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32/ 국방11/ 백선엽 장군의 6.25전쟁 비망록5/ 111 “자칫 전멸할 수도…”, 중공군 앞에서 후퇴를 결심하다 - 135 8사단의 참패, 1만여 병력 중 사망과 실종자 7100여명
대한민국32/ 국방11/ 백선엽 장군의 6.25전쟁 비망록5/
111 “자칫 전멸할 수도…”, 중공군 앞에서 후퇴를 결심하다
(14) 낯선 군대 중공군
풍부한 경력의 싸움꾼
평양을 방문했던 이승만 대통령을 배웅한 뒤 다시 돌아온 1사단의 상황은 심각했다. 커다란 방죽 어딘가에서 터진 봇물이 이미 사방으로 흘러넘치는 분위기였다. 중공군은 그 시점에 우리의 전면, 오른쪽으로 인접한 국군 2군단의 정면을 세게 압박하고 있었다. 도처에서 중공군과의 접전이 벌어지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그들 중공군은 밤의 군대였다. 낮에는 좀체 움직이지 않는 버릇이 있다. 그들은 줄곧 밤에만 공격을 펼쳤다. 피리를 불고 꽹과리를 치면서 다가왔다. 아주 어두컴컴한 야밤에 그런 피리와 꽹과리 소리를 내면서 다가오는 중공군의 분위기는 매우 음산했다.
12연대장 김점곤 대령은 중공군의 야습 분위기를 “꼭 무당집 같았다”고 표현했다. 낮에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다가 컴컴한 밤중에 이상한 소리를 내면서 다가서는 그들의 전법은 상대의 공포심을 유난히 자극했다. 미군이 특히 그런 분위기에 취약했다. 그들은 종전까지 경험해보지 못했던 그런 중공군의 전법에 우선 기겁을 하기 일쑤였다.
/6.25전쟁에 참전하기 위해 압록강을 넘는 중공군의 모습이다. 군악대가 이들을 환송하고 있다.
국군의 상황도 대체적으로는 마찬가지였다. 단지 일제 말기 전쟁터에 나간 경험이 있던 일부 장교들이 그나마 중심을 잃지 않고 중공군의 공격에 맞설 수 있었다. 그러나 장병의 대다수는 막 전쟁을 익히기 시작한 사람들이었다. 치열한 낙동강 전투를 치러냈지만, 정면에 제대로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채 다가서는 중공군과의 싸움은 매우 버거웠다.
중공군의 전법을 떠올릴 때 사람들은 대개 ‘인해전술(人海戰術)’을 이야기한다. 압도적인 병력으로 상대를 압박하는 방식이다. 그러나 대개는 “중공군이 무기를 제대로 갖추지 않고 일부는 손에 몽둥이 등을 쥔 채 압도적인 병력으로만 밀어붙였다”고 말한다. 이는 큰 오해다. 중공군은 미군과 같은 막강한 화력과 장비를 갖추지는 못했지만 전체 장병이 근접전에는 매우 유리했던 이른바 ‘따발총’으로 무장한 상태였다.
게다가 그들에게는 약 20년에 걸친 항일(抗日) 전쟁, 국민당과 공산당으로 나뉘어 싸웠던 ‘국공(國共) 내전’의 경험이 있었다. 특히 전투를 이끄는 중공군의 수뇌부와 전선 사령부 요원들은 제법 오래 이어진 항일 전쟁과 국공 내전을 통해 아주 다양한 실전(實戰) 경험을 쌓았던 사람들이었다.
300m 앞의 적군
그런 상황이었으니 중공군의 전법(戰法)과 전기(戰技)는 매우 뛰어났다. 늘 상대의 틈을 노렸고, 허약한 구석을 정확하게 찾아 공격을 펼쳤다. 미군은 그에 매우 고전(苦戰)할 수밖에 없었다. 밤에 취약한 군대가 미군이었다. 그들은 앞에서도 잠시 언급했듯이 야간 전투에 그렇게 익숙지 않았다.
따라서 야음(夜陰)을 틈타 공격을 펼치는 중공군에게 미군은 넌더리를 치곤했다. 제2차 세계대전을 치른 막강한 미군이었으나 특이한 전법을 펼치는 중공군을 상대로 해서는 힘든 싸움을 할 수밖에 없는 형국이었다. 미군의 사정은 그래도 나았다. 문제는 한국군이었다.
전선을 지휘하는 사단장과 연대장급 지휘관도 별반 내세울 만한 전투 경험이 없었다. 사단장 정도의 국군 지휘관은 광복군이나 일본 육군사관학교, 만주 군관학교 출신이 거의 전부를 차지했다. 대개는 실전 경험이 전혀 없었거나, 있었다 하더라도 소대와 중대 정도를 이끌었던 수준에 지나지 않았다.
따라서 중공군 참전 초반의 싸움은 우리에게 미리 예고됐던 고전(苦戰)일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우리는 쉽게 물러날 수 없었다. 힘에 겹기는 했으나 안간힘을 다해 새롭고도 낯선 군대 중공군을 맞아 싸워야 했다. 그러나 전황(戰況)은 계속 불리한 쪽으로 급속히 기울어가고 있었다. 내가 1사단장으로 다시 복귀한 시점이 특히 그랬다.
/한반도 전선에 뛰어든 중공군이 박격포 공격을 벌이고 있다.
영변의 1사단 지휘소로 돌아온 나는 우선 일선의 상황부터 점검키로 했다. 현장을 둘러본 뒤에 전체적인 작전계획의 윤곽을 짜야 했기 때문이다. 지프에 올라타 나는 영변을 출발해 운산 지역으로 나아갔다. 영변 북쪽에는 굽이가 많이 발달한 구룡강이 흐른다.
그중에서도 굽이가 여러 개 겹쳐 구불구불한 협곡 형태의 지형을 보이는 곳이 있다. 사람들은 그곳을 ‘낙타머리 길’이라고 불렀다. 내가 탔던 지프는 선두에 서 있었다. 뒤에는 다른 지프 한 대가 따르고 있었다. 낙타머리 길의 초입(初入)에 들어설 때였다.
문득 앞을 바라보니 낯선 군대가 눈에 띄었다. 나는 그 순간 속으로 놀라고 말았다. 중공군이었다. 약 300m 앞에 그들이 진을 친 채 머물고 있었다. 내 눈에는 그들의 총구까지 들어왔다. 정면에 나타난 우리 일행을 겨누고 있음이 분명했다. 그나마 거리가 다소 떨어져 있다는 점이 다행이었다.
급히 차를 돌려야 했다. 내 지시도 아니었다. 적군을 직접 본 운전병이 반사적으로 차를 돌렸다. 그러나 사단장인 내가 탄 지프에는 조그만 트레일러가 달려 있었다. 숙영(宿營)이나 야전에서의 지휘를 할 때 필요한 담요와 텐트를 싣고 다녔던 트레일러였다. 그러나 이 트레일러 때문에 지프를 순간적으로 돌리는 일이 쉽지 않았다.
뒤를 따르던 지프는 이미 냉큼 머리를 돌린 상태였다. 내가 탄 지프는 한두 번 더 움직여야 했다. 그러나 트레일러가 결국 문제였다. 차를 트는 데 트레일러가 계속 걸렸다. 운전병은 급기야 차에서 뛰어내려 트레일러를 차체로부터 뗐다. 그러고서야 지프는 간신히 머리를 돌릴 수 있었다.
“오늘 후퇴해야 할 것”
아주 다행이었던 점은 중공군이 그런 우리를 보고서도 사격을 가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내 지프에는 참모장도 타고 있던 상황이었다. 한국군 1사단의 사단장과 참모장이 함께 탄 차를 중공군이 공격하지 않았다는 점은 우리로서는 매우 다행이었으나 중공군 입장에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기도 했다. 그 점이 나는 지금까지도 궁금하다.
우리는 길을 돌려 운산으로 향했다. 그 길에는 중공군이 없었다. 그러나 중공군은 낙타머리 길에서의 상황이 말해주듯 이미 운산 일대에 진출한 우리 1사단의 곳곳에 다가와 있던 상황이었다. 마치 어둠을 타고 슬며시 산자락에 퍼지는 밤안개와도 같았다. 낮에는 미군의 공군력과 야포 등의 화력으로 중공군의 공세를 막아낼 수 있었으나 늘 밤이 문제였다.
운산 일대의 상황을 둘러보니 1사단 장병은 여기저기에 파고들었던 중공군으로부터 야간에 심각한 공격을 당하고 있었다. 나는 속으로 ‘더 이상 지체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우선 후퇴를 생각했다. 후퇴는 적에게 등을 보이는 비겁함만으로 치부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적의 공격이 내 힘에 부칠 때 후퇴를 해야 한다. 적의 세부적인 모습을 알 수 없는 상황에서 상대로부터 펼쳐지는 공격에 노출될 때도 마찬가지다. 그런 후퇴도 엄연한 작전의 일부였다. 나는 마음속으로 후퇴의 시기를 저울질하고 있었다. 그러나 사단의 후퇴는 우리가 배속한 미 1군단과의 정밀한 협의를 거쳐야 가능했던 일이다.
중공군의 공세는 야음을 타고 계속 이어졌다. 곳곳에서 아군의 피해상황이 속출하고 있었다. 그 해 10월의 마지막 날이었다. 미 제10 고사포 여단을 이끌고 낙동강 전선에서 평양까지, 그리고 다시 운산으로 북상하던 우리를 돕던 윌리엄 헤닉 대령이 나를 찾아왔다.
/1950년 10월 31일 중공군의 공세가 깊어짐에 따라 후퇴를 논의하면서 길을 걷고 있는 백선엽 당시 1사단장(왼쪽)과 미 제10 고사포 여단장 윌리엄 헤닉 대령(오른쪽).
그의 표정은 매우 심각했다. 그는 웨스트포인트를 나와 제2차 세계대전을 치렀던 경험 많은 군인이었다. 낙동강에서 북진을 시작한 뒤 나는 줄곧 그의 판단과 경험을 중시했다. 그의 조언을 전혀 마다하지 않았다. 전쟁터에서의 경험이 아무래도 부족하다고 할 수밖에 없는 내 처지에서는 그의 경험이 매우 소중했기 때문이다.
윌리엄 헤닉 대령은 “아무래도…오늘 밤을 버티기 어려울 것 같다”고 했다. 나도 후퇴를 상정하고는 있었으나 막상 그의 말을 듣는 순간 마음이 괴로웠다. 나는 “그래도 아직은 더 싸워야 할 상황 아닐까?”라고 물었다. 그렇게 묻고 있었지만 속마음은 달랐다.
윌리엄 헤닉 대령은 “솔직히 내 의견을 말하겠다. 백 장군, 오늘 중으로 후퇴해야 한다. 내 판단으로 볼 때 그러지 않는다면 우리 부대 전체가 전멸할 수도 있다”고 했다. 그는 한 걸음 더 나아갔다. “지금 당장 미 1군단장 밀번 장군을 찾아가서 철수를 건의해라”고 충고했다. 나는 속으로 ‘그게 맞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물러서는 일도 신속해야 한다. 나는 곧장 움직였다. 밀번 군단장을 찾아 길을 나섰다.
112 “1사단은 후퇴하라”, 미군 엄호 부대는 불길한 행군을 시작하고…
(14) 낯선 군대 중공군
혈전(血戰)의 서막
1950년 10월 말 전체의 전선 상황은 당시 서부 지역 깊숙이 들어서 있던 내가 파악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그러나 중공군의 공세는 전선 전면에서 파상(波狀)으로 벌어졌다. 꺾어도 꺾어도 밀물처럼 끊임없이 다가서는 저들의 공격이었다. 국군을 비롯해 미군과 다른 유엔군 등 아군이 이때 펼친 공격은 흔히 ‘추수감사절 공세’라고 불렀다.
맥아더 장군이 있는 도쿄의 유엔군 총사령부는 11월 하순의 추수감사절까지 모든 공세를 펼쳐 적군을 완전히 압록강 밖으로 몰아내거나 소멸시킨 뒤 전쟁을 종식한다는 계획이었다. 그에 따라 우리 1사단이 속한 미 1군단, 그 위의 미 8군, 그리고 맥아더 유엔군 총사령부가 증편한 미 10군단이 각자 서부전선과 동부전선에서 총공세에 나섰다. 이에 맞서 중공군은 ‘1차 공세’로 나섰다. 한반도 참전을 확정하고 미군의 시선을 피해 몰래 압록강을 도강한 중공군은 역시 필사적인 공격을 벌이고 나왔다. 정확한 병력의 수는 알 수 없으나 대략 30만 명에 가까운 대규모 군대가 이미 강을 넘었거나 넘는 중이었다.
그들은 앞서 소개한 대로 전략적인 진출선을 상정했다. 서부전선의 덕천을 중심으로 동서를 잇는 선이었다. 그들은 한반도 참전 뒤 이곳에 진출함으로써 향후 모든 작전의 거점(據點)으로 삼고자 했다. 청천강을 넘어 북상했던 아군 또한 이곳을 전략적 요충지로 삼은 뒤 다시 북상해 압록강과 두만강으로 진출코자 했었다. 따라서 중공군의 입장에서는 사활(死活)이 걸린 전투에 해당됐고, 아군의 입장에서도 전쟁을 모두 끝내기 위한 핵심적인 작전이었다. 사정이 그러하니 1950년 10월 말에 벌어졌던 전투는 이 두 힘이 매우 강렬하게 부딪히면서 거대한 파열음을 낼 수밖에 없었다.
/전선에 진출한 중공군의 고사포 부대. 수풀로 모습을 은폐했다.
특기할 만한 내용은 미군의 작전이 두 갈래로 나누어져 있다는 점이었다. 평양을 점령한 뒤 북상하던 아군은 맥아더 장군의 지시에 따라 종래의 미 8군 중심의 단일한 지휘체계를 아몬드 장군이 이끄는 미 10군단과 둘로 나누는 결정을 했다. 이에 따라 서부전선은 워커 장군의 미 8군, 동부전선은 아몬드 장군의 미 10군단이 이끌었다. 이는 나중에 치명적인 결과로 나타난다. 중공군이 전략적으로 진출하려는 거점을 두고 사활이 걸린 공격을 펼치던 현장에서 불가피하게 나타날 수밖에 없었던 후퇴 국면(局面)을 맞이할 때 특히 그랬다. 단일한 지휘체계로 일사불란(一絲不亂)한 후퇴작전을 펼치기가 매우 어려웠기 때문이다.
중공군이 놓은 덫
아군은 중공군의 공세 의도를 간과한 채 이제 치열한 싸움터에 깊숙이 발을 디딘 형국이었다. 미 8군은 이에 따라 10월 말에 이르러 박천과 운산, 온정리와 희천을 잇는 선으로 진출한 상태였다. 국군 2군단 예하의 6사단은 이미 발 빠른 기동력으로 압록강에 붙어 있는 초산에 당도했다. 동부전선은 미 10군단의 지휘 아래 원산과 흥남, 함흥을 넘어 내륙의 장진호와 동해안의 청진까지 진출하기 위해 기동 중이었다. 아군의 당시 공세는 매우 신속했다. 11월 말의 추수감사절 이전에 모든 전쟁을 끝내려는 조바심과 기대심리도 그에 한몫을 하고 있었다.
중공군은 10월 19일 도강을 시작한 13병단 예하의 5개 군단을 서부전선에 투입했다. 이들은 대개 적유령 산맥 남단에 몸을 숨긴 뒤 진지전을 중심으로 싸움을 벌인다는 당초의 계획을 변경해 기동전에 나설 준비에 착수한 상태였다. 나머지 1개 군단은 장진호 북쪽으로 병력을 전개 중이었다. 나는 그 와중에 있었다. 중공군 5개 군단이 밤안개처럼 도사린 적유령 산맥의 남쪽, 늘 구름이 감싸 어둑어둑한 분위기를 물씬 풍기는 운산이었다. 구름은 더 짙게 우리를 감싸 크고 사나운 비로 돌변할 참이었다. 나는 어느덧 그런 위기의 전조(前兆)를 아주 예민하게 감지하고 있었다.
/중공군 참전 초반의 김일성(왼쪽)과 중공군 총사령관 펑더화이.
제10 고사포 여단장 윌리엄 헤닉 대령의 충고는 시의적절(時宜適切)했다. 그는 아무래도 나이, 전투경험에 있어서 내게는 선배였다. 비록 당시의 계급이 준장과 대령으로 차등을 이뤘다고는 하더라도 삶과 죽음을 가르는 전쟁터의 경륜은 그가 나보다 훨씬 두터웠다. 10월 31일의 분위기는 더욱 심각했다. 나는 윌리엄 헤닉으로부터 “오늘 밤중으로 철수를 단행하지 않으면 우리는 전멸할 수도 있다”는 말을 듣고 우선 현장을 돌았다. 11연대와 12연대, 15연대장을 모두 만났다. 그들도 한결같이 “아주 심각한 상황”이라고 말했다. 나는 더는 때를 늦출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사령부로 돌아와 헤닉 대령을 다시 만났다. 나는 그에게 “지금 포탄이 얼마나 남아 있느냐”고 물었다. 헤닉은 “약 1만 5000발 정도 남아 있는 상태”라고 답했다. 나는 이어 “오늘 밤에 우리가 철수를 시작한다면 그 화력을 적의 정면에 모두 집중해서 발사할 수 있느냐”고 물었다. 그는 단호한 표정으로 “기꺼이 그렇게 하겠다”고 했다.
나는 그의 답변을 들은 뒤 바로 움직였다. 지프에 올라타고서 급히 미 1군단 사령부로 향했다. 영변으로부터 신안주로 가는 길이었다. 길은 제법 험했다. 당시의 도로사정은 지금만 같지 못했고, 특히 산악이 발달한 지형이라 험한 길의 굽이가 많은 편이었다. 마음이 급했던 것이었을까. 그런 내 속사정을 미리 헤아렸는지 운전병은 차를 급히 몰았다. 빠른 속도로 길을 내닫던 지프가 굽이진 길목에서 그만 뒤집히고 말았다. 나는 전쟁을 벌이면서 차량 사고를 두 번 당했다. 처음 당하는 차량 사고였다. 지프는 기동성이 매우 뛰어난 차량임에도 가끔 뒤집히는 경우가 있었다.
공식 후퇴명령
죽을 고비는 아니었다고 하더라도 자칫 차량 몸체에 내 몸이 깔릴 뻔했다. 다행히도 지프 위에 있던 기관총 받침대가 엎어진 차량에 조금 틈을 냈고, 나는 그 받침대 덕분에 몸이 깔리지 않을 수 있었다. 가까스로 지프를 수습해 다시 길을 달렸다. 신안주의 미 1군단 사령부에는 마침 밀번 군단장과 함께 미 1기병사단의 호바트 게이 소장이 있었다. 나는 밀번 군단장을 보자마자 “오늘 밤중으로 철수해야 한다. 전선 상황이 아주 다급하다”고 했다. 이어 나는 스스로 판단한 몇 가지 정황을 설명하면서 반드시 오늘 밤중으로 병력을 후퇴시켜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밀번 군단장은 내 말을 주의 깊게 듣고 있었다. 여러 번 소개했듯이, 밀번 군단장은 부하의 의견을 신중하게 받아들이는 편이었다. 함부로 흘려서 듣지 않는 지휘관이었다. 그는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전화기를 들어 올렸다. 통화내용을 들어보니 미 8군 사령관 워커 장군과 나누는 대화였다.
/공세에 나선 중공군의 선전용 사진. 오른쪽 병사가 손에 들고 있는 것이 야간 기습에 활용했던 피리다.
지금 미 1군단이 처해 있는 상황을 다소 장황할 정도로 설명하는가 싶더니, 전화통으로부터 들려오는 소리를 잠시 듣고는 곧 전화를 끊었다. 밀번은 신중한 표정이었다. 그는 나를 향해 “오늘 밤중으로 철수할 수 있겠느냐”고 물었다. 나는 제10 고사포 여단 헤닉 대령과 나눈 대화를 보고했다. “윌리엄 헤닉 대령에게 우리 1사단의 철수를 도와 달라고 했다. 그는 1사단이 후퇴를 시작하면 적군 전면에 현재 보유 중인 포탄을 쏟아 붓겠다고 했다. 전면에 포탄으로 탄막(彈幕)을 형성하면서 1사단을 후퇴시킬 계획이다”라고 했다.
그 말을 듣고 난 뒤 밀번 군단장은 정식으로 내게 명령을 내렸다. “그렇다면, 오늘 밤중으로 1사단을 운산으로부터 후퇴시켜 영변과 입석을 잇는 선으로 진출하라”는 내용이었다. 밀번 군단장은 아울러 함께 동석해 있던 미 1기병사단 게이 소장을 향해 “이제 한국군 1사단의 후퇴를 당신 부대가 엄호해야 한다”고 했다. 공식적인 후퇴명령이었다. 한국군 1사단이 먼저 전선에서 후퇴할 때 그 주변을 미 1기병사단이 엄호하는 방안이었다. 따라서 나는 발 빠르게 움직여야 했다. 우선 전화로 운산 일대에 포진해 있는 사단의 각 연대장을 찾아 후퇴명령을 내렸다. 연대장들은 즉각 움직이겠다고 했다. 나는 이어 게이 소장과 함께 그의 미 1기병사단 사령부로 움직였다. 게이 소장과 내가 1기병사단 사령부로 이동하고 있을 무렵에 미 1기병사단의 예하 8기병연대가 운산 동쪽으로 이동하는 중이었다. 아주 불길한 행군이었다.
113 “헉…적에게 당하고 있다”, 무전기로 흘러나오는 미군의 비명
(14) 낯선 군대 중공군
중공군의 공세 시작
앞에 선 적은 누구인가. 역시 당시 전쟁터의 한복판에 있었던 나로서는 제대로 알기 어려운 일이었다. 전혀 낯선 군대였다. 그런 중공군의 첫 공세에 직면할 무렵의 나는 상대를 알기가 어려웠다. 그저 밤의 정적을 깨뜨리며 다가서는 중공군의 공세를 맞아 싸우고 싸우는 도리밖에 없었다. 나중에 전사(戰史)를 뒤적이면서 알아본 내용에 따르면 당시 우리가 직면했던 적군은 중공군 13병단 소속의 39군단이었다. 병력 숫자에서는 우리의 3배에 달하는 군대였다. 그들은 주로 적유령 산맥 남단의 여러 산지(山地)에 숨어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병력은 우리를 압도했지만, 무기와 장비 면에서는 그렇지 못했다. 그러나 그곳은 우리에게 익숙지 않은 지형이었다.
중공군은 험준한 산악의 곳곳에 숨어서 우회와 매복, 침투와 포위 등의 노련한 전법으로 우리를 맞이해 싸울 준비를 이미 마친 상태였다. 안주를 거쳐 청천강을 지나 그 샛강인 구룡강을 다시 넘어 운산 북쪽으로 진출한 뒤 다시 압록강으로 향하려던 우리의 발길은 이미 중공군의 거듭 이어지는 공세에 막힌 상태였다. 한국군 1사단을 지원하기 위해 와있던 제10 고사포 여단 윌리엄 헤닉 대령의 강력한 권고에 따라 철수를 결심한 뒤 미 1군단장 프랭크 밀번 장군의 허락을 얻었다. 당시 미 1군단 사령부에 와 있던 호바트 게이 미 1기병사단장과 함께 그의 사령부를 거쳐 나는 1사단으로 돌아온 뒤 후방으로 후퇴할 작정이었다.
/중공군의 제1차 공세 당시를 촬영한 사진이다. 운산 북쪽에서 남쪽을 향해 공격을 펼치는 중공군 모습이다.
그때는 밤이었다. 아마도 자정인 12시를 넘었던 시간이었을 것이다. 나는 게이 사단장과 함께 1기병사단 사령부로 들어섰다. 그러나 분위기가 영 심상치 않았다. 우선 사령부에 설치했던 무전기에서 급박하면서도 절박한 음성이 터져 나오고 있었다. “헉~어~어~, 적이다, 적이야. 적병이 전차에 기어오르고 있다!” 비명과 다를 바 없었다. 절규도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우리가 당하고 있다. 억….” 이어서 요란한 굉음이 들렸다. 무엇인가 강렬하게 터지면서 나오는 폭발음이었다. 이어서 계속 들리는 소리가 끔찍했다. 요란한 총소리, 강렬한 포탄 폭발음, 그리고 미군이 외치는 고함 등이 모두 뒤섞인 채 무전기를 통해 마구 쏟아져 나오는 중이었다. 호바트 게이 소장과 나는 그 자리에서 얼어붙은 듯 움직이지 못한 채 그 소리를 그대로 듣고 있어야 했다. 1기병사단 소속 8기병연대가 중공군에게 공격을 당하는 현장의 소리였다.
밤새 울린 포성
그들은 미 1군단장의 지시에 따라 운산 북쪽으로 진군하면서 그곳으로부터 철수를 시작하는 한국군 1사단을 엄호하는 부대였다. 그들이 벌써 심각하게 중공군의 공세에 직면하는 셈이었다. 미 1기병사단 사령부의 무전기에서 들려오는 소리로 판단할 때 그 상황은 매우 심각하다고 여겨졌다. 그러나 이미 내게 내려진 명령을 수행하는 일이 우선은 다급했다. 미군이 고전(苦戰) 중임은 틀림없지만 미 1군단 프랭크 밀번의 명령에 따라 국군 1사단은 신속하게 후방으로 물러나야 했다. 나는 미 1기병사단의 그런 상황을 잠시 지켜보다가 그곳을 빠져나왔다.
지프에 올라타 나는 밤길을 달렸다. 달이 바뀌어 이미 11월 1일 새벽 1시 무렵이었다. 영변의 1사단 사령부에 당도해 철수 작전을 제대로 지휘해야 했다. 불길한 예감이 마구 스치고 지나갔다. 지프를 몰아 달려가면서 스치는 차가운 밤 공기도 마냥 스산하기만 했다. ‘각 연대는 철수작전을 제대로 서두르고 있을까’ ‘미 제10 고사포여단이 포격은 옳게 펼치고 있을까’ 등의 사념(思念)이 끊임없이 갈마 들고 있었다.
영변으로 다가서면서 차츰 마음이 놓였다. 멀리서부터 포성이 들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윌리엄 헤닉 대령의 미 제10 고사포 여단이 전면의 적을 향해 퍼붓는 포 소리는 영변으로 다가서면서 점차 커지면서 잦아졌다. 속으로 ‘철수작전이 명령대로 잘 벌어지고 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미 내려진 철수명령에 따라 한국군 1사단 소속의 각 연대는 진지를 미군과 교대하고 움직이는 상태였다. 원래는 운산을 중심으로 서쪽에 미 1기병사단이 진출해 있었고, 그 동쪽으로는 우리 1사단이 있었다. 1사단이 후퇴할 수 있도록 측방(側方)에서 엄호(掩壕)를 하는 게 미 1기병사단의 임무였다. 윌리엄 헤닉 대령이 지휘하는 미 제10 고사포여단은 영변 남쪽의 진지에서 지속적으로 포탄을 퍼붓고 있었다. 100문이 넘는 야포와 박격포 등을 동원해 헤닉은 한국군 1사단 전면 운산 일대에 아주 막강한 화막(火幕)을 펼쳤다. 그를 틈타 운산 일대에 전개했던 1사단의 각 연대는 신속하게 남쪽으로 이동해야 했다.
/전쟁 당시 한국군 1사단을 지원했던 미 제10 고사포여단이 북쪽 운산의 중공군을 향해 포격을 벌이고 있다.
그날 밤과 새벽까지 미 제10 고사포여단의 포격은 이어졌다. 끊임없이 올라가는 포탄의 행렬이 컴컴한 하늘 먼 북쪽에서 섬광으로 이어지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나는 초조했다. 일선의 연대가 제대로 철수를 하고 있는지가 궁금해서였다. 아주 다행이었다. 11, 12, 15연대 등 사단의 각 연대는 전선에서 잘 물러날 수 있었다. 모두 다 윌리엄 헤닉 대령이 이끄는 고사포여단의 막강한 화력 전개 덕분이었다. 윌리엄 헤닉 대령은 그날 자신의 여단이 소유하고 있던 포탄 1만 5000발 가운데 1만 3000발을 모두 소진했다. 중공군은 그런 미군의 막강한 화력에 저항할 수 있을 만큼 강력하지는 않았다. 험준한 산지에 숨어서 매복과 우회, 기습과 포위로 전선에 나선 아군을 섬멸하는 게 그들의 1차 목표였다. 나중의 전사(戰史) 기록에도 분명히 등장하지만, 당시의 중공군이 노렸던 가장 큰 목표는 한국군을 주요 타깃으로 상정한 뒤 재기(再起)할 수 없을 정도의 타격을 입히는 내용이었다.
‘평양 축구부’ 긴급 투입
중공군은 그를 ‘유생역량(有生力量)을 섬멸적(殲滅的)으로 타격한다’고 했다. 싸움을 이어갈 수 있는 대상을 ‘유생역량(有生力量)’이라고 규정한 것이다. 특히 화력과 장비, 전투 경험이 모두 뛰어난 미군보다 한국군을 집중으로 노렸다는 점이 눈에 띈다. 압록강을 막 넘어 당초 구상했던 진지전을 전환해 기동전으로 나올 수밖에 없었던 중공군으로서는 불가피한 선택이었을 것이다. 어쨌든 우리는 그런 중공군의 머리 위로 강력한 화망(火網)을 구성했고, 결국 그는 주효(奏效)했다. 운산 전면으로 진출했던 한국군 1사단은 그 덕분에 커다란 피해 없이 전선으로부터 후퇴할 수 있었다.
그러나 한국군 1사단의 후퇴를 엄호하기 위해 운산 일대로 북상했던 미 1기병사단이 결국 문제였다. 그들은 내가 호바트 게이 미 1기병사단장과 함께 그의 사령부를 들렀을 때 이미 중공군의 심각한 공격에 몸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들은 또한 별도의 철수 명령을 받지 않은 상태이기도 했다. 계속 전진하면서 한국군 1사단의 후퇴를 엄호해야 했던 상황이었다. 특히 운산 좌전방의 1사단 12연대와 진지교대에 들어갔던 미 1기병사단 8기병연대의 상황이 매우 심각해 보였다. 12연대의 김점곤 연대장은 윌리엄 헤닉 대령의 제10 고사포여단이 펼친 탄막 덕분에 무사히 철수를 하고 있었다. 그로부터 연락이 왔다.
“후퇴를 잘하고 있는데, 아무래도 미군 8기병연대의 3대대 상황이 아주 심각하다. 철수하고 있는 우리 12연대에게 구원 요청이 왔다. 어쩌면 좋을지 지시를 달라”는 내용이었다. 나는 망설이지 않고 “구할 수 있는 병력은 모두 구해야 한다. 당장 8기병연대를 도우라”고 지시했다.
/참전 초반 평북 대유동 금광 동굴 앞에서 만나 작전을 논의하는 중공군 총사령관 펑더화이(동굴 앞 왼쪽)와 김일성.
김점곤 대령은 철수 대오를 수습하면서 급히 구조대를 조직했다고 한다. 그는 체격과 체력이 좋으며, 운산 일대의 지형과 지리에도 밝은 요원들을 급히 모았다고 했다. 김점곤 대령이 그때 조직한 구조대는 ‘평양 축구부’라고 불리는 수색조였다. 그들은 원래 12연대에서 활약이 가장 뛰어났던 요원들이라고 했다. 평양 출신이자, 평양에서 축구선수로 활동했던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는 것이다. 그들은 12연대의 수색대로 활동하면서 적잖은 전적을 올리기도 했다. 김점곤 대령이 당시 매우 아끼던 수색 요원들이기도 했다.
김점곤 대령은 나와 통화를 마친 뒤 ‘평양 축구부’ 팀을 미 8기병연대의 3대대가 공격을 받고 있던 지역에 급파했다고 한다. 그러나 3대대가 당면한 절박한 상황을 구제할 방법은 전혀 없었다. 미 3대대는 절체절명(絶體絶命)의 위기에 고스란히 놓여 있었기 때문이었다. ‘평양 축구부’는 미군 3~4명을 구조한 뒤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114 미군의 치욕, 포위된 아군을 구하지 않은 채 물러서다
(14) 낯선 군대 중공군
전 세계에 알려진 오보
‘한국군 1사단 전멸-’. 꿈속에서라도 나타날까 두려웠던 말이다. 그러나 당시 전투를 취재했던 일부 서방 언론에 의해 이 말은 정확한 단어로 나열이 된 채 세계 각지에 알려졌다. 전쟁터에서는 그렇듯 본의(本意)와 사실(事實)에 상관없이 소식이 난무하는 법이다. 삶과 죽음을 가르는 경계의 한 가운데에 서있기 때문이다. 늘 어둑어둑한 느낌을 줬던 곳, 구름 많이 끼는 운산(雲山)에서 북상하는 길은 두 갈래가 있다. 조그만 산 하나를 사이에 두고 나뉜 길이다. 산허리를 가운데에 두고 서쪽의 길, 동쪽에 난 길이 있다. 우리 1사단의 연대 병력들은 동쪽으로 난 길을 따라 후퇴를 했다. 중공군의 거센 공격에 밀릴 때였던 1950년 11월 1일이었다. 전날 밤 시작한 포격으로 앞에서 달려드는 중공군의 전면에는 강력한 탄막을 형성했다. 그 틈을 타서 국군 1사단은 무사히 병력과 장비, 무기 등을 모두 안전하게 후퇴시킬 수 있었다.
