란 패전의 흔적을 남긴 채 휴전협정 조인을 받아들여야 했던 그에게는 아주 다행스러운 결과였던 셈이다. 이를 지켜보던 미군 수뇌부 또한 마찬가지였다.


로튼 콜린스 당시 미 육군참모총장 또한 그의 회고록에서 “금성 전투에서 한국군이 그 정도의 능력을 발휘할 줄 몰랐다”고 적었다. 하룻밤 사이에 9㎞가 밀렸던 금성 전투에서 한국군이 후방의 강력한 동원력을 발휘하면서 중공군 공세를 막아낸 점이 경이롭게 비쳤던 것이다.

<②편에 계속>

 

<①편에서 계속>

그동안의 한국군은 중공군에게 쉬운 먹잇감 정도로 비칠 경우가 많았다. 개전 초반과 이듬해 중공군 공세에서 전선을 내주고 등을 보이며 후퇴하기에 바빴던 한국군의 인상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 후에 한국군은 놀라울 정도의 성장세를 보였다.


각종 고지전에서 한국군은 좀체 뒤로 물러선 적이 없었다. 현대의 전투를 이해하면서 세계 최강의 미군, 우리를 돕기 위해 이 땅에 올라선 각 참전국의 뛰어난 전투력을 보면서 배운 결과였다. 이제 우리는 자신을 위협하며 다가서는 적에게 어떻게 맞서며 싸움을 벌일까에 관해 알아가고 있었던 셈이었다.


휴전은 그런 와중에 홀연히 다가왔다. 나는 육군참모총장의 신분으로 판문점에 가서 귀환하는 아군 포로들을 맞았다. 군악대가 서양의 곡을 연주하는 점이 마음에 걸렸다. 나는 군악대장에게 다가가 “가능하면 우리 민요를 연주하는 게 좋지 않겠느냐”고 했고, 결국 군악대는 우리 민요를 연주하며 귀환하는 포로들을 맞이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못내 불만이었다. 휴전협정에 한국의 대표를 보내지도 않았다. 대통령은 휴전 직전에 반공포로를 대거 풀어버려 미국과 서방 진영으로부터 심한 공격도 받은 처지였다. 연로했지만 결코 기를 꺾지 않던 이승만 대통령은 그래도 늘 “북진통일”을 강조하고 있었다.

 

그러나 군사적인 견지에서 볼 때 대통령이 주장하는 북진은 어려웠다. 단독으로 휴전선을 넘어 전쟁에 다시 불을 붙인다는 일은 정치적 수사로 가능했지, 군사적으로는 불가능했다. 그런 분위기였지만 휴전은 눈앞의 현실로 닥치고 말았다.

 

▲휴전회담이 열리고 있던 판문점 인근에서 중공군 초병이 경계를 서고 있다. /US NAVY 제공

 

미군 철수에 따른 문제

이제 남은 문제가 있었다. 한국의 전선에서 발을 빼려는 미군의 역량을 우리가 어떻게 이어받아 단독으로 대한민국을 지킬 수 있는가 하는 문제였다. 미군은 이 땅에서 철수하려 했으나 휴전 뒤 공산군의 도발을 어떻게 효과적으로 막을 수 있느냐 하는 문제를 심각하게 고민하는 편이었다. 가장 시급한 작업이 하나 있었다. 휴전협정으로 인해 양측은 휴전선으로부터 각 2㎞씩 물러나 비무장지대를 형성했다. 우리로서는 현재의 방어선에서 물러나 비무장지대가 시작하는 지점에 방어진지를 구축해야 했다. 그곳에 강력한 진지를 만드는 일, 이를테면 ‘축성(築城) 작업’이라고 부를 수 있었다.


미군의 철수는 동시에 벌어졌다. 그러나 전력 집중이 수월한 곳인 서부전선 일대에는 미군이 계속 남아 방어를 펼치기로 했다. 나머지 지역의 전선에는 대개 한국군이 서야 했다. 그곳의 진지는 땅을 더 깊이 파야 했다. 미군은 뛰어난 화력이 뒷받침을 해줬지만 한국군의 경우는 그렇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미군을 비롯한 유엔군 대부분은 철수준비로 어수선했다. 서부전선을 맡았던 미 1군단을 제외한 다른 미군과 유엔군 부대들은 각자 철수를 위한 스케줄을 만들었고, 그에 따라 축제 분위기에 휩싸였다. 미군 8개 전투사단, 영연방에 속한 1개 사단 규모의 부대, 다른 참전국 1개 사단 병력이 떠나가고 그 자리를 한국군이 맡아야 하는 상황이었다.


미군과 유엔군이 남기고 간 자리에 서야 했던 한국군 사단은 모두 16개였다. 전쟁 전의 10개 사단보다 수적으로 성장했고, 질적으로도 발전한 점은 사실이지만 서부전선 일대를 제외한 휴전선 전체를 책임지기에는 매우 부족했다. 적어도 적이 침공할 경우 즉시 나설 수 있는 전투사단을 20개로 증강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경제력이 빈약해 물자와 장비, 화력을 스스로 해결할 수 없던 대한민국으로서는 매우 어려운 작업이었다. 미군이 도와주지 않는다면 자체적으로 그를 마련할 방법이 우리에게는 없었던 것이다. 냉정한 군정가 맥스웰 테일러 미 8군 사령관은 나름대로 치밀한 계획을 세웠다.


휴전 뒤 2~3년 안에 미군 2개 사단이 서부전선을 담당하고 나머지는 한국군에게 모두 맡긴다는 내용이었다. 그에 따른 한국군 재편성이 이뤄지고 있었다. 따라서 미군에게 직접 배우는 일이 잦아졌다. 그들로부터 하나라도 더 배워둬야 하는 게 한국군의 실정이었다.


한국군 3, 5, 6군단의 창설이 임박했다. 군단장과 예하 사단장의 인사가 분주했다. 그들은 현지에서 방어 중인 미 군단으로부터 철저한 교육을 받았다. 3군단과 5군단이 휴전 뒤에 만들어졌고, 6군단은 이듬해 출범할 계획이었다. 그 작업으로 나는 휴전 직후 영일이 따로 없었다.

 

183-(1)(2) 막대한 양의 군수물자 미군으로부터 인도 받는 한국군

(24) 끝나지 않은 전쟁
미군이 남기고 가는 무기

1953년 7월 27일의 휴전 뒤 나는 그런 전쟁 뒤의 복구 사업으로 인해 쉴 틈이 거의 없었다. 전후 복구 사업에 필요한 물자와 자금 등은 대개 미국에서 건너왔다. 민간 차원의 협조 또한 없을 수 없었으나, 당시 한반도에서 가장 커다란 힘을 행사하던 존재는 미군이었다.

