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30/ 국방9/ 백선엽 장군의 6.25전쟁 비망록3/ 51 이승만, "한국군 단독으로라도 북진한다"며 미국과 충돌 - 80 별 둘 미군사령관, 바주카포로 북한군에 맞서다 체포돼
대한민국30/ 국방9/ 백선엽 장군의 6.25전쟁 비망록3/
51 이승만, "한국군 단독으로라도 북진한다"며 미국과 충돌
김일성, "장제스 부하들 왜 송환하냐", 중공군 포로 귀환에 무관심
(7) 김일성에 대하여
휴전 이야기가 처음 나온 때는 1951년이다. 리지웨이 신임 미 8군 사령관의 신속한 반격작전이 펼쳐져 우리가 다시 서울을 되찾은 뒤였다. 트루만 대통령의 미 행정부는 한반도에서 전쟁이 확산될까봐 우려했다. 한반도에서 전쟁이 더 번져 사회주의 종주국 소련과 본격적인 대결이 펼쳐지지 않을까 걱정한 것이다.
이런 미국의 ‘제한적인’ 전쟁 의지는 서방 진영의 일부 국가들이 나서서 공산진영에 휴전을 제의하는 형식으로 나타났다. 소련 또한 전체적인 틀에서 한반도의 전쟁이 미국과의 본격적인 이념전쟁으로 번지는 상황을 피하고자 했다. 따라서 서방 진영의 일부 국가에 의한 휴전 제의는 공산 진영에도 매력적이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그런 서방의 휴전 제의를 처음부터 아주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그는 항상 “미국이 휴전을 추진한다면 나는 결코 그에 따를 수 없다. 한국군 단독으로라도 북진하겠다”는 입장을 강조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이미 수많은 희생을 치른 전쟁에서 통일을 이루지 못한다면 그 의미를 찾을 수 없다는 생각이 분명했다.
/국군 부대 창설식에서 연설하는 이승만 대통령. 휴전 직전까지 이 대통령은 '단독으로라도 북진'의 뜻을 굽히지 않았다.
이 대통령은 “한국군 단독으로라도 북진한다”는 발언을 자주 했고, 이로써 미 행정부와 상당한 파열음을 빚곤 했다. 휴전 협정에 사인을 하기 직전까지 이 대통령은 줄곧 이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김일성도 처음에는 마찬가지였다. 첫 휴전 제의가 서방 진영으로부터 나오자 김일성은 펄쩍 뛰었다고 한다. 대한민국 적화 야욕에 들떠 전쟁을 일으켰던 사람답게 그는 서방 진영의 휴전제의를 결사코 반대했던 것이다. 그러나 수많은 병력을 한반도에 참전시킨 중국의 마오쩌둥(毛澤東)은 달랐다. 병력 중 사상자가 많아지면서 피로감이 엄습한 것이 한 이유일 것이다.
김일성과 마오쩌둥의 입장은 서로 뒤바뀐다. 휴전회담이 1952년에 이어지면서 양 진영의 핵심 논쟁거리는 포로 교환 문제로 모아지고 있었다. 서방진영의 포로 교환문제에 관한 입장은 명확했다. 포로의 개인적인 의지를 중시하자는 입장이었다. 한국이나 서방진영에 남기를 희망하는 공산군 포로는 그 의지대로 남게 해준다는 구상이었다.
그에 비해 마오쩌둥은 본국으로의 송환을 염두에 두고 협상을 벌였다. 중공군 포로는 결코 적지 않았다. 2만여 명을 훌쩍 넘은 상태였다. 중국은 이들을 모두 자기들 쪽으로 넘겨달라고 고집했다. 김일성의 입장은 갈수록 모호해졌다. 북한 출신의 인민군 포로도 적지 않았으나 전쟁을 벌인 뒤 대한민국 땅에서 강제 징용한 포로도 많았다.
/전쟁 중에 아군에 의해 붙잡히고 있는 중공군. 중공군 포로 대부분은 휴전 뒤 대만 또는 제3국행을 원했다.
권력 장악에만 몰두했던 김일성
김일성에게는 당시 정치적 상황이 중요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1952년에 접어들면서 당초 “휴전에 결사코 반대”라는 입장이 180도 바뀌었다. 최대한 빨리 휴전협정에 서명하자는 식이었다. 그와 관련해 살펴볼 상황은 북한 내 권력구도다. 김일성은 하루 빨리 휴전을 이룬 다음에 내정(內政)에 치중해야 했다.
그 내정이라는 것은 북한 국가건설에 관한 내용도 일부 담고 있겠으나, 사실은 그의 권력기반 강화가 핵심이었일 것이다. 전쟁의 도발에 관한 책임에서 하루 빨리 벗어나 자신을 중심으로 북한 권력 구도를 개편하는 작업이다. 그는 일찌감치 그런 점에 주목했던 듯하다. 북한 권력을 모두 휘어잡아 자신의 1인 지배체제를 강화하기 위해서는 자신과 다른 사람들을 솎아낼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중공군의 후광(後光)을 업은 팔로군 출신의 이른바 ‘연안파(延安派)’를 제거하고, 남로당 계통의 박헌영 일파를 축출하며, 소련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 사람들도 없애야 했다. 1950년대 후반에 들어서면서 김일성의 1인 지배체제는 매우 견고해지는데, 김일성은 그런 상황의 기반 조성 작업을 전쟁이 막바지에 들어서는 시점에 미리 착수했다는 게 관련 연구 학자들의 공통적인 시각이다.
중국은 그와는 다른 입장이었다. 전쟁을 일단 끝내자는 휴전제의 자체를 거부할 수는 없었으나, 북한과는 다른 주판을 튕기고 있었다. 소련으로부터의 지원을 더 끌어내야 중국은 전쟁에 쏟아부었던 막대한 재정과 물량의 손실을 만회할 수 있었다.
아울러 소련의 지속적인 지원으로 자국 군대를 무장해야 하는 입장이었다. 따라서 전쟁을 그대로 끝내기에는 어딘가 아쉬운 입장이었다. 아울러 미군 포로를 전쟁 중에 잡았다가 풀어주는 전술을 구사했던 데다가, 포로 자체보다는 상대 병력에 가하는 타격에 집중했던 터라 포로로 확보한 미군이 별로 많지도 않았다. 따라서 상대와 포로를 숫자에 맞춰 교환하는 방식에는 관심이 덜했고, 중공군 포로 모두를 귀환시키는 방안을 고집했다. 휴전 자체에 대한 의지도 약했다고 봐야 한다.
소련의 스탈린은 중국을 지지하는 입장이었다. 한국 전선에 미군을 더 묶어두면서 제한적으로 전쟁을 벌이기만 한다면 자국에게는 매우 유리했다. 동유럽 사회주의 국가들에 대한 미국의 간섭 역량이 크게 떨어진다는 점, 동아시아에서 공산주의 동맹을 강화할 수 있다는 점 등을 고려한 전략적 시각이었다.
/스탈린에 이어 소련 권력 1인자로 등장한 흐루시초프(왼쪽)와 김일성. 김은 휴전 막바지에 국내 권력 장악을 위해 휴전협정을 급히 서둘렀다.
그러나 김일성은 급했다. 휴전을 반대하는 입장에서 휴전을 하루빨리 이루자는 입장으로 변했으나 소련의 스탈린과 중국의 마오쩌둥을 설득할 카드가 별로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김일성이 드러내는 면모는 어땠을까. 역시 이 분야에 정통한 선즈화(沈志華) 교수의 연구 자료를 인용하는 게 좋겠다.
중공군 포로 송환에 냉담
북한 주재 소련대사였던 라주바예프가 모스크바에 보고한 내용이라고 했다. 라주바예프는 1952년 들어 휴전 관련 내용을 모스크바에 분주하게 보고했다고 한다. 그에 따르면 당시의 김일성은 “미군의 공습으로 계속 피해가 막심해지는 상황에서 휴전을 서두를 필요가 있다. 포로 교환 문제로 휴전협상을 지루하게 끌고 가는 태도를 이해할 수 없다. 중공군 포로 문제로 논쟁을 거듭하고 있는데, 따지고 보면 중공군의 상당수는 과거의 장제스(蔣介石) 국민당 군대 출신 아니냐. 그들은 사상적으로 믿을 수 없는 사람들이다. 그들을 위해 (송환에) 힘쓰는 일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식의 내용이었다.
김일성은 그렇듯 아주 냉혹한 인물이다. 권력을 부여잡기 위해 모든 술수를 동원하면서도 사람에 대해서는 아무런 동정심을 느끼지 않으니 말이다. 권력이 그렇게 달콤할까. 권력 만능주의에 많은 사람들이 빠져들고 있었다.
그러나 제가 일으킨 전쟁에서 수많은 동족의 피를 불렀고, 제 정권이 꺼져가는 막바지에 부리나케 한반도로 뛰어든 중공군의 희생에 눈 한 번 깜짝하지 않는 그의 인간적 면모는 생각해 볼 일이다. 그런 김일성이 일으킨 전쟁은 그러나 휴전을 향해 한 발자국씩 움직이고 있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단독 북진’을 공공연하게 언급하며 끝까지 통일을 열망했다. 정치적 요소를 고려치 않는 성격은 아니지만, 이 대통령은 북한의 도발로 인해 생겼던 민족의 거대한 비극을 통일로나마 치유해 보겠다는 순수한 열정을 품었던 인물이었다. 군사적으로 볼 때 이승만 대통령의 ‘국군 단독 북진’은 불가능했다. 나를 포함한 당시 한국군 장성들은 모두 그 점을 알았다.
/1954년 1월 석방된 반공 포로들이 이승만 대통령의 사진을 앞세우고 행진하고 있다.
그럼에도 우리는 대통령의 그 순결한 뜻을 존중했다. 그 뜻에 따라 우리는 미군의 지휘를 받아가면서 국군의 역량을 조금이라도 강화하기 위해 절치부심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이 대통령은 휴전 협정이 이뤄지기 직전에 ‘반공포로 전격 석방’이라는 강수(强手)를 뒀다.
중국이 가장 경악했음은 물론이다. 그에 따라 벌어진 일이 이 연재의 앞부분에서 소개한 ‘금성 돌출부 전투’이다. 우리는 나름대로 중공군 최후의 그 대공세를 잘 막아냈다. 금성 전투에서 드러난 한국군의 가능성에 주목한 미군이 국군의 현대화 계획에 박차를 가할 수 있도록 도운 점은 다행이었다.
김일성은 그 와중에 제 권력 기반을 착실히 다졌다. 결국 그는 왕조식 통치체제로 북한을 이끌었다. 권력 다지기의 과정에서 드러난 그의 면모는 나중에 언급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어쨌든 그의 내면에 숨겨진 냉혹함과 잔인함, 나아가 독기(毒氣)는 아직 한반도 북부에 큰 그늘을 드리우고 있다. 그 점에서 김일성은 한반도 현대사의 큰 화근(禍根)이었다. 우리가 벼리는 칼날이 늘 향해야 할 깊고 어두운 환부라는 점을 결코 잊지 말아야 한다.
52 아이젠하워에 크게 뒤처졌던 '한국 육군의 아버지' 밴플리트
(8) 아이스크림 장군 밴플리트
수많은 미군이 이 땅에 왔다. 전쟁이 벌어지고 있던 60여 년 전의 한국에 말이다. 연인원으로 따지면 150만 명이 넘을 것이다. 지휘관도 아주 많다.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을 비롯해 월턴 워커, 매슈 리지웨이 등 제2차 세계대전에서 찬란하게 떠올랐던 기라성 같은 장군들이 즐비하다.
그 중에서 한국군 육성에 가장 공을 들인 사람은 단연 제임스 밴플리트다. 나와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의 미군 장성이었다. 그와 나는 약 2년 동안 이 땅에서 벌어진 숱한 전쟁에서 모질고 잔인한 적과의 싸움을 이어갔다.
/한국 전선을 지휘하는 미 8군 사령관으로 부임할 때의 밴플리트.
그는 네덜란드계다. 1653년 조선에 표류해 13년을 이 땅에서 머물렀던 헨드릭 하멜과 한국 축구대표팀을 이끌었던 거스 히딩크 감독이 한국과 깊은 인연을 맺었던 네덜란드인이다.
밴플리트는 ‘한국 육군의 아버지’로 불린다. 우리의 육군이 오늘날의 현대화한 군대로 성장하는 데 그의 공로가 대단히 컸기 때문이다. 그는 나무랄 데 없이 진지하고 성실한 사람이었다. 또 다른 미군 장성들과 마찬가지로 공산주의에 맞서 싸우는데 있어 매우 단호했다.
밴플리트는 한국에 대한 정이 남달랐다. 그 속에 담긴 사정은 차츰 소개할 작정이다. 많은 미 장성들이 전쟁 전후에 한국에 머물렀지만 밴플리트가 보인 한국에 대한 열정과 애정은 각별하다. 그는 전쟁이 휴전으로 막을 내린 뒤에도 한국과 미국의 관계발전을 위해 헌신하다 세상을 떠났다.
지금 태릉의 육군사관학교에는 그의 동상이 서 있다. 원래 동상이 섰던 곳에서 구석진 자리로 옮겨지긴 했으나, 대한민국 육군사관학교에 그를 기리기 위한 동상이 들어섰다는 사실은 유념할 만하다. 그는 한국군 현대화의 가장 절실한 과제를 능력 있는 ‘초급 장교의 육성’이라고 본 인물이다. 그래서 벌인 일이 육군사관학교 설립이다.
/6.25 전쟁 당시 미8군 사령관을 지낸 제임스 밴플리트 장군의 외손녀 에이브리 라이더 미 육군 소령이 지난 2001년 육군사관학교 교정에 있는 외할아버지의 동상 앞에서 웃고 있다.
전쟁 중에 벌어지는 전투에 관한 지원은 미 8군이 독자적으로 결정할 수 있다. 그러나 육군사관학교 설립은 권유할 수 있을 뿐이지, 지원을 할 수 있는 사안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그는 한국의 육군사관학교 설립과 발전에 골몰했다. 하루 빨리 정규 육군사관학교를 만들어 유능한 장교들을 길러내야 한국군이 발전한다는 생각에서였다. 1952년 들어서면서 그는 결국 일을 벌인다. 미 8군의 건설 자재를 당시 새 육군사관학교를 짓던 서울 태릉의 연병장으로 옮기도록 했다. 자재들이 곧 산더미처럼 쌓였다.
초급장교 육성에 주목하다
그의 열정은 그러나 곧 제동이 걸리고 만다. 미 의회에서 “한국 육군사관학교를 짓는데 왜 미 8군의 건설 자재를 사용하느냐”는 지적이 나왔다. 합당한 지적이었다. 미 8군의 한국을 지원 범주를 넘어서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밴플리트는 부득불 그 엄청난 양의 건설 자재들을 다시 원위치로 옮겨야 했다. 밴플리트는 위대한 군인이기는 했으나 행정에는 그다지 밝지 않았다. 이쯤되면 웬만한 장성이라면 아마 민망함과 무안함 때문에 같은 일에 다시 손을 대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밴플리트는 달랐다.
그는 자신의 사재(私財)부터 털었다. 정확히 얼마인지는 모르겠으나 자신이 앞장서서 돈을 내놓고 휘하의 각 지휘관들에게 “한국의 육군사관학교 생도들을 위해 도서관을 지어야 하니 내 놓을 수 있는 사람은 돈을 내라”고 했다. 그렇게 돈을 모아 마침내 빨간 벽돌의 육사 도서관을 지었다.
/현재 노원구 공릉동에 위치한 육군사관학교 전경
밴플리트는 장교 생활 초기에 이름 때문에 손해를 봤다. 현대의 미군이 오늘날의 모습으로 성장한 데는 조지 마셜(1880~1959)의 공이 절대적이다. 웬만한 미군 고위 장성들은 모두 그의 손을 거쳐 성장했다. 6.25전쟁이 한창이던 그 시절엔 그의 영향력이 더 절대적이었다. 마셜이 기억하는 미군 지휘관 중에 밴플리트 장군과 이름이 흡사한 사람이 있었던 모양이다.
그는 술주정뱅이로 미군에서 소문이 자자해 마셜의 귀에도 그 이름이 들어갔다고 한다. 이 때문에 밴플리트는 장군 진급에 여러 번 실패했다는 것이다. 밴플리트는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오마 브래들리와 미 육사인 웨스트포인트 동기생이다. 아이젠하워와 브래들리는 모두 제2차 세계대전에서 명성을 얻은 뒤 후에 각각 미국 대통령과 5성 장군의 자리에 올랐으나 밴플리트는 그들보다 훨씬 뒤처졌다. 그러나 군인, 전쟁터의 지휘관으로 지닌 자질과 역량은 그 둘에 손색이 없었다. 특히 적과 싸우려는 투지(鬪志)는 그들을 오히려 넘어선다는 평가가 많다.
내가 밴플리트에게 웨스트포인트 다닐 때 성적이 어땠는지 물어 본 적이 있다. 밴플리트는 “아이젠하워의 성적은 전교생의 중간 정도였고, 내 성적은 그보다는 조금 아래였다”고 했다. 웨스트포인트에서 그는 두드러지는 생도가 아니었다는 얘기다. 이름에 관한 오해 때문에 진급에서도 거듭 누락했다. 그는 아이젠하워가 제2차 세계대전 막바지에 유럽연합군 최고사령관으로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지휘할 때 겨우 연대장인 대령 계급으로 프랑스의 유타 비치에 상륙했다.
훈련에 몰두했던 스타일
그런 밴플리트를 보면서 가족들은 꽤나 우울했던 듯하다. 동기생인 아이젠하워가 이미 별을 달고서 전선에서 맹활약을 펼치는 모습과 대조적으로 밴플리트가 영관(領官) 계급에서 허덕이는 모습이 만족스러울리 없었을 것이다. 2차 세계대전이 한창일 때 밴플리트의 형이 그 점을 지적하면서 심경이 어떠냐고 물었다고 한다. 밴플리트는 서슴없이 “군대는 훈련이 중요하다. 나는 후방에서 장병들을 훈련시키는 일에 만족한다”고 대답했다고 한다.
그는 프랑스 유타 비치에서 상륙작전을 매우 성공적으로, 그리고 대담하면서도 용감하게 수행한다. 그 공로로 그는 노르망디 상륙작전 직후인 1944년에야 겨우 별 하나를 달아 준장 계급으로 수많은 전쟁 영웅들이 버티고 있는 미군의 장성 대열에 오른다.
/웨스트포인트 동기생인 오마 브래들리(오른쪽) 미 합참의장이 방한했을 때의 밴플리트(가운데), 왼쪽이 도쿄 유엔군총사령관 매슈 리지웨이.
그의 고향은 플로리다다. 네덜란드에서 미국으로 건너온 할아버지에 이어, 사업 수완이 뛰어났지만 실패와 재기를 반복하면서 굴곡진 삶을 살았던 아버지를 좇아 당시 인적이 드물던 플로리다에 정착했다. 풍부한 습지와 삼림이 발달한 플로리다에서 밴플리트는 꿈 많고 심성 우직한 청년으로 자랐다. 그는 군대의 한직(閑職)이랄 수 있는 대학교 ROTC 교관을 맡은 적이 있다. 고향의 플로리다 대학에서였다.
그는 학교 교관으로서 대학의 미식축구팀을 이끌었다. 아이젠하워와 브래들리 등 웨스트포인트 동기생들이 엘리트 장교로서 승승장구할 때 그는 햇볕 따스한 플로리다에서 한가하게 대학 미식축구팀을 가르치고 있었다.
꽤 오랜 시간이었다. 그럼에도 그는 부단히 자신을 연마했다. 대학축구팀을 이끌면서 그는 전쟁을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미식축구는 전쟁판을 꼭 닮은 스포츠였다. 전쟁에서 이기는 길은 무엇인가. 끊임없는 훈련이 가장 중요하고, 장병들을 아우르는 단결력과 협동심이 필수적이라는 것을 그는 플로리다 대학에서 터득했다.
그 우직했던 초급 장교는 영관급으로 성장한 뒤 프랑스 유타 비치에서 맹활약했고, 그리스 정부를 도와 현지의 공산 게릴라를 없앴다. 그러나 그의 진가가 가장 크게 드러난 것은 6·25 전쟁때였다. 1951년 4월, 키가 멀뚱하게 크고 약간 촌티가 나는 미 장성이 8군 사령관에 부임했다. 중공군의 춘계 공세가 무섭게 도지는 시점이었다. 나는 그곳에서 밴플리트를 처음 만났다.
53 아들의 전사 소식 전하며 끝내 눈물 보인 미8군 사령관
(8)아이스크림 장군 밴플리트
그와는 전쟁터, 아주 급박하게 돌아가는 싸움의 현장에서 처음 만났다. 나중에 그 사정을 자세히 소개하겠지만, 그는 중공군에게 맞서 싸우다 등을 보인 채 궤멸하다시피 한 국군 3군단에게 아주 단호하게 해체 명령을 내렸다. 내가 듣고 있던 현장에서였다.
그 3군단이 중공군에게 결정적으로 패한 싸움은 ‘현리 전투’다. 나는 당시 인근 주문진에 있던 1군단 사령부를 이끌고 있었다. 키가 훌쩍 크고, 어쩌면 무뚝뚝하다 해도 좋을 인상의 밴플리트 신임 미8군 사령관은 그렇게 나와 처음 조우했다.
그는 약 2년에 걸쳐 한국 전선을 이끈다. 내가 그에게 아주 많은 것을 배웠다. 생사를 다투는 전쟁터에서 지휘관으로서 어떻게 필승의 의지를 다져야 하는가, 그런 의지를 또 어떻게 현실의 싸움터에서 구현해야 하는가, 부하와 상관은 어떻게 대하면서 싸움을 이끌어 가야 하는가 등 부지기수다.
그러나 내가 그를 평생 잊을 수 없던 이유는 다른 데 있다. 싸움에 관한 많은 테크닉, 즉 전기(戰技)는 다른 여러 지휘관들, 아울러 적지 않은 전사(戰史)를 통해 배우고 익힐 수 있다. 내가 백살을 눈 앞에 둔 지금도 그를 잊을 수 없는 까닭은 그가 우리 대한민국 국방 초석을 이루는 데 있어서 빼놓을 수 없는 은인(恩人)이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재창설된 국군 2군단장에 취임한 백선엽 소장이 군단기를 인계받는 모습.
그는 대한민국 국방의 현대화를 위해 결정적인 역할을 한 사람이다. 나는 재창설한 2군단장으로서, 그리고 지리산 일대의 빨치산 토벌사령부의 총사령관으로서, 나아가 별 넷의 한국 최초 대장으로서, 또 육군참모총장으로서, 대한민국 국방의 초석을 다지는데 그가 보였던 활약을 늘 옆에서 지켜본 사람이다.
나는 1960년 군복을 벗었고 이후 많은 일들을 거쳤지만 밴플리트 장군은 잊지 않았다. 아니, 누군가에게 먹을 것을 나눠주며 인정스럽게 사람을 대하다가도 전쟁터에 서서는 추호의 빈틈을 보이지 않는, 공산주의와 싸우던 대한민국을 위해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앞장을 서던 그를 잊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내 나이 일흔을 막 넘겼을 때였다. 나는 1960년 군문을 나와 이미 대만 대사, 프랑스와 아프리카 등 총 19개국 겸임 대사, 캐나다 대사를 거쳐 고국에 돌아왔고 이어 박정희 대통령 정부에서 교통부 장관을 맡았다가 한국종합화학 사장을 지낸 뒤 완연한 민간인의 신분으로 돌아와 있었다.
그 무렵(1991년)에 밴플리트 장군은 이미 망백(望百)의 노인으로서 자신의 고향인 미국 플로리다에 은거하고 있었다. 그의 나이 99세였다. 내 나이는 어느덧 71세였다. 그는 1882년생으로 나에 비해 28살이 많았다. 내게는 사실 아버지뻘이었다. 그는 1953년 초반 군문을 나와 다양한 활동을 펼쳤다.
/밴플리트 장군이 1953년 퇴역 뒤 부인 헬렌 여사와 함께 고향 플로리다에 도착해 환영객들에게 인사하고 있다./플로리다 아카이브
국군 2군단 창설식의 戰死 통보 그는 미국의 존경 받는 4성 장군 출신으로 미국의 대외 방위 정책에 깊이 간여하며 한국을 자주 찾았다. 특히 한국군 현대화에 지속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아 이승만 대통령은 물론이고 뒤에 등장한 박정희 대통령과도 깊은 교분을 쌓았다. 그는 한국의 조야(朝野)로부터 깊은 신뢰와 존경을 받았다.
그는 주지하다시피 한국 전선에 부임해 싸움을 이끄는 도중에 자신의 외아들인 제임스 밴플리트 2세의 사망소식을 접해야 했다. 아들은 아버지를 따라 공군 폭격기 조종사로 6·25전쟁에 참전했다가 북녘 어딘가에서 폭격기 추락으로 사망했다. 그 시점은 국군 2군단 재창설식을 거행하기 하루 전인 1952년 4월 4일이었다. 군단 창설식에는 이승만 대통령과 함께 밴플리트도 왔다.
군단 창설식은 춘천 북방의 소토고미에서 열렸다. 그 국군 2군단 재창설은 여러 모로 의미가 깊었다. 군단 편제가 미군 군단과 비슷했고, 한국군 현대화의 첫 걸음이라고 불러도 좋을 정도의 수준 높은 첫 한국군 군단 창설이었다. 이 부분은 나중에 다시 소개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이승만 대통령은 군단 창설식에서 기분이 좋았다고 한다. 현대화한 첫 한국군 군단 창설식에서 축사를 했기 때문일 것이다. 밴플리트 장군도 그 광경을 흐뭇하게 바라봤다. 그의 뚝심으로 국군 현대화의 첫 걸음이 막 긴 여정에 들어섰기 때문이었다. 군단 창설식이 끝난 뒤 각 요인들은 임시 막사로 자리를 옮겨 다과회에 참석했다.
그러나 분위기가 이상했다. 밴플리트 장군이 신임 2군단 군단장인 나를 불렀다. 그 주위에는 이미 창설식에 참석했던 파머 미10군단장, 오 대니얼 1군단장 등 미군 장군들이 모여 있었다. 밴플리트 장군의 표정이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사실은 말입니다…제 아들이 어제 저녁 군산 옥구비행장을 출발해 폭격에 나섰는데…아직 돌아오지 않고 있답니다….”
/국군 2군단 재창설식이 끝난 뒤 다과회 석상에서 밴 플리트 장군(오른쪽 고개 숙인 이)이 아들의 전사 소식을 알리는 모습.
적 앞에서 한없이 단호했던 그의 얼굴이 점점 아래를 향하고 있었다. 그는 눈물을 보이지 않으려고 고개를 자꾸 숙였다. 우리 모두는 깊은 침묵에 빠져들었다. 애써 무슨 위로의 말을 전하려고 했으나 결국 마땅한 말을 찾지 못했다.
밴플리트는 후에 부인 헬렌 여사를 위로하는 데 애를 먹었다. 헬렌 여사는 당시 도쿄(東京)에 머물고 있었다. 부부가 함께 일선 현지에 머물지 못하도록 한 미군의 규정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헬렌 여사는 줄기차게 한국을 방문했다. 외아들의 생사를 확인하는 것은 물론, 그의 시신이라도 수습하기 위한 애틋한 모정 때문이었다. 밴플리트 장군은 아내가 찾아올 때마다 위로하기 위해 상당한 노력을 기울였으나 큰 소용이 없었다.
아들 잃은 아버지와 어머니
헬렌 여사는 1952년 7월 육군참모총장에 오른 내게도 자주 찾아왔다. 대구 육군본부에서 업무를 보기 위해 서울의 미8군 게스트하우스(지금 한국의 집)에 들렀을 때 마침 서울에 와있던 헬렌 여사는 늘 내 방문을 노크했다. 그녀는 성격이 매우 밝았다. 하지만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문득 말문을 닫는 경우가 있었다.
/6.25전쟁에 참전했다가 1952년 4월4일 비행기 추락으로 사망한 밴플리트 장군의 아들 밴플리트 2세의 실종을 보도한 기사.
헬렌 여사는 그 대목에서 어김없이 손수건을 꺼내들었다. “백 장군님, 어떻게…아들의 시신을 찾을 방법이 없을까요?” 그러면서 그녀는 눈물을 줄줄 흘리며 울었다. 나는 안타까운 마음에 위로의 말 몇마디를 건넸지만, 그의 큰 슬픔을 가라앉히는 데는 별 소용이 없는 듯했다. 헬렌 여사는 내게 무슨 위로를 받을 수 없었을텐데도 부지런히 나를 찾아왔다. 이런 사연들 때문에 나는 밴플리트의 단호한 군인정신 속에 가려진 그 가족들의 큰 슬픔을 잘 이해하는 편이다. 밴플리트 장군은 아들을 잃었으면서도 늘 꿋꿋하게 전선을 지휘했으나, 아버지로서의 슬픔을 간혹 보이곤 했다. 그는 업무가 특별히 바쁘지 않았던 어느날 내게 연락을 해왔다. “백 장군, 시간 있으면 나와 잠깐 어디를 다녀옵시다.”
그와 나는 서울의 뚝섬 비행장에서 L-19 경비행기 두 대에 별도로 올라 탄 뒤 군산으로 향했다. 나는 그가 가자고 하는 곳이 군산이어서 마음이 착잡했다. 목적지는 그의 아들이 있던 옥구 공군비행장이었다. 나와 그는 아무 말없이 군산으로 향했다.
그가 옥구비행장에 도착해서 하는 일은 특별한 게 없었다. 먼저 공군 조종사들이 묵는 막사에 갔다. 그리고 공군기지 사령관의 배려로 아직 유품 등을 그대로 남겨 둔 아들의 침실을 찾았다. 밴플리트는 아들이 남기고 간 물품을 말없이 조용히 바라보기만 했다. 나는 옆에서 물끄러미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그의 슬픔을 지켜주는 초병(?) 역할을 수행한 셈이다. 사실이지, 그 때는 그 정도가 최선이었다.
밴플리트는 자신의 전투 지휘 철학을 ‘필승의 의지(The will to win)’라고 내세우며 적 앞에서는 늘 불굴의 면모를 과시했다. 나는그들 부부의 깊고 어두운 슬픔을 이해했다. 그런 연유 때문만은 아니겠지만 그는 대한민국 전선 지휘관인 나를 크게 알아준 인물이기도 하다. 그 곡절은 나중에 설명할 기회가 다시 있을 것이다.
54 세상 떠나기 직전의 밴플리트, 내 거수경례 받고 눈물범벅
(8) 아이스크림 장군 밴플리트
그가 100세 생일을 앞두고 거동조차 불편하다는 전갈이 전해졌다. 나는 밴플리트의 자상한 면모를 어느덧 떠올리고 있었다. 이제 나도 70줄에 들어선 노인이건만, 그가 혹시 갑자기 세상이라도 뜨기 전 얼굴 한번이라도 뵈는 게 도리라고 생각했다. 나는 그런 생각에 미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뉴욕에 거주하는 딸의 집을 먼저 들렀다.
나는 딸의 집에 도착하자마자 “플로리다 행 비행기 표를 예약해라. 너도 같이 가자”고 했다. 딸은 “아버지도 이제 노인이신데 한국에서 먼 길 오셨으면서 어딜 또 가시자는 거예요”라고 물었다. 나는 “잔말 말고 어서 마련해”라고 말을 끊었다. 딸은 그런 나의 반응에 퍽 당황했다고 한다. 평소 차분하기만 했던 내가 벌컥 화를 냈기 때문이다.
나는 딸과 함께 플로리다로 향했다. 가는 길은 멀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비행기 속에서 밴플리트와 나, 그리고 전화(戰火)에 휩싸인 채 갈 길을 잃고 헤맸던 당시 대한민국의 상황을 떠올리고 있었다. 그는 전선의 적에 의해 휘둘리고 있던 대한민국에 홀연히 나타난 인물이다. 그리고 2년이 채 안 되는 시간에 대한민국 국방의 기저(基底)를 크게 다질 수 있도록 상황을 이끌었던 사람이다.
/이승만 대통령 내외는 서울 동숭동 서울대 자리에 있던 미8군 사령부의 주말 단골 손님이었다. 식사를 마치고 사령부 현관을 나선 이 대통령 내외와 밴플리트(오른쪽), 필자(왼쪽) 모습.
비행기 속에서 잔잔히 떠올렸던 밴플리트 장군의 면모 중 하나가 ‘음식’이었다. 그는 늘 남과 음식을 나눠 먹기 좋아했다. 야전의 현장에 나타나 나와 함께 걸을 때 그는 주머니에서 항상 무언가를 꺼내 들었다. 당시로서는 우리가 접하기 힘들었던 오렌지를 비롯해 비스킷과 과일 등이었다. 그는 늘 자신이 먹고도 남을 만큼의 음식을 지니고 다녔다.
밴플리트는 그런 주머니 속의 음식을 꺼낸 뒤 “백 장군, 이 거 한 번 먹어보라”며 권했다. 나는 그 덕분에 오렌지를 비롯해 미군의 다양한 음식을 즐길 수 있었다. 특히 그는 아이스크림을 무척 좋아했다. 자신의 공관에서 식사를 할 때 그는 후식으로, 또는 식사랑 상관없이 아이스크림을 찾았다. 그때도 “함께 먹어보자”며 곁의 사람과 나누기를 좋아했다.
이승만 대통령 내외는 전쟁 와중인데도 주말이면 서울 동숭동 옛 서울대 자리에 있던 미8군 사령부를 찾았다. 밴플리트 장군이 미8군 사령관으로 있을 때 더욱 그랬다. 그곳에서 이승만 대통령 내외는 미8군 사령관으로부터 ‘극진한’ 서비스를 받을 수 있었다. 이 대통령은 1875년 출생이어서 1892년에 태어난 밴플리트 장군의 ‘아저씨뻘’이었다.
밴플리트 장군은 주말에 이 대통령 내외를 모셔 놓고는 포크와 나이프를 들고 식탁 위의 스테이크와 칠면조 고기 등을 썰어 둘의 접시에 올려놓는 ‘서빙’을 매우 즐겼다. 그런 밴플리트의 친절한 서비스를 이 대통령 내외는 퍽 즐겼다. 매번 그런 주말의 회동이 끝난 뒤 이 대통령 내외는 한껏 유쾌해진 표정으로 차에 올라타 사령부 정문을 빠져나오곤 했다. 나도 그런 자리에는 자주 참석했다.
비행기가 플로리다의 한 공항에 내렸다. 그의 고향에 왔다는 생각에 우선 기뻤다. 그곳으로부터 딸과 나는 자동차를 빌려 타고 2시간 정도를 더 달려야 했다. 그는 은퇴 직후 평소의 소원대로 고향 플로리다에 목장을 마련했다. 다양한 사업을 벌이기도 했지만, 그는 원래 그의 소박한 꿈대로 육우 50여 마리를 키우는 목장을 만들고 그곳에 안주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밴플리트 장군과 더할 나위 없이 사이가 좋았다./라이프지(誌)
플로리다 밴 플리트 목장
멀리 그의 목장이 보였다. 정문에는 그의 둘째 딸이 나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밴플리트는 거동이 불편해 집안 거실에 있다고 했다. 목장 문을 들어서면서 나는 다시 군산의 옥구비행장, 그리고 실종으로 이미 사망했다고 봤던 그의 아들 침대와 그곳에 들어서서 물끄러미 아들의 관물을 지켜보던 밴플리트의 모습을 떠올렸다.
우리는 현관을 지나 그의 거실로 들어섰다. 거실의 한 구석 휠체어에 앉아 있던 밴플리트 장군이 주섬주섬 몸을 일으켜 세우고 있었다. 그 역시 세월을 비켜갈 수 없었던 듯했다. 185㎝에 달하는 거구는 어느덧 작아져 있었다. 나는 그의 시선에 마주치면서 부동자세를 취했다. 그리고 거수경례를 했다. “Sir,….”
밴플리트 장군도 몸을 곧추 세웠다. 그러나 기력이 아주 떨어져 보였다. 그는 내가 거수경례를 올리자 역시 마찬가지 몸짓을 했다. 그러나 팔을 들어 올릴 힘마저 없어 보였다. 그는 왼손을 들어 올려 오른팔을 받치면서 간신히 거수경례를 했다. 희미한 표정이었지만 나를 바라보는 눈이 반가움으로 빛나는 듯했다. 나는 경례를 마친 뒤 빠른 걸음으로 그에게 다가갔다.
우리는 서로를 부둥켜 안았다. 나의 얼굴, 그리고 밴플리트 장군의 얼굴은 벌써 눈물로 범벅을 이루고 말았다. 세월의 야속함에 흘리는 눈물이었는지, 아니면 그저 반가움으로 흘리는 눈물이었는지는 기억에 없다. 휠체어에 의지해 생명의 마지막 순간을 맞이한 밴플리트 장군은 그저 처연(悽然)하기만 했다. 말도 없이 우리는 한동안 눈물을 흘렸다. 밴플리트 장군의 말은 내가 전혀 알아들을 수 없을 정도였다. 반가움에 무엇인가를 열심히 말하고 있었지만 이미 노쇠할 대로 노쇠해진 장군은 얼굴과 입술을 제 마음껏 움직일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러면서도 그는 어느덧 40여 년 전 나와 함께 싸웠던 한국의 전선을 회고하고 있었다. 밴플리트 장군의 말은 오직 그의 둘째 딸만이 알아들을 수 있었다. 장군은 나와의 사이에 둘째 딸을 앉혀두고 먼 기억 속의 한국 전선을 돌아보고 있었다.
그의 기억은 제법 또렷한 편이었다. 그러나 기력이 많이 떨어져 오랜 동안 그와 말을 나눈다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그를 쉬게 해야 할 시간이었다. 아울러 밴플리트 장군과 헤어져야 할 시간이었다. 플로리다 그의 목장에서 헤어진다는 일은 이제 이 세상에서 그를 더 이상 만날 수 없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나는 그에게 마지막 경례를 올렸다. 마음의 평정을 찾은 뒤였다. 우리는 기쁜 마음으로 헤어질 수 있었다. 40여 년 전의 전우(戰友)와 헤어지는 심정은 비교적 차분했다. 밴플리트는 거실의 휠체어에 앉아 나의 경례를 받고 역시 답례를 했다. 그는 희미한 손짓으로 나와 딸을 배웅했다. 밴플리트는 옆에 서있던 자신의 딸에게 한 두 마디를 건넸다.
/은퇴 뒤에도 밴플리트는 한국에 각별한 관심을 갖고 서울을 자주 방문했다. 이승만 대통령이 밴플리트를 접견하는 모습./대통령 기록관
둘째 딸은 문 앞까지 따라 나왔다. 나는 밴플리트 장군이 나를 보내면서 자신의 딸에게 건넨 말이 무엇인지 괜히 궁금해졌다. 나는 어느 정도 그 내용을 짐작했다. 집 문을 나서면서 나는 장군의 둘째 딸에게 “아버지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던가요?”라고 물었다.
딸은 살며시 웃으면서 “별 말씀은 아니고요, 그저 백 장군 가시기 전에 점심이라도 꼭 대접해서 보내라고 하셨어요”라고 대답했다. 역시 내 짐작은 맞았다.