아주 다급했던 후퇴작전이었다. 따라서 ‘한국군 1사단 전멸’의 섣부른 기사를 탓할 수는 없었다. 중공군 13병단 예하의 39군단은 압도적인 병력, 노련한 전술, 사나운 공격력으로 밤안개처럼 조용히 다가와 섬광(閃光)과도 같았던 일격(一擊)을 가했기 때문이다. 그런 다급한 상황 속에서 전투력이 미군에 비해 현저하게 낮았던 우리 1사단의 운명을 점치는 일은 쉬웠다. 그러나 대상이 우리 1사단은 아니었다. 따라서 그 제목의 보도는 분명히 오보(誤報)였다. 그럼에도 그저 오보로만 치부하고 넘어가기에는 너무 가슴이 아팠다. 우리 1사단을 대신했던 희생(犧牲)의 피가 중공군의 공세 앞에 허무하게 뿌려졌기 때문이다. 그 부대는 호바트 게이 소장이 이끄는 미 1기병사단의 예하 8기병연대 소속 3대대 장병들이었다.
이 부대의 희생은 내게 큰 상처를 남겼다. 생면부지(生面不知)의 아군이었다면 그 아픔이 조금 줄었을까. 그들은 우리 1사단에게는 매우 가까운 동료였고, 아군이었으며, 친우(親友)라고 해도 좋을 부대였다. 불과 몇 개월 전 삶과 죽음을 걸고 김일성 군대를 맞아 함께 어깨를 걸친 채 싸웠던 부대였던 까닭이다. 김일성 군대의 최정예 3개 사단이 필사(必死)의 각오로 대구를 뚫고 부산까지 내달을 생각으로 다부동을 공격하던 1950년 8월 무렵이었다. 당시 우리 1사단은 좌측에 15연대, 중간에 12연대, 우측에는 11연대를 전개한 뒤 적을 맞았다. 대한민국 운명이 걸렸다고 해도 좋을 정도로 긴박한 전선이었다. 낙동강을 기점으로 남북의 종향(縱向)으로 흐르는 구간은 미군이 담당했고, 왜관으로부터 포항에 이르는 횡향(橫向)의 동서(東西) 구간은 한국군이 맡았다. 미군이 담당했던 남북 구간을 작전 편의상 X선으로 불렀고, 동서 구간의 한국군 전선은 Y선으로 호칭했다.
미 3대대 전우의 참담한 희생
X와 Y로 이어진 이 낙동강 전선이 대한민국의 김일성 군대의 공세 앞에서 명맥(命脈)을 이어갈 수 있느냐 없느냐를 가르는 분수령이기도 했다. 그렇게 늘어선 X와 Y의 축선이 만나는 곳이 바로 왜관과 다부동의 접점이었다. 동쪽에는 우리 1사단의 15연대가 섰고, 서쪽에는 미 1기병사단의 8기병연대가 섰다. 그 1기병사단 8기병연대 가운데 3대대가 바로 한국군 15연대와 접점을 이룬 부대였다. 그들은 당시에도 용맹하게 적을 맞아 싸웠다. 그들은 “8월 15일까지 부산을 해방하라”는 김일성의 빗발치듯했던 독촉에 따라 맹렬하기 짝이 없던 공세를 펼치는 북한군에 맞섰다. 왜관 동쪽 303고지에서 싸우던 3대대의 통신소대원 26명이 결국 포로로 잡혀 전원 포박 상태에서 사살당하고 말았다. 그런 아군이자, 동료이며, 친우였던 미군 3대대가 또 중공군의 공세에 밀려 곤경에 빠지고 말았던 것이다. 그래서 나는 김점곤 12연대장의 전화를 받고서는 어떻게 해서든지 그들을 구출하라고 지시를 내렸다. 그러나 중공군 공세는 밀물과도 같았다. 한 번 밀리면 급기야 모든 것을 휩쓰는 거센 물결이었다.
/중공군 1차 공세 때 중공군 병력에 의해 포로로 잡히고 있는 미군 장병의 모습.
중공군은 예의 노련한 전법으로 나왔다. 틈을 노려 구멍을 뚫고, 그 구멍으로 신속하게 병력을 밀어 넣었다. 미 3대대는 그런 중공군에게 3면으로 포위를 당하는 궁지로 몰렸던 것이다. 결과는 참담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 전투에서 3대대의 병력 800명 가운데 600명이 전사 또는 행방불명이었다. 호바트 게이 미 1기병사단은 예하 5연대를 긴급 투입해 8기병연대의 3대대를 구출하려고 시도했지만 허사였다. 손을 쓸 새도 없이 미 3대대는 중공군의 공격에 주저앉고 말았다. 병력의 4분의 3을 잃을 정도의 처참한 패배였다. 뒤늦게 구출에 나선 5기병연대는 중공군의 흔적조차 찾을 수 없었다. 중공군은 야간에 거친 공세를 벌였다가 날이 새면 산속으로 숨었다. 게다가 그들은 자신들이 숨어 있던 산에 불을 지폈다. 미군 공군기의 정찰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산은 그래서 늘 희뿌연 연막(煙幕)에 가렸고, 중공군은 그 진한 연기 속으로 몸을 숨겼다.
이 전투는 미군에게 매우 충격적이었다. 적의 공세에 포위당한 채 절체절명의 위기에 몰린 아군을 두고 미군이 철수를 할 수밖에 없었다는 점에서 그랬다. 미군 역사 상 예하 부대가 적의 포위에 갇힌 상태를 알면서도 그냥 물러난 사례는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눈물을 머금고 물러나는 일이야 늘 있는 게 전쟁터의 모습이다. 그런 미군의 희생을 알면서도 우리 1사단은 서둘러 전선에서 물러나야 했다. 그 또한 엄연한 작전(作戰)이었기 때문이다. 우선은 전열(戰列)을 가다듬기 위해서였고, 그로써 적에게 맞서 다시 싸워야 했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청천강을 다시 남쪽으로 넘었다. 평양 북쪽의 평안남도 안주군 입석이라는 곳이 우리의 철수 뒤 집결지였다. 예로부터 큰 강(江)은 높고 험한 준령(峻嶺)과 함께 천혜(天惠)의 방어선 노릇을 했다. 청천강은 역시 그에 충분한 지형이었다. 아군 전체는 우선 청천강 남쪽으로 물러선 뒤 그곳을 새 방어선으로 설정했다.
/선전용으로 찍은 중공군 환호 장면의 사진이다. 1~2차 공세를 통해 중공군은 강한 공격력을 드러냈다.
재정비에 들어간 1사단
전체적으로 그려진 그림에 따라 아군 대부분은 중공군 1차 공세에 밀려 강의 남쪽으로 내려와 방어에 임했다. 우리 1사단의 전열 재정비가 필요했다고 판단했던 이는 프랭크 밀번 미 1군단장이었다. 사실, 당시의 우리 1사단은 많이 지쳐있는 상태이기도 했다. 낙동강 전선에서 다부동의 격전(激戰)을 치른 뒤 최초로 북진의 혈로(血路)를 뚫었고, 이어 밀번 군단장의 허락을 얻어 평양 주공(主攻)으로 나섰다. 밤을 낮 삼아 걷고 또 걸어 적도(敵都)인 평양에 최초로 입성하는 수훈(殊勳)도 올렸다. 이어 평양 북쪽 숙천과 순천 일대를 공중에서 강습하는 미 공정대(空挺隊)와 연계하기 위해 숨 돌릴 틈도 없이 북상했다. 이어 벌어진 게 운산의 전투였다. 따지고 보면 조금도 쉬지 않고 멀고 험난한 길을 달려온 셈이었다. 프랭크 밀번 군단장은 그 점을 감안했을 것이다. 그는 결국 우리 1사단을 미 1군단의 ‘예비’로 조정하는 판단을 내렸다. 전열을 다시 가다듬은 뒤 전선으로 북상시키기 위해서였다.
일단 군단의 예비로 빠진 만큼 후방에서 당도하는 물자와 장비로 전쟁을 치르는 과정에서 발생했던 결손(缺損)을 메우고, 인원도 새로 보충해야 했다. 그래서 우리 1사단은 청천강 남쪽으로 내려온 뒤 더 남하해 안주 벌판의 입석으로 집결했다. 인원을 점검했다. 우리 1사단의 병력 손실은 약 500여 명에 달했다. 일부는 전사(戰死)했으며, 대부분은 부상을 입었다. 중박격포 2문의 손실도 있었다. 그러나 미 1기병사단의 피해에 비하자면 거의 ‘온전’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였다. 그러나 피로의 누적이 문제였다. 그런 피로가 쌓이고 또 쌓이면 적 앞에 용감히 나설 사기(士氣)에 결정적인 문제가 생기고 만다. 따라서 우리는 휴식과 재정비가 필요한 시점이었다.
그럼에도 나는 불안했다. ‘중공군의 전투력이 생각보다 훨씬 강하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무기와 장비는 미군에 비해 현저하게 떨어지지만 전선의 작은 틈을 관찰해 내는 능력, 그곳을 무섭게 파고드는 전법, 내전과 항일(抗日)에서 다져진 장병들의 전투력이 다 높았다. 따라서 ‘다시 이들과 어떻게 싸워야 옳을까’라는 생각이 늘 내 머릿속을 채웠다. 휴식과 재정비를 위해 우리가 모였던 입석에는 비행장이 있었다. 넓고 긴 비행장 활주로에는 초막(草幕)이 가득 들어섰다. 장병들이 안주 벌판에 풍성하게 자랐던 볏짚을 구해다가 잠자리를 삼았던 것이다. 모처럼의 휴식에 장병들의 얼굴은 밝았다. 그러나 내 마음을 가린 구름은 좀체 걷히지 않고 있었다.
115 김희갑씨 포함된 연예인 위문공연이 즐겁지만은 않았다
(14) 낯선 군대 중공군
전쟁터를 찾아온 연예인들
오랜 전투에 시달리던 장병의 얼굴 표정이 그렇게 밝을 수 없었다. 우리가 입석에 당도해 쉬는 기간 내내 그랬다. 바로 옆에 있는 긴 활주로에서는 끊임없이 미군 비행기가 뜨고 내렸다. 보급물자와 탄약, 장비 등을 후방에서 전방으로 실어 나르는 미군의 비행기였다. 나는 그를 체크해야 했다. 우리에게 부족한 물자와 탄약이 제대로 도착해 우리 몫으로 자리를 잡아가는지, 여러 전투를 거치는 동안 결원이 생긴 예하 부대에 후방으로부터 올라온 새 병력을 제대로 보내지는지 등을 체크해야 했다. 나는 그래서 매우 바쁘게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전쟁의 한 복판에서도 음악과 율동은 뒤를 따른다. 전시(戰時)라서 전투 부대에는 한가한 일상(日常)의 활동이 발길을 들이지 못할 것 같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위문공연단은 후방에서 전선으로 부지런히 찾아왔다. 격렬한 전쟁터에 나아가 생사(生死)의 고비에 서서 고전(苦戰)을 거듭했던 장병에게 후방으로부터 오는 위문공연단은 그야말로 긴 가뭄 끝에 만나는 단비와 같을 수밖에 없었다.
우리 1사단이 달콤한 휴식과 재정비를 하고 있던 입석에도 위문공연단이 찾아왔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의 나도 그런 쪽에는 일절 관심을 두지 않는 편이다. 유명한 가수나 영화배우 등은 줄곧 내 관심의 시야 바깥 먼 곳에만 머물렀다. 연예(演藝)라는 활동 자체에 관심을 두지 않았고, 둘 마음조차 내지 않았던 편이라 어느 유명한 대중 연예인이 곁에 다가와도 흥미를 보이지 않는다.
/1950년 11월 국군 1사단이 주둔 중인 입석을 찾아와 위문공연을 하고 있는 연예인들.
재정비에 열중하던 우리 1사단에 위문공연단이 찾아왔고, 어느덧 영내 곳곳에는 그들이 울리는 풍악(風樂)이 맴돌았다. 그들은 사흘 정도 1사단이 있던 입석에 머물다가 떠났다. 가설무대가 차려지고 1사단 예하 장병이 구름처럼 모여들었다. 당시 유행하던 ‘홍도야 울지 마라’라는 노래가 들렸고, 마침 그 노래를 히트시켜 당시 한국 일반 대중들에게 큰 인기를 끌었던 가수도 현장에 왔다는 기억이 있다. 분위기가 매우 흥겨웠다.
장병은 가설무대를 중심으로 어깨를 들썩이며 노래를 부르면서 공연을 벌이는 연예인들에게 환호를 보냈다. 제법 낯이 익은 코미디언의 모습도 보였다. 이름을 날렸던 김희갑씨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나는 영내를 지나가다가 그 대열에 잠시 몸을 섞었다. 장병은 사단장인 내가 자신들의 틈에 섞이는 것도 눈치를 채지 못할 정도로 신이 나 있었다. 함께 노래를 따라 부르는 장병도 있었고, 흥에 겹다 못해 함께 춤을 추는 장병도 있었다. 나도 그런 모습을 지켜보면서 즐거웠다. 그러나 오래 지켜볼 때가 아니었다. 나는 그 틈에서 곧 빠져나와 다시 업무에 집중해야 했다.
전쟁 지휘관이 할 일들
전선의 사령관은 매우 바쁜 자리다. 죽음과 삶의 거창한 주제를 생각할 겨를은 사실 거의 없다고 해도 좋을 정도다. 전투가 벌어지는 경우는 더 그렇다. 전황(戰況)을 시시각각으로 체크하면서 다음 단계의 대응 조치를 늘 생각해야 한다. 전투가 벌어지는 와중의 여러 손실을 급히 메워야 하는 일도 사령관의 몫이다. 전투가 벌어지지 않는 상황에서도 마찬가지다. 거느린 부하 장병의 먹을 것, 입을 것을 늘 챙겨야 한다.
/중공군 진영을 방문해 장병들을 위문 중인 중국 공연단. 왼쪽이 중국 오페라 '경극(京劇)'의 당대 최고 스타 메이란팡.
전투를 대비한 훈련 상황도 역시 사령관의 부지런한 시선이 닿아야 할 대목이다. 장병이 어떤 지향(志向)을 지닌 채 훈련을 벌이며, 전기(戰技)를 연마해야 하는지도 사령관이 판단해야 할 몫이기도 하다. 따라서 사령관은 부지런해야 한다. 명민(明敏)함까지 갖추면 더 좋다. 그로써 우리의 피해를 최소화하면서 전과(戰果)를 최대한으로 확대해야 한다. 사정이 그러하니 전쟁을 수행 중인 사령관은 감상(感想)에 젖거나 한가한 잡기(雜技)로 시간을 보낼 여유는 별로 없다.
그 무렵, 전쟁터의 지휘관이 지녀야 할 덕목을 떠올릴 때 나는 늘 우리 1사단이 배속해 있던 미 1군단의 프랭크 밀번 군단장을 생각했다. 그는 지휘관으로서의 덕목 중에 갖춰야 할 필수적인 요소를 두루 지닌 사람이었다. 우선 그는 용감했다. 적 앞에서뿐만 아니라, 스스로에게도 용감했다. 그는 우선 남의 말을 경청(傾聽)할 줄 아는 지휘관이었다. 특히 부하 지휘관의 건의에 귀를 크게 열 줄 알았던 사람이다. 미리 상정했던 작전계획, 앞서 생각해뒀던 행동 지침이나 방향 등을 지니고 있었더라도 부하의 건의에 귀를 열어 이를 옳은 방향으로 조정할 줄 아는 장군이었다.
그가 만약 미 8군, 더 나아가 도쿄의 유엔군 총사령부가 1950년 10월 말 내린 과감한 공격 지시에만 골몰한 채 부하인 나의 건의를 무시했더라면 상황은 어땠을까. 그가 거느린 미 1군단은 사실 한반도 전쟁에서 항상 승부가 갈리기 마련이었던 신의주~평양~서울~대전~대구~부산의 축선에서 핵심 전력을 이루고 있었다. 사실상 미 8군의 핵심에 해당하는 부대였다. 1950년 10월 말에 벌어져 11월 초에 끝난 중공군과의 1차 대규모 접전에서 다행히 미 1군단은 예하 미 1기병사단 8기병연대가 참담한 패배를 기록한 것 외에는 달리 큰 피해를 당하지 않았다. 주력(主力)을 보전했으며, 장비와 물자에서도 큰 피해를 기록하지 않은 채 후퇴작전을 성공적으로 완수했다.
현장에서 붙잡은 중공군 포로를 심문했던 내가 급히 그에게 이 사실을 알린 뒤 “직접 심문해 보시라”고 한 권유를 그는 마다하지 않았다. 이어 중공군 전면 개입의 가능성을 심각하게 여겨야 한다는 부하의 제의에도 귀를 열었다. 그로써 그는 미 8군에 후퇴의 불가피성을 역설하고 나서 그를 실천에 옮겼다.
/1950년 11월 초 주둔지에서 장병들에게 연설하고 있는 백선엽 1사단장(왼쪽).
다시 시작한 행군
나아갈 때 나아가고, 물러날 때 물러날 줄 알아야 한다. 수많은 부하 장병의 생사를 어깨에 짊어지는 지휘관은 그래야 한다. 나아갈 때를 알아 나아가고, 물러날 때를 미리 알아야 물러나야 하는 법이다. 그는 그런 점에서 매우 용감하면서도 진실한 지휘관이었다. 스스로 쌓은 견해에 매달리지 않고 상황에 따라 진퇴(進退)의 적절함을 판단할 줄 알았다는 점에서 그랬다. 우리 1사단의 재정비 기간은 제법 길었다. 11월 하순에 접어들면서 다시 우리의 공세가 시작됐다. 서부전선 운산 일대에서 맞았던 적의 공세를 심각하게 여기지 않는 분위기가 다시 번졌다. 재정비에 들어갔던 우리 1사단의 얘기는 아니다. 도쿄의 유엔군 총사령부가 보였던 분위기다.
도쿄의 유엔군 총사령부는 1950년 10월 말에서 11월 초까지 벌였던 아군의 ‘추수감사절 공세’, 그리고 한반도 참전 뒤 벌어진 초반전에서 청천강 이북의 덕천을 동서로 잇는 선까지 진출하기 위해 중공군이 벌였던 ‘1차 공세’의 성적표를 잘못 읽었던 듯하다. 맥아더 장군이 이끄는 도쿄의 유엔군 총사령부는 다시 총공세를 지시했다. 중공군의 참전이 대규모가 아니라는 판단을 했기 때문일 것이다. 아군이 11월 하순에 접어들면서 시작했던 공격은 이른바 ‘크리스마스 공세’였다. 12월 25일 크리스마스 전까지 한반도에서 모든 전쟁을 승리로써 종식한다는 내용이었다. 그에 따라 우리 1사단은 새로운 진공로를 배정받았다. 청천강을 건넌 뒤 평안북도 박천을 지나 태천으로 공격을 펼치라는 지시였다. 최종 목표 지점은 역시 ‘추수감사절 공세’ 때와 마찬가지로 압록강 수풍호였다. 미 1군단의 작전 지역은 커다란 변동이 없었다.
대신 미 1군단 동쪽인 영변과 개천은 남쪽으로부터 북상해서 전선에 새로 당도했던 미 9군단이 맡았다. 미 9군단 예하의 2사단이 영변으로 진출했고, 25사단이 개천으로 공격을 펼쳤다. 그로부터 더 동쪽인 덕천과 영원은 한국군 2군단이 맡았다. 우리 1사단은 제법 긴 시간 동안 휴식과 재정비를 한 터였다. 도쿄 유엔군 총사령부가 내린 진격 명령은 따라서 절대 버겁지 않았다. 새로 배정을 받은 병력으로 지치거나 다친 병력을 대체했고, 미국의 원활한 보급망을 통해 받은 동복(冬服)과 탄약, 장비, 물자 등으로 긴 전투에서 생겨났던 결손을 메운 상태였다.
청천강을 무사히 건넜다. 적의 저항은 없었다. 11월 24일 입석을 떠나던 상황은 그랬다. 우선 당도했던 박천까지도 특기할 만한 상황은 없었다. 도쿄 유엔군 총사령부의 판단이 옳았을지도 몰랐다. 10월 말에 새로 나타났던 중공군의 존재감이 느껴지지 않던 박천까지의 진격 상황까지는 적어도 그랬다. 그러나 박천을 지나면서 상황은 급격히 달라지고 말았다.
116 사령관 옆으로 날아온 총탄, 또 무너지는 전열(戰列)
(15) 가장 추웠던 겨울
“크리스마스 전에 돌아가자”
평양 북쪽의 입석이라는 곳에서 우리 1사단이 비교적 긴 휴식과 재정비를 취할 수 있었던 이유는 보급의 문제 때문이었다. 당시로서는 보급로가 원활치 않았다. 한반도에 난 육상의 길이 우선 대단치 않았던 데다가, 그마저도 전쟁이 벌어지면서 곳곳이 끊어졌던 까닭이다. 그러나 맥아더 장군의 유엔군 총사령부는 작전을 서둘렀다.
1950년 10월 말에서 11월 초까지 벌어졌던 중공군 1차 공세 뒤의 상황을 보고 난 뒤 내린 판단이었다. 유엔군 총사령부는 중공군의 개입으로 미 1기병사단의 8기병연대, 압록강에 먼저 도착해 적의 포위를 받아 커다란 피해를 당하였던 한국군 6사단의 피해 상황을 심각하게 보지는 않았던 듯하다.
앞에서도 잠시 언급했듯이, 유엔군 총사령부는 그런 중공군의 1차 공세를 대규모의 본격적인 참전으로 간주하지 않았다고 볼 수 있다. 아주 빠른 속도로 자신과의 접경(接境)인 압록강을 향해 다가서는 유엔군과 한국군을 향해 중국이 경고의 의미로 보낸 신호에 불과하다고 봤을 수 있다. 그에 따라 내려진 명령이 ‘크리스마스 총공세’였다. 낙동강에서의 북진, 인천상륙작전 뒤 평양 탈환 등의 여세(餘勢)를 몰아 크리스마스 전에는 공세를 종료하고 승리를 쟁취한다는 구상이었다. 그러나 11월에 들어서도 공세는 직접 취할 수 없었다.
부산 등의 남부 항구로 도착한 미군의 물자가 전선으로 때에 맞춰 도착할 수 없었기 때문이라고 국방부 전사(戰史)는 소개하고 있다. 아군의 보급에 숨통이 트였던 때는 11월 중순이었다고 한다. 총사령부의 강력한 지시에 따라 막혔던 육상의 보급로가 다시 열리고, 평양 인근의 해상 보급로 길목이었던 진남포 해역에 공산군이 설치했던 기뢰(機雷) 제거 작업 완료로 항구를 통한 물자 보급이 이뤄졌기 때문이었다.
/1950년 11월 크리스마스 공세 전후에 촬영한 국군 1사단 백선엽 장군.
그래서 ‘크리스마스 공세’를 시작한 날짜가 바로 11월 24일이었다. 미리 소개했듯이, 당시 아군의 작전 지휘는 동서(東西)로 크게 나뉘어 있었다. 서부전선은 미 8군이 지휘했고, 동부전선은 원산을 통해 다시 상륙작전을 펼쳤던 에드워드 알몬드 장군의 미 10군단이 이끌었다. 미 8군은 프랭크 밀번 장군이 이끄는 미 1군단을 청천강에서 압록강으로 향하는 주(主)공로에 배치했고, 후방으로부터 급히 북상한 미 9군단의 미 2사단과 25사단을 그 오른쪽, 다시 그로부터 동쪽 지역에는 한국군 2군단을 포진시켰다.
동부전선의 미 10군단은 미 1해병사단에게 장진호를 지향케 하면서 그 오른쪽에 미 7사단을 배치했다. 청진 등 동부 해안 쪽 방면으로의 공격은 한국군 1군단이 맡은 상태였다. 이런 배치를 통해 압록강을 넘어 한반도 북부에 진주한 중공군과 김일성 군대의 잔여 병력을 소탕한 뒤 압록강과 두만강으로 진출해 전쟁을 끝낸다는 구상이었다.
공격엔 불리, 방어엔 유리
그에 비해 중공군은 13병단 산하의 18개 사단, 그에 이어 추가로 압록강을 도하했던 9병단 산하의 12개 사단을 각기 서부전선과 동부전선에 배치한 상태였다. 전체 병력은 모두 38만 명으로 서부전선에는 약 23만 명, 동부전선에는 약 15만 명의 수준이었다. 전투 병력은 중공군이 아군보다 조금 더 많았다. 문제는 지형이었다. 아군의 입장에서 볼 때 서부전선은 청천강과 압록강 사이에 강남산맥과 적유령산맥이 뻗어 있는데다가, 청천강 남쪽 방면으로는 묘향산맥도 병풍처럼 버티고 있어 공로(攻路)에 익숙지 않을 경우 곤란을 당할 소지가 컸다.
공격하는 쪽보다는 그곳에 웅크리고 앉아 방어하는 쪽이 훨씬 유리했던 것이다. 협곡이 발달해 이동로가 극히 적은 점이 특히 그랬다. 아울러 청천강을 넘어 압록강에 당도하기 전의 지형은 대개가 험준한 산지(山地)와 빽빽한 삼림(森林) 지대를 이루고 있어 공격하는 입장보다는 방어하는 입장이 훨씬 수월했다.
마침 한반도 북부에 일찍 닥치기 마련인 겨울이 성큼 다가서 있는 상황이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한반도 북부, 특히 험준한 산맥이 동서남북으로 뻗어 있는 평안북도, 함경도 일대에는 강설(降雪)과 그에 따른 혹한(酷寒)이 유명하다. 비록 11월 중순의 대규모 보급에 의해 두터운 동복(冬服)과 군량(軍糧), 물자와 장비, 탄약 등으로 무장했다고 하더라도 그곳의 겨울 상황을 수월하게 볼 수는 없었다.
그럼에도 미군을 비롯한 유엔군 전체는 분위기가 좋았다. “크리스마스 전에는 모든 전쟁을 종료하고 귀국할 수 있다”는 정체불명의 자신감이 퍼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전투를 지휘하는 지휘부도 그런 확신에 차 있었던 듯했고, 그런 분위기는 자연스레 전투부대 장병 모두에게 금세 퍼졌던 듯도 했다. 국군도 그런 점에서는 마찬가지였을 테다. 어깨를 함께한 채 싸우는 미군과 다른 유엔군이 전쟁 조기 종식과 승리라는 자신감에 빠져 있던 터라 한국군 장병 또한 그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었다. 그런 분위기에서 우리는 11월 24일 입석을 떠나 박천으로 힘차게 행군했다.
/북진에 나선 국군 1사단 행렬, 교통을 맡은 미군 헌병의 모습.
태천을 지날 무렵까지는 저항이 없었다. 그 북쪽으로 박천을 지날 무렵 우리는 적의 공세에 직면했다. 나는 당시 태천의 야트막한 야산에다가 차려놓은 전방지휘소에서 우리 1사단 장병의 전투 상황을 지휘하고 있었다. 갑자기 우리 쪽을 향해 총탄이 날아들었다. 매복해 있던 적으로부터 날아온 총탄이었다. “휘~익”거리며 날아오는 총탄은 소리를 들어봐도 먼 곳으로부터 오는 게 아니었다. 날아오는 총탄은 거리에 따라 다른 소리를 낸다. 힘차지 않은 소리의 총탄은 몸에 맞아도 결코 치명적이지 않다. 그러나 쇳소리가 강하게 나는 총탄은 사정이 다르다. 그런 총탄 소리였다.
사령부에 날아든 총탄
갑자기 비명과 함께 내 옆에 서 있던 미군의 공지(空地) 연락장교 윌리엄 메듀스 대위가 쓰러졌다. 옆으로 고개를 돌려보니 메듀스 대위는 가슴을 쓸어안은 채 나뒹굴고 있었다. 그는 내 옆에 머물면서 미 공군과의 교신을 통해 공중폭격을 유도하는 장교였다. 살펴보니 그의 흉부가 적의 총탄에 뚫렸다. 미 공군기와 연락을 취하고 있다가 어디에선가 날아온 총탄에 맞았던 것이다. 가까이에 있는 내 지프를 불러 그를 급히 신안주에 있던 이동외과병원으로 후송했다. 나중에 확인한 사실이지만, 그는 다행히 신속한 후송으로 목숨을 건졌다.
메듀스 대위와 내가 서 있던 곳으로 총탄이 날아들었다는 점은 1사단 사령부 전체가 적과 매우 가까운 거리에 붙어서 격렬한 접전(接戰)을 펼치고 있다는 사실을 말해주는 대목이다. 곧 박천 일대는 맹렬한 전투현장으로 변했다. 그러나 상황이 아무래도 불길했다.
점차 밀리는 기색이 드러나기 시작하고 있었다. 밀려도 우리가 미리 준비했던 순열(順列)에 따라 밀린다면 크게 걱정할 상황이 아니었다. 분산(分散)의 조짐이 보이고 있었다. 우왕좌왕하면서 적의 공격에 체계적으로 반응하지 못한 채 마구 밀리는 조짐이었다. 그대로 두면 아군끼리 퇴로에 몰리며 마구 뒤로 물러서면서 극도의 혼란, 이어 막심한 피해를 보는 상황으로 번질 수 있었다. 분산을 시작하면 전투부대는 화력을 포함한 모든 전투력을 한 곳에 집중할 수 없는 상황에 놓이게 마련이다. 나는 전방지휘소를 뛰쳐나갔다.
/평양 북방의 공격 목표를 향해 나아가면서 전투를 벌이고 있는 국군 1사단.
일선의 전투부대 동향을 직접 눈으로 볼 수 있는 거리이기는 했지만, 나는 계속 지프를 탈 수 없었다. 모두 구릉(丘陵)으로 이어진 지역이라서 지프를 타느니 차라리 뛰는 게 나을 것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나는 일정 구간을 지프로 달린 뒤 곧 이리저리 뛰어다니기 시작했다. 우선 눈에 보이는 연대와 대대 지휘소를 찾아다녔다. 밀리는 기세를 조금이라도 극복하기 위해 그들을 안정시켜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좀체 그런 기미를 되돌릴 수 없었다. 나는 안간힘을 다 쏟아내야 했다. 입에서는 벌써 단내가 나고 있었다. 헐떡거리면서 전선의 연대, 대대, 그 밑의 중대 지휘소 등을 계속해서 찾아다녔다.
나는 각급 부대 지휘관을 만날 때마다 “당신들 이러면 못써, 여기서 이렇게 밀리면 우리는 끝이야!” “야, 이 사람아 밀리면 안 돼!” 라면서 분전을 촉구하고 또 촉구했다. 평소에도 욕설은 잘 입에 담지 않는다. 비교적 점잖은 말로, 그러나 간곡하게 독전(督戰)을 거듭했다. 아마도, 반나절 정도는 꼬박 뛰어다녔던 것으로 기억한다. 다행이었다. 무너지는 기미가 어느덧 발걸음을 멈췄다. 전선을 뛰어다닌 나의 거듭 이어지는 독전으로 일선의 부대 지휘관들이 마음을 다잡고 전투에 나선 덕분이었다. 전선 전면에 세웠던 2개 연대의 후퇴와 붕괴 기미가 사라지면서 전체 사단의 전열(戰列)이 다시 다듬어지고 있었다.
117 참담한 겨울의 협곡 속으로 걸어 들어간 미군들
(15) 가장 추웠던 겨울
분산이 두려웠던 이유
전선을 이끄는 지휘관으로서, 더구나 전투의 현장에 선 지휘관으로서 가장 무서운 일이 적전(敵前)에서 우리 대오(隊伍)가 분산(分散)의 조짐을 보이는 경우다. 감당할 수 없는 참혹한 결과로 이어지는 일이기 때문이다.
1950년 8월 낙동강 전선 다부동 전투 때에도 그런 조짐이 있었음을 소개했다. 당시에도 수적으로 우세한 북한군의 공세를 맞아 1사단 11연대 1개 대대 병력이 산을 타고 급히 밀려 내려왔던 적이 있다. 산 밑의 계곡에서 방어진을 펼쳤던 미 25사단 27연대 마이켈리스 대령의 강력한 항의, 그를 접수했던 미 8군의 가혹한 질책에 따라 나는 11연대 1대대의 방어지역으로 급히 뛰어가 우리 장병을 설득했던 적이 있다.
/사단 장병들을 대상으로 연설을 하고 있는 1사단장 백선엽 장군(왼쪽).
적에 맞서다가 여러 요인에 의해 아군이 밀리는 경우는 많다. 전황(戰況)은 쉴 새 없이 변수(變數)를 맞아 변하고 또 변하기 때문이다. 적에게 밀리는 경우는 압도적인 적의 공세 외에도 여러 요인이 있다. 아군끼리의 협조가 잘 이뤄지지 않을 경우에도 그런 상황은 발생할 수 있다. 그런 상황을 맞을 경우 지휘관은 전면에 나서야 한다.
상황을 수습하기 위해서는 때로 스스로 안전을 돌아보지 않으면서 앞으로 나서야 한다. 특히 불확실한 전황으로 부대가 분산의 조짐을 보일 때가 그렇다. 전투는 여러 측면에서의 설명이 가능하지만, 크게 보면 아군끼리의 이음새를 잘 유지하는 일이기도 하다.