전쟁 복구 사업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전시 물자의 일부를 전용해 민간의 시설을 다시 세우기도 했고, 미군이 물자를 이동시키는 경로를 통해 미국 본토로부터 물자 등을 공급 받아야 했다. 그런 모든 과정이 미군과의 원활한 협조를 통해 이루어졌던 까닭에 내 임무 또한 가볍지 않았다.

미국으로 철수하는 참전 미군은 많은 물자를 남기고 갔다. 우선 무기와 장비 등이 그랬다. 각종 총기는 물론이고 탄약과 유류(油類), 진지를 구축하는 데 필요한 축성(築城) 장비 및 자재, 공병과 병참 등이 사용하고 남긴 모든 물자 등은 우리에게 정말 요긴했다.

미군으로부터 받아낼 수 있는 물자와 장비는 최대한 받아내는 게 우리의 목표이기도 했다. 경제력이 빈약한 한국의 당시 사정으로 볼 때 미군이 남기고 떠나는 물자는 당장 우리 군이 무장하는 데는 빼놓을 수 없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미군은 후한 편이었다. 남기고 가는 상당수의 물품을 한국군이 사용하도록 배려했다.

그러나 8인치 곡사포는 어떤 이유에서인지 미군의 인계 물품 목록에서 빠져 있는 점이 눈에 띄었다. 8인치 곡사포는 적의 강력한 진지를 파괴할 수 있는 155㎜에 비해 더 화력이 셌다. 상황이 심각할 때 핵을 투사할 수도 있는 최고 성능의 야포였다.

나는 이 문제 때문에 맥스웰 테일러 미 8군 사령관을 찾아갔다. 한국군의 독자적인 방어를 도우려면 8인치 곡사포도 내줘야 한다는 점을 설득했다. 테일러 사령관과 나는 이미 가까운 사이로 변한 상태였다. 휴전 직전의 대규모 중공군 공세가 벌어졌던 금성전투에서 함께 싸워 그를 물리친 뒤였기 때문이다.

테일러 사령관은 내 요청에 기꺼이 응했다. 전략적인 무기에 해당한다는 점 때문에 인계를 꺼렸으나 그의 응낙에 따라 문제는 수월하게 풀렸다. 그로써 전선에서 미군이 운용하던 각종 무기는 한국군의 수중으로 넘어올 수 있었다. 105㎜와 155㎜, 8인치 곡사포에다가 M-46전차까지 받았다.

수를 헤아릴 수 없는 막대한 양의 화약, 탄약, 포탄 등도 마찬가지였다. 아울러 트럭을 비롯한 각종 공병장비도 받을 수 있었다. 한국군이 향후 4~5년을 충분히 쓰고도 남을 양이었다.

 

▲휴전 직후 한국군은 하루 빨리 전력을 증강해 미군 철수로 생긴 공백을 메우면서 휴전선 단독 방어에 나서야 했다. 1953년 군 부대 관계자들을 격려하고 있는 백선엽 육군참모총장의 모습이 보인다. /백선엽 장군


학교, 병원, 고아원을 세우다

전쟁이 벌어져 한국 땅에 올라선 미군은 연 인원 200만 명에 달했다. 세계 최강의 전투력을 지닌 미군과 물자, 장비 등이 쉴 새 없이 한국에 올라서면서 미국의 강력한 힘은 어느덧 한국 전역에 퍼지고 있었던 셈이다. 전국 곳곳에서는 활발한 복구 사업이 펼쳐졌다.

사업의 명칭은 ‘AFAK(Armed Forces Assistance to Korea)’였다. 미군은 무기와 장비 등만을 전해준 것이 아니라 자신의 창고도 열었다. 복구를 위해 필요한 시멘트와 철근, 목재와 유리 등은 전부 그곳에서 나왔다. 사업 진행에는 미군과 함께 우리 군대도 대규모로 나섰다.

무너진 학교 900여 개가 그런 사업을 통해 다시 세워졌다. 연세대학교의 세브란스 병원과 대구 효성여자대학교, 강릉의 관동대학교 등이 대표적인 사례였다. 교회의 재건도 눈부셨다. 물자와 장비 등을 제공하는 미군의 문화적 배경 때문이었을 것이다. 아울러 200여 개의 병원, 전쟁고아들을 수용하기 위한 시설도 많이 세워졌다. 그렇게 전후 복구 사업의 속도가 빨라지면서 어느덧 해가 저물어갈 무렵이었다. 맥스웰 테일러 미 8군 사령관이 만나자는 전갈을 보냈다.

그는 내게 한국의 야전군(Field Army) 창설 계획을 말했다. 동아시아에서는 유례가 없는 대규모의 야전군 창설이었다. 단독으로 모든 작전을 소화할 수 있는 규모였다.
<②편에 계속>

 

국군 전선 지휘하기 위해 낮은 직급 전출도 감수하는 백선엽 장군

<①편에서 계속>

테일러 사령관은 내게 “당신은 지금 육군참모총장이어서 새로 창설하는 야전군 사령관으로 옮긴다면 직급이 한 단계 내려간다. 그러나 155마일의 휴전선을 한국군이 단독으로 방어하는 체계를 갖추기 위해서는 이 야전군 창설이 반드시 필요하다. 이 야전군을 이끌기 위해서는 풍부한 야전 경험을 갖춘 사람이 필요한데, 내가 볼 때는 당신이 적임자”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거듭 내 의중을 물었다.

직급으로 따지면 한 단계 낮은 곳으로 갈 수 있겠느냐는 물음이었다. 나는 기꺼이 그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단독방어를 위한 한국군의 전투력 증강을 이루기 위해서는 직급의 강등은 결코 문제가 아니었다. 단지, 내가 그 방대한 규모의 야전군을 조직하고 통솔하는 능력이 있느냐는 점이 문제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1야전군 출범 문제가 매듭이 지어졌다. 내가 병력 40만 명의 대규모 야전군 초대 사령관을 맡기로 했고, 신임 육군참모총장에는 정일권 장군, 신설하는 연합참모본부 총장에는 이형근 장군이 가기로 했다. 1954년 2월 14일 정식 인사명령이 내려졌다.