밴플리트 장군은 평소의 습관대로 자신의 먹을 것을 나눠주려는 배려를 보였던 것이다. 내 얼굴에는 의미심장한 웃음이 떠올랐다. 장군의 딸은 그런 내 웃음을 보면서 궁금증이 이는 듯했다. 밴플리트 장군은 이듬해 세상을 떠났다. 그가 세상을 떠난 뒤 나는 미국의 알링턴 국립묘지에 들러 그의 묘소를 찾기도 했다. 그보다 먼저 세상을 하직한 부인 헬렌 여사, 그리고 한국의 전선에 공군 비행사로 참전했다 행방불명 뒤 사망한 그의 아들 밴플리트 2세가 그의 이름과 함께 묘비를 장식하고 있었다.
세월은 그렇게 옛 전우를 안고 흘러갔지만 그에 대한 기억은 아직 생생하다. 그는 이승만 대통령 내외, 그리고 대한민국과 내게는 매우 친절하고 따뜻한 사람이었으나 자신이 싸워야 했던 적에게는 매우 무서운 인물이었다. 아울러 적 앞에서 등을 보이며 도망치는 아군에게는 아주 혹독한 사람이기도 했다.
1951년 4월에 그는 한국 전선에 신임 미8군 사령관으로 부임했다. 미국 본토에서 제2차 세계대전 당시에 비해 전투력이 훨씬 떨어진 군대의 지휘관으로 있다가 미군 수뇌부의 부름을 받아 급히 한국 전선으로 옮겨왔다. 그가 속한 미군이 2차 세계대전 뒤에 계속 해체와 약화(弱化)의 길을 걸어왔지만, 그는 1944년 노르망디 상륙 작전에서 최선봉으로 유타비치에 올라섰던 당시의 용기와 기개를 전혀 잃지 않고 있었다.
마침 중공군의 막바지 춘계 공세가 펼쳐지고 있었던 시점이었다. 중공군은 1·4 후퇴로 내줬다가 우리가 다시 탈환한 서울까지 집어삼킬 기세로 덤벼들고 있었다. 미군은 이제 완연히 중공군의 괴이하다 싶을 정도의 변칙적인 작전에 적응해가던 무렵이었다. 그러나 국군은 여전히 중공군이 먹잇감으로 노리는 대상이었다.
55 광화문에서 마포까지 야포 400문, 중공군 머리에 불벼락
8)아이스크림 장군 밴플리트
월턴 워커 미 8군 사령관은 한국 전선을 지휘하다 불의의 교통사고로 사망했다. 1950년 12월이었다. 당시의 분위기는 이미 소개했던 그대로다. 인천상륙작전으로 전쟁의 반전을 꾀했던 맥아더의 의중대로 아군은 압록강 인근까지 적을 몰아갔으나 중공군의 기습적인 참전으로 전선은 38선을 향해 마구 밀려 내려오던 시점이었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워커 장군의 장례식이 미국에서 열렸을 때였다. 당시 밴플리트 장군도 그 장례식에 참석했다고 했다. 이 자리에서 로튼 콜린스 미 육군참모총장은 넌지시 밴플리트 장군에게 “지금 한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상황에 관심을 가져달라”고 했다. 콜린스 장군은 이어 “모종의 변동이 생길 경우 당신이 미 8군 사령관으로 부임할 가능성이 있을 것”이라고 했다는 것이다.
당시 밴플리트는 미 본토에 주둔하고 있던 미 2군의 사령관이었다. 워싱턴 정가는 아주 복잡해져 있었다. 도쿄의 유엔군 총사령관 맥아더 장군과 대통령 트루먼의 사이가 점점 나빠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맥아더는 트루먼의 미 행정부가 공산군과의 협상을 통한 휴전에 나설 움직임을 보이고 있던 데 비해 “승리만큼 확실한 대안은 없다”며 지속적인 공격 의사를 표명하고 있었다.
결국 맥아더는 미 행정부에 의해 1951년 4월 11일 공식 해임당하고 만다. 맥아더가 이끌고 있던 도쿄의 유엔군 총사령관직은 매슈 리지웨이 미 8군 사령관에게 맡기기로 했다. 워싱턴은 아울러 리지웨이 후임에 미 본토에 있던 2군 사령관 밴플리트 장군을 확정했다.
/전쟁 영웅 맥아더가 미 의회에서 은퇴연설을 한 뒤 손을 흔들고 있는 모습이다. 그의 퇴임 뒤 밴플리트 장군이 미 8군 사령관에 부임한다.
행정부의 그런 결정이 있기까지 논란이 적지 않았다. 밴플리트 장군이 리지웨이의 웨스트포인트 2년 선배인데다, 두 사람이 2차 세계대전을 치르면서 적지 않은 의견차를 드러낸 이력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트루먼은 끝내 밴플리트 장군을 선택했다. 이유는 밴플리트가 미 본토의 2군 사령관을 맡기 전 그리스에 주둔하면서 그곳 왕실을 도와 장기간에 걸친 대(對) 공산게릴라 작전을 거의 완벽하게 마무리지었기 때문이었다.
밴플리트는 1948년 2월부터 1950년 7월까지 그리스에 머물때 복잡한 현지의 정치적 환경과 공산 게릴라의 막강한 활동력, 무능하고 허약했던 그리스 군대 등의 불리한 여건에 처해 있었다. 하지만 그 속에서도 그리스 왕실과의 유대를 강화하고 그리스 군대를 착실하면서도 체계적으로 교육시켜 공산 게릴라를 완벽하게 제압하는 성과를 거뒀다.
초기에는 미미했던 그의 존재가 노르망디 상륙작전에서 보인 유타비치작전 지휘 능력, 그리스에서의 공산게릴라 제압 등을 통해 점차 워싱턴 행정부의 시야에 분명하게 드러나고 있던 시점이었다. 한국 전선으로의 부임은 밴플리트의 그런 성가를 확인하는 또 하나의 무대가 될 참이었다.
밴플리트는 맥아더의 해임 소식이 있던 날 휴가를 받아 고향 플로리다에 돌아와 자신의 과수원에 오렌지나무를 심고 있었다. 그때 로튼 콜린스 미 육군참모총장이 전화를 해왔다. 그는 “워커 장군 장례식 때 내가 했던 말 기억하고 있는가? 지금 당장 한국 전선에 부임해야 하니 떠날 준비를 해주게”라고 했다.
한국의 ‘마음’을 이해했던 사람
그의 회고록에 따르면 밴플리트는 당시 콜린스 총장의 전화를 받고 두가지 느낌에 젖었다고 했다. 하나는 한동안 잊고 있었던 전선에서의 투지(鬪志)가 되살아나는 느낌이었고, 또 하나는 자신이 주재했던 그리스처럼 한국의 전선 상황도 상당한 정치적 주의력이 필요한 자리라는 느낌이었다. 적과의 휴전을 도모하려는 워싱턴의 입장과 한국을 이끌고 있는 이승만 대통령의 입장 및 관점 차이를 조화롭게 극복해야 한다는 점을 그는 이미 알고 있었다는 얘기다.
사실, 이 점이 특기할 만하다. 밴플리트는 대한민국 국방의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점차 소개해 나가겠지만, 그는 워싱턴의 여러 우려에도 불구하고 한국군의 성장 잠재력을 믿고 우직하게 그 뒤를 받치면서 미국이 한국군의 현대화를 위해 막대한 지원을 펼치도록 용의주도하게 이끌었던 사람이다.
휴전으로 전쟁을 일단 끝내기 위해 한국에서의 싸움을 제한적으로 이끌었던 워싱턴의 복잡한 속내를 잘 알면서도, 그는 한국군을 신속하게 증강시켜 자체적인 힘으로 공산군의 위협에 맞설 수 있도록 했다. 그런 자신의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는 워싱턴의 생각과 현지인 한국의 분위기에 두루 밝아야 했다. 한 쪽에만 그의 생각과 선호(選好)가 쏠릴 경우 그의 목표는 달성하기 힘들었다.
따라서 그리스에서 2년 5개월 동안 머물며 공산군 게릴라를 제압했던 그의 경험은 매우 중요했다. 현지의 문화와 관습을 존중하면서 공산주의에 대항하는 미국의 이념을 조화롭게 실천해야 하는 신임 미 8군 사령관으로서는 밴플리트가 사실 최고의 적임자였던 셈이다.
그러나 워싱턴의 조야(朝野)에서 밴플리트는 늘 한국에 전폭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는 것으로 화제거리가 됐다. 칭찬보다는 비아냥이 늘 그에게 따라붙었다. ‘밴플리트 탄약량’이라는 말도 그래서 나돌았다. 그는 적의 침공을 맞받아치면서 모든 것을 소진해서라도 적을 제압하려는 자세로 나왔다. 미국의 예산 사정은 고려에 두지 않았다.
그는 어느 전선이든 적에게 한 치의 땅도 내줄 수 없다는 입장이었다. 그를 위해 그는 지니고 있는 모든 물자와 화약, 인원을 동원했다. 그런 밴플리트의 태도에 워싱턴 의회는 늘 시비를 걸었지만, 결국은 밴플리트의 왕성한 의지를 꺾지는 못했다. 그는 그런 점에서 “승리 말고는 다른 대안은 없다”는 맥아더와 맥을 함께 하는 장성이었다. 밴플리트의 그런 전투력은 그가 평소 자주 언급한 ‘이기려는 의지(The will to win)’라는 자신의 신념에서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400문의 대포를 동원하다
그가 막 부임한 한국의 전선은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중공군은 전선사령관 펑더화이(彭德懷)와 막후 조종자 마오쩌둥(毛澤東) 사이의 ‘확전이냐, 자제냐’의 이견이 좁혀지면서 1951년 1월에 잠시 점령했던 서울을 다시 손에 넣기 위해 맹렬한 공세를 벌이고 있었다. 서울이 재차 적의 수중으로 들어갈지도 모를 상황이었다.
도쿄의 신임 유엔군 총사령관으로 부임한 매슈 리지웨이 등 미군 수뇌부는 일시적으로 서울을 다시 내줄 수도 있다는 입장을 보이고 있었다. 그러나 새로 부임한 미 8군 사령관 밴플리트는 달랐다. 그는 “서울은 한국인의 얼굴이자 상징”이라며 “이곳을 다시 내준다는 것은 한국인의 심정을 전혀 고려치 않는 무책임한 짓”이라고 했다.
/밴플리트는 1951년 4월 미 8군 사령관에 부임한 뒤 서울을 재차 점령하려는 중공군을 야포 400문으로 강력히 응징한다. 사진은 서울 광화문에서 마포까지 늘어선 미군의 야포가 불을 뿜고 있는 장면.
그는 곧 단호한 조치를 취했다. 미군이 보유한 야포 400문을 동원해 광화문에서 마포 한강변까지 죽 늘여 세웠다. 당시 중공군은 서울을 다시 손에 넣기 위해 경기도 송추 쪽으로 이미 접근해 있는 상태였다. 마오쩌둥의 확전 의지, 그에 동의한 전선사령관 펑더화이의 지시에 따라 중공군 대병력은 경기도 북부 일원에서 서울을 향해 막바지 공세에 온 힘을 쏟아붓고 있던 상황이었다. 그곳에 밴플리트가 배열한 400문의 포가 굉음을 뿜으면서 밤낮없이 폭탄을 퍼부었다.
부임 뒤 벌인 첫 대형 전투였다. 그것은 장관이었을 게다. 155㎜와 105㎜ 야포가 광화문에서 마포까지 늘어선 것 자체가 그랬고, 그곳에서 탄약의 적정량을 계산에 넣지 않고 사정없이 포탄을 쏘아대는 장면이 그랬다. 엄청난 포격이었다. 중공군은 당연히 그런 밴플리트의 기세에 눌리고 만다.
경기도 북부 일원에까지 공세를 펼치기는 했으나 아주 강력한 반발에 밀려 수많은 사상자를 낸 중공군은 더 이상 서울을 향해 공격을 펼치지 못했다. 중공군이 야심차게 벌인 1951년 4월의 춘계 대공세는 그로써 실패로 돌아가고 만다. 나는 그 현장에 있지를 않고, 주문진의 국군 1군단을 이끌고 있었다.
먼 곳에 떨어져 있었지만 나는 새로 부임한 밴플리트라는 장군이 벌이는 그 포격전을 아주 큰 감명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나는 밴플리트가 한국을 잘 이해하는 사람이라는 생각을 했다. 서울을 사수코자 하는 그의 결기는 내가 있는 주문진의 사령부에도 충분히 전해지고 있었다. 그것은 서막(序幕)에 지나지 않았다. 그는 더 많은 것을 우리와 나눌 생각이었다.
56 포격 맞고도 날아온 밴플리트, "국군 3군단 당장 해체"
(8) 아이스크림 장군 밴플리트
우리 대한민국 군대는 보잘 것 없는 역량이었으나, 북한 김일성이 벌인 처절했던 6·25전쟁의 와중에서 눈물겹게 싸웠다. 사병들은 총을 들고 떨쳐 일어나 적을 맞아 싸웠고, 지휘관들은 부족한 역량이었으나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전선으로 나아갔다.
그런 여러 장면에서 우리가 범한 기록적인 패배는 꽤 있었다. 지휘관의 자질 부족을 욕할 수도 있다. 그러나 당시의 대한민국 군대는 아주 허약했다. 기습적인 적의 남침에 허둥지둥 나설 수밖에 없었던 이유다. 신생 대한민국은 국가의 간성(干城)인 군대를 키울 만한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 따라서 당시에 벌어진 기록적인 패배를 두고 지휘관 하나만을 탓할 수는 없다.
1951년 5월에 벌어진 전쟁에서 한국 군대는 기록적인 패배를 하나 기록한다. 중공군의 춘계 2차 대공세에서 국군 3군단이 궤멸하고 말았다. 처참하게 무너져 결국 3군단이 해체의 길로 들어서는 그 곡절은 나중에 다시 소개할 작정이다. 밴플리트 신임 미 8군 사령관은 야포 400문을 동원해 중공군이 그 해 4월 서울 재탈환을 위해 벌인 춘계 1차 대공세를 돌려 세웠으나, 5월에 들어서는 한국군 군단 하나가 송두리째 무너지는 패배에 직면한다.
/밴플리트 장군.
나는 그 사건의 와중에서 밴플리트와 처음 조우했다. 국군 3군단은 강원도 인제군(麟蹄郡)의 현리(縣里)라는 곳에서 무너졌다. 나는 그 동쪽을 지키고 있던 1군단장이었다. 우리 1군단을 동원해 무너져 내린 현리 전선의 동쪽을 방어하는 임무를 맡았다.
상황은 아주 급박했다. 현리에서 정면이 뚫린 아군은 큰물에 밀리듯 후퇴만 하고 있었다. 자칫하면 우리가 지키고 있던 강릉을 내줄 수도 있었다. 강릉에는 당시 미 해병의 비행장이 있었다. 그 곳에는 해병을 지원하기 위한 막대한 물자가 쌓여 있었다. 강릉을 내줄 경우 중공군은 그 곳의 물자를 발판으로 동해안 일대를 석권하려는 공세를 이어갈 수 있었다.
5월 21일 아침 미 8군 사령부에서 작전회의를 개최한다는 연락이 왔다. 대관령에서 멀지 않은 국군 3군단 사령부에서 회의를 여니 급히 오라는 전갈이었다. L-19 경비행기에 올라타고 나는 3군단 사령부가 있던 하진부리를 향했다. 공중에서 보는 현리 일대의 광경은 처참했다. 검은 연기가 가득 피어오르고 있었다. 후퇴한 국군이 수습할 수 없었던 물자를 미 공군기가 네이팜탄을 투하해 소각하는 과정에서 피어오르는 연기였다.
전선에서 무기력하게 밀려난 현장을 지켜보는 마음은 참담했다. 군단장인 나로서는 수습책을 놓고 고민에 휩싸였다. 한편으로는 신임 미 8군의 사령관이 어떻게 수습하는지 지켜보자는 생각도 들었다. 그는 과연 어떤 지휘관일까.
단호하고 신속한 조치
평창의 하진부리 3군단 사령부는 벌써 텅 비어 있었다. 전선을 내주고 맥없이 물러난 군단의 분위기가 충분히 느껴지는 상태였다. 경기도 광주에 주둔 중이던 미 3사단의 유진 라이딩스 부사단장도 이미 현장에 도착해 있었다. 나처럼 미 8군 사령부의 긴급 호출을 받고 현장으로 달려온 것이다. 그의 출현은 미 8군의 유일한 예비사단인 미 3사단도 급박한 사태를 막기 위해 동원됐다는 점을 의미했다.
/유재흥 3군단장은 '영천회전의 영웅'이자 '현리전투의 패장'이기도 하다.
나는 간이 활주로에서 라이딩스 준장과 함께 기다렸다. 밴플리트 사령관이 곧 도착할 예정이었기 때문이다. 서쪽 하늘 멀리서부터 비행기 한 대가 나타났다. 그러나 정상적인 모습은 아니었다. 비행기 꼬리에서 흰 연기가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비행 중에 적으로부터 사격을 받아 연료통이 새고 있었던 것이다. 비행기는 연기를 뿜으며 간이 활주로에 내려앉았다.
한국 전선을 이끄는 최고 지휘관이 적의 대공 포화를 무릅쓰고 전선을 다닐 정도로 상황은 급박했던 셈이다. 어쨌든 위기의 순간이었다. 자칫하면 비행기가 추락까지 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와는 처음 대면하는 순간이었으나 수인사조차 제대로 나눌 여유가 없었다.
키가 훌쩍 큰 밴플리트는 매우 화가 나 있는 듯했다. 우리는 간이 활주로 옆에 세워둔 지프차의 보닛 위에 지도를 펼쳤다. 간이 작전 상황도였던 셈이다. 밴플리트는 서슴없이 작전 지시를 내렸다. 그는 나와 라이딩스 준장을 번갈아 보면서 작전을 지시했다.
“두 사람이 잘 협조해야 한다. 이 사태를 반드시 수습해야 한다. 미 3사단은 서쪽으로 진격하라. 제너럴 백의 1군단은 동쪽을 막아라. 적을 물리쳐야 한다. 적에게 최대한의 징벌을 가하라.” 그의 지시는 매우 단호했다. 아울러 상황을 수습하려는 강력한 의지가 엿보였다. 동시에, 냉정하게 전황(戰況)을 파악하고 있으며 구체적이면서도 간단명료하게 지시를 내린다는 느낌도 받았다.
밴플리트 장군과 함께 비행기에서 내렸던 미 8군의 작전 참모 마제트 대령이 지프차 위에 펼쳐진 지도를 가리키며 미 3사단과 우리 1군단의 진격 방향을 정확히 짚어줬다. 그 작전지도에는 커다란 포켓 형태의 라인이 그어져 있었다. 국군 3군단이 뚫린 지역이었다. 우리더러 그 포켓 형태 라인의 동쪽과 서쪽을 받쳐주면서 공격을 하라는 지시였다.
/1951년 주문진의 국군 1군단장 시절의 백선엽 장군(오른쪽 끝). 동해안에서 함포 지원사격을 하던 로스앤젤레스함의 버크 제독(백 장군 왼쪽 옆)과 자리를 함께 한 모습.
나는 “언제부터 공격을 해야 하느냐”고 물었고, 밴플리트는 내 눈을 똑바로 보면서 “지체 없이 벌여라”고 했다. 처음 만난 그의 인상은 그랬다. 적 앞에서 주저 없이 공격에 나서는, 많은 전선을 거치면서 쌓고 또 쌓은 지휘관으로서의 이력이 돋보인다는 느낌을 줬다.
국군의 작전권을 회수하다
작전은 성공했다. 그 뒤에 벌어졌던 과정은 다음에 소개하기로 한다. 우리 1군단과 미 3사단은 밴플리트의 단호하고 명쾌한 지시에 따라 움직였고, 공세를 지속하기에는 뒷심이 부족했던 중공군 병력은 결국 커다란 피해를 입고 물러나야 했다. 현리에서 입은 아군의 피해는 막심했지만, 중공군 또한 소기의 성과를 내는 데 실패하고 발길을 돌려야 했다.
종국에는 목숨까지 바치며 적과 싸워야 하는 전선의 상황은 아주 가혹하다. 사느냐 죽느냐를 다투는 전선의 상황에서 지휘관은 단호해야 한다. 그 단호함을 나는 밴플리트한테서 읽었다. 그는 무너진 아군 상황을 수습하기 위해 스스로 앞을 향해 곧장 내달았고, 예하의 병력들을 빈틈없이 동원했다.
며칠이 지난 뒤였다. 5월 23일을 기점으로 전선은 소강(小康) 상태를 보이기 시작했다. 다시 이틀이 지난 25일이었다. 밴플리트가 다시 강릉에 온다는 전갈이 왔다. 당시 한국 육군참모총장이었던 정일권 장군은 강릉의 육군본부 전방지휘소에 와 있었다. 그와 함께 비행장에 나가 밴플리트 장군을 기다렸다.
/1951년 춘계 1차 대공세에 나선 중공군이 미군에게 포로로 붙잡힌 모습.
비행기에서 내린 밴플리트는 사무실에 들어서기도 전에 우리에게 충격의 한 마디를 던졌다. “정 총장, 앞으로 한국군 3군단은 해체합니다. 그리고 한국 육군본부는 작전을 통제할 수 없습니다. 인사와 행정, 군수업무만 수행하시오.” 우리는 마치 몸에 두른 옷이 벗겨지는 기분이었다.
그의 지시에 따라 적 앞에서 물러난 3군단 예하의 3사단은 우리 1군단으로 넘어왔다. 다른 하나인 9사단은 미 10군단으로 넘어갔다. 국군 3군단의 해체이자, 육군본부 작전통제권의 회수였다. 아울러 육군본부의 전방 지휘소도 폐지됐다.
6·25 개전 초 이승만 대통령은 급박한 전쟁 상황에 따라 유엔군 총사령관 맥아더 장군에게 작전 지휘권을 넘겨줬다. 그러나 미군은 전선의 일부 책임을 한국군에게 맡기는 형식으로 전쟁을 치러왔다. 따라서 한국의 육군본부는 명색이나마 일정한 작전권을 쥐고 있었다. 밴플리트는 그런 명색조차 없애버렸다.
육군참모총장 정일권 장군은 결국 총장직에서도 물러나야 했다. 그는 미 지휘참모대학으로 유학을 떠났다. 단호했던 밴플리트는 한국군의 실질적인 성장을 어떻게 도모할 것이냐는, 보다 본질적인 문제에 매달렸다. 그런 밴플리트의 부임은 한국에 큰 다행이었다. 그러나 그의 뜻을 미군 수뇌부, 나아가 미 행정부는 잘 받아들이지 않았다.
57 이승만 대통령 "자네가 백인엽이 형인가, 동생인가"
8) 아이스크림 장군 밴플리트
부랴부랴 한국 땅에 올라와 전쟁을 치러야 했던 미군 최고 지휘관들의 마음 한 구석을 오래 잡아끌었던 생각은 무엇이었을까. 어떻게 해서든 미국 행정부가 명령한 전쟁을 승리로 이끌어야 한다는 생각이 우선이었을 테다. 군인으로서는 당연한 일이기도 했다. 그러나 전쟁에서 이기기 위해서 필요했던 다음 생각들은 무엇일까.
그들은 막대한 예산과 장비, 무기와 병력을 한국 전선에 투입했다. 그러면서 미군은 현지의 한국 군대와 어깨를 나란히 해야 했다. 미군 외에 적지 않은 유엔군 병력이 있었으나, 아군의 병력 가운데 가장 많은 수를 차지했던 것은 한국군이었다. 따라서 전쟁의 승패를 가르는 핵심적인 요소는 유엔군 가운데 다수를 차지하는 미군이 현지의 한국군과 합동작전을 성공적으로 펼칠 수 있느냐는 문제였다.
전선은 그곳에 서 봤던 사람이 안다. 미군이 단독으로 전선에 서더라도 그 옆, 또는 그 옆의 옆에는 항상 한국군이 있어야 했다. 어깨를 나란히 한다는 점은 매우 중요하다. 전선의 옆이 뚫릴 경우 전면의 적은 그곳을 파고들어 후방에서 포위해 들어온다. 적의 포위에 들어갈 경우 그 군대는 전멸(全滅)까지 염두에 둬야 할 정도로 크고 깊은 위험에 빠진다. 따라서 전선에 서는 미군의 지휘관이 먼저 따지는 것은 ‘누가 내 옆에 서느냐’였다.
/낙동강 전선 최대 격전이었던 다부동 전투 당시 백선엽 사단장(왼쪽)이 신성모 국방장관에게 전황을 설명하는 모습.
당시의 한국군은 미군의 수준을 맞추기 어려웠다. 군대의 편제, 지닌 역량의 크기, 전선의 적에 맞서 싸우는 전기(戰技) 등에서 미군을 따라가기 아주 힘이 들었다. 그런 점에서 미군 최고 지휘부는 한국군의 역량을 살피고 또 살폈다. 특히 한국군의 지휘관 중에서 누가 자신과 호흡을 맞출 수 있는가를 알아내기 위해 상당한 노력을 기울였다. 전쟁에서 거둘 수 있는 승리의 달콤한 맛 때문이 아니라, 싸움터에서 내가 살아남을 수 있느냐의 여부를 가르는 문제였기 때문이다.
아주 세밀한 체크리스트
미군은 한국군에 파견한 군사고문관, 한국군의 전투 역량을 보태기 위해 보내는 지원 장교, 심지어는 비공식적으로 한국군 내부에 심어놓는 정보 요원 등을 활용해 한국군 지휘관의 능력을 아주 면밀하게 체크했다. 그런 엄밀한 감시를 통해 미군은 하루라도 빨리 ‘내가 믿고 싸울 수 있는 한국군 지휘관이 누구냐’를 알아내기 위해 혈안이었다.
그런 과정은 이미 6·25 개전 초반 미군의 급작스러운 참전 과정때 시작이 된 뒤 전쟁 기간 줄곧 이뤄졌다. 미군의 문화적 토대는 ‘앵글로색슨’이다. 이들은 냉정한 현실주의자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모든 과정을 정확한 데이터에 따라 판단했다. 아주 엄밀한 ‘계산’이 돋보였으며, 그를 뒷받침하는 것은 자신들이 직접 입수하거나 경험한 정보였다.
앞에서도 잠깐 소개를 했지만 미군의 그런 치밀한 면모는 전쟁 과정의 여러 장면에서 등장했다. 나에 관해서는 대표적인 예가 1·4 후퇴 때다. 서부전선에서 방어를 담당하고 있던 당시의 국군 1사단장인 나는 임진강에서 중공군에게 밀려 다시 후퇴해야 했다. 급박한 후퇴였다.
1사단 전면에 출현한 중공군 공세가 아주 거세 우리 군대가 밀렸다는 보고를 들으면서 나는 전화기를 놓치거나, 전화기를 들고 있다가도 통화를 끝낸 뒤 다시 그것을 제자리에 놓지 못하고 있었다. 패배에 직면했을 때 지휘관들은 종종 그런 상황에 빠진다. 그때 거의 실신했던 나를 들쳐업고 지프에 태워 후퇴를 했던 미 고문관이 있다. 메이(May) 대위였다.
나중에 그가 내게 전해준 말을 기억하고 있다. 당시 신임 미 8군 사령관으로 부임했던 매슈 리지웨이 장군은 국군 1사단의 후퇴 소식을 들은 뒤 이렇게 물었다고 한다. “1사단장은 후퇴 당시 제 위치를 지키고 있었느냐, 아니면 다른 곳에 있었느냐”. 미군은 그 점을 먼저 지켜보고 있었던 것이다. 최선을 다 해 싸우다가 진 것이냐, 아니면 전투에 집중하지 않은 채 패배를 맞이했느냐는 것이다.
/미 7함대 소속 전함이 동해에서 함포 사격을 하는 모습.
전쟁을 치르고 있던 당시의 나는 그런 점에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다. 나는 내가 맡은 임무를 착실하게 수행한다는 생각만 했을 뿐이었다. 그러나 미군 지휘부는 그런 내 일거수일투족을 모두 들여다보고 있었던 셈이다. 나는 이미 알려진 대로 김일성 군대의 모진 공세에 놓여있던 1950년 8월의 낙동강 전선에서 이른바 ‘다부동 전투’라고 알려진 혹심한 싸움을 이끌면서 한국군 내부에서 큰 주목을 받았다.
이어진 북진에서 국군 1사단을 이끌고 최초로 평양 입성 작전에 성공하면서 나름대로 성가(聲價)를 쌓기도 했다. 이어 중공군 참전으로 벌어진 1.4 후퇴의 대열에서 병력을 크게 잃지 않으면서 후퇴를 했고, 1951년 4월에는 주문진의 1군단장을 맡아 동부전선을 북상시키는 작업에서 성과를 쌓아가고 있던 중이었다. 그 무렵에 벌어진 일이 앞에서 소개한 ‘현리 전투’였고, 나는 그 동쪽을 떠받치라는 신임 미 8군 사령관 밴플리트의 작전 명령을 성공적으로 수행했다.
미군이 나를 주목한 이유
나는 국군 1군단장으로 부임하기 전에 부산의 임시 경무대에 들러 이승만 대통령에게 진급 신고를 했다. 이 대통령과는 첫 대면이었다. 대통령은 경무대에 진급 신고를 위해 찾아온 나를 보더니 “자네가 백인엽이 형인가, 아니면 아우인가?”라고 물었다. 당시의 이 대통령은 나를 잘 몰랐다. 오히려 내 동생을 잘 알고 있었다. 동생 인엽은 개전 초반 옹진반도를 지키고 있던 17연대 연대장이었고, 서울을 내주고 이승만 대통령이 대전에 들렀을 때는 현지에서 무너진 병력을 수습해 사열식을 벌임으로써 늙은 대통령으로 하여금 감격의 눈물을 흘리도록 했던 적이 있다. 그래서 대통령은 나보다 동생 인엽을 잘 알고 있었다.
당시 내 존재감은 미미했지만, 낙동강 전선의 다부동 전투와 평양 입성 작전을 성공적으로 마침으로써 이름은 조금 알려지고 있었다. 그러나 나를 면밀하게 지켜보고 있던 미군의 시선은 그보다 조금 더 내게 기울었던 것도 사실이다. 낙동강 전선 다부동 전투를 끝낸 뒤 북진을 시작할 무렵 국군 1사단을 지휘했던 미 1군단장 프랭크 밀번 중장의 힘이 컸다.
그는 다부동 전투에서 김일성 군대의 3개 정예 사단에 맞서 싸우면서도 물러나지 않은 국군 1사단의 역량을 아주 높게 평가한 사람이다. 그는 그 뒤로 내게 전폭적인 장비 지원을 하면서 북진에 나설 수 있도록 했으며, 중공군 참전 직후의 상황에서 전선에 서있던 내 판단을 받아들여 미 8군 전체의 전투 흐름을 ‘신속한 후퇴’로 바꾸기도 했다.
/미 육군참모총장 콜린스 대장(오른쪽에서 두번째 앉은 사람)이 훈련 중인 7사단 5연대 장병들과 대화하고 있다. 맨 왼쪽이 밴플리트 장군이며 두 사람 건너가 채명신 대령.
아마 그런 점이 작용했다고 봐도 좋을 것이다. 밴플리트 또한 1951년 5월의 ‘현리 전투’에서 자신의 명령에 따라 신속하게 출동해 대관령에서 중공군의 공세를 막은 내게 아주 우호적인 시선을 보냈다. 그는 미 8군 사령부가 있던 서울에서 걸핏하면 경비행기에 올라타고서 내가 있던 주문진의 국군 1군단을 방문하곤 했다. 특별한 일도 없이 가끔 그는 나를 찾아왔다.
음식을 남과 나눠 먹기 좋아하는 그의 습성은 그때도 여지없이 드러나곤 했다. 그는 샌드위치와 과일 등이 담긴 조그만 박스를 손에 직접 들고 다녔다. 주문진의 바닷가 모래밭에 앉아 나와 함께 ‘풍부하게’ 만들어온 샌드위치와 담아온 과일을 펼치고 나눠 먹었다. 그가 올 때면 바다에서도 한 사내가 올라왔다. 나중에 미 해군참모총장에 올랐던 알레이 버크 제독이었다.
버크 제독은 당시 미 7함대의 일부 전함을 이끌고 동해에서 활동하면서 국군 1군단의 작전을 지원하고 있었다. 국군 1군단은 포병이 약해 작전에 애를 먹고 있었는데 미 7함대의 함포 사격은 그 점을 보완해주고 있었던 것이다.
밴플리트 장군을 소개하는 이 글에서 중간 제목을 ‘아이스크림 장군 밴플리트’라고 했던 이유가 있다. 우선 그는 아이스크림을 매우 좋아했다. 주문진을 자주 찾아오는 그의 식성(食性)을 나는 잘 알았다. 그러던 어느 날 그가 다시 1군단을 방문했고, 여느 때처럼 알레이 버크도 뭍에 올라 함께 해변에서 식사를 마친 다음이었다.
나는 밴플리트에게 “버크 제독의 로스앤젤레스 순양함에 자주 가는데, 아이스크림이 아주 맛있더군요. 다녀오시는 게 어떻습니까”라고 했다. 그러자 그는 어린아이처럼 입맛을 다시면서 길을 나섰다. 둘은 곧장 헬기에 올라타 로스앤젤레스 순양함으로 갔다. 한참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자 나는 느낌이 이상했다. 돌아올 시간이 한참 지난 뒤에 멀리서 조그만 상륙정이 하나 보였다.
58 "캐딜락 한 대 또 날아간다!", 함포사격 지원했던 미 수병들이 외쳤던 말
(8) 아이스크림 장군 밴플리트
조그만 보트에 세 사람이 탔다. 알레이 버크가(1901~1996) 직접 보트를 몰고 있었고, 밴플리트와 수병(水兵)이 함께 타고 있었다. 파도가 거세 수병이 보트를 잘 몰지 못하자 알레이 버크가 직접 배를 몰고 왔다고 했다. 아이스크림을 먹으러 순양함 로스앤젤레스호에 갔다가 한참이 지나 돌아온 두 사람의 곡절은 심상치 않았다.
헬기를 타고 주문진 국군 1군단 사령부를 출발해 로스앤젤레스 순양함으로 갔던 두 사람은 자칫 목숨을 잃을 뻔했다. 헬기가 함정에 내리다가 사고를 일으켰다. 바다에 추락하기 직전 헬기는 다행히도 함정 한 쪽에 걸려 매달렸다고 한다. 밴플리트와 알레이 버크는 바다에 빠지기 전 간신히 빠져 나올 수 있었다는 것이다.
내가 제의한 아이스크림 때문에 미 8군 사령관과 미 7함대의 제독이 자칫 목숨을 잃을 수도 있었다는 얘기다. 나는 미안한 마음에 어쩔 줄을 몰랐다. 그러나 두 사람은 태연했다. 보트가 물이 얕아 직접 모래사장에 접안을 하지 못하자 밴플리트는 버크 제독과 함께 물 속을 걸어나오면서 “미 해군 제독이 직접 상륙 보트를 몰았던 일은 해군 역사상 처음일 걸세”라며 우스개를 던지기도 했다.
/알레이 버크.
알레이 버크는 그런 저런 이유로 나와 아주 가까운 사이가 됐다. 그는 지금의 휴전선이 동해안에서 북한의 금강산 남쪽인 고성까지 바짝 북상할 수 있게끔 도와준 인물이다. 당시 국군 1군단의 화력은 보잘 것 없었다. 자체적인 포병은 화력과 사정거리에서 크게 내세울 것 없는 105㎜ 야포가 주종을 이뤘고, 그 수량마저 별 게 없어 적과 싸움을 벌이기에는 커다란 한계를 보이고 있었다.
여담이지만, 미군은 마땅한 명분이 설 때는 도움을 아끼지 않는 경향이 있다. 결국 명분이 정당해야 하고 그 내용 또한 충실한 경우에는 직접 행동으로 나선다는 얘기다. 당시 한국군으로서는 미군의 지원이 절대적인 요소였는데, 그들을 설득하려면 스스로 정직한 바탕을 갖춘 뒤에 떳떳한 명분을 내거는 게 필요했다. 나는 그런 점에서 뻔뻔했다고 해도 좋을 정도였다.
나는 로스앤젤레스 순양함으로 버크 제독을 아주 빈번하게 찾아다녔다. 1군단 예하의 사단을 동원해 강원도 북부에서 적을 몰아내면서 전선을 북상시킬 때 특히 그랬다. 나는 “이번에도 함포 사격을 지원해주기 바란다”면서 그의 지원을 이끌어냈다. 그럴 때마다 버크 제독은 군말 없이 국군 1군단의 작전을 위해 함포 지원사격에 나서곤 했다.
당시 전함급의 함정에서 쏘는 함포의 포탄 한 발은 1만 달러를 상회했다. 그때 물가로 따지자면 고급 캐딜락 한 대에 달하는 가격이었다. 나는 사실 전함급 함포에서 발사하는 포탄의 가격이 얼마인지는 잘 몰랐다. 모든 군수 물자가 비쌌으니 함포의 포탄도 꽤 비싸리라는 생각만 어렴풋하게 했다.
“다 쏴주시죠”, 뻔뻔했던 내 요구
그러나 함포에 포탄을 장전하는 미국 수병들은 값비싼 함포 포탄이 공중을 향해 수도 없이 날아가는 일을 예사롭지 않게 여겼다. 미주리 전함 등 당시 동해안에 떠있으면서 국군 1군단을 돕던 미 7함대 소속 5순양함대의 수병들이 특히 그랬다. 그들은 국군 1군단을 위해 함포사격을 하면서 포탄 한 발을 장전할 때마다 구호처럼 외친 말이 있다. “캐딜락 한 대 또 날아간다!(One more cadillac on the way)”.
/로스앤젤레스 순양함을 방문한 백선엽 당시 1군단장(오른쪽)과 그를 영접하는 알레이 버크 제독.
내색을 하지는 않았지만 알레이 버크 5순양함대 제독도 사실은 그런 점이 꽤 불편했던 듯하다. 그는 나중에 펴낸 회고록에서 “한국군 1군단장 백선엽 장군은 꽤 열심히 전선의 작전에 나섰다. 그럴 때마다 그는 우리에게 아낌없는 함포사격 지원을 요청했는데, 그는 매 번 우리가 보유한 탄약 전량을 지원해 달라고 했다. 그는 탄약에 대한 개념을 갖고 있지 못했다”고 했다.
그의 회고록 내용대로 나는 고집스러웠다. 적을 몰아내고 대한민국의 땅을 한 치라도 더 확보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렇지만 탄약 사용에 관해 미 정부의 감독을 받아야 했던 미 해군으로서는 난감한 일이기도 했다. 그런 점 때문이었는지는 몰라도 버크 제독은 자신이 거느린 참모진을 자주 국군 1군단에 파견했다.
버크는 미 해군사관학교를 졸업한 뒤 미시간 대학에서 화약을 공부해 전선에서 싸움이 붙을 때 필요한 화약 총량에 관해 정통한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자신의 순양함에 자주 찾아와 “전폭적인 함포사격 지원을 부탁한다”는 나를 달가워할 리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가 우리 1군단에 보낸 인원들은 대개가 관측 장교였다.
보다 정밀한 관측을 한 뒤 지원사격을 함으로써 탄약 소비량을 줄여보자는 심산이었던 것이다. 그 전까지는 주로 공중 관측 뒤에 함포사격을 했지만, 보다 정밀하게 육상 관측을 벌여 불필요한 사격을 줄여보려 했다. 버크는 그에 따라 자신의 참모 절반을 국군 1군단에 보냈으며, 필요한 경우에는 직접 본인이 군단 사령부를 방문할 때도 있었다.