전투 부대의 각 단위가 서로 이어지는 곳, 즉 전투지경선(戰鬪地境線)은 우리의 허점이 잘 드러나는 부분이다. 그곳에는 예외 없이 적의 공격력이 모여든다. 전투는 그런 아군 부대와 부대의 접점이 잘 이어져 있느냐, 아니면 쉽게 허물어지느냐에 따라 승패가 갈리는 경우가 매우 많다. 옆에 서 있던 전우(戰友)가 제자리를 지키지 못하고 모습을 감추면 심각한 공황(恐慌)이 찾아들게 마련이다.
그에 따라 전우가 사라진 다른 쪽 옆의 부대도 곧 후퇴를 한다. 그는 잇따른 파상(波狀)의 후퇴 국면으로 이어진다. 미리 정해진 순열(順列)에 따라 후퇴를 하지 못할 경우 전체 부대의 상황은 붕괴(崩壞)로 다시 발전한다.
속수무책(束手無策)의 후퇴 상황, 그에 편승하는 적의 공세는 아주 가공(可恐)할만한 효과로 나타난다. 부대는 그에 따라 돌이킬 수 없는 상황으로 치달아 결국 소멸(消滅)과 와해(瓦解)의 결과를 맞이할 수밖에 없다. 60여 년 전 벌어진 전쟁에서 내가 가장 경계하며 두려워했던 대목이다.
부대를 돌려 사흘을 버티다
나는 2개 연대가 적을 맞아 싸우는 현장을 부지런히 돌아다니며 우리의 틈새를 막았다. 일부 장병은 도주하는 길에 나와 맞닥뜨리기도 했다. 나는 그들을 보면서 간곡하게 타이르고 또 타일렀다. 내가 지금 기억하는 말은 “당신들, 이러면 못써, 우리 큰일 난다”의 내용이었다. 다행히 전선으로부터 이탈해 뒤를 향해 내빼던 장병은 나의 그런 간곡한 부탁을 외면하지 않았다.
사느냐 죽느냐를 다투는 전투 현장에서 적의 공세를 맞아 등을 보인 때에는 극도의 혼란감과 함께 공포가 엄습하기 마련이다. 그럴 때는 틈새를 막아 거꾸로 향하는 흐름을 막아줄 버팀목, 즉 지주(砥柱)가 필요하다.
나는 비록 젊은 나이의 사령관이었지만 혹독했던 6.25 개전 초기, 낙동강 전선, 북진의 전투를 거치면서 그 정도의 요체(要諦)를 나름대로 알았던 상태였다. 아주 다행이었다. 아주 험악한 전쟁터를 함께 누비면서 낙동강을 딛고, 평양에까지 이르는 동안 동고동락했던 전우들의 신뢰로 우리는 곧 안정을 되찾았다.
전면의 2개 연대가 잠시 밀리다가 곧 제자리를 찾았다. 중공군은 예의 그런 기이한 전술과 기만적인 방식으로 우리 1사단의 전면을 세게 두드렸다가 아군의 방어전선에 커다란 구멍이 뚫리지 않자 주춤했다. 그런 상태로 사흘인가를 버텼다. 중공군은 더 이상의 공세를 지속할 수 없었다.
/평양 이북의 전투 현장에서 잠시 시간을 내 예배를 드리고 있는 미군들.
후방에는 마침 우리를 튼튼하게 뒷받침하고 있던 미 제10 고사포여단의 화력이 버티고 있었다. 윌리엄 헤닉 대령은 우리가 운산 북방에서 접전을 벌이다가 후퇴할 때 대규모 화력을 퍼부어 중공군 공세를 막아내는 데 도움을 줬듯이 그때에도 효과적인 포격으로 중공군의 앞길을 가로막았다. 우리 1사단이 배속한 미 1군단은 앞에서 말했듯이 미 8군의 주력에 해당했다.
이번에도 프랭크 밀번 군단장이 지휘하는 미 1군단은 무사히 중공군의 공세에 직면했다가 뒤로 빠질 수 있었다. 박천에서 우리 1사단이 중공군 공세에 무너지지 않은 점이 우선 다행이었다.
1950년 11월 말에 시작해 12월 초까지 이어진 당시의 전투를 우리는 ‘크리스마스 공세’, 북상하는 유엔군을 맞아 싸웠던 중공군은 당시의 전투를 ‘2차 공세’라고 부르는 게 보통이다. 중공군도 이번에는 작심하고 싸움에 나섰다. 1차 공세를 통해 전투력 일부를 선보이는 데 그쳤던 중공군은 2차 공세에서 본격적으로 아군의 ‘유생(有生) 역량’을 섬멸할 기세로 덤볐다.
그런 중공군의 공세에 직면했음에도 미 1군단은 커다란 피해를 보지 않은 채 뒤로 물러날 수 있었다. 먼저 우리 1사단이 박천에서 중공군과 사흘 정도 접전을 벌이다가 후퇴할 수 있었다. 무질서하면서 혼란스러운 후퇴가 아니라, 적을 맞아 싸우다가 불리할 경우 물러나도록 했던 작전 계획에 따라서였다.
서부 해안을 따라 진군하던 미 24사단은 우리의 엄호부대로 역할을 수행했다. 우리가 빠진 틈을 미 24사단이 측방에서 엄호하면서 지탱했다. 그 사이를 벌면서 우리 1사단은 순조롭게 뒤로 빠졌고, 미 24사단 또한 차분하게 중공군과 소규모 접전을 벌이면서 후방으로 후퇴하는 작전이었다. 이를테면 지연(遲延)과 후퇴(後退)를 반복하는 방식이었다. 적의 공격에 맞서 공방을 벌이면서 조금씩 뒤로 물러나는 일이었다.
Coldest winter
이 글의 작은 제목이 ‘가장 추웠던 겨울’이다. 미국에서 나온 책자 제목 『Coldest winter』를 옮긴 내용이다. 그 책은 1950년 11월 말에서 12월 초에 벌어졌던 당시의 전투를 소개하고 있다. 그 책의 제목이 암시하듯이, 당시의 전투에서는 참혹한 결과가 나왔다. 중공군 2차 공세에 아주 참담한 피해를 본 미군의 이야기가 주요 흐름이다.
실제 그해 겨울은 우리 아군의 입장에서는 몹시 추웠다. 가장 춥다고 해도 좋을 정도로 우리의 심리적 위축감은 극도로 강해졌기 때문이다. 미 1군단의 예하에 배속했던 우리 1사단의 상황은 그래도 나았다. 직접 중공군의 2차 공세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해 참담한 피해를 봤던 부대의 경우가 바로 그랬다. 그들에게는 정말 춥고도 지독한 겨울이었다.
장소는 우리가 10월 말에 진주했던 영변 인근이었다. 앞서 말한 대로 그곳에는 험준한 적유령산맥과 강남산맥이 지나고 있다. 영변을 중심으로 그 북쪽에 운산이 있었고, 그 동남쪽으로 군우리가 있었다. 군우리는 지금 개천(開川)이라는 이름으로 지명이 바뀐 상태다.
/강설에 대비해 흰 광목천으로 위장한 국군 1사단 장병들.
적을 알아 적의 실력을 미리 가늠하면 여러 가지 상황에서 자신을 보전할 수 있다. 적을 알지 못하고서도 적의 실력을 낮춰본다면 참혹한 상황에 직면할 수 있다. 전쟁의 ‘원칙’에 가까운 말이다. 그러나 1950년 겨울, 적이 도사리고 있던 한반도 북녘 산맥의 깊은 협곡 속으로 행군하던 아군은 그 점을 놓쳤던 듯하다. 여러 가지 부주의(不注意)가 그에 겹치고 말았다. 우선은 중공군의 2차 공세 의도를 제대로 짐작조차 못 했다는 점이 전체 유엔군의 커다란 판단 착오였다. 한 번 잘못 내린 판단은 거듭 잘못된 판단을 부르는 게 정리(定理)일 것이다. 우리가 보였던 부주의함의 근원은 어쩌면 상대를 얕잡아 보는 이른바 ‘경적(輕敵)’이 그 뿌리였을 것이다.
압록강을 도강한 뒤 한 달, 그 시간을 통해 중공군은 이미 병력을 크게 보강한 상태였다. 그럼에도 유엔군 총사령부는 그 상황을 미리 알지 못했다. “크리스마스는 고향에서 보낸다”는 자신감과 흥분은 유엔군 전 장병의 마음속에 이미 자리를 잡은 시점이기도 했다. 장소 역시 고래(古來)로부터 한반도의 전쟁이 줄곧 벌어지던 영변과 군우리 일대였다. 결과는 이미 예고된 것일 수도 있었다. 참혹함은 곧 아군의 머리 위에 내려앉을 모양새였다. 미 1군단의 동쪽을 맡았던 미 9군단, 그 예하의 미 2사단과 미 24단이 그런 조짐을 전혀 감지도 못한 채 영변과 군우리를 향해 서서히 행군(行軍) 중이었다.
118 후방에 침투한 중공군의 총구, 미군의 등을 겨누다
(15) 가장 추웠던 겨울
1950년 겨울의 작전배치
적은 우리를 유인(誘引)했다. 1950년 11월 말에서 12월 초에 벌어진 우리 측의 ‘크리스마스 공세’, 중공군 측의 ‘2차 공세’ 속 모든 전투가 그렇지는 않았다 하더라도, 큰 틀에서 보면 중공군은 우리를 자신들이 매복한 깊숙한 협곡 속으로 끌어들이고자 했다. 해발 2000m가 넘는 준령(峻嶺)이 솟아있고, 그 안으로 난 협곡은 깊고도 길었다. 1차로 압록강을 도강한 중공군 13병단 25만의 병력은 서부전선, 나중에 강을 넘은 9병단은 동부전선에 늘어선 상태였다. 그들은 우선 평양~원산을 잇는 곳에 진출할 계획이었다.
그들의 주공(主攻)은 청천강에서 평양으로 이어지는 축선에 집중했다. 조공(助攻)은 장진호와 함흥, 나아가 원산을 겨냥하고 있었다. 그렇게 공세를 벌인 뒤 평양에서 원산으로 이어지는 라인을 확보하면서 사전에 미리 남쪽으로 침투시켰던 제2선의 부대와 연계해 38도선을 향해 전과(戰果)를 지속적으로 펼친다는 생각이었다. 아군의 전개도 비슷했다. 전선의 주공(主攻)은 미 8군이었다. 미 1군단의 예하 미 24사단이 서해안 방면으로 나있던 통로를 따라 신의주 쪽으로 진군하며, 한국군 1사단은 박천을 지나 수풍호로 움직였다. 영연방 제27연대도 그 안에 들어 있었다.
미 8군 예하의 다른 두 군단인 미 9군단은 서부전선의 중앙, 한국군 2군단은 그 동쪽을 맡았다. 이들은 중공군 공세에 가장 피해를 당하였던 부대였다. 미군 사단으로는 2, 25사단이 있었으며 터키군 1개 여단이 뒤를 받쳤다. 우리 1사단과 함께 평양을 공격했던 미 1기병사단과 영연방 29여단은 후방에서 예비대로 남아 있었다. 동부전선은 미 10군단이 주력을 맡았다. 미 1해병사단이 동부전선의 좌측, 10군단 예하의 미 7사단이 전선의 중앙을 담당했다. 그 동쪽으로는 수도사단과 3사단을 거느린 한국군 1군단이 진출할 계획이었다. 중공군 참전 이래 최대의 싸움이 불붙을 태세였다.
문제가 생기면서 아군에게 가장 참혹한 피해를 안겼던 전장(戰場)은 서부전선의 중앙과 우측, 동부전선의 서쪽인 장진호였다. 상처가 가장 깊었던 곳은 서부전선의 중앙과 우측이었다. ‘장진호 전투’라고 불리면서 미 해병의 악전고투(惡戰苦鬪)로 알려진 동부전선 좌측의 싸움터는 아주 유명하다. 나중에 소개하겠지만, 미 1해병사단의 전투는 인상적이었다. 미 해병의 피해가 깊었으나, 사실 더 다친 쪽은 중공군이었다. 아군에게 참담함을 넘어 참혹하다고 해도 좋을 정도의 결과가 나타났던 곳은 서부전선 쪽이었다. 그곳은 우리 1사단에서 멀리 떨어진 곳이 아니었다.
/중공군 공세에 밀렸다가 포로로 붙잡히고 있는 1950년 겨울의 미군들.
다양했던 중공군 공격 전술
중공군은 2차 공세에서 다양한 전술을 선보였다. 그러나 전술의 주조(主調)는 역시 기습과 매복, 그리고 대규모 포위였다. 변칙적인 전술이 큰 특징이었다. 그러나 ‘인해전술(人海戰術)’이라는 전법도 이때 본격적으로 구사했다. 아군의 정면을 돌파해야 할 때, 상황의 필요에 따라 단기적으로 전과를 확대해야 할 때였다. 사람 목숨의 희생에는 아랑곳하지 않는 전법이었다. 무수한 사람이 죽어 넘어져도 압도적인 병력으로 그저 앞을 향해 밀고 들어오는 방식이었다. 때로는 그런 무모하다 해도 좋을 정도의 인해전술, 그러나 때로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우리를 휘감고 들어오는 우회와 매복, 빈틈을 뚫고 곧장 쳐 내려와 아군을 둘러싸는 포위 전술이 모두 등장했다.
가장 심각한 피해에 직면했던 부대는 미 2사단이었다. 전면에서 공격에 나선 미 25사단과 함께 서부전선 중앙을 맡아 전투를 벌였던 미 9군단의 중심을 이뤘던 부대였다. 군단 담당 전선의 좌측을 맡았던 미 25사단은 커다란 피해를 보지 않았다. 영변을 거쳐 운산 북방으로 진출해 압록강으로 향하고자 했던 미 25사단은 중공군 공격에 직면한 뒤 신속하게 후퇴를 결정했다. 그에 비해 군단 전면의 우측을 맡아 구장동을 지나 희천으로 진출할 계획이었던 미 2사단이 맞이한 상황은 전혀 달랐다. 이들은 우리 1사단처럼 11월 24일 미 8군 사령관 워커 장군의 결정에 따라 공격에 나섰다. 그러나 그로부터 닷새 동안, 즉 11월 28일까지 그들은 줄곧 악몽(惡夢)과도 같은 상황에 놓이고 말았다.
미8군 사령부의 공격 명령이 내려왔던 11월 24일의 상황은 특기할 만한 게 없었다. 이 점은 서쪽 방면의 전선에 서서 박천을 향해 다가가던 우리 1사단의 상황과 마찬가지였다. 우리도 태천을 지날 때까지는 중공군의 공세 조짐을 눈치 채지 못할 만큼 순조로웠다. 우리가 11월 25일 박천에서 중공군 공세에 직면했던 것처럼 구장동을 지나 군우리로 향하던 미 2사단도 그날 중공군 공세에 길이 우선 막혔다. 미 2사단은 전선 좌측으로부터 우측으로 9연대와 23연대, 38연대를 배치한 채 북상하고 있었다. 미 2사단도 당초 중공군의 반격 가능성을 크게 염두에 두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25일에도 중공군 공세가 대단치 않으리라고 봤던 미 2사단은 공격을 서두르고 있었다. 그러나 사단 전면에서 중공군의 저지 공격이 벌어졌다. 심각한 상태는 아니었으나, 일부 연대는 중공군 기습에 적지 않은 희생자가 나오는 피해를 봤다.
/한반도 전선에 뛰어든 중공군 병력이 진군하고 있다.
후방을 뚫고 들어온 적군
26일 새벽 2시를 넘기자 중공군 공세가 본격적으로 불붙었다. 중공군은 야습(夜襲)에 매우 강했다. 야음을 틈타 중공군은 미 2사단의 전선 전면을 압박하기 시작했다. 곳곳에서 요란한 포성이 터지면서 중공군의 공격 방향을 제대로 가늠하지 못했던 미군의 희생이 커지고 있었다. 미 2사단 전면에 포진한 중공군은 40군단이었다. 한반도에 참전한 중공군 부대 중에서 그들이 특별히 강한 부대라고는 할 수 없었다. 다른 중공군 병력처럼 야습에 나섰고, 피리를 불며 꽹과리를 치면서 다가왔다. 매복에 뛰어났고, 우회와 기습에 능했다. 다른 중공군 부대와 다를 바는 전혀 없었다. 그러나 이들의 전술은 미 2사단을 지향할 때 크게 효과를 거둔 듯하다.
이날 새벽 야음을 틈타 덤비기 시작한 중공군은 현란한 전술을 선보였다. 중공군은 미군의 전선 이곳저곳을 뚫고 후방으로 부대 일부를 침투시키는 데 성공했다. 전면(前面)에 등장한 중공군의 야습에 미 2사단 각 연대가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동안 중공군 일부 병력은 후방 깊숙한 곳으로 발길을 옮겼다. 이는 미 2사단으로 하여금 극도의 혼란을 초래하도록 만들었다. 26일의 전투에서 일부 대대의 경우는 부대원 절반이 희생당할 정도였다. 전면을 뚫고 침투한 중공군은 후방에서 미 2사단 각 연대의 대대 지휘소를 직접 공격할 정도로 아군의 후방 깊숙한 곳에 나타났다. 상황은 좀체 수습하기가 어려웠다. 따라서 후퇴가 필요한 상황이 닥치고 말았다.
미 9군단의 군단장은 콜터(Jhon B. Coulter) 소장이었다. 그는 미 2사단 등이 맞이하는 상황의 어려움을 즉석에서 판단했다. 그는 중공군 공세가 심각하게 아군의 피해로 이어지는 상황을 파악하고 26일 새벽 미 2사단장에게 청천강 방어를 강화하라고 명령했다. 군우리 남쪽의 도로를 따라 순천과 평양으로 향하는 길로 후퇴를 시작해야 했다. 미 2사단장 카이저(Lawrence B. Keiser) 소장은 청천강 좌측에 9연대, 우측에 38연대를 배치한 뒤 23연대를 예비로 두고 청천강 방어선을 강화할 생각이었다.
유엔군 총사령부가 중공군 공세의 심각성을 깨닫고 압록강으로의 진출 명령을 철회하는 대신, 모든 전선의 아군에게 후퇴 명령을 내린 시점은 11월 28일이다. 이날 도쿄의 맥아더 유엔군 총사령관은 전선에 있던 워커 미 8군 사령관 등을 불러 회의를 한 뒤 이 같은 명령을 내렸다. 청천강 이남으로 내려와 이곳을 새 방어선으로 삼으라고 지시한 것이다. 뒤늦은 감은 있었으나, 어쨌든 전선 전면에서 물러나 병력과 장비 등을 보전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에 따라 서부전선의 아군 병력은 모두 청천강 이남으로 이동해야 했다. 그러나 후퇴는 그저 뒤로 물러나는 단순한 일이 아니다. 여러 번 언급하지만, 후퇴 또한 엄연한 작전이다.
길의 이용 권한을 어느 부대에 먼저 주느냐, 물러설 때의 각급 부대 사이의 순서 등을 엄밀하게 짜놓은 뒤 그를 따라 펼쳐야 하는 게 후퇴다. 그러나 당시의 상황은 전혀 순탄하지 못했다. 중공군은 이미 전선을 우회해 아군의 후방으로 깊숙이 발을 들여놓은 상태였기 때문이다.
119 죽음의 계곡, 가혹한 ‘인디언 태형’식으로 얻어맞은 미 2사단
(15) 가장 추웠던 겨울
중공군 포위망에 들어서다
영변의 동남쪽에 있는 군우리(軍隅里), 그곳에서 미군은 중공군에게 6.25 개전 이래 가장 큰 패배를 당하고 말았다. 그 군우리라는 곳은 남북으로 병력이 지나는 군사적인 요충(要衝)이라고 해도 좋을 지역이었다. 따라서 과거의 전쟁 길목이었음이 분명하다. 지금은 개천(開川)이라는 이름으로 바뀌었으나, 예전의 그 이름대로라면 군사(軍事)와 관련이 있어 지명에 군(軍)이라는 글자를 달고 있을 터였다. 실제 평양에서 순천을 거쳐 북진(北進)할 때, 또는 북쪽에서 평양을 공격할 때 병력이 반드시 거쳐야 하는 곳이었다.
그 군우리에서 평양을 향해 남쪽으로 후퇴할 때 선택할 수 있는 길은 두 갈래였다. 서쪽인 안주(安州) 방면으로 난 길, 그리고 순천을 향해 직접 나설 수 있는 길이었다. 미 2사단이 중공군의 2차 공세에 직면해 급히 후퇴를 결정할 무렵에는 이미 두 갈래 길 중 하나는 사용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곳에는 이미 다른 미군 부대와 유엔군으로 붐볐다. 안주 방면으로 난 서쪽의 우회로였다. 아울러 전화(戰禍)를 피하기 위해 길에 나선 피난민들도 그 길로 몰려들고 있었다.
따라서 미 2사단의 후퇴로는 군우리에서 직접 순천 방면으로 이어진 길고 좁은 협곡의 길 하나만이 있었다. 길이는 10㎞를 넘었다. 길다고 하면 제법 길다고 할 수 있는 협곡의 지형이었다. 중공군의 강한 공세에 직면한 미 2사단은 달리 선택할 길이 없었다. 이 계곡을 지나 순천 방면으로 남하한 뒤 평양을 향해 걸음을 옮기는 수밖에 없었다. 이 계곡을 두고서는 나중에 여러 별칭이 붙었다. ‘죽음의 계곡’은 당시 미군이 당한 처참했던 상황을 일컫는 말이다. ‘인디언 태형(笞刑)’이라는 말도 따라 붙었다. 미군이 아메리카 대륙 서부에 산재한 인디언들과 싸우면서 개척을 벌일 때 인디언에게 붙잡히는 경우가 많았을 것이다.
인디언들은 미군 포로를 잡았을 때 특별한 형벌을 가했다고 한다. 2열로 죽 늘어선 인디언 사이를 미군 포로로 하여금 걸어서 지나가게끔 하는 방식이었다. 그렇게 늘어선 인디언 사이를 지나가는 미군은 사정없이 두드려 맞는다. 인디언들은 주먹으로, 때로는 몽둥이로 포로를 마구 때렸다. 그게 바로 ‘인디언 태형’이다. 1950년 11월 28일 군우리 북쪽까지 진출했다가 후퇴 길에 나선 미군이 꼭 그렇게 당하고 말았다. 죽음의 계곡에 들어선 뒤 인디언에게 두드려 맞듯, 태형의 가혹한 아픔에 맨살을 드러내야 했다. 그냥 맞고 끝난다면 그런 다행도 없었다. 적지 않은 미군이 목숨을 잃어야 할 참혹한 상황을 맞이하고 말았던 것이다.
/군우리 죽음의 계곡에서 매복했던 중공군 병력이 거세게 공세를 펼치는 모습이다.
생지옥의 후퇴 현장
좁은 협곡을 빠져나가는 일이 막심하면서도 참담한 병력의 희생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그곳 계곡의 양쪽 산자락을 중공군 병력이 이미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이미 미 2사단과 한국군 2군단 사이의 전투지경선을 예리하게 파고 들어와 아군의 후방으로 침투한 상태였다. 아울러 지형(地形)이 그려내고 있는 군사적 이해(利害)를 정확하게 파악하면서 미군이 후퇴할 길목을 미리 선점했던 것이다. 중공군은 그 점에서 매우 노련했다. 상대의 허실(虛實)을 날카롭게 파악해 자신의 전술을 선택했다.
중공군은 군우리에서 순천으로 향하는 가장 직접적인 협곡에 이미 매복을 마친 상태였다. 전면의 강력한 중공군 공격에 당황한 미군은 달리 상황을 따질 겨를도 없이 그 협곡에 거칠게 들어서 후퇴를 서두르고 있었다. 아군은 넓게 쳐놓은 그물에 어쩔 수 없이 걸려든 새, 깊고 미끄러운 독으로 빠져든 쥐와 같았다. 협곡은 좁고 긴 골짜기다. 넓게 트인 개활지(開豁地)와는 다르다. 후퇴의 국면에서 협곡에 들어설 때, 그나마 적이 발을 들이지 않는 경우라면 다행이다. 신속하게 대열을 이뤄 순서를 정해 빠져나가면 그만이다. 그러나 적이 이미 높은 곳에서 아군을 겨냥할 수 있는 감제(瞰制)의 고지에 매복을 하고 있는 경우라면 상황은 아주 달라진다. 현장에 있었던 미 2사단 장병들의 증언을 실감나게 채록해 당시의 상황을 그렸던 에는 그 장면이 생생하다.
계곡을 지나는 미군의 트럭은 협곡 위의 고지에서 빗발치듯 쏟아지는 중공군의 사격으로 곧 진행을 멈췄다. 그렇게 멈춘 트럭은 미군 후퇴 대열의 길을 막았다. 길을 막고 서있는 트럭을 밀어내기 위해 미군들이 나설 경우 중공군은 곧장 공격을 벌여왔다. 좁은 길을 빠져나가려는 지프와 트럭은 이미 중공군의 사격을 받아 길에 널브러져 있던 동료 미군의 몸을 밟고 그냥 넘었다고 했다. 심각한 공격, 나아갈 수 없는 후퇴로, 눈앞에서 벌어지는 생지옥과도 같은 장면으로 미군들은 넋을 차리지 못할 정도였다고 한다. 사단장 카이저 소장의 경우도 등장한다. 사단장은 그 계곡의 남단에 있는 이른바 ‘죽음의 계곡’(당시 미군들이 붙인 이름이다)를 정찰하려고 걸어가다 길가에 지쳐 누워있던 병사 하나를 밟았다고 했다. 사단장 본인도 너무 지쳐 그만 병사의 몸을 밟았다는 것이다. 그러자 밟힌 병사가 “이 나쁜 자식!”이라며 욕을 했고, 사단장은 자신도 모르게 “미안하네”라고 사과를 했다고 한다.
/군우리 남쪽에서 벌어졌던 미군의 처참한 패배 현장.
나아가고 물러설 때
그 당시 전쟁터에 섰던 사람들의 증언을 직접 수집한 내용이니 믿을 만한 기록일 것이다. 사단장과 병사의 그런 대화가 눈에 띈다. 삶과 죽음이 갈라지는 경계에 함께 서 있으니, 그런 절망적인 상황에서 사단장에게 욕한 사병을 탓할 일이 아니다. 마치 포로로 잡은 병사를 인디언들이 죽 늘어서 마구 때리듯, 중공군의 가혹한 총구와 포탄 세례를 받으며 협곡을 지나온 미 2사단의 경우는 아주 참담했다. 미 2사단은 그로부터 중공군에게 계속 밀리면서 결국 서울에 집결할 수 있었다. 이들은 영등포에 모였는데, 당시의 참담함은 필설로 다 형용키 어려울 정도였다.
한 중대의 경우 170명 가운데 10명 정도가 모습을 드러냈고, 한 대대는 600명의 구성원 가운데 150명 정도만 살아왔다. 피해는 아주 심각했다. 가장 큰 피해를 당했던 연대는 9연대였다. 그들은 부대원 절반을 잃었다. 나머지 38연대의 피해도 심각했다. 절반 가까운 병력을 그곳에서 상실했다. 건제(建制) 병력의 3분의1 이상을 잃으면 그 부대는 전투력을 제대로 발휘할 수 없는 상태로 본다. 따라서 절반 이상, 또는 절반 이상의 병력을 손실한 미 2사단의 9연대와 38연대는 이미 전투를 수행할 수 없는 부대로 전락하고 말았던 셈이다. 포병대대의 손실도 심각했다. 사단 포병대대가 보유했던 155㎜ 18문은 모두 잃어버렸고, 105㎜는 8대만 건졌다. 포병대대의 인명 피해도 적지 않았다. 개인화기의 손실률은 40%에 달했고, 차량은 35%를 그곳에서 잃었다. 기타 장비의 손실률도 40%에 이르렀다. 최종 병력 손실은 4000명을 조금 웃돌았다. 그에 따라 미 2사단은 사단의 이름을 달고는 있었지만 사실 상 연대전투단(RCT) 정도의 전투부대로 전락하고 말았던 것이다.
지금 돌아보면 당시의 전투는 참담한 결과 외에 많은 점을 일깨워준다. 당시 미 2사단을 이끌었던 카이저 소장의 지휘 능력이다. 물론, 그 하나만을 탓할 수는 없다. 그 때 전투에 나섰던 아군의 지휘관들 모두는 중공군의 전투력을 제대로 가늠하지 못했다. 따라서 그런 중공군의 공세를 제대로 막아낸 사람도 없다. 그럼에도 유념(留念)하고 싶은 대목이 있다. 나아가고 물러서는 일, 즉 진퇴(進退)의 문제다. 전쟁터에서 나아가는 일은 순조로울 때가 많다. 일종의 세(勢)가 만들어지고, 그에 따른 진격일 경우가 많아서 그렇다. 그러나 물러설 때는 신중해야 한다. 나아가다가도 물러서는 경우를 항상 생각해야 옳다. 수많은 장병의 생사를 어깨에 짊어진 전선 지휘관은 꼭 그래야 한다.
나 또한 당시의 상황에서 카이저 소장에 견줘 더 전투를 잘 이끌었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당시 카이저 소장은 물러설 때에 꼭 필요한 사항을 놓쳤다. 진격했던 길을 되돌아올 때의 후퇴로를 미리 상정하지 못한 점이다. 만약 그가 앞으로 나아갈 때 물러서는 상황을 미리 상정해 협곡 곳곳에 일부 부대를 잔류시켰다면 어땠을까. 카이저는 그를 세밀하게 다루지 못해 큰 피해를 본 경우다. 그러나 그 점이 어디 카이저 소장 한 사람에게만 그치는 잘못일까.
120 장진호의 혹독한 겨울, 미군과 중공군의 전투력을 시험하다
(15) 가장 추웠던 겨울
영하 40도의 장진호
내가 있었던 전쟁터는 아니었지만 60여 년 전 벌어진 이 땅에서의 전쟁을 회고할 때 언급하지 않을 수 없는 전투가 바로 장진호에서 벌어졌던 미군 해병사단과 대규모 중공군 부대의 싸움이었다. 이 전투는 새삼 언급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많이 알려졌다. 장진호 일대는 높은 고원지대에 둘러싸여 있는 지형이라 강설(降雪)이 한반도에서 가장 빠른 지역 중 하나다. 아울러 기온이 가을에 들어서면서는 매우 급격하게 떨어지며 일찍 내리는 눈에 강추위가 겹치는 지역이다. 이곳에 진출했던 미군 1해병사단은 막대한 병력을 뒷심으로 삼아 마구 밀려오는 중공군 부대와 싸우면서 이곳의 혹독한 추위와도 다퉈야 했다.
당시의 처절했던 미 해병사단의 후퇴작전은 각종 기록과 필름 등으로 대중에게 알려지면서 1950년 11월말부터 12월 초순까지 벌어진 유엔군의 대표적인 고전(苦戰) 사례로 알려졌다. 미 해병사단의 피해는 막심했다. 따라서 일반인들이 그렇게 장진호 싸움을 이해하고 있더라도 큰 무리는 없다. 그러나 결론부터 말하자면 장진호 전투는 아군의 후퇴 작전 중에서 손꼽히는 성공적 사례라고도 할 수 있는 싸움이었다. 막대한 병력을 앞으로 내세워 밀고 내려오는 중공군은 당시 상승세를 타고 있었다. 전선 너머에 버티는 적을 비교적 수월한 상대로 치부했던 아군 최고 지휘본부의 판단 착오 때문이다.
앞서 소개했던 군우리 전투는 미군이 기록한 전투 중에서 매우 치욕스러운 결과를 빚고 말았다. 미군 2사단은 2개 연대가 절반에 가까운 병력 손실을 보면서 그야말로 참패(慘敗)를 당했기 때문이다. 당시 2사단 전선 가까운 곳에 있었던 나는 그들과 함께 미 8군의 예하여서 그 분위기를 잘 아는 편이다. 장진호 전투는 미 8군 관할지역이 아니었다. 미리 소개했듯이 당시 미 1해병사단은 원산으로 상륙해 한반도 동북부 지역의 싸움을 지휘하던 미 10군단 알몬드 소장의 지휘를 받고 있었다. 따라서 나와는 직접적으로 이어지지 않는 전투였다. 아무튼 비슷한 상황에서 미 2사단은 참패했고, 미 1해병사단은 분투를 거듭하며 다른 결과를 낳았다.
/장진호에 진출한 미 1해병사단 대원들이 전투 준비를 하고 있다.
장진호는 인공으로 만들어진 내륙 호수다. 발전(發電)의 필요를 위해 만들어졌다. 그 동쪽으로는 부전호가 있다. 특히 장진호는 서쪽으로는 강계와 이어지는 전략적 요충에 해당했다. 당시 강계에는 북한 김일성의 전쟁 지휘부가 들어서 있었던 까닭에 장진호 방면으로 진출하는 일은 매우 중요한 일이었다. 아울러 장진호는 북에서 동남쪽으로 흥남과 원산을 잇는 길목이기도 하다. 북쪽에서 압록강을 도강해 한반도 동부의 전선으로 향하는 중공군에게 매우 중요한 전략적 지점이기도 했다. 일본 강점기 때인 1930년대 만들어진 장진호는 수력발전이 가능해 다량의 전기를 공업지대였던 흥남과 원산에 공급하고 있던 터라 여러모로 이목을 끌 수밖에 없던 지역이기도 했다.
함흥에서 장진호로 이어지는 곳은 2000m 높이의 연봉들이 즐비하다. 남북으로 뻗는 낭림산맥이 지나가는 곳이다. 동서로는 부전령산맥이 지나간다. 황초령이라는 곳에서 낭림산맥과 부전령산맥이 만난다. 산세가 매우 험한 황초령 이북지역이 한반도의 지붕이라고 호칭하는 개마고원이다. 그 이남지역은 함경도에서 가장 평탄한 지형을 보이고 있다.