정일권 장군과 이형근 장군은 이 날짜로 별 넷의 대장에 올랐다. 테일러 미 8군 사령관과의 사전 협의에 따라는 나는 1953년 12월 김웅수 2사단장을 1야전군 참모장으로 내정했다. 그와 함께 1야전군 창설 요원들을 구성해 미 10군단이 있던 강원도 인제군 관대리로 파견했다. 대규모 야전군 창설에 필요한 내용을 준비시키기 위해서였다.


현대 한국 육군의 초석

매우 중차대한 작업이었다. 병력 40만 명을 거느리고 서부전선 일부를 제외한 나머지 휴전선을 모두 자체 역량으로 방어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거쳐야 하는 길목이기도 했다. 나아가 현대 한국군의 초석을 닦는 작업이기도 했다. 그러나 우리 모두에게는 그를 수행할 만한 능력이 갖춰지지 않은 상태였다.

따라서 꼭 필요했던 일이 교육이었다. 세계 최강의 군대인 미군으로부터 배워야 하는 일이었다. 인제군의 관대리에 있던 미 10군단은 그런 한국군의 홀로 서기를 위한 요람과도 같았다. 1야전군을 실제 이끌 참모와 지휘관들은 모두 이곳에서 엄격한 교육을 거쳤다.

 

▲한국군 부대 창설식에 참석한 이승만 대통령 내외가 미군 지휘관들과 인사를 나누고 있다. 이승만 대통령은 군대 증강에 관심이 매우 높아 부대 창설식이 열리면 노구를 이끌고 반드시 참가했다. /백선엽 장군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정식 인사명령이 내려진 뒤 나는 미 10군단장 부르스 클라크 장군과 참모장 에이브럼스 참모장으로부터 교육을 받기 시작했다. 클라크 군단장은 나중에 유럽 주둔 총사령관을 역임했던 인물이었다. 에이브럼즈 참모장 역시 매우 유명한 인물이다.

제2차 세계대전 때 패튼 장군 밑에서 전차대대장을 역임했으며, 후일 미군이 신형 전차에 그의 이름을 붙일 정도로 전차 분야에서 탁월한 능력을 선보였던 사람이었다. 매우 능력이 뛰어났던 미군의 지휘관으로부터 나와 참모진, 주요 지휘관 등은 작전 이론과 전술 운용 및 부대 지휘, 참모 절차, 보급과 병참 등 군대와 관련이 있는 모든 분야를 배웠다.

특기할 사람은 미 8군 부사령관 새뮤얼 윌리엄스 소장이었다. 그는 야전군 창설 당시 해당 한국부대를 모두 시찰한 뒤 개선해야 할 사항을 정리해 테일러 미 8군 사령관에게 보고한 일이 있다. 그 보고서를 받아 본 나는 깜짝 놀랐다. 한국군 부대의 식당 위치에 관한 문제점까지 낱낱이 들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그에게 “도대체 어떤 비결을 지닌 것이냐”고 물은 적이 있다. 그는 웃으면서 “함부로 공개할 수 없는 비밀인데…”라면서 웃더니 자신의 숙소에 있던 캐비닛을 공개했다. 그는 “30년 동안 군대생활을 하면서 보직을 거칠 때마다 챙기고 점검했던 체크리스트”라고 했다.

나는 그 체크리스트가 아주 탐이 났다. 그를 모두 빌려와서 타자로 친 뒤 우리 부대 운용에 필요한 자료로 삼도록 했다. 아주 장구한 기간과 시련을 거쳐 성숙한 존재가 미군이었다. 그들이 지닌 노하우를 잡아내 우리의 자양분으로 삼는 일이 당시에는 매우 긴요했다. 몸을 낮춰야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는 법이다.

우리는 그런 과정을 겸허하게 거쳤다. 그리고 1954년 5월 강원도 원주 사령부에서 이승만 대통령 내외와 귀빈들, 국군 주요 지휘관과 유엔군 고위 장성 등이 참석한 가운데 1야전군 창설식이 열렸다.

4개 군단, 16개 사단을 거느린 동아시아 최초의 대규모 야전군 창설이었다. 우리는 그로써 휴전선 단독 방어를 위한 초석을 다졌다. 아울러 현재의 60만 대군을 거느린 대한민국 육군의 기초를 그로써 반듯하게 세울 수 있었다
.

184(完)-(1)(2) 내무부 장관 제안하는 이승만과 군인의 삶 다짐하는 백 장군

(24) 끝나지 않은 전쟁-시리즈 完.

늘 전쟁터를 서성이다

 

1946년의 겨울은 혼란스러웠다. 고향인 평양을 떠나 38선 이남으로 내려와 서울의 풍경을 접했을 때 느낌이 그랬다. 군사영어학교라는 곳에 들어가 한반도 남쪽의 군문(軍門) 생활에 접어든 지 14년에 나는 군복을 벗었다. 4.19가 벌어진 직후였다. 그런 뒤에 나는 외교관 생활을 했다. 1960년 자유중국(대만) 대사를 시작으로, 이듬해 5.16이 벌어진 뒤에는 다시 주(駐)프랑스 대사로서 서방 6개국, 아프리카 13개 국가의 대사를 겸임했다. 우리의 국력이 약해 여러 나라에 동시에 대사를 파견할 수 없었던 실정을 보여주는 장면이다. 그 뒤 나는 캐나다 대사를 역임한 뒤 귀국했다.

박정희 대통령의 배려로 교통부 장관을 약 1년 반 정도 지낸 뒤 한국종합화학 사장 등을 맡아 석유화학 산업의 근기(根基)를 다지는 데 일조했다. 산업화를 이뤄 국력을 키우는 일은 마치 전쟁과도 같았다. 나라가 부유해져야 병(兵)을 키우는 법이다.

 

▲용산 전쟁기념관에서 백선엽 장군이 전사자 명부를 보고 있다. /조선일보 DB

 

동양사회의 오랜 꿈 부국강병(富國强兵)은 선후(先後)의 관계를 말하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나라가 부유해지지 않으면 강병의 꿈은 이뤄지지 않는다는 식이다. 해방 뒤의 혼란에 김일성 군대의 남침은 그 도를 크게 더하고 말았다. 그래도 다행이라면 미군의 신속한 개입으로 우리는 우선 김일성의 적화야욕을 꺾은 뒤 미국이 주도하는 질서에 편승해 국력을 놀라울 정도로 키우는 데 성공했다.

전쟁 뒤의 혼란을 제대로 정리하고 나서 산업화에 전력을 기울인 까닭이다. 그 모든 과정은 정말이지, 전쟁과 다르지 않았다. 나는 4.19 뒤 외교관으로 국제질서가 요동을 치는 현장에서, 박정희 대통령의 강한 의지로 펼쳐지는 산업화의 일선에서 그런 점을 깊이 체감할 수 있었다.