그런 인적인 교류가 활발해지다 보니 버크 제독의 5순양함대와 우리 1군단은 사이가 매우 가까워졌다. 모든 일이 그렇지만, 전쟁 또한 사람이 벌이는 일이다. 같은 진영에 속해 있으면서 사이가 가까워지면 일도 한결 수월하게 풀어갈 수 있는 법이다. 그렇게 나와 버크 제독도 아주 친근한 사이로 변해갔다. 나는 그러면서 전선 북상을 위한 ‘명분’을 줄곧 내걸었고, 버크는 난감한 속내를 감추면서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동해안에서 작전 중이던 미 7함대 5순양함대의 전함이 함포사격을 하는 모습. 국군 1군단의 전선 북상 작전에 큰 힘을 보탠 지원이었다.
한 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밴플리트 8군 사령관이 군단 사령부를 방문한다는 전갈이 왔다. 나는 버크 제독에게 “밴플리트 사령관이 사령부를 방문하니 함께 참석해달라”고 했다. 그리고 회의가 열렸다. 나는 전황보고를 마친 뒤 “다음은 본관의 포병 사령관인 알레이 버크 제독이 설명하겠다”고 했다. 이 대목에 대한 내 기억은 불분명하지만, 버크 제독의 회고록에는 내용이 상세하다.
동맹군을 서로 묶었던 덕목은 믿음
그에 따르면 나는 알레이 버크 제독을 ‘내 포병 사령관’으로 소개했고, 버크는 그런 내 언급에 적잖이 당황했던 모양이다. 밴플리트는 모른 척하고 그런 상황을 자연스레 받아줬다. 버크는 회고록에서 마치 내가 ‘꾀’를 낸 것으로 여기고 있었다. 하지만 그 역시 내 도발적인 언급과 행동을 너그럽게 받아주고 있었다.
그런 배경은 아무래도 솔직함이었다. 나는 내가 이끄는 작전의 세부적인 부분까지 버크에게 설명하면서 그의 이해를 구했고, 명분과 실제에서 큰 어김이 없었던 나를 신뢰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로써 국군 1군단은 미 7함대 소속 5순양함대의 지원을 전폭적으로 이끌어낼 수 있었던 셈이다.
그랬던 버크 제독이 하루는 나를 찾아와 “급한 일이 있어 이곳을 떠난다. 작별인사를 하러 왔다”고 말했다. 나는 그가 떠나는 일이 몹시 섭섭할 수밖에 없었다. 앞의 어느 부분에서 소개했지만, 당시 밴플리트는 금강산 권역인 고저(庫底)에 상륙할 작전을 준비한 적이 있다. 이는 도쿄의 유엔군 총사령관이었던 매슈 리지웨이의 반대로 좌절하고 말았다.
그런 분위기에서 버크의 이임 소식은 달갑지 않았다. 그 직후에 밴플리트 장군도 나를 찾아왔다. 여느 때와 같이 해변에서 음식을 나눠 먹은 뒤 밴플리트는 내게 불쑥 “백 장군, 중국어도 할 줄 안다고 들었는데 사실이오?”라고 물었다.
나는 “표준어 정도는 만주군관학교에서 배워서 할 줄 압니다”라고 했다. 그러자 밴플리트는 알았다는 듯이 고개만 끄덕거렸다. 나는 만주군관학교에서 청나라 마지막 황제였던 부의(溥儀)의 동생 부걸(溥杰)에게서 중국어를 배웠다. 청나라 황실에서 썼던, 당시 중국에서는 가장 표준적인 중국어였다. 나는 그런 점을 상기하면서 “유창하지는 않지만 중국인이 하는 말을 알아들을 정도”라고 덧붙였다.
당시는 휴전회담을 준비 중에 있던 무렵이었다. 서방측이 제안하고 공산측이 그를 망설이면서 저울질하다가 결국 첫 휴전회담을 열기로 의견이 모아지고 있던 때였다. 밴플리트는 국군 지휘관 중에 한 사람을 휴전회담 한국 측 첫 대표로 선정할 생각이었다. 그를 염두에 두고 밴플리트는 내게 “중국어를 할 줄 아느냐”고 물었던 것이다.
든든한 원군(援軍)이던 버크도 느닷없이 작별 인사를 했고, 밴플리트 역시 나를 찾아와 중국어에 관해 물었다. 묘한 기분이 들었다. 밴플리트 장군이 돌아간 뒤 얼마 지나지 않아 대구의 육구본부에서 전화가 걸려왔다.
59 영어를 몰랐던 미 군사학교 유학 한국 장교들, 배식대에서 "me too"만 반복
(8) 아이스크림 장군 밴플리트
나는 그해 7월 벌어진 공산 측과의 첫 휴전회담에서 한국을 대표하는 자리에 나섰다. 대구 육군본부에서 내게 걸려온 전화는 한국군 첫 회담대표로 선정했으니 이승만 대통령에게 신고를 한 다음 개성으로 가라는 명령을 전했다. 물론 그 배후에는 주문진 1군단 사령부로 찾아와 내게 “중국어를 할 줄 아느냐”고 물었던 밴플리트 8군 사령관이 있었다.
밴플리트 장군이 8군 사령관으로서 당시 전쟁을 이끌었을 때는 그 전의 리지웨이, 다시 그 앞의 맥아더 사령관이 있을 때와는 전황이 달랐다. 그가 부임했을 때 벌어진 중공군의 춘계 1~2차 대공세 외에는 특기할 만한 대규모 기동전이 없었다. 대신, 휴전선의 각 주요 고지를 손에 넣기 위한 아군과 적군의 치열한 접전만이 벌어지는 상황이었다. 그런 고지전은 역시 수많은 사상자를 내는 격전이기는 했으나, 전선이 크게 요동치는 대규모의 국면 전환으로는 이어지지 않았다.
밴플리트는 그 상황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것을 수행하기 위해 노력을 기울인 장군이었다. 전선의 전체 국면이 크게 변화할 수 있는 큰 위기의 상황이 없어 밴플리트의 진면목이 잘 드러나지 않는 면도 있으나, 그는 그런 때에 맞춰 가장 시급했던 작업에 착수했다.
/한국군은 전쟁을 치르면서 미군의 지도에 따라 기초 훈련과 전술 훈련 등을 착실히 받았다./라이프
한국군의 내실을 다지는 작업이었다. 앞서 소개한 대로 밴플리트는 ‘교육’과 ‘훈련’의 명수였다. 동기생인 아이젠하워와 브래들리에 비해 진급에서 훨씬 뒤졌으나, 그는 미국 본토에서 강한 군대를 키우기 위한 훈련의 중요성에 누구보다 주목했던 군인이었다. 그는 ‘현리 전투’에서 중공군에게 맥없이 무너진 국군 3군단을 해체한 뒤 그 휘하에 있던 3사단을 내가 이끌고 있던 1군단에 배속했다. 이어 그는 강원도 양양에 훈련장을 만들어 놓고 그 3사단을 혹독하게 훈련시켰다. 3사단장 백남권 준장을 비롯해 모든 장병이 그 훈련을 거쳐야 했다.
한국군 교육에 나선 밴플리트
밴플리트는 이를 위해 야전훈련사령부를 구성해 토머스 크로스 미 9군단 부군단장을 책임자로 임명했다. 아울러 150여 명의 미군 장교와 하사관을 교관으로 동원했다. 훈련은 매우 엄격해 각 부대 단위 별로 9주 동안 미군 교관의 테스트를 통과하지 못할 경우 원점에서 다시 시작토록 했다. 이는 한국군이 미군의 정규적인 틀에 따라 처음으로 훈련을 거치는 과정에 해당했다.
무기를 다루는 과정, 전술 훈련과 장비 테스트 등을 모두 망라하는 과정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각종 전투를 성공적으로 수행했던 미군의 최고급 전술 능력이 한국군에 처음 전해지는 과정이기도 했다. 국군은 그들로부터 ‘걷는 법’부터 다시 배울 수 있었다. 먼저 국군 3사단이 그 과정을 거쳤고, 1년 뒤에는 신설되는 국군 사단들이 양양에서 엄격한 미군의 훈련을 거쳐야 했다.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한국군이 언젠가는 단독으로 공산 군대와 맞서려면 다른 무엇보다 교육과 훈련이 중요하다는 점을 내세웠다. 1951년 12월에는 육군참모총장과 협의해 대구에 참모학교를 만들었고, 이듬해 1월에는 4년제 정식 육군사관학교를 진해에 만들었다. 이는 밴플리트가 늘 강조하던 “강력한 군대를 키우려면 우수한 초급 장교를 육성해야 한다”는 신념 때문이었다.
/첫 휴전회담의 아군 대표단 모습. 왼쪽부터 알레이 버크 제독, 한 사람 건너 백선엽 장군, 터너 조이 아군 수석대표, 매슈 리지웨이 유엔군 총사령관.
아울러 밴플리트는 1951년 말에 장교 250명을 선발했다. 그 중 150명을 포트 베닝의 미 보병학교에, 나머지 100명을 포트 실의 미 포병학교에 보냈다. 비록 단기이기는 하지만, 그를 통해 한국군의 장교 역량을 강화해보겠다는 심산이었다. 그의 이런 조치들은 성공적이었다.
이런 단기 코스의 집중 훈련 방식은 이후 전군으로 퍼졌다. 거의 모든 한국군 장교들이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세계 최강이었던 미군의 체계와 시스템을 익혀가고 있었다. 이는 국군의 뿌리가 모습을 드러내는 과정이기도 했다. 이는 밴플리트의 집요한 의지와 노력이 없었다면 성공하기 힘든 일이었다.
당시 포트 배닝과 포트 실의 미 군사학교 주방 담당자들은 한국군 장교들의 식성이 모두 같은 줄 알고 당황했다고 한다. 음식물을 배급할 때 한국군 장교들이 모두 “미 투(me too)”만 반복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영어를 구사하기 어려웠던 한국군 장교들이 앞의 사람과 똑같이 해달라는 간단한 영어, “미 투”만을 반복했던 까닭이다. 그런 여러 일화를 남기면서 한국군은 미군으로부터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다.
양양에 실험적인 한국군 교육 훈련장을 만들었고, 나와의 친분도 더 쌓였던 까닭에 밴플리트는 주문진의 1군단 사령부를 자주 방문했다. 이어 그는 나를 7월에 시작한 첫 휴전회담 한국군 대표에도 천거했다. 그에 따라 나는 한 동안 개성에서 열린 휴전회담에 참석했다. 회담은 진척이 없었다. 신경전과 탐색전이 지루하게 이어지기만 할 뿐이었다.
8월 중순 경에 밴플리트로부터 전화가 왔다. 판문점에서 전화를 받았다. “사령부로 잠시 와 달라”는 전갈이었다. 그는 나를 회담장에서 빼고자 했다. 나중에 휴전회담 아군 측 대표였던 터너 조이 제독은 회고록에서 “백선엽 1군단장은 전투에 꼭 필요한 사람이므로 회담장에 복귀시키지 않고 1군단에 남기는 것으로 결정했다는 통보를 매슈 리지웨이 사령관으로부터 받았다”고 했다.
/1951년 7월 처음 열린 휴전회담에서 공산측은 아군 차량에 백기를 꽂게 해 마치 자신들이 항복을 받는 것처럼 착각을 하게 했다. 백기를 꽂은 차량과 미군을 북한 병사가 촬영하는 모습.
敵에게서 양구를 찾아오다
밴플리트는 당시 강원도 전선의 북상에 진척이 없자 고민 중이었다. 내가 빠진 뒤의 1군단 전선 상황이 교착에 빠졌기 때문이었다. 그는 판문점에서 서울의 8군 사령부를 찾아온 내게 “함께 전선에 가서 상황을 파악한 뒤 해결방법을 찾아보자”고 했다. 그래서 나는 밴플리트와 뚝섬 근처의 비행장에서 L-19 경비행기를 타고 강원도 간성의 1군단 11사단 사령부에 도착했다.
당시 양구는 적의 수중에 있었다. 그 양구는 철의 삼각지대 한 쪽을 이루는 곳이어서 전략적인 요충에 해당했다. 그를 빼앗기 위한 작전을 펼치고 있었는데, 적은 이미 그곳에 6개 사단을 집결시켜 산악 곳곳을 요새화한 상태였다. 송요찬 장군의 수도사단은 공격에 성공했으나, 문제는 11사단이었다. 세 차례에 걸쳐 고지를 빼앗았으나 역시 세 차례에 걸쳐 고지를 빼앗기며 진척을 보이지 못하고 있었다.
밴플리트는 내게 해결책을 물었다. 나는 “화력 집중이 우선이다. 요새화한 적의 진지를 타격하려면 지금의 105㎜ 야포로는 어렵다. 155㎜를 동원해 타격을 가한다면 방법이 나올 듯하다”고 말했다. 그러자 밴플리트는 “그렇지만 지금 155㎜ 야포를 어디서 구하느냐”고 반문했다. 나는 망설이지 않고 “옆의 미 10군단에 있다”고 했다.
동석했던 클로비스 바이어즈 10군단장이 “우리도 상황이 좋지 않다”며 난색을 표했다. 그러나 밴플리트는 단호한 어조로 “야포를 지원하라”고 명령했다. 미군은 신속했다. 미 10군단 상황 역시 좋지 않기는 했으나, 8군 사령관의 명령에 군말 없이 움직였다. 이튿날 미 10군단의 155㎜ 야포 중대 병력이 11사단에 도착했고, 때마침 구름도 걷히면서 아군의 포격이 불을 뿜었다. 동해에 있던 미 7함대의 함재기도 지원사격을 벌였다.
열흘 넘게 공방이 불붙던 양구 일원의 전투는 그 포격으로 승부가 갈리고 말았다. 국군 1군단은 155㎜의 거센 포격 끝에 보병의 진격으로 양구 일원을 통제할 수 있는 모든 고지를 확보했다. 밴플리트는 이 전투 뒤에 도쿄에 있던 유엔군 총사령관 매슈 리지웨이에게 전화를 걸어 “백선엽 군단장을 회담장에 복귀시키지 않고 전선에 남기겠다”고 통보했다.
미군은 엄격하고 냉정한 시선으로 자신과 함께 싸울 ‘전선의 동지’를 물색 중이었고, 8군 사령관 밴플리트의 눈에 내가 어느덧 자리를 잡아갔다. 밴플리트는 한국군 교육과 훈련에 큰 비중을 두려 했으나, 그 전에 중요한 무엇인가를 해결해야 했다. 마침 그는 가을 무렵에 나를 다른 하나의 시험장에 걸어 들어가게 할 작정이었다. 전쟁이 발발한 뒤 두 번째의 가을이 찾아왔던 11월 중순이었다. 이종찬 당시 육군참모총장이 전화를 걸어와 “내일 서울 미8군 사령부에 와서 밴플리트 사령관과 함께 논의할 일이 있다”고 했다.
60 "지리산 일대 전화선부터 끊어라!"…1951년 가을, 빨치산 소탕 작전
(8)아이스크림 장군 밴플리트
동숭동 옛 서울대 자리에 있던 미 8군 사령부를 찾아간 때는 1951년 11월 중순이었다. 1군단 사령부를 떠난 L-19 경비행기가 동대문 밖 뚝섬 인근의 경비행장에 내린 뒤 나는 지프에 타고 곧장 8군 사령부로 갔다. 밴플리트 사령관의 집무실에는 이종찬 참모총장이 벌써 도착해 있었다.
8군 참모장 애덤스 소장과 작전 참모 마제트 대령도 자리에 있었으나, 밴플리트 장군은 이종찬 총장과 나를 대상으로 직접 말을 꺼냈다. 회의 내용은 공비를 토벌하는 일이었다. 전쟁 전에도 빨치산은 존재했다. 그러나 전쟁이 발발하면서 양상은 더욱 복잡해지고 있었다.
밴플리트 장군은 전선으로 보내는 물자가 빨치산의 준동으로 크게 위협을 받는 상황이 빈번해지고 있다면서 말을 꺼냈다. 그는 지리산 일대의 상황이 매우 심각하다는 점을 다시 강조했다. ‘해방구’가 도처에 등장했으며, 밤에는 지리산 일대에 일반인들이 출입을 할 수 없을 정도로 발전했다며 상황을 설명했다.
/그리스에서 공산 게릴라 소탕작전을 벌였던 밴플리트(오른쪽).
실제 그랬다. 전쟁이 터진 뒤 그곳 일대의 상황은 더 꼬여가고 있었다. 남침 대열을 따라 침공을 벌였다가 후퇴하는 북한군에 합류하지 못한 채 낙오했던 일부 김일성 군대의 정규 전력이 그곳에 합세하면서 상황이 더 어려워졌던 것이다. 아울러 북한은 후방을 교란하기 위해 특별 훈련을 거친 정규 병력을 대한민국으로 침투시켜 이들 빨치산 대열을 키우려는 의도를 보이기도 했다.
산세가 깊은 지리산은 그들이 활동하는 데 아주 적절했다. 빨치산의 세력이 더욱 커지면서 남쪽 항구에서 전선으로 보내는 물자들이 위협을 받았다. 경부선은 아주 가끔, 전라선은 빈번하다 해도 좋을 정도로 빨치산의 공격에 의해 운행을 멈췄다. 전쟁을 지휘하는 미 8군 사령관의 입장에서는 매우 중대한 조치를 취해야 했던 것이다.
그런 상황을 설명한 뒤 밴플리트는 나를 보면서 이런 내용의 말을 했다. “제너럴 백, 귀관은 전쟁 전에 호남 일대의 빨치산을 토벌한 경험이 있다고 들었다. 게다가 전쟁이 터진 뒤 귀관은 많은 군사적 경험을 쌓았다. 이제 당신이 지리산 일대의 빨치산 토벌 책임을 맡아야겠다. 모든 지원을 할 테니 작전을 빈틈없이 수행하길 바란다.”
공식적인 자리에서 공식적으로 하는 밴플리트의 발언이었다. 그의 발언은 무뚝뚝하다는 느낌이 들 정도였다. 그러나 공식적인 자리가 끝난 뒤 밴플리트는 커다란 아이스박스에 샌드위치와 과일을 담아와 직접 내게 음식을 권하던 모습으로 변했다. 사람 사이는 가까워지면서 신뢰가 깊어지며, 다시 그를 바탕으로 상대를 아껴주려는 감정이 깊어지기도 한다.
/지리산 빨치산 토벌작전. 국군 지휘관과 붙잡힌 빨치산. 왼쪽에서 두 번째가 토벌대장 송요찬 준장.
핵심 참모를 내게 보내다
밴플리트는 이종찬 총장이 돌아간 뒤 내게 “제너럴 백, 이번 작전은 전쟁의 후방에서 위협적인 요소를 근절하는 아주 중요한 일이다. 그러나 걱정하지 말라. 다츠 대령을 당신에게 보낼 테니 그와 모든 것을 상의하라. 커다란 도움이 될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는 나를 신뢰했으며, 나를 든든하게 후원하고 있었다. 다츠는 밴플리트 자신이 그리스에서 공산군 게릴라를 소탕할 때 참모로 기용했던 인물이었다. 당시 그는 한국 전선에 와서 연대장을 맡고 있었는데, 지리산 토벌 작전을 위해 내게 그를 참모로 보내주겠다는 배려였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1951년 말에 벌어진 지리산 일대 빨치산 소탕 작업은 밴플리트의 아주 빛나는 전과(戰果)에 해당했다. 그는 휴전선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적군과의 고지전을 수행하면서 대한민국의 장기적인 안보를 해결하기 위해 후방의 빨치산을 없애는 작업에 착수했으며, 그 결과는 매우 성공적이었다.
밴플리트는 그 앞에 나를 내세웠던 것이다. 부대의 규모는 매우 컸다. 단기적인 작전을 위해 군단 이상의 부대를 편성키로 했다. 정규 2개 사단과 예비 1개 사단, 전투경찰 1개 사단을 모두 이끌도록 했다. 밴플리트는 “귀관은 이미 토벌 경험이 있으니 휘하에 둘 정규 2개 사단은 직접 선택하라”고 재량권까지 부여했다.
/51년 봄 빨치산에게 반동이나 악질지주 등으로 몰려 학살당한 지리산 주변 농촌의 양민들.
주문진에서 1군단을 이끌었던 경험이 내게 있지만, 대규모 병력을 지리산 일대로 이동시킨 뒤 은밀하고 치밀하게, 또 기민하게 부대를 지휘해야 하는 만큼 작전은 고도의 집중력이 필요했다. 그런 임무를 밴플리트는 서슴없이 내게 맡겼던 것이다. 또 그리스에서 게릴라 토벌에 나섰을 때 중요한 역할을 했던 자신의 참모를 내게 보내줬다.
나는 그 자리에서 작전 구상의 개요를 밴플리트에게서 들었고, 직후에는 미군 참모들과 줄곧 세부적인 작전 계획을 짰다. 그 작업은 상당한 시간이 필요했다. 또 보안에도 각별한 주의가 필요했다. 상대가 전혀 눈치를 채지 못한 상황에서 적의 옆에 바짝 다가서야 했다. 그 뒤 전격적으로 모든 작전을 펼쳐야 했다. 아군에게는 낯선 지역이었으나, 적들은 익숙한 지형에서 활발한 기동을 벌일 수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주문진의 1군 사령부와 서울의 미 8군 사령부를 오가면서 면밀하게 작전 계획을 짜갔다. 시간이 지나면서는 대구의 육군본부에 내려가 아주 은밀하게 후속 작전을 계획했다. 내가 선택한 국군 사단은 수도사단과 8사단이었다. 수도사단은 험악한 산지(山地)가 많았던 강원도 1군단에서 작전을 펼친 점, 8사단은 전쟁 전에 빨치산 토벌에 나섰던 경험의 부대라는 점이 이유였다.
수도사단은 먼 거리를 이동했다. 강원도에서 수륙함정에 올라타 여수 근처로 상륙한 뒤 은밀하게 지리산으로 이동토록 했고, 8사단은 육로를 거쳐 지리산 북쪽으로 다가가도록 했다. 나는 대구 육군본부에서 마지막 작전계획을 작성한 뒤 트럭에 올라탄 부대 인원 500여 명을 이끌고 전주를 향했다. 바야흐로 가을이 깊어가고 있었다. 대구에서 전주로 향하면서 나는 이 작전의 의미, 내가 어떻게 대규모 부대를 이끌어야 하는가를 두고 깊은 생각에 빠지기도 했다.
“피의 악순환을 끊어라”
부대 정식 명칭은 ‘백 아전전투사령부’였다. 영어로 적으면 Task force Paik이었다. 부대 이름에 지휘관의 호칭을 붙이는 사례는 처음이었다. 그만큼 밴플리트의 깊은 신뢰가 묻어 있었다. 그러나 정작 그런 8군 사령관의 호의에는 깊이 주의를 기울일 여유가 없었다.
/2000년 6월 13일 방북한 김대중 대통령에게 평양 만수대 의사당 내부를 안내하고 있는 이상진 만수대 의사당 부총장. 이씨는 지리산 빨치산 활동을 하다 1953년 사망한 이현상의 딸이다./청와대 사진기자단
지리산 일대의 빨치산 토벌은 매우 성공적이었다. 그 자세한 내용은 다음 기회를 봐서 풀어가도록 하겠다. 지금 소개하는 내용은 밴플리트 이야기다. 그에 관한 이야기를 좀 더 덧붙일 생각이다. 그는 지리산 토벌 작전이 벌어진 뒤에도 아주 전폭적인 관심과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나는 그런 8군 사령관의 배려와 관심 및 지원에 부응코자 했고, 나아가 대한민국의 후방을 크게 위협하는 빨치산을 어떻게 빨리 잠재울 수 있겠느냐를 두고 절치부심했다. 밴플리트의 지휘철학은 매우 중요했다. 그는 그리스에서 공산 게릴라를 완벽하게 소탕한 경험자답게 몇 가지 주문을 잊지 않았다. 우선 게릴라를 상대로 하는 작전은 민간의 피해를 최소화하면서 그로부터 신뢰를 얻어야 한다는 점이었다.
‘초토화(焦土化)’라는 작전이 있다. 작전을 구사하는 입장에서 그 초토화는 매우 수월했다. 적이 있는 곳을 모조리 불태워 없애는 일이 초토화의 본질이다. 그러나 당하는 입장에서, 특히 무기를 손에 들지 않은 민간인의 입장에서 그것은 악몽(惡夢)이다. 영혼의 목을 죄는 아주 불길한 꿈이다. 나는 1948년에서 약 1년 반 동안 광주 5사단을 이끌면서 지리산 일대의 빨치산을 토벌할 때 일찌감치 그 초토화의 잔인함을 경험했다.
적성(敵性)이 있다 하더라도 민간인을 함부로 대한다면 그 작전이 어떤 성과를 내든 효과는 크게 줄어든다. 가능한 한 많은 생명을 살려 피가 피를 부르는 악순환을 벗어야 한다. 빨치산 주변에 붙어 있어야 하는 민간인들을 최대한 살리고, 귀순의 의향이 있는 빨치산도 가능하면 최대로 살려야 한다. 작전의 요체는 바로 그 점이었다.
전주와 남원, 그리고 광주에 우리 사령부의 요원들이 도착하면서 그 일대의 모든 전화선을 끊었다. 아군 병력의 이동 정보를 그들이 서로 전할 수 없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아울러 전주 북중학교에 차린 사령부에는 유리창에 담요 등을 걸어 빛을 차단했다. 움직임을 보이지 않기 위해서였다. 낮에는 모든 요원들이 출입하지 않도록 했다. 수도사단은 예정대로 여수 인근으로 상륙해 지리산 남쪽에 도착했고, 8사단 또한 양구에서 출발해 무사히 지리산 북록에 자리를 잡았다.
<정리=유광종, 도서출판 ‘책밭’ 대표>
61 지리산 상공서 에어포켓으로 구역질,
(8)아이스크림 장군 밴플리트
D데이는 12월2일이었고, H아워는 오전 6시였다. 12월 1일 자정을 기해 부산과 대구를 제외한 대전 이남의 모든 지역에 비상계엄령이 발효했다. 빨치산 퇴로를 막기 위해 출동했던 예비 3개 연대와 전투경찰 3개 연대도 정해진 위치에 자리를 잡았다.
그러나 막상 작전이 벌어지자 나는 초조함을 금할 수 없었다. 빨치산이 드문드문 모습을 드러냈지만 이렇다 할 성과를 거두지 못했기 때문이다. 일본에서 인쇄한 1000만 매의 귀순 유도 전단이 지리산 일대를 뒤덮었으나, 초기에 뚜렷하게 드러나는 성과는 없었다. 귀순자와 빨치산 주변 가족들을 수용하기 위해 남원과 광주에 수용소도 지었지만, 그곳을 채울 귀순자들은 좀체 눈에 띄지 않았다.
그런 무렵에 밴플리트 사령관이 현지에 직접 내려왔다. 작전이 벌어진 D데이에서 이틀이 지난 시점이었다. 나는 당시의 상황을 그에게 브리핑했다. 그러면서 말미에 “그러나 어쩐 일인지 성과가 잘 나오지 않는다”고 솔직하게 말했다. 그러자 밴플리트 장군은 씩하고 웃으면서 “괜찮다. 좀 더 차분하게 기다려라. 그러다 보면 좋은 성과가 나올 것”이라고 말했다. 그런 말을 하면서도 그는 줄곧 입가에 미소를 띠었다.
그는 역전(歷戰)의 미군 지휘관이었다. 그 역시 성과를 기다리는 마음이 간절했겠지만 그는 느긋하게 미소를 지으면서 나를 격려할 뿐이었다. 지금 돌이켜 보면, 밴플리트는 게릴라를 상대로 벌이는 작전의 본질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었던 듯하다. 초기부터 성과를 도출해 낸다면 오히려 그 점이 이상했을 것이다. 게릴라를 상대로 벌이는 작전에서 최고 지휘관이 성과만 강조한다면 그 작전은 분명 시작부터 꼬일 가능성이 높다.
/미 8군 사령관 밴플리트 장군(지프 본닛에 앉은 이)이 미국 종군 기자들과 인터뷰하는 모습.
그 밑에서 작전을 벌이는 지휘관이 성과에 집착한다면 먼저 ‘초토화’의 유혹에 이끌리기 쉽다. 당장의 성과는 그래서 금물(禁物)이라 해야 옳다. 이리저리 숨어 다니면서 몸체를 드러내지 않는 게릴라의 속성 때문이다. 성과에 집착하는 지휘부는 작전에 임하는 사람들로 하여금 당장의 성과로 포장할 수 있는 초토화의 카드를 선택하도록 만든다는 뜻이다.
밴플리트는 그렇게 나로 하여금 ‘여유’를 찾을 수 있도록 했다. 단기적인 성과에 집착해 가시적인 성적을 거두는 데 급급해 한다면 대한민국 내부에 숨어 있는 빨치산을 발본색원(拔本塞源)하는 데 실패할 가능성이 크다. 보다 장기적인 틀에서 한국의 안보를 위협하는 빨치산을 다뤄야 했다.
군단장의 비행
그러나 그를 성공적으로 이끌어가기 위해서는 내부의 단속도 필요했다. 전선에 서 있는 일선의 지휘관들과 예하의 장병들에게 이를 숙지시킨 뒤 철저하게 이행토록 해야 하는 문제였다. 여기에는 왕도(王道)가 따로 있을 수 없다. 최고 지휘관이 먼저 나서서 모범을 보여야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부지런히 현장을 다닐 수밖에 없었다.
일선의 기동 부대 장병들은 모두 대공포판(對空布板)을 등에 매도록 했다. 빨간색과 흰색의 옷감으로 만든 표지물로 이를 장병들이 매고 작전을 벌이면 공중에서 진격 상황을 일목요연하게 판단할 수 있었다. 나는 하루에 두 번 세스나 경비행기를 타고 지리산 일대를 날아올라 대공포판을 보면서 아군의 작전 상황을 파악했다. 나는 미군으로부터 L-19 10대를 지원받아 이를 각 사단의 연대장 급 이상의 지휘관들이 활용토록 했다.
아울러 부지런히 현장을 찾아다녔다. 나는 남원의 사령부에만 머물지 않고 각 사단의 연대, 필요에 따라서는 대대 등을 다녔다. 그런 예하의 각 부대를 방문할 때면 나는 늘 “투항과 귀순이 먼저이고, 대민 피해는 발생치 않도록 철저하게 노력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지리산 일대 토벌 작전으로 귀순하거나 붙잡힌 빨치산들이 재판을 받는 모습./라이프
내가 늘 찾던 곳이 또 있다. 포로 수용소였다. 투항하거나 귀순한 빨치산, 아니면 아군 토벌대에게 잡혀 내려온 빨치산들이 있는 곳이었다. 붙잡히거나 귀순을 위해 내려 온 빨치산들을 나는 유심히 살폈다. 부상의 정도, 심문을 통해 나온 내용 등도 세심하게 살피면서 작전이 벌어지는 과정에서 아군의 무리한 측면이 없었는지 등을 관찰했다.
미 8군 사령관 밴플리트 장군, 나아가 도쿄의 유엔군 총사령관, 그 뒤의 미군 최고 지도부 등은 모든 작전이 벌어질 때마다 한국군의 일거수일투족을 면밀하게 들여다보던 상황이었다. 따라서 지리산 빨치산 토벌 작전 또한 일종의 아주 냉정한 ‘시험대’라고 봐도 좋았다. 더구나 당시 작전은 미군에게 전쟁 발발 뒤 처음 벌어지는 한국군 군단 병력의 기동, 수색, 대민작전 임무 수행 능력 등을 종합적으로 살필 수 있는 기회이기도 했다. 나는 그 모든 과정의 책임을 맡은 지휘관이어서 그 무게감을 절실하게 느낄 수 있었다.
주어진 시험을 잘 치러야 다음 단계로의 도약이 가능한 법이다. 물론 그 다음에도 다른 시험이 기다리고 있겠지만, 우선은 당면한 시험을 훌륭히 치러야 다음의 발전을 꾀할 수 있다. 나는 1951년 막바지의 가을에 펼쳐진 그 빨치산 토벌 작전이 대한민국 군대의 질적인 성장을 위해 아주 필요한 과정이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따라서 밴플리트 사령관이 내게 준 임무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성공을 거두도록 노력을 거듭했다. 그런 이유 때문에 나는 무리하게 지리산 상공을 비행했다. 오전에는 그나마 괜찮았다. 지리산 상공은 매일 오전에는 바람이 잤다. 그러나 오후에는 바람이 거셌다. 몸체가 무겁지 않은 세스나 경비행기는 그런 바람 앞에 무력해 에어포켓 현상으로 곤두박질쳐야 했다.
수험생의 심정
그럴 때마다 나는 머리를 비행기 천장에 부딪히거나 심한 구역질에 시달려야 했다. 눈물도 나고, 콧물도 흘리면서 비행기 안은 금세 더렵혀지고는 했으나 나는 매일 비행을 감행했다. 토벌대 사령관의 비행기가 뜨면 사단장, 연대장의 비행기도 떠야 했다. 작전은 그래서 정해진 틀에 따라 착착 펼쳐졌다. 최고 지휘관이 각 예하부대를 찾아다니자 군대의 군기(軍紀)도 엄정함을 유지했다. 따라서 대민 피해는 발생하지 않았다.
지리산 일대의 산악 지역에 총성이 잦아지고 있었다. 2기 작전을 마무리했던 1952년 1월 12일 내게 진급 소식이 전해졌다. 별 둘에서 별 셋의 중장을 달아준다는 소식이었다. 사령부로 그 소식이 전해지면서 먼저 금속제 계급장을 현장에 파견 와 있던 경찰 간부들이 구해왔다.
/지리산 빨치산 토벌에 나선 '백 야전사령부'의 백선엽 장군(지휘봉을 잡은 이)이 상황판을 보며 작전을 설명하는 모습.
어깨 견장에 다는 계급장은 군 참모들이 현지의 누군가에 부탁해 수를 놓아 가져왔다. 나와 이종찬 육군참모총장, 해군 손원일 제독의 동시 승진이었다. 이로써 대한민국 군대에서 별 셋의 중장에 오른 사람은 미국에 유학 중이던 정일권 장군을 포함해 모두 넷으로 늘었다.
기쁨만 앞서지는 않았다. 밴플리트 장군의 강력한 지원이 고맙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부담스럽기도 했다. 그는 내 역량을 믿고 전폭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그래서 고마웠다. 그러나 그로부터는 다시 미군의 ‘시험’이 펼쳐질 예정이었다. 그런 지속적인 테스트를 잘 이겨야 한국군은 미군의 도움을 이끌어 내 질적인 성장을 이룰 수 있다는 점을 나는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군복을 입은 내가 왜 군공(軍功)에 관심이 없을까. 그러나 나는 비록 젊은 나이였지만 내 자신을 잘 알았다. 나는 전쟁이 없었다면, 그래서 미군이 이 땅에 오르지 않았다면 일정 수준 이상의 계급을 달지 못했을 것이다. 숫기가 부족했고, 남과의 교제에도 서툴다. 정무적인 판단에 익숙지 않아 나는 사람과 사람이 만들어내는 기묘한 상황에 잘 어울리지도 못하기 때문이다.
어쨌든 남과 무엇인가를 나누기 좋아했던 밴플리트가 한국 전선에 부임했고, 마침 그는 나를 전폭적으로 신뢰했다. 그 덕분에 지리산 빨치산 토벌 작전도 매우 성공적으로 치렀다. 매사에 부지런했던 밴플리트는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다. 또 무엇인가를 기획하고 실천할 태세였다. 내게는 그런 밴플리트가 냉정한 ‘시험관’으로 보였다.
지리산 작전은 1~3기로 나눠 벌어졌다. 초기에는 성과가 별로였으나 2, 3기 작전에 들어서면서 빨치산은 거의 소멸했다. 작전이 마무리를 향해 가던 1952년 2월 초였다. 밴플리트의 작전 참모 마제트 대령이 찾아왔다. “올드 맨(Old man; 마제트가 자신의 상관인 밴플리트를 지칭하는 말)의 다른 구상이 하나 있다”고 했다. 시험을 치러야 하는 수험생, 나는 그런 기분으로 마제트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62 '솜방망이' 105㎜포 마감하고 상대 진지 뒤엎는 155㎜포를 얻다
8) 아이스크림 장군 밴 플리트
나를 찾아온 미8군 작전 참모 마제트 대령은 미 8군 사령관 밴 플리트 장군이 지리산 토벌 작전을 벌였던 ‘백 야전사령부’를 토대로 한국군 군단을 하나 만들려고 하는데 내 의견은 어떠냐고 물었다. 새로운 한국군 군단을 창설한다는 얘기였는데, 아직 지리산 토벌 작전이 끝나기도 전의 상황이었다.
한국군 군단은 1950년 10월 말에 벌어진 북진 작전 때 중공군의 기습에 휘말려 2군단이 무너졌고, 1951년 5월의 이른바 중공군 춘계 2차 공세 때 3군단이 강원도 현리에서 와해하는 바람에 주문진에 주둔하며 강원도 북쪽을 지키던 1군단 하나만 남아 있었다.
군단이라고 타이틀을 붙이기는 했지만 실제 역량은 보잘 것이 없었다. 주문진의 1군단도 이름만 군단이지 실제는 2개 사단의 병력에 야포를 제대로 갖추지 못했다. 나는 그런 생각이 앞섰다. 그런 군단의 재창설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게 내 판단이었다. 나는 마제트 대령에게 솔직하게 의견을 말했다. “그런 군단 창설이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는 반문이었다.
그러자 마제트는 기다렸다는 듯이 다음 말을 이어나갔다. 아주 새로운 얘기였다. 그는 “아니다. 이번에는 다르다. 155㎜ 야포 대대를 둘 예정이다. 공병단과 병참단도 만들어 준다. 미 제5 포병단이 군단 포병사령부를 대신할 것”이라고 말했다. 아주 놀라운 얘기였다.
/1952년 4월 재창설된 현대화한 국군 2군단 포병들이 155㎜ 야포를 적의 진지에 발사하는 모습.
그 때까지 한국군의 야포는 105㎜가 전부였다. 그마저도 보유량이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6.25전쟁이 벌어지기 직전에 우리 국군은 105㎜ 몇 문을 들여와 용산에서 한강 너머의 지금 광진교 남단으로 포사격을 실시했다. 그 뒤 105㎜를 들여와 포병 화력을 갖췄으나, 그 역량은 정말 내세울 게 없었다.
북한군은 그를 압도하는 야포를 갖췄으며 물량에서도 우리를 크게 앞질렀다. 소련의 지원 덕분이었다. 적을 제압하기 위해서는 당시로서는 가장 현대화한 155㎜ 야포가 필요했다. 105㎜와 155㎜는 서로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화력의 크기가 다르다. 사정거리는 물론이고 적을 타격하는 힘에서도 아주 뚜렷한 차이를 보인다. 105㎜는 적을 그저 두드리는 정도의 화력이다. 그에 비해 155㎜는 상대 진지를 뒤집어 놓을 만큼 세다.
105㎜의 포격으로는 적의 진지를 그저 강타하는 수준이지만, 155㎜로 때릴 경우 적진지의 땅바닥은 모두 뒤집어진다. 나는 1950년 7월 김일성 군대에 밀리면서 낙동강 전선을 향해 남쪽으로 내려갈 때 부산에 급히 상륙해 일선으로 달려온 미군들이 당시 끌고 왔던 155㎜ 야포를 처음 봤다.