뛰어났던 미 해병대 지휘관
원산으로 상륙해 북상하고 있던 미 1해병사단의 목표는 압록강의 강계 지역이었다. 그에 앞서 미 해병사단은 장진호 방면으로 접근해 서쪽의 미 8군 지역 동쪽 경계선에 이르러야 하는 임무를 지녔다. 부지런히 그곳으로 진출해 미 8군 가장 동쪽을 보완해야 했다. 전투지경선을 이루는 곳에 도착해 그 틈을 노리는 중공군의 공세를 막아야 하는 임무였다. 11월 말, 이어 시작하는 12월에 들어서 이곳의 추위는 이상할 정도로 강했다. 평균 기온을 보면 그 무렵은 영하 30도 정도에 머물러야 정상이었다. 그러나 해병대에게는 행운 대신 불행이 먼저 닥쳤다. 장진호 방면으로 진출하고 있던 당시의 미 해병사단은 영하 40도에 이르는 강추위에 먼저 시달려야 했기 때문이다.
중공군은 우선 수적으로 아군을 압도했다. 한반도 동북부의 장진호 지역으로 진출한 중공군은 9병단 산하의 7개 사단이었다. 병력은 적어도 6만 명 정도였다. 중공군은 미 10군단 예하 미 1해병사단이 이곳으로 진출하는 것을 막는 한편, 공세를 지속해 흥남과 원산으로 진출하는 것을 공격의 목표로 세워두고 있었다. 역시 중공군은 매복을 노렸고, 우회와 포위를 머리에 두고 있었다. 장진호 일대의 협곡에 매복해 미 1해병사단의 병력이 다가오는 것을 기다렸고, 일부는 동남쪽으로 진출해 미 해병대의 후방을 공격한 뒤 포위 작전을 벌이려는 구상이었다. 장진호 전투는 11월 27일 본격적으로 불붙어 12월 11일까지 약 2주 동안 벌어졌다.
/포탄이 떨어지는 전선을 향해 장진호 일대에 도착한 미 해병들이 진군하는 모습.
당시 미 1해병사단의 사단장은 올리버 스미스(Oliver P. Smith) 소장이었다. 당시 아군 전선에는 심각한 문제 하나가 있었다. 서부전선을 담당한 미 8군과 동서(東西)로 연계를 해서 남진하는 중공군을 막아야 했음에도 전투지경선에 약 8마일 정도의 공백이 생기고 만 점이었다. 따라서 미 8군과의 연계에 나서야 했던 미 1해병사단에게 미 10군단 지휘부는 급속한 진출을 재촉하고 있던 상황이었다. 더구나 스미스 소장은 군단장 알몬드 장군과 의견충돌이 있었다고 한다. 알몬드의 성급한 작전 지휘를 스미스 소장이 잘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는 것이다. 우선 중공군과의 접전은 장진호 서쪽에 있는 유담리에서 벌어지기 시작했다. 유담리는 서쪽으로 강계와 이어지는 교통로 상의 중요한 길목에 해당했다. 미 1해병사단은 이곳에 예하 5연대와 7연대를 진출시켰다. 나머지 1연대는 후방의 하갈우리에 배치했다.
입에 물어 녹인 모르핀
나중의 전투 결과를 보면 등장하는 대목인데, 미 1해병사단의 스미스 소장은 야전에서 매우 뛰어난 지휘력을 보였던 장군이다. 그 역시 중공군의 압도적인 수적인 우세에 밀려 후퇴를 반복해야 했지만, 자신이 거느린 부대의 희생을 최소화하면서 적에게는 격렬한 반격을 펼쳐 심각한 손실을 끼쳤다. 물러날 때 물러나더라도 자신의 역량을 총동원해 적에게 타격을 입힐 수 있었던 뛰어난 군인이었다는 얘기다. 그는 진공(進攻)의 요로(要路)를 거치면서 혹시 적에게 밀려 후퇴할 때의 상황을 면밀하게 감안했다. 그에 따라 그는 진격하는 과정에서도 도처에 거점(據點)을 만들어 일부 병력을 잔류시키는 용의주도함을 선보였다.
육군본부 육군군사연구소가 펴낸 <1129일간의 전쟁 6.25>는 당시의 상황을 자세히 소개하고 있다. 미 해병사단의 공격도 초반에는 별다른 저항이 없이 펼쳐졌다고 한다. 그러나 중공군의 공세는 시간이 흐르면서 강도가 아주 높아지고 있었다. 우선 먼저 닥친 문제가 있었다. 역시 한반도의 지붕, 개마고원 일대를 일찌감치 감싸고 있던 강한 추위였다. 기록에는 당시의 기온이 이미 영하 35도를 가리키고 있었다고 나온다. 중공군은 역시 밤에 집중적으로 등장하고 있었다. 그 특유의 전법을 또 선보였다는 것이다. 유담리 일대의 일부 고지를 점령하는 데 성공했던 미 해병사단 장병은 중공군의 야습(夜襲)에 대비하기 위해 야전삽으로 참호를 파려고 했지만 땅은 파이지 않았다. 추위에 이미 얼어붙을 대로 얼어붙었기 때문이었다.
/장진호 일대에 도착한 미 해병대원들이 전차와 함께 행군 중인 모습.
육군본부 전사에는 당시의 미군 병사 한 사람의 증언이 실려 있다. “바위처럼 얼어붙은 땅에 참호를 파기 위해 야전삽으로 땅을 파자 삽이 부러졌다. 그래서 폭약을 음료수 캔에 넣어 땅에 묻고 폭발시켰다”는 내용이다. 다른 한 미군 간호사는 “중대 위생병들은 모르핀이 얼지 않도록 입속에 넣고 부상자가 있는 곳으로 뛰어다녔고, 혈액이 얼어 많은 전우가 눈앞에서 죽어가는 고통스러운 모습을 봐야만 했다”고 했다.
장진호 전투는 자연이 가져다주는 혹독한 환경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그는 미 해병사단의 고난(苦難)을 미리 예고하는 조짐이기도 했다. 그러나 추위는 사람을 가리지 않는 법이다. 중공군도 같은 환경에 놓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중공군은 수적으로 미군을 우선 크게 압도했다. 이튿날인 28일 사단장의 결단에 따라 미 해병사단의 후퇴가 시작됐다. 혹독한 겨울 날씨 속의 고난에 찬 행군이었다.
121 강추위와 눈보라 속에 벌어진 미 해병과 중공군의 격전
(15) 가장 추웠던 겨울
비행기 활주로를 만들다
장진호 서쪽에 있는 유담리는 미 1해병사단이 진출한 전선이었다. 이곳에서 후방으로 차례대로 있는 곳이 하갈우리, 그로부터 다시 후방으로 내려오면 고토리가 있다. 미 해병대는 원산으로 상륙한 뒤 장진호 방면으로 병력을 전개하면서 고토리~하갈우리~유담리 선을 이으면서 진출했다. 미 1해병사단의 사단장 스미스 소장은 나아가면서도 물러설 때를 상정해 자신이 지휘하는 병력을 보전할 줄 알았던 지휘관이었다. 그 점에서 그의 안목, 경륜은 탁월했다. 그는 특히 병력 집결지로서 후방 기지 역할을 할 수 있는 곳으로 하갈우리를 꼽았다.
원산으로 상륙하면서 이끌고 온 사단 중장비를 동원해 스미스 소장은 하갈우리에 비행장을 우선 만들었다. 지나오는 길의 주요 경로에는 일부 병력을 잔류시켰다. 모두 물러설 때를 대비한 노련한 포석(布石)이었다. 당시의 정황으로 볼 때 중공군의 참전 가능성은 분명했다. 비록 맥아더 장군의 도쿄 유엔군총사령부가 중공군 1차 공세를 본격적인 참전이 아닌 탐색전 정도의 참전으로 간주하고 있었음에도, 전선 곳곳에서 드러난 징후는 달랐다.
/장진호 전투에서 후퇴 길에 들어선 미 해병대원들이 중공군을 향해 반격을 하고 있다.
낙엽 하나에 가을이 왔음을 알아차리는 사람이 있다. 온 산의 수많은 잎사귀가 물기를 잃어 시들어갈 때도 가을이 왔음을 깨닫지 못하는 사람도 있다. 전선의 지휘관은 징후를 무시할 수 없는 위치에 있는 사람이다. 천 번 만 번을 경계해도 조그만 틈새를 비집고 들어온 위기의 칼끝은 사람을 늘 겨누기 마련이다. 막대한 병력과 화력, 장비를 이끌고 죽느냐 사느냐를 다투는 전선의 지휘관은 따라서 그런 위기의 조짐에 늘 대비하면서 절치부심해야 하는 법이다. 스미스 소장은 그런 점에서 탁월한 전선 지휘관이라고 해도 좋을 장군이었다. 그는 용의주도했고 면밀했다.
이른 강설(降雪), 살을 에는 듯한 강추위에 아랑곳하지 않은 채 먼 길을 이끌고 온 중장비를 동원해 하갈우리에 비행장을 닦은 스미스 소장의 판단은 탁월했다. 그는 낯선 곳으로 진출하는 군대의 지휘관답게 혹시 몰아닥칠지도 모를 최악의 상황을 미리 염두에 뒀던 것이다. 그로써 미군이 느닷없는 적군의 출현, 예상치 못한 상대의 공세, 거스를 수 없는 지형과 추위에 시달려 후퇴하더라도 피해를 최소화하면서 물러날 방도를 마련할 수 있었다. 아울러 지나왔던 요로(要路) 곳곳에 아군의 병력 일부를 잔류시킴으로써 퇴로(退路)의 줄기를 세울 수 있었다는 점은 정말 다행이었다.
혹독한 추위
길은 미끄러웠고 야전삽으로 파는 땅은 꽁꽁 얼어붙었던 상태였다. 낯선 땅으로 행군하는 미 해병대에게는 아주 불리한 환경이었다. 진출한 곳에 진지(陣地)를 만드는 일 자체가 아주 곤란했다. 기록에 따르면 당시 장진호 일대의 땅은 지표로부터 35㎝가 얼어 있었다고 했다. 강설로 인한 적설량은 많게는 60㎝에 달했다고 했다. 강한 서북풍이 불면 눈이 날렸고, 시선을 가로막는 눈보라도 심했다고 한다. 바람과 함께 눈보라가 휘몰아치는 날에는 시계(視界)가 15m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길을 오가는 미군 차량이 원활한 운행을 할 수 없었고, 사병들은 진출한 곳에 진지를 파기 위해 폭약으로 언 땅을 깨뜨렸지만 몸을 가릴 만큼의 참호 구축에는 실패했다.
그 점에서 중공군도 예외일 리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우선 수적으로 미 해병사단을 압도했다. 아울러 모진 추위를 참아가며 부지런히 길을 걸어 장진호의 유담리는 물론, 미군의 후방지역인 하갈우리 일대를 포위하고 있었다. 문제는 미군에게 더 겹쳤다. 탄약의 폭발이 불발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었다. 미군은 강력한 무기체계와 막대한 화력으로 적을 제압하는 개념의 군대였다. 장비도 탁월했지만, 우선은 강력한 화력이 큰 장점이었다. 그러나 장진호에서는 경우가 조금 달랐다. 지나칠 정도의 추위 속에서 탄약의 불발이 잦아지면서 강력한 화력으로 버텼던 전술상의 우위가 사라질 수 있었기 때문이다.
/미 해병대 후퇴의 행렬이 장진호 일대 좁고 험한 길에 길게 늘어서 있다.
쇠붙이에 한 번 손을 잘못 대면 그곳에 손이 얼어붙을 정도의 추위였다. 식량도 문제였다고 한다. 꽁꽁 얼어붙은 음식을 허겁지겁 먹어야 했던 전투 환경에서 장병은 배탈을 계속 앓아야 했기 때문이다. 싸움도 환경이 받쳐줘야 하는 법이다. 이런저런 점을 다 따져볼 때 1950년 11월 말 장진호에서 벌어졌던 전투는 최악의 수준이라고 말할 수 있었다. 11월 27일 아침 하갈우리에서 공격을 펼쳐갔던 미 해병대의 초반 전투는 순조로웠다. 유담리까지 진출하는 데는 성공했지만, 그 뒤가 문제였다. 오후에 접어들면서 중공군의 반격이 점차 강도를 더 해갔다. 중공군은 79사단, 89사단, 59사단이 전면에 등장했다. 이들은 북쪽과 서쪽, 그리고 하갈우리와 유담리를 잇는 후방의 능선에서 공격을 펼쳤다.
이튿날인 11월 28일 미 1해병사단의 스미스 소장은 진격을 포기했다. 미 10군단장 알몬드 소장이 지시한 강계로의 진출을 포기하고 후퇴를 결심했던 것이다. 전면에 등장하는 중공군의 숫자가 워낙 압도적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이 시점도 적절했다. 우선 하늘이 내리는 때, 천시(天時)는 강추위와 적지 않은 강설로 인해 불리했다. 지형에서의 이점, 지리(地利)도 미군에게 따르지 않았다. 그러나 미군의 후퇴는 생각만큼 만만치 않았다. 길이 미끄러워 기동이 쉽지 않은데다가 중공군의 공격이 끊임없이 밀려드는 파상(波狀)의 형태를 보이고 있기 때문이었다. 11월 30일에는 도쿄의 유엔군총사령부로부터 공식 철수 명령이 떨어졌다. 서부전선을 비롯한 전선 모두에서 대규모의 중공이 출현하고 있었고, 전선의 대부분이 밀리는 형국을 보였던 까닭이다.
미 해병대의 전우애
그에 따라 유담리에 진출했던 미 1해병사단 5연대와 7연대가 철수를 시작했다. 그러나 첩첩산중이었다. 중공군은 이미 병력을 우회해 유담리의 후방인 하갈우리와 고토리로 접근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모든 병력은 우선 함흥과 흥남으로 후퇴해 집결하는 게 목표였다. 후퇴로는 험악하기만 했다. 중공군은 곳곳에 매복해 있다가 미 해병대를 노리면서 달려들고 또 달려들었다. 정식으로 사단장에게 철수 명령을 받은 뒤 미 1해병사단의 5, 7연대가 유담리 남쪽으로부터 후방인 덕동 고개라는 곳까지 이르는 데도 상당한 시간을 거쳐야 했다.
육군본부의 기록에 따르면 유담리에서 하갈우리까지 미 해병대가 이동했던 시간은 77시간이었다. 30㎞에도 미치지 못하는 그 거리를 3일이 넘는 시간 동안 움직여야 했던 셈이다. 사방팔방에서 다가서는 중공군과 싸우고 또 싸워야 했던 까닭이다. 1㎞를 가는 데 3시간 반의 시간이 걸렸던 것이다. 전사자는 164명, 실종은 55명, 부상자 921명 등 모두 1140명의 전투력 상실이 생겨났다. 이 싸움에서 눈여겨볼 대목이 하나 있다. 미 해병대는 제 몸조차 가누기 어렵고 어려웠던 환경 속에서 들것에 실린 부상자 600여 명의 전우를 모두 옮겼다는 점이다.
/전투 중에 숨진 동료들을 트럭에 싣고 후퇴 길에 오른 미 해병대원들./라이프 제공
밤낮을 가리지 않고 줄곧 벌어지는 가혹한 추위와 동상(凍傷)의 전쟁터 속에서 움직이기가 불가능한 부상 전우를 옮기는 일은 말처럼 쉽지 않다. 적 앞에서 한 몸으로 뭉치는 부대의 전우애가 있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부상자만 옮긴 것도 아니라고 한다. 미 해병대는 전쟁터에서 숨진 전우들의 시신도 옮겼다. 군화의 발목 부위를 잡고 끌고 오거나, 차량에 싣지 못할 경우에는 자주포의 포신(砲身)에 전우의 시신을 매달아 옮길 정도였다는 것이다. 하갈우리에는 미 1해병사단의 사단본부가 있던 곳이었다. 그러나 이곳에도 중공군은 지속적으로 공격을 펼쳤다. 가까스로 사단본부가 있는 하갈우리를 지켜냈지만 문제는 그곳으로부터 후방으로 철수하는 일이었다. 가장 심각했던 점은 이미 해병대의 전상자들이 넘쳐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12월 6일 하갈우리를 떠나 흥남으로 향하는 철수작전이 벌어졌다. 병력은 약 1만 명, 피난민은 1000명 정도, 아울러 길에는 1000대 정도의 트럭 등 차량이 움직여야 했다. 그런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4300명에 달하는 부상자 운반이 심각한 문제의 하나였다. 결코 두고 갈 수는 없는 전우들이었다. 미리 닦기 시작했던 하갈우리의 비행장 활주로가 어떻게 보면 이 심각한 문제를 해결할 유일한 법보(法寶)였다. 그러나 공정이 40% 정도에 불과했다. 그럼에도 달리 방법이 없었다. 미 해병사단은 공군과 연락해 부상자를 실어 나를 수 있는 대형 수송기 C-47을 착륙시켜 보기로 했다.
122 “장비를 적에게 줄 수 없다”, 항공로 후퇴를 거부했던 미 해병사단장
(15) 가장 추웠던 겨울
항공 후퇴로가 뚫리다
미 1해병사단 지휘관 스미스 소장의 절치부심이라는 지성(至誠)이 통했는지, 미 공군이 보낸 C-47은 무사히 하갈우리 활주로에 안전하게 내려앉을 수 있었다. 장진호의 가혹한 겨울 추위, 수적으로 압도적 우세를 보인 중공군의 공격에서 미 해병대가 비교적 순탄하게 후퇴할 수 있는 서광(曙光)이 잠시 비쳤다. 그러나 흥남으로 갈 길은 아직 멀고도 어둡기만 했다.
1950년 12월 강추위와 많은 적설(積雪) 속에서 압록강을 넘어온 중공군 대군(大軍)에 둘러싸여 사투(死鬪)를 거듭해야 했던 미 해병대는 사실 고래로부터 잔혹하게 벌어졌던 한반도 군대와 외적(外敵)의 싸움터 한복판에 서 있었다. 이곳 또한 앞서 지나왔던 서부전선의 평안북도 운산, 안주 등과 함께 한반도의 군대가 밖으로부터 경계를 넘어섰던 외부의 적과 늘 싸우던 지역이었다. 해병대는 흥남으로 철수하기 위해 우선 황초령(黃草嶺)을 넘어 남쪽으로 내려가야 했다. 해발 1200m 높이의 황초령은 험준한 부전령(赴戰嶺) 산맥의 남쪽 끝에 해당한다. 이곳을 넘어야 함흥과 흥남, 원산으로 내려올 수 있다. 갔던 길을 되돌아오는 코스였던 셈이다.
/1950년 12월 후퇴길에 올라선 장진호 미 해병사단의 행렬.
부전령산맥 자체가 사실은 함경남도의 지형을 크게 둘로 가르는 분계선(分界線)에 해당했다. 함경남도 해안가 지역의 평원과 산맥을 서북쪽으로 넘었을 때 펼쳐지는 개마고원의 중간 가름 장벽이라는 얘기다. 이 산맥을 경계로 해안가의 함경남도 지역은 평원, 서북쪽은 험준한 지형의 개마고원이다. 부전령산맥의 이름 자체가 싸움터를 향해 달린다는 뜻의 부전(赴戰)이다. 황초령의 동북쪽에는 1355m 높이의 부전령(赴戰嶺)이 있고, 그 동북쪽에 다시 1676m의 금패령(禁牌嶺) 버티고 있다. 이 세 고개를 넘어 함경남도 동남쪽의 해안가 사람들은 부전령 서북쪽의 개마고원 지대로 향한다. 세 고개는 그래서 다 유명하다. 세 고개 모두 함경남도에서 서북쪽으로 진출하는 중요한 길목이었기 때문이다. 특히 두만강과 압록강을 넘어 이곳으로 진출하려 했던 외부의 적에 맞서 싸우기 위해 한반도의 군대는 이곳에서 싸움터를 향해 달려갔던 모양이다. 그래서 얻은 이름이 부전령이었을 것이다. 그런 점을 감안하면 이곳 또한 고래로부터 격렬한 싸움이 불붙었던 땅이라고 봐도 무방했다.
미 1해병사단은 황초령을 넘기 위해 하갈우리를 떠나 남쪽의 고토리에 집결해야 했다. 그런 과정이 순탄했을 수 없었다. 압도적인 숫자로 다가섰던 중공군의 대규모 병력이 일찌감치 하갈우리와 고토리를 잇는 전선 곳곳에 매복해 있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미 1해병사단의 후퇴 또한 사투가 줄곧 이어지는 험난한 여정이었다.
어려운 길을 택하다
그럼에도 하갈우리에 이어 유담리로 진출했던 미 1해병사단의 사단장 스미스 소장은 일찌감치 사단 본부가 있던 하갈우리에 서둘러 비행장 활주로를 닦았다. 동토(凍土)의 얼음장 같던 지표면을 닦아 채 이루지는 못했어도, 이 비행기 활주로는 미 해병대의 후퇴에 결정적인 역할을 할 수 있었다. 당시로서는 대형 수송기였던 C-47을 불러 내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대형 수송기가 활주로를 통해 내려앉을 수 있다는 점은 절체절명의 위기 속에서 병력 모두를 안전하게 건질 수 있다는 얘기와 같았다. 특히 미 해병대는 4000여 명에 달하는 부상자를 옮기는 데 이 공중 수송로를 활용할 수 있었다.
미 해병대가 적을 두고 잠시 물러서서 가야 할 길은 아주 멀고 험난하기만 했다. 그럼에도 전우애(戰友愛)에 충실한 미 해병대원들은 부상한 동료를 그대로 두고 갈 수 없었다. 따라서 이들을 옮겨야 했던 해병대원들의 전투력은 크게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하갈우리 비행장에 도착했던 C-47 수송기는 이런 문제의 해결에 결정적인 수단이었다. 그러나 문제는 또 남았다. 중공군이 곳곳에 매복함으로써 고단한 전투를 벌이며 흥남으로 후퇴하는 미 해병사단이 육로로 계속 험난한 길을 가야 하느냐, 아니면 수송기를 통해 보다 편안하게 후퇴하느냐를 선택하는 문제였다.
/유담리에 진출했다가 하갈우리로 후퇴한 뒤 다시 철수길에 오른 미 1해병사단 7연대.
해병사단 모두에게는 수송기에 탑승해 전선으로부터 벗어나는 일이 훨씬 쉬웠다. 그러나 그럴 경우에는 전선에 진출하면서 자신들이 이끌고 왔던 수많은 장비와 물자를 포기해야 했다. 병력을 안전하게 후퇴시키는 대신 아주 값비싼 대가를 치러야 하는 점이 문제였다. 당시 수송기를 운용하던 미 공군에서는 해병사단장 스미스 소장에게 그런 후퇴방법을 제안했다고 한다. 그러나 스미스 소장은 이를 거부했다고 한다. 미 해병대의 역사에 그런 불명예스러운 후퇴는 있을 수 없다는 이유를 댔다는 것이다. 항공으로 철수한다고 해도 적의 공격을 막기 위해 적어도 2개 대대를 잔류시켜야 한다는 점도 한 이유였다고 한다. 게다가 미 해병대를 따라 남쪽으로 움직이려는 피난민의 문제도 무시할 수 없다고 했다.
당시 미 해병사단을 따라 장진호 일대로 진출한 사람 중에는 외신 종군기자들이 많았다. 그런 이유 때문인지 미 해병사단의 고투(苦鬪)는 미국은 물론이고 전 세계에 자세히 알려졌다. 잔혹한 추위의 사지(死地)에 몰렸고, 수를 헤아리기조차도 어려울 정도로 몰려든 낯선 중공군의 포위에 갇혔던 미 해병사단의 분투는 현지에 있던 종군기자들의 필설(筆舌)에 실려 서방세계에 전해졌다.
“후퇴가 아닌 새로운 공격”
항공편 철수를 거절했던 스미스 소장은 그런 말도 했다고 한다. “사단은 후퇴하는 것이 아니다. 후방의 적을 격멸하고 함흥까지 진출하기 위해 새로운 방향으로 공격에 나서는 것이다”는 내용이다. 하갈우리에 이어 고토리, 다시 황초령을 남쪽으로 넘기 위해 철수준비를 하던 해병사단 장병에게 내린 훈시였다. 하갈우리에 여러 노력을 기울여 닦은 비행기 활주로 덕분에 미 해병사단은 그동안의 전투에서 부상을 당해 스스로 발걸음을 옮길 수 없었던 동료를 비행기에 태웠다. 그로써 손이 가벼워진 미 해병사단의 나머지 장병은 12월 6일 새벽 집결명령 지역이었던 흥남을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개마고원의 험준한 산악지대 곳곳을 누비며 남하했던 중공군 병력은 그러나 이미 미 해병사단의 철수로 곳곳에 몸을 숨기고 있는 상태였다. 기록에 따르면 중공군 20군(군단)이 철수로를 차단하면서 공격을 펼칠 준비에 들어갔고, 후방에 예비로 뒀던 26군이 미 해병대 철수병력의 후미(後尾)를 따라 공격을 벌일 계획이었다고 한다. 사단장 스미스 소장은 결연하게 후퇴에 나섰다. 그의 말대로 적의 공세에 밀려 그저 뒤로 물러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공격의 개념으로 나선다는 자세였다. 그럼에도 중공군 공격은 집요해 미 해병사단의 철수로 곳곳을 막았다. 육군본부가 펴낸 전사(戰史)에 따르면 첫날 미 해병사단의 철수는 결코 순조롭지 못했다.
후퇴에 들어선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중공군 공세가 벌어졌고, 6일 밤 10시가 넘어서야 비로소 선두 부대가 하갈우리 남쪽 5㎞ 지점에 도착할 정도였다. 이어지는 협곡은 철수부대로서는 높은 경계심을 지녀야 하는 길목이기도 했다. 중공군은 그런 협곡 지형 곳곳에 매복해 공격의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이튿날 새벽 선두부대가 겨우 고토리에 진입하는 데 성공했다. 뒤를 따랐던 후속 부대 또한 천신만고 끝에 고토리에 당도했다. 피난민 1000여 명과 함께였다. 그러나 해병사단은 100여 명의 전사자, 506명의 부상자가 생겼다. 피를 말리는 후퇴작전이었다. 그럼에도 미 1해병사단은 또 하나 큰 난관에 봉착하고 말았다. 후퇴가 성공하느냐, 좌절하느냐를 가르는 중요한 고비였다.
/영하 40도 이하로 내려갔던 장진호의 강추위속에 중공군과 전투를 벌이다 숨진 미 해병사단 대원의 시신.
중공군은 추격전에서 실패했다. 미 해병사단은 비록 적지 않은 사상자를 냈지만 중공군의 매복 지역을 뚫고 고토리에 일단 집결하는 데 성공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중공군 지휘부의 독촉과 성화도 당시 상황에서는 제법 대단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고토리에 도착할 무렵의 미 해병사단 장병은 기진맥진한 상태에 들었다. 마지막 관문인 황초령을 넘어서기 위해서는 눈물과 피로 채워야 하는 또 다른 고투(苦鬪)가 기다리고 있었다. 중공군이 이미 차지하고 있는 큰 고개를 돌파해야 하는 일이 우선이었다. 더 큰 문제는 협곡을 건너는 다리가 그대로 끊어진 채 있었다는 점이었다.
흥남으로 가는 길은 아직 험난하기 짝이 없었다. 그럼에도 해병사단 장병은 길에 나섰다. 중공군이 차지하고 있던 1081고지를 향해 공격을 벌였고, 마침내 거센 화력을 동원해 길을 뚫었다. 고지를 차지하고 있던 중공군은 해병대원의 공격에 밀려 고지에서 도망쳤다. 중공군에게도 황초령 일대의 강추위는 여지없이 파고들었다.
123 끊긴 다리 설비 공중 투하, 중공군을 좌절시킨 미군의 보급
(15) 가장 추웠던 겨울
한계 드러낸 중공군
영하 40도에 두텁게 내려앉은 강설(降雪). 후퇴로는 모두 고지(高地)를 지나야 했던 까닭에 추위는 깊었고 지표를 뒤덮은 눈은 단단했다. 상대방과의 싸움에 앞서 이런 추위와 눈을 이겨야 했던 게 당시 미군과 중공군이 당면한 큰 과제였다. 그럼에도 서로 공방전은 모질게 이어졌다. 지형 때문에 생기는 애로(隘路)는 도처에 있었다. 협곡의 지형으로 길은 계속 좁아진 채 이어졌고 그 중간 어딘가에 미리 매복한 중공군이 나타날 경우 싸움은 여지없이 불붙었다. 고토리에서 황초령을 넘어서면 진흥리라는 곳이 있었다. 그 진흥리를 향해 후퇴하던 미군은 황초령 고개의 애로에서 다시 한 번 걸음을 멈춰야 했다. 미 1해병사단을 꺾기 위해 7개 사단을 동원한 중공군은 이미 황초령 일대에 매복한 상태였다. 미 1해병사단의 퇴로를 막아서기 위해 깊고 어두운 개마고원 지대를 줄곧 남하한 뒤 험준한 황초령 인근의 1081 고지에 다가서서 몸을 숨긴 상태였다. 따라서 미 해병사단은 이곳을 먼저 점령해야 했다.
/장진호 철수 작전 도중 고토리에서 숨진 동료 시신을 앞에 두고 미 해병이 기도를 올리고 있다.
고지를 탈환하지 못한다면 사단의 본대가 황초령을 넘을 때 막심한 인명피해를 감내해야 했기 때문이다. 먼저 이곳에 도착한 부대는 미 1해병사단 제 1연대 제1대대였다. 몇 차례의 공격을 시도해도 고지는 좀처럼 해병대의 수중으로 들어오지 않았다. 그러나 중공군 매복에도 한계가 있었던 모양이다. 날씨가 너무 추웠던 까닭이었을 테다.
영하 40도가 넘는 강추위에 충분한 동계 복장과 장비, 물자를 지니지 못한 채 매복을 하는 일은 사실 초인적인 인내력을 동반해야 했다. 중공군에게는 그런 강추위 속의 오랜 매복을 이겨낼 만한 물자와 장비가 부족했다. 소련에서 급히 만든 고무 운동화, 두터운 누비옷 정도가 중공군 각 장병에게 주어진 전부였다.
미숫가루 1주일 분량의 식량을 지녔기 때문에 이동은 재빨랐는지 몰라도 강추위 속에 몸을 보전할 만한 영양식은 꿈조차 꾸기 어려운 형편이었다. 그런 부실한 복장과 장비, 매우 불량한 영양 상태로 며칠 동안 40도 이하로 내려가는 황초령과 개마고원의 추위를 이겨내며 매복을 견딜 사람은 많지 않았을 것이다.
그 점은 미 해병사단 본대가 도착하기 전 1081 고지를 점령해야 했던 1연대 1대대 해병대원들에게는 아주 다행이랄 수밖에 없었다. 강력한 화력을 동원해 몇 차례 공격을 벌이다 실패한 끝에 결국 1대대 해병대원들은 1081고지를 점령하는 데 성공했다. 고토리에서 이동한 미 해병사단 본대가 황초령 초입에 발을 들여놓기 직전이었다고 한다.
800피트 상공서 던진 교량
기록에 따르면 황초령 일대에 매복했던 중공군의 상당수가 꽁꽁 얼어붙은 시체로 그냥 땅바닥에 나뒹굴고 있었다고 한다. 설령 얼어 죽지 않았더라도 대부분의 중공군 장병은 오랜 이동과 긴 매복, 밤이면 영하 40도 이하로 내려가는 강추위 속에서 거의 전의(戰意)를 상실했다고 한다. 그러나 고개 너머 남쪽의 진흥리에 진입하기 위해서는 다른 관문이 또 버티고 있었다.
수문교라고 하는 다리였다. 이곳은 원산으로 상륙해 장진호를 향하던 미군이 넘어선 뒤 끊어진 상태였다. 협곡에 놓인 다리여서 장비와 물자를 끌고 이동하는 미 해병대원에게는 달리 우회로가 없어 반드시 지나야 했던 곳이다.
/고토리에서 진흥리로 향하는 중간 길목에 있던 수문교. 중공군의 폭파로 끊겼던 다리다.
미 1해병사단이 보여준 1950년 12월 크리스마스 공세 때의 장진호 지역 전투에서 사람들의 입에 자주 오르내리며, 아울러 현대전의 전쟁 양상 중 핵심 개념을 보여주는 장면이 미 해병대원들이 이 끊어진 다리를 어떻게 극복하느냐는 과정에서 등장한다. 중공군은 이 수문교를 폭파하는 데 일단 성공했다. 미 1해병사단의 후퇴로를 절단하기 위한 작전이었다. 고토리 남쪽 6㎞ 지점에 있는 다리의 이름은 수문교. 전장 450m 구간 중 일부를 중공군이 끊는 바람에 미 해병사단은 어떻게 해서든지 다리를 복구하는 데 힘을 집중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자재가 있을 턱이 없었다. 급한 후퇴의 과정에서 다리 복구를 위한 자재와 설비를 챙길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미 1해병사단이 이 다리를 복구하지 못한다면 문제는 여러모로 심각해진다. 병력을 이동시키는 과정이 우선 큰 어려움에 봉착하지 않을 수 없었고, 다른 무엇보다 40대를 웃도는 전차와 1400대에 달하는 차량을 적진(敵陣)에 그대로 남겨둘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유일한 방도는 조립교를 미 공군이 옮겨오는 일이었다. 거대한 공수(空輸)작전이었던 셈이다. 미 1해병사단 공병대대장은 흥남에 있는 공병창(工兵廠)에 연락해 수문교의 끊어진 다리를 복구할 수 있는 조립교를 공수해 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말처럼 쉬운 작전은 아니었다.