나는 외교관으로 약 10년 동안 해외에 주재하면서도 내가 겪었던 참혹한 전쟁의 의미를 잊지 않았다. 그 당시 내게는 이상한 버릇이 하나 있었다. 프랑스에 대사로 주재할 때였다. 사람들이 간혹 나를 찾아왔다. 그들과 함께 여행을 나서는 적이 몇 차례 있었다. 그러나 그럴 때마다 내 발걸음은 유럽의 옛 전쟁터로 향했다.

다른 이들을 남겨두고 혼자서 전쟁터 주변을 기웃거리는 내 모습을 접하면서 여러 사람들은 의아심을 품기도 했다. 나는 나폴레옹 군대와 영국의 웰링턴 군대가 격렬하게 맞붙었던 워털루 전쟁터를 아주 여러 번, 미군 주도의 연합군이 상륙했던 프랑스 노르망디의 유타 비치 등을 자주 배회했다. 2차 세계대전 막바지에 미군이 진격하면서 독일군과 격렬한 싸움을 벌였던 라인강의 강변 또한 내가 자주 찾던 곳이었다.

나는 그곳에서 싸움을 회고했다. 사람 사이의 전쟁은 왜 벌어지는가, 그리고 전쟁은 어떻게 펼쳐지는가, 누가 그런 싸움에서 이기며 어떤 이가 질까, 왜 이 지형에서 커다란 싸움의 종지부를 찍는 장면이 벌어졌을까 등을 묻고 또 물었다.


“군인으로 남겠습니다”

전쟁은 모든 것을 앗아갈 수 있는 무서운 일이다. 사람의 생명은 그런 싸움에서 연기처럼 사라지고, 국가와 사회는 이루 말할 수 없는 상처를 품어야 한다. 그런 참혹한 싸움에 나서는 군인의 어깨는 따라서 매우 무거울 수밖에 없다.

내게 군대를 좀 더 일찍 떠날 기회가 한 번 있었다. 이승만 대통령의 제안 때문이었다. 1956년 5월 25일에 대통령과 부통령 선거가 있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신익희 후보가 갑자기 사망하는 바람에 3선에 성공했다. 부통령 투표가 화제였는데, 자유당 이기붕 후보가 민주당 장면 후보를 누르고 당선했다. 그러나 대구에서 개표 시비가 벌어져 정국이 매우 소란했다.

6월 어느 날 이승만 대통령이 나를 호출했다. 경무대에 들어서자 대통령은 “자네, 내무부 장관 자리를 맡게”라고 했다. 개표 시비로 사직한 김형근 내무장관의 후임으로 오라는 제안이었다. 그러나 나는 망설였다.

이승만 대통령 시절의 내무부 장관은 매우 비중이 높은 자리였다. 그로써 개인적인 영달은 이루겠지만, 전국 각 지역의 행정과 선거 등을 관리하는 자리여서 정치적으로는 매우 민감했다. 나는 즉답을 피하고 “며칠 생각해 본 뒤 결정하겠다”고만 했다.

사흘 뒤 나는 이 대통령을 찾아가 의견을 피력했다. 가족과 상의한 결과였다. “죄송하지만, 저는 군인으로 일생을 마치고 싶습니다. 끝까지 군에 남을 수 있도록 해 주십시오”라고 했다. 그러자 대통령은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그렇다면 자네 뜻대로 하게”라고만 했다.

<②편에 계속>


스러지지 않는 부국(富國)과 강병(强兵)의 꿈

 <①편에서 계속>

그러나 그런 내 뜻은 이뤄지지 않았다. 4.19가 벌어진 뒤 타의에 의해 군문에서 일찌감치 떠났고, 예기치 않았던 외교관 생활에 한국의 석유화학 산업 초석 닦기에 나서고 말았다. 그럼에도 내 마음은 전쟁터를 쉬이 떠날 수 없었다. 외교관 시절에 유명 전쟁터를 찾아다녔고, 석유화학산업에 종사할 때도 각종 전쟁 기록을 찾아 읽었다.

그런 나의 습성은 아무래도 참혹했던 6.25전쟁터를 누볐던 기억 때문이라고 본다. 전쟁의 기록을 살피면서도 내 마음은 늘 60여 년 전 이 땅에서 벌어졌던 전쟁터를 향해 움직였다. 나는 ‘그 싸움에서 제대로 싸웠던 것일까’를 물으면서 말이다.

당시의 전쟁에 나섰던 한국군의 주요 지휘관은 대개 경험이 없었다. 그를 대신할 교육의 기회도 충분치 않았다. 따라서 느닷없이 벌인 김일성 군대의 침략 전쟁의 초반에는 우리 모두 당황했다. 쉽게 나아가고, 쉽게 무너져 등을 돌리는 일이 허다했다.

싸우려는 의지는 약하지 않았으나 싸움터의 참혹함을 견디면서 침착하게 적의 약점을 노리는 일에는 강하지 않았다. 낙동강 전선에서 북진할 때는 매우 용감했으나, 중공군의 개입으로 전선이 요동을 칠 때는 쉽게 무너지는 모습도 보였다. 오랜 훈련과 치밀한 조직을 통해 성장한 군대가 아니었던 까닭이다
.

/백선엽 장군.


나를 이겨야 남을 이긴다

따라서 중공군 개입과 1951년 봄까지 벌어진 중공군의 대규모 공세에서 보였던 우리의 싸움 방식은 스스로 지닌 기질, 습성, 사고 등이 여과 없이 그대로 드러난 경우라고 봐야 옳다. 그런 방식은 여러 교훈을 준다. 감성적 반응은 활발했지만 전쟁의 전체 흐름을 파악하면서 움직이는 이성적 측면은 부족했다.

승기를 잡았을 때 나아감은 빠르지만, 불리한 경우에 도달하면 스스로 공황상태에 쉽게 빠져들어 물러섬이 또한 신속했다. 전쟁의 개념을 이해하지 못해 옆에서 함께 싸우는 아군과의 연계를 쉽게 잊은 점도 눈에 띈다. 그로써 전선을 허물어뜨리고 옆의 아군에게도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군인에게는 삶과 죽음을 가르는 상황이 자주 닥친다. 결정적으로 목숨을 내걸고 싸우려 할 때가 전쟁터에 선 군인에게는 잦다는 얘기다. 그럴 때의 결단(決斷)이 부족하다는 점도 당시 전쟁터의 한국군 지휘관에게 자주 눈에 띈다. 현리 전투에서 3군단이 무너졌던 경우가 대표적이다.