105㎜와 155㎜의 차이
내가 당시 이끌던 1사단의 참모들과 장병들은 그 야포를 보고 그만 놀라고 말았다. 우리가 보아오던 야포와는 아주 다른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우선 야포의 크기와 그에 탑재하는 포탄의 크기가 상상을 초월할 만큼 컸다. 눈앞에 나타난 155㎜를 보면서 우리는 그저 “어…”라고 감탄만 할 정도였다. 한 마디로 155㎜는 경이(驚異) 그 자체였다.
/국군 2군단 재창설과 함께 세운 병기창을 둘러보고 있는 백선엽 군단장(가운데).
그러나 언감생심(焉敢生心)이었다. 미군은 그 155㎜를 동원해 한국군을 도왔지만, 그 자체를 한국군에게 제공하지는 않았다. 따라서 우리 국군은 현대전에서 가장 필요한 무기를 운용할 방법이 없었다. 직접 사들이기에는 모든 사정이 허락하지 않았다.
그런 점 때문에 155㎜ 야포에 관해서 나는 이상할 정도의 집착을 보이기도 했다. 그런 155㎜를 새로 창설하는 한국군 군단에 배속하겠다는 얘기에 나는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이는 우리 국군을 도약시킬 수 있는 커다란 계기라고 볼 수 있었다. 역시 밴 플리트 장군다웠다. 그는 지리산 토벌 작전의 경과를 주의 깊게 살피면서 한국군 무장을 강화하는 시기를 저울질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마제트에게 “그렇다면 합시다”라고 분명하게 말했다. 천금과도 같은 기회였다. 미군이 제공하는 중화포를 건네받아 한국군을 튼튼하게 무장하는 절호의 기회를 잡아야 했다. 마제트는 그런 내 반응을 지켜본 뒤 곧장 서울의 미8군 사령부로 돌아갔다. 밴 플리트의 의중은 곧 실천에 옮겨졌다.
나는 지리산 토벌 작전을 우선 끝냈다. 최종의 마무리 작업은 수도사단에 맡겼다. 수도사단은 현지에 주둔하면서 토벌 작전의 마지막을 장식했다. 나머지 ‘백 야전사령부’ 요원들은 모두 나와 함께 춘천의 천전리로 이동했다. 그곳은 미 9군단의 주둔지 옆이었다. 천전리의 빈 땅에 막사를 치고 약 200명에 달하는 군단 창설 요원들은 숙영(宿營)에 들어갔다. 밴 플리트 사령관의 계획대로 우리는 그곳에서 새 군단을 만들기 위한 기초 교육을 받기로 했다.
후속 인사발령은 조금 의아했다. 이형석 준장이 참모장, 원용덕 준장이 부군단장으로 왔다. 두 사람은 나보다 10년 정도 연상이었다. 이형석 준장은 일본 육사를 나왔고, 원용덕 준장은 연세 세브란스의전을 나온 군의관 출신으로 전투 지휘관의 자리에 오른 선배였다. 특히 이 준장은 성격이 괄괄하며 입이 거칠기로 유명했다. 한국군 인사야 육군 참모총장이 하는 일이어서 내가 간여할 바는 아니었으나 당시 상황에 딱 들어맞지는 않았다.
/백선엽 신임 2군단장이 미 9군단으로부터 군단 깃발을 건네받는 모습.
두 ‘선배’는 다행히 내 입장을 잘 헤아려 줬다. 나 역시 두 사람의 입장이 곤란하지 않도록 언행과 처신에 각별히 주의했다. 미 9군단이 새로 창설하는 국군의 교육을 맡았다. 책임자는 미 9군단장 윌라드 와이먼 소장이었다. 그는 나를 직접 가르쳤다. 우리는 그 때 처음 ‘OJT(on the job training)’라는 용어를 접했다.
미 9군단장은 한국군 군단장인 나를 교육했고, 한국군 참모들은 미 9군단의 참모와 같은 사무실에 앉아 그들이 움직이는 모든 과정을 배웠다. 실제의 업무를 현장에서 직접 실행해 봄으로써 일을 익히는 방식이었다. 포병과 공병, 통신 및 기갑 등 제 병과(兵科)의 요원들 역시 미 9군단의 실무 책임자와 함께 일하면서 직접 업무를 배우고 익혔다.
한국군 증강의 절호 기회
미국의 사정은 당시로서는 그리 좋지 않았다.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군대를 창설하려고 서두르고 있어서 한국 전선에 신경을 쓸 여유가 부족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한국군을 무장시킨 뒤 병력을 빼 유럽의 전선으로 보내야 했다. 그런 전체적인 흐름에서 밴 플리트는 지리산 토벌 작전 직후의 시기를 잡았던 것이다. 밴 플리트는 그런 흐름을 가속화할 생각이었다.
그래서 먼저 선택한 작업이 1950년 10월 중공군의 참전으로 무너졌던 2군단을 재창설하는 일이었다. 군단 급 병력이 기동했던 지리산 토벌 작전의 경과를 지켜봤고, 그 작전이 성공적으로 마무리됨에 따라 당시를 적기(適期)라고 봤던 것이다. 아울러 밴 플리트는 적임(適任)의 한국군 지휘관으로서 나를 선택했던 셈이다.
중차대한 순간이었다. 그를 훌륭하게 펼쳐야 했다. 결론적으로, 중공군 참전으로 무너졌던 한국군 2군단은 1952년 4월 다시 일어섰다. 리처드 메이요 대령이 이끄는 미군 105㎜ 1개 대대와 155㎜ 2개 대대가 2군단에 배속됐고, 이와는 별도로 군단은 한국군 포병으로 이뤄진 155㎜ 4개 대대를 보유할 수 있었다.
흐름은 잘 타야 한다. 일정한 기류가 만들어져 흐름으로 이어질 때는 그에 잘 올라야 한다. 그 흐름은 분명했다. 한국군은 미군의 지원을 받아 현대화한 군대로 변모할 수 있는 기회를 맞이하고 있었다. 남과 나누기를 좋아하는 밴 플리트라는 사령관이 마침 한국 전선을 지휘하고 있었다. 그는 한국군을 위해 전폭적인 지원을 할 수 있는 인물이었다.
국군 2군단의 재창설은 따라서 의미가 컸다. 155㎜ 중포로 무장했고, 미군의 업무체계를 고스란히 인수해 안팎으로 현대화한 군단을 보유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에 그치지 않는다. 밴 플리트는 내친 김에 한국군 전체의 화력을 증강시킬 계획을 갖고 있었다. 모두 17개 대대 400문의 155㎜로 무장한 포병을 양성한다는 내용이었다.
국군 2군단은 그 핵심으로 작용했다. 한국군의 모든 포병은 훈련을 받고 2군단에 와서 교육을 받았다. 광주에 포병학교를 세우고 인원을 양성한 뒤 2군단에 배치해 실전을 거치도록 하는 과정이었다. 이들은 2군단에서 일정한 실전 교육을 거친 뒤 다시 자대로 보내졌다. 그로써 현대화한 한국군의 포병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63 일본군이 쓰던 '각반' 매고 출범한 한국군, 모든 게 부족했었다
(8) 아이스크림 장군 밴 플리트
그렇다면 왜 밴 플리트 미 8군 사령관은 한국군 증강에 유독 큰 관심을 보였을까라는 의문이 남는다. 물론, 앞에서도 소개했듯이 미군은 유럽 전선으로 자국의 병력을 보내야 했던 전략적 이유 때문에 한국 전선에 오래 붙어 있을 수 없었다. 여러 대안 중의 하나로 미군은 한국군을 증강해 단독으로 휴전 이후의 전선에 나서는 방법을 모색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밴 플리트 장군은 특별했다. 단기간에 획기적으로 한국군 전력을 증강시키는 방법을 모색하는 데 ‘혈안(血眼)’이 됐을 정도라고 해도 좋았다. 아주 적극적으로, 때로는 미 행정부의 시각에서 보더라도 ‘과격하다’ 싶을 정도로 한국군 전력 증강에 나서고 있었다.
전쟁을 지휘하는 최고 지휘관의 입장에서 그는 한국군의 어떤 가능성, 그와 함께 군대로서 지녀야 했던 기본적인 조건마저 갖추지 못하고 있음을 봤을 수도 있다. 그런 계기는 아주 일찍 닥쳐왔다. 그가 한국전선을 지휘하는 미 8군 사령관으로 막 부임했을 때였다.
앞서도 설명한 적이 있다. 그는 한국 전선에 부임하자마자 중공군의 1951년 춘계 1차 대공세에 직면한다. 서울을 다시 점령하려는 게 중공군의 의도였다. 그로써 중공군은 전쟁의 판세를 뒤집으려 했다. 밴 플리트는 서울 광화문에서 마포까지 야포 400문을 세워놓고 그런 중공군의 총공세를 꺾었다.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조선경비대 초기사진집에서, 경성 서대문 사진관에서 촬영하였다.
머잖아 소개할 예정이지만, 중공군은 자신의 주력을 중동부 전선으로 우회했다. 이어 강원도 인제군 현리(縣里)에서 춘계 2차 공세에 나섰다. 앞에서 적은대로 그곳서 한국군 3군단은 전선을 뚫고 침투한 중공군 1개 중대에게 후방의 요지(要地)를 점령당함으로써 군단 전체가 무너지고 만다. 6·25전쟁 중 한국군이 보였던 기록적 참패였던 이른바 ‘현리 전투’다.
밴 플리트는 중공군의 중동부 전선 침투와 한국군의 기록적인 패배를 목격하고서 충격에 휩싸였던 모양이다. 그 이후의 기록을 보면 밴 플리트는 국군 수뇌부에 한국군 전력 증강에 관한 필요성을 역설하는 장면이 자주 나온다. 곧 이어 펼쳐진 역습으로 중공군의 공세를 돌려세우기는 했지만, 군단 전체가 무너지는 장면을 보고 밴 플리트는 크게 당황했던 것이다.
한국군의 전력 증강은 큰 과제였다. 그러나 한국군 단독으로 그 작업을 실현할 수는 없었다. 한국군은 모든 면에서 커다란 ‘결여’를 드러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에게는 당시 아무 것도 없었다. 그저 있었다고 한다면 풍부한 인력(人力)이었고, 그런 인력을 병력으로 끌어와 굶주림과 헐벗음을 겨우 메워줄 식량과 피복류만을 댈 수 있는 정도였다.
모든 창고 열쇠는 미군 손에
당시 대한민국의 젊은 인력으로는 사실 100만 명 정도의 군대 양성이 가능했다. 식량의 공급은 그 정도의 병력을 먹일 만큼은 되지 않았어도 굶주림 정도는 면할 수 있게 할 정도였다. 그러나 그로써 군대를 이루지는 못한다. 손에 쥐는 개인 화기(火器)가 필요했고, 적의 머리에 퍼부을 곡사포 등의 화력도 필요했다.
/전쟁 중 국군 부사관의 식사 장면. 밥상의 음식은 한식, 바닥에 놓인 것은 미군이 지원하는 부식이다.
군대의 보급에서 대한민국이 스스로 해결할 수 있는 것은 1종인 식량과 2종인 의류의 일부였다. 나머지인 3종의 유류(油類), 4종 총포(銃砲), 5종 탄약(彈藥)은 그저 미군의 얼굴과 의중을 살피면서 그들의 처분에 따라야 했다. 그나마 우리가 스스로 해결한다는 1종 식량도 쌀을 제외한 밀가루와 소맥(小麥), 대두(大豆) 등은 대부분을 미군의 지원에 기대야 했다.
미군은 한국군의 지원에 선뜻 나섰다. 한국이 낯설고 먼 나라이기는 했으나 그들의 지원은 풍부했다. ‘마음씨 좋은 샘 아저씨’라는 말이 유행했던 것처럼 미군의 지원은 통이 컸다. 그러나 마구 주는 것은 아니었다. 철저한 검증이 따랐고, 때로는 인색하다고 해도 좋을 정도로 냉정했다.
나는 1946년 ‘군사영어학교’를 마친 뒤 창군 멤버로 군군의 창설 과정에 몸을 들였는데, 첫 임지가 부산의 5연대였다. 5연대 병력은 신발조차 제대로 없었다. 나는 당시 미 군정청 장교를 찾아가 일본군이 패퇴하면서 남기고 갔던 군화(軍靴) 인수 교섭에 나선 적이 있다. 창설 초기의 국군은 군화가 없어 일본군이 차던 ‘각반(脚絆)’을 그대로 사용하던 사람도 많았다.
나는 그런 사정을 설명하면서 “일본군이 남기고 간 군화가 부산 창고에 있다고 들었는데 지원해줄 수 없느냐”고 했다. 그러자 군정청의 미군 장교는 “당신들에게 나눠주라고 우리가 일본군 군화를 보관하고 있는 게 아니다”라며 냉소와 함께 내 청을 아예 무시했다.
전쟁이 벌어진 뒤 한국군이 미군의 지원을 이끌어내는 일은 그리 쉽지 않았다. 전차와 고성능의 야포 등 중무기의 지원을 요청해도 미군은 자신의 판단에 따라 지원할 뿐이었다. 따라서 미군을 상대하고, 그로부터 막대한 지원을 이끌어 내는 일은 결코 쉽지 않았다.
미군이 한국 전선을 관리하기 위해 운용하고 있던 큰 규모의 보급 창고는 영등포와 춘천에 있었다. 그 말고도 전략적인 요충에 별도의 창고들을 세워 전시에 필요한 물자를 관리했다. 그런 창고의 열쇠는 모두 미군의 손에 쥐어져 있었다. 그 미군의 창고를 열어 한국군의 전력을 뒷받침하는 데에는 상당한 명분과 교섭 능력이 따라야 했다.
밴 플리트만이 할 수 있었던 일
그런 와중에 한국 전선에 부임한 밴 플리트 미 8군 사령관은 전임자들에 비해 한국군 전력 증강에 아주 높은 관심을 보이고 있었다. 미군의 모든 보급 창고는 밴 플리트의 그런 의지에 따라 활짝 열릴 기미를 보이던 중이었다. 1951년 12월 ‘백 야전사령부’를 창설해 지리산 일대의 빨치산을 토벌함으로써 후방의 안정을 이룬 다음 밴 플리트는 한국군 전력 증강사업에 야심차게 나섰던 것이다.
/진해의 별장에서 망중한을 즐기는 이승만 대통령(왼쪽)과 밴 플리트 장군. 밴 플리트는 이승만과 더 할 나위 없이 좋은 관계를 유지하며 한국군 전력 증강에 나섰다.
밴 플리트는 당시의 한국에게는 아주 소중한 사람이었다. 그는 우선 이승만 대통령과의 관계가 더 할 수 없이 좋았다. 그의 전임자인 월턴 워커와 매슈 리지웨이 사령관은 이승만 대통령에게는 “고약한 친구”였다. 그 둘은 전선의 상황이 한국군의 부진으로 밀렸을 때면 이 대통령을 찾아와 “도대체 이게 무슨 군대냐”면서 힐난을 퍼부었다.
그런 이유 때문에 이 대통령은 워커와 리지웨이를 달갑지 않게 여겼다. 워낙 다급한 전선 상황이라 자존심 높기로 유명한 이 대통령이었지만 그들의 호통에 대꾸를 할 수 없었다. 그러나 밴 플리트는 달랐다. 제2차 세계대전 종전 뒤 그리스에 주둔하며 현지 왕실과 차분한 교섭을 벌여 공산 게릴라를 모두 없앤 경험 덕분이었다.
그는 이승만 대통령의 높은 자존심을 잘 떠받쳤다. 아울러 공산주의에 대한 이승만 대통령의 견해를 존경하며 따랐다. 자유와 민주에 대한 두 사람의 공감대도 깊고 넓었다. 그는 전선의 위기가 닥칠 때마다 창고의 문을 활짝 열어 유엔군과 한국군의 뒤를 떠받쳤다.
그런 밴 플리트가 드디어 본격적인 한국군 전력 증강에 나섰다. 우선은 강력한 중포(重砲)를 갖춘 현대적인 한국군 군단인 2군단을 재창설했고, 이어 전국 네 곳에 미 군단 예하의 야전훈련사령부(FTC)를 만들어 전선에 선 한국군을 재교육하기 시작했다. 도쿄에 있는 유엔군 총사령부의 매슈 리지웨이도 한국군 초급 장교의 교육에 관심을 보냈다. 그러나 한국군 증강에 관한 활발한 ‘동력’은 밴 플리트 8군 사령관이 뿜어내고 있었다.
아주 면밀한 계획이 마련됐다. 전황이 지금 휴전선 일대의 일부 요지를 점령하기 위한 아군과 적군의 고지전 형태로 교착을 보이는 상황에서 밴 플리트는 상황이 급하지 않은 전선의 국군을 후방의 FTC로 돌려 2~9주 동안 교육을 거듭했다. 그런 교육과정의 최우선 작업은 ‘검열’이었다. 전선 부대로서 지니고 있어야 할 무기와 장비를 우선 점검하는 과정이었다. 그런 검증 과정에서 국군은 모두 ‘부적격’이었다.
우선 처음부터 제대로 갖추지 못한 무기와 장비가 각종 전투를 거치면서 더 부족해졌기 때문이었다. 밴 플리트는 그런 한국군의 부족한 무기와 장비를 모두 채웠다. 한국에 있던 미군의 모든 창고를 최대한 열었고, 모자랐던 부분은 일본에 있던 탄약과 장비 창고에서 실어왔다.
그런 1차 검열 과정을 거친 뒤 한국군은 면밀한 훈련 계획에 따라 짧게는 2주, 길게는 9주 동안 훈련을 거듭했다. 한국군이 현대화한 군대로서 일종의 ‘격’을 만들어가던 과정이었다. 춘천 북방의 소토고미에서 국군 2군단을 재창설했던 작업은 그 시초를 이뤘다. 재창설식이 끝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전선 북쪽에 중공군이 모여든다는 첩보가 날아왔다.
64 애국심 투철했던 김종필 중령,기발한 아이디어로 중공군 잡아와
(8) 아이스크림 장군 밴 플리트
중공군은 6.25 전쟁 기간 내내 한국군을 ‘먹잇감’ 정도로 봤다. 만만한 상대 정도가 아니라 때리면 아무 말 없이 맞고 도망치는 존재로 여겼다. 실제 여러 전투에서 채록한 한국군의 증언에 따르면 한국군은 수저를 들고 밥을 먹다가도 “중공군이 온다”는 소리를 들으면 밥과 함께 모두를 내팽개치고 줄행랑을 치기에 바빴다고 한다.
치욕스러운 이야기지만 사실이었다. 우리가 싸움 앞에서 한없이 움츠러드는, 용기 없는 민족이라는 이야기가 아니다. 개개인으로 보면 한국군은 중공군에 비해 밀리지 않았다. 죽음을 무릅쓰고 앞으로 나아가는 용기도 없지 않았다. 단지 그들을 조직하고 훈련할 여유와 능력이 없었던 것이다.
따라서 그들은 한국군의 방어 지역을 노리고 덤벼드는 경우가 많았다. 미군의 방어지역은 가능한 한 피했다. 강력한 공격력과 방어력을 모두 갖춘 미군에게 덤벼들면 피해가 막심하다는 점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적과의 전선을 형성하고 있는 국군의 방어지역은 따라서 중공군의 출현에 상당한 관심을 기울여야 했다.
내가 밴 플리트 미 8군 사령관의 전폭적인 지원에 따라 2군단을 재창설하고, 당시 우리의 형편으로는 보유할 수 없었던 155㎜ 중화포로 무장을 하면서 현대화한 군단의 ‘격’을 갖춰가고 있던 1952년 5월에도 마찬가지였다. 중공군이 재창설 2군단의 전면에 모여든다는 정보가 날아들고 있었다.
/적진을 향해 퍼붓는 아군의 포격 장면.
적정(敵情)을 확인하기 위해 가장 필요한 일은 적을 포로로 잡아들이는 것이었다. 전면에 중공군이 모이고 있다는 첩보에는 밴 플리트 사령관 또한 매우 깊은 관심을 기울였다. 나는 특공작전을 벌이기로 했다. 각 부대의 요원들을 뽑아 특공훈련을 시킨 뒤 적진으로 침투시키기 위해서였다. 밴 플리트는 현장에 직접 찾아와 그런 특공훈련을 지켜보면서 각종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군단 예하의 6사단이 당시 많은 전과를 올렸다. 특히 기억나는 대목은 대대장 김종필 중령(전 국무총리)의 활약이었다. 그는 아이디어가 풍부했다. 단순한 군인이라기보다 문학적 감성이 퍽 발달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상상력 또한 발달했음인지, 다양하고 기발한 아이디어를 내서 휘하의 장병들을 보내 중공군 포로 다수를 붙잡아 왔다. 당시 김종필 중령이 내게 준 인상은 애국심이 강했고, 매사에 빈틈을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업무에서의 충실도가 아주 높다는 느낌도 줬다.
김종필 중령의 맹활약
곧 각 사단은 전선 전면에서 적지 않은 중공군 포로를 생포했다. 우선 두드러졌던 특징은 그 포로들의 출신이 아주 다양하다는 점이었다. 소속이 각기 달랐다는 얘기다. 그렇다면 우리의 전면에는 아주 많은 중공군이 집결했다는 얘기와 같았다. 나는 즉각 이 사실을 밴 플리트가 있던 미 8군 사령부에 보고했다.
웬만한 미 사령관은 그런 보고에 즉각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 좀 더 신중하게 적정을 파악한 뒤 행동에 나서는 게 일반적이었다. 그러나 밴 플리트는 즉각 판단을 내렸다. 아주 단호한 내용이었다. 밴 플리트는 “즉각 포격을 개시하라. 사전에 적을 제압하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탄약은 아끼지 마라. 필요하다면 제한 없이 포탄을 사용하라”고 말했다.
흔쾌함이었다. 아무런 주저도 없었다. 공산주의 중공군을 상대하는 그의 일관된 태도였다. 그는 미군의 지휘관 중에서는 돋보이는 사람이었다. 한국을 돕고, 나아가 공산주의 군대를 물리치는 일에서는 아주 적극적이었다. 밴 플리트의 그런 태도에 대해서는 미군의 반대가 적지 않았다.
/(왼쪽부터) 밴 플리트 미8군 사령관과 도쿄 유엔군 총사령관에서 이임한 매슈 리지웨이, 그리고 그의 후임인 마크 클라크 대장.
특히 밴 플리트의 명령에 따라 내가 군단 예하의 포병단장 메이요 대령을 불러 그 내용을 전하자, 그는 난색(難色)부터 표시하고 나왔다. 그는 포병으로서 오랫동안 생활한 노련한 장교였다. 미 포병학교인 포트 실에서 교관으로 오래 근무했던 까닭에 탄약 사용에 매우 민감한 사람이기도 했다.
그는 아주 못마땅한 표정으로 내게 말했다. “정확하게 목표 지점과 대상을 측정하지 않은 상태에서 포격하는 일은 규범에 맞지 않는다”면서 “더 관측을 벌인 뒤에 차분하게 포격에 나서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나는 “밴 플리트 사령관의 명령이다. 지시대로 이행하라”고 말했다.
미군은 항상 그랬다. 자신의 의견을 들어 문제를 지적하다가도 역시 상관의 명령에는 복종하는 자세를 취했다. 그냥 겉으로만 명령을 이행하는 게 아니라 나설 때에는 최선을 다 하려고 했다. 그는 내가 다시 명령을 내리자 “옛 써~!”하면서 포격 태세를 취했다.
오후 3시 무렵이었다. 군단 포병 7개 대대와 3개 사단 휘하 3개 포병대대가 일제히 적진을 향해 불을 뿜었다. 보병부대의 박격포들도 마찬가지였다. 우리 군단이 늘어선 동서 약 20여㎞에서 동시에 강력한 포격이 벌어졌다. 이는 사흘 동안 이어졌다. 군단이 발사한 당시의 포탄은 모두 2만 여 발에 달했다.
중공군의 반격은 없었다. 포격의 효과라고 나는 믿고 있다. 당시의 포격이 어떤 효과를 나타냈는지를 증명할 길은 없다. 단지 중공군은 당시 국군 2군단 전면에 새카맣게 모여든 뒤 공세를 벌이려 했다는 정황은 명확했고, 우리의 포격 뒤 중공군은 그냥 사라지고 말았다.
1년 여 뒤 이곳에서는 중공군의 최후 공세가 펼쳐진다. 전선의 북쪽이 적을 향해 불쑥 솟아올라 있는 ‘돌출부’를 이루고 있어서, 적의 입장에서 볼 때는 전선 관리에 치명적인 약점을 드러내는 곳이었다. 적은 이 ‘돌출부’를 제거하기 위해 안간힘이었고, 재창설한 2군단의 전면은 그런 중공군의 강력한 공세가 벌어지기에 가장 알맞은 장소였다.
‘밴 플리트 탄약량’의 탄생
나는 포격을 끝낸 뒤 관측 초소로 갔다. 그곳에서 망원경을 들어 적진을 살폈다. 적의 참호는 거의 “뒤집어져 있다”고 해도 좋을 정도로 막심한 포격의 피해를 입었다. 아래에 있던 흙이 전부 나와 위를 덮고 있었다. 화약으로 인해 흙의 상당 부분은 흰색을 뒤집어쓰고 있었다.
나는 현대전을 수행하기 위해 가장 필요한 중화포의 위력을 새삼 실감했다. 적은 그렇게 뒤로 물러나고 말았다. 나는 약 3개월 반 동안 재창설 2군단장을 맡았다. 군단을 현대화하기 위한 작업이 주를 이뤘으나, 중공군의 머리에 퍼부은 포격이 남겼던 인상은 매우 강렬했다. 전에도 중공군에게 밀리다가 부분적으로 승리를 이루기는 했으나, 국군이 현대화한 장비와 화력을 갖추고 본격적으로 중공군에게 위력적인 ‘한 방’을 먹인 사건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밴 플리트 탄약량’이라는 용어는 이전에 소개했다. 미 8군 사령관에 부임한 밴 플리트가 탄약 재고량 등과는 상관없이 적진을 향해 아주 많은 탄약을 소모했기 때문에 만들어진 용어다. 그 말이 만들어진 중요한 계기가 바로 2군단 전면의 중공군 포격이었다. 그 때 본격적으로 미 의회 등에서 밴 플리트 8군 사령관의 1일 탄약 소모량이 지나치게 많다는 문제를 제기하면서부터다.
나중에 다시 밴 플리트 사령관을 만났을 때 인사부터 전했다. 나는 “장군 명령 덕분에 중공군을 꺾을 수 있었다”고 했다. 미국 조야에서 ‘밴 플리트 탄약량’으로 곤경을 당하고 있던 그를 위로할 심산에서였다. 그러자 밴 플리트는 내 심중을 짐작했는지, 우선 씩 웃었다.
이어 밴 플리트는 “중공군에게는 강하게 나와야 한다. 적의 기선(機先)을 꺾었으니 그것 하나만으로도 충분하다. 한국군이 중공군에게 계속 밀리면 곤란하다. 한국군 전면에 나타나는 중공군을 강하게 때릴 수 있어야 한다. 이번에는 그 점을 잘 보여준 것 아니냐? 그 뒤로 중공군의 움직임이 없다. 탄약을 많이 썼다고들 이야기하는 사람이 있지만, 그 정도 비용으로 이 정도의 효과를 거뒀다면 훌륭하지 않으냐?”고 말했다.
국군 2군단은 일약 화제의 부대로 떠올랐다. 현대화한 전력을 제대로 갖춘 국군의 출발이라는 점, 미군이 향후 한국전선에서 철수할 경우 한국군의 전력증강을 어떻게 꾀해야 하는가를 보여줬다는 점, 미군 전력 이양의 모범적 케이스란 점 등에서였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우리를 찾아왔다. 리지웨이 후임으로 도쿄 유엔총사령관으로 부임한 마크 클라크 대장, 콜린스 미 육군참모총장, 영국군 원수와 그리스 육군참모총장 등이었다. 내 개인적으로도 이때의 경험이 매우 소중했다. 미군의 지원을 받아 한국군을 어떻게 현대화하느냐에 관한 중요한 시사점을 던져줬기 때문이었다.
65 정일권, 사단장으로 강등되자 "몸 아프다"며 두문불출
(8) 아이스크림 장군 밴 플리트
갑작스런 승진
나는 갑자기 육군참모총장이라는 자리에 올랐다. 1952년 7월이었다. 당시 부산에서 정치 파동이 있었다. 대통령을 직선제로 뽑고자 했던 이승만 대통령의 의중과 국회의 충돌로 벌어진 사건이었다. 이 대통령은 그해 5월 부산 일대에 계엄령을 선포하면서 대통령 직선제를 골자로 하는 헌법 개정을 추진했다. 그 와중에 이종찬 육군참모총장이 대통령의 요청을 거부함으로써 자리에서 물러나고 말았다.
나는 돌연 그 후임에 임명됐다. 내 나이 32세였다. 나는 왜 그런 선택을 받았을까. 당시로서는 그 점을 따질 여유가 없었다. 어느 날 갑자기 내게 전문이 날아왔다. 2군단장 집무실에서 받은 전문이었다. “육군참모총장에 임명됐으니 부산(임시 경무대)에 가서 대통령께 신고하라”는 내용이었다.
나는 당시 부산에서 벌어지던 정치 파동의 내용조차 잘 몰랐다. 정국(政局)의 추이에 관심을 두기에는 전선의 여러 가지 상황이 급절하기만 했다. 지금의 휴전선 일대에서는 적군을 상대로 치열한 고지전이 여러 곳에서 벌어지고 있었으며, 내가 맡은 2군단은 국군 현대화의 초석을 만들어가고 있었던 관계로 아주 분주했기 때문이다.
/대통령 간선제를 반대하는 부산 정치파동(1952.2)
나는 우선 서울로 향했다. 동숭동의 옛 서울대 자리에 있던 미 8군 사령부로 밴 플리트 장군을 찾아갔다. 내가 돌연 육군참모총장 자리에 오르는 곡절을 그로부터 들으려 했던 것은 아니다. 밴 플리트는 어느덧 내 인생의 선배로 자리를 잡고 있었다. 그에게서 육군참모총장에 오른 뒤 내가 어떻게 처신을 해야 할지 먼저 물었다.
그는 내 질문을 들은 뒤 잠시 생각에 잠겼다. 이어 밴 플리트는 고개를 들어 나를 보면서 “백 장군, 당신은 참모총장 임무를 잘 수행하리라 믿소. 당신이 거둔 지금까지의 전적(戰績)으로 볼 때 이 점은 분명합니다. 그래도 내 입장에서 덧붙일 말이 하나 있소. 우선 말을 많이 하지 마시오. 그리고 판단하기 쉬운 안건에 대해서는 ‘예스’냐 ‘노’냐를 분명히 하시오. 판단이 어려운 사안에 대해서는 그 자리에서 답변을 하지 마시오. 하루 밤 정도는 충분히 생각을 해 본 다음에 답변을 하시오. 부하들에게는 가급적 화를 내지 마시오”라고 말했다.
나를 아끼는 마음에서 한 말이었다. 전쟁을 거치는 동안 나는 지휘관이 어떤 사람이어야 하는가를 어렴풋하게 배웠다. 우선 침착해야 했다. 섣부른 판단은 아주 많은 화를 불러들일 수 있다. 아울러 부하를 아껴야 했다. 겉으로만 그런 척 하는 게 아니라,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동료애가 있어야 한다. 그런 여러 가지를 함축적으로 담은 말이 밴 플리트의 충고였다.
“자네 그만 두게!”, 이승만의 호통
그러나 그는 내게 숨기는 게 있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내가 육군참모총장에 오른 데는 그의 역할이 결정적이었다. 그는 부산 정치파동으로 이종찬 장군이 참모총장에서 물러날 때 그 현장에 있었다. 모두 세월이 지난 뒤 밴 플리트 장군이 내게 직접 들려준 말이었다.
/이종찬 육군참모총장.
당시 이승만 대통령은 집무실에서 밴 플리트 사령관, 이종찬 참모총장과 함께 있었다. 그 자리에서 이승만 대통령은 손가락으로 이종찬 장군을 직접 가리키며 “자네, 이제 자리에서 썩 물러나게”라며 호통을 쳤다고 한다. 아주 화가 난 모습이었다고 했다. 그런 이승만 대통령 앞에서 밴 플리트 장군은 배짱도 좋게 “후임은 어떻습니까…저는 아무래도 백선엽 장군이 적합하다고 생각합니다”고 말했다.
미군이 작전 지휘권을 갖고 있는 상황이었지만, 한 나라의 육군참모총장 인선에 관해서 미군이 개입할 명분은 없었다. 그러나 그런 명분은 간혹 실재하는 역량에 자리를 내주기 일쑤다. 당시 상황이 그랬다. 추천의 형식이기는 했으나 밴 플리트의 발언에는 무게가 실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이승만 대통령이나 밴 플리트 장군이나 이종찬 참모총장에게는 좀 ‘잔인하다’ 싶을 정도였다. 해임된 참모총장을 앞에 두고 두 사람은 후임자를 직접 거론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이승만 대통령은 그 자리에서 밴 플리트 장군의 권유를 선뜻 받아들였다고 한다. 그 만큼 미군의 힘은 강했다. 공산주의 군대와 싸우는 대한민국의 사정이 그랬고, 모든 기초 역량을 쌓지 못한 채 전쟁을 맞이함으로써 대부분의 영역에서 허약하기 짝이 없던 나라 사정이 그랬다. 곰곰이 따져 볼 때 이승만 대통령의 의중에는 내가 들어가기 힘들었다. 나는 전쟁이 벌어진 뒤 줄곧 굵직한 전적을 쌓았다고는 해도 이 대통령의 눈에 찼던 사람은 아니었다.
나는 ‘평안도 촌뜨기’였다. 전쟁이 벌어지기 전까지가 그랬다. 대통령은 전쟁이 벌어지기 전에는 내 이름을 들어보지도 못했다. 평양에 선두로 입성한 뒤 이름이 제법 알려지면서 이 대통령의 귀에 들어간 정도였다. 그러나 미군은 줄곧 내 주위에서 나를 면밀히 지켜봤다. 밴 플리트의 천거는 그런 상황에서 이뤄졌고, 어쨌든 이 대통령은 그를 받아들였다.
/전쟁 중에 맞은 광복절 기념행사에서 연설하는 이승만 대통령.
이종찬 총장은 자리에서 물러났지만 다른 탈은 없었다. 밴 플리트의 배려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 총장이 대통령으로부터 ‘괘씸죄’를 얻은 이유는 군 병력을 계엄 치하의 부산에 동원하라는 국방부 장관의 명령을 거절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작전 지휘권을 지닌 미군의 입김도 작용했으리라고 봐야 한다. 그 점은 다행이었다. 이종찬 장군은 그에 따라 미국으로 유학을 떠날 예정이었다.
야전 경험이 없었던 정일권
미군은 모든 것을 댔다. 화력과 장비, 그리고 막대한 양의 전쟁 물자 모두였다. 그러니 한국 사회에 미치는 힘의 크기는 상상을 초월했다. 32세에 불과한 나를 육군참모총장의 자리에 올린 힘도 당연히 미국의 것이었다. 아울러 여러 구석에도 고루 그런 힘이 미쳤다.
정일권(丁一權) 전 육군참모총장의 경우가 그랬다. 그는 전쟁 초반에 채병덕 장군의 후임으로 총장 자리에 올라 활약했다. 낙동강 전선에서 우리가 고전을 거듭할 때 미군과의 원활한 교섭을 이룰 수 있던 데에는 그의 활약이 컸다. 그러나 그 뒤로는 잘 풀리지 않았다. 특히 1951년 징병 대상인 장정(壯丁)들을 이끌다 부정과 독직으로 많은 이를 굶어 죽게 한 이른바 ‘국민방위군 사건’의 책임을 지고 총장 자리에서 물러났다.
그는 내가 총장 자리에 오르기 직전에 국군 2사단장으로 발령을 받았다. 역시 이승만 대통령과 논의했던 밴 플리트 장군의 ‘권유’ 때문이었다. 말하자면, 미군에 의해 전 육군참모총장이 사단장으로 내려앉은 것이다. 이 점이 아주 골칫거리였다. 정일권 장군은 그런 인사 발령 소식을 들은 뒤 급기야 문을 닫아걸고 나타나지 않았다. ‘두문불출(杜門不出)’의 정일권 장군 행위는 일종의 ‘시위’였다.
/전쟁 중의 백선엽 소장(왼쪽)과 정일권 육군참모총장.
그 인사발령은 밴 플리트의 의중이 진하게 배어있는 결과이기도 했다. 당시는 전쟁 중이었다. 따라서 군을 이끄는 지휘부도 전쟁에 걸맞게 짜야 한다는 미군의 의도가 만든 판국(版局)이라고 보는 게 옳다. 밴 플리트는 정일권 장군의 야전 경험이 적다는 점을 지적했던 셈이다. 아울러 야전을 거쳐 다시 올라오라는 배려이기도 했다.
그러나 심사가 틀어진 정 장군은 문을 열고 나오지 않았다. 내가 육군참모총장에 오른 뒤 처음으로 수행해야 할 ‘임무’는 바로 정 장군의 마음을 돌리는 일이었다. 군인은 야전의 경험이 중요하다는 미군의 실용적인 태도, 체면과 서열을 함께 중시하는 한국적인 문화의 충돌이기도 했다. 미군은 그런 점에서 눈치와 체면을 따지지 않았다. 오히려 정일권 장군을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태도였다.
정일권 장군은 국민방위군 사건으로 총장 자리에서 물러난 뒤 미국 포트 레븐워스 지휘참모대학 유학을 마치고 막 귀국해 있었다. 진해의 친구 집에서 “몸이 아파 쉬고 있다”면서 한 발짝도 나오지 않을 태세였다. 그러나 밴 플리트 장군 역시 자신의 뜻을 돌이킬 생각이 없었다. 대한민국 군대의 초기 명칭이었던 국방경비대 시절 정 장군은 4연대장을 맡은 ‘야전 경험’이 전부라서 사단에서 지휘 경험을 쌓아야 한다는 점을 굽히지 않았다.
나는 경비행기에 올라타 진해로 향했다. 초췌한 얼굴의 정 장군은 집으로 찾아온 나를 보자 “이제 군대 생활 접고 다른 일자리나 찾아볼 생각”이라고 말했다. 불만과 서운함이 가득한 표정이었다. 나는 “전쟁을 이끄는 미군이 야전 경험을 중시하다 보니 나온 결과”라며 “후배들에게도 모범을 보이는 게 좋다”고 간곡하게 설득했다.
66 8군사령관 한국군 전력 증강 계획 언급…"드디어 기회가 왔다" 속으로 쾌재
(8) 아이스크림 장군 밴 플리트
정일권 장군은 다행히 내 설득에 응했다. 그는 내가 자신이 칩거하고 있던 진해까지 찾아와 “2사단장으로 부임해 달라”고 하자 이튿날 내가 보낸 경비행기에 올라타고 사단장에 부임했다. 그는 이후 야전 경험을 쌓은 뒤 2군단장을 거쳐 내 후임의 육군참모총장으로 복귀했다.
이 점에서 우리가 생각할 대목이 있다. 전화(戰禍)에 허덕여야 했던 대한민국에게 미국은 절대적인 후원자였다. 그들은 막대한 물량을 지원했다. 그로써 대한민국은 전화의 참담함을 딛고 일어설 수 있었다. 특히 한국군에 대한 그들의 영향은 이루 말할 수조차 없을 만큼 지대했다.