도쿄에 있던 유엔군총사령부는 기술진을 흥남에 급파했다고 한다. 기술적으로 상당한 노하우를 요구하는 작전이었기 때문이다. 험준한 산악지대를 향해 막중한 교량 자재를 투하하는 일이었다. 공중에서 투하하는 자재와 설비는 땅에 닿는 순간 발생하는 충격으로 부서지기도 쉬웠다. 조밀한 산악지형이라서 정확한 투하지점을 잡아내는 일도 결코 쉽다고 할 수 없었다. 그러나 미군의 움직임은 매우 신속하고 정교했다. 투하 때의 충격으로 자재와 설비가 부서지는 상황을 감안해 미군은 모두 8개의 조립교 자재를 준비했다고 한다. 이어 C-119 수송기에 자재와 설비를 실은 뒤 800피트 상공에서 준비해 간 8세트의 조립교 자재와 설비를 투하했다.
밤중에 넘어선 황초령
기록에 따르면 조립교 세트 중 1개는 적진에 떨어졌다고 한다. 1개는 땅에 닿는 순간의 충격으로 부서졌다. 8개 중 6개가 결국 황초령을 넘어서려는 미 1해병사단의 수중에 들어왔다. 그에 따라 미 1해병사단 공병대대는 긴급 보수에 나섰고, 12월 9일 오후 3시경 다리 복구를 끝낼 수 있었다. 현대전은 강한 화력, 장병의 정신력과 전투력에만 의해 벌어지지 않는다. 대규모의 물자를 전선 곳곳에 투입하는 능력, 즉 보급의 문제가 현대전쟁의 승부를 가르는 중요한 변수다. 그에 못지않게 현대전은 ‘공병전(工兵戰)’으로도 부를 수 있다.
공병의 업무는 병력이 이동하는 하천과 산악에 먼저 다가가 이동로를 닦는 일이다. 아울러 후방의 보급로 개척과 보수 또한 공병의 몫일 수밖에 없다. 병력의 전진(前進)이 어려운 곳에 먼저 강력한 장비로 길을 터주는 일도 그의 역할이다. 보급을 신속하게 펼치기 위해 비행장을 닦아 공로(空路)를 통해 병력과 물자를 이동시키는 일도 공병의 업무다. 상륙작전 때 상륙 주정(舟艇)을 동원하고, 끊어진 물길을 잇기 위한 부교(浮橋)을 설치도 그의 일에 속한다. 따라서 공병은 현대전에서 결코 빼놓을 수 없는 존재다. 어느 경우에는 공병의 활약 여부에 따라 현대 전쟁의 승패가 쉽게 갈리기도 한다. 공병의 운용은 따라서 그 군대를 지닌 국가의 이면(裏面) 실력을 엿볼 수 있는 가늠자이기도 하다. 미군은 그런 점에서 매우 강했다.
/대담한 공수작전으로 끊겼던 다리를 복구한 뒤 교량을 통과해 후퇴중인 미 해병대원.
수문교 자재와 설비를 신속하게 현지에 투입하는 일은 훈련에 훈련을 거쳐야 가능한 일이었다. 미군은 전쟁의 여러 수요에 대비해 그런 훈련을 반복해서 실시했던 셈이고, 결국 퇴로 상의 매우 엄중한 기로(岐路)에 놓여 있던 미 1해병사단에게 조립교의 자재와 설비를 성공적으로 투하할 수 있었던 것이다. 중공군의 ‘체력’은 이미 바닥을 보이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수문교 복구를 위해 미군은 매우 인상적이면서도 입체적인 작전 수행능력을 보여줬다. 수문교 인근에 매복 중이던 중공군은 그런 상황을 지켜보면서 사기가 떨어졌을 법하다. 수문교는 신속하게 이어졌고, 마지막으로 공격을 펼치려던 중공군은 미 1해병사단 7연대 1대대의 반격으로 속절없이 물러나고 말았다.
미 해병사단의 수많은 차량과 전차는 다리 위에 선 유도병의 안내를 받으면서 12월 9일 밤중에 수문교를 지날 수 있었다. 중공군은 의외로 이 시점 이후부터는 제대로 공격을 펼치지 못했다. 미 1해병사단은 험난한 고개였던 황초령을 통과했고 결국 무사히 진흥리에 진입할 수 있었다. 중공군은 늘 같은 패턴을 보이고 있었다. 초반의 공세가 변칙적이면서 화려했고, 또 강했으나 뒷심이 부족했다. 물자와 장비, 화력의 부족 때문이었다. 공격에 실패해도 줄곧 단일한 공로(攻路)에 집착하는 점도 드러났다. 차분하게 들여다보면 중공군의 밑천이 드러날 수도 있는 대목이었다. 그러나 시간과 여유 부족이 당시로서는 문제였다.
124 5만 중공군 전투력 상실, 장진호 전투는 미 해병의 승리
(15) 가장 추웠던 겨울
스미스 미 해병사단장
순탄한 길에 들어서면 앞으로 나아가는 여정은 수월하게 풀리기 마련이다. 굽이가 많아 형편이 좋지 않은 길에 들어서면 나아가는 일은 많은 곤란에 닿는다. 생활 속에서의 많은 경우가 대개 그렇다. 전쟁에서도 그런 상황은 마찬가지다.
1950년 11월 말에 벌어진 유엔군의 크리스마스 대공세, 중공군이 그를 맞아 벌인 2차 대공세의 상황에서도 그랬다. 아군의 전체 대오는 굽이가 많아 꼬임이 자주 빚어지는 길에 들어섰던 모양이다. 우선 주변을 에워싼 큰 흐름, 형세(形勢)의 읽기에서 실패했다는 점이 무엇보다 먼저 눈에 띈다. 중공군의 대규모 병력이 한반도 북부 낭림, 적유령, 묘향, 강남산맥 등에 가득 들어차 호시탐탐 아군의 진출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점을 간과했다. 아울러 그들이 지닌 전투력을 보잘것없는 수준이라고 판단하는 우를 범하고 말았다. 날씨는 한반도 북부를 일찍이 감싸버리는 강추위로 이어졌고, 부산으로부터 올라오는 보급선은 작전상의 판단 착오와 적군이 설치한 장벽에 흔들리면서 불안한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그런 전체 상황 속에서 고전에 고전을 거듭하면서도 장진호 일대로부터 병력을 무사히 이끌고 내려온 올리버 스미스 미 1해병사단장을 거론하지 않을 수 없다. 그는 맥아더 장군이 이끌었던 제2차 세계대전 중의 태평양 전쟁에서 용감한 전투력을 과시했던 장군이다. 팔라우 전역(戰役)에서도 격렬하기로 유명했던 펠렐리우 전투를 이끌었고, 일본군의 최후 저항으로 참담한 피해를 감수해야 했던 오키나와 전투도 일선에서 지휘했다. 쌍방이 모두 혹심한 손해를 입었던 펠렐리우 싸움에서 절대 꺾이지 않는 집념으로 일본군을 몰아냈던 전쟁터의 지휘관답게 그는 야간이면 영하 40도까지 내려가는 장진호 일대의 강추위, 짐작키 어려운 병력과 전법으로 포위와 매복 및 우회를 거듭하는 낯선 군대 중공군에 맞서 싸웠다.
/6.25전쟁 중 매우 인상적인 장진호 전투를 성공리에 이끌었던 미 1해병사단장 올리버 스미스.
장진호 전투에 앞서 그가 한국 전선에서 몸을 드러냈던 장소는 바로 인천이었다. 인천상륙작전의 선두로 월미도에 먼저 상륙했던 미 해병대의 지휘관이었으니 그는 이름을 떨칠 법도 했다. 그러나 스미스 소장은 그 뒤에 벌어진 작전 판단의 혼선으로 이름이 잘 알려지지 않고 말았다. 서울 탈환을 마친 미 해병사단을 원산으로 다시 상륙시키도록 한 맥아더 사령부의 작전지시 때문이었다. 거의 한 달이 지나 원산으로 다시 상륙한 미 해병사단에게는 달리 넘어야 할 산이 많았다. 서북부의 험준한 개마고원 일대로 진출하면서 속도까지 붙여야 한다는 지시가 내려왔기 때문이다.
맥아더 사령부는 당시 한반도 전쟁 지휘권을 양분했다. 서부전선은 월튼 워커 미 8군 사령관, 동부전선은 맥아더 참모부에 있다가 한국에 온 미 10군단장 에드워드 알몬드 소장에게 맡겼다. 그러니까, 미 1해병사단장 스미스 소장은 알몬드 소장의 10군단 예하로 배치를 받았던 셈이다.
미 10군단장 알몬드
앞에서도 소개했던 <콜디스트 윈터>라는 책에는 알몬드 소장에 대한 극히 부정적인 평가가 많이 나온다. 맥아더 사령부를 매우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저자의 시점 때문이다. 그가 말한 바로는 알몬드 소장은 전선 자체를 잘 이해하지 못하는 지휘관이다. 전선 지휘관으로서 현장에서 드러낸 개인적 사치와 방만함도 지적했다. 그러나 책의 모든 비판에는 선뜻 다 동의할 수는 없다.
그는 나름대로 유럽 전선에서 활약했던 장군이다. 비록 전과(戰果)가 대단하다고는 할 수 없더라도 전선 자체를 이해하지 못하는 지휘관이랄 수는 없다. 그 역시 6·25전쟁에 참여했던 대다수의 미군 지휘관들처럼 한국의 상황, 중공군의 개입 징후 등에 밝지 못했다. 맥아더 참모부의 출신이라서 그곳으로부터 내려오는 명령에 충실할 수밖에 없기도 했다. 따라서 그 또한 맥아더 사령부의 참모들처럼 전쟁을 쉽게 끝낸다는 확신, 그로써 신속한 공격을 가해야 한다는 강박에 사로잡혔던 듯하다.
/인천상륙작전에 성공한 뒤 맥아더(오른쪽) 장군과 악수를 나누는 미 1해병사단장 올리버 스미스 소장.
그런 알몬드 군단장과 비교할 때 스미스 소장의 전투태세는 훌륭했으며 매우 탁월했다. 그 점은 뒤에 다시 소개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아무튼 그의 탁월한 지휘력으로 인해 미 1해병사단은 황초령을 남쪽으로 넘어 진흥리에 안착했다. 길고 모질었던 전투였다. 그로써 중공군 9병단의 발길이 결정적으로 묶이고 말았다. 미 1해병사단, 그 우익을 담당했던 미 7사단의 거듭 이어진 분투로 인해 물이 밀려날 때처럼 혼란스러울 수 있었던 후퇴 상황은 숨을 고르면서 차분하게 벌어질 수 있었다.
중공군의 공세가 멈칫거리기 시작하면서 미 10군단장 알몬드는 침착하게 함흥 일대의 전선을 안정시킬 수 있었다. 후퇴한 미 1해병사단, 미 3사단, 미 7사단, 그리고 함경도 동해안 일대를 따라 북상했던 한국군 1군단을 동원해 함흥에다가 비교적 짜임새 있는 교두보를 구축하는 데 성공했던 것이다. 한국군 1군단을 포함해 흥남 부두를 통해 철수시켜야 했던 병력만 10만 명이 넘었다. 차량은 모두 1만 8000여대, 적에게 남겨둘 수 없어 옮겨야 할 각종 물자는 3만 5000톤이었다. 교두보를 구축해 적인 중공군의 발길을 묶는 것 외에 결코 쉽지 않은 대규모의 철수작전이 필요했던 상황이었다.
당초 미군이 철수작전을 서두르면서 배를 이용해 옮기려고 했던 민간인은 아주 적은 숫자에 불과했다. 이 절체절명의 고비에서 김백일 1군단장 등 여러 사람이 “피난민을 그냥 두고 갈 수 없다”는 진언을 알몬드 군단장에게 했고, 그는 결국 이를 수용했다. 그로써 10만에 달하는 아군 병력, 그와 비슷한 규모의 피난민, 그리고 대량의 장비와 물자가 함께 부두를 떠나는 ‘흥남 철수작전’이 펼쳐졌던 것이다. 그 작전이 남긴 풍부한 휴먼드라마는 지금까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릴 정도로 감동적이기 짝이 없다. 전쟁의 참화를 피하기 위해 목숨을 걸고 남행길에 오른 피난민들의 눈물 젖은 스토리 또한 아무리 읽어도 늘 감동적이기만 하다.
전투력 상실한 중공군
많은 사람의 피와 눈물, 땀이 섞인 노력이 있어서 가능했던 일이다. 국군 1군단의 눈부신 전진도 빼놓을 수 없는 전과였고, 미 7사단의 분전도 결정적이었다. 그럼에도 인상적인 전투를 꼽으라면 아무래도 미 1해병사단의 전투를 거론하지 않을 수 없다. 중공군 9병단 예하의 7개 사단은 장진호 일대의 강추위와 강설 속에서 몸을 숨기며 미 1해병사단을 쫓고 또 쫓았다. 전쟁이 끝난 뒤에도 중공군은 이 전투를 자랑스럽게 이야기하기를 피한다. 공식적으로는 미 1해병사단을 꺾었다고 말할지는 몰라도 속으로 입은 피해가 매우 컸던 까닭에 드러내놓고 이 전투를 자랑하지 못한다.
장진호 일대에서 벌어진 전투를 통해 미 1해병사단은 600여 명의 전사자를 기록했다. 막강한 화력과 정신력, 전투력으로 무장했던 미 1해병사단의 위상을 감안하면 뼈아픈 피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부상 또는 실종으로 기록할 수 있는 병력은 약 3000명에 달한다. 역시 미 해병대의 전통으로 볼 때 큰 피해였다. 아울러 미 1해병사단은 3700여 명이 강추위로 인한 동상에 걸렸다. 그러나 중공군의 피해는 이보다 훨씬 컸다. 9병단 예하 각 부대의 사상자는 모두 2만5000명 정도에 달하는 것으로 추정한다. 부상 또는 실종자는 약 1만 2500여 명에 달한다. 동상환자는 미군의 약 3배에 달하는 1만여 명이다.
중공군 9병단은 동부전선의 주축이었다. 이들의 예기(銳氣)가 꺾이면서 전선 전체의 동향에도 결코 작다고 할 수 없는 변수가 생기고 말았다. 우선 미 10군단을 비롯해 동부전선에 진출한 아군의 병력, 물자와 장비, 그리고 적지 않은 피난민이 흥남을 통해 남쪽으로 무사히 빠져나갈 수 있었다. 그러나 더 큰 변수는 중공군 9병단이 공세를 지속할 수 없을 정도로 전투력을 손실함으로써 향후 38선을 향해 벌였던 중공군의 대규모 공세가 완전한 모습을 갖출 수 없는 상태에서 펼쳐져야 했던 점이다.
/동부전선에서 대규모 중공군의 남하를 저지하면서 성공적으로 벌어졌던 흥남철수작전의 한 장면.
중공군 9병단은 장진호 일대에서 입은 피해로 3개월 정도 부대의 재편성이 필요했다. 그는 아군이 마구 밀리기만 했던 1951년의 1.4 후퇴 상황에서 동부전선의 작지 않은 공백이 존재함을 의미했다. 따라서 중공군의 38선과 수도 서울을 향한 공세는 제한적일 수밖에 없었다. 수도 서울을 점령한다고 해도 지속적으로 공세를 펴기에는 동부전선 9병단이 초래한 공백이 매우 컸다는 얘기다. 그런 중공군 9병단의 전력 손실을 크게 이끌어낸 주인공이 바로 미 1해병사단과 그 지휘관 스미스 소장이다. 그들은 낯선 적을 경계했지만 두려워하지 않았다. 불굴의 투지가 돋보였고, 낯선 곳으로 나아갈 때 지녀야 할 신중함을 절대 잊지 않았던 부대였으며 지휘관이었다.
125 마지막 병력 승선 뒤 미 UDT 상륙, 흥남부두에 곧 거대한 불기둥
(15) 가장 추웠던 겨울
치밀한 철수
세계에서 유례를 찾아보기 어려운 흥남철수작전은 그런 와중에서 급박하게 벌어졌다. 그러나 대량의 병력과 물자, 장비, 그리고 끊임없이 자유의 품을 향해 몰려드는 수많은 피난민을 이동시키는 철수작전은 상당한 경험과 노력이 필요했다. 미 10군단장 알몬드 장군은 침착하게 그 작전을 벌였다. 미 1해병사단 스미스 소장과의 갈등, 맥아더 사령부 참모 출신으로서의 판단 착오 등 그에게 따르는 불명예가 있지만 그는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흥남에서의 대규모 철수작전을 이끌었다.
/미 1해병사단장 올리버 스미스 소장이 흥남부두에서 철수하기 직전 전투 중 사망한 해병대원의 묘지에서 묵념하고 있다.
중공군 9병단 산하의 7개 사단 중 미 해병사단의 후미를 좇아 계속 공격을 펼쳤던 중공군 5개 사단, 게다가 혜산과 청진으로부터 국군의 뒤를 추격해 온 북한군도 흥남을 향해 공세를 벌이고 있었다. 알몬드 군단장은 함흥과 흥남 외곽에 교두보를 마련했다. 아울러 해상 철수작전이 유일한 방법이라고 판단했다. 당시 미 3사단은 원산에서 흥남으로 이동 중이었다. 후방에서 전선으로 올라오는 길이었다. 따라서 흥남에서 원산으로 육로를 향해 병력과 장비를 후퇴시키는 일은 마땅치 않았다. 결국 맥아더 유엔군총사령부의 재가가 떨어지면서 흥남 부두를 통한 해상 철수 작전이 최종 결정됐다.
작전은 12월 14일부터 24일까지 약 열흘 동안 펼쳐졌다. 미 3사단은 후방에서 올라와 병력 손실이 없는 상태여서 흥남의 최후 저지선에 섰다. 전선에서 후퇴해 흥남으로 집결한 부대는 미 1해병사단, 미 7사단, 국군 수도사단이었다. 따라서 미 3사단이 최후까지 접적(接敵) 지역의 방어를 맡는 사이 미 1해병사단, 국군 수도사단, 미 7사단 순서로 승선한 뒤 철수하기로 했다. 최후 승선 병력은 물론 미 3사단이었다.
중공군과 북한군은 장진호 일대를 비롯한 동부전선 전역에서의 공세 실패를 만회하기 위해 흥남 저지선을 뚫으려 안간힘을 쓰면서 덤벼들고 있었다. 알몬드 군단장은 저지선을 전초선부터 제1~3주저항선까지 설정했다. 적의 공세를 순차적으로 막아내며 마지막까지 병력 모두를 철수시키기 위한 구상이었다. 흥남을 중심으로 반경 10㎞의 타원형 저지선, 그로부터 최후 2~3㎞까지 좁아지는 방어선 개념이었다. 모든 일은 정해진 순서에 따라 행해졌다. 축차적으로 병력과 장비를 승선시켜 질서 있게 후퇴를 시키기 위함이었다. 미 1해병사단이 우선 승선 순서에 꼽힌 이유는 부대가 입은 피해 때문이었다. 그 다음이 수도사단, 다음이 미 7사단, 최후에는 미 3사단의 순서였다.
피난민을 모두 실어라
중공군과 북한군은 공세를 늦추지 않고 지속적으로 공격을 펼쳐왔다. 그러나 미 3사단은 방어선을 굳게 지킬 수 있었다. 흥남 앞바다에 모여든 미 함대의 함포 사격이 빛을 발휘했기 때문이었다. 육상에 남아있던 미 포병부대의 화력과 함께 흥남 앞바다의 수많은 미군 함선들은 함포사격으로 전방에 다가서는 중공군과 북한군에게 포탄을 퍼부었다. 미군 함재기들도 부지런히 적의 머리 위를 강타했다. 입체적인 작전이 벌어지면서 적군은 함부로 아군의 저지선에 다가서지 못하고 있었다.
12월 14일 미 1해병사단이 가장 먼저 승선했다. 미 해군이 지닌 LST 등 함정 외에 당시에는 적지 않은 상선(商船)이 철수를 도왔다. 그중에는 꽤 많은 일본 함선과 인원들이 현지에 와서 미군과 피난민들의 철수를 거들었다. 중공군의 공세는 그 와중에 더욱 거세졌다. 그러나 미군은 함포지원전단을 구성해 흥남을 중심으로 양쪽으로 10마일을 늘어서 포탄을 퍼부었다. 해군 함재기들도 쉬지 않고 부지런히 적의 머리 위로 날아올라 근접 항공지원을 벌였다. 함흥의 북쪽으로 그어진 교두보 전초선은 그런 아군의 강력한 입체작전에 따라 때로는 흔들렸으나 끝내 뚫리지 않았다.
/흥남부두에서 승선한 뒤 철수하려는 미 병력이 트럭을 타고 부두를 향하고 있다.
북한군 일부 병력은 강원도 오대산과 설악산 일대에 출몰했다. 후방에 게릴라를 보내는 이른바 ‘제2 전선’을 형성하기 위한 의도였다. 정규군이 남하할 경우에 대비해 거점을 확보하려는 계획의 일환이었다. 이에 따라 알몬드 군단장은 국군 수도사단을 흥남에서 배로 이동시킨 뒤 묵호에 상륙시켜 그들의 의도를 분쇄했다. 피난민이 흥남부두에 몰려들기 시작했던 때는 12월 10일 경이었다. 수는 급속하게 불어나고 있었다. 12월 18일에는 저지선을 좁혔다. 북한군은 아군의 교두보 일부를 흔들기도 했으나 곧 강력한 함포와 함재기의 폭격으로 접근로가 막히고 말았다. 국군 1군단은 피난민의 후송을 적극적으로 모색하고 있었다.
12월 19일 중공군과 북한군은 흥남 철수작전 이래로 가장 강력한 공세를 펼쳤다. 그러나 역시 견고한 아군의 해상 함포 화망(火網)을 돌파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공세 뒤에 그들은 후퇴로까지 끊기는 경우도 있었다. 12월 20일 알몬드 군단장은 군단 지휘소를 해상의 함선으로 옮겼다. 최후의 방어를 맡았던 미 3사단은 흥남부두를 중심으로 2~5㎞밖에 방어선을 설정했다. 그에 따라 피난민 수송 작전도 본격적으로 벌어졌다. 함경남도 일대의 피난민들은 공산 치하(治下)의 고통을 피하기 위해 계속 몰려들었다. 미 10군단 참모부장 에드워드 포니(Edward H. Forney) 대령이 당초 예상했던 피난민 수송 인원은 2만5000명 정도였다고 한다. 그러나 피난민이 계속 몰려들자 포니 대령은 생각을 바꿔 그들을 가능한 한 모두 수송키로 했다.
15일 동안 발 묶인 중공군
그는 결국 LST 2척과 빅토리호 등 상선 3척을 지휘해 모두 10만 명에 달하는 피난민을 배에 실어 거제도와 부산으로 옮길 수 있었다. 수많은 병력과 장비 등이 부두에 남아 있던 당시의 정황에서 피난민 후송은 많은 문제에 봉착했으나 국군 1군단 등 한국 측의 강력한 요구, 미군의 인도적인 배려에 따라 결국 10만 명의 피난민이 적의 치하를 벗어날 수 있었다. 모든 철수 준비가 끝난 시점은 12월 24일 오전 8시였다. 흥남의 해안은 모두 네 가지 색으로 분류했다. Yellow, Green, Blue, Pink였다. 네 가지 색깔의 해안은 다시 7개 지점으로 세분했다. 육상에 남아 있던 미 3사단의 승선을 위해서였다. 오후 2시 무렵 정해진 지점을 통해 미 3사단의 거의 모든 병력이 승선을 완료할 수 있었다.
미 3사단 잔여 병력이 승선하는 것과 동시에 미 해군 기동함대 소속의 폭파 전담 요원인 UDT 대원들이 상륙했다. 15분 뒤 미 기동함대의 함장은 이들 UDT 대원들에게 부두의 주요시설, 해안가에 남겨뒀던 400톤의 다이너마이트, 50만 파운드에 달하는 폭탄을 폭파하라고 지시했다. 마지막 수송전단의 함선들이 흥남의 외항(外港)을 빠져나올 무렵 거대한 폭발음과 함께 흥남 일대의 미군 잔류 물자들이 일제히 굉음을 내면서 폭발했다. 방파제를 비롯한 흥남부두의 주요 시설도 거대한 불기둥, 연기와 함께 공중으로 날아올랐다.
/1950년 12월24일 마지막 철수선이 흥남 외항을 빠져나가는 순간 미 UDT대원이 장착한 폭탄이 터지면서 거대한 연기가 치솟고 있다.
미군의 강력한 입체 작전이었다. 견고한 방어선을 유지하며 중공군 공세를 묶어 놓은 미군은 10만5000여 병력과 1만7000여 대의 차량, 10만명에 달하는 피난민, 35만 톤의 화물을 모두 옮겼다. 더 주목할 대목은 동부전선을 공략하던 중공군 9병단의 병력이 이곳에서 15일을 지체했다는 점이다. 이들은 흥남에 이어 원산, 다시 한반도 중부로 진출해서 서부전선의 13병단과 함께 유엔군을 다시 사지(死地)로 몰아넣을 수 있었던 병력이었다.
그에 따라 38선 이북을 향해 움직이려던 중공군의 전체 작전구상에도 차질이 빚어질 수밖에 없었다. 우선은 장진호 일대에서 고전을 거듭하면서도 7개 중공군 사단을 맞아 싸우고 또 싸웠던 미 1해병사단의 분투가 돋보인다. 전체적으로 밀리는 흐름에 있으면서도 입체적인 작전을 구사해 중공군 대병력의 발을 묶어 놓았던 미 10군단의 흥남철수작전도 우리가 적극적으로 평가하지 않을 수 없다.
1950년 11월 말에서 한 달 동안 벌어진 당시의 전쟁은 숱한 인명(人命)의 희생을 도외시했던 중공군의 전술, 한 사람의 목숨이라도 건져야겠다는 아군의 결심과 실행이 극명한 대비를 이뤘다. 따라서 1950년 12월에 아주 많은 감동의 스토리를 품으며 벌어졌던 흥남철수작전을 우리는 유심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는 자유를 향한 출항(出航)이었다. 위대한 작전을 성공적으로 이루기 위해 흘렸던 아군의 피와 땀이 또한 그렇듯 흥건했다. 우리는 그로부터 배울 게 참 많았다. 적과 맞서 싸우면서 물러설 때 어떤 마음가짐, 어떤 전술, 그를 총체적으로 뒷받침하기 위해 우리 국가는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 등 모두를 생각하게 하는 장면이었다.
126 묘향산서 도망친 국군, 유엔군 모든 전선을 출렁이게 했다
(16) 2군단의 해체
기록적인 국군의 패배
한반도 서북부, 평안북도와 평안남도에 걸쳐 있는 유명한 산이 있다. 해발 1900m가 넘는 우람하면서도 아름다운 산이다. 산 전체에 어떤 향내가 풍기는지는 모르겠으나, 그윽한 경치와 아름다운 산과 계곡으로 인해 묘향(妙香)이라는 그럴 듯한 이름을 얻었다. 이 산은 평안북도 구장, 평안남도 영원에 걸쳐 있다. 1950년 11월 말의 묘향산은 그러나 이름 그대로 경치가 아름답지만은 않았다. 이곳에서는 그해 그 무렵, 한반도 북부의 어느 전쟁터와 마찬가지로 피의 냄새가 물씬 풍겼다. 이른바 ‘덕천-영원 전투’라는 싸움이 우리 국군과 압록강을 넘어섰던 중공군 사이에서 벌어졌기 때문이다.
전쟁은 늘 승패가 갈린다. 잘 싸운 쪽은 승리를 거머쥐고, 그렇지 않은 쪽은 패배로 가슴앓이를 해야 한다. 이기고 지는 일이 병가(兵家)의 상사(常事)라고 했지만 지는 쪽의 참담한 슬픔과 아픔은 겪지 않은 사람이 함부로 입에 올릴 일은 아니다. 지휘관의 입장에서 보면 전쟁터에서의 패배는 헤아릴 수 없는 많은 것의 상실(喪失),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그러나 헤아릴 수 없는 상실이라는 것이 얼마나 살을 저미는 아픔일 것인가는 생각해야 한다. 거느렸던 수많은 장졸(將卒)의 목숨이 사라지는 일은 정말 슬프고 안타깝다. 남의 집 가장과 아들로 하여금 전쟁터에서 숨을 거두게 했으니 그렇다. 그 고통은 헤아릴 수 없는 깊이로 다가온다. 그 뿐이 아니다. 차지했던 지역을 적에게 내줘야 하는 아픔 또한 필설(筆舌)로 다 형용키 어렵다. 그에 그치면 그나마 다행이다. 끌고 다녔던 장비와 화력의 손실(損失)은 뼈를 찌르고 들어올 만큼 날카롭기 그지없다. 거기에 절망(絶望) 또한 깊어진다. ‘다시 일어나서 적과 싸울 수 있을까’라는 번민은 좀체 벗어날 수 없을 정도다.
사정이 그러하니 전선을 이끄는 지휘관에게 패배는 고통 그 자체다. 1950년 벌어진 6.25전쟁에서 국군은 잘 싸웠으나 그를 충분히 가리고도 남을 만큼의 적지 않은 패배에 직면했다. 참담한 패배가 현실로 나타나면서 당장에는 전선의 붕괴로 이어져 인접 아군에게는 옆구리를 뚫림으로써 궁지에 몰리도록 하는 결과를 안겼다. 그럼에도 우리는 당시 국군의 패배를 제대로 적어야 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어떻게 싸우다가 어떻게 이겼으며, 또 어떻게 패배를 맞이했고, 다시 일어설 수 있었느냐를 잘 적어야 한다는 말이다. 그럼으로써 우리는 그 과정에 담긴 진지한 교훈을 후세에 잘 전해야 한다.
장진호에서 미 1해병사단이 고전에 고전을 거듭하면서 흥남철수 작전을 수행하기 위해 후퇴 길에 오르기 전, 그리고 미 2사단이 군우리의 좁은 협곡 속에서 인디언이 포로를 잡아 매몰차게 매를 때리던 방식처럼 중공군에게 가혹한 ‘태형(笞刑)’을 당하기 전 우리 국군은 먼저 전선을 뚫리고 말았다.
/전투 중 중공군에게 붙잡힌 미군 포로들이 이동하고 있다. 1950년 11월 말의 전선에서 국군은 유엔군에 앞서 적에게 등을 보임으로써 전체 전선의 위기를 불렀다.
중공군이 친 덫에 들어서다
앞서 적은대로 과감한 공격을 펼쳐 압록강에 도달함으로써 전쟁을 끝내려던 유엔군의 선두 부대는 11월 24일 공격명령을 내려 전선을 북상시켰다. 미 1군단이 서쪽, 미 9군단이 서부전선 중부, 국군 2군단이 서부전선 동쪽 견부(肩部)를 형성했다. 동부전선에서는 미 10군단 예하의 미 1해병사단이 동부전선의 서쪽 견부, 미 7사단이 동부전선의 중앙, 한국군 1군단이 함경도 해안가인 동쪽 견부를 맡았다. 당시의 상황을 기술하면서 나는 앞의 장절(章節)을 통해 우선은 군우리 협곡에서 ‘인디언 태형’을 당하면서 참담한 패배를 기록했던 미 2사단, 그 뒤 장진호에서 눈물겨운 고투(苦鬪)를 감행하면서 끝내 흥남부두의 거대한 철수작전을 성공시킨 미 1해병사단의 전투를 소개했다.
1950년 11월 말 묘향산 일대를 두르고 있던 덕천과 영원이라는 곳에서 한국 군대가 벌여야 했던 전투는 그 둘과 관련이 아주 깊다. 이곳에는 한국군 2개 사단이 앞에 섰다. 2군단 예하의 7사단과 8사단이었다. 7사단은 덕천 지역을 맡았고, 8사단은 영원과 맹산으로 진출하는 임무를 담당했다. 덕천과 영원은 지금 우리에게는 다소 낯선 이름이기는 하지만 한반도 서북부의 명산(名山)인 묘향산이 거대한 산맥 줄기 속에서 아름다움을 뽐내고 있는 지역이라고 설명한다면 한결 알아듣기 쉬울 것이다. 그러나 이곳은 삼림이 우거진 곳이기도 했다.
빽빽한 나무로 울창한 숲을 이루고 있는 곳이라면 이 지역에 숨은 적을 공격하기 위해 다가서는 사람에게는 아무래도 작지 않은 걸림돌이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곳을 지키기 위해서 몸을 숨기려는 사람에게는 마치 바람을 가리는 병풍(屛風)이랄 수 있었다. 게다가 중공군은 기만(欺瞞)의 전술에 아주 능했다. 중공군은 그해 10월 말에서 11월 초까지 벌어진 자신들의 1차 공세 뒤에 제 모습을 감쪽같이 감추고 말았다. 간혹 그림자를 보이다가도 아군의 추격이 벌어질 경우에는 재빨리 깊은 숲과 어두운 협곡 속으로 모습을 감추는 경우가 많았다.