전쟁에서의 승리는 두려움을 지배하는 일이다. 피비린내 가득 풍기는 전쟁터에 서는 사람에게 두려움은 아주 일반적인 감성이다. 그러나 그런 두려움을 이기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 두려움에 젖어 스스로를 먼저 무너뜨리는 사람이 있다.

오랜 훈련, 치밀한 조직, 그를 뒷받침하는 화력과 장비 및 물자 등이 싸움의 핵심적인 요소다. 그러나 내면적인 요소를 따지면 결국 두려움을 비롯한 사사로운 감정을 누가 억누르고 싸움터에 나서는가가 가장 중요하다. 나는 그 점을 극기(克己)라는 낱말로 표현할 때가 많은 편이다.

장병(將兵) 모두에게 필요한 일이다. 일반 사병들은 오랜 훈련을 통해 기능을 숙지하면서 유사시에 대오로부터 이탈하는 가능성을 없애야 한다. 장교들 또한 그와 다르지 않다. 오랜 사고와 훈련을 통해 전쟁이 벌어졌을 때 사사로움에서 벗어나 싸움을 이어가며 승리에 다가설 수 있어야 한다.

제 나라 군대가 그렇게 가도록 하는 일이 중요하다. 정치적으로는 무풍(無風) 지대를 형성하고, 장병 개개인이 군대의 조직을 위해 헌신적으로 나설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아낌없는 지원이 덧붙여져야 하고, 나라 경제의 강고함을 이뤄 물자와 화력 등을 철저하게 받쳐줘야 한다.

우리는 그렇게 하고 있을까. 우리 장병들은 60여 년 전의 전쟁 경험을 살려 전기(戰技)와 함께 정신적 역량을 제대로 쌓고 있을까. 그럴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삶의 모든 과정이 싸움과 다름이 없다면, 우리사회는 그런 싸움의 철리(哲理)를 얼마나 깨닫고 있을까. 나는 그 점이 두루 마음에 걸려 이 회고를 적었다. 성원해주신 많은 독자들께 감사드린다.

오늘의 대한민국을 위해 이름을 드러내지 않고 스러져간 6.25전쟁의 숱한 영웅들을 기리며-. 끝.

<정리=유광종, 도서출판 ‘책밭’ 대표>

 

2017.06.05  대한민국 지킨 참군인 백선엽 장군, "내가 선두에 서겠다. 내가 물러서면 너희들이 나를 쏴라!"

백선엽 장군은 6·25전쟁 당시 부산 교두보 방어작전의 최대 결전이었던 다부동전투를 승리로 이끈 명장이다. 만약 다부동전투에서 우리가 패했다면 지금의 대한민국은 존재할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그는 전쟁 중 평양에 첫 번째로 진군했고 서울 재수복의 선봉에 섰던 명장이기도 하다. 32세의 나이로 국군 최초로 대장에 오른 ‘최고의 야전사령관’이기도 했고 휴전을 전후해 두 번이나 육군참모총장을 역임한 인물이다.


사진 : 백선엽 장군 제공

 

올해는 6·25전쟁 발발 67주년이 되는 해다.

전쟁을 체험했거나, 체험하지 않은 세대라고 하더라도 6·25전쟁 하면 떠올리는 인물이 있다. 백선엽 장군이다. 그의 이름은 지금도 참군인의 전형으로 6·25전쟁의 영웅으로 회자된다. 우리 대한민국이 6·25전쟁에서 적화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바로 백선엽 장군 같은 참군인들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백선엽 장군. 그는 6·25전쟁 당시 부산 교두보 방어작전의 최대 결전이 벌어진 다부동전투에서 ‘세계 전사상 최후의 사단장 돌격’을 감행했던 인물이다. 만약 다부동전투에서 우리가 패했다면 지금의 대한민국은 존재할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그는 전쟁 중 평양에 첫 번째로 진군했고 서울 재수복의 선봉에 섰던 명장이기도 하다. 32세의 나이로 국군 최초로 대장에 오른 ‘최고의 야전사령관’이기도 했고 휴전을 전후해 두 번이나 육군참모총장을 역임했다.

백선엽 장군은 올해 97세다. 건군(建軍)에도 참여한 백 장군은 60년 전인 1950 6월 불과 서른 살의 나이에 1사단장으로 6·25를 맞았다.

1950
8월 낙동강 방어선상의 다부동전투는 미국 전사에도 6·25전쟁 최악의 전투로 기록됐다. 그는 이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그가 지휘한 1사단은 다부동전투에서 8000명가량의 병력으로 북한군 2만여 명의 총공세를 한 달 이상 막아냈다. 그는 6·25전쟁 발발부터 휴전까지 1000일 이상을 전장에서 보낸 야전군 사령관이었다.


부친 사망 후 집단 자살까지 생각했던 백 장군 가족

 

백선엽 장군은 1920 11 23일 평안남도 강서군 덕흥리에서 백윤상·방효열 부부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동생 인엽(후일 육군 중장으로 예편) 1923년생인데 동생이 태어난 그 2년 후에 아버지가 별세했다.

부친이 사망한 이듬해 백 장군의 가족은 고향 덕흥리를 떠나서 평양으로 갔다. 모친이 어떻게든 아들 둘에게 교육의 기회를 주겠다는 일념에서였다. 평양에서 새로운 생활이 시작되었지만 2년도 채 지나지 않아 생활비가 바닥났다. 어머니가 선택한 길은 가족 4명의 집단자살이었다. 백 장군의 회고다.

“뒷날, 어머니와 누나에게 들은 얘기지만, 일가 넷이 대동교에서 투신하려고 집을 나섰어요. 죽으러 가는 길에 누나가 어머니에게 ‘나무도 3년이 되어야 뿌리를 내리는데, 우리도 3년은 견뎌야 할 것 아닙니까’라고 말했대요. 어머니는 열세 살 딸의 하소연을 듣고서야 정신이 번쩍 들어 귀가했다고 합디다. 죽음 일보 직전까지 갔던 어머니와 누나는 그로부터 밤낮으로 일했습니다. 어머니는 ‘평안고무’에 취업해 고무신을 만드셨고, 누나는 ‘산십’이라는 견사 회사에 취직했어요. 어느새 안정을 찾았지요. 

저축도 늘어나 신리에다 집 한 채를 사서 이사하게 되었죠. 누나는 곧 석탄 판매상을 하던 댁으로 시집을 갔는데, 어머니가 그 사업을 도우면서 경제적 여유도 생겼습니다.”