그런 이유 때문에 정일권 장군의 인사를 비롯한 모든 지휘관급 장교의 보직 배치와 승진 및 강등 등을 미군이 좌지우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전쟁 중에 넘겨줬던 작전권은 어쩔 수 없다 하더라도 미군이 한국군 고위 지휘관의 인사를 모두 총괄하게 내버려 둘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현실적으로 미군의 입김이 미치는 것은 허용할 수밖에 없지만, 인사의 근간을 미군에게 맡길 수는 없었던 것이다. 따라서 미군과의 협력을 최대한 펼치더라도 우리 스스로 체계성을 지니면서 독자적으로 일어서는 길을 찾아야 했다. 나는 육군참모본부에 파견 나와 있던 미 고문관과 참모본부 요원들의 협력 토대를 단단하게 다졌다.
그들은 참모본부 부장들과 같은 방에서 일했다. 공산주의 군대와 전쟁을 치르기 위해서는 마땅한 협력 방식이었다. 나는 휘하의 참모들에게 함께 같은 방에서 일하고 있던 당시의 미 군사고문단(KMAG) 요원들과 업무협조를 더욱 원활하게 진행하라고 지시했다. 그들은 앞에서 소개했던 대로 우리가 필요로 하는 모든 물자와 장비, 탄약 등의 ‘열쇠’를 쥐고 있던 사람들이었다.
/1951년 병참학교 졸업식 장면. 병참 분야를 줄곧 맡았다가 1952년 준장으로 승진한 이후락은 나중에 박정희 대통령 밑에서 중앙정보부장을 역임했다.
우리가 필요하다고 물자와 장비 등을 맘껏 동원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그들이 응하지 않으면 창고의 문은 열리지 않았다. 그들의 승낙을 거쳐야 물자와 장비 등을 전선으로 옮길 수 있었다. 따라서 미 군사고문단 고문관들과 휘하 참모들의 협력은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나는 미 군사고문단의 단장인 라이언 소장과 일부러 자주 만났다. 사소한 일이라도 그의 협력이 필요한 사안이라면 나는 먼저 그를 찾아가거나, 만나자고 해서 본부로 들어오도록 했다. 그를 만나는 일에 나는 시간을 아끼지 않았다. 내가 그를 자주 만나야 휘하 참모들과 본부에 파견 나와 있던 미 군사고문관의 협력이 잘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내가 해야 했던 일
미군이 한국군에게 지원하는 모든 역량은 우선 라이언 미 군사고문단장의 양해, 이어 서울에 주둔하는 미 8군 사령관의 승낙, 최종적으로는 도쿄의 유엔군 총사령관의 재가를 거쳐서 우리에게 전해지고 있었다. 이 세 사람을 만나서 상황을 설명하고 한국의 실정을 이해시키며,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지원을 이끌어 내는 일은 순전히 나의 몫이었다.
라이언 소장은 특히 나와 자주 만났다. 육군참모본부와 미 군사고문단 사령부는 모두 대구에 있었다. 같은 시내에, 아주 가까운 거리에 있어서 나는 그와 시도 때도 없이 만났다. 점심에 특별한 약속이 없는 경우에도 그랬고, 심지어는 저녁 때 특별한 사안이 없어도 만나서 자주 의견교환을 했다.
나는 서울의 미 8군 사령부에도 자주 올라갔다. 마침 내가 지닌 보잘 것 없는 능력을 인정하고, 나를 한국군 최고 지휘관인 육군참모총장에 천거했던 밴 플리트가 사령관을 맡고 있었다. 밴 플리트는 6·25에 함께 참전했다가 북쪽으로 폭격 비행을 나선 뒤 행방불명, 숨졌을 것이 확실해 보이는 자신의 아들이 생각날 때도 나를 찾았다. 나는 그런 경우에는 아무 말 없이 길을 나서 그와 함께 그의 아들이 머물렀던 군산의 옥구 비행장을 찾아가기도 했다.
그렇게 나는 그들과 가까워졌다. 대한민국이 지닌 역량이 변변찮은 상황이었고, 그들의 지원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시절이었기 때문이다. 목표를 수행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가까워졌을 수도 있지만, 그런 과정을 겪다 보니 사이도 가까워졌고 일도 잘 풀어나갈 수 있었던 것이다. 미군의 협력이 너무나 아쉬웠던 우리의 사정을 두고 볼 때 더욱 그랬다.
/전쟁 직전 백선엽 대령(오른쪽에서 둘째)이 이후락(왼쪽에서 둘째), 김창룡(오른쪽 끝)과 찍은 사진.
그러면서 나는 한국군 인사를 우리 스스로의 필요와 판단에 따라 펼쳐가는 작업에 나섰다. 미군은 모든 것을 주고 있었지만, 장기적으로 우리 스스로 자립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해야 했기 때문이다. 미군은 너그러웠다. 모든 것을 손에 쥐고 놓지 않는 스타일이 아니었다. 자신의 필요와 이해(利害)를 날카롭게 저울질하는 성향을 보이지만, 명분과 실정에 맞는 일이라면 자신의 권한을 양도하는 데 결코 인색하지 않은 군대였다.
그들의 성향이야 여러 가지임에 분명하지만, 미군은 특히 합리성을 존중했다. 명분에 합당하다면 상대를 받아들이는 성향이 있었다. 아울러 자신들이 대한민국에게 절대적인 지원을 펼치고는 있지만, 모든 것을 “감 놔라 배 놔라”하는 식은 아니었다. 그래서 설득이 중요했다. 명분과 실제를 조화시켜 합리적으로 설득할 경우 그들은 쉽게 한국의 사정을 받아들이는 편이었다.
별 단 아들, 아버지에 꾸지람
그 무렵 한국 전선을 이끌던 밴 플리트 사령관은 그런 점에서 한국군에게 매우 소중한 존재였다. 그는 한국의 사정을 깊이 이해했고, 가능한 한 한국을 돕고자 했다. 나는 그 점을 충분히 활용했다. 우선 시급했던 사안은 한국 육군참모본부의 병과장(兵科長)을 승진시키는 일이었다. 당시 육군참모본부 병과장의 계급은 대령이었다.
그 병과장들이 각 육군본부 예하의 지휘관을 상대하기가 어려웠다. 군대는 모든 것이 계급을 위주로 돌아가기 때문이다. 아귀가 서로 맞지 않았다. 상대가 장성이라면 이쪽도 장성이 나서야 말이 통할 수 있었다. 그래서 나는 육군참모본부의 병과장을 무더기로 승진시키는 일에 나섰다. 우선 이승만 대통령의 재가가 필요한 일이었고, 아울러 미군이 양해해야 했다.
10여 명을 우선 진급시켰고, 그 뒤에는 모든 병과장에게 준장 계급을 달아줬다. 이승만 대통령은 내가 올리는 장군 진급 인사안을 모두 재가했다. 미군도 이에 대해 아무런 의견을 달지 않았다. 당시도 지금처럼 ‘별’을 다는 일은 영광이었다.
내가 진행한 무더기 준장 승진의 대열에 올라 있던 한 병과장은 승진한 뒤 제 방에다가 “하인(何人: 어떤 사람)이든 막론하고 노크를 하라”고 써 붙였던 일이 있다. 다른 사람에게는 결례가 아니었으나, “아들이 별을 달았다”는 소식을 듣고 대구 육군본부를 방문했던 그의 부친이 그 종이를 보고서는 붙 같이 화를 내며 아들을 꾸짖었다는 이야기는 나중에 내가 들었던 유쾌한 일화였다.
아주 영리한 인상을 주는 한 사람이 있었다. 그는 언변이 좋았고, 아이디어를 잘 냈다. 나와는 오래 함께 일한 적은 없었으나 평소 그런 이미지를 풍겨 나 또한 주목했던 인물이기도 하다. 이후락이었다. 나중에 박정희 대통령이 집권했을 때 권력 핵심을 이뤘던 전 중앙정보부 부장이다.
/1972년 비밀리에 북한을 방문한 이후락 당시 중앙정보부장(왼쪽)이 김일성과 악수를 하는 모습.
그 역시 내가 벌인 ‘무더기 승진’에 묻혀 그 때 준장으로 진급했다. 그는 줄곧 병참 분야를 맡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승진 당시에도 그는 대구의 육군본부에서 병참감을 맡고 있었다. 그 외에도 작전참모부장 이준식, 행정참모부장 양국진, 군수국장 백선진 등이 모두 준장으로 진급했다.
내가 육군참모총장에 올라 벌인 일은 적지 않았다. 자리에 가만히 앉아 있지 못하는 성격 때문이기도 했다. 그러나 당시의 대한민국 군대는 무엇인가 새롭고 의미 있는 일을 찾아 부지런히 움직여야 했다. 그냥 앉아 있기에는 국정이 아주 급박했다. 그렇다고 대한민국 군대가 혼자 해결할 수 있는 일이 많은 것도 아니었다.
당시로서 가장 절박했던 현안은 대한민국 군대의 전력 증강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하늘에서 떨어지는 빗물이 있어야 벼를 심을 수 있는 ‘천둥지기’의 신세였던 것이다. 미국이 움직여주지 않으면 우리가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었다. 그러나 마침 미군이 움직이고 있었다. 그것도 자신이 지닌 음식을 누군가와 늘 나눠먹기 좋아하는 사령관, 밴 플리트의 움직임이었다.
그가 대구에 있던 나를 서울로 불렀다. 사무실에 들어서는 나를 기다렸다는 듯이 “이제 한국군 전력 증강 계획을 짜야 할 때”라고 말했다. 나는 그 말의 앞뒤 사정을 잘 알았다. 나는 속으로 ‘이제 기회가 왔다’라고 되뇌었다. 대단히 중요한 변화가 몰아닥치고 있었던 것이다.
67 "아이젠하워를 설득시켜라. 내 사무실에서 브리핑 연습하라", 용의주도했던 밴 플리트
(8) 아이스크림 장군 밴 플리트
“아이젠하워가 온다.
기회다.” 2014.8.14. 화려하지는 않았으나 밴 플리트는 한국군의 내실화를 누구보다 진지하게 시도했다. 아울러 그는 중요한 작전이 벌어질 때, 그리고 한국군 전력 증강을 위한 작업에 꼭 나를 내세웠다. 중공군에 한국군 3군단 전체가 무너졌을 때 내가 이끄는 내가 지휘하던 1군단이 그 후방을 받쳐 전선의 위기 상황을 타개한 일이 아무래도 큰 계기였던 듯하다.
그는 이후 1개 군단 이상의 병력이 치밀하게 벌였던 지리산 빨치산 토벌 작전에 나를 내세웠고, 전쟁 초반에 무너졌던 국군 2군단을 재창설하면서 벌였던 한국군 현대화 작업에 다시 나를 내세웠다. 앞에서 소개한 내용처럼, 그는 더 한 걸음 나아가 이승만 대통령에게 나를 육군참모총장으로 천거했다. 이제 그가 다시 일을 벌일 태세였다. 그는 동숭동 미 8군 사령부로 찾아온 내게 한국군 전력 증강계획을 언급하더니
“이제 한국군을 20개 사단으로 늘려야 한다”고 했다. 조금 과장하자면, 밴 플리트의 그 말을 들었을 때 내 귀가 먼저 반응했던 듯하다. 귀가 번쩍 뜨였다는 얘기다.
/서울의 지게꾼이 아이젠하워 미 대통령 당선자의 한국 방문을 환용한다는 문구를 읽고 있는 모습./AP
한국 육군은 전쟁이 벌어지기 직전인 1950년 6월 당시의 기준으로 볼 때 약 9만 7000명 정도였다. 수도경비사령부까지 합쳐서 모두 8개 사단이었고, 1개 전투사단의 병력은 약 9000명 정도였다. 그러나 주지하다시피, 당시의 국군은 전쟁을 수행할 만한 화력과 장비는 거의 갖추지 못한 상태였다.
그러다가 졸지에 김일성이 벌인 남침 전쟁에 휘말렸다. 피눈물을 쏟는 저항으로 겨우 김일성 군대를 돌려 세웠으나 우리 자체의 병력과 화력으로는 155마일에 달하는 휴전선(휴전 협정과 함께 획정했다)을 지키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따라서 전력증강이 필요했고, 미군은 한국에 장기간 주둔하는 문제가 여러 가지로 부담스러워 이를 어떤 형식으로든지 밀고 나가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 시기가 예상보다 빨리 다가오고 있었던 것이다. 마침, 전선을 이끄는 밴 플리트 장군이 그를 먼저 언급하고 나왔다. 미군이 지원한다면 보다 현대화한 전력을 갖춘 전투 사단을 증강할 수 있었다. 밴 플리트는 우선 20개 사단을 얘기했다. 전쟁 전에 비해 2배 이상의 전력을 갖추는 일이었다. 미국의 의지가 확고하다면 대한민국 군대는 미군의 막강한 화력과 장비를 물려받을 수 있었다.
그는 한국군의 자립(Self standing)을 말하고 있었다. 당장 우리 역량으로는 이룰 수 없으나 미군의 지원을 받는다면, 그래서 안보가 튼튼해지고 국가 역량이 커진다면 한국군은 독자적인 안보 역량을 구축할 수 있었다. 밴 플리트는 “미군이 장기적으로 한국에 머무를 수는 없으니 앞으로는 한국군의 힘을 강화해 독자적인 방어에 나서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밴 플리트가 그를 언급하는 속내가 무엇인지는 잘 알 수 없었다.
미군과 함께 만든 계획서
그러자 밴 플리트는 “곧 미국의 새 대통령 당선자가 한국을 방문할 수 있으니 그 때 당신이 한국군 증강계획을 브리핑해야 한다”고 말했다. 제2차 세계대전의 마지막을 장식하고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던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미국 대통령 당선자가 한국을 방문한다는 얘기였다. 아울러 그 앞에서 내가 한국군 전력 증강의 필요성과 세부 계획을 브리핑하라는 내용이었다.
그의 말을 들으면서 나는 무조건 기뻤다. 이제 한국군의 전력을 획기적으로 증강할 기회가 다가온 셈이었다. 속으로는 만감(萬感)이 오갔다. 적지 않은 전쟁터를 다니면서 나는 미군의 실력을 확인했다. 그들의 막강한 화력이 늘 부러웠다. 그 모습 그대로 우리 군을 키울 수는 없지만 기초적인 역량을 획기적으로 현대화할 수 있다는 점만은 분명했다.
밴 플리트는 이어 “세부적인 계획을 이제부터 마련해야 한다”고 내게 말했다. 나는 그의 배려에 따라 라이언 미 군사고문단장과 함께 작업에 들어갔다. 지금 서울 필동 ‘한국의 집’은 당시 미 8군의 게스트하우스였다. 나는 그곳을 자주 이용했다. 대구 육군본부에서 미 8군 사령부가 있는 서울을 들를 때면 거의 이곳에서 묵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장기 투숙’에 들어갔다. 나는 그곳에서 라이언 미 군사고문단장, 밴 플리트 사령관의 참모들과 함께 2주 동안 한국군 전력 증강의 밑그림을 그려 나갔다. 우리 육군본부에서는 정래혁(丁來赫·후일 국회의장 역임) 작전교육국장을 시켜 기본계획을 마련토록 지시했다.
/1982년 당시의 정래혁 국회의장. 아래는 전두환 대통령이 대통령의 국회 국정연설을 15년만에 부활시키면서 국회에서 연설하는 모습.
당시는 차트의 활용도가 높았다. 중요한 계획은 모두 차트에 글과 그림을 적거나 그려놓은 뒤 보고를 받을 사람 앞에 걸어놓고 한 장씩 넘기면서 설명을 했다. 아이젠하워가 미 차기 대통령 당선자의 신분으로 한국을 방문할 경우에도 마찬가지였다.
밴 플리트는 매우 용의주도했다. 아이젠하워가 한국을 방문해 한국군 증강계획 관련 브리핑을 들을 장소가 그의 집무실이었다. 밴 플리트는 차트가 완성될 무렵 나로 하여금 자기 집무실을 활용할 수 있도록 배려했다. 아이젠하워 앞에서 충분하고 자신 있게 한국군 전력 증강의 필요성을 설명할 수 있도록 ‘예행연습’을 하라는 취지였다. 아이젠하워는 대통령 선거 경선 때 6·25전쟁의 휴전 필요성을 강조하고 다녔다. 아울러 “대통령에 당선된 뒤에는 한국을 방문해 직접 현장을 살피겠다”고 공언까지 했다.
그런 분위기를 밴 플리트는 잘 살핀 셈이었다. 그가 한국을 방문하는 상황을 활용해 한국군 전력 증강의 필요성을 확인케 한 뒤 그 작업을 밀어붙이자는 계산에서였다. 나는 차트 작성이 끝날 무렵 여러 번에 걸쳐 밴 플리트의 집무실을 사용했다. 그와 참모들이 듣는 자리에서 나는 열심히 차트를 넘겨가며 연습을 했다.
서울에 나타난 미 대통령 당선자
그러나 아이젠하워가 언제 한국에 올지는 알 수 없었다. 이미 대통령 당선자의 신분이라 경호 상의 문제로 일정 자체가 극비에 속했기 때문이다. 정확한 일정을 알려주는 사람은 없었지만, 나는 부지런히 밴 플리트 장군의 사무실에서 차트 내용을 점검하며 브리핑 연습에 몰두했다.
/이승만 대통령이 1952년 12월 3일 대통령 당선인 자격으로 한국을 방문한 아이젠하워를 맞아 악수하는 모습.
아이젠하워의 방한 일정에 관해서 미군들은 내게 한 마디의 언급도 없었다. 그만큼 철저하게 보안 규정을 준수하고 있었다. 중요한 브리핑을 앞둔 내게 귀띔이라도 해주리라 기대했으나, 그것은 그저 내 어리석은 기대에 불과했다. 시간은 그렇게 흘렀다. 나는 필동의 미 8군 게스트하우스에 묵으면서 분주하게 차트를 확인하고 브리핑 연습을 했다.
밴 플리트의 참모들은 여러 모로 도움을 줬다. 브리핑을 들으면서 발음을 교정해주거나, 때로는 용어가 적절한지의 여부도 검토해줬다. 그러면서 나는 점차 영어 브리핑 실력을 갖춰 나갔다. 미군에게 브리핑하는 일이야 여러 번 있었지만, 미 대통령 당선자 앞에서 한국군의 비약적인 성장을 꾀하는 자리여서 각고의 노력을 기울여야 했다.
12월 4일로 기억한다. 나는 여러 가지를 점검한 뒤 해질녘에 필동 숙소를 나섰다. 행선지가 어디였는지는 기억할 수 없으나 차량에 올라탄 뒤 시내로 향했다. 요란한 자동차 행렬을 본 적은 여러 번이었다. 기억에 남는 자동차 행렬은 우선 1950년 6월 28일 경 다급한 한국 전선을 시찰하기 위해 수원에 와서 영등포로 움직였던 맥아더 장군 일행이었다. 흙먼지 속으로 사라지는 많은 지프 차량의 행렬은 당시 김일성 군대에 쫓겼던 내게 큰 감흥을 줬다.
그보다 훨씬 요란한 행렬이 마포 쪽에서 광화문 방향으로 지나갔다. 유독 큰 검은색 세단 한 대가 눈에 띄었다. 누가 탔는지는 확인할 수 없었으나, 나는 마음속으로 ‘아이젠하워가 한국에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조등을 환하게 켠 미군 헌병의 지프차가 앞에서 호위했고, 그 뒤로도 아주 많은 차량들이 따르고 있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아이젠하워 당선자가 한국을 방문할 것에 대비해 거리 곳곳에 그를 환영하는 플래카드와 시설 등을 마련해 놓은 상태였다. 그런 한국의 열렬한 환영 분위기는 상관치 않겠다는 듯, 아이젠하워가 탄 차량의 행렬은 빠른 속도로 시내를 달려 지나갔다.
그렇게 하루가 저물었다. 아이젠하워가 서울에 왔다는 통보는 없었다. 나는 식사를 마치고 필동의 숙소로 돌아왔다. 밤이 깊었다. 조그맣게 나있는 숙소의 뜨락을 보면서 나는 생각에 잠겼다. 아이젠하워는 한국군 전력 증강에 흔쾌히 나설까. 나는 최선을 다 할 수 있을까. 많은 생각 끝에 잠자리에 들었다.
68 대통령 이승만을 바람맞힌 아이젠하워…약소국의 설움
8) 아이스크림 장군 밴 플리트
다음 날 8시였다. 동숭동 미 8군 사령부에서 전화가 왔다. “회의에 참석하라”는 내용의 전갈이었다. 짐작대로 드와이트 아이젠하워가 서울에 도착했던 것이다. 그의 숙소는 미 8군 사령부 안에 있었다. 아침에 회의가 열린다는 전갈은 내가 그간 준비해온 한국군 증강 계획을 아이젠하워 앞에서 브리핑해야 한다는 통보와 같았다.
나는 서둘러 필동의 숙소를 나와 동숭동 옛 서울대 문리대 자리로 향했다. 본관 앞에서 내려 회의실이 있는 2층을 향해 계단에 올라서려고 할 때였다. 1층 복도가 왁자지껄하더니 여러 사람이 걸어서 계단 앞으로 왔다. 아이젠하워 일행이었다. 그들은 막 아침 식사를 끝낸 뒤 회의실이 있던 2층으로 자리를 옮기고 있었다.
맨 앞에 걸어 나오는 사람이 아이젠하워였다. 인상이 부드러웠다. 그 뒤로는 마크 클라크 도쿄 유엔군 총사령관과 밴 플리트 사령관, 브래들리 미 합참의장, 레드포드 태평양함대사령관 등이 따르고 있었다. 나와 일행은 그들을 향해서 거수경계를 했다. 뒤에 서 있던 밴 플리트 사령관이 우리 일행이 누구인지를 아이젠하워에게 간단히 설명하는 듯했다.
아이젠하워는 얼굴에 웃음을 띠며 “굿모닝, 이렇게 여러 사람들이 모이니 노르망디 상륙작전 D데이 전날의 상황이 떠오르는군요”라며 화답했다. 이어 나는 그들과 함께 2층에 있는 밴 플리트 장군의 집무실로 이동했다. 회의는 우선 밴 플리트 사령관의 브리핑으로 시작됐다. 한국 전선의 현황 브리핑이었다. 그러나 그 시작이 내게는 참 이상하게 느껴졌다.
/이승만 대통령은 서울 중앙청 광장에 아이젠하워를 대대적으로 환영하는 행사를 준비했으나 아이젠하워는 끝내 그 자리에 나타나지 않았다.
밴 플리트 사령관은 우선 한국 전선에 와있는 아이젠하워 당선자의 아들 존 아이젠하워 소령의 안부부터 보고했다. “존 소령은 현재 3사단에서 근무 중입니다. 선거에서 각하가 당선자로 선출된 뒤에는 인사 조치를 취했습니다. 일선 대대장에서 사단 정보참모로 보직을 바꿨으며, 현재 그 자리에서 잘 근무하고 있습니다.”
나는 밴 플리트를 잘 이해할 수 없었다. 대통령 당선자의 아들 현황부터 보고를 하다니…. 공(公)과 사(私)가 뒤바뀐 것 아니냐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그러자 아이젠하워가 입을 열었다. “내 아들에 관한 인사 조치는 사령관 권한에 속하는 일입니다. 나는 아들 존 아이젠하워 소령이 어떤 보직을 받아도 개의치 않습니다만, 존이 적의 포로가 되는 일은 절대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나는 그때서야 미 대통령 당선자와 한국 주둔 미군 총사령관이 주고받는 ‘선문답’의 문맥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미 대통령 당선자는 그때까지 한국전선에 참전 중이던 자신의 아들에 관해 사사로이 언급한 적이 없었던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밴 플리트는 존 아이젠하워 소령의 인사에 처음 언급하면서 대통령 당선자의 염려 사항을 불식시키고 있었던 것이다.
신중하면서 부드러웠던 아이젠하워
곧 이어 진행할 게 내 브리핑인지라 그에 신경을 바짝 세울 수밖에 없는 처지였으나, 나는 왠지 그 점이 아주 부러워보였다.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일의 원칙과 경중(輕重)을 신중히 헤아리는 미군의 업무 태도가 내 마음속에 경탄(驚歎)으로 자리를 잡고 있었다. 이어 밴 플리트는 한국전선 상황을 간략하게 보고했다.
그는 보고를 끝마치면서 자리에 앉아 있던 나를 바라봤다. 다시 아이젠하워 당선자에게 눈을 돌리더니 “다음은 한국 육군참모총장 백선엽 장군이 한국군 증강계획에 관해 보고하겠습니다”라고 말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차트를 옆에 두고 섰다. 라이언 미 군사고문단장이 내 옆에서 차트를 한 장씩 넘겨주기 위해 나와 함께 섰다.
나는 긴장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미 대통령 당선자 앞에서, 한국군 전력 증강을 위한 설득 절차에 들어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밴 플리트 사령관의 배려에 따라 실제의 브리핑장인 그의 집무실에서 여러 차례 반복했던 ‘예행연습’의 효과는 뚜렷했다.
나는 “현재 한국군은 10개 사단으로 이뤄져 있는데, 이를 20개 사단으로 증강해야 한다. 화력과 장비를 제대로 갖춘 한국군 10개 사단을 증강한다면 미군을 비롯한 유엔군 등이 맡고 있는 지역을 크게 줄일 수 있다”는 취지로 브리핑을 이어갔다. 마지막에 준비한 한 마디를 더 보탰다. “미군 1개 사단이 주둔하는 비용으로 한국군 2~3개 사단을 창설할 수 있으며 미국이 협조하면 2년 안에 증강을 완료할 수 있다”는 내용이었다.
나는 그 뒤로도 아이젠하워를 여러 번 만난다. 그가 당선자 신분을 벗어나 실제 대통령으로 재직할 때였다. 그를 만날 때마다 나는 한국군의 전력 증강이나 대한민국 사정을 호전시키기 위한 몇 가지 제안을 했다. 아이젠하워는 대개 내 말을 경청했다. 그런 뒤에는 꼭 “원칙적으로는 동의한다”고 했다.
동숭동 미 8군 사령부의 밴 플리트 사령관 집무실에서 내가 한국군 증강계획에 관한 브리핑을 마친 뒤에도 아이젠하워는 똑같은 말을 했다. 그 뒤에는 다른 여러 말을 붙이지 않았다. 나중에도 늘 들었던 그 말, “원칙적으로 동의한다”는 발언은 그의 성격을 보여주는 단면이다. 그는 그만큼 신중했던 사람이다.
나는 사실 아이젠하워 발언이 의미하는 바를 잘 알 수 없었다. 그러나 브리핑을 마치고 나서 밴 플리트는 만족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이제 할 말은 다 했고, 다 잘 풀릴 거야”라는 메시지를 내게 던지는 듯했다. 아이젠하워의 표정은 내가 보기에도 좋았다. 그는 결국 한국에서 벌어지는 전쟁을 하루 빨리 끝내고자 한 사람이었다. 그러니 그가 한국군을 증강해 휴전선의 대부분을 한국군에게 맡기고자 하는 계획 자체에 반대할 이유는 없었던 것이다.
이승만 대통령의 파커
아이젠하워 일행은 이어 일선에 있는 미군부대 시찰에 나섰다. 먼 곳의 전선으로 가기에는 부담이 있었다. 아이젠하워는 행보에도 매우 신중했다. 그는 자신이 미국 대통령 신분이 아니라 대통령 당선자로 한국에 왔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따라서 공식적으로 한국의 이승만 대통령을 면담하는 일을 매우 꺼렸다.
아울러 미군부대 방문도 조용하게 하려 했다. 아이젠하워 당선자는 우선 경기도 광릉(光陵)에 있는 한국 수도사단을 방문한 뒤 미군부대를 방문할 예정이었다. 그날 날씨가 매우 추웠다. 이승만 대통령은 수도사단에 가서 아이젠하워의 일행을 맞이할 예정이었다.
/1952년 12월 한국을 방문한 아이젠하워 미 대통령 당선자가 이승만 대통령과 광릉의 수도사단을 시찰하는 모습./라이프
그러나 대통령이 마땅히 걸칠 옷이 없었다. 대통령은 양복 차림으로 나갈 예정이라고 했다. 영하 10도를 넘는 강추위였다. 대통령은 이미 72세의 고령이었다. 나는 급히 미 군사고문단장에게 대통령이 걸칠 외투를 준비해 달라고 부탁했다. 미군은 당시 우리에게는 매우 낯설었던 파커 한 벌을 즉시 구해왔다. 나는 파커를 들고 부리나케 광릉으로 향했다.
당시 이승만 대통령은 아이젠하워의 방한을 하나의 ‘큰 기회’로 간주하는 듯했다. 휴전을 서두르려는 미국의 속내를 잘 알고 있던 대통령이었다. 그러나 이 대통령은 100만 명에 달하는 중공군이 북한에 주둔하는 상황에서 휴전은 어림없다고 봤다. 휴전이 기정사실화하더라도 한국으로서는 국가 안보를 위해 미국으로부터 명확한 약속을 받아내야 했다.
그런 대통령의 기대와는 상관없이 아이젠하워는 자신이 대통령 당선자의 신분이라는 점을 유독 강조했다. 공식적인 접촉은 가능한 한 자제하겠다는 뜻을 분명히 했다. 광릉 수도사단에서 이 대통령과 아이젠하워는 수도사단을 함께 시찰했다.
그러나 아이젠하워는 곧장 경기도 북부에 주둔 중인 미 3사단과 미 9군단을 방문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서울로 돌아와 광화문, 옛 중앙청 광장에서 벌일 아이젠하워 환영행사장으로 갔다. 그러나 아이젠하워는 이승만 대통령을 비롯한 한국의 3부 요인, 각 부처 장관들이 기다리고 있던 중앙청 광장에 오지 않았다. 지금의 실정에서 보면 있을 수 없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우리의 요청에도 아랑곳하지 않은 채 아이젠하워는 자신의 일정을 고집했다. 중앙청 광장의 행사장에서는 이미 많은 인파가 아이젠하워를 기다리고 있었다.
일이 크게 어그러지고 있었다. 대한민국이 어엿한 국가임에는 틀림이 없었으나, 나라의 힘이 미국 대통령 당선자를 행사장으로 이끌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던 것이다. 대통령의 얼굴은 점점 더 어두워졌다. 단상에서 함께 있던 한국의 3부 요인과 내각의 장관들 표정도 일그러지고 있었다.
69 이승만과 아이젠하워의 거대한 신경전, 나의 중개로 결국 아이젠하워 굴복
(8) 아이스크림 장군 밴 플리트
이승만 대통령은 집요했다. 전쟁으로 휘청거리던 신생 대한민국을 어떻게 해서든지 제 자리에 올려놓기 위한 늙은 대통령의 안간힘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는 결코 주눅이 들지 않았다. 전선에 선 용사(勇士)처럼 그는 자신의 의지와 목표를 잃지 않았다. 아이젠하워 당선자는 대한민국 대통령과 요인, 장관들, 수많은 서울 시민의 기대와는 달리 환영식장에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다.
대통령과 요인들이 자리를 잡고 앉아 있던 무대 위는 군중들의 열기와는 달리 아주 착잡한 분위기에 휩싸였다. 아이젠하워를 기다리는 이승만 대통령 주변으로 여러 사람들이 오고 갔다. 아이젠하워의 동정을 시시각각으로 알리는 사람들이었다. 그런 보고가 도착할 때마다 무대의 분위기는 더욱 가라앉고 있었다. 아이젠하워는 제 일정을 고집할 뿐 환영식장으로 발길을 돌릴 기미가 전혀 없었다.
아이젠하워는 끝내 이승만 대통령의 기대를 저버렸다. 그러자 이 대통령이 연단 앞으로 나섰다. 늘 강조하던 ‘북진통일’을 중심으로 연설을 하기 시작했다. 군중들은 열렬한 환호와 박수로 그에 화답했다. 연설 말미에 대통령은 무대 뒤를 흘끗 돌아보더니 “지금 한국에 온 아이젠하워 차기 미 대통령은 제2차 세계대전을 이끈 전쟁 영웅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도 전쟁 영웅이 있습니다. 백선엽 참모총장이 바로 그 영웅입니다”라고 말했다.
/드와이트 아이젠하워와 외아들 존 아이젠하워. 한국전쟁에 참전해 낙동강 전투에서 공을 세웠던 존 아이젠하워는 전역 후 군 역사에 관한 많은 저서를 남겼으며 지난해 12월 91세로 타개했다.
나는 민망하면서 어안이 벙벙했다. 아주 갑작스럽게 대통령은 나를 전쟁 영웅으로 소개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순간 우레와 같은 시민들의 박수가 터졌다. 대통령은 나를 무대 앞으로 나오도록 했다. 나는 무대 앞에 나가 얼떨결에 경례를 올리고 말았다. 아주 겸연쩍은 일이었다. 난감했지만, 순간적으로 대통령의 뜻을 거역할 수는 없었다.
아이젠하워의 태도에 심사가 뒤틀렸던 대통령이었다. 그가 영웅이라면, 한국에도 그런 영웅이 있다는 즉흥적인 소개는 그래서 나왔을 것이다. 내가 진짜 영웅인지는 나도 잘 모르는 일이다. 대통령은 그런 소개를 통해 자존심을 회복하려는 듯했다. 그는 타고난 승부사였다. 의지가 강했고, 실천력은 더 강했다. 대통령은 아이젠하워에게 다시 도전장을 내밀 태세였다.
그 다음날이었다. 아이젠하워가 서울을 떠나기로 예정했던 날이었다. 대통령은 오전부터 사람들을 경무대에 모이도록 했다. 전날 환영식장에 있다가 그냥 귀가했던 요인들과 장관들이 다시 모두 경무대의 응접실에 모였다. 아이젠하워를 다시 오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이 대통령의 오기
그러나 신중함에 고집까지 강했던 아이젠하워는 역시 그에 응하지 않았다. 나는 아이젠하워가 경무대에 도착하는 순간을 위해 의장대와 군악대를 오도록 했다. 그런 의전을 수행할 요원들의 준비사항을 점검하는 게 내 일이었다. 그러나 분위기가 또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아이젠하워 쪽으로부터 좋은 기별이 전혀 오지 않고 있었다.
그는 경무대를 예방할 생각이 없었다. 자신의 신분이 대통령 당선자여서 공식적인 활동을 자제해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오전 일찍 경무대에 모여들었던 한국의 요인과 장관들은 불편한 기다림을 이어가야 했다. 당시 경무대의 응접실은 그리 넓지 않았다. 빽빽하게 모여 앉은 대통령과 요인, 장관들 사이에서는 깊은 침묵만이 쌓여갔다.
/전시의 경무대 사진. 전쟁 중이라 건물 전체에 위장막이 설치돼있다.
지금의 대한민국으로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 벌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기다리던 사람들은 결국 점심을 해결하기 위해 경무대 밖으로 삼삼오오 나가서 끼니를 때웠다. 이승만 대통령은 경무대에서 웬만한 경우에는 식사를 베풀지 않았다. 그럴 만한 공간도 부족했고, 여럿의 식사를 함께 준비할 인력과 시설도 없었기 때문이다. 오후 시간도 답답하게 흘러갔다. 아이젠하워가 있던 동숭동 미 8군 사령부로부터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
오후 늦게 이 대통령은 김태선 서울시장을 동숭동으로 가보라고 했다. 그는 미국에 유학했던 경력이 있어서 미국대사관과의 교섭이 빈번했던 인물이었다. 그러나 그는 곧장 돌아왔다. “사령부 정문 안에도 들어가지 못했다”고 말했다. 그러자 경무대 응접실의 분위기는 더욱 가라앉았다.
대통령은 급기야 나를 바라보더니 손짓을 했다. “이리 와보게, 백 총장.” 곁에 다가선 내게 대통령은 착잡한 표정으로 “자네가 한 번 다녀와보게”라고 말했다. 힘이 많이 빠진 대통령의 목소리였다. 나는 군말 없이 경무대를 나왔다. 지프에 올라타고 동숭동으로 직행했다. 대통령의 체면이 걸린 문제였다. 비록 대통령 당선자의 신분이라고는 해도 아이젠하워가 자존심 강한 이 대통령의 체면과 마음에 상처를 남긴다면 앞으로 양국의 협력에는 상당한 장애가 생길 수 있었다.
나는 경무대에서 동숭동으로 향하는 시간 동안 많은 것을 생각했다. 미국과의 협력은 아주 절실한 과제였다. 특히 한국군의 전력증강 사안에서 미군이 지닌 몫은 거의 절대적이었다. 어떻게 해서든지 아이젠하워 일행을 설득해 경무대에 오도록 해야 했다. 내가 탄 지프는 어느덧 사령부 정문에 도착했다. 정문을 지키고 있던 미군 헌병은 낯익은 내 차가 도착하자 문을 바로 열었다.
나는 2층의 사령관 집무실로 곧장 올라갔다. 밴 플리트는 자신의 집무실에 있지 않고 그 옆의 부속실에 있었다. 자신의 집무실은 아이젠하워에게 내준 상태였다. 밴 플리트는 돌연 나타난 나를 보더니 “나도 설득했지만 소용 없었다”고 말했다. 그런 뒤에 그는 짤막하게 “마크 클라크에게 직접 이야기해보라”며 사령관 집무실에 붙은 다른 부속실을 가리켰다. 클라크 사령관이 머물던 방이었다.
단도직입적인 설득
나는 그 방에 노크를 하고 들어섰다. 클라크 사령관도 마찬가지 대답이었다. “경호원들이 융통성이 없어 설득에 실패했다”는 얘기였다. 나는 단도직입적으로 말을 이어가는 게 좋다고 판단했다. “이제 한국은 병력 수만으로는 100만 대군을 갖출 수 있다. 공산주의에 맞서 함께 싸우는 이 100만의 한국군을 움직이려면 어떻게 해야 좋은지 아느냐? 아이젠하워 당선자가 이승만 대통령을 예방하지 않고 그냥 떠나면 그런 일이 절대적으로 어려워진다. 장군께서 설득해야 한다”고 말했다.
/설득 끝에 경무대를 방문한 아이젠하워 미 대통령 당선자가 이승만 대통령과 환담하고 있다(가운데). 왼쪽부터 밴 플리트, 마크 클라크, 이승만, 아이젠하워, 그의 아들 존 아이젠하워 소령.
클라크 사령관은 미국의 자존심을 최고로 내세우는 스타일이었다. 그러나 그는 이승만 대통령을 잘 알았다. 이 대통령의 학식과 미국에 대한 이해, 자유와 민주에 대한 철저한 인식을 존경했던 사람이었다. 그는 결코 길지 않은 내 ‘협박’에 얼굴이 금세 벌겋게 달아올랐다. 그는 아무 말 없이 벌떡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어 클라크 장군은 사무실 뒤로 난 작은 문을 열고 들어갔다. 아이젠하워가 머물고 있던 방이었다. 그는 곧 밖으로 다시 나왔다. 나를 보면서 클라크는 “경무대로 돌아가 기다려라. 아이젠하워 당선자가 곧 경무대를 방문한다”고 짧게 말했다.
내 자랑 같지만, 사실은 자랑이 아니다. 당시 상황은 모든 게 급절하기 짝이 없었다. 대한민국의 절박한 상황을 감안할 때 미국의 지원은 절대적이었다. 내 입장에서는 하루라도 빨리 미군의 지원을 얻어내 한국군을 무장해야 했다. 이승만 대통령과 미 행정부의 관계가 나빠진다면 그 시간은 한없이 늘어질 수 있었다. 나는 그 점이 무엇보다 염려스러웠다.
다행히 나의 설득이 주효했다. 나는 곧장 경무대로 가서 클라크 사령관의 언질을 대통령에게 전했다. 이 대통령은 “수고했네”라는 말도 없이, 아이젠하워를 맞을 준비에 착수하라고 지시를 내렸다. 나는 응접실 밖으로 나가 군악대의 준비상황을 다시 점검했다. 경무대 응접실의 안팎이 갑자기 부산스러워졌다.