11월 말부터 12월 중순까지 벌인 자신들의 2차 공세를 위해 아군을 유인하는 모양새였다. 물론, 이런 분석은 세월이 한참 흐른 뒤에나 입에 올릴 수 있는 내용이었다. 당시 전선에 섰던 미군과 참전국 군대, 그리고 국군은 그런 정황을 제대로 알 수 없었다. 아무튼 11월 말에 들어서 유엔군이 본격적인 ‘크리스마스 대공세’를 펼치기 전에 중공군은 전선에서 제대로 활약을 보이지 않았다. 그에 앞서 벌인 중공군의 1차 공세를 잠정적이면서 일시적인 작전으로 간주하도록 유엔군 총사령부를 기만하려 했던 중공군 지휘부의 방침이었을 것이다.
/전쟁 중에 노획한 미군 무기를 앞에 놓고 촬영한 중공군 전선 장병들.
허약한 국군의 체력
전체적으로 우리 아군은 그런 중공군의 덫에 강하게 걸리고 말았다. 서부전선을 이끌고 있던 미 8군 예하의 미 2사단이 군우리에서 매복과 우회를 노린 중공군에게 말려 가혹한 ‘인디언 태형’을 당하면서 2개 연대의 전투력을 상실하고 말았다. 세계 제2차 대전의 가장 강력했던 군대였던 미군으로서는 씻을 수 없는 모욕이었다. 그에서 그치지 않는다. 미 1해병사단의 용감한 분투로 흥남철수작전을 성공적으로 이끌기는 했으나 동부전선의 미 10군단 역시 참담한 후퇴를 해야 했다. 병력 손실은 물론이고 적의 수중에 넘겨주지 않기 위해 수많은 물자와 장비, 탄약 등을 스스로 폭파하면서 전선으로부터 물러나야 했다.
중공군은 한반도 북부의 동서를 가르는 전선을 넘어오면서 결국 38선을 향해 공세를 펼치고 만다. 그 뒤에 벌어진 일은 누구나 다 잘 안다. 바로 개전 후 두 번째로 대한민국 수도 서울을 적의 수중에 다시 넘겨주는 1.4후퇴였다. 적은 수도 서울을 넘어 북위 37도선까지 내달았고, 아군은 또 한 번 부산의 교두보를 상정하면서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적의 공세에 대응해야 했다. 당시의 국군은 걸음마를 막 뗀 아기가 억지스러운 성장기를 거쳐 성년(成年)의 복장을 그저 걸쳐 입은 모습과 다름이 없었다. 일제 강점기 일본군이 지녔던 38식, 99식 소총으로 무장하고 가죽 군화(軍靴) 대신 일본군의 각반(脚絆)을 발에 두른 채 출범했던 국군은 체계적인 군사훈련과 지식으로 무장할 틈도 없이 김일성이 일으킨 동족상잔의 참화(慘禍)속으로 발을 디디고 말았던 것이다. 따라서 전투력은 전체적으로 보잘 것이 없었다. 그럼에도 국군은 대한민국이라는 풍전등화(風前燈火)의 운명을 맞아 가물거리는 조국의 안전을 지키기 위해 주저 없이 전선에 나섰다. 그러나 역량은 아직 태부족일 수밖에 없었다. 그런 이유로 6.25전쟁 3년 동안 국군이 담당한 전선에서는 차마 적기조차 민망한 패배가 속출했다.
그 하나가 바로 1950년 11월 말의 덕천-영원, 향기가 그윽하게 느껴질 정도로 아름답다는 묘향산 일대에서 벌어진 전투였다. 싸우려는 의지가 없었던 것도 아니다. 지휘관이 그저 형편없다고 욕할 일도 아니었다. 화력과 무기에서는 미군에 비할 바 아니었으나, 국군은 적이 다가서면 그를 쓰러뜨릴 최소한의 무기는 손에 쥐고 있었다. 그럼에도 국군 2군단 예하의 7사단과 8사단은 쉽게 등을 보이고 말았다. 이들이 쉽게 물러남으로써 유엔군 전체 전선에는 커다란 구멍이 뚫렸다. 그런 틈을 중공군은 노련하게 잡아냈다. 뚫린 틈으로 그들은 막대한 병력을 집어넣고 말았다. 미 2사단이 참혹하게 얻어맞았던 ‘인디언 태형’, 곳곳에서 출몰하는 중공군에게 둘러싸이고 말았던 미 1해병사단의 경우가 다 이로부터 비롯했다고 할 수 있다.
127 마구 밀려든 중공군, 국군 1개 연대는 미군 지역으로 피신
(16) 2군단의 해체
심상찮은 국군 연대의 이동
여러 전선이 동시에 흔들리는 국면이었다. 내가 서부전선의 미 1군단 예하의 한국군 사단으로서 태천을 향해 공격을 펼칠 무렵이었다. 압록강을 향해 공세를 펼치라는 이른바 맥아더 사령부의 ‘크리스마스 대공세’의 명령은 1950년 11월 24일 내려졌다. 그에 따라 북위 40도선에 진출해 있던 아군의 전선 총병력은 압록강과 두만강을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서부와 동부에 섰던 당시의 아군 상황은 여러 차례에 걸쳐 소개한 그대로다. 중공군은 한반도 동부와 서부를 종횡으로 지나는 낭림과 강남, 적유령 등 산맥 곳곳에 매복해 있었다. 그로써 아군이 자신들의 공격 시야에 들어오기를 기다렸다. 그런 매복과 우회, 포위에 걸려 아군은 심각한 피해를 당하고 말았다. 그렇게 전선 전체가 요동치는 국면이었으니 세부적으로 1개 연대가 움직이는 상황이 눈에 잘 들어올 수는 없었다.
그럼에도 꽤 주목을 끄는 한 ‘사건’이 벌어졌다. 국군 7사단의 3연대가 서쪽으로 인접해서 중공군을 향해 진격하던 미 2사단의 작전 권역으로 넘어온 일이었다. 모두 북쪽을 향해 진군하는 마당에 벌어진 심상찮은 국군의 이동이었다.
지금 전해지는 공식 자료를 통해 추정해보면 그 시점은 11월 26일이다. 미 2사단은 11월 30일부터 12월 1일까지 군우리의 험한 협곡에 갇혀 중공군에게 혹심하기 짝이 없던 ‘인디언 태형’을 당하고 만다. 그러니까 미 2사단의 2개 연대가 그런 가혹한 중공군 공격에 몸을 드러내기 4일 전쯤에 국군 7사단의 3연대가 미 2사단의 작전 권역에 넘어온 셈이다.
이는 상식적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부분이다. 엄격한 군령(軍令)에 따라 벌어지는 일이 작전이다. 사람의 목숨이 걸려 있으며, 적과 전체 전쟁 국면의 승(勝)과 패(敗)를 걸고 벌이는 게 작전이다. 그렇게 아군 진영의 전군(全軍)에 공격 명령이 내려졌음에도 자신의 작전 권역을 넘어 아군의 다른 작전 권역으로 전술의 기초 단위에 해당하는 1개 연대가 넘어왔다는 점은 이해하기 힘든 대목이 아닐 수 없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국군 7사단의 3연대는 인접한 미 2사단의 38연대의 작전 지역으로 넘어왔으며, 향후 국군 7사단이 승호리라는 곳에 모여 재편성을 할 때까지 그 둘은 함께 움직였다. 그렇다면 당시 국군 7사단의 작전 지역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졌다는 말일까.
공식적인 전사(戰史) 기록을 보면 유엔군 서부전선의 가장 동쪽을 맡아 낭림산맥 일대를 통해 평북 희천을 거쳐 압록강으로 진출하려던 국군 2군단은 11월 24일 맥아더 사령부의 ‘크리스마스 대공세’ 작전 명령이 떨어지기 전에 기동을 시작했다. 처음에는 그 작전이 순조로웠던 것으로 적혀 있다.
진출하는 지역에서 중공군과 산발적인 전투를 벌였으나 중공군은 퇴각을 거듭했던 모양이다. 싸우는 척하면서 뒤로 내빼는 형국이었던 듯하다. 국군 7사단이 기동을 시작한 시점은 11월 22일, 그 뒤에 벌어진 전투는 그런 중공군의 노련한 전술적 의도에서 벌어졌다고 보인다.
/중공군이 진지 전투를 하는 모습.
사단 사령부도 적에 노출
일부 중공군 병력이 국군 7사단의 진격로에 몸을 가끔 모습을 드러냈으나 사단은 그들을 순조롭게 격퇴했다는 것이다. 문제의 7사단 3연대는 사단의 공격 배치에서 가장 서쪽의 일선을 담당한 상태였다. 이들이 벽에 맞닥뜨린 시점은 11월 24일이었다.
이튿날에 접어들면서 사단 전체는 중공군의 강한 반격에 직면하기 시작했다. 묘향산 일대의 삼림 지대에 출몰하던 중공군은 곧 거대한 병력으로 변해 사단의 전방과 후방을 공격하고 있었다. 26일 새벽 2시에 접어들면서 중공군의 공세는 더욱 강렬해지고 있었다. 연대의 일선 지휘소는 말할 것도 없이 사단의 지휘소도 적의 공격에 노출되기 시작했다. 사실은 그때가 결정적인 시점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국군 7사단 정면을 압박해오던 중공군은 전사 기록에 따르면 중공군 13병단 소속의 42군으로 알려졌다. 당시 중공군의 1개 사단 병력 편제가 대략 9000~1만 명 정도였으니, 어림잡아 3만 명의 군단급 중공군이다. 중공군의 ‘인해전술(人海戰術)’이라는 것은 아는 사람은 다 아는 전법이다. 아군보다 그들이 가장 우위를 보였던 게 바로 병력의 숫자였다. 압도적인 병력으로 밀고 들어오는 전법 말이다. 1950년 추수감사절 공세와 크리스마스 공세 때 아군은 중공군의 그런 인해전술에 크게 밀렸다.
중공군은 예외 없이 모든 전선에서 압도적인 병력을 무기로 삼아 아군을 압박했다. 어두컴컴한 밤과 동이 트기 전의 새벽에 이상한 피리 소리와 꽹과리 소리를 내면서 다가오는 중공군의 전법은 상대의 심리적 장벽을 무너뜨리려는 일종의 교란 전술이었다. 그럼에도 당시까지 매우 낯설기만 했던 중공군의 그런 전법은 아군, 특히 화력과 훈련이 매우 부족했던 국군에게는 공포 그 자체였다.
유감인 점은 우리 정부가 공식적으로 발행하는 공간사(公刊史)에는 당시 덕천과 영원 일대에서 국군 7사단과 8사단이 당면했던 전투의 실제 모습이 자세히 드러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전선의 한 축을 담당하면서 서부전선에서 함께 싸웠고 나중에 육군참모총장을 두 차례나 역임하는 나였지만 당시 전투의 실상을 알고 싶어도 잘 알 수 없는 점이 안타깝기만 하다.
1.4후퇴로 인해 급히 서울을 내주고 안성 인근까지 내려왔다가 다시 반격을 펼치면서 숨을 돌리는 사이에 나는 당시 덕천과 영원에서 벌어졌던 전투의 실상을 들을 수 있었다. 간단하게 말하자면 매우 심각한 패퇴였다. 전투력이 모자라서 그저 적에게 밀렸다면 굳이 ‘심각한’이라는 표현을 달 수 없을 것이다. 당시의 전투에는 우리가 한 번이라도 제대로 따져보고 넘어가야 할 전훈(戰訓)이 담겨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중공군은 전선 도처에 길고 견고한 동굴을 파고 참호전을 벌이곤 했다. 당시 중공군의 동굴 진지 모습이다.
신속한 전진, 급속한 패퇴
그런 이유 때문에 나는 우선 1950년 11월 26일 자신의 작전지역을 넘어 인접한 미 2사단 38연대의 작전지역으로 넘어간 국군 7사단 3연대의 이야기를 꺼낸 것이다. 공간사에서 비교적 간략하게 다루고 있는 당시의 정황 때문에 사실 관계를 전부 이야기하기는 어렵다.
단지, 중공군의 대병력을 전면에서 맞이하고 있던 국군 7사단의 당시 상황이 예하의 1개 연대가 엄격한 군령에 의해 그어진 전투지경선(戰鬪地境 線)을 넘어 인접한 미 2사단의 작전 지역으로 넘어설 정도로 급박했다는 점만은 분명하게 알 수 있다. 실제 공간사 기록을 보면 연대는 물론 사단 사령부 자체도 적의 공격에 노출됐다는 점이 드러난다.
문제는 더 심각했던 듯하다. 국군 7사단을 정면에서 압박하던 중공군 42군이 국군 7사단 3연대와 8연대를 동시에 공격하다가 7사단과 동쪽으로 인접한 국군 8사단 사이의 전투지경선(戰鬪地境線)을 넘었기 때문이다. 그로써 “덕천 동측방의 전선이 위기에 처했다”는 게 국방부가 펴낸 <6.25 전쟁사>의 표현이다. 상황은 아주 심각한 상태로 흐른 듯하다.
7사단의 전선 2개 연대, 즉 3연대와 8연대는 그 이후 전방의 적과 후방의 적을 맞아 싸워야 했다. 전투지경선은 늘 강조했지만, 전투에서 적을 막아 제대로 싸울 수 있느냐 없느냐를 가르는 중요한 분계(分界)다. 이곳이 뚫릴 경우 적은 후방으로 포위해올 수 있다. 따라서 적을 맞아 싸우는 사람으로서는 이 전투지경선을 결코 적에게 내줘서는 안 된다.
이미 대대 규모의 중공군이 후방으로 침투해 7사단 사령부의 공격에 나선 상황이었다고 한다. 사령부가 있던 덕천 읍내는 중공군이 쏘아 올리는 신호탄이 마구 날아다녔다는 묘사도 공간사에 등장한다.
사단 사령부는 예비로 뒀던 5연대의 병력을 동원해 후방 사령부에 접근하던 중공군의 공세를 막아보려고 안간힘을 썼지만 그들을 좌절시킬 수 없었다고 했다. 이미 퇴로(退路)도 끊겼다. 그나마 사령부는 온갖 가용 병력을 동원해 혈로(血路)를 뚫었던 모양이다. 사단 사령부 본대, 포병대대의 1개 포대가 후방으로 침투해 이미 퇴로를 막고 서있던 중공군의 포위망을 겨우 빠져나왔다고 한다.
8연대와 예비였던 5연대는 사령부의 후퇴 상황을 모른 채 후퇴에 나섰다가 이미 후방에서 아군을 둘러싼 중공군의 공격을 받은 뒤 뿔뿔이 흩어졌다. 2개 연대가 전투력을 한 곳에 모으지 못한 채 각기 살 길을 찾아 나서면서 혼란을 가중하는 심각한 분산(分散)의 상황에 도달했던 셈이다.
128 국군 2군단의 와해, 전체 유엔군 긴급 철수명령으로 이어져
(16) 2군단의 해체
신병이 많았던 국군 7사단
전쟁에서의 패배는 아주 깊은 후유증으로 부대의 장병에게 남는다. 격렬한 공방(攻防)을 벌이다가 지는 전투는 나름대로 괜찮다. 전비(戰備)의 상황이야 각기 다르겠지만 적에게 일방적으로 밀리지 않았다면 저 자신의 실력을 우선 알고, 상대의 상황도 대강 알기 때문이다.
단지 싸움에서의 패배로 받아들이면서 다음의 기회를 노릴 수 있어서 그렇다. 참혹하게 무너지는 경우가 문제다. 깊게 파인 상처는 좀체 아물지 않는다. 심리적인 공황은 더 심각하다. 적의 실체를 잘 모르는 상황에서 그냥 처참하게 얻어맞아 무너졌을 때는 두려움이 매우 커진다. 따라서 부대 전체는 적에게 다시 밀리는 상황에 도달하면 공포감이 급증해 제풀에 꺾인 채 등을 보이면서 마구 무너진다.
1950년 11월 말 평안남북도 묘향산 일대에서 중공군에게 무너진 7사단의 형편이 그와 무관치 않다. 7사단은 김일성 군대가 그 해 6월25일 전면적인 남침을 벌일 때 서울 북방의 동두천과 의정부 일대를 막았던 사단이다. 국군은 김일성의 기습적인 남침에 제대로 대응할 수 없었다. 준비가 부족했기 때문이었다.
나름대로 분투한 사단이 있었지만 국군은 전반적으로 김일성의 기습에 당황했고 대다수 전선에서 상당한 타격을 입었다. 7사단도 예외일 수 없었다. 그들은 비교적 빨리 김일성 군대에게 등을 보였다. 적의 주공(主攻)에 해당했던 병력이 동두천~의정부를 공략했고, 7사단이 빠르게 무너지는 바람에 수도 서울은 곧 인민군의 발길에 놓이고 말았다.
낙동강 전선에서 적의 공세를 막아내던 무렵, 그리고 아군의 모든 부대가 북진 대열에 뛰어들던 시점에 7사단은 후방인 대구에서 급히 모집한 신규 병력으로 채워지면서 재편성을 마쳤다. 따라서 11월 말에 접어들어 중공군과의 대규모 접전을 벌일 무렵이라고 해도 7사단의 많은 병력은 전기(戰技)가 충분치 않은 인원이 다수를 이루고 있었다.
그에 앞서 10월 말에 벌어진 전투 상황에서도 7사단을 비롯한 국군 2군단 예하 6사단, 8사단은 모두 중공군의 대규모 공세 앞에 전선으로부터 급히 물러나야 했다. 전투의 속성을 잘 알지 못한 채 급히 재편성을 위해 끌어모았던 병력이 많았던 7사단은 따라서 적 앞에 설 때의 두려움이 컸을 것이다. 아울러 사단이 위기에 처했을 때의 상황은 더욱 심각했을지 모른다.
앞에서도 자주 거론했던 내용이다. 부대의 후퇴는 엄연한 작전에 속한다. 대오를 정렬하면서 정해진 순서에 따라 축차적으로 물러선다면 아군의 피해는 최대로 줄일 수 있다. 그렇지 못한 경우가 바로 분산(分散)이다. 이리저리 나뉘고 쪼개진 상태로 어지러이 뒤로 빠지는 경우다. 일정하게 적의 공격에 대응하면서 물러나는 일은 이런 상황에서는 불가능하다.
/6.25전쟁에 참전한 중공군 포병대의 모습이다. 미군에 비해 떨어지는 화력이었으나 중공군은 우회와 매복을 반복하며 참전 초반 승세를 이어갔다.
궤멸적인 패배
당시의 7사단 후퇴 상황은 분산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었다. 먼저 전선 동쪽을 맡았던 5연대와 8연대는 중공군 군단 병력이 몰려들면서 급격하게 무너지고 말았다. 사단본부와 연대 본부가 적의 공세에 직접 노출되면서 상황은 더 나빠졌다. 사단과의 통신은 모두 끊겼고, 덕천의 퇴로(退路)에는 이미 중공군이 서 있었다. 앞과 뒤에서 적을 맞아야 하는 상황이었다. 따라서 일종의 포위 상태였다고 볼 수 있었다.
사단 전체의 분산은 더 심각해지고 있었으며, 후방으로 진입해 포위망을 구축한 중공군의 공세는 더욱 맹렬해지고 있었다. 5연대와 8연대가 무너지는 상황을 알았던 3연대는 급기야 군단 전투지경선을 넘어 미군 2사단 38연대로 후퇴했다.
결국 3연대는 미 2사단 38연대와 함께 움직여야 했다. 미 2사단의 상황도 물론 좋지 않았다. 앞서 소개한 그대로다. 그들은 순천 지역으로 후퇴하면서 좁은 협곡 지형에 몰려들다가 중공군의 가혹한 공격을 받아야 했다. 아무튼 국군 7사단 3연대는 그나마 미군의 연대와 함께 후퇴하면서 7사단 3개 연대 중에서는 가장 적은 피해를 기록할 수 있었다.
이들은 결국 평양의 동쪽인 강동군 승호리라는 곳에 집결한 뒤 재편성에 들어갔다. 후퇴 뒤의 재집결은 당연한 수순이었으나 부대가 심각하게 분산의 상황을 맞아 후퇴했던 바람에 재편성이 결코 쉽지는 않았다. 전선 지휘관이 해야 했을 단계별 조치는 전혀 이뤄지지 않았던 까닭이다.
같은 2군단 예하의 국군 8사단의 상황도 그와 다를 바 없었다. 2군단은 6, 7, 8사단을 거느리고 있던 부대였다. 6사단은 일찌감치 벌어진 압록강 초산진 전투로 인해 예비로 머물렀다. 이들은 10월 말 신속한 기동으로 압록강 바로 앞인 초산에 먼저 진출했었다. 그러나 이미 압록강을 넘어들어와 적유령, 강남산맥 등에 몸을 숨긴 중공군의 매복과 포위에 걸려 치명적인 타격을 입고 말았다.
6사단은 재편성을 시도했지만 약 한 달에도 미치지 못하는 짧은 시간에 작업을 마무리할 수 없었기 때문에 11월 말에 벌어진 ‘크리스마스 대공세’ 때는 군단의 예비로 남아있었던 것이다. 전선에는 지금까지 소개한 7사단과 8사단이 섰다. 7사단은 덕천, 8사단은 영원과 맹산을 향해 나아갔다. 역시 묘향산 일대의 지명들이다.
8사단은 원리(院里)라는 곳에 사단 전방지휘소를 만든 뒤 11월 23일부터 공격에 들어갔다. 묘향산 동쪽에 있는 영원과 맹산을 발판으로 진출해 압록강이 흐르는 만포진을 점령한다는 계획이었다. 8사단이 진출을 시작할 무렵의 중공군은 이미 야간을 이용한 산악 이동으로 11월 20일경 이미 빽빽한 삼림이 우거진 지역 일대에서 병력을 산개(散開)해 놓은 채 아군을 기다리고 있었다.
/한반도 전쟁에 참전하기 위해 출정식에 선 중공군 병력. 압도적인 병력수를 내세워 중공군은 참전 초반 강력한 공세를 벌였다.
포로로 잡힌 연대장 둘
8사단이 맞이하는 상황은 대개 7사단과 거의 비슷했다. 11월 24일 전선의 모든 유엔군과 국군에게 공격명령이 떨어졌고, 초반에는 순조로운 출발을 보였다. 24일 당일에는 당초의 공격목표인 덕천과 영원, 맹산으로의 진출이 쾌조(快調)였다. 그러나 25일에 접어들면서 아군은 적인 중공군의 대부대와 조우(遭遇)하기 시작했다. 그저 만나서 싸우는 정도는 아니었다. 중공군의 출현이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전선 어딘가가 뚫려 그 틈으로 적이 물밀듯이 밀고 들어오는 낌새였다. 25일은 도처에서 아군의 분산에 이은 마구잡이 후퇴가 벌어졌던 듯하다. 연대는 연대의 대오를 갖추지 못했고, 대대 또한 마찬가지 상황이었다.
적의 기습에 당황한 아군은 부대가 대오를 갖추지 못한 분산으로 이리저리 나뉘면서 마구 밀렸다고 한다. 연대장과 각급 대대장 등이 그런 상황을 돌이키기 위해 안간힘을 써보았지만 적은 이미 아군의 후방에까지 내달아 포위와 기습을 반복하고 있었다고 한다.
당시 벌어진 전투는 대개 ‘덕천~영원 전투’라는 이름으로 알려졌다. 당시 전력과 정신력 등 모든 전쟁준비에서 미군과는 현격한 차이를 드러내고 있던 한국군 군단 차원의 싸움이었는데, 패배는 아주 컸다. 먼저 소개했듯이 2군단은 미 8군 예하의 서부전선 가장 동쪽을 맡았다.
따라서 서부전선을 총괄하는 미 8군과 동부전선을 담당했던 미 10군단의 경계 지점에 섰던 군대가 바로 국군 2군단이었다. 크게 이르자면, 미 8군과 미 10군단의 전투지경선에 국군 2군단이 섰던 셈이었다. 이 경계선이 국군 2군단의 급속한 후퇴로 무너지면서 생긴 결과는 자못 심각할 수밖에 없었다.
미 8군의 오른쪽 견부(肩部)가 빨리 무너지면서 중공군의 대규모 병력이 그 틈으로 전진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는 아군 전체의 전선을 강력하게 위협하는 날카로운 칼과 다름이 없었다. 7, 8사단의 연대장 두 명은 이 전투에서 적에게 포로로 잡혔다.
연대장이 적에게 잡힐 정도였다면 당시 국군 7, 8사단의 후퇴상황이 도대체 얼마나 심각했는지를 알 수 있다. 승호리 등에서 재집결 뒤 재편성을 했다고는 하지만 병력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정황도 여러 증언을 통해 드러난다. 국군 7, 8사단에 파견 나와 있던 미군 군사고문 등은 국군의 급속한 와해에 상당히 경악했던 모양이다. 급기야 11월 28일에는 도쿄의 맥아더 사령부가 아군 전체에 후퇴명령을 내린다.
이는 국군 2군단의 급속한 와해에 따른 것으로 볼 수 있었다. 미 8군 전선의 오른쪽 견부가 급격하게 무너져 내리자 맥아더 사령부는 매우 당황했을 것이다. 국군에 대한 미군의 시선이 아주 싸늘해질 수밖에 없었던 상황이기도 했다.
129 사단장이 연대장에게 지휘 맡기고 부상병과 함께 철수하다니…
(16) 2군단의 해체
어느 날 사라진 국군 군단
결론부터 말하자면, 국군 2군단은 슬그머니 사라지고 말았다. 유엔군과 국군이 중공군의 공세에 밀려 서울을 내줘야 했던 1.4 후퇴의 과정에서였다. 미 8군의 동쪽 어깨를 형성했던 국군 2군단의 와해는 중공군의 서부전선 공세에 커다란 힘을 보탰다.
당시 우리 아군이 급속히 무너져 38선까지 일거에 밀려내려 와 결국 수도 서울까지 내준 데에는 여러 요인이 있다. 겉으로 먼저 드러나는 요인 중에 단연 손에 꼽을 만한 게 바로 국군 2군단의 붕괴였다. 중공군에게는 국군 2군단의 와해가 대거의 병력을 전진시켜 서부전선의 유엔군 배후를 압박할 수 있는 커다란 구멍과도 같았다.
이곳으로의 중공군 침투는 서쪽으로 인접한 미 2사단 등 미 9군단의 철수를 재촉했다. 연쇄적으로 서부전선의 미 8군은 그 때까지 북상했던 모든 전선을 내주고 평양에 이어 38선 이남으로 서둘러 후퇴를 해야 했다. 이는 중공군 지휘부가 의도한 작전의 일부였다.
중공군은 미군 대신 한국군을 골랐다. 화력이나 장비, 물자 등에서 미군보다 보잘것없던 국군을 본보기 삼아 먼저 무너뜨림으로써 모든 전선을 요동치게 하여 유엔군과의 싸움 국면을 일거에 전환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런 중공군 수뇌부 의도에 국군 2군단이 먼저 걸려들었던 셈이다.
서부전선에서 유엔군과 함께 중공군을 상대로 싸운 국군 사단은 미 1군단 배속 국군 1사단, 그리고 국군 2군단 소속의 6, 7, 8사단이었다. 내가 이끌고 있던 국군 1사단은 미 1군단 예하에서 병력과 장비를 거의 잃지 않은 채 후퇴할 수 있었다. 그러나 2군단은 1.4 후퇴 과정에서 슬그머니 그 존재가 지워지듯이 없어졌다. 패배의 후유증을 극복할 수 없을 정도로 손실이 매우 컸던 까닭이다.
/흥남철수 직전 승선을 위해 부두에서 대기 중인 국군 병력.
나는 앞서도 이야기했듯이 1950년 10월 말 북진 공세에서 며칠 동안 2군단장으로 가 있었다. 촌각을 다퉈야 했던 전시 중에 났던 이상한 인사발령이었다. 나는 며칠 동안 2군단장으로 가 있는 동안 압록강에 진출한 6사단이 벌써 중공군에게 둘러싸여 궤멸적인 타격을 받고 있던 상황을 알았다.
7사단과 8사단의 상황도 좋지 않았다. 급기야 약 한 달 뒤에 벌어진 ‘크리스마스 대공세’에 덕천과 영원을 거쳐 만포진으로 향하려던 7사단과 8사단은 중공군에게 참혹한 패배를 당하고 말았다. 내가 계속 2군단장으로 남아 있었다면 나는 그런 상황을 피할 수 있었을까.
그 점은 장담할 수 없다. 나 또한 어지러운 패배를 계속 당하면서 처절한 후퇴를 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만큼 7사단과 8사단은 전투 경험에서 단련을 거치지 못한 상태였다. 부대는 훈련을 바탕으로 성장한다. 전투의 경험도 중요하다. 그런 모든 요소를 당시 7사단과 8사단은 충분히 갖추지 못했던 상태였다.
전선의 급격한 붕괴에 이어 38선으로까지 아군의 전선이 모두 밀린 데에는 다른 요인도 있다. 당시의 미군 역시 침착하지 못했다. 서둘러 후퇴길에 올랐던 당시의 나로서는 알 수 없는 점이었으나, 뒤에 정리한 사료들을 보면 미군 최고 지휘부의 당혹감 역시 급속한 전선 붕괴를 불렀던 한 요인임이 분명하다.
미군도 겁에 찌들었다
중공군의 실체를 과대하게 평가했던 것이다. 낯선 군대의 매우 기이한 전법에 일부 아군 전선이 무너지자 중공군의 실체를 과도하게 부풀려 상상함으로써 거대해진 공포감이 미군 지휘부의 냉철한 작전지휘를 가로막았던 듯하다. 역시 후퇴를 예상해 미리 상정할 수 있었던 방어선을 제대로 설정하지 못했다는 점이 그 이유다.
만약 한반도 북부에서 방어선을 설정한다면 평양과 원산을 잇는 라인이 가장 적당했다. 아군은 공세를 벌일 때에도 간과했던 그 라인을 후퇴 국면에서도 역시 놓치고 말았다. 전장 약 270㎞인 평양~원산 라인에 후퇴한 병력을 축차적으로 투입해 견고한 방어선을 구축했다면 아군의 급속한 38선 후퇴를 막을 수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나중에 드러난 자료들을 보면 미 8군은 중공군에게 38선까지 밀리면서 낙동강 방어선을 다시 상정했다. 낙동강 방어선을 다시 설정함으로써 부산 교두보를 지키고, 이어 유엔군 병력을 일본 등으로 철수시킨다는 구상이었다. 뒤에 벌이는 가정이기는 하지만, 미 8군이 1~2차에 걸친 중공군 공세를 보면서 중공군의 실력을 냉정하게 파악했다면 이런 낙동강 방어선 설정과 해상으로의 철수는 매우 성급한 판단이랄 수밖에 없었다.
아무튼 미군 또한 급격한 북진, 낯선 중공군과의 조우, 이어 벌인 패퇴의 국면에서 현실과는 매우 동떨어진 공포감에 사로잡혀 있었던 셈이다. 중공군은 그런 아군의 등을 보면서 결국 38선까지 내달았고, 아주 손쉬웠던 공세를 벌인 뒤 마침내 1951년 1월4일 수도 서울을 다시 우리의 수중으로부터 빼앗았다.
그럼에도 우리가 먼저 봐야 할 점은 국군의 상태였다. 미군도 그런 공황감에 빠져 마구 밀린 점이 분명하지만 역시 우리의 근본적인 문제는 당시 국군 사단의 후퇴 및 붕괴 상황에서 찾는 게 옳다. 국군 2군단이 해체의 상황에까지 이른 데는 나름대로 충분한 이유가 있다.
2군단 예하의 6사단은 나름대로 건제를 유지하고 있었다. 1950년 10월 말의 북진에서 서둘러 압록강에 진출한 뒤 매복한 중공군에게 크게 당했지만 한 달여의 재정비, 군단 예비로의 전환 등을 거쳐 나름대로 병력과 장비 등을 보충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문제는 7사단과 8사단이었다. 이 두 사단의 병력은 좀체 수습하기가 어려웠다. 후방으로 마구 밀려 내려오는 병력은 차분한 수습의 과정을 거쳐 다시 모이도록 해야 했다. 그러나 재집결 자체가 어려울 정도로 사단은 무너진 상태였다. 평양 동쪽의 강동군 승호리에 집결했다고는 하지만 그 병력은 많지 않았다.
두 사단의 연대장 둘이 적에게 포로로 잡힐 정도였다면 그 부대의 붕괴 수준은 대단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역시 병력 수습이 매우 어려웠던 모양이다. 7사단의 경우는 약 6800명 정도가 모여들었고, 8사단은 그보다 적은 5700명 정도가 수습이 가능했던 병력이었다.
사단장이 있어야 했던 곳
그런 와중에서 사단을 이끄는 사단장은 어떻게 처신해야 옳을까. 사단장은 제가 거느렸던 병력을 결코 떠날 수 없는 법이다. 사단장의 권위와 역량은 제가 거느린 부대와 생사를 함께 할 때 크고 대단해진다. 사단장이 사단 병력을 통솔치 못해 서로 떨어진다면 그 사람은 더는 사단장이라고 할 수 없다.
나아갈 때도 그렇고, 물러설 때는 더욱 그렇다. 제게 운명을 맡긴 병력과 생사고락을 함께할 수 있어야 진정한 지휘관이다. 그 점에서 당시 7, 8사단의 사단장은 원칙에 충실하지 않았다. 국방부가 편찬한 <6.25 전쟁사>를 보면 8사단장은 황해도 시변리와 경기도 연천을 잇는 도로가 아군의 공중 폭격으로 곳곳이 끊긴 사실을 알고서는 전선의 지휘를 한 연대장에게 맡겼다고 한다.