소학교 졸업 후 그는 평양사범학교와 평양상업학교 두 곳에 합격했는데 결국 평양사범을 선택했다

백 장군은 1939년 평양사범을 졸업하고 1940년에 만주군관학교에 입교한다. 1941 12월에 제9기생으로 졸업했는데 그가 졸업한 시기는 이른바 ‘태평양전쟁’이 발발한 시기였다. 그는 ‘견습 사관’으로 동만주에 주둔하고 있던 만주군 보병 제28(연대급)에서 근무했다. 이어 소위로 진급해 1943년에는 함경북도와 접하는 간도성, 즉 현재의 연변조선족자치주에 있던 간도특설대로 전임됐다.

그는 그곳에서 많은 한국인을 만났다. 그곳 군관의 대부분이 한국인이었기 때문이다. 이 부대는 후일 국군 장성을 다수 배출했다. 한국전쟁 중 제1군단장으로 전투를 벌였던 김백일(1군단장 재임 중이던 1951년 비행기 추락사고로 전사) 장군은 그곳 중대장이었다. 한국 해병대의 ‘아버지’로 불리는 신현준 장군과 김석범 장군, 그리고 훗날 육군대장으로 진급한 임충식 장군도 그곳 출신이었다. 그 부대 출신으로 6·25전쟁 중 연대장급으로 활약한 이는 부지기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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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전쟁에서 만나게 될 적장들을 평양에서 미리 만나다

▲1951년 7월, 망중한을 즐기는 유엔 측 휴전회담 대표들. 왼쪽부터 미8군 참모부장 행크 호디스 소장, 알레이 버크 제독, 연락장교 이수영 대령, 백선엽 장군.

 

광복 후 그는 부대를 탈출해 아내와 어머니가 먼저 가서 기다리고 있는 평양으로 돌아왔다.

평양으로 돌아온 그는 외가 쪽 친척인 송호경씨의 소개로 민족지도자 조만식 선생의 비서로 일하게 된다. 조만식 선생은 평안남도 인민정치위원회를 조직해 평양 일대의 치안 유지에 힘쓰면서 장차의 독립에 대비하고 있었다. 그곳에서 그는 김일성도 자주 봤다고 한다.

“당시 저는 사무소 입구에 책상 하나를 놓고 접수계 역할을 했는데, 김일성은 사무실을 자주 방문했습니다. 그때 본 김일성은 호리호리하고 머리를 바짝 치켜 깎은 30대 청년으로서 양복 차림이었죠. 조만식 선생은 그를 ‘김일성 장군’이라고 깍듯하게 불렀지만, 저는 너무 젊은 그와 1910년대부터 명성이 높았던 ‘항일의 노영웅 김일성 장군’을 연결해서 생각지는 않았습니다. 그저 내가 복무하던 간도특설대에 쫓겨 소련으로 도피했던 중국 동북항일연군의 조선계 부대의 김일성이 아닌가 하고 생각했습니다. 사실, 그와 행동을 함께했던 최현(후일의 인민군 대장), 최용건(후일의 인민무력상), 김책(6·25 남침 시 전선사령관) 등도 우리 사무실에 들락거렸는데, 이름이 귀에 익어 백두산 일대에서 게릴라전을 전개하던 사람들이라고 확신은 했습니다.”

6
·25전쟁 당시 남북의 군대를 각각 이끌던 적장들과의 숙명적 만남이 이루어졌던 것이다. 물론 훗날 동지가 된 사람들과의 만남도 있었다.

“연락이 편리한 사무소여서 많은 옛 전우와 지인이 찾아왔습니다. 정일권(만주군 대위 출신, 후일 육군대장·육군참모총장·국무총리·국회의장 역임)씨도 여기서 처음 만났습니다. 정일권씨와 얘기하고 있는 중에 그 옆으로 김일성이 지나갔는데, 대화를 나눴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김백일 선배도 나의 소개로 김일성과 서로 인사 정도의 얘기를 했습니다.”

소련군이 진주한 평양에서 민족주의자 조만식 선생이 공산세력을 등에 업은 김일성을 대적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평양에서 민족주의자의 중심은 조만식 선생이 이끌었던 평안남도인민위원회의 사무소였다. 그러나 사태가 심상치 않았다. 11월 하순, 김일성의 친위대인 적위대가 사무실을 덮쳐 백 장군의 동생 백인엽씨가 대장이던 경호대의 무장을 해제시켰다. 사태가 이 지경에 이르자 정일권씨가 찾아와 함께 월남할 것을 권했다. 백 장군은 우선 동생(인엽)부터 데리고 월남해달라고 부탁했다

김일성이 조선공산당 책임비서가 된 후 백 장군은 조만식 선생에게 월남을 권했다. 조만식 선생과 백선엽은 고향이 평안남도 강서군으로 같았다. 조만식 선생은 백 장군의 월남 권유에 “나는 북쪽 사람들에게 책임이 있다. 이들을 버리는 일은 할 수 없다. 자네 같은 젊은 사람은 남으로 가야 한다”면서 백 장군의 월남만 권했다.

백 장군은 김백일 장군과 협의한 후 같은 간도특설대 출신인 최남근 등과 함께 월남했다. 월남 후 이들 셋은 훗날 국방경비대가 되는 군사영어학교에 들어갔다. 영어를 배우겠다는 마음으로 입교했지만 그들에게 주어진 임무는 부대 창설이었다

백 장군은 부산 제5연대로 갔다. 서류상 임관 날짜는 1946 2 26일자였다.

때가 때였던 만큼 백 장군의 승진은 빨랐다. 1946 2월 보병 제5연대 A중대장, 그해 9월 제5연대 제1대대장, 1947 1 1일 중령 진급과 동시에 제5연대장이 되었다. 1947 12월에는 부산 주둔 제3여단(여단장 이응준 장군)의 참모장으로 전출되었다가 1948 4 11일 통위부(미 군정기의 국방과 경비를 전담하던 기구) 정보국장 겸 국방경비대 총사령부 정보처장으로 상경했다

1949
7 30일 백선엽 대령은 광주 주둔 제5사단장이 되었고, 1950 4 23일에는 서부전선 최일선을 담당하는 제1사단장으로 부임했다. 전임 2개월 후 일어난 6·25전쟁 발발 당시에는 경기도 시흥에 있던 육군보병학교에서 ‘고급간부 훈련’을 받던 중이었다. 그는 전쟁이 발발하자 곧바로 사단 사령부로 복귀해 전쟁을 진두지휘하기 시작했다.