6시 무렵이었다. 아이젠하워는 마침내 경무대에 왔다. 그는 클라크 사령관과 브래들리 합참의장, 그리고 한국전선에서 활약 중이던 아들 존 아이젠하워를 대동하고 경무대에 도착했다. 응접실로 들어가기 전 간단한 의장대 사열식을 했다.
아이젠하워는 아무래도 이승만 대통령과 요담하는 일을 꺼려했던 것으로 보인다. 한국에 대해 모종의 정치적 약속을 해줘야 할 수도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그런 깊은 사정을 잘 알 수 없었다. 단지 그때의 만남이 불발에 그쳤다면 자존심 강했던 이 대통령과 차기 미 행정부의 관계는 매우 냉랭해졌을 가능성이 컸다. 미 대통령 당선자가 아들인 존 아이젠하워를 데리고 왔던 덕분에 그때의 면담 분위기는 나쁘지 않았다. 아이젠하워는 1시간 남짓 경무대에 머물다가 여의도 비행장을 통해 일본으로 향했다.
70 전시의 미8군 사령관 중 한국군을 가장 사랑한 사람은 밴 플리트
(8) 아이스크림 장군 밴 플리트
김일성의 기습적인 남침에 의해 벌어진 전쟁으로 이 땅 전선에 나섰던 수많은 미군을 지휘한 미 장성들은 모두 나름대로 독특한 개성을 지닌 인물들이었다. 전쟁 초기 김일성 군대에 한없이 밀리던 우리의 뒤를 받쳐줬던 미 8군 사령관은 월턴 워커다.
그가 갑작스러운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나자 뒤를 이어 전선을 지휘했던 장군은 매슈 리지웨이이다. 그는 탁월한 지휘력으로 1·4후퇴 당시의 급박했던 상황에 대처했다. 그 뒤를 이어 사령관으로 부임한 사람이 이번에 자세히 소개하는 제임스 밴 플리트다. 그는 휴전이 이뤄지기 전인 1953년 1월에 한국을 떠난다. 후임은 맥스웰 테일러 장군이었다.
이 네 사람은 다 독특한 면모를 지녔다. 워커 장군은 별명이 ‘불독’이었다. 생김새가 우선 불독다웠다. 성정 역시 외모을 닮았다. 투지가 뛰어났고, 공세(攻勢)를 펼칠 때 맹견처럼 사납고 집요했다.
/전시의 월턴 워커 미8군 사령관(오른쪽).
리지웨이는 강철과 같은 사람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군의 공수부대를 이끌었던 맹장(猛將)이었다. 한국에 대규모 병력을 보냈던 중공군은 그의 공격력에 전전긍긍했다.
밴 플리트는 색깔이 또 달랐다. 한마디로 우직함의 미덕을 보여준 사람이다. 나아가 대한민국의 사정을 깊이 이해한 사람이었다. 한국을 어떤 방식으로든 도우려고 누구보다 애를 쓴 사람이다. 그 후임으로 온 테일러 사령관은 리지웨이처럼 제2차 세계대전 막바지의 노르망디 상륙작전에서 유명한 101 공수부대를 지휘했던 탁월한 지휘관이었다.
다들 화려한 야전 경력을 갖췄다. 그 넷이 한국전선에 부임한 시점은 공교롭게도 각자 개인적인 장점을 가장 잘 발휘할 수 있는 때였다. 불독의 사나운 기질을 지닌 워커는 낙동강 전선의 풍전등화(風前燈火) 위기에 대처하는데 절묘하다 싶을 정도로 적합한 지휘관이었다. 중공군 공세로 다시 서울을 내주고 전체 병력이 공황에 가까운 심리상태에 젖어 들어갈 무렵에 나타난 리지웨이는 강철처럼 단단해 적에게 가공할 공격력을 선보이는 인물이었다. 그는 전세(戰勢)를 확실하게 뒤집어 놓았다.
밴 플리트도 마찬가지였다. 한국군의 전력증강이 가장 필요한 시점에 나타난 그는 한국 사정을 깊이 헤아리며 화합을 이끌 줄 알았던 사령관이었다. 후임 테일러 장군은 날카로운 이지력이 돋보인 군정가(軍政家) 스타일이었다. 밴 플리트가 초석을 다진 한국군 증강사업은 그로써 치밀하게 펼칠 수 있었다.
적재적소 인사에 능했던 미 지휘부
미군 수뇌부는 그렇게 약 3년 동안의 6·25전쟁 기간동안 각 상황에 적합한 야전 사령관을 한국에 파견했다. 지휘관에 대한 정확한 이해, 치밀한 검증이 뒷받침이 됐기에 가능한 일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들 지휘관은 전임과 후임으로서 한국 전선에 온 뒤 나름대로 서로 갈등을 겪기도 한다. 미군이라고 사람 사이의 갈등이 없을 수는 없다.
낙동강 전선에서 맹활약을 벌이던 워커를 결코 고운 시선을 보지 않았던 사람이 있었다. 리지웨이였다. 그는 당시 미 육군본부의 참모차장으로 있으면서 낙동강 전선을 찾아온 적이 있다. 내가 직접 현장에서 들은 내용은 아니지만, 당시 리지웨이는 워커의 작전능력에 대해 상당히 비판적이었다. 일종의 험구(險口)까지 늘어놓았다고 했다.
내가 직접 들은 바로는, 당시의 리지웨이는 ‘몸이 근질근질했다’고 한다. 워커 대신 한국 전선의 지휘봉을 잡겠다는 열망이 컸다. 그래서 워커를 상당히 불편하게 만들었다고 한다. 불의의 교통사고로 워커가 세상을 하직하자 리지웨이는 자신의 염원대로 한국전선의 지휘봉을 잡았고, 그 특유의 전투력을 발휘해 중공군의 모진 공세를 막아냈다.
맥아더 유엔군 총사령관의 돌연 해직으로 리지웨이는 몇 개월 만에 그 자리를 다시 이어받았고, 얼마 뒤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총사령관으로 다시 영전했다. 그로부터 8군 사령관 자리를 이어받은 밴 플리트는 미 육사 입학으로 볼 때는 리지웨이의 2년 선배다. 그러나 진급이 여러 차례 늦어지면서 리지웨이 예하의 사령관 자리에 올랐다.
둘의 사이는 썩 좋지 않았다. 밴 플리트는 여러 불만을 직접 입에 올리기를 꺼려했지만, 그 둘 사이에 벌어진 일은 내가 그와 함께 한국전선을 이끌면서 제법 많이 파악할 수 있었다. 밴 플리트는 우선 한국전선의 북상을 강력하게 원했다. 전쟁 자체에서 승리를 거두고자 하는 군인의 자세에 충실했다는 얘기다.
그에 비해 리지웨이는 좀 더 정치적이었다. 전선에 선 야전 지휘관으로의 능력으로는 나무랄 데 없었으나, 자신의 군공(軍功)을 포장하고 가꾸는 데 더 열심이었다. 저 앞 어딘가에서 소개를 했지만, 밴 플리트와 리지웨이가 각 미 8군 사령관과 도쿄의 유엔군 총사령관으로서 한국전선을 지휘하면서 처음 의견 대립을 보인 때가 금강산 고저(庫底) 작전을 펼치려던 무렵이었다.
밴 플리트는 1951년 4~5월의 공세를 막아낸 뒤 거꾸로 적을 향한 공세에 나설 심산이었다. 그래서 계획한 게 금강산 고저 작전이었다. 그는 서해로 미 항모 2척을 끌어들인 뒤 서부전선을 안정시킨 다음 미 2개 군단과 내가 당시 이끌던 국군 1군단을 동원해 금강산 일대를 점령하려는 계획이었다. 나는 주문진의 1군단 사령부에서 밴 플리트 사령관이 보낸 작전계획까지 받았다.
“한국군보다는 일본군 증강”
그러나 이 작전은 돌연 취소됐다. 도쿄에 있던 유엔군 총사령관 리지웨이가 반대를 했기 때문이다. 전선의 동쪽을 크게 밀고 올라가려던 그의 계획은 그래서 좌절했다. 리지웨이는 전선 북상에 관심을 기울였던 밴 플리트에게 “39도선까지 밀어붙일 생각이냐”는 물음을 자주 던졌다고 한다. 평양과 원산까지 위협할 수 있는 39도선을 염두에 둔 것 아니냐는, 조롱(嘲弄)의 뜻이 담긴 말이었다.
39도선을 향한 공세는 한반도 전선의 새로운 국면(局面)을 여는 일이었다. 확전의 염려가 아주 높아 미 행정부가 가장 꺼리는 일이기도 했다. 정치적인 판단에 예민한 리지웨이는 그 점을 잘 알았다. 그래서 전선의 북상 자체를 시도할 생각이 없었던 것이다. 그에 비해 밴 플리트는 아주 우직한 군인이었다. 미 행정부의 정치적 판단은 그렇다 치더라도, 실질적인 효과를 거두기 위해서는 공세를 멈추지 말아야 한다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
그래서 밴 플리트는 서부전선의 고착을 기정사실화하면서, 상대적으로 세계의 주목을 덜 받는 동부전선에서 공격을 펼쳐 땅을 손에 넣자는 생각이었다. 군인으로서는 매우 충실한 아이디어였고, 한 치의 땅이라도 우리 쪽으로 끌어들이려는 대한민국의 정서에도 깊이 호응하는 계획이었다.
한국군 전력 증강에서도 둘은 큰 이견(異見)을 보였다. 밴 플리트는 앞에서 소개한대로 한국군 전력증강을 아주 절실한 과제로 보고 추진에 나섰다. 미 수뇌부의 입장과는 다소 달랐다. 미국 본토에서도 언젠가는 한국군 전력증강을 지원해야 한다고 판단했지만, 그 시기와 규모에 대해서는 신중한 입장이 대세였다. 회의적인 반응도 없지 않았다.
따라서 누군가 나서서 이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었다. 본토의 미군 수뇌부가 먼저 그 일에 나설 분위기는 전혀 없었다. 도쿄의 리지웨이 역시 마찬가지였다. 본토 펜타곤의 동정에 관심이 많았던 그는 서둘러서 한국군 전력증강에 나설 뜻이 별로 없었다.
밴 플리트의 회고록에는 그런 저간의 사정이 잘 드러난다. 그는 미 본토의 수뇌부와 도쿄의 유엔군 총사령부가 한국군 전력증강을 적극적으로 추진할 의사가 없다는 점을 잘 파악하고 있었다. 밴 플리트는 리지웨이에게 “빠른 시간 안에 한국군 전투 사단 10개를 더 증강해야 한다”고 건의했던 적이 있다. 그에 대한 리지웨이의 반응은 냉정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유럽전선 사령관이었던 아이젠하워(오른쪽)와 그 부사령관 마크 클라크. 클라크는 리지웨이의 뒤를 이어 한국전선을 지휘했다./라이프
밴 플리트 회고록에 따르면 리지웨이는 미군 수뇌부의 뜻이 그렇지 않다는 내용을 전하면서 “한국군보다는 오히려 일본 병력을 보강하는 게 더 급한 사안”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리지웨이는 “귀관의 뜻에 존경심을 지니고는 있지만, 미국은 보다 중요한 임무를 고려해야 한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그 분위기는 리지웨이의 후임으로 마크 클라크 대장이 부임하면서 달라졌다.
71 한국전에서 아들 잃은 밴 플리트, 그가 한국군 건설에 바친 열정의 뿌리
(8) 아이스크림 장군 밴 플리트
밴 플리트 미 8군 사령관은 그런 점에서 외로운 입장이었다. 한국군 증강에 관한 원칙적인 생각은 다를 게 없었으나, 시기적으로 언제, 그리고 어떤 규모로 한국군 전력 증강에 나서야 할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모아지지 않았다. 앞 회에서 소개한 것처럼 리지웨이는 한국군 전력 증강을 당장 추진하자는 밴 플리트의 입장에는 퍽 부정적이었다.
리지웨이는 한국의 경제적 상황을 먼저 고려하고 있었던 듯하다. 밴 플리트 회고록에는 리지웨이가 한국군 전력을 당장 증강하더라도 그를 유지하고 확대할 수 있는 한국의 경제력이 없는 까닭에 당시 한국군 전력 증강에 신속히 나서는 일이 바람직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 맥락에서 리지웨이는 “한국군보다 오히려 일본 군대를 보강하는 일이 더 급하다”고 했던 것이다.
밴 플리트의 직속상관이었던 도쿄 유엔군 총사령관이 그런 생각을 지니고 있었으니, 미 8군 사령관의 뜻은 워싱턴의 펜타곤에 있는 미 국방부에 전해지기 훨씬 전에 좌초할 가능성이 높았던 셈이다. 그런 리지웨이가 NATO 총사령관으로 영전했고, 그 뒤를 이어 마크 클라크 대장이 신임 유엔군 총사령관으로 부임하면서 분위기가 달라질 가능성이 엿보이고 있었다.
마크 클라크 역시 여느 미군 고위 장성처럼 ‘유럽주의’의 기질을 지닌 사람이다. 자신의 조국인 미국에 대한 자부심이 매우 높았고, 그에 따라 미국의 전략적 토대를 유럽 중심으로 바라보는 사람이었다. 따라서 아시아, 그것도 당시까지는 ‘극동(極東·Far East Asia)’이라고 여겼던 곳의 작은 일부인 한국을 중시하지 않을 수 있는 사람이었다.
/리지웨이 후임으로 도쿄 유엔군 총사령관으로 부임한 마크 클라크 장군이 한국전선을 방문해 미군 장병들과 함께한 모습./라이프
마크 클라크는 리지웨이와 조금 달랐다. 그는 제2차 세계대전 종전 뒤 공산주의 소련과 동유럽에서 담판을 벌였던 경험이 있다. 그의 회고록에는 당시 회담에 참여하면서 느꼈던 공산주의에 대한 환멸감이 아주 진하게 드러나고 있다. 그는 정통 백인의 미군이면서 유럽주의 시각을 지녔음에도, 리지웨이에 비해서는 훨씬 높은 강도로 공산주의를 비판하는 입장이었다.
따라서 그의 부임과 함께 밴 플리트의 한국군 증강에 관한 구상은 조금 더 힘을 받을 수 있는 계기가 만들어졌다고 볼 수 있었다. 실제 앞에서 소개한 것처럼, 무너졌던 한국군 2군단을 재창설하면서 강력한 155㎜ 포병 대대를 한국군에게 이양하는 작업, 그 뒤 한국군 포병을 양성하는 사안 등이 줄곧 순탄하게 이뤄진 것은 그런 분위기와 무관치 않다.
워싱턴, “시야가 좁다”고 힐난
그러나 고비는 더 기다리고 있었다. 미 육군본부를 비롯한 워싱턴의 수뇌부는 쉽게 달라지지 않았다. 밴 플리트는 줄곧 워싱턴으로부터 우려의 시선을 받는 상태였다. 먼저 소개한 내용처럼 그는 한국전선에서의 승리를 위해 포탄 등을 아끼지 않아 ‘밴 플리트 탄약량’이라는 단어까지 만들어질 정도로 워싱턴 조야에서 비판을 받은 적이 있다. 밴 플리트는 그런 분위기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본국에 귀환하는 미군의 대체 병력을 줄기차게 요구했다.
미 합참과 육군본부는 그런 밴 플리트를 고운 눈으로 보지 않고 있었다. 심지어는 비난까지 할 정도였다고 한다. 미 국방부는 그런 밴 플리트를 두고 “자신이 부임한 지역을 중심으로만 대처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워싱턴의 그런 분위기는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다.
한국전선과 함께 유럽에서 펼쳐지는 소련과의 총성 없는 대결을 염두에 두고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국방부를 비롯한 워싱턴의 고위 참모들은 “밴 플리트가 전 세계의 위협에 대처하기 위한 미군의 여러 수요를 무시하고 한국만 감싸고 있다”는 비난을 퍼붓기 일쑤였다.
/1952녀 60세 생일을 맞은 밴 플리트 사령관(오른쪽)이 한국전선에서 실종되기 직전의 아들 제임스 밴 플리트 2세 소령과 환담하는 모습. 제임스는 결국 사망으로 간주됐다.
그 점에서 밴 플리트는 거의 고립무원(孤立無援)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의 상황에 빠져들고 있었던 게 사실이다. 전 세계를 상대로 전략을 구사해야 한다는 워싱턴 수뇌부의 사고와 시각에 밴 플리트를 제외한 모든 미 고위 지휘관들이 찬성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리지웨이는 신임 NATO 사령관이어서 ‘극동’의 한국전선과 새로 경쟁하는 입장이었다. 따라서 한국에 우선적인 전력 지원을 하기보다는 넓은 시야로 유럽을 비롯한 다른 지역에도 지원을 펼쳐야 한다는 주장이 강했다.
그의 후임으로 왔던 마크 클라크 유엔군 총사령관도 그 점에서는 리지웨이, 나아가 워싱턴의 미군 수뇌부와 생각이 같았다. 밴 플리트는 리지웨이가 도쿄에 있을 때 그와 이 사안을 두고 자주 의견충돌을 빚었으며, 그 후임으로 온 클라크와도 갈등을 벌였다고 한다. 클라크는 부분적으로 밴 플리트의 입장을 후원했으나, 한국군의 신속한 전력증강을 위한 전폭적인 지원에는 소극적이었다는 얘기다.
의견을 낼 때는 자신의 의견을 끝까지 밀고 가는 사람이 밴 플리트였다. 그러나 상황은 결코 녹록치 않았다. 워싱턴 수뇌부는 미 8군에 대한 병력보충을 거절하기 일쑤였고, 한국군 증강 정도에 따라 미군의 전투 사단을 한국전선에서 철수시켜 일본에 주둔시키라는 명령을 내리기도 했다. 밴 플리트는 그런 미군 수뇌부의 결정에 순순히 따랐다.
그러나 그의 생각은 바뀌지 않았다. 미군 수뇌부가 주장하는 논리를 받아들이지 않았던 것이다. 그는 워싱턴이 주장하는 세계 각 지역의 위협은 그저 위협에 불과하다는 생각을 굽히지 않았다. 그는 한국전선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그곳에서는 실제의 전쟁이 벌어지고 있기 때문이라는 생각에서다.
그런 상황에서 벌어진 일들이 앞에서 소개했던 것처럼 한국군 2군단의 재창설이고, 한국군 초급 장교 및 지휘관 급 장교들에 대한 교육이었다. 따라서 한국군 2군단의 재창설과 이들을 현대전의 총아였던 155㎜ 중화포로 무장시키는 일은 매우 중요했다. 그런 계획이 차질 없이 펼쳐질 수 있느냐의 여부는 밴 플리트의 한국군 전력증강에 관한 실행과 깊은 관련이 있었기 때문이다.
부활절에 보낸 메시지
그는 뚝심이 있었다. 그래서 나는 그의 성정(性情)을 표현할 때 우직(愚直)이라는 단어를 사용했다. 그러나 그의 철학을 받쳐준 것은 스스로 지닌 풍부한 야전의 경험이었다. 워싱턴 수뇌부도 그 점을 잘 알았다. 밴 플리트는 워싱턴에 있던 미군 수뇌부의 어떤 참모들보다 야전의 경험을 풍부하게 지녔던 장군이었다. 그는 결국 자신의 그런 자력(資歷)을 바탕으로 식지 않는 열의(熱意)와 꺾이지 않는 신념으로 자신의 뜻을 관철했다.
/한국군 전력 증강에 관한 소신과 행동으로 밴 플리트는 세계적 시사주간 잡지 타임지의 표지 인물로 자주 등장했다.
나는 그런 밴 플리트의 뜻과 조그만 접점을 형성하는 위치에 있었다. 그 점은 내게 행운이기도 했다. 나는 밴 플리트의 의지를 읽어가며 한국군 전력증강에 함께 나섰다. 그래서 그의 여러 면모를 잘 읽을 수 있었다. 그는 내게 자주 샌드위치와 오렌지를 나눠주면서 “같이 먹자”고 했듯이, 그 성격 그대로 건국 직후 전화(戰禍)의 폐허 위에 섰던 대한민국에 아주 큰 관심과 배려를 보여주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1953년 1월 미 8군 사령관에서 물러나 은퇴했다.
그때까지 그는 한국군 4개 사단을 증강했다. 그로써 다시 전선에 섰다가 철수해야 하는 미군의 자리를 채웠다. 매우 신속한 작업이었다. 그 점은 이승만 대통령이 반드시 이루고야 말겠다는 ‘한국군 20개 전투사단’의 꿈을 펼치는 중요한 계기이기도 했다.
밴 플리트는 당시의 한국으로 볼 때 아주 고마운 미 장성이었다. 그의 열의가 없었으면 한국군 전력증강은 신속하게 펼쳐지기 어려웠다. 많은 고비를 맞아 기우뚱거릴 가능성도 있었다. 그는 자국 정부로부터 전해지는 많은 멸시와 편견을 딛고 결국 한국군 전력증강의 토대를 닦은 인물에 해당한다.
밴 플리트는 도대체 무슨 생각에서 한국을 돕기에 열정적으로 나섰던 것일까. 그 속내를 다 들을 수는 없었다. 그는 자신의 공로를 먼저 내세우는 사람이 아니었다. 아주 가깝다고 할 수 있는 내게도 그는 가슴에 품은 고뇌와 번민을 쉽게 털어놓지 않았다.
그의 회고록을 보면서 한 대목에 내 눈이 멈춘 적이 있다. 그의 아들 제임스 밴 플리트 2세가 군산 옥구 비행장을 떠나 북한으로 갔다가 실종된 뒤였다. 아들의 실종은 곧 죽음을 의미했다. 그 여러 사정은 앞에서 몇 번 소개했다. 밴 플리트는 절망의 시간 일부를 자신의 아내, 그리고 지인들에게 편지 쓰는 일로 보냈던 듯하다. 그는 다정다감한 어투로 아내를 위로했고, 관심을 보여준 지인들에게는 의연한 말투로 오히려 그들을 위로했다.
그해 부활절이었다. 그는 한국전선에서 아들을 잃은 모든 미국의 부모들에게 위로의 메시지를 전했다고 한다. “저는 모든 부모님들이 저와 같은 심정이라고 믿습니다”라며 시작한 그의 메시지는 이렇게 끝을 맺고 있다. “오래 전에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은 세상에 없습니다.” 내 눈길은 이 대목에서 아주 오래 머물렀다.
72 "휴전으로는 이승만 설득할 수 없다"…밴 플리트, 주한대사 직 일언지하에 거절
(8) 아이스크림 장군 밴 플리트
어두운 표정으로 한국을 떠나다
전쟁을 피해 부산으로 내려와 있던 서울대학교 임시 캠퍼스에서 명예박사 학위 수여식이 있다는 전갈이 왔다. 주인공은 밴 플리트 장군이었다. 1953년 1월이었다. 나는 대구의 육군참모본부를 떠나 부산으로 향했다. 그가 떠나기 직전 서울대에서 건네는 명예박사 학위가 한국의 입장을 끔찍이도 아꼈던 밴 플리트 장군에게 얼마나 큰 위안을 줄까.
대한민국으로서는 밴 플리트에게 해 줄 것은 많지 않았다. 다행히 서울대학교에서 명예박사 학위를 수여하고, 대한민국 정부의 태극무공훈장을 건네주는 일이라도 있으니 다행이었다. 밴 플리트가 한국을 떠나는 자리에서 벌어지는 웬만한 행사에는 가능한 한 참여할 수밖에 없었다.
서울대 임시 캠퍼스에서 열린 명예박사 수여식 때 밴 플리트는 예의 여유 있는 미소를 잃지 않았다. 그러나 수여식과 기념 촬영을 하는 자리에서 바라본 밴 플리트의 얼굴에는 어딘가 어두운 그림자가 있었다. 사랑하는 아들을 잃었던 전선으로부터 이제 떠나야 하는 아비의 심정도 있었을 테고, 못내 이루지 못한 전선에서의 승리가 아쉽다는 정한(情恨)도 배어 있는 듯했다.
그는 약 2년에 걸쳐 한국 전선에 머물렀다. 중공군에게 밀렸던 전선을 회복하는 데 빼어난 지휘력을 발휘했고, 한국군의 전력증강을 위해 물심양면으로 힘을 보태던 장군이었다. 그럼에도 그 날의 명예박사 수여식은 어딘가 좀 쓸쓸했다. 평소에 비해 기운이 빠진 듯한 밴 플리트의 어깨가 유난히 돋보였다.
/1953년 1월 부산의 임시 서울대학교 캠퍼스에서 밴 플리트 장군를 위해 명예박사 수여식이 열렸다. 행사 뒤 기념촬영한 모습.
그는 승리를 위해 싸우는 군인이었다. 그에 비해 워싱턴의 미군 수뇌부는 ‘승리’보다는 ‘패하지 않는 전쟁’에 더 많은 관심을 두고 있었다. 브래들리 미 합참의장이 그랬고 콜린스 육군참모총장도 마찬가지였다. 미군 수뇌부는 대개가 한국에서의 전쟁을 모양새 있게 마무리하는 데 급급했다는 얘기다.
밴 플리트는 그런 분위기를 모르지 않았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희망을 걸었던 대상이 아이젠하워 대통령 당선자였다. 그는 주지하다시피 제2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마감한 전쟁 영웅이었으며, 밴 플리트 본인과는 미 육사인 웨스트포인트 동기생이었다. 그런 아이젠하워가 대통령에 당선해서 곧 분위기를 돌릴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희망이 밴 플리트에게는 조금이나마 남아 있었다고 볼 수 있다.
대통령 당선자 신분으로 아이젠하워가 서울을 방문했을 때 한국군 전력증강에 관한 브리핑을 마쳤던 점은 앞에서 설명했다. 밴 플리트는 1953년 1월 현역에서 은퇴한다. 한국을 떠나 미국에 도착한 밴 플리트는 각종 환영행사 등에 참석하면서도 아이젠하워 등 요인들을 만날 때마다 “한국 전선에서 우리는 승리할 수 있다”며 끝까지 분위기 반전을 시도했다.
워싱턴에서 벌인 마지막 설득
그러나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선거전에서 ‘전쟁 끝내기’를 공약했던 상황이었고, 좀 더 넓은 시각에서 소련과 동유럽 및 중국 등 사회주의 세력에 대항해야 한다는 전략 구도를 짰던 워싱턴 미군 수뇌부의 심경에도 변화가 일지 않았다.
그런 상황에서 한국을 떠나는 밴 플리트의 심정이 편할 리 없었다. 실제 그는 1953년 2월 한국을 떠날 때 행한 기자회견에서 1951년 10월과 11월 벌인 공세의 좌절을 못내 아쉬워했다. 그 때 공세를 지속적으로 이어갔다면 전쟁에서 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고 판단했다는 것이다.
그는 워싱턴에 가서도 이런 취지의 발언을 계속 했다. 그는 그런 점에서 맥아더와 같은 맥락을 지닌 군인이었다. 맥아더는 워싱턴의 ‘사려 깊은 외교적 시야’를 우습게 본 사람이었다. 공산주의자와 대화가 통하지 않는다는 믿음에다, 전쟁을 벌였다면 상대의 수도에까지 진격해 항복을 받아내야 한다는 철학을 지닌 장군이었다. 밴 플리트는 그런 점에서 맥아더와 아주 흡사했다.
그러나 때가 너무 늦고 말았다. 워싱턴의 정가에서는 밴 플리트를 의심하고 있었다. 콜린스 육군참모총장은 밴 플리트의 그런 언행을 두고 “정치판에 뛰어들려고 한다”고 발언했고, 이 말을 전해들은 밴 플리트는 “도대체 그가 왜 그런 발언을 하는지 이해할 수 없군…”이라며 끌탕을 쳤다고 한다.
밴 플리트는 미국으로 돌아간 직후 주한 대사로 부임하지 않겠느냐는 제안을 받는다. 그가 워싱턴에서 여러 인사들을 만나 “한국 전선에서 반드시 승리해야 한다”고 역설한 뒤 고향인 플로리다에 막 정착했을 때였다. 아이젠하워 대통령 정부에서 국무부 차관에 올랐던 월터 스미스(Walter Smith)가 메신저 역할을 맡았다.
/1952년 12월, 미국 대통령 당선자 아이젠하워(왼쪽)가 한국전선에서 아들 존 소령을 만났다. 아이젠하워는 전쟁을 종결시킬 방법을 찾기 위해 한국을 방문했다./바움 제공
월터 스미스는 플로리다 목장의 밴 플리트를 찾아와 “한국의 이승만 대통령이 정전협정을 반대하고 있다. 그는 단독 북진까지 주장하며 정전협정 체결에 반대하고 있다. 이 대통령과 친분이 있는 장군께서 주한 미 대사를 맡아주면 좋겠다고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말했다”는 취지로 내용을 전했다.
밴 플리트는 즉석에서 거절했다고 한다. 그는 “이 대통령이 당신들의 말을 따르도록 하기 위해 정전 자체에 반대하는 내 생각을 바꿀 수 없다는 점을 잘 알고 있지 않은가?”라고 말했다. 그래도 월터 스미스는 굽히지 않았다고 한다. 그는 “이승만 대통령도 장군의 의견이라면 반대하지 않을 것”이라고 다시 설득을 벌였다.
밴 플리트의 입장은 확고했다. 그는 “결코 안 되는 일이다. 당신은 내가 절대 할 수 없는 일을 하라고 강요하는 중이다. 그렇다면 나는 차라리 사표를 내야 할 것”이라며 다시 제안을 일축했다고 한다. 완고한 밴 플리트의 입장을 전해들은 아이젠하워는 결국 대사 임명 계획을 철회했다.
90세에도 160㎞로 차를 몰다
이런 점에서 보면 “정치적 의도가 있어 이상한 말을 하고 다닌다”고 했던 당시 미 육군참모총장 콜린스의 판단은 옳지 않다. 밴 플리트는 군인으로서의 순수한 입장으로 ‘한국 전선에서의 승리’를 주장했던 것이다. 펼쳐놓은 전선에서는 반드시 승리를 거둬야 한다는 강력한 소신을 지녔던 사람이 바로 밴 플리트였다.
그는 자신의 고향인 플로리다에 있는 목장과 관련 사업에 뛰어들었다. 제2차 세계대전을 겪고, 그리스 반군 게릴라 소탕 작전의 성공적 수행에 이어 한국 전선에서 이름을 높였던 밴 플리트는 플로리다의 유명인사 대접을 받았다.
그는 다른 한 면모로도 제법 유명했다. 4성 장군 출신으로 고향의 유지이기도 한 그가 플로리다에서 아주 빠른 속도로 차를 몰고 다녔기 때문이다. 거의 100마일(160㎞) 이상의 속도로 빠르게 돌진하는 그의 차량은 여러 사람에게 화제였던 모양이다. 그의 운전은 90세 이후에도 이어졌다. 목표를 향해 후퇴와 우회보다는 직진(直進)만을 거듭했던 군인으로서의 밴 플리트 성격이 그 차량의 질주와 어떤 관련이 있을까. 곁눈질을 하지 않았던, 그래서 적을 두고 벌이는 전쟁에서는 오직 승리만이 중요하다고 했던 그의 성향이 그와 아무 연관이 없다고는 할 수 없겠다는 게 내 생각이다.
그는 또 플로리다의 여러 유지들로부터 “주지사 선거에 나가라. 당신 정도면 충분한 자격이 있다”는 정치 입문 권유를 받았다고 한다. 그럴 때마다 밴 플리트는 “그냥 당신들이 나가라. 나는 그와 전혀 관련이 없는 사람”이라고 퉁명스럽게 되받곤 했다는 것이다.
/6.25전쟁 기간인 1952년 7월 3일 이승만 대통령(앞 좌석)이 미8군사령관 밴 플리트 대장, 제주도 제1훈련소장 장도영 준장(뒷줄 오른쪽부터)과 제주도를 시찰하는 모습./정부기록보존소
그는 그러면서 한국에 대한 관심과 열정을 계속 키웠다. 한국과 미국의 최고(最古) 교류단체인 ‘코리아 소사이어티’의 발족과 발전을 주도했다. 아울러 한국의 전후(戰後) 지원 문제를 두고 미 행정부의 자문역을 맡아 활동하는가 하면 실제 집행과정을 감독하기 위한 순회대사로도 활동했다.
그는 퇴임 뒤에도 한국을 자주 방문했다. 그의 후임 미 8군 사령관인 맥스웰 테일러 장군은 사실 그 점이 매우 거북했다고 한다. 전임자가 자신의 임지에 자주 나타나니 신경이 쓰이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100마일로 차를 모는 ‘직진(直進) 스타일’ 군인 성격의 밴 플리트는 그에 전혀 구애받지 않고 자신의 열정 그대로 한국을 돕는 일에 몰두했다.
그렇다. 그는 오직 승리만을 위해 뛰었던 미국의 장군이었다. 공산주의 위협에 직면했던 대한민국에 진정한 승리가 무엇인지를 알았던 사람이기도 했다. 그래서 이승만 대통령과의 우의(友誼)가 아주 깊었다. 이승만 대통령이 하와이에서 망명객으로 세상을 떠났을 때도 그는 주저 없이 그의 곁으로 달려갔다.
73 "위대한 보병 중의 보병", 그는 생애 마지막에도 아이스크림을 나눠 먹었다
8) 아이스크림 장군 밴 플리트(끝)
밴 플리트의 말년은 평온했다. 전쟁터를 휘돌다가 돌아온 그를 고향 플로리다는 따듯하게 맞았다. 목장을 비롯해 일부 사업을 확장하려는 의지도 보이면서 밴 플리트는 요란하지는 않으나 활기에 찬 여생을 보냈다. 그러나 한국에 대한 애정만큼은 식을 줄 몰랐다. 그는 ‘코리아 소사이어티’의 창설을 주도해 끊임없이 한국에 대한 지원을 펼치는 데 관심을 기울였다.
또한 여러 기회를 잡아 한국을 방문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인상에 남는 장면은 이승만 대통령과의 인연을 소중히 생각하는 그의 자세였다. 이승만 대통령은 1960년의 4.19에 대한 책임을 지고 하야(下野)한 뒤 하와이에 망명객 신분으로 거주했다. 이 대통령은 1965년 7월 서거했고, 밴 플리트는 그 소식을 들은 뒤 하와이에 가서 이 대통령의 운구 행렬에 참가했다. 그는 전쟁으로 고아가 된 한 한국 소녀를 깊이 후원했다.
그는 한국 전선을 이끌면서도 거의 입양한 딸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그 소녀를 도왔다. 밴 플리트의 후원으로 곱게 자라던 소녀는 특히 학습 능력이 아주 뛰어나 경기여고에 진학했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한국 전선에서 이임한 뒤 고향으로 돌아간 밴 플리트는 지속적으로 그 소녀를 지원했다. 그러나 병을 앓았던 소녀는 밴 플리트의 성원에도 불구하고 세상을 먼저 떴다. 나는 밴 플리트 사령관이 한국 전선을 이끌던 무렵 그가 소녀를 후원한다는 사실을 들어서 알고 있었다. 그러나 소녀는 나이 많은 밴 플리트보다 먼저 세상을 떠남으로써 귀국했던 후원자의 가슴에 다른 상처 하나를 더 남기고 말았다.
/젊은 시절의 밴 플리트(왼쪽).
그는 한국의 전쟁고아에도 많은 관심을 기울였던 것으로 알고 있다. 밴 플리트는 미 8군 사령관으로 재직하면서도 고아 수용시설에 깊은 관심을 기울였고, 시간을 쪼개 그곳에 들러 적지 않은 물품을 보태고 돌아오는 적도 많았다. 그러나 밴 플리트는 자신의 그런 행동을 알리는 데에는 매우 소극적이었다. 나와 친분이 깊었음에도 그는 한국의 소녀를 후원한다는 사실에 대한 언급을 매우 꺼렸다.
그는 박정희 대통령과도 친분이 깊었다. 이승만 대통령의 뒤를 이어 5·16을 통해 권력을 장악한 박정희 전 대통령 또한 밴 플리트가 어떤 심정으로, 그리고 어떤 자세로 한국을 돕는지 매우 잘 알았다. 밴 플리트는 여러 활동을 펼치면서 한국을 돕는 데 계속 열정을 보였고, 이는 5·16으로 들어선 박정희 전 대통령 정부 인사들에게도 잘 알려졌다.
96세에 면허 다시 취득
밴 플리트는 은퇴 후 플로리다에서 활발하게 움직였다. 미국 정부의 요청이 있을 때는 동아시아 군사 문제에 관한 자문에 나섰고, 미군의 전투준비 태세 점검을 위한 자문에도 기꺼이 나섰다. 특히 그는 공산주의와 싸우는 아시아 국가들을 미국이 왜 더 지원해야 하는가를 지속적으로 역설했다고 한다.
그는 천성(天性)이 군인이었던 듯하다. 고향의 도로를 100마일 이상의 속도로 주행한 그의 운전 실력은 노년에도 계속 화제였다고 한다. 그의 외손자가 전하는 바에 따르면 밴 플리트가 나이 96세 때 운전면허 유효기간이 끝나 면허장을 다시 찾은 얘기가 나온다.
/1953년 현역에서 은퇴한 밴 플리트(가운데)가 부인 헬렌 여사(오른쪽)와 고향 플로리다에 도착할 때의 모습.
면허관은 96세의 은퇴한 대장 출신을 알아볼 리 만무했다. 면허관은 우선 그의 시력을 테스트했고, 이어 면허 갱신을 위해 지팡이를 짚고 나온 그의 연령(年齡)을 문제 삼았다고 한다. 그러자 밴 플리트는 “내 시력은 문제가 없다”면서 시력 테스트를 완벽히 통과했고, 면허관이 지팡이를 문제삼자 지팡이를 차 뒷좌석으로 집어 던지면서 “이곳에 걸어올 때 필요해서 짚었던 것이고, 차를 몰 때는 당연히 필요가 없다”고 호언했다는 것이다.
그 후로도 밴 플리트는 계속 차를 몰았다고 한다. 90세가 넘은 나이에도 밴 플리트는 워싱턴에 볼 일이 생겼을 경우 고향 플로리다를 떠나 워싱턴까지 왕복하는 길에 차를 직접 몰고 나섰다고 한다. 믿을 수 없는 활력이다. 젊었을 적 미식축구를 통해 단련한 체력이라고 해도 그 정도의 왕성함을 유지하기는 참 어려운 일이다.
나는 그 점이 아깝다. 곧은 성정과 왕성한 활력으로 밴 플리트가 한국군 전력 증강의 뒤를 더 받쳐줬더라면 한국군이 빨리 실력을 키우고, 나아가 한 치의 땅이라도 공산군의 수중으로부터 더 빼앗아 올 수 있었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그렇다. 그러나 대세는 이미 그의 은퇴를 기정사실화한 상태였고, 그를 되돌릴 힘은 대한민국과 그에게 없었다는 점이 안타까울 뿐이다.
그는 한국을 정말 사랑한 장군이었다. 그는 여러 곳에 사무실과 별장 등을 두고 활동했다. 그러나 그가 마지막으로 운명한 곳은 플로리다 그의 목장이었다. 그 목장의 집무실 이름을 밴 플리트는 ‘한국의 방’이라고 지었다. 아울러 그의 회고록을 집필한 폴 브레임에 따르면 밴 플리트는 한국을 “나의 고향, 나는 고향으로 돌아간다”라고 자주 언급했다고 한다.