이어 사단장은 먼저 사단본부와 중장비, 환자 등을 실은 차량을 이끌고 먼저 철수했다고 한다. 사단장이 당시 있어야 할 곳은 마지막까지 후퇴하는 병력을 집결시킬 수 있는 곳이어야 한다. 그 점이 우선 돋보이는 문제다. 그 뒤에 사단장은 서울에 왔던 모양이다. 7사단도 상황은 별반 다른 게 없다.
공간사에는 제대로 적은 기록이 없다. 그러나 내가 1.4 후퇴 뒤 전투를 치르면서 들은 바로는 7사단장 역시 제 병력을 뒤에 두고 서울에 체류하다가 문제가 생겼다. 내가 들은 내용에 따르면 두 사람은 서울에서 헌병대에 의해 체포당했다. 이어 곧 군법회의에 넘겨졌다.
두 사람 모두 군법회의에서 아주 무거운 중형을 받았지만, 당시가 심각한 전시(戰時)라는 이유 때문에 감형을 받고 다시 군문(軍門)에 복귀할 수 있었다. 7사단은 군단이 해체되면서 강원도 홍천에서 정비를 거친 뒤 춘천으로 이동해 육군 예비로 운명이 바뀌고 말았다. 8사단은 국군 3군단에 배속돼 화천 저수지 남쪽을 지키는 임무를 맡았다.
이 모두가 준비도 없이 전쟁을 맞이한 국군이 보여줄 수 있었던 솔직한 상황이었다. 지휘관 개인의 책임으로만 떠넘기기에는 당시 우리 국군은 모든 것이 형편없었다. 훈련도 부족했고, 화력과 장비는 턱없이 부족했다. 그래도 싸울 의지만은 잃지 말아야 했다. 슬그머니 사라진 국군 2군단은 많은 교훈을 우리에게 일깨운다.
130 “인분 냄새 한국…”, 불손한 리지웨이 전선 분위기를 바꾸다
(17) 횡성의 대패
암울했던 1.4후퇴
중공군의 3차 공세는 유엔군과 국군이 평양 이북의 모든 전선에서 밀려 내려오던 시기에 벌어진 것이었다. 그로써 우리는 38선까지 내주고 서울을 또다시 적의 수중에 넘겨야 했다. 안타까운 패배였지만 전쟁터에서의 대세(大勢)는 그렇게 기울어지고 있었다. 아군은 결국 북위 37도 선까지 후퇴한 뒤 반격을 준비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커다란 변화가 있었다. 6·25전쟁 개전 초반의 아주 힘들었던 형세를 반전시키는 데 혁혁한 공로를 세웠던 월튼 워커 미 8군 사령관이 불의의 교통사고로 의정부 도로에서 세상을 떴다.
그 뒤를 이은 사람이 매슈 리지웨이 사령관이었다. 그는 앞에서도 자주 소개했듯이 미 공수부대를 이끌고 제2차 세계대전에서 용맹을 떨쳤던 강인한 지휘관이었다. 그는 전임이었던 월튼 워커 장군이 1950년 12월의 중공군 공세에 밀려 부산 교두보 후퇴에 이어 최종적으로는 철수까지 고려했던 것과는 달리 강력한 반격작전을 구상했다.
그러나 의지만 있다고 해서 바람이 현실로 반드시 이어진다는 법은 없다. 당시 유엔군을 비롯해 아군 모두는 중공군의 실체가 어느 정도인지에 대한 두려움이 매우 컸다. 특히 국군이 중공군에게 지니는 공포심은 대단했다. 나 또한 적에게 밀려 서울을 내주고 안성 일대로 후퇴하면서 자괴감이 커지고 있었다.
부끄러움 정도를 넘어서는 두려움도 자못 커져가는 때였다. 미군이 이 땅에서 물러날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임진강에서 물러나 서울을 다시 내줄 무렵에 우리 국군 사이에서도 “미군이 부산 교두보를 설정한 뒤 축차적으로 철수하면서 한국을 떠날 가능성이 크다”는 말이 떠돌았다. 실제 낙동강 전선의 다부동 전투에서 나와 함께 호흡을 맞췄던 마이켈리스 대령도 내게 비슷한 말을 전해줬다.
/1950년 12월 불의의 교통사고로 숨진 당시 미 8군 사령관 월튼 워커(왼쪽)이 개전 직후 북에 포로로 잡혔던 윌리엄 딘 소장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Morning Calm Weekly Newspaper Installation Management Command, U.S. Army
서울을 내준 뒤 안성 인근의 입장에 사단 사령부를 차릴 무렵 그런 불안감이 늘 내 머릿속을 짓누르고 있었다. ‘이제 미군마저 떠난다면 우리 대한민국의 운명은 어떻게 될 것인가’라는 초조감, 두려움이었다. 안성을 향해 후퇴하던 때였을 것이다. 나는 부관 김판규 대위를 불렀다.
“자네, ‘정감록(鄭鑑錄)’ 알지 않는가? 어디 가서 그 <정감록> 잘 보는 사람이 있는지 알아보고, 그런 이가 있다면 도대체 우리가 어디까지 후퇴할 것인가를 한 번 알아보게”라고 했다. 오죽 답답했으면 점(占)이라도 한 번 쳐보려 했던 것일까. 당시 나는 그 정도로 심사가 답답했다. 실제의 전선 지휘관이 점에 의존할 수는 없는 법이다. 그러나 점이라도 한 번 보려고 했던 것은 우리를 짓누르는 스트레스가 아주 대단했기 때문이었다.
‘정감록’의 예언
김판규 대위는 용케 <정감록>에 아주 능한 사람을 만날 수 있었다고 했다. 이어 그는 “다행히 적군은 안성 이남까지는 절대 내려올 수 없다고 한다”는 말까지 전했다. 나는 부관이 침울함에 젖어 있던 상관을 안심시키기 위해 만든 말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럼에도 나는 조금의 위안을 얻었던 듯하다. 매슈 리지웨이 신임 8군 사령관은 호락호락하지 않은 인물이었다. 특히 국군의 통수권자였던 이승만 대통령에게 그랬다. 앞의 어딘가에서 잠시 소개한 내용이지만 그는 한국에 도착했을 때의 첫인상을 “인분 냄새가 가득한 이 땅을 우리가 왜 지키려고 왔는지 모르겠다”고 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는 ‘미 합중국의 적법한 명령을 수행하기 위해 싸우러 왔다’고 부연했다.
그만큼 그는 군인으로서 자신의 조국인 미국 행정부의 명령, 그로써 얻어지는 명예와 전공(戰功)을 매우 존중하는 지휘관이었다. 그러나 전쟁터에서의 맹렬한 지휘관답게 그는 당시 한국군이 보이고 있던 전투력에 아주 가혹한 심사를 거리낌 없이 드러내는 사람이기도 했다. 그는 이승만 대통령을 찾아가 “국군 통수권자인 대통령께서 전투력이 허약한 한국군의 어지러운 군기를 그대로 방치하신다면 우리는 한국군을 지원할 수 없다”고 다그치기도 했다.
따라서 이승만 대통령은 리지웨이 장군을 절대 좋아하지 않았다. 나중의 일이지만 이 대통령은 리지웨이와 월튼 워커 장군 등 자신을 타박했던 미 지휘관을 거론할 때는 “못된 친구들”이라며 끌탕을 치기도 했다. 그러나 우리가 미군의 그런 강압적인 언사를 받아들이지 않을 방법은 없었다. 달리 길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 리지웨이의 호통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때부터 전선 부대를 찾아오는 고관(高官)들이 많았다. 이승만 대통령을 비롯해 장면 국무총리, 신성모 국방장관 등의 일선부대 방문이 잦아졌다. 신성모 국방장관이 당시 안성 부근의 입장에 있던 우리 1사단 사령부를 찾아왔던 기억이 난다.
/1951년 1.4후퇴로 서울을 다시 내줬던 유엔군이 2월 들어 서울을 향해 공격을 펼치던 당시의 모습이다./Morning Calm Weekly Newspaper Installation Management Command, U.S. Army
그의 별명은 ‘낙루(落淚) 장관’이었다. 연설을 하다가 눈물을 흘리는 경우가 많아 붙여진 별명이었다. 우리가 37도 선까지 밀려 내려가 있던 당시의 상황도 대한민국 정부의 입장에서 볼 때는 매우 암울했다. 그런 분위기 때문이었을까. ‘낙루 장관’ 신성모 국방장관은 우리 1사단을 방문해 연설하다가 다시 또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그를 듣고 있던 부대 장병의 눈시울도 따라 붉어졌던 장면이 지금까지 눈에 선하다.
리지웨이는 독했다. 그는 부임하자마자 의정부 전선을 시찰했다. 그곳에서 한국군 6사단과 미 25사단이 중공군에게 밀려 마구 후퇴하는 것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고 했다. 특히 평양 이북에서 중공군에게 먼저 등을 보여 아군 전선에 치명적인 틈을 내주고 말았던 한국군의 전력에 매우 심한 불신감을 지녔던 듯하다. 그런 그의 감정이 아무래도 이승만 대통령을 찾아가 윽박지르는 행위로 이어졌을 것이다. 아무튼 암울한 국면에 등장한 새로운 지휘관 리지웨이는 활발하게 움직였다. 그는 아군 부대와 부대를 쇠사슬과 같은 강인한 연대로 묶고자 했다. 적에게 더 이상 틈을 허용하지 않기 위한 방책이었다. 따라서 아주 높은 수준의 군기(軍紀)가 필요하다고 봤다.
반격에 나선 리지웨이
좀 더 시간이 지난 뒤의 일이지만 나는 수원 인근에서 자동차 사고를 당한 적이 있다. 신성모 국방장관을 수행해 미 1군단 사령부를 방문할 때였다. 그때 차가 뒤집혔다. 신성모 장관은 다치지 않았으나 내가 제법 심각한 상처를 입었다. 허리를 쓸 수 없을 정도였다. 나는 당장 미군 병원에 입원했고, 사람들은 “일본으로 후송해야 할 정도”라고 걱정했다. 그때 리지웨이 사령관이 내 병실을 찾아왔다.
그는 내 병세를 잠시 들여다보더니 “지금은 사단장이 일선에 서 있어야 할 때”라고 말했다. 그러고서는 내 의사를 물었다. 나는 “좋다. 일선에 서겠다”고 했다. 그는 만족한 표정을 지어 보이고 병실을 나갔다. 그는 그렇듯 전의(戰意)를 강조하는 지휘관이었다. 나는 하루 뒤 퇴원해 일선에 복귀했고, 당시 누군가가 가져다준 웅담을 먹으면서 버텼다. 나중에 중공군 전사(戰史)를 뒤적여보면 그런 리지웨이가 중공군에게는 가장 위협적인 지휘관이었음이 드러난다. 중공군은 강력한 화력(火力)을 바탕으로 견고한 부대 운용에 나섰던 리지웨이가 자신에게 어떤 위협으로 다가오는지를 전전긍긍하면서 지켜봤던 것이다.
/워커 사령관이 숨진 뒤 한국에 부임한 리지웨이 장군(지프 뒷좌석 왼쪽)이 맥아더 유엔군 총사령관을 수행해 전선을 시찰하고 있다./Morning Calm Weekly Newspaper Installation Management Command, U.S. Army
신임 미 8군 사령관은 평양 이북으로 진군할 때 갈라졌던 한반도 전쟁에서의 지휘권을 하나로 묶었다. 서부전선이 미 8군 사령관, 동부전선이 미 10군단장의 책임구역으로 나뉘어 있던 지휘권 분할을 하나로 묶어 자신이 전체를 지휘하는 체계로 다잡았다. 게다가 강력한 전의(戰意)와 군기(軍紀)로 아군 전선 부대의 자세를 바로잡기에 적극적이었다. 그는 예하 각 지휘관에게 ‘2단계 하급(下級) 제대(梯隊) 지휘’를 강조했다. 예를 들면, 사단장은 밑으로 연대(聯隊)와 대대(大隊)까지 직접 통제하라는 말이었다. 연대장은 따라서 대대와 중대(中隊)까지 직접 챙기라는 얘기였다.
그 자신도 일선에 서기를 마다하지 않았다. 당시 미 8군 사령부는 대구에 있었다. 그러나 리지웨이는 늘 대전에 와 있었다. 대전에는 프랭크 밀번 장군이 이끄는 미 1군단 사령부가 있던 곳이다. 둘은 사이가 별로 좋지 않았다. 밀번 장군이 웨스트포인트 선배였으나 진급에서 늦어 웨스트포인트 후배였던 리지웨이의 명령을 받들어야 하는 처지였다. 그럼에도 리지웨이는 늘 대전의 미 1군단 사령부에 머물며 전선 상황을 챙기고 또 챙겼다. 그런 리지웨이의 강인한 성격과 실행력 덕분에 전선의 분위기는 달라지고 있었다. 중공군 3차 공세로 많이 무너졌던 아군의 기강과 전투력이 차츰 눈에 띌 정도로 높아지는 분위기였다.
131 ‘늑대’와 ‘벼락', 리지웨이의 작전에 실체 드러낸 중공군
(17) 횡성의 대패
깊어지는 중공군의 고민
중공군은 한강에서부터 이남 지역으로 적어도 80㎞는 치고 내려온 상황이었다. 따라서 아군은 북위 37도선에서 겨우 전열을 재정비했다. 중공군의 공세는 언제까지 이어질 수 있을까. 강인한 전의(戰意)로 무장한 신임 8군 사령관이 등장하면서 당초 미군이 마음에 뒀던 부산 교두보로의 후퇴 염려는 사실상 사라지고 말았다. 그럼에도 중공군 공세가 언제까지 지속할 수 있을까에 관한 의구는 여전히 남아 있었다. 이 점이 사실은 커다란 문제였다. 중공군 전사(戰史)를 보면 그들은 당시에 이미 더 이상의 추격을 펼칠 만한 역량을 모두 소진한 상태였다. 수도 서울을 점령하고 경기도 중부 일원과 원주 북쪽까지 내려왔지만 더 이상의 공세는 펼치기 어려웠다.
전선이 남쪽으로 내려오면서 중공군의 보급선이 길어진 점이 가장 큰 이유였다. 게다가 함흥에서 머물고 있던 중공군 제 9병단의 추가 배치가 어려웠다. 제 19병단은 신규로 한반도 전선에 참여할 부대였다. 만주로부터 이동해 한강 이남으로 내려와야 하는 새 병력이었으나, 충분한 경제력을 갖추지 못한 중국의 후방 사정으로 이 또한 차일피일 미뤄지고 있었다. 따라서 중공군 총사령관 펑더화이(彭德懷)는 1951년 1월 8일자로 전 중공군에게 유엔군 추격 정지 명령을 내렸다. 일단 숨을 고르면서 후방 보급사정과 병력 추가 배치가 이뤄진 뒤에 다음 공세를 펼치려는 심산(心算)이었다. 아울러 걱정도 많았다.
/중공군 총사령관 펑더화이가 전선을 시찰하는 모습. 그는 1951년 4차 공세를 앞두고 부족한 보급 등의 문제 때문에 깊은 고민에 빠져 마오쩌둥과 갈등을 겪기도 했다.
도쿄(東京)에는 아직 맥아더 장군이 총사령관으로 버티고 있었다. 그는 당시 세계적으로 알아주는 명장(名將)이었고, 특기가 바로 상륙작전이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중공군은 보급선이 길어지는 국면과 함께 언제일지 모르지만 한반도 동서(東西) 해안으로 미군 부대가 다시 상륙을 감행할 수도 있다는 두려움을 안고 있었다. 펑더화이 등 중공군 수뇌부는 그에 따라 전선이 남하하는 상황에 맞춰 일부 대규모 병력과 북한군을 동원해 동서 해안 경계에 부쩍 신경을 쓸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서울을 우리에게서 빼앗은 3차 공세까지는 성공했지만, 1~2차 공세를 펼치는 동안 한반도 북부의 강력한 추위에 시달린 중공군의 많은 병력 중에는 동상(凍傷) 환자도 적지 않았다. 따라서 길어진 보급선, 언제 닥칠지 모르는 미군의 상륙작전, 기동력이 크게 둔화한 중공군 병력 등이 다 문제로 떠올랐다. 따라서 펑더화이의 입장에서는 달리 선택의 길이 없었다. 일단 쉬어야 전투를 계속 이어갈 수 있다는 판단이 정확했던 셈이다. 따라서 그런 중공군의 속사정을 읽어야 했던 게 아군의 가장 중요한 일이었다.
리지웨이가 내민 탐침
당장은 낯선 상대가 불러일으키는 당혹감과 두려움으로부터 벗어나는 일이 시급했다. 도대체 중공군의 진짜 실력은 어느 정도일까. 우리는 그 점을 알면서 지금의 상황에까지 몰렸던 것일까. 아니면, 상대의 허실(虛實)을 제대로 짚지도 못한 채 뒤로 물러서기만 했던 것일까.
1950년 11월 말부터 12월 초에 적에게 밀리기 시작해 대한민국 수도 서울을 내주고 북위 37도선으로 후퇴한 1951년 1월 초의 상황은 아군에게 전체 전쟁국면을 크게 전환할 수 있는 매우 중요한 시기였다. 그러나 능력이 따라야 했다. 어설픈 판단으로 국면을 잘못 읽는다면 추가적인 후퇴에 이어 낙동강 전선으로 다시 몰려야 하는 위험도 있었다. 리지웨이는 그 국면에서 자신의 능력을 보란 듯이 드러낸 명장(名將)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는 우선 중공군을 두려워하기 전에 그들의 실체가 어떤지를 알아보려는 지휘관이었다. 그는 사실 중국에서 체류한 적이 있던 군인이었다. 초급 장교 시절 중국 톈진(天津)에서 근무했던 경험이 있던 터라 중국인이 전혀 낯설지는 않은 편이었다.
/1950년 말 부임해 중공군에 대반격을 가한 매슈 리지웨이 미 8군 사령관. 가슴에 수류탄을 맨 모습이 눈길을 끌었다.
그 점이 주효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다른 점도 있었다. 풍부한 실전(實戰) 경험, 제2차 세계대전에서 미군의 대규모 공수강하 작전을 주도했던 날카로운 공격력이 그의 특징이었다. 따라서 그는 용감했고, 치밀했다. 상대가 낯설어서 마구 커지기만 하는 두려움에 그냥 굽힐 군인이 아니었다는 얘기다. 그는 우선 ‘탐침(探針)’을 준비했다. 정밀한 탐침을 적의 한가운데로 집어넣은 뒤 적군이 그를 어떻게 물리치는지를 우선 보고자 했다. 사실 이는 병법(兵法)의 원칙에 해당했다. 그러나 원칙이라는 것은 잘 알지만 지키기가 쉽지는 않다. 그런 원칙이란 다른 것이 아니다. 상대의 실체를 제대로 알아야 한다는 점이었다. 지피지기(知彼知己)라는 말이 그냥 나오지는 않았을 것이다.
전선의 분위기를 다진 뒤 리지웨이 신임 미 8군 사령관이 벌인 일은 탐색이었다. 군대의 전문용어로는 ‘위력(威力) 수색’에 해당하는 작업이었다. 크게 강화한 화력을 선두에 선 수색 임무의 부대에 보태고서는 그를 적진(敵陣) 깊숙이 들여보내는 게 우선이다. 아울러 적이 그런 위력 수색을 물리치기 위해 어떻게 대응에 나서는지를 정밀하게 관찰하는 작업이 뒤를 따른다. 리지웨이는 중공군 대규모 병력이 서울에서 남하해 수원 일대에 체류하고 있는 사실을 알았다. 더 이상 남하하지 못하는 중공군이었다. 리지웨이의 날카로운 탐침은 그곳을 바로 겨누고 들어갔다. 일명 ‘울프하운드(Operation Wolfhound)’라고 불리는 작전이었다.
미 1군단 예하에서 강력한 화력을 지닌 연대전투단(RCT: Regimental Combat Team)을 구성하고 미 9군단에서 1개 대대전투단을 보강했다. ‘연대전투단’이란, 사단과는 별도로 단독 작전을 수행할 수 있도록 전투 기능을 대폭 보강한 전투 단위다. 연대전투단의 핵심은 미 25사단 27연대였다. 낙동강 전선의 다부동 전투에서 우리 1사단과 함께 싸움에 나섰던 마이켈리스가 연대장이었다.
‘늑대’에 이어 ‘벼락’이 나섰다
리지웨이가 겨누는 칼끝은 매우 예리하고 강했다. 기존의 작전 개념과는 다른 차원의 싸움을 준비했기 때문이다. 그는 이전까지 벌어졌던 지역 확보 우선의 작전개념에서 탈피했다. 대신 중점을 상대 병력에 대한 ‘살상(殺傷)’에 뒀다. 적군을 눈에 띄는 대로 섬멸(殲滅)하겠다는 구상이었다. 중공군이 리지웨이를 두려워했던 이유는 바로 그 점에 있었다. 보병(步兵)과 전차(戰車), 포병(砲兵)을 일컫는 보전포(步戰砲)의 강력하고 치밀한 화력(火力)에 상대를 압도했던 미군의 공군력을 덧붙여 중공군 병력을 보이는 대로 살상하겠다는 작전개념이었기 때문이다.
울프하운드 작전은 1월 15일부터 22일까지 1주일 동안 펼쳐졌다. 이 작전을 통해 중공군은 수원 이남으로 내려오지 않았다는 점이 분명하게 드러났다. 아울러 중공군은 미군 연대전투단을 피해 산속으로 숨어들어 가는 모습을 보였다. 따라서 강력한 화력 앞에 중공군의 인해전술(人海戰術)식 싸움 방법이 더 이상 통하지 않는다는 점도 분명해졌다. 리지웨이는 이와 함께 몇 가지 작전상의 중요한 지침을 예하의 각 부대에 내렸다. 적과 접전 뒤 후퇴할 때라도 반드시 적과의 접촉선을 유지해야 한다는 점, 공격 때에는 아군의 인접 부대와 횡적인 연결선을 그대로 이어가야 한다는 점 등이었다. 이런 지침의 분명한 지향 하나는 적에게 막대한 출혈(出血)을 요구한다는 점이었다.
/1951년 1월 중순 아군의 대반격이 펼쳐질 무렵 한국 요인들의 국군 부대 방문이 줄을 이었다. 국군 1사단을 방문한 요인들. 앞줄 오른쪽 둘째부터 백선엽 사단장, 신성모 국방장관, 장면 총리.
울프하운드 작전은 그런 점에서 큰 성공이었다. 한반도 북부의 싸움터에서 아군에게 막심한 피해를 안겼던 적, 중공군의 실체가 크게 드러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아울러 경기도 중북부와 강원도에 걸쳐 형성된 전선은 험준한 산악과 협곡이 발달한 한반도 북부와 차이가 있었다. 매복과 기습에 뛰어난 중공군으로서는 아무래도 불리한 지형이었다. 리지웨이의 날카로운 탐침은 계속 중공군의 허점을 향해 뻗었다. 미군은 울프하운드 작전에 이어 다음에는 썬더볼트(Operation Thunderbolt) 작전을 펼쳤다. 앞의 울프하운드는 굳이 번역하자면 ‘늑대’일 것이다. 그보다 이름이 더 강력했던 다음 작전은 우리말로는 ‘벼락’일 것이다. 이 작전은 수도 서울이 있는 한강 이남까지로 수색 범위를 설정했다.
울프하운드로 위력 수색을 벌인 뒤 중공군이 미군의 강력한 화력에 당황한 틈을 타 더 강력한 수색작전을 벌인 셈이었다. 중공군을 향한 리지웨이의 ‘벼락’은 울프하운드 작전을 마친 22일 직후인 23일 뻗어나갔다. 중공군으로서는 매우 당황스러운 작전이었을 것이다. 중공군은 적잖이 흔들리고 있었다. 중공군으로서는 고민이 깊어지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132 용감한 터키군의 백병전, 용인에서 중공군을 쫓아내다
(17) 횡성의 대패
투르크의 후예들의 용맹
썬더볼트 작전이 펼쳐지는 동안 유명해진 부대가 있다. 미 1군단 예하 미 25사단에 배속해 있던 터키 여단이었다. 이 부대는 아군이 처참하게 무너졌던 평북의 군우리 전투에서도 이름을 드러낸다. 그러나 중공군 공세에 맥없이 물러났다는 부끄러운 기록과 함께였다.
그러나 썬더볼트 작전이 펼쳐지면서 터키 여단은 결코 다시는 물러서지 않았다. 그들의 싸움터는 당시 김량장으로 불렸던 용인 일대였다. 터키 여단은 김량장리와 신갈을 향해 진격했다. 미 1군단 오른쪽 전선을 담당한 터키 여단은 썬더볼트 작전의 개시일인 1월 25일 첫날에는 진격이 순조로웠다. 그러나 이곳을 방어하고 있던 중공군은 인근 야산에 이미 강력한 진지를 구축한 상태였다고 한다.
이튿날인 26일 터키 여단의 선두부대는 곳곳에서 중공군과 격전을 펼쳐야 했다. 적지 않은 손실에도 터키 여단 선두는 중공군의 공격을 맞받아가며 싸움을 벌였다. 매우 격렬한 싸움이었다. 터키 여단의 이름이 아군 진영에서 오르내렸던 이유는 당시 벌어진 중공군과의 처절한 백병전(白兵戰) 때문이었다.
/6.25전쟁에서 용맹을 떨친 터키군 병사가 기관총을 겨눈 채 참호를 지키고 있다.
터키 군대는 군우리에서의 패배를 설욕하기 위해서인지 한 걸음도 다시 물러서지 않았던 모양이다. 필요에 따라 중공군이 이미 견고한 진지를 형성한 고지에 공습을 요청한 뒤 터키군은 그곳을 점령하기 위해 나아갔고, 그에 따라 진지를 사수하려는 중공군과 백병전이 불붙었다고 한다. 지금의 용인 시가지와 인근 신갈 일대는 따라서 뜨거운 격전장으로 변했다.
터키 여단은 썬더볼트 작전이 개시된 25일 이후 이틀이 지나면서 김량장과 신갈을 점령하는 데 성공했다고 국방부가 발간한 <6.25 전쟁사>는 소개하고 있다. 중공군의 피해가 아주 컸다고 한다. 터키 여단이 후방에서 진격해 온 우리 1사단에게 김량장과 신갈을 이양한 뒤 수원을 향해 이동할 때 그 전과(戰果)가 자세하게 드러났다.
중공군은 27일에 이르면서 김량장과 신갈 일대에서 모습을 감추고 말았다. 백병전은 직접 총칼로 벌이는 육박전이다. 김량장과 신갈 일대의 중공군이 점령했던 고지에는 그들의 시신이 처참한 모습으로 널려 있었다. 김량장과 151고지라는 곳에서 발견된 중공군의 시신은 머리와 턱이 깨지고 총검(銃劍)에 찔린 모습이었다고 한다.
특히 151고지에서의 백병전은 약 30분 동안 펼쳐지면서 당시 현장에 있었던 종군기자들에 의해 생생하게 알려졌다. 이 고지에서 397명의 중공군 전사자가 발생했다. 터키 군대의 희생은 그에 비해 아주 적었다고 한다. 이로써 터키 군대는 유엔군 사이에서 ‘백병전까지 무릅쓰고 중공군을 물리친 강력한 군대’라는 명예를 얻었다는 것이다.
관악산까지 진격
리지웨이의 날카로운 공격 구상은 점차 빛을 더 해가고 있었다. 터키 여단은 끝내 물러서지 않는 용감함으로 백병전까지 무릅쓰면서 중공군을 격퇴해 이름을 드높이는데 이어 미 25사단과 함께 더 진격을 펼쳐 수원과 인천 방면의 이동로를 감지 할 수 있는 수리산까지 점령했다. 2월 초의 상황이었다.
그 무렵 우리 1사단도 15연대(연대장 김안일 대령)가 전면으로 진출하면서 과천을 지향할 수 있는 모락산을 점령하는 데 성공했다. 2월 4일이었다. 따라서 중공군은 계속 몰려야 하는 상황이었다. 이제까지 등을 보이면서 후퇴하는 유엔군과 국군을 추격하면서 그들이 벌였던 공세와는 전혀 다른 양상이 나타나고 있었다.
/전투를 마친 뒤 단체로 촬영에 나선 터키군 장병.
따라서 중공군은 점차 궁지에 몰리는 형국이었다. 그러나 그대로 당할 수만은 없었을 것이다. 중공군은 나름대로 반격을 구상하고 있었다. 서울을 다시 내줄 것인가는 부차적인 문제였다. 북위 37도선인 안성과 삼척을 잇는 전선에서 반격해오는 유엔군의 기세가 심상치 않았기 때문이다.
이를 방치할 경우 중공군은 힘들여 진격했던 38도선을 다시 내줘야 하는 형국이었고, 경우에 따라서는 전체 전선의 붕괴까지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기도 했다. 중공군은 따라서 한강 남쪽에 병력을 대규모로 배치하지 않은 상태에서 전선을 어떻게 형성할 것인지 고민하기 시작했던 듯하다.
2월 10일경에 이르러서는 미 25사단이 한강 진출선을 확보한 데 이어 우리 1사단의 15연대가 서울을 눈앞에 두고 있는 관악산 점령에 성공했다. 중공군으로서는 이제 수도 서울을 내주고 후퇴할 것인가를 진지하게 고민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서부전선은 그런 기세로 중공군을 압박하는 모양새였다. 울프하운드, 썬더볼트 작전에 이어 펼쳐진 것이 라운드업(Roundup) 작전이었다.
이는 중동부 전선의 상황을 감안한 작전이었다. 중공군은 서울이 있는 서부전선에서 앞서 이야기한 대로 점차 불리한 상황에 몰리고 있었다. 이를 만회하기 위한 중공군의 구상 중 하나가 강력한 화력을 지닌 서부전선의 유엔군을 피해 중동부 전선을 노리자는 것이었다.
당시 중공군의 주력이 강원도 홍천을 향해 집결하고 있다는 정보가 들어왔다. 이에 맞서기 위해 리지웨이는 중동부 전선의 미 10군단 등을 동원해 새로운 작전을 펼쳐야 했다. 그 작전의 이름이 ‘라운드업’이었다. 미 10군단의 요청에 의해 작전은 만들어졌고, 리지웨이는 그를 승인했다.
당시의 전선 배치 상황은 이랬다. 서쪽으로부터 미 1군단, 중서부 전선에는 미 9군단, 중동부 전선에는 미 10군단, 그 오른쪽에는 국군 3군단, 동해안에는 국군 1군단이 섰다. 국군 3군단은 미 10군단장 알몬드 소장의 지휘를 받아야 했다.
중공군으로서는 제 4차 공세를 펼쳐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리지웨이가 신임 미 8군 사령관으로 부임하면서 전선의 상황에 많은 변화가 생기고 말았다. 서부전선은 한반도에서 벌어지는 전쟁의 전체적인 승패가 갈리는 곳이었다. 따라서 이곳에 서 있는 미군은 화력이나 장비, 병력 등의 모든 면모에서 가장 셌다.
강원도로 기동한 중공군
그런 서부전선의 미 1군단은 리지웨이의 강력한 명령을 제대로 수행해 마침내 중공군이 점령하고 있던 대한민국 수도 서울의 코앞까지 바짝 다가선 상태였다. 일찌감치 소개한 내용이지만, 당시의 중공군 총사령관 펑더화이는 다음에 펼칠 공세를 두고 큰 고민에 빠진 상태였다.
/격렬한 전쟁터에서 전투를 수행한 뒤 춤과 노래로 휴식을 취하고 있는 터키 군대.
중공군의 보급이나 화력, 장비, 기동력에서 이미 유엔군과 제대로 싸움을 벌일 만한 역량이 갖춰져 있지 않다고 봤기 때문이었다. 이 문제를 두고 펑더화이는 전쟁 전체를 이끌고 있던 베이징(北京)의 마오쩌둥(毛澤東)과 심각한 갈등을 벌였다. 마오쩌둥은 공세를 지속하도록 펑더화이를 압박했다.
그러나 펑더화이는 전선의 상황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던 야전의 최고 지휘관이었다. 그는 모든 면에서 다음 공세를 정식으로 펼쳐가기에는 역량이 매우 부족하다는 점을 잘 알았다. 그러나 최고 전쟁 지휘부의 독촉은 계속 그를 압박했다. 결국 펑더화이는 리지웨이가 펼치고 있는 대규모 반격에 다시 대응을 할 수밖에 없던 상황이었다.
중공군의 그런 상황을 모두 감안해 펑더화이가 결정한 내용이 아군의 중동부 전선을 강타하자는 계획이었다. 중공군은 대한민국 수도 서울의 방어에 전력을 기울일 형편이 아니었다. 어차피 해빙기(解氷期)에 접어들면서 차량과 장비, 병력의 이동이 어려운 3월에 접어들어서는 서울로부터의 철수가 어렵다는 판단을 했다.
따라서 서부전선의 강력한 유엔군을 상대로 해 지키기 어려운 수도 서울에 매달려 있는 대신 다른 돌파구를 마련해 병력을 집중시키는 방법이 필요했다. 그는 서부전선의 강력한 유엔군을 피하는 대신 중동부 전선의 한국군을 노리는 전략을 택했다. 나름대로 ‘우회’였다.
6·25전쟁 3년 동안 대부분의 아군 전선배치는 맥락이 같았다. 한반도 전쟁의 승패를 크게 가르는 서부전선에는 대개 강력한 군대를 세웠다. 미 8군 예하에서 가장 센 미 1군단은 따라서 요지부동의 서부전선 담당 부대였다. 동쪽으로 갈수록 그에 비해 다소 힘이 떨어지는 군대가 서는 일이 보통이었다. 따라서 중동부 전선으로는 국군 담당 지역이 점차 늘어가는 흐름이었다.