그는 그로부터 약 1000일 이상 최전선에서 무용(武勇)을 떨치며 ‘한국군 최고의 야전사령관’이란 명성을 얻게 된다.


“내가 물러서면 너희들이 나를 쏴라”

▲1951년 2월 제1사단을 방문한 이승만 대통령(앞줄 중앙). 그 오른쪽이 백선엽 장군

 

탱크를 앞세운 북한군의 기습은 속도전이었다. 개전 3일 만에 의정부-미아리로 진격한 북한군에 의해 서울이 함락됐다. 개성-임진강 정면을 방어하던 제1사단은 서울이 떨어진 다음 날인 9 28일 오전까지도 서부전선에서 적과 싸웠다. 그 결과 적의 포위에 빠진 1사단은 행주나루에서 한강을 도하해 부대를 재편성하고 후퇴 중에도 지연전을 전개했다.

전쟁 발발 1개월도 안 된 7 20일에는 대전이 함락됐다. 닷새 후인 7 25일에 백선엽 대령은 준장으로 진급했다. 한강 이북에서 남은 최후의 사단으로서 선전하고 건제(建制)를 유지한 채 도하한 전공이 장군 진급 사유였다. 그 직후 백 장군에게는 자신의 운명은 물론이고 조국의 운명을 건 혈전을 벌여야 했다. 다부동전투가 그것이다.

북한군은 ‘8월 공세’를 벌이며 국군과 미군을 밀어붙였다. 당시 백 장군의 제1사단은 대구 북방 다부동에서 방어선을 치고 있었다. 8월 중순, 1사단의 정면에는 북한군 제3사단, 13사단, 그리고 제1사단의 1개 연대가 공격을 해오고 있었다.

다부동전투는 부산을 사수하려는 국군과 미군의 운명을 건 결전이었고 8 15일은 그 위기의 절정이었다. 곳곳에서 백병전이 벌어졌다. 북한군은 8 15일까지 부산을 함락시키려던 당초 계획을 수정해 8 15일을 ‘대구 해방의 날’로 정하고 총공세를 펼쳤다. 치열한 방어전으로 한국군의 피로도는 한계점에 도달했다. 적은 화력이 우세한 미군 방어지역을 회피해 제1사단 정면을 집요하게 파고들었다. 백 장군의 회고다.

“피아가 너무 가까이서 대치해 사격보다 수류탄을 주고받는 혈투가 사단 정면 20km 전 전선에서 밤낮으로 계속됐습니다. 고지마다 시체가 쌓이고 시체를 방패 삼아 싸운 겁니다. 드디어 한계 상황에 이르렀어요. 저는 8월 15일 즉시 대구의 미 8군사령부와 2군단사령부(군단장 유재흥 준장)에 증원부대를 요청했습니다. 곧 ‘미 25사단 27연대와 국군 8사단 10연대가 증원부대로 투입될 테니 그때까지 전선을 지탱하라’는 회신이 날아왔습니다.”

증원 부대가 도착한 후 상황은 외양상 대등한 결전이 됐다. 이어지는 그의 회고다.

“우리 1사단은 산 위에서 싸우고 미 27연대는 도로상에서 전차 대 전차로 싸우는 대등한 결전의 양상으로 바뀌었습니다. 적은 18일부터 단말마적인 공세로 나왔어요. 다시 전선에서 육박전이 전개돼 수류탄과 총검으로 싸우며 일진일퇴를 거듭했죠. 적의 포로와 부상병 입에서는 술 냄새가 났습니다.”

 

▲인천상륙작전 직후인 1950년 9월 16일 대구 동촌에서 모처럼 여유를 찾은 백선엽 장군.

 

8 19일 낮에는 미 23연대도 증파되어 1사단의 뒤를 받쳤다. 이렇게 한국전쟁 중 국군사단에 미군이 두 겹으로 투입된 것은 다부동전투가 유일한 경우였다.

 

8 20일에는 미 27연대 좌측 능선을 엄호하던 국군 11연대 1대대가 고지를 탈취당하고 다부동 쪽으로 후퇴한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8군으로부터는 ‘한국군은 도대체 싸울 의지가 있느냐’ 하는 질책이 들려왔다. 측면이 뚫린 미 27연대는 퇴로가 차단되기 전에 후퇴하겠다는 입장을 전해왔다

 

다부동이 뚫리면 50리 남쪽 대구는 곧 적의 수중에 떨어지게 마련이다. 대구가 함락되면 미군은 울산-밀양-진해를 연결하는 데이비드슨선 아래로 물러나게 되어 있었다. 데이비드슨선은 미군 철수의 안전을 위한 최소한의 공간 확보용이었다

 

백 장군은 미 27연대장에게 ‘기다려달라. 내가 직접 가보겠다’고 말하곤 현장으로 달려갔다. 우리 군 2대대는 뿔뿔이 흩어져 후퇴하고 있었다. 장병들이 계속된 주야격전으로 지친 데다 보급이 끊겨 이틀째 물 한 모금 못 마셨던 것이다. 그때 그는 후퇴해 오는 병사들 앞에 버티고 서서 병사들을 땅바닥에 앉히고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우리에게는 이 이상 내려갈 곳이 없다. 여기가 격파되면 나라가 망하고, 우리들에겐 죽음이 기다리고 있다. 대한민국이 멸망해서는 안 된다는 마음은 모두 같다. 보라, 우리를 돕기 위해 지구 저쪽에서 온 미군이 저 아래 골짜기에서 싸우고 있지 않는가. 그들을 버리고 우리만 살겠다고 하는 것은 대한의 남아로서 부끄러운 일이다. 내가 선두에 서겠다. 내가 물러서면 너희들이 나를 쏴라.

 

백 장군은 돌격 명령을 내리고 자신이 선두에 섰다. 곧 병사들의 함성으로 골짜기가 진동했다. 2대대는 삽시간에 488고지를 재탈환했다.

 

일본의 군사 저널리스트 이노우에 와히코(井上和彦)는 “백선엽 장군이 세계 전사상(戰史上) 최후의 장군 돌격을 감행했다”고 평가한 바 있다.

 

다부동전투의 고비이자 전환점은 8 21일이었다. 그날은 피아간에 기습에는 기습, 돌격에는 돌격으로 맞서며 고지와 능선마다 시체가 쌓여 갔다.

 

백선엽 장군의 증언이다.