그리스도 그의 주둔지였으나, 말년의 밴 플리트는 한국에 대한 자신의 기대와 사랑을 아낌없이 펼쳐 보였던 듯하다. 특히 한국의 산업화에 속도가 붙었던 1970년대에는 주변 사람들에게 “한강의 기적”이라며 이를 매우 자랑스러워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1985년 이후에는 다리를 절기 시작해 움직임이 불편했다. 이는 그 전 해에 세상을 뜬 아내 헬렌과도 관련이 있어 보인다. 어쨌든 그는 그 무렵부터 활동의 범위가 크게 줄어들었다.
마지막 소망 ‘88 서울 올림픽’ 참석
그럼에도 그는 1988년 서울에서 올림픽이 열리게 되자 서울행을 강력하게 희망했다고 한다. 회고록에 따르면 밴 플리트의 주치의는 “이 상태로는 도저히 움직일 수 없다”며 극구 만류했다고 한다. 서울 방문을 위해 구체적인 계획까지 짰던 밴 플리트는 아주 실망했다고 한다. 그러나 서울행의 꿈을 접으면서 밴 플리트가 남긴 말도 명언이다. “군인으로서 어떻게 명령을 어기겠느냐”였다.
/1954년 고향 플로리다에서 지역 유지로 활동할 때의 밴 플리트 모습.
나는 이번에 그를 꽤 많이 추억했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그는 한국 전선에 홀연히 나타난 미군 장성이다. 그러나 한국군의 전력 증강이 발 빠르게 이뤄질 수 있었던 것은 거의 그의 공로라고 할 수 있다. 한국을 보는 시선이 그렇게 우호적이지만은 않았던 무렵, 한국과 한 가닥 인연의 줄도 없이 나타나 다른 어느 누구보다 한국인의 단점과 장점을 알아보고 그를 채우면서 북돋으려 했던 사람이 밴 플리트였다.
그는 자기 것을 남과 나눌 줄 알았던 사람이었다. 나는 그의 성정을 표현할 때 오렌지나 샌드위치를 많이 준비해 와 나와 나눠 먹었던 점을 자주 거론했다. 그는 그렇게 자신이 지닌 것을 마음이 맞는 사람에게 스스럼없이 나눠주려 했던 사람이다.
그를 소개하는 이 글의 작은 제목이 ‘아이스크림 장군 밴 플리트’다. 그는 늘 부드럽고 달콤한 아이스크림을 즐겼다. 그는 아이스크림 또한 남과 나눠 먹는 것을 즐겼다. 동숭동 미 8군 사령부 등 여러 곳에서 맛있는 아이스크림을 발견하면 주위의 사람들과 나눠 먹기를 즐겼다. 그래서 우선 그의 면모를 떠올리다가 ‘아이스크림 장군’이라는 말이 생각났던 것이다.
그는 100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그가 100세 생일을 맞이하던 날 고향 플로리다는 그를 위해 따뜻한 기념식을 열었다. 그 기념식에서 밴 플리트를 모시던 옛 부하 몇 명이 다가와 그에게 “장군께서는 군인 중의 군인, 보병 중의 보병이십니다”라는 작은 헌사(獻詞)를 바쳤다고 한다.
내 생각도 그와 같다. 그는 군인 중의 군인이요, 보병 중의 보병이었다. 적을 향해, 그리고 승리를 쟁취하기 위해 끊임없이 다가서는 군인 중의 군인, 보병 중의 보병이었다. 그 기념식이 끝난 뒤 밴 플리트는 역시 그답게 기념식장의 많은 이를 그의 목장으로 초대했다고 한다. 그리고 밴 플리트는 그 사람들에게 아이스크림을 대접했다고 한다.
나는 요즘에도 양식(洋食)을 먹을 때면 가능한 한 아이스크림을 주문한다. 단 음식 많이 먹지 말라는 주치의의 충고를 떠올리면서도 말이다. 그는 내게 뭘 가르쳤던 것일까. 앞에 놓인 아이스크림을 보면서 나는 그를 줄곧 떠올린다. 그는 내게, 적어도 당시의 대한민국 많은 이에게 결코 잊힐 수 없는 위대한 군인이었다.
74 술에 취했던 그날 새벽, 김일성 군대가 38선을 넘어왔다
(9) 전쟁의 시작
전쟁을 이해하는 사람은 없었다
60여 년 전 벌어진 6·25전쟁에서 전쟁을 제대로 이해하는 대한민국 군 지휘관은 거의 없었다. 중국 장제스(蔣介石) 국민당 정부의 군대에서 경력을 쌓았던 김홍일 장군, 일본 육사 출신으로 실전을 치렀던 김석원 장군 정도가 전쟁을 조금 이해한다고 할 수 있을까. 그러나 두 장군 역시 대규모로 벌이는 전쟁에서 경험을 쌓은 것은 아니었다.
대대급 병력의 전투에서 참여해 본 경험이 거의 다였다. 대한민국을 이끌었던 당시의 이승만 대통령 역시 마찬가지였다. 국제무대에서 약소국이 지닌 서러움을 잘 알고 외교적 전략을 통해 대한민국의 입지를 다지는 데는 아주 탁월했던 분이었지만 전쟁 자체는 잘 알지 못했던 대통령이었다.
전쟁 당시 국방부를 이끌었던 신성모 장관도 그랬다. 그는 선원 출신이었고, 상하이(上海)를 기반으로 국제노선을 오가는 상선(商船)의 선장을 맡았던 게 가장 큰 이력이었다. 어느 누구도 전쟁을 제대로 알지 못했던 시기였다. 북한도 마찬가지였다. 그럼에도 김일성의 섣부른 야욕은 이 땅에 거대한 전쟁을 불렀다.
/존 포스터 덜레스 미 국무성 특사가 38선 시찰을 하면 촬영한 사진. 왼쪽부터 존 무초 주한대사, 신성모 국방장관,덜레스.
나는 1950년 4월 전까지 광주에서 국군 5사단을 지휘하다가 임진강 전면을 방어했던 1사단의 사단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당시 대한민국은 개성을 우리 땅으로 안고 있었다. 그러나 부임 직후에 개성 일대를 살펴보니 방어 전면이 너무 넓다는 점이 마음에 걸렸다. 나는 언제라도 북한의 김일성 군대가 남침을 시도하리라 봤다. 그 가능성이 얼마인지와는 상관없이 국군 1사단장으로서의 나는 전쟁 가능성에 대비해야 했다. 나는 전쟁이 돌발하면 개성을 지키기가 어렵다고 봤다. 1개 사단으로는 90㎞에 달하는 개성 방어 전면을 담당하기가 거의 불가능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임진강 남쪽의 파평산~적성 일대에 참호를 파서 주방어선을 설정한 다음, 그 뒤로 3선까지 이어지는 방어 계획을 확정했다. 당시 대한민국 군대는 혹시 있을지 모를 김일성 군대의 남침에 대비하기 위해 전선의 사단에 방어 계획을 가다듬으라고 지시했다. 그에 따라 나는 개성 이남의 진지 공사에 돌입했다.
그렇게 분주히 방어 계획 작성에 열중하던 나는 그해 6월 10일 경 발령을 받았다. 시흥의 육군보병학교에 가서 고급 지휘관 교육과정을 이수하라는 내용이었다. 그에 따라 서울의 신당동 집에서 시흥으로 출퇴근하며 교육을 받았다. 차량 등 일선 지휘관에 대한 지원은 없었다. 매일 대중교통을 이용하며 부지런히 시흥을 다녔다.
무시했던 전쟁의 조짐들
김일성 군대의 동향은 그때까지 줄곧 관심사였다. 내 개인적인 관심사 정도가 아니라, 대한민국 정부와 군대가 줄곧 주목했던 동향이었다는 얘기다. 내가 1948년 정보국장의 자리에 있었을 때도 없는 예산에 많은 돈을 들여 사람을 파견하면서 모았던 게 북측 군대의 동향에 관한 정보였다. 그때에도 북한은 이미 적잖은 힘과 노력을 기울여 전쟁 준비에 나선다는 점을 파악할 수 있었다.
1950년에 접어들면서 김일성 군대의 동향은 더욱 분주해졌다. 6월 들어서는 그 정도가 훨씬 심해졌다. 그래서 채병덕 육군참모장 등 수뇌부는 6월 11일을 기해 전군에 비상경계령을 내렸다. 그러나 어쩐 일인지는 모르겠으나, 김일성 군대의 남침이 전격적으로 벌어지기 하루 전 그 경계령이 풀렸다. 6월 23일 24시를 기해 전군에 내려졌던 경계령이 풀리면서 수많은 장병들이 외박과 휴가를 나갔다.
24일의 분위기는 아주 평화로웠다. 나는 마침 시흥의 보병학교에서 치를 시험에 대비하고 있었다. 토요일이었고, 평소보다 더 안온한 분위기에서 책을 들여다보며 씨름하고 있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육군본부 한 구석의 상황은 그와 전혀 달랐다.
김종필 중위는 당시 육본 정보국에 속해 있었다. 그는 그곳에서 문관이었던 박정희 전 대통령 등과 함께 1949년 12월 북한의 기습 남침 가능성에 관한 보고서를 내기도 했다. 그랬던 까닭에 그는 전선 상황에 매우 민감했다. 심지어 6월 24일 38선 동향이 아주 심각해지자 정보국장 장도영 대령에게 긴급 적정(敵情) 브리핑을 했다고 한다.
김종필은 그 자리에서 “적이 전선에 병력과 무기들을 전진배치하고 있어 오늘내일 안으로 공격을 할 가능성이 있다”고 했다. 아주 정확한 예측이었다. 김종필 등 정보국의 발 빠른 움직임에 따라 육군본부 총참모장 채병덕 장군도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두 팀을 적진으로 파견했다고 한다.
60여 년 전 벌어진 6·25전쟁의 속내를 드러내 보여준 학자는 꽤 많다. 그 중에서 박명림 연세대 교수는 줄곧 나를 찾아와 당시의 여러 가지 사정을 두고 인터뷰를 했던 학자다. 그의 저작은 전쟁 당시의 상황을 아주 깊이 파고 들어갔다는 평을 받고 있다. 그에 따르면 채병덕 총참모장은 동두천과 포천, 개성 지구에 정보장교들을 급파했다고 한다.
24일에 보낸 요원들은 다음날인 25일 오전 8시까지 채병덕 총참모장에게 보고를 하기로 돼 있었다. 그러나 전쟁은 이튿날 새벽에 터지고 말았다. 일부는 26일 오전 육군본부에 돌아와 적정에 관한 보고를 했다. 그러나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전선은 이미 북한군에 의해 철저하게 짓밟힌 뒤였다. 다른 일부 정보요원들은 개성으로 넘어가 적진에 들어갔다고 했다. 이들은 결국 육군본부가 대전으로 후퇴한 뒤에야 돌아와 보고를 마칠 수 있었다.
정보국의 김종필 중위는 그날 당직을 자처했다고 알려져 있다. 상황이 너무 긴박하게 돌아가고 있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줄곧 적정을 파악하던 김종필 중위는 오후 들어서도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고 한다. 육군본부의 분위기는 뒤숭숭했다. 전쟁 발발 15일 전인 6월 10일 대대적인 인사이동으로 전방의 사단장과 육군본부의 지휘관이 상당수 바뀌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전쟁 전야의 한가로운 파티
/6.25발발 당시 인민군의 남침에 대한 작전을 총지휘해야 했던 채병덕 육군총참모장.그는 간밤의 파티에서 늦게 돌아와 잠들었다가 몽롱한 상태에서 북의 남침과 직면해야 했다.
적의 침공에 대비해 방어 계획 작성을 주도했던 강문봉 작전국장도 그때 자리에서 물러났다. 그는 후임자인 장창국 대령에게 자리를 물려준 뒤 미국으로 유학을 가기 위해 준비 중이었다. 모든 상황이 김일성 군대의 남침에 유리하게 맞춰지고 있었던 셈이다. 게다가 느닷없이 비상경계령을 해제하면서 전선의 핵심 방어인력 중 상당수가 외박이나 휴가를 나간 상태였다. 오로지 육군본부의 정보국만이 전전긍긍하면서 전선 너머의 적정을 파악하기에 안간힘을 쓰고 있던 상황이었다.
그날 저녁에는 용산의 장교구락부 준공식이 있었다. 지금 미 8군 용산캠프 안에 있는 콘크리트로 지은 건물이었다. 장교구락부의 준공식은 나름대로 의미가 있었다. 대한민국 군대의 고위 장교들이 서로 모여 의견을 교환하는 자리였으니 말이다. 교육생 신분이기는 했지만 나 역시 그 자리에 초청을 받았다. 나는 저녁 무렵 도착했다. 많은 사람들이 모였다. 채병덕 육군 총참모장을 비롯해 정부 요인, 일선 사단장을 포함한 고위 지휘관 등이 그 자리에 얼굴을 드러냈다. 나는 술을 전혀 하지 않는다. 그래서 미군이 들여온 작은 콜라 두 병을 시켜 마시면서 한 구석을 지키고 있었다.
폭풍 전야였다. 준공식은 스탠딩 파티 형식으로 벌어졌다. 적지 않은 부인네들도 눈에 띄었다. 고위급 장성들이 모이고, 정부의 요인들도 얼굴을 드러내는 자리여서 제법 흥이 높아져 갔다. 벌써 술을 들이켜는 사람들이 많이 보였다. 나는 자리가 흥에 익어갈 무렵 그곳을 떠나 신당동의 자택으로 돌아왔다.
나중에 들은 내용이다. 우리 고위 장교들은 술이 거나하게 취하도록 그 자리를 이어갔던 모양이었다. 채병덕 총참모장의 귀가 시간은 새벽 2시였다고 한다. 박명림 교수의 기록에 따르자면 그렇다. 육군의 최고 지휘관이었던 총참모장이 자리를 떠나지 않으니 다른 고위 장교들도 자리를 지켜야 했을 것이다. 그렇게 술자리는 새벽까지 이어졌던 듯하다.
/남하하는 북한 전차들.
그날 38선 전역에서는 북한군이 조용히 움직이고 있었다. 병력 이동은 이미 마친 상태였다. 세부적인 움직임을 보이며 전선 일대에서 곧 강력한 야포 사격을 벌일 작전명령이 내려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육군본부에서 그에 주목했던 사람은 거의 없었다. 장교들은 술에 취해가며 그 순간을 맞이했다. 정보국의 일부 당직자들만이 애를 태우고 있었다. ‘뭔가 크게 벌어질지도 모른다’는 걱정과 초조에 휩싸이면서 말이다.
75 적의 공격 5시간 뒤에야 겨우 나타난 육군본부 국장
9) 전쟁의 시작
전선으로부터 온 전화
1950년의 6월25일, 서울은 언뜻 평화롭게 보였다. 내가 전선으로부터 급히 걸려온 전화를 받고 길거리에 나섰던, 그래서 부랴부랴 전선으로 향하면서 보았던 서울의 거리는 최소한 그런 모습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잠들어 있었던 아침이었다.
나는 오전 7시쯤 전화소리를 들었다. 아침 일찍 일어나는 습관이 있던 나는 그날도 잠자리에서 일어나 육군보병학교 시험에 대비하고 있었다. 내게 전화를 걸었던 이는 1사단 작전참모로 있던 김덕준 소령이었다. 내가 육군보병학교에 입교해 수업을 받는 신분이었으나 그는 다급했던 나머지 내게 전화를 걸었던 것이다.
아주 당황한 목소리였다. “적이 공격해 왔다”는 말이 먼저 들렸다. 그 전에도 남과 북은 38선 인근에서 여러 차례 충돌을 벌인 적이 있었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적의 공격이 어느 정도냐는 것이었다. 그런 내 생각을 짐작했음인지 김 소령은 “개성에 이미 적들이 진입했다. 전면적인 도발인 것 같다”라고 말했다.
나는 개성에 적군이 진입했다는 그의 보고를 듣고 상황이 심각함을 깨달았다. 머리에 떠올리기조차도 싫었던 적의 전면남침이라는 판단이 들었던 것이다. 나는 우선 움직였다. 비록 교육생의 신분이기는 하지만 내가 이끌던 1사단으로 급히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나는 옷을 주섬주섬 챙겨 입었다. 전투복이 아닌 정복 차림에 신발은 군화가 아닌 일반 단화였다.
/6.25 전쟁 때 진격하는 북한군의 선전 사진. .
신당동 집을 우선 나와 길거리에서 차를 잡아타려고 했으나 도로에는 차량이 거의 보이지 않았다. 한동안 차를 기다리며 ‘어디로 갈 것인가’를 우선 생각했다. 드문드문 지나는 차량은 내 간절한 손짓을 무시하고 그냥 지나쳤다. ‘이래서는 차를 잡지 못한다’고 판단한 나는 멀리 지프가 오는 것을 보고 무작정 길 복판으로 나서 마주 오는 차를 향해 섰다.
다행히 지프가 멈췄다. 나는 신분을 이야기한 뒤 상황을 설명하면서 육군본부까지 태워달라고 했다. 육군본부에 도착했을 때 상황은 심각해 보였다. 채병덕 총참모장이 굳은 얼굴로 참모 몇 사람과 함께 회의를 하고 있었다. 나는 용건부터 말했다. “제가 교육생 신분이니, 1사단 현장에 가서 지휘할 수 있도록 명령을 다시 내려달라”고 했다. 채 총참모장은 “그게 무슨 소리야, 당장 현장에 가라구!”라며 고함을 치듯 말했다.
전쟁이 벌어진 마당에 현장으로 달려가는 일이야 당연했다. 그러나 명령이라는 형식도 중요했다. 그런 명령이라는 형식이 있어야만 나는 제 자리에서 내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할 수 있다고 봤던 것이다. 다혈질의 채 총참모장은 그런 내가 못마땅해 보였을 수 있다. 그러나 거쳐야 할 경로는 분명히 거치는 게 마땅했다.
잠자리에서 맞았던 전쟁
그러나 차편이 없었다. 나를 전선으로 싣고 갈 만한 차량도 준비할 수 없던 상황이었다. 나는 궁리 끝에 육군본부 근처에 살고 있던 국군 1사단 미 군사고문관 로이드 로크웰(Lloyd H. Rockwell) 중령을 떠올렸다. 급히 그곳으로 가서 집 문을 두드렸다. 영문도 모른 채 밖으로 나온 로크웰 중령이 “일요일인데, 도대체 무슨 일이냐?”면서 의아해했다.
/6ㆍ25전쟁 당시 제78 야전정비 중대로 참전해 1953년 3월부터 1954년 4월까지 한국에서 근무한 미국 출신 참전용사 로버트 T.호이트 씨가 1953년 카메라에 담은 서울 시내 풍경.
나는 상황을 설명하면서 급히 전선으로 가자고 했다. 그는 역시 군인이었다. 상황을 짐작하는 속도가 빨랐고, 행동 역시 기민했다. 그는 급히 옷을 차려 입은 뒤 지프를 몰고 길을 나섰다. 차에 올라탄 뒤 문득 최경록 대령에 생각이 미쳤다. 1사단 11연대장이었던 그는 시흥에서 교육을 받고 있던 나를 대신해서 사단을 이끌고 있었다. 이를테면 대리 사단장이었던 셈이다.
그 또한 집에 와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당시 ‘남대문 이발소 골목’이라고 불리던 곳에 그의 집이 있었다. 나는 차를 잠시 기다리게 해놓고 그 골목 안의 최 대령 집을 향해 “얼른 이리 나오시게. 지금 일이 벌어졌어!”라고 큰 소리로 외쳤다. 그는 얼른 옷을 차려 입고 나왔다.
나는 최경록 대령, 로크웰 중령과 함께 급히 길을 나섰다. 수색을 지나던 무렵에 멀리서 교회의 종소리가 울렸다는 기억이 있다. 아직 서울까지는 전쟁의 소음(騷音)이 전해지지는 않았다. 단지 거리에는 군용 지프 차량이 부쩍 많이 보였다. 전쟁이 벌어진 뒤 급히 움직이는 차량들이었다. 그로써 전쟁이 본격적으로 벌어졌다는 사실이 느낌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1사단 본부 현관에 참모들이 마중을 나와 있었다. 내게 전화를 걸었던 작전참모 김덕준 소령, 포병대대장이던 노재현 소령(육군대장 예편, 전 국방부 장관), 통신 중대장 동홍욱 대위 등이었다. 사령부 안으로 들어갈 경황도 없었다. 나는 선 채로 그들의 보고를 우선 들었다. 개성은 이미 적의 수중으로 넘어간 상태였다. 그곳에 주둔했던 12연대와는 이미 연락도 끊겼다고 했다.
문산 방면으로 진출해 있던 13연대는 현재 적과 교전 중이었다. 예비로 두고 있던 수색의 11연대는 현재 병력을 끌어모아 전방 진지에 다시 배치하는 중이라고 했다. 역시 큰 문제는 전날 해제한 비상경계령으로 인해 아주 많은 수의 병력이 외출과 휴가를 나와 돌아오지 않고 있다는 점이었다.
그나마 다행이었던 점이 있었다. 13연대였다. 김익렬 대령이 지휘하는 연대는 비상 경계령 해제와는 상관없이 부대원들의 외출과 휴가가 거의 없었다. 검열을 받아야 했던 까닭에 부대원들에게 외출이나 휴가를 허용하지 않아 거의 전 대원들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던 것이다. 전투력이 온전한 연대가 하나 남아 있다는 점이 그나마 위안이었다.
사단본부에는 결국 들어가지 않고 나는 차를 몰도록 해서 곧장 전방지휘소로 향했다. 파주국민학교에 차려 뒀던 지휘소였다. 그곳에 잠시 들러 지휘소 상황을 확인한 후 나는 다시 전방 지역을 우선 살피려고 임진강 철교로 향했다. 내가 도착하던 그때 임진강 북안에서 다리를 건너는 차량 한 대가 있었다.
신발도 잃고 도망친 미 고문관
12연대의 미 군사고문관이었던 다리고(Joseph R. Darigo) 대위였다. 그의 모습은 많은 상황을 말해주고 있었다. 그는 내게 “적군이 열차를 통해 개성 역에 내렸다”고 말했다. 끊어져 있던 개성 북쪽의 선로를 연결해 북한군이 열차에 올라탄 뒤 기습적으로 개성에 진입했다는 얘기였다. 그는 거의 두서없이 상황을 설명했다. 그만큼 아주 당황했던 것이다.
/남침 직전의 김일성.
나는 지프를 직접 몰고 남쪽으로 내려왔던 그가 군화조차 신고 있지 않은 점을 눈여겨봤다. 군화를 제대로 신을 틈도 없이 급히 쫓겨 내려왔던 것이다. 나는 임진강 철교가 내려다보이는 언덕으로 올라갔다. 로크웰 중령이 옆에 서 있었다. 나는 그에게 “담배를 가지고 왔느냐?”고 물었다. 그가 자신이 가지고 있던 럭키스트라이크 담배를 한 대 건넸다.
나는 그 자리에서 잇따라 담배 세 대를 피웠다. 그래도 가시지 않는 것이 있었다. 불안감이었다. 내가 지닌 군사적 경험이라야 중대를 이끈 정도에 불과했다. 만주군에서 쌓은 경험이었고, 대한민국 군대에 들어와 훈련과 학습을 거치면서 조금 전기(戰技)를 연마했다고 하더라도 역시 실전은 아니었다. ‘이 전쟁을 어떻게 치를까.’ 불안감이 더 깊어지고 있었다.
전쟁의 시작은 그랬다. 모두 잠에 들어 있었던 상황이었다. 국군 전반이 그랬고, 실전의 경험이 있던 미군의 고문단도 마찬가지였다. 아무도 대비하지 않는 전쟁을 치를 참이었다. 상대는 오랜 훈련과 기다림 끝에 전선을 넘은 군대였다.
럭키스트라이크 담배는 손끝에서 자꾸 타들어갔다. 내 마음도 그렇게 타들어가는 듯했다. 육군본부 핵심 참모 한 사람은 그렇게 준비 없이 전쟁을 맞았던 우리의 모습을 생생하게 일깨워주고 있다. 그 역시 전날의 장교구락부 연회에 참가한 뒤 새벽까지 술을 마셨던 모양이다.
전쟁이 터진 다음날이었다. 전쟁을 치르는 데 없어서는 안될 그가 나타나지 않아 지휘부는 한동안 애를 태웠다고 한다. 헌병이 그가 살고 있던 동네를 샅샅이 뒤졌다고 한다. 전화조차 가설하지 않은 상황이라서 그랬다. 결국 그는 마이크로 가두방송을 하고 다닌 헌병 덕분에 전쟁이 벌어지고 한참 뒤 집을 나와 육본으로 향했다고 한다.
전쟁에서 지지 않으려면 적을 얕보지 말아야 한다. 그러나 당시 대한민국은 그 점을 너무 수월하게 깨고 말았다. 누구든 제대로 전선에 서있던 적의 실체를 보려 하지 않았다. 게다가 김일성 군대의 역량을 아주 얕잡아보고 있었다. 전쟁은 따라서 적의 의도대로 흘러갈 태세였다.
76 "전쟁 나면 도와준다 해놓고서 철수한다니!"…미군 앞에서 흘린 눈물
(9) 전쟁의 시작
치밀했던 김일성의 전쟁 준비
김일성이 일으킨 전쟁이었다. 그러나 나는 그 배후에 버티고 있는 존재는 소련이라는 점도 잘 알았다. 김일성의 야욕은 소련의 후원이 없는 상태에서는 그다지 대단하지 않을 수 있었다. 임진강 철교가 내려다 보이는 언덕에서 내가 잇따라 담배를 피워 물며 깊은 불안감에 빠졌던 것은 사실 그 점에 기인하는 바가 적지 않다.
나는 평양에서 월남하기 전에 조만식 선생의 비서로 있으면서 소련군을 예의 주시했다. 아울러 그들이 움직이는 모습을 자세히 살핀 적이 많다. 해방을 맞이하기 전 만주 일대에서 당시 막강했던 일본 관동군을 동서로, 북남으로 협격(挾擊)하는 소련군의 전술도 이미 자세히 들여다 본 경험이 있다. 그들의 힘은 매우 강했고, 전법은 아주 거칠었다.
그래서 내 불안감은 자꾸 깊어만 갔다. 전쟁은 아주 높은 강도로 벌어질 태세였다. 게다가 우리는 준비도 제대로 없이 전장에 나서야 할 형국이었다. 김일성 군대의 작전계획은 3000여명에 달하는 소련의 군사고문단이 수립한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수많은 야전을 치르며 성장한 소련 군대가 만든 작전계획이 허술할 수 없었다. 김일성 군대는 그에 올라 타 치열한 공세에 나설 것이다.
우리의 상황은 어땠나. 나는 지금도 그 장면을 기억한다. 전쟁이 터지기 직전 우리 군대는 겨우 105㎜ 야포를 들여와 용산에서 광나루 쪽으로 시험 사격을 벌였다. 적이 압도적 전력의 우위를 지니게끔 만든 소련제 전차 같은 것도 우리에겐 없었다. 1948년 대한민국 건국 뒤 군대의 편제가 제대로 섰다고는 하지만, 무기와 인력 및 장비 면에서는 보잘 것이 없었다.
우리의 강력했던 요청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미군은 무기와 장비를 건네는 데 아주 인색했다. 그때 우리 군의 대다수 지휘관은 전쟁을 예상하고 있었다. “언젠가는 저들이 꼭 쳐들어온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시기가 문제였다. 언제 어떻게 닥칠지에 대해서는 입장이 달랐다. 1948년, 나는 정보국장으로서 전선 동향을 자주 접했다. 김일성 군대가 전쟁을 준비하는 정황이 여러 경로로 잡혔다.
/전쟁을 준비하던 무렵 김일성의 망중한.
육군과 해군, 공군의 사관학교가 우리보다 훨씬 빨리 들어섰다. 가장 뚜렷한 동향은 길을 닦는 작업에서도 읽혔다. 남침을 위한 요로(要路)가 북한 전역에서 새로 닦였다. 전쟁 준비 정황은 그로써 충분히 읽을 수 있었다. 1948년에는 해방 전 만주군에서 근무하다가 김일성에게 합류한 이기건과 박림항 등이 북한 지역을 탈출해 대한민국에 귀순하면서 전쟁 준비 정황이 훨씬 자세하게 전해졌다.
다리까지 떨렸던 기억
그들은 우리에게 아주 상세한 정보를 귀띔했다. 철도경비대를 창설한 북한은 전쟁을 위해 싸우다가 죽는 군인들을 위한 유족 학교도 건립했다. 해방 직후부터 착수한 작업들이었다. 그들은 5년 동안 치밀하게 전쟁 준비 작업을 벌여왔던 셈이다. 도로와 함께 통신시설도 전쟁 전에 이미 충분할 정도로 구비했다고 알고 있다.
그런 치밀한 준비가 모두 스탈린이 이끄는 소련의 지원 아래 펼쳐졌다는 점이 가장 마음에 걸렸다. 준비를 마친 김일성 군대를 깔보는 것은 아니었지만 결국 관건은 그 뒤를 받쳐주는 소련이었다. 따라서 나는 이 땅에서 전쟁이 벌어지면 미군의 개입이 가장 중요하다고 늘 생각했었다. 그러나 미국의 방어전략에는 대한민국이 들어 있지 않았다. 전쟁이 벌어지기 직전인 1950년 1월 미 국무장관 딘 애치슨이 선언한 미군의 방어선에는 일본까지만 들어 있었다.
미 군사고문단과 그 가족들이 일부 남아 있기는 했으나, 미국은 ‘애치슨 라인’ 선포로 사실상 한국을 자신의 방어 영역에서 제외한 상태였다. 그러니 전쟁이 벌어진 그날의 내 심사는 착잡하기 짝이 없었다. 전력의 불균형은 아는 사람은 다 아는 사실이다. 거기다가 믿었던 미국이 발을 빼는 형국에서 드디어 터지고 만 전쟁이었다.
그런 여러 생각을 하면서 나는 국군 1사단의 미 고문관 로크웰 중령으로부터 담배 석 대를 빌려 연신 피웠다. 로크웰 중령은 그런 내 심사를 어느 정도 읽었는지 모르겠으나, 내가 달라는 대로 담배를 건넸다. 이어 나는 발길을 돌렸다. 전쟁 전에 파주 일대의 학도호국단 1000여 명의 학생을 동원해 건설한 주방어선의 참호가 있는 곳이었다.
그곳에는 파평산이 있다. 파평 윤씨(尹氏)의 대종(大宗)이 있는 곳이다. 나는 그 파평산을 중심으로 인근 적성에까지 이어지는 긴 참호를 파도록 했다. 그곳을 둘러보려는 생각이었다. 길에서 파평산으로 조금 올라가면 지금도 그 참호는 보인다. 나는 그 낮은 언덕을 올라가는데 휘청거렸다. 다리가 왠지 모르게 떨렸다. 후들거리는 다리가 순간 창피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김일성이 전쟁 준비에 몰두하고 있던 1947년의 평양 모습.
로크웰 중령도 내 뒤를 따랐고, 1사단의 참모 몇 명도 나를 쫓아 파평산에 오르고 있었다. 나는 떨리는 다리를 감추려고 애를 썼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도 착잡한 심정으로 산을 오르기 때문이었는지 내 다리의 떨림을 눈치채지 못한 듯했다. 알고서도 모른 척한 것일 수도 있었겠다.
참호는 건재했다. 그곳에서 주방어선을 형성하면 적이 임진강을 넘더라도 당분간은 버틸 수 있다고 생각했다. 속으로는 ‘정신을 제대로 차리자’고 수도 없이 되뇌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이 전쟁을 도대체 어떻게 치를 수 있을까’ ‘미군은 참전할 것인가’를 반복해서 생각했다. 그러면서 다리의 떨림은 차츰 잦아들었다.
등을 돌린 미군
참호를 둘러보고 내려왔다. 나는 일행들과 파주의 전방지휘소로 돌아왔다. 나름대로 방어전략을 구상하느라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던 내게 로크웰 중령이 머뭇거리는 기색을 보이면서 다가왔다. 무슨 중대한 말을 꺼내려는 모양새였다. 로크웰 중령은 나를 바로 보면서 “사단장, 지금 명령을 받았다. 우리는 이제 모두 돌아가야 한다”라고 말했다. 청천벽력 같았다. 나는 나도 모르게 고함을 치듯 말했다. “아니, 이게 무슨 소리요! 전쟁이 나면 도와주겠다고 하지 않았소? 지금 와서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거요!”라고.
미군은 전쟁이 발발하기 전에 여러 경로를 통해 “대한민국이 침략을 당하면 반드시 돕겠다”고 했다. 미국 정부도 그런 의사를 여러 번 강조했고, 한국에 와 있던 미 군사고문단도 그 점을 자주 언급했다. 그런 미군이 정작 전쟁이 벌어지자 완전히 철수를 결정했다는 얘기를 전하고 있는 것이다. 로크웰은 내 외침과는 상관없이 “그래도 이제 작별 인사라도 해야 한다”며 악수를 청했다.
/전쟁 발발 직후 철수 명령을 받고 한국을 떠나기 위해 이동하는 미 군사고문단.
그는 내 손을 잡아 악수한 뒤에 길을 떠났다. 나와 함께 타고 왔던 지프에 올라 길을 떠나는 로크웰 중령을 바라봤다. 전방지휘소 밖이었다. 멀리 사라지는 로크웰의 그림자를 바라보면서 나는 급기야 눈물을 떨어뜨리고 말았다. 나약함의 표시일 수도 있었으나 이것저것 따질 겨를 없이 그저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누가 지켜보는지를 따질 경황도 없었다. 큰 불안감 때문에 흘렀던 눈물이었을 게다.
내 한몸 죽고 내가 사는 것은 부차적인 일이었다. 모든 것을 빼앗길 수 있다는 불안감이 더 컸다. 내가 거느린 9000여 명의 사단 병력, 내가 지키고 있던 개성 이남 임진강 일대의 지역, 그리고 대한민국의 운명….
전쟁의 성격은 분명했다. 김일성의 배후에 도사리고 있는 소련의 힘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터진 전쟁으로부터 미군은 등을 보였고, 신생 대한민국의 준비조차 불충분한 군대가 나서서 전선에 홀로 서야 한다는 점이 불안했다. 눈물을 좀체 보이지 않은 나였으나 그 상황에서는 어쩔 수 없었던 모양이었다.
결론은 어쨌든 싸워야 한다는 것이었다. 적은 이미 개성을 점령한 뒤 대규모 공세를 벌이는 중이었다. 개성을 지키고 있던 12연대는 계속 연락이 끊긴 상태였다. 포병대대가 전쟁 전에 개성에서 수색으로 이동한 게 그나마 위안이었다. 포병대대장 노재현 소령의 건의를 받아들인 덕이었다. 그는 정비를 위해 대대를 수색으로 이동시키는 게 좋겠다는 제안을 했고, 나는 일선의 책임자 의견을 중시해야 한다는 원칙 때문에 제안을 수용했다.
문제는 임진강 철교였다. 언제 그곳을 끊어 적의 진로를 일단 막아야 하느냐가 중요했다. 개성 전면에 있던 12연대가 강을 건넌 뒤에 끊어야 했다. 나는 12연대와의 연락 상황을 물었다. 역시 소식이 없었다. 공병대대장 장치은 소령은 “철교 폭파 작업을 완료했다”고 보고했다.
77 노재현 소령의 놀라운 포사격…3일을 버티다 후퇴 건의했더니 돌아온 명령은 '현지 사수'
(9) 전쟁의 시작
임진강 철교 폭파 실패
나는 지금도 우리가 적의 침략에 맞서 제대로 싸우지 못하는 민족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는다. 비록 준비가 없었고, 전쟁을 예견치 못했던 우를 범했더라도 우리는 싸움에 관한 한 그렇게 호락호락한 민족이 아니다. 문제는 누가 나서서 그를 잘 조직하고 훈련하느냐 하는 문제였다. 아쉽게도 우리는 그런 점을 미리 챙기지 못했다.
비상경계령을 해제해 부대 밖으로 외박과 휴가를 나갔던 1사단 장병들은 부지런히 전선으로 모여들고 있었다. 그러나 중대한 결정이 하나 남아 있었다. 어느 시점에 임진강 철교를 폭파해 적의 진로를 막느냐 하는 점이었다. 공병대대장 장치은 소령은 철교 폭파 준비를 마쳤다고 보고한 상태였다.
25일 오후 3시가 넘어서 개성 전면을 방어하던 전성호 대령의 12연대가 철교를 통해 강을 넘기 시작했다. 전성호 대령은 이미 53세의 ‘고령’에 속하는 지휘관이었다. 그럼에도 분전을 거듭하다가 얼굴 등에 피를 많이 흘리는 부상을 입고 겨우 강을 넘어오고 있었다. 나는 그를 즉각 후방으로 이송토록 했다. 대신 1948년 정보국장 시절 나와 함께 일했던 김점곤 중령을 후임 12연대장으로 보내달라고 육군본부에 요청했다.
나는 12연대 후퇴 병력이 거의 모두 다리를 건넌 뒤에 “철교를 폭파하라”고 지시했다.
/6ㆍ25전쟁 당시 제78 야전정비 중대로 참전해 1953년 3월부터 1954년 4월까지 한국에서 근무한 미군 참전용사 로버트 T.호이트 씨가 1953년 촬영한 임진강 자유의 다리.
불운은 늘 겹쳐서 다가온다고 했던가. “폭파 준비를 완료했다”고 했던 장치은 공병대대장의 호언장담과는 달리 임진강 철교 폭파음은 들리지 않았다. 중대한 실책이 생겨났던 것이다. 전차를 앞세운 적의 주력을 막아서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할 수 있었던 철교 폭파는 그렇게 헛수고로 돌아가고 말았다.
적은 전차를 앞세우고 강을 건넜다. 25일 저녁에는 본격적으로 우리 전면에 출현하기 시작했다. 나는 이튿날 한낮에 강을 건넌 적의 전차를 멀리서 볼 수 있었다. 소련제 T-34 전차의 성능은 당시로서는 탁월했던 듯하다. 철갑의 두께와 기동성 등에서 당시 첨단이었다.
우리는 할 수 있는 방법을 모두 동원하는 수밖에 없었다. 전차를 처음 보는 장병들이 대부분이었으나, 그냥 겁에 질려 후퇴할 수는 없었다. ‘육탄 돌격’이라는 말이 신화처럼 들릴 수도 있겠으나, 하다가 끝내 달리 방법을 찾지 못하면 몸에 직접 폭탄을 지니고 뛰어드는 수밖에 없었다.
당시의 1사단 장병들은 모두 비장했다. 어떻게 해서든 적의 진공로를 막아 서울이 적의 수중에 넘어가지 않도록 해야 했다. 그러나 파상적인 적의 공세는 멈출 기색이 없었다. 26일은 남진하는 적이 13연대와 11연대의 저항을 받아 주춤했다. 우리는 파평산에 설정한 주저항선의 진지에서 기관총을 쏘면서 적의 진출을 방해했다.
전차를 향해 육탄 돌격
특공대를 별도로 모집했다. 직접 수류탄 등을 손에 쥐거나 몸에 두른 다음에 적의 전차를 공격하는 요원들이었다. 약 30명이 모여들었다. 이들은 2개 분대로 나뉘어 적진으로 향했다. 직접 적의 전차가 진출하는 도로로 바짝 접근한 뒤 전차에서 가장 방비가 약한 궤도에 수류탄을 던져 넣는 공격을 벌였다. 나름대로 효과가 있었다. 적의 전차 일부가 도로에서 방향을 틀어 주변의 마을로 들어서는 모습도 보였다. 궤도가 우리의 공격으로 망가졌던 것이다.