미 10군단 알몬드 소장은 북진 과정에서 탁월한 지휘력을 선보이지 못했던 지휘관이었다. 그러나 흥남철수 작전에서 나름대로 침착한 지휘력을 보였다. 그럼에도 전선 지휘는 다소 불안했다. 그 미 10군단 예하에는 국군 8사단이 있었다. 북진했다가 묘향산 부근 영원과 맹산이라는 곳에서 중공군에게 참패를 당했다가 가까스로 재편성에 성공한 부대였다. 그러나 그곳에는 새 먹잇감을 노리는 중공군의 대부대가 몰려들고 있었다.
133 7개 사단 11만 명 중공군 급거 이동, 홍천엔 불길한 전운(戰雲)
(17) 횡성의 대패
성급했던 미 10군단장
그 무렵의 일이었다. 중공군은 앞서 말한 대로 중동부 전선을 향해 서부전선의 공격을 담당하던 13병단 예하의 7개 사단을 이동시켰다. 방향은 그렇게 정했으나, 어느 곳을 향해 선공(先攻)의 칼을 겨눠야 하는지는 정론(定論)이 없었다.
그곳은 모두 미 10군단 예하의 부대들이 지키는 곳이었다. 우선은 횡성과 경기도 가평 부근의 지평리가 논의의 대상이었다. 중공군 지도부는 그 두 곳 중의 하나를 택해 선제공격을 감행해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횡성을 먼저 칠지, 아니면 전략적으로 더 큰 요충에 해당하는 지평리를 공격해야 할지 자신이 없었다.
중공군 전사(戰史)에 따르면 그를 두고 펑더화이를 중심으로 한 중공군 지도부는 퍽 열띤 논의를 벌였다고 한다. 그러나 전쟁에서의 그런 논쟁은 사실 결론이 뻔하게 나기 쉽다. 가장 약한 곳을 향해 전력(戰力)을 집중하는 게 보통이기 때문이다. 중공군은 따라서 열띤 논의를 벌였지만 결국 국군이 선공(先攻) 부대로 나선 횡성 지역을 공격키로 결정했다.
/6·25전쟁 중 미 10군단을 이끌고 여러 전투에 참가했던 에드워드 알몬드 소장.
미 10군단장 알몬드 소장이 구상해 8군 사령관 리지웨이 장군으로부터 승인을 받은 ‘라운드업 작전’은 평범한 내용이 아니었다. 선두에 국군 부대를 올려놓은 뒤 그 후방을 강력한 미군 지원부대로 받친다는 구상이었다. 팀워크가 잘 맞아떨어질 경우 서부전선 일대에서 리지웨이 장군이 감행한 ‘울프하운드’, ‘썬더볼트’ 등의 위력 수색 작전에 손색이 없을 수도 있었던 내용이다.
그러나 전쟁터에서의 싸움은 적정(敵情)과 함께 스스로 지닌 힘의 장단(長短)과 강약(强弱)을 잘 따져야 하는 법이다. 당시 미 8군 정보 참모 대리였던 로버트 퍼거슨(Robert G. Ferguson) 대령은 중공군의 이동 사실을 제법 상세히 알고 있었다고 한다. 약 11만 명 이상의 중공군 병력이 중동부 전선으로 이동하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아울러 퍼거슨 대령은 그런 중공군의 대규모 병력이 양평과 홍천 일대에 집결한 뒤 원주를 향해 공격을 펼칠 것으로 보인다는 점도 정확히 판단했다. 그는 또 중공군이 원주를 지향하다가 종국에는 서쪽으로 방향을 돌려 충주 지역을 향해 공세를 벌일 것이라고 봤다.
이는 나중에 중공군이 보인 대부분의 지향(指向)과 일치하는 판단이었다. 따라서 매우 뛰어난 정보 수집, 분석, 판단에 해당하는 내용이라고 볼 수 있었다. 문제는 미 10군단이었다. 중공군 대규모 병력이 몰려드는 전선 전면(前面) 상황을 제대로 파악했느냐가 우선 중요했다.
그러나 여러 정황으로 보면 미 8군의 정보 판단 내용이 전해졌음에는 분명해 보이지만 횡성으로부터 홍천을 지향하는 미 10군단의 공세 의도에서는 아무래도 전면의 적군을 깊이 관찰하지 않은 듯한 흔적이 여럿 드러난다. 미 10군단장 알몬드 소장의 독촉이 이어졌다는 점이 특히 그랬다.
당시 전선에 서서 싸움을 지휘했던 지휘관으로서는 적의 사정을 제대로 파악하는 일과 함께 스스로 지닌 역량의 바른 모습을 옳게 알아야 했다. 미 10군단장 알몬드 소장은 횡성에서 홍천을 향해 공격을 펼치는 주공(主攻)으로 국군 8사단과 5사단을 내세웠다.
허약한 국군을 전면에 세워
라운드업 작전의 좌측 전방에 세운 국군 8사단이 작전의 주공을 담당하기에 적절했느냐의 여부가 문제였다. 국군 8사단은 앞에서 여러 번 소개한 내용처럼 아군의 북진에 이은 ‘추수감사절 공세’ ‘크리스마스 공세’에서 영원 지역으로 진출해 압록강으로 향하려다가 중공군 매복에 걸려 커다란 패배를 당했던 부대였다.
참담한 패배를 기록한 뒤 재편에 들어갔고, 제 역량을 채 추스르기도 전에 다시 전선에 서야 했던 부대였다. 한반도 북부인 영원 일대에서 기록적인 패배를 맞아 전투 역량의 상당 부분을 잃었던 데다가, 재편에 성공했다고는 하지만 전투 경험이 전무(全無)했던 신규 병력이 다수를 이루고 있어 여러모로 주공을 담당하기에는 힘이 크게 부족했다.
그럼에도 미 10군단장은 홍천을 향한 공격을 서둘렀다. 중동부 지역으로 몰려드는 중공군의 의도가 아무래도 원주를 향하고 있다는 판단에서였다. 그 길목에 해당하는 홍천을 서둘러 점령해 원주를 지향하는 중공군의 발길을 묶어두겠다는 생각이었다.
당시 국군 8사단장 최영희 준장은 그런 알몬드의 독촉을 자주 받았다고 회고한 적이 있다. 국방부의 <6.25 전쟁사>를 보면 알몬드는 전화로 독촉하는 데 그치지 않고 하루에도 여러 번 국군 8사단의 지휘소를 찾아와 8사단의 발 빠른 기동(機動)을 주문했다고 한다.
/1950년 9월 인천상륙작전 성공 뒤 맥아더(지프 앞 좌석)와 함께 전선을 시찰하는 알몬드 장군(맥아더 왼쪽). 알몬드는 인천상륙작전이 벌어질 때는 맥아더의 핵심 참모였다.
라운드업 작전은 1951년 1월 말에 구상하고 기획한 뒤 미 8군 승인을 거쳐 2월 5일 공세에 나서는 내용으로 짜여 있었다. 공격력이 약한 국군 8사단과 5사단을 전선 좌우의 주공(主攻)으로 내세우는 대신 후방의 방어진지 구축을 벌이고 있던 미 2사단과 미 7사단으로부터 포병과 전차를 동원해 그를 지원하는 것으로 공격의 틀을 짠 상태였다.
그에 비해 중공군의 전선 지휘는 펑더화이 최고 사령관 밑에서 2인자로 있던 덩화(鄧華)가 이끌었다. 그는 중공군 4차 공세가 펼쳐졌던 1951년 2월로부터 5개월이 흐른 뒤인 7월의 첫 휴전회담에서 중공군을 대표해 회의 테이블에 나타났던 사람이다. 나 또한 첫 휴전회담 한국 대표로 나서서 그를 마주한 경험이 있다.
그는 전형적인 ‘차이니즈 스마일(Chinese smile)’을 보여주던 지휘관이었다. 사세(事勢)를 끊임없이 저울질하고 또 저울질하면서 기쁘거나 슬픈 감정 따위를 전혀 겉으로 내비치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는 펑더화이와 함께 6·25전쟁에 뛰어들었던 중공군을 줄곧 지휘했던 인물이었다.
아울러 국민당 정부와의 싸움인 국공(國共) 내전, 이후 벌어진 항일(抗日) 전쟁에서 숱한 야전의 경험을 쌓기도 했다. 따라서 전법(戰法)에 관한 한 매우 밝은 지휘관이었다. 중공군 전사(戰史)를 보면 그는 1951년 2월의 공세를 펼치기 전 횡성과 지평리를 지향하던 예하 중공군 부대에 현실적인 지침을 내린다.
당시 덩화가 내린 지침은 여러 가지에 이르지만, 그 핵심은 ‘분할(分割)’이었다. 싸움의 상대인 아군이 여러 단위로 쪼개질 수 있도록 정면과 함께 측면과 후방을 공격하라는 내용이었다. 아울러 아군이 그들의 공세에 밀려 등을 보일 때에도 역시 ‘분할’에 중점을 두면서 다면(多面)을 공격하라는 내용이었다.
/중공군 총사령관 펑더화이 밑에서 2인자로 6·25전쟁을 계속 지휘했던 덩화가 휴전 뒤 귀국해서 붓글씨를 쓰고 있다.
중공군의 ‘쪼개기’ 전법
이 점은 1951년 2월에 벌어지는 중공군 제4차 공세의 중요한 전법 개념에 해당했다. 그리고 덩화의 그런 지침은 매우 정확했다. 적어도, 횡성으로부터 홍천을 향해 움직이던 국군 8사단을 공격할 때는 그랬다. 그러나 덩화의 그 같은 전법은 국군에게는 통했지만, 그 직후에 벌어진 지평리 싸움에서는 절대 먹혀들지 않았다.
그럼에도 ‘분할’을 노리고 들어오는 중공군의 날카로운 공세는 첫 먹잇감으로 국군을 향했다. 여러모로 여의치 못한 보급 사정이 있었음에도 중공군은 제4차 공세를 벌여 리지웨이 부임 뒤 몰리고 있던 국면(局面)을 전환하기 위해 날카로운 예기(銳氣)를 다듬은 상태였다.
그들 또한 1951년 2월의 첫 공세에서 국면 전환을 위한 계기를 만들지 못할 경우 자신들이 힘들여 밀고 내려왔던 38선을 유엔군에게 다시 내줘야 한다는 생각에 몰렸다. 따라서 어떻게 해서든지 2월 첫 공세에서 국면 전환을 위한 발판을 마련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일촉즉발(一觸卽發)이라는 말은 아무래도 그런 상황을 두고 만들어진 성어일 것이다. 중공군은 나름대로 리지웨이 부임 후의 수세(守勢)를 극복하면서 국면을 바꿔야 하는 입장에 있었고, 미 10군단장 또한 홍천을 미리 점령해 원주를 향할지 모를 중공군의 발길을 묶어 리지웨이가 펼쳤던 ‘울프하운드’ ‘썬더볼트’ 등의 작전에 호응하는 일이 필요했다. 그는 결국 국군 8사단을 직접 찾아가 발 빠른 북상을 독촉했고, 중공군은 덩화의 지침을 받아 ‘분할’이라는 명제를 숙고하면서 북한강을 넘어 홍천 일대로 접근하고 있었다.
국군 8사단의 초반 진격은 적의 큰 저항이 없어 순조로웠다. 모두 18㎞에 이르는 넓은 정면(正面)이 문제이기는 했으나 스타트는 쾌조(快調)라고 해도 좋을 정도였다. 2월 5일 기동을 시작한 8사단은 별다른 접전 없이 북상하고 있었다. 전면에 출현했던 적도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곧 등을 보이면서 달아났다.
그럼에도 사실은 많은 것을 따져야 하는 상황이었다. 부대의 허약함은 그런 순조로운 길에서는 좀체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법이다. 잠시 나타났다가 곧 등을 보이는 적군 또한 주력은 아니었다. 13병단 예하로 중동부 전선으로 급히 이동하며 아군의 ‘분할’을 기도했던 적군은 아직 8사단의 정면에 모습조차 나타내지 않고 있었다.
134 8시간 만에 국군 8사단 포위한 중공군, 곧 닥친 대혼란…
(17) 횡성의 대패
너무 넓었던 부대 전면
중동부 전선에 섰던 미 10군단이 홍천 일대를 향해 진격을 시작한 날짜는 1951년 2월 5일이었다. 이른바 ‘라운드업’이라고 명명했던 작전의 개시였다. 당시 대규모의 중공군은 아직 전선에 나타나지 않은 상태였다. 그들은 주로 홍천 남부 지역에 집결하고 있었다.
따라서 아군이 횡성으로부터 홍성을 향해 진격하기 시작한 시점에서는 서부전선으로부터 중동부 전선으로 대규모 이동한 중공군을 볼 수 없었다. 그런 이유로 인해 당초 공격 개시 시점인 2월 5일로부터 한동안은 대규모 중공군 병력과 조우(遭遇)하는 일 없이 앞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1951년 2월 초순 벌어지는 라운드업 작전을 위해 횡성 이북으로 진군하는 미군의 모습이다.
중공군으로서는 모든 전선의 국면을 전환하기 위해 벌였던 당시의 공세가 ‘4차 공세’에 해당했다. 중공군이 그런 4차 공세를 개시한 시점은 2월 11일이었다. 그들의 우선적인 지향은 원주였고, 그 작전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홍천으로 다가오는 아군에게 공세를 집중코자 했다.
미 10군단 전면으로 다가서기 시작한 중공군은 우선 수적으로 아군을 압도했다. 당시의 미 10군단이 전면의 주공(主攻)으로 내세웠던 국군 8사단과 5사단, 후방의 방어진지 구축을 하면서 뒤를 따르기로 했던 미 2사단과 7사단이 주력을 이뤘던 데 비해 중공군은 이보다 압도적인 병력을 전선으로 집결시켰다.
적은 모두 중공군 4개 군, 북한군 2개 군단이었다. 중공군은 40군 산하 3개 사단, 66군 예하의 3개 사단을 우선 홍천 공격을 위한 전열(前列)에 세웠다. 아울러 지평리 일대의 미군을 공격하기 위한 부대로 42군 예하의 3개 사단을 준비해 둔 상태였다. 42군 예하의 중공군 3개 사단은 홍천 일대에 집결하지 않고 지평리 북쪽으로 다가서고 있었다.
북한군 2개 군단은 동쪽에서 중공군을 지원하는 역할을 맡기로 한 상태였다. 당시의 북한군은 부대 건제와 화력, 장비 등이 주공으로 나서기에는 많이 부족했다. 개전 초기, 아울러 인천상륙작전 뒤 벌어진 아군의 북진으로 크게 무너져 부대 대부분이 급히 재정비를 통해 겨우 전선에 나섰던 형편이었기 때문이었다.
국군 8사단이 지니고 있던 약점 몇 가지는 매우 치명적이랄 수 있었다. 우선 부대가 담당한 공격 전면이 너무 넓었다. 모두 18㎞에 이르는 광정면(廣正面)에 해당했다. 그에 비해 공격 전면 동쪽을 담당한 국군 5사단의 정면은 10㎞에 이르렀다. 지원부대로 급히 배치했던 국군 3사단은 2.4㎞의 정면을 담당했다.
게다가 앞서 소개했듯이 국군 8사단은 전쟁에서 겪는 참담한 패배의 두려움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한 상태의 부대였다. 북진 무렵의 두 차례 아군 대공세 때 평북 지역의 영원, 맹산으로 향하다가 중공군의 포위와 매복에 걸려 기록적인 패배를 당했던 경험이 있었던 것이다. 부대는 따라서 불과 2개월 전 중공군에게 혹독하게 당했던 패배의 두려움을 아직 떨치지 못한 상태였다.
순식간에 뚫린 전선
이런 경우에는 지휘관의 선택이 중요하다. 적정(敵情)과 함께 아군이 지닌 여러 상태를 간과해서는 아주 곤란한 상황을 맞이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넓은 정면에 부대를 배치하며 진격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게다가 주의할 점은 새로 나타날 중공군의 부대가 수적으로 아군을 압도한다는 사실이었다.
중공군은 당시 중동부 전선에서 공세를 펼치기 위해 모두 11만 명 이상의 병력을 동원한 상태였다. 아군의 2배를 웃도는 병력이었다. 저들의 의도는 명확했다. 일거에 상대를 압도할 수 있는 대규모 병력으로 최대한의 공세를 벌인 뒤 리지웨이 미 8군 사령관의 부임 후 벌어졌던 상황의 불리함을 만회하자는 생각이었다.
게다가 당시 중동부 전선의 공세를 지휘했던 덩화(鄧華)는 여러 각도에서 공격을 펼쳐 아군을 쪼개고 또 쪼개는 ‘분할(分割)’을 공격의 주요 개념으로 채택한 상태였다. 아군이 공격을 개시하던 2월 5일 무렵에 별다른 움직임을 보이지 않던 중공군은 홍천을 향해 아군의 진군이 이어지자 공격에 나서기 시작했다.
/1951년 2월에 벌어진 중공군 제4차 공세를 위해 출정하고 있는 후방의 중공군과 그를 배웅하는 민간인.
대규모 접전이 벌어지기 시작한 때는 2월 11일 오후 5시였다. <6.25 전쟁사>에 따르면 국군 8사단을 강타하고 나선 부대는 중공군 66군이었다고 했다. 중공군은 인해전술(人海戰術)만을 고집하지는 않았다. 전선 지휘관 덩화는 야포 부대를 보병부대에 배속해 짧지만 강력한 급습(急襲)을 시도한 뒤 전선을 넘도록 지시한 상태였다.
압도적인 병력 우세를 기반으로 중공군은 강한 화력까지 동원해 급습을 시도한 뒤 국군 8사단을 공격했다고 한다. 대규모 접전이 벌어지면서 8사단은 중공군의 공격이 매우 강하다는 점을 금세 깨달은 듯하다. 8사단장 최영희 장군은 군단에 그런 정황을 여러 차례 보고했던 모양이다. 적절한 조치가 필요했던 상황이었다.
사단을 받쳐주는 군단의 역할은 매우 중요하다. 화력과 장비의 부족을 뒤에서 지켜보고 있다가 예비로 둔 역량을 적절한 시점에, 적절한 장소로 투입해야 하는 게 군단의 몫이었다. 그러나 8사단의 급박한 보고를 접했음에도 미 10군단은 지속적인 진출을 요구했다고 한다.
6ㆍ25전쟁에서 중공군 참전 뒤에 여러 차례 벌어지는 상황이 당시에도 다시 도졌던 듯하다. 중공군 일선 공격부대가 아군의 전투지경선이나 방어지역을 뚫고 전진하면서 아군의 전선부대 후방을 넘어서는 추월(追越)의 상황이었다. 이런 경우에는 접전 지역의 아군이 아주 심각한 위험에 빠지고 만다.
사령부도 포위한 적
측방(側方)도 아닌, 후방(後方)을 내줄 경우 적은 전면과 후면에서 모두 아군을 공격할 기회를 차지한다. 그런 경우 아군은 멀리 돌아가 표현할 것도 없이 바로 포위(包圍)의 상황에 놓이는 법이다. 포위는 적을 맞아 싸우는 사람이 놓일 수 있는 가장 불리한 경우다.
<6ㆍ25 전쟁사>의 기록으로는 대규모 접전이 벌어진 시점은 2월 11일 오후 7시였다. 중공군은 66군의 주력부대가 공세에 나섰고, 그를 맞아 싸운 병력은 국군 8사단이었다. 두 시간 정도가 지나자 중공군 66군 예하 198사단은 국군 8사단 21연대의 전방을 공격하고 전면으로부터 양쪽 후열(後列)에 있던 부대를 이동시켰다고 한다. 전선의 옆이 먼저 뚫렸다.
중공군은 국군 8사단 21연대와 10연대 사이의 빈 곳을 공략하고 아군의 지역으로 밀려 들어왔다고 한다. 좌, 우 양쪽의 모든 측방(側方)이 중공군의 공세에 급속히 무너지고 말았던 셈이다. 8사단장은 이 같은 상황을 보고받은 뒤 21연대장에게 조금만 후퇴를 하도록 지시를 했다고 한다.
/1951년 2월 공세에 나선 중공군이 참호 속에서 바깥을 경계하고 있다.
그러나 상황은 아군의 생각보다 훨씬 나빴다. 중공군은 측방을 뚫고 들어와 이미 아군의 후방으로 내달린 뒤였기 때문이다. 중공군은 아군이 짐작했던 것보다 훨씬 빨리 진격해왔다. 이들은 21연대의 후방을 훨씬 넘어 그 뒤에서 지원을 위해 주둔하고 있던 미 제21 지원부대와 ‘B지원팀’이라고 불렸던 또 다른 미군 부대를 우회했다는 것이다.
중공군은 이어 미 지원부대의 후방에 있던 도로를 점령하고 나서 아군의 이동을 막기 위해 교량까지 파괴했던 것으로 <6ㆍ25 전쟁사>는 적고 있다. 아군의 2개 연대 사이 빈틈을 비집고 들어와 후방 침투를 시도했던 중공군의 공세는 아주 빨리, 아주 효과적으로 펼쳐지고 있었던 셈이다.
이런 경우의 아군은 아주 커다란 혼란에 휩싸일 수 있다. 배면(背面)은 공세에 선 아군이 노출할 수 있는 가장 큰 약점에 해당한다. 이곳으로 적군이 대규모 병력을 넣어 침투하면 아군은 우선 통신선이 끊겨 피아(彼我)를 구분할 수 없는 상황으로 내몰린다.
당시의 상황이 꼭 그랬던 듯하다. 중공군이 공세를 벌인 오후 5시로부터 8시간이 지난 2월 12일 새벽 1시였다. 국군 8사단의 사령부와 연대, 연대와 연대, 그런 연대 예하의 대대와 대대 사이의 모든 통신선이 끊겼다고 한다. 통신선이 끊기면 아군 부대 사이의 혼란은 곧 극을 향해 치닫는다.
지휘는 정점(頂點)을 잃으면서 역시 걷잡을 수 없는 혼란으로 번진다. 일사불란(一絲不亂)함은 도저히 찾아볼 수 없는 상황이다. 그로써 두려움은 마구 커진다. 더구나 중공군의 포위와 매복에 걸려 참담한 패배를 기록했던 8사단 장병의 두려움은 몇 배로 커질 수 있었다. 그렇게 8사단은 무너지고 있었다. 무질서한 후퇴, 그로써 벌어지는 수습 불가능의 분산(分散)이었다.
135 8사단의 참패, 1만여 병력 중 사망과 실종자 7100여명
(17) 횡성의 대패
왜 서전이 중요할까
전쟁에 나선 군대가 처음 적을 상대로 싸우는 싸움을 우리는 서전(緖戰)이라고 부른다. 다른 말로 하자면 초전(初戰)이라거나 개전(開戰)이랄 수 있다. 보통은 맨 앞의 ‘서전’이라는 말을 많이 쓰는 편이다. 이 싸움은 매우 중요하다.
이긴 사람에게는 먼저 상대를 물리적, 심리적으로 제압하는 효과가 생긴다. 이른바 기선(機先)을 잡는다는 의미다. 그래서 사람들은 싸움이 도질 때 반드시 선발(先發)의 효과를 거두기 위해 상당히 공을 들이는 편이다. 동양에서 흔히 ‘선발제인(先發制人)’이라는 한자 성어로 표현할 수도 있는 말이다.
그렇다면 처음 붙는 싸움에서 지는 쪽에게는 어떤 일들이 벌어질까. 우선 물리적 피해는 상당한 수준일 것이다. 병력 중에서 다치고 심지어는 목숨을 잃는 이가 많이 생긴다. 지니고 있던 화력을 잃거나 적에게 빼앗기기도 한다. 따라서 겉으로 드러나는 피해가 우선 만만치 않다.
그러나 더 심각한 측면은 심리적으로 오그라드는 일이다. 상대에 대한 두려움이 자리를 잡기 시작하다가 그것은 결국 물을 빨아들이는 솜처럼 점점 커진다. 이를 극복하는 일은 절대 쉽지 않다. 아주 긴 시간에 걸쳐 일정한 전기(戰技)를 배우고 또 익히는 과정을 반복하면서 그 두려움을 이겨야 한다.
그런 치유의 과정 없이 다시 전선에 나아가 이미 두려움으로 대하기 시작한 상대를 또 맞이한다는 일은 매우 위험하다. 처음에는 막연한 상태였던 두려움은 상대와 다시 마주할 때 부대 전체를 지배하는 심리로 커진다. 두려움은 곧 공황(恐惶)으로 발전하기 십상이다.
처음 싸움에서 당했던 참혹한 패배의 두려움이 다시 부대 전체를 감쌀 경우 그 부대는 제대로 싸움을 펼쳐갈 수가 없다. 더구나 서전에 이어 다시 벌어진 전투에서도 마찬가지로 밀리는 상황이 닥칠 경우가 그렇다. 부대는 순식간에 커다란 혼란의 소용돌이로 빠져들기 마련이다. 일선에서 아군의 등을 보이면 뒤에 버티던 동료도 곧장 뒤를 향해 내빼는 연쇄적 후퇴 상황이 생긴다.
6ㆍ25전쟁의 3년 동안 벌어진 각종 전투에서 우리 국군이 드러냈던 문제는 대개 이와 같은 맥락에서 생겨나 늘 일정한 양상을 보였다. 우선 준비와 역량이 부족했고, 그를 메울 만큼의 시간적인 여유도 없었다. 준비 없이 맞은 전쟁이었고, 적을 맞아 싸우며 쓰러지고 또 쓰러지면서도 그저 일어나기를 반복했다.
/1951년 2월 초 국군 8사단을 와해의 수준으로 내몰았던 중공군의 당시 모습으로 추정하는 사진이다.
중공군은 그런 점에서 특기할 만한 상대였다. 6ㆍ25전쟁 3년여 세월에서 우리가 북한 김일성 군대를 맞아 싸운 기간은 사실 개전 초반의 3개월 정도다. 이미 언급한 내용이겠으나 다시 부연하자면, 김일성 군대는 그 뒤 2년 8개월 동안 벌어진 각종 싸움에서 그저 중공군의 향도(嚮導) 역할에 지나지 않았다고 해도 좋을 정도였다.
중공군의 먹잇감
지리에 밝아 중공군에게 길을 안내하는 가이드 정도의 역할, 아군의 역량이 부족한 곳에 배치돼 다소 가벼운 전투를 수행하는 정도의 역할을 맡았다는 얘기다. 아울러 아군의 후방으로 침투해 게릴라전을 수행하는 제2선 부대로써 중공군을 돕는 임무도 수행했다.
중공군은 가능한 한 모든 전선에서 전투력이 크게 떨어지는 국군 사단을 향해 공격을 벌였다. 그들로서는 강력한 화력의 미군을 우회하면서 전선을 돌파하고자 했던, 나름대로 적절한 선택이었다. 따라서 중공군은 참전 뒤 집요하다 싶을 정도로 국군에게 총을 겨누고 덤벼들었다.
미군을 비롯한 유엔군 전체가 1950년 10월 말 이후의 북진 공세에서 은밀하게 참전했던 중공군에게 모두 쓰라린 패배를 당했지만, 그들은 스스로 일어설 역량이 있었다. 특히 미군은 중공군 참전 초반의 전투에서 비록 패배했으나 그를 극복할 만한 전투 경험, 조직력, 군기(軍紀)를 갖추고 있었다. 더구나 막강한 화력과 함께 상대가 전혀 갖추지 못했던 공습(空襲)능력이 있었다.
/횡성과 지평리에서 혹심한 전투가 벌어진 뒤인 1951년 3월 미군들이 전차에 올라타 진격하고 있다.
문제는 늘 국군에게서 나왔다. 심한 표현일 수도 있으나, 전사(戰史)를 만드는 과정에서 채록한 당시 참전 용사들의 증언에는 “밥을 먹다가도 ‘중공군이 온다’는 말을 들으면 숟가락과 밥그릇을 내던지고 도망쳤다”는 내용이 자주 등장한다. 이런 증언은 꽤 설득력이 있는 내용이라고 봐도 좋다.
중공군이 정말 잘 싸웠던 것일까. 참전 초반의 중공군은 실제 매우 강해 보였다. 국군에게는 더욱 그랬고, 세계 최강을 자랑했던 미군에게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중공군도 문제가 많았던 부대였다. 전법(戰法)의 구사 능력에서는 탁월한 면모를 보였으나, 우직한 힘이 떨어지는 군대였다.
만주와 화베이(華北) 일대에서 보내온 미숫가루로 초기에는 곧잘 버텼으나, 장기적인 보급에서 우선 심각한 문제를 드러냈다. 그런 까닭에 튼튼한 힘으로 상대를 밀어붙이는 강력함보다는 변칙(變則)에 크게 기대는 양상을 보였다. 따라서 중공군 참전 초반의 불투명한 상황에서 당한 아군의 패배는 심리적인 요소가 더 크게 작용한 경우가 많았다.
막연한 두려움에서 빠져나와 중공군의 실체를 직시하면서 차분하게 전선을 유지해야 했으나 국군의 역량은 그 점에서 매우 부족한 상태였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미군은 리지웨이 신임 8군 사령관이 부임하면서 분위기를 일신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그런 미군에 비해 한국군은 아직 중공군에 대한 두려움의 구덩이에서 아직 헤어 나오지 못한 상태였다.
특히 한반도 북부 묘향산 일대에서 중공군에게 처절한 패배를 당했던 국군 8사단은 그런 공황심리가 부대 전체를 크게 지배하고 있었다. 따라서 8사단을 횡성으로부터 홍천 일대를 공격하는 전선의 주공(主攻)으로 내세웠던 미 10군단장 알몬드 소장의 조치는 매우 부적절했다. 어떤 다른 의도가 있었다고도 볼 수 있지만, 저간의 사정은 나로서는 자세히 알 길이 없을 뿐이다.
치욕의 대패
사정이 그렇다고 해도 8사단장의 부대 지휘는 생각해 볼 여지가 있다. 군단장의 독촉이 빗발친다고 하더라도 스스로 이끄는 부대 병력의 생존을 유지하며 전투력을 잃지 않는 일은 바로 사단장 본인이 챙겨야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특히 전법에서 드러난 문제가 만만치 않은 편이다.
우선 부대의 넓은 정면 18㎞에 예하 3개 연대를 병진(竝進)토록 한 점은 아무래도 수긍이 가질 않는 대목이다. 그럴 경우 3개 연대 사이의 전투지경선(戰鬪地境線)은 쉽게 뚫리는 약점을 드러낸다. 중공군은 참전 뒤 늘 같은 양상을 보였다. 국군 전면에 몰려들었고, 부대와 부대 사이의 전투지경선을 집중적으로 노렸다.
틈이 뚫려 그곳으로 중공군 대규모 병력이 밀어닥친다면 부대는 위험에 휩싸인다. 더구나 불과 몇 달 전에 중공군에게 포위와 매복을 당해 참혹한 패배를 경험했던 8사단이었다. 따라서 8사단은 또 한 번의 참패에 놓이고 말았던 것이다.
사단장은 불과 반나절 만에 모든 통신선이 끊기고, 후방까지 중공군에게 포위된 상황을 맞았다. 그는 결국 중공군과 접전이 벌어진 뒤 14시간 만에 군단에서 지원한 L-19기를 이용해 ‘철수 명령서’를 잔뜩 자루에 넣어 연대 지휘소가 있는 곳을 향해 공중에서 투하했다고 한다. 통신선이 끊겨 부대 간 연락이 모두 불가능한 상황에서 취했던 응급조치였다.
사단의 피해는 혹심했다. 10연대장과 부연대장, 7명의 대대장, 30명의 중대장을 포함한 장교 323명이 실종 또는 사망했다. 사병의 실종 또는 사망자는 7142명에 달했다. 잔여 병력은 장교 263명, 사병 3000여 명이었다. 생존자는 절반 이상이 사단 근무요원이었다.
이 정도면 와해(瓦解)와 해체(解體)의 수준이라고 볼 수 있었다. 후방에 남아 있던 사단 근무요원은 겨우 후방 미군부대의 지원에 힘입어 빠져나온 정도였고, 나머지 전선의 3개 연대 장병 대부분은 결국 포로로 잡히거나 전사하고 말았던 것이다.
1.4 후퇴로 서울을 내주고 북위 37도선까지 밀렸다가 겨우 전열을 수습하며 앞으로 나아가고 있던 아군, 특히 국군의 같은 일원으로서는 당시 8사단의 횡성 대패가 충격적이지 않을 수 없었다. 리지웨이 부임 뒤 벌어졌던 ‘울프하운드’ ‘썬더볼트’ 작전의 승리가 빛을 크게 바래는 순간이기도 했다.
/1951년 2월 초 썬더볼트 작전이 벌어진 뒤 영등포 전선까지 진출한 영국 전차가 적을 향해 포를 쏘고 있다.
그러나 다행이었던 점이 한 가지 있었다. 중공군 대규모 병력이 달려들었던 지평리에서 미 2사단 23연대장 폴 프리만 대령과 프랑스 대대가 기적적인 승리를 거두면서 중공군 4차 공세가 그로써 일단 꺾이고 말았기 때문이다. 국군은 쉽게 물러섰지만 미군과 프랑스 군대는 끝내 물러서지 않고 중공군 정면을 강타했다.◎
<정리=유광종, 도서출판 ‘책밭’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