 

“적은 일몰 직후부터 공격 준비 사격을 개시하더니만 T34/85형 탱크 14대를 앞세우고 미 27연대의 방어선을 돌파해 왔어요. 피아 모두 모든 중화기를 최대 발사 속도로 발사했습니다. 다부동 골짜기는 발사음과 작렬음의 지옥이었습니다. 탄약 무제한의 싸움이었죠. 교전은 다섯 시간 동안 계속됐어요. 적은 맹렬한 탄막(화력의 벽을 만들어서 공격)에 견디지 못하고 물러갔어요. 다음 날 아침에 보니 전지 앞에 적 전차 7대를 비롯해 중장비, 차량 등이 다수 버려져 있습디다. 미군 추산으로는 적 전사자가 1300명이었어요.

 

8 22일에 마침내 전세는 아군 쪽으로 기울었다. 팽팽한 접전이 균형의 고비를 넘긴 것이다. 평양 최초 입성

 

▲1953년 3월 26일 미8군사령부에서 이승만 대통령이 지켜보는 가운데 테일러 장군이 백선엽 장군에게 미 공로훈장을 수여하고 있다.

 

8월 말 1사단은 다부동 지역을 미 1기병사단에 이양하고 팔공산 북쪽으로 이동했다. 1사단은 다부동전투에서 장교 56명을 포함, 2300명의 전사자를 냈다. 적군은 2배 이상인 5690명이 전사한 것으로 집계됐다. 백 장군은 이 전투를 이렇게 평가한다.

 

“살아남은 자의 훈장은 전사자의 희생 앞에 빛을 잃습니다. 매일 주저앉아 울고 싶을 심경 정도의 인원 손실이었습니다. 그러나 후방의 청년·학생들은 전선을 자원하여 그 틈을 메워주었습니다. 인근 주민들은 지게를 지고 나와 포화를 무릅쓰고 전방 고지에 탄약, 식량, 물과 보급품을 져 올렸습니다. 이 전투는 나의 1사단뿐만 아니라 국군 1개 연대, 미군 2개 연대 등 3개 연대가 증원부대로 가담했습니다. 국군, 우방, 국민의 승리였습니다.

 

이후 1사단은 승승장구했다. 1950 10월 한·미 양군은 38선을 돌파, 드디어 평양 공략에 나섰다. 1기병사단과 1사단이 ‘평양 제1번 입성’을 사단의 자존심, 나아가 나라의 명예를 걸고 경쟁했다. 백 장군은 선두 전차부대의 1번 탱크에 탑승해 진격을 독려했다.

 

‘평양 입성 제1번’은 백 장군의 1사단이 차지했다. 대동강에서 멱을 감으며 자란 백 장군은 평양 접근로를 꿰고 있었던 것이다.

 

이후 1사단은 청천강을 넘어 평안북도 운산까지 진출했다. 그러나 중공군의 대거 개입으로 전 전선이 무너졌다. 적의 대부대에 포위된 1사단은 다행히 미군의 엄호를 받아 이번에도 부대의 건제를 유지하며 후퇴했다

 

3 15일 우리 국군과 미군은 서울을 재탈환했다. 그 영예도 한강 도하작전을 감행한 1사단이 차지했다. 그로부터 꼭 한 달 후인 4 15, 그는 소장으로 진급해 동해안 지역을 담당하는 국군 제1군단장이 되었다. 그때 북진을 선도한 것은 백 군단장의 1군단이었다. 오늘의 휴전선이 38선을 넘어 강원도 북부 해안 고성까지 치올라가 있는 것을 보면 1군단의 전공을 짐작할 수 있다

 

1952 1 12, 그는 중장으로 진급했다. 4 5일에는 새로 창설된 제2군단장이 되어 중부전선을 담당했다. 이어 7 23일에는 육군참모총장에 오르고, 1953 1 31일 국군 최초의 대장으로 진급했다. 주한 미 군사고문단(KMAG) 1951년 말에 작성하여 미 정부에 보고하고, 1992년에 비밀 해제된 문건이 있다. 이 문건에는 이승만 대통령부터 일선 주요 사단장까지 한국의 전쟁지도부 28명에 대한 평가가 기록되어 있다. 이승만, 장면, 이기붕 등 정치인에 대한 평가와 이종찬 장군 등 군인들에 대한 평가가 있는데 백선엽 장군에 대해서는 최상의 평가를 하고 있다.

 

〈소장. 33(실제 만 31, 너무 젊었던 그는 당시 대외적으로 자신의 나이를 두 살 올리고 있었다). 일본 만주군관학교. 2차 세계대전 때 일본 육군 중위. 한국 육군에서 최상(best)의 야전지휘관으로 평가됨. 참모와 지휘관 양쪽 모두 탁월한(exllent) 기록 보유. 친미적. 영어, 중국어, 일본어를 말하고 읽고 씀. 한국 육군에서 가장 걸출한(most outstanding) 장교임〉

 

1954 2 14 155마일 전선을 전담하는 제1야전군 사령부가 창설되자 그는 육군참모총장직에서 물러나 그 초대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3 9개월 동안 야전군을 키우고 1957년 육군참모총장으로 복귀했다

 

두 번째 육군참모총장을 약 2년간 역임한 그는 연합참모본부 의장으로 전임해 1년 남짓 근무하다가 4·19가 일어났던 1960 5 31일 군복을 벗었다. 군인 백선엽은 국내에서도 존경을 받았지만 우방국에서 더 존경을 받았던 것 같다. 아이젠하워, 아버지 부시, 아들 부시 등 미국의 역대 대통령이 그를 ‘백악관의 귀빈’으로 맞았던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일본의 자위대 고급장교들과 군사연구가들도 ‘실전에서 배우기’ 위해 계속 백 장군을 찾았고 그의 전투는 주요 연구의 대상이었다. 오카자키(岡崎) 연구소의 주임연구원 오가와 아키라(小川彰)는 이런 말을 했다.

 

“백 장군에게 한국이 구원받은 것은 1950 8 21일 다부동전투다. 만약 이 전투에서 다부동이 뚫렸다면 그 후 부산까지의 함락은 한순간이었을 것이다. 만약 개전 2개월인 이 시점에서 북조선군이 부산을 점령했다면 미군의 본격적인 지원은 시기를 놓쳐 오늘날 조선반도는 전부 북조선이 되었을 것이다.

 

이렇게 평가받는 그이지만 전장에서의 공포는 없었을까. 백 장군은 이런 대답을 내놓았다.

 

“공포심을 극복하는 것은 책임감과 의지입니다. 전투는 피아 지휘관이 벌이는 의지의 충돌인데, 누가 책임감이 강하냐에 따라 승패가 판가름 납니다.

 

역시 그는 참군인이다.◎

 

출처톱클래스 2017년 6월호   김성동 톱클래스 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