/1950년 6월 28일, 일부 군중의 환영 속에 서울로 진입하는 인민군 전차.
공병대대 장치은 소령은 임진강 철교를 제때 폭파하지 못한 부담감 때문에 공병대대 자체 병력으로 특공대를 구성하기도 했다. 그들은 야밤에 적의 진영으로 진입해 전차를 파괴하러 길을 떠났다. 그러나 전차를 발견하지 못해 적의 중화기 몇 점을 노획한 뒤 돌아오는 성과만을 거뒀다.
나중에 박정희 대통령 밑에서 마지막 국방부 장관을 지낸 노재현 포병대대장의 활약도 상당했다. 그는 후에 대한민국 육군의 포병 양성에 상당한 역할을 하는데, 당시 내 밑에서 1사단 포병대대를 이끌고 있었다. 그는 우선 사격술이 좋았다. 우리가 운용하고 있던 야포는 105㎜였다.
노재현 소령은 105㎜를 동원해 곡사(曲射) 형태로 포물선을 그으며 포탄을 공중으로 날려 적의 전차를 공격했다. 사격술이 좋았던 덕분에 아군의 포탄은 용케도 적의 전차에 명중하거나 궤도 등 취약한 부분에 타격을 가했다. 26일의 전세는 그에 따라서 다소 소강의 상태를 보였다. 적은 임진강을 넘었지만 1사단의 저항에 주춤거리고 있었다.
/1972년 10월 17일 유신조치가 선포되었을 때 육군참모총장으로서 계엄사령관을 맡았던 노재현.
그러나 우리의 분전(奮戰)에는 한계가 있었다. 저들은 소련의 강력한 지원 덕분에 전차와 압도적인 야포 및 중화기로 무장한 상태였다. 정신력에 기대 전쟁에 나서는 일은 그 앞에서 뚜렷한 한계를 드러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25일, 등을 보이며 “철수명령을 받아 떠난다”고 했던 미군 고문관이 이튿날 느닷없이 돌아왔다. 12연대 미 고문관으로 있던 마이크 도노반 소령이 “철수명령이 갑자기 취소됐다”며 돌아온 것이다.
정말 반가웠다. 전선의 모든 상황을 관리하느라 경황이 없었지만 나는 머릿속으로 항상 그 점을 생각해야 했다. 1944년 만주군 중위로 복무하고 있을 때 중국 선양(瀋陽)에서 병이 생겨 군 병원에 입원한 적이 있었다. 그때 나는 인상적인 한 장면을 목격했다.
병원 뜰에 나가 쉬고 있던 나는 사이렌 소리에 눈을 들어 하늘을 봤다. 미 공군기가 출현했다. 먼 하늘 한 구석에 비행기 모습이 보였다. B-29 폭격기의 형체였다. 거리가 멀어 아주 작게 보였지만, 당시 세계 최강의 폭격기로 알려졌던 B-29의 모습은 제법 뚜렷했다.
선양 인근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 전투기들이 급발진해서 먼 하늘의 B-29를 향해 날아올랐다. 일본 전투기들은 한동안 열심히 B-29를 향해 다가갔다. 그러나 어느 정도의 고도에 이르러서는 더 이상 올라가지 못하고 하강을 반복했다. B-29의 비행 고도에 미치지 못했던 것이다.
나는 그 무렵 세계 최강을 향해 앞으로만 치닫던 일본군이 곧 패망하리라는 점을 알 수 있었다. 미국이 최강의 국력을 바탕으로 일본으로서는 도저히 따라잡을 수 없는 전비(戰備)를 확보하고 있다는 점도 그때 직접 눈으로 확인했다. 조그만 사실일 수는 있지만, 어떻게 보면 매우 상징적인 B-29와 일본 전투기의 조우 장면이었다.
이해할 수 없는 명령서
나는 그런 점 때문에 미군의 개입 여부에 초미의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다. 신생 대한민국은 어차피 김일성의 야욕에 따라 전화(戰火)에 휩싸였다. 그러나 그 배후가 문제였다. 미국에 버금가는 소련이 그 뒤를 지탱하고 있는 한 신생 대한민국 또한 강력한 후원자가 필요했다.
‘현대전’은 내가 60여년 전 전쟁을 치르면서 줄곧 머릿속으로부터 떠나지 않던 개념이었다. 단순한 병력과 화력으로 상대를 제압하는 차원보다는 훨씬 멀리 나가 있는 전쟁의 개념이 현대전이었다. 병력과 화력은 물론이고, 그 뒤를 받쳐주는 보급과 공병(工兵)이 제 역할을 못하면 현대전에서는 자신을 지킬 수 없다.
그러나 그런 복잡한 생각만을 할 수는 없었다. 당장 눈앞에서 김일성 군대의 침공이 벌어지고 있었으니 말이다. 그런 와중에도 나는 12연대 미군 고문관 도노반 소령의 복귀가 정말 반가웠다. 그러나 미군 고문관이 돌아왔다고 해서 당장 전세를 뒤집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본격적인 미군의 참전이 있기 전에는 전선의 적을 우선 물리쳐야 했다.
그러나 27일 들어서면서 전세는 더욱 험악해졌다. 도저히 버틸 수 없을 만큼 적의 공세는 줄곧 강한 힘으로 이어졌고, 그에 맞서 싸우려는 아군의 힘은 자꾸 바닥을 향해 주저앉고 있었다. 27일에는 최후 저지선인 봉일천으로 모두 후퇴했다. 전방 지휘소를 봉일천 초등학교로 옮겼다. 그곳이 허물어지면 더 이상 갈 곳이 없었다.
/전쟁 초기 한강 방어선을 지휘했던 김홍일 장군.
마침 육군본부 전략지도반장 김홍일 소장이 봉일천 지휘소를 방문했다. 내 전황보고를 듣고 난 뒤 그는 “그래도 참 잘 싸웠다. 그러나 의정부 방면이 이미 허물어졌다. 적에게 포위될 염려가 있으니 이제 한강 이남으로 철수하는게 좋지 않으냐”고 했다. 나도 그 점을 생각하고 있었다.
의정부 7사단이 이미 적에게 뚫린 상황이었다. 따라서 지체할 경우 적에게 둘러싸일 위험은 충분했다. 나는 김홍일 소장에게 “육군본부로 돌아가시면 총참모장에게 후퇴를 건의해 달라. 명령이 있어야 움직일 수 있다”고 부탁했다. 그는 “알았다”며 돌아갔다.
그날 저녁 늦게 육군본부로부터 명령서가 도착했다. 후퇴를 허가한다는 내용인줄 알았다. 그러나 내가 펴든 명령서에는 ‘현재 위치를 사수하라’고 적혀 있었다. 무슨 영문인지 도대체 알 수가 없었다.
<정리=유광종, 도서출판 ‘책밭’ 대표>
78 정신없던 후퇴길, 단화엔 피가 흥건하고…마침내 "맥아더가 왔다"
(9) 전쟁의 시작
나흘 버틴 전선에서의 후퇴
채병덕 총참모장을 비롯한 대한민국 육군 지도부는 1950년 6월28일 새벽 2시 경, 그러니까 한강 인도교를 폭파하기 직전의 시간에 이미 강을 넘었다고 했다. 당시 전선에 있던 나는 그런 동향을 알 수 없었다. 그러나 한강 이북에 아직 숱하게 많이 남아 있는 국군과는 상관없이 지도부는 강을 넘고 다리를 폭파했던 것이다.
다리를 끊는 일―, 서두르다가 많은 인명을 냈고 전방에 남은 국군 전력을 고스란히 적의 수중에 넘겨줄 수도 있었던 까닭에 많은 사람들이 당시의 육군본부 결정을 비판하고 있다. 나 역시 다리를 서둘러 끊는 바람에 생긴 많은 인명 피해와 육군 전력 손실 등을 두고 볼 때 한강 다리 폭파가 큰 아쉬움으로 남아 있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솔직히 말하자면, 당시 대한민국의 실력이 그 정도에 불과했다는 점도 인정해야 한다고 본다. 채병덕 총참모장은 실전 경험이 없었던 지휘관이었다. 아니 그를 포함해 당시 대한민국 육군에 전쟁의 경험을 제대로 갖춘 인물은 거의 없었다. 김일성의 기습적인 남침까지 벌어진 마당이었다. 차분하게 후퇴를 이끌면서 전쟁을 지휘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고 봐야 한다. 이 문제는 나중에 기회가 되면 자세히 언급하기로 하자.
/1950년 7월3일 미군 폭격기들이 한강철교 중 끊기지 않았던 부분에 추가로 폭격을 하고 있는 모습.
어쨌든 다리는 끊겼고, 내가 이끄는 국군 1사단의 후방은 어느덧 동두천으로 진입한 북한군에 의해 흔들리고 있었다. 나는 한강 다리가 끊겼던 28일 아침까지 파주 남쪽의 봉일천에서 전쟁을 지휘했다. 또 밀릴 태세였지만, 육군본부는 내게 ‘현 전선을 사수하라’는 명령서를 보낸 터였다.
정신을 가다듬어 전선 상황을 지켜보고 또 지켜봤지만 대세(大勢)를 돌리기에는 우리의 역량이 너무 부족했다. 그럼에도 문산 일대를 탈환한다는 작전계획을 세웠다. 어떻게 해서든지 적의 예기를 꺾고 밀렸던 지역을 되찾으려는 생각이었다. 28일 아침이었다. 떨어진 탄약을 보충하기 위해 서울로 갔던 군수참모 박경원 중령(중장 예편, 내무부 장관 역임)이 빈 트럭으로 지휘부로 돌아왔다.
박 중령은 “녹번리에 갔더니 서대문형무소에 있던 죄수들이 다 풀려나고 거리마다 이미 붉은 깃발이 걸렸다. 서울에 북한 인민군이 다 들어와 탄약 수령은 엄두조차 낼 수 없었다”고 보고했다. 절망감이 지휘부를 휘감았다. 이어 포병대대장 노재현 소령이 찾아왔다.
절망감에 또 흘린 눈물
노 소령은 “이제 포탄이 다 떨어졌다”고 보고했다. 작전계획은 세웠지만 그 작전을 수행할 아무런 힘이 내게는 남아 있지 않았다. 나는 또 절망감에 젖었다. 노재현 소령의 보고는 마지막으로 버텼던 내 기운을 모두 앗아가 버렸다. 나는 앞에 서 있는 노 소령의 어깨를 안았다. 그리고 허무한 마음에 또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봉일천 초등학교에 차렸던 지휘본부에서는 약 300m 앞에 조그만 야산이 보였다. 28일 아침이었다. 나는 문득 시선을 들어 그 야산을 보고 있었는데, 말에 장비를 실은 적의 병력이 그 위로 올라가는 장면이 눈에 들어왔다.
/적의 포격으로 파괴된 수원 화성.
이어 그들이 사격을 가해오기 시작했다. 기관총 총탄이 지휘부의 벽면에 맞아 마구 떨어지고 있었다. 나와 지휘 참모들은 건물 반대편으로 뛰어나가 봉일천을 건넜다. 참모 여럿을 모아두고 나는 노상에서 작전회의를 열었다. 마침 봉일천 저 건너편으로 미군 공군기가 날아갔다. 이어 비행기로부터 폭탄 몇 발이 떨어졌다.
이제 물러나야 할 시간이었다. 나는 함께 모인 참모들에게 “이제 한강을 넘어서 후퇴할 수밖에 없다. 전면에서 작전 중인 모든 부대원들에게 각자 한강을 넘어 시흥에 집결하도록 지시를 내려라. 각자 한강을 건너 시흥 보병학교에 모여 항전하고, 그마저 어렵다면 마지막에는 지리산에서 모이자. 지리산에라도 들어가 최후까지 싸워야 한다”라고 말했다.
그렇게 흩어진 국군 1사단은 각자 한강으로 향했다. 나도 사단 참모 몇 명과 함께 강 쪽으로 이동했다. 이포 쪽으로 강을 넘자는 11연대장 최경록 대령의 의견과 행주나루 쪽으로 강을 건너자는 15연대장 최영희 대령의 의견이 나왔다. 결국 일제 때 징병으로 군대에 가서 수색 일대에 근무한 경험이 있던 최영희 대령의 의견을 따라 우리는 저녁 무렵 행주나루에서 강을 건넜다.
당시 내 모습은 말이 아니었다. 전투복 차림이 아니었다. 25일 아침 집을 나서던 때의 정복 차림 그대로였다. 나흘 동안 전선에서 버텼으나 밥을 제대로 먹었는지 기억조차 없다. 그저 배가 고팠고, 갈증도 심했다. 발이 유독 아팠다. 신발을 벗어서 보니 피가 흥건했다. 집을 나서면서 신고 나왔던 단화 밑창으로부터 못이 솟아나와 발에 상처를 냈던 것이다.
/한국군의 포로가 된 북한군.
행주나루로 우리를 이끌었던 최영희 대령은 굶주린 우리를 위해 닭을 구해왔다. “닭을 삶아왔다. 그동안 끼니를 제대로 때우지 못했으니 드시고 가자”고 했다. 배는 고팠지만 차마 그 닭에 입을 댈 수 없었다. 전선에 아직 많은 병사가 있어 후퇴를 제대로 할지 알 수 없는 상황이었다. 사령관이 그런 상황에서 배가 고프다고 닭을 집어들 수는 없었다. 당시의 내 심정은 그랬다.
눈치가 빨랐던 부관 김판규 대위가 논의 물을 떠왔다. 갈증이라도 풀라는 배려였다. 그 물이 참 달았다. 물조차 제대로 마시지 못했던 모양이었다. 한강의 어느 구간에 가서는 타고 있던 지프도 강물로 밀어 넣었다. 전방에서 쫓아오는 북한군의 눈에 띄지 않기 위해서였다. 그렇게 우리는 밤새 걸었다.
시흥에서 본 미 장군의 행렬
영등포쪽으로 도착한 우리는 시흥을 향해 계속 걸었다. 아침 동이 틀 무렵에 우리는 시흥역에 닿았다. 거리는 분주했다. 이리저리 군용 지프차가 오가고 있었다. 시흥역에 도착한 나는 피로에 젖어 제대로 운신할 수 없었다. 낯익은 미군 장교가 눈에 띄었다.
로버츠 미 군사고문단장의 부관 메이 중위였다. 그는 나중에 내 곁을 자주 지키는 고문관의 한 명이었지만, 당시로서는 정보국장 시절 잠시 대면했던 인연이 전부였다. 나는 메이 중위와 인사를 몇 마디 건넨 뒤 “미안하지만 설탕이 있으면 좀 가져다 줄 수 있느냐”고 물었다. 메이는 내 말을 듣더니 잠시 뒤 설탕을 구해왔다.
나는 물에 설탕을 타서 마셨다. 도저히 기력을 차릴 힘이 없어서였다. 설탕물을 타서 먹으니 조금 기력을 되찾을 수 있었다. 내친 김에 나는 메이 중위에게 전황에 대해서 물었다. 그러자 메이는 조그만 목소리로 “곧 VIP가 전선 시찰을 할 예정”이라고 귀띔을 해줬다. 그 VIP가 누군지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다.
곧이어 그 행렬이 눈에 들어왔다. 미군의 헌병 지프차가 대열을 이끌면서 거리를 지나갔다. 그 뒤로 호위 행렬이 이어지면서 먼지가 자욱하게 일었다. 누가 그 차에 타고 있는지를 알 수 없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더글라스 맥아더 장군이었다. 메이 중위와 나는 그 대열이 먼지 속으로 사라지는 장면을 끝까지 지켜봤다.
메이는 설탕물을 마신 뒤 조금 기력을 찾은 내게 “미군은 한국을 지원할 것이다. 함께 힘을 내자”고 격려했다. 그 말을 듣고 나니 조금 안심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당장 피로가 몰려왔다. 기력은 조금 회복했으나 잠이 쏟아졌다. 움직이기조차 힘이 든 상태였다. 나는 시흥역에서 잠에 빠졌다. 두 세 시간을 잤을까. 다시 일어나 보병학교로 향했다. 그곳에는 한강 방어 작전을 주도하는 김홍일 장군의 사령부가 들어서 있었다.
/1950년 6월27일 한국전선을 처음 둘러보는 맥아더 장군.
거리에서는 그때서야 비로소 “맥아더 장군이 전선을 시찰하기 위해 영등포 전선을 방문했다”는 말이 들려오고 있었다. 그로써 미군의 개입은 기정사실화하는 듯했다. 그러나 우리는 적이 한강을 넘어서지 못하도록 발을 묶어야 했다. 나는 보병학교에 도착해 옷을 겨우 갈아입을 수 있었다. 신당동 집을 나설 때 입었던 정복과 단화를 벗어버리고 군복과 군화로 갈아입었다.
보병학교에 설치한 지휘부의 이름은 ‘시흥지구 전투사령부’였다. 한강 이북에서 밀려 내려온 국군 병력을 수습해 부대를 재편성한 뒤 방어작전에 나서도록 지휘했던 곳이다. 나는 김홍일 장군부터 찾아갔다. 어떤 어투였는지는 모르겠으나 나는 따지듯 그에게 물었던 듯하다.
“사단을 방문했을 때 내가 했던 후퇴 건의를 왜 묵살했느냐”는 내용이었다. 나는 전선시찰을 위해 1사단을 방문했던 그에게 “채병덕 총참모장의 후퇴 명령이 필요하니 꼭 건의해 달라”고 부탁을 했었다. 그러자 김홍일 장군은 “전화기까지 들어 후퇴 명령을 내리라고 다그쳤지만 채 총참모장이 그에 응하지 않았다”고만 설명했다.
79 허약한 미군, 턱없는 자신감으로 덤볐다가 북한군에 혼쭐
(9) 전쟁의 시작
“지프 한 대만 빌려주게”
김홍일 장군에게 더 따져봐야 헛일이었다. 이미 물은 엎질러진 상태였으니 말이다. 김홍일 장군은 내게 제안 하나를 건넸다. “여기 남아 김포 지구 전선방어를 맡아달라”는 얘기였다. 내가 이끌던 1사단의 경우는 매우 참혹했다. 다른 전선에 섰던 국군 전투사단 역시 북한군에게 밀린 점에서는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1사단은 야포와 트럭을 비롯한 중장비와 수송수단, 그리고 기관총 등 중형 무기 등을 제대로 건사하지 못했다. 한강 다리가 끊기는 바람에 개인화기를 제외한 다른 일체의 무기와 장비를 가져오지 못한 상태였다. 더구나 사단 병력 모두는 뿔뿔이 흩어져 한강을 넘었다.
그런 병력들이 내가 마지막에 지시한 대로 한강을 넘어 시흥에 제대로 집결할지도 알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런 내 형편을 보고 던진 김홍일 장군의 제안이었을 게다. 전쟁 중에도 지휘관은 제 병력을 잘 거둬야 한다. 부하들을 이끌고 있지 못한 지휘관은 다급하기 짝이 없는 전시 중엔 제 힘을 발휘할 수 없다. 게다가 나는 부하들과 한 약속이 있었다. “시흥에서 집결해 싸우자. 그러다가 밀리면 지리산에라도 들어가 최후의 순간까지 싸우자”고 말하지 않았던가.
나는 김홍일 장군의 제안을 들은 뒤 “배려는 고맙지만 나는 1사단과 운명을 함께할 것”이라며 거절했다. 김홍일 장군은 “알겠다”고 한 뒤 나를 대신해 15연대장을 맡고 있던 최영희 대령을 그 자리로 보내겠다고 했다.
오후에 나는 영등포쪽으로 나가봤다. 아직 강을 넘지 못했던 적과의 교전이 벌어지는 지역이었다. 나는 그곳에 가서 뿔뿔이 흩어져 강을 넘어왔던 부하 장병들을 모집할 생각이었다. 아무것도 지니고 온 게 없어 도보로 영등포를 향해 걸었다. 적은 그곳 일대에 맹렬하게 포격을 가하고 있었다. 노량진 일대 역시 마찬가지 상황이었다.
/잡지 '스미소니언'에 실린 미군의 북진 및 피란민 모습.
사육신묘가 있는 곳을 지날 때 우연스럽게도 그곳을 방어하고 있던 기갑연대장 유흥수 대령을 만날 수 있었다. 그는 노량진 제방 위에서 37㎜포를 한강 북안으로 발사하며 전투를 이끌고 있었다. 나는 염치없게도 그를 만나자마자 이런 말부터 꺼냈다. “흥수야, 지프 한 대 내줄 수 없느냐?” 내게 급했던 것은 이동을 위한 지프였다.
그 차에 올라타 흩어져 강을 넘은 부하 장병들을 한 곳에 모아야 했던 것이다. 유 대령은 줄곧 나를 ‘형’으로 부르며 친근한 관계를 이어왔던 사람이었다. 그는 “형님, 그러세요. 제 차를 가져가세요”라며 자신이 타고 다니던 지프 한 대를 내줬다.
다시 모여드는 병력
이제 본격적인 수습에 나서야 했다. 나는 지프에 올라탄 뒤 영등포와 노량진, 이어 시흥 일대를 부지런히 돌아다녔다. 지프를 한 지역에 멈추게 한 뒤 “1사단 장병은 시흥 보병학교로 모이자”고 했다. 하나둘씩, 때로는 몇 명이서 함께 내가 있는 지프로 모여들었다. 모두 나와 함께 전선을 지켰던 장병들이었다. 헌병대도 길에서 후퇴 병력 수습에 나섰다. 눈물겨웠던 장면도 있었다.
개인화기가 아닌 박격포와 무거운 기관총을 어깨 등에 메고 한강을 넘어온 병사들이었다. 이들은 적에게 무기가 넘어가는 것이 아까워 촌각을 다투는 후퇴 길에서도 고생을 마다하지 않고 중화기를 가져 왔던 것이다. 어떤 장병들은 군복을 벗고 민간인 복장 차림으로 강을 넘어왔다. 부대에 합류하기 위해 갖은 방법을 동원해 강을 넘었던 것이다. 그런 장면을 지켜보는 사령관의 심정이 어땠을지는 굳이 적지 않겠다.
우리는 그렇게 조금씩, 그리고 줄기차게 모여들었다. 어느덧 모여든 부대원들은 1000여 명을 넘어섰다. 나는 그들을 이끌고 수원의 임시 육군본부가 있는 학교로 향했다. 당시 참모부장이던 김백일 대령이 국군 재편성 계획을 짜고 있었다. 교실 안으로 들어서면서 보니 김 대령은 칠판에다가 무엇인가를 가득 쓰고 있었다. 재편성의 내용이었다.
평소 친분이 있던 김백일 대령은 내가 나타나자 아주 반가워했다. 나는 “병력을 재편성할 때 이왕이면 내가 이전에 이끌었던 5사단을 1사단과 통합해주면 안 되겠냐”고 부탁했다. 김백일 대령은 흔쾌히 내 건의를 받아들였다. 한강 이남으로 흩어져 내려오는 국군 부대를 어떻게 해서든 재편해 전선으로 다시 보내야 하는 상황이었으니, 병력 분산이 심각한 1사단 입장에서는 아주 잘된 일이었다.
/1950년 12월 19일 묵호진에서 신병들을 모아놓고 연설하는 김백일 소장. 육군 1제군단장이었던 김 소장은 유엔군의 반격과 함께 가장 먼저 38선을 돌파, 혜산까지 북상했으며 12월 흥남철수작전 때 10만명의 피난민 수송을 지휘했다. 1951년 3월 비행기 추락으로 순직했다.
그러나 그렇게 재편을 마쳤어도 실제 병력은 원래의 1개 사단에 훨씬 미치지 못했다. 급조라고 할 수밖에 없을 정도의 수준이었고, 병력은 물론 화기마저 제대로 갖출 수 없던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우리는 길을 떠나야 했다. 7월 초였다. 경기도 용인 근처의 풍덕천으로 가서 적의 공세를 막으라는 명령을 받았다. 한강을 넘은 뒤 처음 재개하는 적과의 전투였다.
북한군은 서울을 점령한 뒤에 잠시 머뭇거렸다. 앞에서 이미 소개한 내용이다. 도하장비를 제대로 갖추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설이 있으나 분명치 않다. 어쨌든 김일성의 군대는 서울에서 3~5일 정도를 지체했다. 채 끊지 못했던 한강철교를 통해 그들은 다시 공격을 벌이려던 참이었다.
춘천으로 공격을 펼쳤던 북한군은 그곳에서 우리 6사단에게 길이 막혔다. 따라서 춘천으로 향했던 공격 부대는 서쪽으로 수원을 향해 접근하는 중이기도 했다. 김홍일 장군의 지휘 아래 시흥전투사령부는 한강 방어 작전을 훌륭히 수행했으나, 무기와 병력 등에서 국군을 압도했던 북한군의 남진은 단지 시간상의 문제에 불과했다.
미군과 북한군의 첫 조우전
1사단과 5사단을 합쳐 새로 재편한 1사단이었으나, 내가 이끌고 있던 부대는 무기와 장비조차도 제대로 갖추지 못한 상태였다. 그럼에도 어떻게 해서든 북한군의 진공을 막아야 했다. 7월 3일 용인 풍덕천에 병력을 V자 형태로 매복시켰다. 적은 병력으로 우세에 있는 적을 상대하려면 그 방법이 가장 좋았다.
나는 적군이 매복 지점 깊숙한 곳까지 들어섰을 때 일제히 공격을 하라고 지시했다. 풍덕천 초입에서 대열을 드러낸 북한군은 우리가 매복한 사실을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서 깊이 들어왔다. 마침내 공격 명령이 내려졌고, 1사단 병력은 포위망에 들어선 적에게 일제히 사격을 가했다. 북한군은 제대로 응사를 하지 못한 채 무너졌고, 결국 용인에서 수원으로 향하는 공로(攻路)를 포기하고 후퇴해야 했다.
대단한 전과를 올렸다고 볼 수는 없으나, 육군본부가 있던 수원으로 북한군이 다가서지 못하게 한 효과를 거뒀다. 그러나 수원에 있던 육군본부도 남행을 결정했다. 북한군 공세를 더 막아내기는 힘들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그를 따라 1사단을 포함한 국군 병력도 남쪽으로 향해야 했다.
나는 그 시절을 ‘유랑(流浪)’이라는 말로 표현한다. 1사단은 다른 사단에 비해 초라하기 짝이 없었다. 거의 모든 중장비와 중화기를 한강 이북에 남겨두고 왔기 때문이다. 타고 다닐 트럭은 전혀 없었다. 사단장인 나 혼자 노량진의 유흥수 대령으로부터 빌려 온 지프를 타고 이동했다. 나머지 모든 참모와 장병들은 도보로 걷고 또 걸었다.
정처 없이 떠돌면서 적당한 곳에 머물다가 또 길을 떠나는 유랑 극단의 신세와 같았다. 이를 테면 ‘유랑 사단’이었다고 봐도 좋다. 나는 지프에서 잠을 잤다. 장병들은 진창에 그대로 몸을 뉘었다. 당시는 장마철에 들었다. 비가 오는 날이 많았는데, 장병들은 고단한 몸을 그대로 진창에 뉘고 잠을 잤다. 밤에는 모기가 거침없이 달려들었다.
/1950년 7월초 오산에서 북한군과 처음 조우전을 벌이던 미 24사단 소속 스미스 대대의 전투 장면.
오산을 지날 때 미 24사단의 스미스 부대와 만났다. 그들은 맥아더 장군의 명령으로 급히 부산에 도착해 북상하는 길이었다. 북한군에게 “미군이 왔다”는 사실을 알리는 효과를 거두기 위해 급히 파견한 부대였다. 그로써 북한에게 미군의 참전 사실을 알리면서 전선을 묶어두자는 생각이었다.
105㎜ 야포를 이끌고 북상하던 포병 미군 고참 하사관과 말을 주고받을 기회가 있었다. 그는 매우 자신이 있다는 표정으로 “곧 북한군을 격퇴할 것”이라고 말했다. 나는 전선에 섰던 내 경험을 들려주려고 했다. 그에게 “적의 전차는 반드시 조심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는 두려운 기색을 전혀 보이지 않았다. 북한군을 적수로 생각지 않는다는 느낌을 줬다.
이튿날 그 스미스 부대가 낭패를 당한 모습으로 우리 곁을 지나 후퇴했다. 북한군과 처음 조우했던 자리에서 그들은 그만 커다란 패배를 당했던 것이다. 싸움에서 진 뒤 급히 쫓기는 미군의 모습이 마냥 불안해 보였다. 이 후퇴가 어디까지 이어질지 장담할 수 없는 상황에서 등을 보이며 내쫓기는 미군의 모습이 내 불안감을 더 키워버리고 말았다.
80 별 둘 미군사령관, 바주카포로 북한군에 맞서다 체포돼
(9) 전쟁의 시작
미군의 처절한 항전
평택에서는 열차에 잠시 올라탈 수 있었다. 운행 중인 열차가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고된 행군을 피하는 행운도 잠시였다. 열차는 조치원에서 멈춰야 했다. 힘든 행군에서 잠시 맞았던 편안함이었다. 그래도 우리는 조치원 역에서 경사를 하나 맞았다.
각자 뿔뿔이 흩어져 내려온 장병들이 조치원 역에서 우리와 합류했던 것이다. 함께 열차에 타고 이동했던 병력이었을 게다. 우리가 역 앞으로 나오자 수 백 명에 달하는 1사단 병력들이 몰려들었다. 나는 그들에 둘러싸인 채 짤막한 연설을 했다. “이제 이렇게 다시 모였으니 전력을 회복해 적과 다시 싸우자”는 내용이었다.
우리 1사단이 이동하는 동안 미 24사단 윌리엄 딘 소장이 대전에서 고전을 벌이고 있었다. 그에 앞서 오산 쪽으로 먼저 진군해 북한군과 첫 조우전을 벌였던 스미스 대대는 이미 인민군의 화력과 기동력에 밀려 뒤로 쫓겼다. 그 뒤를 이어 한국에 도착한 사단장은 금강 유역에 방어선을 설정한 뒤 북한군과 교전했다.
그는 유일하게 전쟁 중 북한군의 포로가 된 미군 장성이었다. 그는 나와 몇 차례의 인연이 있는 인물이다. 전쟁 전에 나는 강릉으로 향하던 수송기 안에서 그를 본 적이 있다. 그는 당시 한국에 주둔하던 군정장관의 신분이었다. 강릉으로 향하는 비행기는 가끔 대관령을 넘을 때 심한 기류에 크게 흔들린다.
/개전 한달도 안된 1950년 7월 20일. 인공기를 앞세우고 대전 시내로 진주해 들어오는 북한군 제3사단. 딘 소장 휘하의 미 제24사단은 패퇴하고 말았다.
당시 내가 타고 있던 비행기도 대관령을 넘으면서 아주 큰 기류에 휘말려 곤두박질치듯이 하강하다가 급상승하기를 반복했다. 기체는 심하게 흔들려 탑승자들은 모두 겁에 질렸다. 나도 매우 당황했는데, 얼핏 시선을 들어 보니 한 미군 장성이 아주 꼿꼿하면서도 침착하게 앉아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가 윌리엄 딘 소장이었다.
당시 미군은 일본에 4개 전투사단을 주둔시키고 있었다. 제2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끌었던 미군은 이미 커다란 몸집(군조직)을 해체한 상태였다. 일본에는 형식적으로 2개 사단을 두고 있었는데, 이미 전쟁을 잊은 군대였다. 당연히 전시 대비 훈련도 거의 없었다. 맥아더는 그 중 24사단을 한반도에 급파, 적의 예봉을 꺾어보려 했던 것이다.
6월30일 부산 수영만으로 급히 올라왔던 스미스 대대는 북한군의 상대가 아니었다. 첫 조우전에서 바로 패배해 황급히 후방으로 쫓겼다. 딘 소장은 그 뒤를 이어 24사단의 주력을 이끌고 부산에 도착해 금강 유역으로 진출한 뒤 방어선을 펼쳐놓고 분전코자 했다.
미 장군의 포로 생활
그러나 미군은 전쟁을 잊은 지 오래였다. 금강 유역의 방어선도 쉽게 무너졌고, 평택과 오산에 진출은 했으나 북한군의 전력을 전혀 막아내지 못했다. 그럼에도 딘 소장은 대전을 사수코자 했다. 대전에서 적의 기동을 막아 부산으로 추가 상륙하는 미군에게 시간상의 여유를 보태고자 했던 것이다. 그러나 일본에서 달콤한 휴식을 취했던 미 24사단은 제 실력을 발휘할 수 없었던 듯하다. 대전이 곧 흔들리면서 위기에 빠졌다.
/3년의 포로생활을 마치고 휴전협정 뒤 돌아온 윌리엄 딘 소장(가운데)에게 이승만 대통령(왼쪽)이 훈장을 수여하고 있다.
24사단은 그래도 분투를 거듭했다. 실력은 퇴색했지만 군기(軍紀)는 여전했다. 더구나 딘 소장이 앞장을 서서 전투를 이끌었다고 했다. 딘은 아마도 전쟁 발발 전 군정장관으로 있던 시절, 강릉으로 향하던 비행기 안에서 보였던 꼿꼿함을 잃지 않은 듯하다. 그는 정말 끝까지 자신의 본분을 다 했다. 24사단은 대전을 사수한다는 마음으로 북한군에 맞서 싸우면서 3일 동안 대전을 지켰다. 그러나 워낙 압도적인 병력으로 밀고 내려오는 북한군을 막아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대전 외곽의 터널이 적에게 점령당하면서 24사단은 퇴로가 없어졌다.
딘 소장은 스스로 3.5인치 바주카포를 들고 대전 시내 한 로터리에서 북한군의 전차에 맞섰다고 했다. 딘 소장의 종적은 그후 사라졌다. 사단장이 바주카포를 손에 들고 직접 적의 전차에 사격을 퍼부어야 할 정도로 미 24사단은 곤경에 몰리면서도 우직하게 싸웠다. 그러나 전세를 뒤집기는 아예 불가능했다. 급히 한국으로 오느라 24사단은 중화기를 제대로 챙겨오지도 못한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급기야 사단장이 일선에 나서 적과 싸우다가 행방이 묘연해졌다. 딘은 바주카포로 마지막 항전을 벌이다가 북한군에 고립됐다. 그는 북한군 포위를 피해 36일 동안 헤맸다고 한다. 7월20일 대전에서 종적이 사라진 딘 소장은 8월25일 전라북도 무주에서 북한군에게 잡혔다.
그는 36일 동안 적의 피해 여러 곳을 다녔다. 남의 눈에 띄지 않도록 밤길만을 걸었고, 굶주림에 허덕이면서 산딸기와 감자 등으로 허기진 배를 채웠다. 대전에서 처음 고립될 때는 17명의 미군 병사와 함께 있었다. 그러나 밤길을 걷다 갈증을 풀기 위해 물을 찾다가 낭떠러지로 굴러 떨어지면서 혼자 고립됐다고 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최대한의 노력과 신경을 기울여 아군이 버티고 있는 지역으로 탈출하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그러나 한 차례의 밀고로 북한군에게 잡히기 일보직전에 탈출했다가, 또 어느 지역에서는 마음씨 착한 농부로부터 삶은 닭 한 마리를 얻어먹는 ‘행운’을 잠시 누리기도 했다.
/부산에 도착하는 미군 병력을 한국군 군악대가 환영하는 모습.
결국 그는 한 농민을 만나 “대구로 데려다 주면 백만원을 주겠다”고 했다가 그의 밀고로 북한군에게 잡히고 말았다. 당시에는 이미 월턴 워커가 이끄는 미 8군의 주력이 부산으로 올라와 낙동강 전선에 강력한 방어선을 펼치고 있던 무렵이었다.
후퇴 길은 고행의 연속
그렇게 딘 소장은 전쟁 기간 중 유일하게 북한군에게 포로로 잡힌 미군 장성이 되고 말았다. 그는 처음에는 전주형무소에 갇혔다가 나중에는 평양, 압록강 인근의 포로수용소, 심지어는 만주 지역으로 이송돼 포로 생활을 했다. 3년이 넘는 시간이었다.
미군은 제2차 세계대전 뒤 전력이 크게 허물어졌으나 딘 장군 같은 지휘관이 여전히 남아 있었다. 맥아더의 과감한 결정으로 부산을 통해 한반도에 올라선 미군이 짧은 기간에 낙동강 전선을 형성하면서 적을 묶어두는 실력을 발휘한 저력(底力)이라고 해야 할까. 아무튼 딘 소장은 미군 장성으로서 부끄럽지 않게 적을 맞아 용감하게 싸우면서 버텼다.
전후에 그와 여러 번 만났다. 그중 기억에 남는 장면은 내가 두 번째로 육군참모총장을 할 때인 1958년이었다. 나는 당시 미국을 방문할 기회가 있었다. 샌프란시스코에 들르는 김에 그곳에서 만날 수 있는 미군의 옛 전우(戰友)를 만나보려는 생각이었다.
샌프란시스코 육군장교회관에서 그와 만나기로 했다. 그는 전쟁 직후 포로생활에서 풀려났다. 당시 아주 수척해진 모습이 미디어를 타고 사람들에게 알려지면서 화제가 됐다. 이미 몸상태는 많이 회복한 모습이었다. 그는 자신이 압록강 근처 만포진의 포로수용소에 갇혀 있던 때를 회상했다.
포로수용소에서 앞날을 기약키 어려운 불안한 생활을 보내고 있던 무렵 수용소의 한 북한군 장교가 자신을 찾아왔다고 했다. 그는 딘 소장에게 “남쪽의 백선엽을 아느냐”고 물었다고 한다. 딘 소장은 “잘 안다”고 대답하자 그 장교는 모포와 음식을 남몰래 갖다 줬다는 것이다.
그 북한군 장교는 안흥만이라는 사람이다. 내가 국군 초창기의 부산 5연대장으로 근무할 때 거느렸던 부하였다. 전쟁 직후 북한군에 가담을 했지만, 나는 5연대에서 그에게 여러 가지 인생사를 상담하면서 충고를 해줬던 기억이 있다. 안흥만은 그런 나를 기억해서 딘 소장에게 친절을 베풀었던 모양이다.
전선에 급히 선 미군은 흔들리고 있었지만 딘 소장이 상징처럼 보여주듯이 싸우려는 뜻이 강한 군대였다. 그 무렵 미군은 지속적으로 부산과 포항을 통해 낙동강 전선 이남으로 속속들이 포진하고 있었다. 딘 소장이 미군 장성으로서는 유일하게 북한에 포로로 잡히는 수모를 겪는 사이 미군은 그렇게 이 땅으로 올라오고 있었다.
그러나 ‘유랑 사단’의 신세였던 우리는 고전을 면치 못했다. 끼니는 가까스로 때웠다. 우리 땅에서 벌어지는 전쟁이라 쌀은 물론 고추장과 된장, 채소 등을 구하기도 어렵지 않았다. 손에 쥐고 있던 무기도 형편없었다. 김홍일 장군이 이끄는 1군단에 배속을 받아 남행을 계속했다. 분수령인 백마령을 넘어 음성으로 진출했다가 증평과 괴산을 거쳤다.
부대원은 지속적으로 불어났다. 그러나 아직 4000여 명 정도에 불과했다. 전쟁 전의 규모를 회복하지 못했다. 복색은 남루하기 짝이 없었다. 군복을 입은 장병, 서울 등을 거쳐 빠져나오면서 입었던 민간인 복장 그대로의 부대원들도 있었다. 중화기는 거의 없었고, 소총을 지니지 못한 사병도 눈에 띄었다.◎